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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조업 비중 22년만에 50% 넘었다는데… 고용창출 효과는 ‘뒷걸음’

    제조업 비중 22년만에 50% 넘었다는데… 고용창출 효과는 ‘뒷걸음’

    2010년 우리나라 전체 산업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22년 만에 50%를 다시 넘어섰다. 그해의 ‘고환율 정책’이 수출을 크게 끌어올리면서 수출 비중이 높은 제조업이 신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비스업 비중이 12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전체 산업의 생산·부가가치·고용 유발 효과는 뒷걸음질쳤다. 고환율 정책의 수혜가 삼성전자·현대차 등 대기업 중심의 제조업에 집중됐다는 의미다. 성장의 분배나 경제 체질 강화를 위해서는 서비스업 중심의 내수 기반을 좀 더 키워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국은행이 30일 발표한 ‘2010년 산업연관표’(연장표)에 따르면 제조업 비중은 50.2%로 전년보다 2.5% 포인트 올랐다. 제조업 비중이 50%를 넘은 것은 1988년(52.7%) 이후 처음이다. ‘최틀러’(최중경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가 귀환한 2010년은 고환율(연평균 달러당 1156.3원) 덕분에 수출이 15.8% 신장한 해다. 덕분에 제조업은 2009년 역성장(-1.0%)에서 2010년 18.5% 수직 성장했다. 반면 서비스업 비중은 2009년 39.3%에서 2010년 37.7%로 줄어들었다. 외환위기 때인 1988년(35.8%)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이우기 한은 투입산출팀장은 “서비스업도 성장(7.9%)했으나 제조업보다 신장 폭이 작다 보니 서비스업의 산업비중이 축소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서비스업은 생산액 10억원당 16.6명의 취업을 유발한다. 제조업은 9.3명이다. 부가가치 유발 효과도 서비스업(0.826)이 제조업(0.590)보다 높다. 그런데 서비스업 비중은 줄고 제조업 비중이 늘다 보니 전체 산업의 평균 취업유발계수는 2009년 13.8명에서 2010년 12.9명으로 0.9명 감소했다. 일자리 창출 효과는 떨어졌다는 얘기다. 같은 기간 부가가치 유발계수(0.687→0.686)와 생산유발계수(1.955→1.948)도 떨어졌다. 소비·투자·수출을 모두 합한 최종수요(1761조 7000억원)에서도 수출 비중(35.1%)은 민간소비(35.0%)를 앞질렀다. 이 같은 역전은 관련 통계를 내기 시작한 1960년 이래 처음이다. 기업 소득이 늘어난 만큼 가계 소득이 늘지 않아 소비가 부진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수출 제조업 위주의 경제 구조는 과거 IT(정보기술) 버블 사태 등에서 볼 수 있듯 외풍에 크게 흔들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신운 한은 조사국장은 “그런 단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반대로 금융 쪽에서 위기가 터지면 제조업이 튼튼해야 버틸 수 있다.”며 “제조업 강국인 독일이 유로존 사태에서 돋보이는 것이나 최근 미국에서 제조업을 다시 살리자는 ‘제조업 르네상스’ 얘기가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안미현기자 hyun@seoul.co.kr
  • 의정부 ‘미군기지 남북 관통로’ 새달 뚫린다

    경기 의정부시는 도심 정중앙에 위치해 시가지 전체 교통흐름을 왜곡시켜온 가능동 미군기지 캠프 ‘라과디아’를 동서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가 다음 달 4일 부분 개통한다고 30일 밝혔다. 남북축 도로 가운데 개통 구간은 착공 1년째인 신흥로(의정부의료원~가능로삼거리) 일부다. 캠프 내 흥선로에서 가능로까지 600m 길이다. 남쪽 구간은 3년여에 걸친 보상 끝에 폭 30m로 개설됐으며, 북쪽 구간인 가능로는 예산부족 탓에 폭 10m로 우선 개통하고 내년부터 보상에 들어가 2년 안에 폭 30m로 완전개통할 예정이다. 동서축으로 관통하는 도로(의정부경찰서~흥선로터리)는 지난해 10월 경기도내 미군 반환공여지 가운데 최초로 국비를 지원받아 먼저 개통했다. 캠프 라과디아는 6·25전쟁 직후인 1953년 미1군단 사령부의 지휘·통신을 목적으로 직속 항공대가 들어선 이후 60년간 주민 생활에 큰 불편을 끼쳤다. 구도심과 신시가지를 가로막아 도심 발전에도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번 신흥로 개통으로 가능동 구시가지에서 의정부동 신시가지까지 이동시간이 20분에서 5분으로 단축되는 등 의정부시내 전체 교통난 해소에 숨통을 확 터줄 전망이다. 한상봉기자 hsb@seoul.co.kr
  • 금강 기운 머금은 옥천 민물고기 요리

    금강 기운 머금은 옥천 민물고기 요리

    ‘향수’ 정지용 시인의 고향으로 잘 알려진 충북 옥천군. 예로부터 옥천은 한가운데에 흐르는 금강이 있어 민물고기를 잡아먹기도 하고 또한 그 강물 덕분에 토질이 비옥해 각종 농산물이 풍부한 고장이었다. 1980년 대청댐이 생기면서 물길도 변하고 옥천 사람들의 삶도 많이 변했지만, 여전히 금강은 그들의 삶, 그 자체다. 31일 밤 7시 30분 KBS 1TV에서 방영되는 ‘한국인의 밥상’에서는 동자개(배가사리), 모래무지(마주), 붕어, 피라미 등의 민물고기로 만든 어죽, 생선국수, 도리뱅뱅이 등 비릿한 향기 물씬 풍기는 옥천의 민물고기 밥상을 소개한다. 군북면 환평리는 높은 산 중턱에 자리 잡아 대청댐이 생길 당시 수몰을 면할 수 있었던 마을이다. 그 덕분에 골목 어귀마다 쌓인 돌담길이며, 슬레이트 지붕 등 옛집의 풍광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6년 전 고향으로 돌아온 이준설(59)씨는 어머니를 위해 여름철 보양식으로 으뜸인 어죽을 끓인다. 마을 근처 냇가에서 직접 잡은 작은 민물고기와 산중턱 지천에 널린 오가피, 덧나무(접골목) 잎을 따서 함께 끓인 약초어죽. 다른 반찬 하나 없지만, 아들이 직접 끓여준 어죽 한 그릇이 어머니에게는 최고의 성찬이다. 30년 넘게 금강에서 민물고기 조업을 해온 전장식(62)씨. 여태 부인과 함께 고기를 잡다가 2년 전부터는 손승우(42)씨와 함께 매일 아침 배를 타고 금강으로 간다. 오늘도 그물 한가득 동자개와 모래무지, 잉어, 장어 등이 들어 있다. 대청댐으로 인해 옛날보다 잡히는 물고기의 종류도, 양도 많이 줄었지만, 그에게 있어 금강은 삶 자체이자 가족을 지켜준 은인이다. 그런 남편의 몸보신을 위해 부인이 끓여낸 배가사리매운탕과 마주조림 등으로 차린 특별한 밥상을 만나본다. 굽이굽이 경사진 길을 따라 차로 10 여분 가다 보면 옥천의 하늘 아래 첫 동네인 ‘높은벼루’라고 불리는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청성면 고당리다. 이 마을에서 60년 이상을 함께 산 진기석(84), 이소분(80) 부부는 이맘때에 참옻나무에서 새순을 따고 (참)가죽나무에서 잎을 따다 삶아서 무쳐먹기도 하고, 전을 부쳐 먹기도 한다. 평생을 함께 이곳에서 살았지만, 여전히 알콩달콩하면서도 티격태격하는 노부부의 모습이 정겹기 그지없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사설] ‘윤금순 결단’ 바로 국민이 바라는 진보다

    통합진보당 윤금순 비례대표 당선자가 한시적으로 국회의원직을 유지하겠지만, 국회의원으로서의 모든 권한은 행사하지 않겠다고 어제 밝혔다. 비례대표 문제가 마무리될 때까지 자신의 사퇴를 보류한다는 혁신비상대책위원회의 결정을 존중해 일단 의원직은 유지하지만, 보좌관을 두지 않고 세비나 연금도 받지 않겠다는 특권 포기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비대위로서는 비례대표 1번인 윤 당선자가 사퇴할 경우, 구당권파 후보가 의원직을 승계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고육책의 성격이 짙다. 윤 당선자의 사퇴 여부에 따라 당의 진로가 크게 달라지는 만큼 그의 사퇴는 그 자체로 중요 사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윤 당선자의 국회의원 기득권 포기 선언이라고 본다. 200개가 넘는 국회의원 특권 중에는 의원 본연의 업무 수행과는 본질적으로 상관없는 것들이 적지 않다. 단 하루 국회의원을 해도 ‘월 120만원 종신연금’을 받는 데 대해 선뜻 공감할 국민이 얼마나 될까. 국회의원 특권 포기 ‘결단’은 그동안 누구도 실천에 옮기지 못한 일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국민 눈높이에 맞춘 진보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좌파라고 해서 다 진보는 아니다. 서울대 박효종 교수는 일찍이 이렇게 지적했다. “1960년대 낡은 의식에 머물러 진보하지 않는 세력, 헌법적 가치에 대한 존경심도 없고 세계사의 흐름이나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좌파 세력이 내건 ‘진보’는 ‘검은 백조’처럼 모순된 표현의 극치다.” 한사코 사퇴를 거부하는 이석기·김재연 당선자가 꼭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엄청난 부정경선을 치러놓고도 “어느 나라에도 100% 완벽한 선거는 없다.”고 강변하는 이 당선자도 오늘부터 국회의원 신분이다. “종북보다 종미가 문제”라는 시대착오적 주장을 펴는 그가 어떤 행보를 보일지 걱정이 앞선다.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는 게 진보일진대 그 사전적인 뜻조차 모르는 그들은 이미 진보가 아니다. ‘진보의 프리미엄’을 누리기 위해 진보를 참칭하는 ‘진보 위장세력’일 뿐이다. 이번 통진당 사태는 진보정치의 미래를 위해 오히려 ‘약’이 될 수도 있다. 통진당은 종북좌파 세력과 확실한 선을 긋기 바란다. 진보는 합리와 상식의 길을 가야 한다. 진보정치의 재구조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 日방사능 오염 참다랑어 美서 발견

    미국 서부 태평양에서 잡힌 참다랑어가 지난해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에서 누출된 방사능에 오염된 것으로 밝혀졌다. 방사능 물질이 참치에 의해 멀리 이동한 첫번째 사례로 기록됐다. 미국 스토니브룩스대 연구진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5개월 뒤인 지난해 8월 샌디에이고 부근 해역에서 잡힌 참다랑어 15마리를 조사한 결과 모두 체내 함유 세슘-134와 세슘-137 수치가 전년보다 10배가량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고 28일 미국립과학원회보(PNAS) 온라인판에 발표했다. 이는 미국과 일본 정부가 정한 식품 안전 기준치보다는 훨씬 낮은 것으로 사람이 먹어도 인체에 해를 끼칠 수준은 아니다. 태평양 참다랑어는 몸길이 3m, 무게 450㎏까지 나간다. 이들은 일본 근해에서 산란하고 동쪽으로 이동해 미국 캘리포니아주와 멕시코 바하 칼리포르니아주 근해의 무리에 합류한다. 학자들은 몸집이 큰 참치가 물질대사로 방사능을 제거할 수 없었던 것에 놀라움을 표했다. 연구진은 참다랑어 몸에서 나온 방사능 물질을 비교하기 위해 후쿠시마 사고 이전에 캘리포니아 남부로 이동한 참다랑어를 잡아 분석했다. 그 결과 세슘-134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고 1960년대 이후 두 차례 실시된 핵무기 시험의 잔류물인 세슘-137이 바탕준위(background level)로 검출됐을 뿐이다. 우즈홀 해양연구소 관계자는 “이 방사능의 출처는 의심의 여지 없이 후쿠시마”라고 말했다. 연구진은 참다랑어들이 방사능에 오염된 해역의 크릴 새우나 오징어 등을 잡아먹으면서 방사능 세슘을 흡수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열린세상] 새로운 계급의 고전적 계급투쟁/허만형 중앙대 행정학과 교수

    [열린세상] 새로운 계급의 고전적 계급투쟁/허만형 중앙대 행정학과 교수

    오래된 책이기는 하지만 최근까지 미국 대학에서 교재로 쓰인 책이 밀로반 질라스가 쓴 ‘새로운 계급’(New Class)이다. 질라스는 티토 대통령과 함께 유고의 공산체제를 건설하는 데 앞장섰고, 한때 부통령을 지냈다. 그때가 1953년이었다. 그런데 소련식 공산주의 체제에 대해 염증을 느낀 그는 1954년 1월 공산주의를 탈당하고 하루아침에 반체제 인사로 변신했다. ‘새로운 계급’은 1957년 출간되었다. 질라스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무기로 권좌에 오른 사람을 새로운 계급이라고 했다. 역사상 모든 계급은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권좌에 오른 반면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권좌에 오른 수단이 이데올로기였기 때문에 ‘새로운’이라는 용어를 썼다. 1960년대 미국 학계에서는 새로운 계급 연구에 몰두한 적이 있었다. 대표적 학자 중 한 사람이 버거로 기억된다. 이들은 대학이나 연구소와 같은 지식산업 종사자 및 노조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묶어서 새로운 계급으로,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형성된 계급을 옛날 계급으로 지칭했다. 새로운 계급과 옛날 계급의 끊임없는 투쟁을 하나의 사회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우리 사회에서도 일면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 사회의 진보 계열 정당은 새로운 계급의 한 유형이다. 과거의 민주노동당, 오늘의 통합진보당이 이 계열에 속한다. 그러나 둘의 행태는 참 다르다. 과거 민노당 시절에는 국민적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공약이 서민의 뜻을 반영하는 부분이 많았고, 언행에서는 이념을 건전하게 실천하려는 의지가 보였다. 또한 계급투쟁의 전사라기보다는 민주적 가치를 존중하는 인사로 보기에 크게 모자람이 없었다. 그러나 통진당에서는 계급투쟁의 전사 모습만 보이지 민주적 가치를 존중하는 모습은 볼 수 없다. 부정이 있으면 수용하고 책임을 지는 태도를 보여도 국민적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데 일단 권력의 끈을 잡으면 절대 놓지 않겠다는 케케묵은 계급투쟁의 전사 모습만 보일 뿐이다. 통진당의 비례대표 부정 경선에 대한 당내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마치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 부정선거를 당내에 옮겨 놓은 것 같았다. 현장 투표에서 선거인 명부보다 실제 투표수가 많은 투표소가 7곳으로 총 611표가 더 많았다. 동일인 필체가 이어지는 등 대리 투표로 추정되는 정황도 포착되었다. 온라인 투표에는 동일한 IP(인터넷 프로토콜)주소에서 집단적으로 투표가 이뤄졌다. 당원이 아닌 사람이 투표한 부정행위도 확인되었다. 이런 역사도 반복되는가 싶어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1960년 3·15 부정선거 행태를 조사해 보았다. 당시 자유당의 정·부통령 후보는 이승만과 이기붕, 민주당은 조병옥과 장면이었다. 기록에 있는 부정선거는 이랬다. 40% 사전투표, 3인조 또는 5인조에 의한 반공개 투표, 유령 유권자의 조작, 기권 강요 및 기권자의 대리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 발표 등 통진당의 비례대표 부정 경선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3·15 부정선거를 목도한 젊은 학생들과 시민은 용감하게 독재와 부정선거 타도에 나서 이 땅에 민주주의 씨앗을 뿌렸다. 그 민주화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 진보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사회가 성숙했다. 그러나 통진당은 부정을 확인하고서도 책임지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대학생인 듯한 젊은 진보가 불의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현실은 참담하다. 통진당 비상대책위원회의 접근방식도 이해할 수 없다. 총체적 부정을 확인하고도 부정 경선으로 비례대표가 된 사람들에게만 화살을 돌릴 수는 없다. 부정선거를 주도한 인물은 밝히지도 않고 이석기, 김재연 등 비례대표 당선자 문제만 처리하면 그것으로 부정 경선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까? 당내 부정선거에 관여한 모두가 민주적 가치를 짓밟은 당사자들인데 누가 누구를 단죄할 수준은 이미 넘었다. 경선부정이 그 정도라면 땜질로 해법을 찾을 수 없다. 허물어 땅을 고른 후에 다시 세우는 것이 옳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계급투쟁의 전사 모습을 버리고 진보 정당의 미래를 위해 국민의 심판을 다시 받아야 한다.
  • [글로벌 시대] 영국 여왕 즉위 60주년/강승중 수출입은행 런던법인장

    [글로벌 시대] 영국 여왕 즉위 60주년/강승중 수출입은행 런던법인장

    요즈음 영국 런던 시내 거리는 여기저기에 국기가 게양되고 축제를 준비하는 분위기이다. 1952년 왕위에 오른 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하는 축하행사가 6월 2일부터 열리기 때문이다. 영국 역사상 빅토리아 여왕에 이어 두 번째로 즉위 60주년을 맞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친근한 인상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여왕 즉위 당시 영국인들은 여왕이 다스리면 나라가 잘된다는 속설에 따라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리라는 기대감을 품었다고 한다. 과거 16세기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이류국가에 머물던 영국을 강대국 위치에 올려놓았다.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절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전성기였다. 그에 비해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즉위 후 60년은 영국이 내리막길을 걸어온 기간이었으나 그나마 여왕 덕에 영국의 위상이 급속한 추락을 모면하고 대외적 위신과 존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여왕 재위 60년은 왕실의 권위도 실추된 기간이었으며 많은 고비가 있었다. 여왕의 여동생과 자녀는 이혼과 각종 추문으로 국민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고 왕실 유지에 대한 회의론까지 대두하였다. 특히 1997년 국민의 사랑을 받던 다이애나비의 비극적 죽음은 왕실에 치명타를 안겨 주었으며 다이애나비에 대한 냉정한 태도 때문에 여왕마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여왕의 지혜로운 처신으로 그 후 비판이 수그러들었고, 작년 4월 서민적 풍모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윌리엄 왕자의 결혼을 계기로 왕실에 대한 호감이 다시 살아나 여왕 즉위 6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분위기가 마련되었다. 영국 왕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통을 굳건히 지켜 오고 있어 근본적 신뢰감을 잃지 않고 있다. 영국 왕족들은 군 복무 전통을 이어 오면서 영국이 전쟁에 휩싸이면 기꺼이 참전해 왔다. 여왕 자신이 2차대전 당시 여군에 복무하면서 트럭 운전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여왕의 둘째 아들인 앤드루 왕자는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 헬리콥터 조종사로 참전하였으며, 둘째 왕손인 해리도 이라크 전쟁에 참가하였다. 영국이 천 년 넘게 현재까지 군주제를 유지해 온 것은 국왕이 국민통합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 국민은 국론분열이나 외부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 국왕을 중심으로 단결되는 모습을 보여왔다. 영국은 13세기 초 마그나카르타 이후 약 5세기에 걸쳐 서서히 입헌군주국 체제를 굳혀왔으며, ‘군림하나 지배하지 않는’ 국왕이 상징적 권위를 유지하고 ‘지배하나 군림하지 않는’ 총리가 실제적 권력을 갖는 이원적 체제를 300년 가까이 유지해 오고 있다. 이러한 권력분점 체제하에서 국왕은 정쟁의 과녁에서 벗어나 국가원수로서의 상징을 유지하면서 국가통합의 안전판 역할을 흔들림 없이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뒤엎으려 하기보다는 전통을 중시하고 타협의 가치를 인정하는 영국적 지혜에 바탕을 둔 것으로 유럽 대륙의 여러 나라가 혁명과 반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숱한 유혈 참극을 겪은 사실과 크게 비교되는 부분이다. 또한 영국이 과거 영국의 영토였거나 식민지였던 나라들로 ‘영국 연방’을 구성하여 국가적 위상과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국왕(여왕)이라는 연결고리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영국 외 53개 영연방 국가들은 여왕의 상징적 권위를 인정하고 있으며,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15개국은 아직도 여왕을 자국의 국가원수로 모시고 있다. 영국의 국력 약화에도 불구하고 영연방이 유지되는 데는 여왕의 존재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영국 왕실이 존경과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왕실의 노력과 전통의 힘을 믿는 영국인들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기에 노쇠해 가는 영국의 숨은 저력이 있다고 하겠다.
  • 민주 非친노계 후보 6명 공동성명… “정책대의원 추가선정 공정성 훼손”

    민주 非친노계 후보 6명 공동성명… “정책대의원 추가선정 공정성 훼손”

    민주통합당 당 대표 경선에 참여할 정책 대의원 추가 선정을 놓고 친노·486(40대·80년대학번·60년대생) 주자인 이해찬·우상호 후보를 제외한 비(非)친노계 김한길 후보 등 후보 6명이 “공정성 훼손”이라며 집단 반발하고 나서 파문이 예상된다. 25일 지역순회 당 대표 경선 충남·대전 임시대의원 대회에서는 이 후보가 김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1위를 재탈환했다. ●일부 후보 “경선 집단 보이콧” 경고 김 후보를 비롯한 정세균계 강기정, 구민주계 추미애, 손학규계 조정식, 정동영계 이종걸, 원외 문용식 후보는 이날 오후 치러진 경선 직후 ‘정책 대의원 추가로 인한 대의원 변경에 대한 입장’이란 제목으로 성명서를 발표했다. 후보들은 성명서에서 “당 비상대책위원회와 전당대회준비위원회가 정책 대의원 추가 선정 여부를 놓고 논의를 하고 있다.”면서 “이미 지역별 순회경선이 상당히 진행된 상황에서 선거 결과를 완전히 뒤집을 수 있는 상당 규모의 유권자군을 추가하려는 것은 선거의 공정성에 심각한 훼손을 야기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정책 대의원은 통합 당시 민주당의 정책에 동의해 협약을 맺은 단체들에게 대의원 자격을 부여한 것이다. 오전 비대위는 전대준비위가 전날 양대 노총과 ‘백만민란’ ‘내가꿈꾸는나라’ 등에 정책 대의원 2600명을 할당하기로 결정한 것과 관련, 회의를 열고 ‘정책 대의원 구성안’ 결정이 당헌·당규의 원칙과 기준에서 벗어났다며 재논의할 것을 요구했다. 박용진 대변인은 “어떤 기준과 원칙으로 대의원이 배정됐는지 제시해야 하며 몇몇 단체는 (‘친이해찬표’ 등) 특정 후보에게 유리하다는 말에 모욕감을 느낀다고 했다.”고 전했다. 김두관 경남지사를 지지하는 자치분권연구소, 진보 성향을 띠는 복지국가진보정치연대, 민주통합시민행동, 진보대통합시민회의 등 4개 단체는 탈락했다. 앞서 전대준비위는 1년 이상 활동한 전국 단위 구성원 1000명 이상 보유 단체 등을 원칙으로 내놓았다. ●“어떤 기준·원칙따라 배정됐는지 제시하라” 이에 대해 후보들은 “선거는 사전에 정해진 유권자를 후보들에게 알리고 치러야 하는 것이 대원칙이다. 각 후보의 유불리나 논의 대상 단체의 적합성 여부와는 무관하다. 경선에서 확인된 대의원들의 표심을 존중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한 후보 측은 “흥행대박이 아닌 ‘쪽박’이 될 것이며 경선 집단 보이콧까지 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충남 천안 상록리조트와 대전 서구 평송청소년문화센터에서 각각 열린 충남·대전지역 대의원 투표에서 이 후보는 대의원 604명(투표율 75.5%)이 1인 2표제로 참여한 가운데 35.3%인 426표를 획득해 누적합계 1398표로 김 후보(1193표)를 205표 차로 따돌렸다. 이 후보의 고향(충남 청양)이라는 지역적 특성이 이 후보에게 ‘몰표’로 이어진 것으로 풀이된다. 김 후보는 충남에서 5위로 처지면서 169표(14%)를 얻는 데 그쳤다. 한편 6·9 전당대회 유권자의 대의원 명부에서 주소지와 실거주지가 다른 ‘무(無)자격’ 대의원이 부산·대전 대덕구에 15명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윤호중 민주당 사무총장은 “부산 수영구에 거주하지 않는 대의원 15명이 있다는 문제 제기에 따라 다른 시·도당까지 조사한 결과 수영구 14명, 대전 대덕구 1명이 주소지가 일치하지 않았다.”며 부정 행위 적발시 엄중 문책할 것이라고 밝혔다. 강주리·대전 이범수기자 jurik@seoul.co.kr
  • ‘이·박 역할분담론’ 반감에 ‘정책 대의원’ 논란도 한몫

    ‘이·박 역할분담론’ 반감에 ‘정책 대의원’ 논란도 한몫

    김한길 민주통합당 당대표 후보가 24일 차기 당 대표 선출을 위한 대구·경북 지역 대의원 투표에서 누적 합계에서 처음으로 친노계 이해찬 후보를 제치고 1위에 올랐다. 이 지역에서 280표(21.1%)를 얻은 김 후보는 전국 6개 지역 누적 대의원 득표수 1024표로 972표에 그친 이 후보를 52표 차로 따돌렸다. 이 후보는 추미애 후보에 이어 3위에 그쳤다. 민주당은 대구 북구 엑스코에서 치러진 대구·경북지역 당 대표 후보자 합동연설회 및 지역순회 대의원 투표에서는 664명이 참여해 67.4%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1위를 탈환한 김 후보에 이어 구민주계의 지원을 받고 있는 대구 출신 추 후보가 212표(16%)를 받았다. 친노무현계 이 후보는 200표(15.1%), 손학규계 조정식 후보 189표(14.2%), 486(40대·80년대학번·60년대생) 주자 우상호 후보 158표(11.9%), 정세균계 강기정 후보 115표(8.7%), 정동영계 이종걸 후보 98표(7.4%), 원외 문용식 후보는 76표(5.7%)를 얻었다. 김 후보는 결과 발표 직후 “당심이 민심을 잘 수용한 결과다. 박근혜 의원을 반드시 꺾으라는 뜻으로 반드시 대선 승리의 길로 가겠다.”고 말했다. 반면 이 후보는 “선방했다고 생각한다. 내일(25일) 대전·충남에서는 1등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종합 1위도 가능할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김 후보가 선두를 탈환했지만 이 후보의 고향이자 지역구인 충청권, 친노계 의원들이 많이 당선된 서울 등이 남아 있어 판세를 예단하기는 이르다는 분석이다. 이 후보의 하락세에는 친노 주도 총선 패배 책임, ‘이해찬·박지원 역할분담론’에 대한 반감이 있지만 이날은 ‘정책 대의원’ 선정 논란이 한몫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당대회준비위원회는 오전 비공개 회의를 열고 한국노총 2000명, 민주노총 300명, ‘국민의명령·백만민란’(백만민란) 200명, ‘내가 꿈꾸는 나라’(내꿈나) 100명 등 총 2600명의 정책 대의원 할당을 결정했다. ‘정책 대의원’은 민주당이 통합과정에서 당과 정책 협약을 맺은 단체들에 대의원을 할당해 폭넓게 민심을 반영하자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친노계 문성근 전 당대표대행이 대표였던 백만민란의 표는 ‘친(親)이해찬표’라는 게 후보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김 후보 측은 “울산 대의원의 숫자가 221명인 것을 감안할 때 300여명은 적은 숫자가 아니다. 특정 후보에게 유리한 경선 룰이 정해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 후보가 이긴 지난 21일 부산 경선에서는 ‘유령 대의원’ 의혹이 제기됐다. 정청래 전대준비위원은 전대준비위 회의에서 “부산 수영구 지역 대의원 15명이 수영구 사람이 아닌데 대의원으로 등록돼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며 사실 확인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윤호중 사무총장은 “전대준비위에서 논의할 사항이 아니어서 선관위로 넘겼다. 자기 지역 당원이 아닌 사람이 지역위원회 선출로 대의원이 된 경우가 없는지 전수조사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 선관위원은 “자격에 문제가 있는 투표권자의 투표는 무효 처리가 될 것”이라고 밝혀 부정 대의원 투표 의혹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제2의 통합진보당 사태가 될 것이란 우려와 함께 불공정 선거를 둘러싼 후보 대결도 한층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강주리·송수연·대구 이범수기자 jurik@seoul.co.kr
  • [유통플러스]

    빙그레, 6년만에 새 바나나맛 우유 빙그레가 대표적 장수브랜드 바나나맛 우유의 신제품을 6년 만에 내놨다. 아몬드·호두 등 견과류로 만든 토피넛을 넣은 ‘바나나맛 우유& 토피넛’이다. 기존의 부드럽고 달콤한 바나나맛에 고소한 맛까지 추가됐다. 국순당, 정통 ‘옛날 막걸리’ 출시 국순당은 1960년대 유행했던 정통 쌀막걸리의 맛을 재현한 ‘국순당 옛날 막걸리’를 시판한다. 100% 국산 쌀과 전통 밀누룩으로 빚어 걸쭉한 맛이 난다. 인공 감미료는 첨가하지 않았다. 알코올 도수는 7도로 일반 막걸리보다 1도가 높다. 750㎖, 2000원. 코카콜라, 친환경 용기 선봬 코카콜라사는 ‘코카콜라 제로’ 300㎖ 제품을 식물성 소재를 사용한 친환경 용기에 담아 선보였다. 기존 페트 수지의 30%가량을 사탕수수에서 추출한 식물성 소재를 사용함으로써 화석연료의 사용을 줄였다. 기존 용기처럼 100% 재활용할 수 있고 내구성과 무게 등에서는 차이가 없다. 땀냄새 억제 ‘러블리 믹스 에티켓’ 더페이스샵은 여름철 땀 냄새를 억제하고 향기를 더하는 ‘러블리 믹스 에티켓’ 5종을 출시했다. 두피에 뿌리는 ‘헤어 미스트’, 겨드랑이에 바르는 ‘데오드란트 미스트’와 ‘스틱 데오드란트’, 전신에 사용하는 ‘바디 파우더’, 발 관리용 ‘풋 미스트’ 등이다. 5900~8900원. 동원F&B, 온라인 ‘몰앤모아’ 오픈 동원F&B의 식생활전문 쇼핑몰인 동원몰(www.dongwonmall.com)이 아웃렛 식품쇼핑몰인 ‘몰앤모아(www.mallnmoa.com)’를 열었다. 기존 온라인 매장에 비해 약 30~70% 저렴한 가격으로 5일간 한정 판매한다. 제품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업데이트된다.
  • [데스크 시각] 아길라와 빅뱅의 역전/문소영 문화부 차장

    [데스크 시각] 아길라와 빅뱅의 역전/문소영 문화부 차장

    2012년 5월에 찾은 필리핀 마닐라에도 여느 동남아 국가들처럼 한류가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들이 아이돌 스타 ‘빅뱅’과 ‘샤이니’ 등의 K팝에 열광하는 모습이었고, 50~60대들은 한국 드라마에 빠져 있었다. 이민호 팬클럽뿐만 아니라 고현정 팬클럽도 있었다. 필리핀의 대졸 초임이 한국 돈으로 30만원 수준인데, K팝 콘서트 좌석 중 최고가인 25만원짜리 티켓이 가장 빨리 매진된다고 한다. 황성운 마닐라 한국문화원장은 지난해 신인급의 어느 아이돌 그룹이 마닐라에서 공연했는데 국내에서는 생각도 못할 ‘빅뱅’급의 환호를 받고는 잔뜩 고무돼 귀국했다고 귀띔해 줬다. 태풍이 몰아쳐 휴교령이 내린 날, 공교롭게 한국어 수강신청을 받았는데 그 악천후에도 새벽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고 한다. 최근 온라인으로 수강신청을 바꾸고 수강생을 200명에서 400명으로 늘렸는데도 2분 만에 신청이 끝난단다. 그들은 K팝을 따라 부르려고 한글을 배운다. 한류 열풍이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필리핀이 이렇단다. 베트남과 태국의 열풍은 더 놀랍다고 했다. 태국의 한 기업 주재원은 최근 원전과 물관리 등 태국의 국책사업 수주를 놓고 한국기업과 유럽의 기업들이 경쟁하고 있는데 ‘한류 프리미엄’을 누리고 있다고 했다. 태국의 한류 열기 덕분에 우리가 가진 기술 이상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리핀의 한류를 보면서, 문득 30여년 전 한국에서 유행했던 필리핀 노래가 생각난다. 필리핀의 국민가수 프레디 아길라의 ‘아낙’(Anak)이다. 올해 59세인 아길라가 당시 애절하게 불렀던 아낙은 1978년 한국·일본 등 아시아를 강타했고, 미국에선 빌보드 차트 5위까지 올랐다. 당시 24살에 불과했던 아길라는 통기타 반주에 영어도 아닌 필리핀 공용어 타갈로그어로 노래했다. 한국에서는 이 노래를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이 ‘아들’로 번안해 더 인기를 끌었다. 1960년대 말까지 필리핀은 한국보다 잘살았다. 세계은행 자료를 보면 1960년 필리핀의 국내총생산(GDP)은 67억 달러로 39억 달러였던 한국의 1.8배였다. 그해 1인당 GDP는 필리핀이 257달러, 한국은 155달러였다. 심지어 1961년에는 필리핀이 270달러로 92달러였던 한국의 3배가 됐다. 그 시절에 필리핀 건축기술도 들어왔다. 대표적인 게 미국이 발주하고 필리핀 기술로 지은 광화문의 쌍둥이 건물인 미국 대사관과 전 문화체육관광부 건물이다. 1963년에 지은 장충체육관도 설계는 한국인이 했지만, 시공·감리를 필리핀 건설회사에서 했다. 필리핀은 미국에 앞서 1975년 중국과 수교를 맺었고, 1976년 아세안독트린을 발표해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다. 아무튼, 1960~70년대의 필리핀은 영향력이 있었다. 마닐라의 밤하늘을 보면서 30여년 전 ‘아길라’를 배출했던 필리핀과 ‘빅뱅’을 낳은 한국의 역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역전의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경제와 정치의 상관관계가 먼저 떠오른다. 경제가 몸이라면 정치는 머리다. 몸이 커지는 속도에 맞춰 두뇌 시스템이 커지고 적절하게 기능하지 않으면, 몸은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필리핀의 경제와 문화에 낙후된 정치가 질곡으로 작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존경받는 독립운동가에서 독재자로 전락해 1986년 국외 추방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가족들을 보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독재자 마르코스는 1989년 사망했지만, ‘3000켤레의 구두’로 사치와 허영의 퍼스트레이디로 찍혔던 이멜다 마르코스는 2010년 하원의원에 당선됐고, 그의 아들은 상원의원, 그의 딸은 주지사가 됐다. 한국인들은 ‘어떻게 그럴 수가’하고 경악하겠지만, 그들을 당선시킨 지역은 마르코스 가족의 17세기적 봉건 영지 같다. 지속 가능한 한류를 만들기 위해 정부와 민간에서 갖가지 계책을 내놓고 있다. 중요한 것은 지속 가능한 한류란 선진화된 정치시스템, 정치의식 등이 수반돼야 하지 않을까, 필리핀의 한류를 보며 그렇게 느꼈다. symun@seoul.co.kr
  • [김문이 만난 사람] ‘음악 인생 60주년’ 대중가요 작곡계의 살아있는 전설 김희갑

    [김문이 만난 사람] ‘음악 인생 60주년’ 대중가요 작곡계의 살아있는 전설 김희갑

    ‘사랑아 내 사랑아’ ‘진정 난 몰랐네’ 등으로 존재를 처음 알렸다. 추억의 노랫말을 잠시 음미해본다. ‘그토록 사랑하던 그 사람/잃어버리고/타오르는 내 마음만/흐느껴 우네/예전에는 몰랐었네/진정 난 몰랐네’에 이어 세월이 지나 ‘그 겨울의 찻집’으로 옮겼다. ‘바람 속으로 걸어갔어요/이른 아침의 그 찻집/마른 꽃 걸린 창가에 앉아/외로움을 마셔요/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 이번에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으로 변신했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적 있는가/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어디 이뿐이랴. ‘사랑의 미로’와 ‘향수’ 등 수많은 히트곡마다 한국의 대표적 정서를 담아냈다. 하여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대중가요 3000여곡, 영화음악 300여편, 뮤지컬 3곡 등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에 커다란 획을 ‘쫘악’ 긋는다. 그래서 대중 가요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불후의 명품 작곡가라고 한다. 김희갑(76)씨. 중학교를 졸업하고 미8군에서 기타 연주를 시작했으니 올해로 음악 인생 60년을 맞는다. 또 1967년 ‘사랑아 내 사랑아’로 작곡 앨범을 처음 낸 지 45년이다. 그는 올해 새로운 대중음악의 한 장르를 준비하고 있다. 어떤 것일까. 지난 21일 오전 경기도 용인 자택에서 김씨를 만났다. 확 트인 창가를 배경으로 부인 양인자씨가 커피 한 잔을 권한다. 양씨에게 ‘그 겨울의 찻집’의 가사는 아무리 들어도 감미롭다고 했더니 남편 김씨가 “요즘에는 그런 찻집이 없어요.”라고 대신 대답을 한다. 김씨는 여전히 모자를 쓰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미8군 부대에서 연주할 때 빡빡머리를 감추기 위해 모자를 쓰기 시작한 것이 습관이 돼 60년 동안 거의 벗어본 적이 없다. 김씨는 칠순인데도 얼굴 피부색은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둘은 잉꼬부부로 소문나 있기도 하지만 작사·작곡계의 명콤비로 알려져 있다. 둘은 1985년에 만나 2년 뒤에 결혼했다. 마침 부부의 날이었다. 양씨는 “안 그래도 다음 달 결혼 25주년을 맞아 기차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며 웃는다. 김씨는 “알 만한 사람 부부 여섯쌍이 함께 간다.”며 즐거운 듯 활짝 웃는다. 김씨 부부는 원래 경기도 분당에 살았다. 그래서 언제 이사 왔는지부터 먼저 물었다. “한 4년 됐나요. 원래는 여기보다 더 조용한 곳인 강원도 문막 정도로 가려고 했어요. 그랬더니 우리 집사람 친구들이 멀리 이사 가면 아예 인연을 끊겠다고 협박(?)을 하더군요. 그 바람에 여기에 머물렀습니다(웃음). 사실 내년이면 다시 판교 쪽으로 이사를 갈 겁니다. 그곳에 아파트를 하나 장만했거든요.” 양씨가 주방에서 떡과 차 한 잔을 꺼내오며 권한다. 김씨는 “고맙습니다.”라고 깍듯이 인사한다. 늘 반말이 아닌 존대어를 쓰는 모양이다. 김씨에게 올해가 작곡가로 데뷔한 지 45년째라고 했더니 “(가요사 등) 일부 기록에는 1967년으로 나와 있는데 레코드사에 알아봤더니 1965년이라고 하더군요. 그거나 이거나 그렇게 세월이 흘렀네요.” 기타 연주는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의 음악적 환경은 어떠했을까. 평양에서 태어난 김씨는 의사 집안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는 한의사, 아버지는 의사였다. “아버지는 독자였고 저는 맏아들로 태어나 할아버지한테 귀여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보약을 자주 먹었던 기억이 지금도 선합니다. 아마 12살까지 매일 먹었지요(웃음). 아버지는 의사였지만 음악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제가 6살 때 평양에서 40여리 떨어진 평남 강동에서 아버지가 병원장을 맡았습니다. 사택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시간 날 때마다 대학 때 음악 활동을 같이 했던 친구들을 불러 음악 연주를 자주 했습니다. 나중에는 악단을 조직해 시골 여러 곳에 다니면서 공연을 하곤 했지요. 8·15 광복 이후에는 의사라는 신분을 감추고 국가 지정 음악당, 그러니까 남한으로 치면 예술의전당 같은 곳을 맡아 운영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코디언 같은 것을 잘 연주했습니다.” 김씨는 원래 축구 선수가 되고 싶어 했다. 초등학교 때 레프트윙 포지션으로 학급 대표로 출전했을 만큼 축구 실력이 남달랐다. 내친김에 학교 대표로 출전하고 싶었다. 그 무렵 음악 활동을 하는 아버지를 보고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6·25전쟁이 발발했고 1·4후퇴 때 김씨 집안 식구들은 임진강을 거쳐 대구까지 월남하게 된다. 먹고사는 것이 어려워졌다. 대구에 있던 미 25야전병원에 취직하려고 했으나 아버지가 갖고 있던 의사면허는 인정이 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아버지는 미군부대 장교 식당에서 접시닦이로, 아들 김씨는 친구와 함께 하우스보이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오후 2시 30분쯤이 쉬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때마다 같이 일을 하는 친구가 주머니에서 작은 하모니카를 꺼내 연주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좋아 아버지한테 음악을 배우겠다고 했지요. 흔쾌히 허락을 하신 아버지한테 악보 읽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때 처음 만진 악기가 만돌린이었습니다. 중고품이었는데 선이 끊어지면 미군들이 사용하는 전화선을 연결해 사용하곤 했지요. 6개월 정도 하니 웬만한 연주가 가능해지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한테 김영순(김트리오 부친)씨가 놀러 왔는데 트럼펫과 기타 연주를 기가 막히게 했습니다.” 이후 김씨는 ‘바로 기타야, 기타!’라고 생각하며 기타에 푹 빠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가르쳐 주는 대로 가사를 적고 노래를 배웠다. 말 그대로 밥숟가락만 놓으면 새벽 4시까지 기타를 배웠다. 또한 작곡가 박시춘 선생과의 만남 등을 통해 장차 훌륭한 음악인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한 지 2년 세월이 지나서야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때마침 고등학교에 악단이 하나 생겼는데 김씨는 곧바로 악단장을 맡았다. 웬만한 편곡은 그의 손을 거칠 정도로 음악 실력을 인정받았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미 공군 클럽에서 기타 연주를 했다. 사실상 프로 생활을 시작했던 것.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대구에서 ‘음악 연주자 베스트 7’에 뽑혀 서울로 올라와 ‘록쇼’ 악단에 합류했다. “그때 오산에 있는 미군부대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전국 곳곳을 다녔습니다. 그러던 1년 뒤에는 제가 직접 악단장을 맡게 됐지요. 악단 명칭도 록쇼에서 ‘A1쇼’로 바꿔 활동 무대를 넓히게 됩니다. 운 좋게도 미8군 클럽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연주자로 소문이 나기도 했지요. 이후 7년 동안 A1쇼 악단을 이끌었습니다.” 그가 미군부대와의 인연을 접은 것은 1962년이었다. 다시 음악 공부를 하고 싶은 열정이 생겼기 때문이다. 당시 해군 군악단 단장을 지냈고 작곡가로도 유명한 이교숙 선생을 찾아가 작곡과 편곡 등을 강도 높게 배웠다. 그렇게 2년 정도 시간이 흘렀을 무렵 작곡가 박춘석씨를 만나게 됐다. 박씨의 곡을 녹음할 때 기타 연주를 해주고 박씨에게 편곡을 더 배우게 됐다. 아울러 작곡가 김영광씨의 부탁으로 편곡을 해주면서 이 방면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섬세한 작곡 솜씨가 일품이라는 소문까지 자자했다. “하루는 오아시스레코드 손진석 사장이 찾아와 작곡 앨범을 내자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건성으로 대답했는데 거의 매일같이 집요하게 부탁을 했습니다. 특히 대중가요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작곡의 명분론으로 설득하더군요. 그래서 ‘사랑아 내 사랑아’(태원), ‘불타는 연가’(남진), ‘진정 난 몰랐네’(김상희), ‘모래 위를 맨발로’(이시스터즈) 등 12곡을 4명이 3곡씩 나눠 부른 이른바 ‘김희갑 작곡 제1집’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후 본격적인 작곡 활동을 하면서도 ‘김희갑 악단’을 계속 이끌어오다 드라마 주제가를 작곡하면서 크게 히트를 친다. 1983년 KBS 주말드라마 ‘청춘행진곡’에서 노주현과 정윤희의 ‘러브송’을 하나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최진희를 발탁, ‘그대는 나의 인생’을 작곡했던 것이다. 이 노래는 가수 최진희를 탄생시키고 우리나라 최초의 뮤직비디오 음악이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많은 인기를 끌었다. 이어 ‘사랑의 미로’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 등이 담긴 제2집 작곡 앨범이 나오면서 악단을 해체하고 작곡과 연주 등 솔로로 활동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가 지금까지 작곡한 노래만 무려 3000곡이 넘는다. 이 가운데 부인 양씨와 함께 작사·작곡을 한 것은 400여곡에 이른다. 예를 들어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겨울의 찻집’ ‘서울 서울 서울’ 등 조용필의 히트곡을 포함해 ‘타타타’ ‘우리도 접시를 깨트리자’ ‘립스틱 짙게 바르고’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대는 나의 인생’ ‘하얀 목련’ 등이 대표적인 부부 합작 국민 애창곡이다. 얼마 전에는 TV프로그램 ‘불후의 명곡’에서 젊은 가수들에 의해 불려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다. 요즘 대중가요계의 흐름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음악적으로 재능이 대단한 가수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그룹 쪽으로 치우친 것이 아쉽습니다. 재즈, 댄스, 트로트 등 다양한 장르를 통해 듣는 사람이 좋아하는 음악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하거든요. 앞으로는 ‘대중음악을 감상하는 시대’가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김씨는 요즘 모종의 작업을 하고 있다. 발성의 기본기를 확실히 갖춘 남자 3명, 여자 1명으로 이뤄진 중창단을 만들어 대중음악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일이다. 40대 중후반 한 팀, 20~30대 젊은 성악가 한 팀 등 두 팀을 만들어 실내악 분위기의 대중음악을 올가을쯤 선보일 예정이다. 필생의 역작이나 다름없다. 새로운 꿈과 희망, 식지 않은 열정으로 그 일에 집중하고 있다. km@seoul.co.kr ●김희갑은 고교 졸업 후 ‘록쇼’ 멤버 활동… 대중가요 3000여곡 작곡 1936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의사인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웠다. 대구에서 대성고등학교에 다닐 때 학교 악단장을 맡아 발군의 음악 실력을 발휘했다. 아울러 미8군 부대에서 프로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서울에 있는 ‘록쇼’ 악단 멤버로 활동했다. 이후 ‘A1쇼’ 악단장으로 7년 동안 활동했다. 1962년 미군부대 위주의 활동 무대를 접고 본격적으로 작곡 공부를 시작했다. 5년 뒤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김희갑 작곡 제1집’ 앨범을 냈다. 1983년 KBS 주말드라마 ‘청춘행진곡’ 주제가를 작곡해 크게 히트쳤다. 1985년 이후에는 김희갑 악단을 해체하고 솔로 활동에 전념했다. 지금까지 3000여곡을 작곡했으며 1987년에 양인자씨와 결혼한 뒤 함께 400여곡을 작사·작곡했으며 300여편의 영화음악과 뮤지컬 ‘명성황후’ 작곡 등으로도 유명하다. 취미는 골프와 분재.
  • “숭례문 지붕 설계 부적절… 화재 진화에 취약”

    숭례문 복원과정에서 기와지붕 공사가 전통방식으로 설계되지 않아 화재에 취약하고 원형이 훼손될 우려가 있는 것으로 지적됐다. 감사원은 문화재청과 문화재 보수 국고보조금을 많이 받는 기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문화재 보수 및 정비사업 집행 실태’ 결과를 22일 공개했다. 감사원은 문화재청이 숭례문의 기와지붕을 전통방식대로 설계하지 않아 화재 재발 시 진화가 어려울 것으로 지적했다. 감사원은 “숭례문 기와지붕 아래 두께 15㎝로 시공하는 강회다짐층 때문에 통풍과 공기순환이 안 돼 화재 시 불길을 잡기가 힘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강회다짐층은 기와를 얹기 전 목조 지붕에 보토를 하고 그 위에 누수를 막기 위해 강회를 발라 넣는 것. 전통 한옥지붕은 강회다짐층을 두지 않고 서까래 위에 보토를 30㎝ 이상 두껍게 말려 시공한 뒤 기와을 잇는다. 문화재청은 설계과정에서 강회다짐층이 숭례문의 목부재 부식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자문 의견이 있었는데도 이를 무시했다. 이에 감사원은 통풍과 수분 배출이 원활한 전통 보토방식으로 지붕 시공을 재검토할 것을 문화재청에 권고했다. 또 문화재청이 뒷짐만 지고 있는 탓에 전통기와 생산도 머지않아 맥이 끊길 위기에 놓였다. 1980년 이후 보수공사를 했던 숭례문(1997년), 경복궁 근정전(2003년), 광화문(2011년) 등이 모두 공장제 기와로 대체됨으로써 전통기와는 단 한 사람의 기능보유자로 명맥만 유지되고 있다. 문화재청은 전통기와가 자연스럽고 고풍스럽지만 품질이 균일하지 않다는 이유로 문화재 보수 공사에 전통기와보다 2배 정도 무거운 공장제 기와를 쓰고 있다. 감사원은 “현재 숭례문 복원 공사에는 전통기와를 쓰고 있으나, 문화재청이 이후 중요 국가지정문화재 수리·복원 시 전통기와를 사용하기 위한 검토는 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강회다짐층 시공과 관련, 문화재청은 “강회다짐층 시공은 1960년대부터 있어 왔고 1994년 개정된 문화재수리 표준시방서에도 규정된 것”이라면서 “지붕공사는 다음 달 중순 착수할 예정으로, 숭례문복구자문단의 결정에 따라 보토에 강회를 섞어 다진 후 기와를 올리는 방법으로 공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황수정·문소영기자 sjh@seoul.co.kr
  • 호남·구민주계 공천탈락 역풍 맞아… “절대강자가 없다”

    호남·구민주계 공천탈락 역풍 맞아… “절대강자가 없다”

    광주·전남은 민주통합당 당 대표 경선을 혼전으로 밀어넣었다. 22일 오후 전남 화순 하니움체육관에서 열린 민주당 당 대표 후보자 합동연설회 및 광주·전남 대의원 투표에서는 호남 출신 정세균계 강기정(광주 북갑) 후보가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비노무현계 김한길, 3위는 친노무현계 이해찬 후보였다. 친노계가 주도한 공천에서 호남 및 구민주계 인사들이 대거 탈락한 것이 강 후보의 지지표로 결집됐다는 분석이다. 이로써 두 차례 대의원 투표에서 한 번씩 1위를 주고받았던 김 후보와 이 후보의 격차는 28표 차로 줄어든 가운데 이 후보가 가까스로 선두를 지켰다. 강 후보는 이날 대의원 투표에서 절반(49.9%)에 달하는 득표율을 따내며 호남세를 과시했다. 당초 ‘대표·원내대표’ 역할분담론의 한 축인 박지원 원내대표의 ‘홈그라운드’에서 지원 사격을 기대했던 이 후보는 실망한 표정으로 대회장을 떠났다. 김 후보는 투표 결과 발표 직후 기자들과 만나 “성원에 감사드린다. 광주·전남의 마음을 담아 정권교체의 한 길로 달려가겠다.”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반면 초반 주도권을 다투던 이해찬, 김한길 후보는 오전부터 성명전을 펼치는 등 장내·외에서 치열하게 격돌했다. 김 후보는 연설에서 이 후보가 전날 부산연설회에서 “김 후보는 2007년 ‘노무현의 시대는 끝났다’며 대선 전 열린우리당을 탈당했다.”고 말한 것과 관련, “인격모독에 가까운 언사”라며 사과를 촉구했다. 김 후보는 “이 후보는 4년 전 대선예비경선에서 떨어진 뒤 지도부를 비난하며 탈당했고 총선 와중에도 탈당 운운하며 지도부를 압박했다. 원내대표자리 하나 던져 주면 호남은 무조건 따라올 것이라고 한 이 후보에게 내가 비난받아야 하느냐.”고 이 후보를 비판했다. 이에 질세라 이 후보 선대본부 오종식 대변인은 반박 논평을 내고 “오직 상대 후보에 대한 흠집내기로, 비판으로만 선거캠페인을 했던 데 대해 겸허하게 돌아보길 바란다.”고 받아쳤다. 이 후보도 “총리까지 한 사람이 뭐가 아쉬워 담합을 하겠느냐.”고 맞섰다. 두 후보에게 광주·전남 지역 승리는 절박했다. 민주당 내 상징성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국민 경선 당시 지지율 2%에 불과했던 노무현 후보가 세 번째로 실시된 광주 경선에서 1위를 차지한 뒤 여세를 몰아 ‘이인제 대세론’을 누르고 대선 후보에 올랐었다. 구민주계의 지지를 받고 있는 추미애 후보도 추격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해찬·박지원 연대’의 한 당사자인 박 원내대표가 영향력을 미치는 두 번째 표를 흡수하기 위해 ‘호남 정서’를 자극했다. 486(40대·80년대학번·60년대생) 주자인 우상호 후보, 손학규계 조정식 후보, 정동영계 이종걸 후보 등은 현장 연설에서 ‘비이해찬 세력’의 결집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한편 당 대표 경선은 향후 정책 대의원의 표심이 중요하게 작용할 전망이다. 민주당은 노동계, 시민사회계 등과의 통합과정에서 정책 협약을 맺은 기관 구성원들에게 정책 대의원 신분을 부여하고 6월 1일 최종 선거인단을 확정지어 9일 전대에서 대의원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할 예정이다. 특히 노동계가 5000여명에 달해 1000표 안팎의 박빙의 승부가 펼쳐질 것으로 예상되는 경선에서 당락을 결정지을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강주리·화순 송수연기자 jurik@seoul.co.kr
  • “이변은 없었다”… 親盧 좌장 이해찬 울산 ‘굴욕’ 만회

    “이변은 없었다”… 親盧 좌장 이해찬 울산 ‘굴욕’ 만회

    친노무현계 이해찬 민주통합당 당권 후보가 21일 민주당 당 대표 후보 선출을 위한 부산 지역 대의원 투표에서 353표를 얻으며 1위를 차지, 4위에 그쳤던 전날 울산 대의원 투표전의 ‘굴욕’을 만회했다. 울산에서 이 후보에게 ‘더블스코어’로 선두에 올라섰던 비노(非)계 김한길 후보는 204표로 2위, 486(40대·80년대 학번·60년대생) 그룹 주자 우상호 후보가 160표로 그 뒤를 이었다. 친노 진영의 본거지인 부산에서 이 후보는 예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1인 2표제인 점을 감안하면 이 후보의 득표율은 과반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28.7%여서 22일 치러지는 광주·전남 대의원 투표 결과가 경선 판세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 후보가 박지원 원내대표와 제안했던 ‘대표-원내대표’ 역할 분담론이 호남 대의원 표심으로 반영될 경우에는 이 후보에게 유리할 수 있지만 반이해찬 정서도 만만치 않다는 게 중론이다. 민주당은 이날 오후 부산 연제구 국제신문사에서 대표·최고위원 등 지도부를 선출하는 민주당 당 대표 후보자 합동연설회와 지역 순회 대의원 현장 투표를 실시했다. 이 후보는 김 후보에게 149표 차로 앞서며 역전에 성공했다. 하지만 부산 지역에 조직 기반이 없는 김 후보가 선전했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이 후보의 승리는 김 후보에 대한 반격과 친노계의 몰표가 주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후보는 합동 연설회에서 작심한 듯 ‘이해찬-박지원 연대’를 담합으로 연일 몰아붙였던 김 후보의 참여정부 시절 탈당 전력을 거론하며 맹비난했다. 이 후보는 “김 후보는 2007년 2월 노무현의 실험이 끝났다며 23명의 의원을 데리고 탈당한 사람이다. 2008년 정계에서 은퇴할 때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탓으로 돌렸다.”고 폭로했다. 이어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면서 가슴에 맺힐 일은 안 하겠다고 생각해서 참고 또 참았는데 사실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며 감정이 북받치는 듯 울먹거렸다. 이 후보는 “위선과 거짓으로 민주당의 대표가 돼서야 국민들에게 낯을 뵐 수 있겠나. 정치는 말로 하는 게 아니라 진실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며 쐐기를 박았다. 대회장에는 친노계 유력 대선주자인 문재인 상임고문과 문성근 전 당 대표대행도 참석해 1000여명이 모인 현장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이 후보에 앞서 연설한 김 후보는 이날도 이 후보의 계파 담합 정치를 비난했다. 김 후보는 이 후보를 겨냥해 “친노라는 이름으로 정치를 하면서 밀실에서 반칙 정치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가장 노무현답지 않은 정치를 하면서 마치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는 것처럼 구는 걸 보면 기가 찰 일이라고 노 전 대통령의 친구가 탄식하는 걸 들었다.”고 공격했다. 문 상임고문도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3위를 한 우 후보는 “지금 민주당에 바보 노무현 정신이 어디 있나. 계파정치는 노 전 대통령이 그토록 청산하고자 했던 낡은 정치 아니냐.”고 이 후보를 압박했다. 후보들은 부산이 노 전 대통령의 정치 활동 근거지였던 점을 감안해 부산 시민과 대의원 표심을 얻기 위해 오전 부산MBC 방송토론회에 이어 합동연설회에서도 ‘노무현 마케팅’을 너도나도 활용했다. 김 후보는 “2002년 노무현 대선 후보의 지지율이 14%로 떨어져 사람들이 떠날 때도 난 오히려 노 후보를 도왔다.”며 강조했다. 정동영계 이종걸 후보는 “바보 노무현이 그립다. 계파 정치는 거짓 정치다. 노 전 대통령은 거짓 정치에 앞장서 싸웠다.”며 이 후보를 에둘러 비난했다. 추미애 후보는 “계파 없이 정도 정치를 해왔다. 제2의 노무현이 되겠다.”고 호소했다. 강주리·부산 송수연기자 jurik@seoul.co.kr
  • 김한길, ‘친노강세’ 울산서 이해찬 꺾다

    김한길, ‘친노강세’ 울산서 이해찬 꺾다

    김한길 민주통합당 당권 후보가 20일 민주당 6·9 전당대회의 개막전인 울산 지역 대의원 현장 투표에서 친노무현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유력 당권 주자 이해찬 후보를 꺾고 1위로 올라서는 대이변을 연출했다. 이 후보는 국회 환경노동위원장 출신의 5선 추미애 후보, 486(40대·80년대학번·60년대생) 그룹의 대표 주자인 우상호 후보에 이어 4위를 기록했다. 울산 등 영남권 대의원 표를 싹쓸이해 초반 주도권을 잡으려던 이 후보의 대참패라는 분석 속에 향후 경선 판세는 예측불허의 대혼란 속으로 빠져드는 분위기다. ●이해찬 ‘영남권 싹쓸이 전략’ 대패 민주당은 이날 울산 남구 상공회의소에서 울산시당 대의원 대회를 열고 대표와 최고위원 등 당 지도부를 선출하는 민주당 전대의 첫 지역순회 대의원 현장 투표를 진행했다. 투표에는 울산 지역 대의원 총 221명 가운데 88.2%인 195명이 참여했다. 무난한 1위를 예상했던 이 후보 대신 김한길, 추미애, 우상호 후보가 먼저 발표되자 대회장 곳곳에서는 환호와 탄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김한길, 反이해찬연대 선두 각인 ‘반(反)이해찬’을 외쳤던 비(非)노계 김 후보(103표)와 이 후보의 표차는 55표로, 이 후보가 받은 48표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 복수노조 허용 등 ‘노동법 개정안’ 처리로 당내 징계를 받았던 추 후보가 높은 인지도와 대중성을 바탕으로 2위로 올라선 것도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3위를 차지한 우 후보는 ‘올드보이’ 느낌의 후보들 사이에서 젊은 대표 후보로서 가능성을 보여 줬다는 평가다. 이 후보의 패배를 놓고 당 안팎에서는 친노계가 주도한 공천 및 총선 패배에 대한 ‘반성 없는 독주’에 대한 심판이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 후보가 ‘대안부재론’을 언급하며 박지원 원내대표와 ‘대표-원내대표’를 나눠 갖는 ‘역할분담론’을 제안한 데 대해 나머지 7명의 후보들이 “당원과 국민을 우습게 아는 담합”이라고 비판한 것이 표심을 움직였다는 분석이다. 조직세가 약한 김 후보가 이 후보와의 대결에서 큰 표차로 승리한 것도 그가 ‘반이해찬’ 연대의 선두주자임을 각인시키는 전략이 주효했다고 보고 있다. 실제 김 후보는 이날 현장 연설에서 이 후보를 겨냥해 “이·박 연대라는 담합 때문에 당이 위기에 빠졌다. 가장 센 계파의 좌장이 쓴 각본대로 된다면 당은 죽는다.”고 비난했다. 우 후보도 “‘짜여진 각본대로 전대를 치르려는 세력’과 ‘각본 없는 드라마를 만들려는 세력의 대결’이다. 짜인 각본대로 가면 국민을 감동시킬 수 없다.”고 가세했다. 추 후보는 “각본대로 짜고 치는 판이 된다면 지난 총선과 뭐가 다르겠느냐.”고 비판했다. 범친노인 정세균계 강기정(5위) 후보로의 표 분산을 막지 못했다는 ‘힘의 한계’도 지적된다. ●추미애·우상호도 선전 2·3위 이 후보 측은 “선거운동 기간이 짧았고, 대의원이 200여명에 불과해 특정 후보 측이 적극 선거운동을 벌인 결과일 수도 있어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지만 친노계의 구심점인 21일 부산 경선과 박 원내대표가 있는 22일 광주·전남 경선에서 압승해야 한다는 부담을 떠안게 됐다. 당초 ‘울산~부산~광주·전남’으로 이어지는 대의원(30%) 투표 초반 판세는 대세론을 따라가는 ‘밴드왜건 효과’를 야기해 70%를 차지하는 당원·시민 선거인단의 표심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어 후보들은 기선 제압에 총력을 기울였다. 지도부 탈락 가능성이 높은 하위권으로 처진 손학규계 조정식 후보, 정동영계 이종걸 후보는 공천 계파 배제 등으로 인한 세력 약화를, 문용식 후보는 원외 인사의 낮은 인지도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 준 결과라는 게 중론이다. 강주리기자 jurik@seoul.co.kr
  • [미주통신] 진기한 스파이 초소형 비밀무기 첫 공개전시

    [미주통신] 진기한 스파이 초소형 비밀무기 첫 공개전시

    제임스 본드 주연의 007 영화 시리즈에서 가끔 등장했던 미소 냉전 시대 스파이들이 사용했던 실제 비밀무기들의 첫 전시회가 18일(현지시각) 뉴욕 맨해튼에서 열려 화제가 만발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 등이 전했다. 이번에 전시되고 있는 비밀무기에는 소련 KGB가 사용했던 독침용 우산, 치약처럼 위장한 독극물, 동전으로 위장한 살인용 독 앰풀, 가방으로 위장한 무선 장치 등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가 사용했던 스파이 비밀무기들이 즐비하게 전시되고 있다고. 특히, 그중 1960년대 체코슬로바키아 정보원이 당시 체코 주재 미 대사에게 선물한 수제화 구두(사진)는 사실은 구두 바닥에 도청장치를 한 정교한 비밀 병기였다는 것이 밝혀져 시선을 끌었다. 또한, 이번에 전시된 초소형 미녹스 카메라는 미 정보당국이 당시 소련의 이중정보원에게 제공한 것으로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시 이 카메라를 이용하여 전쟁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소련의 핵심문서를 촬영해 미국에 넘김으로써 당시 존 에프 케네디 미 대통령이 전쟁 불사라는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번에 공식 전시회를 주관한 전직 미 정보관계자는 주로 과거에 사용하던 스파이 무기들이 전시되었지만, 그 원리는 지금의 최첨단 스파이 비밀 병기들과 같은 것이라고 역설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공개 전시된 스파이 비밀무기 사진 보기 다니엘 김 미국 통신원 danielkim.ok@gmail.com
  • 日 우주산업 미래 아리랑3호에 달렸다?

    日 우주산업 미래 아리랑3호에 달렸다?

    일본이 다목적 실용위성인 아리랑 3호 발사에 비상한 관심을 쏟고 있다. 아리랑 3호가 일본 H2A로켓에 실려 발사되기 때문이다. 발사 성공 여부에 일본 우주산업의 미래가 달려 있는 셈이다. 아리랑 3호는 환경, 기상, 해양, 지질, 지도제작, 임업, 수자원, 농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용적으로 쓰인다. 서브미터급(해상도 1m 이하) 광학카메라를 탑재한 초고해상도 위성이다. 1999년 처음 발사된 아리랑 1호는 해상도 6.6m(정상적인 상태에서 6.6×6.6m 크기의 지표상 물체를 식별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으나 3호는 70㎝이다. 아리랑 3호는 2018년까지 39억 달러(약 4조 5000억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세계 초고해상도 위성영상 시장에 진입할 것으로 기대된다. 앞서 아리랑 2호는 2007년부터 위성영상 시장에 진출해 타이완, 아랍에미리트(UAE), 유럽우주청 등에 2200만 달러(약 235억원)의 직수신권 판매와 약 26억원의 개별영상 판매 실적을 올렸다. 아리랑 3호를 실어 발사하는 H2A은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이 제작한 길이 53m, 지름 4m의 2단 로켓이다. H2A 첫 발사는 2001년 8월 29일 이뤄졌으며 지금까지 총 20회 발사했다. 그중 19번의 발사를 성공시킨 성공률 95%의 로켓이다. 아리랑 3호는 21번째 발사되는 H2A 로켓에 실린다. 아리랑 3호는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이 처음으로 외국으로부터 발사 수주에 성공한 위성으로, 일본 우주 비즈니스의 출발점이다. 가고시마현 다네가시마 우주센터로 향하는 길목에는 한국과 일본의 국기가 사이 좋게 걸려 있어 양국의 첫 번째 협력을 축하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은 아리랑 3호의 발사를 계기로 일본 로켓의 우수성을 알려 글로벌 시장에서 우주 비즈니스를 강화하려고 한다. 일본이 H2A와 개량형 로켓인 H2B를 안정적으로 생산하기 위해서는 연 네 차례 정도의 발사가 필요하다. 올해 이후 계획은 정부와 일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로부터 위탁을 받은 연간 2∼3기 위성 발사가 전부다. 수지를 맞추려면 외국으로부터 연간 1∼2기 정도의 수주가 있어야 하지만 유럽, 미국, 러시아 등 위성 선진국과의 경쟁이 치열해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한편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JAXA 국제부의 쓰지노 데루히사 특임담당은 “한국의 로켓 기술은 일본의 1960년대 수준이지만 위성 기술이 우수해 (아리랑 3호의) 관측기기에 국산 기술을 주입했다.”고 말했다. 도쿄 이종락특파원·아리랑3호 공동취재단 jrlee@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패션 인생 60년 기념전 여는 디자이너 노라노

    [김문이 만난사람] 패션 인생 60년 기념전 여는 디자이너 노라노

    세월의 옷 단추를 잠시 풀어보자. 1956년 11월 29일 오후 2시 서울 소공동 반도호텔 그랜드볼룸. 경쾌한 피아노 선율이 울려 퍼지자 관객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피아노 연주는 ‘마포종점’ ‘초우’ ‘비 내리는 호남선’ 등 수많은 곡을 히트시킨 젊은 작곡가 박춘석씨가 맡았다. 이어 원피스 코트 앙상블 등을 입은 모델들이 등장했다. 관객들은 숨을 죽인 채 처음 보는 광경에 시선을 집중했다. 1부가 끝나고 2부에서는 바이올린 선율 속에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나온 여인들의 모습에 관객들은 또다시 흥분했다. 마지막으로 그해 최고의 여배우상을 수상한 조미령씨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천천히 등장했다. 관객들의 환호가 이어졌다. 모델들이 나란히 무대에 섰다. 사회자가 “오늘의 주인공 디자이너 노라노!”라고 외쳤다. 그러자 관객들은 기립 박수로 답하며 많은 꽃다발을 주인공에게 안겼다.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열정 하나로 60여년 동안 단 한번도 쉬지 않고 오롯이 패션 인생을 살아온 디자이너 노라노(84)씨. 그에게는 항상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국내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 최초의 해외 유학 디자이너, 최초로 패션쇼를 연 디자이너 등이다. 또한 그의 아버지 노창성은 최초의 방송인이었고 어머니 이옥경 또한 최초의 아나운서였으니 말 그대로 ‘최초’라는 수식어를 연이어 만들어낸 특별한 집안이다. ●“50년대 옷 딸에게 물려줄 것”에 큰 감명 노씨는 요즘 또 하나의 ‘최초’를 준비하고 있다. 1952년 서울 명동에 의상실을 처음 연 후 올해로 60년이 되는 것을 기념해 오는 23일부터 다음 달 6일까지 강남구 신사동 호림미술관 JNB갤러리에서 ‘Nora Noh의 LA VIE EN ROSE展’(노라노의 장미빛 인생전)이라는 전시회를 연다. 패션계에서는 60년 동안 의상실을 운영하면서 한번도 빠짐없이 계절마다 패션쇼를 하고 60주년 행사를 갖는 디자이너는 세계에서도 매우 드문 사례라고 의미 부여를 한다. 이번 행사는 지난 세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여배우들과 다양한 분야의 VIP 고객들로부터 증정받은 노씨의 작품으로 채워질 예정이다. 또한 작품을 연도별로 전시해 195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의상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아울러 노씨의 작품을 오마주한 현재의 내로라하는 스타일리스트, 포토그래퍼 및 패션 디자이너들의 작품 등도 다수 참여한다. 이번 전시는 유명 스타일리스트 서은영씨 등에 의해 기획됐다. 한국 패션의 뿌리를 찾아보자는 취지에서 준비됐다. 특히 노씨가 이번 전시를 위해 지난 4년 동안 과거의 여배우 등 국내외에서 자신의 옷을 소장한 사람들을 만나 시대별로 인기를 끌었던 의상을 다시 수집해 한곳에 모은다는 점에서 각별하다. 84살이란 나이를 뛰어넘어 영원한 현역으로 살아가는 노씨를 지난 14일 오후 서울 강남의 의상실에서 만났다. 검은 커튼 레이스 재킷 차림이 인상적일 만큼 젊어 보였다. 까만색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더니 “원래 흑색이라는 것은 상복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여성에게는 자주 독립을 상징한다.”며 웃었다. 평생 열정과 도전정신으로 살아온 자신감을 녹여낸 듯한 옷차림이라고나 할까. 물론 예나 지금이나 자신이 직접 옷을 만들어 입는다. 노씨가 앉은 자리 뒤편에는 하얀 웨딩드레스가 걸려 있었다. 궁금해하자 “1959년 미스 코리아 오현주씨가 미스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베스트 드레서 상을 받을 때의 의상이다.”라면서 “이번 전시에 선보이려고 그대로 재현해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연스럽게 전시 얘기부터 나왔다. “젊은 친구들이 (전시를) 하는 거고, 저는 단지 지난 60년 동안 만들었던 옷들을 다시 제공받아 전시장에 건네주는 역할을 할 뿐이지요. (잠시 생각하더니) 사실은 나이 80이 넘게 되자 60년 세월에 대해 뭔가 현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여러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편하고 참 오래 입었다’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50년 전에 제가 만들었던 옷을 아직도 갖고 계신 분들이 많더라고요. 그분들에게 보답하는 뜻에서라도 어떤 행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이러한 노씨의 생각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에서 그 뜻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50년 전 약혼식 때 옷을 입었던 사람과도 연락이 닿았고 1962년 당시 양단 코트를 가지고 있다는 재미교포에게서도 소식이 왔다. 1950년대에 만든 한복 느낌의 ‘아리랑 드레스’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해외 교포에게는 여러 번 사정해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빌려 오기도 했다. 특히 영화 ‘로마의 휴일’이 유명했을 무렵 배우 엄앵란씨가 즐겨 입었던 오드리 헵번의 원피스나 1960년대 TV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나옥주, 사미자, 윤소정, 정혜선 등 유명 스타들이 드라마를 통해 입었던 의상도 어렵지 않게 제공받았다. 또한 이인호 전 러시아 대사가 부임지에 갈 때 입었던 의상도 기증받았다. “해외에 계신 어떤 분은 아리랑 드레스를 지금도 매년 8·15 때 입고 있으며 죽을 때까지 간직했다가 꼭 딸한테 물려주겠다는 얘기를 해주셔서 너무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두 400벌 정도 모았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특색 있는 것 위주로 60벌 정도 선보일 예정입니다. 영화배우, 음악가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한 분들이 아직도 옷을 갖고 있어 참 고맙더군요. 저도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엄앵란씨가 제 옷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번에 새삼 알게 됐습니다(웃음).” ●“옷은 잘 절제된 멋 나와야”가 신념 이어 의상의 시대적 변천사와 관련해 잠시 언급한다. “1950년대는 아시다시피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안 되던 시절이었지요. 영화나 연주 의상, 쇼 의상, 창극 의상 등을 제작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유행에 따라갔습니다. 1960년대에는 TV드라마가 생겨나면서 의상 협찬을 통해 제 옷이 대중들에게 다가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성복 시대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에는 여성들의 활동이 많아지면서 투피스 형태의 여성용 정장이 생겨나 인기를 끌었지요.” 노씨는 이 무렵 미국 뉴욕의 고급 백화점 ‘삭스’에 진출해 ‘메이드 인 코리아’ 패션을 해외에 알리기도 했다. 아울러 뉴욕에서의 패션쇼 등을 통해 현지 언론으로부터 극찬을 받기도 했다. “아마 2000년 봄이었지요. 미 브라운대학 초청으로 강의를 할 때였습니다. 참석자 대부분이 교수였는데 제가 1940년대에 미국에서 패션 공부를 했던 일, 1980년대 뉴욕 7번가에 진출해 한국산 실크를 널리 알리며 외화를 벌어들인 일 등 50년을 한결같이 패션 디자이너의 길을 걸어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옷이란 잘 절제된 멋이 나와야 한다는 신념을 강조했더니 다들 많은 박수로 대접을 해주더군요. 특히 50년 외길을 걸어온 점에 아주 놀라워했습니다.” 이때 미국의 패션업계에서는 “노라노는 한국에서 패션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창조한 여인이며 그녀의 디자인은 세계적으로 퍼졌다.”고 높이 평가했다. 노씨는 일제강점기였던 1928년 3월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서 유복한 집안의 차녀로 태어났다. 어릴 적에는 혼자 된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는 과거에 급제한 뒤 영어 공부를 해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 이은의 영어 교사 역할을 맡기도 했다. 아버지는 1927년 초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을 개국한 공로자이며 일본어를 할 줄 알았던 어머니는 방송국 아나운서로 일하게 됐다. 이처럼 일찍부터 ‘멋을 내는 가풍’의 외가 쪽이나 부모들을 보고 자란 덕분인지 자연스럽게 패션 디자이너의 끼를 타고 났다. ●“놀고먹는다는 것은 죽음 기다리는 것” 경기여고 재학 시절에는 책을 무척 좋아하는 문학 소녀였다. ‘이와나미 문고’라는 일본의 문고판 책은 거의 다 읽다시피 했을 정도다. 그러다 고 3때 일제 징집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결혼했으나 얼마 안 가 이혼하게 되면서 원래의 끼를 살려 ‘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됐다. 광복 직후 외환은행 설립을 위해 한국에 온 미국인 스미스의 비서로 일하면서 가끔 각국의 대사들과 장관들이 참석하는 파티를 도울 때 직접 드레스를 만들어 본 것이 계기가 돼 스미스의 추천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됐다. 이후 미국과 한국, 프랑스와 일본 등을 오가며 토종 한국 패션을 세계에 알렸다. 학창 시절 읽었던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에서 주인공 ‘노라’가 집을 떠나 자신의 인생을 찾듯 노씨 역시 ‘노라’라는 이름을 갖고 새 인생을 펼쳤던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60년 동안 쉼 없이 일을 할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첫째는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계속했고 둘째는 어떤 목적이나 욕심을 두지 않았으며 사람 만나는 것을 워낙 좋아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울러 “산다는 것은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이고 놀고먹는다는 것은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도전은 하되 욕심을 버렸기에 오늘날까지 행복하게 살고 있다. 열심히 하다 보면 누군가에 의해 한 단계 한 단계 올라설 것”이라고 말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노라노 디자이너는 본명은 노명자다. 1928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여고를 졸업했다. 1947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프랭크 왜건 테크니컬 칼리지’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6·25전쟁이 한창일 때 피난지인 부산에서 쇼 의상 등을 만들었고 1952년 서울 명동에 의상실 ‘노라노의 집’을 열었다. 이후 패션의 중심지 파리로 건너가 ‘아카데미 줄리앙 아트스쿨’에서 수학한 뒤 1956년 서울 반도호텔에서 한국 최초의 패션쇼를 열었다. 1966년에는 최초의 기성복 패션쇼를 열었고 1970년부터 1973년까지 파리 프레타포르테 패션쇼에 참가했다. 1974년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패션쇼를 열었다. 이후 매년 계절마다 국내에서 패션쇼를 여는 등 60년 동안 왕성한 활동을 계속해 오고 있다. 주요 수상으로 세계 패션그룹 ‘패션대상’(2000) 등이 있다.
  • [최동호 새벽을 열며] 사랑의 시인 김수영 사전

    [최동호 새벽을 열며] 사랑의 시인 김수영 사전

    5월 8일 김수영 시비를 찾아 도봉공원을 향했다. 현대시 젊은 연구자들과 함께 10년의 작업을 거쳐 김수영 사전을 마치고 난 다음 현장을 한번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오후 늦게 도봉산을 향하니 초여름을 연상시키는 무더운 기운이 느껴졌다. 오래전과는 주변상황이 크게 달라져 시비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등산객에게 물어보아도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고 등산로 어디에도 표지가 없었다. 도봉산서원의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었는데, 굽은 산길을 오르다 보니 시비는 공사장 펜스 앞에 초라하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등산로 한구석을 지키고 있는 시비가 쓸쓸해 보였다. 2003년 가을 시작된 김수영 사전은 연인원 80명이 넘는 인원이 작업에 참여해 30여 차례의 기획 편집회의를 열었고 10차례의 교정을 보아 지난달 출간되었다. 한국현대문학 연구를 보다 실증적 차원에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연구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기초와 뿌리에 대한 객관적이며 실증적인 연구 없이 이루어지는 문학 연구가 외래의 비평 방법에 좌우되거나 감성적인 비평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실증적 연구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화려하지도 않아 일반적으로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사명감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 사전작업이다. 이 사전의 표제어는 모두 5220개이며 대상 작품은 모두 176편이다. 사전을 통해 시어 활용의 특징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김수영은 부정어 ‘않다, 없다, 안, 없어, 아니, 말다, 못하다, 안한다’ 등의 시어를 98편의 시에서 가장 많은 250차례 사용했다. 이는 김수영이 지닌 부정의 정신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긍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사랑’이란 시어를 16편의 시에서 48차례나 사용하고 ‘좋다’를 32편에서 41차례 사용했으며 ‘웃다’를 17편에서 33차례 사용했다. 그는 참여시를 대표하는 부정의 시인으로 알려졌지만 보다 근원적으로 그는 사랑의 시인이요, 긍정의 시인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사람’이란 시어도 56편에서 92차례 사용했는데, 이는 그의 사랑이 사람에 대한 것이었으며, 이는 사회현실에 대한 그의 비판이나 부정이 사람을 사랑하는 긍정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고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게 한다. 감각인지어 계열의 시어는 ‘보다’가 72편에서 123차례 사용됐으며 ‘보이다’가 22편에서 34차례 사용됐다. 이는 그가 사물이나 현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뜻하며, 동시에 피동적인 방식이 아니라 능동적이며 적극적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려 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김 수영은 20세기 후반 한국현대시를 대표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1960년대 김수영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1970년대의 김지하의 풍자적 담시나 1980년대의 신경림의 민중시를 생각할 수 없다. 어휘 활용사전에서 실증적으로 입증된 것처럼 그는 현실을 부정적,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사랑과 긍정에 도달하는 시적 인식의 과정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시인이다. 이는 그의 시를 바라보는 종전 시각의 대전환을 의미한다. 명편으로 알려진 ‘풀’이나 ‘사랑의 변주곡’ 등은 그가 보여준 부정의 정신이 사랑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시대에 대한 그의 부정과 비판은 사랑과 긍정이라는 더 큰 목표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수영은 4·19혁명의 시인이다. 그는 4·19의 영광과 좌절을 경험한 1960년대 시의 한 정점에 도달했다. 그는 자유에서 피의 냄새를 느끼고 자유의 억압에서 굴욕을 느꼈던 시인이었다. 오는 6월 16일은 그의 44주기이다. 이를 기념하여 작은 무대가 마련되어 이 사전을 헌정하는 것은 물론 한 시대의 첨단에서 고투했던 그의 영혼을 위무하는 자리가 있었으면 한다. 김수영 시비가 지키고 있는 도봉산의 서늘한 기운이 방향감각을 상실한 21세기 한국의 현대시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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