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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한은행 신화:1(테마가 있는 경제기행:13)

    ◎「최고은행」의 성적표/은감원 평가 6년연속 “최우수”/10여년만에 25개은중 순이익 1위·총수신 7위/임직원 다른 은행의 절반수준… 소수정예 위력 신한은행의 1등 비결은 무엇인가.신한은행이 1등 은행이란 점은 더이상 뉴스가 아니다.너무 많은 분야에서 너무 오랫동안 1등을 누리고 있는 탓이다.신한은행의 성적표를 보자. 신한은 지난 2월 은행감독원의 일반은행 평가에서 최우수은행(AA)에 뽑혔다.6년연속이다.유러머니지는 지난 90년 12월 신한은행을 세계 24위의 우량은행으로 뽑았다.유러머니지가 세계의 우량은행에 국내 은행을 선정한 것은 처음이었다. 신한은행의 지난해 순이익은 1천3백24억원으로 25개 일반은행 중 최고다.2년연속 1위다.순이익을 뺀 생산성 지표에서도 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은행 등 5대 시중은행에 빠른속도로 근접하고 있다. 지난 6월말의 총수신은 20조5천4백억원으로 서울은행을 누르고 7위에 올랐다.지난해 말의 총자산은 13조1천7백45억원으로 5대 시중은행 평균의 75%까지 올라왔다.지난해 평균 임직원은 4천3백85명으로 5대 시중은행 평균의 52%에 불과하다.따라서 신한은행의 소수 정예주의 위력은 은행의 총 실적보다는 은행원 1인당 생산성에서 더 돋보인다. 지난해의 실적을 은행원 1인당 실적으로 보자.신한은행의 1인당 총자산은 50억8천6백만원이나 5대 시중은행 평균은 32억3천7백만원이다.신한은행의 1인당 부가가치는 1억2천7백만원,5대 시중은행 평균은 8천2백만원이다.신한은행의 1인당 순이익은 2천7백만원으로 5대 시중은행(6백만원)의 4.5배다. 은감원의 한 관계자는 『모든 은행의 검사에 신경을 쓰지만 신한은행을 검사할 때에는 특별한 것은 없을 것이라는 마음이 든다』고 털어놨다.다른 관계자도 『신한은행이 제출한 보고서에는 믿음이 간다』고 말했다.은감원 관계자들의 평가는 신한은행에 대한 외부의 평가를 함축한다. 신한은행은 지난 82년 7월7일 재일동포들에 의해 자본금 2백50억원,임직원 2백61명,점포 3곳으로 출발했다.은행이라기 보다는 상호신용금고 수준이었지만 불과 10여년만에 독특한 경영기법으로 「신한은행 신화」를 엮어내고 있다.신한은행 출범 배경에 대해 이희건회장의 로비설 등 이런저런 말도 있지만,신한은행의 등장으로 국내 금융산업은 경영수준을 한단계 높이는 계기를 맞았다.공정한 인사,최고의 대우,확실한 주인(전문경영인) 등도 신한은행을 키운 주요 요인이나 외부적인 요인도 무시할 수는 없다. 기존 은행들의 발목을 잡는 산업합리화 여신(대출)이 신한은행에 없는 게 대표적이다.부실기업을 떠안지도 않았다.5대 시중은행들은 평균 1조원 이상 산업합리화 여신에 물려있다.신한은행의 실적을 평가절하하는 쪽의 좋은 안주감이다. 신한은행이 앞으로도 지금까지와 같은 고속질주를 계속할지에 대해서는 의문시하는 시각도 있다.부실대출이 급증하는게 우선 그렇다. 지난해 말 부실대출 규모는 1천6백25억원으로 전년보다 54% 늘어났다.지난해의 순이익은 전년보다 2백8억원 줄었다.외형은 늘지만 순이익은 감소하는 셈이다. 신세대들은 창업세대보다 일 욕심이 덜하다.1등 은행이라는 자부심이 지나쳐 자만심으로 흐른다는 지적도 있다.덩치가 커져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말도 들린다.지난해의 비자금 파동으로 깨끗한 이미지에는 흠이 생겼다. 이런 신한은행의 새로운 약점들을 고려하면서 신한은행이 1등 은행으로 성장한 비결을 캐보려 한다.〈곽태헌 기자〉
  • 「둥둥 낙랑둥」 12일부터 무대에/최인훈 연극제 마지막 공연작품

    ◎전래설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재구성 예술의 전당이 창작극 활성화를 위해 기획한 제2회 「오늘의 작가 시리즈­최인훈 연극제」의 마지막 작품인 「둥둥 낙랑둥」(손진책 연출)이 12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580­1234)무대에 오른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6월1∼16일),「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6월22일∼7월7일)에 이은 세번째 공연작이다. 「둥둥…」은 우리 민족 전래설화인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에서 모티브를 빌려 새롭게 재구성한 작품. 자신때문에 사랑하는 여인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다시 그 쌍둥이 언니를 사랑하게 되는 호동왕자와,적국의 왕비로서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는 왕비의 비극을 통해 진정한 자아인식과 참된 인간의 가치를 보여준다. 이번 작품은 특히 원래 설화와는 다른 인물설정이 눈길을 끈다.낙랑공주를 쌍둥이로 설정하고 그중 한사람을 호동의 어머니로 만들었으며 설화에서의 비련의 사랑을 삼각관계로 되살려 사랑의 의미를 추구했다.이와 함께 호동이 낙랑을 무찌르고 승리한 것과 호동의 자살이라는 독립된 두 사건을 교묘하게 연관시키고 있다. 이번 공연은 또 연극의 묘미를 한껏 살릴 수 있는 토월극장으로 무대를 옮겨 색다른 연극의 맛을 느끼게 해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번 작품은 출연진의 화려한 면면에서도 기대를 갖게 한다. 정동환이 오랜만에 정통 연극무대에 출연,사랑과 현실 사이에서 번민하는 강하면서도 한없이 여리고 섬세한 성격의 호동왕자 역을 맡았으며 김성녀가 낙랑공주와 왕비,1인2역으로 등장해 연기력을 과시한다.또 관록의 배우 윤문식이 난쟁이 역을 맡아 호흡을 맞춘다. 이밖에도 무대미술가 윤정섭이 선보이는 웅장하고 장엄한 무대,「오장군의 발톱」초연 당시 감동적인 선율을 선사했던 작곡가 이병욱의 음악,국립무용단장 국수호의 안무 등이 관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해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평일 하오 4시30분·7시30분,토·일·공휴일 하오3시·6시.〈김재순 기자〉
  • 문인사진·육필·희귀자료전/문학상·시상식행사 담은 영상물도

    정지용에서 신경숙까지. 한국문학 대표문인들의 사진,육필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알찬 전시회가 열린다. 문학의 해 조직위원회(위원장 서기원)와 대산재단(이사장 신창재)은 「문인모습 및 작고문인 육필전시회」를 25일부터 7월7일까지 서울 일민문화회관에서 개최한다. 행사는 ▲작고 및 생존문인 2백9명의 모습 전시 ▲작고문인의 육필과 희귀본 문학자료 전시 ▲한국현대문학 1백년의 흐름을 보여주는 영상물 상영등으로 구성한다. 「육필전」에는 이육사·윤동주·신석정·유치환·김팔봉·김동리등 작고문인 80여명의 육필 1백31점이 공개된다.「소년」「청춘」「개벽」 등 현대문학 초기 문예지 창간호와 최초의 시집 「해파리의 노래」,최초의 번역서 「오뇌의 무도」 등 희귀자료 30점도 함께 선보인다. 또한 문학상시상식,문단행사,작고문인 생전의 모습등을 찍은 영상물 상영도 있고 작가와의 대화(6월29일 이청준,7월6일 윤대녕)도 마련된다.〈손정숙 기자〉
  • 다우너 호 외무장관 30일∼7월7일 방한

    알렉산더 다우너 호주 외무장관이 30일부터 다음달 7일까지 공식방한한다.
  • 「1차」발표후 15일내 1·2위 결선/러대선 2차투표 어떻게하나

    ◎1표라도 더 얻은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1차선거 최종결과는 투표 18일내 발표 16일의 선거에서 최다득표 후보가 투표권자의 50%지지를 얻지못하면 러시아 연방대통령선거법에 따라 러시아는 2차투표에 들어간다.2차투표 및 2차선거에 관한 내용은 연방대통령선거법 제55조(선거의 무효),제56조(2차투표),제57조(2차선거)에 규정돼 있다. 2차투표는 상위득표자 두명을 중앙선관위가 지명해 실시한다.투표는 중앙선관위가 1차선거에 관한 최종결과를 결정,공표한 뒤 15일안에 실시하는 것으로 연방법은 밝히고 있다.물론 선관위는 1차선거결과에 대한 최종공표를 투표실시후 18일안에 한다.2차투표일과 관련,중앙선관위는 7월7일 일요일로 잡고 있으나 옐친후보진영이 『투표율이 낮으면 득될 것이 없다』는 이유로 평일인 3일을 주장하고 있다. 대통령선거법은 또 선관위가 2차선거를 결정한 뒤 2일안에 언론매체를 통해 2차선거 시행시기,요령에 대한 안내를 하도록 돼 있다.만일 2차투표에서 대상후보 가운데 한 후보가 유고가 생길 경우 나머지 후보가 자동적으로 이기는 것은 아니다.선관위는 한 후보의 유고시 다음 득표자를 다시 지명,2차투표를 실시하도록 한다.두 후보중에 한표라도 더 많이 득표를 한 자가 대통령에 당선된다.1차선거에서 총유권자의 50%미만이 선거에 참여할 경우,선관위가 1차선거를 무효화하는 중대한 선거법 위반상황이 발생할 경우,또(그럴리는 없겠지만)2차투표에서 모든 유권자가 두 후보에 대해 반대표나 기권표를 던졌을 경우는 2차투표가 아니라 선거절차를 다시 시작하는 「재선거」가 실시된다.선거를 무효화하는 중대한 상황에 대한 최종 결정은 헌법재판소가 한다.〈모스크바=류민 특파원〉
  • 러 대선 투표 시작/내일 상오(한국시간) 판세 윤곽

    ◎옐친­주가노프 각축/옐친 패배땐 공산정권 회귀 우려 【모스크바=류민 특파원】 러시아의 장래를 좌우할 제2대 러시아연방 대통령선거가 16일 러시아 동쪽끝의 북극권 지역을 시발로 실시된다.〈관련기사 3·7면〉 총 1억6백40만명의 유권자가 89개 지방 및 자치공화국에 설치된 9만4천여개소의 기표소에서 앞으로 4년간 러시아를 통치할 연방대통령을 뽑는 이번 선거의 결과는 시베리아 극동지방의 개표가 상당히 진행되는 시점인 17일 새벽 3시(한국시간 상오 8시)쯤부터 윤곽이 서서히 드러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제 2대 러시아연방대통령선거에는 당초 보리스 옐친 현대통령,겐나디 주가노프 공산당수,퇴역장성 알렉산드르 레베드,개혁주의의 기수 그리고리 야블린스키 등 11명이 입후보하여 치열한 경합을 벌였으나 선거 직전인 12일 아만툴레예프 케메로보 주지사가 공산당 지지를 선언하면서 사퇴,10명이 최종적으로 우열을 가리게 됐다. 지금까지의 각종 여론조사 결과 옐친 대통령이 선두를 달리고 그 뒤를 주가노프당수가 쫓고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주민들이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일이 많아 정확한 판세를 알기 어려운 상황이다.어쨌든 1차투표에서는 50%이상 얻는 후보가 없어 최종 결판은 오는 7월7일로 예상되는 2차투표에서 판가름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모스크바 시간으로 15일 밤 11시(한국시간 16일 새벽 4시) 북극권인 시베리아 동북단의 추코트카지방 아나드리,우엘렌,프로비데니야 마을에서 시작되는 이번 선거는 16일밤 11시(한국시간 17일 새벽4시) 발트해 연안의 칼리닌그라드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러시아 선거법은 공식투표시간을 상오 8시부터 밤 10시까지로 규정하고 있으나 동서로 광대하게 뻗어 있는 국토가 모두 11개 시간대로 나눠져 있어 전체 투표는 만 24시간 동안 계속된다.
  • 옐친,여론조사서 선두 고수/5일 앞으로 다가온 러시아대선 전망

    ◎최대라이벌 주가노프에 지지율 6∼20% 앞서/부동층 향방이 변수… 2차투표 가면 옐친 유리 러시아 대통령선거가 5일 앞으로 다가왔다.러시아 국내관심은 온통 「옐친 현대통령이냐,아니면 주가노프냐」에 쏠려 있다.다른 9명의 군소후보에 대해서는 매스컴조차 외면하고 있는 상황이다.여러 기관의 여론조사결과는 옐친후보가 주가노프후보를 지지율에서 6∼20%가량 리드하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으며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두 후보 사이의 틈은 더 벌어지고 있다. 최근에 조사된 미국의 CNN과 모스크바타임스의 공동여론조사에 따르면 옐친이 34.5%의 지지율을 획득,주가노프의 15.9%보다 20%에 가까운 지지를 더 얻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1천5백명을 최근 조사한 공공여론재단(POF)의 조사는 옐친후보가 34%로 22%의 주가노프후보를 12%가량 앞서고 있다.전러시아여론조사센터(VTsIOM)의 최근 조사도 37%대 25%로 옐친후보가 리드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조사결과는 어디까지나 「참고용」에 지나지 않는다.조사당사자 자신들도 『누가 승리할 것이다』라는식으로의 결론은 회피한다.남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감추려드는 러시아인의 민족성,수십년동안 비판기능을 잃어온 시민의식,과학적·민주적 사고의 결여 때문에 여론조사 자체가 과학적으로 진행되기 힘들다는 것이 조사전문가들의 실토다. 또 하나의 변수는 부동층.여론조사에서 나타나듯 아직 찍을 후보를 결정하지 못한 부동층은 17∼20%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돼 여론조사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다는 것이다.부동층의 향방이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사기관들은 또 『오는 16일의 1차투표에서 누구도 투표자 50%의 지지를 얻지 못해 2차투표(7월7일 예정)에나 결판이 날 것』이라고 지적한다.이 지적은 여러 여론조사결과에서 일치된 견해로 나타난다.2차선거에 들어가면 옐친후보가 다소 유리할 것으로 관측통들은 분석한다.젊은 유권자가 민주적 권리행사에 관심이 높고 이들은 시장경제메커니즘을 선호,옐친후보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모스크바=류민 특파원〉
  • 예술의 전당/「최인훈 연극제」 연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등 대표작 3편 공연/독일인 루트겐홀스트·손진책씨가 연출 예술의 전당이 선정하는 「오늘의 작가 시리즈」 두번째 무대인 「최인훈연극제」가 6월1일부터 7월24일까지 서울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과 토월극장 무대에 오른다. 「오늘의 작가 시리즈」는 한국의 대표적인 희곡작가를 선정,그 작품세계를 집중조명함으로써 창작극을 활성화하기 위한 기획. 지난 94년 「오태석연극제」에 이은 이번 「최인훈연극제」에서는 예술의 전당이 극단 미추와 손잡고 「봄이 오면 산에 들에」(6월1∼16일),「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6월22일∼7월7일),「둥둥 낙랑둥」(7월12∼24일)등 최씨의 희곡 3편을 공연한다.「옛날 옛적에…」는 독일인 마뉴엘 루트겐홀스트씨가,다른 두 작품은 손진책씨가 연출을 맡는다. 「봄이 오면…」은 화전민 아버지와 문둥병으로 집을 나간 어머니등 어려운 환경에 처한 처녀 달내가 사또의 유혹을 물리치고 가족간·연인간 사랑을 이뤄낸다는 이야기.시적인 대사와 상징성,완벽한 구성이 돋보여 작가의 대표적인 희곡작품으로 꼽힌다.윤문식·오보현 등 출연. 「옛날 옛적에…」는 난세에서 백성을 구해줄 아기 장수의 탄생 및 죽음·부활을 내용으로 하는 평안북도지방의 구전설화에서 모티브를 빌려 우리 전래의 인간사상을 표현한 작품.지난 91년 「시간의 그림자」 연출로 해박한 동양사상을 선보인 바 있는 루트겐홀스트씨가 가장 한국적인 소재를 택했다는 점에서 어떤 연출력을 보일지가 관심거리다.정태화·방숙·이용이 등 출연. 「둥둥 낙랑둥」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설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구성. 윤문식·김성녀·정동환 등이 출연한다. 공연시간은 평일 하오 4시30분·7시30분,토·일·공휴일 하오 3시·6시.580­1810.〈김재순 기자〉
  • 중견극단들 추억의 레퍼토리 무대에

    ◎연기파 배우 총출연… 연극팬에 손짓 □창단 30·20·10주년 기념공연 풍성 광장,「아가씨와 건달들」·「코러스 라인」 자유,30년전 공연작 「따라지의 향연」 극단 76단도 「관객모독」 공연 연륜과 실력을 갖춘 국내 이름있는 극단들의 창단 기념공연이 잇따르고 있다. 극단 「광장」과 「자유」「76단」「아리랑」「학전」등 연극계 중심부에 있는 이들 극단이 연기파 배우들을 총동원,창단 당시의 공연작이나 그동안의 공연작 가운데 우수한 레퍼토리를 선보여 연극팬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 올해로 창단 30주년을 맞는 극단 「광장」(3672­1391)은 지난달 26일부터 공연을 시작한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16일까지·서울 문화일보홀)과 3일부터 공연중인 몰리에르의 대표적 풍자극 「귀족놀이」(서울 인켈아트홀)에 이어 18일부터는 미국 뮤지컬사상 최대 성공작인 뮤지컬 「코러스 라인」(6월16일까지)을 서울 정동극장 무대에 올린다. 66년 창단공연 이래 극단 「자유」의 대표적인 레퍼토리가 된 이 작품에는 박정자·박인환·박웅·김금지씨 등 연기파 중견배우들과 탤런트 이세창·정수영 등이 호흡을 맞추고 있다. 또 소외계층의 삶을 다룬 연극을 추구해온 극단 「76단」이 창단 20주년을 맞아 실험극 「관객모독」을 지난 9일부터 대학로 아카데미소극장(747­9998)에서 공연하고 있다.7월7일까지. 79년 국내 초연 이래 수차례 공연된 바 있으며 「76단」의 실험적 이미지에 꼭 들어맞는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작품은 특별한 줄거리나 무대장치없이 반복되는 대사와 관객들에 대한 욕설,물·꽃·색테이프·스프레이를 뿌리는 행위를 통해 색다른 쾌감을 준다. 민족극단을 표방하는 극단 「아리랑」(763­6055)은 창단 10주년을 기념해 이윤택 작·김명곤 연출의 「어머니」(서울 동숭아트센터 동숭홀·18일∼6월13일)와 손영호 작·권호웅 연출의 「달팽이 뿔위에서 바라본 세상」(〃 동숭스튜디오씨어터·24일∼7월7일)을 공연한다. 이밖에도 창단 5주년을 맞은 극단 「학전」이 1일부터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 96」(볼커 루드비히 원작·김민기 연출)을 대학로 학전 그린(763­8233)무대에 올리고 있다.7월31일까지. 이번 무대에는 94년 공연에 참가했으며 지난해 영화 「301.302」로 스타반열에 오른 방은진과 지난해 공연에 나왔던 오지혜 등이 함께 츨연하고 있다.〈김재순 기자〉
  • 서울신문에 미친 사회풍속도 세태 50년:Ⅱ(서울신문50돌 특집)

    ◎70년대/「보릿고개」 넘기자 미니스커트 상륙/비상계엄 후유증 「카더라 통신」 난무 70년대 70년대는 유신체제라는 스펙트럼이 처음부터 끝까지 국민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잣대로 작용했다. 유신체제는 우선 「우리도 한 번 잘살아보세」라는 새마을운동 노래로 국민들의 새벽단잠을 깨우며 다가왔다. 전국 농·어촌에 새마을기가 나부끼기 시작했으며 동남아시아 국가등 해외에서도 새마을 붐을 불러 일으켰다. 서울신문도 71년부터 정부의 본격적인 사업전개에 앞서 새마을가꾸기 선두부락을 소개하는 기획물 「번영을 가꾸는 희망가족 시리즈­의욕의 현지,북돋는 자립,땀흘린 보람의 합창」이란 고정컷으로 본지 최초의 새마을운동 기획물을 72년초까지 50회에 걸쳐 연재함으로써 이 운동의 확산에 큰 몫을 담당했다. 72년 3월24일자 사설에선 이 운동을 「농민들이 스스로 잘살기 위해 자조·자립·협동하는 정신의 계발」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70년 7월7일 경부·호남고속도로 개통에다 71년 3월31일 서울·부산 자동전화 개통은 「일일생활권」이라는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정부의 이러한 불도저식 경제 최우선 정책으로 국민들의 배고픔도 어느 정도 해결되기 시작해 국민들의 얼굴에 미소가 띠기 시작했다. 환해진 모습은 먼저 옷차림에서 띠였다.67년 가수 윤복희씨가 선보인 미니스커트는 73년에는 무릎위 17㎝위까지 올라갔을 정도로 그 길이가 짧아져 경찰이 경범죄처벌대상에 미니스커트 길이를 포함시켜 자를 들고 다니며 이를 단속하는 진풍경을 빚기도 했다.남자들의 긴 머리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생들을 비롯한 청년들은 청바지를 즐겨 입고 통기타와 생맥주로 이어지는 이른바 「청통맥문화」를 만끽했다.「사랑해」「왜불러」등의 포크송이 거리를 메웠으며 「아침이슬」「고래사냥」등 금지곡도 양산됐다. 72년 7·4 남북공동성명은 통일을 염원해 온 국민들에게 벅찬 감격과 흥분으로 소용돌이쳤다. 이날자 본지는 「피맺힌 4반세기…이제 전쟁은 사라지는가! 3천리에 벼락환성」「대화있는 남·북대결의 시대 열리다」라는 제목으로 당시 시민들의 반응을 실감있게 전하고 있다. 강하면 부러진다고 했던가. 70년 11월 13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며 근로조건개선을 요구하며 평화시장 교복공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전태일씨의 분신자살 사건은 이러한 고도성장 드라이브 정책이 필연적으로 맞을 수 밖에 없는 종착점을 예고한 사건과 다름 없었다. 72년 10월 17일에는 비상계엄선포로 국회가 해산되고 대학이 문을 닫고 신문·통신마저 사전검열을 받으면서 국민들은 「카더라 방송」「유비통신」으로 불리는 소문에 귀를 기울이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행정부의 시녀로 전락한 유신국회의원들이 장충체육관에서 「체육관 대통령」을 뽑는 「거수기」로 변한 것이나 비상계엄 아래서도 반체제 인사들의 저항과 민주회복운동,양심선언 등이 계속된 것도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사건을 예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유신정권은 「그때 그사람」이라는 노랫가락 속에 울린 몇발의 총성과 함께 79년 10월26일 막을 내렸다. 10·26사태 뒤엔 「한다면 합니다」란 말과 5·17후의 떡고물 얘기가 유행했다.부정축재자로 지목된 L씨가 자신은 떡(정치자금)은만졌으나 고물(부스러기돈)만 떨어졌다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70년대 종반은 79년 12월 12일 신군부의 군사반란에 이어 80년 5·17일 쿠데타로 또 다른 군사정권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80년대/“금융사기” 장영자에 “큰손” 조롱/테러범 김현희에 구혼 줄잇고/“탁치니 억하고 죽었다”엔 분노 79년 10월26일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을 뒤로 하고 80년대를 앞두고 있을 때만 해도 국민들은 비로소 「서울의 봄」을 맞게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79년 12월12일 이른바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탈취를 노린 신군부는 압제와 서슬 퍼런 군사독재의 시대로 80년대를 열고 있었다. 80년 5월17일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18일 군부독재 연장기도에 맞서 광주에서 발생한 항의시위를 공수부대 특전단을 동원해 총검으로 유혈진압하는 비극을 초래했다. 결국 신군부는 그해 9월1일 전두환 정권을 탄생시킨다.그리고 이날부터 TV에는 「땡전뉴스」가 등장하게 된다.9시 뉴스는 어김없이 『전두환 대통령께서는…』으로 시작됐던것이다. 80년 11월12일에는 언론통폐합과 언론기본법 등이 제정돼 기자들은 강제해직을 면치못했고 언론은 통폐합 됐다. 이같은 압제는 학생운동의 흐름에도 영향을 미쳤다.학생운동은 광주항쟁에서의 좌절을 계기로 반미라는 새로운 흐름으로 표출됐고 급기야 82년3월18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발생했다.이는 85년 서울·광주 미문화원 점거로 이어졌다. 82년 5월에는 장영자 금융사기 사건이 발생했다.6천억원대에 달하는 건국후 최대의 금융사기사건으로 이때부터 사람들은 씀씀이가 큰 사람을 「큰손」이라 일컫기도 했다. 분단의 아픔은 80년 대에도 지워지지 않았다.83년 9월1일에는 사할린 부근에서 항로를 이탈한 대한항공 보잉007기를 소련의 전투기가 공격,승객과 승무원 등 탑승자 2백69명 전원이 사망했고 그해 10월9일에는 서남아시아 순방에 나선 전두환 대통령을 수행하던 서석준 부총리 등 고위관리 13명이 미얀마 양곤의 아웅산묘소에서 북한공작원이 설치한 폭탄에 절명,분노를 자아냈다. 그같은 분노는 87년 6월 테러범 김현희가 대한항공 858기에 폭탄을 설치,1백51명의 승객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로 절정에 달했다.그러나 압송돼온 김현희의 미모에 반해 결혼하고 싶다는 남성들의 문의가 쇄도했다는 웃지 못할 뒷얘기도 남겼다. 87년 1월14일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도 시대의 아픔을 공유케 했다.「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발표는 폭력적인 공권력과 인권침해에 대한 국민적인 저항을 불러 일으켜 6·29선언을 낳게 했다.민주화를 염원하는 국민들의 요구에 굴복해 나온 이 선언은 후에 「죽이구」선언으로 회자되기도 했다. 이처럼 어두운 시대였지만 변화의 물결도 뚜렷했다.80년 컬러TV 시대가 개막됐고 82년에는 통행금지가 해제됐다.또 비디오문화가 새롭게 열리기 시작하면서 외설문화의 범람을 초래하기도 했다. 80년에는 또 대입본고사 폐지,대학정원의 졸업정원제 등을 내용으로 하는교육개혁조치와 함께 과외 전면금지가 단행 됐다.이에 따라 숨어서하는 과외가 성행,수백만원대의 과외풍조가 생겨났으며 「쪽집게과외」 등 돈으로 교육을 사는 세태를 낳기도 했다. 82년 중·고생 두발자율화,83년 교복자유화 등의 조치는 청소년들의 유흥업소 출입 등 많은 문제를 양산하기도 했으며 유니섹스모드의 유행을 가져오기도 했다. ◎90년대/3D기피 현상속 세계화 바람타고 외국어 수강 “붑” 93년 2월25일 제 14대 김영삼 대통령 취임과 함께 「문민정부」가 탄생했다.5·16 이후 30여년만에 민간대통령이 탄생한 만큼 90년대는 사회 모든 분야에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안으로는 금융실명제 등을 통해 사회개혁의 기치를 높이 드는 사이 49년간 북한을 통치해온 김일성이 사망하고 김정일체제가 들어서는 등 안팎으로 많은 소용돌이가 있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90년대를 특징짓는 함축적인 표현은 이른바 「X세대 문화」다. 뒤돌아볼 겨를 없이 성장가도를 달려온 부모·선배 세대가 만들어 놓은 과실을 향유하는 신세대들의 시대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개인주의적이고 향락주의적이라는 부정적인 측면과 함께 개성적인 새대라는 의식이 공존 한다.알아들을 수 없는 「랩」을 흥얼거리며 록카페를 드나드는 「오렌지족」인가 하면 마음만 먹으면 배낭하나 덜렁 메고 유럽이고 미국이고 가고 싶은 곳은 어디라도 찾아나서 모험을 즐기기도 하는 세대들인 것이다. 컴퓨터 없이는 아무 것도 할수 없지만 정보화시대를 앞당기며 국제화와 세계화를 이끌 첨병도 바로 그들이다. 젊은이들의 문화가 인간성 상실로 인한 황금만능주의와 개인주의적 대중문화의 병폐를 양산하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컴퓨터나 외국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30∼50대 「컴맹세대」가 느끼는 세대간의 문화적 격차일 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수대교 붕괴사고,서울 아현동 가스폭발사고,삼풍백화점 붕괴 등 90년대 들어 빈발하고 있는 대형사고들은 선배세대들의 부정적 부산물일 뿐이며 그점에서 그들은 오히려 피해자인 것이다. 하지만 즐기는 신세대로서의 그들은 3D 기피현상이라는 어두운 한 단면을 90년대에 그려내고 있기도 하다.「고학력 구직난,저학력 구인난」현상과 외국인근로자의 양산도 바로 그들의 시대를 특정짓는 모습들이다.
  • 김옥숙씨 친척 투기의혹/사촌 여동생/국유지 3만5천평 특혜 불하

    【부산=김정한 기자】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씨 4촌여동생을 포함 3명이 부산에 시가 수백억원대에 이르는 수만여평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어 노씨가 친·인척을 이용,부동산 투기를 했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 1일 부산북부 등기소와 부산지역 부동산업계 등에 따르면 지난 87년 12월31일 김씨의 4촌 여동생으로 알려진 김모씨(여) 등 3명이 국유지인 부산 사상구 주례동 산113일대 임야 11만7천5백㎡(3만5천6백여평)를 평당 3천2백여원인 11억4천7백76만원에 불하받아 88년 7월7일 등기를 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다른 지역의 땅과 맞바꾸는 환매특약부교환 방법을 사용해 특혜 및 강압에 의한 불하 의혹을 받고 있다. 문제의 땅은 부산보훈병원 인근 야산으로 이 곳 주변에는 지난 85년 토지개발공사가 택지개발지구로 지정,개발붐을 타고 고층아파트가 속속 들어서고 있어 평당 땅값이 1백여만원으로 시가가 3백50여억원에 이른다. 부동산업자 이모씨(57)는 『이 지역이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되면서 평당 수만원에 불과하던땅값이 크게 올랐다』고 밝혔다. ◎안양에 77평 소유 【안양=조덕현 기자】 노 전대통령은 지난 71년부터 연고가 없는 경기도 안양시에 대지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1일 안양시와 등기소에 따르면 노씨는 지난 71년 12월31일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101의 42 대지 1백54평을 이모씨와 공동으로 매입했다.이 대지는 지난 90년 등기 분할로 101의 41와 232로 나눠졌으며 노전대통령은 101의 42 대지 77평을 소유하고 있다. 노씨가 소유하는 대지는 공시지가가 ㎡당 57만원이며,시가로는 80만∼90만원 정도된다.
  • 내실 경영·6공 실세 지원 “상승작용”/신한은 고속성장 배경

    ◎나 행장,이원조·이용만씨와 밀접… 특혜설 노태우 전대통령의 4천억원 비자금설과 관련,4백85억원의 은닉처로 드러난 신한은행이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지난 해 수신고 10조원을 돌파,창사 13년만에 금융재벌로 고속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배경도 세인들의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6공(91년)시절 신한은행장으로 취임,지금까지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응찬 행장도 이번 비자금 파동을 계기로 뉴스의 초점으로 부각됐다.더욱이 나행장이 서소문지점에 입금된 4백억원대 차명계좌 개설에 직접 관여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이 은행에 대한 6공의 특혜설이 더욱 꼬리를 물고 있다. 신한은행은 이희건씨(신한은행 회장)등 재일교포 실업인들이 자금을 모아 82년 7월7일 자본금 2백50억원,8개 점포로 출발했다.그 후 금융계에선 파격 경영이란 소리를 들으며 6대 시중은행을 맹추격했다.특히 6공시절인 88년과 89년 3차례에 걸쳐 납입자본금을 4천3백억원으로 늘리면서 금융재벌로 급부상하는 발판을 마련했다.이어 90년에는 신한생명보험,91년에는 신한리스와 신한시스템을 설립,화려한 금융재벌로 등장했다.그 결과 지난 6월말 현재 점포수 1백91개,총수신 16조5천억원,납입자본금 6천1백60억원,자기 자본금 2조원으로 급성장했다. 금융계에서는 신한은행의 이같은 고속성장에 대해 은행자체의 참신한 경영기법이 큰 힘이 됐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고있다.지난 해 국내은행 가운데 최고의 당기순이익(1천5백32억원)을 냈고 세계 양대 신용평가 기관인 무디스사와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사로부터 국내 민간 기업중 최고의 신용평가 등급을 받는 등 내실을 다져왔다. 그러나 정치바람이 거센 우리 금융계 풍토에서 과연 특혜 없이 내실 경영만으로 초고속 성장이 가능했겠느냐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이런 입장에 선 사람들은 TK의 핵심으로 6공의 금융계 황제로 불리는 이원조씨,재무장관으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렀던 이용만씨와 나행장의 끈끈한 관계에 주목한다.이용만씨가 신한은행장(85∼88년)재직시 상무로 근무하던 나행장은 이원조씨와 연결돼 6공의 정치자금을 관리하게 됐다는 주장이다.이용만씨가 신한은행장을 지낼때 이원조씨가 은행감독원장(86∼88년)을 역임했고 이용만씨도 90년부터 은행감독원장을 지내면서 이 세사람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졌다는 것이다. TK(경북 상주)출신인 나행장이 고졸 출신(선린상고)으로 학연이 중시되는 금융계에서 91년 은행장의 자리에 오른 것도 이원조씨와 이용만씨 등 6공실세들의 전폭적인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신한은행이 이원조씨 등 6공 인물들과 유대관계를 유지하면서 은행의 발전에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남다른 경영능력으로 금융계의 떠오르는 별로 통했던 신한은행이 비자금의 온상이라는 세간의 의혹을 어떻게 떨치고 일어설지 주목된다.
  • 자랑스런 밀리언셀러카 「엑셀」/채영석(자동차 이야기)

    20세기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인 자동차는 고트리프 다이믈러와 칼 벤츠의 가솔린 엔진 발명 이후 본격적으로 대중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런 대중화를 재촉하는 최다생산 모델을 탄생시킨 것은 미국의 포드사가 만든 T형 포드 모델이었다.이 모델은 1908년 10월1일 첫 차가 출고된 이후 1927년까지 무려 1천5백만7천33대가 생산되는 대기록을 남겼다. 히틀러가 포르쉐 박사에게 의뢰해서 만든 폴크스바겐의 비틀(일명 딱정벌레)은 1939년부터 지난 78년까지 무려 39년 동안이나 디자인과 기술적인 큰 변화없이 생산을 계속했다.모두 1천9백만대를 생산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영국의 미니 자동차는 지난 58년에 발표된 이래 지금까지 영국인의 사랑을 받아오며 지금도 월 1천여대가 생산되고 있다.올해로 36주년을 맞이해 멀지 않아 비틀을 제치고 최장수 모델 기록을 갖게 될 것이다. 프랑스의 르노 4CV도 지난 81년에 밀리언셀러카의 자리에 올랐다.일본 도요타의 카롤라 모델은 지난 87년부터 지금까지 생산되고 있다.지난 해까지 모두 1천7백92만여대를 생산해 큰 이변이 없는 한 멀지않아 최다 생산모델과,최초로 2천만대를 돌파하는 모델로 될 것 같다. 우리는 자동차의 도입이 비교적 늦어 이들만큼의 대기록은 없지만 그런 짧은 세월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밀리언셀러카가 있다. 현대자동차의 엑셀은 이미 지난 88년 7월7일 1백만대 생산을 돌파해 당시 자동차인들에게 커다란 희망이 되었다.우리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우리의 자동차 산업도 그만큼의 안정된 판로가 있고 대량생산에 의한 사업성이 충분하다는 것을 입증했다는 얘기다. 엑셀은 지난 75년 12월에 등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모델인 포니의 발전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몸체 디자인은 이탈리아의 「이탈 디자인」이 했고,엔진과 섀시는 일본 미쓰비시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고유모델이라고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포니로 시작해 엑셀로 마감한 이 차는 78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수출은 2백9만3천여대,내수판매는 1백28만1천여대였다.3백37만4천여대를 생산한 뒤 엑센트에게 자리를 넘겨줬다.
  • 부산 정치파동(새로 쓰는 한국현대사:35)

    ◎우남,「대통령 직선」 시도… 야서 강력 반대/계엄 선포·민의 조작… 발췌개헌안 통과 1952년 초 한국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다.유엔군과 공산군이 51년 11월 판문점 휴전회담에서 양쪽의 접촉선을 일단 군사분계선으로 인정키로 합의한 뒤 큰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1월 초 서부전선인 문산 북쪽 두매리고지와 중동부전선의 크리스마스고지에서 충돌이 있었을 뿐 양쪽의 작전은 수색·정찰,간헐적인 포격전 등 일상적인 군사활동에 그쳤다.이 군사분계선은 거의 변하지 않은 채 휴전까지 이어져 지금의 휴전선으로 고정됐다.한편으론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정전회담이 거듭 열려 휴전과 포로교환 문제를 논의했다. 이때쯤 후방은 전쟁의 공포에서 어느정도 벗어나 안정을 되찾아갔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1월19일에는 제32회 전국체전 동계대회가 수원에서 열리기도 했다.그러나 백성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웠다.월남 동포 1백20만∼1백50만명을 포함해 전국에서 모두 7백만명가량의 피란민이 발생했고 이들이 대부분 도시로 몰리는 바람에 생필품은 매우부족했다.대한민국 임시수도 부산의 경우 전쟁전 43만명이었던 인구가 1백50여만명으로 늘어났다.52년 초 물가는 「6·25」전보다 13배나 뛰어올라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정치권에서는 헌정사에 큰 오점을 남긴 「부산정치파동」이 서서히 싹터갔다.부산정치파동은 1952년 5월25일 계엄령선포에서 7월7일 제1차 헌법개정,이른바 발췌개헌 공포에 이르기까지 부산에서 벌어진 일련의 정치사건들을 말한다.그 발단은 51년 11월 이승만 대통령의 의도에 따라 정부가 발의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에서 비롯됐다. ○첫 표결 압도적 부결 이승만은 개헌발의에 앞서 자유당을 창당,이를 발판으로 국회에서 개헌안을 통과시키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자유당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반대하는 원내세력과 지지하는 원외세력으로 갈라져 결국 창당 한달여만에 원내자유당과 원외자유당으로 분리됐다.이런 가운데 헌법개정안은 해를 넘겨 1월18일 국회 표결에 부쳐졌는데 찬성 16,반대 1백43,기권 1표라는 압도적 표차로 부결됐다. 이승만은 자신을 반대하는 국회에더이상 미련을 두지 않는 대신 충성을 다하는 경찰력을 이용,민의를 동원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이때부터 원외자유당 주도로 「개헌안 부결반대 민중대회」가 열리는가 하면 헌법규정에도 없는 국회의원 소환운동을 벌이는 등 갖은 수법을 동원해 국회에 압력을 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이승만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먼저 4월25일 실시한 읍·면의원선거와 5월10일의 도의원선거 등 첫 지방의회 선거에서 여당인 원외자유당이 압승을 거두었다.이승만은 지방의회와 원외자유당을 양대 축으로 삼아 직선제개헌안을 더욱 거세게 밀어붙였다. 내각책임제 개헌에 앞장서던 서민호 의원이 4월24일 육군대위 서창선을 저격한 사건도 반이승만파에게 큰 타격을 입히는 계기가 됐다.서의원은 지방의회선거 감시차 전남 순천에 갔다 숙소에서 술취한 서대위와 시비가 벌어졌다.서대위가 먼저 권총 6발을 쏜 뒤 서의원이 응사했지만,서의원은 살인 혐의로 구속됐다.국회는 서의원의 살인이 정당방위인데도 그를 구속한 것은 내각책임제 개헌을 방해하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서의원 석방결의안을 의결했다. ○대낮 야 의원에 테러 서의원이 5월19일 석방되자 부산 거리에는 이를 항의한다는 구실로 조작된 민의가 활개를 쳤다.민족자결단·백골단·땃벌떼 등 정체모를 집단들이 때를 만난듯 거리를 누비며 대낮에 야당의원들에게 공공연하게 테러를 가했다.이들은 또 「살인 국회의원 석방한 국회는 해산하라」며 정부·국회·대법원 청사를 습격하기도 했다.피란수도 부산시내에는 공포 분위기가 확산됐다.때맞춰 이승만지지파가 주를 이룬 7개 도의회가 국회해산 요구를 결의했고,지방의회 대표는 반민의국회 해산궐기대회를 열었다. 정부의 공세는 5월25일 0시를 기해 부산·경남북과 전남북 일부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공비소탕을 내세운 계엄을 악용,야당의원을 철저히 탄압한 것이다.계엄당국의 언론 검열이 시작됐고 25일 밤부터 서민호의원 등 내각제 지지의원들을 잡아들였다.26일에는 헌병대가 국회의원 40명이 탄 통근버스를 크레인에 달아 끌고갔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우방들의 비난이쏟아졌다.맨 처음 반응은 유엔한국통일 부흥위원단(UNCURK)에서 나왔다.언커크는 5월28일 이승만에게 성명을 보내 『한국에서 유엔을 대표하는 본 위원단은…부산시의 계엄령을 즉각 해제하고,현재 체포·구금된 국회의원들을 석방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트루먼 미국대통령도 항의각서를 보냈지만 이승만은 「계엄령은 공비토벌을 위한 것이며,국회의원 체포는 공산당과의 공모여부를 밝히기 위해서」라고 둘러대며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어 6월25일 반이승만 세력에게 결정타를 먹인 「이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이 발생했다.부산 충무로광장에서 벌어진 「6·25기념식전」에서 유시태(당시 62)가 이승만에게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그러나 총알이 발사되지 않는 바람에 이승만은 암살을 면할 수 있었다.이 사건으로 유시태에게 신분증과 옷을 빌려준 민주국민당 김시현의원 등 야당의원 5명이 배후세력으로 체포됐다.「이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은 온갖 테러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재집권 야욕을 꺾으려던 야당에게 치명적인 악재로 작용했다. ○장택상의 수정안수용 이처럼 반이승만 세력이 궁지에 몰렸을 때 장택상 국무총리가 제안한 제3의 개헌안이 등장했다.이 개헌안이 바로 정부의 안과 국회의 안을 적당히 절충한 「발췌개헌안」이었다.하지만 대통령직선제·양원제를 뼈대로 한다는 점에서 이승만의 개헌의도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국회안을 몇가지 수용하긴 했지만 이는 야당의원들에게 타협할 명분을 주기 위한 치장에 불과했다.「이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으로 기진맥진한 야권은 장총리의 「발췌개헌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952년 7월4일 밤 발췌개헌안은 기립표결로 통과됐다.출석 1백66명 가운데 1백63명이 찬성했고 3명이 기권했다.정부는 7월7일 개정헌법을 공포함으로써 부산정치파동은 막을 내렸다.이 개헌에 따른 정·부통령 직접선거가 8월5일 실시돼 이승만은 다시 대통령 권좌에 올랐다. 우리 헌정사에 첫 개헌으로 기록된 발췌개헌은 이처럼 불미스러운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고 이후 거듭된 정치파동의 선례가 됐다.역사는 부산정치파동을 「여야간의 정치운영 방식을 폭력을 통한 극한대립 양상으로 바꾸어 놓았으며,헌정사에서 평화적 정권교체의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게 만든 분기점이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부산 정치파동」에 미 직접개입 주장/휴전협상·군사작전에 악영향 판단/한때 이승만 제거·임정수립을 암사 1952년 한국 정정이 부산정치파동으로 위태로워지자 미국은 한때 이승만 대통령의 제거를 고려하는 등 대책 마련에 크게 고심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당시 미국 정부의 입장을 보여주는 극비문서를 최근 워싱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 보관중인 「정책수립처 문서」(Records of Policy Planning Staff)더미에서 발굴했다.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이 문서는 「한국에서 정치적 위기의 지속」이라는 제목으로 모두 3쪽분량.미 국무성 유엔과장 힉컬슨이 1952년 6월13일 작성,정책수립처의 니체를 포함해 국무차관보 매튜,극동과의 앨리손과 존슨등 간부들에게 발송한 것으로 돼 있다. 힉컬슨은 이 문서에서 부산 정치파동의 해결책으로 미국의 직접 개입을 주장하고 있다.그는 미 국무성이 제한적인 차원에서 개입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전제아래 위기의 책임을 이승만보다는 그의 측근인 이범석·임영신·윤치영에게 돌렸다.그 까닭은 한국에서 이승만을 대체할 만한 『전 국가적인 명망성』을 지닌 인물이 없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때문에 이승만의 지위는 인정해 주면서도 주변의 추종자를 거세함으로써 그의 독재적 경향을 제어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며칠 뒤 발췌개헌안을 내놓은 장택상 국무총리를 미국이 비난대상에서 제외한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당시 미국은 지지부진한 휴전협상보다 한국의 정치적 위기를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미국은 이 위기가 휴전협정 뿐만 아니라 군사작전의 시행마저도 위협한다고 보았다.따라서 이승만을 제거하고 임시정부를 세울 계획이 한때 있었음을 이 문서는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서는 미국의 개입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음을 밝혔고 이 내용대로 미국은 발췌개헌안 통과­이승만 재선의 과정을 묵인하게 된다.
  • 한강 인도교 폭파(새로 쓰는 한국현대사:33)

    ◎「임진강교 폭파 실패」뒤 서둘러 준비 지시/미 참전으로 예정보다 하루 늦춰 결행 19 50년 6월25일 일요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다음날 26일 월요일에 벌써 수도 서울을 혼란에 몰아넣었다.대한민국 정부와 국회는 26일 밤 각각 긴급 국무회의와 긴급국회를 열어 27일 새벽 수원으로의 천도를 결정할 만큼 전선은 긴박하게 돌아갔다.그리고나서 28일 상오2시30분쯤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폭파해버렸다.한강다리를 폭파한 시간에 T33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북한 공산군은 아직 수도 서울의 중심부 밖에 있었다. ○개전 다음날 검토 착수 한강 다리 폭파계획은 전쟁 다음날 26일 상오부터 이미 검토되었다.전황이 매우 불리해지면서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불러들여 한강다리 폭파에 대한 여러 질문을 던졌다.이는 적의 진로를 차단하기 위해 임진강 다리 폭파를 시도했다 실패한 과오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공병감은 공병학교 폭파교관 황원회 이창복 중위에게 폭파준비를 서둘러 지시했다.당초 폭파시각은 27일 하오4시로 결정되었다. 이같은 결정은 육군본부가 시흥으로의 철수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그러나 이날 하오2시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미군개입 가능성과 극동미군의 전방지휘소(ADCOM)가 한국에 설치될 것이라는 전문이 날아들었다.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이 소식을 미군사고문단(KAMAG)단장대리 W H 라이트로부터 전해들었다.그래서 시흥으로 나앉았던 육군본부를 다시 용산으로 복귀시켰다.이에따라 한강다리는 결국 하루늦게 폭파되었다.이시영 부통령 일행은 폭파직전 한강을 마지막으로 건넜다. 이승만 대통령은 27일 상오2시 특별열차편으로 한강를 건너 대전으로 내려갔다.그런데 이날 한강다리가 폭파되기 30분전에 이승만 대통령의 방송이 전파를 탔다.그 내용은 『미국의 적극적인 군사원조가 있을 것이니 국민은 총궐기해 반란분자들을 퇴치하자』는 것이었는데,사실은 사전에 준비한 녹음방송이었다.한강다리의 폭파는 결국 수도 서울을 사수하던 국군장병 4만4천명을 낙오병으로 만들었다. ○국군 4만4천명 낙오 북한 공산군이 서울시내 중심부에 들어온 시각이 28일 하오3시쯤이었으니까 다리 폭파를 6∼8시간 정도 늦추어도 큰 무리가 없었을 것이라는 비판이 뒷날 나왔다.이런 이유로 해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은 군사재판을 통해 처형되었다.그러나 폭파를 명령한 육국 참모총장 채병덕은 7월27일 하동전선의 180고지에서 북한군의 기습을 받고 전사했다.한강 다리가 끊겨나간 이후 육군 5개 혼성사단이 노량진 본동을 중심으로 모여 한강 방어선을 구축했다.서울에서 퇴각한 이들 부대는 명목상 사단편제였지 사실은 연대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개전한 시각에 한국의 우방 미국의 대통령 트루먼 대통령은 미조리주 인디펜던스 자기 사저에 머물고 있었다.그는 당장 워싱턴으로 돌아오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국무장관의 충고를 받아들여 다음날 백악관에 도착했다.미국은 국제연합(UN)이 「평화에 대한 침략적 행위」로 규정지어 주기를 바라면서 경거망동한 행동을 하지않는 전략을 취했다.그리고 미국무성은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즉각개최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무렵 소련은 중화인민공화국(중공)대신대만의 자유중국이 중국을 대표하는 회원국으로 총회 안보이사회 의석을 차지하도록 결정한데 항의하여 유엔을 보이콧하고 있는 중이었다.소련이 불참한 안보이사회는 즉각적인 전투중지와 38선 이북 원위치로의 철수를 요구하는데 결의했다.이와 더불어 유엔 회원국은 이 결의의 집행을 위해 한국에 원조를 제공하고 북한에 대한 원조 자제를 요청하는 안도 결의안에 포함시켰다. 미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 공산군이 서울 근교에 접근하던 6월27일(워싱턴 시간) 미공군과 해군에 한국정부를 엄호지원하는 명령을 내렸다.이날 유엔 안보이사회는 소련이 여전히 불참한 가운데 「무력침략을 격퇴시키고 평화와 안전을 회복시키는데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다음날 28일 서울은 침략자의 손에 들어갔다.트루먼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미국은 한국에서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유엔의 경찰행위를 돕는 것이라고 말했다. 개전 5일째가 되고 서울이 공산권 수중에 완전히 넘어간 다음날인 6월29일에는 맥아더장군이 자신의 전용기 바타안호를타고 동경에서 수원으로 비행해왔다.바타안호가 착륙하는동안 간이 활주로 한쪽 끝을 북한의 소련제 야크기가 공격했다.맥아더는 사태의 심각성을 피부로 느꼈다.한편 임시수도 대전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적의 항공기로부터 요격을 피하기 위해 계곡을 따라 저공비행으로 수원에 와 닿았다.이들이 서울대 농과대학 캠퍼스에서 만나는 동안에 적의 전투기는 계속 기총소사를 해댔다. ○“미 해군 해안선 봉쇄” 맥아더는 모든 준비가 갖추어지는대로 한국을 지원하겠다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약속했다.트루먼은 6월30일 일본에 기지를 둔 미공군이 북한의 군사시설에 대한 폭격을 승인했다.이와함께 한반도의 전 해안선을 해군이 봉쇄하도록 명령하고 맥아더 장군으로 하여금 한국에서 상당한 지상군 지원부대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에따라 찰스 스미드 중령이 이끄는 미 지상군 선발대가 일본 사세보를 떠나 부산을 거쳐 7월5일 평택에 도착했다.그러나 이 미군부대는 한국군의 한강 방위선을 무너뜨리고 계속 남하하는 북한군 탱크앞에 속수무책이었다.이런 상황속에 UN안보이사회는 7월7일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는 회원국은 그 군대를 미국이 지명하는 사령관 휘하에 둘 것을 권고했다. 그 다음날 트루먼 대통령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주한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기에 이른다.개전후 뼈아픈 11일간이 지나가는 동안 유엔과 미국은 한국전쟁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그리고 16개국에 이르는 회원국이 한국을 지원하기로 한 결의를 행동으로 옮겼다.특히 미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아의 지상전에 주동적 참전국이 된 것이다. 미국의 참전은 전선 주변에 위험한 그림자를 깔기 시작했다.그 위험은 한국군과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공산군 점령지역의 허리인 인천을 상륙한데 이어 낙동강 전선을 뚫고 북한 깊숙이 들어갔을 때 현실로 다가왔다.1950년 가을이 저문 10월19일 저녁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넜던 것이다.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은 전쟁양상을 또 한번 바꾸어 놓았다. ◎미 「국가정보평가서」/“소,「한국전 중 개입땐 대전 확산」 예측”/“유엔군 내분 조장… 전력약화 기대/필요땐 중에 소 의용군 지원 태세” 1950년 한국전쟁에 중공군이 개입했을때 소련은 한국전쟁의 세계대전 비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그와같은 사태발전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당시 미국은 평가한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입수한 「국가정보평가서­11」(NIE­11)에 따르면 소련의 통치자들이 중공의 한국전 개입을 지시 혹은 재가하면서 세계대전으로 확산될 위험성을 인지했다고 미국은 평가하고 있었다.NIE­11은 그러나 소련이 중공군 개입과 동시에 세계대전에 돌입할 것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NIE­11은 또 소련이 세계대전 발발여부와 상관없이 미국과 중공간의 전면전에 거는 기대가 크다고 적고 있다.▲우선 미국과 연합군대를 다른 전장으로 유인해 병력을 소멸시킬 수 있고 ▲미국과 그 동맹국간 알력을 조성할 뿐만 아니라 ▲한국에의 침공으로 유엔의 단결력을 좌절시킬 수 있다는 것이 소련의 판단으로 추정했다. 이에따라 소련은 중공에 대해 적절한 물자와 기술인력,심지어는 의용군까지 제공해 한국에서의 중공군 작전을 지원할 것으로 판단했다.특히 유엔군의 공중공격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중국내 거점 방위가 필요하다면 비행기와 대공포를 훈련된 요원도 함께 제공할 것으로 내다보았다.또 중국영토에 대한 미군(유엔)의 대규모 작전이 있을 경우 중·소조약에 근거해 중공에 대한 소련의 공개적 군사지원이 따를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NIE­11은 이어 사태추이를 볼때 중국 공산당의 개입목적은 유엔이 한국에서 발붙일 수 없도록 하는데 있다고 덧붙였다.NIE­11은 미 중앙정보부가 1950년 12월5일 국무성 및 육·해·공군의 정보관계자들을 참여시켜 작성한 1급 비밀문서다.
  • 한국­격동의 반세기 발자취/1945∼95:1

    ◎분단대결 구도속 민주주의 꽃피우다/동족상잔의 전쟁 발발… 전국토 초토화­1950년/5·16 쿠데타… 본격 개발독재시대 돌입­1961년/유신 선포… 장기집권의 「정치암흑기」로­1972년 95년 8월15일.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되찾은지 쉰번째 맞는 광복절이다.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민족상잔의 비극과 국토의 허리가 꺾이는 분단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분단을 원죄 삼아 정치·사회등 각부문에서 여러가지 사건들이 꼬리를 물었으며 최근들어서는 고속성장의 후유증으로 붕괴·폭발등 인재가 속출,광복 반세기사에 깊은 골이 패이게 했다.그러나 한민족은 이같은 역사의 도전을 끈질김과 슬기를 갖고 성공적으로 극복,전쟁의 폐허속에서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눈부신 꽃봉오리를 피워냈다.광복 및 분단 반세기동안 빚어진 영욕의 역사를 연도별로 간단히 정리해본다. ▷1945년◁ 8월15일 한민족은 36년간의 일제강점에서 벗어났다.그러나 얼마뒤 9월2일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소양군의 한반도 분할점령이 발표돼 분단의 씨앗이 심어졌다.김일성은 9월19일 원산항을 통해 북한에 들어왔다.이 가운데 10월25일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을 중심으로 2백여 정당대표가 회합해 조선독립 촉성중앙협의회를 발족시켰다.김구등 임정요인들은 11월23일 개인자격으로 뒤늦게 환국했다.연합국은 12월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조선 신탁통치를 결정,12월31일 반탁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1946년◁ 조선공산당은 1월2일 입장을 급선회,신탁통치 지지에 나섰다.5월23일에는 군정장관의 허락없이 38선을 무단 월경하는 것이 금지돼 분단이 사실화됐다.이에 따라 이승만은 6월3일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천명했으며 소련은 7월2일 서울영사관을 철수했다.대구에서 쌀배급요구를 내세운 10·1폭동이 일어나 3천7백명이 체포돼고 16명이 숨졌다. ▷1948년◁ 2월26일 유엔은 남한단독 총선거 실시를 결의했다.김구등 한독당 대표들은 이에 반발해 4월19일 38선을 넘어 김일성과 남북연석회의를 갖고 통일방안을 논의했다.또한 제주도에서 4월3일 남한단정에 반대하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그러나 결국 5월10일 유엔 한국위원회의 감시 아래 남한단독 첫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다.총선 이후 첫 소집된 국회는 7월1일 대한민국을 국호로 결정했으며 원내 선거로 초대대통령에 이승만을 선출했다. ▷1949년◁ 5월20일 남로당 국회프락치사건이 일어나 국회의원들이 체포됐다.미국은 같은날 미군철수를 발표했으며 6월29일 철수를 완료했다.이에 앞서 6월26일 민족지도자 김구선생이 안두희에 의해 피살,국민의 깊은 슬픔을 자아냈다. ▷1950년◁ 미 애치슨 국무장관은 1월12일 미방위선에서 한국이 제외된다고 말했다.반면 1월26일에는 외침시 미군의 개입을 보장하는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이 체결됐다.마침내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53년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여간 전국토가 전화에 휘말려 폐허화됐다.3일만인 6월28일 서울이 인민군에 함락됐으며 같은날 새벽 3시 한강인도교가 폭파됐다.미국은 6월27일 참전을 결정하고 유엔 안보리에 연합군 결성을 제안,7월7일 안보리에서 유엔군 최고사령부 설치를 채택됐다.부산까지 계속 밀리던유엔군은 9월15일 새벽 인천상륙작전을 감행,9월26일 서울을 수복한데 이어 38선을 돌파하고 북진에 들어갔다. ▷1951년◁ 중국군은 1월1일 6개군단으로 38선을 넘어 남하했고 정부는 다시 1월4일 부산으로 후퇴했다.이 가운데 공비토벌을 이유로 거창양민 6백63명을 국군이 학살한 사건이 벌어졌다. ▷1953년◁ 이승만은 미측의 조기 휴전 추진에 반발해 6월18일 반공포로 2만7천여명을 석방하는등 미측에 압력을 가했다.그러나 7월27일 유엔과 북한·중국이 당사자로 서명한 가운데 휴전협정이 조인됐다.북한에서는 8월7일 박헌영등 남로당 계열을 간첩혐의로 사형을 집행했다고 밝혔다. ▷1960년◁ 전년의 사라호 태풍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것을 간신히 수습하고 3월15일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돼 4대 대통령에 이승만대통령이 당선됐다.그러나 부정선거였음이 밝혀져 거센 항의시위가 빚어졌다.4월11일 마산에서 최루탄에 맞아 숨진 김주렬군의 사체가 발견되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됐다.4월19일 서울에서 2만명의 학생들이 대대적인 도심시위를 벌여 4·19혁명의 불길이 당겨졌다.4월26일 이승만대통령은 마침내 하야성명을 발표했다.이에 따라 4월28일 과도내각이 구성됐으며 이승만은 5월29일 하와이로 망명길을 떠났다. ▷1961년◁ 5월16일 박정희소장의 주도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전두환대위가 이끄는 육사생도들은 18일 쿠테타지지 시위를 벌였다.박정희는 20일 국가재건 최고회의를 결성하고 의장에 취임했다.이어 용공분자와 깡패 6천2백여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7월27일 미측은 한국군사정부를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1962년◁ 한일양국은 3월12일 외무장관 회담을 개최했다.또 3월19일 최고회의는 63년 민정이양을 발표했으며 정치활동정화법을 공포했다.이에 따라 윤보선대통령이 사의를 표명하자 박의장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했다.또 6월10일에는 10환을 1원으로 평가절하하는 화폐개혁이 단행됐다.10월15일에는 한미행정 협정실무자회담이 학생들의 반대속에 18개월만에 재개됐으며 11월12일 김종필은 일본 오오히라와의 비밀메모를 작성했다. ▷1963년◁ 1월18일 민주공화당이 발기선언을 가졌으며 박정희는 민정불참을 발표했다.25일 김종필은 순회대사 자격으로 자의반 타의반 외유길에 올랐다.11월26일 실시된 6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공화당은 압승을 거두고 이어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64년◁ 4월1일 국회에서 김종필과 오히라간의 비밀메모가 공개되면서 학생시위가 격렬해지자 정부는 6월3일 각급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1965년◁ 국회는 1월26일 베트남에 대한 국군공병단의 파견동의안을 통과시켰다.또 2월20일에는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됐다.군은 한일조약에 대해 반대하는 시위가 날로 거세지자 4월19일 위수령을 발동했으며 정부는 6월22일 한일협정을 정식조인했다. ▷1966년◁ 6월18일 장창선이 세계아마레슬링 플라이급 자유형에서 금메달을 땄다.1주일 뒤인 6월25일에는 김기수가 국내 처음으로 주니어미들급으로 세계챔피언에 올랐다. ▷1967년◁ 3월22일 북한 중앙통신부사장 이수근이 위장 귀순했다.5월3일 제6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돼 박정희후보가 당선됐다.7월8일 중앙정보부는 동베를린 간첩단사건 관련자1백94명 가운데 1백4명을 구속했다. ▷1968년◁ 1월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무장공비31명이 청와대기습을 위해 서울에 잡입했다.1월23일에는 푸에블로호가 납북됐다.4월 파라과이와의 이민협정에 체결됨으로써 남미 이민의 막이 올랐다. ▷1969년◁ 2월5일 서울시 중학교 무시험 전형이 실시됐다.3월22일에는 3·1고가도로가 개통됐다.3월28일 김수환대주교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추기경에 선임됐다.10월17일 3선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가결됐다. ▷1970년◁ 3월17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강변로에서 정인숙이 피살,배후를 놓고 전국이 들끓었다.4월8일 와우아파트가 무너져 33명이 사망했다. 11월13일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이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 자살해 노동운동의 험난한 앞길을 예고했다.
  • “방치땐 모두 불리” 미·일 본격 개입/달러화 급등의 배경

    ◎53년 이후 최악 실업률… 투자 희생 시급­일/차·항공협상 타결… 내년 대선 악재 해소­미 엔화의 환율이 8월들어 급반전되고 있다.이제 곤두박질 치고 있는 것은 달러가 아니라 엔화다.2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1달러당 89엔대를 기록하더니 뉴욕시장을 거쳐 3일 도쿄시장으로 돌아온 외환시세는 개장초 91엔대로 뚝 떨어졌다. 「엔고 달러저」에서 「엔저 달러고」로 흐름이 바뀐 것은 올해 초 1백엔대에서 80엔대 초반으로 급등한지 4개월여만으로 일본 경제가 침체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대한 미국의 우려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당초 일본이 무역흑자를 줄이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미국과의 무역협상에서도 좀처럼 양보하지 않으려는 일본을 응징하기 위해 엔고현상을 방조해 왔다. 그러나 거품경제후 침체됐다가 약간 회복기미를 보인던 일본경제는 15%를 웃도는 엔고의 강펀치에 또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지난 6월 일본의 실업률은 3.2%까지 치솟았다.5월보다 0.1% 악화된 수준으로 지난 53년 이후 최악의 실업률이었다.엔고현상으로 투자 마인드가 얼어붙은데다 해외로 빠져 나갈 기회만 노리고 있는 기업의 구인 움직임도 별로 활발하지 않아 실업률이 더 악화될 가능성도 있는 형편이었다.또 6월중 소비자물가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0.2%포인트 하락,일본 경제가 디플레이션으로 빠져드는 것 아닌가라는 우려가 높아졌다. 미국 경제가 지난 5,6월 잇따라 감속되고 있는 터여서 미국정부내에서는 더 이상 일본경제의 침체와 일본 금융시스템의 흔들림을 방치할 경우 미국경제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견해가 강화돼 왔다.내년은 미국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이기도 하다. 이에 앞서 미국으로서는 지난 7월7일 일본과 자동차협상을,7월 말에는 항공운수협상도 마무리지었다.양대 무역현안이 그런대로 마무리되었던 점도 더 이상 일본의 팔을 비틀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었다. 이에 따라 지난 7월초부터 조금씩 엔화 환율이 80엔대 중후반으로 움직여 왔다.미국은 지난달 국제통화기금 회의등에서 일본정부에 근본적인 경기대책 및 해외투자 규제의 완화등을 재차 요구했고 일본정부가 이를 받아 2일 9개 항목에 걸친 해외투융자 완화책을 발표하자 7월7일 이후의 협조개입을 강화해 엔화 급락을 유도한 것이다. 일본정부로서는 경제가 침체국면을 빠져 나오지 못하면서 최근 참의원선거에서 참패하는 등 곤경을 겪어 왔다. 일본 경제전문가들은 독일도 마르크 고 시정을 위해 금리인하에 나설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강하다.달러화가 전세계적으로 오르게 될 경우 엔화는 90엔대에서 정착될 것이라는 게 이곳의 대체적인 전망이다.
  • 「중·일전쟁」 발발 58돌에 부쳐(해외사설)

    올해는 반파시스트 전쟁승리 50주년을 맞는 해다.이러한 때 우리는 항일전쟁의 발단이 된 「7·7사변」 58년을 계기로 그 특수한 의의를 되새겨본다. 37년 7월7일,일본제국주의는 완평성과 노구교를 폭격·침공하면서 중국을 집어삼키려는 야심을 드러냈다.이후 8년 항전을 중국인민은 위대한 승리로 이끌었다. 역사는 위대한 교사다.미래를 열고 민족진흥의 위대한 이상을 실현하는데 그 고귀한 경험을 흡수해나가야 한다.역사는 말한다.낙후되면 억울함을 당하고 짓밟히게 된다.민족의 자립자강을 위해선 경제와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강대한 종합국력을 유지해야 한다.58년전 중국이 일본에게 침략당한 것은 약한 국력 때문이었다.경제와 과학기술은 국방의 기초다.발달된 경제와 과학기술 없이 국가독립과 안녕을 유지하기 어렵다. 이것이 피와 생명을 바꿔 얻은 역사의 교훈이다. 오늘날 중국은 58년전 중국은 아니다.지난 17년동안의 개혁개방과 건설을 통해 우리 경제실력과 종합국력은 크게 성장,활력을 지닌 국가로 일어섰다.우리는 계속 등소평동지가세운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이론과 당의 기본노선을 견지,개혁심화·개방확대하며 「과학흥국」의 전략방침을 끊임없이 실천해 사회주의 현대화수준을 높여나가야 한다. 공산당의 영도는 민족해방과 진흥의 가장 중요한 정치역량이었다.이것은 중국공산당원이 짊어지고 나가야 할 신성한 사명이다.강택민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중앙의 영도아래 전국 각 민족의 단결로 조국을 부강·민주·문명의 사회주의 현대화국가로 만들어나가야 한다. 「7·7사변」을 기념해 우리는 중·일관계를 생각하게 된다.대다수의 일본국민은 일본군국주의 침략역사를 반성하고 있다.그러나 지금도 역사의 전철을 되풀이하고자 획책하는 자들이 있다.정치계에도 그러한 대표적인 자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정확한 역사반성을 통해서만 민족의 올바른 길을 선택할 수 있다.두 나라가 우의를 바탕으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써가기를 바라고 있다.역사의 비극이 또다시 재현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김일성 시신8일 공식공개”/러 주간지 보도

    ◎사망 1주기 맞춰… 방부처리에 1백만달러 김일성의 시신은 이미 러시아의료진에 의해 방부처리가 끝났으며 오는 8일 사망 1주년에 맞춰 공식 공개될 것이라고 러시아의 주간지 「모스코프스키에 노보스치」가 5일 최근호에서 보도했다. 이 신문은 러시아 레닌의학연구소 소속 사체방부처리 의료진 7명이 지난해 8월부터 교대로 북한을 방문해 사체방부처리작업을 마쳤다고 밝혔다. 한편 이 신문은 지난해 김일성사망 당시 1차로 의료진을 싣고 묘향산 초대소에 급파됐다가 기상악화로 추락한 헬리콥터 조종사는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공개하면서 당시 시체방부처리 전문의료진이 북한에 머물렀으며 이는 우연한 사건이라고 판단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본지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김일성의 시신은 이미 방부처리가 끝나 김일성 사망 1주년인 8일 공식 공개될 예정이다. 김일성은 지난해 7월7일 저녁 묘향산 초대소에서 심장발작을 일으켰으며 의료진을 실은 첫번째 헬리콥터가 기상악화로 추락한뒤 두번째 헬리콥터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숨진뒤였다. 장례당시 평양시내를 돌았던 운구차에는 김일성의 시신이 실려있지 않았다.왜냐하면 당시 엄중한 경계속에서 일단의 러시아의료진이 시체해부실에서 김일성의 사체를 해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사체방부처리작업을 맡은 레닌의학연구소와 북한정부가 어떤 내용의 계약을 체결했는 지는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단지 시신을 생전의 모습에 가깝게 보존한다는 원칙이 합의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를 위해 지난해 8월부터 7명의 의료진이 교대로 평양을 방문했다.그리고 김일성의 사체방부처리는 의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김일성의 시신을 보존할 방탄유리관은 과거 정부소속이었던 한 민간회사에서 발주했다. 이제 누구든 희망자는 자신의 시신을 방부처리할 수 있다.이에 소요되는 비용은 미화 30만달러이다.단지 이 비용은 초기 처리비용일뿐 사체를 지속적으로 보존하고 방탄유리관을 주문하는 값은 포함돼 있지 않다.김일성의 시신을 방부처리하는 데는 대략 1백만달러정도가 소요된 것으로 알려졌다.
  • 불 첩보위성 7일 발사

    【파리 AFP 로이터 연합】 프랑스의 인공위성 발사 회사인 아리안스페이스사는 오는 7월7일 프랑스 최초의 군사첩보위성을 발사할 것이라고 이 회사 대변인이 29일 밝혔다. 마트라 마르코니 스페이스사가 제작한 이 인공위성(무게 2천5백㎏)은 프랑스령 기아나의 쿠루에 있는 프랑스 우주기지에서 아리안­40 로켓에 의해 발사된다. 「엘리오스­1A」로 명명된 이 첩보위성은 「스폿­4」라는 민간용 인공위성을 개조해 만든 것으로 이어 제작될 「엘리오스­1B」 위성까지 포함해서 1백억프랑(20억달러)의 비용이 소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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