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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녹조·적조 확산 비상] 4대강 보가 녹조 부채질?

    강에 녹조가 발생할 때마다 4대강 사업이 원인이라는 논란이 제기돼왔다. 올 들어서도 낙동강과 영산강에까지 녹조가 번지자, 환경단체를 중심으로 4대강 사업 때 만든 보(洑)가 녹조 현상을 악화시켰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반면 4대강 사업을 녹조와 연관짓는 것은 억지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논란은 윤성규 환경부장관이 낙동강 녹조 확산의 원인으로 4대강 사업을 지목하면서 재점화됐다. 윤 장관은 대통령에게 녹조와 수돗물 공급에 대해 언급하는 자리에서 4대강 보가 최근 낙동강의 녹조 원인 중 하나라고 보고했다. 이에 대해 박석순 이화여대 교수(전 국립환경과학원장)는 “녹조 발생이 4대강 보로 인해 유속이 느려졌기 때문이라는 환경단체의 억측 주장을 이해할 수 없다”면서 “소양호나 충주호와 같은 큰 호수는 몇 년씩 고여 있어도 녹조가 발생하지 않는데 이는 담수량이 많아서 여름에도 수온이 쉽게 올라가지 않고 인의 농도가 낮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4대강 사업을 놓고 전문가들마다 평가는 제각각이다. 다만 4대강 보 때문에 유속이 느려지고 녹조 발생이 심화됐다는 개연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수긍하는 분위기다. 조원철 연세대 토목공학과 교수는 “녹조는 과거 1960년대부터 낙동강에서 매년 발생했던 일”이라며 “하천이 보로 막혀 있는 상태에서 일조량이 증가하고 인근 농경지 등에서 오염물질이 유입되다 보니 남조류가 과거보다 많이 증식했다”고 말했다. 이현정 국토환경연구소 책임연구원도 “기후 변화로 인한 녹조 현상 변화는 서서히 진행되는 편이다. 현재로서는 하천의 체류 시간이 길어지면서 녹조가 심화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분석했다. 세종 유진상 기자 jsr@seoul.co.kr 서울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상어 그물에 걸려 죽을 뻔한 혹등고래 포착

    상어 그물에 걸려 죽을 뻔한 혹등고래 포착

    ”살려주세요!” 국제적인 보호종인 거대한 크기의 혹등고래 한마리가 그물에 걸려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포착됐다. 하마터면 바다 한 가운데에서 목숨을 잃을 뻔한 이 혹등고래는 지난 14일(현지시간) 아침 호주 골드코스트 해안 인근에서 발견됐다. 이날 혹등고래를 둘러싼 그물은 이 주변에서 출몰하는 상어를 저지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지만 엉뚱하게도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않는 고래가 희생양이 됐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현지 해양생물 보호단체는 전문가들을 동원해 혹등고래 구조에 나섰고 약 2시간 만에 그물을 제거하고 무사히 풀어주는데 성공했다. 퀸즈랜드 상어 통제 프로그램 관리자 제프 크라우즈는 “그물에 걸린 혹등고래는 약 9m 크기의 어린 놈으로 생각보다 침착하게 구조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면서 “건강 상태는 양호해 보였으며 곧 먼 바다로 사라졌다”고 밝혔다. 한편 혹등고래는 몸길이가 최대 약 18m, 몸무게는 40t에 달하는 대형 고래다. 긴 지느러미 때문에 멀리서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으며 수명은 최대 60년이다. 한때 포경 선박들의 표적이 되기도 했지만 1944년부터 국제적인 보호가 시작돼 현재는 개체군이 안정적이거나 증가하는 추세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1940~80년대 추억의 ‘광복절 풍경’

    1940~80년대 추억의 ‘광복절 풍경’

    국가기록원은 광복절을 맞아 관련 기록물을 나라기록포털(contents.archives.go.kr)에 공개한다고 14일 밝혔다. 이번에 공개하는 기록물은 1940~1980년대 광복절 기념식 등 동영상 6건과 사진 6건, 일반문서 1건 등 모두 13건이다. ① 1960년 8월 15일 부산에서 진행된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시민들이 대형 태극기를 들고 시가 행진을 벌이고 있다. ② 1948년 8월 남대문의 광경. ‘경축, 대한민국 정부수립 만세’라는 현수막이 남대문에 걸려 있다. ③ 1948년 8월 15일 발표한 이승만 대통령의 대한민국정부수립 기념사가 담긴 관보 1호(같은 해 9월 1일자). 민주주의를 믿을 것, 민권과 개인 자유를 보호할 것 등 건국의 기초 조건과 민주주의의 모범 정부임을 세계에 알리자는 선언의 내용을 담고 있다. 안석 기자 ccto@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MC 데뷔 40년 영원한 뽀빠이 이상용

    [김문이 만난사람] MC 데뷔 40년 영원한 뽀빠이 이상용

    낙천적이다. 언제나 웃음을 선사한다. 온갖 역경을 이겨 낸다. 위기에 처했을 때 시금치를 먹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 그랬다. 원조 뽀빠이는 그렇게 탄생했다. 1929년 1월 ‘골무극장’(Thimble Theater)이라는 잡지 만화의 조연으로 처음 나온 캐릭터였다. 이후 뽀빠이는 플라이셔 스튜디오를 통해 파라마운트의 애니메이션 ‘베티 붑의 대나무 섬’(Betty Boop’s Bamboo Isle)에 등장해 인기를 누린다. 뽀빠이 덕분에 1930년대 미국에서는 시금치 소비량이 30%나 증가했을 정도였다. 이에 감격한 텍사스주의 시금치 재배 농부들은 뽀빠이 동상까지 세워 주기도 했다는 얘기가 전한다. 영원한 뽀빠이 이상용씨. 우리 나이로 올해 70세. 방송 프로그램 ‘우정의 무대’를 진행하며 인기 MC로 각인된 그가 방송을 통해 시청자들을 즐겁게 한 지 올해로 꼭 40년이다. 그동안 어수선한 세월을 겪어 왔음에도 여전히 ‘젊은 뽀빠이’로 살고 있다. 우여곡절도 많았겠다. 송해씨가 1925년생, 김동건씨가 1939년생, 그다음 세 번째 ‘장수만세’ 하는 방송인은 아마 이씨가 아닐까 싶다. 이씨는 요즘 매주 일요일 아침 ‘늘 푸른 인생’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전국 오지라는 오지는 죄다 돌아다닌다.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할머니를 만나도 ‘어머니’라는 표현을 정감 어리게 한다. 물론 ‘아버지’라는 표현도 그렇다. 8월의 더위가 시작되던 지난 1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그의 비밀 아지트(?)에서 만났다. 66㎡(약 20평) 정도 공간의 바닥에는 운동기구가 있고 벽에는 김수환 추기경, 요한 바오로 2세, 법정 스님 등 종교계 인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만나자마자 그는 “20분 뒤 밀양 가야 돼 빨리 (인터뷰) 하자고”라면서 바쁜 일정을 얘기한다. 이어 “지난 7월에도 강연을 100번이나 했어. 나 무척 바쁜 사람이야. 강연할 때 처음부터 두 시간 동안 배꼽 잡게 하지. 야한 얘기도 섞어 가면서. 그러면 다들 아주 웃겨 죽겠대”라고 한다. 얼른 야한 얘기 한 토막 들려 달라고 했다. “가만 있어 보자. 신문에 나올 수 있는 걸로 할까. 응 그래, 하나 들려줄께. 고급 아파트 단지에 가서 바자회를 열었어. 경비실에서 ‘주민 여러분, 안 쓰는 물건이 있으면 갖고 나오세요’라고 했지. 그랬더니 아줌마들이 남편을 데리고 나오는 거야(웃음).” 그의 강연 제목은 항상 ‘인생은 아름다워라’이다. “나는 말이야. 강연 소재가 3만 3000가지야. 왜냐구. 한 달에 책을 70권 읽어. 닥치는 대로. 주로 새벽에 읽어. 외국 갈 때는 책을 20권 갖고 가. 비행기, 버스, 기차만 탔다 하면 책을 읽어, 그러니까 강연 소재가 풍부하지.” ‘에구, 그러니까 영원한 뽀빠인가부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말을 잇는다. “나는 말이야. 키 작지, 얼굴 까맣고 못생겼지, 돈도 없지. 이런 것들을 극복하려면 독서밖에 없어. 잘생기고 키 큰 남들보다 하나라도 더 알아야 하잖아. 머리를 비우면 바람 소리가 나. 이 나이에 매일 운동하는 것도 다 그런 까닭이지. 하하하, 어때 얘기 되지 않아. 스스로 당당하게 살면 되는 거야.” 거침이 없다. 묻지 않아도 시원시원하게 말을 한다. 인생을 그렇게 ‘건강하게’ 살아왔음을 느낄 수 있다. 건강 얘기가 나오자 일화 하나를 들려준다. 어느 날 실업자 한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다음은 두 사람의 대화. “저는 건강한데 왜 돈을 못 벌죠? 어쩌면 되나요?”(실업자) “자네 우측 팔 하나 자르고 1억 주면 될라나?” “아뇨, 미쳤어요.”(실업자) “그럼 80 먹은 노인네 만들어 주고 10억 줄까?” “안 해요, 미쳤어요? 나, 갈래요.”(실업자) “그렇다면 자네는 지금 11억원을 갖고 있는 셈이네.” 이러한 예를 들면서 건강에 관해 강연을 할 때 “여러분 팔다리, 두 눈, 입. 멀쩡하다면 불평 말고 열심히 사세요”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어제 죽은 재벌은 오늘 아침 라면도 못 먹어. 살아 감사야. 튀지 말고 잘난 척하지 말고 건강하게 열심히 사는 거야. 인생 뭐 별거 있어.” 그는 ‘늘 푸른 인생’을 60살부터 10년째, 운동은 60년째 꾸준히 해 오면서 ‘푸르고 건강한 인생’을 살고 있다. 데뷔 40년에 대한 소감을 물었더니 “기분이 40살이야. 이렇게 (보람되게) 살 줄은 몰랐어. 여섯 살 때 생각하면 덤으로 사는 인생이야”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왜 ‘여섯 살 때’라는 말이 나왔을까. 그는 기구한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 “어머니는 나를 뱃속에 넣고 아버지가 계시다는 백두산까지 걸어갔다가 아버지를 못 만나고 친정인 부여에 오셔서 날 낳으셨지. 병 덩어리 그 자체였고 못 먹어서 거의 시체이다시피 했지. 주위 친척 식구들이 이런 나를 보고 평생 걱정거리에다 어머니는 시집도 못 가는 신세를 만든다고 땅에 묻어 버린 거야. 이를 본 이모님이 묻은 나를 꺼내 솜에 싸서 뒷산으로 도망갔다가 이틀 만에 나를 데리고 내려왔고, 이후 6년을 누워서 살았어.” 결국 6살 때 걸음마를 시작해서 12살까지 온갖 병치레를 하면서 겨우 목숨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13살부터 아령을 시작해 18살에 미스터 대전고와 미스터 충남에 뽑혔다. 1966년에는 미스터 고려대와 응원단장을 지낸 뒤 ROTC 기갑장교로 군 복무를 마쳤다. 제대 후에는 번데기 장수, 북어 장수, 다시마 장수 등 22가지 외판원을 하다가 28살 때 TV에 나와 뽀빠이가 됐고, 그때부터 ‘덤 인생’을 살아왔던 것. 태어날 적 아버지는 동아일보 기자로 있다가 친일을 했다는 이유로 눈총을 받아 백두산과 회령 등지에서 숨어 지냈다고 이씨는 회고한다. “세상에서 가장 약하게 태어나 가장 건강한 뽀빠이가 됐으니 더 바랄 게 있나? 세상 어디에나 무엇에나 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지.” 건강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자신감이지. 자신만만하게 사는 게 제일이야. 덕분에 나는 아직도 바쁘게 일하고 있잖아”라고 대답한다. 그는 새벽 3시에 일어나 5시 30분까지 독서를 하고 두 시간가량 아령과 역기로 건강을 다진다. 지금도 팔뚝 근육은 젊은 헬스 선수 못지않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술과 커피, 담배를 입에 댄 적이 없고 식혜나 수정과 등을 주로 마신다. 그가 인생을 살면서 뜻하지 않은 오해를 받기도 했다. 김영삼 정부 때 여당 측으로부터 대전 지역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이씨는 “국회의원은 4년밖에 못 한다. 나는 영원한 뽀빠이가 되겠다”며 거절했다. 얼마 후 KBS ‘추적 60분’ 프로그램에서 ‘뽀빠이 이상용 심장병 어린이 돕기 성금 유용 의혹’이라는 방송을 내보냈다. 이런 여파로 MBC ‘우정의 무대’ 등 모든 방송에서 중도 하차했다. “그때가 1996년 11월인가 그랬어. 화천에서 우정의 무대를 녹화하던 중 프로그램이 없어졌다는 통보를 받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지. 참 어이가 없어서. 심장병 어린이 600명을 도와 동백장 훈장을 받았고 군 위문만 3000번을 해 대통령 표창을 받은 사람이야. 나를 조사하던 강남경찰서 경찰관이 ‘선생님, 너무 깨끗합니다. 오히려 훈장을 더 주어야 할 것 같아요’라고 하더군. 결국 4개월 뒤 무혐의 처분을 받았어. 그런데 언론에서는 그 사실을 안 다뤄 주는 거야. 오히려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 같은 분은 ‘하늘이 (이씨를) 크게 쓰려고 그런다’며 위로해 주더군.” 이씨는 당시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던지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관광버스 안내원 생활을 2년 동안 하면서 분노를 삼켜야 했다. 관광버스 안내는 주로 미국에 오는 한국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했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있듯 죽고 싶어도 진실한 국민들의 격려로 참고 살아왔더니 지금 이렇게 사랑받고 살고 있다고 술회한다. 그는 정치 얘기가 나오자 “개그맨들은 국민을 즐겁게 하지만 정치인들은 국민을 아프게 한다”면서 “남자의 코털과 국회의원의 공통점은 뽑을 때 잘 뽑아야 하는 것이다. 국회의원이 가장 좋아하는 고사성어는 파란만장(1만원권 만장)이다”라는 말로 꼬집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는 “그동안 전국 오지란 곳은 다 다녀 봤다. 오로지 농민을 아끼는 생각밖에 없다. 버스 한 대 사서 ‘고향 어르신 곁으로 뽀빠이가 갑니다’라는 행사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버스에 가수, 악단, 의료봉사단 등을 태워서 오지를 찾아가 어르신들을 즐겁게 하고 비상약을 전달하는 것이란다. 또 장날 막걸리 파티라도 열어 주면 어르신들이 아주 좋아할 것이라면서 1, 2년 안에 그 뜻을 꼭 펼치겠다고 다짐한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이상용은 누구 ‘유쾌한 청백전’으로 방송 데뷔… ‘우정의 무대’ 통해 국민 MC로 1944년 충남 부여에서 미숙아로 태어나 서천에서 자랐다. 여섯 살 때 걸음마를 시작했다. 책가방을 들 힘이 없을 정도로 유약하게 자라면서 12살 때까지 여덟 가지 병을 앓았다. 13살 때부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아령을 들기 시작했다. 18살 때 미스터 대전고와 미스터 충남에 뽑혔다. 고려대 농대에 진학해 미스터 고려대에 선발됐고 응원단장을 지냈다. ROTC 기갑장교로 군 복무를 마쳤다. 제대 후에는 취직을 하지 못해 번데기와 북어 장수 등 22가지 물건을 파는 외판원 생활을 했다. 1973년 MBC의 ‘유쾌한 청백전’으로 방송에 데뷔해 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1989년부터 장교로 군 복무한 점이 인정돼 MBC ‘우정의 무대’의 MC로 발탁되면서 군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또한 연예인으로 활동하면서 중앙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해 심장병 어린이 돕기 등 많은 선행과 자선사업을 활발히 펼쳤다. 주요 수상으로는 국민훈장 동백장(1987년), 대한민국 5·5문화상(1995년), 문화관광부장관 표창 선행연예인(1998년), 제5회 대한민국 환경문화대상 MC상(2007년) 등이 있다.
  • 中 매섭게 느는 부채… 금융 위기 ‘먹구름’

    中 매섭게 느는 부채… 금융 위기 ‘먹구름’

    중국의 국가 부채 증가 속도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의 미국보다 빨라 중국발 금융위기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12일 미국 투자은행 골드만삭스가 발표한 ‘중국 신용 우려’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율은 2007년 153%에서 2012년 209%로 무려 56%포인트나 급증했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지기 전인 2002년부터 2007년 사이 미국의 부채 비율이 46%포인트가 증가한 것보다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 또 중국의 국가 부채 상황도 골드만삭스가 조사한 금융위기 발발의 세 가지 주요 조건 중 두 가지를 총족시키고 있어 위기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골드만삭스가 1960년대 이후 세계 170개국의 대출 급팽창 사례 175건을 조사한 결과 대출 급팽창이 6년 이상 지속되거나 부채 비율이 연간 25% 이상 상승할 경우 금융위기로 이어졌다. 급팽창 시작 시점의 부채 비율이 60% 이상일 때도 마찬가지다. 현재 중국의 경우 대출 급팽창이 5년째 계속되고 있으며, 급팽창 시작 시점의 부채 비율이 60%를 훨씬 초과했다. 다만 부채 비율 상승률은 연간 15% 정도에 그쳤다. 중국의 부채는 정부가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2008년 말부터 4조 위안(약 728조원)을 풀어 내수 부양에 적극 나선 이후부터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골드만삭스는 중국이 당장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향후 금융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인사]

    ■방위사업청 ◇기술서기관△선도기술사업팀장 류계근△국방로봇사업팀장 윤창문◇서기관△부대개편사업팀장 임영일 ■한국예탁결제원 △증권대행부장 남송우△리스크관리부장 김영민 ■한국일보 △부사장 이준희△논설위원실장 황영식△논설위원 이영성 황유석 장학만◇편집국△국차장(종합편집부장 겸임) 진성훈△부국장 황상진 고재학(전략기획실 제1실장 겸임) 최진환(전략기획실 제2실장 겸임)△편집2부장 채봉석△경제부 부장직대 정영오△산업부장 이성철△국제부장 박광희△문화부장 오미환△디지털뉴스부장 박진용△기획취재부 부장직대 최윤필△편집국장석 선임기자 장병욱△인천취재본부장 송원영◇창간60주년기념사업단△창간60년사편찬담당 하종오◇전략기획실△실장대우 송영웅 ■강남대 ◇부총장△교학 유양근△경영 배장오◇실장△교목 이준우△전략지원조정 오세진◇처장△총무인력개발 고인곤△학생 민상훈△시설관리 윤준선△입학 문재익◇원장△전산정보원 김대범△일반대학원 김철주◇비상대책위원회△제1대책위원 김동언△제2대책위원 서진수△제3대책위원 이춘호◇센터장△취업정보 김경환△교수학습지원 강현우 ■유진투자증권 ◇신임△리서치센터장 변준호 ■동부화재 ◇신임 <상무>△투자사업본부 허장<본점부장>△특별계정운용부 박준수◇승진 <본부장>△융자사업본부 유재호<부서장>△재무전략파트 정영△투자심사파트 박인배◇이동△투자지원파트장 신이영△융자심사파트장 임재환△일반계정운용1부장 황성배 ■아시아나항공 ◇임원△운항본부장 김승영△운항기획담당 김정수△안전운항담당 노은상 ■한라그룹 ◇승진 <만도>△대표이사 수석사장 성일모<한라마이스터>△대표이사 사장 박준열△부사장 김동건△전무 김상구◇전보 <한라그룹>△정도경영실 실장 박윤수<한라엔컴>△대표이사 이공희◇겸직△만도 부사장(안양한라아이스하키단 구단주 및 단장 겸직) 이석민△만도 전무(한라그룹 CIO 겸직) 이흥영
  • “복지 없이는 경제성장은 물론 국가존립까지 위험”

    “복지 없이는 경제성장은 물론 국가존립까지 위험”

    “복지국가 없이는 경제성장도 없다.” 장하준(50) 케임브리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9일 한국미래학회 주최로 서울 신문로 아산정책연구소에서 열린 ‘한국 복지국가의 미래:역사에서 배우는 교훈’ 초청 강연에서 이같이 강조했다. 그는 “1960년대 당시 ‘40년 후에 한국이 휴대전화 세계 최대 수출국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면 어느 누가 믿었겠느냐”면서 “지금은 없는 미래를 고민하는 과감한 상상력이 필요하다”며 1960년대 한국 상황과 지금을 비교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어 “2060년대 미래 한국이 지금보다 더 좋은 나라가 되도록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게 무엇일까. 나는 복지국가를 만드는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먼저 현재 한국이 처한 다양한 문제는 모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절반도 안 될 정도로 복지 지출이 미미하다는 것과 밀접히 연관된다고 지적했다. 그가 사례로 든 것은 자살률과 의대·공무원시험 쏠림현상, 저출산, 가계부채 악화와 중산층 붕괴 등이었다. 그는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복지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하면 경제성장은 고사하고 국가 존립까지 위협할 정도”라면서 “경제가 어려운데 복지가 웬말이냐고 하는 분들은 틀렸다”고 역설했다. 그는 “왜 미국이 스웨덴이나 핀란드보다 구조조정이 더 힘든지 생각해 봐야 한다”면서 “스웨덴이나 핀란드에선 직장을 잃어도 국가에서 최대 2년까지 봉급의 60~80%를 보전해 주고 재교육해 주며 취업을 지원해 주기 때문에 실업을 받아들이고 다른 살길을 찾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스웨덴과 핀란드의 역사를 통해 상상력을 키울 것을 주문했다. 그는 “스웨덴은 1920년대까진 전형적인 ‘작은 정부’였고, 피임법 가르치는 게 불법일 정도로 보수적인 국가였으며, 노사분규가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나라였다”고 지적하며 “미국조차 1913년에 스웨덴이 도입한 소득세를 1932년에야 처음 시행했다”고 말했다. 이어 “핀란드는 600년가량 스웨덴 식민지였고, 100년가량 러시아의 식민지배를 받았고 독립 뒤 곧바로 좌우 내전이 벌어졌으며 사민당은 1966년이 돼서야 첫 집권에 성공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가 부러워하는 복지국가들도 과거에 여건히 좋고, 상황이 쉬워서 복지국가를 이룩한 게 아니다”라면서 “결국 역사는 인간이 만든다. 지금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모든 면에서 우리 미래가 달라진다”고 말했다. 이어 “올해 세수가 부족한데 복지예산 축소가 맞느냐, 확대가 맞느냐 하는 식이 아니라 30년 이상을 바라보는 긴 시각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슐츠버거 회장 “뉴욕타임스 안 팔아”

    슐츠버거 회장 “뉴욕타임스 안 팔아”

    아서 슐츠버거 주니어(62) 뉴욕타임스(NYT) 회장이 NYT 매각설을 일축했다. 7일(현지시간) NYT 등에 따르면 슐츠버거 회장과 마이클 골든 부회장은 이날 전 직원에게 메일을 보내 “우리 가문이 신문을 팔 것인가. 대답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워싱턴포스트(WP) 매각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했다”며 “(WP를 소유했던) 훌륭한 그레이엄 가문이 WP를 떠났다는 사실이 슬프다”고 전했다. 일간지들의 연이은 매각 소식에 NYT도 매각되는 것이 아니냐는 여론이 증폭되자 1896년부터 3대째 NYT를 경영하고 있는 슐츠버거 집안이 직접 해명에 나선 것이다. 슐츠버거 회장은 “국제적 투자, 상품 다양화 등에 집중하는 신성장 전략과 질 에이브럼슨 편집국장을 주축으로 한 편집인단의 역량 강화가 성장의 주춧돌이 되고 있다”며 “NYT의 미래를 위해 우리 가족과 이사회는 물론 모든 경영진과 임직원이 똘똘 뭉쳐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2011년 NYT 160년 역사상 첫 여성 편집인이 된 에이브럼슨 국장은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영향력 있는 여성 20인 중 5위에 오르기도 했다. 2011년부터 온라인 뉴스 유료화에 들어간 NYT는 수익이 6.6%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매달 NYT 홈페이지를 찾는 방문자 수는 3000만명에 이른다. 월가 애널리스트들과 미디어 컨설턴트들은 “올해 2분기에 1480만 달러(약 164억원) 적자를 기록한 WP와 달리 NYT는 5340만 달러(약 593억원) 흑자를 기록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극과 극](4)라면과 울고 웃은 50년…‘신라면’ 아성 뒤 비운의 ‘쌀탕면’ 아시나요

    [극과 극](4)라면과 울고 웃은 50년…‘신라면’ 아성 뒤 비운의 ‘쌀탕면’ 아시나요

    라면이 우리나라에 소개된지 꼭 50년이다. 1963년 9월 15일 삼양라면이 처음 출시됐다. 중량은100g, 가격은 10원이었다. 1961년 설립된 삼약식품이 2년만에 내놓은 첫 작품이다. 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은 최근 “국민을 위해 애국하는 마음으로 라면을 생산했다”고 말했다. 전 회장에게 ‘라면은 기아(飢餓)로부터 탈출, 식량자급문제 해결 수단’이었다. “당시 남대문시장을 지나다 시민들의 미군들의 음식찌꺼기로 만든 5원짜리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줄을 선 광경을 보고, 과거 일본에 갔을 때 라면을 시식했던 기억을 떠올렸다”는 게 전 회장의 회고담이다. 이후 일본 묘조(明星)라면의 오쿠이(奧井) 사장을 끈질기게 설득, 시설과 기술을 이전받았다. 한국 1인당 年69개,세계1위 라면소비국  라면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은 시큰둥, 자체였다. 곡식 위주의 생활을 하던 국민들에게 라면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생소한 제품이었던 까닭에서다. 게다가 담백한 국물도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식량 문제를 고심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삼양라면에 관심을 보였다. “한국 사람은 맵고 짠 것을 좋아하니 고춧가루가 좀 더 들어갔으면 좋겠군”이라며 박 대통령은 제조 단가 탓에 사용하지 못하던 고춧가루 자금을 지원해주었다.(책:사물의 민낯) 일본식 라면과 다른 맵고 짠 맛으로 대표되는 한국식 라면이 탄생한 것이다. 라면은 적극적인 자사 홍보와 함께 정부의 혼분식 장려 정책에 힘입어 출시된지 1년쯤 지나자 소비자들의 반응이 나타났다.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라면 붐’의 시작이다. 라면은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한 인스턴트 식품으로 꼽히고 있다. 일본에 본부를 둔 세계라면협회(WINA)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즉석라면 판매량은 1014억 2000만개이다. 1997년 조사가 시작된 이래 처음 1000억개를 돌파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소비된 라면은 무려 35억 2000만개다. 중국, 인도네시아, 일본, 베트남, 인도, 미국에 이어 7번째로 라면을 많이 먹었다. 하지만 1인당 라면 소비량은 우리나라가 69개로 1위다. 중국 32.6개, 일본 42.6개에 비해 월등히 앞섰다. 쌀이 부족했던 시기 대체식품으로 개발했던 국산 라면이 반세기만에 국민의 기호식품, 제2의 쌀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삼양, 농심, 한국야쿠르트, 오뚜기 등 주요 라면업계의 지난해 매출액은 무려 1조 9800억원을 기록했다. 올해는 2조 800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물론 삼양라면이 첫 선을 보인 지 50년 동안 모든 라면이 국민들의 호응을 받은 것은 아니다. 제대로 소비자들의 손길을 받지도 못한 채 자취를 감춘 ‘비운의 라면’이 적잖다. [1968년 개발된 동명식품의 ‘풍년라면’ CF. 당시 라면은 기호식품이 아닌 배곯는 대다수 국민들의 훌륭한 먹거리였다. 1960년대부터 수많은 라면이 개발됐고 상당수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자료=유튜브] 농심 야심작 ‘쌀탕면’, 최단명 불명예 국내에서 ‘최단명 라면’은 농심에서 나왔다. 농심은 1990년 2월 야심차게 쌀을 30% 함유한 ‘쌀탕면’을 내놓았다. 1989년 12월 삼양식품이 전격적으로 쌀라면을 출시, 초반에는 공급이 달릴 큰 인기를 끌던 쌀라면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다. 한국야쿠르트도 농심보다 약 한 달 전 쌀라면을 선보였던 터였다. 이른바 ‘쌀라면 전쟁’은 1989년 11월 사회적인 논란이 된 ‘우지(牛脂)파동’에서 촉발됐다. 삼양식품은 직격탄을 맞았다. 우지, 즉 공업용 쇠고기 기름으로 라면을 튀겼다는 것이다. 삼양식품은 우지파동 속에 ‘절대강자’의 위상 유지를 위해 대안으로 쌀라면을 신제품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때 마침 쌀 소비량이 급격하게 감소, 쌀 소비 촉진도 쌀라면 전쟁을 부추기는데 한 몫했다. 농심은 ‘쌀탕면’의 흥행을 위해 최초로 ‘진공믹서공법’이라는 신 제조기술까지 도입, 면발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또 기름에 튀기지 않은 ‘무지방 건면’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가격 역시 기존 쌀라면보다 30원 비싼 330원으로 책정했다. 그러나 쌀라면에 대한 시장의 호응은 오래가지 못했다. 특히 ‘밀가루 라면’에 익숙해져버린 소비자들의 입맛을 돌리기에 역부족이었다. 쌀은 밀보다 비싸 가격경쟁력도 떨어졌다. 결국 뒤늦게 ‘쌀라면 전쟁’에 뛰어든 농심은 6개월 만에 ‘쌀탕면’ 생산을 중단했다. 쌀탕면은 농심 홈페이지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사라진 것이다. 쌀라면은 현재 삼양식품 등이 건강식으로 생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984년 설립된 청보식품의 주력 ‘영라면’ CF.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이었던 이주일씨를 홍보모델로 내세워 ‘곱배기’라면과 함께 출시 4개월 만에 라면시장 점유율 5%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장기 성장 발판을 마련하지 못하고 출시 2년 만에 결국 단종됐다. 자료=유튜브] 이주일 내세운 ‘영라면’도 불운 청보식품의 ‘영라면’과 ‘곱배기라면’도 생명이 짧았다. 1984년 식품업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청보식품은 이듬해 ‘영라면’과 ‘곱배기라면’으로 라면시장의 판도를 흔들었다.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이었던 고(故) 이주일씨를 모델로 발탁, 출시 4개월만에 시장 점유율 5%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청보식품 측은 이주일씨를 여러 차례 찾아가 “도와달라”고 읍소한 끝에 홍보모델 수락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과는 다르지만 당시 라면 광고 모델은 대체로 인기 코미디언이 맡았다. 코믹하고 소탈한 서민 타겟의 광고가 대세를 이뤘기 때문이다. 1975년 ‘농심라면’의 광고 모델 구봉서, 곽규석씨가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광고 멘트로 히트를 친 것이 대표적인 예다. 1986년 코미디언 이홍렬과 이경규의 ‘짜짜로니’ 광고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맛’이다. 곱배기라면은 이름 그대로 면의 양이 다른 라면보다 많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소비자들로부터 “맛이 싱겁다”, “스프 양이 부족한 것 같다”, “특별한 장점이 없다”는 혹평을 받았다. 이후 1987년 경영난을 겪다 부도가 난 청보그룹의 식품사업 대부분은 오뚜기로 흡수되면서 두 라면은 2년만에 단종됐다. 라면업계는 소비자들의 다양한 입맛을 사로잡기 위해 파격적인 맛을 내거나 새로운 기능을 곁들였지만 적잖게 쓴맛을 봤다. 지금은 이름도 생소한 카레라면(삼양·1971년 출시), 머그면(농심·1993년), 쇼킹면(팔도·1997년), 채식면(오뚜기·1998년), 케찹라면(팔도·1998년), 매운콩라면(빙그레·1998년), 랍스타맛 왕라면(한국야쿠르트·2000년) 등이 그것이다. 쇼킹면은 TV 광고에서 입에서 나온 뜨거운 열기 때문에 천장 스프링쿨러에서 물이 뿜어져 나와 방 전체가 물바다가 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자신있는 분만 드십시오’라는 다소 과장된 멘트로 청소년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는 했지만 소비자들의 오랜 선택을 받지 못했다. “자신있는 분만 드십시오” 쇼킹면의 도발 최근 들어 출시된 제품 가운데 2011년 4월 농심의 ‘신라면블랙’은 쌀탕면보다 더 빠른 출시 5개월만에 잠정 생산 중단돼 ‘최단명 라면’이라는 새로운 오명을 쓸 뻔했으나 용기면인 ‘신라면 블랙컵’으로 부활한 동시에 봉지면을 재출시, 미국·일본·중국 등 해외 수출로 판로를 개척했다. ‘신라면블랙’은 ‘신라면’보다 두배나 비싼 1600원을 소비자가격으로 정하고, “설렁탕 한 그릇의 영양이 그대로 담겼다”는 광고 카피를 통해 프리미엄 라면 이미지를 내세웠다. 하지만 출시 직후부터 “기존 제품을 개선한 ‘리뉴얼제품’에 불과한데 가격을 너무 많이 인상했다”는 논란에 휩싸인 끝에 출시 5개월만인 8월 30일 전격적으로 국내 봉지면 생산·판매를 중지했다. 농심은 지난해 봉지면 ‘신라면 블랙’을 국내에서 다시 내놓은 한편 월드스타 싸이를 용기면 ‘신라면블랙컵’ 홍보모델로 등장시키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에 나서고 있다. 해외에서 더 통한 신라면 블랙 5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어도 소비자들이 선택한 라면 맛의 변화는 그리 크지 않다는 게 업계의 한결같은 말이다. 일반적으로 국내 소비자들을 사로잡는 맛은 얼큰한 ‘매운 맛’이다. 장기적으로 성공한 라면을 단번에 따라잡기는 쉽지 않다는 얘기다. 농심 관계자는 “지금까지 장기 히트한 신라면 같은 대부분의 주력 라면은 출시 이후부터 맛의 변화가 전혀 없다. 맛을 바꿀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전통적인 매운 맛이 아닌 실험적인 시도는 거의 실패로 돌아갔다. 소비자가 요구하는 라면 맛이 상당히 보수적이라는 의미다. [빙그레가 1998년 개발한 ‘매운콩라면’ CF. 100% 콩기름을 사용해 라면시장에 ‘건강’이라는 화두를 던지며 한 때 돌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빙그레가 2003년 수익성 악화를 이유로 라면시장에서 철수하면서 결국 퇴출됐다. 자료=유튜브] 라면요리대회에서 우승경력이 있는 라면매니아 이창헌(42·국방부 계룡대 조리원사)씨는 “과거에 새로운 시도가 많았지만 소수를 위한 시장이기 때문에 소비자의 입맛에 어필하지 못하고 사라진 라면이 많다”면서 “각 회사마다 라면을 연구해서 새롭게 출시해도 대다수 소비자의 입맛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시장성이 떨어져 중도에 사라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신라면’, 단일품목 27년연속 1위 아성 반대로 우리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라면은 농심의 ‘신라면’ 이다. 1986년 10월 첫 출시돼 지난해까지 총 220억 봉지를 판매했다. 농심은 지금까지 판매한 신라면을 일렬로 세우면 지구를 100바퀴 돌 수 있고 에베레스트산을 22만 7924회 왕복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어떤 라면도 따라올 수 없는 실로 어마어마한 판매량이다. 단일 품목으로 현재까지 27년 연속 1위를 차지해 ‘라면계의 아성’으로 불린다. 한때 ‘하얀라면 돌풍’으로 점유율을 위협받기도 했지만 흔들리지 않고 지금까지 이르렀다. 해외에서는 80여개국에 수출돼 효자수출상품으로 불린다. 농심은 국산 라면의 자부심을 높이기 위해 2009년부터 ‘한국의 빅맥지수’로 불리는 신라면 지수를 발표하고 있다. 신라면 지수는 신라면이 판매되고 있는 주요 10개 지역의 신라면 1봉지 가격을 미국 달러로 환산한 것이다. 신라면 매출액은 국내외 판매를 합쳐 연간 8000억원에 달한다. 농심 전체 매출 2조원의 3분의 1에 가까운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최근에는 농심의 또 다른 베스트셀러인 ‘짜파구리’(짜파게티+너구리)의 약진에 잠시 주춤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국민들의 까다로운 입맛을 사로잡기에는 신라면 만한 것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라면매니아 이창헌씨는 “하얀 국물 라면이라는 새로운 시도가 있었지만 역시 빨간 국물이라는 전 국민적인 공감대를 벗어나지 못했다”면서 “신라면은 주식은 물론 해장용으로도 많이 사용하는 빨간 국물 라면의 대표주자 격인 라면”이라고 설명했다. 이씨는 “앞으로는 염도를 줄이고 건강을 생각하는 프리미엄 라면이 앞으로의 트렌드가 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전망했다. 한 라면업계 관계자는 “염도가 낮아지면 특유의 맛이 변할 위험도 있지만 규제가 강화되고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어 조금이라도 염도를 낮춘 건강 라면 개발에 모든 연구자들이 사활을 걸고 있다”고 말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시론] 부정청탁 금지법, 이젠 국회가 나설 때/최진욱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시론] 부정청탁 금지법, 이젠 국회가 나설 때/최진욱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한국은 세계 15위권의 경제력을 보이고 있다. 1960년대 초반만 해도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채 되지 않은 최빈국에서 선진국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경제 성장을 한 것은 가히 기적과도 같다. 반면 2012년 정부의 부패 정도를 나타내는 국제투명성기구의 부패인식지수는 세계 45위에 그쳤다. 최근 전·현직, 직위, 부처를 막론하고 연일 쏟아져 나오는 공직 사회의 부패 사건은 청렴에 관한 우리나라의 현 주소이다. 부패에는 거의 필연적으로 공직자가 개입되어 있다. 공직 사회의 부패를 척결하지 않는 한 부패 문제의 해결은 요원하다. 부패가 발생하는 복잡성만큼이나 그 해결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패에 가담한 공직자에 대한 예외 없는 처벌과 함께 부패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제도 개선이 중요하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부패 인식에 관해 선진국 수준으로 평가받는 홍콩과 싱가포르도 과거 극심한 부패를 그렇게 해결했다. 최근 국민권익위원회는 부패 방지를 위한 중요한 법 제정을 추진하였다. 공직자가 알선·청탁이나 사적인 이익에 매몰되어 공직을 개인적 이익 추구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부정청탁 금지 및 공직자의 이해충돌 방지법’(부정청탁 금지법)이 그것이다. 그렇게 추진되었던 이 법이 입법예고 이후 1년 동안 논의를 거쳐 드디어 국무회의를 통과하고 국회에 제출되었다. 입법예고 기간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에 비해 과잉처벌을 우려하는 정부 부처와 협의를 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국무회의를 통과한 정부안이 원안보다 후퇴했다는 비판적 시각도 제기되고 있는 등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가장 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은 공직자가 금품을 수수할 때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에 대한 규정이다. 원안에서는 100만원을 초과한 금품을 수수한 경우에는 형사 처벌, 100만원 이하인 경우에는 과태료를 물리도록 하였다. 이번에 국회에 제출된 정부안에서는 직무와 관련하여 또는 직위나 직책 등에서 유래하는 사실상의 영향력을 통하여 금품을 수수한 경우는 형사 처벌하는 것으로 조정되었다. 그 외에 직무와 관련 없는 금품은 기부, 후원 등 명목 여하를 불문하고 과태료로 제재한다. 정부안은 무조건 공직자를 형사 처벌하는 것보다, 엄하게 처벌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기준점을 무엇으로 정할 것인지를 고민한 결과물이다. 직무관련자가 제공하는 금품은 향후 청탁을 위한 일종의 ‘보험적 성격’이 있기 때문에 100만원보다 적은 금액이라고 해도 엄격한 잣대로 처벌해야 하는 것이 옳다. 이번 정부안은 이러한 부분이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원안에 비해 약화된 것만은 아니다. 후퇴, 반쪽짜리 논쟁보다는 우리 사회의 청탁 관행과 공직부패 근절을 위해 향후 국회에서 부정청탁금지법의 취지가 훼손되지 않고 국민의 기대를 담을 수 있도록 힘을 보태야 할 때이다. 실제 이 법은 대가성 없는 금품수수 금지만이 아니라 부정청탁의 금지, 공직자의 이해충돌 방지라는 의미 있는 장치들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부정청탁 금지는 일반 공직자보다 국회의원 등 정치인이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조항이다. 최근에도 한 국회의원이 지역구 교육감에게 인사 청탁하는 문자를 보낸 것이 문제된 적이 있다. 이제 이 법의 통과는 국회에 달려 있다. 우리 사회의 불신 중 국회와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가장 무겁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내려놓고 이 법의 통과에 나서야 할 때이다. 우여곡절 끝에 국회에 제출된 부정청탁금지법이 국회의원의 손에서 온전히 그 초심을 지켜갈 수 있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간절히 희망해 본다.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⑧ 1950~60년대 : 파괴와 재건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⑧ 1950~60년대 : 파괴와 재건

    “도시는 기억으로 살아간다”(The city lives by remembering)고 미국의 시인 랠프 왈도 에머슨은 읊었지만, 서울은 600년 고도의 기억이 별로 없다. 마치 신흥도시 같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통에 불타고 약탈당했으며, 일제강점기 도읍에 대한 자취는 강제적으로 지워졌다. 조선총독부-경성시청-남산 조선 신궁을 상징 축선으로 하는 식민 도시로 치장됐다. 한국 전쟁통에 그나마 남은 것 대부분이 파괴됐다. 1960년대 이후 개발독재시대의 무지막지한 개발 광풍을 타고 또 한 번 뭉개졌다. 역사의 향기는 흩어졌다. 한강 이남으로 영역을 확대한 서울은 사실상 한국전쟁 이후 새로 건설된 신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대문 안에는 표지석만 어지럽게 남았을 뿐이다. 전쟁과 대사건은 도시를 재건한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 폭격을 앞둔 맥아더는 “원래 도시란 천재지변이나 전쟁을 겪고 나면 그전에 비해 몇 곱절 더 크고 좋은 새 도시로 부흥된다. 미국이 재건을 도울 것이니 서울은 앞으로 이상적인 현대 도시로 탈바꿈할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실제 1644년 대화재로 도시의 80%가 타 버린 영국 런던은 옥스퍼드대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 교수에 의해 오늘의 런던으로 재건됐다. 일본 도쿄도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잿더미가 됐지만 탁월한 도시계획가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도쿄시장의 주도로 세계 도시계획 사상 유례가 없는 시가지 개조를 통해 새로 태어났다. 런던과 도쿄는 세계대전으로 또 한 번 타격을 입었지만, 옛 도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서울의 재건은 성공작일까? 서울을 역동적인 현대 도시로 평가할 수는 있지만, 역사 도시로 평가하기엔 머쓱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서울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은 꽤 혼란스럽다. 서울은 네 번 결정적인 상처를 입었다. 16세기 일본과 중국 군대에 의해 약탈당했으며, 근대 일제강점기엔 성곽을 허물고, 상징 축을 강제로 바꾸는 방법으로 도시 형태가 조작됐다. 한국전쟁기 유엔군과 한국군의 청야(淸野)작전(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농작물이나 건물 등 지상에 있는 것들을 말끔히 없애는 작전)을 통해 철저하게 파괴됐다. 1960~70년대 우리 손으로 남은 문화재를 헐어서 치워 버렸다. 맥아더의 말처럼 기회는 있었다. 1952년 전후 복구 차원의 첫 도시계획안을 마련하면서 세종로 등 39개의 큰길을 확장하거나 신설하고, 광화문광장·서울시청광장·남대문광장 등 19개의 광장을 만드는 과감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재정부족 등을 이유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유럽의 오래된 도시처럼 구도심(사대문 안)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사대문 밖이나 강남 신시가지를 개발하겠다는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전환이 없었다. 한국전쟁 이후 ‘광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서울 집중이 기회를 날려 버렸다. 집중을 막으려고 온갖 정책을 동원했지만 약효가 듣지 않았다. 해방 전후 100만명대였던 서울 인구는 1966년 380만명, 1970년 540만명을 넘어서더니 1990년 1000만명을 돌파해 버렸다. 수도 서울 행정은 집 지을 땅을 확보하고, 도로를 넓히고, 교통수단을 늘리고, 수돗물을 공급하고, 쓰레기를 치우는 것에 매달렸다. 만약 그때 인구의 서울 집중을 막을 수 있었더라면 서울은 한가롭게 전차가 다니며, 꼬불꼬불한 골목길이 정겨운 기와집이 빼곡한 도시로 남았을 것이다. 한강과 북한산이 주는 자연의 세례를 맘껏 누리는, 풍광이 뛰어난 성곽 도시로 유지됐을 것이다. 1950년대 서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손정목 전 시립대 교수의 ‘서울도시계획이야기’를 기본으로 사대문 밖 풍경을 상상해 보자. 동쪽으로 동대문을 나서면 신설동 큰 길가까지 집이 들어 차 있지만, 바깥은 논밭 천지다. 신당동에 집이 드문드문했을 뿐 금호동·옥수동 일대는 산이었다. 왕십리를 지나 한양대 일대는 미나리꽝이었고 성동교의 나무다리가 삐꺽거렸다. 남쪽 한강대교에 이르는 동빙고동과 서빙고동 주민은 1000명 안팎이었고, 원효로 일대는 대부분 논밭이었다. 노량진, 상도동, 대방동, 영등포는 큰 길가조차 목가적인 전원 풍경을 연출했다. 서쪽으로 신촌을 지나 마포 전차 종점을 벗어나면 벌거숭이 산과 논밭이 펼쳐졌다. 동북쪽은 미아리고개, 서북쪽은 독립문과 현저동이 경계였다. 지금의 강남·서초·송파·강동·강서·관악·구로·금천·도봉·노원·은평구 등은 모두 경기도였다. 서울의 고층 건물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최고층 건물은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8층짜리 반도호텔이었다. 이웃 조선호텔과 한국은행 모두 일제가 남긴 건물이었다. 1955년에 종로 사거리에 2층짜리 신신백화점이 신축됐고, 1957년 광화문 사거리와 을지로 1가에 3층짜리 국제극장과 5층짜리 개풍빌딩이 각각 들어섰다. 1958년 남대문에 7층짜리 그랜드호텔이 문을 열자 구경 인파가 몰렸다. 당시 서울 도심부의 평균 층 높이는 2층이 채 되지 않았다. 도심부를 고층화하려고 주요 간선도로변의 건물 높이를 3~5층 이상으로 정할 정도였다. ‘한강의 기적’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62년부터 약 20년간의 고도성장기를 일컫는다. 이 기간 서울은 경천동지할 변화를 겪는다. 서울의 공간 변화는 1966년부터 1980년까지 15년간 거의 이뤄졌다. 주택지·도로·상하수도·지하철 등 현대 서울의 하부구조가 이때 거의 갖춰졌다.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절대권력자의 ‘분부’를 이행한 김현옥·양택식·구자춘이라는 3명의 ‘충복’ 서울시장이 재직한 기간과 일치한다. 서울의 얼개는 박 대통령의 구상과 지시에 의해 거의 결정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6년 서울도시기본계획안이 세워졌다. 서울의 균형 발전을 꾀하려고 사대문 안에 집중된 입법·사법·행정부의 기능을 분산시키려는 계획이 눈에 띈다. 입법부는 남서울(강남·서초구), 사법부는 영등포, 행정부는 용산 일대, 세종로 지역은 대통령 관저 및 직속기관 배치 지역으로 정했다. 지금 와서 보면 입법부와 사법부의 입지가 맞교환됐고, 서울시청이 용산으로 옮겨가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교통계획을 보면 서울역~청량리(1호선), 서소문~을지로~성동(2호선), 갈현동~종로2가~을지로2가~퇴계로~천호동(3호선), 우이동~종로4가~퇴계로~말죽거리(4호선) 등의 지하철 4개 노선 건설계획이 잡혀 있다. 10년 뒤 구자춘 시장에 의해 2호선이 을지로와 영등포~영동을 잇는 순환선으로 변경되는 등 엄청난 노선 변화가 일어났지만, 지하철 4개 노선에 대한 기본 구상이었다. 이 밖에 4개 순환선과 14개 방사선을 간선도로망으로 7개의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계획과 노면 전차는 철거하고 광화문 사거리와 시청 앞 광장에는 지하차도를 만들고, 시청 앞 광장 지하는 지하도시화한다는 계획도 포함돼 있다. 도심 재개발과 강남·송파 등 남서울개발, 뚝섬·창동·망우 등 동서울개발, 불광·성산·김포·시흥지구의 서서울개발 등 신시가지개발 계획이 들어 있다. 1년 예산이 170억원에 불과한 서울시가 20년 앞을 내다보고 인구 500만명을 예상해 3235억원의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한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언론으로부터 ‘즉흥계획’ ‘실현성 없는 독단’ ‘재무계획 없는 무지개’ 등등 융단폭격을 맞았다. 그러나 격변의 15년 중 7년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 기획관리실장 등을 지내며 계획을 수립하고 집행한 손정목 전 교수는 “꿈도 환상도 아니었다. 최초의 기본계획이었다는 점, 도심부 재개발이니 고도지구, 미관지구 개념이 도입돼 일반에 공개됐다는 점, 70~80년대 전국 모든 도시가 수립한 도시계획의 모델이 됐다는 점 등에서 의미가 있다”고 회고했다. 불완전하나마 서울시 장기계획의 틀이 된 것이 사실이다. 일제 말기인 1940년부터 1965년까지 서울은 잠자는 도시였다. 1937년 중·일 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이 터져 건축자재를 구할 수 없었고, 한국전쟁이 이어지면서 건축 행위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 건물이 목조건물 수명 30년을 다한 상태였다. 장충동, 신당동 일대와 남대문로, 충무로, 을지로 등 일본인 주거지에 정원이 딸린 일본식 저택과 주택이 밀집해 있었다. 가회동·명륜동·동숭동·북아현동 일대에는 한옥촌이 빼곡하게 형성돼 있었다. 마포, 왕십리, 동대문을 벗어난 지역은 논밭이었다. 사대문 안과 독립문, 신촌, 신설동, 돈암동, 신당동, 용산이 서울의 전부였다. 노면 전차 노선을 기준으로 보면 동쪽으로 청량리·왕십리, 남쪽으로 노량진·신길동·영등포, 서쪽으로 마포·신촌, 서북쪽으로 독립문, 동북쪽으로 돈암동 전차 종점까지가 서울이었다. 지방에서 무작정 상경한 사람들의 주거인 무허가 판잣집이 도심에서 가까운 하천변이나 산비탈을 차지했다. 1966년 당시 13만여채의 판잣집이 서울 곳곳에 달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서울은 개발행 특급 열차가 출발하기 직전의 폭풍전야였다. joo@seoul.co.kr
  • [서동철의 시시콜콜] 정림사 복원을 추진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동철의 시시콜콜] 정림사 복원을 추진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여 정림사터 오층석탑은 목조 건축을 석조로 번안한 한국 특유의 붙탑 가운데서도 초기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예술은 발생하여 전성기를 지나 쇠퇴하는 것이 일반적 사이클이다. 그런데 백제 석탑이 놀라운 것은 발생한 순간 보완이 필요없는 완결미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후 석탑의 전통이 1500년 동안 이어져 왔지만, 백제 조형미와 비교할 수 있는 석탑은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정도이다. 지금 남아 있는 백제 석탑은 정림사 것과 익산 미륵사 서탑, 최근에야 백제 것으로 공인받기 시작한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이 전부이다. 특히 정림사탑의 균형 잡힌 아름다움은 뛰어나다.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부여는 538년 성왕이 공주에서 도읍을 옮긴 이후 660년 왕조가 막을 내릴 때까지 백제의 수도였다. 부여는 오래전부터 중고생들의 중요한 수학여행지였고, 지금도 갈수록 중요한 역사탐방지로 떠오르고 있다. 그럼에도 부소산에 올라 낙화암을 돌아보고, 궁남지에도 가보지만 전설만 남았을 뿐 눈에 보이는 백제의 흔적은 찾기가 어렵다. 그 면모를 눈으로 확인하려면 20세기 건물인 국립부여박물관으로 가는 것이 오히려 빠르다. 이런 상황에서 정림사터 오층석탑은 부여시내에 남은 사실상 유일한 백제 유적이다. 정림사를 복원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주민들은 신라는 물론 고구려도 생각하지 못했던 석탑의 존재가 자랑스럽기만 하다. 그런데도 오층석탑은 부여시내 한복판이라고는 해도,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정림사터에 쓸쓸한 모습으로 외롭게 서 있다. 절의 모습을 백제 당시로 되돌리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국내외 답사객을 더 많이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관광산업적 기대도 높다. 불교계 역시 삼국시대 대표적 사찰이 복원된다면 단순한 순례지가 아니라 예불과 수도 공간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반기고 있다. 하지만 나당연합군이 부여를 잿더미로 만든 상황에서 어떻게 정림사탑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잘 알려진 대로 정림사탑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낙서가 새겨졌다. “백제가 다시 일어설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라”는 내용이다. 주민들을 협박하는 정치적 선전판으로 쓰이지 않았다면 정림사탑도 파괴됐을 것이다. 정림사가 화려하고 웅장하기만 한 절집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백제 멸망 과정에서 정림사탑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퇴색하고 만다. 발굴조사로 백제 당시 절의 구조는 확인됐다고 한다. 하지만 백제 건축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오리무중이다. 복원한다고 해도 백제 사찰이 아니라 조선 후기 건축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복원을 추진하는 분들에게 당부한다. 정림사는 지금이 가장 아름답다.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시론] 우리 역사 교과서 문제의 핵심은…/이호철 소설가·예술원 회원

    [시론] 우리 역사 교과서 문제의 핵심은…/이호철 소설가·예술원 회원

    내가 우리 작단에 소설가로 데뷔한 뒤 처음으로 특별 글 청탁을 받아 응낙했던 것이 바로 1956년 봄인가, 이 서울신문이었다. 그로부터 어언 60년 가까이 지나 모처럼 같은 서울신문에서 글 청탁을 받고 보니, 82세에 이르러 뭉클한 감회도 없을 수가 없고, 1970년대와 1980년대 두 번에 걸친 감옥살이를 비롯해 필자대로 파란만장하게 겪었던 숱한 일들이 새삼 한 아름으로 당겨온다. 그리하여 모처럼 기회가 닥친 이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할 것인가. 오늘 2013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간곡하고 당면한 그리고 간절한 이야기를 내밀고 싶은데,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 점을 두고 며칠을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 얻어낸 결론은 다름이 아니었다. 요즘 항간에 부글부글 끓고 있는 우리네 중·고등학교의 ‘역사교과서’ 문제였다. 그렇잖아도 지난 7월 31일자 어느 신문에도 ‘청와대, 새누리당, 교육부가 검토 중인 역사교육 강화 4개 방안’이니, ‘국사(國史), 국사학과 독점 안 된다’느니 관련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는데, 그 점을 한번 이 자리에서 필자대로 제기해 볼까 한다. 1945년 해방 뒤의 우리네 역사는, 우선은 남북 양측 권력의 실황(實況)에 초점을 맞추어야만 확실한 답이 나온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이를테면 남쪽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북의 권력자 김일성, 이 두 사람만을 놓고 정면으로 한번 마주 비교해 보자. 1947년에 이승만이 ‘정읍(井邑) 발언’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을 때 당시 김구·김규식을 비롯해 이 나라 방방곡곡에서 반대의 물결이 회오리쳤었는데, 바로 그때 북에서는 그곳에 주둔했던 소련군 지휘하에 그 1년 전인 1946년 2월 8일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라는 단독정부가 이미 출범해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갖은 무리한 짓까지 서슴지 않으며, 좌익 쪽 스탈린의 졸개들인 박헌영 일당을 송두리째 탄압해 이 남쪽의 공산화를 막아냈던 것이었다. 1948년 4·19를 기해 북의 평양에서 북한 정권 주관으로 남북 협상이라는 것이 열렸을 때도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남쪽 요인 여럿이 북으로 들어가지만 김구 일행은 그냥 돌아오고, 벽초 홍명희는 그대로 북에 남아 그해 8월에는 박헌영과 함께 북한 정권, ‘공화국’의 부수상이라는 자리를 맡기에 이른다. 그로부터 66년이 지난 현 2013년 시점에 와서 새삼 돌아보면, 그때 이승만이 거의 혼자 힘으로 해 냈던 그 일, 스탈린 휘하의 박헌영 일당을 무찌름으로써 우리 남한의 ‘공산화’를 막아냈던 그가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그리고 어떤가. 그 이승만은 지금도 그 뒤의 박정희·김대중과 함께 동작동의 묘소 속에 묻혀 있고, 부산 토성동 ‘이승만 기념관’이라는 곳에 가 보아도 그지없이 조촐하고 질박하지만, 북의 김일성과 김정일은 어떤가. 저들 부자(父子)의 시체는 엄청난 거금을 들여 보존, 온 세계에 유례가 없는 호화찬란한 사후 궁전까지 조성함으로써 전 인류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어찌 한 나라의 권력이라는 것이 저 지경까지 이를 수 있다는 말인가. 필자는 바로 5년 전인 2009년에 우리네 남북이 겪어온 지나간 역사를 그 실상(實狀)대로 소설 형식으로 다룬 ‘별들 너머 저쪽과 이쪽’이란 책 한 권을 출간했었는데, 이번 기회에 교육부를 비롯해 관련 부처 담당자들이 관심을 가져준다면, 새로 책 제목부터 ‘손쉽게 읽을 우리네 근·현대역사’ 같은 것으로 고쳐 전국 중고생들부터 읽혔으면 싶다. 아무쪼록 관련 부처 담당자들부터 이 책을 한번 읽어주었으면 하는 간곡한 바람이다.
  • [데스크 시각] 불안과 불편/박상숙 산업부 차장

    [데스크 시각] 불안과 불편/박상숙 산업부 차장

    초등생 아들이 수련회를 다녀왔다. 처음으로 혼자 집을 떠난 2박 3일. 학교에서 가정통신문이 왔을 때 고민스러웠다. 보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기우(杞憂)라고 해도 혹시 모를 사건, 사고가 걱정됐다. 어린이들이 희생된 십수년 전 씨랜드 화재의 악몽도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내가 간 ○○○수련장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데래.” 건강한 얼굴로 씩씩하게 돌아온 아들은 집 떠난 첫 경험을 묻는 말에 자랑이 늘어진다. 아이의 굳은 믿음에 이제 시설과 시스템이 좋아졌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긴 그렇게 많은 인재를 겪었으니 그래야겠지. 방심은 금물이라더니 얼마 안 가 생때같은 고등학생 5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설 해병대 캠프 사건이 터졌다. 이보다 허망한 죽음이 또 있을까. 주민들도 위험하다고 말렸던 바닷가로 아이들은 구명조끼도 없이 내몰렸다. 그즈음,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지하에서 상수도관 공사를 하던 근로자들이 불어난 물에 수장된 변고가 있었고, 방화대교 상판이 무너지면서 귀중한 생명이 희생당하는 비극이 이어졌다. 원인은 이번에도 역시나 ‘안전 불감증’이다. 특정 구호나 단어가 자주 거론되는 데는 그런 표현이 상징하는 내용이 사회에 제대로 구현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역설처럼 우리는 늘 안전 불감증을 말할 뿐 여전히 안전을 ‘불감’하고 있다. 산업현장의 빈번한 안전사고로 경각심이 높아질 만한데도 글로벌 일류를 지향한다는 삼성조차 불산 누출, 물탱크 붕괴 등 인재를 잇달아 일으키고 있지 않은가. 몇 년 전 이탈리아에서 만났던 한 지인의 체험적 비교문화론이 생각난다. 흔히 이탈리아도 반도국가라 한국인과 성향이 비슷하다고 한다. 그는 그러나 결정적 차이가 있다면서 ‘불안과 불편’을 키워드로 끄집어 냈다. 그의 관찰에 따르면 이탈리아 사람은 불편한 건 참아도 불안한 건 못 참는다. 이와 반대로 대부분의 한국인은 불안한 건 참아도 불편한 건 못 참는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는 5층, 7층짜리 건물 가운데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도 상당하다. 혹시 모를 엘리베이터 고장에 대한 불안을 견디느니 불편해도 두 발로 걸어 올라가는 게 차라리 낫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그 나라에서는 어린 아이를 엘리베이터에 혼자 태우는 것은 불법이다. 안전사고나 납치 등의 범죄를 우려해서다. 자칫하면 부모가 경찰에 불려 갈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은 불안과 동거하는 데 익숙하다. 연이어 터진 어이없는 죽음은 불안보다 불편을 먼저 앞세운 탓이다. 먼 바다도 아닌데 구명조끼 없이 들어간다고 무슨 일 나겠어? 공사가 하루가 시급한데 비 좀 내린다고 별일 있겠나? 규칙 좀 어겼다고 무슨 큰일이 터질까? 21세기 정보기술(IT) 강국에 사는 우리는 여전히 ‘설마가 사람을 잡게’ 하고 있다. 얼마 전 6·25 정전 60년 기념식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한국은 승리자”라고 칭송해 마지 않았다. 초토화된 폐허에서 마천루의 숲으로 바뀐 서울은 성형미인의 ‘비포, 애프터’ 사진보다 더 극적인 변신을 이뤘으니 그럴 만하다. 그러나 예뻐진 외모와 커진 덩치에 걸맞게 인식은 자라지 못했다. 세계 10위권 경제강국이지만 안전의식은 턱없이 낮은 것이 우리의 자화상이다. 인명재천(人命在天)을 신봉하면서 안전수칙을 불편으로 인식하는 한, 한국사회는 불안을 계속 이고 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alex@seoul.co.kr
  • 전두환 전대통령측 “원래 재산 많아…숨긴 돈은 없어”

    검찰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미납 추징금 환수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이는 가운데 전씨 측이 “취임 전부터 원래 재산이 많았다”고 주장했다. 일가 재산의 형성·증식에 재임시 받은 불법 정치자금이 섞이지 않아 추징당할 돈도 없다는 얘기다. 현재 전씨 본인의 재산이 사실상 없기 때문에 가족 등 제3자에게 추징하려면 자금원이 전씨의 비자금이거나 비자금에서 유래한 불법재산임을 검찰이 입증해야 한다. 전 전 대통령을 17년 동안 보좌한 민정기 전 청와대 비서관은 6일 최근 논란이 되는 전씨 일가 재산의 형성 과정을 비교적 자세히 공개했다. 민 전 비서관은 이례적으로 A4 용지 7쪽 분량의 ‘보도 참고 자료’를 작성, 배포했다. 민 전 비서관에 따르면 재산의 대부분은 전씨가 영관급 장교이던 1960∼1970년대 장인인 고 이규동씨가 자신이나 전 전 대통령, 장남 이창석씨 등의 명의로 취득했다. 그는 이창석씨 소유로 있던 경기 오산 일대 임야와 현재 시공사 사옥이 들어선 서울 서초동 땅, 성남 하산운동 일대 토지 등을 사례로 들었다. 전체의 절반 가량이 차남 재용씨에게 넘어간 오산 땅 29만여평(95만㎡)의 경우 1968년, 이창석씨가 1978년 사업자금을 마련하려고 처분한 성남 땅 역시 1960년대 취득했다는 것이다. 전씨가 월남에 파병됐을 당시 부인 이순자 여사가 현재 자택을 지은 연희동 땅도 1969년 취득했다고 그는 밝혔다. 민 전 비서관은 “증여와 상속 등의 절차를 거친 것은 1980∼1990년대지만 취득시기는 그보다 훨씬 전”이라며 “정치자금이 흘러들어갔다는 의혹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들 땅의 재산가치가 1970년대 이후 도시개발 등으로 크게 불어났지만 취득 당시에는 별 볼일 없었다고 설명했다. 오산 땅은 전 전 대통령의 장인이 산림녹화사업을 하려고 잣나무를 심은 야산이었고 연희동 자택 부지 역시 원래는 논밭이었다는 것이다. 서초동 땅 역시 당시에는 경기도 광주군에 속했다. 민 전 비서관은 “1983년 공직자 재산등록 때 전 전 대통령 내외가 각각 20억원, 40억원 정도의 재산을 신고했고 현재 가치로 따지면 최소 수백억원”이라며 “대통령 취임 전에 조성됐다는 증빙 서류가 첨부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 취임 전 재산은 육군 경리감을 지낸 장인 이규동씨가 “집안 살림은 나한테 맡기고 군무에만 전념하라”며 증식시켜 줬다고 그는 전했다. 민 전 비서관은 “덕분에 전 전 대통령은 박봉이지만 봉급을 한 푼도 안 쓰고 모았고 이순자 여사는 편물을 배워 부업을 했다”고 덧붙였다. 지난달 말 검찰이 압류한 이순자 여사 명의의 연금보험 역시 네 자녀에게 고루 나눠준 이규동씨의 재산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러나 일가의 재산관리인으로 지목되는 처남 이창석씨와 자녀들의 재산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조사가 진행중인 만큼 자금은닉 여부가 조만간 판명될 것”이라며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민 전 비서관은 “공과 사를 엄격히 가리는 것은 전 전 대통령이 평생을 지켜온 생활 수칙”이라며 “공적인 용도를 위해 마련한 정치자금을 자녀들에게 빼돌렸다는 의심은 전 전 대통령을 잘 모르고 하는 억측”이라고 반박했다. 전씨 측의 이런 주장은 비자금의 사용처를 명확히 밝히는 동시에 일가 재산의 자금원을 비자금과 분리시키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앞서 지난 5일 전씨 측은 과거 뇌물수수 사건의 수사기록 일체를 열람하게 해달라고 검찰에 신청했다. 전씨 측은 당시 기업들로부터 받은 돈을 정치 활동비로 다 썼고 나머지는 검찰에 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민 전 비서관은 이날 “이번 자료 발표가 전 전대통령의 지시나 위임에 의한 것이 아닌만큼 전 대통령의 입장과 생각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며 “관련 내용은 민정기 개인의 생각을 밝힌 것”이라고 전제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朴대통령과 김기춘 비서실장의 각별한 인연… 정수장학회부터 ‘父女 대통령 보좌’

    朴대통령과 김기춘 비서실장의 각별한 인연… 정수장학회부터 ‘父女 대통령 보좌’

    김기춘 신임 청와대 비서실장은 박근혜 대통령과 매우 각별한 인연을 이어왔다. 두 사람의 인연의 시작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선 김 실장은 박 전 대통령과 육영수 이사의 이름을 따서 만든 ‘정수장학회’의 1기 장학생 출신이다. 정수장학회 출신 졸업생들의 모임인 ‘상청회’의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1960년 1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뒤 1964년 광주지검 검사를 시작으로 서울지검 공안부장 등을 거친 검찰 내 공안통이었다. 김 실장이 35세이던 1974년 육영수 여사가 조총련계 문세광으로부터 살해당했고, 이 사건을 김 실장이 조사하고 문세광의 자백을 받아내면서 본격적으로 박 전 대통령과의 인연도 시작됐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문세광에게 ‘사나이답게 당당하게 답해라’고 다그치면서 문세광이 육 여사 암살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앞서 1972년 유신헌법 제정 과정에서는 초안 작성에 참여하는 등 관여했고, 박 전 대통령 말년에는 청와대 비서관도 지냈다. 그는 이어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을 연달아 지냈다. 법무부 장관 재임시절에는 ‘초원복집’ 사건을 주도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92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당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부산 남구 대연동의 ‘초원복집’ 식당에서 부산시장과 부산지방경찰청장 등 지역 기관장들과 모여 비밀회동을 하면서 파문이 일었다. 이 자리에서 나온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상징어가 되는 등 큰 논란을 불러왔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총애를 받아 김 실장은 승승장구했다. 그는 1995년 15대 총선을 통해 정계에 입문한 뒤, 16대, 1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2004년 17대 국회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을 주도했으며,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으로 탄핵 심판시 일종의 검사 역할을 했다. 박 전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를 맡았던 2005년 여의도연구소장에 내정되면서 박 대통령과도 정치적으로 연을 맺었고, 특히 2007년 17대 대선을 앞두고 벌어진 한나라당 경선에서 박 대통령의 선거대책부위원장 및 법률자문위원장을 맡아 박 대통령을 지원했다. 이 때부터 김 실장의 주도로 원로 자문그룹인 ‘7인회’가 핵심 역할을 했다. 7인회에는 최병렬, 김용갑, 김용환, 현경대 전 의원 등이 포함됐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여섯살 때 맞은 북한군 총알 63년 만에 심장 옆에서 꺼내 “아이에게 총 쏘는 비극 끝내야”

    여섯살 때 맞은 북한군 총알 63년 만에 심장 옆에서 꺼내 “아이에게 총 쏘는 비극 끝내야”

    1950년 10월 강원도 양양군의 한 야산에서 여섯살 꼬마는 밭일하는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가 어디선가 울리는 총성에 정신을 잃었다. “북한 인민군이 우리 아들을 쐈다”는 아버지의 외침만 희미하게 들렸다. 꼬마는 기적처럼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총알(아래)은 60년 세월, 몸 안에 고스란히 상처로 남았다. “이제 편합니다. 그 긴 세월 몸에 지니고 다녔다는 게 기적 같은 일이죠. 어린 아이에게 총을 쏠 만큼 비극적인 일이 다시는 없길 바랍니다.” 4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만난 오경택(위·69)씨는 그간 쌓인 억울함에 눈물부터 쏟았다. 오씨는 지난달 29일 이 병원에서 총탄 제거술을 받았다. 63년 만이었다. 호흡곤란과 가슴 두근거림 때문에 병원을 찾은 오씨의 병명은 ‘교착성 심낭염’이었다. 병원에서 짚은 원인은 우심방 옆 탄두였다. 엑스레이와 컴퓨터 단층촬영(CT) 필름에는 심장 바로 옆 경계선에 총알 모양의 금속성 물체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오씨는 그동안 몇번이나 병원을 찾았지만 “제거하려면 위험하니 그대로 사는 게 낫다”는 말을 듣고 발길을 돌렸다. 35년간 군 복무를 마치고 원사로 전역한 오씨는 “내 몸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그들로부터 이 나라와 다른 사람을 지키고 싶다는 각오가 컸다”고 말했다. 그의 몸에서 나온 총알은 길이 1.6㎝. 신인균 자주국방네트워크 대표는 당시 북한군이 사용한 소련제 기관단총 PPSH-41의 탄약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주치의 엄재선 교수는 “당시 총알이 폐와 심장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심장 바로 옆에서 멎는 바람에 기적적으로 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1㎜라도 더 들어갔으면 위험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
  • [글로벌 시대] 전쟁의 추억/배종하 국제식량농업기구 베트남국가사무소장

    [글로벌 시대] 전쟁의 추억/배종하 국제식량농업기구 베트남국가사무소장

    베트남은 거의 40년 가까이 전쟁을 치른 나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5년 9월 독립선언을 계기로 10여년간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치러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프랑스를 물리쳤다. 그러나 제네바협정에 따라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이 갈라졌고 1965년 미국이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1975년까지 10년 동안 베트남전을 치른 후 마침내 통일을 이룬다. 1978년에는 캄보디아를 침공해 폴포트 정권을 붕괴시켰고, 국경분쟁으로 거대한 중국과 전쟁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60년이 흘렀음에도 3년의 전쟁이 남긴 상처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는데, 베트남은 강산이 네 번이나 변하도록 전쟁을 했으니 국민들이 겪은 정신적·물질적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전쟁이 종식된 지 30년이 지났고 한창 뻗어나는 젊은 세대들은 전쟁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지만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가정이나 집안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1972년 12월에는 B52 폭격기가 보름 동안 밤낮으로 하노이를 폭격했다. 그 속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공포가 어떠했을까. 말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 희생되어 거의 모든 국민들이 부모 또는 친척이나 가까운 친구를 전쟁에서 잃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아직도 전쟁의 그림자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깊게 드리워져 있다. 베트남에 오면서 궁금했던 것 중의 하나가 이 사람들은 과거 비참하고 힘들었던 전쟁의 역사에 대해서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런데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베트남 사람들은 전쟁 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지난 수 십년 동안 전쟁이 그들의 삶이었기에 무슨 대화를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전쟁이 화제에 오르리라고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그렇지 않다. 한국도 베트남전쟁의 가해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도 보지 못했다. 정부 관리들도 과거를 얘기하거나 베트남 전쟁에 대해 사과한다고 얘기하면 일관되게 그건 지나간 일이고 지난 일은 더 이상 논하지 말자, 앞으로 잘하자는 얘기만 한다. 더구나 베트남은 전쟁 피해에 대해서 배상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누구에게도 사과를 요구한 적도 없다. 위안부, 강제징용 문제 등이 일본과 아직도 큰 외교 현안이 되고 있는 우리와 대비가 된다. 우리보다 엄청나게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과거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는 꼿꼿함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국가 통치의 핵심에 있는 공산당 정부 때문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베트남의 국민성이라고 보는 게 맞지 않나 싶다. 재미있는 일화 하나. 베트남전 당시 미국에도 반전운동이 심했고 영화배우 제인 폰다, 가수 조앤 바에즈와 같은 반전운동가들은 전시에 하노이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 전 하노이 유명호텔을 리노베이션하다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지하 방공호를 발견했는데 그 방공호에서 그들이 남긴 메모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수년 전에는 전쟁 중에 희생된 젊은 베트남 여인의 일기가 알려져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 전쟁에 대한 원망, 비참한 조국의 운명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은 이 일기는 한 미국인이 간직해 오다가 수년 전 책으로 출판되었다. 전쟁의 상흔은 이렇게 아직도 여기저기 남아 있다.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남아 있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은 그걸 드러내지 않는다.
  • 美 “北의 통미봉남 더이상 안 통해”

    美 “北의 통미봉남 더이상 안 통해”

    미국은 1일(현지시간) 북한의 ‘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시드니 사일러 백악관 한반도 담당 보좌관은 한인 비영리단체인 한인위원회(CKA) 관계자를 비롯한 재미 한인들을 초청해 가진 국정브리핑에서 한국말로 ‘통미봉남’이라고 발음한 뒤 “이는 미국과 대화하면서 한국을 배제하려는 북한의 전략”이라면서 “이에 대한 우려는 옛날 얘기”라고 잘라 말했다. 사일러 보좌관은 부인이 한국 사람으로 한국어가 유창하다. 그는 “지난 4년여에 걸쳐 이명박, 박근혜 정부와 미국 정부는 매우 긴밀하고 투명한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면서 “한·미 양국이 북한의 교묘한 전략에 당할 것이라는 우려는 더 이상 없다”고 부연했다. 그는 특히 최근 남북 간 개성공단 협상을 지목하면서 “북한이 한·미 양국을 갈라놓는 전략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게 협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중국 및 러시아와도 대북정책에서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면서 “북한의 최근 도발 위협으로 인해 6자회담 참가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는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용납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커졌다”고 말했다. 사일러 보좌관은 북핵 문제와 관련, “한·미 양국은 비핵화가 대북정책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강력한 공감대를 갖고 있는 만큼 비핵화의 진전 없이 남북 관계에 큰 개선이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면서 “마찬가지로 비핵화 진전이 없고 북한이 개성공단에 대한 대화를 계속 거부하는 상황에서 북·미 관계의 상당한 개선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평화협정 체결에 대해 “북한이 핵무기 개발과 도발 행위를 계속하는 동안에는 신뢰 있는 평화협상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난 60년의 정전이 한반도의 남쪽에 놀랄 만한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며 “따라서 한반도의 평화를 확보하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두 번째인 이날 백악관 한인 초청 브리핑에는 하워드 고 보건복지부 차관보, 크리스 강 백악관 법률고문, 토드 박 백악관 최고기술경영자(CTO), 리아 서 내무부 차관보 등 한인 고위 당국자들도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크리스 강 고문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는 아시아계 연방 법관이 8명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21명으로 늘어났다”면서 조만간 한국계 대법관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DMZ 대성동 마을 “환갑잔치 축하해요”

    비무장지대(DMZ) 안에 있는 국내 유일의 주거지역인 경기 파주시 대성동 마을이 3일 예순 번째 생일을 맞는다. 마을 주민들은 2일 6·25전쟁 당시 참전한 5개국 대사관 관계자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성동 마을 명명 60주년 기념 잔치를 열었다. 이날 기념 잔치는 평화로운 60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는 대성동 초등학교 학생들의 퓨전난타공연, 대성동 명예주민증 전달, 평화통일기원 떡 탑 쌓기, 환갑잔치 떡 전달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잔치 떡은 인근 통일촌, 해마루촌 공동경비구역(JSA) 경비대대, 1사단 장병들에게 전달됐다. 대성동 마을은 1953년 8월 3일 ‘남북이 각각 비무장지대 안에 마을 1곳을 둔다’는 정전협정조항에 따라 평화의 마을로 조성됐다. 1800m 거리의 북쪽 북한에도 기정동 마을이 있다. 지척이지만 서로 왕래를 할 수 없어 분단의 현실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주민들은 4대 의무 중 국방과 납세 의무가 면제된다. 지난달 현재 주민은 56가구 213명이다. 당초 30가구 160여명이었으나 결혼 등으로 늘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주민 박필선(80)씨는 1968년 1월 원산 앞바다에서 미군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납북됐을 때와 1976년 8월 판문점 JSA에서 미군 장교 2명이 북한 병사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됐을 때는 “진짜 전쟁이 나는 줄 알았다”면서 힘겨웠던 지난날을 회고했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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