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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발보다 상표·기술도입이 돈벌이 쉬워/로열티 지급액 급증에 우려

    ◎“첨단기술 투자 경쟁국보다 소홀” 반증/원본기술 개발로 국제경쟁력 높여야/정부,세제혜택·각종 지원금 등 대책 강구 국제수지를 악화시키는 주범 중 하나가 국내 업계의 로열티(기술대가)지급이다.로열티 지급액이 해마다 급증하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국내 업계가 세계화(Globalization)전략을 구사한다는 명분 아래 선진국으로부터 기술도입을 크게 늘리고 있는 반면 기술개발 분야에 대한 투자는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고 있는 점이 맞물려 있다. 국내 업계가 선진국으로부터 도입하는 기술은 반도체 등의 첨단분야가 주종을 이룬다.재경원 분석에 따르면 62년부터 지난 해 11월까지 국내 업계가 지불한 총 로열티 중 전기·전자 분야가 전체의 43.8%나 차지했다.재경원 관계자는 『국내 굴지의 전자업계의 경우 연간 반도체 분야에서 치르는 로열티가 수억달러나 된다』며 『기업이 생존전략으로 이같은 투자성 지출을 불가피하게 늘려야 하는 면도 있지만 이것이 국제수지 악화를 가져오고 있다는 데 정부의 고민이 있다』고 말했다. 재경원은 국내 업계가 무턱대고 외국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하려는 경향은 하루빨리 고쳐져야 한다고 지적한다.재경원 관계자는 『공익 차원에서는 불필요한 사치성 기술을 도입하는 경우도 많다』며 『물론 국내에 수요가 있기 때문이며 기술을 도입하지 않을 경우 외국제품을 수입해야 하는 모순이 있기는 하나 장삿속만을 챙기려는 기업의 관행도 이제는 고쳐져야 할 때가 됐다』고 지적했다.이는 역으로 국내 업계의 기술개발 투자가 미흡하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다. 재경원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경우 국내 총생산(GDP)대비 기술개발 투자비 비율은 91년에 1.83%였다.그러나 같은 해 선진국의 경우 미국은 2.72%,일본 3.08%,독일 2.81%로 우리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보였다. 기술개발 투자비는 91년의 경우 우리나라는 32억달러에 그친 반면 미국은 1천5백43억5천만달러,일본 9백3억3천만달러,독일 4백18억달러였다.91년 당시 국내 업계가 치른 로열티는 11억8천3백70만달러로 전체 기술개발 투자비의 3분의 1 가까이나 된다. 이와 관련,재경원 관계자는 『국내 업계 중에는 일본 등의 선진국에서 이미 4∼5년 전에 생산을 중단한 제품의 기술을 비싼 로열티를 치르고 도입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며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기술도입에 대한 각종 규제를 완화하는 것을 국내 업계가 안이하게 생각해 기술개발에 대한 투자를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경원은 무역외 수지가 악화되는 가장 큰 요인이 로열티 및 광고 선전비로 대표되는 기타 용역수지에 있다는 점을 중시,대응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중이다.구체적인 대안은 마련하지 않았지만 기술개발 투자에 대한 세제지원 및 기술개발 관련 각종 지원금을 늘리는 방안이 강구되고 있다. 기술개발에 대한 정부의 효율적인 지원 및 업계의 기술개발에 대한 의욕이 함께 제고돼야 할 시점이다.〈오승호 기자〉
  • 로열티 지급액 100억 달러 돌파/작년 11월까지 총109억달러

    ◎미 49%·일 32% 차지/재경원,무역외 적자 개선대책 마련 착수 외국으로부터 각종 기술을 도입한 뒤 그 대가로 치르는 로열티 지급액이 처음으로 1백억달러를 넘어섰다.이같은 로열티 지급액은 정부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의 가입을 원활히 하기 위해 외국인 투자개방 업종을 대폭 확대키로 함에 따라 국내 업체와의 합작 등으로 인해 급증할 것으로 보여 무역외 수지 적자액도 확대될 전망이다. 14일 재정경제원이 분석한 로열티 지급현황에 따르면 외자도입법에 의해 우리나라가 로열티를 지급하기 시작한 지난 62년 이후 지난해 11월까지 치른 총 로열티는 1백9억3천3백70만달러로 집계됐다.지난 94년까지는 로열티 지급 총액이 91억8천2백만달러였다. 나라별로는 미국이 전체의 49.4%(53억4천9백만달러)를 차지해 가장 많았고,일본(32.3%) 독일(4.3%) 프랑스(3.5%)등의 순이었다. 업종별로는 전기·전자가 43.8%(47억9천2백만달러)로 최고치를 보였으며 그 다음은 기계(20%) 정유·화학(13.9%)전력(6.8%) 조선 및 화학섬유 (각 2%)등의 순이다.이밖에 금속과 요업·시멘트 각 1.7%,통신 1.6%,식품 1.1%,농업·축산 0.2% 등이었다. 연도별로는 지난해(1∼11월)의 경우 17억5천만달러로 94년 같은 기간에 비해 74.3%(7억4천6백60만달러)나 늘어났다.이같은 증가율은 62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로열티 지급액은 지난 92년에는 28.1%가 감소했었다. 재경원 관계자는 『외국인 투자개방 확대 등으로 외국인의 국내 투자가 대형화되는 등 국내 업체와의 합작투자 등으로 인해 로열티 지급액도 증가 추세』라며 『로열티 및 여행수지 등에 따른 무역외 수지 적자를 개선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중』이라고 밝혔다.〈오승호 기자〉
  • 수명다한 원자로 해체작업 첫 실시/원자력연

    ◎연구로 1·2호기 99년까지 수명이 다한 원자로를 해체하는 폐로 작업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실시된다. 한국원자로연구소는 11일 국내 최초의 원자로인 연구로 1호기(트리가마크 2)와 국내 두번째 원자로인 연구로 2호기(트리가마크3)를 97년 초부터 99년말까지 3년동안 완전 폐로키로 했다고 밝혔다. 계획에 따르면 열출력 2백50로 1962년부터 가동하기 시작했던 1호기는 99년 말까지 방사능 오염제거작업(제염)을 한후 역사적 가치를 살려 영구기념관으로 보존하기로 했고 열출력 2천인 2호기는 97년초부터 99년말까지 3년동안 완전 제염후 해체 철거하기로 했다.1호기는 지난 95년 1월부터,2호기는 95년 12월 말부터 가동이 정지된 상태였다. 연구소측은 『폐로작업 자체도 중요한 원자력 기술』이라고 밝히고 『이번 작업을 통해 관련 기술을 축적,국내 원자력 시설의 노후화에 대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원자로의 주요 폐로 기술로는 오염제거,방사성폐기물 처리처분,방사선관리,불필요한 건물의 철거등 여러분야가 있다.또한 원자로의 폐로 방법은 밀폐관리,차폐격리,해체 철거의 세가지 방식이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원자로를 정지시킨후 5∼10년동안 밀폐 관리하고 해체 철거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신연숙 기자〉
  • 기미년 「서울역 만세시위」 주도/이달의 독립운동가 신익희 선생

    ◎서울신문·보훈처·독립기념관 선정/3·1운동 전국확산 계기… 일에 쫓겨 망명/임정 수립·만주 「대일전선동맹」 결성 주역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은 2일 해공 신익희 선생(1894∼1956)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총장과 임시의정원 부의장을 지내면서 항일독립투쟁을 펼치고 광복후에는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1894년 6월9일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 한학을 수학한 뒤 13살때인 1908년 상경,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했다.일제로부터 국권을 되찾고 민족적 수모를 설욕하는 방법은 서구의 진보한 문명을 받아들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영어과를 택했다. 선생은 조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1910년 졸업했다.극일의 심정으로 일본유학을 단행,1912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에서 수학하고 귀국,중동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윌슨 미국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한 1918년 림규·송진우·최남선 등과 독립운동을 밀의한다.3·1운동을 지켜본 선생은 3월5일 서울역 앞에서 만세시위를 추진한다.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면서 일경에 쫓기는 몸이 돼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선생은 상해에서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을 추진하고 같은 해 4월13일 임정수립을 대내외에 공포하는 한편 대한민국을 민주공화제로 하는 10개항의 임시헌장도 선포한다. 임정의 조각이 이루어지자 선생은 초대 내무차장 겸 내무총장대리로 선임되어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대리로 부임한 안창호를 도와 임정의 국내 행정조직인 「연통제」를 창안,실시하게 된다. 임정 법무총장·외교부장을 두루 역임한 선생은 한국청년 5백명을 모집,군사행동을 위한 유격대성격의 「분용대」도 편성하는 등 한·중 합작에 의한 대일항전을 역설했다.한국혁명당을 창당한 선생은 만주사변과 상해사변을 도발하며 중국침략을 노골화한 일본에 맞서 모든 독립운동단체와 정당이 결속할 것을 주장,「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그러나 가맹단체간 협의기관인 이 동맹은 결속력과 통제력에 한계를 드러내 1935년 남경 금릉대학에서 민족통일전선의 원칙아래 신한독립당·의열단·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 등 5당 통합을 이뤄낸다. 선생은 조선의용대 병력이 모여 있는 낙양으로 가서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연합,무장투쟁노선의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의 결성을 주도했으며 1941년에는 한·중합작으로 한·중문화협회를 조직한 뒤 다시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된다. 1943년 4월 임정 선전부의 선전위원회에서 조소앙·유림 등과 활동하면서 대한민국의 선전계획수립과 실행에 이바지했다.1944년 5월 임정의 연립내각성립 때 내무부장에 선임되어 활약하다가 중경에서 광복을 맞는다. 광복이후 선생은 1945년 12월2일 임정요인의 2차환국 때 자주적 민족국가건설의 희망을 안고 귀국하지만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김구주석을 도와 반탁운동을 선도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선생은 1946년 국민대학을 설립,민족국가건설의 동량을 육성하는 한편 「자유신문」을 발행,민족 자주성을 길러나가는 데 일조했다. 1948년 5월 제헌의원선거때 경기 광주에서 출마,당선됐고 이승만의 후임으로 국회의장에 선출되어 활약하면서 대한민국건국에 크게 공헌하게 된다.1956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으나 5월5일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사했다.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황성기 기자〉
  • 부모중 한명이 한국인이면 자녀는 우리국적 취득 가능

    ◎국적법 「양계혈통주의」로 고친다/한국인과 결혼한 외국여성 2∼3년 체류해야 국적 허용/올 정기국회서 개정안 처리 국적법이 바뀐다.부모 중 어느 누구라도 우리나라 국민이면 그 자녀가 우리 국적을 가질 수 있게 된다.지금은 아버지가 우리 국민일 때만 가능하다. 외국 여성이 우리나라 남자와 결혼하더라도 일정 기간 동안 계속 체류하지 않으면 국적을 취득할 수 없다.위장결혼의 폐해를 막기 위해서이다.2중 국적은 지금처럼 허용하지 않는다. 법무부는 29일 부계 혈통주의를 채택한 현 국적법을 모계 혈통주의도 인정하는 양계 혈통주의로 개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국적법은 지난 48년 제정된 이래 62년·63년·76년 등 세 차례에 걸쳐 부분 개정됐으나 이번에는 「국민의 기본요건」을 대상으로 한 전면 개정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법무부는 지난 해 12월 「국적법 개정 특별분과 위원회」를 발족,지난 13일까지 이미 세차례 회의를 갖고 개정의 방향과 내용에 대해 대체적으로 의견을 모았다.오는 8월까지 개정안을 확정,정기국회를 거쳐 내년부터 시행할 계획이다. 위원회에는 판사·검사·변호사·교수·내무부 및 외무부 간부 등 9명이 참여하고 있다. 개정안의 초안은 현행 법 제 1조1항의 「출생 당시에 아버지가 대한민국의 국민인 사람」이라는 내용을 「출생 당시 아버지 또는 어머니가 대한민국 국민인 사람」으로 바꿨다. 예컨대 외국인과 결혼해 외국에 거주하며 국적을 지닌 한국 여자의 경우 그 자식도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고,어머니의 성을 따 호적에 올릴 수 있다. 한편 5년 이상 계속 국내에 거주한 외국인에게 귀화의 자격을 주도록 규정한 제 5조1항의 자격기준은 「2∼3년 계속 거주」로 완화할 것으로 알려졌다.미국처럼 우리나라 남자와 결혼하더라도 2∼3년 동안 결혼생활을 계속해야 국적을 허용한다는 것이다.〈박홍기 기자〉 ◎해설/48년만에 국적법상 남녀평등 구현/재외국민 범위 확대… 적국 보호의지 지난 48년 제정된 국적법의 기본 틀이 38년만에 바뀐다. 지난 62년 이후 세차례에 걸쳐 부분적으로 개정됐지만 부계 혈통주의라는 「뼈대」는 한번도 건드리지 않았다.「남성 우위」의 전통적 유교사상이 절대적으로 지배했기 때문이다. 개정의 배경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책임을 남자와 똑같이 인정하겠다는 인권평등 사상이다.자녀에 대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과 권리에 차이가 없다는 진취적 방향이다. 재외 국민을 보다 적극적으로 보호하려는 의미도 있다.국적법이 개정되면 외국 남자와 결혼한 여성의 자녀도,그 어머니가 우리 국민이면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한민족의 피가 반만 섞이면 모두 우리 국민이 될 수 있다. 부계뿐 아니라 모계 혈통주의를 인정하는 것은 세계적 추세다.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오래 전에 양계 혈통주의를 채택했다.일본도 지난 64년 「출생시 아버지 또는 어머니가 일본 국민일 때」 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했다. 그동안 세계 인권단체나 국내 여성단체들은 우리 정부에 모계 혈통주의를 인정하라고 끈질기게 요구해 왔다.우리나라를 남녀평등의 정신에 어긋나는 「남존여비」 사상의 표본국가라고 비난해 왔다. 반면 개정되는 국적법에서는 외국인의 대한민국 국적 취득이 보다까다롭고 엄격해진다. 현행 법은 결혼·인지·귀화 등으로 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개정안에서는 인지와 귀화의 요건은 그대로 두고,결혼 요건은 강화한다.인지는 외국인과 자녀를 낳은 뒤 결혼할 경우 그 자녀에게 우리 국적을 허용하는 것을 뜻한다. 결혼 요건을 강화하려는 것은 무분별한 국적취득을 막기 위해서다.따라서 한국 남자와 결혼한 외국 여자는 일정 기간 동안 결혼생활을 계속해야 우리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미국 방식과 똑같다. 지금은 외국인 여자가 내국인과 결혼한 뒤 6개월 안에 본 국적을 포기하면 모두 대한민국 국적을 허용한다.중국 교포 여성들의 위장결혼이 늘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박홍기 기자〉
  • 복권의 함정(외언내언)

    복권발행기관들의 당첨금과 보너스선전에 함정이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와 주목을 끈다.소비자보호원의 조사결과 시중에 유통중인 체육·찬스·기술등 「즉석식 복권」이 당첨금을 과다하게 선전하거나 보너스상품을 애매하게 표시,사행심을 조장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복권은 애초부터 사행심과 깊은 함수관계를 갖고 있지만 당첨금을 과다하게 선전하는 이른바 「미끼광고」까지 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복권은 사행심조장 우려가 있지만 정부예산으로 재원조달이 어렵거나 특별한 목적을 위해 부득이 발행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행된 복권은 지난 47년 런던올림픽 참가경비조달을 위한 체육복권이다.이 복권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한시적으로 발행된 복권의 효시이기도 하다.그후 49년 구호자금마련을 위한 후생복권,56년 애국복권이 발행된 바 있다.또 62년부터 5차례에 걸쳐 개최된 박람회경비조달을 위해 복권이 발행되기도 했다. 복권이 매주 주기적으로 발행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69년9월부터다.국민주택기금조성을 위해 주택복권이 탄생한 것이다.그후 각종 명목으로 복권이 발행되어 현재는 7개 기관에서 무려 11종의 복권이 발행되고 있다.95년도 복권발행총액은 무려 4천1백70억원에 달한다.장수로 13억3천만장으로 국민 한사람당 30장(1만5천원)꼴로 발행된 셈이다. 이번에 문제가 되고 있는 즉석복권들은 2장을 한세트로 발행하고 있는데 최고당첨금을 2천만원이라고 광고,마치 1장당 당첨금이 2천만원인 것으로 오인토록 돼 있다는 것이다.찬스복권은 「2배 더블」이라고 표시,1등으로 당첨될 경우 2천만원을 탈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당첨금이 1천원과 5천원일 경우에만 「2배 더블」이 적용되고 있다. 당첨금 이외에 보너스로 행운상 등 다양한 부상을 제공하고 있으나 상품명을 정확하게 기재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복권발행기관들은 시장확보를 위한 과대광고를 즉각 중단하기 바란다.〈최택만 논설위원〉
  • 시인 고은/내 기질 꽃피울 곳은 역시 예술(작가를 찾아:5)

    ◎미학으로서의 역사를 미는 나는 정치적 유미주의자/중학 하교길 한하운 시집 주워 읽고 시인 꿈꿔/시집 「만인보」는 고달픈 민중의 삶 기록/통일이 특정세력의 구호였던 시대 끝나 인간을 하나의 소우주라고들 하지만 이 우주라는 비유가 고은(63) 시인에게서 처럼 걸맞는 대상을 만난 경우도 드물다. 어떤 자리에서든 한번이라도 고은과 마주앉아 봤다면,더욱이 그와 술잔이라도 기울여본 이라면 잘 알 것이다.빨아들일듯 이글대다가도 금세 세상잡사를 초개로 돌려버리듯 표연히 돌아앉는 눈초리와 넘실대는 거대한 에너지의 엄청난 감염성을. 시인으로서 그의 생산력은 초신성 터지듯 폭발적이다.그런가하면 블랙홀처럼 바닥을 알 수 없는 허무의식은 젊은시절 그를 잇단 자살기도로 몰아대기도 했다. 그의 세계에서 세인들이 갈라놓은 선악개념은 빛이 바랜다.인간적 가치를 넘어선 곳에서 우주가 불규칙적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듯 그의 내부에서도 늘 낡은 관념에 묶인 자아에 대한 사살이 일어나고 번번이 새 생명이 돋는다.그는 진흙위에서만 화려하게피어나는 연꽃의 미덕을 안다. 어느 때는 천진,제멋대로인 소년이다가 어느 때는 선승의 도통으로 속세를 내려다보는 예술가.민주화의 물결을 앞에서 끌며 감옥을 제집 드나들듯한 이상주의자인가 하면 어느 순간 무정하리만치 매서운 현실분석으로 돌변하는 정치사상가. 이 종잡을 수 없는 카오스 자체이며 마르지 않는 글샘 고은이 최근 왠지 침묵을 지키고 있다.1년에 열권의 책을 쉽게 쏟아내던 그가 새책을 내놓지 않은지 어느새 반년. 『이제는 숨도 좀 돌리고 정리를 해가며 쓰려고요.하루 1백60장까지 쓰던 때도 있었지만 요즘은 많아야 50장이면 족합니다.오래 발효시켜 올 하반기쯤 큰 글을 하나 낼 계획입니다.「만인보」10∼12권도 이때쯤 나올겁니다』 젊은날 시인이 불교며 동양사상에서 받은 세례는 현실문제가 다급했던 80년대 내내 잠복해있다가 근작에 일제히 분출됐다.「화엄경」「선」「뭐냐」 등 소설과 선시집으로 오묘하며 허허로운 도의 세계를 빚어냈던 그는 다음 작품에서도 이를 더욱 파들어가보겠다고 한다. 『동양사상은 서구에서도대접받기 시작한지 오랩니다.보르헤스도 불교에 심취했었고 옥타비오 파스도 노장의 영향을 받았다지 않습니까.미국의 신과학주의 같은 것도 그렇고….종속이론이며 제3세계의 많은 저항적 정치이념이 사양길을 걷는 때에 그 정신문화는 오히려 주목받는다는 사실이 흥미롭지 않습니까.이것은 제1,2세계 문학이 퇴색했으니 동양사상이 다시 떠올라야 한다는 식의 대항개념은 아니라고 생각해요.나는 서구의 것까지 껴안아 넘어서는 더 넓은 대안의 문학을 제시해보고 싶은 겁니다』 진보·저항문인의 대표적 단체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창립했고 그 후신인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까지 지냈던 그로서는 90년대 한국 정치상황의 급변을 매번 눈을 씻고 다시 보아왔다. 『이번 총선 때도 보세요.과거 민주화운동을 같이했던 동지와 후배들이 무소속,민주당,국민회의,신한국당까지 뿔뿔이 흩어져 나왔더군요.과거엔 짐작이나 했던 일입니까.몹쓸 선거역병들이 여전히 들끓었지만 나는 크게 보아 발전이고 적어도 발전을 향해 가고 있다고 봐요.몸살을 실컷 치르고 나면 우리 시민사회가 성큼 무르익겠지요』 그는 우스개삼아 『사실 정치라면 내가 누구보다 기질이 있다』고 덧붙인다. 『정치적 아이디어 풍부하지 선동력,토론능력,싸움꾼 근성까지 어느 출마자에 뒤지지 않지요.하지만 이게 직업정치에만 필요한게 아닙니다.민주주의를 꿈꾸고 독재의 모순과 맞섰던 정치적 인간으로서 나는 더욱 떳떳하니까요.본질적으로 내 기질을 꽃피울 곳은 누가 뭐래도 예술이겠고요』 중학 3학년 때 한시간을 넘게 걸어다녔던 하교길에서 우연히 한하운 시집을 주워 읽은뒤 시인을 꿈꾸기 시작한 그에게 예술혼이란 말은 숙명과도 같은 울림을 띤다.그래서인지 『나는 앎의 궁극목표가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과학으로서의 역사 보다 미학으로서의 역사를 믿는다.나는 정치적 유미주의자다』라는,다른 사람이 했으면 엉뚱했을 호언조차 자연스럽게 들린다. 지난 83년 결혼과 함께 들어앉은 경기도 안성군 대림동산 장미골 집에서 그는 13년째 살고 있다.이곳 2층에 차려진 거대한 서재에서의 세월은 계절병처럼 찾아든 몇번의 구속을 빼곤 생애 처음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문학과의 밀월을 흠뻑 즐긴 기간이었다.이 시절에 그는 고달픈 민중삶에 대한 거대기록인 시집 「만인보」를 쓰기 시작했고 네권짜리 장시집 「백두산」을 맺었다.나이 쉰둘에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딸도 얻었다. 눈앞에 펼쳐진 산맥에서 이름을 딴 그 딸 차령이가 어느덧 국민학교 5학년.자라나는 자식을 보며 노시인은 누구보다 간절히 풍요로운 미래를 꿈꾼다.그때마다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화두는 통일이다. 『통일이 민주화운동 세력들만의 구호이던 시대는 지났지요.이제는 어느 편도 통일이 보편적 염원이라는 것을 부정하진 않아요.저마다 나름의 통일방안을 내세우는 이도 많지만 통일이 어찌 이뤄질지야 운명만이 아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때를 대비해 민족의 자기동일성을 이뤄나가는 일이에요.저토록 폐쇄적이고 모든 면에서 뒤떨어진 북한을 그대로 두고 통일이 된다 해도 얼마나 문제가 많겠습니까.북한에 대한 창조적 비판과 민족애로 굳고 맺힌데를 풀어줘야 합니다.이들에게도 통일을 준비시켜야 해요.이런 저런 이유로 통일은 한 20년쯤 걸리지 않겠습니까.나는 그때까진 살 작정이요』〈손정숙 기자〉 □연보 ▲1933년 전북 옥구군 용둔부락(현 군산시 미룡동)에서 고근식·최점례의 3남중 장남으로 출생.본명 고은태 ▲군산중학교 수석입학(47년) ▲전쟁의 참혹상에 충격받고 두차례 자살시도.이 와중에 한쪽 고막이 녹아버림.혜초승려를 만나 출가(50∼51년).법명 일초(52년) ▲조지훈의 천거로 「현대시」에 시 「폐결핵」발표.「현대문학」에 서정주의 단회추천으로 등단(58년) ▲첫시집 「피안감성」발표(60년) 환속(62년) ▲시집 「문의마을에 가서」(74년)「조국의 별」(84년)「네 눈동자」(88년)「만인보」9권(86∼89년) 장시집 「백두산」4권(87∼91년) ▲「이중섭 평전」(73년)「이상평전」(74년)「한용운평전」(75년) ▲기타 소설집·평론집·산문집 등 저서 1백여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초대 대표간사(74년)국민연합 부위원장(79년) 한국민예총 공동의장(89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90∼91년) ▲83년 함석헌 주례로 이상화(이상화·중대교수)와 결혼 ▲제3회 만해문학상(88년) 등 수상
  • 법정관리(외언내언)

    법정관리중인 서주산업(법정관리인 이상용)이 법원 모르게 불법어음을 발행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제도의 문제점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법정관리란 기업이 「재정적 궁핍」으로 파탄에 처해 있으나 회생가능성이 보일 경우에 한해서 법원이 내리는 특별조치다.법정관리기업이 되면 부도를 낸 기업주의 형사처벌이 면제되고 부채상환이 10년동안 동결되며,세금도 감면된다.법정관리는 경제개발과정에서 기업을 하나라도 살려 근로자의 실업을 막고 하청업체의 도산을 방지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다. 지난 62년 도입된 법정관리는 부도를 낸 기업에 대한 일종의 특혜조치에 해당된다.그같은 특혜문제로 인해 부실기업주들이 이를 악용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때문에 법정관리문제에 대해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실제로 법정관리에 들어간 기업중 중도에 부도를 낸 기업이 있는가 하면 서주산업과 같이 불법어음을 발행하는 사례마저 있다. 의류업체인 논노의 경우 지난 93월 법정관리에 들어간지 3년만인 지난해 11월 또다시 부도를 낸 바 있다.증시에 상장된 기업 가운데 법정관리에 들어간 기업도 있다.한국벨트는 92년 서울민사지법에서 법정관리 신청을 기각당한 후 2심인 고등법원에서 법정관리허가를 받았으나 법정관리가 개시된 뒤에도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가전기기 생산업체인 흥양은 법정관리를 받은 후 매출은 증가하고 있지만 좀처럼 수지개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물론 법정관리가 「성공작」이었다는 평가를 듣는 기업도 있다.보루네오가구는 92년 3월 법정관리에 들어간 다음해부터 경상이익을 실현하는 혁신적인 경영을 하고 있다.보루네오가구는 법정관리제도의 취지를 제대로 살리고 있는 기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법정관리기업은 이 제도의 본래 취지인 기업회생보다는 채무동결 등 특혜만을 노리고 있다.그러므로 법원은 「회생이 가능한 명백한 기업」에 대해서만 법정관리를 허가하고 법정관리인도 엄격한 자격기준을 거쳐 선정해야 할 것이다.〈최택만 논설위원〉
  • 전 총무처장관 최창윤씨 별세

    전 총무처장관 최창윤 국제교류재단이사장이 30일 상오7시20분쯤 서울 삼성의료원에서 지병으로 숨졌다.향년 57세. 고인은 지난 62년 육사를 졸업(18기)한 뒤 육군사관학교와 국방대학원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83년 준장으로 예편했으며 서울대와 미 하와이대에서 수학,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5공화국 출범당시 국보위 외무분과위원으로 참여한 뒤 청와대 정무비서관으로 관계에 진출,6공들어 대통령 정무수석비서관과 공보처 장관을 지냈다. 김영삼 대통령이 민자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된 이후 총재비서실장으로 발탁돼 보좌했으며 문민정부 첫 총무처장관을 거쳐 95년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으로 일해왔다. 유족으로는 부인 주인숙씨(51·의사)와 딸 윤희(28)·주희씨(27),막내아들 현진씨(19·경희대1년)가 있다. 발인은 3일 상오9시 삼성의료원,장지는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묘지. 연락처 교류재단 757­3463∼5,삼성의료원 3410­0469
  • 이훈평씨 야당 34년만에 전국구 배정(오늘의 인물)

    국민회의의 이훈평 유세위부위원장(54).야당가에선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불릴 만큼 마당발이다.걸쭉한 입담으로 야당가의 비화를 얘기하면 웃지않고 배겨날 사람이 없다.서울 여의도 중앙당사 3층 출입기자실은 그의 주요 「출입처」.하루도 거르지 않고 들른다. 그가 이번에 전국구 16번을 배정받았다.지난 62년 어느날,재경목포동우회를 만들기 위해 당시 초선의원이던 김대중총재를 만나면서부터 야당판에 뛰어들었으니까 꼭 34년만에 「턱걸이 번호」에 안착한 것이다. 이부위원장은 목포상고 38회 졸업생이다.김총재(22회),권노갑 선대위상근부위원장(27회)의 「새카만」 후배로 권부위원장이 김총재의 분신이라면 이훈평은 「리틀(작은)권」인 셈이다.〈양승현 기자〉
  • “인구 2020년 정점 점차 감소”/한국보사연 인구정책세미나

    ◎2010년­남·여성비 1.28대 1로 불균형 심화/노동인력 15만명 모자라… “자갈 높여야” 우리나라 인구는 오는 2020년의 5천59만명을 정점으로 점차 감소하며 남녀 성비의 불균형도 점점 심화된다.낮은 출산율 때문에 2010년에는 15만명,2020년에는 1백만명의 노동력이 모자라게 된다. 19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주최한 인구정책 세미나에서 이 연구원의 홍문식 선임 연구위원은 「저출산 시대의 인구정책 방향」을 통해 인구 문제 및 새로운 인구정책 방향을 제시했다. 여아 1백명당 남아의 비율인 출생성비는 갈수록 급상승한다.성감별에 따른 선택적인 임신중절 때문이다.성비는 지난 83년 1백7에서 86년 1백12,94년 1백16으로 높아졌다. 출산순위에 따라 성비는 더욱 높아진다.94년의 경우 첫째 아이는 1백6.1이었으나 둘째는 1백14.3,세째아이는 2백5.9였다.세번째 아이는 3명 중 2명이 남자인 셈이다. 멀지않아 여자를 못 구해 결혼을 못하고 평생을 홀로 늙는 남자가 늘어나게 된다.2000년의 결혼 적령기 남자(25∼29세)는 2백26만3천명,여자(20∼24세)는 1백89만6천명으로 전망됐다.적령기의 성비가 1백19.4가 되는 셈이다.2010년에는 1백28.6으로 높아진다. 인구구조 전망과 신경제 구상의 노동인력 전망에 따르면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2010년에는 2천5백99만여명의 산업인력이 필요하다.그러나 공급은 2천5백84만여명에 그쳐,15만여명이 모자란다.부족인력이 2020년에는 1백만명으로 늘어난다.현재 겪고 있는 인력부족 현상이 더욱 심화되는 것이다. 지난 62년부터 시작한 가족계획 사업에 힘입어 가임여성 1인당 출생아의 수인 합계출산율은 지난 60년 6.0에서 93년엔 1.75로 낮아졌다. 2010년의 인구성장률은 0.37%로 총인구가 4천9백68만명이 되며,2020년의 5천59만명을 정점으로 인구가 줄어든다.노인인구의 비율은 60년 2.9%에서 90년 5%,2021년에는 13.1%로 높아진다. 홍박사는 앞으로의 인구정책은 출산억제보다는 인구의 자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조명환 기자〉
  • JP 「독도발언」/박정희 의장 「거론 금지」 훈령 “위반”

    ◎62년 지전수상에게 “독도 폭파해버릴까” 제의/일측 집요한 거론에 JP “제3국이 중재” 양보 일본은 지난 52년 한·일회담이 개시된 이후부터 줄곧 독도영유권을 주장했다.일본은 회담의 고비마다 독도영유권문제를 카드로 사용했지만,진심으로 독도의 영유권을 확보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인가는 명백하지 않다. 62년9월3일 제6차 한·일회담 2차정치회담 예비절충 4차회의 회의록에 따르면 일본측 대표인 이세키 국장은 『사실상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다.크기는 「히비야」공원 정도인데,폭발이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구권협상 때문에 좀처럼 실마리가 잡히지 않던 한·일회담을 타결시키기 위해 62년10월20일과 11월12일 두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김종필 중앙정보부장(현자민련총재)과 오히라 마사요시(대평정방)외상간의 회담에서도 바로 이 독도문제가 거론됐다. 지금까지 공개된 회의자료등에 따르면 10월20일 1차회담에서 오히라는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데 한국이 응해달라』고 요청했다.이에 대해김부장은 『독도문제는 한·일회담과는 별개이므로 국교정상화후 시간을 갖고 해결하자』고 말한 것으로 알려진다.일부에서는 이날 회담에서 오히라의 국제사법재판소 제소요청에 대해 김부장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아 오히라는 김부장이 양해한 것으로 해석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독도문제가 부각되자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은 62년11월8일 긴급훈령을 통해 『일본측에 독도문제는 한·일회담의 현안이 아니라고 지적하고,일측이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한국민에게 일본의 대한침략을 상기시킴으로써 회담의 분위기를 경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지적하라』고 지시했다. 11월12일 재개된 김·오히라의 2차회담에서도 독도문제가 협의됐다.오히라외상은 독도의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집요하게 요청했다.김부장은 이에 대해 제3국 중재안을 역제안한 것으로 알려진다. 김부장은 또 이에 앞서 11월11일 도쿄 오쿠보호텔에서 일본 교도통신과 회견하는 자리에서 『이케다(지전)총리와의 회담시 「독도를 폭파해버릴까」하니 지전총리는 「그러면 더욱 큰 문제로 된다」고 하면서 크게 웃은 바 있다』고 말했다. 김부장이 3국 조정안을 거론한 사실은 이후 양국 실무자간의 회의내용에서 확인된다. 62년11월19일 한·일회담 제2차 정치회담 예비절충 15차회의 회의록에 따르면,일본의 우시로쿠 국장은 『이 자리에서 당장 토의할 수 있는 문제는 청구권 명목과 독도문제를 제3국 조정에 넘기는 문제인데,독도문제는 일본정부가 국회등에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겠다고 말해온 터이므로 이케다 총리의 결정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이에 대해 우리측은 『독도문제는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게 되면 승패가 명백하게 돼 모처럼 조성된 좋은 분위기가 깨질 염려가 있으므로,제3국에 의한 조정에 맡기자는 제의를 김부장이 하게된 것이며,이는 김부장의 최종적인 생각인 것』이라고 말했다.
  • 독도문제/JP에 “집중포화”

    ◎신한국당­이동원씨 관련없다면 유령이 다뤘나/민주당­「JP 청구권만 관여」 주장 거짓말 입증 독도 영유권 문제가 15대 총선의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른 가운데 자민련 김종필 총재가 지난 62년 한일회담에서 독도 영유권 문제를 확실하게 해놓지 않고,독도를 제3국 조정에 맡기자고 일본측에 제의했다는 자료가 발견됨에 따라 독도논쟁이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독도문제는 불과 26일 앞으로 다가온 선거판세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임이 분명하다.또 전 외무장관인 이동원 국민회의상임고문이 관련됨에 따라 4당 관계에 복잡한 파장을 드리우고 있다. 전날에 이어 신한국당의 김철대변인은 15일에도 『자민련의 김종필총재가 한일회담때 청구권 부분에만 관여했다고 하고 국민회의 이동원상임고문은 관련이 없다면 독도문제는 유령이 다뤘다는 것이냐』고 다그쳤다.이어 『야당은 두사람을 설득,진상과 책임소재를 밝히라』고 주장했다. 또 하나의 변수는 민주당.신한국당과 민주당이 김종필 총재의 명확한 해명과 정계은퇴를 강력히 요구하며 양당공조체제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민주당의 김찬호 선대위부대변인은 김총재가 한일회담에서 독도를 제3국 조정에 맡기자고 일본측에 제의한 것과 관련,『김총재는 청구권문제만 관여했다고 변명해 온 것이 거짓임이 입증됐다』면서 『김총재는 역사에 있어서도 당사자가 아니라 제3자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라고 주장했다. 전날의 자민련 김총재의 정계퇴진 요구에 연이은 이날 「대국민 사과」 등 신한국당의 공세는 그 강도로 볼 때 계속될 전망이다. 자민련의 이동복 대변인은 『당시 김총재는 청구권협상에만 관여했다』며 『김총재가 청구권협상에만 관여했다는 것은 당시 이동원 외무장관이 증언한 바 있다』고 수세적 대응으로 일관하면서도 국민회의측에 묘한 「손짓」을 보냈다.국민회의 윤호중 부대변인도 이전장관의 무관함을 강조하면서 오히려 현정부의 대일 외교역량에 초점을 맞추는 논평으로 대응했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이같은 상대 「약점」에 대한 침묵은 서로에 대한 비방전이 가열될 경우 여당만 이롭게 한다는 공통인식에 도달했기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독립운동가 양세봉 장군(압록강 2천리:27)

    ◎재만조선군 총사령… 20년대 항일전 주도/노구대전투 등 승리 이끌어… 군관학교도 설립/해방직후 평야서 유해모셔… 서울선 훈장 추서/조선족은 요령성 신빈현에 흉상 건립해 추모 요령성 신빈현 왕청문향 조선족학교 운동장에는 항일독립운동가 양세봉(1896∼1934년)장군의 석상이 서 있다.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생애를 마감한 그의 석상은 지난 1989년8월29일 낙성되었다.신빈현과 왕청문 지방정부,북경과 동북3성의 50여개 단체대표 5백여명이 낙성식에 참석했다.중국 인민대표대회 대표이자 중국인민해방군 전 40집단군 정위였던 정순주소장,중국 공안부 심계실장 서세명의 아들 서철 등 굵직굵직한 조선족 인사들이 나왔다. 장군의 동상은 중국 전역에 흩어져 사는 조선족의 모금으로 세워졌다는 점에서 큰 뜻을 지닌다.석상 건립을 발기한 사람은 신빈현문화관 전정혁(41)씨인데,그는 자전거를 타고 장군의 활동무대였던 옛 흥경땅 신빈현 일대를 모두 누볐다.석상건립을 제의하면서 장군의 항일운동사료도 함께 수집했다.그 결과 신빈현 당위원회 전 부서기 최선죽(63)선생 같은 조선족이 발벗고 나섰다.요령조선문신문,길림신문,국가민족사무위원회,연변대학,연변조선족사학회,흑룡강조선말방송,민족출판사가 후원을 자청했다. 조선족의 의견이 집약되자 공직에서 정년퇴직한 노년층 조선족이 주동이 되어 모금운동에 뛰어들었다.동북3성은 물론이려니와 북경 천진 등지를 메주 밟듯 누볐다.침대차 한번 타지않고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고 대합실 새우잠을 자기도 했다.신빈현 조선족문화관 전 관장 김순화 선생이 무순시 제1조선족중학교에서 양세봉장군의 독립투쟁업적을 강연하고 돌아온 이후 학생들이 2천8백87원을 모아 보냈다.중국 전역의 50여개 조선족단체와 1천4백여명의 개인들이 석상 건립비로 맡겨온 돈도 10만원에 달했다. ○3·1운동직후 독립군 투신 중국의 조선족 뿐 아니라 중국에 와 있는 한국인도 성금을 내놓았다.중국에 주재한 한국한화집단 북경판사처(대표 신영수)와 동북농업대학 초빙교사(교환교수)인 한국 사진작가 유은규선생과 그의 일본인 부인 도타이쿠코여사도 동참했다.그럭저럭 모두17만5천원이 모금되어 심양 노신미술학원 조각학부 주임 전금택선생에게 조각을 맡겼다.그래서 기단을 포함한 높이 5·4m의 양세봉장군 흉상이 제막되었던 것이다. 양세봉장군은 평안북도 철산 출신이다.서봉,윤봉이라고도 불렀는데 호는 벽해다.1919년 3·1운동 직후 평안북도 삭주 천마산을 근거로 한 천마산대 독립군에 첫발을 들여놓았다.다음해 압록강을 건너가 광복군총영을 거쳐 1923년 육군주만참의부에서 소대장과 중대장으로 활약했다.1929년 재만 각 단체가 통합하여 국민부를 조직했을 때는 국민부 소속 독립군 조선혁명군 제1중대장이 되었다.그리고 조선혁명군을 개편하여 총사령이 되어 일본군이 차지한 영릉가성과 흥경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그는 혁명군을 보충하기 위한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노구대전투와 쾌대모자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1932년 일본경찰의 밀정 박창해의 계략에 빠져 두도구에서 일본군에 포위되어 치열한 전투끝에 전사했다. 그의 부인과 자녀들은 해방이후 북한 당국이 평양으로 데려갔다.한국에서는 그의 빛나는 독립운동의 업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고 한다.장군의 직계 가족들은 평양으로 갔지만 동생 양시봉의 부인과 자녀들은 지금 요령성 청원현 북삼가촌에 살고 있다.양시봉의 부인이자 장군의 계수인 김화실(85)할머니는 시숙 양세봉의 행적을 어제 일이나 되는 것처럼 똑똑히 기억해냈다.열세살 나던 1924년에 양씨 가문으로 시집을 온 할머니는 아직도 총기가 대단했다. ○일 밀정 계략에 빠져 전사 『흥경 진코우츠로 시집을 왔디요.위로 시할머니와 시어머니에다 청춘과부가 된 시숙모가 아들 둘을 데리고 얹혀 삽데다.그리고 시숙 양세봉장군은 독립운동을 하느라 집에 계시지 않고 큰 형님만 함께 사셨디요.거기에 둘째 시숙 내외·시누이·우리 내외를 합해 열두 식솔이 우굴댔단 말입네다.강지주네 밭 닷새갈이를 소각했지만 입에 풀칠하기 바빴디요.그 잘난 살림에 독립군들이 시도 때도 없이 몰래 들락거렸으니 사는게 말이 아니었습네다』 양씨 일가의 집은 당시 독립군의 연락처이자 비밀숙박처였고,믿음직한 후방 기지였다.독립군이 묵는 날이면 없는 살림에 한 끼니라도 더 따뜻하게 대접할 요량을 대고 삼동서가 애를 썼다.맏시숙 양세봉은 모처럼 집을 찾을 때면 의레 걸레 같은 양말을 한짐씩 가지고 왔다.며칠을 몇밤을 새워 꼬매 다시 보내곤 했다.매년 겨울철에는 반입한 무기를 산골짝에 감추었다가 해동하면 독립군부대로 보내는 일도 양씨 일가가 맡았다. 그런 어느 날 양세봉이 느닷없이 집에 들렀다.만주 사변이 일어난 1932년 일이었는데,가족이 여러패로 나누어 빨리 피신하라고 재촉했다.양세봉이 편지를 써주어 청원현 소산성에 사는 이영준을 찾았다.그의 도움으로 소산성에 자리를 잡았으나 그해 양세봉장군은 전사했다.전사 소식을 들은 동생 양시봉은 명주 20자를 사가지고 흥경으로 가서 형의 시신을 고구려산성 기슭에 고이 묻었다.일본군이 장군의 아들을 인질로 잡으려고 또 눈에 쌍심지를 켜 양씨 일가는 40원에 소를 팔아 종손을 일본으로 빼돌렸다. ○일군 묘파고 시신 목잘라 고구려산성 기슭에 양세봉장군의 시신을 모셨을 당시 정황을 기억하는 노인한분이 아직도 생존해있다.신빈현 왕청문향 고려산촌의 김효순 할머니가 그분이다.독립운동가 김두선의 딸인데 아버지는 양세봉장군의 휘하에 있었다고 술회했다. 『나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독립군 연락을 자주 다녔디요.양세봉장군의 장례를 치르고 얼마 안되어 일본놈들이 들이닥치더구만.그놈들은 아버지를 나무에 매어놓고 장군의 묘소를 대라고 족쳤디요.아버지가 말을 듣지 않으니끼리 어머니한테도 매를 댔수다.결국은 알아내어 묘를 파서 장군의 시신을 끄잡아 냈습네다.기리고 아버지더러 도끼로 시신의 목을 치라고 다그칩데다.아버지는 막무가내를 댔디요.하는 수 없는지 놈들이 제손으로 목을 쳐서 보자기에 싸가지고 내려 가면서 아버지에게 총질을 했지 뭡네까.아버지도 비명에 돌아가셨디요』 양세 봉장군의 유해는 지금 고려촌 고려산성 기슭을 떠났다.해방 이후 북한에서 모시겠다고 파갔다.김효순 할머니 증언대로 두개골이 없는 유해였다고 한다.이제 양세봉 장군의 살아 생전 모습을 본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야 손가락 몇개를 꼽을정도가 되었다.얼마전 개주시 쌍천안촌에서 만났던 양세봉장군의 비서 박윤걸 노인도 이번 여행길에서는 만나지 못했다.그토록 출간을 기다렸던 「양세봉 장군 회고록」을 손에 쥐지 못한채 지난 91년 눈을 감았다는 것이다.
  • JP,62년 「오히라담판」때 “독도 제3국서 조정” 양보

    ◎한·일회담에 빌미로 잡혀 한일회담 흑막의 진원지인 62년 「김­오히라회담」에서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현 자민련총재)은 독도를 제3국 조정에 맡기자고 일본측에 제의했던 것으로 13일 확인됐다. 한일회담 회의록에 따르면 김부장은 두차례(62년 10월20일,11월12일)에 걸친 오히라 마사요시(대평정방·80년 작고) 일본 외상과의 정치담판에서 오히라가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통해 독도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한데 대해 제3국 조정안을 제시,일본측의 집요한 독도문제 제기에 물러서고 만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김­오히라 담판 이후 그 내용을 서로 대조하면서 후속 협상을 진행했던 양국 회담대표단간의 회의록 곳곳에서 반복돼 확인되고 있다. 이와관련,2차 김­오히라회담 4일후인 62년 11월16일 일본 외무성에서 열렸던 양국 회의록은 일본측이 청구권의 명목문제와 함께 『독도문제를 제3국조정에 넘기는 문제를 당장 토의하자』고 들고 나온데 대해 한국측은 『제3국 조정안이 김부장의 최종적인 생각』이라고 밝힌 것으로 나타나있다. 또 같은해 12월21일의 20차 회의록은 일본정부가 한일회담에 대한 기본입장을 설명한 문서를 제시한데 대해 『제3국에 의한 거중조정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을 줄로 생각한다』는 한국정부의 「타협안」이 그후의 양국 협상과정에서 일측의 빌미로 잡혔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같은 기록들은 김 자민련총재가 그동안 오히라와의 회담등 한일회담과정에서 청구권문제만 관여했었다고 밝혀온 것과 거리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부장의 3국 조정안 제시는 오히라와의 1차담판이 끝난 후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긴급훈령(62년 11월8일)을 통해 독도문제는 언급하지 말라고 김부장에게 지시했던 것과도 어긋나고 있다.
  • “정신대 문제 잘못 해결 JP 여권신장 걸림돌”(조약돌)

    ○…한국여성단체연합(공동대표 이미경·지은희·한명희)은 여성권익발전에 걸림돌이 된 정치인으로 「김총재」를 선정. 9일 한국여성개발원에서 열린 3·8세계여성의 날 기념대회에서 이를 발표한 여연은 『김총재가 62년 중앙정보부장 재직당시 김·오하라 메모를 교환했으며 이 메모를 기초로 65년 「한일간의 모든 문제를 완전히 해결된 것으로 한다」는 일본과의 청구권협정이 조인돼 정신대문제 해결에 결정적 걸림돌로 작용했다』고 선정이유를 밝혀 「김총재」가 자민련 김종필 총재임을 시사. 여연은 김총재 이외 나머지 걸림돌 4인과 디딤돌 5인을 지난 5일 발표한 바 있다.
  • 자민련 김종필 총재 관훈토론 문답

    ◎“「독도폭파」 발언 일에 못준다는 취지”/「캐스팅보트」 가능한 의석 확보 자신/무소불위 권력 갖는 대통령제 한계 자민련의 김종필 총재는 8일 저녁 관훈클럽 초청토론회에서 「독도폭파」발언과 「보수논쟁」 등 정국현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소상히 밝혔다. ­지난 62년 한·일회담 당시 독도를 폭파하겠다고 말했나. ▲「청구권」문제만 관여했다.독도문제는 일본측이 『한국영토라고 주장하면 양국간 논쟁이 될 것』이라고 먼저 꺼냈다.일본측에 줄 수 없다는 취지에서 농담조로 말한 것일 뿐이다. ­당시 독도문제를 미국에게 맡기자는 제3국 거중조정론을 제의했는지. ▲그런 것 없다. ­「굴욕외교」를 서두른 이유와 오히라 외상과의 밀약이 있었는지. ▲경제건설을 위해서는 일본과의 국교정상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밀약은 없었으며 메모지에 유상 3억달러,무상 2억달러,기타 1억 플러스 ○를 적어 양국원수의 승인을 받으면 합의한 것으로 하자는 약속을 했다. ­사과를 받아내지 못했는데. ▲한·일국교정상화에 관여했건 안했건 무한책임을 지고 있다.미흡했던 점에 대해 국민에게 가슴아프고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총선에서의 목표의석은. ▲진인사 대천명의 자세다.적어도 「캐스팅 보트」할 수 있는 의석은 확신한다. ­동화은행 1백억원 계좌설은. ▲그런 계좌는 없다.연초에 부대심청한이라고 말했듯이 항간의 설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겠다. ­자금출처조사금지는 중산층을 겨냥한 선심공약 아닌가. ▲자금출처조사는 돈의 흐름을 경색시킨다.금융실명제로 자금의 투명성은 충분히 확보된다.검은 돈은 자금추적이 아니더라도 언제고 드러난다. ­내각제주장은 권력을 분점하려는 의도 아닌가. ▲우리 사회가 내각제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했다.한사람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는 대통령제는 한계에 이르렀다.지역감정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5·18특별법제정을 반대했는데 쿠데타의 원조이기 때문인가. ▲5·16은 동기나 과정·결과로 볼 때 분명한 혁명이다.특별법은 위헌이기 때문에 반대했다.특별법이 없더라도 5·17관련자들을 처벌할 수 있다.혁명을 한 사람으로 다시는 위헌이 없어야 한다는 충정에서 반대했다. ­김대통령은 5·16을 쿠데타라고 했는데. ▲역사의 해석은 자유다.후세에 우리의 아들딸이 가려줄 것이다. ­자민련이 지역감정을 부추긴다는 비난이 있는데. ▲왜 자민련만 비난하나.김대중씨는 호남이 있고 김영삼대통령은 영남이라는 기반이 있다.충청도에서 자민련을 열렬히 지지하는 것은 사실이다.두 김씨가 전국적인 기반을 다지는 우리를 두려워해 하는 비난일 뿐이다. ­대권도전의사는. ▲민주절차의 당내경선을 하겠다. ­TK(경북·대구)지역을 정략적으로 이용하지 않았나. ▲이 지역은 박대통령과 아내의 고향이다.인정상 어느 지역보다 가까운 것은 사실이다.
  • 지휘자 임원식(이세기의 인물탐구:93)

    ◎26세에 지휘봉 잡은 “한국의 토스카니니”/46년 고려교향악단 창설… 4대교향곡 국내초연/서울 온 오사카필 등 단골 지휘… 일 TV서도 소개/서울예고·예원학교 설립… 7순넘긴 나이에도 “꼿꼿한 현역” 미국의 NBC교향악단이 세기적 거장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를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음악의 자존심」 임원식이 있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그는 음악을 위한 수많은 업적을 남겼고 그의 이름은 음악사의 중앙을 가로질러 우뚝한 산맥을 형성하고 있다. 평생을 통해 그처럼 존경과 사랑과 선망을 한몸에 받은 인물도 드물 것이다.그리고 음악의 발전·보급과 그 질을 높이는데 지금도 식을줄 모르는 정열을 불태우고 있다. 첫째,그는 우리나라 교향악운동에 초석을 놓은 독보적 존재다.아직 새파랗게 젊은 나이인 26세에 하얼빈교향악단 지휘로 음악계에 데뷔,국내 최초의 고려교향악단을 창설하여 46년 서울 부민관무대에서 첫지휘봉을 잡았을 때 『혜성같이 나타난 젊고 아름다운 예술가에 대한 청중의 열광은 참으로 대단했다』『연주 때마다 객석은입추의 여지가 없었고 그날 입장하지 못한 관객들은 극장의 창문을 깨뜨릴 정도였다』고 그의 오랜 동료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전봉초씨가 이를 증명한다.그로부터 10년후인 56년,KBS교향악단창단과 함께 그는 지금까지 「현역의 단정함」을 꼿꼿이 지키고 있다. 지난 94년 음악생활 50년을 기념하는 음악회에서 그는 베토벤 교향곡 1번·5번을 필두로 다섯차례나 암보지휘를 하여 노익장을 과시했다. 전에는 비교적 섬세한 해석이 눈에 띄었으나 해를 거듭할수록 큰 흐름을 붙들면서 「음률의 마디마디에서 거인의 숨결이 느껴지고 인간정신의 승리가 구가되는 한층 심화된 경지」를 펼쳐보였다.『그가 지휘봉을 드는 순간이 바로 음악을 이루는 순간』이라는 박용구씨의 평은 결코 과장일수가 없다. ○연주때마다 관객 만원 둘째,음악교육에서도 그는 미래를 지향하는 청사진을 제시하고 이를 몸소 실천해왔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서울예고와 예원학교를 만든 일이다.미 줄리어드 음악학교 유학시절 청소년예능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이화재단 신봉조이사장과 의논하여 예술고교를 설립하는 한편 해외에 나가있는 재능있는 젊은이가 눈에 띄면 어떤 방해도 뿌리치고 국내무대에 진출할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음악계 일선에서 쟁쟁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서울시향의 상임지휘자 원경수를 비롯,이남수 박은성,피아니스트 백낙호 정진우 신수정 이경숙 백건우등등 연주자 성악인의 대부분은 그의 도움을 받아 발돋움한 이들이다. 우리나라에 클래식이 보급되는 역사와 더불어 그는 주옥 같은 명편을 직접 들려준 첫지휘자이기도 하다.이른바 4대교향곡으로 일컬어지는 차이코프스키의「비창」,드보르자크의「신세계」,베토벤의「운명」과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초연은 물론 음악애호가들이 탐닉해마지않는 모차르트에서 프로코피예프에 이르기까지 「특유의 이모셔널한 시심과 티없이 순수한 천상의 음악」으로 그때마다 지식층의 청중들을 일시에 혼도시키고야 말았다. 그는 지방교향악단의 위상과 연주확대의 차원에서도 남이 넘볼수 없는 커다란 획을 긋고 있다.83년 인천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로 부임했을 때 동호인 그룹에 불과하던 이 악단을 3관편성의 풀오케스트라로 전열을 가다듬었고 지방시향으로선 엄두도 못낼 동남아및 미국순연으로 활기와 용기를 불어 넣었다.이런 면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세계적 교향악단으로 성장시킨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에 비유되기도 한다. 이처럼 굵직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에 대한 행사는 떠들썩하게 소문내는 법이 없다.62년 이래 오사카필을 비롯,일본 NHK심포니·도쿄필하모닉의 단골지휘자였으며 지난 71년에는 서울에 온 오사카필을 지휘,내한공연을 갖는 외국교향악단을 최초로 지휘한 기록을 세웠고 77년 일본 도쿄와 삿포로에서 열렸던 아시케나지와의 협연역시 「아시케나지 특유의 탁월한 기교와 시적감성 표출을 절묘한 조화로 이끌어냈다」는 일본신문들의 특필이 있었으나 이를 과시하지 않고 평상적으로 지나갔다. ○유학도 국내진출 뒷받침 91년에는 레닌그라드필,다음은 러시아국립교향악단 객원지휘로 차이코프스키를 연주,「음 하나하나를 갈고 닦은 다이내믹한 쾌감과 가슴을 파고들게한 더없이 아름다운 거장의 선율」로 호평되었고 지난해엔 일본 마이니치 TV가 제작한 세계 최원로지휘자인 아사히나 다가시(조비나 융)다큐멘터리에 참가,이 프로그램은 다가시와 다가시의 후계자였던 그의 하얼빈교향악단 지휘 50년을 기념하는 동양음악사에 남을만한 내용이었다. 그의 성품이 바로 그렇다.폭이 넓고 대범하면서도 절도와 예의범절을 중시하여 어떤 경우에도 남에게 폐해를 끼치지 않는다.단지 싫고 좋은 것을 선명하게 가리는 까다로움 때문에 「카리스마적」이라든가 또는 「독선적」으로 몰아붙이는 예가 없지 않으나 이는 임원식 카테고리에 들지 못한 사람들의 질투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 간단해진다. 오히려 불의에 굽히지 않는 강건한 의협심은 작곡가 윤이상씨가 국가보안법에 관련되어 주변 사람들이 만나기를 꺼려할 때도 점심을 싸들고 구치소에 드나들며 「거대한 예술가」의 고뇌와 슬픔을 달래주고 예술혼을 격려한 것으로 유명하다.그래서 윤이상씨는 『임원식은 나의 유일한 은인』임을 자랑삼았고 바로 이런 정의감과 의리가 그의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을 모으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 끈끈한 친화력은 다양한 층과 교분을 트고있는 사교맨이기도 하다.정·재계는 물론 체육계와도 깊이 관련되어 70년대엔 남자대학농구협회부회장을 지내는가 하면 바로 「농구의 노래」를 지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농구와의 인연은 그가 누구도 「못말릴 농구광」이기 때문이다.그가 얼마나 열렬한 농구광인가는 그가 있는 곳엔 반드시 어린이농구든 어머니농구든 농구경기가 열리고 있다고 짐작하면 정확하다. 그는 평북 의주의 독실한 개신교집안에서 태어났다.집안이 만주로 이사하는 바람에 봉천서 유년기를 보내고 하얼빈에 있는 제일음악학원에서 피아노와 이론을 사사,교회찬양대를 반주하면서 자연스럽게 음악과 접할수 있었다.편곡과 작곡에도 능하여 도쿄음악학교시절에 작곡한 파인 김동환의 「아무도 모르라고」는 지금도 폭넓게 애창되는 가곡의 하나다.가족은 플루티스트인 고순자씨와의 사이에 2녀1남,연극연출가 임영웅씨가 그의 조카다. ○각계각층 인사와 교분 토스카니니가은퇴해야 할 69세부터 87세까지 거장다운 황금시대를 누렸고 스토코프스키가 95세까지 7천회의 지휘로 금자탑을 쌓았다면 그는 지금 욕구와 절제,감성과 이성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음악의 정수를 순수한 형태로 구현하려는 의지가 결집된 시기다.그의 열렬한 지지자의 한사람인 원경수는 「영원히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전진한다」는 점에서 『그는 파우스트적』이라고 말한다.그리고 날이 갈수록 『그의 피아니시모는 예리하고 그의 포르티시모는 누구보다 웅장하며 긴장되고 팽팽한 현의 울림,꽉차오르는 관의 장중한 볼륨은 거센 폭풍우를 분출시키면서 청중의 가슴속에 날카롭게 꽂힌다』고 경탄해 마지않는다. 올해는 그가 하얼빈서 돌아와 첫지휘봉을 잡은지 만50주년이 되는해,상대방의 내부에 음악의 혼을 심어준 「위대한 음악의 은인」에게 우리 모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심의 기립박수를 보낼 때이다. □연보 ▲1919년 평북 의주출생 ▲1942년 일본 동경고등음악학교 졸업 제정삼낭사사 ▲1945년 중국하얼빈심포니 지휘데뷔 ▲1946년 고려교향악단창단,초대상임지휘자 ▲1948년 줄리어드음악학교 수학 ▲1949년 탱글우드음악제서 러시아출신의 쿠세비츠키에게 지휘법사사 ▲1953년 서울예고 창립 ▲1954년 대한민국 예술원회원 ▲1956∼71년 KBS교향악단 창단,상임지휘자 ▲1961∼75년 서울예고교장 ▲1962년이래 일본 오사카·도쿄필,NHK교향악단 등 50여회 객원지휘 ▲1966년 한국음악협회이사장 ▲1971년 내한 오사카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서울시민회관) ▲1973∼86년 국제청소년 음악연맹 한국지부 회장 ▲1976년부터 서울예고 명예교장 ▲1978년 경희대 음대학장 ▲1981∼84년 예총부회장 ▲1984∼95년 인천시향상임지휘자 ▲1985년부터 추계예대교수 ▲1987년 인천시향 동남아순회연주 및 미국 샌프란시스코 등 3개도시 연주 ▲1991년 싱가포르 교향악단 및 레닌그라드필 지휘 ▲1994년 음악데뷔 50년 기념음악회 서울시향 「베토벤 교향곡전곡」지휘,러시아국립교향악단 지휘 ▲1995년 국제청소년음악연맹 한국지부회장 예술원회원,인천시향 및 서울아카데미심포니 명예지휘자 서울시문화상·방송문화상·오월문예상·대한민국예술원상·서독문화훈장·은관문화훈장·음악동아대상
  • “「5·18」기념일제정 추진/신한국 이회창 의장·망월동묘역 참배

    ◎“새정치세력 밀어줘 과거청산 공백 메워야” 【광주=박찬구 기자】 여야는 4일 각각 호남과 서울등지에서 지구당대회와 선거대책위 현판식등을 통해 새로운 정치세력 창출과 3김청산등 15대 총선을 겨냥한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신한국당의 이회창 중앙선거대책위의장은 이날 광주 망월동 묘역참배에 이어 열린 광주북갑 및 전남 순천갑지구당개편대회에서 『5·18특별법 제정을 통한 과거청산의 공백을 새로운 정치세력이 메워 나가야 한다』면서 지지를 호소했다.이의장은 『거시적 차원에서 5·18특별법 취지에 맞게 기념일 제정등 후속조치들이 이루어지도록 조만간 정부와 김영삼 대통령에게 건의하겠다』고 말했다. 강삼재 사무총장은 이날 부산 중·동구지구당개편대회에서 『62년 한일수교 협상에 임했던 김종필씨가 한일회담에 장애가 된다면 독도를 폭파해버릴수 있다고 말한 사실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면서 『김총재는 일본의 독도망언에 대해 일단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은 이기택 상임고문이 이날 경남 울산지역 4개 지구당개편대회에서 『3김 정당은 정책이나 인물을 선전하기 보다는 소모적인 지역감정 싸움과 보수논쟁만 벌이고 있다』면서 민주당 지지를 호소했다.
  • “JP 62년 일정부와 수교회담때 「독도 폭파」 발언 해명을”

    ◎김 신한국 선대대변인 신한국당의 김철 선거대책위대변인은 4일 김종필 총재가 과거 한일회담 당시 일본정부와 「독도폭파」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진데 대해 책임있는 해명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대변인은 이날 논평에서 『김총재는 지난 62년 한일회담 당시 독도폭파 언급과 아울러 독도문제가 한일국교 정상화 뒤에 시간을 두고 해결할 문제라고 언급,명백한 우리 영토인 독도 문제를 일본측과 암묵리에 지나쳤다는 인상을 준다』며 진상공개를 요구했다. 김대변인은 또 『당시 외무장관으로서 한일회담을 주도하고 마무리한 국민회의의 이동원 상임고문도 독도문제에 대해 책임있는 설명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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