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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스키 시장에 이변/윈저 「1위자리」 탈환

    ◎선두 임페리얼 원액부족 생산위축/2개월연속 11만상자 판매… 대반격 두산씨그램의 고급위스키 「윈저」의 판매량이 크게 늘고 있다.윈저의 판매량은 지난달 11만1천 상자(한상자는 700㎖ 6병)를 기록,9만8천600상자를 판매한 「임페리얼 클래식」을 앞섰다.4월에 이어 2개월 연속 이같은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물론 임페리얼은 그동안 위스키 시장의 최강자로 군림해왔다.윈저는 임페리얼 출시 이후 빼앗겼던 위스키 시장 1위자리를 4년만에 되찾았다. 임페리얼에 비해 판매량이 적었던 윈저가 많이 팔리고 있는데는 이유가 있다.임페리얼이 원액 부족난을 겪고 있기 때문.진로로서는 그동안 너무 잘 팔려 1위자리를 빼앗긴 셈이 됐다.없어서 못팔아 2위로 내려 앉았으니 그렇게 기분이 나쁠 리는 없지만 진로로서는 안타깝지 않을수 없다. 윈저의 판매량은 지난 3월까지 한달에 3만 상자 정도 밖에 되지 않았으니 3배나 증가한 것이다.조선맥주의 「딤플」 역시 9만1천 상자를 판매해 임페리얼을 양면 공격하고 있다.그러나 진로는 여유있는 표정이다.원액 확보작전에 나서 이달부터는 정상적인 생산에 들어가 1위를 탈환할 수 있다고 말한다.진로는 원액이 모자라는 임페리얼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대체 제품격으로 「칼튼힐」과 「로비듀」를 판매중이다. 씨그램사와 협력 체제를 갖고 있는 두산씨그램의 원액 공급 사정은 좋은 편이다.원액 부족으로 많이 팔지 못해 1위 자리를 내주었다는 진로측의 주장을 일축한다.사원들의 판촉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는 얘기다.전국의 유흥업소를 뛰어다닌 결과가 나타났다는 것.앞으로도 1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모든 영업력을 쏟겠다며 자신만만한 표정이다.진로는 사실 원액 부족으로 가짜 임페리얼이 유통되는 등 어려움을 겪어왔다.진로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가짜를 식별할 수 있는 표시를 넣는 등 대책을 세워왔다.마개를 따기 전에는 영문 표기의 임페리얼 클래식이 적혀 있으나 딴 뒤에는 오픈이라는 입체 문양이 나타난다. 윈저는 2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스카치 위스키의 명가 윌리엄 힐의 제조비법과 스크틀랜드 하일랜드 지방에서 12년동안 숙성된 최고급 원액을 사용한다.임페리얼은 스코틀랜드의 윌리엄 그랜츠 가문에서 직접 원액을 수입,진로 연구진에서 맛과 향을 한국인이 취향에 맞게 제조했다.그물망으로 둘러싼 병이 트레이드 마크인 딤플은 15년산의 디럭스급.87년 세계 주류 품평회에서 디럭스 위스키 부문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쉰여섯 「억척어멈」의 힘 넘친 무대(객석에서)

    「그여자,억척어멈」의 박정자씨가 지쳐서 공연기간을 줄인다는 얘기가 들려왔다.일본전역 순회로부터 시작해 국내공연으로 이어진 연속 4개월의 장기공연으로 거의 탈진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얘기였던지 학전 블루 무대에 선 그에게서는 힘이 넘쳤다.군화발에 단추 풀린 블라우스 자락을 허리에 질끈 동여매고 나타난 그는 초반부터 무대위와 아래를 힘으로 틀어쥔다. 박정자가 혼자 얘기하고 노래하고 통곡하는 「그여자,억척어멈」은 양파껍질처럼 겹겹으로 싸인 복잡한 구조가 특징.극(극)의 배경이 50년대 한국전쟁에서 17세기 유럽 종교전쟁으로,또 대동아전쟁과 동학란으로 수시로 왔다갔다 하며 이 속에서조차 현실과 극중의 얘기가 교차한다.배우가 이 겹겹의 시간과 공간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관객을 이끌고 넘나드느냐가 연기의 핵심이라면 이 부분에서 쉰여섯 관록있는 여배우의 역량이 생생히 살아난다. 난해함을 풀어가는 열쇠는 다름아닌 97년 현실의 박정자.군데군데 극에서 떨어져 해설을 곁들인 뒤 관객을 몇십년,몇백년 전후로 훌쩍데려간다.그래도 모자란다 싶으면 『나도 헷갈리는 연극이니 굳이 정확히 이해하려 하지 말자』며 편안한 감상으로 이끈다.그렇다고 극의 품위와 긴장감이 손상되는 것도 아니다.극중에서 보여주는 감정의 기복과 상황반전의 폭이 워낙 커 그 속으로 다 묻혀들기 때문이다. 이 연극에서 그는 대사와 표정,몸짓 못지않게 다양한 노래로 사람들을 쥐고 푼다.「굳세어라 금순아」로 숙연함을 자아내는가 하면 프랑스 샹송으로 장단박수를 유도하기도 하고 아리랑메들리로는 숨죽이는 적막과 눈물을 이끌어낸다.동학란의 한켠에서 총에 맞은 딸을 끌어안고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나타난 그는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열창한다.극의 연속이겠거니 여긴 관객들은 각본처럼 다시 박수장단을 맞추지만 2절이 시작되면서야 극의 종막을 깨닫고 앙코르를 청한다.배우의 관객장악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배우는 아플 수도,슬플 수도 없고 항상 약속한 그 장소에 서야 합니다.오늘 공연은 어느 때보다 친밀감을 느꼈습니다.연극에 적극 참여한 여러분과 제가 기를 주고받는다는 생각으로 공연했습니다』 앙코르 노래를 대신한 그의 인사말에 박수는 더욱 커졌다.공연은 공연장내 모든 사람의 합작품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나중 그는 실제로 몸이 안좋은 상태라고 고백했다.
  • 피아니스트 백건우(이세기의 인물탐구:133)

    ◎끝없이 「대곡」에 도전하는 “건반의 거장”/미·불 등서 더 명성… 라벨·리스트 해석에 권위/고전적 기교·낭만적 선율로 청중 매료시켜 그는 음악의 화가,음악의 철학자, 음악의 시인이다.한편의 시를 쓰기 위해 무수한 어휘의 바구니속에서 하나의 낱말을 골라내고 그 낱말이 다음의 낱말에 연결되어 어떤 이미지를 형성할것인가를 무한히 추구해 나간다.그리고 높고 낮고 험한 계곡과 계류를 지나 정상에 올랐을 때의 정복감과 승리감,완성과 사색을 동시에 안겨준다.그의 「메피스토 왈츠」는 마치 여러 대의 피아노가 협주하는듯한 역동성을 분출시킨다.또 「발렌슈타트 호반」은 금물결이 튕겨나오고 나뭇잎새에 맺힌 이슬방울이 수면에 아롱지는 섬세함의 극치다.고전적인 기교와 낭만적인 선율이 조화된 그의 연주는 때로는 넘치는 폭발력으로,때로는 심장을 후비는 미세한 서정성을 만들어냈고 잘게 부서지는 투명한 화음과 광풍같은 질주로 치닫다가 자지러질듯 소멸된다. 그는 방대한 레퍼토리를 넘나들며 난곡 대곡에 끝없이 도전한 마에스트로다.일찍이 라벨과 리스트 해석의 권위자로 떠올랐고 독일의 슈트겐슈미트는 『백건우보다 「밤의 가스파르」를 더 훌륭하게 연주한 사람은 없을것』이라고 단언한다.프로코피에프 무소르크스키 라흐마니노프에 이어 지난 92년 프랑스 단테사가 출반한 스크리야빈연주는 권위있는 디아파종 금상에 선정되었고 「놀라운 기량과 독특한 점층법으로 스크리야빈의 색소와 섬세함을 제압하고야 말았다」는 평을 받았다.프랑스의 음악평론가 알랭 코샤르는 「스크리야빈의 해석에 있어 호로비츠,리히터에 대항할 확실한 경쟁자가 나타났다」고 격찬,리스트의 「헝가리광시곡」에 대해서도 「천재적 해석의 결정판」으로 못밖는다. ○배재중 졸업후 단신 도미 지난해 가을 명동성당에서 국내초연한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20개의 시선」은 그의 수많은 연주중에서도 단연 명연주의 백미다.올리비에 메시앙의 이 피아노대곡은 연주시간 2시간 30분 길이에다 기교적으로도 대단한 난곡이어서 이를 완주한 피아니스트는 손꼽을 정도다. 이곡을 들은 사람들은 무엇을 만날지 알수없는 소리의 힘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기예수의 이미지가 다이아몬드의 다면체처럼 반짝거리는 신비로운 상념을 체험할수 있었다. 성당안은 음이 뿜어내는 눈부신 광휘로 가득찼고 별들이 일으키는 우주의 천둥소리에 청중은 전율했다.그는 화음의 각음을 연속적으로 연주하는 아르페지오의 연쇄와 폴리포니(다성음악)로 장대한 음악의 성전을 구축해 낸것이다.「변화무쌍한 리듬,찬란한 화성,소용돌이치는 음의 진행」속에서 소리는 빛의 다발이 되어 객석을 온통 얼어붙어버렸고 연주가 끝나자 청중은 한동안 침묵,문득 깨어나 전원 기립과 긴 박수로 열광했다.메시앙이 「나는 음악을 듣고 작곡할때 움직이는 모든 색채를 본다」고 했듯이 그는 다채로운 음의 변화를 작가자신이 되어 되살려낸 것이다.청중은 더이상 바랄것이 없었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어릴때부터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칠수있는 분위기에서 자라났다.장충국민학교 3학년때 벌써 김생려씨가 지휘하는 서울시향과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주제를 위한 랩소디」협연으로 「천재성과탐구성」의 기미를 보이더니 배재중 졸업후 혼자서 도미,맨손으로 세계음악의 중심에 뛰어들어 고독한 방황끝에 어떤 음악을 어떻게 연주할 것인가를 터득하여 「건반위의 순례자」가 되었다. 일년내내 꽉찬 스케줄속에서 연주여행으로 끝없이 움직이는 가운데도 그는 음악을 말할때 두눈을 반짝인다.지금도 순수무결한 소년같은 모습이지만 연습에 들어가면 숲을 조감하는 매처럼 날카로운 안광을 번뜩이며 건반을 낚아채고 찍어낸다.그리고 건반 깊숙이 숨어있는 미지의 보석들을 얼마든지 캐낸다.앉은 자세 하나만으로도 피아노 장악력이 느껴질만큼 그의 모든 분위기는 이미 음악이다. ○여우 윤정희와 결혼 또 엄격주의자로서 보수적인 편이지만 지휘자나 오케스트라와의 곡해석에서 의견이 다를때는 상대방의 무한한 가능성에 요구하기보다 제한된 능력을 빠르게 파악하고 적응해나간다. 지난해 차이코프스키 볼쇼이교향악단과 BMG(RCA레드실)가 제작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완주녹음에 들어갔을때 그는 명상적인 순간을 길게 가져간데 비해 페도세예프는 열혈적인 슬라브의 민족성을 몰아붙이듯 빠르고 강한 템포로 오케스트라를 지휘,그러나 페도세예프는 「라흐마니노프의 선율이 가진 난해한 깊이를 어려움없이 끌어내는 백건우」를 이해하여 두 사람은 마법에 걸린듯 호흡과 개성을 맞춘 뒷얘기를 남기고 있다. 폭넓은 통찰력과 감각적 기교를 겸비한 그는 곡이 갖고있는 고유한 색채를 가장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피아노의 시인」「피아노의 건축가」로서 그의 음악은 맑게 정제된 영롱성으로 화창감을 성취하는 것이 특징이다.그의 연주에 감동받은 브리짓드 마셍은 「르마뗑」지에다 「백건우의 리스트연주는 한마디로 신비로운 여행이며 청중들을 작품의 심장부로 끌어들여 원초적인 맥박의 경험과 그 깨달음을 전해준다」고 했다.그와 절친한 피가로지의 피에르 페티도 「만약 리스트가 현재 살아있다면 틀림없이 백건우와 같이 빈틈없는 테크닉과 순수하고 경이로운 음악적 해석으로 연주했을 것」이라고 평한다.이런 모든 증명처럼 그의 음악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먼저 「시적 심상」을 떠올리게 하는 매력이 76년 파리에서 결혼한 영화배우 윤정희와의 사이엔 바이올린을 공부하는 딸 진희양(20)이 있다.음악외엔 그림과 영화를 좋아하고 사진실력은 수준급,무대예술에 관심이 많아 그방면의 책과 대화를 즐긴다. ○권위의 디아파종상 수상 이제 그는 세계적으로 일급연주자만을 엄선하는 RCA의 전속으로 미국과 러시아 프랑스 등에서 그의 음악을 집중적으로 녹음하고 있다.이른바 세계적 음악가로서 입지를 굳힌 셈이다.또 수많은 대곡을 정복하고 다음 대곡의 정상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그는 에베레스트를 탐험하는 산악인에도 비유된다.그러나 「피아노 비루투오소」「그레이트 카리스마」로 불리는 시기이지만 어떤 찬사에도 쉽게 현혹되지 않는다.음악에서의 완성이라든가 원숙은 있을수 없다는 주의다.그래서 연주할 때마다 언제나 새로 시작하는 자세,건실한 학구적 태도를 고집스럽게 지킨다. 무궁무진한 음악의 광활한 세계에 파고들어 다음은 어떤 신세계를 펼쳐낼 것인가.그리고 새롭게 캐낸 수많은 음과 리듬을 내부에 양성시켜 어느날 일진광풍을일으킨다.누군가 「1세기에 몇명 나오는 예술가의 한사람」이라고 한 말은 「건반위의 명상자」인 마에스트를 두고 너무나 적중된,당연한 찬사다. □연보 ▲1946년 서울 출생 ▲61년이후 뉴욕예술고와 줄리어드음악학교 동시입학,로지나 레빈 일로나 카보쉬 빌헤름 켐프사사 ▲65년 뉴욕 카네기홀 데뷔 연주 ▲69년 미레벤트리트 콩쿠르 특별상 ▲70년 이부조니콩쿠르 금메달 ▲71년 미 나옴버그피아노콩쿠르 대상 ▲72년 뉴욕 링컨센터연주 ▲74년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모리스 라벨 1875­1937」제전 피아노전곡 탄주자 초청 ▲75년라벨탄생 100주년 기념음악제 연주,광복 30주년기념 음악제 귀국연주 ▲82년 리스트연속연주(파리) ▲84년 라벨­스크리야빈­무솔그스키의 작품 전곡 4차례연주(파리) ▲86년 리스트 100주년기념 음악제 독주자초청연주 ▲87년 런던 프롬나드 페스티벌 100주년 기념공연 라스트연주 ▲88년 파리 단테사 전속계약 ▲89년 리스트콩쿠르 심사위원, 영국 버진사에서 리스트 「헝가리 광시곡」 등 10매의 음반 출반 ▲91년 KBS홀 개관기념 연주 ▲92년 디아파종상 금상 및 대상 ▲93년 누벨아카데미 디스크상, 피가로지 「베스트 레코드」선정, 그리그 탄생 150주년기념연주,라흐마니노프 탄생 120주년 및 서거 50주년기념완주(3일연속),서울독주회 ▲96년 메이저사인 BMG와 4년간 독점계약,올리비에 메시앙의 「아기예수를 바라보는 20개의 시선」(명동성당서 3일간연주) 등 연 60회 연주 ▲97년 라로크 단테룸에서 프로코피에프연주(유럽전역에 실황중계) 〈현재〉 프랑스 디나르 에머럴드 해변축제 음악감독 런던필 런던필하모니 BBC교향악단 베를린필 프랑스국향 스위스로망드관현악단 등 셰계적 교향악단 수백여회 협연
  • 서예가 구당 여원구(이세기의 인물탐구:132)

    ◎옥돌과 한지에 아로새긴 선비정신/점·획의 일분서서 현판 글씨까지 멋과 기품/40대에 서법탐구 나서… 천변만화 경지에 서울 신문로 파출소 뒤편에 위치한 구당서실.당호는 글씨와 전각을 뜻하는 현묵헌 또는 단석실로 내걸고 있다.서실에 들어서면 싱그러운 묵향이전에 고서적과 서예관련 자료에 둘러싸여 몸집이 작은 구당은 온통 책속에 매몰된 분위기다.그는 전각을 할 수 있는 공간과 글씨를 쓸수있는 서탁을 따로 마련해서 전각이 되는 날은 하루종일 옥돌을 쪼고 글씨가 되는 날은 먹을 갈아 성자에 몰두한다.글씨도 점과 획으로된 일분서에서 현판 등 대형글씨에 이르기까지 그의 예술은 한창 멋과 기품이 무르익는 경지다. ○실용성보다 정도 고집 그에게 서법의 길을 권하여 직접 서예와 전각을 가르친 여초 김응현은 「구당은 외화를 즐기지 아니하고 진솔을 추구하는 서가로 법도에의 구속을 면치 못하는 고집이 있다」고 말한다. 지난번 구당이 서예계에서는 처음으로 「반야심경」전각이 실린 「구당인존」을 발간했을때 「실용성이 없는 이런 대작을 시도하는 것은 참으로 예술하는 자세이며 구도자의 정신이 아니고는 해낼수 없는 원숙과 저력」임을 격려해 마지 않았다.그의 전각은 「전법 장법 도법을 치밀하게 궁리하고 계산한 호매괴려의 세계」로 알려져 있다.주옥같은 중국의 명필들이 집대성된 서법법첩으로 한금문에서 갑골문,백서와 죽목간을 교습하여 그는 언제부턴가 구당의 서미로 믿음의 신표인 전각을 성립해 낸것이다. 전각뿐만 아니라 그는 글씨에서도 조선일보가 초대한 「구당서전」과 「일분서전」으로 서단의 비상한 존재가 되었다.일분서전이란 문자그대로 작은 글씨전이다.그러나 단순한 선조가 아닌 소자에서 방촌에 이르는 모든 서체를 구사하는 것은 다른 대작과 마찬가지다.다만 필심을 세우고 가장 가는 붓으로 붓끝이 얼마나 지면에 닿아 혈과 육을 형성하느냐에 따라 그 품격이 점쳐지게 된다.점과 획이 뚜렷한 뼈대를 이루면서도 여기에 기운생동하는 정백이 통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파리의 머리만큼 작은 글자인 승두소자나 가는 터럭에 비견되는 호발과 같은 세서를 위한 행필에서도 그는 팔을 굽히고 펴는 모든 수법을 섭렵하게 되었고 그의 자재로운 용필은 여초의 지적에 의하면 「신채를 감지할수 있게된」 경지다.그중에서도 금박가루를 아교에 갠 금니로 쓴 금강경은 예서 해서로 5천400자를 이루고 그 길이는 폭 45㎝에 길이가 5m나 된다.한문성경중 잠언도 1천300자를 써서 10곡 병풍으로 만들고 있다. 구당 여원구는 청장년기를 보내다가 교단과 직장에 있다가 40대에 서법탐구의 길로 용감히 전환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경기도 양평에서 지주이자 한학자이던 여운필씨의 5형제중 장남,양근 향교 전교이던 부친으로부터 6살때부터 한문과 붓글씨를 배웠으나 서예가가 된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치 못한채 고교졸업후 고향에서 교편생활을 했었다.그후 다시 서울에 올라와 제일약품에서 경리일을 하다가 함양 여씨 종친회의 족보간행에 끼어든 것이 서예의 길에 들어선 동기다. ○전각으로 국전 첫 대상 때마침 인사동에서 표구사를 하던 집안의 어른이 「저렇게 잘쓰는 글씨를 경리일이나 하면서 썩히게 할수없다」면서 동방연서회의 여초에게 데려간 것이다.낮에는 회사에 다니고 퇴근후엔 동방연서회로 나와 글씨,그러나 붓잡는 방법조차 달라서 그는 세로획에서의 뾰족한 침을 매달아놓은듯한,이슬방울이 맺힌듯한 현침수로를 익히기 위해 창신동 단칸방에서 식구들이 줄줄이 누워 자는동안 글씨연습으로 밤을 새웠다. 그러나 스승은 딱부러지게 가르치는 대신 『전서를 많이 써라』『책을 많이 보라』고만 했고 세월이 지나자 비로소 「붓을 송곳처럼 세우고」쓰는 현완직필에 녹아들수 있었다.70년이후 동방연서회가 주관하는 행사와 교류전에 작품을 출품하기 시작했고 76년부터 국전 6회 연속입선,다음해 특선과 국전서예부문 대상은 전각으로서는 서예계에서도 최초의 경사였다. 그때 충북 괴산에서 활동하던 청화백자의 권위자인 황규동씨가 직장을 그만두고 괴산에 내려와 함께 일하자고 권유해왔고 만 6개월간 괴산에 내려가 도자기에다 쓴 글씨로 79년 서울 관훈미술관에서 첫전시인 도서전을 열었다.이때 문화재위원장인 임창순씨는 「글씨는 쓰는 사람의 내면의성숙과 외율의 조화이기 때문에 천질만으로는 부족하고 노력만으로도 미치지 못하나 그는 노력과 천질로 청자위에 글씨의 강과 유를 성취했다」고 호평했다. 구당은 성품이 깨끗하고 상냥해서 좀체로 화를 내는 법이 없는 무골호인이다.언제봐도 웃는 얼굴에 다정다감하지만 들끓는 불화가 그치지 않는 서예계에서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옳은 말을 하고 자신의 의견을 명료하게 타진시킨다.그대신 도무지 융통성이 없고 막무가내로 비사교적이며 멋적고 쑥스러운 일은 해본적이 없는 천성 선비타입이다.여주 사람인 부인 경석분여사와의 사이엔 3남1녀. 그는 그날 글씨가 되지않으면 처음부터 쓰지 않는다.안되는 날은 하루종일 씨름해봤자 한자도 써지지 않기 때문이다.글씨를 쓰다보면 첫획에서부터 「오늘은 글씨가 된다」「안된다」는 것이 점쳐진다.그러나 일분서를 하기 위해 한번 책상앞에 앉으면 그는 몇날 몇밤을 그곳에 매달린다.그만큼 집념과 오기가 강하다. ○화를 모르는 무골호인 또 연륜이나 나이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지금도 글씨에 필요한것은열심히 배우고 연구한다.동양화가 홍석창에게 사군자를 배우고 당의 이양빙의 전서에 꿰뚫을듯이 파고든다.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게된것을 「스스로 대견하고 행복하게」 여긴다. 이제는 자신의 서법예술을 다양하게 펼치고 있으나 자신이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고는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다.「천변만화의 계경에 이르렀다」는 스승의 칭찬도 극구 사양한다.다만 유창탁발을 앞세우기보다 「기하거나 험하거나 삽한 기미가 없이 정직하고 온자한 향기를 지닌 글씨」를 이루기에 전심전력할 뿐이다. 요즘은 천자문 전각을 완성하고 이를 책으로 출간,눈부신 옥돌에 심선을 새기고 청결한 백지에 묵향을 뿌리면서 자신만의 서법언어로 낭랑한 지음을 울리고 있다. □연보 ▲1932년 경기도 양평 출생 ▲51년 서울농고 졸업 ▲73∼91년 동방연서회전(서울) ▲76∼81년 국전연속 6회입선 ▲79년 동아미술제 미술상수상,도서전(서울 관훈미술관) ▲78∼86년 국제서도연맹전(도쿄),한국서예가협회전(서울) ▲80∼92년 한국전각학회 이사 ▲81∼86년 한중서법전(서울·대북),한일서예교류전(서울·도쿄) ▲82년 국전 특선 ▲83년 국전서예부문 대상수상 ▲83∼88년 국제서도연맹이사 ▲84년 개인전(롯데미술관) ▲84∼91년 국립현대미술관초대전 ▲86년 한불수교 1백주년기념전 ▲87년 동아미술제 심사위원 ▲88년 국전심사위원,한국서예 백년전(예술의 전당) ▲88∼92년 동방연서회및 국제서법예술연합이사 ▲89∼91년 한국미협 이사 ▲91년 단국대 교육대학원졸업,전국대학미술대전 심사위원장,대한민국 서예대전 운영위원장,서울서예대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장 ▲92년 개인전(조선일보미술관) ▲93년 대한민국서예대전 심사위원장,국제전각대전 평심위원(북경) ▲94년 동아미술제 운영위원 ▲96년 구당일분서전(덕원미술관) 〈현재〉 한국미협 및 한국전각학회부이사장, 국제서법예술연합 및 동방연서회 이사 〈저서〉 「구당인존(상·하)」 「반야심경인보」 전각 「천자문」외
  • 김학준 총장 경총 경영조찬세미나 주제발표

    ◎북한경제 이미 자생력 상실/대북지원 품목 추가허용·농업기술 이전 바람직 한국경영자총협회(회장 김창성)는 9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제29회 경영조찬세미나를 개최했다.다음은 김학준 인천대 총장이 주제발표한 「북한의 현재 상황과 남북경협의 장래」의 요지이다. 북한의 오늘날 상황은 정상이 아니다.경제체제가 몇 년째 사실상 붕괴됐는 데도 정권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북한의 비정상성을 증명한다.지난 7년간 국민총생산이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계속하고 있으며 발전소와 공장의 가동률도 각각 30% 미만으로 주민 대다수가 굶주리고 있는 처참한 조건에서도 민중봉기가 전혀 없다시피하다.북한이 직면한 비극의 핵심은 바로 비정상에 있다.정상적인 정권교체는 아예 생각조차 못한다고 해도 쿠데타나 민중봉기에 의한 정권교체를 시도하지 못한다는 점이 문제를 더 악화시키고 있다. 김정일 정권은 권력상황만 놓고 보면 비교적 안정성을 유지하고 있다.김일성이 김정일을 20년 넘게 후계자로 키워온데다 특유의 억압체제와 세뇌체계가복합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김일성이 죽은 뒤에도 저항의 징표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우리식 사회주의」체제는 사실상 무너졌다.체제를 떠받드는 가장 중요한 기둥은 경제인데,「인민경제」부문은 가격과 배급체계 양면에서 모두 파탄났다.「인민경제」에 초점을 맞춰보면 공업과 농업,무역 모두가 파탄났음을 쉽게 알 수 있다.원유·전기·일상소비품·식량·외화 등이 모두 부족하다.그렇다면 북한 경제는 회복될 수 있을까.부정적이다.인민경제 부문은 이미 자생력을 잃었다.군수경제 부문을 인민경제로 전환하면 되살아날수 있다는 예측에도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동의하지 않는다.군수경제 부문도 심각한 긴장상태에 놓여 있어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북한경제가 그래도 아주 죽지 않고 잔명이 유지되는 요인은 미국과 중국 두 강대국,부차적으로는 일본과 러시아가 직·간접으로 돕고 있기 때문이다.왜 북한의 붕괴를 막고자 하는가.우선 북한이 붕괴될 경우 한반도 전체가 예상하기 어려운 큰 혼란과 무질서에 빠지게 될 것이며 주변 강대국들의 군사적 개입이 불가피해진다고 전망한다.그러한 상황은 겨우 냉전구조에서 벗어나 화해와 협력을 지향하는 동아시아 지역의 안정을 한꺼번에 깨뜨리게 될 것이며 주변 열강은 그런 불투명한 불안정의 상황을 감당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특유의 통치 메커니즘에 주변 열강의 이해가 겹쳐 북한은 국가적 존속을 적어도 4∼5년,또는 6∼7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10년 정도는 더 가리라고 보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다.이러한 전제 아래 남북경제협력의 방향을 생각해본다.이제까지 남북 경협은 대체로 물자교역 및 위탁가공 등에 의존해왔다.그러나 외화부족으로 인한 북한의 반입능력 제한,경쟁력있는 북한 상품의 제한,대북교역 절차의 복잡성,남북교역의 수익성제약 등으로 남북교역이 한계에 이르렀다.섬유제품 위주의 한계,해외시장 진출의 한계 등으로 위탁가공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기는 어렵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절차의 간소화가 요청된다.4자회담의 진전상황 및 북한의 태도변화를 감안한 뒤 경협규모 및 범위를 단계적으로 확대하고 남북한 사이에 준공식적 협상창구를 수립하는 일 등을 함께 추구하는 것도 바람직하다.또 대북지원 품목을 단계적으로 추가 허용하고 농업기술을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스페인 연쇄열차탈선/21명 사망·93명 부상

    【마드리드 AFP 연합】 스페인에서 이틀간 열차 탈선사고가 2차례 연속으로 발생,모두 21명이 숨지고 93명이 다쳤다고 스페인 국영철도 RENFE가 1일 밝혔다. 지난 31일 북부 나바라주에서 지난 17년간 스페인에서 발생한 열차사고중 최악의 사고로 기록되는 탈선사고가 발생,19명이 숨지고 93명이 다쳤다.
  • “자금수요 줄여 인플레 억제”/미 금리인상 배경

    ◎연준 “투자·소비증가율 너무 빨라 불가피”/정부 성장저해 우려… 폭적어 영향 적을듯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금리 인상은 인플레 사전 차단용으로 수개월 전부터 예상되어 왔다. 기업 투자와 일반의 소비가 전망치보다 빠른 속도로 상승세를 타고있어 인플레가 일어날 조짐이 있다고 보고 이자율을 올려 돈줄을 죄겠다는 것이다.대통령이나 재무장관으로부터 완전 독립돼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연준은 상징적인 재할인율은 그대로 놔둔 채 은행들이 서로 하룻밤 돈을 빌리면서 무는 단기금리의 지표인 연방기금 금리를 0.25% 포인트 올렸다.이 단기이자율은 지난 95년2월 연6.00%로 인상됐다가 1년새 3차례 연속 인하됐었다.신용확대로 그만큼 돈 빌리기가 수월해졌던 것인데 이에 제동을 걸었다. 활발한 생산활동을 통한 성장보다는 인플레 싹을 자르는 안정노선을 택한 것이다.성장 우선인 행정부측은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하고 돈 빌리기에 앞서 은행이자를 더 물어야 하는 일반인들은 얼굴을 찌푸리게 됐다.연방기금 금리는 은행의 우대,일반금리와 연계되어 있어 주요은행들은 즉시 우대금리를 8.5%로 인상했다.인플레 조짐이 과연 실재하느냐는 반발이 대두된다. 연준의 앨런 그리스펀 의장은 연 2%로 예상된 올 경제성장율이 현 생산활동대로 하면 4%를 육박하며 물가상승과 큰 관련이 있는 실업율이 5.3%로 낮아져 7년래 최저이며 지난해 총2.9%에 머물렀던 소비자물가상승률이 올해 벌써 2%에 가깝다고 강조한다.신용축소로 인한 경기침체에 빠진다는 반대론을 물리쳤다. 인상폭이 적기 때문에 미 국내경기의 침체반전은 크게 우려할 것이 없어 보인다.다만 좋아진 미 이자율에 눈독들인 국제부동자금의 미국 유입으로 달러화 가치가 높아져 상대적으로 일본 엔화나 우리나라 원화가 더 떨어질 가능성은 있다.그러나 이번 금리 인상폭보다는 6년연속 상승대세인 미 주식시장의 활황유지 전망이 더 클 수도 있어 이같은 국제환율 파장도 소폭에 그칠수 있다. 그러나 일부 예상대로 금리인하가 연내에 몇차례 더 이어지면 국제 파장도 커질수 밖에 없다.
  • 북한 작년 마이너스 3%내외 성장/통일원 경제동향 분석

    ◎건설·교통­자재·장비부족으로 실적 54.9% 감소/농업­홍수 등 영향 평년작보다 45만t 미달/광공업­공장가돌률 30%미만… 위탁가공 20%/대외무역­총규모 19억불… 무역적자 6억2천만불 북한의 지난해 경제는 수재와 에너지 및 원자재부족 등으로 농업과 건설·광공업 등 거의 전부문에서 생산차질이 빚어져 전년대비 마이너스 3%내외의 성장을 기록했다고 통일원이 20일 밝혔다. 이로써 북한경제는 지난 90년부터 7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심각한 침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통일원은 밝혔다. 통일원이 이날 발표한 「96년 하반기 북한경제 동향」에 따르면 북한의 지난해 농업생산은 7,8월의 국지성 집중호우로 작황이 불량,평년작 414만t에서 10.8%가 감소한 369t에 그쳤다. ◇건설·교통=하반기중 완공·조업된 총건설실적은 자재와 장비부족으로 전년동기의 51건보다 54.9% 감소한 23건에 불과했다.이나마 정치선전목적의 상징물 16건,선행부문 4건등 소규모 건설사업이 주류를 이뤘다.또한 이미 추진중이던 건설사업들도 중단되거나 공사진척이 부진,김정일의 지시로 역점추진하던 원산∼금강산간 철도공사의 경우 12월말 현재 공사진척도가 50∼60%에 머물렀다. ◇농업=96년 농업생산량이 전년대비 6.9% 증가했으나 국지성 집중호우와 홍수피해 미복구 등으로 평년작 414만t에는 45만t 미달한 369만t에 머물렀다.쌀 134만t,옥수수 197.6만t,두류 12.1만t,기타잡곡 25.2만t을 수확했다.수해로 28만8천여㏊의 농경지가 침수·유실됐고 소 761두,돼지 1천710두등 2만7천여두의 가축피해를 입었다. ◇광공업=내수용 생필품 생산증대에 주력했으나 시설개체가 이뤄지지 못해 침체가 여전했다.에너지와 원자재 부족으로 공장가동률이 30%미만으로 떨어졌다.다만 섬유·봉재는 한국과 일본의 위탁가공으로 비교적 생산이 활발,남북한 위탁가공 교역규모가 2천428만달러로 전체 교역의 20.3%를 차지했다. ◇대외무역=지난해 대외무역 총규모는 19억달러로 전년도 20억5천만달러보다 7.3%가 감소했다.수출 6억4천만달러에 수입 12억6천만달러로 6억2천만달러의 무역적자를 기록했다.특히 극심한 식량난과 관련,하반기 밀가루와 곡물류 수입액이 7천123만달러로 전년동기의 57만달러보다 무려 125배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 삼미 어떤 회사인가/54년 창업… 한때 계열사 14개 거느려

    ◎60년들어 급성장… 92년부터 경영악화 삼미특수강과 (주)삼미 등 6개 계열사에 임직원이 4천500여명인 삼미그룹은 목재·건자재·금속제품등의 무역업과 스테인레스강판 제조,자동차 기계부품용 단조품 제조,유통업(부산유나백화점)을 운영하고 있다.54년 창업주인 고 김두식 전그룹회장이 세운 대일기업이 모태.6.25이후 수요가 많았던 목재를 공급하며 사업기반을 다졌다. 60년대에 들어 경제개발 붐을 타고 무역업으로 사업을 확장한 삼미는 67년에 삼양특수강을 인수해 특수강 소재를 국산화,산업자재 공급에 한몫을 했다.74년에는 정부에서 특수강 육성업체로 선정되고 77년에는 삼미금속을 설립하는 등 사세를 키워갔다. 89년에는 캐나다 아트라스 특수강공장 인수해 삼미아트라스사를 설립하는 등 투자를 확대했다.91년들어 철강경기 하강과 과잉투자로 14개 계열사중 삼미특수강과 (주)삼미 등 6개사를 제외한 8개사를 처분하는 등 자구책을 썼으나 92년부터 4년연속 적자기록하는 등 경영난이 지속됐다.95년 말 김현배 회장체제가 출범한뒤 지난해 12월지속된 경영난으로 주력기업인 삼미특수강 사업부문과 미국·캐나다 특수강공장을 포철에 일괄 매각했으나 경영은 계속 악화돼 왔다. ◎김현배 회장 문답/회사 정상화에 최선/현철씨 만난적 없어 ­자금사정이 어려운 이유는. ▲삼미특수강 평가금액에 포철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특수강 매각으로 그룹전체의 부채가 감소하는 것은 사실이나 자금난 완전해소는 힘들다.사옥을 팔아서라도 회사를 살리려했지만 부동산이 처분되지 않아 여의치 않았다. ­향후 대책은 ▲모든 자산을 처분해서라도 회사 정상화에 최선을 다하겠다. ­김현철씨와 친분이 두텁다는데. ▲사실과 다르다.현철씨와는 한번도 만난적이 없는 모르는 사이다. ­부도전 법정관리신청 이유. ▲자금난이 빠른 시일내에 회복되기 어렵다고 판단돼 부도로 인한 부작용을 최소화위해 결정했다. ­다른 계열사는 어떻게 되나. ▲상황을 봐가며 법정관리 신청여부를 결정하겠다.
  • 팀스피리트 훈련 올해도 실시안해/북 핵동결 이행으로

    국방부는 6일 대규모 한미연합 방어훈련인 97년 팀스피리트 연습을 실시하지 않기로 미국과 합의했다고 밝혔다.이에 따라 지난 94년부터 중단된 팀스피리트 연습은 4년연속 실시하지 않게 됐다. 국방부 관계자는 『북한이 제네바 기본합의서에 따른 핵 동결조치를 이행하고 있다』면서 『한반도 긴장완화에 긍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한·미 양국이 97년 팀연습을 실시하지 않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 서울대 재외국민 자녀 특례입학/해외수학 5년이상으로

    98학년도 서울대 입시부터 외교관 등 재외국민 자녀의 특례입학 지원자격이 대폭 강화된다. 서울대는 24일 『외교관 등 자녀의 특례입학 지원자격을 내년부터 「해외 수가기간 5년이상인 자로 반드시 고교과정 1년 이상을 포함,2년 연속 또는 3년 이상 중·고교과정을 이수한 자」로 강화한다』고 밝혔다. 지금까지는 「외국 중·고교에서 고교과정을 포함,2년이상 수학한 자」였다. 이같은 조치는 특례입학제도가 실시된 지난 77년이후 이 제도의 맹점을 악용,대부분의 교육과정을 국내에서 이수한 학생들이 혜택을 받거나 위장이민 등 탈법적 방법을 통해 지원자격을 획득하는 등 문제점이 많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시험과목은 현재처럼 외교관 등 재외국민 자녀는 국어와 수학,논술,외국어 등 4과목이며,교포자녀는 논술,영어,수학 등 3과목이다.
  • 김우석 내무·황병태 의원/소환 2인은 누구인가

    ◎김우석 내무­3당통합후 김 대통령 보필/황병태 의원­학·정계 두루거친 재선의원 김우석 내무부장관(60)은 언론인·기업인 등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로 뒤늦게 정치에 입문한 김영삼 대통령의 핵심측근중 한명이다. 경남 진해 출신인 김장관은 동아대 법대를 졸업한 뒤 64년에 부산문화방송 보도부장을 지냈고 71년부터는 대한통운의 대구·인천지점장을 거친 뒤 74년 대양운수대표를 지냈다. 김장관은 민주화바람이 거세게 불던 지난 87년 민주당 총재이던 김대통령의 특별보좌역을 맡으면서 정치에 뛰어들었다.88년 13대총선때 서울 송파갑에서 민주당후보로 출마,당선됐다. 90년 3당통합이 되자 최고위원 비서실장을 맡아 김대통령을 가장 가까운거리에서 보필했다. 문민정부 출범후 한국토지개발공사사장·건교부장관을 거쳐 95년12월에는 최형우의원의 뒤를 이어 내무부장관으로 임명됐다. 이날 함께 소환된 황병태의원은 학계와 관계·정계를 두루 거친 재선(경북 문경·예천)의원으로 경제문제에 밝은 데다 언변이 뛰어나 한때 「좌병태 우병태」로 불릴 정도로 김영삼 대통령의 신임이 두텁던 인물이다.37세에 경제기획원차관보에 오를 정도로 화려한 관료시절을 거친 뒤 88년 외국어대 총장으로 있다가 「상도동캠프」에 합류,정계에 입문했다.3당통합때 막후협상을 주도하며 「실세」로 부상했으나 주변과의 마찰이 적지 않아 문민정부 출범후 중국대사를 맡아 잠시 정치에서 비켜 있기도 했다.14대 서울 강남갑에서 연속당선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뒤 15대에서는 지역구를 옮겨 재기에 성공,국회재경위원장을 맡았다.
  • 임영조씨 신작시집 「귀로 웃는 집」

    ◎한편 한편 넉넉한 「익살과 여유」/잡티없는 자연속 담백한 수묵화 한폭 시인 임영조씨(52)의 신작시집 「귀로 웃는 집」(창작과비평사)은 삶과 문학이 어우러져 한폭의 담백한 수묵화처럼 상쾌하다. 지난 70년 등단한 뒤 27년만에 이번 네번째 시집을 묶을 정도로 임씨는 붓을 아껴왔다.그토록 오래 걸러낸 덕에 어떤 작품을 펼쳐도 시인 평생의 조심스럽고도 소박한 기품이 말갛게 들여다보인다. 철철이 되풀이하는 산행,갖가지 곤충과 화초,평해의 달과 가을숲 등 잡티없는 자연에서 노랫감을 구하면서도 시인은 늘 이를 통해 삶과 문학의 이치로 되돌아온다. 〈늦가을 탱자나무 가지에/해탈하듯 허물을 벗어 걸고/어디론가 잠적한 은자/그가 남긴 구각을 들여다보면/비로소 햇빛 본 유고집 같다/…/한평생 집 한칸 없이/세속을 멀리하고 숲속에 숨어/…/온 몸을 쥐어짜며 시를 읊었다/…/그리하여 이 가을 홀연/장정이 투명하고 광나는/시집 한 권 남기고 갔다/아무도 모르게 열반에 들 듯.〉(「매미 껍질」중) 〈사람이 그리운 날/사람을 멀리하고 산에 오른다/…/그러고 보니 어느새 나도/사람 벗은 한 마리 나비였구나/어느 경전 위에 앉아도 두렵지 않은…/뻐꾹새가 불현듯/내 마음 빈터로 날아들어/뻐꾹뻐꾹 뻑뻐꾹 방점을 찍는다/이제 그만 환속하라고?〉(「봄 산행」중) 사람과 자연,성과 속이 혼연히 삼투하는 그윽한 경지를 보여주는 그의 시집은 느긋한 익살과 여유로운 관조로 페이지마다 넉넉하다.
  • 서예가 조수호(이세기의 인물탐구:120)

    ◎석고문을 법첩으로 독창적 행장구축/“글씨보다 인품”… 흐트러짐 없는 자세 일관/“개인전은 최상의 기량때 일생 한번” 고집 동강의 글씨는 패기와 강유를 겸하고 그의 난죽은 칼날 같고 풋솜 같고 세찬듯 부드럽다. 음악에 음조가 있듯이 명필에는 선조가 숨어 있다.옛대가의 서체를 두루 완수한 동강의 행초는 「천변만화를 구사하는 경지」에서 일생일작을 놓고 냉엄한 생사의 소명을 수행하는 시기다. 그는 서단에서는 여러 모로 남다른 존재다. 첫째 서예가로서는 드물게 서울대 미대 서양학과를 졸업했다.동양화가 아닌 서양화를 전공한 것은 서구적인 미학의 특성과 이질감을 접목하여 동양예술을 심도 있게 탐색,창조하자는 의도에서다.둘째는 미대재학중 「사군자」성적이 「100점」 만점을 기록한 일화가 있고 25세인 49년 제1회 국전 특선이후 57년부터 연 4회특선,아직 30대초반에 국전추천작가·심사위원·운영위원을 역임하는 등 만만치 않은 기세로 서단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서양학과 전공 이색경력 또 서예를 보는 눈과 이론에 정연하여 강물처럼 쏟아내는 명강의로 유명하다.84년,중국정부주최로 열린 「안진경 서거 1천2백주년 기념 국제서법학술대회」에서 그가 강의한 「안진경의 위치와 중국서법에 끼친 영향」은 중국서단의 거봉인 요몽각·우우임을 감동시켰고 그 내용이 중국 문화일보에 전면게재된 바 있다.이에 앞서 「예술의 파죽지세」로 지칭되는 그의 대작 「난죽도」를 대북의 역사박물관과 중국서화회겸 중국서법학회 이사장이던 마수화와 황군벽이 구입하여 소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강의 예술관은 「글씨에 앞서 고매한 인품을 먼저 형성시켜야 한다」는 자세가 굳건하다.문자의 의상에서 창출되는 서예술은 글씨의 점과 획,장법도 중요하지만 「부단한 노력과 수련을 통해 진실을 발견해야만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게 된다」는 지론이다.그런 맥락에서 그는 「누에가 실을 토할 때」의 「여잠토사」와 「송곳으로 모래를 그린다」는 「추획사」의 명언을 가슴에 새기고 언제나 한점 흐트러짐이 없는 엄숙하고 경건한 심신과 팽팽한 긴장감으로 붓을 잡는다. 그가 좋아하는 법첩은 전예해행초가 모두 들어 있는 「석고문)」을 최고로 꼽고 있다.「글씨를 잘 쓰기 위해서는 천가지 비문을 배워야만 비로소 글씨를 이룰 수 있다」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젊은 시절에는 왕희지와 안진경·구양순을 임서하는 과정에서 글자의 형태에 중점을 두는 「형임)」과 운필과 필세를 체득하는 「의임」,마음속으로 외워서 쓰는 「배임」의 과정을 섭렵한 끝에 자신의 체질에 맞는 정묘하고 유심한 행초의 세계에 접근하게 되었다. ○정연한 논리의 달변가 그는 고향인 경북 선산에서 국민학교에 다닐 때부터 이웃의 부탁을 받아 「입춘대길」을 쓰기 시작했다. 한학에 조예가 깊은 전통사회의 엄격한 집안분위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묵향에 젖어들게 되었고 대구사범 심상과에서 현재 대우그룹 김우중회장의 부친인 우당 김용하 선생에게 서예와 교육심리학을 배웠다.그때 스승이 추천해준 왕희지의 「난정서」와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은 서법수업에서 일생의 지침서가 되었다. 평소의 성격은 괴팍하며 불의가 싫은 나머지 이에 저항하는 기질이과격한 편이다.가식과 겉치례를 경멸하고 현실과 의기투합한 속물적인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친구의 범위도 산정 서세옥이나 오정 김진해에 한하고 생존해 있는 유일한 스승인 월전(장우성)을 극진히 모신다.지금도 청년같이 건강하여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정의감은 「원문 한줄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국전이나 서예전에서 입·특선하는 기미가 보이면 추호의 용서없이 몰아붙인다. 『나에게 순탄하고 행복한 역정을 지내왔다고 하지만 나나름대로 고통과 인내,탄압과 분노,좌절과 희망으로 점철된 청춘기를 보냈다』고 그는 돌아본다.『국민학교 교사로 있던 일제시대에는 사상이 불온한 반일교사로 지목되어 왜경의 감시에 시달리다 징병으로 끌려간 적이 있고 6·25때는 굶주림과 뼈저린 외로움을 겪었으며 죽음을 넘긴 여러 번의 체험 탓인지 어떤 일도 함부로 포기하는 일이 없어졌고 침식을 거르고 작품제작에만 몰두하면서 자신의 운명에 책임과 용기를 갖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수많은 국제전에 출품하고 국제서법학술대회에 참여하면서도 75년 문예진흥원이 주관한 국전초대작가상 수상기념전에 응한 것 외에 서울에서는 정식으로 개인전을 연 적이 없다.이에 대해 동강은 『자연의 사계가 다르고 해마다 피는 꽃의 자태와 빛깔이 다르듯이 나만의 빛과 나만의 자태와 나만의 향기가 절로 우러나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새롭고 신묘한 기운」이 현현할때 일생 단 1회 개인전을 생각할 수 있다』고 밝힌다.다만 그 시기는 예정된 것은 아니지만 첫특선이 50주년이 되는 99년에 지금까지의 화업과 서업을 한자리에 펼쳐 스스로를 돌아보고 검토하고 반성하는 자리로 만들고 싶다는 의지다. 90년 서울교대 정년퇴임후 종로3가 세운상가에 있는 서실에 나와 그는 아침부터 난과 죽의 은은한 향기를 눈부신 백지에 뿜는다.일생을 걸고 한판 승부를 건 듯한 그의 서체는 세상을 질타하는 듯한 필획과 결구를 표출하여 「한획보다는 한폭에 흐르는 탐신의 미학이 구축된」 독창적 풍모다. 가족은 「글씨를 사랑하여 나를 따르던 묘령의 착한 소녀가 어느새 백발로 변한 아내」와 장남의 가족과 함께 종로구 구기동에서 살고 있다.아호는 달 밝은 밤이면 강이나 산으로 밤새도록 헤매는 습성 때문에 스스로 「월명」을 지어 가졌으나 고향이 낙동강부근이라는 데 착안하여 소전(손재형)이 「동강」을 내려주었다. ○퇴임후 종로에 서실 내 사람과 글씨가 함께 무르익는 「인서구로」를 지나 「마음속에 이미 대를 그리고 있는 흉중성죽」을 성취한 동강은 「묵과 획이 서로 화목하고 운치와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심오한 유현의 세계를 유유자적으로 누리는 시기다. 그러나 「예술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예술가는 선택된 사람만이 가능하다」는 것과 「예술가는 자기노래를 부르면서 자기자신을 발견하고,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태워나가는데서 희열을 느낀다」는 진언은 바로 자신을 향한 심혼의 혈서일지도 모른다. □연보 ▲1924년 경북 선산 출생 ▲45년 대구사범 심상과 졸업 ▲47년 서울대 미대 서양학과 입학, 전국대학생미전 「고궁」특선 ▲49년 제1회 국전 서예부문 「어부사」특선 ▲57·58·59·60년 국전 서예부문 연속4회 특선 ▲51년 서울대 미대 서양화과졸업, 김용진·손재형·김용준·장우성사사 ▲62년 국전초대작가·심사위원·운영위원 ▲68∼90년 서울교육대학 교수 ▲74년 국전초대작가상 수상 ▲75년 초대작가상수상 세계일주기념전(문예진흥원 미술회관) ▲77∼83년 제1·2·3회 아시아현대서화명가연합전 대회장 ▲76년 한중교류전(대북역사박물관) ▲78∼81년 문교부 1종도서 중학교서예교과서 개발위원장 ▲81년 중화민국 중화학술원서 명예철학박사,중국정부초청 서화개인전 ▲83년 제1∼3회 아시아 현대서화명가연합전 대회장 ▲84년 중화민국정부주최 「안진경서거 1천2백주년기념」국제서법학술대회 한국대표,대구매일신문사 특별초대전 ▲85년 문교부 중·고교미술교육과정 심의위원 ▲86년 중화민국 서법학회명예이사,부산일보 초대개인전 ▲91∼현재 한국국제서법연맹 회장 ▲94년 대북국제서법연토회 한국대표 ▲95년 광복50주년기념 95 서울국제서예전 대회장(예술의 전당) ▲96년 대구국제서예전 대회장(대구 문화예술관) 〈저서〉 「근례비편해열」(80년) 「동강 조수호서화집」(81년) 문교부검인정교과서 「고교서예」편찬 〈수상〉 경북문화상(60년) 국민훈장목단장(90년)
  • 조각가 김창희(이세기의 인물탐구:119)

    ◎자연­인간­생명의 하모니를 빚는다/형태와 윤곽 파괴… 근본적 원형만 담아내/「고향마을」시리즈 도시인에 이상향 제시 「넓은 벌 동쪽끝으로/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얼룩배기 황소가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것은 조각가 김창희가 그리는 「고향마을」시리즈다.그의 조각품을 보고있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차마 잊힐리 없는 두고온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풀이슬이 발등을 적시는 오솔길,보리가 익어서 황금물결 치는 들판,솔밭에 내리는 가랑비와 어디선가 들려오는 풀피리소리.논밭을 맬때 손에 닿는 향긋한 흙의 촉감그대로 그는 두고온 고향산천을 손끝에서 꾸밈없이 빚어낸다. 지난 93년 그가 뉴욕주립 스토니브룩대에 대작 「고향마을」을 기증했을때 뉴욕타임스(4월 30일자)는 이 사진을 크게 취급하고 「한국적 토속정서를 담고있는 독자적 조형성은 정신적인 위안과 새로운 인스피레이션을 함양하게 될것」을 보도한바 있다.그 무렵 뉴욕에 들렀던 세계 10대 화상의 한사람인 파리의 다니엘 르롱은 「인체를 조형미의 탐구로서뿐만 아니라 영혼이 깃든 인간상을 조성하여 메마른 도시인들에게 이상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감탄했다. ○“예술은 여유와 휴식” 르롱부부의 소개로 지난해 파리 노세라출판사가 출간한 그의 작품집 서문에 보면 저명한 미술평론가 피에르 레스파니는 「김창희의 미학적 통찰은 인간과 자연의 본질을 겨냥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매스와 볼륨,비례와 균제에서의 독창성과 유일성외에도 환경과 인물설정에서 연극적 특성을 연출하고 있다」고 했다.무대미술가 윌프레드 밍크가 셰익스피어와 몰리에르 로버트 윌슨을 연극과 오페라무대에서 재현하고 있다면 김창희는 과연 「적극적인 표현의 미와 표현의 힘」으로 「인간이 잃어버린 고향과 가족」을 그의 브론즈로 되살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김창희의 일관된 작업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레스타니의 이러한 지적에 거부감을 표할수 없게 된다.우선 그의 작품에는 자연속에 인간이,인간앞에 자연이 자연스럽게 스며들면서 「인간적 정취」가 「굽이치는 리듬」과 「청결한 라인」으로 「유동적인 하모니」를 이루어나간다.그의 매질은 브론즈지만 그가 빚은 둥그런 구릉은 인체의 양감과 질감,「선」에서 출발하여 「조각에는 독창성보다 생명이 필요하다」는 로댕의 말을 실감시킨다.그의 인체는 어느것이나 살아숨쉬는 바이털리즘을 지니는 것이 특징이다.산과 나뭇잎은 햇빛에 반짝거리고 잔디는 푸른 윤기를 머금은채 바람에 흩날린다. 지난해 파리 기테화랑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을 보고 파리화단의 제라르 주리게라는 「김창희에게 있어 예술이란 여유와 휴식」이라고 평한다.「그가 노구치나 백남준,이우환처럼 자신이 국제적으로 경력을 쌓지 않은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는것은 자신이 태어난 땅과 그 전통에 뿌리를 둔 한국 예술가로서 독특한 언어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면의 아름다움에 눈길 그는 외향적으로는 정열의 화신같은 예술가지만 실은 명상적인 예술가다.64년 국전 첫입선후 77·78년 문공부장관상 국무총리상을 연달아 수상할 때도 「인체의 무한한 신비」에 매혹되어 손가락으로 찌르면 터질 것같은 풍만한 탄력,한복바지에서의 대님을 맨 이미지로 다소곳한 「기다림」「무심」과 「깊은 사색」을 작품의 내면에 담고 있었다. ○뇌출혈·폭음으로 쓰러져 한때는 창공으로 치닫는 도약과 화려한 누드군이 도시한복판을 질주히는듯한,또는 도시로부터 끝없이 탈출하고 싶은 도시인의 생리를 역동적으로 그려낸적도 있다.엘지 쌍둥이빌딩이나 쁘렝땅백화점의 인체들이 그 예이고 이후 작위성에서 탈피한 자연의 근본문제에 파고들면서 「예술가의 개성이나 독창성은 기법의 특이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경험에서 얻어지는 달관의 경지」임을 터득하게 되었다.형태를 차츰 지우고 윤곽을 뭉개어 가장 근본적인 원형만을 남긴채 인간을 끝내 자연에 귀의시키게 된 작업이 최근의 「고향마을」시리즈다. 어떤 예술가도 곡절없이 정상에 오른 예는 없겠지만 김창희야말로 모험과 모색의 긴 험로를 지나 오늘에 다다른 작가다.그는 대학교수로서 조각가로서 지나치게 완벽과 최고를 지향한 나머지 89년 엄청난 작업량과 노동에 짓눌려 뇌출혈로 쓸어졌고 두번째는 3년전 두주불사의 술실력을 자랑하다 술때문에 쓰러졌다.주변의 가족들은 그의 소생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받아들였으나 「부르델처럼 되지 못하는한 눈감을수 없다」면서 수개월만에 병석을 털고 일어섰다.「삶과 죽음의 고비」를 넘나든 남다른 체험을 살려 「다시 태어나는 아픔과 혼돈」속에서 그는 『미켈란젤로는 가장 인간적인 형상을 만들었으나 로댕은 바로 인간 그자체를 만들었다』는 것을 마음의 등불로 켜두고 미의 원점인 내면의 아름다움을 응시하게 되었다. 그는 충남 당진에서 인조치아를 만들던 김인성씨의 3남3녀중 셋째로 태어났다.그의 아호인 「당진」은 고향인 당진에서 딴 이름이다.치과가 흔치않던 시절에 부친이 밤새 이빨을 갈고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도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일상적으로 접근해 갔다.인천사범시절 만국공원에서 열린 맥아더 장군 동상제막식을 본것이 「조각가가 그처럼 위대한 존재」인줄을 처음 알게 되었고 바로 그 「위대한 존재」가 되기 위해 홍대 조각과에 진학했다. ○구긴듯한 백색형체 집착 그가 무엇이 되고자하는 목표와 꿈은 거칠것 없이 확실하다.「가장 높이 오르는 새가 가장 먼데를 보듯」 마음속 깊은 「심연의 공간」에 서서 아주 멀리 전체를 보고싶은 것이 그의 꿈이다.그리고 「모든 것을 지나치게 설명하면 창조적 상상력이 상실된다」는 자세로 다시한번 설명과 테크닉을 배제한 구긴듯한 백색형체에 집착하고 있다. 그의 작품의 핵심테마는 「정신의 풍요로움」에 대한 표현이다.그런 메타포로 인해 그는 삶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유미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황폐한 도시의 숲속에서 그의 우뚝한 백색의 운집들은 마치 천상의 신기루인듯 눈부신 극광을 발산하고 있다.고향마을시리즈는 「환상적 현실」과 「실제적 환상」을 동시에 함축하면서 「형태의 빛을 내면에 비친다」는 새로운 결론아래서 그는 찬란한 미래를 향해,그리고 뉴욕과 파리의 화단을 향해 싱싱하고 약동적인 질주를 멈추지 않게 될 것이다. □연보 ▲1938년 충남 당진 출생 ▲60년 홍익대 입학 ▲64년 국전 「요정」입선 ▲65년 국전 「탈출」 특선 ▲66년 신상회공모전차석상 ▲67년 홍대 조각과 졸업 ▲77년 국전 문공부장관상 ▲78년 홍대 대학원 졸업,국전 국무총리상,제1회 개인전(선화랑) ▲78∼현재 서울시립대 교수 ▲79년 국전 추천작가 ▲80년 한국구상조각회 로마전 ▲81년 뉴욕 한국화랑초대전,서울개인전(선화랑)이후 해마다 개인전 ▲83년 바로셀로나 국제화랑 10인초대전(바르셀로나 국제화랑) ▲84년 ’84현대미술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환경조각전 ▲85년 국전 초대작가,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86년 도쿄한국문화원초대 개인전 ▲88년 ’88서울미술대전 ▲90년 ’90부산 환경조각전 ▲91년 모스크바 국립동양예술박물관 초대개인전 ▲92년 오사카 대한민국총영사관 초대개인전 ▲93년 뉴욕 한국문화원 초대개인전,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에 대작「고향마을」 설치 ▲94년 뉴욕 패터슨미술관 초대 한국조각 ’94전 ▲96년 ’96쾰른아트페어참가,「김창희조각 작품집」(프랑스 노세라출판사)출간,파리기테화랑초대 작품집출간기념전,「LE BENEZIT 세계예술가 인명사전」에 인명수록 ▲97년 ’97도쿄아트페어참가(도쿄 빅사이트,아키에 아리치갤러리) ▲98년 5월 레스타니기획 서울∼뉴욕전(뉴욕 파크애버뉴)예정
  • 현대무용가 김복희(이세기의 인물탐구:118)

    ◎부딪치는 모든 인연을 안무주제로/한지·상여·전통악기 등 우리것 춤속 용해/동서의 모든것 혼합·파격… 「한국적 춤」 고수 「변치않는 경상도 사투리」 「70년대의 몸매와 90년대의 몸매」 「풍경을 만들줄 아는 멋쟁이」 「우정」 「시시한 평문은 무시하기」 「뛰어난 음악 감식안」 「생선요리와 채소선호」 「연습때는 호랑이」 「작품에 임할때는 독」 이는 무용평론가 김영태가 김복희와의 20년 교류를 정리한 「김복희의 열가지 특징」이다. 김복희는 자신의 예술을 성취하기 위해 절대로 소극적이지 않다.어느 부분에서도 「호랑이」와 「독」의 요소를 속속들이 지니고 있다.정열적으로 자신을 설명할줄 알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승부근성이 대단하다.그의 춤은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고 부딪치는 모든 인연」을 안무의 주제로 삼으면서 어떤 무대에서나 「정서적으로 안정된 한국적 춤」을 고집한다.그의 춤은 이른바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자료들, 이른바 백의와 한지와 탈 상여 부채를 끌어내고 대금 징 목탁과 구음을 춤에 인용하고 있다.또 자료와 자료들을 서로 접목시키거나 동서의 모든 것을 뒤섞어 보기도 한다.그리고 이 모든 것을 파격하고 다시 용해시켜 춤의 탄성을 확고하게 확대해 나간다. 이광수소설을 원작으로한 「꿈,탐욕이 그리는 그림」에서의 대금과 첼로의 대비가 그랬고 서서히 역사의 뒤로 사라져가는 고려의 이미지를 윤이상의 「이미지」에 접목한 「반혼」이 그 한예이다.그중에서도 대작 「꿈,…」은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의 조각」들이 현실의 가상공간으로 유도되는 과정을 오버랩과 자막으로 처리하면서 불균형과 비대칭으로 해탈과 초월에 이르는 경지를 경건하게 그리고 있다.이 춤은 지난 95년,푸미폰 아둔야뎃태국국왕 즉위50주년을 맞아 태국정부가 마련한 기념공연페스티벌에 초청되어 『그의 극미한 거동조차도 춤의 흐름이며 춤의 다이내믹스와 짜임새가 놀라울만치 아름답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의 저돌적이면서도 앞장서는 행동은 71년 이화여대를 졸업하던 해부터 시작된다.그가 현대무용을 본격적으로 접하던 60년대 말의 우리의 현대무용은 육완순이 미국에서 배워온 마사 그레이엄과 호세리몬의 테크닉이 전부였다.그 시절에 스승을 떠나 독립한다는 것은 일종의 도전으로 받아들여졌으나 그는 『예술의 세계와 사제지간은 별개』라고 선언하고 동기생인 김화숙과 스승의 문하를 떠났다. ○대학졸업때 독립선언 「우리만의 한국적 현대무용」을 만든다는 각오로 전통악기나 살풀이가락을 춤에 맞추거나 한국적인 정중동과 서구적인 역동성을 도입하여 그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이룩하기 위해 긴 세월을 모색으로 보냈다. 그때의 첫무대가 불교적 색채가 짙은 「법열의 시」다.공연이 끝나자 『현대무용의 새로운 시각이다』 『아니다.저것이 무슨 현대무용이냐?』는 호평과 비난이 엇갈렸고 결국 「구성상의 재치가 돋보이는 완성도 높은 작품」을 계속 선보여 「자신들의 세계를 투철하게 성취」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예술은 체험의 산물」이라는 말에서 출발된 그들의 협력작업은 「예술가는 항상 자신에게 귀기울이면서 자신이 들은 것을 스스로 기록해야 한다」는 에머슨의말에 공감하여 지난 92년부터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그때부터 김복희는 그동안 축적된 자신의 세계를 솟구칠듯 분출시키면서 「오리지널 김복희춤」을 연속적으로 발표해 나갔다. 「십우도」를 바탕으로하여 「인간본성의 상실과 억제,정열과 정열의 파멸」을 심층있게 파헤친 「아홉개의 의문,그리고」를 비롯,그리움이 하나가 되어 한송이 꽃에 이르는 「국화옆에서」와 인체를 산이나 강에 비유한 「진달래꽃」,역시 종교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장승과 그림자」는 인간의 현란한 삶이 「장승」이라는 목신의 유구함에 비해 아무것도 아닐수 있다는 새로운 해석으로 무용계의 호평받았다.평론가 김경애의 「평소 불교적인 소재의 작품을 많이해온 김복희의 일련의 작품에서 또다른 탁월한 능력을 인정하게 된다」는 평이 이를 뒷받침한다. ○「법열의 시」가 첫무대 그가 불교적 의식과 분위기를 좋아하게 된것은 대학 4학년때 우리의 전통악기를 사용한 작품 「탑」이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부터다.절에서 울리는 북이나 종소리를 녹음해 오기도 하고 석가탑다보탑 등을 직접 보고 느끼고 실감하기 위해 그는 요즘도 자주 지방여행에 나선다. 그는 대구중심가인 상서동에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과수원을 하던 아버지는 완고한 편이었으나 어머니가 무용을 좋아해서 두딸중 장녀인 그에게 무용을 가르쳤다.6살때부터 함귀봉무용연구소에 다녔고 정소산 최희선을 거쳐 수도여사대 김남주 교수에게 발레를 배우기도 했다.자신의 무용과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지 배운다는 욕심에서 그는 대학에 와서도 현대무용외에 김진걸의 「산조」,육태환의 「탈춤」을 사사했고 「반드시 춤은 몸으로만 춘다」는 타성에서 벗어나 「몸으로 내는 모든 소리와 움직임은 춤」이라는 원칙을 세우게 되었다. ○불교적 소재 즐겨 사용 사업을 하는 김규현씨와의 사이엔 딸만 둘,74년부터 살고있는 연남동자택에서 가야금과 관음보살상이 걸린 서가에 앉아 그는 강의와 공연이 없는 날은 하루종일 탈춤을 연구하고 무당춤의 동작에 파고들어 새로운 동작을 창조하는데 천착한다.그의 저서에서 「춤은 끊이지 않고 의미를 바꾸면서 암시적이면서도 포괄하기 어려운 고리를 형성시킨다」고 한것처럼 그는 강렬한 창작력이 샘솟는 가운데 「가장 감정적이고 지적인 경험」을 그의 새로운 작품에 살려내려는 것이다. 「몸을 움직일수 있고 춤을 출수 있을때까지 무대에 서겠다」는 그의 의지는 「춤을 춤으로도 보고 춤을 소리로도 듣고 춤을 그림으로도 생각하면서」 언제나 「열려진 감각으로 사물과 자연과 풍속과 세태를 감지」하는 자세를 지킨다.그리고 김영태의 지적대로 자신의 일상적인 모습은 변치않지만 그의 춤만은 끊임없이 변하고 흐르고 움직이면서 긴 인고와 고뇌끝에 마침내 「춤은 아름답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이제 한국현대무용언어를 정립한 시점에서 「그만의 의식을 위해」「인생의 자유를 표현하기 위해」 밤새 천둥소리를 이긴 또다른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그는 현란한 창조의 빛을 무대에 흩뿌리고 있다. □연보 ▲1948년 대구출생 ▲71년 이화여대 무용과 졸업,제1회 현대무용발표회 「법열의 시」외 ▲74년 이대 대학원 졸업,이대 강사 ▲75년한양대 전임강사,제2회 현대무용발표회 「춘향이 이야기」외 ▲79년 프랑스 엑상프로방스(남불) 개인공연 ▲80년 브뤼셀 암스테르담 개인공연 ▲80∼85년 서울대 연세대 강사 ▲81년 대한민국무용제 참가 ▲82년 미국 LA개인공연 ▲83년 일본 ’83무용작가협회 특별공연(도쿄 도라노몬홀) ▲84∼85년 소극장운동 전개 ▲85년 파리 국제무용제 참가 ▲86년 현대춤협회 회장 ▲87년 파리 피에르카르댕극장 개인공연 ▲88년 서울올림픽 개회식 「혼돈」안무,서울국제무용제 참가 ▲89년 대한무용학회 부회장 ▲90년 멕시코 세르반티노시티 축제참가 및 5개 도시순회 공연 ▲91년 한국무용협회 부이사장,서울예술단 「영혼의 노래」 안무 ▲92년 원광대 대학원(철학) 졸업 ▲93년 예술의 전당 개관기념공연 ▲94년 경기대 대학원서 박사학위,스페인 마드리드 라빌라문화센터 초청공연 ▲95년 태국국왕제위 50주년기념 페스티벌초청공연,광주비엔날레 축하공연 ▲96년 멕시코문화원초청공연,김복희무용단 창단25주년기념공연 〈저서〉「현대무용 테크닉」(80년) 「무용창작」(83년) 「무용론」(86년) 〈수상〉대한민국무용제우수상(79년) ’87최우수예술가선정 대한민국무용제 안무상(90년)
  • 개도국 지원금 3천3백억/대외경협기금 계획 확정

    정부는 올해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을 통한 대 개도국 지원 규모를 3천3백억원(4억달러) 수준으로 정하고 사업별 자금지원 한도를 5천만달러로 상향 조정했다. 10일 정부가 확정한 97년 대외경제협력기금 업무계획에 따르면 정부는 오는 2000년까지 공적개발원조(ODA) 규모를 국민총생산(GNP)의 0.1% 수준으로 확대한다는 방침아래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대외경제협력기금 지원규모를 3천억원 이상 책정했다.
  • 홍콩/150년 영국지배 마감/7월1일 중국 품으로

    ◎어떻게 달라지나/특구로 지정… 행정자치 실시/외교·국방 대륙직할… 인민해방군 진주 영국의 직할식민지 홍콩은 올 7월1일자로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로 바뀐다.영국의 유니언잭이 내려지고 오성홍기가 나부끼게 되는 것이다.사자와 용이 방패를 맞잡고 있는 홍콩의 상징디자인도 사라지는 대신 「일국양제」 등 특구를 상징하는 박태기나무(자형)꽃그림이 모습을 보일 것이다.6월 두번째 토요일에 시작되던 영국여왕 탄신기념 연휴 등 영국식 공휴일도 중국의 국경일에 자리를 내주게 되며 나탄로드·퀸스로드 등 영국왕과 총독들의 이름을 딴 거리의 명칭도 바뀌게 된다. 홍콩특구의 최상위법은 특구 기본법이다.이 법은 지난 90년4월 중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제정됐으며 중국 전인대에서만 개정이 가능하다.150여년동안 영국 왕이 파견하던 총독을 대신해 특구에서 뽑은 행정장관이 행정수반으로서 홍콩을 경영하게 된다.행정장관은 특구선거위의 선출을 거쳐 중국 중앙정부가 임명하며 임기5년에 1차에 한해 연임할 수 있다. 행정분야가 자치실현을 목표로 했다면 외교·국방은 중국 중앙정부의 직할 아래 들어간다.전군에서 선발된 8천명의 중국인민해방군은 오성홍기를 휘날리며 내년 7월1일 이전 홍콩에 진주,영국군과 자리바꿈을 하게된다.외교 업무는 중국 국무원에서 직접 파견된 외교부 홍콩판사처 주임의 책임아래 이뤄진다.영국 추밀원의 「법사위원회」가 결정하던 재판의 최종심도 특구내에 최종심을 다룰 별도 법원을 설치해 처리하게 된다.입법 분야에선 기존 의회역할을 했던 입법국이 해산되고 대신 주민의 직선 및 직능대표로 구성되는 60명의 입법의회가 각종 법률을 제정·개폐하게 된다. 한편 외국인의 홍콩 장기체류는 더 수월해진다.지금까지 7년 이상 거주해도 체류권만 인정됐으며 추방이 가능한 반면 특구에선 7년 이상 되면 영주권을 얻게 된다.장기거주자에 대한 참정권도 인정되고 의회 정원의 20%내에 외국국적 소지자의 참여도 가능하게 된다.기존의 무비자 입국허용 등 입국제도는 바뀌지 않는다.경제·무역 및 해운·통신·관광·체육분야에선 중국­홍콩(HONG KONG,CHINA)이란 명칭으로 독립된 국제관계를 유지하고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이런 변화에도 97년7월1일 이후 홍콩특구의 운영과 생활은 큰틀에서 변화가 없다고 할수 있다.우선 행정의 틀을 그대로 살렸다.기존 법령은 원칙적으로 유효하다.관습법이 위주인 영국법체계를 대신해 현지 법령화하는 작업은 진행되고 있다.97년 이후에도 홍콩 돈은 그대로 사용된다.독자적인 화폐발행과 의환관리가 유지되고 자유무역,자유항,외환관리정책이 지속된다.외교 및 국방분야에 대한 중국정부의 「직할」을 제외하면 홍콩특구는 옛 홍콩의 연속선상에서 움직여진다고 보면 된다.고도의 자치를 통해 「동양의 진주」를 살려나가겠다는게 중국정부의 입장인 셈이다. ◎반환 의의·과제/역사 치욕 청산… 중 주권회복/사회주의체제에 자본주의 접목 숙제 새해 7월1일 0시를 기해 홍콩의 주인은 영국으로부터 중국으로 바뀌게 된다. 아시아에서 금세기 최후로 이루어지는 식민지 반환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떠나 중국인들로서는 「치욕과 굴욕」의 역사를 청산하는 감회를 맛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중국의 최고지도자 등소평도 건강이 허락하는한 역사적 반환식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한다. 중국인들의 눈으로 볼때 홍콩의 역사는 치욕이었지만 또다른 한편 150년 치욕의 역사를 보상하듯 홍콩은 세계적인 금융·무역중심지로 성장해서 엄청난 부와 가능성을 안고 중국인의 품으로 되돌아온다. 따라서 홍콩을 반환하는 중국인들은 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 홍콩을 죽이지 않고 계속 번창하도록 만드는 동시에 대륙의 사회주의 체제가 이 자본주의 실험장으로 인해 손상되지 않도록 하는 쉽지 않은 과제를 떠안게 됐다. 그것은 홍콩인들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려온 자본주의의 과실을 계속 누리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중국정부의 인내심의 한계를 넘지 않도록 「몸조심」을 해야한다. 홍콩의 초대행정장관으로 선출된 동건화씨는 당선 뒤 기자회견에서 홍콩어인 광동어,본토어인 만다린,그리고 영어 등 3개어로 인사말을 해 앞으로 특구 홍콩이 헤쳐나가야 할 길이 순탄치 않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반환 뒤 홍콩의 지위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1국 2체제」의 존속으로 요약된다. 이 기본입장은 지난 85년 영·중 사이에 발효된 공동선언에 담겨져 있다. 이 공동선언에서 중국정부는 ▲홍콩을 특별행정구로 지정해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하고 ▲외교와 국방은 중앙정부의 관리하에 두며 ▲행정관리권,입법권,사법권은 홍콩에 부여 ▲홍콩정부는 현지인으로 구성 ▲현행사회·경제제도와 생활양식을 유지 ▲이같은 홍콩정책은 홍콩특별행정구 기본법에 의해 향후 50년간 지속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홍콩의 미래에 대해서는 상반된 견해들이 혼재하고 있다.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홍콩의 자본주의 체제가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에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에 중국지도부도 홍콩의 자치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장래를 불안하게 보는 사람들은 홍콩의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중국정치의 영향을 결국 받을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편다. 최고실력자 등소평 사후 대륙에서 불어닥칠 격동의 바람을 어떻게 넘길지에 대한불안감도 적지않다. 언론자유 등 기본권이 과연 말 그대로 보장될 수 있을까도 의문이다. 중국과 홍콩주민간의 기본인식 및 가치관의 차이도 극복해야 할 과제중 하나이다. 중국은 사회주의,전통적 중화사상의 가치관을 견지하고 있는 반면 홍콩주민들의 의식 수준은 국민소득 2만3천달러의 선진국에 걸맞게 국제화돼 있다. □영의 홍콩지배 일지 ▲1842:아편전쟁후 맺은 남경조약에 따라 홍콩섬 영국에 할양 ▲60:북경조약 체결로 구룡반도 영국에 할양 ▲98.7.1:신계와 235개 부속도서를 99년간 영국에 조차 ▲1941­45:일본군 점령 ▲49:모택동,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선포 ▲72:영·중 외교관계 수립 ▲79:대처 영국총리 북경 방문,홍콩반환 논의 ▲84:대처 영국총리와 조자양 중 총리,홍콩반환 원칙담은 북경선언 채택 ▲89:천안문 사태,홍콩서 대규모 반중국 시위 ▲90:중,홍콩기본법 채택 ▲92:패튼 총독 취임,입법국 직선확대문제로 중·영 관계 악화 ▲95:직선의원이 대폭 확대된 입법국 선거실시 ▲96.12:초대행정원장 동건화 선출
  • 김영남 외교부장 “붕괴 위기” 시인 계기로 본 실태

    ◎북 경제 7년째 “뒷걸음”… 파탄직전/에너지·자재난… 공장가동 30% 밑돌아/획기적 개방·국제지원 없인 회생불능 『지난해 발생한 홍수와 동유럽국가들의 몰락으로 인해 대외무역상대국이 사라지면서 북한경제는 붕괴위기에 놓여있다』 북한의 김영남외교부장은 지난 11일 독일TV와 가진 회견에서 북한경제의 실상에 대해 이렇게 실토한 바 있다.웬만해서는 시인하지 않고 사정이 어려워도 잘 돼간다고 호언해온 것이 그간의 북한 당국자들의 언행임을 감안할 때 북한 경제가 어느 정도로 심각한 것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지난 90년 이후 계속해서 성장이 뒷걸음질 치고 있는 북한 경제는 이제 파탄직전에 이르렀다는 것이 북한경제전문가들의 지배적인 시각이다.『완전히 거덜났다』,『자력갱생 운운하지만 자력으로는 이젠 회복불능이다』,『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정도의 한계상황에 놓여있다』 표현만 다를뿐 북한 경제가 최악의 상황에 놓여있다는 데 모두들 견해를 같이하고 있다. 아직 추정치는 나오지 않았으나 북한경제는 올해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으리라는 게 관계당국이나 북한경제전문가들의 일치된 평가이다.한국 경제가 비교적 높은 성장을 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7년간 내리 경제성장이 후퇴하고 있는 셈이다. 북한경제는 90년대 이후 95년까지 6년 연속 성장이 뒷걸음질쳤다.지난 89년까지만 해도 2∼3% 수준의 저율이지만 그런대로 성장세를 유지해왔으나 90년부터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올해도 그 연장선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에서 북한경제를 연구하는 전홍택박사는 제조업 부문에서도 지난해 보다 나아진 것이 없을 뿐아니라 농업부문에서도 수해가 겹쳐 마이너스 성장이 확실시된다고 분석했다.다만 마이너스 성장폭이 95년의 4.5%보다는 다소 적을 것이라는 시각이다.김석우 통일원차관도 최근에 열린 한·캐나다포럼에서 『북한의 지난해 석탄생산량은 2천3백70만t으로 수요량의 절반에 못미쳤고 원유도입량도 1백10만t에 그쳐 공장가동률이 30% 수준을 밑돌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 경제가 이같이 파탄직전에 이른 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가장 큰이유는 에너지난과 자재난이 가중되고 있는데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큰 수해가 겹쳤기 때문이다. 둘째 시회주의계획경제의 결함이 누적된 가운데 무력증강을 위해 군수분야에 집중투자함으로써 경제전반에 걸쳐 심각한 비효율성이 초래된 결과로 볼 수 있다. 현 시점에서 보면 3차7개년계획의 실패 이후 지난 94년부터 3년간의 「완충기」를 두고 주력해오고 있는 무역·경공업·농업 제1주의도 모두 실패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현재 북한의 대내외 여건으로 보아 획기적인 개방·개혁과 외부의 대대적인 지원이 없는 한 북한경제는 계속해서 최악의 상태로 치달을 것으로 보이며 식량난까지 겹쳐 북한체제는 심각한 위기를 맞게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 무리한 투자 등으로 자금­경영난 가속/삼미 매각추진 안팎

    ◎3년째 적자… 작년부채 1조3천억원대 삼미를 궁지에 몰아넣은 주범은 경기예측의 실패와 무리한 투자였다.자동차 조선 등 수요산업의 불황으로 삼미는 그간 심각한 자금압박을 겪어왔다.주력품인 스테인리스 강판의 경우 작년 t당 2백만원수준에서 지금은 1백80만원 수준으로 떨어지는 등 강판,강관,봉강재의 가격하락은 매출감소를 부채질 했다.87년부터 4년동안 3천억원을 투자한 설비증설은 삼미위기의 근인으로 작용했다. 규모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연산 50만t이던 생산능력을 1백5만t으로 확장한 게 화근이었다.이중 77만5천t이 분할 매각대상인 봉강이었다.경기는 증설당시의 예측과 달리 하향곡선을 그었다.적자가 쌓일 수밖에 없었다.93년 8백95억원의 적자를 시작으로 94년 6백85억원,작년 3백94억원 등 3년 연속 적자행진을 했다.때문에 금융비용도 대폭 늘어나 95년 부채가 1조3천79억원으로 확대됐다.누적자자와 부채의 부담을 견디지 못해 끝내 그룹 매출(95년 1조7천2백억원)의 58.4%를 차지하는 주력기업의 분할매각을 자구책으로 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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