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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실비아 플라스 지음

    미국의 여성 시인 실비아 플라스(1932∼1963)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신화다.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 시대에 계관시인을 지낸 테드 휴스의 아내로 황금빛 로맨스의 주인공이었지만 끝내 남편의 외도와 우울증,생활고에 시달리다 서른 살의 나이에 가스 오븐에 머리를 박고 자살한 인물.그 충격적인 죽음은 1960년대 초반 태동하던 페미니즘의 시류를 타고 여성해방운동의 표상이 됐다.나아가 실비아 플라스는 남편 테드 휴스의 외도로 상징되는 폭압적인 남성성에 희생된 순교자로 신화화됐다.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실비아 플라스 지음,김선형 옮김,문예출판사 펴냄)는 신화의 너울에 갇힌 한 여성 시인의 생생한 육성을 들려준다.책은 실비아 플라스가 스미스 대학 입학을 앞둔 1950년부터 테드 휴스와 별거에 들어간 1962년까지의 일기를 소개한다. 실비아 플라스의 사랑과 비극에 관한 이야기는 극적 요소를 두루 갖춘 한 편의 드라마다.몇몇 일화들은 극적이다 못해 작위적인 느낌까지 준다.‘쿵’하고 부딪치는 맹렬한 키스 끝에 실비아 플라스가 테드 휴스의 뺨을 피가 철철 나도록 물어뜯어 평생 사라지지 않는 흉터를 만들어놓았다는,유명한 첫 만남의 이야기가 그 한 예다.그러나 정작 일기에는 ‘여성해방운동의 순교자’로 부각된 사후의 신비화된 모습이나 멜로드라마의 극적인 주인공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풍경이 그려져 있다.자살로 생을 마감한 ‘창백한 희생자’의 모습보다는 냉철하고 잔혹할만큼 정직하며 때론 매우 이기적일 뿐 아니라 세상과의 소통에 실패해 악에 받친 외로운 인간의 초상을 보여준다.잡지에 보낸 시가 반송되지 않을까 걱정하며 하루종일 유리창에 매달려 우체부를 기다리는 모습이라든지,눈을 맞으며 걸어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행복을 느끼는 모습 등 신화가 아닌 ‘인간’ 실비아의 모습이 담겨 있다. 테드 휴스는 실비아 플라스를 “사생활에서나 글에서나 수많은 가면을 쓰고 있던 사람”으로 규정했지만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실비아의 절규는 사뭇 눈물겹다.“하느님,이것이 전부인가요? 웃음과 눈물의 회랑 한가운데를 쏜살같이 스쳐 달리는 것이? 자기숭배와 자기혐오,영예와 오욕 사이를 이렇게 위험하게 질주하는 것이?” 이번에 국내에 처음 소개된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는 테드 휴스가 프랜시스 매컬로와 공동 편집해 1986년에 낸 책을 토대로 했다.두 사람은 일기 원본의 3분의2 가량을 생략한 뒤 책으로 출간해 비난을 샀다.실비아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테드 휴스가 관련 부분의 일기를 파기하고 일부 지문을 삭제했기 때문이다.“망각이 생존의 조건”이라는 게 그의 말.테드 휴스는 실비아 플라스를 죽게 한 냉혈한이란 오명을 평생 낙인처럼 달고 다녀야 했다.강연이나 시낭독회 때마다 시위대가 뒤따랐고,실비아 플라스의 묘비명에 새겨진 남편의 성 ‘휴스’는 실비아의 추종자들에 의해 무참히 지워지는 수난을 당했다. 하지만 테드 휴스는 1998년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 죽어버린 아내와의 삶과 사랑을 고통스럽게 토로한 ‘생일편지’라는 시집을 펴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실비아 플라스의 이야기는 그의 사후에도 끊임없이 대중의 관심거리가 됐다.테드 휴스가 죽자 영국 BBC는 미국 자본과 손잡고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영화 ‘실비아’를 만들기도 했다.실비아 플라스의 신화는 여전히 빛을 내뿜고 있다.2만 5000원. 김종면기자 jmkim@˝
  • [토요영화]

    ●체인리액션(MBC 오후 11시10분) 키아누 리브스,모건 프리먼 주연.시카고의 대학실험실에서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획기적인 실험에 성공한다.고갈될 염려가 없고 공해가 없는 무색무취의 강력한 에너지를 만들어낸 것.실험이 성공하던 날,대학생 에디와 릴리는 암살 협박을 받는다. 연구 결과가 공식적으로 발표되기 직전,실험실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연구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은 살해되거나 실종된다. 누명을 쓰고 도망자 신세가 된 에디와 릴리.FBI 요원들의 추격을 받으며 거대한 음모의 배후를 밝혀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초콜릿(KBS2 오후 11시10분) ‘길버트 그레이프’‘개 같은 내 인생’의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작품.보수적인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 등장한 초콜릿 가게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로맨틱 코미디.줄리엣 비노시와 조니 뎁,주디 덴치 등 유명 배우들의 호연이 돋보인다. 비안은 어린 딸과 프랑스의 한 마을에 들어와 초콜릿 가게를 연다.그녀는 활기찬 성품과 초콜릿으로 사람들과 친해지려 하지만 쉽지 않고,일부 사람들은 그녀를 마을에서 몰아내려 한다.그러던 중 비안은 배를 타고 떠돌아다니는 남자 로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데,마을 사람들에겐 그들의 사랑도 눈엣가시다. ●맘마 로마(EBS 오후 11시10분) 이탈리아의 거장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가 1962년 만든 두 번째 작품.베니스 영화제 비평가상을 수상했다.파졸리니는 폭력에 대한 과격한 묘사,파시즘과 반파시즘의 기묘한 줄타기로 항상 논쟁거리를 제공해왔다.동성애자였던 그는 마지막 영화 ‘살롬 소돔의 120일’을 완성한 후 17세의 동성애자 청년에 의해 살해 당했다고 전해진다. 매춘부 맘마 로마는 16세 된 아들 에토레를 위해 야채가게를 시작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보려고 하지만 포주 카르미네는 엄청난 몸값을 요구하며 놓아주지 않는다.할 수 없이 맘마 로마는 낮에는 과일을 팔고 밤에는 거리에서 몸을 파는 신세로 전락한다.그러나 애지중지하던 아들마저 바람과 달리 자꾸 어긋나기만 한다.라디오를 훔치던 아들은 결국 총을 맞아 사망하고 그녀는 큰 충격에 빠진다.하층민의 삶을 비극적으로 그린 이 작품은 신분의 벽이 높은 이탈리아 사회를 고발하고 있다. 박상숙기자 alex@ ˝
  • 스필버그 SF ‘테이큰’ 시리즈 방영

    “우주 저편의 세계에 관심이 많았다.그러나 내가하고싶은 이야기를 스크린에 담기에 두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E.T’와 ‘미지와의 조우’ 등 SF영화로 우주의 생명체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했던 스티븐 스필버그.1990년부터 ‘외계인 납치’를 다룬 작품을 준비한 그는 스크린이 너무나 비좁은 활동무대임을 실감하고 TV시리즈로 만들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홈CGV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초대형 SF 10부작 ‘테이큰(Taken)’을 20일부터 매주 토·일요일 오후 10시에 내보낸다.스필버그가 제작·기획하고 드림윅스가 만든 이 시리즈는 미화 4000만 달러(약 500억원)의 제작비를 들인 블록버스터급 미니시리즈.2002년 미국의 케이블TV로 방영되어 시청률 1위를 기록했고,지난해 에미상과 TV비평가 협회상 등을 휩쓸었다.‘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특수효과를 담당한 제임스 리마의 뛰어난 영상미와 영화 ‘아이엠 샘’에 나왔던 다코다 패닝의 초능력 소녀 연기가 눈길을 끈다.헤더 도나휴,조엘 그레치 등 연기파 배우들도 출연한다. ‘테이큰’은 잇따라 외계인에게 납치되는 키스 가족,외계인의 피를 이어 받은 클라크 가족,외계인의 뒤를 쫓는 크로포드 가족 등 외계인과 서로 다른 관계를 맺고 있는 세 가문의 4대에 걸친 이야기를 펼쳐간다.‘서클현상’,‘로스웰 사건’등 외계인과 관련된 각종 미스터리는 물론 제2차 세계대전과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등 50년동안 미국의 사건들이 스토리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국내에서도 인터넷 동호회(cafe.daum.net/Taken)에 1800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을 정도로 화제다. 이영표기자 tomcat@˝
  • ‘1000만’ 태극기 꽂은 강제규감독

    강제규(42) 영화감독은 하마터면 ‘태극기를 휘날리지 못할 뻔’했다.지난 2001년 6월 강 감독은 매우 중요한 기로에 선다.영화 ‘쉬리’ 이후 새로운 아이템으로 SF장르를 선택한 그는 몽골을 다녀오는 등 칭기즈칸을 소재로 한 시나리오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KBS-TV에서 제작한 6·25특집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우연히 접했다.그의 시선에 찰나처럼 스쳐간 장면은 이러했다.육군본부가 주도한 유해발굴사업단의 연락을 받고 50년 만에 남편의 유해와 마주하는 아내(75)와 딸(33)의 모습이었다.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어떤 예술가적 고통이 그의 가슴에 파고 들었다.곧,‘그래,한국전쟁이야!’라는 직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단박에 ‘칭기즈칸’에서 ‘태극기 휘날리며’로 방향을 확 틀었다.이때부터 1000만 관객에게 다가서는 긴 여정이 시작됐던 것이다. ● 태극기는 휘날릴 수밖에 없었다 지난 주말 서울 강남구 포이동 ‘강제규 필름’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머리는 80년대의 대학생처럼 길었고, 헐렁한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대작 영화의 역량이 과연 어디에서 나왔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우선 최근 미국 샌타모니카에서 가진 영화 ‘태극기∼’ 시사회의 현지 반응을 먼저 물었다. “아메리칸 필름마켓(AFM) 전용극장에서 미국과 유럽 각국의 영화관계자 200여명이 관람했지요.그런데 이례적일 만큼 한 사람도 중간에 자리를 뜨지 않았습니다.다들 눈물이 글썽한 채 나오면서 ‘쇼킹하다’고 입을 모으더군요.” 특히 그는 “시사회때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상황을 소개하는 것이 관례지만 ‘태극기∼’는 시사회 기준인 1시간40분 러닝타임보다 더 길어 그냥 진행했다.”면서 “그럼에도 다들 감동적으로 영화를 감상했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에도 충분히 도전해볼 만하다는 찬사도 아끼지 않았다. ● “영화는 철학적 메시지 담아야” 관객 1000만돌파의 비결에 대해 그는 “영화 ‘태극기∼’가 우리의 모든 상황을 종합해볼 때 시대적으로,정서적으로 중요한 위치에서,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다.”면서 “영화는 보고,즐겁고,기뻐하고,철학적 감동의 메시지를 줘야 한다.”고 자신의 영화철학을 피력했다. 제목을 ‘태극기∼’로 정한 특별한 까닭이 있는지 물었다.그는 “영화를 처음 시작할 때 제목을 ‘W프로젝트’로 명명했으나 막상 보도자료를 내려고 하다 보니 마땅한 제목이 없어 고민했다.”고 토로했다.또한 한국전쟁을 떠올리면 강렬한 이미지가 한가지 연상된다는 그는 “그건 군인들이 총신 끝에 태극기를 묶고 휘날리며 고지 위로 뛰어오르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또 ‘태극기∼’가 커보이고 역설적으로 뭔가 있을 것 같다는 의견을 듣고 제목을 그렇게 확정지었다.“모든 게 당초보다 커졌지요.영화를 찍고 나니 필름길이만 해도 33만자(1자가 약 30㎝)였습니다.서울∼부산을 왕복해도 남을 거리이지요.또 전국 67군데 흩어진 촬영장소를 돌아다닌 거리도 15만㎞에 이릅니다.” 영화관련 인터뷰 기사는 많이 보도돼 그의 과거시절로 얘기방향을 돌렸다. 그는 마산에서 2남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부친이 마산 시내에서 조그마한 장사를 했는데 마침 집 근처 강남극장(지금은 없어졌지만)의 주인과 친하게 지냈다.덕분에 어릴 적부터 극장을 공짜로 자주 드나들 수 있었다.이때 즐겨 본 영화가 ‘아톰시리즈’‘로봇태권V’‘독수리요새’ 등이었다.흑백 영사기 돌리는 모습도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었다.영화 ‘시네마천국’의 꼬마 주인공 ‘토토’처럼. 중학교때 학교 성적은 3년 줄곧 전교 1등을 차지했다.특히 수학·과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해 주변에서 ‘신동’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때마침 형이 비행기 조립을 무척 좋아하는 바람에 집안을 온통 비행기 조종석처럼 꾸며놓았다.그의 과학적 재능을 더욱 개발하는 바탕이 됐다(형은 나중에 공군사관학교로 진학한다.지금은 대한항공 조종사로 근무중이다). 이같은 주위의 칭찬과 배려속에 중학을 마친 그는 고교에 진학하면서 사춘기를 맞아 비뚤어지기 시작했다.철학자들이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인생이 뭐꼬?’라는 물음표를 하루종일 떠올리며 거리를 마냥 쏘다니기 일쑤였다.하루는 ‘불선천지 팔양신주경’을 우연히 접하면서 불경에 푹 빠지기도 했다. 또 ‘어린왕자’와 ‘갈매기의 꿈’을 읽고 생텍쥐페리와 리처드 바크의 철학사상에 탐닉하기도 했다.학교성적은 거의 꼴찌수준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사진촬영’에 취미를 가졌다.카메라 하나를 둘러메고 바다로,시내로,산으로 가서 닥치는 대로 셔터를 눌러댔다.필름현상은 집 근처의 사진관 아저씨한테 직접 배웠다.이때 배운 촬영기술이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선배들과 곧바로 단편영화에 제작에 나서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 영화감독 꿈을 펼치기 시작한 고2 이뿐만 아니었다.사진촬영을 하면서 동시에 문학서클에도 가입했다.주로 표현주의 기법의 시를 창작하면서 문학적 자질을 키워 나갔다.이때 쓴 습작시만 수백편에 이른다고 했다.그가 ‘태극기∼’ 촬영을 끝마치고 영화제작의 전 과정을 담은 책을 쓰게 된 것도 그의 문학적 재능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을 돌아보며 “참,괴기하게 보냈다.”고 표현했다.그러나 그런 행동들이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영화감독을 할 수밖에 없는 ‘동물적 토양’이었다고 술회했다. 그가 영화감독의 꿈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한 것은 고2때.어느 겨울날 마산 시민극장에서 ‘닥터 지바고’를 관람했다.극장문을 나서면서 ‘영화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구나.’하는 찡한 감동을 느꼈다.이때부터 사진 찍는 것을 중단했다.오로지 영화공부였다.마산에는 개봉극장이 거의 없어 주말이면 부산으로 달려가 개봉영화를 감상하고 막차로 돌아오곤 했다.이때 본 영화가 ‘사학비권’‘철수무정’‘하노버스트리트’‘새벽의 7인’등이었다. “고교때는 술도 마시고 좀 이상한 짓을 많이 했지요.고3때 연극영화학과에 진학하겠다고 했더니 ‘딴따라’라고 만류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또 당시만 해도 마산고에서 예체능계를 진학하는 예가 거의 없었지요.”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그는 선배들과 어울려 단편영화를 미친 듯이 찍어대기 시작했다.흔하던 미팅은 딱 한번.그것도 미팅 선약을 펑크낸 선배 대신이었다. ● ‘태극기~’는 다시 시작합니다 이때 만든 단편영화들은 ‘침묵’‘땅밑 하늘공간’‘깰수 없는 겨울잠’ 등이었다.제목에서 풍기듯 실험적인 작품에다 이미지 표현 중심의 영화가 주류를 이루었다.16㎜영화는 10여편.특히 대학 2년때 같은 학과 동료인 탤런트 박성미씨와 함께 단편 ‘가을오후’를 제작하면서 친해져 결혼에 골인했다. “89년에 결혼했지만 한동안 먹고 사는 것이 걱정이 돼 아이를 5년만에 낳았습니다.‘은행나무 침대’를 만든 후 첫째 아들 윤원이,그리고 ‘쉬리’ 이후에 둘째 지완이를 낳았지요.” ‘태극기∼가 대박을 터뜨렸으니 부인한테 보너스를 두둑히 주었느냐는 질문에 올 여름에 가서야 결산이 될 것 같다고 대답했다.그후에는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지 물었다. “‘태극기∼’는 겨우 끝났고 다시 시작합니다.세계인들이 한국영화를 보고 울고 웃고 해야 합니다.끊임없이 그 문을 두드릴 뿐입니다.” 김문기자 km@ 강제규 감독 프로필▶1962년 11월 마산 출생 ▶81년 마산고졸 ▶85년 중앙대 연극영화과졸 ▶90년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로 시나리오 데뷔 ▶96년 ‘은행나무 침대로’로 영화감독 데뷔▶99년 미국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아시아 개혁을 주도할 개혁 50인에 선정.강제규필름 대표 ?99년 영화 ‘쉬리’제작▶2004년 영화 ‘태극기휘날리며’ 제작 ▶수상기록=백상예술대상 각본상,대종상영화제 신인감독상,백상예술대상 각본상,아시아스타 50인 등˝
  • [기고] 차관급 문화재청장에 거는 기대/조유전 동아대 고고미술사학 초빙교수

    16대 국회 막바지인 지난 2일 본회의에서 문화재관리국을 차관급으로 격상시키는 정부조직법 개정이 통과되었다.지난 1999년 문화재관리국이 1급 청장직급인 문화재청으로 승격했지만 그 중요성을 볼 때 최소한 차관급으로라도 격상해야 한다는 줄기찬 여론이 받아들여진 셈이다.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된 지 42년만에 문화재의 총 관리부서 장이 차관급으로 업그레이드된 것으로,만시지탄이 있지만 환영할 일이다. 문화재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오늘을 살면서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의 유산이자,바로 우리의 얼굴이고 자존심일 뿐 아니라 민족의 긍지이자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정체성이다.그렇기 때문에 그 문화재를 다루는 총책기관의 위상을 높여야 할 당위성은 충분히 있다.이제 요구대로 문화재청의 위상이 보다 높아졌으니 그에 걸맞게 문화재 보존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할 것이다.지금까지의 문화재보존 정책에서 진일보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해야 한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문화재의 복원·보존에 비중을 두어왔던 정책을 예방 우선 차원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이 말은 지금까지 남아있는 문화유산에 더이상 손상이 가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는 정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 문화재를 복원한다 해도 그것은 오늘날에 새롭게 만든 것이지,옛 것 그대로의 복원에서는 멀다.예를 들어 성곽을 복원한다는 계획아래 무너진 부분을 헐어내고 새롭게 쌓았다면 그것은 외형만 옛 것을 따랐을 뿐 오늘날 새로 쌓은 성곽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다음은 문화재의 활용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지금까지 많은 문화유산이 지정,보존되고 있지만 이들 유산이 극소수의 전문가들에게만 이해되고 향유되는 전유물로 남아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예를 들면 경주에서 신라시대 황룡사가 있었던 터를 발굴조사한 지 30여년에 이르고 있지만 고작 조사된 건물터에만 잔디를 심고 정비해,찾는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공개하고 있는 실정이다.그러나 이 곳을 찾는 사람들조차 전문가의 긴 설명 없이는 유적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없다.말하자면 시각적으로 느끼게 해서 찾아드는 이들에게 이해와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도록 새롭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유적의 중요성이 보는 사람 모두에게 이해되고,이를 통해 자긍심을 복돋우게 될 때 우리의 문화유산은 저절로 보존되어 나갈 것이기 때문에 이제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로의 정책전환이 중요한 것이다.이러한 정책을 펴기 위해서는 다음의 몇 가지가 시급히 추진되어야 한다. 첫째 전문 연구인력의 대폭적인 확보다.문화재는 한번 원형을 잃게 되면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그렇기 때문에 심층적인 조사연구 없이 함부로 손을 댈 수도 없다.이를 위해서 고도의 숙련된 전문인력 양성이 따라야 함은 당연하다.즉 교육공무원이나 교도·법무행정처럼 일반행정이 아닌 특수한 문화재 직종이 필요한 것이다. 둘째 지방조직이 시급히 마련되어야 한다.문화유산의 관리에는 현장확인이 반드시 필요하다.지방조직이 없다는 것은 머리만 있고 몸통은 없는 기형의 형태나 다름없어 문화유산의 전국적인 관리를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셋째 앞으로 다가올 남북문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한성백제의 고도인 서울을 아우를 국책연구기관,말하자면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 설립이 시급하다. 넷째 매장문화재 대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개발에 수반되는 매장문화재의 파괴가 심각한 반면 민원 또한 끊이지 않고 있다.그러나 문화재청의 업무 폭주는 한계를 넘어선 지 이미 오래되었다.기구를 확대하고,문화재기금을 마련해서라도 이 문제 해소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문화재청장의 위상만 높였다고 문화재의 보존정책이 진일보하지는 않는다.거듭 말하지만 위상에 걸맞은 조직과 예산이 함께 따라야만 명실공히 한 단계 높아진,새로운 문화재 정책이 정착될 수 있을 것이다. 조유전 동아대 고고미술사학 초빙교수 ˝
  • 도산 안창호 66주기 추모식

    독립 운동가로 민족교육에 헌신한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의 순국 66주기 추모식이 10일 서울 도산공원에서 기념사업회(회장 서영훈) 주관으로 열린다. 정부는 1962년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 과거엔 누가 있었나-첫 女 프로레슬러는 옥경자

    1962년 3월초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에 마련된 특설링에 한국에서는 최초로 여자프로레슬러가 등장했다.83년 은퇴 때까지 무패의 신화를 이어간 옥경자(61)씨가 남자선수들과 오픈 게임을 가진 것. 장영철 우기환 안명길 등 1세대 프로레슬러들이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던 당시 여자프로레슬러의 출현은 하나의 사건이었다.이후 박정옥 유미숙 오순명 김경희 등 우람한 덩치를 자랑하는 여성들이 속속 도전장을 내밀었다. 60년대 후반 들어서는 오픈 게임을 벗어날 정도로 여자프로레슬링의 저변이 확대됐다.71년 11월에는 드디어 서울신문 주최의 여자프로레슬링 헤비급 타이틀 매치가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열렸다.옥경자는 이 대회에서 수십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챔피언 벨트를 거머쥐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여자프로레슬링은 아이로니컬하게도 프로레슬링의 꽃이 활짝 핀 70년대 중반부터 위기를 맞았다.김일과 같은 슈퍼스타가 등장하면서 여자 경기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떨어진 것.쇠락의 길을 걷던 여자프로레슬링의 명맥은 정현숙 이희승 임혜림 등이 겨우 이었다. 최근에는 이종격투기와 미국 프로레슬링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자 관심을 갖는 젊은 여성들이 부쩍 늘었다.옥경자씨는 “프로레슬링은 단순한 쇼가 아닌 종합무술”이라면서 “젊은 후배들이 분발해 제2의 전성기를 일궜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창구기자
  • ILO “세계화가 빈부격차 키워”

    ‘세계화의 진로를 바꿔라.그렇지 않으면 세계의 안보 불안과 각국간 분쟁이 더욱 격화될 것이다.’ 유엔 산하기구인 국제노동기구(ILO)가 24일 세계화의 위험을 경고하는 보고서를 내놓았다.2001년 ILO가 결성한 ‘세계화의 사회적 측면에 관한 세계위원회’는 ‘공정한 세계화:모두를 위한 기회 창출’이란 제목의 이 보고서를 통해 “세계화가 막대한 혜택을 낳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혜택은 일부 부국,또는 한 국가내 최상위층에만 돌아가고 있다.”면서 이로 인해 국가간 또는 국가 내에서 부유층과 빈곤층간 격차가 더욱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세계화가 자리잡으려면 세계화의 혜택이 공정하게 분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러나 실제로는 극소수만이 혜택을 입을 뿐 대다수는 세계화에 대해 불만을 자아낼 뿐이라면서 이것이 불만을 느끼는 사람들을 테러리스트로 키우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고 경고했다.따라서 세계화가 공정한 결과를 낳는 방향으로 진로를 바꾸지 않는 한 세계화는 정정 불안과 갖가지 분쟁 등 국제안보의 불안을 부르는 기본 원인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보고서는 불평등이 심화되는 근거로 1962년부터 2002년까지 40년간 최빈국 20개국과 최부국 20개국간의 소득 증가를 제시했다.이 기간 1인당 국민소득은 최빈 20개국의 경우 212달러에서 267달러로 바뀌었지만 최부국 20개국은 1만 1417달러에서 3만 2339달러로 늘었다.62년 53배이던 소득격차가 2002년에는 120배가 넘어선 것이다. 보고서는 이같은 불평등이 부국들의 자국이기주의와 정당화할 수 없는 일방주의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하면서 나름대로의 대안을 제시했다. ILO는 오는 6월 정기총회에서 이같은 보고서의 권고 내용을 논의할 예정이지만 세계 최대 부국 미국이 자국의 사정에 맞춘 정책을 고집하는 한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유세진기자 yujin@˝
  • 사회복지 실무지침서 발간

    서찬교 서울 성북구청장이 40여년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사회복지분야의 실무지침서를 펴냈다. 1962년 건설부 총무과 재경서기로 공직을 시작한 서 구청장은 오랜 공무원 생활과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강의한 경험을 살려 ‘사회복지시설 운영론’이라는 이론서를 발간했다.오는 27일 오후 5시 고려대 교우회관에서 출판기념회를 갖는다.
  • MBC무비스, 오스카수상작 방영

    영화채널 MBC 무비스는 29일(현지시간) 제76회 아카데미 시상식을 계기로 29일 역대 수상작 여덟 편을 특집 편성한다. 우선 오전 9시에는 1962년 최우수 작품상,감독상 등을 수상한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방송된다.오후 2시에는 폴 뉴먼·로버트 레드퍼드 주연의 7개 부문 수상작 ‘스팅’이,오후 4시에는 1998년 남녀주연상 수상작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가 이어진다. 이밖에도 1982년과 1997년 여우주연상을 각각 받은 ‘소피의 선택’(오후 6시),‘파고’(오후 11시)에 이어 1992년 5개부문 수상작 ‘양들의 침묵’이 새벽 1시에 방송된다.˝
  • [스포츠 라운지] 17세이하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 로버트 알버츠

    늦겨울 아침에 만난 그는 하얗게 눈덮인 산들 사이로 펼쳐진 초록색 그라운드에 우뚝 서 있었다.천진난만한 몸짓과 발짓으로 강의를 하는 모습은 ‘축구 걸음마’를 시작했던 어린시절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다.축구공과 함께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는 ‘피터팬’ 같았다. 로버트 알버츠.지난달 14일 청소년국가대표팀(17세 이하) 감독을 맡았다.‘2010년 세계 10위권 진입’이라는 대한축구협회의 마스터플랜을 감안하면 꿈나무들과 동고동락할 그의 어깨에 한국축구의 미래가 달린 셈이다. ●축구와 함께 울고 웃은 40년 “축구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40여년 동안 축구와 함께 울고 웃은 알버츠,그에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유쾌하게 대화를 나누던 그는 “축구는 내 인생 자체입니다.축구를 한다는 것은 세계 어느 곳을 가도 친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죠.”라며 순간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1954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난 그는 동네 축구대장이었다.8세 때 클럽팀 코치의 눈에 띄어 정식으로 유소년클럽 활동을 시작했다. 에피소드 하나.나이 제한(12세)으로 공식경기에 출전하지 못하자 나이 많은 팀 동료와 이름을 바꿔 출전하기도 했다.이렇듯 축구에 미친 그는 18세에 네덜란드 축구명문 아약스A팀에서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한 시즌에 6∼7골을 뽑는 공격형 플레이메이커였지만 주전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20세를 바라보던 75년 초,감독에게 주전에서 제외됐다는 통보를 받자마자 미련없이 공 하나만 달랑 메고 더 넓은 세상으로 축구여행을 떠났다.프리메라리가(스페인)나 프리미어리그(잉글랜드)와 같은 빅리그행은 아니었다.그렇지만 그는 미국,프랑스 그리고 스웨덴에서 현역시절의 마지막 불꽃을 활활 태웠다.특히 북미프로리그 밴쿠버 시절을 인생의 황금기로 꼽았다. “당시 뉴욕 코스모스팀에서 뛴 펠레(브라질)나 프란츠 베켄바워(독일)와 경기를 했어요.축구영웅들과 함께 그라운드를 밟다니 정말 감격스러웠죠.” 축구황제와 승부를 겨루던 모습이 떠올랐을까,문득 그의 눈은 산너머를 응시했다.그러나 기쁨도 잠시.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생의 전환점이 다가왔다.스웨덴 헬싱보리클럽에서 선수생활을 하다가 허리부상을 당한 것.선수로서는 사형선고를 받은 셈이다. “인생이 끝장난 것 같았습니다.삶의 전부였으니까요.” ●“신명나는 축구라야 창의력 나와” 아시아로 오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스웨덴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고 축구인생 ‘제2라운드’의 공을 울린 그는 잠시 짬을 내 세트플레이 연습용 ‘프리킥 월(WALL)’을 개발했다.세일즈를 위해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다 지난 92년 말레이시아 클럽팀 감독으로 발탁됐다.그리고 그곳에서 메르데카컵에 출전한 한국축구와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된다.스피드가 인상적이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다시 10년이 흘렀다.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광풍이 지나간 뒤 대한축구협회 전임강사 자격으로 마침내 한국땅을 밟았다. “14세 이하 한국축구는 기술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세계 최고수준이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처집니다.어렸을 때는 성인 수준의 강도높은 훈련이 즉시 효과를 내지만 선수들이 성장을 거듭하면서 만성적인 부상 등 부작용이 나타나곤 하지요.” 그는 30세가 되면 노장 소리를 듣는 한국축구 풍토를 지적한다.체계적인 유소년 시스템이 발달한 유럽에서는 30세쯤이면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뽐낼 원숙기라는 것이다.그는 듣기에만 익숙한 한국의 새싹들에게 자신을 스스로 표현할 수 있는 축구를 할 수 있게 해주고 싶다. 한국 생활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무 간섭을 받지 않고 또래끼리 ‘제멋대로’ 공을 차는 풍경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그는 그것이 “그립다.”고 했다.그리고 즐거움에서 시작한 축구가 무한한 창의력을 안겨주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월드컵대표팀에 대한 얘기도 잊지 않았다.“거스 히딩크 감독도 자신의 색깔과 한국축구를 접목시키기 위해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움베르투 코엘류 감독도 조만간 자신의 스타일과 한국축구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요즘 그에게는 하루가 짧다.아침 일찍부터 시작한 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NFC)에서의 축구지도자 강의는 저녁이 넘어서야 끝나곤 한다.또 이번에 새로 맡게 된 청소년 선수들의 훈련 일정을 짜고 장단점을 파악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다. 녹초가 돼 일산의 집에 들어서지만 그의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네살배기 아들과의 축구 한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늦둥이로 얻은 아준은 집안에 있는 모든 것을 축구공마냥 걷어차고 다니는 것이 버릇.“아들이 축구를 하고 싶어하면 적극 밀어줄 계획입니다.왜냐고요? ‘축구’잖아요!” 그는 활짝 웃었다. ■ 약력 ·1954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출생·62년 아약스 유소년·청소년 클럽 ·72∼74년 아약스 클럽A팀 ·75∼79년 밴쿠버(캐나다),클레르몽(프랑스),헬싱보리(스웨덴) 클럽 ·79년 스웨덴축구협회 코칭스쿨 이수 ·86∼87년 스웨덴 히타르프스 감독 ·91년 아시아축구연맹(AFC) 코칭스쿨 이수 ·92년 이후 AFC 인스트럭터 ·92∼95년 말레이시아 케다 클럽 감독 ·96∼2001년 싱가포르 홈유나이티드 감독 ·2002년 8월 대한축구협회 전임 지도자 강사 및 첫 외국인 기술위원 ·2004년 1월 청소년대표팀(17세 이하) 감독 글 홍지민기자 icarus@˝
  • 술따라 맛따라-안동소주

    “술 빚기의 처음은 ‘기도’하는 마음입니다.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술을 기다리는 정성이 깃들어 있어야 ‘안동소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와 전통식품 명인6호로 지정받은 안동소주의 제조기능보유자 조옥화(83) 할머니는 지금도 소주를 내리는 날에는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온 정성을 쏟는다.“안동소주는 누룩과 쌀만을 섞어 발효시키고 그것을 증류하여 만들어 낸 순곡주입니다.안동에서 소주를 만드는 사람들이 여럿 있지만 누룩,쌀,물 등 재료 선별에 정성을 들이지 않습니다.저는 누룩을 직접 띄우고 좋은 쌀을 손으로 만지며 깨끗한 술이 나오기를 마음으로 기원합니다.” 조 할머니가 술을 한 잔 권했다.안동소주는 향이 깊고 강했다.45도의 안동소주 한잔을 들이켜자 혓끝에 담백함이 느껴질 뿐 쓴맛은 없다. 우리 소주는 몽골(후에 원나라로 칭함)에서 전래되었다.칭기즈칸이 세계를 정복하면서 페르시아의 이슬람문화를 받아들이며 증류방식의 술제조법을 배웠고 그것이 고려에 전파되면서 비로소 소주의 시대가 열렸다.당시 몽골군 기지가 있었던 개성,안동,제주를 중심으로 소주를 많이 빚었다.역시 그랬다.그래서 안동소주에는 선비의 부드러움보다 무인의 강렬함이 느껴지는가 보다.안동소주는 조선시대 들어 안동 사대부집안의 가양주(家釀酒)로 자리잡았다.그러나 일제 강점기때 전통주 생산이 금지되었고 광복 후엔 1962년 주세법이 개정되어 순곡주 생산이 금지되면서 안동소주의 맥도 끊겼다. 조씨가 안동소주 재현에 뜻을 두게 된 것은 1986년 새마을운동 기금 마련을 위해 동동주를 향토 야시장에 팔면서다.정년을 앞둔 한 시청 직원이 ‘동동주보다 안동소주가 더 낫지 않겠느냐?’는 말을 했던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가보처럼 내려오던 조씨의 전통 소주고리가 빛을 보게 된 것은 1990년 9월.그때 처음으로 안동소주 제조면허를 받아 빚기 시작했다.안동시 신안동에 살던 집에서 전통방식 그대로 만들어 팔면서 안동소주의 명성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그때는 정신이 없었어요.전국 각지에서 술을 사겠다고 새벽 5시부터 집 앞에 줄을 섰는데,그 줄이 동네를 한 바퀴 돌고도 남았어요.술을 더 달라고 항의하는 이들도 많았어요.” 그때는 혼자 제대로 된 술을 만들려는 욕심 때문에 밤새우는 일도 많았다고 회고했다. 안동소주는 누룩(밀)과 쌀을 발효시켜 증류시킨 술로 장기간 보관이 가능하고 오래될수록 향기와 맛이 좋아진다.또한 증류를 통해 불순물이 제거돼 마신 후에도 뒤끝이 깨끗하다. 현재 조옥화씨는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 배경화(53)씨에게 비법을 전수하고 있다.음식을 만들고 술을 빚는 일이 너무 힘들어 며느리에게는 가르치고 싶지 않았지만 며느리 배씨가 자청해 수제자가 되었다고. 조옥화씨는 마지막으로 “안동소주의 맛과 향의 비결은 ‘누룩’입니다.좋은 밀에 정성을 쏟아 발효시킨 누룩만이 안동소주의 이름을 지킬 수 있게 합니다.”라고 했다.조씨는 “지금도 옛 어른들의 정신과 방법을 충실히 지키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며 우리 것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안동소주 이렇게 빚어요 ① 좋은 밀 1㎏을 분쇄한 후 물을 넣고 적당히 반죽한다. ② 원형틀에 밀반죽을 넣고 모시보자기를 씌운 후 발로 밟아 모양을 만든다. ③ 누룩을 틀에서 꺼내 20일 정도 띄운 뒤 콩알 크기로 분쇄해 건조시킨다. ④ 건조한 누룩을 하룻밤 이슬을 맞혀 곡자 냄새를 없앤다. ⑤ 쌀 5㎏을 씻어 물에 불린 후 시루에 쪄 고두밥을 만든다.그늘에 멍석을 깔고 고두밥을 넓게 펴 말린다. ⑥ 누룩과 고두밥을 손으로 버무리며 적당량의 물을 넣어 혼합한 후 술독에 넣고 약 15일간 숙성시킨다.전술 완성. ⑦ 전술을 증류기에 넣고 증류를 한다.처음에는 70도의 독한 술이 나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도수가 떨어지는 술이 나온다. ⑧ 받은 술의 도수가 45도 정도 되고 혀끝에서 가장 좋은 향과 맛이 날 때 증류를 멈춘다. 글 안동 한준규기자 hihi@˝
  • 企協중앙회장 선거 열기 후끈

    중소기업인의 구심체인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의 회장선거 열기가 뜨겁다. 오는 27일 치러질 이번 선거에서 현 김영수(21대·64) 회장이 재선을 노리는 가운데 고종환(69) 제유조합 이사장,김용구(64) 전 광업조합 이사장,손상규(60) 밸브조합 이사장,배영기(58) 기계연합회 회장,장인화(42) 철강조합 이사장이 출사표를 던졌다.1962년 기협중앙회가 설립된 이후 가장 많은 후보다.그동안은 대의원(지역·업종 대표 201명)들이 만장일치로 회장을 추대,선거를 치르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중소기협중앙회는 연간 운영예산(100억원)이 얼마 되지는 않지만 280만 중소기업을 대표하는 경제단체다.회원사만 8만여곳에 이르며,한때는 정부의 중소기업 물자구매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그래서인지 전경련이나 경총,상의 등 다른 경제단체들이 ‘회장구인난’에 시달리는 것과 달리 회장자리를 놓고 늘 경쟁이 치열했다. 일부 회장들은 바로 정치에 입문하기도 했다.박상규(17대 회장·한나라당)·박상희(18,19대 회장·민주당) 의원이 중소기협회장 출신이다. 6명의 후보들은 한결같이 ‘중소기업의 경영난 해소’를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다.새로 출마한 5명은 “김 회장이 임기 3년 동안 중소기업의 경영난 타개책을 정부에 적극 개진하지 못했고,이 때문에 중앙회의 위상이 크게 추락했다.”며 현 임원진을 공격하고 있다. 재선에 도전하는 김 회장은 “중소기협중앙회의 자립기반 확충을 위해 서울 상암동에 중소기업 종합지원센터를 지어 연 300억원의 임대수입을 확보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다.이에 최연소 후보인 장인화 이사장은 “김 회장이 지난 선거에 이어 또 다시 종합지원센터 건립문제를 들고 나왔으나 건립부지가 용도변경도 되지 않았다.”며 “올 하반기에 착공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했다.그는 “홈쇼핑 채널,금융사업 진출 등 실현 가능성있는 사업만 펼치겠다.”고 했다. 저변이 넓은 기계분야의 대표인 배영기 회장은 “1조원 규모의 중소기업 전용 공제제도를 도입하겠다.”고 얘기한다.고종환 이사장은 “힘있는 중소기협중앙회의 위상을 정립하겠다.”고 밝히고 있고,김용구 전 이사장은 “다양한 중소기업 진흥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한다.손상규 이사장은 “회장 단임제를 도입하고 수익모델을 창출하겠다.”고 말하는 등 후보들이 모두 ‘중기협 재건’을 밝히고 있다. 한편 선거전이 뜨거워지면서 중소기협중앙회 선관위는 대선처럼 후보자 토론회까지 계획하고 있다. 김경운기자 kkwoon@˝
  • [뉴스플러스] 潘외교 중동3개국 순방시작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18일 요르단과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등 중동 3개국 순방을 위해 출국했다. 반 장관은 5박6일간의 순방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이라크 추가 파병에 대한 이해와 지지를 구하는 한편,우리 정부의 대(對) 중동 외교 강화방안을 설명할 예정이다.우리 외교부 장관의 요르단 방문은 지난 1962년 양국 수교 이래 처음이며,사우디아라비아 방문도 25년 만이다.˝
  • 무엇을 할 것인가?/워너 본팰드등 지음

    러시아의 인문주의자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는 1862년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소설을 통해 차르 치하 젊은 지식인들에게 사랑과 혁명,진보와 인간애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했다.블라디미르 레닌 또한 이 ‘혁명의 교과서’에 자극 받아 1902년 같은 제목의 팸플릿을 발표했다.여기서 레닌은 계급해방과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선 ‘프롤레타리아 전위당’이 사회주의적 계급의식을 확고히 심어줘야 한다고 역설했다.레닌의 전위주의는 이후 20세기 사회주의 혁명의 모델이 됐다.그러나 이데올로기가 퇴조한 오늘날 사회주의 혁명은 무엇을 할 것인가,아니 무엇을 다르게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워너 본펠드 등 지음,조정환 옮김,갈무리 펴냄)는 그런 문제의식에서 출발,20세기 사회주의 혁명의 역사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위기,혁명의 방향 등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오픈 마르크시즘’ 계열을 대표하는 저자들은 사회주의는 비록 몰락했지만 ‘새로운 유형의 혁명’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이 바로 멕시코 민족해방군 사파티스타다.지난 94년부터 멕시코 라캉도나 정글을 중심으로 투쟁을 벌여온 사파티스타는 ‘국가권력의 장악’을 의식적으로 거부한다는 점에서 레닌주의와 구분된다.사파티스타 봉기 10주년을 맞아 나온 이 책은 20세기의 정신인 ‘무엇을 할 것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한다.1만 5000원. 김종면기자 jmkim@˝
  • 티베트 16회 탐험… 야생화 500종 찾아내/팔순의 현역 산악인 박철암 씨

    ‘쇠바위(철암 鐵岩)’.히말라야에 첫 도전장을 냈던 대한민국 산악 역사의 산증인이자 팔순의 현역 탐험가에 딱맞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이름에서 풍기는 강한 이미지는 첫인상에서도 그대로 묻어났다.그가 살아온 햇수를 나타내는 ‘80’이란 숫자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청년의 기운이 흘렀다.투박하고 거무튀튀한 손은 티베트의 모래 바람을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지난해 10월 16번째 티베트 고원을 탐험하고 돌아온 박철암 옹은 만나자마자 대뜸 “산을 아느냐.”고 물었다.“잘 모른다.”고 하자 “그럼 인생은 아느냐.”고 물었다.역시 “모른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할 말이 별로 없다.”며 먼저 자리를 뜨려는 깐깐한 할아버지를 간신히 붙잡았다.무협지처럼 흥미진진한 탐험담과 인생 이야기 보따리가 풀리기에는 한참의 침묵이 필요했다. ●무인구(無人區)의 꽃을 찾아 박 옹이 처음 티베트에 발을 디딘 것은 지난 1990년 6월20일.적막한 고원에 앉아 휴식을 취할 때 은은한 풀피리 소리가 들렸다.멀리서 양떼를 몰고 오는 목동들의 손에는저마다 잉카르빌리아라는 꽃을 이용해 만든 풀피리가 들려 있었다. 박 옹은 이때부터 잉카르빌리아와 목동,그리고 피리 소리에 이끌려 티베트 고원을 계속 찾았다. 16차례의 티베트 탐험은 전세계적으로도 전무후무하며 그가 걸은 길을 모두 합치면 9만 5000㎞나 된다.500여 종류의 야생화를 찾아내 ‘티베트의 꽃’이란 책으로 집대성했으며,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구를 탐험한 기록은 ‘지도의 공백지대를 가다’라는 책으로 엮었다. 특히 3년을 헤맨 끝에 92년 메코노프시스를 찾았을 때의 감동은 아직도 그대로다.히말라야와 티베트의 접경 지역인 좌촐라파스산 4900m 지점에서 발견한 메코노프시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꼽힌다. 그는 “손이 떨려 사진기 셔터를 누를 수조차 없었다.”면서 “꽃을 바라보며 ‘하느님’만 외쳤다.”고 말했다. 타클라마칸사막 밑으로 흐르는 물이 타림분지의 끝자락에 고여 이루어진 로프노르 호수는 며칠 사이에 형상이 변하는 신비한 자태로 박 옹을 매료시켰으며,실크로드 중간에 자리잡은 허탠 근처에서는 옥이지천에 널린 강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다.사막에서 천지를 집어 삼킬 듯한 돌개바람을 만났으며,야루창푸강을 건널 때는 급류에 휘말려 100여m를 떠내려 갔다. “말커차카 호수를 처음 발견하고 기뻐 날뛰다 길을 잃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뻔했지.항상 죽음을 각오하고 길을 떠나지만 막상 죽음이 엄습해오면 당황스럽더라고…” ●한국 최초로 히말라야 원정 지난 62년 국내 최초로 히말라야 원정에 나선 박 옹은 한국 산악계의 거목이자 살아있는 전설이다.변변한 지도조차 없이 나선 첫 히말라야 등정은 다울라기리봉 7751m 지점에서 그쳤지만 그의 도전은 언제나 한국 등반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다. 경희대 중문과 교수를 지낸 박 옹은 “당시 원정대를 꾸려 히말라야에 가겠다고 하자 문교부장관까지 나서서 말렸다.”면서 “누군가가 가야 할 히말라야라면 내가 첫 발을 내딛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후 65년 겨울에는 타이완 옥산을 등반했으며,67년에는 일본 북알프스 등반대장을 맡았다.71년에는 최초의 로체샬 원정에서 한국인 최초로 해발 8000m 선을 넘었다.84년에는 홀연히 히말라야 쿰부지역을 탐사하더니 90년부터 티베트의 대자연을 찾아 나섰다. 그는 타고난 탐험가다.평남 영원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2000m가 넘는 험준한 동백산과 낭림산을 동네 뒷산 오르듯 했다.고산지대에 지천으로 널린 마타리꽃은 소년의 가장 친근한 벗이었다. 박 옹은 “동백산과 낭림산 어느 골짜기에 난파한 배의 파편과 조개 화석이 있다는 어른들의 말이 산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다.”면서 “죽기 전에 통일이 된다면 어렸을 때 올랐던 그 산들을 탐험하고 싶다.”고 말했다. ●‘인생은 인내’ 평생 고원과 산악을 탐험한 박 옹은 무엇을 얻었을까? “참는 것을 배웠지.인생은 인내야.” 박 옹은 “사람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 참지 못할 일이 없다.”면서 “한순간만 참으면 곧바로 행복해진다.”고 강조했다. 참을 줄 아는 사람이 인생이란 멀고 험한 탐험을 즐길 수 있다고 믿는 박 옹은 요즘 젊은이들에게 할 말이 많다.불혹을 넘기면서부터 자신의 나이를 세보지 않았다는박옹은 “젊은이들의 이상이 점점 낮아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스스로 젊다고 생각한다면 에베레스트 정상에 눈을 맞추고,사하라사막을 품을 만한 넉넉한 가슴을 가져야지.” 지난 97년 명예교수직마저 내놓은 박 옹은 1년에 3∼4개월은 티베트를 탐험하고,나머지는 대부분 설악산 용대리 농가에서 꽃을 가꾸며 지낸다.“티베트가 나를 부르지 않을 때까지 계속 찾아 가겠다.”고 말하는 박 옹의 눈은 어느새 티베트 고원을 향하고 있었다. 곽영완기자 kwyoung@ ▲1924년 평남 영원군 출생 ▲1949년 경희대 산악부 창립 ▲1961∼97년 경희대 중문과 교수 ▲1962년 국내 최초 히말라야 원정 ▲1963∼72년 대한산악연맹 이사 1965년 타이완 옥산 등반 ▲1967년 일본 북알프스 등반 ▲1971년 로체샬 원정 ▲1990년 티베트 탐험 시작 ▲2003년 16번째 티베트 탐험
  • 피아노의 지평 넓힌 아믈랭, 그가 온다/30일 첫 내한 독주회

    피아노 음악의 레퍼토리는 무한한 것 같지만,실제 연주회장에서 만날 수 있는 범위는 매우 한정되어 있다.몇몇의 예외를 제외하면,고전에서 낭만에 이르는 수백곡 정도만이 반복 연주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62년 몬트리올에서 태어난 캐나다 피아니스트 마르크 앙드레 아믈랭(사진)이 특별히 평론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제한적인 피아노 음악의 레퍼토리를 확장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그가 30일 오후 7시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첫번째 내한 독주회를 갖는다. 아믈랭은 어떠한 난곡도 기교적인 어려움을 겪지않고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로 알려진다.나아가 복잡하고 난해한 곡의 구조를 풀어내는 혜안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는다.단순히 알려지지 않은 레퍼토리를 발굴하는 수준이 아니라,그의 손을 거치면서 작품의 진가를 새삼 확인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아믈랭의 레퍼토리는 상당 부분이 자료실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19∼20세기 작품들이다.지금까지 낸 20여종의 음반 가운데 상당수가 최초 녹음이거나 생소한 작곡가들을 다루었다.고도프스키·알캉·로슬라베츠·메트네르·볼콤·오른슈타인·그레인저 등 앨범의 표지를 장식한 작곡가 가운데 전문가라도 알만한 이름은 많지않다. 아믈랭은 내한 독주회에서도 특유의 레퍼토리를 펼쳐놓는다.알캉의 ‘이솝의 향연’과 스크리아빈의 소나타 제7번 ‘하얀 미사’,고도프스키의 ‘쇼팽 연습곡에 의한 53개의 연습곡’ 가운데 7곡,슈베르트의 작품을 리스트가 편곡한 ‘세 개의 행진곡’이다. 알캉은 쇼팽과 동 시대를 산 프랑스 작곡가로,그의 작품은 난이도가 높은 테크닉을 요구하여 한동안 거의 연주되지 않았다고 한다.수많은 편곡을 남긴 리스트는,다른 사람의 음악도 자신의 음악세계에 편입시켜 연주했다는 점에서 아믈랭과는 ‘닮은 꼴’이다. ‘슈퍼 비르투오조’같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은 찬사로 포장된 아믈랭.걸맞은 연주실력을 보여주어 국내 음악계에 자극을 줄 수 있을지 기대해보자.(02)780-5054. 서동철기자 dcsuh@
  • KOTRA 첫 여성부장 탄생/‘한국의 칼라 힐스’ 김선화씨

    1962년 코트라(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여성부장이 탄생했다.통상정보의 총본산으로 꼽히는 벨기에 브뤼셀무역관에서 ‘총성 없는 정보전쟁’을 치르고 있는 김선화(사진·39) 부장.연초 정기인사에서 승진의 기쁨을 맛봤다. 김 부장은 코트라가 통상기능을 갖고 있던 1992년부터 96년까지 우루과이라운드(UR)·세계무역기구(WTO) 협상실무 등을 도맡아 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칼라 힐스 전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에 견줘 ‘한국의 칼라 힐스’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도 이 때다. 김 부장은 “오는 5월 유럽연합(EU) 회원국이 15개국에서 25개국으로 확대됨에 따라 기업들의 EU시장 정보 요구가 쇄도하고 있다.”면서 “국내 기업들이 EU시장에 좀 더 많이 진출할 수 있도록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88년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나와 코트라에 입사,시장조사처·기획조사부·국제경제처·국제통상팀 등 핵심부서를 두루 거쳤다.한국무역협회에 근무하는 남편과는 3년째 ‘별거 아닌 별거’를 하고 있다.안미현기자 hyun@
  • 외교장관 반기문씨 임명/반기문은 누구

    1996년 3월 차관급인 의전수석에 발탁된 이후 8년 만에 장관이 됐다.동기 중 선두주자였으며,과장 때부터는 선배들도 추월했다. 주미대사관 참사관 겸 총영사,미주국장,주미공사를 거친 미국통이다. 차분한 성격에 일처리가 치밀하다.세련된 매너에 대인관계도 원만하다. 고교 시절 영어 경시대회에서 1등을 했고,고3 때인 62년 주한 미대사관에 의해 ‘한국을 대표하는 고등학생’으로 뽑혀 케네디 대통령도 만났다.부인 유순택씨와 1남2녀. ▲충북 음성(60) ▲충주고 ▲서울대 외교학과 ▲외시 3회 ▲외교부 제1차관보 ▲청와대 의전·외교안보수석 ▲주오스트리아대사 ▲외교부 차관
  • 화폐개혁 논란/정부“고액권으로 충분”韓銀 “디노미네이션 필수”

    화폐제도 개편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다.한국은행에 이어 정부와 정치권도 고액권 발행 방침 등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그러나 한은은 디노미네이션(화폐단위 절하)을 제도 개편의 핵심에 두어야 한다고 보는 반면 정부는 고액권 화폐만 발행하면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한은 “화폐단위 1000분의1로 조정을” 한은은 디노미네이션을 화폐제도 개편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기본구상은 지금의 화폐단위를 1000분의1로 조정하는 것이다.즉,1000원은 1원으로,1만원은 10원으로 각각 절하해 이를 기준으로 100원(지금의 10만원에 해당)짜리 고액권을 만들겠다는 복안이다.단위절하에 따라 미국의 센트(100센트는 1달러)와 비슷한 전(錢) 등 100분의1짜리 보조단위도 만든다는 방침이다. 한은은 계산·기록·지급·대외거래의 편의 등을 위해 디노미네이션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한은 관계자는 “분석 결과 앞으로 5∼6년 뒤면 조(兆)의 1만배인 경(京)이 각종 경제수치에 등장하게 될 것”이라면서 “이렇게 복잡한 단위를 쓰는 나라는 선진국 그룹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은은 정부 등 외부의 지적과 달리 디노미네이션에 따른 물가상승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한 관계자는 “유럽연합(EU) 12개국이 2002년 1월 유로화를 도입했을 때,이탈리아 리라화가 2000분의1 가까이 액면절하되는 등 대부분 나라들이 디노미네이션을 경험했지만 물가는 첫 달에만 0.2%포인트가 올랐을 뿐”이라고 설명했다.특히 상품가격을 구권기준과 신권기준으로 이중 표기하면 함부로 물가를 올리지도 못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한은도 디노미네이션에 들어갈 막대한 비용에 대해서는 자신하지 못한다.고액권을 발행하면 현금인출기,자동판매기 등만 고치면 되지만 디노미네이션을 하면 대기업부터 구멍가게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전체의 회계장부와 전산프로그램 등을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재경부 “디노미네이션,경기에 찬물” 재정경제부는 박승 한은 총재가 2002년 취임 직후 화폐개혁 구상을 꺼냈을 때부터 ‘디노미네이션 반대,고액권 발행 찬성’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김광림 차관은 13일 기자들과 만나 “디노미네이션을 하게 되면 과소비를 부추길 수 있고 물가도 자극할 수 있다.”면서 “득실을 따져 본 결과,경제적 실효가 크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가뜩이나 경기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화폐개혁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할 경우,기업·가계 등 경제 주체들의 심리적 위축과 경제적 충격에 대한 우려감도 깔려 있다. 재경부는 고액권 발행 논의가 나온 데 대해서는 내심 반기는 눈치다.겉으로는 ‘연간 수표 발행 및 거래비용 8000억원 절감’ 등을 이유로 내세우고 있지만 속으로는 경기부양효과를 기대하고 있다.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도 이날 10만원권 화폐 발행에 협조할 뜻을 밝혔다. ●시민단체들 고액권 발행 반대 전문가들은 대체로 고액권 발행에는 찬성하면서도 디노미네이션에는 신중한 입장이다.LG경제연구원 김성식 연구위원은 “10만원권 발행에는 찬성”이라면서 “그러나 디노미네이션은 경제위기 상황 등에서 개발도상국들이 하는 혁명적인 조치로 시장주도 경제가 자리잡은 국내에는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한국개발연구원(KDI) 김현욱 박사는 “디노미네이션은 물론,고액권 발행 또한 비용에 비해 실익이 크지 않을 것”이라며 “신용카드와 전자결제가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10만원짜리 고액권을 발행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시민단체들도 뇌물제공 등 부정부패를 부추기고 지하경제 등 자금의 음성화를 조장할 수 있다며 반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한은이 디노미네이션을 관철시키기 위해 고액권 발행을 같이 제시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금융권 관계자는 “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하면 고액권 발행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된다.”면서 “두가지를 동시에 추진한다는 것은 다소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안미현 김태균 김유영 기자 hyun@ ■화폐개혁 3차례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 3차례 화폐개혁이 있었다. 첫번째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8월.북한군이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에 보관돼 있던 1000원권을 탈취,북한 인민권과 함께 시중에 유통시키고 100원권을 마구 찍어내면서 생겨난 경제교란 때문이었다.정부는조선은행권 유통을 정지시키고 이를 한국은행권으로 교환하도록 했다.53년 1월까지 5차례에 걸쳐 719억원의 조선은행권이 한국은행권으로 교체됐다. 두번째는 살인적인 인플레를 잡기 위해 53년 2월 이뤄졌다.45년부터 52년까지 산업생산은 부진한데 막대한 군사비 지출이 이어져 물가상승률이 무려 4만여%에 달했다.정부는 화폐단위를 ‘원’에서 ‘환’으로 바꾸고 구권 100원을 1환으로 교환해줬다. 특히 화폐교환 때 일정액을 은행에 예치하는 ‘봉쇄(封鎖)예금’을 의무화해 과잉유동성(돈)을 흡수했다.물가가 잡히고 봉쇄예금을 통해 산업자금까지 확보,1석2조의 효과를 올렸다. 세번째는 62년 6월.5·16쿠데타로 집권한 군부는 10환을 1원으로 바꿨다.목적은 물가상승 억제와 산업자금 확보를 위한 봉쇄예금의 도입.53년의 성공적인 화폐개혁을 본뜬 것이었지만 최고 100%에 이르는 봉쇄율에 국민들이 강력 반발하자 1개월여만에 자금봉쇄를 해제했다. 김태균기자 windsea@ ■새 화폐인물 누구로 고액권 발행에 대한 논의가 급진전되면서 남성 전유물로 통했던 화폐모델에 여성이 채택될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국은행 김두경 발권국장은 “현재 지폐의 모델이 모두 조선시대의 이씨 성을 가진 남자들(세종대왕,이황,이이,이순신)로만 돼 있다는 지적이 있다.”며 “시대가 바뀐 만큼 여성모델을 화폐에 등장시키는 것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동덕여대 김경애 교수 등 일부 여성학자들은 그간 여성지위 향상 차원에서 여성을 화폐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지난해 만들어진 ‘여성인물을 화폐에! 시민연대’는 모델후보로 선덕여왕,신사임당,유관순,명성왕후,허난설헌,최승희를 꼽았다.일본은 오는 7월부터 메이지시대 여성 소설가인 히구치 이치요 초상을 넣은 화폐를 발행할 예정이며,호주는 화폐 양면에 각각 남성과 여성모델을 쓰고 있다. 남성 화폐모델로는 장영실,정약용,광개토대왕,김구 선생,안중근 의사,담징,김홍도 등이 거론되고 있다.2001년 한은의 여론조사에서는 김구,안중근이 이황,이이보다 순위가 높았다. 한은은 설문조사를 통해 화폐모델을 선정할 계획이며,남성 화폐모델을 채택할 경우에도 조선시대를 벗어나 5000년 역사로 지평을 넓히겠다는 입장이다. 김유영기자 carili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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