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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계 인맥 대해부 (4부)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풍산그룹] 유로화 등 세계 60여개국 35억명 풍산이 만든 소전 사용

    [재계 인맥 대해부 (4부)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풍산그룹] 유로화 등 세계 60여개국 35억명 풍산이 만든 소전 사용

    반세기에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풍산그룹은 ‘동전과 총알의 왕국’으로 통한다. 구리를 가공해 동 및 동합금, 동파이프, 소전(素錢·동전의 소재) 등 다양한 신동(伸銅) 제품을 생산하는 종합신동회사이지만 각종 탄약류를 제조하는 방위산업 전문 기업으로도 유명하다. 풍산은 오는 2018년 창립 50주년을 맞아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소재 등을 주력으로 하는 글로벌 첨단 소재 전문 기업으로 도약한다는 포부다. 풍산은 1968년 10월 고 류찬우 창업주가 설립한 신동(구리 가공 산업)업체인 풍산금속공업주식회사가 모태다. 경북 청송에서 나서 대구공립직업학교(현 대구공고)를 졸업한 고 류 창업주가 일본으로 건너가 무역으로 번 돈 1000만 달러를 전액 투자해 만들었다. 전문 인력도, 기술도, 자본도 없었지만 사업보국의 기치 아래 전기·전자, 반도체, 자동차, 조선, 원자력, 건축 등 산업 전 부문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소재의 국산화를 이룩한 것이다. 풍산은 1969년 인천 효성동에 연산 4만t 규모의 국내 최초 현대식 신동공장을 준공함으로써 국내 신동산업의 닻을 올렸다. 1980년에는 온산 신동공장을 준공, 한국을 세계적인 신동 강국의 대열에 진입시켰다. 1992년 미국 아이오와주에 PMX인더스트리를 설립해 연산 12만t 규모의 신동공장을 가동시킨 것은 물론 태국, 홍콩, 중국 등지에도 현지법인과 공장을 속속 설립해 명실공히 세계 3대 신동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또 풍산이 만드는 동전의 재료인 소전은 세계 시장의 60%를 차지하는 한국 대표 수출 상품이다. 1970년 한국조폐공사로부터 소전 생산 업체로 지정돼 국내 주화용 소전을 전량 납품한 풍산은 1973년 대만에 소전을 수출하면서 세계 소전 시장의 강자로 우뚝 섰다. 1997년 유럽의 경쟁업체들을 누르고 유럽연합(EU) 각국에 유로화용 소전을 공급하는 등 현재 해외 60여개국 35억 인구가 풍산이 만든 소전을 쓰고 있다. 신동과 소전 분야의 성과도 혁혁하지만 풍산의 오늘을 있게 한 것은 국내에서 독점적인 방위산업과 관련이 깊다. 1973년 정부로부터 탄약제조업체로 지정돼 국내 유일한 종합탄약공장인 안강공장을 건립했고, 1982년에는 육군 조병창까지 인수해 부산 동래공장을 운영했다. 풍산은 5.56㎜ 소구경탄약에서부터 대공포탄, 박격포탄, 함포탄, 전차포탄, 곡사포탄 등 우리 군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탄약을 만들어 납품한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국내 방산 수출 1위 업체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방산 부문 매출은 지난해 기준 풍산 전체 매출의 33%인 8000억원에 육박하는데 이 중 해외 수출이 35%가량을 차지한다. 최근에는 탄약뿐 아니라 기술과 플랜트까지 수출할 정도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미주 지역에 경기 및 수렵용 스포츠탄을 PMC라는 자체 브랜드로 수출하고 있다. 반면 정경유착으로 방위산업을 키웠다는 꼬리표도 따라다닌다. 1982년 전두환 정권 당시 지금의 부산공장 자리인 국방부 조병창 부지를 불하받은 것이 대표적이다. 고 류 창업주가 전두환 정권에 당시 30억원도 넘는 정치자금을 댄 사실 때문에 5공 청문회에 불려나가 국회의원이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부터 수모를 당한 사건은 지금도 회자된다. 하지만 풍산이 세계 3대 신동기업과 굴지의 방산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점에서 권력 특혜 시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시각도 있다. 풍산은 1999년 2세대인 류진 회장으로 조타수가 바뀐 이후 힘찬 걸음을 내딛고 있다. 2008년 창립 40주년을 맞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며 기업지배구조를 변경했다. 이어 2011년에는 비철금속 업계 최초로 풍산기술연구원을 개원했으며, 충정로 신사옥에 새롭게 입주하는 등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꾸준히 사세를 키우고 있다. 다만 최근에는 구리 값 등 국제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영업이익이 줄어드는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풍산의 매출은 2010년 3조 610억원에서 2014년 3조 2734억원으로 증가한 반면,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2967억원에서 1701억원으로 줄었다. 신동사업부문은 원자재인 구리 가격에 큰 영향을 받는데 구리 가격이 떨어지면 수익 역시 떨어진다. 풍산그룹은 다가오는 2018년 창립 50주년을 맞아 전기차 커넥터 등 미래 산업 발전에 필요한 새로운 핵심소재 개발에 역량을 집중,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목표다. 풍산 측은 “글로벌 핵심소재 개발 업체로 거듭나기 위해 글로벌 생산기지와 해외 판매망을 확충하고 선진업체와의 전략적 제휴, 과감한 설비투자와 기술혁신 등을 추진하고 있다”면서 “방산부문에서도 미래의 디지털 환경에 대비한 다기능 정밀 스마트 탄약을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부고] ‘의문사’ 최종길 교수 부인 백경자씨

    1973년 유신 시절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 의문사한 최종길(당시 43세) 전 서울대 법대 교수의 부인 백경자씨가 지난 24일 오후 별세했다. 80세. 백씨는 최 전 교수가 사망한 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및 최종길교수고문치사진상규명및명예회복추진위 등에서 활동하며 남편 사망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백씨 등 유족은 2002년 국가권력의 불법 가혹 행위에 의해 최 전 교수가 사망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고, 2006년 서울고법은 “국가가 유족에게 18억 48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백씨는 유산의 대부분을 최 전 교수 추모기금으로 천주교 인권위원회에 기부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발인은 26일 오전 10시 30분. 백씨는 마석모란공원에서 최 전 교수와 합장된다. 최선을 기자 csunell@seoul.co.kr
  • [나우! 지구촌] 노숙자로 살다 사망한 ‘미스 베네수엘라’의 비극

    [나우! 지구촌] 노숙자로 살다 사망한 ‘미스 베네수엘라’의 비극

    한 때 나라를 대표했던 미인이 지난 15년 간 공원 노숙자로 살다 객사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최근 베네수엘라 현지언론이 지성과 미모를 겸비했던 한 여인의 굴곡진 인생을 보도해 안타까움을 주고있다. 한 편의 비극적인 드라마같은 삶을 살다간 주인공은 다마리아 루이즈(68). 그녀는 최근 수도 카라카스의 한 공원에서 사망한 채 발견돼 병원 영안실에 안치됐다. 가족도 찾아오지 않는 한 노숙자의 죽음에 관심이 모아진 것은 놀랍게도 그녀가 지난 1973년 '미스 베네수엘라 대회'에 출전한 미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녀는 '미스 수크레'로 선발된 후 이 지역을 대표해 '미스 베네수엘라 대회'에 나설만큼 빼어난 미모와 몸매를 자랑했다. 또한 그녀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엘리트이기도 했다. 이처럼 지성과 미모를 모두 갖춘 덕에 언론의 조명을 받은 그녀였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법률가로서의 삶 대신 유명세를 이용해 홈메이드 악세서리 사업을 시작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특히 문제는 그녀의 오빠. 지난 2005년 현지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루이즈는 "함께 살던 오빠가 질투가 심해 나에게 조금의 자유도 허락하지 않았다" 면서 "자주 때리고 학대해 친구도 제대로 만날 수 없었다"고 털어논 바 있다. 결국 그녀는 학대 사실을 경찰에 신고했으나 나아지는 것은 전혀 없었다. 이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가출로, 지난 2000년 무작정 집을 나와 이때부터 길거리를 떠돌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녀는 가족과 연락을 끊고 노숙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같은 사연이 지난 2005년 잠시 언론 인터뷰로 주목 받았으나 다시 잊혀진 인물이 됐다. 2년 전 부터 공원에서 그녀와 대화를 나눴다는 한 지인은 "가족 혹은 친구의 도움없이 자신을 옥죄여 온 '올가미'를 벗어 던지기 힘들었을 것" 이라면서 "정말로 똑똑하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는데 비참하게 인생이 끝났다"고 밝혔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장준하 선생의 6000리 항일투쟁 여정기

    장준하 선생의 6000리 항일투쟁 여정기

    돌베개/장준하 지음/돌베개/460쪽/1만6000원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나는 붓글씨 한 자 한 획을 그을 때마다 손에 힘을 넣었고 그 힘은 나의 신념에서 솟아 흘렀다.” 장준하(1918~1975) 선생이 자신의 항일 기록을 서술한 수기 ‘돌베개’가 개정 출간됐다. 책은 단 2년간의 체험이 중심이다. 일제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4년 7월, 장준하가 중국 쉬저우(徐州)의 일본군 쓰카다 부대를 탈출한 뒤 6000리 먼 길을 7개월에 걸쳐 걸어서 충칭(重慶)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갈 때까지의 대장정과, 광복을 맞아 1945년 11월 임시정부가 환국할 때까지의 상황을 담았다. 제목 ‘돌베개’는 성서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야곱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장준하가 결혼 일주일 만에 떠나온 아내에게 준 일군(日軍) 탈출의 암호였다. 그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륙에 발을 옮기며 내가 벨 ‘돌베개’를 찾는다”는 편지를 보내고 쓰카다 부대를 탈출했다. 돌베개를 베고 중원을 걸었던 장준하의 고된 여정은 그러나 해방 조국에 돌아와서도 끝나지 않았다. 근본을 알 수 없는 인사들이 광복군 모자 하나 얻어 쓰고 광복군입네 행세하는 “적반하장의 세상”이 되어버린 광복 조국에서 그는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부조리와 싸웠다. 하지만 “현대사는 독립을 위해 이름 없이 피 뿜고 쓰러진 주검 위에서 칼을 든 자들을 군림시켰”고, 그는 “그 불쌍한 선열들 앞에 이 증언을 바람의 묘비로 띄우고자” 돌베개를 펴냈다. 책은 전면 개정판이다. 1971년 4월 첫 출간에 이어 1973년 시공사에서 나온 제3판을 원본으로 삼고, 이를 지난해 3월에 나온 다른 출판사의 개정판과 대조해 오류와 누락 부분을 바로잡았다. 예컨대 원문에는 김준엽의 일군 탈출 시기가 장준하 일행보다 ‘5개월’ 앞섰다고 되어 있으나 김준엽은 3월 29일, 장준하는 7월 7일 탈출했으므로 관련 자료에 따라 ‘3개월’로 수정했다. 6000리 역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상세한 지도와 다양한 컬러도판, 주요 등장인물 소개 등이 더해진 것도 새 개정판의 특징이다. 장준하 선생은 책 머리말 끝자락에 “살아서 50대 초반을 보내며 잠자리가 편치 않음을 괴로워한다”고 썼다. 참담한 운명을 예견한 걸까. 그는 1975년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2012년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두개골에 타격의 흔적이 발견됐고, 이후 그의 사망원인이 실족추락사가 아닌 타살이었다는 게 확인됐지만 여태 진상은 규명되지 않고 있다. 영면의 잠자리조차 편안하지 않은 셈이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노숙자로 살다 객사한 한 ‘미스 베네수엘라’의 비극

    노숙자로 살다 객사한 한 ‘미스 베네수엘라’의 비극

    한 때 나라를 대표했던 미인이 지난 15년 간 공원 노숙자로 살다 객사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최근 베네수엘라 현지언론이 지성과 미모를 겸비했던 한 여인의 굴곡진 인생을 보도해 안타까움을 주고있다. 한 편의 비극적인 드라마같은 삶을 살다간 주인공은 다마리아 루이즈(68). 그녀는 최근 수도 카라카스의 한 공원에서 사망한 채 발견돼 병원 영안실에 안치됐다. 가족도 찾아오지 않는 한 노숙자의 죽음에 관심이 모아진 것은 놀랍게도 그녀가 지난 1973년 '미스 베네수엘라 대회'에 출전한 미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녀는 '미스 수크레'로 선발된 후 이 지역을 대표해 '미스 베네수엘라 대회'에 나설만큼 빼어난 미모와 몸매를 자랑했다. 또한 그녀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엘리트이기도 했다. 이처럼 지성과 미모를 모두 갖춘 덕에 언론의 조명을 받은 그녀였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법률가로서의 삶 대신 유명세를 이용해 홈메이드 악세서리 사업을 시작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특히 문제는 그녀의 오빠. 지난 2005년 현지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루이즈는 "함께 살던 오빠가 질투가 심해 나에게 조금의 자유도 허락하지 않았다" 면서 "자주 때리고 학대해 친구도 제대로 만날 수 없었다"고 털어논 바 있다. 결국 그녀는 학대 사실을 경찰에 신고했으나 나아지는 것은 전혀 없었다. 이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가출로, 지난 2000년 무작정 집을 나와 이때부터 길거리를 떠돌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녀는 가족과 연락을 끊고 노숙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같은 사연이 지난 2005년 잠시 언론 인터뷰로 주목 받았으나 다시 잊혀진 인물이 됐다. 2년 전 부터 공원에서 그녀와 대화를 나눴다는 한 지인은 "가족 혹은 친구의 도움없이 자신을 옥죄여 온 '올가미'를 벗어 던지기 힘들었을 것" 이라면서 "정말로 똑똑하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는데 비참하게 인생이 끝났다"고 밝혔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新국토기행] 경남 남해군

    [新국토기행] 경남 남해군

    경남 남해군은 남해안의 중심에 있는 섬으로 이뤄졌다. 남해도와 창선도를 비롯해 크고 작은 올망졸망한 섬과 높고 낮은 산, 아름다운 해안선 등 한려수도의 비경과 어우러진 풍광이 보석처럼 아름다워 보물섬으로 불린다. 본섬인 남해도는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이다. 주민 대부분이 남해도와 창선도에 산다. 두 섬에 딸린 작은 유·무인도는 모두 79개다. 1973년 6월 남해대교가 건설돼 육지인 하동군과 연결됐다. 고려~조선시대에는 남도의 유배 섬 가운데 한 곳이었다. 절해고도에 갇혀 유배생활을 했던 선비들은 귀양살이의 아픔과 외로움을 글을 쓰며 견뎠다. 자암 김구의 ‘화전(남해 옛 이름)별곡’, 서포 김만중의 ‘구운몽’, 유의양의 ‘남해견문록’ 등이 탄생했다. 김만중은 노도에서 1689년부터 3년간 유배생활을 하다 1692년 55세로 생을 마쳤다. 남해대교 양편에는 노량(梁)리라는 같은 지명이 있다. 귀양 온 선비들에게 남해와 하동 사이를 갈라 놓은 바다 물결은 이슬방울로 이뤄진 다리처럼 보여 더욱 향수에 젖게 했다. 그래서 노량으로 불리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1980년에 남해도와 창선도를 잇는 창선교가, 2003년 창선도와 삼천포를 잇는 창선·삼천포 대교가 건설되면서 남해안 관광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다. >>볼거리 ●기암괴석 즐비한 금산… 원효대사가 꼭대기에 ‘보리암’ 창건 기암괴석이 곳곳에 솟아 있는 금산(해발 705m)의 절경을 직접 보면 소금강이나 남해의 금강으로 불리는 이유를 알게 된다. 하나하나 전설을 간직한 천태만상의 기묘한 바위군과 남쪽으로 펼쳐진 바다가 어우러진 비경은 장관이다. 원래 이름은 보광산이었다. 원효대사가 신라 문무왕 3년(663년)에 산꼭대기 부근에 보광사(현 보리암)를 창건하면서 유래됐다. 금산이란 이름은 이성계가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기 전 보광산을 찾아 임금이 되게 해달라고 100일 기도를 하면서 뜻이 이뤄지면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왕이 된 이성계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산 이름을 비단 금(錦)자를 써 금산으로 지었다. 금산에는 제1경인 쌍홍문을 비롯해 38경이 있다. 꼭대기에서 보는 일출은 장엄하고 환상적이지만 변화무쌍한 날씨가 구경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3년 동안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고 한다. 정상에 있는 보리암은 강화도 보문사, 낙산사 홍련암과 함께 3대 기도처로 꼽힌다. ● 육지 관광객들 발길이 절로~ 남해대교와 창선·삼천포대교 설천면 노량리와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를 잇는 남해대교는 길이 660m로 1973년 6월 22일 개통됐다. 건설 당시 동양 최대 현수교로 1968년 착공해 5년여 만에 완공됐다. 남해군은 육지에서 접근이 편리해지면서 관광지로 빠르게 발전했다. 개통된 뒤 한동안 관광객들이 전국에서 줄을 이었다. 1983년에는 미스코리아 수영복 사진을 남해대교를 배경으로 촬영하기도 했다. 당시 미스코리아 진에 뽑힌 임미숙씨는 “남해대교에서 수영복을 입고 사진 찍다 감기에 걸렸다”고 밝히기도 했다. 왕복 2차로인 남해대교는 늘어나는 교통량을 소화하지 못해 옆에 새로운 대교가 건설되고 있다. 남해 창선도와 삼천포 사이 바다에도 길이 3.4㎞의 창선·삼천포 대교가 건설돼 2003년 4월 28일 개통됐다. 단항교, 창선대교, 늑도대교, 초양대교, 삼천포대교 등 각기 다른 모양의 교량 5개가 늑도, 초량섬, 모개섬 등 3개의 섬을 이어주고 있다. 이 다리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될 정도로 경관이 아름답다. ●하얗고 부드러운 모래사장에 울창한 송림 품은 상주은모래비치 반달형으로 생긴 백사장 길이가 2㎞에 이른다. 수심이 얕고 완만한 데다 물이 깨끗하고 따듯해 어린이들도 안전하게 물놀이를 즐길 수 있다. 모래가 하얗고 부드럽다. 뒤쪽으로 금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울창한 송림이 모래밭을 감싸고 있다. 앞쪽 먼바다에 있는 나무섬과 돌섬이 파도를 막아 주기 때문에 해수욕장 물결이 천연호수처럼 잔잔하다. 여름에는 100만명 이상이 찾는다. 겨울에는 전지훈련 온 선수들의 운동 장소로 이용된다. ●비탈진 급경사 100여층 계단을 보는 듯… 가천마을 다랑이 논 남면 홍현리 가천마을 앞 바닷가 비탈 급경사지에 계단처럼 층층이 조성된 논이다. 구불구불하게 생긴 논이 바다에 닿는 곳까지 100여층을 이룬다. 주민들이 한 뼘의 땅도 놀리지 않고 얼마나 많은 노력과 정성을 쏟아 농사를 짓는지 보여 주는 농업 현장이다. 2005년 1월 명승 제15호로 지정됐다. 다랑이 논 뒤쪽으로 설흘산과 응봉산이 둘러싸여 있고 앞쪽으론 바다가 펼쳐진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바닷가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생긴 것으로 꼽히는 암수 미륵바위(경남도 민속자료 제13호)가 있다. ●이순신 장군의 혼이 서린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지 고현면 차면리 관음포 앞바다는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곳이라고 해 이락파(李落波)라고 불린다.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왜군이 쏜 유탄에 맞아 숨을 거두면서 아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적의 기세가 오를 것을 걱정해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유언했다. 이순신 장군의 유해가 최초로 육지에 오른 관음포에는 장군의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한 유적지(사적 제232호)가 조성됐다. 제사를 지내는 사당 이락사가 있고 충무공유허비와 충무공묘비각 등이 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은퇴 후 안식처로 삼은 독일마을 독일에서 광부와 간호사를 하다 은퇴한 교포들을 위해 군이 삼동면 물건리에 독일풍으로 조성한 마을이다. 교포들은 독일에서 건축자재를 들여와 독일건축 양식으로 빨간 지붕에 하얀 벽으로 된 주택을 지었다. 물건항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34채가 있다. 1960~70년대 가난했던 시절 돈을 벌기 위해 독일로 갔던 광부와 간호사 출신 60~80대 주민 18가구 20여명이 산다. 마을 뒤쪽에는 지난해 6월 문을 연 남해파독전시관이 있다. ●김만중 등 남해 유배객 6명의 작품을 소개한 유배문학관 유배와 유배문학에 관한 자료를 전시해 놓은 국내 최초의 전시관이다. 남해읍에 있다. 향토역사실, 유배문학실, 유배체험실, 남해유배문학실 등으로 꾸며졌다. 유배문학실에서는 세계 유배의 역사와 문학을 살펴볼 수 있고 남해유배문학실에는 김만중을 비롯한 남해 유배객 6명과 주요 작품 등을 소개해놨다. >>먹거리 ●단단한 육질에 비린내 없는 남해 죽방렴 멸치 바다물살이 센 삼동면과 창선면 사이 지족해협에서 원시어업 방식인 죽방렴을 이용해 잡는 멸치다. 우리나라 최고급 멸치로 생산량이 많지 않아 구하기 어렵다. 죽방렴은 수심이 얕은 바다에 참나무로 된 기둥을 ‘V’자 모양으로 박은 뒤 대나무를 그물처럼 엮어 놓은 고정 어로시설이다. 중간에 설치한 통발 속으로 밀물 때 고기가 들어가고 썰물 때는 입구가 막혀 들어간 고기가 빠져나가지 못한다. 지족해협에 수십개가 설치돼 있다. 명승 제71호다. 죽방렴 어장은 시설과 면허가 제한된다. 죽방으로 잡는 멸치는 그물로 잡는 멸치보다 비늘이나 몸체에 상처가 없어 신선하다. 물살이 센 곳에서 자라 육질이 단단하며 기름기가 적고 비린내가 없다. 삼동면과 미조면 주변에는 멸치회와 멸치쌈밥, 멸치구이 전문 음식점들이 많다. 청정바다 남해에서 갓 잡은 멸치로 요리한 회, 통멸치로 찌개를 끓여 쌈을 싸서 먹는 쌈밥 등을 한번 먹어본 사람들은 그 맛을 잊지 못해 다시 찾는다. ●최적의 바닷바람과 햇살 속에서 자라 고품질 자랑하는 남해 마늘 남해군은 대표적인 항암식품으로 꼽히는 마늘의 주산지다. 마늘은 강한 냄새를 제외하고는 100가지 이로움이 있다고 하여 일해백리(一害百利) 식품으로도 부른다. 하루에 마늘 한 쪽을 꾸준히 먹으면 암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늘을 구워도 영양가에는 변화가 없어 먹기에 좋고 소화와 흡수도 잘된다. 남해군 토질은 물이 잘 빠지는 사암이 많고 토양 무기질 가운데 칼슘과 칼륨 농도가 다른 지역보다 높아 마늘을 재배하는 데 알맞다. 토양 산도도 적합해 바닷바람과 햇살 속에서 자란 남해 마늘은 전국 최고 품질로 인정받는다. 남해 마늘은 칼륨과 칼슘, 당도가 높고 조직이 치밀하다. 씨알도 굵고 오래 저장할 수 있다. 남해 마늘로 만든 흑마늘과 흑마늘 엑기스도 인기가 있다. ●부드러운 육질에 지방산·필수아미노산이 풍부한 남해 한우 남해군은 오염원이 없는 섬 지역으로 산소량이 많고 오존층이 두껍다. 한우도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조건이다. 남해한우는 철저한 족보 관리로 태어난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송아지를 사육한다. 남해축산업협동조합과 남해한우영농조합법인은 한우혈통번식우 단지를 운영해 송아지를 생산한다. 수송아지는 거세해 2년간 사육한 뒤 체중 600㎏이 넘으면 출하한다. 고기가 부드럽고 지방산과 필수아미노산이 풍부한 남해한우는 전국 각종 품평회에서 최고급 한우로 인정받고 있다. ●짙은 맛과 향기 품은 남해 유자, 입맛 돋우고 숙취 해소까지 남해군에선 최고 품질의 유자가 생산된다. 맛과 향기가 짙고 당도가 높다. 가격이 높지만 품질이 뛰어나 인기가 있다. 7300여 농가에서 600여㏊에 유자를 재배, 1년에 700여t을 생산한다. 유자는 비타민C가 레몬보다 3배 많다. 헤스페리딘 성분은 모세혈관을 튼튼하게 한다. 식욕을 돕고 숙취를 풀어주며 기침을 삭이는 효과가 있다. 몸의 노폐물도 내보낸다. 술과 차 원료로 널리 쓰인다. 남해 유자는 11월에 수확한다. 잘게 썰어 설탕에 재어 유자청을 만들어 판매하기도 한다. 인기를 끌면서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유자가 남해 유자로 둔갑하는 사례도 있다. 남해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세상 감싸 안은 노화가의 동심

    세상 감싸 안은 노화가의 동심

    굵은 붓으로 자유롭게 그은 선은 새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물고기일 수도 있겠다. 아이들이 그린 것처럼 천진함이 묻어나는 그림 속에서 물체들은 생명력이 넘친다. 자연적인 소재를 독특한 표현방식과 기법으로 재해석해 내는 화가 노은님(69)의 개인전이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독일 함부르크와 프랑크푸르트 인근의 미헬슈타트, 미국 LA를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 중인 작가는 4년 만에 서울에서 갖는 이번 전시회에서 자신의 신작과 도자기, 모빌 설치 등 60여점을 선보인다. 1946년 전주에서 태어난 노은님은 1970년 파독간호사로서 독일로 이주했다. 함부르크의 병원에서 중환자,행려병자 등을 보살피는 간호보조원으로 일하면서 향수를 달래기 위해 그림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감기에 걸려 출근을 하지 못하게 된 그의 집을 방문한 병원 간호장이 우연히 쌓여 있던 그림을 보게 됐다. 이를 계기로 병원 한쪽에서 전시회를 열게 됐고 1973년 27살의 나이에 국립함부르크미술대학에 진학해 칸딘스키의 직계 제자인 티만 교수로부터 그림 지도를 받으며 6년간 수학했다. 시에서 장학금을 받고,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도 참여하면서 작품활동을 하던 노은님은 1990년 함부르크 조형미술대학의 교수직을 맡아 2010년까지 학생들을 가르쳤다. 내면적이고 정신적인 에너지를 품은 노은님의 그림은 규격화된 미술 교육을 받은 이들의 그림과는 사뭇 다르다. 함부르크에 있는 19세기에 지어진 알토나 요한니스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에서 노은님은 물, 공기, 흙, 불이라는 4대원소를 통해 모든 생물이 함께 공존하는 공간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화랑에서 만난 작가는 “이번에 발표한 신작 가운데 ‘봄’은 뉴욕에 있는 지인이 목 디스크로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짐처럼 느껴진다는 그의 머리를 생각하며 점을 찍고, 그 점에서 선들이 이어져 나와 순식간에 완성했다”고 설명했다. ‘내게 긴 두 팔이 있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을 안아주고 싶다’는 개인전 제목은 노은님이 제18회 KBS 해외동포상 문화예술 부문을 수상하며 밝힌 소감에서 가져왔다. 전시는 31일까지.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태권도 한민족”… 남북 화합의 하이킥

    “태권도 한민족”… 남북 화합의 하이킥

    남한과 북한의 태권도가 통합을 향한 힘찬 첫발을 내디뎠다. 북한이 주도하는 국제태권도연맹(ITF)은 13일 러시아 첼랴빈스크 트락토르 아레나에서 열린 2015 세계태권도연맹(WTF) 세계선수권대회 개회식에서 시범 공연을 펼쳤다. WTF 주관 대회에 ITF가 참가한 것은 1966년 ITF, 1973년 WTF 창설 이후 처음이다. 두 단체 모두 통합과 화합을 향한 역사적인 상징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공연은 남북이 태권도 발전을 위한 의향서에 서명한 뒤 이뤼진 첫 번째 실천이다. 조정원 WTF 총재와 북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인 장웅 ITF 총재는 지난해 8월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의향서에 사인했다. 의향서는 WTF와 ITF에 속한 선수들이 두 단체가 주최하는 대회와 행사에 교차 출전할 수 있도록 했다. 이날 ITF와 WTF 시범단은 20분씩 공연에 나서 1000루블(약 2만 2000원)에서 1500루블(약 3만 2000원)을 주고 7000석을 가득 메운 관중을 매료시켰다. 남·북한의 태권도는 같은 뿌리임에도 그동안 각기 다른 길을 걸어왔다. WTF 태권도는 올림픽 스포츠로서 변화를 거듭해왔고, ITF 태권도는 비교적 무도 태권도의 원형을 유지하면서 발전했다. 양측 시범에서도 이 같은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13명의 북한 선수와 러시아, 체코 출신 각 2명 등 모두 17명으로 꾸려진 ITF 시범 선수들은 힘과 절도 있는 동작을 바탕으로 다소 투박하지만 순수한 모습을 선보였다. 단원의 가슴과 배에 각목을 내리치는 등 차력에 가까운 장면도 연출했다. 무도 태권도의 원형을 유지한 모양새다. 이에 견줘 WTF 시범은 스토리가 있는 한편의 공연이었다. 웅장하면서도 경쾌한 음악에 화려한 조명까지 깔리면서 극적인 요소를 강화했다. WTF와 ITF 공연은 기본 동작 등에서 차이가 없어 결국 뿌리는 하나임을 감추지 못했다. 장웅 총재의 불참으로 기자회견에 대신 나선 황호용 수석 부총재는 “다른 길을 걸어온 두 단체가 통합을 위해 지난 10년 넘게 기울인 노력의 결실”이라면서 “태권도가 신뢰하는 길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라고 말했다. 조정원 총재는 “이번 교류는 태권도가 진정 하나 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면서 “WTF는 세계(W) 태권도(T) 패밀리(F)의 뜻이 있고 IOC 정신과 평화에 기여하는 특별한 의미도 있다”고 강조했다. 김민수 선임기자 kimms@seoul.co.kr
  • [포토] 1968억에 팔린 피카소 ‘알제의 여인들’ 실물 모습

    [포토] 1968억에 팔린 피카소 ‘알제의 여인들’ 실물 모습

    20세기 미술 거장 파블로 피카소(1881∼1973년)와 스위스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가 세계 미술품 경매 역사를 새로 썼다. 피카소의 유화 ‘알제의 여인들’(Les Femmes d’Alger)은 11일(현지시간) 밤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7936만5000 달러(한화 1968억 1721만원)에 낙찰돼 기존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경신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4부)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태영그룹] 친구 투자받아 300만원으로 건설사 설립… 방송사업으로 확장

    [재계 인맥 대해부 (4부)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태영그룹] 친구 투자받아 300만원으로 건설사 설립… 방송사업으로 확장

    이동녕 의원이 정계를 은퇴한 1970년부터 미륭건설 등에 다니던 윤세영 회장은 1973년 태영개발주식회사를 설립했다. 태영(泰榮)이라는 이름은 서울고 동기 동창으로 투자자가 돼 준 정태근씨의 태(泰)자와 강백영씨의 영(榮)자를 한 자씩 따와 지은 것이다. 돈 문제가 얽히더라도 우정은 변치 말자는 일종의 묵계였다. 당시 창업 자금은 300만원. 하지만 회사가 커지면서 서로 불신이 쌓이게 됐고 결국 윤 회장은 어음 등을 발행해 친구들의 지분을 모두 인수하며 동업을 접었다. 창업 3년 만에 위기는 찾아왔다. 초기 모자란 자금 탓에 남의 회사 건설장비를 빌리는 편법으로 면허를 딴 것이 화근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정부 실사에 그는 면허가 취소될 위기에 처했다. 당시 정계에 끈을 대 가까스로 면허취소를 막았다. 이 과정에서 윤 회장은 ‘원칙’과 ‘정직’이라는 두 가지 큰 교훈을 얻었다. 두 단어는 윤 회장이 지금까지 내세우는 인생 철학이기도 하다. 창업 이후 5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당시 도급순위 606위인 영세 건설사에 돈이 되는 공사를 맡기는 이는 없었다. 일단 창덕궁 보수공사 등 문화재 보수공사를 따내 근근이 버텼다. 윤 회장에게도 기회는 왔다. 1977년 선유수원지 공사와 1981년 가락지구 토지구획정리 사업을 수주했다. 게다가 1980년도 후반부터는 전국에 건설 붐이 일었다.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 특수로 정부 발주 공사도 눈에 띄게 늘었다. 1980년대 후반에는 용인 CC 등 골프장 건설사업에 손을 댔다. 때가 되면 사무실을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만 했던 회사는 여의도에 사옥을 지을 수 있을 만큼 커졌다. 당시만 해도 여의도 사옥이 훗날 SBS의 첫 터전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1989년 태영은 도급순위 1군 건설사에 오르면서 기업공개를 하게 됐다. 1990년도에 들어서 태영은 사업 다각화에 나섰다. 기존 정수처리장과 하수처리장 건설사업을 넘어 고속도로, 교량, 지하철, 신도시기반시설, 항만시설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점차 공공사업 등이 줄어든다는 점을 감안해 주택과 민간 부문으로 영역을 넓혀 나갔다. 사업 다각화의 하이라이트는 방송사업 진출이다. 윤 회장은 1990년 9월 10일 정부의 방송법 개정에 맞춰 민방 설립신청을 했다. 당시 정부·여당은 기존 KBS와 MBC 외 민간 방송사 설립을 허가하는 방송법 개정을 추진했다. 정국은 시끄러웠다. 당장 야당 소속 문공위원들은 방송구조 개편을 내각제 개헌을 통한 장기 집권의 음모라고 비판했다. 언론학 교수 61명도 성명을 통해 민방 도입과 공영방송에 대한 법적 통제 강화에 반대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결국 방송법 개정안은 여야 정치권의 난상토론 끝에 몇 가지 독소조항을 제외하고 국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논란은 이어졌다. 같은 해 10월 31일 태영이 민방 사업자로 선정되자 일각에서 특혜 의혹을 제기했다. 당시 태영은 국민에겐 낯설고 작은 회사였다. 민방사업에 도전장을 던진 이들 중에는 농심, 인켈, 중소기업중앙회, CBS, 일진 등 쟁쟁한 기업이 적지 않았다. 태영의 주력 사업인 건설 분야는 방송과 연관성이 없다는 지적도 일었다. 이듬해 3월 라디오방송을 시작한 SBS 서울방송은 같은 해 12월 9일 TV 전파를 처음 송출하게 된다. 유영규 기자 whoami@seoul.co.kr
  • “선생님 덕에 자란 저희, 은혜 갚고자 무대 오릅니다”

    “선생님 덕에 자란 저희, 은혜 갚고자 무대 오릅니다”

    스승의 날을 앞두고 제자들이 대장암으로 투병 중인 피아니스트 스승의 쾌유를 비는 음악회를 연다. 경남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 교수를 지낸 정송자(72·여)씨의 제자들이 오는 13일 오후 7시 30분 창원 3·15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5월의 사랑음악회’를 개최한다. 제자들은 음악회 팸플릿의 모시는 글을 통해 “선생님의 헌신과 노력으로 저희들은 음악을 평생의 반려자로 삼아 음악가, 교사, 교수가 됐다”면서 “받았던 사랑을 조금이라도 돌려 드리고 싶어 무대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음악회에 피아노 연주자로 나서는 황정선·김보람씨를 비롯해 이들과 협연을 하는 경남오케스트라 지휘자 이동호씨 등은 정씨의 직계 제자다. 또 정씨의 제자들이 키운 제자들도 피아노 연주에 참여한다. 정씨의 딸로 바이올리니스트인 곽안나 백석대학교 교수도 연주자로 나선다. 정씨는 1960년대 말부터 마산동중학교와 진해여고 교사, 음대 교수, 피아노 연주자로 활동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1960~70년대 지방에서 피아노를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손꼽을 정도로 귀했다. 당시 마산에서 피아노를 배웠거나 음대에 진학한 학생들 가운데 정씨로부터 레슨을 받은 음악도가 많다. 1973년부터 27년간 경남대 음악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길러낸 피아노 전공 제자만 80여명에 이른다. 경남대 음악교육과 1회 졸업생인 전희주(64·여)씨는 “레슨비를 내지 못하는 학생들에게도 선생님은 성심껏 피아노를 가르쳐 주셨고 학생들을 집으로 초대해 점심을 먹이면서까지 강의를 할 정도로 열정적이셨다”고 회상했다. 정씨는 개인 독주회를 열거나 마산음악협회 회장을 맡아 경남오페라단 창단에 참여하는 등 지역문화예술 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정씨는 2009년 대장암 진단을 받은 뒤 6년째 투병 중이다. 요즘도 한달에 한번 서울로 가 항암치료를 받는다. 정씨 제자들은 “선생님이 우리 곁에서 오래오래 영원한 멘토가 돼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씨는 “제자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면 병이 나을 수 있을 것 같다”며 고마워했다. 창원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44년 전 헤어진 쌍둥이 찾아주세요” 前주한미군 SNS 110만 차례 SOS

    “44년 전 헤어진 쌍둥이 찾아주세요” 前주한미군 SNS 110만 차례 SOS

    주한미군 출신의 한 백인 남성이 44년 전 헤어진 쌍둥이 자녀를 찾는 기구한 사연이 미 NBC방송에 소개되면서 온라인 공간을 달구고 있다. 한국 여성과 결혼해 낳은 아이들은 미국에 입양된 뒤 종적을 감춘 상태다. NBC는 5일(현지시간) 앨런 토머스란 이 남성이 1967년 낳은 이란성 쌍둥이인 아들 제임스와 딸 샌디아를 찾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사연은 앞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페이스북을 통해 무려 110만 차례나 회자됐고, 아이들의 행적을 쫓기 위한 온라인 모임에는 2만 5000여명이 가입했다. 방송에 따르면 토머스는 18세 때 군에 입대해 한국으로 파견됐고 이곳에서 두 자녀를 얻었다. 하지만 군에서 본국 복귀 명령이 내려졌고 미국행을 거부한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귀국하지 못했다. 토머스는 1971년 휴가차 한국에 들러 아이들과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다. 1973년 다른 여성과 결혼한 그는 뒤늦게 아이들이 미국에 입양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쌍둥이 찾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토머스는 이 같은 사연이 페이스북을 통해 알려지면서 방송 전파를 타게 됐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말로, 그의 발 닿는 곳마다 다른 바람이 불다

    말로, 그의 발 닿는 곳마다 다른 바람이 불다

    앙드레 말로 평전/장 라쿠튀르 지음/김화영 옮김/김영사/652쪽/2만 5000원 ‘인간의 조건’, ‘정복자’ 등 문학사에 길이 남은 걸작을 남긴 뛰어난 문인이자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의 측근으로 문화부 장관을 지낸 프랑스의 대표 지성 앙드레 말로(1901~1976)는 “나의 모든 소설 중 최고의 소설은 바로 나의 삶”이라고 했다. “오직 나 개인에게만 중요한 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겠는가”라며 문학, 미술, 탐험, 전쟁, 영화, 정치를 종횡무진했던 ‘행동하는 지식인’의 삶이 얼마나 드라마틱했는지를 웅변하는 말이다. ‘르몽드’와 ‘누벨옵세르바퇴르’지 등 프랑스 유수의 언론 매체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했던 대기자이자 전기작가로 확고한 명성을 쌓은 장 라쿠튀르가 펴낸 ‘앙드레 말로 평전’이 불문학자 김화영 고려대 명예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됐다. 말로가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인 1973년 초판이 발행된 평전은 1982년 김 명예교수의 번역으로 처음 소개됐으나 출판했던 홍성사가 문을 닫아 오랫동안 절판됐었다. 평전은 무엇보다도 말로가 그 누구보다 위대한 작가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의 삶과 문학, 사유와 행동의 궤적을 저널리스트이자 역사가의 관점에서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다. 거칠고 밀도 짙었던 말로의 삶을 하나의 작품처럼 재구축해 보여 준 라쿠튀르는 말한다. “그가 다녀온 지평에서는 항상 바람이 다르게 분다.” 20세기가 첫발을 내디딘 1901년 파리 몽마르트르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10대에 1차 세계대전의 격동을 맞이한 말로는 파리에서의 댄디 생활을 털고 인도차이나, 스페인, 소련, 오리엔트의 사막 등 광대한 지역에서 벌어진 치열한 모험 속으로 몸을 던졌다. 희귀본을 찾아내 판매하며 출판사 기획자로, 집필자로 활동하던 그는 스무살 때 이국에 대한 호기심에 프랑스령인 인도차이나 반도로 향한다. 고대 앙코르와트 사원의 조각을 밀반출하려다 도굴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프랑스 지식인들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난다. 하지만 감옥에서 식민 지배에 심한 혐오감을 느낀 그는 열렬한 반식민주의자가 됐다. 1924년 프랑스로 돌아오던 길에 중국에 들른 말로는 사회주의혁명의 소용돌이를 직접 목격한다. 1933년 장제스가 공산당을 탄압한 상하이 쿠데타를 무대로 한 소설 ‘인간의 조건’을 발표해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수상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나치 수용소를 그린 ‘모멸의 시대’로 전체주의를 비판한 그는 1936년 스페인내전이 일어났을 때는 직접 가담해 싸웠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쓴 ‘희망’에서 스페인의 파시즘을 고발한다. 2차 세계대전 중에 프랑스 레지스탕스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전선에서 샤를 드골 장군을 만났다. 드골 장군의 첫 번째 내각에서 공보장관을 지냈으며 1959년부터 10년간 드골 내각에서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그는 1969년 드골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자 함께 은퇴했다. 1976년 만성 폐출혈로 파리에서 생을 마감한 말로는 1996년 서거 20주기를 맞아 프랑스 최고의 국가유공자들만 안장된 파리 판테온 사원에 유해가 안장됐다. 김 명예교수는 해제에서 “소용돌이치는 역사적 사건들 속으로 몸을 던진 말로는 인류의 복지와 건전한 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정치가가 아니다”라며 “말로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을 치열한 모험을 통해 초극하는 것이었다”고 전한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11년의 ‘썸’ 사진 27만장의 추억 “굿바이 어스”

    11년의 ‘썸’ 사진 27만장의 추억 “굿바이 어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무인 수성 탐사선 ‘메신저’호가 11년간의 임무를 마치고 1일 새벽 폭발로 최후를 맞았다. NASA는 “1일 오전 4시 26분(한국시간) 연료가 소진된 메신저호가 수성의 중력에 이끌려 표면에 충돌해 폭발하면서 임무를 마쳤다”고 밝혔다. NASA는 “메신저호는 시속 1만 4081㎞의 속도로 수성에 충돌하면서 지름 16m 정도 되는 구덩이 형태의 흔적(크레이터)을 남겼다”면서 “이는 인류가 수성에 남기는 최초의 발자취”라고 말했다. ●시속 1만㎞로 충돌… 지름 16m 흔적 남겨 메신저호는 인류가 발사한 두 번째 수성 탐사선이면서 수성 궤도를 돌며 임무를 수행한 첫 번째 탐사선이다. 최초의 수성 탐사선은 NASA가 1973년 발사한 ‘마리너’ 10호지만 1974년과 1975년 수성의 근처에만 접근했을 뿐 제대로 된 관측을 하지는 못했다. 메신저호는 2004년 8월 발사돼 6년 7개월 동안 78억 9000㎞를 비행한 끝에 2011년 3월 수성 궤도에 진입했다. 메신저호가 수성에 도착하기까지 6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 이유는 지구와 금성 등의 중력을 이용해 탐사선의 궤도를 조정하는 ‘플라이 바이’ 항법을 이용해 수성에 천천히 접근했기 때문이다. 수성은 태양 가까이에서 빠른 속도로 공전하고 있기 때문에 수성을 향해 직접 탐사선을 발사할 경우 자칫 태양의 거대한 중력권 안으로 빨려 들어가 임무 수행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해 메신저호는 발사 뒤 태양을 중심으로 15바퀴를 돌면서 지구와 금성, 수성을 모두 6차례 근접 통과하는 과정을 거친 뒤 수성 궤도에 진입했다. 무게 500㎏에 너비 2m, 높이 2.5m 크기인 메신저호는 지표면을 원격 근접 촬영하기 위한 두 대의 카메라와 레이저 고도계, 자력계, 분광계 등 7대의 장비를 탑재해 수성의 비밀을 풀어냈다. ●지구 출발 뒤 6년 만에 수성과 만나 메신저호가 지구로 보내온 사진은 27만 7000장에 이른다. 과학자들은 메신저호가 보내온 사진과 각종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수성의 극 지역에 얼음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또 수성 내부에 철로 구성된 핵이 있으며 탄소를 포함한 유기물이 있다는 사실도 메신저호를 통해 처음 알려졌다. 메신저호 미션을 기획해 이끌어 온 NASA의 션 솔로몬 박사는 “메신저호 덕분에 인류는 미지의 행성인 수성의 모습이 다채롭고 황홀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됐다”고 말했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4부)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애경그룹] 평범한 주부… 국내 1호 여성 CEO… 매출 5조 그룹 키워내

    [재계 인맥 대해부 (4부)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애경그룹] 평범한 주부… 국내 1호 여성 CEO… 매출 5조 그룹 키워내

    “아이들이 클 때까지 아버지의 유업을 잘 지키고 있다가 성년이 되면 물려주리라. 애경을 내가 맡아 아이들과 똑같이 건실하게 성장시키리라.” 장영신(79) 애경그룹 회장이 자서전 ‘밀알 심는 마음으로’에서 밝힌 속마음이다. 국내 1호 여성 최고경영자(CEO), 터프우먼 마담 장(張), 여걸 등 걸출한 여성 경영인을 나타내는 온갖 수식어가 붙는 이가 바로 장 회장이다. 장 회장은 남편인 고 채몽인 애경그룹 창업주가 남긴 작은 생활용품 기업을 현재 매출액 5조 6000억원대의 생활용품, 유통, 항공, 부동산 기업으로 변신시킨 주역이다. 장 회장의 CEO로서 경력이 곧 애경의 역사다. 애경그룹은 무역회사인 대륭산업(1945년 설립)이 전신이지만 비누 제조업으로 출발했던 애경유지공업주식회사의 설립일인 1954년 6월 9일을 창립기념일로 삼고 있다. 장 회장은 1970년 막내아들(채승석 애경개발 사장)을 낳은 지 사흘 만에 남편을 심장마비로 떠나보낸 뒤 1주기가 끝난 1972년부터 경영에 참여했다. 장 회장의 나이 36세 되던 해다. 장 회장이 경영참여를 선언하자 시댁과 친정은 물론 회사 임원들까지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 회사가 LG그룹의 모태인 비누제조사 락희화학과 경쟁을 벌이며 사업 확대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장 회장이 경영 문외한인 데다 여성의 사회활동을 보기 어려웠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장 회장은 남편의 회사를 성장시켜 자녀들에게 전해주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장 회장은 남편이 계획만 했던 석유화학 원료제조 분야를 애경의 미래 지표로 삼았다. 생활용품 산업에는 한계가 있지만 본격적인 화학공업은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 장 회장의 대학 전공이 화학이었던 점도 한몫했다. 1970년부터 애경유화, 애경화학 등 기초화학 관련 회사를 속속 설립했고 이 분야는 지금까지도 애경에서 매출 비중 40% 이상을 차지하는 주력 사업군이다. 위기도 있었다. 1973년 1차 석유파동으로 직격탄을 맞은 삼경화성(1970년 설립한 무수프탈산 제조사로 현재의 애경유화)이 공장을 가동한 지 1년도 안 돼 원료공급이 중단될 위기를 맞았다. 이때 장 회장은 한국에 파견돼 있던 걸프사의 미국인 사장을 만나 물물교환 중개를 요청했고 미국인 사장은 “그런 일을 왜 우리에게 부탁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장 회장은 “삼경화성은 한국의 석유화학사업 발전에 크게 기여할 기업이다. 한국의 석유화학사업이 발전해야 걸프사에도 이익이 될 게 아닌가”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결국 걸프사의 주선으로 원료를 차질 없이 공급받아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때 큰 위기를 모면한 삼경화성은 연 매출 1조원을 넘는 현재의 애경유화가 됐다. 장 회장은 남편이 설립한 애경유지공업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83년 중앙연구소를 설립해 생활용품사업의 기반을 다졌고 미국 취스브로 폰즈사와는 화장품 제조 관련 기술제휴를 맺고 1984년 애경폰즈를 설립해 화장품 사업에 진출했다. 이런 투자와 노력으로 생활용품기업 애경산업이 탄생했다. 장 회장은 경영일선에 있는 동안 ‘나인(9) 투(to) 파이브(5)’ 원칙을 지켰다. 매일 오전 5시 기상과 함께 조간신문을 읽고 그날 하루의 주요 업무를 계획하는 것을 시작으로 관청과 은행이 문을 여는 오전 9시 이전까지 새 사업이나 프로젝트 기획, 결재업무를 모두 처리했다. ‘여장부’ 장 회장의 어린 시절은 부유했다. 그는 1936년 7월 22일 서울에서 아버지 고 장회근씨와 어머니 고 문금조씨의 4남4녀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일본 와세다대에서 영문과를 졸업한 대지주의 아들, 어머니도 당시 일본 귀족학교인 쓰다여대 영문과를 나온 재원이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4남 4녀 모두 공부를 잘했다. 장 회장의 큰오빠인 고 장윤옥씨는 감사원 5국장까지 지냈고 미국으로 이민 간 큰언니 장영옥씨는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둘째 오빠인 고 장성돈 전 애경유지 사장은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했다. 셋째 오빠 고 장위돈씨는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정치담당특별보좌관, 이집트 총영사, 에콰도르 대사를 지내는 등 이력이 화려하다. 장 회장은 어린 시절 부유했지만 광복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 경기여중을 졸업하고 경기여고에 재학 중이던 장 회장은 외국어 재능을 인정받아 전액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1955년 미국 필라델피아 체스넛 힐 대학 화학과에 진학했다. 이때 다져진 영어실력과 화학에 대한 이해는 지금의 애경을 키우는 자산이 됐다. 장 회장은 직함은 회장이지만 2004년부터 경영에서 손을 뗀 상태다. 장 회장은 6년 전쯤 유방암에 걸린 뒤 현재 건강 관리에 집중하고 있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4부)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대성그룹] 독실한 기독교 가문에 자유연애… 종교만남서 인연 맺은 혼맥

    [재계 인맥 대해부 (4부)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대성그룹] 독실한 기독교 가문에 자유연애… 종교만남서 인연 맺은 혼맥

    독실한 기독교 가문인 대성그룹의 혼맥은 종교적인 만남 속에 인연을 찾은 경우가 많다. 정략결혼보다는 비교적 자유로운 연애 속에 때때로 실속 있는 재계 간 혼사들이 이어진다. 대성그룹 창업주 고 해강(海崗) 김수근 명예회장은 1916년 대구에서 부친 김두윤(작고), 모친 기묘임(작고)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복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대구상고를 중퇴하고 당시 일본 기업이었던 삼국석탄 대구지점에 취직했다. 이후 1940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일본대학 법학부를 수석 졸업했다. 7세 연하인 여귀옥(작고) 여사와는 26세인 1942년에 결혼했다. 여 여사는 대구 남산교회에서 만났다. 모친 기씨의 마음에 든 여 여사는 당시 신명여고를 졸업해 평양여자신학교를 수료한 명망가 집안의 고명딸이었던 터라 김 명예회장은 결혼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여 여사는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 한국지부 회장을 맡기도 했다. 59년간 동고동락했던 부부는 2001년 김 명예회장이 세상을 뜨고 5년 뒤 여 여사도 생을 마감하면서 하늘의 연으로 이어졌다. 두 사람은 4남 3녀를 뒀다. 4남 영철씨는 1973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6남매는 전원 명문대 졸업에 2개 이상 석사 학위 소지자여서 자식 농사를 잘 지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장남 영대(법학과 수석 졸업), 차남 영민(사학과), 3남 영훈(행정학과), 장녀 영주(미대)씨는 모두 서울대 출신이다. 차녀 정주씨는 이화여대 영문학과(수석 입학·졸업), 3녀 성주씨는 연세대 신학과와 미국 애머스트대 사회학과를 나왔다. 장남 김영대(73) 대성산업 회장은 어머니 친구의 소개로 1971년 검사 출신 변호사 차영조 변호사의 딸 정현(66)씨와 혼사를 맺었다. 정현씨는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정한, 인한, 신한씨 3형제가 있다. 장남 김정한(43) 라파바이오 사장은 1997년 서울 덕수교회에서 대원외교 동창인 전성은(42)씨와 화촉을 밝혔다. 전씨는 뉴잉글랜드 음대를 졸업하고 예일대 음대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 그녀의 부친 전경호 서한모방 회장은 김 회장과 경북사대부고 동창이다. 둘은 1남 1녀를 뒀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차남 김인한(42) 콜로라도대 정치학과 교수는 대학 캠퍼스 커플이다. 평범한 가문의 같은 과 후배인 이내리(37)씨와 2002년 서울 덕수교회에서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이 둘 있다. 3남 김신한(40) 대성산업가스 사장은 미국 유학 중 지인의 소개로 만난 한조희(34)씨와 신앙생활을 함께하며 1년간 교제하다 2006년 서울 온누리교회에서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한씨는 주유소업체 중앙에너비스 한상렬 사장의 딸이다. 한씨는 결혼 3개월 전인 그해 3월 창업주의 미망인이자 시조모인 여 여사의 상중일 때부터 대성가 며느리 역할을 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두 사람은 세 아들을 낳았다. 차남 김영민(70) 서울도시가스 회장은 1979년 친지의 소개로 서울대 성악과를 나온 민명옥(65)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민씨의 부친은 민유봉 전 유화증권 사장이다. 김 회장 부부는 은혜(35), 요한(33), 종한(26)씨 등 2남 1녀를 뒀다. 장남 김요한 서울도시가스 부사장만 결혼했다. 3남 김영훈(63) 대성그룹 회장은 1993년 박영창 목사의 소개로 김홍도 금란교회 목사의 차녀인 김정윤(46)씨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17살 차이를 극복하고 사랑에 성공했다. 슬하에는 의한(21), 은진(18), 의진(15)과 늦둥이 은정(5) 등 1남 3녀가 있다. 김영훈 회장은 경기고 동문인 김한(61) 광주은행장과 서울대 동창인 신희택(63) 서울대 법대 교수와 절친한 사이다. 장녀 김영주(67) 대성그룹 부회장은 1975년 서울대 의대 출신의 내과 전문의 신현정(70)씨와 연을 맺었다. 신씨는 개인병원을 운영한 뒤 현재 그룹 계열사인 대성에너지 제1·2·3서비스 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신정희(40), 신명철(38)씨 등 1남 1녀가 있다. 벤처사업 캐피탈을 하고 있는 장남 신명철 킹스베이캐피탈 공동 창업자는 변호사 권순혜(34)씨와 결혼해 온유(5), 민유(2) 두 딸을 두고 있다. 권씨는 호주 퀸즐랜드대 법학과를 나온 호주 변호사로 전 이건산업 사장이었던 권주혁 동원그룹 상임고문의 딸이다. 김 부회장은 화가이자 인테리어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차녀 김정주(66) 대성홀딩스 공동대표이사는 하버드대 신약학 박사 출신으로 2013년까지 연세대 신학대에서 신약학을 강의했다. 지금은 대성그룹 계열사인 출판사 대성도 운영하고 있다.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 수석부회장으로 독신이다. 막내딸은 대한적십자사 총재인 김성주(59) 성주그룹 회장이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세계기록 도전하는 인도판 라푼젤, 모발 길이는?

    세계기록 도전하는 인도판 라푼젤, 모발 길이는?

    25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은 기네스 세계 신기록에 도전하고자 머리카락을 기르는 ‘스미타 스리바스타바(Smita Srivastava·37)’라는 인도 여성의 사연을 소개했다.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 알라하바드에 사는 스리바스타바의 현재 모발 길이는 2.1미터. 앞서 스리바스타바는 1.8미터의 모발 길이로 인도판 기네스북인 ‘림카 북 오브 레코드(Limca Book of Records)’에 이름을 올린 바 있다. 스리바스타바는 “쇼핑을 갈 때면 사람들이 몰려와 어떻게 머리를 길게 기를 수 있느냐고 물어온다”며 “내 머리카락을 가짜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다가와 내 머리를 직접 만져보기도 한다. 그러나 진짜라는 것을 곧 알게 된 사람들은 행운아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며 자랑스러워 했다. 하지만 스리바스타바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기네스 세계 기록(Guinness World Record)에 이름을 올리고자 계속 머리를 기르고 있다. ‘가장 긴 머리카락 여성(Longest head hair:female)’이라는 타이틀로 현재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된 여성은 중국의 ‘시에 치우핑(Xie Qiuping)’으로, 1973년부터 꾸준히 길러온 머리카락으로 지난 2004년 모발길이 5,627미터의 신기록을 세운 바 있다. 세계 기록에 비하면 스리바스타바의 모발 길이는 매우 짧은 편. 그러나 어릴 때부터 계속된 스리바스타바의 도전과 열정에 가족들 또한 지원을 아끼고 있지 않다고 한다. 한편, 스리바스타바는 석유 제품 홍보대사와 지역 미인대회 심사위원을 겸해 활동하고 있다. 사진·영상=RuptlyTV/유튜브 김형우 인턴기자 hwkim@seoul.co.kr
  • 42년 만에… 핵연료 저농축·재처리 길 열렸다

    42년 만에… 핵연료 저농축·재처리 길 열렸다

    그동안 미국의 사전동의 규정 등에 묶여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사용후핵연료의 저농축과 재처리가 가능해질 전망이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측면에서 핵 주권을 일부 찾았다는 실리를 챙기면서도 미국이 우려하는 비확산의 문제도 해결했다는 평가다. 한국과 미국은 22일 박노벽 외교부 한·미원자력협정 개정협상 전담대사와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가 이날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한·미원자력협정 가서명식을 갖고 이같이 합의했다. 40여쪽 분량으로 구성된 이번 협정은 2010년 10월 공식협상 개시 후 약 4년 6개월 만에 타결된 것이다. 특히 1973년 발효된 기존 협정 이후 42년 만에 내용 상당수가 바뀌었다. 협정문에는 우선 원전 연료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 차관급을 위원으로 하는 고위급위원회에서 합의를 거쳐 미국산 우라늄을 20% 미만으로 저농축할 수 있게 했다. 20%는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규정한 저농축의 기준선이다. 또 사용후핵연료의 재처리와 관련, 양국이 공동 연구 중인 파이로프로세싱(건식 재처리) 연구를 공동 진행키로 했다. 이 때문에 핵 연료의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를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이른바 ‘골드 스탠더드’는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 한·미 양국과 원자력 협정을 체결한 제3국에 대해서는 우리 원자력 수출업계가 미국의 동의를 받을 필요 없이 미국산 핵물질이나 원자력 장비, 물품 등을 자유롭게 재이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동안 전량 수입에 의존했던 암 진단용 방사성동위원소(몰리브덴-99)도 미국산 우라늄을 이용해 국내에서 안정적으로 생산하고 이를 수출할 수 있는 근거도 마련했다. 기존 41년이었던 협정 유효 기간도 20년으로 대폭 단축했다. 또 협정 만료 2년 전에 어느 한쪽이 연장 거부를 통보하지 않으면 1회에 한해 5년 연장될 수 있도록 했다. 이번 협정은 양국의 가서명에 이어 1~2개월 후 정식서명, 미 의회 비준과 국회 보고 등을 거쳐 기존 협정의 유효기간인 내년 3월 이전에 정식 발효될 것으로 보인다. 리퍼트 대사는 “새로운 협정은 한·미 간의 깊은 파트너십과 강력한 동맹에 어울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중남미 4개국을 순방 중인 박근혜 대통령은 “우리의 실질적 국익이 최대한 반영된 것으로 평가한다”고 밝혔다고 청와대는 전했다. 이제훈 기자 parti98@seoul.co.kr 원유빈 인턴기자 jwyb12@seoul.co.kr
  • 73년전 난파선에서 ‘550억 원어치 보물’ 발견

    73년전 난파선에서 ‘550억 원어치 보물’ 발견

    1942년 인도 붐베이(현재의 뭄바이)에서 영국으로 향하던 중 침몰한 배 안에서 3400만 파운드어치의 은화가 발견됐다고 BBC 등 영국 언론이 15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영국 소유의 이 증기여객선은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아프리카 서해안의 영국령 섬인 세인트헬레나에서 독일 잠수함 어뢰에 의해 격침된 뒤 가라앉았다. 최근 영국의 보물탐사업체는 최신 음파탐지기 및 로봇 등을 이용해 수심 5150m 지점에서 난파선을 찾았으며, 배와 함께 가라앉아있던 보물들을 건져 올리는데 성공했다. 이 배 안에서는 시가로 3400만 파운드, 한화로 약 550억 원에 달하는 은화가 발견됐다. 당시 영국 재무부 소유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 해양학자 20여 명과 함께 탐사를 이끈 업체 DOS(Deep Ocean Search)의 관계자는 “수심 5000m 아래를 탐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는 타이타닉이 발견된 지점보다 1372m 가량 더 깊은 곳”이라면서 “배는 두동강 난 상태로 해저 모래에 파묻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배의 일부는 수 미터에 달하는 진흙에 완전히 묻혀 있기도 했다”면서 “우리는 최첨단 로봇을 이용해 난파선의 이미지를 확보한 뒤 음파탐지기 자료 등을 통해 은화가 있는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 배가 침몰할 당시 증기선 내부에는 승객과 승무원 302명이 타고 있었으며, 6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구명보트로 옮겨 타는데 성공했다. 이후 3주에 걸쳐 구조가 진행됐지만 104명은 구조를 기다리다 결국 숨졌다. BBC는 이 난파선의 탐사 작업이 이미 2013년 9월 완료됐지만 영국 정부의 요청에 의해 공식 발표를 미루다 최근에서야 이를 공개했다고 전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경남기업 15일 주식시장서 퇴출

    수장이 떠난 경남기업이 15일 주식시장에서 퇴출된다. 국내 건설사 가운데 처음으로 증시에 상장된 지 42년 만이다. 해외자원개발 사업의 실패에 따른 적자 전환과 이에 따른 자본 잠식이 결정적 이유로 분석됐다. 1994년 주당 22만 5000원까지 치솟았던 경남기업의 주식은 14일 113원으로 곤두박질쳤다. 검찰의 자원외교 비리 의혹과 관련해 집중 수사를 받던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지 불과 6일 만에 벌어진 일이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경남기업은 지난달 11일 자본전액 잠식설에 대한 한국거래소의 조회공시 요구에 자본 완전잠식 상태임을 공시했다. 이어 지난달 30일 제출한 2014사업연도 감사보고서에서 ‘감사의견 거절 및 자본 전액 잠식’이 확인됨에 따라 상장폐지가 결정됐다. 경남기업은 이날까지 정리매매를 거쳐 15일자로 상장이 폐지, 1973년 2월 기업공개에 나선 이후 주식시장에서 사라진다. 지난해 경남기업은 9106억원의 매출을 올렸지만 영업이익 -2616억원, 당기순손실 -3549억원을 기록했다. 1951년 8월 대구에 세워진 경남기업은 굴곡진 역사를 지녔다. 1954년 경남토건에서 경남기업으로 사명을 바꾸고 시공능력 순위 20위권에 달하는 중견 건설회사로 성장했다. 1977년 서울 반포 경남아파트를 시작으로 ‘경남 아너스빌’ 브랜드로 명성을 떨쳤다. 1987년 대우그룹 계열사로 편입됐다가 1999년 워크아웃과 함께 2000년 재분리됐다. 이후 2004년 대아건설을 흡수합병하고 경남정보기술을 설립하는 등 사세를 키웠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국내외 건설 경기 침체로 어려움에 처했고 2009년 채권단이 또다시 워크아웃을 결정하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노무현, 이명박 정부 때 적극 참여했던 해외자원개발 사업이 잇따라 실패,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2013년 세 번째 워크아웃을 신청했고 급기야 지난 7일 처음으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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