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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최고경영자=⑪ 세방(世邦)그룹 오세중(吳世重)씨

    [기획]최고경영자=⑪ 세방(世邦)그룹 오세중(吳世重)씨

     관광업체 중「랭킹」1위를「마크」하고 있는「세방(世邦)」의 73년 외화 획득 목표액은 4백56만$, 한화로 치면 18억원. 세방(世邦)여행사,「글로발」여행사, 세방관광(世邦觀光) 3개 회사를「리드」하는 세방(世邦)「그룹」회장 오세중(吳世重)씨(49)는 대학시절 영어책을 내다 팔아 끼니를 때우던 고학생, 자수성가의 대표적인「케이스」다. 『「호텔」이 모자라요. 관광객을 받아들일「호텔」방이 없어서 이 정도에 그치고 있읍(습)니다.이 문제만 해결되면 6백만~7백만$까지도 기록할 자신이 있읍(습)니다』  호리호리한 몸매, 까무잡잡한 얼굴. 사장이나 회장이란 인상을 주기보다는 그저 평범한「샐러리맨」과 같은 느낌이다.  세방(世邦)의 72년 실적은 관광객 3만8천명에 2백30만$. 외국관광객 한 사람에 평균 61$씩의 수입을 올린 셈이다.이에 비해 73년 목표는 7만8천명에 4백56만$로 관광객 1인당 58$씩의 수입을 올릴 것으로 가늠하고 있다.  72년의 전체 외국관광객이 37만명이었으니 그 중 10%의 손님을 세방(世邦)이 시중 든 셈이다.  관광업체 중에서「톱」의 실적을 올리고 있다.  한때 어머니와 팬츠 장사…영어사전 팔아 끼니 때(우)고  『우리나라를 찾는 관광객의 80%가 일본인입니다. 일본 관광객의 대중화가 아루어진 반면 질적인 면에선 해마다 떨어지고 있어요. 72년 관광객 1명에 대한 수입이 60$선이었던 것이 올해는 50$선으로 떨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쨌든「붐」은「붐」이에요. 큰 변화가 없는 한 앞으로 3~4년간은 한국 관광「붐」이 계속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읍(습)니다. 그 후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기복이 있겠지요』  오(吳)씨가 지적하는 바론 80%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 관광객은 구미 관광객과 큰 차이가 있다는 것. 구미 관광객은 일단 관광에 나서면 여러 나라를 한꺼번에 도는데 비해 일본인은 거의 한 곳에 머무르며「릴렉스」하는 관광여행이라는 것이다.  결국 3~4년 후 혹시 중공(중국)의 문이 열리면 그쪽으로 몰리지 않을까, 조심스런 예상을 하고 있다.  관광업계에 오(吳)씨가 뛰어든 것은 58년 5월. 대한여행사 해외여행부 직원으로 출발했다. 60년에 지금의 세방(世邦)을 창설, 만 13년만에「랭킹」1위의 관광업계로 세방(世邦)을 키워 왔다.  『관광업도「서비스」업이 아닙니까? 남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제 소신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이라고 믿고 있지요.「정직」하면 사업도 번창하고 돈도 모을 수 있겠지요』  오(吳)씨는 고대(高大) 영문과 출신. 대학 졸업후 피난지 부산(釜山)에서 국제신보 외신부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년후 우연한 기회에 서북항공사로 옮겨 5년간 근무하다가 뛰어든 곳이 바로 대한여행사였다.  오(吳)씨의 학창 시절은 가난과 고생으로 점철되었던 시련기. 고향인 황해도 해주에서 맨손으로 월남한 처지였기에 눈물나는 고생을 해야 했다.  서울에 떨어져서 어머니 동생과 함께 살림을 꾸려야 했는데 하루는 쌀독이 바닥났다. 아무리 집안을 뒤져보아도 집에 값나갈만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들고 나간 것이 영어「콘사이스」. 전차 탈 차비마저 없어 마포에서 종로2가의 고서점까지 걸어야 했다.「콘사이스」를 처분하여 생긴 돈이 5백환. 메고 갔던 배낭에 살 한되를 넣고 전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서 밥을 해 먹은 추억을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다.  대학 입학 후에는 남대문시장에서「팬츠」장사로「아르바이트」. 헌 광목을 사다 염색을 하여 만든「팬츠」를 내다팔아 생활을 꾸려나갔다.  당시「팬츠」만드는 바느질 일을 맡은 것이 어머니. 광목을 사오고 , 만든「팬츠」를 내다파는 일은 오(吳)씨가 맡았다.  『동란 때니까 누구나 마찬가지였겠지만 거의 20대는 비참할 정도였어요, 극장이나 다방이라곤 근처에도 얼씬해 보지 못한채 나이 30을 넘겼으니까요』  공부하는 경영자로 사원 승진시험 치러  이 때문인지 오(吳)씨는 이름난 구두쇠. 꼬장꼬장하고 헛돈을 안쓰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다. 오(吳)씨와 함께 일하는 사원들의 이야기를 빌면 오(吳) 회장 자신이 메(미)주알고주알 너무나 다 알고 있어 일하기가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고. 자수성가의 대표적인 예이기에 많은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과는 나무나 차이가 난다고 혀를 내두른다.  또 오(吳)씨는 한번 사람을 쓰면 절대로 내보내지 않는 경영자로도 유명.  현재 세방(世邦)에서 기둥 역할을 하고 있는 중역진의 대부분이 60년 세방(世邦)이 출범할 당시 신입 사원들이었다.그래서 현재 세방(世邦)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연조 깊은 사원이 많아 월급이 너무 많이 지출되고 있다는 것. 사원 봉급이 세방(世邦) 전 예산의 50~60%를 처지하는 데다 봉급「베이스」가 높은 사원이 많아 골치를 앓고 있다.  『이젠 옛날과 사정이 많이 달라졌어요. 저희같은 관광업체의 경우엔 특히 사원들의 자질 문제가 회사의 장래를 결정하게 되었읍(습)니다. 전문 지식이 없이는 우선 만나는 고객들과 이야기가 통하질 않게 돼요. 때문에 근무 연한이 오래 되었다고 승진하는 게 아니라 시험을 치러서 일정한 수준의 성적을 따야 승진하도록 하고 있읍(습)니다』  경영자로서 영문과 출신이란「핸디캡」을 메우기 위해 오(吳)씨는 69년 고대(高大) 경영대학원 연구과정(1년「코스」)을 수료한데 이어 그 해에 또다시 석사과정에 입학,「공부하는 경영자」가 되기 위한 자세를 가다듬었다.  대학·대학원을 모두 고대(高大)에서 수료한 탓인지 사원의 8~9할이 고대(高大) 출신. 그러나 오(吳) 회장 자신은 의도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떻게 고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파안대소.  오(吳)씨의 취미는 바둑(7급)과「골프」(「핸디」10). 세방(世邦) 창설 후에는 사회 활동도 부지런히 해 온 편. 1960년 이후 줄곧 JCI·「로터리·클럽」회원으로 활약해 왔다.  부인 백남희(白南姬) 여사와의 사이에 2남1녀를 두고 있다. 지난 해부터는 수도여사대 관광개발과 강사로도 출강. 오(吳)씨 자신의 뼈아픈 대학 생활이 너무도 사무쳐 수도여사대에「세방장학회」를 마련, 가난한 대학생을 돕고 있기도 하다.  <신근수(申槿秀) 기자>[선데이서울 73년 3월 25일 제6권 12호 통권 제232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9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기사 내용과 광고 카피 등 당시의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한권에 얼마냐고요? 50원이었습니다. ●이 기사에 대한 저작권, 판권 등 지적재산권은 서울신문의 소유입니다. 무단 전재, 복사, 저장, 전송, 개작 등은 관련법으로 금지돼 있습니다.
  • 조선실록 오대산사고본 74책 서울대서 고궁박물관으로 이관

    문화재청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관리해 온 국보 151-3호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朝鮮王朝實錄 五臺山史庫本) 74책을 문화재청 산하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 관리하기로 했다고 3일 밝혔다. 오대산사고본은 1913년 1181책 전체가 일본 도쿄제국대학에 반출됐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 소실됐고, 남은 74책 중 27책을 1932년부터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제국대에서 보관해왔다. 이 27책은 1973년 국보로 지정됐고, 나머지 47책은 2006년 도쿄대로부터 반환돼 2007년 국보로 추가 지정된 후 서울대에서 관리해 왔다. 문화재청의 최종덕 문화재보존국장은 “서울대의 법인화로 국유재산은 모두 서울대가 수용하지만, 문화재는 예외로 규정됐다.”면서 “규장각과 서울대박물관 등이 소장한 문화재는 여전히 서울대가 위탁관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사연따라 연예반세기(演藝半世紀)…그시절 그노래(12)

    사연따라 연예반세기(演藝半世紀)…그시절 그노래(12)

     김정구(金貞九)가 가수의 꿈을 안고「뉴코리아·레코드」사에 들어간 얼마 뒤 또 한 사람의 가수 지망생이「시애론·레코드」사의 문을 두드렸다. 남인수(南仁樹)다. 가요 사상 누구보다 화려하게 살다 간 남인수(南仁樹). 이난영(李蘭影)이 가요계 여왕이었다면 그녀와 함께 가요계 주류를 이뤄온 남인수(南仁樹)는 가위 가요계 황제였다. 그가 등장한 것은 1934년이다.  그때 남인수(南仁樹)는 17살의 떠꺼머리 총각이었다. 검정「쓰메에리」학생복에「게다」(일본 나막신)을(를) 신고 있었다.「시애론」의 문예부장 박영호(朴榮鎬)가 찾아온 그를「테스트」해 보고 가능성을 인정하여 작곡가 박시춘(朴是春)한테 소개, 이것이「데뷔」의 계기가 된 것이다.  여기에 첫 취입한 노래가 바로 남인수(南仁樹)의 대표곡『애수(哀愁)의 소야곡(小夜曲) 』이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러주나 휘파람 소리>(1절)  그러나 당초의 이 노래는 제목, 가사가 달랐다. 가사는 <현해탄 푸른 물에 밤이 내리면 임 잃고 고향 잃고 우는 저 배야>로 시작되는『눈물의 해협』이었다. 시인 김상화(金尙火)의 가사에 박시춘(朴是春)이 곡을 붙였다.  처음 이『눈물의 해협』은 남인수(南仁樹)의 본명인 강문수(姜文秀)란 이름으로 취입했다. 그런데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남인수(南仁樹) 자신은 말할 것도 없지만 당초 기대를 걸었던 박시춘(朴是春)도 여간 실망하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 안가 남인수(南仁樹)는 전속사를 OK로 옮겨 버렸다. 여기서 처음 취입한 게 손목인(孫牧人) 작곡의『사랑도 싫더라 돈도 싫어』와『범벅서울』. 두 곡의 반응은 좋았으나「레코드」는「히트」하지 못했다. 하루 3부제 데이트에 여자끼리 싸움도  남인수(南仁樹)에 이어서 OK로 옮겨온 박시춘(朴是春)은 아무래도『눈물의 해협』이 아까왔(웠)던지 제목과 가사를 바꿔서 남인수(南仁樹)한테 다시 취입을 시켰다. 가사는 이부풍(李扶風)이 썼다. 이부풍(李扶風)은 본명이 박노홍(朴魯弘)으로『알뜰한 당신』『맹꽁이 타령』등「히트」곡의 가사를 쓴 사람이다. 똑같은 곡을 가사와 제목만 바꿔서 부른 것인데『애수의 소야곡』은「레코드」가 나오자마자「베스트·셀러」가 됐다.「시애론」을 실망시킨 노래가 OK로 옮겨와서 일약「달러·복스」가 된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좋은 노래라도 여건이 좋아야「히트」한다는, 지금도 내려오는 대중 가요계의 한「징크스」로 볼 수 있다. 사실상「레코드」가요의 황금기인 30년대는 지금도 상상할 수 없는 대규모의 선전 방법을 썼다.  「레코드」사가 신보를 내면 신문 잡지에 광고가 실리고 가수의「브로마이드」가 수만장씩 뿌려졌다. 하늘엔「애드벌룬」이 띄워지고 창경원의 벚꽃놀이 때는 신곡의 가사를 인쇄한 가사지(歌詞紙)가 꽃잎처럼 휘날렸다. 비행기를 이용해서 이 가사지와 공연 광고지를 살포한 예도 있다.「레코드」판매점에는「아치」가 세워지고 행인들한테 가사지를 나눠줬다. 가사지를 받아든 손님들은「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서 수백명이 노래를 합창하는 광경도 일어났다.(전수린(全壽麟)씨 말)  이런「레코드」계의「붐」속에서 남인수(南仁樹)는 그 보다 먼저 나온 고복수(高福壽) 이난영(李蘭影) 이화자(李花子) 등과 함께 대중의 우상이 됐다. 가수를 딴따라라고 천대하던 시대에서 불과 10여년. 그러나 30년대 가수는 딴따라가 아니라 가장 멋있고 돈 잘 쓰고 잘 노는 인기인이었다.  까닭에 인기 가수일수록 염문이 많이 따랐다. 남인수(南仁樹)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연이 끝나는 저녁 시간이면 그는 기생들이 보낸 인력거, 무대 뒤로 몰려온 여성「팬」, 여관방까지 따라오는 아가씨들을 어떻게 안배, 처리하느냐로 고민해야 했다.  오전, 오후, 저녁으로 3부제의「데이트」를 했는가 하면 시간 할당이 잘못되어 여자끼리 싸움판이 일어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그가『꼬집힌 풋사랑』을 불렀을 때의 얘기.『발길로 차려무나, 꼬집어 뜯어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그 당시 유행하던 기생「엘레지」의 하나였다. 이 노래에 매혹된 산홍(山紅)이란 한 어린 기생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 나머지 자살 미수.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남인수(南仁樹)가 병문안을 갔다.  뜻밖에 남인수(南仁樹)를 만난 이 산홍(山紅)이란 기생은 그에게 순정을 바쳤고 그것을 보람삼아 삶을 이어갔다. 62년 6월 남인수(南仁樹)가 죽었을 때「산홍(山紅)」이란 이름으로 꽃다발이 그의 영전에 보내졌다. 남인수(南仁樹)와 그녀의 관계를 아는 연예인들은 평생 순정을 바꾸지 않은 한 숨은 여인의 꽃다발에 애틋한 정회를 느끼기도 했다.  24살때부터 폐 앓고 「돈인수」란 별명들어  인기와 돈과 여자에 부족함이 없었던 남인수(南仁樹)에게도 어쩔 수 없는 불행은 있었다. 건강 문제였다. 그는 한창 청춘이 피어나는 24, 25세때부터 폐를 앓았다. 무대에 올라서면 9창 10창까지 터지는「앙코르」에 따라 노래의 강행군을 해야 했고 그러고 나면 각혈을 하고 몸져 누웠다. 무대에서 쓰러진 예도 한두번 아니다.  그래도 건강이 다소 좋아지면 무대에 올랐다.  그의 생활은 자연 병석과 무대의 교체. 병석에 누울 때를 대비해서 그는 번돈을 무척 아꼈는데 그 때문에 친구들은「돈인수」란 애칭을 주기도 했다.  남인수(南仁樹)의「히트」는 해방 후에도 계속되었다,  38선이 그어지자 부른『가거라 38선』은 3천만의 애원을 그대로 대변했다, 그리고 휴전 뒤의『이별의 부산정거장』은 피난살이를 청산한 환도열차의 합창곡이었다.  그의 노래는 일제 때에 약 8백곡, 해방후 2백곡으로 1천곡을 헤아린다,  그러나 역시 대표곡은 그의「데뷔」곡인『애수의 소야곡』이었던가?  62년 6월30일, 45살로 숨진 그의 장례식(연예협회장)에서는 장송곡으로「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을 연주했다.  <조관희(趙觀熙) 기자>  [선데이서울 73년 3월 25일 제6권 12호 통권 제232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9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기사 내용과 광고 카피 등 당시의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한권에 얼마냐고요? 50원이었습니다. ●이 기사에 대한 저작권, 판권 등 지적재산권은 서울신문의 소유입니다. 무단 전재, 복사, 저장, 전송, 개작 등은 관련법으로 금지돼 있습니다.
  • “나 좀 살려주시게” 흥선대원군, 명성황후에게 목숨 구걸

    “나 좀 살려주시게” 흥선대원군, 명성황후에게 목숨 구걸

    1873년 실각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1882년 임오군란으로 재집권하는가 싶었지만 친청파인 명성황후의 역습으로 그해 청나라에 납치됐다. 유폐된 톈진(天津)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흥선대원군은 1882년 정치적 라이벌인 명성황후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한글 편지를 보낸다. “그동안 망극한 일을 어찌 만 리 밖 책상 앞에서 쓰는 간단한 글월로 말하겠습니까. (중략) 다시 뵙지도 못하고 (내가 살아 있을) 세상이 오래지 아니하겠으니 지필을 대하여 한심합니다. 내내 태평히 지내시기를 바라옵나이다.” 이종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은 27일 “흥선대원군이 편지봉투에 ‘뎐 마누라 젼(前)’이라고 써 놓은 편지가 그의 부인 민씨가 아니라 며느리인 명성황후에게 보낸 편지였다.”고 ‘조선시대 한글편지 공개 강독회’에서 주장했다. 이는 1973년 11월 문학사상 14호에서 정양완 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마누라’를 아내로 해석한 기초를 부정한 것이다. 이 연구원은 “‘뎐 마누라 젼’의 ‘뎐’은 대궐 전(殿) 자이며 ‘마누라’는 지체 높은 사람의 부인을 높여 부를 때 사용된 말”이라며 “(순조 임금의 딸 덕온공주의 손녀인) 윤백영 여사의 글에도 ‘뎐 마누라’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중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했다. 그는 “편지의 사연으로 보아도 대원군의 부인이 될 수가 없다.”고 덧붙였다. ‘마마께서는 하늘이 도우셔서 환위(還位)를 하셨거니와 나야 어찌 생환하기를 바라오리까.’라는 편지 내용에서 ‘환위’는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지방으로 피신했다가 왕궁으로 돌아온 일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이 이 연구원의 설명이다. 이 연구원은 “또한 안부를 물을 때는 임금의 안부를 먼저 묻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편지에서 흥선대원군은 아들인 고종의 안부보다 실권자인 명성황후의 안부를 먼저 물었다.”면서 “당시 상황이 얼마나 다급했으면 그랬겠느냐.”고 말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사연따라 연예반세기(演藝半世紀)…그시절 그노래(11)

    사연따라 연예반세기(演藝半世紀)…그시절 그노래(11)

     두만간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님을 싣고  떠나간 그배는 어데로 갔소  그리운 내님이여 그리운 내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이시우(李時雨) 작곡『눈물 젖은 두만강』의 1절이다. 김정구(金貞九)의 대표작이기도 한 이 노래는 1935년에 OK「레코드」에서 취입됐다. 국내뿐 아니라 만주(滿洲) 일본 등지에 있는 교포들을 숱하게 울린 노래로, 그리고 근 40년 꾸준히 애창된 노래로 손꼽힌다. 2년 뒤면 60살이 되는 노장 가수 김정구(金貞九)는 지금도 술집 무대에서 이 노래를 열창하고 있다. 김정구(金貞九)의「팬」이었던 사람들의 아들 딸들이 이제 다시 김정구(金貞九)의「팬」이 되어 이「두만강 푸른 물-」에 박수 갈채를 보내는 것이다.  김정구(金貞九)는 1934년에「레코드」사「뉴·코리아」에서『어머님 품으로』란 노래를 취입함으로써 가요계에「데뷔」했다. 최근 감기 몸살로 4일간 쉬었다는 그는『4일간이나 노래를 못부른 건 평생 처음』이라고 말할 만큼 꾸준히 노래를 불렀다. 김정구(金貞九)야말로 가요 사상 최장수(最長壽) 가수다.  출생지는 함남(咸南) 원산(元山). 작곡가 겸 가수로 날린 김용환(金龍煥)이 바로 친형이고 일본(日本) 동경(東京)음악학교 출신의 여가수 김(金)안나가 바로 누나다.  『16살에 고향을 떠났읍(습)니다. 그때까지는 교회 합창단에서 노래 공부를 했죠. 3남매가 남매 합창단이 되어 강원도 일대의 교회를 돌기도 했읍(습)니다』  형 김용환(金龍煥)씨한테「바이얼린」을 배웠고 이흥열(李興烈·작곡가) 황재경(黃才景·목사) 두 사람한테「클래식」을 배웠다. 그러니까 당초 김정구(金貞九) 의 꿈은 정통 성악가가 되는 것이었다.  대중 가요로 목청을 돌린 건 돈벌이 때문이었다. 일본서 고학으로 음악학교에 다니는 누님이 너무 고생하는데 자극 받아 돈벌이가 되는 대중 가요를 택했다 한다. 물론 이 시도는 충분히 성공했다.「데뷔」1년 뒤『눈물 젖은 두만강』이「히트」함으로써 김정구(金貞九)는 돈방석에 올라 앉게 된 것이다.  학비 벌려 대중가요 택해···코믹·송으로 인기를 다져  『그때 취입료, 무대 출연료 모두 합쳐서 한달에 1천원 가량 받은 일이 있었죠. 3백50원 주고 고향에 대궐 같은 집을 샀읍(습)니다』그러나 세월 좋을때 마련한 재산은 고스란히 고향에 두고 1·4 후퇴때 빈 손으로 내려왔다.  당초 김정구(金貞九)의 인기는 만요(만謠)라고 불린「코믹·송」으로 굳혀졌다.  「누님 누님 나 장가 보내주」로 시작되는『총각 진정서』나「비단이장사 왕서방」의『왕서방 연서』가 그 방면의 대표곡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장「실크·해트」를 쓰고 부동 자세로 노래하는 게 무대「매너」였다. 만요가수 김정구(金貞九)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익살스런 노래에 맞춰 익살스런 몸짓을 해야 했기 때문에 손발을 흔들고 몸짓, 고갯짓을 했다. 이것이 새로운『제스처』라고 관객의 환영을 받았다.  목소리가 형 김용환(金龍煥)과 비슷해서 처음에는 오해를 받았다. 김용환(金龍煥)은「포리돌」전속이었는데 김정구(金貞九)가「뉴·코리아」에서『어머님 품으로』를 취입 발표하자 김용환(金龍煥)이 타사에서 취입했다고 일대 소동을 벌였다는 것.  OK로 옮겨와 처음「히트」한 노래가 박시춘(朴是春) 작곡의『항구의 선술집』이다.「부어라 마셔라 탄식의 선술집」이렇게 시작되는 이 비탄조의 노래는 그때 술집 기생들이 무척 즐겨 불렀다.「사나이 우는 맘을 누가 알리요」하는 2절은 그야말로 갈 곳없는 젊은이들의「엘레지」.「파이프 연기처럼 흐르는 신세, 내일은 어느 항구 선술집에서」의 3절은 방황하는 젊은이를「마도로스」에 비유한 것이라 한다.  대표곡『눈물 젖은 두만강』의 작곡 이면에는 흥미있는 일화가 뒤따르고 있다. 작곡자 이시우(李時雨)는 그때 만주지방 공연단을 따라 두만강변 국경 지대인 도문(圖門)에 머무르고 있었다.  갈채받은 노래 때문에 유치장 신세까지  국경의 허술한 여관방에서 잠 못이루고 뒤척이던 그의 귀에 조용히 흐느껴 우는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산란하던 그는 그 여인을 불러 우는 이유를 물어봤다. 그 여인은 남편을 찾아서 국경을 넘어 왔는데 돈벌어 온다던 남편은 일본 경찰에 잡혀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는 것. 그때 독립운동단체의 연락 책임을 맡았던 탓으로 남편은 아마 죽음을 당한 것 같다는 사연.  이 여인의 슬픈 사연을 이시우(李時雨)는 5선지 위에 올렸고 당시 작사자로 날린 김용호(金用浩)가 가사로 만들었다 한다.  만주 지방에 흩어진 교포들은 김정구(金貞九)가 부르는 이「두만강 푸른 물에-」자기들의 설움을 담아 위안을 삼았다. 『낙화삼천(落花三千)』은 김정구(金貞九)에게 1주일간 유치장 신세를 지게 한 노래.「물어보자 물어보아(자) 3천궁녀 간 곳 어디냐」하고 부르는 이 노래는 망해 간 백제(百濟)를 소재로 한 것인데 일경(日警)의 귀에는 항일의 노래로 들린 것 같다. 평양 지방공연에서 이 노래가 갈채를 받자 그때 일경의 앞장이 였던「다까야마」란 한국인 형사가 김정구(金貞九)를 평양경찰로 연행해 가 1주일간 유치장에 넣었다. 마침내 노래마저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묘한 것은 이 노래가 바로 지원병 응모를 장려하는 총독부의 국책영화『너와 나』의 주제가 였다는 점이다.  <조관희(趙觀熙) 기자> [선데이서울 73년 3월 18일 제6권 11호 통권 제231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9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기사 내용과 광고 카피 등 당시의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한권에 얼마냐고요? 50원이었습니다. ●이 기사에 대한 저작권, 판권 등 지적재산권은 서울신문의 소유입니다. 무단 전재, 복사, 저장, 전송, 개작 등은 관련법으로 금지돼 있습니다.
  • “용담댐덕에 104년 만의 가뭄도 문제없어”

    104년 만의 가뭄에도 불구하고 전북지역은 진안 용담댐 덕분에 수돗물 공급에 차질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25일 전주기상대에 따르면 올해 강수량은 201.1㎜로 1973년 기상관측 이래 가장 적은 것으로 기록됐다. 이 같은 강수량은 평년 405.2㎜의 49.6%에 지나지 않고 가뭄이 극심했던 1992년 262.2㎜보다도 61.1㎜가 적은 것이다. 그러나 전북도 내 주요 도시에 생활용수를 공급하는 용담댐(만수위 8억 1500만t)은 저수율이 34.2%로 평년 31.9%보다 오히려 2.3% 포인트나 높다. 지난 21일 현재 용담댐의 저수량은 2억 7640만t으로 저수량 1000만t 크기의 대형 댐 28개가량의 물을 담고 있다. 전북도는 현재 용담댐의 저수량을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전주, 군산, 익산, 완주 등 도내 주요 도시에 740일 정도 생활용수를 공급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하천 유지수, 농·공업용수 등 다른 용도로 공급되는 것을 감안하면 앞으로 1년간 더 가뭄이 지속돼도 수돗물 공급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같이 용담댐이 가뭄에도 끄떡없는 것은 그동안 가둬뒀던 물을 계속 사용해도 마르지 않는 초대형 담수호이기 때문이다. 상류인 무주, 진안, 장수의 수원이 좋은 것도 용담댐 물이 맑고 풍부한 주요인이다. 1990년 착공해 2001년 10월 완공된 용담댐은 소양강댐, 충주댐, 대청댐, 안동댐에 이어 전국에서 5번째로 크다. 전북과 충남 등 2개 도, 6개 시·군에 연간 4억 9200만t의 생활용수와 농업·공업용수를 공급하는 다목적 댐이다. 높이 70m, 길이가 498m에 이르는 콘크리트 차수벽형 석괴댐이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서울어린이대공원 놀이동산 새단장

    서울 광진구 능동에 위치한 서울어린이대공원 놀이동산이 18개월 동안의 대대적인 공사를 거쳐 도심 속 테마파크로 새단장한다. 서울시설공단은 새달 1일부터 어린이대공원 내 놀이동산(아이랜드)의 문을 닫고 놀이동산 재조성 사업을 벌인다고 25일 밝혔다. 재개장은 2014년 4월쯤 이뤄질 예정이다. 공단은 시 예산 202억원을 투입해 대대적인 놀이동산 환경 개선에 나선다. 88열차, 다람쥐통 등 유행이 지난 기존 놀이기구 9종을 철거하고 대신 제트코스트, 스카이타워 등 최신 기종의 놀이기구 7종을 배치할 계획이다. 또 과학오락관 등 노후 건물 2개 동을 철거해 여기에 2층 건물을 신축하고 영상관, 카페, 기프트숍 등을 설치할 예정이다. 놀이동산 내 하수관, 수목, 바닥 포장 공사도 한다. 대공원 관계자는 “놀이동산 공사 중에도 동물원 등 다른 시설은 정상 운영한다.”며 “새단장 이후에도 이용요금은 현재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1973년 5월에 처음 문을 연 서울어린이대공원 놀이동산은 당시로서는 국내 최고 시설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민간 테마파크가 속속 생겨난 반면 이곳에 대한 신규 투자는 부진해 경쟁력을 잃게 됐다. 또 2007~2010년 어린이대공원 재조성 사업 당시에도 놀이동산 지역은 리모델링 대상에서 제외돼 시설 노후화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허시강 서울어린이대공원장은 “18개월 후면 서울어린이대공원이 도심 한복판의 가족 나들이 명소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단색화 대가의 일탈, 色의 향연

    단색화 대가의 일탈, 色의 향연

    한평생 단색화에 힘써온 작가다. 그런데 빨간 구두를 신고 나타났다. 빨간이 아니라 ‘빠~알간’ 정도 된다. 예사롭지 않다 싶더니 최근작이 ‘이후접합’ 시리즈라며 선보이는데 색깔이 화려하다. 가로 4m 88㎝에 이르는 작품도 있다. 솔직히 화려해서 좋다기보다는 77세의 나이로 저 넓은 데다 저 많은 색들을 다 칠하려면 엄청나게 고생했겠다 싶은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런데 표정은 아주 신났다. 그림을 두고서는 “만선의 기쁨을 표현했다.”한다. 그렇게 신나고 좋은데, 그간 저 많은 색 부리고 싶어 어떻게 참았을까. “아니 뭐, 평생 도 닦은 거죠. 크하하하.” 작품이 만선의 기쁨이라더니, 웃음은 만선 어부의 그것이다. 8월 12일까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여는 하종현 작가. “내 작품에 한국 현대사가 녹아 있다.”는 말도 괜한 뻥은 아니다. 초기엔 앵포르멜 화풍을 따랐다. 6·25전쟁 이후 피폐한 상황에서 어둡고 기괴한 느낌의 그림을 그렸다. 너무 답답했던 나머지 이런 흐름을 깨고자 1967년 화려한 색의 기하추상화를 처음 시도했다. 실컷 첫 테이프를 끊어놓고 남들이 기하추상을 그리기 시작하자 정작 작가는 다시 단색화로 돌아왔다. 1970년대 유신정권 때문이다. 마포를 구해다가 그 뒤에서 물감을 밀어넣는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캔버스 위에 그린다’는 미술 상식을 깨버린 것. 이게 접합 시리즈다. 평론은 물질이 어쩌고 그러는데, 밑바닥 사람들의 피눈물 같은 느낌이 든다. 가끔 작품에다 철조망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1973년 작품은 아예 캔버스를 뒤돌려 세운 뒤 철조망으로 감싼 형태로 만들었다. 억압적인 현실에 대한 울분이요 저항이다. 그 뒤 접합시리즈를 변용, 발전시키다 2008년 딱 접었다. 70년대, 80년대, 90년대, 2000년대 작업 4점을 골라 뒤집은 뒤 철조망으로 감싼 작품을 내놓은 게 그 선언이었다. 이제 이런 거 말고 다른 거 해 보겠다는 선언이었다. “내가 못 해 본 게 뭐 있나 봤더니 색이었어요. 이제 한번 마음대로 써보자, 10년 잡고 있습니다. 뭔가 새로운 걸 내놓을게요.” 작가의 여정을 쭉 확인해볼 수 있다. 2000원. (02)2188-6000.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부고] 노벨경제학상 유일한 女수상자 엘리너 오스트롬

    노벨상 경제학 부문의 유일한 여성 수상자인 엘리너 오스트롬 전 미국 인디애나대 교수가 12일(현지시간)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78세. 1933년 미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오스트롬은 사회의 공유재산에 대한 경제적 지배구조 연구로 2009년 올리버 윌리엄슨 UC버클리대 교수와 노벨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공유자원 연구 분야 전문가인 오스트롬은 제도주의 관점에서 제도가 개인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왔다. 전통적인 경제이론은 중앙 정부나 민간 기업이 삼림, 어장, 유전, 방목지 등 자연 자원과 공유 재산을 통제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 반면 그는 대표 저서인 ‘공유의 비극을 넘어’(1990) 등을 통해 실제 그것에 관계하는 사람들, 즉 시민과 지역 커뮤니티의 결정이 더욱 효율적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오스트롬이 남편 빈센트(93)와 1973년에 설립한 인디애나대 정치 이론 및 정책 분석 공동연구소의 마이클 맥지니스 소장은 “오스트롬은 지난해 췌장암에 걸린 사실을 알고도 적극적으로 연구를 계속했으며, 올봄에도 연구를 위해 멕시코를 방문하는 등 열정적으로 일했다.”며 안타까워했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오스트롬은 노벨상 상금을 이 연구소에 기부하기도 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日여대생, ‘명성황후 시해’ 강의 듣다가 갑자기…

    日여대생, ‘명성황후 시해’ 강의 듣다가 갑자기…

    도도히 흐르는 역사가 만약 헝클어졌다면? 당연히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또한 역사의 사명이다. 그렇다면 누가? 여기 한 역사학자의 열정을 잠시 살펴본다. 2004년 6월 24일 일본 도쿄대학 고마바 캠퍼스 총합문화학과 강의실. 한국 교수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사를 강의하는 날이었다. 강의실에는 이 대학 대학원생 20명 안팎이 자리했다. 교수 4~5명도 참석했다. 한국 교수의 근대사 강의, 특히 대한제국과 고종 황제, 한일병합 등에 관련한 집중 강의여서 그런지 분위기가 매우 진지했다. 강의가 끝나자 학생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처음 들어보는 소리라는 것이었다. 역사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한 학생은 제출한 리포트에서 ‘메이지(明治)시대 때 국가 운영체계를 존경했는데 그 지도자들이 한국에 대해 그런 짓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역사상이 흔들린다.’면서 한·일 관계사를 새롭게 공부하겠다고 다짐했다. 왕비 시해사건에 대해서는 눈물을 흘리는 여학생도 있었다. 어떤 교수는 “이 강의가 씨앗이 되어 훗날 큰 나무로 자랄 것”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매우 감명 깊어했다. 이 한국인 교수는 이후 7월 15일까지 집중강의와 특별강연 등으로 일본 학계와 일반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모았다. 앞서 이 교수는 2003년 9월부터 1월까지 한 학기 동안 하버드대에서 사상 처음으로 한국어로 강의를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버드대 동아시아 언어문화학과 대학원에서 ‘조선왕조의 역사’와 ‘한국의 역사적 연구’라는 두 과목 강의를 했던 것이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1988년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리실장을 맡던 시절, 규장각 소개책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외규장각 도서 환수에 결정적 근거가 된 ‘반출경위 문건’을 찾아낸 역사적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극동함대 지휘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 제독이 철수하면서 ‘강화도의 한 건물에 5000여권의 책이 있는데 그중 우리 국립도서관에 소장할 340여 책은 싣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우고 간다.’라고 적은 편지를 찾아낸 것이다. 이를 계기로 20년 동안 노력 끝에 프랑스로부터 도서반환이란 큰 결실을 얻게 된다. 이 같은 역사 바로잡기 외에도 1910년 ‘한일병합’이 순종 황제의 서명 없이 불법적으로 자행된 근거를 밝혀냈다. 이어 일본 도쿄국립공문서관에서 이를 입증할 ‘일본측 한일병합 조서’ 등 여러 불법 증거물을 찾아낸 끝에 2010년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한·일 역사학자 500명이 서명한 ‘한일병합은 불법’이라는 성명서 발표를 주도했다. 국사학계의 거목 이태진(70) 국사편찬위원장. 이러한 일련의 업적은 우리 역사의 ‘자긍심’을 되찾으려는 이 위원장의 일관된 열정과 뚝심에서 비롯됐다. 그는 최근에 또 하나의 역작 ‘새韓國史-선사시대에서 조선후기까지’를 펴냈다. 이 책은 40여년간 연구생활 끝에 상재하게 된 한국통사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특히 이 책은 일국사(一國史)의 틀을 벗어나 동아시아로 시야를 넓히면서 한국사에서의 ‘외계충격설’이라는 새로운 학설을 제기하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외계충격설’도 궁금했고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중국의 ‘신만리장성 발표’ 등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어서 인터뷰를 요청했다. 지난 11일 오전 경기도 과천에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만났다.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어렵고도 지난한 우리 역사를 올곧게 연구해오면서 꼬인 결을 바로잡는 작업이 녹록지 않았을 텐데도 말이다. 먼저 최근 펴낸 ‘새韓國史’에 대한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외계충격설’이란 무엇인지부터 물었다. “외계충격설은 우리의 전 역사에 흐르고 있습니다. 20여년 전부터 조선시대 중기의 전란과 민생 피폐로 인해 혼란했던 역사의 원인을 밝혀 보는 일을 해 왔습니다. 그 원인이 됐던 장기 재난현상의 발생에 대해 연구하던 중 외계충격설(Theory of Terrestrial Impact)을 접하게 됐지요. 외계충격이란 소행성과 혜성 등의 지구 근접물체들이 지구의 대기권으로 끌려들어와서 공중폭발하거나 지구표면에 충돌하는 것을 말하지요. 과학자들에 따르면 화성과 목성 사이에 크고 작은 수없이 많은 바윗덩어리들이 떠돌고 있는 소행성 벨트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고생대-중생대-신생대로 바뀐 이유가 초대형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과학자들은 입증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역사속에 생긴 장기 재난도 바로 이런 외계충격현상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남쪽 농경지대로 이동해 동아시아 전체가 격동속에 놓이게 되며 그 동요속에 한민족은 어떻게 고난을 겪으며 살아가는지 하는 것들이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이 같은 흔적과 현상이 잘 나타나고 있단다. “조선 중기사회의 동요와 혼란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태조부터 철종 때까지의 ‘실록’에서 조선왕조 470년간 있었던 자연의 이상현상들에 관한 기록들을 모두 발췌해 분석, 정리한 적이 있지요. 이때 조선 중기 270여년간 대량의 유성이 지구 대기권에 돌입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 위원장은 이번 책을 통해 새로운 역사 학설, 즉 ‘외계충격설에 의한 장기 자연재난 현상 연구’를 처음 공식적으로 내놓은 셈이다. 이에 대해 그는 “너무 성급하다는 판단이 나올 수 있다. 서구 역사학계에서는 이런 논의가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회의적인 의견이 나올 수 있다.”고 하면서 “하지만 만약 서구 역사에 있어서, 우리의 ‘실록’과 같은 자연재난에 관한 장기 기록이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이미 학설로 굳어졌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는 지난 4월 우리 ‘실록’에 기록된 외계충격 현상을 토대로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한 바 있다. 이때 참석한 외국 학자들이 ‘실록’은 참으로 대단한 것인데 왜 지금까지 서양에 알리지 않고 있느냐는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 화제를 돌렸다. 중국의 만리장성 길이 발표에 대한 본질이 무엇인지 물었다. “중국은 대중화주의 차원에서 현재의 영토 안에 들어온 것은 모두 중국 역사라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소수민족이 갖고 있던 개별적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현재 중국에서 장성이라고 할 때 두 가지 용어를 씁니다. 명대의 만리장성과 그외 각 지역에 있는 성곽(장성)을 말하지요. 이번 중국의 발표를 볼 때 새로 조사한 장성들을 명대의 것과 확실히 구별해야 하는데 (발표문이)애매하게 돼 있어 오해를 자아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만리장성 길이가 총 2만 1196.18㎞에 달한다는 중국 측 발표내용은 일선으로 쭉 이어진 것이 아니라 현재의 만리장성과 역대 수축된 장성의 길이를 모두 합산한 것으로 일단 이해해야 한다고 풀이한다. 하지만 중국 측이 장성 보존정책을 펴기 위해 장성의 실태를 파악한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나 발해지역에 있는 각 산성들은 중국의 장성과 달리 고유한 형태와 역사가 있다는 것을 계속 밝혀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우리가 조사한 것을 가지고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꾸준히 세계에 알리면서 학술적으로 단단하게 준비해 둘 필요가 있다는 점을 거듭 역설했다. 이 위원장은 오는 9월이면 취임 2주년을 맞는다. 그동안 크고 작은 업적이 많다. 가장 돋보이는 것이 바로 ‘조선왕조실록 영문번역작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제가 국사편찬위원장에 취임할 때 조선왕조실록의 영문번역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제 예산 확보를 끝내고 2033년 완역을 목표로 지난 1월부터 영역작업에 착수했습니다. 현재 기초 조사를 하면서 번역인원 등을 확보하고 있지요. 또 기본적으로 용어정리 및 용어통일의 문제 등 갖추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이번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앞으로는 ‘실록학’도 새롭게 나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3살 때부터 영일에서 자랐다. 초등학생때의 꿈은 화가였다. 그러던 그가 고 3때 역사공부를 하라는 학교 선생님의 권유로 서울대 사학과에 진학하면서 꾸준히 역사연구에 천착, 오늘날 국사학계의 거목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요즘 ‘새韓國史’의 후속편을 준비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미지 중심의 외계충격현상을 실감할 수 있는 책을 곧 펴내는 일이다. 이왕 시작한 김에 ‘외계충격설’을 새로운 학설로 정립하겠다는 의욕이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이태진 위원장은 2003년 하버드大 첫 한국어 강의…한국교수로 도쿄大 한국사 첫 수업 1943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거쳐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3년 경북대 교양과정부 및 문리과대학 사학과 전임강사를 했다. 1977년부터 서울대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를 2009년까지 역임했다. 1988년부터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리실장을 맡을 당시 외규장각 도서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과정을 밝혀내고 환수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2003년 하버드대에서 사상 첫 한국어로 강의했으며 2004년에는 도쿄대에서 한국 교수로는 처음으로 한국사를 강의했다. 그동안 진단학회 회장, 역사학회 회장 및 학술단체연합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는 대한민국학술원회원, 문화재위원,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재임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사회사연구’(월봉저작상), ‘조선유교사회사론’(치암학술상), ‘왕조의 유산-외규장각도서를 찾아서’, ‘고종시대의 재조명’, ‘의술과 인구 그리고 농업기술’(백상출판저작상), ‘한국 병합의 불법성연구’(공저),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메이지 일본의 한국침략사’, ‘조약으로 본 한국병합-불법성의 증거들’(동북아재단) 등이 있다. 이 밖에 다수의 공저와 180편의 논문이 있다.
  • [김문이 만난사람] 한국역사 연구 40년 ‘새韓國史’ 펴낸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

    [김문이 만난사람] 한국역사 연구 40년 ‘새韓國史’ 펴낸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

    도도히 흐르는 역사가 만약 헝클어졌다면? 당연히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또한 역사의 사명이다. 그렇다면 누가? 여기 한 역사학자의 열정을 잠시 살펴본다. 2004년 6월 24일 일본 도쿄대학 고마바 캠퍼스 총합문화학과 강의실. 한국 교수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사를 강의하는 날이었다. 강의실에는 이 대학 대학원생 20명 안팎이 자리했다. 교수 4~5명도 참석했다. 한국 교수의 근대사 강의, 특히 대한제국과 고종 황제, 한일병합 등에 관련한 집중 강의여서 그런지 분위기가 매우 진지했다. 강의가 끝나자 학생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처음 들어보는 소리라는 것이었다. 역사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한 학생은 제출한 리포트에서 ‘메이지(明治)시대 때 국가 운영체계를 존경했는데 그 지도자들이 한국에 대해 그런 짓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역사상이 흔들린다.’면서 한·일 관계사를 새롭게 공부하겠다고 다짐했다. 왕비 시해사건에 대해서는 눈물을 흘리는 여학생도 있었다. 어떤 교수는 “이 강의가 씨앗이 되어 훗날 큰 나무로 자랄 것”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매우 감명 깊어했다. 이 한국인 교수는 이후 7월 15일까지 집중강의와 특별강연 등으로 일본 학계와 일반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모았다. 앞서 이 교수는 2003년 9월부터 1월까지 한 학기 동안 하버드대에서 사상 처음으로 한국어로 강의를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버드대 동아시아 언어문화학과 대학원에서 ‘조선왕조의 역사’와 ‘한국의 역사적 연구’라는 두 과목 강의를 했던 것이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1988년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리실장을 맡던 시절, 규장각 소개책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외규장각 도서 환수에 결정적 근거가 된 ‘반출경위 문건’을 찾아낸 역사적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극동함대 지휘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 제독이 철수하면서 ‘강화도의 한 건물에 5000여권의 책이 있는데 그중 우리 국립도서관에 소장할 340여 책은 싣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우고 간다.’라고 적은 편지를 찾아낸 것이다. 이를 계기로 20년 동안 노력 끝에 프랑스로부터 도서반환이란 큰 결실을 얻게 된다. 이 같은 역사 바로잡기 외에도 1910년 ‘한일병합’이 순종 황제의 서명 없이 불법적으로 자행된 근거를 밝혀냈다. 이어 일본 도쿄국립공문서관에서 이를 입증할 ‘일본측 한일병합 조서’ 등 여러 불법 증거물을 찾아낸 끝에 2010년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한·일 역사학자 500명이 서명한 ‘한일병합은 불법’이라는 성명서 발표를 주도했다. 국사학계의 거목 이태진(70) 국사편찬위원장. 이러한 일련의 업적은 우리 역사의 ‘자긍심’을 되찾으려는 이 위원장의 일관된 열정과 뚝심에서 비롯됐다. 그는 최근에 또 하나의 역작 ‘새韓國史-선사시대에서 조선후기까지’를 펴냈다. 이 책은 40여년간 연구생활 끝에 상재하게 된 한국통사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특히 이 책은 일국사(一國史)의 틀을 벗어나 동아시아로 시야를 넓히면서 한국사에서의 ‘외계충격설’이라는 새로운 학설을 제기하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외계충격설’도 궁금했고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중국의 ‘신만리장성 발표’ 등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어서 인터뷰를 요청했다. 지난 11일 오전 경기도 과천에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만났다.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어렵고도 지난한 우리 역사를 올곧게 연구해오면서 꼬인 결을 바로잡는 작업이 녹록지 않았을 텐데도 말이다. 먼저 최근 펴낸 ‘새韓國史’에 대한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외계충격설’이란 무엇인지부터 물었다. “외계충격설은 우리의 전 역사에 흐르고 있습니다. 20여년 전부터 조선시대 중기의 전란과 민생 피폐로 인해 혼란했던 역사의 원인을 밝혀 보는 일을 해 왔습니다. 그 원인이 됐던 장기 재난현상의 발생에 대해 연구하던 중 외계충격설(Theory of Terrestrial Impact)을 접하게 됐지요. 외계충격이란 소행성과 혜성 등의 지구 근접물체들이 지구의 대기권으로 끌려들어와서 공중폭발하거나 지구표면에 충돌하는 것을 말하지요. 과학자들에 따르면 화성과 목성 사이에 크고 작은 수없이 많은 바윗덩어리들이 떠돌고 있는 소행성 벨트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고생대-중생대-신생대로 바뀐 이유가 초대형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과학자들은 입증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역사속에 생긴 장기 재난도 바로 이런 외계충격현상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남쪽 농경지대로 이동해 동아시아 전체가 격동속에 놓이게 되며 그 동요속에 한민족은 어떻게 고난을 겪으며 살아가는지 하는 것들이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이 같은 흔적과 현상이 잘 나타나고 있단다. “조선 중기사회의 동요와 혼란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태조부터 철종 때까지의 ‘실록’에서 조선왕조 470년간 있었던 자연의 이상현상들에 관한 기록들을 모두 발췌해 분석, 정리한 적이 있지요. 이때 조선 중기 270여년간 대량의 유성이 지구 대기권에 돌입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 위원장은 이번 책을 통해 새로운 역사 학설, 즉 ‘외계충격설에 의한 장기 자연재난 현상 연구’를 처음 공식적으로 내놓은 셈이다. 이에 대해 그는 “너무 성급하다는 판단이 나올 수 있다. 서구 역사학계에서는 이런 논의가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회의적인 의견이 나올 수 있다.”고 하면서 “하지만 만약 서구 역사에 있어서, 우리의 ‘실록’과 같은 자연재난에 관한 장기 기록이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이미 학설로 굳어졌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는 지난 4월 우리 ‘실록’에 기록된 외계충격 현상을 토대로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한 바 있다. 이때 참석한 외국 학자들이 ‘실록’은 참으로 대단한 것인데 왜 지금까지 서양에 알리지 않고 있느냐는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 화제를 돌렸다. 중국의 만리장성 길이 발표에 대한 본질이 무엇인지 물었다. “중국은 대중화주의 차원에서 현재의 영토 안에 들어온 것은 모두 중국 역사라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소수민족이 갖고 있던 개별적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현재 중국에서 장성이라고 할 때 두 가지 용어를 씁니다. 명대의 만리장성과 그외 각 지역에 있는 성곽(장성)을 말하지요. 이번 중국의 발표를 볼 때 새로 조사한 장성들을 명대의 것과 확실히 구별해야 하는데 (발표문이)애매하게 돼 있어 오해를 자아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만리장성 길이가 총 2만 1196.18㎞에 달한다는 중국 측 발표내용은 일선으로 쭉 이어진 것이 아니라 현재의 만리장성과 역대 수축된 장성의 길이를 모두 합산한 것으로 일단 이해해야 한다고 풀이한다. 하지만 중국 측이 장성 보존정책을 펴기 위해 장성의 실태를 파악한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나 발해지역에 있는 각 산성들은 중국의 장성과 달리 고유한 형태와 역사가 있다는 것을 계속 밝혀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우리가 조사한 것을 가지고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꾸준히 세계에 알리면서 학술적으로 단단하게 준비해 둘 필요가 있다는 점을 거듭 역설했다. 이 위원장은 오는 9월이면 취임 2주년을 맞는다. 그동안 크고 작은 업적이 많다. 가장 돋보이는 것이 바로 ‘조선왕조실록 영문번역작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제가 국사편찬위원장에 취임할 때 조선왕조실록의 영문번역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제 예산 확보를 끝내고 2033년 완역을 목표로 지난 1월부터 영역작업에 착수했습니다. 현재 기초 조사를 하면서 번역인원 등을 확보하고 있지요. 또 기본적으로 용어정리 및 용어통일의 문제 등 갖추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이번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앞으로는 ‘실록학’도 새롭게 나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3살 때부터 영일에서 자랐다. 초등학생때의 꿈은 화가였다. 그러던 그가 고 3때 역사공부를 하라는 학교 선생님의 권유로 서울대 사학과에 진학하면서 꾸준히 역사연구에 천착, 오늘날 국사학계의 거목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요즘 ‘새韓國史’의 후속편을 준비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미지 중심의 외계충격현상을 실감할 수 있는 책을 곧 펴내는 일이다. 이왕 시작한 김에 ‘외계충격설’을 새로운 학설로 정립하겠다는 의욕이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이태진 위원장은 2003년 하버드大 첫 한국어 강의…한국교수로 도쿄大 한국사 첫 수업 1943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거쳐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3년 경북대 교양과정부 및 문리과대학 사학과 전임강사를 했다. 1977년부터 서울대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를 2009년까지 역임했다. 1988년부터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리실장을 맡을 당시 외규장각 도서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과정을 밝혀내고 환수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2003년 하버드대에서 사상 첫 한국어로 강의했으며 2004년에는 도쿄대에서 한국 교수로는 처음으로 한국사를 강의했다. 그동안 진단학회 회장, 역사학회 회장 및 학술단체연합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는 대한민국학술원회원, 문화재위원,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재임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사회사연구’(월봉저작상), ‘조선유교사회사론’(치암학술상), ‘왕조의 유산-외규장각도서를 찾아서’, ‘고종시대의 재조명’, ‘의술과 인구 그리고 농업기술’(백상출판저작상), ‘한국 병합의 불법성연구’(공저),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메이지 일본의 한국침략사’, ‘조약으로 본 한국병합-불법성의 증거들’(동북아재단) 등이 있다. 이 밖에 다수의 공저와 180편의 논문이 있다.
  • ‘원전마피아’ 오명 한수원 개혁충전 승부수 통할까

    ‘원전마피아’ 오명 한수원 개혁충전 승부수 통할까

    잇단 임직원 비리와 원전 사고 은폐로 ‘원전 마피아’라는 오명까지 들었던 한국수력원자력㈜이 초고강도의 내부 개혁에 착수, 성공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처장급(1급) 이상 간부와 임원의 공개 모집, 부장급(2급)의 재산 등록 등 공기업으로서는 보기 드문 혁신안이 추진되고 있다. 11일 지식경제부와 한수원에 따르면 지난 7일 임시이사회에서 신임 사장 후보로 추천된 김균섭(62) 전 신성솔라에너지 대표이사 부회장이 4일 만에 청와대와 지경부의 인사 검증을 거쳐 이날 취임식을 했다. 인증 절차가 통상 1~2주일 이상 걸렸던 관행에 견주면 초고속인 셈이다. 한수원은 전임 김종신 사장의 사표가 수리된 지난달 17일 이후 20일 넘게 사장 공석 상태가 지속돼 왔다. 1, 2차 사장 공모 과정에서는 후보들이 돌연 사퇴하는 등 잇단 내홍을 겪었다. 지경부 관계자는 “여름철 전력난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원전 점검 등으로 한수원의 책임자 자리를 계속 비워둬선 안 된다는 교감이 청와대와 정부 사이에 있었다.”고 김 사장 선임 배경을 설명했다. 김 사장은 취임과 동시에 처장·임원급 15명의 고위직에 대한 외부 공모를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그동안은 으레 내부 승진으로 채워지던 자리다. 이에 따라 ▲현직들을 포함한 내외부 공모 ▲현직들의 사임 후 공모 참여 ▲현직 배제 후 외부인만 대상 등 구체안을 놓고 내부 검토에 들어갔다. 또 부장급 간부 1000여명의 ‘사내 재산 등록제’를 전격 도입했다. 본사와 전국 지사의 모든 부장급은 본인과 배우자의 토지·건물, 자동차, 현금, 예금, 유가증권 등을 감사실에 자진 신고해야 한다. 이 같은 조치는 올 들어 납품업체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4명의 직원 대부분이 근속 연수가 20년 안팎인 중간급 간부였기 때문이다. 한국전력, 한국토지주택공사(LH) 등 일부 공기업에서는 임원급에 대한 재산 등록을 받고 있다. 한수원 감사팀 관계자는 “법적인 강제력은 없지만 만약 자진 신고를 하지 않으면 승진심사에서 감점을 당하고 비리 대상 감시자로 등록되는 등 상당한 불이익을 받기 때문에 빠짐 없이 등록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아울러 한수원은 10년 이상 근무자에 대해 강제 순환보직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한수원 안팎에서는 “외부 인사를 끌어온다고 조직 문화가 당장 바뀌나.”, “재산 등록이 조작돼도 검증 권한이 없다.”, “급격한 몰아세우기가 직원들의 사기를 꺾고 있다.” 등의 볼멘소리와 항변이 쏟아지고 있다. 한편 김 신임 사장은 경남 진주 출신으로 부산고와 서울대 항공학과를 졸업한 뒤 1973년 기술고등고시(9회)를 거쳐 산업자원부 기획관리실장, 에너지관리공단 이사장, 주남아공 대사 등을 역임했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열린세상] 제왕적 대통령과 용감한 녀석/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열린세상] 제왕적 대통령과 용감한 녀석/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12월 19일 치러지는 제18대 대통령 선거가 채 200일이 남지 않았다. 언론들은 여론조사를 인용, 새누리당은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이 후보 자리를 굳히고 있고 민주통합당은 당내 경선의 혼전 양상에다 장외 안철수 교수 요인이 있어 안갯속이라고 전하고 있다. 모든 선거가 그러하지만 이번 대선은 특히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 때문에라도 최소한 흥행에는 성공할 것이다. 어찌됐든 유권자들의 정치적 관심과 투표 참여가 높아진다는 것은 ‘한국적 민주주의’의 유지 관리 측면에서 바람직하다. 그러나 선거는 스포츠 경기가 아니다. 특히 대통령 선거는 그래서는 안 된다. 스포츠 경기는 관객으로서 즐기면 그만이지만, 선거에서 우리는 우리를 대표하고 통치할 지도자를 뽑는 주체이다. 이처럼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정작 선거국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망각하고 스스로 관객 자리에 안주하고 만다. 누가 당선될 것인가에 온통 관심을 빼앗긴 나머지 어떤 사람이 대통령 역할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지도자의 조건을 따질 여유를 갖지 못한다. 아니, 지금 내가 ‘누구’를 선출하는 선거를 하고 있는지조차 망각한다. 대한민국은 겉치레로만 민주적 대통령을 선출하고 있다. 헌정사 이후 대통령 선거 역사는 ‘임금’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제왕적 대통령’을 뽑아 왔다. 민주적 절차를 통해 선출됐다 해도 대통령은 사실상 왕처럼 군림했다. 1980년대 말 민주화 이전 대통령들의 독재는 말할 것 없고, 민주화 이후 현재까지의 대통령들도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상당부분 제왕적 통치를 했다. 대통령 임기 말 또는 임기 후 대통령과 주변 권력자들이 줄줄이 범법자로 낙인 찍힌 슬픈 역사는 대통령이 민주주의와 법치 위에서 임금처럼 군림해 왔음을 말해준다.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표현은 미국의 대통령 권력이 2차 세계대전 등 대외 전쟁을 수행하면서 의회 권력에 비해 비대해진 현상을 정치학자 아서 슐레진저가 1973년 저서 ‘제왕적 대통령’에서 비판하면서 유래됐다. 미국의 제왕적 대통령은 법치 내에서 의회 권력을 압도하는 권한을 행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일으킨 닉슨 대통령 사례처럼 불법 사찰이나 세무조사를 통해 권력 남용을 자행하기도 한다. 유교적 왕조 역사를 간직한 대한민국 대통령의 제왕적 속성은 미국의 제왕적 대통령 현상과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종종 더욱 후진적이다. 언론의 대통령 ‘말씀’ 보도를 보라. 대통령 말씀은 임금님 말씀이고, 곧바로 정책이고 명령이 된다. 실제로 정부부처나 정부 유관 조직 등 권력 주변부에서는 대통령 말 한마디로 인사, 정책, 조직운영 방향이 뒤바뀌기도 한다. 제왕적 대통령은 오늘날에도 법 위에 군림한다. 검찰과 언론을 포함한 공공기관의 인사에 법 절차 또는 법 정신을 무시하고 청와대가 낙하산 인사하는 것이 관행처럼 돼 있다. KBS, MBC, YTN 등 공영적 방송사의 장기간 파업사태는 제왕적 대통령의 비민주적 탈법 낙하산 인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런 잘못된 관행은 진보 정권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것이 대한민국 대통령 권력의 현주소이다. 요즘 대통령 주변 세력의 민간인 불법사찰이 폭로돼 수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도 임기 말 청와대는 여전히 공공기관 등의 임원인사에 막바지 자기 사람 챙겨주기식 개입을 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제왕적 대통령 또는 대통령 같은 임금을 뽑고 있다. 그동안 자행된 대통령들의 제왕적 행태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결여된 채, 제왕적 대통령 자리에 누가 오를 것인가에만 온통 관심이 쏠려 있다. 유력한 임금 후보에 정치권의 줄서기가 한창이고, 이를 보도하는 소위 제도권 언론은 벌써부터 눈치보기 보도를 하고 있다. 일단 가능성이 가장 높은 박근혜 후보 관련 보도들은 후보 검증보다는 줄대기 보도라는 인상이 짙다. 많은 언론들이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을 당연시하고 그것에 종속돼 있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탈법적인 제왕 노릇을 한 대통령을 임기 후에 벌하는 일이 없도록 임기 전에 제왕적 대통령이 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선거가 됐으면 한다. 언론은 제왕적 대통령에 도전하는 ‘용감한 녀석’이 될 수 없을까.
  • 美 보수 싱크탱크 ‘헤리티지’ 키워낸 퓰너 이사장 40년 만에 재단 떠난다

    美 보수 싱크탱크 ‘헤리티지’ 키워낸 퓰너 이사장 40년 만에 재단 떠난다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진영 인사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에드윈 퓰너(70) 헤리티지 재단 이사장이 40년 만에 재단을 떠날 것으로 알려졌다. 워싱턴포스트(WP)는 4일(현지시간) “1973년 헤리티지 재단을 창립한 뒤 1977년부터 이사장직을 맡아 온 퓰너가 곧 물러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일리노이주 시카고 출신인 퓰너 이사장은 1963년 콜로라도주 레지스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뒤 와튼스쿨에서 경영학 석사(MBA), 영국 에든버러대에서 박사 학위를 각각 받았다.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워싱턴DC의 싱크탱크와 인연을 맺었으며 이후 멜빈 레이어 전 공화당 하원의원의 보좌관 생활을 하다가 1973년 창립 멤버로 헤리티지 재단에 몸담았다. 그는 창립 당시 9명의 직원이 임대사무실에서 일하던 재단을 현재 3개 건물에 225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미국의 대표적 보수 성향 싱크탱크로 변모시켰다. 특히 그는 2009년 포브스가 선정한 워싱턴DC의 영향력 있는 보수 인사 가운데 6째로 꼽혔으며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선정한 미국의 대표 보수 인사 100명에 포함되는 등 대표적인 보수 인사로 평가받고 있다. 지금까지 100여 차례 한국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진 퓰너 이사장은 2002년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한·미 우호관계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수교훈장 광화장을 받는 등 ‘지한파’ 인사로도 알려져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헤리티지 재단이 아직 후임자를 발표하지 않고 있으나 퓰너 이사장이 올 하반기에 공식적으로 사임을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딕 체니 전 부통령의 보좌관을 지냈던 데이비드 애딩턴이 최근 재단 이사로 취임한 점으로 미뤄 그가 퓰너 이사장의 뒤를 이을 것이라는 관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부산타워 ‘등명기’ 첫 관광용 등대 지정

    부산타워 ‘등명기’ 첫 관광용 등대 지정

    부산 용두산공원 부산타워의 등명기가 우리나라 최초의 ‘관광용 등대’로 지정됐다. 부산시는 지난달 9일 부산타워 전망대 야외 옥탑에 광도 300만cd의 소형 등명기 1대를 설치했고, 관광용 및 항행 원조형이란 등명기 설치 목적에 따라 관광용 등대로 최근 지정·고시했다고 3일 밝혔다. 부산타워 등대의 등탑 높이는 전국 등대 중 가장 높은 120m에 달한다. 매일 남항대교 방향 쪽으로 일몰 후부터 오후 10시 40분(부산타워 소등시간)까지 불을 밝힌다. 시는 해양도시를 상징하는 대표적 시설물로 관광자원화를 추진할 계획이다. 부산타워는 1973년 해발 69m의 용두산 공원 정상에 세워졌으며 높이 120m 전망대에서 민주공원·영도대교·부산대교·부산항·자갈치시장·남항대교·오륙도 등을 내려다볼 수 있는, 부산을 대표하는 상징물의 하나이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K-코믹스 신한류 이끈다] (7)리얼리즘을 말하다

    [K-코믹스 신한류 이끈다] (7)리얼리즘을 말하다

    ‘만화 같다.’는 말이 있다. 좋게 이야기하면 환상적이라는 뜻으로, 나쁘게 이야기하면 황당무계하거나 유치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만화 특유의 상상력이 강조된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근대 만화의 뿌리를 더듬다 보면 18~19세기 유럽 풍자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석판이나 동판에 계몽과 풍자를 담아낸 그림들이다. 원래 만화의 출발점이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근대 만화는 시사만화, 풍자만화라는 이름으로 한반도에 상륙해 우리 만화 역사의 첫 장을 기록하기도 했다. 최근 들어 리얼리즘 만화가 K코믹스의 새로운 흐름으로 주목받고 있다. 상상이 아닌 현실을 이야기해도 충분히 재미있고 감동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리얼리즘 작품들이 줄을 잇고 있다. 물론 리얼리즘 만화는 교양·학습 만화, 웹툰 등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은 틈새 시장이다. 하지만 우리 만화 생태계에 다양성의 저변을 넓히고, 오락·상업 위주로 성장한 만화에 예술성을 부여해 다른 예술 장르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만들어 줄 분야로 만화계는 기대하고 있다. 서울신문과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공동 선정한 ‘한국 만화 명작 100선’ 중엔 허영만의 ‘오! 한강’, 이희재의 ‘간판스타’, 오세영의 ‘부자의 그림일기’, 장진영의 ‘삽 한자루 달랑 들고’, 최규석의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와 ‘100도씨’, 최호철의 ‘태일이’가 넓은 의미의 리얼리즘 만화로 분류된다. 신문 만평과 네 컷 만화 등 시사 만화가 오랫동안 현실을 반영해 온 것에 비해 긴 이야기 구조를 갖춘 서사 만화에서 리얼리즘이 본격적으로 싹을 틔운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해외에선 퓰리처상에 빛나는 만화 ‘쥐’의 모태인 아트 스피겔먼의 ‘지옥별의 죄수’나 미국 언더그라운드 만화의 기수 로버트 크럼의 ‘로버트 크럼의 고백’ 등 1970년대 초 작품들을 리얼리즘 만화의 초기 형태로 본다. 이웃 일본 같은 경우에도 히로시마 원폭 피해 경험을 소재로 1973년 연재를 시작한 나카자와 게이지의 ‘맨발의 겐’이 대표적이다. 시기적으로 68혁명이나 전공투 운동 등의 역사 흐름 속에서 리얼리즘 만화가 태동했다는 분석도 있다. 국내에서는 1980년대가 출발점이다. 큰 갈래 가운데 하나가 1980년대 민중 운동 흐름 속에서 나왔다. 1982년 농촌 문제를 다룬 탁영호의 ‘학마을 사람들 이야기’가 기념비적인 작품. 이후 1980년대 중후반까지 노동 만화, 농민 만화, 빈민 만화 등이 꾸준히 등장했다. 다른 갈래는 제도권 만화의 몫이었다. 1980년대 이후 이현세와 허영만이 두각을 드러내며 표현에 있어 사실성을 가미한 극화 열풍이 거세게 불었다. 한 발 더 나아가 내용의 사실성과 사회적인 탐구, 현실 비판적인 내용을 담아내려고 하는 흐름이 형성됐다. 대표적인 작가가 이희재, 오세영, 박흥용, 백성민 등이다. 특히 이희재, 오세영 등은 월간 ‘만화광장’ 등 여러 성인 만화 잡지를 통해 사회성 짙은 단편들을 쏟아냈다. 1990년대 중반 단행본으로 출간된 ‘간판스타’와 ‘부자의 그림일기’는 이러한 단편들을 모은 것으로 국내 리얼리즘 만화의 이정표를 세웠다. 오락성에 치우쳤던 기존 만화와 달리 시대와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녹여내고, 한편으로 새로운 만화 문법을 제시해 작가주의 작품, 예술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원래 만화는 고급 엘리트 문화가 아니라 대중 문화로 출발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사람의 이야기를 담아 내는 것은 애당초 당연한 요구라고 할 수 있다.”(위원석 휴머니스트 편집 주간) 1990년대 들어서는 동구권이 몰락하는 등 사회가 변화하고 상업 만화가 정점을 찍으며 리얼리즘 만화는 흐름을 계속 이어가지 못한다. 대신 해외 리얼리즘 만화 걸작들이 속속 소개되는 한편 만화 예술 운동을 내세운 언더그라운드·독립 만화가 등장하며 다음 시기를 위한 발판을 준비했다. 2000년대, 특히 2000년대 중후반 들어 리얼리즘 만화가 다시 꽃을 피운다. 강풀의 ‘26년’과 최규석의 ‘100도씨’ 등 사실과 허구를 섞은 팩션 만화에서부터 어두운 현대사를 조명하는 역사 만화(정경아 ‘위안부 리포트’, 박건웅 ‘노근리 이야기’ 등),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사회적인 메시지를 주는 자전 만화(오영진 ‘보통시민 오씨의 북한체류기’, 고영일 ‘푸른 끝에 서다’ 등) 등으로 범주도 다양해졌다. 김홍모를 비롯한 여러 작가들이 참여한 ‘내가 살던 용산’, 김수박의 ‘사람 냄새’ 등 사회 이슈를 직접 발로 뛰며 취재해 만화로 옮기는 다큐멘터리(르포) 만화도 나왔다. 리얼리즘 만화가 재도약하고 있는 이유는 우선 1980년대 우리 만화 붐을 청소년기에 경험했던 세대가 성장해 만화 시장에서 주요 소비층이 됐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제 30~40대가 된 독자 사이에 진지한 만화를 보고자 하는 수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론 2000년대 들어 정치 지형도가 바뀌면서 정치적 피로감과 무력감을 해소하는 미디어들이 예전만큼 다양하지 않은 상황도 한몫했다. 기존 미디어에서 균형감 있는 소통이 부족하다 보니 하위 문화인 만화로 소통에 대한 요구가 쏠렸다. 창작자들의 발언 욕구도 강화됐다. 1980년대 리얼리즘 만화가 일부 선구자들이 이끌고 가는 것이었다면 요즘 리얼리즘 만화의 창작 지형은 보편화됐다. 1인 미디어 시대의 흐름을 타고 창작자들이 만화를 통해 사회에 말하고 싶은 바를 전달하려는 분위기가 이뤄진 것. 가장 신세대적인 분야로 여겨지는 웹툰도 예외는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을 동물에 빗댄 윤필의 ‘야옹이와 흰둥이’는 리얼리즘 우화의 수작으로 손꼽힌다. 또 웹툰 특유 ‘병맛’ 작품을 그렸던 이경석도 최근엔 진지한 리얼리즘 단편을 그려내기도 한다. 젊은 작가군도 사회에 대한 인식과 감각이 높아졌다는 방증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자본과 기득권의 시선에서 바라본 현실이 많이 유포되고 있는데 이와는 다른 시선에서 사회와 진실을 바라보는 노력들도 필요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리얼리즘 만화, 다큐 만화가 지속돼야 한다.”(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만화평론가) 리얼리즘 만화의 숙제는 확연하다. 일부 성공 사례들도 있지만 지속 가능한 창작 활동을 담보하기에는 아직 전체 시장이 여물지 않았다. 독자에게 소비되고 또 이를 통해 얻은 이익이 다시 창작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만화계에서는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다. 우선 리얼리즘 만화의 외연을 넓히는 것이다. 사회 참여적인 소재나 내용을 유지하되 주요 타깃인 성인 독자층의 정보 교양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역사나 인문 소재와의 접목도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또 리얼리즘 만화 자체가 상업·오락 만화의 대안으로 출발한 점을 고려하면 산업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문화 운동, 예술 운동 차원의 협동조합 등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창작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리얼리즘 만화가 새 시장을 만들었지만 아직 만족할 수 있는 시장이 된 것은 아니다. 만화 전체 시장의 위축 속에서 틈새 역할은 충분히 한 만큼 이를 지속시키기 위해 확장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박석환 한국만화영상진흥원 팀장·만화 평론가)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기획]최고경영자=⑩ 전 한미(韓美)식품 사장 고(故) 장계량(張啓良)씨

    [기획]최고경영자=⑩ 전 한미(韓美)식품 사장 고(故) 장계량(張啓良)씨

    단돈 10원짜리도 함부로 쓰는 일이 없었다. 꼭 지갑에 넣었다 꺼내 쓰는 구두쇠 사장이었다. 창업 당시엔 5전짜리 콩국수를 먹고 전무가 된 뒤에도 일본에 출장을 나가면 1백「엔」짜리 메밀국수 외에는 입에 대지 않았다. 이렇게 모은 돈 1억 2백만원을 임종 직전 선뜻 사회에 되돌려 놓았다.『자식들에게 유산을 남겨 주어야 아이들만 버릴뿐』이라는 주장. 지난 5일 작고한 전 한미(韓美)식품 사장 장계량(張啓良)씨는 참된 기업인이 어떤 것인가를 임종에서 보여 주었다. 북에 두고 온 아들 그리며···사원 가족·문중 자녀 위해  우리나라 기업인 중 자기 재산을 몽땅 사회에 되돌려 보낸「케이스」는 유한양행(柳韓洋行)의 유일한(柳r一韓)씨에 이어 이번 작고한 장(張) 사장이 두번째. 장(張)씨의 재산이 단신 월남, 맨손과 땀으로 이루어 놓은 것이라는 데 더 의의가 깊다.  간암(肝癌)으로 지난 해부터 연세(延世)대 의대 병원에 입원, 투병하던 장(張) 사장은 자신의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안 지난 해 12월 중순, 녹음기와 변호사를 불러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겨 두었다.  『맨손으로 월남, 오늘의 한미(韓美)식품과 칠성(七星)음료를 이룩했으니 유한은 없다. 다만 통일이 되어 고향에 못 가본 것이 한일 뿐. 내 소유로 되어 있는 한미(韓美)식품의 주식 1억 2백만원 전액을 기금으로 인동(仁同)장학회를 만들어 주기 바란다. 인동(仁同)장학회는 ①「펩시」에 3년 이상 근무한 전 종업원의 자녀 ②내 고향 평북(平北) 귀성(龜城) 군민의 자녀 ③인동(仁同) 장(張)씨 문중의 자녀들로 고등학교, 대학교에 진학한 수재들을 도와 주기 바란다. 단 명예직인 장학회 이사장 자리는 공석으로 남겨 두었다가 통일이 되거든 북(北)에 남겨 두고 온 내 아들에게 물려 주도록. 못난 아비의 마지막 선물이다』 50원짜리 구내식당 점심···사원들에겐 자상한 사장  이 유언에 따라 한미(韓美)식품 중역진은 곧 인동(仁同)장학회 준비위를 구성, 올해부터 이를 실시키로 했다. 지난 7일 경기도 벽제면에 묻힌 장(張) 사장의 묘소 옆에는 북(北)에 두고 온 장(張) 사장 부친의 묘비도 세워져 있는데 이는 통일이 되거든 이 묘비를 부친의 산소에 세워 달라는 장(張) 사장의 애절한 유언이 있었기 때문.  「펩시·콜라」판매로 지난 해 23억원을, 칠성(七星)「사이다」로 30억원을 벌어들인 칠성(七星)·한미(韓美)식품은 원래가 7명의 동업자들로 구성된 합명회사였다.  전 칠성(七星)음료 사장인 최금덕(崔今德)씨가 수원에서 자그마한「사이다」공장을 경영하다가 경영난에 몰리자 50년 봄 동업자를 구한 것이 칠성(七星)의 시초. 최금덕(崔今德)씨를 비롯 작고한 장(張) 사장, 주동익(周東益·작고)씨, 김명근(金命根)씨, 박운석(朴云錫)씨, 최창문(崔昌文·작고)씨, 그리고 우(禹)모씨(납북) 등 7명이 모였다. 대부분이 단신 월남한 실향민(失鄕民)들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성이 모두 달랐다. 회사 이름은 동방(東邦)음료였지만「칠성(七星)」의 상표를 붙인 것은 칠성(七姓)이 모였대서 생긴 이름이었다.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 공장을 차렸을 때만 해도 이 7명이 주주이자 사장이자 공장 직공이며 사환이었다. 모두들 작업복 바지에「잠바」를 입고「사이다」를 만들어 들고 나가 팔았다. 공장 앞 개성(開城) 아주머니가 경영하던 판잣집 콩국집에서 3끼 식사를 하고 어쩌다 잘 팔리면 호떡을 사다가 호떡「파티」를 벌이는 게 최고의 호사.  6·25 동란이 터진 이듬 해 박재화(朴在華·현 회장)씨 최희태(崔希泰·현 이사)씨 등이 새로운 동업자로 참가하고 그 뒤 다시 김영태(金永泰·지난 7일 장(張) 사장의 뒤를 이어 사장에 취임) 강내근(姜迺根·이사)씨 등이 끼어 들었지만 칠성(七星)을 키운 원「멤버」는 칠성(七星)의 창업자들이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칠성(七星)은 국내 청량음료 업계를 파고 들기 시작, 60년대에 와서는「톱·메이커」로 성장했다. 칠성(七星)의 성장으로「라이벌」이던 서울「사이다」가 도산 위기에 직면하자 이를 인수, 주동익(周東益)씨와 박운석(朴云錫)씨, 김명근(金命根)씨 등이 분리,독립해 나갔다.  한동안 호경기를 누리던 칠성(七星)은 67년「코카·콜라」의 상륙과 함께 된서리를 맞기 시작했다. 칠성(七星)은 국내 청량음료 업자들과 힘을 합쳐「코카」의 상륙을 막으려 애썼으나 실패, 이 때 장(張) 사장은『반대만이 능사가 아니다. 우리도 외국 것을 들여다 싸우자』고 제의, 김인선(金寅善·현 영업 제2과장)씨를 통해「펩시」를 끌어 들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장(張) 사장은 거의「쇄국적」이랄 정도로 외국 자본의 한국 침투를 꺼리는 사람. 합작 투자를 거절하고 오직「펩시」원액만을 사들인다는 조건부로 한미(韓美)식품을 68년 창설했다.「펩시」측 미국인 중역을 맞을 땐 꼭 한복 차림이었고 요정엘 가도 자신이 장구치고 한국 춤을 추었다고. 69년 6월 영등포 공장이 준공되었을 땐 외국인 내빈이 많자 일부러 한복으로 갈아 입고 나오기도 한 외고집이었다고.  49년 혈혈단신 월남한 장(張) 사장이었던지라 자신에겐 마냥 인색하면서도 어려운 사람에겐 더 없이 잘 해주었다고. 명절 때면 꼭 떡과 고기를 가지고 공장에 나와 공장 종업원들과 수위들에게 나누어 준 인자한 사장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50원짜리 구내식당의 점심을 먹고 10원짜리도 꼭 지갑에 넣어두었다 쓰는 지독한 구두쇠였다. 김인선(金寅善)씨와 함께 68년 동남아 출장을 갔을 때도 꼭 1백「엔」짜리 메밀국수만 찾아 먹어 김(金)씨가『이러단 굶어죽겠다』며 사표 내겠다고 협박한「에피소드」까지 갖고 있다. “돈 남겨주면 사람 그르칠까봐 가족 안줘”  칠성(七星)과「펩시」의 연간 총 매상이 한해 55억원으로 오른 70년대에 사장직을 맡았으나 이 구두쇠 기질은 변함 없었다.  한때 매상 55억원의 기업체 사장이면서 융자를 얻으러 산은(産銀) 총재를 찾아갈 때도「잠바」차림이었다면 알조(죠). 차림이 너무 허술해 면담을 거절 당하자『나도 세금을 내는 국민의 한 사람』이라며 총재실 문을 밀치고 들어선 장(張) 사장이다.  직원들이 어쩌다 가불 신청을 한면 절대로 가불 안해주는 사장이었으면서도 유능한 충각 직원이 장가를 가면 선뜻 자기 돈에서 50만원을 내주기도 하고 사정이 딱한 직원에겐 자기 돈을 이자없이 꿔주기도 했다.  『자식이나 친척들에게 돈을 남겨 주는 것은 오히려 그 사람을 그르치게 한다』는 게 장(張) 사장의 평소 주장. 간암(肝癌)과 싸우면서 장(張) 사장은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육영사업을 벌일 것을 계획했다가 끝내 못이루고 인동(仁同)장학회 설립을 유언으로 남겼다.  『내 평생 아무런 원도 없다. 다만 단신 월남해 북(北)에 두고 온 부모님께 효도 못하고 처자식들에게 몹쓸 아비된 것이 부끄러울 뿐이고 통일되는 걸 못보고 죽는 게 한이 될 뿐. 그러나 내 평생을 두고 키운 칠성(七星)·「펩시」의 가족들을 위해 인동(仁同)장학회를 세운다면 더 이상 큰 보람은 없다. 평소 구두쇠 사장이라고 나를 나무랐겠지만 여러분 자녀를 공부시키는데 내 재산을 돌려드리니 이젠 구두쇠 소리를 말아 주게』  지난 7일 칠성(七星)·「펩시」사장(社葬)으로 치러진 장(張) 사장의 유언이 녹음「테이프」서 흘러 나오자 장례식은 그대로 울음바다가 됐다. 참된 기업인의 깊은 뜻을 그제서야 알게 된 것.  향년 55살의 아까운 나이 북(北)에 1남(男)1녀(女), 남(南)에 1남(1男)을 두고 갔다.<김창웅(金昌雄) 기자>   <편집자주>=「최고경영자」는 생존해 있는 경영자 중 각 부문별「톱·메이커」를 다루게 돼 있으나 이번 회만은 장(張) 사장의 갸륵한 뜻을 널리 알리기 위해 작고한 분을 골랐읍(습)니다. [선데이서울 73년 3월 18일 제6권 11호 통권 제231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9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기사 내용과 광고 카피 등 당시의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한권에 얼마냐고요? 50원이었습니다. ●이 기사에 대한 저작권, 판권 등 지적재산권은 서울신문의 소유입니다. 무단 전재, 복사, 저장, 전송, 개작 등은 관련법으로 금지돼 있습니다.
  • [부고] 美 ‘포크음악 전설’ 덕 왓슨

    ‘미국 포크 및 컨트리음악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맹인 기타리스트 겸 싱어 송 라이터 덕 왓슨이 사망했다. 89세. 왓슨은 29일(현지시간) 미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한 병원에서 별세했다고 AP·AFP통신이 병원 대변인과 그의 매니저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그는 지난주 복부 수술을 받은 뒤 심각한 후유증이 생겨 현지 노스캐롤라이나주 윈스턴세일럼의 웨이크 포레스 밥티스트 메디컬센터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숨졌다. 1923년 3월 3일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난 왓슨은 첫돌을 맞기도 전에 눈병을 앓는 바람에 시력을 잃었다. 그가 받은 정식 교육이라곤 맹인을 위한 롤리 학교를 고작 몇 년간 다닌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불우한 환경과 장애를 딛고 왓슨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경쾌하면서도 빠른 스타일의 ‘플랫 피킹’ 연주 기법을 선보이며 기타리스트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딥 리버 블루스’ ‘하우스 오브 더 라이징 선’ 등이 대표곡인 그는 1973년, 1974년, 1986년, 1990년 등 4차례 그래미상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도 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이용철의 영화만화경] ‘시네마 베리테’

    [이용철의 영화만화경] ‘시네마 베리테’

    리얼리티 TV쇼가 폭발 중이다. 연예인들은 여전히 멋지고 아름답다. 하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들이 연기하는 것은 그럴싸하게 꾸며진 삶이지 삶 자체가 아니다. 그들의 몫은 어쩔 수 없이 삶보다 작다. 언제나 꿈을 꾸고 싶다면 또 모를까, 허구의 세상에서 가면을 쓴 채 연기하고 노래하는 연예인과 현실을 견뎌야 하는 사람들이 친구가 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런 까닭에 언젠가부터 리얼리티 TV쇼가 보통 사람의 볼거리로 자리 잡았다. 싸우고 사랑하고 노력하고 쟁취하고 실패하는 진짜 사람을 보며 시청자들은 나와 비슷한 사람이 어딘가에서 같이 숨 쉬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한다. 더 큰 감동으로 보상받으려면 시청자는 보고 있는 것에 조금의 조작도 없으리라고 믿어야 한다. 과연 그럴까. ‘시네마 베리테’는 리얼리티 TV쇼의 본격적인 시작점을 되돌아본다. 보통 사람들의 삶을 연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담는다는 생각은 다큐멘터리 진영에서 오래 전부터 시도됐던 바다. 지가 베르토프(1896~1954)를 거쳐 장 루슈(1917~2004)가 이끌었던 그러한 다큐멘터리의 전통은 시네마 베리테로 불린다. 1970년대 초반 미국의 제작자 크레이그 길버트는 시네마 베리테와 TV쇼를 결합해보기로 한다. 인류학자가 원시 부족을 연구해 논문을 내놓듯이 길버트는 카메라로 미국 가족을 관찰해 시청자에게 보여주기를 원했다. 카메라가 켜지는 순간 진실이 수면 위로 올라올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그가 TV쇼의 대상으로 선택한 라우드 가족에게 약속한 것은 ‘계몽과 실험’이었다. ‘아메리칸 패밀리’라 이름 붙여진 TV쇼의 주인공은 캘리포니아 샌타바버라에 사는 라우드 일가족. 그들의 일상을 수백 시간에 걸쳐 기록한 필름은 12회 분량으로 편집돼 PBS에서 방영됐다. 1973년 당시 시청자들은 ‘아메리칸 패밀리’를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사적으로 묻어둬야 할 모습을 세상에 공개한 라우드 가족을 바보로 업신여겼고 방영 이후 의도하지 않게 괴물로 취급당한 라우드 가족은 다시 TV에 출연해 처지를 밝히고 편견과 싸웠다. 제작진이 드라마 전개에 개입한 게 문제의 발단. 방송국은 가족이 나누는 일상의 대화보다 가족의 갈등, 비밀, 이혼 따위의 선정적인 내용을 추구했고 시청률을 높이려고 멋대로 편집해 진실을 왜곡했다. 감독 샤리 스프링어 버먼과 로버트 풀치니는 대표작 ‘아메리칸 스플렌더’(2003)에 이어 TV를 도마 위에 올린다. ‘아메리칸 스플렌더’에서 실존 인물 하비 피카는 토크쇼에 나와 부정적인 태도를 보일수록 더욱 관심을 끈다. TV 프로그램은 기형적인 존재다. 진실은 사라진 지 오래고 기괴한 짓거리로 주목받으려고 안달인 정신병자들이 매일 TV에 등장하며 방송국은 호기심 끌기에 혈안이 돼 싸구려 볼거리를 주워 모은다. ‘시네마 베리테’는 리얼리티 TV쇼의 순수가 출발점에서부터 이미 변질했다고 말한다. 반면 가수 돈 헨리는 ‘더러운 세탁소’라는 노래에서 더러운 소식에 열광하는 대중을 비꼬았다. 주기에 받아먹는 걸까, 원하기에 주는 걸까. 순수가 죽은 자리에 더러움만 가득하다는 사실 외에 무엇이 답인지는 모른다. TV 영화로 제작된 ‘시네마 베리테’는 한국에선 홈비디오로 출시됐다. 영화평론가
  • [기획]최고경영자=⑨진로(眞露)그룹 장학엽(張學燁)씨

    [기획]최고경영자=⑨진로(眞露)그룹 장학엽(張學燁)씨

     맨손으로 월남한 지 23년.「진로(眞露)」는 23년만에 연간 1백억원어치가 팔리는 대기업으로 자라났다.「진로(眞露)그룹」의 경영주 장학엽(張學燁·71)씨는 이제 학교를 세워 내일의 인재를 키우는 것만이 남은 소망이라고 말한다. 20살 교사생활 인상 깊어…20년 전부터 장학회 운영  72년 매상액이 소주「진로(眞露)」만 1백억원. 73년 목표가 무려 1백50억원이다. 앞으로 줄곧 매해 50%씩의 성장을 가늠한다는 초「스피드」성장 계획. 그래서 74년 목표를 자그마치 2백억원으로 잡고 있다.  『계획대로 무난히 이루어질 줄로 알고 있읍(습)니다. 68년부터 기획·관리제도를 도입해서 철저히 실행해 왔는데 아직 목표 달성을 못한 적은 한번도 없었읍(습)니다 』  말이 1백억원이지 1백억원어치의 소주라면 보통 어마어마한 것이 아니다.1백억원어치의「진로(眞露)」는 40개들이 상자로 5백30만상자. 병수로 따지자면 2억1천2백만병이 된다. 어쨌든 71년에 계산해 본 바론 그 해에 팔린 소줏병을 늘어 놓으면 경부고속도로를 21차례 오갈 수 있을 정도였다고.  이밖에 포도주 판매액이 72년에 10억원. 인삼주는 7년에 50만$(달러)어치를 수출할 예정.그러나「진로(眞露)」의 경우「예정」이란 단어는 곧「꼭 그렇게 되는 것」으로 믿어도 좋다. 아직까지 목표 달성에 미달된 적이 한번도 없었다니까.  현재「진로(眞露)그룹」에는 크게 잡아 5개 자회사가 있다. 으뜸은 역시「진로주조」.그 다음「서광(西光)산업」이 연간 4백만$(달러)어치의 봉제 가공품을 수출하고 있고「효성병유리」는「진로」에서 쓰이는 각종 병을 자가 생산. 「도원관광」이 7월 준공 예정으로 부산 용두산에 부산「타워」를 건설 중이다. 72년에 인가를 얻은「우천(友泉)학원」은 74년 3월에 문을 열어 중·고교 입학생을 받을 예정.  『본래 꿈이 젊은이들을 가르쳐 보는 것이었어요. 20년 전부터 장학회를 운영해 오고 있기는 하지만 역시 꿈은 교육자였지요. 아직도 내 추억 중엔 나이 스무살 때 황해도에서의 국민(초등)학교 선생 시절이 가장 인상깊게 남아 있읍(습)니다』  오늘의「진로」가 있기까지에는 크게 잡아 3차례의 어려운 고비가 있었다. 그 첫번째가 6·25로 인한 월남. 맨손으로 피난지 부산에 떨어져 오직 성실과 근면으로 뛰었다. 54년에 현재「진로」가 자리잡고 있는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으로 이사. 지금은 3천명 종업원이지만 그때 종업원은 고작 1백명. 지금은 소주시장에서의 시장 점유율이 60~70%를 오르내리는 입장이지만 그때는 사정이 달랐다. 더구나 자기 지본은 적고 남에게 빈 돈이 많았기 때문에 이자 부담이 커 더욱 고생이 많았다. 어려운 고비 3차례 겪고…거센 반발 속에 기반 굳혀  이 고비를 넘기는데 소비한 햇수가 4년. 4년만에 웬만한 빚은 다 갚고 새 출발을 할 수가 있었다. 마지막 고비는 10년 후인 65년에 닥쳤다. 당시 정부 양곡관리법에 따라 순곡소주를 없애고 고구마에서 주정을 뽑아내는 새 소주를 만들어 팔아야 했다. 이와 함께 타 업체와의 경쟁이 극심해져 광고선전비·접대비 지출이 크게 늘어났다, 이에 따라 외상 판매의 비중이 격증, 67년에는 회사의 존폐가 우려될 정도로 극심했다.  『이때부터 외상을 없애고 현금거래제도로 뜯어 고쳤습니다. 반발이 컸지만 그대로 밀고 나갔어요. 덕분에 오늘의「진로」로 성장할 수 있는 탄탄한 기반이 마련되었지요』  68년부터「진로」는 종래의 경영 방식에서 탈피, 생산 판매를 모두 치밀한 계획하에 집행하는 기획·관리실 위주의 경영으로 탈바꿈 했다.이에 따라 다달이 경영분석·결산을 하여 경영 합리화에 박차를 가했다. 덕분에 68년 이후 5년 동안에 거든 성장율(률)이 5백%, 해마다 두곱으로 회사가 커온 셈이다. 65년에 비하자면 10배의 성장율(률)을 기록하였을 정도.  『72년 이익율(률)이 11%입니다. 만족할만한 성과였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이제「진로」의 과제라면 세계 무대로의 진출이 남아 있지요. 국제 경쟁력 강화로「세계의 진로」가 되는 것이 당면 과제이지요』  만족할 만한 “이익율(률) 11%”…지금은 한창 새로운 술 연구  현재「진로」는 새 품종 개발을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 중. 생활 수준이 점점 높아져만 가는 소비자의 입맛에 맞을 새로운 술을 멀지 않은 장래에 선보일 예정이다.  『장(張) 사장의 성격은 한마디로 과묵 실천형이죠. 또 지독한 구두쇠이기도 하셔요. 예전에는「와이샤쓰」한벌에「칼라」만 떼었다 붙였다 하며 헐도록 두고 두고 입으실 정도였어요. 이건 자랑이 아니라 창피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저희 회사 건물부터가 아주 낡고 사무실이 비좁은 것도 이 때문이지요』  부사장이자 장(張) 사장의 동생이기도 한 장학형(張學炯)씨의 말. 아닌 게 아니라「진로」의 신길동 사무실은 여간 흐름하지가 않다. 신길동 공장을 신축하던 54년 당시 종업원 1백명으로 출발할 때의 건물을 모체로 종업원 3천명을 헤아리게 된 오늘까지 그 공장에 덧붙여 하나씩 늘려 왔기에 때문에 이런 현상은 거의 불가피했다고.  그러나 이젠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고 자신하기 때문에 올해안에 신길동 공장을 재배치, 사무실용 6층「빌딩」을 새로 짓고 공장 건물도 대량 생산 체제로 크게 바꿀 예정이다.  『아시다시피「진로」의「마스코트」는 두꺼비입니다. 51년 부산에서 다시 출발할 때부터 두꺼비로 했는데 아마 두꺼비가 우리「진로」를 여러모로 돌보아 준 모양입니다. 두꺼비 덕을 단단히 보았다고 할까요?』  「진로」는 아직 비공개법인. 현재 주주의 입장에서 주식 공개를 연구 중이라고 했다. 총자산 36억원에 비해 이익율(률)이 높기 때문에 주식 공개시 성공은 자신있다고.  3남 2녀를 둔 진로(眞露)「그룹」의「리더」장학엽(張學燁) 사장은 무취미가 취미.「골프」와 거리가 멀고 오직 바둑을 조금 두는 정도. 앞으로는 74년에 문을 열「우천(友泉)학원」을 돌보는 일이나 재미를 붙여 보겠다고 했다.  <수(秀)>  ◇ 장학엽(張學燁)씨의 약력◇  1923.3 진남포 공립상공학교 상과 졸업   3 황해도 곡산공립보통학교 교원  1927.4 평남 용강군에서 진천(眞泉)양조장 경영(상품명 진로(眞露))  1950.11 월남  1951.3 부산에서 구포(龜浦)양조 합자회사 경영  1954.1 서광주조(西光酒造) 사장  1959 「진로(眞露) 장학회」  1966 「진로주조(眞露酒造)」  1970 「대한교련」에서 교육 독자ㅣㄱ상 수상  1971 은탑산업훈장 수상 [선데이서울 73년 3월 11일 제6권 10호 통권 제230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9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기사 내용과 광고 카피 등 당시의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한권에 얼마냐고요? 50원이었습니다. ●이 기사에 대한 저작권, 판권 등 지적재산권은 서울신문의 소유입니다. 무단 전재, 복사, 저장, 전송, 개작 등은 관련법으로 금지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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