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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때의 사회면] 쌀밥 판매 단속/손성진 논설실장

    [그때의 사회면] 쌀밥 판매 단속/손성진 논설실장

    지금은 남아돌아 처치 곤란인 쌀. 불과 몇 십년 전에는 쌀이 부족해 쌀밥을 팔면 벌을 받아야 했으니 금석지감(今昔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971년 11월 8일자 서울신문 사회면 머리기사는 쌀 소비를 줄이고 혼·분식을 강력히 추진하기 위한 행정명령이 발동된 그날 상황을 전하고 있다. 당시 농림부 등 관계부처는 합동으로 단속반을 짜 전국 3만 3000여곳의 음식점에 대한 일제단속에 나서 쌀밥을 파는지 점검했다. 양곡 소비 절약에 관한 행정명령에 따르면 관광호텔 등 모든 음식점에서는 밥에 보리쌀 등 잡곡을 20% 이상 섞어야 하며 분식센터와 양식 판매업소는 아예 밥을 팔지 못하게 했다. 또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밥을 팔지 못하게 돼 있다. 단속 첫날에는 협조와 당부에 그쳤지만 한두 번 명령을 위반하면 영업 정지 등의 처분을 내렸고 3번 단속에 걸리는 음식점은 허가 취소 등의 엄한 처벌을 받았다. 음식점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혼·분식을 하도록 했다. 도시락 검사를 해 잡곡을 30% 이상 섞지 않은 밥을 싸 오는 학생에게는 벌을 주었다. 가정에서도 혼·분식을 하도록 간접적으로 유도한 것이다. 한국인의 주식은 쌀이지만 유사 이래 1980년대 이전까지 한국인에게 쌀이 풍족했던 적이 없었다. 혼·분식은 일제강점기에도 절미운동(節米運動)의 하나로 장려되었다. 종전 이후 폭발적인 인구 증가와 민생 안정을 위한 저미가(低米價) 정책으로 쌀 증산 의욕을 꺾은 것도 쌀이 부족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1962년 대흉년으로 쌀 한 가마 값이 400%나 상승한 5000원 선까지 솟구치자 정부는 혼·분식 장려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이기 시작했다. 쌀은 부족했지만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미국산 밀가루는 넘쳐났다. 우리와는 반대로 농산물 생산이 급격히 늘었던 미국이 잉여농산물을 후진국에 원조 형식으로 대량 수출했던 것이다. 그에 따라 라면과 빵 등 밀로 만든 식료품의 생산과 소비가 크게 늘어났다. 1976년 밀가루 수입량이 170만t에 이르자 정부는 외화 절약을 위해 분식보다는 혼식을 장려했다. 통일벼 개발과 농지 개간, 댐 건설 등으로 쌀 생산은 꾸준히 늘어나 마침내 1977년 자급자족을 이루게 되었다. 혼·분식 장려운동이 시들해진 것도 당연했다. 정부는 14년 동안 금지되었던 쌀막걸리 제조도 허가했다. 유명무실해진 혼·분식 장려운동이 공식적으로 폐기된 것은 1980년대 중반이다.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주말 영화]

    ■알카트라즈 탈출(OBS 일요일 오후 10시 10분) 정의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형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더티 해리’로 유명한 명콤비 돈 시겔 감독과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의기투합해 만든 또 한 편의 흥행작이다. 슈퍼 경찰의 원조 격인 해리 캘러헌 형사로 인기를 모았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단 한 번의 탈옥도 허용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감옥에서 집단 탈옥을 주도한 은행 강도 프랭크 모리스를 연기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미 샌프란시스코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에 지어진 알카트라즈 교도소가 배경이다. 1962년 모리스의 탈옥 사건이 일어난 뒤에는 폐쇄됐고, 현재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록’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곳은 마이클 베이 연출, 숀 코너리·니컬러스 케이지 주연의 액션 영화 ‘더 록’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1979년작. ■마스크 오브 조로(EBS1 일요일 오후 2시15) 슈퍼 히어로 만화에 영향을 준 모험 소설 시리즈 ‘쾌걸 조로’를 바탕으로 한 작품. 소설에서 조로는 스페인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20세기 초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억압받는 민중을 도와 독재자와 악당을 무찌르는 영웅이다. 검은 모자와 눈만 가린 가면, 콧수염과 검은 망토, 놀라운 검술 솜씨가 트레이드마크. ‘마스크 오브 조로’는 스페인 출신의 섹스 심벌 안토니오 반데라스를 캐스팅해 새롭게 만든 영화다. 원작을 살짝 각색해 조로의 역할을 대물림한다는 설정이 흥미롭다. 원조 조로는 앤서니 홉킨스가 연기했다. 1998년작.
  • [부고] 美 북한 전문가 셀리그 해리슨 별세

    [부고] 美 북한 전문가 셀리그 해리슨 별세

    미국의 저명한 아시아 전문가이자 한반도 문제를 다룬 ‘코리아 엔드게임’의 저자인 셀리그 해리슨이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89세. 고인이 거주하던 메인주 캠던의 지역매체는 5일 고인이 골수이형성증후군을 앓다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펜실베이니아 출신의 해리슨은 하버드대 졸업 후 언론계에 입문했다. 워싱턴포스트(WP)로 자리를 옮겨 1962년부터 1965년까지 뉴델리의 남아시아지국장으로, 1968~1996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동북아시아지국장으로 재직했다. 해리슨은 특히 북한을 11차례나 방문한 미국 내 대표적인 북한통이다. 그는 1972년 5월 뉴욕타임스(NYT) 기자와 함께 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전쟁 후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최순실 게이트 탓… 재계 조용한 신년회

    최순실 게이트 탓… 재계 조용한 신년회

    5대 그룹 총수·전경련 회장은 불참 ‘최순실 국정농단’에 휘말린 재계가 조용한 신년인사회를 치렀다. 대통령이 참석하던 행사에 대통령 권한대행이 참석했고, 국정농단에 관련된 5대 그룹 등 주요 그룹 총수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예년 수준의 3분의2 정도가 참석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4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정관계, 경제계, 주한 외교사절 등 각계 주요 인사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2017년 경제계 신년인사회’를 열었다. 2015년 1500여명, 지난해 1300여명이 참석했으나 올해는 참석자가 대폭 줄었다. ‘경제계 신년인사회’는 경제계 최대 규모의 행사다. 대통령은 퇴임을 앞둔 때만 빼고는 대부분 행사에 참석해 경제계 인사들과 교류하고 신년 메시지를 전했다. 신년인사회는 1962년에 시작됐다. 정부 측 인사로는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을 비롯해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형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 등이 참석했다. 정계에서는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김동철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 심재철 국회부의장, 심상정 정의당 상임대표 등이 참석했다. 재계에서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삼성, 현대차, SK, LG 등 4대 그룹 총수는 불참했다. 지난해 참석했던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도, 경제단체를 대표해 매년 신년인사회에 참석했던 허창수(GS그룹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도 안 왔다. 대신 GS그룹 차원에서 허 회장의 동생인 허진수 GS칼텍스 회장이 참석했다. 손경식 CJ그룹 회장, 구자열 LS그룹 회장,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등도 참석했다. 황 대행은 “경제인들은 말로 하는 애국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애국자라고 생각한다”며 “경제인과 함께 국회와 정부가 힘을 합해 활로를 개척해 나가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기업은 기업인의 전유물만이 아닌 성실한 급여 생활자들의 삶의 터전이며 기업의 활력은 경제만이 아닌 이 사회의 맥박과 같다”면서 “난국을 헤쳐 나가는 데 모두가 응원해 주시길 간곡히 머리 숙여 부탁한다”고 말했다. 전경하 기자 lark3@seoul.co.kr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 스웨덴 왕비 “궁전에 유령 산다” 깜짝 발언 화제

    스웨덴 왕비 “궁전에 유령 산다” 깜짝 발언 화제

     스웨덴의 실비아(74) 왕비가 자신이 살고 있는 궁전에 ‘친절한’ 유령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다고 밝혀 화제를 모으고 있다.  실비아 왕비는 최근 현지 SVT1방송이 스웨덴 왕실 드로트닝홀름 궁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던 도중 “이곳은 유서가 깊고 작은 친구들도 살고 있다. 바로 유령들 말이다”고 말했다고 AFP 통신이 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실비아 왕비는 “이들 유령이 모두 친절하다”고 재차 강조했다.  실비아 왕비는 “궁에 놀러 와서 어두운 곳에서 걷거나 해 보라”면서 “아주 재미있다. 깜짝 놀라는 일은 없다. 유령들은 상냥하다. 가끔은 내가 완전히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독일 태생의 실비아 왕비는 칼 구스타프 16세(71) 현 스웨덴 국왕과 1972년 결혼해 슬하에 1남2녀를 뒀다. 실비아 왕비의 ‘궁궐 유령’ 발언이 담긴 STV1방송의 다큐멘터리는 오는 5일 방영된다. 유럽에서는 오래된 건물에서 유령이 출몰하고 있다는 괴담은 드물지 않다. 영국의 주요 관광명소이자 한때 감옥으로 사용됐던 런던 탑에서도 옛날 왕과 왕비의 유령을 목격했다는 제보가 잇따랐다.  실비아 왕비가 머물고 있는 드로트닝홀름 궁전은 스웨덴 왕가가 1662년 스톡홀롬 교외에 건축한 여름별궁으로, 17세기 스웨덴의 부와 권력을 상징하던 건물이다. 프랑스 바로크 양식의 영향을 받아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과 비교되며 ‘북유럽의 베르사유’라고도 불린다. 수백 개의 방이 있는 거대한 궁전이지만 현재 관광객에는 일부만 공개하고 있다.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태국 국립공원서 셀카 찍던 여성 악어 공격당해

    태국 국립공원서 셀카 찍던 여성 악어 공격당해

    셀카를 찍던 여성이 악어에 다리를 물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1일(현지시간) 영국 데일리메일은 최근 태국 카오야이 국립공원(Khoao Yai National Park)에서 관광객 프랑스인 베네풀리에 레즈플러(Benetulier Lesuffleur·46)란 여성이 악어의 공격을 당했다고 보도했다. 당일 여성은 남편과 함께 코 야이 국립공원을 구경 중이었으며 셀카를 찍던 중 물가서 나온 악어에게 다리를 물렸다. 사고 직후 여성은 인근 병원으로 이송돼 회복 중이며 생명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카오야이 국립공원 칸치트 스리나파완(Kanchit Srinoppawan) 소장은 해당 여성이 악어 출몰 경고 표지판을 무시한 채 사진 찍기 위해 물가 가까이 접근하다 이러한 피해를 입었다고 밝혔다. 카오야이 국립공원은 1962년에 태국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그 넓이만 2천 제곱킬로미터며 2005년 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동파야엔(Dong Phaya Yen) 국립공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사진= dailymail.co.uk, google 영상팀 seoultv@seoul.co.kr
  • [사설] 이란서 2조원 공사 수주한 대림산업의 낭보

    국내 건설업계가 해외 수주 가뭄에 허덕이는 가운데 대림산업이 이란에서 2조 3000억원 규모의 공사를 따낸 것은 세밑의 낭보가 아닐 수 없다.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남쪽으로 400여㎞ 떨어진 이스파한 정유공장을 개선하는 프로젝트로 서방이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를 해제한 이후 글로벌 건설사가 수주한 첫 사례라고 한다. 국내 건설사가 이란에서 따낸 역대 최대 규모의 공사이기도 하다. 이번 소식이 단비와 같이 반가운 것은 나라 밖에서 침체일로를 겪고 있는 건설업계에 해외 진출의 자신감을 다시 불어넣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다. 올해 해외 건설 수주액은 2014년(660억 달러)의 절반에도 한참 못 미치는 282억 달러로 곤두박질친 상황이다. 이런 중에 나온 대형 공사 수주는 내년 해외건설 시장의 반등신호로 잔뜩 움츠러든 국내 건설업계의 해외시장 전열을 재정비하는 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 수주는 대림이 이란에서 40년여간 뚝심으로 쌓아 온 신뢰의 결실이란 점에서 높게 평가받을 만하다. 대림은 1962년 이란과 수교가 이뤄지자 국내 건설사 중 가장 먼저 진출한 뒤 1975년 이란 이스파한의 군용 토목공사를 처음으로 따냈다. 지금까지 모두 26건 45억 5000만 달러의 공사를 수행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1988년 7월 한국인 근로자 13명이 숨지고 40여명이 다치는 사고가 터졌음에도 인력을 철수하지 않고 공사를 마무리해 좋은 인상을 남겼다. 이란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됐을 때도 국내 업체로는 유일하게 현지를 지켰다고 한다. 이번 공사는 수주액으로 따져도 초대형이지만 수주 방식도 상당히 주목할 만하다. 대림은 설계·시공뿐만 아니라 금융조달까지 책임지는 형태로 공사를 진행할 것이라고 한다. 그동안 국내 업체들이 중동에 진출할 때 단순 설계와 시공만 맡아 공사 전체에 대한 주도권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던 게 사실이다. 금융조달부터 시공까지 공사 전체를 담당하면 하도급 업체 선정, 기자재 조달 등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번 대형 수주가 건설업계의 해외 사업을 다각화·고도화하는 계기가 되는 한편 후속 수주로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특히 지난 5월 박근혜 대통령의 이란 국빈 방문 당시 양국 정상 간에 약속했던 60여건 50조원대 공사의 수주에도 물꼬가 트이기를 기대한다.
  • ‘암흑물질 연구’ 개척 여성천문학자, 우주로 돌아가다

    ‘암흑물질 연구’ 개척 여성천문학자, 우주로 돌아가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는 천문학과 깊은 관련이 있는 날처럼 보인다. 1642년 12월 25일에는 아이작 뉴턴이 태어났고,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천문학계의 또 다른 영웅 베라 루빈이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88세. 미국의 여성 천문학자 베라 루빈은 현대 우주론의 한 분야인 암흑물질 연구에 선구적인 업적을 남긴 과학자로, 그의 업적은 30년대 이후 주목받지 못하던 암흑물질 가설을 되살려 이론으로 나아가게 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천문학 발달사에 큰 분수령을 이루는 암흑물질에 대한 최초의 예측은 스위스 출신 물리학자인 프리츠 츠비키 칼텍 교수가 1933년에 '정체불명의 물질이 우주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다'고 발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우주 안에는 우리 눈에 보이는 물질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암흑물질이 존재한다는 주장이었다. 우주론 역사상 가장 기이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주장은 간단히 무시되었고, 세월과 함께 묻혀진 채 망각되었다. 오래 잊혀졌던 암흑물질을 다시 무대 위로 올린 주인공이 바로 베라 루빈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도움으로 천문학의 매력에 빠진 루빈은 1948년 배서대학을 졸업한 후, 프린스턴대학원에서 천문학을 공부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이 대학원은 천문학 과정의 여성 입학을 허용하지 않아 그는 다른 대학원들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코널 대학에서는 리처드 파인만, 한스 베테 같은 거물들에게 배웠다. 츠비키로부터 한 세대가 지난 1962년, 베라 루빈은 1950년대 애리조나에 있는 키트피크 천문대에서 은하 내 별들의 회전 속도를 측정하면서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발견했다. 은하 중심부에 가까운 별들이나 멀리 떨어진 별들의 공전속도가 거의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이것은 케플러의 법칙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처사였다. 이 법칙에 따르면, 바깥쪽 별들의 속도가 당연히 한참 느린 것으로 나와야 한다. 태양 둘레를 도는 행성들만 보더라도 그렇다. 초당 공전속도를 보면, 수성은 47km, 지구는 30km, 해왕성은 수성의 10분의 1밖에 안되는 5km다. 만약 해왕성이 수성의 속도로 공전한다면 애시당초 태양계를 탈출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은하는 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가? 이미 한 세대 전 츠비키가 예언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루빈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학계에서 묵살당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여자라는 성(性)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남녀차별은 천문학 동네의 뿌리 깊은 관습법이었다. 그러나 전세는 대역전되었다. 암흑물질 이론의 근거가 될 만한 관측 증거들이 잇달아 발견됨에 따라 현재는 암흑물질이 우리 우주의 운명을 결정할 거라는 데 반기를 드는 학자들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암흑물질의 존재를 가장 극적으로 증명한 것은 중력렌즈 현상의 발견이었다. 빛이 중력에 의해 휘어져 진행한다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 의해 예측되었고, 1919년 영국의 천문학자 에딩턴의 일식 관측으로 증명되었다. 질량이 큰 천체는 주위의 시공간을 구부러지게 해서 빛의 경로를 휘게 함으로써 렌즈와 같은 역할을 하는데, 이를 일컬어 중력렌즈 현상이라 한다. 이 중력렌즈를 통해 보면, 은하 뒤에 숨어 있는 별이나 은하의 상을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최신 성과가 말해주는 암흑물질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우주 안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은하나 별 등의 물질은 단 4%에 불과하고, 나머지 96%는 암흑물질과 암흑 에너지이다. 그중 암흑물질이 23%이고, 암흑 에너지는 73%를 차지한다. 이것은 어찌 보면 허블의 팽창 우주에 버금갈 만한 우주의 놀라운 현황일지도 모른다. 성차별에 시달리긴 했지만 루빈은 츠비키와는 달리 보상을 받았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뒤인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에 ‘국가과학메달’을 받았으며, 이듬해인 1994년에는 암흑물질 연구에 관한 공로로 미국 천문학회가 주는 최고 상인 헨리 노리스 러셀(H-R그림표를 만든 천문학자) 상을 받았다. 그녀는 2000여 명의 과학자들이 모인 앞에서 수상 강연을 한 후, 엉뚱스럽게도 '은하수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TV드라마 주제가를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그 많은 과학자들도 그녀의 노래에 맞춰 합창을 했다는 사실이다. 천문학 동네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리라. 우주를 바라보는 인류의 시각을 크게 바꾸어놓은 베라 루빈. 그녀가 그토록 사랑했던 우주로 돌아가 평화로이 영면하기를 기원한다. 이광식 칼럼니스트 joand999@naver.com
  • 제53회 대종상영화제, 오늘(27일) 개최...배우들 참석률에 ‘관심 집중’

    제53회 대종상영화제, 오늘(27일) 개최...배우들 참석률에 ‘관심 집중’

    제53회 대종상영화제가 27일 오후 6시 세종대학교 컨벤션홀에서 열린다. 최근 대종상영화제 집행위원회는 부문별 후보작을 발표했다. 최우수 작품상 후보에는 ‘곡성’, ‘내부자들’, ‘대호’, ‘덕혜옹주’, ‘밀정’ 등 5편이 올라왔다. 감독상 후보에는 나홍진(곡성), 우민호(내부자들), 이일형(검사외전), 허진호(덕혜옹주), 김지운(밀정) 감독이 포함됐다. 남우주연상 후보로는 곽도원(곡성), 최민식(대호), 하정우(터널), 이병헌(내부자들), 송강호(밀정)가 꼽혔다. 여우주연상 후보에는 배두나(터널), 윤여정(계춘할망), 이태란(두번째 스물), 손예진(덕혜옹주), 심은경(널 기다리며), 강예원(날 보러와요)이 이름을 올렸다. 대종상영화제는 1962년부터 열린 국내 대표 영화제이지만 그동안 수상자 선정 과정에서 공정성 논란이 이는 등 끊임없이 잡음이 나왔다. 지난해에는 “영화제에 참석하지 않은 배우에게는 상을 주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가 남녀 주연상 후보와 인기상 수상자 전원이 불참해 대리 수상이 이어지는 역풍을 맞기도 했다. 이에 올해 대종상영화제 시상식에서도 얼마나 많은 영화인들이 참석할지 관심이 쏠리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 제53회 대종상영화제 시상식은 K스타 채널을 통해 생중계될 예정이다. 사진제공=연합뉴스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서울 근대의 풍경을 찾아… “마포종점에서 내립니다”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서울 근대의 풍경을 찾아… “마포종점에서 내립니다”

    서울신문이 서울시·문화지평과 함께 진행한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이 지난 3일 마포대로 일대 답사를 마지막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지난 7월부터 시작해 5개월간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 서울의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나선 여정에는 서울시민 1000여명이 참여했다. 횟수로는 20회를 진행하면서 서울의 역사를 지탱하고 있는 서울미래유산 372개 중 150여개를 찾아다니며 그 속에 담긴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났다. 답사에는 성인뿐만 아니라 유치원생부터 초·중·고 및 대학생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남녀노소가 함께 서울의 큰길과 골목을 누볐다. 미래유산은 미래 세대에게 전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문화자산을 말한다. 비록 지금은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았지만 미래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답사를 주관한 문화지평이 답사에 참여한 시민들에게 답사 후기를 받아 본 결과 대부분 그런 가치를 충분히 느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울시는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와 페이스북 그룹 ‘문화지평’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미래유산을 홍보하고 있다. 서울신문과 서울시는 또 내년에도 더 깊고 촘촘한 역사탐방을 준비하고 있다. 서울 충정로에서 마포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를 예부터 애오개로 불렀다. 애오개란 이름 유래는 매우 다양하다. 모두 그럴 듯한 해설이 붙어 어떤 게 정설인지 모를 정도다. 지난 3일 오전 10시 애오개역에서 시작된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은 애오개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됐다. 전상봉 서울미래유산 해설사는 “애오개는 인근 만리재에 비해 고개가 아이처럼 작다는 뜻의 아이고개가 변한 것이라든지, 옛날 도성에서 어린아이가 죽으면 서소문을 통해 이 고개 밖으로 묻어서 ‘아이고개’라고 했던 데서 유래했다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고 운을 떼면서 답사를 시작했다. 이날 답사 주제는 ‘마포대로 위에 남은 근대 서울의 풍경’이다. 마포대로 주변에 있는 60년이 넘은 노포 음식점과 한국정교회 성 니콜라스 성당 등 근대 역사를 담은 서울미래유산을 중심으로 둘러봤다. 마포대로는 교통이 발달하기 전 도성에서 남대문을 지나 배가 있는 삼개(마포) 나루를 가려고 발달된 길이다. 현재는 마포대교 북단부터 아현교차로까지 길이 2.8km에 달하는 도로다. 마포대로는 과거 ‘귀빈로’라는 별명이 있다. 외국 정상들이 김포공항을 통해 국빈 방문을 하면 마포대로를 통해 서울 도심에 진입했다. 이때 도로 인근에 있는 초·중생들이 연도에 나와 양국 국기를 흔들며 정상을 맞이했다고 한다. 인근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한선영(46) 씨는 “아무것도 모르던 초등학교 때 불려나가 작은 국기를 흔들었던 기억이 있다”며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미국 지미 카터 대통령 방한 때가 아니었나 싶다”고 회상했다. 카터 대통령이 오기 전 VIP들은 한강대교를 건너 지금의 한강로를 통해 도심으로 들어왔다. 1975년 방한한 아프리카 가봉의 봉고 대통령은 김포가도, 제2한강교(지금의 양화대교), 신촌로터리를 통해 시청으로 진입했다. 1979년 6월 29일 방한한 카터 대통령은 이튿날 여의도에서 열린 서울시민환영행사를 마치고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마포대로를 거쳐 청와대로 향했다. 귀빈로는 사실 카터 대통령 때문에 만들어졌다. 서울시민환영대회뿐 아니라 다음날 여의도침례교회와 국회 방문 일정 등 두 차례나 마포대로를 지났기 때문에 귀빈로 중에서도 특히 이 구간 정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래서 마포대로가 귀빈로를 대표하는 별명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는 카터 대통령 방한 전인 1979년 5월 공항에서 여의도, 서울대교(지금의 마포대교), 마포로, 서소문, 시청 간 총연장 20㎞에 달하는 길을 귀빈로라 명하고 환경정비를 명한다. 시야에 들어오는 상가, 빌딩, 심지어 개인 주택까지 건물, 간판, 담장 등을 자비로 고쳐야 했다. 물론 시예산도 2억 6200만원을 배정했다. 이때 신민당사, 마포중고등학교 등이 재개발됐고 아현초등학교, 마포경찰서는 제외돼 지금도 볼 수 있다. 마포대로 일대에는 마포옥, 최대포집, 역전회관 등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3개의 식당 ‘노포’(鋪)가 있다. 마포옥은 1949년경 개업하여 2대째 가업을 이어 오고 있는 설렁탕 전문점이다. 1970년 리모델링해 옛 모습은 사라졌지만 음식 맛은 그대로라는 평을 받고 있다. 최대포집은 1955년 공덕로터리 인근에서 처음 문을 연 돼지갈비 전문식당이다. 역전회관은 서울시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62년 용산역 앞에서 창업주 홍종엽씨가 ‘역전식당’으로 개업한 바싹불고기 전문식당이다. 2012년 현 위치로 이전해 창업주 대를 이어 2대 김도영 씨가 현재까지 운영해오고 있다. 창업주는 전라도 순천에서 불고기, 수육을 팔았던 호상식당 김막동이란 할머니에게 전수받았다고 한다. 답사 날 잠시 들른 역전식당엔 김도영 대표가 없었다. 김 대표는 요즘 미슐랭가이드에서 발표한 빕 구르망 맛집을 찾아다니느라 바쁘다. 이날도 답사팀이 방문했지만 명동교자 벤치마킹을 위해 다녀오느라 자리에 없었다. 대신 박덕자(63) 역전식당 매니저가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후 이에 대한 질문이 많아졌다”며 “종업원들이 선정 이유를 설명하면서 나름 자부심을 갖는다”고 말했다. 이들 서울미래유산 마포지역 식당 노포들은 반세기를 꾸준하게 한결같은 입맛으로 식객들을 사로잡았고 그 맛은 현재진행형이다. 마포대로를 걷다가 마포트라팰리스 2차 길 건너편 언덕바지를 보면 고색창연한 돔 지붕을 가진 교회건물이 보인다. 한국정교회 성 니콜라스 대성당이다. 안토니우스 임종훈 신부는 “성 니콜라스 대성당은 한국정교회 한국 관구의 중심이 되는 교회로 1903년 고종이 하사한 정동 땅에 축성한 것을 1968년에 지금 장소로 옮겨 신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정교회는 1899년 대한제국에 진주해 있던 러시아군과 러시아 외교관들을 위해 러시아정교회에서 신부를 파견하면서 역사가 시작됐다. 이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과 한국전쟁 등으로 한국정교회는 그리스정교회 산하로 소속이 바뀐 뒤 뉴질랜드 그리스정교회 대주교청 관할기를 거쳐 2004년 6월 한국 대교구로 독립했다. 성 니콜라스 대성당은 1968년 콘크리트 구조로 지어진 비잔틴 양식의 국내 유일의 정교회 성당으로 종교사적, 건축사적 보존 가치가 높은 종교시설물이다. 안토니우스 신부는 “현재 한국정교회는 서울에 1곳을 포함 전국에 7개 교회 건물이 있으며 3000여명의 신자가 있다”고 말했다. 정동에서 지금 자리로 이전한 원인은 고종이 하사한 땅을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수탈당하고 해방 후에는 정부에 귀속됐기 때문이다. 정부와 부지반환 소송을 벌이면서 승소했다. 하지만, 막대한 소송비용 감당하기 어려워 땅을 팔아서 소송비용을 제하고 남는 금액으로 현재 터를 샀다. 지금 자리는 경성감옥 교도소장 관저가 있던 자리다. 경성감옥은 마포경찰서 건너편 지금의 서부지방법원이 있는 자리다. 전 해설사는 “일제는 경성감옥에서 1㎞ 정도 떨어진 마포연와공장에 죄수들을 데려가 강제 노역을 시켰다”며 “연와공장은 지금 삼성마포아파트 자리”라고 설명했다. 옛 신민당사가 있었던 자리에는 현재 SK허브그린 빌딩이 들어서 있다. 이 빌딩 앞 인도에는 신민당사 터 황동표지판이 박혀 있다. 삼각형 표지판에는 ‘1979. 8. 11 야당 당사에서 농성하던 YH무역 노동자 김경숙이 경찰 진압과정에서 사망’이라고 적혀 있다. 당시 도화동에 살았던 이봉규(55) 중산고 역사교사는 “당시 전투경찰 차가 즐비했는데 11일 아침에는 모두 사라지고 소방차가 물청소를 하고 있었다”며 “신문에는 여공이 투신자살한 것으로 보도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에 따르면 삼각형은 국가폭력을 의미한다. 원형은 시민저항, 사각형은 제도 내 폭력이란 의미로 인권과 관련된 표지판이 서울에만 38개소에 설치돼 있다. 청계천 피복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에 이어 김경숙의 희생으로 노동운동이 민주화운동을 견인하는 기폭제가 됐다. 아현중학교 자리는 조선시대 가난한 전염병자를 치료하기 위해 도성 밖 서쪽에 설치했던 의료기관 ‘활인서’ 터다. 공덕동 396-4번지에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장인 아소당(我笑堂) 인근에 설치된 ‘공덕리 금표’ 표지석이 있다. 아소당은 대원군이 권력 무상을 스스로 비웃으면서 지은 이름이다. 공덕리 금표에는 아소당에 120보 내 접근을 불허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답사팀은 마포내로 남단 한강변에 이르러 강변한신코어, 마포타워를 끼고 옛 마포장터에 올랐다. 오르막을 오르며 만난 안정호(78)씨는 “지금도 일주일에 1회씩 현장을 나가 역사 공부를 한다”며 “후손에게 유산으로 남겨주기 위해 답사 후에는 반드시 기록을 남긴다”고 노익장을 과시했다. 마포장은 현재 마포동 419번지 벽산빌라 일대로 추정되는 곳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해방 후 귀국해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대단원의 막은 마포종점에서 내렸다. 마포어린이공원에는 은방울자매의 마포종점 노래비가 서 있다. 대학 간호학과 동기인 유은주·변선주·이현주 씨와 함께 나온 김묘경(49) 씨는 “서울신문을 보고 친구들과 같이 나오게 됐다”면서 “내년에도 프로그램이 진행된다면 모두 참여하고 싶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글 사진 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 김중업 설계 원형대로 주한프랑스대사관 복원

    국내 1세대 건축가인 김중업(1922~1988)이 설계한 주한 프랑스대사관 건물이 복원된다. 서울 서대문구 서소문로에 있는 이 건물은 김수근의 공간사옥 건물과 함께 우리 현대 건축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됐지만, 1962년 준공 이후 수 차례 증·개축을 통해 본래 형태가 훼손됐다. 파비앙 페논 주한 프랑스대사는 14일 대사관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대사관 리모델링 계획을 밝혔다. 원래 건물인 본관과 사무동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리모델링을 통해 증·개축된 부분을 덜어내고 초기 모습으로 되돌린다는 복안이다. 대표적으로 한국 전통가옥의 선을 모티브로 한 사무동 지붕의 처마선이 김중업이 설계했던 그대로 복원된다. 대사관 건립 당시 한국 전통 문화와 프랑스의 현대적 감각의 결합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이후 보안 등의 이유로 변형됐다. 페논 대사는 “김중업 선생은 프랑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유일한 한국 제자이며 대사관저는 한·불 양국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존재”라며 “리모델링은 김중업 선생의 건축작품 가치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해외투자 유치 3조 9000억 이끈 ‘사령탑’은 김기현 울산시장

    1962년 후 전체실적의 45% 수준 울산시가 해외투자 유치를 통해 주력산업에 드리운 불황의 그늘을 걷어내고 있다. 울산시 투자유치단은 가까운 일본, 중국을 넘어 중동, 유럽, 미국 등 세계 곳곳을 누비고 있다. 투자유치단은 김기현 울산시장이 직접 이끌고 있다. 12일 울산시에 따르면 시는 민선 6기인 2014년 7월부터 지난달까지 33개사 33억 9325만 달러(약 3조 9000억원)의 해외투자 유치 성과를 올렸다. 지구 두 바퀴 반 이상을 돌며 세일즈 행정을 펼친 결과물이다. 지난 10월에는 미국의 에어프로덕츠와 산업용 가스 증설투자를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한 데 이어 쿠웨이트 PIC사와 투자의향서를 맺는 성과를 거뒀다. 에어프로덕츠는 2018년까지 850억원을 들여 울산 울주군 온산읍 6500㎡ 부지에 질소, 산소, 아르곤 등 산업용 가스를 생산하는 공장을 증설한다. 지난 6월에는 화학분야 글로벌기업인 BASF가 국내 안료사업 전담법인을 울산에 신설하고 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울산시와 BASF가 국내 안료사업 전담법인 신설 및 전략적 투자협력 파트너십 구축을 위한 업무협약의 결과물이다. 또 지난 1월에는 SK가스와 PIC의 전략적 투자협력 파트너십 구축 MOU를 체결해 프로판 탈화수소(PDH) 사업에 9000만 달러를 유치하기도 했다. 울산시는 최근 2년간 33억 달러의 외자 유치 실적을 올렸다. 이는 외국인 통계가 시작된 1962년 이후 전체실적 74억 달러의 45% 수준이다. 이 중 사우디와 쿠웨이트가 약 30억 달러를 투자해 대부분을 차지했다. 중동 자본 유치로 경제 활성화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다. 김 시장은 “글로벌 기업이 국내 투자를 검토할 때 까다로운 인허가 등이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만큼 행정절차를 도와주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면서 “불황을 이유로 움츠리기보다는 공격적인 전략이 투자를 유치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울산 박정훈 기자 jhp@seoul.co.kr
  •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이웃 얻는 법을 아직도 모르는 중국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이웃 얻는 법을 아직도 모르는 중국

     “1962년 12월 25일 오후 중국 베이징(北京) 인민대회당.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외교부장은 국경조약 체결과 경제원조 를 요청하기 위해 베이징을 방문한 윰자긴 체덴발 몽골 총리와 마주 앉았다. 저우는 회담이 시작되자마자 뜬금 없이 회담 의제와는 상관 없는 ‘인도가 미국 제국주의에 팔려가 반중국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고 중국-인도 간의 국경분쟁을 거론하며 중국 입장을 적극 지지해줄 것을 요구했다. 체덴발 총리는 그러나 중·인 분쟁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는 선에서 그쳤다. 예상과는 달리 체덴발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저우는 “유감이라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다시 한번 중국 입장을 지지해줄 것을 강하게 압박했다. 중국이 옳다는 답이 정해진 문제에 대해 중립은 있을 수 없다고 욱대긴 셈이다. 체덴발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사람도 살지 않는 히말라야 산맥의 땅 쪼가리를 놓고 인도와 싸우는 것은 인도를 서방 쪽에 붙도록 몰고 감으로써 중국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자 저우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몽골 외교부가 1962년 12월 저우-체덴발 간의 당시 중-몽골 정상회담록을 비밀해제해 온라인에 공개했다고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가 지난 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들의 치열한 설전으로 양국 회담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으면서 중국 노동자를 몽골에 더 많이 파견해 달라는 체덴발의 요청을 저우는 그 자리에서 일축했다. 화가 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저우에게 체덴발은 “그렇게 화낼 필요가 없지 않느냐. 차분하게 얘기하자”고 말하자 저우는 “지금 나를 훈계하는 것이냐”고 발끈했다. 당시 배석했던 중국주재 몽골대사는 “이때 주먹 다짐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다”고 전했다. 이후 중국은 몽골에 대한 경제원조를 끊었고 2년 뒤엔 중국 노동자를 몽골에서 철수시켰다. 위협을 느낀 몽골은 곧바로 소련에 보호를 요청하면서 양국관계는 급랭했다. 이에 따라 1991년 소련 붕괴 때까지 몽골에 소련군이 주둔하게 됐다. FP는 “비록 중국이 국경분쟁에서 이겼지만 정말 중요한 문제는 국제사회에서 인도가 나쁜 놈들이라는 것을 인정받는 것이었기 때문에 저우는 외교력을 집중하고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비슷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중국은 최근 몽골에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의 방문 계획을 취소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몽골은 달라이 라마의 방문을 허용했다. 달라이 라마는 지난달 18∼21일 몽골 최대사원인 간단사원(간등사)과 대형체육관 등에서 대중 강연을 갖고 몽골 학자 및 청년대표들과 만나는 등 일정을 진행했다. 티베트와 역사적, 종교적 연원이 깊은 몽골은 1979년부터 달라이 라마를 수차례 초청한 바 있다. 이에 중국은 양국 정부 간 회담을 무기 연기한 데 이어 국경을 통과하는 화물 차량마다 통관비를 징수하고 광산에 전기를 끊는 등 경제적 보복 조치를 단행했다. 까닭에 몽골이 중국으로부터 기대해온 원리금 상환 부담이 가벼운 연성차관과 경제원조도 사실상 물거품이 됐다. FP는 중국이 자국의 부상은 이웃 국가들과 공동으로 이기는 길이라며, 자신들의 외교정책은 과거 강대국들과 달리 국가 간 평등과 내정불간섭을 원칙으로 고수하고 있다고 선전하고 있으나, “몽골이 자신들의 정치적 요구에 굴복토록 강압하는 것은 중국이 말하는 우의의 사악한 면을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중국과 몽골 관계사는 노골적인 압박과 협박이 (중국이) 예기치 않는 방향으로 역풍을 불러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저우가 중국의 도움을 기대하며 자국을 방문한 몽골의 지도자에게 무리하게 중국의 입장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한 것은 기대와 달리 반대 효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중국은 1960년대에 몸은 성인이 됐지만 정신은 어린이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게 베이징 외교가의 대체적인 평가다. FP는 “다른 나라, 특히 중국의 의도에 의심을 가진 이웃 국가들을 협박해 굴종시키는 게 이웃을 얻는 유용한 방법이 아니라는 점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달라이 라마의 몽골 방문 논란 때도 산지먀타브 야담슈렌 국회부의장이 “용(중국)을 건드리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했으나, 중국의 고압적인 태도로 중국과 우호관계를 맺자는 주장의 정치적 입지가 도리어 약화하고 말았다는 얘기다. FP는 “중국이 역내 국가들로부터 신뢰를 얻으려면 평등에 관한 자신들의 말이 구두선(口頭禪)이 아님을 인식시키고, 다른 나라가 다른 견해를 가질 권리를 인정하며 ‘강력한 요구’나 분노에 찬 경제 지렛대로 순종을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국민 외면’ 대종상 다시 살아날까?…12월 27일 개최

    ‘국민 외면’ 대종상 다시 살아날까?…12월 27일 개최

     한 때 국내 최고 권위를 자랑했지만 잇따른 공정성 실추로 존폐 위기에 놓인 ‘대종상영화제’ 측이 그간의 논란에 사과했다.  30일 대종상영화제 사무국은 다음달 27일 오후 6시 세종대학교 컨벤션센터에서 열릴 예정인 제53회 시상식 개최를 앞두고 공식입장을 발표했다.  이들은 “대종상영화제가 최근 몇 년간 구설에 휘말리고 잡음을 낳으며 53년이라는 전통을 가진 시상식의 권위에 큰 상처를 입었다”면서 “한국영화를 사랑하는 팬들 및 국민들이 (분노하는 데는)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인정한다. 진심으로 반성하고 머리숙여 용서를 구한다”라고 밝혔다.  이어 “최근 수많은 회의와 연구를 통해 앞으로 이런 일이 절대 발생하지 않도록 매사에 신중을 기해 운영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심사에 있어서 만큼은 한점 의혹이 없도록 투명하고 공정하게 운영하겠다”고 말했다.  KBS의 중계 거부로 난항을 겪은 것과 관련해선 “현재 방송사와 편성에 대한 부분이 결정될 것”이라면서 “최종수상작이나 수상배우들은 본심 심사위원들의 심사표를 밀봉한 상태로 행사당일 개봉후에 집계를 하기 때문에 그전엔 알 수가 없고 당일 발표가 된다”고 말했다.  사무국 관계자는 “대종상영화제는 한국영화를 사랑하는 팬들의 축제이자 국민적인 행사라고 생각한다”며 “이번 행사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통해 영화팬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새로운 형식으로 진행하게 돼 많은 기대와 성원 부탁드린다”고 덧붙였다.  1962년 처음 열려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온 대종상영화제는 과거에도 여러차례 운영 논란과 공정성 시비가 불거지곤 했다.  지난해에는 대종상 후보 대다수가 시상식에 불참해 이 상을 바라보는 배우들의 인식이 확인됐다. 특히 조근우 대종상영화제 위원장이 “비난 받아야 할 이들은 우리가 아닌 영화제에 참석하지 않은 배우들”이라며 책임을 전가하는 듯한 발언을 해 비난이 커졌다.  인터넷으로 진행되던 인기 배우 투표를 유료로 진행해 논란이 됐고, ‘박정희 대통령 미화 논란’을 빚었던 영화 ‘국제시장’에 10개의 상을 몰아준 것도 네티즌들의 비난을 샀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후폭풍 맞는 박정희 흔적 2제] “5·16도로 개명”…제주 ‘부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후폭풍 맞는 박정희 흔적 2제] “5·16도로 개명”…제주 ‘부글’

    군사쿠데타·박정희 재조명 논란 2000년대 여론조사선 ‘유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분노하고 있는 제주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산인 ‘5·16도로’ 명칭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불거지고 있다. 28일 서귀포신문 등에 따르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5·16도로 명칭 변경에 대한 도민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 한라산 동쪽 750m 고지를 횡단해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잇는 1131번 지방도로는 흔히 ‘5·16도로’로 불린다. 당시 군사정권이 5·16쿠데타를 정당화하고 기념하고자 5·16도로라는 명칭을 붙인 것으로 추정되지만, 남아 있는 자료가 없어 공식 작명의 주체는 모른다. 5·16도로가 처음 개설된 것은 1932년. 당시 일제가 군사 목적과 한라산 산림수탈 목적으로 한라산에 임도를 개설했다. 이후 5·16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군사정권은 한라산 남과 북을 연결하는 도로 건설을 계획했고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62년 3월 현 제주시청 앞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기공식에는 2만명의 도민이 참석했고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송민도, 도미, 박재란, 해군군악대 등의 요란한 축하공연이 펼쳐져 전국에 생방송으로 나갔다. 1963년 10월 12일에는 개통식도 했다. 5·16도로는 1969년 10월 1일 또 한 번 개통식을 갖게 된다. 당시 전 구간에 포장공사가 끝나지 않았으나 곧 있을 대통령 선거를 의식해 개통식을 다시 여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당시 5·16도로 건설을 총지휘한 제주도지사는 5·16 이후 박정희가 임명한 현역 해군소장이었다. 제주시 산천단에 위치한 춘강사회복지법인 맞은편 도로변에 5·16 도로명비가 세워져 있다. 5·16도로 개명 논란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0년대 중반에도 5·16 군사쿠데타와 박정희에 대한 재조명 논란이 벌어지면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제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한라산 종단도로에 군사쿠데타를 상징하는 5·16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청산해야 할 역사라는 논리였다. 당시 제주도민 여론조사까지 실시했지만 ‘좋은 역사든 나쁜 역사든 있는 그대로 보여 줘야 한다’면서 5·16도로 명칭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글 사진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분노한 제주, ‘5·16 도로’ 이름 바꾸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분노한 제주, ‘5·16 도로’ 이름 바꾸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분노하고 있는 제주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산인 ‘5·16도로’ 명칭을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불거지고 있다. 28일 서귀포신문 등에 따르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등을 통해 5·16도로 명칭 변경에 대한 도민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 한라산 동쪽 750m 고지를 횡단해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잇는 1131번 지방도로는 흔히 ‘5·16도로’로 불린다. 당시 군사정권이 5·16쿠데타를 정당화하고 기념하고자 5·16도로라는 명칭을 붙인 것으로 추정되지만, 남아있는 자료가 없어 공식 작명의 주체는 모른다. 5·16도로가 처음 개설된 것은 1932년. 당시 일제가 군사 목적과 한라산 산림수탈 목적으로 한라산에 임도를 개설했다. 이후 5·16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군사정권은 한라산 남과 북을 횡단하는 도로 건설을 계획했고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62년 3월 현 제주시청 앞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기공식에는 2만명의 도민들이 참석했고,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송민도, 도미, 박재란, 해군군악대 등의 요란한 축하공연이 펼쳐 전국에 생방송으로 나갔다. 1963년 10월 12일에는 개통식도 했다. 5·16도로는 1969년 10월 1일 또 한번 개통식을 갖게 된다. 당시 전 구간에 포장공사가 끝나지 않았으나 곧 있을 대통령 선거를 의식해 개통식을 다시 여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당시 516도로 건설을 총 지휘한 제주도지사는 5·16 이후 박정희가 임명한 현역 해군소장이었다. 제주시 산천단에 위치한 춘강사회복지법인 맞은편 도로변에 2m높이에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인 5·16 도로명비가 세워져 있다. 5·16도로 개명 논란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0년대 중반에도 5·16 군사쿠데타와 박정희에 대한 재조명 논란이 벌어지면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제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한라산 횡단도로에 군사쿠데타를 상징하는 5·16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청산해야 할 역사라는 논리였다. 당시 제주도민 여론조사까지 실시했지만, ‘좋은 역사든 나쁜 역사든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 한다’면서 5·16 도로 명칭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CIA 634회 암살 시도說… 권총소지, 공산혁명 연설 땐 어깨에 비둘기 앉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피델 카스트로는 뒷이야기도 많이 남겼다. AFP가 ‘피델 카스트로 : 인생의 여섯 가지 스냅숏’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카스트로의 비화들을 전하는 등 외신들은 특이한 그의 에피소드를 26일(현지시간) 소개했다. 1926년 부유한 사탕수수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난 카스트로는 변호사로 활동하다 투사로 변신했다. 1953년 풀헨시오 바티스타(1901~1973) 독재정권을 타도하려고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다가 실패했다. 당시 그는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고 멕시코로 건너갔다. 망명 중이던 멕시코에서 ‘혁명가’ 체 게바라를 만났다. 결국 그는 1959년 1월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쿠바 혁명’을 시작했다. 쿠바의 공산혁명은 냉전 시대 미국으로선 코앞에서 ‘붉은 위협’을 마주한 모양새였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을 중심으로 카스트로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모두 634회 있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암살 방법도 독약이나 독극물이 든 담배에서부터 화학 물질이 묻은 다이빙복 입히기 시도까지 다양했다. 카스트로는 만약을 대비해 브라우닝 권총을 거의 항상 차고 다닌다고 한때 고백하기도 했다. 방탄조끼를 입는다는 설은 부인했다. 카스트로는 “올림픽에 암살에서 살아남기 종목이 있다면 내가 금메달을 땄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1979년 기자들에게 가슴을 까 보이면서 “나는 힘이 센 ‘도덕의 방탄조끼’를 갖고 있다. 그것은 항상 나를 보호해 준다”고 말했다. 강인한 인상의 카스트로는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를 직접 두 번 본 한 여성은 “너무 깊은 인상을 받았다”며 “그의 얼굴을 보고 ‘그를 사랑한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카스트로는 공식적으로 두 번 결혼을 했고 3명의 여성과의 사이에서 7명의 자식을 뒀다. 그가 비밀스러운 불륜을 했고 더 많은 자식이 있다는 소문도 있다. 카스트로는 1992년 “사생활은 홍보나 정치를 위한 도구가 돼서는 안 된다”며 사생활 보호를 강조했다. 카스트로는 스스로 “미 제국주의”의 반대자라고 강조했다. 그는 친미 정권을 무너뜨리고 쿠바에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면서 미국과 대립을 반복했다. 가장 극한 대립은 핵전쟁 위기까지 갔던 1962년에 있었다. 그해 10월 14일 미국은 정찰기를 통해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려는 움직임을 포착했다. 뒤통수를 맞은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2년 10월 22일 미 해군에 쿠바를 봉쇄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14만명의 병력을 준비했다. 그해 10월 26일 구소련은 미국과 협상을 했다. 극한의 대치까지 갔던 쿠바사태는 결국 구소련이 미사일 기지를 철거하고 미국이 쿠바 해상의 봉쇄를 풀면서 타결됐다. 카스트로의 아디다스 체육복 사랑도 남다르다. 그는 올해 9월 쿠바를 찾은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와 자신의 집에서 면담할 때 파란색 바탕에 흰 줄무늬가 있는 아디다스 체육복을 입었다. 올해 프란치스코 교황과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을 만날 때도 카스트로는 아디다스 체육복을 ‘예복’으로 착용했다. 카스트로는 최장 유엔 연설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 유엔 웹사이트에 따르면 그는 1960년 9월 26일 4시간 29분 연설해 유엔에서 가장 연설을 오래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그는 1998년 2월 24일 쿠바에서 국가평의회 의장직에 재선출된 후에 7시간 30분간 연설을 한 기록도 갖고 있다. 카스트로가 1959년 공산혁명을 선언하는 연설을 할 때 그의 어깨에는 하얀색 비둘기가 내려앉았다. 그 이후 그는 쿠바인들에게 신화적 인물이 됐다. 쿠바인들은 카스트로가 신의 보호를 받는다고 여겼다. 카스트로가 불멸의 존재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그도 결국 인간이었고 지난 25일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헌법의 시대 정신은 ‘국민’

    헌법의 시대 정신은 ‘국민’

    지금 다시, 헌법/차병직·윤재왕·윤지영 지음/로고폴리스/528쪽/1만 8000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헌법 제1조 2항) 헌법 1조 1항과 2항은 우리 국호인 ‘대한민국’을 함부로 바꿀 수 없다고 천명하는 동시에 ‘어떤 국가기관’도 국민의 뜻에 반해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강력한 상징성이 담긴 조항이다. 이는 국가 권력 구조의 최정점에 있는 대통령에 대한 경고 메시지다. 다수 헌법학자들의 문제 제기를 보면 우리 정치사에서 헌정 파행과 왜곡의 근원지로 항상 ‘대통령’이 지목됐다. 수직적이며 상명하복식의 정치문화는 국민에게 가야 할 권력을 대통령에게 돌리는 기형적 현상을 보여 왔다. 민주화 시대 이전이나 그 이후나 대통령이 제왕으로 군림하는 ‘제왕적 대통령제’를 우리 정치에 팽배한 비민주적 제도와 관행, 정서의 원천지로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책 ‘지금 다시, 헌법’은 우리 헌법의 정신이 무엇인지, 또 시대와는 어떻게 조화하거나 불화해 왔는지를 구체적인 헌법 조문을 통해 풀어내고, 헌법의 세계로 안내하는 해설서다. 참여연대 창립 멤버이자 인권 변호사로 활동해 온 차병직(법무법인 한결) 변호사, 법철학자인 윤재왕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윤지영(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가 2009년 함께 쓴 ‘안녕 헌법’을 새로 썼다. 쉽고 간결한 문체로 헌법 전문부터 130개의 조문, 부칙까지 그 의미와 배경을 설명했다. 개정판인 만큼 지난 7년 동안 벌어진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세월호 참사 등 중요 사건과 향후 개헌 때 반영돼야 할 논점도 담았다. 헌법은 근대 국가라는 ‘정치 혁명’의 산물이다. 근대 국가는 전제적 왕을 몰아내고 그 권한을 국민에게 돌려준 뒤 선거를 통해 국가기관을 구성하는 방식을 택했다. 국가기관과 국민 사이의 관계를 밝힐 필요성에서 헌법이 탄생했다. 왜 헌법이 ‘법 위의 법’으로 모든 법의 지휘자이자 국가 최고의 감독자 역할을 하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저자들은 “헌법에 절대적 지위가 부여된 이유는 국민의 ‘인간다운 삶에 봉사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10개의 장으로 나눠진 헌법 중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한 2장은 10조부터 39조까지 모두 서른 개의 조문으로 구성돼 있다. 그런데 눈여겨볼 만한 건 국민의 의무를 규정한 건 납세와 국방에 관한 두 개 조항뿐이다. 28개 조항이 국민의 권리를 다루고 있다. 그만큼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최우선으로 한다. 저자들이 해석하는 대상은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의 ‘피로 쓴’ 결과물인 현행 헌법이다. 우리 헌법은 1948년 제정된 후 1987년 10월 29일까지 아홉 차례 개정됐다. 제9차 개헌을 통해 채택된 게 ‘대통령 직선제’와 ‘헌법재판소 부활’이다. 우리 헌법은 독재자의 등장 때마다 격동했다. 이승만 정권이 장기 집권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2차 개헌(1954년 11월 29일)은 국무총리제를 폐지하고, 초대 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철폐했다.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는 5차 개헌(1962년 12월 26일)을 통해 대통령제 환원, 헌법재판소 폐지로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로 전환했다. 이후 대통령 3선을 허용한 6차 개헌(1969년 10월 21일), 대통령 긴급조치권 발동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통령 선출 등 이른바 유신헌법으로 불리는 7차 개헌(1972년 12월 27일), 전두환 정권의 8차 개헌(1980년 10월 27일)까지 헌법은 독재의 도구가 됐다. 최근 국정 농단 및 헌정 질서 훼손 사태와 관련해 당사자인 박근혜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권자(국민) 의견이 커지고 있다. 제65조에 규정된 대통령 탄핵의 헌법적 의미는 ‘공직으로부터의 추방’이다. 헌법은 내란 및 외환죄를 제외한 대통령의 불소추특권(제84조)에 대해 ‘대통령 개인에게 부여한 특권’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대통령의 범죄 혐의는 재직 중에는 공소시효가 정지되지만 퇴임 후 민형사상 책임은 남아 있다. 저자들은 “헌법과 헌법 현실은 항상 다를 수밖에 없다”면서도 “헌법은 물론 헌법 현실도 결국 국민이 만들어 가는 것이며, 행동으로 현실을 창조해 가는 과정에서 헌법의 이해는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열린세상] 우리 헌법의 기구한 운명/이공현 법무법인 지평 대표 변호사

    [열린세상] 우리 헌법의 기구한 운명/이공현 법무법인 지평 대표 변호사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20대 국회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국민을 놀라게 했다. 취임할 때부터 개헌에 부정적이었던 대통령이 헌법 개정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날 저녁부터 터진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는 개헌을 포함한 모든 국정 현안을 삼키고, 모든 국민의 마음을 참담하게 만들었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어떻게 탄생하고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을까. 우리 헌법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헌법 전문에서 천명하고 있다. 상하이에 수립된 임시정부가 제정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우리 헌법의 모태다. 그리고 1945년 광복 이후 1948년 7월 12일 대한민국의 헌법이 제정된 이래 70년도 채 되지 않아 아홉 차례나 헌법이 개정됐다. 첫 번째 개헌은 1952년 6·25 중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국회의원을 위협하고 연금하는 폭력 사태 가운데 이루어졌다. 정부의 대통령 직선제와 야당의 의회주의안을 혼합한 소위 발췌 개헌안이다. 다시 1954년 초대 대통령에 한해 3선 제한을 철폐하는 내용의 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이때는 개헌에 필요한 의결정족수에 미달했으나 사사오입의 계산 방법이 동원된다. 3·15 부정선거로 연임에 성공한 이승만 대통령이 4·19 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하야했다. 그러자 1960년 6월 내각제를 채택한 헌법 개정이 이루어지기도 했고, 그해 11월 반민주 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한 개정이 추가됐다.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에 의해 1962년 12월 대통령제를 채택한 헌법 개정이 실현되고,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연장을 위한 3선 개헌이 이루어졌다.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다음 소위 유신 조치가 단행되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지향한다는 목표 아래 1972년 권위주의적 신대통령제 소위 총통제를 채택한 유신헌법이 등장했다. 10·26 사태 이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세력은 1980년 제5공화국의 출범을 선언하면서 대통령이 선거인단에 의해 7년 단임제로 간선되도록 하는 헌법 개정을 관철했다. 출범 당시부터 민주적 정당성에 심각한 결함을 지녔던 전두환 정부는 6월 민주화 항쟁에 직면하게 되고, 그 결과로 5년 단임의 대통령제를 채택한 현행 헌법이 1987년 탄생하게 된 것이다. 현행 헌법은 ‘여야 8인 정치협상’에서 개헌안을 마련해 여야 공동으로 국회에서 발의하고 의결한 다음 국민투표에 의해 확정됐다. 그렇다면 70년 미만의 우리 헌정사에서 현행 헌법이 30년 가까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추진 배경이 된 점을 들 수 있다. 1980년대 권위주의 통치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촉발되고 민주화 항쟁의 결과로 개헌 작업이 진행된 것이다. 헌법 개정은 국민투표라는 공동체 구성원의 합의로 확정하게 돼 있다. 누가 개헌을 주장하든지 진정한 동기와 의도는 헌법 제정권자인 국민이 결국 알게 된다. 국민의 공감을 반드시 얻어야 하는 이유다. 1987년 체제를 극복하고 통일을 지향한다는 거창한 구호를 내세우더라도 개헌의 동기와 의도가 의심받고 오해와 갈등을 불러일으킨다면 다시 생각할 일이다. 설사 개헌이 이루어지더라도 그 수명이 길지 않다는 점만은 우리 헌정사가 명백히 보여 주고 있다. 다음 현행 헌법은 국민과 여야가 개헌안의 마련에서부터 국민투표에 이르기까지 협력해 마쳤다는 점에 특색이 있다. 헌법은 국가라는 공동체에서 이루어 낸 정치적인 합의와 타협의 산물이다. 따라서 국민과 국회가 공감대를 이뤄 헌법에서 정한 개정 절차를 마찰 없이 밟아야만 절차적 정당성이 확보되고 헌법의 수명이 보장된다. 국가 권력을 제한하고 국민의 권리 신장을 꾀한다는 목표를 내세운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정치권의 타협과 국민의 적극적인 참여 없이는 단명에 그치고 만 것이 지난 헌정사다. 개헌론의 기세가 물 위로 솟구치는 듯하다 한풀 누그러진 모습이다. 이제 차분하게 왜 개헌이 필요한지, 즉 개헌의 동기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루고, 여야 및 국민이 협력하는 가운데 진행되는 헌법 개정 절차를 보고 싶다. 그래야만 새로운 헌법은 길이길이 효력을 지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 [탈북 3만명 시대] “3개월 부딪쳐 자신감”… 은행원 된 탈북민, 근성으로 편견 깨다

    [탈북 3만명 시대] “3개월 부딪쳐 자신감”… 은행원 된 탈북민, 근성으로 편견 깨다

    KEB하나은행 통합1기 강원철씨 부족한 금융지식 실무 통해 습득 지난 11일을 기점으로 대한민국에 입국한 북한이탈주민(탈북민)이 3만명을 넘어섰다. 6·25전쟁 이후 1962년에 첫 귀순자가 남한으로 입국한 이후 탈북민들의 남한행은 끊이지 않고 있다. 1994년 대량 아사자가 발생한 북한의 ‘고난의 행군’을 계기로 ‘대량 탈북’이란 용어가 생겨났고, 2004년에는 동남아에서 전세기를 이용해 400명이 한꺼번에 국내로 들어온 적도 있다. 최근에는 한류(韓流) 등을 접하면서 더 나은 삶을 위한 ‘이민형 탈북’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 김정은 체제에 대한 염증,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동경, 자녀의 장래 문제 등 동기도 다양하다. “나의 꿈은 통일된 이후 남한에서 터득한 경험을 북한 주민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정착해 살아가는 탈북민들에게 있어 취업의 문턱은 매우 높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해 불평만 하지 않고 도전하는 이들이 있다. 서울신문은 14일 ‘탈북민 3만명 시대’를 맞아 우리 사회에 정착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좌충우돌을 소개하고 있다. 지난해 KEB하나은행 통합 1기로 취업한 강원철(35)씨를 만나 남한 생활의 명암을 들어 봤다. 강씨는 남한에서도 손꼽히는 금융 대기업인 하나은행에 입사하는 기회를 잡았다. 그와 하나은행의 인연은 지난해 하나은행에서 진행한 탈북청년 멘토링에 참여하면서 시작됐다. 강씨는 “그전에 탈북청년단체 ‘위드유’(with-U)가 마련한 전직 대통령들의 업적을 소개하고 배우는 근·현대사 강좌를 하나은행의 후원으로 공동 작업하면서 인연을 맺게 됐다”며 “무엇보다도 하나은행이 남북 관계에 관심이 많고, 통일 이후 북한을 개발하려는 의지가 다른 기업들보다 높기 때문에 탈북민들을 뽑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현재 하나은행에서는 강씨를 포함해 3명이 일하고 있다.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라 할 수 있는 34세에 회사에 들어갔다. 입사를 해 보니 동기들은 모두 은행권에 취직하기 위해 금융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한 상태였다. 어떤 동기들하고는 띠동갑 차이가 날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비해 그는 다른 직종에서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은행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것을 느꼈다. 입사하자마자 연수원에서 은행 업무에 대한 수업을 받는 도중 ‘내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강씨는 “금융 관련 수업이 많았는데 정말 어려움이 많았다. 3개월간 부딪치다 보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연수가 끝난 뒤 하나은행 고려대 지점에 발령받았다. 지점 창구에서 고객들한테 금융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데 솜씨가 서툴러 불편을 많이 줬다고 한다. 지점에서 처리하는 금융 상품 취급 시간도 오래 걸리고, 실수를 해서 고객한테 민원도 받았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점차 업무에 적응하게 됐다. 강씨를 포함해 탈북민들을 채용한 하나은행의 사회공헌에 있어서 최우선 사업은 통일 이후 남북한 사회통합이다. 하나은행은 그간 통일부, 남북하나재단을 통해 탈북민 정착지원사업을 꾸준히 해 왔다. 그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내가 어떤 식으로든 통일에 기여해야 한다고 항상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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