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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권도 한민족”… 남북 화합의 하이킥

    “태권도 한민족”… 남북 화합의 하이킥

    남한과 북한의 태권도가 통합을 향한 힘찬 첫발을 내디뎠다. 북한이 주도하는 국제태권도연맹(ITF)은 13일 러시아 첼랴빈스크 트락토르 아레나에서 열린 2015 세계태권도연맹(WTF) 세계선수권대회 개회식에서 시범 공연을 펼쳤다. WTF 주관 대회에 ITF가 참가한 것은 1966년 ITF, 1973년 WTF 창설 이후 처음이다. 두 단체 모두 통합과 화합을 향한 역사적인 상징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공연은 남북이 태권도 발전을 위한 의향서에 서명한 뒤 이뤼진 첫 번째 실천이다. 조정원 WTF 총재와 북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인 장웅 ITF 총재는 지난해 8월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의향서에 사인했다. 의향서는 WTF와 ITF에 속한 선수들이 두 단체가 주최하는 대회와 행사에 교차 출전할 수 있도록 했다. 이날 ITF와 WTF 시범단은 20분씩 공연에 나서 1000루블(약 2만 2000원)에서 1500루블(약 3만 2000원)을 주고 7000석을 가득 메운 관중을 매료시켰다. 남·북한의 태권도는 같은 뿌리임에도 그동안 각기 다른 길을 걸어왔다. WTF 태권도는 올림픽 스포츠로서 변화를 거듭해왔고, ITF 태권도는 비교적 무도 태권도의 원형을 유지하면서 발전했다. 양측 시범에서도 이 같은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13명의 북한 선수와 러시아, 체코 출신 각 2명 등 모두 17명으로 꾸려진 ITF 시범 선수들은 힘과 절도 있는 동작을 바탕으로 다소 투박하지만 순수한 모습을 선보였다. 단원의 가슴과 배에 각목을 내리치는 등 차력에 가까운 장면도 연출했다. 무도 태권도의 원형을 유지한 모양새다. 이에 견줘 WTF 시범은 스토리가 있는 한편의 공연이었다. 웅장하면서도 경쾌한 음악에 화려한 조명까지 깔리면서 극적인 요소를 강화했다. WTF와 ITF 공연은 기본 동작 등에서 차이가 없어 결국 뿌리는 하나임을 감추지 못했다. 장웅 총재의 불참으로 기자회견에 대신 나선 황호용 수석 부총재는 “다른 길을 걸어온 두 단체가 통합을 위해 지난 10년 넘게 기울인 노력의 결실”이라면서 “태권도가 신뢰하는 길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라고 말했다. 조정원 총재는 “이번 교류는 태권도가 진정 하나 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면서 “WTF는 세계(W) 태권도(T) 패밀리(F)의 뜻이 있고 IOC 정신과 평화에 기여하는 특별한 의미도 있다”고 강조했다. 김민수 선임기자 kimms@seoul.co.kr
  • [포토] 1968억에 팔린 피카소 ‘알제의 여인들’ 실물 모습

    [포토] 1968억에 팔린 피카소 ‘알제의 여인들’ 실물 모습

    20세기 미술 거장 파블로 피카소(1881∼1973년)와 스위스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가 세계 미술품 경매 역사를 새로 썼다. 피카소의 유화 ‘알제의 여인들’(Les Femmes d’Alger)은 11일(현지시간) 밤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7936만5000 달러(한화 1968억 1721만원)에 낙찰돼 기존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경신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4부)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태영그룹] 친구 투자받아 300만원으로 건설사 설립… 방송사업으로 확장

    [재계 인맥 대해부 (4부)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태영그룹] 친구 투자받아 300만원으로 건설사 설립… 방송사업으로 확장

    이동녕 의원이 정계를 은퇴한 1970년부터 미륭건설 등에 다니던 윤세영 회장은 1973년 태영개발주식회사를 설립했다. 태영(泰榮)이라는 이름은 서울고 동기 동창으로 투자자가 돼 준 정태근씨의 태(泰)자와 강백영씨의 영(榮)자를 한 자씩 따와 지은 것이다. 돈 문제가 얽히더라도 우정은 변치 말자는 일종의 묵계였다. 당시 창업 자금은 300만원. 하지만 회사가 커지면서 서로 불신이 쌓이게 됐고 결국 윤 회장은 어음 등을 발행해 친구들의 지분을 모두 인수하며 동업을 접었다. 창업 3년 만에 위기는 찾아왔다. 초기 모자란 자금 탓에 남의 회사 건설장비를 빌리는 편법으로 면허를 딴 것이 화근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정부 실사에 그는 면허가 취소될 위기에 처했다. 당시 정계에 끈을 대 가까스로 면허취소를 막았다. 이 과정에서 윤 회장은 ‘원칙’과 ‘정직’이라는 두 가지 큰 교훈을 얻었다. 두 단어는 윤 회장이 지금까지 내세우는 인생 철학이기도 하다. 창업 이후 5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당시 도급순위 606위인 영세 건설사에 돈이 되는 공사를 맡기는 이는 없었다. 일단 창덕궁 보수공사 등 문화재 보수공사를 따내 근근이 버텼다. 윤 회장에게도 기회는 왔다. 1977년 선유수원지 공사와 1981년 가락지구 토지구획정리 사업을 수주했다. 게다가 1980년도 후반부터는 전국에 건설 붐이 일었다.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 특수로 정부 발주 공사도 눈에 띄게 늘었다. 1980년대 후반에는 용인 CC 등 골프장 건설사업에 손을 댔다. 때가 되면 사무실을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만 했던 회사는 여의도에 사옥을 지을 수 있을 만큼 커졌다. 당시만 해도 여의도 사옥이 훗날 SBS의 첫 터전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1989년 태영은 도급순위 1군 건설사에 오르면서 기업공개를 하게 됐다. 1990년도에 들어서 태영은 사업 다각화에 나섰다. 기존 정수처리장과 하수처리장 건설사업을 넘어 고속도로, 교량, 지하철, 신도시기반시설, 항만시설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점차 공공사업 등이 줄어든다는 점을 감안해 주택과 민간 부문으로 영역을 넓혀 나갔다. 사업 다각화의 하이라이트는 방송사업 진출이다. 윤 회장은 1990년 9월 10일 정부의 방송법 개정에 맞춰 민방 설립신청을 했다. 당시 정부·여당은 기존 KBS와 MBC 외 민간 방송사 설립을 허가하는 방송법 개정을 추진했다. 정국은 시끄러웠다. 당장 야당 소속 문공위원들은 방송구조 개편을 내각제 개헌을 통한 장기 집권의 음모라고 비판했다. 언론학 교수 61명도 성명을 통해 민방 도입과 공영방송에 대한 법적 통제 강화에 반대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결국 방송법 개정안은 여야 정치권의 난상토론 끝에 몇 가지 독소조항을 제외하고 국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논란은 이어졌다. 같은 해 10월 31일 태영이 민방 사업자로 선정되자 일각에서 특혜 의혹을 제기했다. 당시 태영은 국민에겐 낯설고 작은 회사였다. 민방사업에 도전장을 던진 이들 중에는 농심, 인켈, 중소기업중앙회, CBS, 일진 등 쟁쟁한 기업이 적지 않았다. 태영의 주력 사업인 건설 분야는 방송과 연관성이 없다는 지적도 일었다. 이듬해 3월 라디오방송을 시작한 SBS 서울방송은 같은 해 12월 9일 TV 전파를 처음 송출하게 된다. 유영규 기자 whoami@seoul.co.kr
  • “선생님 덕에 자란 저희, 은혜 갚고자 무대 오릅니다”

    “선생님 덕에 자란 저희, 은혜 갚고자 무대 오릅니다”

    스승의 날을 앞두고 제자들이 대장암으로 투병 중인 피아니스트 스승의 쾌유를 비는 음악회를 연다. 경남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 교수를 지낸 정송자(72·여)씨의 제자들이 오는 13일 오후 7시 30분 창원 3·15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5월의 사랑음악회’를 개최한다. 제자들은 음악회 팸플릿의 모시는 글을 통해 “선생님의 헌신과 노력으로 저희들은 음악을 평생의 반려자로 삼아 음악가, 교사, 교수가 됐다”면서 “받았던 사랑을 조금이라도 돌려 드리고 싶어 무대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음악회에 피아노 연주자로 나서는 황정선·김보람씨를 비롯해 이들과 협연을 하는 경남오케스트라 지휘자 이동호씨 등은 정씨의 직계 제자다. 또 정씨의 제자들이 키운 제자들도 피아노 연주에 참여한다. 정씨의 딸로 바이올리니스트인 곽안나 백석대학교 교수도 연주자로 나선다. 정씨는 1960년대 말부터 마산동중학교와 진해여고 교사, 음대 교수, 피아노 연주자로 활동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1960~70년대 지방에서 피아노를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손꼽을 정도로 귀했다. 당시 마산에서 피아노를 배웠거나 음대에 진학한 학생들 가운데 정씨로부터 레슨을 받은 음악도가 많다. 1973년부터 27년간 경남대 음악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길러낸 피아노 전공 제자만 80여명에 이른다. 경남대 음악교육과 1회 졸업생인 전희주(64·여)씨는 “레슨비를 내지 못하는 학생들에게도 선생님은 성심껏 피아노를 가르쳐 주셨고 학생들을 집으로 초대해 점심을 먹이면서까지 강의를 할 정도로 열정적이셨다”고 회상했다. 정씨는 개인 독주회를 열거나 마산음악협회 회장을 맡아 경남오페라단 창단에 참여하는 등 지역문화예술 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정씨는 2009년 대장암 진단을 받은 뒤 6년째 투병 중이다. 요즘도 한달에 한번 서울로 가 항암치료를 받는다. 정씨 제자들은 “선생님이 우리 곁에서 오래오래 영원한 멘토가 돼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씨는 “제자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면 병이 나을 수 있을 것 같다”며 고마워했다. 창원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44년 전 헤어진 쌍둥이 찾아주세요” 前주한미군 SNS 110만 차례 SOS

    “44년 전 헤어진 쌍둥이 찾아주세요” 前주한미군 SNS 110만 차례 SOS

    주한미군 출신의 한 백인 남성이 44년 전 헤어진 쌍둥이 자녀를 찾는 기구한 사연이 미 NBC방송에 소개되면서 온라인 공간을 달구고 있다. 한국 여성과 결혼해 낳은 아이들은 미국에 입양된 뒤 종적을 감춘 상태다. NBC는 5일(현지시간) 앨런 토머스란 이 남성이 1967년 낳은 이란성 쌍둥이인 아들 제임스와 딸 샌디아를 찾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사연은 앞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페이스북을 통해 무려 110만 차례나 회자됐고, 아이들의 행적을 쫓기 위한 온라인 모임에는 2만 5000여명이 가입했다. 방송에 따르면 토머스는 18세 때 군에 입대해 한국으로 파견됐고 이곳에서 두 자녀를 얻었다. 하지만 군에서 본국 복귀 명령이 내려졌고 미국행을 거부한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귀국하지 못했다. 토머스는 1971년 휴가차 한국에 들러 아이들과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다. 1973년 다른 여성과 결혼한 그는 뒤늦게 아이들이 미국에 입양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쌍둥이 찾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토머스는 이 같은 사연이 페이스북을 통해 알려지면서 방송 전파를 타게 됐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말로, 그의 발 닿는 곳마다 다른 바람이 불다

    말로, 그의 발 닿는 곳마다 다른 바람이 불다

    앙드레 말로 평전/장 라쿠튀르 지음/김화영 옮김/김영사/652쪽/2만 5000원 ‘인간의 조건’, ‘정복자’ 등 문학사에 길이 남은 걸작을 남긴 뛰어난 문인이자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의 측근으로 문화부 장관을 지낸 프랑스의 대표 지성 앙드레 말로(1901~1976)는 “나의 모든 소설 중 최고의 소설은 바로 나의 삶”이라고 했다. “오직 나 개인에게만 중요한 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겠는가”라며 문학, 미술, 탐험, 전쟁, 영화, 정치를 종횡무진했던 ‘행동하는 지식인’의 삶이 얼마나 드라마틱했는지를 웅변하는 말이다. ‘르몽드’와 ‘누벨옵세르바퇴르’지 등 프랑스 유수의 언론 매체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했던 대기자이자 전기작가로 확고한 명성을 쌓은 장 라쿠튀르가 펴낸 ‘앙드레 말로 평전’이 불문학자 김화영 고려대 명예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됐다. 말로가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인 1973년 초판이 발행된 평전은 1982년 김 명예교수의 번역으로 처음 소개됐으나 출판했던 홍성사가 문을 닫아 오랫동안 절판됐었다. 평전은 무엇보다도 말로가 그 누구보다 위대한 작가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의 삶과 문학, 사유와 행동의 궤적을 저널리스트이자 역사가의 관점에서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다. 거칠고 밀도 짙었던 말로의 삶을 하나의 작품처럼 재구축해 보여 준 라쿠튀르는 말한다. “그가 다녀온 지평에서는 항상 바람이 다르게 분다.” 20세기가 첫발을 내디딘 1901년 파리 몽마르트르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10대에 1차 세계대전의 격동을 맞이한 말로는 파리에서의 댄디 생활을 털고 인도차이나, 스페인, 소련, 오리엔트의 사막 등 광대한 지역에서 벌어진 치열한 모험 속으로 몸을 던졌다. 희귀본을 찾아내 판매하며 출판사 기획자로, 집필자로 활동하던 그는 스무살 때 이국에 대한 호기심에 프랑스령인 인도차이나 반도로 향한다. 고대 앙코르와트 사원의 조각을 밀반출하려다 도굴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프랑스 지식인들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난다. 하지만 감옥에서 식민 지배에 심한 혐오감을 느낀 그는 열렬한 반식민주의자가 됐다. 1924년 프랑스로 돌아오던 길에 중국에 들른 말로는 사회주의혁명의 소용돌이를 직접 목격한다. 1933년 장제스가 공산당을 탄압한 상하이 쿠데타를 무대로 한 소설 ‘인간의 조건’을 발표해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수상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나치 수용소를 그린 ‘모멸의 시대’로 전체주의를 비판한 그는 1936년 스페인내전이 일어났을 때는 직접 가담해 싸웠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쓴 ‘희망’에서 스페인의 파시즘을 고발한다. 2차 세계대전 중에 프랑스 레지스탕스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전선에서 샤를 드골 장군을 만났다. 드골 장군의 첫 번째 내각에서 공보장관을 지냈으며 1959년부터 10년간 드골 내각에서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그는 1969년 드골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자 함께 은퇴했다. 1976년 만성 폐출혈로 파리에서 생을 마감한 말로는 1996년 서거 20주기를 맞아 프랑스 최고의 국가유공자들만 안장된 파리 판테온 사원에 유해가 안장됐다. 김 명예교수는 해제에서 “소용돌이치는 역사적 사건들 속으로 몸을 던진 말로는 인류의 복지와 건전한 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정치가가 아니다”라며 “말로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을 치열한 모험을 통해 초극하는 것이었다”고 전한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11년의 ‘썸’ 사진 27만장의 추억 “굿바이 어스”

    11년의 ‘썸’ 사진 27만장의 추억 “굿바이 어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무인 수성 탐사선 ‘메신저’호가 11년간의 임무를 마치고 1일 새벽 폭발로 최후를 맞았다. NASA는 “1일 오전 4시 26분(한국시간) 연료가 소진된 메신저호가 수성의 중력에 이끌려 표면에 충돌해 폭발하면서 임무를 마쳤다”고 밝혔다. NASA는 “메신저호는 시속 1만 4081㎞의 속도로 수성에 충돌하면서 지름 16m 정도 되는 구덩이 형태의 흔적(크레이터)을 남겼다”면서 “이는 인류가 수성에 남기는 최초의 발자취”라고 말했다. ●시속 1만㎞로 충돌… 지름 16m 흔적 남겨 메신저호는 인류가 발사한 두 번째 수성 탐사선이면서 수성 궤도를 돌며 임무를 수행한 첫 번째 탐사선이다. 최초의 수성 탐사선은 NASA가 1973년 발사한 ‘마리너’ 10호지만 1974년과 1975년 수성의 근처에만 접근했을 뿐 제대로 된 관측을 하지는 못했다. 메신저호는 2004년 8월 발사돼 6년 7개월 동안 78억 9000㎞를 비행한 끝에 2011년 3월 수성 궤도에 진입했다. 메신저호가 수성에 도착하기까지 6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 이유는 지구와 금성 등의 중력을 이용해 탐사선의 궤도를 조정하는 ‘플라이 바이’ 항법을 이용해 수성에 천천히 접근했기 때문이다. 수성은 태양 가까이에서 빠른 속도로 공전하고 있기 때문에 수성을 향해 직접 탐사선을 발사할 경우 자칫 태양의 거대한 중력권 안으로 빨려 들어가 임무 수행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해 메신저호는 발사 뒤 태양을 중심으로 15바퀴를 돌면서 지구와 금성, 수성을 모두 6차례 근접 통과하는 과정을 거친 뒤 수성 궤도에 진입했다. 무게 500㎏에 너비 2m, 높이 2.5m 크기인 메신저호는 지표면을 원격 근접 촬영하기 위한 두 대의 카메라와 레이저 고도계, 자력계, 분광계 등 7대의 장비를 탑재해 수성의 비밀을 풀어냈다. ●지구 출발 뒤 6년 만에 수성과 만나 메신저호가 지구로 보내온 사진은 27만 7000장에 이른다. 과학자들은 메신저호가 보내온 사진과 각종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수성의 극 지역에 얼음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또 수성 내부에 철로 구성된 핵이 있으며 탄소를 포함한 유기물이 있다는 사실도 메신저호를 통해 처음 알려졌다. 메신저호 미션을 기획해 이끌어 온 NASA의 션 솔로몬 박사는 “메신저호 덕분에 인류는 미지의 행성인 수성의 모습이 다채롭고 황홀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됐다”고 말했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4부)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애경그룹] 평범한 주부… 국내 1호 여성 CEO… 매출 5조 그룹 키워내

    [재계 인맥 대해부 (4부)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애경그룹] 평범한 주부… 국내 1호 여성 CEO… 매출 5조 그룹 키워내

    “아이들이 클 때까지 아버지의 유업을 잘 지키고 있다가 성년이 되면 물려주리라. 애경을 내가 맡아 아이들과 똑같이 건실하게 성장시키리라.” 장영신(79) 애경그룹 회장이 자서전 ‘밀알 심는 마음으로’에서 밝힌 속마음이다. 국내 1호 여성 최고경영자(CEO), 터프우먼 마담 장(張), 여걸 등 걸출한 여성 경영인을 나타내는 온갖 수식어가 붙는 이가 바로 장 회장이다. 장 회장은 남편인 고 채몽인 애경그룹 창업주가 남긴 작은 생활용품 기업을 현재 매출액 5조 6000억원대의 생활용품, 유통, 항공, 부동산 기업으로 변신시킨 주역이다. 장 회장의 CEO로서 경력이 곧 애경의 역사다. 애경그룹은 무역회사인 대륭산업(1945년 설립)이 전신이지만 비누 제조업으로 출발했던 애경유지공업주식회사의 설립일인 1954년 6월 9일을 창립기념일로 삼고 있다. 장 회장은 1970년 막내아들(채승석 애경개발 사장)을 낳은 지 사흘 만에 남편을 심장마비로 떠나보낸 뒤 1주기가 끝난 1972년부터 경영에 참여했다. 장 회장의 나이 36세 되던 해다. 장 회장이 경영참여를 선언하자 시댁과 친정은 물론 회사 임원들까지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 회사가 LG그룹의 모태인 비누제조사 락희화학과 경쟁을 벌이며 사업 확대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장 회장이 경영 문외한인 데다 여성의 사회활동을 보기 어려웠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장 회장은 남편의 회사를 성장시켜 자녀들에게 전해주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장 회장은 남편이 계획만 했던 석유화학 원료제조 분야를 애경의 미래 지표로 삼았다. 생활용품 산업에는 한계가 있지만 본격적인 화학공업은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 장 회장의 대학 전공이 화학이었던 점도 한몫했다. 1970년부터 애경유화, 애경화학 등 기초화학 관련 회사를 속속 설립했고 이 분야는 지금까지도 애경에서 매출 비중 40% 이상을 차지하는 주력 사업군이다. 위기도 있었다. 1973년 1차 석유파동으로 직격탄을 맞은 삼경화성(1970년 설립한 무수프탈산 제조사로 현재의 애경유화)이 공장을 가동한 지 1년도 안 돼 원료공급이 중단될 위기를 맞았다. 이때 장 회장은 한국에 파견돼 있던 걸프사의 미국인 사장을 만나 물물교환 중개를 요청했고 미국인 사장은 “그런 일을 왜 우리에게 부탁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장 회장은 “삼경화성은 한국의 석유화학사업 발전에 크게 기여할 기업이다. 한국의 석유화학사업이 발전해야 걸프사에도 이익이 될 게 아닌가”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결국 걸프사의 주선으로 원료를 차질 없이 공급받아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때 큰 위기를 모면한 삼경화성은 연 매출 1조원을 넘는 현재의 애경유화가 됐다. 장 회장은 남편이 설립한 애경유지공업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83년 중앙연구소를 설립해 생활용품사업의 기반을 다졌고 미국 취스브로 폰즈사와는 화장품 제조 관련 기술제휴를 맺고 1984년 애경폰즈를 설립해 화장품 사업에 진출했다. 이런 투자와 노력으로 생활용품기업 애경산업이 탄생했다. 장 회장은 경영일선에 있는 동안 ‘나인(9) 투(to) 파이브(5)’ 원칙을 지켰다. 매일 오전 5시 기상과 함께 조간신문을 읽고 그날 하루의 주요 업무를 계획하는 것을 시작으로 관청과 은행이 문을 여는 오전 9시 이전까지 새 사업이나 프로젝트 기획, 결재업무를 모두 처리했다. ‘여장부’ 장 회장의 어린 시절은 부유했다. 그는 1936년 7월 22일 서울에서 아버지 고 장회근씨와 어머니 고 문금조씨의 4남4녀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일본 와세다대에서 영문과를 졸업한 대지주의 아들, 어머니도 당시 일본 귀족학교인 쓰다여대 영문과를 나온 재원이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4남 4녀 모두 공부를 잘했다. 장 회장의 큰오빠인 고 장윤옥씨는 감사원 5국장까지 지냈고 미국으로 이민 간 큰언니 장영옥씨는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둘째 오빠인 고 장성돈 전 애경유지 사장은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했다. 셋째 오빠 고 장위돈씨는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정치담당특별보좌관, 이집트 총영사, 에콰도르 대사를 지내는 등 이력이 화려하다. 장 회장은 어린 시절 부유했지만 광복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 경기여중을 졸업하고 경기여고에 재학 중이던 장 회장은 외국어 재능을 인정받아 전액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1955년 미국 필라델피아 체스넛 힐 대학 화학과에 진학했다. 이때 다져진 영어실력과 화학에 대한 이해는 지금의 애경을 키우는 자산이 됐다. 장 회장은 직함은 회장이지만 2004년부터 경영에서 손을 뗀 상태다. 장 회장은 6년 전쯤 유방암에 걸린 뒤 현재 건강 관리에 집중하고 있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4부)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대성그룹] 독실한 기독교 가문에 자유연애… 종교만남서 인연 맺은 혼맥

    [재계 인맥 대해부 (4부)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대성그룹] 독실한 기독교 가문에 자유연애… 종교만남서 인연 맺은 혼맥

    독실한 기독교 가문인 대성그룹의 혼맥은 종교적인 만남 속에 인연을 찾은 경우가 많다. 정략결혼보다는 비교적 자유로운 연애 속에 때때로 실속 있는 재계 간 혼사들이 이어진다. 대성그룹 창업주 고 해강(海崗) 김수근 명예회장은 1916년 대구에서 부친 김두윤(작고), 모친 기묘임(작고)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복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대구상고를 중퇴하고 당시 일본 기업이었던 삼국석탄 대구지점에 취직했다. 이후 1940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일본대학 법학부를 수석 졸업했다. 7세 연하인 여귀옥(작고) 여사와는 26세인 1942년에 결혼했다. 여 여사는 대구 남산교회에서 만났다. 모친 기씨의 마음에 든 여 여사는 당시 신명여고를 졸업해 평양여자신학교를 수료한 명망가 집안의 고명딸이었던 터라 김 명예회장은 결혼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여 여사는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 한국지부 회장을 맡기도 했다. 59년간 동고동락했던 부부는 2001년 김 명예회장이 세상을 뜨고 5년 뒤 여 여사도 생을 마감하면서 하늘의 연으로 이어졌다. 두 사람은 4남 3녀를 뒀다. 4남 영철씨는 1973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6남매는 전원 명문대 졸업에 2개 이상 석사 학위 소지자여서 자식 농사를 잘 지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장남 영대(법학과 수석 졸업), 차남 영민(사학과), 3남 영훈(행정학과), 장녀 영주(미대)씨는 모두 서울대 출신이다. 차녀 정주씨는 이화여대 영문학과(수석 입학·졸업), 3녀 성주씨는 연세대 신학과와 미국 애머스트대 사회학과를 나왔다. 장남 김영대(73) 대성산업 회장은 어머니 친구의 소개로 1971년 검사 출신 변호사 차영조 변호사의 딸 정현(66)씨와 혼사를 맺었다. 정현씨는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정한, 인한, 신한씨 3형제가 있다. 장남 김정한(43) 라파바이오 사장은 1997년 서울 덕수교회에서 대원외교 동창인 전성은(42)씨와 화촉을 밝혔다. 전씨는 뉴잉글랜드 음대를 졸업하고 예일대 음대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 그녀의 부친 전경호 서한모방 회장은 김 회장과 경북사대부고 동창이다. 둘은 1남 1녀를 뒀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차남 김인한(42) 콜로라도대 정치학과 교수는 대학 캠퍼스 커플이다. 평범한 가문의 같은 과 후배인 이내리(37)씨와 2002년 서울 덕수교회에서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이 둘 있다. 3남 김신한(40) 대성산업가스 사장은 미국 유학 중 지인의 소개로 만난 한조희(34)씨와 신앙생활을 함께하며 1년간 교제하다 2006년 서울 온누리교회에서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한씨는 주유소업체 중앙에너비스 한상렬 사장의 딸이다. 한씨는 결혼 3개월 전인 그해 3월 창업주의 미망인이자 시조모인 여 여사의 상중일 때부터 대성가 며느리 역할을 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두 사람은 세 아들을 낳았다. 차남 김영민(70) 서울도시가스 회장은 1979년 친지의 소개로 서울대 성악과를 나온 민명옥(65)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민씨의 부친은 민유봉 전 유화증권 사장이다. 김 회장 부부는 은혜(35), 요한(33), 종한(26)씨 등 2남 1녀를 뒀다. 장남 김요한 서울도시가스 부사장만 결혼했다. 3남 김영훈(63) 대성그룹 회장은 1993년 박영창 목사의 소개로 김홍도 금란교회 목사의 차녀인 김정윤(46)씨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17살 차이를 극복하고 사랑에 성공했다. 슬하에는 의한(21), 은진(18), 의진(15)과 늦둥이 은정(5) 등 1남 3녀가 있다. 김영훈 회장은 경기고 동문인 김한(61) 광주은행장과 서울대 동창인 신희택(63) 서울대 법대 교수와 절친한 사이다. 장녀 김영주(67) 대성그룹 부회장은 1975년 서울대 의대 출신의 내과 전문의 신현정(70)씨와 연을 맺었다. 신씨는 개인병원을 운영한 뒤 현재 그룹 계열사인 대성에너지 제1·2·3서비스 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신정희(40), 신명철(38)씨 등 1남 1녀가 있다. 벤처사업 캐피탈을 하고 있는 장남 신명철 킹스베이캐피탈 공동 창업자는 변호사 권순혜(34)씨와 결혼해 온유(5), 민유(2) 두 딸을 두고 있다. 권씨는 호주 퀸즐랜드대 법학과를 나온 호주 변호사로 전 이건산업 사장이었던 권주혁 동원그룹 상임고문의 딸이다. 김 부회장은 화가이자 인테리어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차녀 김정주(66) 대성홀딩스 공동대표이사는 하버드대 신약학 박사 출신으로 2013년까지 연세대 신학대에서 신약학을 강의했다. 지금은 대성그룹 계열사인 출판사 대성도 운영하고 있다.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 수석부회장으로 독신이다. 막내딸은 대한적십자사 총재인 김성주(59) 성주그룹 회장이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세계기록 도전하는 인도판 라푼젤, 모발 길이는?

    세계기록 도전하는 인도판 라푼젤, 모발 길이는?

    25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은 기네스 세계 신기록에 도전하고자 머리카락을 기르는 ‘스미타 스리바스타바(Smita Srivastava·37)’라는 인도 여성의 사연을 소개했다.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 알라하바드에 사는 스리바스타바의 현재 모발 길이는 2.1미터. 앞서 스리바스타바는 1.8미터의 모발 길이로 인도판 기네스북인 ‘림카 북 오브 레코드(Limca Book of Records)’에 이름을 올린 바 있다. 스리바스타바는 “쇼핑을 갈 때면 사람들이 몰려와 어떻게 머리를 길게 기를 수 있느냐고 물어온다”며 “내 머리카락을 가짜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다가와 내 머리를 직접 만져보기도 한다. 그러나 진짜라는 것을 곧 알게 된 사람들은 행운아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며 자랑스러워 했다. 하지만 스리바스타바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기네스 세계 기록(Guinness World Record)에 이름을 올리고자 계속 머리를 기르고 있다. ‘가장 긴 머리카락 여성(Longest head hair:female)’이라는 타이틀로 현재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된 여성은 중국의 ‘시에 치우핑(Xie Qiuping)’으로, 1973년부터 꾸준히 길러온 머리카락으로 지난 2004년 모발길이 5,627미터의 신기록을 세운 바 있다. 세계 기록에 비하면 스리바스타바의 모발 길이는 매우 짧은 편. 그러나 어릴 때부터 계속된 스리바스타바의 도전과 열정에 가족들 또한 지원을 아끼고 있지 않다고 한다. 한편, 스리바스타바는 석유 제품 홍보대사와 지역 미인대회 심사위원을 겸해 활동하고 있다. 사진·영상=RuptlyTV/유튜브 김형우 인턴기자 hwkim@seoul.co.kr
  • 42년 만에… 핵연료 저농축·재처리 길 열렸다

    42년 만에… 핵연료 저농축·재처리 길 열렸다

    그동안 미국의 사전동의 규정 등에 묶여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사용후핵연료의 저농축과 재처리가 가능해질 전망이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측면에서 핵 주권을 일부 찾았다는 실리를 챙기면서도 미국이 우려하는 비확산의 문제도 해결했다는 평가다. 한국과 미국은 22일 박노벽 외교부 한·미원자력협정 개정협상 전담대사와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가 이날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한·미원자력협정 가서명식을 갖고 이같이 합의했다. 40여쪽 분량으로 구성된 이번 협정은 2010년 10월 공식협상 개시 후 약 4년 6개월 만에 타결된 것이다. 특히 1973년 발효된 기존 협정 이후 42년 만에 내용 상당수가 바뀌었다. 협정문에는 우선 원전 연료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 차관급을 위원으로 하는 고위급위원회에서 합의를 거쳐 미국산 우라늄을 20% 미만으로 저농축할 수 있게 했다. 20%는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규정한 저농축의 기준선이다. 또 사용후핵연료의 재처리와 관련, 양국이 공동 연구 중인 파이로프로세싱(건식 재처리) 연구를 공동 진행키로 했다. 이 때문에 핵 연료의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를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이른바 ‘골드 스탠더드’는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 한·미 양국과 원자력 협정을 체결한 제3국에 대해서는 우리 원자력 수출업계가 미국의 동의를 받을 필요 없이 미국산 핵물질이나 원자력 장비, 물품 등을 자유롭게 재이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동안 전량 수입에 의존했던 암 진단용 방사성동위원소(몰리브덴-99)도 미국산 우라늄을 이용해 국내에서 안정적으로 생산하고 이를 수출할 수 있는 근거도 마련했다. 기존 41년이었던 협정 유효 기간도 20년으로 대폭 단축했다. 또 협정 만료 2년 전에 어느 한쪽이 연장 거부를 통보하지 않으면 1회에 한해 5년 연장될 수 있도록 했다. 이번 협정은 양국의 가서명에 이어 1~2개월 후 정식서명, 미 의회 비준과 국회 보고 등을 거쳐 기존 협정의 유효기간인 내년 3월 이전에 정식 발효될 것으로 보인다. 리퍼트 대사는 “새로운 협정은 한·미 간의 깊은 파트너십과 강력한 동맹에 어울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중남미 4개국을 순방 중인 박근혜 대통령은 “우리의 실질적 국익이 최대한 반영된 것으로 평가한다”고 밝혔다고 청와대는 전했다. 이제훈 기자 parti98@seoul.co.kr 원유빈 인턴기자 jwyb12@seoul.co.kr
  • 73년전 난파선에서 ‘550억 원어치 보물’ 발견

    73년전 난파선에서 ‘550억 원어치 보물’ 발견

    1942년 인도 붐베이(현재의 뭄바이)에서 영국으로 향하던 중 침몰한 배 안에서 3400만 파운드어치의 은화가 발견됐다고 BBC 등 영국 언론이 15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영국 소유의 이 증기여객선은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아프리카 서해안의 영국령 섬인 세인트헬레나에서 독일 잠수함 어뢰에 의해 격침된 뒤 가라앉았다. 최근 영국의 보물탐사업체는 최신 음파탐지기 및 로봇 등을 이용해 수심 5150m 지점에서 난파선을 찾았으며, 배와 함께 가라앉아있던 보물들을 건져 올리는데 성공했다. 이 배 안에서는 시가로 3400만 파운드, 한화로 약 550억 원에 달하는 은화가 발견됐다. 당시 영국 재무부 소유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 해양학자 20여 명과 함께 탐사를 이끈 업체 DOS(Deep Ocean Search)의 관계자는 “수심 5000m 아래를 탐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는 타이타닉이 발견된 지점보다 1372m 가량 더 깊은 곳”이라면서 “배는 두동강 난 상태로 해저 모래에 파묻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배의 일부는 수 미터에 달하는 진흙에 완전히 묻혀 있기도 했다”면서 “우리는 최첨단 로봇을 이용해 난파선의 이미지를 확보한 뒤 음파탐지기 자료 등을 통해 은화가 있는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 배가 침몰할 당시 증기선 내부에는 승객과 승무원 302명이 타고 있었으며, 6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구명보트로 옮겨 타는데 성공했다. 이후 3주에 걸쳐 구조가 진행됐지만 104명은 구조를 기다리다 결국 숨졌다. BBC는 이 난파선의 탐사 작업이 이미 2013년 9월 완료됐지만 영국 정부의 요청에 의해 공식 발표를 미루다 최근에서야 이를 공개했다고 전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경남기업 15일 주식시장서 퇴출

    수장이 떠난 경남기업이 15일 주식시장에서 퇴출된다. 국내 건설사 가운데 처음으로 증시에 상장된 지 42년 만이다. 해외자원개발 사업의 실패에 따른 적자 전환과 이에 따른 자본 잠식이 결정적 이유로 분석됐다. 1994년 주당 22만 5000원까지 치솟았던 경남기업의 주식은 14일 113원으로 곤두박질쳤다. 검찰의 자원외교 비리 의혹과 관련해 집중 수사를 받던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지 불과 6일 만에 벌어진 일이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경남기업은 지난달 11일 자본전액 잠식설에 대한 한국거래소의 조회공시 요구에 자본 완전잠식 상태임을 공시했다. 이어 지난달 30일 제출한 2014사업연도 감사보고서에서 ‘감사의견 거절 및 자본 전액 잠식’이 확인됨에 따라 상장폐지가 결정됐다. 경남기업은 이날까지 정리매매를 거쳐 15일자로 상장이 폐지, 1973년 2월 기업공개에 나선 이후 주식시장에서 사라진다. 지난해 경남기업은 9106억원의 매출을 올렸지만 영업이익 -2616억원, 당기순손실 -3549억원을 기록했다. 1951년 8월 대구에 세워진 경남기업은 굴곡진 역사를 지녔다. 1954년 경남토건에서 경남기업으로 사명을 바꾸고 시공능력 순위 20위권에 달하는 중견 건설회사로 성장했다. 1977년 서울 반포 경남아파트를 시작으로 ‘경남 아너스빌’ 브랜드로 명성을 떨쳤다. 1987년 대우그룹 계열사로 편입됐다가 1999년 워크아웃과 함께 2000년 재분리됐다. 이후 2004년 대아건설을 흡수합병하고 경남정보기술을 설립하는 등 사세를 키웠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국내외 건설 경기 침체로 어려움에 처했고 2009년 채권단이 또다시 워크아웃을 결정하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노무현, 이명박 정부 때 적극 참여했던 해외자원개발 사업이 잇따라 실패,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2013년 세 번째 워크아웃을 신청했고 급기야 지난 7일 처음으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지구촌 감동] 무려 73년 해로한 부부 2분 차로 세상 떠나다

    [지구촌 감동] 무려 73년 해로한 부부 2분 차로 세상 떠나다

    무려 73년을 해로(偕老)한 부부가 각각 2분 차이로 세상을 떠난 동화같은 이야기가 전해졌다. 최근 미국 워싱턴포스트등 현지언론은 켄터키 렉싱턴에 살았던 윌리엄 윌슨(93)과 릴리안 윌슨(89) 부부의 사연을 전했다. 무려 73년을 함께 한 이들 부부는 알츠하이머병으로 인해 25km 떨어진 각기 다른 양로시설에서 지내는 처지가 됐다.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평생 함께 한 부부가 노후에 각기 떨어져 생활하게 된 것. 부부의 이승에서 마지막 순간은 지난 7일(현지시간)이었다. 새벽 4시 경 아들 더그(66)에게 부모의 별세를 알리는 다급한 전화가 걸려온 것. 먼저 전화가 온 곳은 아버지 측 양로원이었다. 그로부터 몇 분 후 이번에는 어머니 측 양로원에서도 같은 비보를 알리는 전화가 왔다.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난 것은 불과 2분 차. 수십 km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부부는 서로의 죽음을 알고있었던 듯 나란히 세상을 떠난 것이다. 무려 73년을 잉꼬부부로 살아왔지만 두 사람의 생은 평탄치 않았다. 각각 운동선수로 대학에 다니던 두 사람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출해 살림을 차렸다. 특히 제 2차 세계대전으로 남편 윌리엄은 징집된 후 전장에 투입돼 생이별할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이후 다시 재회해 평생을 함께 한 부부는 결국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함께했다. 이들 더그는 "평소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지 않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면서 "두 분이 함께한 마지막 순간은 지난 크리스마스였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 "두 분이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남은 가족의 슬픔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이리 떠나신 것 같다" 고 덧붙였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나우! 지구촌] 무려 73년 해로한 부부 2분 차로 세상 떠나다

    [나우! 지구촌] 무려 73년 해로한 부부 2분 차로 세상 떠나다

    무려 73년을 해로(偕老)한 부부가 각각 2분 차이로 세상을 떠난 동화같은 이야기가 전해졌다. 최근 미국 워싱턴포스트등 현지언론은 켄터키 렉싱턴에 살았던 윌리엄 윌슨(93)과 릴리안 윌슨(89) 부부의 사연을 전했다. 무려 73년을 함께 한 이들 부부는 알츠하이머병으로 인해 25km 떨어진 각기 다른 양로시설에서 지내는 처지가 됐다.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평생 함께 한 부부가 노후에 각기 떨어져 생활하게 된 것. 부부의 이승에서 마지막 순간은 지난 7일(현지시간)이었다. 새벽 4시 경 아들 더그(66)에게 부모의 별세를 알리는 다급한 전화가 걸려온 것. 먼저 전화가 온 곳은 아버지 측 양로원이었다. 그로부터 몇 분 후 이번에는 어머니 측 양로원에서도 같은 비보를 알리는 전화가 왔다.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난 것은 불과 2분 차. 수십 km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부부는 서로의 죽음을 알고있었던 듯 나란히 세상을 떠난 것이다. 무려 73년을 잉꼬부부로 살아왔지만 두 사람의 생은 평탄치 않았다. 각각 운동선수로 대학에 다니던 두 사람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출해 살림을 차렸다. 특히 제 2차 세계대전으로 남편 윌리엄은 징집된 후 전장에 투입돼 생이별할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이후 다시 재회해 평생을 함께 한 부부는 결국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함께했다. 이들 더그는 "평소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지 않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면서 "두 분이 함께한 마지막 순간은 지난 크리스마스였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 "두 분이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남은 가족의 슬픔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이리 떠나신 것 같다" 고 덧붙였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정치 개입病’ 국정원 개혁 첫 단추… 조직 개편 함께 처방해야

    국가정보원이 ‘정치 보고서’를 없앰에 따라 개혁의 첫 단추를 꿴 것으로 평가된다. 조직 개편과 인력 재배치 등 ‘근본 처방’을 추가로 이끌어 낼지 여부가 관심거리다. 그동안 국정원이 청와대에 보냈던 정치 보고서는 단순히 대통령의 정치적 판단을 돕는 참고자료 수준을 넘어 정치 개입이나 정치인 사찰 등의 논란을 빚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국정원 차원의 사전 ‘의견 제시’를 바탕으로 사후 ‘역할 수행’까지 이뤄졌기 때문이다. 정치 관련 청와대 보고가 폐지되면서 국회 등지에서 이뤄지는 국정원의 정보 수집 활동도 위축됐다는 게 중론이다. 한 여권 관계자는 9일 “국회를 드나들거나 의원실을 찾아가는 모습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말했다. 다만 정치 보고서 작성 금지를 곧 국정원의 정치 개입 차단으로 연결 짓는 데는 무리가 있다. 정치 보고서는 사라졌을지 몰라도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조직과 인력은 아직까지 큰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1, 2, 3차장이 각각 해외·대북, 국내, 사이버·과학기술 분야 업무를 분담하는 구조다. 조직·인력 개편 없이는 국정원의 정치 개입 가능성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해소하기가 쉽지 않다. 앞서 국정원의 정치 개입은 ‘고질병’처럼 굳어져 있었다.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가 1961년 출범한 이후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서는 ‘정치 공작’의 상징처럼 군림하기도 했다.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권위주의 정권이 막을 내린 이후에도 국정원을 둘러싼 논란은 식지 않았다. 김영삼 정부 당시 미림팀을 비롯해 정권마다 도청팀을 가동했으며, 지난 대선 때는 댓글팀의 활동이 드러나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에도 남재준 전 원장 시절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간첩 증거 조작 사건’ 등으로 국정원이 정치적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에 따라 정치 보고를 없애고 대북 업무에 주력하겠다는 이병호 원장의 방침이 향후 조직과 인사에 어떻게 반영될지 주목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대북 포용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대북 정보망이 부실해졌다는 우려가 제기된 바 있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국정원에 대한 대대적인 물갈이 인사가 이뤄지면서 전문 인력 양성 기반이 흔들린다는 비판도 받았다. 여기에 최근 간첩 증거 조작 사건까지 겹치면서 대북·해외 정보망 붕괴에 대한 우려는 더욱 커진 상황이다. 여권 관계자는 “대북 정보망은 한번 무너지면 단기간에 회생이 어렵고 자칫 안보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 [부고] 주영관 前 국회의원·서울신문 주필

    [부고] 주영관 前 국회의원·서울신문 주필

    전직 국회의원이자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주영관씨가 4일 오전 노환으로 별세했다. 87세. 1928년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고인은 육군통역장교를 거쳐 합동통신사 외신부장, 서울신문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973년에는 제9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지만 이후 다시 언론인으로 복귀해 서울신문 주필, 세계일보 논설고문 등을 역임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주용씨와 며느리 최성희씨가 있다. 빈소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4호실이며, 장지는 경기 안성시 새사람수련원이다. 발인은 7일 오전 7시. (02)2227-7560
  • [재계 인맥 대해부 (4부)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대상그룹] 불도저 명형섭 “글로벌·차별화”… 3년째 1000억대 영업익 주도

    [재계 인맥 대해부 (4부)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대상그룹] 불도저 명형섭 “글로벌·차별화”… 3년째 1000억대 영업익 주도

    명형섭(58) 대상 사장은 1982년 미원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34년간 대상에만 몸담은 정통 대상맨이다. 사원에서 사장이 된 입지전적 인물로 통한다. 충남 당진 출신인 명 사장은 경희고등학교를 나와 고려대학교 농화학과를 졸업하고 2011년 11월 사장직에 올랐다. ‘즉시 한다, 반드시 한다, 될 때까지 한다’. 그가 직원들에게 특히 설파(?)하는 이 문구는 1973년 세 평짜리 시골 창고에서 단 네 명이 시작해 현재 계열사 140개, 직원 13만명 규모로 성장한 일본전산의 모토다. 일본전산의 창업주 나가모리 시게노부 사장은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은 경영인이기도하다. 그는 일본전산의 사훈에는 자신감과 함께 포기하지 않는 실행 정신이 있다며 모든 직원에게 특히 주인 의식을 강조한다. 청정원을 비롯해 대상 전체 식품사업총괄 중역과 전분당 사업부문 등을 두루 거친 그는 취임 후 ‘글로벌화’와 ‘차별화’를 경영 열쇳말로 삼고 특히 해외 시장 공략에 힘을 쏟고 있다. 국내 최초 필리핀 전분당 사업 진출, 인도네시아 식품 공장 준공 등을 진두지휘한 그는 최근 중국 시장의 잠재력에 주목하고 있다. 대상은 현지화 전략으로 2017년까지 중국 식품 시장에서 500억원 매출 규모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국내 시장 또한 차별화된 상품으로 장기 불황을 헤쳐 나가고 있다. 컵국밥, 고구마츄 등 즉석간편식 시장 공략에 힘을 실어 준 것도 그다. 명 사장은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장류, 조미료 시장 등 전통 시장 규모가 줄어들고 있다고 판단, 과감하게 편의식 틈새시장을 공략했다. 이 같은 경영에 힘입어 대상은 안정적인 매출 상승세를 기록하고 있다. 2011년 1조 3930억원이었던 대상의 매출액은 2012년 1조 5525억원, 2013년 1조 5703억원, 2014년 1조 6000억원으로 꾸준히 증가했고, 영업이익 역시 2012년 1038억원, 2013년 1181억원, 2014년 1210억원을 기록하는 등 3년 연속 1000억원을 초과 달성했다. 한편 명 사장은 직원들과의 스킨십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명 사장은 1년에 2~3차례 출근하는 직원들을 안아 주고 격려하는 ‘프리허그’ 아이디어를 실행하는 등 직원들과의 거리 좁히기에 적극적이다. 지난해 마케팅 콘퍼런스에서는 직원들에게 보내는 당부의 메시지를 스케치북에 직접 적어 마치 영화 ‘러브액츄얼리’의 프러포즈 장면을 연상케 하는 발표로 직원들의 환호를 받기도 했다. 직원들에게 금연을 권하는 사장으로도 유명하다.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
  • 지난달 미세먼지 5년새 최악

    지난달 서울의 미세 먼지 평균 농도가 최근 5년 사이 가장 높았던 것으로 조사됐다. 황사 관측 일수가 많았고 비가 적게 내렸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5일 민간 기상업체 케이웨더에 따르면 지난달 서울의 평균 미세 먼지 농도는 공기 ㎥당 71㎍(마이크로그램·100만분의 1g)으로 최근 5년(2011~2015년)간 미세 먼지 농도가 가장 짙은 3월로 기록됐다. 또 같은 기간 전국 평균은 66㎍으로, 2014년 3월(56㎍)보다 10㎍ 정도 높았다. 케이웨더 관계자는 “원인은 황사가 잦았던 데다 바람도 잘 불지 않아 미세 먼지 농도가 공기 중에 계속 쌓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기상청에 따르면 올 3월 전국의 황사 발생 일수는 평년(1.8일)보다 3.8일 많은 5.6일로 집계됐다. 1973년 이래 세 번째로 잦았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4부)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코오롱그룹] 싸고 질긴 나일론 1963년 첫 생산… 한국 섬유역사 산증인

    [재계 인맥 대해부 (4부)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코오롱그룹] 싸고 질긴 나일론 1963년 첫 생산… 한국 섬유역사 산증인

    코오롱그룹의 역사는 대한민국 섬유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4년 12월 고 이동찬 명예회장이 설립한 개명상사는 당시 생소한 나일론사를 국내에 처음으로 들여왔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나일론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터라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양말은 물론 의류까지 나일론의 수요가 확대되면서 사업이 번창했다. 코오롱(KOLON) 이름도 코리아+나일론(Korea+Nylon)의 합성어다. 한국 기업 최초의 영어 사명으로 ‘KORLON’으로 표기하다 1968년 ‘KOLON’으로 변경됐다. 고 이원만 창업주와 고 이동찬 명예회장은 1957년 4월 12일 한국 최초의 나일론 제조회사인 한국나이롱주식회사(현 코오롱인더스트리㈜)를 설립했다. 스트레치 나일론 생산쯤은 우리 손으로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과감히 도전장을 던진다는 각오로 설립한 회사다. 같은 해 11월 스트레치 나일론 공장 건립의 첫 삽을 떴고 이듬해인 1958년 10월 총건평 1500평의 공장을 준공했다. 싸고 질긴 합성섬유를 접한 소비자들은 말 그대로 열광했다. 그 덕분에 1963년에 국내 최초로 나일론을 생산한 일일 생산 2.5t 규모의 나일론원사제조 공장은 4년 만인 1967년 4배가 성장해 하루 10t의 나일론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도약했다. 초기 코오롱의 전성기이기도 하다. 1960년대 섬유제품의 수출은 주로 수입된 섬유를 가공해 수출하는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코오롱은 섬유산업을 수출산업으로 만들기 위해선 저렴한 가격에 원사를 확보하는 일이 필수라고 생각해 폴리에스터 원사 생산에 돌입했다. 결국 코오롱은 이를 기반으로 1973년 타이어코드 사업에도 진출했다. 등산이라는 개념조차 모호했던 1970년대, 코오롱상사는 코오롱스포츠 브랜드를 출시해 등산의류와 용품 등을 선보였다. 창립 20주년을 맞으면서 코오롱은 또 한번의 도전을 시작했다. 기존 섬유사업 외 필름, 비디오테이프, 메디컬사업 등 비섬유부문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기로 한 것이다. 1988년에는 정보기술(IT) 소재필름을, 1991년에는 냉동·냉장식품 포장에 사용되는 나일론 필름을 국내 최초로 생산했다. 연산 1000만권 규모의 비디오테이프 공장을 준공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코오롱은 1993년 세계에서 세 번째로 머리카락 굵기의 1000~1만분의1에 불과한 초극세사를 이용하는 첨단 섬유소재 샤무드를 생산했다. 2002년에는 액정표시장치용 광학산 필름과 프리즘 필름을, 2005년에는 국내 최초로 강철보다 강한 섬유 헤라크론(아라미드) 양산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코오롱의 포트폴리오는 첨단부품과 소재산업 중심으로 재편됐다. 계열사 간 합병과 사업부문의 분할도 진행했다. 모기업인 ㈜코오롱을 중심으로 2007년 코오롱유화㈜의 합병, 2008년 원사사업부문 물적 분할, 지난해 8월 FnC코오롱㈜와의 합병법인을 출범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코오롱그룹은 또 2009년 12월 31일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했다. 코오롱은 또 한번 변신 중이다. 화학섬유 제조와 건설, 무역에 주력하던 사업 영역을 하이테크 산업 및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으로 확대하고 있다. 바이오 신약과 웨어러블 기술이 대표적 사례다. 코오롱생명과학㈜은 세계 최초 퇴행성관절염 세포유전자 치료제인 ‘티슈진-C’를 국내에서 임상 3상을 진행 중이며, 미국에서도 임상 3상을 준비하고 있다. 코오롱인더스트리㈜는 유기태양전지 제조 분야에 주력한다. 유기태양전지는 유기물 기반으로 제작된 태양전지로 기존 무기태양전지에 비해 가볍고 유연하며 형태 및 색상 구현이 자유롭다는 장점이 있다. 이 기술을 이용하면 태양전지는 실외가 아닌 실내에서도 이용할 수 있다. 의류, 포장지, 벽지, 소형 전자기기 등 사용 범위도 다양하다. 코오롱글로텍㈜은 국내 최초로 섬유에 전자회로를 인쇄해 전류를 흐르게 한 전자섬유를 상용화했다. 히텍스(HeaTex)란 이름의 섬유는 전류 및 정보를 전송할 수 있다. 전류가 흐를 수 없다고 인식됐던 섬유에 전류를 흐르게 함으로써 웨어러블 컴퓨터의 가능성을 한층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 전기로 열을 내는 아웃도어 의류에 적용 중이다. 코오롱인더스트리㈜는 2013년 수소연료전지 차량의 핵심 부품인 연료전지용 수분제어장치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 같은 성과는 연구에 대한 투자가 바탕이 됐다. 코오롱은 미래신수종 산업 발굴과 인재 육성을 위해 2011년 8월 대전 카이스트(KAIST) 내에 ‘코오롱-KAIST 라이프스타일 이노베이션 센터’를 열었다. 아울러 서울 강서구 마곡지구에 약 2464억원을 투자해 그룹 차원의 연구·개발(R&D)센터인 ‘미래기술원’도 신규 건립할 계획이다. 2017년 8월 완공 예정인 이 시설은 향후 100년을 책임질 기업의 싱크탱크이기도 하다. 유영규 기자 whoam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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