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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구늘리기 3·1운동’

    ‘인구 늘리기 3·1운동을 아십니까.’ 경북 영양군은 공무원 1명이 1년 동안 1가구 이상을 전입시켜 10년안에 인구 3만명을 달성하는 ‘3·1운동’을 전개한다고 1일 밝혔다. 군의 현재 인구는 6개 읍·면 1만 9000여명으로 섬을 제외한 육지에 있는 전국 시·군 중 인구가 가장 적다. 이는 지방자치법상 읍(邑)의 설치기준(2만명 이상)에도 못 미친다. 이에 따라 공무원을 대상으로 이 운동을 적극 추진하는 한편 매년 실적을 평가해 우수 공무원에게는 인사상 혜택을 줄 계획이다. 3·1운동과 함께 부모님과 함께하는 주소 갖기, 출향인 자녀 고향학교 보내기 등도 벌여나갈 계획이다. 군 관계자는 “전입 가구에는 기념촬영, 쓰레기봉투 지급, 의료검진, 각종 세금 감면 등의 인센티브가 주어진다.”고 말했다. 한편 영양군의 인구는 1973년 7만 700여명이었으나 1980년 5만 2000여명,1990년 3만 100여명, 지난해 말 1만 9879명으로 크게 줄었다.영양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박성서의 7080X파일] 35년 만에 재결합한 자니브라더스

    [박성서의 7080X파일] 35년 만에 재결합한 자니브라더스

    남성적인 매력이 한껏 돋보였던 남성 4중창단 자니브라더스가 35년 만에 재결합을 선언했다. 평균연령이 자그마치 68세. 이로써 우리나라 최장·최고령의 보컬 팀이 탄생한 것. 유독 박력 있고 시원스러운 가창력과 더불어 싱싱한 수목을 연상시키는 건강미가 매력 만점이던 이들 멤버는 각각 김현진(리드,71세), 양영일(테너,68세), 김준(본명 김산현, 바리톤,67세), 진성만(베이스,67세). 여전히 ‘빨간 머플러’가 썩 잘 어울릴 듯한 외모, 전성기 때 못지 않은 박력에 깊이까지 갖춘 이들의 정겨운 화음은 세월을 뛰어넘어 특히 중장년층들의 깊은 공감을 이끌어낼 것으로 기대된다. 1961년, 당시 최고의 음악성을 갖춘 정예들로 구성된 예그린합창단 1기생으로 출발, 기량을 뽐내던 중 뜻이 맞는 이들 네 명이 모여 4중창단을 결성했다. 이어 문화방송 톱싱거대회 월별 예선을 통과, 연말 본선 결선을 앞두고 예그린이 해체된다. 아울러 이들은 당시 문화방송 톱싱거 경연대회, 동아방송 연말 중창단경연대회 등을 잇달아 휩쓸며 무서운 신예로 급부상했다. 특히 춤과 연기 실력으로 완전무장한 예그린 출신답게 TV쇼를 화려하게 바꾼 동시에 영화주제가 ‘빨간 마후라’를 비롯해 ‘방앗간 집 둘째딸’,‘아나 농부야’,‘수평선’ 등을 잇달아 발표, 정상에 오른다. 아울러 당시 꿈의 무대였던 워커힐에 전속되며 통행금지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마치 한 몸인 양 ‘사인오각(四人五脚)’을 이뤄 바쁘게 활동,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최정상에서 이들은 해체를 선언한다. 각자의 재능을 살리기 위해 솔리스트로 전향을 꿈꾸던 이들은 결국 1968년 6월8일 동양TV ‘쇼쇼쇼’를 통해 ‘자니브라더스 고별쇼’를 갖는다. 하지만 이들의 재능을 아쉬워하던 당시 장태화 서울신문사 사장 등 후견인들에 의해 다시 재결성, 그룹명을 ‘메아리진(전국에 메아리친다는 순수 우리 말)’으로 바꾸고 1970년 1월11일 mbc-TV ‘메아리진쇼’를 통해 컴백, 매주 30분씩 브라운관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들은 당시 중창단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제각각 부업전선에 나선 후 이어 1972년, 서울 을지로 4가에 ‘메아리진’이라는 음악 살롱을 차려 경제적 타개책을 적극 모색하지만 1년이 채 못돼 하나둘씩 각자의 길로 흩어진다. 오는 3월12일 공식적으로 KBS 가요무대를 통해 재결합을 선언, 컴백무대를 갖는 이들이 마지막으로 함께 섰던 무대는 1973년 1월, 당시 TBC ‘쇼쇼쇼(PD 황정태)‘ 400회 특집프로그램. 오랜 만에 똑같은 의상으로 통일한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비록 그동안 제각각의 길을 걸어왔지만 늘 음악과 함께 해왔기에 이 번 재결성은 매우 자연스레 이루어진 일”이라고. 실제로 멤버 중 바리톤 파트의 김준씨는 그룹 해체 후 솔로가수로 전향, 현재까지 매년 음반을 발표해오며 국내 유일의 남성재즈보컬리스트로 활동하고 있고 멜로디 파트의 김현진씨는 그간 보험일을 거쳐 현재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본인이 이끄는 ‘울바우 남성합창단’과 더불어 매년 정기공연을 해왔다. ‘빈대떡 신사’의 작곡자인 양원배씨의 차남으로 경희대 음대 출신이기도 한 테너 양영일씨는 지난 23년간 음악교사로 재직해 왔다. 현재는 부산 코스모스악기사 상무로 재직 중이다. 그런가하면 동아방송 성우 1기생이기도 한 베이스 진성만씨는 영화배우 김지미씨의 여동생 김지애씨와 결혼, 지미필름 대표를 거쳐 현재는 요식업에 종사하고 있다. ‘자니브라더스’라는 이름으로 함께 무대에 서는 것이 오랜 꿈이었다는 이들은 이미 지난 가을부터 매주 한 차례씩 모여 호흡을 고르고 화음을 맞춰 왔다. 이전까지는 멜로디 위주의 유니송(Unison)을 주로 발표해 왔지만 이제부터는 하모니 위주의 4성, 즉 네가지 화음을 조화시켜 남성4중창단으로서의 매력을 한껏 펼칠 예정. 클래식과 교회음악에서 출발한 이들이 들려줄 주요 레퍼토리는 역시 올드팬들에게 친숙한 ‘올드송’들이다. 자신들의 히트곡은 물론 민요에서 올드 팝까지 폭넓게 펼칠 예정으로 편곡은 작곡가 김기웅(71)씨가 맡았다. . 대중음악평론가 sachilo@empal.com
  • 베트남전 기록 되찾는다

    정부가 베트남전쟁에 파병했던 한국군 관련 기록물을 직접 현지 조사를 거쳐 찾아올 수 있는 길이 열린다. 특히 올해부터 베트남을 비롯, 러시아와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를 대상으로 한국 관련 비공개 기록물 수집에 본격적으로 나설 계획이다. 행정자치부 산하 국가기록원은 오는 10월 베트남 국립문서보존소와 ‘기록물 교류협력 협정’을 체결한다고 27일 밝혔다. 조윤명 국가기록원장은 “협정이 체결되면 베트남 현지에 있는 한국 관련 기록물을 수집·조사할 수 있다.”면서 “특히 한국군 파병이 이뤄진 베트남전 관련 기록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가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인 탓에 그동안 우리나라와 기록물 교류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1964년부터 1973년까지 10년 동안 5만여명의 한국군이 파병됐지만, 우리나라가 확보하고 있는 현지 자료는 전무하다시피하다. 조 원장은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희생은 물론, 가해자로서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자료의 파급력은 클 것”이라면서 “균형적, 체계적인 시각을 갖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앞서 국가기록원은 지난 2005년부터 해외에 흩어져 있는 한국 관련 기록물 수집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이를 통해 지난해 말까지 37만 5000여점의 자료를 확보했다. 이에 따라 국가기록원은 올해부터 국내 연구기관이 접근하기 어려운 러시아·중국·베트남 등 사회주의 국가의 비공개 기록을 집중 조사할 계획이다. 러시아의 경우 러시아국립문서보존소가 소장하고 있는 비공개 기록, 중국에서는 현지에서 이뤄진 독립운동 및 한인 관련 기록 등이 주요 대상이다. 조 원장은 “올 한 해 동안 구한말 이후 최근까지 생산된 한국 관련 기록물 12만여점을 확보하는 게 목표”라면서 “해외에 산재해 있는 한국 관련 기록물 현황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가이드북’도 발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안녕하셔요] 돌아온 스타 성훈(成薰)과 펄·시스터즈 3남매

    [안녕하셔요] 돌아온 스타 성훈(成薰)과 펄·시스터즈 3남매

    『돌아와보니 나보다 더 유명해졌어요 』- 「펄 · 시스터즈」의 오빠 성훈(成薰)은 동생들을 가리키며 자못 대견해 못견디겠다는 말투다. 「수출배우 제1호」란 별칭으로 「홍콩」에 갔다가 3년만에 돌아온 그는 자기가 없는 3년동안 동생들이 가요계 정상의 인기를 차지한데 대해 더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 것 같다. 모두가 늘씬한 체구 성훈(29)의 본명은 배용수(裵龍守). 「펄」자매는 인순(仁順·21) 인숙(仁淑·19). 이들 인기 연예인 3남매는 부산에서 통조림 공장을 하고 있는 배경식(裵敬植·59)씨의 6남매(남3·여3)중 세째, 다섯째, 여섯째 자녀다. 한결같이 쭉빠진 늘씬한 체구가 우선 혈통을 과시하는데, 어머니 (현정득(玄正得)·53)와 아버지중 어느쪽을 닮았느냐는 물음에, 『 양친이 모두 늘씬하시다』고 공평한 대답이다. 「매스콤」을 통해 수 없이 소개된 이들 3남매 이외의 비연예인 3남매 역시 『우리들 보다 더 늘씬하다 』는 자랑인데 출가한 맏딸 미령(美玲·33)씨는 소문난 미인이었고, 둘째 용하(龍河·31)씨는 한국수출공단 근무, 그리고 네째 용문(龍文·26)씨는 난방관계 회사를 갖고있는 예비재벌급 사장이라고 소개. 영화배우이든 가수이든 그것이 사람들의 이목을 즐겁게 해주는 직업이고 보면 이들 성훈과 「펄」자매가 타고난 신체조건은 그야말로 천혜(天惠)라 할 수 있다. 재능을 과시하기 전에 우선 남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천질을 갖고 있으니까. 그런데 이들의 재능 역시 갖가지다. 본업인 노래와 연기를 제하고도 이들은 「스포츠」에 각기 「프로」급의 실력을 갖고 있다. 성훈은 중앙대(中央大) 재학중 축구 「팀」주장이었고 유도 2단, 당수 초단의 실력. 인순양은 중학교때 수영2백m에서 국내1, 2위를 다퉜다는 것. 인숙양은 「스포츠」는 『별로 흥미없다』지만 기성 뺨치는 「발레리너」. 허물없는 친구처럼 운동과 연예에 상통점이 있어서인지 이들 3남매는 오누이관계라기 보다 허물없는 친구사이다. 한국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점잔빼기가 이들한텐 전혀 없다. 어디서 든지 함께 뛰고 뒹굴 수 있는 그런 탁 트인 분위기. 소꿉장난할 때의 동심을 이들 장성한 3남매는 그대로 지니고 있다. -셋이 함께 영화에 나간다는 소문이던데? 『 얼마전 그런 부탁을 받았어요. 「첫사랑」등 「펄」의 「히트·송」3편에 함께 출연해 달라는-』 성훈의 이 말에 인순·인숙양은 함께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영화화기획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는 것. -영화배우가 되고 싶은지? 이 물음에 인순양은 『멋진 영화배우가 되고싶다』고 대답했으나 인숙양은 『 오빠와 함께 나가는 것뿐이지 큰 관심은 없다』고 서로 다른 의견이다. 이번에 3남매가 공동 출연할 생각을 내린 것은 이를테면 오빠의 귀국을 기념한 우애의 열매. 뮤지컬 영화 해봤으면 그런데 성훈은 동생들의 인기에 편승하려는 것으로 오해될까봐 퍽 난처한 기색이었다. 『어린 동생들에게 폐가 될지도 모른다』고 입빠른 사람들의 편견을 두려워 했다. 그는 『 동생들이 이만큼 됐으니 「뮤지컬」영화를 해봤으면 해요. 노래와 연기가 제대로 조화된 본격적인 「뮤지컬」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 우리들 3남매의 「이미지」도 새로운 것이 될거』라고 그나름의 희망을 표했다. 그러면서도 성훈은 인기연예인으로 보다 순수한 여성으로 동생들이 행복해지길 희망했다. 『나는 이렇게 역설해요. 인순이는 72년까지만 노래하고 · 인숙이는 73년에 그만두라고. 여자는 결혼할때가 되면 시집가서 현모양처가 되는게 현명한 일이 아닙니까? 』 이 말에 동생들은 「너무 서두른다」고 똑같이 불만을 표했다. 『이제부터 노래공부도 본격적으로 할참인데- 』라는 게 인순양의 말이고, 『 시집가는 것보다 노래하는게 행복하다』는 게 인숙양의 항변. 귀국 한달이 채못되는 성훈에게는 이미 6, 7편의 작품 청탁이 밀려들었고 그 중 3편쯤은 동생들과 공연할 생각. [선데이서울 70년 7월 2일호 제3권 27호 통권 제 92호]
  • “멀쩡히 산 사람을 日전범과 합사하다니…”

    “멀쩡히 산 사람을 日전범과 합사하다니…”

    “(야스쿠니 신사에서)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을 마음대로 합사시켰지. 빼달라고 했더니 유패에 ‘생존자’라고 붙여 놨더라고. 이번에 가면 차라리 ‘강제징용자’로 고쳐 달라고 할 거야.” 김희종(82) 할아버지는 최근 하루도 편안하게 잠을 못 이뤘다.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 신사를 공동 피고로 한 ‘야스쿠니신사 합사철폐 재판’ 원고인단 가운데 생존자로는 유일하게 참여해 25일 일본땅을 밟기 때문이다.23일 서울 신림2동의 자택에서 만난 그는 귀가 조금 어두웠지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꼭꼭 눌러왔던 한(恨)을 풀어냈다.50년 넘게 함께 산 유희훈(74) 할머니에게도 3년 전에야 징용 사실을 털어놓았을 만큼 일부러 잊고 지낸 그의 과거사는 불행했던 우리 역사를 오롯이 담고 있었다. ●일본에서 미국, 다시 한국으로, 힘 없는 민족의 설움 황해도 황주 출신인 그가 제국주의의 망령이 드리워진 야스쿠니 신사에 ‘긴 기시오(金喜種)’란 이름으로 전범들과 함께 합사된 것은 지난 1944년 일본 군속으로 징용당한 뒤 전사한 것으로 잘못 기록된 탓. 그는 “개 끌고 다니듯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끌려갔어. 배를 탔을 때에야 남양군도로 간다는 것을 알았지.”라고 그때를 떠올렸다. 요코하마에서 기초 군사훈련을 받은 뒤 사이판으로 옮겨갔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 일본군 기지를 구축하던 그는 44년 6월 미군의 포로가 됐고, 이후 캘리포니아 목화 농장에서 노예처럼 노역을 했다. 광복을 맞았지만 돌아올 길이 마땅치 않아 1년을 더 기다린 끝에 46년 고국 땅을 밟았다. 48년 순경 시험에 합격해 73년 정년 퇴직한 그는 퇴직금으로 조그마한 문방구를 열었지만 신통치 않았고 구슬 꿰기를 하는 등 힘겹게 2남1녀를 키웠다. 지금은 자식들이 마련해준 3500만원짜리 전셋집에 살고 있다. 지난 세월 일본의 망언이 이어질 때마다 가슴을 후벼내듯 아팠지만 일부러 잊고 지낸 악몽들이 새삼 떠오른 것은 지난해 2월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정부 조사가 이뤄지면서였다. 등록을 하라는 연락을 받고 여러 가지 서류를 떼서 해당 관청을 찾아간 할아버지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일본에서 사이판, 다시 미국까지 짐승처럼 끌려다녔어. 한 달에 50만원도 아닌 1년에 50만원이라니. 기도 안차. 죽은 사람에겐 2000만원이래. 쓴웃음만 나오더라고.” 지난해 5월에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자신이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져 있다는 것. 관련 단체의 도움으로 일본을 찾아간 할아버지는 자신을 합사자에서 빼달라고 말했지만 야스쿠니 신사 측에선 묵묵부답이었다. “잘못을 감춰 보려는 것 아니겠어. 당시에 조선 사람들이 일본에 충성했다고 선전하기 위해서겠지. 정신대 문제의 방패막이로도 이용할 수 있을 테고”라며 애써 분을 감췄다. 그는 정부에 대해서도 따끔한 충고를 잊지 않았다.“고작 1년에 50만원 지원하겠다고 해놓고 그나마 정치인들끼리 치고받느라고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대. 내가 100살까지 살 것도 아닌데 이젠 줘도 안 받을 거야. 언제 힘없는 백성들을 생각한 적이 있나.”라고 힐책했다. ●야스쿠니신사 합사 철폐 재판 야스쿠니 신사에는 도조 히데키 등 14명의 A급 전범을 포함해 240여만명의 일본인 이외에도 약 2만 1000여명의 한국인이 강제 합사돼 있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야스쿠니 신사 합사자 가운데 13명은 현재까지 살아 있다. 야스쿠니 신사에 무단으로 합사된 국내 생존자와 유족들은 당사자나 유족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민족적 인격권을 침해하는 행위이며 즉각 철폐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신사 측은 ‘한번 합사된 이상 취하할 수 없고 당시 일본인으로 희생됐고, 죽으면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진다는 것을 알고 참전했기 때문에 합사는 유족들의 의사와 관계없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번 소송은 한국인 합사자만을 원고로 해 제기되는 소송이다. 오는 26일 도쿄지방재판소에 정식으로 제소된다. 글 사진 임일영 김동현기자 argus@seoul.co.kr
  • [Book Review] 남미권력 재단하는 美 유학파 엘리트

    1970년대까지 유학하면 미국이었다.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학자들이 우리 학계를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특히 경제학에서 미국 학문의 영향력을 가히 절대적이었다.2차 세계대전 승전국 미국의 경제학은 냉전시대에 서방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궁정전투의 국제화’(이브 드잘레이·브라이언트 가스 지음, 김성현 옮김, 그린비 펴냄)는 미국 유학파 엘리트들의 권력투쟁 과정을 조명한 책이다. 칠레,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을 사례로 삼고 있지만 우리의 경우와도 전혀 무관치 않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실제 한·미FTA 등 주요 대외정책을 다루는 브레인들은 대부분 미국에서 수학한 엘리트들이다. 우리의 외교나 거시경제 정책이 미국에서 생산된 학문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는 과거처럼 단순히 국가정책을 실현하는 데 머물지 않고, 국가의 향방을 결정할 만큼 중요한 위치에 올라섰다. 저자들은 그래서 ‘테크노폴스’라는 개념을 내세웠다. 책 제목으로 사용된 ‘궁정전투’(Palace Wars)는 과거 식민지 시기 대토지소유 가문의 후예나 법률엘리트, 경제엘리트 등이 국제적인 전문지식을 기반으로 권력 다툼을 벌인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마치 궁정내부에서 권력을 놓고 벌이던 귀족들의 정치투쟁과 유사하다는 의미에서다. ‘반(反)신자유주의 연대’를 제창한 피에르 부르디외의 제자인 이브 드잘레이는 중남미 국가에서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어떻게 퍼져나갔는지 탐구하고 있다. 미국 사우스웨스턴 로스쿨 학장인 브라이언트 가스와 함께 중남미 국가들의 권력구조 재편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경제엘리트, 법률엘리트들의 활동과정을 400여차례의 인터뷰를 통해 재구성했다. 저자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미국의 국제전략과 각국 엘리트들의 미국지식 습득을 통한 권력투쟁이다. 중남미 각국의 엘리트들은 미국 유학과 국제기관 활동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베트남전쟁 이후 미국 경제학과는 하버드대 등 아이비리그의 케인스주의에서 점차 시카고학파의 신자유주의 논리가 중심이 됐다. 이때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으로 대표되는 시카고대 경제학파는 해외로 눈을 돌려 인재를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이른바 ‘시카고 보이스’(Chicago Boys)의 탄생은 이렇게 시작됐다.‘시카고 보이스’들이 유명해진 것은 칠레의 피노체트 쿠데타였다. 1973년 살바도르 아옌데의 좌파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칠레 군부는 ‘시카고 보이스’가 제공한 어젠다를 통해 과거의 권력 중심에 포진해 있던 엘리트 세력을 효과적으로 붕괴시킬 수 있었다. 칠레의 ‘시카고 보이스’들은 시카고 대학에서 공부한 경험과 경제 전문성을 무기로 국가개입의 축소, 민영화 등 급진적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을 실시하며 칠레 경제를 이끌었다. 이 책은 지식의 수출과 수입이 국가권력의 변동과 맺는 관계, 특히 중심부 국가의 지식이 주변부 국가의 권력구성에 끼치는 영향을 규명하고 있다. 미국 경제체제 확산전략인 ‘워싱턴 컨센서스’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라틴 국가의 엘리트들은 외환시장 개방, 시장자유화, 관세인하, 민영화 등을 골자로 하는 ‘워싱턴 컨센서스’를 충실히 받아들였다. 잘레이는 “라틴 아메리카의 ‘궁정전투’가 한국인들이 보기에 거리가 먼 주제일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국가전문성을 상징하는 법률엘리트와 경제엘리트 세력은 아시아 정치무대에서도 분명히 발견된다.”고 지적했다.528쪽,2만원.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도올 강의는 신학영역 침범”

    “한국 교회가 교단뿐만 아니라 진보·보수 진영으로 갈라진 채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 지탄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일부의 잘못으로 인해 한국 교회 전체가 비난받아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에 취임한 이용규(65·성남성결교회 담임) 목사는 20일 취임후 처음으로 기자들과 만나 “한국 교회에 대한 부정적 인식 청산에는 교회의 연합이 무엇보다 시급하며 임기중 한기총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교단장협의회를 아우르는 연합운동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취임소감을 밝혔다. “한국교회사의 큰 사건이었던 평양대부흥회 100주년에 더해 새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 중요한 해에 대표회장을 맡게 돼 막중한 책임을 느낍니다.” “평양대부흥회의 근본정신은 회개와 낮춤”이라고 거듭 강조한 이 목사는 “평양대부흥회의 정신을 되찾아 교회의 새모습을 찾는 한편 섬김의 리더십을 갖춘 새 지도자를 뽑는데 첨병 역할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특히 대선과 관련해선 “기독교 신앙과 관련된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지지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면서 “다만 헌법이 정한 기준 안에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세계속의 한국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후보 검증 차원에서 다양한 기독교 인사들이 참여하는 정책포럼을 5월중 열어 가이드라인을 정하겠다.”고 밝혔다. “새 시대의 리더가 갖춰야 할 가장 큰 덕목은 포용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연합만 하더라도 가장 어려운 것은 깊이 뿌리내린 판이한 정체성과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충분한 이해심과 겸허한 자세로 양보할 건 양보해야 합니다. 국민들에게 정말 필요한 나라의 새 지도자상을 알리기 위해 한기총이 나서겠다는 것입니다.” 최근 논란을 빚고 있는 김용옥 교수의 EBS 요한복음 강의와 관련해선 “성경에 대한 인식부족과 성서신학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몰이해의 발상”이라며 “대응할 만한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일축했다.“김용옥 교수가 동서양 철학을 꿰뚫고 있는 해박한 지식인이라 하더라도 계시로 말미암은 성경을 철학서로 분석하려는 시도는 신학의 영역을 침범한 교만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함께 배석한 최희범 한기총 총무는 “요한복음 강의 논란을 비롯해 최근 일련의 사태를 보면 마치 교회를 허물려는 모종의 음모처럼 느껴진다.”며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이용규 목사는 성결교신학교(현 성결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1973년 목사 안수를 받은 뒤 부용중앙성결교회 담임목사와 전주성결교회 부목사를 거쳐 지난 1979년 1월부터 성남성결교회 담임목사로 사목해 왔다. 총회 이단사이비특별대책위원장, 중부지역총회장, 교단 부총회장,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을 지냈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8) 중인들 필운대·육각현서 노닐다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8) 중인들 필운대·육각현서 노닐다

    인왕산의 네 구역 가운데 지난주에 소개한 안평대군의 무계정사가 인왕산의 왼쪽 기슭이라면, 필운대와 육각현은 오른쪽 기슭이다. 필운대는 현재 배화여자고등학교 안에 있다. 필운대 정자에서는 대원군 당시 핵심측근이었던 중인들이 시를 지으며 풍류를 즐겼다. ●권율과 이항복의 집이 필운대 인왕산의 다른 이름은 필운산(弼雲山)이다.1537년 3월에 명나라 사신 공용경(用卿)이 황태자의 탄생 소식을 알리려고 한양에 들어오자, 중종(中宗)이 그를 경복궁 경회루에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중종은 그 자리에서 북쪽에 솟은 백악산과 서쪽에 솟은 인왕산을 가리키면서 새로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손님에게 산이나 건물 이름을 새로 지어 달라는 것은 최고의 대접이었기 때문이다. 한양 주산의 이름을 새로 짓게 된 공용경은 도성을 북쪽에서 떠받치고 있는 백악산을 ‘공극산(拱極山)’이라 이름 지었으며, 경복궁 오른쪽에 있는 인왕산은 ‘필운산(弼雲山)’이라고 이름 지었다. 필운산이라고 이름 지은 까닭을 ‘우필운룡(右弼雲龍)’이라고 설명했다. 운룡(雲龍)은 임금의 상징이니 인왕산이 임금을 오른쪽에서 돕고 보살핀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왕산이나 북악(백악)이라는 이름이 조선 초부터 널리 알려져 있어 공용경이 지은 이름들은 별로 쓰이지 않았다. 명재상으로 알려진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이 살았던 집터에 ‘필운대’라는 이름으로 전할 뿐이다. 순조 때의 실학자인 유본예(柳本藝)는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 필운대를 이렇게 소개했다. (필운대는) 성안 인왕산 밑에 있다. 필운대 밑에 있는 도원수 권율(權慄)의 집이 오성부원군 이항복의 처갓집이므로, 그는 그곳에 살면서 스스로 별호를 필운(弼雲)이라고 하였다. 지금 바위벽에 새겨져 있는 ‘필운대(弼雲臺)’ 석자가 바로 오성부원군의 글씨라고 한다. 필운대 옆에 꽃나무를 많이 심어서, 성안 사람들이 봄날 꽃구경하는 곳으로는 먼저 여기를 꼽는다. 시중 사람들이 술병을 차고 와서 시를 짓느라고 날마다 모여든다. 흔히 여기서 짓는 시를 “필운대 풍월”이라고 한다. 필운대 옆에는 육각현(六角峴)이 있으니, 이곳도 역시 인왕산 기슭이다. 필운대와 함께 유명하다. 종로구 필운동 9번지에는 이항복의 글씨라는 ‘필운대(弼雲臺)’ 석자가 아직도 남아 있다. 지금도 필운대 바위 앞에 서면 경복궁과 백악산을 비롯한 서울의 모든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옆에는 1873년(고종 10년)에 이항복의 9대손인 이유원(李裕元·1814∼1888)이 찾아와 조상을 생각하며 지었던 한시가 새겨져 있다. 이 해는 최익현의 상소로 대원군이 물러나고 이유원이 영의정에 임명된 해인데, 날짜가 없다. 조상님 예전 사시던 곳에 후손이 찾아오니 푸른 소나무와 바위벽에 흰구름만 깊었구나. 백년의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유풍(遺風)은 가시지 않아 부로(父老)들의 차림새는 예나 지금이나 같아라. ●가객 박효관 영의정과 교류 그 옆 바위에는 가객 박효관(朴孝寬·1800∼1881무렵)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계유감동(癸酉監董)’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옆에 박효관을 비롯한 일행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이유원 일행과 함께 이곳에 와서 풍류를 즐기며 한시를 바위에 새기는 일을 돌봐주었던 듯하다. 위항의 가객이었던 박효관은 필운대에 운애산방(雲崖山房)을 마련해 노래 부르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유원도 시조에 관심이 깊어 당시 대표적인 시조 45수를 칠언절구의 한시로 번역했다.20종 이상의 시조집을 조사하여 45수를 뽑아내고 한시로 번역해 감상할 정도로 조예가 깊었으므로 위항의 가객들과도 친하게 지냈던 것이다. 그는 또한 악부(樂府)에도 관심이 많아, 칠언절구 100수의 연작시로 ‘해동악부(海東樂府)’도 지었다.(박효관의 운애산방을 중심으로 필운대에 모였던 가객들의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설명하기로 한다.) ●정선과 위항시인 칠송정서 풍류 인왕산에 오래 살았던 화가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은 인왕산을 여러 각도에서 여러 모습으로 그렸다. 그는 1676년 1월3일에 한성부 북부 순화방 유란동(幽蘭洞)에서 태어났다. 지금 종로구 청운동 경기상고 부근에 있던 동네이다. 그런 인연으로 젊은 시절에는 난곡(蘭谷)이라는 호를 썼다. 청운동 일대에는 장동 김씨들이 살았는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1629∼1689)의 아들 6형제가 다방면에 이름나 6창(昌)이라고 불렸다. 정선은 그 가운데 셋째인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2)에게 글을 배웠다. 김창흡은 성리학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 제자백가와 시문(詩文)·서화(書畵)에 달통한 학자였다. 정선이 7세였던 1682년에 북악산 남쪽에 낙송루(洛誦樓)를 짓고 글을 읽으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정선이 육각현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이 전하는데, 후배 조영석이 “농은당에서 육강현을 바라보았다.”고 썼다. 육강현은 육각현을 소리나는 대로 쓴 듯하고, 농은당은 김창흡의 형인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1651∼1708)의 집일 가능성이 있지만, 확인할 수 없다. 왼쪽에 크게 그려진 집이 바로 농은당이고, 언덕 너머 솔숲 사이의 큰 바위가 필운대, 그 너머 고개가 바로 육각현이다. 송석원시사 동인 박윤묵이 장혼의 집에 들렸다가 주인이 없어 육각현에 올라가 지은 칠언율시가 전한다. 육각현 위에 세운 칠송정(七松亭)이라는 정자가 바로 위항시인들의 모임터였다. ●중인, 대원군을 움직이다 칠송처사 정훈서의 소유였던 칠송정에는 송석원시사의 선배인 정내교(鄭來僑·1681∼1759) 때부터 위항시인들이 모여 시를 지었다. 한동안 버려져 폐허가 되었다가 1840년대에 위항시인 지석관이 수리하여 다시 옛모습을 찾았다. 박기열·조경식·김희령 등이 칠송정과 일섭원에 모였는데, 이 무렵에는 서원시사(西園詩社)라고 불렸다. 육각현 칠송정이 장안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대원군이 권력을 잡은 뒤부터이다. 대원군은 안동김씨를 비롯한 당시의 권력층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아전들에게 많은 권한을 주었으며, 수많은 중인 서리들이 그의 사조직으로 흡수되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천하장안’으로 불렸던 천희연·하정일·장순규·안필주 네 사람이었다. 개화파 지식인 박제경(朴齊絅)은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에서 그 실태를 이렇게 기록했다. 형조의 책임을 맡은 아전에는 오도영을, 호조의 책임을 맡은 아전에는 김완조와 김석준을, 병조에는 박봉래를, 이조에는 이계환을, 예조에는 장신영을, 의정부 팔도의 책임을 맡은 아전에는 윤광석을 뽑아서 맡겼다. 이들은 모두 대대로 아전 일을 보았던 집안의 후손들이어서 전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을 당하면 곧바로 판단하여 처리하였다. 대원군이 하나같이 그들의 말을 따랐다. 박제경은 대원군의 아전 정치를 비판적으로 기록했지만, 이 책에 평을 덧붙인 위항시인 차산(此山) 배전(裵琠)은 그들의 능력을 인정했다. 특히 이들 가운데 위항시인으로 이름난 여러 명의 행정능력을 이렇게 칭찬했다. 운현궁에서 신임하는 자들을 보면 모두가 민간의 기이한 재주꾼들이다. 윤광석·오도영·장신영 등은 글재주를 사랑할 만하고, 기억력도 놀랍게 총명하였다. 무리 가운데 뛰어나게 민첩하여, 사리를 훤하게 통달하였다. 이들 가운데 오도영과 장신영이 육각현 칠송정시사에 드나들며 시를 지었다. 경복궁을 중건하는 대사업을 벌이던 대원군은 위항시인들의 시사를 격려하기 위해 칠송정을 수리해 주었다. 대원군은 박효관·안민영 등 가객들과도 친해 함께 어울리며 풍류를 즐겼는데, 박효관이 위항시인들보다 더 총애를 받자 칠송정시사의 중심인물이었던 오횡묵(吳宖默·1834∼?)이 백운동에 집을 짓고 모임터를 옮겼다. 지금의 청운초등학교 뒷골목이 바로 백운동 골짜기였다. (정선이 인왕산에서 그린 그림들은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한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이승엽 홈런 올 50개 가능”

    “이승엽은 올 시즌 홈런 50개를 칠 수 있다.” 일본프로야구 통산 홈런 랭킹 7위(504개)인 장훈(56·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이 지난 15일 이승엽의 프리배팅을 본 뒤 내놓은 전망이다.이승엽은 이날 48차례의 스윙 가운데 3차례 담장을 넘겼다. 의식적으로 왼쪽으로 밀어쳤다. 이승엽의 올해 홈런 목표는 45개. 이에 이승엽은 “잘 되고 있습니다.”라며 자신감을 보였다고 일간 스포츠닛폰이 16일 보도했다. 장훈은 지난해 이승엽의 성적을 “최소 3할 타율에 40홈런”이라고 예측, 같은 한국인으로서 후한 평가라는 일부의 지적이 있었지만 적중했다. 이승엽이 타율 .323에 41홈런을 기록한 것. 장훈이 올해도 ‘족집게’ 실력을 발휘할지 또다른 관심거리다. 요미우리에서 한 시즌 50홈런을 달성한 선수는 오 사다하루(왕정치·1964년 55홈런,1973년 51홈런,1977년 50홈런)와 마쓰이 히데키(2002년 50홈런)뿐. 여전히 한국 국적을 갖고 있는 장훈은 통산 3085안타를 작성한 타격 달인.1976년 요미우리로 이적한 뒤 1979년까지 4번타자로 활약하다 롯데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해 이승엽과 공통점이 있다. 이승엽은 이날 자청해서 팀 청백전에 백팀 1루수 4번타자로 나와 실전 감각을 다졌다. 그러나 내야 땅볼 2개, 외야 뜬공 1개 등 3타수 무안타에 그쳤다.경기 중 지명타자로 교체되는 등 지난해 무릎수술로 인한 수비 부담감까지 드러냈다.스포츠닛폰은 또 삼성에 있을 때 대선배였던 김기태가 요미우리 육성군 코치로 합류해 이승엽이 분발할 수 있는 여건이 완벽하게 갖춰졌다고 전했다.김영중기자 jeunesse@seoul.co.kr
  • [월요영화] “日 지진 뒤 338일만에 침몰”

    ●일본침몰(MBC 오전10시25분) 1973년 처음 출간된 이후 일본인들을 공포에 떨게 한 소설 ‘일본침몰’은 같은해 영화로 만들어져 커다란 인기를 모았다. 그 후 33년 만에 리메이크되어 또한번 엄청난 흥행을 이끌어냈다. 일본 스루가만에서 강도 10을 넘는 엄청난 파괴력의 대지진이 발생한다. 이어 도쿄, 규슈 등 전역에서 지진이 발생해 일본 전역은 공포에 휩싸인다. 미국 지질학회는 이것이 일본의 지각 아래 있는 태평양 플레이트가 상부맨틀과 하부맨틀의 경계 면에 급속하게 끼여 들어 발생하는 이상현상으로 판단, 일본열도가 40년 안에 침몰하게 될 것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한다. 그러나 미국의 가설에 의문을 품은 지구과학박사 타도코로는 독자적으로 조사를 실시, 일본이 338일 후에 침몰한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 김경숙 의문사 28년만에 풀릴까

    부마항쟁의 도화선이 된 1979년 ‘YH 여공’사태를 기억하십니까.여공 김경숙씨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28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18일 오후 11시5분 YTN의 민주화 20주년 특별기획 ‘진실-YH 여공 김경숙, 그리고 우리들의 누이편’은 지나간 역사의 진실을 파헤친다. YTN은 아픈 우리의 역사를 김경숙이란 인물에 초점을 맞춰 풀어간다.1973년 김경숙은 남동생을 공부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상경해 이른바 ‘공순이’가 된다. 소규모 하청업체 세 군데를 전전하던 그녀는 1976년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에 입사한다. 철야와 잔업을 마다않고 고향에 송금하는 것을 보람으로 알던 그녀는 서서히 노동자 현실에 눈을 뜨고 1978년 YH 노동조합 대의원에 선출된다.1979년 8월, 회사는 폐업을 통보하고, 신민당사에서는 회사 정상화를 요구하는 YH 여공들의 농성이 벌어진다. 1000여명의 경찰병력이 투입된 진압과정에서 김경숙은 시신으로 발견된다.21살, 그녀의 죽음은 개인적인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신민당 농성,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부마 민주항쟁,10·26사태로 이어져 유신시대의 종말을 앞당긴 기폭제가 됐다. 1979년 8월, 경찰은 김경숙의 죽음에 대해 ‘경찰 진입 전 투신자살’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가족이나 그녀와 함께 농성장을 지켰던 동료들 가운데 그녀가 자살했다고 믿는 이는 없다. 그렇게 30년이 다 되도록 김경숙의 죽음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제작진은 취재기간 중 경찰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책을 입수,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밝힌다.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7개 항목만 공개해선 싼지 비싼지 조차 알수없어”

    “7개 항목만 공개해선 싼지 비싼지 조차 알수없어”

    1·11 부동산대책은 미완성의 정책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실효성을 거두려면 보완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7개 항목의 원가공개는 허점 투성이다. 서울대 김용창 교수는 “사실상 공개가 아니다.”면서 “폭리구조가 드러나도록 정보를 공개한다는 데 의미가 있는데, 이런 시스템으로는 원가를 공개해도 검증을 못한다.”고 지적했다. ■ ‘미완의 정책’ 한계 및 대안 세종대 부동산경영학과 변창흠 교수도 “핵심은 비교와 검증이 가능해야 한다는 점인데, 공개를 해도 그 가격이 비싼 건지, 싼 건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며 “이번 대책이 업계에 자율성을 주는 선에서 절충돼 있다.”고 꼬집었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원가공개를 하더라도 대형건설사는 느긋하다.”고 업계 분위기를 전했다. ●검증 불가한 원가공개 1·11대책에 따라 민간이 공개하게 되는 7개 항목은 공공기관이 공개하는 61개 항목을 7개의 광주리에 담아놓는 식이다. 까닭에 공개 내역이 두루뭉술해지는 데다, 공공과 민간이 다른 기준으로 원가를 공개하는 탓에 비교·검증이 불가능하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윤순철 국장은 “감리자 모집 단계에서 이미 민간의 58개 항목별 공사비가 공개되는 마당에 구체적 공개를 피하는 이유가 뭐냐.”며 “정말 원가공개 의지가 있는 건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정부가 민간에까지 확대한 원가공개 내역은 택지비, 직접공사비, 간접공사비, 설계비, 감리비, 부대비, 가산비 등 7개 항목이다. 전면공개를 해야 한다는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불명확한 공개기준 항목별로 살펴보면 택지비 문제가 첫 손에 꼽힌다.1·11대책에서는 감정평가액을 택지원가로 인정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감정가로는 택지비에 포함된 거품을 걷어낼 수 없고, 투명성도 확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윤순철 국장은 “감정가는 주변시세가 반영된 가격”이라며 “민원처리비, 리스크(위험) 비용 등에다 미래가치까지 포함돼 있어 실제 매입원가와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했다. 감정가는 토지 매입비보다 높기 마련이어서 원가로 볼 수 없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10년 전 평당 10만원에 사뒀던 땅이 평당 100만원으로 올랐을 경우 감정가는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정해지게 된다. 원가는 10배로 부풀려지게 마련이다. 감정가의 신뢰성 문제도 제기된다. 변창흠 교수는 “감정가는 감정평가사의 시각에 따라 결정된다고 해도 무리가 아닌데, 문제는 사업주가 감평사를 지정하는 과정에서 사업주의 입김이 반영된다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사업주가 원하는 대로 감정가가 높게 책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끊이지 않는 토지 감정 비리 사건은 이같은 우려를 더하는 대목이다. 둘째로 직접공사비, 간접공사비, 설계비, 감리비, 부대비 등 5개 항목으로 구성되는 기본형건축비의 문제도 지적된다. 대한전문건설협회 이석우 조사부장은 “하도급을 주는 과정에서 원가가 뻥튀기 되는데, 땅 파는 토공사에 실제 40억원이 든다면 200억원이 들었다고 원가를 매기는 식”이라며 “공사비 부풀리기는 100% 다 한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세부 공정에서도 이렇게 부풀리기가 만연되고 있는데, 수십개나 되는 공사 항목을 큰 묶음으로 모으게 되면 거품이 낄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셋째로 가산비 내용도 불분명하다. 가산비는 체육시설이나 도서관 등 아파트 주민을 위한 편의시설 비용이다. 대한주택건설협회 관계자는 “호화롭게 짓는다고 하면 얼마든지 가산비도 부풀릴 수 있다. 브랜드 가치 차이를 누가 검증할 수 있겠냐.”고 우려했다. ●심사위 활동이 관건 결국 1·11 대책의 성공 여부는 이런 허점들을 어떻게 보완하느냐에 달렸다. 서울시립대 서순탁 교수는 “원가 공개 내역을 검증할 분양가심사위원회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면서 “지자체별로 구성하는 심사위에서 전문성과 공정성을 바탕으로 제대로 허실을 가려내느냐가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김용창 교수는 “단순히 분양원가를 검증만 한다는 건지, 분양승인도 거부하는 효력까지 부여할 것인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정부 정책의 불분명한 점을 지적했다. 경실련 정책위원장을 맡고 있는 경원대 홍종학 교수는 “1·11대책의 허점은 많지만 그래도 기본형건축비를 크게 낮추면 원가의 거품을 뺄 수 있을 것”이라며 기본형건축비 재조정을 촉구했다. 현행 기본형건축비는 중소형 기준 344만원으로 터무니없이 높아 적정수준으로 낮춰야 한다는 지적이다. 홍 교수는 또 원가인하에 따른 부실시공 가능성에 대해 “감리가 바로 서면 해결된다.”고 했다. 감리회사가 건설사의 하수인 비슷하게 돼 있는 현행 구조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얘기다. 감정가에 대해서 우리은행 이성규 부부장은 “택지를 매입했던 시점의 감정가냐, 아니면 분양이 이뤄지기까지 금융비용이 포함된 감정가냐에 따라 그 차이가 엄청나다.”면서 “현재로선 기준이 없어 문제”라고 지적했다. 공정성을 위해 감정평가사 선정 과정도 투명해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 부동산시장 기상도 1·11 부동산 대책에 이어 1·31 대책이 잇따라 나오면서 집값이 잡힐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부동산 시장이 연착륙을 할지, 경착륙을 할지를 놓고 의견이 엇갈린다. 급매물이 나와도 거래가 뜸하고, 사려는 사람도 팔려는 사람도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부동산시장 급랭기류가 당분간은 지속되겠지만, 상승 가능성이 항상 잠재해 있다고 지적한다. 국민은행 PB사업부 박합수 부동산팀장은 “상반기는 분양가 및 대출규제 등으로 주택가격이 더 오르지 않고, 하반기에는 강보합세가 예상된다.”면서 “투기 심리를 어떻게 잠재우느냐가 중요한데, 이번 대책도 별 게 아닌 것으로 판명나면 곧바로 가격이 상승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 관계자는 “분양원가 공개 및 분양가 인하를 중심으로 한 공급확대 정책 등으로 광풍은 잦아들 것”이라면서도 “연말 대통령선거에 따른 규제 완화 기대감은 여전할 것으로 보인다.”고 예측했다. 거래 급감 현상은 곧 해결되겠지만, 가격 급등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많다. 고종완 RE멤버스 대표는 “설이 지나면 실수요자 위주로 거래가 좀 살아날 것”이라면서도 “거래의 절대량이 크게 증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부동산 가격이 다시 강세로 전환되더라도 급등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임대주택 공급확대를 핵심 내용으로 한 1·31대책으로 장기적으로 중소형의 가격은 하향 안정세가 지속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부동산 114 김희선 전무는 “중장기적으로 정부의 부동산대책 발표 내용이 일관적으로 추진된다면 중소형의 시장가격이 훨씬 더 안정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청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등 준비수요는 늘어나겠지만, 당장 무리하게 집을 구매하겠다는 사람이 늘어나거나 시장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내집마련정보사 김영진 사장은 “임대주택이 늘어나면 민영아파트 건축이 줄게 되는데, 그러면 어차피 집을 한 채 사는 입장에서 더 좋고 큰 아파트를 찾게 된다.”면서 “30평 이상 중대형 평형은 수요·공급의 원리에 의해 5∼6월쯤 가격 반전이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 되짚어 본 부동산정책 정부의 아파트 분양가격 정책은 경제사정과 맞물려 규제와 자율화를 되풀이하면서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8일 재정경제부, 건설교통부 등 관계부처에 따르면 1963년 공영주택법에서 공영주택의 입주금과 임대료를 건설원가에 연계해 결정하도록 하면서 정부의 가격통제가 시작됐다.1973년에는 가격통제 대상이 민영주택으로 확대됐다. 1977년에는 주택규모나 공영·민영에 관계없이 정부가 획일적으로 가격을 정해주는 강력한 분양가 상한제가 도입됐다. 국민들이 분양대금을 미리 내는 선분양 제도를 일반화시켜 집값을 확실한 정부 통제 하에 두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정부의 부동산대책은 1989년에 원가연동제로 완화됐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부터는 국민주택기금의 지원을 받는 18평 이하 소형주택을 제외한 모든 주택에 분양가 자율화가 실시됐다. 시민단체들은 “선분양으로 인해 파생된 모든 규제를 철폐했다면 당연히 후분양으로 선회해야 했다.”고 지적한다.‘선분양-상한제’,‘후분양-가격자율화’가 시장원리에 맞다는 주장이다. 경실련 아파트거품빼기운동본부 김헌동 본부장은 “정부는 그동안 선분양에다 분양가 자율화는 물론 국가가 강제로 수용한 택지를 헐값에 민간업체에 넘기고, 분양가를 부풀려 신청해도 아무런 통제 없이 승인해 줬으며, 미분양 대책까지 세워줬다.”면서 “공급자가 리스크(위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완벽한 공급자 중심의 시장이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1982년부터 18년간 대형 건설업체에 몸담았던 부동산 전문가다. 분양가 자율화 이후 신규 아파트의 분양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기존 아파트의 가격까지 끌어 올리자 참여정부는 집값을 잡기 위한 대책을 잇따라 내놓았다.2005년 3월에 공공택지의 공공주택을 대상으로 원가연동방식의 상한제를 적용하기 시작했다가 이번에 민영아파트까지 대상을 넓힌 것이다. 민간의 자율에 맡겼던 분양가격을 정부의 통제에 두겠다는 얘기다. 하지만 경실련,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는 정부의 이번 대책을 놓고 “건설업체의 폭리를 합법화시킨 ‘무늬만 원가공개’”라고 비난한다. 반면 건설업계는 “원가를 공개하고, 가격을 통제받는 제품이 어디 있느냐.”며 반(反)시장적 정책이라고 반발한다. 이번 대책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된 중소건설업체들의 모임인 대한주택건설협회는 1·11 대책 발표 직후 “주택사업에서 손을 떼겠다.”고 반발했다. 대형업체의 모임인 한국주택협회도 “민간주택 분양원가 공개를 입법화하면 헌법소원을 낼 것”이라고 밝혔다. ■ ‘부동산 정책’ 이런 점은 걱정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자칫 건설경기 위축과 아파트 공급 축소, 부실시공을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민간 건설업체들은 “1·11 부동산 대책이 시행되면 결국 건설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면서 “공급이 축소돼 가격이 급등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익이 적어지면 값싼 건설자재를 쓸 수밖에 없어 아파트의 품질이 하향 평준화될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소비자만 골탕을 먹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 관계자는 “전국의 주택보급률은 평균 105.9%에 이르지만 수도권은 90%대에 머물러 주택수요가 여전히 많다.”면서 “원가공개와 분양가 상한제로 수익이 줄어들면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함으로써 이윤을 창출한다.’는 기업의 시장원리가 작동하지 않아 적재적소의 공급이 이뤄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은행 김일수 부동산팀장은 “수도권에서는 대기수요가 너무 많은 반면 공급은 턱없이 부족하다.”면서 “정부의 신도시 계획과 공공주택 확대 계획은 몇년 내에 이뤄지기 어려워 결국 부동산 가격이 다시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경일감정평가법인 관계자는 “원가공개로 일단 분양가는 낮아질 것”이라면서도 “사업을 발주하는 시행사들의 이익이 불투명해지면 개발을 추진하려는 시행사가 급격하게 줄어들 수 있다.”고 말했다. 대한주택건설협회 관계자는 “건설업체들은 값싼 중국산 자재를 쓰고 비숙련공을 고용하는 방법으로 원가를 맞출 수 있고, 결국 아파트 품질만 떨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경원대 홍종학 교수는 “현재의 주택수요 중에는 투기적 가수요가 많다.”면서 “부동산 개발은 전세계적으로 대표적인 고위험 고수익 사업인데 유독 한국에서만 짓기만 하면 ‘대박’이 터지는 저위험 고수익 구조가 형성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1990년대에 1000개도 안 되던 건설사가 1만 3000개로 급증한 사실은 그동안 건설사들이 얼마나 폭리를 취했는 지를 반영하는 것”이라면서 “건설업계의 폭리를 위해 소비자들이 계속 피해를 볼 수는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경실련 윤순철 시민감시국장은 “소비자가 공개된 원가에 대해 법적으로 문제삼지 못하게 한 것과, 강제수용으로 이뤄지는 공공택지개발에 민간업체의 참여를 허용한 것은 오히려 민간업체에 대한 특혜”라고 지적했다. 정부의 부동산 대책에 대한 업계의 주장이 일방적인 하소연과 으름장만은 아닌 듯하다. 부동산 정책을 맡고 있는 정부 당국자도 “공급위축 위험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면서 “아파트 공급위축은 바람직스럽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심사위원간 가격깎기 경쟁이 빚어질 수도 있고, 이는 공급을 늦추고 결국은 원가를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경제부처 한 국장은 “부동산에 거품이 없다는 박병원 전 재정경제부 차관의 발언은 집값 거품붕괴로 이어져서는 안된다는 경제정책 당국의 바람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원가공개에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여왔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기획탐사부 이창구 강혜승 유지혜 박지윤기자 tamsa@seoul.co.kr ●기획탐사에 대한 독자 여러분들의 제보를 받습니다. (02)2000-9261∼9263 또는 tamsa@soeul.co.kr
  • 폐목에 꽃을 피우다

    폐목에 꽃을 피우다

    “취미가 직업이 됐으니 정말 행복합니다.” 서울 노원구에서 ‘나무 마술사’로 불리는 노원구립 노원 목공예센터 하종연(55) 소장의 이야기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인 7일 오후 불암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노원 목공예센터에서 그를 만났다. “저 나무로 무엇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하 소장이 공예센터 마당에 버려진 듯 놓여 있는 작은 나무뿌리를 가리키며 던진 말이다.“글쎄요….” 기자가 머뭇거리자 그는 “오리로 만들지 강아지로 만들지 생각 중이다.”며 환하게 웃었다. 그의 손을 거치면 나무는 의자가 되고 뿌리는 용의 머리가 된다. 버려진 나무는 새 생명을 받아 부활한다. 늘그막에 나무에서 삶의 보람을 찾았지만 그의 삶은 그의 이마에 난 주름만큼이나 굴곡이 많았다. 그는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굴지의 건설업체 직원이었다. 경북대학교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후 1973년 현대건설 중기부에 입사해 20여년간 국내외 건설현장을 누볐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1995년 회사를 그만두고 친구와 창업을 하면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1∼2년은 잘나갔지만 1997년 말 외환위기(IMF)가 닥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2억여원의 빚만 떠안고 빈털터리가 됐다. 그래도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생각에 가족과 주변의 도움으로 또 다른 사업을 시작했다. 이번에도 1억 5000만원의 빚만 떠안은 채 사글셋방으로 나앉았다. 화병이 나 산과 들을 찾았다. 그때 주로 찾은 산이 우면산. 산은 그에게 희망을 안겨줬다. 베어 낸 나무가 방치된 것을 보고 활용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마침 서초구가 상용직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구청을 찾아가 버려진 나무의 재활용 방안을 제시해 서초구청 목공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남달랐던 손재주가 발휘된다. 그는 놀이시설이 없던 초등학교 시절 고향 합천에서 친구들의 팽이, 눈썰매, 활 등을 도맡아 만들어 줬다. 현대건설 시절 취미삼아 목공부에서 어깨너머로 10여년 동안 기술을 배운 것도 보탬이 됐다. 그는 폐목으로 벤치 등을 만들어 버스정류장 등에 무료로 제공했다. 반응이 좋았다. 그 과정에서 일을 배우기 위해 대목장을 찾아다니고, 목공 관련 책도 읽었다. 의자를 만들던 수준에서 목공예 전문가 수준으로 올라섰다. 하 소장은 지난해 5월 노원구로 옮겨왔다.7월에는 손수 불암산 밑에 터를 닦고 목공예센터를 열었다. 수락산과 불암산 등에서 나오는 폐목 등으로 중계동 화인아파트 단지에 무료로 정자를 만들어 제공했다. 나무 의자와 벤치 공예품 등 200여품목을 만들어 노원구청과 어린이집 등에 주었다. 요즘 그의 희망은 목공예센터에서 어린이나 주민들을 대상으로 강좌를 여는 것이다. 노원구는 오는 5월 목공예센터에서 만든 작품들을 모아 시청 앞 광장에서 전시회도 가질 계획이다. 하 소장은 “하고 싶은 일을 해서 좋겠다.”는 말에 뭐라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완전히’ 만족합니다.”라는 말로 대신했다. 그는 소장으로 불리지만 아직 노원구청 정식 직원이 아니다. 이노근 구청장은 최근 그를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한편 노원 목공예센터는 산림간벌 등에서 나오는 폐목을 재활용하기 위해 설립됐다. 그동안 폐목 처리비용만 연간 3000여만원이 들어갔다. 하지만 지금은 목공예센터가 다른 구청의 폐목을 돈을 받고 처리해 준다. 또 폐목으로 구청의 벤치나 의자, 책꽂이 등 200여품목,8000만원 상당의 목공예품을 만들어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 [종교플러스] 8일 ‘생명을 위한 미사’ 봉헌

    천주교 주교회의 생명31 운동본부(위원장 김지석 주교)는 8일 오후 6시 서울 명동성당에서 ‘생명을 위한 미사’를 봉헌한다. 이날 미사는 1973년 모자보건법 제정 이후 지속된 낙태와 생명조작, 사형, 전쟁 등 죽음의 문화를 청산하고 생명에 대한 의식과 행동을 바로잡기 위한 범 천주교 캠페인인 ‘생명31’운동을 널리 알리기 위한 행사다.
  • [박성서의 가요X파일](2)‘산너머 남촌에는’의 박재란

    [박성서의 가요X파일](2)‘산너머 남촌에는’의 박재란

    ‘삼천만의 연인’이었던 ‘꾀꼬리가수’ 박재란씨는 빼어난 외모만큼이나 당시 옴니버스 음반들의 커버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데뷔 때부터 전성기였던 196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음반 재킷을 장식했던 가수가 바로 박재란씨로 필자가 확인한 것만도 무려 100여종. 아울러 스크린에도 진출,1959년 박종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손석우씨가 주제가를 맡은 영화 ‘비오는 날의 오후 세시’에서는 미남, 미성의 가수 손시향씨와 함께 특별 출연해 주제가와 함께 연기를 선보였고 이어 1961년, 영화 ‘천생연분(박성호 감독)’에서는 타이틀 롤을 맡아 열연했다. 또한 1962년 발표된 히트곡 ‘님’은 가사 중 ‘창살 없는 감옥’이라는 단어를 타이틀로 이듬해 영화로까지 제작되었다. 아울러 이 노래 ‘님’은 2001년, 작사가 차경철씨 출생지인 울산의 대운산 입구에 노래비까지 건립됐다. 방송과 영화, 취입과 공연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시절, 전국을 누비던 ‘박재란 쇼’는 언제나 몰려드는 관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무리한 일정으로 인해 폐가 나빠져 약으로 버티면서도 하루에 무려 30곡이나 되는 노래 연습과 취입을 해야 했어요. 젊었을 때니까 가능했던 일이었겠지만 무엇보다 대중들의 환호가 가장 큰 힘이었지요.” 무대에서 생긴 병은 다음 무대에서 치유되었을 정도로 그에게서 노래는 어려움을 이겨낸 치료제이자 면역력을 키워준 힘이었다.‘대중들 앞에서의 삶’이 전부였던 그에게도 비로소 ‘자신만의 인생’이 펼쳐진다.1959년, 영화주제가 ‘장마루촌의 이발사’를 연습하기 위해 작곡가 김광수씨 집에 갔다가 운명처럼 남편 박운양씨를 만난 것. 동갑내기이자 당시 성균관대생이었던 박운양씨는 작곡가 겸 연주인 김광수씨가 출연하는 ‘무학성 카바레’의 단골로 서로 의형제를 맺은 사이. 그와의 사랑이 시작되면서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찾아왔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바로 1989년 ‘한번만 더’로 사랑받았던 가수 박성신씨다. 아울러 남편이 영화제작에 손을 댔다가 결국 사기를 당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이 시작된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함께 쇼 단체를 만들어 전국 공연에 나서기도 했지만 세상일을 모르고 살았던 이들에게 결코 만만치 않았다. 결국 100평 남짓하던 서울 후암동 2층집에서 용산 단층집으로, 또 갈현동 전셋집으로 전락하며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갔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부간의 불화로 인해 결국 이혼을 택한 뒤 1973년 혼자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LA에 도착한 그는 나이트클럽 ‘타이거’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재기에 안간힘을 썼다. 동시에 한국을 오가며 음반을 발표하며 방송에도 종종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 무렵 미국 시민권을 가진 연예인들이 이따금씩 귀국해 활동하는 것에 대해 ‘국고를 해외로 빼돌린다.’는 투서사건이 발생, 국내 활동이 일체 중단되자 그 역시도 점차 대중들로부터 잊혀져 갔다. 더구나 1979년, 아파트 화재로 모든 걸 잃는다. 밑바닥까지 내려간 그의 생활은 재기에 집착할수록 오히려 그 집념이 병이 되어 심장과 신장에 이상이 오는가 싶더니 급기야는 악성 위궤양으로 발전, 음식물을 삼킬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유년시절 숱한 잔병치레를 통해 강한 면역력을 키운 동시에 어려웠던 시대를 향해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던 가수 박재란. 이제 그는 스스로 ‘긍정적으로 대할수록 긍정적으로 되는’, 이른바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를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듯 여겨졌다. 너나없이 어려운 시절이었기에 오히려 밝은 모습으로 대중들 앞에 나섰던 그, 스스로의 ‘피그말리온 효과’는 지금에 와서 새삼 그를 지탱해주는 에너지이다. 현재는 선교활동을 통해 ‘노래하는 전도사’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대중음악평론가 sachilo@empal.com
  • [씨줄날줄] 하노이 제인/함혜리 논설위원

    1972년의 미국은 베트남전 반대시위로 하루도 잠잠한 날이 없었다. 반전뉴스에서 빠지지 않는 인물 중 한명이 할리우드의 반체제 스타 제인 폰다였다. 폰다는 그해 2월 개최된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청중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오늘은 안 하겠다.”라고 말하고는 퇴장해 버렸다. 폰다는 같은 해 7월 미국정부의 거듭된 만류를 무릅쓰고 공산 베트남의 본거지인 하노이에 들어가 적극적인 반전운동을 펼쳤다. 하노이에서 베트남 전통 복장 차림으로, 베트남군의 대공포앞에서 반전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부르는 폰다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하노이에서 행한 반전 활동으로 그녀는 논란의 한복판에 섰다. 반역자라는 비난 속에서 그녀에게는 ‘하노이 제인’이란 닉네임이 붙었다. 명배우 헨리 폰다의 딸이며 피터 폰다의 누나인 제인 폰다는 좌파 자유주의자로 60년대말∼70년대 초 인종차별 철폐와 반전, 여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초기의 통속적인 영화와 달리 전성기에 출연한 인형의 집(1973년), 줄리아(1977년), 귀향(1978년) 등은 좌파 자유주의자인 그녀의 성향을 대변해 주는 영화들이다. 연기 활동 외에도 80년대에는 에어로빅 운동법을 전파하며 건강한 미국의 중년을 상징하는가 하면 미디어 재벌 테드 터너와의 재혼과 이혼 등으로 꾸준히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녀가 어느덧 고희를 맞았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하노이 제인’이 34년만에 다시 반전운동의 선봉에 나섰다는 소식이다. 폰다는 지난 27일 워싱턴 내셔널몰에서 열린 대규모 이라크 반전 시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폰다는 “나에 대한 거짓된 이야기들을 우려해 지난 34년간 반전집회에서의 연설을 삼갔지만 이제 침묵은 더 이상 선택사항이 아니다.”면서 “베트남전 철군 결정을 내리는 데 6년이 걸렸다. 이라크전은 3년이면 충분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올 연말이면 만 70세가 되는 할머니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함과 아름다움을 간직한 폰다. 그녀는 여전히 멋졌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의사들의 ‘딴죽’

    의사들의 ‘딴죽’

    34년 만에 추진되고 있는 의료법 개정 작업이 막판에 극심한 진통을 겪고 있다. 정부와 보건의료계·시민단체 등이 6개월간 합의해 만든 법 개정안을 대한의사협회가 ‘수용 불가’로 틀어버린 탓이다. 이 때문에 29일로 예정됐던 법 개정안 공식 발표가 1주일 이상 연기됐다. 보건복지부는 당초 오후 2시30분 과천정부청사에서 보건의료단체장 등과 함께 ‘의료법 개정 추진 공동발표회’를 열려고 했다. ●당일 아침에 개정안 발표 연기 그러나 의사협회가 참석을 거부하고 별도 기자회견을 통해 정부안의 문제점을 적시하겠다고 밝히면서 일이 꼬였다. 이미 지난주 의사협회는 실무협상 대표까지 철수시킨 상황이었다. 대립이 격화되자 의사협회와 한의사협회, 치과협회 회장이 이날 오전 7시 유시민 복지부 장관을 만났다. 이들은 “의사협회와 추가 협상을 가진 뒤 공식 발표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뜻을 유 장관에게 전달, 일단 연기하는 쪽으로 결정됐다. 정부와 의사협회는 7∼8명으로 협상대표단을 구성, 곧바로 절충에 들어가기로 했다. 복지부는 “일부 쟁점에 대해 다시 한번 협의해 다음주 공동 발표회를 갖기로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의료행위 범위 등 10여개 항목 이견 의사협회는 의료행위의 개념, 표준진료지침 제정, 유사의료행위 인정 등 10여가지 항목에 대해 반발하고 있다. 맨 처음 1조부터 잘못됐다는 게 의사협회의 주장이다. 의료법의 목적을 기존 ‘국민의료에 관한 사항’에서 ‘의료인·의료기관 등에 필요한 사항’으로 한정함으로써 의료법의 위상을 격하시켰다는 것이다. 표준진료지침 제정과 관련해서는 “의료는 규격화할 성질의 것이 아닐 뿐더러 표준지침을 평가의 잣대로 활용할 경우 의료계는 자율성이 크게 훼손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난해 8월부터 복지부, 보건의료단체, 시민단체, 전문가 등이 참여한 실무작업반에서 마련한 개정안에 혼자서 거부의사를 밝힌 데 대해 지나치게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비난이 일고 있다. 또 반발하는 내용의 상당수가 다른 직역에 맞서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의료행위의 개념에 ‘투약’을 반드시 포함시키라고 하는 것은 약사들에게 밥그릇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것이고 간호사 업무에서 ‘진단’관련 부분을 빼라는 것, 유사 의료행위를 인정하면 안된다는 것도 비슷한 이유로 분석된다. 이에 대해 장동익 의협회장은 “의료법 개정안은 한번 제정하면 장기간 변동이 없는 것인데, 시간에 쫓겨 졸속으로 하면 결국 그 피해가 국민들에게 돌아간다.”고 말했다. 최종안에 의사협회의 요구가 반영될지는 미지수다. 복지부 관계자는 “추가논의 과정에서 합리적인 대안이 나오면 검토해 볼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다른 관계자는 “이미 수용 가능한 의사협회의 요구는 모두 들어준 상태이기 때문에 특별히 바뀔 것은 없다.”고 단언했다. 김태균기자 windsea@seoul.co.kr ●의료법 적정한 의료서비스를 유도해 국민건강을 보호·증진한다는 뜻에서 1951년 9월 ‘국민의료법’으로 제정됐으며 1973년 2월 ‘의료법´으로 바뀌었다. 이후 전면개정 없이 사안이 있을 때마다 28차례에 걸쳐 고쳐져 대표적인 누더기법으로 통한다. 의료계의 이해관계 등이 얽혀 좀체 손대기 힘들다는 뜻에서 ‘의료헌법’으로 불리기도 한다.
  • [인혁당 재건위 무죄판결]인혁당 재건위 사건 이란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은 발생 시기에 따라 1·2차로 나뉜다.2차 인혁당 사건은 ‘인혁당 재건위원회(재건위)’ 사건으로도 불린다.“1964년 인민혁명당이 북괴의 지령을 받아 국가 변란을 획책했다.”는 당시 중앙정보부의 발표가 1차 인혁당 사건이다. 연루자들은 대법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로부터 10여년 뒤인 1974년 4월 중정은 또다시 ‘인혁당 재건위’조직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의 배후에서 학생 시위를 조정하고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2차 인혁당 사건이다. 2차 인혁당 사건의 도화선은 1973년 서울대 학생들의 유신 반대 시위를 계기로 ‘반(反)유신 운동’이 격화된 상황에서 민청학련 명의의 유인물이 배포돼 다음해 4월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되면서부터다. 긴급조치 4호는 반유신 학생운동의 주도 세력을 겨냥한 것으로 긴급조치에 따라 설치된 비상군법회의는 민청학련 주동자들이 1969년 이래 남한에서 지하조직으로 암약한 인혁당과 연계를 맺어왔고 공산혁명을 기도했다며 다수의 학생들을 구속했다. 구속된 도예종씨 등 8명은 대통령긴급조치 및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등의 혐의로 기소돼 1975년 4월8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됐으며,18시간여 만인 다음날(4월9일)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됐다. 인혁당 사건이 유신정권의 조작이라는 의혹은 끊임없이 제기됐다. 하지만 이같은 의혹이 공식화된 것은 2002년 9월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인혁당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이라는 조사 결과와 함께 인혁당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면서부터다. 의문사위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유족들은 같은 해 12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또 2005년 12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도 자체 조사를 벌여 인혁당과 민청학련 사건이 고문과 조작으로 날조된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이어 지난해 1월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인혁당 사건이 수사당국의 가혹한 고문에 의해 조작됐고, 이 사건 관련자들의 행위가 민주헌정질서 회복을 위한 민주화운동이라고 판단해 관련자 16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고 발표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30년만에 명예회복’ 했지만…

    유신정권에 밉보여 한국에서 교수생활을 접어야 했던 한 교수가 30년 만에 명예를 회복했다. 하지만 세월은 야속하게도 기다려 주지 않아 더 이상 강단에 복귀할 수 없게 됐다. 서울행정법원 행정5부(부장 김의환)는 22일 박정희 정권 때 경제개발정책을 비판하는 논문과 당시 중·고교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다 재임용이 거부된 차모(72)씨에 대해 해당 D대학이 낸 교원징계재심사결정처분 취소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했다고 밝혔다. 서울대 생물학과를 졸업한 차씨는 서울 D대학 시간강사를 거쳐 1973년 부교수로 승진 임용됐다. 그러나 박사후 과정으로 휴직중이던 76년 ‘재임용 탈락’통보를 받았다. 연구실적도 뛰어났고 교내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정부정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문제였다. 그는 연구논문, 저서에서 유신정권의 경제정책에 따른 환경오염의 폐해를 다뤘다.또 73년에는 현직 중·고교 교사들을 상대로 한 강의에서 교과서의 문제점 등을 지적했다. 그의 지적은 기사화되면서 당시 문교부는 대학 총장에게 항의했고, 차씨는 총장에게 꾸중을 듣기도 했다.차씨는 05년 7월 ‘대학교원 기간임용제 탈락자 구제를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자 재임용이 거부된 지 29년 만에 교육부 교원소청심사특별위원회에 재임용거부처분에 대한 심사를 청구했다. 심사특별위는 “차씨가 정권의 미움을 사 부당하게 재임용이 거부됐다.”며 차씨의 손을 들어줬지만 대학은 이에 불복해 소송을 냈다. 그동안 미국 LA에서 연구원을 하던 차씨는 이날 판결에도 불구하고 이미 대학교수 정년이 지나 임용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차씨는 해당 대학을 상대로 피해보상 청구를 법원에 낼 계획으로 알려졌다.임광욱기자 limi@seoul.co.kr
  • 대한항공, 정부와 ‘파리노선’ 갈등

    대한항공이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오는 23∼24일 이틀간 과천에서 열릴 한·프랑스 항공회담과 관련해서다. 총대는 이종희 대한항공 총괄사장이 멨다. 이 사장은 17일 예정에 없던 기자회견을 통해 “유럽연합(EU) 공동체 조항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U공동체 조항은 파리노선 복수제 대가로 프랑스 정부가 우리 정부에 요구하는 사안이다.EU는 한 국가나 마찬가지인 만큼 EU 국가의 항공사는 모두 인천에 들어올 수 있게 해달라는 게 EU측의 요구다. 이렇게 되면 항공회담은 프랑스 정부와 하지만 독일, 네덜란드 등 EU 내 다른 항공사도 인천 취항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복수제와 공급력 확대라는 입장을 갖고 있는 건설교통부는 이번 회담에서 EU공동체 조항을 피하기가 쉽지 않다. 이와 관련, 이 사장은 “건교부가 EU공동체 조항을 수용하려는 것은 확인됐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 “EU공동체 조항은 한마디로 불평등한 조항”이라고 주장했다. 이 조항을 수용할 경우 한국은 현재의 대한항공외에 아시아나항공이 파리노선만 들어갈 수 있지만 EU 27개 국가는 모두 인천에 들어올 수 있어 EU 국가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내용이라는 게 대한항공측의 얘기다. 그는 “EU공동체 조항은 현행 항공법에도 위배된다.”면서 “국익을 위해 전략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협상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한항공이 건교부와 대립각을 세우는 것은 정부가 EU공동체 조항을 수용할 경우 상당한 타격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대한항공의 주장과 관련, 아시아나는 “서울∼파리 노선은 한국 여행객이 대다수”라면서 “지난 1973년 이후 지금까지 단수 항공사제에 의한 시장 독과점에 따라 소비자들은 불이익을 봤다.”고 반박했다. 아시아나는 “대한항공은 아시아나의 주력시장인 중국에 취항하기 위해서는 항공자유화가 대세라고 주장하는 등 모순된 모습을 보여 왔다.”고 덧붙였다.최용규기자 ykcho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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