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73년
    2026-06-19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7,438
  • 김중호신부 몽골 최우수의료인상

    천주교 김중호(68) 신부(가톨릭대 의과대학 사목센터 소장)가 몽골 보건복지부 장관이 수여하는 훈장과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시장이 수여하는 최우수 의료인상, 몽골 명예의사 면허를 받았다고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13일 밝혔다. 1973년 사제 서품을 받은 김 신부는 1997년부터 몽골 의료봉사를 시작해 에콰도르, 콜롬비아 등 세계 각국을 방문해 자선 활동을 벌여왔다.
  • [맑은 물 밝은 세상] (7) ‘홍수 파수꾼’ 다목적댐

    [맑은 물 밝은 세상] (7) ‘홍수 파수꾼’ 다목적댐

    기상청은 이달 중순쯤부터 장마가 시작된다고 예보했다. 집중호우로 인한 물난리가 벌써부터 걱정된다. 특히 기상이변으로 인한 돌발·집중호우는 물관리(治水)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15개 다목적댐이 있어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 하지만 집중호우로 인해 다목적댐의 홍수조절능력에도 과부하가 걸리고 있다. 홍수 피해 예방은 다목적댐의 효율적인 물관리에 달려 있다. ●하천유량계수 400대1… 홍수·가뭄 되풀이 우리나라는 연평균 강수량만 놓고 보면 홍수나 가뭄 피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동고서저(東高西低) 지형인 데다 강수량이 여름철에 집중돼 수자원관리가 여간 어렵지 않다. 전체 강수량의 3분의2 이상이 6∼9월 홍수기에 집중해 내린다. 특히 기상이변에 따른 돌발강우와 특정 지역에 편중된 집중호우로 엄청난 홍수피해를 입고 있다. 하루 강수량이 80㎜이상 되는 호우가 연평균 25회,150㎜이상 내리는 비도 7회가량 된다. 홍수 때 넘쳐나는 물을 관리하는 데 진땀을 빼는 이유다. 국토의 3분의2 이상이 산지이고 대부분의 중소 하천은 급류가 많다. 대부분의 하천 흐름 방향도 남서쪽으로 몰린다. 흙으로 덮인 층이 얇아 가둘 수 있는 물의 양도 한정돼 있다. 때문에 호우 때는 연례행사처럼 물난리를 겪는다. 비가 그치고 나면 전국이 가물어 대지가 타들어가는 가뭄 피해에 시달린다. 우리나라 하천의 물관리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유량변동계수(최대유량과 최소유량의 비율)로 증명된다. 영국 템스강은 유량변동계수가 8대1이다. 미국 미시시피강은 3대1, 이집트 나일강은 30대1에 불과하다. 반면 우리 하천의 유량계수(댐 수량조절 이전)는 300∼400대1이나 된다. 문태완 수자원공사 물관리센터 실장은 “기상예측의 불확실성, 수량의 계절적 편차와 하천 유량 변동폭이 커 수자원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이상 강우·홍수 피해↑… 다목적댐 중요성↑ 홍수피해도 엄청나다.2002년 8월 집중호우와 태풍 루사의 위력 앞에선 맥을 추지 못했다. 강릉에는 하루 870.5㎜가 내렸다. 피해는 사망 209명, 실종 37명,6조원 이상의 재산피해를 입었고 8조원이 넘는 복구비를 쏟아부었다.2003년 태풍 매미도 큰 피해를 입혔다.118명이 사망하고 13명이 실종됐다. 재산피해도 4조 2000억원이나 됐고 복구에 6조 5500억원이 투입됐다. 지난해 7월 태풍 에위니아와 집중호우로 인한 피해도 62명 사망,1조 8000억원의 재산피해를 가져왔고 피해복구에만 3조 5125억원을 들여야 했다. 문제의 심각성은 이상기후 현상이 점차 증가한다는 데 있다.100년에 한번 내릴 수 있는 시간당 최다 강우량을 최근 10년 동안 6번이나 넘겼다. 피해액도 4.5배 증가했다. 최근의 기후 변화를 감안, 강우확률모델을 변경해야 할 때이다. 그런데도 물관리는 엉망이다. 예방 사업보다 복구비가 많은 비효율적인 투자를 되풀이하고 있다. 치수 관련 예산은 ‘치수사업비)홍수피해(감소추세))복구비’로 이뤄지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예산은 ‘치수사업비(홍수피해(증가추세)(복구비’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상강우 현상을 인위적으로 막기에는 한계가 따른다. 정확한 기후 예측과 사전 예방만이 피해를 줄일 수 있다. 홍수 피해를 막는 효자는 뭐니뭐니해도 다목적댐이다.4대강 유역에는 15개의 다목적댐이 건설돼 있다. 하지만 다목적댐 건설은 환경에 대한 관심 증가, 수몰지역 재산권 행사 등의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벽에 부딪치고 있다. 전경수 성균관대 교수는 “치수사업에는 게을리하고 엉뚱하게 피해 복구에만 예산을 쏟아붓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우(愚)를 범하고 있다.”며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한 투자가 우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만약 충주댐이 없었더라면… 만약 충주댐이 없었더라면…. 지난해 7월 한강수계 다목적댐(소양강댐, 충주댐, 횡성댐)유역의 평균 강우량은 898.8㎜로 예년(322.3㎜)에 비해 3배 가까이 불어났다. 특히 7월10∼22일에 내린 비만 충주댐의 경우 619㎜로 예년대비 3.3배나 많았다.1973년 기상관측 이래 강우량이 최고치를 기록하면서 한강 유역은 국가적인 위기에 직면했다. 남한강 여주지역과 한강하류의 범람이 우려됐다. 특히 남한강 충주댐(저수용량 27억 5000만㎥)은 계획홍수위(145m)를 불과 0.1m 남겨두고 있었지만 비는 그칠 줄 몰랐다. 건설교통부 홍수통제소와 수자원공사 물관리센터 직원들 역시 피가 마르기 시작했다.24시간 15개 댐 수위를 분석하고 기상을 예측하느라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댐 상류인 충북 단양 주민들은 마을이 물에 잠긴다며 빨리 수문을 열라고 아우성쳤다. 반면 댐 하류인 경기 여주 주민들로부터는 시내가 잠긴다며 수문을 닫으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물관리센터는 그러나 수문을 모두 열지 않았다. 댐 운영 이후 최대인 2만 2650㎥/s가 유입됐지만 40%수준인 9050㎥/s만 조절 방류했다. 결국 충주댐이 여주 시내 범람을 막고 서울 지역 홍수 피해를 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계속 수문을 닫아둘 수는 없었다.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댐 안전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상류지역 피해도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센터는 잠수교 수위가 점차 내려가고 여주지역도 물이 빠진 것을 확인한 뒤 비로소 댐방류량을 3000㎥/s로 늘렸다. 댐은 곧 계획홍수위에서 0.9m의 여유를 보이면서 위급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충주댐으로 유입된 28억㎥의 물 가운데 13억㎥를 하류로 흘려 보내고,15억㎥를 가둠에 따라 하류 여주지점의 홍수위를 3.05m 낮출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충주댐 하류 하천변 378ha(100만평)의 침수를 막아 2조 1000억원의 홍수피해를 줄일 수 있게 됐다. 정확한 홍수 조절은 수공이 자체 개발한 ‘K-water홍수분석모형’덕분에 가능했다. 댐 방류에 따른 하류 하천 수위와 홍수량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는지를 자동 분석하는 첨단 기계다. 물관리센터 황필선 팀장은 “댐관리 전문가와 기상전문가, 전산·통계요원 50여명이 24시간 전국 15개 다목적댐과 용수댐을 지켜줘 홍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다목적댐 홍수관리 어떻게 우리나라 홍수관리는 원칙적으로 정부차원에서 이뤄진다. 전국 하천의 홍수관리를 총괄하는 곳은 4대강을 중심으로 설립·운영 중인 홍수통제소(Flood control office)다. 다목적댐은 대부분 하천의 상류에 건설되고 담수 용량이 커 홍수조절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다목적댐의 효과적인 홍수조절을 위해서는 댐 상·하류를 연계한 댐간, 댐∼하천간의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에는 모두 15개의 다목적댐과 12개 용수전용댐이 있다. 댐 수량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곳은 한국수자원공사의 물관리센터다. 홍수 때 수문을 여닫는 의사 결정은 건설교통부 홍수통제소가 지휘한다. 홍수통제소의 의사결정은 그러나 수자원공사 물관리센터의 과학적인 분석에 근거를 둔다. 물관리센터는 국내외 기상전문기관으로부터 각종 예보 기초자료를 실시간으로 받아 자체적으로 댐유역 국지 기상을 분석, 강우를 예측한다. 자동으로 지역별 댐별 홍수정보를 수집하고, 댐 상·하류 수위를 예측한 뒤 댐 방류 시기와 양을 정한다. 이를 홍수통제소에 보내면 수문을 열게 된다. 모든 자료는 1분 간격으로 생산된다. 주요 하천에 설치된 유량 측정기를 통해 수위 변화가 자동으로 센터로 들어온다. 운영자료는 무궁화2호 위성을 통해 실시간으로 송수신 처리된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빌 게이츠 “인간의 위대한 발전은 불평등 줄일 때 온다”

    |워싱턴 이도운특파원|“인류의 위대한 진보는 ‘발견’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발견들이 얼마만큼 불평등을 줄일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기술 발전은 부와 보건, 교육 등 다양한 불평등을 해소할 때 비로소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이 7일(현지시간) 중퇴한 지 30년 만에 하버드대 졸업장을 받은 자리에서 졸업생 및 동문들에게 불평등에 도전하자는 메시지를 던졌다. 8일 월스트리트저널 등에 따르면 그는 연설에서 “공교육과 공중보건, 광범위한 경제 기회 등이 민주주의를 통해 확산돼 수 있었다.”면서 “인터넷도 사회 구성원들이 보편적인 문제를 함께 논의할 수 있게 했기 때문에 위대한 발견”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렇게 불평등을 줄여나가는 것이야말로 인류가 달성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성취”라고 역설했다. 그는 “대학 시절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불평등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이를 깨닫는 데 수십년이 걸렸다.”고 운을 뗐다. 이어 “졸업생들이 30년후 이 자리에 다시 돌아와 일의 성취로서만 아니라 불평등을 바로잡는 데 기여한 공로로서 자신을 평가하기를 바란다.”말했다. 또 에이즈 등 인류 당면 문제를 거론하면서 “문제해결 접근법을 발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와 영향력, 당신의 성공 및 실패에서 다른 사람들이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게이츠 회장은 연설문 준비를 위해 반 년 이상 공을 들이며 워렌 버핏 등 지인들과 의논해 왔다. 이를 위해 조지 마셜 전 미 국무장관이 1947년 6월5일 역시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마셜플랜의 내용을 발표할 당시 연설문을 참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후 붕괴된 유럽사회의 재건을 목표로 작성된 마셜의 연설문이 불평등을 해소하자는 자신의 메시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게이츠는 1973년 법학과에 입학한 뒤 수학과로 전과했다.3학년 재학 중 MS를 창립하고 사업에 몰두하기 위해 77년 자퇴했다.MS는 세운 지 3년 만인 1980년에 세계 굴지의 IBM사와 거래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게이츠는 내년부터 MS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아내 멜린다 게이츠와 함께 설립한 자선단체인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서 새로운 도전인 ‘불평등과의 전쟁’을 위해 인도주의 사업에 몰두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dawn@seoul.co.kr
  • [산이 좋아 산으로] 강원도 원주 치악산

    [산이 좋아 산으로] 강원도 원주 치악산

    해발 1100m 고지에 자리 잡은 치악산(1288m) 상원사에는 목숨을 구해준 나그네의 은혜를 갚기 위해 피투성이가 된 채 종을 울렸다는 꿩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이 꿩의 보은 전설은 가을 단풍이 곱다 하여 적악산(赤岳山)이라 불리던 산의 이름까지 ‘치악산(雉岳山)’으로 바꿔놓았다. 최고봉 비로봉을 중심으로 강원도 원주시와 횡성군, 영월군에 걸쳐 있는 치악산은 1973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후 1984년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다.‘악(岳)자 붙은 산은 험하다’는 속설을 증명하듯 원주 사람들은 치악산을 ‘치 떨고 악 쓰며 오르는 산’이라 말한다.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일반적인 지형지세와 반대로 주능선을 중심으로 완만한 동쪽에 비해 심하게 가파른 서쪽 산길을 오를라 치면 입에서 단내가 나는 정도는 감수해야 할 것. 대신, 흠뻑 젖은 땀을 충분히 식혀줄 만큼 깊은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고 장엄한 산의 위용에 감탄하게 된다. 치악산에는 ‘치악 8경’이라는 볼거리가 있는데 비로봉 미륵불탑, 상원사, 구룡사, 성황림, 사다리 병창, 영원산성, 태종대, 입석대 등이다. 모두 치악산의 역사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어 산행 중 꼼꼼히 둘러봐도 좋을 것이다. 치악산의 면모를 두루두루 맛보려면 주능선 종주가 제격이다. 남쪽 성남리 상원골을 들머리 삼아 남대봉, 향로봉을 거쳐 정상인 비로봉에 닿는다. 사다리병창을 지나 구룡사 쪽으로 하산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9시간 남짓. 때문에 아침 일찍 서두르지 않으면 해가 저물어서야 산을 내려올 수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역방향 코스도 걸리는 시간은 비슷하지만 오르막이 더 가파른 데다 날머리인 성남리 교통편이 좋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전체 24㎞에 달하는 주능선 종주 말고도 치악산은 어느 쪽으로 올라도 내려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산길이 다양하다.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산기슭에서 화전을 일구며 살았기 때문이다. 구룡사 방면에서 비로봉에 이르는 정규 등산로만 해도 5개 코스. 특히 바위능선으로 이루어진 사다리병창 코스는 가파르지만 조망이 좋아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구룡사에서 사다리병창을 거쳐 비로봉에 이르는 왕복 12㎞코스는 약 7시간쯤 걸린다. 이 밖에 치악산 주능선의 허리를 치고 오르는 등산로도 여럿 있다. 원주 쪽에서는 황골과 행구동 등산로에 매표소가 있다. 황골에서 입석대 쪽으로 향하는 험준한 코스는 비로봉 정상에 오르는 가장 빠른 길로 2시간이면 바로 비로봉에 닿을 수 있다. 횡성 방면에서 치악산을 오르는 길은 강림면 부곡리에서 출발한다. 태종 이방원과 그의 스승 운곡 원천석의 일화가 담긴 태종대(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6호)가 있는 부곡리 코스는 입산통제소를 지나 곧은치골을 따라가는 길이다. 이 길은 예전부터 원주와 횡성을 오가던 주요 교통로였는데 등산로 옆으로 소가 다니던 넓은 길이 따로 나있기도 하다. 곧은치라는 지명은 곧게 뻗어있는 고갯길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산길이든 인생길이든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는 저마다의 몫이 아닐까. 치악산 산행은 자신의 취향과 체력에 맞게 골라가는 재미가 있다. 순한 길로 느릿느릿 오래 걷는 코스도, 한 순간 고통을 참아내며 빠르게 정상에 코스도 본인이 즐겁고 만족스러우면 그만이다. ‘아랫입술을 세 번쯤 꽉 깨물고 퍽퍽한 다리를 참으며 오른’ 비로봉. 그렇게 닿은 1288m 정상에는 1964년 고 용창중씨가 처음 쌓아올렸다는 돌탑 3기가 나란히 서서 사람들을 반긴다. 글 정수정 사진 남영호(월간 MOUNTAIN 기자)
  • 韓·印 해군연합훈련 합의

    인도를 방문 중인 김장수 국방장관은 30일 수도 뉴델리에서 아라카파람빌 쿠리안 안토니 인도 국방장관과 회담을 갖고 군사교류와 협력방안을 논의했다. 양국간 국방장관 회담이 열리기는 지난 1973년 수교 이래 처음이다. 이날 회담에서 양측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공동 노력하고, 해상 테러와 재난 구조를 위해 양국 해군 간 연례 연합훈련을 실시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김 장관은 인도의 군 현대화 계획에 한국 방위산업체의 참여 가능성을 타진, 긍정적 답변을 얻었다고 국방부는 전했다.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아나운서 출신 가수 1호 이정민(Ⅱ)

    1967년 이정민씨는 곧바로 국군방송 아나운서로 정식 발탁된다. 군 복무기간 내내 두각을 나타냈던 ‘얼굴 없는 가수’로서도 ‘타향처녀’‘남매’ 등의 히트로 주목받은 그의 목소리는 이미 많은 작곡가들이 탐내고 있었다. 아울러 제대 후 본격적으로 김학송, 백영호, 정민섭, 김강섭씨 등 인기작곡가들과 손잡고 새 음반들을 취입하지만 국군방송 아나운서는 공무원 신분이라 야간무대를 비롯한 많은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때문에 결국 레코드 취입만으로 가수 활동을 해야 했던 ‘반쪽 가수’였다. 1971년 8월, 그는 방송요원으로 베트남에 파견된다. 베트남, 즉 월남은 당시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파월장병을 위한 ‘주월 한국군방송국’이 1965년 11월15일, 시험전파를 첫 발사한 데 이어 주월사령부가 있던 사이공방송국을 비롯해 맹호부대와 십자성부대 지역의 퀴논방송국, 청룡부대 지역의 호이안방송국, 백마부대의 나트랑방송국 등을 잇달아 개국했다. 이정민씨는 사이공방송국에 배치된다. 사이공은 외관상 마치 전쟁과 무관한 도시처럼 평온해 보였지만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전쟁터라 방송요원도 무장을 해야 했다. 호신용 권총도 지급되었고 수당도 당시 ‘한국군 소령의 월급’에 해당하는 150달러가 별도로 지급되었다. 방송국 주변을 비둘기부대가 엄호해 주었지만 이따금씩 게릴라가 나타나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방송은 하루 9시간. 그중 두 시간은 자체 뉴스와 신청곡 프로그램, 부대 탐방 등을 내보냈고 나머지 시간은 국내에서 공수해온 인기 프로그램 중 CM만을 빼고 방송했다. “전국을 누비며 고향소식과 함께 전하는 ‘가족통신’의 인기는 파월장병들에게 절대적이었어요. 전국 방방곡곡 파월장병의 고향을 찾아 가족들과 인터뷰하면서 무사귀국을 기원하는 그 간절한 사연들이 하나하나 전해질 때마다 함께 목놓아 울기도 했죠.” 이정민씨의 회고다. 1972년 2월 청룡부대가 귀국함에 따라 호이안방송국을 폐쇄했고 계속해서 나트랑 해변에도 베트콩이 밀려오기 시작하면서 한국군의 전면 철수와 함께 퀴논방송국, 나트랑방송국, 투이호아중계소가 차례로 폐쇄해 나갔다.1973년 2월15일. 마침내 베트콩의 기세가 사이공 가까이까지 밀려오자 사이공방송국도 고별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다. “1967년 2월1일, 월남의 애국시민과 주월 한국군을 위해 개설되어 7년여 동안 동고동락했던 주월 한국군 사이공방송국이, 오늘 마지막 소원을 풀지 못한 채 고별방송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자유를 위해 피를 흘려야 했던 수많은 영혼들의 소망을 저버리고 저희는 이제 떠납니다. 하지만….” 아나운서 이정민씨의 목소리는 끝을 맺지 못하고 있었다.(계속) 대중음악평론가 sachilo@empal.com
  • [교정 대상 특별상]

    ■ 면려상 이경수 김천교도소 교위 정신질환을 앓는 수용자를 매일 직접 목욕시키고 보살핀 희생정신의 소유자다.1996년부터 2년 동안 징벌사동 근무를 자원해 불우한 징벌자들을 도왔다.2005년부터 가정형편이 어려워 변호사 선임을 할 수 없는 수용자들에게 국선 변호인 선임절차를 홍보해 150명이 김천변호사협회에서 무료 법률상담을 받도록 도왔다.■ 성실상 김원태 여주교도소 기계장 자신의 일을 스스로 찾아 업무에 힘쓰는 성실한 공무원으로 남들이 꺼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1973년부터 86년까지 봉제2급기능사 13명, 기능사보 22명, 차량정비기사 7명, 기타 자격증 소지자 17명을 배출시켰다. 운전면허증을 딴 수용자도 23명에 이른다. 매달 독거 노인을 찾아 보살피는 등 지역사회 봉사에도 적극적이다.■ 창의상 김재우 부산구치소 교위 소년·여성 수용자들을 위한 한자 교육을 지원해 수용자들이 의욕적인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1990년 수용자가 어머니와 만난 뒤 비관해 자살까지 생각하자 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주선하고 상담하며 수용자가 심리적 안정을 갖게 했다.2003년 ‘제례’ 책자 100여권을 직원들에게 배포하는 등 충효를 몸소 실천한다.■ 교화상 김남경 제주교도소 교위 수용자들의 작업 훈련과 수용자 기능자격 취득, 기능경기대회 입상지도에 힘썼다. 불우 수용자 3명의 벌금 108만원을 대납해 사회에 복귀할 길을 터줬다. 직원들과 ‘한라교정봉사회’를 결성해 수용자 29명에게 87만원을 지원했다. 시내버스가 교도소 입구까지 오지 않자, 시청과 협의해 교도소 입구에 정류소를 설치했다.■ 박애상 박상구 안양교도소 종교위원 안양신망애성결교회 목사로 1980년 서울구치소와 안양교도소 종교위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사형수 20명과 특별관리대상 수형자 40명, 무의탁수용자 20명과 자매결연을 맺어 계속 상담했다. 출소자에게는 취업과 결혼식을 주선해 삶에 대한 의욕을 불어넣었다. 출소자 보호시설인 ‘오네시모선교회 사랑의 집’을 운영한다.■ 자비상 박덕례 목포교도소 종교위원 옥주민속무용학원을 운영하며 한국무용협회 전남지부 부회장을 맡고 있다.1976년 수용자 대상 공연으로 교화활동을 시작해 교화 기자재 기증, 출소자 취업 알선에 힘써 왔다. 서화에 재능을 보인 수형자가 출소하자 목포 유명화가 화실을 소개해 서화지도를 받게 해 작품활동을 도왔다. 수용자 특별활동반 농악대 창설을 지원했다.■ 자애상 조남덕 대구구치소 종교위원 대구 경진가구사 대표로 1994년 대구교도소 교정사목후원회를 통해 수용자 생일잔치에 참석한 이후부터 수용자 종교상담, 출소자 취업알선에 참여했다.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때 교정 참여인사를 중심으로 성금을 모아 전달하고, 서문시장 화재나 광주지방 폭설 때에도 현장을 방문해 자원봉사를 했다.■ 공로상 최태향 대구교도소 교화위원 한·몽 불교교류협회 부회장으로 1989년 수용자와 자매결연을 맺으며 교화활동에 뛰어들었다. 지금까지 175차례에 걸쳐 2320여명의 문제 수용자와 자매결연을 맺어 상담하고 영치금과 다과비 등 2430여만원을 지원했다.2001년 대구교도소에 관세음보살 입상을 봉안하며 1750만원을 건넸다.
  • 김앤장의 사람들

    김앤장의 사람들

    김앤장은 김영무(65)·장수길(65)·이재후(67) 변호사가 대표를 맡는 트로이카 체제로 운영된다. 김 대표변호사는 내부 살림을 맡고, 장·이 대표변호사가 대외 업무를 한다. 로펌 내부의 중요한 결정은 세 변호사가 함께 논의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서울대 법대 동기인 김영무·장수길 변호사가 1973년 로펌을 만들었고, 성을 따서 ‘김앤장’으로 이름지었다. 이 대표변호사는 6년뒤에 합류했다. 나이가 들면 변호사는 일선 현장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등식은 김앤장에서는 통하지 않는다.30년 경력을 훨씬 넘어도 현장에서 활동한다. 이재후 대표변호사도 예외가 아니다. 이재후 대표변호사는 “팀 리더는 있지만 다 같은 변호사이지 상관·부하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대표변호사 개념이 기업의 CEO와는 다르다.”면서 “대표변호사 역시 파트너 중 한사람일 뿐이며, 그래서 가끔 법원에도 가고 팀플레이에도 참여하는 등 업무를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판사 출신으로 김앤장에서 4년째 근무하고 있는 권오창(42) 변호사는 “후배들을 법정에서 만나면 그 연차에 아직도 서초동에 직접 나오느냐고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면서 “연차가 어떻게 되든 송무를 하는 변호사에게는 법정이 생명”이라고 말했다. 변호사 대부분이 서울대 법대 출신이지만, 다채로운 경력의 소유자들도 많다. 정계성(사시 16회) 변호사는 1971년 장수길 변호사가 무죄를 선고했던 ‘신민당사 농성사건’의 주역 대학생 중 한 명으로 사법연수원을 수석 수료한 뒤 바로 김앤장에 합류했다. 최근에는 전기·기계설계·물리학 등 이공계열을 전공한 변호사들도 늘고 있다. 이원복 변호사는 의과 대학을 졸업한 뒤에, 이진영 변호사는 약대를 마친 뒤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박준기 변호사는 미국 하와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물리학과까지 마친 뒤 국내에 돌아와 사법시험에 합격,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김앤장이 신규 변호사 채용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부분은 크게 팀플레이에 적합한 인화력 등 품성과 새로운 일을 창출할 수 있는 적극성, 능동성 등이다. 사법연수원 졸업생이 받는 연봉은 1억원 정도로 알려져 있으며, 밤 11시 퇴근을 ‘칼퇴근’이라고 부를 정도로 업무 강도가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연봉은 대외비.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청자의 거장’ 도예가 혁산 방철주 옹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청자의 거장’ 도예가 혁산 방철주 옹

    총알에 날개를 달았다. 날카로운 부리도 있다. 어떤 계략이나 은폐·엄폐가 필요없다. 잔잔한 호숫가를 그저 바라보는가 싶더니 ‘쉬익∼’ 하고 날아가 눈 깜짝할 사이에 물고기를 낚아챈다. 하늘로 치솟는 모습이 예술이다. 햇빛에 반사되는 파문과 현란한 날갯짓에서 펼쳐지는 청록색 향연은 그야말로 눈이 부시다. 이 광경을 보고 아마 ‘비(翡)’라고 했을 터.0.002초의 승부사 물총새, 바로 그 색깔(翡)에 우리 조상들은 넋을 놓았을 것이다. 천년 세월을 이어온 ‘고려청자’가 세계의 으뜸인 까닭은 무엇일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결같이 형언할 수 없는 천하제일의 비색(翡色)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보석의 비취색보다 더 고운, 태고의 신비감이 자랑이다. 그 비색을 좇아 살아온 40년 세월이다. 고려인의 비색청자를 가장 가깝게 재현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울러 생동감 있는 문양창조로 청자의 품격을 한층 세련되게 끌어올려 한국을 방문하는 각국의 정상들로부터 ‘보물급’이라는 찬사를 듣는다.‘청자의 거장’이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美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작품 영구전시 혁산(赫山) 방철주(85)옹. 경기도 이천의 ‘동국요’에서 나이를 잊은 채 여전히 ‘작업중’이다. 선생은 요즘 어느 때보다 ‘청자인생’에 보람을 느낀다. 다름 아닌 다음달 7일 선생의 작품 ‘지구무늬 항아리(Global Jar)’가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영구 전시(등록번호 2043527)된다. 1998년 제작된 이 ‘지구무늬 항아리’ 표면에는 물방울 모양이 점점 확대되거나 축소되면서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듯한 현대적인 문양이 그려져 있다. 스미스소니언 측은 고려청자의 고전적인 아름다운 비색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디자인을 표현한 최고의 작품이라고 극찬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선생은 2000년 일본 도자기상이 연출한 희대의 고려청자 사기극을 밝혀내 국내외 언론에 대서특필이 된 바 있다. 지난 9일 도자기 축제가 벌어지는 경기도 이천시내를 거쳐 신둔면 수하리에 위치한 ‘동국요’를 찾았다. 마당 한가운데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지금까지 선생과 동고동락을 같이해 온 세월의 버팀목인 듯했다. 그 주위로 전시장, 작업실, 사무실 등이 그림처럼 이어진다. 낯선 기척에, 수제자이자 딸인 방문숙(43)씨가 먼저 손님을 맞이한다. 이어 선생이 “멀리서 왔다.”며 손을 내밀었다.85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얼굴피부가 무척 젊고 고왔다. 아름다운 비색과 함께 살아서 그럴까. ●수제자인 딸과 함께 작업 작업실에 들어섰더니 마침 딸과 함께 작업중인 ‘지구무늬 항아리’가 있었다.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보관될 작품과 똑같은 크기로 전체 작업단계 중 약 80%라고 선생은 설명했다. 이어 전시실로 들어섰다.40평 남짓한 공간에는 온통 비색으로 가득찼다. 가장 아낀다는 ‘벚꽃무늬 항아리’를 비롯한 각종 꽃들이 비색과 절묘하게 어우러진 공간이다. 또 주병(酒甁), 장경병(長頸甁) 등 여러 가지 병류와 매병(梅甁), 각종 주전자 등이 저마다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특히 진열대 중간 중간에 찰스 영국 왕세자, 미테랑 전 프랑스대통령,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일본의 나카소네·후쿠다·호소가와, 고이즈미 전 총리 등 혁산의 비색청자를 선물받은 각국 정상 12명의 사진과 관련 기사들이 액자로 쭉 놓여져 있었다. 그의 작품이 세계 정상들의 안방에 놓여져 있다는 생각에 경외스럽게 느껴진다. 잠시 그의 도록집을 살폈다. 도자사학가 강경숙씨는 “선생의 작품세계는 절정기의 비색청자의 모방과 재현에서 출발했으나 현대의 미감이 충분히 발현돼 있다.”면서 “기형은 전통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무늬는 젊고 생동감이 넘치며,4월의 등나무 꽃을 연상시키는 연이은 구슬무늬 등 현대인의 감각에 잘 와닿는다.”고 평가했다. 또 정양모 전 국립박물관장은 “비색을 빚어내는 오묘한 기술은 단절되고 그 영롱한 아름다움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려운데 지금 같은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의미부여를 했다. 기법 또한 상감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 문숙씨는 “조선시대의 분청사기에 주로 사용된 박지기법(백토를 문양 위에 바른 후 다시 얇게 벗겨내는 것)이 상감과 어우러지며 진사채(辰砂彩)와 함께 고고(孤高)하면서도 화사하게 아롱진다.”고 설명했다. ●계룡산 점술가 “평생 깨지는 물건 취급할 팔자” 선생의 도예인생은 어쩌면 숙명적이었다. 충남 논산 출생인 그는 27세때 우연히 계룡산 근처의 노(老) 점술가를 만난다. 이때 점술가한테 “자네는 평생 깨지는 물건을 취급할 팔자야.”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안 돼 정말로 우연하게 유리사업을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됐다. 같이 일하던 중 1954년 서울 을지로2가에 ‘유리상회’를 차렸다. 이어 대전에 3000평 규모의 유리가공 공장을 설립했다. 일본을 오가며 기술개발도 하며 나름대로 번창했다. 그러던 어느날 건강이 악화되자 문득 “돈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다 때려치우고 건강하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 이상하게도 어린 시절 옹기그릇을 잔뜩 이고 있던 할머니 모습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그 할머니는 우리 집에 와서 그릇을 다 줄 테니 곡식과 바꿔달라고 했거든요. 그 모습이 얼마나 애절하던지….” 1967년,45세 나이에 유리사업가에서 도예의 길로 뛰어든 계기가 됐다. 일본에서 4년 동안 유약과 흙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1971년 귀국해 현재의 ‘동국요’를 만들었다. 이후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청자재현에 매진했다.1973년, 일본에 사는 지인이 가끔 왔다 가곤 하더니 하루는 5만달러를 불쑥 보내왔다.“부담없이 받고, 혹 (도자기)구워지는 거 있거든 하나 둘 보내달라.”는 짤막한 서신도 동봉했다. 빚 아닌 빚이 된 셈. 이후 일본으로 완성품 청자를 몇번 보냈다. ●1974년 고 이병철 회장과의 만남 1974년 봄이었다.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갑자기 사람을 보내 잠시 만나자고 해 이 회장 집무실로 찾아갔다. 셋째 아들 이건희씨와 그의 장인이자 당시 중앙일보 사장인 홍진기씨 등도 함께 있었다. 이 자리에서 이 회장은 “지금 국내 어디에서 도자기를 팔고 있느냐.”고 물었고, 혁산은 단 한점도 없다고 대답했다. 이어 이 회장은 “도자기는 여러 사람한테 보여주는 것이다. 신세계백화점에 장소를 내줄 터이니 그곳에 전시하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 극구 사양하고 돌아왔지만 며칠 동안 사람이 찾아와 설득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신세계에 직매장을 설치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일본의 지인에게 보냈던 작품이 도쿄시내에 전시됐고 이 회장이 이를 우연히 보고 혁산을 부르게 됐다. 선생은 평소 ‘도자기의 생명은 흙이라는 단미(單味)에 있다.’는 말을 항상 가슴에 품었다.1975년 전남 강진군 일대를 샅샅이 답사하던 중 또 한번 숙명적으로 고려시대의 ‘태토’와 만났다. 고려청자에 가장 근접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미 800년의 긴 세월 동안 단절돼 버린 그 전통기법의 맥은 과연 무엇이며, 과연 이를 살려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 저를 괴롭힌 숙명적 화두였지요.”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22년 논산 출생 ▲65∼70년 일본의 세토(瀨戶), 교토(京都), 마쓰자카(松阪) 등지에서 도예 수학 ▲71년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 수하리 현 위치에 ‘동국요’ 설립 ▲73∼2007년 일본에서 개인전 80여회 ▲73년∼현재 12개국 정상들에게 해외 수교예술품으로 증정 ▲75년 전남 강진에서 최고의 청자용 태토 발견, 채취에 성공 ▲76∼79년 신세계백화점 내 미술관에서 개인전(4회) ▲84∼88년 미국, 남미 등지 순회그룹전 ▲85년 한국의 전승공예도예 5대 작가 초대기획전 ▲97년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대학 주최 한국 전승 도자전(한국학과 설립 100주년 기념) ▲97∼2002년 한국 이천 도자기 축제에서 한·중·일 작가 특별전 ▲02년 프랑스 파리 한국도자전 ▲05년 청자 초대전(롯데 에비뉴엘 갤러리) ▲06년 한국도자기 런던 특별전 ▲07년 6월 ‘지구무늬 항아리’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영구전시
  • 팔당호 곤충·조개류 급감

    팔당호에 사는 물살이 곤충과 조개류가 급격히 줄어든 것으로 조사됐다. 13일 국립환경과학원 한강물환경연구소가 지난해 하반기 실시한 ‘팔당호 생태 조사결과’에 따르면 1988년 82종에 이르던 물살이 곤충과 조개류가 2003년 70종, 지난해에는 52종으로 감소했다. 연구소는 “조개류 감소는 상류지역 집중 홍수에 따른 탁수(濁水)가 증가했기 때문”으로 분석했다.또 “조개류가 줄어들면 조개의 몸속에 산란하는 각시붕어 등 토종 물고기의 감소로 이어져 생태계 파괴도 우려된다.”고 밝혔다. 반면 팔당호에 서식하는 수생식물은 1988년 37종,2003년 70종, 지난해 43종으로 증가했다. 물고기는 1992년 36종,2003년 42종, 지난해에는 48종으로 늘어나 1973년 댐 건설 이후 교란상태에 빠졌던 팔당호 생태계가 서서히 안정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줬다.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08일 TV 하이라이트]

    ●클래식 오디세이(KBS2 밤 12시45분) 어릴 적부터 서울에 실내악 축제를 여는 것이 꿈이었다고 말하는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과 넉넉한 웃음과 여유로움으로 실내악의 편안함을 전해주는 첼리스트 조영창. 이들이 들려주는 따뜻한 실내악 선율로 마음을 채워보는 건 어떨까. 그들이 선사할 아름다운 오월의 밤으로 초대한다.   ●세계 세계인(YTN 오전 10시40분) 몸무게 1t, 길이 6m에 달하는 거대한 나일 악어가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됐다.73년부터 악어 사냥이 금지된 덕에 이처럼 거대한 악어도 무사히 남아 있다. 멸종위기의 악어를 보호하고 주민들의 수익도 올릴 수 있는 새로운 해결책은 악어농장을 만드는 것. 악어 가죽을 팔면 주민들에게는 적잖은 벌이가 된다.   ●시대의 초상(EBS 오후 10시50분) 1957년 아버지 손에 이끌려 처음 조치원 난장에 선 이후 50년,1978년 공간 사랑에서 세 명의 친구들과 사물놀이 공연을 한 이후로 30년. 김덕수, 그의 이름은 국악계에서 이제 보통명사가 됐다. 하지만 그에게는 영광만 있지 않다. 오욕도 있고 배신도 있다. 광대의 길 50년을 걸어온 김덕수를 만나본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SBS 오후 6시50분) 지상최고의 고집불통 청개구리. 이유불문, 장소불문. 뭐 하나 걸렸다 하면 무조건 반대로 고집을 부리는 4살 서현. 무조건 반대로만 행동하는 서현의 못말리는 행동은 오직 한사람, 엄마한테만이다. 황당무계하게 우기는 것은 기본이요, 떼와 악으로 대응하는 서현. 과연 이 아이는 달라질 수 있을까.   ●히트(MBC 오후 9시55분) 14년 전 일어났던 동남부 연쇄살인사건의 상황과 똑같은 살인사건들이 계속 일어나자 김영두와 정인희, 김재윤은 그 당시 범인 백수정을 떠올린다. 김일주는 조규원에게 충주경찰학교로 내려 가 있는 차수경을 다시 불러달라고 한다. 그리고 그동안 강창선이 팀을 와해시키려고 했던 상황들을 이야기한다.   ●하늘만큼 땅만큼(KBS1 오후 8시25분) 한 호텔, 다른 공간에서 내키지 않는 상대와 마주앉아 있는 무영과 지수. 자신의 할 말을 다하고 돌아선 무영과 지수는 호텔 앞에서 우연히 부딪힌다. 자리를 피하는 무영이 누구를 만났는지 지수는 알 것만 같다. 명태가 전하는 봉례 이야기에 명자와 태식은 여전히 믿기 어려운 눈치다.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17)송시열 기리는 경기도 여주 대로사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17)송시열 기리는 경기도 여주 대로사

    경기도 여주에는 세종대왕의 무덤인 영릉(英陵)과 효종의 영릉(寧陵)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세종릉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이웃한 효종릉은 차분하기만 하지요. 세종릉과 남한강 건너 신륵사는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세종의 영릉이 예종 원년(1469년) 지금의 서울 대모산 기슭에서 여주로 옮겨진 뒤 신륵사는 세종의 극락왕생을 비는 원찰이 되었으니까요. 효종의 영릉 또한 여주군청에서 가까운 시내에 있는 대로사(위 사진·大老祠)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효종릉이 현종 14년(1673년) 여주로 천장(遷葬)되지 않았다면 대로사도 없었을 것입니다. 대로사는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아래·1607∼1689)의 사당입니다. 정조 9년(1785년) 왕명으로 지어졌지요. 우암은 성인의 반열에 오른 대학자로 추앙받기도 하지만, 당쟁의 참화를 이끈 편벽한 소인이라는 극단적인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입니다. 우암이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을 바라보는 시점에 정조가 그의 사당을, 그것도 효종의 영릉을 바라보도록 서향으로 지은 데에는 ‘효종의 죄인’이라는 ‘혐의’를 풀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정치적 판단이 담겨 있습니다. 효종이 종종 ‘대왕’으로 받들어지는 것은 병자호란 당시 삼전도의 치욕을 씻고자 북벌의 기치를 높이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봉림대군 시절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 8년 동안이나 고초를 겪은 효종의 신임을 받아 북벌론의 기수로 지목된 이가 우암입니다. 우암의 북벌론은 그러나 양병보다는 민생의 안정, 무력보다는 군왕으로 덕을 쌓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는 점에서 효종의 실천적인 북벌론과 달랐습니다. 그의 존명배청 감정은 한족의 나라는 높이고 오랑캐는 물리친다는 유교경전 ‘춘추(春秋)’의 원리에 따라 관념적으로 형성됐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우암은 1659년의 유명한 기해독대에서 효종이 구체적인 북벌계획을 제시했을 때도 “제왕은 먼저 자신을 닦고 가정을 다스린 뒤에야 법도와 기강을 세웠는데 이것이 북벌의 선결조건”이라는 말뿐이었다고 합니다. 효종은 우암과 독대한 지 불과 두달 만에 급서하는데, 우암은 국상의 예법을 조언합니다. 이때 관이 시신보다 작은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지요. 장지 역시 수원부가 길지라는 지관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경기도 구리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곁으로 정했지만, 불과 15년 만에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들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여주의 세종릉 곁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반대파인 남인들이 이 모두를 우암의 탓으로 돌린 것은 물론입니다. 우암은 사약을 받아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효종의 죄인으로 지탄받은 것을 뼈아프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정조는 규장각과 초계문신제로 양성된 친위세력을 바탕으로 산림의 정치참여를 억제하는 강경책을 폈지만, 초반기에는 지지세력으로 포섭하고자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학문을 닦은 노론 중심의 산림(山林)을 중용했습니다. 정조가 대로사를 세운 데 이어 우암의 세 번째 회갑년인 1787년에는 북벌대의론을 칭송하는 비문을 직접 지어 대로사비를 세운 것도 노론을 향한 정치적 제스처라는 뜻입니다. 건축사적으로 대로사는 18세기 익공집의 기준이 될 만큼 부재를 짜올린 수법이 완벽하다고 합니다. 나아가 대로사는 조선 후기 권력투쟁의 큰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에 더욱 주목해야 할 것 같습니다. dcsuh@seoul.co.kr
  • 병역특례업체 모두 수사

    병역특례업체 비리 의혹을 수사 중인 서울동부지검 형사6부(부장 김회재)는 27일 특례업체들이 특혜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금품을 수수했다는 구체적인 제보가 잇따라 접수됨에 따라 수사팀을 충원해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제보토대 3개업체 추가 수색 검찰 관계자는 이날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한 뒤 인터넷과 전화 등으로 제보가 쇄도하고 있다.”면서 “전화제보 쪽에서 금품 거래가 있었다는 구체적인 내용과 고위층이 관련됐다는 내용이 들어와 수사에 반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동부지검은 이에 따라 이미 압수수색을 마친 58개 특례업체 외에 제보와 관련된 3개 업체에 대해 이날 압수수색을 단행하고 대검찰청에 수사 인력 지원을 요청해 병역특례비리 전반에 대해 본격적으로 수사를 확대했다. 검찰은 전날 유명 남성그룹 출신 솔로 가수 K씨,L씨, 프로축구 K-리그 J구단 소속 수비수 이모(21)씨 등 연예인과 스포츠 선수 20여명을 불러 27일 새벽 1시쯤까지 강도높은 조사를 벌였다. 검찰 관계자는 “실제로 근무를 했는지와 친인척 회사에 근무를 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우선대상이었던 60개 업체 외에도 병무청의 협조를 얻어 전수조사로 자세히 훑을 예정”이라고 밝혀 추후 병역특례업체 전체에 대해 수사를 확대할 방침임을 시사했다. 검찰 수사로 병역특례제도의 허술함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1973년 시행된 병역특례제도는 석사 학위자 이상으로 한 전문연구요원과 기술자격증 보유인을 대상으로 한 산업기능요원으로 나뉜다. 이는 현역 입영 대상자 기준이며, 신체검사 4급 이하 공익근무대상자의 경우 전문연구요원은 학사 이상, 산업기능요원은 자격증이 필요없다. 복무 기간은 전문연구요원이 3년이고, 현역 산업기능요원은 34개월로 현역 육군 복무기간(24개월)보다 훨씬 길지만 공익근무 산업기능요원은 26개월로 불과 2개월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허술한 병역특례제도가 비리 키워 이로 인해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이 산업기능요원을 선호하고, 일부에서는 비리 의혹도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병무청은 비리를 막기 위해 특례업체 대표이사의 4촌 이내 친인척은 편입을 제한하고 있지만 제대로 된 단속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번에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는 가수 K씨는 4급 공익근무대상자로 쉽게 온라인 게임개발업체인 M사에 입사할 수 있었지만 현역입영대상자인 L씨는 정보처리기능사 자격증을 딴 뒤 게임개발에 참여하겠다며 이 회사에 입사한 것으로 알려졌다.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병역특례’비리 유명가수 2명 소환

    병역특례업체 비리 의혹을 수사중인 서울동부지검 형사6부(부장 김회재)는 26일 서울병무청이 관할하는 병역특례업체 가운데 비리 혐의가 있는 6개 업체 관계자와 유명 남성그룹 출신 솔로 가수 K씨,L씨,2부리그 프로축구선수 A씨 등 연예인과 스포츠 선수들을 불러 조사했다. 검찰 관계자는 “실제 근무하지 않는 병역특례자가 버젓이 특례업체 직원으로 등록한 뒤 다른 일반 업체에서 이중으로 일을 하는 등 병역특례제가 비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25일 서울병무청 관할 1800여개 업체 가운데 비리 의혹이 있는 60곳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여 관련 자료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이어 “현재 혐의가 짙은 6개 업체 대표와 실무자 등 관련자들의 소환 조사에 들어갔다.”면서 “그러나 연예인의 비리 연루에 대해서는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덧붙였다. 검찰은 연예인 K씨와 L씨를 대상으로 병역특례업체에 금품을 건넨 정황이 있는지, 근무 중에 특혜를 받은 적은 없는지 등을 집중 추궁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K씨 소속사 관계자는 “지난해 K씨가 제대로 다니고 있는데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는 점을 조사관이 확인했다.”면서 “현재 참고인 자격으로 검찰에 출두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검찰은 일부 병역특례자들이 실제 근무하지도 않으면서 일하는 것처럼 눈속임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 출입국 기록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자주 외국을 드나드는 등 비정상적인 정황을 포착해 내사를 벌여 왔다. 1973년 도입된 병역특례제도는 사업주가 병역특례 직원의 선발권에다 관리권을 모두 갖고 있어 고위층 자제 및 고시 유학준비생 등의 병역회피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한국 현대사 산증인… 영원한 ‘TK 대부’

    26일 타계한 신현확 전 국무총리는일제시대 때부터 최근까지 정·재·관계를 넘나드는 화려한 이력을 지녔다. 특히 4·19,12·12,80년 ‘서울의 봄’ 등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의 한가운데서 영욕의 현장을 지켜본 20세기 한국사의 산증인이었다. 그는 최근까지 막후 실력자로 ‘TK(대구·경북) 대부’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1920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고 불렸던 신 전 총리는 1943년 경성제대(현 서울대)재학 시절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해 한국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일본 상무성에서 근무했다. 광복 후 대구대 교수로 3년을 보낸 뒤 장택상 전 총리의 권유로 1951년 상공부 공업국 공정과장으로 관직인생을 시작해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전기국장, 광무국장, 공업국장을 두루 맡아 상공부 내 실력자로 알려져 1957년에는 부흥부 차관 겸 외자청장 서리,1959년 3월에는 만 39세의 젊은 나이로 부흥부(현 재정경제부)장관에 임명됐다. 그러나 이듬해 4·19 혁명이 일어난 뒤 국무위원 일괄 사퇴로 장관직에서 물러나고 ‘3·15 부정선거’혐의로 2년 7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출감 후 쌍용그룹과 함께 사업을 하다가 1973년 공화당 공천을 받아 국회로 진출했다. 그러다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눈에 띄어 1975년 말 보건사회부 장관,1978년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로 임명됐다. 10·26 이후 최규하 대통령 과도정부 시절 부총리에서 국무총리가 된 그는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신군부 세력을 규합, 헌법 개정을 적극적으로 주도해 비판받기도 했다. 같은 해 5월 16일 이화여대에서 모인 전국 55개 대학총학생회장단은 당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과 신 총리의 퇴진을 동시에 요구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5월 17일 그는 비상국무회의를 주재해 전국 비상계엄안을 의결한 뒤 이튿날 총리직에서 사퇴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에도 1986년 삼성물산 회장,1988년 행정개혁위원회 위원장,2003년 한·일 협력위원회 명예회장 등을 지내며 말년까지 활동을 계속했다. 한편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 빈소에는 26일 김대중 전 대통령, 이용훈 대법원장 등이 보낸 조의 화환과 한덕수 국무총리, 정세균 열린우리당 의장,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 권오규 경제부총리, 이재정 통일부장관, 이홍구·남덕우 전 총리, 조석래 전경련 회장 등 조문객들이 줄을 이었다.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이젠 포스트 BRICs] (5) 칠레 (상)

    [이젠 포스트 BRICs] (5) 칠레 (상)

    |산티아고(칠레) 김태균특파원|코트라 무역관이 자리한 칠레 산티아고 서부 프로비덴시아 지구의 셉티엠브레 11번가에는 기업체, 금융기관이 밀집해 있다. 깔끔하게 꾸민 상점, 카페, 레스토랑은 뉴욕 맨해튼의 중심가를 방불케 한다. 여기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산타아고시가 대대적으로 개발 중인 라스 콘데스 지구가 나온다. 하얏트, 메리어트 등 고급 호텔과 칠레 최대의 복합 쇼핑몰(아푸만케) 파르케 아라우코가 들어서 있다. 파르케 아라우코에서는 팔라벨라, 파리스 등 대형 백화점들이 패션의류·가전들을 진열해 놓고 손님들의 발길을 붙든다. 삼성,LG, 대우의 전자제품도 귀한 대접을 받는다. 최숙영 산티아고 무역관 과장은 “평균 1%대에 불과한 초(超) 저관세가 이곳 사람들의 소비성향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높여 놓았다. 칠레가 ‘세계의 테스트 마켓’으로 불리는 이유”라고 말했다. 칠레가 농업·수산업·광업(1차 산업)과 서비스업(3차 산업)으로 양극화된 산업구조를 바탕으로 ‘강중국(强中國)’으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지렛대는 정보기술(IT)과 생명공학(BT) 등 첨단산업이다. ●1차 산업의 확실한 경쟁력 칠레는 국내총생산(GDP) 중 제조업의 비중이 17%(한국 28%)에 불과하다. 북부 아리카 지역 등 일부를 빼면 산업공단이 없다. 대부분의 공산품을 수입에 의존하는 이유다. 제조업 수출도 표백펄프, 제재목, 포도주, 어분, 메탄올 등 농림수산물 가공제품이 태반이다. 산업의 원천은 세계 공급량의 40%에 이르는 구리다. 지난해 333억달러로 전체 수출액의 58%를 차지하며 최대 무역흑자를 견인했다.2004년 파운드당 1.30달러이던 국제 구리값이 지난해 2.27달러로 뛴 덕이다. 연어도 지난해 노르웨이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22억달러어치를 수출했다. 포도·아보카도 등 농산물도 경제의 큰 축을 담당한다. 서비스업에서는 유통과 통신, 금융이 강세를 보인다. 한국처럼 칠레에서도 카르푸 등 다국적 유통기업들이 팔라벨라, 파리스, 리플레이, 리데르, 에코노, 알마크, 소디막 등 경쟁력 높은 토착기업에 밀려 철수했다. 이동통신도 다른 중남미 국가들과 달리 텔레포니카 모빌, 엔텔PCS, 클라로 등 3개 토착기업이 시장을 100% 차지하고 있다. ●선택과 집중…1차 산업에서 3차 산업으로 칠레는 무역 빗장을 건 다른 중남미 국가와 달리 1970년대에 개방과 자유경쟁 시장체제를 구축했다.73년 쿠데타로 집권한 피노체트는 ‘시카고 학파’를 대거 기용해 개방정책을 폈다. 그 결과, 경쟁력이 없는 제조업은 몰락했지만 질 좋고 값 싼 공산품들이 들어와 국민들의 생활은 나아졌고 1,3차 산업도 안정 속에 성장할 수 있었다.90년 정권 교체 이후에도 이런 기조는 이어져 2003년에는 모든 수입상품에 일괄적으로 6%의 단일관세만 적용하고 있다. 각종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전체 평균 관세율이 1%대에 불과하다. 현재 56개국과 17건의 FTA를 맺고 있다. ●IT와 BT로 도약 칠레는 북유럽의 핀란드를 개발모델로 설정했다. 한선희 산티아고 무역관장은 “통신·화학·제약 등 IT와 BT를 강화하기 위해 핀란드를 벤치마킹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면서 “IT기업에 최고 70만달러까지 지원하는 생산진흥청(CORFO)의 ‘이노바 칠레’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라고 말했다. 자체 기술로 만든 고속도로 요금징수 시스템은 이런 노력의 결실이다. 산티아고에서 발파라이소로 가는 1시간 거리 고속도로에는 톨게이트가 없다. 과속감시 카메라처럼 생긴 장치가 도로 곳곳에 세워져 차량 안에 부착된 센서와 감응, 자동으로 요금을 기록한 뒤 매월 은행계좌를 통해 징수한다. 하지만 이런 IT 기술력을 바탕으로 올 초 추진한 ‘트란 산티아고’(산티아고 교통개혁) 프로젝트는 오히려 대혼란을 가져와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하는 상황을 맞기도 했다. ●투명성 높은 사회 카를로스 에두아르도 칠레 외국인투자유치위원회 부위원장은 “칠레의 진정한 경쟁력은 대외개방 외에 정치·사회적 안정, 공공부문의 투명성과 청렴성, 선진국 수준의 치안 등에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국제투명성기구 발표 부패인식지수에서 세계 20위(한국 42위)에 올랐고 지난해 산티아고의 인구 10만명당 살인범죄율도 2명(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48명)에 그쳤다. 부가가치세율이 19%나 되지만 조세행정이 철저해 구멍가게에서조차 영수증을 내주는 게 일반화돼 있다. 하지만 빈부격차는 사회통합의 걸림돌이다. 칠레 가톨릭대 학생 로만 조시프는 “부의 편중과 교육의 불균형 해소가 칠레 성장의 관건이라는데 대부분이 의견을 같이 한다.”면서 “중산층 이하 자녀의 교육수준 향상을 위해 재정지원을 확대해야 하지만 현재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windsea@seoul.co.kr ■‘칠리안’ 특징은 |산티아고(칠레) 김태균특파원|산티아고 공항에서 미국인들은 특별대우를 받는다. 미국인 전용 입국심사대가 따로 있다. 초강대국에 대한 배려가 아니다. 별도의 입국세를 받기 위해서다.“미국이 우리 국민에게 비자를 요구하니 우리도 미국인에게 비자 발급비용에 해당하는 만큼의 돈을 걷는다.”는 게 칠레 정부의 논리다. 칠레는 다른 나라보다 ‘반미감정’이 강하다.‘유럽의 후손’이라는 자부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과거 미국이 피노체트 독재정권을 지원한 데 대한 반감이다.2004년 산티아고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때 칠레 경호원들이 조지 부시 대통령을 따라 만찬장에 들어가는 미국측 경호원들을 제지하다 싸움이 크게 붙었던 것은 유명하다. 중남미 다른 나라들과 동일선상에서 비교되는 것 역시 좋아할 리가 없다.“중남미에서 가장 잘 산다고 으스대고 다른 나라를 무시하는 경향이 강해 질시를 받는다. 아르헨티나, 페루, 볼리비아 등 인접국들과 모두 사이가 좋지 않다. 일본에 대한 한국·중국의 국민감정과 비슷한 데가 있다.”(교포 장기현씨) 인구 중 백인이 29%로 아르헨티나와 함께 중남미에서 백인 비율이 가장 높다.60%에 이르는 메스티소(원주민·백인 혼혈)도 상당수가 육안으로는 백인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될 정도다. 스페인계와 독일계가 많아 정치·사회·경제 제도를 유럽에서 차용하는 경우가 많다. 감정적이고 친분을 중시하는 전형적인 중남미인들의 특징이 약한 반면 논리적·이성적이며 검소하고 신중한 편이다. 일부에서는 1800년대 중반에 대거 이주한 독일계의 영향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동양계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기도 하지만 한국·중국 등의 빠른 성장에 대해 부러움도 갖고 있다. 이곳의 가족중심 문화는 유명하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저녁에 서둘러 퇴근해 집으로 직행한다. 저녁에 아이들 데리고 산책하고 놀아주는 것이 남자들에게 관행화돼 있다. 여성들의 직장생활 비율이 높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내가 전업주부인 경우에도 하루종일 고생했으니 잠시 쉬라는 뜻의 배려라고 한다. 이런 관행이 간혹 회사의 잔업 등 요구와 충돌하기도 한다. windsea@seoul.co.kr ■비즈니스 환경은 |산티아고(칠레) 김태균특파원| 칠레인과 비즈니스를 하려면 높은 ‘언어의 장벽’을 넘어 꼭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다른 어느나라보다도 특히 그렇다는 얘기다. 스페인어권 국가들의 공통적 특징이긴 하지만 칠레에는 영어를 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길거리나 상점에서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칠레가 지리적으로 고립돼 있을 뿐 아니라 정규교육에 영어과목이 매우 빈약한 탓이다. 유럽을 종주국으로 생각하는 문화적 특성도 작용한다. 비즈니스를 할 때에는 스페인어가 기본이고 부득이하게 영어를 쓸 때에는 반드시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해야 한다. 칠레인들은 웬만해선 모험을 하지 않는다. 안전 위주의 신중한 거래가 철칙이다. 수입상의 시험주문의 개념도 다른 나라와 다르다.1회 시험주문을 해보고 품질이 확인되면 정식거래를 트는 게 보통이지만 칠레인들은 3회 시험주문이 보통이다. 기계·장비류는 통상 1∼2년간 시험해 본 뒤에 정식 거래를 시작한다. 오랜 철권통치의 여파로 사회에 아직 불신풍조가 강하다. 믿음을 주는 것이 그래서 더 중요하다. 설령 칠레인들이 미덥지 않더라도 속으로만 생각해야지 우리쪽에서 먼저 못 믿겠다는 식의 표정이나 몸짓을 하면 그걸로 거래협상은 끝이다. 코트라 산티아고 무역관 성기주 과장은 “구두로 협의한 내용은 나중에 번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모든 거래는 반드시 문서로 남겨야 한다.”고 말했다. “칠레가 우리보다 소득수준이 떨어진다고 얕잡아 보는 듯한 태도를 취하면 안된다. 페루, 볼리비아, 파라과이 같은 데서는 혹시 먹힐지 몰라도 자존심 강한 칠레인들에게는 상종 못할 사람이라는 인식을 주게 된다.”(교포 방민수씨·식당업) windsea@seoul.co.kr ■후안 코이만스 칠레카톨릭대 교수 인터뷰 |산티아고(칠레) 김태균특파원| 칠레 최고의 명문으로 통하는 칠레가톨릭대학 경제학부 4층 연구실. 후안 코이만스 교수는 지구 반대편에서 온 ‘코레아’의 기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꽤 많았던 모양이다. 예정된 인터뷰 시간을 1시간 이상 넘기면서 쉴 새 없이 설명과 주장을 쏟아냈다. 무엇보다도 칠레가 ‘제조업 없는 농산·광산물 수출국’이란 일부의 인식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칠레의 포도와 아보카도가 왜 좋은지 아십니까. 단순히 기후 때문에 그런 게 아니지요. 우리나라 아보카도 농장에서는 물방울을 이용한 첨단농법을 씁니다. 과학과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우리만의 ‘과일 제조업’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는 컴퓨터·네트워크 등 뉴 테크놀로지에서도 세계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칠레가 항공기 제작에 들어가는 첨단 전자장비 기술을 수출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코이만스 교수는 칠레 경제가 성장의 기틀을 마련한 계기로 ‘혁신적인 실험’을 꼽았다. 다른 어떤 중남미 국가도 시도하지 않았던 개방경제를 1970년대에 과감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성장-위기-성장-위기의 악순환을 무역장벽 완화와 자유시장체제 도입으로 끊은 것이지요.80년대에 시작한 세제·재정 혁신과 사회보장제도·노동시장 개혁은 거기에 촉매 역할을 했습니다.” “경제부문의 성공은 사회의 안정으로도 이어졌습니다. 빈곤계층 비율이 90년대 초반 전 국민의 절반 가량에서 지금은 18% 정도로 줄었고 생계 자체가 곤란한 극빈층은 5% 수준으로 급감했습니다.” 코이만스 교수는 이 대목에서 ‘피노체트 17년 독재’를 언급했다.“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누가 뭐래도 국민을 탄압한 철권통치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경제성장의 동력이 그의 통치기간에 나왔던 것도 일정부분 사실입니다. 자유경제, 개방경제, 관료사회 숙정 등은 잘 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공기업 민영화는 경제개혁의 완성작이었습니다.” 그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과 관련해 “한국의 일부 산업분야는 FTA로 상당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면서 “농업에서 강점을 갖고 있는 칠레조차 FTA로 생과일 수출에서는 득을 봤지만 과일 통조림 수입에서는 큰 손해를 입었다. 시장개방으로 인한 산업간 득실 차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며 이를 어떻게 조화롭게 상쇄시켜 나가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windsea@seoul.co.kr
  • [이색거리 탐방] (12) 금천구 가산동 패션타운

    [이색거리 탐방] (12) 금천구 가산동 패션타운

    “창고같은 아웃렛은 가라.” 서울 금천구 가산동 서울디지털산업 2단지 일대 금천패션타운에 변화의 바람이 거세다. 유명브랜드의 의류를 반값이하에 살수 있는 곳으로 유명한 이곳에 ‘쇼핑의 편리함+고급화’ 바람까지 불고 있다. 상인들은 이 같은 고급화가 가격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백화점이야 아웃렛이야?” 2001년 7월 문을 연 후 4000만명의 고객이 매장을 찾았다는 마리오 아웃렛은 금천패션타운의 고급화를 이끈 강자다. 하루평균 내점객도 2만 5000명. 폴로랄프로렌부터 노티카, 토미힐피거, 버버리 등 국내외 내로라는 유명 의류브랜드는 대부분 입점해 있다.2004년과 2006년 마리오 Ⅱ·Ⅲ를 잇따라 오픈하는 등 ‘거침없는 투자’를 진행 중이다. 전체고객 중 65%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20∼30대 여성고객으로 물건이 많고 다양하기로 유명하다. 독특한 건물외관, 넓은 주차공간, 패밀리 레스토랑형 푸드코트 등으로 금천패션타운의 경쟁력 강화를 이끌고 있다. 올 2월 초 문을 연 ‘더블유몰(W-mall)’은 층마다 고객층을 달리하는 백화점식 매장구성으로 눈길을 끈다. 과거 아웃렛 매장에서는 볼 수 없는 전략이다. 금천패션타운 내 유일한 상업전용시설로 지하 4층, 지상 14층에 국내 300개 브랜드가 입점해 규모도 메머드급이다. 아웃렛은 1층부터 6층까지. 지하 1층엔 대형마트와 푸드코트,7층엔 전문식당가를 유치했다. 이외에도 클리닉센터와 스포츠센터, 뷰티센터, 스카이라운지까지 아웃렛인지 백화점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지난해 문을 연 여성 캐주얼메이커 타임과 시스템, 마인 등으로 유명한 한섬의 팩토리스토어는 건물의 심플한 디자인이 흡사 청담동의 유명디자이너의 매장을 옮겨놓은 듯하다. 하지만 가격은 ‘콧대’가 높지 않다. 대부분의 제품이 60∼70%세일이지만 일부품목은 이미 세일된 가격에서 다시 30%까지 추가세일을 한다. 길건너 진도매장은 모피와 가죽제품을 정상가의 40%(비시즌에 한함)까지 싸게 살수 있는 보기드문 매장이다. 진도모피, 엘페, 진도옴므, 우바 등을 일반매장에 비해 5% 이상 추가할인한다. 나이키부터 필라, 아디다스 등 스포츠 의류 매장이 많은 만승아웃렛은 남성들과 10대들이 많이 찾는다. ●금천패션타운은 금천패션타운은 구로공단 2단지를 중심으로 지난 97년부터 자생적으로 커져갔다. 당시 IMF로 경쟁력을 잃은 의류제조업들 사이에서 할인매장은 생존전략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공장터에 최소한의 인테리어와 판매대를 만들어 싼값에 의류를 판매하는 형태였다. 하지만 유명메이커를 반값이상으로 살수 있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손님이 줄을 이었고 매장도 늘어갔다. 특히 2000년 마리오를 시작해 패션아일랜드, 더블유몰 등 대형 전문아웃렛 등의 등장은 이곳 패션타운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는 1㎞정도의 ‘패션의 거리’ 안에 570여개업체가 자리잡고 있다. ●발전 가로막는 걸림돌 하지만 패션단지의 발전을 가로막는 규제도 적지않다. 사실 이곳 공단은 국가가 수출산업을 육성을 위해 1964년부터 73년까지 10년여에 걸쳐 조성한 수출산업공업단지다.‘산업집적활성화 및 공장설립에 관한 법률(산집법)’에 따라 단지 내의 건물은 건물 면적의 20% 정도만 매장을 만들 수 있다. 이런 탓에 대부분 아웃렛들은 1∼2층만을 의류매장으로 쓰고 3∼4층은 비워두는 일이 많다. 또 원칙적으로 건물 내에 공장을 가지고 있는 브랜드만 건물에 매장을 차릴 수 있다. 예를 들어 A건물 1층에서 폴로와 나이키, 아디다스, 푸마 등을 팔려면 건물 내에 해당되는 4개사의 공장이 모두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이유로 수십억원의 벌금을 물어가며 불법영업을 감행하는 비정상적인 구조가 되풀이되고 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마리오’ 박계홍 팀장 실속쇼핑법 고수들은 어떻게 쇼핑을 할까.‘대충 사도 반값’이라는 아웃렛 매장에서도 쇼핑고수들의 ‘내공’은 빛나게 마련이다. 여성의류 구매 10년 경력의 마리오 아웃렛 박계홍(49)팀장이 권하는 실속 쇼핑법을 정리해봤다. ▲1∼2개월 전에 구매하라 물건이 들어오는 시즌 1∼2개월 전에 미리 쇼핑을 하면 물량이 풍부하고 선택의 폭이 넓다. ▲같은 브랜드도 매장마다 가격이 다르다 업체만 500개가 넘는 만큼 곳곳에 동일 브랜드가 많다. 하지만 같은 브랜드 같은 제품도 매장마다 할인율 차이가 있다. 결국 발품은 필수다. ▲베이직 스타일이 안전하다 특성상 시즌이 끝난 상품이나 이월상품이 많아 잘못하면 유행이 지난 옷을 구입할 수 있다. 유행에 민감한 스타일은 옷장만 차지할 위험이 높다. ▲환불·교환 여부 확인을 모든 매장에서 환불이나 교환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매장에서 반드시 물어봐라. ▲입어보고 꼼꼼히 살펴라 아무리 싸도 자신과 어울리는지는 별개문제다. 또 아웃렛 제품 중엔 일부엔 경미한 하자가 있는 제품도 있다. 제조일자, 원단, 재봉질, 때나 얼룩까지 매장보다 더 꼼꼼하게 살펴라. ▲두 번 생각하되 맘에 들면 바로 사라 좋은 제품은 남의 눈에도 좋다. 두세 번 생각해본 후 충동구매가 아니란 확신이 들면 사이즈와 해당제품이 있을 때 지체 말고 구매하는 것이 좋다.
  • 한국음악 전도사 프로바인 美 메릴랜드大교수

    한국음악 전도사 프로바인 美 메릴랜드大교수

    |워싱턴 이도운특파원|“한국 음악의 힘과 매력은 ‘한’과 같은 정서가 아니라 노래와 연주에서 표현되는 고도의 테크닉에 있습니다.” 미국 음악학계의 대표적인 한국 음악 전문가인 로버트 프로바인 메릴랜드 대학 음악학과 교수는 지난 15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음악은 서양인들도 빠져들게 만드는 강한 흡인력과 호소력을 갖고 있다.”면서 “독특한 3박자 리듬을 앞세워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 시장에 한국 음악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프로바인 교수는 또 “한국의 음악은 국악과 한류, 그리고 둘이 결합된 새로운 음악 등 세 갈래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프로바인 교수는 1966년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뒤 이듬해 군에 입대, 군시절 16개월 동안 주한미군으로 복무하면서 한국의 음악을 접하게 됐다. 처음 들은 한국 음악은 경기 파주시 봉일천의 캠프 하우스에서 함께 복무했던 전우가 빌려준 LP판에 담긴 소리꾼 임방울의 ‘쑥대머리’였다. ▶한국 음악에 대한 첫 느낌은. -임방울의 쑥대머리 LP는 사실 노랫소리보다 지직거리는 소음이 더 컸다. 그러나 노래를 들으면서 묘한 매력을 느꼈다. 처음부터 한국 음악에 빠졌던 것은 아니지만 군복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나의 길은 한국 음악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 빠져들었다. ▶한국 음악의 특징은. -국악의 독특한 장단은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하나, 둘, 셋. 하나, 둘, 셋’하는 세박자의 장단은 정말 독특하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나라가 어떻게 전혀 다른 음악을 발전시킬 수 있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국악은 호소력이 매우 강하다. ▶한국의 전통음악과 현대음악의 차이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같은 시대 음악들도 차이가 많다. 조선시대 궁중음악과 산조, 판소리는 같은 시대의 음악이지만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국악에 근대·현대 음악까지 범위를 넓히면 차이점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진다. ▶한국의 대중가요도 즐겨 듣는가. -요즘 유행하는 한류 음악은 좋아하지 않는다. 음악적으로 판소리가 훨씬 매력적이다.(그는 한국의 대중음악을 계속 ‘한류’라고 지칭했다.) ▶수업 중에 한국 음악을 듣는 미국 학생들의 반응은 어떤가. -다양하다. 얼마전 150여명이 수강하는 학부 강의에서 장구를 연주했더니 학생들의 반응이 아주 좋았다. 연주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악기가 발산하는 매력 때문이다. 한국 음악은 멜로디보다 리듬이 주는 호소력이 강하다. ▶판소리의 창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동료인 성악교수가 판소리를 듣고 목에 너무 많은 무리가 가는 창법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박동진 명창은 평생 노래를 했다. 판소리 가수들은 목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훈련하고 관리하는 과학적인 노하우가 있는 것이다. 헤비메탈 가수들은 30대만 넘기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한국 젊은이들이 한류에만 몰두해 국악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나. -70년대에 국악을 함께 공부했던 학생은 대부분 외국인이었다. 당시에는 장구 하나를 구하기 위해 전라도까지 내려가야만 했다. 나를 가르치던 선생님은 내가 한국을 떠날 당시 ‘한국의 음악은 한국의 젊은이들에 의해 지속되기는 어려울 것 같고, 당신과 같은 외국 유학생들이 지키지 않는 한 사라질지도 모르겠다.’고 한탄하셨다. 그러나 78년 사물놀이가 탄생한 후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국악에 관심을 보였다. ▶사물놀이의 매력은 무엇일까. -사물놀이의 변화무쌍한 리듬 변화는 세련되면서도 호소력이 강하다. 서양인들에게 사물놀이가 낯설게 들리지 않는다. 특히 조그만 타악기 네 개를 들고나와 수많은 청중을 압도한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정서의 차이 때문에 외국인이 국악을 이해 못하지 않을까. -정서는 국가나 문화를 초월한다. 외국인에게 판소리가 어려운 것은 정서의 차이가 아니라 음을 만들어내는 테크닉과 언어 때문이다. ▶한국에서 음악을 수입해 미국 시장에 판다면 어떤 음악을 선택하겠는가. -한류를 수입해서 팔겠다. 그러면 큰 돈을 벌 것이다(웃음). 동시에 한국 전통음악의 진가를 알리기 위해 국악 음반도 수입할 것이다. 큰 돈은 버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프로바인 교수는 누구 지난 2월 워싱턴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한국 음악:최신화된 전통’이란 주제로 강연하는 등 미국에서 한국 음악을 알리기 위해 노력중이다. 1960년대 후반 쑥대머리를 들은 이후 한국 음악에 관심을 갖고 정읍 등 전국을 다니며 소리꾼과 고수로부터 창과 북 다루는 법 등을 배웠다. 하버드 음대에서 동북아 지역 음악으로 박사학위 과정을 밟던 73년부터 75년 사이에 다시 한국을 방문, 논문 준비를 했다. 그의 주변은 온통 한국적이다. 연구실에는 장구 3개가 놓여 있었다. 국악 FM도 듣는다. 부인 진은 서울시립교향악단 첫 외국인 연주자였다. 그의 자랑거리는 평생 모은 한국 음악 자료들.LP와 CD, 그리고 카세트 테이프가 300여점씩이다. dawn@seoul.co.kr
  • [모험과 도전-변신에 성공한 기업들] (2) 아모레퍼시픽 ‘설화수’

    [모험과 도전-변신에 성공한 기업들] (2) 아모레퍼시픽 ‘설화수’

    “끝에다 ‘수’를 붙이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요? 생수 이름 같기도 하고.‘엑설런트’나 ‘어드밴스트’ 같은 건 어때요.” “용기가 촌스럽게 노란색이 뭡니까, 요즘 소비자들 안목이 얼마나 높은데.”1996년 가을 아모레퍼시픽 회의실은 날마다 진통의 연속이었다. 회사의 명예를 내건 프리미엄 화장품 출시 예정일(97년 3월)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사내의 갑론을박은 잦아들지 않았다. 설화수(秀)의 산고(産苦)는 아모레가 만들어낸 어떤 화장품보다도 길고 강했다. 지난해 설화수의 매출액은 4470억원.2위 회사의 화장품 전체 매출을 웃도는 규모로 국내 화장품시장 단일 브랜드 부동의 1위다. ●“한방기술을 화장품에 담아내자” 설화수의 개발이 시작된 건 94년이었다. 당시 87년부터 유지돼 온 ‘설화’란 한방화장품이 있었지만 서성환(2003년 별세) 회장은 성에 차지 않았다.“‘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우리만의 한방기술을 화장품에 담아내자.’고 그토록 노력했는데 결국 꿈은 이뤄질 수 없는 것인가.” 실제로 아모레의 한방화장품 개발은 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 회장의 개인적 신념도 작용했다. 인삼으로 유명한 황해도 개성 출신인 그는 인삼의 효능에 대해 종교에 가까운 믿음을 갖고 있었다.73년에 나온 ‘진생 삼미(蔘美)’는 노력의 첫 결실이었다. 진생 삼미는 세계 34개국에 ‘트루삼’(일본) 등 브랜드로 2000만달러어치를 수출했을 만큼 국내외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삼미’(75년),‘삼미진(眞)’(81년) 등 후속 리뉴얼 제품을 선보였지만 ‘인삼 화장품’은 일반 화장품과 겨룰 만큼의 시장규모를 형성하지 못했다. “인삼만으로는 안된다. 한방과학을 접목한 진짜를 개발하라. 내용물도, 용기도 모두 바꿔라.” 80년대 중반 아모레는 ‘삼미’의 한계를 뛰어넘을 신제품 개발에 착수한다. 하지만 한의대에서조차 피부와 한방을 접목한 연구는 거의 없던 시절, 최고의 참고서인 ‘동의보감’에도 피부만을 위한 처방은 나와 있지 않았다. 모든 연구원이 중국·일본의 책까지 뒤져가며 밤샘 공부를 한 끝에 500여종의 물질을 추려냈다. 여기에서 향이 나쁜 것, 색이 너무 진한 것, 쉽게 변질되는 것 등을 빼고 오랜 시간을 달여내 87년 피부에 아름다움의 눈꽃을 피운다는 뜻의 ‘설화(雪花)’라는 이름으로 첫 제품을 내놓았다. 하지만 시장 반응은 싸늘했다. 출시 10년 뒤인 1996년의 매출액이 50억원 수준이었으니 극소수 마니아들만 찾았던 셈이다. ●최고급 한약성분·과학기술 접목 서 회장은 94년 2월 이옥섭(현 기술연구원장·부사장) 연구팀장 등 핵심 연구진을 한 자리에 불렀다.“국내 최고의 기술진을 구성하라. 비용은 얼마가 들어도 좋다. 우리만의 최고급 한방화장품을 개발해야 한다. 지금 못 만들면 프리미엄 화장품 시장을 랑콤, 에스티로더에 내주게 되고 만다.”이 원장 등 아모레 연구진은 경희대 한의대를 찾아갔다. 화장품업계의 최고와 한의학계의 최고가 만나 더 높은 시너지효과를 내자고 요청했다. 몇 차례의 회의에서 한방 ‘오행(五行·목화토금수) 이론’을 접목하기로 했다. 본초강목과 신농본초경 등 한방고전에서 3000여가지 성분을 1차로 선정했다. 이 중 163가지를 추출해낸 뒤 다시 30가지를 엄선했다. 실험실에서 오행의 특성별로 약재를 분류해 1차 실험을 한 뒤에는 직접 사람의 몸에 실험을 했다. 연구원들이 자발적으로 실험대에 앉았다. 피부를 찌르고 떼어내고 전기를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몇몇 연구원들은 부작용으로 병원 신세도 졌다. 결국 목(木·피부세포 보호)의 참작약을 비롯해 화(火·피지분비억제·연꽃), 토(土·피부항상성·옥죽), 금(金·백합·미백), 수(水·지황·재생 및 노화억제)에 해당하는 각각의 약재가 선택됐다. “약재 선택에 우리만의 철칙을 세웠습니다. 우리 농가에서 재배가 가능한 것만을 고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녹용·사향·주목·음양곽 등 구하기 힘든 것은 처음부터 배제했지요. 비싼 가격도 그렇지만 원료를 구하려다 자연을 파괴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이었습니다.”(이옥섭 원장) 한약재를 강한불, 중간불, 약한불을 번갈아가며 18시간동안 달이는 노하우는 수천번의 시행착오 끝에 나왔다.1시간 달여보고 샘플을 채취하고 1시간10분을 달여보고 다시 채취하는, 원시적인 방법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달이는 시간이 18시간이 안 되면 효능이 떨어지고 그 이상이면 성분이 파괴된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고품질·서비스로 승부 마케팅도 차별화했다. 사람을 모델로 쓰지 않고 TV광고도 하지 않기로 했다. 가격은 비싼 원료값 등을 반영해 기존 아모레 제품의 두배 수준으로 정했다. 출시에 임박해 생각못한 걸림돌이 생겼다. 몇몇 백화점에서 설화수를 들여놓지 않겠다고 통보했다.‘고급 한방’이란 게 백화점과 어울리지 않고 용기가 촌스럽다는 등 사내 격론에서 나왔던 반론과 비슷한 이유들이었다. “품질에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델료,TV광고료에 들어갈 비용으로 회사사보(향장)를 통해 샘플을 제공하기로 했지요. 문제는 샘플을 일일이 손으로 붙여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 수량이 35만개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아찔합니다.”(최백규 상무) 샘플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써 본 사람들의 주문이 밀려들면서 백화점마다 품절사태가 빚어졌다. 그들의 평가가 이어지면서 저절로 구전(口傳)마케팅이 이루어졌다. 설화수의 성공은 외국 화장품에 형편없이 밀리던 국산 화장품업계가 그들에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찾는 계기였다. 국내 화장품시장에 프리미엄급의 보편화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기도 했다. 김태균기자 windsea@seoul.co.kr
  • [박성서의 7080 가요 X파일]만능 엔터테이너 조영남(2)

    가수 조영남씨의 노래들 속에는 다분히 자전적인 요소가 담겨 있다. ‘1·4후퇴 때 피란 내려와 살다 정든 곳, 태어난 곳은 아니었지만 나를 길러준 고향 충청도’. 노래처럼 그는 1945년 해방둥이로 황해도 남천에서 태어났다.1·4 후퇴 때 피란 내려와 충청도 예산의 삽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여보, 무교동 어느 음악다방에서 당신과 내가 처음 만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로 시작되는 ‘여보’에도 그의 음악과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배경은 젊은이들의 문화를 주도했던 음악감상실 ‘쎄시봉(C´est Si Bon)’, 상대는 첫사랑 윤여정씨다. 이곳에서 만나 활동을 시작한 이들은 가수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김도향씨 등 이른바 1970년대 ‘청년문화’의 주역들이며 이들과 어울려 통기타 문화의 밑그림을 그렸다. 그뿐인가. 지난 2001년에 발표, 최근 네티즌으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는 ‘은퇴의 노래’.‘제발 나같이 오래된 가수한테 은퇴란 말은 마세요. 몸은 비록 최희준 선배지만 마음만은 HOT랍니다.’며 자신의 마음을 호소하고 공감을 이끌어낸다. 그는 1973년 첫 개인전 이래 꾸준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음악은 대중성이 있어야 하지만 미술은 독자적이고 독창성이 있어야 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특이하게도 화투를 주 오브제로 사용하다가 1980년대 말부터는 바둑판, 초가집, 바구니, 태극기 등으로 소재를 넓혔다. 그러나 정작 고스톱은 못 친다. 바둑 또한 못 둔다. 최근엔 입체 콜라주로까지 영역을 확대, 설치미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무게 잡기’를 싫어하는 듯한 그의 거침없는 행동, 너무 특출나 오히려 진지해 보이지 않는 면 때문에 손해도 많이 보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드는 조영남씨.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며 동시에 여러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한양음대 2년 중퇴, 서울대 음대 3년 중퇴, 그리고 미국 트리니티침례신학교의 졸업장과 목사 자격증을 받은 뒤 1981년 귀국, 첫 저서 ‘어느 한국 청년이 본 예수’를 발간했다. 이어 ‘조영남 양심학(1983)’ ‘놀멘 놀멘(1994)’ ‘예수의 샅바를 잡다(2001)’ 등에서 예의 해박함과 자유분방한 논리를 보여준다. 스스로 억제시키지 않으면 오히려 곤란할 것 같은 강렬한 개성, 본인이 하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해내고야 마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러다 보니 대중들로부터 비난도 동시에 많이 받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번 출간한 저서,‘맞아죽을 각오로 쓴 친일선언’의 파장이었다. 민감한 시기였던지라 더욱 논란이 되었다. 그 여파로 KBS-TV ‘체험 삶의 현장’을 비롯한 모든 방송활동을 한동안 중단했었지만 1년7개월 만인 지난해 11월, 본격 방송 DJ로 복귀했다. 현재는 최유라씨와 함께 MBC 간판 프로그램 ‘지금은 라디오시대’를 진행하고 있다. 변화무쌍한 발상의 전환을 지닌 자유주의자, 조영남씨의 활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대중음악평론가 sachilo@empal.com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