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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도체 신화’ 강진구 전 삼성전자 회장 별세

    ‘반도체 신화’ 강진구 전 삼성전자 회장 별세

    강진구 전 삼성전자 회장이 19일 오후 별세했다.유족은 20일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강 전 회장이 어제 오후 숙환으로 별세했다”고 밝혔다. 경북 영주에서 출생한 강 전 회장은 대구사범학교와 서울대 전자과를 졸업했으며, KBS와 미8군 방송국에 근무한 데 이어 중앙일보와 동양방송 이사를 거쳐 1973년부터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창업주인 이병철 전 회장의 신뢰를 받았던 강 전 회장은 이후 삼성전자 전무·사장, 삼성전자부품·삼성전자 사장, 삼성반도체통신 사장, 삼성전자 부회장, 삼성전기 대표이사, 삼성전자 회장, 삼성전관·삼성전관·삼성전기 회장 등을 거치며 삼성 ‘반도체 신화’의 초석을 깔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지난 1995년 6월 ‘삼성 명예의 전당’ 설립과 동시에 첫번째로 헌액된 인물로도 유명하다. 특히 전자공업진흥회장, 전자산업진흥회장, 전자부품연구원 이사장 등을 지내며 국내 전자업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혔고, 2006년에는 서울대와 한국공학한림원이 선정한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에 오르기도 했다. 2000년 12월 31일 건강 문제와 후진 양성을 이유로 삼성전기 회장직을 사임하면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유족으로는 강병창 서강대 교수, 강선미 서경대 교수와 강선영 씨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오는 23일 오전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당집 뒷마당서 나온 고대 유물… 동아시아 교류·해양 제례 흔적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당집 뒷마당서 나온 고대 유물… 동아시아 교류·해양 제례 흔적

    전라북도 부안이라면 주민들 스스로가 ‘축복의 땅’이라고 일컬을 만큼 관광 자원의 보고다. 개암사, 내소사, 월명암 같은 고찰(古刹)도 그렇지만, 아름다운 서해 바다 그 자체가 무한대의 가치를 지닌 관광자원이다. 젓갈로 유명한 곰소항에 이어 최근에는 자연친화적 관광 붐을 타고 곰소염전도 각광받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반도(半島)인 부안군에서도 가장 서쪽에 자리잡은 변산면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관광지의 하나다.변산이라면 해수욕장과 함께 채석강과 적벽강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파란만장한 역사가 깃든 중국 명승의 이름을 딴 것은 그만큼 경치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붉은색 바위 절벽이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북쪽 적벽강과 수만권 책을 차곡차곡 포개 놓은 듯한 퇴적암층으로 이루어진 남쪽 채석강이 경계를 이루는 곳이 격포 죽막동(竹幕洞)이다. 1992년 국립전주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 죽막동에서는 삼국시대 이후 큰 바다를 건너야 하는 뱃사람들의 기원이 담긴 국제적 해양제사유적이 확인됐다. 꼭 큰 바다를 건너지 않더라도 변산 앞바다를 삶의 밑천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과거든, 현재든 해신(海神)에 목숨을 의탁하기 마련인데, 민간신앙의 전통은 지금도 남아 있는 당집 수성당(水城堂)에서 활발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부안의 관광자원을 이야기한 것은 죽막동 유적의 가치가 아직은 제대로 부각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죽막동은 고대 한·중·일 세 나라의 해양 교류 및 해양 제례의 역사를 한자리에서 보여 주는 동북아시아 유일의 유적이다. 한마디로 지금까지의 부안이 국내용 관광지였다면 죽막동 유적의 존재로 국제적 관광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됐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그런데 막상 죽막동 유적을 찾아가기는 쉽지 않다. 관광객이 승용차를 몰고 서해안고속도로를 나서 변산에 이르는동안 유적을 알리는 이정표는 단 하나도 발견할 수 없다. 다만 격포에 들어서면 수성당으로 가는 작은 이정표가 하나 보일 뿐이다. 변산의 자연과 묶으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거둘 역사 관광 자원으로 죽막동 유적의 가치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가장 많은 사람이 쓴다는 내비게이션에도 ‘죽막동 유적’은 들어 있지 않다. 그러니 죽막동 유적에 가려면 ‘수성당’을 입력해야 한다. 수성당이 1974년 전라북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덕분일 것이다. 다행히 최근 문화재청이 ‘부안 죽막동 유적’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예고했다니 조만간 달라질 것으로 기대한다. 바다로 내민 해발 57m의 죽막동 언덕에 서면 왜 옛사람들이 제사 지내는 장소로 이곳을 선택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일망무제(一望無際)라는 표현이 실감이 나는데, 먼바다는 고사하고 변산 앞바다의 위도와 칠산바다에도 수많은 어민들의 고혼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수성당은 정면 두 칸, 측면 한 칸의 작은 기와집이다. 상량문은 1850년(철종 원년) 이전에도 신당이 있었음을 알려 준다. 1864년(고종 원년)에 3차로 중수한 것을 1940년에 다시 중수했는데, 지금의 신당은 1973년 다시 지은 것이다. 이 과정에서 원래의 모습은 잊혀진 것으로 보인다. 수성당은 지금도 살아 있는 민간신앙의 현장이다. 당집인 수성당뿐 아니라 주변에 무속인들이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자리를 다양하게 마련해 놓았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바다 쪽으로 앉힌 작은 고깃배 한 척이다. 쌍촛대와 향로를 올려 놓았으니 풍어와 안전은 물론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영혼을 위로하는 기도를 올리는 장소일 것이다. 죽막동 유적이란 수성당 바로 뒤편의 넓지 않은 마당이다. 전주박물관에 따르면 유적은 발굴조사 당시에 이미 상당 부분 파괴된 상태였다. 1980년대 이후 해안경비가 강화되고 참호, 막사, 창고, 철책 등 군사시설물이 설치되면서 유적의 상당 부분이 잘려 나갔다는 것이다. 그런대로 원형이 남아 있는 면적은 가로 8m에 세로 13m 정도였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50일 남짓한 발굴조사에서 거둔 성과는 엄청났다. 유물은 30㎝ 남짓한 두께로 종류도 다양하게 집중 퇴적되어 있었다. 해신에게 제사 지내는 데 사용한 용구를 의도적으로 파쇄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3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백제 유물이 주류를 이룬 가운데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조선시대 유물도 그릇류를 중심으로 소량이 출토됐다. 규모가 큰 해양제사는 백제시대에 집중되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죽막동 유적의 출토 유물은 전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각종 항아리와 큰 독, 술잔, 기대(器臺)를 비롯한 토기와 무기, 마구, 갑옷, 거울을 비롯한 금속유물이 생각보다 다양하고 수량도 많다.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집중된 유물의 양상은 같은 시기 수장급 무덤의 부장품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제사의 주체가 지역 수장이거나 왕으로 대표되는 국가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근거가 된다. 학계에 따르면 토기류는 백제 것과 함께 대가야나 왜(倭) 계통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도 적지 않았다. 금속유물도 대가야 것과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특히 돌로 만든 쇠도끼, 칼, 갑옷 등의 모조품은 일본 후쿠오카현 오키노시마 제사유적 출토품과 형태, 크기, 재질, 제작수법이 대부분 일치했다고 한다. 여기에 중국 남조(317~581)의 청자도 나왔다. 흙으로 빚은 말의 모형도 여럿 나왔는데 하나같이 머리와 다리는 떨어져 나간 채였다. 말을 바쳐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푸는 의식은 과거 동아시아에서는 흔히 행해졌다고 한다. 따라서 말의 축소 모형은 해신에게 바치는 공물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기와는 통일신라시대 이후 것만 나왔으니 백제시대에는 노천 제사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정보를 종합하면 죽막동 유적이 국제적 성격의 제사터라는 것은 자명하다. 백제가 주도한 제사에 대가야, 왜, 중국 남조의 사신, 상인, 선원이 참여한 것인지, 각각의 세력이 별도로 제사를 지낸 것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하지만 이런 의문과 관계없이 당시 죽막동이 동아시아 해양 교섭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죽막동 유적을 찾는다면 전주박물관도 여행코스에 넣는 것이 좋다. 발굴 현장과 출토 유물을 함께 보면 유적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격포에서는 닭이봉 전망대에도 올라가 보기를 권한다. 채석강과 죽막동, 적벽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서해용왕에게 제사 지내는 데 죽막동보다 더 영험 있는 곳은 찾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단독] 전기료 싼 심야시간대 ‘피크타임의 2.5배’ 펑펑

    [단독] 전기료 싼 심야시간대 ‘피크타임의 2.5배’ 펑펑

    기업들 원가 이하로 기계 돌려 설비 좋은 대기업까지 과다 소비 경부하 요금 인상에 힘 실릴 듯 기업체들의 심야시간 전력 사용량이 피크타임 때의 두 배를 넘는 것으로 파악됐다. 일반 가정집 등 비교적 사람들이 덜 쓰는 심야에 공장을 돌리면 전력 수급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고 심야 전기요금을 대폭 깎아 줬는데 오히려 이런 허점을 노려 심야 전력을 펑펑 쓰고 있는 셈이다. 경부하 시간대(오후 11시~오전 9시) 전기요금을 올려야 한다는 정부와 일부 전문가들의 주장에 힘이 실릴 것으로 보인다.17일 한국전력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산업용 전력판매량(2억 7883만㎿h)에서 경부하 시간대 발전량 비중이 50%(1억 3941만㎿h)로 가장 많았다. 전력을 가장 많이 쓰는 시간대인 최대부하(오전 10시~낮 12시, 오후 1~5시, 3~10월 기준) 시간대 사용량은 5298만㎿h로 19%에 그쳤다. 경부하 때 기업들이 최대부하 때보다 무려 2.5배 이상 전기를 쓴 것이다. 경부하와 최대부하 시간대를 뺀 모든 일상 시간을 포함한 중간부하 시간대도 31%(8644만㎿h)로 경부하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이유는 값싼 경부하 전기요금에 있다. 경부하와 최대부하 시간대 요금 차이는 최대 3.7배다.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여름철 기준 경부하 요금은 53.7~61.6원, 중간부하 106.6~114.5원, 최대부하는 178.7~196.6원이다. 홍준희 가천대 에너지IT학과 교수는 “원래 경부하 요금은 전기 수요가 없어서 안 쓰고 놀리는 설비를 일정량 이상 써 주기 위해 가격을 깎아 주는 것”이라며 “경부하 고객 상당수가 시멘트를 굽거나 쇳물을 녹이는 등 밤새 돌릴 수 있는 자동화 설비가 잘 갖춰진 대기업들인데 원가에도 못 미치는 전기요금 가격대로 공정 일정을 옮겨 전기를 과다 소비하는 것은 정상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전기요금 원가는 80~90원 수준으로 전해졌다. 현재 경부하 시간대는 전력 피크 때의 수요를 분산하고 24시간 돌려야 하는 원자력 발전과 석탄 발전의 남는 전기를 소모하는 차원이었지만 발전량이 너무 많다 보니 발전 단가가 비싼 액화천연가스(LNG)까지 돌리는 상황이다. 송일근 전력연구원 부원장은 “경부하 등 시간대별 요금은 1973년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피크 전력을 저감하고 낮에는 너무 많이 쓰고 밤에는 안 쓰는 전력의 비효율화를 낮추기 위해 1977년 12월 도입됐다”며 “정상적이라면 중간부하 시간대가 가장 많아야 하고 경·최대부하가 비슷한 수준으로 가는 게 맞는데 정책이 뭔가 잘못됐다”고 설명했다. 한전에 따르면 지난해 대기업이 포함된 산업용 ‘을’(계약전력 300㎾h 이상) 전기요금을 계약한 기업 수는 4만 4414곳으로 전체 산업용 전기요금 계약기업(40만 5771곳)의 10.9%에 불과했지만 연간 전력판매량은 2억 5569만㎿로 전체 산업용 전력판매량의 91.7%에 달했다. 산업용 전력 소비량은 지난해 전체 전력 판매량의 56.1%를 차지했다. 김진우 연세대 글로벌융합기술원 교수는 “중소기업은 경부하 요금이 싸도 부하조정 능력이 안 돼 밤에 일을 안 하지만 24시간 가동하는 석유화학, 철강, 전기전자 등 대기업은 부하 조정이 가능한데도 일정 시간대 요금을 고정시키다 보니 혜택만 주는 모양이 돼 버렸다”며 “경부하 수요를 줄이기 위해 경부하 요금 인상과 최대부하 소폭 인하 등 조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시간당으로 따지면 경부하대 소비가 최대부하의 1.6배에 그친다”고 해명했다. 세종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정준모의 영화속 그림 이야기] 청춘,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

    [정준모의 영화속 그림 이야기] 청춘,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

    예술은 굳이 혁명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아도 새롭게 인정되면 예전의 것과 공존하거나 또는 스스로 고전이 되어 뒷자리로 물러나기 때문에 기존의 것을 대체하거나 밀어내지 않는다. 이와 달리 사회와 제도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면 과거와 현재의 질서를 대신하는 속성이 있어 늘 기성체제로부터 배척당하기 일쑤다.때문에 진보와 혁신은 항상 어렵고 전통 또는 고전은 걸림돌처럼 생각되지만 실은 그 반대이기도 하다. 새가 한쪽 날개로만 날 수 없듯 고전과 혁신, 원칙과 변화는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공존해야 한다. 세상에 새로운 좋은 것들이 가득해도 ‘오래된 것은 좋은 것’(Oldies but Goodies)이라는 말이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는 이유다. 사실 고전이란 단순하게 오랫동안 굳어진 진리가 아니라 동시에 끝없는 새로움을 제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칭호다.불과 2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 ‘굿 윌 헌팅’(1997)이 고전의 반열에 든 것도 단지 오래된 영화라기보다는 시선과 관점에 따라 끝없이 새로움을 주기 때문이다. 영화는 로맨스영화이며, 성장영화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인생영화’로도 꼽힌다. 법학, 수학, 역사 등등 거의 모든 학문에 재능을 지닌 천재소년 윌(맷 데이먼 분)은 상처투성이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이비리그의 본산 보스턴 남부에 사는 그는 MIT대학의 청소부로 일하며 대학생들도 어려워 쩔쩔매는 수학문제를 칠판에 낙서처럼 쉽게 풀어낸다. 그의 수학실력을 알아본 수학교수 램보(스텔란 스카르스고르드 분)는 그를 자신의 수하에 두고 싶어 하지만 정작 윌은 아랑곳 않는다. 동네친구들과 사고를 친 윌을 램보는 고액의 보석금을 내고 데려와 자신의 연구실로 끌어들이지만 윌은 고분고분하기는커녕 더욱 삐딱하게 나간다. 그의 상처를 달래고 보듬기 위해 정신과 의사까지 붙여도 소용이 없자 램보는 동창이자 라이벌인 션 맥과이어에게 윌을 맡긴다. 션은 영원한 ‘오 마이 캡틴’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했다. 영화는 윌과 션의 만남으로 진부한 성장영화가 아닌 인생영화로 반전한다. 마음을 닫은 윌과 션의 관계는 한 폭의 작은 그림 덕분에 풀린다. 영화에서 이 그림은 션이 그린 것으로 나오는데 사실 영화를 연출한 구스 반 산트가 솜씨를 부린 것으로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 윈즐로 호머(1836~1910)가 그린 유화 ‘안개경보’(The Fog Warning·1885)를 모사한 것이다.호머는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이자 삽화가로 가장 미국적인 화풍으로 일컫는 풍경화가들의 모임인 ‘허드슨강파’(Hudson River School)의 일원이다. 이들은 미국에서 자생한 최초의 화파로 광활한 대자연에 대한 외경심을 낭만적이며 사실적인 필치로 담았다. 허드슨강파의 풍경화는 6·25전쟁 전후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물레방아와 폭포, 초가집이 삼위일체를 이루는 소위 이발소그림의 원형이 되었다. 영화는 호머에게 상당 부분 빚졌다. 특히 윌과 션이 서로의 공통점을 발견하는 단초가 되는 그림은 호머의 ‘안개경보’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 ‘안개 때문에 잡은 고기를 버리고 빨리 돌아올 것인가, 아니면 잡은 청어를 가지고 사력을 다해 항구로 복귀할 것인가’ 하는 실존적 고민을 윌의 입장에서 풀어냈다. 영화 후반부에 윌이 그의 친구로 배운 것은 없지만 충고를 아끼지 않는 처키(벤 애플렉 분)와 광대한 하늘을 배경으로 저 멀리 조선소를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 뒤로 노인들이 오래된 탑을 철거하고 있다. 처키는 범선이 그려진 셔츠를 입고 있다. 이것도 호머가 삽화가로 일하던 하퍼스 위클리(1873년 가을판)에 실었던 음각 목판화 ‘배짓기, 글로스터 항구’를 연상시킨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조선소와 철거지가 교차하는 대목에서 문화지리학자 피어스 루이스의 ‘경관 읽기에 필요한 공리’를 떠올리게 된다. 자연을 배제하고 인간이 만든 경관을 문화경관이라 하는데 문화경관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 왔고, 살고 있고, 살아가게 될 것인가를 보여 주는 증거다. 사실 엄청난 변화나 압력, 동기가 없다면 사람들은 크게 경관을 바꾸지 않는다. 항구 근처 조선소에서 일하는 노동자 계급은 불가피하게 스스로가 풍경의 일부가 되어 그 삶을 영위한다. 처키는 영화에서 통찰력 있는 말로 윌에게 충고한다. “내일 나는 일어나서 50살이 될 것이고 나는 여전히 이 일을 할 거야.” 이외에도 영화는 장면마다 문화적 경관을 놓치지 않는 관찰자로서 호머의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영화 초입에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이라든가, 윌이 칠판 앞에서 문제를 푸는 모습도 호머의 작품 ‘칠판’에서 빌려 온 것이다. 사실 영화와 그림, 회화는 매우 흥미로운 관계다. 영화는 예술적인 문제를 풀고자 회화가 획득한 일련의 효과들을 이용한다. 회화의 고정성과 단면적인 성격은 영화의 유동성과 방향성과 어울려 서로 단절되는 것이 아니다. 회화는 형상의 움직임은 없지만 관람객의 눈의 움직임에 의해 영화와 같은 연속적인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와 회화는 같으면서 다르고 또 다르면서도 같다. 수학도 마찬가지다. 이성과 감성, 두 가지 속성이 모두 필요한 게 수학이다. 윌은 아무도 손을 못 대는 수학문제, 수학의 노벨상이라는 필즈상을 받은 램보 교수도 정답을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를 술술 푼다. 그가 수학문제를 머리로만이 아니라 직관 즉 마음으로 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사람에게는 머리도 중요하지만, 마음도 중요하다. 윌의 마음을 열기 위해 많은 사람이 노력했지만, 마음으로 다가간 이는 같지만 다른 상처를 공유한 션뿐이었다. 혁신도 좋고 새로운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세상에는 어른과 선생 즉 고전과 전통 그리고 뿌리와 원칙도 필요하다. 스승은 없고 선생만 있는 이 시대에,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세상에 나오기를 두려워하는 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열 수 있도록 하는 게 오로지 일자리뿐일까.
  • 44세 두아이 엄마 조 파비 “내년 유럽선수권 1만m 2연패 겨냥”

    44세 두아이 엄마 조 파비 “내년 유럽선수권 1만m 2연패 겨냥”

    영국의 44세 육상 선수 조 파비가 1년 뒤 독일에서 열리는 유럽육상선수권에 참가해 여자 1만m 2연패를 겨냥한다. 그녀는 13일(현지시간) 막을 내린 런던 세계육상선수권 출전 기준 기록을 여유있게 충족했지만 뒤꿈치 부상 때문에 뛰지 못한 한을 내년에 풀겠다고 입술을 깨물고 있다. 1973년 9월 20일 태어난 파비는 내년 유럽선수권대회에 출전한 뒤 한달 뒤에 45회 생일을 맞는데 은퇴를 마다하고 내년 대회에서 2연패를 노리겠다고 하는 것이다. 3년 전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린 유럽선수권 1만m를 우승하며 대회 최고령 여자 우승자의 영예를 차지했는데 이제 4년을 더 늘리겠다고 벼르는 것이다.다섯 차례나 올림픽에 참가했던 파비는 16일 영국 BBC와의 인터뷰를 통해 “내년에 유럽선수권 출전 자격을 얻는 데 집중할 것”이라며 내년 3월 호주에서 열리는 커먼웰스 게임에는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이어 이번 시즌 초반 부상을 당해 실망했다. 과거 1~2년 전에 느꼈던 것보다 훨씬 젊어졌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트랙에서의 기록을 좀더 좋게 만들 수 있길 갈망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또 “어느날 은퇴해야 하겠다고 생각할 때가 오겠지만 난 결코 완벽하게 은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난 늘 끊임없이 달릴 것”이라고 말했다. 두 아이의 엄마인 파비는 얼마전 세계선수권대회가 열린 런던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2007년 대회 때 4위를 차지했지만 대회 도중 엘반 아베일레게세(터키)가 금지약물 양성반응이 나와 실격되면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신라왕 극락왕생 빈 백제 유민…불비상에 아로새긴 망국의 한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신라왕 극락왕생 빈 백제 유민…불비상에 아로새긴 망국의 한

    1960년 대학 탁본 과제 계기로 발견 …세종·공주 소재 7점 국보·보물로 지정 1960년 동국대 불교학과 2학년이었던 이재옥 학생은 집 주변의 문화재를 탁본해 오라는 방학 과제를 받았다. 지도교수는 이후 1970년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내고 2011년 타계한 미술사학자 황수영 선생이었다. 학생의 고향은 오늘날에는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쌍류리로 바뀐 충남 연기군 서면 쌍류리였다. 그는 고향집에서 서쪽으로 언덕을 하나 넘으면 나타나는 세종시 전의면 다방리의 비암사에서 어릴 적부터 봤던 비석들을 떠올렸다. 극락보전 앞 삼층석탑의 3층 지붕에는 세 점의 검은색 비석이 있었다.이재옥 학생은 스님이 출타하기를 기다려 사다리를 놓고 석탑에 올라갔다. 하지만 처음 해 보는 탁본이라 표면의 이끼를 제거해야 하는 것을 몰랐던 데다 스님이 언제 돌아올지 몰라 서두르느라 찍힌 모양이 선명하지 않았다. 황수영 선생은 탁본을 새로 해 오라고 했고, 이재옥 학생은 다시 고향에 내려가 이번에는 이끼를 벗겨내고 제대로 탁본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바람에 외출했던 스님이 돌아왔고, 크게 혼이 났다. ‘부처님의 무덤’에 올라갔으니 당연한 일이다.탁본에 찍힌 명문(銘文)을 보고 황수영 선생은 조사단을 구성해 9월 10일 비암사로 향했다. 이날 확인한 것이 계유명전씨아미타삼존석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과 기축명아미타불비상(己丑銘阿彌陀佛碑像)과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彌勒菩薩半跏思惟碑像)이다. 국내에서는 처음 알려진 불비상이었다. 글자 그대로 비석 모양의 돌에 부처를 새겼다.이듬해 세종시 조치원읍 서창리 서광암에서 계유명삼존천불비상(癸酉銘三尊千佛碑像)이, 연서면 월하리 연화사에서 무인명석불비상(戊寅銘石佛碑像)과 칠존불비상이 조사됐다. 공주시 정안면 평정리에서도 삼존불비상이 확인됐다. 모두 삼국시대 백제땅이다. 한반도 다른 지역에는 없는 특정 불교조각이 일정 시기 좁은 지역에서 집중 조성된 것이다. 비암사 아미타삼존석상과 서광암 삼존천불비상은 국보로, 다른 5점의 불비상은 모두 보물로 지정됐다. 비암사 불비상 3점은 1962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넘겨진다. 지금은 국립청주박물관에서 가장 중요한 전시유물로 대접받고 있다. 이제 팔순에 접어든 이재옥 선생은 여전히 비암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공주시 정안면에 살고 있다. 역사에 남을 ‘중요한 발견’을 한 셈이지만, 이 때문에 비암사(碑巖寺)는 비암(碑巖)없는 절이 되고 말았고, 그는 미안한 마음에 오랫동안 비암사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술회하고 있다.서광암 삼존천불비상은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지금은 이 박물관이 선사·고대문화실의 전시를 교체하고 있어 삼존비상을 볼 수는 없다. 공주 정안의 삼존불비상도 동국대박물관으로 넘겨졌다. 연화사의 두 불비상은 그대로 연화사에 있다. 서광암과 연화사는 모두 일제강점기 이후 세워진 사찰이라고 한다. 비암사 불비상도 다른 절에서 옮겨 왔을 가능성이 크다. 절 이름도 불비상을 옮겨 왔기에 이렇게 지었을 것이다. 황수영 선생은 비암사 불비상을 조사한 해 11월 ‘비암사 소장의 신라재명석상(新羅在銘石像)’이라는 논문을 처음 발표한다. 이후 최근까지도 적지 않은 미술사학자와 역사학자가 이들 불비상에 남겨 놓은 의문을 푸는 노력을 해 오고 있다. 불비상에 얽힌 의문이란 이런 것이다. 비암사 계유명삼존석상에는 ‘국왕·대신(國王·大臣) 및 칠세부모(七世父母)와 모든 중생(含靈·함령)을 위해 절을 짓고 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과 함께 이 불사(佛事)를 주도한 이들의 벼슬과 이름을 새겨 놓았다. 그런데 신라 관등인 내말(乃末)·대사(大舍)와 백제 관등인 달솔(達率)이 한데 명기되어 있다. 연화사 계유명삼존천불비상도 다르지 않다. 이 때문에 학계는 계유년을 백제가 망하고 13년이 지난 673년(신라 문무왕 13)으로 추정한다. 조각 양식이 8세기로 내려가지 않는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라고 한다. 같은 이치로 무인년은 678년(문무왕 18), 기축년은 689년(신문왕 9년)으로 보고 있다. 망국민(亡國民)이 새로운 지배 치하에 막 들어서 조성한 불비상에 새긴 ‘국왕·대신’이 백제왕인지, 신라왕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백제왕과 대신으로 보는 학자들은 불비상을 백제 옛 땅에서 백제 유민들이 만들었다는 데 주목한다. 신라가 당나라와의 혈전을 앞두고 백제인들에게 관작을 주면서 회유하던 시기 망국의 군주와 대신의 극락왕생을 비는 성격이라는 것이다. 한 걸음 나아가 백제부흥운동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비암사 계유명삼존석상의 인왕상(仁王像)은 갑옷 차림에 왼손에는 긴 창을 들고 있고, 허리 장식은 X자형으로 교차되어 있는데, 사찰의 수호신이라기보다는 나라를 되찾고자 했던 백제부흥군의 모습을 상징한다는 주장이다. 신라왕과 대신으로 보는 학자들은 명문의 백제 유민 대부분이 신라 관등을 갖고 있는데다 백제부흥운동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근거로 삼는다. 특히 계유명 불비상을 조성한 673년은 당나라가 백제 옛 땅에 설치한 통치기관인 웅진도독부를 내쫓은 이듬해라는 데 의미를 부여한다. 신라가 백제 유민들의 역량을 당군 축출에 집결시키려면 황폐해진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만큼 불비상과 사찰 조성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라왕과 대신으로 보는 학자들도 불비상을 발원한 백제 유민이나, 조상(造像)에 참여한 백제 조각가들이 마음속으로도 새로운 지배자들의 발복을 빌었는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백제 유민과 조각가들은 망국의 현실은 인정하면서도, 백제인의 정체성은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기에 옛 백제 양식으로 불상을 조성하지 않았겠느냐는 해석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일종의 절충론이다. 일련의 불비상은 죽은 뒤 서방정토에서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아미타신앙에 기반한다. 따라서 ‘국왕·대신 및 칠세부모와 모든 중생’에는 백제 패망과 부흥운동 과정에서 죽은 중생, 당나라에 끌려간 1만 2000명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대외적이고 표면적인 조성 목적은 신라왕과 대신들을 위해서라지만, 심정적으로는 백제왕과 대신들을 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결국 불비상은 새로운 통치자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백제 옛 땅 유민들의 복잡한 심사를 보여 준다는 것이다. 신라인으로 삶을 이어 가야 하는 망국민이기에 불상 및 사찰 조성에서도 타협하는 자세를 보여 주기는 해야 했으되 망국의 스타일로 불상을 만들어 사라져 간 사람들을 마음 한구석에 담아 두고자 하는 처연함을 불비상은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군사공격 대통령 권한” “의회 동의 필요”… 美 여야 이견

    미국 의회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대북 ‘군사’ 옵션의 ‘사전 동의’를 놓고 갑론을박하고 있다고 미국의 정치전문 매체인 더힐이 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화염과 분노’ 발언 직후 미 의원들 사이에서 북핵 해결을 위한 ‘선제공격’ 개시 절차를 두고 격렬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괌을 먼저 공격한다면 대통령의 독자적 결정이 가능하지만, ‘선제타격’이라면 미 의회의 사전 동의가 필요하다는 쪽으로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민주당은 선제타격을 위해선 대통령이 의회에 공식적인 무력사용 승인안을 제출해야만 한다는 입장이다. 대니얼 설리번 민주 하원의원(알래스카)은 “헌법 1조에 모든 입법권이 미합중국 의회에 귀속된다고 적시됐다”면서 “어떤 종류의 대북 군사 공격이라도 의회 동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단, 설리번 의원은 북한이 괌·알래스카·하와이 등 미국 영토가 공격을 받는 경우엔 트럼프 대통령에게 독자 결정 권한이 있다고 덧붙였다. 반면, 공화당 의원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의회 동의 없이 단기적 군사 공격을 감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데이브 브랫 공화당 하원의원(버지니아)은 1973년 제정된 전쟁권한법을 들어 “단기적(전쟁)이라면 대통령은 액션을 취할 독자적 권한이 있다”고 주장했다. 전쟁권한법이란 의회의 승인이 없는 상태에서 대통령이 해외 전쟁 지역에서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는 기한을 60일로 제한한 법이다. 2001년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통과된 무력사용권(AUMF)은 대통령이 ‘테러 전쟁’의 경우 독자적 결정을 가능케 만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4월 화학무기를 문제 삼아 시리아 공군기지를 미사일로 공격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법에 따른 것이다. 대상과 기한 등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이 법은 언제든 미 대통령이 북한에 독자적 선제공격을 할 수 있는 구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바버라 리 민주 하원의원(캘리포니아)을 중심으로 AUMF 폐지 노력이 진행 중이지만 성공 여부는 불투명하다. 워싱턴 정가에서는 미 의회가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군사행동에 동의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내년 중간 선거를 앞둔 여야 의원들이 표심을 의식해 한반도 전쟁에 찬성할 가능성은 낮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워싱턴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근현대사 여적 오롯이 東郊에서 생생한 무지갯빛 이야기 童話되고 동상·기념비의 천국 童心저격

    어린이대공원이 면한 능동, 군자동, 구의동은 조선시대 동교(東郊)의 언저리다. 동교란 동대문서부터 아차산과 광나루까지 서울의 동동쪽 교외를 이르는 조선식 지역 구분법이다.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백악~낙산~남산~인왕산)이 사대문을 형성한다면 외사산(북한산~아차산~관악산~덕양산)은 사대문 밖 10리 즉 성저십리(城底十里)를 감싼다. 동교는 동쪽 벌판이었다. 북교, 서교, 남교라는 지역명은 낯설지만 동교는 귀에 익다. 생산지가 없는 소비도시를 먹여살리고 지키는 중요한 배후지였다.●동대문~광나루 동교는 소비도시 배후동교는 목장→군대 주둔지→채소 재배지로 돌고 돌았다. 너른 들에 말을 키우던 목장이었지만 군마를 키우지 못하도록 항복 조건을 못박은 병자호란 이후 훈련도감 군인 주둔지로, 사대문 안에 필요한 채소 재배지와 물물교환 시장으로 변천한 것이다. 전농동, 마전교, 마장동, 면목동, 자양동, 미근동처럼 지명에 농사와 목축, 채소 재배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특히 마장동 축산물시장과 옛 뚝섬 경마장에 이 지역의 대표 유전자가 깃들어 있다.어린이대공원을 단순히 하나의 공원, 그것도 어린이용 공원으로 만만히 봤다가는 큰코다친다. 한국 근현대사의 여적이 오롯이 남은 터전이다. 이 땅의 마지막 황태자비이자 황후인 순명효황후가 1926년 유릉에 순종과 합장하기 이전까지 묻혔던 유강원 자리였다. 능동이라는 지명이 여기서 비롯됐다. 1927년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장 서울컨트리클럽(군자리골프코스)의 클럽하우스가 건재하고 공원에는 18홀 코스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앞두고 남북 간 체제 경쟁의 폭풍 속에서 “골프장을 한가로운 교외로 옮기고 그 자리에 어린이대공원을 조성하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마디에 골프장은 어린이공원으로 둔갑했다.●골프장 모습 그대로… 동양 최고 공원1973년 5월 5일 어린이날을 기해 71만 9400㎡짜리 동양 최고 규모의 공원을 우리 손으로 조성한 기념비적인 공간이다. 공원이라곤 창경원, 남산공원, 사직공원, 효창공원, 삼청공원, 파고다공원 같은 자연공원과 사적지공원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 350달러, 조경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지만 국민의 염원을 담아 만든 최고의 어린이공원이었다. 모든 어린이와, 어린이를 빙자한 어른들의 놀이터였다.공원을 조성한 양택식 시장 등 서울시 공무원들이 가장 잘한 일은 공원이 인공적인 놀이기구에 파묻히지 않고 골프장 상태 그대로 잔디와 숲을 유지하도록 해 달라는 자문위원회의 의견을 수용한 점이다. 동양 최대의 디즈니랜드를 만든다면서 모든 길을 포장하고, 동서남북으로 6개의 광장을 만들고, 모노레일을 깐다는 식의 계획은 백지화됐다. 덕분에 오늘의 어린이대공원이 도시의 허파로 온전하게 남았다.●예술가들 무보수 참여… 도시의 허파로당대의 쟁쟁한 예술가들이 무보수로 공원 조성에 참여했고 기업과 개인독지가가 분수대, 벤치, 음수대 제작비 등 공사 대금을 기증 혹은 찬조했다. 광화문 충무공 동상을 조각한 김세중이 중앙분수대를, 세종문화회관을 설계한 건축가 염덕문이 정문과 팔각정을 각각 지었다. 어린이대공원은 잠자던 능동 일대의 지도를 새로 그렸다. 1973년 개원일에 맞춰 서울시는 시내 어느 곳에서라도 한 번만 갈아타면 대공원에 갈 수 있도록 시내버스 운행체계를 개편했다. 개원 첫날 60만명, 다음날 30만명이 몰렸다. 한적한 교외마을 능동과 뚝섬·화양·중곡동에 시민들의 관심이 쏠리면서 개발붐을 탔다. 주변이 학교와 주택지로 변했다. 능동로·중곡동길·자양로가 생겼고 천호대로와 동이로가 개통됐다. 지하철 2·5·7호선이 지나게 된 것도 모두 어린이대공원의 영향이다. ●마지막 황후의 능… 살아 있는 역사로‘옥에 티’가 있다면 20개에 이르는 동상과 기념비가 개념 없이 꽂혀 있고 육영재단 어린이회관과 통일교에 알토란 같은 부지 13만㎡를 떼어준 점이다. 1974년 남산에서 옮겨온 어린이회관은 길을 잃었고 리틀엔젤스예술단 자리엔 유니버설발레단, 선화예술 중·고교 등이 들어서 사유화됐다.꿈마루는 ‘소설 같은’ 건축물이다. 조선의 마지막 황후의 능과 최초의 골프장 클럽하우스 그리고 어린이대공원 교양관이라는 여러 시간대의 역사가 한 장소에 겹쳐 꿈을 꾸기 때문이다. 워커힐호텔 본관을 설계한 나상진이 1970년 완공한 이 건물은 철거 일보 직전 살아남은 뒤 조성룡과 최춘웅에 의해 2011년 되살아났고 2013년에는 한국 최고의 현대 건축 14위에 뽑혀 건축물 순례지가 됐다. 살아남은 역사란 바로 이런 것이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서울신문이 서울시 및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7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1회 동심이 전하는 메시지편이 서울 광진구 능동로 216 어린이대공원 일대에서 지난 5일 진행됐다. 어린이대공원은 공원 전체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도시의 보물창고이다. 참가자들은 무더위를 피해 오후 7시부터 9시 30분까지 나무들이 소곤대는 소리와 보름달을 조명 삼아 시원한 밤을 보냈다. 부모의 손에 이끌려나온 어린이들도 김미선 서울도시문화지도사가 전해 주는 감미로운 무지갯빛 이야기보따리를 따라 동심을 맘껏 발산했다.
  •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東郊에서 童話되고 童心저격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東郊에서 童話되고 童心저격

    서울신문이 서울시 및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7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1회 동심이 전하는 메시지편이 서울 광진구 능동로 216 어린이대공원 일대에서 지난 5일 진행됐다. 어린이대공원은 공원 전체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도시의 보물창고이다. 참가자들은 무더위를 피해 오후 7시부터 9시 30분까지 나무들이 소곤대는 소리와 보름달을 조명 삼아 시원한 밤을 보냈다. 부모의 손에 이끌려나온 어린이들도 김미선 서울도시문화지도사가 전해 주는 감미로운 무지갯빛 이야기보따리를 따라 동심을 맘껏 발산했다.어린이대공원이 면한 능동, 군자동, 구의동은 조선시대 동교(東郊)의 언저리다. 동교란 동대문서부터 아차산과 광나루까지 서울의 동동쪽 교외를 이르는 조선식 지역 구분법이다.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백악~낙산~남산~인왕산)이 사대문을 형성한다면 외사산(북한산~아차산~관악산~덕양산)은 사대문 밖 10리 즉 성저십리(城底十里)를 감싼다. 동교는 동쪽 벌판이었다. 북교, 서교, 남교라는 지역명은 낯설지만 동교는 귀에 익다. 생산지가 없는 소비도시를 먹여살리고 지키는 중요한 배후지였다. ●동대문~광나루 동교는 소비도시 배후 동교는 목장→군대 주둔지→채소 재배지로 돌고 돌았다. 너른 들에 말을 키우던 목장이었지만 군마를 키우지 못하도록 항복 조건을 못박은 병자호란 이후 훈련도감 군인 주둔지로, 사대문 안에 필요한 채소 재배지와 물물교환 시장으로 변천한 것이다. 전농동, 마전교, 마장동, 면목동, 자양동, 미근동처럼 지명에 농사와 목축, 채소 재배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특히 마장동 축산물시장과 옛 뚝섬 경마장에 이 지역의 대표 유전자가 깃들어 있다. 어린이대공원을 단순히 하나의 공원, 그것도 어린이용 공원으로 만만히 봤다가는 큰코다친다. 한국 근현대사의 여적이 오롯이 남은 터전이다. 이 땅의 마지막 황태자비이자 황후인 순명효황후가 1926년 유릉에 순종과 합장하기 이전까지 묻혔던 유강원 자리였다. 능동이라는 지명이 여기서 비롯됐다. 1927년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장 서울컨트리클럽(군자리골프코스)의 클럽하우스가 건재하고 공원에는 18홀 코스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앞두고 남북 간 체제 경쟁의 폭풍 속에서 “골프장을 한가로운 교외로 옮기고 그 자리에 어린이대공원을 조성하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마디에 골프장은 어린이공원으로 둔갑했다.●골프장 모습 그대로… 동양 최고 공원 1973년 5월 5일 어린이날을 기해 71만 9400㎡짜리 동양 최고 규모의 공원을 우리 손으로 조성한 기념비적인 공간이다. 공원이라곤 창경원, 남산공원, 사직공원, 효창공원, 삼청공원, 파고다공원 같은 자연공원과 사적지공원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 350달러, 조경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지만 국민의 염원을 담아 만든 최고의 어린이공원이었다. 모든 어린이와, 어린이를 빙자한 어른들의 놀이터였다. 공원을 조성한 양택식 시장 등 서울시 공무원들이 가장 잘한 일은 공원이 인공적인 놀이기구에 파묻히지 않고 골프장 상태 그대로 잔디와 숲을 유지하도록 해 달라는 자문위원회의 의견을 수용한 점이다. 동양 최대의 디즈니랜드를 만든다면서 모든 길을 포장하고, 동서남북으로 6개의 광장을 만들고, 모노레일을 깐다는 식의 계획은 백지화됐다. 덕분에 오늘의 어린이대공원이 도시의 허파로 온전하게 남았다.●예술가들 무보수 참여… 도시의 허파로 당대의 쟁쟁한 예술가들이 무보수로 공원 조성에 참여했고 기업과 개인독지가가 분수대, 벤치, 음수대 제작비 등 공사 대금을 기증 혹은 찬조했다. 광화문 충무공 동상을 조각한 김세중이 중앙분수대를, 세종문화회관을 설계한 건축가 염덕문이 정문과 팔각정을 각각 지었다. 어린이대공원은 잠자던 능동 일대의 지도를 새로 그렸다. 1973년 개원일에 맞춰 서울시는 시내 어느 곳에서라도 한 번만 갈아타면 대공원에 갈 수 있도록 시내버스 운행체계를 개편했다. 개원 첫날 60만명, 다음날 30만명이 몰렸다. 한적한 교외마을 능동과 뚝섬·화양·중곡동에 시민들의 관심이 쏠리면서 개발붐을 탔다. 주변이 학교와 주택지로 변했다. 능동로·중곡동길·자양로가 생겼고 천호대로와 동이로가 개통됐다. 지하철 2·5·7호선이 지나게 된 것도 모두 어린이대공원의 영향이다. ●마지막 황후의 능… 살아 있는 역사로 ‘옥에 티’가 있다면 20개에 이르는 동상과 기념비가 개념 없이 꽂혀 있고 육영재단 어린이회관과 통일교에 알토란 같은 부지 13만㎡를 떼어준 점이다. 1974년 남산에서 옮겨온 어린이회관은 길을 잃었고 리틀엔젤스예술단 자리엔 유니버설발레단, 선화예술 중·고교 등이 들어서 사유화됐다. 꿈마루는 ‘소설 같은’ 건축물이다. 조선의 마지막 황후의 능과 최초의 골프장 클럽하우스 그리고 어린이대공원 교양관이라는 여러 시간대의 역사가 한 장소에 겹쳐 꿈을 꾸기 때문이다. 워커힐호텔 본관을 설계한 나상진이 1970년 완공한 이 건물은 철거 일보 직전 살아남은 뒤 조성룡과 최춘웅에 의해 2011년 되살아났고 2013년에는 한국 최고의 현대 건축 14위에 뽑혀 건축물 순례지가 됐다. 살아남은 역사란 바로 이런 것이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 [씨줄날줄] 위르겐 힌츠페터/이순녀 논설위원

    [씨줄날줄] 위르겐 힌츠페터/이순녀 논설위원

    지난 2일 개봉한 영화 ‘택시 운전사’가 흥행하면서 영화 속 외신 기자의 실제 모델인 위르겐 힌츠페터(1937~2016)가 재조명되고 있다. 영화는 1980년 5월 19일 계엄령하의 광주에 잠입해 군부 독재가 저지른 참혹한 살상 현장을 카메라에 생생히 담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그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당시 독일 제1공영방송 ARD-NDR 동아시아 특파원으로 도쿄에 주재하던 힌츠페터는 녹음을 담당하는 동료 기자와 함께 서울에서 택시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 광주로 가는 길목이 모두 차단된 상태에서 택시 기사는 기지를 발휘해 샛길을 찾아 이들을 목적지까지 데려다줬다. 21일 광주에서 빠져나온 힌츠페터는 필름을 과자 상자에 담아 도쿄로 돌아왔다. 이튿날 독일에서 영상이 방송되자 큰 파문이 일었고, 이후 CBS 등 다른 외신들도 광주 취재에 나섰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는 23일 다시 광주로 돌아와 계엄군이 철수하고, 시민 자치가 된 해방 광주의 모습을 촬영했다. 그해 9월 독일에서 ‘기로에 선 한국’이란 제목으로 방영된 다큐멘터리는 1980년대 중반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대학가 등지에서 상영되며 1987년 민주화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의대에 다니다 1963년 카메라기자로 입사한 힌츠페터는 1967년 홍콩 지부로 발령받아 베트남 전쟁 등을 취재했고, 1973년부터 1989년까지 동아시아 특파원으로 활약했다. 1986년 11월 광화문 시위 취재 중 사복경찰에 맞아 중상을 입기도 했다. 1970~80년대 한국의 안타까운 상황을 가까이서 지켜봤기 때문일까. 한국에 대한 그의 애정은 남달랐다. 2004년 심장병으로 쓰러졌을 때 가족에게 “광주 망월동 묘지에 묻히고 싶다. 몸이 못 가면 사진과 위패라도 광주에 보내 달라”고 했다. 건강을 되찾아 2005년 5·18 2주년 때 광주를 방문했을 당시 5·18기념재단에 직접 손톱과 머리카락을 맡기기까지 했다. 지난해 1월 25일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이 유품은 망월동 5·18 옛묘역에 안치됐다. 힌츠페터는 광주까지 태워 준 택시 기사를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워했다. 그가 2003년 송건호언론상 수상 소감에서 “1980년 5월 나를 안내해 준 용감한 택시 기사에게 감사한다”고 말한 게 영화의 모티브가 됐다. 영화 엔딩 크레디트에는 제작진이 생전에 인터뷰한 힌츠페터의 모습이 나온다. “당신을 꼭 한 번 만나고 싶다”고 말하는 힌츠페터의 떨리는 목소리가 큰 울림을 안겨 준다. 끝내 택시 기사를 만나지도, 영화의 완성을 보지도 못한 그를 대신해 부인이 오는 8일 방한한다.
  •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노아 방주’ 닮은 김수근의 불광동성당…‘장인 손길’ 불광대장간·청기와양복점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노아 방주’ 닮은 김수근의 불광동성당…‘장인 손길’ 불광대장간·청기와양복점

    투어단이 첫 야행지로 선택한 은평구에는 마을공동체 산새마을, 소설가 장용학 가옥, 불광동성당, 불광대장간, 청기와양복점 등 모두 5곳이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일행은 이 가운데 불광동성당과 불광대장간, 청기와양복점 등 3곳과 양천리 비석, 서울혁신파크를 답사했다. 녹번동이란 지명의 유래가 된 서울 유일의 광산 녹번이고개 산골판매소는 이날 문을 열지 않아 방문하지 못했다. 대신 정순희 해설자가 미리 준비한 접골 특효약 산골 알갱이를 참가자들에게 나눠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불광동성당은 마산 ‘양덕성당’, 서울 ‘경동교회’와 함께 한국 건축계의 1세대 김수근이 지은 3대 종교 건축물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성당은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킨다고 한다.불광대장간은 1963년에 개업했으며 창업주 박경원씨의 아들 박상범씨가 1991년 가업을 계승했다. 쇠를 화덕에 달궈 망치로 두들기고 잘라 모양을 만들어 내는 전통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제품에는 장인정신과 자부심을 담은 ‘불광’이라는 상호를 새겨서 판다.청기와양복점은 1973년 현재의 자리에서 문을 열어 올해로 44년째 영업 중이다. 검은 바탕에 황금색 글씨로 ‘명품신사복 청기와’라고 쓴 간판 아래 창업주 황재홍씨가 국제양복기술대회에서 받은 대상이 쇼윈도에 전시돼 있다. 황필승씨가 부친의 정통 수제 양복과 반 맞춤 양복 생산방식을 병행해 업을 이어 가고 있다.서울혁신파크는 충북 오송으로 이전한 식품의약품안전처와 질병관리본부 건물 32개 동을 리모델링한 공간이다. 국민의 건강을 책임지던 공간에서 도시재생과 사회혁신을 통해 사회를 치유하는 혁신파크로 탈바꿈했다. 서울혁신파크와 청년허브, 사회적경제지원센터, 서북50플러스센터, 마을공동체지원센터 관련 200여개 업체가 입주했고 앞으로 어린이 복합문화공간, 청소년 직업체험관, 서울기록원 등이 들어올 예정이다. 2300여명의 상주 인력과 8000억원의 경제적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서울혁신파크와 산골판매소는 앞으로 선정이 유력한 서울미래유산 후보라고 할 수 있다.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서울미래유산팀
  • [런웨이 조선] 쪽빛부터 학·호랑이 장식까지… 色 입고 美 더한 ‘신분의 상징’

    [런웨이 조선] 쪽빛부터 학·호랑이 장식까지… 色 입고 美 더한 ‘신분의 상징’

    지금처럼 한복을 가깝게 느꼈던 때가 또 있을까. 결혼식이나 집안 행사에서 겨우 입었던 한복은 이제 다양한 해석과 더불어 즐겁게 사용되고 있다. 경복궁이나 인사동, 전주의 한옥마을 등에는 한국인뿐 아니라 외국인까지 한복 체험이 필수 코스다. 또한 거의 매일 방송되는 사극 드라마에서는 아이돌 연기자가 평소 요란한 옷차림을 내려놓고 곱게 차려입은 한복으로 시청자들에게 한복의 아름다움을 각인시키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예쁘기만 한 옷으로 보기에는 한복에 담긴 의미가 깊다.조선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다. 이 중요한 신분을 가장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도구가 복식이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옛 사람들의 복식에는 그 사람의 신분이 드러나는 여러 가지 장치가 담겨 있다. 옷을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것은 소재다. 그러니 높은 신분일수록 고급의 직물로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비단으로 만든 옷인지 무명으로 만든 옷인지는 가까이 다가가 보거나 만져 보지 않으면 쉽게 판별이 어렵다. 어느 정도 옷감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분별이 가능한 것이다. 소재보다 조금 더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색상이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사람이 즐겨 입은 색은 염색하지 않은 기본적인 색, 소색(素色)이다. 여기에 잦은 세탁이 더해지면서 소색은 점차 흰색으로 바뀌어 너도 나도 흰색 옷을 입게 되었다.왕실을 비롯해 권세가 있는 사대부가에서는 쪽빛을 비롯해 붉은색까지 다양한 색상을 즐겼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청색을 길색(吉色)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쪽염을 좋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쪽은 가성비에 있어서 문제가 되었다. 벼를 심어 쌀을 생산하는 것보다 훨씬 소출이 적을 뿐 아니라 점점 진한 색을 좋아하다 보니 쪽은 더 많이 필요했고, 염색을 하는 데 드는 공력 또한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쪽물을 들인 청색 옷이 좋다 해도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소색을 입을 수밖에 없다. 붉은색은 또 어떤가? 사대부는 물론 심지어 천례(賤隷)에 이르기까지 좋아했던 색이 자색이라고 한다. 자색 역시 한번 염색으로 얻을 수 있는 색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번 염색을 해야 하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사치와 맞닿을 수밖에 없다. 통치자 입장에서 염색을 금해야 하는 이유이다. 염색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구별 짓기의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색상 외에 또 다른 방법은 문식(文飾)이다. 문식은 아름답게 꾸며 장식하는 것인데 가슴과 등에 무늬를 넣어 표식하는 것으로 흉배(胸背)가 대표적이다. 흉배는 문무백관의 집무복에 붙이는 장식물로 그 무늬에 따라 문관과 무관을 구분하고 품급까지 구분한다. 그러나 조선 초부터 관리들의 의복에 흉배를 달았던 것은 아니다. 1446년(세종 28) 우의정 하연과 우참찬 정인지 등이 평상시 의복은 화려한 것이 필요하지 않지만 조정의 관복은 등차(等差)를 분명하게 하고 존비(尊卑)를 분별하는 것이니 예법에 따라 흉배를 달자는 의견을 내놓으면서 흉배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영의정 황희는 흉배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것은 정치가가 가장 먼저 힘써야 하는 것이 검소를 숭상하고 사치를 억제하는 일인데 “단자(段子)와 사라(紗羅) 같은 비단이 우리 땅에서는 생산되지 않을 뿐 아니라 흉배를 준비하는 것도 어렵다”는 이유였다. 또 “존비하는 등차를 두기 위한 것이라면 이미 금대(帶)·은대(銀帶)·각대(角帶)를 사용해 구분하고 있으므로 굳이 흉배를 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여기에 임금까지 황희의 손을 들어 흉배를 달자는 논의는 일단락되었다. 다시 흉배제도에 대한 논란이 불거진 것은 1454년(단종 2) 검토관 양성지가 흉배 이야기를 꺼내면서부터이다. 그는 경연자리에서 “풍속을 금하는 법령이 다 없어져 상하의 차등이 없어질까 두려우니 흉배를 입어서 조정의 의식과 법식을 엄하게 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시험 삼아 종친에게 먼저 흉배단령을 착용하도록 했다. 그리고 뒤이어 문무관의 상복에도 문장을 정해 신분을 구분하였다. 이에 따라 대군은 기린, 도통사는 사자, 제군은 백택으로 하고 문관 1품은 공작, 2품은 운안, 3품은 백한으로 정했으며 무관 1품과 2품은 호표, 3품은 웅비, 대사헌은 해치로 정했다. 이때 문신은 날짐승, 무신은 길짐승으로 기준을 정했다.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제도는 점점 문란해져 무신이 간혹 날짐승인 학 흉배를 착용하자 영조(英祖)는 법식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흉배제도의 문란을 단단히 타일러서 경계하라는 하교를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흉배제도가 정비되지 못하다가 1873년(고종 10년) 조신의 흉배제도를 학과 호랑이로 구분하고 당상관은 두 마리, 당하관은 한 마리만을 수놓게 했다. 근검절약보다는 문무백관의 품식(品式)과 절문(節文)을 우선시하여 예법에 맞추고자 했던 흉배는 아름다움은 물론 간편함까지 챙겼으니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이민주 한국학중앙연구원선임연구원
  • 개발계획 모른 채 낡은 집 신축했다면…

    공공주택사업 추진 계획을 알 수 없던 시점에 낡은 집을 허물고 새로 지었다면 이는 투기 목적이 아닌 만큼 이주자 택지 공급 대상자에서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는 행정심판 결정이 나왔다. 국민권익위원회 소속 중앙행정심판위원회는 이주자 택지 공급 대상자 선정에서 제외된 A씨가 낸 행정심판 사건에 대해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A씨를 이주자 택지 공급 대상자로 선정하라”고 결정했다고 24일 밝혔다. 이주자 택지란 정부 혹은 지방자치단체가 특정 지역을 개발하고자 토지를 수용하면서 기존 주택 소유자(철거민)에게 특별 공급하는 단독 택지를 말한다. 이곳에는 단독주택뿐 아니라 상가주택도 지을 수 있어 원주민이 선호한다. 이른바 ‘딱지’로 불리며 투자자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다. 1973년부터 경기도 의정부에 살아온 A씨는 2006년 4월 자신이 살던 고산동의 낡은 집을 부수고 신축했다. 이후 의정부시는 6개월쯤 뒤인 10월 9일 고산동을 비롯해 민락동·산곡동 일대를 국민임대주택단지 예정지구로 지정하려고 주민공람공고를 냈다. 이에 따라 공고일 1년 전인 2005년 10월 9일이 이주자 택지 지급 기준일로 잡혔다. LH는 이주자 택지 공급 기준일에 A씨의 낡은 주택이 철거돼 사라진 상태여서 택지 공급 대상자가 될 수 없다고 통보했다. A씨의 주택 신축을 투기 목적으로 본 것이다. 그러자 A씨는 LH의 결정이 부당하다며 올해 1월 중앙행심위에 행정심판을 청구했다. 행심위는 A씨가 이주자 택지 공급 기준일에 주택에 거주한 사실이 인정되고 건물 신축에 투기 목적은 없었다고 봤다. 또 그가 의정부시의 공공주택 건설 계획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단지 생활의 편의를 위해 낡은 집을 허문 것이어서 이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권익위 관계자는 “이번 결정은 권익위가 한 차례 시정권고한 사항을 LH가 거부해 다시 내린 결론”이라면서 “LH는 관련법에 따라 결정서를 받는 즉시 A씨를 이주자 택지 공급 대상자로 선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노조활동가 출신… “양극화·일자리 개선”

    노조활동가 출신… “양극화·일자리 개선”

    농구선수 → 노동운동 → 3선 의원…19대 국회에서 환노위원장 활동23일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더불어민주당 김영주 의원은 농구선수 출신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했다가 3선 의원까지 오른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김 후보자가 인사청문회를 통과하면 ‘첫 노조활동가 출신 장관’과 ‘첫 여성 고용부 장관’이라는 이력을 더하게 된다. 김 후보자는 서울 무학여중 2학년 때 농구를 시작해 1973년 서울신탁은행 농구팀에 입단했다. 하지만 체력적 한계를 느껴 3년 만에 서울신탁은행 약수지점 은행원으로 변신했다. 은행원 6년차 때 자신의 급여가 여자라는 이유로 신입 남자행원보다 적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뒤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1985년 서울신탁은행 노조 여성부장을 시작으로 노조 정책연구실장을 거치며 여성차별 개선에 주력했다. 그 과정에서 ‘남녀고용평등법’ 제정에 큰 기여를 했다. 1995년에는 전국금융노동조합연맹 부위원장 겸 여성복지·교육홍보국장이 되면서 금융노조 최초 여성 상임 부위원장이 됐다. 동일노동·동일임금 가치를 실현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6년 국민포장을 받았다. 199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발탁으로 새천년민주당 노동특위 부위원장을 맡으며 정계에 진출했다. 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으며, 통합민주당에서 초선으로 사무총장까지 맡았다. 18대에 낙선했지만 19·20대 총선에서는 영등포갑에서 연달아 승리하며 3선에 올랐다. 김 후보자는 19대 국회에서 환경노동위원장으로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 문제 쟁점화에 주력했다. 김 후보자는 이날 국회에서 발표한 입장문에서 ‘협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경제 불평등으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고용부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면서도 “국민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은 정부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노·사·정이 함께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 후보자는 고용부 핵심 과제로 ‘일자리 창출’과 ‘근로시간 단축’을 꼽았다. 그는 “일자리가 국정의 최우선 순위에 놓여 있는 만큼 일자리 창출과 일자리의 질 개선을 위한 평가시스템을 제대로 갖춰야 한다”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장 수준인 장시간 노동문제도 해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동계는 환영 입장을 내놨다. 민주노총은 논평을 통해 “김 후보자는 국회 환노위 위원장 출신으로 누구보다 노동3권이 보장되지 않는 노동현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며 “청와대의 가이드라인에 갇히지 않고 노동 적폐 청산과 노동권 전면 보장에 대해 과감한 정책 의지를 보여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서울(62)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 ▲16대 대통령직인수위 사회문화여성분과 자문위원 ▲열린우리당 원내부대표 ▲통합민주당 사무총장 ▲19대 대선 문재인 후보 선대위 서울공동선대위원장 ▲국회 환경노동위원장 ▲문재인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조직특보단장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낮에는 소설가 밤에는 매춘부…‘넬리’ 예고편 공개

    낮에는 소설가 밤에는 매춘부…‘넬리’ 예고편 공개

    소설 ‘창녀’의 작가 넬리 아르캉의 문제적 삶을 그린 영화 ‘넬리’ 메인 예고편이 공개됐다. 여류 소설가 넬리 아르캉은 1973년 캐나다 퀘백에서 태어났다. 2001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5년 동안 매춘에 종사한 체험을 고스란히 녹여낸 데뷔 소설 ‘창녀’를 발표해 프랑스 문학계에서 가장 영예로운 메디치상(Prix Médicis)과 페미나상(Prix Fémina)을 모두 수상했다. 이후 ‘미친 여자’ 외 다수의 장편, 단편 소설을 출간했다. 그러나 2009년, 36세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영화 ‘넬리’는 작가, 누군가의 연인, 매춘부 그리고 스타라는, 양립할 수 없는 정체성들의 사이에서 길을 잃은 한 여성의 초상이다. 그녀의 안에는 여러 사람이 공존했고, 거대한 행복감과 환멸감 사이를 항해했다. ‘넬리’는 바로 그녀의 격렬한 삶을 비추는 영화다. 공개된 예고편은 프랑스와 캐나다 출판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재능과 미모를 겸비한 여성 작가 ‘넬리 아르캉’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문제적 소설 ‘창녀’의 작가 넬리 아르캉의 실제이야기”라는 카피 후, 언론과 출판 관계자들로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생애 절정의 순간을 맞는 그녀의 모습이 이어진다. 낮에는 소설가 밤에는 매춘부로 생활하며 쓴 첫 소설의 대성공으로 멋진 삶을 이어가던 그녀는 두 번째 소설 출간을 앞두고 실패의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글쓰기를 빼면 전 아무것도 아니죠. 난 작가가 아니라 안달이 난 매춘부”라고 손님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귓속말 장면은 그녀의 이중적 삶을 과연 영화가 어떻게 표현했을지 궁금케 한다. 영화 ‘넬리’는 오는 8월 개봉 예정이다. 101분. 청소년 관람불가.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DB의 아버지’ 바크먼 별세

    ‘DB의 아버지’ 바크먼 별세

    현대적 데이터베이스(DB) 개념을 처음으로 구축한 ‘DB의 아버지’ 찰스 윌리엄 바크먼이 지난 13일(현지시간)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뉴욕타임스(NYT) 등이 17일 전했다. 92세. 미국 캔자스주 맨해튼에서 태어난 바크먼은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기계학을 전공했다. 1961년 제너럴 일렉트릭(GE)에 입사한 그는 생산라인을 관리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최초로 상용화 데이터베이스관리시스템(DBMS)을 구축했다. 바크먼은 DB 시스템을 구축한 공로로 1973년 소프트웨어계의 노벨상인 ‘튜링상’을 받았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 무역협정 손대는 트럼프 ‘미국산 홍보’에도 여론은 싸늘

    무역협정 손대는 트럼프 ‘미국산 홍보’에도 여론은 싸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7일(현지시간) ‘메이드 인 아메리카’(Made in America) 주간 첫날을 맞아 직접 미국산 제품 홍보에 나섰다. 이 행사는 취임 6개월을 맞은 트럼프 대통령이 19일 제조업 지원 대책을 발표하기에 앞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각종 무역협정 개정에 대한 미국 내 지지 여론을 확대하려는 정치적 캠페인으로 풀이되나 정작 트럼프 일가부터 이를 실천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오후 백악관 남쪽 잔디광장에 마련된 ‘메이드 인 아메리카 제품 쇼케이스’ 행사에 참석해 대형 트럭, 트랙터, 기계, 야구방망이, 골프채 등 50개 주에서 공수해 온 대표 제품들을 둘러봤다고 로이터통신 등이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람 도중 전시된 대형 소방차 운전석에 오른 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면서 “어디서 불이 났느냐? 내가 빨리 끄겠다”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이어 “우리 제품에 ‘메이드 인 아메리카’ 브랜드를 다시 붙이겠다”라며 “미국산 제품을 사면 이곳에서 이익을 얻고 매출과 일자리도 이곳에서 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언론의 반응은 싸늘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칼럼을 통해 “트럼프 그룹이나 관련 회사들은 미국 내에서 자사 제품을 생산하는 게 적합하지 않은 듯한 모습을 보여 왔다”면서 “(트럼프의 딸) 이방카의 회사는 왜 방글라데시와 인도네시아, 베트남, 중국 등지에서 신발과 핸드백, 블라우스, 청바지 등을 만드나”라고 지적했다. 온라인매체 데일리 비스트도 “트럼프 호텔이 중국, 베트남, 페루 등지에서 만든 옷을 기념품으로 팔고 있다”고 꼬집었다. 한편 미국 몬마우스대학이 지난 13~16일 성인 8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 조사 결과 ‘트럼프 대통령이 탄핵을 당해 대통령직을 떠나야 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41%, 탄핵 반대 여론은 53%로 나타났다. 이는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하기 전년인 1973년 7월 미국인의 24%가 그의 탄핵에 찬성했던 것보다 높은 비율이다. 당시 닉슨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39%로 현재 트럼프 대통령과 비슷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트럼프 탄핵 여론 ‘워터게이트’ 때보다 강하다…미국인 41% “탄핵해야”

    트럼프 탄핵 여론 ‘워터게이트’ 때보다 강하다…미국인 41% “탄핵해야”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불거졌던 당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여론보다 현재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여론이 더 강하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미국 몬마우스 대학이 지난 13∼16일(현지시간) 성인 800명을 대상으로 한 ‘트럼프 탄핵’ 관련 설문조사 결과를 17일 발표했다. 응답자의 41%는 “트럼프 대통령이 반드시 탄핵당해 대통령직을 떠나야 한다”고 답했다. 탄핵에 반대한다는 응답자는 53%였다. 이번 조사의 표본오차는 ±3.5%포인트이다. 이번 조사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은 39%였다. 52%의 응답자는 그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도가 36%에 그쳤던 워싱턴포스트(WP)와 ABC방송의 최근 공동 여론조사 결과보다는 다소 높은 것이다. 미 CNBC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한 닉슨 전 대통령과 관련해 1973년 7월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미국인의 24%가 “탄핵에 찬성한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탄핵 반대율은 62%였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1972년 닉슨 전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비밀 공작팀이 워싱턴DC 소재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잠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된 미국 정치사 전대미문의 정치 스캔들이다. 닉슨 전 대통령은 탄핵 절차가 본격화되기 전인 1974년 자진 사임했다. 몬마우스대는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과 닉슨 대통령의 당시 지지율이 비슷한 수준인데도 탄핵지지율은 트럼프 대통령이 더 높았다고 전했다. 패트릭 머레이 몬마우스 대학 여론조사팀장은 정치권의 양분이 심한 게 원인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40년 전에는 현재 트럼프 대통령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과 같은 분열상이 이 정도로 만연해있지 않았다. 그것이 한 이유일 수 있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빙하에 녹아든 위장 예술가 ‘리우 볼린’

    빙하에 녹아든 위장 예술가 ‘리우 볼린’

    몽클레르는 지난 시즌에 이어 사진작가 애니 레보비츠, 행위예술가 리우 볼린과 함께 ‘2017 F/W 광고 캠페인’을 진행했다고 14일 밝혔다. ‘사라짐’의 대가, 불가능을 뛰어넘는 리우 볼린은 몽클레르를 위해 카멜레온같이 변모하는 초현실적이고도 환상적인 퍼포먼스를 재현했다. 그는 장엄한 북유럽의 겨울 풍경에 스며들어 그의 실루엣만을 남겼다. 캠페인 속 아이슬란드의 풍경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빙산과 들쭉날쭉한 얼음 조각들로 덮여 있고, 그 속에 리우 볼린이 거의 투명한 모습으로 녹아들었다. 리우 볼린은 1973년 중국 산둥성에서 태어나 베이징 베이스로 활동하고 있고, ‘투명 인간’이라고 불리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주변 환경 속에 자신을 완전히 녹여내는 그의 시그니처 스타일로 큰 인기를 얻었다. 상징적이고 강렬한 포토그래피로 유명한 애니 레보비츠는 지난 여섯 시즌 동안 몽클레르 캠페인을 작업해오고 있다. 영상팀 seoultv@seoul.oc.kr
  • [서울형 도시재생 공공 디벨로퍼가 이끈다] “대량공급 집착 않고 주민과의 공감대가 최우선”

    [서울형 도시재생 공공 디벨로퍼가 이끈다] “대량공급 집착 않고 주민과의 공감대가 최우선”

    “홍콩은 노후된 공공임대주택을 재건축할 때 우선 주민들의 임시 거주지를 찾습니다.” 유엔푹첸 홍콩 주택청(HA) 람틴 지부 최고책임자는 지난달 23일(현지시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홍콩은 대부분 땅이 국유지라 한국의 상황과 다를 수 있지만 공급자 위주의 생각에서 벗어나 수요자 입장에서 바라봐야 한다. 공적 기관과 주민이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는 의미”라며 이같이 밝혔다.1973년 홍콩 정부는 기존의 주택관련 부서를 통합해 출자기관인 HA를 설립하고, 공공임대주택 공급에 주력해 왔다. 민간주택에 입주할 수 없는 이들의 삶을 보장해 주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지난해 기준으로 HA가 운영·관리하는 공공임대주택 단지는 214개에 이른다. 전체 단지의 80~90% 수준이다. 73만 7416가구, 205만 7113명이 거주한다. 유엔푹첸 최고책임자는 “공공임대주택 단지들은 지역에 따라 규모는 다르지만 보통 4~10개 동으로 구성된다. 현재 람틴 지역은 4개 동으로 이뤄졌고, 노후화돼 2009년 재건축을 마쳤다”면서 “홍콩은 오랜 시간 영국의 식민지배를 당해 민간의 능력이 떨어진다. 우리 같은 공기업들이 권한을 갖고 주도적으로 계획·건설·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들어 HA는 ‘환경’과 ‘편의·복지시설 확충’에 큰 관심을 둔다. 새롭게 짓는 공공임대주택 단지의 녹지 비율을 30%에 맞추고, 노인보호센터를 함께 짓는 식이다. 주택의 대량 공급에 치중했던 과거와 달라졌다. 유엔푹첸 최고책임자는 “시민들이 낸 세금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공공성을 무시할 수 없다. 커뮤니티와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방편”이라고 강조했다. 홍콩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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