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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원평야 일대 안보관광·탐조여행

    철새의 귀족 두루미.아침 햇살에 더욱 빛나는 고고한 자태의 두루미들이 철원평야 위를 유유히 난다.토교 저수지에서는 20여만 마리의 기러기떼가 굉음을 내며 비상한다.가을 걷이가 끝나 황량하던 철원 들녘이 철새들의 멋진 군무를 위한 거대한 야외 무대로 바뀐다.비행편대를 이루며 철원평야를 돌던철새들이 비무장지대(DMZ)로 날아간다.분단 반세기동안 문명의 발자국이 닿지 않은 그 곳은 철새들의 낙원.철새들은 자유롭게 군사분계선을 넘나든다. 그러나 그 자유는 그들만의 자유다.DMZ는 분단의 아픔을 증언하고 있는 비극의 현장.강원도 철원에 가면 분단의 비극을 체험할 수 있는 ‘안보관광’도하고 겨울 철새들도 만날 수 있다.철새들의 합창을 들으며 안보관광을 떠나보자. ■철원평야와 비무장지대 철원평야의 아침은 철새들의 합창으로 열린다.철원은 겨울 철새들의 낙원.두루미·청둥오리·기러기·독수리 등 겨울 철새들이 가을이 깊어지면 철원으로 날아든다.겨울에도 얼지 않는 천연 샘물이 솟아나는 샘통지역(0.5ha)은 철새들의 도래지로서 73년천연기념물 245호로 지정됐다.겨울에도 얼지 않는 물과 늪,토교·동송 저수지 등 담수호,철원평야에떨어진 벼이삭,사람들의 출입 제한 등 철새들의 서식지로 천혜의 환경이 갖추어져 있다. 민통선 안에 있는 토교 저수지와 강산리에 있는 동송 저수지 등에는 수십만 마리의 철새들이 모여든다.그들이 한꺼번에 날아 오르는 모습은 어느 예술작품 못지 않은 감동적인 장관이다.그들의 힘찬 비상의 굉음은 철원평야의정적을 깬다.세계적으로 희귀한 두루미를 만나는 것도 큰 즐거움.우아한 모습의 재두루미와 흰두루미떼들이 날아다니거나,숲이나 논에 있는 것을 쉽게볼 수 있다.철원군은 탐조여행을 위해 하갈리에 있는 아이스크림 고지에 철새 전망대를 만들 계획이다.내년에 착공 2001년 완공 예정.늦가을부터 봄까지 철새를 만날 수 있다. ■제2땅굴 1975년 3월19일 발견된 북한의 남침용 지하 땅굴.북한의 서방산에서 시작된 땅굴은 3.5km.땅굴 입구에서 108m를 내려가면 북한이 화강암을 뚫고 만든 땅굴을 만난다.500m까지만 공개.땅굴속에는 먹고 자고 쉬던 ‘광장’이 있다.그 광장에 서서 북한쪽을 바라보면 땅굴을 팔 때 동원됐던 북한인들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땅굴 저편에서 아직도 들려오는듯 하다. ■철의 삼각 전망대와 월정리역 남방 한계선에 인접한 전망대에 오르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뜻밖에도 고라니 한쌍이었다.고라니 한쌍이 철책선주위를 한가롭게 거닐고 있었다.6·25 때 격렬한 전투로 ‘죽음의 땅’이었던 비무장지대는 자연의 위대한 복원력으로 지금은 울창한 숲으로 바뀌었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숲속에서 산새와 짐승들은 그들의 낙원을 이루고 있다.숲도 잔인한 비극의 역사를 모른 채 평화스럽다.그러나 그것은 긴장된 평화다.전망대에 오르면 김일성 고지와 피의 능선 등 북녘땅도한눈에 들어온다. 월정리역은 경원선의 남쪽 마지막 역.6·25때 폭격으로 부서진 열차의 잔해가 앙상한 골격만 남긴 채 누워 있어 분단의 아픔을 증언하고 있다. ■백마고지 전적비와 기념관 한국전쟁의 전설로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하고 있는 백마고지 전투.12번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뀐치열했던 전투의 상흔들이기념관에 전시돼 있다.너덜너덜한 철모가 전쟁의 비극성을 고발하고 있다.중공군이 심각한 타격을 입고 패한 백마고지는 비무장지내 안에 있다.전적비와 기념관은 지난 90년 철책선 근처 철원군 대마리에 만들어졌다. ■노동당사 해방후 북한이 공산독재의 정권강화와 국민통제를 위해 소련식공법으로 완성한 무철근 건축물.6·25전까지 북한 노동당 철원군 당사로 쓰이며 반공인사들을 탄압하던 현장.지붕이 없어지고 일부 벽도 무너져 내렸다.벽에 남아 있는 수많은 탄흔은 치열했던 당시의 전투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듯하다.참담한 모습의 노동당사는 분단의 슬픈 역사의 유산으로 이념의장벽처럼 서 있다. 철원(강원도) 이창순기자 cslee@ ■여행안내 탐조여행과 안보관광은 철원에 있는 고석정 국민관광단지에서 부터 시작.고석정에 있는 철의 삼각지 전적관 관리사무소 2층 접수실에서 신청서를 작성한후 접수시킨다.신분증 필요.외국인은 여권 또는 ID카드. 출입은 9시30분,10시30분,11시30분,13시,14시(3월∼10월은 마지막 출입시간이 14시30분) 등 하루에 5회.화요일 휴무.자동차나 관광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전적관에 있는 안내인의 가이드에 따라 고석정을 출발,6검문소를 통해 민통선 안으로 들어간다.(렌즈가 100mm 이상인 사진기는 검문소에 맡겨야 한다). 103초소를 지나 제2땅굴에 도착.제2땅굴을 본후 다시 103초소를 거쳐 철의삼각 전망대와 월정리역 도착.그 이후는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다.백마고지전적비를 거쳐 노동당사를 방문하는 것이 편리.오후 5시까지 여행을 마쳐야한다.식당이 없어 점심을 준비해 가는 것이 좋다. 입장료는 어른 1,500원(단체 1,400원),청소년 1,200원(800원),어린이 800원(500원).주차료 소형 2,000원 대형 4,000원.관리사무소 (0353)455-3129,3577,450-5558,5559. ■가는길 43번국도를 타고 의정부-포천-운천-신철원-문혜리(좌회전)-승일교-고석정.
  • [외언내언] 신·구교 화해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간 안에 일어난 내면적인 변화를 그리스도교에서는 ‘의화(義化·Justificatio)’라고 말한다.인간 안에 실현되는 의화의 내용은죄의 용서와 내면적 쇄신이다(로마서 5:1-5). 이 의화교리 논쟁에서 그리스도교의 분열은 시작됐다.즉 종교개혁의 발단이 된 마틴 루터의 95개 조항의 의견서(1517년)는 의화에 대한 로마 가톨릭 교리에 정면 도전한 것이었다.가톨릭의 전통적 교리는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함께 선행(善行)을 실천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인데비해 루터는 “의화와 구원에 필요한 것은 오직 신앙뿐이며 선행은 단지 인간의 정화와 사회에 대한 임무로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가톨릭과 루터교 사이에 500년 가까이 계속돼온 의화 논쟁이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지난 10월31일 독일 아우스부르크에서 두 종교의 대표자들이 인간구원과 의화 등에 관한 공동선언문에 서명했다.44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이선언문은 “신앙은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라면서 “우리는 인간의 어떤 덕목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 예수의 은총에 의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함께 고백한다”고 밝히고 있다.두 종교는 “선행하라는 권고는 신앙을 실천하라는 권고”라고 절충하고 “의화는 신앙만으로도 가능하지만 선행은 참된 신앙의 핵심적 표지이다”고 합의했다.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과 루터교가 생산적인 대화에 나선 것은 60년대 후반부터다.지난 73년에는 가톨릭·루터교협동위원회를 구성하고 공동저서를 출판하는 등 두 종교간 역사적 반목과 불신의 벽을 조금씩 허물어왔으며 양쪽신학자들이 지난 94년 공동선언 초안을 작성했다. 아우스부르크 공동선언문은 의화교리의 기본적 진리에 관한 것일뿐 전체에관한 것은 아니다.이로 인해 신·구교의 틀이나 교회조직에 당장 큰 변화가일어나지는 않을 전망이다.두 종교가 완전한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앞으로 ‘교황의 지위’와 ‘성체성사’에 대한 이견등 풀어야 할 난제가 많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신·구교 분열이 발생한 유럽 전체에 희망을 던지는 표시”라고 공동선언문을 환영했지만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200여명은 이선언문이 신교를 팔아 넘기는것과 같다며 반대서명을 한 것으로 외신은 전하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스부르크 공동선언문은 교회일치운동의 획기적 진전으로 평가 받아 마땅하다.전세계 10억 가톨릭 인구와 6,000만 루터교인들을함께 묶어준 일치와 화해정신이 극심한 종교 갈등현상을 보이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피어오르기를 기대해 본다.마침 오는 성탄절에는 본사 주최로 ‘가톨릭·개신교 연합과 일치를 위한 성탄 축하음악회’가 열릴 예정이다.임영숙 논설위원
  • 문예진흥기금 조성시비 언제까지

    문예진흥기금이 최근 끝난 국정감사를 계기로 다시 문화정책 현안 중의 하나로 주목되고 있다.비록 올 문화관광부 국정감사가 정치적 사안에 걸려 파행되는 바람에 본격적으로 다뤄지진 못했으나 문예진흥기금 문제는 언제라도격렬한 논쟁을 일으킬 소지를 안고 있는 것이다. 문예진흥기금은 순수한 문화예술의 창작·보급을 북돋우려는 국가의 특별장려금이라 할 수 있다.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업성은 어떤 분야든 갈수록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데 상업성이 취약한 순수 문화예술에 대한 국가적보호막인 문예진흥기금의 필요성에 대해선 별다른 이의가 제기되지 않는다. 문제는 기금을 모으는 구체적 방법과 기금의 공정한 사용이다. 그중에서도 기금 조성문제가 보다 중대하고 시급하다.기금 조성과 관련,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해소될 오해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본질적으로 돈문제인 만큼 누구도 부담 지지 않으면서 해결할 쉬운 길은 없어 보인다. 지난달 중순 규제개혁위원회가 문예진흥기금의 모금 중단 시기를 당초 2003년에서 2005년으로 연장토록결정하면서 기금조성 문제가 크게 부각됐다.지난 73년 설치된 문예진흥기금은 영화관 등 문화시설 입장료에 얹혀지는 기금용 부과금으로 일반인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부과금 방식의 모금이 문예진흥기금의 유일한 조성재원인 냥 잘못 인식하고 있다. 많은 언론조차도 이같은 오해에서 벗어나지 못해 규제개혁위의 모금연장 조치를 두고 규제를 없앤다는 대원칙에 위배된다고 비판한 뒤 “문화부와 문예진흥원은 지금까지 26년동안 7,500여억원을 문예진흥기금으로 모금했으나 이중 3,171억원만 기금으로 적립하고 나머지 4,443억원을 다 써버렸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적립액과 그간의 지원총액을 단순합계한 액수인 7,500여억원을 모금총액으로 본 일부 언론보도는 문예진흥기금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문화시설 입장료에 2%∼9%씩 부과되어 걷히는 문예진흥기금 모금액은 올 9월 현재 모두 2,166억원에 그친다.이 부과금 모금 말고 국고출연 1,200여억원,공익자금 1,500여억원 및 이자수입 등 기금운용수익 2,100여억원 등이 보태져 그간 총 8,300억원이 넘는 문예진흥기금이 모아졌고 여기서 3,100여억원의 적립과 4,400여억원의 지원이 병행실시되어 왔다.나머지는 경상운영비 등으로 나갔다. 부과금 모금총액보다 1,000억원이 더 많은 액수가 기금으로 적립,운용되고있는 것인데 문예진흥기금 적립금은 4,500억원이 조성 목표액이다.이에 따라 지난 96년 세계화추진위원회가 세계화추진 과제로 설정한 이 기금조성 목표를 달성하자면 1,300여억원이 더 필요하며 문화부는 이를 위해 국고출연,공익자금 배당 등을 고려하더라도 연 200억원 내외인 부과금 모금을 당초 방침보다 2년 더 늘여 2004년까지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규제개혁위는 2004년 이전이라도 조성목표액이 차면 즉시 모금을 중단하는 일몰(日沒)제 조건과 함께 이를 받아들였다. 국정감사에서 문예진흥기금 적립 자체를 반대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4,500억원 목표액의 근거를 요구하거나 모금연장을 성토하는 소리는 높았다. 영화관 등 1,100여개소에서 문화예술을 즐기는 입장객에게 씌우는 기금부과금은 준조세라고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무성한 비난과는 대조적으로 지난 97년부터 끊긴 국고출연이 거의유일한 모금연장의 현실적 대안으로 제시되었을 뿐이다.모금연장을 관철시킨 문예진흥원 등 문화당국 역시 모금연장 조치에도 불구하고 미달될 것으로보이는 300여억원을 국고출연금이 충당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그러나 전액이든 일부이든 국고출연은 부담의 주체가 개별적인 문화시설 입장객에서 추상적인 전 납세자로 바꿔진다는 것일 뿐 부담 자체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따라서 문예진흥기금은 설치 취지 자체를 문제삼지 않더라도 상향까지 포함한조성목표액의 적정선과 부담 주체의 범위에 관한 적극적인 논의가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김재영기자 kjykjy@ * 신청자중 40%만 혜택 받아 문예진흥기금을 관장하고 있는 문예진흥원은 결산이 끝난 98년도 예산집행에서 660억원의 총세출 규모중 진흥사업으로 495억원을 지출한 뒤 40억원을기금으로 적립했다. 당시 세입에서 이자수입이 384억원이었고 모금수입이 214억원이었다.올해 예산의 경우 총 예산액 828억원중 547억원을 진흥사업비로 쓰고 205억원을 기금에 적립할 방침이다. 즉 지난해 경우 모금수입의 2.3배에 해당하는 예산이 진흥사업에 지출됐다. 문화예술 단체 및 개인에 대한 무상지원을 의미하는 진흥사업은 문학,미술,음악,연극,무용,전통예술,대중예술 및 기타 등 8개분야로 지원신청및 심의가이루어진다. 그러나 세출내역에선 예술진흥,문화복지,국제문화교류,기반조성,영상문화산업 등 5개분야로 나눠진다.지난해의 495억원 사업비로 1,420건(109개사업)이지원받았다. 세분해 살펴보면 예술진흥분야에 문학 7억1,400만원,전시예술 17억3,600만원,공연예술 24억8,300만원,전통예술 8억2,200만원,창작여건조성 30억9,600만원 등 88억5,000만원이 집행되었으며 문화향수 27억8,700만원,지역문화 36억5,600만원,교육연수 2억8,900만원 등 문화복지분야에 67억3,000만원이 지원됐다. 또 국제문화교류분야는 문화소개 5억600만원,교류여건조성 8,600만원,세계화 9억8,400만원 등 15억8,000만원이,기반조성분야는 문화예술정보사업 8억3,100만원,지원시설운영 12억6,200만원,홍보발간 3,200만원 등 21억2,500만원이 집행됐다.특히 영상·문화사업진흥에는 303억원이 집행되었는데 여기에는출판계 불황을 타계하기 위한 특별융자지원금 200억원이 포함되어 있다. 당시 모두 3,648건이 신청했으나 심의결과 2,200여건이 지원을 받지 못했다.40%가량만 통과된 것이며 특히 올해 문예진흥원이 한국문학창작 특별지원사업으로 95명에게 1,000만원씩 지원하기로 하자 645명이 신청했었다.탈락률이 높은 만큼 선청결과와 과정에 대해 불만과 불평이 높을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되도록 많은 신청자들에게 지원혜택을 주도록 하다 보니 실효성없는 소액다건이란 비판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의 1,400여건 지원건수 중 300만원 미만이 811건(57%),500만원 미만이342건(24%)이었다. 2차에 걸친 지원심의에 대해서도 참여 전문가의 연령이 평균 55세로 문화예술의 새 경향을 충분히 반영한다고 할 수 없으며 심의에 필요한 실질적인 심사기간을 1박2일로 늘였다고 하지만 80여명의 심의위원이 3,000건이 넘는 신청건수를 심의하는 것은 졸속을 면할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 [김재영기자]
  • 남미대륙에 ‘신좌파 바람’

    남미대륙에 신좌파 바람이 불고 있다.이른바 ‘제3의 길’.70년대와 80년대초까지 피비린내 나는 좌·우익 대립을 거친 끝에 80년대 중반 미국이 지원하는 우익세력에 정권을 넘겨 줬던 남미에 최근 좌파 집권 도미노가 일고 있다. 24일 치러진 대선에서 사회민주계 라디칼당과 좌파연합체 프레파소당의 야당연합 후보인 페르난도 델 라 루아(62)가 50.3%지지율로 압승한 아르헨티나를비롯, 이달 31일 우루과이,그리고 오는 12월10일의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 좌파 지도자들이 잇따라 집권할 기세다. 지난 73년 온건 사회주의자 살바도르 아옌데의 피살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부 쿠데타,그리고 뒤이어 학정으로 오명을 날린 칠레에서는 좌파 투사리카르도 라고스가 대권 탈환을 목전에 두고 있다.사회주의당 출신인 그는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정통 후계자.소련대사로 부임 중 피노체트 쿠데타가 발생,그대로 망명투쟁을 벌인 대표적 투사로 기독민주당의 10년 집권을무너뜨릴 것이 확실시된다. 우루과이 범좌파전선 대선 후보로 나선 타바레 바스케스 전 몬테비데오 시장도 여론조사에서 줄곧 지지도 1위를 고수하고 있다.지지도가 40%를 훨씬상회,11월 결선투표까지 가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올 정도로 압도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대권을 잡지는 않았지만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등에서도 좌파세력이 연립정권에 적극적으로 참여,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엘살바도르 등에서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좌파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남미대륙에서 좌파세력 부상의 첫번째 원인은 만성적인 경제침체와 20%에육박하는 실업률,만연하는 집권층의 부정 부패,심각한 빈부격차에 국민들이등을 돌린데 있다.더 큰 핵심은 냉전종식 이후 치열한 이념대결 구도가 사라진 배경속에 남미 사회주의 지도자들이 체 게바라나 카스트로식의 교조주의적 혁명투쟁이념에서 탈피해 다원주의를 수용,정치적 대안으로 내세운 결과다. 유럽 사회주의자들이 선택한 ‘제3의 길’과 일맥상통한 이들의 전략은 우익정권 지원을 포기한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와 맞물려 유권자들을 파고 들고 있다.라고스 후보도 “투자 저축 경제성장에 영향을 주지않으면서빈부격차를 줄이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으로 현실수용적인 사회운동론을 주창하고있다. 마약 밀매 등이 관련된 콜롬비아나 페루 멕시코 등은 상황이 다르지만 이같은 일련의 좌경화는 남미대륙이 하나의 경제권에 묶여 있는 상황에서 잇따라영향을 받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김수정기자 crystal@
  • [박정희 전대통령 서거 20주년](상) 집권 18년의 功·過

    역사적 인물의 평가는 시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특히 시간이 지나도 영향력이 줄지 않는 지도자 일수록 평가의 스펙트럼은 폭넓고 다양하다.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역사적 평가도 현재진행형이다.객관적이고 엄정한 공(功)·과(過)의 분석 토대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26일 박 전대통령 서거 20주기를 맞아 역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상을 상·하로 나눠 살펴본다. 【 功 】 ‘박정희(朴正熙) 시대’가 우리 현대사에 남긴 긍정적 의미는 ‘한강의 기적’으로 요약된다.‘하면 된다’라는 자신감으로 유례없는 경제성장의 업적을 이룩했다는 평가다.초고속 성장의 잔영으로 사회 곳곳에 부작용을 남겼다는 지적도 있지만 박 전 대통령이 근대화에 기여한 통치자라는 사실에 물음표를 던지는 시각은 드물다.일부 ‘박정희 옹호론자’는 “위로부터의 경제개발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면서 “박 전 대통령이야말로 대한민국의운명을 바꿔 놓은,존경받아 마땅한 통치자”라고 찬사를 보낸다.이른바 ‘개발독재 불가피론’이다.박 전 대통령의 독재적 리더십은 경제 근대화의 동력(動力)을 제공한 ‘필요악’이었다는 시각이다. 특히 62년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전후(戰後) 복구에 치중한 50년대를 극복하고 60년대 성장의 물꼬를 튼 경제개발 모델로 기록된다.이는 가난과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미래의 희망과 도약의 의지를 심어준 계기였다.국가가 주도한 수출위주 공업화 정책은 이후 여러 개발도상국과 후진국의 발전 모델로 ‘차용’됐다.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 우리 사회에 ‘박정희 붐’이 일고 있는 현상도 ‘박정희 시대’의 ‘경제 신화(神話)’에 기대려는 향수 때문이다. ‘박정희 시대’의 결집된 국가적 에너지는 70년대 새마을운동이란 이름으로 더욱 고조됐다.대중동원식 개발 프로그램은 일제 치하의 1930년대 조선농촌진흥운동이나 일본의 농촌경제갱생운동 등을 비롯,2차세계대전을 전후해사회주의나 자본주의 진영 곳곳에서 전개됐지만 ‘박정희 시대’의 새마을운동이 보기 드문 성공사례로 꼽힌다. 남북관계에서 ‘박정희 시대’는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3대원칙에 합의한 72년의 ‘7·4남북공동성명’을 통해 새로운 전기를 만든 것으로 기억된다.‘7·4남북공동성명’은 유신체제를 유도하기 위한 정치 수단으로 활용되는 한계를 드러냈지만 6·25 이후 처음으로 남북한간 공식대화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측면에서 분단 이후 통일운동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사건이다. 【 過 】 ‘박정희(朴正熙)정권’이 우리 사회에 드리운 암영(暗影)은 그의 공적(功績)을 무색케 할 정도로 짙고 투박하다.민주주의와 인권,분배 정의 등의 가치를 부정한 폐해가 ‘보릿고개의 극복’과 ‘초가지붕의 개량’이라는 ‘박정희 옹호론’을 일축하는 근거로 제시된다.박 전 대통령과 무원칙한 화해를 시도하면 자칫 민주주의의 가치와 역사의식의 왜곡을 부를 수 있다는 우려도 같은 맥락이다. 헌법을 무시한 쿠데타로 막을 올린 박정권은 영구집권을 위한 3선개헌과 유신체제,연고주의와 지역감정을 조장한 지역패권주의 등으로 우리 정치사에씻기 어려운 오점을 남겼다.경제성장 지상주의로 인한 물질만능 풍토와 정경유착 등 왜곡된경제구조도 박정권이 후세에 남긴 부채(負債)로 꼽힌다. 이를 두고 일부 ‘박정희 비판론자’는 “쿠데타로라도 정권만 잡으면 되고,돈이면 다 되는 관행을 만든 장본인이 박정희”라면서 박정권의 민중억압성과 냉전적 권위주의,비합리적 정치행태 등을 비판한다.최근 ‘박정희기념관건립과 국고지원’문제와 관련,강만길(姜萬吉)고려대·조동걸(趙東杰)국민대 명예교수 등 일부 역사학자가 토론회와 각종 모임을 통해 부당성을 강조하는 등 ‘박정희 비판론’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박정권의 국가중심 발전지상주의적 산업화가 90년대 말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의 주요 요인이라는 분석도 만만찮다.선단식 경영 위주의 재벌경제를기본축으로 하는 ‘박정희식(式)’ 권위주의 발전모델이 역사적 한계를 보이면서 한보부도,기아부도 등 IMF 위기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새마을운동도 ‘박정희 비판론자’에게는 비난의 대상이다.농민운동가나 비판적 지식인들은 새마을운동을 전시행정이라고 폄하한다.이들은 “박정권이장기집권체제를꾀하면서 사회적 저항을 희석시키기 위해 새마을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주장한다.유신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정적(政敵)을 무자비하게 처형하거나 의문의 주검으로 몰아 넣은 대목에서는 ‘자연인 박정희’를 옹호하는 주장이 설득력을 잃는다는 지적이다. 박찬구기자 *朴정권 탄압사 ‘제3공화국’은 오랜 통치기간 만큼이나 많은 반체제인사를 만들어냈다.현대사의 한획을 그을 만한 굵직굵직한 ‘사건’과 ‘파동’,‘의혹’이 잇따랐고 그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박해와 탄압을 받았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그 대표적인 표본이다.71년 7대 국회의원 선거를앞두고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고,73년 납치사건을 겪는 등 죽을 고비를 수차례를 넘겼다. 잡지 ‘사상계’를 이끌면서 정권비판에 앞장선 장준하(張俊河)선생도 마찬가지다.한·일회담과 월남파병문제 등 계속되는 비판으로 정권의 미움을 샀다.이로 인해 여러차례 구속됐고 세무사찰로 생활고를 겪어야 했다.75년 장선생은 결국 의문의 추락사로 생을 마감했다.최종길 서울대교수도 비슷한 경우다.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도 ‘유신체제의 위험인물’로 꼽히면서 수난을 겪었다. 72년 유신체제 등장은 이른바 ‘민주인사’를 대량으로 양산하는 계기가 됐다.정계 뿐 아니라 학계,종교계,언론계,문인계 등 사회 각 분야에서 반민주·반독재 항거가 일어났다.74년 ‘긴급조치1호’는 이에 대한 탄압의 신호탄이었다.장준하·백기완씨를 시작으로 함석헌·안병무·문동환·계훈제씨 등수백여명의 재야인사와 교수들이 기소됐다.그해 ‘긴급조치4호’를 발동시킨 ‘민청학련사건’으로는 253명의 민주인사,학생들이 구속됐다.이철,유인태씨 등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대부분 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배후조종자로 김동길교수,박형규목사,지학순주교,김지하시인 등이 기소됐다.75년 긴급조치9호가 선포되기까지 구속자는 수천명이나 됐다. 정치인들은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혹독한 고문에 시달렸다.이세규·조윤형·조연하·이종남·강근호·최형우·김상현씨 등이 대표적인 피해자들이다. 이지운기자 jj@. [특별기고] 朴正熙 리더십의‘이중성’정치인의 행위나 업적을 평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시대적 상황에대한 인식이 다를 수 있고 나타난 결과의 중요성을 보는 각도도 다를 수 있는 까닭이다.특히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 통치를 경험했던 우리 세대는지극히 주관적·감정적으로 그를 평가할 개연성이 높다. 개인을 상황과 연계시켜 구분해볼 때 정치 리더십은 이상주의자,현실주의자,그리고 창조적 지도자로 나누어진다.현실주의 리더십은 목적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기에 미사여구로 그 사회가 지향하는 목표를 제시할지언정실제 행동은 다분히 이에 부합하지 않는 형을 지칭한다. 반대로 이상주의 리더십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낮은,경우에 따라서는 불가능한 이념에 집착하여 추구하는 목표에 근접하지도 못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보통이다.창조적 리더십은 역사의 흐름에 부합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현실적 제약을 극복하면서 이를 단계적으로 성취해 가는 유형이다. 이러한 리더십 유형에 비추어 박정희 전 대통령은 현실주의 지도자였음이분명하나 창조적 리더십의 특성도 부분적으로 갖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가 내걸었던 국정목표는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로 상징화된 조국 근대화였다.경제성장 지상주의 정책은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계기를마련했고 경제의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는 점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물론 ‘선(先)성장 후(後)분배’정책에서 나타난 심각한 경제불평등과 재벌에 집중된 자본,그리고 다원화되어 가는 시민사회의 강압적 통제는 문제로지적할 수 있다. 60년대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관 주도의 경제정책과 선성장 후분배정책이최선의 것이었는가는 먼 훗날 역사가 평가할 몫이다. 그의 ‘근대화’정책이 가진 본질적 문제는 정치영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산업화가 진행될수록 다원적인 사회로 이행되고 좀더 제한적·분권적권력구조가 성립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 체제로 역행했기 때문이다. 3선개헌은 ‘나 아니면 안된다’는 오만의 상징이다.공작정치는 야권을 회유하거나 분열시켜 정권을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자행되었다.시민사회의 자율성 신장에 관한 요구는 공권력을 동원하여 제도적으로,그리고 실질적으로 억압되었다. 권위주의의 제도화를 기도했던 유신체제는 결국 권력 엘리트들의 균열로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거대한 민주화의 흐름이 70년대 중반 포르투갈을 시발로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자유민주주의가 시대의 보편적 흐름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 그의 정치행보는 잘못된 것이었다.분명히 그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정권의 유지와 재창출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은 현실주의자였다. 그러나 ‘조국근대화’를 경제적 측면에서 국한시켜 볼 때 그는 어느 정도창조적 역할을 했었다.여기서 박정희 리더십의 이중적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나는 그가 만일 3선개헌으로 정권을 연장하고 유신을 통해 권력의 영속화를 시도하지 않았다면 아마 위대한 대통령으로 남았을 것으로 본다. 사회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정치도 변해야 하고 역사 흐름에 부응한 현실의변화도 아울러 추구해야 정치가 안정적으로 발전한다는 점을 우리는 박정희통치가 남긴 역사적 교훈으로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柳勝男 국민대교수·정치학]
  • [포커스 투데이] 아르헨 새 대통령 유력 페르난도 델라루아

    21세기 아르헨티나를 이끌 것으로 유력시 되는 페르난도 델라루아는 96년아르헨티나 사상 최초의 민선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장으로 당선된 온건 좌파정치인.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의 10년 집권과 부패,늘어난 범죄율 등에 등을 돌린국민들의 반(反)메넴 정서에 힘입어 최근 석달새 인기가 급상승했다.엘리트층의 인기는 온건한 정치스타일에서 비롯됐다는 평. 야당 라디칼당 소속.페론당에 대항,프레파소당과 연합한 ‘알리안자’의 대선 후보로 나서 무난하게 승리할 것이 확실하다.73년 라디칼당 소속 연방 상원의원으로 당선돼 정계에 입문한 뒤 83년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서 라울 알폰신 전 대통령에게 패배했다.부에노스아이레스 민선시장을 맡고서는 시재정 적자 6억달러를 청산,인기를 한몸에 얻었다. 깨끗한 정부와 시장경제의 지속을 약속하고 있는 그는 최근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대통령 전용기인 ‘탱고 10’을 팔겠다고 약속하는 등 내핍대통령의 의지를 내보이고 있다.유세기간 내내 메넴 정권의 부패 스캔들을 지적하며‘도덕적 힘’과 ‘투명성’이지배하는 나라를 세우겠다고 강조해왔다. 김수정기자 crystal@
  • 신당동 떡볶이 전성시대 다시 오나

    간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중 하나가 ‘떡볶이’이다.매운 것을 싫어하는 사람도 한 두 번은 먹어봤을 정도로 떡볶이는 오랫동안 ‘간식왕’자리를 지켜왔다.생각만해도 군침이 도는 음식이다.그런 ‘떡볶이’가 축제 테마로 떠올랐다. ‘신당동 떡볶이 페스티벌’. 이는 문화관광부가 오는 20일 대학로·인사동·홍익대앞·신당동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마련하는 ‘문화의 달,파티’의 하나.신당동 떡볶이 골목에서 열린다. 군것질거리로만 여겨졌던 떡볶이가 이처럼 정부에서 주관하는 행사 소재로떠오른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친근하게 여기고 좋아한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왜 떡볶이를 좋아할까. 떡볶이의 미학(味學)은 무엇보다 맵고 개운한 맛에 있다.대부분의 간식거리가 달거나 느끼한 반면 떡볶이는 칼칼한 자극으로 미각을 만족시킨다. 떡,어묵 등 기본재료 외에 라면·쫄면·달걀·만두·튀김 등을 추가함으로써 어우러지는 맛의 변주 폭도 넓다.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입맛에 제격이다.만들기 쉬운 데다 ‘오징어’ ‘카레’ ‘치즈’떡볶이등 창의력을 무한히 발휘할 수 있는 음식이라는 점도 한몫한다.그리고 가격이 싸다.5,000원이면 두 사람이 푸짐하게 먹을 수 있다.한끼 식사로도 충분해 주머니 부담이 적다. 떡볶이는 조리법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눌수 있다.재료와 양념을 한꺼번에 넣어서 직접 끓여 먹는 ‘즉석 떡볶이’와 커다란 사각 철판에 양념을 끓인 다음 떡과 어묵,달걀을 넣고 만드는 ‘철판 떡볶이’가 그것.‘철판 떡볶이는포장마차에서 많이 팔아 일명 ‘길거리 떡볶이’ 또는 ‘포장마차 떡볶이’로도 통한다. ‘즉석 떡볶이’는 ‘신당동 떡볶이’가 대표적이다.야채와 함께 먹을 수있는 장점이 있지만 즉석에서 조리해 먹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철판 떡볶이’는 바로 먹을 수 있다.날씨가 쌀쌀해지면 ‘철판 떡볶이’는 더욱 인기다.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다가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어묵국물에 떡볶이 한접시를 후딱 해치우고 나면 추위도 가시고 배도 든든해지기 때문이다. 둘은 재료에서도 차이가 난다.즉석 떡볶이는 앉은 자리서 익혀 먹으므로 떡은 가능하면 가늘고 어묵도 종이처럼 얇은 것이라야 한다.그래야 재료가 익으면서 적당하게 간이 배어 맛있다. 그러나 철판 떡볶이는 만들어 놓은 상태서 손님을 기다리기 때문에 떡은 통통하고 어묵은 도톰해야 한다.그래야 오래 둬도 떡이 퍼지지 않고 제맛을 유지할 수 있다. 신당동 떡볶이 상우회 조옥성회장(45·조가네 떡볶이 대표)은 “신세대의입맛이 변해 유행을 타기도 하지만 학창시절 추억을 되새기며 가족들과 함께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았을때 보람을 느낀다”며 “이번 페스티벌을 계기로신당동 떡볶이 골목이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선임기자 sunnyk@ * 신당동 떡볶이-이것이 ‘비법' 재료 가는 떡(쌀떡이 아니어도 가능함),어묵(식성에 따라 라면·쫄면·당면·삶은 달걀 등을 추가해도 됨),양배추,당근과 양파,양념장(고추장·춘장·마늘다진것·육수·물엿,멸치다시다,라면스프 등을 넣어 섞은 것), 고춧가루,소금. 만들기 ①떡·어묵에 채썬 양배추와 당근,양파,파를 함께 프라이팬에 넣는다.양배추는 물이 나오면서 부피가 줄므로 많이 넣는다.②프라이팬 높이 절반정도로 물을 붓고 양념장을 식성껏 넣는다.고춧가루도 넣고 간은 소금으로 한다. 조리포인트 센불에 끓여야 하며 뚜껑은 덮지말것.고추장과 춘장의 비율은9:1정도로 해야 신당동 떡볶이 맛이 남. * ‘신당동 떡볶이'의 유래 ‘떡볶이’하면 신당동,신당동하면 ‘떡볶이’를 떠올리게 된다.그만큼 오래됐다는 이야기다. 손님들도 다양하다.소문을 듣고 찾아오거나 학창시절 추억을 되새기기 위해 온 사람들.학생들.모두 떡볶이를 먹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이곳은 다른 먹자골목과 달리 ‘원조’ 싸움이 없다.누구나가 즉석 떡볶이개발자로 ‘마복림 할머니네’ 주인인 마복림 할머니(79)를 인정한다. 상우회 조옥성회장에 따르면 신당동 즉석 떡볶이의 역사는 대략 27년전인 1973년부터 시작한다.6·25전쟁 직후부터 시작됐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춘장을 넣은 즉석 떡볶이는 이때부터라고 조회장은 말한다. 신당동 떡볶이는 한때 짜장 떡볶이라하여 논란이 있었으나 값싸고 특별한맛으로 인기를 끌었다. 가수 DJ덕의 리메이크곡 ‘신당동 떡볶이’에 나오는 DJ가 등장한 것은 80년대 중반.마할머니 가게앞으로 흐르던 개천 복개공사가 끝나고 새로운 가게들이 들어서면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뮤직박스를 들여놓은 것이다. 이때가 신당동 떡볶이 전성시대.30여개의 가게가 있었다.그러나 주고객인청소년들이 피자·햄버거를 즐기면서 발길이 줄어들고 DJ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면서 기세가 한풀 꺾였다. 이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햄·소시지 사리 등이 등장했으며 지금은 라면·어묵·쫄면·만두·삶은 달걀 등 입맛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신당동 떡볶이 집에서 사용하는 재료는 모두 같다.한곳에서 공급받기 때문이다.그러나 양념은 집주인의 손맛으로 집집마다 조금씩 차이가 난다. 22곳이 영업중이며 ‘약속’에는 아직도 DJ박스가 남아있다.이곳에서는 지난 3월까지만 해도 노래를 틀어 주었다. 강선임기자 * 신당동 떡볶이 페스티벌 20일 낮 12시부터 신당동 떡볶이 골목에서 행사가 시작된다. 원조로 알려진 ‘마복림 할머니네’를 포함,22개 가게가참가한다. 떡볶이집 주방장이 나와 ‘신당동 즉석 떡볶이’만들기 시범을 보이고 떡볶이에 일가견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는 7팀이 출연,‘떡 신(神)경연대회’를연다. 요리경연대회에 필요한 양념과 기본재료는 신당동 떡볶이 상우회에서 제공한다.참가자들은 이를 제외한 나머지 재료들을 준비,즉석에서 선보인다. ‘인기상’과 특이한 떡볶이를 선보인 팀에게 주는 ‘특별상’이 있다.특별상은 행사위원들이 선정하며 인기상은 페스티벌 구경꾼들로부터 가장 많은스티커를 받은 팀에게 주어진다. 이밖에도 만화전시회,힙합 공연 등 다양한 행사가 밤 12시까지 계속된다. 강선임기자
  • 파키스탄 쿠데타 이모저모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 동요없이 조용 [워싱턴 베를린 이슬라마바드 외신종합] 12일밤의 군부 쿠데타는 나와즈 샤리프총리측과 쿠데타측의 무력충돌 없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져 날이 밝은 13일 수도 이슬라마바드 시내는 큰 동요없이 조용한 분위기를 보였다. ●목격자들은 군부가 총리 관저 및 주요 정부 청사,국영 TV방송 등을 완전히장악한 뒤 군부대의 대부분을 철수시켜 주요 건물 청사 주위에 몇 명의 무장한 경비병들만 경비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전언. ●쿠데타를 이끈 페르베즈 무샤라프 육군 참모총장은 나와즈 샤리프 총리가자신을 국외로 축출하기 위해 항공기 착륙을 거부하는 바람에 입국하지 못할뻔 했다고 주장.그는 13일 행한 국민연설을 통해 스리랑카에서 귀국하던 그를 막으려는 음모가 있었다고 주장. ●영국에 망명중인 베나지르 부토 파키스탄 전 총리는 축출된 샤리프 총리를 ‘파시스트’라고 목청을 높이며 비난.부토 전 총리는 13일 CNN 과의 회견에서 “샤리프 총리가 모든 민주적 기관들을 해체,국민들의 지지를 잃었다”고 주장.●군부의 한 소식통은 샤리프 총리와 그의 동생 펀자브주 행정책임자인 샤바즈 샤리프가 현재 총리 관저에서 군에 의해 보호 감금돼 있다고 전언. ●미국은 12일 샤리프 총리의 실각과 관련,파키스탄 군 당국에 헌법을 준수하라고 촉구.제임스 루빈 국무부 대변인은 “파키스탄 헌법은 문구로서 뿐만아니라 그 정신 면에서도 존중돼야 한다”고 말했다. ●인도는 ‘심각한 우려’를 갖고 사태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총리실 대변인이 말했다.바지파이 총리도 12일 국가안보위원회 회의를 긴급 주재한데 이어 13일 취임식을 마친 뒤 곧바로 내각안보회의를 주재. ●일본 정부는 13일 파키스탄의 군사 쿠데타에 깊은 우려를 표명.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는 이날 오전 “파키스탄 국내의 사태진전을 우려하고있다”고 말했다.고노 요헤이(河野洋平)외상은 성명을 통해 “일본은 민주적헌법절차에 따라 조속히 사태가 수습되기를 강하게 기대하며 사태의 진전에대해 중대한 관심을 갖고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포커스 투데이] 쿠데타 주도 무샤라프 육참총장 파키스탄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페르베즈 무샤라프(58)육군 참모총장 겸 합동참모위원회(JCSC) 위원장은 최근 인도와의 카슈미르 분쟁과 관련,대(對)언론 브리핑을 주도하면서 국내외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지난 98년 10월 자항기르 카라마트 장군의 뒤를 이어 육군의 12대 참모총장이 됐을 때만해도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던 인물이었다.정책결정에서의 군부의 실권을 요구한 뒤 샤리프 총리에 의해 해임된 카라마트와 마찬가지로 그역시 총리측과 계속 불화를 빚어왔다.특히 카슈미르 분쟁과 관련,외교적으로해결하려는 샤리프측과 항상 대립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그는 군부내에서 카라마트처럼 개혁지향적이며 서구화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샤리프에 대한 군부의 불만이 최고조로 올라가 있는 상황에서 12일 총리가자신을 해임하자 곧바로 ‘거사’를 단행했다는 설이 유력하다.그는 BBC등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샤리프의 외교적 해결 노력을 지지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카라치 출신으로 64년 파키스탄 발루치스탄의 퀘타에 있는 명문 지휘참모대학을 졸업한 그는 포대,보병사단,육군 특수부대 등을 두루 거치면서 다양한지휘관 경험을 쌓았다. 샤리프 총리는 최근 무샤라프의 임기를 2001년까지 연기,군부와의 갈등을없애려는 듯 보였으나 태도가 돌변,무샤라프가 스리랑카를 방문한 틈을 타 12일 그를 해임했다.그러나 무샤라프는 재빨리 귀국,육군에 총리 관저를 포위할 것을 명령하고 방송과 공항 등 주요 시설을 장악했다. 김수정기자 crystal@ *쿠데타로 점철된 파키스탄 현대사 ●47년 영국으로부터 인도와 분리독립●58년 첫 군부 구데타.총리로 임명된 아유브 칸 참모총장이 미르자 대통령축출하고 대통령에 취임(69년까지 재임)●69년 아유브 대통령 총사령관인 야히야 칸 장군에게 권력 이양.야히야 장군 계엄령 선포 후 대통령에 취임. ●71년 동파키스탄이었던 동벵골 지역 방글라데시로 독립.야햐 칸 대통령 줄피카 알리 부토에게 권력 이양. ●73년 내각제 민주헌법 개헌.부토 대통령 총리 취임. ●77년 지아 울 하크 육군 참모총장 쿠데타로 정권 장악. ●88년 지아 대통령,비행기 사고로 사망.알리 부토 전 총리의 딸인 베나지르부토 총선승리 총리에 취임. ●90년 부토 총리 이스하크 칸 대통령에 의해 해임.회교민주동맹(IDA)당수나와즈 샤리프 총리 취임. ●93년 부토 총선 승리 재집권. ●96년 레가리 대통령 부토 총리 해임. ●97년 나와즈 샤리프 총선 승리 총리 재취임.
  • [문명자 회고록] 비화 3공의 실세들(4) 이후락의 ‘축재’

    이후락은 자신의 아들들을 한국 재벌들과 정략결혼을 시켜 온 나라를 사돈관계로 얽어놓았다.첫째아들은 서정귀(徐廷貴·박정희의 대구사범 동창,전흥국상사·호남정유 사장·작고)의 사위가 됐는데 그는 김동조(金東祚·전외무장관) 주미대사 시절 대사 관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둘째아들 이동훈(李東勳)은 한국화약 창업주이자 전 회장인 김종희(金鐘喜·작고)의 사위가됐다.그래서 이들 사돈기업을 포함해 이후락의 후원으로 기업을 성장시킨 다섯개 기업의 회장을 세칭 ‘이후락의 5인방’이라 불렀다.신진자동차의 김창원(金昌源·작고),극동건설의 김용산(金用山),대농의 박용학(朴龍學),한국화약의 김종희,호남정유의 서정귀가 바로 그들이다. 미국의 석유재벌 칼텍스와 유니언 오일사의 한국내 합작선 선정은 제3공화국 사상 최대의 이권이었다.한국 재벌들이 석유합작선을 놓고 벌인 혈투에서 호남정유와 한국화약그룹이 최후의 승리를 한 데는 이후락의 영향력이 결정적이었다.이들 미국의 국제적 석유자본은 기름값을 정부가 결정하는 한국에서 석유공급을 독점함으로써 폭리를 취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박정희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다.그것을 관리한 것이 이후락 일가였다. 내가 이후락 일가 부정부패의 세세한 부분까지를 알게 된 것은 사실 내 친구 ㅊ의 덕분이다.미국유학을 다녀온 그녀는 60년대 이후 이후락과 그의 부인·자녀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쳤다.ㅊ은 후암동 이후락의 집을 드나들면서 접하게 된 기기묘묘한 일들을 나에게 들려주었다.한번은 집주인이 내방객이 두고간 돈봉투를 소파 밑에 밀어넣어 두었다가 깜빡 잊어버려 청소하던 식모가 수백,수천만원짜리 수표를 주운 일도 있었다고 한다. 또 당시 국민학생이던 이후락의 셋째아들이 ㅊ의 집에 놀러왔다가 ㅊ의 어린 딸에게 돈세는 법을 가르쳐준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지폐를 한 장씩 넘기며)“돈은 1억,2억,3억…이렇게 세는 거야” 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고 평양을 왔다갔다하던 이후락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던 때 나는 서울을 방문해 ㅊ의 집에 며칠 머물렀는데거기서 영어를 배우러 온 이후락의 부인 정윤희(鄭允熙)와 마주친 적이 있다.ㅊ이 나를 ‘미국친구’라고만 소개했기 때문에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채 한담을 나누게 되었다.그녀는 말끝마다 “우리 남편이 이제 남북통일을시킬 것”이라고 자랑을 하기에 내가 한마디 쏘아붙였다. “정 여사,당신 남편은 도둑놈이오”.그러자 이후락의 부인이 펄펄 뛰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그건 다 모르고 하는 소리예요.세간에서 이러쿵저러쿵 하지만 우리 주인은 절대로 결백합니다.부정이라고는 모르는 분이에요”.이후락 부인과 나는 이후락이 도둑인가 아닌가를 놓고 한참 설전을 벌였다.내가 자리를 뜨자 이후락의 부인이 ㅊ에게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묻더라고 한다.“워싱턴의 문 기자”라고 하자 다음날 그녀는 돈봉투를 가지고 와서 내미는 것이었다.기가 막힌 나는 그녀에게 목청을 높였다.“나까지 도둑으로 만들려고 이러십니까?” 5공시절 나는 동향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온 박영옥(朴榮玉)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부정축재 액수에서)우리보다 이후락이가 적게 나왔는데 이럴수가 있나. 신군부 놈들이 이후락이는 봐준 거다.당시 신군부 군인들의 기세가 어땠는줄 아니?그들은 나에게 ‘이 도둑년’하면서 내 손가락에 낀 반지까지 빼갔다.그러면서도 이후락이는 봐줬으니 신군부에다 뭘 바쳤는지….목숨 바쳐 혁명한 사람은 두 번이나 외국으로 쫓아내고 아무 한 일도 없으면서 권력은 다 해먹은 게 바로 그 자다” 이처럼 온 나라를 혼맥으로 엮어가며 차기 권력을 향한 자기기반을 착착 다져가던 이후락도 73년 12월 박정희의 ‘가지치기’로 해임되고 말았다.권좌를 떠난 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이후락은 조계종 회의에 참석한다는 명목으로 73년 12월말 한국을 빠져나와 런던으로 갔다.거기서 미국비자를 받으려했으나 실패하자 당시 한·영 영사협정에 따라 비자 없이 갈 수 있던 영국령(領) 바하마로 갔다.거기서 이후락은 당시 돈으로 50만달러를 주고 저택을사들이려 했으나 이 역시 실패하였다. 이후락이 바하마에 집을 사 정착하려고 한 이유는 자신의 재산을 이곳으로도피시켜 놓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바하마는 은행에돈을 갖다 넣어도 비밀이 보장되고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곳이어서 미국 부호들이 재산도피 장소로 애용하는 곳이었다. 김형욱에 이어 이후락마저 해외로 도망가자 박정희는 이후락을 귀국시키기위해 노심초사했다.자신의 엄청난 치부들이 폭로될 것을 극도로 우려했기 때문이다.두 사람 사이에 몇 차례 특사가 오갔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조선일보 외신부의 김 아무개 기자였다.이후락은 결국 박정희로부터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친필편지를 받고 74년 2월말 귀국했다. 73년 이후락 해임후 박정희의 스위스은행 비밀계좌는 어떻게 되었을까.일설에 의하면 박정희는 비밀계좌의 예금주 이름을 모두 자신의 측근으로 바꿨다고 한다.그런데 10·26 이후 전두환(全斗煥·전 대통령)이 보안사 요원 5명과 그를 스위스로 보내 비밀계좌의 돈을 모두 찾아왔다는 얘기가 있다.그때따라갔던 요원 중 한 사람이 미국에 와 “그 때 수고비로 5만달러를 받았다”고 발설한 일이 있다. 정리 정운현기자 jwh59@
  • 日정치인2세 3당연립정권에 대거 입각 ‘화제’

    5일 출범한 일본의 자민 자유 공명 3당 연립정권 내각은 휠체어 장관의 첫탄생,정치인 2세의 대거 등장 등 여러가지 화제를 낳았다. ?총리를 포함,19명 각료의 면면을 보면 2세 진출이 두드러졌다.나카소네 히로후미(中曾根弘文) 문부상은 나카소네 전총리의 장남.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외상도 전후 보수당의 실력자 이치로씨의 아들.우스히 히데오(臼井日出男)법무상은 ‘청렴한 8선 의원이었던 아버지의 유지를 잇기 위해’80년 정계에들어왔다. 나카야마 마사아키(中山正暉) 건설상의 경우에는 아버지는 참의원,어머니는후생상, 형은 중의원을 지낸 정치 명문가 출신. 오부치 총리도 고헤이(光平)전의원의 차남으로 7명의 각료가 정치인 2세다. ?실무형 내각인 오부치 2기 조각(組閣)과 자민당 3역 인사에서 오부치 총리의 인사 스타일에 큰 변화를 보였다.자세를 낮추고 화(和)를 중시해 ‘진공(眞空)총리’라는 별명도 갖고 있던 그는 이번에는 보복인사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난달 총재 경선에서 그를 격렬히 비판했던 가토 고이치(加藤紘一)와 야마사키 다쿠(山崎拓)파를 철저히 무시한 반면 자신을 지지했던 가메이파 등 ‘신주류’ 인사는 요직에 기용했다. 가토파가 각료로 추천한 3명중 입각한 인사는 가와라 쓰토무(瓦力)방위청장관 1명뿐.반면 가메이 시즈카(龜井靜香)의원은 정조회장에 기용했다. ?야시로 에이타(八代英太) 우정상은 TV 사회자 출신.73년 사회를 보던중 무대에서 떨어져 반신불수가 됐으나 재기에 나서 77년 참의원 전국구로 정계에입문했다. 일본 정치사상 신체장애자가 각료에 기용된 것은 처음. ?입각자의 출신교는 도쿄,와세다(早稻田),주오(中央)대가 각 5명,게이오(慶應)대가 3명.오부치 총리의 출신교인 와세다대는 1기 내각때보다 3명이나 늘었다.평균 연령은 64세.한편 마이니치(每日)가 이날 보도한 오부치 내각 지지율은 지난해 7월 출범이후 최고인 48%를 기록했다. 황성기기자 marry01@
  • [문명자 회고록 내가 본 朴正熙와 金大中](1)

    대한매일은 미국 US 아시안뉴스 서비스 주필인 문명자씨의 미공개 회고록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을 단독입수,내용 가운데 일부를 발췌하여 연재합니다.문씨는 지난 73년 ‘김대중납치사건’을 국내에 보도한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껴 미국에 정치망명을 선언한 이후 30여 년간 미국서 활동해온 현역언론인입니다.그동안 그는 국내에서 접할 수 없는 한국관련 고급정보를 목격하고 기록해 왔으며 이번 회고록은 이같은 내용들을 토대로 한 것 입니다.회고록에는 한국현대사의 ‘미스터리’는 물론 한·미관계의 이면사를 처음 공개한 것도 상당수 포함돼있어 ‘역사적 기록’으로서도 큰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73년 4월 15일 대만대학에 박사학위를 받으러 간다며 한국을 빠져나온 전중앙정보부장 김형욱(金炯旭)이 며칠후 미국에 나타났다.그것은 영락없는 도망길이었다. 5·16 쿠데타의 주동인물중 하나였던 그는 그후 출세가도를 달렸다.63년 5월 제4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한 김형욱은 박정희를 위해 별명처럼 ‘곰’같은 충성심을 발휘하는 한편 자기자신을 위해 온갖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치부를 했다.이같은 김형욱이 미국으로 도망온 이유는 자명했다.수십년간 충성해온 수하들을 하루 아침에 내치고 잡아넣는 박정희의 냉혹성에 대한 공포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미국에서 김형욱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71년 공화당 전국구 의원 신분으로 남미를 방문하고 뉴욕에 들렀을 때였다.그때 나는 MBC 워싱턴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유엔 취재차 뉴욕에 있다가 당시 컬럼비아대학 연수생으로 와 있던 동아일보 기자 이웅희(李雄熙·현 무소속 국회의원)와 함께 김형욱과 뉴욕의 한 한국음식점에서 식사를 했다. 김형욱이 미국으로 도망온 이후 나는 그와 수 차례 만난 적이 있다.73년 11월 내가 미국에 정치망명을 선언한 후 그는 내게 “문 여사,용감한 결심을존경합니다.우리는 뜻을 같이 하는 동지입니다”라며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그는 내가 망명을 선언한 후 부쩍 자주 전화를 걸어왔는데 “김대중 납치범 명단을 내가 다 가지고 있는데 때가 되면 가르쳐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77년 1월 김형욱은박 정권의 미국 의회 부정로비사건 조사를 위해 구성된프레이저위원회에 증인으로 채택되어 있는 상태에서 아들과 함께 유럽여행을한 적이 있다. 그는 뉴욕 케네디공항을 통해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여기서 낯뜨거운 사건이 발생했다.김형욱이 달러를 밀반입하다가 세관원에게 걸린 것이다.내가 그 사건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한 유태인 친구의 제보 때문이었다. 세관원은 오리걸음(덕 워킹)으로 걸어 들어오는 동양남자가 뭔가 숨긴 것이틀림없다고 확신,김형욱을 멈춰 세웠다.꼭 아편쟁이같이 생겨 마약밀수를 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헤이,유,스탑”(여보,좀 멈춰요). “미?”(나요?). “예스,유”(예,당신말이오). 더욱 한심한 일은 세관원이 그를 불러 세워 몸수색을 하려 하자 김형욱은 한국식으로 세관원을 협박했다고 한다.“내 몸을 수색해서 아무것도 안나오면너 그냥 두지 않겠다”.“오케이”.세관원은 보안관에게 명령했다. “데려가 발가벗겨”. 보안관이 김형욱을 방으로 데려가 발가벗겼는데 그는 무려 7만5,000달러의돈뭉치를 다리에 붕대로 둘둘 감고 그 위에 여자 타이즈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 79년 10월 7일 김형욱이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후 나는 교토통신의 요코가와 워싱턴특파원과 함께 처음으로 뉴저지에 있는 그의 저택을 방문한 일이있다.그의 부인 신영순(申英順·在美)에게 주소를 물어 찾아간 그의 집은 웬만한 미국 부호의 집 못지않게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실종 직전 김형욱은 이른바 ‘회고록’ 출판문제로 박 정권과 막판 거래를하고 있었다.박 정권은 김형욱에게 “회고록을 출간하지 않는 대가로 500만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하고 이미 100만∼150만 달러를 먼저 지불했다고 한다.김형욱은 그 나머지 돈을 받으러 파리에 갔다가 결국 실종되고 만 것이다. 김형욱이 어떻게 최후를 맞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우선 중앙정보부가 파리에 온 김형욱을 납치,살해한 후 센강에 버렸다는 설도 있었고,또 산 채로 짐짝처럼 포장해 KAL기에 실어 서울로 데려갔다는 설도 있다. 그 무렵 우리 사무실에 프랑스어로 된 익명의 편지가 날아들었는데 그 내용은 김형욱이 KAL기 짐칸에실려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미국의 한 항공사 화물부에 문의를 해보았다.“사람을 짐짝처럼 싸서운송하는 것이 가능합니까?”.“산소가 부족해 호흡이 곤란하고 온도·습도가 낮아 사람이 짐칸에서 파리∼서울간 15시간을 버틴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이래저래 취재는 벽에 부딪쳤고 나는 김형욱의 사인규명을 거의 포기했다. 그런데 80년대초 나는 뜻밖의 루트를 통해 김형욱의 사인에 대한 상당히 정확한 정보에 접하게 되었다.발설자는 정일권(丁一權) 전 국무총리였다.그는유럽을 여행하던 중 파리에서 자신이 신뢰하는 모 인사(본인의 요청으로 신분을 밝힐 수 없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잔인하다 잔인하다 했지만 박정희가 이렇게 잔인할 수 있나.잘못했다고비는 김형욱이를 자동차에 실어 그대로 폐차장에 밀어넣어 버렸다네”그의 말에 따르면, 산 채로 서울로 납치해간 김형욱을 차지철이 경복궁에서청와대로 이어지는 지하벙커를 통해 박정희 앞에 대령했는데 김형욱이 박정희에게 “잘못했습니다.죽여주십시오”하고 빌었다는것이다. 정일권의 말대로라면 김형욱은 폐차장 압착기 아래서 최후를 맞았다는 얘기가 된다.정일권의 입장에서 보면 김형욱은 자신을 대통령으로 옹립하려던 ‘이북파 최측근’이었으니 분개할만도 했을 것이다. 나는 이같은 사실을 정일권 본인을 통해 거듭 확인한 바 있다.지난 86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하얏트호텔에서 정일권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이렇게 물어보았다. “김형욱이가 서울로 잡혀와서 비참하게 죽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으시다는데 사실인가요?”“예,내가 그런 애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그것은 사실입니다”. 정일권은 말년에 암에 걸려 고생하다가 94년 타계했는데 내가 그를 본 것은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정리 정운현기자 jwh59@ -文明子씨 일문일답 ■회고록을 출판하게 된 동기는. 역사를 위한 기록이다.한국사회는 가치의 혼돈시대를 맞고 있다.이대로 한세기만 지나면 한국사회에는 박정희를 미화하는 기록만 남을 것이다. 오랫동안 미국의 권부를 가까이서 취재하면서 나는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사실들을 많이 보고 들었다.우리 후손들의 역사인식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바람으로 그동안 보고 들은 박정희의 모든 것을 기록했다. ■회고록의 제목은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인데 박정희 전대통령에 관한 부분이 70% 정도를 차지하는 있는 것 같은데…. 61년 5·16쿠데타 때부터 시작해 82년 김대중씨가 사형수에서 사면을 받고워싱턴에 왔을 때까지를 기록했기 때문이다.박정희씨는 이미 관 뚜껑에 못을박은 사람이고 김대중씨는 아직 활동하는 현역 정치인이 아닌가. 김대중씨에대한 기록은 또다른 기회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문 주필의 박정희 전대통령 비판에 대해 일각에서는 주관적이라는 지적이나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박정희에 대해서 나는 한 언론인으로서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있다.그러나독자들은 나의 책에서 사실만을 보면 된다.1961년 4월이후 현재까지 워싱턴에서 벌어진 한국정치 관련사건들을 사실에 입각해 기록했다.사실에 대한 해석과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문 주필의 회고록에는 특정인들의 실명이 거침없이 거론되고 있는데…내가 실명을 거론한인물들은 한국정치사에서 책임있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다.그들은 공직에 취임함으로써 이미 역사의 심판대 위에 스스로 올라선것이다. 나는 그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남겼을 뿐이다.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한국언론의 익명문화다.육하원칙의 가장 첫번째 요소가 ‘누가’이지 않은가.한국의 언론인들은 혈연·지연·학연의 인간관계 속에 깊이 편입돼 있어 실명을 거론하지 못한다. 퇴직후에도 그 인간관계 속에서 살길을 찾아나가야 하므로 ‘익명의 문화’는 극복되지 않는다.내 경우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사회에서 떨어져 40년을 살아왔기 때문에 거칠 것이 없다. ■그동안 ‘반한인사’ 또는 ‘친북인사’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는데 이에대한 본인의 견해는? 유신정권때인 70년대까지는 ‘반한인사’로 불렸는데 80년대말 남북 고위급회담이 본격화된 후 북한취재에 나서면서 ‘친북인사’로 호칭이 바뀌었다. ‘반한인사’,‘친북인사’란 중앙정보부가 만들어낸 용어로 전혀 타당하지않다.굳이 말하자면 ‘반박정희 인사’나 ‘반유신인사’라고해야 옳다.‘친북’도 그렇다.남북은 같은 민족이다.서로가 ‘친북’도 하고 ‘친남’도해야 한다.‘친미’나 ‘친일’,‘친중’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94년 김일성 주석 사망후 ‘100일설’부터 ‘3년설’까지 북한붕괴론이 대단했다.내가북한에 가보고 와서 북한은 붕괴하지 않는다고 했더니‘친북인사’라고 했다. 한반도 남북에 사는 사람들은 분단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보는 시야도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다.스스로 외눈박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두 눈으로 보는 사람이 편파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정운현기자] -文明子씨는 인가 문명자(文明子·70)씨는 38년째 미국 권부의 상징인 백악관을 출입하고 있는 현역 재미교포 언론인이다.73년 11월 당시 보도금지 사항인 ‘김대중납치사건’을 보도한 후 중앙정보부의 체포위협을 피해 미국에 ‘정치망명’을한 전력으로 그동안 국내에선 그의 활동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80년 중국 덩샤오핑(鄧小平)의 초청으로 미국 여기자단 단장으로 중국을 방문,덩샤오핑을 인터뷰했으며 90년 남북고위급회담 이후방북취재를 시작한이후 92,94년 두차례에 걸쳐 김일성 주석을 인터뷰했다. 30년 대구 출생인 문씨는 숙명여고 졸업후 연세대 영문학과 1학년 재학중 6·25를 맞아 피란지 부산에서 일본으로 유학,메이지대 경제학부·와세다대국제법 대학원을 졸업했다. 61년 조선일보 워싱턴특파원을 시작으로 동아일보,경향신문,MBC 워싱턴특파원을 역임한 그는 73년 미국에 정치망명한 후 미국인 동료기자들과 함께 US아시안뉴스 서비스(통신사)를 설립,국제정치담당 주필로 일하고 있다. 동양통신 초대 워싱턴특파원을 지낸 남편 최동현(崔潼鉉)씨와 사이에 1남 1녀.그의 미국이름 주리 문(Julie Moon)은 ‘대지’의 작가 펄 벅 여사가 지어준 것이다. [정운현기자]
  • 붕괴위험 교실서‘목숨건 수업’

    전국의 많은 초·중·고교생들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학교건물에서 불안에 떨며 수업을 받고 있다.이로 인해 학생들은 교실의 낡은 조명시설로 시력이 급격히 저하되고 주변의 소음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교육부와 서울시교육청이 30일 국회교육위원회에 제출한 국감자료에 따르면 전국 초·중·고교 건물 가운데 92개교 120개동이 교육부의 자체 안전점검결과 재난위험시설로 판정돼 곧바로 철거하거나 개축돼야 하는데도 재정난등을 이유로 계속 사용,대형 붕괴사고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 재난위험시설 D급(보수 및 개축 필요)으로 판정된 학교는 전국 73개교 99개동이며 E급(철거 대상)으로 분류된 학교도 19개교 21개동에 달했다.시·도별로는 ▲서울 D급 30개교(42개동),E급 9개교(10개동) ▲인천 D급 10개교(18개동),E급 1개교(1개동) ▲경북 D급 7개교(8개동),E급 1개교(1개동) ▲경남 D급 7개교(10개동) ▲전남 E급 3개교(4개동) ▲경기 D급 4개교(5개동) 등이다. 서울 신길2동 장훈고교는 6층짜리 제2동 교사를 지난 68년부터 73년 사이에네 차례 증축하면서 증축이음 부분과 출입문에 균열이 발생,지난해 E급 판정을 받았으나 학교측은 1∼3층 보강공사만 한 뒤 부분적으로 사용을 중지하는 ‘땜질식’ 처방에 그쳤다. 지난 33년에 지어진 서울 신당2동 장충중학교는 교실천장에서 물이 새고 벽에 금이 가 지난해 E급 판정을 받았지만 위험지역에 접근금지 표시를 하는등 눈가림 처방으로 1년 이상을 버텨왔다.주흥(周興)교장은 “10월중 운동장에 가교사를 지은 뒤 건물을 철거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정숙(金貞淑·한나라당)의원은 서울시교육청에 대한 국감에서 “현재 철거중인 서울의 학교는 E급 판정을 받은 9개교 가운데 광희초등학교뿐이며 D급 판정학교 중에는 강덕초등·시흥초등·강남초등·강남여중 등 4개교가 보수공사를 하는데 불과하다”면서 “나머지 학교는 위험 속에 그대로 방치돼있다”고 지적했다. 이밖에도 의원들은 기준조도(300룩스)에도 못미치는 어두운 교실과 창문을열지 못할 정도의 소음(소음기준 55㏈)이 학생들의 급속한 시력저하와 학습의욕 상실을 부채질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시교육청에 따르면 7만152개 교실중 조도미달 교실수가 3만9,406개(56.2%)에 이르렀다.중학교 2년생의 48.9%,고교 2년생의 55.8%가 근시(한쪽 눈의 시력이 0.6이하)로 분류되는 등 급속한 시력저하는 어두운 조명시설 때문인 것으로 지적됐다. 39개 학교는 기준을 초과하는 소음피해를 겪고 있으며 이중 16개 학교는 방음벽 등 방음시설 설치계획조차 세우지 않았다.비가 오면 교실 및 운동장에물이 고이는 학교도 92개교에 달했다. 유인종(劉仁鍾)서울시교육감은 “재난위험 시설 학교에 대해서는 168억원의 예산을 들여 보수공사 및 개축공사를 진행하고 있다”면서 “10월중 재점검에 들어가 종합대책을 세우는 등 열악한 학교환경을 개선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노주석기자 joo@
  • 연금 못받는 독립유공자 후손 “훈장 집단반납” 파란 일듯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설이 빈말이 아닙니다.우리 회원들은선대(先代)가 독립운동을 한 ‘죄’로 물려받은 것이라곤 무식과 빈곤 뿐입니다.해방된 조국에서 거지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선대의 훈장이 무슨소용이 있습니까”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비공식으로 구성한 애국선열유족회(회장 孫守光)는28일 정부의 부당한 처우에 대한 강력한 항의의 표시로 회원 226명 전원이선대의 훈장을 국가보훈처에 반납키로 결의,7명이 먼저 훈장을 유족회에 내놓았다. 이들이 대통령 명의로 수여된 훈장을 집단반납할 경우 큰 파란이 일 전망이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들의 후손(손자)들이지만 아무도 정부로부터 연금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지난 73년 비상각의에서 관련법을 개정,8·15 광복 이후에 사망한 애국지사의 경우 유족의 연금수혜 대상자를 손자대(代)에서 자녀대(代)로 1대 축소했기 때문이다. 손 회장은 “후손들의 교육·생활정도는 감안하지 않은채 단지 선대의 사망일자를 기준으로 후손들의 연금수혜 가부를 결정하는 것은 타당치 못하다”면서 “생활이 곤란한 후손들을 배려해 연금수혜 대상자를 손자대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곽기수(郭琦洙·서울 대치동 거주)씨의 경우 이른바 ‘밀양폭탄사건’의 주모자로 옥고를 치른 곽재기(郭在驥·63년 독립장)의사의 손자로 현재 장례식장에서 염(殮)을 하며 생활을 꾸려가는 등 회원 대부분이 어렵게 살고 있다. 한 독립운동가는 “보훈처가 예산·관련법규를 들먹이며 독립유공자 예우에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직분을 망각한 처사”라면서 “연금을 받고 있는 생존지사·유족이 점차 감소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연금수혜 대상자를 오히려 증손자대까지로 추가확대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운현기자 jw
  • 北외교관 상아 밀거래행위 ‘멸종생물 국제협약’ 의제로

    최근 2년간 해외에서 4차례나 적발된 북한 외교관들의 상아 밀거래 행위가‘멸종위기에 처한 동식물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CITES) 상임위에서 논의될 예정이다. 정부 당국자는 27일 “CITES 사무국은 28일부터 내달 1일까지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리는 42차 상임위에서 북한 외교관들의 잇단 상아 밀거래 행위를 의제로 긴급 상정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CITES 사무국은 지난 7월 1일자로 스위스주재 북한대사관에 상아 밀거래 행위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는 서한을 발송했고 사무국장이 이철 북한 대사의면담을 신청한 상태로 알려졌다. 북한 외교관의 상아 밀수행위는 최근 2년간 모스크바에서 2회,파리와 나이로비에서 각각 1회씩 적발됐으며 지난달 30일 나이로비에서는 북한 외교관여권 소지자가 총 689㎏ 상당의 상아를 운송하다 케냐 당국에 의해 적발되기도 했다. CITES는 야생 동식물의 남획으로 멸종 가능성이 증대되면서 국제교역을 통제,동식물을 보호하자는 취지아래 73년 3월 워싱턴에서 채택된 협약으로 남한은 93년 7월에 가입했으나 북한은가입하지 않고 있다. 오일만기자 oilman@
  • [21세기 초일류 전문기업] 포항제철-‘유리알’ 철강왕국

    “포항제철은 세계 철강업체 중 가장 오래 살아남을 기업이다.” 미국 세계적인 증권사인 모건스탠리사는 지난 5월 ‘철강업계 경영분석’이라는 자료에서 포철을 이렇게 진단했다.그렇다면 장수(長壽)의 비결은 무엇일까.바로 굴지의 경쟁력이다.그리고 그 경쟁력의 바탕은 ‘투명한 경영과핵심역량의 집중,특유의 기업문화’로 요약된다. 투명성이 요체 포철은 현재 이슈로 떠오른 재벌의 소유·지배구조 개선논의에 관한한 재계의 이단아(異端兒)다.“투명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기업활동이 위축된다”는 재계의 구호대열에서 완전히 이탈해 있다.경영의 지향점도 ‘유리알 경영’이다.총수가 정보와 권한을 독점하는 ‘황제경영’도 먼나라의 얘기일 뿐이다. 유상부(劉常夫)회장이 지난 3월 ‘글로벌 전문경영체제(GPM)’를 선언하며이사회 운영을 대폭 강화한 것이 단적인 예다.예산 등의 의사결정권과 집행임원의 임면 등 인사권까지 부여,경영을 실질적으로 감시·통제하도록 했다. 사내이사로만 구성된 이사회를 재편해 전체 인원(15명)의 과반수를 넘는 8명을 사외이사로 배정,지배구조 개선을 일찌감치 단행했다. 매주 정례 브리핑 제도 구색만 갖춘 게 아니다.“미국 등 선진 외국기업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특히 정보제공 서비스는 완벽하다.” 뉴욕은행 부총재를 지낸 슈발리에 사외이사의 말이다.사외이사에 거는 포철의 기대도 대단하다.고위 관계자는 “만약 삼성전자가 사외이사로 구성된 이사회를 했으면삼성자동차에 투자를 못했을 것”이라며 “사외이사는 우리의 파수꾼”이라고 말한다. 국내기업 최초로 대변인 제도를 도입,외부에 정보제공의 통로를 활짝 열어둔 것도 주목할 만하다.1주일에 한차례씩 정례 브리핑을 갖는다.포철 사외이사인 서울대 임종원(林鍾沅)교수는 “기업의 경영정보를 숨기지 않는 포철로부터 많은 기업들이 배워야 할 것”이라고 평했다. ‘한 우물 파기’경영 유 회장의 포철 경영모토는 ‘선택과 집중’이다.평소 “핵심역량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한다.문어발식 확장전략에 열을 쏟은 여타 재벌과는 다르다.경영전략도 ‘최대 생산,최대 판매’에서 ‘적정 생산,최대 이익’으로 바꿨다.“돈을 벌지 못하는 경영자는범죄자”라는 지론에 따라서다.이는 성과로 이어졌다.지난해 1조1,230억원,올 상반기에 6,840억원의 순이익을 올렸다.국내 최대 규모다.부채비율도 6월말 현재 96.7%로 5대그룹 평균 302%보다 월등히 낮다.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창업정신 포철의 성장사(史)에는 독특한 기업문화도 빼놓을 수 없다.이른바 ‘우향우 정신’이다.“국가경제의 흥망을 좌우하는 제철소 건설에 실패하면 영일만에 모두 몸을 던져야 한다”는 박태준(朴泰俊) 전 회장(현 자민련 총재)의 말에서 비롯됐다.포철직원들은 요즘도“나라 발전…” 운운하면 금세 경직된다.‘제철보국(製鐵報國)’의 창업정신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는 증거다. 철(鐵)은 바늘에서 우주선에 이르기까지 쓰임새가 무궁무진하다.유병창(劉炳昌)상무는 “영국은 제철산업으로 산업혁명을 완성했고,미국이 세계 최대부국으로 발돋움한 것은 철강왕 카네기의 공이 컸다”면서 “일본과 독일의철강산업은 항공 우주 조선 자동차 분야에서 세계를 제패하는 동력으로 작동했고,한국에는 포철이 있다”고 자신감을 표시했다.포철에 같은 기대를 걸어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 싶다. 박은호기자 unopark@ * 21세기 일류가 되려면 21세기에도 ‘포철신화’를 이어가려면 반드시 해결해야할 과제가 있다.몸집을 더욱 가볍게 해야 한다는 점이다. 산업연구원 김주한(金主漢) 소재환경산업연구실장은 “현재 포철의 가장 큰 골치거리는 과잉설비 문제”라며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군살을 뺄 수있는지 등에 대한 심층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과잉설비 규모는 1조4,300억원이나 투자된 광양 5고로를 비롯,광양 1·2미니밀,광양 4냉연공장 등 4조5,000억원에 이른다. 이들 설비는 현재 가동중단 상태이거나,생산단가가 시장가격의 두배를 웃도는 등 공장을 돌릴수록 손해가 나고 있다.조강생산에 들어간 73년 이후 매년 흑자행진을 구가해온 포철의 최대 애물단지다. 전문가들은 “핫코일 등 철강수요가 차츰 살아나고는 있으나 매각 등을 포함,유휴설비 처리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오늘의 쟁점] 정신지체 장애인 강제불임수술

    정신지체 장애인에 대한 강제 불임수술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최근 불거진정신지체 장애인의 강제 불임수술 사건을 놓고 논란이 뜨겁게 일고 있다.정신지체 장애인들은 본인 뿐만 아니라 후세를 위해서도 결혼해 아기를 낳아선안된다는 주장과 장애인들도 엄연한 인격체인 만큼 정당한 결혼생활과 생식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견해가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이다.사회발전과 본인의 입장을 고려한 강제 불임수술 찬성쪽과 인권을 강조한 반대측 주장을각각 들어본다. ■찬성 정신지체 장애인도 결혼해 아기를 낳아 기를 권리가 있다는 주장과 그들에게 그러한 능력이 없고 그들을 수용할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못되므로 강제불임수술을 시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맞서 있다.더구나 이들에 대한 강제 불임수술이 은밀하게 관(官)과 시설,기관의 주도로 이루어졌다하여 더 큰 충격과 비난이 일어나고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아이를 낳고 기르고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정신지체 장애인이라 해 예외일 수는 없다.따라서 그들의 본능적이라고 할 수있는 욕구를 빼앗을수 있는 권한은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다.그들이 원한다면 결혼도 시키고 아이도 낳고 기르도록 해줘야 한다.그러나 그런 인간적이고 감정적인 마음을 접고 한번 더 생각해보자.과연 그게 옳은 일인가. 같은 장애인이라도 신체장애인들은 본인 스스로와 자신을 돌보는 극히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불편을 줄 뿐이다.그러나 정신지체 장애인들은 본인 스스로는 그 불편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고 사회에 누를 끼칠 수도 있다.그들은 또 정신지체 장애아이를낳을 가능성이 높은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어 후손들에게까지 비극과 불행을잉태시킬 수도 있다. 정신지체 장애인에게서 태어난 자손들이 후대에까지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례를 통해 작은 불씨 하나가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나 소개하고 싶다.미국 뉴 저지주 바인 랜드 정신박약자수용소에 수용된 한 소녀의비극적이고 불행한 가계(家系)이야기이다.이 소녀는 미국 독립전쟁에 출정하였던 마틴 칼리카크라는 병사가 전지인 어느 시골에서 알게 된 정식박약인여자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마틴의 자손임이 밝혀졌다. 마틴의 자손 480명 가운데는 정신박약자 143명,조서자(^^逝者) 82명,성도착증 환자 32명,알코올 중독자 24명,창가(娼家)경영자 8명,범죄인 3명이고,많은 매춘여성 등이 있으며 정상적인 사람은 단지 4명에 불과했다.그러나 칼리카크가 전쟁이 끝난후 고향에 돌아와 정상적인 여인과 결혼해 낳은 자손 496명중에는 단 1명의 정신이상자와 4명의 알코올 중독자가 있었을 뿐이라고 한다.현대과학에서 정신지체장애는 환경적·문화적인 영향에 의해서보다는 유전적인 소질이 높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선진국에서도 정신장애인에 대한 강제불임수술이 이뤄지고 있다.스웨덴의경우는 1975년까지 40여년동안 6만2,000명을 시술했으며,미국서도 30개 주에서 정신지체아 등에 대한 단종법(斷鍾法)을 시행하였다.일본도 우생보호법으로 유전병환자,정신장애인 등에게 강제 불임시술을 하였고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도 장애 여성에 대한 강제 불임수술이 시행되었다.정신지체 장애인들에 대한 강제불임조치가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야만적인 행위는 아닌 것이다. 우리 사회가 정신지체 장애인들을 정상인들과 다름없이 기르고 같이 생활하며 아무 편견없이 그들을 대할수 없다면 그들의 불행을 또 생산시켜서는 안될 것이다.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얕은 동정심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필자는 사회에 위해한 유전인자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단종(斷鍾)을 시행하는 일이 더 인간적이라 생각된다.따라서 이제라도 정신지체 장애인 불임수술을 명령할 수있는 조항을 삭제한 모자보건법을 재개정,이를 부활시켜야 한다. 그 대상은 73년 제정돼 시행되었던 모자보건법상의 7가지인 유전성 정신분열증과 유전성 조울증,유전성 간질증,혈우병,유전성 운동신경원 질환,현저한유전성 범죄 경향이 있는 정신장애,기타 유전성 질환으로 태아에 미치는 영향의 발생빈도가 10%이상인 질환 등으로 정해야 한다. 요즈음 미국에서 성폭력 상습범에 대한 화학적 성기거세형을 선택형으로 부과하고 있음을 한번 생각해볼만한 일이다.우리도 이제는 은밀하게 강제 불임수술을 할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정당한 법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池光準 강남대교수·형사정책학]■반대 어릴 때 돼지의 거세 광경을 동네에서 한 두번 본 적이 있다.돼지의 높은목청에 동네꼬마들이 모여들고 날카로운 사금파리를 든 어른이 네발이 꽁꽁묶여 있는 돼지 앞에서 유능한 수술의사가 되어 능란한 수술 솜씨를 보여준다.거세를 하면 더 많은 양의 고기를 얻을수 있다 해서 돼지에게는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방법이었다.비록 동물이긴 하지만 생식기능을 없앤다는 것이 너무 끔찍하다. 얼마전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김모 의원이 폭로한 정신지체 장애자 66명에 대한 강제 불임수술 소식을 접한 후 바로 그런 느낌이 들었다.인간을돼지와 함께 비유하는 게 매우 불경스럽기는 하지만 인간이 돼지처럼 취급받았다는 울분의 느낌이다. 정신지체 장애자의 경우 2세에게 같은 증세가 나타날 가능성이 매우 많으며 또 장애인 복지가 우리나라처럼 열악한 환경에서는 그러한 조치가 불가피하다는 것,나아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스웨덴,노르웨이,미국,일본 등 사회보장 선진국가에서도 암암리에 행해지는 일이기 때문에 새삼스런 일이 아니라는 생각은 너무 위험하고 안이한 생각이 아닌가? 필자는 다음의 세가지 이유로 정신지체 장애자에 대한 강제 불임수술에 반대한다.첫째로 인간은 본성적으로 누구나 종족 보존을 원하는 존재이고,인간이 가진 생식능력은 바로 이러한 인간본성을 충족시키는 기본적인 권리에 속하는 것임에도 이런 기본권을 강제적으로 박탈당한다면 이는 매우 중대한 인권 침해라는 이유에서이다. 인간은 누구나 영원하기를 원하는 존재이고,이런 인간의 염원은 자식을 통해 실현된다고 할 때 과연 우리들 중에 어느 누가 정신지체 장애자는 이러한 본성적인 염원까지도 희생해야 한다고 요구할 수 있겠는가? 인권,평등이라는 단어는 결코 몇몇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둘째,강한자의 힘으로 약한자를 희생시킬 수있다는 논리가 이 사회에 통용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정신장애자들은 분명 이 사회의 약한자들이다.그런데 이 약한자들이 강한자들의 힘의 논리에 떠밀려 소외된다면 그 사회는건전한 사회가 될 수 없다.사회의 목적은 ‘공동선’이라고 할 수 있다.정신장애자라고해서 사회가 추구하는 공동선의 범주를 벗어날 순 없는 것이다.공권력이 힘없는 사람,위험에 노출된 사람들에게 더 큰 관심을 가질 때 비로소 공동선의 실현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셋째,장애인 복지의 문제는 이 사회가 떠맡아야 할 책임이지 장애인 개개인이 인간으로서 기본권을 박탈당하면서까지 책임져야 할 문제는 아니라는 이유에서이다.인간은 누구나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에 반드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타인으로부터의 도움은 누구에게나 지극히 자연스런 삶의 모습일진대 우리는 장애인들이 이 사회의 짐이 되고 있기 때문에 이 사회에서는 사라져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장애인을 위한 도움과 관심을 외면하는 것은 너무 이기적이다.사회복지의 열악한 환경의 이유로다른 사람의 인권을 무시할 수 있다는 발상자체가 심한 정신장애적 발상은아닌가? 환경이 열악하다면 그러한 환경을 바꾸려 노력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인간은 분명히 동물과 구분되는 존재이다.만물의 영장이라고도 정의되는 것이 인간 존재이다.이러한 인간의 특성을 떠받치는 것이 곧 인간의 ‘존엄성’이다.이 존엄성 때문에 인간은 인권을 지니는 것이고,이 인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적용된다.장애인이건 정상인이건 인간이면 누구나 평등하다는것이 인권의 기초가 아니겠는가? 한편으로 우리 모두는 예외없이 정신장애자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李東益 가톨릭대교수·윤리신학]
  • [北 서해NLL 무효화 파장] NLL이란

    유엔군과 북한군은 53년 정전협정을 체결하면서 내륙의 군사분계선은 명확히 정했으나 서해상의 경계선은 긋지 못한 채 협정에 서명했다. 유엔군사령관은 그러나 같은해 8월 우리 해군함정의 경비활동 통제 등을 목적으로 백령도와 연평도 등 ‘서해 5도’를 남한에 귀속하게 하는 선에서 서해 북방한계선(NLL;NORTHERN LIMIT LINE)을 일방 선포했다. 북한은 55년 일방적으로 12해리 영해를 선포했지만 이후 20년간 NLL에 대해 특별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한국군은 NLL 남쪽을 실질적으로 관할해왔다.북한은 그러나 70년대들어 12해리 영해가 국제적으로 일반화되자 73년부터 수시로 NLL을 침범하는 등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북한은 84년 NLL에서 수재구호물자가 실린 배를 우리측에 인계하는등 NLL의 실체를 인정하는 양면성을 보였다.특히 북한은 91년 ‘남북의 경계선과 구역은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해 온 구역으로 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남북기본합의서(11조)에 서명했다.이로써 북한은 NLL 남쪽을남한측의 수역으로 공식적으로인정했다는 게 우리측의 설명이다. 우득정기자 djwootk@
  • 퇴임 김창희 대우증권사장

    대우증권의 채권단인수로 2일 퇴임한 김창희(金昌熙) 전 사장은 한국증권산업의 산증인이다.김 전 사장은 지난 62년 증권계에 투신,증권거래소,한국투자공사(증권감독원 전신),삼보증권 등 증권업계에서만 37년을 보냈다.김우중(金宇中) 대우 회장과는 경기고,연대 경제학과를 같이 다녔던 친구사이로 지난 73년 김 회장이 현 대우증권의 전신인 동양증권을 인수하면서 대우에 합류했다. 평소 보수적인 업무스타일과 ‘김핏대’라는 별명이 붙여질 만큼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정평이 나 있다.과감한 업무처리로 김 회장의 신임을 받아 지난 83년 업계 수위이던 삼보증권 대표이사에 취임한 이후 대표이사만 16년을지내며 대우증권을 부동의 업계 1위로 올려 놓는 경영수완을 발휘했다.또 지난 93년 약정경쟁 중단선언,지난해 임직원 윤리강령선언 등으로 대우증권뿐아니라 업계의 경영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도 받았다. 퇴임후 김 전 사장은 편한 말년을 보내기 어려울 전망이다.다른 그룹보다금융이 취약한 대우에서 대우증권이 자금줄 노릇을 한 탓에 민·형사상 법적책임문제가 거론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김환용기자 dragonk@
  • TFT-LCD ‘수출神話’ 만든다

    TFT-LCD(박막액정표시장치)가 수출효자 품목으로 떴다. 올들어 7월까지 수출증가율이 268%를 기록하면서 반도체 자동차 컴퓨터 무선통신기기 등 주요 품목의 수출신장세를 따돌렸다.7월까지 수출금액(15억3,000만달러)은 반도체(105억달러)에 크게 못미치지만 이 추세가 이어진다면제2의 반도체 신화도 어렵지 않을 것이란 게 업계 전망이다. LCD는 노트북PC나 벽걸이TV에 쓰이는 액정화면으로 95년 이전까지는 샤프 NEC 도시바 등 일본업체들의 독무대였다.그러나 삼성과 LG가 반도체에서 얻은 이익을 이 분야에 집중투자함으로써 95년 양산이후 불과 4년만에 세계 1,2위 업체로 도약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샤프는 73년 세계 최초로 액정표시기술을 제품화해 20년이상 LCD업계의 선두주자로 군림했다.그러나 LCD주력시장이 10.4인치에서 12.1인치로 바로 넘어가는 바람에 11.3인치에 주력했던 샤프는 주도권을 점차 상실했다. LCD시장은 올해 110억달러에서 2005년에는 340억달러로 신장될 전망이다.특히 액정TV 광고패널 등 대형LCD시장은 기술 고도화와 가격하락,신수요 창출에 힘입어 2007년까지 연평균 20% 성장이 기대된다.대형 고화질의 경우 가격이 소형차 한대와 맞먹어 최근 LG가 수출한 20.1인치 의료기기용 제품은 한개에 6,000달러나 됐다. 삼성경제연구소는 “TFT-LCD는 선진국과 경쟁해 단기간에 세계 정상에 오른 성공모델”이라며 “LCD의 성공은 축소일변도의 구조조정으로 침체돼있는국내 기업들에게 희망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권혁찬기자 khc@
  • 중부국세청장에 봉태열씨

    정부는 29일 중부지방국세청과 경인지방국세청의 통합으로 새로 생겨난 중부지방국세청장(1급)에 봉태열(奉泰烈·53) 경인지방청장을 승진,발령했다. 국세청은 이날 1개 지방청 감축과 35개 세무서 통폐합,기능별 조직으로의전환 등 조직개편을 계기로 사상 최대규모의 정기인사를 단행했다.이에 따라국장급 15명과 과장급 116명이 승진·전보되거나 보직을 재발령받았다. ■ 봉태열씨 프로필 기획력과 업무추진력이 뛰어나다. 73년(행시13회) 국세청에 투신, 세무서장총무과장 기획관리관 조사국장 경인지방청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윗사람의 마음을 잘 읽는’ 참모형이라는 평가다.부인 조숙성씨와 1남2녀를 두고 있고,취미는 테니스.전남 장성출신으로 연세대 행정학과를 나왔다. 추승호 기자 c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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