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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태권 손 들어준 美대법…트럼프 또 뒤통수 맞았다

    낙태권 손 들어준 美대법…트럼프 또 뒤통수 맞았다

    최근 잇따라 진보진영 편에 선 판결을 내놨던 미국 연방대법원이 낙태 이슈와 관련해 다시 한번 진보 측의 손을 들어줬다. 11월 대선을 앞두고 진영 간 갈등이 더욱 첨예해지는 가운데 미 최고법원이 2주 사이에 진보진영에 유리한 판결을 세 차례나 내놓으며 보혁갈등의 중심에 선 모습이다. 뉴욕타임스(NYT) 등은 연방대법원이 29일(현지시간) 낙태진료소와 낙태 시술 의사의 수를 제한하는 루이지애나 주법에 반대하며 낙태 옹호 단체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해당 주법이 헌법이 보장한 여성의 낙태권을 침해한다는 판결을 내놨다고 이날 보도했다. 이번 소송은 대법관 9명의 이념 분포가 보수 우위로 바뀐 후 처음 다룬 낙태 권리 사건이었다. 약 30마일(48㎞) 내에 두 개 이상의 낙태 진료 시설을 두지 못하고 시술도 환자 입원 특권을 가진 의사만 할 수 있도록 규정한 이 법은 그동안 낙태 권리를 지나치게 제한한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루이지애나 주법은 낙태 시술 제공자의 수와 지리적 분포를 급격히 감소시켜 많은 여성이 주 내에서 안전하고 합법적인 낙태를 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낙태를 여성의 헌법적 권리로 인정한 1973년 ‘로 대(對) 웨이드’ 판결 이후 비슷한 소송에서 앞선 판례를 따르는 결정을 내려왔던 대법원이 다시 한번 기존 입장을 유지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번 판결은 9명의 대법관이 5대4로 나뉘어 결정됐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임명한 보수 성향의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앞서 직장 내 성소수자 차별 금지 판결(15일)과 불법체류 청소년 추방유예 제도(다카) 폐지 제동 판결(18일)에 이어 또다시 진보 성향 판사들의 편에 섰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별개 의견에서 자신은 기존 대법 판례를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닐 고서치와 브렛 캐버노 등 두 명의 보수 성향 대법관을 임명하며 최고 사법부를 보수 우위 지형으로 바꿔 왔던 그동안 행보에 비춰 보면 보수진영이 이번 판결에서 느낄 당혹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특히 같은 보수 성향이면서도 정작 쟁점에서는 균형추 역할을 했던 앤서니 케네디 전 대법관이 2018년 퇴임했을 당시 보수진영에서는 ‘앓던 이’가 빠졌다며 쾌재를 불렀고, 조만간 낙태 권리의 ‘사망선고’가 내려질 것이란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로버츠 대법원장이 기존 선례를 유지하는 ‘소극적’ 판단을 내리며 보수진영은 연거푸 뒤통수를 맞은 셈이 됐다. 백악관은 대변인 성명에서 “유감스러운 판결”이라며 “선출직이 아닌 대법관들이 자신의 정책 선호에 따라 낙태에 찬성해 주 정부의 자주적인 특권을 침해했다”고 비판했다. 일각에서는 보수·진보 간 ‘이념전쟁’의 한 축을 차지해 왔던 오랜 의제인 낙태 이슈가 오는 대선에서도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를 것이란 전망도 제기된다. NYT는 “오는 11월은 낙태를 둘러싼 싸움의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라며 “이번 판결은 백인 천주교 신자들이 중요한 부동층으로 분류되는 미시간과 펜실베이니아 등 6개 주요 경합주에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종교계 지지를 다시 불러모을 수 있는 정치적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이번엔 낙태권리 인정…또 진보측 손들어준 美 대법원

    이번엔 낙태권리 인정…또 진보측 손들어준 美 대법원

    최근 잇따라 진보진영 편에 선 판결을 내놨던 미국 연방대법원이 낙태 이슈와 관련해 다시 한번 진보 측의 손을 들어줬다. 11월 대선을 앞두고 진영 간 갈등이 더욱 첨예해지는 가운데 미 최고법원이 2주 사이에 진보진영에 유리한 판결을 세 차례나 내놓으며 보혁갈등의 중심에 선 모습이다. 뉴욕타임스(NYT) 등은 연방대법원이 29일(현지시간) 낙태진료소와 낙태 시술 의사의 수를 제한하는 루이지애나 주법에 반대하며 낙태 옹호 단체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해당 주법이 헌법이 보장한 여성의 낙태권을 침해한다는 판결을 내놨다고 이날 보도했다. 이번 소송은 대법관 9명의 이념 분포가 보수 우위로 바뀐 후 처음 다룬 낙태 권리 사건이었다. 약 30마일(48㎞) 내에 두 개 이상의 낙태 진료 시설을 두지 못하고 시술도 환자 입원 특권을 가진 의사만 할 수 있도록 규정한 이 법은 그동안 낙태 권리를 지나치게 제한한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루이지애나 주법은 낙태 시술 제공자의 수와 지리적 분포를 급격히 감소시켜 많은 여성이 주 내에서 안전하고 합법적인 낙태를 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낙태를 여성의 헌법적 권리로 인정한 1973년 ‘로 대(對) 웨이드’ 판결 이후 비슷한 소송에서 앞선 판례를 따르는 결정을 내려왔던 대법원이 다시 한번 기존 입장을 유지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번 판결은 9명의 대법관이 5대4로 나뉘어 결정됐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임명한 보수 성향의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앞서 직장 내 성소수자 차별 금지 판결(15일)과 불법체류 청소년 추방유예 제도(다카) 폐지 제동 판결(18일)에 이어 또다시 진보 성향 판사들의 편에 섰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별개 의견에서 자신은 기존 대법 판례를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닐 고서치와 브렛 캐버노 등 두 명의 보수 성향 대법관을 임명하며 최고 사법부를 보수 우위 지형으로 바꿔 왔던 그동안 행보에 비춰 보면 보수진영이 이번 판결에서 느낄 당혹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특히 같은 보수 성향이면서도 정작 쟁점에서는 균형추 역할을 했던 앤서니 케네디 전 대법관이 2018년 퇴임했을 당시 보수진영에서는 ‘앓던 이’가 빠졌다며 쾌재를 불렀고, 조만간 낙태 권리의 ‘사망선고’가 내려질 것이란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로버츠 대법원장이 기존 선례를 유지하는 ‘소극적’ 판단을 내리며 보수진영은 연거푸 뒤통수를 맞은 셈이 됐다. 백악관은 대변인 성명에서 “유감스러운 판결”이라며 “선출직이 아닌 대법관들이 자신의 정책 선호에 따라 낙태에 찬성해 주 정부의 자주적인 특권을 침해했다”고 비판했다. 일각에서는 보수·진보 간 ‘이념전쟁’의 한 축을 차지해 왔던 오랜 의제인 낙태 이슈가 오는 대선에서도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를 것이란 전망도 제기된다. NYT는 “오는 11월은 낙태를 둘러싼 싸움의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라며 “이번 판결은 백인 천주교 신자들이 중요한 부동층으로 분류되는 미시간과 펜실베이니아 등 6개 주요 경합주에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종교계 지지를 다시 불러모을 수 있는 정치적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믿었던 대법원장에게도 ‘발등 찍힌’ 트럼프, 낙태권 다툼도 패배

    믿었던 대법원장에게도 ‘발등 찍힌’ 트럼프, 낙태권 다툼도 패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믿었던 존 로버츠 대법원장에게 또 발등을 찍혔다. 29일(현지시간) 미국 보수진영의 시선은 연방대법원에 쏠렸다. 두 명의 보수 성향 대법관을 투입해 보수 우위로 연방대법원을 개편한 뒤 처음으로 여성의 낙태권과 관련한 판결이 나오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낙태에 대한 입장이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기준이 된 미국에서 보수 진영은 낙태권 보호를 인정한 1973년 연방대법원 판례를 뒤집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연방대법원은 낙태 시술이 가능한 병원과 의료진 수를 제한하는 2014년 루이지애나주의 법이 헌법에 보장된 여성의 낙태권을 침해한다고 판결했다. 이 법은 48㎞ 거리마다 한 곳씩만 낙태를 허용하도록 해 여성의 권리를 제한한다는 반론에 부닥쳤다. 그런데 9명의 대법관 중 5명이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하는 쪽에 손을 들어줘 5-4로 헌법 불합치 판결이 내려졌다. 문제는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임명한 보수 성향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 4-4 상황에서 캐스팅보트를 행사해 낙태권 보호에 찬동했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닐 고서치와 브렛 캐버노 등 두 명의 보수 성향 대법관을 임명, 보수 과반으로 지형을 바꿔놓아 4-4를 만들었지만 보수 성향 로버츠 대법원장이 낙태권 보호에 손을 들어줄지는 몰랐다. 낙태권 보호에 찬동한 진보 성향 대법관들은 스티븐 브레이어, 러스 베이더 긴스버그, 소니아 소토마요, 엘레나 케이건이며 이에 반대한 보수 성향 대법관들은 클래런스 토머스, 사뮈엘 앨리토, 고서치, 캐버노였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2012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건강보험 정책 ‘오바마케어’를 유지하는 쪽에 손을 들어주기는 했지만 대체로 보수 성향에 따른 판결을 해왔다. 하지만 지난주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불법체류 청소년 추방 유예 제도 및 성적 성향에 따른 고용 차별과 관련한 판결에서 잇따라 진보 성향 대법관들과 입장을 같이 한 데 이어 이날 낙태 반대라는 보수 어젠다에도 중대한 타격을 입혔다. 물론 로버츠 대법원장이 이번 판결에서 진보 성향 대법관들과 같은 논리를 편 것은 아니다. 2016년에도 연방대법원이 텍사스주의 비슷한 법률에 대해 무효 판결을 했기 때문에 일관성을 해치면 안된다는 게 로버츠 대법원장의 뜻이었다. 그러나 미국 언론에서는 보수 우위가 된 연방대법원이 처음 다룬 낙태권 사건이라는 점을 부각하면서 로버츠 대법원장의 행보에 이목을 집중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날 판결에 대해 “낙태 옹호론자들의 중대한 승리이자 보수화한 연방대법원이 입장 차가 극명한 사안에 대한 선례를 내던질 준비가 안 됐다는 뜻”이라고 평가했다. CNN 방송도 “로버츠 대법원장이 보수화한 대법원에 대한 사회적·정치적 기대를 산산조각냈다”면서 “이민과 성소수자 권리, 낙태에 있어 일련의 주목할 행보를 보이면서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고 분석했다.
  • 경기의회 안혜영 부의장, 여성의원 역량강화 워크숍 참석

    경기의회 안혜영 부의장, 여성의원 역량강화 워크숍 참석

    경기도의회 안혜영 부의장(더불어민주당, 수원11)은 23일 경기도의회에서 열린 여성의원 역량강화 워크숍에 참석해 축하의 메시지를 전했다. 안 부의장은 “과거에 비해 여성의 정치참여가 확대되고 있지만, 유권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의 대표성을 반영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면서 “사회 각 부문에서 여성의 역할 확대는 사회적 불평등 해소를 넘어, 대한민국의 다양성과 경쟁력을 높이는 소중한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오늘 행사에는 특별히 대한민국 73년 헌정역사 최초로 여성 의장단을 탄생시킨 김상희 국회 부의장, 높은 성인지 감수성을 바탕으로 명품도시 수원, 자치분권 시대를 선도하고 계신 염태영 수원시장, N번방 사건재발방지를 위한 관련 3법 개정을 비롯해 사회적 약자 보호를 위해 다양한 입법활동을 펼치고 계신 백혜련 국회의원께서 참석해 주셨다”면서 “기존 중앙·남성·기득권 중심의 사회구조를 탈피해, 다수의 국민이 우선되는 새로운 변화를 이끌고 계신 지도자들의 아낌없는 고견을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안 부의장은 “경기도의회는 공정한 경쟁을 통해 정당한 대가를 얻는 것이 상식이 되는 사회구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서 “앞으로도 중앙과 31개 시군과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사회 각 부분의 보이지 않는 유리천정을 깨고, 여성이 대한민국 발전의 당당한 한 축이 될 수 있도록 정책 지원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조선 찻사발 ‘히틀러 거래상’ 손에 어떻게 들어갔나

    조선 찻사발 ‘히틀러 거래상’ 손에 어떻게 들어갔나

    조선시대에 제작된 명품 찻사발이 나치시대 미술상의 컬렉션을 몽땅 상속받은 스위스 베른의 한 미술관에서 확인됐다. 한국 문화재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에게 고용된 미술상의 손에 어떻게 들어갔는지 관심이 집중된다. 스위스 베른시립미술관은 2014년 사망한 독일인 코르넬리우스 구를리트가 소장하던 작품 1500여점에 대해 4년간의 출처 조사를 마치고 작품 리스트를 웹사이트에 게재했다. 그에게 작품을 대거 물려준 아버지는 히틀러를 위해 일했던 유명한 예술품 거래상이었다.●임진왜란 전 조선 찻사발 일본 통해 간 듯  21일 베른시립미술관이 웹사이트에 게재한 구를리트의 잘츠부르크 리스트에 따르면 엷은 황토색의 조선시대 다완 2점이 사진과 함께 간략하게 소개돼 있다. ‘072_10_a’와 ‘072_10_d’라는 번호가 붙여진 도자기는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이 확실하다는 게 전문가의 견해다. ‘072_10_a’ 찻사발은 깨어진 조각을 붙인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미술관 측은 ‘아시아 도자기’라고만 소개하고 있다.  사진을 본 비영리법인 법기도자 이사장인 신한균 사기장은 “실물을 직접 보지 않았지만 ‘072_10_a’는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에서 만들어진 명품 찻사발이 분명하다”며 “이런 명품 찻사발을 서양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함축하는 바가 많다”고 평가했다. 신 사기장은 ‘072_10_d’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직후 일본인들이 조선 도공에게 주문해 만들어 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찻사발은 17세기 중반까지 조선에서 만들어졌으나 이후 맥이 끊어졌다가 20세기 중후반에 재현됐다. 신 사기장은 조선 전기의 도자기가 어떻게 머나먼 유럽까지 갔는지에 대해 전문가와 학계가 나서 연구할 대상이라고 말했다. 이런 계통의 도자기 가운데 최고봉으로는 꼽히는 기자에몬(喜左衛門·일본 도쿄 다이토쿠지 고호안 소장)은 일본 국보로 지정돼 있다. 신 사기장은 “베른의 조선 찻사발은 일본이 유럽에 도자기를 수출할 때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이 도자기의 보관 상태, 관련 에피소드 등에 대해 이메일로 물었으나 미술관 측은 답하지 않았다.  베른시립미술관은 어떻게 조선시대 명품을 소장하게 됐을까. 수많은 작품을 가졌던 구를리트가 사망 직전인 2014년 5월 모든 소장품을 베른미술관에 넘긴다는 유언을 남기면서 미술관은 소위 ‘횡재’를 했다. 작품 상당수는 작품성이 높지 않지만 일부는 이름만으로도 놀랄 만한 작가들의 것이다. 이를테면 모네, 르누아르, 고갱, 리베르만, 뭉크, 마네, 로댕 등의 작품이 포함됐고 그리스, 로마시대의 것도 있다. 상속받은 작품 중 출처가 명확한 마네의 1873년 작품인 ‘폭풍 치는 바다’는 베른미술관이 지난해 일본 국립서양미술관에 400만 달러(약 48억원)에 팔았다.  독일 국적이던 그가 다른 나라 미술관에 작품을 몽땅 기증한 것은 독일이 자신과 부친을 홀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일 당국이 그의 소장품 출처에 대해 조사를 벌였다는 것이다.  그의 소장품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우연이다. 2010년 9월 70대 노인이던 그가 현금 9000유로를 들고 스위스에서 국경을 넘어 독일로 들어왔다. 합법적으로 반입 가능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직업도, 소득 수단도 없는 그가 2~4주마다 현금을 가져오는 것을 수상히 여긴 독일 세관 당국이 그에게 현금 출처를 추궁했다. 그러자 그는 “그림을 판 돈을 은행에서 찾아오는 것”이라고 답했다. 이를 미심쩍게 생각한 세관 당국은 2011년 뮌헨에 있는 그의 아파트를 압수수색해 판매 기록과 같은 증거를 찾아 헤집었다. 그곳에서 그림과 조각 등 예술품 1300여점이 무더기로 나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예술품 발견 사건이었다. 그의 또 다른 집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도 250여점이 나왔다. 이렇게 발견된 작품 1500여점을 통상 ‘구를리트 컬렉션’이라고 부른다. ●나치 소장 예술품 20상자 보유한 구를리트家  방대한 분량의 구를리트 컬렉션은 그의 아버지 힐데브란트 구를리트(1895~1965)가 수집한 것이다. 미술사학자로 예술품 거래상을 했던 그는 히틀러를 위해 일했다. ‘총통 미술관’ 설립을 추진했던 히틀러가 개인 미술관을 채우기 위해 고용한 거래상 4명 가운데 한 명으로 활동했다. 이들 거래상은 명작을 수집하기 위해 군대까지 동원해 파리를 비롯한 유럽 곳곳으로 예술품 구매 여행을 다녔다. 나치에게 박해받아 유럽을 떠나려던 유대인 자산가들이 소장한 작품을 헐값에 사는 것이 주요 목표였다. 구를리트는 다른 주머니를 차고 자신의 컬렉션을 위해서도 작품을 마구 사들였다. 이런 과정에서 조선의 찻사발도 그의 손에 들어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구를리트가 부인과 함께 체포될 때 예술품을 20상자 분량이나 보유하고 있었다. 1945년 2월 미군의 드레스덴 대공습 당시 화재로 자택에 보관 중이던 작품과 미술품 거래 내역 대부분이 불타 버리고 남은 것이 이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연합군의 추궁에서 벗어났고 소장품들을 압류당하지 않았다고 아트뉴스가 전했다.  구를리트는 자신의 몸에 “유대인 피가 4분의1이 흐른다”며 나치 박해의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의 할머니가 유대인이다. 그는 곧바로 풀려나면서 다시 거래를 시작했다. 외아들 코르넬리우스 구를리트가 1968년 아버지 컬렉션을 모두 상속받았다. 아들은 직장도, 직업도 구하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사실상 은둔했다. 그러다 생활비가 떨어지면 말썽이 되지 않을 작품을 내다 팔고, 그 돈을 스위스 은행에 넣어 뒀다가 조금씩 조금씩 빼내 쓰는 생활을 계속해 왔다. 독일 미술계는 구를리트 컬렉션을 알고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컬렉션의 존재가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던 것이다.  2012년 예술품을 모두 압류당한 아들 구를리트는 아버지의 상속 예술품을 돌려 달라고 주장했지만 정부 당국은 작품 출처들을 조사해야 한다며 반환을 거부했다. 나치시대 강탈된 작품들은 원래의 합법적인 소유자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 독일 당국의 주장이었다. 결국 양측은 강탈한 작품은 원소유자에게 돌려주고, 나머지는 코르넬리우스에게 반환하는 것에 합의했다. 이 합의에 양측이 서명하고 한 달쯤 뒤인 2014년 5월 그가 81세로 사망했다. 사망 직전 그는 모든 재산을 독일 대신 베른시립미술관에 넘겨준다는 유언을 남겼다. ‘구를리트 컬렉션’의 소유권 문제가 다시 얽히는 순간이었다.●약탈품 속속 반환… 조선 찻사발 유출 경로 추적을  유일한 상속자 베른시립미술관은 다시 독일 정부가 2016년 만든 ‘독일분실예술품재단’과 합의, 강탈된 예술품은 원래 소유자에게 돌려주기 위해 작품 분류에 들어갔다. 이런 분류 작업이 4년의 활동 끝에 지난달 말 끝났다. 1566점에 대한 최종 분류 결과 앙리 마티스와 막스 리베르만 등의 작품 14점만 약탈품으로 공식 확인됐고, 이 가운데 13점이 원래의 소유자 또는 그 후손들에게 반환됐다고 독일 일간 도이체빌레가 보도했다.  이 외 1000여점은 약탈인지, 합법인지 불투명한 상태에 놓여 있다. 나머지 300여점은 나치 이전에 구를리트 가문이 소유한 것으로 판명 났다. 강탈 확인이 극히 미미한 것과 관련해 독일분실예술품재단 사무국장 길베르트 루페는 “회색 영역이 많다는 것을 알지만 상상할 수 있는 가능한 조사는 다 해 봤다”며 “더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나치시대 이후 70여년이 흘러 약탈 피해자나 1차 상속자들이 숨지면서 약탈 입증 문제는 더욱 미궁으로 빠지고 있다. 늦기 전에 조선의 찻사발에 대한 유출 경로 추적에 나서야 한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특파원 칼럼] 불 꺼진 ‘리버티 오사카’와 조선인 추도식/김태균 도쿄 특파원

    [특파원 칼럼] 불 꺼진 ‘리버티 오사카’와 조선인 추도식/김태균 도쿄 특파원

    ‘2020년 5월 31일’은 일본 인권사에 또 하나의 커다란 오점이 남겨진 날로 기록될 것이다. 인권 수호의 상징적 보루로 자리매김해 온 오사카인권박물관이 이날 35년의 여정을 마감했다. ‘리버티 오사카’로 불린 이곳은 인권의 존엄한 가치를 일본 국민들에게 웅변해 온 이 나라에 단 하나뿐인 종합 인권박물관이었다. 리버티 오사카의 폐관은 끝없이 해코지를 반복해 온 일본의 극우 활동가들과 강력한 행정권력을 손에 넣은 극우 정치세력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리버티 오사카는 대대로 천대받아 온 최하층 계급 ‘부라쿠민’ 인권단체와 오사카부·오사카시가 오사카시 나니와구 7000㎡ 부지에 1985년 공동 설립했다. 박물관에는 부라쿠민을 비롯해 재일한국인, 한센병 환자, 각종 공해병 피해자 등 일본 사회에서 차별과 멸시를 받아 온 계층·집단에 관한 자료 3만여점이 전시됐다. 조선인들이 일제에 당했던 핍박과 고통도 다양한 전시물로 만들어져 관람객을 맞았다. 그러나 2008년 당시 39세의 극우 성향 변호사 하시모토 도루가 오사카부 지사에 당선되면서 고난이 시작됐다. 하시모토는 당선되자마자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전시가 아니다”라며 관람내용의 수정을 요구했다. 박물관은 파국을 막기 위해 전시물 일부를 변경하는 굴욕까지 감수했지만, 철거를 목표로 한 그들의 공세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오사카시 시장으로 자리를 옮긴 하시모토는 2013년 전체 운영비의 80%를 차지하는 보조금 지급을 중단했다. 2014년에는 박물관 부지 무상대여를 중단하고 연 2700만엔씩 임대료를 내라고 압박했다. 2015년에는 임대료 미납을 이유로 퇴거를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5년간의 다툼 끝에 결국 박물관은 밀린 임대료 부담을 면제받는 대신 올해 5월 말로 박물관 운영을 종료하고 내년 6월까지 건물을 철거한다는 내용의 법원 화해권고를 받아들였다. 박물관 측은 2년 후 다른 곳으로의 이전 개관을 계획하고 있지만, 가능성은 차치하고 설령 실현된다 하더라도 리버티 오사카로서의 상징성은 결코 가질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극우 세력이 완벽한 승리를 거둔 리버티 오사카에 이어 도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다. 매년 9월 1일 도쿄도 스미다구 요코아미초공원에서 개최돼 온 1923년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희생자 추도식이 올해부터는 아예 열리지도 못할 위기에 놓인 것이다.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 지사가 추도식 행사 당일 바로 옆에서 맞불집회를 여는 극우단체와 충돌 가능성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행사 자체를 무산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1973년 추도식이 시작된 이후 근 5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에 관한 한 극우세력은 이미 한 차례 큰 성과를 거둔 상태다. 오사카 하시모토류의 성향인 고이케 지사는 6600명에 이르는 조선인 희생자가 발생했던 당시 만행을 부정하며 역대로 빠짐없이 해 왔던 도쿄도지사의 추도문 전달을 2017년부터 중단했다. 이후 3년 만에 나온 이번 압박은 추도식 자체를 없애기 위한 전체 과정의 마지막 단계인 셈이다. 코로나19 와중에도 일본에서는 인권을 부정했던 과거를 재차 부정하는 시도들이 계속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양심과 비양심, 이성과 비이성의 싸움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반동의 진영에 선 세력의 연이은 승리다. 일본 근대 산업화 과정에서 자행됐던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들에 대한 폭력과 착취의 과거를 지운 채 오직 영광의 역사로만 포장한 ‘산업문화유산센터’라는 이름의 시설물이 지난 15일부터 도쿄 한복판에서 일반 국민에 공개된 것도 그런 범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windsea@seoul.co.kr
  • 호주 앞바다 ‘白 혹등고래’ 출몰…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갈루 추정

    호주 앞바다 ‘白 혹등고래’ 출몰…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갈루 추정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백색 혹등고래’ 미갈루가 다시 호주 앞바다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16일(현지시간) 호주 데일리메일은 흰혹등고래 ‘미갈루’로 추정되는 흰고래가 뉴사우스웨일스주 남부 해안에 나타났다고 전했다. 고래는 곧 바이런베이 다다를 것으로 예상된다. 미갈루는 1991년 6월 뉴사우스웨일스주 바이런베이 해안에서 최초로 목격됐다. 그전까지 단 한 번도 목격된 적 없는 백색 혹등고래였다. 사람들은 세계 최초의 백색 혹등고래에게 ‘미갈루’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호주 원주민 말로 ‘하얀 친구’를 뜻한다.발견 당시 3~5세 사이로 추정됐던 미갈루는 2004년 10월 우여곡절 끝에 확보한 피부 샘플 분석 결과, 1986년 무렵 태어난 수컷 개체로 확인됐다. 분석을 담당했던 서던크로스대학 고래연구센터 월리 프랭클린 박사는 "건강상 특별한 문제도 없는 것 같고 기대수명인 100세까지는 충분히 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후 미갈루와 비슷한 백색 혹등고래가 잇따라 발견됐다. '발루'라는 이름의 흰고래는 2008년 세계 최대 산호초 지대인 호주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에서, 윌로우라는 이름의 고래는 2012년 노르웨이 해안에서 목격됐다. 그러나 발루는 머리와 꼬리에, 윌로우는 꼬리 밑부분에 각각 검은 반점이 있어서, 루시스틱(Leucistic, 색소변이) 개체일 것으로 추정된다. 때문에 성체 중 완벽한 백색 개체는 지구상에 미갈루 단 한마리 뿐인 것으로 여겨진다.몇 년 전에는 미갈루의 새끼로 추정되는 백색 고래도 나타났다. ‘미갈루 주니어’라 불리는 백색 고래는 2011년 미갈루와 다른 검은혹등고래 곁에서 함께 헤엄치는 모습이 포착됐다. 유전자 샘플이 확보되면 미갈루 주니어가 정말 미갈루 새끼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미갈루와 미갈루 주니어가 알비노(Albino, 색소결핍)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일단 '저색소증'(hypo-pigmented) 개체로 보고 있다. 혹등고래는 매년 11월부터 5월까지 새끼를 낳고 기르기 위해 남극해에서 따뜻한 호주 바다로 이동한다. 며칠 전 모습을 드러낸 미갈루 추정 흰고래도 다른 고래와 함께 따뜻한 바다를 찾아 호주로 이동한 것으로 추측된다. 전문가들은 지난해 7월 미갈루 피부가 변색된 사실이 확인됐다며, 건강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지 우려하고 있다. 미갈루를 주시하고 있는 흰고래연구센터 측은 혹시라도 흰고래를 목격하면 즉시 제보하라고 당부했다.그러나 호주 매쿼리대학교 해양과학자 바네사 피로타 박사는 “미갈루는 다른 혹등고래 4만 마리 중 몇 안 되는 흰고래다. 건초더미에서 바늘을 찾는 격”이라면서 “나도 오랫동안 고래를 관찰했지만 그동안 단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래도 미갈루와 마주치게 된다면 500m 이상 거리를 유지하라고 강조했다. 고래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는 등 현지 고래 보호규정을 어기면 1만6500 호주 달러, 우리 돈 1384만 원의 벌금을 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유난히 사람을 잘 따르는 혹등고래는 마구잡이 포경의 희생양이 되면서 한때 개체 수가 500마리까지 급감했다. 1966년 국제조약으로 포경이 제한되고 1973년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되면서 다행히 개체 수는 서서히 회복됐고 현재는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이 지정한 멸종위기 관심대상에 올라있다. 전문가들은 2021년~2026년 사이에는 개체 수가 약 4만 마리로 절정에 이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지구상 단 한마리…환상의 흰고래 미갈루 올해 첫 포착

    지구상 단 한마리…환상의 흰고래 미갈루 올해 첫 포착

    사람에게 목격되는 것 자체가 큰 뉴스거리가 되는 고래가 있다. 바로 성체로는 전세계에서 단 한마리만 발견된 흰색 혹등고래 ‘미갈루’다. 지난 16일(현지시간) 호주 ABC뉴스 등 현지언론은 미갈루가 올해 처음으로 지난 15일 뉴사우스웨일스 남부 해안에서 목격됐다고 보도했다. 미갈루는 특이하게도 흰색의 피부를 갖고있어 호주에서는 이 고래에 원주민어로 ‘하얀 친구’란 뜻을 갖는 미갈루(Migaloo)라는 이름을 붙였다. 미갈루의 몸이 흰색인 이유는 선천적으로 멜라닌 색소가 결핍된 알비노이기 때문이다. 보기에는 신비하고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 알비노는 햇빛 노출에 약하며 시력도 그리 좋지 않다. 또한 눈에 띄는 몸 색상 때문에 어렸을 때 포식자에 의해 죽는 사례가 많다.   올해 30세 이상으로 추정되는 미갈루가 인류와 처음 조우한 것은 지난 1991년으로 역시 호주에서였다. 특히 2003년 6월에는 미갈루의 새끼로 추정되는 흰 혹등고래가 함께 포착돼 관심을 끌기도 했다. 미갈루는 매년 이맘 때 쯤이면 남극에서 따뜻한 남태평양 쪽으로 무리들과 이동하는데 이 과정에서 호주에서 목격되며 다시 가을이 오면 남극으로 돌아간다. 특히 미갈루는 관광 수입에도 한몫하는 ‘효자’이기 때문인데 호주 정부는 일정 거리 내의 접근을 금지하는 연방법까지 만들어 놓을 정도로 보호에 각별히 신경쓰고 있다.  호주 맥쿼리대학교 해양생물학자 바네사 프로타는 "사실 미갈루는 약 4만 마리의 혹등고래 중 하나여서 본질적으로는 건초더미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다"면서 "이같은 이유로 미갈루를 목격하는 것 자체가 행운으로 여겨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미갈루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고래로 우리가 해양 생태계에 얼마나 많이 관심을 가져야하는지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한편 유난히 사람을 잘 따르는 혹등고래는 그러나 마구잡이 포경의 희생양이 되면서 한때 개체 수가 500마리까지 급감했다. 1966년 국제조약으로 포경이 제한되고 1973년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되면서 다행히 개체 수는 서서히 회복됐고 현재는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이 지정한 멸종위기 관심대상에 올라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산 깎여 나가고 육지가 된 섬… 한강의 기적 지켜본 ‘기억 저장소’

    산 깎여 나가고 육지가 된 섬… 한강의 기적 지켜본 ‘기억 저장소’

    이호철의 소설 ‘서울은 만원이다’가 신문 연재를 시작한 게 1966년이었고, 1968년 서울의 인구는 400만명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은 123달러,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8층짜리 소공동 반도호텔, 승용차는 1만대에 불과했지만 모든 게 광적으로 팽창하던 시기였다. 서울의 교통난, 주택난, 급수난을 해결할 요술 방망이가 필요했다. 여의도 개발은 ‘한강의 기적’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10일 만에 제방 축조공사가 끝났다. 기적에 가까운 초스피드 공사였다. 홍수가 오기 전 완공이 유일한 목표였고, 생태나 환경은 돌볼 틈이 없었다. 개발연대의 원초적 불행이었다. 여의도라는 섬은 육지가 됐다. 높이 190m의 양이나 말을 기르던 목축장이던 양말산(羊馬山)은 평평해졌다. ‘불도저’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이 여의도 건설을 주축으로 하는 한강개발 3개년계획에 착안한 것은 1967년 8월이었다. 손정목의 ‘서울도시계획이야기’에 따르면 “김현옥은 첫째 여의도에 제방을 쌓아서 가능한 한 많은 택지를 조성한다. 둘째 여의도와 마포·영등포를 연결하는 교량을 가설한다. 셋째 한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의 제방도로를 연차적으로 축조하라”고 지시했다. 한강변의 얼개가 이때 형성됐다. 새로 탄생한 하중도시(河中都市) 여의도를 어떻게 조성할 것인가. 김종필 국무총리, 김현옥 서울시장과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는 건축가 김수근이 등장한다.김현옥은 김수근에게 초현대적이며 후세에 길이 남을 예술적 설계를 요구했다. 국회, 대법원, 서울시청이 입주하는 ‘제2의 서울’을 건설키로 했다. 자동차는 지상으로, 보행자는 2층으로 다니는, 지하도나 육교가 없는 초현대적 입체도시를 꾸미기로 했다. 김수근에게서 사사한 건축가 김석철이 ‘한반도 그랜드디자인’에서 밝힌 여의도 개발의 뒷이야기에 따르면 설계팀은 동서 두 개의 광장축과 남북 하나의 통과 교통축을 중심으로 국회의사당과 대법원, 시청과 시의회를 두는 여의도 마스터플랜을 제시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광장 조성 지시로 모든 게 휴지가 됐다. 예술의전당을 작품 목록으로 남긴 건축가는 “여의도를 섬으로 남겨 두고 한강을 여의도 안으로 흐르게 디자인했더라면…”이라고 아쉬워했다. 여의도 한가운데에 12만평 규모의 ‘텅 빈’ 광장을 만들라는 박 전 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졌다. 계획에 잡혀 있는 상업·업무지구를 동서로 나누라는 허탈한 지시였다. 여의도 입체도시 건설의 꿈이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5·16광장’ 건설로 여의도 계획은 뿌리째 뒤틀렸다. 대법원지구로 예정된 금싸라기 땅에 아파트를 지어 팔았다. 여의도 시범아파트의 탄생이다. 분양이 쉽지 않았다. 서울시민들은 급조된 여의도 제방의 안전이 미덥지 못했고, 모래섬 위에 사는 것을 꺼렸다. 그러나 극적인 반전이 찾아왔다. 최고를 내세운 시범아파트가 팔리기 시작한 것이다. 민영아파트도 따라 들어섰고 택지도 덩달아 팔려 나갔다. 서울시청 건설 예정 부지였던 지금의 산업은행 자리도 팔았다. 국회와 방송 3사, 증권거래소를 좇아 사람과 자본이 몰려들었다.박 전 대통령이 의도한 여의도광장 조성은 전시 비상용 활주로 용도였다. 여의도는 1916년 간이비행장이 생긴 이래 1961년 김포공항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서울의 국제관문이었다. 대한민국 공군의 발상지였으며 1971년 성남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공군 K16 비행장이었다. 1968년 김신조 일당의 서울 침입, 울진·삼척 무장공비사건 등 안보위기가 겹치면서 여의도는 예상치 못한 운명을 맞았다. 일련의 남북체제 대결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1971년 10월 1일. 국군의날 행사 TV중계 방송을 통해 처음 선보인 여의도와 여의도광장의 엄청난 규모에 온 국민은 놀랐다. 이후 반공궐기대회와 대통령 유세 및 취임식, 국군의날 행사 등이 광장의 주요 용도였다. 1973년 닷새 동안 200만명이 모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 서울전도대회를 시작으로 국풍, 이산가족 찾기, 부처님오신날, 천주교 200주년 행사 등이 잇따르면서 매번 집회 참가인원 신기록을 갈아 치웠다. 1999년 조순 초대 민선 서울시장이 100억원을 들여 광장을 시민공원으로 바꾸기 전까지 여의도와 여의도광장은 한국 현대사의 영욕이 담긴 기억저장소다. 여의도에는 국회의사당, 윤중제, 원효대교, 한국거래소, 지하벙커, 여의도공원, KBS 만남의 광장, 금성부동산 등 8개의 서울미래유산이 지정돼 있다. 사대문 안을 빼고 이렇게 많은 미래유산이 집중된 곳은 여의도밖에 없을 것이다. 급조된 인공 섬 여의도가 우리 산업화에 미친 영향을 알 수 있다.국회의사당 본관은 화강석의 큰 계단과 기단 위에 건물을 받치는 높이 32.5m의 열주를 자랑한다. 24개의 열주는 경회루의 석주를 본뜬 것으로, 24절기를 상징한다. 지붕을 이루는 밑지름 64m의 돔은 다양한 의견이 원만히 합의된다는 의회정치의 본질을 표현했다. 1975년 완공됐다. 본래 직사각형 당선 설계작을 본 박 전 대통령이 “상여 같다”고 지적해 돔을 얹었다는 웃지 못할 속설도 있다. 여의도의 초석 윤중제는 1968년 서울시 한강개발계획에 따라 지어진 제방도로다. 마포대교와 서울교를 축으로 동쪽은 여의동로, 서쪽은 여의서로이다. 윤중제는 그해 한강개발계획에 따라 여의도 주위에 제방을 쌓고 그 위에 도로를 낸 것이다. 높이 16m, 둘레 7.6㎞, 폭 35~50m의 제방이다. 윤중제의 완공에 따라 여의도는 홍수로부터 해방된다. 더불어 택지와 상업용지 개발로 여의도 아파트와 국회의사당 등 건축물이 들어섰다. ‘한강개발’이라는 박 전 대통령 친필 화강암 정초석이 남아 있다.1981년 민자로 준공된 13번째 한강교량 원효대교는 국내 최초로 디비닥공법에 따라 다리의 미관을 고려해 지어졌다. 1979년 명동에서 현 위치로 옮겨온 증권거래소는 우리나라 금융 자본시장의 중추기관이다. 증권사들이 여의도로 본점을 재빠르게 이전하면서 한국의 월스트리트를 형성했다. 여의도가 국내 최초의 비행장이었다는 흔적인 여의도비행장 역사의 터널 안에는 최초의 조종사 안창남 이야기가 꾸며져 있다. 여의도 지하벙커는 1976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유사시 대통령 대피시설이다. 지하벙커의 위치는 과거 ‘국군의날’ 행사 때 대통령을 비롯한 요인들이 서 있던 사열대 단상과 일치했다. 2005년 5월 여의도 환승센터 건립 도중 발견됐다. 여의도는 우리나라의 정치, 금융, 언론의 중심지이지만 상대적으로 문화시설이 부족한 편이다. 이 목마름을 채워 주는 이색 문화예술 공간으로 활용 중이다. 여의도는 우리 현대사에서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한 편의 드라마가 펼쳐졌던 곳이다. KBS가 1983년 6월 30일부터 장장 138일, 방송 시간 453시간 45분 동안 생방송으로 내보냈던 연속특별기획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텔레비전을 활용한 세계 최초, 최대 규모의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이었다. 각종 사연이 빼곡하게 붙어 있던 KBS 본관 앞은 ‘만남의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서울미래유산에 지정됐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올해로 입주 50년을 맞았다. 뒤이어 1978년까지 대교, 한양, 공작, 수정, 광장아파트 등 4000여 가구가 들어서면서 여의도 전성시대를 열었다. 서울의 대표적인 노후 재건축단지인 잠실 주공5단지(1978년)나 대치동 은마아파트(1979년)보다 형님격이다. 모래톱에서 한국의 월스트리트로 변모한 여의도가 제2의 전성기를 기다리며 기지개를 켜고 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 밀라노의 동상에 붉은칠, 열두살 아프리카 소녀와 결혼한 언론인

    밀라노의 동상에 붉은칠, 열두살 아프리카 소녀와 결혼한 언론인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공원에서는 14일(현지시간) 한 동상을 물청소하는 인부들이 눈에 띄었다. 지난 2001년 세상을 떠난 언론인 인드로 몬타넬리의 동상인데 얼굴에 붉은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고 기단에는 “인종차별주의자, 강간범”이란 낙서가 돼 있었다. 미국과 유럽을 휩쓸고 있는 인종차별 반대 시위대가 노예제를 옹호하거나 식민주의를 옹호한 정치인이나 역사적 인물의 동상에 공격을 가했는데 이탈리아에서는 처음 공격을 가한 동상이 언론인 동상이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시위대원들이 동상을 훼손하는 동영상을 인스타그램에 올려놓아 돌아다니고 있다. 시위대는 그의 이름이 들어간 공원에서 이 동상을 철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쥐세페 살라 밀라노 총리는 몬타넬리의 언론인으로서 기여는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고 영국 BBC가 전했다. “언론 자유를 위해 싸웠던 위대한 기자였다.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오점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느냐? 삶은 여러 복잡한 맥락에서 판단해야 한다.” 그의 반박이다. 1909년생인 몬타넬리는 군 복무 중이던 1930년대 아프리카 에리트레아에서 열두 살 소녀를 데려와 몸종처럼 부리다 결혼한 것으로 악명 높다. 극우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가 통치하던 이 무렵 파시스트 신문 일 셀바지오(야만)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기자로 부각된 것은 미국 뉴욕의 유나이티드 프레스 기자로 활약하던 때였다. 1935년 이탈리아 식민지였던 에리트레아와 소말리랜드에서 대군을 아비시니아(지금의 에티오피아)로 파병했다. 몬타넬리는 무솔리니가 내세운 대의에 공감해 기자로 종군했다. 물론 나중에 무솔리니에 환멸을 느꼈다고 털어놓긴 했다. 그는 나중에 스페인 내전에 파시스트 종군 기자로 참여했고, 2차 세계대전 때 여러 곳의 최전선에서 전황 기사를 썼다. 국제적으로도 평판을 얻어 2012년 국제언론연구소 세계언론자유 영웅으로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파시즘의 앞잡이란 멍에가 따라다녔다. 그는 1935~36년 에리트레아 침공 때 이탈리아 군이 독가스를 썼다는 의혹을 오랫동안 부인해왔다. 그의 말이다. “암바 아라담 공격작전에 가스가 사용됐다고 얘기들 한다. 나도 거기 있었다. 난 알아채지도 못했다. 우리 연대 동료였던 누디란 친구였던 것 같은데 내게 양파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전형적인 겨자가스 냄새였다. 그러나 지금 얘기가 되는 것은 그런 종류의 무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쟁이었고, 가스는 쓸모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있던 지역에 적의 군대가 많이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1996년 이탈리아의 저명 역사학자 안젤로 델 보카가 증거 문서들을 들이밀자 마지못해 겨자가스가 사용됐다고 인정했다. 그는 일간 코리에레 델라 세라에서도 몇년 동안 일한 뒤 1973년 우익 일간 일 조르날레를 창간했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신문을 인수한 뒤 그에게 회사 운영을 맡기고 정계에 입문한 인연도 있다. 1977년 극좌파 붉은여단 조직원이 신문사 근처에서 총격을 가해 그의 다리를다치게 한 일로도 유명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선 넘는 일요일] 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유지인의 그때 그 모습은?

    [선 넘는 일요일] 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유지인의 그때 그 모습은?

    ‘선데이 서울’에 실린 전설적인 스타들의 그때 그 모습. 1970년대 장미희·정윤희와 더불어 ‘여배우 트로이카’의 한 축을 담당했던 유지인의 ‘선데이 서울’ 속 모습은 어땠을까?유지인은 1973년 TBC탤런트 14기로 입사했으나 정식 데뷔는 중앙대 연극영화과 1학년에 재학 시절 연방영화사와 주간한국이 공동으로 모집한 신인배우 모집에서 2,3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1974년 박종호 감독의 영화 <그대의 찬 손>으로 하게 됐다. 당시 그녀는 인터뷰를 통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좌절하지 않고 훌륭한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당찬 발언을 하기도 했다. 자신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인기 작가 강신재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그대의 찬 손>은 흥행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둔다. 데뷔 이후 유지인은 <돌아온 팔도강산>, <정형 미인>, <하얀 날개>, <환상의 공포> 등 각종 드라마와 영화에 지속적으로 출연하며 정윤희·장미희와 함께 ‘2대 여배우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하면서 197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톱스타로 성장한다.유지인은 트로이카 여배우들 중 최초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엄청난 연기력을 입증했다. 더불어 주연으로 출연한 1980년 이두용 감독의 영화 <피막>은 3대 국제영화제인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특별상(ISDAP)을 받으며 유지인은 한국 영화계에 큰 업적까지 이룰 수 있게 된다. 한편 여배우 트로이카의 1인이었던 유지인은 ‘백치미’를 보여주는 정윤희와 ‘청순미’를 보여주는 장미희와 달리 도시적인 이미지와 세련미를 내세웠다. 또한 중앙대학교 재학생이라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지성미’는 유지인이 정윤희·장미희와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할 정도의 인기를 얻을 수 있게 만든 가장 큰 무기이기도 했다. 대표작으로는 <금쪽같은 내 새끼>, <내조의 여왕>, <찬란한 유산>, <넝쿨째 굴러온 당신> 등이 있으며, 2000년대에 이르러서 영화보다는 다양한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그 인기를 이어갔다. 최근에는 <알토란>, <마이웨이> 등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도 등장하기도 하고 KAC한국예술원의 방송연기계열 교수로도 활동하며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도 다양한 유지인의 모습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글 임승범 인턴 seungbeom@seoul.co.kr영상 임승범 인턴 장민주 인턴 goodgood@seoul.co.kr
  • [서울광장] 김종인, 보수를 살릴 수 있을까/이종락 논설위원

    [서울광장] 김종인, 보수를 살릴 수 있을까/이종락 논설위원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요즘 여의도에서 최고로 주목받는 정치인이다. 통합당 지도부가 ‘삼고초려’해 모셔온 김 비대위원장은 예상대로 파격적인 정책들을 내놓고 있다. 기본소득 논의에 불을 붙여 야당은 물론 여권까지 들썩이게 하더니 전일보육제 등 과감한 복지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비대위 내 정강정책 태스크포스(TF)를 꾸려 정강정책 내에 ‘노동자의 권리’를 명시하는 방안도 검토한다고 알려졌다. 그동안 진보진영의 보검처럼 여겨지던 분배와 보육, 노동 등의 담론을 보수진영으로 끌어옴으로써 ‘보수 꼰대’ 꼬리표를 떼어내고 실용적 경제노선을 추구하는 정당으로의 변화를 꾀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김 비대위원장의 깜짝 행보에 일부 당내외 인사들은 반발하고 나섰다. 통합당 대선주자로 꼽히는 원희룡 제주지사는 “진보의 아류가 돼선 영원한 2등이고 영원히 집권할 수 없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지금은 무소속인 홍준표 의원은 “기본소득제는 사회적 배급주의”라며 반박했다. 하지만 김 비대위원장은 이런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보 정당보다 더 앞서가는 걸 할 수 있다”며 ‘마이웨이’를 걸을 태세다. 보수당인 통합당에 대해 ‘창조적 파괴’와 ‘파괴적 혁신’을 주창하는 김 비대위원장의 신념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그는 1964년 25세에 독일행 비행기를 탔다. 뮌스터대학에서 8년 동안 공부한 뒤 1972년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의 주제는 ‘개발도상국에 있어서 분배 및 재분배 정책의 가능성과 한계’이다. 벌써 50년 전 성장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한국 경제에 분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좋은지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셈이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조세, 노동, 복지 역시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이 분야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당시 독일은 사회의료보험과 연금제도를 도입한 상태였고 ‘68운동’으로 표현되는 유럽의 격변기여서 김 비대위원장이 분배 문제를 공부하기에는 딱 좋은 환경이었다. ‘보수는 성장, 진보는 분배’라는 도식적인 얘기를 김 비대위원장은 제일 싫어한다. 자서전 ‘영원한 권력은 없다’에서 그는 “철권정치를 하던 비스마르크 수상이 ‘복지는 곧 안보’라는 신념을 갖고 오늘날 독일 복지제도의 기반을 만들었다”면서 “권위적인 정부에서 사회 조화를 위한 복지제도를 오히려 선제 대응하는 식으로 만들어 낸 대표적인 사례이자 정치적 역설”이라고 적었다. 박사학위를 받은 이듬해인 1973년 그는 서강대에서 재정학 강의를 시작했다. 교수 자문단의 일원으로 1976년 근로자 재산형성저축(재형저축)과 사회의료보험 제도를 제안했다. 1987년 개정 헌법에 경제민주화 조항을 넣는 데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독일 전문가인 김 비대위원장은 통합당을 독일의 기독교민주당(기민당·CDU)처럼 만들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기민당은 보수정당이지만 스스로 보수를 앞세우지 않으면서 보수주의를 실천하고 좌파의 어젠다까지 선점하며 좌파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다. 실제로 김 비대위원장은 2011년 새누리당 정책분과위원장을 맡아 경제민주화를 주창하며 보수라는 용어를 정강정책에서 빼 당 지도부와 갈등을 빚었다.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보수라는 말 자체는 아무런 소용없는 허명(虛名)이다. 보수란 용어를 한마디도 사용하지 않고서도 보수주의를 제대로 실천한다면 그것이 진짜 보수”라고 역설한다. 김 비대위원장은 2016년 민주당 비상대책위 대표로 총선을 치를 때도 소득하위 70%에 해당하는 노인들에게 월 30만원을 균등지급하는 내용을 공약으로 채택하는 등 ‘포용적 성장’을 내세웠다. 참패할 것이라던 민주당은 예상과 달리 123석을 획득, 제1당으로 회생해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 2020년 총선에서 연승을 거두며 대한민국 정치의 주류가 됐다. 코로나19 이후 인공지능(AI) 시대가 본격화돼 일자리가 사라지고 소득이 줄어드는 상황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시장에 대한 신뢰보다 정부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어 ‘분배주의자’ 김종인은 어쩌면 지금 최고의 황금기를 맞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에 김종인이 성공한다면 지금까지 보수의 개념을 넘어 진보의 가치도 포괄하는 새로운 이념적인 좌표를 지향하는 정당이 탄생할 것이다. 그걸 보수당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에 대한 치열한 논쟁도 예측 가능하다. 진보와 보수당의 대표를 번갈아 맡으며 전인미답의 길을 걷는 김종인 정치 역정의 종착점이 궁금해지는 이유다. jrlee@seoul.co.kr
  • 49세 김대중의 외침 “민주주의 위해 모든 것 바치겠다”

    49세 김대중의 외침 “민주주의 위해 모든 것 바치겠다”

    “민주주의 정권 회복과 통일을 위해 내 목숨과 내 가족, 모든 것을 바쳐 싸우겠습니다.”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이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을 맞아 11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1973년 3월 21일 미공개 육성 연설의 일부를 공개했다. 반(反)유신 투쟁을 위해 일본에 망명 중이었던 김 전 대통령은 당시 재일교포 민주화 운동가를 상대로 110분 동안 강연했다. 당시 49세였던 김 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3단계 통일론을 주장하며 그 전제 조건으로 민주 정부 회복을 제시했다. 그는 “평화적 통일을 하려면 대한민국에 민주정권이 서서 민족적 양심을 가진 사람이 정권을 잡아야 한다”며 “박정희 정권으론 절대로 통일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김대중도서관 관계자는 “한국 정치 역사상 가장 뛰어난 대중연설가로서의 격정적인 연설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삼국시대 말 갑옷 한자리서 만난다

    삼국시대 말 갑옷 한자리서 만난다

    신라와 가야, 백제지역에서 출토된 말 갑옷과 고구려 고분벽화 속 말 갑옷까지 고대 삼국의 말 갑옷을 처음으로 한자리에서 만난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와 국립경주박물관이 공동개최하는 ‘말, 갑옷을 입다’ 특별전이 12일부터 8월 23일까지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에서 열린다. 1992년 함안 마갑총에서 출토된 말 갑옷 1점과 2009년 경주쪽샘지구 C10호에서 나온 말 갑옷 1점, 부산 복천동과 공주 공산성 등에서 수집된 말 갑옷 조각 6점 및 말 투구 10점 등 총 18점이 출품됐다.말 갑옷은 일제강점기인 1934년 경주 황남동에서 처음 확인된 이후 전국에서 여러 점 출토됐다. 하지만 온전한 형태가 드물어 연구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 함안 마갑총과 경주 쪽샘지구 C10호에서 완전한 형태의 말 갑옷이 출토되면서 고대 삼국 말 갑옷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됐다. 1부 ‘신라 귀족들의 안식처, 쪽샘지구’는 10년간의 보존처리를 마친 말 갑옷과 재현품을 선보인다. 황남동 109호와 계림로 1호에서 출토된 말 갑옷도 1934년과 1973년에 발굴된 이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다. 2부 ‘말 갑옷’에선 함안 마갑총에서 나온 말 투구와 말 갑옷, 그리고 부산, 김해, 합천 등에서 출토된 말 갑옷을 만날 수 있다. 백제 지역인 공주 공산성에서 나온 우리나라 최초의 옻칠 말 갑옷과 말 투구도 자리한다.3부 ‘고구려 고분벽화 속 중장기병’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투영된 고대 철기병의 여러 모습을 영상 등으로 소개한다. 관람 신청은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사전 예약제로 운영하며, 300명 안팎으로 현장 접수도 받는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34년 미궁 팔메 스웨덴 총리 암살 규명될까 1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34년 미궁 팔메 스웨덴 총리 암살 규명될까 1

    스웨덴의 오늘을 만든 올로프 팔메 총리가 스톡홀름의 번화가에서 흉탄에 스러진 지 34년이 훌쩍 흘렀다. 자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숱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막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던 차였다. 경찰은 신변 보호를 하겠다고 했으나 그는 보통의 삶을 누리겠다며 단호하게 손사래를 쳤다. 1986년 2월 28일(이하 현지시간) 밤 9시쯤 시작하는 영화를 보러 외출해 21분 뒤 부인 리스벳과 함께 걷다가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에 등을 맞고 즉사했다. 리스벳도 한 방을 맞았다. 이 나라에서 가장 번화한 스베아바겐 거리에서 일어난 일인데도 암살범은 검거되지 않았다. 수십명의 목격자들이 키 큰 남자가 총을 발사하고 현장에서 달아났다고 증언했지만 소용 없었다. 스웨덴 검찰청이 10일 아침 기자회견을 열어 30년 넘게 밝혀지지 않은 암살 사건 수사의 결론을 내릴 예정이어서 주목된다고 영국 BBC가 7일 전했다. 지난 2월 크리스터 페테르손 검찰총장은 공영 텔레비전 인터뷰를 통해 “살해 과정에 일어났던 모든 일과 누가 책임있는지에 대해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한다”고 예고했다. 지금까지는 기소된 사람도 없었고 새로운 용의자 이름이 알려진 것도 없다. 하지만 경찰이 어쩌면 수십년 동안 국민들 사이에 온갖 억측을 낳고 끊임없는 음모론 소재를 제공했던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근접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터져나온다. 책 ‘블러드 온 더 스노-올로프 팔메 살해’를 쓴 얀 본데손 박사는 BBC 인터뷰를 통해 “(영국으로 치면) 마거릿 대처가 피가딜리 광장에서 총 맞고 쓰러진 것과 같으며 이 살해범은 남의 눈에 띄지도 않고 지하철 역 안에 들어가 사라져 버렸다”고 말했다. 고인의 아들이며 생전 마지막 모습을 봤던 목격자 중 한 명인 마르텐 팔메는 연초에 경찰이 “아직 공개하고 싶어 하지 않는 증거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결코 발견되지 않았던 범행 무기와 관련된 것이 새로운 증거일 것으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일간 아프턴블라뎃과의 인터뷰를 통해 “누군가 중요한 것을 알고 앞으로 나서주지 않으면 분명 시간이 그렇게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1927년 귀족 집안과 연결된 상류층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9년 사회민주당에 입당해 1969년 정신적 스승이었던 타게 에를랑더의 뒤를 이어 총리 직에 올랐다. 안나 순드스트롬 올로프 팔뫼 국제센터 사무총장은 “스웨덴 복지 체계의 아버지로 통하는 에를랑더에 의해 정치인으로 훈육됐는데, 난 그가 에를랑더의 정책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고 말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재임 기간 그는 노동조합의 권한을 강화하고 건강보험과 복지체계를 확장했다. 왕가의 정치적 기능을 제거하고 교육에 많은 투자를 집중했다. 교육 개혁에 힘써 간호사 학교와 유치원 들을 지어 여성이 직업을 갖게 해 성 평등을 이룩하게 만들었다. 국제 문제에도 당당히 목소리를 냈다. 미국과 옛 소련 어느 쪽도 그의 싫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1968년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을 때, 미군이 4년 뒤 베트남 전쟁 때 북폭 작전으로 많은 인명을 희생시켰을 때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의 수용소 캠프에 비견해 미국과 사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는 1973년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 인터뷰를 통해 “이 세상에서는 누군가 들으라고 공평하게 떠들 자유가 있기 때문에 난 후회하지 않는다. 난 이런 이슈들이 생길 때마다 침묵할 수가 없고 침묵에 눌리지도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명령이야 말로 “완전 소름끼치는 시스템”이라고 비판하면서 아프리카민족회의(AFC)에 기금을 냈다. 프랑코 스페인 총통을 “우라질 살인범”이라고 격하한 것도 유명했다. 핵 비확산 조약을 체결하자고 앞장섰으며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의 중재자로 나선 것도 대단했다. 그러나 이렇게 거침 없는 행동 때문에 지지자도 많았지만 적도 많았다. 스웨덴 기업인들과 자유주의자들은 그의 개혁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잠식한다고 경계했고 해외 지도자들도 마뜩찮아 했다. <2편에 이어진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나이 들어 빠지는 근육 방어 비법 ‘완전단백질’

    나이 들어 빠지는 근육 방어 비법 ‘완전단백질’

    우리 몸속 근육은 하루하루 사라진다. 노화로 인해 줄어드는 양만큼 근육 세포가 재빨리 생성되지 않고 그 자리를 지방이 채워 물렁물렁해진다. 이때 조금이라도 근육을 지키고 싶다면 근력운동과 함께 노화된 근육세포에 보다 양질의 영양분, 즉 단백질을 공급해줘야 한다. 단백질은 우리 몸에서 수분 다음으로 많은 성분이다. 근육과 뼈, 피부, 머리카락 등을 구성하는 필수 성분일 뿐 아니라 에너지 생성을 돕고, 체내 호르몬과 효소, 항체를 만드는 데도 단백질이 쓰인다. 때문에 단백질은 우리 몸속에서 끊임없이 분해와 합성을 반복한다. 하루 평균 약 300g의 단백질이 분해되고 합성되는데 이때 단백질 섭취가 부족해 체내 단백질이 충분하지 않으면 근육에 저장해 두었던 단백질을 분해해서 사용하게 된다. 결국 근육에서 단백질이 빠져나가기 전에 매일매일 충분한 양의 단백질을 섭취하는 것이 근육을 제대로 지키고 저장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식품에 함유된 필수아미노산 함량을 나타내는 ‘아미노산 스코어’를 따져봐야 한다. 아미노산 스코어는 세계보건기구(WHO)가 1973년 제정한 단백질 영양 평가 방법으로 아미노산 스코어가 100점 이상인 양질의 단백질을 섭취하는 것이 좋다. 특히 9가지 필수아미노산을 모두 충분히 함유한 양질의 단백질을 ‘완전단백질’이라고 부르는데 일반 식품 중에는 우유, 달걀 등이 높고 원료로는 유청단백질과 카제인 단백질의 아미노산 스코어가 높다. 신체기능이 저하되는 노년층의 경우, 근육건강을 위해 특히나 ‘완전단백질’ 섭취에 신경 써야 한다. 필수아미노산이 부족한 단백질 식품만 오래 섭취하면 단백질 합성이 원만히 이뤄지지 못해 성장발육이 더디고 근육감소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양질의 단백질 섭취가 화두가 되면서 성인 단백질 시장은 날로 성장하고 있다. 출시 1년여 만에 누적매출 400억원을 돌파하며 국내 성인 단백질 시장의 선두주자로 자리잡은 매일유업 셀렉스는 최근 100% 완전단백질 ‘코어 프로틴 플러스’를 새롭게 선보였다. 지금까지 총 150만 캔이 판매된 ‘코어 프로틴’ 제품에 고객 목소리를 반영해 업그레이드했다.‘코어 프로틴 플러스’는 체내에서 합성되지 않아 음식물로 섭취해야 하는 9가지 필수아미노산을 모두 고르게 가진 완전단백질(유청단백질, 카제인 단백질, 분리대두 단백질)로 구성돼 있다. 단백질의 질 뿐 아니라 총량도 늘렸다. 기존 ‘코어 프로틴’보다 단백질은 10% 늘린 20g, 필수아미노산 류신(부원료)은 50% 늘린 3,000mg이 함유돼 있다. 영양성분도 강화해 근육과 뼈를 위한 칼슘(300mg), 마그네슘(100mg), 비타민D(20㎍)는 기본으로 구성하고, 활력을 위한 비타민B군과 정상적인 면역 기능을 위한 아연까지 추가했다. 우유의 진하고 고소한 맛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유당은 우유의 10분의 1로 줄이고 평소 유당 때문에 우유를 잘 마시지 못한 사람도 편하게 마실 수 있다. 운동 후 단백질 보충용으로는 물론이고 단백질이 부족한 중년 여성, 바쁜 아침 가족건강을 위한 간편식사대용으로 좋다. 가정용 캔과 운동이나 야외활동시 휴대가 간편한 스틱형 2가지 형태가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씨줄날줄] G7과 G11/오일만 논설위원

    [씨줄날줄] G7과 G11/오일만 논설위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9월 워싱턴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한국을 초대하면서 G11 혹은 G12 탄생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 일본으로 구성된 G7에 한국, 러시아, 호주, 인도가 참여하면 G11, 브라질까지 더하면 G12가 된다. 청와대가 중국 눈치를 볼 줄 알았더니 트럼프 입에 묻은 침이 마를세라 얼른 참가를 표명했다. G7은 의장국 권한으로 비회원 국가를 초대할 수 있다. 중국 국가주석, 인도 총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등이 의장국 초대로 참가한 적이 있다. 2010년에는 확대회의가 개최돼 아프리카 대륙에서 알제리ㆍ에티오피아ㆍ나이지리아ㆍ세네갈 등 6개국, 중남미에선 콜롬비아 등 3개국이 참여했다. 따라서 워싱턴 G7 초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전망할지는 리더 격인 미국의 의중을 살필 수밖에 없다. 게다가 2014년부터 참가 자격이 정지된 상태인 러시아도 G11으로 가는 큰 변수다. 러시아는 동서냉전이 끝나면서 98년부터 정식으로 참가해 G8 회원이 됐지만, 크림반도 강제 합병으로 여타 7개국이 참가 자격을 뺏은 상태다.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도 지명했지만 영국과 캐나다, 유럽연합(EU)이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러시아의 G7 참가는 불투명해졌다. 일본은 북방 4개섬 반환을 현안으로 둔 러시아와의 관계를 고려해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 ‘전략적 모호성’으로 갈 수 있다. 1973년 오일 쇼크로 침체된 세계 경제 회복을 위해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5개국이 만든 G5에 이탈리아(1975년), 캐나다(1976년)가 가입함으로써 G7이 됐다. 7개국의 인구는 세계의 10%밖에 되지 않는데도 국내총생산(GDP) 합계는 세계 200여개 국가의 50%를 차지하는 지구촌 경제의 리더그룹이자 최고의 선진국 클럽이다. 러시아를 뺀 G10이든 G11이든 정치·경제를 주도할 새 체제에 한국이 참가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리스크 덩어리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을 ‘중공’으로, 국가주석을 총서기로 표현하는 등 중국 포위망을 노골화하는 가운데 나온 돌발적 구상이라 찜찜함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지 못하면 G11 구상은 물건너가고, 한국 등의 초청은 의장국의 단순한 일회성 권한 행사에 그칠 공산이 크다. 한국을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법치주의 등 기본적 가치를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이웃’이라고 했던 일본이 한때 이들 표현을 삭제했던 만큼 한국의 확대 G7 체제 편입에 선뜻 찬성표를 던져줄지는 미지수다. 국격 상승 운운하며 들뜨지 말고 차분히 지켜보는 것이 득책(得策)이라 권하고 싶다. oilman@seoul.co.kr
  • 과거와 미래 잇는 2代째 문화사랑방

    과거와 미래 잇는 2代째 문화사랑방

    종로에서 인사동 방향으로 꺾어져 고만고만한 건물들이 붙어 선 한 구역을 지나면 인사동길로 접어든다. 길 오른편 1, 2층짜리 구옥들 사이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채 서 있는 ‘통인가게’가 나온다. 1973년에 지어진 7층짜리 건물은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는다. 1, 2층의 외벽이 유리로 마감된 반면 3층 이상은 벽으로 처리돼 시각적인 상층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고가구들이 햇볕을 많이 받으면 뒤틀려 변형되기 때문에 창을 거의 내지 않고 지었어요.” 통인화랑 주인 김완규씨의 설명이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통인가게는 1924년 김씨의 부친 김정환씨가 창업해 2대째 가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실제 명함에는 회장, 대표가 아니라 주인이라고 당당하게 새겨져 있다. 1961년 종로구 통인동에서 현재 위치인 인사동으로 이전했다. 화랑이 없었던 1970년대부터 골동품 애호가와 다양한 예술인의 문화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 오고 있다. “한국을 찾는 주한 대사관의 외교사절은 물론 해외 명사들까지 우리 화랑을 방문해 전통 고가구 및 공예품을 즐겨 찾고 있어요.” 상업적인 목적보다는 좋은 작가를 발굴한다는 일념으로 지금까지 500회 이상의 전시를 해 오고 있다. 1970년대 화랑을 통한 작품전시가 지름길이었던 시대, 우리 공예품의 우수함을 널리 알리고자 시작했던 화랑이 이제는 도예, 섬유, 회화까지 범위를 넓혀 전시를 이어 오고 있다. “어떤 불황이 닥쳐도 전시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통인화랑을 찾는 손님뿐 아니라 작가와의 약속을 지키고 통인을 지탱하게 하는 힘입니다.” 김씨의 부인 이계선 관장은 안주인이다. 좋은 작가를 찾아 육성하는 일에 집중한다. 2002년 뉴욕통인갤러리를 탄생시켰고 한국 공예 작가 60명을 소개하는 대단한 일을 해냈다. 계간지 ‘통인미술’을 발행한다. “미래를 내다보고 좋은 작가를 알아보는 게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게 서울미래유산에 선정된 이유가 아닐까요.” 통인화랑은 4년 후면 창업 100년을 맞이한다. 강화도에 통인미술관 개관을 준비하고 있다. 통인의 숨결이 흐르는 걸 느낀다. 김희병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 “할머니들 생전 정대협·윤미향 무서워했다… 사리사욕 혼자 채워”

    “할머니들 생전 정대협·윤미향 무서워했다… 사리사욕 혼자 채워”

    “망향 동산에 묻어달라는 유언도 무시 30년간 악용… 尹, 국회의원 사퇴하라 생존자 17명에 정대협 재산 나눠줘야”“진짜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10원도 못 받았는데, 윤미향 의원은 왜 그렇게 많은 돈이 있습니까. 왜 사리사욕을 혼자 채웠습니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양엽 할머니의 딸 김성희(74·가명)씨는 1일 인천 강화군 알프스식당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격앙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A씨는 “누가 저를 알아볼까 두렵지만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왔다”며 “윤 의원은 국회의원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이날 양순임(76)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장은 “지난 30년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악용한 윤미향은 의원직을 사퇴하고 정의기억연대(정의연)는 해체하라”고 밝혔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는 일제 치하 군인, 근로정신대, 일본군 위안부 등으로 강제로 끌려간 한국인 피해자와 유가족들이 1973년 만든 단체다.양 회장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인권을 위한 단체라면서 1995년 할머니들이 아시아여성인권기금을 받으면 ‘공창이 된다’고 말했다”며 “위안부 할머니들은 생전 정대협과 윤미향을 무서워했다. 이들은 죽으면 망향의 동산에 묻어 달라는 고 강순애 할머니의 유언도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양 회장은 “유족회는 정대협이 모은 재산을 국가가 환원해 위안부 피해 생존자 17명과 유가족에게 나눠주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김양엽 할머니의 아들 김광훈(79·가명)씨도 “어머니께서 문제 해결을 위해 회의를 다니다 갑자기 돌아가셨다”며 “저도 정대협에 카메라를 기증하고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도 했지만 지금은 눈물만 난다”고 말했다.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 양순임 “위안부 할머니들 생전에 윤미향 무서워했다” 주장

    양순임 “위안부 할머니들 생전에 윤미향 무서워했다” 주장

    양 회장 “윤미향 비리 빙산의 일각” 주장유족회, 의원직 사퇴·정의연 해체 요구 일제 강제징용·위안부 피해자와 유가족 단체인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가 1일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을 지낸 더불어민주당 윤미향 의원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양순임(76) 유족회 회장은 “위안부 할머니들은 생전에 정대협과 윤미향을 무서워했다”면서 “이번에 드러난 윤 의원의 비리는 빙산의 일각”이라고 주장했다. 유족회는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지난 30년 동안 위안부 문제를 악용한 윤미향은 의원직을 사퇴하고 정의연을 해체하라”고 주장했다. 유족회는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의연의 전신)과 윤미향은 수십 년 동안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피해자 중심의 단체가 아닌 권력 단체로 살찌우는 데 혈안이 됐다”고 비판했다. 이어 “정대협과 윤미향은 할머니를 위한 최소한의 예의도 다하지 않은 천인공노할 집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됐다. 정부는 이 단체에 지원금을 보내서는 안 되고 국민을 상대로 한 기부금 모금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양 회장은 “죽으면 언니들이 묻혀 있는 망향의 동산에 묻어달라는 고 강순애 할머니의 유언을 정대협이 무시했다. 강 할머니는 결국 납골당에 안치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할머니 이름 새긴 비석 하나 세우는데 비용이 그리 아깝다는 말인가”라면서 “유족회가 힘이 없어 고인을 차디찬 납골당에 모셔두고 있어 송구스럽다”고 했다. 기자회견에는 양 회장과 함께 위안부 피해자 유가족 2명이 참석했다. 회견에 참여한 유가족 김모씨는 “아무 보상도 없이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20년이 넘었다. 지원금을 받아야 할 사람은 10원도 못 받고 있는데 윤미향은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다”고 비판했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는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을 전후해 군인, 노무자, 여자근로정신대, 일본군 위안부 등으로 강제로 끌려간 한국인 피해자와 그 유가족들이 1973년 만든 단체다. 최선을 기자 csunel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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