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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유구(琉球) 왕국/이용원 수석논설위원

    제주 국립박물관이 다음달 26일까지 여는 ‘탐라와 유구왕국’ 특별전과 관련해 아주 주목할 만한 학설이 나왔다. 일본 오키나와 섬에 15∼19세기 존재한 유구(琉球)왕국의 기초를 닦은 이들이 고려 때 몽골 침략에 끝까지 저항한 삼별초 군인들이라는 주장이다. 그 근거는 ‘癸酉年高麗匠人瓦匠造(계유년고려장인와장조=계유년에 고려의 장인이 만든 기와)’라 새긴 기와들이 오키나와 우라소에 성터에서 발굴됐는데, 그 모양과 제작 기법이 전남 진도의 용장산성에서 출토된 13세기 기와와 같은 계통이라는 것. 용장산성은 1270년쯤 축조된 고려시대의 석축산성. 강화도에서 옮겨온 배중손 장군이 ‘승화후 온’을 왕으로 모시고 삼별초를 이끌며 대몽항쟁을 한 근거지이다. 학설대로라면, 여·몽연합군에게 패한 삼별초의 생존자들이 무작정 배에 올랐다가 오키나와까지 흘러갔으며, 생존자 중에 기와장인이 있어 계유년(1273년)에는 비로소 대형 건물을 짓고 정착한 것이라 하겠다. 삼별초 군인들이 뱃길로 5000리가 넘는 오키나와까지 간다는 게 가능할까. 물론 가능하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선조 22년(1589년) 진도에 표착(漂着)한 오키나와 사람 30명을 동지사 편에 딸려 중국으로 보내 그곳에 온 오키나와 사절에게 넘겨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오키나와에서 진도로 표류했으면 진도에서 오키나와로 가는 일도 당연히 가능했을 것이다.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와 문화·전통이 다르다. 아울러 한국과의 역사적 관계를 매우 중시한다. 유구국 왕성인 수리성 정전에는 ‘삼한(三韓)의 빼어남을 모으며, 대명(大明)·일역(日域)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내용의 명문이 있다. 문화를 수용하되 한국을 으뜸으로 삼고 중국·일본을 그 다음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삼별초는 외적의 침략에 맞서 백성과 나라를 지키느라 온몸으로 싸웠다. 그 군인들이 비록 패했지만 항복하지 않고 후일을 도모하며 어두운 밤바다를 빠져나갔다면? 그래서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오키나와에서 지배층으로 자리잡아 새 왕조를 여는 데 한몫을 했다면?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진도-오키나와 연결고리를 확인하는 후속 연구가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이용원 수석논설위원 ywyi@seoul.co.kr
  • 李의 두형 땅60만㎡ 보유 논란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경선 후보의 가족과 관련된 부동산 의혹이 또다시 불거졌다. 이 후보의 큰형 이상은(74)씨와 둘째형 이상득(72) 국회부의장이 전국 18곳에 각각 50만 6845㎡와 10만 2819㎡ 등 총 60만 9664㎡의 땅을 소유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9일 경향신문이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이씨 형제가 갖고 있는 이천군 일대 땅 54만 4526㎡ 중 48만 6023㎡는 1972∼73년에 집중적으로 매입됐다. 현대전자의 전신인 국도건설이 인근 부발음 아미리 땅을 대량으로 매입하기 직전이다. 이 과정에서 이 부의장은 부인 최모씨 명의로 72년부터 86년까지 호법면 일대 논, 밭 6만 3655㎡를 샀다. 최씨는 외지인의 논, 밭 매입을 금지하고 있는 농지법을 피하기 위해 이천시 호법면 송갈리 산34로 주소를 옮기기도 했다. 이상은씨는 2004년에 이천 땅 전부를 자신의 아들이 아닌 이 부의장의 장남 지형씨에게 양도했다. 이 부의장측은 “이명박 후보 아버지와 상은씨가 73년 낙농 육성정책에 따라 이천군으로부터 불하받아 산 땅이며 팔아 이득 본 게 전혀 없다.”면서 “상수원보호구역으로 묶여 팔리지 않자 동생 아들인 지형씨에게 증여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상은씨가 77년에 산 제주 서귀포시 상효동 과수원 6013㎡에 대한 의혹도 제기됐다.78년 중문관광단지 개발이 시작되면서 1년 만에 땅값이 크게 올랐기 때문이다. 또한 90년대 말까지 이 땅의 관리비를 동생인 이상득 부의장이 내준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 이 부의장측은 “80년대 말 큰형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어 지원한 것뿐”이라며 “지원액도 매월 25만원에서 50만원 정도였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상은씨는 87년에 이명박 후보의 처남인 김재정씨와 함께 도곡동 땅을 사들이고 현재 다스의 전신인 대부기공을 설립했다. 한상우기자 cacao@seoul.co.kr
  • 엔화 6월 실질실효환율 93.4 85년 ‘플라자합의’ 보다 1.4↓

    |도쿄 박홍기특파원|엔화의 실질적인 가치가 지난 1985년 9월 ‘플라자 합의’ 당시 94.8(1973년 3월의 엔화 가치를 100으로 기준해 환산한 가치)에 비해 1.4나 떨어졌다.21년 9개월 전보다 더 약세인 셈이다. 4일 일본은행에 따르면 미국 달러화, 유로화, 한국 원화 등 주요 15개국의 통화에 대한 엔화의 종합적인 가치를 보여주는 지표인 ‘실질실효환율’은 지난달 93.4를 기록했다. 엔화의 실질실효환율은 ‘1973년 3월=100’을 기준으로 수치가 높으면 ‘엔화 강세’, 낮으면 ‘엔화 약세’를 뜻한다. 플라자 합의는 지난 1985년 주요 5개국(G5) 재무장관들이 뉴욕에 모여 ‘달러화의 강세, 엔화의 약세’를 바로잡기 위한 결의다. 현재 엔의 환율은 플라자 합의 당시 1달러당 240엔 안팎에서 1달러당 123엔대에 거래될 정도로 반토막이 난 상태다.hkpark@seoul.co.kr
  • 공무원연금등도 개혁 속도낼듯

    국민연금법 개정안의 6월 임시국회 처리가 확실시됨에 따라 공무원연금과 사학연금, 군인연금 등 특수직역 연금 개혁을 위한 정부 움직임도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특수직역 연금들은 국민연금보다 기금 고갈시점이 빠를 뿐 아니라 국민연금 개혁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꾸준히 개혁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기 때문이다. 장병완 기획예산처장관은 지난해 10월 방송에서 “연말에 국민연금 개혁안이 나오면 이 방향에 맞춰 군인연금·사학연금도 개혁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연금 개혁의 기본방향이 국민연금처럼 보험료는 그대로, 또는 더 많이 내고 연금은 더 적게 받는 것이 될 수밖에 없어 논의가 진행되면 공무원과 교직원, 군인의 반발도 거셀 것으로 예상된다. 행정자치부의 공무원연금은 2002년에 이미 기금이 고갈됐으며 현재 상태로라면 2030년 적자폭이 18조 1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교육인적자원부의 사학연금도 2029년이면 기금이 고갈되고 2030년 적자폭이 5조 7500억원으로 예상되며 1973년 이미 기금이 고갈된 국방부의 군인연금도 2030년에는 1조 9830억원의 적자가 예상된다. 이들 연금에 대한 개혁 논의는 공무원연금을 시작으로 이미 시작된 상태다. 행자부는 지난해 연금제도발전위원회를 통해 마련한 시안을 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에 제시했으며 양측은 내달 5일 시작되는 단체교섭에서 이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다. 하지만 공무원노총 전국공무원노동조합협의회 등은 정부의 공무원연금 개혁안에 대해 이미 전면거부 의사를 밝혔으며 연금 부실의 책임을 가입자들에게 떠넘기는 개혁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어서 첨예한 대립이 예상된다.연합뉴스
  • 롯데그룹 ‘간판 전쟁’

    롯데그룹이 자사 브랜드를 사용하는 비계열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28일 롯데그룹에 따르면 롯데그룹 계열사인 호텔롯데, 롯데쇼핑, 롯데제과는 지난 26일 롯데관광그룹 계열사인 롯데관광개발을 상대로 서비스표권 침해금지 등 청구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냈다. 롯데그룹측은 “원 안에 로마자 ‘L’ 3개가 겹쳐진 이른바 ‘스리엘’ 마크를 롯데관광이 사용해선 안 된다.”면서 “이와 관련된 간판을 없애라.”고 요구했다. 이 마크는 호텔롯데가 1977년 서비스표 출원을 하면서 쓰기 시작했다. 현재 호텔롯데 등 3개사가 소유권을 갖고 있다.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막내 여동생인 신정희씨의 남편 김기병 회장이 롯데관광을 운영하고 있다. 롯데관광은 2005년 롯데그룹에서 분리된 뒤에도 롯데 마크를 사용해 왔다. 롯데그룹은 지난달 여행업 진출을 선언하고 ‘롯데JTB’라는 회사를 설립하면서 롯데관광과 브랜드가 겹치는 문제가 발생하자 소송을 냈다.롯데그룹측은 “그동안 롯데관광에 우리 마크의 사용을 중지하라고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사용해 소비자들이 롯데관광을 롯데 계열사로 오인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롯데관광 관계자는 “롯데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은 롯데가 그룹으로 형성되기 전인 1973년 신격호 회장이 호텔업과 분리해 관광 여행업은 이미 월드여행사를 경영하던 여동생 부부에게 롯데 브랜드를 사용하도록 한 약정에 근거한 것”이라고 반박했다.김태균기자 windsea@seoul.co.kr
  • “오늘은 점원, 내일은 손님” 뉴욕의 인기 슈퍼마켓

    “오늘은 점원, 내일은 손님” 뉴욕의 인기 슈퍼마켓

    “오늘은 손님이 아니라 점원입니다.” 최근 미국 뉴욕의 한 슈퍼마켓이 독특한 운영방식을 도입, 시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이 슈퍼마켓은 일정한 시간을 1일점원으로 일하면 다음날 손님으로 와서 보다 싼값으로 물건을 구입할 수 있다. 겉 모습은 여느 슈퍼마켓과 다를 바 없지만 ‘점원이 곧 고객’이라는 독특한 운영방침이 많은 손님들을 부르고 있다. 시민들의 아이디어로 탄생하게 된 이곳은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다. 4주일에 한번씩 무상노동을 해야 회원자격이 주어지며 2시간 45분동안 1일점원으로 일하게 된다. 한 일일 남성점원은 “내 직업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다. 이곳의 독특한 운영방침이 마음에 들어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한 여성고객은 “이 슈퍼마켓의 물건은 품질도 좋고 가격도 싸 자주 찾고있다.”며 “거대도시 뉴욕에서 이웃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 같아 좋다.”고 말했다. 이곳의 또 다른 독특한 점은 고객이 집까지 카트를 끌고 갈 경우 1일점원이 같이 따라간다는 것. 카트 회수를 위해 점원이 고객의 말동무가 되어 주는 것이다. 이 슈퍼마켓은 지난 1973년에 오픈돼 34년동안 1만 3천여명의 회원수를 확보하며 뉴욕 시민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사진= 니혼 TV 나우뉴스 주미옥 기자 toyobi@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경제현장 읽기] 풍수해보험 가입률 고작 5%

    [경제현장 읽기] 풍수해보험 가입률 고작 5%

    경북 예천에 사는 김모씨는 지난 3월 돌풍에 집이 무너졌으나 풍수해보험 가입으로 보험금 750만원을 받아 시름을 덜었다. 그가 낸 보험료는 2만 8000원이었다. 같은 지역에 사는 이모씨도 주택 파손으로 인한 보험금 750만원을 지급받았다. 경북 예천은 풍수해보험이 도입된 지난해 5월부터 시범지역으로 지정된 곳이다. 풍수해보험은 현재 전국 31개 지역에서 가입이 가능하며 소방방재청은 내년부터 전국으로 가입 지역을 넓힐 예정이다. 지금까지 풍수해보험에 가입돼 보험금이 지급된 사례는 26건이다. ●정부 지원규모 적어 민원제기 많아 가입 실적은 매우 낮다. 소방방재청에 따르면 1·2차 시범사업 17개 지역의 풍수해보험 가입대상 40만 4224명 중 가입자는 5% 수준이다.3차 시범지역은 실적이 미미한 수준이다. 손해보험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보상해 줄 것이라는 인식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동안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정부가 국고에서 일단 지원하고 예산이 부족하면 추경편성까지 하는 관행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정부(지방자치단체 포함)가 지난 1996년부터 2005년까지 10년간 지원한 피해복구비는 모두 25조원이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규모는 실제 피해규모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아 이를 둘러싼 민원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풍수해보험은 지방자치단체가 보험료 일부를 지원하는 제도다. 동부화재가 위탁사업자다. 최근 법령 개정을 통해 정부가 지원하는 보험료 수준이 49∼65%에서 58∼65%로 높아지고 보험료를 내기 힘든 기초생활수급자는 정부가 90%까지 지원한다. 자식이 부모를 위해 보험을 가입할 수 있게 된다. 최대 보험가입금액도 2700만원에서 5400만원으로 인상된다. ●인식전환과 인프라 구축 필요 풍수해보험이 확대되기 위해서는 풍수해보험관리지도가 만들어져야 한다. 삼성화재 부설 삼성방재연구소가 24일 발표한 ‘풍수해 위험지도’ 등이 그 예다. 이 지도는 지리정보시스템(GIS)을 이용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하천 범람률을 전국 840개 수자원 단위별로 계산했다. 이 같은 지도가 갖춰져야 합리적인 보험료율 계산이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인식 전환이 가장 필요하다. 지구 온난화, 생활수준의 개선 등으로 피해액은 매년 늘어나지만 정부의 재원은 한정돼 있다. 개인의 사유재산에 대한 피해를 정부가 보상하는 것에 대한 논란도 여전하다. 미국은 지난 1973년 홍수재해방지법을 제정, 위험지구내 건물에 융자를 받거나 저당설정을 하려면 반드시 홍수보험에 가입하도록 했다. 사유시설에 대한 피해를 직접 지원이 아닌 국가가 지원하는 정책보험을 통해 지원하는 간접 방식이 선진국들의 정책방향이다. 보험이 자리를 잡으면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해에 모인 기금을 피해가 많이 발생한 해에 사용, 재해에 의한 손실을 시간적으로 분산시킬 수 있다. 피해가 적은 지역에서 적립된 돈을 피해가 많이 발생한 지역 복구에 사용, 공간적 분산도 가능한 셈이다. 전경하기자 lark3@seoul.co.kr
  • [다시보는 선데이서울] 원조 ‘도시미인’ 유지인

    [다시보는 선데이서울] 원조 ‘도시미인’ 유지인

    [다시보는 선데이서울 - 표지모델편 ⑨] 60년대 남정임, 문희, 윤정희의 여배우 트로이카 전성시대가 있었다면 70년대 말엔 정윤희, 장미희, 유지인의 新트로이카 전성시대가 있었다. 이들은 스크린과 안방극장을 넘나들며 폭넓게 활동했고, 특히 유지인은 세련된 도시적 아름다움으로 시청자와 관객을 사로잡았다. 유지인은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73년, 방송국 공채에 붙으면 대학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기 쉽다는 말에 동양방송(TBC) 14기 탤런트 공모에 응시해 선발됐다. 그리고 곧바로 대학생 대상 잡지에 표지모델로 실린 사진이 눈에 띄어 1974년 영화 <그대의 찬손>을 통해 데뷔한다. 인기여류작가였던 강신재씨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었는데, 유지인이라는 예명도 유치원 보모였던 주인공 ‘지인’의 이름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화 몇 편 찍으면 세계일주를 보내주겠다.”는 영화제작진의 말에 혹해서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는데 끝내 세계일주는 공수표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 유지인이 두 아이의 강인한 엄마 역할을 소화해낸 <심봤다>는, 그녀에게 1979년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안기기도 했다. 정치가 실종된 암울한 시대가 종점을 향해 치닫던 70년대의 마지막 해 호스티스 영화 역시 봇물을 이루며 정점을 향해 줄달음질 쳤다. 유지인은 <26×365=0, 1979>라는 영화에서 엄마의 병원비를 벌기위해 호스티스로 전락하는 여대생 주인공 역을 맡아 열연했다. 26살의 여주인공이 365일 술을 따르고 몸을 팔아도 남는 것은 없더라는 뜻을 가진 이 영화 제목은 수학 공식처럼 난해해 인상에 남았다. 묘한 제목으로 독자를 낚는 일이 인터넷 시대인 지금 횡행하고 있는데, 그 시절 영화제목에서도 이런 일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바람불어 좋은날, 1980>은 1976년 대마초 흡입혐의로 활동을 중단했던 이장호 감독이 다시 메가폰을 잡아 재기에 성공한 작품이다. 시골출신 총각과 처녀들의 희망 없는 고달픈 서울생활을 다뤘는데 유지인은 조연으로 출연하고, 안성기가 중국집 자장면배달부로 출연하여 아역배우 탈을 벗고 성인 배우로 데뷔한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의 포스터와 옥외광고에 유지인의 치마가 바람에 날리는 장면을 넣었다. 치마의 은밀한 곳에 ‘바람 불어 좋은 날’이라는 제목을 써넣고 ‘성기완전노출영화’라는 광고문안을 덧붙였다니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장안이 들썩이기 시작했고 급기야 당시 문화공보부에서 해명을 요구했는데 “아역배우였던 안성기군이 성인으로 노출되는 첫 번째 영화”라는 뜻으로 붙인 것이라고 둘러대어 무사히 넘어갔다고 한다. 빠져나갈 구멍을 절묘하게 만들어 둔 낚시 제목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어쨌거나 <별들의 고향3 ,1981>, <도시로 간 처녀, 1981>,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1984> 등으로 한창 잘 나가던 유지인은 1986년 평범한 내과의사와 결혼, 96년 KBS 드라마 ‘여울’을 끝으로 연기를 중단했다. 그러나 결혼 16년 만인 2002년 남편과 이혼을 발표해 잉꼬부부라고 부러워하던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후 MBC 미니시리즈 ‘삼총사(2002)’를 통해 컴백, MBC 드라마 ‘회전목마(2003.8~2004.3)’ KBS 드라마 ‘금쪽같은 내 새끼(2004.6~2005.2)’ 등으로 본격적으로 방송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방송 복귀 후 몇 년째 진행해오던 KBS3라디오 ‘유지인의 음악편지’를 최근 지승현 아나운서에게 마이크를 넘겨줬다. 외주제작사 프로시안미디어에서 준비 중인 시트콤 ‘국립수라원’에 캐스팅됐기 때문이다. 유지인은 이 작품에서 궁중요리를 연구하고 교육하는 기관인 국립수라원 원장 자리를 놓고 이계인과 경쟁하면서 서로 사랑의 불꽃을 피우게 되는 역할을 맡았다. 지난 79년 영화 <가시를 삼킨 장미>에서 호흡을 맞춘 경험이 있는 두 사람이 28년 만에 다시 만나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기대가 크다. 두 딸과 함께 살고 있으며 모교인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표지=통권 515호 (1978년 10월 1일) 박희석 전문위원 dr39306@seoul.co.kr
  • [한국건설 60년]”해외 수주 올 200억弗”…지구촌 대역사의 주역

    [한국건설 60년]”해외 수주 올 200억弗”…지구촌 대역사의 주역

    ●현대 65년 태국 고속도로 공사 해외수주 1호 해외 건설은 현대건설이 1965년 11월 태국의 파타나∼나라타왓 고속도로 공사를 따내면서 본격화됐다.80년대 성장기와 90년대 중반 도약기를 거쳤다가 외환위기 직후에는 침체했다. 하지만 최근 다시 전성기를 맞고 있다. 지난해 해외건설 수주 금액은 165억달러로 사상 최대였다. 올해는 5월 말 124억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무려 91%나 증가했다. 올해 200억달러 이상 수주가 예상된다.20일 건설의 날을 맞아 외화 획득의 효자인 해외건설을 기념비적 사업을 통해 짚어봤다. 현대건설이 완공한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유전지대인 주베일항은 국내 건설업계에 의미가 깊다. 선진국 업체의 독무대였던 해상유조선 정박시설(OSTT) 시장에 진출, 성공리에 공사를 마쳤기 때문이다. 단일 업체가 수주한 단일 공사로는 당시 세계 최대였다. 공사 금액 9억 4400만달러는 계약한 76년 당시 환율로 따져 원화로 4600억원 정도였다. 이는 그해 우리나라 예산의 25%에 가까운 금액이다. 이 공사는 ‘20세기 최대의 역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현대는 또 81년 말레이시아가 발주한 페낭대교(총길이 7958m)를 수주했다. 입찰에서 2위였지만 공기를 30주 앞당기겠다는 제안으로 공사를 따냈다. 당시 동양 최장, 세계 세번째로 긴 다리였다. 완공은 85년 8월. ●삼성 버즈 두바이 세계 최고층 건물 ‘등록´ 삼성물산이 한창 공사 중인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버즈 두바이도 빠질 수 없는 건축물이다.2009년 완공되면 800m(170층)가 넘는 세계 최고층 건물이 된다. 높이에 걸맞게 건물 연면적도 어마어마하다. 잠실종합운동장 56배 넓이인 15만평이다. 삼성물산은 앞서 세계 최고층인 말레이시아의 KLCC빌딩(452m·92층)를 세웠다.2004년 타이완의 타이베이 101(101층·509m) 이전 완공되기 전까지 세계 최고층 빌딩이란 칭호를 들었던 쌍둥이 건물이다. 쌍용건설이 지은 싱가포르의 래플즈 시티 복합건물은 국내 업계의 해외건설사업 반세기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꼽힌다.80년 착공한 건물은 당시 세계 최고층(73층)과 최대 객실(2065개)로 진기록을 세웠다. 공사금액은 4억 1000만달러였다.86년 6월 완공됐다. 쌍용이 2000년 완공한 두바이의 에미리트 타워호텔은 여전히 두바이의 3대 건축물로 불린다.‘중동의 홍콩’ 두바이에서 쌍용의 명성을 높인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쌍용 에미리트 타워호텔 두바이 3대 건축물로 대우건설이 97년 완공한 파키스탄 고속도로는 단일 업체가 시공한 세계 최장의 고속도로이다.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와 산업도시인 라호르(357㎞)를 잇는다.21세기 ‘실크로드’로 불린다. 공사금액은 11억 6000만달러나 됐다. 대우는 이 공사를 설계부터 관리까지 턴키방식으로 진행했다. 뒤늦게 해외건설에 눈을 돌린 롯데건설은 러시아 모스크바에 ‘롯데루스’를 한창 공사 중이다.4억달러짜리 공사로 1단계인 백화점과 사무실은 올 하반기 완공할 예정이다. 동아건설의 리비아 대수로,GS건설의 오만 아로매틱스 플랜트,SK건설의 멕시코 카데레이타 정유소 등도 한국건설의 위상을 높인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한강의 기적’ 견인… 시장규모 520배 성장 한국 건설산업은 1947년 조선토건협회가 창립되면서 태동했다.1950년 현대·극동 등 61개였던 건설업체는 지난해말에는 5만 3329개사로 늘어났다. 건설시장도 1973년 3000억원에서 지난해에는 156조원으로 520배가 증가했다. 외형은 커졌지만 불합리·불투명하다는 오명(汚名)은 해결되지 않고 있다. ●70~80년대 국가경제 이끈 ‘효자´ 건설은 50년대에는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국토를 복원하면서 ‘산업’으로 자리를 매김했다.60년대 들어 건설인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한강의 기적’을 일으켰다. 국토개발을 중심으로 경제개발이 본격화됐다. 당시 치수사업과 전국 주요도로의 포장, 항만, 상하수도 등으로 사업이 확대됐다. 65년 제2한강대교와 섬진강댐이 준공됐다. 국내 첫 고속도로인 경인고속도로(23.89㎞)는 68년 12월 준공됐다. 70년대는 전국 고속도로와 지하철 건설의 골격이 마련됐다.70년 중반이후 중동 건설시장의 붐으로 건설이 국가 경제의 ‘효자’로 한단계 더 성장했다. 이에 맞춰 75년 해외건설촉진법이 만들어졌다.70년 7월에는 경부고속도로(425.48㎞)가,74년 6월에는 서울지하철 1호선이 각각 개통됐다. 한국 건설은 80년대에는 국가 경제발전의 1등 공신 역할을 했다는 말도 들었다. 국내에서 주택 200만 가구와 올림픽 경기장 등 사회간접자본이 활성화됐다.87년 건설업 고용자는 100만명을 돌파했다.84년 88올림픽경기장이 완공됐고,88올림픽고속도로가 개통됐다. 한국 경제의 상장이자 서울의 랜드마크인 63빌딩은 85년 7월 준공됐다. ●90년대 UR·성수대교 붕괴 등 시련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UR)로 건설시장이 개방됐다. 또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등 부실시공의 뼈저린 교훈을 얻은 시기이다. 외환위기에 따른 경영난과 연쇄부도 사태로 건설산업은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90년 분당신도시가 착공돼 96년 입주됐다.96년 국내 최대 규모의 LNG생산기지인 인천LNG생산기지가 완공됐다. ●2000년대 선진 경영기법 도입 재도약 외환위기 이후 건설산업은 선진경영 기법을 도입하고 수주전략을 합리적으로 짰다. 단순 시공을 넘어 수익성 분석을 통한 수주와 고부가가치 사업에 치중하게 됐다.2001년 3월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했으며, 같은해 12월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됐다.2002년 10개의 월드컵 축구경기장이 건설됐고, 단군 이래 최대 역사로 불리는 경부고속철도가 2004년 4월 개통됐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현대산업개발 본사사옥(아이파크타워)도 랜드마크로 꼽힌다.2004년 11월 완공한 이 건물의 외관이 특이하다. 설계의 기본 컨셉트는 ‘탄젠트’이다.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변하는 기술을 상징하는 직선과 세계와 자연을 상징하는 원, 인간을 표현한 사각형을 건물 외관에 투영했다. 또 롯데건설은 서울 잠실에 112층(555m)의 새로운 랜드마크를 구상하고 있다. 경주의 첨성대를 모티브로 한 제2롯데월드는 사업비 1조 7000억원을 계획하고 있다. 추진여부는 곧 결정된다.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다시보는 선데이서울] ‘만년 소녀’ 정소녀

    [다시보는 선데이서울] ‘만년 소녀’ 정소녀

    [다시보는 선데이서울 - 표지모델편 ⑧] 음악을 접할 수 있는 미디어라곤 고작 라디오와 LP·카세트오디오뿐이었던 아날로그 시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김정호의 데뷔곡은 사춘기 청소년들을 왠지 모를 센티멘털한 기분에 젖어들게 했다. 차분히 시작하지만 결국 격정을 발산하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멜로디와 가사에 매료되어 따라 부르곤 했다. 김정호의 노래가 뜨고 난 후 같은 이름의 영화로 만들어진 <이름모를 소녀> 정소녀는 1974년 청춘남녀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룬 멜로물인 이 영화를 통해 데뷔한다. 영화보다 노래가 더 인기를 끈 것처럼, 정소녀 역시 배우·탤런트로도 활동했지만 1970~80년대 최고의 여성 MC로 더 기억에 남아있다. 또 탤런트 출신으로 MC를 맡은 여성 연예인 1호라는 레테르가 붙어 다닌다. TBC(동양방송) ‘쇼쇼쇼’ 와 23년째 장수프로그램인 KBS ‘가족오락관’ 2대 여성MC로 허참과 함께 무려 6년이나 진행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지난해 뉴스의 인물로 떠올랐다. 무대를 떠난 지 15년만에 은막으로 돌아온 것이다. 1990년 <서울의 달빛>에 마지막으로 출연했다가 영화 <썬데이서울>을 통해 컴백했으니 그녀는 서울을 뒤로 하고 떠났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온 셈이다. 옴니버스 형식의 이 영화에서 그녀는 두 번째 에피소드인 ‘우연한 방문객’ 편에 김추련과 함께 죽어도 죽지 않는 귀신 부부로 등장했다. 결국 영화 <썬데이서울>은 주간지 <선데이서울>만큼 인기몰이에 성공하지 못한 채 호된 비난과 실험영화라는 옹호론이 대결하며 막을 내렸다. 세간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한때 가수로도 활동했다. 1977년 <난 정말 몰랐었네>로 잘 알려진 최병걸과 함께 듀엣으로 그의 자작곡인 <그 사람>과, <사랑한다고 말해줘요>라는 곡을 불러 음반을 냈다. 중앙대 연극영화과 출신인 정소녀는 1973년 MBC 공채 탤런트 6기로 연예계에 데뷔해 75년에는 TBC 연기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95년 12월 경기도 장흥유원지에 ‘무니무니’라는 레스토랑을 차려 2004년까지 경영했다. 남편과는 32살 때 이혼했으나 재혼하지 않고 대학생 딸을 뒷바라지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표지=통권 513호 (1978년 9월 17일) 박희석 전문위원 dr39306@seoul.co.kr
  • [하재봉의 영화읽기]세계 영화사의 신화 : 조도로프스키의

    [하재봉의 영화읽기]세계 영화사의 신화 : 조도로프스키의

    만약 당신이, 아직까지 조도로프스키의 영화를 보지 못했다면 당신은 분명히 영화광이 아니다. 나는 많은 영화를 섭렵했다, 라고 당신은 항의할지 모른다. 그러나 <엘 토포> <홀리 마운틴> <성스러운 피> 같은 조도로프스키의 영화를 아직 한 편도 보지 못했다면 당신은 영화라는 매체의 반쪽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조도로프스키의 영화들은 영화라는 매체가 다다를 수 있는 한 극점을 표현하고 있다. 그의 영화 속에는 문학과 신화, 철학, 종교 등이 서로 충돌하거나 아니면 부딪치는 척하면서 은밀히 녹아 있다. 그의 영화는 비대중적이고 비상업적이다. 영화라는 매체가 갖는 본질적 소통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그의 영화는 철저하게 한 예술가의 정신적 표현이다. 국내에서 개봉된 조도로프스키 감독의 영화는 <성스러운 피>가 유일했다. 그것도 여기저기 처참하게 가위질된 모습으로. 그러므로 조도로프스키의 걸작 <엘 토포>(1970년)와 <홀리 마운틴>(1973년)이 거의 40여 년 만에 노컷으로 한꺼번에 국내 개봉된다는 것은 영화광들의 마음을 뒤흔들 만한 사건이다. 그 동안 국내에서 개최된 영화제에서 조도로프스키의 영화들이 잠깐 상영된 적은 있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수입 절차를 밟고 개봉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었다.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는 매우 다양한 경력을 지닌 사람이다. 그의 활동은 현대 예술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져 있다. 우리에게는 영화감독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가 쓴 만화는 국내에서도 여러 권 출간되었다. 그는 소설도 썼고 장 루이 바로와 함께 판토마임 배우로도 활동했으며 심지어 타롯카드 점술사로도 명성을 날렸다. 초현실주의 잡지도 출간했고 세계 연극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아라발 같은 연출가와 함께 연극 활동을 하기도 했다. 조도로프스키는 1929년 러시아계 유대인의 아들로 칠레의 볼리비아 국경 부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서커스단 배우였는데, 유년시절의 곡마단 경험은 그의 영화 여기저기에 흔적을 남긴다. (<성스러운 피>에서는 곡마단 아들인 주인공 피닉스의 유년시절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영화의 대부분이 곡마단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또 <엘 토포>나 <홀리 마운틴>에 등장하는 장애인이나 기형아 역시 곡마단에서 그가 직접 목격한 인물들의 캐릭터를 형상화 한 것들이다) 조도로프스키는 칠레의 산차고 대학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공부했지만 의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말에 반항해서 학업을 중단하고 집을 나간다. 1953년 파리로 간 그는 당시 파리 예술계에 불던 아방가르드 예술을 온몸으로 받아들였으며 판토마임을 공부한다. 장 루이 바로의 스승이었던 에뜨엔느 뒤크레에게서 판토마임을 배워 ‘마르소 마임’이라는 극단에서 마르셀 마르소와 함께 판토마임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무비 카메라를 만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는 직접 카메라를 구입해서 판토마임을 영화로 찍기도 했다. 그리고 1962년 잔혹극이라는 장르를 만들었던 연극 연출가이며 극작가인 페르난도 아라발, 롤랑 토포와 함께 ‘파닉 무브망 Panic Movement’이라는 그룹을 만들어서 연극, 퍼포먼스 등의 활동을 했다. 그리스 신화의 장난꾸러기 요정인 판을 숭배한다고 해서 붙여진 그룹 이름이다. 조도로프스키가 본격적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멕시코에 정착한 이후부터다. 프랑스 시절 판토마임 배우들과 함께 찍은 <잘려진 머리>라는 단편은 지금 남아 있지 않고, 1967년 멕시코에 정착한 후 아라발의 희곡을 영화로 만든 <판도와 리스>가 그의 첫 장편영화로 기록되어 있다. 그를 세계적인 영화감독으로 유명하게 만든 작품은 1970년 찍은 <엘 토포>다. 이 영화는 1970년 미국에서 심야 영화로 7개월 동안이나 장기 상영되면서 마니아층을 만들어냈다. 존 레논이 이 영화를 보고 매혹되어서 <엘 토포>의 세계 배급 판권을 샀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1973년 <홀리 마운틴>을 만든 후 조도로프스키는 다음 영화 제작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불운이 겹쳤다. 프랭크 허버트의 원작 《듄》은 초현실주의 화가인 살바드로 달리나 <시민 케인>의 감독 오슨 웰즈, 한 세기를 풍미한 배우 글로리아 스완슨 등을 출연시켜서 만들려고 했지만 결국 또 한 사람의 컬트 감독 데이비드 린치에게 뺏기고 말았다. 조도로프스키의 다음 영화는 16년 뒤인 1989년에야 만들어졌다. 국내에서 처음 개봉된 조도로프스키의 영화인 <성스러운 피 Santa Sangre>는 기존의 영화들에 비해 훨씬 대중적인 내러티브를 갖고 있어서 마니아층에서는 실망했지만 대중적으로 그의 이름을 알린 영화가 되었다. 조도로프스키는 1990년 오마 샤리프와 피터 오톨 같은 대배우가 출연한 <무지개 도둑>을 만들었지만 지나치게 현실 타협적인 영화라는 비난을 받았다. 멕시코에서 마뉴엘 모로라는 만화가를 위해 이방인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시나리오를 쓴 조도로프스키는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 다양한 만화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특히 뫼비우스와 함께 발표한 여러 편의 시리즈들은 조도로프스키라는 이름을 세계 만화계에 알렸다. 특히 그는 공상과학 분야에서는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로 손꼽힌다. 1980년 뫼비우스의 그림으로 메탈 위를랑에서 출간된 《잉칼》은 존 디폴이라는 주인공을 등장시켜 아무것도 아닌 왜소한 남자가 세계를 구원하는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조도로프스키는 《잉칼 이전》《잉칼 이후》 등 40여 권의 만화 시나리오를 썼다. 달라이 라마의 환승을 다룬 《흰 라마승》, 국내에서도 출간된 공상과학 만화 《테크노페어》(2000년) 시리즈 등이 있고 1996년 앙굴렘 국제만화 페스티벌에서 《쥬앙 솔로》 시리즈로 알파아르 최고의 시나리오 상을 수상했다. 서부극 형식을 차용하고 있는 조도로프스키 감독의 <엘 토포>는 스페인어로 두더지라는 뜻이다. 조도로프스키 감독 자신이 직접 주인공 엘 토포 역을 맡아 출연하고 있는데,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하는 엘 토포는 아들과 함께 사막을 건너가다가 한 마을 사람들을 끔찍하게 살육하고 지배하는 악당을 처치한다. 그리고 아들 대신 악당의 매혹적인 여자 마라를 선택한다. 사막에서 엘 토포는 동양철학자, 자연주의자, 사막의 성인 등 4명의 현자와 대결하는데 그는 비열한 방법을 동원하고 행운까지 뒤따라서 승리하지만 마라의 배신으로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는다. 죽음의 위기에서 엘 토포를 구해준 사람들은 동굴 속에 살고 있는 기형아와 장애인들이다. 그는 과거의 죄를 씻고 해탈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타인을 위한 이타적 자세로 장애인들을 동굴 밖으로 탈출시킨다. 그러나 동굴 밖의 세계는 더욱 끔찍했다. 세상 사람들은 장애인들을 혐오하며 동굴 밖으로 탈출하는 그들을 모두 총으로 쓰러뜨린다. <홀리 마운틴>은 악마적 파시스트가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예수의 형상을 닮은 사내가 세계 구원의 메시지를 찾기 위해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그는 그곳에서 지도자(조도로프스키가 지도자 역으로 출연하고 있다)로부터 연금술을 배우고 태양계의 7행성을 수호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지도자와 함께 그들 9명은 불사의 삶을 찾기 위해 성스러운 산에 오른다. 조도로프스키의 영화는 대사가 극도로 절제되어 있고 수많은 상징적 이미지들이 넘쳐난다. 특히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그는 종교적 이미지를 자주 차용하는데, 예수 등 기독교의 성서에서 많은 이미지를 가져오지만 그것이 꼭 기독교의 이미지라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멕시코 등의 토착문화와 미묘한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조도로프스키가 그의 청년시절 프랑스에서 경험한 초현실주의 운동은 그의 전 작품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성적 논리와 합리적 사고로 접근할 수 없는 서구 형이상학의 단점을 그는 위대한 상상력으로 극복한다. 그의 영화가 갖는 힘은, 현실 초월적 상상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것은 지상에서의 헛된 욕망에 사로잡힌 오만한 인간들을 비웃고 조롱하면서 삶의 궁극적 가치를 발견하려는 그의 일관된 주제의식과 맞물려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글 하재봉 시인, 영화평론가, 동서대 교수     월간 <삶과꿈> 2007.04 구독문의:02-319-3791
  • 김중호신부 몽골 최우수의료인상

    천주교 김중호(68) 신부(가톨릭대 의과대학 사목센터 소장)가 몽골 보건복지부 장관이 수여하는 훈장과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시장이 수여하는 최우수 의료인상, 몽골 명예의사 면허를 받았다고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13일 밝혔다. 1973년 사제 서품을 받은 김 신부는 1997년부터 몽골 의료봉사를 시작해 에콰도르, 콜롬비아 등 세계 각국을 방문해 자선 활동을 벌여왔다.
  • [맑은 물 밝은 세상] (7) ‘홍수 파수꾼’ 다목적댐

    [맑은 물 밝은 세상] (7) ‘홍수 파수꾼’ 다목적댐

    기상청은 이달 중순쯤부터 장마가 시작된다고 예보했다. 집중호우로 인한 물난리가 벌써부터 걱정된다. 특히 기상이변으로 인한 돌발·집중호우는 물관리(治水)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15개 다목적댐이 있어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 하지만 집중호우로 인해 다목적댐의 홍수조절능력에도 과부하가 걸리고 있다. 홍수 피해 예방은 다목적댐의 효율적인 물관리에 달려 있다. ●하천유량계수 400대1… 홍수·가뭄 되풀이 우리나라는 연평균 강수량만 놓고 보면 홍수나 가뭄 피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동고서저(東高西低) 지형인 데다 강수량이 여름철에 집중돼 수자원관리가 여간 어렵지 않다. 전체 강수량의 3분의2 이상이 6∼9월 홍수기에 집중해 내린다. 특히 기상이변에 따른 돌발강우와 특정 지역에 편중된 집중호우로 엄청난 홍수피해를 입고 있다. 하루 강수량이 80㎜이상 되는 호우가 연평균 25회,150㎜이상 내리는 비도 7회가량 된다. 홍수 때 넘쳐나는 물을 관리하는 데 진땀을 빼는 이유다. 국토의 3분의2 이상이 산지이고 대부분의 중소 하천은 급류가 많다. 대부분의 하천 흐름 방향도 남서쪽으로 몰린다. 흙으로 덮인 층이 얇아 가둘 수 있는 물의 양도 한정돼 있다. 때문에 호우 때는 연례행사처럼 물난리를 겪는다. 비가 그치고 나면 전국이 가물어 대지가 타들어가는 가뭄 피해에 시달린다. 우리나라 하천의 물관리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유량변동계수(최대유량과 최소유량의 비율)로 증명된다. 영국 템스강은 유량변동계수가 8대1이다. 미국 미시시피강은 3대1, 이집트 나일강은 30대1에 불과하다. 반면 우리 하천의 유량계수(댐 수량조절 이전)는 300∼400대1이나 된다. 문태완 수자원공사 물관리센터 실장은 “기상예측의 불확실성, 수량의 계절적 편차와 하천 유량 변동폭이 커 수자원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이상 강우·홍수 피해↑… 다목적댐 중요성↑ 홍수피해도 엄청나다.2002년 8월 집중호우와 태풍 루사의 위력 앞에선 맥을 추지 못했다. 강릉에는 하루 870.5㎜가 내렸다. 피해는 사망 209명, 실종 37명,6조원 이상의 재산피해를 입었고 8조원이 넘는 복구비를 쏟아부었다.2003년 태풍 매미도 큰 피해를 입혔다.118명이 사망하고 13명이 실종됐다. 재산피해도 4조 2000억원이나 됐고 복구에 6조 5500억원이 투입됐다. 지난해 7월 태풍 에위니아와 집중호우로 인한 피해도 62명 사망,1조 8000억원의 재산피해를 가져왔고 피해복구에만 3조 5125억원을 들여야 했다. 문제의 심각성은 이상기후 현상이 점차 증가한다는 데 있다.100년에 한번 내릴 수 있는 시간당 최다 강우량을 최근 10년 동안 6번이나 넘겼다. 피해액도 4.5배 증가했다. 최근의 기후 변화를 감안, 강우확률모델을 변경해야 할 때이다. 그런데도 물관리는 엉망이다. 예방 사업보다 복구비가 많은 비효율적인 투자를 되풀이하고 있다. 치수 관련 예산은 ‘치수사업비)홍수피해(감소추세))복구비’로 이뤄지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예산은 ‘치수사업비(홍수피해(증가추세)(복구비’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상강우 현상을 인위적으로 막기에는 한계가 따른다. 정확한 기후 예측과 사전 예방만이 피해를 줄일 수 있다. 홍수 피해를 막는 효자는 뭐니뭐니해도 다목적댐이다.4대강 유역에는 15개의 다목적댐이 건설돼 있다. 하지만 다목적댐 건설은 환경에 대한 관심 증가, 수몰지역 재산권 행사 등의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벽에 부딪치고 있다. 전경수 성균관대 교수는 “치수사업에는 게을리하고 엉뚱하게 피해 복구에만 예산을 쏟아붓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우(愚)를 범하고 있다.”며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한 투자가 우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만약 충주댐이 없었더라면… 만약 충주댐이 없었더라면…. 지난해 7월 한강수계 다목적댐(소양강댐, 충주댐, 횡성댐)유역의 평균 강우량은 898.8㎜로 예년(322.3㎜)에 비해 3배 가까이 불어났다. 특히 7월10∼22일에 내린 비만 충주댐의 경우 619㎜로 예년대비 3.3배나 많았다.1973년 기상관측 이래 강우량이 최고치를 기록하면서 한강 유역은 국가적인 위기에 직면했다. 남한강 여주지역과 한강하류의 범람이 우려됐다. 특히 남한강 충주댐(저수용량 27억 5000만㎥)은 계획홍수위(145m)를 불과 0.1m 남겨두고 있었지만 비는 그칠 줄 몰랐다. 건설교통부 홍수통제소와 수자원공사 물관리센터 직원들 역시 피가 마르기 시작했다.24시간 15개 댐 수위를 분석하고 기상을 예측하느라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댐 상류인 충북 단양 주민들은 마을이 물에 잠긴다며 빨리 수문을 열라고 아우성쳤다. 반면 댐 하류인 경기 여주 주민들로부터는 시내가 잠긴다며 수문을 닫으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물관리센터는 그러나 수문을 모두 열지 않았다. 댐 운영 이후 최대인 2만 2650㎥/s가 유입됐지만 40%수준인 9050㎥/s만 조절 방류했다. 결국 충주댐이 여주 시내 범람을 막고 서울 지역 홍수 피해를 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계속 수문을 닫아둘 수는 없었다.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댐 안전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상류지역 피해도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센터는 잠수교 수위가 점차 내려가고 여주지역도 물이 빠진 것을 확인한 뒤 비로소 댐방류량을 3000㎥/s로 늘렸다. 댐은 곧 계획홍수위에서 0.9m의 여유를 보이면서 위급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충주댐으로 유입된 28억㎥의 물 가운데 13억㎥를 하류로 흘려 보내고,15억㎥를 가둠에 따라 하류 여주지점의 홍수위를 3.05m 낮출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충주댐 하류 하천변 378ha(100만평)의 침수를 막아 2조 1000억원의 홍수피해를 줄일 수 있게 됐다. 정확한 홍수 조절은 수공이 자체 개발한 ‘K-water홍수분석모형’덕분에 가능했다. 댐 방류에 따른 하류 하천 수위와 홍수량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는지를 자동 분석하는 첨단 기계다. 물관리센터 황필선 팀장은 “댐관리 전문가와 기상전문가, 전산·통계요원 50여명이 24시간 전국 15개 다목적댐과 용수댐을 지켜줘 홍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다목적댐 홍수관리 어떻게 우리나라 홍수관리는 원칙적으로 정부차원에서 이뤄진다. 전국 하천의 홍수관리를 총괄하는 곳은 4대강을 중심으로 설립·운영 중인 홍수통제소(Flood control office)다. 다목적댐은 대부분 하천의 상류에 건설되고 담수 용량이 커 홍수조절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다목적댐의 효과적인 홍수조절을 위해서는 댐 상·하류를 연계한 댐간, 댐∼하천간의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에는 모두 15개의 다목적댐과 12개 용수전용댐이 있다. 댐 수량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곳은 한국수자원공사의 물관리센터다. 홍수 때 수문을 여닫는 의사 결정은 건설교통부 홍수통제소가 지휘한다. 홍수통제소의 의사결정은 그러나 수자원공사 물관리센터의 과학적인 분석에 근거를 둔다. 물관리센터는 국내외 기상전문기관으로부터 각종 예보 기초자료를 실시간으로 받아 자체적으로 댐유역 국지 기상을 분석, 강우를 예측한다. 자동으로 지역별 댐별 홍수정보를 수집하고, 댐 상·하류 수위를 예측한 뒤 댐 방류 시기와 양을 정한다. 이를 홍수통제소에 보내면 수문을 열게 된다. 모든 자료는 1분 간격으로 생산된다. 주요 하천에 설치된 유량 측정기를 통해 수위 변화가 자동으로 센터로 들어온다. 운영자료는 무궁화2호 위성을 통해 실시간으로 송수신 처리된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빌 게이츠 “인간의 위대한 발전은 불평등 줄일 때 온다”

    |워싱턴 이도운특파원|“인류의 위대한 진보는 ‘발견’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발견들이 얼마만큼 불평등을 줄일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기술 발전은 부와 보건, 교육 등 다양한 불평등을 해소할 때 비로소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이 7일(현지시간) 중퇴한 지 30년 만에 하버드대 졸업장을 받은 자리에서 졸업생 및 동문들에게 불평등에 도전하자는 메시지를 던졌다. 8일 월스트리트저널 등에 따르면 그는 연설에서 “공교육과 공중보건, 광범위한 경제 기회 등이 민주주의를 통해 확산돼 수 있었다.”면서 “인터넷도 사회 구성원들이 보편적인 문제를 함께 논의할 수 있게 했기 때문에 위대한 발견”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렇게 불평등을 줄여나가는 것이야말로 인류가 달성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성취”라고 역설했다. 그는 “대학 시절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불평등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이를 깨닫는 데 수십년이 걸렸다.”고 운을 뗐다. 이어 “졸업생들이 30년후 이 자리에 다시 돌아와 일의 성취로서만 아니라 불평등을 바로잡는 데 기여한 공로로서 자신을 평가하기를 바란다.”말했다. 또 에이즈 등 인류 당면 문제를 거론하면서 “문제해결 접근법을 발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와 영향력, 당신의 성공 및 실패에서 다른 사람들이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게이츠 회장은 연설문 준비를 위해 반 년 이상 공을 들이며 워렌 버핏 등 지인들과 의논해 왔다. 이를 위해 조지 마셜 전 미 국무장관이 1947년 6월5일 역시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마셜플랜의 내용을 발표할 당시 연설문을 참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후 붕괴된 유럽사회의 재건을 목표로 작성된 마셜의 연설문이 불평등을 해소하자는 자신의 메시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게이츠는 1973년 법학과에 입학한 뒤 수학과로 전과했다.3학년 재학 중 MS를 창립하고 사업에 몰두하기 위해 77년 자퇴했다.MS는 세운 지 3년 만인 1980년에 세계 굴지의 IBM사와 거래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게이츠는 내년부터 MS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아내 멜린다 게이츠와 함께 설립한 자선단체인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서 새로운 도전인 ‘불평등과의 전쟁’을 위해 인도주의 사업에 몰두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dawn@seoul.co.kr
  • 韓·印 해군연합훈련 합의

    인도를 방문 중인 김장수 국방장관은 30일 수도 뉴델리에서 아라카파람빌 쿠리안 안토니 인도 국방장관과 회담을 갖고 군사교류와 협력방안을 논의했다. 양국간 국방장관 회담이 열리기는 지난 1973년 수교 이래 처음이다. 이날 회담에서 양측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공동 노력하고, 해상 테러와 재난 구조를 위해 양국 해군 간 연례 연합훈련을 실시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김 장관은 인도의 군 현대화 계획에 한국 방위산업체의 참여 가능성을 타진, 긍정적 답변을 얻었다고 국방부는 전했다.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산이 좋아 산으로] 강원도 원주 치악산

    [산이 좋아 산으로] 강원도 원주 치악산

    해발 1100m 고지에 자리 잡은 치악산(1288m) 상원사에는 목숨을 구해준 나그네의 은혜를 갚기 위해 피투성이가 된 채 종을 울렸다는 꿩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이 꿩의 보은 전설은 가을 단풍이 곱다 하여 적악산(赤岳山)이라 불리던 산의 이름까지 ‘치악산(雉岳山)’으로 바꿔놓았다. 최고봉 비로봉을 중심으로 강원도 원주시와 횡성군, 영월군에 걸쳐 있는 치악산은 1973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후 1984년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다.‘악(岳)자 붙은 산은 험하다’는 속설을 증명하듯 원주 사람들은 치악산을 ‘치 떨고 악 쓰며 오르는 산’이라 말한다.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일반적인 지형지세와 반대로 주능선을 중심으로 완만한 동쪽에 비해 심하게 가파른 서쪽 산길을 오를라 치면 입에서 단내가 나는 정도는 감수해야 할 것. 대신, 흠뻑 젖은 땀을 충분히 식혀줄 만큼 깊은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고 장엄한 산의 위용에 감탄하게 된다. 치악산에는 ‘치악 8경’이라는 볼거리가 있는데 비로봉 미륵불탑, 상원사, 구룡사, 성황림, 사다리 병창, 영원산성, 태종대, 입석대 등이다. 모두 치악산의 역사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어 산행 중 꼼꼼히 둘러봐도 좋을 것이다. 치악산의 면모를 두루두루 맛보려면 주능선 종주가 제격이다. 남쪽 성남리 상원골을 들머리 삼아 남대봉, 향로봉을 거쳐 정상인 비로봉에 닿는다. 사다리병창을 지나 구룡사 쪽으로 하산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9시간 남짓. 때문에 아침 일찍 서두르지 않으면 해가 저물어서야 산을 내려올 수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역방향 코스도 걸리는 시간은 비슷하지만 오르막이 더 가파른 데다 날머리인 성남리 교통편이 좋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전체 24㎞에 달하는 주능선 종주 말고도 치악산은 어느 쪽으로 올라도 내려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산길이 다양하다.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산기슭에서 화전을 일구며 살았기 때문이다. 구룡사 방면에서 비로봉에 이르는 정규 등산로만 해도 5개 코스. 특히 바위능선으로 이루어진 사다리병창 코스는 가파르지만 조망이 좋아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구룡사에서 사다리병창을 거쳐 비로봉에 이르는 왕복 12㎞코스는 약 7시간쯤 걸린다. 이 밖에 치악산 주능선의 허리를 치고 오르는 등산로도 여럿 있다. 원주 쪽에서는 황골과 행구동 등산로에 매표소가 있다. 황골에서 입석대 쪽으로 향하는 험준한 코스는 비로봉 정상에 오르는 가장 빠른 길로 2시간이면 바로 비로봉에 닿을 수 있다. 횡성 방면에서 치악산을 오르는 길은 강림면 부곡리에서 출발한다. 태종 이방원과 그의 스승 운곡 원천석의 일화가 담긴 태종대(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6호)가 있는 부곡리 코스는 입산통제소를 지나 곧은치골을 따라가는 길이다. 이 길은 예전부터 원주와 횡성을 오가던 주요 교통로였는데 등산로 옆으로 소가 다니던 넓은 길이 따로 나있기도 하다. 곧은치라는 지명은 곧게 뻗어있는 고갯길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산길이든 인생길이든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는 저마다의 몫이 아닐까. 치악산 산행은 자신의 취향과 체력에 맞게 골라가는 재미가 있다. 순한 길로 느릿느릿 오래 걷는 코스도, 한 순간 고통을 참아내며 빠르게 정상에 코스도 본인이 즐겁고 만족스러우면 그만이다. ‘아랫입술을 세 번쯤 꽉 깨물고 퍽퍽한 다리를 참으며 오른’ 비로봉. 그렇게 닿은 1288m 정상에는 1964년 고 용창중씨가 처음 쌓아올렸다는 돌탑 3기가 나란히 서서 사람들을 반긴다. 글 정수정 사진 남영호(월간 MOUNTAIN 기자)
  •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아나운서 출신 가수 1호 이정민(Ⅱ)

    1967년 이정민씨는 곧바로 국군방송 아나운서로 정식 발탁된다. 군 복무기간 내내 두각을 나타냈던 ‘얼굴 없는 가수’로서도 ‘타향처녀’‘남매’ 등의 히트로 주목받은 그의 목소리는 이미 많은 작곡가들이 탐내고 있었다. 아울러 제대 후 본격적으로 김학송, 백영호, 정민섭, 김강섭씨 등 인기작곡가들과 손잡고 새 음반들을 취입하지만 국군방송 아나운서는 공무원 신분이라 야간무대를 비롯한 많은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때문에 결국 레코드 취입만으로 가수 활동을 해야 했던 ‘반쪽 가수’였다. 1971년 8월, 그는 방송요원으로 베트남에 파견된다. 베트남, 즉 월남은 당시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파월장병을 위한 ‘주월 한국군방송국’이 1965년 11월15일, 시험전파를 첫 발사한 데 이어 주월사령부가 있던 사이공방송국을 비롯해 맹호부대와 십자성부대 지역의 퀴논방송국, 청룡부대 지역의 호이안방송국, 백마부대의 나트랑방송국 등을 잇달아 개국했다. 이정민씨는 사이공방송국에 배치된다. 사이공은 외관상 마치 전쟁과 무관한 도시처럼 평온해 보였지만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전쟁터라 방송요원도 무장을 해야 했다. 호신용 권총도 지급되었고 수당도 당시 ‘한국군 소령의 월급’에 해당하는 150달러가 별도로 지급되었다. 방송국 주변을 비둘기부대가 엄호해 주었지만 이따금씩 게릴라가 나타나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방송은 하루 9시간. 그중 두 시간은 자체 뉴스와 신청곡 프로그램, 부대 탐방 등을 내보냈고 나머지 시간은 국내에서 공수해온 인기 프로그램 중 CM만을 빼고 방송했다. “전국을 누비며 고향소식과 함께 전하는 ‘가족통신’의 인기는 파월장병들에게 절대적이었어요. 전국 방방곡곡 파월장병의 고향을 찾아 가족들과 인터뷰하면서 무사귀국을 기원하는 그 간절한 사연들이 하나하나 전해질 때마다 함께 목놓아 울기도 했죠.” 이정민씨의 회고다. 1972년 2월 청룡부대가 귀국함에 따라 호이안방송국을 폐쇄했고 계속해서 나트랑 해변에도 베트콩이 밀려오기 시작하면서 한국군의 전면 철수와 함께 퀴논방송국, 나트랑방송국, 투이호아중계소가 차례로 폐쇄해 나갔다.1973년 2월15일. 마침내 베트콩의 기세가 사이공 가까이까지 밀려오자 사이공방송국도 고별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다. “1967년 2월1일, 월남의 애국시민과 주월 한국군을 위해 개설되어 7년여 동안 동고동락했던 주월 한국군 사이공방송국이, 오늘 마지막 소원을 풀지 못한 채 고별방송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자유를 위해 피를 흘려야 했던 수많은 영혼들의 소망을 저버리고 저희는 이제 떠납니다. 하지만….” 아나운서 이정민씨의 목소리는 끝을 맺지 못하고 있었다.(계속) 대중음악평론가 sachilo@empal.com
  • [교정 대상 특별상]

    ■ 면려상 이경수 김천교도소 교위 정신질환을 앓는 수용자를 매일 직접 목욕시키고 보살핀 희생정신의 소유자다.1996년부터 2년 동안 징벌사동 근무를 자원해 불우한 징벌자들을 도왔다.2005년부터 가정형편이 어려워 변호사 선임을 할 수 없는 수용자들에게 국선 변호인 선임절차를 홍보해 150명이 김천변호사협회에서 무료 법률상담을 받도록 도왔다.■ 성실상 김원태 여주교도소 기계장 자신의 일을 스스로 찾아 업무에 힘쓰는 성실한 공무원으로 남들이 꺼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1973년부터 86년까지 봉제2급기능사 13명, 기능사보 22명, 차량정비기사 7명, 기타 자격증 소지자 17명을 배출시켰다. 운전면허증을 딴 수용자도 23명에 이른다. 매달 독거 노인을 찾아 보살피는 등 지역사회 봉사에도 적극적이다.■ 창의상 김재우 부산구치소 교위 소년·여성 수용자들을 위한 한자 교육을 지원해 수용자들이 의욕적인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1990년 수용자가 어머니와 만난 뒤 비관해 자살까지 생각하자 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주선하고 상담하며 수용자가 심리적 안정을 갖게 했다.2003년 ‘제례’ 책자 100여권을 직원들에게 배포하는 등 충효를 몸소 실천한다.■ 교화상 김남경 제주교도소 교위 수용자들의 작업 훈련과 수용자 기능자격 취득, 기능경기대회 입상지도에 힘썼다. 불우 수용자 3명의 벌금 108만원을 대납해 사회에 복귀할 길을 터줬다. 직원들과 ‘한라교정봉사회’를 결성해 수용자 29명에게 87만원을 지원했다. 시내버스가 교도소 입구까지 오지 않자, 시청과 협의해 교도소 입구에 정류소를 설치했다.■ 박애상 박상구 안양교도소 종교위원 안양신망애성결교회 목사로 1980년 서울구치소와 안양교도소 종교위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사형수 20명과 특별관리대상 수형자 40명, 무의탁수용자 20명과 자매결연을 맺어 계속 상담했다. 출소자에게는 취업과 결혼식을 주선해 삶에 대한 의욕을 불어넣었다. 출소자 보호시설인 ‘오네시모선교회 사랑의 집’을 운영한다.■ 자비상 박덕례 목포교도소 종교위원 옥주민속무용학원을 운영하며 한국무용협회 전남지부 부회장을 맡고 있다.1976년 수용자 대상 공연으로 교화활동을 시작해 교화 기자재 기증, 출소자 취업 알선에 힘써 왔다. 서화에 재능을 보인 수형자가 출소하자 목포 유명화가 화실을 소개해 서화지도를 받게 해 작품활동을 도왔다. 수용자 특별활동반 농악대 창설을 지원했다.■ 자애상 조남덕 대구구치소 종교위원 대구 경진가구사 대표로 1994년 대구교도소 교정사목후원회를 통해 수용자 생일잔치에 참석한 이후부터 수용자 종교상담, 출소자 취업알선에 참여했다.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때 교정 참여인사를 중심으로 성금을 모아 전달하고, 서문시장 화재나 광주지방 폭설 때에도 현장을 방문해 자원봉사를 했다.■ 공로상 최태향 대구교도소 교화위원 한·몽 불교교류협회 부회장으로 1989년 수용자와 자매결연을 맺으며 교화활동에 뛰어들었다. 지금까지 175차례에 걸쳐 2320여명의 문제 수용자와 자매결연을 맺어 상담하고 영치금과 다과비 등 2430여만원을 지원했다.2001년 대구교도소에 관세음보살 입상을 봉안하며 1750만원을 건넸다.
  • 김앤장의 사람들

    김앤장의 사람들

    김앤장은 김영무(65)·장수길(65)·이재후(67) 변호사가 대표를 맡는 트로이카 체제로 운영된다. 김 대표변호사는 내부 살림을 맡고, 장·이 대표변호사가 대외 업무를 한다. 로펌 내부의 중요한 결정은 세 변호사가 함께 논의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서울대 법대 동기인 김영무·장수길 변호사가 1973년 로펌을 만들었고, 성을 따서 ‘김앤장’으로 이름지었다. 이 대표변호사는 6년뒤에 합류했다. 나이가 들면 변호사는 일선 현장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등식은 김앤장에서는 통하지 않는다.30년 경력을 훨씬 넘어도 현장에서 활동한다. 이재후 대표변호사도 예외가 아니다. 이재후 대표변호사는 “팀 리더는 있지만 다 같은 변호사이지 상관·부하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대표변호사 개념이 기업의 CEO와는 다르다.”면서 “대표변호사 역시 파트너 중 한사람일 뿐이며, 그래서 가끔 법원에도 가고 팀플레이에도 참여하는 등 업무를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판사 출신으로 김앤장에서 4년째 근무하고 있는 권오창(42) 변호사는 “후배들을 법정에서 만나면 그 연차에 아직도 서초동에 직접 나오느냐고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면서 “연차가 어떻게 되든 송무를 하는 변호사에게는 법정이 생명”이라고 말했다. 변호사 대부분이 서울대 법대 출신이지만, 다채로운 경력의 소유자들도 많다. 정계성(사시 16회) 변호사는 1971년 장수길 변호사가 무죄를 선고했던 ‘신민당사 농성사건’의 주역 대학생 중 한 명으로 사법연수원을 수석 수료한 뒤 바로 김앤장에 합류했다. 최근에는 전기·기계설계·물리학 등 이공계열을 전공한 변호사들도 늘고 있다. 이원복 변호사는 의과 대학을 졸업한 뒤에, 이진영 변호사는 약대를 마친 뒤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박준기 변호사는 미국 하와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물리학과까지 마친 뒤 국내에 돌아와 사법시험에 합격,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김앤장이 신규 변호사 채용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부분은 크게 팀플레이에 적합한 인화력 등 품성과 새로운 일을 창출할 수 있는 적극성, 능동성 등이다. 사법연수원 졸업생이 받는 연봉은 1억원 정도로 알려져 있으며, 밤 11시 퇴근을 ‘칼퇴근’이라고 부를 정도로 업무 강도가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연봉은 대외비.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청자의 거장’ 도예가 혁산 방철주 옹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청자의 거장’ 도예가 혁산 방철주 옹

    총알에 날개를 달았다. 날카로운 부리도 있다. 어떤 계략이나 은폐·엄폐가 필요없다. 잔잔한 호숫가를 그저 바라보는가 싶더니 ‘쉬익∼’ 하고 날아가 눈 깜짝할 사이에 물고기를 낚아챈다. 하늘로 치솟는 모습이 예술이다. 햇빛에 반사되는 파문과 현란한 날갯짓에서 펼쳐지는 청록색 향연은 그야말로 눈이 부시다. 이 광경을 보고 아마 ‘비(翡)’라고 했을 터.0.002초의 승부사 물총새, 바로 그 색깔(翡)에 우리 조상들은 넋을 놓았을 것이다. 천년 세월을 이어온 ‘고려청자’가 세계의 으뜸인 까닭은 무엇일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결같이 형언할 수 없는 천하제일의 비색(翡色)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보석의 비취색보다 더 고운, 태고의 신비감이 자랑이다. 그 비색을 좇아 살아온 40년 세월이다. 고려인의 비색청자를 가장 가깝게 재현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울러 생동감 있는 문양창조로 청자의 품격을 한층 세련되게 끌어올려 한국을 방문하는 각국의 정상들로부터 ‘보물급’이라는 찬사를 듣는다.‘청자의 거장’이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美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작품 영구전시 혁산(赫山) 방철주(85)옹. 경기도 이천의 ‘동국요’에서 나이를 잊은 채 여전히 ‘작업중’이다. 선생은 요즘 어느 때보다 ‘청자인생’에 보람을 느낀다. 다름 아닌 다음달 7일 선생의 작품 ‘지구무늬 항아리(Global Jar)’가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영구 전시(등록번호 2043527)된다. 1998년 제작된 이 ‘지구무늬 항아리’ 표면에는 물방울 모양이 점점 확대되거나 축소되면서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듯한 현대적인 문양이 그려져 있다. 스미스소니언 측은 고려청자의 고전적인 아름다운 비색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디자인을 표현한 최고의 작품이라고 극찬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선생은 2000년 일본 도자기상이 연출한 희대의 고려청자 사기극을 밝혀내 국내외 언론에 대서특필이 된 바 있다. 지난 9일 도자기 축제가 벌어지는 경기도 이천시내를 거쳐 신둔면 수하리에 위치한 ‘동국요’를 찾았다. 마당 한가운데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지금까지 선생과 동고동락을 같이해 온 세월의 버팀목인 듯했다. 그 주위로 전시장, 작업실, 사무실 등이 그림처럼 이어진다. 낯선 기척에, 수제자이자 딸인 방문숙(43)씨가 먼저 손님을 맞이한다. 이어 선생이 “멀리서 왔다.”며 손을 내밀었다.85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얼굴피부가 무척 젊고 고왔다. 아름다운 비색과 함께 살아서 그럴까. ●수제자인 딸과 함께 작업 작업실에 들어섰더니 마침 딸과 함께 작업중인 ‘지구무늬 항아리’가 있었다.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보관될 작품과 똑같은 크기로 전체 작업단계 중 약 80%라고 선생은 설명했다. 이어 전시실로 들어섰다.40평 남짓한 공간에는 온통 비색으로 가득찼다. 가장 아낀다는 ‘벚꽃무늬 항아리’를 비롯한 각종 꽃들이 비색과 절묘하게 어우러진 공간이다. 또 주병(酒甁), 장경병(長頸甁) 등 여러 가지 병류와 매병(梅甁), 각종 주전자 등이 저마다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특히 진열대 중간 중간에 찰스 영국 왕세자, 미테랑 전 프랑스대통령,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일본의 나카소네·후쿠다·호소가와, 고이즈미 전 총리 등 혁산의 비색청자를 선물받은 각국 정상 12명의 사진과 관련 기사들이 액자로 쭉 놓여져 있었다. 그의 작품이 세계 정상들의 안방에 놓여져 있다는 생각에 경외스럽게 느껴진다. 잠시 그의 도록집을 살폈다. 도자사학가 강경숙씨는 “선생의 작품세계는 절정기의 비색청자의 모방과 재현에서 출발했으나 현대의 미감이 충분히 발현돼 있다.”면서 “기형은 전통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무늬는 젊고 생동감이 넘치며,4월의 등나무 꽃을 연상시키는 연이은 구슬무늬 등 현대인의 감각에 잘 와닿는다.”고 평가했다. 또 정양모 전 국립박물관장은 “비색을 빚어내는 오묘한 기술은 단절되고 그 영롱한 아름다움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려운데 지금 같은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의미부여를 했다. 기법 또한 상감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 문숙씨는 “조선시대의 분청사기에 주로 사용된 박지기법(백토를 문양 위에 바른 후 다시 얇게 벗겨내는 것)이 상감과 어우러지며 진사채(辰砂彩)와 함께 고고(孤高)하면서도 화사하게 아롱진다.”고 설명했다. ●계룡산 점술가 “평생 깨지는 물건 취급할 팔자” 선생의 도예인생은 어쩌면 숙명적이었다. 충남 논산 출생인 그는 27세때 우연히 계룡산 근처의 노(老) 점술가를 만난다. 이때 점술가한테 “자네는 평생 깨지는 물건을 취급할 팔자야.”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안 돼 정말로 우연하게 유리사업을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됐다. 같이 일하던 중 1954년 서울 을지로2가에 ‘유리상회’를 차렸다. 이어 대전에 3000평 규모의 유리가공 공장을 설립했다. 일본을 오가며 기술개발도 하며 나름대로 번창했다. 그러던 어느날 건강이 악화되자 문득 “돈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다 때려치우고 건강하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 이상하게도 어린 시절 옹기그릇을 잔뜩 이고 있던 할머니 모습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그 할머니는 우리 집에 와서 그릇을 다 줄 테니 곡식과 바꿔달라고 했거든요. 그 모습이 얼마나 애절하던지….” 1967년,45세 나이에 유리사업가에서 도예의 길로 뛰어든 계기가 됐다. 일본에서 4년 동안 유약과 흙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1971년 귀국해 현재의 ‘동국요’를 만들었다. 이후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청자재현에 매진했다.1973년, 일본에 사는 지인이 가끔 왔다 가곤 하더니 하루는 5만달러를 불쑥 보내왔다.“부담없이 받고, 혹 (도자기)구워지는 거 있거든 하나 둘 보내달라.”는 짤막한 서신도 동봉했다. 빚 아닌 빚이 된 셈. 이후 일본으로 완성품 청자를 몇번 보냈다. ●1974년 고 이병철 회장과의 만남 1974년 봄이었다.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갑자기 사람을 보내 잠시 만나자고 해 이 회장 집무실로 찾아갔다. 셋째 아들 이건희씨와 그의 장인이자 당시 중앙일보 사장인 홍진기씨 등도 함께 있었다. 이 자리에서 이 회장은 “지금 국내 어디에서 도자기를 팔고 있느냐.”고 물었고, 혁산은 단 한점도 없다고 대답했다. 이어 이 회장은 “도자기는 여러 사람한테 보여주는 것이다. 신세계백화점에 장소를 내줄 터이니 그곳에 전시하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 극구 사양하고 돌아왔지만 며칠 동안 사람이 찾아와 설득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신세계에 직매장을 설치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일본의 지인에게 보냈던 작품이 도쿄시내에 전시됐고 이 회장이 이를 우연히 보고 혁산을 부르게 됐다. 선생은 평소 ‘도자기의 생명은 흙이라는 단미(單味)에 있다.’는 말을 항상 가슴에 품었다.1975년 전남 강진군 일대를 샅샅이 답사하던 중 또 한번 숙명적으로 고려시대의 ‘태토’와 만났다. 고려청자에 가장 근접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미 800년의 긴 세월 동안 단절돼 버린 그 전통기법의 맥은 과연 무엇이며, 과연 이를 살려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 저를 괴롭힌 숙명적 화두였지요.”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22년 논산 출생 ▲65∼70년 일본의 세토(瀨戶), 교토(京都), 마쓰자카(松阪) 등지에서 도예 수학 ▲71년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 수하리 현 위치에 ‘동국요’ 설립 ▲73∼2007년 일본에서 개인전 80여회 ▲73년∼현재 12개국 정상들에게 해외 수교예술품으로 증정 ▲75년 전남 강진에서 최고의 청자용 태토 발견, 채취에 성공 ▲76∼79년 신세계백화점 내 미술관에서 개인전(4회) ▲84∼88년 미국, 남미 등지 순회그룹전 ▲85년 한국의 전승공예도예 5대 작가 초대기획전 ▲97년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대학 주최 한국 전승 도자전(한국학과 설립 100주년 기념) ▲97∼2002년 한국 이천 도자기 축제에서 한·중·일 작가 특별전 ▲02년 프랑스 파리 한국도자전 ▲05년 청자 초대전(롯데 에비뉴엘 갤러리) ▲06년 한국도자기 런던 특별전 ▲07년 6월 ‘지구무늬 항아리’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영구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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