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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마당] 다시 세워야 할 숭례문의 의미/이윤택 동국대 연극학과 교수

    [문화마당] 다시 세워야 할 숭례문의 의미/이윤택 동국대 연극학과 교수

    국보 1호 숭례문이 불타 사라졌다는 것은 지금 이곳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이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정치적 책임 공방이 제기되었고, 행정부처간 책임 공방으로 이어졌다. 뒤이어 민족주의와 세계주의의 관점이 덧붙여졌다. 전통 복원에 대한 의지와 아예 새로운 숭례문을 짓자는 논의로 발전되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우리 모두의 탓이오로 결론이 나는 듯하다. 추모제까지 열렸다. 이제 언젠가 숭례문이 다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것인가. 그렇게 한 시대의 어처구니없는 악몽은 극복되는 것인가. ‘숭례문 논란’과 관련, 숭례문이 불탔는데 왜 대한민국이 망합니까? 라는 당돌한 물음을 제기한 네티즌의 냉정한 시각이 오히려 현실성을 획득할지도 모른다. 숭례문이 불타고 지금 갖가지 논란이 일고 있지만 어느새 이 모든 논의는 잠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한 시대의 악몽, 혹은 정서적 공황은 일시적 충격으로 작용하고 망각의 시간 속에 묻혀질 것이다. 그러나 사라진 600년전 건축물 숭례문이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600년전 우리민족의 문명의 증거라면, 우리는 단순한 건축물을 잃은 것이 아니라 600년전 문명의 귀중한 증거물을 잃은 셈이다. 문명이 문화의 구체적 표현양식이라면 우리는 또한 600년전 우리의 문화를 잃은 것이다. 우리가 숭례문의 소실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단순한 문화재의 소실보다 우리 민족의 존재감을 증명하던 한 의식의 상징물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 의식의 상징물을 잃었다고 대한민국이 망합니까? 라는 질문을 계속 한다면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이렇게 되묻고 싶다. 그렇다면, 영어를 통용어로 사용한다고 해서 우리의 모국어가 없어지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러나 영어가 통용어로 사용되면서 우리의 사고방식 자체가 영어적 사유로 전환될 것이고, 말의 리듬과 생체리듬·생활방식까지 전이될 것이다. 급기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직면할지 모른다. 대한민국이 망한다고 한민족이 사라집니까. 물론 아니다. 국가가 망했다고 민족은 사라지지 않음을 일제 36년 식민치하를 통해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한민족을 사라지지 않게 한 노력은 국가를 다시 회생시키려는 독립지사들의 의지와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춘원 이광수의 뼈아픈 고백- “나는 조국이 그렇게 빨리 해방될 줄 몰랐다. 나는 민족의 장래를 위해 친일했다.”-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국가가 사라져도 민족은 존재한다고 믿었기에 친일을 했다는 친일 지식인들의 논리야말로 대한민국은 망해도 한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논리와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국가가 사라져도 민족은 영원한가. 일본과 분명히 다른 독자적 민족성과 언어권을 지닌 유구국은 국가를 상실하면서 일본의 오키나와현으로 편입되었다. 지금 오키나와 시민들은 일본과 다른 민족이며 독자적 삶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고 애써 주장할 수 있는가. 한때 원·청 제국을 건설했던 만주 기마민족은 지금 중국의 국민으로 변방 소수민족에 불과한 입장에 처해 있다. 숙신 말갈 같은 그들의 독자적 국가와 민족의 이름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 중국 국민으로 편입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라진 숭례문에 대해 당황하는 것은 바로 이런 한민족 의식의 문제 때문이다. 나는 숭례문은 반드시 가능한 한 옛 건축양식에 의거해서 재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새로 지은 숭례문 내에 무너지고 불타 사라진 악몽의 기억까지 고스란히 전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옛 숭례문 사진뿐만 아니라 2008년 2월 불타 흉물로 남은 숭례문 모습을 그대로 전시해 한 문명이 어떻게 역사적 굴곡을 넘으며 존재하고 있는가를 생생히 증거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건강한 삶의 의식 아닐까. 이윤택 동국대 연극학과 교수
  • [女談餘談] 생각할수록 속상한 ‘짝퉁 남대문’/문소영 경제부 차장급

    닷새 전만 해도 퇴근길에 오며 가며 남대문(숭례문)을 두 차례나 볼 수 있었다. 남대문이 전소되기 일주일 전쯤 퇴근 버스 안에서 야간 조명 속의 남대문을 물끄러미 보다가 동승한 선배에게 생뚱맞게 이렇게 이야기를 했었다.“도로 한가운데 문만 덩그러니 남아있으니 을씨년스럽다. 기왕에 공원까지 조성했으니 문 옆으로 작으나마 성벽을 연결해 조선시대 성문이었다는 사실이 환기되면 좋겠다.” 그러자 그 선배는 문화재청이 앞으로 성벽을 복원할 계획이 있다는 소식을 들려주었다. 남대문 근처를 십수 년간 돌아다니면서 자세히 돌아보지 않다가, 소실 1주일 전 어쩌다 쏟은 관심과 애정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하다. 한국의 ‘아이콘’이었다는데,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찍은 기념사진은 있어도 서울 남대문과 찍은 기념사진이 없다. 더 속상하다. 늘 거기에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대접을 제대로 안 한 탓이다. 이래저래 속이 상한데 남대문 소실 이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와 문화재청, 서울 중구청 등 ‘관(官)’쪽의 반응과 대응을 보면 ‘저러니 소실됐다.’는 확신에 분노가 치민다. 남대문 개방 이후 위험관리가 제대로 됐는지를 평가하기도 전에 국민의 성금으로 복원하자며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태도, 처참한 몰골의 국보 1호를 그저 국민들의 시선 밖으로 몰아내기 위해 가리개로 덮어버리는 행위, 복원 뒤 국보 1호의 지위를 유지하겠다는 성급한 발표, 복원 방식이 결정되지 않았는데 600년 역사를 하찮은 쓰레기로 내다버리는 몰역사성까지, 어느 하나 마뜩찮다. 민심이 흉흉해질 것을 우려해 잘못을 쉬쉬 덮으려고만 하거나, 곧 복원하니 괜찮다며 무마하려는 발상은 곤란하다. 관리 소홀로 타버린 흉한 국보 1호를 시간을 두고 지켜보며 국민과 정부가 모두 처절하게 반성하고 복원에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복원된 ‘짝퉁 남대문’에서 짝퉁 꼬리표를 국민들이 뗄 수 있을 것 같다. 얼렁뚱땅식의 반성은 ‘짝퉁 경복궁’,‘짝퉁 덕수궁’을 만들 수 있다. 재빠른 복원보다 길고 심도있는 반성이 먼저다. 문소영 경제부 차장급 symun@seoul.co.kr
  • [숭례문 복원 불붙은 논쟁] 숯덩이 하나도 소중… 굴삭기로 퍼 버리다니…

    재로 변한 기와와 목부재(木部材)를 빗자루로 쓸어 모아 굴삭기로 퍼담았다. 타다 남은 목부재는 트럭에 싣기 위해 톱으로 잘게 썰었다.600년 동안 숭례문을 지탱하던 나무가 순식간에 토막나는 순간이었다.13일 오후 숭례문 화재 현장 모습이다. 14일 문화유산연대 강찬석 대표와 함께 다시 찾은 현장은 그제서야 경찰 과학수사대의 지휘를 받아 처리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기와와 서까래 등 엄청난 양의 잔해가 서울 수색동과 경기 파주시 폐기물장에 버려진 뒤였다. 현장 감식으로 신원확인을 위한 유류품도 확인하기 전에 물청소를 해버린 대구 지하철화재참사 현장과 똑같았다. 시민들은 분노했다. 김광열(61·서울 도봉구)씨는 “우리 아이들이 보고 배울 게 있어야 하는데, 국상을 맞은 우리가 국보의 흙 한줌이라도 쓰레기 버리듯 하면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배모(54·인천시)씨는 “전문가들이 현장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도 안 내렸는데 굴삭기가 들어간다는 게 말이 되나.”라고 반문했다. 1994년 유네스코 산하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일본 나라시에서 동양의 목조문화재에 대한 회의를 연 뒤 작성한 ‘나라 다큐먼트’에 따르면 문화유산의 판별 기준은 성분·재질·형상이 유사하거나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새로 지은 숭례문 건물은 이미 문화유산의 의미를 상실하는 셈이다. 화재현장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문화유산연대 김란기 집행위원장은 “타고 남은 숯이라도 원래의 나무가 우리의 문화유산인데 마구잡이로 폐기하는 몰상식한 짓을 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현장 노동자들은 처리에만 열중했다.S건설사 장모(60) 사무소장은 “과학수사대의 지휘 아래 문화재청의 자문을 받아 잔해를 처리하고 있다.”면서 “숯덩이로 변해 의미가 없는 폐기물은 폐기물처리장으로 보내고, 타다 남은 목재나 의미있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서울시가 마련한 별도의 장소로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하지만 그는 별도의 장소를 몰랐다. 강찬석 대표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유해를 그냥 버리나.”며 한숨을 내쉬었다.“잔해를 급하게 치우지 말고 현장을 보존하고 덧집을 씌워서 눈비에 의한 손상을 막은 뒤 문화재위원들이 현장을 지휘해 발굴조사를 해야 했는데….”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숭례문 방화범 체포이후] 채씨 형량 얼마나 될까

    숭례문 화재 사건의 피의자 채모(70)씨가 유죄 판결을 받으면 중형 선고를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채씨는 2006년 4월 창경궁 문정전에 불을 지른 혐의로 구속기소돼 법원에서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2년을 선고받았다. 집행유예 기간에 또 다시 같은 범죄를 저지른 셈이다. 이에 따라 ‘국보 1호’를 전소시킨 범죄의 형량에 그동안 집행이 유예됐던 징역형까지 추가된다. 문화재보호법 106조가 준용하고 있는 형법 165조는 ‘공용건조물 등의 방화’에 무기징역 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채씨는 최고 무기징역에서 최소 3년이상 15년 이하의 유기징역형을 각오해야 하는 처지다. 특히 창경궁 문정전 방화 당시 법원은 채씨가 초범인데다 문정전 건물이 1986년에 복원된 점을 감안해 비교적 낮은 형벌인 집행유예를 선택했지만, 숭례문이 태조 7년인 1398년 완공된 이후 600년 이상 보존된 점, 채씨가 두차례나 문화재를 훼손한 점 등을 감안하면 중형이 불가피하다는 게 법조계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경찰 수사를 지휘하고 있는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채씨가 방화 사실을 실토했지만 아직 확정할 단계는 아니다.”면서 “범행을 입증할 증거를 최대한 확보해 사실 관계를 확정한 뒤 적정한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서울 아이콘 무너졌다”

    서울의 아이콘인 국보 1호 ‘숭례문’ 화재로 2층 누각이 전소, 붕괴된 소식을 외신들은 11일 일제히 전하며 큰 관심을 보였다. AP통신은 지난 2006년 3월 일반인에게 개방된 숭례문 역사를 소개하며 “한밤중의 화재가 서울의 대표적 랜드마크이자 한국의 국보 1호를 앗아갔다.”고 전했다. 로이터 통신은 ‘600년 된 서울의 아이콘 무너지다’란 제목의 기사에서 경찰이 방화 용의자를 찾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숭례문이 1398년 축조된 조선 최고의 목조 건축물이란 점도 소개했다. 특히 일본의 주요 언론들은 신문 1면 또는 사회면에 불타는 숭례문 사진을 싣고 주요기사로 타전했다. NHK방송은 숭례문이 불타는 장면을 서울 특파원의 현장 리포트로 전하면서 화재 현장 주변에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진화 장면을 지켜보던 시민들의 반응도 곁들였다. 교도통신은 숭례문이 일본인 관광객에게 친숙한 명소라면서 “소방당국의 초기 대응이 미숙했다.”는 한국 언론 보도를 인용했다. 아사히 신문은 “한국사회가 600년의 역사를 가진 국보 제1호의 손실로 큰 충격에 빠졌다.”고 전했다. 특히 “참사를 왜 막지 못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한국인의 자긍심이 사라졌다.”며 망연자실해하는 시민들의 반응을 자세히 소개했다. 요미우리 신문은 “2006년 개방 이후 무인경비시스템만 있을 뿐 무단출입을 감시하는 체제를 갖추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재연기자 연합뉴스 oscal@seoul.co.kr
  • ‘국보 1호’ 숭례문 전소…완전 붕괴

    국민들은 경악하고 분노했다.600년 넘은 국보 1호 숭례문이 불타 없어지는데 5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특히 밤 11시쯤까지만 해도 진화되는 듯해 안심하고 잠을 청했던 국민들은 다음날인 11일 아침에 모두 불타버린 숭례문의 흉한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목조 문화재가 화재 위험에 드러나 있다는 우려가 몇차례 지적돼 왔지만, 국보 1호를 보호하려는 대책과 매뉴얼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서울시는 대책없이 개방에만 열을 올렸고, 지방자치단체의 체계적인 화재 진화 대응책은 없었다. 숭례문은 야간과 휴일에 무방비 상태였고, 소방당국은 택시기사의 신고를 받고서야 화재 발생사실을 파악했다. 소방당국은 방수처리된 목조 국보의 특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발화지점이 아닌 엉뚱한 곳에 물을 뿌려댔다. ●현장서 라이터 방화범 추적 더욱 놀라운 사실은 자연 발화가 아닌 방화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남대문서와 서울경찰청 과학수사팀, 소방방재청, 중부소방서, 서울시청, 전기안전공사 등 관계기관 전문가 20여명으로 구성된 합동 감식팀은 이날 낮 화재 현장을 점검하는 과정에서 숭례문 1층에서 라이터 2개를 발견했다. 경찰은 이 라이터가 방화에 사용된 범행 도구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정밀감식을 의뢰했다. 119에 가장 먼저 신고했던 택시기사 이모(44)씨는 “50대로 보이는 남성이 쇼핑백을 들고 숭례문에 올라간 지 3∼4분이 지나서 불꽃과 함께 연기가 솟아올랐다.”고 말했다. ●CCTV에 잡힌 용의자는 없어 경찰은 방화 용의자로 의심되는 50대 남성을 자신의 택시에 태웠다고 주장하는 개인택시 기사 이모(49)씨를 불러 용의자의 인상착의 등을 캐물었다. 하지만 숭례문 주변의 폐쇄회로(CC)TV 화면에서는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숭례문 CCTV 4대 중 1대는 후문 방향으로, 또 1대는 숭례문 안쪽 방향으로, 나머지 2대는 정면 방향으로 각각 설치돼 있어 방화 용의자가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계단과 발화 지점인 2층 누각이 찍히지 않았다. 경찰은 관할 구청 및 무인경비업체인 KT텔레캅의 관리ㆍ감독 소홀 여부에 대해서도 수사를 벌이고 있다. 검찰도 이날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부장 조주태) 산하에 특별수사반을 편성, 화재 원인 규명에 착수했다. 글 / 서울신문 임일영·이경원기자 argus@seoul.co.kr 영상 / 손진호기자·김상인VJ nasturu@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20일 TV 하이라이트]

    ●TV쇼 진품명품(KBS1 오전 11시) 청화백자 모란문 푼주. 푼주란 큰 대접처럼 생긴 도자기나 옹기로 된 그릇을 말하는데, 주로 식혜나 화채를 담거나 나물을 무치는 데 사용했다. 의뢰된 푼주는 맑은 청화문이 돋보이고 내부 밑바닥에 장수를 의미하는 ‘壽(수)’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조선시대 궁중이나 왕실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두뇌왕 아인슈타인(KBS2 오전 10시40분) 김나운, 이광기, 김영철, 김태현, 조원석, 장동혁, 강균성, 서단비, 이현지가 아인슈타인에 도전한다. 김영철은 MBC 라디오 정선희의 ‘정오의 희망곡’을 통해 영철 영어 코너를 인기리에 진행해 왔고, 그것을 바탕으로 실력 있는 영어 강사로 거듭나기도 했다. 개그맨 김영철이 영어를 잘하는 비법을 공개한다. ●신비한 TV서프라이즈(MBC 오전 10시50분) 세조 6년, 한 소설 속에 등장한 절세 영웅.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이 영웅이 실존인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조선왕조실록’에서 발견된 영웅의 기록을 놓고 학계에서는 그의 활동 범위에 대해 흥미로운 주장을 내놓았다. 과연 그는 누구이며, 정말 실존했던 인물일까? ●굿모닝 세상은 지금(SBS 오전 7시40분) 취미를 넘어 프로 뺨치는 실력자들, 사람들은 그들을 ‘프로추어(프로페셔널+아마추어)’라고 부른다.‘프로추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은 블로그와 미니홈피 등 1인 미디어. 취미삼아 그린 만화, 요리 비법 등을 블로그에 올려 스타가 된 프로추어들을 만나본다. 연예계 지망생이 몰리는 ‘프로추어 오디션’ 현장도 가본다. ●스페이스 공감(EBS 오후 10시) 2인조 포크 록 밴드 ‘플라스틱 피플’. 이 밴드는 음악 전문 잡지 ‘서브(Sub)’의 기자 출신이자 밴드 ‘메리 고 라운드’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한 김민규와 보컬리스트이자 드러머인 윤주미가 만나 2000년에 결성한 팀이다. 나른하고 기분 좋은 오후에 코코아처럼 달콤한 이들의 음악을 만났다. ●인사이드 월드(YTN 오후 5시30분) 스리랑카에서는 도시의 미용실에서부터 시골의 농장에 이르기까지 재생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다. 탄자니아에서는 농산물 쓰레기를 연료로 벽돌을 구워냄으로써 숲을 보존하고 있고, 방글라데시에서는 태양열을 사용할 수 있도록 상업인들에게 무담보 소액 대출을 지원해 1년에 1000만 리터의 등유를 절약하고 있다. ●SBS 스페셜(SBS 오후 11시5분) 평균 수명 100세를 꿈꾸는 21세기에 인간의 장애물은 알츠하이머와 같은 뇌질환이 될 것으로 보인다. 뇌를 보다 건강하게 만드는 방법은 없을까? 뇌질환 연구를 선도해온 세계적 권위자들의 처방은 무엇일까? 그 해답을 ‘첨단 뇌영상 보고-당신의 뇌, 안전하십니까?’에서 제시한다. ●비포&애프터 성형외과(MBC 오후 11시40분) 기남은 어머니가 쓰러져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병원에선 계속된 적자 때문에 회의가 열리고 서진이 제안한 옥외광고를 추진하기로 한다. 기남은 건수에게 월급을 가불해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한다. 한편 거만한 복부인과 딸이 병원을 찾아와서는 유지인, 송혜교와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한다.
  • [19일 TV 하이라이트]

    ●걸어서 세계 속으로(KBS1 오전 10시) 지중해 최대 항구도시, 마르세유.2600년의 역사가 흐르고 있는 이곳은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다. 온갖 수산물과 그것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이곳은 도시가 탄생한 시점부터 프랑스 제2의 도시로 성장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품고 있다. 마르세유에서 생생한 역사의 흔적을 더듬는다.●드라마 시티(KBS2 오후 11시35분)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우경은 애인 세현이 전임 교수로 있는 부산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 그리고 선배, 친구들과 집들이를 겸한 파티를 하게 되고 즐거운 장면들을 캠코더로 찍어 둔다. 하지만 캠코더로 찍은 장면들을 애인 세현이 보고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는데….●주말 연속극 깍두기(MBC 오후 7시55분) 수남 때문에 자신이 절에서 키워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야는 큰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사야는 재우의 전화도 받지 않은 채 방황을 한다. 달래는 한모가 늦은 밤 부엌에서 라면을 끓여먹는 모습을 보고 마음의 갈등을 일으킨다. 한편, 수남은 사야에게 무릎까지 꿇으며 용서를 구한다.●조강지처클럽(SBS 오후 9시55분) 응급실로 옮겨진 길억은 기적의 집도하에 수술을 받는다. 기적은 길억이 죽게 되면 당신 책임이 크다는 복수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수술을 동료의사에게 맡기고 수술실을 나온다. 지란은 화신이 나타나자 깜짝 놀란다. 화신이 지란에게 면박을 주자 지란은 원수와 반드시 함께 살 거라고 맞받아친다.●한국말 요리쇼(EBS 오후 9시30분) 짭짜름한 갈치조림을 만들어본다. 오늘 도전을 함께 할 출연자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나타샤씨.1남 1녀 중 애교 많은 막내딸로 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던 중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학업도 접고 한국으로 오게 됐다. 오늘의 한국말 코너에서는 한국 사람들도 종종 헷갈리는 나이 헤아리는 법을 함께 배워본다.●생생웰빙테크(YTN 오전 7시25분)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진 40대 남성. 바로 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은 무엇인가? 최근 들어 이 같은 돌연사의 주범으로 심장질환이 지목되고 있다. 심장질환은 보이지 않게 우리의 숨통을 조여오다가 한순간에 목숨을 앗아가는데, 그 예방법이 궁금하다.●잘먹고 잘사는 법(SBS 오전 9시) ‘하루에 물 8잔을 마시면 몸에 좋다’는 속설의 진실을 알아본다. 재료가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수분을 이용해 조리하는 ‘저 수분 요리’. 영양과 맛을 한꺼번에 완성할 수 있는 저 수분 요리법을 완전정복한다. 또 개그맨 김한국의 건강비결을 알아보고,‘거꾸로 하우스 시즌 2’의 마지막회가 방송된다.●과학카페(KBS1 오후 7시10분) 정신을 집중해 몸의 흩어져 있던 기를 모아 내지르는 기합. 상대방에게 위협을 가하기 위해, 혹은 자신에게 힘을 불어넣기 위해 활용하는 기합의 위력은 생각보다 엄청나다. 자타가 공인한 대한민국 최고의 역도 영웅 전병관 감독도 인정한 기합의 힘. 과연 그 실체는 존재하는 것일까? 기합에 관한 모든 궁금증을 알아본다.
  • 영월 박물관 고을로 떠나는 시간여행

    영월 박물관 고을로 떠나는 시간여행

    단종의 애사가 서린 청령포에서 수달이 사는 동강까지. 여기에 겨울이면 등장하는 판운리 섶다리 등 깨끗하고 수려한 풍광을 품고 있는 곳이 강원도 영월. 해묵은 소나무들 가득한 내륙의 오지 영월이 박물관의 고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자그마한 시골 마을에 동강사진박물관, 화석박물관 등 무려 13개의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겨울방학을 맞은 자녀들과 함께 찾는 학습기행지로 제격일 듯하다. ●아이들을 위한 박물관 가득 영월이 박물관의 고장으로 거듭나게 된 것은 2005년부터다. 행정자치부 1기 신활력사업의 하나로 박물관 고을 육성사업이 지정되면서 다양한 박물관들이 속속 들어서게 된 것. 특히 영월은 아이들에게 유익한 박물관이 많이 모여 있다. 북면의 곤충박물관, 하동면 조선민화박물관, 수주면 호야지리박물관 등 아이들의 눈길을 끌 만한 박물관이 ‘널려’ 있다. 지난 12월에 문을 연 주천면 화석박물관도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다. 호야지리 박물관은 국내 최초의 지리 테마 박물관. 지리학의 역사와 종류, 체험 등 지리와 관련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독일이 우리나라를 섬으로 표기했던 1600년대 지도 등 희귀한 자료도 다수 소장하고 있다. 지리에 관한 학문적 원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돕는 체험 프로그램도 마련해 놓았다. 폐교를 활용한 곤충박물관은 나비와 나방 1000여 점과 갑충류 1000점, 동강 유역에 서식하는 곤충 1000점 등 총 3000점의 표본이 전시돼 있다. 특히 동강 유역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 곤충들도 전시돼 자녀들이 교과서에서 보지 못했던 곤충들을 직접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듯하다. 영월의 자랑거리 중 하나가 별마로 천문대. 동강과 서강이 만나는 봉래산 정상에 세워진 국내 최대 규모의 민간 천문대다. 직경 80㎝ 주망원경을 비롯해 보조망원경 13대 등 총 14대가 설치돼 있다. 천체관측 등 체험프로그램을 통해 아이들이 신비로운 우주 세계를 직접 관찰할 수 있다. 밤하늘의 별을 세며 하룻밤을 보낼 수도 있다.15∼20명이 묵을 수 있는 단체실은 1인당 3만 5000원∼4만원,10∼13명은 3만원∼3만 5000원을 받고 있다. ●먹거리 명소 ‘주천 섶다리마을 다하누촌’ 조용하던 주천리 시골마을을 일약 관광명소로 띄운 곳이 다하누촌. 토종한우를 싼 가격에 제공하는 한우전문상가다. 다하누촌 정육점에서 원하는 부위의 한우고기를 사다 인근의 지정 식당에서 조리해 먹는 방식이다. 한우 300g(모듬)에 8000원. 서울 시내 웬만한 고기집의 4분의1밖에 안되는 가격이다. 지정 식당에서는 기름소금과 된장, 쌈야채 등을 포함한 ‘테이블 세팅비(1인당 2500원)’를 받는다. 공기밥과 된장찌개 등도 별도.www.dahanoo.com,033)372-0121. # 가는 길 영동고속도로→중앙고속도로 신림 나들목→88번 지방도→영월 # 맛집 주천묵밥은 도토리묵밥과 메밀묵밥이 별미인 집. 직접 만든 묵을 사용한다.5000원.372-3800. 콩깍지밥상은 무농약 콩두부와 청국장 등 콩요리로 알려져 있다. 콩깍지정식 8000원.372-9434.‘꼴두국수’는 가난했던 시절 물릴 정도로 먹어 ‘꼴도 보기 싫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 신일식당이 유명하다. 메밀 꼴두국수 3500원.372-7743. # 가볼 만한 곳 비운의 왕 단종의 묘소인 장릉, 단종의 유배지로 강줄기와 험준한 절벽으로 둘러쳐진 청령포, 서강이 휘돌아 치며 한반도 지형을 만들어 낸 선암마을, 큰 칼로 절벽을 쪼개다 만 듯한 기묘한 형태의 선돌, 겨울철에만 볼 수 있는 판운리 섶다리 등이 잊지 말고 찾아야 할 영월의 관광명소들이다. 글 사진 영월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49)햇골산 마애불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49)햇골산 마애불

    중원문화권은 충주를 중심으로 한 충청북도 일대를 가리키지요. 한반도 중심부의 내륙인 이 지역은 소백산맥을 중심으로 고구려·신라·백제가 각축을 벌인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중원문화권에는 당연히 삼국의 문화유산과 통일신라 이후의 문화유산이 두루 남아있는데, 그 ‘출신 국가’를 두고 논란이 빚어지기도 합니다. 충주시 가금면 봉황리에 있는 햇골산 마애불상군(群)이 대표적입니다. 햇골산이라는 이름은 동쪽에서 해가 환하게 비춘다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하지요. 햇골산은 해발 80m의 야트막한 동산이지만 마애불은 가파른 절벽에 새겨져 있어 답사객을 위해 설치해놓은 철제사다리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오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마애불은 산 중턱의 동남향 바위에 새겨져 있지요. 불상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는데, 오른쪽 사유상은 좌우에 협시보살을 두어 삼존상의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그 왼쪽에는 세 보살이 나란히 서 있는데, 삼존불과 중첩되도록 새겨놓아 제법 원근감까지 살아나고 있지요. 이 불상군의 왼쪽에는 다시 큼직한 여래좌상과 이 여래에게 고개숙인 공양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미술사학자들은 이 마애불이 고구려 양식으로 6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면 크게 무리는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몇몇 학자들은 6세기 중엽 고구려 제작설에서 7세기 중엽 신라제작설까지 다양한 학설을 제기하고 있기도 합니다. 6세기 중반설을 내놓은 쪽에서는 이 마애불이 북위(386∼534)의 전통을 이어받은 고구려 초기양식을 보여준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사유상을 보면, 백제의 서산 마애삼존불이나 신라의 경주 단석산 마애불군의 사유상에서 느껴지는 아이 같은 모습이나 둥근맛이 없는 만큼 마애사유상으로는 삼국을 통틀어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것이지요. 반면 7세기 중엽설을 주장하는 쪽은 백제에는 태안과 서산에 마애삼존불이 있으나 고구려 것으로 확정된 마애불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고구려에는 마애불 전통이 없었다는 논리를 폅니다. 따라서 햇골산 마애불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앞두고 중원지역을 포섭하는 차원에서 조성했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600년 안팎을 주장하는 쪽입니다. 고구려는 장수왕(재위 413∼491) 시절 이 지역을 세력권에 두었습니다. 햇골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중원고구려비의 존재도 이런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지요. 광개토대왕비와 닮은 중원비에는 고구려왕이 남하하여 신라왕과 그 신하들에게 의복을 하사했다는 내용도 들어있습니다. 절치부심하던 신라는 거칠부가 551년 이 지역을 다시 빼앗으면서 556년에는 국원소경(國原小京)을 설치했습니다. 햇골산 마애불을 6세기 후반 이후 것으로 본다면 조성 주체가 고구려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운 일이지요. ‘고구려 사람이 신라 땅에 와서 조각한 것’이라는 연구가 나온 것은 이런 고심의 결과였을 것입니다. 이 연구는 고구려의 혜량법사가 551년 신라에 망명할 때 따랐던 무리의 누군가가 마애불을 새겼을 것이라는 구체적인 추정까지 이어졌지요. 혜량법사는 신라의 국통(國統)이 되어 황룡사 주지에 오른 인물입니다. 보물 제1401호로 지정된 햇골산 마애불은 우리 고대사에 있어 미술뿐만 아니라 사상·문화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자료입니다. 햇골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삼국의 각축이 치열했던 중원지역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훌륭한 역사 선생님의 구실까지 해주고 있습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48) 원각사탑에 새긴 ‘서유기’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48) 원각사탑에 새긴 ‘서유기’

    ‘정사(精舍) 안을 들여다보니 불상이 엄연한 자태로 결가부좌하여 오른발을 위에 얹었는데, 왼손은 샅에 두고 오른손은 늘어뜨린 채 동쪽을 향하여 앉아 있었다.…대좌의 높이는 4.2자, 대좌의 너비는 12.5자이며, 불상의 높이는 11.5자, 양 무릎의 너비는 8.8자, 양 어깨의 너비는 6.2자였다.’ 현장(玄·602∼664)은 인도를 여행하면서 부처가 깨달음을 이룬 인도 보드가야의 마하보리사를 찾았을 때 본 성도상(成道像)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 당나라 고승(高僧)이 쓴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나오는 대목이지요. 현장은 629년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출발하여 인도 각지에 남아 있는 부처의 흔적을 돌아본 뒤 경전과 불상, 불사리를 갖고 645년 중국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일본인 건축학도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1907∼1942)는 ‘대당서역기’에 보드가야 성도상의 치수가 담겨 있는지는 몰랐을 것입니다. 그는 조선총독부박물관 촉탁으로 근무하던 1940년 석굴암을 측량하면서 본존불을 재어본 결과 높이가 11.5자, 무릎너비가 8.8자, 어깨너비가 6.6자였다고 하지요. 석가모니가 정각(正覺)하는 순간을 묘사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동쪽을 향해 앉은 석굴암 본존불이 보드가야 성도상을 모델로 삼았다는 사실은 이후 40년도 훨씬 넘어서야 알려지게 됩니다. 어깨의 너비가 차이 나는 것은 어깨선이 둥근 만큼 기준점을 서로 달리했기 때문이었겠지요. ‘대당서역기’의 영향은 석굴암 조성 이후 600년 남짓 지난 고려 충목왕 4년(1348)에 세워진 경천사터 십층석탑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현장이 삼장법사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서유기(西遊記)’의 22개 중요 장면을 기단에 새겨 놓은 것입니다. 하지만 재질이 무른 대리석으로 만든 경천사탑은 세월이 흐르면서 비바람에 깎여 나가 이제 식별할 수 있는 장면은 10개 남짓뿐이지요. 다행스럽게 조선 세조 13년(1467) 경천사탑의 형식과 새겨진 조각을 그대로 옮겨 놓은 원각사터 십층석탑이 있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서유기’는 명나라의 문인 오승은(吳承恩·1500?∼1582)이 지은 것이지요. 경천사탑은 물론 원각사탑보다도 100년 이상이나 뒤에 씌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장의 업적과 명성이 알려지면서 벌써부터 그의 여행담은 전설적인 모험담으로 각색되었다고 하지요. 현장이 경전을 구하는 과정을 그린 취경(取經)설화는 연극으로 공연되다가 원나라(1271∼1368) 때부터 책으로 출판되면서 ‘서유기’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원나라 때의 ‘서유기’가 경천사 및 원각사 탑에 새겨진 조각의 전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원각사탑의 ‘서유기’ 조각은 세 단으로 이루어진 기단의 윗단에 2장면, 가운데단에 20장면이 새겨졌습니다. 이야기는 당 태종이 천축으로 구법행을 떠나는 현장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는 무차대회(無遮大會)로 시작되지요. 세 번째 장면에서 사오정이 등장합니다.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 사오정이 아홉개의 해골로 만든 목걸이를 풀고 불교에 귀의하는 장면이지요. 손오공이 파초선으로 화염산의 불을 끄고 가는 장면을 새긴 다섯 번째 조각에는 현장과 말을 끌고 가는 저팔계, 행장을 들고 있는 사오정 등 ‘서유기’의 주인공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탑에 ‘서유기’를 새긴 것은 예배하는 이들에게 교훈을 삼도록 하겠다는 뜻이겠지요. 우선은 온갖 고난을 헤치고 부처의 법신(法身)인 경전을 가져다 한문으로 옮겨 더 많은 사람을 불법의 세계로 이끈 현장의 공덕을 본받게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손오공과 사오정, 저팔계 같은 미물조차 공덕을 쌓으면 보살이 될 수 있다는 ‘서유기’의 스토리가 어떤 고승의 설법보다도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힘이 크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35) 아프리카의 카멜롯 - 곤다르 기행

    (35) 아프리카의 카멜롯 - 곤다르 기행

    곤다르 시내에서 차로 약 20분쯤 떨어진 곳에 ‘웰레카’라는 마을이 있다. 지금은 폐허처럼 변모해 관광객들에게는 별로 인기가 없는 곳이지만 1991년에 에티오피아 멩기스투 정부는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목숨을 담보로 이스라엘과 외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에티오피아 사람들을 ‘아베샤(아비시니아 사람이라는 의미)’라고 하는 것에 반해 웰레카에 사는 사람들은 피부색깔은 같지만 ‘팔라샤(‘외지인’ 혹은 ‘이스라엘 가문’을 의미)’라고 부른다. 19세기 중엽 영국인 선교사들은 외부와 단절되어 1600년 이상 자기들 고유의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유대인 신앙을 실천하는 이 사람들을 발견하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들은 언젠가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전 세계를 떠돌던 유대인들의 한 뿌리였던 것이다. 4세기에 기독교가 에티오피아의 국교가 되지만 이들은 개종하지 않고 그때까지 스스로를 유대인으로 믿고, 또 살고 있었던 것이다. 1991년 5월 24일 25시간 만에 진행된 엑소더스로 약 10만 4천여명의 팔라샤가 에티오피아를 떠났는데 웰레카에 사는 사람들은 그 후에도 남아 있는 사람들이다. 토지를 강제로 몰수당해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갖은 종교적인 핍박을 받으면서도 도자기, 대장장이, 천짜기 기술 등으로 생활을 하며 유대인 고유의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간 덕택에 수준 높은 수공예품을 많이 만들어냈는데 이제는 관광객들의 발길도 끊어져 마을에는 좀처럼 생기가 없다. 검은 피부의 유대인이 궁금한 사람들은 한번 가볼만한 곳이다. 랄리벨라에는 팔라샤 마을 정도는 아니지만 팔라샤가 경영하는 호텔이 있다. 호텔 이름이 ‘ALEF’라는 곳인데 이스라엘어로 ‘first’라는 의미다. 이곳에 가면 이스라엘에서 온 배낭여행객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주인이 처음부터 본인과 그곳에 드나드는 친구들이 팔라샤임을 실토한 건 아니었지만 호텔 이름과 방문객들의 국적이 연관성이 있어 보여 집요하게 질문을 던졌더니 결국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면 곤다르에서 북동쪽으로 약 120Km정도 떨어져있는 시멘국립공원을 강추한다. 표고 4,000m가 넘는 봉우리들이 연이어 이어진 협곡으로 ‘아프리카의 천장’으로 불린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이 되었지만 삼림이 심각하게 훼손되어 현재는 위험유산으로 분류가 되어 있으니 방문을 하더라도 자연을 훼손하는 일은 자제하기를 권한다. 시멘국립공원은 경관이 수려하고 ‘비비’나 ‘에티오피아 여우’ 등 이곳에서만 서식하는 야생동물들을 구경할 수 있다. 트레킹 코스로 적당하며, 곤다르 시내의 여행사를 통하면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상품들이 많다.       <윤오순>
  • “中 예식진과 백제의 예식은 동일인물”

    “中 예식진과 백제의 예식은 동일인물”

    지난해 중국 시안(西安)에서 출토된 묘지명의 주인인 예식진( 寔進)은 600년 나당연합군의 백제정벌 때 의자왕을 협박해 항복토록 한 예식( 植)과 동일인물이라는 연구 결과가 한·중 학자에 의해 동시에 제기됐다. 바이건싱(拜根興) 중국 산시(陝西)사범대 역사문화학원 교수는 충남대 백제연구소 주최로 8일 열리는 ‘제13회 백제연구국제학술회의’에서 이런 내용을 담은 ‘당과 백제의 국제관계에 관한 두 가지 문제’를 발표한다. 앞서 김영관 서울역사박물관 전시과장은 최근 발간된 ‘신라사학보’ 10호에 실린 ‘백제 유민 예식진 묘지 소개’에서 “예식진은 ‘구당서(舊唐書)’ 소정방 열전에 보이는 백제대장군 예식과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했다. 예식진 묘지명은 지난해 뤄양(洛陽)의 골동품가게에 나타난 뒤 중국 지린성(吉林省) 사회과학원이 발간하는 ‘동북사지(東北史地)’에 ‘시안 출토 당대 백제인 묘지 탐색’이라는 논문에 내용이 소개됐다. 묘지명에는 예식진이 백제 웅천(공주) 사람으로 당나라에서 좌위위대장군을 역임했으며, 할아버지는 좌평까지 오른 예다(藝多), 아버지는 역시 좌평을 역임한 사선(思善)이라고 적혀있다. 예식진이 당 고종 함형 3년(672) 5월25일 내주(來州) 황현(黃縣)에서 사망하자, 당의 수도인 시안으로 운구되어 고양원(高陽原)에 묻혔다고 적혀 있다. 바이건싱 교수는 “당시 웅진으로 피신한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투항하는 것은 장수들의 쿠데타적 협박에 인한 것이었으며, 그 주역은 당연히 웅진성 방어를 총지휘한 웅진방령 예식”이라면서 “의심할 필요도 없이 예식은 당나라에서 특별한 대우와 큰 작위를 받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예식진이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산둥반도 동북부에 있는 황현에서 죽은 것도 신라가 옛 백제지역을 공략하고 있는 상황에서 웅진도독 세력을 지원하는 역할과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김영관 박사는 “묘지명에서 예식진을 두고 ‘창해에서 명성을 드날리고, 청구에서 기개를 떨쳤다.’거나 ‘아득한 바다 동쪽에서 황제의 가르침을 펼치고, 보검을 휘두르며 활 시위를 보름달처럼 당겼다.’고 묘사한 것으로 볼 때도 그가 백제의 고위 무장이었음이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김 박사는 “예식진 묘지명은 기존 백제사에서 알려진 이른바 대성팔족(大姓八族)말고도, 예식진이 대표하는 예씨 집단이 웅진을 거점으로 대대로 좌평직을 세습하면서 백제 지배층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을 확인케 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정순모 충남대 교수는 “이번 연구는 기존의 ‘예식진묘지명’에 대한 고증을 심화시켜 당과 백제 관계 연구를 진일보시킬 수 있는 기초적 작업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면서 “하지만 7세기 한자발음에서 식(植)과 식(寔)을 같은 발음으로 인정한다고 해도 진(進)이라는 글자가 추가된 원인은 보다 자세히 설명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왕흥사 목탑, 위덕왕이 세 왕자 위해 세운것”

    “왕흥사 목탑, 위덕왕이 세 왕자 위해 세운것”

    충남 부여 왕흥사터에서 최근 출토된 백제시대 사리장엄에 새겨진 명문에서 그동안 ‘망(亡)’자로 읽혀졌던 글자는 ‘삼(三)’자의 이체자(異體字)로 밝혀졌다. ‘망(亡)왕자’가 아니라 ‘삼(三)왕자’라면, 백제 위덕왕(554∼598)은 죽은 세 왕자를 위하여 577년 왕흥사에 목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한 것이 된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亡’자처럼 보이는 글자는 ‘三’의 이체자로 중국 제나라의 방주타 무덤에서도 ‘三’으로 쓰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31일 밝혔다. 이 교수는 “‘망왕자’로 판독하면 세상을 떠난 왕자가 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다면 ‘망왕자 누구누구’라는 식으로 이름을 쓰거나, 몇째 왕자로 언급했어야 했다.”면서 “문맥상으로도 ‘삼왕자’로 판독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고 설명했다. 이체자란 뜻과 음은 정자와 같으나 형태가 다른 글자를 말한다. 왕흥사 사리장엄의 동제 사리호에 새겨진 ‘삼’자는 정자 ‘三’의 중간획과 아래획의 왼쪽 상하로 획을 하나 더 파놓은 모습이다. 왕흥사 명문에는 三을 비롯해 立(입)·刹(찰)·本(본)·葬(장)·神(신) 등이 이체자이다. 이 교수는 “세 왕자가 모두 고인이 된 시대적 배경을 찾는 일이 긴요하다.”면서 “‘위덕왕 8년(561년) 백제가 신라의 변경을 침공했으나 패하여 1000여명의 사상자를 냈고, 위덕왕 24년(577년)에는 신라 서변을 침공하다가 3700여명이 전사했다는 ‘삼국사기’ 기록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백제와 신라의 577년 전투는 10월의 일로, 목탑이 건립된 577년 2월15일보다 오히려 늦지만, 신라측 사료에서 나온 기록인 만큼 신라 기년에 따르면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실제로 ‘광개토왕릉비문’에서 확인된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즉위년은 ‘삼국사기’ 기록보다 1년 앞선 391년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이 교수는 “이렇듯 여러 차례의 전쟁에서 전몰한 왕자의 숫자가 3명에 이르렀던 것 같다.”면서 “위덕왕의 뒤를 아들이 아닌 아우인 혜왕이, 그것도 70세 안팎의 고령에 계승한 것은 아들들이 모두 일찍 죽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성왕이 신라와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고 아들인 위덕왕도 전쟁을 몸소 치렀듯이 왕실이 왕자들을 사령관으로 하는 전쟁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왕자들이 잇따라 전사했고,‘亡’자와 닮은 이체자로 사망한 왕자들을 위해 목탑을 세운다는 의식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아좌태자의 존재 또한 “당시는 왕의 동생도 왕자라고 표기한 만큼 위덕왕의 아들이기보다는 아우일 가능성도 열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 교수는 “경주 ‘황룡사찰주본기’에 나오는 刹柱(찰주)가 ‘탑기둥’을 뜻하는 것 처럼, 왕흥사 명문에 나오는 立刹(입찰)도 ‘절을 세우다.’가 아니라 ‘탑을 세우다.’로 해석하는 것이 맞는다.”면서 “따라서 왕흥사는 ‘삼국사기’ 기록대로 600년(법왕 2년)에 축조되고,634년(무왕 35년) 낙성되었다는 데 아무런 변동이 없다.”고 덧붙였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43) 일본의 氣 가 살아나다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43) 일본의 氣 가 살아나다 Ⅱ

    1629년 겐포(玄方) 일행은 상경을 허용하라고 요구하면서 자신들이 도쿠가와 막부 장군의 명령을 받아 온 사자(國王使)라고 강변했다. 조선 조정은 그들이 진짜 국왕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정홍명(鄭弘溟)을 선위사(宣慰使)로 왜관에 보냈다. 하지만 겐포 일행은 국왕사가 마땅히 지참해야 할 국서(國書)를 갖고 있지 않았다. 조선은 당연히 상경을 다시 거부했다. 겐포는 국왕사라고 우기며 협박을 계속했다. 임진왜란 이후 최초의 상경을 둘러싼 실랑이는 쉽사리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외교전문가로 길러진 겐소의 제자 겐포 겐포(1588∼1661)는 17세기 초반 조·일 관계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승려였다. 그의 정식 이름은 기하쿠 겐포(規伯玄方)였고 호를 백운(白雲) 또는 회계(晦溪)라고 했다. 규슈 하카다(博多)에서 태어난 그는 출가한 이후 쓰시마로 건너갔는데, 출가한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겐포에게 외교술을 가르쳐준 스승은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였다. 본래 하카다의 성복사(聖福寺) 주지였던 겐소는 1580년 쓰시마로 건너갔다. 겐소는 뛰어난 한문 실력을 바탕으로 쓰시마에서 조선과의 외교 교섭을 담당하는 책임자로 활약했다. 조선과의 교역이 경제적 생명선이나 마찬가지였던 쓰시마의 입장에서는 능숙하게 외교문서를 다룰 수 있는 전문가가 절실했다. 문화적으로 일본인들을 ‘한 수 아래’로 보았던 조선 관인들과 접촉하려면 한문 실력뿐 아니라 시문(詩文) 등을 수작(酬酌)할 수 있을 만큼 문학적 재능도 필요했는데 겐소는 바로 그 같은 임무에 적격이었다. 겐소는 임진왜란에도 참전했다. 왜란 당시 명군 지휘부는 그를 일본군의 모주(謀主) 가운데 한 명으로 지목하여 그의 목을 가져오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상금을 주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겐소의 활약은 왜란이 끝난 뒤에도 이어졌다.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승리를 통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한 이후 쓰시마의 소오씨(宗氏)는 겐소를 내세워 조선과의 강화를 성공시켰다. 겐소는 조선 사절의 도일(渡日)을 이끌어내고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조선과의 관계를 놓고 볼 때, 겐소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외교관이었던 셈이다. 겐포는 17세부터 쓰시마의 이정암(以酊庵)이란 곳에 머물며 겐소를 보좌하면서 조선과의 외교를 배웠다.1611년 겐소가 세상을 떠나자 스승을 이어 쓰시마의 외교문서를 담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소오씨는 겐포의 나이가 아직 어린 점을 고려하여 그를 교토(京都)로 보내 좀더 학문을 닦도록 했다. 겐포는 1619년부터 쓰시마의 외교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1621년에도 국왕사라는 직함을 갖고 부산에 왔던 적이 있었다. 요컨대 겐포는 스승 겐소와 쓰시마 당국에 의해 의도적으로 길러진 외교 전문가, 조선 전문가였던 셈이다. ●조선, 논란 끝에 상경을 허용하다 겐포가 상경을 고집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조선 조정은 고민했다. 인조는 강경했다. 그는 ‘왜놈들은 우리의 원수’라고 전제한 뒤 일단 금제(禁制)를 풀면 이후의 폐단을 막을 수 없다는 것과 대의(大義)를 고려하여 상경을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고 했다. 또 ‘상경을 허용하면 공갈과 협박에 굴복하는 셈이 되고, 일본은 분명 조선에 사람이 없다고 여길 것’이라고 우려했다. 신료들의 의견은 사뭇 달랐다. 병조판서 이귀(李貴)는 ‘선조(宣祖)께서도 일본을 이웃나라로 대우했는데 이웃 사신의 상경을 불허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했다. 그는 현실론을 내세웠다.‘호란 때문에 만신창이가 된 현실에서 왜인들의 비위를 거스를 수는 없으며 유순한 태도로 강자를 제압하는 것이야말로 보국(保國)의 방책’이라고 강조했다. 신료들의 생각도 대체로 이귀의 주장과 같았다. 하지만 인조가 워낙 강경하게 반대하여 결론은 쉽사리 내려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현실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겐포가 왔을 무렵 안팎의 사정이 너무 뒤숭숭했기 때문이다.1629년 2월, 후금 사신 만월개(滿月介)가 서울에 들어왔고, 같은 달 후금군은 선사포에 있는 모문룡의 둔전을 습격했다. 이 때문에 서울에는 후금이 다시 쳐들어올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퍼지면서 피란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3월에는 홍타이지가 국서를 보내와 ‘조선이 맹약을 지키지 않는다.’고 질책하고 ‘모문룡과 관계를 끊으라.’고 다시 협박했다. 전국적으로 가뭄이 계속되는 와중에 명화적(明火賊) 등이 발생했다. 이정구(李廷龜)는 이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당시의 조선을 가리켜 ‘공허한 나라(空虛之國)’라고 표현했다. 이귀가 다시 나섰다. 그는 ‘후금과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 일본과 사단을 만들 수는 없다.’는 논리로 상경을 허용하자고 주장했다. 이정구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그는 겐포 일행 가운데 몇 사람만 ‘특소(特召)’라는 명목으로 상경을 허용하되 나머지 인원은 부산에서 접대하자고 주장했다. 인조도 상황 논리에 밀려 결국 신료들의 주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조정의 절충안이 부산으로 전달되었다. 조선 조정은 겐포 일행에게 상경을 허용하면서 그들을 국왕사가 아닌 바로 아래의 거추사(巨酋使) 급으로 대우하기로 결정했다. 국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국왕사의 사절 정원은 25인이었는데 거추사의 정원은 15인이었다. 겐포는 반발하면서 거추사의 인원에 수행원 4인을 더 추가해야 한다고 강청했다. 또 자신이 ‘보행이 불편하다.’는 핑계를 내세워 가마를 타고 상경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정홍명은 겐포 일행의 집요한 요구에 밀려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이윽고 1629년 4월6일,19명으로 구성된 겐포 일행은 부산을 출발하여 서울로 향했다. 임진왜란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린 상경 길이었다. ●돌아갈 때 목면 600동까지 챙겨 겐포 일행은 4월22일 서울로 들어왔다. 그들은 4월25일, 경덕궁(慶德宮, 오늘날의 경희궁)에서 인조에게 인사를 올리는 숙배(肅拜)를 행하고 5월21일 출발할 때까지 약 한 달 동안 서울에 머물렀다. 그들은 인조를 알현할 때 진상품으로 조총 20정을 비롯하여 화약 원료인 유황(硫黃)과 염초(焰硝) 수백 근을 바쳤다. 조선이 후금과 막 전쟁을 치렀던 것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 전쟁을 치른 조선이 가장 아쉬워 할 수밖에 없는 무기류를 헌상함으로써 쓰시마의 존재 가치를 환기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기도 했다. 겐포가 이끄는 사절단의 본래 목적은, 막부의 명령을 받아 정묘호란 이후의 조선과 대륙 정세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겐포 일행은 서울에 머무는 동안 조선 내부 사정은 물론 명과 후금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부심했다. 조선인들을 통해 얻어들은 정보를 기행문 등에 꼼꼼하게 적었는가 하면, 대동했던 화가들을 시켜 목도했던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 기록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겐포 일행은 실리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쓰시마 도주(島主)가 특별히 보낸 스기무라(杉村采女)는 무기류 등을 헌상하여 조선의 환심을 사는 한편, 당시 이런저런 이유로 조선으로부터 받지 못했던 목면(木棉)을 지급해 달라고 요청했다. 스기무라가 요청한 목면의 양은 600동(同)이었다. 자그마치 3만 필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었다.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조선 조정은 당연히 거절했다.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겐포 일행은 5월21일 서울을 뛰쳐나갔다. 조선 조정이 쓰시마 도주에게 보내는 서계(書契)의 접수도 거부했다. 조선 조정은 난감했다. 최명길 등은 남변(南邊)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달래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선은 결국 목면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왜관에 머물며 조선의 수락 소식을 들은 겐포 일행은 6월12일 유유히 귀국선에 올랐다. 정묘호란을 겪은 직후 ‘공허지국’ 조선의 외교를 이끌던 당국자들의 고뇌가 눈에 밟힌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금동향로’이후 최대성과

    ‘금동향로’이후 최대성과

    충남 부여 왕흥사(王興寺)터에서 나온 백제시대 사리장엄이 학계를 흥분시키고 있다. 고구려·백제·신라를 통틀어 삼국시대의 사리장엄이, 그것도 완벽한 상태의 ‘한 세트’가 출토된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의 사리구는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 알려진 것이 전혀 없었다. 다만 백제 지역에서는 부여 군수리사지 목탑터의 심초석 윗부분에서 유명한 납석제여래좌상과 금동보살입상이 나와 사리공양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 전북 익산 제석사의 목탑터 심초석함에 불사리를 담은 수정병 등을 봉안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신라 지역에서는 경주 황룡사와 분황사에 사리 관련 유물이 있다. 황룡사 구층목탑터의 심초석 아래에서 사리함으로 보이는 청동그릇이 발견되었으나, 도굴되어 원래 상태를 알 수 없는 형편이다. 분황사 모전석탑에서도 사리장엄이 발견되었으나, 고려시대 유물이 함께 나와 훗날 사리장엄을 다시 만들어 넣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사리장엄이 나온 왕흥사는 백마강을 사이에 두고 백제왕성과 부소산성을 마주보고 있는 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리에 있다.1934년 ‘王興(왕흥)’이라고 찍힌 기와조각이 수습되면서 왕흥사터로 비정되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2000년 9월부터 발굴조사를 벌이고 있으며,2001년 2월에는 사적 제427호로 지정되었다. 왕흥사 사리장엄이 특별히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는 것은 청동 사리함 바깥벽에 새겨진 29자의 명문(銘文) 때문이다.‘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本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고 적혀 있다. 백제왕 창은 성왕의 맏아들인 위덕왕을 말한다. 성왕은 554년 당시 왕자 창을 보내 신라의 관산성(충북 옥천)을 공격하고, 뒤이어 자신도 출전했으나 전사한다. 위덕왕은 아버지가 죽은 충격으로 출가하여 불도를 닦으려 했던 것으로 ‘일본서기’는 전한다. 일본 쇼토쿠태자의 스승인 아좌태자(阿佐太子)는 위덕왕의 아들로 597년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진다. 따라서 사리함의 명문은 위덕왕에게 다른 아들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위덕왕은 성왕의 죽음에 대한 분풀이로 신라와 자주 싸웠는데, 이 과정에서 이 아들을 잃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위덕왕이 세상을 떠난 뒤 성왕의 둘째아들이자 위덕왕의 동생인 혜왕(惠王)이 왕위를 이어받은 것도 이처럼 위덕왕의 아들들이 전사하거나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목탑은 577년 건립되었으나 정작 왕흥사는 법왕(백제 29대왕) 시절인 600년에 창건이 시작된 것으로 전한다.”면서 “왕자의 명목을 비는 목탑과 사찰이 당초 별도로 각각 조성되었음을 시사하는 만큼 왕흥사터 목탑은 ‘위덕왕 발원탑’이나 ‘위덕왕 왕자 추복탑’으로 명명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42) 일본의 氣가 살아나다 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42) 일본의 氣가 살아나다 Ⅰ

    정묘호란의 발생은 조선과 일본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쓰시마(對馬島)와 도쿠가와(德川) 바쿠후(幕府)는 동원할 수 있는 채널을 모두 가동하여 전쟁의 추이와 승패를 파악하려 했다. 그들은 조선과 후금의 동향을 주시하면서 전쟁이 자신들에게 미칠 파장을 따져보았다. 그런데 분명한 것이 하나 있었다. 후금의 침략 때문에 곤경에 처한 조선의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하고자 했던 점이다. 그것은 우선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완강한 거부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던 왜사(倭使)의 상경(上京)을 관철시키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 사람들의 대일 감정은 격앙되었다. 무고하게 침략하여 처참한 살육과 약탈을 자행한 데 대한 원한과 적개심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특히 선릉(宣陵)과 정릉(靖陵) 등 왕릉을 파헤쳤던 일본군의 행위에 격분했다. 왜란 직후의 기록에는 일본을 가리켜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원수(萬世不共之讐)’라는 표현이 공공연히 등장한다. 심지어 1607년(선조 40) 일본에 갔던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가 소지했던 국서 속에도 ‘의리상 귀국과는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을 정도였다. ●“日은 같은 하늘 이고 살 수 없는 나라” 이 같은 적개심을 고려하면 임진왜란 직후 조선이 일본과 국교를 재개한다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쓰시마는 절박했다. 경제적으로 자활할 수 없었던 그들은 조선과의 교역이 생명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국교를 다시 열고 교역을 재개하기 위해 결사적으로 매달렸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599년 쓰시마는 국교 재개를 요청하기 위해 가케하시 시치다유(梯七太夫)와 요시조에 사콘(吉副左近) 등의 사절을 조선에 보냈다.1600년에는 유타니 야스케(柚谷彌介)를 다시 보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살아서 귀환하지 못했다. 쓰시마는 한편으로는 왜란 당시 잡아간 조선인 포로들을 돌려보내는 등 ‘성의’를 표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이 국교 재개 요청을 계속 거부하면 다시 침략이 있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실제 1603년, 사쓰마(薩摩)에 억류되어 있다가 송환되었던 하동(河東) 출신의 유학(幼學) 김광(金光)의 보고 내용은 심상치 않았다. 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조선과 다시 화친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과 ‘화친 요청을 거부할 경우 재침이 있을 것’이라고 진술했다. 조선은 긴장 속에서 승려 유정(惟政)을 탐적사(探賊使)란 명칭으로 파견하여 일본의 정세를 살피도록 했다.1605년 4월, 유정은 후시미성(伏見城)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화친에 대한 그의 의도를 탐지하고 조선인 포로들을 데리고 귀국했다. 조선은 이어 ‘일본이 먼저 화친을 요청하는 국서(國書)를 보낼 것’,‘선릉과 정릉을 파헤친 범인(犯陵賊)을 묶어 보낼 것’,‘조선인 포로들을 돌려보낼 것’ 등을 국교 재개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제시했다. 쓰시마는 조선이 제시한 요구에 신속히 응답했다. 그들은 1606년 9월, 이에야스 명의의 국서와 범릉적을 조선에 보냈다. 국서는 위조된 것이었고, 범릉적 또한 날조된 인물들이었다. 조선은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문제를 덮어두었다. 이윽고 1607년 조선은 강화(講和)를 위해 회답겸쇄환사라는 명칭으로 통신사(通信使)를 일본에 파견했다. 임진왜란으로 단절된 양국의 국교가 회복되는 출발점이었다.1609년(광해군 1)에는 기유약조(己酉約條)를 맺어 쓰시마와의 교역을 허락했다.1617년에는 2차 회답겸쇄환사를 보내 도쿠가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잔당 세력을 소탕한 것을 축하했다. 조선이 이렇게 적개심을 억누르면서 일본과 국교를 재개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우선 일본측의 간청과 협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더하여 북방에서 날로 고조되고 있던 누르하치의 위협을 염두에 둔 조처이기도 했다. 누르하치의 위협에 대처하려면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서북방과 동남방 양쪽 모두를 적으로 만들 수 없는 지정학적 조건이 작용했던 것이다. ●누르하치 세력 커지자 일본과 국교재개 국교를 재개하고 교역을 허용했지만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경계의식은 쉽사리 줄어들지 않았다. 조선 정부는, 쓰시마에서 왕래하는 교역선의 숫자를 왜란 이전에 비해 대폭 줄였고 일본인들에 대한 감시도 강화했다. 특히 왜사들이 서울로 올라오는 것은 엄격히 금지했다. 과거 그들에게 상경을 허용함으로써 부산에서 서울에 이르는 산천 형세와 지리 정보가 모두 유출되었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조처였다. 쓰시마는 상경을 불허한 조선의 조처에 답답해했다. 그러나 조선은 요지부동이었다. 정묘호란의 발생은 상황에 변화를 몰고 왔다. 조선은 후금과의 관계가 틀어져서 서북방에서 군사적 긴장이 높아가고 있을 때부터 그 사실을 왜관(倭館)의 일본인들이 알지 못하도록 숨기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전쟁이 일어난 판국에 언제까지나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선은 1627년 2월, 정묘호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왜관에 통보하고 전란이 끝날 때까지 사선(使船)의 파견을 중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정묘호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쓰시마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쓰시마 도주(島主) 소오 요시나리(宗義成)는 조선에 사람을 보내 ‘이미 파견한 선박을 회항(回航)시키는 것은 어렵고, 그럴 경우 조선이 훨씬 더 많은 대가를 지급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는 또한 조선을 돕기 위해 병력을 보내고 조총(鳥銃) 등의 무기를 원조할 수 있다고 제의했다. 쓰시마는 정묘란을, 위기에 처한 조선으로부터 경제적 이득을 얻어내고 자신의 존재를 과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활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일본은 여진을 달단()이라 불렀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집권 무렵부터 만주의 정세와 여진의 동향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이미 1592년 여름, 함경도를 점령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두만강을 건너 여진 마을에 침입하여 그들과 군사적으로 접촉했던 경험이 있었다. 이후 달단이 더욱 강성해져 후금을 건국하고 요동을 점령하자 일본의 위기의식은 높아갔다. 도쿠가와 바쿠후는, 후금이 1621년 요동을 점령했다는 정보를 당시 나가사키(長崎)에 왕래했던 중국상인들을 통해 알고 있었다.1623년 새로 쇼군이 된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는, 후금 관련 정보를 제대로 수집하여 보고하지 않았다고 쓰시마의 야나가와 시게오키(柳川調興)를 질책했다. 다급해진 소오 요시나리와 야나가와 시게오키는 조선에 조총 등을 보내는 한편, 요동 사정을 탐문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하지만 조선이 여전히 상경을 허용하지 않자 쓰시마 측의 조바심은 높아갔다. ●“상경길 안 열면 문제 생길 것” 공갈치는 일본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쓰시마 측은 위의 전례를 흘려 조선을 압박했다. 즉 ‘전에도 바쿠후가 요동 사정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고 질책했는데, 만일 이번에 야나가와가 잘 주선하지 않으면 바쿠후가 요동을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킬 것이고 그러면 조선과 쓰시마가 피해를 입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1627년 11월, 소오 요시나리는 에도(江戶)로 가서 정묘호란과 관련된 전후 상황을 바쿠후에 보고했다. 조선과 대륙 정세 변화에 민감했던 바쿠후는 요시나리에게 조선과 대륙 정세를 상세히 조사하여 다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1628년 11월, 쓰시마로 돌아온 요시나리는 승려 겐포(玄方)를 차출했다. 1629년 윤 2월, 겐포는 ‘조선과 대륙 정세 파악’이라는 중책을 안고 부산에 상륙했다. 요시나리는 이미 조선에 서계(書契)를 보내 겐포 일행의 상경을 허용하라고 촉구했다. 조선은 여전히 거부했지만 이번에는 겐포 일행도 물러서지 않았다. 상경을 허용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공갈을 쳤다. 정묘호란으로 수세(守勢)에 처한 조선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오죽헌 율곡매 천연기념물로 지정

    문화재청(청장 유홍준)은 전국 우수 매화자원 발굴 일환으로 강원 강릉 오죽헌 율곡매(栗谷梅)를 비롯한 매화나무 3건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고 5일 밝혔다. 지정번호 484호인 오죽헌 율곡매는 오죽헌이 들어설 당시인 1400년 무렵(수령 600년 추정)에 심어졌고 신사임당과 그의 아들 율곡 이이가 직접 가꿨다고 전해진다. 전남 구례 화엄사 길상암 앞 급경사지 대나무 숲에 자라는 매화(485호·수령 450년 추정)와 전남 장성 백양사 고불매(古佛梅·486호·수령 350년 추정) 또한 천연기념물로 등재됐다.
  • [내 책을 말한다] 인도, 그 독특한 생존방식

    ‘인도 현대사’는 2007년 독립 60주년을 맞은 인도가 영국 식민통치하의 적대적 환경에 적응하고 저항하며 생존한 지난 3세기의 여정을 담았다. 식민체제로부터 자율적으로 작동한 인도 사회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조명하고, 긴 투쟁과 타협의 과정을 통해 국가의 해방을 이룬 인도인을 인도사의 주변인에서 주인공으로 이동시켰다. ‘정의하고 정의되는 것’이 인간세계의 법칙이라는 경구처럼, 그동안 힘을 가진 영국이 정의한 인도 근현대사는 ‘수억 야만인’에게 문명을 전해준 영국 식민주의에 대한 변명과 찬양의 기록이었다. 그 영향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인도사도 영국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내용이 주류였다. 그 논리에 따르면, 인도는 유럽에서 온 왕자님의 ‘키스’를 기다리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였다. 그러나 이라크 침공 등 미국의 제국주의적 오만과 편견이 여실히 드러나는 오늘날, 지난 세기 인도에서 작동한 영국의 제국주의를 낭만화할 순 없다. 식민통치란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의 영토와 삶을 빼앗고 강제로 바꾸는 것이므로 미화되어선 안 된다. 강자가 행사한 힘의 역사를 당연시하면 개인과 사회를 억압하는 현실이 반복될 것이므로…. 이 책은 인도인에게 영국 통치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를 물었다. 이별할 때까지 사랑의 깊이를 잴 수 없듯이 독립할 때까지 인도가 받은 영국 식민통치의 폐해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1600년 영국이 인도에 올 무렵 세계 GDP의 22.5%를 차지하던 인도는 영국의 통치를 마감한 1952년 세계 GDP의 겨우 3.8%를 점유하는 빈곤국으로 전락하였다. 제국사가의 화려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영국 통치는 ‘빵을 빼앗은’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인도인에게 은혜롭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책은 영국이 얼마나 악독하게 인도를 이용했는가를 주목하진 않았다. 어떻게 인도인이 영국에 영웅적으로 저항했는가에 중점을 두거나 인도 민족주의를 ‘선’으로 파악하지도 않았다. 나는 식민주의와 민족주의의 이분법보다 그 둘이 빚은 변증법적 화음과 불협화음, 지배자를 자기 안에 받아들인 비영웅적 인도의 힘,‘영국으로부터 배운 언어로 영국을 저주’한 인도의 방식을 추적하였다. 인도처럼 타자에 의해 불행한 근대를 경험한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변방사로 폄하되는 인도 역사를 소개하여 미래를 향한 우리의 길목에 이정표를 더하려는 이 책은 최근 인도의 강대국 부상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 영국이 오기 전에 누린 위상을 되찾는 과정이자 인도가 소지한 독특한 생존방식의 결과라는 사실을 보다 넓은 견지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옥순 연세대 연구교수
  • [24일 TV 하이라이트]

    ●사랑과 전쟁(KBS2 오후 11시05분) 세상의 어느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사이가 이렇게 좋을까. 속옷도 같이 입고 목욕도 같이 할 정도로 거리낌없이 지내는 두 사람. 그러던 어느 날, 시어머니와 다정하게 찜질방에 갔던 인경은 깜짝 놀랄 만한 광경을 목격한다. 술에 취해 치근덕거리는 남자를 시어머니가 거의 한손으로 메다꽂은 것이다.   ●라이프n조이(YTN 오후 80시35분) 자연이 살아 숨쉬는 전북 부안.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담긴 기암절벽과 전설 속 섬으로 떠난다. 켜켜이 쌓여있는 절벽이 세월의 숭고함을 일깨워주고,600년 전 조선시대가 한 눈에 펼쳐지는 승마체험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자갈 백사장과 해수욕장까지, 거친 바닷바람을 맞으며 섬 여행을 떠난다.   ●다큐-10(EBS 오후 9시50분) 1994년 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진도 6.7의 지진이 일어나 이 일대가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모두 400억 달러에 달하는 재산 피해를 낸 지진은 고가도로의 연결부위를 지탱하는 교각의 약한 지지대와 지역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지어진 건물들로 인해 더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날아오르다(SBS 오후 9시55분) 버스를 놓칠 뻔한 진희는 무의식중에 벗은 신발을 던져 버스를 향해 던지는데, 신발은 열린 창문 안으로 들어가 한 남자를 맞히고 만다. 이에 버스는 급정거를 하고, 그 덕에 진희는 차를 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자기가 던진 신발을 맞은 사람이 아는 체하자 난감해 하면서 종가집으로 돌아온다.   ●생방송 오늘아침 ‘특집기획’(MBC 오전 8시30분) 통조림 갈비탕, 찐쌀, 어패류 등 국내 모든 먹을거리를 점령하다시피 한 중국산은 과연 안심하고 먹을 수 있을까. 염색약으로 물들인 오리알, 항생 물질이 검출된 어패류뿐만 아니라 아이스크림과 국수, 고기류 등 대다수의 중국산 먹을거리의 위생 상태에 빨간 불이 켜졌다.   ●이영돈PD의 소비자고발(KBS1 오후 10시) 어느 날 밀린 전화요금 250만원을 내라는 독촉장을 받은 김씨. 알고 보니 누군가 김씨의 명의를 도용해 무려 861개의 전화를 개통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와 함께 비상구 없는 극장을 고발하는 등 UCC의 힘을 살펴보고, 칡 성분은 거의 들어있지 않은 ‘칡냉면’의 실태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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