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포커스] 징병 검사 현장을 가다
“군대 가기가 싫어서요.” 10월 어느날 아침 8시 서울 신길동 서울지방병무청 입구. 한 손에 커다란 엑스선 사진 봉투를 들고 징병검사장으로 들어서던 이모(19)씨는 이렇게 말했다. 전방 십자인대가 완전히 파열됐었다고 했다. 이씨는 “돈 있고, ‘백’ 있는 사람들은 전부 군대 면제되던데요.”라며 “안 갈 방법이 있다면 안 가는 게 좋죠.”라는 말을 남기고 징병검사장 안으로 ‘힘차게’ 발을 옮겼다.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로 인식되고 있는 병역기피 현상은 1950년 1월6일 최초의 징병검사가 실시된 이후 끊임없이 불거지고 있다. 최근에는 ‘환자 바꿔치기’라는 신종 수법까지 등장했다. 브로커가 환자의 진단서를 기피자의 것으로 위조해 제공, 징병검사에서 면제받게 하는 수법이다. 수많은 병역기피자들이 6급 ‘면제’라는 성적표를 받고 싶어 하는 징병검사, 지금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현장을 찾았다.
평일 아침 8시 서울지방병무청은 마치 대학교 풍경과 흡사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들이 한 쪽 어깨에 가방을 메고 등교하듯 징병검사장 안으로 들어섰다. 징병검사 대상 연령이 만 19세이기 때문에 질병, 해외여행 등 특별한 사유가 아니면, 대부분 대학교 1학년생이거나 재수생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하면 자동으로 신체 5급으로 판정, 예비군 훈련 없이 민방위훈련만 받는 제2국민역으로 분류돼 징병검사를 받지 않는다. 신체등위 판정에서 1~3급은 현역, 4급은 공익근무요원, 5급은 제2국민역, 6급은 면제, 7급은 재검대상이다.
신원확인 과정과 색각검사를 마친 징병검사 대상자들은 컴퓨터로 신상명세서, 질병상태 문진표를 작성하고 365개 문항의 인성검사를 시작했다. 이외 다른 검사 결과도 컴퓨터를 통해 데이터로 저장됐다. 징병검사 전산화 시스템은 2001년부터 마련됐다고 했다.
인성검사를 모두 마친 대상자들은 노란색 상의와 짙은 남색 하의의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방사선촬영, 임상병리검사, 채혈, 혈압측정 등을 받았다.
징병검사 복장은 1970년 병무청 창설 이전까지 팬티 차림, 1990년대까지 반바지 차림이었다. 그러나 상의 탈의로 인해 수치심을 유발한다는 문제가 제기돼 2000년대 들어 상·하의 체육복 차림과 피부 질환자용 전용 가운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병역기피의 단골 메뉴인 고혈압. 하지만 면제되려면 수치가 굉장히 높아야 한다. 혈압에 따른 신체등위 판정기준은 최저혈압 110이상, 최고혈압 180 이상이 돼야 공익근무요원인 4급으로 판정되며, 최저 130, 최고 200이 돼야 5급으로 판명, 사실상 면제가 된다. 하지만 4·5급 수치가 나오면 수동혈압측정기로 2~3회, 그 이후 6시간 동안 30분 단위로 혈압측정을 받아야 한다. 그래도 혈압의 변화가 없으면 7급 재검 판정 후 2~3개월 동안 치료한 뒤 다시 징병검사를 받아야 한다. 혈압측정을 담당하는 김승옥 간호사는 “현재 혈압 때문에 병역 면제가 되는 경우는 사실상 없다.”고 못박았다.
다음으로 키, 몸무게를 측정했다. 키가 159~195㎝이면 몸무게에 따라 1~4급까지 분류됐다. 기준을 알아보니 146~158㎝이거나, 196㎝ 이상일 경우에는 몸무게에 상관없이 4급이었다. 141~145㎝는 5급 제2국민역으로 판정, 사실상 병역이 면제됐다.
마지막으로 징병검사 대상자들은 안과, 정형외과, 이비인후과, 내과, 피부과 등의 전문의로부터 신체검사를 받았다. 질병에 따른 판정 기준은 매우 복잡했다. 같은 질병이라도 구체적인 상태에 따라 등위가 달라졌다. 기준은 있었으나 일반인이 해석하기 어려운 의학용어들이 많아 전문의의 소견서가 필요한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지금껏 발생한 대부분의 병역비리도 각 과별 신체검사에서 발생해 왔다. 특히 정치인, 고위공무원, 연예인, 스포츠선수 중 일부는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자녀들을 병역면탈시키거나, 사회적 명망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법망을 피하는 수법으로 병역을 기피해 왔다. 서울 오금동에서 온 김해수(19) 학생은 “국민에게 모범이 돼야 할 정치인이나 연예인부터 법을 어기고 국방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데 어느 국민이 지키겠냐.”고 꼬집었다.
임일규 서울지방병무청 징병관은 “현재 이뤄지는 징병검사가 정예병력 충원 개념에서 탈피, 국가가 제공하는 무료 종합건강검진 개념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임 징병관은 “20세 때 종합검진으로 질병을 발견하면 연 1조원의 치료비용이 들어가지만, 30세 때는 3조원, 50세 때는 5조원의 치료비용이 들어간다.”면서 “징병검사장이 종합건강검진센터장이 되면 국민건강 수준도 높일 수 있고 국가의 경제적인 어려움도 개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영준기자 apple@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