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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수엑스포 D-1년 현장을 가다

    여수엑스포 D-1년 현장을 가다

    지난 6일 오후 전남 여수시 신항. 맞은편 산 중턱 전망대에서 바라본 공사 현장에선 골조공사가 한창이었다. 전시관 철골 구조는 대부분 모습을 갖췄고, 안전모를 쓴 인부들은 쉴 새 없이 몸을 놀렸다. 공정률은 50%. 대형 덤프트럭이 일으킨 뿌연 흙먼지와 중장비가 불러온 굉음은 500여m 떨어진 산 중턱까지 바닷바람을 타고 몰려왔다. 400여년 전 전라 좌수사 이순신 장군이 왜적과 맞섰던 곳이다. 여수 세계박람회(엑스포) 조직위 김근수 사무총장은 “바다와 연안을 동시에 아우르는 세계 첫 엑스포”라며 “전시 면적만 25만㎡, 호텔과 엑스포타운, 엑스포 역사, 공원 등을 합하면 174만㎡의 방대한 규모”라고 강조했다. 이어 “오는 9월이면 KTX가 여수와 서울 용산 간을 3시간 18분에 주파한다.”고 전했다. ‘D-1년’. 성큼 다가온 여수 엑스포가 기대와 우려 속에 분주히 손님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살아 있는 바다, 숨쉬는 연안’을 주제로 내년 5월 12일 개막, 93일간 일정을 이어 간다. 국제박람회사무국(BIE)이 공인한 인정 박람회로 조직위는 100여개국, 5개 국제기구, 10여개 기업, 16개 지자체의 참가를 목표로 하고 있다. 관광객은 외국인 55만명을 포함해 800여만명에 이를 전망이다. 1960년대 이후 전국 각지의 부두 노동자가 몰려와 일하던 여수 신항이 탈바꿈을 시작한 것이다. 섬 전체가 식물원인 오동도와 잇닿은 신항 3부두 쪽에는 25층 높이의 거대한 철골 구조물이 들어섰다. 대명리조트가 700억원 가까이 들여 짓는 고급호텔(282실)로, 각국 대표 등 VIP들의 숙소로 활용된다. 고개를 돌리자 맞은편 산 중턱에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짓는 1442가구의 엑스포타운(행사요원 숙소)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는 11월이면 한국관과 국제관, 주제관 등 10여개 전시관이 대부분 완공되고 100여개 참가국의 전시 콘텐츠도 배치된다. 시범 운영은 내년 3~4월 이뤄진다. 김 사무총장은 “지난해 상하이 엑스포는 등록 엑스포, 여수 엑스포는 인정 엑스포”라며 “등록 엑스포는 5년에 1회, 최장 6개월간 규모에 제한 없이 열리지만 인정 엑스포는 등록 엑스포 사이에 1회 열리고 기간은 최장 3개월, 면적은 25만㎡로 제한받는다.”고 말했다. 이어 “비록 규모가 작지만 95개국, 7개 대기업이 참가신청을 마쳤고, 생산유발 효과만 12조 2000억원 수준”이라고 전했다. 수천명의 인부들은 이미 지역경제에 훈풍을 몰고 왔다. 비좁은 부지 탓에 현장에 식당을 마련하지 못해 인부들은 점심 시간마다 인근 식당을 찾는다. 이날도 식당들은 북새통을 이뤘다. 여수시 관계자는 “다음 달 서울의 조직위가 여수로 옮겨 오고 현장 인부가 2만명까지 늘면 7만 9000여명으로 예상된 고용유발 효과를 체감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걱정도 앞서는 상황이다. 이곳을 둘러본 관계자들은 “VIP용 고급 호텔과 직원 숙소를 제외하고는 일반 관광객을 위한 숙박시설이 크게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바닷가 인근 모텔들은 가족 단위 관광객이 묵고 가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엑스포 기간 예상 해외관광객도 전체의 6~7%에 머물러 있다. 엑스포의 ‘킬러 콘텐츠’가 무엇이냐는 질문도 나온다. 예컨대 조직위 측은 스페인관에선 피카소의 작품을 전시하거나 플라시도 도밍고의 공연을 계획하고 있지만 ‘해양’이라는 공통된 주제에선 벗어난 것들이다. 국민들의 무관심이 가장 큰 문제다. 조직위 측은 “지역 행사가 아닌 국가가 유치한 행사지만 위상에 걸맞은 관심이 부족하다.”고 자평했다. 한 시민은 “2007년 11월 전남의 작은 반도인 여수가 엑스포 유치 소식에 들썩였다.”면서 “개막까지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글 사진 여수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선데이 시리즈] 사연따라 연예 반세기(演藝 半世紀)…그 시절 그 노래①

    [선데이 시리즈] 사연따라 연예 반세기(演藝 半世紀)…그 시절 그 노래①

     작사자(作詞者)도 작곡자(作曲者)도 모른채 설움 싣고  나라 뺏긴 슬픔 노래하던 창가(唱歌)의 시절  가수도 없었다. 노래를 전파시킬「레코드」도「라디오」도 나오기 전, 그래도 유행가는 있었다. 누가 가사를 만들고 누가 작곡을 했는지 알 수 없는 노래가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입에서 입으로 전파됐다. 대중 가요의 요람기로 꼽는 1910년대-.    [學徒歌 전후]  ①청산 속에 묻힌 옥도/갈아야만 빛이 나네/낙락장송 큰나무도/깎아야만 동량되네  ②공부하는 청년들아/너의 직분 잊지 마라/새벽 달은 넘어가도/동천조일 비쳐온다  ③유신문화 벽두초에/선도자의 책임 중코/사회진보 깃대 앞에/개량자된 임무로다  ④농상공업 왕성하면/국태민안 여기있네/가급인족 하고보니/국가부영 이 아닌가    최초의 대중 가요로 꼽는「학도가(學徒歌)」가사다.  요즘 말로 대중가요지 그때는 특정한 지칭이 없었다. 창가(唱歌)라고도 하고 신민요(新民謠)라고도 했다.「창가」는 1904년에 처음으로 소학교 교과 과정에 끼였다.  1910년에 처음으로 소학교 교과서로서「보통교육 창가집 제1집(普通敎育 唱歌集 第一輯)」이 발간된 것을 미루어 보아 10년대를 전후해서 신식노래인「창가」가 생겨난 것 같다.  신민요는 우리 고유 민요와 구분해서 붙인 명칭이다.  「유행가(流行歌)」는 훨씬 뒤에 붙여진 이름이다. 신민요가 기생들 사회에서 주로 불려졌다면 창가는 학생층에서 불려졌다.  이때 창가집에는 군가, 양악, 지금의 대중 가요조 노래가 뚜렷한 구별없이 수록되었다. 나중에야 대중 가요조의 노래는 창가(唱歌)에 新자 하나를 더 붙인 신창가집(新唱歌集)에 구분해 실었다.  『학도가』는 신창가집(新唱歌集)에 수록되었다고 한다(형석기·刑奭基씨 말). 최초의 소학교 음악 교과서인「창가집(唱歌集)」에도 수록됐다는 사람이 있었으나 이 책자는 그 행방을 감춰 확인할 수가 없다.  따라서 작사, 작곡자도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평양 숭실(崇實)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던 김인식(金仁湜)씨가 작곡했다는 설이 있고 그때 일본 사람들의『철도가(鐵道歌)』(철도개통 기념가) 곡을 따온 것이란 설이 있다.  소위 신식 노래라고 하는 것을 한국인 자신이 작곡하여 부른 것은 극히 적고 대개가 외국 곡조에다가 가사를 붙여 불렀다는 점에서 볼때「철도가」쪽의 가능성이 크다.(황문평·黃文平씨 말)  가사는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이 평양에 대성(大成)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에게 부르게 했다는 말이 있다. 또 다른 설은 윤치호(尹致昊)씨가 만들었다는 주장. 윤치호(尹致昊)씨는 그때 개성 송도(松都)중학교 교장이었다.  이 노래가 처음 개성쪽에서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김수린·金壽麟씨 말)는 의견을 뒷받침하는 것이 된다.  어쨌든 이 교훈적인 노래는 학생 층에서 시작하여 전 국민에게 굉장한 전파력으로 유행했다.  당시 동경(東京)유학생들이 방학을 끝내고 일본(日本)땅으로 건너갈때 동대문(南大門)역(지금 서울역)「플래트 폼」에서 곧잘 이 노래를 합창했다 한다. 엄격히 따져서 요즘 말하는 대중가요와는 퍽 다른 점이 있지만 대중들 사이에 널리 유행한 신식 노래임은 틀림없다.  이『학도가』는 나중에 한국 최초의 직업가수 채규엽(蔡奎燁)이「레코드」에 취입했다. 따라서 채규엽(蔡奎燁)은 한국 최초의「레코드」가수다. 그는『오너라 동무야, 강산에 다시 되돌아 꽃은 피고, 새는 이 봄을 노래하자, 강산에 동무들아 모두 다 모여라, 춤을 추며 노래 부르자』하는『봄노래』와『희망가(希望歌)』를 불러「레코드」시대의 여명기를 장식했다.  『희망가(希望歌)』의 가사는『이 풍진 세상을 만나면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히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중에 또다시 꿈 같도다 』(1절)라는 것으로『희망』이기보다 자포자기적인 내용이다.  나라를 빼앗긴 젊은이들이 암담한 장래를 생각하며 화풀이도 제대로 못하는 울분을 가락에 실은 것이라 할까? 이 노래 역시『학도가』와 비슷한 시기인 1910년대 전후해서 유행한 것으로 작사, 작곡자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대중가요가 지나치게 비탄 절망적인 내용이라는 비판은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직업가수가 생기기 이전의 구전(口傳) 노래부터 이 비탄조는 한국 대중가요의 속성이요 운명이었다.  교훈적인『학도가』『권농가』와 종교 계통의『불어라 봄바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눈물, 탄식, 향수를 담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게 유랑(流浪)의 노래들이다.『피 식은 젊은이 눈물에 젖어, 낭만과 설움에 병든 몸으로 북국한설「오로라」로 끝없이 가는, 애달픈 이 가슴 누가 알거냐』(『유랑자(放浪者)의 노래』, 작사·작곡자 미상),『흘러가는 이 신세 물에 뜬 버들잎, 흐르고 흘러서 어디로 가나, 정든 고향집이 차마 그리워 해 다 지고 저문 길 눈물이 아득하네』(『유랑인(流浪人)의 노래』, 김서정(金曙汀) 작사·작곡), 나라를 잃은 젊은이들이 낯선 만주땅, 산해관(山海關), 연해주(沿海州)로 정처없이 떠나는 모습들이 담겼다. 그야말로 희망도 장래도 없는「피 식은 젊은이」들의 넋두리다.  우리나라 처음의 무대가수가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노래가 연극 공연의 중간에 불려져 막간가수란 말이 전해 온다.  1922년에 최초의 연극단체인「토월회(土月會)」가 조직되었는데 이 토월회(土月會)가 연극 공연 막간에 노래를 불렀다. 토월회(土月會)는 당시 동경(東京)에 유학, 신교육을 받은 박승희(朴勝喜)가 조직한 학술평론회였다. 여기의 멤버는 김기진(金基鎭), 이서구(李瑞求), 김을한(金乙漢), 김복진(金復鎭), 김기창(金基昶), 안석주(安碩柱), 이백수(李白水), 복혜숙(卜惠淑), 이승만(李承萬), 이정숙(李貞淑), 윤수선(尹水仙), 연학연(延鶴年), 이덕경(李悳卿) 등 이었다. 24년 7월에 조선극장(서울 인사동에 있었음)에서 신극을 공연하면서 막간에『아리랑』을 불렀다는 것. <계속>  <趙 觀 熙 기자> [선데이서울 73년 1월1일 제6권 1호 통권 제221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서울 자동차 300만대 시대

    서울 자동차 300만대 시대

    서울시가 ‘자동차 300만대 시대’를 맞았다. 서울시는 3일 기준으로 자동차 등록 대수가 300만대를 넘어섰다고 4일 밝혔다. 이는 시민 3.5명 당 자동차 1대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의 등록 차량은 1962년 1만대를 시작으로 1990년 100만대, 1995년 200만대를 넘어선 뒤 16년만에 300만대를 돌파했다. 차량 증가율은 1960년대 27%, 1970년대 15%, 1980년대 9%, 2000년대 3%로 점점 낮아지는 추세를 보였다. 서울의 자동차 등록 대수는 전국 등록 대수 1818만대의 16.5%에 해당하는 것으로 가구 당 0.7대, 자동차 1대 당 인구는 3.5명이다. 자치구별로는 강남·서초·중구가 가구당 보급 대수가 한 대로 서울에서 가장 높고, 관악구가 0.48대로 가장 낮았다. 전체 차량 중에는 승용차가 81.8%(245만 4000대)를 차지해 가장 높았고, 화물차 12.2%(36만 6000대), 승합차 5.8%(17만 5000대), 특수차 0.1%(4000대) 등의 순이었다. 배기량별로는 1600㏄ 미만 28.6%, 1600∼2000㏄ 미만 42.1%, 2000㏄ 이상 29.3%로 조사됐다. 2000㏄ 이상 대형 자동차의 30%가 강남 3구(강남 13%, 서초 9%, 송파 8%)에 등록된 것으로 집계됐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열린세상] 삶의 가치와 초심/박광철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열린세상] 삶의 가치와 초심/박광철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삶이란 사람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여정을 말한다. 이 여정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 스스로 우주로부터 올 때 가지고 온 기운, 즉 하고자 하는 욕심을 자기 생애에 구체화하고 갈무리하는 과정의 연속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삶의 가치라는 나무는 그 뿌리에 해당하는 ‘처음에 먹은 마음’의 일관성에 따라 평가되는데, 초심(初心)을 잃지 말자고 외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연유한다. 그렇다면 어떤 초심이 가치 있는 삶의 모습이 되는 것일까? 답을 내리기 전에 우선 삶의 모습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의 띠는 12개로 이루어져서 태어난 해의 띠(甲子)는 다섯 번째인 60년 만에 돌아온다. 그런데 12개의 띠가 다섯번 반복되는 일생 가운데 두번 24년은 부모 밑에서 성장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60년에서 24년을 빼고 남는 36년이 자기 스스로 의지를 갖고 살아가는 진정한 삶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의 초년은 24년에 12년을 더한 36세까지, 중년은 36세에 12년을 더한 48세까지, 말년은 49세부터 60세까지의 12년을 일컫는다. 인생 36년은 여기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고 다시 위·아래 같은 파장으로 맞물려 영향을 미치는 부모의 36년과 자식의 36년을 합산한 108년이 개인의 일생이다. 이것이 108번뇌의 근원이다. 개인의 삶 속에는 부모와 자식의 인생이 녹아 있다. 주역(周易)의 63번째 괘는 수화기제(水火旣濟)요, 마지막 64번째 괘는 화수미제(火水未濟)로 되어 있다. 63번째 괘는 사람이 자기 의지를 갖고 세웠던 뜻을 이루었다(물로 불을 끄니 이루어진다)는 뜻이고, 64번째 괘는 다시 새로운 목표를 정하여 앞으로 나아가니 반대로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다(불이 물 위에서 겉도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주역은 삶을 우주의 삼라만상과 맞물려 이루고 또 이루어져 변하는 생멸(生滅) 속에서 처음과 끝이 없이 한 몸으로 순환하는 것이라고 보았고, 이를 교묘하게 마지막 괘에 엇박자로 배치해 설명한다. 영화 ‘빠삐용’에서 주인공이 섬으로 유배될 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죄라고 했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을 반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삶은 언어를 통해 소통하면서 서로의 존재와 역할을 인식하고 구성원으로서 동질감을 갖고 활동하면서 이루어진다. 사회적 활동은 자기가 아닌 그 구성원에 의하여 평가되고, 결과는 이름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뼈 빠지게 살고, 죽도록 열심히 살아도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후회하는 삶이 되는 까닭은, 노력은 있으되 결코 바르게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르게 산다는 것은 먹고 사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부모와 자식 그리고 구성원들의 입장까지 이해하고 베풀며 서로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 올 때 가지고 온 처음의 기운, 초심이다. 이 기운을 일관되게 유지·사용하는 것이 바르게 사는 길이며 가치 있는 삶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요즈음 화두는 단연코 권력의 힘이 너무 일방적으로 가고, 기업은 현금을 쌓아놓고도 미래의 먹거리를 준비할 투자에 관심이 없으며, 가진 자들은 문을 걸어잠근 채 자기들만의 세상을 구축하고 그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몰두하는 작태들에 대한 비판이다. 이런 양태가 무척 걱정되는 이유는 삶의 모습이 자기중심적으로 기울고 편을 갈라 싸우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끊임없이 욕심을 채우고자 하며 세상살이의 질곡 역시 여기에 종속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권력과 명예, 돈에 대한 욕심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것을 바르게 다루느냐이다. 다시 말해 권력은 강제하고 통치하기 위한 힘이 아니라 백성의 천심(天心)을 얻기 위한 소통의 도구로 사용되어야 하고, 돈은 많이 벌어서 이웃과 나누어 부유하고 따뜻한 나라를 만드는 수단으로 써야 하며, 가진 자의 닫혀 있는 문은 초심으로 돌아가 상생의 마음으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올바른 욕심으로 살아야 후손들에게 무엇이 가치있는 삶인지 말할 수 있다.
  • 부처님 오신날 충남 서산 개심사 가는 길따라

    부처님 오신날 충남 서산 개심사 가는 길따라

    이맘때 충남 서산의 이미지는 ‘둥글다.’로 모아집니다. 서산의 오른쪽, 그러니까 운산면과 해미면, 음암면 일대의 느낌이 특히 그렇습니다. 한우를 방목하고 있는 야트막한 산들은 이국적인 둥근 구릉의 자태로 이방인을 맞습니다. 그 위에 신록이 입혀지고, 한우들이 뛰놀기 시작하면서 예쁜 풍경화가 완성됩니다. 둥근 구릉들 너머엔 소박하고 단아한 개심사도 있습니다. 작은 절집이지만 풍경의 크기는 그보다 몇 배 더 큽니다. 부처님 오신 날이 코앞입니다. 시기에 맞는 여행지를 찾는다면 충남 서북부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서산도 대안이 될 듯합니다. 세상에 온 부처님의 뜻이야 범부로서 가늠조차 할 수 없지만, 혹시 모를 일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좇아 서산을 주유하다 번뇌를 끊는 반야의 칼을 찾을 수 있을는지도요. ●순박한 절집에서 혼탁한 마음 털기 충남 서산은 내포(內浦·충남 서북부) 불교문화의 성지처럼 여겨지는 곳이다. 가야산을 중심으로 수덕사와 보덕사 등의 절집과 마애삼존불상 같은 불교 문화유산들이 가지처럼 펼쳐져 있다. 개심사는 그 가운데 첫손 꼽히는 명찰 수덕사의 말사다. 절집 초입엔 벌써 많은 종류의 꽃들이 피어 있거나, 개화를 준비하고 있다. 봄철 개심사의 아이콘인 진분홍 왕벚꽃은 아직 피지 않았지만, 해탈문 앞 겹벚꽃과 명부전 앞 청벚꽃은 벌써 절정에 달했다. 자목련과 흰동백도 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사적기에 따르면 ‘마음을 여는 절집’ 개심사(開心寺)는 백제 멸망(660년)을 6년 앞둔 의자왕 14년, 서기 654년에 창건됐다. 당시 절을 세운 혜감 스님은 절집 이름을 개원사(開元寺)라 했으나, 고려 때인 1350년에 처능 스님이 중건하면서 개심사로 개칭했다. 절집 뒤편 상왕산(象王山) 코끼리의 갈증을 풀어주기 위해 만들었다는 연못을 지나면 해탈문과 안양루 등 소탈한 건축물들이 방문객을 맞는다. 규모가 작은 데다 번듯한 느낌도 없지만, 어딘가 차분한 기운이 절집 안팎을 휘감고 있다. 개심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은 대웅보전이다. 보물 제143호다. 그 안에 보물 제1619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엄정한 자태로 앉아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불상 중 하나로, 나무 위에 금박을 입혔다. 또렷하면서도 엄숙하게 표현된 이국적인 얼굴 등이 조각예술의 진수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정작 방문객의 시선을 끄는 건 대웅전 옆 심검당(尋劍堂)이다. 얽히고설킨 번뇌를 벨 반야(般若)의 칼을 찾는 집이란 뜻. 한데 이름은 날카로우나 자태는 더없이 순박하다. 사람 인(人)자를 겹친 맞배지붕 아래 이리저리 휜 목재를 기둥 삼았다. 단청도 하지 않았다. 껍질만 벗긴 소박한 두리기둥과 기둥 위를 가로지르는 창방의 나무들이 물결 같은 곡선을 그려낸다. 그 모습을 보자니 회색 도시에서 다져진 각진 마음이 은연중 둥글어 가는 듯하다. ●용현계곡의 내포 불교 유적들 사실 대웅전을 제외한 개심사의 대부분 건축물들은 이처럼 굴곡진 목재를 사용하고 있다. 명부전이 그렇고, 무량수각과 범종각, 해탈문 등도 비슷한 형태다. 개심사를 창건한 이는 기둥에 어떤 뜻을 담았던 걸까. 이강열 서산시 문화관광과 학예사는 “치목(다듬어진 목재)을 사용해 건물을 짓는 게 이리저리 휜 목재를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쉬웠을 것”이라며 “하지만 왜 이런 목재를 사용했는가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고 아쉬워했다. 결국 절집을 돌아 보며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는 오롯이 방문객의 몫으로 남는다. 예까지 온 마당에 ‘마애삼존불상’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국보 제84호다. 마애삼존불상은 개심사 인근의 용현계곡 들머리에 서 있다. 백제시대 용현계곡은 중국과의 교역항이었던 태안반도에서 사비(부여)로 가는 길목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마애삼존불상은 사비를 떠난 사람들이 다리쉼을 하거나, 먼 교역길의 안녕을 비는 곳이었던 셈이다. 계곡 너머 너덜겅 사이로 놓인 돌계단을 올라 가면 세 불상과 만난다. 불상마다 꾸밈없고 순박한 미소를 입가에 매달고 있다. 나른한 오후 햇살 아래라선지 미소가 더욱 은은해 보인다. ‘백제의 미소’라 부를 만하다. 누군들 저 미소를 피어나게 한 내면의 평화를 찾고 싶지 않을까. 용현계곡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 사이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 보원사 절터도 남아 있다. 한때 1000여명의 승려가 기거했을 만큼 대찰이었으나, 이제 법인국사탑과 비,오층석탑과 당간지주,석조 등만이 광대한 절터를 지키고 있다. ●청년 이순신 머물던 해미읍성 개심사에서 차로 15분 거리의 해미읍성(海美邑城)도 둘러볼 만하다. 230여년간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이 있었던 곳. 왜구의 빈번한 침략을 막기 위해 1417년 축조 사업이 시작돼 세종 3년인 1421년 완성됐다. 이순신 장군도 서른다섯 살 때(1579년) 이 성에서 종8품 훈련원 봉사로 열 달간 근무했다고 한다. 해미읍성은 조선 초기의 성채 특징을 잘 보여준다. 성벽의 높이는 4.9m, 성의 둘레는 약 1.5㎞다. 오래전엔 성의 둘레에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탱자나무를 심었다 해서 ‘탱자성’이라 불리기도 했다. 해미읍성은 여느 성벽과 견줘도 뒤지지 않을 만큼 빼어나다. 진남문은 결코 위압적이지 않고, 복원된 관아와 주택들도 정겹고 소박하다. 읍성 초입의 회화나무는 병인박해(1866년) 때 천주교도들을 목매달아 처형했던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동헌 위쪽 서벽 근처의 소나무들은 자유분방하면서도 절제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서문 밖 여숫골 등에도 천주교 유적들이 남아 있다. 글 사진 서산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41) ▲가는 길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서해안고속도로→서산 나들목→운산→개심사(68 8-2256) 순으로 간다. ▲맛집 마애삼존불상 초입의 용현집(663-4090)은 어죽 전문 식당이다. 추어 국물에 국수와 쌀을 넣고 끓여 양푼에 담아 내는데, 비리지 않고 얼큰한다. 1인분 5000원, 2인분 이상 판다. 해미읍성뚝배기(688-210 1)는 소머리곰탕이 맛있다. 80 00원. 해미읍성 앞에 있다. ▲주변 볼거리 천수만과 간월도 등은 서산의 관광 명소. 지곡면 화천리에 조선 초 산수화의 대가 안견기념관이 있다. ‘몽유도원도’ 영인본 등 그의 대표작들이 전시돼 있다. 660-2536.
  • 미국 한국전쟁 참전용사 2인 오바마정부 첫 최고무공훈장

    미국 정부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병사 2명에게 명예훈장을 안겼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2일(현지시간)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앤서니 카호오하노하노, 헨리 스벨라 일병에게 숨진 지 60년 만에 최고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카호오하노하노, 스벨라 일병은 각각 1951년, 1952년 전투 도중 숨졌다. 스벨라 일병은 1952년 적군과 사투를 벌이다 진지 안으로 적군의 수류탄이 날아들자 전우들을 구하려고 자신의 몸을 던졌으나 깨어나지 못했다. 카호오하노하노 일병도 1951년 동료들의 후퇴를 돕다 적군의 공격을 받고 숨졌다. 명예훈장은 미군이 받을 수 있는 최고 무공훈장으로 1861년 미국 의회가 승인한 이후 지금까지 3400명이 받았다. 한국전쟁에 참전해 명예훈장을 받은 사람은 이들을 포함, 총 135명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전쟁 참전 병사들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한 것은 처음이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carlos@seoul.co.kr
  • 전화기 한대 값이 쌀 60가마?

    전화의 변천과 관련된 1950~70년대 대통령 기록물이 공개된다. 국가기록원 나라기록관은 ‘대통령 기록물로 보는 전화의 변천사’ 서비스를 28일부터 대통령 기록포털(www.pa.go.kr)을 통해 제공한다. 이번에 공개되는 기록물은 1953년 국무회의록, 1970년에 작성된 ‘전화 행정 쇄신 방안’ 등 문서 7건과 이승만 전 대통령의 서울 영등포전화국 방문 사진을 비롯한 시청각 기록물 3건 등 모두 10건으로 기록 포털 사이트의 ‘이 기록, 그 순간’ 코너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무회의록에는 1949년 이 전 대통령이 진해 별장에서의 전화 사용에 대한 불편사항을 지적하며 전반적인 기능 개선을 주문한 내용과 1953년 전화기를 신제품으로 교체하라고 지시한 내용 등이 담겨 있다. 1959년 부흥부(기획재정부의 전신)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전화 회선 증설을 위한 정부의 국외 차관 확보 노력에 대한 기록도 있다. 하지만 1960년대까지 통신 시설은 여전히 부족해 전화 가입 수요를 충당할 수 없었고, 당시 전화기 한대 가격이 쌀 60여 가마에 해당하는 기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기록원 관계자는 “이번에 공개되는 전화의 변천사를 보면 1950~70년대 전화 정책에 관한 기록을 포함해 정보 통신 강국으로 발돋움하기까지 우리의 정보 통신 발달사 일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성국기자 psk@seoul.co.kr
  • 소설 이어 연극·뮤지컬·영화로… 다시 부는 ‘맘 신드롬’

    소설 이어 연극·뮤지컬·영화로… 다시 부는 ‘맘 신드롬’

    ‘어머니’라고 하면 그 맛이 살지 않는다. ‘엄마’라고 해야 가슴이 먹먹해진다. 외국도 다르지 않다. 최근 미국 뉴욕타임스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올라 있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영문판 제목이 ‘플리즈 룩 애프터 맘’인 것처럼 마더(Mother)보다는 맘(Mom)이 울림이 있다. 최근 ‘맘 신드롬’이 다시 거세다. 엄마를 소재로 한 소설, 연극, 뮤지컬, 영화 등이 잇따르고 있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미국발(發) 인기가 한국 판매량을 다시 끌어올리면서 200만부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지난해 만들어진 같은 제목의 연극은 전국 순회 공연 중이고, 새달 5일에는 똑같은 제목의 뮤지컬이 무대에 오른다. 작가 노희경이 1996년에 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은 드라마로 만들어져 많은 이들의 눈두덩이를 벌겋게 만들더니 같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져 지난 20일 개봉했다. 개봉하자마자 첫 주말에 10만명 이상 관객을 동원했다. 외국 영화 ‘마더 앤 차일드’도 28일 가세한다. 앞서 ‘친정엄마’, ‘친정엄마와 2박3일’, ‘애자’ 등도 연극·영화 등으로 장르를 바꿔 가며 관객의 마음을 잡아끌었다. 어떤 작품은 아예 마음껏 울라고 극장 입구에서 휴지를 나눠 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신경숙 소설에 대해 미국의 유명 서평가 모린 코리건이 “김치 냄새 풍기는 ‘크리넥스 소설’(눈물을 짜내는 소설)”이라며 “싸구려 위안에 기대지 말라.”고 혹평했듯, 부정적 시선도 존재한다. ●잊고 있던 단어… 힘겨운 삶의 절박한 구원 통로 26일 방북길에 오른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마더 릴리언의 위대한 선물’이라는 책을 썼다. 최근 국내에서도 번역 출간됐다. 카터 전 대통령이 평생에 걸쳐 평화와 봉사의 삶을 살았던 자신의 어머니(릴리언)에게 바치는 사모곡(思母曲)이다. 그는 1976년 대통령 취임 기자회견에서 “나를 키운 어머니부터 만나 보라.”고 했을 정도로 어머니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공공연히 얘기했다. 최동호 고려대 국문과 교수는 “디지털과 로봇으로 상징되는 현대 문화는 인간성 상실과 부성 상실로 연결될 수밖에 없으며 근원에 대한 결핍감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문화예술의 몫”이라면서 “이런 시대에 인간의 존재 비의를 설명할 수 있는 출발점이자 종착점인 어머니로 귀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동서고금을 아울러 창조적 감성의 원천으로 작용해 왔다는 얘기다. 이는 문화예술 영역에서 무한하게 변주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세상이 척박해질수록, 개인의 삶이 힘겨워질수록 편안하고 따뜻한 품을 줬던 어머니는 갈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대중문화평론가 정덕현씨는 “2009년 서구에서 환호했던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나 최근 미국에서 각광받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드러내는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어머니에 대한 인간 본연의 절박함을 보여준다.”며 창작의 감성을 일깨워 주는 존재로서 어머니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렇다고 어머니의 상(像)이 무한희생의 모성, 헌신과 애정의 주체만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 문호 막심 고리키의 장편소설 ‘어머니’ 속의 안나는 유약한 어머니에서 혁명가로 거듭난다. 1960년대 주요섭 소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속의 어머니는 정절이 아닌 욕망을 표출한다. 어머니의 ‘희생’을 반복해서 보여 주며 눈물을 요구하는 요즘의 추세와는 분명 차이가 있다. ●하드코어 신파… 박제가 돼 버린 엄마 최 교수는 “여성 가치, 모성이 품고 있는 긍정의 힘을 그 이미지만을 소비하며 상업주의적으로 활용하려는 문화산업계의 메커니즘은 경계해야 한다.”면서 “무한 애정과 헌신의 주체로만 어머니를 박제화시키며 우려먹는 최근의 흐름은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 다분히 ‘하드코어 신파’라는 냉소다. ‘엄마’라는 상업적으로 검증된 콘텐츠를 문화계가 안이하게 끊임없이 ‘자기복제’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대중문화평론가 조용신씨는 “엄마라는 콘텐츠는 마케팅 측면에서 보면 젊은 층과 중장년층을 모두 끌어안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매력적”이라면서 “그 자체로 팔릴 수밖에 없는 아주 상업적인 코드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 안에서 완성도를 높이는 노력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문화 현장의 창의력과 노력이 부족하다는 쓴소리다. 연극 ‘친정엄마’에 이어 뮤지컬 ‘엄마를 부탁해’ 등을 잇따라 연출해 ‘대학로의 엄마 전문가’로 불리는 구태환 연출은 “흥행 성공의 비결이 단순히 엄마라는 소재에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면서 “사람들이 잊고 있던 정서를 한국적 사실주의로 자극한 때문 아니겠느냐.”고 역설했다. 박록삼·김정은기자 youngtan@seoul.co.kr
  • “6개월이면 은행 다 뚫어? ‘준비된 기업’ 해킹 절대 불가능”

    “6개월이면 은행 다 뚫어? ‘준비된 기업’ 해킹 절대 불가능”

    현대캐피탈과 농협에서 잇따라 대형 전산사고가 발생하면서 우리 사회의 보안 시스템이 전반적으로 열악하다는 현실이 다시 한번 드러났다. 특히 두 사건 모두 해커가 개입된 것으로 추정되면서 국가적 차원에서 ‘해커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 보안업체인 안철수연구소의 김홍선(51) 대표는 지난 20일 “해커들은 이미 글로벌 범죄 조직으로 성장했지만 이에 대처하는 우리 기업들의 보안 의식은 너무도 취약하다.”고 우려했다. 다음은 김홍선 대표와의 일문일답. →최근 발생한 일련의 전산 사고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분산 서비스 거부(디도스) 공격부터 현대캐피탈, 농협 사태 모두 전 세계 모든 PC들이 초고속 인터넷(브로드밴드)으로 네트워크화되면서 해커들이 특정 PC에 접근하기가 더욱 쉬워지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네트워크를 통해 원하는 PC에 들어올 수 있는 통로가 넓어져 이젠 중국인 해커가 아프리카에 서버를 둔 채 동남아에서 노트북 한대만 들고 한국의 금융기관을 해킹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국내 정보 당국이 용의자를 찾더라도 인터폴 등과 협의해 해당 국가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면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현대캐피탈이나 농협 같은 금융기관을 해킹할 수 있는 이들이 국내 혹은 세계에 얼마나 된다고 보나. -그 정도 수준의 해커들은 추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다. 영화에서 해커들이 1~2명 단위로 숨어 다니며 정부 등 거대 조직을 상대로 정의롭게 싸우다 보니 해커들을 ‘나홀로 움직이는’ 신비한 존재쯤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정부 관계자들조차 그렇게 보기도 해 놀라기도 한다. 하지만 해커들 대부분은 (마피아처럼) 전 세계에 걸친 글로벌 조직의 구성원으로 일한다. 해킹은 국제 조직의 주요한 범죄가 됐다. →해커들은 어떤 식으로 돈을 버나. -주로 동유럽과 중국 및 동남아, 아프리카, 브라질 등에 거대 조직들이 밀집해 있는데, 통상 이들은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수익을 창출한다. 하나는 해킹을 원하는 일반인들에게 자신들이 개발한 해킹 프로그램을 판다. 동유럽의 한 해킹 조직이 개발한 ‘제우스’라는 프로그램은 한개에 3000달러(약 330만원)가 넘는 고가에 팔린다. 두 번째는 금융기관 등을 해킹해 정보를 빼낸 뒤 해당 업체를 협박해 돈을 갈취한다(현대캐피탈 사례가 대표적). 세 번째는 해킹을 원하는 조직을 위해 대신 일해 주고 사례금을 받는다(농협 사례도 이 경로로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 일종의 아웃소싱인데 해킹 계약을 따내기 위한 글로벌 조직들의 ‘수주전’(戰)도 치열하다. →이들이 벌어들이는 수익은 얼마나 되나. -해커들이 지하 경제에서 활동하다 보니 정확한 계산은 힘들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엄청난 돈을 버는 것은 분명하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금융기관은 해킹당한 사실이 알려지면 신뢰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때문에 해커들이 달라는 대로 거액을 주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실제 농협도 2008년 이미 한 차례 해킹을 당했지만 이를 숨겨 온 사실이 검찰 조사로 드러났다). 금융기관이 아니어도 기업 운영에 불법적인 요소가 많은 곳은 조사받는 것 자체를 꺼리게 된다. 해커들도 이를 알고 무리한 요구를 하는데 기업 입장에선 어쩔 수 없이 현금을 주고 덮고 간다. →그렇다면 국내 기업 가운데 현대캐피탈이나 농협 말고도 이미 해커들에게 해킹을 당한 뒤 돈으로 무마하고 넘어간 곳들이 있었다는 뜻인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 질문에는 답하지 않겠다. →최근 전직 해커 한명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6개월이면 어떤 은행도 다 뚫을 수 있다.”고 밝혀 화제가 됐다. 결국 기업들이 아무리 보안에 투자해도 마음먹고 덤벼드는 해커들은 못 막아 낸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여러 번 웃으며) 요즘 언론에 ‘전직 해커’라는 이들이 자주 나오던데 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 난 그 해커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무리 뛰어난 해커라 해도 사전에 철저히 보안 시스템을 2중, 3중으로 갖춘 ‘준비된 기업들’은 절대 뚫을 수 없다. 전 세계 해커들이 노리는 구글이나 아마존, 페이스북 등은 어떻게 지금까지 건재할 수 있었겠나. 만에 하나 이를 모두 뚫고 들어올 수 있는 능력이 있더라도 이런 시스템을 뚫게 되면 반드시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게 돼 있다. →끝으로 해킹과 관련해 우리 사회에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10년째 같은 얘기를 반복해야 하는 우리 현실이 참 안타깝다. 해커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치밀하게 범죄를 준비한다. 우리나라에서 보안 검색이 가장 까다롭다는 한 기업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오너 등 고위층이 들어갈 때 (일행인 척) 따라 들어가면 아무 검색도 받지 않고 출입할 수 있다. 해커들은 이런 사회공학적 배경까지도 모두 분석해 일을 진행한다. 하지만 우리 기업들의 보안 의식은 낮아도 너무 낮다. 국내 굴지의 한 기업에서는 쉬는 시간마다 직원들이 회사 공장 시스템을 돌리는 메인 컴퓨터로 인터넷 서핑이나 쇼핑을 하다 악성코드에 감염돼 가동이 중단되기도 했다. 보안 시스템 설치 당시 설정해 준 비밀번호를 한 차례도 바꾸지 않고 몇 년씩 쓰다 사고를 당하는 대기업도 많다. 무엇보다 보안 문제는 정보기술(IT) 담당자가 아닌 최고경영자(CEO)가 챙기는 풍토가 마련돼야 한다. 글 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김홍선 대표는 ▲1960년 서울 ▲서울대 전자공학과(학·석사) 및 미국 퍼듀대(박사) ▲미국 텍사스주립대 연구원, 삼성전자 컴퓨터사업부 선임연구원, 시큐어소프트 대표이사 등 ▲정진기언론문화상, 미국 퍼듀대 최고의 동문상, 과학기술창의상 등 수상
  • [지금&여기] 2011년 봄날 ‘메멘토 모리’/박록삼 문화부 기자

    [지금&여기] 2011년 봄날 ‘메멘토 모리’/박록삼 문화부 기자

    늘 그렇다. 봄은 잔인하다. 1960년 4월의 봄이 그랬고, 1980년 서울·광주 등 도처의 봄이 그랬다. 1991년 봄날도 마찬가지였다. 모란이 지듯 자고 일어나면 젊은이들이 제 목숨을 바닥에 뚝뚝 내려놓았다. 많은 서러운 죽음이 있었고, 잔혹한 죽임이 있었다. 쉬 지워내기 어려울 만치 혹독했다. 시대의 봄날뿐 아니라 개인에게도 그러했다. 최근 자서전 ‘스님은 사춘기’를 펴낸 봉은사 전 주지 명진 스님도 여섯살에 여읜 어머니와 네살 터울 동생의 군대 사고사 기억이 공교롭게도 모두 어느 봄날의 것임을 고백한다. 올해 봄도 어느 시절의 봄날 못지않게 잔인하다. 모든 장애와 우려, 반발을 무릅쓰고 속도전을 펼치는 4대강 공사 현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계속 죽어 나가고 있다. 지난 18일 금강6공구에서 ‘굴착기사 김씨’가 25t 덤프트럭에 깔려 숨졌다. 저녁 7시 야간작업 중이었다. 이틀 앞서서는 낙단보 공사현장에서 인부 하씨와 김씨가 콘크리트가 무너져 숨졌다. 역시 전날 야간공사 때 부은 콘크리트가 채 마르지 않은 곳에서 일하다 빚어진 사고였다. 4대강과 함께 묻혀 버린 19명 중 11명이 올해 봄날을 전후해서 떠났다. 삼성전자에서 하루 10~15시간씩 일하며 스트레스와 우울증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20대 젊은이는 회사 측의 사과 한마디를 받으려고 지난 15일까지 무려 97일 동안 냉동고에 누워 있어야 했다. 우리의 봄날을 더욱 우울하게 만든 카이스트 학생 4명, 교수 1명의 죽음은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다시 명진 스님의 책 얘기다. 그는 돌이켜보니 죽음의 기억이야말로 자신의 출가와 공부, 수행을 지탱시켜준 힘이자 불보살(佛菩薩)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살아남은 자가 죽음으로부터 배운 소중한 가르침이다. 방사능이 한반도로 오네 마네 하며 막연한 공포가 감도는 올해 봄날에도 키 낮은 제비꽃은 보랏빛 움을 틔웠고, 연분홍 앵두꽃, 벚꽃은 속절없이 제 멋을 뽐내며 난분분히 휘날리고 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또 다른 겸손한 생명을 틔우기 위해서는. youngtan@seoul.co.kr
  • “내 전성기는 지금… 무대가 안방보다 편해”

    “내 전성기는 지금… 무대가 안방보다 편해”

    “내 전성기는 바로 지금…. 무대에서 가장 편안합니다.” ‘무대 환갑’을 맞은 가수 겸 뮤지컬 배우 윤복희(65)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그는 21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데뷔 60년 만에 처음으로 단독 콘서트를 여는 소감을 밝혔다. ●루이 암스트롱 권유로 음악생활 시작 “제가 가창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 리사이틀을 한번도 열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동안 제가 연줄이나 배경도 없이 TV나 라디오는 물론 연극 등 모든 장르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부족하지만 제게서 삶의 위로를 원했던 많은 분들이 계셨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윤복희는 1951년 5세때 코미디언인 아버지 윤부길씨의 손에 이끌려 서울 중앙극장 악극단 무대에서 데뷔했다. 세계적인 재즈스타 루이 암스트롱의 권유로 미국에서 음악 생활을 시작한 그는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미국에서 루이 암스트롱을 비롯해 유명 재즈 뮤지션과 같은 무대에 섰던 것은 참 행복한 기억이죠. 지금 같으면 감히 떨려서 못했을 것 같은데, 그때는 참 철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 이후로 재즈는 평생 제 음악적 토양이 되었죠.” 워낙 어렸을 때부터 공연을 했기 때문에 세계 어느 곳에 가든지 무대가 안방보다 조금 더 편한 곳으로 느껴진다는 윤복희. 어린 시절 부모님을 여의고 나서야 했던 차가운 무대는 족쇄처럼 여겨질 법도 하지만, 그런 기억은 어른이 된 윤복희를 오히려 동심의 세계로 이끌었다. “네다섯살 때부터 공연을 하다 보니 제 또래의 배우는 저밖에 없었어요. 저도 학교에 가고 싶고 무대에서 내려오고 싶은 적도 많았죠. 하지만 서른이 넘어서 종교(기독교)를 가지게 되면서 제게 달란트가 주어진 것을 알았어요. 그때부터 어린이의 마음으로 살면서 어린이 뮤지컬 ‘피터팬’을 만들게 된거죠.” 윤복희는 “‘피터팬’을 하면서 만난 3~7세 어린이 관객들을 통해 거꾸로 어릴 때 느끼지 못했던 성장기를 배웠다.”면서 환하게 웃었다. 이후 그는 한국 뮤지컬의 효시인 ‘빠담빠담’을 비롯해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등의 주연을 맡으며 국내 뮤지컬 배우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했다. ●30일 대전 시작으로 전국 돌아 그동안 80여편의 뮤지컬에 출연했던 그는 30일 대전을 시작으로 전국을 돌며 60주년 스페셜 콘서트를 연다. 그는 이 공연에서 자신의 출연작 가운데 일부를 압축해 드라마와 함께 보여줄 예정이다. 1979년 서울국제가요제대상을 받았던 히트곡 ‘여러분’을 통해 대중의 지친 감성을 위로했던 그는 지금이 바로 자신의 전성기라고 단언한다. “‘여러분’이라는 노래를 30년 넘게 불렀는데, 노래의 발성과 호흡을 제가 만들어 놓고도 한 10년 됐을 때 노래의 맛이 느껴지더군요. 최근 들어서 노래가 또다르게 느껴지면서 조금씩 음악의 맛을 알게 됐어요. 부족하지만, 조금 더 표현하고 싶은 것을 알게 된 지금이 바로 제 전성기가 아닐까요.”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영화리뷰] ‘상실의 시대’

    감독에게 베스트셀러 원작은 비빌 언덕일 때가 많다. 논란은 원작의 그늘이 너무 짙을 때 생긴다. 1987년 첫 발간 후 36개국에서 1100만부가 팔린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 ‘상실의 시대’(원제:Norwegian Wood)쯤 되면 적확한 예가 될 법 하다. 오랜 세월 왕자웨이 감독을 비롯한 숱한 이들이 매달렸지만 하루키는 영화화를 거절했다. 4년여의 구애 끝에 허락받은 이는 베트남 출신 프랑스 감독 트란 안 홍이다. ‘그린파파야의 향기’ ‘씨클로’를 통해 영상시인으로 불리는 감독이다. 17살의 와타나베(마쓰야마 겐이치)는 기즈키와 그의 연인 나오코(기쿠치 린코)와 어울렸다. 어느 날 기즈키가 목숨을 끊는다. 2년 뒤 도쿄에서 대학을 다니던 와타나베는 나오코와 재회한다. 둘 다 죽은 친구의 존재를 애써 거론하지 않는다. 나오코의 스무 살 생일. 둘은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나오코는 기즈키를 잊은 게 아니었다. 우울증이 심해진 나오코는 요양원에 들어간다. 그즈음 와타나베에게 사랑스러운 여인 미도리(미즈하라 기코)가 나타난다. 건조하게 줄거리만 읊으면 ‘상실의 시대’는 삼각관계가 얽히고설킨 연애소설이다. 물론 단순 연애소설이라면 20년 넘도록 스테디셀러로 남지는 못했을 터. 1960~70년대 일본 사회의 무거운 공기 속에서 사람(혹은 사회)과 소통하지 못하는 청춘의 얘기는 비슷한 경험을 한 한국·유럽 독자에게도 울림을 남겼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에 이르는 나날은 우리에게 이른바 ‘멀미나는 시대’였습니다…여기서 그려내고 싶었던 것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동시에 시대를 감싼 분위기라는 것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아의 무게에 맞서는 동시에 외부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상실의 시대’ 한국어판 중 하루키의 서문) 하지만 21일 개봉한 트란 안 홍 감독의 ‘상실의 시대’는 청춘들을 극단적 선택으로 내몬 ‘시대를 감싼 분위기’에는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그의 시선은 사랑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청춘들로 국한된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은 치유할 수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함도,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는 와타나베의 내레이션은 감독의 시각을 오롯이 드러낸다. 찬반이 엇갈리는 지점이다. 물론 원작에 대한 기대치를 걷어내면 영화도 제법 괜찮다. 특히 영화를 보면 “18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버린 지금도 나는 그 초원의 풍경을 분명히 떠올릴 수 있다.”던 소설 속 서른일곱 와타나베의 독백이 절절이 와 닿는다. 나오코가 와타나베에게 속마음을 토해내는 이 장면은 일본 효고현의 초원에서 무려 5분여의 롱테이크로 완성됐다. 무난한 캐스팅 속에 돋보이는 이는 미도리로 나오는 한국계 신인배우 미즈하라 기코다. 그의 묘한 눈빛과 목소리는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133분. 18세 관람가.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외국선 수명 60년” vs “안전설계 잘못”

    “외국선 수명 60년” vs “안전설계 잘못”

    한국수력원자력이 20일 고리 원전 1호기의 전면 재점검 의사를 밝히면서 원전에 대한 안전성 논란이 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고리원전 1호기는 지난 12일 전원을 공급하는 차단기의 결함으로 가동이 중단된 뒤 9일째 재가동을 놓고 이견을 빚어 왔다. 이날 경기 과천의 지식경제부를 방문한 김종신 한수원 사장은 “국민 의혹을 풀기 위한 차원에서 이번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일각의 폐쇄 주장에 대해선 “고리 1호기가 설계를 벤치마킹한 미국 위스콘신주의 키와니 원전은 설계수명이 40년으로 현재 60년까지 계속운전 승인을 받고 운영 중”이라고 일축했다. 키와니 원전(55만 6000㎾급)은 1974년 상업 운전을 시작해 38년째 가동되고 있다. 고리 1호기(58만 7000㎾급)도 1978년 상업 운전을 개시해 2008년 30년의 수명을 다했으나 이 같은 논리를 앞세워 재가동 승인을 받았다. 반면 일본 후쿠시마 원전 1호기의 경우 1971년 상업 운전을 시작했고 두 번째 수명 연장을 한 뒤 한달 만에 지진으로 사고가 났다. 애초 한수원은 차단기를 교체한 뒤 지난 15일 재가동을 예정했다. 차단기 고장은 경미한 사안으로 규정상 정부 보고도 필요 없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입장이 바뀐 데는 정치권과 시민단체, 지역여론 등의 압력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아직 점검 주체와 방식, 범위, 기간 등은 정해지지 않은 상태다. “정부와 협의하겠다.”고 했는데 점검을 의뢰받은 교육과학기술부 측은 21일 이후 이를 공개하겠다는 입장이다. 한수원 측이 정밀안전 진단에 외부 전문가나 민간단체의 참여를 저울질하고 있으나 교과부의 태도는 명확지 않다. 이런 가운데 고리 1호기를 둘러싼 논란은 확산되고 있다. 김 사장은 원자로의 압력용기에 균열이 올 수 있다는 ‘조사취화현상’과 낙뢰 등에 따른 비상 정지 사례, 비상 매뉴얼 부재 등에 대해서도 일일이 오해라고 해명했다. 대신 고리 1호기 정지가 현대중공업이 납품해 2007년 교체한 차단기 탓이라는 입장은 재확인했다. 차단기 스프링의 장력에 문제가 생겨 현대중공업이 공식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각에선 고리 1호기의 안전시설이 설계부터 잘못됐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정부원전 안전점검단 등에 따르면 고리 원전에 설치된 수소제어기(PAR)와 비상발전기 등 안전시설이 규격에 맞지 않거나 1층에 설치돼 강력한 지진 등 돌발사태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원자로 증기발생기의 튜브가 두께 2㎜로 얇아 대형 지진 시 방사성물질이 냉각수기 밖으로 유출될 가능성도 제기됐다. 한수원 측은 “비상 발전기는 진동이 심해 모든 원전의 1층에 자리한다.”고 설명했다. 또 “고리 1호기의 PAR은 중대사고 대응 능력을 증진시키려고 지난해 캐나다 회사로부터 공급받아 설치한 것”이라고 말했다. 증기발생기 튜브에 대해선 “특수강으로 제작됐고, 이 제품(인코넬 698)이 세계 주요 원전에서 쓰이고 있다.”고 반박했다. 한편 지난 19일 3호기를 정비하던 한전 케이피에스(KPS) 직원 3명이 고압 전류에 감전돼 3, 4호기 전원이 차단된 사고는 ‘인재’에 따른 국내 원전사고의 가능성을 한 단계 높여 놨다. 한수원 측에 따르면 KPS가 인력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울진에 있던 직원 2명을 이번 작업에 투입하면서 작업자 실수로 사고가 빚어졌다. 한 원자력 전문가는 “고리 원전에서만 하청업체 직원의 실수로 이와 비슷한 사고가 두 차례 더 발생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작업자의 실수가 대형 사고로 이어진 사례는 미국 스리마일섬 사고(1979년)와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사고(1986년)가 대표적이다.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한국경제 전망 수정계획 없다”

    “한국경제 전망 수정계획 없다”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 준비위원회 기획조정단장을 지낸 이창용(51) 아시아개발은행(ADB) 수석 이코노미스트가 20일 내한해 정부과천청사에서 기자 간담회를 가졌다. 최근 ADB가 발표한 2011년 아시아 경제전망을 놓고 진지한 대화가 오갔다. 지난 3월 ADB로 발령받은 그는 “G20 정상회의의 가장 큰 수혜자가 바로 나”라면서 “G20 정상회의 개최로 전 세계에서 한국이 갖는 위상은 크게 높아졌으며, 올해도 한국이 지난해 G20에서와 같이 어떻게 깊은 인상을 주느냐가 과제”라고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국에 대한 경제전망은. -ADB는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4.6%, 물가상승률을 3.5%로 전망했다. 유가가 지난해보다 평균 30% 올라간다는 가정 아래 물가 전망치를 내놨는데 현재까지는 전망치를 수정할 계획이 없다. ‘리비아 사태’가 얼마나 더 갈지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유가 상황이 바뀌면 수정할 수도 있다. →일본 대지진이 한국에 영향을 미칠까. 삼성전자 주가는 떨어졌는데. -삼성전자 주가가 일본 대지진 때문에 떨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번 사태는 분명히 일본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국내총생산(GDP)에까지 영향을 줄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공급 측면에 충격이 와서 기업이 어려울 수는 있지만, 우리나라 GDP에 영향을 줄 것 같지는 않다. 예를 들어 A기업이 그 나라의 모든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고, 그만큼 대체가 되기 때문이다. 중국에 갔을 때 큰 기업들이 일본 대지진 사태 때문에 조심하고 있다는 얘기는 했지만, 생산량이 엄청 떨어졌다고는 하지 않았다. 대지진이 처음 발생했을 당시에는 원자력발전소 안전이 문제였다면, 지금은 그로 인한 전력 피해가 얼마나 될 거냐가 중요하다. →일본 대지진과 리비아 사태 등 외부 충격이 많은데, 환율 조정이 바람직한가. -중국의 12차 5개년 개발계획을 보면 명확하게 성장 속도를 희생하더라도 균형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면서 소득 분배에 치중하고 있다. 물가를 잡기 위해 환율을 조정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고 이는 가장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본다. 우리나라도 어느 한쪽에 치중하는 것보다는 환율도 병행해 조정하는 게 바람직하다. →국내와 ADB에서 근무할 때의 차이점은. -국내에 있을 때는 아시아에 대해 우리나라 아니면 중국을 얘기하는 게 다였다. 하지만 밖에 나가서 보니 아시아에 다양한 나라가 많다는 것을 알았다. 각 나라의 특징들을 살펴보는 것은 굉장히 보람 있는 일이다. 중국에 비해 인도를 몰랐고, 인도 주변의 많은 나라들이나 카자흐스탄 등에 대해 잘 몰랐다. 기업인들은 이런 나라들에 많이 진출하고 있다. 정책 실무자들은 이런 나라들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 아시아는 굉장히 빨리 변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에 대한 자원외교만 생각할 게 아니라 실제 기업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G20 정상회의 끝난 뒤 중국을 지켜봐야 한다고 했는데. -전 세계에서 아시아가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 더 많이 느끼고 있다. 밖에서 아시아에 대한 수요가 많다. 1980년대 미국에 갔을 때 소니가 전미를 휩쓸고 서점이 모두 일본 서적으로 도배됐던 기억이 난다. 지금 일본이 가라앉으면서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줄었다고 본다. 하지만 밖에 나가면 중국뿐 아니라 아시아에 대한 수요가 굉장히 많다. 반면 아시아의 공통된 목소리, 즉 아시아만의 견해가 있는지 의문이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물품은 수출하지만, 지적인 측면을 수출하지는 못하고 있다. G20 회의에는 유럽과 미국 견해는 있는데, 아시아의 공통된 견해는 없는 것 같다. →G20 정상회의를 국격외교 진전의 기회라고 했는데. -G20의 가장 큰 수혜자가 나다. 지금은 전 세계 어느 회의에 가도 내가 발표하는 것의 반은 ADB, 반은 G20 얘기다. 우리나라는 G20 정상회의 이후 위상이 상당히 높아졌다. 또 한국의 의견에 대한 수요가 굉장히 많다. 지난해만큼 노력해서 다른 나라들에 깊은 인상을 주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다. 글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사진 이종원 선임기자 jongwon@seoul.co.kr ■ 이창용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1960년 충남 논산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국민경제자문회의 민간 자문위원 ▲17대 대통령직인수위 경제분과 위원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차관급) ▲주요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 준비위원회 기획조정단장 ▲아시아개발은행(ADB) 수석 이코노미스트
  • 市기록관에서 보관중인 가장 오래된 공문서 아시나요

    市기록관에서 보관중인 가장 오래된 공문서 아시나요

    서울시에서 보관 중인 가장 오랜 공문서는 한 세기 조금 미치지 못하는 97년 전 것이고, 공문서에서 ‘서울특별시’라는 명칭은 60여년째 사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18일 서울시 각 부서에서 생산된 행정기록물을 이관받아 보존·관리하는 서울시기록관에 따르면 가장 오래된 기록물은 ‘인감증명규칙’이 시행된 다음 날인 1914년 7월 8일 영등포에 등록된 ‘1호 인감대장’(사진①)이다. ●‘서울, 경기에 편입’… 일제 문서 발견 1호 인감은 영등포구 영등포동(당시 경기 시흥군 북면 영등포리)에서 작성된 것으로, 1개 면에 4명의 인감이 등록돼 있다. 인감대장은 등록 순서에 따라 등록일자와 성명, 주소, 본적지, 생일 등이 함께 기재돼 있다. 인감대장 이름난에는 일본인으로 추정되는 4글자의 한자가 유난히 많았다. 인감대장에 이어 오래된 문서는 당시 서울시 토지대장과 측량원도, 면적측정부 등 지적관련 대장과 도면으로 현재 시민들의 재산권 확인 등에서 여전히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기안문 형태로 된 시 최초의 공문서는 1945년 4월 27일 경성부 도시계획과에서 작성한 ‘환지처분 인가 신청의 건’(換地處分認可申請ノ件②)이다. 1937년 경성시가지 계획사업 돈암토지구획정리지구의 제1공구 사업이 완료돼 경성부에서 당시 상급기관인 경기도에 환지처분 인가를 요청하는 내용의 문서로 부부윤(副府尹·부시장)을 거쳐 부윤(府尹·시장)까지 결재가 이뤄졌다. 당시 일제가 조선시대 한성부를 경성부로 이름을 바꾸고, 수도(首都)로서의 개념을 없애려는 음모 아래 격을 낮춰 경기도에 편입했다는 사실이 공문서에서도 발견된다.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이 서울시헌장을 선포하면서 공문서에서 ‘경성부’라는 명칭을 ‘서울시’로 바꿨고, 1949년 8월 15일 시행된 지방자치법에 따라 이후 문서부터는 ‘서울특별시’(사진③)라는 명칭이 사용됐다는 점도 알 수 있다. 특히 1960년대 이전 공문서는 상신문서체와 하달문서체로 나뉘어, 상급기관에는 ‘~하고저 재결을 앙청(仰請·우러러 청함)하나이다’와 같은 경어를 사용했고, 하급기관에 보내는 문서는 ‘~차질 없도록 바람’ 등 권위주의적 표현을 사용했다. 이후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행정간소화 지시로 타자기 사용에 대비한 가로쓰기 채택과 한글전용 쓰기를 단행했다. 이에 따라 1980년대 이후에는 타자기를 사용한 공문서들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1990년대 이후 컴퓨터로 만든 문서들이 나왔다. 공문서 규격도 B5에서 현재의 A4로 바뀌었다. 1990년 정부 공통 기안용지에 타자기로 작성된 기안문서를 보면 당시 원세훈 주택기획과장(현재 국가정보원장)의 전결로 처리됐으며, 통제관이 있어 외부로 발송되는 문서에 대해 시장 직인 등을 통제했다. ●1961년 한글전용·가로쓰기 단행 1997년부터 서울시에 전자결재시스템이 도입되면서 결재를 받기 위해 상사의 사무실 앞에서 문서판을 들고 길게 줄서는 풍경이 사라졌으며, 2004년부터 전자문서시스템이 도입돼 종이문서를 출력해 캐비닛에 보관하는 관행이 급격히 줄었다. 한편 지금까지 생산된 서울시 공문서는 200쪽 분량의 책자 13만권으로 경북 청도서고와 남산서고, 서울서고 등 3곳에 분산해 보관하고 있다. 경북 청도군청 인근 지하 3층에 마련된 시 문서보관소는 1968년 김신조 청와대 습격사건 이후 비상사태에 대비해 공문서를 분산 배치하라는 정부 지시로 설치돼 명맥을 잇고 있다. 홍순성 기록정보팀장은 “공문서에서는 당시의 행정뿐만 아니라 흥미로운 서울의 역사를 담고 있다.”면서 “앞으로 공공기록물관리법에 따라 서울시에 영구기록물관리기관이 설립되면 보다 체계적으로 기록물을 보존·관리·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이승만기념사업회 사과 운운 진정성 없다”

    “이승만기념사업회 사과 운운 진정성 없다”

    “그런 사과가 어디 있느냐. 우리로선 총 한방 더 맞은 것이다.” 4·19혁명 51주년을 맞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80) 박사가 처음으로 혁명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사과 입장을 밝혔으나 당사자 격인 4·19 단체는 발끈하는 분위기다. 반세기가 넘도록 사과는커녕 독재 통치 정당화에 골몰했던 사람들이 보도자료를 통해 사과 운운하는 것은 희생자에 대한 결례이고 진정성도 없다는 것이다. 4·19혁명 당시 시위에 나섰던 청년들의 모임인 ‘4·19민주혁명회’ 오경섭(69) 회장은 18일 서울 필동 4·19혁명기념회관에서 가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달랑 보도자료 하나 공문 형식으로 보낸 진정성 없는 사과는 안 하느니만 못한 것”이라면서 “이인수 박사와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가 51년 만에 사과를 한다고 나섰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정신적으로 총 한방을 더 쏜 것이나 다름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1960년 4월 19일 당시 경동고 3학년이었던 오 회장은 서울 미아리 시위 현장에서 경찰이 발포한 총 두발에 하복부 관통상을 입은 뒤 50여년 동안 4·19 희생자와 민주화를 위해 힘써 왔다. 그는 “유족과 희생자들과 교감 없이 일방적으로 이뤄진 사과는 형식적으로도 옳지 않고 내용적으로도 진정성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인수 박사와 이승만기념사업회가 사죄의 뜻을 밝혔다. 입장은. -아주 불쾌하다. 사과문이 없는데 무슨 사과를 받아들이라는 거냐. 4·19혁명과 관련해 정부가 공식 인정한 당사자 단체는 우리를 포함해 딱 세 군데밖에 없다(정부가 인정한 4·19관련 공식단체는 4·19민주혁명회, 4·19혁명희생자유족회, 4·19혁명공로자회 3곳이다). 그런데 우리 중 어떤 단체에서도 직접적인 사과나 사과문을 받은 적이 없다. 정신적으로 우릴 능욕했다. →사과에 진정성이 없다는 뜻인가. -사과라는 것은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간에 교감이 있어야 한다. 사전에 어떤 식으로 사과를 하겠다는 말도 없이 먼저 각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보냈다. 우리 사무실로 보낸 공문도 언론사에 보낸 ‘기사 전제 요청의 건’ 공문이다(이승만기념사업회가 지난 15일 4·19민주혁명회 측에 보낸 공문 겉봉투에는 ‘보도자료 재중’이라고 적혀 있다). 당사자에게 직접 말도 없이 언론을 통해 ‘사과하겠다.’고 발표만 하면 그게 사과하는 거냐. →이인수 박사로부터 직접 사과는 없었나. -인터뷰 직전에 이인수 박사가 전화를 걸어 왔다. 대뜸 전화를 해서 한다는 말이 ‘내 나이가 80이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내일 민주묘지에서 참배하도록 협조해 달라.’는 얘기만 하더라. 사과 방법도 잘못됐고, 내용에 진정성도 없다. →이인수 박사 등이 19일 오전 수유리 민주묘지를 직접 찾아 참배를 하겠다고 하는데. -받아들일 수 없다. 참배하겠다고 하면 우리가 물리적으로 막겠다.(4·19민주혁명회 등 3개 단체는 이날 오후 ‘이승만 추종자들의 사과는 진정성이 없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내고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내세워 4·19민주묘지를 방문하고 헌화·참배하는 행위는 단연코 거부한다.”고 밝혔다.)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목소리도 나오는데, 어떻게 보나.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를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후대에 역사가들이 평가할 일이다. 이승만기념사업회나 유족들은 이제 와서 ‘이 전 대통령이 3·15 부정선거를 몰랐다.’ 이런 말만 되풀이한다. 역사적으로 큰 죄를 짓고 이제 와 사과하겠다는 사람들 인식이 이것밖에 안 되는지 한탄스럽다. 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 “케네디 대통령, UFO 비밀 밝히려다 암살당해”

    “케네디 대통령, UFO 비밀 밝히려다 암살당해”

    존 F. 케네디 미국 전 대통령의 사망이 UFO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돼 눈길을 모으고 있다고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 등이 지난 18일 보도했다. 최근 미국 중앙정보국(CIA)는 1963년 11월 12일 UFO 관련 문건 열람을 요구했던 케네디의 서신을 공개했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UFO 관련 비밀문건열람을 원한다는 내용의 서신 2장을 CIA측에 보냈는데, 이중 한 장이 공개된 것. 또 그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 국장에게 우주개발 및 조사 활동과 관련해 소련과 협력할 것을 당부하는 메시지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서신은 ‘존 F. 케네디와 뉴프런티어’(A Celebration of Freedom: JFK and the New Frontier)라는 책을 집필중인 작가 윌리엄 레스터가 ‘정보공개법’(FOIA· Freedom of Information Act)을 언급하며 공개를 요구하면서 빛을 보게 됐다. UFO 신봉자들은 케네디 전 대통령이 암살되기 10일 전 이 문서의 열람을 신청했고, 그의 암살은 UFO의 진실을 알려던 움직임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했다. 가장 관심이 쏠리는 부분은 1960년대에 CIA에서 일했던 한 인물이 빼돌렸다가 공개된 불에 타다 만 문서다. 신상정보가 공개되지 않은 이 인물은 CIA가 중요 비밀문건을 소각할 때 이를 몰래 빼돌렸으며, 이 문서에는 케네디 전 대통령의 암호명인 ‘랜서’라는 이름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랜서가 우리의 활동과 관련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몇 가지를 요구했다.”는 CIA 국장의 메모도 함께 볼 수 있어 UFO와 케네디 전 대통령 암살의 상관관계에 의심을 더하고 있다. 윌리엄 레스터는 “케네디 전 대통령은 소련이 자국 상공에서 자주 목격되던 UFO가 미국의 침공으로 오해받을까 염려해 비밀문건 열람을 요청했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같은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케네디 전 대통령이 UFO 관련 기밀을 유출하려고 하자 CIA가 나서 암살을 주도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CIA 측은 이 같은 주장에 어떤 공식적인 답변도 내놓지 않고 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나와 통일] (8) 어희선 치과의사

    [나와 통일] (8) 어희선 치과의사

    2009년 금강산 이산가족상봉행사에서 작은할아버지를 만난 뒤 통일에 대한 나의 생각은 상당히 많이 달라졌다. 우리의 소원이 통일이라는 것에 대해 이의는 없지만 통일이 나의 문제로 다가왔을 때 과연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런 현실적인 관점에서 통일을 생각하게 됐다. 북한에 있는 가족들에 대해서는 돌아가신 할아버지로부터 어릴 때부터 많이 들었다. 장남이었던 할아버지를 대신해 둘째, 셋째할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의용군으로 전쟁터에 나가셨다가 북에 남게 되셨다. 명절 때면 고작 5명 남짓한 식구들이 보내는 게 썰렁해 대가족에 대한 부러움이 늘 마음에 있었다. 이산가족 상봉단에 선발됐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신청을 한 지 몇년이 지나서였다. 마침 추석을 며칠 앞둔 시기여서 북한의 친척들을 만날 마음에 설레고 또 매우 분주했다. 우리는 가족들의 지난 수십년 동안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사진첩과 약품, 옷가지, 식료품 등을 챙겼다. 상봉행사에 참석한 가족들 모두 어린이 키만 한 이민가방을 두세개쯤 들고 버스에 올랐다. ●경제격차 커 통일돼도 갈등 클 것 상봉장에서 북측 사람들이 들어서는 순간 “아, 우리 작은할아버지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빼닮은 외모. 정정하신 발걸음. 본 적도 없는 작은할아버지를 본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느냐.”면서 서로의 뺨을 어루만지면서 금세 눈물바다가 됐다. 헤어질 때는 버스 유리창 너머 손을 맞대고 “잘 가라.” “잘 있어라.”라며 또 한번 눈물을 흘렸다. 2박 3일 동안 3번을 만났는데 기억에 남는 순간은 이 두번 정도다. 가족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보다 더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북한사람들에게서 느낀 이질감이었다. 상봉장에 나타난 가족들은 모두 똑같은 중절모에 양복 차림이었다. 작은할아버지는 별다른 얘기를 나눈 것도 아닌데 북측 요원들과 눈이 마주치면 움찔했고, 호텔방에서는 도청을 걱정해 늘 TV를 켜 두었다. 이들이 정말 나의 형제, 가족이고 민족일까. 떨어져 지낸 지난 60년 동안 우리는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이때 이후 통일에 대한 나의 생각은 많이 바뀌었다. 통일이 되면 우리들이 북한 사람들을 똑같은 국민이라고 인정하고 차별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지금도 남한에는 지역감정이 남아 있는데 지금 이 상태로 통일이 된다면 갈등이 클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북한 사람들을 내가 먹여살려야 할 식구라고 생각하니 앞이 깜깜했다. 통일을 하더라도 어느 정도 격차를 줄인 다음에 하지 않으면 같이 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량 지원 등 남북 교류 회의적 인도적인 차원의 남북교류에 대해서도 회의를 갖게 됐다. 이 행사도 이산가족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대가를 요구하기 위한 행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쌀을 보내는 사업도 지금은 찬성하지 않는다. 그 쌀이 북한 주민들에게 돌아간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장기적인 통일프로젝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통령 5년 임기를 다 바쳐서 통일에 힘 쏟는다고 해도 될까 말까 한데 정권에 따라 너무 쉽게 변하는 통일정책으로는 통일은 불가능하다. 정권이 바뀌어도 누구도 손댈 수 없는 10년, 20년짜리 통일 프로젝트가 있어야 한다. 통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북한이 변하는 수밖에 없다. 북한 고위층이 생각을 바꿔 개방을 받아들이는 전향적인 자세가 되지 않는 한 통일은 어렵다. 북한은 진정으로 통일을 원하는가. 이 물음에 북한이 답을 보여 주기를 바란다. 정리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UFO추락 ‘외계인 사체?’…러서 발견 진위 논란

    UFO추락 ‘외계인 사체?’…러서 발견 진위 논란

    러시아에서 외계인 사체가 발견됐다는 주장이 나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지난 17일 동영상 공유사이트 유투브에는 ‘러시아에서 발견된 외계인 사체’란 제목을 단 1분 25초의 영상이 올라와 수많은 네티즌들의 눈을 의심케 했다. 영상에는 러시아인으로 추정되는 남성 2명이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눈 쌓인 숲 한쪽에서 흑갈색의 형체가 땅에 떨어져 있는 모습이 자세히 담겼다. 문제의 형체는 1960년 대 공상과학(SF)영화 봤을 법한 외계인의 외모 그대로지만 크기가 훨씬 작다는 특징이 있었으며, 몸 곳곳이 그을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영상을 올린 이는 “UFO가 추락할 당시 사망한 외계인의 잔해”라는 설명을 덧붙였지만, 그간 공개된 다른 가짜 외계인 영상과 마찬가지로 조작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한편 이번 주장이 러시아에서 관심을 모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미확인비행체 집단 목격사건이 벌어져 러시아를 뜨겁게 달군 지 불과 한 달 여 만에 발생한 일이기 때문이다. UFO 집단 목격사건은 지난달 11일 이르쿠츠크 주에서 마을 사람 수백 명이 동시에 밤하늘에서 핑크색과 파란색으로 빛나는 비행체가 날아오다가 숲으로 사라지는 현장을 목격한 일로, 민영통신사 인테르팍스 등 여러 매체가 보도할 정도로 크게 화제가 된 바 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트위터(twitter.com/newsluv)  
  • “내게 올 총탄 학생이 맞았다” 이승만대통령 눈물

    “내게 올 총탄 학생이 맞았다” 이승만대통령 눈물

    4·19혁명 발생 51년 만에 이승만 대통령의 유족이 혁명 희생자 및 유족들에게 사과한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이자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 부회장인 이인수(80) 박사가 19일 오전 9시 서울 수유리 국립4·19민주묘지를 참배하고 당시 경찰의 총탄에 숨진 학생들에게 헌화한다. 또 희생자와 유족에게 사죄의 뜻을 밝히는 성명을 낭독한다. 이와 관련해 4·19민주혁명회 광주·전남지부 이승록 사무처장은 “늦게나마 사죄를 한다고 하니 고맙다. 4·19혁명은 한국 민주화의 초석이라는 사실이 더 널리 알려져야 한다.”며 반겼다. 이 박사는 “이 전 대통령은 하야 후에도 4·19를 떠올리면 ‘내게 올 총탄을 학생들이 맞았다’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제 반세기가 지났으니 유족들에게 사과와 화합의 손을 내밀 때도 됐지요.”라고 17일 말했다. 이 전 대통령은 4·19혁명 당시 많은 학생이 숨진 데 대해 미안함을 표했다고 이 박사는 전했다. 이 전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사업회와 대통령 유족이 4·19 희생자 묘역을 참배하고 사과 성명을 발표하는 것은 혁명 이후 처음이다. 그간 4·19 혁명희생자유족회 등은 기념사업회 측에 여러 차례 사과를 요구했다. 하지만 이 박사는 4·19혁명의 원인을 이 전 대통령이 제공했다는 역사적 시각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이 전 대통령과 4·19에 대한 반발이 격했던 시기에는 피차간 이해와 화해가 어렵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1960년 3·15 부정선거가 있고 같은 해 4월 12일 각료회의록을 보면 ‘선거에 무슨 잘못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고 아버지께서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만일 선거가 잘못됐다면 내가 물러나야지’라고 말하는 게 나온다. 집권 말년에 당신이 얼마나 속았는지 뒤늦게 알았던 것이 확인되는 대목”이라면서 “고령에다 ‘인의 장막’에 둘러싸인 탓이었지만 200명 가까운 시위대가 사살된 사태에 국가 최고 지도자로서 책임을 지려고 기꺼이 물러난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당시 현대건설에 근무했던 이 박사는 “4월 18일 외근을 나왔다가 고려대 후배들이 당시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앞에서 흰 머리띠를 두르고 시위하는 현장을 보고 가슴이 뭉클해 동참한 적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 박사는 이승만 전 대통령과 같은 종친인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로 1961년 12월 양자로 입양됐다. 미국 뉴욕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1~93년 명지대 법정대학장을 지냈으며, 96년부터 이승만기념사업회 임원을 맡고 있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는 17일 4·19혁명 당시 경찰의 총탄에 맞아 숨진 학생과 유족에게 사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업회는 성명서에서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대한민국은 (4·19혁명) 당시 학생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정치적으로 세계 어느 선진국 못지않은 민주화를 이루었으며, 경제적으로는 G20 정상회의를 국내에서 개최할 정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면서 “(이는) 60여년 전 이승만 대통령께서 이 나라를 세우실 때 주창하신 건국이념과 4·19 당시 학생들의 애국충정을 우리 후손들이 잘 받들어 실천한 결과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정신과 4·19 당시 학생들의 나라 사랑 정신은 하나’라 생각하고 당시 정부의 잘못 때문에 희생된 학생들과 그 유족들에게 머리 숙여 조의를 표하면서 앞으로 4·19유족회 등 관련 단체와 힘을 모아 당시의 잘못을 반면교사로 삼아 국가 발전에 함께 이바지하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김일주 사무총장은 “희생자 유족들은 그간 기념사업회 측에 꾸준히 사과를 요구했으나 사업회 내부 의견이 갈려 이뤄지지 않았다.”면서 “이번 사죄 성명 발표는 지난 2월 기념사업회장으로 취임한 이기수 전 고려대 총장의 의지로 결정됐다.”고 전했다. 김양진기자 ky0295@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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