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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여수세계박람회] 환상의 ‘빅오’쇼… 화려한 개막

    여수세계박람회가 11일 전야제를 시작으로 오는 8월 12일까지 93일간의 대항해에 나섰다. 여수세계박람회 조직위원회는 이날 오후 7시 이명박 대통령과 곤살레스 로세르탈레스 세계박람회기구(BIE) 사무총장 등 국내외 주요 인사 2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야제를 겸한 개막식 행사를 했다. 강동석 여수세계박람회조직위원장은 환영사를 통해 “바다의 소중함과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줄 전시관, 신 나는 문화 예술 공연 등 160년 역사상 가장 빛나는 박람회를 구현하기 위해 준비했다.”고 밝혔다. 이명박 대통령은 엑스포 개막식 이후 공식만찬에서 “남해안은 환경 자체가 아름답고 국내에도 알려지지 않은 곳이 많다.”면서 “엑스포를 계기로 남해안 일대가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관광 명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개막식은 1시간 50분 동안 해양 무대인 ‘이어도’에서 여수엑스포의 주제인 ‘살아 있는 바다, 숨 쉬는 연안’을 형상화한 대규모 해상 공연과 퍼포먼스로 시작됐다. 개막식의 최대 하이라이트는 빅오(Big-O)쇼였다. 워터스크린 디오를 활용한 빅오쇼는 세계 최초로 홀로그램 영상을 물 위에 투사한 레이저쇼와 해상분수쇼, 불꽃쇼가 함께 어우러져 이번 박람회 최고의 볼거리였다. 여수엑스포는 전 세계 104개 국가가 참가하는 세계 3대 축제 중 하나다. 모두 2조 1000억원이 투입된 행사장은 국내 최대 아쿠아리움과 원형 해상 무대 빅오, 스카이타워, 엑스포 디지털 갤러리 등 4개의 특화 시설과 주제관, 한국관 등 76개 주요 전시관으로 구성됐다. 여수 최종필기자 choijp@seoul.co.kr
  • [2012 여수세계박람회] 스마트폰으로 ‘전시관 사전예약’ 잊지 마세요

    [2012 여수세계박람회] 스마트폰으로 ‘전시관 사전예약’ 잊지 마세요

    딱 1년 만이다. 지난해 5월 전남 여수시 신항지구의 맞은편 산 중턱에서 내려다본 엑스포행사장은 철골 구조물 가설과 엑스포역사 건설로 분주한 가운데 흙먼지만 날렸다. 김근수 여수엑스포 조직위 사무총창의 “바다와 연안을 아우르는 세계 첫 엑스포로 엑스포타운과 공원 등을 합하면 174만㎡의 방대한 규모”라는 설명에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정식 개막을 하루 앞둔 10일 엑스포 행사장은 ‘상전벽해’를 실감케 했다. 용산역에서 출발한 KTX열차가 3시간 30분만에 다다른 엑스포역사는 바다 내음을 머금은 밤바람을 날려 보내며 일행을 맞았다. 섬 전체가 식물원인 오동도, 섬과 잇닿은 대형 수변 전시장들은 25층 높이의 호텔과 어울려 풍만한 야경을 연출했다. 맞은편 산 중턱에선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완공한 1442가구 규모의 엑스포타운(행사요원 숙소)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1960년대 이후 전국 각지의 부두 노동자가 몰려와 일하던 여수 신항이 탈바꿈에 성공한 것이다. 11일 밤 화려한 개막 축하행사를 갖고 93일간의 대장정에 들어간 여수엑스포가 나들이철을 맞은 행락객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 ‘여수 밤바다~, 이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란 그룹 버스커버스커의 노래 ‘여수의 밤바다’처럼 이미 네티즌 사이에서 여수는 꼭 찾아야 할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다. 여수행을 결심했다면 입장권 예매가 우선이다. 기업은행이나 이마트에서 구매하거나 엑스포 홈페이지(www.expo2012.kr), 인터파크(interpark.com)에서 예매가 가능하다. 성인 기준 3만 3000원짜리 입장권 한 장이면 모든 전시관 관람이 가능하다. 한국관과 국제관, 주제관 등 10여개 전시관에서 100여개 참가국의 다양한 전시 콘텐츠를 접할 수 있다. 교통편은 다양하다. 오전 KTX열차를 타고 내려와 밤 9시 50분 막차를 타고 서울역으로 올라가는 당일 코스가 연인, 가족에게 가장 추천할 만하다. 편도 운행시간은 3시간 30분 안팎. 엑스포역사가 엑스포장과 잇닿아 있어 접근성도 좋다. 서울~여수 항공편은 1일 8회가량 운항하며 소요시간은 55분가량이다. 서울에서 버스와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각각 5시간과 3시간 50분이 걸린다. 여수시의 숙박시설은 비용(1박 6만~14만원) 대비 시설이 만족스럽지 않은 상황이다. 여수~전주~익산, 보성~고흥~여수, 하동~광양~여수 등 인근 지역과 연계한 가족나들이를 추천할 만하다. 하동에서 시작해 광양을 거쳐 여수에 닿는 코스는 그윽한 봄의 정취와 문학의 향기, 신나는 서커스를 즐길 수 있다. 숙박은 엑스포 홈페이지나 전화(1566-3630, 1899-2012)를 통해 예약이 가능하다. 박람회장 내에는 한식·중식·일식·분식 등 다양한 식당이 즐비하다. 음식점마다 대표 메뉴 2~3개씩을 갖추고 시중보다 1000원 이상 싼 4500~8000원에 식사를 제공한다. 관람 전 전시관 예약제를 활용하면 오래 시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아직 시스템이 안착되지 않았지만 조직위는 엑스포기간 8개 전시관에서 스마트폰앱 등을 활용한 사전예약 시스템을 예정대로 운용할 계획이다. 여수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돌고래의 바다 귀환, 그들 선택에 맡겨야”

    “돌고래의 바다 귀환, 그들 선택에 맡겨야”

    “돌고래들이 바다로 돌아갈지 아니면 바다 인근 훈련장에 남을지 역시 그들이 선택할 몫입니다.” 오랫동안 사육장에서 생활한 돌고래를 방사하는 것이 오히려 돌고래의 생존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 세계적인 돌고래 보호활동가 릭 오베리(73)는 1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반대의견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지난 8일 동물보호단체인 동물자유연대 초청으로 입국했다. ●40여년간 전시용 돌고래 30여마리 바다로 보내 오베리는 1960년대 미국 마이애미 해양수족관의 조련사로서 당시 인기 TV드라마인 ‘플리퍼’에 등장한 돌고래 5마리를 포함해 수많은 돌고래를 직접 포획하고 조련해 큰 명성을 얻었다. 세계 최초로 전시용으로 포획돼 길러진 범고래 ‘휴고’ 역시 그의 손을 거쳤다. 조련사에서 돌고래 보호 활동가로 나서게 된 계기는 ‘플리퍼’에 출연한 돌고래 ‘캐시’의 죽음 때문이다. 오베리는 캐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믿고 있다. “돌고래는 물 위로 올라와서 숨을 쉬어야 하는데 그날 내게로 헤엄쳐오더니 뭔가 결심한 듯 끝내 숨을 쉬려고 올라오지 않았고 내 품에서 숨을 거뒀죠.” 1970년 4월 22일 돌고래 쇼 등 전시산업에 반대하는 ‘돌핀 프로젝트’라는 단체를 출범시켰다. 40여 년간 미국, 브라질, 바하마 등 전 세계에서 30여 마리의 전시용 돌고래를 바다로 돌려보냈다. 일본 연안과 솔로몬 제도 등에서 벌어지는 고래잡이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했다. 오베리의 활동은 2009년 다큐멘터리 영화 ‘더 코브’로 제작돼 다큐 부문에서 아카데미상을 타는 등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왔다. 오베리는 불법 포획된 뒤 과천 서울대공원에서 돌고래쇼를 해온 제돌이를 다시 야생에 방사하기로 한 서울시의 결정을 “영웅적인 결단”이라고 치켜세웠다. “바다로 돌아가기 전 야생적응 훈련장에서 햇볕도 쬐고 바다의 물결도 느끼면서 치료를 받는다면 크게 걱정할 것이 없다.”고 했다. 오베리는 “만약 그들이 남기를 원한다면 인간이 먹이를 공급하면서 돌고래들이 삶을 마감할 때까지 보살필 의무가 있다.”고 지적했다. ●“제주에 제돌이 방사훈련장 몇 군데 있어” 지난 10일 제주도에 내려가 제돌이의 야생 방사지로 거론되는 제주시 북동쪽 해안을 둘러본 릭 오베리는 “제돌이가 살 만한 좋은 방사훈련장을 몇 군데 발견했다.”면서 “제돌이가 성공적으로 바다로 돌아가게 되면 서울시가 동물과 생명을 존중한다는 메시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베리는 이날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돌고래 자연방사에 대한 감사패를 증정했다. 신진호기자 sayho@seoul.co.kr
  • [부고] ‘헤어스타일 개척자’ 비달 사순 하늘로

    축구선수를 꿈꾸던 11살배기 영국 소년은 “아들을 미용사로 만들어야 한다는 계시를 받았다.”는 어머니에 이끌려 미용실로 향했다. 미용실 주인은 예의 바랐던 소년을 견습생으로 고용했다. 누구도 이 소년이 죽을 때 이름을 남길 거장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했다. ‘헤어 스타일 개척자’ 비달 사순이 9일(현지시간) 숙환으로 숨졌다. 84세. 케빈 메이버거 미국 로스앤젤레스 경찰 대변인은 이날 대표적 부촌인 벨에어의 저택에서 사순이 숨진 채 발견됐다고 밝혔다. 타살 및 자살 흔적은 없었다. 사순은 백혈병 투병 중이었다. 사순은 헤어 드레싱 분야의 선구자였다. 현대적이면서도 손질하게 쉬운 헤어 스타일 ‘사순 커트’를 유행시켜 ‘여성을 해방시켰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유럽과 미국, 일본, 한국 등 세계 각국에 ‘비달 사순 헤어살롱’을 냈으며 자신의 이름을 건 샴푸 등 헤어용품 제작자로도 유명하다. 사순 커트는 C, V자 형태의 커트와 대칭적이고 기하학적인 스타일이 특징이다. 올림머리를 하거나 곱슬 파마 머리가 보편적이던 1950~60년대에는 혁명적 스타일이었다. 사순이 창안한 헤어스타일은 멋진 데다 헤어 드라이기나 스프레이 없이 관리하기 쉬워 여성의 외모뿐 아니라 생활과 사고방식에도 큰 변화를 불러왔다는 평가다. 여성이 직업을 가지면서 머리 손질에 많은 시간을 보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머리를 감고 바로 외출할 수 있는 스타일을 창조해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영국에서 1928년 태어난 사순은 유대계 아버지가 가출한 뒤 7년간 고아원에서 생활하다 11살때 재혼한 어머니와 재회했다. 1948년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 군에 입대해 참전했고 나중에 유대인 탄압을 연구하는 비달 사순 국제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네 번 결혼한 사순은 로스앤젤레스에서 네 번째 부인 론다와 전처 소생인 자녀 3명과 살았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김정은 ‘혁명혈통’ 아니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의 외할아버지 고경택은 일제시대 김정은의 할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을 뒤쫓는 일본군에 군복을 납품하던 제조공장에서 일한 인물이라고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가 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텔레그래프는 ‘북한 지도자 김정은의 반역자 외할아버지’라는 제목의 인터넷판 기사에서 “제주도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간 고경택은 오사카에 있는 일본군 군복 제조공장에서 일했는데 그 군대는 당시 항일 게릴라 활동을 하던 김일성을 토벌하는 곳이었다.”면서 “일본의 인권운동가 가토 겐이 일본 내 군 문서 보관소와 의회 도서관 등에 있는 자료에서 이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텔레그래프는 이어 “일본 점령군에 협조한 전력은 북한에서 반역 행위로 간주돼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 수용소에 투옥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고경택은 1960년대 북한에 돌아간 뒤 김정일이 아낀 그의 딸(고영희) 덕분에 그런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며 “그러나 외할아버지의 전력은 김정은의 위상을 북한사회 밑바닥인 ‘적대계층’으로 떨어뜨릴 만하다.”고 전했다. 자유아시아방송(RFA)도 이날 “김정은의 외할아버지가 1930년대에 일했던 오사카 공장이 일본군 군수업체임이 확인됐다.”면서 “이는 김정은이 ‘혁명의 혈통’이 아니라 ‘적대계층’ 출신이라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가토 겐은 RFA 인터뷰에서 “당시 비밀문서로 분류된 2차 세계대전 관련 기록의 일부인 육군관리공장의 목록을 확인한 결과 고경택이 일했던 히로타봉공장(廣田縫工場)이 1930년대 말 일본군에 천막과 군복을 납품하는 군수공장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10년만에 돌아온 ‘맨 인 블랙 3’ 좋거나 나쁘거나

    10년만에 돌아온 ‘맨 인 블랙 3’ 좋거나 나쁘거나

    1997년 ‘맨 인 블랙’은 5억 8939만 달러(약 6671억원)를, 2002년 ‘맨 인 블랙 2’는 4억 4181만 달러(약 5001억원)를 쓸어담았다. 두 편을 합쳐 11억 3120만 달러(약 1조 2805억원)의 흥행. 제작비(2억 3000만 달러)의 5배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꼭 10년 만에 그들이 뭉쳤다. 외계인을 관리하는 비밀기관 ‘MIB’(Men In Black)의 두 정예요원 윌 스미스(요원 제이)와 토미 리 존스(요원 케이)는 물론 스티븐 스필버그(제작), 베리 소넨필드(감독), 보 웰치(미술감독)까지. 게다가 3D다. 팬들의 기대치가 한껏 높아진 건 당연한 일. 이야기는 2002년 속편 당시 스미스가 “제이가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의 케이를 만난다.”고 말한 데서 비롯했다. 달 교도소에 40여년을 갇혀 있던 흉악범 짐승 보리스가 탈옥한다. 어느 날 케이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외계인 함대의 침공이 시작된다. 사라진 파트너를 찾고 지구를 구하기 위해 제이는 1969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24일 개봉하는 ‘맨 인 블랙3’의 장단점을 분석해 봤다. [UP] 생생한 3D·아직 식지않은 콤비플레이… 10년 만에 돌아온 ‘맨 인 블랙 3’(이하 ‘MIB 3’)는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검은색 안경과 정장을 차려입은 MIB 요원 제이(윌 스미스)와 케이(토미 리 존스)는 액션과 유머의 호흡이 척척 맞는 콤비 플레이로 향수를 자극했고, 3D로 커진 스케일과 화려한 스펙터클은 한층 진화된 시리즈의 모습을 선보였다. 40년 전의 위험한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MIB 3’의 가장 큰 특징은 과거와 미래가 공존한다는 점. 24시간 안에 우주의 비밀을 풀고 현재로 돌아와야 하는 MIB 사상 최고의 미션에 도전한 이야기가 짜임새 있게 펼쳐진다. 파괴력만 점점 세지는 기존의 블록버스터와 달리 ‘MIB 3’는 1969년의 복고와 최첨단의 2012년을 유기적으로 오가면서 아기자기한 구성과 SF 액션의 균형을 잘 잡아 나간다. 이번 시리즈의 특징인 3D 효과도 잘 살려 냈다. 제이가 77층 건물에서 뛰어내려 시간 여행을 떠나는 장면이나 외계인의 다이내믹한 공격 등을 어색하지 않게 생생한 3D로 잘 살려 냈다. 다수의 아카데미상 수상 경력을 지닌 할리우드 최강 드림팀이 뒷받침된 결과다. 공간감을 부각시킨 카메라 앵글은 3D 효과로 입체감이 두드러진다. 상상력의 대가 스티븐 스필버그가 총감독을 맡은 만큼 SF 블록버스터로서 볼거리도 풍부하다. 특히 외계인 전문 디자이너 릭 베이커가 만들어 낸 127종의 외계인이 대거 등장해 눈길을 끈다. 그는 1960년대 공상과학영화에서 영감을 얻어 애벌래 외계인, 물고기 외계인 등 1969년에 있었을 법한 복고적이면서 친숙한 외계인들을 창조해 냈다. 특히 1960대 문화 아이콘 앤디 워홀을 카메오로 등장시킨 부분도 재미있다. 3인의 주연 배우들의 시너지 효과도 극의 완성도를 더한다. 윌 스미스는 코믹하면서도 재치 있는 연기로 변함없는 유쾌함을 선사하고 토미 리 존스의 안정감 있는 연기는 영화의 중심을 잡는다. 특히 젊은 시절의 케이 역을 맡은 조시 브롤린은 토미 리 존스의 외모와 의상까지 완벽하게 재현해 이번 시리즈의 활력소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단, 외계인으로 깜짝 등장하는 레이디 가가는 그냥 지나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DOWN] 밋밋해진 액션·참신하지 않은 외계인… 지지부진해진 블록버스터 시리즈를 되살리는 할리우드의 특효약은 한동안 ‘프리퀄’(1편 이전의 이야기를 다룬 속편)이었다. ‘프리퀄 심폐소생술’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는 배트맨이다. 팀 버튼 감독이 연출한 1·2편과 달리 조엘 슈마허가 맡은 3·4편에서 배트맨 시리즈는 망가졌다. 8년 만에 시리즈를 재개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억만장자 브루스 웨인이 왜 배트맨이 됐는지를 다룬 ‘배트맨 비긴즈’(2005)로 3억 7271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10년 만에 ‘맨 인 블랙’ 시리즈를 부활시킨 소넨필드 감독의 전략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만사에 시니컬한 요원 케이(토미 리 존스)의 과거는 어떤지, 능글능글한 젊은 요원 제이(윌 스미스)와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40년 전으로 시곗바늘을 돌려놓는다. 대신 시리즈의 인기 비결인 스미스와 존스, 두 배우의 구도는 고스란히 가져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친근하면서도 다르게’ 보이고자 한 소넨필드의 콘셉트는 ‘리부트(reboot) 전략’으론 지나치게 안전지향적이다. 젊은 시절의 요원 케이(조시 브롤린)와 과거로 돌아간 제이가 외계인 악당과 펼치는 액션의 긴장감은 1·2편에 비해 떨어진다. 시리즈 사상 최고 악당이라는 보리스의 기대에 못 미치는 전투력도 한몫을 한다. 도시 하나쯤은 쑥대밭으로 만드는 최근 블록버스터 규모에 익숙한 관객에겐 심심할 듯싶다. (‘투캅스’를 비롯한 수많은 영화에서 반복된) 베테랑과 젊은 요원의 티격태격에서 비롯된 코미디 코드도 힘을 잃었다. 스미스의 개인기는 여전하지만, 그도 어느덧 44살이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큰 웃음을 터뜨리던 존스의 젊은 시절을 맡은 브롤린은 외모는 닮았지만 존재감은 역부족이다. 외계인 전문 디자이너 릭 베이커와 미술감독 보 웰치의 솜씨는 여전하지만 10년 동안 관객들은 다른 할리우드 영화에서 너무 많은 외계인을 만났다. 3편에 등장하는 127종의 외계인이 더는 참신하지 않다. 향수만 자극할 게 아니라 진짜 ‘리부팅 전략’이 필요한 때다. 임일영·이은주기자 argus@seoul.co.kr
  • [K-코믹스 신한류 이끈다] ③ 1970~80년대 만화를 말하다

    [K-코믹스 신한류 이끈다] ③ 1970~80년대 만화를 말하다

    1970년대 우리 만화는 혹독한 시련의 터널을 지나야만 했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검열과 ‘신촌 대통령’ 합동문화사의 독점, 유해물로 치부하는 사회적 인식등이 만화의 건전한 발전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혹한 속에서도 봄을 부르는 싹은 움을 틔우고 있었다. 주간지와 신문 연재 등 새로운 돌파구의 기반이 마련됐고, 어린이가 아닌 어른을 위한 만화문화가 본격적으로 태동하고 있었다. 결국 1980년대 들어 어린이·성인·순정 만화 잡지들이 봇물을 이루며 한국만화는 바야흐로 ‘르네상스’를 맞게 된다. “1970년대에도 검열이 심했다. 부분수정, 전면수정, 폐기만 있었는데 무사통과는 거의 없었다. 작가들은 만화를 잘 그리는 것보다 검열을 피하는 방법을 연구하기에 바빴다. 합동문화사 체제도 작가들을 옥죄었다. 인기 작가가 마음에 안 들면 이름이 비슷한 작가를 만들어 엇비슷한 작품을 그리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창작 분량을 강제로 할당하기도 했다. 출판사가 만들어 낸 유령 작가의 작품을 대신 그려야 하는 괴상한 착취 구조도 있었다.”(김형배) ●만화에 가해진 군사정권의 분서갱유 사회적으로 만화가 푸대접을 받는 상황은 1970년대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린이·청소년 문제가 생길 때마다 만화는 항상 일등으로 몰매를 맞았다. 해마다 어린이날이면 남산이나 동대문운동장에서 불량만화를 모아 태우는 행사가 열렸다. 만화계에서 특히 잊을 수 없는 사건은 1972년 1월 말 일어난 ‘불량만화 파동’이었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 6학년생이 사고로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군사정권과 언론은 “어린이가 만화에서 본 내용을 흉내내다 숨졌다.”며 엉뚱한 곳에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특별단속이 시작됐고 경찰은 곳곳의 만화방을 급습해 수만권의 만화책을 폐기처분했다. 그해 10월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을 선포했다. “교육계 전반이 만화에 적의(敵意)를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혀 검증되지 않았음에도 모든 문제가 만화에서 비롯된다는 시각이 팽배했다. 하지만 현재 30~40대인 내 올드팬 가운데 어렸을 때 만화를 읽어서 잘못됐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김형배) ●새로운 만화의 통로, 잡지 1960년대 만화방 중심의 문화는 1970년대 들어 큰 변화를 맞는다. 바로 만화잡지의 확산이었다. 이 시기 어린이 잡지에 실린 만화들은 이전과 달리 호흡이 길어졌다. 1960년대 중후반에 창간된 ‘새소년’, ‘어깨동무’, ‘소년중앙’ 등이 그 중심이었다. 컬러 지면을 도입하고 만화 분량을 대폭 늘린 것이다. 특히 어깨동무는 1972년 사상 처음 별책부록으로 ‘도깨비 감투’(신문수)를 끼워줬다. 본지에 연재하던 만화가 7쪽 안팎이었지만 도깨비 감투는 60쪽이나 됐다. 어린이 잡지의 약진은 서점용 단행본 만화문고 등장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게 새소년을 발행하던 어문각의 ‘클로버 문고’다. 1972년부터 약 12년 동안 429권이 나오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이 가운데 389권이 만화였다. ●한국만화의 어두운 과거, 표절 클로버 문고는 다른 한편으로, 일본만화 표절이라는 부끄러운 과거를 갖고 있다. 문고의 첫 작품인 ‘유리의 성’(정영숙)과 최고 히트작인 ‘바벨 2세’(김동명) 등 상당수가 일본작품을 베낀 것이었다. 사실 일본만화 표절은 그 역사가 오래됐다. 1952년 한국전쟁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밀림의 왕자’(서봉재)를 첫 표절 사례로 본다. 1951년 나왔던 일본 작품 ‘소년 케냐’를 그대로 옮긴 작품이다. 이후에도 일본만화 표절 및 복제 작품이 인기를 끄는 사례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바벨 2세의 인기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바벨 3세’를 그려야 했던 김형배 화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본만화 표절 문제에서 기성 작가 대부분이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사회가 만화를 창작품이 아닌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등 만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결과다. 출판업자들은 돈벌이에 급급해 작가들에게 베끼기를 강요했고, 작가들은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해야 했다. 만화가와 우리 사회 모두 피해자다.” ●1970년대의 수확, 성인만화 잡지 문화의 발달은 성인만화 시대를 열어젖혔다. 1968년 성인 주간지 ‘선데이서울’과 1970년 국내 첫 스포츠신문 ‘일간스포츠’가 창간됐다. 1970년대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이 매체들은 성인만화 시대를 연 쌍두마차다. 일간스포츠의 경우 1972년 ‘임꺽정’, ‘수호지’ 등 고우영의 극화를 싣기 시작하며 그해 2만부에 불과했던 발행부수가 1975년 30만부로 늘어났다. 선데이서울은 1974년 박수동의 ‘고인돌’을 게재하며 성인만화 인기에 불을 댕겼다. 선데이서울의 성공으로 각종 주간지가 나오게 되는데 강철수가 ‘주간여성’에 ‘청춘의 낙서’를 연재하며 성인만화 붐을 거들었다. 신문이나 잡지도 심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지만 어린이 만화나 만화방용 만화보다는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누릴 수 있어 성인만화의 활성화에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후 성인만화들도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과정에서는 대대적으로 수정, 삭제 조치를 당해야 했다. ●한국만화 르네상스의 상징, 보물섬 1982년 10월 기념비적인 일이 일어났다. 어린이 만화 월간지 ‘보물섬’이 창간된 것이다. 오로지 만화만 실린,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만화 잡지였다. 상업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뒀다. 이현세, 허영만, 김수정 등 수많은 인기 작가들이 작품을 연재했다. 그런데 보물섬을 발간한 곳이 육영재단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육영재단은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가 설립했다. 보물섬이 창간되던 해 박근혜(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만화에 암흑기를 드리운 대통령의 딸이 우리 만화 르네상스의 이정표를 세웠다는 점은 아이러니한 대목이다. 이후 1985년 ‘만화광장’, 1987년 ‘주간만화’, 1988년 ‘만화세계’와 ‘매주만화’가 나오는 등 1980년대 중반 이후 성인만화 잡지가 잇따라 창간되며 만화의 전성시대가 열린다. 하지만 영세한 졸속 저질 만화 잡지가 양산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1988년 ‘아이큐 점프’, 1991년 ‘소년 챔프’ 등 일본식 체계를 그대로 이식한 잡지가 잇따르며 우리 만화잡지는 다시 변화를 맞게 된다. 1970년대에 어린이 잡지의 강세에 힘입어 명랑만화가 도드라졌다면, 1980년대에는 장르를 불문하고 장편극화가 큰 흐름을 형성한다. 순정만화도 다시 도약기를 맞는다. 김동화, 한승원, 황미나 등이 먼저 지평을 넓혔다. 이어 장편 서사 멜로물을 앞세운 김혜린, 강경옥, 김진, 신일숙 등이 걸작들을 대거 선보였다. 특히 1988년 11월 순정만화 월간지 ‘르네상스’가 창간되며 순정만화의 꽃은 활짝 만개한다. “1980년대 들어 만화가가 데뷔하고 작품을 발표할 매체가 훨씬 다양해지며 우리 만화가 정점을 이뤘다. 어린이 잡지와 스포츠 신문 등이 큰 역할을 했다.”(김형배)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이 기사는 김형배(65) 화백 인터뷰를 바탕으로 최열 ‘한국 만화의 역사’, 손상익 ‘한국만화통사㈛’, 박기준 ‘박기준의 한국만화야사’, 박인하·김낙호 ‘한국현대만화사’를 참고해 재구성했습니다.
  • [씨줄날줄] 섬마을 선생님/임태순 논설위원

    섬은 바다를 통해 온 세상과 연결되는 열린 공간이지만 또 바다로 인해 닫혀 있는 폐쇄된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개방, 발전의 이미지보다는 낙후, 정체의 이미지가 더 크게 다가온다. 경제개발이 막 시작되던 1960년대 섬 색시들에게 총각 선생님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특히 총각 선생님이 서울에서 왔을 때에는 더욱 그랬다. 서울은 번영의 상징이자 동경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인텔리이자 사회적 지위가 대단한 선생님과 결혼하는 것은 가난의 탈출구이자 행복의 징검다리였다. 산업화 시대 섬 색시의 도시를 향한 열망과 좌절을 노래한 것이 원로가수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이다. 섬마을 선생님이 다시 세인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1972년이었다. 목포에서 뱃길로 네 시간이나 떨어진 전남 신안군 사치분교 농구단이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잇따라 도시 아이들을 격파하고 준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섬개구리 만세’의 신화를 일군 사람들은 부부 교사로, 이들은 생나무와 사과 궤짝으로 농구대를 만들고 농구공을 처음 만져 보는 아이들과 구슬땀을 흘려 기적을 일구어 냈다. 부부 교사의 희생과 헌신에 많은 국민들이 박수를 보내고 감동을 받았다. 교육과학기술부와 교직원공제조합이 올해 처음으로 제정한 제1회 대한민국 스승상 대상 수상자에 섬마을 선생님이 선정됐다. 전남 진도군 조도고 조연주 교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편부모, 조손가정 학생들을 위해 사비를 들여 저녁 급식을 제공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동아리, 독서, 봉사활동 등 자기주도학습을 할 수 있도록 지도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덕분에 진도에서 뱃길로 한 시간 들어가는 조도에서 처음으로 서울대 합격생을 배출하기도 했다. 세계 바둑 1인자 이세돌 프로기사는 목포에서 배를 타고 두 시간 가야 하는 전남 신안군 비금도 출신이다. 그에게 섬마을 선생님은 아버지였다. 교편을 잡다 농사를 짓던 아버지는 바둑에 대한 아들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를 바둑의 길로 이끌었다. 물론 그는 서울로 바둑 유학을 와 대성했지만 아버지의 교육자적 안목, 혜안이 아니었으면 평범한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오늘날 섬은 인구가 줄면서 더욱 외로워지고 고독해지고 있다. 사치분교만 해도 전교생이 78명이었지만 조도고는 28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선생님의 열정과 애정, 희생이 있으면 교육 사각지대의 섬 학생들도 빛을 볼 수 있다. 조연주 교사와 같은 섬마을 선생님이 많으면 우리는 진흙 속에서 더 많은 진주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Nell… 서른셋의 네 남자, 연애하듯 엮은 10樂

    Nell… 서른셋의 네 남자, 연애하듯 엮은 10樂

    모던록 그룹의 대표 주자 그룹 ‘넬’이 돌아왔다. 2008년 멤버들의 군입대로 4년간 공백기를 가진 넬이 5집 정규앨범 슬립 어웨이(Slip Away)를 들고 나왔다. 앨범 작업 과정에서 100여곡을 만든 넬은 좋은 곡을 추려 20곡을 녹음했다. 그리고 곡의 조화와 색깔의 균형을 잡아 가며 곡을 다시 추렸다. 그렇게 해서 10곡의 엑기스 같은 노래가 이번 앨범에 실렸다. 그만큼 공을 들였다는 이야기다. 촉촉한 감성을 가진 넬의 네 멤버, 1980년생 동갑내기 친구 김종완(보컬), 이재경(기타리스트), 정재원(드럼), 이정훈(베이스)을 지난 2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스스로 ‘송파 키즈’라 부르는 넬 멤버들은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인근에서 어릴 적부터 살아온 친구들이다. 동네 친구이자 오륜중학교 동창으로 만난 이들은 1998년 수능시험을 치른 뒤 이듬해 20살 때부터 밴드를 구성, 13년째 함께 음악을 해오고 있다. 오랜 친구 사이라 그런지 음악도 자연스럽고 편하다. 김종완은 “곡 작업은 연애와 비슷하다. 연애할 때 난 꼭 이런 사람을 만나야지 하면서 만나지 않듯 앨범 작업도 꼭 이런 곡만 넣어야지 하면서도 진행되진 않는다. 자연스럽게 ‘아 이 곡이 들어가야 하는구나. 33살의 넬이 남기고 싶은 노래는 이런 거구나’ 하면서 10곡의 노래를 앨범에 담을 수 있었다.”고 했다. 20살 때 인디 밴드 활동을 하면서 내놓은 1집 앨범과 33살의 넬이 내놓은 음악의 차이는 어떨까. 이재경은 “정말 많이 다르다.”고 했다. 김종완도 “20살 때에는 하면 안 되는 것들을 많이 꿈꿨다. 33살이 된 지금도 그 점은 똑같다. 조금 달라진 건 다른 사람들에겐 무의미할지 모르지만 곡 후반 작업에서 사람들이 별 관심을 두지 않을 소리에 수천만원의 스튜디오 비용을 투자했다. 우리가 원하는 소리를 잡고 싶은 열망이 커졌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들은 이번 앨범에 과감하게 투자했다. 세계적인 가수들이 작업한 곳으로 알려진 미국 뉴욕의 아바타 스튜디오에서 녹음했으며 마스터링은 스노 패트롤, 레드 제플린, 뉴오더 등 최고의 아티스트와 작업했던 존 데이비스와 함께 런던 메트로 폴리스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며 완성도를 높였다. 이재경은 “소리에 특히 신경을 많이 썼다.”면서 “1950년대 악기를 일부러 찾아서 당시의 악기들이 지닌 특유의 깊은 소리를 내려고 했고 우리가 원하는 소리를 내려고 1960년대 독일산 진공관을 구해 기존과 전혀 다른 소리를 담을 수 있었다.”고 했다. 해외 아티스트들은 진공관을 이용해 소리를 내는 경우가 많지만 국내에서는 드물다는 게 넬 멤버들의 설명이다. 이재경은 “남들이 보면 미쳤다고 할 것”이라면서 “인터넷을 뒤져서 진공관 수집가를 찾았다. 돈도 꽤 들었다.”고 말했다. 김종완은 앨범의 마지막 트랙곡인 슬립 어웨이에 얽힌 이별 얘기를 털어놨다. 그는 “8분의 7박자 노래인데 불안정한 느낌이에요. 굉장히 오랜 시간 만났던 여자 친구였는데 곡을 다 쓰고 들려줬거든요. 그 곡을 들려주고 석 달 뒤에 헤어졌어요. 가사도 어찌 보면 제 마음을 고백한 것일 수도 있고요. 왜 헤어지기 전 연인들은 말을 안 해도 서로 끝나가는 감정을 잘 알잖아요. 그런 게 노래와 가사에 녹아든 거 같아요.” 그들은 지난 4월 컴백 콘서트를 하고 팬들에게 가장 먼저 신곡 ‘그리고 남겨진 것들’ 등을 들려줬다. 김종욱은 “오래 쉬다가 무대에 오르니 공연장의 분위기가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졌다.”며 “4년이란 긴 시간 동안 기다려준 팬들에게 고마웠고 그 공연장 안에 내가 존재한다는 게 축복인 것 같았다.”고 했다. 넬은 마니아 팬층이 두껍다. 2001년 인디 밴드 시절 내놓은 1집 앨범 ‘리플렉션 오프’(Reflection of)는 레코드점 향뮤직이 운영하는 중고 음반 인터넷 경매에서 30만원의 판매가를 기록할 정도다. 정재원은 “1집 앨범을 얼마 전까지 갖고 있었는데 최근에 없어졌다. 저 또한 구하려고 애쓰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정훈은 “1집이 희귀 앨범이 돼 비싼 값을 주고서라도 사려는 분들에겐 넬 음악의 가치를 높게 평가해주셔서 고맙지만 아주 일부는 비싼 값에 파시는 분도 있다고 들어 서운함을 느낀다.”고 했다. 넬의 새 앨범이 공개되자마자 아이돌들도 뜨거운 성원을 보내 화제가 됐다. 걸그룹 ‘카라’의 강지영과 ‘2PM’의 택연이 트위터 등에 넬의 앨범 발매 소식을 전하며 열혈 팬임을 인증한 것이다. 정재원은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됐다. 그저 고마울 뿐”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쿠바 경제사절단 첫 내한

    외교통상부는 정부 관료가 포함된 쿠바 경제사절단이 국내 기업들과의 사업 확대와 경제·통상 분야에서의 협력관계 증진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7일부터 11일까지 방한한다고 6일 밝혔다. 미수교국인 쿠바가 공식 성격을 띤 경제사절단을 파견하는 것은 처음이다. 이번 사절단은 노엘 바스케스 페레스 쿠바 대외무역외국인투자부 국장을 대표로 공기업 임원 등 4명으로 이뤄졌다. 이들은 방한 기간 중 코트라(KOTRA), 현대자동차, 현대모비스, 현대중공업을 방문할 예정이다. 이들은 또한 8일 외교통상부를 방문해 양국 간 통상·투자 관계 증진을 위한 협력 방안을 협의한다. 외교부 관계자는 “쿠바 정부 관료가 직접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온 것은 이례적”이라며 “향후 쿠바와의 협력 확대를 위한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우리 정부는 지난 1959년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 이후 쿠바와 단교했다.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는 지난 1960년 북한과 수교했으며 1986년에는 국가원수인 카스트로 의장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1997년에는 북한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는 등 밀접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 거친 언어 담은 광부의 詩

    ‘광부 시인 1호’로 불리는 정일남(77) 시인이 여덟 번째 시집 ‘훈장’(시와에세이 펴냄)을 내놓았다. 시인은 석탄산업 성수기인 1960년대 초반 강원도 태백에 있는 광업소에 채탄 광부로 들어가 20년 동안 석탄을 캤다. 시집 ‘훈장’은 다소 꺼끌꺼끌하고 직설적이다. 유려하고 세련된 시어를 기대했다면 취향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노시인이 바라보는 폐광촌의 일상과 운명, 인연을 향한 시선을 읽다 보면 이 시들이야말로 삶 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신울진 1·2호기 착공… 100% 우리기술 첫 ‘토종 원전’

    신울진 1·2호기 착공… 100% 우리기술 첫 ‘토종 원전’

    순수 국내 기술로 만드는 ‘신울진 1·2호기’가 본격적인 건설 공사에 착수했다. 원자력발전 건설 40여년 만에 핵심기술까지 100% 우리 기술로 지어지는 첫 ‘토종 원전’이다. 지식경제부는 4일 경북 울진군 북면 덕천리와 고목리 일대 한국수력원자력 울진원자력본부 인근 건설 현장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홍석우 지경부 장관, 김관용 경북도지사 등과 지역주민 7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신울진 1·2호기 건설 기공식을 열었다고 밝혔다. ●공사비 7조·年 620만명 참여 ‘초대형 사업’ 1400㎿급 신형 가압경수로형인 신울진 1·2호기는 한국 원전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 그동안 우리 원전은 핵심부품 몇 가지를 해외업체에 의존해야 했다. 이전에도 ‘한국형 원전’이라고는 했지만 완전히 우리 힘만으로는 지을 수 없었던 것이다. 부품 국산화율이 95%에서 100%에 도달했다. 하지만 신울진 1·2호기에는 원전계측제어시스템(MMIS)과 원자로냉각재펌프(RCP)가 우리 기술로 개발돼 처음 장착됐다. MMIS는 원자로 설비와 터빈 설비의 움직임을 계측하고 제어하는 시스템이다. 또 RCP는 냉각수를 원자로에 주입시키는 대형 펌프다. 원전 가동에 꼭 필요한 핵심 부품이다. 한수원 관계자는 “두 종의 부품은 두산중공업과 포스코 등 국내 업체들이 2007년부터 연구·개발에 착수, 4여년 만에 개발에 성공했다.”면서 “미국에 의존하며 무(無)에서 시작했던 우리 원전 건설이 이제 완벽하게 우리 손으로 가능해지면서 미국과 프랑스, 일본 등 원전 강국들과 동급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고 자평했다. 또 하나의 핵심 설비인 ‘원전설계핵심 코드’도 2006년부터 개발을 시작해 2012년 12월에 완료될 예정이다. 원전 설계에 사용되는 일종의 소프트웨어로 안전해석코드와 노심설계코드로 구성된 핵심코드이다. ●내진 설계 등 안전성도 세계 최고 수준 신울진 1·2호기는 안전성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높일 수 있게 됐다. 지난해 3월 일본 후쿠시마 사태 이후 국내외의 안전점검 결과, 도출된 개선사항을 건설 단계에서 모두 반영해 안전성을 대폭 강화한 것이다. 지진 발생 때 원전이 자동 정지하는 것은 물론 원전의 내진 설계도 강화했다. 지진 리히터 규모 7까지(현재 6.5) 견딜 수 있도록 설계했다. 설계수명도 40년에서 60년으로 높아졌다. 또 각종 사고로 냉각수의 온도가 올라가 발생하는 수소의 원자로 폭발 등을 막기 위한 피동형 수소제거설비도 설치된다. 후쿠시마 사태에서는 이런 수소가 폭발하면서 엄청난 피해를 가져 왔다. 또 자칫 원자로가 물에 잠기더라도 가동되는 방수형 배수펌프 설치, 이동형 발전차량 확보 등 침수발생 때 전력·냉각계통을 보호할 수 있는 2중, 3중의 장치들도 설치된다. 지경부 관계자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원전이 될 수 있도록 신울진 1·2호기에는 모든 안전장치를 설치했다.”면서 “원전 운영도 더욱 투명해질 수 있도록 원전 운영 소프트웨어 부분도 전면적으로 손보겠다.”고 말했다. 한수원은 2009년 4월에 실시계획승인을 거쳐 2010년 3월 주설비공사 계약을 체결했으며, 2010년 4월 부지정지공사를 시작했다. 앞으로 콘크리트 타설, 원자로 설치 및 기능시험 등을 거쳐 2017년 4월 말과 2018년 2월 말에 각각 1·2호기가 준공될 예정이다. 공사에는 약 7조원의 건설비가 투입되고 연인원 620여만명이 참여하는 초대형 사업이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공정률 70%에서 문루 고증작업 지연… 경주 월정교 복원 차질

    공정률 70%에서 문루 고증작업 지연… 경주 월정교 복원 차질

    우리나라 최초의 누교(橋)형 다리로 통일신라 최전성기인 경덕왕 19년(서기 760년)에 축조된 경북 경주시 인왕동 월정교(조감도·사적 제457호) 복원공사가 문루(門樓) 고증이 지연되면서 차질을 빚고 있다. 3일 경주시에 따르면 경주역사문화도시 조성 사업의 하나로 지난 2008년 4월부터 월정교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사업은 국비 232억원 등 총 332억원을 들여 길이 66m, 폭 9m, 높이 8m 규모인 월정교를 복원하는 것. 월정교는 신라왕궁인 월성과 경주 남쪽을 연결하는 주 통로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공정률은 70%이지만 월정교 양쪽 교대 위의 문루에 대한 문화재위원회의 고증 작업이 이뤄지지 않아 복원공사가 차질을 빚고 있다. 이는 월정교 형태(구조)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서다. 이런 가운데 시는 문루 복원 공사를 위해 올해 말까지 문화재위의 고증작업과 복원심사를 통과하고 내년 초 설계 등을 거쳐 공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러나 80억~100억원의 관련 예산을 확보해야 하는 게 과제다. 시 관계자는 “고증 작업이 지연되면서 월정교 복원 공사가 빨라야 2014년쯤 완공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경주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열린세상] 남해안 발전의 출발 여수 엑스포/김현호 한국지방행정연구원 지역발전연구실장

    [열린세상] 남해안 발전의 출발 여수 엑스포/김현호 한국지방행정연구원 지역발전연구실장

    여수 엑스포 개막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며칠 전에는 총예행연습도 했고 이제 최종 리허설을 남겨두고 있다. ‘살아 있는 바다, 숨 쉬는 연안’을 주제로 오는 12일부터 8월 12일까지 개최되는 여수 엑스포는 105개 국가, 10개 국제기구가 참여한다. 이번 엑스포는 1988년 서울올림픽, 1993년 대전 엑스포, 2002년 월드컵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가장 큰 규모의 국제행사에 속한다. 서울에서 2시간 50분이면 엑스포역에 도착할 수 있는 KTX 전라선과 항공편 등 다양한 교통망과 호텔 등 숙박시설도 확충되었다. 지방자치단체도 전광판, 홈페이지, 버스 등을 동원해 여수 엑스포 홍보에 나서고 있다. 국내뿐 아니라 외국 언론도 여수 엑스포를 주목하고 있다. 미국의 24시간 케이블 뉴스 채널 CNN은 최근 ‘2012년에 꼭 가봐야 할 여행지 7곳’ 중 1위로 여수를 선정했다. 유럽에서 가장 시청률이 높은 뉴스 채널 유로뉴스도 여수 엑스포에 대해 이와 비슷한 소개를 하고 있다. 여수 엑스포에서는 눈에 띄는 대목이 많다. 160년의 박람회 역사 가운데 처음으로 박람회장이 바다 위에 만들어졌다. 포르투갈 리스본, 스페인 사라고사 등 ‘바다’를 주제로 한 박람회는 예전에도 있었지만, 바다 자체를 박람회장으로 삼은 건 여수가 처음이다. 대기 관람객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판줄 공연’이나 유명 마임 등 찾아가는 게릴라 공연도 제공한다. 우리의 정보기술(IT)을 활용해 만든 초대형 발광다이오드(LED) 디스플레이를 갖춘 엑스포 디지털 갤러리와 버려진 시멘트 저장시설을 재활용해서 만든 세계 최대의 스카이타워 파이프 오르간도 그러하다. 대도시가 아닌 인구 30만명인 지방 중소도시에서 개최되는 행사라는 점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세계적으로 볼 때, 엑스포의 랜드마크가 지역발전에 기여한 사례가 많다. 파리 에펠탑이 대표적이다. 1889년 파리 박람회 기념물 공모전에 당선된 높이 300m 철골 구조물이 파리의 낭만을 고양시키고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명소가 되었다. 오늘날 캐나다 밴쿠버 대중교통의 근간이 된 경전철 ‘스카이 트레인’도 1968년 밴쿠버 박람회 때 만들어졌다. 미국 시애틀의 ‘스페이스 니들’도 그러하다. 이번 엑스포의 관건은 기념비적 건물의 명소화에 그치지 않고 엑스포가 어떻게 하면 일회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역발전에 기여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여수 엑스포는 빼어난 해양 경관에도 불구하고 낙후지역으로 남아 있던 남해안의 발전을 견인할 수 있는 촉매가 되어야 한다. 정부가 역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남해안 선(Sun) 벨트 가운데 ‘남중권’의 핵심이 여수다. 여수 엑스포가 남해안을 수도권에 대응하는 새로운 국토의 성장축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도해 2500여개 섬은 물론이고 전남·경남·부산·광주뿐 아니라 제주까지를 포함하는 30여개 지자체에 여수 엑스포의 지역발전 효과를 확산, 공유시킬 필요가 있다. 특히 엑스포가 제주를 포함한 남해안으로 외국인을 다시 불러들이는 ‘발전의 선순환’을 창출해야 한다. 남해안에 소재한 순천·남해·거제·남원·곡성 등 각 지역의 특색을 살리되, 이들을 연계한 관광코스와 패키지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개발해야 한다. 그래서 남해바다의 절경과 세계자연유산 제주도 지역 전체가 동남아를 넘어 세계적인 해양관광벨트로 도약해야 한다. 최근 증가하고 있는 중국과 일본의 관광객도 이 전략의 성공에 유리한 환경이 되고 있다. 행사 후도 중요하다. 엑스포가 토목공사에 머물지 않고 남해안의 지속적 발전과 연계되도록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 추진해야 한다. 리스본 박람회가 좋은 사례다. 15년이 지난 리스본 박람회는 행사 후 철거용으로 지은 임시건물도 상가로서 활기를 띨 정도로 지역발전의 견인차가 되고 있다. 엑스포 이후 10년을 대비한 지역개발계획을 착실히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엑스포는 문명의 전시장이라는 원론을 넘어 우리나라의 국가 이미지 제고와 함께 남해안 발전의 또 다른 시발이 되어야 한다.
  • 풍림산업 최종 부도

    중견 건설사 풍림산업이 최종 부도났다. 회사는 곧바로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입주 예정자들은 큰 피해가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건설업계는 다시 ‘줄도산’ 공포에 떨고 있다. 지난달 30일 기업어음(CP) 423억원을 갚지 못해 1차 부도를 낸 풍림산업은 2일에도 이를 막지 못해 부도처리됐다. 이로 인해 시공사와 시행사 간, 채권단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주채권은행인 우리은행은 채권단이 지난달 24일 풍림에 800억원을 지원하기로 결의했으나 분양수익금 계좌를 관리하는 국민은행과 농협이 자금 지원을 거부해 부도 사태를 맞았다고 주장한다. 국민·농협은행 측은 “시공사인 풍림산업은 시행사인 일주건설에서 공사미수금을 받을 게 있다고 주장하지만 일주건설은 풍림 측에 치러야 할 공사대금이 없다고 주장한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자금을 지원할 수 있겠느냐.”고 반박했다. 풍림산업 측은 “(미수금 등을 두고) 일주건설과 의견 차이가 너무 커 법정관리를 선택했다.”고 밝혔다. 1960년 설립된 풍림산업은 지난해 기준 시공 서열 30위로 360여개 협력업체를 거느리고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건설명가’ 중의 하나로 꼽혔다. ‘아이원’(일반 아파트)과 ‘엑슬루 타워’(초고층 아파트)라는 브랜드로 아파트 사업 다각화를 시도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택경기가 고꾸라지면서 어려움에 처했다. 현재 부산 남천 등 전국 3개 현장에서 1100가구의 아파트를 짓고 있다. 대부분 대한주택보증의 보증에 가입해 있어 입주 예정자들에게 큰 피해는 없다는 게 풍림 측의 설명이다. 김성곤·오달란기자 dallan@seoul.co.kr
  • [옴부즈맨 칼럼] 선거와 착시, 그리고 언론/나은영 서강대 신방과 교수·사회심리학 박사

    [옴부즈맨 칼럼] 선거와 착시, 그리고 언론/나은영 서강대 신방과 교수·사회심리학 박사

    선거가 끝나면 항상 “그랬었구나” 하고 깨닫는다. 결과를 알기 전에는 민심에 대한 주관적인 지각에 의존하다가, 결과를 알고 난 후에 비로소 진짜 민심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잘못 지각하는 ‘착시’ 현상은 객관적 판단을 흐릴 수 있다. 선거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 결론을 얻기 때문에, 그 과정에 사회심리가 작용한다. 투표는 개개인이 하지만, 누구를 선택할지 결정할 때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대한 나의 지각’이 상당한 영향을 준다. 여기에 개입되는 착시 현상 중 하나가 ‘다원적 무지’(pluralistic ignorance) 효과다. 이는 “실제로는 사람들이 자기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자기만 다르게 생각한다고 믿는 것”을 말한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사회심리학자 프렌티스와 밀러 교수는 학생들에게 ‘본인’이 얼마나 음주를 즐기는지, 그리고 ‘다른 프린스턴 학생들’은 얼마나 음주를 즐긴다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그 결과, 실제로는 본인처럼 음주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다른 학생들이 많음에도, 실제보다 더 많은 다른 학생들이 음주를 즐긴다고 생각하는 ‘다원적 무지’ 현상이 나타났다. 미국 백인들이 1960년대 흑백분리정책에 찬성하는 백인 비율을 실제보다 과대 추정했던 사례도 여기에 해당한다. 대체로 ‘변화’의 방향 쪽에 있는 생각에 다원적 무지가 더 잘 발생할 수 있고, 이것이 여론조사에서 응답을 회피하는 사람들의 심리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번 19대 총선에서 사례를 찾아보면, 마음속으로는 야당 김용민 후보의 비상식적 발언으로 말미암아 지지 의사를 철회했더라도, 다른 사람들 생각이 자기와 다를 것으로 추측하여 의견 표명을 꺼렸을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런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 다수였던 것이다. 특히 야당 지지자가 다수를 점하는 서울의 유권자들과 트위터 이용자들은 여당을 지지한다고 당당하게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고, 이것이 서울의 출구조사 당시 숨어 있던 여당의 표가 최종 개표 결과로 드러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승자는 자만하기 쉽고, 자만이 있는 곳에서 특히 착시가 커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새누리는 더 겸손하고 민주는 더 자성하라”라는 서울신문 4월 13일 자 사설은 핵심을 짚었다. 오만하여 판세를 잘못 지각함으로써 패배를 자초한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회창-노무현 후보의 2002년 대선 직전,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지지율과 함께 당선 가능성을 추가로 물었던 것이 대표적이다.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계속 우위로 나오는데도 그 자체를 당선 가능성의 지표로 삼지 않고 당선 가능성을 추가로 물어 “지지율은 노무현 후보가 앞서지만, 당선 가능성은 이회창 후보가 앞선다.”라고 보도하는 언론들이 많았다. 대통령은 지지율로 결정되는 것이고, 당선 가능성에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대한 나의 지각’이 포함되기 때문에 착시가 섞인 응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 지지율을 믿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은 당선 가능성을 줄기차게 함께 물었다. 최종 결과는 역시 착시가 아닌 현실을 반영한 지지율로 결정되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미루어 짐작하는 것은 자유다. 그러나 이는 올바른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다. 미래를 향한 변화의 열망을 잘 읽어내는 쪽이 대다수 국민의 ‘실제 의견 분포’를 객관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승리에 다가갈 수 있다. 유권자 입장에서 착시를 줄이려면 ‘사람’과 ‘미래’를 보아야 한다. 신문에도 ‘그 사람들’의 솔직한 ‘미래 비전’을 실어 주면 좋겠다. 언론을 통해, 그리고 대화를 통해 타인들의 의견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기존 언론은 물론이려니와, 트위터와 같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도 사람들의 의견을 실어 나르는 중요한 언론의 역할을 하는 만큼, 그곳에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왜곡하여 받아들이지 않도록 정화된 글을 쓰는 분위기가 정착되었으면 한다.
  • 이병철·구인회 美 ‘CEA 명예의 전당’에

    이병철·구인회 美 ‘CEA 명예의 전당’에

    고 이병철(왼쪽) 삼성그룹 창업회장과 구인회(오른쪽) LG그룹 창업회장이 미국 소비자가전협회(CEA)가 선정하는 올해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1일 재계에 따르면 CEA는 지난달 30일(현지시간) ‘2012 CEA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인물로 이 창업회장과 구 창업회장 등 12명을 선정해 발표했다. 이 회장은 1969년 삼성전자공업과 삼성-산요전기 등을 설립하며 전자업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으며, 이듬해에는 삼성NEC(옛 삼성전관)를 설립하며 브라운관 시대를 열었다. 또 1977년에는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며 반도체 산업을 시작했고, 같은해 4월에는 컬러TV를 수출하는 등 현재 세계 최대 전자·IT 업체인 삼성전자의 기틀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구 회장은 6·25전쟁 후 산업 불모지에서 창조력, 결단력 등으로 한국의 전자산업을 개척한 선구자로 LG가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데 크게 공헌한 점이 평가를 받았다. 구 회장은 1958년 금성사를 설립하고, 1959년 국내 최초의 국산 라디오를 비롯해 TV·냉장고·세탁기·에어컨 등 전자제품을 국내 처음 개발·생산했다. 1960년대에는 전력 및 통신용 케이블, 전화기 및 교환기 등을 개발해 보급하며 우리나라의 정보기술(IT)과 통신의 대중화에도 기여했다. 한편 지난해까지는 소니, 파나소닉, 제니스, RCA, 필립스 등의 창업자가 ‘CE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축소판 세상 만드는 모형 제작의 대가

    축소판 세상 만드는 모형 제작의 대가

    세상을 축소해 과거를 기록하고 미래에 남기는 작은 거인 ‘기흥성’. 올해로 어느덧 모형 제작 인생 46년을 맞는 그는 이 분야에서는 대가로 손꼽힌다. 현재는 아버지와 후학들을 위해 자신의 작품 인생을 총망라하는 박물관을 세우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직접 현장 시찰을 가고 도면을 그려 직원들과 회의를 하는 등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위풍당당하게 현역 생활을 계속해 오는 미니어처 제작의 선구자 기흥성씨를 1일 밤 10시 40분에 방영되는 EBS ‘직업의 세계-일인자’에서 만나본다. 모형 제작 인생 46년. 그는 어릴 때부터 손으로 만드는 것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우리나라에선 모형에 대한 기본 개념조차 서 있지 않았던 1960년대에 모형 제작 일에 뛰어들었다. 건축디자이너는 아니지만 회사 건축부에서 일하던 그는 자신의 스승인 고(故) 김수근 선생의 뜻에 따라 회사 내부에 모형팀을 만들어 전문적으로 모형 제작 일을 시작했고 이후 꾸준히 작업 활동을 이어와 그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로 자리매김하며 미니어처 제작이라는 외길을 걸어오고 있다. 그래서 그의 또 다른 이름은 ‘모형 제작의 일인자’다. 기흥성씨가 제작한 모형을 보면 우리나라의 발전사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여의도 개발 ▲경부고속도로 ▲독립기념관 ▲88올림픽 주 경기장 ▲상암 월드컵 경기장 ▲영종도 신공항 등 1960~70년대 개발 연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또 허물어지거나 다시 지어진 건물들의 원형 또한 그가 만든 모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건물로 김영삼 정부 시절에 폭파됐던 중앙청의 모형은 건축물로서는 뛰어났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또 2008년 2월 화재로 소실되기 전의 숭례문과 서울역, 서울대학병원 등 많은 건축물이 그의 손에 의해 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기흥성씨는 요즘 박물관을 짓는 문제로 바쁜 날을 보내고 있다. 평생 자식들을 위해 사셨던 아버지와 자신의 길을 따라오는 후배들을 위해 박물관을 지어 자신의 46년 작품 세계를 총망라할 계획이다. 4번의 심장 수술을 버텨내며 걸어온 길. 그는 자신의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일을 계속할 계획이라고 말한다.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당당하게 현역 생활을 이어 나가는 그. 오늘도 그의 손끝에서 또 다른 대한민국의 미래가 만들어진다. 눈앞에 펼쳐지는 모형의 세계! 미니어처 제작의 선구자 기흥성씨를 만나본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납세자·세정당국 가교 역할 충실히”

    “납세자·세정당국 가교 역할 충실히”

    한국세무사회(회장 정구정)는 30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창립 50주년 기념식 및 50회 정기총회’를 개최했다. 기념식은 김황식 국무총리, 정선태 법제처장, 이현동 국세청장, 이삼걸 행안부차관, 백운찬 세제실장, 김낙회 조세심판원장, 김순철 중소기업청 차장을 비롯한 정부 고위인사 및 민주통합당 김진표 원내대표, 여야 국회의원 35명 등 100여명의 내빈과 회원 3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치러졌다. 김 총리는 “세무사제도가 도입된 1960년대 초만 하더라도 40%에 불과했던 소득세의 자진 신고율이 95%까지 높아졌고 전자신고율도 세계 최고 수준이 됐다.”면서 “이러한 성과는 정부의 조세정책에 적극 협조해 국민의 성실납세를 유도해 온 세무사의 노고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치하했다. 박재완 기획재정부장관도 축사를 통해 “조세정의 실현의 파수꾼 역할과, 그리고 납세자의 어려움에 귀를 기울이는 따뜻한 전문가상을 확립해 나가달라”고 당부했다. 정구정 회장은 “지난 50년간 축적된 경험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납세자 권익보호를 위해 가일층 매진하고 세제 및 세정의 발전에 적극 동참해 국가발전에 앞장설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날 세무사회는 ‘납세자와 세정당국간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국가발전에 기여한다’는 세무사 비전 선포식을 가졌다. 오일만기자 oilman@seoul.co.kr
  • [K-코믹스 신한류 이끈다] (2) 1950~60년대 만화를 말하다

    [K-코믹스 신한류 이끈다] (2) 1950~60년대 만화를 말하다

    우리 만화 역사는 100년이 넘는다. 영화 등 다른 대중문화와 비슷하게, 만화도 신문물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던 때 국내에 첫발을 들였다. 1909년 대한민보 창간호에 실렸던 이도형의 한 칸짜리 그림을 국내 첫 시사만화이자, 근대만화의 기원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물론 17~18세기 조선시대 풍자화나 풍속화, 또는 그보다도 오래 된 민화(民畵)를 우리 만화의 뿌리로 보는 시각도 있다. 우리 만화는 이미 1926년 첫 ‘원소스 멀티유스’(하나의 소재를 여러 장르에 다양하게 활용하는 것) 사례가 나올 정도로 일찌감치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국내 최초 풍자영화로 인정받는 ‘멍텅구리’라는 작품이 개봉했는데 이는 1924년 한 일간지에서 선보였던 노수현의 네 칸짜리 만화 ‘멍텅구리 헛물켜기’를 각색한 작품이다. 일제시대 만화는 짧은 시사 풍자만화가 주류를 이뤘고, 호흡도 짧았다. 우리 만화가 대중과 본격적으로 호흡하며 역사를 써나간 것은 1945년 해방 이후다. 일제에 의해 폐간됐던 신문과 잡지가 복간되고 새 간행물이 쏟아져 나왔다. 거기에 만화가 실렸다. 첫 단행본과 첫 만화전문 잡지도 등장했다. 특히 만화방을 중심으로 여러 장르의 작품이 쏟아진 1950년대 중후반에서 1960년대 초중반을 첫 황금기로 본다. ●‘코주부’ 김용환·‘고바우’ 김성환 선구자 해방 뒤 우리 만화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가가 바로 코주부 캐릭터로 유명한 김용환(1912~1998)이다. 일본에서 그림 유학을 했던 그는 일찌감치 일본 최고 원고료를 받는 톱클래스 삽화가로 활동했다. 해방 직후 출간한 ‘토끼와 거북이’(1946)는 국내 단행본 만화의 효시로 남아있다. 김용환은 1948년 우리나라 최초의 만화전문 잡지 ‘만화행진’ 창간을 주도했다. 협회를 만들어 만화가 권익향상과 후진양성에 힘쓰기도 했다. 히트작 ‘코주부 삼국지’(1952)가 서울신문·한국만화영상진흥원 선정 ‘한국만화 명작 100선’에 포함됐다. 또 다른 거목으로는 시사만화의 대가 김성환(80)이 있다. ‘고바우 영감’(1950)으로 유명한 그는 3권짜리 반공만화 ‘도토리 용사’(1951)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김용환과 김성환은 우리 현대만화의 개척자이자 아버지다. 김용환은 과장법을 사용한 그림에서부터 섬세한 그림까지 만화의 모든 분야에서 완벽한 능력을 갖췄다. 김성환은 과장법 위주의 가벼운 그림을 그리는 데 완벽했고, 호흡이 길지 않은 신문과 잡지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를 이뤘다. 이들의 그림을 교과서 삼아 연구하고 따라하며 많은 작가들이 탄생하게 됐다.”(박기준) 이 시기 작품 19편이 한국만화 명작 100선에 포함됐다. 김용환을 비롯해 ‘엄마 찾아 삼만리’(1958)의 김종래, ‘만리종’(1959)의 박기당, ‘조국을 등진 소년’(1964)의 이근철, ‘땡이의 사냥기’(1965)의 임창 등 일본 유학을 했거나 일본에서 나고 자랐던 작가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100선에는 들지 못했지만 국내 순정만화의 어머니 엄희자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만화방(만화가게)은 만화의 유통과 소비를 확산시켜 만화가 대중적인 오락거리로 떠오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만화 자체의 질을 떨어뜨려 ‘불량’, ‘저질’ 이미지를 덧씌우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만화방이 등장한 것은 1950년대 후반으로 추정된다. 만화 단행본이 잇따라 성공을 거두자, 이를 빌려주는 노점 좌판이 먼저 나타났다. 서점에서 실비를 받고 진열돼 있던 만화책을 보여줬다는 이야기도 있다. 전쟁 뒤 사서 보기 힘들던 힘겨운 경제상황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만화방, 기폭제이자 부작용 양산도 작가들이 단행본으로 몰려 발행부수가 폭증했으나, 만화방이 생겨나며 판매부수가 줄어들자 서점들은 오히려 만화 취급을 꺼렸다. 만화 소비가 만화방 중심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전국 유통망을 갖춘 총판이 잇따라 등장하며 만화방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1959년 전국 2000 곳이던 만화방은 1960년대 말에는 9.5배인 1만 9000곳으로 늘었다. 만화방이 성황을 이루자 다양한 작가와 작품을 찾는 수요가 생겨났다. 이에 맞춰 부엉이문고, 제일문고, 크로바문고 등 만화전문 출판사가 등장했다. 이 출판사들은 인기작가를 전속으로 두고 만화책을 펴냈다. 부작용도 나타났다. 만화가 돈벌이 수단으로 여겨지면서 저가·저질 만화가 나오기 시작했다. 1950년대 초반 20쪽 안팎의 딱지만화가 유행했지만, 중후반에 두꺼운 고급 양장 단행본이 성공을 거두며 시장을 재편했다. 그러나 만화방용 만화는 고급 양장본과 달리 분량도 50~60쪽 안팎에 그쳤고, 싸구려 느낌이 강했다. 특히 1967년 중소 출판사들이 뭉쳐 ‘합동’이라는 이름으로 만화 출판과 유통을 독점하게 되자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 “신촌대통령 합동의 등장 이후 더 열악해졌다. 단가를 낮추면 그만큼 이익이니 크기도 줄이고, 종이도 싸구려를 썼다. 인쇄도 조악했다. 인기작이 나오면 대충 베끼기 일쑤였다. 만화 자체의 질이 크게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박기준) ●검열의 시작… 20~30년 후퇴기 1961년 5·16 군사 쿠테타는 문화계 전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작가들의 창작력을 옥죄는 사전심의, 즉 검열이 시작된 것이다. 만화도 예외일 수 없었다. 1961년 12월부터 원로 만화가들과 출판사 관계자로 구성된 한국아동만화자율회가 이름만 ‘자율심의’인 검열을 맡았다. 그러나 명목상의 자율도 오래가지 않았다. 1967년 박정희 정부는 밀수, 도벌, 탈세, 폭력, 마약과 함께 만화를 ‘사회 6대 악(惡)’으로 규정했다. 이듬해 8월 한국아동만화자율회 해체 뒤 문화공보부 산하 한국아동만화윤리위원회가 생겼고 이들은 거침없이 칼을 휘둘렀다. 소재와 내용은 물론 어린이 건강을 보호한다며 종이 종류와 판형, 쪽수, 편수까지 통제하고 강제했다. 이름과 달리 폐휴지나 다름없던 선화지(仙花紙) 대신 갱지(紙)를 사용하게 하고 국판에서 4X6배판으로 책 크기를 키웠다. 권당 최대 130쪽까지 내용을 늘리게 하는 대신 편수는 무제한으로 이어가지 말고 ‘상·중·하’로 끝내게 했다. 아동만화윤리위원회는 1970년 1월 한국도서출판윤리위원회, 한국잡지윤리위원회와 함께 한국도서잡지윤리위원회(현 간행물윤리위원회)로 통폐합됐다. “남자와 여자가 손만 잡아도 풍기문란이라고 빨간 색연필이 그어졌다. 심지어 가족이라도 남녀가 한방에서 자는 것은 그릴 수 없었다. 전쟁만화를 그리면 북한 장교가 잘생겼다고 트집 잡아 늑대 같이 그리게 했다. 필명을 쓰던 작가들은 사람 이름 같지 않다는 지적에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만화 속 등장인물도 마찬가지였다.”(박기준)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이 기사는 박기준 화백 인터뷰를 바탕으로 최열 ‘한국 만화의 역사’, 손상익 ‘한국만화통사㈛’, 박기준 ‘박기준의 한국만화야사’, 박인하·김낙호 ‘한국현대만화사’를 참고해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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