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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히틀러, 권총 자살 아닌 1971년 남미에서 숨졌다”

    “히틀러, 권총 자살 아닌 1971년 남미에서 숨졌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가 남미에서 사망했다는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 히틀러의 전후 행적을 추적해온 브라질의 기자 마르셀로 네토는 "히틀러가 남미에서 1971년 사망했다"고 최근 주장하고 나섰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자 히틀러가 몰래 유럽에서 남미로 탈출, 숨어 지내다 사망했다는 주장은 그간 여러 번 제기됐지만 네토는 구체적인 사망날짜까지 제시해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네토에 따르면 히틀러는 1971년 2월 5일 아르헨티나와 칠레 사이의 모 지역에서 사망했다. 1889년생인 히틀러가 1971년에 사망했다면 82세로 숨진 게 된다. 네토는 히틀러가 묻힌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정황을 소개했다. 그는 "함께 탈출한 나치 잔당이 사망한 히틀러의 장례를 즉각 치르지 못했다"면서 "그의 장례식은 뒤늦게 2년 뒤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 거행됐다"고 말했다. 과연 이런 주장엔 근거가 있는 것일까? 네토는 근거로 장례식에 참석했다는 생존자의 증언을 소개했다. 네토에 따르면 하사관 출신인 브라질 남자 페르난도 노게이라 데 아라우호는 히틀러의 장례식에 직접 참석하고 그의 죽음을 확인했다. 당시 29세였던 그는 남미로 도피한 나치 장교의 아들과 친구로 지내다가 히틀러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됐다. 그는 "장례식이 거행된 날은 1973년 1월 1일이었다"면서 "히틀러는 파라과이 아순시온의 한 황무지에 묻혔다"고 당시를 뚜렷하게 기억했다. 네토는 "아르헨티나와 칠레 사이의 모 지역에서 사망한 히틀러의 시신은 화장 후 파라과이로 옮겨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 아르헨티나 여성의 증언을 소개했다. 이 여성은 "남미로 도피한 나치 비행조종사와 사귄 친구가 있다"면서 "이 친구로부터 히틀러를 화장한 건 자신의 남자친구라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네토는 "히틀러가 남미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그간 수없이 발견됐다"면서 히틀러의 자살설은 이제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석훈 남미통신원 juanlimmx@naver.com
  • 용의자 8명 중 7명 공무여권 소지… 2명 北대사관 은신 추정

    용의자 8명 중 7명 공무여권 소지… 2명 北대사관 은신 추정

    말레이시아 경찰이 22일 김정남 암살 사건에 북한대사관과 고려항공 직원이 연루됐다고 발표하며 북한에 수사 협조를 요청함에 따라 조직적 범행의 전모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말레이시아 경찰이 이날 실명으로 거론한 북한대사관 2등 서기관 현광성(44)과 국영 고려항공 직원 김욱일(37)이 김정남 암살에 관여한 것으로 확인되면 북한 배후설을 입증할 결정적 증거가 된다. 이들은 말레이시아의 사법권이 미치지 못하는 북한대사관 안에 은신한 것으로 추정된다. 칼리드 아부 바카르 경찰청장은 “북한대사관에 사건 연루자를 경찰에 출석시키라는 공문을 보냈지만 수사에 협조하지 않고 있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외교관 여권을 소지한 현광성은 외교관으로 위장한 보위성 요원으로 암살 현장 지원과 정보 제공 업무를 맡았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고려항공은 소속 항공기가 군사활동에 사용되는 등 군 소속 기관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어 공무여권을 소지한 김욱일도 공작원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 말레이시아에는 고려항공이 취항하지 않는다. 김정남 살해 직후 평양으로 도피한 리지현(33), 홍송학(34), 오종길(55), 리재남(57) 등 4명도 공무여권을 소지했으며 해외 공작기관인 정찰총국 소속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경찰이 현광성, 김욱일과 함께 아직 말레이시아에 머물고 있다고 밝힌 리지우(30)도 공무여권을, 이미 체포된 리정철(47)은 해외에 파견되는 외화벌이 일꾼에게 발급되는 공무 여행여권을 갖고 있었다. 말레이시아와 북한은 1973년 수교 이래 최악의 관계로 치닫고 있다. 그럼에도 말레이시아 정부는 북한을 배려하고 중국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자국의 자존심을 세우는 고난도 외교를 구사하고 있다는 게 중평이다. 아부 바카르 청장이 김정남의 신원을 줄곧 북한의 주장대로 김정남이 아닌 ‘김철’이라고 지칭해 온 것이 북한 배려의 대표적 사례다. 현지 언론이 “북한의 강철 대사가 북한의 국익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면 소환돼 총살형에 처해질 것”이라고 전직 말레이시아 외교관의 말을 인용해 보도한 것도 북의 처지를 십분 배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정부는 다른 한편으로 시신 인도를 위한 접촉은 북한대사관을 통하지 않아도 된다며 김정남의 아들 김한솔을 마카오에서 보호하고 있는 중국의 입장도 고려했다. 말레이시아는 경제적으로 중국과 밀착돼 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북한과 말레이시아의 갈등이 악화하는 것은 역내 현상 유지를 원하는 중국이 바라지 않는 것이다. 한 정보 소식통은 “말레이시아 정부가 중국의 눈치를 많이 본다는 점에서 갈등이 서서히 봉합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말레이시아는 국가적 자존심에서 북한을 ‘일정선까지’ 몰아붙이고 있다. 현지 소식통은 “말레이시아 정부의 강경 대응은 수사 초기부터 북한을 배려했음에도 말레이시아를 비판하는 데 따른 악화된 국민감정을 고려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말레이시아가 북한과 단교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게 전문가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쿠알라룸푸르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첫 카이스트 출신 카이스트 총장 “글로벌 톱 10 목표”

    첫 카이스트 출신 카이스트 총장 “글로벌 톱 10 목표”

    카이스트 신임 총장으로 신성철(65) 카이스트 물리학과 교수가 선임됐다. 신 교수는 카이스트 개교 46년 만에 나온 첫 번째 동문 출신 총장이자 13년 만에 배출한 학내 교수 출신 총장이다.카이스트 이사회(이사장 이장무)는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양재동 엘타워에서 임시이사회를 열고 제16대 카이스트 신임 총장을 선임했다. 신 신임 총장은 2004년과 2006년, 2012년에 총장직에 도전했지만 고배를 마시고 ‘3전 4기’ 만에 목표를 이뤘다. 그는 경기고와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에서 고체물리 석사, 노스웨스턴대에서 재료물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카이스트는 1971년 서울 홍릉에서 한국과학원(KAIS)으로 만들어져 1973년과 1975년에 각각 첫 석사과정과 박사과정 입학생을 받았다. 학부과정 학생은 1986년부터 입학하기 시작했다. 신 신임 총장은 1975년 카이스트 석사과정에 입학해 1977년 졸업(3회 졸업)했다. 그는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 미국 이스트먼코닥연구소 수석연구원을 거쳐 1989년에 카이스트 물리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이후 학생부처장, 국제협력실장, 기획처장, 고등과학원설립추진단장, 나노과학기술연구소 초대소장, 부총장 등 주요 보직을 두루 역임했다. 한국물리학회장,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도 지냈고2011년부터는 올해 초까지는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초대·2대 총장을 맡았다. 특히 DGIST 총장 재직 시 융복합대학원과 무학과 단일학부를 도입하는 등 교육 혁신을 이끈 것으로 평가받았다. 또 자성학 분야의 오랜 난제인 2차원 나노 자성박막 잡음 현상을 처음으로 규명하는 등 나노스피닉스 연구 분야를 선도하는 세계적 석학으로 알려져 있다. 신 신임 총장은 “교육 혁신, 연구 혁신, 기술사업화 혁신, 국제화 혁신, 미래전략 혁신이라는 5대 혁신을 통해 카이스트를 반드시 ‘글로벌 톱10 대학’으로 도약시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 정세현 “김정남 암살, 박정희의 DJ 납치 사건과 닮았다”

    정세현 “김정남 암살, 박정희의 DJ 납치 사건과 닮았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김정남 암살 사건’에 연루된 사람만 10명이고, 여성 두 명을 제외하면 모두 북한인이라는 내용의 중간 수사결과를 지난 19일 발표한 적이 있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이 사건의 배후로 북한을 명확히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남성) 용의자들이 모두 북한 국적”이라고 말해 김정남 암살 사건의 배후로 북한이 지목된 상태다. 물론 북한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지난 13일 발생한 김정남 암살 사건의 ‘북한 배후설’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정세현(72) 전 통일부 장관은 “절대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권력의 속성 때문에 김정은이 (이복형) 김정남을 암살했다”고 진단했다. 정 전 장관은 ‘국민의 정부’ 집권기 말미인 2002년 1월~2003년 2월, ‘참여정부’ 집권 초창기인 2003년 2월~2004년 6월 각각 통일부 장관을 지냈다. 정 전 장관은 지난 20일 오마이TV ‘장윤선의 팟짱’ 프로그램에 출연해 “경쟁자를 제거하려는 것은 정치권력의 속성이다. 특히 절대권력은 권력을 유지하려는 유혹이 더 크다”면서 “1973년 박정희가 (일본에 있던) DJ(김대중)를 납치해 죽이려 한 사건도 같은 맥락”이라는 말로 김정남 암살 사건과 비교했다. 정 전 장관은 “박정희 정권 때는 선거가 형식적이었다. 그런데 DJ가 1971년 대선 때 박정희를 바짝 추격했다. 그게 화가 돼서 1973년 8월에 도쿄에 있던 DJ를 중앙정보부가 납치해 죽이려 했다”면서 “김정은 입장에서는 장남 김정남으로 언제 권력이 바뀔지 모른다는 불안이 항상 존재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경쟁자를 제거하는 것은 절대권력을 지키려는 정치권력의 불가피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북한의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권력 교체’의 불안감을 갖게 된 배경에 대해 정 전 의원은 “김정은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제기된 암살설과 선제타격론 등에 불안해했다”면서 “화근을 없애고자 5년 전부터 계획을 세워 김정남을 암살(시도)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중국이 김정남을 보호하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자신의 안위에 위협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남이 미국의 보수 세력과 연결돼 북한을 비판하는 최선봉에 서면 (김정남의) 실체는 빈약해도 김정남이라는 이름 자체가 스피커로서 갖는 의미는 매우 큽니다. 김정은은 김정남이 체제를 비판하는 스피커가 되기 전에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인터뷰에서 정 전 장관은 김정남 암살 사건을 계기로 정치권에서 제기되고 있는 ‘안보 위기론’에 대해 “김정남 암살 사건 때문에 남북대화를 하지 말자는 것은 국가적으로 불행한 일”이라면서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쏠 때 최대 피해자는 우리나라다. 낮은 급이 됐건, 높은 급이 됐건 남북대화는 해야 한다. 대화 없이 북한의 핵과 미사일 정책 변화를 유도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북한을 압박해서 어떤 결과를 얻었냐”면서 “남북 대화 없던 지난 9년 동안 북한의 핵 능력만 고도화됐다”고 꼬집었다. 정 전 장관은 지난 14일 출범한 ‘10년의 힘 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다. 이 위원회는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내각에 몸담았던 장·차관 60여명으로 구성된 자문그룹으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집권 비전과 국정 운영에 필요한 지원을 하게 된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40년 우방’ 말레이·北 외교전 격화

    ‘40년 우방’ 말레이·北 외교전 격화

    말레이, 평양 주재 대사 전격 소환 北대사 초치 ‘수사 비판’ 강력 항의 北 “DNA 요구, 국제기준 안 맞아” 말레이 총리 “경찰 수사 결과 확신” “김정남 아들 한솔, 말레이에 도착”김정남 암살 사건에 리정철(47)을 비롯해 최소 8명의 북한 국적자가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말레이시아가 북한 주재 자국 대사를 소환하고 주말레이시아 북한대사를 초치해 항의했다. 이에 맞서 강철 주말레이시아 북한대사는 수사 결과를 믿지 못하겠다고 공개 반박했다. 그러자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경찰 수사 결과를 절대적으로 확신한다”고 말하는 등 1973년 수교 이후 40여년간 우호적 관계를 맺어 온 양측의 외교전이 격화되고 있다. 말레이시아 외교부는 20일(현지시간) “협의를 위해 평양에 있는 (말레이시아)대사를 소환했다”고 밝혔다. 또한 주재국 정부를 비난했던 강 대사를 불러들여 강력히 항의했다. 말레이시아 외교부는 성명을 내고 “법에 따라 북한대사관에 (김정남 암살) 문제와 관련한 진척 상황과 절차를 알렸다”며 “강 대사가 제기한 비난은 근거가 없다”고 밝혔다. 이어 “김정남 사망은 말레이시아 영토에서 발생했고, 말레이시아 정부의 책임으로 법에 따라 조사가 투명하게 진행됐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말레이시아의 성명은 강 대사가 외교부 제1사무차장을 만나기 위해 청사에 머무르는 동안 발표됐다. 이에 강 대사는 이날 오후 기자회견을 열고 “외교관 여권 소지자 (김정남의) 신분을 당사국이 확인해 줬음에도 시신 훼손이 심해 알아볼 수 없는 사람을 확인할 때 사용하는 DNA 샘플을 요구하는 것은 국제기준에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이번 사건으로 유일하게 혜택을 보는 것은 한국”이라며 “당사국도 모르는 일이 정보기관을 통해 언론에서 먼저 보도되는 것은 말레이시아와 한국이 결탁한 사실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했다. 강 대사는 “북한 법률 관계자를 파견할 테니 공동 조사를 진행하자”고 제안했다. 강 대사는 지난 17일 한밤중에도 기자회견을 열고 “김정남에 대한 부검은 기초적인 국제법과 영사법을 무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은 지난주 김정남 시신 부검 강행 등을 이유로 평양 주재 말레이시아대사를 외무성으로 초치해 항의했다고 현지 언론이 전했다. 이런 가운데 김정남의 아들 한솔(22)씨가 마카오에서 출발해 이날 저녁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쿠알라룸푸르 하종훈 기자 artf@seoul.co.kr 서울 이제훈 기자 parti98@seoul.co.kr
  • 그레그 전 미국대사 “5·18 북한군 개입설 슬퍼…깡패같은 우익”

    그레그 전 미국대사 “5·18 북한군 개입설 슬퍼…깡패같은 우익”

    도널드 그레그(사진·90) 전 주한 미국대사가 공개 서한을 통해 “한국에서 아직도 5·18 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이 광주에 왔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대해 매우 슬프다”고 밝혔다. 5·18 기념재단은 그레그 전 대사가 20일(한국시각) 오전 재단 앞으로 ‘5·18 북한군 개입설’을 유포하는 일부 우익 세력을 비판하는 내용의 전자우편을 보냈다고 이날 밝혔다. 재단에 따르면 그레그 전 대사는 4∼5줄 분량으로 보낸 전자우편에서 “5·18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전 세계 사람이 진실을 이야기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레그 전 대사는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주한 미국대사로 일했다. 그에 앞서 1973년부터 1976년까지 미국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 책임자를 지낸 경험이 있다. 김양래 재단 상임이사는 “그레그 전 대사는 ‘한국의 우익이 깡패 같은 우익’이라고 표현했는데 경우에 따라 ‘도둑’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했다”면서 “우리 정부가 국민에게 5·18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지 않아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고 연합뉴스는 보도했다. 재단은 최근 그레그 전 대사에게 ‘5·18 당시 북한의 군사행동 기미가 없었다’고 확인한 CIA 기밀해제 문건에 대한 의견을 요청했다. 앞서 CIA는 지난달 19일(현지시간) 1300만쪽에 달하는 93만 건의 기밀 해제 문서를 온라인에 공개했다. 이 중에는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과 관련한 비밀 문건들도 포함돼 있었다. 1980년 5월 9일 미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비밀문건에는 ‘북한은 한국의 정치 불안 상황을 빌미로 한 어떤 군사행동도 취하는 기미가 없다’고 적혀 있다. 그러면서도 ‘하지만 1979년 10월 26일(10·26 사태)과 12월 12일(12·12사태)의 사건에 무척 놀라고는 있다’는 동향보고가 기록돼 있다. 같은 해인 1980년 6월 2일 미 국가정보위원회(NIC) 극비 문서에는 ‘현재까지 북한은 남한의 사태에 대해 합리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김일성은 남한에 위협이 되는 북한의 행동이, 전두환을 돕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북한은 남한의 사태에 결코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록돼 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낯설고도 익숙한 1970년대 강남

    낯설고도 익숙한 1970년대 강남

    1970년대 강남 개발 현장을 생생한 사진으로 엮은 책이 나왔다.서울역사박물관은 1974~1978년 강남·잠실·송파 등 한강 이남 지역 개발 현장 등을 찍은 사진 260여장을 수록한 ‘서울시정사진총서Ⅶ, 가자! 강남으로, 1974~78①’을 간행했다고 15일 밝혔다. 총서엔 1973년 입주를 시작한 반포주공아파트 공사 현장을 비롯해 잠실·송파 일대, 조성을 마친 도산공원 전경, 잠실 미성아파트와 주공아파트 건설 현장, 신사동과 논현동 일대 사진 등이 고스란히 담겼다. 강남과 강북을 연결하는 순환선 지하철 2호선 공사 장면과 남산3호터널, 한강 교량, 도로 등 건설 현장을 담은 사진도 수록됐다. 1976년 준공된 잠수교가 집중호우로 잠긴 모습, 고속버스업계 9개 회사가 공동 출자해 1976년 개장한 강남종합버스터미널 전경, 강남대로 일대 모습 등도 볼 수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1957∼1995년 서울시정 사진 원본 58만여장을 서울시에서 이관받아 시대·주제별로 정리하고 그중 대표 사진들을 선별해 2010년부터 ‘서울시정사진기록총서’를 발간하고 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봉급과 물가

    [그때의 사회면] 봉급과 물가

    1968년 11월 말 운행이 중단된 서울의 전차 요금이 2원 50전이었다. 1원이 요즘의 100원 가치는 족히 됐으니 전 단위의 가격이 매겨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1원의 10분의1에 해당하는 10전짜리와 그 다섯 배 가치인 50전짜리 지폐는 1962년 12월 1일 처음 발행돼 1980년 12월 1일까지 찍었다고 한다. 화폐 수집용 10전짜리 지폐의 인터넷 가격이 1640원이다. 생각보다 저렴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따지고 보면 액면가의 1만 6400배나 된다. 1972년 3월 21일자에 공무원 봉급표가 실렸다. 지금의 9급 공무원에 해당하는 5급을 1호봉의 봉급이 본봉 4180원과 직책수당 1만 3120원을 더해 1만 7300원이었다. 현재의 5급인 3급을 1호봉의 봉급은 2만 8000원이었다. 올해 9급 공무원 1호봉의 수당을 포함한 실수령액은 180만원가량, 5급 1호봉은 295만원가량 되니 대략 100배 이상 오른 셈이다. 당시 최고 인기 직업이던 은행원의 첫 월급이 3만~4만원(고졸)이었다. 번듯한 직업의 월급이 이 정도이고 일반 공장 근로자의 월급은 몇천원에 불과했다. 월급이 몇백 배 오른들 뭐하랴. 물가는 그보다 더 뛰었으니 말이다. 1972년과 2016년을 비교한 통계청 물가지수 통계를 보면 소비자물가는 16배 오른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통계는 통계일 뿐 실생활 물가의 상승폭은 훨씬 크다. 1971년 준공된 서울 여의도 시범아파트의 분양가는 평균 450만원이었다. 지금은 200배 이상 비쌀 것이다. 1974년 분양된 서울 잠실 시영아파트의 분양가는 230만~250만원 선이었다. 목욕료, 짜장면값, 설렁탕값, 연탄값, 이발료, 커피값 등은 이른바 협정요금으로 묶여 있었다. 만약 이를 어기면 위생검사, 영업정지 등의 행정처분을 받았다. 1971년 6월 물가를 보면 짜장면과 우동 60원, 라면 20원, 커피 50원, 설렁탕 100원, 연탄 20원, 이발료 180원, 신문구독료 350원, 시내버스 요금 10원이었다. 그러나 이후 1차 석유파동을 거치면서 물가는 급등해 짜장면은 1976년에는 200원으로 5년 만에 3배 이상 뛰었다. 1973년 영화 개봉관 입장료는 300~670원이었다. 또 같은 해 택시 기본요금과 주택복권 한 장값은 100원, 1974년 서울 지하철 개통 당시 기본요금은 30원이었다. 쌀값은 1972년 80㎏ 한 가마니에 1만 200원선이었다. 10년 후인 1982년에는 5만 6000원(정부미 기준)으로 올랐다. 지난해 말 산지 기준 쌀 한 가마니값은 12만 9000원이다. 쌀값은 2000년대 초반 21만원대까지 꾸준히 오르다 이후 풍작과 소비 감소로 1995년 수준으로 도리어 뒷걸음질쳤다. 정부가 서민을 위해 억제하고 있는 연탄값(한 장 600원)과 더불어 가장 적게 오른 게 쌀값인 셈이다.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영화·드라마 신스틸러 된 ‘서울 최고령 경찰서’

    영화·드라마 신스틸러 된 ‘서울 최고령 경찰서’

    시설 낡아도 치안 만족도 1위 내년 후반기 신청사로 이전서울 내 최고령(最高齡)인 금천경찰서 청사가 ‘낡은 덕분(?)’에 영화·드라마 촬영지로 다양하게 러브콜을 받아 화제가 되고 있다. 금천서 청사는 1973년 준공돼 올해로 44년이 됐다. 서울에서 가장 처음 지은 경찰서는 1969년에 문을 연 남대문서와 서부서다. 서부서는 현재 신축을 위해 이전했고, 남대문서는 2011년 리모델링을 한 터라 금천서가 ‘연장자’가 됐다. 영화·드라마 제작자들은 금천서 청사가 ‘오래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고 평가한다. 금천서 관계자는 “신식 청사와 달리 고전적이어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섭외차 찾는 분이 많다”며 “청사가 도심에서 떨어져 있어 인파가 많지 않으면서도 남부순환로를 끼고 있어 교통편이 좋은 점도 촬영 장소로 주목받는 이유”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KBS 드라마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 ‘여자의 비밀’ 등을 촬영했다. 며칠 전에도 영화 제작사에서 촬영 섭외를 위해 찾아왔다. 과거 이곳에서 있었던 범죄를 토대로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였다. 다만 경찰서 본연의 기능을 위해 촬영 허가를 많이 해 줄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금천서 관계자는 설명했다. 44년 전까지만 해도 금천서는 최신식 설비를 갖춘 대형 청사로 꼽혔다. 하지만 인력과 수사 설비가 늘면서 포화 상태가 됐다. 강력팀은 청사 뒤편 컨테이너 박스를 사무실로 쓰고 경제범죄 및 사이버범죄를 담당하는 지능팀은 옥상 컨테이너 박스에서 근무한다. 민원인들도 비좁은 주차 공간과 대기 장소로 불편을 겪곤 한다. 청사를 옮겨야 할 이유가 더 많은 상황이지만 금천서는 2013년부터 4년 연속 치안 고객만족도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직원들은 내년 하반기에 금천구청 옆 신축 건물로 사무실을 옮긴다는 데 반색하고 있다. 그러나 나이가 지긋한 직원들은 시원섭섭한 심경을 내비쳤다. 한 경찰은 “과거 금천구뿐 아니라 관악구, 구로구를 관할하며 많은 강력범죄를 해결했던 화려한 역사를 가진 곳”이라며 “새 건물의 좋은 환경에서 근무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크지만 정든 청사를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도 분명 있다”고 말했다. 글 사진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서울시의회 김동율의원 “망우묘지공원에 역사문화관 조성”

    서울시의회 김동율의원 “망우묘지공원에 역사문화관 조성”

    망우묘지공원에 역사적 잠재력을 활용한 망우역사문화관(가칭)을 조성하여 오랜 세월 중랑구 지역발전을 저해한 망우묘지공원의 부정적 이미지를 가치 있는 역사공간으로 탈바꿈 시킨다. 서울시는 지난해 이 사업에 대한 타당성조사를 끝내고, 올해 1월 기본계획 수립을 완료했으며, 2019년까지 총 사업비 85억원(전시 컨텐츠 및 조성에 80억원, 설계 5억원)을 들여 총 면적 3,543㎡ 에 지하주차장을 비롯한 지상 3층의 다목적 복합기능의 역사문화관을 조성하는 것으로 계획하고 있다. 이 사업은 한 광역의원이 숙원사업 해결을 위한 끈질긴 의정활동의 결과로 그 주인공은 서울시의회 김동율 의원(더불어민주당, 중랑4) 이다. 김 의원에 따르면, “1933년부터 공동묘지로 조성되어 1973년에 매장이 종료된 묘지공원은 40여년이라는 세월 동안 부정적인 이미지로 중랑구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었다”며 “이로 인한 피해는 온전히 중랑구민들에게로 돌아가 지역경제가 침체되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또 “망우묘지공원에는 근·현대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신 만해 한용운을 비롯한 약 50여명의 애국지사 및 문화예술가들이 영면하고 계시는데 역사적으로도 잠재력이 무궁무진한 곳으로 단순 공동묘지로 불리는 것에 부당함을 느끼고 구의원 시절부터 꾸준히 문제해결을 위해 뛰어 왔다”며 “이제라도 그 가치를 인정받는 변화를 가져오게 되어 기쁘다”며 이 사업의 결실을 맺은 소회를 밝혔다. 김 의원은 망우공원 인문학길인 ‘사잇길’ 조성과 ‘망우역사문화관 설립’ ‘사색의 길 가로경관등 설치 지원’ ‘망우묘지공원 명칭개정’ 등을 동시에 추진하면서 망우리 공원의 부정적 이미지를 탈바꿈 시키고 있다. 그 동안 김 의원은 망우묘지공원의 역사적 가치와 잠재력을 알리기 위해 서울시의회에 입성하여 시정 질문 및 5분 발언, 공청회 개최 등 다방면으로 노력한 바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자치단체장 25시] 영동대로·재건축 사업 ‘속도’… 르네상스 꿈꾸는 강남

    [자치단체장 25시] 영동대로·재건축 사업 ‘속도’… 르네상스 꿈꾸는 강남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목표를) 이룰 수 없다.” 신연희 서울 강남구청장은 7일 3층 구청장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올해도 ‘불광불급’의 자세로 지역개발 사업 현안들을 매듭짓고 2017년을 강남 르네상스 시대의 원년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강남구는 주요 현안을 두고 서울시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어 서울시와의 한판 대결을 예고한 셈이다. 2011년 10월 보궐선거로 등장한 박원순 서울시장과 오래 갈등했지만, 강남구가 연전연승을 이뤄온 만큼 올해도 불퇴전의 각오로 밀어붙인다는 계획이다.신 구청장은 현대차그룹의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건립을 위한 공공기여금 1조 7000여 억원의 사용처를 놓고 박원순 시장과 3년째 격돌하고 있다. 강남구는 서울시가 2015년 5월 강남 코엑스~송파 잠실운동장 일대를 국제교류복합지구로 묶어 개발하도록 확정한 지구단위계획구역 결정고시를 무효화시킨다는 방침이다. 이 결정으로 애초 강남구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현대차 GBC 건립 공공기여금을 송파구에서도 쓸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소송으로 비화한 이 다툼은 지난해 7월 서울행정법원에서 각하됐지만, 강남구는 지난 연말 대법원에 상고했다. 신 구청장은 이와 관련, “공공기여금은 해당 건물 건립이 유발하는 인근 교통·환경을 개선하는 데 쓰라고 법에서 정했는데 공돈 나눠 먹듯 쓰겠다는 게 제정신이냐”고 포문을 열었다. 강남구는 서울시의 국제교류 지구단위계획이 현대차 공공기여금을 박 시장의 공약 사업인 잠실운동장 일대 개발에 쓰려고 적법절차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추진된 만큼 원천무효라는 입장이다.●“현대차 기여금, 교통난 해소에 써야” 그는 “영동대로 일대가 통합 개발되면 유동인구가 많아지고 교통난이 가중되는 만큼 공공기여금의 상당 부분을 주차장 건립 등 관련 기반시설 구축에 우선 사용하고, 혹여 남는 돈이 있다면 그때 다른 데 가져가는 게 순리”라고 지적했다. 이어 “관광객들이 GBC 타워에 올라갔다가 바로 그 지하로 내려가 봉은사 지하로 이동할 수 있도록 봉은사 등을 영동대로 지하공간 통합개발과 묶는 데에도 그 기여금이 쓰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서울시는 지난해 5월 공공기여금을 영동대로 지하공간 통합개발에 우선사용한다고 양보하면서 양측 간 갈등이 봉합되고 사업 추진에 시동이 걸렸다. 그러나 서울시는 잠실 아시아공원 기반시설 재정비 등 송파구 사업에 공공기여금 예산을 쓴다는 계획을 고수해 강남구와의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신 구청장은 또 GBC 착공도 올해 6월 시작한다는 방침이다. 서울시는 난색이다. 그는 “서울시는 정신 차려야 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신 구청장은 “박 시장은 말로만 청년 일자리를 만들자고 해선 안 된다”면서 100만 개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현대차 GBC 건립 사업이 빨리 착공에 들어가도록 승인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 구청장은 2014년 9월 현대차가 한전부지를 매입하고 GBC 건립 계획을 밝힐 때부터 영동대로 통합개발 구상을 처음 제시해 사업 추진을 이끌어왔다. 그는 국토교통부의 KTX,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3개 노선과 서울시의 위례~신사 등 광역교통시설 개발 등이 각각 영동대로 지하에 들어서는 공사가 따로따로 진행된다면 강남 일대는 수십 년간 흙먼지 날리는 공사판이 될 것이라며 ‘원샷 개발’을 주장했다. 신 구청장은 요즘 후두 치료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학창시절 선생님들로부터 늘 ‘온순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구청장 취임 이후 서울시와 맨날 목청 높여 싸우다 보니 목이 아프다”고 말하며 웃었다.●까다로운 사업에 과감한 추진력 발휘 신 구청장은 고려대 졸업 이후 1973년 서울시 7급 공무원으로 출발했다. 서울시 회계과장, 행정국장, 여성정책관 등을 거치며 서울시의 정통 행정가로 자리매김했다. 2010년 7월 강남구청장에 취임한 뒤에는 5급 행정고시 출신인 전임 남성 구청장들이 꺼렸던 사업에 과감하게 손을 대면서 불도저 같은 행정을 펼치고 있다. 우선 2012년 강남 양재천변 다리인 영동5교 아래 모여 살던 ‘왕초’ 윤팔병씨의 넝마공동체를 이주시킨 게 대표적이다. 강남구민의 오랜 민원을 해결한 것이다. 윤씨는 박원순 시장이 총괄상임이사를 지낸 ‘아름다운 가게’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또 강남 내 최대 판자촌인 구룡마을 개발 방식을 확정 지은 것도 신 구청장의 작품이다. 신 구청장은 2012년 11월부터 구룡마을 개발방식을 두고 서울시와 싸워 이겼다. 투기 세력이 개발 이익을 챙기지 않고 거주민들이 온전히 정착하기 위해 전체를 수용한 뒤 공영 개발을 해야 한다며 서울시와 토지주들이 제시한 민영개발에 반대했다. 우여곡절 끝에 재선된 후인 2014년 말 서울시로부터 공영개발 찬성을 얻어냈다. 2015년 1월부터 토지주 118명이 민영개발을 고집하며 제기한 공영개발 취소 소송도 대법원에서 강남구가 승리했다. 신 구청장의 완승이다. 공영개발하는 구룡마을은 2020년까지 분양 1585가구, 임대 1107가구의 대형 아파트 단지로 탈바꿈한다. 지난해 말에는 강남 요충지인 대치동 세텍(서울무역전시장) 부지에 제2시민청을 지으려던 서울시 계획도 백지화시켰다. 강남구는 서울시가 2015년 3월 동남권 제2시민청을 세텍 부지에 짓겠다고 발표한 뒤 행정소송 등 총 5차례에 걸친 법적 다툼을 벌였다. 신 구청장은 이 과정에서 서울시의 공사를 막으려고 공사 차량의 진입을 막는 ‘실력행사’도 불사한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시가 수서역에 지으려던 수서동 727번지 모듈러주택 건립 계획도 2년여 투쟁 끝에 최근 무산시켰다. 서울시 등과의 연전연승으로 강남구에서 ‘여전사’의 이미지를 굳히고 있다. 이런 성과 속에서 GBC와 영동대로 지하공간 통합개발이 강남의 구상대로 적기에 착공되면 올해는 강남의 르네상스 시대를 본격화하는 원년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주민들, 압구정·대치동 층수 제한 반대” 신 구청장은 올해 역점 사업으로 압구정 현대아파트지구 등 관내 5만 가구 상당의 재건축 사업을 속도감 있게 추진한다는 목표다. 신 구청장은 우선 1만여 가구 규모인 압구정 현대아파트지구와 관련, “서울시가 지난해 10월 일방적으로 개발방식을 정비계획이 아닌 지구단위계획으로 전환추진한다고 발표해 결과적으로 사업을 지연시켰다”고 비판했다. 정비계획이 단지별로 개발하는 방식이라면, 지구단위계획은 보다 광역적인 개발을 하는 것이어서 교통 영향 평가 등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재건축 추진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에 따라 단지는 내년부터 부활하는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금도 내야 한다. 신 구청장은 또 “서울시가 주민들의 의견수렴조차 없이 지역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서울2030도시기본계획’을 내세워 재건축 층수를 35층 이하로 제한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서울시는 사유재산을 가지고 이래라저래라 해선 안 된다. 층수를 35층 이하로 제한하는 것도 무슨 근거에 의한 것인지 납득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압구정아파트지구 재건축은 35층 이상, 대치동 은마아파트는 49층 이상 개발하자는 주민의 요구를 서울시가 재검토하도록 적극 요청할 방침이다. 신 구청장은 자신을 두고 스스로 “바보 같다”고 비유했다. 서울시와 적당히 타협하면서 일을 추진해 나간다면 편할 길을 포기하고, 사사건건 원칙을 내세우며 끝까지 대립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태도를 바꿀 계획은 전혀 없다. 그는 “강남구민들을 위해서라도 적당히 타협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정 하사, 좋은 말 할 때 나와라”...해병대 전국 수배

    “정 하사, 좋은 말 할 때 나와라”...해병대 전국 수배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이 보고싶다던 ‘정 하사’를 찾는 데 며칠째 애를 태우고 있다.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말이 무색해지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해병대전우회는 웹 사이트에 “미 국방장관이 옛 전우를 찾고 있습니다”는 배너를 만들어 지난 4일 이후 5일째 정 하사를 수배하다시피 찾고 있다. 사회에 나와서도 전우애가 끈끈한 해병대가 옛 전우를 좀체 찾지 못하는 것도 매우 드물다. 해병대전우회는 정 하사를 1973년 3월 31~4월 8일까지 한·미 연합훈련을 할 당시 매티스 당시 해병소위에 도움을 준 사람으로 범위를 좁혔다. 훈련부대는 해병대 3연대 2대대와 미해병대 4연대 2대대로 하서리 해안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미군과 접촉할 가능성이 높은 이들은 통역과 월남전 등에서 미군과 작전을 같이 한 경험이 있는 ‘고참급’ 하사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전국 전우회를 중심으로 수소문하고 있다. 또한 소속 부대는 훈련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미군 통역을 위해 다른 부대에서 파견왔을 ‘통역병’도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당시에는 시범 훈련으로 한국군과 미군이 처음 섞여 훈련을 했다”고 정택경 해병대전우회 중앙회 총무국장이 전했다. 이에 따라 당시 해병소위인 매티스 장관이 만났을 한국군의 폭은 상당히 넓어진다. 게다가 매티스 장관은 한민구 국방장관에게 “서전트 정(Sergeant Jeung)”이라고 했다. 미군에게 서전트라고 부르는 계급은 병장에서 중사까지 폭이 넓다.  또 해병대 전우회는 매티스가 영어로 말한 ‘정’이라는 발음의 성도 외국인에겐 비슷하게 들리는 ‘전’과 ‘장’씨 성을 가진 이들까지 포함해 수소문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김치를 건네받은 매티스 장관은 이를 오래 기억해도 김치를 건네준 ‘정 하사’는 무심결에 한 행동으로 대수롭잖게 여겨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도 정 하사를 찾는 걸림돌이다. 해병대 전우회는 정 하사가 사망했다면 그 후손이라도 찾겠다는 의지를 보이지만 수소문 범위가 넓어지면서 행적을 찾는데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란 시각이 많다. 이기철 기자 chuli@seoul.co.kr
  • 암세포 또렷하게 보여주는 ‘나노MRI 램프’

    암세포 또렷하게 보여주는 ‘나노MRI 램프’

    1590년 네덜란드 안경 제작자인 자카리아스 얀센이 발명한 현미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과 세포를 관찰할 수 있게 해 생물학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일조했다. 이후 과학자들은 ‘몸속을 효과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기술 개발에 골몰하게 됐다.1895년 독일 물리학자 빌헬름 뢴트겐이 우연히 발견한 엑스선은 사람의 몸속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 첫 번째 영상진단 기술이다. 그로부터 80년 정도 지나 엑스선 촬영의 진화인 컴퓨터단층촬영(CT) 기법이 개발됐다. 1971년에 선보인 CT는 원통 모양의 기계에서 엑스선으로 인체 각 부분을 촬영한 뒤 이를 재조합해 영상으로 표시해 보여 주는 것이다. CT를 개발한 앨런 코맥, 고드프리 하운스필드 박사는 1979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CT와 함께 정밀 영상진단에 많이 쓰이는 것이 자기공명영상장치(MRI)다. 폴 라우터버와 피터 맨스필드 박사는 1973년 MRI를 개발한 지 30년 만에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MRI는 CT와는 달리 방사선 피폭 걱정 없이 인체에 무해하고 정확한 방식으로 인체 장기의 영상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MRI는 핵자기공명(NMR)이라는 물리학 원리를 영상화한 기술로, 인체의 70%를 차지하는 물분자를 이루는 수소원자를 이용한다. MRI에 장착된 고감도 자기센서는 신체조직의 물이 만드는 미약한 자기장의 변화를 감지해 내부 코일로 증폭시켜 위치와 세기를 등고선처럼 나타낸다. 이를 컴퓨터가 변환시켜 신체 영상으로 보여 준다. 횡단면만 촬영이 가능한 CT와 달리 종·횡단면을 모두 찍을 수 있는 MRI가 더 선명하게 신체 내부를 볼 수 있다. 좀더 정확한 영상을 얻기 위해 조영제를 활용한다. 조영제는 MRI를 찍기 전 주사해 원하는 부위의 영상을 선명하게 보이게 만드는 약품으로 세포를 현미경으로 관찰하기 전에 염색시키는 것과 같은 원리다. 문제는 기존에 나와 있는 조영제는 질병 발생 부위와 주변 정상 부위를 모두 염색해 병변 부위가 또렷하게 보이지 않게 되는 문제가 있다. 기초과학연구원(IBS) 나노의학연구단 천진우(연세대 화학과 특훈교수) 단장팀이 질병 부위만 선택적으로 찾아내 MRI 신호를 강하게 내보내는 ‘나노MRI 램프’라는 일종의 나노물질 조영제를 개발하고 재료과학 분야 국제학술지 ‘네이처 머티리얼스’ 7일자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자성물질의 거리에 따라 MRI 신호 강도가 달라지는 자기공명튜너(MRET) 현상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이를 활용해 자성을 띠는 나노입자와 상자성(常磁性) 물질, 생체인자 인식물질로 구성된 나노MRI 램프를 개발했다. 생체인자 인식물질이 암세포 같은 특정 단백질을 인식하면 상자성 물질이 암세포에 가까워지는 대신 자성나노입자와 멀어지면서 나노MRI 램프가 켜지는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주변 조직보다 병변 조직이 최대 10배 이상 밝게 보이기 때문에 기존 MRI 조영제를 사용했을 때보다 명확한 고감도 영상을 구현할 수 있다. MRI 검사 후 정확한 진단을 위해 세포나 조직 일부를 떼어내 검사하는 생검도 필요 없게 돼 의료진과 환자의 번거로움이 사라질 수 있다. 실제로 연구팀은 생쥐에게 암을 유발시킨 뒤 나노MRI 램프와 기존 조영제로 진단을 실시한 결과 나노MRI 램프가 암 발병 부위를 정확하고 선명하게 보여 주는 것을 확인했다. 천 단장은 “나노MRI 램프는 기존의 MRI 진단보다 높은 정확도와 민감도를 갖고 있어 분자 수준에서 질병을 관찰하고 진단하는 영상진단의 신개념을 제시한 것”이라며 “분자들의 결합과 해리 등 상호작용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의학 분야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명현상 연구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 [위기의 한국경제, 답은 있다] 스웨덴·獨 ‘노동·복지개혁’-덴마크 ‘친환경 에너지’로 제2의 성장

    [위기의 한국경제, 답은 있다] 스웨덴·獨 ‘노동·복지개혁’-덴마크 ‘친환경 에너지’로 제2의 성장

    2002년 우리나라 현대중공업에 코쿰스 크레인을 단돈 1달러에 팔아넘겨 ‘말뫼의 눈물’로 알려진 스웨덴의 남부도시 말뫼는 당시 조선소 폐업으로 도시 인구의 10%인 2만 7000명이 실직했다. 하지만 말뫼는 중앙정부로부터 2억 5000만 크로나(약 324억원)를 지원받아 공장부지를 사들이고 환경친화적인 미래형 도시를 만드는 데 투자했다. 조선업에 썼던 재원을 신재생 에너지와 정보기술(IT) 등 새로운 산업에 투자해 200여개의 새로운 기업과 6만 3000개의 일자리도 만들어 냈다. 23만명대로 줄어들었던 인구는 도시가 활력을 되찾으면서 다시 유입돼 2010년 이후 30만명을 돌파했다. 이렇듯 경제위기에서 탈출한 국가도 있다. 과감한 구조조정과 일자리 친화적 복지로 다시 일어선 스웨덴이 대표적이다. 제조업 강국 독일과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불리는 덴마크도 빼놓을 수 없다. 박근혜 정부가 ‘고용률 70% 달성’의 모범 사례로 자주 인용했던 독일의 하르츠 개혁은 단기직과 시간제 근무를 늘리고 실업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엄격하게 하는 등 고용시장 유연화에 초점을 맞춘 개혁이다. 1990년대 스웨덴의 경제위기 극복 과정은 우리나라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경제위기에 봉착했을 때 참고했던 북유럽의 대표적인 강소국 사례다. 스웨덴은 1990년대 재정 적자와 자산 가격 거품이 급속히 꺼지면서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고 금융기관 대출채권 부실화가 심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밖으로는 세계화, 안으로는 고령화가 맞물리면서 연대임금 정책과 적극적 노동시장을 근간으로 하는 복지모델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1991년부터 3년간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한 이유다. 스웨덴이 3년 만에 마이너스 성장에서 4% 성장(1994년)으로 극적 반등할 수 있었던 동인은 근본적으로 경제 체질을 바꾸려 했던 노력에 있다. 1994년 재집권한 사민당 정부는 신자유주의적 요소를 반영한 복지모델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거시적 경제안정 정책과 미시적 구조개혁 정책을 동시에 진행했다. 장보형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실장은 “거시적 안정화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성장 둔화, 실업 증가 등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지만 유연성 제고와 구조조정 등 경제 전반의 구조개혁을 통해 성장 잠재력을 확충할 수 있게 한다”며 “다만 사회안전망이 확립되지 않은 국가의 경우 위기로 인한 고용과 소득분배 구조 악화 위험이 상대적으로 크다”고 지적했다. 2차 대전 후 ‘라인강의 기적’을 이뤄 낸 독일(서독)이지만 시작은 순탄하지 않았다. 1970년대 분배 중심의 복지정책이 실시되면서 서서히 침체해 ‘유럽의 병자’로 전락했다. 연평균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2003년 -0.7%까지 떨어졌다. 독일 정부는 과감히 메스를 들이댔다. 성장률을 올리기 위해 부양책을 내세운 게 아니라 실업률을 낮추는 데 주목했다. 미니잡 등 가벼운 일자리를 만들며 주부, 휴학생, 은퇴 노인도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내줬다. 도철환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하르츠 개혁이 미완이긴 하지만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종합적이고 장기적 관점에서 추진됐다는 점”이라며 “예컨대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2003년 전후(戰後) 최대 경제 구조개혁인 ‘어젠다 2010’을 발표하며 하르츠 개혁을 노동시장 개편을 위한 하나의 모듈로 추진했다”고 설명했다. 사회보장제도, 세율 및 세제 개편, 노동개혁, 규제 철폐 등을 전방위적으로 진행한 것이다. 정책 연계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구조개혁을 패키지로 진행했다는 얘기다. 뒤이어 등장한 기민당의 앙켈라 메르켈 정부는 ‘하르츠 IV 지속발전법’을 통과시켜 슈뢰더 정부의 개혁정책을 계승했다. 정파의 이익에 관계없이 정책을 일관되게 장기적으로 추진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하르츠 개혁은 일방의 희생만을 강요하지 않았다. ‘일하지 않으면 지원도 없다’는 워크페어(workfare) 정신에 입각해 실업자에 대한 지원을 축소하고 구직 의무를 강화하는 등 노동자의 희생을 강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부도 고용 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한 구조개혁을 선행적으로 실시했다. 고용 서비스 체계를 간소화하고 맞춤형 서비스인 ‘잡센터’를 신설했다. 일자리 중개 기능의 인력알선사무소(PSA)도 설치했다. 도 연구위원은 “독일 위기 해결의 키워드 중 하나는 ‘타임 갭’을 극복한 지도자의 리더십”이라고 강조했다. 정책 결실을 보는 데 3~4년이 소요되는 만큼 성과가 다음 정권으로 넘어갈 것을 알면서도 정치인이 아닌 국가 지도자로서 장기적인 안목에서 정책을 추진하고 반대를 버텨 냈다는 얘기다. 하르츠 개혁을 강행했던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자신이 추진했던 개혁의 여파로 결국 총선에서 패배했지만 여전히 독일 고용 확대의 기반을 다진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세계 10위권인 덴마크는 세계적으로 내세울 만한 다국적기업이 없는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다. 공업의 다양성도 적다. 면적은 한반도의 5분의1밖에 안 되고 인구는 우리나라의 10분의1 수준인 570만명이다. 그러나 1인당 국민소득은 지난해 5만 3243달러로 우리(2만 7633달러)의 두 배에 이른다. 배경은 국가적 혁신과 복지, 높은 사회적 결속에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전적으로 에너지를 수입에 의존하던 덴마크는 1973년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더이상 석유에 의존하지 않기로 하고 친환경 에너지 개발로 성장 전략을 세웠다. 또 1990년대 말 조선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조선업의 기존 노하우, 인프라, 인력들을 풍력발전 산업에 재사용했다. 그 결과 덴마크는 풍력발전으로 자국 전기 수요의 140% 이상을 생산하고 있다. 덴마크 풍력회사 베스타스는 연매출 69억 유로, 고용인원만 2만 3000명으로 세계 풍력시장의 약 20%를 차지하며 1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김재훈 대구대 경제학과 교수는 ‘구조조정에 관한 국내외 사례연구’에서 “1973~1990년 경제위기 속에서 덴마크 정부는 생산적이고 서비스 지향적인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숙제에 시간을 쓰기보다는 개인적인 소비를 위해 일하고 돈 벌 것을 권장했다”며 “이런 교육체계 등이 노동 현장까지 연장되면서 자연스럽게 학습경제가 가능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백민경 기자 white@seoul.co.kr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매티스 “누가 정 하사를 모르시나요”

    매티스 “누가 정 하사를 모르시나요”

    “1970년대 초 해병대에 복무했던 정 하사를 찾습니다.”지난 2~3일 방한했던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이 초급장교 시절 한국 내 훈련 중 도움을 받았던 해병대 ‘정 하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해병전우회를 중심으로 ‘정 하사 찾기’가 본격화됐다. 5일 해병대 등에 따르면 해병전우회는 관련 소식이 알려진 지난 3일 오후 ‘미 국방장관이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제목의 문건을 만들어 지역 및 기수별 밴드와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전파하고 있다. 앞서 매티스 장관은 지난 2일 한민구 국방장관과의 만찬에서 1970년대 초 초급장교 시절 훈련차 한국에 왔으며, 당시 김치를 가져다줬던 정 하사에게 감동받았고, 기회가 있다면 다시 만나고 싶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해병전우회는 매티스 장관이 해병대 사병으로 복무한 뒤 학군단(ROTC)을 통해 1972년 다시 해병대 장교로 임관했다는 점에서 1973년 4월 실시된 한·미 해병대 연합훈련인 ‘금룡 작전’에 참가했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전파 문건에는 당시 훈련에 참가한 부대가 우리나라는 3연대 2대대, 미 측은 4연대 2대대로 추정하고 있으며 훈련 장소는 경북 경주시 양남면 하서리 해안 일대로 적혀 있다. 그러면서 정 하사가 7218773~7223074의 하사 군번대, 하사관 학교(하교) 46~93기에 해당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해병대 관계자는 “당시 하사로 근무했다면 현재 나이가 60대 중후반으로 추정된다”면서 “당사자가 매티스 장관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예비역들이 찾고 있으니 좋은 소식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박홍환 전문기자 stinger@seoul.co.kr
  • “매티스 장관이 정 하사를 찾습니다”…해병대전우회 고지문

    “매티스 장관이 정 하사를 찾습니다”…해병대전우회 고지문

    해병대가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이 만나고 싶어하는 ‘정 하사’를 수소문하고 있다. 해병대 관계자는 “1972년에 해병대에서 근무한 하사의 군번대와 기수 등을 담은 고지문을 제작해 전우회와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전파하고 있다”고 5일 전했다. SNS를 통해 게시된 해병대 전우회 고지문에는 “미(美) 국방장관(제임스 매티스)이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라는 제목과 함께 “1973년 3월 31일~4월 8일까지 한미 연합훈련(팀스피리트 추정, 금룡 73작전, 피블렉스-73)간 매티스 미 국방장관(당시 해병소위)과 훈련을 같이하며 많은 도움을 줬던 정 하사를 찾고 있습니다”라고 적혀있다. 고지문은 또 당시 “훈련부대는 한(韓) 3연대 2대대, 미(美) 4연대 2대대로, (장소는) 하서리 해안일대(추정)”라고 적혀 있다. 하서리는 경주 양남면 하서리 백사장이다. 해병대는 1972년 당시 근무한 하사 군번대는 7218773~7223074로 추정하고 있다. 하사관학교 기수로는 46~93기 사이로 당시 하사로 근무한 군인이었다면 지금은 65세~75세로 추정된다고 해병대의 관계자는 설명했다. 앞서 매티스 장관은 2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민구 국방장관 주최 만찬 행사에서 “과거 한미 연합훈련 때 한국을 방문했는데 당시 한국 해병대의 정 하사에게 도움을 받았다”면서 “당시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정 하사는 김치 등을 나에게 갖다줬다. 꼭 만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매티스 장관은 1969년 해병대에 사병으로 자원입대해 제대한 뒤 다시 대학 학군단(ROTC)을 거쳐 장교로 임관해 4성 장군까지 오른 군인이다. 아프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지휘했고, 중부사령관을 끝으로 2013년 전역했다가 이번에 국방부 장관에 임명됐다. 한편 매티스 장관은 지난 3일 한민구 국방장관에게 양국 장관끼리 24시간, 365일 소통하자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의 한 관계자는 5일 “매티스 장관이 3일 열린 국방장관회담에서 한민구 장관에게 ‘24시간, 365일 긴밀하게 소통하자’고 제의했다”면서 “한 장관도 이에 적극적으로 공감한다고 응답했다”고 밝혔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위기에 빠진 동화면세점, 시장 재편 신호탄 되나

    위기에 빠진 동화면세점, 시장 재편 신호탄 되나

    동화면세점 공동 경영 원하지만 호텔신라 “가능성 희박” 선긋기 최악 땐 ‘44년 역사’ 청산할 수도국내 최초의 시내 면세점인 동화면세점이 위기에 처했다. 면세점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면서 중소·중견 기업 면세점으로 불똥이 튀고 있다. 올 연말까지 3개의 시내 면세점이 추가 개장할 예정이라 시장 재편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동화면세점은 호텔신라에 빚을 갚는 대신 경영권을 넘기고 싶어 하지만 호텔신라는 빚을 갚으라는 입장이다. 31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동화면세점은 지난해 6월 호텔신라의 매도청구권(풋옵션) 행사로 지난해 12월 19일까지 갚아야 할 715억원을 갚지 못했다. 이에 따라 오는 23일까지 위약금 10%를 더해 788억원을 갚아야 한다. 이를 갚지 못하면 담보로 제공했던 동화면세점 주식 30.2%를 추가로 내놓아야 한다. 호텔신라는 2013년 5월 김기병 롯데관광개발 회장의 동화면세점 지분 19.9%를 600억원에 취득하면서 3년 뒤 투자금 회수를 위한 풋옵션을 걸었다. 김 회장은 이 자금을 롯데관광개발의 증자에 투입했다. 롯데관광개발은 용산개발사업에 실패해 2013년 4월 법정관리에 들어갔다가 그해 8월 졸업했다. 김 회장은 롯데관광개발(43.55%)과 동화면세점(41.66%)의 최대 주주다. 동화면세점은 김 회장의 배우자인 신정희(21.58%) 대표와 아들 김한성(7.92%) 대표 등 일가족이 71.16%의 지분을 갖고 있다. 신 대표는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막내 여동생이다. 동화면세점 측은 “면세점 사업을 포기하거나 특허를 반납하려는 것이 아니라 핵심 역량에 집중하려는 것”이라며 “호텔신라와 공동 경영에 나서는 게 낫겠다는 전략적인 판단을 했다”고 밝혔다. 김 회장이 투자금을 갚지 못할 경우 호텔신라는 총 50.1%의 지분을 갖게 된다. 경영권이 넘어오는 것이다. 호텔신라 측 관계자는 “법인이 아니라 김 회장 개인에게 돈을 빌려준 것이고 김 회장이 갚지 못할 상황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경영권) 인수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했다. 양측이 협상을 진행하고 있지만 접점을 찾기는 어렵다는 관측이다. 면세점은 특허 사업이라 기업이 임의로 팔 수 없다. 특허권을 획득한 기업이 사업을 하지 않으면 특허를 반납해야 한다. 매각이나 승계를 하려면 당국과 협의해 진행해야 한다. 정부 입장에선 중소·중견 기업 몫을 대기업으로 돌리기는 부담스럽다. 최악의 경우 청산 가능성도 제기된다. 광화문 사거리에 있는 동화면세점은 1973년 설립됐다. 중소·중견 면세점이지만 루이비통 등 명품 브랜드를 입점시키며 성장했다. 그러나 최근 수년간 실적이 악화됐고 올 들어 루이비통과 구찌 매장이 잇따라 철수했다. 관세청에 따르면 전체 면세점 매출은 2012년 6조원대에서 지난해 12조원대로 늘었다. 사업자 수도 2012년 6곳에서 올해 13곳으로 늘어난다. 이 중 중소·중견 기업이 3곳이다. 전경하 기자 lark3@seoul.co.kr
  • 이동휘 임시정부 초대 총리 오늘 82주기 추모식 개최

    이동휘 임시정부 초대 총리 오늘 82주기 추모식 개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독립운동가 성재 이동휘(1873~1935) 선생 82주기 추모식이 31일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다고 국가보훈처가 30일 밝혔다. 추모식은 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리며 유족 및 보훈처, 독립운동 관련 단체 관계자 등 100여명이 참석한다. 선생은 1873년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나 한성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강화도 진위대장을 맡았으나 1906년 군직에서 물러나 구국계몽운동에 투신했다. 1913년에는 러시아 연해주로 떠나 독립군 양성에 나선 선생은 1919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에 올랐으며 1935년 1월 31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거했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日이 약탈했던 불상, 부석사에 돌려주라”

    “日이 약탈했던 불상, 부석사에 돌려주라”

    法, 고려사 등 근거 소유주 인정 “7만점 약탈 문화재 찾는 시작” 日 “판결 유감… 韓에 반환 요구”국내 문화재 절도단이 일본 쓰시마섬 관음사에서 훔쳐온 금동관음보살좌상을 700년 전 소유주로 알려진 충남 서산 부석사에 돌려주라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절도로 국내 반입한 해외문화재라도 소송으로 돌려받을 가능성을 연 판결이어서 주목된다. 대전지법 민사12부(부장 문보경)는 26일 대한불교 조계종 부석사가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금동관음보살좌상 인도 청구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그간의 변론과 문화재청이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 수장고에 보관 중인 불상 현장검증 등을 통해 불상이 부석사 소유로 충분히 인정된다”며 “역사·종교적 가치를 고려할 때 불상 점유자는 원고에게 인도할 의무가 있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근거로 불상의 결연문에 ‘고려국 서주(서산 지역)’라고 쓰여 있고, 시주자 32명의 이름이 새겨졌다는 점을 꼽았다. 재판부는 또 “다른 사찰로 이전되면 불상 내부 복장물에 그 기록을 남기는 게 전통인데 없다”며 약탈 등 방법으로 일본에 넘어갔다고 판단했다. 그 근거로 “왜구들이 1352~1381년 새 5차례 서산 지역을 침입했다”는 ‘고려사’의 기록을 들었다. 재판부는 “부석사가 인도받아도 충분히 보관할 능력이 있다고 본다”며 “함께 청구한 가집행도 받아들인다”고 덧붙였다. 원우 부석사 주지는 “한·일 관계와 역사적 사실을 종합해 현명한 판단을 내린 재판부에 감사하다”며 “7만점으로 추정되는 일본 내 한국의 문화재를 찾아오는 시발점이 됐으면 한다”고 반겼다. 부석사 측 변호인은 “설 연휴 이후에 불상을 수거해 일단 부석사 본사인 수덕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재판정에는 NHK, 도쿄TV 등 일본 유력 언론사 기자도 다수 몰려와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일본 정부는 이 판결에 유감을 표시했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일본 정부는 아직 반환되지 않은 이 불상이 조기에 일본으로 반환되도록 외교 루트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한국 정부에 요구해 왔다”면서 “신속하게 불상이 일본으로 반환되도록 한국 정부 측에 적절한 대응을 요구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높이 50.5㎝, 무게 38.6㎏의 이 불상은 1330년 부석사에서 제작해 보관해 오다 일본으로 건너갔고, 1526년 창건된 쓰시마섬 관음사에 봉안됐다. 1973년 일본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그러나 2012년 10월 2일 오후 8시쯤 김모(74)씨 등 5명의 한국인 절도단이 이 불상 등을 훔쳐 국내로 들여온 뒤 이듬해 1월 몰래 팔려다 붙잡혔다. 한국과 일본에서 ‘뺏긴 보물이 돌아왔으니 돌려줄 수 없다’, ‘훔쳐간 장물이니 반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선 가운데 2013년 2월 부석사 신도 등이 법원에 반환 중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대전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판결문으로 뜯어본 금동불상 부석사 인도 이유는

    판결문으로 뜯어본 금동불상 부석사 인도 이유는

    일본 쓰시마섬 한 사찰에서 도난돼 한국으로 반입된 불상을 원래 소유주인 충남 서산시 부석사로 인도하라는 법원 판결이 주목받고 있다. 문제의 금동불상은 고려시대인 1330년 서산에서 제작된 후 1526년쯤 이전에 일본으로 이동됐다고 추정되는 만큼 무려 600여년 만에 귀환하는 셈이다. 법원은 그동안 진행된 변론과 현재 문화재청에서 보관 중인 불상에 대한 현장 검증 등을 통해 이 불상은 ‘부석사 소유로 넉넉히 추정할 수 있다’고 봤다. 법원은 ‘증여나 매매 등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도난이나 약탈‘ 등 방법으로 일본 쓰시마 간논지((觀音寺)로 운반돼 봉안되어 있었다’며 부석사 소유를 인정했다. 26일 대전지방법원 민사 12부(재판장 문보경 부장판사)가 선고한 판결문을 보면 이 불상 내부에서 발견된 복장물, 간논지 연혁약사, 고려사(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시대 역사서), 불상에 남아 있는 화상 흔적 등이 부석사 소유를 인정한 주요 근거가 됐다. 판결문에 따르면 ‘금동관음보살좌상’이 간논지에 봉안돼 있던 1951년 5월 주지가 우연히 불상 내부에서 신도들의 불심을 담는 기록물인 복장물을 발견했다.복장물 가운데 ‘결연문’에는 1330년쯤 서주(현재 충남 서산의 고려시대 명칭)에 있는 사찰에 봉안하려고 이 불상을 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국내 사찰에서는 불상을 보수하거나 이안(移安, 신주나 영정 따위를 다른 곳으로 옮겨 모심) 등을 할 때 관련된 새로운 기록·유물을 넣는 전통이 있는데, 정상적인 교류면 불상을 주는 측에서는 복장물을 빼고 대신 ‘어느 사찰에서 조성해 다른 사찰에 이안한다’는 내용 등 불상의 이안에 대한 기록물을 넣는 게 일반적이다. 재판부는 ‘이런 자료가 없을 경우 도난이나 약탈 등으로 인해 불상의 현상이 비정상적으로 변경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불교 전문가들의 견해를 인용했다. 재판부는 “불상 제작 당시 넣어두었던 복장물이 1951년쯤까지 발견되지 않은 상태로 있었고, 이안에 관한 기록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간논지의 ‘연혁 약사’와 재단법인 서일본문화협회가 발행한 ‘대마의 미술’ 속 기고문도 주요 근거가 됐다. 이 불상이 봉안된 간논지는 1526년 창건됐기 때문에 이 불상이 1330년쯤 서산에서 제작된 후 1526년쯤 이전에 일본으로 이동됐다고 추정할 수 있고, 기고문의 전체적인 취지도 ‘왜구가 이 불상을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일방적으로) 가져왔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고려사’에는 불상이 제작된 1330년 이후인 1352년부터 1381년까지 5회에 걸쳐 왜구들이 현재의 서산 지역을 침입했다는 기록이 있고, 대마도 향토사학자 등이 발간한 잡지인 ‘대마도의 자연과 문화’에도 역시 그 무렵 왜구들이 서산 지역을 침탈했다는 내용이 기재돼 있다”고 적시했다. 불상에 남아 있는 불에 그슬린 흔적과 불상과 함께 있어야 할 보관(寶冠)·대좌(臺座)가 없는 등 일부 손상된 상태도 ‘불상이 약탈당하였다는 근거로 볼 수 있다’는 증언도 반영됐다. 이 불상은 1973년 일본에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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