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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성비 균형/함혜리 논설위원

    1962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가족계획사업 결과 1980년대 중반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현저히 떨어졌다. 인구억제 정책의 성공은 그러나 우리 사회에 새로운 고민 거리를 안겼다. 다름아닌 출생 성비(性比)의 불균형이었다. 전통적인 남아선호(男兒選好) 관념이 잔존한 상태에서 인공임신중절이 보편화되고 태아성감별을 위한 의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출산율 저하와 여러가지 변수들이 상호작용한 결과였다.‘아들딸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구호가 무색하게 이왕이면 아들을 낳으려는 여성들이 많았던 탓이다. 여자 아이 100명당 남자 아이 출생비율은 1980년 104.3을 저점으로 계속 높아져 1990년 115.5까지 증가했다. 성비 균형이 무너지면서 1990년대 후반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저학년에서는 여자 짝을 갖지 못하는 남자 어린이들이 늘었다. 학교에서 여자 짝을 갖게 되면 그야말로 ‘경사’였다. 성비 불균형에 따른 신부 부족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특히 2010년에는 신랑감(26∼30세)이 총 198만 9000명인 반면 신붓감(23∼27세)은 161만 2000명에 불과해 성비가 123.4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 결과 남자의 20% 정도가 결혼에 애를 먹을 것으로 보인다. 이 예측대로라면 2년 뒤 대한민국 결혼시장에는 대재앙이 닥칠 공산이 크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의 남녀 출생 성비가 25년 만에 마침내 정상 수준인 106.1로 돌아섰다는 소식이다. 여성의 지위 향상과 남아선호 사상 약화 등 우리 사회의 급속한 변화 양상과 맞물려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나 아직 안심하기엔 이르다. 셋째, 넷째 아이의 경우 여전히 성비 불균형이 심하고 이런 현상은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심한 편이다. 성비 불균형을 야기하는 근본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남아선호 관념은 하루 아침에 근절될 수 없는 전통적인 의식구조인데다 아직 사회 곳곳에 여성 차별이 남아있다. 더구나 헌법재판소가 지난달 31일 태아 성감별 고지를 금지한 의료법 조항을 헌법불합치로 선언해 태아 성감별이 사실상 허용될 예정이다. 남녀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함께 풀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최악의 전범 6인을 잡아라’

    ‘최악의 전범 6인을 잡아라’

    보스니아 인종청소의 주범 라도반 카라지치는 13년 만에 결국 체포됐지만 아직도 많은 전범 용의자들이 국제 사회의 수색망을 뚫고 도피행각을 벌이고 있다. 포린폴리시 인터넷판은 5일 전쟁과 반인도적 행위로 국제사법기관에 의해 1급 수배령이 내려진 최악의 전범 6인을 소개했다. 라트코 믈라디치는 카라지치와 더불어 보스니아 학살을 자행한 공범으로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의 수배를 받고 있다. 현상금만 무려 600만유로(약 94억원)에 달한다.2001년 베오그라드 시내에서 목격되는 등 세르비아내에 은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나 여전히 행방은 묘연하다. ‘죽음의 의사’로 불리는 독일 나치 전범 아리베르트 하임도 공개수배 1순위 인물이다.2차 세계대전 때 오스트리아 유대인 포로수용소에서 의사로 근무하면서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온갖 반인류적 실험을 자행했다.1962년 이후 종적을 감췄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정부는 현상금 49만달러(5억원)를 내걸고 행적을 뒤쫓고 있다. 최근 칠레에 은신 중이라는 첩보가 입수됐다. 오마르 하산 알 바시르 수단 대통령은 다르푸르 분쟁 전범 혐의로 지난달 24일 기소됐다. 국제형사재판소(ICC) 검찰은 바시르가 2003년 발발한 다르푸르 내전에서 반군과 민간인 등 3만 5000여명을 살해하고,250만명의 난민을 발생시킨 혐의로 체포영장을 신청했다. 하지만 바시르가 혐의를 부인하며 출두를 거부하는 데다 아프리카연합(AU) 등도 반발하고 있어 앞으로 추이가 주목된다. 콩고민주공화국의 전 반군 그룹 지도자 보스코 은타간다도 지난 4월29일 ICC에 의해 공개수배령이 내려졌다. 별명이 ‘터미네이터’인 은타간다는 2002∼2003년 콩고 동부 이투리지역에서 15세 미만 어린이들을 강제 징집해 전투에 참여하도록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우간다 반군단체 ‘신의 저항(LRA)’을 이끄는 조지프 코니는 2만 5000명의 어린이를 납치하고, 학살을 자행한 혐의로 2005년 기소됐다. 우간다 정부는 테러를 막기 위해 2006년 코니에게 특별사면을 제안하고, 정전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코니는 ICC가 170만달러의 현상금까지 내걸고 체포 시도를 강행하자 반군 해산을 거부하고 있다. 르완다의 백만장자 펠리시앙 카부가는 르완다 대학살 사건의 배후로 1998년 국제수배범 명단에 올랐다. 그는 94년 르완다 내전 당시 군부에 무기를 판매해 떼돈을 벌었다. 유엔은 그가 케냐에서 정부의 보호 아래 은신 중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500만달러를 현상금으로 내걸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러시아 양심 잠들다

    ‘러시아의 양심’으로 불리던 소설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3일(현지시간) 모스크바 근교의 자택에서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솔제니친의 아들인 스테판은 “아버지가 오후 11시35분쯤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고 말했다고 이타르타스 통신이 전했다. 1962년 자신의 수감생활을 바탕으로 스탈린 시대 강제수용소의 실태를 그린 단편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이어 당국의 탄압 속에 ‘제1원’,‘암병동’ 등 문제작을 잇따라 내놓으며 197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73년 장편 ‘수용소 군도’를 출간한 뒤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추방되어 독일, 스위스, 미국 등에서 오랜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 구소련 탄압에 저항… 러 문학전통 살려

    구소련 탄압에 저항… 러 문학전통 살려

    ‘수용소 군도’의 작가인 솔제니친의 생애는 ‘탄압’과 ‘저항’으로 점철돼 있다. 그는 평생을 타협하지 않는 비판을 업으로 삼았고, 그런 그에게 옛 소련 당국의 제재는 가혹했다. 솔제니친은 1918년, 카프카스 키슬로보드스크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출생 직전 세상을 떠났다. 예술에 조예가 깊던 어머니는 솔제니친이 일찍부터 문학에 눈뜰 수 있게 도왔다. 솔제니친은 대학을 졸업한 뒤, 제2차 세계대전에 포병으로 참전했다.1945년, 동프로이센에서 친구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로 그는 10년을 수용소에서 보내게 된다. 스탈린을 비난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경험을 바탕으로 첫 작품을 출간했다.1962년 문학지 ‘노비미르’에 발표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다. 한 서민 출신 죄수가 스탈린 시대 수용소에서 보내는 하루를 그렸다. 솔제니친은 단숨에 유명인사가 됐다. 이후 1963년에는 ‘마트료나의 집’,‘크레체토프카역에서 생긴 일’,‘공공을 위해서는’ 등의 작품을 잇따라 내놓으며 작가로 입지를 굳혀갔다. 그러나 1964년 옛 소련은 브레즈네프가 서기장으로 취임하면서 이념적 규제가 심해졌다. 그의 작품은 출판이 금지됐고 1969년에는 작가동맹에서도 제명됐다. 그에게는 ‘반체제 인사’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1968년작 ‘암병동’을 비롯한 이후의 작품들은 해외에서 출간해야 했다. 국내에서는 자비 출판 형태로 암암리에만 발표할 수 있었다. 솔제니친은 1970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도덕적인 힘으로 러시아 문학의 전통을 추구했다.”는 것이 스웨덴 한림원이 밝힌 선정 이유였다. 노벨상 수상으로 탄압은 더욱 거세졌고, 그는 귀국하지 못할까봐 스톡홀름에서 열린 시상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1973년 그의 대표작인 장편 ‘수용소 군도’가 파리에서 출판됐다. 옛 소련의 체포, 심문, 정죄, 이송, 구금 등을 묘사한 작품이다. 당국은 그에게 반역죄를 씌웠고 강제 추방 명령을 내렸다. 그는 옛 소련이 무너진 1994년에야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귀국한 뒤에도 물질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향수를 끊임없이 비판했다. 하지만 무자비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베일에 가려 있던 스탈린 시대의 참상을 처음 드러낸 솔제니친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폭로 일변도 문학에, 지나친 국수주의자”라는 것이다. 냉전시대 서방의 평가와 21세기적인 시선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고도를 기다리며’ 40년째 연출 임영웅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고도를 기다리며’ 40년째 연출 임영웅

    여기 지독히 몰개성한 방랑자들의 무궁한 지껄임이 있다. 에스트라공:그만 가자. 블라디미르:가면 안 되지. 에스트라공:왜? 블라디미르: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참 그렇지. 그 유명한 ‘고도를 기다리며’에 등장한다. 얼핏 쓸모없는 대사 같지만 연극 전편에 소나타 2중주처럼 깔린다. 그저 그렇게 살아온 이른바 유쾌한 허무주의자들이 아무 생각없이 수시로 내뱉는다. 시간과 약속 장소도 종종 헷갈릴 정도로 판단력이 흐리다. 하지만 이들은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점에는 서로의 생각이 일치한다.‘고도∼’(이하 고도)의 마지막 장면을 잠시 들여다보자. 에스트라공:우리 헤어지는 게 어떨까, 그게 나을지도 몰라. 블라디미르:내일 목이나 매자. 고도가 안오면 말야. 에스트라공:만일 온다면? 블라디미르:그럼 살게 되는 거지,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가자(그러나 둘은 움직이지 않는다). 사뮈엘 베케트는 ‘고도’로 1969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작품성에 대해 새삼 거론할 필요는 없겠지만 아일랜드 사람들은 베케트의 ‘고도’를 셰익스피어의 그 무엇보다 더 자랑스럽게 여긴다. 베케트의 모교인 트리니티대학에서는 ‘베케트센터’를 설립, 이를 기념하고 있으며 얼마 전에는 ‘베케트극장’까지 새로 오픈했다. ‘젊은 원로’ 연출가 임영웅(74)씨. 그는 1969년 서울에서 ‘고도’를 처음 무대에 올리면서 운명적으로 만났다. 이후 거의 매년 공연을 해왔다. 올해로 40년째. 그러는 사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연극계에서도 ‘임영웅=고도’가 됐음은 물론이다. 하기야 우리나라 대학 연극영화과에 다닌 학생들이라면 ‘임영웅의 고도’를 최소 한번쯤 이상 관람했으니 말이다. 이런 ‘임영웅의 고도’가 오는 10월21일부터 5일간 트리니티대학 베케트극장에서 역사적인 공연을 갖는다.1990년 10월 아일랜드의 더블린 연극제에 참가한 적은 있지만 베케트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긴 모교에서 정식 초청받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이번 공연은 올해로 한국·아일랜드 수교 25주년을 위한 문화행사에 초청됐으니 그 의미가 사뭇 크다.‘고도’가 더블린 연극제에 참가할 당시 “한국의 고도는 기다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등 현지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지난해 트리니티대학 교수가 방한했을 때 ‘임영웅의 고도’를 관람하면서 자연스럽게 초청제의가 있었다. 그동안 ‘임영웅의 고도’는 아일랜드 외에 프랑스 폴란드 일본 등에서도 여러 차례 초청될 정도로 수준 높은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한국 연극계의 거목으로 통하는 임씨는 1955년 ‘사육신’으로 데뷔했으니 올해로 연출 인생 53년이기도 하다. 그는 여전히 은퇴를 모르는 현역이다. 최근 막을 내린 ‘달이 물로 걸어오듯’ 외에도 뮤지컬 ‘갬블러’의 연출을 맡았으며, 올가을에는 연극 ‘산불’과 ‘고도’를 연달아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체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서울 홍익대 인근의 산울림극장에서 그를 만났다. ▶어떻게 해서 ‘고도’를 처음 만나게 됐습니까. “1969년 한국일보 사옥이 신축됐지요. 당시 김성우 주간한국 국장이 점심을 함께 하면서 사옥 12층에 극장이 하나 생겼는데 개관공연으로 연극을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물어요. 선뜻 대답했지요. 우선 등장인물도 적고 무대도 복잡하지 않은 ‘고도’를 떠올렸습니다.3일 동안 작품을 다 읽고 나서 ‘아차 이거 정말 난공사구나.’라고 후회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합니까. 계속 밀어붙였지요. 그런데 공연 올리기 일주일 전 베케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거 아닙니까. 개막 일주일 전에 입장권이 동나고 말았습니다. 나의 연극 인생에서 막이 오르기도 전에 표를 다 팔고 초연한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겁니다.” ▶그동안 ‘고도’만 20여차례 연출한 것으로 압니다. “베케트는 여러 연극적 기법을 동원해 현대인의 모습, 도덕과 인생의 의미 등을 그려냈습니다. 매번 작품을 대할 때마다 저번 공연에서 찾지 못한 것을 발견할 정도로 깊이 있고 폭넓은 작품이라고 실감합니다. 일단 ‘고도’를 올리면 객석이 꽉 찹니다. 현대연극을 이해하려면 ‘고도’를 거쳐야 하니까요. 연극영화과 학생들에겐 필수코스나 다름없어요.‘고도’를 연출할 때마다 신선하고 새로운 깊이를 느낍니다. 또 그걸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하지요.40년 전 나의 인생관과 지금의 인생관이 다르듯이 말입니다.” ▶베케트의 본고장에서, 그것도 한·아일랜드 수교 25주년 초청 공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겠습니다. “1989년 아비뇽 연극제에 ‘고도’를 갖고 참가했지요. 동양에서 ‘고도’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유럽 사람들의 관심이 많았습니다. 당시 아일랜드 관계자가 다음해 더블린 연극제에 정식 초청을 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현지에서 공연을 했는데 리셉션때 ‘당신네 고도를 보니까 새로운 것을 많이 발견했다.’는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튿날 아일랜드 최대 일간지 ‘더 아이리시 타임’ 등 대부분의 신문 1면에서 ‘한국의 고도는 기다릴 가치가 있었다’‘활발하고 감동적인 연기’ 등의 찬사를 쏟아내더군요. 이번에는 베케트가 다니던 모교에서 공연이 이뤄지는 만큼 어떤 반응이 나올지 기대됩니다.” ▶부조리 연극의 권위자 마틴 에슬린과도 만난 적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에슬린은 1988년 서울연극제 세미나에 초청을 받고 방한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떠나던 날 우리의 ‘고도’를 공연하기 시작하게 됐지요. 에슬린도 ‘한국의 고도’를 궁금하게 여겼고 결국 일정을 이틀 미루고 ‘고도’를 관람하게 됐습니다. 공연이 끝난 뒤 그는 배우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베케트의 작품세계를 정확히 해석했다.’고 칭찬했지요. 베케트 전문가인 그의 말은 곧 ‘보증수표’가 됐고 아비뇽축제에도 참가하게 됐습니다.” ▶그동안 ‘고도’를 해오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배우는 누구인가요. “다들 특징이 있지만 초연 때 에스트라공을 맡은 함현진씨가 생각납니다. 추송웅씨와 중앙대 동기인데 1970년대 후반 애석하게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연출기법이 사실주의와 심리주의라고들 합니다. “그건 평론가들이 하는 몫입니다. 물론 연극의 기본은 리얼리즘에 있지만 모든 것이 리얼리즘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요. 연극은 인간을 그리는 예술이기 때문에 무대위에서 사람이 사는 얘기가 펼쳐집니다. 관객이 보고 나오면서 저 연극과 내 삶의 차이가 무엇이냐, 관객의 삶에 보탬을 주는 게 바로 연극이지요. 일본 시즈오카대학의 센다 아키히코 교수는 우리 ‘고도’를 보고 나더러 ‘수비범위가 넓은 연출자’라고 하더군요.” 어떻게 해서 그 범위가 넓어졌을까. 그는 태어날 무렵 재즈 연주가였던 아버지를 따라 일본과 중국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다 세살 때 모친과 사별하자 기독교 권사인 조모의 밑에서 자랐다. 조모는 연극과 영화에 관심이 컸다. 그래서 어린 임영웅은 교회와 극장엘 자주 다녔다. 또 숙부가 명지휘자로 이름을 날렸던 터라 자연스럽게 차이코프스키와 베토벤을 접했다. 열두살 되던 해 아버지와 사별한 그는 휘문중학에 진학하면서 예술적 끼를 인정받는다.1946년 개교 50주년 기념으로 명동의 시공관극장에 올린 ‘마의태자’에 출연했으며 휘문고에 진학하면서 교내 예술제 행사를 주도했다. 당시 백두진 재무장관, 박종화 서울신문 사장 등을 찾아가 다짜고짜 돈을 받아낼 정도로 뱃심 또한 두둑했다. 서라벌예술대학에 진학하던 해에 ‘사육신’(유치진 작) 연출을 맡아 전국대회에서 입상하면서 데뷔했다. 이후 세계일보-조선일보-대한일보 등에서 문화부 기자 생활을 하면서 연출안목과 인맥을 넓히기도 했다. 그의 동반자 오증자(72)씨는 불문학을 전공하고 서울여대 교수를 역임하면서 ‘고도’를 번역했다. 뒤를 이어 서울여대 교수로 있는 아들 임수현씨도 베케트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변에서는 내공이 간단치 않은 ‘베케트 집안’이라고 얘기한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정연호기자 tpgod@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34년 서울 출생 ▲55년 ‘사육신´으로 연출 데뷔 ▲58~62년 세계일보·조선일보·대한일보 문화부 기자 ▲63년 동아방송 드라마 PD ▲69년 한국연극협회 이사 ▲73년 KBS TV연예부 차장·라디오국 차장·제작위원 ▲85년 소극장 ‘산울림´ 창단·대표(현) ▲91년 한국연극연출가협회 초대회장 ▲92년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99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연극·현) ▲99∼2005년 한·일문화교류회의 한국측 위원 ▲2001년 문화관광부 21세기문화정책위원 ▲2006년 한·일문화교류회의 위원, 국립극단자문위원회 위원장, 단국대 초빙교수 # 수상 한국백상예술대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동랑연극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 # 주요 작품 사육신, 살짜기옵서예, 환절기, 고도를 기다리며, 산불, 위기의 여자 등
  • [한국의 대표기업] (33) (주)효성

    [한국의 대표기업] (33) (주)효성

    효성은 섬유산업의 대표주자로 알려져 있으나 지금은 섬유 이외에 전력중공업·화학 등의 부문에서도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 또한 효성의 미래를 밝혀줄 신재생에너지·전자소재 등 신성장동력 발굴에도 적극적이다. ●생활문화 속의 대표기업 효성 효성이란 이름은 일반 소비자들에겐 다소 낯설다. 중간재 위주의 사업 구성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생활 곳곳에 효성의 제품이 자리잡고 있다. 원사와 타이어코드가 대표적이다. 효성이 생산하는 스판덱스·나일론·폴리에스테르 등 화학섬유는 옷의 원료로 사용된다. 효성의 ‘크레오라’는 세계 2위의 스판덱스 브랜드다. 운동복·등산복·내화복(耐火服) 등 고기능성 섬유 제품에서도 앞선 기술력으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최근에는 국내 최초로 재활용이 가능한 섬유인 리젠을 개발했다. 아디다스·노스페이스·컬럼비아 등 의류 업체에 원료를 공급하고 있다. 흔히 고무로 알고 있는 타이어에는 안전과 효율을 위해 고강력원사로 만든 타이어코드라는 보강재가 들어가는데 효성은 이 분야 세계 시장점유율 1위 업체다. 굿이어·미셰린·브리지스톤 등 세계 굴지의 타이어 업체와 한국타이어·금호타이어 등 국내 업체에도 납품한다. 전세계 자동차 3∼4대 가운데 1대꼴로 효성의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 이밖에 자동차용 안전벨트를 비롯, 각종 산업용벨트도 효성의 고강도섬유로 만든다. 소비자가 흔하게 접하는 효성의 제품으로는 페트병도 있다. 효성은 국내 페트병 생산 1위 업체다. 음료·주류·장류·제약 등 모든 종류의 페트병을 만든다. 국내 최초로 온장고용 페트병과 맥주용 페트병도 만들었다. 최근에는 국내 처음 무균충전시스템인 아셉시스 페트병도 제작했다. 초고압변압기·차단기·현금인출기·펌프 등의 제품 시장점유율도 국내 1위다. 고(故) 조홍제 회장은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선친인 고 이병철 회장과의 14년에 걸친 동업을 청산하고 1962년 ‘효성물산’이란 이름으로 독자사업을 시작했다. 국가경제 발전을 위해 경제성장 기여도가 높은 화학섬유산업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룹의 이름인 효성은 샛별을 뜻하는 말로 ‘민족의 앞날을 밝게 비칠 동방의 별’이란 뜻을 담고 있다. 그의 나이 56세 때 일이다. 이듬해인 1963년 대전피혁을 손에 넣었고,1966년 11월엔 동양나이론을 창립했다. 창립 4년여만인 1971년 1월 효성은 국내 민간기업 최초로 기술연구소를 만들었다.1973년부터 폴리에스테르 원사를 생산하는 동양폴리에스터, 염색가공을 담당하는 동양염공 등 화학섬유 계열사들을 잇따라 설립, 국내 화섬 업계 선두주자로 입지를 굳혔다. 1975년 효성중공업의 전신인 한영공업을 인수해 대표적인 전력사업체로 키웠다. 변압기·차단기·발전기 등을 주로 생산한다. 국내에선 이미 송배전 설비분야 1위 업체이다. 해외에서는 지난 5월 난퉁(南通)효성 변압기공장을 설립해 중국시장 교두보를 확보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해외수주도 꾸준히 늘리고 있다. 지난해에는 최고 전압용 차단기인 1100㎸ GIS(가스절연개폐장치) 개발에도 성공,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자랑했다. 영업이익도 전력중공업 부문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80대 이후부터는 페트병·카펫·강선재·컴퓨터·엔지니어링 플라스틱·스틸코드·금융자동화기기·건설자재·산업용 펌프 등 기존 사업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부문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갔다. 1990년대 들어 효성은 고부가가치 신소재 제품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1997년 세계에서 4번째로 일명 ‘섬유의 반도체’로 불리는 스판덱스를 독자 개발했다. 이에 앞서 1992년 국내 최초로 우리나라 전기발전사에 한 획을 그은 765㎸급 초고압 변압기도 개발했다. 특히 1998년 주력 계열사인 효성T&C(구 동양나이론), 효성생활산업(구 동양폴리에스터), 효성중공업, 효성물산을 ㈜효성으로 통합하는 한편 강도높은 구조조정을 단행, 글로벌 대표기업으로서의 기반을 구축했다. 효성의 화두는 신성장동력 사업 발굴이다. 풍력·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산업을 비롯해 전자소재, 금융, 건설 등의 분야로 영역을 확대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우선 오는 2010년까지 세계 10대 풍력 발전 설비업체가 목표다. 지난 2006년 초 국내 최초로 기어드 타입의 750㎾ 풍력 터빈을 개발해 상용화했으며 2㎿ 발전시스템도 자체 개발을 완료하는 등 국내 풍력 발전 산업의 선두주자다. 조만간 3㎿급 해상용 풍력 터빈 등도 개발해 동아시아·호주·미국 등으로 수출할 계획이다. 태양광 발전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지난 5월 준공한 3㎿ 규모의 삼랑진 태양광발전소는 국내 단일 태양광 발전설비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이밖에 연료전지, 매립가스 발전, 폐기물 소화가스 발전 등 사업도 벌이고 있다. 3년전부터는 전자소재 부문을 차세대 전략사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울산 용연에 총 1300억원을 투입, 연산 5000만t 규모의 LCD용 TAC 필름 공장 건설에 나섰다.2009년 완공이 목표다. 현재 전량을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는 TAC필름의 수입 대체는 물론, 한국 내 디스플레이 완성품 및 중간제품 업체의 경쟁력 강화에 기여할 전망이다. 이밖에 올 들어 중견 건설업체인 진흥기업을 인수, 기존 건설부문과의 시너지 효과를 내도록 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에 앞서 지난해 5월에는 리스전문업체인 스타리스를 인수, 여신금융전문업으로도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효성은 금융업을 신성장동력의 하나로 설정했다. ●사업다각화로 글로벌 효성으로 성장 섬유와 타이어코드 부문도 강화할 계획이다. 섬유쪽은 스판덱스 매출 세계 1위를 목표로 중국을 비롯해 터키에도 생산기지를 확충하고 있다. 타이어코드는 중국·미국·유럽·남미 등에 이어 2010년까지 베트남에 총 1억 6000만달러를 투자해 연산 5만 3000t 규모의 공장도 세운다. 효성 관계자는 “48개 해외법인 등을 갖고 있는 ㈜효성의 지난해 매출은 5조 4251억원으로 그중 약 70%가량을 해외에서 냈다.”면서 “앞으로도 글로벌 현지 생산체제 구축을 강화해 전세계 고객들에게 현지 로컬 기업보다 안정적이고 신속한 제품공급 및 기술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글로벌 효성으로 각인시키겠다.”고 말했다. 주현진기자 jhj@seoul.co.kr
  • [부고] ‘3선 개헌’ 반대… 헌정사 큰 획

    [부고] ‘3선 개헌’ 반대… 헌정사 큰 획

    24일 83세를 일기로 별세한 심산(心山) 양순직 선생은 헌정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서울신문 25일자 26면 참조> 충남 논산 출신으로 1962년부터 서울신문 사장을 지냈고,6·7·14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서울신문 사장 시절에 대해 그는 “정부 비판기사를 허용하며 편집국 독립을 인정해 신문사가 활기를 찾은 1년 동안이 참 원 없이 일해 본 기억으로 남는다.”고 회고록에서 회상했다. 양 전 사장은 여당인 공화당 의원으로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69년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3선 개헌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앞서 같은 해 4월 공화당 의원들이 당론을 어기고 권오병 문교부 장관 해임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4·8 항명파동’을 주도할 때 예고된 일이기도 했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이 암살되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며 계엄이 선포되자 양 전 사장은 재야 운동가인 함석헌·백기완 선생 등과 함께 통대선출저지 국민대회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흔히 YWCA 위장결혼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인해 기소된 양 전 사장은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84년부터 재야단체인 민주헌정연구회를 만들어 활동한 양 전 사장은 그 인연으로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정치를 함께 하게 됐다.87년 평민당 부총재를 지냈다. 이후 92년 고인이 된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통일국민당에 합류하면서 DJ와 다른 길을 걸었다. 14대 국회의원을 끝으로 의원직에서 물러난 뒤 양 전 사장은 자민련 고문, 충청향우회장, 한국자유총연맹 총재 등을 지내며 현안마다 방향을 제시하는 국가 원로의 역할을 했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제18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4강전 1국] 조훈현, 통산 2500대국 초읽기

    [제18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4강전 1국] 조훈현, 통산 2500대국 초읽기

    제6보(51∼70) 조훈현 9단이 세계최초로 2500대국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지난 17일 농심신라면배 예선전에서 윤준상 7단과 2498번째 대국(1770승 9무 719패)을 치른 조훈현 9단은 앞으로 대기록 달성에 단 두 판만을 남겨두고 있다. 이는 1962년에 입단한 조훈현 9단이 46년간의 프로기사 생활동안 매년 평균 55국을 두어온 셈이다. 또한 조9단은 통산 최다승(1770승), 최다타이틀 획득부문(157회) 등에서도 굳건히 1위를 지키고 있으며, 단일기전 최다연패(패왕전 16연패), 세계 최연소 입단(만9세) 등 다채로운 기록도 함께 보유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린하이펑 9단이 통산 2142국을 둔 것이 최다대국 기록이며, 국내에서는 서봉수 9단이 2251국으로 조9단의 뒤를 잇고 있다. 흑51을 활용한 뒤 흑55로 모양을 갖추고 나니 어느덧 상변 흑대마의 안형이 풍부해진 모습이다. 흑59는 당장 손을 빼더라도 (참고도1)의 수순처럼 좌상귀 흑이 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지만, 백7로 흑 두점이 선수로 잡히는 것이 아프다. 흑63까지의 후수 삶은 예정된 수순. 홍성지 6단으로서는 양쪽의 대마를 알기 쉽게 수습했다고 판단하는 순간 백64로 찌른 것이 보기보다 통렬한 안형의 급소였다. 물론 여기서 흑이 (참고도2) 흑1로 막는다면 대마를 살리는 데는 지장이 없다. 그러나 이 그림은 백의 외곽이 너무 두터워져 살더라도 흑이 큰 불만이다. 이런 이유로 흑은 67로 버틴 것인데 가만히 백70을 밀고 들어온 점이 또 한번 흑을 괴롭힌다. 최준원 comos5452@hotmail.com
  • [부고] 양순직 前서울신문 사장 별세

    [부고] 양순직 前서울신문 사장 별세

    3선 국회의원을 지낸 양순직 전 서울신문사장이 24일 오후 5시 지병으로 숨졌다.83세. 서울대 교육학과를 졸업한 양 전 사장은 해군본부 정훈차감을 거쳐 1962년부터 약 1년간 서울신문 사장을 지냈다. 고인은 또 충남 논산지역 등에서 6·7·14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공화당 재경위원장을 지냈지만, 나중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개헌에 반대하다 공화당에서 제명되기도 했다. 신민당 부총재, 평화민주당 부총재 등을 역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정순자(76)씨와 아들 희태(개인사업), 희룡(개인사업), 상훈(에프아이텔 대표)씨 등 3남 4녀가 있다. 발인은 26일 오전 9시, 장지 천안공원묘지,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다.(02)3010-2631.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Local] 동남참게·각시붕어 방류

    현대자동차와 울산시는 22일 태화강 생태자원 복원사업의 하나로 멸종위기에 처한 동남참게와 각시붕어 각 1만마리씩을 태화강 삼호교 부근에서 방류했다. 현대차와 울산시는 각시붕어가 번식하는데 공생관계에 있는 말조개 300여마리도 함께 방류했다. 지난해 8월에도 태화강 대숲생태공원 태화강변에서 어린 동남참게 1만마리를 방류했다. 동남참게는 1962년 울산공단 조성이 가속화되면서 황어·연어와 함께 태화강에서 자취를 감췄다.울산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서울신문 창간 104주년 특집-세계로 뛰는 한국 대표기업] LG전자

    [서울신문 창간 104주년 특집-세계로 뛰는 한국 대표기업] LG전자

    LG전자는 전략 제품과 프리미엄 제품으로 해외시장에서 브랜드 위상을 강화하고 있다. LG전자는 1962년 11월 라디오 62대를 미국에 수출하면서 해외시장에 노크를 했다. 본격적인 첫 진출은 68년 미국 뉴욕에 지사를 설립하면서부터다.73년 3월 국내 전자업계 최초로 증권거래소(현 증권선물거래소)에 상장했다. LG전자는 꾸준히 세계 시장에서 그 역량을 키워갔다. 특히 95년 미국 최대 가전회사였던 제니스 인수는 LG전자 해외시장 공략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 현재 제니스는 연간 약 9000만달러(약 900억원)의 디지털 TV 로열티를 벌어들이는 ‘LG전자의 효자’다. LG전자의 최대 해외 시장인 북미 시장의 전략 제품은 3세대(3G) 휴대전화, 액정표시장치(LCD) TV, 플라스마 디스플레이 패널(PDP)TV, 드럼 세탁기,3도어 냉장고 등이다.LG전자는 프리미엄 이미지를 확고히 하면서 전략제품에 대한 마케팅을 강화해 지난해 매출(115억달러)보다 13% 정도 많은 130억달러의 매출을 올해 북미 지역에서 달성할 계획이다. LG전자는 유럽에서는 지난해 전년보다 20% 이상 늘어난 70억달러의 매출을 올렸다.2010년에는 120억달러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지난해 유럽 시장에서 약 1000만대를 판매한 휴대전화 사업을 강화해 2010년까지 유럽 이통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꿈을 키워나가고 있다. 중동 및 아프리카 지역에선 지난해 30억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휴대전화 사업을 점차 확대시켜 2010년에는 60억달러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지난해 이 지역에서 500만대의 휴대전화를 판매한 LG전자는 올해에는 목표를 1000만대로 대폭 늘려 잡았다. 특히 ‘지구촌 마지막 시장’으로 불리는 아프리카 공략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LG전자는 나이지리아 라고스에 서비스센터를 건립했다. 70여명의 직원이 상주하며 연간 7만건의 서비스 요청을 처리한다.LG전자 관계자는 16일 “올해와 내년에 앙골라의 루안다, 코트디부아르의 아비장 등 아프리카에만 11곳의 서비스 센터를 추가 개설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서아프리카 28개 국가에서 제품을 구매한 고객은 어느 나라에서나 똑같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팬(Pan) 아프리카 보장 서비스’도 시작했다.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LG전자의 인지도는 60%나 된다. 인기있는 전자회사로 자리매김한 LG는 TV, 에어컨, 세탁기, 냉장고 등 주요 가전 제품 시장점유율 1위를 지키고 있다. LG전자는 인도에선 오는 2010년 매출 38억달러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LG전자는 지난해 상반기 기준으로 TV, 세탁기, 에어컨의 인도 시장 점유율 1위였다. 또 냉장고, 전자레인지,DVD플레이어 등도 인도 시장에서 부동(不動)의 1위를 달리고 있다. 중국 지역에서 LG전자의 최종 목표는 ‘중국 국민에게 가장 사랑 받는 기업’,‘중국 국민이 사랑하는 1등 LG’가 되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93년 중국 진출 후 15년간 중국지역에서 생산, 마케팅, 인재 육성, 연구개발(R&D)에 이르는 ‘4대 현지화’와 집중화·현지화·전문화를 통한 사업 모델 차별화를 바탕으로 중국 기업으로 성장해 왔다. 이같은 적극적인 해외시장 진출은 남용 LG전자 부회장의 강력한 의지에서 출발한다. 남 부회장은 일본의 소니나 핀란드의 노키아처럼 해외에서 LG전자를 어느 나라 회사인지 모를 정도로 현지 최고의 기업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남 부회장은 취임 초부터 “80여개 해외법인장을 현지인으로 발탁하겠다.”고 강조해 왔다. LG전자는 현지 우수인력의 동기부여를 위해 최근 중국법인 현지 직원들을 선발해 아프리카 법인에 파견했다.LG전자의 이번 발령은 ‘국적 없는 글로벌 기업’을 추구한다는 남 부회장의 의지가 반영됐다. 남 부회장은 지난 5월 다국적 기업인 유니레버에서 25년간 인사관리를 맡아온 레지날드 불 부사장을 본사의 최고인사책임자(CHO)로 임명하면서 “능력이 되면 국적과 성별을 가리지 않겠다.”고 말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오디세이 서울] (2) 소공로(상)

    [오디세이 서울] (2) 소공로(상)

    소공로는 일찍이 장안의 댄디(멋쟁이)들이 출몰하던 첨단의 거리였다. 총독부와 경성부청에 근무하는 일본인 관료들의 통근로였고, 중산모와 회중시계로 멋을 낸 모던보이들이 소파에 몸을 묻고 제임스 조이스와 예세닌을 논하던 식민지 살롱문화의 본산이었다. 소설가 박태원이 하루에 세번씩이나 드나들며 가배(커피)를 홀짝이던 다방도, 시인 박인환이 일본 패션잡지를 찢어들고 찾아가 홈스펀 양복을 맞춰입던 테일러 숍도 이곳에 있었다. 소공로가 댄디의 주무대로 자리잡은 것은 이곳이 조선은행으로 상징되는 경제권력과 총독부·경성부라는 식민통치의 심장부를 연결하는 직통 루트였다는 데서 연유한다. 1922년 일본 양복점 재벌이 정자옥(현 미도파백화점)을 설립한 뒤 이 일대는 남성 패션의 중심거리로 부상한다. 뒤이어 상공회의소와 기독청년회, 빅터 레코드사 등이 들어서고 철도호텔(현 조선호텔) 지척에 반도호텔이 건립되면서 ‘모데로노로지오’(考現學·현대를 탐구하는 학문)의 현장학습장으로, 첨단과 유행에 목마른 모던보이들을 불러모으게 된 것이다. 댄디의 시대는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쳐 1970년대까지도 이어졌다. 물론 문인과 지식인들이 모여 앉아 문단사와 시국담을 나누던 맹아적 살롱문화의 거점은 명동으로 옮겨간 뒤였다. 궁핍한 예술가와 ‘먹물’들의 빈 자리는 재력있는 멋쟁이들이 채웠다. 이 시기 소공로는 맞춤양복의 메카였다.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양복점 한구석을 빌려 의상실을 개업한 것이 1962년이었다. 소공로와 명동 일대에만 내국인과 일본 관광객을 상대하는 크고 작은 양복점이 300여개나 됐다. 소공동 양복가로의 탄생 배경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1920년대 필동에 살며 소공로로 출퇴근하던 총독부 관리들을 상대로 일본인들이 점포를 내면서 시작됐다는 설이 우세하지만, 볼셰비키 정부의 박해를 피해 이주한 터키인들의 테일러 숍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기원이야 어찌됐든 소공동 상권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이 거리의 주인공은 당대 최고의 전문직으로 꼽히던 은행원과 고급 공무원, 그리고 소수의 선택받은 예술가들이었다. 이들은 세련된 라이프스타일과 고급스러운 몸치장으로 곤핍에 찌든 대중들과 스스로를 구별했고, 취향의 심미화를 통해 범속한 졸부들이 넘볼 수 없는 ‘그들만의 궁정’을 구축하려 했다. 천박한 세태에 대한 반감을 자의식적 저항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까닭에 이들의 ‘구별짓기’는 세기말 유럽을 풍미했던 댄디즘의 핵심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다만 ‘일상의 미학화’를 무기로 교양·예술과는 담을 쌓은 졸부집단을 향해 지독한 멸시와 혐오를 공공연히 표출함으로써, 문화와 취향의 영역마저 식민화하려던 경제권력의 공세에 저항한 공로만은 인정받을 만하다. 오로지 돈과 사익을 위해 들쥐처럼 내달리는, 이 만개한 속물의 전성시대에 소공로의 몰락과 댄디의 죽음은 그래서 더욱 서글프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글 사진 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자취감출 이대(梨大) 명물「메이·퀸」

    자취감출 이대(梨大) 명물「메이·퀸」

    이화(梨花)여대 창립 기념행사 가운데 「하일라이트」로 사랑받아온「메이·퀸」 대관식이 71년을 마지막으로 아주 폐지되거나 5년단위로 거행될 것이라는데…. 1908년에 이화학당(梨花學堂) 창설자 「스크랜톤」부인을 초대 「메이·퀸」으로 선발한 이후 63년이 지난 올해까지 계승돼온 이 유서깊은 신록의 잔치를 폐지하려는 까닭은? 너무 흔해져 당초 멋 잃어 가장 오랜 「메이·퀸」대관행사의 전통을 자랑해온 이대가 63년만에 「메이·퀸」행사에 대한 비판론을 들고나왔다. 이 문제가 교무회의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재작년부터 있었던듯. 처음에는 5년 또는 10년마다 한번씩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나 이제는 완전 폐지쪽으로 의견이 기울고 있다는것. 『69년부터 「메이·퀸」행사에 대한 비판적 의견이 상당했는데 송두리째 없애는것보다는 아무래도 전통적인 개교기념행사의 하나니까 5년마다 한번씩 아니면 10년에 한번씩 하기로 일단 결정을 봤던 거예요』 이대 한 당국자의 신중한 발언. 그러나 지난 5월은 어차피 개교 85주년이니까 별 이견없이 「메이·퀸」을 뽑았다. 그러다가 올들어 완전 폐지쪽으로 의견이 기울기 시작, 지난 7월에는 거의 결정을 보았다고 암시했다. 『그거 별로 재미가 없어져 간단 말예요. 애초 개교기념 행사때는「메이·퀸」행사가 아주 엄숙하고 뜻깊은 거였는데 요즘에는 유행병처럼 아무 학교나 다 하고 있잖아요? 우리 학교는 5월에 창립했으니까 「메이·퀸」이고 개교기념일도 「메이·데이」라고 하는데 다른 학교에서도 「메이·퀸」을 선발하는게 「난센스」가 아니겠어요? 그리고 「메이·퀸」에 당선되면 그 뒤끝이 별로 좋지않단 말입니다. 가령 최근에는 살해사건 까지 난 정도가 아녜요?』 그러니까 7월의 교무회의 결정은 덕성여대 「메이·퀸」유신숙(柳信淑)양(22)의 살해사건의 충격파라고나할까? 초기엔 학교 유공자 선출 일제땐 명침 바꿔 9월에 유양의 죽음이 「메이·퀸」에 대한 일반의 인상을 흐리게한건 사실 유양이 「나이트·클럽」이나 「호텔」에 드나든게 청초해야 할 대학생의 「이미지」에 먹칠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이러한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난 이상 교육자의 입장으로도 이 제도를 다시 한번 검토하게 되는게 당연한 일. 그래서 5년 단위로 하자던 주장이 아주 중단해 버리자는 주장으로 바뀔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게 이대 당국자의 말이다. 어쨌든간에 내년부터는 이대 창립기념식행사의 「하일라이트」였던 「메이·퀸」대관식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최초의 「메이·퀸」 행사는 1908년 5월 30일. 「아래 위를 흰옷으로 입고 치렁치렁 땋아내린 칠흑같은 머리끝에 빨간 댕기를 드리운 여학생들의 행진하는 모습은 한국 역사이래 처음일지도 모르는 진풍경이요, 이색적인 「미의 제전」이었다. 제 1회의 영광스러운 관을 쓴 「메이·퀸」은 이화학당의 설립자인 「스크랜톤」부인. 그이후 1925년 이전까지 초창기에는 주로 학교설립의 유공자나 존경받는 교원들이 5월의 여왕으로 선출되었다. 학생신분으로 최초의 「메이·퀸」이 된 사람은 1917년에 뽑힌 문과 4학년생이었던 고 김활란(金㓉蘭) 박사. 그 후에도 교사중에서 「메이·퀸」을 뽑다가 27년부터 본격적으로 학생 「퀸」이 등장했고, 29년 이화학당이 여고와 전문학교로 나뉘어지자 교대로 1년마다 「메이·데이」행사를 주관하게 됐고 따라서 해마다 여고와 전문부에서 「메이·퀸」을 번갈아 뽑았다. 1933년부터는 일제의 압박으로 「메이·퀸」행사가 「자세여왕(Posture Queen)」이란 이름으로 바뀌고 날짜도 매년 9월로 변경되었다. ”시국 혼란해 행사 못한다” 중단-부활-중단의 수난 그나마 37년부터는 일제의 탄압으로 모든 행사가 중단되었다가 1947년 제61주년 창립기념일에 비로소 부활되어 해방후 첫 번째인 15대 「메이·퀸」으로 가사과 4학년의 김계현양을 뽑았다. 그러나 시국의 혼란으로 48년부터 55년까지 중단됐다가 1956년에 다시 부활, 제 15대 「메이·퀸」 에 교육과 4학년 신장현(申長鉉)양을 선출, 1960년에는 4·19로 중단하고 올해까지 계속되어왔다. 「메이·퀸」 선발 자격규정을 보면 (1)각대학 각학과의 4학년 재학생으로 (2)기독교 신자로서 신앙생활이 깊으며 (3)성적(3.0학점 이상)이 우수하고 품행이 단정하며 (4)활동적이고 지도자 자격이 있는자로 (5)신장은 160cm 안팎이라야 한다는 비교적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고 있다. 그외에 여왕이나 시녀는 한복을 입어야 하고 여왕으로 뽑힌 뒤에는 기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방식은 4학년 학생들 전원의 투표로 각과에서 1명씩의 여왕 후보자를 뽑고 마지막으로 교수와 동창생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의 심사를 거쳐 「메이·퀸」의 왕관을 쓸 주인공을 뽑는다. 「메이·퀸」 이 되지못한 각과의 후보자들은 시녀가 되어 여왕의 뒤를 따르게 했다. 요즘에는 특히 균형잡힌 체격미와 교양을 심사에서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역대의 「메이·퀸」 은 다음과 같다. 여왕조건 몹시 까다롭고 뽑힌뒤엔 기권 인정안해 1대 「스크랜톤」부인(1908년) / 2대 최활란(崔㓉蘭)교사(1910년) / 3대 김활란(金㓉蘭)학생 (대학부4년·1917년) / 4대「처치」선생 (1920년) / 5대 「밴프리트」선생(1923년) / 6대 「미시즈·토머스」(W·F·M·S)「신시내티」지부 총무 (1925년) / 7대 알수없음 (1927년) / 8대 전수진(全壽鎭)양(문과=1928년) / 9대 최신덕(崔信德)양(문과=1930년) / 10대 최예순(崔禮順)양(문과=1932년) / 11대 심양순(沈良順)양(가사과=1933년) / 12대 김갑순(金甲順)양 (문과=1934년) / 13대 김순임(金順林)양(보육과=1935년) / 14대 손인실(孫仁實)양(문과=1936년) / 15대 김계현양(가사과 1947년) / 16대 신장현(申長鉉)양(교육과=1956년) / 17대 김진명(金鎭明)양(음악과=1957년) / 18대 고광애(高光愛)양(사학과=1958년) / 19대 오선향(吳仙卿)양(영문과=1959년) / 20대 최인숙(崔仁淑)양(사생과=1961년) / 21대 배정자(裵正子)양(정외과=1962년) / 22대 정정자(鄭貞子)양(체육과=1963년) / 23대 고선희(高鮮姬)양(의과=1964년) / 24대 김정자(金貞子)양(약학과=1965년) / 25대 유중근(兪重根)양(영문과=1966년) / 26대 김록희(金鹿姬)양(불문과=1967년) / 27대 김혜숙(金惠淑)양(기독교 문학과=1968년) / 28대 이성례(李聖禮)양(시청각 교육과=1969년) / 29대 홍사원(洪思媛)양(사회학과=1970년) / 30대 신영희(申永熙)양(교육심리학과=1971년) 이상과 같이 찬연한 전통을 이어온 이대의 「메이·퀸」행사가 이제 어쩔수 없이 퇴장하게 됐다. 과연 이 순수하고 의의깊었던 행사가 변질되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 책임은 어디에 있을까? <식(植)> [선데이서울 71년 9월 26일호 제4권 38호 통권 제 155호]
  • 친조카의 칼맞은 정구파(精九派)스님

    친조카의 칼맞은 정구파(精九派)스님

    대처승이 조카 자식을 상대로 8년동안 「호모·섹스」를 강요하다 마침내 그 조카 칼에 맞아 피투성이가 됐다. 16살에 고아가 되어 삼촌인 그 대처승에게 맡겨져 밤마다 시달려 오던 끝에 칼을 휘둘렀다는 조카가 경찰에서 털어놓은 사연은-. “떠들면 쫓아내 버릴테다” 한밤중에 온 작은아버지 9월12일 하오 1시쯤 서울시내 영등포 봉천동 ○○사 법당에서 주지스님 하(河)준정씨(40·가명)가 피를 흘리며 뒹굴었다. 겨드랑이와 등허리, 손바닥등 모두 7군데에 칼을 맞고 중상을 입은 하스님은 곧 이웃 H의원으로 옮겨졌고 가해자로 조카 하모군(23)이 잡혀 노량진경찰서에 구속됐다. 『죽이려고 그랬읍니다. 그런 놈은 백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군은 취조관에게 거침없이 외쳤다. 그도 그럴 것이 하군은 하스님의 친조카인데다 천애고아로 하스님이 부모나 다름없이 길러온 처지. 취조관앞에서 털어놓은 하군의 범행사연은- 하군의 고향은 충북(忠北) 괴산(槐山). 3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16살때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등졌다. 가난한 집안의 외아들인 하군은 유산이라곤 땅 1마지기도 이어받지 못했다. 별수 없이 작은 아버지인 하스님이 그의 양육을 떠맡을 수밖에. 친척가운데 가장 가까운 일가이기도 했고, 주지스님이어서 비교적 살림이 윤택했던 때문. 당시 하스님은 충북 괴산에 있는 ○○사의 주지스님. 『절의 잔심부름을 해주고 얻어먹고 살게 됐어요. 절 밖에 있는 살림집에는 방이 2간이었어요. 저 혼자 사랑채에서 자곤 했지요』 며칠이 지난 어느날 깊이 잠든 하군은 야릇한 움직임에 눈을 떴다. 누군가 어둠속에서 그를 발가벗겨 놓고, 그의 「심벌」을 잔뜩 움켜 쥐고 있었다. 엉겁결에 놀라 일어나려 하자 우악스런 손이 입을 틀어 막았다. 『조용히 있어. 떠들면 쫓아버릴테야. 그러면 거지가 되고 마는 거야』-작은 아버지의 위협에 하군은 힘을 잃고 말았다. 그의 큰손이 이윽고 하군의 손을 잡아 당겨 자기의 사타구니로 끌고갔다. 하군은 미처 자위행위도 모르는 어린 소년이었다. 작은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손을 놀렸다. 『처음엔 멋모르고 시키는대로 했는데 갈수록 더욱 이상해 져요. 전신을 만지게 하고 정말 죽기보다 싫었어요』 차차 하군은 작은 아버지가 징그러운 짐승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밤이되면 사형장에 끌려가는 듯한 느낌으로 견딜 수 없었다. 『초저녁부터 다투기 시작해서 새벽까지 실랑이를 벌일때가 하루 건너 한번씩 있었어요. 밤새도록 저를 벗기려는 작은 아버지와 싫다고 피하는 저는 죽자하고 싸웠지요』 도망쳤다간 또 잡혀오고 7년동안을 생지옥 생활 결국 견디다 못한 그는 18살 되던 1962년 봄, 산으로 나무하러 가는체하고 절을 뛰쳐나와 천안의 외가로 줄행랑. 그러나 그의 행방을 쫓던 스님에게 불과 두달만에 잡히고 말았다. 『그때 외할머니에게 저의 사정을 얘기했으면 될텐데. 저는 만약 제가 그런 소리를 하면 작은 아버지 체면도 있고 친척들이 소동을 일으킬까봐 말을 못하고 끌려 갔어요』 하스님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자기가 공부시켜 주려했는데, 공부를 싫어해 집을 뛰쳐 나왔다고 둘러댔다는 것. 그러나 그해 겨울, 하군은 다시 절을 도망쳐 무작정 상경, 남대문 근처에서 구두닦이로 벌어 먹었다. 『63년 봄에 우연히 길가에서 사촌형을 만났지요. 사촌형도 제가 공부하기 싫어서 나온줄 알고 작은 아비지에게 연락을 했어요』 그때 하스님은 청주시 수동의 ○○사로 옮긴뒤였다. 연락을 받은 즉시 상경한 그는 『책임지고 공부시킨다』며 하군을 다시 데려갔다. 이번에는「호모·섹스」의 방식이 진일보, 더욱 하군을 못살게 굴었다. 그달도 채못가 견디다못한 하군은 ○○사를 탈출, 서울의 영등포구 구로동 외삼촌 집으로 도망쳤다. 『그때 처음으로 외삼촌에게 제가 당한 고역을 고백했읍니다. 외삼촌은 그럴 수 없다면서 모두 때려 부수겠다고 작은 아버지를 찾아가 싸웠죠』 그러나 작은 아버지는 『조카가 허무맹랑한 소리를 한다. 공부하기 싫으니 되레 뒤집어 씌운다』고 펄쩍뛰더라는 것. “고아된 몸 키워줬다지만 이젠 죽어도 더는 못참아” 『그러면 그렇지 그럴수가 있나』라고 생각한 외삼촌에게 실컷 꾸중만 들은 하군은 또다시 작은 아버지에게 맡겨졌다. 그후에도 공주 갑사로 도망치기도 했고, 부산으로 도망치기도 했으며, 청주의 매형에게도 가있었다. 그때마다 작은 아버지는 끈덕지게 수소문해서 하군의 거처를 알아내고 악착같이 그를 데려갔다. 이러는 동안 친척들이 모두 내용을 알게됐고 작은 어머니 마저도 사실을 알게됐다. 『충주 매형에게 있으면서 자동차학원에 들어가 운전기술을 배웠어요.화물차 조수로 취직해서 그런대로 생활을 했는데, 작년에 작은 아버지가 저의 숨어있는 곳을 알아내고 찾아 왔읍니다』 하스님은 매형에게 정중히 사과하며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맹세까지 했다. 스님의 정성스러운 태도에 넘어간 매형이 하군을 『작은 아버님이 마음을 잡았으니까 돌아가라』고 권했다. 결국 매형의 권유를 따라 서울에 올라왔다. 『여전했읍니다. 그러나 이젠 다 컸으니까 만만하게 응하지 않았지요. 1주일만에 뛰쳐 나와 다시 충주에서 취직했읍니다』 사건이 나기 1주일전, 매형집에 들렀다가 작은 아버지가 편지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 선량한 매형까지 괴롭히려는 작은 아버지를 죽이려고 결심한 것은 이때였다고. 그래서 지난 6월12일 아침 충주를 떠나 서울에 와 칼을 사들고 봉천동 ○○사에 뛰어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게 짐승이지 사람입니까? 16살때부터 그렇게 악착같이 저의 뒤를 쫓아다니며 추악한 짓을 해온 작은아버지가…』 삿대질까지 하며 지긋지긋한 악몽의 7년을 연상하는 듯 그는 눈물까지 글썽거린다. 이러한 경우 법은 그에게 과연 어떤 형벌을 내릴것인가? <식(植)> [선데이서울 71년 9월 26일호 제4권 38호 통권 제 155호]
  • 바흐 오케스트라의 바흐 연주

    바흐 오케스트라의 바흐 연주

    라이프치히 바흐 오케스트라와 신포니에타 라이프치히, 아르모니아 목관 앙상블, 라이프치히 체임버 오케스트라, 라이프치히 체임버 브라스, 살롱 오케스트라 라이프치히, 뉴 바흐 콜레기움 무지쿰, 라이프치히 피아노 오중주단, 멘델스존 현악4중주단…. 이들의 공통점은 독일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 속한 실내악 앙상블이라는 것이다.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이루어진 실내악 앙상블은 이들을 비롯하여 모두 20개에 이른다. 이름에서 보듯, 가능한 모든 형태의 음악을 연주할 수 있도록 다양한 편성으로 짜여졌다. 이들 가운데서도 가장 명성을 날리고 있는 라이프치히 바흐 오케스트라가 한국에 온다.26명의 실력파 단원으로 이루어진 이들은 16일과 1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회를 갖는다. 2006년 첫번째 내한에서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전곡 연주로 깊은 인상을 심어준 이후 두번째 방문이다. ‘게반트하우스’는 독일어로 직물회관이라는 뜻이라고 한다.18세기 중반부터 직물 상인들이 연주가들을 초빙해 소규모 공연을 하면서 상설 관현악단의 창설이 논의되기 시작했고,1781년에는 게반트하우스가 준공되면서 관현악단이 동시에 창단되었다. 라이프치히 바흐 오케스트라는 1962년 설립되었으니,1808년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앙상블로는 최초로 창설된 게반트하우스 현악4중주단이나 1896년 결성된 게반트하우스 목관5중주단보다 역사는 짧은 편이다. 당시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프란츠 콘비치니는 제1악장 게르하르트 보세를 리더로 바흐의 작품을 전문적으로 연주하는 소편성 관현악단을 조직했는데, 첫 순회 연주회 도중 콘비치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보세가 고정 멤버를 모아 다시 출범시킨 것이 오늘날의 바흐 오케스트라이다. 바흐 오케스트라는 최근 고악기 연주가 붐을 이루는 가운데서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바흐 연주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현대적 감각을 원하는 사람에게도 부족함이 없는 세련된 음악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이번 내한 연주회의 리더도 전통에 따라 제1악장인 크리스티안 풍케가 맡는다. 이번 공연의 첫날에는 일본의 기타리스트 무라지 가오리가 협연자로 나선다.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가오리는 음악전문 라디오 DJ는 물론 자동차와 장신구 모델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가오리는 라이프치히 바흐 오케스트라가 8일부터 13일까지 일본에서 갖는 6차례 연주회 가운데 8일 도쿄의 산토리홀과 10일 아이치현예술극장 공연에도 협연자로 나선다. 가오리는 16일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콘트라베이스 주자인 라인하르트 로이셔가 기타용으로 편곡한 바흐의 쳄발로 협주곡 2번과 5번을 협연한다. 바흐 오케스트라는 이밖에 헨델의 ‘시바 여왕의 도착’, 비발디의 2개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바흐의 3개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과 관현악 모음곡 2번을 들려준다. 가오리가 빠지는 17일 바흐 오케스트라는 6곡으로 이루어진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전곡을 연주한다. 연주회 시작 오후 8시.3만∼10만원.(02)599-5743.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02일 TV 하이라이트]

    ●낭독의 발견(KBS2 밤 12시45분) 주연을 맡은 영화만 506편. 영화가 인생의 전부였다고 회고하는 남자. 영원히 은막에 아로새겨질 전설의 이름, 영화배우 신성일이 낭독무대에 오른다.2008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이사장을 맡고 있는 그는 1962년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청춘스타 시절부터 시작된 뮤지컬 사랑을 털어놓는다.   ●스포트라이트(MBC 오후 9시55분) 조 변호사 협박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태석은 무고함을 호소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다. 태석을 찾아간 우진에게 위험해지니 나서지 말고 자신이 나갈 때까지 기다리라 말한다. 우진과 순철은 국정원에서 조 변호사 보호조치를 취했다는 증거로 조 변호사와 인터뷰하던 날의 CCTV 녹화화면을 입수한다.   ●산너머 남촌에는(KBS1 오후 7시30분) 과수원에 흑점병이 번지기 시작하자 순호는 그게 재곤이 탓이라며 몰아세운다. 화가 난 재곤은 순호와 말다툼을 하고 작은 몸싸움이 벌어져 순호의 팔이 부러진다. 종갓집과 과수원집은 이 사건으로 신경전이 벌어지고 마침 서울친구로부터 사업제안을 받은 재곤은 서울로 떠나게 되는데….   ●다큐10(EBS 오후 9시50분) 우아하고 화려해 보이는 미술시장. 하지만 그 내부 모습도 화려하고 우아할까? 작품가격을 정하는 건 누구이며, 고가의 미술품을 사들이는 건 또 누구일까? 세계적 경매회사의 수석 경매사와 현대미술의 거장, 큐레이터, 아트 컨설턴트 등과의 인터뷰를 통해 게임 같은 미술시장 속으로 들어가 본다.   ●일지매(SBS 오후 9시55분) 은채는 사대부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객점인 금루각에 대해 소개하게 되고, 변식은 능청스럽게 이곳이 고품격 숙박시설이라며 자랑을 늘어놓는다. 한편, 무인도에서는 용이가 공갈로부터 무술을 전수받고 있는데, 수세에 몰리던 용이는 어느 순간 공갈의 공격을 막아내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클로즈업(YTN 낮 12시35분) 북한 핵문제가 진전되는 과정을 보면 황소걸음을 연상케 한다.2·13합의대로라면 북핵 신고와 불능화는 지난해 말에 이뤄져야 했다. 하지만 6개월 늦은 지난주에야 비로소 이뤄졌다. 냉각탑을 폭파하는 화려한 불꽃놀이를 보여준 셈이다. 북한 핵문제에 대해 한나라당 국제통인 박진 의원과 이야기를 나눈다.
  • ‘천하대란’ 외면한 조선 세도정치

    1850년 10월 중국 광서성 금전촌에서 봉기한 홍수전(洪秀全)은 태평천국(太平天國)이라는 ‘지상낙원’의 건설을 선언하고, 이듬해 2월 천왕(天王)에 즉위한다. 태평천국은 농민들의 대대적인 호응속에 1853년 남경을 점령하여 수도로 정하고, 과거시험을 치러 관리를 등용하는 등 15년 남짓 중국 전역에서 위세를 떨쳤다. 태평천국의 기세가 한풀 꺾일 무렵인 1856∼1960년 영·불연합군은 이른바 제2차 아편전쟁으로 중국을 침공했고 베이징을 점령당한 청왕조는 서구 열강의 요구를 무조건 받아들여야 했다. ‘태평천국과 조선왕조’(하정식 지음, 지식산업사 펴냄)는 내부적으로는 1862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농민봉기인 임술민란을 겪고, 외부적으로는 이양선의 출몰에 극도로 긴장하는 등 내우외환에 직면하기는 청나라와 다름 없었던 당시 조선의 지배층이 ‘태평천국의 난’을 어떻게 파악하고 대응해 나갔는지를 깊이있게 바라보고 있다. 숭실대 사학과 교수인 지은이의 시선은 특히 조선의 지배층이 청나라에서 벌어지는 명백한 위기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대응했기에 결국 피식민지배라는 ‘파국’을 자초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맞춰졌다. 지은이는 연행사절을 통하여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태평천국의 난을 구성해보면 언제, 누가, 어디서, 왜 군사를 일으켰고, 그 형세가 어떤가를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정보에는 물론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조선의 지배층이 긴박한 안팎의 정세를 제대로 인식하고 적절한 대응책을 강구하기에는 충분한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은이는 철종 연간은 세도정치가 심화·확대되던 시기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세도정권은 태평천국의 난이 벌어진 ‘위기의 15년’을 ‘철종실록’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태평의 시간’으로 꾸며놓았다고 지적한다. 스스로 ‘천하대란’으로 시국을 진단했음에도 사회 통합의 능력과 지배의 논리를 잃고 안주하고 있던 조선의 지배층은 폭풍우가 이미 시야에 들어왔는 데도 이를 애써 먼 산 소나기로 여기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개항은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기도 전인 1876년 갑자기 이루어졌고, 열강 침략의 파고도 더욱 높고 거셀 수밖에 없었다고 지은이는 분석했다.2만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박목월시인 장남 박동규 교수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박목월시인 장남 박동규 교수

    ‘구름에 달가듯이’ 청록파 시인 박목월(본명 영종)이 생전에 직접 쓴 일기의 한 대목이다. (연도미상)7월20일. 간밤에 쏟아지던 비와 소란스럽던 우레가 거짓말같이 개고, 맑은 날씨. “날이 개면 어쩐지 즐거워.” 노래와 같은 아내의 말이다. 큰아이들은 직장 나가고 어린 것들도 학교에 가버렸다.“여보, 커피 끓일까요.” 서재를 기웃거리는 아내도 이상하게 다정한 얼굴이다.30년의 결혼생활을 거쳐서 어린 것의 뒷바라지도 한 고비를 넘기고, 초로를 맞이한 내외의 조용하고 오붓한 시간이다. “한판 할까.” 나는 안방에 있는 화투모를 내오게 했다. 이번 여름방학에 아내에게 ‘육백’을 배운 것이다.“또 잃으면 어떡할려고 그래요.” 화투를 가져오면서 아내가 걱정했다. 한판에 500원을 걸었다.“칠띠를 해야지.” 나는 벼르기만 할 뿐 서툰 솜씨가 노상 돈을 잃게 마련이다.“이 ‘솔’을 먹어가지, 그것만 하면 ‘송·동·월’ 아니냐.” 나는 아내의 패를 기웃거리며 싱겁을 떠는 것이다. “당신이나 잘해요.” 그리고 ‘솔’을 뽑다 말고 “참, 동규, 얼굴이 말이 아니에요.” 엉뚱한 곳으로 아내는 화제를 돌린다.“왜-그럴까?” 나도 화투장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그럼 ‘솔’해요.” 아내는 ‘솔’을 잡아오면서 “글쎄요, 웬일인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어야지요. 장가 간 후로는 몸이 그릇되는 걸요.” 그러다가 아내는 “참!”하고 화투장을 덮어버린다. 내외는 벌써 맏이의 건강문제에 정신이 쏠려버렸다(후략). 여기에 나오는 ‘맏이’가 바로 문학평론가 박동규(69) 서울대 명예교수를 말한다. 이 일기는 박 교수가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발견, 그동안 소중히 간직해오다가 지난해 발간한 책 ‘아버지와 아들’(박목월·박동규 지음, 대산출판사)에 처음 실었다. 일기에는 정확한 연도가 없으며 내용으로 봤을 때 1970년 전후로 추측된다는 것이 박 교수의 설명이다. 목월은 1973년 월간 시전문지 ‘심상’을 창간,1978년 작고할 때까지 발행인으로 있으면서 우리나라 문학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장남인 박 교수가 ‘심상’을 꾸려왔다. 어머니가 그만둘 것을 여러번 권유했지만 박 교수는 고집스럽게 아버지의 뜻을 이어왔다. 그동안 흑자를 낸 적이 없을 만큼 어려웠지만 30년동안 단 한번도 발간을 거르지 않았다. 직접 서문을 쓰고 편집과 광고영업을 하면서…, 외부 강연 때 받는 강연료를 전부 투입하지만 어려움은 여전하다. 박 교수는 지난 7일 저녁 오랜만에 TV에 출연했다.‘SBS-TV칼럼’에서 “인간은 서로 존경하고 살지는 못해도 존중하고 사는 방법이 토대가 된 교육정책과 목표를 통해서 근본적 해결에 넓은 길을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대학에 몸담고 있을 때에도 구수한 말투와 따뜻한 언어구사로 ‘아침마당’‘사랑의 리퀘스트’ 등의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대표적 에세이집 ‘내 생애의 가장 따뜻한 날’‘삶의 길을 묻는 당신에게’처럼 평소에도 ‘따뜻한 글’을 주로 써왔다. 박 교수는 요즘 ‘심상’ 발간과 외부강연 외에 별도의 집필을 하느라 바삐 지낸다.2004년 정년으로 대학강단을 떠난 후 틈틈이 메모한 ‘강연노트’를 다시 정리·보완하고 있는 것. 이런저런 궁금증이 생겨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위치한 ‘심상’ 편집실에서 박 교수를 만났다. ▶새로운 신간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압니다. “그렇습니다.‘삶과 소설’이라는 일종의 평론집입니다. 소설을 해독하는 방식, 읽는 방법 등을 체계적으로 만들어보자는 뜻에서 시작했지요. 또 삶의 방식을 현실에 던지고 논리적으로 접근도 해보고…. 낡은 강의노트를 모아 가을쯤에는 책을 낼 예정입니다.” ▶그렇다면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재미가 있나요. “소설은 가상입니다. 현실과 가상의 차이가 무엇인지, 작가는 왜 거짓말(가상의 스토리)을 시켜가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는 이어 “난 따뜻한 글밖에 못쓴다.”고 거듭 말했다. 남들은 문제를 파헤치고 들어가지만, 자신은 여러 사람을 아우르고 위로해주는 그런 글을 써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써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연 방식이나 주제도 이와 비슷하다고 부연했다. 살면서 돈이 많고 적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고, 또 인간으로서 삶의 궤적이 있어야 한다는 것. ▶시는 어떻게 써야 합니까. “시는 글로 쓰는 것입니다. 시대에 뒤떨어져도 괜찮습니다. 세속에 맞추지 않아도 되는 것이 바로 시입니다. 글로 써서 만져보고 다듬어봐야 하는 것이지요.” ▶지난 30년동안 ‘심상’을 통해 시인이 어느 정도 배출됐는지요. “약 280명정도 됩니다. 이들은 ‘심상문학회’ 등을 통해 여러 활동을 합니다. 서울 서초동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시민을 위한 강의도 하고 ‘시낭송 평가’도 합니다. 또 매년 여름 강원도 동해 안쪽에서 해변 시인학교를 열고 있습니다. 폐교에서 다들 모여 밥도 해먹고 인간적인 교감도 나눕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살다가, 삶의 수련기를 겪은 30∼40대 이상의 여자들이 (시로)돌아오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보다 젊은 나이에 치열하게 시인이 되려고 했던 과거와 비교했다. 아울러 옛날의 시가 ‘은은한 돌’이었다면 요즘에는 ‘잘 닦여진 보석’에 비유했다. 다시 말하면 감동이 너무 만들어진다는 것. 시인 본령에 대해서는 “서정성과 진실 고백에는 별 차이가 없다.”는 말로 대신했다. ▶‘심상’ 발행에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30년동안 적자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살아계실 때 그만두라고 했지만 아버지가 했던 일인데 그럴 수는 없지요. 열심히 강의하고 외부 원고 쓰면서 근근이 이어나가고 있습니다.(책상에 앉아 있는 여직원을 가리키며)저 친구랑 나랑 단 둘이서 만들어가고 있지요.” 박 교수는 또 “대개가 그렇지만 시잡지는 광고도 잘 안 붙고 구독자도 늘어나지 않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이어 가족 얘기가 나왔다. 박 교수는 슬하에 아들과 딸을 두었다.39살된 큰아들은 아이 둘 데리고 미국에서 예술행정학 학위공부를 하고 있단다. 그는 “다 큰 아들이지만 공부를 계속 하겠다는데 말릴 수야 없지 않으냐.”며 아들 뒷바라지하랴 ‘심상’을 꾸려가랴 마음과 몸이 무척 바쁘다고 했다. ▶부친 기일 때는 가족들이 모이는지요. “지난 3월24일이 서른번째 기일이었습니다. 동생 셋이 미국에 이민 가 있어 기일 때 가족들이 다 모이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목월의 시비(詩碑)는 생전에 살았던 집 ‘원효로 4가’와 교수로 있던 ‘한양대’, 그리고 ‘목월문학관’이 있는 경주 중문단지 등 세 군데 세워져 있다. 황순원 선생의 아들도 ‘동규’라는 말을 꺼내자 “서울고, 서울대 동기동창으로 친하게 지낸다. 내 동생 남규도 서로 이름이 똑같다.”면서 “아버님도 황순원 선생과 술친구로 가깝게 지냈다.”며 웃는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돌아가시고 난 다음 그해 흰머리카락이 돋아났고 나는 이 머리카락을 만지며 어버지의 우산 안에 살았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했는가를 뼛속 깊이 깨달았다.”고 회고했다. 또 “그때부터 아버지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됐고, 이 생각의 골짜기를 타고 아버지와 함께 살아온 길을 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요즘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고 의미를 실었다. 박 교수는 현재 경기도 분당 자택에서 한국여장로연합회 회장인 부인 송영자(68) 여사와 단둘이 살고 있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남상인기자 sanginn@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39년 경북 월성에서 박목월 시인의 장남으로 출생 ▲57년 서울고 졸업 ▲61년 서울대 국문과 졸업 ▲62년 현대문학 평론추천 데뷔 ▲68년 동대학 대학원 졸업 ▲69∼84년 서울대 교양과정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 ▲81년 서울대 문학박사 ▲84∼2004년 동대학 국문학과 교수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 시전문지 ‘심상’ 편집고문, 문학평론가 # 수상 현대문학상 평론부문상, 황조근정훈장 # 주요 저서 한국현대소설의 비평적 분석, 전후대표작품 분석, 글쓰기를 두려워말라, 별을 밟고 오는 영혼, 당신이 고독할 때,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다, 삶의 길을 묻는 당신에게, 내 생애 가장 따뜻한 날들 외 논문집·수필집·문장집 등 다수
  • 튀니지 국립민속무용단 15년만에 한국무대

    1962년 창단,46년의 역사를 갖는 튀니지 국립민속무용단이 16·17일 오후 7시30분 서울 정동극장과 인천 평생학습관 미추홀서 내한공연을 갖는다. 외교통상부 주최의 ‘아랍문화축전’ 행사 세 번째 행사로 마련된 무대.1993년 대전 엑스포 공연이후 15년만의 한국 공연인 셈이다. 튀니지 민속무용단은 공연에서 무용수 16명이 아르부카, 츠카첵, 타블라, 구안두라같은 전통악기 연주에 맞춰 섬세하고 화려한 춤을 선사할 예정이다.
  • [토요영화] 밤은 부드러워

    ●밤은 부드러워 (EBS 세계의 명화 오후 11시25분) 딕 다이버(제이슨 로바스)는 정신질환에 걸린 니콜 워런(조안 폰테인)을 치료하다 그녀에게 매력을 느껴 결혼까지 하게 된다. 부부로 평온한 일상을 이어가던 이들은 로즈마리가 나타나면서 위기를 맞는다. 딕이 해변에서 우연히 만난 배우 로즈마리(제니퍼 존스)와 사랑에 빠지고마는 것. 로즈마리와 점점 더 깊은 관계를 맺게 된 딕은 가치관의 혼란을 느끼고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그를 찾아온 것은 원망과 질책이 아니라 충격적인 이별 통고였다. 어느새 건강을 되찾은 부인 니콜은 그에게 “토미(세자르 다노바)를 사랑하며 그와 재혼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헨리 킹 감독의 영화 ‘밤은 부드러워’(1962년)는 원작소설의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자전적 경험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피츠제럴드는 아내 젤다의 정신질환이 악화되고 자신의 건강도 나빠지자, 힘겨운 상황을 이겨 내기 위해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했다.7년 만에 완성한 소설에는 1차 세계대전 이후 기성가치가 무너져 가는 역사적 전환기 속에서 한 남자가 겪어야 했던 정신적 방황이 절묘하게 묘사돼 있다. ‘위대한 개츠비’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이 영화는 피츠제럴드의 영혼과 신념이 잘 녹아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감독은 임종 직전의 피츠제럴드를 영화로 옮긴 ‘사랑의 흔적’을 만들었을 만큼 작가의 생애에 관심이 많았다. 원작소설을 최대한 충실히 영화에 옮긴 것도 그런 까닭에서이다. 헨리 킹 감독은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도제 시스템을 통해 연출가로 성장한 덕분에 착실히 시대의 흐름에 보조를 맞추는 작품세계를 구사해 왔다.‘정오의 격전’‘건파이터’ 같은 서부극을 비롯해 전쟁영화, 누아르 액션 영화에 이르기까지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작품을 내며 다양한 장르를 섭렵해온 감독으로 꼽힌다. 그런 그가 특히 두각을 나타낸 장르는 멜로극. 이 영화는 물론이고 ‘킬리만자로의 눈’‘태양은 또 떠오른다’‘사랑의 흔적’ 등에서 그는 멜로 거장으로서의 면모를 톡톡히 선보였다.‘밤은 부드러워’는 일련의 작품군에서도 두고두고 대표작으로 꼽히는 멜로물이다. 원제 ‘Tender is the Night’,142분.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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