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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년 동안 한번도 팔 내리지 않은 ‘달인’

    “38년 동안 단 한 번도 오른팔을 내려 본 적 없다.”는 인도의 달인이 나타났다. 인도 언론매체에 따르면 아마르 사두 바라티(70대 초반 추정)는 30여 년 전 오른팔을 머리 위로 번쩍 든 뒤로 자나깨나 한 번도 내려 본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손을 든 달인’으로 1973년 인도의 한 신문에 소개됐던 할아버지는 최근 “최소한 38년 동안 고행을 자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간의 행적을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할아버지의 오른팔은 동상으로 인한 상처가 남겨져 있고 오랫동안 다듬지 않은 손톱이 길게 자라있다. 이제는 내리고 싶어도 오른팔과 어깨 관절이 굳어 내릴 수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할아버지가 이처럼 ‘벌 서는 고행을 자처한 데에는 종교적인 이유가 가장 컸다. 자녀 3명을 둔 가장이자 평범한 힌두교 신자였던 바라티는 남은 삶을 종교적으로 헌신하고 깨달음을 얻는 데 바칠 것을 결심하고 집을 뛰쳐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정처 없이 인도 곳곳을 떠돌아다닌 지 3년 만에 할아버지는 하루종일 팔을 드는 ‘고통 수행’을 시작했다. 그는 “처음에는 고통스러웠지만 이제는 익숙하다.”면서 “이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고통에 익숙해지는 과정이 중요했다.”고 담담히 털어놨다. 진정한 평화를 얻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 중이라는 할아버지는 “인류가 서로를 미워하지 않고 전쟁이나 싸움이 없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진리를 깨닫게 되길 소망한다.”고 밝혔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 28일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상다리 휘어지게 차려낸 영화밥상

    28일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상다리 휘어지게 차려낸 영화밥상

    봄이면 전주를 찾는 외지인들이 급증한다. 세 부류쯤 된다. 꽃놀이와 식도락을 겸한 상춘객, 프로농구팬(KCC 연고지가 전주다), 그리고 영화 마니아들이다. 제12회 전주국제영화제가 오는 28일부터 새달 6일까지 열린다. 총 38개국 190편이 상영된다. 한술 뜨면 숟가락을 놓기 어려운 전주식 성찬이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진 셈. 놓치면 후회할 영화 8편을 추려봤다. ●‘불면의 밤’에 만날 보석들 올빼미 관객이라면 자정부터 동 틀 때까지 쉬지 않고 영화를 보는 ‘불면의 밤’ 섹션을 주목할 것. 새달 1, 4일 ‘불면의 밤’에서는 지난해 전 세계 영화잡지들이 꼽은 최고의 영화 10편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카를로스’(오른쪽)를 만날 수 있다. 1970~80년대 악명을 떨친 테러리스트 카를로스 더 재칼(본명 일리치 라미레즈 산체스)이 1973년 첫 테러부터 1994년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기까지를 5시간 30분의 러닝타임에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담았다. 지난해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 감독주간과 미국 뉴욕영화제에서 상영되면서 작품성을 인정받은 멕시코의 호르헤 미셸 그라우 감독의 데뷔작 ‘우린 우리다’도 두고 볼 만하다. 인육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저주받은 가족을 그린 호러 영화. 초저예산으로 찍은 탓에 화면에서는 ‘빈티’가 나지만, 고만고만한 뱀파이어물로 판단하는 건 섣부르다. ●오늘의 거장과 내일의 거장들 올해 독일 베를린영화제 금곰상, 남녀주연상을 휩쓴 아스거르 파르허디 감독의 ‘씨민과 나데르, 별거’(왼쪽)가 개막작으로 국내 첫선을 보인다. 통속적일 수 있는 이야기의 함정을 영리하게 피해 간다. 인물들의 갈등을 통해 거짓말의 윤리적 문제, 종교, 성(性)과 계급 등 이란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담아낸다.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의 스릴러 ‘이센셜 킬링’은 지난해 이탈리아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특별대상과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에 체포된 이슬람교도가 북유럽 눈덮인 산에 버려진 뒤 추위와 굶주림, 고독, 공포에 맞서 사투를 벌인다. 상영시간 내내 별다른 대사 없이 죽도록 고생하는 갈로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친형 박찬욱 감독과 함께 작업한 ‘파란만장’으로 베를린영화제 단편부문 금곰상을 받은 박찬경 감독은 다큐멘터리와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양에’를 출품했다. 20여년 전 안양 봉제공장 화재로 22명의 여공이 사망한 사건을 따라가면서 도시개발의 문제, 기억과 망각 등 중첩된 질문을 던진다. 뱅크시 감독의 ‘선물가게를 지나는 출구’는 지난해 미국 선댄스영화제 화제작이다. 영국의 그라피티 예술가로 신분과 얼굴을 밝히지 않은 채 세계 곳곳에서 작업하는 뱅크시의 첫 장편영화다. 올 미국 아카데미영화제 최우수 다큐멘터리 부문 후보에 올랐다. ●만화 혹은 만화원작 소품들 1960~70년대 일본의 청춘들에게 좌표를 제시한 복싱만화 ‘내일의 조’는 극영화 버전으로 상영된다. ‘조’ 역은 아이돌 스타 야마시타 도모히사가 맡았다. ‘야마삐’(야마시타의 애칭) 팬이라면 원없이 몸매를 감상할 기회이니 놓치지 말 것. 고속촬영으로 재현된 조의 주특기 크로스카운터(일부러 상대에게 주먹을 허용하다가 빈틈을 노려 맞받아치기)도 인상적이다. 실뱅 쇼메 감독의 ‘일루셔니스트’는 미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독자적인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프랑스 애니메이션의 내공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실직한 늙은 마술사와 소녀와의 우정을 다뤘고, 애니메이션의 아름다움을 새삼 깨닫게 하는 마법 같은 작품이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해병대 상륙작전권 되찾았다

    해병대가 38년 만에 상륙작전권을 되찾게 됐다. 국회 국방위는 22일 전체회의를 열고 해군에 넘어갔던 해병대의 인사·예산권을 강화하고 상륙작전권을 부활시키는 내용을 담아 이른바 ’해병대 독립법안’으로 불린 국군조직법 및 군인사법 개정안 등을 격론 끝에 통과시켰다. 해병대의 상륙작전권은 1973년 법 개정 때 삭제돼 해군으로 흡수됐다. 국군조직법 개정안은 지금까지 해군 참모총장에게서 위임받아 행사하도록 했던 해병대 사령관의 지휘·감독권한을 강화하고, 상륙작전을 해병대의 주임무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당초 법안심사소위가 ‘해군은 해상작전, 해병대는 상륙작전’ 식으로 나눴던 주임무 규정은 ‘해군은 상륙작전을 포함한 해상작전을, 해병대는 상륙작전을 주임무로 한다.’는 내용으로 수정됐다. 김관진 국방장관과 군 장성 출신 의원들이 “해군의 상륙작전권이 배제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며 소위안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김 장관은 “야전예규와 작전계획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성찬 해군 참모총장도 이례적으로 국방위 소속 여야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반대 입장을 설명했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제자사랑’ 자 작시로 감동 일으킨 카이스트 이재규 교수

    [김문이 만난사람] ‘제자사랑’ 자 작시로 감동 일으킨 카이스트 이재규 교수

    미안하다 외로이 스스로의 목숨을 던지는 너에게 너의 고통을 알지도 못해서 미안하다 그래서 내가 죄인이다 네가 좌절하여 주저앉았을 때 찾아가 안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래서 내가 죄인이다~(후략) 사랑하는 제자들아 죽을 각오로 공부하되 스스로 죽는 나약함은 이겨다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 잃는 것이 가장 두렵다 그 사랑 때문에 죽고 싶던 마음조차 살아야 할 이유가 되지 않겠니 세상이 모두 너를 사랑하지는 않을지라도 너를 사랑하는 단 한 사람 그 얼굴이 있어 네 입가에 미소 짓기를… 네 멍에도 힘들겠지만 네가 네 친구의 미소가 되어 줄 수 없겠니 그를 살리는 것이 네 존재 이유일 수 없겠니 (중략) 나를 본 적 없어도 네가 내 제자이기에 운명적으로 너를 이미 사랑한다 4월은 정녕 잔인한 달인가. 시인 박목월은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라고 읊었다. 그러면서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라고 노래했다. 4월에는 지상의 모든 것들이 스스로 등불을 밝히는 달이라고 은유했다. 그럼에도 요즘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은 영국의 시인 엘리엇(T S Eliot)이 얘기했던 것처럼 ‘4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여겨질 것이다. 관련된 시 두편을 잠시 감상해 보자. 지난 8일 오전 ‘먼저 간 학우들에게’라는 제목의 시가 카이스트 학생들에게 이메일을 통해 배달됐다. 이 학교 수리과학부 2학년생인 박모(19)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다음 날이었다. ‘미안하다/외로이 스스로의 목숨을 던지는 너에게/너의 고통을 알지도 못해서 미안하다 /그래서 내가 죄인이다 /네가 좌절하여 주저앉았을 때/찾아가 안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래서 내가 죄인이다~’/(후략) 나흘 뒤인 12일,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라는 제목으로 또 한편의 시가 배달됐다. ‘사랑하는 제자들아 /죽을 각오로 공부하되 /스스로 죽는 나약함은 이겨다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 잃는 것이 가장 두렵다 /그 사랑 때문에 /죽고 싶던 마음조차 /살아야 할 이유가 되지 않겠니 /세상이 모두 /너를 사랑하지는 않을지라도 /너를 사랑하는 단 한 사람 /그 얼굴이 있어 /네 입가에 미소 짓기를… /네 멍에도 힘들겠지만 /네가 /네 친구의 미소가 되어 줄 수 없겠니 /그를 살리는 것이 /네 존재 이유일 수 없겠니 /(중략) /나를 본 적 없어도 /네가 내 제자이기에 /운명적으로 /너를 이미 사랑한다’ 이 시는 폭풍 감동을 일으키며 많은 네티즌들의 심금을 울렸다. 언론에서도 ‘감동 화제’로 비중 있게 다뤘다. 그럴 것이 올해 들어 카이스트 학생 4명의 자살에 이어 교수까지 총 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학부생 대상 ‘멘토제’ 필요” 이 시를 쓴 주인공은 다름 아닌 카이스트 테크노경영대학 이재규(60) 교수. 그는 첫 번째 시에서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했고 두 번째 시에서는 학생들에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말아 달라고 진심을 실어 당부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한 카이스트 학생은 “시 끝 부분에 나오는 ‘나를 본 적이 없어도 네가 내 제자이기에 운명적으로 너를 이미 사랑한다’는 대목에서 울컥했다.”고 소감을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또 한 학생은 이 교수의 이메일을 통해 “시를 받고 눈물이 고였다. 참 많은 위로가 됐다.”고 했다. 중국에서 주재원으로 일한다는 사람도 역시 이메일을 통해 “진정한 자식을 위한 안타까운 희망을 보내는 메시지로 큰 감동을 받았다.”고 전했다. 현재 서울캠퍼스에서 석·박사 과정의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는 이 교수는 카이스트 교수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월간 한맥문학’을 통해 2002년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지난해 10월 ‘너는 나의 시인이라’는 시집을 내기도 했다. 지난 18일 오후 서울시 회기동에 있는 카이스트 테크노경영대학원 연구실에서 이 교수를 만났다. 이번 시를 쓰게 된 동기부터 물었다. “자살하는 제자를 보면서 많은 고민을 했지요. 위로와 격려의 마음을 어떻게 전달할까 하고 말입니다. 다른 교수들도 마찬가지 생각이었죠. 그래서 첫 번째 ‘먼저 간 학우들에게’라는 글은 교수들에게 먼저 보냈고, 두 번째 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는 바로 학생들에게 보냈지요. 그것이 신문에 나는 바람에 다른 교수들도 알게 됐습니다.” 시를 통해 다소나마 젊은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동료 교수들의 뜻이 잘 전달된 것 같다고 의미 부여를 한다. 그는 평소 아침에 기도하면서 하루 일과를 계획한다. 제자의 자살 소식을 접한 그날 제자들에게 뭔가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강하게 느껴 시를 썼단다. “카이스트 제자들이 더 자살한다면 우리 사회가 좌절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시를 썼습니다. 힘든 것보다 소명감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간혹 낙오되는 제자가 있더라도 보살펴 줘야 하고, 특히 카이스트는 교만해지면 안 되며 좀더 성숙해져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지요.” 그러면서 군대 얘기를 잠깐 인용한다. 행군할 때 낙오자가 생기면 함께 총을 들어 주는 문화적 배려가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그런 부분에서 더는 교수나 학생들 서로가 마음이 차가워지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들 장학생으로 들어왔다가 점수 차이로 탈락하는 학생들이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는 것에 대한 인간적 공감을 서로 간과했다는 것이다. 그는 점수에 너무 예민하고 학점을 잘 딸 수 있는 것만 중요시하는 풍토를 아쉬워했다. 그러면서도 “교수는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지만 평가 또한 안 할 수는 없다.”고 토로한다. 영어 강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영어로 논문 발표를 할 수 없으면 국제적 학자로 인정을 받을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한국에서 한글로 논문을 발표하면 평가절하하는 풍토도 있지요. 그런 것도 숙제로 남습니다. 영어 강의를 듣는 것이 어려우면 ‘브리지 프로그램’으로 영어 교육을 별도로 받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인문학적인 부분은 오히려 영어보다 한글이 전달과정에서 더 용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징벌적 등록금 문제에 대해서 교수들의 생각은 어떨까. 그는 “이번 일로 영어 강의와 학점제도에 대해 개선해야 한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공감을 하고 있다.”면서 다만 그 취지가 국제화에 대비하자는 것인 만큼 이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단서를 달았다. 아울러 학생들이 느끼는 압박감의 강도와 그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제안을 한다. 학부 학생들을 상대로 한 ‘멘토제도’를 두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석·박사 과정에 있는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인간적인 멘토가 된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도교수가 학생들과 자주 만날 수 있도록 하는 환경 조성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카이스트 학생들은 지식교육을 훌륭하게 받지만 인성교육은 소홀한 측면이 없지 않다고 말했다. 교수들도 연구에 쫓긴 나머지 너무 여유 없게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런 가운데 약간의 정신적 여유를 가지면서 제자들과 인간적인 만남을 갖자는 것이다. 제자들도 교수나 선배들한테 인정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느슨한 차원의 여유가 아닌 배려의 마음을 서로 갖자는 뜻이다. 잠시라도 “귀한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는 얘기를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유능한 과학자보다 존경받는 지도자 되길” 서남표 총장의 거취에 대해서 그는 “문제 해결이 목적이지 거취 자체를 목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빨리 답을 내는 것보다는 질서 있게 해결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교수의 입장이나 학생의 입장만 우선하면 정치마당으로 변질될 수 있으니 다들 사명감과 카이스트의 비전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1985년부터 교수로 카이스트에 몸담고 있다. 서울대를 나와 1973년에 카이스트 석사과정 1회로 입학해 지금의 후배들보다 더 어려운 역경을 이겨 냈다. 선배의 조언도 없이 스스로 학문분야를 개척해 나갔던 것. 그의 전공인 경영정보시스템 분야에서는 우리나라 1세대로 꼽힌다. “당시 교수님들은 무척 권위적이었습니다. 학생들이 교수한테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배출한 제자들 대부분은 대학 교수로 일하고 있다. 그 중 30명 정도는 매년 만날 정도로 사제지간의 관계가 돈독하다. 화제를 ‘시’로 바꿨다. 대구 출신인 그는 어릴 적부터 일기 쓰기가 몸에 뱄다. 대학 때는 ‘아성(我成)회’라는 이야기 그룹을 결성했는데 거기서 부인을 만났다. 이때 하루 일과에 대해 제목을 달아 논의하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그는 카이스트 교수로 있으면서 어느 날 ‘시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것’이라는 소명감을 문득 느꼈다. 이후 한맥문학을 노크했고 지난해 여름 죽을 각오로 쓴 것이 ‘너는 나의 시인이라’라는 시집이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학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얘기를 이렇게 말한다. “카이스트의 학업 강도를 낮추는 것은 현안 해결이 아닙니다. 유능한 학생들이 개인의 성취에 끝나지 않고 어려운 동료를 돕는 공동체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 노력은 결코 낭비가 아니고 카이스트의 졸업생을 사회적 지도자가 되게 하는 비결입니다. 우리 학생들이 유능한 과학자일 뿐 아니라 존경 받는 지도자로 성장하기 바랍니다.” 편집위원 km@seoul.co.kr ■ 이재규 교수는… 1951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1969년 경북고를 나와 1973년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해 1975년 카이스트 산업공학과 석사과정을 마쳤다. 1985년 5월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경영정보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때부터 지금까지 카이스트 경영대학 교수로 몸담고 있다. 2006년부터 1년동안 카이스트 경영대학장 겸 테크노경영대학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카이스트 경영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에너지 환경, 물 지속성(EEWS·Energy, Environmnet,Water and Sustainability Initiative) 기획단장을 맡고 있다. 최근에는 ‘맑고 푸른 나라 설계’라는 책을 공저로 발간했다. 그는 2006년 말레이시아에서 개최된 아시아 태평양 정보시스템 학술대회 의장과 전경련의 초빙으로 e-Business 사례 편집위원장 등을 맡았다. 학술활동으로는 국내외 논문상을 12회 수상했고 그가 공저한 ‘Electronic Commerce’의 영문교재는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MBA교재로 채택되고 있다. 이같은 공로로 정보문화의 대통령상과 근정포장을 받았다. 산학협동 활동으로 40여회에 걸쳐 연구용역을 수행했다. 2002년 ‘월간 한맥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지난해 10월 ‘너는 나의 시인이라’는 시집을 발간했다.
  • “카이스트는 사회문제… 개혁 계속해야”

    “카이스트는 사회문제… 개혁 계속해야”

    “사회 컨트롤이 잘못된 것이지 대학개혁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조장희 가천의과학대학교 뇌과학연구소장은 14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한국 고등교육에서의 대학연구 및 연구대학 전략’을 주제로 열린 제34회 ‘미래인재포럼’ 강연에서 “대학들은 여전히 개혁해야 할 것이 많다.”면서 이같이 강조했다. ●“차등수업료제 계속 밀고 나가야” 조 소장은 카이스트 학생들의 자살사건과 관련,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의 개혁이 실패했다면 그것을 포용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며 “개혁을 멈추는 것은 좋지 않다. 좀 더 개혁하고 개혁을 보완해 전화위복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1973년 컴퓨터 단층촬영장치(CT)의 수학적 원리 분석을 시작으로 양전자방출 단층촬영장치(PET), 자기공명장치(MRI)를 최초로 개발한 뇌영상 연구분야의 세계적 석학으로, 노벨상 수상에 가장 근접한 한국인 중 한명으로 꼽힌다. 조 소장은 “카이스트가 기술학교가 아닌데 목적에 맞지 않는 학생을 뽑은 것은 카이스트 개혁 중 잘못된 점”이라며 “세계 학문을 이끌어 가는 대학이 돼야 하는데 그런 노력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차등 수업료제’에 대해서는 “대학이 밀고 나가야 할 부분이지 등록금을 받지 말라는 학생들의 말에 따라야 할 부분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아이들을 어렸을 때부터 공부만 시켜 월반하게 하고 빨리 대학에 보내 놓으니까 신경쇠약에 걸리곤 한다.”면서 “부모들이 이런 부분을 조장한 측면이 있다.”고 꼬집었다. 조 소장은 “한국인의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은 당분간 나오기 어렵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매년 노벨상이 발표되는 기간에는 미국에서만 5000명이 한림원 전화를 기다린다.”면서 “외부적인 노력으로 되는 것은 아니고 한 30년은 더 가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소수의 연구중심대학 육성 필요” 그는 “한국이 세계적인 연구업적을 내려면 국제적인 연구 역량을 갖춘 소수 대학을 선정해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연구중심대학을 육성하는 것은 국가의 핵심 성장전략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20년 만에 방송 진행… OBS ‘명불허전’ MC 차인태 아나운서

    [김문이 만난사람] 20년 만에 방송 진행… OBS ‘명불허전’ MC 차인태 아나운서

    #문: ‘벽창호’라는 말을 아시나요. #답: 물론이죠. 앞이 꽉 막힌 사람을 비유하는 것 아닌가요. #문: 그럼 ‘벽창호’의 어원에 대해서는? #답: ? 잘 모르겠다? 그럼 여기서 잠깐, 강영훈 전 국무총리의 말을 빌려 보자. 강 전 총리는 평소 강연이나 공개 석상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스스로 “저는 벽창호 출신입니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약간 의아하게 여긴다. ‘벽창호’라는 말이 썩 좋은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강 전 총리는 다시 “사실은 평북 창성군에서 태어났습니다. 바로 옆에 벽동군이 있는데 벽동(碧潼)과 창성(昌城)의 소가 어찌나 억세고 우직했던지…”라고 하면서 지금의 ‘벽창호’가 북한 지역의 소 ‘벽창우’에서 유래되었음을 설명한다. 그제야 좌중들은 ‘아!’ 하고 감탄하며 박수를 보낸다. 원래 ‘벽창우’는 주인에게 충직하면서도 무뚝뚝하게 일만 해 오다가 배알이 뒤틀리면 일도 안 하고 주인도 몰라본다는 소를 가리키는 말로 현재 북한 지방에서 사용되고 있다. 앞이 꽉 막혔다는 벽(壁)과 그런 속성을 가진 사람을 연상할 때 쓰는 ‘벽창호’라는 말은 이렇게 벽동과 창성의 소 벽창우(碧昌牛)에서 비롯된 것이다. 평안북도 벽동과 창성은 압록강변에 있으며 백두산과 수풍댐 중간쯤에 있는 산골마을이다. 우리나라 아나운서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통하는 차인태(67)씨. ‘벽창우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1969년부터 1992년 MBC 임원으로 승진할 때까지 23년 동안 일선에서 아나운서와 방송 진행자의 길을 소처럼 우직하게 걸었다. 이후 1998년 제주 MBC 사장을 거쳐 경기대 교수로 자리를 옮겨 후학 양성에 매진할 때도 그러했다. 그가 요즘 화제에 올라 있다. 암을 극복하고 20년 만에 다시 일선으로 돌아와 방송 진행을 맡고 있어서다. 그는 지난 5일부터 매주 화요일 밤 10시 OBS 경인TV의 ‘명불허전’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전화를 걸어 인터뷰 요청을 했다. 그는 “내가 언제 방송계를 떠났나요. 은퇴한다고 얘기도 안 했는데 언론에서는 ‘20년 만에 복귀’라고 합디다. 그건 맞지가 않고요.”라고 했다. 또 그는 “사람이 살면서 아플 수도 있는 건데 못 밝힐 것도 없고 또 드러내 놓고 얘기할 것도 없고 그렇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차나 한잔 하자며 지난 11일 오후 그를 ‘잠시’ 만났다. 6년 전 차씨가 평안북도지사로 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인사를 했다. 활짝 웃는 모습이 여전히 천진한 아이 같다고 하자 파안대소했다. 암투병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 다시 방송 진행을 하게 됐을까. 그는 김종오 OBS 경인TV 사장과의 인연을 먼저 꺼냈다. 김 사장은 MBC 보도본부장 출신으로 대구 MBC 사장 등을 지냈다. “MBC 입사 후배인 김 사장과는 자연스럽게 가끔 만나지요. 최근에는 지난 3월 초에 만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김 사장이 ‘차 선배의 격에 맞는 거 하나 생각하고 있다’는 식으로 제게 의견을 물어 왔습니다. 2, 3일 동안 생각하면서 다른 방송이면 부담이 되겠지만 이번 일은 순수한 마음에서 (후배를) 도와주자고 결론을 냈지요. 그러면서 아무런 조건 없이 응하게 됐습니다.” 그가 후배의 제의를 수락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모든 것이 아날로그가 아닌 요즘, 특히 밤 10시쯤 되면 대부분의 방송 프로그램이 ‘시끄럽거나’ 신변잡기를 늘어놓는 것 일색인 데 반해 ‘명불허전’은 편안히 즐길 수 있는 내용이어서 선택했단다. 그 시간이면 하루를 정리하면서 조용히 잠을 잘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지론을 편다. 인생 성공담을 얘기하는 프로그램은 시청률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점도 작용했다. ‘명불허전’은 사회 각계 인사들을 초청해 그들이 살아온 길을 조명하는 프로그램으로 배우 정한용, 박재동 화백 등이 진행한 OBS의 간판이다. “시끄러운 것들이 아닌, 한 박자 물러서서 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비록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아도 말입니다. 인기인과 정치인은 빼고 한 분야에서 고집스럽게 살아온 사람들을 만나는 그런 부담 없는 프로그램이지요.” 20년 만에 돌아온 소감은 어떨까. “다시 말하지만 복귀가 아닙니다. 타던 자전거를 오랫동안 세워 놨다가 다시 꺼내 페달을 밟는 것입니다. 그때와 다른 점은 대부분 디지털화됐다는 것입니다. 방송 기자재도 그렇고 카메라도 그렇고, 그 앞에 다시 섰을 뿐이지요.” 그의 이력을 보면 1966년에 데뷔한 것으로 돼 있다. 이 부분에 대해 그는 “그해 1월 KBS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했다. 그런데 지방 발령을 하기에 그만두고 군대에 갔다.”면서 군 복무 이후인 1969년 MBC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해 그 길로 줄곧 MBC에서 아나운서의 길을 걷게 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18년 동안 ‘장학퀴즈’를 진행해 40대 이상에게는 여전히 반가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오죽하면 ‘장학퀴즈 세대’라는 말도 있을까. “저 역시 가장 기억에 남지요. 단일 프로그램을 18년 동안 했다는 것도 기록이고, 전철을 타면 ‘장학퀴즈의 차인태’가 아니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간혹 저한테 ‘차인표’가 아니냐고 인사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면 ‘제 동생입니다.’ 하면서 웃어넘깁니다.” 차씨는 특유의 너털웃음으로 그런 에피소드를 추억했다. 그는 제주 MBC 사장 이후 경기대 다매체영상학부 책임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치열하게 살아온 인생의 1막을 정리하려고 잠시 쉬고 있었지요. 그동안 소홀했던 가정에 악센트를 주는 방향으로 설정한 상황이었죠. 그런데 하루는 경기대 손종국 전 총장에게서 식사하자는 연락이 왔어요. 손 전 총장은 학군(ROTC) 13기로 제 후배이기도 했습니다. 다매체영상학부를 만들려고 하니 좀 맡아 달라고 간곡히 얘기하더군요. 그래서 예정에 없던 교수 자리로 가게 됐습니다.” 이에 대해 그는 “당시는 처음이어서 모든 것이 열악했지만 지금은 학부 안에 다섯개의 학과가 있고 교수만 해도 15명이 있으며 경기대에서 가장 커트라인이 높은 인기 학부가 됐다.” 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11년 동안 헌신한 결과다. 화제를 건강 얘기로 돌렸다. 그는 2009년 말 악성 림프종 진단을 받으면서 1년 6개월여간 투병 생활을 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아플 수도 있고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림프종은 혈액암이나 마찬가지지요. 지금 저의 상태를 말하면 항암 표적 치료는 끝냈습니다. 모든 것이 건강해졌고요. 저와 의료진이 서로 잘 어우러져 다행스럽게도 좋은 상황이 됐습니다. 하지만 한번 암에 걸리면 재발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암을 친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떠나보낼 수는 없으며, 또 그렇게 같이 가면서 서로가 서로한테 이기려고 하지 말자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합니다.” 그는 또 “암 환자한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나 주변에서 편안하게 대해주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너무 침소봉대해서도 안 되지만 지나치게 숨길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투병 중에 얻은 또 하나의 교훈을 얘기한다. “주치의가 몇 가지 얘기를 하더군요. 첫째 암 환자들은 귀가 얇아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리산 채식이다, 알래스카산 뭐다 하는 식의 얘기에 현혹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감기를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면역력이 떨어지기 때문이지요. 셋째는 넘어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회복력이 젊은 사람에 비해 더뎌지거든요.” 그는 이런 얘기를 하면서 “병상에 누워 진정 얻은 것은 ‘내가 살아오면서 과분하게 대접받았구나. 남은 인생은 참으로 겸손하고 매사에 고맙게 살아가자’는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서울 압구정동에서 90살이 넘은 노부모를 모시고 산다. 아침마다 부인과 부모 등 네 식구가 식탁에 앉아 함께 식사를 한다. 이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 “우리 네 식구는 314살입니다. 내년에는 318살입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그의 집에는 중국 쪽에서 벽동마을을 바라보면서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비록 어린 나이에 월남했지만 차씨가 태어날 때 태를 묻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편집위원 km@seoul.co.kr ◆차인태 아나운서는… 1944년 평북 벽동에서 태어났다. 다섯살 때 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월남했다. 1963년 휘문고를 나와 1966년 연세대 성악과를 졸업했다. 그해 KBS 아나운서 공채시험에 합격했으나 군 복무를 위해 그만두고 1969년 MBC 아나운서 시험을 통해 입사했다. 이후 ‘뉴스데스크’ ‘장학퀴즈’ ‘출발 새아침’ ‘별이 빛나는 밤에’ 등 100여개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MBC의 역사를 만든 ‘아나운서계의 전설’로 불린다. 특히 ‘장학퀴즈’의 경우 1973년 2월부터 1990년 4월까지 18년간 진행을 도맡아 MBC 대표 프로그램으로 각인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 권투와 축구 등 각종 스포츠 경기를 생생하게 중계해 40대 이상에게는 추억의 목소리로 남아 있다. 1992년 MBC 임원으로 승진하면서 방송 일선을 떠났고, 이후 제주 MBC 사장과 경기대 다중매체영상학부 교수, 평북도지사,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방송언어특별위원장 등 다양한 직함으로 활약했다. 최근 OBS 경인TV의 ‘명불허전’으로 20년 만에 방송 현업으로 돌아왔다. 경원대 교수인 부인과 슬하에 딸 둘을 두었다. 서울 압구정동에서 구순의 노부모를 모시고 살고 있다.
  • “외국정부·기업, 한국시장서 채권발행 길 열려”

    “외국정부·기업, 한국시장서 채권발행 길 열려”

    “우리나라가 아시아 금융 허브로 도약하기 위한 초석을 놓았다고 자부합니다.” 국제 신용평가 시장은 글로벌 3대 신용평가사인 무디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피치의 전유물이었다. 이들의 판단에 국제 금융시장이 좌지우지됐다. 우리나라도 그 한마디에 울고 웃었다. 하지만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글로벌 신평사에 국제적인 비판이 쏠리고 있다. 선진국에 편향됐던 평가가 빗나가는 일이 빈번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토종 신평사인 한신정평가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정부 신용등급 평가를 시작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말레이시아·태국·인도네시아·필리핀·브라질 정부에 대한 신용을 평가해 등급을 발표한 것이다. 글로벌 3대 신평사 체제로부터의 독립 선언을 한 셈이다. 그 중심에 있는 이용희(61) 한신정평가 대표이사 부회장을 14일 서울 여의도에서 만났다. →이번 평가 작업이 갖는 의미는. -세계적으로 정부 신용평가를 하고 있는 곳은 무디스, S&P(이상 미국), 피치(영국), R&I, JCR(이상 일본), 다궁(중국)밖에 없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정부 신용평가를 시작했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 국제 금융시장에 보다 다양한 의견이 제공돼 시장 효율성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우리 경제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외국 정부와 기업들이 한국에서 국채나 회사채를 발행하려면 우리 정부가 인정하는 신평사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동안 외국 정부나 기업이 한국 시장에서 국채나 회사채를 발행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으나, 이제 길이 열린 셈이다. 국외로 투자 대상을 확대하고 있는 우리 투자자들에게 질 높은 정보를 제공하는 한편 외국 정부와 기업들에 한국 시장에 뛰어들 통로를 만들어 줬다. 한국이 아시아 금융 허브로 가는 지름길은 외국 투자가들이 한국 시장에 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초석을 놓았다고 자부한다. →신용등급 평가 제안에 외국 정부들이 적극적이었나. -놀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우선 3대 글로벌 신평사들에 대한 불만이 누적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글로벌 3대 신평사들이 금융위기를 거치며 비난을 많이 받았다. 높은 등급을 줬던 유럽의 포르투갈, 그리스, 이탈리아, 아일랜드가 부도 위기에 빠졌다. 반면 낮은 등급을 받았던 이머징 마켓들은 아무 문제 없이 호황을 누렸다. 글로벌 신평사들의 시각이 잘못된 게 아니냐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제안에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또 한국 경제와 금융 시장의 국제적인 영향력이 커지고 성숙해진 상황도 한몫했다. →해외 경제 인사들을 만나며 느낀 점은. -외국 정부 재경부 장관이나 중앙은행 총재들이 모두 자기 나라의 미래와 비전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다는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짧은 시간에 고도 성장을 이루고 외환위기도 빨리 극복했다며 부럽다는 반응이 많았다. 대한민국의 위상이 안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높아 자부심을 느꼈다. 우리 문화와 스포츠 분야가 세계 무대에서 대단한 활약을 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금융시장도 그만큼 성장했다. 우선 아시아에서, 나아가 전 세계에서 마켓 리더가 돼야 한다. →정부 신용평가에 대한 향후 계획은. -국내 기관 투자자들의 관심이 높은 지역이 이머징 마켓이기 때문에 이를 중심으로 먼저 평가를 이어 나갈 계획이다. 올해 안에 5~6곳을 추가로 평가한다. 10년 안에 40여개국까지 확대하는 게 목표다. 궁극적으로는 무디스 같은 글로벌 신평사와 경쟁하는 것이 목표다. →정부나 기업 평가 못지않게 개인 신용 문제도 중요할 것 같은데. -물론이다. 외환위기 이후 신용사회가 정착되며 개인신용 관리의 중요성이 커졌다. 금융 소비자들은 신용카드 거래, 은행 대출, 백화점 거래 등 자신의 모든 금융 정보가 종합관리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평생 건강 관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용 관리를 해야 한다. 일단 세 가지부터 실천해야 한다. 카드 연체를 주의하고, 보증을 서지 말고, 충동구매를 자제해야 한다. 특히 신용이 좋을 때 적극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오랫동안 머물렀던 공직을 떠날 당시 아쉬운 점은 없었는지. -어쩔 수 없이 떠났지만 섭섭하기는 했다. 허전하기도 하고…. 이후 백수 생활도 겪어 보고 민간 쪽에서 일하며 세상을 많이 배우게 됐다. 공직에 있을 때 바라보는 세상과 이쪽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다르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공직에 있을 때는 선과 정의, 명분을 찾았지만, 이곳은 모든 가치가 이익으로 통하고 이익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정글이다. 요즘은 더 늦기 전에 세상에 나온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성공한 관료 출신 CEO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CEO로서 강조하는 지점은 무엇인가. -한신정의 지배구조가 변화하는 시기에 합류해 자율과 책임을 항상 강조해 왔다. 또 인간 관계에서 상호 신뢰를 오랫동안 지속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자기가 먼저 희생하고 좀 더 양보하는 게 그 시작이다. 언제나 하는 이야기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불평보다 감사하는 마음과 자세를 갖고 있으면 오만과 편견이 줄어들고 일을 할 수 있는 추진력이 생긴다. 나 또한 고위 관료였다는 생각을 버리고 민간 비즈니스를 바닥에서부터 배운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이용희 대표는 이용희 대표는 독특하게도 서울대 재학 시절 전공이 천문기상학이었다. 미국과 소련이 우주 진출 경쟁을 펼치던 1960년대 말이 고교 시절이라 자연스럽게 우주 여행에 대한 꿈이 있었다. 그러다 대학교 4학년 때인 1973년 제14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과 인연을 맺었다. 원세훈 국가정보원장, 김광림·이용섭 국회의원, 박종원 코리안리 사장,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 등이 행시 동기다. 정통 경제관료로 경제기획원, 재경원, 재경부 등을 거쳤고, 1990년대 말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각종 정책 입안과 집행 과정에 깊숙이 참여했다. 하지만 참여정부에서 ‘코드 논쟁’에 휩쓸린 끝에 퇴진을 결심하고 2004년 30여년의 경제관료 생활을 끝냈다. 한신정평가와는 2006년 인연을 맺었다.
  • [씨줄날줄] 윤정희/허남주 특임논설위원

    영화배우 윤정희가 그제(현지시간) 프랑스 문화장관이 수여하는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시에를 받았다. 지난해 8월 프랑스에서 개봉된 영화 ‘시’(詩)가 집중조명을 받으면서 한국영화에 쌓아온 업적이 인정돼 프랑스 영화계의 추천을 받았다. 당초 알려졌던 훈장 슈발리에보다 격상된 훈장을 받을 만큼 그의 존재감은 프랑스에서도 빛나고 있다. “즐겁게 희망을 갖고 영화를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45년간 한국을 대표해온 여배우의 소감치고는 겸손하고 소박하다. 프랑스가 알아보기 전부터 우리가 사랑해온 윤정희는 문희, 남정임과 함께 1960년대 한국영화 황금기를 대표하는 배우다. 1200대1의 경쟁을 뚫은 신데렐라로 1966년 영화 ‘청춘극장’으로 데뷔, ‘안개’ ‘독짓는 늙은이’ ‘무녀도’ 등 300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단 7년간의 활동으로 한국 영화사를 대표하는 작품에 이름을 남긴 그는 1973년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고,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해 파리에 살면서 간간이 한국영화에 출연했다. ‘자유부인’ ‘만무방’이 더해졌고, 오랜 공백 끝에 출연한 영화 ‘시’는 주인공의 이름이 그의 본명인 ‘미자’였음이 말해주듯 윤정희가 있어 가능했던 영화였다. “윤정희 같은 대배우가 내 시나리오를 보고 출연을 결정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존경을 표했던 감독 이창동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주름”이라며 윤정희의 주름을 화면 가득 담아냈다. 미당 서정주는 생전에 “윤정희 이전에도 윤정희 이후에도 윤정희만 한 배우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젊음을 으뜸으로 내세우는 우리 사회에서 주름이 아름다움의 또다른 표현이 될 줄은 윤정희 전에는 몰랐다. 보톡스는커녕 흔한 주름완화제도 바르지 않았을 것 같은 그의 얼굴은 곱기만 하다. 세월의 흐름을 자연스레 보여주는 60대 중반을 넘어선 여배우의 모습은 자유로웠다. 순리를 아는 사람의 당당함이었다. 지난해 칸 영화제 시상식에서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치렁치렁한 드레스도, 화려한 회장이나 반회장을 덧대지도 않은, 소박하다 못해 조금 초라해 보일 정도의 한복을 차려입은 윤정희의 모습은 자신감 그 자체였다. 남편과 휴대전화를 공유하고, 맛깔스러운 김치를 만들기 위해 직접 멸치젓갈을 담가 친구들에게 ‘집밥’으로 대접하길 즐긴다는 윤정희. 이 여배우에게는 흘러가는 시간마저 향기롭다. 90살까지 배우로 살고 싶다는 그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며 후속작을 기대한다. 허남주 특임논설위원 hhj@seoul.co.kr
  • 춤 인생 80년만에 첫 화보집… 승무·살풀이 ‘國舞’ 
무형문화재 이매방 선생

    춤 인생 80년만에 첫 화보집… 승무·살풀이 ‘國舞’ 무형문화재 이매방 선생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춤을 추다 쓰러질 사람이다. 몹쓸 병에 의사의 집도를 받고는 체중이 헌 짚신짝만큼이나 줄어들었을 때도 무대에 올라서면 굽은 등이 펴지고 까치 걸음이 날렵해지고 어깨춤이 절로 나는 나 자신을 보았다. 못된 제자를 만나 피를 토하는 모욕과 배신과 울분에 사나이 눈물을 깨밀다가도 장단 소리만 나면 생기가 돌았으니 천생 나는 춤을 추다가 갈 사람이다. -우봉 이매방춤 전수관 홈페이지에서 집 안에 들어섰을 때 그는 한복 저고리에 동정을 달고 있었다. 저녁 공연 때 처(妻)가 입을 한복이라고 했다. 그의 바느질은 유명한 얘기이지만 짐짓 모른 척하고 물었다. “잉. 지금도 이쁜 것(제자)들은 내가 직접 옷 지어 줘.” 처가 예쁜 모양이다. 그런데 그는 왜 지금도 무대에 입고 올라갈 옷을 손수 지을까. “의상도 작품이거든. 요샛것들은 바느질 못혀. 바늘귀도 못 꿰는 게 무신 춤꾼이여.” 우봉(宇峰) 이매방(85). 국내 몇 안 되는 두 종목(승무·살풀이춤) 무형문화재다. 평생 춤만 춰 왔다. 그런데 이제서야 생애 첫 책을 갖게 됐다. 제자 부부(이병옥·김영란)가 귀한 사진자료를 곁들여 낸 두툼한 화보집이다. 출판기념회를 하루 앞둔 6일 서울 양재동 자택에서 선생을 만났다. →‘국무’(國舞), 요즘 말로 하면 국민춤꾼이신데 생애 첫 책이라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잉. 화보집은 첨이여. 그때는 그냥 춤만 췄제. 누가 (자기 자신을) 선전하고 그랬간디. 예술하는 사람들은 머리 굴리면 안 돼. →머리 굴리는 사람도 있다는 지청구로 들립니다. -예술은 정직하고 깨끗해야 혀. 그런데 요즘엔 춤이고 대중가요고 다들 돈 벌어 먹을라고 머리 굴리고 지랄 염병들이여. 언제 나오나 싶어 조마조마했는데 초장부터 터졌다. 선생의 별명은 ‘욕쟁이’다. 질펀한 전라도 사투리에 육두문자가 거침없이 튀어나온다. →요샛것들이 많이 마음에 안 드시나 봅니다. -내가 수많은 제자와 문하생을 길러냈지만 맘에 드는 년은 딱 한명이여. 그냥 (기사에는) 재미무용가라고 해 둬. 다른 것들은 지들이 공연할 때면 내 이름 (공연 책자에) 올리려고 앞다퉈 찾아와서 이빨 드러내고 웃으며 온갖 애교를 떨어. 그러고는 그만이지. →제자들이 들으면 섭섭하겠습니다. -섭섭해도 할 수 없어. 나는 쬐깐했을 때부터 어머니 경대(거울 달린 화장대) 앞에서 춤을 췄어. 머스마가 초랭이처럼 춤을 잘 춰 옆집 살던 나이든 기생(함국향)에게 춤을 배웠지. 그때 내 나이 일곱살이었어. 그 뒤 초등학교 6년 내내 춤을 배웠지. (춤)냄새를 쪼끔 맡은 거여. 그런데 요샛것들은 춤 쪼깨 배우고는 어디 가서 ‘이매방 춤입네’ 지랄들을 혀. →뭐가 그리 못마땅하신가요. -내 춤을 변형 변질시키니까 하는 말 아니여. 이수증만 따고 나면 (내 춤에) 딴 가락을 넣고 지들 춤을 집어넣어. 내 춤은 멀리 하늘로 보내버려 놓고는 이매방 춤이라고 혀. 한마디로 사기제. 춤추는 사람은 정직하고 마음이 고와야 혀. 마음이 고와야 춤도 고와. →선생님 춤의 원형은 무엇인가요. -춤은 무겁게 춰야 혀. 우리 춤의 핵심은 정중동(靜中動)이여. 중심은 배꼽이제. 그라니깬 요염하고 아름다운 건 배꼽 아래에서 나오고, 명랑하고 활발한 건 배꼽 위에서 나와. 물이 들면 다시 나가고 밤이 있으면 낮이 있고, 음양 이치가 있는 게 바로 우리 춤이여. →한국춤의 매력은 찌르르하고 요염하고 이상야릇하다고 말씀하신 게 이 뜻이군요. -그라제. 발레나 현대무용은 동만 있고 정이 없어. 양복 깃처럼 직선이지. 요즘 사람들은 그런 서양춤에 환장들을 혀. 하지만 한국춤은 정과 동이 다 있어. 버선, 기와, 전부 곡선이잖어. (외국 것만 좋아하는) 국민들도 반성해야 혀. →작고하신 한영숙 선생과도 정중동 논쟁이 있었지요. -1980년대인가, 영국의 세계적인 무용가 마고트 폰테인 앞에서 우리 두 사람이 춤을 췄어. 춤을 보고 나서 폰테인이 말하기를, 한영숙은 개량화된 현대 춤이고 이매방은 흙 냄새 나는 전통춤이다. 이게 기사화됐는데, 한영숙씨가 ‘이매방이 기자들을 구워삶았다’며 난리쳤어. →한영숙 춤은 남성적이고 선생님 춤은 여성적이라고 합니다. -한영숙 춤은 정이 멀어지고 동이 부각된 신무용이야. 한마디로 박력 있지. (요즘 탄생 100년이라고 떠들썩한) 최승희 춤도 마찬가지여. 그에 반해 내 춤은 요염하고 곡선미가 있어. 어찌 보면 징그럽제. 여자 같고…. →여자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선생님의 성(性) 정체성을 의심하는 시선도 있습니다. -내가 곱게 화장하고 여자 옷 입고 춤추니까 그라제. 지금도 내가 호모, 그라니깬 동성애자인 줄 아는 사람이 많어. 근데 아니여. 곁에서 듣고 있던 부인 김명자(68)씨가 웃는다. 두 사람은 열일곱살 차이가 난다. →(이매방 선생을 향해) 생전에 무형문화재 후계자를 정하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암만. 그래도 내 춤을 변형 변질 안 시키고 끝까지 지키는 사람은 내 처하고 내 딸밖에 없어. →외람된 말씀이지만 집안끼리 다 해먹는다고 욕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아무리 집안 사람이어도 머리 굴리고 내 춤을 변형시키면 그걸 왜 시켜. 바로 바꿔야제. 김명자씨는 승무와 살풀이춤 전수교육 보조자다. 외동딸 현주(37)씨는 현대무용을 전공(한성여대 무용과)했으나 지금은 한국무용으로 바꿔 한양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현주씨는 7일 오후 6시 서울 메리어트호텔에서 열리는 출판기념회에서 아버지의 살풀이춤을 재연한다. →어려서 아버지한테 많이 맞으셨다던데 춤이 그렇게 좋던가요. -울 아버지가 나이 쉰에 나를 봤는디(낳았다는 뜻) 쉰둥이라고 그렇게 이뻐하셨지. 그런데 가시내처럼 춤을 춰대니 몽둥이 들고 무대까지 쫓아오셨어. 그런데도 그렇게 춤이 좋더라고. 어린 나이에 내가 돈맛을 알았겄어, 춤맛을 알았겄어. 그냥 좋았던 거여. →지금도 무대가 무서우신가요. -그라제. 무대는 정직해야 혀. 옛것을 찾아내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이여. 내 맘대로 해도 되면 뭐가 무섭겄어. 그래서 난 지금도 무대가 무서워. →춤인생 80년 기념공연 계획은 없으신지요. -없어. 그래도 올가을이나 겨울쯤 무형문화재 공개 행사는 할 거여. 인자는 기력이 달려 완판(완막 공연)은 힘들어. 부분(춤사위)만 해 보여야제. →건강 관리 비결이 따로 있으신가요. -없어. 소식(小食)하는 것 말고는. 그때 부인이 끼어들었다. “하고 싶은 소리 다 하고, 욕을 저렇게 많이 해대는데 무슨 스트레스가 있겠느냐.”고. “춤만 성숙해졌지, 지금도 애기 같다.”며 눈치를 준다. 고집이 너무 세서 타협이 잘 안 된다며, 그래서 제자들도 많이 힘들어한다고도 했다. 불리한 얘기가 나오니 선생이 슬그머니 자리를 뜬다. 그래도 이 말은 잊지 않았다. “출판기념회에 꼭 와. 박지원(민주당 원내대표)도 온당께. 고향(목포) 사람이거든. 유인촌도 불렀는디 외국 가 있어서 못 온대.” 정리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대담 안미현 문화부장 ■ 이매방 선생은 ▲1926년 전남 목포생(호적에는 1927년생) ▲1933년 일곱살 때 목포 권번(기생조합)서 처음 무용 배움 ▲19 34~1939년 큰누나가 있던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당대 유명 경극배우 매란방에게 춤 배움. 매란방에게 매료돼 예명도 ‘매방’(본명 규태)이라 지음 ▲1941년 목포역전 임방울 공연 때 ‘승무’ 맡았던 박봉선 대타로 첫 무대 데뷔 ▲1943 목포공업학교 졸업 ▲1973년 결혼 ▲1987년 중요무형문화재 27호 승무 보유자 지정 ▲1990년 중요무형문화재 97호 살풀이춤 보유자 지정 ▲1998년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수훈 ▲20 08년 한민족문화예술대상
  • [마스터스] 8인의 코리안 “그린재킷 입을 래”

    [마스터스] 8인의 코리안 “그린재킷 입을 래”

    ‘그린 재킷’의 계절이 돌아왔다. 올해로 75회째를 맞는 명인들의 열전, 마스터스 토너먼트가 오는 8일 미국 조지아주의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장(파72·7435야드)에서 열린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시즌 첫 메이저 대회다. ‘맏형’ 최경주(왼쪽·41·SK텔레콤)를 비롯해 8명의 한국(계) 선수들이 출전한다. 역대 가장 많은 규모다. 1973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한장상 한국프로골프협회 고문이 오거스타에 첫발을 디딘 지 38년째인 올해 코리아 군단들은 그린 재킷을 걸칠 수 있을까. 최경주는 9년 연속 초청장을 받은 한국 골프의 간판이다. 2008년 소니오픈 우승 이후 PGA 투어에서 7번 우승했지만 마스터스와 인연은 없었다. 2003년 첫 출전에서는 공동 15위, 2004년엔 우승자 필 미켈슨(미국)에게 3타 뒤진 단독 3위에 그쳤다. 지난해엔 타이거 우즈(미국)와 4라운드 내내 동반 플레이를 펼치며 공동 4위에 오르는 저력을 보였다. 최경주는 5일 “새 스윙에 익숙해졌고 컨디션도 좋다.”면서 상위권 진출로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겠다고 밝혔다. 최경주는 1주일 전 열린 아널드 파머 인비테이셔널에서 공동 6위를 기록, 시즌 두 번째로 톱 10에 진입하는 등 상승세를 타고 있다. 네 번째로 도전하는 양용은(오른쪽·39)도 “이번에도 톱 10에 들겠다.”는 각오다. 지난해 공동 8위였다. 양용은은 오거스타에서 9홀 연습 라운딩 뒤 인터뷰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연습해 왔기에 컨디션은 좋은 상태”라면서 “그린이 빠른 만큼 쇼트게임에 역점을 두겠다.”고 했다. 지난해 깜짝 3위를 차지한 재미교포 앤서니 김(26·나이키골프)도 지난주 셸 휴스턴 오픈에서 공동 13위를 차지하는 등 올해도 돌풍을 이어갈 기세다. 케빈 나(28·타이틀리스트)와 지난해 일본프로골프투어(JGTO) 상금왕 김경태(25·신한금융그룹)도 그린을 밟는다. 이 밖에 한국계 아마추어 3명이 대회 주최 측 초청으로 생애 처음 마스터스의 문을 두드린다. 지난해 브리티시아마추어대회 우승자인 정연진(21)과 US 아마추어 퍼블릭링크스 챔피언십 우승자인 재미동포 라이언 김(22·한국명 김준민), 지난해 US아마추어 챔피언십에서 준우승한 데이비드 정(21·스탠퍼드대)이 주인공이다. 미시간대에 재학 중인 라이언 김은 최근 골프 다이제스트가 선정한 올해 마스터스의 주목할 신인 10명 안에 이름을 올렸다. 데이비드 정은 라이언 김과 함께 미 대학 골퍼들에게 최고의 영예로 평가되는 ‘벤 호건 어워드’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 몽골 사막의 풍력 서울서 쓸 수 있는 날 온다

    몽골 사막의 풍력 서울서 쓸 수 있는 날 온다

    1993년 대전 엑스포를 기억하시는지. 이때 각 전시관에 ‘도우미’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이후 전국에서 이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도우미들이 등장하게 된 시초가 됐다. 도우미와 함께 대전 엑스포에서 처음 선보인 것이 자기부상열차다. 전시장 600m를 도는 작은 열차였는데, 선로 위를 바퀴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10~20㎜ 정도 공중에 떠서 달리는 열차였다. 이렇게 말하면 자기부상열차가 ‘초전도 현상’을 응용한 것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초전도 현상이 발견된 지 올해로 100년이 됐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을까. 이달 8일이면 발견된 지 100년이 되는 초전도 현상에 대해 알아봤다. 1911년 4월 8일, 네덜란드 레이덴대학의 물리학자 헤이커 카메를링 오너스(1853~1926)는 극저온 실험장치를 이용하여 온도에 따른 수은의 전기저항 변화를 관찰하다가 절대온도 4.2K(섭씨 영하 269도)에서 전기저항이 완전히 없어지는 현상을 발견했다. 카메를링 오너스는 이를 초전도라고 불렀다. 초전도 역사의 시작이었다. 1933년 발터 마이스너와 로베르트 오센펠트는 초전도체에서 전기저항뿐만 아니라 내부의 자기장도 완전히 없어지는 ‘완전반자성’의 성질을 발견했다. 특정 온도 밑으로 온도가 내려가면 나타나는 완전무저항과 완전반자성은 초전도체의 가장 중요한 성질이다. ●일정 온도 이하에서 전기저항이 사라지는 현상 중간에 장애물이 있어도 초전도 현상이 적용된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1962년 당시 22살의 케임브리지대 대학원생 브라이언 조지프슨은 두개의 초전도체 사이에 얇은 절연체가 있어도 이를 뚫고 전류가 흐를 수 있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예측했다. 조지프슨의 예측을 이바르 예베르 박사와 일본인 에사키 박사가 실험적으로 확인했다. 이들 3인은 이 공로로 1973년 노벨상을 공동 수상했다. 지금도 초전도체-절연체 배열을 ‘조지프슨 접합’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처럼 전기저항이 없어지고 자기 반발성을 가진 초전도체였지만 문제도 있었다. 이 같은 현상이 극저온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이를 되도록 높은 온도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점이다. 1986년 스위스 IBM 연구소의 베드노르츠와 뮐러는 절대온도 35K(섭씨 영하 238도)에서 초전도체가 되는 구리산화물을 발견했다. 1973년 발견된 임계온도 23K(섭씨 영하 250도)를 끝으로 13년 동안 나타나지 않던 더 높은 임계온도의 새로운 물질을 발견한 것이다. 이 연구로 이들은 1987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이를 시작으로 봇물 터지듯 새로운 초전도체가 발견되었다. 고온 초전도체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초전도 현상은 양자컴퓨터나 자기공명영상(MRI)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최근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후에는 원자력발전을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는 핵융합 발전과 초전도 전력기술이 각광받고 있다. 기존의 원자력발전이 우라늄 분열 과정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이용한 것이라면 핵융합 발전은 수소 등 가벼운 원자핵들이 융합하면서 나오는 에너지를 이용한 것이다. 핵융합 발전은 태양의 원리와 같아 ‘인공 태양’을 만드는 것에 비유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국가핵융합연구소에서 연구용 초전도 핵융합 장치인 ‘KSTAR’를 개발, 지난해 10월 2000만도에서 6초간 플라스마(원자핵과 전자가 분리된 상태) 상태를 유지해 핵융합에 성공했다. 핵융합 발전은 KSTAR처럼 초고온의 플라스마를 진공 용기에 넣어야 한다. 하지만 고온이기 때문에 플라스마가 용기 벽에 닿으면 안 된다. 플라스마를 용기 벽에 닿지 않게 하기 위해 자기장을 이용하는데, 이 역할을 하는 것이 고자장의 초전도 자석이다. ●핵융합, 저항 없는 전력 전송 가능해져 핵융합 발전이 앞으로도 수십년간 연구가 필요한 장기 과제라면 초전도 전력기술은 당장 지금도 사용할 수 있다. 초전도 전력기술은 특정 조건에서 전기저항이 ‘0’이 되는 특징을 이용한 것이다. 기존 구리선을 이용한 전력 수송은 구리선 자체의 저항으로 인해 전력 손실이 발생한다. 지난해 송배전 과정에서 손실된 전력량은 총전력 생산량의 4%로, 원자력발전소 3기가 생산하는 전력량과 맞먹는 수치다. 초전도 케이블을 사용하면 이 같은 전력 손실을 크게 줄이는 것은 물론 현재는 불가능한 원거리 대용량 전력 수송도 가능해진다. 지난달 10년간의 연구를 마치고 연구 성과를 보고하는 대회에서 21세기 프런티어 차세대초전도응용기술개발사업단 성기철 단장은 “초전도 기술을 이용하면 원전에 의존하지 않고 에너지 자립을 할 수 있다.”면서 “수송 과정 중 전기 손실이 없고 100㎞ 이상 장거리 전력 수송이 가능해져 기존 전력 시스템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외나 해상 등에서 신재생에너지를 대량으로 개발해 국내로 바로 끌어올 수 있다.”고 밝혔다. 태양광·태양열이나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를 활용할 때에는 장소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대규모의 신재생에너지 발전시설을 만들기 위한 장소도 필요하다. 대규모 단지를 만들면 지금보다 신재생에너지의 경제성이 좋아진다. 성 단장은 몽골 사막에서 풍력과 태양광 등으로 전기를 만들고 우리나라로 이를 수송하는 ‘초전도 에너지 하이웨이’를 제안했다. 이는 초전도 전력기술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외에도 시속 550㎞ 이상을 달릴 수 있는 초전도 자기부상열차나 MRI에 높은 자기장을 만들어주는 초전도 자석이 핵심 부품이다. 또 초전도 전자소자를 이용하면 초고속-저전력의 디지털 회로를 만들 수 있는데 이를 통하면 현재의 컴퓨터 개념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면서도 높은 처리 능력을 갖는 양자컴퓨터도 만들 수 있다. 한편, 오는 5월 20일 연세대 100주년 기념관에서는 초전도 발견 100주년을 기념하는 심포지엄이 열린다. 한국초전도학회 등이 주관하는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국내 초전도 연구의 성과 발표는 물론 학생들이 직접 초전도 현상을 보고 체험할 수 있는 실험도 계획되어 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씨줄날줄] 대검 중수부/박홍기 논설위원

    검찰의 심벌마크는 대나무의 올곧음에서 나왔다. 직선을 병렬 배치해 검찰의 중립성과 독립성 이미지를 담았다. 상단의 곡선은 천칭저울의 받침을, 중앙의 직선은 칼을 형상화했다. 균형과 함께 공평한 사고와 냉철한 판단을 표현한 것이다. 다섯개의 직선은 중앙을 기준으로 정의, 왼쪽은 진실과 공정, 오른쪽은 인권과 청렴을 의미한다. 청색은 합리성과 이성을 상징한다. 검찰 수장은 검찰총장이다. 대법원장, 감사원장, 경찰청장과 명칭부터 사뭇 다르다. 준사법기관인 검사와 감찰 조직을 거느리고 다스리며 통괄하는 까닭이다. 검찰총장은 직할 부서로 중앙수사부를 갖고 있다. 중수부는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 청와대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은 ‘하명사건 ’, 굵직한 부패·비리사건만을 수사하는 곳이다. 따라서 위상과 위력은 엄청나다. 칼을 뽑으면 ‘살아있는 권력’도 움츠릴 수밖에 없다. 중수부의 뿌리는 1961년 4월 출범한 대검 중앙수사국에 두고 있다. 대형 경제·정치 사건을 맡는 미 연방수사국(FBI)을 본떠 출발했지만 초기에는 국내 대공정보 수사를 맡았다. 1973년 특별수사부를 거쳐 1981년 현재의 중앙수사부로 개편됐다. 중수부는 지검·지청에서 수사 경험을 쌓은 ‘칼잡이’ 중에서도 1급에 꼽히는 특수통 검사들을 파견받아 진용을 짠다. 최정예 검사들이 모인 최고의 조직이다. 중수부 수사는 상당한 성과를 냈지만 정치적 시비와 논란도 적지 않았다. 영욕의 역사다. 1995년 전두환·노태우 사건, 1997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 비리, 같은 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 홍업·홍걸씨 비리, 2003년 불법대선자금 사건 등에서 개가를 올렸다. 그러나 1997년 한보특혜대출 1차 수사 땐 축소·은폐수사라는 비난에 휩싸였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았던 박연차 게이트 땐 ‘먼지털이식’ 수사라는 오명과 함께 중수부 폐지론의 역풍을 불러일으켰다.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했다는 이유에서다. 중수부가 위기에 처했다. 국회 사법제도개혁위원회가 중수부를 폐지하는 대신 독립기관인 특별수사청 설치안을 들고 나왔다. 법무부와 검찰의 반발도 만만찮다. 2004년 노무현정부 시절 중수부 폐지가 논의되자 당시 송광수 검찰총장은 “중수부 수사가 지탄을 받는다면 먼저 내 목부터 치겠다.”며 맞섰다. 하지만 이번엔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중수부의 칼날이 존속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전적으로 정치권과 여론의 향배에 달렸다. 박홍기 논설위원 hkpark@seoul.co.kr
  • 암자서 맺은 스님과 처녀 러브 스토리

    암자서 맺은 스님과 처녀 러브 스토리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어느 미남 승려와 폐결핵 환자 아가씨와의 청순한 러브 스토리. 원효(元曉) 대선사가 요석공주와 동침하여 파계한 끝에 설총(薛聰)을 낳았다는 천년 전의 로맨스처럼 지현(知玄)스님의 로맨스는 물씬한 감동마저 준다. 지금은 환속하여 부산(釜山)에서 알뜰하게 살고 있다는 그들의 파계 장소 전남(全南) 여천(麗川)군 돌산도(突山島) 향일암(向日庵)에 얽힌 얘기-.  전남(全南) 여수(麗水)시에서 배를 타고 1시간쯤 가면 돌산(突山)섬이 나온다. 여천(麗川)군 돌산(突山)면 율촌(栗村)리에서 1km쯤 북쪽에 금오산(金鰲山)이 있고 산에는 흔들바위란 게 있다. 집채만큼 큰 바윗덩이가 사람이 밀면 흔들거린다는 기묘한 바위다. 이 흔들바위 밑에 까치집처럼 앙증맞은 향일암(向日庵)이란 암자가 있다. 하지만 이 암자의 유래는 거창하다. 신라 선덕(善德)여왕 13년(사기 639년)에 원효(元曉)대사가 창건했고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이 곳을 본거지로 승군(僧軍)이 활약했다는 곳. 그 건 그렇고 이 일대 경치가 장관이다. 울창한 낙락장송의 솔바람 소리, 온갖 기묘한 모양의 바위, 그리고 남해바다의 장쾌한 파도가 기막힌 절경이다.  1957년이면 17년전. 키가 헌칠하고 미목수려한 스님 한분이 순천(順天) 송광사(松廣寺)로부터 향일암(向日庵)으로 왔다. 당시 나이 27살, 법명은 지현(知玄), 속명은 박영식(가명), 호는 호월(湖月).  경남 남해(南海)가 고향인 지현(知玄)스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살에 출가, 전국 유명 사찰을 돌아다니며 10년을 목표로 수도하다가 마지막 3년을 채우기 위해 향일암(向日庵)을 찾은 것이다. 지현(知玄)스님은 절 주변을 알뜰하게 손질한 뒤 백팔염주에 사바세계 번뇌를 실어 깊은 사념의 경지를 거닐었다.  그동안 폐사처럼 버려져 있던 향일암(向日庵)에는 이로부터 여신도들이 몰려들었다. 낭랑한 목소리에 곡식 위의 제비같은 탈속(脫俗)의 지현(知玄)스님, 게다가 인물 좋고 경치마저 절경이어서 그는 인기스님이 된 것이다.  세월은 흘러 59년 봄이 되었다. 향일암(向日庵)에서 1km 떨어진 해변가 율촌(栗村)마을에 양장 차림의 미인 아가씨가 찾아들었다. 광주(光州)에 산다는 박애희(朴愛姬)양(23·가명). 폐결핵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요양차 이모가 사는 율촌(栗村)에 왔다는 그녀는 발그레한 볼의 홍보가 요정처럼 기막히게 예쁜 미인.  아열대성 식물인 동백·산죽(山竹)·비화(飛花)가 온 섬을 뒤덮고 바위 틈에 도사린 석란(石蘭)의 향기는 십리 안팎을 뒤덮어 6순 환갑이라 해도 마음 설렐 판이었다.  박(朴)양의 병은 이런 절묘한 풍경의 탓(때문)이었는지 눈에 띄게 회복되었고, 차츰 힘이 생겨 산책 코스를 넓혀갔다.  그때 그녀의 눈에 띈 남성이 바로 지현(知玄)스님. 부처님 앞에 정좌하여 청아한 목소리로 독경하는 근엄한 모습을 취한듯 응시했다.  이로부터 그녀는 2개월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향일암(向日庵)을 찾았다. 그녀의 시선은 날이 갈수록 뜨거워졌고 지현(知玄)스님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잠이 들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스님은 장승. 눈길 한번 주는 법이 없었다.  가을이 되었다. 사무친 가슴 속의 사연이 맺히고 맺혀 이번엔 폐결핵이 아닌 상사병에 몸부림하다가 농약을 마셔 버렸다. 위급한 그녀를 두고 이모 되는 여인은 조카의 애절한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 지현(知玄)스님에게 달려가『그 애를 구해 달라』고 애원했다.  스님은 그 요청을 거부하고『나의 손길보다는 당장 해독시키게 녹두물이나 먹이시오』했다. 이모는 되돌아와 녹두를 갈아 먹였다. 의사 없는 갯마을에서 꼼짝없이 죽어야 했던 그녀는 신통하게도 살아났다.  59년이 저물고 새해 음력 1월14일 새벽 4시. 지현(知玄)스님은 화엄경(華嚴經)을 독경하며 새벽의 경내를 산책하고 있었다. 그때 느닷없이 뒷산에서 비통한 여인의 통곡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스님은 뒷산으로 달려갔다. 박(朴)양이 흔들바위에 맨발로 서서 바다를 향해 투신하려는 찰나였다.  혼비백산한 지현(知玄)스님. 자기로 인해 원한을 품고 죽을 여자를 생각하니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는『아가씨 소원은 뭐요? 다 들어 주겠으니 제발 뛰어내리지만 말라』고 애원했다.  그녀의 소원이란 불을 보듯이 뻔한 것.『스님과 함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망설이고 더듬거릴 나위가 없었다.『알겠으니 제발 그곳에서 내려와 달라』고 간청했다. 그 소리를 듣자 박(朴)양은 바위 위에서 실신하고 말았다.  스님은 그녀를 구출해 냈다. 암자에 누이자 비로소 정신을 차린 그녀는 스님의 품안에 안겨 몸부림치며 울었다. 난생 처음으로 싱싱한 여인의 체취와 풍만한 마찰감에 스님도 얼이 빠져 버렸다.  29년동안 막혀 있던 정열이 용솟음 치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10년 수도를 1년도 못남기고 거센 폭포수 속의 물거품이 되었다. 이날 새벽부터 지현(知玄)스님의 낭랑한 독경소리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로부터 6년의 세월이 지난 65년 여름. 대구(大邱) D사에서 참회의 수도에 전념하던 지현(知玄)스님은 어떤 모녀의 방문을 받았다.  『이 애가 스님의 딸입니다』면서 모녀는 6살 귀여운 아기를 내보였다. 스님은 가가대소, 『그렇습니다. 내 아이입니다』면서 즉시 승복을 벗고 딸을 한가슴 가득 안았다. 그는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 뒤로 스님 부부는 딸 하나에 아들 하나를 더 얻어 1남2녀를 두었다.  지난 71년 5월. 향일암(向日庵)을 중창할때 속인 지현(知玄)부부는 찬조금 5만원을 보냈다.  그들은 현재 부산 영도구 봉래동에서 미곡상을 경영하며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살고 있으나 찾아간 기자에게 사진찍기를 거부-.  그러나 한 여인의 억센 사랑의 집념으로 10년 수도승의 마음을 움직인「흔들바위」는 오늘도 의연하다. <麗水=金德鉉 기자> [선데이서울 73년 7월15일 제6권 28호 통권 제248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뚱뚱보 여성연예인 3인의 ‘애교 인터뷰’

    뚱뚱보 여성연예인 3인의 ‘애교 인터뷰’

    <肉體美야 최고,愛嬌도 최고>…더위걱정 말라는 뚱뚱보 연예인들 ●코미디언 白金女  22살에 시작해 만 22년을 연예계 생활을 해왔다.「코미디언」의 행운을 잡은 것은 전적으로 이 풍만한 육체미(?) 덕분. 120kg을 육박했으나 지금은 105kg으로 몸매가 퍽 날씬(?)해졌다.  『뚱뚱하다고 미련하다고 날 보고 웃지 말아요-』『굳세어라, 금순아-』의 가락에 자작 가사를 달아서『까불면 싹 문질러』로 맺는「히트·송」이 백금녀(白金女)의 애창곡인데 얼핏 엘레지이면서 폭소를 자아내는 게 특징. 목소리만은 적어도 어느 인기가수 뺨치게 미성(美聲)이란 게 白金女의 주장이다.  -연애해 본 일 있는지?  『없다면 거짓말이라 않겠어요? 죽자 살자고 따라 다니던 청년이 있었답니다』  -정말입니까? 언제 어떤 사이었는지 증거라도···.  『하이 참 내, 젊었을 때는 대단했단 말이요-』  화를 내는 체 해도 넘치는 애교는 더욱 희극적. 영화,「쇼」무대, TV까지 골고루 나갔고 출발은 성공. 그래서 『白金女야말로 국보요』라며 그는 짐짓 정색을 한다.   ●코미디언 五千坪  백(白)곰처럼 「고·고」, 코미디언 오천평(五千坪).  115kg의 몸무게, 167cm의 키에 가슴둘레가 59, 허리 49, 히프 58. 五千坪이란 예명이 그대로 어울린다. 본명은 장정숙(張正淑). 나이는? 『이제 30살, 아직 미혼이에요』  -이 더위에 그 몸을 가지고 어떻게?  『무조건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상책이죠. 아니면 고·고 춤으로 땀을 흠뻑 빼든가-.  고·고 춤 출 줄 아는지?  『어머, 사람 무시 보시네, 얼마나 날씬하게 추어대는지-』하면서 잡는 폼이 흡사 창경원의 백곰(?).『그렇지 않아도 제 별명이 백곰이에요-』  -좋아하는 음식은?  『불갈비를 제일 잘 먹어요. 뚱뚱하다고 뭐 보통여자보다 불편할 게 없고 기운이 뻐쳐서(뻗쳐서) 오히려 좋은 일 아니냐』고 시침.  주로「쇼」무대지만 노래, 익살, 춤의 팔방미인. 박희준(崔喜準)의『나는 곰이다』와 남진(南珍)의「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를 제일 즐겨 부른다고.   ●탤런트 崔龍順  『한 번은 녹화 중에 마루장이 주저앉아 버렸어요. 제가 너무 무거웠던가 보죠? 요즘도 마루를 걷는 장면이 있을 때는 또 주저앉을까 두려워 여간 신경이 쓰여지질 않아요-』TV 탤런트 최용순(崔龍順)양(24)의 고민.  69년 KBS 탤런트로 출발해서 『사슴 아가씨』『마부』『동기』등에 출연했고 지금『달래』 『길』에 나오고 있다. 맡은 역은 주로 식모.  순한 식모역처럼 崔龍順은 착하디 착하다고 선배 탤런트의 귀여움을 독차지 한다.  -사이즈는?  『키가 165cm, 몸무게는 84kg, 버스트·히프 따위는 재어본 일이 없어요. 허리는 42인치에서 요즘 38로 줄었어요』  『어렸을 때는 좀 줄여 보려고 무척 애썼어요. 굶기를 밥먹듯 해도 그래도 자꾸 살이 올라 이제는 포기했죠』  『고기는 안 먹어요. 밥, 김치,과일이면 살 수 있어요』  『운동으로 탁구를 해요. 보기는 둔해도 제비처럼 날쌔답니다···.』  <글쎄?> [선데이서울 73년 7월15일호 제6권 28호 통권 제248호] ●이 기사는 38년전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실렸던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배우 朴志暎

    배우 朴志暎

    [선데이서울 73년 7월15일호 제6권 28호 통권 제248호] ●이 기사는 38년전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실렸던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명예훼손 우려가 있는 곳은 부득이 익명 처리했음을 양지바랍니다. 스타가 집에 있을때…배우 朴志暎  麗水 앞바다에서 수영을 하며 자랐읍(습)니다. 한강을 두 번쯤 왕복할 수 있는 실력이니까. 물에 빠져 죽을 염려는 없읍니다.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여수서국민학교) 때는 우등생이었죠.  무용을 잘해서 때로는 발레리나가 될 꿈도 꾸었읍니다. 노래 솜씨는 0점, 오직 듣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무슨 생각을 제일 많이 하느냐구요? 그야 물론 작품이죠. 최근에는 河吉鍾 감독의『守節』에 주연하기로 결정됐읍니다.  제일 고마운 사람은 어머니입니다. 여러분은 딸이 영화배우이기 때문에 그 어머니가 겪는 어려움이 어떤 것인지 모르시겠지요.  좋아하는 음식은 싱싱한 생선회, 말만 해도 군침이 도는군요. 밥을 많이 안 먹는 성미지만 생선회는 예외에 속한답니다.  시집요? 지금이 시집 갈 나이인데 적당한 사람이 안나섭니다. 이해심 많고 생활 기반이 있는 분, 나이는 나보다 10살 이상이 좋을 것 같군요. 요즘은 정말 작품 이외의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답니다.    麗水태생, 漢城여고-中央大 연극영화과 2년 중퇴. 71년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 『약한 자여 』『대지역』『관계』등 출연 영화 30편.  키 160cm, B·W·H=34-24-35. 주소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500의 8.   <톱·플레이어> 하와이언 기타 姜甫中씨  『하와이언 기타는 재주있는 아가씨 같은 거죠. 선율이 무척 아름답고 여성적인데 음이 고정돼 있지 않아서 다루는 사람의 재주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새맛을 풍길 줄 알아요-』  16년간 하와이언 기타와 연애해 왔다는 강보중(姜甫中)씨. 그의 애인은 미제(美製)「센다」로 한국에 1대밖에 없는 진귀품이다. 5년전에 1천$를 줬다고. 연주 생활은 12살 때 바이얼린과 피아노를 치는 것으로 시작됐다.  32년간 악기와 함께 살아온 셈. 다루는 악기도 바이얼린, 피아노, 만들린, 전자오르간, 현악기와 타악기는 거의 마스트 했다. 나이트 쇼에서 그가 악기를 바꿔가며 연주할 때는 인기가수 못지 않게 인기, 익살스런 제스처가 또한 희극배우 이상이다. 올해 44살. 언제나 밤송이형 짧은 머리가 특징.
  • [이슈 추적] 동북3성發 速沙砲(속사포)… 6시간만에 ‘한반도 급습’

    [이슈 추적] 동북3성發 速沙砲(속사포)… 6시간만에 ‘한반도 급습’

    중국 북부 지역에 100년 만에 가장 심하다는 가뭄이 닥치면서 전례 없이 강한 황사가 예측되는 가운데 국내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여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해 3월 20일 관측 사상 최악의 황사를 경험했던 시민들은 또 독한 황사를 만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지난해만큼 강한 황사가 한반도를 덮칠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주요 황사 발원지의 가뭄으로 1차적인 조건은 형성이 됐다고 입을 모은다. 올봄 유난히 독한 황사 가능성이 높아진 것은 중국 동북 3성의 1~2월 강수량이 10㎜ 이하로, 평년의 25~50% 수준에 그쳤기 때문이다. 지역에 따라 강수량이 1㎜ 이하인 곳도 있다.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황사 발원지인 중국 황토고원지대도 상황은 비슷하다. 이렇다 보니 강풍이 불어 한반도를 향할 경우 바짝 마른 모래먼지가 한반도를 덮칠 수 있다. 우리나라에 부는 황사의 69%는 고비·쿠부치사막에서, 21%는 동북 3성에서, 나머지 10%는 황토고원에서 발생한다. 특히 동북 3성에서 불어오는 황사는 거리가 불과 500~1000㎞에 불과해 6~12시간이면 우리나라에 상륙한다. 기상청은 “가장 예측하기 어렵고 피해도 크게 나타나는 것이 동북 3성의 황사”라고 말한다. 전영신 기상청 황사연구과 과장은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중국 타클라마칸 사막 지역의 강수량 부족이 우리나라에 강한 황사를 몰고 올 가능성은 낮다.”면서 “오히려 주목해서 보고 있는 지역은 한반도 북쪽에 위치한 동북 3성 지역이다. 만약 강한 황사가 온다면 위치상 중국 서쪽보다 동북 3성 쪽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최근 10년간 황사 발생일수가 급격히 증가한 것도 우려되는 부분이다. 1973년에서 2000년까지 3~5월 황사발생 일수는 3.6일인 반면 2001년부터 2010년까지는 7.5일로 2배가 넘게 늘었다. 농도도 2008년부터 2010년 사이에 발생한 황사가 상위 10개 중 4개를 차지하고 있다. 김철희 부산대 대기환경과학과 교수는 “고비사막과 황토고원의 황사보다 동북 3성에서 날아오는 것이 더 무섭다.”면서 “2001년과 2002년에는 동북 3성에서 황사가 밀려오면서 서울 성수동의 미세먼지가 2000㎍/㎥가 넘어 학교가 휴교를 할 정도로 강했던 적이 있다. 최근 몇년간은 기류 등의 영향으로 인해 동북 3성 황사에 의한 피해가 적었지만 이 지역의 지표가 건조하다면 일단 주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동북 3성의 옥수수 경작 면적이 늘어나면서 농사를 짓지 않는 겨울과 봄에 휴경지가 늘어나 이 지역의 황사 발원 가능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가능성 단계다. 기상청 관계자는 “올해 황사 발원지가 평년보다 건조하다는 것은 1차적인 발생요건만 갖춘 것”이라면서 “기류나 바람의 정도가 맞아떨어져야 황사가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것만 가지고 강한 황사가 온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동북 3성에서 2000㎍/㎥가 넘는 황사가 밀려온다면 어떤 영향을 미칠까. 정부는 황사 발생으로 약 3조 8000억~7조 3000억원의 손실이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박환일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소비자들의 소비활동에 영향을 끼쳐 여행이나 레저산업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또 추가적인 의료비 지출 등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신동천 연세대의대 환경공해연구소 교수는 “호흡기 및 피부에 자극을 줘 각종 알르레기성 질환을 유발한다.”면서 “특히 천식·기관지염을 가진 사람들에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2008년 환경부를 중심으로 14개 부처가 협력하는 방식으로 피해방지 대책을 마련해 추진하고 있다. 정부는 5년 단위로 황사대비 계획을 세우는 대기환경보전법을 법제화한 상태다. 정부는 먼저 2007년 56%에 그치고 있는 황사예보 정확도를 2012년까지 70%대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현재 10개뿐인 황사 이동경로상 관측망을 25개로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산림청은 몽골 정부와 협력해 황사 발원지의 사막화 방지를 위한 사업을 진행 중이다. 현재 산림청과 몽골 정부가 추진 중인 ‘몽골 그린벨트 조림사업’은 고비사막 지역인 룬솜과 달란자드가드 두 지역에 2016년까지 3000㏊의 숲을 조성할 계획이다. 환경부 관계자는 “사실 황사는 발원지의 사막화를 막는 게 가장 중요해 몽골 정부와 협력, 사막화 방지 사업을 벌이고, 한·중·일 간의 미세먼지와 황사에 대한 정보 교류를 확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동현기자 moses@seoul.co.kr
  • 大學출신 아내는 離婚을 좋아한다

    大學출신 아내는 離婚을 좋아한다

    [선데이서울 73년 7월1일호 제6권 26호 통권 제246호]  ●이 기사는 38년전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실렸던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여필종부(女必從夫)』라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된 느낌. 부부의 갈등을 이혼으로 해결하려는 아내가 오히려 남편들을 능가하고, 그것도 신혼기에 속하는 결혼 1~3년 사이의 주부에 많다. 특히 학력이 높을수록 더욱 그러하다니 배운 아내를 가진 남편들을 아찔하게 하는 「쇼킹」한 정보-.  이 놀라운 사실은 한국부인회 법률상담소가 부인들의 상담을 통해 조사·분석한 것. 조사 기간은 작년 7월부터 12월까지 약 5달 동안. 상담 인원은 모두 7백45명이며 상담기록 「카드」와 대화를 토대로 조사했다.  상담 건수를 사건별로 나누면 형사 1백8, 민사 4백12, 그리고 가사 사건이 2백25건. 그런데 전체 상담 건수의 약 33%를 차지하는 가사 사건이 바로 「이혼」과 관련된 문제들.  『더이상 함께 살 수 없어 갈라서야 겠다』『이혼을 하려는데 위자료를 받을 수 있겠나』는 주장이었다.  이혼 상담을 해온 부인들의 나이 분포는 30~40살.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의 대부분이 결혼하고 3년이 못 된 30살 안팎이고, 사유야 어떻든 여자쪽에서 이혼을 먼저 제의한 경우가 70%에 이르는 1백50여명이었다.  이들을 학력별로 살펴보면 50%인 1백10여명이 대학 졸업자로 가장 많고 고교 졸업이 25%, 나머지가 중학교 이하의 학력을 가졌다.  이 가운데 여자쪽에서 먼저 이혼을 제의한 것은 대부분 고교 이상의 졸업자들이며 중학 이하의 학력을 가진 아내들은 『주인이 헤어지자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오히려 남편과 헤어지기가 싫어서 한 상담이었다.  상담에서 나타난 이혼 사유를 보면 당연히 이혼을 제의할 만큼 중대한 문제도 있으나 웃지 못할 사유도 허다하다.  크게 몇가지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 인격 침해 79건(35%) ▲ 부정 때문에 54건(24%) ▲ 의처증 때문에 45건(20%) ▲ 무능력 27건(12%) ▲ 타인의 간섭(5%).  이 통계는 옛날처럼 자식이 없어 부부가 파경에 이르는 경우는 거의 없음을 입증.  『현대여성은 결혼생활에 있어서 적어도 기본적인 인권이 존중된 그런 부부관계에 놓이기를 추구한다』는 게 이곳 배성심(裵成心) 상담부장의 실명이다.  상담한 대개의 사건들이 내세운 이혼사유(조건)는 무엇이라고 내세울이(내세울)만큼 서로 비슷한 것이었지만 기본권·인권이 침해되었다는 한 예를 보자.  남편 李모(32)씨는 서울 D고등학교 교사. 결혼은 했으나 아내는 시골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게 했고 줄곧 서울에서 하숙생활을 하면서 철새처럼 방학때만 아내를 찾아왔다.  3년동안 따로 살면서 참다 못한 아내는 서울로 남편을 찾아왔다.  남편은 그동안 같은 학교의 여교사와 눈이 맞아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분통이 터진 아내는 두 사람을 간통으로 고소하려 하자 둘은 학교를 그만 두고 도망치고 말았던 것.  또 의처증이 빚은 다른 예-.  4자녀를 둔 崔모씨(40)는 변태적일 만큼 무서운 의처증이 있었다.  공연한 트집을 잡아 히루에도 몇 차례씩 아내를 두들겼다. 결혼 뒤 줄곧 이런 두려움에 시달려 끝내 아내는 정신이상을 일으켰다. 매정한 남편은 자기 때문에 이 꼴이 된 아내를 이웃 보기가 창피하다고 친정으로 쫓아 보냈다.  또 다른 한 예는 아들을 낳지 못한 아내가 남편에게 2호부인을 얻어주는 대신 남편의 재산을 송두리째 차지하기로 했던 사건.  결혼 20년이 된 중년부부 였다. 아내는 딸만 여섯을 낳았다. 아내의 잘못일 수도 없었는데 남편은 아들을 낳기 위해 2호를 얻겠다고 고집.  아내는 2호를 집에 들이기로 하고, 대신 집의 명의를 자기 앞으로 돌려 달라고 했다. 이것이 합의되어 집의 소유권은 아내에게로 넘겨졌다. 2호부인은 바로 임신, 그토록 남편이 바라던 아들을 낳았다.  아내는 2호가 낳은 아들을 자기의 소생으로 입적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2호부인은 그럴 수가 없다며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갔고, 남편은 아내를 두들겨 재산권을 도로 빼앗고 내쫓았다.  남편의 잘못으로 빚어지는 이런 별난 사건들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양상.  아내들은 이런 횡포를 숙명적인 것으로 돌리고 감수했었다.  그러나 오늘의 여성들은 이를 참지 못하고 강경한 저항을 보이고 있으며 반드시 응징하거나, 차라리 헤어져 혼자 자유롭게 살려는 움직임이 두드러진 현상이라는 것.  이같은 사고 방식은 최근 고조된 여성의 사회참여 의식, 그리고 늙기 전에는 여자도 벌이를 할 수 있어 재정적으로 굳이 남편에게 얽매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관계자들은 풀이한다.  남편들에게 더 많은 원인이 있는 이면에는 자신들의 잘못으로 파경을 부르는 아내들도 적지않은 실정.  어떤 부인은 성품이 남자보다 더 괄괄하고 고집이 대단했다. 심한 표현으로 바꾸면 남편을 장악하려는 아내였다.  그리고 이들 부분이 남편의 사회적인 교제에 이해가 부족하여 늦게 집에 돌아오는 것을 퍽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으며 밖에 쏘다니기를 좋아하고, 신문 한장을 읽지 않는 게으럼을 피우면서 허영에 들뜬 부인도 있었다니 한심스럽다.<燦>
  • 나훈아(羅勳兒) 공군 입대-지금 신병 훈련중

    나훈아(羅勳兒) 공군 입대-지금 신병 훈련중

    [선데이서울 73년 7월15일호 제6권 28호 통권 제248호] ●이 기사는 38년전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실렸던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연말 은퇴할 것이라고 미리 은퇴 선언을 했던 나훈아(羅勳兒·26)가 돌연 공군에 입대, 예정보다 빨리 가요계를 떠났다. 5일부터 이미 신병훈련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은퇴 소감도 직접 전하지 못한채 「매니저」인 강창호(姜昌浩)씨를 통해 이 소식을 전했다.    羅勳兒「매니저」인 姜昌浩씨는 7월7일 상오 11시 M제과점에서 羅勳兒의 갑작스런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11시10분쯤에 羅勳兒는 나오지 않았고 「매니저」만 혼자 나타나『羅勳兒가 7월5일 하오 3시 공군에 지원 입대, 이미 훈련 중이어서 대리로 참석했다』고 밝혔다.  그의 말에 따르면 羅勳兒는 지난 4월에 서울서 공군 시험을 치르고 합격했다.  지원은 했지만 영장은 내년쯤에 나올 것으로 예상했으나 7월3일에 나왔다는 얘기. 아무에게도 연락을 취하지 않았고「매니저」와 단 둘이 신병훈련소로 떠났다고 그간의 경위를 설명했다.  『주변 사람들에겐 훈련이 끝나고 휴가때 인사하기로 하고 조용히 입대했다』고.  3군 중에 공군을 택한 것은『육군과 해병대에는 이미 많은 연예인이 다녀왔고 공군에는 없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들었다.  그가 입대하면 군예대로 활동하게 되는 것일까? 물론 이것은 개인의 뜻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군복무 기간 중에 군연예대에서 노래 부를 생각은 전혀 없고 일반병으로 충실히 근무하겠다는 것이 羅勳兒의 생각이라고 전했다.  羅勳兒의 공군 입대설은 지난 4월부터 나돌았다.(선데이서울 4월8일자 보도) 그때 공군 입대설을 물었을때 장본인은『그런 일 없다』고 딱 잘라 말하고『징병검사에서 X레이를 세번에 걸쳐 찍었는데 폐가 좋지 않아서 번번이 불합격을 맞아서 입대할 수 없는 처지예요』라고 부인했었다. 그때 공군시험을 치른 사실을 구태여 숨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때 말대로 라면 羅勳兒는 폐가 좋지 않다. 어떻게 군에 입대할 수 있었는지?  『70년에 처음으로 징병검사를 받았을 때 정말 폐가 좋지 않았읍(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무종을 받았죠. 그후 약을 계속 복용하여 작년 가을 신체검사 때는 X레이 사진에 완쾌된 것이 나타나 합격을 맞았던 거죠』  그는 금년 초에 73년 말이란 기한부 은퇴를 선언했었다. 은퇴의 이유는 『젊었을때 사업가로 전향해 보기 위해서』라고 말했었다.  은퇴를 선언했던 것은 사업가의 기초를 닦는 것이기보다 군에 입대하게 되기 때문에 그랬던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의 약속대로 된 것은 은퇴 공연을 지난 5월에 성공적으로 한 것 뿐이다.  -제대 후에 연예활동을 벌일 것인지?  『자세히는 모르지만「라이온스」쇼에 6개월간 남은 전속기간과 지구(地球)레코드에 3개월 남은 전속기간은 해 줘야 되지 않겠느냐』고 제대 후 일단 다시「컴백」할 뜻을 비치기(내비치기)도 했다.  -地球레코드와 재계약을 했다는 것은 사실인지?  『군에 가는 사람이 재계약 될 리 있읍니까. 낭설이에요』   地球레코드는 오는 9월로 1년반 기간 동안의 전속기간이 끝난다. 3개월 앞두고 떠나 버린 것.  『은퇴에 관계없이 제대 후라도 남은 기간은 채워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게 임정수(林政秀·地球레코드 대표)씨의 얘기다.  인기 가수로서 정상을 걷다가 군에 입대한 것은 남진(南珍·해병대) 조영남(趙英男·육군)에 이어서 羅勳兒가 3번째.   羅勳兒의 군입대는 남자 가수들의 판도에 적지 않은 변화를 자연 일으키게 됐다.  제대가 임박한 趙英男의「컴백」도 관심거리이긴 하지만 장기 도미유학설이 확실시 되고 있어 제외된다면 가요계 판도는 두 가지로 압축되어 생각할 수 있다.  그 하나는 南珍이 단독 플레이로 계속 아성을 굳혀나갈 것인가 하는 점, 다른 하나는 羅勳兒 자리를 메울 유능한 신인가수가 나타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사실상 羅勳兒가 은퇴를 선언한 후 그 영향 탓(때문)인지는 모르나 羅勳兒와 비슷한 목소리의 신진들이 대량으로 등장했다.  『흙에 살리라』의 홍세민(洪世民), 『산비둘기』의 한세일(韓世一),『아시겠지요』의 한국일(韓國一),『사랑도 세월이 가면』의 박우철(朴友喆),『영광의 길』의 나광일(羅光一),『순아』의 김지성(金志成), 김영준(金榮俊), 하길(河吉) 등과 도중 하차해 버린 전창규(全昌奎) 등 무려 10여명에 이른다.  신인들은 한결 같이 羅勳兒와 비슷한 창법을 들고 나와 저마다 제2의 羅勳兒를 표방했다.  그러나 羅勳兒식 창법은 자칫 벽에 부딪치기 쉽다. 최근 방송계서는 울부짖고 쥐어짜는 듯한 노래는 되도록 피하자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  羅勳兒 자신의 노래도 어느 가수보다 방송 전파를 타기 어려워 타격을 받아왔던 입장이다.<杰>    羅勳兒의 가수생활 8년  ▲66년「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가수 출발. 무명 가수로 고군분투하다가 67년에『사랑은 눈물의 씨앗』(金榮光 곡)으로 톱 싱어의 길에.  ▲70년에 지금의 아내(李淑姬·23)와 결혼. 그러나 이 사실은 73년 1월까지 숨겨져 왔다.  ▲72년 6월, 서울 시민회관 무대에서 테러를 당했다. 소주병으로 얼굴에 상처를 입힌 청년은 「나도 유명해지고 싶어서」라고 범행 동기를 설명.  ▲72년 12월에 전속사를「地球」로 옮겼다, 1년6개월 전속이니까 아직 3개월이 남았다.  ▲취입곡=『잊을 수가 있을까』『해변의 여인』『물레방아 도는데』『찻집의 고독』『머나먼 고향』등 약 5백곡.  ▲출연영화=『친구』『사랑은 눈물의 씨앗』등 40여편.
  • “날 좀 놔줘요” 유명 여가수 발버둥

    “날 좀 놔줘요” 유명 여가수 발버둥

    [선데이서울 73년 7월 8일호 제6권 27호 통권 제 247호] ●이 기사는 38년전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실렸던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명예훼손 우려가 있는 곳은 부득이 익명 처리했음을 양지바랍니다.  매력적인 야성미를 물씬 풍기는 인기「팝 싱어」A모양(26)이 40대 중년에게서 끈덕진 청혼을 받고 있다. 그러나 A양은 『제발 날 좀 놔줘요.』다. 왜? 40대는 늙었단 말인가···. 첫사랑의 쓴맛이 아직 안가신 탓일까···?  A양의 측근에서 새어나온 소문에 따르면 A양은 모 약사와 은밀히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는 것.  이에 대해 A양은 『약사라구요? 호호···.』다소 당황한 듯한 표정에 웃음을 날리며 『약사는 아녜요···.』라고 해명.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연예계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비듬약의 광고 「모델」이 된 적 있었죠.』  비듬약 광고라 묘하게 A양의 뒤통수만 찍힌 것이었다. 그때 중간 역할로 알게 된 사람이「피아르」 관계 회사의 李모씨.  『그분이 나를 퍽 귀여워 해주어 나도 따랐던 편인데 이성적인 것은 아니었죠.』  그 후 A양은 미8군 연예단체서 1년간 노래하다 한 여성「보컬·그룹」의 「멤버」로 2년반 동안 동남아 공연을 돌고 귀국. 거의 3년이란 세월이 지났는데도 李씨는 A양을 잊지 않고 찾아왔다,  『그 분은 여전히 나를 귀여워해 주었죠.』  종종 극장 구경도 함께 가는 등 그들의 「데이트」는 자주 눈에 띄어 결혼설까지 나돌았을 정도. 이때부터 李씨를 알게 된 어머니도 과히 싫은 눈치를 보이지 않았다고. 그런데 A양은 69년 말에 또다른 「보컬·그룹」의 「리더· 싱어」로 다시 미국으로 떠나게 됐다.  미국서 1년을 보내고 「캐나다」로,「캐나다」에서 3년간 연예활동을 하다가 72년 1월에 귀국했다. 그녀가 돌아오자 李씨는 목마르게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A양의 집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  『내가 없을때 어머니에게 종종 찾아와 청혼한 것 같아요.』  A양의 실토에 따르면 李씨가 어머니를 통해 상당히 「치근덕」거리며 접근전을 벌이는 것 같다.  그러나 A양은 李씨가 40대로 나이 차이가 많아지고(많고) 경제적 기반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는 것.  『이씨가 집을 자주 드나들곤 한 것이 약혼 상대가 있는 것처럼 소문난 것같아요.』라는 게 A양 나름대로의 추측이다.  어머니를 설득시켜 딱 잘라 거절해 李씨는 1개월전부터 발길을 끊었다고 하는 데 또 언제 나타날지 알겠느냐고.  『나는 그 분을 친척같은 기분으로 따랐었지, 이성관계로 대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렇다면 결국 李씨는 김칫국만 마신 사랑을 해 온 것일까?  『나의 애인은 이미 오래 전부터 따로 있었어요. 지금은 헤어졌지만...』  A양이 연예계에「데뷔」한 지 얼마 안되었을 때-. 같은 「보컬· 그룹」에 있었던 S군과 눈이 맞았다. (이어진 S군의 활동내용 문장은 싣지 않았음) A양이 동남아 공연을 떠나기 전인 20살 되던 무렵이었다.  『순진한 때의 첫사랑이어서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심각한 사랑이었어요.』라는 고백.  처음엔 몰랐으나 사귀다 보니 S군은 이미 결혼한 몸이어서 결국은 이루 수 없는 첫사랑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얘기다. 그런 첫사랑의 쓰라린 경험 때문에 남성 관계에 퍽 신중을 기하다 보니 어느 틈에 노처녀 위험선에 서게 됐다는 A양은 2~3년 뒤에나 서너살 위인 경제력 있고 「와일드」한 남성과 결혼하겠다며 씁쓸히 웃었다.<杰>
  • 刑事들의 事件秘話

    刑事들의 事件秘話

    [선데이서울 73년 7월 8일호 제6권 27호 통권 제 247호]  제1화=도둑과 신사협정 맺고 6시간만에 되찾은 “나라 체면”  A=남대문경찰서 하면 우선 서울역이 연상되니 서울역에 얽힌 이야기부터 하지요.  B=3년전 제2회 재일교포학생단 초청때「5만$ 도난」사건이 있었자나요. 학생 7백20명을 인솔한 책임자가 역에 내리는대로 점검하느라「백」을 잠시 내려둔 사이「백」이 없어져 버리고 말았어요.  사건이 보고되자 당시 홍종철 문교장관은 직접 경찰서에 나와 『고국에 대한 이미지 문제가 있으니 사건을 단시간내 해결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해 후끈하더군요.  수첩을 보며 생각을 해보니 범행으로 봐서 曺東濟(가명·27) 일파가 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들이 잘 나오는 다방에 가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曺로부터 그의 동료를 찾는 전화가 오자나요. 그래서 내가 받았지요.  그랬더니『형님, 웬일이십니까』하며 시치미를 떼더군요. 내가 신사협정을 제의하니까 『사실 우리들이 했는데 해놓고 나니 너무 큰일이구나』생각 중이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미 자기가 1만$를 바꿔 버렸는데 이것만 해결해 준다면 나머지 돈과 일당이 있는 곳을 말해주겠다 더군요.  그래서 신사협정을 했지. 그 돈은 경찰이 책임지겠다고.  그의 말대로 「L호텔」갔더니 일당 4명이「사우나」에서 늘어지게 뻗어 있더군요. 결국 사건 6시간만에 깨끗이 해결되었지요.  C=그래서?  B=曺는 그 뒤 3년형을 받고 살다 나와서는 인사하러 왔더군요.   제2화=홍등가(紅燈街) 불명예 벗자 치솟은 桃동·陽동 땅값  A=작년 일인데 관내 J여관에서 포주가 14살 소녀를 일금 3천원에 인신매매업자를 통해 샀다는 거예요. 한 사흘 잔일을 시킨 뒤 손님방에 넣었다나요. 풋처녀라 보통보다 2배의 화대를 받았는데 정작 나이가 너무 어려 잘 안되었던 모양이야. 소녀가 울고 발버둥치니 포주가 수면제와 최음제를 먹여 억지 정사를 시켰다나요.  D=지금은 다 없어졌지만 하여간 죽일 놈도 많았어요.  B=바로 그 악질 포주 李成一(가명·47)은 지금도 교도소 생활을 하고 있지. 아마.  A=이제는 이런 포주도 창녀도 거의 없어졌어요. 99% 이상 정화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D=지난해 남대문서의 제1목표를 도동·양동지구 정화에 두고 경찰력을 총집중했을 뿐아니라 주민들의 협조가 컸지요.  A=지금 도동·양동지구 땅값이 굉장히 올랐어요. 이제 완전히 일반주택가로 탈바꿈한 때문이라는 거지요.   제3화=불고기 아니면 차라리 굶겠다”는 개 단식투쟁에 무릎꿇은 경찰 C=71년 총선 직전의 이야기인데 야당계 모 고위층 집 독일산 「콜」과 「셰퍼드」 2마리가 없어졌던 사건이 있었어요.  D=보상금 받아서 보신탕 먹은 이야기 말이군요, 하하.  A=지금은 웃지만 그때는 혼났어요. 국회의원 J씨댁의 속칭 「고양이 방화사건」이 있은 뒤라 이것도 정치문제화 될 뻔한 거였거든요.  하여간 1주일만에 대전(大田)에서 개도둑 일당을 잡고 「콜」과 「셰퍼드」 2마리 뿐만 아니라 그들이 훔친 고급 개 11마리를 찾아냈어요.  즉시 그분 댁에 연락,「콜」과「셰퍼드」를 인계하니 그 자리에서 감사하다며 금일봉을 주시더군요.  D=그래서 보신탕···.  A=보신탕 타령은 그만 하고 그 뒤가 또 문제였지요. 왜냐 하면 나머지 9마리 개 임자가 열흘이 넘도록 나타나야지요.  고급 개들이라서 밥 찌꺼기는 먹을 생각을 않고 꼭 「갈비탕」과 「불고기」만 먹는 거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더구나 9마리씩이나 먹이느라 우린「라면」먹고, 귀하신 개님들에게는「갈비탕」을 대접하느라 정말 혼났어요.  제4화=여관방 “요밑 금고”를 과신하지 말라는 도(盜)선생의 충고  A=며칠 전 일인데 쌍쌍이 든 여관방을 골라 현금을 훔친 녀석이 있어요. 그 녀석의 말이 결작이야. 제아무리 항우장사라도 여자를 데리고 잔 사람은 새벽 4시쯤에는 녹아웃 되게 마련이라 목욕탕을 통해 방에 들어가 자는 사람을 굴러도 모른다는 거예요. 사람을 굴려버리고 요 밑을 보면 꼭 지갑이 있다는군요.  그러면서 『잠잘 때 귀중품은 반드시 여관 주인에게 맡기는 게 안전하다』고 충고하더란 말이에요.  B=이 기회에 독자들에게 한가지 부탁 말씀을 드리면-.  남산공원에 놀러가는 건 좋은 일이나 출입금지구역에 들어가 엉뚱한 장난을 하는 분이 가끔 있읍(습)니다. 이건 좀 삼가주셨으면 합니다. 또 여름철이라 덥다며 문열어 두고 주무시는 것도 좀 삼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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