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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9혁명, 이제 세계에 알린다

    4·19혁명, 이제 세계에 알린다

    해외 유학생 탐방단 첫 모집 근현대사기념관·민주묘지 방문 세계기록문화유산 등재 추진도 ‘56년 전 민주주의를 외친 함성을 강북구를 시작으로 전 세계에 알린다.’ 박겸수 서울 강북구청장은 1960년 4·19혁명의 정신을 되살리는 국민문화제를 오는 16~19일 연다고 11일 밝혔다. 2013년 시작해 네 번째 열리는 ‘4·19혁명 국민문화제’의 올해 주제는 ‘퍼져라! 4·19의 숨결이여, 함께 가자! 통일의 한길로’다. 지난해 ‘4월 혁명과 한국의 민주주의’라는 영문 학술자료집을 만들어 전 세계 유수의 대학과 도서관에 배포한 강북구는 올해 해외 유학생 탐방단을 모집한다. 한국에서 유학 중인 외국인 유학생들이 4·19혁명을 세계에 알리는 ‘전도사’가 되리란 기대에서다. 20~30명 정도 참여할 것으로 예상되는 해외 유학생 탐방단은 국민문화제에 참가하고 근현대사기념관, 4·19민주묘지 등을 둘러보게 된다. 4·19혁명은 3·15부정선거에 분노한 시민과 학생들이 12년에 걸친 이승만 정부의 장기 집권을 무너뜨린 민중혁명이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마산3·15의거 사진전과 영상전도 올해 처음으로 함께 열린다. 3·15의거기념사업회와 4·19민주혁명회가 함께 진일보한 혁명 정신을 계승하려는 노력이다. 서울의 한 기초단체에서 여는 ‘4·19혁명 국민문화제’의 규모가 점점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구청장의 남다른 역사 인식과 젊은층에게 혁명정신을 알리려는 의지가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전야제에는 윤도현, 안치환, 딕펑스, 체리필터 등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록 그룹들이 대거 참여한다. 또 1960년 고려대 학생들보다 먼저 거리로 나선 대광고 학생들이 합창단으로 무대에 선다. 그동안 고려대에서 열었던 4·19 대학생 마라톤 대회도 올해는 처음으로 문화제와 대학이 함께 주최한다. 문승주 4·19민주혁명회 회장은 “국민문화제 개최에 드는 예산 5억여원의 절반 이상을 중앙정부에서 출연하지만 한국 민주화의 토대가 된 혁명정신을 세계에 알리는 데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오는 7월에는 4·19 기록물을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심사신청서를 제출한다. 5년 전 이미 세계기록유산에 오른 5·18광주민주화운동처럼 내년 8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는 게 목표다. 박 구청장은 “4·19혁명은 3·1운동과 함께 헌법에 있는 건국이념으로 아직 민주화를 이루지 못한 나라에서 4·19의 가치가 공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결혼한 암환자, 미혼 환자보다 생존율 높다(연구)

    결혼한 암환자, 미혼 환자보다 생존율 높다(연구)

    결혼한 암 환자들의 생존율이 미혼의 암환자에 비해 높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 샌디에이고의 캘리포니아대학 연구진이 2000~2009년 여성 암환자 38만 9697명과 남성 암환자 39만 3470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했다. 실험에 참가한 약 79만 명은 위암이나 유방암 등 발병률이 높은 10대 암을 앓은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돼 있다. 연구진은 이들 인종과 결혼 여부, 생존율 등을 비교분석한 결과 성별과 인종에 따라 암을 이겨내는 생존율이 달라지는 것을 확인했다. 예컨대 결혼하지 않은 비(非)히스패닉계 백인 남성은 결혼한 비 히스패닉계 백인 남성에 비해 사망률이 24%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의 경우 결혼하지 않은 비 히스패닉계 백인 여성은 결혼한 비 히스패닉계 백인 여성에 비해 사망률이 17% 더 높았다. 일본과 중국 등 미혼의 아시아-태평양 출신 여성은 역시 결혼한 아시아 여성에 비해 암으로 인한 사망률이 6% 더 높았다. 연구진은 미국 내에서 암으로 인한 사망률이 점차 높아지는 것이 결혼하지 않는 성인의 수가 늘어나는 것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내 성인 인구 중 결혼하지 않은 남성의 비율은 1960년대에 10%에서 2012년도에는 23%까지 증가했으며, 여성은 같은 기간 8%에서 17%로 올랐다. 국가별로 봤을 때, 미국 밖에서 태어난 환자가 미국 내에서 태어난 환자보다 생존율이 더 높았다. 연구진은 히스패닉인지 아시아인인지 등을 아닌지를 떠나, 미국 내에서 태어난 환자의 사망률이 더 높은 것은 이들이 자라면서 미국 문화에 성공적으로 동화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미국에서 태어난 아시아-태평양 출신 미혼 남성은 미국 밖에서 태어난 미혼 남성에 비해 사망률이 21% 더 높았으며, 미국 밖에서 태어난 기혼 남성에 비해서는 사망률이 9% 더 높았다. 또 여성이 남성에 비해 결혼여부의 영향을 덜 받는 것은 평소 남성보다 건강에 대한 우려를 더욱 자주, 많이 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이번 연구에는 두 가지 만성질환을 앓는 환자 또는 결혼하지 않고 동거만 하는 커플 등은 포함되지 않았다. 연구진은 결혼한 환자의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받는 지지와 격려가 암 환자들의 생존율을 높이는 비결이라고 주목했다. 연구를 이끈 캘리포니아대학의 엘레나 마티네즈 박사는 “암 연구자들은 개개인의 결혼 여부가 암 생존율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면서 “만약 결혼하지 않은 환자를 치료해야 한다면 반드시 이들이 치료기간 동안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사회적 네트워크를 활발히 유지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자세한 연구결과는 미국암학회(American Cancer Society)에서 발행하는 학술지인 ‘저널 캔서(journal cancer) 최신호에 실렸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4·19혁명을 전 세계에 알리는 강북구

    4·19혁명을 전 세계에 알리는 강북구

    ‘56년 전 민주주의를 외친 함성을 강북구를 시작으로 전 세계에 알린다.’ 박겸수 서울 강북구청장은 1960년 4·19혁명의 정신을 되살리는 국민문화제를 오는 16~19일 연다고 11일 밝혔다. 2013년 시작해 네 번째 열리는 ‘4·19혁명 국민문화제’의 올해 주제는 ‘퍼져라! 4·19의 숨결이여, 함께 가자! 통일의 한길로’다. 지난해 ‘4월 혁명과 한국의 민주주의’란 영문 학술자료집을 만들어 전 세계 유수의 대학과 도서관에 배포한 강북구는 올해 해외 유학생 탐방단을 모집한다. 한국에서 유학 중인 외국인 유학생들이 4·19혁명을 세계에 알리는 ‘전도사’가 되리란 기대에서다. 20~30명 정도 참여가 예상되는 해외 유학생 탐방단은 국민문화제에 참가하고 근현대사기념관, 4·19 민주묘지 등을 둘러보게 된다. 4·19혁명은 3·15 부정선거에 분노한 시민과 학생들이 12년에 걸친 이승만 정부의 장기집권을 무너뜨린 민중혁명이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마산 3·15의거 사진전과 영상전도 올해 처음으로 함께 열린다. 마산 3·15의거 기념사업회와 4·19민주혁명회가 함께 진일보한 혁명 정신을 계승하려는 노력이다. 서울의 한 기초단체에서 여는 ‘4·19혁명 국민문화제’의 규모가 점점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구청장의 유별난 역사인식과 젊은층에게 혁명정신을 알리려는 의지가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혁명 전야에 열리는 전야제에는 윤도현, 안치환, 딕펑스, 체리필터 등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록 그룹들이 대거 참여한다. 또 1960년 고려대 학생들보다 먼저 거리로 나선 대광고 학생들이 합창단으로 무대에 선다. 그동안 고려대에서 열었던 4·19 대학생 마라톤 대회도 올해는 처음으로 문화제와 대학이 함께 주최한다. 문승주 4·19민주혁명회 회장은 “국민문화제 개최에 드는 5억여원 예산의 절반 이상을 중앙정부에서 출연하지만, 한국 민주화의 토대가 된 혁명정신을 세계에 알리는 데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오는 7월에는 4·19기록물을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심사신청서를 제출한다. 5년 전 이미 세계기록유산에 오른 5·18 광주민주화운동처럼 내년 8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는 게 목표다. 박 구청장은 “4·19혁명은 3·1운동과 함께 헌법에 있는 건국이념으로 아직 민주화를 이루지 못한 나라에서 4·19의 가치가 공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씨줄날줄] 무슬림 친화 식당/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무슬림 친화 식당/서동철 논설위원

    중국 베이징에는 뉴자칭전(牛家淸眞) 우양육시장이 있다. 이름처럼 소고기와 양고기를 전문으로 다룬다. 이 시장에 돼지고기는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할랄’(Halal) 축산물만 취급하는 시장이기 때문이다. ‘칭전’(淸眞)이 바로 할랄 식품을 뜻한다. 일반 슈퍼마켓에 진열되어 있는 식품도 이 표시가 있으면 할랄이다. 중국의 무슬림은 전체 인구의 2%인 2600만명이다. 대부분 신장위구르자치구와 닝샤회족(回族)자치구를 비롯한 서북부 지역에 살고 있다. 하지만 베이징과 시안을 비롯한 대도시에도 적지 않은 숫자가 있다. 그렇다 해도 뉴자칭전 시장이 붐비는 것은 이슬람 인구 때문만은 아니다. 중국산 먹거리를 신뢰하지 못하는 베이징 시민 사이에 할랄 식품만큼은 믿을 만하다는 인식이 퍼졌기 때문이다. 중국은 그동안 세계 할랄 식품 시장에서 두드러진 모습을 보여 주지는 못했지만, 이슬람 세계의 일원이라는 강점을 갖고 있는 만큼 잠재력은 크다. 특히 시진핑 정부는 현대판 실크로드 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일대일로(一帶一路)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할랄 시장 잠식을 노리고 있다. 2014년에는 닝샤에 할랄 식품 산업단지를 건설하고 닝샤 할랄 식품 인터내셔널 트레이딩 인증센터도 설립했다. 할랄은 잘 알려진 대로 무슬림이 먹고 쓸 수 있도록 허용된 것을 말한다. 반면 하람(Haram)은 금지된 것을 의미한다. 이슬람 경전은 꼼꼼하게 하람을 명시하고 있는데 돼지, 개, 뱀, 악어, 알코올 등이 대표적이다. 하람에서 추출한 원료로 만든 제품은 이스티할라(Istihalah)로 분류하는데, 다시 허용된 변화(Istihalah Sahih)와 허용되지 않은 변화(Istihalah Fasidah)로 나눈다. 예를 들어 알코올을 숙성한 식초는 허용되는 반면 돼지 기름으로 만든 제과류는 금지된다고 한다. 할랄 식품 인증제도는 뜻밖에 이슬람 국가가 아닌 미국에서 시작됐다. 1960년대 미국 무슬림들이 종교적으로 안전한 식품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면서 도입했다는 것이다. 미국 이슬람식품영양위원회(IFANCA)가 인증한다. 현재 세계적으로 300개 남짓한 정부 또는 민간 인증기관이 있다. 비(非)이슬람 국가에서는 현지 이슬람 종교단체가 할랄 인증을 부여하는 전통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이슬람중앙회(KMF)가 인증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한국관광공사가 ‘무슬림 친화 식당’ 증명제를 8월부터 시행할 것이라고 한다. 할랄 정도를 평가해 다섯 단계로 증명서를 발급하는 방식이다. KMF 인증을 받은 식당은 최고 등급이 된다. 한 해 1조 달러가 넘는 세계 할랄 식품 시장 규모는 이슬람권의 소득 증가와 함께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한국 방문 무슬림도 지난해 74만명에서 올해는 80만명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어떤 이유에서도 할랄 시장 개척에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부고] 극작가 겸 연출가 김의경 선생 별세

    [부고] 극작가 겸 연출가 김의경 선생 별세

    원로 극작가 겸 연출가 김의경씨가 지난 7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80세. 한국 연극의 국제 교류에 기여한 고인은 1960년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브랜다이스 대학원 연극학과에서 수학했다. 1964년 잡지 문학춘추에 ‘갈대의 노래’, ‘신병 후보생’이 추천되면서 극작가로 등단했다. 극단 실험극장 창립 동인으로 1960년부터 1976년까지 대표를 지냈다. 1976년에는 극단 현대극장을 세웠다. 한국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ASSITEJ) 초대 이사장,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서울시립극단 초대 단장, 공연문화산업연구소 이사장 등을 지냈다. 대표작으로는 희곡 ‘남한산성’(1975), ‘길 떠나는 가족’(1991) 등이 꼽힌다. 백상예술상 희곡상, 서울연극제 희곡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빈소는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 6호실, 발인은 10일 오전. (02)2072-2022.
  • 60년대 압축 성장 밑바탕에 만주국 있다

    60년대 압축 성장 밑바탕에 만주국 있다

    만주 모던/한석정 지음/문학과지성사/518쪽/2만 8000원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나는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학교 조회 시간마다 암송해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국민교육헌장이 만들어지고, 충성과 효도를 강조하는 신라 화랑도의 세속오계가 우리 삶에 깊숙이 자리잡고, 백의종군했던 이순신 장군이 민족정신의 화신으로 떠오른 시기는 1960년대다. 모두 경제 성장의 기틀을 닦기 위해 도입된 교육 이념, 사상들이다. 국민 소득 100달러 수준의 절대 빈곤 시대에 박정희 정부는 이러한 정신들을 바탕으로 북한과 체제 경쟁을 벌이며 압축 성장을 거듭했다. 그런데 저자는 1960년대 우리 체제의 뿌리를 만주국에서 찾는다. 철도 건설을 명분으로 일본 관동군이 남만주에 세운 괴뢰 정부(1932~1945)다. 만주국은 권위주의 체제와 불도저식 건설을 토대로 사회 전반에 걸쳐 국가적 정책을 수행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해 이선근, 정일권, 유석창, 신기석, 김성태, 이인기 등 많은 지도층이 만주 인맥이라는 점에서 만주국 체제가 모방·차용·변형되며 이식된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인 결과로 보인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국토 개발, 반공대회, 대량 전단 살포, 표어 제작, 주민 점호 등 1960~70년대 우리 일상들이 만주국 유산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1960년대를 읽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저자는 친일 대 민족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시선으로 만주국을 바라보지는 않는다. 요컨대 식민 경험이 오로지 고난의 시기였던 것만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후일 일부 분야에 있어서는 옛 식민자를 능가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하고 있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수천년 갈등이 쌓은… 모두의 성지, 모두의 상처

    수천년 갈등이 쌓은… 모두의 성지, 모두의 상처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은 성벽의 도시다. 베이지색의 성벽이 둘러싸고 있는 예루살렘 구시가지는 도시 전체 면적의 0.8%에 불과하다. 하지만 구·신시가지를 막론하고 건물과 도로는 모두 성벽의 색을 따르고 있어 어디에 서 있든 성벽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느낌이다. 예루살렘을 수놓은 베이지색 벽돌은 햇빛을 머금으면 화려함을 뽐내고, 비가 도시를 적실 때는 본연의 청초함을 내보인다. 성벽은 변함 없이 그 자리를 지켜 왔지만 성벽의 돌은 매 순간 변화한다. 성벽 너머에는 그 유명한 황금색 돔의 이슬람 사원과 함께 유대교의 메노라(일곱 갈래의 촛대 문양), 기독교의 십자가로 장식된 여러 종교 건물이 풍경을 더욱 다채롭게 한다. ●이슬람·유대·기독교 문화 공존하는 도시 예루살렘은 성벽을 중심으로 안은 구시가지, 밖은 신시가지로 나뉜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인이 활동했던 지역은 모두 구시가지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예루살렘은 성벽 밖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다윗왕이 기원전 10세기경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은 이후 예루살렘의 주인은 수차례 바뀌었고 그 때마다 구시가지와 성벽은 파괴되고 또 건설되기를 반복했다. 오늘날의 구시가지와 성벽은 16세기 오스만튀르크제국의 쉴레이만 1세에 의해 재건돼 이어져 오고 있다. 예루살렘 성벽을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가지다. 전체 길이 4㎞인 성벽 위로 올라가 한 바퀴 돌며 구시가지와 신시가지의 경치를 비교할 수 있다. 구시가지와 바로 마주한 시온산이나 올리브산에 올라 산등성이를 따라 흘러가는 성벽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다. 좀 더 멀리 나가 히브리대 캠퍼스가 있는 스코퍼스산의 전망대에 가면 예루살렘 시내를 조망할 수 있다. 이번 여행에서는 걷기가 아닌 세그웨이를 택했다. 바퀴가 두 개 달려 있는 킥보드 모양의 스쿠터인 세그웨이는 운전자가 발판 위에 올라선 뒤 원하는 방향으로 몸을 기울이면 저절로 움직인다. 예루살렘의 세그웨이 투어 업체를 이용하면 초심자라도 간단한 훈련 과정을 거쳐 성벽 외곽을 둘러보는 단체 투어에 따라나설 수 있다. 세그웨이 투어는 걷기보다 품을 덜 들이며 예루살렘 풍경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 외에도 약간의 스릴과 속도감도 느낄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軍 경계선이었던 성벽… 빈부 경제 장벽으로 세그웨이 투어 가이드는 우리를 ‘예민 모세의 풍차’ 밑 전망대로 이끌었다. 1860년쯤 근처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해 영국 출신 유대인 모세 몬테 피오르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풍차 주변에는 이제 부유한 유대인들이 모여들어 부촌을 형성하고 있다. 예루살렘 서쪽 성벽을 마주 보고 있는 이 전망대에 서면 성벽과 힌놈 계곡이 위아래로 평행을 이루며 좌우로 펼쳐진다. 푸른 힌놈 계곡과 옅은 흙빛의 성벽은 대조를 이루며 오른쪽으로 달려 나가다가 어느새 성벽은 끊어지고 계곡은 너른 사막과 만난다. 가이드는 저 사막 너머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관할이라고 알려 줬다. 풍차 밑 전망대에서 바라본 예루살렘 서쪽 성벽은 평화로웠지만 불과 50여년 전만 하더라도 총탄이 빗발치는 국경이었다. 1967년 이전 예루살렘을 동서로 분할 점령하고 있었던 요르단과 이스라엘은 서쪽 성벽을 두고 대치했고 요르단군의 총격으로 성 밖 인근에는 사람이 살기 어려웠다. 하지만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좁고 낡은 구시가지 대신 서쪽 성벽 밖을 개발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고급 빌라와 명품 브랜드들이 즐비한 쇼핑 거리인 마밀라몰이 들어섰다. 이스라엘과 중동을 정치·군사적으로 단절시켰던 예루살렘 성벽은 이제 부유한 유대인과 상대적으로 가난한 아랍인을 나누는 경제적 장벽이 됐다. 이제 성벽 안으로 들어갈 차례. 예루살렘 성벽에는 총 8개의 문이 있다. 그중 동쪽 성벽에 있는 황금문은 현재 사용되지 않는다. 구시가지는 복잡한 역사를 반영하듯 약 1㎢도 안 되는 면적이 종교에 따라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아르메니아 정교회 등 네 쿼터로 나뉘어 있다. 세그웨이 투어가 끝난 뒤 자파(욥바)문을 통해 구시가지에 입성했다. 구시가지에서 일말의 망설임을 느꼈다면 그것은 평균 높이 12m의 성벽이 주는 물리적 압박감에 더해 테러 가능성에 대한 심리적 불안 때문일 것이다. 지난해 동예루살렘 등지에서 이스라엘 정부와 팔레스타인인 사이에 유혈 충돌이 격해지면서 외신들은 1987년, 2000년에 이은 제3차 인티파다(반이스라엘 민중봉기)가 시작됐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구시가지 유대·아랍인 공존… 관광객도 ‘북적’ 하지만 구시가지 길을 걸으며 이런 불안감은 점차 줄어들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았고 그들을 바라보는 유대인과 아랍인의 시선은 부드러웠다. 여행을 도와준 유대인 가이드는 “좁은 구시가지에 사는 유대인과 아랍인 대다수는 작은 소란이 곧바로 파멸로 이어지며 따라서 서로 공존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한 뿌리에서 나왔으나 수천 년 동안 불신하고 불화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복잡한 관계에 비해 구시가지에서 쿼터 간 이동은 시시할 정도로 쉬웠다. 성벽과 닮은 베이지색 벽돌의 길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쿼터를 넘나들며 전혀 다른 문화를 마주하게 된다. 자파문을 지나 기독교 쿼터 거리에서 성모 마리아와 예수가 그려진 기념품들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 순간 푸른색 모자이크로 장식된 아르메니아 스타일의 도자기가 가판에 등장한다. 기독교 쿼터와 이슬람 쿼터의 경계에는 구시가지에서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명소인 성분묘교회와 비아 돌로로사가 있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뒤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인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간 ‘고난의 길’ 비아 돌로로사와 예수가 사망하고 부활한 성분묘교회는 기독교도의 성지다. 하지만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이슬람 양식의 건물과 아랍인 상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며, 종업원의 호객행위에 못 이겨 상점에 들어가면 갖가지 향신료와 중동 음식을 접할 수 있다. 유대교 쿼터와 유대교도의 성지인 통곡의 벽은 성분묘교회에서 동쪽으로 이슬람 쿼터를 가로질러야 나온다. 여행 당일은 유대교의 안식일인 사바스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유대인들은 매주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 모든 생계 활동을 멈추고 신을 기린다. 모든 상점과 관공서는 금요일 일몰 전에 문을 닫고 유대인들은 일몰 무렵 통곡의 벽 앞에서 유대교 경전인 토라를 읽거나 함께 찬송한다. ●유대교 안식일 軍 경비 강화 긴장감 맴돌아 해가 지기 시작하자 유대교 전통 복장인 검은색 상하의를 입고 납작한 원반 모양의 모자 카파를 쓴 유대인들이 속속 이슬람 쿼터 거리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덩달아 구시가지를 지키던 무장한 이스라엘 군인들도 경비를 강화했다. 수상한 행동을 보이는 아랍인 청소년들을 붙잡아 그자리에서 몸수색을 했고, 일부는 본부로 연행했다. 주위에 있던 아랍인들은 애써 모르는 척했으며, 유대인들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누구나 자유롭게 오갔던 거리에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길을 따라 통곡의 벽에 이르기 전에 보안검색대가 앞을 가로막는다. 검색요원은 가방을 일일이 열어 보고 수상한 물건의 정체를 물었다. 보안검색대를 지나면 통곡의 벽이다. 이미 수많은 유대인들이 통곡의 벽 앞에 모여 있었다. 그들이 조명 아래서 앞뒤로 몸을 흔들며 토라를 낭송하거나 서로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돌며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은 장관이다. 통곡의 벽 건너에는 솔로몬왕이 지었다는 성전의 터가 있다. 지금은 이슬람교의 황금사원이 황금색 돔을 뽐내며 위풍당당하게 들어서 있다. 황금색 돔은 유대인들에게 아픈 역사를 상기시킨다. 세계 많은 이들이 예루살렘의 상징으로 주저없이 황금색 돔을 꼽지만 유대교 쿼터에서 파는 예루살렘 기념품에는 황금색 돔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통곡의 벽을 뒤로하고 성벽을 따라 시온산을 오르면 유대인들의 외침은 점점 잦아들고 통곡의 벽과 황금사원이 한눈에 보인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경제수도 텔아비브와 달리 밤에 활동하는 인구가 적기에 도시의 불빛도 여타 대도시에 비해 약하다. 하지만 주변 불빛이 은은할수록 황금색 돔과 통곡의 벽은 더욱 빛나 예루살렘의 야경에 특별함을 더한다. 글 사진 예루살렘(이스라엘)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여행수첩 →한국이 7시간(서머 타임 적용 시 6시간) 빠르다. 기후는 우기(겨울 12~2월)와 건기(여름 4~10월)로 나뉜다. 예루살렘이 텔아비브보다 평균 3도 정도 낮다. 여름에도 일교차가 있으므로 여러 종류의 옷을 준비해야 한다. →텔아비브 벤구리온 공항의 검문검색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공항 요원이 출입국시 직업, 이스라엘 방문 목적, 동반인, 이스라엘 숙소 등을 철저히 묻는다. 따라서 항공기 출발 3시간 전에는 공항에 도착해야 한다. 출입국 시 여권에 스탬프를 찍는 대신 종이로 된 카드를 나눠 준다. 아랍 국가 방문 시 빚어질 수 있는 여러 불편을 줄이기 위해 여권에 이스라엘 방문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는 배려다.
  • 세금 없거나 저세율 ‘검은돈’ 세탁에 최적…1960년대 이후부터 역외금융 중심지로

    세금 없거나 저세율 ‘검은돈’ 세탁에 최적…1960년대 이후부터 역외금융 중심지로

    ‘파나마 페이퍼스’ 파문이 확산되면서 조세피난처인 카리브해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척박한 자연에 서구의 식민 지배를 겪으며 오랜 기간 낙후됐던 카리브해의 섬들은 1960년대 이후 역외금융의 중심지로 떠오르며 현재까지도 세계 유력 인사들의 검은돈이 세탁되고 있다. 카리브해는 미국 남부와 중미 동부, 남미 북부에 둘러싸인 대서양의 내해로 스페인,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의 식민지 쟁탈전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영연방 소속이거나 영국 자치령인 바하마, 케이맨제도, 버진아일랜드 그리고 카리브해와 접한 파나마는 이번 파나마 페이퍼스 파문뿐만 아니라 조세회피 사건이 불거지면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조세피난처다. 카리브해 섬들은 법인세와 소득세가 없거나 세율이 매우 낮다. 미국 시민단체인 ‘조세정의를 위한 시민 모임’은 국세청 통계를 인용해 2010년 미국 기업이 신고한 해외 자회사 영업이익의 절반 이상이 조세피난처 12개국에 집중됐다고 발표했다. 12개국 중에는 버뮤다, 케이맨제도, 버진아일랜드, 바하마, 바베이도스, 앤틸리스제도 등 카리브해 섬 6곳이 포함돼 있다. 2010년 한 해 미국 기업의 해외 자회사 영업이익은 9290억 달러였으며 이 중 조세피난처 12곳의 영업이익은 5050억 달러였다. 특히 카리브해 6개 섬의 미국 자회사 영업이익은 1660억 달러로 전체의 17.8%에 달했다. 버뮤다, 케이맨제도, 버진아일랜드 등 3개 섬의 미국 자회사 영업이익은 이들 섬 전체 국내총생산(GDP)보다 10~17배 많았다. ●바하마 등 6곳 美 자회사 영업익 1660억弗 달해 전문가들은 카리브해 조세피난처의 시초를 미국 시카고에서 활동했던 전설적인 마피아 두목 알폰소 카포네(알 카포네)가 1931년 탈세 혐의로 11년형을 선고받은 시기 전후로 잡는다. 알 카포네의 동료 마이어 랜스키는 알 카포네가 구속되자 미국에 있는 범죄자금을 빼돌린 뒤 돈세탁을 해 다시 가져올 계획을 세웠다. 랜스키는 여행 가방에 현금을 가득 채운다거나 자금을 다이아몬드, 수표, 무기명 주식으로 바꾸는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 범죄자금을 해외로 반출한 뒤 스위스 은행의 비밀 계좌에 보관했다. 스위스 은행은 미국에 있는 랜스키에게 대출 형식으로 자금을 돌려줬고, 랜스키는 이런 과정을 통해 세탁된 ‘깨끗한’ 돈을 만질 수 있게 됐다. ●랜스키 1959년 이후 바하마에 범죄자금 보관 살인과 폭력을 일삼던 알 카포네가 결국 탈세로 무너지는 것을 본 랜스키는 미국 조세당국의 권한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이 돈을 굴리기로 결심한다. 랜스키는 미국을 떠나 쿠바에서 카지노 사업을 시작했고 경마, 마약 사업에까지 손을 뻗쳤다. 이곳은 명실상부한 조직폭력단의 돈세탁 중심지로 부상하게 된다. 그러나 1959년 쿠바혁명이 발발하자 랜스키는 사업을 벌일 다른 장소를 물색한다. 그는 적당히 작고 적당히 부패해 정치권력을 충분히 매수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미국과 적당히 가까워 도박꾼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곳을 원했다. 랜스키의 눈에 들어온 곳은 미국 플로리다주와 쿠바 사이에 있는 바하마였다. 랜스키는 부패한 영국 상인들이 장악한 이곳에 미국의 범죄자금을 비밀리에 보관하고 운용하는 ‘조세피난처’를 구축한다. 랜스키가 바하마에서 사업을 막 시작했던 1961년 바하마 식민성 관리였던 W G 헐랜드는 잉글랜드은행(BOE) 관리에게 서한을 보내 우려를 표명한다. 헐랜드는 “효과적인 규제의 부족이 거대한 (세금) 구멍이 될 수 있다. 현재 바하마에는 인근 버뮤다와 마찬가지로 모든 종류의 금융 마녀들이 몰려들고 있다. 그들의 활동은 반드시 공익에 부합하도록 통제돼야 한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헐랜드의 조언은 묵살됐다. 영국 저널리스트 출신의 니컬러스 색슨은 조세피난처를 다룬 책 ‘보물섬들’에서 이 같은 사실을 서술하며 “영국 정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랜스키는 조세피난 제국을 건설했다”고 평가했다. ●바하마 자치정부 역외금융 발전시켜 경제 성장 바하마에 검은돈이 몰려들자 바하마 자치정부는 이들의 돈을 관리하는 역외금융을 발전시켜 경제 성장을 일궈낸다. 700여개의 섬으로 이뤄진 바하마는 전체 면적이 한반도의 16분의1이며 경작 가능 지역은 전체의 0.5%에 불과해 농공업이 발전하기 어려워 역외금융과 같은 3차산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바하마의 성공은 비슷한 조건을 갖고 있는 인근 영국 자치령 섬들을 자극한다. 케이맨제도는 1960년대만 하더라도 전화시설조차 없었던 낙후된 곳이었다. 1960년대 후반 케이맨제도 자치정부는 자유방임주의, 면세, 비밀 보장을 골자로 하는 법을 제정해 조세회피를 노리는 자금을 끌어모으며 역외금융을 발전시킨다. 이들의 성공 모델은 파나마 등 중남미 국가들에도 영향을 미친다. 바하마, 케이맨제도 등 카리브해 섬들이 조세피난처로 성공적으로 변모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들의 식민지 유산이 있다. 과거 영국, 네덜란드 등 서구국가의 식민지였던 카리브해 섬들은 비록 자연조건은 열악하고 물적 인프라는 부족했지만 서구로부터 이식된 소유권과 금융 거래를 보장하는 현대적인 법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미국과 물리적으로 가깝고 유럽의 문화를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도 조세를 회피하려는 서구의 부유층들이 카리브해 섬을 피난처로 애용했던 이유 중 하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전화(戰禍)가 미치지 않은 지역을 찾던 유럽의 기업들이 카리브해 섬으로 사업을 옮겨 활동하면서 이들 섬의 역외금융 발전을 촉진시키기도 했다. ●서구 식민 지배로 금융 법체계 갖춘 것도 장점 영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과거 식민지였던 카리브해 섬에서 손을 떼면서 이들이 조세피난처의 길을 선택하게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제국의 축소로 더이상의 식민지 경영이 어려워진 영국은 카리브해의 식민지와 자치령에 더 많은 자치권을 부여하는 대신 재정 독립을 요구했다. 이에 카리브해 섬들은 영국으로부터 경제적 독립을 이루기 위해 역외금융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미국 앨라배마대 법대 교수인 토니 프라이어와 앤드루 모리스는 공동 논문에서 “영국 정부는 탈식민화 과정에서 식민지 경제의 지속 가능성만 염두에 뒀을 뿐 ‘조세피난’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고려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용어 클릭] ■조세피난처(tax haven) 법인에 부과하는 세금이 없거나 매우 낮고 법인 설립이 쉬우며 금융 거래의 비밀이 철저히 보장돼 조세 회피 목적으로 이용되는 국가나 지역을 뜻한다. 카리브해 섬 대부분은 법인세와 소득세율이 0%인 무세 지역에 속한다.
  • [열린세상] ‘알파고 쇼크’와 교육 개혁/배상훈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

    [열린세상] ‘알파고 쇼크’와 교육 개혁/배상훈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

    지난달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AI) 알파고가 펼치는 세기의 바둑 대결을 지켜봤다. 인간 챔피언 이세돌이 졌고, 알파고는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남기고 있다. 그 중심에는 인공지능이 있다. 많은 사람이 미래 사회에서 인공지능이 보여 줄 잠재적 가치와 산업화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금융투자 자문에서 의료 분야까지 인공지능이 쓰일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알파고 소설과 신문기사까지 나오는 판이다. 1957년 미국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구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를 쏘아 올린 것이다. 과학이 세계 최고라고 자부했던 미국은 충격에 빠졌고 국가적 위기라 인식했다. 하지만 미국은 총체적인 교육 개혁으로 발빠르게 대응했다. 이때의 개혁이 오늘날 슈퍼파워 미국을 만든 자양분이 됐다. ‘스푸트니크 쇼크’는 오히려 행운이었던 셈이다. 무엇보다 이 사건은 국가가 위기를 맞았을 때 문제의 본질을 간파하고 단호하게 개혁해 나가는 사회적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준다. 다시 ‘알파고 쇼크’로 돌아가 보자. 우리 사회는 지금 한쪽만 보고 달려가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인공지능을 위한 연구개발과 산업화에만 초점을 맞추는 사이에 이세돌의 담대한 도전이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와 통찰은 점차 잊히고 있다는 얘기다. 인공지능이 고부가가치 분야임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온 국민이 인공지능 개발에만 매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로봇과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갈 미래 세대가 어떤 역량을 기르고 어떤 태도로 삶과 세상을 대하도록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마치 60년 전에 미국이 ‘스푸트니크 쇼크’를 맞아 교육 개혁을 생각했던 것처럼 말이다. 알파고와 대결한 이세돌은 한국 교육이 생각해 볼 과제를 남겼다. 첫째, 미래에는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가 중요함을 다시 보여 줬다. 앞으로 복잡한 계산과 추론은 인공지능이 더 잘할 수 있다. 그러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창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그가 한 판을 이길 수 있었던 것도 기존의 수(手)에 머물기보다 창의적인 수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둘째, 그는 도전과 개척 정신의 가치를 보여 줬다. 창의적인 생각도 실행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바둑판의 중앙으로 과감히 치고 들어간 것은 도전 정신의 백미였다. 주어진 명령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인공지능이 감히 따라오기 어려운 인간의 자유 의지가 얼마나 값있는 것인지 알려 줬다. 마지막으로 이세돌은 자신의 능력을 되돌아보면서 오직 자신과 경쟁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대중은 이런 모습을 높이 평가했고 열광했다. 다중(多重)지능이론을 발표한 하버드대학 가드너 교수는 인간에게 7가지 다른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중 전통적인 언어, 수리 능력은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앞설 전망이다. 반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사유와 공감,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능력은 로봇이 범접하기 어려운 인간의 영역으로 남을 것이다. 최근 교육부는 교과 성적평가에서 수행평가 비율을 높이는 방안을 발표했다. 교육과 수업의 패러다임을 암기와 숙달에서 창의와 체험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모처럼 교육감들도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학생들이 학교 밖으로 나가서 세상을 만나고 도전하는 기회를 갖도록 하는 자유학기제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대학들이 학생의 평소 학교 생활을 보겠다는 학생부종합전형도 바람직해 보인다. 문제는 교육 주체들이 바뀌는 시스템에 불안해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국민이 국가의 비전에 공감하고 개혁의 방향에 동의할 때 가능하다. 낱낱의 정책을 분절적으로 시행할 것이 아니라 큰 틀의 교육 비전을 보여 주고 그 프레임 속에서 개별 정책이 갖는 의미를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 머지않아 로봇과 인공지능의 시대가 오면 일과 삶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다. ‘스푸트니크 쇼크’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알파고 쇼크’를 교육 개혁의 계기로 삼는 지혜가 필요하다. 세상의 변화를 꿰뚫어 보고 과감하게 혁신하지 못하면 미래 세대에게 부끄러운 어른들로 남을 것이다. 특히 앞으로 4년 국정을 맡겠다고 나선 의원 후보자들이 새겨들어야 한다.
  • 영화같이 살다간 ‘한국 영화계 풍운아’…신상옥 감독 10주기 추모 행사

    영화같이 살다간 ‘한국 영화계 풍운아’…신상옥 감독 10주기 추모 행사

    한국 영화계의 풍운아 신상옥(1926~2006) 감독의 10주기 추모 행사가 신 감독이 손수 개관했던 서울 종로 허리우드 극장에서 열린다. 1990년대까지 대한극장, 피카디리, 단성사 등과 함께 서울의 대표 개봉관이었던 허리우드 극장은 현재 실버영화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신상옥감독기념사업회는 9일 오후 2시 종로 낙원상가 4층 허리우드 실버영화관에서 10주기 추모행사 ‘난, 영화였다’를 연다. 추모 행사는 거장의 삶을 돌이키는 영상물 상영과 추모식, 신 감독이 이사장으로 있던 안양예고 동문회원들의 추모 공연에 이어 최은희, 남궁원, 도금봉, 남정임이 출연한 ‘여자의 일생’(1968) 상영 순으로 진행된다. 이날 행사에는 신 감독의 반려자였던 최은희를 비롯해 신영균, 신성일, 문희 등 원로 배우, 김수용·김기덕·봉준호·강우석 감독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명예위원장과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 김종원 평론가 등도 함께한다. 10일부터 21일까지 ‘강화도령’(1963), ‘로맨스 그레이’(1963), ‘쌀’(1963), ‘내시’(1968), ‘성춘향’(1961), ‘다정불심’(1967), ‘대원군’(1968), ‘벙어리 삼룡이’(1964), ‘이별’(1973), ‘이조여자잔혹사’(1969), ‘빨간마후라’(1964), ‘꿈’(1967) 등 대표작 12편이 하루에 한 편씩 상영된다. 1950~60년대 한국 영화계를 대표했던 신 감독은 1969년 허리우드 극장을 개관, 3~4년가량 운영했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평생 양복 세 벌뿐이었던 ‘미원의 아버지’

    평생 양복 세 벌뿐이었던 ‘미원의 아버지’

    35세때 일본서 조미료 공법 배워… 1956년 ‘국민 조미료’ 미원 탄생 끝없는 연구·검소한 생활 존경받아 1955년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무역업에 종사했던 35세의 사업가는 한국 식탁을 일본 조미료 ‘아지노모토’가 점령한 것을 보고 반감을 느꼈다. 순수 우리 기술로 조미료를 만들어 해외에 수출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는 무역업을 접고 그 길로 일본으로 떠나 조미료 제조 공법을 익혔다. 1년여의 시간을 들여 연구한 끝에 그는 부산으로 돌아와 495㎡ 넓이의 우리나라 최초의 조미료 공장이자 대상그룹의 전신인 동아화성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여기서 한국 주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미원’이 만들어졌다. 지난 5일 만 96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 ‘미원의 아버지’ 임대홍 대상그룹 창업주 이야기다. 1920년 전북 정읍에서 농사를 짓던 부친 임종구씨와 모친 김순례씨 사이에서 5남 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난 고인은 이리농림학교 졸업 후 고창군청 공무원을 지냈다. 1942년 전북도청 직원으로 근무하던 고 박하경씨와 백년가약을 맺었고 2남 1녀를 낳았다. 공무원에 이어 사업가와 식품연구가로 변신한 고인은 1956년 만든 미원을 바탕으로 대상그룹을 창립했다. 미원은 1960년대 초반 CJ제일제당의 미풍과 ‘조미료 전쟁’을 펼쳤다. 당시 미풍이 가격을 확 내리는 전략을 세웠다면 임 회장은 오히려 높은 품질에 따른 고가 전략으로 승기를 잡았다. 미원은 1970년대부터 인도네시아, 일본, 홍콩 등으로 수출됐다. 대상그룹은 이후 조미료 외에도 각종 장류와 냉동식품, 육가공식품 등을 만드는 종합식품기업으로 성장했다. 고인은 회장 재직 당시 조용히 자신의 공간에서 실험과 연구에만 몰두했다. 1987년 그룹 회장직을 장남인 임창욱 명예회장에게 물려주고 일선으로 물러난 이후에도 조용히 연구에만 신경 썼다. 고인은 특히 검소한 생활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지방 출장 시 5만원이 넘는 숙소에는 묵지 않았고 승용차보다는 전철을 더 많이 애용했다. 고인이 임원들에게 벤츠 승용차를 선물 받았지만 시승도 하지 않고 환불했다는 일화도 있다. ‘평생 통틀어 한 번에 양복 세 벌, 구두 두 켤레 이상을 소유했던 적이 없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대상그룹 본사가 1973년 준공 후 지금까지 한 번도 외관을 바꾸지 않은 것도 그의 검소함을 말해준다. 그는 자신에게 쓰는 것을 아꼈지만 1971년 사재를 출연해 장학재단을 설립하는 등 부의 사회 환원에는 누구보다도 앞장섰다. 검소했던 고인의 유지에 따라 장례식도 가족장으로 조용히 치러진다. 부고도 별도로 내지 않고 조문객과 화환도 받지 않는다. 유가족으로는 아들인 임창욱 대상 명예회장과 임성욱 세원그룹 회장, 딸 임경화씨와 사위 김종의 백광산업 회장, 손녀인 임세령 대상 전무와 임상민 상무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8일 오전 7시, 장지는 전북 정읍 선영이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한 컷 세상] 60년대 빨래방… 한강 빨래터 풍경

    [한 컷 세상] 60년대 빨래방… 한강 빨래터 풍경

    1960년대 한강 빨래터의 풍경. 서울시는 오는 9일부터 시민청 시티갤러리에서 서울시민의 삶과 안전, 환경을 보여주는 ‘안전한, 숨 쉬는 전’을 연다고 5일 밝혔다. 서울시 제공
  • 대륙의 실수? 대륙의 한 수!…샤오미 이어 中 창홍 상륙

    대륙의 실수? 대륙의 한 수!…샤오미 이어 中 창홍 상륙

    ‘메이드 인 차이나’.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시장에서 흔히 ‘중국산 제품’이라고 하면 저가에 질 낮은 제품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견고했던 이런 인식에 균열을 가하기 시작하더니 세계적인 ‘열풍’까지 일으킨 중국 가전 기업은 단연 ‘대륙의 실수’ 샤오미였다. 스마트폰, 보조배터리 등 동종 업계에 비해 파격적인 가격에도 우수한 성능을 자랑하면서 ‘메이드 인 차이나’에 대한 편견을 깨버렸고, ‘대륙의 실수’라던 조롱 섞인 평가 대신 ‘대륙의 한 수’라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중국 3대 종합가전회사 중 하나인 창홍의 소형 가전이 국내 시장 공략에 나섰다. 중국어로 ‘무지개’라는 뜻을 지닌 창홍은 중국 내 5000개 이상의 판매점을 두고 있는 60년 전통의 종합가전회사로 TV,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등을 해외에 수출하고 있다.  창홍의 제품은 디스플레이 전문 기업 ㈜오리온을 통해 소개되며, ㈜오리온은 창홍 가전의 판매와 더불어 A/S까지 담당할 예정이다.   올 상반기 선보이는 창홍 냉장고는 좁은 공간에 어울리는 소형 제품이다. 1도어 직냉식 ORD-046A0W(46L 용량), ORD-092A0W(92L 용량), 2도어 직냉식 ORD-090B0W(90L 용량), ORD-138B0W(138L 용량), ORD-168B0W(168L 용량)의 총 5가지 모델이며, 심플하고 감각적인 디자인은 물론 6개의 핵심 기술 및 5개의 특허, 에너지 절감 기술과 저소음 기술이 축적된 게 특징이다. 또한 가장 작은 사이즈인 ORD-046A0W 제품을 제외한 4개 모델은 강화유리선반과 투명포켓에 신선야채실까지 갖추고 있다.   하반기에는 창홍 TV도 국내에 출시된다. 창홍에서는 연간 1000만 대 이상의 TV를 자체 생산하고 있으며, 세계 최대 가전 박람회인 CES 2016에서는 차세대 제품인 98인치 8K TV, 65인치 커브드 4K OLED TV, 55인치 커브드 4K 퀀텀닷 TV, 그리고 HDR이 적용된 OLED TV 등 신제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특히 이 중 98인치 8K TV는 올해 세계 최초로 상용화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오리온 관계자는 “지난 60년간 중국 전역에 보급된 TV제품 3대 중 1대가 창홍 TV일 정도로 창홍은 소비자가 만족하는 브랜드 중 하나”라며 “기술력으로 무장한 중국산 제품이 국내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만큼 창홍의 제품들도 까다로운 국내 소비자들에게 합격점을 받으리라 예상한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내러티브 리포트] 나는 대한민국 최고 권력이다

    [내러티브 리포트] 나는 대한민국 최고 권력이다

    인쇄~개표 1장당 1만 3000원 가로 10㎝·세로는 최대33.5㎝ 조작 방지 위해 하단에 일련번호 지난 투표율 54%… 절반 버려져 “13일 유권자 손에서 빛나고 싶어”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투표용지 인쇄가 4일 전국적으로 시작됐다. 투표용지는 ‘국민의 뜻’이 직접적인 기표 행위를 통해 나타나는 최종적이고 유일한 수단이다. 투표용지의 인쇄비용은 장당 40원. 그러나 전체 선거보전비용(투표용지 생산부터 개표작업까지 소요되는 비용)을 감안하면 장당 가격은 1만 3000원으로 뛴다. 투표용지의 관점에서 ‘기표와 개표의 모든 것’을 정리했다. 저는 가로 10㎝·세로 18㎝(지역구 후보자 5인 기준)의 작은 종이입니다. 제가 나올 때면 정치인들이 재래시장에서 상인들과 악수를 나누고 청년·서민·경제 같은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길거리에는 후보들을 응원하는 플래카드나 현수막도 나부끼죠. 나는 돈으로는 살 수 없고 권력으로도 얻을 수 없습니다. 만 19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단 한 장씩만 가질 수 있죠. 오는 13일이 되면 제 몸에 찍힌 도장 하나하나에 환호와 탄식이 오갈 겁니다. 나는 투표용지입니다. 지금의 저는 예전에 비해 많이 변했죠. 1960년 정·부통령 선거 때에는 숫자가 아닌 ‘I, II, III’과 같은 작대기로 후보자 기호를 표시했습니다. 당시에는 숫자와 글자를 모르는 유권자가 많았거든요. 지금의 모습은 1993년 제14대 국회의원선거 때부터 갖춰졌습니다. 오는 13일에 저를 만나면 또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전과 달리 후보자란 사이에 공간을 두었습니다. 지금까지는 후보자란 사이마다 선으로만 구분되어 있었는데요. 변경 이유는 오지선 중앙선관위 사무관이 말해주었습니다. “기표용구(선거도장)는 0.7㎝이고, 후보자란 사이의 공간은 1㎝입니다. 이전에는 두 칸에 걸쳐 도장이 찍혀 무효표가 되기도 했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겁니다.” 가로 길이는 10㎝이지만, 세로 길이는 후보자 수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번 선거에는 비례대표 투표용지와 지역구 투표용지 2개가 주어지는데, 비례대표 투표용지는 21개의 정당이 등록하면서 33.5㎝나 됩니다. 역대 최장 기록이죠. 정해진 법(공직선거법)과 규칙(공직선거관리규칙)에 따라 만들다 보니 인쇄·검수 과정이 상당히 까다롭습니다. 우선 특수재질 처리가 돼 있는 종이를 이용합니다. 예전에는 손으로 투표용지를 확인하고 분류했는데 2002년 6·13 지방선거부터 투표지분류기를 도입했기 때문입니다. 돈을 세는 기계처럼 생긴 분류기가 각 후보를 지지한 투표용지를 나누면 이후 관리요원이 제대로 분류했는지 손으로 검수하게 됩니다. 따라서 투표지분류기로 개표할 때 종이가 엉키거나 두 장이 한 장으로 집계되는 것을 방지해야 합니다. 중앙선관위는 한솔제지, 무림제지 등 국내업체 2곳에 의뢰해 정전기 방지 기능이 있는 특수용지를 개발했습니다. 예전에는 선거일 저녁 6시에 투표를 마감하고 개표를 하면 다음날 오전 7시쯤 완료가 됐는데요. 투표지분류기가 도입된 다음에는 당일 자정 전에 당선 윤곽이 나오죠. 저는 후보자 등록 마감일 9일 후부터 만들어집니다. 인쇄소는 각 지역 선관위와 가까운 거리에 있고, 투표용지 인쇄 경험이 있는 곳으로 미리 선정돼 공개됩니다. 당연히 특정정당이나 후보자와 관련이 없어야 합니다. 특수용지가 인쇄소로 옮겨지면 제가 태어날 준비는 끝입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 선관위 직원들은 시험으로 찍어낸 초고에 선이 끊어지거나 점 혹은 잡티 등이 있는지 등을 일일이 확인합니다. 특수용지를 인쇄기계에 쌓아두면 공기의 압력을 이용해 딱 한 장씩만 집혀 벨트 위로 올라갑니다. 이후 줄줄이 인쇄기로 들어가 인쇄가 된 후 차곡차곡 쌓이죠. 이때 제 몸 왼쪽 하단에는 일련번호가 찍히는데요. 혹시나 없어지거나 조작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수량을 엄격히 관리하려는 겁니다. 절단기에서 다시 정확한 규격으로 잘리면 한 장이 탄생하죠. 인쇄소는 경찰의 경비가 삼엄합니다. 유권자의 손에 투표용지가 쥐어지기 전까지 어떤 사고도 없어야 하니까요. 제가 투표장까지 옮겨질 때는 많은 사람의 눈과 손을 거칩니다. 우선 인쇄소에서 선관위 직원들과 각 당에서 추천한 위원들은 수량 확인은 물론 오류나 오해가 없는지 확인합니다. 잘못 인쇄되거나 훼손되면 선관위 직원과 각 당의 추천위원의 입회하에 폐기됩니다. 포장이 완료되면 경찰 협조하에 각 지역 선관위로 옮겨집니다. 선관위에 도착하면 다시 한 번 검수작업을 거쳐 안전한 장소에 보관됩니다. 이렇게 선거일까지 저는 경찰과 선관위 직원들의 호위를 받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하는 저와 제 친구들은 이번 선거에는 대략 6700만장(비례대표 투표용지 포함)에 달합니다. 후보자수나 인쇄매수 등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지만 저를 찍어내는 데 드는 돈은 평균 40원(인쇄비용) 정도입니다. 하지만 선거관리 인력, 투표소 및 개표소, 투표참여 홍보비용 등 선거보전비용을 모두 합치면 저는 1만 3000원 정도로 비싸집니다. 물론 제가 투표함 속으로 들어갔을 때의 가치는 돈으로 따질 수 없을 겁니다. 제가 가장 빛날 때는 바로 유권자의 손에 쥐어졌을 때입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결코 보호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지난 19대 총선의 투표율은 54.2%에 불과했습니다. 절반에 가까운 투표용지가 버려졌던 거죠. 모쪼록 오는 13일 저를 꼭 만나주세요.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예술을 남긴 그… 예술혼을 빛낸 그녀

    예술을 남긴 그… 예술혼을 빛낸 그녀

    부인 김향안 여사 탄생 100주년 기념 김환기 대표작 400여점 대거 선보여 수화(樹話) 김환기(1913~1974)는 한국의 토속적인 모티브와 정서를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예술적 언어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한국 현대미술작가 중 최고의 그림값을 자랑하는 거장이다. 그가 창작열정을 불태우고, 현재에도 하늘의 별처럼 빛날 수 있는 것은 부인이자 예술적 동반자인 김향안(1916~2004)의 헌신과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예술가의 아내로 천재 예술가의 탄생에 절대적 지지와 조력을 아끼지 않았던 김향안은 작가의 사후에 환기재단과 환기미술관을 설립해 그의 예술이 갖는 가치와 거장의 예술혼이 더욱 빛날 수 있도록 고군분투했다. 김향안 여사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환기미술관의 설립 의미를 되돌아보고, 그가 평생을 바쳐 몰두한 김환기 예술세계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건축가 우규승이 설계한 부암동 환기미술관에서는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라는 제목으로 1950년대 초기에서 1970년대 말까지 김환기의 유화, 드로잉, 과슈, 신문지·한지 유채, 종이 콜라주 등 대표작 400여점을 대거 선보인다. 김환기가 노래한 자연과 인간애와 시정신의 감흥을 만날 수 있는 전시의 제목은 1989년 발간된 그의 전기 제목에서 따왔다. 본관 1층은 한국-파리 시대(1950~60년대)의 구상적 드로잉을 소개한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 피난시기에 그린 작은 스케치 작품부터 서울 성북동시절, 3년간의 파리 시대 작품들로 구성됐다. 한국전 당시 정박해 있는 군함을 그린 ‘진해풍경’, 부산 피난지에서의 ‘판자집’과 ‘피난열차’, 좌판을 펼치고 바닥에 앉아 있는 여인상 등은 김환기 특유의 서정성으로 시대상과 자신의 일상을 이야기해 준다. ‘학’, ‘산과 달’, ‘도자기와 여인’ 등 소재를 구상하면서 그린 밑그림들에서 단순하면서도 강한 선으로 세련미 있고 밀도 있게 대상을 파악해 내는 힘을 볼 수 있다. 프랑스 체류 중 그린 풍경과 인상을 기록해 놓은 드로잉도 소개된다. 2층에는 한국의 자연을 담은 1960년대 과슈 작품들을 모았다. 광택이 없는 불투명 수채물감인 과슈는 유화의 질감을 지니면서도 흡수성이 빠른 특성을 보인다. 김환기는 과슈를 이용해 한국의 자연을 담은 산월(山月)과 순수한 추상으로 이어지는 점, 선, 면을 즉흥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작품으로 완성했다. 반추상으로 그린 산, 달, 매화, 구름 등 자연의 정서와 민족적 감흥을 일깨우는 화면 구성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는 뉴욕진출 초기인 1963~64년 부인에게 보냈던 과슈로 그린 편지그림일기가 공개된다. 김환기는 1963년 50세의 나이로 뉴욕에 건너가 1974년 작고할 때까지 치열한 창작열정으로 다양한 화면구성의 변주와 재료의 변화를 실험했다. 색면과 색띠를 이용한 구도, 타원이 중심을 향해 밀집되는 십자구도, 원의 모양이 세로로 쌓이거나, 네모 안에 문자형상을 추상화시킨 불규칙한 점적 요소 등 1970년대의 전면 점화 시대를 예고하는 실험적인 작품들이 2층에 전시됐다. 캔버스 화면을 공간을 탐구하는 장으로 삼았던 김환기는 섬세한 점과 선, 면을 그리며 개성적인 방법으로 조형공간을 다양하게 해석했다. 1963~74년 뉴욕에서 시도한 실험적 작업 중에서 드로잉은 양적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번 전시에는 당시 그려진 점, 선, 면의 드로잉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전시작품들은 모두 환기미술관 소장품들이다. 특히 작가의 창조적 에너지의 집약체이며 완성된 여정의 기록이라 일컬어지는 대형 점화(點畵)들이 1층부터 3층까지 적절하게 분산 배치됐다. 먹색에 가까운 짙은 푸른색 작은 점들을 화면 전체에 찍은 것을 비롯해 노란색, 오렌지색, 짙은 녹색의 대형 점화들은 무한한 상상력을 열어 주며 아득한 우주적 공간감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전시는 8월 14일까지. (02)391-7701.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학력 콤플렉스와 빨간 스포츠카… 아베 성장 과정의 비밀

    학력 콤플렉스와 빨간 스포츠카… 아베 성장 과정의 비밀

    아베 신조, 침묵의 가면/노가미 다다오키 지음/김경철 옮김/해냄/296쪽/1만 6000원 2015년 10월. 일본 정부 내에 제3차 아베 내각이 출범했다. 한데 뜻밖에도 각료 가운데 일본 최고의 명문인 도쿄대 출신이 드물었다. ‘총리의 친구’라 불리는 시오자키 야스히사 후생상, ‘아베 키즈’라 불리는 마루카와 다마요 환경상 등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는 일본의 역대 정권 가운데서도 극단적으로 적은 편이라고 한다. 왜 이런 도쿄대 기피 현상이 빚어졌을까. 새 책 ‘아베 신조, 침묵의 가면’은 이 같은 현상의 원인을 아베 신조 총리의 ‘학력 콤플렉스’에서 찾는다. 알려졌듯, 아베 총리는 도쿄대 법학부 진학을 숙명으로 여기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 형제와 친할아버지, 아버지 등이 죄다 도쿄대 법학부를 나왔다. 특히 외무상을 지냈던 아버지 신타로는 “대학은 도쿄대밖에 없다고 생각하라”며 아베를 닦달하기 일쑤였다. 한데 아베는 도쿄대 출신이 아니다. 우리에겐 이름도 생경한 세이케이대 법학부를 나왔다. 그것도 이른바 ‘에스컬레이터식’(명문 사립학교에 입학해 입시를 치르지 않고 자동으로 상급 학교에 진학하는 시스템)으로 졸업했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 아베가 갖는 느낌은 어떤 것이었을까. 빨간색 스포츠카 알파로메오를 타고 학교를 오가며 유력 정치인의 자제라는 신분을 과시했지만 그에게 이 같은 유희란, 좌절의 다른 이름이나 마찬가지였을 터다. 그의 이력서에서 ‘세이케이대 법학부 졸업. 고베제강소 근무를 거쳐 1982년 부친인 아베 신타로 외무대신의 비서 역임’이라는 문장이 사라진 것도 이와 비슷한 원인 때문이었을 거라 추정해 볼 수 있다. 책은 일종의 ‘아베 연구서’다. 분석의 틀은 성장 과정이다. 아베 총리의 부친 신타로 시절부터 아베 가문을 밀착 취재해 온 교도통신 정치부 기자 출신의 저자가 아베 본인과 가족, 친구, 양육 교사 등과의 인터뷰를 통해 ‘강경 보수 정치인’의 이면에 어떤 성장 과정이 있었는지를 들춰 보고 있다. 책은 유모 품에서 자란 아베 총리의 유년기부터 고급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며 마작에 심취했던 대학 시절, 가문의 지지 기반과 간판, ‘가방’(자금) 등을 물려받아 손쉽게 정계에 입문한 정치 신인 시절,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에서 강경 발언을 쏟아내며 스타 정치인으로 급부상해 총리에까지 올랐으나 건강 문제로 사임한 후 총리에 재취임하기까지의 여정을 소개한다. 부수적으로 일본 정치사의 한 획을 그은 자민당 60년의 계보와 당내 세력 관계도 살펴볼 수 있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송혜민 기자의 월드 why] ‘맞이하는 죽음’으로의 변화… 영국 호스피스 성공의 시작

    [송혜민 기자의 월드 why] ‘맞이하는 죽음’으로의 변화… 영국 호스피스 성공의 시작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늙는다. 죽음을 향해 간다는 뜻이다. 돈이 많든 적든 상관없이 누구도 삶의 마지막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한 마지막이 조금 더 인간답고, 조금 더 행복할 수 있기 위한 노력이 바로 ‘웰 다잉’(Well-Dying)이다. 영국은 당하는 것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에 있어서, 가장 죽기 좋은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영국 경제전문지인 이코노미스트가 주관하는 ‘2015 죽음의 질 지수’ 통계에 따르면 죽음의 목전에서 방문할 수 있는 병원의 수, 병원 의료진의 숫자와 수준, 죽음을 앞두고 받을 수 있는 의료 서비스의 혜택과 수준, 죽기 직전까지 지불해야 하는 의료비용 등의 항목을 나라별로 평가한 결과 영국이 100점 만점에 93.9점을 받아 1위를 차지했다. 영국이 이처럼 ‘죽기 좋은 나라’가 된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英, 1967년 도입… 말기암 환자 95% 이용 영국이 ‘웰다잉’의 선두국가로 꼽힌 데에는 호스피스 제도가 큰 몫을 한다. ‘죽음의 동반자’라고 부르기도 하는 호스피스는 ‘손님’이라는 뜻의 라틴어 ‘호스페스’(Hosepes)에서 유래했다. 중세시대에는 성지 예루살렘으로 가는 성지 순례자나 여행자가 쉬어 가던 휴식처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고, 근대에 들어 아픈 이들 혹은 곧 죽음에 이를 사람들을 위해 숙박을 제공하고 간호를 베푸는 장소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 영국에서 본격적인 체계를 갖추고 발전하면서, 호스피스라는 용어는 삶의 끝자락에 있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봉사활동 혹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됐다. 호스피스 제도가 처음 제도화된 나라는 앞서 언급했듯 영국이다. 1967년 영국 런던에 ‘성 크리스토퍼 호스피스’가 개방된 뒤 이듬해 미국에서도 가정형 호스피스가 시작됐다. 일찌감치 웰다잉에 대한 개념을 확립한 영국은 현재 호스피스기관협회인 ‘호스피스UK’를 설립, 운영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지난달 2일 발표에 따르면 영국 말기 암 환자의 호스피스 이용률은 95%로, 한국의 13.8%(2014년 기준)와 비하기 어려운 수치다. 영국인들이 삶의 끝에서 각종 의료기기로 둘러싸인 병원이 아닌 호스피스 시설(혹은 제도)을 선택할 수 있는 배경에는 자원봉사자들의 기금 모금과 재능기부가 있다. 호스피스UK에 따르면 호스피스 자원봉사자는 전국에 약 12만 5000명에 이른다.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이뤄진 자원봉사자들은 음악회를 열거나 미술 치료를 돕는 등 재능기부를 아끼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호스피스 시설 운영비의 3분의2는 모금을 통해 조달된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영국의 공공의료서비스인 NHS(국민의료보험)의 지원 규모는 전체 호스피스 기관의 운영비의 30%를 약간 웃도는 수준에 불과하다. 말기 암 환자의 95%, 12만명의 환자가 무료로 이용하는 영국 호스피스 제도의 성공 원동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죽음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이미 죽음에 가까워진 이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서는 것이다. 호스피스 병동이 죽음을 기다리는 곳이 아닌 죽음을 맞이하는 곳이라는 인식 역시, 수많은 사람들의 웰다잉을 돕는 호스피스 제도가 활성화될 수 있게 도왔다. 호스피스 제도의 높은 이용률은 새로운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영국을 포함해 호스피스 제도가 자리잡은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는 음악이나 미술 등을 매개로 몸의 통증 및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최소화해 주는 음악심리치료사, 미술심리치료사 등이 일반화한 직업으로 자리잡았다. 이들은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직접 호스피스 시설 또는 환자가 평소 머물렀던 집에서 서비스를 받는 가정형 호스피스 이용자의 집을 방문하거나, 관련 기관에 정식으로 취업해 안정적인 급여를 받으며 환자들을 돌본다. ●수요 점점 느는 한국, 난치병 등 확대 필요 호스피스는 가정형과 전문 호스피스 병동 등 시설에서 받는 시설형 등으로 나뉘는데, 영국에는 시설형과 가정형이 모두 보편화되어 있는 반면, 한국은 가정형을 선호하는 경향이 짙다. 한국호스피스완화의료학회가 2012년 말기 암 환자 465명에게 물은 결과, 75.9%가 가정형 호스피스를 가장 선호한다고 밝혔다. 병원이나 요양시설은 24.1%에 불과했다. 이에 보건복지부는 올 3월부터 말기 암 환자가 자택에서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말기 암 가정 호스피스 완화의료 시범사업’을 전국 17개 병원에서 실시하고 있다. 호스피스 서비스는 건강보험이 적용돼 전체 진료비의 5%만 지불하면 된다. 간호사가 1인 방문할 경우 1회 5000원, 의사와 간호사 및 사회복지사가 모두 방문할 경우 1만 3000원 정도를 부담한다. 한국도 호스피스와 관련한 인식이 확산되고 수요가 늘면서 호스피스 지원 규모가 확장되고 있지만, 무료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데다 말기 암 환자뿐만 아니라 난치병, 소아 암 환자 등도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 구비된 영국에 비하면 아직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다. 최근 일본에서 말기 암 환자들이 생의 끝에서 병원보다는 집에 머물렀을 때 생존기간이 길어진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쓰쿠바대학교 연구진이 일본 내 말기 암 환자 사례 2000건을 분석한 결과, 2주의 시한부 진단을 받은 환자가 병원에 계속 머물 경우 평균 9일 정도를 생존한 반면, 집으로 곧장 돌아갈 경우 평균 13일을 생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병원에 있을 때보다 집에 있을 때 평균 나흘을 더 가족과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병든 부모님을 집이나 호스피스 전문시설로 옮기는 것이, 마치 치료를 포기하고 효를 다하지 않는 것처럼 비춰지는 인식 탓에 여전히 호스피스를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음 앞에 선 당사자의 선택과 의지다. 생의 마지막을 보낼 장소를 고를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huimin0217@seoul.co.kr
  • [김동률 교수의 1980’s 청춘의 재발견] 팝과 샹송과 칸초네를 들으며

    [김동률 교수의 1980’s 청춘의 재발견] 팝과 샹송과 칸초네를 들으며

    스물 몇 살 때다. 여자 친구가 불쑥 두 가지를 제안해 왔다. 혹시라도 자기와 결혼할 생각이 있으면 먼 훗날 체코 프라하와 사이먼&가펑클 콘서트에 데려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헐, 이과 출신인데 뜻밖에 낭만스러운 면도 있구나 하며 우선 놀랐다. 그렇게 어려운 조건도 아니고 또 결혼해야겠다고 내심 맘먹은 나는 즉각 그러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 제안에 대해 지금 세대들은 의아해할 것이다. 카를 다리가 황홀한 프라하 정도는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80년대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도 또 자유로워도 경제적으로 쉽게 갈 수 있는 풍요의 시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눈먼 나는 호기롭게 약속했다. 문제는 내가 약속 강박증이 심하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뱉은 말은 죽지 않으면 지킨다는 황당한 원칙을 정해 놓고 살아왔다. 그래서 주변 누구도 내가 한 말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경우는 드물다. 프라하야 언젠가 갈 수 있을 것이고 걱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동안 수많은 유럽 여행길에도 아내와의 약속 때문에 프라하만큼은 애써 가지 않았다. 프라하 얘기가 등장할 때면 체코 출신 작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나 이를 영화화한 ‘프라하의 봄’으로 달래 가며 언젠가 같이 가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약속 중의 하나인 사이먼&가펑클 콘서트였다. 어려운 것을 넘어 불가능에 가까웠다. 오래전에 결별한 두 분이 죽기 전에 회동해 콘서트를 열어야 해 볼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게다가 그 콘서트가 서울이나 도쿄에서라도 열려야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것이고. 하지만 이 전설적인 듀오는 나의 맘도 몰라 주고 점점 할아버지가 되어 갈 뿐 콘서트를 열 낌새조차 없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뉴욕 센트럴파크 82년 실황공연 DVD를 구해 주며 달래 왔다. 그뿐만이 아니다. 먼 훗날 결혼을 하고 떠난 유학 중에는 짬을 내어 공연이 열렸던 센트럴파크와 캐나다 접경 메인주까지 다녀왔다. 바닷가재와 개기일식으로 유명한 메인은 스티븐 킹의 베스트셀러 소설 ‘돌로레스 클레이본’의 무대. 그러나 나의 목적은 메인주 초입의 시골 동네 스카버러를 찾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여행 책자에서 시 당국이 스스로 밝혔듯이 이 작은 동네가 사이먼&가펑클의 ‘스카버러 페어’와 직접적인 연관 관계가 있는지는 불분명했다. 그러나 단지 스카버러에 가 봤다는 것만으로도 나와 아내는 그날 밤을 감동으로 설쳤다. 80년대는 이처럼 외국 노래가 넘쳐나는 시대였다. 누구나 팝을 듣고 좀더 세련되어 보이는 사람은 샹송과 칸초네를 들었다. 과 엠티나 서클 엠티에는 으레 유명 팝이나 실비 바르탕의 ‘라 마르차 강변의 추억’, 산레모의 영웅 니콜라 디 바리의 칸초네 한 자락이 흘러나왔다. 안치환도 신입생 환영회 때 캔자스의 ‘더스트 인 더 윈드’를 불렀다가 사람들의 권유에 의해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고 했다. 조금 윗세대야 말할 것도 없겠다. 우리 대중음악이 빈약하던 그 시절, 선배 세대인 세시봉 세대도 수많은 외국 노래들을 번안해 불렀다. ‘하얀 손수건’부터 ‘썸머와인’ 등등 아직도 우리에게 익숙한 가락은 대개 팝을 번안한 곡들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사이먼&가펑클이 있다. 이분들이 부른 노래는 70년대를 거쳐 80년대 이 땅을 풍미했다. ‘엘 콘도르 파사’,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사월이 오면’ 등등은 다방에서 빵집에서 심지어 영화가 상영되기 전 막간에 허구한 날 흘러나왔다. 거기다가 명문대 박사라는 후광까지 더해지면서 그 시절 젊음을 사로잡았다. 그러고 보니 까까머리 고1 때 교생 선생이 가르쳐 주던 “아름다운 스카버러여 / 나 언제나 돌아가리 / 내 사랑이 살고 있는 / 아름다운 나의 고향…”을 따라 부르던 생각이 난다. 35년 만에 최근 귀국한 박인희 선생이 그 옛날 부른 노래다. 사이먼&가펑클은 영화 ‘졸업’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왔다. 빨간색 스포츠카 쉐보레 카마로를 몰고 버클리대학에 다니는 여자 친구를 찾으러 가는 더스틴 호프먼이 지금도 또렷하게 생각난다. 우여곡절 끝에 여친의 결혼식장에 침입해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손을 잡고 냅다 뛴다.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도망치는 라스트 신은 지금도 자주 패러디되고 있는 명장면. 미국 중산층의 타락한 생활과 60년대 말 신세대의 심리적 불안을 그린 영화는 80년대 방황하던 이 땅의 청춘에게 먼 나라에 대한 동경을 꿈꾸게 했다. 영화는 무명의 연극배우 더스틴 호프먼에게 오스카상을 안겨 줬다. 또 배경음악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 ‘스카버러 페어’ 등이 알려지면서 사이먼&가펑클은 일약 세계 포크계의 지존으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스카버러 페어’는 영국 민요에서 멜로디를 따왔다. 전쟁에서 죽은 병사가 자신의 몸에 피어난 풀들에게 말을 건네는 형식이다. 애절한 가사와 멜로디를 통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있다.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의 저항 노래로 시작했지만, 지구촌 수많은 가수들에 의해 불리며 클래식 반열에 올랐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결이 고운 노래만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도어스, 핑크 플로이드, 조 코커, 딥 퍼플, 리 오스카 등등은 물론이고 지미 페이지, 리치 블랙모어, 프레드릭 머큐리, 믹 재거, 핼러윈 등등은 고래고래 따라 부르며 고함쳤던 우리가 몹시도 사랑했던 아티스트였다. 신촌과 이태원의 데카당한 술집 벽면을 장식한 지미 페이지의 털북숭이 가슴과 중요 부위를 유난히 도드라지게 입었던 스키니진에 킥킥거리며 독한 술을 가슴에 들이부었다. 무엇 때문에 그리 분노했는지 모르겠지만 모두들 분노를 가슴에 담고 살았다. 퇴폐적이고 불온한 팝은 불만투성이 그 시절 앵그리 영맨을 위로해 주었다. 클래식을 듣고 교양 있는 척하며 얘기하던 것도 그 시절 유행이었다. 덕분에 궁핍했던 청춘 시절 입주 과외를 하면서 푼푼이 모은 돈으로 마련한 명품 오디오가 몇 세트 있고 오랜 세월 어렵게 사 모은 적잖은 분량의 그래머폰, 데카 원판은 지금도 장롱 깊숙이 잠자고 있다. 바하의 파르티타는 내가 즐겨 듣는 레퍼토리이고 빈한했던 시절 아르바이트한 돈을 꼬불쳐 뒀다가 가끔은 폼나게 콘서트홀을 찾기도 했다. 1988년 가을 서울올림픽 기념으로 삼성그룹에서 초대한 루치아노 파바로티 공연 팸플릿 서문도 내가 썼다. 주최 측에서 누구의 말을 들었는지 내게 부탁해 왔고 그날의 팸플릿은 지금도 서재 한 구석에 잠자고 있다. 세월이 흘렀다. 얼마 전 TV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신세대 가수 SG 워너비가 사이먼&가펑클을 닮고 싶어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는 것이다. 노래가 발표될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던 그들이 전설적인 듀오를 닮고 싶다는 당찬 고백에 못내 그리운 80년대를 잠깐 생각해 봤다. 그러면서 나의 아내가 SG 워너비 공연에 모셔가면 그 옛날의 약속을 지킨 것으로 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월이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어야 하는 잔인하고도 기막힌 계절이 왔다.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매체경영) yule21@empal.com ●알림 토요일자에 격주로 연재되던 ‘김동률 교수의 1980´s 청춘의 재발견’이 4월부터 금요일자로 옮겨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산을 닮아 있었다… 세계 최초 ‘히말라야 8000m급 16좌 완등’ 엄홍길 대장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산을 닮아 있었다… 세계 최초 ‘히말라야 8000m급 16좌 완등’ 엄홍길 대장

    안나푸르나에서 겸허함 배웠고 히말라야 휴먼 원정대 영화로 남아 2006년 여름에 만난 엄홍길은 전사(戰士) 같았다. 허벅지 인대가 땅긴다며 잠시도 앉아 있지를 못하고 거실을 어정거렸다. 뜨거운 심장과 혈액을 히말라야 고봉 능선의 어디쯤에 두고 온 듯했다. 그때는 로체샤르(8400m) 3차 도전에 실패한 직후였다. 머리에서 산이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편안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 만남이 있고 9개월 후 엄홍길은 4차 도전을 했고, 성공했다. 동시에 세계 최초의 ‘히말라야 16좌 완등’ 주인공이 됐다. 10년이 흘러 다시 만난 쉰여섯 살의 엄홍길은 산을 닮아 있었다. 허예진 머리카락에 여유를 담은 미소. “돌아보니 산이 품을 내주어 내가 그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작은 거인의 깨달음은 ‘겸허함’이었다. -1977년 9월 15일. 네팔 현지시간 낮 12시 50분에 고상돈(1948~1979) 선배가 에베레스트(8850m) 정상에 올랐다. 신문을 보는데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 ‘고상돈’이라는 이름 석자는 나에게는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고상돈 선배의 세계 최고봉 정복은 고1 우리 반 교실에서도 화제가 됐다. 대부분 친구들은 “뭐하러 그 추운 데까지 날아가서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나는 달랐다. 이미 나는 산을 잘 타는 학생으로 약간 이름을 알리고 있던 터였다. 그걸 아는 한 친구가 말했다. “홍길아, 너도 나중에 한 번 해 봐.”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가 지나 산소마스크를 쓰고 오른손에 태극기를 든 영웅의 모습이 신문 1면에 일제히 실렸다. 정성껏 사진을 오려 내 방 벽에 붙였다. 사진을 보고 또 보았다. 머릿속에는 온통 히말라야 빙벽을 올라가는 내 모습뿐이었다. 당시 나의 산악 등반 능력은 이미 수준급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앞에서 깔아 준 줄을 잡고 암벽을 오르는 게 아니라 내가 선봉에 서서 루트를 개척하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경남 고성에서 농사꾼으로 살던 아버지는 시골살이를 답답해하셨다. 1960년 첫째인 나를 낳고 3년 후 과거에 군 복무를 해서 익숙했던 경기 의정부로 이사를 오셨다. 그런데 하필 터를 잡은 게 등산로였다. 도봉산을 찾는 등산객들을 상대로 작은 매점을 차렸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부모님과 도봉산 망월사와의 인연이 계기가 됐다. -산은 집이기도 했고 놀이터이기도 했다. 호암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아침에 학교에 갈 때는 1시간을 뛰어서 내려갔고, 오후에는 1시간 30분 동안 산길을 올라왔다. 그 어릴 적부터 하루에 2시간 30분씩 산을 탔던 셈인데, 처음부터 힘들다는 불평도 없이 잘 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반에서 나는 ‘산에 사는 아이’로 통했다. 지금처럼 컴퓨터나 스마트폰 같은 게 없던 시절, 친구들에게 우리 집은 인기가 아주 많았다. 봄에는 버찌를 따려 벛꽃나무에 오르고, 진달래를 따 먹었다. 여름에는 계곡물을 막아 물장구를 치며 고기나 가재를 잡았고, 가을이면 다래·밤·잣 등을 찾아다녔다. 겨울에는 눈길을 헤치며 토끼를 잡으러 다녔다.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클라이밍(암벽 등반)에 관심이 생겼다. 주말이면 산악회 사람들이 많이 왔는데 도봉산 두꺼비바위에서 등반하던 산악인들에게 클라이밍의 기초부터 배웠다. 그러나 내가 그들보다 더 산을 잘 타는 ‘날다람쥐’로 성장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세상에, 어쩜 그렇게 산을 빨리 올라가니.” 어른들은 일주일이 무섭게 늘어가는 나의 빠른 실력 향상에 혀를 내두르곤 했다. -1980년 2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설악산으로 들어갔다. 전문 산악인이 되기로 한 이상 대학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한 선배가 대청봉 밑에서 ‘희운각’ 산장을 운영했는데 그 일을 도우며 산을 탔다. 그때 만난 사람이 정양근 형이었다. 그가 1983년 스물일곱 나이에 안나푸르나에서 눈사태를 만나 세상을 뜰 때까지 그는 나에게 정신적 지주였다. 하도 설악산을 헤집고 돌아다니다 보니 나중에는 능선들이 손금 보듯 훤했다. 일반 등산객들은 대청봉까지 2, 3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1시간이면 올랐다. 5시간이 걸리는 설악동까지의 코스도 2시간 30분이면 충분했다. 사람들은 나를 ‘축지법 청년’이라고 불렀다. 체력이 절정에 달해 어떻게든 발산을 해야만 했는데, 그것이 아무리 험준한 산도 한달음에 내달릴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집에 있는 부모님은 한숨이 늘어갔다. “그렇게 대학도 안 가고 등산만 하면 도대체 나중에 뭘 해 먹고 살려는 거냐.” -그런 걱정과 반대에도 당시 벌이는 꽤 쏠쏠했다. 설악산 등반객들 때문에 산장 운영은 꽤 벌이가 되는 장사였다. 명절이나 휴가철이면 ‘돈을 라면박스에 쓸어 담는다’며 즐거워했다. 군대 가기 전 1년 반 정도의 설악산 산장 생활은 전국 산악인들과의 인연을 맺는 귀한 시간이기도 했다. 일반인 등반객들이 뜸한 비수기가 되면 보름 정도씩 지리산, 오대산, 소백산 등 다른 산을 찾아가 그곳에서 활동하는 산악인들과 만나 등반도 하고 식사도 했다. 얼마 후 전국적인 인맥이 형성됐다. -내가 도달하지 못한 산 정상이 하나씩 둘씩 줄어갈수록 가슴속에 있던 히말라야에 대한 꿈은 점점 더 커져갔다. 그러기 위해서 꼭 해결해야 할 숙제가 있었다. 군대였다. 십수년을 산에서 보내서였을까. 몸으로 하는 거라면 뭐든지 자신이 있었던 시절. 육군은 재미가 덜할 것 같았다. 해군에 입대했다. 인천에서 작은 군함을 탔는데 3개월 만에 배의 엔진에 불이 나서 대기발령을 받게 됐다. 그때 지체 없이 해군특수전단(UDT)에 지원했다. 석 달간의 수병 생활도 지루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UDT 훈련은 산악인으로서 나의 능력을 몇 단계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엄청난 양의 수영은 폐활량과 근력을 키워 주었다. 경주 감포에서 독도까지 5박 6일 동안 헤엄쳐 가 본 적도 있었다. 6개월 동안 다이빙, 수중 폭파, 수중 침투, 육상 침투, 낙하산 공중침투 등 훈련을 다 견뎌내야 했는데, 1주일간 단 한숨도 잠을 안 잔 적도 있었다. -1984년 9월 제대를 하고 나서 그해 연말부터 에베레스트 원정을 준비했다. 박영배 대장이 나를 원정대원으로 뽑아 주었다. 대원을 선발할 때에는 등반 기술, 체력도 중요하지만 정신력과 인간성도 중요한 심사 요소로 본다. 1년가량 혹독한 훈련이 이어졌다. 무거운 배낭을 지고 속보 산행을 하며 지구력 훈련을 하면서 암벽과 빙벽에 붙어살았다. -히말라야 도전은 집에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1985년 겨울 D데이가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저 얼마 있으면 네팔에 갑니다.” 아버지는 펄쩍 뛰셨다. 죽을지도 모른다며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셨다. “저는 정상까지는 안 가요. 꼭대기는 선배들이 오르고 저는 그냥 심부름 정도만 하는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비용 부담도 만만치 않았다. 지금처럼 원정대 스폰서가 흔치 않아서 그동안 모아둔 돈 500만원을 고스란히 털어 넣었다. 그렇게 떠난 첫 도전에서 에베레스트는 나를 품어 주지 않았다. 1993년 초오유(8201m)와 시샤팡마(8201m) 등정 성공을 시작으로 1998년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았다. 히말라야 16좌 중 10번째 등정이었는데, 고1 때의 다짐으로부터 20여년 만이었다. -많은 사람이 히말라야 16좌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봉우리가 무엇인지 묻는다. 안나푸르나(8091m)다. 네 번을 실패했다. 1998년 네 번째 도전에서는 동료를 3명이나 잃었고 나 자신도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다. 7600m 지점 급경사에서 미끄러지는 셰르파를 구하려다 함께 굴러떨어졌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발목이 완전히 꺾여 돌아가 있었다. 사고 지점에서 4600m의 베이스캠프까지 그 다리를 하고 2박 3일 동안 내려왔다. 유독 그 봉우리만 실패를 거듭한 이유를 떠올려 보면 젊은 날 그 산에서 떠나간 정양근 선배가 떠오른다. 언제나처럼 자만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고 싶었을 것은 아닐까. -어쨌든 안나푸르나 4차 등정 실패 후 병원에서 “다시는 산에 오를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11번째 봉우리를 앞에 두고 평생의 여정이 끝나는가 싶었다. 어둠 속의 고통을 말해 무엇하겠나. 10개월간 고통 속에서 도봉산을 오르내리며 재활했고 다시 몸을 만들 수 있었다. 이듬해 5번째 안나푸르나로 향했고 결국 정상에 섰다. 그곳에서 배운 겸허함은 16좌 완등을 무사히 마치게 해 준 힘이었다. -2007년 16좌 등반을 완료하자 기쁨과 함께 허탈함이 밀려왔다. 주변에서 “이젠 편하게 살라”고 했다. 목숨을 건 사투가 그들에게 꽤나 힘겨워 보였는가 보다. 엄홍길휴먼재단을 만들기로 했다. 네팔의 산골 오지 학생들에게 학교를 지어 주는 프로젝트인데 16개를 건립하는 것이 목표다. 현재 13개가 착공돼 있다. -2013년 말 영화 ‘해운대’, ‘국제시장’을 만든 윤제균 감독이 연락을 해 왔다. 감독이 아닌 영화 제작자로서였다. 에베레스트 8750m 지점에서 조난당한 후배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2005년 휴먼원정대를 꾸린 것을 영화로 만들자는 거였다.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고 자문을 해 달라고 했다. “절대로 안 됩니다. 가까스로 치유한 유족의 상처를 다시 건드리게 됩니다.” 완강히 거절을 했다. 사실 앞서 2005년에도 여러 영화 제작자가 연락을 해 왔다. 그때도 같은 이유로 모두 거절을 했다. 그러나 윤 감독의 집요함은 이전 제작자들과 달랐다. “산과 사람의 역사를 함께 조명하자”고 했다. 고민을 거듭했다. 결국 마음을 바꿨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메시지를 영화를 통해 전하기로 했다. 초고속 성장을 하면서 추락한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휴먼원정대를 통해 일깨우고 싶었다. ‘배려와 양보가 사라진 이기적인 사회에서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동료애와 희생정신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가. 정신이 황폐화된 채 맞는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는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 해서 영화 ‘히말라야’(2015년·황정민 주연)가 탄생했다. -나는 지금도 히말라야에 오르고 싶다. 도시는 너무 답답하다. 야생마처럼 멋대로 천지를 달리다가 갇힌 기분이다. 열정을 불태우던 시절이 그립다. 체력적으로 아직 8000m 산에 오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시간이 없는 게 가장 큰 문제다. 매월 많게는 10번 정도 강의를 한다. 말하는 것을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군부대, 경찰, 관공서, 기업체, 학교 등 다양한 곳에서 강연 의뢰를 받는다. -지금도 웬만하면 오전 스케줄은 비우고 북한산을 오른다. 내 산책 코스는 북한산 백련사 입구에서 진달래 능선을 지나 대동문까지 오른 후 아카데미 하우스로 내려오는 길(10㎞)이다. 1시간 30분 정도면 완주하는데 요즘은 나를 알아보는 분들이 많아서 이렇게 저렇게 인사를 하다 보면 2시간이 넘게 걸리기도 한다. -산에 오르는 길은 ‘이러다 죽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상황의 연속이다. 산은 사람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곳곳에 크레바스가 도사리고 있다. 눈사태도 감수해야 한다. 8000m 고봉에서는 산소가 해수면의 3분의1밖에 안된다. 두세 발짝 움직이고 나서 3~5분간 숨을 거칠게 쉬어야 다음 한 발을 내디딜 수 있다. 유일한 동반자는 시련을 참아내는 내 안의 용기와 인내뿐이다. 정상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내고 완전히 탈진이 된 후 하산을 한다. 오를 때는 정상이라는 결과에 몰입해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내려올 때는 정신이 돌아오면서 겁이 나기 시작한다. 사고도 내려올 때 더 많이 일어난다. 우리들 인생과 비슷하다고나 할까.김태균 사회부장 windsea@seoul.co.kr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사진 박윤슬 기자 seul@seoul.co.kr ■엄홍길 대장은 1993년 초오유(8201m)를 시작으로 2007년 로체샤르(8400m) 등정까지 세계 최초로 8000m 이상 히말라야 고봉 16좌를 완등했다. 2005년에는 에베레스트 등반 도중 숨진 고 박무택, 백준호, 장민 대원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휴먼원정대’를 조직했다. 세계 산악계 최초로 동료를 구하러 목숨을 건 등반을 감행해 ‘휴머니스트’라는 별명을 얻었다. 현재는 엄홍길휴먼재단을 운영하며 네팔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 건립에 분주하다. ▲1960년 경남 고성 출생 ▲양주고, 한국외국어대 중문학 학사·체육교육학 석사 ▲밀레 홍보팀 기술 고문, 상명대 자유전공학부 석좌교수, 대한산악연맹 대회협력위원장 ▲체육훈장 거상장·맹호장·청룡장, 대한민국 산악대상, 대한민국 창조경영인상 수상 히말라야 16좌 등정 일지 초오유→시샤팡마(1993년·8027m)→마칼루(1995년·8463m)→브로드피크(1995년·8047m)→로체(1995년·8516m)→다울라기리(1996년·8167m)→마나슬루(1996년·8163m)→가셔브룸1(1997년·8068m)→가셔브룸2(1997년·8035m)→에베레스트(1998년·8850m)→안나푸르나(1999년·8091m)→낭가파르바트(1999년·8125m)→칸첸중가(2000년·8586m)→K2(2000년·8611m)→얄룽캉(2004년·8505m)→로체샤르
  • [송혜민의 월드why] ‘죽기 좋은 나라’ 영국…죽음의 인식을 바꾸다

    [송혜민의 월드why] ‘죽기 좋은 나라’ 영국…죽음의 인식을 바꾸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늙는다. 죽음을 향해 간다는 뜻이다. 돈이 많든 적든 상관없이 누구도 삶의 마지막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한 마지막이 조금 더 인간답고, 조금 더 행복할 수 있기 위한 노력이 바로 ‘웰 다잉’(Well-Dying)이다. 영국은 당하는 것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에 있어서, 가장 죽기 좋은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영국 경제전문지인 이코노미스트가 주관하는 ‘2015 죽음의 질 지수’ 통계에 따르면 죽음의 목전에서 방문할 수 있는 병원의 수, 병원 의료진의 숫자와 수준, 죽음을 앞두고 받을 수 있는 의료 서비스의 혜택과 수준, 죽기 직전까지 지불해야 하는 의료비용 등의 항목을 나라별로 평가한 결과 영국이 100점 만점에 93.9점을 받아 1위를 차지했다. 영국이 이처럼 ‘죽기 좋은 나라’가 된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호스피스’의 유래 및 영국 호스피스 제도의 특징 영국이 ‘웰 다잉’의 선두국가로 꼽힌 데에는 호스피스 제도가 큰 몫을 한다. ‘죽음의 동반자’라고 부르기도 하는 호스피스는 ‘손님’이라는 뜻의 라틴어 ‘호스페스’(Hosepes)에서 유래했다. 중세시대에는 성지 예루살렘으로 가는 성지 순례자나 여행자가 쉬어가던 휴식처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고, 근대에 들어 아픈 이들 혹은 곧 죽음에 이를 사람들을 위해 숙박을 제공하고 간호를 베푸는 장소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 영국에서 본격적인 체계를 갖추고 발전하면서, 호스피스라는 용어는 삶의 끝자락에 있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봉사활동 혹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됐다. 호스피스 제도가 처음 제도화 된 나라는 앞서 언급했듯 영국이다. 1967년 영국 런던에 ‘성 크리스토퍼 호스피스’가 개방된 뒤 이듬해 미국에서도 가정형 호스피스가 시작됐다. 일찌감치 웰다잉에 대한 개념을 확립한 영국은 현재 호스피스기관협회인 ‘호스피스UK’를 설립·운영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지난 2일 발표에 따르면 영국 말기 암 환자의 호스피스 이용률은 95%로, 한국의 13.8%(2014년 기준)와 비하기 어려운 수치다. 영국인들이 삶의 끝에서 각종 의료기기로 둘러싸인 병원이 아닌 호스피스 시설(혹은 제도)을 선택할 수 있는 배경에는 자원봉사자들의 기금 모금과 재능기부가 있다. 호스피스UK에 따르면 호스피스 자원봉사자는 전국에 약 12만 5000명에 이른다.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이뤄진 자원봉사자들은 음악회를 열거나 미술 치료를 돕는 등 재능 기부를 아끼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호스피스 시설 운영비의 3분의 2는 모금을 통해 조달된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영국의 공공의료서비스인 NHS(국민의료보험)의 지원 규모는 전체 호스피스 기관의 운영비의 30%를 약간 웃도는 수준에 불과하다. 말기 암 환자의 95%, 12만 명의 환자가 무료로 이용하는 영국 호스피스 제도의 성공 원동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죽음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이미 죽음에 가까워진 이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서는 것이다. 호스피스 병동이 죽음을 기다리는 곳이 아닌 죽음을 맞이하는 곳이라는 인식 역시, 수많은 사람들의 웰 다잉을 돕는 호스피스 제도가 활성화 될 수 있게 도왔다. 호스피스 제도의 높은 이용률은 새로운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영국을 포함해 호스피스 제도가 자리잡은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는 음악이나 미술 등을 매개로 몸의 통증 및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최소화 해주는 음악심리치료사, 미술심리치료사 등이 일반화한 직업으로 자리 잡았다. 이들은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직접 호스피스 시설이나 가정형 호스피스 이용자의 집을 방문하거나, 관련 기관에 정식으로 취업해 안정적인 급여를 받으며 환자들을 돌본다. ◆ 한국 호스피스 제도 실정 호스피스는 자신이 평소 머물렀던 집에서 서비스를 받는 가정형과 전문 호스피스 병동 등 시설에서 받는 시설형 등으로 나뉘는데, 영국에는 시설형과 가정형이 모두 보편화 되어 있는 반면, 한국은 가정형을 선호하는 경향이 짙다. 한국호스피스완화의료학회가 2012년 말기암 환자 465명에게 물은 결과, 75.9%가 가정형 호스피스를 가장 선호한다고 밝혔다. 병원이나 요양시설은 24.1%에 불과했다. 이에 보건복지부는 올 3월부터 말기 암 환자가 자택에서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말기 암 가정 호스피스 완화의료 시범사업’을 전국 17개 병원에서 실시하고 있다. 호스피스 서비스는 건강보험이 적용돼 전체 진료비의 5%만 지불하면 된다. 간호사가 1인 방문할 경우 1회 5000원, 의사와 간호사 및 사회복지사가 모두 방문할 경우 1만 3000원 정도를 부담한다. 한국도 호스피스와 관련한 인식이 확산되고 수요가 늘면서 호스피스 지원 규모도 확장되고 있지만, 무료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데다 말기 암 환자뿐만 아니라 난치병, 소아 암 환자 등도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 구비된 영국에 비하면 아직 해결해야 할 숙제가 더 많다. 최근 일본에서 말기 암 환자들이 생의 끝에서 병원보다는 집에 머물렀을 때 생존기간이 길어진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쓰쿠바대학교 연구진이 일본 내 말기 암환자 사례 2000건을 분석한 결과, 2주의 시한부 진단을 받은 환자가 병원에 계속 머물 경우 평균 9일 정도를 생존한 반면, 집으로 곧장 돌아갈 경우 평균 13일을 생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병원에 있을 때보다 집에 있을 때 평균 나흘을 더 가족과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병든 부모님을 집이나 호스피스 전문시설로 옮기는 것이, 마치 치료를 포기하고 효를 다 하지 않는 것처럼 비춰지는 인식 탓에 여전히 호스피스를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음 앞에 선 당사자의 선택과 의지다. 생의 마지막을 보낼 장소를 고를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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