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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답으로 풀어 본 ISD 오해와 진실

    최근 투자자국가소송제(ISD)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소문이 온라인상에 떠돌고 있다. 여당과 정부는 2008년 촛불시위의 발단이 된 ‘미국산 쇠고기 괴담’을 떠올리며 부리나케 진화에 나섰고, 야당 측은 온라인 여론을 자극하고 부추기는 모습이다. 일명 ‘ISD 루머’는 사실과 다르거나 다소 부풀린 측면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ISD를 둘러싼 오해와 진실을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쉽게 풀어봤다. Q 과테말라 등 남미 나라들이 ISD 때문에 미국 기업에 제소를 당하고 국민들도 피해를 봤다고 하는데. A ISD가 ‘원흉’이라기보다는 부패하거나 무능한 독재정권이 투자 기업과 사전에 잘못된 계약을 맺은 탓에 일어난 측면이 크다. 미국계 기업 RDC는 1997년 50년간 철도 운영권을 따냈는데, 2008년 과테말라 정부가 이 계약이 국익에 반한다는 결의서를 채택했다. 이후 RDC에 대한 외부의 투자가 끊겨 급기야 철도 운행이 중단됐다. RDC는 ISD를 통해 과테말라 정부를 제소했고 현재 중재가 진행 중이다. 볼리비아와 벡텔의 수돗물 분쟁, 페루와 렌코의 납 중독 소송 등도 정부의 정책적 판단 착오가 발단이었다. ●의료 등 44개분야 ISD 예외 Q 우리도 미국이 의료, 복지, 전기, 수도 등 공공사업에 ISD를 걸면 어떡하나. A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는 ‘안전장치’가 있다는 게 정부 측 설명이다. 공공보건, 안전, 환경, 부동산 가격 안정화 정책 등은 간접적으로 외국 투자를 수용하는 개념에 넣지 않도록 규정했기 때문에 ISD 대상이 아니다. 이와 별도로 보건의료·사회서비스, 전기·가스·환경 등 공공성이 높은 분야와 초·중등 교육 및 성인 교육 등 44개 분야에 대해선 정부가 규제하거나 강화할 수 있도록 부속서II에 기재해서 ISD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정부는 설명한다. 미국이 중남미 국가들과 맺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중미자유무역협정(CAFTA)에는 이런 ‘유보’ 조항이 없다. Q ISD 중재를 해주는 곳이 미국에 유리한 판정을 해준다고 한다. 미국의 승소율이 80%가 넘는다고 하는데. A 중재판정부는 한국과 미국 기업이 각각 임명하는 중재인 2명과 양국이 합의하는 1명으로 구성된다. 보통 합의가 안 되면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 사무총장이 중재인을 임명한다. 야당은 세계은행 총재 자리를 60년 넘게 독식하고 있는 미국에 유리한 판정이 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 ISD 자료를 보면 미국 기업이 투자 상대국 정부를 제소한 108건 가운데 미국 기업은 22차례 지고 15차례 이겼다. 패소율이 더 높다. 여당은 중재를 담당하는 국제기구가 특정 국가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판결을 내린다는 것은 비합리적인 발상이라고 주장한다. 야당은 나머지 71건은 대부분 정부가 합의를 해준 것이기 때문에 미국 기업의 승소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반박하고 있다. ●美기업 22차례 지고 15차례 이겨 Q FTA 협상을 다시 해서 ISD 조항을 뺄 수 없나. A 미 의회가 한·미 FTA 비준안을 통과시키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사인만 남은 상태에서 재재협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다. 다만 한·미 FTA가 발효된 뒤 ISD의 문제점을 양국이 점검해 볼 순 있다. 김종훈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과 론 커크 미 무역대표는 지난달 30일 서비스투자위원회 설치에 합의했다. 양국 정부대표로 구성된 위원회는 협정 발효 후 90일 이내에 첫 회의를 하고 이후 매년 또는 수시로 회의를 열어 ISD 제도의 보완을 논의하기로 했다. 오달란기자 dallan@seoul.co.kr
  • 민주당 당권 계파갈등 확산

    민주당의 차기 당권 경쟁이 계파 간 갈등으로 확산될 조짐이다. 차기 지도부 구성과 관련, 일단 단독 전당대회를 통해 차기 지도부를 구성한 뒤 다른 야당과 통합을 추진하자는 주장과 범야권을 단번에 아우르는 통합 전대를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면서 계파 갈등이 확산되는 양상이다. 2일 손학규 대표는 정권교체를 위해 통합 전대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정동영·정세균 최고위원 등 당내 ‘빅3’ 지도부의 담합설도 나돈다. 전날 비공개 최고위원회의에서는 박주선·조배숙 최고위원을 제외한 전원이 통합 전대에 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용섭 대변인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손 대표의)통합 전대 구상에 대한 이견은 없다.”면서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등 다른 야당들과 노조, 시민단체, ‘혁신과 통합’ 등 통합 대상은 네댓 개가 될 것이며 이르면 3일 구상을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누군가는 (통합 논의를) 던져야 하며 민주당은 야권의 맏형으로 해야 하는 입장이다.”라고 강조했다. 대선 출마자들에게 적용되는 당직 사퇴 마감기한(선거일로부터 1년전)인 다음 달 18일 이전까지 손 대표의 사퇴는 없을 것이라는 입장도 분명히 했다. 이인영 최고위원, 우상호 전 의원 등 ‘486’(40대·80년대 학번·60년대생)들이 주축이 된 ‘진보행동’ 모임도 “통합전대가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손 대표 측에서는 일부 야당이 끝내 반대할 경우 한국노총, 언론노조, 예술계 등 전 분야 시민사회세력들과 통합해 최고위원직을 일정 부분 배분하거나 공동 대표를 맡는 등의 방식도 거론되고 있다. 이에 대해 민주당 원외위원장들은 즉각 반발했다. 이들은 이날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0·26 재·보궐 선거를 사실상 패배로 규정하고 지도부 전원 사퇴와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하는 ‘선 민주당 전대, 후 통합 전대’라는 투트랙 전대를 촉구했다. 이들은 손 대표가 당헌을 무력화하는 통합 전대를 통해 당권을 쥐고 내년 총선 공천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면서 대권 욕심을 챙기려 한다고 보고 있다. 강주리기자 jurik@seoul.co.kr
  • 손학규·문재인, 목표 같지만 길은 제각각?

    범야권 통합의 두 주역은 손학규 민주당 대표와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다. 목표(통합)는 같지만 오르는 길은 각기 다르다. 손 대표의 나침반은 대선에, 문 이사장은 총선에 기울어 있는 듯하다. 통합 범위를 놓고도 손 대표는 기존 야당과 노동계, 비정치적 시민사회까지 범야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반면 문 이사장은 야당과 시민사회를 우선 참여 주체로 정했다. 손 대표는 ‘민주당 대 다자 구도’를 지향한다. 민주당 중심의 ‘수혈론’에 가까워 보인다. 손 대표는 2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대통합을 강조하면서도 “민주당은 60년 전통을 가진 민주진보 세력의 적통”이라고 못 박았다. 문 이사장은 ‘민주당 대 비민주 구도’를 세웠다. 범야권 지형을 ‘일대일’로 만들고 민주당을 바깥에서 견인하겠다는 의도다. 전날 “민주당은 통합의 주체이지만 기득권을 버리고 다른 정치 세력 및 시민사회와 결합해야 더 큰 힘을 갖게 된다.”며 민주당의 혁신을 촉구했다. 다음은 통합 시기의 차이다. 손 대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전체 통합 전당대회를 추진하려 한다. 문 이사장은 통합 전당대회가 필요하지만 통합추진위원회 구성을 통해 가능한 세력부터 합치자는 입장이다. 결론적으로 손 대표는 자신의 정치 일정(대권)을 염두에 둔 야권 통합을 노리는 것 같다. 그로서는 대통합이 유일한 승부처인 셈이다. 단계적으로 통합을 추진하면 민주당의 기득권을 차례차례 허물어야 한다는 것도 손 대표에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당 관계자는 “한 번에 통합 전당대회를 연 뒤 지분 확보가 가능한 지도부를 구성하고 기회(대선)를 노리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래서 측근들은 ‘통합과 (대선) 불출마 연계설’에 대해서도 “손 대표의 생각이 아니다. 검토했다 하더라도 통합을 위한 진정성 차원”이라고 부인했다. 이에 반해 문 이사장은 통합에 속도를 내고 있다. 야당은 각자 지분이 있지만 자신은 변방에서 이제 막 정치 무대로 입성했다. ‘안철수·박원순’의 세트 플레이가 민주당을 압도하는 상황에서 성과를 내야 한다. ‘혁신과 통합’의 관계자는 “이달 내로 통합 문제를 매듭짓지 않으면 범야권 세력들이 각개 약진할 것”이라며 조바심을 냈다. 문 이사장은 진보정당에 지분을 나눠 주는 방안을 이미 제시했고, 새로운 정치주체를 대거 영입해야 한다고 밝혔다. 단계적 통합은 결국 민주당의 기득권(지분)을 무너뜨리는 과정이다. 여기에 2012년 4월 이후 개인 진로를 정하겠다고 한 것까지 더해지면 문 이사장의 시선은 2012년 총선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옴부즈맨 칼럼] 공직사회 다양성이 행정의 미래다/박제국 행정안전부 인력개발관

    [옴부즈맨 칼럼] 공직사회 다양성이 행정의 미래다/박제국 행정안전부 인력개발관

    생물다양성이란 특정 지역 내에 존재하는 생물종의 다양성을 뜻하는 말이다. 한 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생물의 종수는 그 나라의 생물자원의 풍부성을 나타내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브라질, 멕시코, 마다가스카르, 콜롬비아, 자이르, 오스트레일리아, 인도네시아 등의 생물자원 부국들이 경제부국 G7과 대별되는 M7(Megadiversity 7)이라고 불리며, 미래 세계의 강대국이 될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온 바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도 인적 구성의 다양성이 갈수록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사회가 점차 분화되고 복잡해지면서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에 더해 최근 북한이탈주민, 외국인 노동자·국제결혼 이주자 등의 증가로 말미암아 우리 사회는 명실공히 다문화 사회로 변화해 가는 현실이다. 세계는 이러한 사회적 다양성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미국은 이미 1960년대에 소수자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을 도입하여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을 대학 입학, 취업 등에 있어서 우대하는 정책을 꾸준히 펼쳐 왔다. 우리 정부에서도 공무원 선발과정에서부터 소수집단 출신 또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부여하기 위하여 다양한 균형인사정책을 시행 중이다. 대표적인 것이 2003년부터 도입된 ‘양성평등채용목표제’이다. 이는 행안부가 실시하는 공무원 공개경쟁 채용 시험에서 한쪽 성(性)의 합격자 비율이 30% 미만일 경우, 목표 비율만큼 추가 선발하는 제도이다. 장애인에 대해서는 7·9급 공채 때 선발예정인원의 일정 규모를 구분하여 모집하는 한편, 중증장애인 특채시험도 별도 실시하고 있다. 저소득층에 대해서는 9급 공채 및 기능직 신규채용인원의 1%를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를 대상으로 구분모집하고 있다. 또한, 지방 소재 4년제 대학에서 추천을 받은 성적우수자를 지역별로 선발하여 수습근무 후 7급으로 채용하는 ‘지역인재추천채용제’도 실시 중이다. 최근 급증하고 있는 북한이탈주민에 대해서도 연간 채용하는 행정보조인력의 1%를 이들로 채용하도록 하고 있다. 특히, 올해에는 민간에서 다양한 경력을 쌓은 인재들을 공직에 유치하기 위한 ‘민간경력자 5급 일괄채용시험’을 최초로 도입하여 시행 중이다. 이는 그동안 공직 사회의 인적 구성 단순화 및 현장 경험 부족 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민간 전문가들의 생생한 현장 경험을 실제 행정에 접목시켜 보다 적실성 있는 정책을 펼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8월 27일 시행되었던 민간경력자 일괄채용 1차 필기시험 결과, 합격자 65%가 민간 현장 경력 보유자로 나타나 앞으로 민간경력자 출신 5급 공무원이 다수 탄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대졸자 중심의 공직사회에 고졸 출신 공무원 채용을 확대하기 위해 특성화고 출신자 중 학교추천을 받은 성적우수자를 견습근무 후 기능직으로 채용하는 ‘기능인재추천채용제’ 선발인원 및 분야를 확대하고, 고졸자에게 적합한 직무분야를 발굴하여 채용을 적극 독려하고 있다. 지난 9월 16일 자 서울신문에서 “하반기 고졸취업 풍요속 빈곤“이라는 기사를 통해 민간기업의 채용과정에서 제기된 문제점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민간부문을 대상으로 작성된 기사이나 정부에도 고졸자 채용 확대를 위해서 무엇이 더 필요한지를 알려주는 기사라고 생각된다. 교육 관련 기관이나 정부부처들은 학교들이 실제 직장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를 길러낼 수 있도록 좋은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하도록 하는 한편, 수요기관들 또한 이들에게 적합한 직무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선 취업 후 면학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이 땅의 유능한 젊은이들이 자신의 실력으로 당당하게 성장할 수 있는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열린 고용 정책을 통해 공직에 입문한 다양한 공무원들이 서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창의적으로 일하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사회가 지속적으로 공생발전할 수 있는 튼튼한 기반을 마련하는 길이다.
  • 마오쩌둥 전용 차량 사이드미러 없는 이유

    지난달 30일까지 중국 마카오에서 열린 국제 자동차 전시회에서는 전 중국 국가주석 마오쩌둥(毛澤東)이 살아생전 탄 전용 차량이 전시돼 눈길을 끌었다. 특히 이 차량은 다른 차량과 달리 사이드미러가 없는데 그 이유가 “사회주의는 앞으로 있을 뿐”이라는 의미가 담긴 것이라고. 마오쩌둥의 전용 차량은 1950년대 소련의 자동차 업체 스탈린 사의 것으로 당시 구소련에서 중국에 지원한 차량 중 하나라고 한다. 차체 외부나 유리 모두가 방탄 재질로 돼 있어 모든 방향에서 주요인사를 보호할 수 있는 차량이다. 하지만 그 완벽해야 할 전용 차량에 사이드미러가 없다. 이 사항에 대해서 전시회는 “이 차량에는 사이드미러가 없다. 1950~60년대의 “사회주의는 앞으로 있을 뿐, 후퇴하는 것은 없다”라는 이데올로기가 짙게 나와 있기 때문”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실제로 차량 사용시, 호위 차량이 있어 마오쩌둥이 탄 차량이 뒤를 볼 필요가 없도록 경호를 하고 있던 것이다. 당시 운전자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여지간히도 진땀을 흘렸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대해 중국 네티즌들은 “후세에 좋은 웃음 거리다”, “사회주의는 브레이크도 없더라”,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 미래도 보이지 않는 것인데” 등의 견해를 보이고 있다. 윤태희기자 th20022@seoul.co.kr
  • [영화프리뷰] ‘악질경찰’

    [영화프리뷰] ‘악질경찰’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강타한 미국 뉴올리언스. 테렌스 맥도나 경위는 물난리에 고립된 죄수를 구하려다 허리를 삐끗한다. 6개월이 흘렀는데도 진통제로는 고통을 덜 수 없다. 증거품으로 압수한 마약에 손을 대고, 불법도박과 협박·갈취를 하는 악질경찰로 변해간다. 어느 날 관내에서 세네갈 이민자 가족 5명이 몰살당한다. 사건을 맡은 맥도나는 목격자 진술을 받아내려고, 투병 중인 노인의 산소 호흡기를 떼는 등 무리한 수사를 펼친다. 내사과 추적과 범죄조직의 빚 독촉에 시달리면서 맥도나는 점점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오는 10일 개봉하는 ‘악질경찰’(원제: Bad Lieutenant)은 독일의 거장 베르너 헤어조크가 모처럼 상업영화 연출을 맡아 관심을 끌었다. 1960년대 독일 뉴저먼시네마 운동의 중심인물로 ‘아귀레, 신의 분노’(1972), ‘노스페라투’(1979) 등 문제작을 통해 정체성을 잃고 표류하는 독일영화에 일침을 가했던 그이지만, 영화 교과서 밖에서 만날 일은 드물었다. 1980년대 이후 다큐멘터리와 저예산 영화에 몰두했기 때문.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주연을 맡은 니컬러스 케이지(왼쪽)에 있다. 1980~1990년대 미국 인디영화의 기괴한 캐릭터를 도맡아 연기했던 케이지는 1995년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로 미국 남우주연상을 싹쓸이했다. 이후 ‘더 록’(1996) ‘페이스오프’ ‘콘에어’(1997)의 성공으로 블록버스터 액션 스타로 거듭났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특수효과에 의존한 고만고만한 액션영화에서 재능을 낭비했다. 전환점이 필요했다. ‘저예산영화의 마틴 스콜세지’로 불리는 아벨 페라라의 ‘배드캅’(원제: Bad Lieutenant·1992)을 새롭게 각색했다는 점도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 페라라는 ‘악질경찰’에 공동각본가로 참여했다. 뻔하지 않은 이야기 전개는 영화의 미덕이다. 부패경찰로 타락한 맥도나가 비극적 결말을 맞는 게 할리우드 영화에 어울릴 텐데 헤어조크는 ‘사필귀정’, ‘정의’ 따위는 집어치우라고 말한다. 악인들이 출세하는 건 미국도 다를 바 없나 보다. 마약중독 창녀로 분한 에바 멘데스(오른쪽)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단점도 분명하다. 갑자기 이구아나의 시선으로 옮겨가는 장면은 어색하다. 영화 마지막의 판타지도 LP판이 지직거리듯 거슬린다. 숱한 악행의 증거를 남긴 맥도나가 우연의 연속으로 승승장구한다는 설정도 허술하다. 박스오피스모조에 따르면 2009년 개봉 당시 제작비 2500만 달러의 절반도 못 건졌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30) 진보적 신학자 이반 일리히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30) 진보적 신학자 이반 일리히

    1992년, 이반 일리히는 암 선고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일반적인 병원 치료를 거부하고, 요가 같은 자기 수양으로, 고통이 극심할 때는 생아편을 피우면서까지, 최선을 다해 통증을 감당해냈다. 일리히에게 병은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시련”이었고, 삶이 준 선물이었다. 그는 병을 얻음으로써 새롭게 열리는 세계에 대한 숙고가 우리의 삶을 고귀하게 만든다고 믿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몇 분 몇 초밖에 남지 않았을지라도, ‘안녕’이라는 작별 인사를 온전히 자기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일리히는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스스로 고귀해지는 길. 그 길을 최선을 다해 걸어간 이 시대의 현자, 이반 일리히(1926~2002). 이반 일리히는 192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제2차 세계대전 도중 사망하자 유대계 독일인이었던 어머니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피렌체로 갔다. 일리히는 피렌체에서 학교를 마친 후 사제가 되기 위해 로마의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고, 잘츠부르크 대학교에서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교황청은 신실하고 총명한 이 젊은 사제가 로마에 남아서 추기경이 되어 주길 바랐다. 그러나 일리히는, 사제란 교회라는 제도에서 복음을 독점적으로 전파하는 사람이 아니라 청빈과 무권력과 비폭력을 실천하며 사는 또 하나의 예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교회와 일리히 사이의 갈등은 예견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태생… 철학과 신학 공부 일리히는 교회를 ‘그녀’(she)와 ‘그것’(it)으로 구분해서 불렀다. 전자는 “개개인이 따로 또는 함께 믿음과 사랑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그리스도의 삶을 이어나가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 모습을 간직한 교회였고, 후자는 “사랑을 세속적으로 만들고 진실한 믿음을 강제화하는 제도화를 통해 삶을 타락하게 하는” 세속화된 교회였다. 그는 둘 중 ‘그녀-교회’에, 즉 권력 없는 ‘어머니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머물고자 했다. 일리히는 로마교회의 관료제도를 뒤로한 채 미국으로 떠난다. 당시 뉴욕은 푸에르토리코 이민자들로 넘쳐났고, 일리히는 그들이 사는 지역의 사제직을 자청했다. 그러나 기존의 천주교단은 이주민들을 새로운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리히는 분개했고, 교회에 이들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1956년, 푸에르토리코의 가톨릭 대학교 부총장으로 임명되면서 일리히의 문제의식은 확장된다. 그는 학교라는 제도가 ‘경제성장’ ‘진보’라는 말로 포장된 자본의 배타적 경쟁 논리를 이식하고, 사람들에게 “의무교육을 마치지 못했다는 내면의 죄의식까지 새로 짐 지우는 역할”을 했다고 보았다. 일리히는 ‘교육’이라는 말 속에 계몽자가 수동적인 수혜자를 구원한다는 의미가, 서구 근대 문명에 기독교식 구원의 논리가 깔려 있음을 발견한다. 1960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 한 달 전, 푸에르토리코를 장악하고 있던 두 명의 가톨릭 주교가 사제 권력을 남용해 정치에 개입하는 일이 벌어진다. 일리히는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이 일로 추방된 후 멕시코로 건너가 국제문화형성센터(CIF)를 창설한다. 이를 1966년에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CIDOC)로 전환하고, 일리히는 여기서 주류적 흐름에 반하는 대항-연구와 지식운동을 전개해갔다. 일리히가 멕시코로 건너간 그 해에 존 F 케네디가 ‘진보를 위한 동맹’ 계획을 발표한다. 내용인즉, 미국이 22개 중남미국가와 경제협력관계를 체결하여 그들의 경제발전과 자유민주주의 정치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사회주의 확산을 두려워한 미국이 소수의 부유한 자를 위해 마련한 책략에 불과했고, 미국을 등에 업은 우익단체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럼에도 교회는 이를 묵인했을 뿐 아니라 미국의 보조를 맞춰 ‘평화봉사단’까지 창설했다. 심지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있는, 다시 말해 대량학살 도구를 가지고 있는 각국 정부를 아직은 규탄할 수 없다.”는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일리히 말대로, 교회는 “빈부격차가 더욱 심화되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합리적인 정치수단”이 되었고, 교황은 “현대의 개발 경제학이라는 전제 위에 복음주의적 문장을 처바르는 기회주의자”로 전락한 것이다. 일리히는 세속화된 교회권력에 대항하는 운동을 전개해갔다. 기존의 가톨릭 사회에서 일리히는 ‘이상하고 불성실하고 미덥지 못하며 국적을 알 수 없는 사람’ ‘호기심 많고, 교회를 곤혹스럽고 떠들썩하게 하는 눈엣가시’였다. 1967년, 교황청은 미국 정보부(CIA)의 보고서를 도용해 그를 소환하고 심문했고, 침묵으로 저항한 일리히는 결국 파문당했다. 이제 일리히는 신부로서의 공식 임무를 버리고, 새로운 배움과 실천의 길을 찾아 떠난다. ●구원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 일리히는 세미나를 조직해 공부하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으며, 푸에르토리코에서 품었던 질문을 정교화했다. 이를 바탕으로 1970년대에는 활발한 저술과 강연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그가 전하는 새로운 ‘복음’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네 편의 팸플릿, ‘학교 없는 사회’(1971) ‘성장을 멈춰라’(1973)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1974) ‘병원이 병을 만든다’(1976)는 건강, 죽음, 교통, 배움, 사랑과 같은 삶의 보편적 ‘가치’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좋은 삶을 위해 우선은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하며, 그 제도에 의존해서만 잘살 수 있으리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일리히의 눈에 제도는 ‘사람을 잡아먹는 우상’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사랑과 제도적 허위를 구분하지 못한 채 생의 모든 가치들을 서비스나 보호의 결과로 여기고 제도의 노예가 되었다. 일리히는 넘쳐나는 제도가 인간을 구원하기는커녕 불필요한 소비를 증대시키는 방식으로 인간의 삶을 소외시켰다고 판단했다. 그는 이런 상황을 ‘가치의 제도화’라고 정의했다. ‘제도적 인간’은 자신에게 내재된 잠재적 가치를 실현하는 대신 제도라는 외적 척도에 의해서만 가치가 실현된다고 믿는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전하는 복음은 잘 곳 없는 나그네들에게 기꺼이 잠자리를 내주고, 먹을 것이 없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전해주는 자발적 실천행위였다.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는 많은 제도가 필요치 않다. 우리는 최소한의 소유와 행위만으로도 복음을 실천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제도의 서비스를 구하지 말고, 스스로 자발적인 환대능력을 키워라! 일리히가 존경했던 12세기 수도사 성 빅토르 휴그의 말처럼, 구원은 나 자신과 “내가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오는” 것이지 제도로부터 오는 게 아니었다. 일리히는 교회 제도와 계몽에 의해 인간을 구원하려는 오랜 기독교 전통을 폐기하고, 꺼져가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불씨를 현재에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가 내 이웃인가 1980년대 이후에는 ‘그림자 노동’(1981), ‘젠더’(1982)에서 노동과 성의 문제 등을 다루며 연구를 확장시켰다. 일리히는 역사로 눈을 돌린다. 그에게 역사는 “현재를 바깥에서 바라볼 수 있는 아르키메데스의 기준점”에 이르는 특별한 길이었다. 과거는 오직 현재의 경험에서 출발할 때에만 대안이 될 수 있다. 일리히는 역사와 고전을 배움의 보고(寶庫)로 새롭게 인식했다. 부단히 자신을 돌아보는 배움의 과정 없이는 다른 삶이란 불가능하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지혜를 이끌어내고 그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배움의 여정에서, 모든 사람은 누구에게나 가르칠 수 있고, 누구에게든 배울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얻어맞아 쓰러져 있는 유대인을 구해주는 사마리아 사람, 유대인을 구해주는 팔레스타인 사람으로 행동하고 싶다.” ‘누가 내 이웃인가?’라는 어느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예를 들었다. 강도를 당해 반죽음이 된 유대인을 도와준 것은, 유대인들의 적이자 멸시의 대상인 사마리아인이었다.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법, 의무, 종교와 같은 제도와 무관한, 보편적 인류애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일리히는 예수의 답을 평생의 질문으로 간직했다. 누가 내 이웃인가? 끝없는 배움과 실천의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했던 자, 일리히는 또 하나의 예수였다. 최태람 남산 강학원 연구원
  • 최악 모면한 방콕 ‘사수작전’ 계속

    최악 모면한 방콕 ‘사수작전’ 계속

    60년 만의 최대 홍수로 대규모 범람 위기를 맞았던 태국의 수도 방콕이 일단 최대 고비는 넘긴 것으로 보인다. 침수 위기가 지속되고 있지만, 방콕을 가로질러 흐르는 짜오프라야강의 수위가 예상보다 낮아 최악의 사태는 모면했다고 방콕포스트, AFP·AP통신 등이 보도했다. 잉락 친나왓 태국 총리는 30일(현지시간) “비만 더 오지 않는다면 홍수 사태가 악화되지 않을 것”이라며 “방콕 북부의 아유타야주와 나콘사완주의 강물 수위가 낮아지는 등 상황이 호전되고 있어 방콕의 대규모 침수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밝혔다. 태국 정부는 그러나 여전히 침수 위기가 계속되는 만큼 장기간 침수 사태로 수질관리가 어려운 일부 지역에 대해 제한 급수를 실시하기로 했다. 이번 홍수 사태의 최대 고비로 여겨졌던 지난 29일 오후 짜오프라야강 수위가 홍수방지벽(2.5m)보다 낮아 방콕의 대규모 범람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앞서 태국 당국은 상류의 강물 유입 시기와 만조가 겹치는 이날 강 수위가 2.65m에 이르러 방콕 전역이 물에 잠길 것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방콕 차이나타운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시다팟 오사나라사미(32)는 “(지금 상황으로선) 그렇게 걱정하지 않는다.”면서 “방콕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내 가게의 경우 물이 조금 들어찼을 뿐”이라며 안도했다. 태국 철도청은 중부의 롭부리주와 아유타야주, 나콘사완주 등에서 강물 수위가 낮아짐에 따라 방콕과 북부 치앙마이 간 철도 운행을 한 달여 만에 재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방콕 외곽지역의 침수 피해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방콕 북쪽과 서쪽에 있는 최대 국내선 공항인 돈므앙과 사이 마이, 방플랏, 타위 와타나 구역에는 아직도 주민 대피령이 내려져 있다. 청과물 시장인 딸랏 타이와 짜오프라야강 서쪽 톤부리 구역도 침수됐다. 방콕의 상징인 왕궁도 밀물 때면 입구와 내부 일부가 발목 높이까지 물이 찼다가 빠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돈므앙 공항은 활주로 침수로 폐쇄됐고, 방콕 내 도로 곳곳의 교통도 마비됐다. 때문에 수재민 1만명 이상이 22개 구역 84곳에 마련된 임시 대피소에 피신해 있으며, 방콕 수도 당국은 논타부리주와 사뭇 쁘라깐주의 일부, 방콕 톤부리 구역 등에 오전 6∼9시, 오후 5∼8시에 한해 제한 급수를 실시하고 있다. 태국 정부는 방콕 상류에 대규모 강물이 몰려 있는 점을 감안, 군병력 5만명을 추가 투입하는 등 ‘방콕 사수’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태국에서는 3개월 이상 계속된 홍수 사태로 381명이 숨졌다. 이번 홍수 사태는 자동차 산업과 컴퓨터 산업에도 직격탄을 날렸다. 각종 제조공장이 몰려 있는 아유타야주와 빠툼타니주 등에서 침수로 문을 닫거나 조업을 중단한 제조공장이 1만여개에 이르며 66만여명의 노동자가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됐다. 특히 이곳의 7개 공단이 물에 잠기면서 주요 부품을 조달해온 도요타와 혼다, 닛산, 마쓰다 등 일본 자동차 업체들에 비상이 걸렸다. 태국 자동차 업계는 공장들이 12월까지 정상화되더라도 올해 자동차 생산량이 목표치(180만대)에 17% 정도 못 미칠 것으로 전망했다. 세계 컴퓨터 업계에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 생산량의 4분의1을 담당해온 태국의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 생산공장들이 물에 잠기면서 HDD 공급량이 30%가량 줄어 가격 폭등이 예상된다. 한국 교민과 현지 진출 기업들의 피해도 가시화되고 있다. 30일 코트라 방콕무역관에 따르면 아유타야주의 침수된 공단에 있는 사출, 전자부품 등 제조업체 10여곳이 피해를 본 것으로 알려졌으나 구체적인 피해 규모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조선왕실의궤 반환 주역 환수위 사무처장 혜문 스님

    [김문이 만난사람] 조선왕실의궤 반환 주역 환수위 사무처장 혜문 스님

    ‘집 나간 부처가 돌아왔다’를 사자성어로 하면 뭘까. ‘환지본처’(還至本處)라는 말이 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중생들은 이승에서 본래의 자리가 어딘지 몰라 우왕좌왕 헤맨다고 한다. ‘금강경’에 그 뜻을 풀이해놨다. 2010년 8월 10일 간 나오토 총리가 ‘한일강제병합 100년’과 관련된 담화를 통해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의 뜻을 밝히고 그에 따른 조치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일본이 통치하던 기간에 조선총독부를 경유해 반출돼 일본 정부가 보관하고 있는 조선왕실의궤 등 한반도에서 유래한 귀중한 도서에 대해 한국민의 기대에 부응, 이른 시일에 인도하겠다.” 이는 2006년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가 출범한 이후 4년간 지속적인 반환운동을 전개하고 한·일 국회의원과 시민단체가 협력해 이루어 낸 한·일관계의 중대한 일이었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사무처장 혜문 스님이 있었다. 일본 최고 두뇌 집단이라고 하는 도쿄대를 끈질기게 상대해 ‘조선왕조실록’을 찾아오고, 일본 권력의 중심인 일본 왕궁에 직접 들어가 조선왕실의궤를 목격한 뒤 반환의 결정적 역할을 했으니 말이다. 혜문 스님은 이 밖에도 도쿄 시내 오구라호텔에 있는 고려시대 문화재 ‘평양율리사지 오층석탑’ 환수 등 북한까지 포함시켜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문제로 그 영역을 확대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혜문 스님은 ‘문화재 제자리 찾기’와 ‘오류 바로잡기’ 운동가로 분주히 활동하고 있다. 몇 가지 흥미로운 예가 있다. 슈베르트의 가곡 ‘숭어’는 잘못된 번역이다. 하여 당국에 정정 신청을 내 ‘송어’라고 교과서에 고쳐놨다. 국보146호 청동방울은 당초 강원도에서 출토된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혜문 스님은 추적 끝에 강원도가 아닌 충남 논산으로 올바르게 돌려놨다. 안동 도산서원에 심어진 금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기념식수한 것으로 돼 있으나 사실은 안동군수가 심었다는 것도 그가 새롭게 밝혀낸 일이다. 도산서원 준공 당시 박 전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가서 금송을 심었는데 겨울이라 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에 겁을 먹은 안동군수가 몰래 금송을 사다가 심었다는 것. 또 있다. 명성황후가 생전에 쓰던 표범가죽 양탄자의 행방을 찾아내 눈길을 끌었다. 지금까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관돼 있던 조선시대 기생 명월이의 생식기 표본과 백백교 교주 머리의 보존 중지 운동에도 앞장섰다. 그렇다면 스님이 이런 일을 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있는 ‘문화재 제자리 찾기’ 사무실에서 스님을 만나 그 까닭을 먼저 물었더니 ‘환지본처’라고 짤막하게 대답한다. 다시 “그래도 꾸준히 그런 일을 벌이기가 쉽지 않을텐 데요.”라고 했다. “누가 그러더군요. 교수나 공무원이 독립운동하는 것 봤냐고 말입니다.”라며 크게 웃는다. 그렇다면 문화재 환수를 위해 그동안 일본에만 40여 차례 오갔는데 경비는 어떻게 조달하느냐고 했다. “다 부처님 것이죠.”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에구, ‘도 닦은 스님’에게 괜히 물어봤나 보다. 이렇게 그의 말은 빨랐고 거침이 없었다. 호탕하게 웃는 것도 그랬다. 조선왕실의궤 환수운동은 어떻게 벌이게 됐을까. “2003년 저희 은사 스님인 철안 스님께서 경기도 봉선사 주지로 부임하셨습니다. 철안 스님은 불교문화재에 관심이 많으셔서 봉선사의 관할 사찰 중 27개의 전통사찰에 대한 문화재 현황 파악을 저에게 맡기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6·25 전쟁 등을 거치면서 멸실된 문화재의 현황이 그대로 드러나게 됐지요. 예를 들어 현등사 사리구는 삼성미술관 리움이, ‘조선왕조실록’은 도쿄대가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파악됐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불법적인 유통경로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고 이에 따라 흩어진 문화재를 제자리로 되돌리려는 ‘제자리 찾기’ 운동이 시작됐습니다.” 이렇게 탄력을 받은 혜문 스님은 ‘한·일협정 문서공개’와의 연관성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일본으로부터 1432점의 문화재를 돌려받고 문화재 청구권을 포기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특히 한·일협정 문서는 일부만 공개됐다가 2004년 완전 공개되는 과정에서 과연 1432점의 반환 문화재가 어떤 것들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세세하게 살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짚신, 막도장, 우체부 모자 등 문화재적 가치가 의심되는 것들을 보고 졸속 협상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됐다. “때마침 그 무렵 일본에 공부하러 갔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 일본에 있는 것을 알게 됐지요. 신물(神物)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문득 느꼈습니다. 일왕 궁내청에서, 1922년 진상품으로 건너와 일본인의 소유가 되어 버린 ‘조선의궤-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를 봤을 땐 더욱 그랬습니다. 원래의 소장처를 나타내는 ‘오대산’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더군요. 색을 화려하게 배합해 그려진 갖가지 그림은 1895년 일본인에게 죽임을 당한 뒤 무려 2년 2개월에 걸쳐 치러진 생생하고도 슬픈 ‘국장의 기록’들이었습니다.” ‘보인소의궤’란 책이 눈에 들어왔을 때도 그랬단다. 고종 13년(1876), 경복궁 교태전(交泰殿)에서 발생한 화재로 조선의 옥새가 소실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고종은 무위소(武衛所)라는 관청에 옥새와 인장을 새로 제조하도록 명령, 각종 보인 11과(科=개)가 제조돼 고종에게 헌상됐다. 이때의 제작과정을 낱낱이 기록한 종합보고서가 바로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로 이는 옥새 제작에 관한 유일한 자료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한민국 국새’ 제작도 ‘보인소의궤’에 근거해서 제작된다고 한다. 스님은 또 1897년 10월 13일 대한제국의 탄생과 관련된 중요한 의궤인 ‘대례의궤’란 책을 봤을 때도 ‘신물의 부름’으로 울컥했다고 말했다. “명성황후의 죽음은 한·일 간 피로 피를 씻었던 사건의 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항일의병,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 등 반일운동이 탄생하는 역사적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제가 살고 있는 봉선사와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이 가까이 있다는 것도 신물의 부름이 아니겠습니까. 명성황후를 죽인 칼 ‘히젠도’를 후쿠오카에서 봤을 때는 ‘아 이것이 조선의 심장을 찌른 칼이구나’ 하는 생각에 피가 거꾸로 쏟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명성황후를 죽이고 국부검사를 자행한 기록 ‘에이조 보고서’를 입수했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는 현재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 가운데 고종의 갑옷과 투구 반환에 가장 역점을 두고 있다. 조선시대 대대로 내려오던 임금의 투구가 일본에 있다는 것은 여전히 볼모로 잡혀 있다는 것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군대가 싸울 때 적에게 깃발을 빼앗긴 것과 같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고 스님은 여러번 강조한다. “조선시대 군사권력의 최고 상징인 투구, 정치권력의 최고 상징인 임금의 관모 익선관(翼善冠·높이 19㎝)이 도쿄국립박물관에 아직까지 인질처럼 보관돼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세요.” 스님이 던지는 말문마다 조목조목 비장함이 서려 있다. “우리나라는 2000년도까지 친일 논쟁만 했습니다. 누가 친일을 했느니 안 했느니 말입니다. 일본에서 들은 얘기지만 2000년 이후에야 직접 도쿄에 와서 ‘우리 문화재 내놓으라’고 일본 외무성을 압박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일본 당국은 그런 사람들을 예의 주시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반일감정을 부추기는 장본인이거든요. 사실 우리가 직접적으로 문화재 환수 문제를 제기한 것은 너무 늦었습니다. 스스로 자기반성을 해야 합니다. 앞으로 북·일 수교 때 대대적인 문화재 반환을 약속받아야 하는 것도 지금부터 바짝 신경을 써야 합니다. 일본은행에 있는 징용 노무자 공탁금 4조원이나 사할린 강제징용 문제 등도 말입니다.” 그에게 앞으로 남은 숙제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자 “50가지 오류를 바로잡아야 하는데 지금까지 10가지밖에 못 했다.”며 웃는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환구단의 조경과 석등이 일본식으로 돼 있는 것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도 중국 갑옷과 일본도를 차고 있어 문제가 된다고 지적했다. 조선왕실의궤도 원소장처인 오대산 제자리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터뷰를 마칠 무렵 “백백교 교주의 머리가 오늘 화장을 하는데 염불하러 가야 한다.”며 바삐 자리를 떴다. 김문 편집위원 km@seoul.co.kr ●혜문 스님은 1998년 대한불교 조계종 25교구 본사 봉선사에 철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001년 부산 해운정사 금모선원에서 진제 스님을 모시고 수선안거를 한 이래 봉선사에서 정진하고 있다. 2004년 일본 교토 유학 중 ‘조선왕조실록’이 도쿄대에 소장돼 있음을 확인한 후 ‘조선왕조실록환수위’를 구성, 반환운동에 앞장섰다. 2006년 9월 ‘조선왕실의궤환수위’를 조직해 4년에 걸친 운동을 전개, 일본 정부로부터 1205점의 문화재를 반환받게 했다. 그 외에도 6·25 전쟁 당시 미군 병사가 약탈했던 ‘표범카펫’의 행방에 문제를 제기, 60년 동안 박물관수장고에 있던 것을 찾아냈으며 보스턴미술관 소장 라마탑형 사리구 반환운동 등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과 조선왕실의궤환수위 사무처장 등을 맡고 있다.
  • “외계인 납치사건” 과학적으로 실험해보니…

    1960년대 미국 전역을 뒤흔든 뉴햄프셔 외계인 납치사건이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닌 주민들이 잠재의식으로 경험했던 일일 가능성이 높다고 미국 과학자들이 최근 주장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UCLA)의 마이클 러두가 교수가 이끈 연구팀은 “외계인과의 조우라는 비현실적인 체험은 단기간의 수면연습만으로도 충분히 꿈속에서 경험할 수 있다.”면서 과학적인 실험으로 이 현상을 증명해냈다고 27일(현지시간) 밝혔다. 연구팀의 수면연습은 유체이탈과 관련이 깊었다. 연구팀은 실험에 참가한 20명을 반은 깨있고 반은 자고 있는 상태를 만들어 외계인과의 만남을 상상하는 연습을 시켰다. 나흘에 걸친 실험에서 참가한 20명 가운데 무려 7명이나 꿈속에서 외계인과의 만남을 체험했다. 꿈에서 외계인을 만났다는 7명의 참가자들은 꿈속 일들이 매우 생생했으며, 신비로운 기분을 느꼈다고 입을 모았다. 크레이그라는 참가자는 “실험 나흘째 되는 날 오전 10시 40분부터 약 40분 동안 낮잠을 잤고 유체이탈을 경험했다. 꿈속에서 어떤 산 근처에서 우주선을 봤고 헬멧을 쓴 외계인 2명과 그들이 데리고 있는 2.1m의 은색 로봇도 함께 봤다. 매우 친근한 느낌이었다.”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이 실험을 통해 인간이 잠재의식 훈련만으로 얼마든지 외계인과 꿈속 조우를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낸 것이라고 의미를 풀이했다. 러두가 교수는 “이 실험은 우리가 체험해 본 적이 없는 지구 밖 경험들이 거의 우리 뇌에서 생산된다는 걸 의미한다.”면서 “외계인 목격담은 실제로 외계인을 만나는 경험을 했다는 게 아니라 연구가 거의되지 않은 분야에 대해 무심결에 잠재의식으로 경험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 인류에 최초 포착된 ‘초신성’ 비밀 풀렸다

    인류에 최초 포착된 ‘초신성’ 비밀 풀렸다

    2000년 전 인류가 최초로 목격했다는 기록이 내려오는 초신성의 비밀이 최근 밝혀졌다. 미국항공우주국(NASA)는 스피처 우주망원경과 광역적외선 탐사망원경을 이용해 인류가 최초로 목격한 것으로 전해지는 초신성의 잔해를 관찰했다고 24일(현지시간) 발표했다. 서기 185년 중국 천문학자들은 밤하늘에서 달처럼 반짝이는 별의 신기한 장면이 목격됐다는 내용을 실으면서 이 별을 ‘손님별’이라고 기록해 둔 바 있다. 1960년 대 천문학계는 분석을 통해 ‘손님별’이 8000광년 밖에서 폭발한 항성이란 사실을 밝혀낸 바 있다. 초신성은 항성진화의 마지막 단계에 이른 별이 폭발하면서 생긴 엄청난 에너지를 순간적으로 방출하는 것으로, 그 밝기가 평소의 수억 배에 이르렀다가 서서히 낮아지는 현상이다. 문제는 RCW 86이라는 초신성 잔해의 간격이 과학자들의 예상보다 규모가 컸다는 점. 과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의 이유를 찾아내지 못해 오랫동안 미스터리로 남겨뒀다. 이번 연구를 이끈 노스캐롤라이나대학 브라이언 윌리엄스 교수는 “초신성 잔해들이 예상보다 2~3배 정도 크게 분포했다”면서 “그 이유가 백색왜성의 일종인 초신성이 폭발할 때 주변에 빈 공간을 형성해 훨씬 더 빠르게 분포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혀냈다. 즉 초신성이 우주공간인 공동(空洞)에서 폭발해 다른 물질들의 방해를 받지 않아 더 빨리 퍼져나갈 수 있었다는 것. 연구진은 “백색왜성이 주변에 공동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냈다.”고 천체물리학 저널 최신호에서 밝혔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 “젊은 여자만?” ‘롤링스톤즈’ 론 우드 39세 연하와 열애

    영국의 전설적인 록그룹 ‘롤링 스톤스’의 기타리스트 론 우드(64)가 유독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여성들과 끊이지 않는 열애로 또 다른 ‘전설’을 만들게 생겼다. 영국 대중지 더 선에 따르면 우드가 지난 20일(현지시간) 주얼리샵 점원 니콜라 살젠트(25)와 다정하게 런던 거리를 거닐며 공개적으로 데이트를 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무려 39세 나이 차이를 극복한 우드와 살젠트 커플은 주위를 의식하지 않으며 열애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특히 이날 우드는 멋스러운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검은색 재킷을 입어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세련된 패션 감각을 자랑했다. 측근들은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서 사랑에 빠지게 됐으며, 살젠트가 우드와의 연애에 한껏 들떠있다.”고 전했다. 최근 살젠트는 우드가 사는 런던으로 이사를 온 것으로 전해졌다. 우드는 최근 몇 년 새 엄청난 나이차이의 여성들과 사랑에 빠졌다. 불과 지난주까지는 브라질 패션모델 안나 아라우조(29)와의 2년째 데이트를 즐겼다. 그 전에는 칵테일바에서 일하는 21세 예카테리나 이바노바와 연인이 됐다. 우드는 이바노바와의 연애 때문에 무려 23년이나 함께 살았던 부인 조(54)와 이혼을 했으며, 이 과정에서 간통혐의로 650만 파운드(한화 약 130억원)의 위자료를 지불해야 한다는 판결을 받은 바 있었다. 우드와 이바노바는 41세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남다른 패션 감각을 자랑하면서 영국연예계의 화제의 중심에 섰다. 하지만 지난해 초 우드가 이바노바를 폭행해 파경을 맞았다. 이바노바는 우드와의 열애를 계기로 연예계에 진출해 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한편 1962년 영국 런던에서 결성된 롤링스톤스는 1960년대말과 1970년대 초에 비틀스에 필적할 만큼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우드는 1972년 밴드에 합류했다. 다른 고전적 록밴드들이 해체수순을 밟은 데 비해 롤링스톤스는 20세기 말까지 연주를 계속했다. 1989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의 공연자(performers)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 존레논 ‘어금니’ 경매 나와…얼만데?

    존레논 ‘어금니’ 경매 나와…얼만데?

    호랑이가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이 죽으면 이름을 남기지만, 비틀즈의 존 레논은 이름 외에 치아를 남긴 것 같다. 바로 존 레논의 치아가 다음 달 5일 영국 스톡포트에서 열리는 한 경매에 출품된다고. 18일(현지시간) 영국 BBC 등 외신 보도를 따르면 이 치아는 경매 시작가 1만 파운드(약 1800만원)로 출품되며, 존 레논의 전 가정부로 일한 도트 자렛트라는 여성이 소장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이 치아는 1960년대 존 레논이 거주한 서리 주의 캔우드 맨션에서 일한 도트 자렛트가 비틀즈의 열성팬이었던 친딸 선물로 존 레논으로부터 직접 선물받은 것이라고 한다. 도트의 아들 배리 자렛트는 “존이 주방에서 종이에 싼 치아를 모친에게 버려달라고 준 뒤, 만약 딸이 비틀즈의 팬이라면 그녀에게 선물로 주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우리는 이 치아가 아주 개인적인 기념품이라고 생각했다.”면서 “나와 여동생은 모친에게서 받은 치아를 금고 안에 보관해 왔다.”고 덧붙였다. 배리 자렛트의 말을 따르면 이전 경매에서도 비틀즈 앨범 ‘러버 소울’로 활동할 당시 존 레논이 입은 재킷을 출품했으며, 이번에는 이 치아가 진짜 임을 증명하는 인증서도 첨부했다. 경매 주최인 오메가 옥션의 한 관계자는 “존 레논의 치아가 지금껏 출품된 경매품 중 가장 이상하지만 훌륭한 상품”이라면서 “매우 독특해서 어느 정도의 가격을 붙여야 좋을지 판단이 어려웠다.”고 전했다. 사진=오메가 옥션 페이스북 윤태희기자 th20022@seoul.co.kr
  • 떠도는 우주쓰레기 7만~8만개 매주 한개꼴로 지구 대기권으로

    독일 뢴트겐 위성의 추락에 따른 인명피해 가능성이 제기되자 전 세계적으로 수명을 다한 인공위성에 대한 불안이 커지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 위성 잔해로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없다. 인공위성은 추진력에 의한 원심력과 지구의 중력이 평형을 이룰 경우 떨어지지 않고 일정 궤도를 돌 수 있다. 그러나 남은 연료가 부족하거나 통제가 불가능하게 되면 대기와의 마찰과 저항이 커져 조금씩 추락한다. 고도가 낮아지는 것이다. 일부 위성 보유국들은 이 과정에서 우주쓰레기를 만들지 않기 위해 위성을 지구로 추락시켜 바다에 가라앉히거나 대기권 마찰을 통해 불태우고 있다. 현재 7만~8만개의 우주 쓰레기들이 지구 위를 떠돈다. 인공위성은 추락하면서 대기권에 진입할 때 매우 높은 온도까지 달궈진다. 총알보다 20배나 빠른 속도로 대기권을 통과하면서 엄청난 마찰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고도 74~83㎞에서 인공위성이나 우주 쓰레기는 부서지기 시작한다. 연료나 고압가스가 폭발할 수도 있다. 대부분의 파편도 다시 불타 대기 중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타지 않은 파편은 낙하 속도가 서서히 줄면서 지구로 돌진한다. 커다란 위성 파편은 레이더 등으로 탐지가 가능하다. 문제는 작은 파편들은 어디에 떨어질지 예측하기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파편의 운동속도는 무려 초속 7㎞에 이른다. 예측했던 낙하 시점이 실제와 10초 차이만 나도 예상 지점에서 70㎞나 빗나간 곳에 떨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다만 위성이 추락하기 한두 시간 전 고도가 110~120㎞로 낮아지면 적어도 어느 지역이 안전한지 정도는 예측이 가능하다. 작은 파편이라도 큰 위협물이다. 속도 탓에 엄청난 파괴력을 갖는 것이다. 잔해의 지름이 1㎝만 돼도 시속 100㎞의 속도로 200㎏의 물체가 부딪히는 충격을 가하게 된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아직까지 수명이 끝난 인공위성의 추락을 막고 지구로 안전하게 귀환시키는 기술은 없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3~4년 내 개발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항공우주 전문가들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미국과 소련이 경쟁적으로 우주 개척에 나서면서 대형 인공위성을 많이 쏘아 올렸기 때문에, 이들의 수명이 다하는 2010년대에 추락하는 인공위성의 수가 급증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현재 우주잔해는 한 주에 한 번꼴로 지구 대기권에 들어오고 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파주 三善…평화·역사·예술을 한번에 즐기는 가을 근교 여행지

    파주 三善…평화·역사·예술을 한번에 즐기는 가을 근교 여행지

    때로는 사람이 몰리지 않는 호젓한 북쪽으로 발길을 돌릴 일입니다. 단풍 행락객들로 도로가 몸살을 앓는 가을엔 더욱 그렇습니다. 경기도 파주는 은근히 흥미로운 도시입니다. 최전방 도시로 인식되지만, 그곳에 전쟁의 기억만 있는 건 아닙니다. 율곡 이이의 고향 마을이 있고, 예쁜 현대 건축물들이 늘어선 언덕, 헤이리도 있지요. 평화와 상생의 공간이 된 임진각 평화누리도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오가며 기러기 등 철새들의 군무까지 덤으로 즐길 수 있으니 이만하면 가을 근교 여행지로 제격이지 싶습니다. 전쟁 상흔 지운 임진각 평화누리 예전 임진각은 무거운 분위기가 짓누르던 곳이었다. 굳은 표정의 초병이 지키던 ‘자유의 다리’와 남북을 가르는 철조망 등에선 늘 긴장이 흘렀다. 하지만 새 단장한 임진각 평화누리는 평화롭다. 그리고 밝다. 주말엔 장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번다하다. 임진각 평화누리는 분단과 냉전시대의 상징이었던 임진각을 화해와 상생, 평화와 통일의 상징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조성된 복합문화공간이다. 대형 야외공연장 ‘음악의 언덕’과 수상카페 ‘카페안녕’, 3000여개의 바람개비가 있는 ‘바람의 언덕’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말이면 다양한 문화행사도 열린다. 주차장에서 시민들의 메시지를 새겨 넣은 조각 작품을 지나면 연못 한가운데에 찻집 ‘카페안녕’과 만난다. 코르텐이란 녹슨 철강 마감재로 외벽을 마감한 모습이 마치 100년도 넘게 서 있었던 느낌을 준다. 연못을 건너면 바람의 언덕이다. 남북을 자유롭게 오가는 자연을 이야기하는 공간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언덕에선 3000여개의 바람개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바람의 언덕 옆으로는 인상적인 대나무 작품 네 점이 서있다. ‘통일부르기’란 이름의 조형물로, 점점 키가 자라는 모습에서 점점 다가오는 통일의 그날이 연상된다. 임진각은 옛 콘크리트 건물을 철거하고 현대적인 건축물로 새로 태어났다. 한국 근현대사의 현장이었던 곳이 하릴없이 스러져 간 것에 아쉬움도 남는다. 전망대와 식당, 커피숍, 기념품점 등이 들어서 여행자의 편의를 돕고 있다. 임진각 앞에는 전쟁의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자유의 다리’는 1953년 6·25 전쟁 포로 교환을 위해 설치됐다고 전해진다. 당시 포로들은 차량을 이용해 경의선 철교(임진각 철교)까지 온 뒤, 자유의 다리를 걸어서 건넜다. 자유의 다리 끝은 굳게 닫힌 철문이다. 그곳부터 민간인통제구역이다. 철문엔 통일을 염원하는 메모 리본과 깃발이 빼곡하게 매달려 있다. 자유의 다리 초입엔 경의선 증기기관차가 전시돼 있다. 6·25 전쟁 당시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던 기차다. 녹슨 기관차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총알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1950년 12월 말 평양으로 가던 기차는 파주 장단역 어름에서 심한 공격을 받았고, 파괴된 채 반세기 넘도록 비무장지대에 방치되다가 2009년 이곳으로 옮겨졌다. (031)953-4854. 360살 느티나무 그늘아래 율곡 유적지 파주는 조선시대 대표적 경세가 중 한 명인 율곡 이이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외가인 강원도 강릉이지만, 본가가 있던 곳은 파주였다. 자신의 호 또한 파평면 율곡리 지명을 따 지었다고 전해진다. 6세 때인 1541년 처음 파주 땅을 밟은 이후, 그는 주로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던 시기에 파주를 찾았다. 그만큼 그의 숨결이 머문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곳이 법원읍 동문리 율곡 유적지다. 자운서원과 율곡의 가족묘, 율곡기념관 등이 한곳에 모여있다. 율곡 유적지에 들면 가을 무르익은 너른 공간이 방문객을 맞는다. 단풍 든 느티나무 아래 너른 풀밭은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와 휴식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여느 유적지들과 달리 풀밭에 들어가도 잔소리하는 관리인이 없어 좋다. 자운서원은 1615년 율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 유림들에 의해 창건됐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소실됐다가 1970년 복원됐다. 서원의 규모는 크지 않은 편. 하지만 오래된 나무들이 뿜어내는 묵은 향기는 건물의 크기를 뛰어 넘고도 남는다. 특히 강인당 양 옆에 버티고 선 느티나무의 위세는 대단하다. 360년을 살아온 나무의 밑둥치는 어른 서너 명이 팔을 둘러야 맞닿을 정도다. 자운서원 옆은 가족묘다. 율곡의 묘, 어머니 신사임당과 아버지 이원수의 합장묘 등 13기가 조성돼 있다. 아울러 율곡 신도비와 자운서원 묘정비 등 여러 문화재도 주변에 함께 들어서 있다. 입장료는 어른 1000원, 어린이 500원. (031)958-1749. 율곡이 시상을 즐겼다는 화석정도 둘러 보는 게 좋겠다. 율곡 유적지에서 9㎞ 정도 떨어져 있다. 화석정에 오르면 임진강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건물 정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썼다는 ‘花石亭’ 현판이 걸려 있고, 안쪽엔 율곡이 8세 때 처음 지었다는 시 ‘팔세부시’(八歲賦時)가 걸려있다. 화석정 주변의 밤나무는 2005년 파주시에서 일본산 리기다 소나무를 베고 새로 심은 것들이다. 당시 파주시는 율곡의 탄생설화에 맞춰 999그루의 밤나무와 한 그루의 나도밤나무를 식재했었다. 예술이 흐르는 문화공간 헤이리 임진각 평화누리, 율곡 유적지 등 옛것을 두루 살피고 자유로 주변으로 나오면 현대식 건물과 조형물들이 어우러진 헤이리와 만난다. 구불구불 미로 같은 길을 따라 갤러리와 카페, 공방, 서점, 레스토랑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곳이다. 헤이리는 미술, 음악, 문학, 건축, 문화비즈니스맨 등 380여 명의 예술인들이 1998년 탄현면 50만㎡(15만여 평) 부지에 자연과 사람, 문화예술과 생활이 어우러지는 마을을 만들자는 취지로 건설하기 시작한 마을이다. 문화가 창작되고, 동시에 향유되는 공간이다. 정부 지원 없이 민간인들의 힘으로 시작했고, 지금도 건설 중이다. 마을 규정에 따라 집의 60%는 문화공간이다. 건물 또한 높이 12m를 넘는 건 없다. 담도 없고, 인위적 재질의 페인트를 칠한 건물도 없다. 집이 곧 미술관이고 카페고 공연장이다. 또 마을 전체의 75% 이상은 자연 그대로 둬야 한다. 오래된 굴참나무를 베지 않기 위해 외벽에 12개 구멍을 낸 갤러리가 있고, 마을 가운데 작은 시냇물을 보존하기 위해 다리를 5개나 만든 것도 그런 까닭이다. 다만 문화와 예술을 향유하는 대가로 지갑을 열 각오는 하고 가야 한다. 글 사진 파주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31) ▲가는 길 파주로 가는 길은 다양하다. 승용차는 자유로를 기준 삼는 게 편하다. 임진각 평화누리는 자유로 끝자락에 있다. 율곡 유적지는 당동 나들목을 이용한다. 헤이리는 성동 나들목에서 지척이다. 서울역~임진각을 오가는 경의선을 이용해도 된다. ▲맛집 적성면 두지리의 원조두지리매운탕은 민물고기 매운탕을 잘한다. 959-4508. DMZ 해마루촌(www.haemaru.org)에서는 장단콩으로 만든 각종 음식들을 맛볼 수 있다. 민통선 안에 있기 때문에 반드시 예약해야 한다.
  • [씨줄날줄] 나눔 급식/구본영 논설위원

    얼마 전 춘천의 남이섬을 찾았을 때 얘기다. 섬 안의 한 식당에서 발견한 ‘옛날 도시락’이란 메뉴가 퍽 반가웠다. 낯익은 알루미늄 용기엔 계란 프라이를 덮은 밥이 담겨 있었다. 도시락에 김치 국물을 쏟아부어 흔들어 먹던 학창시절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초등학교를 시골에서 다녔던 필자가 잊지 못하는 삽화가 있다. 점심 시간 도시락을 못 싸와 교정 우물가에서 우두망찰 서 있던 친구의 실루엣이다. 담임 선생님이 그와 자신의 도시락을 나눠 먹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1960년대 말이나 1970년대 초까지였을 법한 이른바 ‘보릿고개의 끝자락’을 힘겹게 넘었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기억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촉발된 무상급식 논란이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전에서도 ‘전면 무상급식 실시’ 대 ‘선별적 무상급식의 단계적 확대’라는 구도가 평행선이다. 내년 총선이나 대선까지 이어진다면 ‘비생산적 논쟁’의 극치가 되지 않을까. 예산 지출의 우선순위나 각자의 가치관에 따른 모범답안은 있을지언정 정답이 결코 있을 수 없는 쟁점이다. 미국·영국·일본 같은 경제대국들조차 여전히 부분적 무상급식만 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인구가 적지만 부유한 강소국인 스웨덴·핀란드 등 몇몇 북유럽국들은 전면 무상급식을 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음식의 질 저하나 예산 확보의 어려움 등 무상급식의 허점을 메울 대안으로 ‘나눔 급식’ 제도를 들고 나왔다. 상대적으로 형편이 나은 학부모는 물론 일반인과 단체의 기부금을 받아 각급 학교 급식의 질을 높이는 데 사용하겠다는 취지다. 그러기 위해 올 정기국회에서 이런 내용을 담은 학교급식법과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 등을 우선 처리할 방침이라고 한다. 무상급식을 둘러싼 평행선 대치를 우회해 초·중·고 학생들에게 주어질 실질적인 혜택을 확대하려는 발상이라면 반기지 않을 이유는 없겠다. 그러지 않아도 세계 13위의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는 기부문화 측면에선 아직 불모지나 다름없다. 영국의 자선구호재단(CAF)이 조사한 지난해 세계 기부지수 평가에서 81위에 불과했다. 학창시절 우물물을 길어올리기 위해선 한 바가지의 물을 먼저 펌프에 부어야 함을 깨달았다. 이른바 ‘나눔 급식’이 단지 질 높은 학교급식을 확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에 기부를 촉진하는 마중물이 되었으면 더 좋지 않을까.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 “50년전 굶겨죽인 학생2명 암매장”

    “50년전 굶겨죽인 학생2명 암매장”

    광주인화학교대책위는 “1960년대 인화학교가 지체장애인 등을 굶겨 숨지게 한 뒤 암매장했다.”고 17일 주장했다. 대책위는 이날 광주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당시 근무했던 교사와 학생 등의 증언을 공개하고, 인화학교 법인의 공식 사과와 해체를 촉구했다. 당시 교사로 재직했던 김모(72)씨는 “1964년 당시 인화학교에는 바보 같은 학생 2명이 있었고 학교 측은 이 학생들에게 밥을 조금만 주고 창고 같은 곳에 가둬 뒀다.”며 “이 학생들은 배가 고파 벽지를 뜯어 먹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학교 측이 1964년 10월 7살짜리 남자 아이를 굶겨 숨지게 했고, 이듬해인 1965년 4월에도 이 학교 여자 보육사가 굶주려 탈진한 상태의 6살 여자 아이를 안고 있다가 떨어뜨리는 바람에 숨졌다.”고 말했다. 김씨는 “학생들이 숨지자 가마니 등으로 싸서 나와 교감, 또 다른 교사 1인이 인근 무등산 자락으로 옮겨 암매장했다.”며 “50여년 전 이들 사건에 대해 경찰에 신고했지만, 시신이 없다는 이유로 무시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학교에 근무했던 선생님들도 함께 목격했고 이분들은 현재 나주의 한 복지시설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인화학교 측은 “당시 근무한 교사들도 모두 학교를 떠나서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김씨 외에도 많은 졸업생이 나와 수십 년 동안 있었던 인권 유린을 폭로했다. 인화학교 졸업생인 광주농아인협회 강복원 회장은 “1975년 당시 대학생이었던 인화학교 이사장의 셋째 아들이 재학 중인 청각장애 여학생 2명의 옷을 벗기고 누드화를 그렸다.”며 “그 셋째 아들은 현재 광주의 한 일반학교에서 미술교사로 버젓이 근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경찰청 인화학교 성폭력 특별수사팀은 이번에 증언한 김씨와 당시 교사 등을 상대로 사실 여부를 조사하기로 했다. 또 당시 광주경찰서(현재 광주 동부경찰서)에 이 사건이 접수됐는지를 가리기 위해 관련 수사기록을 찾기로 했다. 경찰 관계자는 “공소시효(당시 15년)가 지난 만큼 사실 관계를 확인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광주광역시 인화학교 교장으로 재직했던 경기 하남시 성광학교 이모(여) 교장이 이사회의 사퇴 권고를 받아들여 17일 자진사퇴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21일까지 휴가를 떠난 것으로 밝혀져 파장이 예상된다. 성광학교 학교법인 교산학원은 이 교장의 인화학교 교장 재직 당시의 처신이 논란이 되자 지난 15일 이사회를 열어 권고사직 결정을 내렸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사설] 정작 5000원짜리는 보훈처의 인식 아닌가

    국가보훈처가 6·25전쟁 전사자의 보상금을 5000원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큰오빠가 전쟁터에서 전사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2008년 12월 전사자 보상금을 신청한 김모씨에게 보훈처가 지난해 4월 통보한 금액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값이 60년이 지난 현재 5000원이라니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다. 전사한 유족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인지 한심할 따름이다. 국민권익위원회 소속 중앙행정심판위원회가 보훈처에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보상기준을 마련하라고 권고했지만, 이번 일에 대한 보훈처의 무책임하고 꽉 막힌 처리과정을 보면 정작 5000원짜리는 보훈처의 인식이 아닌가 싶다. 보훈처는 처음에는 보상금 청구기간이 지났다며 보상금 지급 자체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후 법원 판결로 보상금을 지급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국방부와 1년 가까이 책임 떠넘기기 식의 ‘핑퐁행정’을 했다니 정부 당국자들의 국가관이 의심스러울 뿐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영웅 대접해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홀대하다니 누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치겠는가. 과거 군인사망급여 규정에 따르면 김씨 큰오빠에 대한 보상금은 5만환이었고, 이 금액을 지금의 ‘원’으로 환산하면 5000원이기 때문에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는 보훈처의 설명은 유족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다. 공직자란 법이 형평성에 맞지 않으면 당연히 고쳐서 공정하게 집행해야 한다. 그것이 공직자 윤리관이다. 목숨을 던져 나라를 구한 값이 점심 한끼 값도 안 된다니 이처럼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6·25 전사자에 대한 ‘5000원 결정’은 김씨 이외도 2건이 더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이전에 얼마나 더 이런 황당한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전사자를 이처럼 홀대하는 나라는 없다. 하루빨리 법을 뜯어고쳐 합당하게 예우해야 한다. 앞서 김씨 같은 경우가 없었는지 정부가 앞장서 찾아내야 한다.
  • “히틀러, 아르헨으로 탈출해 73세까지 살았다”

    “히틀러, 아르헨으로 탈출해 73세까지 살았다”

    나치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한 것이 아닌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73세까지 살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저널리스트이자 역사가인 영국의 제라드 윌리엄스와 사이몬 던스턴은 최근 ‘그레이 울프: 히틀러의 탈출’(Grey Wolf: The Escape of Adolf)이라는 책을 통해 “히틀러와 애인 에바 브라운이 자살로 위장하고 아르헨티나로 탈출해 73세인 1962년까지 살았으며 두딸을 뒀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알려진 히틀러의 최후는 1945년 4월 30일 베를린 지하벙커에서 히틀러는 권총으로, 그의 연인 브라운은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윌리암스는 인터뷰에서 “2차대전 말 히틀러와 브라운이 아르헨티나로 탈출했다는 수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다.” 며 “미국 정보당국이 나치에 의해 개발된 군사기술 제공에 대한 보답으로 히틀러의 탈출을 도왔다.”고 말했다. 또한 “히틀러의 두개골이라고 알려진 그 해골은 40세 이하 러시아 여성의 것” 이라며 “히틀러가 도망쳤다는 증거들이 너무나 많이 무시됐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주류 역사학자인 가이 월터스는 “이책의 주장은 2000% 쓰레기”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월터스는 “히틀러가 1960년대 남미에서 살았다는 주장은 음모론에 기반을 둔 쓰레기 조합”이라고 밝혔다.     서울신문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기고] 글로벌 공생발전의 길/김성태 한국정보화진흥원장

    [기고] 글로벌 공생발전의 길/김성태 한국정보화진흥원장

    지금은 학교나 학원 등에서 원어민에게 영어를 배울 기회가 많지만, 필자가 중학교에 다니던 1960년대만 하더라도 보통의 사람들이 원어민에게 직접 영어를 배우기는 어려웠다. 필자는 운이 좋게도 중학교 시절 1년 동안 미국의 ‘평화봉사단’(Peace Corps)을 통해 원어민 영어 학습을 받았다. 영어 학습은 물론 바깥세상 이야기를 듣고 받은 문화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돌이켜 생각하면, 이러한 경험이 세상을 사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6·25 전후 피폐한 상황에서 선진국의 도움을 받았던 대한민국은 2009년 11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에 24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함으로써 원조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바뀐 세계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국제적 위상에 걸맞게 재난구호, 물자지원, 초청연수, 전문인력 파견, 봉사단 파견 등 다양한 형태의 공적개발원조(ODA)를 시행함으로써 국가 차원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에 앞장서고 있다. 특히 미국의 평화봉사단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지난해부터 여러 봉사단을 통합하여 ‘WFK’(World Friends Korea)라는 이름으로 한 해에 4000여명의 봉사단을 파견하여 수혜국에 다양한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 마침 오는 11월 29일부터 4일간 부산에서 ‘세계개발원조총회’(Fourth High Level Forum on Aid Effectiveness: HLF-4)가 아시아 최초로 개최된다. 이를 계기로 ODA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최근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이 발표한 세계 152개국의 정보통신기술 발전지수에서 우리나라가 세계 1위를 차지한 사실에서도 드러나듯이, 세계가 인정하는 정보화 강국의 이점을 살려 정보기술(IT) ODA에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한다. 대한민국 IT 봉사단은 행정안전부와 한국정보화진흥원의 지원 아래 지난 2001년부터 10년간 약 3500여명이 파견되어 다각적인 방법으로 IT ODA를 시행하고 있다. 올해에도 대학생, 교수, IT분야 전문가로 구성된 대한민국 IT 봉사단원 612명이 22개 개발도상국에서 IT 교육은 물론 한국문화도 전수함으로써 개도국에 IT 발전의 씨앗을 뿌리고 국가 이미지를 높이는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주로 대학생들로 구성된 봉사단은 하루 5시간씩의 교육을 준비하고자 밤을 새워 교안을 작성하고 효과적인 강의방법을 고민하기도 한다. 봉사단의 열정에 현지 담당자들은 감탄하며, 자국의 젊은이들도 배워야 할 덕목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흔히 우리는 글로벌 무한경쟁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을 하곤 한다. 이 말은 마치 국제관계가 정글의 법칙만이 지배하는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국제사회를 보면 인간애를 바탕으로 한 공존과 공생발전을 추구하는 나라들이 존경을 받고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도 더 커진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도 국제사회에서 한층 강화된 위상에 걸맞은 역할을 다해야 한다. 최첨단의 IT 기술이 적용되는 스마트 사회가 도래함에 따라 IT ODA의 확대는 개도국 발전의 핵심적인 원동력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IT ODA는 바로 글로벌 공생의 길이며, IT 홍익인간의 이상을 구현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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