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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마부정/검은손·기수·조교사 “3각공생” 입증

    ◎검찰이 밝힌 경마장비리/장화·채찍색깔로 우승예상마 신호/사인지정 대가,10만∼1백만원 받아/전문조직 암약… 기수 등 95% 매수 추정 서울지검이 25일 경마승부조작에 가담한 기수·조교사·브로커 8명을 구속하는등 25명을 무더기 입건함으로써 그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경마장 부정의 실체가 사실로 확인됐다. 이번 사건은 62년 한국마사회법이 제정된 이래 최대규모의 구속자수를 기록했다는 점외에도 90년 8월1일 마사회법 개정으로 경마부정에 대한 처벌조항이 신설된 이후에도 그치지 않고 있는 경마조작 시비에 대해 검찰이 전면적인 단속의 칼을 든 것으로 풀이된다. 검찰에 의해 밝혀진 경마장주변 부조리는 브로커·기수·조교사들이 조직적으로 경마정보를 유출해온 것으로 그 수법은 경주 시작전에 기수·조교사의 복장이나 동작을 이용한다든지 말에게 가면을 씌우는등 실로 다양하게 구사해왔다. 구속된 조교사 이순봉씨(35)의 경우 경마시작전에 말이 한바퀴 도는 예시장의 게이트번호중에서 미리 정해놓은 짝·홀수를 이용하든가 또는 말에게가면을 씌워 사전에 약속된 브로커에게 신호를 보내주는 수법을 써왔다. 또 기수 최재구씨(35)는 채찍의 색깔및 채찍을 잡는 위치 또는 장화와 안경의 색깔,경주전 말의 운동거리 등을 신호로 이용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조교사·기수들은 경마가 있는 금·토·일요일 합숙을 하면서 일체 외부연락이 금지돼 있지만 목요일 상오까지는 금·토·일요일 경기를 위한 말의 출전요일이 정해지는 점을 악용,주로 목요일 하오 경마브로커들과 만나 사인을 지정해 주면서 이 대가로 매번 10만∼1백만원씩을 정기적으로 받아왔으며 1회 경주에 참가하는 10∼14마리의 말가운데 서로 말이 달리는 상태를 놓고서도 담합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검찰은 밝히고 있다. 경마브로커들은 이같은 조작외에도 재력에 따라 1명 또는 여러명의 기수·조교사들로부터 빼낸 정보를 마권구입자들에게 제공하고 상금을 타면 상금의 10%를 사례금으로 받아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 브로커들 가운데는 서명윤씨(43)처럼 친·인척을 기수와 조교사로 둔 경우 외에도 브로커들끼리 정보를 서로 교환,마권구입자들에게 팔거나 상금액이 큰 대상경주와 특별경주에서는 스스로 돈을 걸어 거액의 상금을 챙겨온 경우도 적지 았다. 브로커들은 그러나 매수한 기수·조교사의 말이 예상된 각본대로 뛰지않는 바람에 거액의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도 많은것으로 드러났다. 김규용씨(43·전 광명시 광명동 새마을금고 전무)는 88년 7월부터 사전정보없이 경마를 하다 집·월세보증금·처갓돈을 날린뒤 89년 10월부터 기수·브로커등을 매수해 정보경마를 하면서 자신의 새마을금고 공금 5억5천만원을 횡령해 경마에 털어 넣고 빈털터리가 되는 바람에 장인이 홧병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검찰은 매주 토·일요일의 경마 판매액 1백여억원 가운데 70%정도가 기수·조교사와 연결된 브로커들을 통해 팔리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이때문에 과천경마장·TV장외경마장 등에는 경마가 있는 날이면 부동산·자동차 등을 담보로 사채놀이를 하는 업자들까지 상주하고 있다고 밝혔다. 검찰은 특히 경마브로커들이 한국마사회소속 기수및 조교사 1백40명 가운데 95%이상을 매수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검찰은 이와함께 내년 7월부터 개인마주제가 시행되면 마주와 기수·조교사들을 둘러싼 경마부정이 더욱 심해질 우려가 있다고 보고 한국마사회 간부들이 그동안 경마장주변의 비리를 눈감아 주었는지에 대해서도 적극 수사할 방침이다.
  • 전 서울신문사장 신범식씨 별세

    문화공보부장관과 서울신문사 사장을 지낸 신범식씨가 11일 0시30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향년69세. 신전서울신문사 사장은 지난62년 정계에 입문,공화당·청와대대변인을 거쳐 69∼71년 문화공보부장관과 9,10대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72∼74년 서울신문사 사장을 역임했다. 유족으로는 미망인 심원선여사(63)와 1남2녀를 두고 있다. 발인은 15일 상오10시.연락처 333­0339.
  • 국민1인 납세액 100만원대 진입(경제화제)

    ◎올 43조6천억 담세… GNP 비중 19.3%/지자제 실시로 지방세비율 26%선 육박/재정의 97.5% 지탱… 조세의 이모저모 우리 국민의 조세부담률(국민총생산에서 납세액이 차지하는 비율)은 19.3%이고 국민 1인당 세금부담액은 국세와 지방세를 합쳐 1백만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최근 재무부와 국세청 등에 따르면 올해 우리 국민들이 내야할 세금은 국세가 35조3천8백63억원,지방세가 8조2천7백26억원으로 모두 43조6천5백89억원에 이른다.이는 2백26조2천여억원으로 예상되는 올해 국민총생산(GNP)의 20%에 육박하는 비율이다. 조세부담률은 지난 62년에 10.6%였으나 20년후인 81년에는 18%로 7.4%나 급증했고 이후 10년간은 경제안정을 위한 긴축재정의 영향으로 증가세가 점차 둔화되고 있다. 조세부담률은 선진 외국의 경우 일본이 89년 기준으로 21.9%,미국 21.2%,영국 29.7%,독일 23.7% 등이고 프랑스가 88년 기준 25.2%,대만이 90년 기준 20.2%로서 우리나라보다는 높은 편이다. ○62년엔 1천4백원 국민 1인당 조세부담액은 지난 62년에 1천4백원이던 것이 72년에는 1만6천원으로 늘었다.81년에는 고도 성장과 경제규모의 비대화가 반영돼 21만1천원으로 껑충 뛰었고 지난해에는 88만6천원을 냈다.올해는 정부예산을 기준으로 국세 81만원,지방세 19만원등 모두 1백만원을 부담하게 된다. 일반회계중에서 국세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은 재정 소요액의 대부분을 해외원조에 의존했던 지난 63년에는 49.8%에 불과했으나 30여년이 지난 올해는 97.5%를 차지,국가 재정의 대부분을 조세로 충당하고 있다. ○작·간접세 균형이뤄 직접세와 간접세의 비율은 지난 80년 간접세가 7대3으로 앞섰으나 지난 89년 이후부터는 4.5대 5.5로 점진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추세에 있다.이는 금융자산과 부동산소득등 불로소득에 대한 과세 강화로 직접세의 세원이 늘고있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한편 지방화 시대를 맞아 조세에서 지방세가 차지하는 비율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미국은 43.3%나 지방세는 지난 80년 국세의 11.7%였으나 광역·기초단체의 자치제가 실시된 지난해엔 지방 양여금을 포함해 26.5%로 늘어났고 올해는 25.9%에이를것으로 전망되고 있다.이같은 비율은 89년 기준으로 일본의 35.8%,미국 43.3%,88년 프랑스의 43.3% 보다는 크게 뒤지지만 89년 영국의 13.3%와 독일의 13.8% 보다는 높은 것이다. ○과세분쟁도 증가세 조세규모가 커짐에 따라 세금을 둘러 싼 납세자와 세무당국간의 분쟁도 많아지고 있다. 최근 4년간 심판청구 사례를 보면 지난 88년 심판청구 건수는 2천14건이었으나 89년에는 2천8백77건,90년 3천1백67건,91년 3천3백44건 등이다.그러나 소송에서 국가가 패소하는 비율은 지난 88년에는 55.5%,89년에는 49.4%로 절반 안팎이었으나 90년에는 38.8%,지난해는 33.3%로 점차 낮아져 부당하거나 무리한 과세가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납세자의 이의청구는 지난 6월 현재 총 2천3백62건을 접수,이중 토지초과이득세가 43.9%인 1천36건으로 가장 많아 과세의 논란이 많음을 반영했다.이밖에 양도소득세가 3백93건(16.7%),상속·증여세가 2백91건(12.3%)부가세가 3백39건(14.4%)등으로 과세분쟁이 비교적 잦은 것으로 나타났다.
  • 과테말라 세라노대통령/26일∼29일 첫 공식방한

    과테말라공화국의 호르헤 안토니오 세라노 엘리아스대통령이 노태우대통령 초청으로 오는 26일부터 29일까지 3박4일 일정으로 우리나라를 공식방문한다고 김학준청와대대변인이 18일 발표했다. 세라노대통령은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최초의 과테말라대통령으로 방한중 노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관계증진방안을 포함한 공동관심사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고 주요산업시설을 시찰한다. 우리나라와 과테말라는 지난 62년에 수교했다.
  • 과테말라공화국/인구 9백만… 면적 10만㎢

    ◎작년 1인당소득 8백89불 중미에 위치한 과테말라공화국은 지난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대통령중심제공화국이다. 면적은 약10만8천8백㎦로 비교적 적은 나라이며 인구는 약9백46만명.스페인어를 쓰고있다. 인구구성은 정치·경제의 중심을 이루는 메스티조및 라틴계가 40.6%,원주민은 53.6%를 차지하고 있다. 국민총생산은 91년 현재 94억달러이며 1인당국민소득은 8백89달러정도. 정치체제는 대통령중심제하에 22개주및 3백30개시에서 89명의 지역구의원과 27명의 전국구의원으로 구성된 임기5년의 단원제의회가 있다. 우리나라와는 지난62년10월수교후 유엔등에서 우리입장을 적극 지지해오며 남북대화를 통한 평화통일을 찬성하는 우방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공산당을 불법화한 반공노선에 따라 북한의 정책을 전면 반대하는 입장이다. 과테말라는 북미자유무역지대및 중미통합에 대비,우리의 우회수출기지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현재 과테말라에는 75개의 국내업체가 진출,모두 5천3백만달러를 투자하고 있다.
  • 자유가 창조적 기술개발 촉진/전일동 연대교수·핵물리학(해시계)

    이탈리아 북부는 알프스 산맥과 지중해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지형을 형성하고 있으며 상업도시 밀라노는 프랑스 파리와 겨루는 세계 패션의 중심지로 너무나 유명하다.밀라노에서 동쪽으로 약 3백㎞ 떨어진 곳에 운하의 도시 베니스가 있다.베니스에서 기차로 아드리아 해변을 따라 동남쪽으로 약 2시간만 가면 오스트리아풍의 도시 트리에스테에 도착한다.이 도시는 원래 오스트리아 제국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세계 제2차대전 직후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 통치하에 들어갔다가 지금은 이탈리아에 귀속되어 있다. 이 교외 해변가에 국제 이론 물리학 연구소가 자리잡고 있다.이 연구소는 유엔산하 국제원자핵기구(IAEA)부속 연구소로서 1962년에 설립되어 제3세계 과학자를 특히 지원하며 과학을 통하여 국가 발전에 이바지 할 수 있도록 후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소장은 창립때부터 압두스살람교수(197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이고 영국 런던 대학 교수직을 겸하고 있다. 이 연구소는 그 특수한 성격과 위상 때문에 세계 각국에서 많은 물리학자들이 짧은 기간동안 머물고 가는 중요한 장소가 되고 있다.제3세계에서는 주로 아프리카 국가와 인도,파키스탄 그리고 남미 브라질,아르헨티나 등의 과학자가 많이 오며 최근에는 동구권 러시아,중국 학자들도 많이 머물고 있다고 한다.물론 IAEA 회원국의 학자만이 공식적으로 이 연구소에서 연구를 할수 있으며 따라서 회원 자격을 중국에 빼앗긴 대만은 학자들을 이 연구소에 보낼 수 없게 되었다.우리나라는 물론 IAEA 회원국이므로 학자들이 이 연구소를 이용할 수 있으며 그간 많은 우리나라 물리학자들이 다녀갔다.북한도 IAEA 회원국이기는 하지만 물리학자를 이 연구소에 보냈다는 보고는 없다.이론 물리학자가 북한에는 없어서인가,아니면 한국의 물리학자들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서인가? 1991년1월경 필자가 이 연구소에 머물고 있을때 마침 루마니아에서 온 스트라탄 교수를 만났다.스트라탄 교수와는 20여년만에 재회한 것이다.스트라탄 교수는 부쿠레슈티 대학 물리학과 교수이며 핵물리학이 전공이다.그는 구 소련 드브나 핵연구소에서도 연구한 바가 있고동구권의 사정에 밝다.이 스트라탄 교수에 의하면 60년대,70년대에는 상당수의 북한 과학자가 소련과 동구권 국가의 각 연구소에 머물고 있었다고 한다.그들은 단순히 과학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언젠가 북한에서 자체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목적을 갖고 파견된 것이며 그 목적 달성을 위해 치밀한 계획아래 정보수집과 과학 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자발적인 연구가 거의 허용되지 않고 국가의 목적에 따라 수립된 정책에 의해 모든 과학자가 동원되는 것이 오늘날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라 할수 있을 것이다.어쩌면 이러한 체제가 어떤 면에서는 특수한 과학기술 개발에 효율적일 수도 있다.그러나 우리는 자유로운 연구 풍토가 창조적 연구에 더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다.
  • 27일 「30년 오페라인생」 결산공연 황영금씨(인터뷰)

    ◎“목소리가 허락하는 한 무대에 설것” 『뜻밖의 큰 무대가 되어 두렵습니다.이렇게 큰 무대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오는 27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30년 오페라인생」을 결산하는 독창회를 가질 소프라노 황영금씨(61·연세대교수)는 『그러나 목소리가 떨려 더이상 노래할 수 없을 때까지는 앞으로도 계속 모대에 설 것』이라고 말했다. 황씨는 지난 90년11월 국립오페라단의 「피가로의 결혼」공연 때 이미 「오페라 은퇴」를 선언했었다. 『좀더 오래도록 노래하고 싶은 욕심에서였지요.그 뒤에도 여러번 오페라출연을 제의받기도 했지만 아낄 수 있는 만큼 자신을 아껴 언제까지나 노래하고 싶은 마음에 거절하곤 했어요』 이번 독창회의 반주는 장일남씨가 지휘하는 서울아카데미심포니오케스트라가 맡는다.황씨는 지난 62년 국립 오페라단의 창단공연 때 장씨의 작품 「왕자호동」에 공주역으로 오페라에 데뷔한 뒤 서로 오래도록 유대를 맺어오고 있다. 『사실 이번 공연은 피아노반주로 이탈리아가곡과 독일가곡을 위주로 하려고 했었지요.그런데 장선생님이 반주를 자청하는 바람에 갑자기 오페라아리아의 밤이 된 셈입니다』 황씨는 지난해 한햇동안 59년부터 재직해온 연세대로부터 안식년휴가를 받았다.황씨는 그러나 한갑나이에 휴식을 마다하고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 주위를 놀라게 했었다. 『이탈리아의 발칸토가 가장 이상적인 발성이라고 생각해 언젠가는 그곳에 가 공부하고 싶었습니다.그래서 시에나의 언어학교에 들어가 이탈리아 말을 배우며 연주회란 연주회는 모조리 찾아다녔지요』 지휘자인 임원식씨가 지었다는 황씨의 별명은 「또스카」.함경도 또순이와 그가 7번이나 출연한 토스카를 합성한 말이라고 한다. 함북 무산에서 태어난 황씨는 청진에 살던 19 47년 오징어장사로 가장해 월남한 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대 성악과에 들어갔고 또 노래를 위해 밀항선을 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예술대학 성악학부를 졸업한 의지의 인물. 그는 『이번 올림픽을 계기로 스포츠는 국제수준에 올라섰으니 이제 음악을 국제수준으로 올려야 할 때』라고 말했다. 가수의 자질에 비해 무대미술이나 조명,소품,의상등은 너무 낙후해 배역이 오면 먼저 서글픔이 들 정도라는 것.그는 이를 위해 『이제 정부와 기업이 오페라를 지원해 관객이 돈을 주고 구경을 와도 아깝지 않은 무대를 만들 때』라고 힘주어 말했다.
  • 3대 독립운동가문 첫 공인

    ◎4대 임주수씨,광복절에 선친 건국훈장 수상 확정/을사조약후 무장항일운동 주도/1대/부친도와 독립의군부결성 기여/2대/전북지역 군자금모금·운반담당/3대 할아버지·아버지에 이어 아들이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 증손자가 국가로 부터 서훈을 받게 돼 「3대 독립운동가」 집안이 탄생했다. 을사보호조약 이후 무장독립운동을 벌이다 실패하자 자결한 돈헌(돈헌)임병찬선생의 손자 임수명선생(지난 77년 80세로 사망)이 오는 15일 광복절 47주년을 맞아 건국포장을 받게 됨으로써 3대에 걸친 이 집안의 조국독립 의지가 함께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1대 임병찬선생은 62년 독립장을,2대 임응철선생(지난 31년 60세로 사망)은 90년 애족장을 각각 받았었다. 정부의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 조국광복을 위해 대를 이어 몸바친 3대가 모두 「공식」인정을 받은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임병찬선생은 그의 나이 55세가 되던 해인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면암 최익현선생과 함께 향리인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10년의 한일합방후에는 고종으로부터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총장으로 임명받아 전국의 시·도 대표 3백29명으로 독립의군을 조직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후 무장독립전쟁을 준비하다 1914년 5월 체포돼 전남 여수군 거문도에 감금당한 뒤 끝내 나라 잃은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2년후 목숨을 끊었다. 구한말 홍문관 학사와 승정원 비서승등을 역임한 2대 임응철선생은 부친을 도와 독립의군부 결성및 활동에 크게 기여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협등과 함께 조선독립대동단을 결성했고 그해 11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공을 상해임시정부로 탈출시키려다 발각돼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번에 건국포장을 받게 된 3대 임수명선생도 이같은 집안 분위기 속에서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할아버지 임병찬선생이 거문도에 감금돼 있는 동안 뒷바라지를 한 데 이어 아버지 임응철선생을 따라 조선독립대동단에 들어가서는 전북지단 이사를 맡아 김흥순등 수십명을 가입시켰으며 이들로 부터 걷은 군자금을 서울 본부로 전달하는 역할을 주로 했다. 그러나 1·2대가 쉽게 공적을 인정받은데 비해 임수명선생의 「독립유공」은 그동안 공인받지 못했다. 그의 활동이 워낙 비밀스러워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4대째인 임주수씨(68·경기도 수원시 고등동 롯데아파트 1동208호)는 아버지의 독립운동 기록을 찾아내느라 백방으로 뛰어다닌 결과 전북향토문화연구회와 그 지역 역사학자들의 도움으로 자료를 입수해 마침내 뜻을 이루게 됐다. 그 자신 독립운동에 빠진 아버지가 집안를 돌보지 않는 바람에 막일을 하며 어렵게 성장한 임주수씨는 현재도 월세 20만원짜리 20평형 아파트에서 부인 이지순씨(64)와 단둘이 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광복을 위해 헌신해온 독립운동가 집안이란 사실과,선대가 남긴 훈장을 자랑으로 여기며 깨끗이 살아왔다』면서 『다만 광복절을 단지 공휴일로만 생각하고 왜색문화에 무분별하게 물드는 듯한 젊은 세대들을 보면 선조에게 죄를 짓는 느낌』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서일선생

    ◎독립군 양성… 청산리전투 대승 이끌어/31세에 만주로 망명… 한인자녀들 가르쳐/항일투쟁단체 규합,대한군정서 총재로/「김좌진전투부대」의 최고지도자… 흑하사변으로 동지 잃자 자결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기리기 위해 서울신문사와 국가보훈처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백포 서일선생이 선정됐다.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서일선생은 만주지역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을 가장 적극적으로 전개,청산리전투의 실질적 주도자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교육자·종교인·언론이기도한 선생은 1921년 소위 흑하사변으로 동지들을 잃자 자결로 민족에 사죄했다.정부는 지난 62년 선생에게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했다.백포의 짧은 생애를 되새겨 본다. 우리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청산리전투를 아는 사람은 많아도 서일선생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일제를 깨부술 수 있는 것은 힘뿐이라고 믿었던 젊은 혁명가,그 힘은 강고한 정신력과 무장을 바탕으로 나온다고 생각한 지휘관이 서일선생이다.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교단에서 백묵가루를 마시던 약골의 선비 서일을 무장독립운동가로 변신시킨 것은 무엇인가. 그는 41세의 짧은 생애 강운데 나중 10년을 백두산과 만주벌판을 누볐다.그 마지막 10년동안 흘린 피와 땀과 사자후가 희미하게 역사에 남아 있다. 혁명가 서일선생에 대한 흔치않은 증언과 색깔 바랜 기록들이 아쉽긴 하지만 그의 이름은 청산리전투와 함께 우리 역사에 영원히 남겨질 것이다. 고향과 가족을 등진채 산악과 벌판에서 풍손로숙한 이름 모를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저승에서도 서일선생을 떠받들고 있을 것이다. 선생은 1881년(고종18년)2월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김희동 농가에서 태어났다.호는 백포. ○월북 경원서 출생 처음 이름은 기학이라 했지만 나중에 일로 바꿨다(대종교·보훈처 기록).18세까지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신학문에 뜻을 두고 경성에 있던 성일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이로부터 후학을 기르는데 전념한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나중 그의 행적을 미루어 보아 식민지 젊은이들의 의와 기를 살리는데 앞장섰으리라생각될 뿐이다. 그러나 그의 20대는 날이 갈수록 어두운 색깔로 채색되어갔다.혈기왕성했던 스물다섯에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겪었고 서른에는 망국의 경술국치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와 망명지 만주등에는 사립학교 설립이 급증했다.이는 조국광복을 위해서는 교육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한 선지자들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선생역시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음에 틀림없다.그러나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망명후 선생이 교육에 정신(대종교)과 힘(무장투쟁)을 융합시킨 사실이 그 증거이다. 31세때(1911년)선생은 국내에서의 항일투쟁의 어려움과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통분해하며 당시 지사들이 많이 망명해있던 동만주 왕청현으로 떠났다.만주지역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 10년의 시작이었다. 그는 한승점이 설립한 대종교계통의 명동학교(왕청 덕원리소재)에서 물밀듯 이주해오는 한인자녀들을 가르치며 조국독립의 강한 의지를 불붙여 주었다(이 명동학교를 서일선생이 설립했다는 설도 있지만 기록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이듬해 10월 선생은 대종교에 귀의한다.홍익인간의 이념을 추구·실행하는 대종교 정신은 벌판을 누비던 독립군들에게 막강한 정신력을 주게된다.선생이 단순한 무장독립운동가가 아닌 교육자·종교인·언론인으로도 평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두만강을 넘어 망명해오는 열혈청년들이 줄을 이을 때 서일선생은 북간도 일대에서 대일항전을 노리는 의병들과 규합,중광단을 조직했다.단장에 취임한 그는 무력항쟁의 기틀을 잡기위한 체제구축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대종교의 이념계승에도 몰두했다. ○대종교에 귀의 그는 대종교 입교후 포교에도 나서 3년동안 동만주 북만주 연해주 함경도 일대에서 10여만의 교우를 얻어 「도력이 큰 도사」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서일선생은 교우들중 젊은 청년들은 독립군으로 편입시키고 일반교우에게는 군량 조달등 다른 직무를 부여했다. 독립군에 편성된 청년들의 강고한 정신무장을 위해 한배검에 귀의케한 탓으로 후일 그가 총재로 지휘한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의 장병은 거의가 대종교인이었다.선생은 교도들을 중심으로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는데 신도 1만5천명을 모아놓고 「독립군 양성기금으로 1인1원씩 거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대종교를 독립운동의 기지로 삼았음이 틀림없다.이 사이 선생은 「오대종지강연」「도해」「신화강의」「진이도설」「삼문일답」「회삼경」등 경전도 저술했다. 당시 선생은 중광단등을 통해 대일무장투쟁을 추구했으나 재정문제등 조직적 체제가 구축되지 않아 실질적 군사투쟁은 전개하지 못했다.이에 선생은 수많은 독립군및 운동단체 결집을 위해 1918년 김좌진 김동삼 신팔균 손일민 신채호등 39인 연서로 「무오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이와함께 강도 높은 전투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일민보」「신국보」등 신문을 발간,『일제와의 항쟁은 혈전을 벌이는 피의 전투 밖에 없다』는 논조를 내세웠다. 이듬해 1919년7월부터 청산리전투가 전개된 1920년10월까지 선생은 중광단을 확대·개편한 대한정의단→대한군정부→북로군정서등 독립군단을 이끌었다.정규병력 1천5백여명을 청산리전투주역인 사관으로 양성하고 러시아·체코군으로부터 3만여정의 무기도 확보했다. 이처럼 군정서가 힘을 갖추기 시작하자 일제는 상당히 겁을 먹고 주목했는데,그들은 「북간도지방의 항일단체 상황」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일제정규군 3천3백여명이 사살 당하는 청산리전투를 짐승처럼 예감하고 있었다. ○일군 3천명 사살 『…군정서는 서대파구에 근거를 두고 서일이 통솔한 단체로서 대부분 단군교도(대종교)이다.…그들 행동은 극히 흉포하여 부단히 선내지에 대한 무력침습을 양언하고 있다.…총재는 서일,부총재 현천묵,사령관 김좌진,부사령관 김성,참모장 나중소등이다.…일단 유사시에는 명령일하 동원소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청산리전투후 여러개의 독립군단들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영 밀산으로 이동한다.여기에서 북로군정서(서일)·대한독립단(홍범도)등 10개 부대는 전만주 3천5백 병력을 통합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고,선생이 총재로 추대되었다.부대편성을 마친 독립군단은 이듬해 정월 우수리강을 건너 시베리아로 이동했다. 그러나 「소련영토 안에 일본에 대적하는 독립군을 육성하면 양국간 우호관계에 큰 지장을 초래하는 것」이라는 일공사 요시자와의 위협에 소련은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강요하는 소위 「흑하사변」이라는 참변이 발발해 독립군은 힘을 잃었다.여기에 토비들의 습격까지 겹쳤다. 수많은 동포와 청년독립군들이 희생을 당했다.비분강개한 선생은 8월28일 마을 뒷산 산림 속에서 대종교의 폐기법으로 자결순국했다.41세 독립운동가가 남긴 유언은 처절하다. 『조국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차리라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역사적 평가/독립운동가·교육가로 큰 발자취/신재홍 국사편편찬위 부장 백포 서일선생은 그가 민족운동사에서 차지 하고 있는 위상에 비하여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일찍이 민족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몸소 이를 실천한 교육자이며 또 민족정신 앙양을 목적으로 한 대종교의 간부일뿐아니라 만주에서 일제와 무장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군 지도자였다. 그의 학력은 함북 경성군에 위치한 성일학교 사범과를 나온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일찍부터 민족혼을 살리는 길은 교육에 있음을 인식하여 향리에서 교편생활을 하였으며 1910년 일제가 주권을 강탈하자 북만주로 망명하여 그곳에 명동 동일 학성 동신 동화 양성학교를 설립하여 구국인재 양성에 헌신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에 강탈당한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강인한 민족혼의 배양에 있다고 확신하였고 이를 위하여는 국조단군을 숭상하고 홍익인간의 이념을 깨우치는데 있다 하여 민족종교인 대종교에 귀의 하였다.대종교의 포교가 바로 민주운동이요 독립운동임을 믿어 교리연구과 포교에도 힘써 많은 저술을 남긴 민족종교의 지도자였다. 선생의 활동에서 특기할 것은 무엇보다 무장항일운동에 있었다.선생은 일제를 우리 국토에서 구축하고 주권을 회복하는 길은 오로지 일제와의 혈전에 있다하여 무장항일운동 단체인 중광단 대한정의단을 조직,활동하였고 1919년에는 여러 무장단체를규합하여 북로군정서를 설립하였다.이 단체는 민족정신이 투철한 대종교 신자가 중심이 된 단체로서 재만 독립군중 최강의 부대였다.따라서 1920년 이 부대가 이룩한 청산리전투의 위업은 결코 우연히 이루어 지지 않았음을 인식하여야 한다.이것은 선생이 배양한 투철한 민족혼과 강인한 항일의식이 그 밑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민족교육가이며 민족종교가로서 또한 무장항일운동의 지도자로 선생이 민족운동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매우 크다는 것을 잘 알수가 있다.
  • 벽산건설 어떤 회사인가

    ◎58년 설립… 벽산그룹 주력업체/3천억대 매출… 도급순위 18위 벽산건설은 50년대 단성사와 반도극장(지금의 피카디리)을 운영해 부를 축적한 김인득 벽산그룹명예회장(77)이 58년에 설립한 건설회사로 그룹의 주력업체. 올해 국내도급순위 18위의 종합건설업체로 설립당시 이름은 한국건업이었다.70년대중반 해외건설에 주력하다 85년 해외에서 완전히 손을 뗀뒤 주로 국내공사와 아파트 분양사업에 주력해왔다. 지난88년 정우계열 5개사를 인수,합병해 주목을 받았고 최근에는 신도시일원과 부산·대전등지에서 높은 영업신장세를 보여왔다.홍은동·수유리재개발사업(도급액 4백77억원)과 반월신도시3공구사업(2백87억원) 국제스노우밸리콘도(2백82억원)등이 벽산이 추진해온 주요사업들이다. 이같은 신장세에 힘입어 국내공사 도급순위가 91년도 19위(도급한도액 1천7백68억원)에서 올해 18위(도급한도액 2천8백33억원)로 뛰어올랐다.지난해 3천3백30억원의 매출액을 올려 54·1%의 신장세를 보였다. 사장은 김명예회장의 3남인 희근씨(46). 김명예회장은 62년 한국스레트공업을 인수,농가지붕개량붐을 타고 일약 재벌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는데 한국스레트공업은 벽산그룹을 건자재중심 그룹으로 성장시킨 모체가 됐다.지난해 용산구 동자동에 새사옥을 지은뒤 9월 김인득회장이 그룹명예회장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장남인 김희철씨(55)가 승계했다.
  • “36년 정상도전” 바르셀로나서 실현/사격 올림픽 금 따기까지

    ◎56년 「멜버른」이래 고작 은에 머물러/76년이후 집중육성… 「메달박스」 전망 한국사격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기 까지는 무려 36년이 걸렸다. 지난 55년 2월6일 대한사격연맹을 창설,국제사격연맹(UIT)으로 부터 임시회원국 자격을 얻어 이듬해 추화일,김윤기 등 단 2명만을 멜버른올림픽에 처녀출전시킨 이후 최고의 성적을 거둔 것이다. 그동안 서방 세계의 보이콧으로 인해 불참한 80모스크바올림픽을 제외하고 줄곧 선수단 규모를 늘려왔던 한국사격은 이번엔 4년전 서울대회때 보다 45%가 적은 12명의 대표를 파견,금메달의 값진 수확을 거둬 질적인 성장을 입증시켰다. 이번 바르셀로나 금메달도전 이전 까지의 최고 성적은 은메달.4년전 서울 홈무대에서 당시 88사격단소속 차영철이 소구경 소총 복사에서 체코의 바르가에게 아깝게 1.1점차로 뒤져 2위에 머물렀던 것. 그러나 차영철을 제외하곤 지금껏 메달권에 진입한 사례가 없을 정도로 올림픽에서 한국사격은 험난한 길을 걸어왔다. 64도쿄올림픽에서 안재송이 자유권총서 9위에 랭크됐으나 이후 76년 몬트리올대회때까진 오히려 최고 성적이 뒷걸음치는 침체기를 맞기도 했다.몬트리올대회에선 당시 아시아 ‘피스톨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박종길마저 15위에 그쳤을 뿐이었다. 8년뒤 상황은 호전됐지만 여전히 메달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여자대표들이 처음 가세한 LA대회에서 박종길의 뒤를 이은 양충렬이 속사권총서 그때까지 최고성적인 5위에 랭크됐고 여자권총의 문양자는 10위에 머물렀다. 처음 결선(8강)시스템이 도입됐던 서울올림픽에서는 개최국 자동출전의 이점을 살려 22명의 매머드선수단을 출전시켰으나 차영철을 포함,고작 2명만이 결선무대에 올라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해야 했다. 그러나 한국은 엔트리 제한에 따라 올림픽 2년전부터 출전쿼터경쟁을 벌여야 하는 ‘적자생존의 원리’에 차츰 항생력을 기르면서 금메달 도전의 발판을 다져왔다.그 분기점이 된 것은 90모스크바 세계선수권대회.소구경 소총서 이은철이 한국사격사상 처음으로 정상에 오르며 2관왕에 등극했던 것. 그 이후 각종 월드컵대회에 출전,꾸준히 금메달을 획득하며 국제경험을 축적해 온 한국은 92프레올림픽에선 은메달 2개를 따내면서 이번 쾌거를 예고하기도했다. 지난 62년 자카르타아시안게임서 남상완의 첫 금메달 획득에 이어 72년 국내에서 처음 열린 국제대회인 제2회 아시아선수권대회서 종합우승한 뒤 아시아권에서 독주를 거듭하던 한국은 80년대들어 중국,북한에 밀려나기도 했지만 78년 세계선수권(은3,동5)의 서울유치를 전환점으로 전략종목으로 집중육성,소총부문에선 세계 정상권에 도달해 있다는 평을 받았다. 총포 화약류단속법 등 상존하는 사격환경의 상대적인 불리함을 딛고 세계 강호들과의 경쟁에서 강한 정신력으로 승부를 걸어야했던 한국사격은 이번의 값진 결실을 발판삼아 장비의 과학화,해외교류확대,선진기술의 신속한 도입 등 재도약을 위한 투자와 설계를 시작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한은이사 김시담씨

    금융통화운영위원회는 24일 한국은행 신임이사에 김시담뉴욕사무소장(56)을 임명했다. 제주출신인 김이사는 서울상대를 나와 62년 한국은행에 입행,미국 뉴욕주립대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은 조사1,2부장 국제금융부장을 역임했다.
  • 외언내언

    통일교에서는 원칙적으로 개인결혼식이 인정되지 않는다.교주인 문선명목사부부가 함께 축복하는 합동결혼식을 거쳐야만 「진정한 신앙가족」의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총각·처녀는 물론이고 이교단에 들어오기전에 결혼했던 부부도 합동결혼식이라는 또한번의 결혼의식을 치러야 한다.세속에서의 결혼식은 무효이기 때문.말하자면 통일교의 합동결혼식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고 교주로부터 한 가족으로 인정받는 가장 엄숙하고 화려한 종교 의식이다.◆합동결혼식에 참가하려면 일정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통일교신자가 된지 3년이상이 되어야 하고 각종 수련과 전도책임을 완수한 24세이상의 남자와 22세이상의 여자라야 한다.이런 조건을 갖춘 신랑·신부후보도 교단심사에서 탈락되면 다음 합동결혼식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통일교가 처음으로 합동결혼식을 거행한것은 60년.이때는 3쌍이었는데 61년 33쌍,62년 72쌍,63년 1백23쌍으로 늘어나더니 88년에는 6천5백쌍이 합동결혼식을 올렸다.당시로서는 세계최대의 합동결혼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다.◆이 기록을 경신할 엄청난 규모의 합동결혼식이 오는 8월25일 서울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거행된다.4년만에 열리는 탓이겠지만 이 결혼식에 참가하는 신랑 신부는 2만여쌍.18개국의 선남선녀가 이날 부부로 탄생하는데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훨씬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런데 통일교 합동결혼식 때문에 일본사회가 떠들썩한 모양이다.리듬체조의 여왕 야마자키(산기호자·32)와 인기여배우 사쿠라다 준코(앵전만자·34)가 이 결혼식에 참가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들은 『문선명교주가 정해주는 배우자라면 어떤 사람이든 어느나라사람이든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통일교의 합동결혼식은 그 나름의 장엄한 종교의식이므로 무어라고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기이하다는 느낌만은 지울수가 없다.
  • 땅사기서 드러난 「보험사」의 얼굴/손남원 생활부기자(저울대)

    오늘날 금융시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보험 역시 하나의 상품이다.그것은 사회보장기능을 수행하는 무형의 특수상품에 해당한다.가입계약자(소비자)인 다중이 기금을 조성하지 않고는 물론 상품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이 보험이기도하다. 그럼에도 보험상품은 소비자 피해구제 대상에서 법으로 제외시켰다.아마도 보험업무를 사회보장측면에서 공익사업으로 해석한 결과가 아닌가 한다.다시말하면 보험사를 공공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소비자보호기관과 같은 맥락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국내 보험산업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것도 이런 보험의 특성이 감안되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정부가 지난 62년 처음으로 「보험업법」을 제정,보험사를 정비·통합한 이후 20억원에 불과했던 자산규모가 90년에는 30조원에 이르렀다.현재 국내의 수입보험료는 대략 21조9천 2백억원으로 추산된다.미국 일본등에 이어 9위를 마크,세계10대 보험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국내 생명보험업계가 사상 유례없는 양적성장을 이룬 이면을 들여다보면 몇가지 이유를 또 발견하게 된다.세제혜택등 각종 정부지원이 그것이다.보험의 사회보장기능을 강변한 보험사들의 주장을 가입자인 소비자들도 그동안 많은부분을 용인해왔다.그러나 보험사고에 대비한 지급자금은 제대로 쓰여지지않았다.국내6대생보사의 부동산 보유규모가 지난해 2조5천2백73억원에 달했다는 사실도 이를 입증한다.90년의 1조7천2백47억원에 비하면 자그마치 46.5%가 늘어난 것이다. 특히 이번 제일생명 사건은 부동산투기와 관련하여 보험사가 드러내보인 가장 추악한 얼굴이다.희대의 사기집단과 어울려 부도덕한 장외거래의 부동산투기에 뛰어든 제일생명은 더 이상 금융기관이 아니다.보험계약자들이 몰려와 해약사태를 빚고 있다는 소식이고 보면 이미 공신력을 상실했다.해약환급금지불과정에서 또 불이익을 당했을 법한 계약자(소비자)들이 그저 딱할 뿐이다. 제일생명은 이제 간판을 내려야한다.그 당위성은 공신력을 제일로 여기는 금융기관의 생명을 잃은 「제일생명」의 상호가 벌써 퇴락해버렸다는데 있다.다른 보험사들도 「종이 놓고 돈 먹는 곳」이라는 넌센스 퀴즈의 해답과 같은 보험사의 부정적 이미지를 이 기회에 씻어야 할 것이다.
  • “새시장개척 견인차 역할 맡겠다”/수출보험공사 이동훈사장(새사장)

    한국수출보험공사가 7일 정식 발족한다. 그동안 수출입은행에서 대행해온 수출보험업무를 이 공사가 맡아 수출에 따른 위험을 덜어주게 된다. 이동훈 한국수출보험공사 초대 사장(52)은 빠른 시일안에 이 공사를 정상궤도에 올려놓고 새로운 시장 개척에 견인차 역할을 하겠다고 다짐한다. 수출보험이란 상품수출이나 해외건설수출,해외투자등의 대외무역거래에서 발생하는 위험 가운데 해상보험과 같은 통상의 손해보험으로는 구제되기 어려운 위험울 부담해 줌으로써 우리나라의 대외무역거래를 지원하기 위한 보험제도이다. 이사장은 수출보험을 제대로 활용하면 이처럼 수출에 따른 위험을 줄일수 있는데도 지금까지 이제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이용률이 극히 부진했다고 안타까워 했다. 이웃 일본의 경우 수출보험이용률(총 수출실적 대비 수출보험 인수 실적)이 30.3%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겨우 2.7%에 불과한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이사장은 우리나라의 전체 수출이 부진한 이유도 우리수출상품의 대외경쟁력이 약화된 점을 첫번째로 꼽을 수 있지만 수출규모는 세계 10위권에 들면서 수출보험이용률은 선직국의 20∼30%수준에 비해 훨씬 못미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수출보험공사의 발족에 따라 앞으로 5년안에 수출보험 이용률을 15%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것이 이사장의 목표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금마련이 급선무인데 현재 1천억원 가량 조성돼 있는 보험기금을 내년에는 1천4백억원을 더 늘리고 5년안에 5천억원의 기금을 확보할 계획이다. 또 지금까지는 수출보험기금을 주로 대기업들이 거의 독점해오다시피 했으나 앞으로는 정보력에 한계가 있는 중소기업의 새시장개척을 중점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수출보험기금 이라는 한정된 재원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위험이 수반되는 상대방국가나 기업에 대한 신용조사능력이 확보돼야 하며 이를 위해 전직원을 대상으로 해외연수 및 전문교육을 실시,세계 최고수준의 보험인으로 양성시켜나가겠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나라 수출산업의 기반을 더욱 굳건히 다지고 중소기업의 국제화를 촉진시키는 첨병노릇을 하겠다는 것이 이사장의 다짐이다. 또하나 주요한 과제는 보다 많은 수출기업이 이 제도를 쉽고 편리하게 이용하도록 제도를 개선하고 미비점을 보완하는 일이다. 경북대 사대를 나와 지난 62년 고시 14회 행정과에 합격,상공부 사무관으로 출발하여 주 월남대사관 상무관,상역국장,제2차관보,공진청장등을 거쳐 지난 5월부터 한국수출보험공사 설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아왔다. 조남풍 육군 제1군사령관,김도언 부산지검장과는 부산 동래고 동기동창으로 절친한 사이다.
  • 「콜럼버스축제」 한창/복원한 산타마리아호 뉴욕항 입항(특파원코너)

    ◎신대륙발견 5백돌 기념행사 풍성/불꽃놀이 장관에 1백만군중 탄성 단 3척의 작은 범선단을 이끌고 서양인으로서 아메리카 대륙에 첫발을 내디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자신의 항해업적이 5백년후 1백만명 이상이 지켜보는 가운데 4만여척 선박행렬의 축하속에 재현되리라고는 결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1492년8월3일 스페인의 팔로시항을 떠나 10월12일 오늘의 중미 산살바도르섬에 처음 도착했던 콜럼버스는 당초의 목표였던 인도의 향로를 구하진 못했지만 세계역사의 진로를 바꿔놓은 업적을 남겼다.콜럼버스가 없었다면 미대륙의 발견은 1세기 또는 2세기 뒤가 됐을지 모르고 그때부터 개발이 시작된 미대륙은 오늘의 모습과는 아주 달랐을지도 모른다. 신대륙발견 5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콜럼버스 기념축제는 지난 2일 시작돼 오는 7일까지 1주일동안 계속되는데 축제의 절정은 역시 4일 있었던 미독립기념일에 맞춰 뉴욕항에서 펼쳐진 「항해작전」(Operation Sail). 「항해작전」은 당시 콜럼버스가 이끈 산타마리아호,니나호,핀타호를 그대로 본뜬 3척의 범선이 뉴욕항에 입항하면서 시작됐다.항해작전에는 3척의 콜럼버스 선단을 필두로 세계각국에서 참가한 34척의 대형범선과 2백여척의 대형선박,4만여척의 소형요트들이 참가했다. 이번 범선초청행사는 지난 62년 당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뉴욕세계박람회를 축하하기 위해 전세계에 퍼져 있는 범선들을 뉴욕항에 초청한 이후 4번째인데 그 규모에 있어서는 과거 어느때와도 비교가 안되는 사상최대의 범선퍼레이드로 기록될것 같다.지금까지 최대기록으로 알려진 미국독립 2백주년기념 범선축제때도 16척의 대형범선과 2백여척의 소형요트만이 참가했을 뿐이다. 세계 24개국에서 초청된 각종 선박중에는 길이가 4백피트에 3개의 대형 돛대를 단 러시아의 세도프호와 뉴욕시가 최근 구입한 벽돌담을 허물만큼 강력한 물기둥을 뿜는 소방선등이 포함돼 있다.이밖에 참가선박중에는 칠레의 3백72피트짜리 에스메랄다호도 끼어 있는데 이 배는 지난 73년 엘살바도르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킨 독재자 피노체트가 이 배를 정치범들의 고문장소로 이용해 더욱 유명해진 선박이다. 2백95피트짜리 이글호도 화제감이다.나치독일의 히틀러해군이 건조한 이 배의 본래 이름은 호스트베셀호.나치정권을 위해 초기에 목숨을 잃은 베셀의 이름을 그대로 딴 것이었으나 종전후 전재배상의 일환으로 미국이 이 배를 인수했고 지금은 미해안경비대가 이름을 바꿔 이용중이다. 고대식 함포를 장착한 스토밀호도 얘깃거리다.이 배는 지난 86년 「자유의 여신상」재정비 기념행사때도 초청됐었으나 항해도중 엔진고장을 일으켜 2주나 지각했던 기록을 갖고 있다.그러나 이번에는 사고없이 퍼레이드에 참가했다. 이날 선박행렬은 뉴욕항외곽 베라자노다리를 출발,「자유의 여신상」을 지나 허드슨강을 거슬러 조지 워싱턴다리에 이르는 11마일 해상에서 펼쳐졌다.선박행렬에 소방선들이 대거 참가한 것은 퍼레이드중 5색 물기둥을 뿜기 위한 것으로 이날 행사에서도 아름다운 축하 물기둥을 유감없이 내뿜었다. 선박축제 외에도 각종 기념공연과 거리행렬등 행사가 다채로운데 4일밤 맨해턴중심 메이시백화점 앞에서 펼쳐진 불꽃놀이도 장관. 구경거리를 좋아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해 다름이 없다.사상최대의 선박쇼를 보기위해 이날 나선 뉴욕시민들은 자그마치 1백만명이 넘은 것으로 주최측은 추산하고 있다.조지 부시 대통령등 주요인사들이 참관한 거버너스 아일랜드(GovernorsIsland)일대는 물론 뉴욕항 주변과 맨해턴의 고층빌딩 옥상은 온통 구경인파로 뒤덮였다.
  • 미술문화올림픽 서울서 열린다/국제조형예술협총회 11월 개막

    ◎60여개 회원국서 1백여명 참가/국내 최초… 동양선 30년만의 “축제”/대회기간중 대규모 전람회등 행사 풍성 세계적인 미술문화올림픽으로 불리는 국제조형예술협회(IAA)제13차총회가 오는 11월26일부터 12월1일까지 서울 올림픽공원내 유스호스텔에서 열린다.세계60여개국의 대표적인 미술인 1백여명이 참가할 이 대회는 국내에서 처음 열리는 것이며 동양권에서는 지난 1962년 도쿄개최이후 30년만에 열리는 행사다. 이 대회는 또 지난89년 마드리드 총회에서 처음으로 IAA에 가입한 북한 미술인을 공식적으로 초대할 예정으로 있어 큰 관심을 모은다. 주최측인 한국미술협회 박광진이사장은 『북한대표를 유치하기 위해 통일원으로부터 북측의 조선미술가연맹 대표 정영만과의 접촉승인을 받아놓았으며 빠른 시일내에 접촉을 시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IAA(International Assiciationof Art)는 지난54년 베네치아에서 결성된 세계미술인들의 연합체로 회원국은 88개국에 이른다. 유네스코 후원아래 창립 운영되고 있는 국제민간미술기구로 각국 미술인들과의 친목도모와 정보교환,미술의 대중화,권익옹호등을 목적으로 하고있으며,문학인들의 국제기구 PEN클럽에 비교될만한 문화예술기구다. 이번 서울대회를 운영하게 될 한국미술협회는 오는 10월1일부터 체육진흥공단내에 IAA총회개최추진사무국을 두고 40여명의 통역훈련을 시작으로 사무국을 가동하고 문화부등 관계당국과 예술원,대기업 문화재단등을 추진위원으로 추대할 계획이다. 올해 대회의 의제는 아직 결정치 못했으나 대회기간중 국제전성격의 대규모 전람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각국 참가자들에게 협조공문을 보냈다. 전람회는 참가 국제대표들이 그 나라를 대표하는 작가 1인의 작품 1점씩을 가져오며 국내에서는 3백30명정도의 작가가 동원돼 총 4백명이 참가하는 국제전으로 꾸민다는 것. 전시회명칭은 「IAA서울92」(가칭)이며 11월30일부터 10일간 서울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서 열리게 된다. 국내미술계의 개가로 인식되는 IAA총회 서울유치는 그러나 유치과정에서 자칫 타국에 개최권을 빼앗길 뻔한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지난 89년 스페인마드리드에서 개최됐던 IAA 제12차총회에서 당시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이던 김서봉씨가 어렵사리 제13차총회를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해당연도인 올해초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전 미술인들의 선거로 교체하는 과정에서 IAA개최준비가 허공에 떴고 이를 알아챈 그리스가 재빨리 각국에 앙케트를 돌리며 총회 개최권을 가로채려 한 것. 그러나 한국미술협회 신임이사장 박씨가 취임직후 각국에 「IAA개최에 관한 한국정부의 보증」을 전제로 한 개최의지를 밝히는 공문을 서둘러 보냄으로써 지난 4월에 다시 한국개최로 확정됐다. 북한대표의 참가만 실현되면 올해 IAA 제13차총회의 서울개최는 우리측 입장에서 볼 때 제모양을 갖춘 국제미술회의로서 우리나라 미술계의 위상을 한층 높일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 주공 오늘 창립30돌/주택 2백만호 건설 주역

    대한주택공사가 1일로 창립 30주년을 맞는다. 지난 62년 창립과 함께 서울 마포에 현대식 아파트 6백42가구를 건립한 이래 지금까지 우리나라 전체 주택의 약 9%에 해당하는 68만3천여가구를 건설해 왔다. 주공은 60년대말에 서울 한남동의 힐탑아파트 1백20가구와 70년초 개봉동에 임대아파트 5백가구를 건설,고층아파트와 임대아파트 시대를 열었으며 특히 70년초에는 부족한 주택재원 충당을 위해 AID,ADB,IBRD차관자금을 도입,차관주택 5만7천86가구를 건설하는 한편 주택상환사채를 발행,사채주택 9천4백8가구를 건립하기도 했다.이와함께 72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광명지구에 조립식주택(PC) 3백가구를 건설했으며 도시지역의 주택문제 해결을 위해 서울의 반포·잠실·개포·둔촌등 대단위 단지와 과천·상계·광명등 신도시를 건설했다. 주공은 6공화국들어 추진된 주택 2백만가구 건설사업물량중 33%에 해당하는 23만7천가구를 건설했으며 올해부터 시작된 7차5개년계획의 2백50만가구 건설계획에서도 매년 8만4천가구씩 42만가구를 건설할 계획이다.
  • 국가경영전략연,「6·29」5돌 성과와 과제 심포지엄

    ◎「제도적 민주화」 걸맞는 의식선진화 시급 국가경영전략연구원(이사장 강경식)은 29일 6·29선언 5주년을 맞아 「한국민주화의 현재까지 성과와 앞으로의 과제」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이날 하오 2시 여의도 중소기업회관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심포지엄에는 김동환변호사가 「법과 질서」, 이동찬한국경영자총협회장이 「능률과 형평」, 정진석외국어대교수가 「민주발전과 언론」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국가의 당면과제와 2천년대 재도약을 위한 종합전략을 제시했다. ◎법과 질서/김동환 변호사/지자제등 「자율」 크게 확대/다양한 욕구 타협적수렴 바람직 6·29특별선언이 있을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의 모든 관심과 노력이 정치현상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특히 5·16군사혁명이후 정치권력이 경제의 주동력이 되자 국민들의 경제생활·사회생활이 정치권력의 향배에 크게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따라서 국민의 관심이 정치상황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극도로 혼란한정치상황이 국민의 동요를 배제하기 위한 처방으로써 6·29선언이 구상되었다고 보며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6·29선언의 본질적이며 직접적인 의의는 대통령직선제를 채택함으로써 정치상황의 안정을 도모하는데 있었다. 또한 이 선언이 정치상황의 안정에 본래적인 의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나타난 효과는 국민의 의식과 생활전반에까지 미치고 있다.특별선언이 정치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만 그 효과는 사회의 모든 활동에 대해서도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를 부여하게 된 것이다. 특별선언 여섯째 항목에서 사회 각 부문의 자치와 자율을 보장하고 있는데 그것은 지자제실시,대학교육의 자율화,교육의 자치 등을 예시하고 있는데 비추어보더라도 제도를 통한 자치와 자율의 확대보장이라고 해석된다. 그러나 제도에 의한 자치와 자율의 확대보장은 국민적 욕구를 처리하기엔 너무나 미흡했다.쾌적한 환경을 요구하는 주장,안전한 소비생활을 요구하는 주장,적정한 책임과 인간다운 생활을 요구하는 주장,참다운 교육을 실시하고 받아야 한다는 주장,장애가 있는 사람이 차별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주장,성별·지역별·학력별 차별을 해서는 안된다는 주장등 다양한 주장들이 알게 모르게 분출된 것이다. 정확히 말해 6·29선언이 다양한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행위를 자유롭게 허용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주장들이 개입되었으며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를 찾아 행동하기 시작한 것이 현실이다. 정치권력에 의해 억제되고 획일화를 요구받던 다양성의 회복은 빠른 속도로 이루어질 것이다.경험이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다양성을 추구하다보니 현행 질서와의 충돌이 불가피했던 것도 사실이다.당면한 이익만을 추구한 결과는 궁극적으로 손실을 초래한다는 경험을 가지게 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의 당면한 과제는 다양한 시민적 필요에 부응하는 새로운 질서의 실현이다.정리되지 않은 다양성을 정리하여 발현하는 자율적인 시민활동의 활성화를 통하여 그러한 노력은 성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새로운 제도는 사적자치의 확대강화와 공권력개입의 축소약화라는바탕위에서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지방자치제의 활성화에 따라 생활법률분야를 조례에 위임하는 방안이 권장되어야 한다.자치와 자율을 바탕으로 지역사회의 공공문제를 스스로 해결토록하는 경우 문제의 그 우선순위 등에 따르는 불만은 해소될 것이다. 모든 생활법률은 규제가 아닌 인도를 기본정신으로 하여 제정되어야 한다.정부나 지방자치단체는 국민들의 생활수요를 능동적으로 발굴하여 민원에 앞서 제도화하는 적극적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건전한 시민의식은 준법생활로 부터 시작된다.법을 지키지 않으면 크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엄정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국민을 맡아서 처리하는 당국자들의 깊은 철학과 결연한 의지,그리고 국민모두의 인고와 호응이 있어야 제도의 정비와 의식의 정립이 이룩될 수 있다. ◎능률과 형평/이동찬 경총회장/고임금따른 역기능 표출/「경제풍향」제시할 일관정책 긴요 우리경제는 6·29이후 일대 변혁기를 맞는다.그것은 성장가도를 달리며 뒤돌아볼 틈이 없었던 우리경제가 잠시 홍역을 치를 수 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에 기인하고 있다.성장의 그늘속에서 잠시 유보시켜 놓았던 문제인 분배와 균형에 관한 요구가 경제민주화 조치와 함께 자연스럽게 대두되었기 때문이다.5주년을 맞는 요즈음 다소 안정되어 가는 느낌도 있지만 그간의 문제해결에 있어 아쉬움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6·29의 본래취지가 어떤면에서는 왜곡되어 너무 조급하게 변화를 바랐던 사회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경제와 관련된 일련의 정책들도 경제발전을 위한 순기능적인 역할도 많이 했지만 일시에 많은 변화를 요구한데서 오는 역기능도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88서울올림픽의 주최는 우리민족에게는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그것은 바로 경제의 힘이었다.우리경제가 세계10대 교역국으로까지 성장할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기업들의 노력도 간과할수 없지만 역시 최대의 공로자는 우리 근로자였다.그러나 계속된 성장위주의 정책은 근로자복지 향상면을 다소 소홀히 하도록 하는 구실을 제공해주었다.근로자들의 쌓인 욕구불만은 결국 6·29경제민주화 조치와 함께 일시에 도출되면서 산업계는 홍역과 같은 과도기적 현상을 맞게 된다. 6·29선언은 우리경제가 고도성장을 풍미하는 가운데 잠시 잊고 있었던 문제들에 대해 되돌아 보게끔한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다.근로자들이 자신의 몫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패배감에 젖게 됐고 이 패배감은 과격한 노사분규로 이어져 기업현실이 등한시된채 과도한 임금인상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87년이후 임금인상은 생산성 향상의 뒷받침없이 이루어졌다.사회적변화와 요구를 풀어가는 과정에 있어 너무 조급하게 처리하려고 했던 것이 오히려 부작용을 낳았음을 간과할 수 없다.근로자들의 가계수지가 사상유례없는 높은 임금인상률에도 불구하고 별로 좋아지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국민소득 5천달러는 결코 잘사는 나라의 수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과소비 풍조의 만연,주택및 전·월세가격의 상승등은 결과적으로 근로자들로 하여금 상대적 빈곤감을 더해준 꼴이 된 것이다.해마다 6천개가 넘는 기업이 도산하고 있으며 과소비풍조속에 자고나면 없어지는 것은 중소제조업이고 늘어나는 것은향락산업이다.우리경제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맞고있다.최근들어 경제단체및 언론이 주체가 되어 「우리경제를 되살리자」는 운동이 펼쳐지고 있는 것은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6·29선언은 경제정책면에서도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주택 2백만호 건립은 주택문제해결과 부동산가격안정에 실로 큰 역할을 했다.그러나 원자재및 임금상승을 부추겼고 성장도 제조업위주에서 건설·서비스분야가 중심이 되는등 급기야 제조업경쟁력강화 문제가 대두되는등 역기능도 무시할수 없다.5·8부동산조치도 부동산가격의 상승을 잡아보겠다는 정부의 신념에 따라 많은 성과를 보인 반면 상대적으로 기업의 활동은 위축되었다.금융정책에 있어서도 계속된 긴축정책은 물가안정에 기여한 공로와 함께 기업의 활동성을 약화시킨 면도 있었다.이상 몇가지 예는 6·29이후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차원이 아니라 너무 급하게 모든 것을 처리하려했던 면과 정책의 일관성이 더러는 없었다는 아쉬움때문이다. 6·29 5주년시점에서의 과제는 각자 제역할을 다해야 한다는데있다.국민은 근검절약하는 가운데 저축을 생활화해야하며 기업도 근로자에 대한 시각을 새로이 정립하여 복지향상을 통한 실질적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근로자는 경제시국에 대한 위기감을 공감하는 가운데 땀흘려 일하는 풍토를 재조성해야 한다.정부도 강력하고도 가시적인 정책을 장기적 안목에서 일관되게 시행해나가야할 줄 믿는다. ◎민주발전과 언론/정진석 외대교수/언론 급신장속 질 못따라/사이비매체 봇물… 부작용 없애야 6·29선언은 언론의 모습을 크게 변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6·29선언의 8개항목 가운데 가장 특기할 부분은 대통령직선제 개헌과 언론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하겠다는 항목이다.언론의 자유는 6·29이후 오늘까지도 계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6·29선언 이후에 정치상황의 변화,서울올림픽 개최등을 통해서 언론은 이전의 여러가지 통제에서 점진적으로 벗어나 과거에는 금기시되었던 영역을 과감하게 보도할 수 있게 되었다.87년11월에는 언론기본법이 폐지됐고 이에앞서 8월에는 주재기자제도가 부분적으로부활됐다.6년만에 신문의 증면이 이루어졌고 기독교방송이 뉴스방송을 다시 시작했다.또 신문·잡지의 발행을 자율화함에 따라 새로운 언론매체가 대량으로 등장했다.60년 4·19직후 제2공화국이 발행의 자유를 제한없이 보장했던 이후 30여년만에 처음 나타난 현상이었다.언론사의 노조결성,언론의 민주화노력등 언론활성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쳤다. 6·29선언때 32종이던 일간지가 92년3월말 현재 99개로 3배이상 늘었다.88년1월과 7월에는 월북작가 1백20여명의 작품을 해금했다.88년7월7일 대통령특별선언이 나온이후 정부는 북한의 자료를 9월3일부터 제한적으로 개방했다.이때부터 북한서적이 시중서점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6·29이후 신문발행의 자유가 상당부문 회복되면서 언론계와 정부당국은 또다시 제2공화국 시절과 같은 언론기관의 난맥상이 일어나지 않을까하는 우려도 있었다.그러나 4·19직후와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90년 상반기부터는 신문이 연중무휴 발행을 실시하고 있다.석간지의 일요판과 조간지의 월요판 발행은 5·16후 군사정부의 언론정책에 따라 62년8월부터 중단됐었다.30년 가까이 지켜져왔던 금기의 벽이 무너지고 연중 쉬는날없이 신문이 발행될 수 있다는 사실도 언론자율화현상의 하나이다. 6공언론을 가장 특징적으로 드러내는 현상은 언론노조의 결성과 기자들의 집단적인 활동이다.89년 1월까지 전국 43개 언론사에 노조가 결성되었고 조합원수가 1만4천여명에 이르렀다. 6·29선언이후 언론자유의 신장과 언론사·언론인구의 급격한 증가에 따르는 문제점도 있었다.첫째,언론사의 급격한 증가로 사이비기자와 사이비 경영인이 발호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사이비기자에 의한 피해를 막기위해서는 공보처와 신문협회·언론중재위등에 「사이비기자 고발센터」를 두기도 했으나 완전근절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둘째,기자들의 윤리와 책임의식이 언론자유의 신장에 비례해서 높아지지는 못했다.과거의 비리가 많이 시정되었으나 언론계의 자정노력은 큰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셋째,언론은 지면을 배가함으로써 전달하는 정보의 양적규모를 확대하는 것처럼보이지만 증가된 지면의 반이상을 스포츠·연예오락·광고가 차지하고 있다.균형잃은 지면배정은 국민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정보와 기본권에 관계된 정보는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넷째,과당경쟁으로 인한 센세이셔널리즘,인권및 프라이버시침해등의 사례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끝으로 발행의 자유가 허용되었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새로운 매체가 기존매체와 경쟁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다.기존매체는 자율화이전에 이미 대기업화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매체는 기존매체에 비해 모든면에서 불리한 입장에 놓여있어 여론의 획일화현상을 심화시킬 우려도 있다.
  • 1원·5원짜리 동전 발행 중단된다

    ◎한은 “재고량 2∼10년간 사용 충분”/거의 유통안돼… 단추·목걸이로 쓰여 1원과 5원짜리 동전발행이 중단된다. 한국은행은 20일 시중에 유통중인 6종의 주화가운데 1원 및 5원짜리 동전제조를 잠정중단했다고 밝혔다. 한은은 1원과 5원짜리 동전이 거의 통용되지 않는데다 지난해 5백만개와 4백만개를 각각 발행,앞으로 새로 찍어내지 않아도 1원짜리는 2년,5원짜리는 10년동안 사용할 수 있는 재고량이 한은창고에 쌓여있기 때문이라고 발행중단이유를 설명했다. 지난 62년 화폐개혁 때부터 발행된 1원·5원짜리 동전은 지금까지 각각 총5억개,3억개가량이 나왔으며 많을 때는 한해 2천5백만개(82년)가 신규발행되기도 했다. 제작비용이 액면가치보다 훨씬 많이 드는 1원과 5원짜리 동전은 최근들어 통용이 거의 되지 않자 단추나 목걸이,심지어는 베갯속 등으로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은관계자는 『1원과 5원짜리 동전이 거의 통용되지 않고 있으나 화폐질서의 근간인데다 계산을 하는 기초단위이기 때문에 폐기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한편 지난해 신규발행 화폐액은 9조1천여억원으로 이들의 발행비용만도 7백70억원이 들었으며 폐기화폐액은 3조원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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