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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사가 걸어온 길] 1.바람의 시인, 예술과 삶을 말하다(하)

    [명사가 걸어온 길] 1.바람의 시인, 예술과 삶을 말하다(하)

    시인 고은(80)을 이야기하면서 그의 예술과 문학론, 사랑과 술을 빼놓을 수 없다. 한 30대 문학평론가는 고은에 대해 “선생은 지리산 자락 깊은 곳에 핀 이름 모를 꽃의 존재에 대해서도 경남의 꽃, 대한민국의 꽃, 아시아의 꽃, 지구의 꽃, 태양계의 꽃, 우주계의 꽃으로 인식하고 들여다보는 확장된 시각을 이미 1960~70년대부터 드러낸 것이 특징”이라고 평했다. 지금이야 당연한 시각인 것 같은데 당시에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시에 대한 고은의 욕망은 이런 것이다. “이 세상이 끝나야 끝나는 시. 아니 모든 멸망 뒤에 다시 이어지는 시. 우주 허공계의 시. 나라는 존재 따위 다 사라져 버린 영구 부재의 시. 시. 시.시. 미치겠다.” (1974년 9월 24일 일기) 고은이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활동을 강화할 때 그의 문우이자 술친구인 민음사 박맹호 사장과 문학과지성사 김병익 사장은 ‘문학을 지켜라. 정치의 자승자박은 안 된다’라며 찬성하지 않았지만, 고은은 자신의 방식대로 문학을 끌어안았다. “시대에 지지 말자./ 시대를 팽개치지 말자./ 시대는 가고 문학은 남는다./ 문학은 그가 태어난 시대를 떠난다.”(1974년 12월 23일 일기) 세상이 흰 눈으로 뒤덮인 지난 연말, 경기도 안성 자택 서재에서 고은은 “내 운명은 시다. 평론도 소설도 써봤지만, 시로서 내 삶을 완결해야 한다. 이제 막 새로운 시 세계가 열리기 시작했다. 다른 시들이 들어오고 있다. 시인으로서 끝 무렵이 아니라 시작 무렵이다. 나에게는 종결이 없다”라고 말하며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1958년 등단한 고은은 첫 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 1960년)을 시작으로 41살까지 6권의 책을 냈다. 그의 저작활동은 1980년대에 폭발적으로 왕성해져, 1986년 1권을 시작으로 2010년까지 24년 동안 만인보 시집만 30권을 냈다. 외국에 고은이 ‘만인보’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이유다. 만인보 외에 시집과 소설, 평론집, 산문집, 시선집, 여행서, 동화집, 동시집, 전기, 자서전, 편집한 책까지 합치면 150여권이 된다. 2013년 새해 벽두에는 1973~1976년까지 일기를 묶은 ‘바람의 사상’과 평론가 김형수와 대담한 ‘두 세기의 달빛’을 한길사에서 펴냈다. 대담집은 앞으로 7~8권 더 나올 예정이어서 고은이 낸 책은 조만간 160여권을 훌쩍 넘을 것이다. 시인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고은은 “모국어로 시인이 되어야 할 운명인 사람인데, 소학교에 입학하니 조선어 사용이 금지됐다. 모국어를 상실함으로써 배움을 시작했다”고 토로한다. 식민지 시대에 태어난 죄다. 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밤이면 머슴 대길에게 비밀리에 한글을 배웠다. 그렇게 배운 한글 덕에 해방되자 3학년에서 4학년으로 월반했다. ‘국문을 아는 사람 손들어’라고 했을 때 고은이 유일했단다. 흔히 그의 프로필에 종교는 불교로 나와 있다. 20대에 10년을 승려로 살았으니, 으레 그리 짐작한다. 그러나 흰 종이에 육필로 시를 적어나가는 고은은 “나에겐 백지가 종교다. 다른 종교가 들어올 여지가 없다. 완벽한 백지가 있으니까, 다른 완벽함이 필요없다”고 말했다. 삶은 힘들어지고, 문학하는 사람들은 늘고 있다. 고은은 “한국전쟁 당시 사람들 속에 진짜 시적인 것이 있었다. 그 시대를 견뎌온 힘은 강력한 정서, 시적인 품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때 시가 더 풍부했다. 시단의 시적인 성취나 완성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사람들은 시와 함께 있고 싶어했다. 지금은 시와 함께하는 사람들은 줄었는데, 오히려 시인들은 늘어나고 있다. 그 시인들이 시적인 품성이 갖춰져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역설적이다”고 현상을 분석했다. 그는 오히려 예비 작가나 기성 작가들에게 조언했다. “자아의 골짜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작가들이 많다. 산 너머 이웃마을의 소식이 전혀 들리지 않는 자아의 골짜기에서만 머물지 말고 나와서, 세상을 돌아보고, 바라보고 해야 한다. 현대인의 특징은 시력이 약해져, 먼 곳을 보지 못한다. 인류가 짐승일 때는 멀리까지 바라봤다. 문명 속에서 익숙해진 시야라서, 아파트 단지의 건너편 창문을 바라본다. 시야가 연장되지 않고 누에고치처럼 내면에 둥지를 튼다. 그러면 어떤 때는 자신에 충실하지만, 자칫 자폐가 된다. 예술은 끊임없이 열려 있어야 한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삐걱삐걱’ 소리가 들려야 하고, 뜨거운 숨결이 밖으로 나가고 밖의 차가운 공기가 들어와야 한다. 안 그러면 사막이 돼 양쪽이 다 죽어버린다.”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간사를 맡아 ‘참여파’는 물론이고 ‘순수파’까지 101명을 그러모아 ‘101 선언’을 추진한 저항시인다운 문학론이다. 그렇다고 그가 정치적이었느냐? 1974년 12월 27일의 일기를 보자. “문학은 비겁한 것인가. 문학은 현실에 대해, 힘에 대해, 이렇게밖에 존속될 수 없는 것인가. (중략) 절대로 권력에 굴복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그런 일이 있게 되면 우리는 팔 하나씩 잘라버려야 한다. 자유실천문협은 한국문협, 자유문협, 그리고 한국문인협회의 그것일 수 없기 때문에 현대 한국문학사를 새로 쓰는 문학의 운동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문학이 정치의 도구로 전락하는 일도 경계할 것이다. 문학은 문학으로 끝난다.” 지금은 하회탈 같이 속탈한 웃음을 짓는 고은이지만 1951년 교사시절이나 승려로 지낸 시절의 사진은 자의식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여간 부담스러운 얼굴이 아니다. 고은은 “고비와 극한을 많이 경험해서 그렇다. 마음의 평화는 인생의 후반기, 지금부터 한 20여년 전에서야 얻었다”고 했다. “내 마그마는 마음의 지하에서 여전히 타고 있는데, 지층까지 올라오지 않도록 달래놓고 유보시키고 하는 것이다. 어느덧 내 무의식의 일상이 지하의 마그마를 노출시키지 않도록 조절하고 달래주고 있다. 나는 본능의 신성성을 인정한다. 본능은 천하고 나쁜 것이 아니라 아주 신성한 것이다. 그것을 내 규범에 의해 억압하면 내가 싫어한다. 그것이 나의 자연이다. 불이 나의 친구다. 그러니까 ‘얘가 덜 필요한가보다’ 하면 자기가 물러나주고, 필요한 듯싶으면 기꺼이 다가오고 그래준다.” 본능의 신성성을 높이 평가한 덕분인지 고은의 여성편력은 화려했었다는 것이 문단의 평가다. 그러나 그는 1974년 9월 5일에 만난, 당시 덕성여대 강의를 나가던 15세 연하의 이상화(66·중앙대 영문과 교수)를 만난 뒤로 사랑에 빠졌다. 이 즈음 고은은 “한 달도 안 됐는데 결혼을 생각해야 할 처지가 되어가고 있다”고 일기에 써놓았다. 결혼식은 만난 지 약 10년 만인 1983년에야 했다. 고은의 나이 50살 때다. ‘생활은 문학의 무덤’이라던 고은의 부인 사랑은 지극하다. 2008년 고은이 그림 전시를 한 뒤로는 생일이 되면 고은 부부는 그림을 그려 생일선물을 대신한다. 문학평론가 권영민은 “결혼 이후 성실한 가장으로 살았고, 특히 딸을 얻은 뒤로 우주를 얻은 듯 기뻐했다”고 회고했다. 올해 정년을 맞는 부인 이상화 교수는 고은의 통역을 자청해 왔다. 흔히 전문통역사들이 외국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고은의 발언을 풀어 설명한다면, 이 교수는 그러지 않는다. 이 교수는 “고은 시인은 발언 자체가 시다. 시를 산문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고은과 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친구’이다. 고은은 “사람들이 그렇게 술 마시며 언제 시를 쓰느냐고 묻지만, 나는 일을 다 털고 난 뒤에 술을 마신다. 일을 했으니 나를 방임하고, 해방시켜줘야 한다”고 변명 비슷하게 말했다. 그는 젊은 시절 황홀했던 주막을 사랑했다. 그렇다면 주량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주량은 내가 측정한 적이 없다. 가장 오래 마신 기록은 이틀을 잠 안자고 계속 마신 적이 있다. 서너 명이 마시다 다 떨어지고, 최종적으로 둘이 대작했는데 내가 졌다. 고은을 이긴 사람이 누구냐고? 다들 죽었다”라며 쓸쓸한 표정으로 입을 꽉 다물었다. 고은에게 술은 대부분 “대취”와 “뻗었다” 사이에 있었다. 맑은 소주를 좋아했다. ‘대취’ 무렵의 그의 술친구를 직함을 생략하고 순서 없이 대충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박맹호, 박성룡, 김현, 이청준, 이어령, 남재희, 한승헌, 김병익, 황석영, 손소희, 이시영, 김승옥, 조해일, 백낙청, 김동리, 이문구, 서정주, 최순우, 조세형, 김현종, 최인호, 김기영, 신경림, 염무웅, 권영민, 민음사 여직원 3명 등등. ‘황홀한 주막’은 서울 종로구 청진동 가락지와 열차집, 신촌 역전 술집, 낭만, 서린동 술집 등등으로 무교동과 청진동, 광화문 언저리다. 그가 기억하는 최고의 술자리는 1960년대 어느 날 새벽 1~2시에 혼자 마시던 술이다. 잠든 세상에서 비장한 비극성을 즐기며 “나는 세상을 숙직하는 자다. 세상을 지키는 취기다”라며 마셔댄 것이다. 연세도 있는데 술을 끊을 것인가? “술을 끊으면, 수사자에게 수염이 없는 것 같다, 원숭이에게 꼬리가 없는 것 같다, 조가비에게 진주가 없는 것 같다. 이별하지 말고 작별을 했다가 다시 만나야지. 옛날 삼거리 주막집에서 나그네들이 만나서 술 마신 뒤 언젠가 다시 만납시다 하면서 손을 흔들면서 헤어지듯이 그래야지. 술에게 가혹하게 굴면 안 된다. 얼마나 헌신적으로 잘해줬느냐. 술이 운다. ” 글 사진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통증 참으며 죽는가보다 했는데 내게도 척추·관절염 치료 행운이…”

    “통증 참으며 죽는가보다 했는데 내게도 척추·관절염 치료 행운이…”

    혹한이 매서운 지난 9일 오후 2시.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서울나은병원에서 윤광원(가명·66·경기 수원시 팔달구)씨가 수술대에 올랐다. 윤씨는 3년 전부터 고질인 척추디스크와 척추관협착증이 심해져 아예 바깥 출입조차 못하고 지내는 형편이었다. 한국전쟁 와중이던 여섯 살 때 전쟁 고아로 내버려진 윤씨는 이후 60년을 가족 없이 살아온 독거노인. 평생을 홀로 살아 일점 혈육도 두지 못한 그는 건설현장 일용직 등으로 어렵게 생계를 꾸려 왔다. 그러다 15년 전에 허리를 크게 다치고도 제대로 치료를 못 받은 게 화근이 됐다. 괜찮다 싶던 허리가 5∼6년 전부터 말썽을 일으켰다. 정부 보조금에 의지해 사는 그가 선뜻 병원을 찾는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수백만원이나 드는 수술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서였다. 도리 없이 참고 지냈지만 갈수록 고통이 심해졌다. 급기야 왼쪽 무릎 윗부분과 장딴지에 마비증상이 왔고, 채 10분도 걷지 못해 길바닥에 주저앉아야 했다. 그런 그에게 믿기지 않는 희소식이 전해졌다. 서울신문과 서울나은병원이 어려운 이웃을 위해 퇴행성 관절염과 척추디스크 환자에게 최신 줄기세포 치료를 무료로 해주는 공익사업을 펼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웃에게서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뿐이었어요. 물리치료나 통증주사도 안 들어 이대로 죽을 수밖에 없겠더라고요. 빨리 몸을 추슬러 뭐라도 해야 목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는 바로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검사 결과, 척추 상황이 말이 아니었다. 척추디스크에 척추관협착증까지 더해져 의료진들조차 “어떻게 버텨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관절 퇴행으로 무릎 연골도 모두 닳아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다. 상태가 심해 척추 부위에 대한 최소절개 현미경수술과 줄기세포 치료가 동시에 이뤄졌다. 줄기세포란 인체의 다양한 조직으로 분화하는 만능세포로, 이 줄기세포를 정제해 손상된 디스크나 연골에 주입해 새로운 디스크나 연골로 자라도록 하는 최신 치료법이 줄기세포 치료다. 단일질환 치료에만 1800만원이나 들어가는 최첨단 수술법이다. 수술을 집도한 공병준 원장은 “수술 경과는 좋다. 그러나 무릎도 당장 수술이 필요한 상태인 데다 생계 때문에 수술 후 재활이 제대로 이뤄질지 걱정”이라며 “기본적인 재활프로그램은 병원에서 제공하지만 그 후에도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나은병원은 지난해 말부터 나눔의료사업을 시작해 벌써 전국의 저소득층 관절염 및 척추질환자 6명에게 줄기세포 치료 등을 무료로 제공했다. 지난해 12월에 사업을 시작한 이래 전국에서 200여명에 이르는 환자들의 치료 요청이 줄을 이었다. 의료진은 이들을 대상으로 문진을 실시한데 이어 직접 환자를 대면해 치료의 적정성을 살펴 치료 대상을 엄정하게 선별했다. 올해까지 이 같은 방식으로 모두 20명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할 계획이다. 이 병원 남기세 원장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퇴행성 관절염이나 척추질환을 가졌으면서도 병원을 찾을 엄두를 못 내는 의료 사각계층이 생각보다 많다”면서 “치료 의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편이 어려워 방치되고 있는 그분들에게 이번의 나눔의료사업이 작으나마 희망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유사한 질환자들임에도 지금까지 무료 수술 혜택을 받은 환자들의 사연은 제각각이었다. 생활 능력이 없는 남편과 10여년 전에 헤어진 뒤 지적장애(1급) 아들과 3년간 모자원에서 생활하기도 했던 여모(58) 환자가 있는가 하면 올해 아흔여덟으로, 폭력성 치매를 앓아 요양원에도 갈 수 없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고모(61) 환자는 10년 전 교통사고로 골절과 함께 연골이 망가지는 사고를 당하고도 여지껏 변변한 치료조차 못 받고 있다가 이번 나눔의료사업 대상자로 선정돼 관절염 치료를 받았다. 고씨는 “지병인 고혈압이 있는 데다 5년 전에 식당에서 일할 때 허리 골절상까지 입어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었다”면서 “치료를 마치면 남은 삶을 정말 열심히 살겠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양모(63) 환자의 사연도 기구했다. 15년 전에 남편과 헤어진 뒤 두 아들과도 연락이 끊겨 생사조차 모른 채 생활하고 있다. 기초생활연금 30만원이 수입의 전부인 그는 척추디스크가 심각하게 손상돼 그동안 일하던 일용직 일자리조차 잃고 말았다. 40대 때 자궁근종 수술을 받았던 양씨는 이후 고혈압과 고지혈증으로 초기 뇌경색이 온 상태. 병원 측은 그에게 줄기세포치료 외에 척추 신경성형술까지 더해 병마의 고통을 덜어주었다. 양씨는 “좋은 꿈을 꿨는지 내게 이런 행운이 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면서 “몸이 나아지면 어디에서 사는지 모르는 두 아들을 찾아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안양나은병원 한영미 원장은 “치료 대상 환자들이 하나같이 어려운 계층이어서 더 마음이 아팠다”면서 “앞으로도 어려운 이웃들에게 인술을 베푸는 의료인으로서의 소명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서울신문과 척추·관절질환 전문 나은병원은 지난해부터 척추디스크와 퇴행성 관절염을 앓고 있으면서도 형편이 어려워 치료를 받지 못하는 어려운 이웃들에게 검사는 물론 줄기세포를 이용한 수술과 재활치료를 무료로 제공하는 나눔의료사업을 펴오고 있다. 전문 의료진이 치료의 적정성을 가려 1차로 20명의 환자에게 무료치료의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치료는 서울나은병원과 안양나은병원에서 이뤄진다. 무료수술이 필요한 환자는 서울나은병원(02-6714-9556)으로 문의하면 상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심재억 전문기자 jeshim@seoul.co.kr
  • [DB를 열다] 수레꾼 모여들던 광교/손성진 국장

    [DB를 열다] 수레꾼 모여들던 광교/손성진 국장

    지금부터 60년 전 6·25전쟁이 끝날 무렵인 1953년 서울 청계천 광교 근처의 풍경이다. 청계천은 1958년부터 1961년 사이에 복개되었다가 2003년부터 복구공사를 시작해 콘크리트를 걷어냈다. 사진은 복개하기 전의 모습이다. 옛 조흥은행 본점 앞, 현재의 광교 교차로 자리인 광교 일대는 당시에는 수레꾼들이 모여들던 상권의 중심이었다. 사진에도 약방, 음식점, 당구장 등 업소들의 간판이 보인다. 광교의 원래 이름은 대광통교로 광통방에 있는 큰 다리라는 뜻이다. 광교는 복개 공사를 하면서 석축을 창덕궁으로 옮겨 방치하는 등 파괴되었으나 청계천을 복구하면서 파묻혀 있던 구조물들을 발굴하고 석축을 옮겨다 복원했다. 복원된 새 광통교는 차량 흐름을 막지 않기 위해 원래 자리에서 청계천 상류 쪽으로 155m 위치에 세워져 있다. 1410년(조선 태종 10년)에 세워진 광교는 길이 13m, 폭 15m로 크고 튼튼한 돌다리였다. 광교에는 숨겨진 역사가 있다. 태종은 아버지 태조가 총애했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묘인 정릉에 있던 12개의 병풍석을 옮겨다 광교의 석축으로 사용했다. 왕자의 난을 일으켜 강씨 소생의 방석 등 아들 2명을 죽이고 실권을 쥔 태종은 중구 정동에 있던 강씨의 묘도 현재의 정릉으로 이장하고 석물을 훼손한 것이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문화 사랑 진정성 있나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문화 사랑 진정성 있나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는 일본의 민예연구가이자 미술평론가다. 1984년 5월 전두환 정권에서 ‘보관문화훈장’을 추서해 9월에 시상했다. 행정자치부 기록에 훈장 수여 사유는 ‘우리나라 미술품 문화재 연구와 보존에 기여한 공로’로 돼 있다. 1916년 관광차 식민지 조선을 방문했던 26살의 야나기는 일본인들이 고려청자에 꽂혔을 때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을 알아보았다. ‘민예’(민중적 공예)란 단어의 창시자로, 1922년 ‘조선과 그 예술’이라는 책을 펴내 조선 공예의 미학을 널리 알려 나갔다. 1924년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했고, 이조도자기전람회와 이조 미술전람회를 열었다. 일본으로 돌아가서는 도쿄에 일본 민예관을 설립했다. 야나기는 3·1운동이 일어나자 1919년 4월 요미우리신문에 ‘조선인을 생각한다’라는 기고문을 5차례나 실었고, 1년 뒤인 1920년 5월 동아일보에 같은 내용이 실렸다. 당시 일제의 무력 진압을 비판했는데,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비판하지 않았다고 해서 해방 이후 그 순수성을 의심받기도 했다. 일제가 경복궁 안에 조선총독부를 세우고 그 건물을 가린다고 1923년 광화문을 철거하려 했을 때 야나기가 반대해 철거되지 않고 이전만한 일을 두고 ‘조선문화를 사랑한 양심적인 일본인’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야나기는 조선인의 흰옷을 두고 “상복”이라며 “그 민족이 겪은 고통이 많고 의지할 곳이 없는 역사적 경험”을 탓하며 조선의 미를 ‘비애의 미’라고 주장했다. 야나기는 동북아 3국의 예술로 ‘중국=힘=형태’, ‘일본=즐거움=색’, ‘조선=슬픔=선’이라는 도식도 내놓았다. 일제 식민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은 수동적이고 소극적 민족이라는 맥락과 통하는 미학론이다. 서양에 몰입해 있던 일본의 시각에서 조선의 미를 평가했다는 점에서 ‘일본판 오리엔탈리즘’이란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에드워드 W 사이드의 정의에 따르면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위압하려는 서양의 스타일”이니, 동양을 조선으로, 서양을 일본으로 대치하면 딱 맞는 말이다. 그래서 야나기가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인지, ‘양의 탈을 쓴 일본 제국주의의 숨겨진 조력자’인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야나기가 1940년을 전후로 일본 정부에 적극 협력하는 글을 쓰고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까지 야나기에 대해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 일방적으로 칭송하던 태도가 사라지게 된 계기다. 이병진 세종대 일어일문학과 교수와 가토 리에 아이치학원대학 강사 등 한·일 소장학자 9명이 ‘야나기 무네요시와 한국’(소명출판사)을 펴냈다. 논란이 무성한 야나기에 대해 한·일 학자들이 함께 처음으로 연구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언론인 정일성이 2007년에 내놓은 ‘야나기 무네요시의 두 얼굴’(지식산업사 펴냄)에 비교하면 너무 옹호 일색이다. 흔히 한국미의 특징에 대해 ‘무기교의 기교’라든지, ‘소박미’, ‘인공적이지 않은 자연주의’라는 당대의 인식은 야나기로부터 유래했다. 이런 미학은 민예운동을 펼친 야나기가 1941년 발표한 ‘조선 고대미술의 특색과 그 전승문제’라는 논문에서 시작됐다. 한국미에 대한 야나기 식 분석이 아직도 일부 통용되는 것을 두고 식민지 유산을 떨쳐내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그래서 야나기의 이런 조선미학론을 두고 해방 전에는 박종홍(1903~1976)이나 고유섭(1905~1944)이, 1960년대에는 시인 김지하, 1970년대에는 시인 최하림과 미술평론가 최열 등이 강하게 비판했다. 조선에 애정을 갖고 있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애정을 제대로 활용할 사상이 없었고, 조선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비애미’에 대한 대안을 내놓기도 했다. 김지하는 한국의 미를 “비애보다는 약동이, 저항과 극복을 고취하는 남성미”라고 주장했고, 재일 민속학자 김양기는 “백색은 태양으로 천손(天孫)의 증거”라고 제시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이병진 교수는 “이번 책은 야나기에 대한 균형 잡힌 판단을 도와주는 책이라기보다 한·일 학자들이 함께 연구했다는 점을 평가해 달라”고 했다. 이 교수는 “지명관 전 한림대 교수의 ‘아무도 돌보지 않았던 조선의 공예에 주목하고 가치를 부여한 것에 대해 야나기를 평가해야 한다’는 발언에는 동의한다. 그는 이어 “야나기가 1920년대 반제국주의자였던 것만은 확실하지만, 그는 순진한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만주전쟁과 태평양전쟁 등이 벌어진 1940년 전후로 제국주의에 수렴해 간 것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이에 대해 신나경 부산대 강사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운동과 ‘내셔널리즘’이란 논문에서 1940년대 신체제가 형성되자 야나기는 민예운동과 유사하다고 파악해 초기에 정부에 협력했지만, 자신의 이념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고 주장했다. 책의 내용은 대체로 야나기가 받고 있는 제국주의자란 혐의를 벗겨 주고 있다. 독자들이 텍스트를 잘 생각하며 읽어야 하는 지점이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박근혜 정부 대한민국의 과제] (5) 저출산·고령화 해소

    [박근혜 정부 대한민국의 과제] (5) 저출산·고령화 해소

    13년 전인 2000년 ‘고령화사회’(만 65세 이상이 인구의 7% 이상)에 진입한 우리나라는 2018년이면 ‘고령사회’(65세 이상 비중 14% 이상)에 접어들게 된다. 일본이 24년, 미국이 72년, 프랑스가 115년 걸린 ‘고령화사회→고령사회’ 도달을 우리나라는 불과 18년 만에 맞게 되는 것이다. 고령화와 저출산은 동전의 양면이다. 아이를 적게 낳으니 나라가 빨리 늙어 가는 것이다. 저출산, 고령화는 나라를 뿌리부터 쇠약하게 만드는 일종의 재앙이다. 우리나라의 저출산, 고령화 속도는 무섭게 가속도가 붙어 있다. 박근혜 정부가 과거 어느 정부보다도 힘든 싸움을 벌여야 하는 이유다. 서울 동작구에 사는 이석례(59·여)씨는 자녀 셋이 석·박사 과정을 마칠 때까지 온 힘을 다해 뒷바라지했다. 늘그막에 애들 덕을 보겠다고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다들 크고 나면 최소한 노후 걱정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자녀들이 결혼을 하고 나서도 아등바등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회의감에 빠졌다. “자기들 먹고살기도 힘든데….” 허무와 우울이 가슴을 때렸다. 이씨는 글쓰기를 통해 노후를 설계해 나갔다. 대학 문턱을 넘지 못해 배움에 목말랐던 이씨는 1998년 40대 중반에 방송통신대 국문학과에 입학해 10년 만에 졸업장을 받았다. 내친김에 문예창작 석사 학위까지 받은 이씨는 시인 겸 수필가로 등단했다. 한국어 강사, 논술 교사 등의 자격증도 따 요즘은 다문화센터에서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다양한 능력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멋진 할머니’가 되는 것이 이씨의 목표다. 서동진(52)씨는 은행원이었다. 1997년 외환 위기 때 다니던 은행이 퇴출되는 비극을 겪었다. 이후 사업가로 변신한 서씨는 2001년 우리나라의 유자차를 중국의 대형 유통 매장에 입점시키며 ‘수출 유공자’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국산 차를 수출하기 위해 중국에 세운 유통회사를 현지 직원들의 농간으로 빼앗기고 말았다. 법정 투쟁 끝에 관련자들은 형사 처벌을 받았지만 막대한 비용 부담 때문에 회사를 되찾기 위한 민사소송을 포기했다. 2011년 빈손으로 한국에 돌아온 그는 재기를 위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중소기업개발원 등에서 재기를 위한 교육을 받는 한편 중국에서의 사업 경험을 바탕으로 중소기업진흥공단의 리포트 공모전에 응모해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는 “중소기업의 중국 진출을 돕는 데 기여하면서 노후를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은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이 실시한 제2회 ‘8만 시간 디자인 공모전’ 에세이 부문 수상자들이다. 이씨와 서씨가 마냥 행복하기만 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들에겐 최소한 미래에 대한 희망은 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 출생자)가 가구주인 1027가구를 대상으로 실시한 노후 소득 보장 실태조사에 따르면 1인당 평균 노후 준비 부담액은 월 19만 8800원이었다. 금액 자체가 크지 않은 가운데 소득 계층별로 양극화가 심했다. 소득 하위 20%인 사람들은 5만 3600원에 불과해 상위 20%(49만 1200원)와 9.2배의 격차가 났다. 우리나라는 2001년 이후 출산율 1.3명 미만의 ‘초저출산’을 거듭해 왔다. 이러한 추세가 지속되면 우리나라 총인구는 2030년 5216만명을 정점으로 감소하고 2060년에는 인구의 약 40%를 노인 계층이 차지할 것으로 추정된다. 또 생산가능인구(만 15~64세) 중 50세 이상의 비중은 2005년 20%에서 2016년 30%, 2051년 40%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생산가능인구가 줄면 세금 감소 등으로 재정 수입은 줄지만 노인들을 위한 복지 지출은 증가한다. 조세연구원에 따르면 2009년 국내총생산(GDP)의 9.6%였던 공공복지 지출이 2050년에는 21.4%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국민연금과 건강보험 재정도 저출산의 여파로 압박을 받게 된다. 보건사회연구원은 2055년에는 국민연금 가입자가 수급자보다 적어지고 건강보험의 누적 적자가 2030년 317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측은 대선 과정에서 출산율 증대의 해법으로 ▲보육시설 확충 및 양육비용 국가 지원 확대 ▲임신 기간 중 근로시간 단축, 아빠 유급 출산휴가 실시 등의 여성 근무 여건 개선안을 제시했다. 고령화에 대비해서는 ▲정년 연장 및 노인 일자리 확대 ▲중증질환에 대한 100% 건강보험 적용 등을 공약한 상태다. 박 당선인은 후보 시절 “법안을 제정한다고 해서 저출산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고 여성이 일과 가정을 양립시키고 큰 부담 없이 아기를 키울 수 있도록 잘 지원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저출산을 막을 수 있는 길”이라고 말했다. 차기 정부가 임기 5년 동안 저출산, 고령화를 해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얼마나 노력을 기울이고 미래를 위한 주춧돌을 얼마만큼 확충하느냐 하는 것은 다른 얘기다. 우리나라가 고령사회에 첫발을 들이는 2018년은 박근혜 차기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해다. 그때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주목된다.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DB를 열다] 겨울 한강의 강태공들

    [DB를 열다] 겨울 한강의 강태공들

    1964년 1월 6일 소한(小寒)에 강태공들이 얼어붙은 한강 위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 뒤로는 한강 인도교(한강대교)가 보이는 노량진 앞 강가다. 이들은 취미로 낚시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전문 어부’였다. 생업으로 하는 것이기에 두툼한 외투를 걸치고 얼레를 바라보는 표정은 심각하기만 하다. 낚시를 제한 없이 할 수 있었을 때 한강에는 강태공들이 사철 모여들었다. 전문 낚시꾼뿐 아니라 반찬거리로 물고기를 낚으러 나온 시민들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한강의 주요 낚시 포인트는 광나루, 마포, 노량진, 서강이었고 잉어나 장어, 붕어 같은 싱싱한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예로부터 무게로 쳐서 잉어 한 근은 쌀 두 되 값이었다고 한다. 하루에 세 근짜리 잉어 서너 마리를 낚으면 열 근은 되니 쌀 두 말 값은 버는 셈이었다. 쌀 두 말 값은 요즘 돈으로 치면 10여만원은 되지만 물고기가 낚이지 않아 공치는 날이 많았으니 큰 돈벌이는 되지 않았다. 1960년대까지 노량진 한강변에도 낚시꾼들이 잡아 올린 잉어나 장어를 요리해 파는 음식점들이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강물이 오염되기 시작해 낚시꾼들도 팔당이나 그 위쪽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한강변 생선 음식점들도 문을 닫았다. 최해국 정보지원팀장 seaworld@seoul.co.kr
  • [씨줄날줄] 삼청동/서동철 논설위원

    삼청동은 인사동 뺨치는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 거리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가 끝날 때마다 정치적 스포트라이트를 받곤 하는 곳이 또한 삼청동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이곳에 단골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당선인의 인수위가 활동하고 있는 한국금융연수원은 이명박 대통령의 인수위도 사용했다. 노무현 정부 인수위는 세종로 외교통상부 청사를 썼지만, 김대중 정부는 금융연수원에서 멀지 않은 옛 삼청초등학교 자리의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을 이용했다. 역대 정부가 삼청동을 인수위 사무실로 선호하는 이유는 당연히 권력의 핵심인 청와대 및 정부청사가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삼청동은 지금도 권력의 주변이라기보다는 여전히 권력의 핵심에 가깝다. 국무총리실이 세종시로 이전했음에도 총리공관은 남아 있을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가회동으로 넘어가는 언덕 위에는 감사원이 광화문 일대 관가(官街)를 감시하듯 내려다보고 있다. 삼청동이라는 이름은 도교의 숭배대상인 태청(太淸), 상청(上淸), 옥청(玉淸)의 세 성신(星辰·별)을 모신 삼청전이 있었던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삼청동’이라는 지명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중종 16년(1521)이니, 벌써 500년 전이다. 최근에는 산 맑고(山淸), 물 맑고(水淸), 사는 사람 또한 맑아서(人淸) 삼청동이라는 이야기도 동네 분위기와 맞물려 그럴듯하게 퍼져나가고 있다. 삼청동길이 복개된 중학천을 따라 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복개가 마무리된 것은 1960년대이다. 삼청동 계곡에서 발원하여 마을버스 종점, 금융연수원, 총리공관, 삼청동파출소, 국립민속박물관을 지나 경복궁 동십자각에 이르는 삼청동길의 땅밑에는 지금도 중학천이 흐른다. 중학천은 얼마 전 문을 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뒤쪽 지하로 흘러 청계천에 합류한다. 인수위가 금융연수원 터에 자리잡은 것이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조선시대 무기와 관련된 정부기관이 줄곧 자리잡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병기제조기관인 군기시의 화약 창고인 북창이 있었고, 병기의 근대화에 힘을 기울였던 구한말에는 기기국의 번사창이 들어섰다. 번사(飜沙)란 터지면 천하가 진동하고 대낮처럼 밝아지는 포탄제조법이니, 번사창은 화약공장이다. 고종 21년(1884)에 지은 번사청 건물은 금융연수원 경내에 여태껏 남아 있다. 새 정부가 부국강병에 힘쓰라는 선조들의 뜻이 담겨 있다면 지나친 견강부회일까.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명사가 걸어온 길] 1.바람의 시인, 시대를 말하다(상) 고은

    [명사가 걸어온 길] 1.바람의 시인, 시대를 말하다(상) 고은

    “프랑코가 곧 죽을 모양이다. 사르트르가 그자를 ‘라틴의 돼지’라고 부르고 그놈이 어서 죽기만 기다리노라고 말한 것이 통쾌하다. 거리의 사람들. 독재를 견디어내는 이 인내의 일상 체념과 방관의 일상이야말로 독재의 온상이다. 의병의 역사, 봉기의 역사가 있었으나 그것의 분출 자체가 타자 의존적인 경우도 적지 않다. 저항보다 순응과 피동의 역사가 더 길다. 혁명, 영구혁명은 관념인가. 창조는 어떤 경우도 혁명적이지 않으면 창조가 아니다.” 1975년 11월 15일 고은(당시 42세)은 청소년기 이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써온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독재를 견디어내는 이 인내의 일상 체념과 방관의 일상이야말로 독재의 온상이다’는 대목에서는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1974년 11월 18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로서 ‘문학인 101선언’을 주도했던 침묵을 깨야 한다는 결단이 느껴진다. ‘창조는 어떤 경우도 혁명적이지 않으면 창조가 아니다’에는 문학이 현실과 동떨어지면 안 된다는 철학이 강하게 배어 있다. 함박눈이 쏟아진 지난 연말 경기도 안성 자택에서 만난 고은은 책으로 벽을 쌓아 지은 고분 같은 서재에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한쪽 창으로 햇빛이 쏟아져 서재는 어두운 듯하면서 환했다. 미닫이문을 터서 만든 10평 안팎의 장방형 서재는 시인에게 어머니 자궁 같은 안온함을 준다고 했다. 짙은 감색 셔츠에 같은 색 실크 머플러를 목에 두른 고은은 고요했다. 전설처럼 떠돌던 술에 전 낭만의 시인이나, 열정의 시인, 독재에 저항하는 시인의 모습은 사라지고, 팔순의 성찰하는 고은이 보였다. 어쩌면 이것이 본래의 고은일지도 모르겠다. 전쟁은 고흐를 열망한 내 소년기를 부쉈다 ‘한국의 고흐’가 되고 싶었던 17살 예술지상주의자였던 소년의 운명을 맨처음 뒤틀어 놓은 것은 한국전쟁이었다. 외삼촌 집에서 본 고흐의 화보집을 보며 꿈을 키우던 고은에게 한국전쟁은 감당할 수 없는 참극이었다. “좌익이 점령했을 때는 우익이 죽었고, 우익이 돌아오자 좌익이 죽었죠. 내 고향에서만도 이 죽음의 재앙이 세 번 되풀이됐다. 군인들이 와 시체를 파내서 옮기라고 했는데, 그 작업을 하고 나면 보름 동안 씻고 또 씻어도 시체 냄새가 몸에서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인간 하면 서로 죽이는 행위, 고향 하면 핏줄끼리도 이데올로기 때문에 싸우는 그런 것만 연상됐다. 죽음에 대해 아무 준비도 없던 10대 어린애가 그것을 만난 것이다. 소년 자체가 부서져버렸다.” 고아의 의식이 투철하다는 고은은 한국전쟁으로 조상과 끈이 끊겼다고 생각했다. 고향도 무섭고, 핏줄도 무서웠다. 극한 상황에서 인간이 얼마나 피에 주려 있는가를 본 소년의 정신은 온전해지지 못했다. 정신착란으로 집을 뛰쳐나갔고, 자살도 여러 차례 시도했다. 전쟁통에 군산고를 중퇴했는데, 전쟁 중에 그는 모교인 군산북중학교 국어교사를 맡기도 했다. 하지만 견딜 수 없는 혐오들이 밀려오던 터에 1952년 출가를 했다. 1957년에 전등사 주지를 지냈고, 1958년 ‘불교신문’을 창간해 주필을 맡았던 그는 1962년 환속했다. 등단은 1958년, 26살 때다. 시인협회 조지훈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폐결핵’이 실렸다. 현대시인이 100명 정도에 불과하던 시절이라 그는 현대문학 2세대 정도되는데도 1세대로 평가받는다고 했다. 김동리, 오상순, 김수영 등과 어울리며 살았다. 유미주의자였던 그의 예술관과 삶의 방식을 전복시킨 것은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의 분신자살이었다. 잊어버린 과거가 된 전태일의 죽음이 술에 절어 나른했던 시인의 삶을 바꿔 놓았다. “지금은 서울 무교동에 현란한 고층건물들이 서 있는데, 당시에는 바라크였다. 낮은 건물뿐이었다. 통행금지 시절이었는데, 술을 마시고 돌아갈 수가 없으니 주모에게 사정하고 아첨해서 술집 탁자 같은 데서 자곤 했다. 그날도 아마 그런 날이었다. 먼동이 틀 무렵인데 신문 쪼가리들이 바람에 굴러다니더라. 묵은 신문이었는데, 사회면과 사설면에 ‘노동자 분신자살!’이라고 써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죽음이 워낙 육친화되어 있다 보니 죽음이라는 말에 눈이 번쩍 떠지더라. 어, 이것 봐라! 일종의 죽음의 비교라고 할까. 그런데 이런 죽음이 있었던 것이다. 풀빵 10개로 점심을 때우고,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우이동 판잣집까지 버스비가 없어 한밤중까지 걸어가고, 그런 인간의 삶이 나오더라.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게 뭔가. 현실을 깨달았다. 거대한 착취와 비인간화, 허리도 제대로 펼 수 없는 다락방 지옥의 밀실 같은 곳에서 소녀들이 가혹한 노동을 하고, 폐결핵으로 피를 토하고.” 민주화 전위? 뒤늦게, 엉거주춤 서 있었다 현실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던 그를 두고 사람들이 ‘초개’라고 했는데, 그는 밀물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에 각성이 됐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1970년대 봉제공장의 노동현실을 설명하던 그는 다시 평온한 얼굴로 돌아와 “사람들은 내가 민주화 운동의 전위에 섰다고 하는데, 사실 뒤늦게 뒤꽁댕이를 따라다니면서 한 것이다. 뒤늦게 엉거주춤하게 거기에 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때 전태일의 죽음에 나만 충격받은 것이 아니다. 서울대 법대생들도 다 깨쳤다. 나중에 감옥에서 만난 조영래, 장기표, 걔네들도 다 깨쳤더라. 나는 지식인이랄 것도 없고 예술인이었는데 전태일의 죽음의 폭풍이 나까지 몰아세웠다. 그래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리 작가들도 뭔가 해야겠다. 그때 자기 몸을 던지는 행복이 생겼다.” 동료 작가들은 물론 선후배 작가들까지 뭉치도록 앞장서서 나갔다. ‘나를 빼고 몰래 하면 안 된다’는 작가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가 설득하면 다소 보수적인 현대문학 1세대 선배들도 동참했단다.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회 대표간사가 된 배경이다. 당시 자유실천문인협회의 주장은 5가지였다. 구속자를 석방하라,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라, 자유민주주의 정신의 절차에 따른 새로운 헌법을 마련하라 등이었다. 당시 세종로에서 시위하고 그와 조해일, 윤흥길, 박태순 등 7명이 연행됐다. 고은의 본격적인 빵살이(감옥살이)는 그로부터 3년이 지난 뒤부터 시작됐다. 1977년, 1979년이 자유실천문입협회 건이었다. 1980년에는 김대중내란음모죄에 연루됐다. 죽음이 목젖까지 찾아왔던 때다. 1988년 정부가 월북·납북작가 작품들을 해금하자, 고은은 더 나아가 한국작가회의와 함께 북한의 작가동맹 소속 작가들과 ‘남북작가회담’을 추진한다. 이것이 문제가 돼 1989년 다시 투옥됐다. 국가가 달아준 ’별’이 4개다. 1980년대 중반 민주화운동이 본격화될 때 그는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1987년)를 맡았다. 국가와의 갈등이 완화된 건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였다. 그의 나이 60세 때다. 1993년 처음으로 여권이 나왔다. 그전까지는 임시여권만 발급됐다. 시인 고은이 ‘세계의 시인 고은’이 된 시점도 그때부터다. 1970년부터 1993년까지 23년간 그는 1960~70년대 산업화 과정의 각종 폐해를 해소하고,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거리의 시인’으로 살았다. 한국전쟁으로 상처받은 그는 이제 통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나에게는 독특한 통일 이론이 있다. 다연방 통일제를 주장한다. 북한의 언어는 문화어(표준어)-평양중심의 언어로 통합된다. 남한은 표준어는 서울 종로에 사는 중산층의 언어다. 마포에서 쓰는 언어도 아니다. 그런데 표준이나 통합은 말살이다. 시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사투리, 지역어는 다 신성한데 다 말살되고 있다. 이것은 나쁜 단일화다. 그래서 나는 사투리와 지역어가 존중될 수 있도록 제주도, 경상도, 전라도, 함경도 등 20여개 연방으로 만들어서, 수상최고회의를 국가최고의사결정기구로 하는 남북한 통일된 국가를 꿈꾼다. 스위스, 말레이시아, 미합중국, 넓게 보면 중국도 다 연방 아니냐.” 그는 100년 안에 아시아에도 유럽연합(EU)과 같은 국가연합이 탄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구상이 한낱 백일몽에 그치지는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 올해로 80세인 고은의 삶은 파란만장하다는 표현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태어나 식민지와 1945년 해방과 분단, 1948년 대한민국 건국, 1950년 한국전쟁, 1960년 4·19민주화혁명, 1961년 5·16군사쿠데타, 1979년 박정희 정권의 몰락, 1980년 서울의 봄과 5·18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10민주화운동, 1997년 외환위기와 극복까지. 롤러코스터보다 더 다이내믹한 인생이다. 침묵할 수 없던 시대, 그것은 선물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시대는 조용할 수 없는 시대였지만, 남들보다 더 격렬하게 부딪치며 살아온 측면이 있다. 시대가 나에게 준 것도 있고, 내가 시대에 준 것도 있다. 이것이 맞물려서 심상치 않은, 비일상적인 삶의 연대기를 갖게 됐다”며 허허롭게 웃은 뒤 “사람들은 나를 ‘풍운아’라고도 부르지만, 돌아보면 시대가 나에게 준 선물과 같은 것이 많다”고 회고했다. 마지막으로 고은은 역사와 사회에 대한 고언을 잊지 않았다. “우리는 역사의 유산을 정리해본 적이 없다. 민족끼리 싸우는 삼국시대, 후삼국시대를 고스란히 복제하고 있다. 그런 바보 같은 땅이 어디 있나. 치유되지 않은 삶을 자손들에게 넘겨줘야 할 판이다. 피의 흔적을 닦아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물론 당대의 정당성이 있겠지만, 이대로 가면 역사라고 할 수도 없다. 길들여져 있는 체제에 의해 쉽게 변경될 수 없는 관행, 제도가 있으니 현안을 다루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당대에 손가락질당하고, 역적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미래에 대한 불온한 꿈을 꾸고 확산해야 한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5·16혁명 규정’ 박효종·‘부당이득 의혹’ 장순흥 논란 예고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4일 18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추가 인선을 단행하며 또다시 보수진영의 대표적 논객을 주요 직책에 선임해 논란이 예상된다. 박 당선인은 ‘뉴라이트 운동’을 주도했던 박효종 서울대 윤리교육학과 교수에게 정무분과 간사를 맡겼다. 박 교수는 시민단체인 ‘바른 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공동대표를 맡으며 뉴라이트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국정기획조정 간사로 임명된 유민봉 성균관대 교수도 이 단체 출신이다. 박 교수는 2005년 ‘교과서 포럼’ 회장으로 있으면서 좌편향된 교과서를 바로잡는다며 일종의 대안 교과서를 출간했는데, 이 교과서에서 5·16쿠데타를 ‘5·16혁명’이라고 규정해 논란을 일으켰다. 5·16쿠데타의 의미에 대해서도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인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주도할 새로운 대안적 통치 집단 등장의 계기가 된 사건”으로 평가했다. 또 “(당시 통치집단은) 국가 발전의 종합적 토대로 경제발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특유의 추진력으로 그것을 성공적으로 주도했다”고 썼다. 유신에 대해서도 “종신 집권을 보장하는 체제이지만 행정적 차원에서는 국가적 과제 달성을 위한 국가의 자원 동원과 집행능력을 크게 제고하는 체제”라고 설명했다. 반면 4·19혁명은 ‘4·19학생운동’이라고 표기하면서 “4·19 학생운동에 대해 과격 진압으로 지탄받았던 경찰은 통제력을 상실했고, 공권력의 무력화로 사회적 불안정은 가속화되었으며 4·19 이후 경제적 어려움도 가속화되었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는 지난 7월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박 당선인의 ‘5·16은 아버지의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란 발언에 대해서도 “그때의 상황과 비교하면 지금은 ‘상전벽해’같은 상황인데 그 당시 1960년대 초의 상황을 불가피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결코 부적절한 표현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는 최근까지도 자유총연맹 등 보수성향 시민단체들이 꾸린 ‘자유민주국민연합’ 상임대표로 활동하는 등 ‘종북 척결’을 앞세운 시민단체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경제 1·2분과 인수위원으로 이름을 올린 홍기택 중앙대 교수와 서승환 연세대 교수도 우파 색채가 강한 학자이어서 박 당선인의 경제민주화 의지가 희석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인수위 교육과학분과 인수위원에 임명된 장순흥 KAIST 교수는 박영아 전 한나라당 의원이 “2008년 장 교수 등 KAIST 교수들이 학부생이 개발한 기술로, 모 회사와 전기자동차 연구개발 관련 협약을 체결하고 자문료 등을 받아 수십억원의 부당이득을 취했다”는 주장을 제기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박건형 기자 kitsch@seoul.co.kr
  • [DB를 열다] 1966년 광화문 지하도 공사… ‘속전속결’ 국가적 사업이었죠

    [DB를 열다] 1966년 광화문 지하도 공사… ‘속전속결’ 국가적 사업이었죠

    1966년 7월 23일 광화문 지하도 공사가 한창인 서울 중구 세종대로 일대의 모습이다. 지금은 철거된 옛 중앙청 건물이 있고 광화문은 복원되지 않았을 때라 보이지 않는다. 왼쪽 세종문화회관 자리에는 나중에 큰 불이 났던 시민회관이 보이고 정부청사는 아직 들어서지 않았다. 지하도 공사를 하느라 네거리 한복판이 깊게 파헤쳐져 있고 버스와 승용차들은 그 주위를 돌아서 운행하고 있다. 1960년대 중반 서울의 인구는 급속도로 늘어났고 자동차도 덩달아 증가했다. 보행자들이 길을 건너는 것도 불편해졌고 교통사고도 빈발했다. 육군 준장 출신으로 부산시장에서 서울시장으로 영전한 김현옥 시장은 강한 추진력을 지닌 ‘불도저형’ 리더였다. 그는 서울의 교통 사정을 개선하기 위해 동시다발적으로 공사를 진행했다. 1966년 4월 19일 김 시장은 서울 세종로와 명동 입구에 지하도 공사를 착공하는 동시에 신세계백화점 앞 등 여섯 곳에서 육교 공사를 시작했다. 부임한 지 겨우 보름 됐을 때였다. 김 시장은 이것 말고도 도로 공사 등 각종 공사를 군대식으로 밀어붙였다. “24시간 5교대로 단 1분도 쉬지 말고 공사를 하라”며 공무원과 공사 관계자들을 다그쳤다. 광화문(세종로) 지하도는 착공한 지 단 5개월 11일 만인 그해 9월 30일 개통돼 우리나라 최초의 지하보도가 됐다. 개통 행사에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국무총리도 참석할 만큼 광화문 지하도 공사는 국가적인 사업이었다. 박 대통령은 개통 전날인 29일 밤 경호원 몇 사람만 데리고 지하도를 암행 순찰하고는 흐뭇해하며 김 시장을 불러 치하하고 금일봉을 하사했다고 한다. 명동 지하도는 사흘 후인 10월 3일 완공됐다. 대리석 기둥에 1500개의 조명등을 갖춘 광화문 지하도는 매우 화려해 보였다. 그러나 겉만 번지르르했을 뿐 날림 공사의 문제점이 곧 드러나기 시작했다. 김 시장이 “동양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지하도”라고 자랑했던 광화문 지하도는 완공 6일 만에 금이 간 천장에서 쏟아진 물이 행인들을 덮치기도 했으며 바닥도 내려앉았다. 김 시장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1968년 1월 4일에는 시무식을 마치자마자 서울시청 서쪽(현재 프레스센터와 서울시의회 사이) 지하도와 남대문 지하도 등 14건의 공사를 설계도도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착공해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부실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런 속전속결식 공사는 결국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을 불렀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1세대 건축설계업체 ‘공간’ 장기 불황에 법정관리 신청

    1세대 건축설계업체인 공간종합건축사사무소가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부동산 불황이 깊어지면서 연관 산업까지 타격을 받고 있다. 4일 건축설계업계에 따르면 공간종합건축사사무소는 지난달 11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한 데 이어 지난 2일 부도를 냈다. 법원은 다음주 기업회생절차 개시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세계적 건축가인 고(故) 김수근 씨가 1960년 세운 공간종합건축사사무소는 국내 건축설계업계를 상징하는 회사다. 김씨가 활동하던 1960~1980년대에는 건축학과 학생들이 가장 동경하는 회사였고, 현재도 매출 496억원(2011년 기준)으로 업계 6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주요 건축물로는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 남산 타워호텔, 을지로 정동교회, 용산구청사 등이 있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책꽂이]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윤치호 지음, 김상태 편역, 산처럼 펴냄) ‘윤치호 일기’ 중 1919~1943년 일기를 번역했다. 윤치호(1865~1945)의 일기 원본은 대학노트 30여권으로 60년의 인생과 시대를 서술했다. 친일파로 분류되는 그의 일기에는 조선의 정세인식, 독립운동에 대한 단상 등 기초 사료가 들어 있다. 3만 6000원. 폴 스미스 스타일(폴 스미스·올리비에 위케르 지음, 김아선 옮김, 아트북스 펴냄) 패션 하면 영감, 창조, 열정 같은 얘기들을 많이 늘어놓는데, 그런 말들을 싹 치워버린 이가 폴 스미스다. 단순한 가운데 포인트를 주는 스미스가 자신만의 디자인을 설명하기 위해 A, B, C, D 순으로 키워드를 뽑아 설명해둔 책이다. 가령 B는 1960년대에 출현해 1920년대 재즈풍 음악을 일거에 잠재워 버린 보위(Bowie), S는 1960년대(Sixties) 하는 식이다. D는 난독증(Dyslexic)인데, 거기에 걸맞게 본문을 뒤틀어놓은 위트도 재밌다. 2만원. 한국식 재료를 이용한 맛있는 프랑스 디저트(장 피에르 제스탱 지음, 김경덕 등 옮김, 벨라루나 펴냄) 제주 귤, 여주 고구마, 영암 무화과, 고창 복분자, 홍천 단호박의 프랑스 요리 변신 기록이다. 제과제빵 전문가로 프랑스 요리 전문학교 르 코르동 블루 숙명 아카데미 교수를 지낸 저자가 한국 재료로 프랑스식 디저트를 만드는 방법을 총정리해 뒀다. 1만 8000원.
  • ‘있는 그대로의 한국’을 담다

    백문이불여일견. 1960년대부터 한국이 어땠고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지 알려면 그의 사진을 보면 된다.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대가로 꼽히는 원로 사진작가 최민식(85)씨의 사진 인생 50여년을 결산한 사진집 ‘휴먼 선집’(눈빛 펴냄)이 나왔다. 1957년 사진에 입문한 이후 55년간 사진가로 살아오면서 ‘인간’이라는 주제에 천착해 온 작품들을 모두 모은 것이다. 수십 년간 촬영한 사람들의 사진을 모아 ‘인간(HUMAN)’이라는 제목의 사진집 14권도 출간했다. 이번 선집은 사진집 14권과 그동안 인화해 보관해 온 사진 중 그의 작품 세계를 잘 보여 주는 사진 490여점을 추려 에세이 15편과 함께 엮은 것이다. 부산 자갈치시장, 거지, 부랑자 등 그의 카메라에 담긴 우리 사회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인간의 희로애락, 생로병사를 주제로 한 작품을 모았다. 또 작가가 1980년대부터 인도나 티베트 등을 여행하며 포착한 현지 사람들의 모습도 사진으로 만날 수 있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부고] ‘에큐메니컬 운동 대부’ 오재식 박사

    [부고] ‘에큐메니컬 운동 대부’ 오재식 박사

    에큐메니컬(교회일치·연합) 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오재식 박사가 3일 오후 8시 20분 지병으로 별세했다. 80세. 오 박사는 평생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 비정부기구(NGO) 활동에 헌신하며 현장을 지켜 왔다. 서울대 종교학과와 미국 예일대 종교학과를 졸업한 뒤 한국기독교회협의회(NCCK) 선교훈련원장 겸 통일연구원장, 세계교회협의회(WCC) 개발국장·제3국장, 크리스찬아카데미 한국사회교육원장 등을 역임했다. 또 월드비전 회장과 참여연대 창립대표, 대북지원민간단체협의회 초대 회장, 월드비전 아태지역본부 북한사업부 자문위원, 아시아교육원장 등을 맡아 대북 협력 사업과 인도적 지원 사업 등을 적극 추진했다. 함석헌, 강원용 등에게 신앙적, 사상적 영향을 받은 오 박사는 미국에서 공부하던 중 사회운동 조직의 대가인 S D 알렌스키를 만난 뒤 평생을 민중운동의 조직 전문가로 활동했다. 특히 1960년대 기독교청년의 사회운동, 1970년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 1980년대 광주민주화운동, 1990년대 평화통일운동 등 역사적인 현장에 투신했다. 도시 빈민과 농민, 산업 노동자를 지원하는 조직운동가, 국내외 네트워크를 조직적으로 형성해 한국 민주화 운동을 이끈 활동가, 대북 협력 사업과 인도 지원 사업 등을 통해 남북한 교류의 물꼬를 튼 평화통일운동가 등이 오 박사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다. 유족으로는 부인 노옥신씨와 자녀 승현(LG화학 부장), 경원(재미), 지원(주부)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진다. 발인은 7일 오전 9시 기독교회관 2층 강당. (02)2072-2020. 조은지 기자 zone4@seoul.co.kr
  • [박근혜 정부-대한민국의 과제(3)] 참여정부 때 평화협정 직전까지 갔다가 MB정부 들어 단절

    [박근혜 정부-대한민국의 과제(3)] 참여정부 때 평화협정 직전까지 갔다가 MB정부 들어 단절

    2013년은 6·25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60주년이다. 이와 맞물려 박근혜 차기 정부가 지난 5년간 경색된 남북관계를 어떻게 이끌고 나갈지 주목된다.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지난 1일 신년사를 통해 남북공동선언 존중을 조건으로 차기 정부에 관계 개선 의지를 타진했다. 박근혜 정부는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국가 안보적 과제를 이뤄내야 할 시험대에 서게 됐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각. 판문점 휴전협정 조인식장에서 유엔군 수석대표 해리슨 미 육군 중장 일행과 북한군 수석대표 남일 일행이 전문 5조 63항의 정전협정 문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3년 이상 끌어온 6·25 전쟁이 끝났다. 이 회담은 1951년 7월부터 협정체결까지 2년 이상 걸려 역사상 가장 긴 휴전회담으로 평가된다. 이후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전협정을 평화체제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됐으나 이는 아직 요원한 과제로 남아 있다. 1954년 4월 군사 활동 중지에 그친 정전협정을 평화체제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이뤄지기도 했다. 당시 유엔 참전 16개국과 한국·북한·소련·중국이 참가한 가운데 우리 측은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자유선거 등 통일 방안을 제시했고, 북 측은 외국군 철수 및 감군을 선결과제로 요구했으나 87일간의 회담은 평행선을 그은 채 막을 내렸다. 정전협정 체결 19년 만인 1972년 남북한은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며 한반도 평화체제 정착을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당시 합의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통일의 3대원칙은 이후 남북 간 모든 합의의 기본 지침이 됐으나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이 이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면서 흐지부지됐다. 1992년 노태우 정부 당시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는 한 발짝 더 나아가 남북 불가침 조항을 담고 정전상태를 항구적 평화 상태로 전환한다는 내용을 명시했으나 1993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사실상 힘을 잃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6·15 남북공동성명은 평화체제 구축에 대한 구체적 합의를 담지는 못했으나 남북관계를 대결에서 화해와 공존관계로 바꾼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2005년 9월 19일 4차 북핵문제를 위한 6자 회담에서 당사국들은 9·19 공동성명을 통해 비핵화를 위한 기본 원칙에 합의했다. 당시 관련 당사국들이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를 논의하기로 합의하고 그동안 한국을 평화협정의 당사자로 인정하지 않던 북한이 입장 변화를 보인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2007년 10·4 남북정상회담에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의 문제가 양 정상 간에 논의됐으나 현재는 남북관계 단절로 맥이 끊긴 상태다. 새해에도 남과 북의 지도자들은 평화체제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대선 공약에 평화협정 체결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평화체제 전환 가능성에 대한 전망은 엇갈린다. 구본학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국제학과 교수는 “북한이 주장하는 정전협정의 평화체제 전환은 남북 간의 평화체제라기보다는 미국과의 적대관계를 해소해 주한미군을 철수하게 하는 등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치적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것”이라면서 “서해 북방한계선(NLL)과 북핵 등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평화체제만 만든다고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므로 남북 간 신뢰 구축이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유엔사가 정전을 관리하는 체제가 2015년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으로 바뀌는 만큼 남북관계의 재설정이 중요하다”면서 “완전한 평화협정으로 가기는 어려워도 평화체제의 중요성을 제기하고 한반도 군비통제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핵보유국임을 주장하는 북한을 고려하면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재래식 군비 감축은 풀 수 있는 문제”라면서“군사 훈련 상호 통지 등 신뢰를 쌓아 평화를 유지할 필요성이 있다”고 제언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정전협정 60주년 맞는 한반도] 한·미동맹 60주년 조언

    [정전협정 60주년 맞는 한반도] 한·미동맹 60주년 조언

    한·미동맹 체제는 6·25전쟁 정전 뒤인 1953년 10월 1일 한·미 상호방위조약으로 출범해 이후 60년 동안 우리나라 외교 및 안보 전략의 핵심 축으로 작용하고 있다. 6·25전쟁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로 시작된 한·미동맹은 상호 보완적인 동반자 단계를 거쳐 현재는 포괄적인 전략동맹으로 자리매김했다. 상호방위조약은 미국이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에 주둔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됐고, 정전협정과 1954년 군사 및 경제 원조에 관한 합의의사록 등을 통해 한·미동맹은 전쟁 재발 방지와 경제 발전의 기틀을 다지는 시발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미동맹의 위기는 미국이 닉슨 독트린에 따라 1971년 주한미군 2만명을 철수시키며 촉발됐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핵무기 개발을 독자 추진하면서 한·미 갈등은 심화됐다. 유신 체제도 한·미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이 됐다. 카터 정부의 철군 계획이 1978년 중단되면서 한·미 양국은 연합사령부를 출범시켰다. 한·미동맹은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 출범으로 공고해졌고, 1994년에는 한국이 평시작전통제권을 넘겨받으면서 상호 동반자 관계로 변화가 이뤄졌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미군 궤도차량 여중생 압사 사건으로 인한 반미 감정,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등한 동맹’ 기조가 맞물리며 우리의 자주적 목소리가 한층 커졌다. 이런 기류에서 양국은 주한미군 기지 통폐합, 전시작전권 이양 문제 등의 현안에 합의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한·미 양국은 2009년 동맹미래비전을 체결하며 포괄적 전략 가치 동맹으로 심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다음달 25일 출범하는 박근혜 정부와 재선에 성공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모두 한·미동맹 강화를 공언하고 있어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홍현익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2일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는 한국 국익이 우선 배려되는 식으로, 일반적인 국제 전략에서는 미국의 이해관계를 배려하는 식으로 한·미동맹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57년만에 해 넘긴 예산안 통과 10년 연속 나라살림 발목잡기

    57년만에 해 넘긴 예산안 통과 10년 연속 나라살림 발목잡기

    2013년 예산안이 해를 넘겨 통과되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게 됐다. 2002년 이후 10년 연속 예산안 법정처리 시한을 넘기는 오점까지 남겼다. 쇄신국회를 전면에 내걸고 출범한 19대 국회 역시 나라 살림 발목을 잡는 구태는 여전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됐다. 그간 국회가 예산안 처리 법정시한(12월 2일)을 넘기는 늑장 처리와 단독처리를 되풀이했지만, 이번처럼 해를 넘겨 예산안을 본회의에 상정·처리한 전례는 1960년 준예산 제도 도입 이후 한 차례도 없었다. 그 이전에는 6·25 전쟁 전후인 1949~1953년과 1955년 등 6차례 회계연도를 넘긴 적이 있다. 여야는 지난 31일 저녁 늦게부터 협의를 거쳐 1일 아침 가까스로 예산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준예산 편성 사태를 면했다. 원칙적으로는 국회가 예산안을 연내 처리하지 못하면 정부는 올해 예산에 준해 내년도 예산을 집행하는 준예산을 편성해야 한다. 공휴일인 1일 예산안이 처리돼 이런 오명은 가까스로 막았지만 ‘5년 만의 여야 합의 처리’라는 대목이 무색해졌다. 특히 올해는 정치권이 대선 일정에만 몰두한 나머지 예산안을 날림 심사했다는 지적도 피하기 어렵다. 복지예산이 확충됐다고는 하지만 글로벌 경제위기 여파로 대내외 환경이 악화된 가운데 서민생활 안정, 일자리 창출 등 민생 요구를 외면한 졸속 심사를 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그동안 국회에서는 예산안 늑장처리는 물론 합의정신을 무시한 여당 단독처리가 난무했다. 실제 지난 18대 국회는 현안 이슈에 발목이 잡혀 여당이 4년 줄곧 예산안을 강행 처리한 기록을 남겼다. 2008년 12월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여당이 일방 상정한 것을 두고 야당이 사과를 요구하면서 파행을 겪었다. 2009년에는 4대강 관련 예산이 말썽을 빚었고, 2010년엔 한·미 FTA 관련 예산 및 비준동의안의 여당 단독처리 여파로 야당이 반발하면서 여당인 한나라당이 예산안을 단독 처리했다. 2011년에는 12월 31일 새해를 불과 몇 시간 앞두고 예산안이 겨우 처리되면서 준예산 편성 직전까지 갔다. 2010년 12월 8일 예산안 통과 때는 해머와 전기톱, 소화기까지 등장하는 난투극이 연출됐다. 연중행사나 다름없었던 예산안 늑장처리 구태가 올해부터는 사라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 지난해 5월 통과된 국회 선진화법이 오는 5월부터 시행되기 때문이다. 국회 선진화법은 예산안과 세입예산 부수법안이 헌법상 의결기한(12월 2일)의 48시간 전까지 예결위 심사를 마치지 못하면 본회의에 자동으로 회부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만 이것도 최소한의 방지책일 뿐 여야가 본회의에서 장기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DB를 열다] 사라져 간 판잣집/손성진 국장

    [DB를 열다] 사라져 간 판잣집/손성진 국장

    1962년의 봄날, 서울의 어느 동네에서 판잣집을 철거하는 현장이다. 철거반원들이 금방 다녀갔는지 한쪽에서는 판자를 나르고 있고 솥단지와 항아리, 소쿠리 같은 살림 도구들이 땅바닥에 뒹굴다시피 하고 있다. 판잣집은 흔히 ‘하코방’으로도 불렸다. 하코는 궤짝 또는 상자라는 뜻의 일본어다. 판잣집은 6·25전쟁 후 집을 잃은 사람들과 피란민들의 보금자리였다. 남인수의 대중가요 ‘이별의 부산정거장’에는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잣집이여…”라는 대목이 나온다. 지방민들의 상경으로 서울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판잣집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40여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는 판잣집으로 뒤덮이다시피 했다. 서울의 용산 해방촌, 금호동 등지에 판잣집이 많았고 청계천 하류 쪽으로도 판자촌이 길게 띠를 이루고 형성되어 있었다. 판자촌은 화재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대형 화재가 자주 발생했다. 이에 대통령까지 나서 판잣집을 철거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1960년대에 판잣집 정비 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인 사람은 김현옥(1926~1997) 당시 서울시장이었다. 그는 판잣집을 철거해 철거민들을 시외로 이주시키거나 서민아파트를 단기간에 많이 지어 주거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서울광장] 부석사의 통합정신 생각한다/서동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부석사의 통합정신 생각한다/서동철 논설위원

    부석사의 사례는 화해와 통합이 말로만 되는 게 아니라, 겸손하게 ‘실망한 쪽’ 진영에 깊숙이 들어가 어려움을 무릅쓰고 상대의 마음을 얻어 내는 노력을 지속해야 실마리를 풀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영주 부석사를 두고 아름다움을 넘어 감동을 주는 절집이라고들 한다. 그랬다. 아홉단의 돌계단을 오르며 숨이 적당히 차오를 무렵 안양루 기둥 사이로 자태를 드러내는 무량수전이 반가웠고, 뒤돌아보면 끝간 데를 모르는 소백산맥의 연봉이 시야를 가득 채우는 순간 무언가 뜨거운 것이 저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느낌마저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새해를 맞으면 부석사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무량수전 앞에 펼쳐진 봉우리의 파도 너머에서 희망의 실마리가 보이는 듯했기 때문이다. 벌써 대통령선거는 묵은 해의 얘기가 됐다. 이제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구성하는 작업에도 속도가 붙을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 당선인의 인수위에는 전에 없던 두 개의 조직이 일찌감치 문패를 내걸었다. 국민대통합위원회와 청년특별위원회가 그것이다. 인수위가 가진 본연의 역할은 새 정부가 추진할 정책의 밑그림을 그리는 일일 것이다. 특별한 기능을 가진 조직이 서둘러 출범했다는 것은, 이들에게 주어진 과제가 곧 새 정부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난제라는 절실한 인식의 일단을 보여준다. 나라 전체가 분주하게 돌아가는데 한가하게 절 이야기를 꺼낸 것은, 부석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초기의 정치상황과 우리의 정치상황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부석사는 불교 교리를 건축적으로 완벽하게 구현해 낸 신앙의 공간이지만, 국가의 구성원이 극단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현실을 극복하겠다는 정치적 염원을 담은 공간이기도 하다. 지난 대선은 이른바 2030세대와 5060세대의 분열로 특징지어지곤 한다. 지역구도 역시 박 당선인의 호남지역 득표율이 평균 10%대를 턱걸이하면서 어느 정도 희석되었다고는 하지만, 갈 길은 여전히 멀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진 삼국통일 직후 상황에 곧바로 대입할 수는 없겠지만 당시의 국가적 과제 역시 국민통합이었다. 부석사는 의상대사가 문무왕의 명을 받아 서기 676년 창건했다. 문무왕은 아버지 무열왕이 660년 백제의 수도 부여를 함락시킨 이듬해 즉위했는데, 백제부흥군에 시달리면서도 668년 평양성을 공격해 결국 고구려마저 멸망시키게 된다. 흔히 의상대사를 화엄종의 개조라고 하는데, 부석사를 화엄도량이 아닌 ‘나무아미타불’만 외워도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정토도량으로 지은 데는 깊은 뜻이 있다. 죽령 일대는 삼국의 각축장이었다. 부석사 창건 설화에도 의상대사를 방해하는 500명 남짓한 도둑의 무리가 등장하는데, 학계는 이들을 고구려 유민으로 본다. 질서조차 잡히지 않은 변방에 국가적 공력을 들여 대찰을 지었을 때는 목적이 분명했을 것이다. 통일전쟁의 와중에 목숨을 잃은 상대 군사의 원혼을 달래겠다는 화해의 메시지였다. 고구려와 백제의 백성들까지 함께 극락왕생하자는 통합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문무왕은 이런 노력 끝에 다음 세기 문화의 황금기를 맞이하는 기틀을 만들 수 있었다. 박 당선인이 국민대통합위와 청년특위에 맡긴 과제 역시 문무왕이 의상대사에게 명해 이루어낸 것 같은 화해와 통합일 게다. 부석사의 사례는 화해와 통합이 말로만 되는 게 아니라, 겸손하게 ‘실망한 쪽’ 진영에 깊숙이 들어가 어려움을 무릅쓰고 상대의 마음을 얻어 내는 노력을 지속해야 실마리를 풀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두 위원회의 활동기간은 길어야 두 달 남짓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새 정부 출범 이후에도 진심을 담은 화해와 통합의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문무왕의 민심 통합 구상은 의상대사 같은 보좌세력이 있었기에 현실화됐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의상은 중국에서 화엄사상을 공부하고 돌아와 신라에 화엄의 교리를 전파하는 데 몰두하고 싶었지만, 국가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자신을 희생하고 대의(大義)를 따랐다. 인수위는 물론 곧 있을 내각 및 청와대 인선에서도 이런 사람이 많이 등용되어야 함을 구태여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dcsuh@seoul.co.kr
  • [사설] 北, 공동선언 이행 요구보다 대화가 먼저다

    북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어제 신년사에서 남북공동선언 이행을 남측에 주문했다. 대규모 경제지원을 뜻하는 것이겠으나, 북측은 이를 위해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자각해야 한다. 무력도발의 허튼 미몽을 접고 남북협력 분위기 조성을 위한 대화 채비를 서두르란 뜻이다. 올해로 6·25 정전 체제가 60년을 맞았다. 강산이 여섯 차례나 바뀌었을 긴 세월이다. 이 기간 남북은 첨예한 무력 대치 속에 각자 제 길을 걸었고, 그 결과는 수치상 비교할 수 없는 국력의 차이로 이어졌다. 2011년 기준으로 북한의 명목 국민총소득(GNI) 32조 4380억원은 남한 1240조 5000억원의 38분의1에 불과하다. 무역액은 무려 171배나 차이가 난다. 22만㎢의 좁은 땅덩어리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지닌 20-50클럽(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인구 5000만명 이상) 국가와, 인구의 3분의1인 800만명이 일상적 굶주림에 신음하는 지구촌 최빈국 중 하나가 적대적 공존을 이어가며 180여만명의 병력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게 분단 65년, 종전 60년이 만들어낸 한반도의 초상이다. 물론 남북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시작으로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2007년 10·4 남북공동선언에 이르기까지 대치의 간극을 좁히기 위한 노력을 힘겹게 펼쳐왔다. 통일을 목표로 상호 불가침을 약속했고,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발전시키기로 다짐했다. 한반도 비핵화를 전제로 대규모 경제협력에도 합의했다. 그러나 1968년 무장공비 31명의 청와대 기습을 비롯해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1983년 미얀마 아웅산 테러, 1987년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 1999년 제1연평해전, 2002년 제2연평해전,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에 이르기까지 헤아리기 힘들 만큼 북한의 무력도발은 끊임이 없었고, 그때마다 애써 쌓아올린 남북 간 합의와 신뢰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지금도 북한은 미국과의 직접 담판을 염두에 둔 채 위성 발사를 가장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실험을 자행한 데 이어 3차 핵실험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우리 새 정부를 시험하고 있다. 1953년 계사년에 시작돼 어느덧 60갑자를 일순한 정전체제, 남북 대치의 분단사도 이제 변할 때가 됐다. 무엇보다 북한은 박근혜 정부 출범을, 자신들의 잇단 도발로 이명박 정부 5년 내내 굳게 닫힌 대화의 문을 다시 활짝 열 기회의 장으로 삼아야 한다. 각종 남북공동선언의 구체적 이행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진정성 있는 대화가 선행돼야 한다. 박 당선인은 대선 기간 수차 남북대화 의지를 천명한 바 있다. 북측은 대화 재개, 교류 및 협력 확대, 남북 간 신뢰 구축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평화 정착의 선순환 구조가 자신들에게 달려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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