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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경영전략연,「6·29」5돌 성과와 과제 심포지엄

    ◎「제도적 민주화」 걸맞는 의식선진화 시급 국가경영전략연구원(이사장 강경식)은 29일 6·29선언 5주년을 맞아 「한국민주화의 현재까지 성과와 앞으로의 과제」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이날 하오 2시 여의도 중소기업회관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심포지엄에는 김동환변호사가 「법과 질서」, 이동찬한국경영자총협회장이 「능률과 형평」, 정진석외국어대교수가 「민주발전과 언론」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국가의 당면과제와 2천년대 재도약을 위한 종합전략을 제시했다. ◎법과 질서/김동환 변호사/지자제등 「자율」 크게 확대/다양한 욕구 타협적수렴 바람직 6·29특별선언이 있을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의 모든 관심과 노력이 정치현상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특히 5·16군사혁명이후 정치권력이 경제의 주동력이 되자 국민들의 경제생활·사회생활이 정치권력의 향배에 크게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따라서 국민의 관심이 정치상황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극도로 혼란한정치상황이 국민의 동요를 배제하기 위한 처방으로써 6·29선언이 구상되었다고 보며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6·29선언의 본질적이며 직접적인 의의는 대통령직선제를 채택함으로써 정치상황의 안정을 도모하는데 있었다. 또한 이 선언이 정치상황의 안정에 본래적인 의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나타난 효과는 국민의 의식과 생활전반에까지 미치고 있다.특별선언이 정치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만 그 효과는 사회의 모든 활동에 대해서도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를 부여하게 된 것이다. 특별선언 여섯째 항목에서 사회 각 부문의 자치와 자율을 보장하고 있는데 그것은 지자제실시,대학교육의 자율화,교육의 자치 등을 예시하고 있는데 비추어보더라도 제도를 통한 자치와 자율의 확대보장이라고 해석된다. 그러나 제도에 의한 자치와 자율의 확대보장은 국민적 욕구를 처리하기엔 너무나 미흡했다.쾌적한 환경을 요구하는 주장,안전한 소비생활을 요구하는 주장,적정한 책임과 인간다운 생활을 요구하는 주장,참다운 교육을 실시하고 받아야 한다는 주장,장애가 있는 사람이 차별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주장,성별·지역별·학력별 차별을 해서는 안된다는 주장등 다양한 주장들이 알게 모르게 분출된 것이다. 정확히 말해 6·29선언이 다양한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행위를 자유롭게 허용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주장들이 개입되었으며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를 찾아 행동하기 시작한 것이 현실이다. 정치권력에 의해 억제되고 획일화를 요구받던 다양성의 회복은 빠른 속도로 이루어질 것이다.경험이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다양성을 추구하다보니 현행 질서와의 충돌이 불가피했던 것도 사실이다.당면한 이익만을 추구한 결과는 궁극적으로 손실을 초래한다는 경험을 가지게 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의 당면한 과제는 다양한 시민적 필요에 부응하는 새로운 질서의 실현이다.정리되지 않은 다양성을 정리하여 발현하는 자율적인 시민활동의 활성화를 통하여 그러한 노력은 성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새로운 제도는 사적자치의 확대강화와 공권력개입의 축소약화라는바탕위에서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지방자치제의 활성화에 따라 생활법률분야를 조례에 위임하는 방안이 권장되어야 한다.자치와 자율을 바탕으로 지역사회의 공공문제를 스스로 해결토록하는 경우 문제의 그 우선순위 등에 따르는 불만은 해소될 것이다. 모든 생활법률은 규제가 아닌 인도를 기본정신으로 하여 제정되어야 한다.정부나 지방자치단체는 국민들의 생활수요를 능동적으로 발굴하여 민원에 앞서 제도화하는 적극적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건전한 시민의식은 준법생활로 부터 시작된다.법을 지키지 않으면 크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엄정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국민을 맡아서 처리하는 당국자들의 깊은 철학과 결연한 의지,그리고 국민모두의 인고와 호응이 있어야 제도의 정비와 의식의 정립이 이룩될 수 있다. ◎능률과 형평/이동찬 경총회장/고임금따른 역기능 표출/「경제풍향」제시할 일관정책 긴요 우리경제는 6·29이후 일대 변혁기를 맞는다.그것은 성장가도를 달리며 뒤돌아볼 틈이 없었던 우리경제가 잠시 홍역을 치를 수 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에 기인하고 있다.성장의 그늘속에서 잠시 유보시켜 놓았던 문제인 분배와 균형에 관한 요구가 경제민주화 조치와 함께 자연스럽게 대두되었기 때문이다.5주년을 맞는 요즈음 다소 안정되어 가는 느낌도 있지만 그간의 문제해결에 있어 아쉬움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6·29의 본래취지가 어떤면에서는 왜곡되어 너무 조급하게 변화를 바랐던 사회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경제와 관련된 일련의 정책들도 경제발전을 위한 순기능적인 역할도 많이 했지만 일시에 많은 변화를 요구한데서 오는 역기능도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88서울올림픽의 주최는 우리민족에게는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그것은 바로 경제의 힘이었다.우리경제가 세계10대 교역국으로까지 성장할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기업들의 노력도 간과할수 없지만 역시 최대의 공로자는 우리 근로자였다.그러나 계속된 성장위주의 정책은 근로자복지 향상면을 다소 소홀히 하도록 하는 구실을 제공해주었다.근로자들의 쌓인 욕구불만은 결국 6·29경제민주화 조치와 함께 일시에 도출되면서 산업계는 홍역과 같은 과도기적 현상을 맞게 된다. 6·29선언은 우리경제가 고도성장을 풍미하는 가운데 잠시 잊고 있었던 문제들에 대해 되돌아 보게끔한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다.근로자들이 자신의 몫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패배감에 젖게 됐고 이 패배감은 과격한 노사분규로 이어져 기업현실이 등한시된채 과도한 임금인상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87년이후 임금인상은 생산성 향상의 뒷받침없이 이루어졌다.사회적변화와 요구를 풀어가는 과정에 있어 너무 조급하게 처리하려고 했던 것이 오히려 부작용을 낳았음을 간과할 수 없다.근로자들의 가계수지가 사상유례없는 높은 임금인상률에도 불구하고 별로 좋아지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국민소득 5천달러는 결코 잘사는 나라의 수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과소비 풍조의 만연,주택및 전·월세가격의 상승등은 결과적으로 근로자들로 하여금 상대적 빈곤감을 더해준 꼴이 된 것이다.해마다 6천개가 넘는 기업이 도산하고 있으며 과소비풍조속에 자고나면 없어지는 것은 중소제조업이고 늘어나는 것은향락산업이다.우리경제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맞고있다.최근들어 경제단체및 언론이 주체가 되어 「우리경제를 되살리자」는 운동이 펼쳐지고 있는 것은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6·29선언은 경제정책면에서도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주택 2백만호 건립은 주택문제해결과 부동산가격안정에 실로 큰 역할을 했다.그러나 원자재및 임금상승을 부추겼고 성장도 제조업위주에서 건설·서비스분야가 중심이 되는등 급기야 제조업경쟁력강화 문제가 대두되는등 역기능도 무시할수 없다.5·8부동산조치도 부동산가격의 상승을 잡아보겠다는 정부의 신념에 따라 많은 성과를 보인 반면 상대적으로 기업의 활동은 위축되었다.금융정책에 있어서도 계속된 긴축정책은 물가안정에 기여한 공로와 함께 기업의 활동성을 약화시킨 면도 있었다.이상 몇가지 예는 6·29이후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차원이 아니라 너무 급하게 모든 것을 처리하려했던 면과 정책의 일관성이 더러는 없었다는 아쉬움때문이다. 6·29 5주년시점에서의 과제는 각자 제역할을 다해야 한다는데있다.국민은 근검절약하는 가운데 저축을 생활화해야하며 기업도 근로자에 대한 시각을 새로이 정립하여 복지향상을 통한 실질적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근로자는 경제시국에 대한 위기감을 공감하는 가운데 땀흘려 일하는 풍토를 재조성해야 한다.정부도 강력하고도 가시적인 정책을 장기적 안목에서 일관되게 시행해나가야할 줄 믿는다. ◎민주발전과 언론/정진석 외대교수/언론 급신장속 질 못따라/사이비매체 봇물… 부작용 없애야 6·29선언은 언론의 모습을 크게 변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6·29선언의 8개항목 가운데 가장 특기할 부분은 대통령직선제 개헌과 언론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하겠다는 항목이다.언론의 자유는 6·29이후 오늘까지도 계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6·29선언 이후에 정치상황의 변화,서울올림픽 개최등을 통해서 언론은 이전의 여러가지 통제에서 점진적으로 벗어나 과거에는 금기시되었던 영역을 과감하게 보도할 수 있게 되었다.87년11월에는 언론기본법이 폐지됐고 이에앞서 8월에는 주재기자제도가 부분적으로부활됐다.6년만에 신문의 증면이 이루어졌고 기독교방송이 뉴스방송을 다시 시작했다.또 신문·잡지의 발행을 자율화함에 따라 새로운 언론매체가 대량으로 등장했다.60년 4·19직후 제2공화국이 발행의 자유를 제한없이 보장했던 이후 30여년만에 처음 나타난 현상이었다.언론사의 노조결성,언론의 민주화노력등 언론활성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쳤다. 6·29선언때 32종이던 일간지가 92년3월말 현재 99개로 3배이상 늘었다.88년1월과 7월에는 월북작가 1백20여명의 작품을 해금했다.88년7월7일 대통령특별선언이 나온이후 정부는 북한의 자료를 9월3일부터 제한적으로 개방했다.이때부터 북한서적이 시중서점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6·29이후 신문발행의 자유가 상당부문 회복되면서 언론계와 정부당국은 또다시 제2공화국 시절과 같은 언론기관의 난맥상이 일어나지 않을까하는 우려도 있었다.그러나 4·19직후와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90년 상반기부터는 신문이 연중무휴 발행을 실시하고 있다.석간지의 일요판과 조간지의 월요판 발행은 5·16후 군사정부의 언론정책에 따라 62년8월부터 중단됐었다.30년 가까이 지켜져왔던 금기의 벽이 무너지고 연중 쉬는날없이 신문이 발행될 수 있다는 사실도 언론자율화현상의 하나이다. 6공언론을 가장 특징적으로 드러내는 현상은 언론노조의 결성과 기자들의 집단적인 활동이다.89년 1월까지 전국 43개 언론사에 노조가 결성되었고 조합원수가 1만4천여명에 이르렀다. 6·29선언이후 언론자유의 신장과 언론사·언론인구의 급격한 증가에 따르는 문제점도 있었다.첫째,언론사의 급격한 증가로 사이비기자와 사이비 경영인이 발호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사이비기자에 의한 피해를 막기위해서는 공보처와 신문협회·언론중재위등에 「사이비기자 고발센터」를 두기도 했으나 완전근절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둘째,기자들의 윤리와 책임의식이 언론자유의 신장에 비례해서 높아지지는 못했다.과거의 비리가 많이 시정되었으나 언론계의 자정노력은 큰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셋째,언론은 지면을 배가함으로써 전달하는 정보의 양적규모를 확대하는 것처럼보이지만 증가된 지면의 반이상을 스포츠·연예오락·광고가 차지하고 있다.균형잃은 지면배정은 국민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정보와 기본권에 관계된 정보는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넷째,과당경쟁으로 인한 센세이셔널리즘,인권및 프라이버시침해등의 사례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끝으로 발행의 자유가 허용되었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새로운 매체가 기존매체와 경쟁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다.기존매체는 자율화이전에 이미 대기업화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매체는 기존매체에 비해 모든면에서 불리한 입장에 놓여있어 여론의 획일화현상을 심화시킬 우려도 있다.
  • 페로/정주영/“인기 시들해졌다”/일 「세계주보」서 보도

    ◎경륜부족에 잇단 실언… 유권자 냉담/신선미 상실… 부동표 공략이 고작 일본의 시사주간지 세계주보는 한국과 미국에서 「정치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로스 페로 미대통령후보(무소속)와 정주영 국민당대통령후보의 통치능력에 의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일본의 지지(시사)통신사가 발행하는 세계주보는 7월7일자에 실린 「신풍을 불러일으키는 정치아마추어」라는 제목의 지동욱씨 기고문에서 『페로와 정후보는 모두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륜의 부족,실언의 연발등으로 유권자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고 있다』고 보도했다.다음은 페로와 정후보를 비교한 기고문을 요약한 내용이다. 한국과 미국에서 아마추어정치 바람이 불었다.새로운 정치바람은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기성정당의 기반을 잠식했다.아마추어 정치가의 등장은 기성정당에 대한 불안,정치상황의 변화와 정치집단의 변질에 주요 원인이 있다. 한국의 「정주영붐」은 한에 맺힌 지역감정과 20년간이나 계속돼온 김영삼·김대중 라이벌 싸움및 기성정당 패권프로들에 식상한유권자들에게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안겨주었다.미국의 페로후보도 공화 민주 양당체제의 스테레오타입적인 정책나열에 실망한 백인중심의 신보수중산층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 아마추어의 강점은 신선미와 미지수라는데 있다.그러나 아마추어가 일단 조직을 만들어 기성정당의 프로들과 기존의 규칙위에서 대결하게 되면 아마추어가 갖는 강점을 살리기가 어렵게 된다.서투르게하면 기존프로 이상의 과오와 실패를 범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한국의 정후보와 미국의 페로후보는 모두 입지전적인 인물로 유권자들의 기대를 받았다.그러나 부동표를 모을 득표능력은 있을지 모르나 통치능력에 대한 의문은 유권자들 사이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 사기업의 유능한 창업자가 국가운영의 명관리자가 될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더욱이 정후보와 페로후보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경륜의 부족과 실언의 연발등으로 유권자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고 있다.또 두사람은 모두 부호이지만 부호라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고 있다.한국과 미국의 재계는이들에게 극히 냉담하다.일부 질투심에 의한 것도 있으나 냉담한 반응은 재계로부터 이들이 경계를 받고 있다는 증거다. 급격히 상승한 인기는 일단 하락하기 시작하면 인기를 잃는 것도 빠르다.올해 대통령선거는 미국이 11월3일,한국은 12월 중순으로 예정되어 있다.그때까지 두사람에 대한 현재의 지지율이 계속될지 여부는 어느 누구도 확실하게 말할수 없다. 대통령선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한국과 미국 모두 경제이다.부시 미대통령의 인기하락은 미국경제 상황이 나쁘기 때문이다. 대통령선거의 귀추를 예측하려면 경제지표의 등락을 체크하는 것이 빠른 길이다.
  • 「8·15범민족대회」 봉쇄 비상/범민련 남측준비위

    ◎서울서 또 불법정치행사 계획/친북한성향 해외교포 참가 추진/“남한에 거점” 북 전략에 이용우려/시민들,“고향방문 무산될라”개탄 재야의 이른바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위원장직대 강희남)가 오는 8월15일 서울에서 남·북한 및 해외인사가 참가하는 「제3차 범민족대회」를 갖겠다고 발표,정부당국을 긴장시키고 국민들에게 깊은 우려를 자아내게 하고있다. 공안분야 전문가들은 「범민련」이 25일 발표한 이같은 일방적 계획은 남북한 당국이 화해와 협력을 모색하는 합의서를 채택하고 오는 8월 「8·15이산가족 노부모방문단 및 예술단교환사업」의 협의를 계속하고 있는 마당에 통일논의분위기를 오히려 혼란에 빠뜨릴 위험마저 있는 것으로 보고있다. 전문가들은 『친북성향의 해외동포등이 참가하는 「범민족대회」는 북한에서 김정일체제를 확립하고 남한에는 「범민련본부」를 결성하려는 「조총련」의 올해 2대사업목표와도 일치해 북한의 대남적화전략에 남한의 재야·운동권인사들이 놀아나는 꼴』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들의 계획대로 남한에 「범민련본부」가 결성되면 일본의 「조총련」을 중심으로 한 「일본본부」와 독일의 「베를린본부」「미주본부」등을 잇는 대남적화 연계망을 구축,안팎에서 우리정부를 곤혹스럽게 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범민련」남측본부 준비위원회는 이번 서울대회의 개최와 함께 이른바 「남북합의서의 조속한 이행을 위한 대중운동」을 전개하고 이를위해 2단계 활동계획을 세워 「반전·반핵·미군철수운동」과 「연방제통일」을 위한 이른바 「민족통일정치협상회의」의 소집까지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있어 더욱 큰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범민련」측은 또 오는 7월7일 국가보안법의 철폐와 「장기수」의 석방을 위한 단식투쟁을 벌이고 남쪽과 북쪽에서 「국토순례대행진기행」도 추진,우리사회에 또 한차례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정부 당국에서는 이에대해 『「범민련」측의 이같은 행위는 북한의 사탕발림에 현혹된 일부 재야운동권의 무분별한 통일운동이기 때문에 결코허용할수 없으며 통일문제의 창구는 정부당국으로 일원화돼야 한다는 것이 국민적 합의』임을 거듭 분명히 하고있다. 통일원의 한 관계자는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된 상태에서 북한이 아직도 남한사회를 교란할 목적으로 이같은 불법정치행사를 기도하고 일부 국내재야단체들이 이에 동조하고 있는 것은 매우 유감』이라고 밝히고 『정부는 이미 두차례나 「범민족대회」의 개최를 중지하도록 엄중경고한 바 있듯이 이 행사를 원천봉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관련 조영황변호사(53)는 『남북한 당국 실무자들 사이에 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마당에 「국가보안법철폐」·「미군철수」운운하며 「범민족대회」를 개최하려는 것은 실정법차원에서도 문제가 있을 뿐아니라 대화진행에도 방해만 될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인정되어야 하나 남북한간의 상호이해와 관계발전에 역행하는 이같은 주장과 행사는 역효과만 초래하므로 국민들의 정서에 혼란을 일으킬 주장과 행동은 지양돼야한다』고 말했다. 황용주중앙대 건설대학원장(62)은 『북한의 통일정책인 「연방제통일」을 위한 「민족통일정치협상회의」를 소집하겠다는등 「범민련」측의 주장은 우리 정부의 통일정책과 어긋날 뿐아니라 북측에 이용당할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다. 실향민인 김진철씨(57·상업)는 『「범민련」의 서울집회결정이 모처럼 활기를 띠고있는 남북교류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면서 『이들이 정치성 집회를 끝내 고집해 8·15 이산가족교류를 무산시킨다면 1천만 이산가족의 지탄을 면치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 한국청년 1백명/일본정부서 초청

    일본정부는 「21세기 한일우호초청사업계획」에 따라 우리나라 청년 1백명을 오는 7월7일부터 한달동안 일본으로 초청했다고 외무부가 11일 발표했다. 정부는 이에따라 학생·교수·근로청년·청소년지도자중에서 25명씩 선발키로 하고 교육부가 주관이 돼 관계부처와 인선을 협의중이다. 일본정부의 우리나라 청년 초청은 지난 1월 미야자와 기이찌(궁택희일) 일본총리의 방한때 한일 양국정상간의 합의에 따른 것으로 일본정부는 96년까지 매년 1백명씩 5백명의 우리나라 청년을 초청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 불우­장애청소년들 연극잔치

    ◎전국청소년축전 14개 시도서 6월에 개막/창원 홍익재활원등 26팀 “소외감 씻기” 공연 소년원생과 장애청소년 등 소외된 청소년들을 위한 「전국 청소년 연극축전」이 오는 6월22일부터 7월10일까지 전국 14개 시·도 지역무대에서 열리게 된다. 올해로 3회째를 맞는 이 행사는 한국청소년공연예술진흥회가 주최하고 문화부가 후원하는 행사로 장애 청소년들의 출연이 확정된 경남에서는 벌써부터 공연준비가 한창이다. 경남대표로 뽑힌 창원의 홍익재활원팀과 농아중심의 천광학교팀은 모두 장애청소년 연극반이어서 이 지역 주민들로부터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창원의 홍익재활원팀은 극단 마산의 연출가 문종근씨의 지도로 「개구장이 스머프」를 준비하고 있으며 창원의 천광학교팀도 극단 마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태성씨의 도움으로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연습하느라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연극 연습과정을 지켜본 홍익재활원 임중기원장은 『이 행사는 심신의 결손때문에 사회로부터 소외된 청소년들에게 꿈과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계기가 될뿐만 아니라 이들의 심리적 소외현상을 치료해주는 역할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연극축전은 여느 연극제와는 달라 경연형식을 취하지 않고 있고 연극연습과정 및 공연자체를 통해 협동정신과 풍부한 정서개발,청소년들의 자기성취 기회마련 등 교육적인 효과를 높이는데 그 목적이 있다. 지난해까지만해도 서울 3개팀과 지방 11개 시도를 참가지역으로 하던 것을 올해부터는 전국 14개 시도로 참가지역을 바꿔 26개팀이 참가하는 명실상부한 지방 청소년들의 공연 예술행사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참가가 확정된 지역단체들과 공연일정·장소는 아래와 같다.▲경기 자혜학교(7월7일)안양소년원(〃 8일)경기도 문화예술회관 소극장 ▲인천 인천카톨릭 농아선교회(6월24일)성동학교(〃 25일)인천 시민회관 ▲강원 명진학교(6월26일)춘천 소년원(〃 27일)춘천 시립문화회관 ▲대전 대전소년원(6월30일)성세재활학교(7월1일)대전 시민회관 소강당 ▲충북 충주소년원(6월23일)충주 문화회관,청주소년원 청주 혜원학교(장소·일정미정) ▲광주 광주소년원(7월2일)광주선명학교(〃 3일)광주 시민회관 ▲전남 여수여명학교(7월3일)여수 시민회관 ▲전주 전주소년원(7월1일)은화학교(〃 2일)전북 예술회관 ▲대구 대구소년원 성보학교(장소·일정미정)▲경북 김천소년교도소(〃) ▲부산 부산소년원(7월2일)혜남학교(〃 3일)부산 시민회관 소강당 ▲경남 홍익재활원(7월8일)천광학교(〃 9일)경남도청 도민홀.서울은 참가단체와 장소·일정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 점보러온 여인 유혹,폭행/전 스님이 1천마원 뜯어(조약돌)

    ○…서울 성동경찰서는 9일 최림무씨(33·전과2범·주거부정)를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최씨는 지난해 7월7일 상오10시30분쯤 스님으로 있던 서울 성북동의 한 사찰에 점을 치러온 조모씨(39·여)를 『나하고 친하면 모든 액운이 없어진다』고 꾀어 이웃 여관으로 데리고가 흉기로 위협,마구때린뒤 1백만원을 빼앗는등 지난해 8월까지 수차례에 걸쳐 1천여만원어치의 금품을 뜯어낸 혐의를 받고있다.
  • 12년전 실종 악몽 고교생 3명/「대구개구리소년」 찾기 나섰다

    ◎“빨리 돌아와 부모 슬픔 덜어줬으면” 지난 79년 마을뒷산에 가재를 잡으러 갔다가 길을 잃고 산속에서 28일간을 지내다 나물캐러온 할머니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됐던 울산의 세어린이가 지금 의젓한 고교생이 되어 대구의 다섯 실종어린이 찾기캠페인에 나섰다. 지난 79년7월7일 경남 울산시 동구 동부동 344 채창수군(당시6세),최병훈군(〃7세),오윤한군(〃7세)등 세어린이는 울산시 동구 남목동 마을뒷산으로 가재를 잡으러 집을 나섰다가 울창한 숲속에서 길을잃고 무려 28일동안 물과 가재만을 먹으며 지내다가 탈진상태에서 산나물을 캐러갔던 동네 세할머니에게 발견돼 극적으로 구조됐었다. 그런데 11년이 지난 현재 채창수군(18)은 현대자동차 자재관리부에 근무하면서 밤에는 현대공고 야간부에 재학중이고 최병훈군(19)은 울산남고 3학년에 재학중이며 오윤한군(19)은 울산성신고교 3학년에 재학중이다. 이들 세학생의 부모들도 자식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부모의 슬픔을 모른다며 당시를 회상하고 대구 다섯어린이들의 부모들도 아이들이 꼭 가족들의 품에 돌아온다는 희망을 갖고 용기를 잃지말 것을 당부했다.
  • 유고연방 해체 시간문제로

    ◎독립협상 유보속 세르비아 영토욕 “점화”/크로아선 “국제개입 유리판단” 확전 노려/EC등 중재역에 한계… 「유혈」 계속될듯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이 1일 정전협정을 깨고 크로아티아공화국에 대한 대규모 육·해·공 합동공격에 나섬에 따라 발칸반도가 또다시 전면전에 휩싸이고 있다. 연방군의 이번 공세는 오는 7일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공화국의 독립선언 유예기간 마감시한을 앞두고 연방군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세르비아공화국이 영토확장을 위한 막바지 야욕을 불사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크로아티아공은 독립선언 유예기간을 연장하지 않고 7일부터 독립을 위한 본격적인 조치를 강행하겠다고 지난달 30일 밝혔다.슬로베니아공도 독립선언 유예기간 연장을 거부해놓고 있다.지난 7월7일 EC(유럽공동체)의 중재를 받아들여 3개월간 독립선언을 유예시키고 독립협상을 갖기로 연방정부와 합의했으나 그후 독립협상 진전은 커녕 4차례의 정전협정마저 번번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 3개월동안 1천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해 감정이 격앙된데다가 2차대전 당시 나치독일의 지원을 받은 크로아티아인 파시스트조직 우스타샤의 세르비아인에 대한 대학살과 극우 세르비아 민족주의 게릴라인 체트니크에 의한 크로아티아인 학살등 뿌리깊은 상호 적대감까지 가세돼 있다. 마케도니아공화국도 지난 9월8일 독립을 선언했고 알바니아인들이 80%이상을 점하고 있는 코소보자치주도 지난주 국민투표를 통해 압도적 지지로 독립을 결의한 상태다. 따라서 이제 연방유지는 물건너 갔으며 해체만이 시간문제로 남아 있다.이같은 상황에서 분쟁당사자들의 최대관심사는 영토확장일 수밖에 없다.세르비아공은 크로아티아가 독립하려면 공화국인구의 12%를 차지하고 있는 세르비아인들의 집단거주지역을 내놓아야 한다는 입장을 공공연하게 밝히면서 세르비아인 게릴라들을 막후에서 지원,이미 크로아티아공 전체면적의 3분의 1 가량을 점령하고 있는 상황이다.크로아티아는 이같은 대세르비아주의를 비난하면서도 전력상의 열세때문에 초반에는 수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명분상의 휴전상태에서 산발적인 교전을 통해 야금야금 국토를 빼앗기기보다는 내전을 전면전으로 확산시켜 국제사회의 개입을 유도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아래 지난달초부터 연방군기지를 봉쇄하는등 적극공세로 돌아섰다. 그동안 유고사태의 평화중재역을 자임해온 유럽의 유일한 군사기구인 서구동맹(WEU)이 지난달 30일 회의에서 유고파병을 결정짓지 못한 것처럼 내정간섭을 꺼리는 국제사회의 개입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 유고내전은 당분간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번질 수밖에 없는 가운데 독립선언 공화국들에 대한 국제사회의 승인이 이뤄지면서 유엔평화유지군에 의한 군사개입속에서도 산발적인 유혈충돌이 계속될 전망이다.
  • 환율,한때 7백30원 돌파/1불에 7백30원40전까지 거래

    미달러화에 대한 원화환율이 오름세를 지속,8일 국내외환시장에서 한때 달러당 7백30원대를 넘어섰다. 8일 한은이 고시한 시장평균환율은 달러당 7백29원60전이었으나 개장이후 환율이 달러당 7백29원80전에서 최고7백30원40전까지 거래됐다. 환율이 7백30원대를 넘어서기는 지난88년 7월7일(7백30원)이후 3년만의 일이다. 이달들어 환율이 이처럼 오르고 있는것은 월초를 맞아 수입대금수요가 늘고 있는데다 원화자금사정이 호전되면서 은행과 기업들이 달러화매입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 토지거래허가구역 13곳 추가/대구 3곳등 3년간

    건설부는 6일 충남 공주군 계룡면·전남 승주군 해룡면 등 공업단지·종합유통단지건설 등으로 땅투기가 우려되는 전국 13개지역 4백87·86㎦(1억4천8백만평)를 새로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했다. 이번에 지정된 토지거래허가구역의 지정기간은 8일부터 94년 7월7일까지 3년간이다. 이로써 전국의 토지거래허가구역은 전국토의 42·56%에서 43·06%(1백29억4천5백만평)로 늘어나게 됐다. 새로 지정된 지역가운데 대구의 3개지역은 종합유통단지,충남 공주군및 논산군지역은 계룡시 개발계획,충남 당진군과 전북 정주시·승주군 등은 공단건설계획이 각각 예정된 곳이다. 이번에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된 지역은 다음과 같다. ◇대구=▲북구 산격동·검단동·복현동 ◇충남=▲공주군 계룡면 ▲논산군 상월면·연산면 ▲당진군 석문면 ◇전북=▲정주시 하북면 ▲정읍군 북면 ◇전남=▲승주군 해룡면 ◇경북=▲안동군 서후면 ▲선산군 산동면 ▲고령군 개진면.
  • 노 대통령,오늘 미·가 순방 등정/8박9일

    ◎내2일 부시·4일 멀로니와 정상회담/북한의 핵개발 포기 전제/미­북 관계 격상 집중 논의/30일 샌프란시스코서 「아태 새질서 구상」 천명 노태우 대통령과 부인 김옥숙 여사는 미국과 캐나다를 국빈으로 공식방문키 위해 29일 하오 특별기 편으로 서울공항을 출발,8박9일간의 일정으로 북미주 순방길에 오른다. 노 대통령은 7월2일 부시 미 대통령과 한미정상회담을 갖고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의 평화·안정구축방안 및 아태 새질서 개편에서의 양국협력,북한의 핵개발 저지,통상확대 등 주요현안들을 논의할 예정이다. 양국 정상은 특히 북한이 핵사찰 수용은 물론 핵재처리시설의 폐기 등 핵개발 노력을 완전히 포기할 경우 미­북한간의 접촉창구 격상,인적 교류확대,인도적 물품의 대북한 수출허용 등 제한적인 미­북한 관계진전에 의견을 같이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노 대통령은 동북아 주변국간의 급격한 질서개편과 관련,한­미 양국이 전통적인 우호협력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여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남북한 통일의 여건조성을 촉진하는 방안을 중점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은 또 7월4일 멀로니 캐나다 총리와 한 캐나다 정상회담을 갖고 자원 및 과학기술 분야에서의 협력문제와 함께 북한의 핵개발대책 등을 논의한다. 노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을 갖기 앞서 30일 샌프란시스코를 방문,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에서 「태평양시대의 새로운 질서와 한국의 역할」이라는 제목으로 아태지역의 새 질서구축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천명할 예정이다. 노 대통령은 이 연설에서 동서대결 및 남북격차문제 해결에 있어 한국의 교량역할을 강조하고 아태 역내 국가들의 공동노력과 협력을 주장할 것으로 전해졌다. 노 대통령은 샌프란시스코와 캐나다 오타와에서 우리 교민들과 만나 이들을 격려하며 5일 밴쿠버에 기착,1박한 후 7월7일 하오 귀국한다.
  • 교육부,건대 특별감사/입시부정 의혹관련,새달 7일까지

    올해 대학입시와 관련,금전거래 등의 소문이 꾸준히 나돌고 있는 건국대에 대한 교육부의 특별감사가 시작됐다. 윤형섭 교육부 장관은 28일 이같은 의혹을 캐기 위해 교육부 이성일 감사과장을 반장으로 10명의 감사관을 건국대에 보내 이날부터 오는 7월7일까지 10일 동안 특별감사를 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감사팀은 건국대가 지난 3년 동안 꾸려온 학사·재정·재단운영 등에 관한 모든 서류를 검토하면서 관계자를 불러 일일이 대조하고 있다. 이보다 앞서 지난 5월 실시한 건국대의 행정·사무감사에서는 별다른 문제점이 없었다고 교육부 관계자는 밝혔다.
  • 여야 총재회담 추진/노 대통령 미 방문후

    여권은 노태우 대통령이 미국과 캐니다 공식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7월7일 이후 노 대통령과 김대중 신민당 총재와의 여야총재회담을 개최할 것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26일 알려졌다. 김윤환 민자당 사무총장은 이날 『정상외교 직후 여야 정치지도자들을 청와대로 초청,정상외교 결과에 대해 설명회를 갖는 것이 지금까지의 관례였다』고 지적하고 『시기와 형식문제는 결정되지 않았지만 노 대통령이 정상외교를 마치고 귀국한 직후 여야 정치지도자간에 대화를 갖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모택동,김일성의 남침 “원칙적 지지”(비사 중국의 한국전개입:1)

    ◎북경자료 분석 통한 진겸 교수(미 뉴욕주립대)의 추적/“아시아 공산화 기회” 판단/한국군 38선 돌파에 파병 결심/“10월15일 15개 사단 투입” 스탈린에 통보/낙동강전투 때 인천상륙 예상하기도 1950년 6·25 동란 발발 당시 북경정부는 중국의 국가안보와 한반도 공산화를 위해 유엔군의 반격이 개시되기 전부터 한국전 개입을 치밀하게 준비했다고 미 뉴욕주립대의 진겸 교수가 주장했다. 중국계인 진 교수는 최근 워싱턴에서 열린 미 대외관계 역사학회 제17차 연례회의에서 발표한 「한국동란중 중국의 목표변화」라는 연구논문에서 최근 공개된 중국 자료를 통해 베일에 싸였던 모택동의 개입결정과정을 소개했다. 이 논문의 요지를 5회에 걸쳐 소개한다. 1950년 6월25일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자 해디 트루먼 미 대통령은 남한 구출 결의를 즉각 천명하는 한편 대만해협에서 중국군를 견제하기 위해 미 제7함대를 이 수역으로 급파했다. 이러한 미국의 조치는 모택동과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 충격과 더불어 몇 가지 심각한 도전을안겼다. 첫째,아시아 태평양에서 공산주의 팽창을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다는 신호인 미국의 강경대응은 「동아시아가 제국주의 국제전선의 취약지대」라고 믿어온 북경 공산정권의 전반적인 인식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둘째,7함대의 대만해협 이동은 중공당 군부가 1949년 가을 이래 준비해온 대만 해방계획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셋째,북한군과 미국 주도 유엔군의 군사대결은 중국의 국가안보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한국전은 중공당 최고의 과제인 아시아 공산화와 관련,중국 혁명의 영향확대 기회를 제공한 것이었다. 모택동과 중공당 지도부가 한국전에 대해 가졌던 인식은 미군 축출에 실패하면 중국에 위험하고 성공하면 아시아 공산혁명을 진전시킬 수 있다는 복합적인 것이었다. 최근 공개된 자료들에 따르면 김일성은 정확한 남침일자 등 세부계획을 중국에 알려주지 않았지만 중공당 지도부는 북한의 남침 의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며 원칙적으로 이를 지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중공당 지도부는 북한의 남침 전부터 남북한간에 군사대결이 불가피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한국전 발발 5일 후인 1950년 6월30일 중국정부 총리이며 중공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인 주은래는 김일성과의 원활한 의사소통과 전쟁자료 수집을 위해 대부분이 군사정보요원으로 구성된 일단의 중국 외교관을 북한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7월7일과 10일 주은래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한국전 관련 군사대비 문제에 초점을 맞춘 2개 회의를 주재했다. 이 두 회의에서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졌다. 즉 인민해방군의 정예부대인 제4야전군 산하 13군단을 동북국경방위군으로 즉각 개편,필요할 경우 한국전 개입에 대비한다는 것이었다. 7월13일 중앙군사위는 동북국경방위군 창설 명령를 공식하달하고 인민해방군에서 가장 유능한 지휘관 가운데 한 사람인 15군단장 등화를 13군단장에 임명했다. 또 동북군구 사령관이며 정치위원인 고강으로 하여금 모든 준비업무를 지원토록 했다. 이리하여 8월초까지 25만명 이상의 중국군 병력이 한·만 국경에 포진했다.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갔을 때 중국군 간부들은주은래에게 북한군 후방에 대한 미군의 기습공격을 저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미군 상륙이 가능한 지점으로 군산과 인천을 지적했다. 유엔군 증강과 더불어 중공당 지도부는 한국내 군사상황의 악화를 우려,한국전 개입 준비를 서두르면서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9월15일)하기 1개월 전인 8월에 이미 북한군 지원을 위한 9월초 파병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8월말까지 훈련과 그밖의 다른 개입준비를 마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너무 촉박하다는 이유를 들어 고강은 준비기간을 9월말까지 연장해주도록 건의했다. 중국은 또 파병 전에 소련의 협조와 김일성의 동의를 얻는 것이 필요했다. 두 개가 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9월17일 중앙군사위는 파병에 대비,한국의 지형을 조사하기 위한 일단의 군 장교들을 북한에 파견했다. 9월20일 주은래는 중국의 한국전 개입 기본원칙을 수립,모택동의 승인을 받았다. 중국정부는 또 한국전 개입시의 중·소 협조 가능성을 소련과 협의했다. 중국과 소련은 쉽게 일반적인 이해에 도달했다. 중국 지상군이 한국전에 투입되면 소련은 공군을 보내 중국군에 공중우산을 제공하기로 했다. 중국군 파병에 관한 최종결정은 10월1일과 2일 사이에 이뤄졌다. 이에 앞서 9월30일 한국군 제3사단이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진격했고 다음날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김일성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10월1일 김일성은 평양 주재 중국 대사 예지량과의 긴급회담에서 중국군 개입을 요청했다. 김일성은 또 부총리 박헌영을 모택동에게 보내 이같은 요청을 거듭했다. 10월2일 모택동은 중앙군사위 이름으로 13군단에 대해 임전태세를 완료하고 명령에 따라 언제든지 전쟁에 돌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같은날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내 소위 「중국의용군」 파병결정을 통보했다. 당시 모택동의 계산은 중국의 병력과 소련의 무기에 의존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우선 중국군 12개 사단을 10월15일까지 북한에 투입,38선 이북에서 방어태세를 취하며 소련 무기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겠다고 스탈린에게 말했다. 또 1951년 봄엔 중국군 24개 사단을 추가 파병하면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해 미군을 섬멸하겠다는 것이었다. 10월3∼5일간 중공당은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어 모택동의 파병결정에 대한 지도부내 이견을 해소하고 팽덕회를 중국 인민의용군 총참모장으로 선임했다.
  • 노 대통령,7월 미·가 공식방문/출국은 이달 29일에

    ◎2일 부시·4일 멀로니와 회담/아태협력·「북한 핵」 대책 논의 노태우 대통령 내외는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의 초청으로 오는 7월1일부터 3일까지 미국을,캐나다의 나티신 총독 및 멀로니 총리의 초청으로 3일부터 5일까지 캐나다를 각각 공식 방문한다고 이수정 청와대대변인이 2일 상오 발표했다. 노 대통령의 이번 미·캐나다 방문은 국빈방문(STATEVISIT)이며 노 대통령은 이를 위해 오는 29일 출국,모두 8박9일간의 순방일정을 마친 후 7월7일 귀국할 예정이라고 이 대변인이 밝혔다. 노 대통령은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1일부터 워싱턴을 방문,2일 백악관에서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냉전체제 붕괴와 걸프전쟁의 종전에 따른 국제정세의 변화와 새로운 국제질서 수립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특히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 있어 평화와 안정을 구축하는 방안에 관해 협의를 가질 예정이다.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특히 남북한 유엔가입에 따른 한반도 냉전종식방안과 북한의 핵사찰수락 등 핵개발대책,미군의 한반도주둔문제 등이 집중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은 2일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백악관에서 열리는 공식 환영행사에 참석하며 이날 저녁에는 부시 대통령이 베푸는 공식만찬에도 참석한다. 노 대통령은 또 미국의 퀘일 부통령 및 의회지도자 등 각계인사들을 접견한다. 노 대통령은 워싱턴을 방문하는 길에 먼저 샌프란시스코에 들러 29일 스탠퍼드대학에서 한미 양국관계 발전에 대해 연설하며 30일에는 교민들과도 만날 예정이다. 노 대통령은 3일 하오 워싱턴을 떠나 캐나다 수도 오타와에 도착,4일 멀로니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한·캐나다 양국간 우호협력관계발전방안과 협력증진 문제에 관해서도 의견을 교환한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정부수립 후 18번째이며 노 대통령 취임 후로는 5번째이다. 또 우리 국가원수가 미국을 국빈자격으로 방문하기는 지난 54년 이승만 대통령,65년 박정희 대통령에 이어 26년 만에 이뤄지는 것으로 이번이 세 번째이다.
  • “남북학생 통일 축전/8월14∼15일 개최”/「전대협」 밝혀

    「전대협」(의장 김종식·24·한양대 총학생회장)은 16일 하오 3시30분쯤 한양대 학생회관에서 기자들을 만나 『8월14일과 15일 이틀에 걸쳐 「남북 해외청년학생 통일대축전」을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전대협」은 이날 「북한학생위원회」와 해외동포 청년학생조직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이같이 밝히고 『오는 25일 상오 9시 판문점에서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서한을 북한청년학생들에게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전대협」은 또 「축전」 준비를 위해 오는 7월7일 판문점에서 「남북해외청년학생대축전실무회담」을 갖자고 제안했다. 한편,김군은 오는 19일로 예정된 소련 고르바초프의 방한과 관련,이 방한계획을 취소할 것 등을 함께 주장했다.
  • “혼수 적게 가져왔다”/아내를 담뱃불 “고문”/20대 회사원 구속

    【대구】 대구지검 부봉훈검사는 11일 김성춘씨(29ㆍ회사원ㆍ서구 평리3동 1083의6)를 상해치상 등 혐의로 구속했다. 김씨는 지난해 7월7일 김모씨(23)와 결혼한 뒤 혼수를 적게 가져왔다는 이유로 옷을 벗겨 스타킹으로 손발을 묶은 뒤 수건으로 입을 막고 온몸을 담뱃불로 지졌고 지난 11월10일 하오10시쯤도 평리동 대진장여관으로 아내를 끌고 가 담뱃불로 눈밑을 지지고 마구 때린 혐의를 받고 있다.
  • 노대통령 방소 계기로 본 두나라 관계사

    ◎극동패권 겨냥,러시아함대 1854년 첫 입항/거문도 상륙뒤 한달동안 동해지역 실측/열강침탈 막으려 1884년 조·로조약/노·일전에 지자 공식관계 끝나… 일제땐 독립운동의 무대로 근대에 들어와서 한국과 러시아가 외교관계를 정식으로 맺게 되는 것은 1884년의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관계의 수립에 앞서서 러시아인과 한인들 사이의 교섭관계가 선행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1850년대 초반에 러시아와 미국은 일본의 개항문제를 둘러싸고 서로 경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때에 러시아의 해군중장 푸티야틴은 대일교섭을 위하여 마닐라에서 북상하여 나가사키로 가는 도중 분산된 함대의 집결장소로 거문도를 지적하였다. 1854년 4월2일 푸티야틴의 기함 팔라다호를 위시로 러시아함대는 5일간 거문도에 상륙하였다. 러시아함대는 계속 북상하여 4월20일부터 5월 중순까지 약 1개월간 한반도의 동해지역을 실측하기도 하였다. 푸티야틴은 또한 강원도 봉천군 금난진과 함경도 안변부 화등해진,영흥부 고령사 대암진 등에 상륙하거나 정박하였다. 이러한 사건은당시에 빈번하게 출몰하였던 많은 이양선사건의 하나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에 러시아는 조선을 개항시키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었으므로 그 이후의 다른 특별한 관계는 일어나지 않았다. 러시아는 19세기 중엽에 극동으로의 진출을 활발히 하게 되어서 1858년에는 아이훈조약을 통하여 아무르지방을 러시아영토로 편입하였고 1860년에는 이어서 북경조약을 체결하여 우수리지방을 러시아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리하여 연해주를 통하여 조선과 러시아는 국경을 맞대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자연히 러시아와 조선과의 관계가 일어나는 조건을 만들게 되었다. 1863년에는 조선에서의 흉년을 계기로 함경도의 농민들이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이주함으로써 재소 한인의 첫 이민그룹을 형성하였다. 이어서 많은 한인들이 연해주로 속속 이주하였고 이들 한인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양측간의 교섭도 이루어졌다. ○흉년 못견뎌 국경 넘어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당시의 극동의 정세로서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들은 한반도를 침탈하여자신의 영향권 아래에 두려고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의 조선정부는 러시아에 대하여 대단한 공포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미국이나 영국에 기대어 나라의 독립을 유지해 보려던 계획이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조선정부는 방향을 바꾸어 적성국이었던 러시아를 끌어 들였다. 청에 대한 견제세력으로,그리고 영국과 일본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이때에 또한 러시아측으로서도 코르프가 프리아무트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동아시아정책을 적극화 하여 일본의 한국지배를 막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와 한국과의 외교는 급진전되어 1884년 7월7일에 처음으로 공식적인 국교를 수립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과 러시아의 첫 외교관계는 이같이 열강의 침입을 외교적 균형을 통해 회복하려는 조선의 노력과 그 열강의 일원으로서 동아시아정책을 강화하려던 러시아의 정책이 만남으로써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국교수립 이후의 조선은 아직 자주적인 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국가의 외교적 힘이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침략하고 있는 외세에 의존하여 문제를 풀어보려는 의존심만 키워주었고 그것조차도 결국은 만족되지 못하였다. ○1896년 친로내각 러시아는 결국 한국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국의 이권을 위하여 한국에 진출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러시아와의 관계 이후에 친러세력이 조정에서 형성되었으며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삼국간섭을 통하여 일본의 세력을 견제한 러시아의 외교적 역할에 대해 높이 평가하여 친러세력은 더욱 더 강화되었다. 바로 이렇게 강화된 친러세력의 형성으로 인하여 1896년에는 아관파천이 일어나고 친런내각까지 성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친러내각의 성립은 러시아의 이익을 철저히 옹호해 주는 역할 밖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강화되어가는 러시아세력과 한반도의 식민지화를 기도하던 일본과의 대립은 드디어 1904년에는 러일전쟁으로 폭발하였고 이 전쟁에서 일본이 기선을 제압하면서 1904년 5월18일에 한로 조약은 폐기되어 공식적으로 한로관계는 차단되고 만다. 한로조약의 폐기 이후 한국은 얼마 안되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고 이 상태로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공식적으로 외교적 관계는 없었지만 한국의 정치적 지도자들과 러시아와의 관계는 다양한 형태를 통하여 여러 각도에서 이루어졌다. 일제에 의하여 나라를 빼앗긴 한인들은 노령으로 정치적 망명을 하여 거기에서 독립운동의 꿈과 실질적 힘을 키워나갔다. ○북방정책의 결실 맺어 또 1917년의 러시아의 10월혁명 이후에는 소비에트정부의 민족해방운동의 지원을 기대하고 민족운동자들로 하여금 러시아와의 유대를 강화하는데 많은 노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역시 한인들은 나라가 없는 상태에서 소련의 지원을 기대한 것이므로 이 기대는 종종 기대 수준에 못미쳤을 뿐 아니라 민족운동의 발전에 역행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921년 6월에는 자유시 사변이 일어나고 1925년에는 일로협약에 의하여 한인의 독립운동이 또다시 제약을 받았으며 그외에도 소련은 자주적 민족운동세력이 새로운 한국건설의 주역이 되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 이로써 1945년 해방 이후에도 패권주의에 입각하여 미국과 더불어 남북한을 분단시키고 북한에서도 자주적 성격의 정권이 성립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게다가 분단된 한반도에 냉전논리를 강요하면서 소련은 북한을 사회주의국가로 간주하고 일방적으로 지원하였고 그 결과 남한은 소련과 적대적인 채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기본적으로 1985년 소련에서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중 냉전논리의 현실적 적용의 결과 1950년에서 1953년까지 피비린내나는 내전이 있었으며 이는 스탈린의 승인에 의한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후 한국과 소련은 서로 적의 상태에서 남남이었다. 이 기간중 1978년 KAL기 무르만스크호수 기착과 같이 외교관계가 없는 상태에서 소련이 한국에 대하여 인도주의적 일반원리를 따라서 행동한 적도 있었지만 1983년에는 KAL기를 격추하여 2백69명의 승객을 전원 사망케 하는 비인도적인 행위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제정치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는 것이며 이해관계가 있을 뿐이다. 소련은 남한의 경제력을 새롭게 평가하고 있으며 동북아의 냉전구도를 바꿀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남한 역시 통일이라는 궁극의 목표를 위해 냉전논리에서 탈피하여 1988년부터 북방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한국과 소련의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되어 1990년 6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양국의 정상이 회담을 하기에 이르렀으며 9월에 한소 수교를 이룬 것이다. 그리고 12월13∼16일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소련을 방문하여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공식적인 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이렇게 하여 한로관계의 역사상 두번째로 다시 국교관계를 가지게 되는 한국과 소련은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양상을 가지고 있다. 소련은 더이상 한국에 대해 패권주의를 강요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며 한국은 더이상 저개발국이 아니다. 한국은 경제면에서 소련과 대등한 위치에서 교섭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며 한국민이 원하면 한국정부가 추구하고 있는 평화적 통일정책은 소련의 기본적인 정책과 어긋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점은 한국과 소련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부분이며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실질적으로 이루어나가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 한·소 외교사 연표

    △1863년 함경도 농민 13호 러시아로 최초의 이주 △1884년 7월7일 조로수호통상조약 체결 △1888년 8월20일 조로 육로통상장정 조인 △1896년 2월11일 아관파천(왕이 러시아공관으로 거소를 옮김 ) △1904년 5월18일 한로조약 폐기 △1921년 6월28일 소련적군이 독립군을 무장해제 △1945년 8월24일 소련군이 평양에 군사령부 설치 △1950년 6월25일 스탈린의 승인하에 북한 남침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 조인 △1959년 3월17일 소련과 북한 기술원조협정 체결 △1961년 7월6일 북한과 소련 상호방위조약 체결 △1978년 4월20일 KAL 707여객기 소련 무르만스크에 불 시착,승객 무사 귀환 △1983년 9월1일 KAL 747여객기 사할린지역 상공에서 소 련 미사일에 의해 격추,승객 전원 사망 △1985년 4월 소련에서 페레스트로이카 시작,신사고 외교정책 전개. △1988년 7월7일 한국에서 7·7선언 채택,북방정책 표명 △1990년 6월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의 노태우 대통령 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 정상회담 △1990년 9월30일 소련 외무장관 셰바르드나제와 한국 외무장 관 최호중 사이에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로 전격 합의 △1990년 12월13일∼16일 노태우 대통령 소련방문,고르바초 프와 정상회담
  • 유엔,이라크 무력제재 결의/한국전 후 처음… 중국 기권

    ◎철군시한 내년 1월15일/부시,“평화적 해결 희망”… 후세인은 불복선언 【유엔본부(뉴욕) AP 로이터 연합】 유엔 안보리는 29일(한국시간 30일 아침) 이라크가 내년 1월15일까지 점령 쿠웨이트에서 철수하지 않을 경우 이라크에 대한 다국적군의 군사력 사용을 승인하는 결의를 찬성 12,반대 2,기권 1표의 압도적 다수로 채택,지난 50년 한국전쟁 이후 40년 만에 처음으로 회원국에 대한 군사력 사용을 유엔의 이름으로 허용하는 역사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날 하오 2시(한국시간 30일 새벽 4시) 이례적으로 각국 외무장관들이 대부분 직접 대표로 참석해 안보리회의로는 최고위급으로 개최된 이날 표결에서 안보리 15개 이사국 중 12개국이 찬성한 반면 쿠바와 예멘은 반대표를 던졌으며 거부권 행사 여부로 주목을 받았던 중국은 기권했다. 이날 회의에는 미국과 영국·프랑스·소련·중국 등 5개 상임이사국과 캐나다·콜롬비아·쿠바·에티오피아·핀란드·말레이시아·루마니아·자이르·예멘·코트디부아르 등 10개 비상임이사국을 포함,15개 이사국들이 모두 참가했으며 특히 예멘과 코트디부아르만이 유엔대사가 참석했을뿐 나머지 국가들은 모두 외무장관들이 직접 회의장에 나왔다. 이날 결의안은 특히 미국과 소련·캐나다·프랑스·영국·루마니아가 공동 발의에 나서는 등 냉전시대의 동서 양진영이 단합,적극적으로 결의채택에 보조를 맞췄다. 유엔의 45년 역사상 회원국에 대한 유엔의 군사력 승인 결의가 채택된 것은 지난 50년 7월7일 한국전 당시 유엔이 북한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주도의 연합군에 대한 군사력 사용을 승인한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통과된 결의는 이라크에 대해 지난 8월2일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유엔이 이라크군의 무조건적인 철수를 요구한 안보리 11개 결의를 이행하도록 재차 촉구하는 한편 이라크군의 쿠웨이트 철수시한을 내년 1월15일로 못박고 기한내에 철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유엔 결의를 집행하기 위해 회원국들이 필요한 모든 조치를 행할 수 있도록 승인하고 있다. 한편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안보리회의 개최에 앞서 28일 발표한 성명을 통해 『이라크는 폭풍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며 이라크에 전쟁이 강요될 경우 아랍과 회교도들이 명예를 걸고 싸울 것』이라고 말해,안보리의 쿠웨이트 철수 요구를 무시할 뜻을 명백히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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