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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오늘만 같지 않기를 - 조현주

    [2017 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오늘만 같지 않기를 - 조현주

    >>등장인물 노대복 69세, 마을버스기사 양옥화 67세, 노대복의 아내 노운수 45세, 노대복·양옥화의 아들, 택시기사 노만석 22세, 노운수의 아들, 퀵서비스맨 때어느 가을 토요일 저녁 장소한눈에도 오래되고 허름해 보이는 집의 거실이다. 거실 벽은 얇은 나무합판으로 둘러쳐져 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거나 나무합판이 삐져나온 곳이 보인다. 가구나 테이블, 가전제품, 주방의 싱크대 등에도 오랫동안 사용한 흔적이 역력하다. 무대 뒤쪽은 주방이다. 싱크대와 냉장고 등이 있고, 냉장고 앞에 식탁으로 사용하는 원목 탁자가 있다. 주방 오른쪽으로는 미닫이문이 있고, 이 문을 나가 좁고 긴 복도를 따라가면 현관문이 나온다(객석에서 현관문은 보이지 않는다). 미닫이문 오른쪽 벽에는 커다란 전신 거울이 걸려 있고, 그 바로 옆은 노만석의 방이다. 주방 왼쪽으로는 뒷마당으로 바로 연결되는, 스테인리스로 된 문이 있다. 뒷마당에는 양옥화가 가꾸는 텃밭이 있다. 파나 고추 같은 것들을 키운다. 바로 옆에 방문이 있고(노운수의 방), 그 옆에 또 하나의 문이 있다. 이곳은 욕실 겸 화장실이다. 그리고 그 옆으로 또 하나의 방문이 있다(노대복, 양옥화의 방). 방문이 마치 이 집 인테리어의 전부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그 외의 특별한 건 보이지 않는다. 흔한 액자조차 벽에 걸려 있지 않다. 무대 앞쪽에는 온 가족이 앉을 수 있는 패브릭 소파가 객석을 향해 디귿자로 배치되어 있고 담요 같은 것들이 걸쳐져 있다. 왼쪽 소파에는 마른 빨랫감들이 아무렇게 놓여 있다. 가운데에는 테이블이 놓여 있고 꽃병이 있다. 테이블은 나무의 밑동을 잘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이 역시 오래돼 보인다. 무대 밝아지면 대복, 방문을 열고 등장한다. 주방을 어슬렁거리며 뭔가를 찾고 있다. 잠시 후 뭘 찾는지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가만히 서서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 기억이 났는지 서랍장을 뒤져 손톱깎이를 찾아 소파 쪽으로 온다. 소파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테이블 위에 발을 올려놓는다. 자신의 발을 불만스러운 듯 이리저리 살피는 대복. 한참을 들여다보다 깎기 시작한다. 통증이 있는지 간간이 허리를 펴고 심호흡을 한다. 동작을 반복하다 신경질이 나는지 손톱깎이를 옆 소파에 던져 버린다. 대복 빌어먹을! 발가락을 뽑아내든가 해야지. 소파에 드러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손톱깎이를 찾는다. 다시 발톱을 깎기 시작하는 대복. 곧바로 미닫이문이 열리고 휘파람을 불며 운수 등장한다. 무스로 정돈한 올백 머리, 알이 큰 선글라스를 쓰고, 동선운수라고 쓰인 택시회사의 제복을 입고 있다. 거울을 보며 한껏 폼을 잡는 운수. 그런 모습을 한심한 듯 쳐다보는 대복. 잠시 후 둘의 눈이 마주친다. 과장되게 인사를 건네는 운수. 운수 그간 옥체 건강하셨습니까? 대복 누구? 운수 저는 그러니까, 아들입니다. 대복 그런 이름은 내 머릿속엔 없는데. 여긴 어떻게? 분명 문을 걸어 잠갔는데. 운수 수척해 보이십니다, 아버님. 들어가서 쉬시지요. (혼잣말처럼, 하지만 대복에게도 들릴 정도로 크게) 큰일이야, 빨리 기억이 돌아와야 할 텐데. 대복 뽑아낼 게 있는데 뽑아낼 수가 없네요. 어째야 합니까, 하나님. 운수 하나님은 바쁘셔서 그런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대복 쑤욱, 하고 뽑혀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운수 세상에 있는 건 다 있을 만한 이유가 있어섭니다. 마음에 평안을 찾으시지요. 대복 실수를 하셨습니다. 아주 큰 실수를 하셨어요, 하나님. (발톱에 통증을 느끼는지 인상을 찡그린다) 운수 병원엘 가세요. 왜 가만히 두고 병을 키워요? 대복 내 병을 키우는 건 네놈이다, 이 망할 자식아. 운수 또, 또 그러신다. 혈압도 높은 양반이. 대복 어디 가서 뭘 했기에 이제야 기어들어오는 거냐? 운수 뭘 하긴요, 일했죠. 대복 네놈이 야간조인 건 너만 모르고 우리 가족이 다 알아. 운수 일 끝나고 피곤해서 그냥 회사 근처에서 잤습니다. 대복 걸어서 이십 분이면 오는 너의 회사 말이냐? 운수 밤새 운전만 하면 다리가 부어요. 천근만근입니다. 대복 그래, 알지 알아. 나도 사십 년을 운전만 해서 발톱이 이 모양이지. 보이냐? (발을 들어 운수 쪽으로 내민다) 얼빠진 놈. 대체 언제 정신을 차리려고. 운수 그만하세요. 저도 낼모레면 오십이에요. 대복 아유, 그러세요. 죄송합니다, 제가 겨우 칠십밖에 처먹지 않아서. 운수 먹을 만큼 먹었다는 거죠. 대복 어디서 같잖게 나이 타령이야? 운수 조심하세요. 곧 터집니다, 제 인생에 잭팟이. 뒷일, 감당할 수 있으시겠어요? 대복 감당 못해도 좋으니 제발 좀 터져다오 그놈의 잭팟. 운수 두고 보세요. (거울을 보며 머리를 다듬는다) 대복 (그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다 발톱을 깎기 시작한다) 어디 이름 모를 강에 가서 돌 껴안고 뛰어들든가 해야지. 운수 (소파에 앉으며) 그 의사 새끼 그거 돌팔이였나봐요. 수술한 지 얼마 됐다고 또 그래요? 대복 내성발톱이란 게 원래 그렇다. 운수 원래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요즘 같은 세상에. 대복 내 자식도 내 맘처럼 안 되는데, 뭔들 되겠냐? 운수 이 자식새끼는 자나깨나 아버님, 어머님 생각뿐입니다. 대복 자나깨나 노름 생각뿐이겠지. 운수 노름이라뇨. 친, 목, 도, 모. 남들이 오해하겠어요. 대복 그래. 하룻밤에 몇 백만 원이 오가는 친목도모. 운수 전 아니에요. 그런 돈도 없고. 대복 얼마나 다행이냐, 네놈이 개털인 게. 운수 총알만 있으면. (대복의 험악한 얼굴을 보고) 농담이에요, 농담. 대복 네 엄마 한 번 더 쓰러지면 네 귓구멍에 총알을 박아주마. 운수 말씀 한번 살벌하십니다. 대복 이 집의 절반이 아직도 은행 거라는 것도 잊지 않았겠지, 응? 내가 평생을 일해 장만한 이 집 말이야,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451-23번지! 운수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요. 느낌이 와요. 운의 바람이 저한테 불어오고 있다고요. 대복 여기 죄 많은 노름꾼 하나가 정신 못 차리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회개할 수 있게 정수리에 번개라도 내리쳐 주세요. 운수 요즘엔 말이죠, 상대가 어떤 패를 들었는지가 보여요. 대복 세 치 혀로 거짓을 일삼는 죄인입니다. 지옥의 문을 잠깐 열었다 닫아주실 순 없으신가요? 그 틈으로 살짝 밀어 넣고 싶습니다만. 운수 진짜라고요. 앉아서 딱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저놈이 지금 땡을 쥐고 있구나, 삼팔따라지를 쥐고 구라를 치고 있구나, 하는 게 보입니다. 대복 그거 정말 놀라운 일이구나. 어찌나 놀라운지 전혀 믿기지가 않아. 운수 열에 여덟은 정확하게 맞힙니다. 이제야 빛을 보는 겁니다, 그간의 세월 동안 쌓인 경험과 그리고. 대복 돈과 빚이. 운수 네, 그렇죠. 정말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터집니다, 빰빠라밤~. 대복 내 속이나 터지게 하지 마라. (사이) 그런데. 운수 네, 존경하는 아버님. 대복 상대 패가 보이는데 왜 돈을 못 따는 거냐? 운수 중요한 지적이십니다. 대복 이유가 뭐냐? 운수 제 패가 그놈들 패보다 낮아서죠. 대복 아! 그렇구나. 그렇지, 그래. 그걸 몰랐네. 내가 몰랐어. (사이) 어떤 패를 들었는지는 보이는데, 그 패를 이길 수 없는 개패만 들어온다 이거지. 그렇지? 운수 환장할 일이죠. 한 끗으로 밟히고 족보로 밟히고 땡으로도 밟히고. 대복 그러니까, 재수가 없는 놈이구나 너는. 운수 기다리세요. 아스팔트는 깔렸습니다. 달리기만 하면 됩니다. 대복 노름꾼에 거짓말쟁이에 재수까지 없는 아이입니다. 하나님 곁에 자리가 남아 있나요? 운수 정말, 미치겠다니까요. 대복 정신 빠진 놈. 발톱을 정리하고 대복이 뒷마당으로 나가자 운수는 피곤한지 소파에 깊이 몸을 묻는다. 잠시 후 안방 문을 열고 옥화 등장. 손에 쥔 기저귀를 주방 쪽에 있는 휴지통에 버린 후 소파 쪽으로 와 잠든 운수를 본다. 옆 소파에 걸쳐진 담요를 들어 운수의 몸에 덮어주는 옥화. 뒷마당에서 들어와 그 모습을 지켜보는 대복, 가만히 서 있다가 안방으로 들어간다. 옥화, 소파에 앉아 이불을 개기 시작한다. 운수 (깜짝 놀라 일어나며 잠꼬대한다) 야 이 개새끼야, 이 씨벌놈아. 내 돈이야.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며 씩씩댄다. 뜨악해하는 옥화와 눈이 마주치자 태연한 척한다) 언제 나오셨어요? 옥화 미칠 거면 저 산골 오지 같은 데 가서 미쳐다오. 내가 못 찾아갈 곳에. 운수 며칠 만에 본 아들이 조금은 반갑지 않으세요? 옥화 그럴 리가. 전~혀 반갑지가 않단다. 운수 마음에도 없는 말 하십니다 또. 옥화 네가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운수 별일 없었어요? 옥화 없었다. 운수 정말요? 옥화 어제도 없었고 오늘도 없었고, 내일도 없을 거다. 하긴, 그런 게 너한테 뭐 중요하겠니. 한 달에 반을 밖에서 자는 애가. 운수 저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니겠어요. 옥화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날 도와주는 거다. 운수 그럴까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멍청하게 손가락만 빨고 집안에 처박혀 있을까요? (사이) 빌어먹을. (일어난다) 옥화 혹시, 여자 생겼냐? 운수 무슨 소리에요? 옥화 정희 엄마가 봤다더라, 네가 어제 젊은 여자랑 시장 입구 족발집에 있는 걸. 운수 (다시 자리에 앉는다) 아, 그분. 평생을 남 얘기로 입을 털어오신 분이죠. 옥화 그래도 없는 얘긴 안 턴다. 누군데? 운수 아무 사이 아니에요. 옥화 말해봐. 어떤 사람인데? 운수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옥화 너 갔다 온 거 알아? 운수 나 참. 그냥 아는 다방 여자애예요. 옥화 다방? 운수 (실망한 듯 보이는 옥화를 보며) 대체 뭘 생각했던 거예요? 아직도 저한테 무슨 기대 같은 걸 갖고 계세요? 옥화 그런 거 없다. (사이) 좀 제대로 된 여잘 만나면 세상이 무너지냐? 운수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 옥화 알아서 하기는. 알아서 해서 이 모양 이 꼴이지. 운수 어머니! 불편한 침묵이 흐른다. 잠시 후 아기 울음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온다. 울음소리 점점 커진다. 운수 저거 아직도 안 갖다 버렸어요? 옥화 말 좀 예쁘게 해라. 저거라니. 운수 만석인 어디 갔어요? 옥화 씻는다. 운수 이 자식은 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옥화 이따 데려다주기로 했다더라. 운수 그래요? 옥화 정말 우리가 키우면 안 되겠냐? 운수 누구요? 옥화 우리! 운수 정신 나간 소리 하지 마세요. 옥화 만석인 절대 안 된다는데, 네가 얘기 좀 잘 해봐. 운수 나도 싫어요. 그리고 그게 그럴 수가 없어요. 대복 (목소리) 여보, 이리 좀 들어와 봐. 옥화, 뭔가 더 이야기를 하려다 말고 방으로 들어간다. 방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소파에 기대서 거실을 둘러보는 운수. 욕실 문이 열리고, 바지와 러닝만 입은 만석이 머리를 털며 등장. 운수 여, 아들. (모른 체하는 만석을 향해) 인사 좀 하지. 만석 오셨어요. 운수 그래. (방으로 곧장 들어가려는 만석을 멈춰 세우며) 아들아. 이리 좀 앉아봐라. 만석 바쁩니다. 운수 나도 바빠. 딱 일 분만 얘기하자. 만석 (앉으며) 왜요? 운수 (무심하게) 너, 뭐하는 놈이야? 만석 뭐가요? 운수 (주방 쪽에 있는 종이상자를 가리키며) 저거 말이야. 만석 저게 뭐예요? 운수 저거 말이야, 저거. 벌써 며칠째야? 열흘 정도 되지 않았냐? 만석 (알아차리고) 일주일밖에 안 됐어요. 운수 밖에는 뭐가 밖에야? 그 일주일 새에 저 방 안에 뭐가 채워졌는지 모르냐? 젖병에 딸랑이에 인형에. 그것만으로도 한 살림이다. 만석 오늘 데리고 갈 겁니다. 담당자 만나기로 했어요. 운수 그런 건 바로바로 처리했어야지. 만석 제가 알아서 합니다. 운수 아니지, 아니지. 이건 우리의 문제라고. 네가 저걸 이 집 안에 들여놓았던 순간부터 말이야, 우리 가족은 모두 공범이 된 거라고. 만석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담당공무원과도 이미 다 얘기가 됐거든요. 운수 공무원? 이 자식 순진하게. 걔네들이 뒤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누가 알아? 다짐을 받아 놔야지 서면으로다. 만석 믿을 만한 사람들이에요. 애 있는 동안 매일 찾아와서 체크하고. 운수 (말 자르며) 확실하게 하란 말이다. (사이) 여자는? 연락은 됐고? 만석 아뇨. 전화기가 계속 꺼져 있어요. 운수 처음 몇 번은 받았잖아. 만석 받았죠. 운수 뭐라고 그랬댔지? 그 남자 애가 확실하니까 잘 키우든, 아님 고아원에 버리든 알아서 하라고? 만석 그랬죠. 운수 망통 같은 년. 애가 무슨 쓰레기야? (사이) 남자는? 만석 여전히 연락 두절. 출입국 기록을 보면 필리핀 쪽으로 간 것 같다던데. 운수 하긴 나라도 웬 여자가 네 애 낳았으니까 네가 알아서 키워 했으면 외국으로 떴을 거다. 만석 경찰이 조사하고 있으니까 곧 해결되겠죠. 운수 뭐, 하든 말든. 아무튼 요즘 젊은 것들은 이해를 못 하겠어. 대체 어떤 강심장이면 애를 박스에 담아서 퀵으로 보낼 수 있나? 대단해, 대단해. 졸라게 놀라워. 안 그러냐? 만석 전 별로. 어렸을 때부터 하도 놀라운 일을 많이 겪어서. 본인이 제일 잘 아시잖아요. 운수 넌 누굴 닮아서 그렇게 비아냥이 수준급이냐? (말이 없는 만석을 향해) 됐고. 정말 네 애 아니지? 마지막 기회다. 지금 말하면 다 용서해주마. 만석 대체 몇 번을.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요? 운수 근데 너도 생각을 해봐. 퀵으로 물건을 받았어. 물건을 받았는데 수취인이 없어. 수취인도 없고 돈도 착불이라 못 받고. 다시 연락을 하니까 전화기가 꺼져 있어. 하는 수 없이 집으로 가져왔는데, 짜잔. 램프의 요정처럼 아이가 튀어나왔네? 너라면 이게 이해가 가냐? 만석 이해가 안 가면 이해를 하지 마세요. 어차피 관심도 없잖아요. 운수 네가 이 애빌 가다마사, 띄엄띄엄 보는, 아주 건방진 경향이 있는데. 만석 (말 자르며) 됐어요. 내 애 아니고, 오늘 데려다줄 거고, 그걸로 끝입니다. 그러니 더는 아무 말 마세요. 운수 (곰곰이 생각하다) 그런데 말이야. 이런 경우엔, 뭔가 보상금 같은 거 안 주냐? 일주일을 먹이고 재우고 씻기고 했는데. 만석 안 줍니다. 버려진 애 돌봐주고 무슨 돈을 바래요? 양심도 없어요? 운수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양심이 무슨 소용이라고. 그러다 손가락 빨고 사는 거야. 손해만 보다 빚더미에 올라앉는 거고. 만석 우리 집도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죠. 누구 덕분에. 운수 (기분 나빠하지 않고 반색하며) 그러니까, 뭔가 탈출구가 절실한 상황이다. 아들아. 그런 의미에서, 총알 좀 있냐? 이번에야말로 빚에서 좀 벗어나보게. 만석 (어이없어하며) 없어요. 운수 갚는다, 갚아. 이번에 한꺼번에 갚는다. 얼마지 이제까지 빌린 게? 한 백만 원 되냐? 만석 이백십팔만 사천오백 원이요! 운수 거짓말하지 말고. 만석 이자 빼고 원금만! 운수 그렇게 많았냐? 사천오백원은 뭐야? 대복 지난주에 가져간 담뱃값이요. 운수 아, 그래, 백 원짜리랑 십 원짜리 말이지. 집 앞 편의점 알바애가 실실 쪼개더라. 십 원이 남네요, 하면서. 그 뒤로 내가 거길 못 가요. 만석 능력 없으면 끊으세요. 운수 담배까지 못 피우면 이 엿 같은 세상을 어떻게 견디겠냐? 만석 그래서, 얼마요? 운수, 비굴하게 웃으며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인다. 만석,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만석 여기요. 운수 (지폐를 보며) 뭐냐 이게? 만석 담배 네 갑은 살 수 있을 겁니다. 운수 (손가락 두 개를 힘차게 펴며) 이 두 개를 말한 거지, (손가락을 굽혀서 내보이며) 이 두 개가 아니라. 만석 없어요. 운수 그러지 말고. 이번 주말 지나면 바로 준다니까, 진짜로. 만석 없습니다. (사이) 다음주 할머니 병원 가는 거 알고 있죠? 운수 벌써 한 달이 지났냐? 만석 이번엔 몇 십만 원이라도 좀 내세요. 할아버지도 나도 이제 돈 나올 데가 없어요. 목구멍까지 찼다고요. 운수 알았어, 알았어. (혼잣말처럼) 그러니까 내가 신약으로 하자니까. 만석 할머니가 빨리 돌아가셨으면 좋겠어요? 운수 네 할머니이기 전에 내 엄마야. 어디서 돼먹지 않은 소리야? 만석 똑바로 하시라고요, 그러니까.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지폐를 하나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이게 다예요. 운수 필요 없어, 새끼야. 보자 보자 하니까 지 애비를 허수아비 짚단으로 알아. 싸가지 없는 새끼.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간다. 잠시 후 다시 나와 지폐를 챙기고 욕실로 향한다) 두고 봐, 이자까지 톡톡히 쳐서 네놈 얼굴에 뿌려줄 테니까. 만석 이백이십오만 사천오백 원입니다. 운수, 가만히 노려보다 욕실로 들어가 문을 세차게 닫는다. 멍하니 지갑을 들여다보는 만석. 한숨을 쉬다 옆에 놓여 있는 빨랫감을 발견하고 정리하기 시작한다. 잠시 후 빈 분유통을 들고 나오는 옥화. 분유통을 싱크대에 넣은 후 소파로 와 앉는다. 옥화 저녁은 어떡할래? 만석 바로 나가봐야 해요. 옥화 뭐가 급하다고 밥도 걸러. 찌개 끓여 놓은 거 데우면 되니까 한술 뜨고 가. 만석 담당 직원이 곧 전화할 거예요. 준비하고 있다 바로 나가야 해요. 옥화 그 사람은 주말에도 일한다니? 만석 그 사람도 빨리 마무리하고 싶겠죠. 옥화 여기 있는다고 애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뭘 그리 야박하게. 전화해서 월요일에 데리러 오라 그래라. 만석 이미 끝난 일이에요. 더이상은 안 돼요. 아까 얘기드렸잖아요. 옥화 그래도 그러는 게 아니야. 애를 데려가면 재울 데는 있대? 분유는 탈 줄 알고? 이제야 겨우 적응 좀 했는데, 또 이렇게 다른 데로 보내면 애가 놀라. 월요일에 오라 그래. 만석 그 사람들은 그게 직업이에요. 버려진 애들 보살피는 거. 옥화 버려지다니. 만석 빨리 가야 적응을 하죠. 여기서 계속 살 수 없잖아요? 옥화 왜 못 살아? 그냥 살면 되지. 아버지가 아무 얘기 안 하던? 만석 (얼버무리며) 별말 없었는데요. 옥화 하여튼 도움이 안 돼요. (사이) 한 번 더 생각해봐라. 만석 뭘요? 옥화 우리가 키우는 거 말이다. 만석 (단호하게) 그건 안 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옥화 네가 말한 그 절차라는 것만 해결하면 키울 수 있는 거잖냐. 만석 그냥 들은 걸 얘기한 거예요. 저도 잘 몰라요. 사실 알고 싶지도 않고요. 옥화 그 애 얼굴을 봐서 알잖니? 큰 눈망울, 둥근 콧잔등에 숱도 무성하고. 사랑받으며 크면 이쁘게 자랄 거야. 천벌받아, 그런 애 버리면. 만석 천벌받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어요. 애가 어떻게 되든 말든 버리고 도망간 사람들이죠. 옥화 이 할미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싶다. 만석 자식을 버리는 게 이해가 가요 할머닌? 그래요? 옥화 (당황하며) 그건 아니다만. 그래도 이게 다 인연 아니겠나 싶고. 만석 여긴 그냥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에요. 길어지면 불행한 인연이 될 뿐이죠. 옥화 애 생각을 해봐라. 어디 멀리 외국에 보내져서 소젖 짜고 양털이나 벗겨내게 할 셈이냐? 만석 누가 그래요? 옥화 나도 귀가 있고 눈이 있어. 티비에서 다 봤다. 만석 팔려 가는 게 아니에요, 입양이죠. 외국 가서 더 잘 먹고 좋은 교육받고 더 사랑받고 클 거예요. 그리고 아무려면 어때요. 내 아이도 아닌데. 옥화 우리 손자가 언제부터 이렇게 인정머리가 없어졌을까. 민달팽이 집이 없다고, 불쌍하다고 울던 우리 착한 손자는 어디 갔을까. 응? (사이, 달래듯) 그러지 말자. 어디 보내지 말고 우리가 키우자. 만석 우리 형편을 좀 생각하세요. 옥화 입 하나 는다고 당장 내일 굶어 죽는다니? 제 먹을 건 타고나는 거야. 만석 다 있는 사람들 이야기에요. 옥화 네가 그렇게 나오면 나도 다 생각이 있다. 만석 무슨 생각이요? 옥화 그 절차라는 거, 내가 하면 되지. 만석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옥화 왜 말이 안 돼? 만석 할머니는 안 돼요. 옥화 내가 왜 안 돼? 만석 암 환자가 무슨 애를 키워요? 옥화 (당황하며) 그게 무슨. 암 환잔 애를 못 키운다니? 만석 입양도 못 할 거예요. 옥화 이 집에 나 혼자뿐이냐? 너도 있고, 운수도 있고, 네 할아버지도 있고. 만석 전 빼주세요. 도와 드리지 않을 거니까. 옥화 그래, 그럼 넌 빠지고. 나랑 네 애비랑, 아니 네 할아버지랑 키우지 뭐. 만석 맘대로 하세요. 근데 애는 오늘 데리고 갈 거예요. 그렇게 하기로 했고요. 얘긴 끝났습니다. 옥화 안 된다. 그렇게 안 둘 거야, 이 할미가. 만석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렇게 하셔야 해요. (방으로 향한다) 옥화 (혼잣말처럼) 커갈수록 지 애비를 닮아가는 건지. 만석, 옥화의 말을 듣고 잠시 멈춰 서 있다가 그대로 방으로 들어간다. 옥화, 멍하니 앉아 있다. 잠시 후 대복 안방에서 나온다. 검정색 양복을 입고 있다. 욕실 문을 열고 깜짝 놀라는 대복. 대복 아이고 깜짝이야. 뭔 짓이냐, 이 망할 자식아! 운수 (목소리만) 뭐가요? 대복 왜 그러고 섰냐고? 운수 (목소리만) 하루에 삼사 분씩 이렇게 물구나무를 서줘야 뇌경색에 안 걸린답니다. 대복 옷이나 처입고 해라. 운수 (목소리만) 아버지, 여긴 욕실이라고요.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는 대복. 주방으로 가 대충 손을 닦고 거실 쪽으로 나와 소파에 앉는다. 대복 애새끼가 갈수록 이상해져. (사이, 혼자 웃으며) 아, 고놈, 참 여자애라서 그런지 애교가 장난이 아니네. 눈웃음치는 게 어찌나 이쁜지. 안 그래? (옥화가 반응이 없자) 뭐해? 옥화 응? 왜요 왜? 대복 어따 정신을 팔고 있어? 옥화 뭐라고 했어요? 대복 밥 먹자고. 옥화 아, 그래요, 그래야죠. 대복 (일어서는 옥화를 말리며) 이 사람이 나사가 빠졌나. 있어 그냥. 저녁은 무슨. 연씨네 상갓집 가기로 했잖아. 옥화 어디요? 아, 그랬죠, 상갓집. 대복 약 때문에 그래? (문득 생각난 듯) 아, 애는 만석이가 보나? 옥화 (힘없이) 조금 있다 데려다주기로 했대요. 대복 (실망한 듯,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래. 오늘? 뭔 사람들이 주말에도 일을 하나. 옥화 만석일 잘못 키웠나 봐요. 대복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옥화 엄마 없는 손자새끼, 기 안 죽이고 번듯하게 키우려고 어르고 달래고 오냐오냐 키웠더니 어른 되더니 인정머리도 없고, 고집불통에, 저밖에 모르고. 대복 헛소리하지 마. 만석이만 한 놈이 요즘 세상에 어디 있다고. 내가 살면서 유일한 자랑거리가 있으면 만석이 놈이 내 손자라는 거야. 옥화 나도 그런 줄 알았죠. 대복 맘고생을 하면서 커서 그런지 어린놈이 어둔 구석이 있긴 하지만. 옥화 친구도 하나 없는 거 아니겠죠? 대복 헛소리 지껄일 거면 가서 옷이나 챙겨 입고 나와. 옥화 정말 우리가 키우면 안 될까요? 대복 누굴? 옥화 저 애요. 대복 어허, 이 사람. 물이나 줘. 옥화 왜요? 불가능한 일도 아니잖아요. 대복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무책임한 일이지. 옥화 (물을 가지러 가며) 풍족하게 키우진 못해도 부족하게 안 키우면 되잖아요. 딴 집에 가서 어떻게 클지 누가 알아요.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데. 대복 당신이 신경쓸 일 아니야 그건. 옥화 그럼 난 뭘 할까요? 왜요? 당신도 암 환자가 뭔 소릴 하나 싶은 거예요? 대복 이 사람, 할 게 왜 없어? 옥화 뭐요? 대복 (무심하게) 잘 보내줘야지. 둘 다 잠시 말이 없다. 잠시 후 물을 떠서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옥화. 대복, 마신다. 대복 (곧바로 잔을 내려놓으며) 찬물 없어? 옥화 따뜻한 거 드세요. 대복 사십 년 동안 내가 따뜻하게 마시는 거 봤어? 옥화 배 아프다면서요. 대복 그런 적 없는데. 옥화 지난밤에도 배 붙잡고 끙끙댄 거 다 알아요. 대복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안 돼. 살던 대로 살아야지. 옥화 살던 대로 살아서 이 모양 이 꼴이잖아요. 대복 우리 꼴이 어때서? 이만하면 잘살았지. (냉장고 냉동칸에서 얼음을 꺼내 컵에 담아 휘젓는다) 옥화 거기 찬장 위에 좀 봐요. 대복 왜? 옥화 만석이가 무슨 비타민인가 사왔다고 하루에 하나씩 먹으라고 했어요. 대복 (찬장을 뒤적여 약통을 꺼내 읽는다) 아쿠알렌? 이게 뭔데? 옥화 몰라요, 몸에 좋대요. 대복 당신이나 먹어. 옥화 드세요. 대복 아, 안 먹어. 내가 평생 약이란 걸 먹고 살았던가. 당신이나 꼬박꼬박 챙겨 먹어, 까먹지 말고. (약통을 다시 찬장에 넣는다) 옥화 난 다른 약 못 먹어요. 의사가 그랬어요, 치료하는 동안 다른 약은 먹지도 말라고. 대복 (찬장 문을 닫으며) 아, 몰라. 그럼 낫고 나서 먹든가. (그냥 물만 마신다) 옥화 사람이 말을 하면 듣는 척이라도 좀 해봐요. 따뜻한 물도 싫다, 약도 싫다, 그놈의 고집은. 대복 칠십 년을 이렇게 살았어. (소파 테이블로 잔을 가져온다) 옥화 앞으로 반백년은 더 살 텐데, 지금부터라도 건강 챙겨야죠. 대복 시답지 않은 소리. 오늘내일하는데 새삼스럽게 뭔 건강 타령이야. 요즘엔 아주 귀가 따가워, 하도 몸 여기저기가 곡소리를 내서. 운전도 그만해야 할까봐. 무슨 정신으로 운전을 하는지 모르겠어. 이젠 내가 겁이 나. 차 몰고 가다 승객들 얼굴을 보면 이 사람들, 다 내 저승길에 데려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니까. 요즘엔 정말이지 제발 곱게만 죽었으면 하는 게. (시무룩해하는 옥화를 보며) 괜찮겠어? 상갓집엔 나 혼자 가도 돼. 옥화 아니에요, 같이 가요. 연씨네가 남도 아니고. 대복 인생 참 허무하지. 그 양반이 그렇게 갈 줄 누가 알았어? 옥화 그러게요. 그렇게 시간 아깝다고, 바쁘게 살아야 한다더니 정말 바쁘게 가버렸네요. 대복 그러니까, 뭐든 적당히 하며 살아야 해. (사이) 몸은 어때? 옥화 그냥 그래요. 대복 그냥 그렇다고? 옥화 그냥 그렇다고요. 대복 그냥 그런 게 어떻다는 거야? 좋다는 거야, 나쁘다는 거야? 옥화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아요. 대복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다) 그러니까 그게 뭔 말이야? 옥화 아휴, 그냥 그런 줄 알아요. 대복 (멋쩍은 듯 주변을 둘러본다) 사람이, 자꾸, 화가 늘어. 옥화 피곤해요. 좀 누워 있다 나올게요. 대복 전기장판 켜놨어. 옥화 벌써 무슨 전기장판을 켜요, 돈 아깝게. 대복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자면서 오들오들 떠는 거 보기 싫어. 이불도 깔아놨으니까 가서 누워 있어. 옥화 (문득 생각난 듯) 애들 밥을 차려줘야 하는데. 대복 내가 차려줄 테니까 들어가. 옥화 당신이 무슨. 대복 어허, 들어가. 나도 다 할 줄 알아. 옥화 (머뭇거리다) 그럼, 좀만 누울게요. 대복 들어가, 들어가. 옥화 방으로 들어가고 홀로 남은 대복. 천천히 거울 앞으로 걸어간다. 양복 안주머니에서 넥타이를 꺼내 매기 시작한다. 하지만 잘되지 않는지 번번이 실패한다. 욕실 문을 나와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운수. 대복이 포기하고 소파로 걸어 나오자 헛기침을 하며 소파로 다가오는 운수. 욕실로 들어갈 때와 똑같은 모습이다. 운수 아, 개운하다. 대복 (시계를 보고, 운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제대로 씻기나 한 거냐? 운수 진정한 신사는 항상 한결같아야 합니다. 대복 네가 한결같이 얼간이긴 하지. 운수 또 그러신다. 하나뿐인 아들이 얼간이면 퍽도 좋으시겠네요. 대복 이럴 줄 알았다면 줄줄이 낳을 걸 그랬지. 운수 그러시지 그랬어요? 대복 먹고살기가 힘들어서 그랬다. 네놈 하나 건사하기도 버거울 것 같아서. 운수 찢어지게 가난한 건 아니었잖아요, 우리가? 대복 (놀란 얼굴로) 네놈 태어났을 때 우리 전 재산이 얼마였는 줄 아냐? 수중에 칠만 원이 있었다, 칠만 원! 자장면 한 그릇에 삼십 원이었는데, 그걸 못 사먹었다, 돈이 아까워서. 운수 귀에 인이 박이겠어요 그 얘긴. 대복 부탁이니 제발 그 쓸모없는 귀에 좀 박아 놔라. 어디 구멍이라도 뚫린 거냐? 왜 맨날 듣고 흘려, 흘리긴? 운수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사이) 어머닌요? 대복 방에 누워 있다. 운수 밥 먹고 바로 일하러 가야 하는데. 어머니! 대복 네가 차려 먹어라. 운수 왜요? 대복 내 마누라가 네놈 종이냐? 앞으론 네가 차려 먹어. 운수 나 참, 계속하실 거예요? 그만하시죠. 대복 밥솥 안에 밥 있고, 냄비 안에 찌개 있다. 그 손 노름할 때만 쓰지 말고 이젠 네 엄마 좀 도와라. 운수 아니, 밥을 나만 먹어요? 숟가락 하나만 얹자는데, 그것도 못마땅하세요 이젠? 대복 (넥타이를 살피면서) 네 엄마랑 난 초상집 갈 거다. 운수 무슨 초상집을 하루건너 하루씩 가요? 대복 난들 아냐? 줄줄이 하나님 품으로 가는 걸 내가 무슨 수로 막아? 운수 또, 또 흥분하신다. 대복 봐라. 네 애비 꼴을 봐. 나도 곧 간다. 차에 치여 가고, 산책하다 심장마비 걸려 가고, 자다 가고, 내 친구들 다 그렇게 갔어. 나도 멀지 않았다. 운수 아버진 오래 사실 겁니다. 걱정 마세요. 대복 말 나온 김에 하나만 물어보자. 운수 묻지 마세요. 대복 너, 나 가고 네 엄마 가면 뭐하고 살래? 그냥 지금처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동네 노름판이나 기웃거리면서 주인 없는 강아지마냥 떠돌면서 살고 싶냐? 운수 퍽도 좋겠습니다. 대복 정신 좀 차려라. 네 나이가 벌써 오십이야. 운수 오십이 뭐 어때서요? 대복 뭔가 대단한 건 못 해냈어도 대단한 척은 해야 할 나이 아니냐. 내가 딱 네 나이 때 이 집을 샀다. 빚 하나 없이. 너도 기억하지? 운수 당연히 기억하죠. 제가 그때 결혼했잖아요. 대복 (당황하며) 그랬냐? 운수 말 나온 김에 저도 하나 물어볼까요?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대복 (말 자르며) 묻지 마라. 운수 그 여잘 왜 그렇게 싫어하셨어요? 대복 그런 적 없다. 운수 나이가 너무 많아서? 근본도 알 수 없는 고아여서? 술집에서 니나노 하던 여자라서? 셋 중에 골라보세요. 아니면, 주관식으로 하셔도 되고요. (대답 없는 대복을 향해 채근하듯) 네, 네? 대복 이상한 아이였다. 음침하고 말도 없고 늘 남의 눈치만 살피고. 병 걸린 사람처럼. 운수 멀쩡할 리가 있습니까? 평생을 비바람 속에서 살아가보세요. 누구라도 이상해집니다. 하지만 절 사랑해줬습니다. 저도 사랑했고요. 대복 나는 네가 더 나은 사람을 만나길 바랬다. 운수 거짓말 마세요. 아버진 그냥 그 여자가 싫었던 겁니다. 아님, 제가 싫었던 건가요? 대복 그 시절 우리 대 부모들은 다 그랬다. 어떤 부모라도 그랬을 거야. 우린 옛날 사람이다. 운수 심지어 만석일 낳고 나서도 변하지 않으셨죠. 아버지도! 어머니도! 대복 그 애가 도망간 게 우리 탓이라는 거냐? 운수 (어이없어하며) 그럼, 누구 잘못일까요? 두 분 말고 그 여잘 싫어한 사람이 또 있었나요? 대복 그만하자. 이십 년도 지난 얘기. 운수 그러죠. 그러니까 쓸데없는 얘기하지 마세요, 아버지도. 대복 (분노하며) 쓸데없는 얘기? 그래서? 앞으로도 그렇게 개차반처럼, 한량처럼, 동네 사람들한테 손가락질받으면서 살겠다고? 운수 제 인생입니다. 남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안 써요. 대복 신경써라 써. 이 지옥불에 빠질 자식아. 이 동네에서 사십 년을 살았어. 모두가 우릴 안단 말이다. 운수 아버지를 아는 거죠. 어머니를 아는 거고. 대복 너는 뭐 어디서 날아 들어왔냐? 네가 우리 집안 골칫덩이인 것도 다 알아. 운수 그렇게 부끄러우시면 나가 드릴까요? 대복 안 되지, 안 돼. 그럴 수야 없지. 나가서 또 무슨 사골 치려고. 수작 부릴 생각 마라. 운수 아, 그렇죠. 이 집이 아직까지 반은 아버지 거죠? 대복 (정색하며) 더는 안 된다. 한 번 더 사고 치면 그땐 정말 너랑 나랑 갈라서는 거다. 운수 갈라서는 게 그리 낯선 경험이 아니라서. 대복 돈은 어떡할 거냐? 운수 무슨 돈이요? (황당해하는 대복을 향해) 갚을 테니 기다리세요. 대복 원금은 바라지도 않으니 은행이자라도 내놔라. 운수 갚습니다, 원금까지 다. 십 원짜리 하나 빼놓지 않을 테니까 두고 보세요. 대복 말했다. 이자. 운수 알았다고요. 갚는다고요. 이때 방문이 열리고 만석이 거실로 나온다. 외출복 차림이다. 운수 여, 아들아. 아버지 밥 좀 차려다오. 주방으로 향하는 만석. 밥을 차리려 하는 줄 알고 득의만만해하며 대복을 향해 웃음 짓는 운수. 만석이 박스를 살펴보고 소파 쪽으로 가져오자 실망한다. 운수 아드님? 제 말 귓구멍에 들리셨어요? 만석 차려 드세요. 바로 나가봐야 돼요. 운수 뭐 어려운 일이라고. 밥 푸고 찌개 데우고 반찬 꺼내놓으면 되지. 만석 그렇게 하시면 되겠네요. 운수 캬아, 아버지. 보셨죠. 제 아들이 저렇게 자기 소신이 있고 싸가지가 없습니다. 대복 차려 먹어라 네가. 만석아, 이리 와서 이것 좀 봐라. 운수 아버지, 우리 집안에 언제부터 예의범절이란 단어가 사라진 거죠? 대복 넥타이를 못 매겠어. 만석, 대복 목에 건 채로 넥타이를 매보다가 안 되자 벗겨내 거울 앞으로 가져가 자기 목에 걸고 매듭을 맨다. 운수 하긴. 원래 대단한 집안은 아니죠 저희가. 족보도 없고. 대복 상놈의 집안이라서 미안하구나. 운수 상놈까지는 아니고. 농민이나 소작농, 그 정도 아니었을까요 우리 조상님들은. 대복 내 십이대손 할아버지께선 정오품 정량 별좌 교리셨다. 네놈의 십삼대손 할아버지 말이다. 운수 처음 듣는 얘기네요. 대복 그럴 리가. 삼십 원짜리 자장면 얘기 다음으로 많이 해줬을 텐데. 만석 (넥타이를 대복의 목에 걸어주며) 잠깐 봐요. (정리를 해준다) 됐어요. 운수 아들아, 너는 이 얘기 들어봤냐? 우리 조상 중에 정오품 정, 뭐, 아무튼, 그런 분이 계셨다는데. 만석 근데 이거 너무 낡았어요. 대복 괜찮다. 아직 쓸 만해. 운수 아주 개가 짖는구나, 개가 짖어. 내 말은 다 씹어 드셔들. 만석 이거밖에 없어요? 여기 실밥도 다 터지고. 다른 거 하세요. 대복 괜찮다니까. 운수 손자분 말 들으세요. 온 동네가 영감님을 아신다면서요. 만석 제 거 있는데 가져올게요. 대복 (만류하며) 됐다. 상갓집에 요란하게 하고 가는 거 아냐. 이 정도가 딱 좋아. 만석 할머니랑 같이 가세요? 대복 그래. 저녁 같이 챙겨 먹어라. 만석 저도 바로 나가봐야 해요. 운수 차리고 가라. 네 아버진 배고프다. 대복 밥은 먹어야지. 운수 그래, 밥은 먹어야지. 만석 약속 있어요. 대복 그러냐? 제대로 된 거 먹고 다녀라. 운수 난 약속 없다. 밥 차려줘라. 만석 할머닌요? 대복 방에. 슬슬 깨워야겠다. 만석 제가 들어갈게요. 애도 데리고 나와야 하고. 운수 찌개 데우고 들어가라. 밥 퍼놓고 데리고 나와. 반찬도 꺼내고. 만석 그만 징징대세요. 운수 뭐, 징징? 오냐오냐하니까 이 새끼가 정말. 만석 이젠 제발 철 좀 드시죠. 운수 아유, 그래요. 철이 일찍 들어서 몸이 무거우시겠어요 우리 아드님은. 만석 가족은 안중에도 없죠? 할머니, 할아버지가 고생을 하든 말든 그냥 아버지 편한 대로 살면 그만이죠? 운수 핏대 세우지 마라. 한 대 치겠다 그러다? 만석 할머니 치료비도 그렇고. 할아버지 발톱 수술 못 하는 거 돈 없어서인 거 알고나 있어요? 대출이자가 한 달에 얼만지나 알고 있냐고? 운수 다 아니까 침 튀기지 마라. 만석 아시면 아는 만큼 내놓으세요. 운수 퍽이나 많이 내놓나 보지? 오토바이 그거 타서 얼마나 버냐? 백? 이백? 만석 다른 사람한테 손 안 벌릴 정도는 버니까 걱정 마세요. 운수 아주 그거 돈 조금 빌려줬다고. 만석 모범을 좀 보이시라고요. 운수 왜? 내가 못 미덥냐? 너도 네 엄마처럼 도망갈래? 대복 (엄하게) 그 입 다물어라. 네 귀방맹이 날릴 힘은 나도 아직 있으니까. 운수 좋아요! 한번 해볼까요, 오늘? 삼대가 진하게 한번 엉켜볼까요? 만석 그만하죠. 운수 왜? 막상 하려니까 쫄려? 어이, 아들, 와 봐. 와보라고. 운수, 자리에서 일어나는 만석을 따라가며 뒤통수를 톡톡 친다. 그러다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뒤통수를 때리자 만석이 되돌아서 운수의 양손을 잡아챈다. 바닥에 떨어지는 지폐. 곧바로 만석의 멱살을 쥐는 운수. 운수의 팔목을 강하게 쥐는 만석. 대복, 테이블에 있는 컵을 그들을 향해 던진다. 대복 나가라. 내 집에서 당장 나가. 네놈들 둘 다 나가서 영원히 돌아오지 마. 적막이 흐르고, 잠시 후 옥화가 방문을 열고 등장한다. 차분한 옷차림, 손에 바구니를 들고 있다. 바구니 안엔 아이가 잠들어 있다. 운수와 만석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무심히 지나치는 옥화. 테이블 위에 바구니를 올려놓고 소파에 앉는다. 대복을 보고 이마를 찌푸리는 옥화. 옥화 아, 또 왜 그 넥타이를 했어요. 버렸어도 벌써 버렸어야 할 걸. 대복 이 사람 버리긴 왜 버려 이걸. 옥화 멀쩡한 넥타이를 두고 왜 자꾸 그것만. 대복 다 자기 몸에 맞는 게 있는 거야. 난 이게 편해. 옥화 그놈의 고집은. 이때, 전화벨이 울리고 만석 통화한다. 통화가 끝난 후 옥화에게 다가오는 만석. 옥화의 눈치를 보다가 바구니에 손을 뻗는 만석. 옥화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라. 만석 가야 해요, 할머니. 옥화 알았어. 안 보내겠다는 게 아니야. 여기, 이것만 좀 하고. (바구니를 정리한다) 대복 (바구니를 들여다보며) 거기, 거기. 바람 안 들어가게 잘 좀 욱여넣어 봐. 옥화 알겠어요, 있어 봐요. 대복 한 번 더 포대기에 싸야 하지 않겠어? 옥화 그럴까요? 바람이 차니까 아무래도. 만석 그 사람이 집 앞까지 차 가지고 오기로 했어요.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대복 그렇다는데? 옥화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거 없으니까. (계속한다) 운수 (상자를 발로 툭 차며) 야, 이것도 같이 가져가. 여기다 담아왔으니 여기에 담아가야지. 옥화 저 상잔 두고 가라. 저기에 또 이 애를 가둘 수는 없어. 그럴 순 없어. 만석 알겠어요 할머니. 그렇게 할게요. 대복 어이쿠. 깼는데? 여보, 깼어. 옥화 (바구니 안을 보며) 간다고 또 인사한다고 깬 거야, 기특하게? 그런 거야? 대복 우루루루루, 까꿍. 웃는다 웃어. 고놈 참. 옥화 한 번 더 해봐요. 대복 그럴까? 우루루루루, 까꿍! 옥화 (만석을 향해) 아가, 방에 파란색 가방 하나 있어. 그거 좀 갖고 나와. 대복 뭔데? 옥화 애한테 필요한 것 좀 쌌어요. 대복 딸랑이도 넣지 그랬어. 그거 좋아하던데. 옥화 넣었어요. 대복 잘했네. 운수 (빈정거리듯) 참, 재미나게 사십니다, 두 분. 알콩달콩, 보기 좋네요. 대복 아직도 안 나갔냐? 운수 나가야지요. 이 집에 제가 있을 곳이 없는데. 대복 밖엔 있고? 운수 글쎄요. 정말 이제부터라도 찾아볼까요? (바닥에 떨어진 돈을 줍는다. 가방을 가지고 나오는 만석과 눈이 마주치지만 서로 외면한다) 돈도 생겼겠다. 옥화 밥 한 숟갈 뜨고 가. 너 좋아하는 꽃게찌개 끓여놨어. 잠시 침묵. 운수 됐어요. 약속 있어요. 옥화 그럼 냉장고에 넣어 놓을 테니까 낼 아침에 들어와서 먹어. 운수 그냥 드세요. 얼마 된다고 그걸 남겨요. 갔다 올게요. (나간다) 옥화 (밖에서 들리게 큰소리로) 냉장고에 넣어 놓는다. 알았지? 알았지? 대복 (가방을 들고 서 있는 만석에게) 왜 그러고 섰어? 앉아. 만석 집 앞에 와 있대요. 대복 벌써? 만석 네. 옥화 (바구니를 들여다보며) 잘살아라. 사는 게 제 맘처럼 되는 것도 아니니까 부모 원망 말고 운명이려니, 팔자려니, 누구 탓할 것도 없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면 세월 가고 세월 가면 언제 이만큼 왔나 싶을 테니 하루하루 즐겁게 웃으면서 살아. 네 세상도 한세상, 내 세상도 한세상, 결국 한세상 사는 거니, 그러니까 너는 멀리멀리, (떨리는 목소리) 발길 닿는 데까지 멀리 가렴. 대복 (꽃병에서 꽃을 꺼내 바구니 옆에 감는다) 꽃바구니 타고. 옥화 그래, 꽃바구니 타고. 어디, 하루하루가 오늘만 같겠니? 대복 그래. 오늘만 같을라고. 전화벨이 울리지만 받지 않는 만석. 그런 만석을 가만히 올려다보는 옥화. 천천히 바구니를 내어준다. 만석 갔다 올게요. 늦을지도 몰라요. 먼저 주무세요. 대복 그래. 얘기 잘하고 와. 만석 네. 저 가요, 할머니. 반응 없는 옥화. 대복 손짓으로 만석을 보낸다. 만석 밖으로 나간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에 다가가 밖으로 나가는 만석을 지켜보는 대복. 잠시 후 자리로 돌아온다. 그사이 옥화 역시 일어서 서성이다가 가운데 소파에 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대복 그 옆에 앉아 정면을 응시한다. 대복 갔네. 옥화 갔네요. 대복 그래. (사이) 어떡할까? 우리도 가야지? 옥화 가야죠. 대복 안 가면 안 되겠지? 옥화 안 되겠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씨잖아요. 대복 그래. 가야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씨니까. 옥화 네. 대복 그럼 갈까? 옥화 그래요, 가요. 대복 그래. 가자구. 옥화 가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두 사람. 무대 서서히 어두워진다. 암전.
  • 백마 탄 ‘산타’ 한여름 ‘이브’

    백마 탄 ‘산타’ 한여름 ‘이브’

    350년 교황 ‘그리스도 탄생일’ 선언 … 동방정교 국가는 13일 늦은 1월 7일러시아는 순록 대신 미녀 파트너…아르헨티나는 찬 사과주스 마시며 파티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전 세계가 성탄절 분위기 내기에 여념이 없다. 우리는 빨간 옷을 입은 산타가 트리 등에 걸린 양말에 몰래 선물을 넣어 두고 가는 날로 생각하지만 모든 나라가 다 같은 것은 아니다. 크리스마스는 2000년 가까이 전 세계로 퍼지며 각 지역의 전통을 흡수해 다양한 형태로 발전돼 왔다. 지구촌이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이모저모를 살펴봤다. ●비기독교 문화권 亞·아프리카서도 성대히 치러 크리스마스는 라틴어 ‘그리스도’(Christus)와 ‘모임’(massa)을 합친 말로 ‘구세주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모임’이라는 뜻의 종교 예식이다. 12월 25일이 예수의 실제 탄생일인지는 알 수 없다. 기독교와 로마제국 간 정치적 타협 과정에서 태양신 축일인 동지(冬至)를 성탄절로 받아들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로마 연감 기록 등에 따르면 기원 전부터 로마와 이집트에서는 페르시아의 영향으로 매년 12월 25일을 ‘무적의 태양신’ 축일로 기념했다. 동지를 지나면 해가 조금씩 길어지는 것에 착안해 ‘빛이 어둠을 이기고 만물을 소생시키는’ 날로 본 것이다. 3세기 초만 해도 로마 일부 기독교도는 크리스마스를 예수 세례일로 알려진 1월 6일에 치렀다. 사람인 예수가 이날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서기 336년에 아기 예수 탄생일인 12월 25일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 행사가 처음 열렸다. 350년 교황 율리우스 1세는 12월 25일이 그리스도 탄생일이라고 공식 선언했다. 이때부터 로마에 ‘태양=예수’ 개념이 생겨났다. 자연스레 태양신 축일이 크리스마스에 통합됐다. 예수 탄생을 기리는 크리스마스가 예수보다 더 오래전에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아는 크리스마스는 ‘12월 25일’이지만 러시아와 그리스 등 10여개 나라에선 이듬해 ‘1월 7일’을 크리스마스로 기린다. 기독교계는 기원전 45년 만들어진 율리우스력(태양력)을 써 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역법과 실제 시간이 맞지 않자 1582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그레고리력(신태양력)을 제정했다. 로마 교회와 반목하던 동방정교계는 새 역법을 쓰지 않고 율리우스력을 고수했다. 그레고리력은 기존 역법보다 매년 11분이 빠르다. 새 역법이 제정된 지 400여년이 지난 현재 두 역법 간 시차는 13일로 벌어졌다. 동방정교 국가들은 지금도 율리우스력을 써 크리스마스 행사를 서구보다 13일 늦게 연다. ●北·中·日 등 40여개 국가 공휴일로 지정 안 해 크리스마스는 기독교 문화권인 미주와 유럽, 오세아니아는 물론이고 비(非)기독교 지역인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도 성대히 치러진다. 중동 지역으로 이슬람 국가인 레바논과 요르단, 인도네시아는 크리스마스가 공휴일이다. 이집트(콥트교)나 이라크(아시리아 교회)도 토종 기독교도가 크리스마스 행사에 참석할 수 있게 배려한다. 세속국가 터키와 국제도시 두바이에서는 외국인을 위한 성대한 크리스마스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기독교인의 크리스마스 행사 참여를 허용한다. 다만 십자가 등 상징물을 외부에 보여선 안 된다. 중동 국가가 크리스마스에 비교적 관대한 것은 예수가 이슬람교에서도 주요 성인(聖人)으로 인정받아 무슬림이 이날을 길일로 여기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지정하지 않은 나라는 북한과 중국, 일본 등 40여곳이다. 대부분 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에 몰려 있다. 중국에선 홍콩과 마카오에서만 공휴일이다. 대만은 12월 25일이 공휴일이지만 이는 제헌절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태어난 이스라엘에서도 크리스마스를 기념하지 않는다. 예수를 ‘선지자’로 보지 않아서다. ●가까운 지인에게 카드 보내는 풍습 영국서 시작 크리스마스는 오랜 기간 지역 전통과 결합해 다채롭게 발전됐다. 17세기 초 명나라 쉬자후이(상하이)에서도 행사가 열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영어권 국가에선 크리스마스 전날인 12월 24일을 ‘크리스마스이브’(성탄 전야제)로,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26일을 ‘박싱데이’(이웃과 선물을 주고받는 날)로 부르며 연말 분위기를 이어 간다. 영국에선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며 가까운 친지에게 카드를 보낸다. 이 풍습은 전 세계로 퍼져 크리스마스의 상징이 됐다. 성탄 아침에는 치즈를 발라 요리한 공작새 고기를 먹는다. 축구의 나라답게 크리스마스 연휴에도 프리미어리그 축구 경기가 진행된다. 아일랜드인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집안 창문을 조금 열고 촛불을 켜 둔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를 낳기 위해 숙소를 찾아 헤매던 어려움을 다시 겪지 않게 하겠다는 의미다. 네덜란드에서는 천사가 백마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전설에 따라 산타가 흰말을 타고 마을 곳곳을 찾는다. 한여름에 크리스마스를 맞는 남미국가에서는 시원한 음료를 즐기며 각종 축제를 진행한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가족이 모여 차가운 사과주스를 마시며 음악이 동반된 축하연을 연다. 당일 자정에는 축포를 쏘며 소원도 빈다. 칠레에선 무용수가 다양한 종류의 옷을 입고 거리로 나와 춤을 춘다. 멕시코에서는 집안 한 곳을 마구간처럼 꾸며 아기 예수 인형을 눕힌다. 러시아에는 ‘데드 모로자’(얼음 할아버지)라는 현지식 산타가 있다. 크리스마스이브가 아닌 12월 31일에 오는데, 순록 대신 ‘스네구르카’(눈의 아가씨)로 불리는 미녀 파트너와 함께 다닌다. 최근 크리스마스는 문화 간 갈등에 휩싸이며 상업화 논란도 가열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크리스마스 인사법을 두고 의견이 양분돼 있다. 비영리단체 공공종교연구소에 따르면 소매업자들이 성탄 및 새해 인사로 어떤 표현을 사용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메리 크리스마스’와 ‘해피 홀리데이스’(행복한 연휴)가 비슷하게 갈려 있다. 미국에선 유대인 등 비기독교인을 고려해 ‘해피 홀리데이스’를 많이 쓰는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가 “성탄에는 ‘메리 크리스마스’를 써야 한다”고 주장해 기독교인의 지지를 받고 있다. ●석가탄신일 등과 달리 소비 지향적 분위기 우려 부처의 탄생일인 석가탄신일이나 유대교 축일 하누카 등이 차분하고 엄숙하게 진행되는 데 비해 유독 크리스마스만 시끄럽고 소비 지향적으로 치러지는 것에 대한 비난도 크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11년 성탄 전야 미사에서 “성탄절이 한낱 상업적 기념일로 전락한 것 같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사도 “정교분리를 규정한 헌법 제20조 2항에 위배된다”며 크리스마스와 석가탄신일을 법정 공휴일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특히 국가의 근간인 헌법 제정을 기념하는 제헌절이 2008년 법정 공휴일에서 빠지면서 이 주장이 더욱 힘을 얻고 있다. 한국에서는 1949년 기독교 신자인 이승만 대통령이 법정 공휴일로 지정했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 기독교 신자가 많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면 대통령 개인의 종교가 공휴일 지정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부활의 新…박태환, 쇼트코스 1500m 金

    부활의 新…박태환, 쇼트코스 1500m 金

    세계新 보유자 꺾고 ‘3관왕’ ‘마린보이’ 박태환(27)이 세계무대에 건재함을 알리며 올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게 됐다. 박태환은 ‘도핑 파문’에 이어 김종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의 리우올림픽 출전 포기 압박, 리우올림픽 전 종목 예선 탈락 등으로 심한 마음고생을 겪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세계대회 3관왕에 우뚝 섰다. 박태환은 12일 캐나다 온타리오주 윈저 WFCU 센터에서 끝난 국제수영연맹(FINA) 쇼트코스(25m) 세계수영선수권대회 남자 자유형 1500m 결선에서 14분15초51의 기록으로 가장 먼저 터치패드를 찍었다. 라이벌 장린(중국)이 2009년 일본오픈에서 작성한 아시아기록(14분22초47)은 물론 지난해 이 대회에서 세계기록(14분08초06)을 새로 작성한 이탈리아의 그레고리오 팔트리니에리를 2위(14분21초94)로 밀어냈다. 박태환은 전날 열린 예선에서는 14분30초14의 개인 최고기록으로 레이스를 마쳐 3조 1위, 전체 참가 선수 42명 중에서는 팔트리니에리에 이어 2위로 8명이 겨루는 결승에 진출했다. 박태환의 종전 최고 기록은 2007년 11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경영월드컵 시리즈 때 작성한 한국기록인 14분34초39였다. ●1500m 직후 치른 100m는 8명 중 7위 박태환은 이어 열린 자유형 100m에서는 준결선 통과 기록(46.89)에 조금 못 미치는 47.09로 결승선을 끊어 출전 8명 가운데 7위에 그쳤다. 그러나 공식 쇼트코스 대회 100m에 뛴 적이 없는 박태환은 이미 예선 때 한국기록(49.74)을 가볍게 갈아치우기도 했다. 앞서 자유형 200m와 400m에 이어 이날 1500m까지 석권한 박태환은 이로써 이번 대회 3관왕에 올라 짧지 않았던 암흑기를 벗어나 내년 새로운 도약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자유형 400m에서 3분34초59로 우승,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쇼트코스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리스트가 됐고, 자유형 200m에서는 1분41초03의 대회 및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고 금메달을 수확했다. ●약물파동·외압논란 이겨내고 제 2전성기 비록 올림픽 규격의 50m가 아닌 길이 25m 코스에서 치른 대회지만 FINA가 주관하는 세계선수권에서 3관왕에 올랐다는 것 자체가 약물 파동, 올림픽 출전 논란 등 그간 겪었던 좌절의 시간에 견줘 볼 때 놀라운 성과다. 또 이번 대회 기록은 2007년 경기고 3학년 재학 당시 FINA 경영월드컵 시리즈에서 작성했던 자신의 최고 기록을 27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모두 훌쩍 넘어선 것이다. 박태환은 자유형 200m에서 올림픽 6개 금메달리스트 라이언 록티(미국)가 2010년(두바이)에 세운 종전 대회 기록(1분41초08)과 자신의 2007년 FINA 경영월드컵(베를린) 아시아 기록(1분42초22)을 모두 새로 썼다. 이는 리우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채드 르 클로스(남아공·1분41초65)를 2위로 돌려세운 기록이기도 하다. 최병규 전문기자 cbk91065@seoul.co.kr
  • 척추에 구멍 뚫린 ‘뱀파이어 유골’ 폴란드서 발굴

    폴란드 서부에 위치한 고르즈챠라는 이름의 마을에서 특이한 유골이 발견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학계와 언론에서 이 유골에 붙인 이름은 바로 '뱀파이어 유골'이다. 최근 폴란드 포르트레스 고스츤 박물관 연구팀은 13~14세기에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세 구의 유골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 유골에 뱀파이어라는 으스스한 이름이 붙은 것인 특이한 매장 방식 때문이다. 먼저 이중 남자와 여자의 유골은 날카로운 도구로 목이 잘리고 시신 곳곳이 훼손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또한 각각의 척추에는 못질을 한 것 같은 구멍이 뚫려있으며 시신은 반듯이 누워 있지 않고 바닥으로 엎드린 채로 매장됐다. 특히 여성은 무릎이 부러져 있었으며 생전에 소위 꼽추라 부르는 척주 후만증을 앓은 것으로 확인됐다. 또 다른 한 구의 남성 유골은 30~35세로 추정되며 역시 척추에는 구멍이, 머리 양 사이에는 커다란 돌이 붙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렇다면 왜 당시 주민들은 이같은 잔인한 방식으로 시체를 매장한 것일까?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13~17세기 사이 지금의 폴란드를 비롯 불가리아 등지의 주민들은 뱀파이어로 여겨진 인물을 이와 같은 특이한 방식으로 매장했다. 심장이나 척추 부위를 못으로 박아 신체를 바닥에 고정시켜 뱀파이어가 다시 무덤에서 부활할 수 없도록 한다는 의미다.    발굴에 참여한 크지슈토프 소샤 박사는 "유골이 발견된 지역 인근에는 과거 주교의 거주지와 성당이 있었다"면서 "여성의 경우 척주 후만증으로 인한 특이한 외모 때문에 주민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하나의 의문은 더 남아있다. 과연 잔인하게 매장된 이들이 진짜 뱀파이어 같은 존재였냐는 점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크게 두가지로 뱀파이어의 정체를 추정하고 있다. 첫 번째로 뱀파이어로 여겨져 묻힌 이들은 대부분 지식인, 귀족, 성직자등 특권층이라는 사실이다. 치열한 권력 암투에 밀린 희생양이라는 주장이다. 두 번째는 해당 시기 유럽은 흑사병이나 콜레라 등 전염병이 만연했는데 특정인을 뱀파이어로 몰고 병균의 원인으로 지목해 살해하는 방식으로 여론을 잠재우려는 의도였다는 분석이다. 종합해보면, 과거 실존했던 뱀파이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무시무시한 흡혈귀가 아닌 역사적 흐름에서 불가피하게 희생된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척추에 구멍 뚫린 ‘뱀파이어 유골’ 폴란드서 발굴

    폴란드 서부에 위치한 고르즈챠라는 이름의 마을에서 특이한 유골이 발견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학계와 언론에서 이 유골에 붙인 이름은 바로 '뱀파이어 유골'이다. 최근 폴란드 포르트레스 고스츤 박물관 연구팀은 13~14세기에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세 구의 유골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 유골에 뱀파이어라는 으스스한 이름이 붙은 것인 특이한 매장 방식 때문이다. 먼저 이중 남자와 여자의 유골은 날카로운 도구로 목이 잘리고 시신 곳곳이 훼손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또한 각각의 척추에는 못질을 한 것 같은 구멍이 뚫려있으며 시신은 반듯이 누워 있지 않고 바닥으로 엎드린 채로 매장됐다. 특히 여성은 무릎이 부러져 있었으며 생전에 소위 꼽추라 부르는 척주 후만증을 앓은 것으로 확인됐다. 또 다른 한 구의 남성 유골은 30~35세로 추정되며 역시 척추에는 구멍이, 머리 양 사이에는 커다란 돌이 붙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렇다면 왜 당시 주민들은 이같은 잔인한 방식으로 시체를 매장한 것일까?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13~17세기 사이 지금의 폴란드를 비롯 불가리아 등지의 주민들은 뱀파이어로 여겨진 인물을 이와 같은 특이한 방식으로 매장했다. 심장이나 척추 부위를 못으로 박아 신체를 바닥에 고정시켜 뱀파이어가 다시 무덤에서 부활할 수 없도록 한다는 의미다.    발굴에 참여한 크지슈토프 소샤 박사는 "유골이 발견된 지역 인근에는 과거 주교의 거주지와 성당이 있었다"면서 "여성의 경우 척주 후만증으로 인한 특이한 외모 때문에 주민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하나의 의문은 더 남아있다. 과연 잔인하게 매장된 이들이 진짜 뱀파이어 같은 존재였냐는 점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크게 두가지로 뱀파이어의 정체를 추정하고 있다. 첫 번째로 뱀파이어로 여겨져 묻힌 이들은 대부분 지식인, 귀족, 성직자등 특권층이라는 사실이다. 치열한 권력 암투에 밀린 희생양이라는 주장이다. 두 번째는 해당 시기 유럽은 흑사병이나 콜레라 등 전염병이 만연했는데 특정인을 뱀파이어로 몰고 병균의 원인으로 지목해 살해하는 방식으로 여론을 잠재우려는 의도였다는 분석이다. 종합해보면, 과거 실존했던 뱀파이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무시무시한 흡혈귀가 아닌 역사적 흐름에서 불가피하게 희생된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오 마이 금비’ 시청자들이 궁금한 3대 의문점은?

    ‘오 마이 금비’ 시청자들이 궁금한 3대 의문점은?

    ‘오 마이 금비’ 허정은과 오지호가 점점 가까워지는 부녀 이야기로 따스함을 선사하고 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전개되는 가운데 시청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은 무엇일까. Q1. 왜 오지호는 이지훈에게 잡혀 살까? 지난 3회분에서 휘철(오지호 분)은 차치수(이지훈 분)가 금비(허정은 분)와 고강희(박진희 분)의 존재까지 알게 되자, 아픈 몸을 이끈 채 종적을 감추며 의문을 자아냈다. 특히 “벌써 15년이야. 지겹지도 않냐?”라고 묻는 휘철에게 “넌 죽기 전날까지 내 손에서 못 벗어나”라는 치수의 답은 두 사람이 오랜 악연임을 암시하고 있는 상황. 이에 제작진은 “4회분을 통해 과거 친구였던 휘철과 치수가 악연이 된 사연이 밝혀질 예정”이라고 전해 기대를 더했다. Q2. 왜 박진희는 허정은을 애틋해 할까? 강희는 유난히 금비를 아낀다. 49제에 함께 가주겠다는 최재진(김도현 분)의 호의는 단번에 거절했지만, 겨우 두 번째 만난 금비가 “같이 가면 안 돼요?”라고 묻자 함께 절에 갔을 정도다. 게다가 휘철이 사라지자 금비를 보육원에 보내지 않기 위해 입양까지 알아보며 핏줄 못지않게 애정을 쏟고 있다. 강희의 고택 곳곳엔 어린이 침대와 자전거, 기둥에 새겨진 7세까지의 성장 기록 등 아이의 흔적이 남아있다. 지난 3회분에서 “그 여자한테 딸이 하나 있었다더라”는 공길호(서현철)의 말처럼, 강희는 금비에게서 ‘있었던’ 딸의 모습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추측하게 했다. Q3. 왜 오윤아는 갑자기 나타나는 걸까? 조그마한 손으로 직접 엄마의 제사상을 차린 금비. 금비의 친엄마가 죽었다고 알고 있던 휘철 역시 금비의 이모 영지(길해연 분)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영지는 금비의 친엄마가 유주영(오윤아)이며, 죽은 게 아니라 “5년 전에 스페인인가 어딘가로 떴다는 말만 얼핏 들었다”고 털어놓으며 휘철을 혼란스럽게 했다.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 금비조차 그 존재를 모르고 있는 주영.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내는 주영이 금비 앞에 나타나게 되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무엇보다 시청자들이 궁금해하는 휘철, 강희, 주영은 결핍과 상처 때문에 마음만큼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어른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있는 금비의 마법이 어른들에게 어떤 변화를 선사할지, 앞으로의 이야기에 기대가 증폭되고 있다. 한편, KBS2 수목드라마 ‘오 마이 금비’는 이날 오후 10시에 방송된다. 사진제공= 오마이금비 문전사, 로고스필름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최영미와 함께 읽는 세계의 명시] 그대가 나를 사랑해야 한다면

    [최영미와 함께 읽는 세계의 명시] 그대가 나를 사랑해야 한다면

    그대가 나를 사랑해야 한다면(If thou must love me) -엘리자베스 브라우닝 그대가 나를 사랑해야 한다면, 다른 아무것도 아닌 오직 사랑을 위해서만 사랑해 주세요. “난 그녀의 미소 때문에, 외모 때문에, 상냥스러운 말투 때문에, 내 생각과 잘 어울리는 재치 있는 생각 때문에, 어느 날 즐겁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해”라고 말하지 마세요. 사랑하는 이여, 이러한 것들은 스스로 변하거나, 당신 마음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으니, 그렇게 엮인 사랑은 또 그렇게 풀릴지도 모릅니다. 내 뺨에 눈물을 닦아 주고픈 그대의 연민 때문에 나를 사랑하지도 마세요. 그대의 위로를 오래 받은 사람이 울기를 잊어버리면, 그대의 사랑을 잃을지도 모르니까요! 오로지 사랑만을 위해 나를 사랑해 주세요, 사랑의 영원함 속에서, 언제까지나 그대가 나를 사랑하도록. If thou must love me, let it be for nought Except for love’s sake only. Do not say “I love her for her smile-her look-her way Of speaking gently,-for a trick of thought That falls in well with mine, and certes brought A sense of pleasant ease on such a day-” For these things in themselves, Beloved, may Be changed, or change for thee,-and love, so wrought, May be unwrought so. Neither love me for Thine own dear pity’s wiping my cheek dry: A creature might forget to weep, who bore Thy comfort long, and lose thy love thereby! But love me for love’s sake, that evermore Thou mayst love on, through love’s eternity. * 철없던 시절에 읽은 엘리자베스 브라우닝(1806~1861)의 시를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다른 아무것도 아닌, 사랑 그 자체만을 위해 사랑해 달라니. 뭔 뜻일까. 연애소설만 들입다 읽었지 연애의 문턱에도 가 보지 못했던 스무 살의 내게 브라우닝의 저 유명한 연애시는 물음표로 남아 있었다. 작년이던가. 관악구민들을 위해 시 강의를 준비하며 ‘If thou must love me’가 새롭게 다가왔다. ‘그대가 나를 사랑해야 한다면’은 영국의 시인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이 그녀의 남편이 될 로버트 브라우닝(1812~1889)에 대한 애정과 고민을 녹여 쓴 14행의 소네트다.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이 아니라 ‘사랑해야 한다면’이다. 그만큼 절박하고, 아무 사랑이나 받지 않겠다는 결의가 내비친다. 대화체에 인용문이 삽입돼, 사랑이라는 단어가 열 번이나 나오는데도 지루하지 않다. 내가 감탄한 구절: ‘그대의 위로에 익숙해진 내가 울기를 잊어버리면, 그대의 사랑을 잃을지도 모르니까요!’ 얼마나 재치 넘치는 표현인가. 연민과 사랑의 차이를 귀엽게 증명한 그녀. 여섯 살이나 어린 로버트가 그녀에게 왜 반했는지 짐작이 간다. 장애인이었던 그녀는 당시 의학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통증을 달고 살았다. 지금은 뜨겁지만 언젠가 로버트가 병약한 자신을 떠나지 않을까 두려웠으리. 환자였던 그녀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진실을 보았다. 미소 때문에, 외모 때문에, 상냥스러운 말투 때문에, 재치있는 말 때문에 나를 사랑하지 마세요. 사랑만을 위해 사랑해 달라는 말투에서 시대를 앞서간 페미니스트의 자의식이 엿보인다.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은 자메이카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는 아버지 밑에서, 12명의 자녀 중 맏딸로 영국의 더럼에서 태어났다. 소녀 시절은 시골집에서 행복하게 보냈다. 어머니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여섯 살부터 시를 지었고, 열네 살에 첫 시를 발표했다. 열다섯 살에 척추를 다쳐 극심한 두통과 척추통을 앓아 하루 종일 집 안에 틀어박혀 책을 벗 삼아 지냈다. 1838년에 처녀 시집을 펴내고 시골의 저택에 칩거하다 남동생 에드워드가 물에 빠져 죽은 뒤로는 가까운 몇몇 외에는 사람 만나는 것을 병적으로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문단에 두루 알려져 있었고, 1844년에 나온 ‘E 배럿의 시집’에 영국의 독자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녀의 시는 대중적인 성공을 거뒀지만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지는 못했다. 1845년 1월에 그녀는 6살 연하의 무명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으로부터 뜨거운 편지를 받았다. “친애하는 배럿양. 귀하의 시를 진심으로 아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건대 귀하의 시집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배럿양 당신을 사랑합니다.” 영문학 사상 가장 아름다운 로맨스라는 브라우닝 부부의 러브스토리는 그렇게 시작됐다. 처음엔 편지만 주고받다 초여름에 두 사람은 만났다. 이들의 만남은 엘리자베스의 아버지에게는 비밀에 부쳐졌다. 이즈음 그녀가 쓴 ‘그대가 나를 사랑해야 한다면’에는 주저하는 여자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1846년, 마흔 살의 신부 엘리자베스는 런던의 아버지 집에서 브라우닝과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한 뒤에도 그녀는 1주일을 더 런던의 친정집에서 살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알려지자 아버지는 물론 남동생들도 그녀를 비난했다. 브라우닝 부부는 이탈리아로 이주했고, 엘리자베스의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딸을 용서하지 않았다. 부부는 피렌체에 정착했고 1849년 아들을 낳았다. 말년에 그녀는 사회·정치 문제에 관심을 쏟아 미국의 노예제도를 비판하는 시를 썼다. 엘리자베스는 1861년 여름, 심한 독감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부인이 죽은 뒤 로버트는 재혼하지 않고 77세까지 장수하며 영문학사에 길이 남을 걸작들을 생산했다. 사랑이 영원한 건지, 예술이 영원한 건지. 변치 않을 무엇이 그리운 계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 역대 특검 11명 살펴보니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 역대 특검 11명 살펴보니

    ‘최순실 국정 농단 게이트’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검을 앞두고 특별검사로는 누가 적임자일지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판검사로 15년 이상 재직해 특별검사의 자격을 지닌 법조인들 중 이번 사태를 낱낱이 규명할 만한 강단과 능력을 겸비한 이들이 꾸준히 하마평에 오르고 있다. 2012년 ‘내곡동 특검’의 특별검사를 역임했던 이광범(57)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와 소병철(58) 전 대구고검장 등이 대표적이다. 17일 법조계에 따르면 역대 특검을 진두지휘한 특별검사 11인의 면면을 살펴보면 앞으로 탄생할 12번째 특별검사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는 의견이 많다. 앞서 11명의 특별검사는 임명 당시 나이가 평균 57.2세로 모두 30년가량 법조 경력을 지닌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1999년 ‘옷 로비 사건’을 지휘한 최병모(67) 전 제천지원장은 당시 50세로 역대 최연소 특별검사로 남아 있다. 2008년 ‘삼성 비자금 특검’을 수사한 조준웅(76) 전 광주지검장은 당시 68세로 역대 최연장자였다. 11인 중 판사 출신이 6명으로 가장 많다. 최병모·송두환(67)·정대훈(63)·정호영(68)·민경식(66)·이광범 변호사가 모두 법관으로 활동했었다. 검사 출신은 강원일(74) 전 인천지검장, 차정일(74) 전 대검 중수부 4과장 등 4명이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측근비리 특검’을 수사한 고 김진흥 변호사는 군법무관 출신이다. 출신학교는 서울대가 절대다수다. 11명 중 무려 9명이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 민경식 변호사와 김진흥 변호사만이 각각 연세대 법대와 전북대 법대 출신이다. 출신지는 비교적 다양하다. 호남 출신이 4명, 수도권 3명, 영남 2명, 충청 2명 등이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맑은 가을햇살 느끼며 옛 ‘경성 월스트리트’를 걷다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맑은 가을햇살 느끼며 옛 ‘경성 월스트리트’를 걷다

    서울신문은 서울미래유산을 시민들과 공유하기 위해 서울시·문화지평과 함께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을 매주 토요일 진행한다.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co.kr)에서 답사 코스 확인과 참가신청을 할 수 있다. 오는 5일 답사는 ‘인권을 생각하며 걷는 남산둘레길’을 주제로 이필용·손안나 서울미래유산해설사가 진행한다. 서울미래유산 중에서 긴급한 보호조치가 필요한 것들은 ‘위기의 미래유산’으로 지정할 수 있다. 관리주체가 없어서 보전이 어렵거나 적극적인 수리·보수가 필요할 경우 미래유산 보존위원회 심의를 거쳐 선정한다. 이 경우 소유자는 적극적인 개방을 통해 시민들과 유산의 가치를 공유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최근 문화지평이 답사하는 과정에서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성우이용원의 이남열 대표이발사는 건물이 노후해 수리가 시급한 실정이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건물은 실제로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고 비가 많이 오면 빗물이 줄줄 샌다고 한다. 또 다른 서울미래유산인 공씨책방의 경우 건물주가 퇴거를 요청하면서 미래유산으로서의 공유가치가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이들 모두 위기의 미래유산인 셈이지만 먼저 미래유산 보존위원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서울 남대문부터 광교까지 뻗은 남대문로는 일제강점기 조선은행(한국은행)을 비롯해 수많은 은행이 밀집했던 금융 1번지였다. 13회차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은 ‘경성 월스트리트를 가다’를 주제로 지난달 15일 오전 10시부터 세 시간 가까이 진행했다. 이 해설사는 이런 역사적 배경을 바탕에 두고 해설하는 한편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서울미래유산들을 꼼꼼하게 챙겼다. 전형적인 가을 날씨로 하늘이 맑은 데다 도심 한복판 평지를 걷는 편안한 코스라서 다른 때보다 많은 40명 가까운 인원이 답사에 참여했다. 이날 참석한 선현호 아시아나국제특허법률사무소 관리부장이 어린아이 주먹만 한 약식 30여개를 싸와 답사팀 간식으로 나눠주었다. 약식은 선씨의 부인이자 이바지 음식 전문가인 강기숙씨가 아침에 손수 만들어 보낸 것이라 온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국보 1호 숭례문(남대문) 옆 작은 공원에서 답사팀은 모였다. 2008년 2월 10일 설날 연휴에 방화로 완전히 불타 버린 숭례문은 2013년 5월 지금의 모습으로 복구돼 일반에 공개됐다. 화재 전에는 도로 위에 섬처럼 서 있어서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웠지만 지금은 공원화되면서 출입이 자유롭다. 문화재 관리의 소중함을 교훈으로 간직한 숭례문에서 이번 답사 여정이 시작됐다. 이 해설사는 “오늘 답사길은 시내 한복판이라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친밀하게 느껴지는 곳”이라며 “서울에서 보기 드물게 가로세로 동서남북형 도로와는 다르게 소공로처럼 대각선 도로와 연결되는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 남대문에서 소월로를 따라 남산 쪽으로 조금 오르면 남산육교 고가차도가 나온다. 1961년 말 만들어진 일반교량으로 오래된 구조물이라는 점에서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남대문시장 안에는 은호식당이란 노포가 있다. 1932년 ‘은성옥’이란 상호로 문을 연 꼬리곰탕집이다. 한국전쟁 때는 부산 피란처에서도 임시로 문을 열었다가 휴전 후 지금 자리에 건물을 짓고 재개업했다. 현재 4대째인 정용식씨가 운영하고 있고 서소문, 여의도에 직영점이 있다. 같은 지역에서 84년 동안 운영되면서 남창동 일대의 시대 흐름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장소라는 이유로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남대문시장 전체도 서울미래유산이다. 1414년 정부 임대시전으로 남대문 근처에 가게를 지어 상인들에게 빌려준 게 시장의 시초다. 종로 시전과 동대문 이현과 함께 남대문 칠패는 조선 내내 주요한 시장의 기능을 했다. 1608년(선조 41년) 선혜청이 지금의 남창동에 설치되면서 지방의 특산물 등을 매매하는 시장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1911년 3월 을사오적 중 한 명인 내부대신 송병준이 조선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남대문시장은 정식 근대시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해설사가 남대문시장 초입의 선혜청 표지석 앞에서 답사팀을 멈춰 세웠다. 17세기 초 조선시대 대동법 실시에 따라 대동미(米)·대동포(布)·대동전(錢) 출납을 관장한 관청이 있던 자리다. 쬐끔 과장해서 월스트리트는 이미 17세기 조선조부터 시작된 셈이다. 대동법은 조선시대에 공물(貢物)을 쌀로 통일해서 바치게 한 납세제도다. 벼농사가 어려운 산간지방이나 쌀 납부가 어려운 경우에는 베·무명(대동포), 돈(대동전)으로 대납할 수 있었다. 선혜청의 의미는 대동법 실시 이후 등장한 공납 대납업자들이 산업자본가로 성장해 수공업과 상업발달을 촉진시켰다는 데 있다. 이렇듯 돈이 흘러가는 곳이다 보니 자연스레 운송활동도 증대하면서 교환경제가 발달하게 됐다. 서울역이 남대문시장 인근에 위치한 이면에는 아마도 이런 이유가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남대문 2층 한옥 상가벽돌 쌓아 올린 한·양 절충식 건물 남대문 지하보도 역시 서울미래유산이다. 정확한 준공 시기는 알 수 없고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남대문 4가 대로변에는 생소하게 한옥 기와를 이고 선 2층 건물 공사가 한창이다. 바로 남대문로 2층 한옥상가다. 올해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662호로 등록됐다. 1910년대 만들어진 벽돌조 한양(韓洋) 절충식 건물로 전통적인 단층 목조 건축 양식에서 벗어난 벽돌조란 특징을 갖는다. 업무상 중국 출장이 잦은 김유림(40·넥스나인 대표)씨는 “중국 VIP 및 비즈니스 고객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남대문 일대 관광을 매우 좋아하는데 그동안 흔하게 알려진 것만 설명하는 데 그쳤다”며 “이번 답사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역사적 사실을 중국인들에게 보다 풍성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이 해설사는 답사팀을 북창동 먹자골목을 통과해 플라자호텔 쪽으로 이끌었다. 길 건너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는 때마침 수문장 교대식이 한창이다. 수문장 교대식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국립극장장을 지낸 허규씨가 병상에서 아이디어를 내 관광 콘텐츠로 발전시킨 ‘작품’이다. 즉 역사에 이런 수문장 교대식은 없었다. 명동 나석주 열사 동상 나 열사가 동양척식회사에 폭탄 던진 곳 이 해설사는 “대한문 앞 도로는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가 근대적 도시 발전을 도모하기 시작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며 “환구단을 거쳐 소공로를 뚫어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길을 개설했고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도로 역시 구체화시켰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도로의 확장과 직선화가 사회 구성원 간 소통의 부재라는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이 해설사는 “도로가 넓어지면 교통은 편리해지지만 사람이나 차가 빠르게 이동하면서 교류가 어려워지게 된다”며 “이는 도로의 발달이 사람보다 자동차에 우선권을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도로는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고 편리하게 걸어가면서 정보를 얻고 교류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져야 사람 간 교류가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환구단 일대 호텔가일제강점기 경성 대표적 상업지역 눈을 조선호텔 쪽으로 돌리자 사적 157호 환구단이 나타났다. 2007년 수유리 그린파크호텔 재개발 과정에서 호텔 정문으로 사용하고 있던 문이 환구단 정문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이전 복원된 사연을 갖고 있다. 환구단 일대는 지금도 각종 호텔이 빼곡하지만 일제 강점기에도 경성을 찾는 외국인이 묵는 호텔이 많았다. 교통이 편리하고 물산이 풍부한 경성의 대표적인 상업지역이었던 셈이다. 백화점과 양판점이 들어서면서 막대한 시장 자금이 돌자 자연스레 금융시설도 들어섰다.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자리에는 조선은행, 신세계백화점 옆 건물인 SC제일은행에는 조선저축은행, 한국은행 소공별관 자리는 조선상업은행, 롯데 애비뉴엘에는 조선신탁주식회사가 있었다. 그 바로 옆 롯데백화점은 식산은행, 길 건너편에는 제일은행, 외환은행 자리엔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있었다. 이 밖에도 시청 을지로별관에는 제국생명, 신한은행 광교빌딩은 한성은행, 광교약국 자리에는 동일은행 등이 있었다. 우리은행 종로지점은 조선상업은행 종로지점으로, ‘1924년 8월에 문을 열었다’는 동판이 벽에 부착돼 있다. 이렇게 금융회사가 밀집해 있었던 역사로 인해 ‘경성의 월스트리트’였다는 표현이 자연스러운 거리다. 한국은행 앞 사거리부터 을지로입구역까지 남대문로 일대를 아우른다. 한편 소공로는 조선총독부와 경성부청을 대각선으로 잇는 짧은 도로였지만 모던보이들이 즐겨 찾던 신식 양복점이 즐비했다. 소공로 중간쯤 있는 서울미래유산 해창양복점은 1945년 문을 열었다. 부산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던 창업주 이용수씨가 소공동으로 이전 운영하다가 1958년 아들 이순신씨에게 가업을 넘겼다. 1995년 재단사로 일하던 한창남씨가 경영에 참여한 이후 2004년 완전히 인수했다. 지금은 일대가 부영그룹에 의해 개발되면서 조선호텔 건너편으로 이전했다. 소공로 해창양복점 거리모던보이들 즐겨 찾던 신식 양복점 을지로입구역에서 명동으로 들어가는 하나은행 옆 골목 초입에는 나석주 열사의 동상이 있다. 이곳은 1926년 12월 나 열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 경찰과 총격전 중 자결한 곳이다. 답사단은 광교 위에서 이번 답사를 정리했다. 고등학생인 두 딸과 함께 참석한 이은순씨는 “오늘 답사를 하면서 그동안 익숙하게 들어 왔지만 자세히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새로이 알게 됐다”며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를 통해서 앞으로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따뜻한 사람들의 체온을 느끼고 싶어졌다”고 후기를 전했다. 이 해설사는 “이번 답사 지역은 조선후기와 대한제국,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150여년간의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우리들 기억 속에 내재해 있는 대표적인 곳”이라며 “일제 치하 경성 금융가, 도로 확장이 주는 사람들 사이 소통의 문제를 엮어서 진행해 봤다”고 끝맺음을 했다. 을지로입구에서 답사를 마무리한 팀 일부는 청계천을 따라 을지로4가까지 걸었다. 그곳에 있는 서울미래유산인 춘천막국수집에 들러 막국수와 돼지고기 보쌈을 나눠 먹으며 훈훈하게 답사를 정리했다. 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 중국에 녹아든 단 하나의 무슬림 ‘후이족’

    중국에 녹아든 단 하나의 무슬림 ‘후이족’

    지난달 10일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허톈지구 피산현 건물 지하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해 현장을 수색하던 경찰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천취안궈 신장자치구 서기가 취임한 후 발생한 첫 테러 사건이어서 당국은 바짝 긴장했다. 중국 언론은 위구르인 테러리스트들이 신장의 새 공산당 지도부에 세력을 과시하기 위한 행동이었다는 해석을 내놨다. 이렇듯 중국에서 무슬림은 테러리스트와 연관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같은 무슬림이지만 중국에 저항하기보다 동화를 택한 후이족(回族)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무슬림이라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중국의 또 다른 무슬림’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후이족이 중국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소개했다. ●위구르는 ‘탄압’… 후이족은 ‘후원’ 이슬람교에 대한 중국의 반응은 예민할 정도다.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무슬림 여성은 얼굴에 베일을 쓸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무슬림에게 기독교의 사순절처럼 내면적 성찰과 금욕의 시기인 라마단에 일부 공공장소에서 금식이 허용되지 않는 때도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종교적 압박에서 예외인 경우가 있으니 바로 후이족이다. 56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중국에는 크게 이슬람교를 믿는 2개의 민족이 있다. 하나는 신장자치구에 있는 위구르족이고 다른 하나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후이족이다. 대략 1000만명 정도로 튀니지 인구와 비슷한 규모의 후이족은 위구르족이 중국 정부의 강력한 감시를 받으며 갈등을 이어 가는 것과 달리 중국 정부의 후원을 받고 있다. 이들은 중국이 가장 번성했던 당나라 때인 7세기 중동 지역인 페르시아와 아랍에서 이주한 상인의 후손이다. 이들이 후이족으로 불리게 된 것은 중국과의 무역에 종사하던 이들이 날씨가 추운 겨울이 되면 따뜻한 중동으로 돌아갔다가 날씨가 풀리면 중국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돌아올 회(回)’를 붙여 후이족으로 불리게 됐다. 이들은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 등 다양한 방면에서 중국과 서역의 교류에 큰 역할을 했다. 원나라 때는 서역의 천문학과 의학, 건축학, 음악 등을 중국에 전했다. ●‘중국 콜럼버스’ 명나라 환관 정화 후이족 출신 특히 후이족이 중국에서 주목받는 것은 최근 중국이 육·해상 신실크로드 경제권을 형성하고자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一帶一路)와도 관련이 있다. 중국의 콜럼버스라며 당국이 집중 조명하고 있는 명나라 시대 환관 정화(鄭和)가 바로 후이족 출신이기 때문이다. 원래 정화의 성씨는 마(馬)씨였으나 일곱 차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넘나드는 대항해에 대한 공을 인정받아 황제가 정씨 성을 하사한 것이다. 터키계인 위구르족 대부분이 신장위구르자치구에 모여 사는 것과 달리 후이족은 자신의 본거지인 닝샤후이족자치구에 모여 살지 않는다. 전체 후이족 중 닝샤후이족자치구에 거주하는 인구 비율은 전체의 6분의1에 불과하다. 특히 중국 정부가 이들에 대해 유연한 자세를 보이는 것은 이들이 이슬람 종파 중에서도 온건 수니파에 속한다는 점도 고려됐다. 시아파가 이슬람 영토와 신념, 기구를 보호하고자 성전에 나설 수 있다는 지하드 개념이 강한 반면 수니파는 이 같은 생각이 비교적 약하다. 후이족 출신인 마퉁 북방민족대 교수는 “후이족이 믿는 종파는 중앙아시아에서 내려온 전통 종교와 수니파가 합쳐진 하나피 학파에 속한다”고 밝혔다. 하나피 학파는 튀르크족이 토착화한 이슬람으로 전통 이슬람과 이슬람 이전 중앙아시아의 전통과 관습, 특히 샤머니즘이 결합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율법을 강조하는 전통 이슬람과 달리 우애를 강조하고 성직자와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고 공동생활을 하면서 생활 속에서 이슬람을 실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 때문인지 중국 당국은 후이족의 정신적 고향인 퉁신(同心)을 포함해 닝샤후이족자치구에 모스크 설립을 많이 허가했다. 1958년 1900개에 불과하던 모스크는 현재 4000개로 두 배 이상 늘었다고 마 교수는 덧붙였다. 마 교수는 “후이족은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면서 “이들은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전 세계에서 차별받고 피해를 당한 일반인과 달리 이슬람포비아의 희생자가 된 적이 없으며 가장 성공한 민족”이라고 말했다. ●호적 안 보면 한족과 구별 안 될 정도로 동화 하지만 후이족 다수가 온건한 종파에 속하기 때문에 전적으로 성공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이 위구르족과 다른 행동을 했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위구르족은 민족적으로도 터키계와 비슷해 그들만의 언어를 갖고 있고 이를 사용한다. 심지어 시간대도 다르지만 베이징 시간대에 맞춰 사용한다. 신장이라는 엄청난 크기의 고향도 있다. 이런 것이 중국의 주류 계층인 한족과 분명하게 구분되게 만든다. 이들은 주로 국영기업에서 일하더라도 고위직이 아닌 하찮은 일에 종사한다. 반면 후이족은 한족과 구분이 쉽지 않다. 후이족인지를 알려면 후커우(戶口·호적)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후이족 대부분은 페르시아나 몽골, 또는 동남아시아 상인의 후예로 수세대에 걸쳐 한족과 결혼하며 섞여 있어 중국인처럼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 위구르족과 달리 중국 전역에 퍼져 살고 있다. 후이족과 중국 사회가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은 여러 방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후이족 출신으로 유명한 정화를 비롯해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왕정웨이 전 주임도 후이족 출신이다. 국무원 산하 국가민족사무위원회는 중국의 민족정책을 총괄하는 기구다. 이렇듯 후이족은 중국의 주류 계층인 한족과의 동화를 통해 중국 사회 곳곳에 진출했지만 항상 관계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사실 이들은 1864~1877년 청나라의 지배에 맞서 둥간 반란을 일으켰다가 큰 피해를 입었다. 마오쩌둥 사망 이후 양측은 화해했다. 드루 글래드니 포모나대 교수는 “후이족이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정치 체제에서 이른바 회색 지역을 찾아내 공산당과 협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자신만의 역할을 찾아내면서 존재감을 이어 갔다. 중국 내 할랄식품 생산을 장악하는 한편 중국 국영기업과 중앙아시아, 또는 걸프 지역 기업 간의 매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 내 최대 아랍어 학교는 후이족이 설립하고 재정 지원을 하고 있다. 졸업생 상당수는 통역사로 활약하고 있다. 중국 역시 후이족의 동화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이들에게 제한된 범위이긴 하지만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를 시행할 수 있도록 자치권을 부여하고 있다. 샤리아는 코란 등에 나오는 이슬람의 기본법으로 이슬람공동체의 헌법이며 모든 삶의 정황에 적용된 법이다. 그동안 중국 법체계에서는 샤리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닝샤후이족자치구의 일부 모스크에서는 설교자이자 지도자인 이맘과 법원이 같은 중재 사무실을 이용한다. 이맘은 매주 샤리아법을 근거로 가족 간 분쟁을 조정한다. 중국 사법 체계가 개입하는 경우는 샤리아법으로 조정이 실패한 경우에 한해서다. ●시진핑 “불법집단 견제”… 다음 감시대상 될 수도 후이족이 중국 사회에 편입됐지만 이들은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있다. 후이족은 자신만의 공동체를 구성하며 살고 있다. 이들은 도시에서 후이족 전통 식당을 운영하거나 택시 기사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 마 교수는 “이슬람교가 후이족을 다른 사람과 구분하게 만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같은 후이족의 번성이 계속될지는 중국 정부의 결심에 달렸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지난 7월 불법적인 집단의 침투에 확고한 방어막을 치겠다고 강조했다. 위구르족에 대한 감시의 눈길이 강화되듯 후이족 내에서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다음 감시 대상이 후이족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제훈 기자 parti98@seoul.co.kr
  • “밀수는 세계무역 역사이자 경제강국들의 발전 토대”

    “밀수는 세계무역 역사이자 경제강국들의 발전 토대”

    밀수 이야기/사이먼 하비 지음/김후 옮김/예문아카이브/516쪽/2만원 밀수(密輸)란 몰래 물건을 사들여 오거나 내다 파는 비공식적이고 불법적인 매매 행위를 가리킨다. 불법, 범죄, 사회적 병폐 등 부정적인 이미지의 단어들을 동반한다. 그러나 사이먼 하비 노르웨이 트론헤임대 역사학·미술사 교수는 “밀수가 없었다면 문명의 확산도 없었고 지금의 세계화도 불가능했다”고 역설한다. 그의 저서 ‘밀수 이야기’는 15세기 대항해 시대부터 21세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밀수’를 키워드로 세계의 변화와 흐름을 설명한다. 대항해 시대의 실크·향신료·은에서부터 제국주의 시대의 금·아편·차·고무를 거쳐 현대의 코카인·헤로인과 아프리카의 블러드 다이아몬드에 이르기까지 7세기 동안의 광활한 여정이 펼쳐진다. 책에는 다양한 밀수품과 더불어 수많은 ‘밀수꾼’이 등장한다. 그중에는 우리가 ‘위대하다’고 여겨 온 인물들도 많이 있다. 16세기 잉글랜드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세계 일주 항해를 하며 지정학의 선구자로 기록된 탐험가 프랜시스 드레이크와 존 호킨스의 주된 임무는 당시 스페인이 독점하고 있던 향신료의 밀수였다. 하비 교수는 밀수를 “무역과 경제의 역사이자 세계화의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밀수가 국제 관계나 분쟁, 세계화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한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16세기 남아메리카 볼리비아 남부 포토시에서 생산되는 엄청난 양의 은이 유럽으로 흘러들어가 국제통화가 되고 ‘세계경제’라는 개념이 탄생했다. 1768년 영국 세관은 와인을 가득 싣고 있던 밀수선 리버티호를 북아메리카 식민지 보스턴 항에서 압류했다. 관세 납부를 거부한 이 배의 선장은 존 핸콕이었다. 이 사건은 미국 독립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정치적·경제적으로 엄청난 가치를 지닌 무기와 예술작품도 밀수의 대상에서 빠지지 않는다. 물리적 실체가 있는 것만 밀수품이 아니었다. 인류를 계몽시킨 사상과 문화도 당시에는 체제를 흔드는 위험한 요소였기에 밀수로 전파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혁명’에도 직접 영향을 미쳤다. 밀수의 중심에는 막강한 배후 세력이 있었다. 바로 ‘국가’였다. 밀수 강국은 하나같이 그 시대의 경제 대국으로 급성장했고 현재 우리가 강국으로 알고 있는 나라들은 모두 밀수를 토대로 부를 축적했다. 하비 교수는 “밀수가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이 세계를 변화시켰고 지금도 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며 “지금도 연간 10조 달러 규모의 거래가 밀수로 이뤄지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라고 지적한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순수·대중성 사이 고심한 17세기 비파 명인 송경운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순수·대중성 사이 고심한 17세기 비파 명인 송경운

    조선 전기만 해도 전문 연주자가 수반되는 음악의 수요층은 왕실과 양반사대부에 한정됐다. 하지만 조선 후기가 되면 부를 축적한 중인이 중요한 음악 소비자로 떠오르고, 서민들도 가세하면서 음악시장이 넓어진다. 상업화의 진전으로 예술에 아낌없이 돈을 쓰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뛰어난 기량을 가진 음악가가 줄지어 나타났다. 비파연주자 송경운도 당대 ‘스타 플레이어’의 한 사람이었다. 오늘은 송경운을 다룬 문학 작품 한 편을 소개한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음률에 밝았는데, 아홉 살에 시작한 비파가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경지에 이르러 열두세 살 무렵에는 벌써 이름이 경향에 널리 알려졌다. 연주 솜씨뿐 아니라 ‘키가 훤칠하게 크고, 얼굴은 풍만하면서 희며, 눈은 가늘면서도 별처럼 밝고, 수염은 아름다우며, 말도 잘했으니 참으로 호남아’라는 것도 인기의 요인이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 음악시장 확대로 ‘스타 플레이어’ 등장 송경운이 17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우리 앞에 모습을 보이고는 있지만 출생 연대도, 사망 연대도 알려지지 않는다. 생몰 연대는 고사하고, 도대체 실존인물인지조차 불분명하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적 관심은 크게 불러일으킨 인물이지만 정사(正史)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문으로 쓰인 단편 ‘송경운전’의 지은이는 서귀 이기발(1602~1662)이다. 그는 문과에 급제해 벼슬을 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남한산성으로 진격했으나, 청나라와 화약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전북 전주로 돌아가 평생을 은거한 인물이다. ‘송경운전’은 이기발의 후손들이 유고를 모아 책으로 꾸민 ‘서귀집’(西歸集)에 실렸다. 서귀는 송경운이 당대 얼마나 명성을 떨친 인물이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예술인들의 지극한 경지를 칭찬할 때 ‘어째 송경운의 비파 같네’라고 했고, 초동이나 목동의 무리가 모여 놀 때도 누가 재미있는 말을 하면 ‘어째 송경운의 비파 같네’라고 했으며, 말을 배우는 두어 살짜리 아이가 자기와 관계없는 것을 가리키며 물어도 ‘어째 송경운의 비파 같네’라고 했다. 송경운이라는 이름이 알려진 게 대개 이러했다.’ 한마디로 ‘송경운’이란 희한하거나 지극한 것의 대명사였고,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서귀가 서울에서 크게 명성을 떨치던 인물의 전기를 쓴 것은 송경운 또한 정묘호란 이후 전주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학계는 송경운이 피란지에 눌러앉은 것을 두고, 장악원에 예속된 신분이었음에도 복귀를 거부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서울에서 부와 인기를 누리는 노비로 살기보다 시골에서 자유로운 삶을 원했다는 것이다. 송경운은 전주 완산성 서쪽에 살았는데, 그의 집은 언제나 북적였다. 손님이 오면 송경운은 성심성의껏 연주하여 만족할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신분이 높은 사람뿐 아니라 하인들에게도 똑같이 성심껏 연주했다. 20년동안 한결같았으니 전주사람들은 감복하여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울에서의 명성이 그대로 전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송경운전’이 돋보이는 것은 드물게 주인공의 음악관(音樂觀)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옛가락 추구하던 그의 음악, 당대 유행 곡조도 연주 ‘비파는 옛가락과 요즘 가락이 다른데, 지금은 대개 요즘 가락을 숭상한다. 하지만 나는 홀로 옛가락에 뜻을 두어 왔다. 무릇 소리를 낼 때 옛가락에 의거하면 요즘 가락이 끼어들지 못하고, 내 마음도 흡족하여 가히 음악답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나의 연주를 듣는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인지라 이런 음악에 즐거워하지 않더라. 음악을 듣고도 즐거워하지 않는다면…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싶다. 이 때문에 특별히 곡조를 변화시켜 요즘 가락을 간간이 섞어서 사람들이 기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송경운의 음악적 이상은 옛가락에 바탕한 느리고 고상한 음악이었지만, 별다른 음악적 교양이 없는 전주의 보통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송경운은 자신의 음악관만 고집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즐거워하는, 아마도 당대 유행하던 빠른 템포의 새로운 음악도 레퍼토리에 포함시켰음을 짐작게 한다. 자칫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한 비파 명인의 존재를 후세에 알려준 것만으로도 ‘송경운전’의 가치는 작지 않다. 나아가 조선시대 음악가들도 오늘날의 음악가들 만큼이나 순수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고심했음을 알게 한다. ‘송경운전’은 음악가의 전기이지만, 동시에 한 시대의 음악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송경운도 송경운이지만 서귀가 일구어낸 예술적 성과 역시 높이 평가하고 싶다. dcsuh@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남대문 옆, ‘시장의 역사’ 품은 떠들썩함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남대문 옆, ‘시장의 역사’ 품은 떠들썩함

    “떡 장수, 메밀묵 장수, 국수 장수, 활기에 넘치고 가지가지 소리가 있는 시장, <페르시아 시장>이 아니고 전쟁이 밟고 지나간 장터에도 음악은 있다. 장난감 파는 가게에 인민군들이 서 있고 그들이 돌아갈 때 누이와 동생, 아들과 딸들에게 선물할 장난감을 고르고 있지 않은가” 박경리의 작품, ‘시장과 전장’(1964)에 묘사된 남대문 시장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한국전쟁 절망의 한 가운데에서도 삶의 생명력을 잃지 않는 유일한 공간으로 그리고 있다. 흡사 붉은 양탄자 층층이 올린 아라비아 페르시아 시장 뒷골목에서 양탄자가 날아오르는 요술처럼, 남대문시장에서도 피난민들의 남루한 삶을 날려 줄 마법의 램프 속 도깨비가 남대문시장에는 있었을 듯하다. 주소로는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시장4길 21. 흔히 없어서 못 파는 물건이 없다는 말같이 도깨비처럼 뚝딱 소리 한 번에 모든 물건을 다 구할 수 있어 ‘박격포’까지 판다는 허명(虛名)마저 되새김질하는 시장이 바로 ‘남대문시장’이었다. 남대문시장은 지금도 명실상부 의류를 비롯해 각종 섬유 제품, 액세서리, 안경 같은 잡화, 주방용품, 공산품, 토산품, 수입 상품, 농수산물 등 1700여 종의 물품들이 거래되는 한국 제일, 최고(最古), 최대 전통시장임은 분명하다. 대지면적으로만 2만 467㎡, 건물연면적으로는 6만 4613㎡에 달하며, 점포 수는 이미 만 여곳 이상이 성업 중인, 하루 4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발도장을 찍는 서울의 대표적인 핫 플레이스이기도 하다. 또한 이 곳에는 도소매를 겸하는 전문 상가가 있어 일반 손님들도 원하는 물품이 소량이라도 편리하고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어 서울 시민의 넉넉한 안살림을 채워주는 곳간과도 같은 곳이다. 최근에는 남대문 시장이 한류(韓流)의 중심지로 다시금 각광받고 있다, 일본 도쿄 우에노 공원의 아메요코(アメ)시장이나 대만 최대 재래시장 디화지에(迪化街)처럼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는 단연 1순위 관람코스로 새롭게 등장하여 과거의 전성기를 누릴 심사를 남대문 시장은 품고 있다. ●옛 모습은 숭례문 밖 생선 팔던 칠패(七牌)시장 남대문시장의 역사는 이러하다. 원래 17세기 초부터 한양 도성에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이라 하여 조정으로부터 물품 독점권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시전(市廛)상인들이 종루(鐘樓) 행랑을 중심으로 모여 조선팔도 모든 물목들을 어깨 힘 잔뜩 넣은 채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도성 외부에 인구가 몰리는 17세기 후반 남대문과 서소문 밖을 중심으로 상가가 조성되기 시작한다. 바로 남대문시장의 전신인 칠패(七牌)시장이 등장한 것이다. 이와 아울러 18세기 중엽, 서울 동부의 어의동(於義洞) 근처에도 또 다른 상가가 등장하게 되는 데 이는‘동대문시장’ 전신인 ‘이현(梨峴)상가’였다. 이로 인하여 서울 도성 안팎의 상가는 종루 시전상가와 이현, 칠패 상가를 합하여 삼대시(三大市)로 나뉜다. 제각각 취급하는 물품도 다양해서 종루 시전상가는 궁궐이나 관아, 그리고 양반 사대부가에 필요한 사치품이나 중국 수입물품, 생활용품을 판매하였다. 반면 남대문시장의 전신으로 볼 수 있는 칠패시장은 마포나루터와 인접해 있어 새벽녘 마포(麻浦) 서강(西江)을 거쳐 들어오는 곡식이나 생선같은 상품들을 도성 안 서민들에게 대주었다. 특히, 칠패의 어물전(魚物廛) 명성은 지금의 노량진 유명세보다 훨씬 윗길이었다. 따라서, 지금도 남대문 시장의 대표 음식인 '갈치조림'의 명맥이 뜬금포처럼 등장하지 않은 연유가 바로 이러하다. 18세기 후반 한양 도성을 기록한 당시의 여러 문헌을 살펴보면 회현동, 죽전동, 주자동, 어청동, 어의동, 이현, 명문 등지에 칠패시장에서 미리 매점매석한 어물이 산처럼 쌓였다고 전해질 정도로 이 지역은 번성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1914년, 우리나라 제1호 시장으로 등록 구한말에 이르러 칠패시장의 규모가 종로와 남대문로를 뒤덮을 정도로 성장하자 대동미와 대동포 출납을 관장하던 선혜청(宣惠廳)으로 시장의 중심 터전이 옮겨가게 되고 이로부터 오늘날의 남대문시장의 자리가 옛 선혜청 자리로 잡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상인들에 의해 시장 경영권이 당연히 넘어가게 된다. 1922년 일본인이 운영하는 중앙물산주식회사로 시장의 경영권이 넘어가고 조선의 유통을 장악하려던 조선총독부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남대문 시장은 1936년경 등록된 상인의 수만 무려 230여 명이 될 정도로 급성장한다. 또한 1930년대 시장의 하루 거래액이 8만원에 이를 정도로 시장은 활성화되어 현재 남대문 시장의 규모가 만들어진다. 당시 주요 거래 품목은 미곡(米穀)과 과일, 채소, 생선 등 농수산물과 식료품이었으며, 이 외에도 고기류나 생활 잡화도 취급하여 명실상부한 거래액 규모에서는 조선 최대 전통시장의 면모를 차지하게 된다. 이후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남대문 시장은 동대문시장과 아울러 서울의 중심시장 자리를 지켜온다. 1947년에 215개의 점포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1952년에 252개로 늘어났고, 종전 후 폐허 속에서도 여전히 150개의 점포와 500여 개의 노점들이 생업을 이끌어가는 공간으로 살아 남아 있었다. 특히 휴전 이후 남대문시장은 주목할 만한 양적 성장을 이룬다. 전후복구를 위한 미군의 구호물자와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군용품,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내려오던 적산(敵産) 사치품과 밀수품 들이 거래되면서 소위 ‘도깨비’처럼 단속을 피해 물건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일이 남대문 시장 안에서는 빈번하였다. 특히 50,60년대 정부에서 유통 금지 물품으로 단속을 하던 밀수품들인 카메라, 양주, 담배, 시계, 양산 등이 남대문 시장 곳곳에 등장했다가 없어지곤 해서 당시 서울 시민들의 호기심을 가득 받기도 하였다. 또한 미군들의 군복, 담요, 시레이션(C-ration) 박스 등 접하기도 힘든 고급 군수물자들을 쉽게 구입할 수 있게 되어 항간에는 ‘박격포’도 살 수 있다는 소문도 그럴듯하게 퍼지기도 하였다. 1960, 70년대에는 빈번한 불난리를 피해 시장 건물 현대화사업에도 박차를 가한 기간이었다. 1969년 1월에는 지하1층 지상 3층짜리 건물이 완공되었고, 이후 1975년까지 667개의 점포가 추가되어 그 때의 건물들이 현재까지 이르러 지금의 시장의 틀을 만들었다. 1980년대는 바야흐로 남대문 시장 전성시대였다. 흔히 ‘남문’패션이라고 해서, 베이비붐 세대들인 1970년대 생 아동들이 학교에 입학할 즈음 전국적으로 아동복에 대한 수요가 넘쳐흘렀고 이를 남대문시장이 감당하였다. 40대 이상이라면 지금도 귀에 익숙한 ‘부르뎅’, ‘원 아동복’ 등의 아동복 브랜드가 당시 ‘국민학교’ 학생들의 ‘워너비’ 메이커가 되었다. 또한, 신발류로는 ‘프로스펙스’, ‘르까프’, ‘까발로’, ‘타이거’, ‘슈퍼카미트’, ‘프로월드컵’ 등의 브랜드가 등장하여, 남대문 시장을 중심으로 서울, 경기를 넘어 전국 각지로 어린이들의 동심을 흔들어 놓았다. 특히 어린이날 전후로는 물건을 떼러온 ‘봉고’들이 남대문 시장 입구 10Km부터 줄지어 서있는 진풍경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런 남대문시장의 호황은 1997년 IMF와 더불어 막을 내린다. 더구나 백화점과 할인마트가 등장하고 인근의 동대문 시장이 의류 특화 상권으로 성장하면서 남대문시장은 의류 중심의 상권이 대거 액세서리, 안경점, 여성 전문 패션, 그릇, 내복류 등으로 이동하여 2000년대를 맞이한다. 오늘날 남대문시장은 비록 예전의 ‘박격포’까지 팔 기세의 위세는 점점 사그라졌을지라도, 여전히 서울의 대표 전통시장으로 발을 굳건히 붙이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중국, 일본 관광객들의 급증으로 인하여 한류상품, 인삼, 김, 가죽 제품 등과 같은 관광상품을 취급하는 상점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 17세기 후반에 출현한 어물 유통의 중심지, 남대문 밖 칠패(七牌)시장으로서의 오랜 역사를 지닌 남대문 시장. 현재 인터넷, 모바일 쇼핑 등의 변화된 유통 환경에서도 그 옛날 나랏님도 어쩌지 못하던 난전(亂廛)시장 특유의 질긴 생명력을 한류(韓流)의 물살을 타고 단단히 이어가길 바란다. <남대문시장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너무나 당연하다. 남대문시장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통시장이다. 서울을 방문하는 초심자에게 남대문 시장은 경복궁, 남산 타워와 아울러 기본 탐방 코스다. 2. 누구와 함께? -나이 드신 부모님과 함께 가 보면 좋다. 추억과 더불어 시장 골목골목 볼거리, 먹을거리가 풍부하다. 3. 가는 방법은? -무조건 대중교통을 이용하길 권유한다. 지하철4호선 회현역 5번 출구로 나오는 것이 제일 낫다. 4. 감탄하는 점은? -규모다. 생각보다 어마어마하게 넓고 크다. 점포수가 만 개가 넘으니 넉넉한 시간을 두고 둘러보는 것이 낫다.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80년, 90년대의 부르뎅 아동복이나 원 아동복을 그리워하는 세대들에게는 그 당시만 못하더라도 여전히 전통시장 특유의 진한 삶의 내음은 찾을 수 있다. 지금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우리나라 사람보다 더 많다. 6. 꼭 봐야할 상점이나 거리는? -수입상품거리나 그릇 도매점, 액세서리 상가도 볼만한 것이 많다. 특히 수입상품상가 강추! 7. 먹거리 추천? -원래 남대문시장 최고의 인기 음식은 단연 갈치조림이다. 갈치조림골목은 남창동 본동상가에 위치해있다. 그리고 회현역 5번 출구 인근의 칼국수 골목도 유명하다. 또한 안경점 골목 주변의 노천 생갈비도 먹을 만하다. 이외에도 곰탕, 닭곰탕 등등의 먹거리 투어 장소로도 손색이 없는 시장. 8. 홈페이지 주소는? -www.namdaemunmarket.co.kr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남대문 시장 만으로 한나절 넉넉하다. 주변이 바로 명동이어서 남산이나 경복궁, 광화문 등지로 쉽게 이동이 가능하다. 10. 총평 및 당부사항 -우선 남대문 시장을 방문하기 전에는 반드시 홈페이지에서 전체 지도를 꼭 보고 가야한다. 또한 전문적인 상가들이 밀집해 있기 때문에 자신의 구매 목적에 맞는 상가 위치를 미리 알고 가면 좋다. 그리고 주차 문제는 심각해서 반드시 주차장에 세워 두어야 견인, 과태료 부과를 피할 수 있다. 에누리 없다.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포토 다큐] “대학 갈끼다” 둥실 떠오른 만학도의 꿈

    [포토 다큐] “대학 갈끼다” 둥실 떠오른 만학도의 꿈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나는 남해 바다를 앞마당으로 둔 경남 창원시 수정마을 구산초등학교에는 만학도 황분이(81), 이명개(76) 할머니가 1학년에 재학 중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초등학교 1학년이던 이 할머니는 아버지를 간병하기 위해 학교를 포기했지만 공부에 대한 열망은 항상 마음속 깊이 남아 있었다. ●밭일하다 학교 입학 소식 듣고 펑펑 울었지 그는 독학으로라도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마침 학교에서 일하는 동생에게 교과서를 구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김옥자 교장으로부터 “차라리 학교에 입학해 공부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입학 권유를 받고 조금 늦은 올해 3월 14일 황 할머니와 함께 구산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학교 입학이 결정됐다는 소식에 밭일하다 호미를 내려놓고 펑펑 울었어요. 드디어 공부에 대한 한을 풀 수 있다는 기쁨과 진작 학교 문을 두드렸으면 지금쯤 중학교에 다녔을 거란 아쉬움이 동시에 밀려왔지요.” 이 할머니는 비록 1학년이지만 손자뻘 학생들에겐 할머니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한다. 등교하면서 만나는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꼭 안아 준다. 같은 반 어린이 세수도 시켜 주고 점심시간에는 어린이들이 옷에 흘린 반찬도 닦아 준다. 무엇보다 어린이들에게 힘이 되는 건 따뜻한 인생 선배로서의 도움이다. 하루는 한 다문화가정 학생이 우두커니 교실 문 앞에 서 있는 있는 모습을 보고 “네가 태어난 곳은 한국이다. 한글을 열심히 배워 어머니 나라에 가서 한국어 선생님이 되라”고 희망을 심어 줬다. 지금 그 학생은 꿈을 이루기 위해 아주 활기차게 학교생활을 한다. ●학교선 친구·인생 선배… 방과 후엔 살림꾼 이 할머니는 하교 후에도 할 일이 많다. 밭에 심어 놓은 채소도 가꿔야 하고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면사무소에서 10년 넘게 청소 일도 하고 있다. 가끔은 홍합을 까는 부업도 한다. 하지만 마음엔 항상 여유가 넘쳐난다.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마음은 늘 공부에 있어 대학교까지 다닐 예정이라 이미 서울에 사는 아들에게 대학 등록금 지원을 요청해 뒀다. 황 할머니는 어느 날 버스를 잘못 탔는데 버스기사에게 한글을 모르면 버스도 타지 말라는 핀잔을 듣고 나서 한글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아직 1학년이지만 이미 버스를 타고 꽤 먼 곳까지 다닌다. 또한 거동이 불편한 87세 남편의 수발을 다 들면서도 밝은 모습으로 학교생활에 최선을 다한다. 치매 예방 및 건강을 위한 운동도 꾸준히 한다. 1학년이 3명뿐인 구산초등학교에서 두 할머니는 짝꿍이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등·하교도 같이하고 교무실에서 선생님이 만들어 주는 커피도 함께 마신다. ●진짜 공부란 세상을 이해하는 ‘그릇’ 키우는 것 문득 ‘공부는 왜 하는 걸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나라에서는 공부 스트레스로 자살하는 중고생도 적지 않다. 공부가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며 학벌 위주의 현실에서 대학교만 졸업하고 공부를 게을리하는 사람도 많다. 또한 100세 시대로 접어들면서 제2의 인생을 살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진정한 공부는 머리로 하는 공부가 다가 아닌 듯하다. “내 인생이 얼마 안 남았기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농사지은 채소를 모두 나눠 주면서 살고 있어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서로 이해하면서 양심적으로 착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이 할머니의 말처럼 지식과 경험이 쌓이면서 세상을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그릇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공부의 의미가 아닐까. 우리나라의 교육이 하루빨리 입시 위주에서 벗어나 앞으로의 100년을 내다볼 수 있는 교육제도가 마련되길 기대해 본다. 글 사진 창원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작은 사치 큰 행복… 고급 디저트 각광

    작은 사치 큰 행복… 고급 디저트 각광

    작은 사치로 삶의 만족감을 느끼는 ‘스몰 럭셔리’를 찾는 소비자들이 늘어나면서 고급 디저트가 각광을 받고 있다. 커피전문점은 물론 식품업계, 호텔 등이 다양한 디저트를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다. 특히 2030 여성 소비자의 관심이 높아 ‘보는 맛’에도 집중하는 경향이다. 11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2015년 국내 디저트 시장 규모는 1조 5000억원이다. 2013년 3000억원 규모에 비해 2년 사이 5배 늘어났다. 그동안 디저트는 사탕, 초콜릿 등이 주를 이뤘지만 최근 들어 과일 가공식품, 푸딩 등으로 다양화되고 있다. 커피전문점 투썸플레이스는 지난 한 주 동안 일부 매장에서 시험판매한 푸딩의 판매처를 전국 모든 매장으로 확대했다. 시판한 매장에서 대부분 소진됐기 때문이다. 우유와 달걀이 주원료인 푸딩은 부드러움과 달콤한 맛이 특징이다. 대상 청정원은 지난 7월 유럽식 과일 디저트 ‘콩포트’를 내놨다. 17세기 프랑스에서 만들어 먹기 시작한 ‘콩포트’는 프랑스어로 ‘섞기’란 뜻이다. 설탕을 조금 넣고 과일을 가볍게 졸여 과일 형태가 통째로 남아 있다. 최근 당류를 줄이려는 경향을 반영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기존 잼과 달리 낮은 설탕 함량을 인정해 과채가공품 카테고리를 적용했다. 유명 호텔은 문턱을 낮추는 도구로 디저트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웨스틴조선호텔은 지난달부터 ‘맥아더, 마릴린 먼로 티 박스’ 프로모션을 진행 중이다. 1950년대 실제 조선호텔을 다녀간 맥아더 장군과 먼로를 모티브로 만든 디저트 8종을 나무 박스에 담았다. 커피, 차뿐만 아니라 칵테일과 세트로 구성해 할인된 가격에 제공한다. 개관 102주년의 역사에 최신 트렌드를 더한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다양한 색깔과 예쁜 모양의 디저트가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전파되면서 디저트가 작은 사치를 누릴 수 있는 아이템으로 20~30대 여성들에게 인기”라고 전했다. 전경하 기자 lark3@seoul.co.kr
  • 일본서 로마 제국 동전 발견...들썩이는 日고고학계

    일본서 로마 제국 동전 발견...들썩이는 日고고학계

     일본 오키나와현의 고성(古城) 유적지에서 고대 로마 제국의 동전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이탈리아 로마와 오키나와섬이 지리적으로 1만㎞ 이상 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고고학계는 이번 발견이 동서양 문화 교류사의 비밀을 풀 열쇠가 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일본 고고학자들이 최근 카츠렌성 유적을 발굴한 결과 로마 제국 시절의 것으로 보이는 구리 동전 4개를 발견했다고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 등이 27일(현지시간) 현지 매체를 인용해 보도했다.  오키나와 교육위원회는 엑스레이(X-ray) 분석을 통해 직경 1.6~2㎝의 동전에 새겨진 인물이 로마 제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최초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재위 306∼337년)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분석 결과 이 동전들은 서기 300년과 4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CNN은 보도했다.  일본 고고학계는 12세기부터 17세기까지 오키나와를 통치했던 류큐(琉球) 왕국의 카츠렌성 유적지에 대한 발굴 사업을 2013년부터 실시하고 있다. 이번 발굴에서는 로마 시대 동전과 함께 17세기 오스만 투르크 제국(현재 터키)이 사용하던 동전 6개도 함께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카츠렌성은 오키나와 류큐 왕국의 주요 거점 가운데 하나로 중국은 물론, 일본과 우리나라, 동남아를 잇는 해상 교역의 요충지로 꼽힌다. 하지만 류큐는 약소국으로 오랫동안 중국에 조공을 바쳐야 했으며 1609년 일본 가고시마를 지배하던 시마즈 가문의 침입을 받은 뒤 그 지배 아래 놓였다. 1879년에는 일본의 오키나와현으로 개편됐다.  이번에 발견된 로마 동전이 언제 누구를 통해서 오키나와로 유입됐는지는 불분명하나, 12세기 이후 중국이나 일본과의 교역을 통해 유입됐을 가능성이 유력하다.  하지만 일본 역사학계는 서양의 로마제국과 일본의 관계가 새로 조명될 기회라며 들뜬 분위기다. 이웃나라 한국만 하더라도 신라 시대의 황남대총 고분군에서 5세기 실크로드를 거쳐 들어온 로마제국 유리병이 발견됐다. 하지만 당시 실크로드의 혜택을 별반 누리지 못했던 일본 고대 사회는 신라, 백제, 고구려보다 문화 수준이 뒤떨어진 것으로 평가됐다. 로마 동전이 고대 일본에서 건너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만큼 일본으로선 고대 일본 사회가 한국보다 뒤졌다는 문화적 열등감을 떨쳐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오키나와 국제대학의 미야기 히로유키 교수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카츠렌성에서 로마 제국 동전이 발견된 사실이 아직 믿겨지지 않는다”며 감격스러워 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아하! 우주] 인류의 오랜 호기심, 우주는 얼마나 클까?

    [아하! 우주] 인류의 오랜 호기심, 우주는 얼마나 클까?

    -1920년 4월 26일 섀플리 - 커티스 논쟁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우리은하가 우주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 미국의 한 천문학자에 의해 우리은하 뒤로도 무수한 은하들이 늘어서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우리은하는 우주 속의 조약돌 한 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발견 하나로 일약 천문학계의 영웅으로 떠오른 사람은 미국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이었다. 그는 얼마 뒤 다시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놀라운 발견을 하여 인류를 경악케 했다. 그러니까 우주란 상당히 오래 쓰여진 말 같지만, 그 진정한 뜻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밝혀지게 된 셈이다. 허블의 발견이 있기 전에도 사람들은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미리내(은하수)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미 300년도 더 전에 갈릴레오가 자신이 만든 망원경으로 들여다보고는, 어마어마한 별무리들이 뭉쳐 있는 게 은하수라고 인류에게 고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백년 뒤 칸트라는 18세기 독일의 철학자는 은하수에 대한 놀라운 추론을 내놓았다. 회전하는 거대한 성운이 수축하면서 원반 모양이 되고, 원반에서 별들이 탄생했으며, 은하수가 길게 한 줄로 보이는 것은 우리가 원반 위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들어 보아도 입이 딱 벌어지는 해석 아닌가. 칸트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우리 은하 바깥으로도 무수한 은하들이 섬처럼 흩어져 있으며, 우리 은하는 그 수많은 은하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섬우주론'을 내놓았던 것이다. 이 섬우주론이 끈질기게 살아남아 200년 뒤 미국에서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1차대전의 연기가 채 가시기도 전인 1920년, 우주를 사색하는 일단의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 세기의 대논쟁을 벌였다. 장소는 워싱턴의 미국과학 아카데미, 주제는 '우주의 크기'였다. 그리고 그 크기를 결정하는 시금석은 안드로메다 성운이었는데, 그 성운이 우리은하 안에 있는가 바깥에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논쟁은 두 논적을 축으로 하여 불꽃을 튀었는데, 하버드 대학의 할로 섀플리와 릭 천문대의 히버 커티스로, 둘 다 우주에 대해서는 내로라하는 일급 천문학자였다. 두 사람의 이력서를 잠시 살펴보면, 먼저 섀플리는 1919년 최초로 우리 은하계의 구조와 크기를 밝히고, 우리 태양계가 은하계 속에서 자리하는 위치를 찾아냄으로써 태양계가 은하 중심에 있을 거라는 종전의 생각을 뒤집어놓았다. 그리고 안드로메다 성운은 우리 은하 안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선언했다. 태양계가 우리 은하의 중심에 있지 않다는 섀플리의 우리 은하 모형은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우주관에 큰 변혁을 가져왔다. 이는 지구 중심설을 몰아낸 코페르니쿠스의 업적에 버금가는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가난한 농가 출신인 섀플리는 특이한 내력을 지닌 사람이었는데, 그가 천문학을 공부하게 된 것도 꽤나 터무니없는 이유 때문이었다. 언론학을 전공하려고 대학에 갔는데, 그 학과 개설이 1년 지연되는 바람에 다른 과를 찾기 위해 전공분야 안내 책자를 뒤적였다. 처음에 'archaeology(고고학)'가 나왔지만 읽을 수가 없었다. 책장을 넘기니 'astronomy'가 나왔다. 그건 읽을 수 있었다. 이게 섀플리가 천문학을 공부하게 된 이유의 전부다. 그는 나중에 천문대장이 되어 관측을 하지 않는 낮에는 천문대 밖에 나와앉아 개미를 관찰하는 일에 열중하여 개미에 관한 논문을 쓰기도 한 괴짜였다. 이러한 섀플리의 반대편에 선 커티스는 허셜-캅테인 모형을 받아들여 칸트의 섬우주론을 지지하는 쪽이었다. 허셜-캅테인 모형이란 우리 은하 구조를 최초로 연구한 허셜의 이론과 캅테인의 이론에서 나온 우리은하 모형으로, 우리은하의 모양은 지름 4만 광년의 타원체이며, 태양은 그 중심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이 모형을 받아들인 커티스는 안드로메다 성운까지의 거리를 50만 광년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섀플리 모형에서 주장하는 우리은하 크기를 훌쩍 넘어서는 거리였다. 즉, 커티스는 안드로메다 성운은 우리 은하 안에 있는 성운이 아니라, 우리 은하 밖의 외부 은하임이 틀림없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대논쟁은 승부가 나지 않았다. 판정을 내려줄 만한 잣대가 없었던 것이다. 해결의 핵심은 별까지의 거리를 결정하는 문제로, 예나 지금이나 천문학에서 가장 골머리를 앓던 난제였다. 그러나 판정은 엉뚱한 곳에서 내려졌다. 3년 뒤 혜성처럼 나타난 신출내기 천문학자 허블에 의해 승패가 가려졌던 것이다. 안드로메다 성운은 우리 은하 밖에 있는 또 다른 은하였다. 이로써 칸트의 섬우주론은 200년 만에 다시 화려하게 등장하게 되었다. 논쟁의 진정한 승자는 칸트였던 셈이다. 허블로부터 안드로메다 성운까지의 거리를 결정한 편지를 받았을 때 섀플리는 "이것이 내 우주를 파괴한 편지다"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판 마넌의 관측 결과를 믿었지. 어쨌든 그는 내 친구니까." 섀플리는 당시 윌슨산 천문대에 있던 동료이자 친구인 판 마넌의 관측값에 근거해 논문을 썼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섀플리는 학문적으로 반대편에 섰던 허블에게 여러 차례 거친 말로 모욕당한 적이 있었지만 끝까지 허블에게 관대하게 대했다. 뿐더러 "허블은 뛰어난 관측자다. 나보다도 몇 배는 더 훌륭하다" 고 상찬했다니, 섀플리는 대인배였던 모양이다. 평생을 은하 연구에 바쳤던 새플리는 1972년 콜로라도주의 한 노인 요양원에서 영면했다. 향년 87세. 그는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우리는 뒹구는 돌들의 형제요, 떠도는 구름의 사촌이다."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이광식의 천문학+] 세기의 대논쟁-’우주는 얼마나 큰가?’

    ​​[이광식의 천문학+] 세기의 대논쟁-’우주는 얼마나 큰가?’

    -1920년 4월 26일 섀플리 - 커티스 논쟁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우리은하가 우주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 미국의 한 천문학자에 의해 우리은하 뒤로도 무수한 은하들이 늘어서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우리은하는 우주 속의 조약돌 한 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발견 하나로 일약 천문학계의 영웅으로 떠오른 사람은 미국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이었다. 그는 얼마 뒤 다시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놀라운 발견을 하여 인류를 경악케 했다. 그러니까 우주란 상당히 오래 쓰여진 말 같지만, 그 진정한 뜻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밝혀지게 된 셈이다. 허블의 발견이 있기 전에도 사람들은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미리내(은하수)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미 300년도 더 전에 갈릴레오가 자신이 만든 망원경으로 들여다보고는, 어마어마한 별무리들이 뭉쳐 있는 게 은하수라고 인류에게 고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백년 뒤 칸트라는 18세기 독일의 철학자는 은하수에 대한 놀라운 추론을 내놓았다. 회전하는 거대한 성운이 수축하면서 원반 모양이 되고, 원반에서 별들이 탄생했으며, 은하수가 길게 한 줄로 보이는 것은 우리가 원반 위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들어 보아도 입이 딱 벌어지는 해석 아닌가. 칸트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우리 은하 바깥으로도 무수한 은하들이 섬처럼 흩어져 있으며, 우리 은하는 그 수많은 은하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섬우주론'을 내놓았던 것이다. 이 섬우주론이 끈질기게 살아남아 200년 뒤 미국에서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1차대전의 연기가 채 가시기도 전인 1920년, 우주를 사색하는 일단의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 세기의 대논쟁을 벌였다. 장소는 워싱턴의 미국과학 아카데미, 주제는 '우주의 크기'였다. 그리고 그 크기를 결정하는 시금석은 안드로메다 성운이었는데, 그 성운이 우리은하 안에 있는가 바깥에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논쟁은 두 논적을 축으로 하여 불꽃을 튀었는데, 하버드 대학의 할로 섀플리와 릭 천문대의 히버 커티스로, 둘 다 우주에 대해서는 내로라하는 일급 천문학자였다. 두 사람의 이력서를 잠시 살펴보면, 먼저 섀플리는 1919년 최초로 우리 은하계의 구조와 크기를 밝히고, 우리 태양계가 은하계 속에서 자리하는 위치를 찾아냄으로써 태양계가 은하 중심에 있을 거라는 종전의 생각을 뒤집어놓았다. 그리고 안드로메다 성운은 우리 은하 안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선언했다. 태양계가 우리 은하의 중심에 있지 않다는 섀플리의 우리 은하 모형은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우주관에 큰 변혁을 가져왔다. 이는 지구 중심설을 몰아낸 코페르니쿠스의 업적에 버금가는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가난한 농가 출신인 섀플리는 특이한 내력을 지닌 사람이었는데, 그가 천문학을 공부하게 된 것도 꽤나 터무니없는 이유 때문이었다. 언론학을 전공하려고 대학에 갔는데, 그 학과 개설이 1년 지연되는 바람에 다른 과를 찾기 위해 전공분야 안내 책자를 뒤적였다. 처음에 'archaeology(고고학)'가 나왔지만 읽을 수가 없었다. 책장을 넘기니 'astronomy'가 나왔다. 그건 읽을 수 있었다. 이게 섀플리가 천문학을 공부하게 된 이유의 전부다. 그는 나중에 천문대장이 되어 관측을 하지 않는 낮에는 천문대 밖에 나와앉아 개미를 관찰하는 일에 열중하여 개미에 관한 논문을 쓰기도 한 괴짜였다. 이러한 섀플리의 반대편에 선 커티스는 허셜-캅테인 모형을 받아들여 칸트의 섬우주론을 지지하는 쪽이었다. 허셜-캅테인 모형이란 우리 은하 구조를 최초로 연구한 허셜의 이론과 캅테인의 이론에서 나온 우리은하 모형으로, 우리은하의 모양은 지름 4만 광년의 타원체이며, 태양은 그 중심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이 모형을 받아들인 커티스는 안드로메다 성운까지의 거리를 50만 광년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섀플리 모형에서 주장하는 우리은하 크기를 훌쩍 넘어서는 거리였다. 즉, 커티스는 안드로메다 성운은 우리 은하 안에 있는 성운이 아니라, 우리 은하 밖의 외부 은하임이 틀림없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대논쟁은 승부가 나지 않았다. 판정을 내려줄 만한 잣대가 없었던 것이다. 해결의 핵심은 별까지의 거리를 결정하는 문제로, 예나 지금이나 천문학에서 가장 골머리를 앓던 난제였다. 그러나 판정은 엉뚱한 곳에서 내려졌다. 3년 뒤 혜성처럼 나타난 신출내기 천문학자 허블에 의해 승패가 가려졌던 것이다. 안드로메다 성운은 우리 은하 밖에 있는 또 다른 은하였다. 이로써 칸트의 섬우주론은 200년 만에 다시 화려하게 등장하게 되었다. 논쟁의 진정한 승자는 칸트였던 셈이다. 허블로부터 안드로메다 성운까지의 거리를 결정한 편지를 받았을 때 섀플리는 "이것이 내 우주를 파괴한 편지다"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판 마넌의 관측 결과를 믿었지. 어쨌든 그는 내 친구니까." 섀플리는 당시 윌슨산 천문대에 있던 동료이자 친구인 판 마넌의 관측값에 근거해 논문을 썼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섀플리는 학문적으로 반대편에 섰던 허블에게 여러 차례 거친 말로 모욕당한 적이 있었지만 끝까지 허블에게 관대하게 대했다. 뿐더러 "허블은 뛰어난 관측자다. 나보다도 몇 배는 더 훌륭하다" 고 상찬했다니, 섀플리는 대인배였던 모양이다. 평생을 은하 연구에 바쳤던 새플리는 1972년 콜로라도주의 한 노인 요양원에서 영면했다. 향년 87세. 그는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우리는 뒹구는 돌들의 형제요, 떠도는 구름의 사촌이다."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111억원 쩐의 전쟁 21세 김시우의 반란

    111억원 쩐의 전쟁 21세 김시우의 반란

    김시우(21·CJ대한통운)가 마침내 보너스 1000만 달러(약 111억원)를 놓고 벌이는 ‘최후의 30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김시우는 12일 인디애나주 캐멀의 크룩트 스틱 골프클럽(파72·7516야드)에서 끝난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플레이오프(PO) 3차전인 BMW 챔피언십 4라운드에서 버디 4개와 보기 3개를 묶어 1타를 줄였다. 최종합계 7언더파 281타를 적어낸 김시우는 공동 20위로 대회를 마쳐 페덱스컵 랭킹 18위로 PO 최종전인 투어챔피언십에 진출했다. 22일부터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열리는 투어챔피언십은 지난 PO 1~3차전을 통해 추려진 페덱스컵 랭킹 30위 이내 선수들만이 출전, 시즌 최고의 선수를 가리는 대회다. 이 대회 우승자는 우승 상금 외에도 1000만 달러의 보너스를 챙길 수 있다. 김시우는 최경주(2007년·2008년·2010년·2011년), 양용은(2009년·2011년), 배상문(2015년)에 이어 한국 선수로는 네 번째로 출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김시우는 이 대회 결과에 따라 신인왕도 바라볼 수 있다. 2013년 데뷔 때는 나이(17세5개월6일) 제한에 걸려 출전 대회 수가 많지 않았다. 규정 출전 대회 수를 채우지 못한 덕(?)에 신인왕 후보 자격을 얻지 못했지만 올해는 최고의 루키 후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경쟁자는 에밀리아노 그리요(아르헨티나)다. 그는 페덱스컵 랭킹 9위로 투어챔피언십 출전권을 확보했다. 김시우는 그리요에게 페덱스컵 랭킹을 비롯해 세계랭킹, 상금 랭킹에서 모두 뒤지지만 신인왕은 기록이 아닌 선수들의 투표로 선정된다. 만약 김시우가 신인왕에 오를 경우 한국인으로는 역대 첫 수상자가 된다. 올해 US오픈을 제패한 장타자 더스틴 존슨(미국)이 합계 23언더파 265타로 BMW 챔피언십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미국의 인기 스타 리키 파울러는 59위로 밀리는 바람에 페덱스컵 랭킹 31위, 간발의 차이로 투어챔피언십 출전권을 얻지 못했다. 턱걸이인 30위로 막차를 탄 샬 슈워츨(남아공)과는 불과 0.57점 차이. 이는 PGA 투어 PO 지난 10년 동안 가장 적은 점수 차다. 최병규 전문기자 cbk91065@seoul.co.kr
  • 서울랜드, 추석 맞아 줄타기 공연·퓨전 국악 등 축제 한마당

    서울랜드, 추석 맞아 줄타기 공연·퓨전 국악 등 축제 한마당

    서울랜드가 민족 최대 명절인 추석을 맞아 추석 연휴 동안 ‘한가위 축제 한마당’을 포함하여 다양한 행사를 마련했다. 서울랜드는 오는 14일부터 5일간 세계의 광장에서 진행되는 ‘한가위 축제 한마당’에서 ▲인간문화재 김대균 줄타기 명인의 공연 ▲여성 4인조 퓨전국악팀 ‘연리지’ 공연 ▲민속놀이 참여 경품 이벤트 등을 진행한다. 세계의 광장 일대에서는 이외에도 민속놀이 참여 경품 이벤트 ‘복불복! 민속놀이 한마당’, 상모돌리기·제기차기 등 우리나라 전통 민속놀이와 일본·중국·태국 등 해외 민속놀이를 함께 즐길 수 있는 ‘민속놀이 체험’, 윷을 던져 올해 남은 기간 운세를 점쳐보는 ‘윷점’도 마련된다. 서울랜드의 대표 마스코트인 아롱이, 다롱이, 브루미즈 캐릭터가 한복을 입고 고객과 즐거운 포토타임을 갖는 ‘한가위 캐릭터 포토서비스’도 운영한다. TV 속 인기 캐릭터 라바의 옐로우, 레드, 브루미즈 등을 서울랜드 곳곳에서 만나는 ‘캐릭터 요정 퍼레이드’도 매일 진행한다. 홈페이지에서 사전신청을 하면 강아지 기차 ‘포포티’에 탑승해 퍼레이드 행렬에 동참할 수도 있다. 이와 함께 가족 뮤지컬 ‘드리밍’과 어린이 뮤지컬 ‘싱 싱 캐릭터’와 야간에는 ‘애니멀 킹덤 2’, ‘라이트 판타지쇼’ 등의 볼거리가 준비돼 있다. 먹거리로는 팝, 가요 라이브 음악과 함께 하는 ‘치맥나이트’, 동남아시아의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아시안 푸드 페스티벌’이 있다. 한편 서울랜드는 9월 한달 간 할인혜택을 제공한다. 신한카드 고객은 전월 실적에 상관없이 자유이용권을 70% 할인된 12000원에 이용할 수 있다. 36개월 이상 7세 이하 미취학 아동은 자유이용권을 50% 할인된 17000원에 구매할 수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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