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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스포츠, 금메달 따도 병역 혜택 없다, 왜?

    e스포츠, 금메달 따도 병역 혜택 없다, 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e스포츠에 출전한 국가대표 게이머들이 29일 오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브리타마 아레나에서 금메달을 놓고 난적 중국과 접전을 벌이고 있다. ‘리그 오브 레전드(LOL·롤)’의 어벤저스로 불리는 한국 대표팀은 막강한 금메달 후보로 꼽힌다. ‘페이커’ 이상혁, ‘기인’ 김기인, ‘스코어’ 고동빈, ‘피넛’ 한왕호, ‘룰러’ 박재혁, ‘코어장전’ 조용인 등 포지션별 롤 플레이어로 드림팀을 꾸렸다. 하지만 한국 대표팀이 이날 금메달을 따더라도 병역 혜택은 받을 수 없다. e스포츠가 정식 종목이 아닌 시범 종목이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는 국위선양과 문화창달에 기여한 예술·체육 특기자에 대해 군복무 대신 예술체육요원으로 복무하게 하는 제도를 1973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국가대표의 경우 올림픽에서 3위 이상, 아시안게임에서 1위를 하면 체육요원으로 편입될 수 있다. 병무청의 병역법 해석에 따르면 이런 기준은 정식 종목에만 적용된다. 시범 종목은 대중의 관심을 고취하고 종목 보급을 확대할 목적으로 실시된다.따라서 공식 메달 집계에 포함되지 않는다. 메달 리스트에게 주는 연금 혜택도 받을 수 없다. 병무청 관계자는 “법률 자문을 받은 결과 시범종목은 메달 집계에 포함되지 않아 우리나라의 순위에 영향을 주지 않으므로 국위선양과 관련이 없다는 해석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아시아올림픽평의회는 2022년 항저우 아시안게임부터 e스포츠를 정식 종목으로 채택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4년 뒤 아시안게임에 출전하는 e스포츠 국가대표들은 금메달 획득 시 병역 혜택을 챙길 수 있을 전망이다. 병무청에 따르면 체육요원 편입기준은 1973년 도입 이후 5번에 걸쳐 개정됐다. 도입 초기에는 올림픽 3위 이상, 세계선수권 3위 이상, 유니버시아드 3위 이상, 아시안게임 3위 이상, 아시아선수권 3위 이상, 한국체대 졸업성적 상위 10% 이내 기준을 충족하면 병역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1990년 4월 병역법시행령이 개정되면서 올림픽 3위 이상, 아시안게임 1위 입상자로 편입조건이 대폭 강화됐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쓴 축구대표팀도 특별한 병역 혜택을 받았다. 정부는 시행령을 고쳐 월드컵 축구 16위 이상 입상자도 체육요원 편입대상으로 인정했다. 2006년 9월에는 WBC(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4위 입상자에게 병역 혜택을 부여했다. 정부는 2008년 1월 다시 시행령을 고쳐 올림픽 3위 이상, 아시안게임 1위 입상자로 체육요원 편입기준을 강화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산부인과 의사들, 인공임신중절 수술 거부키로···“입법 미비 해결하라”

    산부인과 의사들, 인공임신중절 수술 거부키로···“입법 미비 해결하라”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28일 “인공임신중절수술을 전면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보건복지부가 낙태 수술을 비도덕적 진료 행위로 보고 수술한 의사의 자격을 1개월 정지하는 행정규칙을 지난 17일 공포한 것에 산부인과 의사들이 반발한 것이다. 의사회는 이날 발표한 성명서에서 “국민의 건강권을 지키며 밤을 새우는 산부인과 의사가 비도덕적인 의사로 지탄을 받을 이유는 없다”며 “입법 미비 법안을 앞세워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비도덕적 진료행위 유형으로 규정하고 처벌하겠다는 정부의 고집 앞에서 1개월 자격정지의 가혹한 처벌을 당할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의사회는 “행정규칙 개정의 근거가 된 모자보건법 제14조는 1973년 개정된 이후 지금까지도 의학적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며 “유전학적 장애나 전염성 질환은 기형아 유발 가능성이 있는 모체 질환이라는 이유로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허용하면서 무뇌아 등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선천성 기형에 대해서는 수술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모순이며 해당 임신부에게는 가혹한 입법미비”라고 비판했다.그러면서 “수많은 임신중절수술이 음성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불법 인공임신중절의 원인 및 해결방안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여성과 의사에 대한 처벌만 강화하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며 “오히려 임신중절수술의 음성화를 조장해 더 큰 사회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의사회는 “임신중절수술에 대한 합법화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며 “헌법재판소에서 낙태 위헌 여부에 대한 헌법소원 절차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정부는 당장의 입법 미비 해결에 노력하고 사회적 합의가 이뤄질 때까지 의사에 대한 행정처분을 유예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김동석 대한산부인과의사회장은 산부인과 전문의 18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91.7%(1651명)가 ‘정부가 고시를 강행할 경우 낙태 수술거부 투쟁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국일보가 보도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은빛자서전 프로젝트<3>] “대의는 이루지 못했지만 소신 나누며 살았습니다”

    [은빛자서전 프로젝트<3>] “대의는 이루지 못했지만 소신 나누며 살았습니다”

    정지환 감사경영연구소장은 충북 옥천신문과 손잡고 ‘은빛자서전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한 사람의 일생은 그 자체가 역사이고 작은 박물관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80세 이상 주민의 구술(口述)을 풀어내 자서전으로 정리하는 프로젝트다(서울신문 3월 16일 자 38면 ‘인터뷰 플러스’ 참조).이번에 만난 사람은 안남면 도덕리(덕실마을)에 사는 이승우(91) 씨입니다. 어린 시절 유교 학자인 조부로부터 ‘천자문’에서 ‘논어’까지 배웠다는 그가 정한 좌우명은 ‘대의소신(大義小信)’입니다. 사람이 한 번 태어나 ‘대의’를 지키기 위해 살아야 하되, 설령 거기에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소신’ 즉 작은 믿음이나마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였을 겁니다.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였냐”고 묻자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6남매를 낳고 키우고 가르치던 시절이었다”고 답했습니다. 인생 90년을 넘길 무렵부터는 ‘상선약수(上善若水)’가 마음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상선약수는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으로, ‘노자’에 나오는 말입니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속성을 가진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습니다. 전국노인서예대전 입선의 경력을 가지고 있는 이 씨는 올봄 대문에 ‘구(龜)’와 ‘용(龍)’을 써 붙였습니다. 거북이와 용처럼 만수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박학다식 조부와 일자무식 부친 밑에서 나는 1928년 옥천군 안남면 도덕리(덕실마을)에서 태어났다. 조상들이 원래 살던 곳은 청산면 궁촌리(활골)였다. 그곳에서 안남면 도덕리로 이주하기로 결정한 분은 증조모였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까지만 해도 청산에는 원님이 있었다. 조부(이규항)는 원님과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6·25전쟁 때까지 생존하셨던 조부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상투를 고집한 유교 학자였다. 평생 낫과 호미 한 번 손에 들지 않고 동네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나도 어린 시절 박학다식한 조부에게 천자문에서 논어까지 배웠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의 어둠도 짙은 법이다. 젊은 가장이 일하지 않으니 집안이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불똥은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일하지 않고 글만 읽는 조부에 실망한 증조모는 손자, 그러니까 나의 부친(이종억)에게 어떤 공부도 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부친은 일자무식이 되었다. 증조모는 남편, 그러니까 나의 증조부가 돌아가시자 곧바로 청산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마침 언니가 살고 있던 안남면 도덕리가 이주지가 되었다. 박학다식 조부와 일자무식 부친 밑에서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조부는 평생 글만 읽으셨고, 부친은 평생 농사만 지으셨다. 특히 과묵과 인내의 인생을 사셨던 부친은 절대 남에게 해를 끼칠 줄 몰랐던 호인(好人)이었다. ●17세 신랑 이승우와 16세 신부 주재순 나는 안남소학교를 다녔다(7기생). 모친이 조부와 부친 몰래 월사금을 내주었다. 소학교를 마치고 대전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월사금을 내지 못해 입학만 하고 결국 학교는 다니지 못했다. 중학교 진학에 좌절한 나는 곧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내가 15세 때였으니 1942년이었을 것이다. 대전에 있는 한 전기상회 점원으로 취업했다. 당시는 식량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생활용품까지 국가에서 배급하던 전시체제(戰時體制)였다. 전기상회에서 지내다 보니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 풍요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상점 점원들이 서로 배급 물품을 교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17세가 되던 해에 의류를 취급하던 한 상회의 동갑내기 여성 점원과 가까워졌다. “어머니가 많이 아프시니 빨리 귀향하기 바란다.” 갑자기 고향에서 전갈이 왔다. 고향에 가보니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에 잔뜩 몰려와 있었다. 어리둥절해 하는 나에게 집안 어른들이 다짜고짜 이렇게 통보했다. “너는 내일 장가를 가야 한다.” 신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같은 마을에 살고 있던, 나보다 한 살 적은 처녀였다. 그녀는 수원 양성에서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가 정신대에 끌려가는 것을 피하려고 옥천으로 피신을 와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같은 학자였던 조부끼리 이미 우리 두 사람을 결혼시키기로 약조했다고 한다. 17세 신랑 이승우와 16세 신부 주재순은 너무 어려서 첫날밤을 치르지 못했다. 실제로 첫 아이가 태어난 것은 그로부터 5년 후였다. 그렇게 평생의 인연을 맺은 아내와 나는 73년을 해로했다. ●동양화·연필화·풍물 배우기에 푹 빠져 생존을 위해 가족을 이끌고 타지를 떠돌던 나는 회갑을 앞둔 1980년대 후반 귀향했다. 가족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온 나는 농사를 지으며 마을과 지역을 위해 봉사했다. 새마을지도자, 선거관리위원장, 경지정리위원장, 단위농협조합장(임시) 등이 당시 맡았던 나의 주요 직책이었다. 주변에서 ‘돈 안 되는 일’만 골라 한다는 냉소 섞인 뒷말이 들려왔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나는 요즘 미술과 음악에 푹 빠져 있다. 3~4년 전부터 동양화와 풍물을 배웠다. 얼마 전부터는 연필화도 시작했다. 그림 그리고 악기 연주하기를 천하게 여기던 집안 분위기 때문에 멀리했던 것들이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다. 말리는 사람도 없으니 당분간 나의 공부는 계속될 것 같다. 나는 아내 주재순과의 슬하에 6남매(3남 3녀)를 두었다. 1녀 옥자(3남), 1남 상룡(1남 2녀), 2녀 용자(2남), 2남 상준(1남 1녀), 3남 상길(2남), 3녀 숙(2남)이 다시 14명(11남 3녀)의 손주를 낳아주었다. 서원호 객원기자 guil@seoul.co.kr
  • 신념 따랐던 美 보수 거목 스러지다

    신념 따랐던 美 보수 거목 스러지다

    미국 보수의 거목이자, 자신의 신념에 따라 진보적 가치를 지지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정계의 ‘이단아’(매버릭) 존 매케인(공화·애리조나) 상원의원이 영면했다. 82세.AP통신 등은 25일(현지시간) 매케인 의원이 이날 애리조나주 히든밸리 자택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고 전했다. 그는 지난해 7월 말기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이후 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했다. ●베트남 ‘전쟁영웅´… 대권 꿈은 못 이뤄 매케인 의원은 해군 전투기 조종사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1967년 폭격 임무를 수행하다가 격추돼 5년여간 포로 생활을 했다. 당시 해군 사령관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아들을 풀어주겠다’는 월맹군 제안을 거절하고 매케인 의원이 잡혀 있던 하노이 폭격을 명령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아버지의 조기 석방 제안도 그는 먼저 붙잡힌 전쟁포로가 모두 석방될 때까지 풀려날 수 없다며 거절했다. 베트남 국영 뉴스통신사인 VNA 등 현지 언론들은 “베트남과 미국의 협력 기초를 닦은 최초의 인물”이라고 타계 소식을 전하며 매케인 의원을 추모했다. 매케인 의원은 1973년 석방됐고 1981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1982년 애리조나주 공화당 하원의원에 당선됐고, 1986년 주 상원의원이 됐다. 이후 내리 6선을 했다. ‘베트남 전쟁영웅’ 출신 정치인으로 존경을 많이 받았지만 ‘대권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2000년 공화당 대선 경선 당시 조지 W 부시 당시 텍사스 주지사에게 졌다. 2008년에는 본선에서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에게 패배했다.●‘오바마케어’ 폐기 반대·트럼프엔 쓴소리 매케인 의원은 공화당원이었으나 민주당이 옳다고 믿을 때는 민주당에 표를 던졌다. 그는 지난해 7월 뇌종양 수술 직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1호 공약 ‘오바마케어’ 폐기 표결에 참석해 반대표를 던졌다. 그는 오바마케어에 문제가 있지만, 이를 없애려고 미국의 의료보험 시스템 전체를 위기에 빠뜨릴 수는 없다고 역설했다. 매케인 의원은 같은 당의 트럼프 대통령을 탐탁하지 않게 여기고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가치를 지키지 못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AFP통신 등은 “매케인 의원의 장례식에 트럼프 대통령이 초청받지 못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 “매케인 의원의 가족에게 깊은 연민과 존경을 전한다”고 적었다. 부시 전 대통령과 오바마 전 대통령,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부부,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등도 정파를 떠나 애도의 뜻을 밝혔다. ●文대통령 “한·미동맹의 굳은 지지자” 회고 매케인 의원은 여러 차례 방한한 ‘지한파’ 의원이기도 하다. 미 상원 군사위원장 등을 맡아 주한미군과 남북 관계, 북한 문제 등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지난해 6월 방미해 매케인 의원과 단독 회담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26일 페이스북에 “고인이 추구했던 자유와 평화가 한반도를 넘어 전 세계에 뿌리 내릴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애도한 뒤 “고인은 한·미 동맹의 굳은 지지자이며 양국 간 협력을 위해 노력해 왔다. 지난해 워싱턴 방문 때 방미 지지결의안을 주도했고 미 상원의원들과의 면담도 이끌어줬다”고 고인을 회고했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美, ‘나치 부역’ 숨긴 95세 이민자 獨 추방

    美, ‘나치 부역’ 숨긴 95세 이민자 獨 추방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의 강제수용소에서 부역한 사실을 숨긴 채 미국에 숨어 살아온 95세 남성이 독일로 추방됐다. 1945년 나치 독일이 패망한 지 73년 만이다.미국 이민세관단속국은 폴란드의 트라브니키 강제수용소에서 독일 경비병으로 복무했던 야키프 팔리를 21일(현지시간) 독일로 추방했다고 밝혔다. 백악관은 “팔리는 경비병으로서 유대인 수용자의 탈출을 막아 이들이 나치 정권에서 끔찍한 운명을 맞게 했다”고 발표했다. 옛 폴란드 동부지역(현재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팔리는 1943년 트라브니키에서 나치 친위대(SS) 훈련을 받았고 같은 해 11월 유대인 6000여명이 집단학살될 때 수용소 무장경비로 복무했다. 팔리는 2차대전이 끝난 뒤 1957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해 제도사로 일했다. 하지만 미 법무부는 1993년 나치 부역자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해 추적하기 시작했고 2001년 그로부터 자백을 받았다. 뉴욕 지방법원은 2003년 팔리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이듬해 추방 명령을 내렸지만 독일과 폴란드 등 관련국 모두 그를 인계받지 않아 14년간 무국적자로 미국에 머물렀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독일과 협상 끝에 그의 수용 약속을 받아냈다. 이날 독일에 도착한 팔리는 건강 상태를 고려해 양로원으로 보내졌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가족끼리만 첫 ‘도시락 점심’… 밥 같이 먹는 진짜 ‘식구’됐다

    가족끼리만 첫 ‘도시락 점심’… 밥 같이 먹는 진짜 ‘식구’됐다

    3시간 개별 상봉… 북측 도시락 제공 北감시원 없이 객실서 오붓하게 식사 가족들 “자유롭고 기분도 훨씬 좋아” “73년 만에 만난 동생 안 보내고 싶어” “또 언제 만날지… 평화의 담 너무 높아” 오늘 작별 상봉 1시간 늘려 3시간으로남북 이산가족들은 상봉 행사 이틀째인 21일 이산가족 상봉 역사상 처음으로 가족끼리만 함께하는 식사를 했다. ‘식구’(食口)라는 말뜻 그대로 밥을 같이 먹어야 진짜 가족이라는 말을 실현한 셈이다. 그동안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는 가족끼리 만나 대화하는 시간은 있었어도 가족끼리만 밥을 먹는 시간은 없었다. 밥은 늘 식당에서 남북 당국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른 가족들과 단체로 먹었다. 소화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남측 이산가족 89명을 비롯한 동반 가족 등 197명은 북측 가족 185명과 오전 10시 10분부터 숙소인 외금강호텔에서 2시간 동안 개별 상봉을 했다. 이어 북측 감시원이 없는 객실에서 북측이 준비한 도시락을 나눠 먹으며 1시간 동안 점심 식사를 했다. 북측이 미리 준비한 도시락은 오전 11시 40분쯤 상봉 번호가 적힌 객실로 배달됐다. 도시락 메뉴는 삼색찰떡, 오이소박이, 닭고기편구이, 낙지후추구이, 오이절임, 삼색나물, 숭어완자튀김, 돼지고기빵가루튀김, 금강산송이버섯볶음, 소고기볶음밥, 사과, 가시오갈피차, 금강산 샘물, 사이다 등으로 구성됐다.통일부는 앞서 기존에는 오전 객실 상봉 이후 모두 모여 공동 중식을 했지만 이번 행사에서는 가족들의 편안한 만남 시간을 늘린다는 취지에서 객실 상봉에 이어 객실에서 가족끼리 도시락으로 중식을 하도록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이영부(76)씨는 개별 상봉에 대해 “아무래도 자유롭고 훨씬 낫다”며 따로 점심을 한 데 대해선 “얼마나 맛있어. 기분 좋고”라고 흐뭇해했다. 일부 남측 가족은 점심 식사 이후 외금강호텔 정문까지 북측 가족을 배웅하러 나왔다가 “여기까지요. 나중에 또 뵈니 거기서 만나요”라는 남측 관계자의 제지를 받고서야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이산가족들은 오후 3시부터 금강산호텔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된 단체 상봉에서 만나 그리움을 달랬다. 김병오(88)씨는 북측 여동생 순옥(81)씨의 손을 잡고 “우리 여동생 예쁘지 않냐”며 자랑을 했다. 박기동(82)씨는 “60여년 만에 만나 반갑지만 헤어질 것을 생각하니 안됐다”며 하루밖에 남지 않은 상봉을 아쉬워했다. 동반 가족인 남측 여동생 선녀(74)씨는 “이제 헤어지면 언제 만날지 기약이 없다”며 “평화가 빨리 이뤄져야 하는데 담이 너무 높다”고 말했다. 차제근(84)씨는 북측 동생 제훈(76)씨에게 “내가 형으로서 동생을 버리고 나만 살겠다고 나와 미안해. 버리고 나와서 가슴이 너무 아프다”며 계속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다. 동생 제훈씨는 그런 형의 무릎을 매만지며 “아이고, 뭐가 미안해요”라고 위로했다. 김혜자(75·여)씨는 북측 동생 은하(75)씨에게 연신 “사랑해”라고 말하며 “지금까지도 꿈꾸고 있는 것 같다. 아기 때 헤어져서 73년 만에 만난 건데 안 보내고 같이 있고 싶다”고 거듭 아쉬워했다.남측 이산가족 중 일부는 고령과 건강상의 이유로 오후 단체 상봉에 참석하지 못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북측 조카를 만난 강화자(90·여)씨는 오전 개별 상봉과 객실 중식에는 참가했으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오후 단체 상봉을 포기했다. 한신자(99·여)씨도 피로가 쌓여 단체 상봉을 포기했다 상봉 종료를 5분여 앞둔 오후 4시 55분쯤 북측 두 딸을 만나기 위해 부축을 받으며 행사장에 모습을 보였다. 한씨는 다시는 놓고 싶지 않다는 듯 북측 딸들의 손을 꼭 잡았다. 한편 일부 북측 관계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선생이 보기에 지지율이 더 떨어질 것 같냐”며 “흩어진 친척 상봉하면 지지율에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말했다. 북측 관계자는 상봉 규모 확대에 대해선 “장소가 100명 정도가 적당한 규모라서 지금 우리 시설에서는 100명 정도 이상은 현실적으로 하기 어렵다”고 난색을 보였다. 남북은 이날 추가 협의를 통해 마지막 날인 22일 작별 상봉 시간을 기존 합의했던 2시간에서 3시간으로 1시간 늘리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2박 3일간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시간은 기존 총 11시간에서 12시간으로 늘어나게 됐다. 금강산 공동취재단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지탄의 대상, 외제차/손성진 논설고문

    [그때의 사회면] 지탄의 대상, 외제차/손성진 논설고문

    현재 국내에 등록된 외제차는 200만대가 넘는다. 1970년대만 해도 외제차를 타는 사람들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라는 이유로 비난했다. 세금도 엄청났다. 1970년대 초 외제차를 수입해서 타려면 차값의 255%를 세금으로 물었다. 높은 세금을 피하려는 외제차 밀수가 날로 늘었다. 1971년 당국은 단속의 칼을 빼 들었다. 관세청은 밀수한 외제차주가 스스로 신고하도록 했다. 1971년 자진 신고된 외제차는 5833대였고 479대의 밀수 차량이 확인돼 2억 495만원의 세금이 부과됐다.자진 신고가 끝난 뒤 당시 이택규 관세청장이 직접 서울 광화문 거리에 나가 외제차를 단속했다(매일경제 1971년 11월 20일자). 이 청장은 검사 출신으로 초대 관세청장에 임명됐고 법률신문 회장을 지냈다. 그날 하루에 20여대의 밀수 차량을 단속했고 인천제철 사장의 벤츠, 고려제지 사장의 캐딜락도 단속에 걸렸다. 단속이 강화되자 길가에 버려진 외제차를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 차값의 두 배 반을 세금으로 물어야 하고 경우에 따라 구속될 수도 있으니 차를 몰래 버린 것이다. 단속에 대한 불만으로 관세청 정문 앞에 차를 버린 사람도 있었다(매일경제 1971년 12월 16일자). 당국은 밀수 외제차 소유주의 명단을 공개하고 일반 자동차와는 다른 번호판을 외제차에 달도록 했다. 1970년 무렵 관용이나 외교관용을 제외하고 시가 500만원(현재 가치 수억원대)이 넘는 외제차가 498대 있었다고 한다(동아일보 1971년 9월 6일자). 정식 수입차였지만, 고급 외제차를 타는 고관(高官)들도 도마에 올랐다. 장관급 이상이 타는 승용차는 외제차 일색이었다. 국회도 마찬가지였다. 총무처 장관은 크라이슬러, 문공부 장관은 비크, 통일원 장관은 폰티악, 상공부 장관과 건설부 장관은 링컨콘티넨털, 체신부 장관은 올스모빌, 서울시장은 머큐리를 타고 다녔다. 서정쇄신 바람과 함께 외제차를 타는 고위 공무원들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자 김종필 국무총리는 국무위원들에게 국산 승용차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국산은 조립 생산한 신진 크라운과 포드 20M이 있었지만, 외국산 최고급 승용차와는 아무래도 품질의 격차가 있었다. 서슬 퍼렇던 단속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외제차를 타는 사람들이 특수계층이었기 때문에 형평성 있는 처벌이 어려웠던 탓이다. 1973년 에너지 파동으로 ‘관용차량 관리규정’을 만들어 장관은 배기량 1800㏄급 중형차를 타도록 했지만, 몇 년 못 되어 슬금슬금 고급 외제차가 다시 관가에 나타났다.
  • 목타는 저수지… 애타는 준설

    목타는 저수지… 애타는 준설

    최악의 폭염과 가뭄이 동시에 한반도를 덮치면서 저수지도 바싹 말랐다. 19일 기상청에 따르면 최근 한 달(7월 19일~8월 18일) 새 전국 평균 누적 강수량은 43㎜다. 1973년 기상관측 이래 가장 적다. 지난 30년간 평균 강수량(247.7㎜)과 비교하면 17.4%에 그친다. 적은 강수량은 저수지에 직격탄을 날렸다. 현재 충남도 내 898곳 저수율은 45.8%로 지난해 같은 기간 72%에 비해 턱없이 낮다. 도내 주요 농업용수 공급원인 국내 최대 수준의 예당저수지는 29.8%로 떨어져 27㎞나 되는 도수로를 통해 금강 물을 긴급히 ‘수혈’ 받고 있다. 논산 탑정저수지 42.8%, 보령 청천저수지 39.7%로 평년 저수율의 50∼60%밖에 되지 않는다. 급기야 충남도는 최근 ‘용수공급 상황실’을 전격 설치했다. 지난 4월 7일 해체한 지 4개월여 만이다. 평년 71.5%였던 전북 지역 2228개 농업용 저수지의 저수율은 50.9%다. 특히 1주일 전부터 빠른 속도로 저수지 물이 고갈되고 있다. 지난해 90.1%를 기록했던 충북 지역 762개 저수지의 평균 저수율은 57.8%에 머물렀다. 옥천 이원면 장찬저수지는 충북에서 가장 낮은 22%의 저수율을 기록하며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국 저수지의 평균 저수율은 53.1%로 평년대비 74%다. 이런 상황에 저수지 준설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저수지 바닥에 쌓인 흙이나 암석을 파헤쳐 바닥을 깊게 하는 동시에 물그릇을 키우는 작업이다. 수년 전부터 준설이 곳곳에서 진행됐으나 임시방편식 처방이었거나 아직도 대상으로 꼽히는 게 적잖다. 경북도는 도내 전체 저수지 5490곳(시·군 4835곳, 농어촌공사 655곳)을 대상으로 전수조사를 벌였다. 이 가운데 가뭄이 심한 경주시 양남면 상계저수지 등 25곳을 준설하기로 하고 사업을 진행 중이다. 연말까지 11억 4000만원을 투입한다. 17곳은 영농기 뒤에나 준공될 전망이다. 경북도 관계자는 “매년 가뭄 때마다 관정을 뚫고 하천을 굴착하는 단기 처방으로는 지하수 오염만 가중시킬 뿐”이라고 꼬집었다. 청주 남인우 기자·전국종합 niw7263@seoul.co.kr
  • [사설] 광복 73년에도 아직 갈 길 먼 독립유공자 발굴과 예우

    문재인 대통령은 어제 광복절 경축사에서 “묻힌 독립운동사와 독립운동가의 완전한 발굴이야말로 또 하나의 광복의 완성”이라고 말했다.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를 마지막 한 분까지 최선을 다해서 찾아내고, 그 공적을 기리는 일은 후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책무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광복절에도 “독립운동가들을 모시는 국가의 자세를 완전히 새롭게 하겠다”고 했다. 이에 따라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9월 독립운동 사료에 대한 국가 입증 책임을 강화하고, 포상 심사 기준 재검토 등을 담은 ‘독립유공자 발굴·포상 확대 계획안’을 내놓았다. 지난 6월엔 ‘수형(옥고) 3개월 이상’이라는 기준 조항을 없애고, 당시 사회 구조상 관련 공식 기록이 많지 않은 여성은 일기, 회고록, 수기 등 직간접 자료도 폭넓게 인정하는 ‘독립유공자 포상심사 기준 개선안’을 확정했다. 하지만 도산 안창호 선생의 조카인 고(故) 안맥결 여사의 사례에서 보듯 현실의 문턱은 여전히 높다. 만삭의 몸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던 안 여사는 한 달여 만에 가석방됐다는 이유로 심사에서 탈락해 이번 광복절 독립유공자 포상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조선혁명군으로 활약한 조부의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했더니 70년이 넘은 중국 법원의 재판 서류를 가져오라고 했다는 어느 후손의 한탄은 보훈처가 누구를 위한 기관인지 되묻게 한다. 그동안 소외됐던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평가도 시급하다. 지난 1년간 여성 독립운동가 202명이 발굴돼 이 중 26명이 이번에 서훈을 받은 건 다행이다. 하지만 전체 포상자 1만 5000여명 중에 2%에 불과해 갈 길이 멀다. 차별을 딛고 독립운동에 나섰던 여성 애국지사들의 항일 역사가 온전히 복원될 때 광복의 의미가 더욱 빛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애국지사 김산의 아들 “지금 한민족, 새 발자취 만들어”

    애국지사 김산의 아들 “지금 한민족, 새 발자취 만들어”

    김산 ‘한국의 체 게바라’로 불린 혁명가 항일군정대학서 물리학·수학 등 가르쳐 아들 고영광씨 “내 성은 고려에서 따와”“내 성 ‘고’는 ‘고려’에서 따온 것이라오.” 혁명가의 늙은 아들은 비록 아버지의 성을 따르지 못했지만 그의 이름은 고려의 영원한 빛이라는 뜻처럼 빛났다. ‘한국의 체 게바라’로 불리는 애국지사 김산(1905~1938년)의 아들 고영광(81)씨는 성의 유래를 설명하며 자랑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15일 중국 베이징 한국대사관에서는 중국 인민군해방가를 작곡한 정율성 지사의 딸 정소제씨,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서로 일한 김동진 지사의 딸 김연령씨 등 독립유공자 후손 7명을 초청한 광복절 경축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고씨는 “광복 73주년이라는 것 자체가 한민족에게 매우 크고 기쁜 일”이라고 말했다. 그가 한 살 때 처형당한 아버지 김산(본명 장지락)은 미국 여성 언론인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노래’를 통해 불멸의 혁명가로 남게 됐다. 평안북도 용천 출신인 김산은 3·1 만세시위운동 이후 중국 대륙을 누비며 전 생애를 혁명에 바쳤으나 일본 스파이로 몰려 극비리에 처형되었고 이후 덩샤오핑이 집권하면서 1983년 누명을 벗고 복권됐다. 김산은 1920년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학을 배운 뒤 상하이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교정원 및 인쇄공으로 일했다. 1925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고, 베이징에서 1·29 학생운동이 일어나자 허베이성 스자좡에서 4000여명의 학생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를 주도했다. 공산당의 요청으로 옌안 항일군정대학에서 물리학, 화학, 수학, 일본어, 한국어를 강의하다 님 웨일스를 만나 ‘아리랑의 노래’를 구술하게 된다. 고씨는 웨일스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편지를 교환했으며 “김산의 희생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희생이었다”란 회신을 받았다고 밝혔다. 또 웨일스는 “아들을 한 명 두었으니 김산은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았다”며 ‘아리랑의 노래’ 영문 초판을 보내줬다고 소개했다. 김산의 불꽃 같은 삶은 여러 차례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결국 성공하지는 못했다. 고씨는 “아버지의 생애가 영화화된다면 ‘아리랑의 노래’에 따라 만들어지고 다른 이야기를 창조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 73년 동안 남과 북이 모두 아름다운 국가를 건설했으며 이제 한민족이 새로운 발자취를 만들어 가고 있다”며 “남북 정상이 이미 두 번 악수했고, 오는 9월에 제3차 정상회담을 하는데 73년간의 노력이 오늘 이 뜻깊은 자리를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글로벌 In&Out] 남북에서 모두 잊혀진 1945년 8월의 소일전쟁/바실리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글로벌 In&Out] 남북에서 모두 잊혀진 1945년 8월의 소일전쟁/바실리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2018년 8월 15일은 광복 73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 73년 전인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한반도는 일제 식민주의의 압박으로부터 해방되었고 고통받던 한국인들은 광복의 기쁨을 실감했다. 그러나 분단과 냉전을 겪으면서 남북한은 일부 기억을 지워버렸는데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 가운데 유일하게 한반도에서 전투하고 일본의 식민통치를 무너뜨린 소련에 대한 기억이다.남한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해방은 미국이 일본에 원폭을 투하한 것만 떠올리고 한반도 해방에서 소련의 역할 자체를 부정하거나 축소한다. 필자는 관련 학회에서 “소련이 한반도에서 전투를 한 번도 치르지 않고 ‘그냥’ 들어왔다”는 주장까지 들어 봤다. 이런 인식은 북한도 마찬가지다. 북한 평양의 해방탑에 소련군에 의한 해방을 기념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북한 학자들은 해방을 김일성의 조선인민혁명군의 활약으로 해석하면서 ‘신화’를 만들었다. 남북의 국가 편찬 공식 역사의 한계를 잘 보여 주는 사례다. 그 뿌리 깊은 신화를 깨뜨릴 수 있는 역사가의 유일한 무기는 사료(史料)이다. 그러면 소련군의 한반도 진출에 대해 사료들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만주전략공세작전’을 개시하였다. 이 작전은 3가지의 하위 작전으로 구성됐는데, 그중 하나가 한반도를 포함한 하얼빈·지린성 공세작전이었다. 북한 해방 작전 수행을 위해 소련 육·해군 연합부대가 결성되었다. 메레츠코프 원수가 지휘하는 제1극동전선군 휘하 제25군의 남측부대와 유마셰프 제독 휘하 태평양 함대의 해병부대다. 소련군의 한반도 전투는 만주전략공세작전 개시와 동시에 시작되었다. 1945년 8월 9일, 공군은 함경북도 웅기읍의 일본군 시설에 대한 공습을 실시하였고 육군 부대들은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 지역 주둔 일본군은 소련군 급습에도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8월 9일 밤 소련군 부대들이 경흥군을 해방시켰다. 소련 공군은 일본군 시설에 대한 공습을 지속해 많은 일본 군함과 수송선을 침몰시킴으로써 해병부대의 작전을 가능케 하였다. 메레츠코프는 8월 11일 유마셰프에게 상륙부대를 결성해서 북한 해안 지역을 해방하라는 명령을 보냈다. 해군대대와 정찰부대가 웅기에 상륙하여 전투 없이 해방한 후 마침 도착한 육군부대와 합류하여 나진시에 돌격했다. 청진에서는 항구 방어선을 회복하려는 일본군의 지속적인 공격에도 소련 선봉부대는 해병여단이 도착한 15일까지 항구를 고수했다. 15일 정오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포한 ‘옥음방송’이 울렸지만 포성이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일본 관동군 사령부는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살벌한 청진 전투는 동해 해안선을 따라 내려오는 육군사단이 전투에 들어간 16일까지 지속되었다. 청진 상륙작전의 성공과 만주에서의 소련군 승리의 소식을 들은 관동군 사령부는 지속적인 저항의 무의미함을 인정하고 19일 드디어 무기를 내려놓았다. 만주전략공세작전 중에 소련군은 3만 5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그중 약 60%가 만주남부와 한반도를 해방시킨 제1극동전선군이었다. 육군부대들도 2000여명, 해군부대들은 10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소련 제1극동전선군의 군사작전은 한반도 북측 지역의 해방 이외에 또 한 가지의 성과를 거두었다. 조선 북부에서 일제식민통치에 치명적인 타격을 줘 일제 관료, 경찰, 군인들은 남쪽으로 도피했고, 그 식민권력의 공백을 조선인 스스로 채워 나갈 수 있게 한 것이다.
  • ‘여의도 면적’ 크기의 일본인 소유 귀속·은닉재산 국가 환수

    ‘여의도 면적’ 크기의 일본인 소유 귀속·은닉재산 국가 환수

    광복후 지자체 무관심에 귀속 지지부진 조달청 2012년부터 작업… 내년 말 마무리 “귀속재산 3만 5520필지… 끝까지 추적” 은닉재산 163필지 소송 후 90필지 찾아지난 7년간 여의도 면적(290만㎡)의 일본인 명의의 귀속·은닉재산이 국가에 환수 조치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토지가 방치되거나 숨겨져 있어 ‘역사 바로 세우기’에는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14일 조달청에 따르면 지난달 말 현재 귀속재산(3283필지)과 일본인 명의의 은닉재산(90필지) 3373필지, 228만 9805㎡(토지가액 848억원 상당)를 국유화했다. 귀속재산은 1948년 9월 11일 우리 정부와 미국 정부 간 체결된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에 양도된 대한민국 영토 안에 있는 일본인과 일본법인, 일본기관이 소유했던 재산이다. 귀속재산은 귀속재산처리법 등에 따라 광복 후 국가에 귀속됐어야 했는데 지방자치단체의 무관심으로 국유재산 권리보전작업이 답보 상태에 머물자 조달청이 2012년 6월부터 관련 업무를 이관받아 국유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은닉재산도 ‘부동산 소유권이전 등기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악용해 부당하게 사유화한 것이 확인돼 2015년부터 조달청이 맡고 있다. 조달청은 국토교통부로부터 확보한 일본인 추정 토지(9만 800여 필지)와 국가기록원의 ‘재조선 일본인 명부’(23만명) 등을 대조해 귀속재산 3만 5520필지를 선별했다. 이 중 창씨개명과 매각·분배, 과세 자료에 대한 확인 등을 거쳐 3283필지(219만 2363㎡)를 국유화했다. 3759필지는 무주부동산 공고 등을 통한 국유화 조치가 진행 중이다. 1만 1172필지를 조사하고 있으며 1만 7306필지는 국유화 대상에서 제외됐다. 은닉재산과 관련해서는 국토부로부터 은닉의심 토지(53만 필지)와 재조선 일본인 명부를 대조해 기초조사 대상 토지 1만 479필지를 정한 후 서류조사와 현장방문 면담 등을 실시했다. 이 중 은닉재산으로 의심되는 163필지에 대해 환수 소송 등을 거쳐 모두 90필지(9만 7442㎡)를 국유화했다. 이 중 문제를 인정하고 반납한 토지는 20필지에 불과하다. 은닉재산 중 강릉의 임야(4만 6612㎡)가 최대 규모로 확인됐다. 임중식 국유재산기획과장은 “광복 이후 국내외 혼란기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일본인 명의 재산이 온전히 국가에 귀속되지 못한 상태로 방치됐고, 특별조치법을 악용해 사유화한 토지도 확인됐다”면서 “귀속재산 국유화 조사작업은 내년 말 마무리될 예정이지만 추가 신고나 제보도 많아 확인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귀속·은닉재산 국유화 과정은 ‘시간과 설득의 과정’으로 집약된다. 원고가 국가 땅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데 광복 후 73년이 지나 일제 강점기 당시 상황을 입증할 자료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당시 소유자가 사망했거나 연로해 면담, 증인 확보 등도 쉽지 않다. 정부의 특별조치법 당시 적법 여부를 검증하지 않은 채 사유화를 인정한 후 소송을 진행하면서 토지 소유자들의 반발과 불만도 만만찮다. 더욱이 자진 반환 또는 화해 권고를 유도해야 하지만 유인책이나 정책적 뒷받침이 없다 보니 소송이 장기화되고 있다. 박춘섭 조달청장은 “귀속·은닉재산의 국유화는 국가 재산 증대뿐 아니라 일제 잔재 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 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일”이라며 “귀속·은닉재산으로 의심되는 토지는 끝까지 추적해 환수 조치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대전 박승기 기자 skpark@seoul.co.kr
  • 한반도 해방에서 사라진 장면- 1945년 8월 북한 국경에서의 소일(蘇日)전쟁

    한반도 해방에서 사라진 장면- 1945년 8월 북한 국경에서의 소일(蘇日)전쟁

    2018년 8월 15일은 광복 73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 73년 전인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한반도는 일제 식민주의의 압박으로부터 해방되었고 그 아래서 신음하던 한국 사람들은 광복의 기쁨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 후 한국은 분단과 전쟁, 쿠데타와 민주화 운동 등을 겪으면서 오늘의 풍요롭고 자유로운 대한민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번영의 출발점인 해방과 광복의 진상은 냉전시대의 정치와 극단적 좌우갈등으로 왜곡되기도 하였다.한국인의 역사적 기억에서 지워져 버린 것에는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을 치르고 일본의 식민통치를 무너뜨린 유일한 나라 소련의 역할이 있다. 남한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해방은 미국이 일본에 원폭을 투하한 것만 떠올리고 한반도 해방에서 소련의 역할 자체를 부정되거나 축소한다. 필자는 관련 학회에서 ‘소련이 한반도에서 전투 한 번도 치르지 않고 ‘그냥’ 들어왔다’는 주장까지 들어봤다. 이런 인식은 남한만이 아니다. 북한 평양에 있는 해방탑에 소련군에 의한 해방을 기념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북한 학자들은 해방을 김일성의 조선인민혁명군에 의한 것으로 해석하면서 ‘신화’를 만들었다. 남북의 국가 편찬 공식 역사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 뿌리깊은 신화를 깨뜨릴 수 있는 역사가의 유일한 무기는 사료(史料)이다. 그러면 소련군의 한반도 진출에 대해 사료들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살펴보자.소일(蘇日)전쟁과 한반도 진출 과정을 살펴보자. 1945년 8월 9일 새벽,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만주전략공세작전’을 개시하였다. 물론 한국에는 잘 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만주전략공세작전은 3가지의 하위 작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반도를 포함한 하위 작전은 하얼빈-지린성 공세작전이었으며 이 작전의 주력 부대 중 하나가 추후 북한 점령을 맡은 소련의 제25군이었다. 이 작전의 주요 방향은 만주와 조선의 국경 지대였고, 북한은 보조 작전 방향으로 설정되었다. 보조 방향이지만, 한반도 군사 작전은 만주전략공세작전 성공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소련군 한반도 군사작전의 목적은 관동군의 후퇴나 보급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 작전 수행을 위해 육해군 연합부대가 결성되었으며, 이 연합부대는 메레츠코프(K. A. Meretskov) 원수가 지휘하는 제1극동전선군 휘하 제25군의 남측부대와 유마셰프(I. S. Yumashev) 제독 휘하 태평양 함대의 해병부대로 구성되었다.소련군의 한반도 전투는 주력 부대의 만주전략공세작전 개시와 동시에 시작되었다. 1945년 8월 9일, 소련 공군은 함경북도 웅기읍의 일본군 시설에 대한 공습을 실시하였고 샤닌 (G. I. Shanin) 소장 휘하 소련육군 부대들은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 지역 주둔 일본군은 소련군 급습에도 일본군은 치열히 반격했다가 결국 버티지 못해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8월 9일 밤 제25군의 부대들이 경흥군을 해방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제25군 남측 부대의 일부는 회령시 방향으로 진격을 계속하였고, 육해군 연합부대에 속한 부대는 남하를 계속하였다. 육군이 일본군과의 전투를 벌이는 동시에 소련 공군은 일본군의 해안 방어 시설에 대한 공습을 지속하였으며 일본 군함 2척, 수송선 25척을 침몰시킴으로써 해병대 부대의 작전을 가능케 하였다. 작전 개시 2일 후인 8월 11일, 메레츠코프가 태평양 함대 사령부에 상륙부대를 결성해서 청진, 웅기, 나진 등 지역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보냈다. 8월 11일, 해군대대와 소련최고의 훈장인 ‘소비에트 연방 영웅’ 훈장을 받은 레오노프 (V. N. Leonov) 상위 휘하의 태평양 함대 직속 정찰부대가 웅기에 상륙하여 전투없이 해방한 후 마침 도착한 육군부대와 합류하여 나진시에 돌격했다. 다음날 아침에 나진 해방 작전이 시작되었다. 웅기읍과 달리 나진 시는 웅기를 포기한 부대의 증원을 받은 일본군이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악화된 기후조건에도 12일 나진에 상륙한 소련 해군부대와 북쪽에서 진격하는 육군부대는 일본군의 저항을 받아 피해를 입었다. 그러다가 13일에 상륙한 증원군의 지원을 받은 소련군은 일본군의 저항을 뚫고 14일에 나진의 해방을 완수하였다. 웅기읍과 나진 해방 후 소련군의 다음 목표는 청진이었다. ‘조선을 빨리 해방하라’는 메레츠코프의 명령을 완수하기 위해 180여명 밖에 안되는 해군부대가 나진 전투가 끝나기도 전에 어뢰정 6척을 타고 청진에 돌진하고 상륙했다. 뜻밖의 습격을 받은 일본 위수부대는 항구를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항구의 점령을 저지하지 못했으나 그 직후 반격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군은 선봉부대의 완강한 저항을 감수해가며 선봉부대에 큰 피해를 입혔으나, 이를 전멸시키지는 못했다. 다음날 14일에 대대 규모의 증원군을 받은 소련군은 공격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은 장갑열차를 포함한 모든 예비대를 전투에 투입시켰다. 나쁜 기후조건을 이용하고 소련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항구 방어선을 회복하려는 일본군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으면서 커다란 피해를 입은 소련군 선봉부대들은 제13해병여단이 도착한 15일까지 항구를 고수하고 있었다. 15일 정오, 일본 천황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선포한 ‘옥음 방송’이 울렸지만, 포성이 멈추지 않았고 관동군 사령부는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살벌한 청진 전투는 동해 해안선을 따라 내려오는 제393사단이 전투에 들어간 16일까지 지속되었다. 청진 상륙작전의 성공과 만주에서의 소련군 승리의 소식을 들은 관동군 사령부는 지속적인 저항의 무의미함을 인정하고 1945년 8월 19일 드디어 무기를 내려놓았다. 만주전략공세작전에 참여한 소련군은 3만 5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그 중 약 60%가 만주 남부와 한반도를 해방시킨 제1극동전선군이었다. 한반도 해방 작전에 참여한 소련 육군 부대들은 2000여명, 태평양 함대의 부대들은 10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소련의 한반도 해방에 참여한 제1극동전선군의 군사작전은 구체적 지역의 해방 이외에 또 한 가지의 성과를 거두었다. 소련군의 성공적인 상륙작전은 조선 북부에서 일제식민통치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일제 관료, 경찰, 군인들은 남진하는 소련군을 두려워해 북쪽의 주요 도시들에서 남쪽으로 도피하게 되었다.북쪽에서 이런 ‘권력 진공’을 메운 것은 36년 동안 참정권을 박탈당했던 조선인들이었다. 그들은 각지에서 자치위원회를 만들고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물론, 나중에 국제정세가 급변하고 한반도가 다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가어가 분단되고 전쟁을 겪었으나, 이것은 소일전쟁을 평가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다. 글: 바실리 블라디미로비치 레베데프(고려대 사학과 석사)
  • ‘36년 동안 꺼내지 못한 태극기’

    ‘36년 동안 꺼내지 못한 태극기’

    ‘36년 동안 꺼내지 못한 태극기였습니다.’ 서울시가 광복 73주년을 맞아 13일 서울광장 꿈새김판에 이런 문구를 담은 대형 현수막을 걸었다. 일제강점기(36년) 동안 꺼내지 못했던 태극기를 광복 직후 남산에 게양하던 감격의 순간을 통해 광복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함이다. 시 관계자는 “광복 이후 73년이 지난 현 시대에도 우리가 직면한 여러 갈등에 대해 그 시절 꺼내지 못했던 태극기처럼 말하지 못하고 마음속에만 묻어두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고, 이제는 소통으로 사회갈등을 해결하고 더 나아가 시민 모두가 화합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현수막은 이날부터 이달 말까지 게시된다. 유연식 시민소통기획관은 “서울광장 대형 현수막과 광복절 행사를 통해 단순히 그날의 기쁨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는 되풀이돼서는 안 될 불행한 역사와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애국선열과 위안부 할머니 등 광복의 이면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기금 고갈 45년째 군인연금… 국가 부담 80% 넘어도 ‘개혁 무풍지대’

    공무원 이어 국민연금도 재정개혁 논의 군인연금 작년 적자 보전금 1조4600억 근본적 재정 수술 미뤄져 형평성 논란 정부가 국민연금의 장기 지속성을 고려해 재정 개혁을 논의하고 있는 가운데 세금으로 적자를 메우고 있는 군인연금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나마 공무원연금은 2015년 개혁으로 이듬해부터 단계적으로 ‘더 내고 덜 받는’ 구조가 됐지만 군인연금은 1973년부터 45년간 줄곧 예산 지원을 받으면서도 근본적인 개혁은 계속 미뤄지고 있다. 12일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정부는 국민연금 재정 상태를 진단하는 제4차 재정추계 작업을 끝내고 오는 17일 국민연금 재정추계위원회, 제도발전위원회, 기금운용발전위원회의가 참여한 가운데 공청회를 갖는다. 정부는 재정 안정화 방안을 확정하면 다음달 말 국무회의와 대통령 승인을 거쳐 오는 10월 말까지 ‘제4차 국민연금운영계획’을 수립할 방침이다. 이처럼 국민연금은 재정 개혁이 불가피해 보험료율 인상과 수령 시기 연장 등으로 가닥을 잡아 가고 있지만, 4대 연금(국민연금, 공무원연금, 군인연금, 사립학교교직원연금) 가운데 가장 개혁이 시급한 군인연금엔 손을 놓고 있어 형평성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국민연금 개편에 앞서 군인연금을 먼저 하라는 얘기다. 공무원연금은 3년 전 개편이 이뤄졌지만 군인연금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 정부와 국회는 2015년 진통 끝에 공무원연금 지급률을 1.9%에서 20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1.7%까지 낮췄다. 반대로 보험료율은 7%에서 5년간 단계적으로 9%까지 높였다. 반면 군인연금 지급률은 1.9%, 보험료 부담률은 7.0%다. 또 연금 수급에 연령 제한이 없다. 군인으로 20년 이상 복무만 하면 은퇴 시기와 상관없이 연금을 받는다. 게다가 군인연금은 1973년 고갈됐고 2010년부터 해마다 1조원이 넘는 적자를 세금으로 보전하고 있다. 특수직역임을 감안하더라도 군인연금기금의 국가부담률이 80%를 넘어섰다. 지난해 적자보전금은 1조 4600억원이며 개편이 이뤄지지 않으면 2045년엔 두 배가량 증가한 2조 8000억원에 육박할 것으로 추산된다. 지난해 말 국회 예산정책처 분석에서 1인당 국가보전금은 군인 1534만원, 공무원 512만원으로 군인연금이 3배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박근혜 정부가 2014년 말 군인연금 개편 가능성을 내비쳤지만 이해 관계자와 정치권 반발에 부딪혀 공론화조차 하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도 구체적인 군인연금 개편 방안에 대해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年 1조 적자…군인연금 두고 국민연금 개혁

    年 1조 적자…군인연금 두고 국민연금 개혁

    정부가 국민연금의 장기지속성을 고려해 재정개혁을 논의하고 있는 가운데 예산으로 적자를 메우고 있는 군인연금 등에 대한 개혁도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나마 공무원연금은 2015년 개혁으로 이듬해부터 단계적으로 ‘더 내고 덜 받는’ 구조가 됐지만, 군인연금은 1973년부터 45년간 줄곧 예산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근본적인 개혁은 계속 미뤄지고 있다. 10일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정부는 국민연금 재정상태를 진단하는 4차 재정추계를 끝내고 오는 17일 국민연금 재정추계위원회, 제도발전위원회, 기금운용발전위원회가 참여한 가운데 관련 내용을 공개하는 공청회를 갖는다. 이어 다음달 말까지 재정계획을 확정한 뒤 국무회의와 대통령 승인을 거쳐 오는 10월 말까지 ‘제4차 국민연금운영계획’을 수립할 방침이다. ●국민연금 보험료율 인상방안 등 검토 변화되는 재정계획의 핵심은 ‘보험료율’과 ‘의무가입 연령’이다. 국민연금 보험료율은 제도가 처음 도입된 1988년 3%에서 1993년 6%, 1988년 9%(직장가입자는 4.5%)로 차례로 높아졌고 이후 20년간 변화가 없었다. 대신 현재 45%인 소득대체율을 해마다 0.5% 포인트씩 낮춰 2028년에는 40%로 낮아지게 설계했다. 소득대체율 45%, 보험료율 9%를 유지하면 보험재정은 2054년 고갈된다. 예정대로 소득대체율을 40%로 낮춰도 재정 고갈시기는 2058년으로 4년 밖에 늘어나지 않는다. 인구 고령화로 노인이 급증하고 있는 반면 출생아는 계속 줄어들고 있어 재정개혁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보험료율을 단계적으로 4% 포인트 가량 인상해 13%까지 높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더불어 국민연금 의무가입 연령을 늦추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현재 국민연금 의무가입 연령은 18세 이상 60세 미만이다. 하지만 연금 수급 연령은 1998년 1차 연금개혁 때 재정안정 차원에서 2013년부터 2033년까지 5년마다 1세씩 늦춰져 65세로 상향 조정되도록 개혁했다. 현재 연금수령 개시 나이는 62세이지만 2033년에는 65세로 늦춰지는 것이다. 출생연도에 따라서는 1957∼1960년생 62세, 1961∼1964년생 63세, 1965∼1968년생 64세 등으로 1년씩 늘어나 1969년생 이후부터는 65세부터 받게 돼 있다. 결국 60세가 되기 직전까지 보험료를 납부하고 65세에 연금을 수급할 경우 격차가 5년까지 벌어지게 된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의무가입연령과 연금 수급연령을 단계적으로 동일하게 맞추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2033년까지 단계적으로 의무가입연령을 높여 65세로 맞추는 방안이다. 그러나 이런 논의 방향이 알려지자 국민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회사원 김형태(45)씨는 “연금 적립 연령을 늘리거나 보험료율을 올리는 것은 모두 국민 부담을 늘리는 것인데 누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가운데 비판여론은 군인연금으로 옮아가는 모양새다. 공무원연금은 3년 전 개혁이 이뤄졌지만 군인연금은 아무런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정부와 국회는 2015년 진통 끝에 공무원연금 지급률을 1.9%에서 20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1.7%까지 낮추기로 결정했다. 반대로 보험료율은 7%에서 5년간 단계적으로 9%까지 높이기로 했다.●군인연금 해마다 예산 1조원 투입 군인연금은 1973년 고갈됐고 2010년부터는 해마다 1조원이 넘는 적자를 정부 예산으로 보전하고 있다. 지난해 적자보전금은 1조 4600억원으로 1조 5000억원에 가까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군인연금 지급률은 1.9%, 보험료 부담률은 7.0%로 공무원연금과 달리 변동이 없다. 군인연금기금의 국가부담률은 80%를 넘었다. 특수직역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재정 상황이 너무 열악해 기금을 개혁하지 않으면 계속 거액의 예산을 지원해야 할 가능성이 커진다. 지난해 말 국회 예산정책처 분석에서 1인당 국가보전금은 군인 1534만원, 공무원 512만원으로 군인연금이 3배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또 정년제도가 있는데다 단기복무자 비중이 높아 연금 혜택이 일부 장기복무자에게만 집중되는 문제도 있었다. 예산정책처는 “군인연금 지급률을 공무원연금과 동일하게 2035년 1.7%까지 인하하는 방안과 기여금 부담률(보험료 부담률) 인상 등의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10년째 복원 표류… ‘신의 정원’ 서삼릉이 웁니다

    10년째 복원 표류… ‘신의 정원’ 서삼릉이 웁니다

    조선왕가의 최대 능인 경기 고양 서삼릉의 복원이 문화재청의 의지 부족으로 10년째 표류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2009년 6월 조선왕릉 42기 가운데 40기(북한 개성에 있는 2기 제외)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조선왕릉의 발전적 보존을 위해 훼손된 능역 원형을 살려 보전하도록 권고했고, 우리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문화재청은 2010년 6월 훼손이 가장 심한 ‘서삼릉’에 대해 복원 용역보고서까지 받고도 지금까지 두 손을 놓고 있다.8일 경기 고양향토문화보존회에 따르면 1960년대 초반 서삼릉 면적은 333만㎡를 웃돌았지만 정·재계 실력자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 나가 이젠 24만 8000㎡만 남았다. WHC는 “500년 이상 지속된 한 왕조 사례를 찾기 어렵고, 519년에 걸쳐 재위한 임금 27명과 왕비 무덤 모두 남아 있는 경우도 없다”며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허용했다. 조선왕릉은 제릉(1대 태조 원비 신의왕후 무덤)·후릉(2대 정종과 정안왕후 무덤) 등 모두 42기다. 연산군·광해군 묘는 반정(反正)으로 폐위돼 빠졌다. 유교와 풍수, 도교, 전통사상 등 한국인의 세계관을 압축한 장묘문화 공간인 조선왕릉은 독특한 건축과 조영 양식으로 흔히 ‘신(神)의 정원’으로 불린다.그 가운데 조선왕조 시작부터 끝까지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서삼릉은 조선왕가 최대 묘역이다. 희릉(11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효릉(12대 인종과 인성왕후), 예릉(25대 철종과 철인왕후)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서삼릉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1970년 5월 국가사적 제200호로 지정됐다. 여기엔 왕자·공주 묘 22기, 빈 등 후궁 묘 16기도 자리했다. 특히 왕실의 태를 보관해 둔 태실에는 4대인 세종대왕 등 왕의 태 22위와 왕자·공주의 태 32위가 집장돼 있다. 우리 민족의 정기를 끊으려고 눈에 핏줄을 세웠던 일제가 전국에 흩어진 태를 공동묘지처럼 집단화한 것이다. 우리 민족의 묘제 방식을 깨고 공동묘지를 꾸렸다. 학자들은 “한민족의 기를 꺾고 관리하기 편하게 바꾼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광복 73년을 맞이했지만 기막힌 일은 지금 우리에 의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곳곳에 출입제한구역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인종의 효릉, 16대 인조의 큰아들인 소현세자를 모신 소경원, 9대 연산군을 낳은 폐비 윤씨의 회묘, 소현세자의 장남 경선군 및 차남 경완군 묘, 태조의 장자인 진안대군의 딸 경혜옹주 묘, 태실, 왕녀·후궁 묘역 등을 사적지 원형 보존 등을 이유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실제론 인접한 젖소개량사업소에 있는 씨젖소의 전염병 감염 등을 내세워 관람객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조선왕릉의 명성을 무색하게 한다. 서삼릉은 일제시대 때만 훼손된 게 아니다. 군사정권 시절 더 처참한 운명을 맞았다. 당초 서삼릉은 울창한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었다. 숲과 문화유적이 어우러져 역사적 보존 가치와 더불어 빼어난 자연경관으로 유명했으나 1960년대 중반 창경궁 소유 국유지였던 이곳이 정·재계 인사들의 골프장으로, 근대화 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목장 사업지 등으로 쪼개지고 말았다. 가장 앞서 1965년 경기 고양군 원당리 산 38-23 일대 울창한 소나무 숲이 깎여 나가면서 한양골프장이 들어섰고 반대편 신원리 227-12 일대 산등성이에 뉴코리아골프장이 들어서면서 서삼릉 훼손의 흑역사에 첫발을 옮겼다. 당시 한양골프장 이사장은 전 그랜드호텔 조봉구 사장이었다. 뉴코리아골프장 건설엔 단사천 한국제지 회장, 최주호 우성그룹 회장, 이동찬 코오롱그룹 회장, 김종호 세창물산 사장, 박용학 대농 회장 등 정·재계에 이름난 사람들 주도로 이뤄졌다. 이들은 권력과 부(富)를 이용해 전체 서삼릉역 중 40%를 골프 코스로 바꿨다. 오늘날 씨젖소 종자를 개량하는 농협중앙회 산하 사업소가 1968년부터 서삼릉 정중앙 입구 68만 1000여㎡를 점유했다. 당시 창경궁 소유였는데 토지 매입 가격의 80%를 국가에서 지원해 농협으로 헐값에 넘겼다. 한국마사회 경주마연습장도 축협중앙회 산하 유우개량사업소 초지로 사용되던 원당리 산 48-36 일대 능침 30여m 지점까지 37만 4000㎡ 규모의 초지 등을 만들어 1986년부터 33년째 사용하고 있다. 이 밖에 원당리 200-5 일대 3만 3000여㎡의 경우 김종필(1926~2018) 전 국무총리가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회장을 맡던 1965년 야영장으로 바꿔버렸다. 권력 ‘끗발’을 날린 셈이다. 신원리 산 38-62 일대 9만㎡엔 군부대가 들어섰다. 또 한양골프장과 뉴코리아골프장이 158만㎡, 농협대가 33만㎡를 차지했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색다른 인터뷰] “난 한국인 피를 가진 일본인… 한·일 관계 작은 ‘키맨’ 될 것”

    [색다른 인터뷰] “난 한국인 피를 가진 일본인… 한·일 관계 작은 ‘키맨’ 될 것”

    이름·역사 함께 물려받는건 숙명·사명심수관요전 열고 한·일 문화교류 앞장“日, 한국 이해·관심 서서히 개선될 것”“서른 살쯤에 김칫독 만드는 걸 배우러 경기도 여주에 갔습니다. 가자마자 어떤 분이 저에게 ‘400년 된 일본의 때를 벗겨 내고 한국의 혼을 품으라’고 하시더군요. 일본에서는 조선의 성(청송 심씨)을 쓴다고 ‘조센징’으로 불렸는데, 한국에선 제가 나고 자란 일본을 부정하라고 하니 이걸 어쩌나요. 우리(심수관가)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아직도 많은 분들이 저에게 한국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답하지요. ‘아니요, 저는 분명히 일본 사람입니다. 그런데 피는 한국 사람입니다’라고.” 기록적인 무더위가 찾아온 올여름을 제15대 심수관(59·본명 심일휘)은 여느 해보다 분주하게 보내고 있다. 한·일 국교 정상화 53주년을 기념해 지난 6~7월 ‘사쓰마도기 420년: 심수관요(窯)전’을 개최했고, 오는 10일에는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20주년을 맞아 구성되는 일본 내 전문가 모임 ‘일·한 문화인적 교류를 추진하는 심의회’에 참여한다. 그를 만난 것은 심수관요전 마지막 날인 지난달 12일 도쿄 신주쿠의 한국문화원에서였다. ‘일본에 뿌리내린 조선 도공의 제15대 적자’이자 ‘일본의 3대 도자기를 대표하는 장인’이라는 다소 부담스러운 타이틀과 달리 그는 ‘큰형님’과 같은 호방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습명(이름을 물려받음)을 한 지 내년이면 20년. 그는 세상을 바라보는 식견과 안목, 그리고 자신이 부여받은 ‘숙명’과 ‘사명’을 자기만의 언어로 풀어내는 법을 알고 있었다. →요즘 한·일 관련 기념 행사와 모임으로 바쁘신 것 같다. 두 나라 사이에서 ‘심수관’이라는 존재는 어디쯤에 있나. -어떤 신문에서 내가 한국을 모국으로 생각한다고 했던데 그건 잘못 쓴 것이다. 한국은 할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나라다. 모국, 즉 어머니의 나라는 일본이다. →그러면 심수관가의 도자기는 어떠한가. -자주 듣는 말 중에 이런 게 있다. ‘심수관 가문의 도자기는 훌륭하다. 그런데 그 도자기는 한국에서 건너온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의 것은 훌륭하다.’ 그러면 이런 논법은 어떤가. ‘한국의 도자기는 훌륭하다. 그런데 그 도자기는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다. 그러니까 중국의 것은 훌륭하다.’ 거기에 동의할 한국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문화는 이동하는 것이다.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것이다. 420년 전 이곳에 온 조선 문화가 일본의 사회와 풍토에서 적응한 모습이 우리 심수관가의 사쓰마도기다. ‘진화론’을 인용하자면 강하니까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는 것만이 살아남는 것이다. 한국의 씨앗이 일본의 토양에서 꽃을 피운 것이다. →두 나라 사이를 좀더 좋게 만들기 위해 고민도 크시겠다. -옛날 에도시대 나카쓰(오이타현)에 미우라 바이엔이라는 학자가 살았다. 한번은 그가 항구에 나와 바다를 바라보며 이런 말을 했다. ‘바다에 물 한 국자를 부어 넣고 바닷물이 늘었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늘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중요한 것은 바다에 한 국자의 물을 추가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을 위한 나의 노력도 그런 것이다. 내가 하는 소소한 일들이 두 나라의 관계를 개선시킬 것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심수관이라는 이름을 갖고 활동을 이어 가는 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이해와 관심은, 설령 당장은 보이지 않을지라도 개선되는 쪽으로 갈 것으로 믿고 있다. →상대방 지방 문화에 대한 이해를 강조해 왔는데. -틈만 나면 지인이나 친구들에게 서울 같은 대도시 말고 한국의 지방을 여행해 보라고 권한다. 지방의 다양성과 매력을 알고 느끼게 되면 그 나라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올가을에는 많은 인원의 일본인을 데리고 한국의 통영, 하동, 삼천포, 남해, 청송 등을 둘러볼 계획이다. →원래 도자기를 좋아했다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았다면 15대 심수관이 되는 게 부담스러웠을 것도 같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숙명이었다. 대학(와세다대 사회학과)을 졸업할 때까지도 내가 이걸 꼭 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대학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명문이었던 교토대 법학부를 나온 할아버지(13대)도,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나온 아버지(14대)도 작은 고향 마을로 돌아와 가문을 지키는 길을 택했다. 그분들을 보고 자란 내가 다른 일을 하겠다는 말을 꺼내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대학 졸업 후 도쿄를 떠나 고향으로 갔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을 것 같다. -물론이다. 나의 장래가 다른 무언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우리 회사(심수관요)에 25명의 장인이 있는데, 그중에 도자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딱 한 명 있다. 그게 누구냐면 나다(웃음). 농담으로 가끔 하는 말이긴 하지만 같이 일하는 다른 24명은 무수한 직업 중에서 도자기 만드는 게 제일 좋아서 이걸 택한 사람들이고, 나는 집을 지키기 위해 여기에 있게 됐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도 나와 다르게 우리 아들은 가업을 즐겁게 이어받기로 해 안심이다. →다른 일도 아니고 예술의 영역이어서 적성에 부합하는지도 고민이 많았겠다. -심수관이 되기로 결정하면서 두 가지 고민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이 일이 내 적성에 맞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고민은 ‘표현’이라는 말을 해석하고 이해함으로써 내 안에서 떨쳐 낼 수 있었다. 다소 어려운 얘기가 될 수도 있는데 표현의 ‘표’(表)와 ‘현’(現)은 둘 다 뭔가를 ‘나타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 ‘현’에는 인간 내면의 생각, 감격, 불안 등이 관련되는데 여기에는 형태가 없다. 이걸 눈에 보이도록 형체화하는 것이 ‘표’다. 결국 형태가 없는 것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 ‘표현’인 셈이다. 나는 내 안의 생각과 감정에 해당하는 ‘현’을 도자기라고 하는 ‘표’를 통해 형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과 감정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런 면에서 적성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차(茶)의 종가나 가부키의 종가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두 가지 고민 중 다른 하나는. -‘심수관’이라는 이름 석 자에 대한 중압감이었다. 가문의 뿌리가 조선임을 숨기지 않았던 우리 집안은 420년 역사에서 여러 어려운 일들을 겪어 왔다. 그중에서 가장 힘들었을 때가 메이지 유신(1868년) 이후 일본이 제국주의로 갔던 시기였다. 그때 조선에 뿌리를 둔 많은 가문들이 그 사실을 숨기려고 했지만 우리 심수관가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심수관의 이름을 계승한다는 것은 그런 무겁고 엄중한 역사도 함께 물려받는다는 것인데, 나에게 더없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15대 심수관의 작품세계는 어떤 것인가. -전통이란 지층과 같은 것이다. 가장 밑에 있는 초대를 기반으로 그 위에 2대, 3대, 4대 순으로 켜켜이 쌓이게 된다. 각각의 세대들은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추구한다. 14대인 우리 아버지(92·본명 심혜길)의 세계는 역대로 가장 독특하고 화려했다. 전에 ‘우리 가문을 망가뜨릴 수 있는 분은 오직 아버님밖에 없다’고 말씀드린 적도 있었다(웃음). 나도 내 세대의 색을 만들어야 한다. 그 토대는 ‘로컬’과 ‘아날로그’다. 세상이 글로벌화·디지털화하고 있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가고시마의 원료와 가고시마의 기술로 구현되는 가고시마의 미(美)의식 구현이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은 ‘인간의 삶’이다. 글 사진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심수관家는 어떤 곳인가 정유재란 때인 1598년 왜군에 의해 일본 가고시마로 끌려온 남원(전북) 도공 심당길의 후손으로 ‘사쓰마(薩摩·가고시마의 옛 지명)도기’를 발전시켜 온 심수관 가문을 말한다. 태어날 때부터 청송 심씨의 성을 따르는 한국식 이름을 받는다. 사쓰마도기는 1873년 12대 심수관이 오스트리아만국박람회에 도자기를 출품해 정교한 기술과 색감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예술성을 인정받으면서 널리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제15대 심수관은 누구 -1959년 일본 가고시마현 출생 (본명 심일휘) - 1983년 와세다대 졸업 -1985년 교토부립 도공고등기술전문교 수료 -1988년 이탈리아 국립미술관 도예학교 졸업 -1990년 경기 여주 김일만토기공장 연수 -1999년 제15대 심수관 습명
  • 한 여름밤의 작은 ‘선물’... ‘서울미래유산-대중가요의 밤’

    한 여름밤의 작은 ‘선물’... ‘서울미래유산-대중가요의 밤’

    매일매일 계속되는 가마솥 더위에 지친 시민들을 위한 작지만, 따뜻한 선물을 주는 행사가 30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마련됐다. ‘마포종점’ 등 서울을 주제로 한 근현대 대중가요를 젊은 감각으로 재해석한 무대가 이날 저녁 서울시청광장 상설무대에서 펼쳐졌다. 이 공연에서 인디밴드 ‘라꼼마’(위)와 시민밴드 ‘파스톤’(아래)은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60~70년대 가요와 다채로운 곡으로 무더위에 지친 시민들에게 한 여름밤의 추억을 선사했다. 1968년 운행을 중단한 전차의 추억과 함께 영등포~마포 간 다리가 없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은방울자매의 ‘마포종점(1968년)’, 오늘날 한남대교를 소재로 한 대표적인 서울 관련 노래로 지금까지도 꾸준히 사랑받는 혜은이의 ‘제3한강교(1973년)’등 우리 귀에 익숙한 곡이 무대에 올랐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道 튼 도봉산, 김수영 시비 앞에선 더위도 ‘풀’처럼 눕는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道 튼 도봉산, 김수영 시비 앞에선 더위도 ‘풀’처럼 눕는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1회 도봉(창포원의 붓꽃) 편이 지난 14일 서울 도봉구 도봉동 도봉산 자락에서 진행됐다. 가마솥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도심을 떠나 도봉산 속으로 본격 피서를 떠난 셈이다. 울울창창한 도봉산의 녹음과 계곡 길을 걸으며 ‘풀’처럼 눕는 김수영의 시와 28살의 나이 차를 뛰어넘은 조선 최대 ‘러브 어페어’ 유희경과 이매창의 ‘이화우’ 스토리에 흠뻑 빠졌다.참가자들은 이날 도봉산역 2번 출구에서 만나 서울 창포원~평화문화진지~도봉구 희망목재문화체험장~도봉유원지~산악박물관~도봉서원 터와 김수영 시비까지 쉬엄쉬엄 걸었다. 다락원 체육공원과 도봉숲속마을, 광륜사, 북한산 생태탐방원 코스는 그냥 지나쳤다. 창포원과 도봉산 계곡 나무 그늘에 앉아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창포원 붓꽃이 절정을 넘긴 게 아쉬웠다. 지난해 가을 문을 연 평화문화진지는 분단의 상징에서 문화와 창작의 공간으로 변신해 눈길을 끌었으나 때마침 내부 공사 중이어서 전망대에서 도봉산의 비경을 관람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해설을 맡은 박정아 서울미래유산지도사는 센스 넘치는 해설과 즉석 시 낭송회로 참가자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었다. 설문조사에서 참석자들은 “김수영 시비 앞에서 마련한 시 낭송 무대를 통해 잠시나마 더위를 잊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삼각산(북한산)이 서울을 600년 수도로 영속하게 한 으뜸 산이라면 도봉산은 버금 산이다. 삼각산과 도봉산은 서울의 뒤를 병풍처럼 두르고, 떠받치고, 지키는 양대 수호산이다. 삼각산이 영기를 머금은 ‘세 개의 거대한 뿔’ 형상인 데 반해 도봉산은 ‘붓을 꽂은 듯, 홀(笏)을 떠받친 듯’ 우뚝 선 화강암이 산 전체를 ‘바위길’(道峰)로 보이게 한다. 서울시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서울지명 사전’ 등에 따르면 도봉이란 지명 속에는 조선왕조 개국의 길을 닦았다는 뜻과 유생들이 이곳에서 도를 닦았다는 의미가 이중으로 담겼다고 풀이하고 있다. 도봉이라는 지명은 고려 광종 때인 971년 도봉원(도봉사)을 고려의 ‘3대 부동’(不動)사원으로 선정한 데 이어, 1010년 거란의 침입 때 고려 현종이 도봉사로 몸을 피했다는 기록에 등장한다. 부동사원이란 국사 및 왕사가 머무는 선종사찰이다. 인왕산이라는 산 이름이 인왕사라는 절 이름에서 나온 것처럼 대개 사찰의 이름을 산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관례에 따라 도봉사가 있는 산을 도봉산이라고 불렀을 개연성이 높다.이후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도봉산 영국사’(寧國寺)라는 산과 사찰명이 동시에 등장하는 것으로 미뤄 도봉산이라는 산 이름은 조선 중기 들어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영국사는 도봉사의 후신으로 동일 사찰로 추정되며, 사림의 영수 정암 조광조를 모신 사액서원 도봉서원이 들어서면서 전국적 지명도를 얻었다. 도봉이라는 산 이름의 유래를 조선 성리학의 도학(道學)사상과 연관 지을 수 있다. 도학은 고려의 불교식 풍습과 사고방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사대부의 학풍은 물론 가풍까지도 주자의 ‘가례’(家禮)를 따르게 하고, 젊은 과부의 재가도 허락하지 않은 완고한 유학이다. 중기 이후 조선의 풍습과 학풍을 바꿔놨다. 도학사상의 주창자이자 개혁가인 조광조가 유독 도봉산을 좋아했고 즐겨 찾았으며, 도봉사에서 도학사상을 정립했기에 도봉이라는 지명이 살아났다는 추정이다. 도봉산이 본격적으로 이름을 얻은 것은 1573년 도봉서원이 폐사한 영국사 터에 세워지면서부터였다. 또 1694년 도봉서원에서 강학을 하고 바위글씨를 남긴 우암 송시열의 위패까지 함께 모시면서 조선 후기 도학의 산실이자 집권 노론세력의 상징적인 서원이 됐다. 도봉이라는 지명처럼 서울·경기지역 유생들이 독서하고, 강학하며, 수신하는 학문공간이 됐다. 정암의 도학사상 정립을 바탕으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같은 대학자가 탄생했다. 이에 보답하듯 이이는 정암을 김굉필·정여창·이언적과 함께 ‘동방사현’(東方四賢)으로 칭했다. 송시열의 ‘도봉동문’(道峰洞門)을 비롯 당대 명인 재사들이 새겨놓은 바위 글씨 14개가 증언하듯 조선후기 도봉서원은 성균관에 필적하는 위상을 자랑했다.도봉산은 유희경과 매창의 연애현장이 아니다. 천민 출신으로 의병장을 지낸 문인 유희경이 도봉산에 침류대라는 거처를 짓고 살면서 부안에서 만난 기생 매창과 시를 주고받았을 뿐이다. 도봉서원은 정선의 ‘도봉추색도’와 ‘도봉서원도’, 김석신의 ‘도봉첩’, 심사정의 ‘도봉서원’ 서화로 남았다. 또 이이는 ‘도봉서원기’에 도봉서원의 상황과 건물배치까지 세세하게 남겼고, 서거정과 이항복도 도봉산 영국사와 관련된 시를 남겼다. 그러나 홀연히 사라졌던 영국사는 실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누구도 의심치 않던 도봉서원 터에서 지난 2012년 영국사의 기단과 금강령(금동 요령)과 금강저(금동 곤봉) 등 희귀한 고려시대 불교 금속공예품 79점이 쏟아져 나왔다. 기록에만 존재하던 영국사의 존재가 1000여년 만에 확인된 것이다. 청동 걸이향로와 청동 향 그릇에서는 ‘도봉사’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고의적으로 파묻어 놓은 듯 이곳이 도봉사의 소유물이며, 도봉사와 영국사는 같은 사찰의 다른 이름임을 나타냈다. 영국사 터에 도봉서원이 들어선 것은 시대의 전환을 뜻한다.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이 숙수사 터에, 경주 옥산서원이 정혜사 터에 자리잡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퇴락한 사찰 부지와 기단을 활용해 유교시설로 탈바꿈한 셈이다. 오늘이 내일의 역사가 되듯 고려 불교의 성지가 조선 성리학의 성지가 됐다. 영국사의 도봉서원 전환은 유교와 불교 양 종교의 상생이다. 60여개의 사찰이 깃든 도봉산에 서울 유일의 서원 하나쯤 남아 있어도 좋지 않을까 싶다. 누원(다락원)을 통해 고려 개경과 조선 한양을 오가는 물류와 문화의 교류지점이던 도봉산은 이제 고려 불교문화와 조선 유교문화의 만남이라는 희귀한 향기를 내뿜는 공간이 됐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강남야행(청담동에서 압구정동까지) 일시: 7월 28일(토) 오후 6~8시 집결장소: 지하철 7호선 청담역 1번 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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