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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야 ‘치킨게임’

    개정 사학법을 둘러싸고 3주째 이어지는 여야의 극한 대치가 풀릴 조짐이 안 보인다. 마치 ‘치킨 게임’(두 대의 차가 마주 보고 돌진하다가 먼저 피하는 쪽이 패배하는 게임)을 보는 듯하다. 열린우리당 정세균 의장은 민생·국익 등의 이유로 민주당·민주노동당 등과 임시국회를 열 수밖에 없다고 공언했다.28∼30일 소집 요구한 국회 본회의에서 예산안과 이라크 파병연장동의안,8·31 부동산대책 후속법안 등을 처리할 예정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26일 최고위원회의에서 “헌법과 나라 지키는 것보다 더 소중한 일 없다. 안 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줄 때 국민들은 신뢰한다.”며 사학법 무효투쟁 의지를 거듭 천명했다. 열린우리당의 ‘개원 불가피론’은 크게 3가지 사안과 맞물려 있다. 먼저 예산안의 경우 처리가 지연되면 ▲헌법과 법률 위반 ▲막대한 사회적 비용 초래 ▲궁극적 피해자는 국민 등의 논리를 들어 28일까지는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73년 이후 단 한 차례도 12월을 넘긴 적이 없다고 강조한다. 또 8·31부동산 종합대책과 관련, 여권은 후속입법이 금년 내 완성되지 않으면 투기심리가 되살아나 급등세로 돌아설 것이라고 우려한다. 아울러 자이툰 부대 파병연장 동의안이 처리되지 않으면 새해 1일부터 자이툰부대는 불법 파병 상태가 돼 철군이 불가피하고 미국측에 연장을 통보한 상태라 외교관계에도 문제가 된다는 논리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이런 ‘민생 개원론’에 대해 “여당이 민생문제까지 핑계대며 정략적으로 이용한다.”며 “정작 우리가 영업용 택시기사, 장애인, 결식아동, 영세상인 등 진정한 민생용 감세를 주장했을 때는 무시하고 민생과 관련 없는 사학법을 날치기 처리해 국회 파행을 가져온 사실을 잊은 듯하다.”고 맞받아쳤다. 임태희 원내수석부대표도 “여당은 협상 과정을 일방적으로 무시했고 국회법을 어기면서까지 한나라당을 근본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며 “예산안과 파병연장동의안 등도 그런 방식으로 처리하면 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에 따라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의 ‘국회 시간표’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26일 기초의회 의장단 회의, 원외당원협의회 위원장 회의를 열어 ‘전의’를 불태웠다.27일 대구,28일 대전에서 대규모 집회도 이어갈 예정이다. 아울러 오는 28일 의원총회를 열어 김원기 국회의장이 사회를 보는 모든 회의를 저지할 방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한편 한나라당 의총에서 원내외 병행투쟁론이 본격 논의될 경우 장외투쟁 일변도의 방침에도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이종수 박지연기자 vielee@seoul.co.kr
  • 설화수 연매출 4000억원 국내 단일브랜드로 첫돌파

    태평양은 자사의 한방 화장품 설화수(雪花秀)가 국내 화장품 단일 브랜드로는 처음 연매출 4000억원을 돌파했다고 26일 밝혔다. 이는 태평양의 전체 화장품 매출액의 35%를 차지하는 금액이다. 설화수 브랜드 하나가 웬만한 화장품 회사의 연매출을 웃돈다. 26가지 품목으로 구성된 설화수는 지난 73년 약용으로만 쓰던 인삼을 화장품으로 사용한 국내 최초의 한방화장품 ‘진생삼미’에서 비롯됐다.97년 경희대 한의대와 공동 연구를 통해 설화에서 한단계 업그레이된 설화수를 내놓았다.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대전 향토기업 뿌리째 ‘흔들’

    장류생산업체 ‘해찬들’이 22일 CJ에 매각되는 등 대전지역 향토기업이 잇따라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해찬들은 이 날 “2000년부터 CJ와 절반씩 지분을 갖고 경영해오다 해찬들 지분 모두를 CJ에 750억원에 매각키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1973년 삼원식품으로 출발,2000년 현재의 회사명으로 바꾼 이 회사는 고추장·된장 점유율이 국내 최고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향토기업 가운데 하나다. 지난 달에는 화장지 생산업체인 대전모나리자가 법정관리가 끝나면서 서울모나리자로 경영권이 넘어갔다.30년의 향토기업으로서의 생을 마감했다. 대전·충남을 기반으로 하는 소주생산업체 선양은 지난 해 대구에 본사를 두었던 벨소리공급업체 ㈜5425에 매각되는 등 잇따라 대전지역 향토기업들이 사라졌다. 향토기업의 몰락은 1995년 신진건설 부도를 시작으로 2년 후 영진건설이 쓰려지고 그해 말 IMF가 터지면서 더 가속화됐다.충청은행이 하나은행에 합병되고 중앙생명, 중부리스, 한길종금 등이 줄줄이 합병, 퇴출되면서 향토 금융기관은 자취를 감춘 상태다. 대전백화점 부도에 이어 동양백화점도 갤러리아백화점에 넘어갔고 70년대 대전경제를 주도하던 충남방적과 풍한방적은 겨우 명맥만 유지 중이다. 대전시 관계자는 “행정도시 건설 등으로 지역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는 호기를 맞고 있지만 이를 견인하는 향토기업이 많이 사라져 호기를 제대로 살릴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블랙먼, 판사가 되다/린다 그린하우스 지음

    많은 사람들은 지난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기억이 생생할 것이다. 박빙의 대결을 벌인 공화당 부시와 민주당 고어 두 후보. 백악관의 주인은 플로리다 주의 개표 결과에 따라 결정날 상황이다. 재개표 여부를 두고 여러 차례 법정절차가 이어진다. 국정 공백으로 야기될 혼란에 국민들이 불안해 하는 가운데 연방대법원이 최종적으로 나선다.‘더 이상 재검표를 진행하지 말라. 부시의 당선 확정이다. 고어는 승복한다. 만약 그가 승복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일은 미국에선 상상할 수 없다. 옳든 그르든 대법원 판결에 승복하지 않은 사람은 미국 국민 자격이 없다. 연방대법원엔 아홉명의 종신 판사가 재직한다. 그래서 판사 한 자리의 임명을 둘러싸고 온 나라가 요란한 것이다.‘아홉명의 늙은이’가 나라를 망치기도, 살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미국 대법원 판사의 행적에 대한 국민 관심은 지대하다. ‘블랙먼, 판사가 되다’(린다 그린하우스 지음, 안기순 옮김, 청림출판 펴냄)는 1973년 역사적인 ‘로 대 웨이드’(Roe v.Wade) 판결의 판결문을 썼던 해리 블랙먼(1908∼1999)의 첫번째 전기이다. 흔히 ‘낙태 판사’로 알려진 블랙먼의 법조 인생과 사법철학을 조명한 저술. ●美 연방대법원 종신판사로 24년간 재직 저자는 뉴욕타임스 연방대법원 출입기자 출신으로, 지난 1988년 대법원 취재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블랙먼이 소장했던 엄청난 분량의 문서에 접근했던 최초의 기자였던 그는 이같은 자료와 블랙먼의 구술을 바탕으로 블랙먼의 삶과 대법원 재임 중 일어난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엮어냈다. 특히 법률 사건 뒤에 가려진 인간의 존재를 인식하고 낙태, 소수민족 우대정책, 사형, 성차별 등과 같은 논쟁에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데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던 판사로서의 블랙먼의 모습을 보여준다. 연방대법원은 현명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아홉명의 판사들이 사건에 대해 결정을 내리고 다른 판사들을 자신의 관점에서 생각하도록 설득한다. 특히 블랙먼이 판사석에서 보냈던 24년 동안, 그들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을 두고 격렬하게 토론하는 일을 거듭했다. 국방부 문서사건, 로 대(對) 웨이드 사건, 닉슨 도청테이프 사건, 바크 대 캘리포니아 대학 이사회 사건, 가족계획협회 대 케이시 사건 등이 결렬한 논쟁을 거쳤다. ●보수성향에서 진보의 최전선으로 특히 대법원 판사 지명때마다 진보냐 보수냐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는데, 이를 가르는 한 획이 ‘낙태’와 ‘사형제도’에 대한 지명자들의 태도나 성향이다. 해리 블랙먼 또한 리처드 닉슨이 지명할 당시 미국 중서부 출신의 온건한 보수주의자라는 평이 나왔고, 그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블랙먼은 나이 예순에 미국 연방대법원 판사가 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진보의 최전선에 서게 된다. 책은 블랙먼이 닉슨 대통령에게 지명된 1970년부터 24년간 대법관을 지내면서 그가 참여한 중요한 판결의 논의과정을 블랙먼의 눈과 글을 통해 조명했다. 1973년 블랙먼이 판결문을 작성한 ‘로 대 웨이드’ 사건 판례는 그 이전 100년간 낙태를 범죄로 간주한 미국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했다. 그래서 이 판례엔 항상 ‘그 유명한’,‘역사적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다. 평생 불려온 ‘낙태판사’라는 별명도 이때 얻었다. 저자는 지명 당시 보수파로 분류됐던 블랙먼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이끌어내기까지 새로운 생각을 향해 마음을 열었고, 자연스럽게 여성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진보주의자가 된 과정을 추적한다. ●‘로 대 웨이드´ 계기로 여성권리 위해 투쟁 이 과정에서 자신을 대법관으로 추천했던 친구 워렌 버거 대법원장과 가깝고도 불편한 관계를 그린 부분은 인간 드라마로서의 흥미를 돋운다. 블랙먼은 인간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코드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 블랙먼을 중심으로, 우리와는 다른 미국 사법체계가 움직이는 원리, 사법체계의 정점에 있는 연방대법원의 일상을 유명 대법관들이 등장하는 일화와 함께 풀어놓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1만 8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대림산업-이준용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대림산업-이준용 회장家

    대림산업은 지난 1976년 상장 이후 주주들에게 기업 이익을 돌려주고 있다. 건설업체 가운데 오랫동안 빠지지 않고 배당을 한 기업을 찾기란 여간 쉽지 않다.30여년 동안 배당을 거르지 않았다는 것은 부침이 심한 건설업계에서 대림이 오랜 전통을 지켜온 명실상부한 전문 건설업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업종으로 출발했던 현대건설이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늘린 것과 사뭇 다르다. 특히 단순 제조업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대림산업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보수적인 기업 이미지를 떠올린다. 대림 스스로도 이를 인정한다. 그러나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는 아니다. 단지 정통 건설 기업에서 벗어나지 않고 조용하게 기업을 일구겠다는 것이 대림산업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1세대, 정미소에서 건설 명가로 성장 고 이재준(수암) 대림산업 창업주는 경기도 시흥(현재 산본 신도시 일대)에서 부친 이규응 옹과 모친 양남옥 여사의 5남4녀 가운데 차남(넷째)으로 태어났다. 고 이재형 전 국회의장이 이 창업주의 바로 손위 형이며 이재연(74) 아시안스타 회장이 막내 동생이다. 부친은 장남에게는 공부를 시켰지만, 사업 기질이 보였던 차남에게는 장사를 배우라면서 보통학교만 졸업시킨 뒤 자기 밑에 두었다. 수암은 이 때부터 부친이 경영하던 서울 서대문 한일정미소에서 경영수업을 받았다. 이것이 오늘날의 대림을 키우는 원동력이 됐다. 대림의 태동은 1939년 부평에서 목재와 건자재상으로 문을 연 부림(富林)상회에서 출발했다. 초기 부림상회를 이끈 주인공은 3명. 이재준 창업주와 그의 고종 사촌형인 이석구 전 대림산업 사장, 이석구의 매제 원장희로 알려졌다. 사촌지간은 각각 1만 5000원씩 출자했고, 원장희씨는 1만원을 출자했다는 것이다. 이석구는 풍림산업 이필웅 회장의 부친. 결국 대림과 풍림의 뿌리는 부림상회로 같다. 부림상회는 원목을 개발, 사세를 키웠고 광복 이후 군정청으로부터 원목을 값싸게 인수해 교실을 짓는데 들어가는 목재 등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이후 사업이 번창해 1947년 건설업에 진출하면서 상호를 대림산업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평경찰서 신축 공사 수주는 건설업체로서 첫 걸음을 내딛는 계기였다. 주한미군 공사를 수주하기도 했다. 이즈음부터 우리나라 건설업이 시작됐다고 보면 된다. 당시 국내 건설업계를 대표하는 기업으로는 대림산업·현대건설·삼환기업 등이었다. 49년부터는 건설업이 목재업을 앞질러 주력업종으로 자리잡았다. 한국전쟁 중에는 피란민 수용소를 짓는 등 군 시설 공사를 맡았고, 한국경제 재건기를 거치면서 굵직한 공사를 따냈다.58년 시작된 청계천 복구공사와 청계고가도로 건설, 경부고속도로, 소양강댐건설 등 굵직한 사회간접자본시설 현장마다 대림의 깃발이 나부꼈다. 60년에는 풍림산업을 인수, 자회사 형태로 두었다. 서울 영동·잠실·반포지구 개발과 광진교, 영동대교, 양화교 등 한강 다리 공사에도 대림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지하철 시대를 여는데도 대림은 처음부터 참여했다. 동시에 해외공사 수주를 늘리는 등 사세를 키웠다. 54년에 설립한 서울증권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99년 구조조정차원에서 소로스에 매각했다. 지금은 지분을 전혀 소유하지 않고 있다. 대림통상은 아예 동생 재우씨에게 떼어줘 형제간 사업 분리를 마무리지었다. 대림요업 역시 98년 매각하면서 지분을 대림통상에 넘겼다. 창업주가 생전 계열 분리를 통해 경영권 분쟁의 씨앗을 남기지 않았다. ●난형난제(難兄難弟)…운경 이재형 대림산업을 말할 때 흔히 고 운경 이재형 전 국회의장을 끌어들인다. 수암 이재준 창업자와 비교하기도 한다. 정계와 재계에서 각각 독특한 개성으로 주목받으며 거목으로 우뚝 섰던 인물이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고집스러운 면모,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말을 아끼는 점에서 같았다. 운경은 자유당·공화당 시절 내내 골수 야당을 했다. 그래서 동생이 운영하는 대림은 자주 곤욕을 치렀다. 대림에서 정치자금을 대주지 않나 하는 의심과 함께 야당 정치인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대림은 수시로 세무사찰을 받아야 했다. 민정당 시절에도 운경과 수암, 그리고 이준용(67) 회장은 형과 동생, 백부와 조카라는 혈연 빼고는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았다. 운경이 정치한다고 자금을 요구하지 않았고, 대림 역시 운경에게 베풀거나 받지도 않았다. 서로 철저하게 독립된 길을 걸어온 것이다. ●2세대, 건설업에 유화부문 키워 양대축 형성 수암 이재준은 열아홉 되던 해 수원지역 대지주의 딸인 이경숙과 결혼했다. 이 여사는 그러나 장남 준용(현 대림산업 회장)을 낳은지 4년만에 세상을 떴다. 창업주는 박영복 여사와 재혼, 차남 부용(전 대림산업 부회장·61)을 얻었다. 단출하게 두 아들만 두어 경영권 이양 등에서 큰 불협화음이 없었다. 이 회장은 부친과 달리 정규 교육 혜택을 입고 착실히 경영 수업을 받았다. 경기고,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뒤 미국 덴버대에서 통계학을 전공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에도 영남대와 숭실대에서 잠시 강의를 맡는 등 학자풍의 엘리트였다. 그러면서 한경진 여사와 결혼하고 66년부터 대림산업 사무실에 출근했다. 경영 참여와 관련, 이 회장은 “본격적으로 해외 건설시장을 개척할 시기였는데 해외감각과 국제업무에 정통한 사람이 필요했고, 명예 회장의 강력한 요청도 있었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국내외 공사를 막론하고 창업주를 도왔다. 유창한 영어는 해외공사 수주는 물론 각종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됐다. 국내에서는 내실을 다지는데 주력했다.78년 당시 부사장이었던 그는 건설업계 최초로 업무 전산화 작업을 추진하는 등 경영정보시스템 구축에 앞장섰다. 업계는 이 회장이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79년에는 사장에 오르면서 색깔을 내기 시작한다. 동생 부용씨는 상무로 승진했다. 건설과 양대 축을 이루는 유화부문의 틀도 이때 마련됐다. 창업주가 목재상을 건설업으로 키웠다면, 이 회장은 여기에 유화부문을 더해 건설과 석유화학의 양대 사업을 구축해 안정과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대림산업은 66년 베트남 진출로 국내 최초 해외건설시장을 개척한 이래 중동건설붐의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지금까지 해외건설 맥을 유지하고 있다. 잠실 종합운동장 주경기장, 포항제철 3,4호기 건설공사 등도 대림의 손을 거친 건축물이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대림은 국내외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이미지가 실추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86년 개관 11일을 앞두고 독립기념관에서 화재가 발생,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87년 8월까지 당초보다 더 완벽한 복구공사로 전화위복의 계기를 삼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88년에는 이란-이라크 전쟁의 피해를 보기도 했다. 이란 캉간가스정제공장 현장에서 이라크 공군기의 무차별 폭격으로 13명이 죽고 19명이 부상을 당했다. 가장 큰 피해자는 대림이었다. 그런데도 대림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속죄양으로 몰리기도 했다. 대림 역사상 최대 위기였다. 대림은 그 뒤 국내 아파트 공사, 관공서 건물, 평화의 댐공사 등 굵직한 일감을 따내면서 덩치를 키웠으나, 사업 다각화 등으로 몸집을 불린 다른 업체와 달리 한 우물만 고집, 업계 순위에서 상대적으로 밀렸다. ●3세대, 건설·유화 오가면서 경영 보폭 확대중 이 회장의 장남인 이해욱(37) 대림산업 부사장은 건설과 유화부문을 오가면서 경영 수업을 쌓고 지난 7월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미국 덴버대 경제학과를 나와 부친과 동문을 이룬다. 컬럼비아대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고 95년 대림엔지니어링에 입사했다.2000년 건설부문 기획실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2004년부터 전무를 맡았다. 지난 5월에는 대림산업 지분의 21%를 보유하고 있는 사실상 지주회사인 대림코퍼레이션의 공동 대표이사에도 취임했다. 대림산업은 계열사 12개를 거느린 재계 27위 규모의 대림그룹 모기업이다. 이 부사장은 현재 대림산업 0.47%, 삼호 1.85%, 비상장 종합물류 회사 대림H&L의 주식을 100%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지분 움직임이 없어 본격적인 경영권 승계라기보다 다양한 경험 축적 과정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혼맥 1세대는 평범,2·3세대는 화려 이재준 창업자는 조선 선조대왕 7번째 왕자인 인성군(仁城君)의 9대손이다. 가문이 번창했기 때문에 수암의 집안은 늘 북적댔다. 생가가 서울로 향하는 길목이라서 오고 가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500여섬지기 자작농 겸 지주였고 서울에서 큰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경영의 덕목을 키워나갔다. 창업주 세대는 대부분 평범한 가정과 연을 맺었다. 큰 누이는 평범한 가정으로 출가했고, 둘째 누이도 작은 사업가에 시집을 갔다. 형님 이재형 전 국회의장 역시 평범한 집안의 류갑경 여사를 아내로 맞았다. 수암도 예외는 아니다. 평범한 가정에서 배필을 맞았다. 아래 동생들도 일반적인 가문과 결혼을 올렸다. 하지만 막내 이재연 아시안스타 회장의 결혼에서는 국내 굴지의 재계와 혼인을 맺는다.LG그룹 구인회 창업주의 차녀 구자혜(68)여사와 결혼하면서 대림과 LG는 사돈의 연을 맺는다. 이를 계기로 이 회장은 줄곧 LG그룹 경영에만 참여하고 있다. 자녀들도 명문가문과 연을 맺었다.LG카드 부회장을 지냈으며 LG그룹 고문으로 활동했다. 이 회장은 장인이 강세원 전 희성금속 사장과, 박동복 전 금호전기 회장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어 이들과는 한다리 건너 사돈지간이다. 이준용 회장의 형제로 이어진 2세부터는 본격적으로 정·관계, 재계 혼맥이 형성된다. 이 회장은 1965년 연애끝에 이화여대 출신의 한경진 여사와 혼인했다. 장인인 한순성씨는 천안 사업가 집안 출신이었다. 처음에 양가에서 두 사람의 연애결혼을 반대하는 바람에 결혼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차남 이부용 전 대림산업부회장도 경희대 출신의 이선희 여사와 결혼, 재계 인맥을 쌓는다.1970년 집안 어른의 중매로 만났으며 장인이 서울주철회장과 헌정회 이사를 지낸 이종수씨다. 이 회장의 백부인 이재형 전 국회의장은 은행간부 출신인 배상준씨 집안에서 큰 며느리를 맞았다. 이어 큰 딸은 원용덕 전 헌병사령관 아들에게 시집을 보냈다. 작은 사업가와 결혼했던 둘째 고모 고 이임출의 딸은 윤용구 일동제약 회장 아들과 혼인을 맺었다. 숙부 이재연 아시안스타회장은 오세중 세방회장과 추경석 전 건설교통부장관 집안에서 며느리를 얻었다. 3세에 들어서 재계 혼맥은 더욱 두터워진다. 이 회장의 장남인 이해욱 대림산업 부사장은 LG그룹 구자경 명예회장의 외손녀인 김선혜(34) 여사와 결혼했다. 장모가 구자경 회장의 큰 딸 구훤미 여사, 장인은 희성금속 회장을 지낸 고김화중씨다. 이들은 친지의 소개로 만나 연애결혼했다. 이로써 대림산업은 LG가와 두번째 혼맥을 만들었다. 차남 이해승씨의 부인 김경애 여사는 전 미국 미주리대 김현영 박사의 딸이다. 3남 이해창(34)씨의 부인 최영윤(30) 여사는 같은 건설업종인 삼환기업 최용권 회장의 큰딸이다. 초창기 우리나라 토목 건설산업을 일군 두 집안이 사돈을 맺게 된 것이다. 아는 사람이 소개해 연애결혼했다. 결혼 당시 양가 부모들은 청첩장에 결혼 일자만 표시하고 장소, 시간은 넣지 않았다. 친지들에게 두 사람의 결혼 사실만 알리고 식장 참석과 축의금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막내딸 윤영(33)씨 남편은 외국계 금융사에 근무하고 있으며 현재 일본에 체류 중이다. 가족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요일마다 이 회장 집에서 모인다. 이 회장은 손자들이 보고 싶을 땐 아침 일찍 자식들 집을 찾곤 한다. ●전문 경영인, 업계 최장수 베테랑 대림산업㈜ 이용구(59) 사장은 6년 가까이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71년 대림에 입사, 해외·주택 영업 담당 임원, 기획조정실장, 행정본부장, 사우디 사업본부장, 공사본부장 등 주요 보직을 거친 정통 건설맨. 몇 안되는 해외건설 전문가로, 국제감각이 탁월한 국제신사로 알려져 있다.35년간 이 회장과 함께 하면서 임직원들의 맏형 역할을 하는 등 이 회장의 신임이 두텁다. 대림산업의 한 축인 유화사업부문을 이끌고 있는 CEO는 한주희(53) 대표이사 부사장.80년 입사해 관리, 기술기획 및 영업 핵심 업무를 맡았다. 대림 코퍼레이션 기획 담당 임원, 대림 H&L초대 대표이사를 지냈다. 중국 전문가로 바이어 협상에 있어 귀재로 평가받는다. 고려개발㈜ 오풍영(63) 사장은 95년 관리인 사장으로 임명돼 10년 넘게 장수하는 최고경영자.ROTC중앙회 부회장을 역임하는 등 대외활동도 활발하다. 대림산업에 근무하다가 87년 법정관리에 들어간 회사로 옮겨 기획·재무부문을 담당했다. 관리인 취임과 동시에 경영혁신에 드라이브를 거는 등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 당초 2007년까지 계획됐던 법정관리를 9년 앞당겼다. ㈜삼호 신일철(56) 사장은 현장중심 경영자.2001년부터 최고경영자를 맡고 있다.81년 입사하기 전 금융기관과 제조업체에서 근무한 경력으로 기획, 예산, 재경 등을 담당하다가 임원 승진 이후 인사, 자재, 안전 등 전분야에서 경험을 쌓았다. 업계 최상위 수준의 안전경영을 하고 있다. ㈜대림코퍼레이션과 대림 H&L을 동시에 맡고있는 박준형(53) 사장은 76년 대림 석유화학에 입사한 여천 석유화학단지 건설의 역군. 유화 부문 공장장, 구조조정 담당 임원, 석유화학사업부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대림코퍼레이션은 석유화학 주력 무역회사, 대림H&L은 유화 부문 물류 회사. 석유화학 산업 위기를 구조조정을 통해 슬기롭게 극복했다. 대림콩크리트공업㈜ 서봉삼(61) 사장도 장수 CEO.2000년부터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70년 대림산업 입사 이후 주요 건설 현장을 누볐다. 상·하 구분없이 조직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합리적인 경영을 하는 CEO로 평가받는다. 지시와 통제보다 자율과 협력을 강조한다. 오라관광㈜ 김부경(57) 사장은 국내 최대 관광지인 제주에서 512실 규모의 특급호텔과 국제적 수준인 36홀 규모의 골프장을 운영하는 최고경영자.83년 오라관광에 입사, 국내·외 판촉, 객실 운영 등 회사의 주요 업무를 두루 거쳤다. 제주도 관광업계의 산증인. 제주관광협회 부회장, 제주지역골프협회장으로 활동중이다. 대림 I&S 김영복(46) 사장은 38세에 임원,40세 대표이사 등 대림그룹내 최연소 기록을 두루 갖고 있다. 늘 새로운 발상으로 주위를 놀라게 해 ‘아이디어 뱅크’로 소문났다.81년 대림산업에 입사,4년 6개월간 쿠웨이트 현장에서 전산업무를 담당한 것이 인연이 돼 대림그룹의 디지털 경영을 주도하고 있다. 대림자동차공업㈜ 박노균(57) 사장도 2000년부터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73년 대림산업에 입사, 사우디아라비아 현장과 대림엔지니어링 재무담당 이사 및 행정본부장을 역임했다. 현장경영을 중시해 수시로 지방 사업장을 둘러본다. 외환위기 이후 이륜차 산업의 극심한 침체로 인한 경영위기를 슬기롭게 이겨냈다. 웹텍 창업투자 이대영(50) 사장은 금융 전문가.79년부터 94년까지 은행, 레이니어은행, 한미은행,JP모건, 한국신용정보에서 근무하고 화동창업투자 대표이사를 지내기도 했다.95년 대림엔지니어링 국제금융 이사로 인연을 맺어 대림산업 구조조정 담당 상무로 있다가 99년부터 웹텍 경영을 책임지고 있다. chani@seoul.co.kr ■ ’닮은꼴’ 창업주 父子 대림산업 창업주 이재준 명예회장과 이준용 회장은 여러 면에서 닮은 기업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곁눈질하지 않고 한 우물을 파는 고집쟁이라는 점에서 같다.66년 된 회사지만 건설에서 벗어난 적이 한번도 없다. 건설이 제자리를 잡을 즈음해서 확장한 분야라고 해봤자 유화 부문 정도다. 덩치를 키우는 것을 자제한 것도 닮았다.‘돌다리를 두드리고 건너라.’는 말이 있지만 대림은 돌다리를 두드려보고도 건너지 않는 회사다. 하지만 옳다싶으면 금방 정상 궤도에 올려놓을 정도로 강한 추진력을 발휘하는 장점도 지녔다. 청탁을 하지도 않고 받을 줄도 몰랐다. 창업주는 인사 청탁에 있어서는 매우 완곡해 부모님이 살아 돌아와 청탁해도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빽’이나 동창생을 찾아다니면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고 박정희 대통령 생전에 청와대에서 들어온 인사 청탁을 거절한 일화도 있다. 그는 대통령의 부탁을 감히 거절할 수는 없겠지만, 본인이 경영일선에서 물러서 있을 때면 몰라도 당시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명예회장과 현 회장 모두 쉽게 권력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사업가로서 자기 일에만 매달렸다. 이런 분위기는 지금도 이어져 형제간 독립된 사업을 일구거나 아예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친인척이 배제된 전문 경영인 체제로 움직인다. 그래서 친인척들로부터는 ‘남남만도 못한 회사’라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 이 회장은 “대림은 대주주라고 무조건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다. 본인의 의지와 그에 합당한 능력이 뒤따라야 경영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친인척 경영에 있어서 창업주와 똑같은 모습이다. 이 회장의 동생 부용씨는 대림산업 부회장을 지냈지만 지금은 대림산업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이 전 부회장은 대림통상 지분을 놓고 숙부와 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났다. chani@seoul.co.kr ■ 李회장 부부 ‘남다른 문화사랑’ 서울 종로구 통의동 경복궁 옆에 위치한 대림미술관. 화려하지 않지만 멋스러운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대림미술관은 유난히 직장인들이 많이 찾는다. 대림산업 임직원들은 물론 점심 때는 주변 사무실 직장인과 공무원들이 단골 관람객이다. 대림 관련 업체들은 단체로 다녀간다. 회사 차원에서 직원들에게 문화활동을 적극 장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림이 문화예술에 각별한 관심을 갖는 것은 이준용 회장 부부가 문화예술에 갖는 관심의 크기와 비례한다. 이 회장은 94년 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가 탄생할 때부터 부회장으로서 활발한 문화예술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대외 직함을 좀처럼 갖지 않으려는 이 회장이지만 10년넘게 이 단체의 부회장직을 맡고 있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여기에는 문화예술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한경진 여사의 역할도 크다. 한 여사는 대림미술관을 맡아 대림의 문화공헌 사업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다. 대림미술관은 대림이 120억여원을 출연해 문을 연 사진매체 전문 미술관.93년부터 대전에서 운영해 온 한림미술관이 모태인데 2003년 서울로 옮겨 한 단계 발전시켰다. 이 미술관은 프랑스의 미술관 전문 건축가인 뱅상 코르뉘와 루브르 미술학교의 장 폴 미당 교수가 설계했다. 대지 253평에 지상4층, 연면적 366평 규모다. 대부분의 기업은 미술관 설립 때 한번 출연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대림은 운영에도 적극적이다. 문화에 대한 인식 수준이 낮은 현실에서 미술관이 자립운영을 해나가기에는 아직 어려운 실정이기 때문이다. 대림은 전시가 바뀔 때마다 직원들에게 전시를 관람토록 장려하고 경영전략회의나 송년회 등 사내 각종 모임을 미술관에서 열기도 한다. 예술에 대한 친숙도는 직원들의 창의적 사고를 키워주고 제품의 경쟁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대림이 개발한 아파트 외벽 디자인은 미술저작권 등록을 통해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건축조형물들이 건축분야의 저작권에 등록되는데 비해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미술분야의 저작권을 얻기는 쉽지 않다. 이 외벽디자인이 적용된 역삼 e-편한세상의 경우 외관의 차별화로 주변 다른 아파트들에 비해 가격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다. 직원들은 문화적 소양과 미적 안목이 결국 다른 업체와 다른 품질 경쟁력을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chani@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차를 알 수 있는 책들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차를 알 수 있는 책들

    산이 오랜만에 조용히 쉬고 있다. 마치 구멍이 뚫린 듯 퍼붓던 눈발이 뚝 끊기자 세상은 어마어마한 적막속에 잠겨 있다. 길이 끊어지자 인적도 함께 끊긴 탓이다. 오랜만에 산속의 살림살이도 쉰다. 지난 가을 모아두었던 바짝 마른 장작 몇 개를 아궁이에 넣는다. 그리고 눈을 한 움큼 떠서 돌솥에 넣는다. 이른바 ‘설차’를 마시기 위함이다. 돌솥이 달아오르자 눈을 한 움큼씩 집어 넣는다. 마치 만년설이 허공으로 녹아들 듯 돌솥 속에서 녹아든다. 찻물이 끓고 하이얀 백자찻잔에 붓는다. 이른바 ‘눈백차’다. 부처님과 삼라만상에 그 첫잔을 아련한 그리움으로 바친다. 물이 끓는 소리 그리고 백차 한잔. 삶이란 아주 가끔식 나를 멈추는 행복속에서 사는 것이다. 나를 멈추면 그속에 비로소 완벽한 행복이 존재한다. 그러나 일상을 사는 현대인들이 과연 나를 멈출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현재 우리 곁에는 차를 공부할 수 있는 제대로 된 다서(茶書)들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최근들어 차에 관해 다양한 책들이 우리들에게 선보이고 있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일이다. 다구에 관한 것, 차에 관한 것, 중국·일본차에 관한 것. 그뿐만 아니다. 차에 관한 잡지들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차의 대중화가 불러들인 문화적인 현상이다. 차문화는 현재 급속하게 복원 중이다. 또한 다양한 문화적 경계에 접근중이다. 웰빙 그리고 명상·요가 등 다양한 영역으로 급속하게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차에 관한 출발은 육우의 (다경)(茶經)으로부터다. 전문(全文) 약 7000자(字)로 육우가 편찬한 (다경)(780년쯤)은 당대(唐代)와 당대이전의 차에 관한 과학적 지식과 실천경험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중국 차문화의 기초를 확립했다.1200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져온 (다경)은 단순히 차의 종류나 마시는 방법을 말한 표면적인 사항을 정리한 책이라기 보다는 ‘차의 정신’을 중요시하고 있다. 육우가 확립한 다학(茶學), 다예(茶藝), 다도(茶道)의 사상과 그것을 정리한 (다경)은 시대를 초월한 차의 명작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다경)은 3권 10장규모로 1장에는 차의 근원,2장에는 차의 연장,3장에는 차 만들기,4장 찻그릇,5장 차 달이기,6장 차 마시기,7장 차의 옛일,8장 차의 산출,9장 차의 생략,10장 차의 그림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3차례 정도의 수정을 거쳐 교연스님과 안진경의 후원으로 간행된 (다경)은 당의 피일휴, 소의 진사도, 명의 노팽, 진문촉, 장예경(발문), 동승서(육우찬), 이유정, 서동기, 청대에는 증원매, 민국시대에는 상락스님등이 후대에 서문을 썼다. 현존하는 (다경)은 4종이 있다. 주(注)가 있는 것으로 이른 것이 남송대 좌규본(左圭本:백천학해본)이고, 주가 없는 것으로는 (백권(百倦)의 설부본)이며 하나의 증본으로 다기권(茶器卷)을 다구도찬(茶具圖讚)에서 추가한 명의 (정화은본(鄭火恩本))(선화당본(宣和堂本))이 있다. 넷째는 원문을 가감한 삭절본(削節本)으로 명대의 (왕기본(王圻本))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다경)이 전해졌거나 간행되었겠지만 그 흔적은 아직까지 없는 상태다.(다경)역시 고대 다서들의 전철을 밟고 있다. 중국에서 발견된 최초의 (다경)간본은 1273년 좌규가 (백천학해(百川學海))의 (임집(任集))에서 다른 다서와 함께 (다경)을 판각한 (백천학해본)이 있는데 주가 첨부되고 있다. 명대의 간본도 있다. 다경선화당본(宣和堂本)은 명대(1368~1644)에는 세종 가정 연간에서 신종만력 연간에 걸쳐 (다경)에 관한 첨삭이 있었다. 원본에 기타자료를 부가한 (다경외편)중 하나로 다기권을 (다구도찬)에서 추가하여 마치 정문(正文)인 것처럼 만든 것이 바로 (선화당본)이다. 육자다경(陸子茶經)과 건안다록 역시 눈여겨볼 만한 다서중 하나다. 청말 서탑사의 주지인 상락스님이 간행한 가장 완비된 (다경)이다.1792년 (당인설회본)에 (다경)이 함께 수록된다. 건륭연간에 경릉서호의 왕자한이 음운을 교정한 (다경)을 증각했다. 건안다록(建安茶錄)은 송나라 정위(962~1033)가 지은 책인데 총 3권으로 되어 있으며 ‘건안 공다소’의 차밭, 차공자, 기구, 차따기, 제다법을 기록해 놓았다. 중국 지배계층과 일반 서민들의 차생활을 알 수 있는 다서들도 있다. 황제의 다도를 자세히 그린 (다록)과 (다소)가 그것이다. 먼저 다록은 송나라때 복건성 건안동쪽에 있는 봉황산의 산록에 ‘북원’이라 부른 차밭을 관리하던 채양에 의해 저술된 것이다. 당시 황제는 차에 관한 의문을 채양에게 하문했다. 채양은 황제의 하문에 답하기 위해 차에 관한 여러 가지 일들을 정리하여 책으로 묶어 바쳤다. 그 책자가 바로 (다록)이다. 채양은 당시 차제법과, 차의 품평 그리고 황제의 다도를 상세하게 저술했다 이에 비해 다소(茶疏)는 명나라 사람 허차서가 17세기 저술한 자신의 차 체험기 성격을 띤 책이다.(다소)에 대해서는 기록된 것이 없어 관련된 이야기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다소)의 서문을 쓴 요소현 글에서 그 기록의 편린들을 엿볼 수 있다. “병신년(1596년)에 나는 허차서(연명)와 함께 용정을 여행하며 약 열흘간 송사에서 침식을 함께 했다. 그때 승사에서 제공해주는 신차(新茶)를 즐기면서 고담(古談)을 나누었다. 몇해가 지나 허차서가 나를 찾아 그가 저술한 (다소)를 보여주었다. 나는 그것을 어보고 허차서에게 말했다. 육우의 (다경)이후 그 뒤를 이어받는 것 없이 세월이 흘렀는데 이것이면 육우의 익우(益友)가 되겠다. 군의 문장이 한위의 문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어서 육우가 고개를 숙일 것이다. 허차서가 말을 받아 제멋대로 사는 놈이 자기 멋대로 적어 놓은 것인데 육우의 제자라도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고 말했다.” (다소)의 가치는 자신이 체험한 차에 관해 논(論)한 것이라는 데 있다. 초의스님의 (다신전)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만보전서(萬寶全書)도 있다.(만보전서)는 청나라 모환문이 엮은 백과사전으로 초의스님은 1828년 칠불암에서 (만보전서)의 채다론(採茶論)을 필사해 (다신전)이라 붙였다. 만보전서의 채다론은 명나라때 장원이 지은 (다록)을 인용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옛 다서들도 존재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초의스님의 (동다송)(다신전), 한재 이목의 (다부),(고려도경)등이 그것이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은 고려 인종원년인 1123년 6월13일 송사 노윤적, 부사 부묵향을 따라 고려에 온 서긍이 한달 동안 고려에 머물면서 지은 견문기행문이다.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의 갖가지 풍물을 그림과 문장으로 엮어 냈다. 총28문 3백여항으로 분류되어 있는 (고려도경)은 1226년 금나라가 송나라 수도를 함락시켰을때 정본이 불타 없어졌으나 인하 조씨 소산당에서 인각해 간직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고려도경) 목록 31권 ‘다조’(茶俎)라는 절목에 당시 우리나라 차에 대한 기록이 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차는 맛이 쓰고 떫어서 구미에 당기지 않으며, 중국의 납차(臘茶)와 용봉사단차(龍鳳賜團茶)는 중국에서 진상받은 것과 상인이 수입해서 판 것들이 있었는데 차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국의 차들을 즐겨마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차 도구 중 찻잔은 천목(天目)찻잔과 청자찻잔을 쓰고 있는데 청자 찻잔은 비취색과 같다. 또한 은으로 만든 차 화로 등은 중국 것과 비슷하다. 고려 사람들이 차를 어떻게 마시고 사용했는가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먼저 잔치를 할 때다. 먼저 정원에 차를 달여놓는다. 그리고 연꽃모양의 큰 주전자에 차를 담아 손님들에게 “차를 고루 고루 잡수시오. 지금 마시지 않으면 차가 식어 냉차(冷茶)가 됩니다.”라고 안내방송까지 했다. 또한 방안에서 잔치를 할 적에는 홍사포(紅沙布)위에 다구를 놓은 다음 붉은 보로 덮어놓는다. 하루에 세 번씩 차를 마시게 하되 사람이 많아 차가 떨어지면 차관에 탕수만 부어서 차를 마시게 했다는 세밀한 기록도 보이고 있다. 이밖에도 제6권에 연영각에서 잔치를 베풀 때는 차와 정자와 청자 찻잔을 갖추었고, 제26권 관회(館會)절목에는 왕궁사연(私宴)에 골동품과 고완·법서·명화·이화와 좋은 차등을 벌여놓게 했다, 제27권 ‘향림정’(香林亭) 절목에는 무더운 여름 향림정에 소풍을 가 갈증을 해소하기위해 달여온 차를 마시고 놀았다는 기록 등이 있다.(고려도경)은 고려시대 우리 차 문화의 일단을 볼 수 있는 희귀한 자료이기도 하다. 이밖에도 다산 정약용의 저서로 알려진 (동다기)등이 있다. 현대에 들어서는 효당 최범술스님의 (한국의 차도), 금당 최규용 선생의 (금당다화), 김운학선생의 (한국의 차문화), 응송 박영희스님의 (동다정통고)등이 있다. 우리 차인들은 모두 다예, 즉 다도에 얽매이는 경향이 있다. 먼저 차에 대한 정확한 공부가 필요하다. 책을 통해, 강의를 통해 차에 대한 개괄적인 인식을 갖춰야 한다. 그리고 그 체(體)에 맞는 용(用)으로써 차의 진정한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일지암 암주 ■ 심안노인의 다구도찬 차를 마시는 행위는 마치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된 종합예술 같은 것이다. 한잔의 차를 마시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매우 많다. 정갈한 마음과 움직임으로 차를 준비하며 행할 때는 마치 바람이 산을 타고 강을 건너듯 완만하고 원융해야 한다. 그럴때 그 찻자리는 훈훈한 향기를 느끼게 한다. 옛날부터 차를 사랑했던 차인들은 많다. 그중 특이한 차인이 있다. 바로 송나라때 심안노인이다.(다구도찬)을 쓴 심안노인은 당시의 점다법에 근거해 12점의 다구를 의인화해 노래하고 있다. 다구 12점을 그림과 함께 그려넣은 특이한 다서를 만든 것이다. 심안노인은 각 다구의 성격에 따라 의인화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 걸맞은 관직과 이름, 자·호까지 명기하고 있다. 먼저 차를 보관하는 배로(焙爐)다. 배로의 관직은 위홍려, 이름은 성인이 쓰는 솥인 문정, 호는 사창한사다. 심안노인은 “위홍려를 찬양하여 가로되/축융은 여름을 관장하는데/만물을 모두 태운다/그 화염은 곤강의 옥석을 모두 태워 아무도 없게 한다/만약 위홍려를 사용하지 않으면/산과 골짜기의 차는 모두 도탄에 빠지고 말 것이다/도탄에 빠지지 않는 것은/위홍려의 공로다”라고 적고 있다. 탕속의 찻가루를 휘젓는 찻솔은 축부수. 축부수의 이름은 선조, 자는 희점, 호는 눈같이 흰 파도와 같은 공자라는 설도공자라고 했다. 특히 찻솔을 정절을 지키는 의로운 다기로 여겨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있다. “수양산의 백이 숙제는/주무왕이 상나라를 토벌하며/전쟁이 한창일때도 과감하게 간언하였는데/전쟁과 같이 솥에 물이 펄펄 끓을때/그 뜨거움을 가늠하여 간언한 자가 몇 명이나 될까/나는 자네의 청절을 우러러 보며/오직 너만이 홀로이 몸소 실천할 수 있다/이러한 일은 위급에 처하여도/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아니한 자라야 하는데/누가 능히 이루어 낼 수 있는가”라고 칭찬하고 있다. 찻잔에 대해서는 위풍당당한 군자에 비유하고 있다. 찻잔은 검은 독수리가 사는 신비한 누각인 칠조비각이라 했고, 이름은 승지, 자는 하늘을 담고 있다는 역지, 호는 옛 누마루 높은 곳에 앉은 노인이라 하여 고대노인이라고 했다. 물을 따르는 찻주전자에 대해서는 따뜻한 골짜기에 늙음을 버린다는 온곡유노라고 표현했다. 주전자의 이름은 새로운 것을 내놓는다는 발신, 자는 한번 운다, 혹은 소리낸다는 일명이다. “호연지기를 기르고 물 끓는 소리를 내/능히 중용의 도를 지킨다/그는 탕왕을 보필한 덕을 지녀/주객 사이에서 잔을 주고 받으며/주인을 섬기는 공로는 중숙어를 능가한다/그러나 밖으로 뜨거움에 대한 근심이 있고/안으로는 열의 우환이 있으니 어찌하랴”라고 중용의 뜻을 전하고 있다. 말차가루를 곱게 치는 체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체는 나추밀로 이름은 고약, 자는 전사, 호는 사은장료다. 나추밀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일을 함에 있어 세밀하지 못하면 해로움이 되나니/큰 것은 골라내고 작은 것은 흩뿌려지게 하는데는/정밀함과 조잡함이 일치하지 않으면 혼란스러워지나니/사람은 그 모든 것이 어려운 것/어찌 섬세함에 옳고 그름을 아끼겠는가” 이밖에도 찻종지는 도보문으로 칭했고(이름은 거월, 자는 자후, 호는 면위상객), 물을 뜨는 표주박은 호원외(이름은 유일, 자는 종허, 호는 달을 긷는 신선인 저월선옹), 차를 가는 맷돌은 석전운으로(이름은 착치, 자는 매행, 호는 언제나 차를 갈아 차향 가득한 누옥에 은거한다는 향옥은거), 떡차를 으깨는 다듬잇돌과 방망이는 목대제(이름은 이제, 자는 망기, 호는 격죽거인), 찻잎을 으깨 가루를 내는 약연은 금법조(이름은 연고, 자는 원개, 호는 화금선생)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 “DDA타결땐 농가소득 10~40% 감소”

    관세를 낮추고 보조금을 감축, 시장을 개방하자는 도하개발어젠다(DDA) 농업협상이 타결되면 국내 쌀 농가의 소득이 지금보다 10∼40% 정도 감소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쌀 협상 비준안 통과로 관세화가 10년간 유예됐지만 DDA 협상에 따른 국내 보조금 감축과 쌀값을 지지하는 정책이 농가소득 보전 방식으로 바뀐 데 따른 결과다. 고추 등 관세율이 높은 채소농가의 소득도 10∼30% 감소할 전망이다.DDA 협상 타결을 전제로 농가소득의 피해액이 추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또한 정부의 농업정책 실패로 농가소득에서 부채가 차지하는 비율은 10년사이 42%에서 92.7%로 2배 이상 증가해 농가의 부채상환 능력이 갈수록 악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농림부와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8일 서울 청담동 엘루이호텔에서 공동 개최한 ‘아시아농업정책 국제워크숍’에서 농촌경제연구원의 송주호 박사는 DDA 협상에 따른 국내농가의 소득변화를 예측해 발표했다. 송 박사는 ‘한국의 농업발전 전망:교훈과 도전’이란 보고서에서 DDA 협상이 타결되면 국내 쌀 농가의 소득은 2000∼2002년 평균 8조 2060억원에서 개방 속도가 빠르면 2010년에는 5조 780억원으로 38% 감소할 것으로 예측됐다. 개방 속도가 느리더라도 2010년 쌀 농가의 소득은 7조 6340억원으로 같은 기간 7% 감소할 것으로 전망됐다. 송 박사는 “정부가 소득직불보전제로 전환, 농가소득을 지원한다고 했으나 전체 인구의 7%를 차지하는 농업인구를 정부가 보전하기에는 역부족”이라면서 “올해에도 쌀값 하락에 따라 정부가 필요한 직불금은 예산보다 30%나 많은 1조 5000억원에 이른다.”고 말했다. 또한 관세율이 200%를 넘는 고추 농가의 소득도 1조 260억원에서 개방 속도가 빠르면 2010년에는 6999억원으로 32%, 개방이 느리면 927억원으로 10% 각각 감소할 것으로 추정됐다. 관세율이 200%를 넘는 마늘이나 밤,100%를 넘는 양파 등을 재배하는 농가의 소득피해율도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 송 박사는 “정부가 도시·산업화에만 집중한 탓으로 농업정책은 성공적이지 못했다.”면서 “그 결과 농가소득에서 차지하는 농가부채의 비율은 1995년 42%에서 2000년 87.6%를 거쳐 2004년에는 처음 90%를 넘었다.”고 지적했다. 특히 국내총생산(GDP)에서 농업부문 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이 40%(1968년)에서 7%(1991년)로 감소하는 데 우리나라는 26년이 걸렸으나 일본은 73년, 미국은 96년, 영국은 113년 걸렸다면서 우리 농촌의 쇠퇴 속도는 너무 빠르다고 밝혔다. 따라서 농업의 연착륙을 위해 DDA 협상에서는 관세와 국내 보조금의 감축에 유연성을 둘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농림부는 오는 13∼18일 홍콩에서 열리는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를 앞두고 농민단체가 대규모 원정시위를 준비하자 6개 농민단체 관계자들을 과천청사로 초청, 긴급 간담회를 갖고 홍콩에서 시위를 벌일 때 유의할 점 등을 설명했다. 전농 관계자는 “사전 답사를 통해 홍콩 법 등 현지 사정을 미리 파악했으며 평화적인 시위를 벌일 계획”이라고 말했다.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올해의 인물](6)아리엘 샤론

    [올해의 인물](6)아리엘 샤론

    ‘고양이 목숨’을 가진 정치인.77세의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는 올해 그 끈질긴 정치적 생명력을 과시했다. 동시에 ‘불도저’라는 별명도 또다시 입증해보였다.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38년 만에 ‘가자지구 정착촌 철수’라는 미증유의 일을 완수한 것이다. 정적의 도전을 뿌리치고 당권을 지켜내더니 분신과도 같던 집권 리쿠드당을 탈당하고 의회까지 해산시켰다. 이제 신당을 이끌고 내년 3월 조기 총선에 나설 계획이다. 여론조사는 그의 압승을 예상하고 있다. ●‘도박’과 도전 올 1월 예루살렘은 ‘가자지구 철수반대’ 시위로 요동쳤다.13만명의 시위대는 연말까지 가자지구 정착촌을 완전 철수시키려는 샤론 총리를 “독재자, 배신자, 거짓말쟁이”라며 성토했다. 2003년 샤론 총리는 일방적으로 정착촌 철수방침을 발표했다. 팔레스타인과의 분쟁을 끝내자는 구상에서다. 당내 극우세력은 사사건건 샤론 총리의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급기야 총리 출신으로 당내 ‘매파’를 대변하는 베냐민 네타냐후 재무장관은 8월 장관직을 사임, 총리 퇴진운동에 앞장섰다. 결국 매파의 의도대로 5개월여 앞당겨 11월 치러진 당 지도부 개편 대회. 사실상 정치적 ‘탄핵’이었고, 그의 승리 가능성은 낮았다. 샤론 총리는 연설 도중 누군가 마이크 선을 자르는 바람에 발언도 못하고 퇴장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그는 이 즈음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헬기 공습 등 강경책을 사용,52대 48의 신승(辛勝)을 거뒀다. ●의회 해산, 거듭되는 모험 샤론의 위기는 계속됐다. 연정의 한 축인 노동당에서 우군 역할을 해온 시몬 페레스 당수가, 리쿠드당과의 연정 파기를 요구해온 아미르 페레츠 신임 당수에게 밀려났다. 신임 페레츠 당수는 샤론 총리에게 내년 11월로 예정된 총선을 앞당겨 실시할 것을 요구하고 연정 탈퇴를 결의했다. 조기 총선에서 승리해도 당내 내분으로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이 수월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는 의회 해산이라는 강공책을 택했다. 이어 ‘중도파 대결집’을 주창하며 신당 창당을 선언한다. ●‘전쟁을 위해 태어난 수류탄’ 14살에 대(對)팔레스타인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시작, 총리까지 오른 사람.1953년 요르단 공격,56년 수에즈 위기,67년 6일 전쟁,73년 속죄(욤키푸르) 전쟁 등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전쟁 영웅. 그러나 ‘전쟁만을 위해 태어난 사람’ ‘수류탄’이란 소리를 들을 만큼 적에 무자비했던 지휘관.1982년 레바논 침공 지휘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 방조를 책임지고 국방장관을 사퇴했다. 그랬던 그에 대해 아랍세계마저 시각이 엇갈리고 있다.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은 ‘팔레스타인과 평화협상을 이끌 수 있는 유일한 이스라엘 지도자’라 칭했다. 물론 압둘라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등은 군인으로서의 그를 잊지 않고 있다. 내년 1월25일 팔레스타인에서도 야세르 아라파트 수반 사후 처음 총선이 실시된다. 양측의 선거가 마무리되는 내년 3월까지는 평화협상에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그는 요즘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를 연구하고 있다. 고이즈미가 자신에 앞서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에서 대승을 거둔 때문이다. 그의 새해가 주목된다. 이지운기자 jj@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노래인생 45돌 자선공연 갖는 국민가수 하춘화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노래인생 45돌 자선공연 갖는 국민가수 하춘화

    풍(豊)은 풍이로되 신풍(新豊)이도다. 그렇다면 ‘풍’은 무엇일꼬? 주역에 나오는 풍괘(豊卦)를 줄인 말이다.‘풍’은 번영과 성숙이 가득찬 정점의 상태를 말하며, 한낮의 태양처럼 천하를 밝게 비칠 최고의 운에 비유한다. 여기에 늘 향기로운 춘화(春花)가 더해진다면 어떠할까. 최연소 음반 출반(6세), 최연소 레코드회사 전속가수(9세), 최연소 영화주제가를 부른 가수(10세), 최다 개인발표회(1260일)로 기네스북 등재, 최다 사회 봉사활동 공연(100여회), 최초 평양공연(85년)….‘신풍’은 이렇게 ‘최’라는 수많은 접두사를 만들어냈다. 국민가수 하춘화(河春花·본명·50). 아호가 바로 ‘신풍’이다. 항상 새로운 ‘풍’을 선사하라는 아버지의 큰뜻에서 그렇게 지었다. 이후 한번도 흔들림이 없었다. 반세기 가까운,45년 세월을 늘 처음처럼 살아왔다. 그동안 무려 2500여곡을 발표하면서 한결같이 국민의 사랑을 받아왔다. 자신을 좋아하는 팬이 항상 주위에 있었기에 저절로 힘이 생겼다고 말한다. 이같은 결실을 모은 ‘하춘화 노래인생 45년’ 행사를 다음달 10일부터 사흘 동안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갖는다.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깨끗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환경미화원들을 위한 공연이다. 개런티를 포함해 수익금 전액이 환경미화원 자녀들의 장학금으로 쓰인다. 객석은 환경미화원 부부로 꽉 채워진다. 또 있다. 알고보니 하씨는 아무도 모르게 공부를 열심히 해왔다. 내년에는 박사학위를 취득할 예정이어서 현역가운데 첫 박사가수라는 명함이 추가될 전망이다. 노래와 공부, 정열적으로 열심히 달려왔다. 이래저래 내년에는 ‘춘화’의 계절이자 또다른 ‘신풍’으로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정점에 서는 셈이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모 방송국 인근에서 하씨를 만났다. 청바지 차림에 외투 하나를 가볍게 걸친 모습이 무척 젊고 자유스러워보였다.40대 초반으로 보인다고 하자 “다들 그러는데, 사실은 너무 고생해 별로 (몸이)좋지 않아요.”라고 달갑지 않은 듯 받아넘긴다. 공부를 하느라 심신이 피곤해 있다고 고백했다. 하씨는 현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에서 ‘예술철학’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오는 13일 박사논문 예심을 앞두고 있다. 그래서인지 “올 한해는 (공연 등)아무것도 못했어요.”라고 토로했다. 이어 “올 1월부터 4개월 동안 자택(서울 서초구 서초동) 인근의 독서실에서 지독히 공부했거든요.”하면서 피식 웃는다. 읽은 논문만 50편은 훨씬 넘는다고 했다. 대학 입시를 앞둔 학생처럼 정말 열심히 했단다. 하씨의 평소 좌우명은 ‘성실 건강 정직’이다. 악바리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한번 마음을 먹고 일을 정하면 끝을 보고야마는 우직한 성미다. 박사논문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있느냐고 하자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위상과 가치를 재조명하는 것이지요. 우리 국민은 다들 대중가요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동안 이같은 연구접근을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라고 하면서 논문의 제목은 ‘대중이 선호하는 대중가요의 사회철학적 연구’라고 했다. 이어 “대중가요가 엄청난 가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체계적으로, 또 학문적으로 접근한 사람이 없어서 시작하게 됐지요.”라고 연구의 계기를 밝혔다. 아울러 “한때 가수로 명성을 날리다가 인기가 시들해지면 그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요.(가수로)활동할 때 학문적 바탕을 쌓고 인재양성에 열정을 쏟아야겠다는 사명감을 늘 생각했지요.”라고 덧붙인다. 그렇다면 내년이면 박사가수가 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맞아요,1호가 될 겁니다. 더욱 열심히 해야지요. 또 결국 나중에 가서는 학교 강단에 서서 후배와 제자를 키워내는 게 궁극적인 목표입니다.”라는 포부를 밝혔다. 그러면서 “정말이지 (공부가 힘들어)박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절감했어요.”라는 고충을 토로한다. 지나온 45년 가수인생과 더불어 자선공연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71년 ‘물새 한마리’ 이후 ‘영암 아리랑’‘날버린 남자’ 등 다양한 레퍼토리로 사실상 한국가요 70년을 넘나들지 않느냐고 하자 “직업연령으로 치면 정말 많이 먹었지요. 하지만 제 나이에 데뷔하는 사람도 많아요. 직업적으로 보면 후배지요. 하지만 그분들한테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어 “아버지가 늘 그랬어요.‘남을 생각하라, 사회의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라.’고 말입니다. 솔직히 어릴 적부터 그 말이 귀에 콱 박혔습니다. 나중에는 (자선공연이)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더군요.”라고 말했다. 부친이 살아계시느냐고 하자 “물론이지요.(부모)두분 다 84세로 건강하게 계십니다. 오늘도 우리집에 오셔서 같이 점심 드시고 그랬거든요.”라고 대답했다. 한 동네, 걸어서 5분거리에 살면서 일주일에 두어번 식사를 함께 한다고 귀띔했다. 또 “딸만 넷을 두었어요. 사실 저만 빼놓고 다들 박사학위를 땄거든요. 언니는 사회체육학 박사, 바로 밑에 동생은 컴퓨터 전공, 막내는 경남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있어요.”라고 했다. 그러다보니 아버지는 늘 아들 열이 부럽지 않다고 자랑스러워한다며 웃는다. 일제때 신식 교육을 받은 아버지는 요즘도 패션감각이 뛰어나 사위들을 만나면 한수 지도까지 해줄 정도라고 했다. 가요 평론가의 말을 빌려 하씨가 우리식 전통가요를 가장 잘 부르는 가수라고 했더니 “트로트는 미국에서 나왔지요.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와 우리식 가요로 정착하고 있습니다.‘영암아리랑’과 ‘칠갑산’ 같은 경우는 민요에 바탕을 둔 신민요라고 할 수 있어요.”라고 했다. 또한 “문화란 동서양을 넘나들면서 이식의 과정을 거쳐 정착하게 됩니다. 랩음악의 경우 생명력이 6∼10년 정도로 봅니다. 우리 문화에 섞이면서 자연스럽게 도태되는 음악도 많습니다. 하지만 트로트풍의 전통가요는 여전히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우리 음악이지요. 김치가 우리 음식이듯 말입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아울러 “트로트에 대한 우리식 이름이 필요합니다. 나훈아씨는 ‘아리랑’이라는 의견을 제시했지요. 어쨌든 우리 세대에서, 우리들이, 만약 제가 강단에 선다면 학문적으로 접근하면서 문화적 통찰력으로 그 작업으로 본격적으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고 강한 의욕을 내보였다. 그의 목소리는 강하고 항상 거침이 없었다. 어떤 질문에도 막힘이 없이 준비된 테이프처럼 술술 나왔다. 아이큐(IQ)가 몇이냐고 하자 “아이고 그런 질문 하지 마세요. 좋으면 어떻고, 안 좋으면 어때요.”라고 한다. 인터뷰 도중 하씨는 방송녹화 일정 때문에 서둘러 일어서려고 했다. 잠시 붙잡고 건강관리에 대해 물었다.“사실 운동이 생활화됐습니다. 수영 골프 스키 볼링 다 좋아합니다. 집주변의 학교운동장에서 뛰기도 합니다. 집안에서는 스트레칭도 하고요.”라고 대답했다. 골프실력은 싱글 수준이지만 요새는 1년에 한번밖에 라운딩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10년전 늦게 결혼한 하씨는 아직 슬하에 자녀가 없다. 자택에서는 남편(KBS 행정직 직원)과 둘이 오붓하게 지낸다.“다음달 공연 기대하세요. 신인가수의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거든요. 우리 가요 70년의 역사를 보여주는 큰 공연이 될 거예요.”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55년 전남 영암 출생 ▲75년 서울 일신여상 졸업 ▲80년 경남대 가정학과 2년 수료 ▲94년 고려대 자연자원대학원 최고 정책과정 수료 ▲98년 한국방송통신대학 졸업 ▲2000년 동국대 대학원 졸업 ▲2005년 성균관대 예술철학 박사과정 재학중 ● 경력 ▲61년 서울 동아예술학원 가요과 수료, 레코드 취입 8곡 ▲63년 지구레코드사 전속가수 ▲65년 영화 ‘아빠 돌아와요’ 주연 및 주제가 부름 ▲72년 뮤지컬 ‘우리가 여기 있다’ 주연 ▲73년 드라마 ‘여보 정산달, 초가삼간’ 주연 ▲74년 제1회 개인리사이틀 공연, 이후 매년 공연 ▲85년 분단 최초로 평양공연 ▲92년 가요 20년 기념 공연 ▲2001년 가요 40년 공연 ▲2001년 옥관 문화훈장 ▲2002년 선행스타 대상수상 ▲2005년 현재 2500곡 취입
  • 파월 한국군 수당 比·泰와 비슷

    파월 한국군 수당 比·泰와 비슷

    정부가 2일 공개한 베트남전 관련 잔여 외교문서 가운데 두드러지는 대목은 당시 정부가 북한과 중국으로 대표되는 공산권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총력 외교를 펼친 대목이다. 항간에 잘못 알려진 것과는 달리 당시 정부가 파병 장병의 해외근무수당을 비롯한 실익을 챙기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도 눈에 띈다. 정부가 지난 8월 베트남전 관련 핵심 외교문서인 브라운각서와 사이밍턴 청문회 관련 문서를 공개한 데 이어 이날 잔여 문서를 추가 공개함으로써 베트남전과 관련한 세간의 의혹은 대부분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지역적 방위기구’ 창설 시도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 말을 전후로 아시아 지역에서 공산세력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타이완을 등을 아우르는 지역적 방위기구 결성을 검토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국방부가 2일 공개한 베트남전 외교문서 가운데 ‘아국과 자유아세아의 안전보장 대책시안에 대한 대통령 각하 분부’라는 문서에 구체적으로 명기돼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중국·북한을 위시한 아시아의 공산국가가 대항해 미국과 한국·일본·타이완 등이 함께하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를 연상케 하는 지역적 방위체제를 구축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통령은 특히 미국과의 각서 교환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공동선언 또는 문서교환 등으로 할 것이 아니라 확실한 조약기구로 형성하는 것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美, 한국군 근무수당 2억 3556만弗 지급 파월 국군장병들이 미국측으로부터 받은 해외근무수당은 하루 기준으로 준장은 한국군과 필리핀군 공히 7달러, 중령은 한국군과 필리핀군 6달러, 태국군 7달러, 소위는 세 나라 모두 4달러, 병장은 한국군 1달러80센트, 필리핀군 1달러20센트, 태국군 2달러 등으로 비슷한 수준이었다. 파월 국군 장병들이 베트남전 기간에 미측으로부터 받은 해외근무수당은 총 2억 3556만 8400달러로, 이중 82.8%에 달하는 1억 9511만 800달러가 국내로 송금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1965년부터 1973년까지 9년간 집계된 액수로, 대일청구권자금으로 받아낸 3억달러와 유사한 규모로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에 충분했다는 평가다. ●민사상 사상피해도 미군이 보상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전 당시 주월 한국군과 군속이 비전투중 사상 사고를 내더라도 보상책임은 미군이 져야 한다는 방침을 미국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철시켰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주월 한국대사관이 1966년 3월15일 외무장관에게 보낸 ‘청구권에 관한 한·미 실무협정’ 보고서에 명기돼 있다. 한국군은 소청심사위원회를 설치해 민사사건에 대한 소청지급액을 독자적으로 책정하면, 주월 미국군사원조사령부 법무관은 소청지급액에 대한 지불보증을 하도록 합의한 것이다.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에는 빠져 있지만 미국은 1966년 브라운각서 군사협조 제10항과 주월한국군수첩에 명기된 재해보상기준에 따라 해외근무수당과 별도로 베트남전에서 전사하거나 부상한 한국군 장병들에게 총 65억 563만 7000여원의 재해보상금을 지급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최용호 전쟁사2부장이 국방부 자료실에서 입수한 ‘주월군 경리지원(파월재해금 정산현황 제출)’이라는 자료에서 드러났다.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전사하거나 사망한 한국군 장병에게 지급한 재해보상금 규모가 공개되기는 처음이다. 미국 정부는 해외근무수당을 달러로 지급한 것과 달리 재해보상금은 한국의 관련 법규에 근거해 지급한다는 명분에 따라 원화로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광삼기자 hisam@seoul.co.kr
  • [우리는 맞수 CEO] 새 선박 개발 앞장 VS 유전등 신사업 진출

    [우리는 맞수 CEO] 새 선박 개발 앞장 VS 유전등 신사업 진출

    김징완(59) 삼성중공업 사장은 2001년 취임 직후 ‘2006년 세계 1등 조선사’를 외쳤고, 정성립(55) 대우조선해양 사장은 올초 ‘2015년 매출 20조원 달성’이라는 어마어마한 목표를 내걸었다. 삼성중공업은 연 50척 건조체제, 고부가선 비중 70% 이상 등 1등의 조건을 갖추는데는 성공했지만 아직 세계 1등인 현대중공업을 추월하지 못했다. 신사업 진출과 글로벌 생산체제 구축 등으로 매출 20조원을 달성한다는 대우조선의 목표 달성도 쉽지 않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두 CEO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보면 이들의 목표가 ‘꿈’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재무통에서 현장 경영자로 김징완 사장은 1년 중 130여일을 해외 출장으로 소화하고 나머지 시간은 대부분 거제조선소에서 보낸다. 모든 문제와 해답은 현장에 있다는 지론으로 직원들과 즉석에서 허심탄회한 대화를 즐긴다고 한다. 김 사장은 조선업계 출신이 아니다. 경북 달성의 현풍고를 졸업한 김 사장은 고려대 사학과 4학년이던 1973년 제일모직에 입사했다. 이학수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부회장), 김인주 구조본 사장, 최도석 삼성전자 사장(CFO) 등 쟁쟁한 재무통을 배출한 제일모직 경리과 출신이다. 회장 비서실 재무팀, 운영팀장, 삼성물산 금융팀장 등 그의 화려한 이력은 대부분 재무계통이었다. 하지만 93년 삼성중공업 기획관리담당 임원으로 재직할 때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가장 큰 640m짜리 제3도크 건설을 마무리지어 삼성중공업의 경쟁력을 다져놓는 등 조선과의 인연도 만만찮다. 또 재무통답게 환율관리에 초점을 맞춰 환 리스크를 100% 헤지하는데 성공했다. 김 사장은 “제조업이 환율등락에 따라 희비를 겪는 것은 말이 안된다.”면서 “선박 수주 시점부터 환헤지를 통해 이익률을 확정짓고 제조업답게 원가절감, 생산성 향상 등 본질로 승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 사장은 디지털 시대에서는 기존의 사고방식, 일하는 방법, 시스템 등을 180도 바꾸고 임직원들의 의식도 최첨단으로 무장돼야만 살아 남을 수 있다며 끊임없는 변화를 강조한다. 실제 삼성중공업은 신 선형 개발 등에서 앞서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신뢰, 열정, 감성의 정통 조선맨 정성립 사장은 “CEO는 회사 일에 일일이 간섭할 게 아니라 비전을 만들고, 혁신을 주도하고,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정 사장은 루마니아 망갈리아조선소, 오만 수리조선소, 중국 옌타이 선박용 블록 공장 등 글로벌 체제를 기반으로 2015년 매출 20조원으로 세계 조선시장의 20%를 점유한다는 웅대한 비전을 발표했다. 조선업뿐만 아니라 나이지리아 유전개발에 참여했고 JR건설을 인수, 토건사업에도 뛰어드는 등 신사업 진출로 새로운 비전을 만들고 있다. 해양연구 장비·시스템 업체인 씨스캔을 계열로 편입하는 등 해저광물 탐사에도 적극적이다. 정 사장 역시 현장경영으로 유명한데 11월 말 현재 해외출장이 100일을 넘겼고 1년중 5개월은 옥포조선소에서 보낸다. 협력업체를 포함한 전 직원과 가족들에게 회사의 경영환경과 비전을 설명하는 편지를 13차례나 보낼 정도로 ‘소통’도 중시한다. 정 사장은 취임 당시 “조직내에서 권위주의를 없애자.”는 다소 ‘엉뚱한’ 목표를 내걸었다. 직원들간 벽이 없어져야 성장과 혁신이 가능하다는 취지였다. 정 사장의 혁신은 직급 관련 호칭(부장, 과장 등) 폐지, 조선업계 최초의 임금피크제 도입, 즐거운 직장을 만들어 주는 ‘펀 리더(Fun Leader)’ 도입 등으로 이어졌다. 금요일 무조건 일찍 퇴근하기, 호프데이, 월 1회 영화·연극 관람, 책 선물 등 대우조선의 ‘펀 경영’은 단순히 유행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 [씨줄날줄] 피노체트와 후지모리/ 이목희 논설위원

    대표급 독재자들이 세계에서 가장 길쭉한 나라 칠레에서 곤경에 처했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전 칠레 대통령과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이 그들이다. 피노체트는 칠레 사법부의 끊임없는 과거 단죄 노력에 쫓기면서 다시 가택연금 상태다. 후지모리는 칠레 당국에 억류돼 있다. 칠레는 행정·군사제도에서 일본처럼 프로이센을 따랐다. 피노체트는 군에서 뼈가 굵은 무골(武骨).1973년 유혈 쿠데타를 일으켜 1990년까지 철권통치를 했다. 권좌에서 물러난 뒤에도 상당 기간 총사령관직을 유지하며 군부에 실권을 행사했다. 리카르도 라고스 현 대통령 집권 후 피노체트 세력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개헌을 할 정도였다. 후지모리는 일본계 이민 2세로 사무라이 정신이 대단하다.1990년 페루 대통령에 당선된 뒤 친위 쿠데타, 의회해산을 비롯해 피노체트 못지않은 독재 면모를 보여 줬다. 부인 수사나 히구치가 정계진출을 시도하는 등 순종하지 않자 ‘영부인 자격박탈’을 공식선언, 쫓아내기도 했다. 후지모리는 2000년 부정선거 시비를 피해 일본으로 도피했다. 권토중래를 노리던 그는 이달 초 미국·멕시코를 거쳐 페루 입국을 시도하다 칠레 당국에 체포됐다. 최근 칠레가 페루와 경제수역 다툼이 있는 것을 이용해 보자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한다. 사무라이를 숭상하는 일본 여성 기업가 가타오카 사토미가 후지모리의 새 애인이자 후견인이다. 사토미의 부친은 재일 한국인으로 알려져 있다. 피노체트와 후지모리의 차이는 나이. 피노체트는 어제 90세 생일을 맞았다. 치매 증세를 보이는 그가 생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관심사다. 후지모리는 67세로, 한번 더 권좌를 노려볼 연배다. 내년 4월 페루 대선을 앞두고 여론조사에서 2위를 달리고 있으니 아주 헛된 꿈은 아니다. 그러나 여성인 루르데스 플로레스 전 하원의원이 여론조사 선두를 좀처럼 내주지 않고 있다. 특히 페루 중앙선관위는 후지모리의 출마자격을 박탈할 움직임마저 보인다. 새달 실시되는 칠레 대선도 비슷한 맥락에서 주목된다. 역시 여성인 미셸 바첼레 전 국방장관의 당선이 유력하다. 피노체트 쿠데타를 반대하다 옥사한 공군 장성의 딸인 바첼레는 세 자녀를 둔 독신 여성으로 무신론자. 남성 위주의 보수 가톨릭국가에서 불리한 출마조건이다. 이웃한 칠레·페루에서 독재자와 함께 마초의 몰락이 동시에 오는 걸까.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GM대우 사장에 이영국씨

    GM대우 사장에 이영국씨

    GM대우는 24일 이영국 생산부문 수석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 발령하는 등 고위 임원인사를 단행했다. 이 부사장은 1973년 대우자동차로 입사해 부품개발, 품질평가, 생산기술 등 분야에서 일해왔으며 2000년 10월부터 2002년 10월 GM대우 출범전까지 대우차 사장을 역임했다.GM대우는 또 지난달 통합된 대우인천자동차㈜ 김석환 사장을 전략사업담당 사장으로 선임하고 인사부문 장동우 전무를 부사장으로 승진 발령했다.
  • [책꽂이]

    ●김현승 시전집(김인섭 엮음, 민음사 펴냄)‘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라고 노래했던 절대고독의 시인 김현승의 시전집. 기존의 시전집에 실린 글외에 시인의 모교인 숭실대에서 발굴한 18편의 시와 미발표시, 김인섭 교수가 필사한 작품 등 33편을 추가했다. 작품해설, 작품연보, 화보 등도 함께 실었다.2만 5000원.●벚꽃 뜰(박청호 지음, 생각의 나무 펴냄)‘단 한편의 연애소설’‘갱스터스 파라다이스’등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해온 저자의 네번째 소설집. 도쿄에서 파견근무하는 서른아홉살 주인공이 경험하는 성적 환상을 다룬 표제작을 비롯해 미적 존재를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과 고통을 독창적인 기법으로 묘사한 7편의 단편을 묶었다.9000원.●우리는 사랑일까(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은행나무 펴냄)남녀간의 연애심리를 세련된 감각으로 풀어내는 데 탁월한 재주를 지닌 저자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에 이어 내놓은 낭만적 연애소설.20대 중반의 커리어우먼 ‘앨리스’를 중심으로 연애의 탄생과 성장, 결말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놓는다.9800원.●부에노스아이레스 어페어(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현대문학 펴냄)‘거미여인의 키스’로 유명한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거장 마누엘 푸익의 1973년작. 출간 당시 반페론주의적 성향과 동성애 묘사로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지만 1997년 홍콩 왕자웨이 감독의 영화 ‘해피투게더’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지면서 전세계적인 화제를 불러일으켰다.9000원.●존 던의 애가(김선향 편역, 경남대출판부 펴냄)17세기 영국 형이상학파 시의 대부인 존 던의 ‘애가’(Elegies)가 번역돼 나왔다. 보통 ‘엘레지’는 죽음을 슬퍼하는 비가 또는 만가를 의미하지만 존 던의 시는 죽음이 아니라 성에 관한 해학적 표현으로 재미와 웃음을 유발한다. 영어 원문과 작가 연보를 함께 실었다.6000원.
  • WP 우드워드 “리크게이트 알고 있었다”

    |워싱턴 이도운특파원|워싱턴포스트의 편집부국장인 밥 우드워드 기자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비밀요원 발레리 플레임의 신분이 언론에 공개되기 한달 전에 이미 정부 관리들로부터 그같은 사실을 들었다고 증언함에 따라 ‘리크게이트’의 수사 방향에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우드워드 기자는 지난 14일(현지시간) 리크게이트를 수사중인 패트릭 피츠제럴드 특별검사에게 “2003년 6월 중순 정부 고위관리 3명으로부터 조지프 윌슨 전 대사의 부인 발레리 플레임이 CIA의 대량살상무기(WMD) 분석관이라는 사실을 전해들었다.”고 진술했다고 16일 밝혔다. 윌슨 전 대사는 조지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침공의 구실로 내세운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 구입설이 사실이 아니라는 내용의 칼럼을 뉴욕타임스에 게재한 바 있으며, 부시 행정부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부인의 신분을 고의로 언론에 유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우드워드 기자는 3명의 고위관리 가운데 딕 체니 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루이스 리비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따라서 리비 전 실장이 리크게이트의 최초 발설자로 지목한 피츠제럴드 검사의 수사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리비 전 실장측은 이에 대해 피츠제럴드 검사가 수사를 충분히 하지 않은채 기소 결정을 내렸다고 비난하며 리비 전 실장이 최초의 누설자가 아니라고 거듭 주장하고 나섰다. 또 이번 사건에 연루된 칼 로브 백악관 부비서실장측도 우드워드와 만나 플레임 관련 얘기를 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리크게이트의 최초 발설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궁금증도 확산되고 있으며, 발설자가 리비 전 실장보다 고위인사일 것이라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우드워드 기자는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전 결정 과정을 기록한 저서 ‘공격 계획’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전·현직 고위관리들로부터 플레임의 신분을 들었지만 그것이 비밀인지 여부는 몰랐다고 진술했다고 밝혔다. 우드워즈 기자는 지난 73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사임으로 몰고간 워터게이트 사건의 특종기자이다. 우드워드는 자신이 만난 3명의 관리 중 1명이 지난 3일 피츠제럴드 검사에게 이같은 사실을 알려줘 취재원들의 양해 하에 사실을 진술하게 됐으나 고위관리가 누구인지는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우드워드는 플레임에 관한 정보를 회사에 알리지 않았으며 워싱턴포스트의 기자 한 사람에게만 말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해당 기자는 전혀 그런 기억이 없다고 부인했다. 우드워드는 워싱턴포스트 편집인에게 행정부 고위관리가 CIA 비밀요원에 대해 언급한 것을 먼저 공개하지 않은 점을 사과하면서 자신이 침묵을 지킨 것은 취재원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dawn@seoul.co.kr
  • 공석중 대한상의 회장에 손경식 CJ회장 추대될듯

    박용성 전 회장의 사퇴로 공석이 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손경식(66) CJ 회장이 추대될 것으로 보인다. 대한상의는 17일 “손 회장이 지난 15일 열린 서울상공회의소 부회장단 회의에서 서울상의 회장으로 추대됐으며 손 회장도 이를 수락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통상적으로 서울상의 회장이 대한상의 회장을 겸직해왔기 때문에 손 회장이 대한상의 회장을 맡을 가능성이 높다. 서울상의는 오는 22일 임시 의원총회를 열고 손 회장을 회장으로 공식 추대하고, 대한상의도 곧이어 전국 지방상공회의소 대표들이 참석하는 임시의원총회에서 회장을 선출할 예정이다. 새로 선출되는 대한상의 회장은 박 전 회장의 잔여 임기인 내년 3월말까지 회장직을 맡게 되지만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다시 임기 3년의 차기 회장에 선출될 전망이다. 손경식 회장은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의 장남인 이맹희씨의 처남으로 현재 외조카인 이재현 회장과 함께 CJ그룹의 공동 회장으로 그룹을 이끌고 있다. 손 회장은 한일은행과 삼성전자를 거쳐 73년 안국화재(현 삼성화재) 이사로 옮긴 뒤 전무, 사장, 부회장을 지냈으며 93년 제일제당(현 CJ) 대표이사 부회장에 올랐고 이듬해부터 회장을 맡고 있다.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용인민속촌 99칸 기와집 을사오적 이근택의 별장

    한국의 전통 양반가옥을 대표하는 경기도 용인민속촌내 99칸 기와집이 일제시대 친일파 이근택의 집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16일 수원시에 따르면 용인시 한국민속촌 내에 전시된 99칸 집은 1910년대 을사오적의 한사람인 이근택(1865~1919)이 사용하던 집으로, 지난 1973년 민속촌 건립 당시 수원 남창동에서 이전, 복원된 것이다. 이근택은 구한 말부터 일제 초기까지 10여년간 별장으로 이 집을 사용하다 당시 수원지역 최고 거부였던 양성관에게 팔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수원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우리는 맞수 CEO] 장경작 호텔롯데 사장 vs 이만수 호텔신라 사장

    [우리는 맞수 CEO] 장경작 호텔롯데 사장 vs 이만수 호텔신라 사장

    “롯데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호텔입니다.”(장경작 호텔롯데 사장) “신라호텔 서비스가 대한민국 최고지요.”(이만수 호텔신라 사장) ‘친절의 대명사’ 호텔업계에서 최고를 향한 서비스 전쟁에는 한치의 양보가 없다. 장경작(62) ㈜호텔롯데 사장과 이만수(55) ㈜호텔신라 사장이 대표적인 친절 사령관이다. 이들 최고경영자(CEO)는 최고를 지향하는 승부사이자 선의의 경쟁자다. 한편으로 외국의 유수 체인호텔과 경쟁할 땐 이들은 동반자가 된다. 순수 국내 자본으로 설립된 로컬브랜드를 대표하는 ‘호텔리어’인 까닭이다. ●삼성 출신에 늦깎이 호텔리어는 닮은 꼴 두 사람 모두 삼성출신이라는 게 공통점이다. 동종업계의 CEO로서 맞수라기보다는 동반자에 더 가깝다는 게 주위의 평가다. 롯데의 장 사장은 1968년 삼성그룹 비서실에 입사,76년 삼성물산㈜의 과장을 지냈다. 장 사장이 지난 75년 삼성물산으로 입사한 신라의 이 사장보다 7년 삼성 선배다. 장 사장은 82년 ㈜신세계백화점 이사를 거쳐 94년 서울웨스틴조선호텔 대표이사가 되면서 호텔리어 생활을 시작했다. 지난 2월 호텔롯데 대표이사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반면 이 사장은 97년 삼성물산 뉴욕지사장을 거쳐 지난 2002년 부사장으로 승진하면서 신라의 마케팅담당 부사장으로 옮겼다. 여전히 ‘삼성맨’인 그는 2003년 1월 호텔신라 대표이사 사장으로 최고의 사령탑에 올랐다. 모두 늦깎이 호텔리어라는 게 공통점이다. ●우리 호텔이 최고야! 두 호텔 출발은 일란성 쌍둥이처럼 거의 비슷하다. 롯데가 73년 5월5일 법인을 설립,79년 3월10일 롯데호텔서울(소공동)을 개관했다. 신라는 73년 5월9일 법인을 세웠고,79년 3월8일 신라호텔서울의 문을 열었다. 두 회사는 개관 당시부터 신경전을 벌였다. 신라가 3월로 개관 날짜를 잡자, 롯데가 78년 12월22일 부랴부랴 부분 개관했다. 개관일 신경전도 치열했다. 롯데는 서울점·월드점·부산점·울산점·제주점 등 5개 호텔에 3536개의 객실을 갖추고 있다. 국내에서 호텔 체인화를 주도했다. 지난 2002년에는 호텔업계 최초로 5억달러 관광진흥탑을 받는 등 지난해 1조 1851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신라는 서울점과 제주점에 모두 937개의 객실을 두고 있다. 호텔 가운데 유일하게 상장된 신라의 지난해 매출액은 4235억원이다. 외관상 롯데의 판정승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신라는 “제주도에 스위트호텔, 경남 거제에 삼성거제호텔을 위탁경영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롯데는 “최고가 객실인 로열스위트룸은 1박에 968만원으로 신라보다 비싸다.”고 자랑했다. 또 프랑스와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 등이 여장을 풀어 최고임을 과시했다. 신라는 “최고가 객실은 프레지덴셜 스위트 노스윙으로 1일 객실료가 907만 5000원이지만 2개”라고 정색했다. 또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루이스 거스너 IBM회장, 러시아의 테니스요정 샤라포바 등이 묵었다.”며 맞받아쳤다. ●초특급호텔 선두다툼 호텔롯데는 초고급화 트렌드에 따라 별 여섯개의 호텔을 지향하고 있다. 장 사장은 “일본인 단체관광객들이 투숙하는 호텔이란 이미지를 탈피하겠다.”며 “구미지역 CEO들을 유치해 초특급 비즈니스 호텔로 거듭나겠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신관 건물의 리뉴얼 공사를 대대적으로 시작했다. 호텔 디자인을 바꾸기 위해 바베이몰튼사와 함께 리뉴얼 공사 설계작업을 하고 있다.1층의 프런트 데스크를 14층으로 옮긴다는 계획이다. 또 2008년 개장을 목표로 러시아 모스크바의 뉴 아르바트거리에 호텔을 건립하고 있다. 외국 유수호텔과의 본격적인 경쟁을 예고하고 있다. 호텔신라는 신라호텔만의 서비스를 바닥에 깔고 있다. 객실 고객이 TV를 보다가 전화기를 들면 TV볼륨이 자동으로 줄어드는 서비스, 외출 중인 고객의 전화를 휴대전화로 연결하는 서비스 등 다소 특이한 서비스로 무장하고 있다. 이 사장은 “신라호텔을 ‘아시아 톱 5호텔’로 만든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웠다. 현재 15위권이다. 게다가 4년 연속 세계 100대 호텔로 선정돼 턱없는 일만은 아닌 듯싶다. 이 사장은 “장기적으로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런던 등에 체인을 갖는 글로벌 호텔로 키워 나가겠다.”고 밝혔다. 최고를 향한 두 CEO의 집념 속에서 ‘상류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호텔이 조금씩 서민들 곁으로 다가서는 듯했다.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태평양그룹-창업주 故서성환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태평양그룹-창업주 故서성환 회장家

    태평양그룹 창업주 고 서성환(1924∼2003) 회장은 화장품업계의 신화가 됐다.‘미와 향을 파는 마케팅의 귀재’인 서 창업주는 어려서부터 개성에서 혹독한 경영수업을 받았다. 이후 기업경영에서 개성상인의 맥이 면면히 흘렀다. 서 창업주는 이윤의 사회 환원이라는 기업가의 사회적 책무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태평양이 직접 운영하는 비영리 재단이 3개이며 후원 단체는 셀 수없이 많다. 신용과 근검절약을 가장 큰 밑천으로 삼는 개성상인의 기질, 이윤의 사회 환원이라는 기업윤리는 2세 경영으로 넘어온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가업 태평양은 1945년 9월5일 창립됐지만 연원은 좀 더 거슬러올라간다. 태평양의 역사를 알려면 서성환 회장의 가족사부터 살펴봐야 한다. 서 회장은 1924년 7월 황해도 평산군 적암면에서 부친 서대근(1890∼1973)씨와 모친 윤독정(1891∼1959)씨의 3남3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서 창업주 가족은 소학교 시절인 1930년 좀 더 나은 생활을 찾아 개성으로 이사를 했다. 개성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목인 동현동에 정착했다.‘상인의 도시’ 개성 생활은 소년 서성환에게 이후 기업 경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개성에 정착한 가족들의 생계는 어머니 윤 여사가 책임졌다. 전 재산을 털어 조그마한 상점을 열고 잡화를 취급하다가 화장품 제조에 눈을 돌렸다. 윤 여사는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비상한 머리를 지녔다. 이웃으로부터 ‘여중군자’라고 불릴 만큼 활동적이고 사교적이었다. 인삼 매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은 개성지방은 소득수준이 높아 우수한 품질의 동백기름이 잘 팔린다는 것을 간파한 윤 여사는 직접 동백기름을 짜 만든 머릿기름을 팔았다. 당시 서민들은 피마자 기름을 썼지만 상류층은 고가의 동백기름을 애용했다. 참빗으로 곱게 빗어 쪽진 머리에 머릿기름을 자르르 바른 모습은 아름다운 여인으로 보이도록 하는데 필수적이었다. ●태평양 모체는 어머니의 ‘창성상점’ 동백기름에서 자신을 얻은 윤 여사는 차츰 사업영역을 확대했다.1932년부터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던 미안수를 자가 제조법으로 만들어 판매를 시도했다. 또 구리무(크림), 가루분(백분) 등으로 화장품 제조의 종류와 품목을 넓혔다. 소년 서성환도 물건을 도매상에 배달해주는 등 잔심부름을 하며 가업에 참여했다. 당시 제조방식은 물론 가내 수공업이었다. 솥을 걸어놓고 그안에 물과 기름을 섞어 손으로 직접 젓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품질은 우수하다는 평을 얻어 수요를 따르지 못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자신감을 얻은 윤 여사는 ‘창성상점(昌盛商店)’이라는 생산자 명칭을 표기했다. 제품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 상품에 ‘창성당제품’‘오리지날’ 등을 표기했다. 가업에 참여한 소년 서성환의 경영 수업은 계속됐다. 보통학교시절부터 소년 서성환은 하루 끼니인 도시락 세개를 자전거에 싣고 해뜨기 전에 개성을 출발, 화장품 제조에 필요한 물건을 사오곤 했다. 중경보통학교를 졸업한 1939년부터 화장품 사업에 본격 뛰어들었다. 거래 도매상에게 물건을 납품하거나 예성강 20리를 따라 형성된 상로(商路)를 따라 직접 팔기도 했다. 자전거로 화장품을 팔러 다니면서 유통에도 눈을 떴다.10대 소년 서성환은 개성에서 자전거를 타고 내려와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글리세린과 향료, 빈 병을 사는 일을 도맡았다. 창성상점의 제품은 1941년 개성 최초의 백화점인 3층 양옥의 김재현백화점에도 들어갔다. 백화점에 작은 코너를 개설, 자사의 제품뿐만 아니라 인기가 높던 다른 회사의 제품도 위탁 판매했다. 제조와 판매를 함께 할 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 제품도 함께 판다는 서성환의 생각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러면서 화장품 제조법도 어머니 윤 여사로부터 직접 배웠다. 물과 기름의 혼합비율, 열을 가하는 강약 정도, 가성소다(수산화나트륨)의 비율 등에 따라 화장품의 품질은 천차만별이었다. 화장품 유통에 이어 제조까지 현장 경험을 쌓았지만 스물한살이던 1944년 강제징용되면서 그의 화장품 수업은 중단됐다. ●‘블루오션’ 태평양으로 광복을 맞아 다시 개성으로 돌아온 청년 서성환은 화장품에 집중했다. 어머니가 세운 창성상점을 ‘태평양상회’로 이름을 바꿨다. 태평양만큼이나 큰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웅지와 태평양을 건너 세계로 진출하겠다는 도전의지를 담은 이름이다. 광복정국의 혼란속에서 서성환은 1947년 개성을 떠났다. 서울로 이주, 회현동에 새 터전을 마련했다. 청년 서성환은 당시 누님 한분이 내려오지 못한 이산가족의 한을 평생 간직하고 살아야 했다. 이 즈음 부인 변금주(77) 여사를 만나 결혼했다. 모조품과 위조 화장품이 기승을 부리던 50년대 서성환은 “남보다 월등한 제품을 만들어야 제 값에 팔 수 있다.”며 시종일관 품질을 강조했다. 이때 내놓은 메로디크림은 태평양 1호 제품의 영예를 안았다.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는 듯했지만 6·25가 터졌다. 그는 피란길에도 화장품 원료를 싣고 부산으로 내려갈 정도의 집념을 보여줬다. 임시수도 부산에서 1951년 순식물성의 ABC포마드를 시장에 내놓았다. 대단한 인기를 끌며 화장품 시장을 석권했다. 당시 멋쟁이들의 필수품이었다. 서성환 회장이 직접 작명한 ABC포마드는 60년대까지 대히트 브랜드로서 태평양의 성장 기틀이 됐다. 청년 서성환은 환도 이후 1954년 후암동시대를 열면서 기술력에 대한 갈증에서 장업계 최초로 연구실을 만들었다.1953년 처음 열린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등을 통해 화장문화가 태동한 것도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향기나는 밥, 그리고 최초의 연속… 서성환은 후암동 시절 잘 팔리던 화장품을 구해 직원들과 함께 실험을 거듭했다. 생산직 여종업원들과 함께 밥을 지어 먹었다. 가내 수공업에 실험기구가 부족한 것은 당연지사. 향료가 밴 솥과 물바가지를 이용해서 밥을 하면 향내 나는 밥이 되고, 크림을 만들었던 도구를 쓰면 구리무 향밥이 됐다고 한다. 56년 용산으로 이전한 이후 성장가도에 들어섰다. 서성환은 57년부터 해마다 기술자들을 독일과 일본에 유학시켰고,58년엔 동양 최초로 고성능 미분기를 도입했다.59년 주식회사 체제로 출범했고 프랑스 코티사와 기술제휴를 통해 장업사의 새 장을 열었다.60년 장업계 최초의 해외방문,64년 오스카 브랜드로 최초의 화장품 수출, 당시 획기적인 방문판매제와 아모레화장품 개발 등에 힘입어 급신장했다.68년 매출이 14억 2800만원으로 창업 이후 처음 10억원대를 돌파했다. 당시 태평양의 품질은 어느 정도였을까?지난 71년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화장품 콘테스트에서 3개의 금상을 수상했다. 화장품 제조 능력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74년 장업계 최초의 소비자과를 신설, 정부의 소비자 기본법안보다 3년 빨리 소비자 중심을 지향했다. 순항하던 태평양은 90년대 들어 무한경쟁시대를 맞았다. 서 창업주는 창업 50년을 맞은 95년을 ‘세계화의 원년’으로 선포하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을 다짐했다. ●태평양에 순항중인 2세 경영 서 창업주는 개성상인 특유 기질을 두 아들에게 물려줬다. 서 창업주는 지난 82년 장남 영배(49)씨를,87년 차남 경배(42)씨를 입사시키면서 2세들에게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영배씨는 태평양화학에 입사해 도쿄 및 뉴욕 지사를 거쳐 태평양증권 부사장 태평양종합산업의 회장을 지냈다. 지금은 태평양개발 회장으로 기업의 일가를 이루고 있다. 영배씨는 태평양개발을 연매출 1000억원대의 중견 건설업체로 키웠다. 차남인 경배씨는 재경본부를 시작으로 그룹 기획조정실장을 맡아 과감한 구조조정을 지휘했다. 태평양증권·태평양패션·프로야구단 돌핀스·여자농구단 등 계열사를 정리했다.97년 3월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태평양에 2세 경영의 배를 띄웠다. 지난해 매출은 1조 1053억원. 후계작업이 부드럽게 진행되던 2003년 1월 장원 서성환 회장은 영면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기업가 태평양은 해마다 50억원 가량의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여성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여성에게 되돌려준다.’는 취지에서 주로 여성의 삶의 질 향상에 집중하고 있다. 이윤의 사회환원은 기업윤리 이전에 창업주 서성환 회장의 소신이라는 게 한 측근의 설명이다. 그는 “창업주는 ‘사회에 기여하면서 돈을 버는 게 바로 우량기업’이라고 자주 언급했다.”고 말했다.‘불쌍한 사람을 보고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후덕함도 있었다. 그러나 창업주 자신의 일상 생활에서는 개성상인의 ‘짠돌이’가 느껴질 정도였다. 서 창업주는 지난 63년 중앙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성환 장학금’을 만들었다. 중앙대 최초의 외부장학금이다. 당시의 기업가치고는 사회적 책무를 빨리 깨달은 편이었다. 첫 수혜자는 리대룡(64) 중앙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이후 75년부터 가정 형편이 어렵지만 학업 성적이 좋은 여고생 9700여명에게 17억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지난 9월부터 태평양학술문화재단으로 이름을 바꿔 학술연구사업으로 방향을 잡았다. 여성들에게 유방은 모성의 상징이자 여성답게 해주는 상징적인 기관이다. 여성의 건강과 가정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태평양은 2000년 9월 한국유방건강재단을 만들었다. 태평양이 전액 출자한 재단은 국내 최초의 유방암 전문 비영리 공익재단이다. 지금까지 1만 2000여명의 여성들에게 수술비를 지원하거나 무료로 검진받을 수 있도록 했다. 사회 환원은 태평양이 출연한 재단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 2003년 6월 서 창업주가 타계한 다음 태평양 주식 7만 4000주와 이익배당금 전액 등 50억원을 아름다운 재단에 전달했다.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은 아들 서경배 사장으로 이어졌다. 서 사장은 선친의 고향이 북한인 것을 감안, 북한 어린이와 여성을 돕기 위해 유니세프에 지난해와 올해 각각 1억원을 기부했다. ■ 오늘의 태평양 일군 3인방 오늘날의 태평양을 일군 데는 창업주 서성환 회장을 그림자처럼 보필한 3인방이 있다. 태평양의 사사에 남을 정도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들은 한국 여성의 아름다움을 재인식시키고, 국민 생활양식을 한층 높인 신화 창조의 주역이다. 오원식(69)전 부사장은 40년이 넘게 입에 오르내리는 브랜드 ‘아모레’를 1961년 작명했다. 당시 절정의 인기를 끌었던 이탈리아 가곡 ‘아모레미오(난 당신을 사랑합니다)’에서 따왔다. 상금으로 당시 거금인 1만원(당시 월급 7000원)을 받았다. 오 전 부사장은 1967년부터 한방미용법을 연구, 지난 73년 인삼 사포닌을 이용한 화장품 아모레 진생삼미를 탄생시켰다. 진생삼미는 브랜드 진화를 거듭하다가 가장 한국적인 명품 ‘설화수’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설화수는 단일 브랜드로 매출이 2000년 1000억원을 달성했으며, 지난해에는 국내 최초로 3000억원을 돌파했다. 화장품 사상 유래가 없는 기염을 토했던 브랜드다.82년 대한화장품학회 회장을 지낸 오 부사장은 87년 기술연구소 초대 소장을 맡아 기술개발에 힘썼다. 이후 90년대 초까지 연구부문을 총괄하면서 태평양 40년 연구와 생산 분야의 산증인으로서 화장품 기술의 과학화에 큰 획을 그었다. 그 어렵던 50년대의 태평양 생존 기틀을 닦은 데는 구용섭(81)초대 연구실장의 공을 빠뜨릴 수가 없다. 좋은 원료 확보를 위해 암거래 시장에서 발품을 팔았다. 서울 환도이후 후암동의 가내 수공업 시절의 ‘향기나는 밥’과 ‘구리무밥’을 먹으면서도 제품개발을 진두 지휘했다. 이같은 노력 덕분에 태평양은 독자적인 기술 개발과 화장품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발판을 마련했다.68년 한국화장품 화학자회 창립회장에 취임,80년까지 회장을 지내면서 한국의 화장품 발전에도 공이 크다. 머리를 감을 때 비누에서 샴푸로 바꾸게 한 사람이 김창규(66) 고문이다. 프랑스 파리 이과대학 연구소의 실장으로 재직중 태평양에 스카우트됐다. 그가 73년 개발한 브랜드 ‘타미나’는 70년대를 대표하는 히트 상품이 됐다.78년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화장품학회 국제회의에서 인삼사포닌이 모발에 미치는 효과에 대한 논문을 발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김 고문은 80년대 태평양의 생활용품 사업을 일궜다. 당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리도 푸로틴 샴푸는 시장 점유율 70% 이상을 기록했다. 무엇보다도 비누로 머리를 감던 국민들의 생활양식을 샴푸로 머리를 감게 바꿨다.88년 가정용품을 연구하는 기술연구소장과 92년 태평양중앙연구소 초대 소장을 지냈다.91년부터 대한화장품학회장을 연임하면서 화장품학계 발전을 위해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chuli@seoul.co.kr ●정·관·재계로 연결된 화려한 혼맥 창업주 서성환 회장은 1947년 변금주씨와 결혼했다. 슬하에 2남 4녀, 송숙(58), 혜숙(55), 은숙(52), 영배(49), 미숙(47), 경배(42)를 두고 모두 성혼시켰다. 서 창업주의 사돈가는 한마디로 쟁쟁한 집안들이다. 정·관계를 비롯해 기업인과 언론인으로 인연이 이어진다. 방우영(77) 조선일보 명예회장을 비롯해 신춘호(73) 농심그룹 회장, 최두고(84) 전 국회의원 등의 기업인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 을유문화사 정진숙(93) 회장, 최주호(작고) 전 우성그룹 회장, 박세정(88)대선제분 회장과는 혼맥을 쌓았다가 끊어졌다. 서 창업주는 또 사돈가의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을 통해 정재문(69) 대양산업 회장(전 의원), 신춘호 농심 회장을 통해 서봉균(79) 전 재무장관과는 ‘사돈의 사돈’으로 간접 혼맥을 이루고 있다. 김치열(84) 에이오에스 회장(전 법무·내무장관)과는 신춘호 농심 회장을 거쳐 박남규(85)조양상선 회장을 통해 연결된다. 서 창업주는 이같은 순환 혼맥을 통해 김일환(작고) 전 내무장관, 정운갑(작고) 전 농림부 장관, 김영생(작고) 전 의원, 김도창(작고) 전 법제처장 등 정·관계 가문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다. 이같은 현상은 서 창업주 특유의 신중함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이는 자녀 혼사를 사람됨됨이를 중시하여 중매 형식을 택한 서 창업주의 성격에서도 잘 나타난다. 사돈가의 ‘유명세’와 관련해 정략적이라는 세인의 오해를 받기 쉬우나 태평양측은 이를 극구 부인한다. 정관계의 발판을 만들 필요도 없었거니와 ‘정경유착’의 시선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는 게 서 창업주 측근의 설명이다. 관계(官界)의 집안과는 모두 현직에서 물러난 뒤 맺어졌고, 재계 인사들과는 업무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대부분 양쪽 집안 가장들의 친분으로 혼사가 이뤄졌다고 전한다. 혜숙씨는 이화여대 사회생활과 출신으로 김일환씨의 3남인 의광(56)씨와 지난 74년 결혼했다. 김일환씨는 6·25전쟁 당시 국방차관을 역임한 전형적인 무관 출신으로 상공·내무·교통장관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의광씨는 연세대 정외과 출신으로 태평양 계열사의 장원산업 회장으로 활동하다 물러났다.4명의 사위 가운데 유일하게 장인 회사의 경영에 참여했다가 서울 인사동에서 목인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 부부는 공부하고 있는 근종(29)씨와 LG전자에 다니는 우종(27)씨를 두고 있다. 3녀 은숙씨는 국회 건설위원장을 지낸 최두고씨의 차남인 상용(53)씨와 지난 77년 결혼했다. 상용씨는 고려대 의대를 졸업하고 은숙씨와 결혼, 미국에서 7년간 수련의 생활을 끝내고 귀국해 현재 고려대 의과대학장으로 재직중이다. 부부에겐 ㈜태평양에서 사원으로 근무하는 환석(27)씨와 미국에서 학업중인 양희(23)씨 등 1남1녀가 있다. 서 창업주의 두 아들인 영배씨와 경배씨의 혼사도 많은 관심을 끌었다. 장남인 영배씨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기 직전에 이미 그룹경영에 참가했다.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 대학원을 수료한 후 증권회사로 자리를 옮겨 90년도 태평양증권 부사장을 거쳐 태평양개발 회장을 맡고있다. 영배씨는 조선일보 방우영 명예회장의 1남3녀 가운데 장녀인 혜성(45)씨와 지난 83년에 결혼했다.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재원인 혜성씨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마친 후 조선일보에 입사, 문화부 기자로 근무하다가 서씨 집안의 맏며느리가 됐다. 혜성씨는 태평양학원(성덕여중·성덕여상)의 상임이사로 활동 중이다. 영배씨 부부는 2남1녀를 두고 있는데 모두 학생이다. 차남인 경배씨는 지난 90년 11월, 농심 신춘호 회장의 막내딸인 윤경(37)씨와 화촉을 밝혔다. 서 창업주와 신춘호씨는 같은 용산구 관내에서 평소 자주 만나 인사를 나누던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이러한 인연이 훗날 사돈으로 연결된 것. 경배씨는 경성고·연세대 경영학과를 마친 뒤 미국 코넬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수재로 87년 태평양화학 과장으로 그룹에 첫발을 내디뎠다.90년 태평양그룹 기획조정실 실장을 지내는 등 태평양 대표이사 사장 및 대한화장품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경배씨는 학생인 두딸 민정(14), 호정(10)을 두고 있다. chuli@seoul.co.kr ■ 故서성환 회장의 차사랑 “기다리는 시간의 맛도 있고, 잔의 맛도 있고, 차 맛도 있다.” 창업주 고 서성환 회장을 모신 회의에서 손수 차를 우려드렸던 서경배 사장의 회고담이다. 요즘 차는 단순한 기호식품이나 전통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상상력을 뛰어넘는 초스피드 시대에서 여유를 찾아주는 음료이다. 철학이 담긴 고급 문화로 이해된다. 이런 차가 화장품 회사 태평양과 어떻게 이어졌을까? 서 창업주는 60년대 일본 등 외국을 방문할 때마다 그 나라 고유의 차를 대접받았다. 일본 거래처를 찾았을 때 가루차가 늘 나왔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 손님에게 대접하는 것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커피가 고작이었다. 특히 서 창업주는 일본 거래처 사람들이 고려·조선왕조의 다구(茶具)에 열광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에 차에 관심을 기울여 70년대 후반부터 녹차사업을 시작했다. “차밭을 조성하되 반드시 불모지를 개간해야 한다.”80년 녹차밭을 구상하면서 서 창업주는 이렇게 마음먹었다. 당시 차밭 개간은 무모한 사업으로 비쳐졌다. 80년대 초 우리나라는 차의 불모지나 다름 없었다. 부족한 전문인력과 제주도 땅의 척박함 등 그 어느 것 하나 녹록지 않았다. 골프장을 짓는다거나 땅투기를 한다는 등의 오해까지 받았다. 축적된 기술과 자료도 없었다. 주위에서는 회사 전체가 어려워질 것이라며 모두 만류했다. 그러나 서 창업주는 뚝심을 발휘해 밀어붙였다. 대한농구협회 회장 시절인 80년 중국을 방문, 공안(公安)을 설득해 황제차로 유명한 용정차(龍井茶)의 고향 항저우를 둘러봤다. 차가 거대한 산업임을 확인했지만 차 박물관은 그저 형식만 갖춰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해결의 실마리는 우연히 풀렸다.90년대 초 사업을 위해 찾았던 그는 미국 하와이의 파인애플농장 안에 있는 돌(Dole)사의 파인애플하우스, 즉 파인애플박물관에 들렀을 때 무릎을 탁 쳤다. 그러나 겨우 손익분기점에 도달할까말까 하던 차사업을 차박물관으로 견인하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차박물관은 가슴에 고스란히 묻어두었다. 말년, 몸이 쇠약해진 서 창업주는 휴양을 위해 하와이에 머물면서 파인애플하우스를 가보곤했다. 지난 99년 아들 서경배 사장이 부친 문병을 위해 하와이에 들르자 그는 짐을 풀던 아들을 다짜고짜 차에 태우고 돌사의 파인애플농장으로 데려갔다.“바로 이거야, 이렇게 만들어봐라.”와병중이던 아버지의 말은 그게 전부였다. 이렇게 해서 설록차박물관 오’설록이 탄생했다. 지난 2001년 9월 남제주군 안덕면 서광리에 문을 연 오’설록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찻잔 등 다구가 잘 진열되어 있다. 차에 관한 명상의 최적 공간으로 소문나면서 연간 30여만명이 찾는다. 장원 서성환의 정성과 숨결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곳이다. chuli@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부고] 정해영 전 국회부의장

    7선의 정해영 전 국회 부의장이 11일 오후 6시55분 별세했다.90세. 1931년 부산상고를 졸업한 김 전 부의장은 부산대양산업, 대동연탄 등을 경영하다 1954년 3대 민의원에 당선, 정계에 입문한 뒤 5대 민의원을 거쳐 1963년 6대 국회부터 10대까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8대 국회인 1971년 국회 부의장을 거쳐 1973년 신민당 부총재를 역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송영주씨와 정재문 전 의원 등 1남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영안실. 발인은 15일 오전 7시, 장지는 울산 선영.(02)2072-2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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