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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벨과학상 수상 ‘공식’ 있다

    노벨과학상 수상 ‘공식’ 있다

    2009년도 노벨상 수상자들이 발표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도 노벨 과학상을 받기 위해선 보다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으로 분석됐다. 우리나라는 1901년 시작된 노벨상에서 100년이 넘도록 단 한 명의 과학상 수상자도 배출하지 못했다. 7일 포항공대 과학문화연구센터 ‘노벨과학상 분석 및 접근전략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노벨상 수상자들은 노벨상을 다수 배출한 ‘명당대학’에서 이미 노벨상을 받은 ‘노벨상 선배’들에게 교육을 받았고, 수상실적도 화려한 것으로 나타났다. ① 수상자를 스승으로 “노벨상을 받으려면 수상자를 스승으로 모셔라.” 역대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들의 절반 이상이 기존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을 멘토 혹은 스승으로 모셨거나 어떤 형태로든 연관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영국 캐번디시연구소의 톰슨(1906년 물리학상)과 어니스트 러더퍼드(1908년 화학상) 박사는 총 17명의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임경순 포항공대 과학문화연구센터장은 보고서에서 “1972년까지 미국 내 노벨상 수상자 92명 중 48명이 앞선 71명의 노벨상 수상자 밑에서 학생, 박사과정, 연구원 등의 경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② 배출 명당 찾아가라 로또 1등 당첨자를 수차례 배출한 명당 판매점이 있듯 노벨상 수상자를 다수 배출한 명당 대학·기관이 있었다. 1973년부터 2008년 사이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대학 885곳(중복 소속 가능) 중 362곳(41%)이 미국 대학이었다. 그 중 하버드대가 48명 배출로 1위였으며, 캘리포니아대가 39명으로 2위, 매사추세츠공대(MIT)가 32명으로 3위, 컬럼비아 대학이 28명으로 4위를 차지했다. 또한 이들 대학은 노벨상 수상자를 해당 대학 교수로 다시 초빙하는 경우가 많아 재차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데 유리한 환경을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③ 독창적 연구 ‘한우물’ 일본은 지금까지 총 14명의 과학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특히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일본에서만 8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탄생했다. 큰 원동력은 ‘실수를 질책하지 않고 계속 연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연구 풍토’와 해외 우수 연구자와의 협력 때문인 것으로 분석됐다. 이은경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는 “일본 과학계는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끈질기게 연구하는 특징이 있다.”면서 “해외 우수 연구자와의 네트워크 구축에도 뛰어난 모습을 보이고 있어 그것이 노벨상 수상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준기자 apple@seoul.co.kr
  • [뉴스다큐 시선] 사라져 가는 청계6가·이태원 헌책방

    [뉴스다큐 시선] 사라져 가는 청계6가·이태원 헌책방

    이번 주인공은 사라져 가는 ‘헌책방’입니다. 40년 전통의 서울 청계6가 헌책방 골목과 영어서적을 파는 이태원을 다녀왔습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골목은 한산했습니다. 책 주인이 책장 사이에 끼워둔 단풍잎을 발견하는 기쁨, 밑줄 그어 놓은 구절을 읽고 고개를 주억거리던 기억이 그립지 않나요. 올가을 헌책방에 들러 헌책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에 취해 보는 건 어떨까요. 글 사진 동영상 오달란 유대근기자 dallan@seoul.co.kr “내 이름은 여재촬요입니다. 1893년(고종 30년)에 오횡묵이 쓴 지리서입니다. 한국과 세계의 지리를 담고 있습니다. 세계지도와 조선전도가 흠집 하나 없이 들어 있습니다. 개화기에는 지리 교과서로 인기가 많았죠. 우리 헌책방에서 나이가 가장 많습니다. 몸값도 상당하죠. 100만원에도 나를 사갈 고서 수집가가 있을 겁니다.”(서울 청계6가 상현서림의 헌책) “서점 밖 인도에 쌓아둔 책더미 맨 위에 내가 있습니다. 약초한방대백과가 내 이름입니다. 계절별로 나는 약초의 이름과 효능을 사진과 함께 설명한 책입니다. 일반 서점에서는 구할 수가 없어요. 50대 중년부부가 나를 집어 드네요. 올컬러 634쪽의 통통한 자태에 반한 모양이에요. 주인 아저씨는 단돈 9000원을 받고 검은 비닐봉지에 나를 담아 부부에게 건넵니다.”(청계6가 양지서림의 헌책) “나는 1913년에 영국에서 출판된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입니다. 빨간 하드커버 위에 금색 잉크로 코끼리와 알리바바를 새겨 넣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죠. 헌책방에 들어온 지도 어언 20년이 넘었네요. 주인 부부가 잘 관리한 덕분에 96살 먹은 책치곤 상태가 좋습니다. 내 몸에서 나는 은은한 바닐라 향기가 느껴지나요?”(이태원 포린북스토어의 헌책) 서울 청계6가 평화시장의 헌책방 골목. 2평 남짓한 가게 공간이 부족해 인도에까지 쌓아둔 책들이 손님의 시선을 끌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간혹 두어 명의 행인들이 서점을 기웃거리지만 한두 권 꺼내 들춰 보다가 이내 자리를 뜬다. 눈부신 가을햇살에 책 표지만 빛을 바래가고 있다. 40년째 이곳에서 양지서림을 지키고 있는 성세제(63)씨는 “1970년대 150개가 넘었던 책방이 지금은 50개도 안 남았다.”고 말했다. 책이 귀했던 시절, 헌책방은 배움에 목마른 학생들과 지갑을 선뜻 열기 어려운 서민들의 책 욕심을 두둑이 채워줬다. 청계천 골목은 새학기가 시작되는 3~4월과 9~10월이면 교재를 마련하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성씨는 “새까만 머리밖에 안 보일 정도였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신학기 대목에 번 돈으로 1년을 나기도 했다고 하니…. 2대째 상현서림을 운영하고 있는 이응민(45)씨는 “아버지는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대학 교재를 팔아 번 돈으로 집도 사고 삼형제를 키워 장가까지 보내셨다.”고 말했다. 1970~1980년대 장발의 대학생들은 헌책방에 책을 내다판 돈으로 막걸리를 마시기도 했다. 부모님에게는 새책을 산다고 둘러대고 헌책을 구입한 뒤 남은 돈을 갖고 술집으로 향하는 주당들도 있었다고 한다. 유통이 금지된 불온서적들도 헌책방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청년들은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공산당사 등 사상서적을 구하기 위해 헌책방을 찾았다. 책방 주인들은 벽장이나 다락에 깊숙이 숨겨둔 책을 꺼내 신문지에 싸서 학생들에게 주었다. 조순 전 서울대 교수의 ‘경제학원론’은 헌책방 골목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대학생들의 필독서로 여겨지던 이 책을 확보하기 위해 헌책방 주인들 사이에서 피 말리는 경쟁이 벌어질 정도였다. 1980년대 등장한 복사기는 헌책방 호황에 찬물을 끼얹었다. 대학가 곳곳에 1장당 10원을 받고 교재를 복사해 주는 복사집이 대거 들어서면서 헌책방을 찾는 학생들의 발길이 끊기기 시작했다. 급기야 책의 모든 쪽을 복사해 한 권의 책처럼 만들어 파는 제본 방식이 유행하면서 헌책방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태원 포린북스토어 “200명 단골들은 보물1호… 도올선생도 내 고객” 이응민씨는 2001년 아버지 이상화(72)씨의 헌책방을 물려받았다. 1977년부터 책방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삼형제 중 맏아들인 이씨가 대신 가업을 잇기로 했다. 슈퍼마켓 유통 영업소장으로 10여년 일한 이씨는 장사라면 자신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슈퍼에서 야채 팔듯이 책을 팔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우선 8000권에 달하는 책을 5000권으로 줄여 공간을 확보하고 책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했다. 비슷한 시기에 인터넷 헌책방도 시작했다. 인터넷 경매쇼핑몰에 헌책방을 내고 책 사진을 찍어 올렸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하루에 택배 상자 54개를 부칠 때도 있었다. 오프라인 헌책방 수입의 2배를 넘어서기도 했다. 그러나 경매쇼핑몰의 수수료가 비싸 3년 전 인터넷 헌책방을 그만뒀다. 대신 헌책방 블로그를 시작했다. 이씨의 블로그는 하루 평균 700~1200명의 고정 방문자가 있을 만큼 명소가 됐다. 책방 운영 9년째에 접어든 이씨는 “책 장사는 그냥 장사가 아니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5000권이 넘는 책을 빨리 팔아치우겠다는 마음으로 덤볐더니 손님도 줄고 매출도 뚝 떨어졌다.”면서 “어느 순간 ‘못 팔면 내가 읽으면 되지.’ 하는 느긋한 생각으로 임했더니 일이 풀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씨의 남은 소원은 중학교 1학년인 큰딸에게 책방을 물려주는 일이다. 그는 “이 녀석이 예전의 나만큼 책 읽기를 싫어한다.”면서 “책을 싫어한 죄로 책방을 하게 된 아비의 운명을 닮아가려는 것 같다.”며 웃음을 지었다. 서울 지하철 녹사평역 1번 출구에서 나와 조금만 걷다 보면 진초록 천막을 드리운 2층 건물이 보인다. 한눈에도 오래돼 보이는 이곳은 최기웅(66)·김영자(61)씨 부부가 1973년부터 운영해온 포린북스토어다. 영어서적을 전문으로 취급한다. 최씨는 1967년 종로 화신백화점(현 종각타워) 뒷골목 노점에서 헌책 장사를 시작했다. 미군부대 근처 고물상을 뒤져 수집한 헌책은 이발소와 봉투집에서 많이 사갔다. 읽기 위해서가 아니다. 면도크림을 닦고 군밤과 과일을 담는 봉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최씨는 명동 뒷골목으로 자리를 옮겨 ‘읽기 위한 책’으로 팔기 시작했다. 컬러인쇄된 책이 귀하던 시절 그가 팔던 라이프, 루크, 포스트 등 미국 월간지는 좋은 구경거리였다. 영어 공부를 하려는 학생들도 그의 노점을 찾았다. 최씨는 “이화여대 영문과 학생들이 단골이었다. 내가 파는 잡지와 단행본으로 공부해 교수하고 있는 친구도 있을 것”이라며 기억을 떠올렸다. 1985년 이태원의 지금 자리로 이사를 왔다. 소설, 여행안내서, 요리책, 역사서 등 10만권의 책이 2~3중으로 설치한 책장을 빼곡하게 채웠다. 최씨는 영어책을 판다는 자부심으로 한길을 걸어 왔다. 부동산 붐이 일던 1990년 초, 서점을 치우고 부동산을 차리자는 친구의 제안도 단번에 거절했다. 최씨는 “그 당시 부동산을 했으면 큰 부자가 돼 있겠지만 그래도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씨에게 10만권의 헌책은 자식과 마찬가지다. 새것처럼 보이도록 매일같이 먼지를 떨고 손질한다. 24색 매직펜으로 칠이 벗겨진 표지를 덧칠하고 칫솔에 표백제를 묻혀 누렇게 바랜 책 옆면을 쓱쓱 닦아낸다. 10여분의 손질이 끝나면 새책처럼 깔끔해진다. 200명이 넘는 단골들은 최씨의 보물 1호다. 도올 김용옥 선생, 이팔호 전 경찰청장 등 유명인사들도 그의 책방에서 원서를 뒤적였다. 최씨 부부는 살림방이 딸린 이 책방에서 딸 셋을 키워 대학원까지 보냈다. 부인 김씨는 “책과 함께 커 온 딸들은 책방을 놀이터와 공부방으로 여기며 자랐다.”면서 “헌책방 운영이 예전 같지 않지만 여생을 책과 함께 마감하고 싶다.”고 소망했다.
  • 관악산 낙성대공원 대변신

    관악산 낙성대공원 대변신

    고려 명장 강감찬(948~1031) 장군의 추모공원인 관악산 낙성대공원이 서울의 역사문화명소로 탈바꿈했다. 서울시는 강감찬 장군의 동상과 사당이 모셔진 ‘관악산 낙성대공원’에 대한 2년여간의 재정비사업을 마치고 1일부터 개방한다. 시는 우선 공원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과 서울대 후문을 잇는 낙성대길에 있는 공원 담을 철거했다. 공원 내의 주차장도 없애고, 잔디마당을 조성해 시민의 휴게공간이나 행사 장소로 활용할 수 있게 했다. 또 안국사(사당) 주변과 공원 안 옥향나무·편백나무·노무라단풍나무 등 일본 조경수를 없앴으며, 사당 입구에는 홍살문을 설치해 추모공간(사당)과 광장(이용공간)을 분리했다. 관악구 낙성대동 228에 위치한 낙성대공원은 강감찬 장군을 기리기 위해 정부가 1973년 장군의 본가 근처 2만 8878㎡에 조성한 기념공원으로 사당과 장군의 동상, 야외공연장, 연못 등의 시설이 들어서 있다. 그러나 시설이 34년이 지나 노후화되자 시가 지난해부터 관악구에 17억원을 지원, ‘제2차 낙성대공원 성역화사업’을 추진했다. 시 관계자는 “앞으로도 역사적· 문화적 콘텐츠가 있지만 시설이 낡은 공원들을 새롭게 정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백민경기자 white@seoul.co.kr
  • “권력욕심 커지면 죄 짓기 마련”

    이희호 여사가 1970∼80년대 수감 중이던 남편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를 묶은 책 ‘옥중서신 2’(시대의창 펴냄)가 29일 출간됐다. 이 책은 김 전 대통령이 교도소에 있을 때 이 여사에게 보낸 편지와 메모를 묶어 최근 증보·출간한 ‘옥중서신 1’에 이은 것으로, 이 여사의 미공개 편지들을 묶었다. 2권 1장에는 이 여사가 1972∼73년 미국과 일본에 망명 중이던 김 전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들이, 2장에는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1977년 진주교도소에 갇힌 남편에게 보낸 내용들이 담겼다. 3장은 1980년 내란음모사건으로 청주교도소에 있던 김 전 대통령에게 보낸 1981년의 편지들이다. 1, 2장의 편지 대부분은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것들이지만, 3장 편지들은 책으로 출간된 바 있다. 책에 실린 편지들에는 남편인 김 전 대통령이 용기를 잃지 않도록 가족 근황과 마당의 화초 이야기를 전하고, 국내외 정세 등 세상 돌아가는 소식도 담아 현실 정치인으로서 감각을 잃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한 흔적이 역력하다. 또한 동지이자 후원자, 조언자로서 이 여사의 철학과 사상, 종교적 신념도 담겨 있다. 1973년 4월10일자 편지에서 이 여사는 “박정희 대통령은 요새도 술을 마시지 못하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합니다.”라며 “권력 욕심이 커지면 역시 죄를 짓게 마련이고 죄가 커지면 망한다는 것은 자연의 법칙과도 같아서 오늘의 권력자들이 불쌍해요.”라고 썼다. 2만원.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부고] NYT 칼럼니스트 새파이어

    [부고] NYT 칼럼니스트 새파이어

    퓰리처상 수상자이자 뉴욕타임스(NYT)의 유명 칼럼니스트인 윌리엄 새파이어가 암 투병 끝에 사망했다. 80세. 언어에 대한 칼럼과 정치 비평으로 잘 알려진 그는 1973년 뉴욕타임스에 입사, 78년 논평 부문 퓰리처상을 받았다. 다음해인 79년부터 ‘언어에 대하여(On Language)’라는 칼럼을 쓰기 시작, 30년간 연재했다.뉴욕타임스 입사 전인 1968년에는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연설문을 담당했다. 2006년에는 조지 W 부시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일반 시민에게 수여되는 최고의 상으로 꼽히는 자유 훈장을 받았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G20 정상회의 유치] G5~G20 변천사

    [G20 정상회의 유치] G5~G20 변천사

    G는 그룹(group)의 머리글자다. 숫자는 참여하는 국가의 수를 뜻한다. 주로 경제규모에 따라 결정된다. 정치·군사적 영향력도 일부 감안된다. 선진 5개국(G5)은 1973년 1차 석유파동을 계기로 미국 일본 독일(당시는 서독) 영국 프랑스의 경제관료 모임으로 출발했다. 1975년 이탈리아가 들어오면서 G6이 됐다. 다음해 캐나다가 합류해 G7이 됐다. G7은 20여년간 선진국 모임의 대명사가 됐다. 1997년 경제력이 뒤처지는 러시아가 들어오면서 G8은 주요 8개국의 모임으로 의미가 다소 변했다. 2005년 영국에서 열린 G8 정상회의에 브릭스(BRICs)의 멤버인 중국 브라질 인도와 멕시코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신흥 5개국이 초청된 것을 계기로 G13이 나왔다. 최근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주요 20개국(G20)은 1997년 아시아의 외환위기를 계기로 모습을 드러냈다. 중국 브라질 인도 등 신흥국의 경제·군사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G7만으로는 외환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이에 따라 G7은 국제통화기금(IMF) 회원국 중 영향력이 있는 20개국을 선정하게 됐다. 대륙별 대표국가인 한국, 호주, 터키, 인도네시아, 사우디아라비아, 아르헨티나 등 6개국과 유럽연합(EU) 의장국이 추가되면서 G20으로 확대됐다. EU 의장국이 G20 회원국과 겹치면 참가국은 19개국으로 된다. G20은 1999년 12월 독일 베를린에서 첫 회의를 가졌다. 회원국의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가 참석대상이었다. 정상 간의 모임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난해 9월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두달 뒤 미국 워싱턴에서 1차 G20 정상회의가 열렸다. 2차 G20 정상회의는 지난 4월 영국 런던에서 열렸다. G20 국가의 GDP는 전 세계의 85% 정도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NPB] 요미우리 센트럴리그 3연패

    이승엽(33)의 소속팀 요미우리가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에서 3년 연속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요미우리는 23일 도쿄돔에서 열린 주니치와의 홈경기에서 5-3으로 승리했다. 시즌 83승41패9무로 2위 주니치를 11경기차로 따돌려 남은 경기 결과에 관계 없이 정규리그 1위를 굳혔다. 2007년 이후 3년 연속 우승인 동시에 구단 사상 42번째. 또 73년 이후 36년 만에 3년 연속 리그 우승의 기쁨도 맛봤다.2007년 2위 주니치와 1.5경기차. 지난해 한신과 2경기차로 힘겹게 우승을 했던 것과는 달리 올 시즌 요미우리는 내내 압도적인 전력차를 뽐냈다. 일본 진출 이후 최악의 부진에 빠진 이승엽이 1·2군을 들락날락거리면서 타율 .229에 16홈런 36타점에 머물렀지만 전력누수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가사와라 미치히로(타율 .313 30홈런 101타점)와 알렉스 라미레스(.325 29홈런 96타점), 아베 신노스케(.299 29홈런 72타점)가 버틴 타선은 리그 최고의 클러치 능력을 뽐냈다. 팀 타율은 .280에 달했고 팀 홈런도 175개를 쏘아올렸다. 양대리그를 통틀어 1위. 마운드에서는 세스 그레이싱어(13승5패 평균자책점 3.35)와 리키 곤살레스(14승1패 2.07)가 버틴 특급 선발진에 마크 크룬(1승3패26세 1.29)이 뒷문을 단속하는 등 완벽한 투타의 조화를 이뤘다. 클라이맥스시리즈 2스테이지에 선착한 요미우리는 2002년 이후 7년 만에 일본시리즈 제패에 나선다.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AFC 챔피언스리그] ‘파리아스 매직’ 스콜라리 넘는다

    [AFC 챔피언스리그] ‘파리아스 매직’ 스콜라리 넘는다

    세르히우 파리아스(왼쪽·42)도, 루이스 스콜라리(61)도 스타플레이어는 분명 아니었다. 파리아스는 고교 때 발을 다치는 통에 일찌감치 선수생활을 접었고, 스콜라리는 수비수였던 데다 1973년부터 8년 동안 클럽에서 뛰었지만 골 기록조차 없다. 그러나 지도자로서 명장의 반열에 오른 파리아스(K-리그 포항)와 스콜라리(우즈베키스탄 부뇨드코르)가 아시아 최강 클럽을 가리는 무대에서 사령탑으로 벤치 대결을 벌인다.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8강전이 무대다. 23일 오후 9시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의 JAR경기장에서 1차전, 오는 30일엔 포항 스틸야드에서 2차전으로 4강 티켓 주인을 가린다. 같은 브라질 출신이지만 파리아스 감독에겐 특별한 대결이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조국의 대표팀을 이끌고 싶다는 뜻을 밝혔기 때문. 브라질이 낳은 ‘스타 감독’ 스콜라리를 꺾는다면 단숨에 세계적인 명장 대열에 오르게 된다. 26세 때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 파리아스는 1998~99년 브라질 20세 이하(U-20) 대표팀을 이끌었고, 2004년 브라질 세리에C 우니앙 바르바렌시FC를 우승시켜 ‘최고 지도자 4인’에 이름을 올린 바 있다. 2005년 포항에 와서도 지휘봉을 잡은 지 2년 만에 K-리그와 지난해 FA컵, 올 시즌 피스컵코리아 정상에 오르며 국내 프로축구 타이틀을 모조리 거머쥐었다. ‘파리아스 매직’이라는 말까지 만들어 낸 그는 현재 리그 12경기 연속 무패(8승4무)를 기록하며 피스컵코리아, AFC챔스리그와 함께 트레블(3관왕) 꿈에 한창 부풀었다. 성적표를 보면 33세 때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스콜라리가 단연 앞선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부뇨드코르 지휘봉을 잡기 전에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강호 첼시 감독을 맡았던 세계적 명장이다. 지난해 일본 대표팀 사령탑이던 코임브라 지쿠(56·러시아 CSKA모스크바 감독)를 영입해 자국 리그와 컵 대회 우승을 휩쓸었던 부뇨드코르는 스콜라리와 그의 제자 히바우두(36)까지 영입해 23전 전승(71득점 9실점)을 내달리고 있다. 둘의 대결은 몸값 비교표에서도 확연하게 대조를 이룬다. 연봉 4억원으로 알려진 파리아스 감독에 견줘 스콜라리는 1200만파운드(235억원)로 세계 최고액이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엄마와 읽는 동화] 잘 가, 은고양이/이상교

    [엄마와 읽는 동화] 잘 가, 은고양이/이상교

    보름달이 아파트 뒤꼍을 환하게 비추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솔솔 불어와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엄마가 보고 있으면 어쩌지?’ 10층 베란다 창문을 열고 엄마가 내다볼 것이 걱정되었다. 고개를 쳐들어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내다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줄넘기의 나무 손잡이를 두 손에 나눠 잡았다가 나무의자 위에 슬그머니 놓았다. 줄넘기는 정말이지 싫다. 나무 의자에 앉은 채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구름이 조금 떠 있긴 해도 달빛은 더없이 환했다. 한참을 자세히 올려보자 구름 사이로 별이 또렷또렷 보였다. 바람이 불어와 귀 앞머리카락을 쓸었다. ‘뭐, 줄넘기 백번 넘었다고 하면 그만이지.’ 백번 다 넘었다고 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 것으로 해야 옳을는지 걱정이긴 했다. ‘어, 뭐지?’ 의자 아래로 내려뜨린 발에 무언가 닿았다. 털이 달린 말캉한 무엇. ‘강아진가.’ 주인을 따라 산책 나온 강아지가 다리를 건드렸나 했다. 궁금해진 나는 고개를 수그리고 나무의자 밑을 들여다보았다. “어, 고양이잖아.” 고양이는 아직 어린 새끼에 가까웠다. 온 몸이 흰 털로 덮인, 귀가 조뼛하고 눈이 동그란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늘어뜨려져 있는 줄넘기 줄을 앞발로 톡톡 건드렸다. “넌, 어디서 왔니? 줄넘기 하고 싶어서 그래? 너, 할 수 있어?” 나는 길쑴한 다리와 꼬리까지 온통 하얀 고양이에게 물었다. 고양이는 달아날 생각을 않고 줄을 주욱 당겨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리 밤이 깊은 시간도 아닌데 다른 날에 비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눈에 안 띄었다. “넌 줄넘기 못할 거야. 내가 한번 시범을 보여줄게. 참, 이름을 지어줄게. 은고양이, 어때?” 나는 줄넘기 줄을 주워들고 줄넘기를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스무번을 넘자 헉헉 숨이 찼다. “봐, 은고양이야, 이렇게 숨이 찬다니까.” 말을 마치고 돌아보았을 때 흰 고양이는 간 곳이 없었다. 내게 줄넘기를 하게 해놓고 슬그머니 가버린 듯했다. 달은 여전히 밝았다. 달빛을 받은 나뭇잎들이 초록 빛깔이 아닌 흰빛으로 보일 지경으로 희게 빛났다. 은고양이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금요일이었다.? “야, 땡이!” 학교 가는데 정욱이가 뒤에서 불렀다. “왜애?” 화가 나서 소리를 꽥 질렀다. 아이들은 김동엽 이름을 두고 땡이 별명을 불렀다. 땡이는 그래도 낫다. 어떤 애들은 뚱땡이 아니면 뚠띠라고도 했다. 정욱이는 앞서 걷고 있는 내 가까이로 다가왔다.? “너, 숙제 했어?” 정욱이는 숙제 얘기부터 꺼냈다. “숙제? 아니.” “안 했어?” 정욱이는 가느다란 눈을 더 가늘게 뜨고 물었다. “저녁밥 먹은 다음 하려고 했는데 너무 졸려워서 그냥 잤어.” 너무 잠이 쏟아지는 바람에 내 방으로 가지도 못하고 거실 카펫에 누워, 엄마가 아침에 깨울 때까지 계속 잤다. “선생님한테 혼날걸.” “할 수 없지, 뭐.” 혼날 때 혼나더라도 혼날 일을 나는 미리 걱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뭐든 먹고 금세 자면 땡이 되는 거 몰라?” 나는 주먹에 힘을 주었다가 스르르 풀었다. 말라깽이인 정욱이가 등에 멘 가방을 촐싹이며 앞장서 걸어갔다. 정욱이를 볼 때면 동생 세엽이가 생각난다.? 세엽이는 한 살이 아래인데 깽이, 깽이, 말라깽이다. 어디 특별히 아픈 데가 없는데도?아픈 아이처럼 바싹 마른 하얀 세엽이, 뭐든지 안 먹는 세엽이…. 나는 학교 공부 세 시간을 마치자마자 집으로 달음박질쳤다. 수요일은 엄마가 간식을 만들어 주는 날이다. 엄마가 만들어 주는 간식은 뭐든 다 맛있다. 피자, 김밥, 오징어튀김, 잡채, 어묵탕…. 아파트 정문 뒷길로 해서 집 쪽인 102동 입구로 들어가려는데 아파트 101동 쪽에서 뭔가 휘익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뭐지?’?? 까망에 하양이 섞인 고양이 한 마리가 키 작은 쥐똥나무 밑으로 재빠르게 달아났다. 몸이 작은 걸 보니 새끼 같았다. ‘얼룩이 고양이네. 먹을 걸 찾나 본데…. ’ 그렇게 생각하자 배가 갑자기 많이 고파왔다. ‘저런 길고양이들은 뭘 먹고 살까?’ 언뜻 보았지만 얼룩이 고양이의 배는 훌쭉했다. 하루를 꼬박 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틀…. 땅바닥에 비친 그림자가 더 말라 보였었다. ‘저번에 본 흰 고양이는 어디 있을까?’ 내 그림자는 내가 보기에도 뚱뚱하다. 어깨도 뚱뚱, 목도 배도 허벅지도 발목도 뚱뚱, 어디든지 다 뚱뚱…. “에이!” 조금 걸었는데도 땀이 많이 나서 짜증은 더 났다. 424, 424, 99 현관 번호키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도 세엽이도 집에 없었다. 냉장고 문을 홱 열었다. 현관 번호 424, 424, 99를 누를 그때 침은 벌써 꼴까닥 넘어갔다. 424는 사이다, 99는 치킨!?냉장고에는 사이다도 없고 치킨도 없었다. 그래서 사이다 대신 요구르트 다섯 개, 치킨 대신 언제 먹다 두었는지 모를 탕수육을 레인지에 돌려 먹었다. 정신없이 먹고 났을 때 전화벨이 따르르릉 울렸다. “동엽이니?” 엄마였다. “응.” “너, 또 뭐 먹었구나.” 엄마는 뭘 먹었는지부터 따졌다. “아니.” “뭐가 아니니? 뭘 먹은 목소리인데.” 엄마는 내가 뭘 먹었는지, 먹지 않았는지 목소리만 들어도 안다고 했다. 목소리가 텁텁하게 들리고 먹은 음식의 냄새까지 난다고 했다. “탕수육 남은 거 하고 요구르트.” 하는 수 없이 사실대로 말했다. “세엽이 자면 조용히 해라. 세엽이 깨지 않게.” 엄마는 자나 깨나 세엽이 걱정이다. 깽이, 깽이 말라갱이 세엽이. 세엽이는 유치원에 다니지 않고 그림 그리기, 만들기 같은 것을 가르치는 ‘푸른교실’에 다닌다. 세엽이네 선생님은 머리를 길게 기른 대학생 누나다. 엄마가 일이 있어 엄마 대신 세엽이를 푸른교실에 데려다 준 적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엄마가 시킨 대로 대학생 선생님에게 꼬박 인사를 했다. 그러자 대학생 선생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았다. “어머나, 세엽이 형이니? 맞아?” 대학생 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네.” 그러자 대학생 선생님은 말했다. “어머나, 동생 먹을 걸 다 뺏어 먹었나 보네!” 그렇지 않아도 뚱뚱한 것에 대해 한마디 할 것 같았는데 단번에 말했다. 나는 기분이 나빠졌다. “그건 아닌데요.” 나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뭐가 아냐? 뻔해.” 대학생 선생님은 놀리듯 빙글빙글 웃기까지 했다.? “나는 뭐든지 다 잘 먹고, 세엽이는 뭐든지 다 안 먹어서예요.” 억울하게 당할 수만은 없었다. 절대! “그건 그래. 여기서도 간식을 입에도 대지 않으니.” 나는 간신히 누명을 벗었다. 억울한 건 풀렸지만 다음부터 푸른교실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엄마에게 말해 놓았다. 그 뒤 정말로 한 번도 안 갔다. “목욕들 안 하니?” 저녁 먹고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데 엄마가 불렀다. 세엽이가 쪼르르 밖으로 나왔다. “…난 조금 있다가.” 엄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돌아보았다. 엄마가 눈을 갑자기 동그랗게 뜨고 바라볼 때면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곤 했다.? “그래, 잘됐네.” 엄마는 다른 날과 달리 순순히 대답했다. “뭐가 잘됐는데, 엄마?” 나는 엄마 눈을 피해 소파에서 일어났다. “줄넘기 하고 들어와서 씻으면 되겠다.” “누가?” 모르는 척 물었다. “누군 누구야? 너지.” “싫어.” “싫긴 뭐가 싫어. 줄넘기하고 들어와서 씻으면 두번 씻지 않아 좋잖아. 서늘할지 모르니 웃옷 하나 더 걸치고.” 엄마는 마치 미리 준비해 놓은 것처럼 얇은 점퍼와 줄넘기를 내다주었다. “내기 제일 싫어하는 게 줄넘기인 거 엄마도 알잖아!”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 “줄넘기 백번 넘기 싫으면 아파트를 세 바퀴 달리고 오든지.” “달리기도 싫어하는 거 엄마도 알잖아!” “줄넘기도 싫고, 달리기도 싫고… 그럼, 팔굽혀 펴기 서른 번 할 테야?” 엄마는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세엽이는 옷을 홀랑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세엽이의 벗은 궁둥이는 내 궁등이의 반도 안 되었다. “거실에서 하면 안돼?” 안 된다고 할 것이 뻔한데도 물었다. “네가 뛰면 102동 아파트 전체가 쿵쿵 울릴 걸 아마.” 엄마는 말하면서 현관문을 열고 점퍼와 줄넘기를 손에 쥐어주며 신도 제대로 못 신은 내 등을 떼밀었다. “왜 미는 거야?” 나는 밀리지 않으려 두 발바닥에 힘을 주었다. 아파트 뒤꼍으로 나온 나는 나무 의자에 앉아 줄넘기 줄을 무릎에 올려놓았다. ‘…엄마는 만날 나만 갖고 그래!’ ? 목욕탕에서 나온 세엽이는 요플레를 먹을 것이다. 나는 냉장고에 딸기 요플레와 키위 요플레가 있는 걸 보아 두었다. 냉장고 오른쪽 둘째 칸에. ‘보름달이 아파트 뒤꼍을 환하게 비추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솔솔 불어와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엄마가 보고 있으면 어쩌지?’ 10층 베란다 창문을 열고 엄마가 내다볼 것이 걱정되었다. 고개를 쳐들어 윗쪽을 올려다보았다. 내다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줄넘기의 나무 손잡이를 두 손에 나눠 잡았다가 나무 의자 위에 슬그머니 놓았다.?줄넘기는 정말이지 싫다. 나무 의자에 앉은 채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어, 지난번에도 지금과 꼭 같았는데….’ 보름달이 환하게 떠올라 있었다. 나는 놀라 둘레를 두리번거렸다. ‘은고양이가 오지 않을까?’ 줄넘기 줄을 나무의자 아래로 늘어뜨려 놓고 삼십 분이 넘도록 기다렸다. “하나, 둘, 셋, 넷… 스물 하나….” 나는 하나 둘을 세며 타닥타닥 줄넘기를 넘기 시작했다. 어느새 달빛을 받아 털이 더 새하얀 은고양이가 나와 함께 줄넘기를 넘었다. “… 여든 하나, 여든 둘….” 백까지 다 세고 돌아보았을 때 은고양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은고양이야, 잘가!” 언젠가 한번은 세엽을 데리고 나와 은고양이를 보여주어야 할 것 같다. 달빛을 받아 온통 새하얀 은고양이…. ● 작가의 말 몹시 배가 고파 보이는 길고양를 보았다. 길고양이에게 무엇이든 먹이려 슈퍼에서 참치 한 캔을 사 뚜껑을 따 주었다. 길고양이는 내가 멀리 떨어져 앉자 다가와 허겁지겁 먹었다. ‘잘가, 은고양이’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몸이 뚱뚱한 동엽이와 보름달밤 은고양이가 만난 이야기이다. 우리가 살을 빼야 한다든지, 숙제를 열심히 해야 한다든지 그런 자질구레한 일로 분주해 있을 때에도 ‘꿈결 같은 은고양이’는 우리 가까이에 와 있다. ● 작가 약력 서울에서 태어나 강화에서 성장했다. 1973년 소년 잡지에 동시가 추천 완료되었고, 197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부문 입선, 1977년 조선일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부문 입선 및 당선됐다. 지금은 한국동시문학회 회장과 한국아동문학인협회 부회장을 겸하고 있다.
  • 김시습의 ‘십현담요해’ 언해본 해인사 성철스님 서고서 발견돼

    김시습의 ‘십현담요해’ 언해본 해인사 성철스님 서고서 발견돼

    매월당 김시습(1435~93)은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책을 태워버리고 방랑하며 스님 행세를 했다. 교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가 당시 쓴 대표적인 불교 서적 중 하나가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 당나라 동안상찰(同安常察, ?~961) 선사의 게송을 담은 ‘십현담’에 매월당이 직접 주석을 붙인 한문서적이다. ●문화재 목록에 없는 희귀본 자료 그 ‘십현담요해’의 언해본, 즉 한글 번역본이 경남 합천 해인사 백련암에 위치한 성철(1912~93) 스님의 장경각 서고에서 처음으로 발견됐다. 성철 스님의 상좌였던 백련암 원택 스님은 15일 서울 조계종 총무원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올해 4월 성철 스님의 장경각 서고를 정리하던 중 이 책을 발견했다.”면서 “기존 문화재 목록이나 국립도서관 서지목록에도 없는 희귀본 자료로 보인다.”고 밝혔다. 스님에 따르면 이 책은 장경각 서고를 대대적으로 정리했던 지난 4월 오랜 만에 햇빛을 봤다. 성철 스님은 평소 제자들에게 “책 보지 마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당신은 때에 맞춰 폭서(曝書·책을 볕에 말리는 것)를 할 정도로 책을 가까이 했다. 이번 서고에서 나온 책만도 1만권에 달하는데, 스님은 일일이 읽은 책의 리스트까지 작성해 놓았다고 한다. ●4월에 정리하다 햇빛… 전문가 자문받아 하지만 스님의 입적 이후 서고 관리는 자연스럽게 ‘보존’쪽으로 방향이 맞춰졌다. 그러다가 올해 초 원택 스님이 서책 관리를 위해 장경각의 책을 모두 꺼내 정리했다. 스님은 이 중 일부를 모아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받았고, 그 결과 이 책이 지금껏 전해지지 않은 희귀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번에 발견된 언해본은 1548년(명종 2년) 강화도 정수사에서 판각된 것으로 매월당의 한문본 출간(1475년·성종6년) 이후 73년이 지난 뒤 나왔다. 현재 언해의 주체는 밝혀지지 않은 상태. 하지만 국가적인 불경 언해 사업을 폈던 ‘간경도감’(刊經都監)이 사라진 직후인 16세기에 개 사찰 차원에서 제작한 언해본이라 그 희소가치가 높다. 특히 이 책은 지금은 쓰이지 않는 반치음(ㅿ)과 꼭지이응(ㆁ)도 사용하고 있어 16세기 중반 국어학 및 서지학 연구자료로서의 가치도 크다. 성철 스님의 서고에서는 ‘십현담언해본’ 외에 각수(刻手)의 이름이 새겨진 간경도감판 ‘법화경’ 등 여러 고서가 함께 발견됐다. 원택 스님은 “이 고서들은 현재 서지학자 등에게 자문을 구하고 있는 중”이라면서 “검토결과에 따라 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고 영인본을 제작해 연구자료로 활용토록 할 것”이라고 했다. ●서고서 성철스님 책 만권도 나와 한편 ‘십현담’은 성철 스님이 처음 대중 법문을 했던 1965년 경북 문경 김룡사 법문에서 인용했던 책으로 알려졌다. 이에 원택 스님은 “성철 스님의 ‘책 보지 마라.’는 말씀은 수행 중인 수좌들에게 하신 격려의 말이지 일반 대중들까지 책을 멀리 하라는 말이 아니었다.”면서 “당신은 열심히 책을 보셨기에 100일 법문 등도 가능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발견된 자료는 새달 8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리는 성철 스님 추모학술대회에서 연구발표와 함께 그 가치를 논의할 전망이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4대강 개발사업 朴 前대통령때도 추진”

    박정희 대통령이 4대강 개발 사업에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친필 문서가 공개됐다. 박 대통령 비서관을 지낸 동훈(75) 남북평화통일연구소 소장은 박 대통령이 ‘중요업무발췌’라는 제목으로 만년필로 쓴 친필 메모를 문화체육관광부가 16일자로 발행한 정책정보지 ‘위클리 공감’에 소개했다. 박 대통령이 1973년 8월15일 작성한 것으로 돼 있는 이 문서에는 당시 농림부와 건설부가 챙겨야 할 사업으로 ‘四大江 流域開發事業 進度現況(4대강 유역개발사업 진도현황)’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그는 “4대강 살리기 사업의 시발점은 박 대통령의 4대강 유역 개발사업과 통한다고 볼 수 있다.”며 “당시에는 이 사업에 국민의 저항이 없었는데 지금은 거꾸로 백안(白眼)시하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주장했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공주형 미술세계] 조각가 권진규 회고전 日서 열린다는데…

    [공주형 미술세계] 조각가 권진규 회고전 日서 열린다는데…

    바다 건너 일본에서 낭보가 들려옵니다. 조각가 권진규(1922~1973년) 선생의 회고전이 다음 달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에서 석 달 간 열린다는 소식입니다. 회고전은 같은 기간 무사시노 미술대학 자료실에서 동시에 열립니다. 일본에서 손꼽히는 작가들도 전시가 쉽지 않다는 전시장에서 회고전이 열린다니 반갑습니다. 일본 미술 명문 무사시노 미술대학이 ‘가장 성공한 동문 예술가’로 선정해 개교 80년 기념전으로 성사된 전시라니 뜻깊습니다. 선생은 1953년 무사시노 미술대학 조각과 졸업생입니다. 소식을 접하며 선생의 아틀리에를 방문했던 2년 전 겨울을 떠올렸습니다. 미술 교과서에 실린 ‘지원의 얼굴’로 아득히 멀게 느껴졌던 분이었는데 선생의 아틀리에는 의외로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서울시 동선동 언덕배기에 선생의 아틀리에가 있습니다. 1959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선생이 손수 설계하고 건축한 곳입니다. 숱한 작품들을 탄생시키고 선생은 이곳에서 쉰한 살에 목을 매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차 하나 들어가기 좁은 길, 숨차게 올라야 하는 가파른 골목을 지나 유난히 담이 낮고, 대문이 작은 집이 ‘한국적 사실주의를 이루었다.’고 평가되는 선생 예술의 산실입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작업실에 방을 덧붙인 ‘L’자형 아틀리에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작은 문, 좁은 복도를 지나 한 사람 겨우 누울 정도 크기의 방을 통과하면 작업 공간이 나옵니다. 천장 높이가 4.5m에 달하는 작업장에 들어서서 비로소 낮추었던 허리도, 비좁았던 시선도 자유를 찾습니다. 복층으로 나뉜 작업장 한가운데 목재 사다리가 걸려 있습니다. 시멘트 블록으로 쌓은 벽면에는‘범인(凡人)엔 침을, 바보엔 존경을, 천재엔 감사를’이라는 낙서가 쓰여 있습니다. 흙을 다져 마감한 바닥에 주인 잃은 책 더미들이 붉은 노끈에 묶여 놓여 있습니다. 수북한 먼지 사이로 남아 있는 선생의 흔적 때문이었을까요. “한국에 리얼리즘을 정립하고 싶다.”, “만물에는 구조가 있다. 한국 조각에는 그 구조에 대한 근본 탐구가 결여되어 있다.”, “인생은 공(空) 파멸(破滅)”. 생전에 선생의 신념과 좌절 그리고 최후가 번듯한 전시장에서와는 다르게 직접적으로 전해졌습니다. 선생의 예술과 철학이 녹아 있는 아틀리에는 2008년 5월1일 개소식을 거쳐 현재는 사전 예약을 통해 시민에게 공개되고 있습니다. 2006년 유족이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 기금에 기증하여 1년의 보수와 복원을 거쳐 성사된 일입니다. 새롭게 세워야 커지는 가치가 있는가 하면 잘 지켜야 커지는 가치가 있습니다. 혼자 간직해야 커지는 가치가 있는가 하면 함께 나누어야 커지는 가치가 있습니다. 반갑고 뜻깊은 회고전 소식을 접하며 권진규 선생의 아틀리에도 잘 지키고 함께 나누어 더 키워나가야 할 가치가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관람 문의 신청(02)3675-3401~2. www.nt-heritage.org <미술평론가>
  • [피플 인 포커스]우둔이 타이완 신임 행정원장

    [피플 인 포커스]우둔이 타이완 신임 행정원장

    │베이징 박홍환특파원│태풍 ‘모라꼿’ 늑장대응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 타이완의 류자오쉬안(劉兆玄) 행정원장(국무총리격) 후임으로 8일 타이완의 ‘베테랑 정치인’인 우둔이(吳敦義·61) 국민당 부주석 겸 비서장이 선임됐다. 우 신임 행정원장은 타이완 정계에서 35년 이상 다양한 경험을 쌓아온 정통 정치인이다. 국민당 내에서 일견 ‘매파’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달변가인 데다 청렴한 이미지 덕분에 마잉주(馬英九) 총통의 신임이 두텁다. 마 총통이 국민당 주석 선거에 출마할 때 ‘러닝메이트’ 겸 비서실장으로 그를 초빙했고, 매주 마 총통과 ‘도시락 대화’를 하며 국정과 당무를 논하는 관계이다. 타이완 중부 난터우(南投) 출신인 그는 국립 타이완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뒤 타이완 유력지 중국시보(中國時報)에서 기자로 활동하다가 1973년 타이베이 시의원으로 정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1981년부터 고향인 난터우현 현장으로 8년간 재임한 뒤 1990년 타이완 제2도시인 가오슝(高雄)시 시장에 당선되면서 전국적 인물로 부상했다. 1998년 가오슝 시장 3선에 도전했으나 상대 후보의 마타도어로 추문에 휩싸이면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2002년 입법의원 당선으로 재기에 성공한 뒤에는 국민당 주요 직책을 두루 역임하며 중앙정계에서의 입지를 넓혔다. 중국계 언론들은 우 행정원장 발탁 배경과 관련, ▲청렴하고 ▲태풍 피해지역인 가오슝 시장을 8년이나 역임한 데다 ▲마 총통이 존경하는 장징궈(張經國) 전 총통 등이 총애한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실제 그는 평소 ‘인사 문제는 나한테 물어보지 마라’며 당내 인사 등에 개입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장 전 총통 등과의 인연은 대학 2학년 때 쓴 ‘타이완 대학인의 십자가’라는 글을 당시 국방부장이던 장 전 총통과 마 총통의 부친인 마허링(馬鶴凌)이 극찬하면서 비롯됐다. 우 신임 행정원장은 이후 두 사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정계에 입문했다. 마 총통의 전폭적 신임을 받는다 해도 우 신임 행정원장의 앞길이 순탄치만은 않아 보인다. 공상시보(工商時報) 등 타이완 언론들은 우 행정원장 앞에 ▲태풍 피해복구 ▲양안관계 정립 ▲지방자치단체 선거 등 3대 시험이 놓여있다며 이에 대한 해결 능력이 그의 장수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우 행정원장 선임에 대한 지지율은 41%대로 나왔다. stinger@seoul.co.kr
  • 부산 금정산성 남문 ‘여장’ 복원

    부산 금정산성 남문 부근의 ‘여장’(성가퀴·몸을 숨기려고 성 위에 낮게 덧쌓은 담)이 복원된다. 금정구는 문화재청이 최근 금정산성 남문 좌우 125m 성곽의 여장 복원 사업을 승인했다고 7일 밝혔다.이에 따라 금정구는 국·시비 4억원(국비 2억 8000만원, 시비 1억 2000만원)을 들여 이달 중 공사에 들어가 내년 1월 준공할 예정이다. 현재 금정산성 서문과 동문에 남아 있는 여장은 1999년 문화재청 설립 이전인 1973년, 1994년에 각각 복원됐다.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쓱쓱 그린 오리처럼 부유하는 사라지는 것들… 변하는 것들…

    쓱쓱 그린 오리처럼 부유하는 사라지는 것들… 변하는 것들…

    1973년 서울 명동화랑에서 30세의 젊은 서양화가 이강소(66)는 첫 개인전을 열었다. 화랑에 도착한 지인들이나 관객들은 당황했다. 이 작가는 전시장에 낡은 의자와 탁자로 선술집을 차려 놓고 관객들에게 막걸리를 팔았다. 전시 내용은 화랑을 찾은 관객들끼리 술 한잔 마시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작품 한 점 구경하지 못한 채 어리둥절하며 화랑을 떠나는 것이다. 전형적인 현대미술의 퍼포먼스였다. 요즘 같으면 그 장면들을 영상으로 담아 재연함으로써 비디오아티스트로 이름을 날릴 수도 있었겠다. 2년 뒤에 이우환과 함께 참석한 1975년 파리비엔날레에서도 이 작가는 전시장 바닥에 밀가루를 뿌린 뒤 발목이 끈으로 묶인 살아 있는 닭을 풀어 놓기도 한 ‘닭 퍼포먼스’를 벌였다. 1985년에서야 평면회화로 돌아와 추상적인 ‘오리 그림’으로 유명해졌지만, 이강소의 본령은 이렇게 머물지 않는 것, 유한하지 않은 것, 사라지는 것, 변화하는 것 등에 있다. 선 한두 개로 쓱쓱 그려낸 ‘오리’는 그래서 바람과 같이 떠도는 인생과 덧없는 세상의 한 지점을 보여 주는 매개체인지도 모르겠다. 이 작가는 오리를 그리는 이유에 대해 “오리를 붓질 몇 번 만에 그리다 보니 나중엔 리드미컬하게 됐다. 표현적 그림도 아니고 차용하기가 쉬워서 많이 그렸다.”고 말했다. 이 작가가 최근 20년간의 작품활동을 결산하는 전시회를 28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연다. 1989년부터 최근작까지 회화를 비롯해 사진과 도자, 설치 작품 등 시기별 주요작 100여점을 선보이는 대규모 전시다. 단색조의 미니멀한 선으로 오리와 사슴, 배 등을 그린 점은 비슷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작품이 미묘하게 변화하는 과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갤러리 현대 본관에서는 2007년부터 최근작이, 신관에서는 1989년부터 2006년까지 작품이 전시된다. 본관을 먼저 보고 신관을 돌아본 뒤 본관을 다시 돌아보면 좋다.(02)2287-3500.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두 천재화가 문학도 그렸네

    예술의 길을 걷는 이라면 시를 쓰건, 영화를 만들건, 그림을 그리건, 춤을 추건, 노래를 부르건 모두 예술의 한 길에 있는 셈일 테다. 20세기 세계 미술계가 낳은 두 천재가 남긴 시와 소설이 나란히 나왔다. 초현실주의 미술의 거장으로 꼽히는 살바도르 달리(1904~1989년)의 장편소설 ‘히든 페이스’(사진 위·서민아 옮김·문학수첩 펴냄)와,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입체파 미술의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년)의 시를 묶은 ‘피카소 시집’(아래·서승석·허지음 옮김·문학세계사 펴냄)이다. 공교롭게 모두 스페인 출신으로 조국을 떠나 프랑스 등 타국에서 예술활동을 했다. 또한 두 사람 모두 글을 통해 자신의 그림 세계를 고스란히 재현시켰다. 피카소 시집은 피카소가 노년에 썼던 100여편의 시를 묶은 시선집이다. 아내 올가와 헤어진 1953년 무렵 54세의 나이부터 쓰기 시작한 시가 400여편을 헤아리고 있다. 게다가 피카소는 3편의 희곡을 썼을 정도로 문학에도 깊은 조예를 드러냈다. 그는 시를 써내려가면서부터 그림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수십년 동안 그림에 투영됐던 폭발적인 예술혼은 고스란히 원고지 위로 옮겨졌다. 제목도 없이 날짜만 적혀 있는 시, 산문시는 기존의 시 형식과 정서를 파괴하는 실험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 역시 시를 쓰면서도 피카소는 썩 친절하지는 않다. ‘히든 페이스’는 달리가 1944년 처음으로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배경은 1930년대를 전후한 세계대전 와중의 유럽이다. 주제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남녀 간의 초현실적인 사랑이다. 그로테스크한 공포, 불안, 절망 등의 감성을 적나라하면서도 환상적인 묘사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어쨌든 재미있는 사실은 두 사람 모두 생전에 서로에 대한 분명한 경쟁적 존재 의식을 가졌다는 것이다. ‘시인’ 피카소는 일찍이 달리를 “끊임없이 달리는 모터”라고 일컬으며 남달리 빼어난 그의 열정을 높게 평가했다. 반면 ‘소설가’ 달리는 피카소에 대해 “피카소는 천재지만 나는 그보다 1000배는 뛰어난 예술가이며 진정한 천재”라고 떠벌렸다. 겸손과는 담을 쌓은 채 콧대가 하늘을 찌르던 달리였지만 어쨌든 피카소를 천재로 인정했다는 점이 오히려 피카소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것 아닐까.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구로구, 문화예술밸리로 거듭난다

    구로구, 문화예술밸리로 거듭난다

    ‘문화·예술 중심지로 거듭나려는 구로구의 발걸음이 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구로구는 문화예술인 지원기관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옛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구로동 이전을 위한 업무협약 양해각서(MOU)를 1일 교환한다고 31일 밝혔다. 구로구는 지난해 7월 예술교육기관 지원을 담당하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을 지역에 유치한 데 이어 또 하나의 ‘쾌거’를 이뤄냈다. 앞서 지난해 초에는 구로문화재단과 아트밸리예술극장의 문을 열었다. 문예위가 대학로 동숭동에서 구로동으로 이전하는 것은 남다른 의미를 지녔다. 1970~80년대 굴뚝산업으로 대변되던 구로구가 서남권의 문화 중심지로 확실히 탈바꿈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대학로처럼 문화예술 중심지로 부상할 수도 있다. ●동숭동에서 구로동 시대로 1976년 동숭동에 자리잡은 문예위에도 구로동 이전은 30년 넘는 대학로 시대의 폐막을 의미한다. 마로니에 공원으로 상징되던 예술인들의 공간도 이름만 남는다. 문예위는 가난한 문인과 화가, 연극인들의 메카로 알려진 옛 서울대 본관 건물을 빌려 문화예술인 지원사업과 교육 프로그램 등을 꾸려왔다. 1973년 문화예술진흥원으로 출범한 뒤 2005년 문화예술인이 주축인 자율기구로 변신했다. 현재 3실8부1단에 117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이호신 문예위 부장은 “문예위가 대학로에 둥지를 틀며 소극장 130여개가 개관해 유례없는 문화예술공간으로 성장했다.”면서 “문화 불모지라는 이미지가 강한 구로지역도 변화하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구로구는 구로동에 신축되는 다목적문화센터 공간을 문예위 청사로 제공할 예정이다. 대신에 문예위는 올해 말부터 마로니에 여성백일장, 문화의 달 행사, 예술 순회프로그램 등 다양한 사업을 구로구에서 실시한다. 1일 협약식에는 이를 기념해 600여명의 문화예술인들이 참석한다. 서울레이디스싱어즈 등의 음악공연도 펼쳐진다. ●첨단이 접목된 문화예술클러스터 변신 구로구는 현재 580여석 규모의 구로아트밸리 예술극장과 신도림동의 테크노마트 공연장 등 문화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여기에 2012년까지 디큐브시티 뮤지컬 전용극장과 돔구장이 들어서면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예술공연을 펼칠 수 있게 된다. 또 문예위와 문예교육진흥원 유치로 다양한 문화 콘텐츠 확보도 가능해졌다. 구로동~신도림동 일대가 대학로에 버금가는 문화예술 거리로 탈바꿈하면, 산업공단에서 디지털단지, 문화예술밸리로 거듭나는 기나긴 여로를 마무리하게 되는 셈이다. 양대웅 구청장은 “문예위가 입주할 다목적 문화센터에 다른 문화예술단체들의 입주도 유도할 계획”이라며 “문화예술기관들이 구로에 집중되면 문화정책의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구로구는 앞으로 구로동 일대를 디지털밸리의 생명기술(BT)과 정보기술(IT)을 접목한 문화예술 클러스터로 조성할 방침이다.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도시와 산] (22) 청양 칠갑산

    [도시와 산] (22) 청양 칠갑산

    ‘충남의 알프스’를 아시나요. 계룡산, 가야산, 오서산, 충남하면 선뜻 떠오르는 산이 이 정도여서 혹 헷갈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라는 가수 주병선이 부른 가요는 아시는지요. 그렇습니다. 칠갑산입니다. 국민이 애창하는 가요이다 보니 친숙한 이미지로 다가오는 산입니다. 백제의 얼과 혼이 담긴 천년 사적지로 유래가 깊은 산이기도 합니다. 백제의 얼과 혼이 담긴 천년 사적지 청양의 칠갑산(561m)은 백제가 사비성 정북방의 진산(鎭山)으로 성스럽게 여겨 제천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하늘과 산악을 숭앙해 왔다. 산 끝자락이 백제의 옛 도읍지인 공주의 서쪽과 부여의 북쪽과 맞닿아 있다. 칠갑산은 우주 만물의 근원이 되는 일곱가지 ‘지수화풍공견식(知水火風空見識)’을 뜻하는 ‘칠(七)’자와 천체 운행의 원리가 시작되는 ‘갑(甲)’자를 써 이름이 지어진 영산으로 알려졌다. 백제 때 서북방의 요새로 나·당연합군과 36일간 전투가 벌어진 백제 부흥의 근거지였다. 또 금강 상류의 지천을 굽어보는 산세가 일곱 장수가 나올 명당이라 칠갑산이 됐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칠갑산 남쪽 기슭에는 850년 통일신라 문성왕 때 보조선사 체징(體澄)이 창건한 ‘천년고찰’ 장곡사가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중건되고 보수된 장곡사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대웅전이 2개인 절이다. 장곡사의 목조문화재지킴이 노재관(67)씨는 “상대웅전은 신라, 하대웅전은 조선 중기 때 각각 지어졌다.”면서 “각기 다른 시대의 건축 양식을 띤 대웅전이 한 사찰에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이곳이 유일하다.”고 밝혔다. 상대웅전 바닥이 마루가 아닌 연꽃 모양의 벽돌로 깔린 것도 특이하다. 이 절에는 국보 58호인 철조약사여래좌상부석조대좌 등 2개의 국보와 보물 162호, 181호인 상하대웅전 등 4개의 보물이 있다. 유형문화재 151호 설선당 등 전국적으로 보기 드물게 많은 문화재를 갖고 있다. 코끼리 가죽으로 만든 지름 1.5m의 큰북도 있고, 스님들이 밥통으로 쓰던 길이 7m의 통나무 그릇도 있다. 옛날에는 상당히 큰 사찰이었음을 보여준다. 지금은 주지스님 1명뿐이다. 험한 길 부드러운 길, 색깔 다른 등산로들 충남의 산이 으레 그렇듯 완만해 보인다. 하지만 속단은 금물이다. 정상에서 만난 길성묵(46·충남 홍성)씨는 “예로부터 ‘지리산에 들어간 간첩은 잡아도 칠갑산에 들어온 간첩은 못 잡는다.’는 얘기가 전해온다.”면서 “산세가 순하지만 무척 깊다.”고 말했다. 칠갑산은 7개 등산 코스가 있다. 문화해설사 김명숙(45·군의원)씨는 “험한 길 부드러운 길, 코스마다 색깔이 다르다.”면서 “장곡사 주차장~지천로~삼형제봉~정상을 거쳐 사찰로로 내려오다 중간에서 휴양림으로 빠지면 5시간 이상이 걸려 등산하는 맛을 만끽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짧게는 2시간여짜리도 있다. 가장 타기 좋은 코스는 옛길에 있는 칠갑광장에서 산장로를 타고 정상을 거쳐 사찰로를 통해 장곡사로 내려가는 길이다. 광장 위쪽에 면암 최익현(1833~1906) 선생의 동상이 서 있다. 대원군 정책을 비판하다가 제주도로 유배되고, 의병활동을 하다 잡혀 쓰시마에서 단식 중에 순절한 그의 기개가 오롯이 서린 듯하다. 이 거대한 동상은 1973년 세워졌다. 칠갑산 정상을 쳐다본다. ‘콩밭 매는 아낙네상’은 군에서 건립한 것은 없고, 작가 등 개인이 만들어 세워놓은 것들이 있다. 1㎞쯤 올라가면 지난달 28일 문을 연 천문대가 있다. 가상 우주체험을 할 수 있고, 돔형 입체 영상관은 천체 속에 와 있는 느낌을 준다. 이현배 천문대 대장은 “국내 최대 304㎜ 굴절 망원경을 갖추고 있다.”면서 “낮에 태양의 흑점과 홍염을 볼 수 있다.”고 자랑한다. 정상에서는 남동쪽에 계룡산, 서쪽으로 오서산이 아득히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 산들이 모두 발아래에 엎드려 있다. 문화해설사 김씨는 “칠갑산이 주변 산들을 거느리는 듯해 봄철이면 많은 등산객이 몰려와 시산제를 지낸다.”고 전했다. 이어 김씨는 “칠갑산은 육산이다. 큰 바위가 드물고 흙과 자갈로 이뤄져 있다.”면서 “겨울에 눈이 오면 또렷한 산등성이와 상고대가 아름답다. 봄에는 새싹이 꽃보다 예쁘고, 여름에 등산로마다 나무 그늘이 드리운다.”고 치켜세웠다. 길씨는 “높지 않고 가파르지도 않아 이곳에 오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귀띔했다. 산 정상 숲 속의 밤나무에는 탁구공 크기만 한 밤송이들이 매달려 있어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끼게 했다. 남편, 아들과 함께 장곡사에서 정상에 올랐다 내려오던 김경(58·서울 일원동)씨는 “처음 칠갑산을 찾았는데 흙이 많아 걷기가 좋다. 길이 부드러워 여자들도 등산하기가 편하다.”고 말했다. 청양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칠갑산 옛길의 정취 물 좋고 땅 좋고 출렁다리 재미있고… 충남 청양의 칠갑산에도 옛길이 있다. 1981년 청양~공주간 3번 국도에 대치터널이 뚫린 뒤 폐도된 한티고개이다. 사람들은 이를 ‘칠갑산 옛길’이라고 부른다. 길이는 3㎞쯤 된다. 숲이 우거져 하늘이 잘 보이지 않고, 경치가 아름답다. 길은 차 한대 지날 정도로 좁고, 매우 구불구불해 옛길다운 정취가 풍긴다. 데이트를 하거나 오붓하게 걷기에 그만이다. 이 속에 조그만 한티마을과 샬레호텔이 있다. 좀더 가면 작은 터널처럼 생긴 칠갑문이 나온다. 칠갑문 위가 등산길인 산장로 초입 칠갑광장이다. 이 문은 당초 광장 옆 최익현 선생 동상을 구경하고 등산하는 데 쉽도록 고갯길 위에 만든 다리였으나 지금의 성문 형태로 개축됐다. 칠갑문을 지나 내려가는 옛길 옆에 ‘칠갑산 맑은물’ 공장이 있다. 유신준 청양군 칠갑산맑은물 계장은 “예로부터 칠갑산 물이 맛 있기로 소문이 나 2000년부터 생수를 생산해 판매하고 있다.”면서 “마니아층이 형성될 정도로 호평받고 있다. 시장을 확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m의 관정을 뚫어 뽑는 것으로 현재 충남과 서울에서 판매 중이다. 칠갑광장·천문대와 인접한 옛길과 10여분 떨어진 출렁다리 사이에는 오는 11월 말까지 한시적으로 셔틀버스가 운행된다. 하루 10차례 오간다. 출렁다리는 지난달 28일 인공호수인 천장호 위에 설치됐다. 길이 207m로 출렁다리 가운데 국내 최대 규모다. 평일에도 관광객이 몰려 북적댄다. 걸을 때마다 물 위에서 다리가 출렁거려 좀 어지럽다. 명헌상 군 교통행정계장은 “셔틀버스가 없어도 옛길이나 출렁다리로 가는 시내·외 버스가 30분마다 있어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청양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오늘의 눈] 기자 초년병이 본 DJ 서거/오달란 사회부 기자

    [오늘의 눈] 기자 초년병이 본 DJ 서거/오달란 사회부 기자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폐렴으로 서울 연세대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뒤 병세가 위중했던 지난 7일부터 서거한 날까지 매일 아침 병원 앞 벤치에서는 ‘현대사 특강’이 열렸다. 김 전 대통령 측의 최경환 비서관이 ‘강사’였고 기자 생활 1~3년차의 사회부 기자 10여명이 ‘수강생’이었다. 이 시간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이 한국 현대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인물이었음을 깨달았다. 그가 겪은 5번의 죽을 고비, 그 가운데 1973년 도쿄 피랍사건과 1980년 사형선고의 비화를 생생히 전해듣는 것만으로도 기자 초년병들에게는 살아 있는 역사공부가 됐다. 취재를 하며 만난 김 전 대통령의 측근들은 “젊은 기자들이 김 전 대통령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핀잔했다. 한 측근은 “어떤 기자는 신군부가 김 전 대통령에게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한 것을 두고 ‘신군부가 누구예요?’라고 묻더라.”며 실소했다. 1980년 이후에 태어난 기자들에게 현대 정치사는 낯설고 무겁다. 국장이 치러진 6일 동안 거리에서 만난 시민들은 훌륭한 역사 선생님이었다. 1987년 평민당 대선후보였던 김 전 대통령이 연설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를 들쳐 업은 채 서울 수유리 집에서부터 버스와 지하철을 3번 갈아타며 보라매공원으로 향했다는 중년 여성과 1980년 광주항쟁을 목격한 뒤 김 전 대통령을 정신적 지주로 삼아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는 50대 부부의 사연도 마찬가지다. 국회 빈소에서 조문객들에게 근조 리본을 달아주던 30대 여성 자원봉사자는 “서점에 가거나 인터넷 블로그를 뒤져 보라.”고 조언했다. ‘인간 김대중’을 몰랐던 젊은 기자들이 그를 통해 암울했던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게 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이 마지막 일기에서 언급했듯 그의 삶은 민주화와 남북 화해를 위해 혼신을 다한 일생이었다. 김 전 대통령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다시 발견한 젊은이들이 늘어날수록 그 노력은 헛되지 않으리라. 고인의 명복을 빈다. 오달란 사회부 기자 dallan@seoul.co.kr
  • [김대중 前대통령 국장] “사형선고 받고도 소신 안굽힌 분 감사원장 임명뒤 일절 간섭안해”

    [김대중 前대통령 국장] “사형선고 받고도 소신 안굽힌 분 감사원장 임명뒤 일절 간섭안해”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힘든 고난을 오직 강인한 의지로 극복해 오셨다.” 20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입관식을 지켜본 한승헌(75) 전 감사원장은 평생 동지의 마지막 모습을 이처럼 뼈에 사무치게 기억했다. 김 전 대통령은 생전에 한 전 감사원장에 대해 “한승헌 변호사는 무슨 일을 맡겨도 안심된다.”고 자랑했다. 김 전 대통령과 격의없이 농담을 주고 받은 몇 안 되는 인사 가운데 한 명이라고 한다. 한 전 감사원장은 1970년 월간지 ‘다리’의 필화사건을 변호하며 김 전 대통령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74년 김 전 대통령이 선거법 위반혐의로 기소됐을 때 변호를 맡았고 80년 5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때는 육군교도소에서 같이 복역했다. 93년 ‘김대중씨 납치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모임’ 공동위원장, 98년 국민의 정부 초대 감사원장을 역임했다. 지금은 ‘김대중 자서전 편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한 전 감사원장이 김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났던 것은 월간지 ‘다리’ 창간 1주년 기념식이다. 민주주의를 역설하는 강연이었는데 가는 곳마다 청중이 초만원이었다. 정치인으로서 소신과 패기에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73년 8월 일본으로 납치됐던 김 전 대통령이 생환하자, 정부는 67년 대선 때의 발언을 문제삼아 선거법 위반혐의로 김 전 대통령을 기소했다. 한 전 감사원장은 “가택연금으로 운신이 자유롭지 않았던 김 전 대통령 대신 이희호 여사가 나를 찾아와 변호를 의뢰했다. 매일 아침 동교동으로 가서 대책을 상의했다. 그러던 중 내가 75년 3월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자 김 전 대통령은 갈현동 집에 찾아와 어머님과 아내를 위로하셨다.”고 전했다. 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은 ‘신군부의 정권탈취에 가장 큰 장애물인 김대중을 제거하기 위한 사건’이라고 한 전 감사원장은 못박았다. 공소장 낭독에 걸린 시간만 해도 1시간27여분. 그런데도 “사형 선고를 받고 소신을 굽히지 않을 정도로 생사에 초연했다.”고 회상했다. 감사원장 취임 초기 때 대통령이 감사원을 간섭할 경우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범 답안’을 만들었지만 결국 그 답안을 한번도 쓴 적이 없었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남북 화해를 이끌어 내며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한국인의 자랑이다. 아직 나라에 걱정거리가 많은데 그 분의 빈자리가 너무도 크다.”며 말문을 잇지 못했다.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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