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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기의 주력 산업 - 안 보이는 산업정책] 벼랑 끝 몰리는 ‘코리아 빅4’… 현장 요구 담아 선제적 혁신하라

    [위기의 주력 산업 - 안 보이는 산업정책] 벼랑 끝 몰리는 ‘코리아 빅4’… 현장 요구 담아 선제적 혁신하라

    “지금 우리는 막 터널의 입구에 들어섰다.” 이정동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가 한국산업의 위기를 진단한 저서 ‘축적의 길’에는 이런 문구가 나온다. “쉼 없이 성장해 온 한국 경제의 엔진이 서서히 식어 가는 어두운 터널”의 입구에 들어섰다는 말이다. 올해 내내 한국 경제의 위기를 암시하는 경고음들이 들렸지만, 정부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특히 “산업정책이 없다”는 산업현장의 비판은 정부로서는 뼈아픈 대목이다. 우리 경제의 성장동력이 급속도로 가라앉는 것을 단지 현 정권이 추구하는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실패로만 치부하기는 힘들다. 서울신문에서는 산업 정책이 없다는 업계 비판의 실체가 무엇인지 짚어보고 정부가 준비하는 산업정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해 보는 기획시리즈를 준비했다.‘7대 주력산업’으로 꼽혀 온 해운산업이 지난해 허망하게 무너졌다. 최근 경기 하강과 맞물려 위기감은 주력산업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정부가 산업 기반을 다잡기 위한 정책을 잇따라 내놓고는 있지만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우세하다. 오히려 업계에서는 “산업정책이 없다”는 목소리가 더 크다. ●업계 “산업정책이 없다” 목소리 고조 우리나라는 1960년대부터 정부 주도의 강력한 산업정책을 폈다. 1960년대 수출 주도 정책으로 성장 기반을 다졌고,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을 통해 산업화를 일궈 냈으며, 1980년대에는 연구개발(R&D)과 인력 양성에 매진했다. 현재 주력산업으로 불리는 반도체·자동차·조선·철강 등 한국 경제의 기반은 이러한 강력한 산업정책으로 다져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자유무역주의가 득세하면서 산업정책이라는 어젠다가 사라졌다. 특히 1995년 1월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을 계기로 전통적인 의미의 산업정책을 내세울 수 없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장석인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전통적 의미의 산업정책은 개발도상국이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한 저급한 정책으로 치부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런 분위기가 깨지게 된 계기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다. 당시 미국과 독일 등 일부 선진국에서 제조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산업정책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금융위기 당시 부침을 덜 겪은 나라가 바로 제조업 강국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2000년대 초 WTO에 가입한 것도 위협으로 비쳐졌다. 장 연구위원은 “과거처럼 노동집약적 제조업으로는 중국을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한 미국, 영국, 독일 등이 스마트 제조업 등 부가가치를 높인 새로운 제조업을 내세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제조업이 전통적으로 강한 우리나라도 2014년부터 ‘제조업 혁신 3.0’ 전략을 추진해 왔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해 12월 ‘새 정부 산업정책 방향’을 발표하고 올해 중반까지 업종별 발전 전략을 차례로 발표했다. 하지만 정부가 추진해 온 산업정책으로는 주력산업의 침체를 막지 못했다. 정부의 업종별 산업정책이 주로 미래산업 육성에 초점이 맞춰져 업계의 현실적 요구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또 혁신 성장의 성과가 지지부진하고, 규제 개혁도 미흡하다는 업계의 불만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업계에서는 자신들의 애로사항을 대변해 줄 곳이 산업부인데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물론 이는 전통적 의미의 산업정책과는 다른 얘기다. 여기에서 기업과 정부가 서로를 바라보는 산업정책 개념에 대한 ‘미스매치’(부조화)가 발생한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기업의 애로사항을 대변하는 것은 기업정책이지 산업정책은 아니다”라면서 “조선업이나 자동차처럼 사태가 터지고 나서 수습하는 형태는 우리가 원하는 산업정책은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김도훈(전 산업연구원장) 경희대 특임교수도 “산업부가 기존 산업을 관리하는 데 메몰돼 있다”면서 “어려움을 겪는 주력업종들에 대한 선제적인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中企 육성 집중서 U턴… 대기업 지원책 필요” 기존의 전통적 산업정책의 한계는 명확하다. 선진국을 벤치마킹하는 방식으로는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기 어렵다. 이정동 서울대 교수는 “선진국이 만들어 놓은 개념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단계는 지났다”면서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바라보는 현 시점에서는 새로운 개념의 산업정책을 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대기업에 대한 투자 유도보다는 중소·중견기업 육성정책을 펴는 것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대기업이 투자 계획을 발표한 뒤 어떻게 실행하는지 점검하고 지속적인 투자를 유도할 정책이 없다는 것이다. 장 연구위원은 “대기업을 범죄집단으로 치부하고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식으로 새로운 창업을 유도해서는 안 된다”면서 “조세 감면 등을 통해 기업들이 방향성을 가지고 투자하도록 정부가 유인책을 적극적으로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산업정책 전문가로 꼽히는 성윤모 산업부 장관은 최근 “주력산업 혁신과 관련된 종합전략을 연내에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고부가가치화, 상품 기획과 개념 설계 부문의 경쟁력 강화, 기술 경쟁력 강화, 기술 무역적자 개선 등을 위한 다양한 방안이 담길 것으로 예상된다. 또 대기업들의 투자 유치를 유도하기 위해 중소·중견 협력업체의 장비나 부품 등을 우선 구매하면 세금을 감면해 주는 방안 등을 검토 중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대기업 투자가 낙수 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 산업정책의 틀을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세종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사설] 국민연금 개혁, 미래세대에 과도한 부담 안 된다

    국민연금 개혁의 밑그림인 ‘국민연금종합운영계획 정부안’이 나왔다. 보건복지부는 오는 15일 공청회를 앞두고 현행 9%인 보험료율을 올리되 소득대체율에 따라 그 요율을 다르게 적용하는 세 가지 유형을 제시했다. 소득대체율을 현행 45%에서 2028년까지 40%로 낮추고 보험료율은 현행 9%에서 15%로 올리는 안과 소득대체율은 45%로 두고 보험료율만 12%로 올리는 안, 문재인 대통령 공약대로 소득대체율은 50%로 높이되 보험료율을 13%로 올리는 안 등이 그것이다. 1988년 도입된 국민연금의 개혁은 1998년(소득대체율 70%에서 60%로 하향)과 2007년(2028년까지 40%로 하향)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현행 ‘저부담·고급여’ 체계를 개혁하려는 시도는 당초 2060년에 기금이 바닥날 것으로 봤는데 이게 3년 당겨질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에 따른 것이다. 또 국민연금이 용돈 수준으로 소득대체율을 50%까지 높여야 한다는 요구도 있었다. 그러나 보험료는 찔끔 올리면서 소득대체율을 높이는 것은 미래세대에게 부담을 전가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다. 자칫하다가는 세대 갈등으로 비화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많이 받으려면 많이 내야 한다’는 원칙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인데, 이를 설득하려면 기금이 고갈되더라도 정부가 이를 보전해 준다는 것을 법에 명시할 필요가 있다. 또 취약계층에는 정부가 보험료 일부를 보전해 주는 등의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국민연금공단의 방만 경영 등 비효율도 걷어 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어제 “국민의 의견이 보다 폭넓고 충실히 반영될 수 있도록 수정·보완하라”고 했다니 정부는 여론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좀더 듣고 다듬을 것을 권한다. 정부는 물론 국회도 당리당략을 떠나 현세대와 미래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최선의 개혁안 마련에 힘써야 할 것이다.
  •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계수나무 향기를 맡으며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계수나무 향기를 맡으며

    수목원에서 일하는 동안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계절은 초가을이었다. 꽃이 피거나 열매가 아름다운 색을 띠는 때도 아닌 이 어정쩡한 계절이 가장 좋았던 이유는 여름이 지나고 시원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올 때 수목원을 가득 메우는 달콤한 향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가을 소풍 온 어린이들이 솜사탕이나 과자를 먹고 지나갔나 싶었는데 곧 그 향기는 수목원의 한 나무에서 나는 거란 걸 알게 됐다. 열대 온실 앞의 거대하고 노란 계수나무에 다가갈수록 그 향기가 유독 짙어졌기 때문이다.재밌는 건 그 향기가 계수나무에 꽃이 피거나 열매가 열리거나 단풍이 물드는 계절이 아니라 낙엽이 떨어질 때 즈음 짙어져 가을 내내 옅은 향기를 낸다는 것이었다. 그 원인을 찾으려 나무에 매달려 있는 단풍잎과 떨어진 낙엽을 주워 코에 가까이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아 봤지만 딱히 어디에서 나는 건지 찾을 수 없었다. 동료 식물학자들에게 물어보기도 했는데 낙엽이 떨어질 때 나는 걸로 보아 잎이 떨어진 자리에서 향기의 원인인 분자가 방출되는 게 아니냐는 추측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계수나무가 일본 원산이니 일본에서 연구하지 않았을까 싶어 논문을 찾아봤고, 그 향기의 원인은 잎이 낙엽으로 떨어져 부서지면서 잎에서 방출되는 말톨이라는 분자에 의한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온전한 형태의 잎에서 향기의 출처를 알 수 없었던 게 당연했다. 실제로 말톨은 설탕을 태워서 캐러멜 만들 때 방출되는 분자이기도 하다. 계수나무에서 솜사탕이나 달고나 냄새가 난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디를 가든, 서울의 공원과 가로수의 계수나무에서는 수목원의 그들만큼 짙고 강한 향이 나진 않았다. 국립수목원의 계수나무는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돼 식재된, 우리나라 계수나무들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는 걸 나중에야 알 수 있었다.이들은 중국과 일본 원산이다. 학명의 종소명도 ‘자포니쿰’이고 일본에서는 흔히 ‘가쓰라’라 부른다. 이들은 중국과 일본에 분포하다 1860년대 일본이 미국과 교류가 많아지면서 일본의 식물이 북미에 소개돼 서양에서도 널리 재배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을 통해 처음 소개됐고 현재 도시의 정원수나 가로수로 식재돼 ‘하트 모양 잎의 나무’로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그러니 도시의 계수나무가 사랑받는 건 내가 좋아하는 그 달콤한 향기보다는 귀여운 하트 모양의 잎 때문인데, 잎이 하트 모양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내가 관찰한 바로는 달걀형의 잎도 난다. 물론 이들도 꽃이 핀다. 잎이 나기 전 꽃부터 피는데, 암꽃과 수꽃이 따로 핀다. 암꽃은 가느다란 암술이 3~5개 나고 수꽃은 수술이 7개 이상 많이 달린다. 꽃잎이 없다 보니 다른 식물만큼 꽃이 화려하지 않고 작아 고개를 올려 나뭇가지를 자세히 들여다봐야만 하기에 사람들은 계수나무 꽃을 잘 마주치지 못한다. 나도 꽃을 그리기 위해 수년에 걸쳐 봄이면 계수나무 가지를 올려다보았다. 꽃이 진 자리에는 열매가 나고 그 안에 날개가 달린 씨앗이 들어 있다. 씨앗은 바람을 타고 날아 번식한다. 흔히 계수나무 하면 수정과에 넣어 먹는 계피를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계피는 우리나라에는 없는 중국 육계나무의 수피일 뿐 계수나무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계수나무의 ‘계’자가 독특해 이런 오류를 자주 일으키는데, 달에 계수나무와 산토끼가 산다는 내용의 동요 또한 우리가 아는 그 계수나무로 해석하는 게 맞냐는 지적도 있다. 달에 얽힌 중국의 설화에서 유래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계’라는 나무에 해당하는 종은 우리가 생각하는 계수나무 외에도 육계나무나 달에 사는 계수라는 뜻의 월계수, 중국에서는 ‘계화나무’라고 부르는 목서 등 몇 가지 후보군이 있는데 정확한 종이 무엇인지는 국어학자와 식물학자가 함께 연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계수나무는 우리나라 자생식물도 아닌 데다 식별이 쉬워 굳이 그림 기록을 그릴 필요가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주요 식물만 기록하는 게 정답일까? 나 아닌 누군가, 혹은 이미 외국에서 그렸겠지 하는 마음이 식물세밀화의 본질, 종 다양성을 기록하도록 하는 것에 반하게 될까 싶어 올가을엔 우리나라에 사는 계수나무를 관찰해 그렸다. 점점 옅어지는 계수나무 향기를 맡으며 붉게 물든 단풍잎을 마지막으로 기록을 마쳤고, 이들은 내게 식물세밀화라는 책임과 함께 달콤한 냄새로 위안을 주었다. 식물은 내게 늘 일과 위안을 동시에 가져다준다.
  • 유엔군의 눈으로 본 6·25

    유엔군의 눈으로 본 6·25

    국가기록원은 2008년 유엔에서 수집한 사진 기록물 745건을 공개한다고 7일 밝혔다. 이번에 공개되는 사진 기록물은 ‘한국과 유엔’이라는 주제로 1947년 열린 유엔총회부터 2008년 반기문 전 사무총장이 활동할 때까지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번에 공개된 사진 기록물들은 6·25 당시 각국에서 파견한 유엔군이 전쟁 때 어떤 표정이었는지 생생하게 담고 있다. 초가집 앞에 앉은 노인에게 담배를 권하는 유엔군 소속 호주 병사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하다. 휴전 회담을 끝내고 한옥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유엔군 대표단의 모습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와 달리 평화롭다. 이와 함께 6·25 당시 우리 국민의 피란 생활상이 어땠는지 살펴볼 수 있다. 갑작스런 전쟁에 기차에 한가득 올라탄 피란민의 모습과 한겨울 눈을 뚫고 먼 길에 나서는 피란민들의 모습은 전쟁의 참상을 보여 준다. 1948년부터 1960년대까지 국민들이 어떤 일상생활을 살았는지 살펴볼 수 있는 사진도 있다. 사진 기록물은 7일부터 국가기록원 홈페이지(www.archives.go.kr)에서 볼 수 있다. 신형철 기자 hsdori@seoul.co.kr
  • 故신성일 오늘 6일 발인…영화계 떠나 ‘하늘의 별’ 되다

    故신성일 오늘 6일 발인…영화계 떠나 ‘하늘의 별’ 되다

    故(고) 신성일의 영결식 및 발인식이 오늘 6일 오전 엄수됐다. 이날 오전 10시에는 故신성일의 영결식이, 오전 11시에는 발인식이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아내 엄앵란을 비롯한 가족들의 참관 속에 진행됐다. 이후 서울 양재 추모공원에서 화장을 진행될 예정. 장지는 고인이 마지막을 보냈던 경북 영천 선영이다.故신성일은 지난 4일 오전 2시 25분쯤 지병이었던 폐암의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됐고, 고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장례는 영화인장(3일장)으로 거행된다. 故신성일의 장례식에는 연예계와 정계를 아우르는 수많은 인사들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첫날인 4일에는 동료 배우인 최불암과 이순재, 신영균, 안성기,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전 이사장, 문성근, 선우용여, 김수미, 박상원, 임하룡, 조인성, 이창동 감독, 정지영 감독, 한복연구가 박술녀 등이 장례식장을 찾았다. 이어 5일에는 방송인 송해와 정은아, 이상용, 배우 김창숙, 김형일, 전원주, 장미희, 이정섭, 조형기, 강석우, 나영희, 이보희, 김혜선, 배슬기, 전무송, 이장호 감독, 이종격투기 선수 김동현 등이 조문했다. 그뿐 아니라 이회창 전 국무총리와 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 서청원 의원, 나경원 자유한국당 의원과 지상욱 바른미래당 의원 등 정계 인사들이 대거 장례식장을 찾아 고인에 대한 애도를 표했다. 신성일은 1937년생으로 1960년 신상옥 감독의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했다. 본명은 강신영이었으나 데뷔와 함께 신상옥 감독이 지어준 ‘신성일’이라는 예명을 써왔다. 1964년에는 당대 톱 여배우였던 엄앵란과 결혼했고, 슬하에 1남 2녀를 뒀다. 이후 강신성일이라는 이름으로 제16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잠시 정치권에 몸을 담기도 했다. 대표작으로는 ‘길소뜸’(임권택 감독), ‘내시’(신상옥 감독), ‘맨발의 청춘’(김기덕 감독), ‘별들의 고향’(이장호 감독), ‘안개’(김수용 감독), ‘장군의 수염’(이성구 감독), ‘초우’(정진우 감독), ‘휴일’(이만희 감독) 등이 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데스크 시각] 고맙다, 그 자리에 있어 줘서/손원천 문화부장

    [데스크 시각] 고맙다, 그 자리에 있어 줘서/손원천 문화부장

    청와대로 가는 서울 종로구 효자로 중간쯤에 ‘통의동 보안여관’이 있다. 최근에 재생작업(리모델링)을 거쳐 설치미술 작품 등을 전시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새로 태어난 곳이다.보안여관이 들어선 자리는 경복궁 영추문 대각선 방향이다. 그러니까 권부로 들어가는 길목에 떡하니 자리를 잡은 셈이다. 무슨 사연으로 서슬이 퍼랬을 옛 경성의 관청들 사이에 여관이 자리잡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흰 아크릴판에 파란 글씨로 쓴 옛 간판이며 낡은 적벽돌 외투를 두른 외양이 인상적인 건 분명하다. ‘기록이 전하는’, 그리고 ‘여관으로서’ 보안여관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당 서정주는 자서전 ‘천지유정’에 “1936년 가을, 함형수와 나는 둘이 같이 통의동 보안여관이라는 데서 기거하면서 김동리, 김달진, 오장환 등과 함께 ‘시인부락’이라는 동인지를 꾸며내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 시기에 이미 여관으로서 기능을 했다는 뜻이다. 공식 문서에 등장하는 건 1938년이 최초다. 경성상공명부에 ‘이유숙’이라는 운영주 이름과 ‘세금 31.60원’이라고 적혀 있다. 당시 최소 30원 이상 세금을 내는 업소만 경성상공명부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하니, 보안여관이 제법 짭짤한 수익을 내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난 1일 ‘통의동 보안여관’에서는 설치미술전 ‘내일 없는 내일’전이 열렸다. 그간의 재생 작업에 마침표를 찍는 행사이자 건축물로서의 새 출발을 알리는 자리였다. 이날 돌아본 보안여관은 옛 목재 골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벽면의 마감재 정도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러니 그 오래된 나무 기둥과 서까래들은 얼마나 많은 개인들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을까.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이 문화공보부 공무원 시절이던 1960년대 초 이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댄 채 대통령 보고용 자료를 만들었고, 소재구 초대 국립고궁박물관장이 “보안여관 등불 밑에서 ‘문화유적 총람 1, 2, 3’의 원고를 마감”했다. 기자 역시 대학 시절 보안여관에서 ‘달방’을 살았던 기억이 여태 선연하다. 작은형과 함께 머리를 누이고 도란도란 나눴던 정담이며, 머리를 타고 흐르는 장맛비에 뜨겁고 찝찔한 ‘싸나이’ 눈물을 함께 흘려 보낸 기억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보안여관은 거쳐 간 많은 이들의 가슴에 청춘의 한때가 새겨진 ‘기억의 집’이다. 요즘 이런 ‘기억의 집’들을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문화재청이 서울 석관동 의릉 내의 ‘구 중앙정보부 강당’(등록문화재 92호)에서 진행하는 문화행사들이 그 예다. 상상해 보시라. 초기 건축 기술이 집약된 건물에서 역사 강의를 듣고 영화 감상하는 순간을. 문화가 뼈와 살로 곧장 이식되지 않을까. 이처럼 충북 청주에선 낡은 연초제조창이 복합문화공간으로 새 단장됐고, 제주에선 병원 영안실이 수준급의 갤러리로 변해 관람객을 맞고 있다. 이런 흐름은 여기저기서 생기고 있다. 머지않아 거스를 수 없는 도도한 물결이 될 것이다. 다만 두려운 건 그 전에 보전해야 할 유산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서울 한복판에도 이런 데가 있나 싶을 만큼 낡은 공간들이 여전히 있다. 행여 ‘토건족의 삽질 욕망’을 자극하지나 않을까 꽁꽁 싸매서 숨겨 두고 싶을 지경이다. 이런 점에서 보안여관을 비롯한 서촌 일대의 완만한 도시재생 작업이 주는 시사점은 매우 크다. 서촌에서 보듯 우리가 ‘빨리 빨리’ 해야 할 게 있다면 바로 이것일 터다. 도시재생. 삶과 기억, 문화가 건축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일 말이다. angler@seoul.co.kr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81세에 정승 발탁된 원칙주의자 허목… 조선 유학사에 뚜렷한 족적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81세에 정승 발탁된 원칙주의자 허목… 조선 유학사에 뚜렷한 족적

    ‘예기’(禮記)에서는 ‘대부가 칠십이 되면 벼슬에서 물러난다’(大夫七十而致事)고 했다. 동양에서는 고래로 이 조항이 고위 공직자의 은퇴 시기를 정하는 기준으로 사용됐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칠십도 아닌 팔십 대에 우의정으로 발탁된 인물이 있다. 미수(眉) 허목(許穆·1595∼1682)이 그 주인공이다.# 조정을 뒤흔든 한 통의 상소 조선시대에 70세가 넘도록 정승으로 재직한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대표적으로 세종대 명상 황희는 87세까지 정승의 직위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64세에 우의정이 된 뒤로 20년 가까이 줄곧 정승 자리를 지킨 사례다. 그런데 허목은 이와 달리 거의 평생을 재야의 학자로 지내다 81세가 돼 우의정으로 발탁됐다. ‘백세시대’라는 말이 익숙해진 현대라도 흔하지 않을 일인데, 그 시대에 이처럼 파격적인 인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상황과 허목이라는 인물이 궁금해진다. 허목이 우의정에 발탁된 과정은 매우 드라마틱하다고 하겠다. 1660년 66세로 사헌부 장령이 된 허목이 올린 한 장의 상소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그 상소는 ‘예송’이라 불리는 논쟁의 발단이었다. 소현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 효종이 인조의 두 번째 장자로서 나라를 이어받았으니, 대왕대비께서 효종을 위해 재최 삼년복을 입어야 예법에 맞는데, 지금 예를 강등하여 기년복을 입으셨습니다. 서자(庶子)를 세워 후사로 삼은 경우에는 삼년복을 입지 못하니, 첩자(妾子)이기 때문입니다. -‘기언’ 추정상복실례소(追正喪服失禮疏) 1659년에 효종이 승하했을 때 효종의 어머니 자의대비의 복제(상복 차림에 대한 규정)를 기년복으로 정한 것이 오례(誤禮)라는 주장이었다. 이 상소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기년복은 효종을 인조의 적자가 아닌 첩자로 본 데서 나온 것’이라는 말이었다. 부왕 효종의 국상 복제가 잘못 정해졌다는 것만도 놀랄 일인데, 효종을 첩자로 취급했다는 말에 현종은 펄쩍 뛸 수밖에 없었다. 복제를 다시 검토하라는 엄명이 내려졌다. 기해년 복제는 송시열의 주도하에 서인들이 정한 것이었다. 실상 송시열은 효종을 서자로 본 것이지 첩자로 본 것은 아니었으나, 예학에 정통한 허목이 ‘의례’(儀禮)의 ‘상복조’를 근거로 제시한 주장은 매우 논리적이었다. 하지만 집권 서인들은 장자와 차자를 구분하지 않은 ‘경국대전’에 근거한 것이라며 기왕에 정한 복제를 그대로 밀고 나갔다. 더 큰 파장을 막기 위해서라도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허목의 상소는 채택되지 못했고, 그가 삼척 부사로 좌천되는 것으로 일은 일단락했다.# 15년 뒤에 일어난 일대 반전 1674년 효종의 비 인선왕후가 죽었을 때 예송이 재연됐다(갑인예송). 시어머니인 자의대비의 복제를 대공(大功·9개월)으로 정하면서 서인들이 효종을 서자로 보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던 것이다. ‘경국대전’에는 장자·차자와 달리 장자부·차자부에 대한 복제가 기년복·대공복으로 구분됐기 때문이다. 갑인예송은 서인 고관들과 현종 사이에서 전개됐으나, 이 과정에서 15년 전 허목이 올렸던 상소가 다시 크게 부각됐다. 복제 문제로 서인의 주요 인사들이 축출되고 남인들이 대거 등용되면서 정국이 개편됐다. 그러다 현종이 서거하고 숙종이 즉위하면서 더 큰 반전이 일어났다. 숙종이 81세나 된 고령의 허목을 우의정으로 전격 발탁한 것이다. 왕실 복제의 중요성은 짐작할 수 있지만, 허목의 상소 한 통이 15년이 지난 뒤까지 그토록 큰 파급력이 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허목이 왕실 예제의 특수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송시열의 예론은 보편적 규범을 따르기 때문에 국왕도 사대부와 동일하게 다루어진다. 즉,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더라도 차자이므로 장자로 대우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반면 허목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한 만큼 적장자의 예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왕은 사대부와 동일시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임을 인정한 것이다. ‘군약신강’(君弱臣强)이라 지칭되는 현종대를 이어 즉위한 숙종은 이 점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였을 법하다.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바로잡고 왕권을 강화하려면 그에 맞는 논리가 필요했을 테니 말이다. 허목의 상소에는 그에 맞는 정치이념이 제시돼 있었던 것이다.# “말을 하면 반드시 글로 써서 살펴보다” 이런 뚜렷한 행적 때문인지 허목은 사람들에게 정치가로 각인돼 있다. 그러나 그는 조선 유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뛰어난 학자였다. 허목의 학문적인 업적과 특색을 잘 살펴볼 수 있는 게 바로 ‘기언’이다. 나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성현의 가르침을 두려워하여 평소에 말을 하면 반드시 글로 써서 날마다 살펴보며 힘썼다. 그러므로 이 글을 ‘기언’이라 이름하였다. -‘기언’ 자서(自序) ‘기언’은 허목이 직접 엮은 문집이다. 일반적으로 특정 인물의 사후에 그 제자나 후손이 유작을 정리해서 만드는 것이 문집임을 생각하면, 기언을 자편한 것은 매우 특별한 일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허목은 ‘기언’이라는 독특한 이름도 스스로 정했다. 기언은 ‘말을 기록하다’는 뜻이다. ‘언’은 모범이 될 만한 말과 글, 곧 진리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기언’은 평범한 문집이라기보다 후대에 남기려는 의도로 적었던 ‘언’, 다시 말해 허목 나름의 진리라고 하겠다. 기언은 육경(六經)을 근본으로 삼고 예악(禮樂)을 참고하고 백가(百家)의 변론을 널리 포괄한 것이다. 이 글은 간략하면서도 두루 갖추어졌고, 장황하면서도 체제는 엄격하다. -‘기언’ 자서(自序) ‘자서’의 한 대목에서도 그런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기언’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독특함은 글을 수록한 방식이다. 문집에 사용되는 문체별 분류가 아닌 학, 예, 문학, 고문, 유림 등 주제별 분류 방식을 택했다. 허목이 문체보다는 글에 담긴 내용과 사실(진실)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말을 기록하다’라는 기언의 뜻과도 상통한다. ‘기언’ 편집 작업은 88세로 임종할 때까지 계속됐다. 허목은 이 과정에서 스스로 서문을 두 번이나 지었다. 기언의 표제(標題)는 유서(類書)처럼 주제별로 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 선생이 직접 편집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생이 만든 기준에 따라 간행한다. 학(學)·예(禮)·유림(儒林) 등 편목(篇目)은 중복된 듯하지만, 그렇게 한 데에는 선생의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아 함부로 고치지 않는다. -‘기언’ 범례(凡例) 허목 사후 문집 출판을 담당한 제자는 범례에서 이렇게 밝혔다. ‘기언’의 독특한 구성에 대해 ‘선생님의 뜻’이라며 독자들에게 이해를 구한 것을 보면, 그 제자들도 기언의 편집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허목의 구상은 그만큼 독창적이었다. 어쩌면 그는 제자들이 자신의 의도에 맞게 문집을 엮지 못할 것으로 생각해 직접 편집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허목은 ‘기언’을 완결하지 못했다. 범례에 언급되었듯 수고본에는 중복으로 수록된 작품도 있고 표제와 내용이 일치되지 않은 곳도 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첨삭을 가하지 않고, 허목이 머릿속으로 구상하며 엮어 가던 모습 그대로 ‘기언’을 간행했다. 유례없이 독특하고 독보적인 문집 ‘기언’은 이렇게 탄생했다. 미완성의 ‘기언’이 완성을 본 셈이다. 조순희 한국고전번역원 교수●기언(記言) 모두 93권 방대한 문집 원집·속집·별집 나눠져 모두 93권에 달하는 방대한 문집이다. ‘원집’과 ‘속집’은 허목이 직접 엮었다. 80세 이전 저술을 정리한 게 원집이고, 그 이후 저술과 원집에 빠진 글을 수록한 게 속집이다. 허목 사후에 제자들이 원집과 속집에 빠진 글을 정리해 붙인 ‘별집’은 문체별 분류 방식을 따랐다. 1689년 숙종의 명으로 간행했다. 연보는 5대손 허뢰가 1772년 간행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2006∼2008년 번역해 8책으로 출간했다.
  • [그때의 사회면] 음주운전과 대리운전

    [그때의 사회면] 음주운전과 대리운전

    음주운전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사회적인 문제였다. 1928년 4월까지 서울에서 교통사고가 58건이 있었는데 그중에 음주 사고도 있었던 모양이다. 경찰이 과속 등과 함께 ‘용서 없이 처벌하겠다’고 한 항목 중에 음주운전이 들어 있다(동아일보 1928년 4월 29일자).자동차 수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던 1960년대에도 음주 사고는 빈발했다. 1962년 10월 말까지 전국에서 4264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했는데 149건이 음주 때문이었다. 음주 측정 기구도 없던 때여서 단속은 거의 하지 않았고 운전자들의 각성을 촉구할 뿐이었다. 그러면서 음주 적정량이라며 운전자가 술을 마셔도 되는 기준을 제시했는데 지금 보면 터무니없다. ‘술에 강한 자’의 기준은 ‘소주 2홉(360㎖), 탁주 6홉(1080㎖)’이라고 했으니 술이 센 사람은 소주 한 병(당시 소주의 도수는 30~40도), 막걸리 한 병 반까지는 마시고 운전해도 괜찮다는 뜻이었을까. 음주운전이 늘어나자 1967년 경찰은 음주 사고에 살인·상해죄를 적용하겠다고 나섰다. 음주운전을 본격적으로 단속하고자 음주측정기를 처음 도입한 것은 1968년이다. 그해 미국에서 ‘주정검정기’ 20대를 들여와 경인가도에서 단속에 사용했다(경향신문 1968년 5월 7일자). 그래도 음주운전이 줄어들지 않자 1979년 대법원은 음주운전자의 동승자도 공동정범으로 처벌하는 판례를 확립했고 1981년 경찰은 단순 음주운전자를 처음으로 구속했다. 당시 숙취 정도가 0.5% 이상이면 형사입건 대상이었는데 구속된 사람은 무려 13%였다. ‘통금’ 해제와 더불어 ‘마이카’ 시대에 들어서면서 음주운전자는 급속도로 늘어났고 그때마다 당국의 단속과 처벌은 더욱 강화됐다. 특히 연말 망년회 시즌에는 음주 운전이 기승을 부렸는데 이에 대응해 경찰은 단속 강도를 높이는 한편 음주운전자의 명단을 공개했다(경향신문 1984년 12월 13일자). 술 취한 오너 드라이버들을 위한 대리운전 업체가 등장한 것은 1982년 1월이다. 당시에는 ‘이색업종’이었다. ‘서울운전대행상사’가 경력 7년 이상의 운전자 10명을 고용해 대리운전업체 1호로 등록하고 영업을 시작했다. 요금은 지금과 비슷할 정도로 비쌌다. 포니류의 소형차 1만 5000원, 레코드 등 중형차는 2만원, 그라나다 등 대형차는 3만원이었으니 지금 가치로는 최고 수십만원을 주고 운전을 맡긴 셈이다. 다만 초창기의 대리운전 기사는 미리 술집 근처에서 고객이 술을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렸던 것은 지금과 다르다. 단속 강화, 차량 증가와 함께 대리운전은 기업형으로 바뀌어 갔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특파원 생생리포트] 1억엔도 아깝지 않다… 다시 불 지피는 日 ‘판다노믹스’

    [특파원 생생리포트] 1억엔도 아깝지 않다… 다시 불 지피는 日 ‘판다노믹스’

    ‘참을 수 없는 귀여움’으로 무장한 판다의 인기는 세계 어디서나 대단하지만, 일본인들의 판다 사랑은 특히 유별나다. 동물원과 지역사회가 ‘판다노믹스’(‘판다’와 ‘경제학’을 합한 말)에 울고 웃는다. 일본에서 가장 큰 도쿄 우에노 동물원의 경우 2008년 판다 ‘린린’이 세상을 뜨면서 36년 만에 판다가 사라지자 연간 입장객이 60년 만에 처음으로 200만명대로 추락했다. 반대로 지난해에는 6월에 ‘샨샨’이 태어난 덕에 전년보다 66만명이나 많은 450만명의 관람객이 들었다. 2011년(471만명) 이후 7년 만의 ‘450만명’ 회복이었다. 2011년의 기록 또한 샨샨의 부모인 ‘리리’와 ‘신신’이 우에노 동물원에 첫선을 보였기에 가능한 결과였다.4일 도쿄신문에 따르면 일본의 판다노믹스가 한껏 기대감을 부풀리고 있다. 지난달 26일 열린 중·일 정상회담에서 리커창 중국 총리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자이언트 판다를 일본에 대여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빌려줄 판다의 마릿수나 시기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내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일에 맞춰 양측이 양해각서를 교환하는 방안이 유력시되고 있다. 내년에 판다가 일본에 들어오면 2011년 2월 이후 9년 만이다. 현재 일본에는 우에노 동물원 3마리, 와카야마현 와카야마시 어드벤처월드 6마리, 효고현 고베시 오지 동물원 1마리 등 모두 10마리가 있다. 원래대로라면 좀더 있어야 한다. 중·일은 2011년 12월 정상회담을 통해 동일본대지진으로 막대한 피해를 본 미야기현 센다이시 야기야마 동물원에 판다를 보내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듬해 일본 정부의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국유화’ 조치로 양국 관계가 얼어붙으면서 절차가 전면 중단됐다. 새로 올 판다의 유치를 놓고 경쟁하는 곳은 두 곳이다. 고베 오지 동물원은 2010년에 수컷 판다가 죽고 암컷인 ‘탄탄’만 남아 번식의 기회가 절실하다. 2011년 후보지였던 야기야마 동물공원도 원래의 계획대로 자신들에게 판다가 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일본대지진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피폐해진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싶다”며 판다 사육공간까지 마련해 놓은 상태다. 일본 측이 중국 정부에 지불하는 판다 대여료는 마리당 연간 1억엔(약 10억원)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금액을 훨씬 웃도는 판다노믹스의 효과 때문에 두 도시의 유치전은 한층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난 딴따라가 아니다” 맨발로 50년…투병 중에도 ‘소확행’ 꿈꿔

    “난 딴따라가 아니다” 맨발로 50년…투병 중에도 ‘소확행’ 꿈꿔

    ‘맨발의 청춘’ 반항적 캐릭터로 스타 반열 2013년 ‘야관문’까지 총 535편 영화 참여 같은 영화 출연한 엄앵란과 세기의 결혼 강신성일로 개명 뒤 2000년 총선서 당선 자서전에 외도 고백·뇌물 복역 등 부침도“나는 ‘딴따라’가 아닙니다. 나는 종합예술 속의 한가운데 있는 영화인입니다.”‘맨발의 청춘’으로 시작해 영화판을 50년 넘게 누빈 배우 신성일은 생애 마지막까지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 ‘영원한 영화인’이었다. 1957년 한국배우전문학원에 입학해 김수용, 유현목, 김기영 등 감독들의 강의를 들으며 영화에 대한 꿈을 키운 고인은 이후 신상옥 감독이 설립한 신필름 배우 공모에 합격하면서 배우의 길을 걷게 된다. 본명이 강신영인 고인은 신필름 시절 ‘뉴 스타 넘버 원’이라는 영어 뜻을 한자에 담은 ‘신성일’이라는 예명을 얻었다고 한다. 1960년 신상옥 감독의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그는 1962년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후 청춘영화의 주인공은 그가 모두 꿰찼는데 당시 한국 영화를 ‘신성일이 나오는 영화’와 ‘신성일이 나오지 않는 영화’로 구분할 정도였다. 부산영화제 등이 지난해 펴낸 책 ‘배우의 신화, 영원한 스타’에 따르면 1967년 한 해에만 그가 주연한 영화 51편이 극장에 걸렸다. 특히 공전의 히트작인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1964)에서 길거리의 삶을 사는 폭력배를 연기한 그는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반항적인 캐릭터를 대표했다.지난 50여년간 스크린에 등장한 횟수도 단연 독보적이다.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고인은 영화 524편, 감독 4편, 제작 6편, 기획 1편 등 500편 넘는 작품에 참여했다. 1970~80년대 무력과 좌절에 빠진 지식인을 연기한 ‘별들의 고향’(1974), ‘겨울여자’(1977), ‘길소뜸’(1985) 등을 비롯해 2013년 ‘야관문:욕망의 꽃’에서 주연으로 활약하는 등 2000년대까지 작품 활동을 한 ‘현역 배우’였다. 결혼식 역시 영화처럼 극적이었다. 그는 1964년 11월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전국민의 관심 속에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엄앵란과 웨딩마치를 울렸다. 당시 결혼 초청장이 암거래되고 4000여명의 하객과 구경꾼들이 몰려들 정도로 북새통을 이룬 ‘세기의 결혼식’이었다. 당대 최고 스타답게 스캔들도 끊이지 않았다. 그는 2011년에 펴낸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에서 1970년대 연극배우와 아나운서로 활동한 고 김영애씨와의 사랑 이야기를 공개해 파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엄앵란씨가 지난 3월 MBC TV에 출연해 “우리는 동지야. 끝까지 멋있게 죽어야 한다”며 마지막까지 신성일을 돌본 사실이 알려지면서 잔잔한 감동을 안겼다. 영화계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정치에 눈을 돌린 고인은 예명인 ‘신성일’에 본래 성인 강을 붙여 ‘강신성일’로 이름을 바꿨다. 그는 2000년 제16대 총선 때 대구 동구에서 한나라당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진출했다. 하지만 2003년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 옥외광고물업자 선정과 관련해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그는 2005년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07년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신성일은 지난해 자신의 회고전이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내년에는 따뜻하고 애정이 넘치는 영화 ‘소확행’(당시 밝힌 제목은 ‘행복’)이라는 작품을 기획하고 있고, 내후년에는 김홍신 작가의 소설 ‘바람으로 그린 그림’도 영화로 옮길 것”이라며 차기 계획을 밝혔었다. ‘소확행’의 연출을 맡기로 했던 이장호 감독은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성일이 형이 영화 제목을 ‘행복’이라고 붙이신다길래 제가 허진호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작품이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고심 끝에 ‘소확행’이 좋겠다고 하시더라”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형님께서 예측할 수 없는 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니 안타깝다”고 말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맨발의 청춘, 별들의 고향으로

    맨발의 청춘, 별들의 고향으로

    한국의 영화 역사와 함께한 ‘은막의 풍운아’가 ‘별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국민배우’로 오랜 시간 사랑받은 배우 신성일이 4일 오전 2시 25분 폐암으로 별세했다. 81세. 고인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항암 치료를 받아 왔지만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세상과 작별했다. 1960년 신상옥 감독의 영화 ‘로맨스 빠빠’에서 조연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그는 1960~70년대 왕성하게 활동하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조각 같은 수려한 외모로 ‘한국의 알랭 들롱’, ‘한국의 제임스 딘’으로 불린 그는 당대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원조 꽃미남’ 스타로 시대를 풍미했다. ‘맨발의 청춘’(1964), ‘별들의 고향’(1974), ‘겨울 여자’(1977) 등 숱한 히트작을 남겼고, 데뷔 이후 50여년간 500편 넘는 작품에 출연하는 독보적인 기록을 세웠다. 투병 중에도 영화 ‘소확행’(가제) 제작과 김홍신 작가의 소설 ‘바람으로 그린 그림’ 영화화를 구상하는 등 열정을 놓지 않았던 ‘영원한 영화인’이었다.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치러진다. 영결식은 6일 서울아산병원, 장지는 고인이 생전에 직접 지은 경북 영천 ‘성일각’이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영화계, 고 신성일 훈장 추서 추진…정부도 화답

    영화계, 고 신성일 훈장 추서 추진…정부도 화답

    영화계가 4일 작고한 국민배우 신성일씨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훈장 추서를 추진한다. 이에 정부도 화답하고 적극 검토하기로 했다. 고 신성일 장례추진위원회 관계자는 이날 “영화계가 뜻을 모아 정부에 훈장 추서를 건의하기로 했다”면서 “장례가 끝난 뒤 문화체육관광부 측과 구체적인 협의를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영화계는 지상학 한국영화인총연합회 회장, 김국현 한국배우협회 이사장, 이해룡 한국영화인원로회 이사장 등이 주축이 돼 서울아산병원 빈소를 방문한 나종민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에게 이 같은 뜻을 전달했다. 장례추진위 관계자는 “유족 측도 영화계와 뜻을 같이하고 있으며, 정부가 고인을 예우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에 나종민 차관은 “국민에게 큰 기쁨을 주신 분이 돌아가셔서 정부도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고인의 영면을 기원하면서 영화계와 협의해 이분을 예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화계와 유족 측에서 훈장 추서를 말씀했다”며 “잘 협의해서 좋은 방향으로 해보겠다”고 말했다. 다만, “훈장 추서를 결정하는 데 두세 달 정도 걸리고, 결정되더라도 영화계에 좋은 계기나 행사가 있을 때 드려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고인은 1960년 신상옥 감독·김승호 주연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이후 ‘맨발의 청춘’(1964년), ‘별들의 고향’(1974년), ‘겨울 여자’(1977년) 등 무수한 히트작을 남기며 독보적인 스타 자리에 올랐다.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출연 영화 524편, 감독 4편, 제작 6편, 기획 1편 등 데뷔 이후 500편이 넘는 다작을 남겼으며, 주연작만 507편에 달한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한국 영화의 큰 별’ 신성일, 폐암으로 별세 ‘장례는 영화인장’

    ‘한국 영화의 큰 별’ 신성일, 폐암으로 별세 ‘장례는 영화인장’

    ‘한국 영화의 큰 별’ 배우 신성일(본명 강신성일)이 폐암으로 별세했다.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치러진다. 4일 한국영화배우협회 측에 따르면 명예 이사장인 신성일은 이날 오전 2시 25분께 폐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앞서 신성일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항암 치료를 받아오며 회복에 힘써왔다. 그러다 전날인 지난 3일부터 병세가 위독해져 그간 치료를 받아오던 전남의 한 요양병원에서 전남대 병원으로 이송됐다. 그의 곁은 아들 강석현 등 가족들이 지켰다. 고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거행된다. 현재 한국영화배우협회와 한국영화인총연합회 등 영화계 관계자들이 유족과 영화인장의 구체적 절차를 놓고 논의 중이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오는 6일로 예정돼 있다. 장지는 고인이 직접 건축해 살던 가옥이 위치한 경북 영천 성일각이다. 신성일은 1960~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 국민적 스타 배우였다. 1937년 서울에서 태어난 신성일은 생후 사흘 만에 부모의 이사로 대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1956년 경북고를 졸업, 1966년 건국대 국어국문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1960년 신상옥 감독, 김승호 주연의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고인은 1964년 ‘맨발의 청춘’으로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별들의 고향’(1974년), ‘겨울 여자’(1977년) 등 숱한 히트작에 출연하며 영화계에서 독보적인 남자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출연 영화 524편, 감독 4편, 제작 6편, 기획 1편 등 데뷔 이후 500편이 넘는 다작을 남겼다. 1963년 한 해에만 ‘청춘교실’ 등 21편에 출연했으며, 1964년에는 ‘맨발의 청춘’ 등 32편, 1965년 ‘흑맥’ 등 34편, 1966년 ‘초우’ 등 46편 영화에 출연했다. ‘안개’ 등 51편 영화에 출연한 1967년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많은 영화에 출연한 해였으니, 이해 제작된 한국 영화는 총 185편이었다. 명성만큼이나 수상 이력도 화려하다. 1968년과 1990년 대종상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며,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백상예술대상 남자최우수연기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 대종상영화제 공로상, 부일영화상 공로상 등 수없이 많은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영화 관련 단체 활동도 적극적이었다. 1979년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맡았으며, 1994년에는 한국영화제작업협동조합 부이사장을 지냈다. 2002년에는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과 춘사나운규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았다. 1993년 고려대 언론대학원 최고위언론과정, 1997년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2000년 경희대 대학원 사회학과를 수료했다. 대구과학대학 방송연예과 겸임교수, 계명대 연극예술과 특임교수를 맡아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 인터뷰집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 등의 저서를 남겼다. 고인은 영화계 성공을 발판으로 정계에도 진출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서울 마포·용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으며,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했다. 그러나 삼수 끝에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대구 동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의정활동을 펼쳤다. 고인의 생전 마지막 공식 활동은 지난달 초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참석이었다. 그는 부산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해 이장호 감독, 배우 손숙과 함께 밝은 표정으로 레드 카펫을 밟았다. 전찬일 평론가는 “신성일은 투병 와중에도 그가 아니면 소화해내기 힘들 파격적 의상과 환한 미소로 부산영화제 개막식을 빛냈다”면서 “부산영화제 개막식 주인공을 단 한 명 꼽으라면 단연 신성일이었다”고 평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한국 영화의 큰 별’ 배우 신성일 별세, 아내 엄앵란 그리움 드러내

    ‘한국 영화의 큰 별’ 배우 신성일 별세, 아내 엄앵란 그리움 드러내

    ‘한국 영화의 큰 별’ 배우 신성일이 오늘(4일) 새벽 2시 25분 향년 81살의 나이로 별세했다. 故(고) 신성일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전남의 한 의료기관에서 항암 치료를 받아왔으나 끝내 숨을 거뒀다. 신성일은 1960∼1970년대 최고 인기를 누린 배우로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이후 ‘맨발의 청춘’ ‘별들의 고향’, ‘겨울 여자’ 등 숱한 히트작을 남겼다. 유족으로 부인인 배우 엄앵란(82)과 1남 2녀가 있으며,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신성일의 투병 생활은 지난 3월 20일 MBC ‘사람이 좋다’를 통해 전해졌다. 신성일은 방송에서 아내 엄앵란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그는 병문안 온 딸 강수화에게 “둘러보고 엄마를 설득해서 여기 오게 해”라고 했다. 강씨가 잠옷을 선물하자 “네 엄마를 만나는 시간은 잠옷 입었을 때밖에 없었다”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신성일이 암 선고를 받던 날 엄앵란이 병원비를 부담했다고 한다. 엄앵란은 올해 초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신성일이 초라하게 죽을 수는 없다. 마지막까지 특실에서 지낼 수 있도록 병원비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톱스타들이 초라하게 죽었던 옛날 시대에 살았다. (신성일은) 그렇게 죽으면 안 된다”며 마지막 애정을 드러냈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배우 신성일씨 폐암으로 타계…한국 영화사 최고 스타

    배우 신성일씨 폐암으로 타계…한국 영화사 최고 스타

    ‘은막의 스타’ 신성일씨가 4일 오전 2시 25분 폐암으로 타계했다. 81세. 신성일 측 관계자는 이날 “한국영화배우협회 명예이사장이신 영화배우 신성일께서 4일 오전 2시 반 별세했다”고 밝혔다. 고인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뒤 전남의 한 의료기관에서 항암 치료를 받아왔다. 전날 오후 한때 고인이 별세했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단지 위중한 상태로 전해져 오보인 것으로 정정됐다가 결국 몇 시간 뒤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1960~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 국민적 스타 배우였다. 본명은 강신영이지만 고 신상옥 감독이 지어준 예명 ‘신성일’을 주로 썼고, 이후 본명을 표기해야 하는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앞두고 예명과 본명을 모두 살린 ‘강신성일’로 개명했다. 1937년 서울에서 태어난 신성일씨는 생후 사흘 만에 부모의 이사로 대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1956년 경북고를 졸업, 1966년 건국대 국어국문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1960년 신상옥 감독, 김승호 주연의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고인은 1964년 ‘맨발의 청춘’으로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별들의 고향’(1974년), ‘겨울 여자’(1977년) 등 숱한 히트작에 출연하며 영화계에서 독보적인 남자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다작이 성행했던 시대적 특성을 감안해도 신성일씨는 출연 작품 수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출연 영화 524편, 감독 4편, 제작 6편, 기획 1편 등 데뷔 이후 500편이 넘는 다작을 남겼다. 1963년 한 해에만 ‘청춘교실’ 등 21편에 출연했으며, 1964년에는 ‘맨발의 청춘’ 등 32편, 1965년 ‘흑맥’ 등 34편, 1966년 ‘초우’ 등 46편 영화에 출연했다. ‘안개’ 등 51편 영화에 출연한 1967년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많은 영화에 출연한 해였으니, 이해 제작된 한국 영화는 총 185편이었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기록적 다작 속에서 생명력 있는 행군을 펼친 것은 한국 영화사에서 그 예를 찾기 불가하다”며 “기록적 출연 편수야말로 그 스타성 증거”라고 평했다. 명성만큼이나 수상 이력도 화려하다. 1968년과 1990년 대종상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며,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백상예술대상 남자최우수연기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 대종상영화제 공로상, 부일영화상 공로상 등 수없이 많은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영화 관련 단체 활동도 적극적이었다. 1979년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맡았으며, 1994년에는 한국영화제작업협동조합 부이사장을 지냈다. 2002년에는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과 춘사나운규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았다. ]1993년 고려대 언론대학원 최고위언론과정, 1997년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2000년 경희대 대학원 사회학과를 수료했다. 대구과학대학 방송연예과 겸임교수, 계명대 연극예술과 특임교수를 맡아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 인터뷰집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 등의 저서를 남겼다. 고인은 영화계 성공을 발판으로 정계에도 진출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서울 마포·용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으며,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했다. 그러나 삼수 끝에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대구 동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의정활동을 펼쳤다.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자유한국당 강석호 의원이 그의 조카다. 고인의 생전 마지막 공식 활동은 지난달 초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참석이었다. 그는 부산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해 이장호 감독, 배우 손숙과 함께 밝은 표정으로 레드 카펫을 밟았다. 전찬일 평론가는 “신성일은 투병 와중에도 그가 아니면 소화해내기 힘들 파격적 의상과 환한 미소로 부산영화제 개막식을 빛냈다”면서 “부산영화제 개막식 주인공을 단 한 명 꼽으라면 단연 신성일이었다”고 평했다. 영화계에서는 고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영화인장을 거행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영화인 단체 대표들이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한국영화인단체총연합회 지상학 회장과 배우 안성기가 공동장례위원장을 맡는 방안이 거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으로 당대 최고의 여배우 부인 엄앵란 씨와 장남 석현·장녀 경아·차녀 수화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4호실에 차릴 예정이었으나 23호실로 옮겨졌다. ☎ 02-3010-2000(대표번호)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영화배우 신성일 폐암 투병으로 위독…사망설은 오보

    영화배우 신성일 폐암 투병으로 위독…사망설은 오보

    영화배우 신성일이 폐암으로 위독한 상태다.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요양병원에서 투병해왔으며 지난달 다른 의료기관으로 옮겨 치료를 받아왔다. 병세가 좋지 않아 3일 한때 사망보도가 쏟아지기도 했으나 이는 오보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날 신성일 가족이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을 빈소로 예약하면서 오후 8시쯤부터 사망설이 돌았다. 그러나 이후 신성일의 호흡이 돌아오면서 장례식장 예약도 취소됐다. 신성일은 투병 중에도 지난달 열린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하는 등 꾸준히 활동을 이어왔다.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 후 ‘맨발의 청춘’, ‘별들의 고향’, ‘겨울 여자’ 등 수많은 흥행작을 남겼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국립한국문학관, 은평구 기자촌 들어선다

    국내 문학진흥의 거점이 될 국립한국문학관이 서울 은평구 기자촌 일대에 들어선다. 문화체육관광부 ‘국립한국문학관 설립추진위원회’는 지난 31일 최종 회의를 열어 부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문체부는 앞으로 운영 계획과 함께 다음 주쯤 공식 발표한다. 위원회 측은 서울 은평구 기자촌(진관동), 문화역서울284(옛 서울역사), 경기도 파주출판단지, 파주 헤이리마을을 최종 후보지로 추려 이날 부지 실사와 끝장 토론을 벌인 것으로 전해졌다. 문화역서울284는 유서 깊은 문화재 건물이어서 문화재계와 미술공예계에서 반대하는 데다가, 수장고를 지을 공간이 없었다. 파주 출판도시와 헤이리 문화예술마을은 지리상 서울에서 너무 떨어져 최종 낙점에서 제외됐다. 문체부가 애초 부지로 정해졌던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부지는 건축허가권이 있는 서울시가 반대해 무산됐다. 국립한국문학관 건립은 20년 넘은 문학계의 숙원사업이다. 도종환 문체부 장관이 국회의원 시절 대표 발의해 2016년 2월 제정한 문학진흥법에 따라 설립 근거를 마련했다. 이 법에 따라 그해 11월 문학진흥기본계획안이 수립됐다. 정부가 600억 원 예산을 들여 2022년까지 문학관을 건립한다는 내용이다. 문체부는 계획안을 마련하면서 국립한국문학관 건립 최적 후보지로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부지를 선정했다. 그러나 서울시가 용산 건립에 난색을 보이면서 제동이 걸렸다. 문체부는 이에 따라 지난 5월 국립한국문학관 건립을 위한 설립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추진위원회가 부지를 결정하면서 3년 논란의 종지부를 찍게 됐다. 한편 기자촌은 1960년대 정부가 한국기자협회 소속 무주택 기자들을 위해 조성한 언론인 보금자리다. 많은 기자 출신 문인을 배출했으며, 2006년 은평뉴타운이 들어서며 현재는 지명으로만 남았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8개월 아기 강간·촬영해 유포한 부부…최대 60년형 받을 듯

    8개월 아기 강간·촬영해 유포한 부부…최대 60년형 받을 듯

    미국의 20대 부부가 어린이 수 십명을 성폭행하고 이를 촬영한 혐의로 법의 심판대에 섰다. 피해자 가운데에는 생후 8개월 된 아기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폭스뉴스 등 현지 언론의 1일 보도에 따르면 텍사스 주에 사는 크리스토퍼 알마구에르(26)와 그의 아내 사라 알마구에르(26)는 지난 2월 미성년자를 성폭행하고 이를 촬영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조사에 따르면 부부는 14세 이하 어린이 및 영유아 25명을 성폭행하고 이를 촬영했으며, 피해자 중에는 생후 8개월 된 아기도 포함돼 있었다. 부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렇게 촬영한 영상을 인터넷에 유포한 혐의도 받았다. 경찰은 부부 두 사람 모두 소아성애자인 것으로 판단했다. 남편인 크리스토퍼의 SNS에서는 자극적이고 외설적인 메모가 다량 발견됐다. 경찰은 이들이 피해 아동들과 어떻게 접촉했는지, 이들의 범행 사실이 어떻게 발각됐는지 등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현지 언론은 부부가 최근 재판에서 자신들의 혐의를 모두 인정함에 따라, 오는 1월 있을 최종 재판에서 최대 60년 형을 선고받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뭍이 그리워 갯골 타고 온, 바다… 섬이 그리워 바다 물들인, 노을

    뭍이 그리워 갯골 타고 온, 바다… 섬이 그리워 바다 물들인, 노을

    바닷물이 갯골을 타고 육지를 드나듭니다. 갯벌 위로 게가 기어다닙니다. 서해 어느 해안가의 모습이 아닙니다. 경기 시흥 도심에 자리한 갯골생태공원이 보여 주는 풍경입니다. 잠깐, 갯벌이 아니라 갯골입니다. 갯골은 갯벌 사이를 뚫고 난 물고랑을 말합니다. 서해 바닷물은 하루 두 번, 갯골을 따라 시흥 땅을 적십니다. 바다가 땅을 그리워한 나머지 땅으로 향하는 길을 낸 것만 같습니다.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갯골에는 농게, 방게, 흰뺨검둥오리, 칠면초가 어울려 살아갑니다. 겨울이 오면 도요물떼새를 비롯해 수많은 철새가 이곳에서 먹이를 찾고 숨을 돌리겠죠. 갈대의 황금빛, 물 빠진 갯골의 회색빛, 칠면초의 불그스름한 빛. 자연이 풀어놓은 물감에 눈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소금기 머금은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곳, 갯골생태공원에서 생동하는 갯골을 보았습니다.#도심에 난 바닷길, 갯골생태공원 갯골생태공원이 어떤 곳인지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시흥갯골을 이해하는 게 먼저다. 시흥갯골은 서해에서 밀려온 바닷물이 시흥 육지를 파고들며 낸 물길이다. 바닷물이 들어왔다 빠져나가기를 수천수만 번. 물이 쓸고 간 곳은 움푹 팼고 양옆에는 진흙이 쌓여 굽이굽이 급경사를 이뤘다. 이곳은 경기도에서 유일하게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는 내만갯벌이기도 하다. 갯골생태공원은 갯골이 감싸 안은 공원이다. 염전체험장, 소금창고, 갯골생태학습장, 탐조대, 사구식물원 등 볼거리가 다채롭다. 사람이 쉬어 가는 공원은 게, 염생식물, 철새 등 다양한 동식물의 보금자리다. 시흥갯골 일대는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국가 해양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됐다. 갯골생태공원에 우리가 보고 알고 지켜야 할 풍경이 있다. 생태공원은 부지가 넓지만 탐방코스가 나뉘어 있어 일정에 맞춰 움직이기 편하다. 흔들전망대, 염전체험장처럼 공원에서 꼭 들러야 할 곳을 추린 30분 코스부터 공원 인근의 자전거다리까지 다녀오는 3시간 코스까지 다양하다. 물론 갯골을 따라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며 풍경을 완상하는 것이 제일이다.#천일염 만들어 보는 염전체험장 생태공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염전체험장이다. 시흥시 내만으로 흘러드는 바닷물은 예부터 이 지역에 염전이 발달한 이유다. 1934년, 시흥갯골이 있는 경기만 일대에 우리나라 최대 규모 염전 중 하나인 소래염전이 만들어졌다. 148만㎡(약 45만평) 규모의 염전은 한때 우리나라 소금 생산량의 30%를 도맡았다. 일제의 야욕은 우리 땅에서 난 소금을 우리가 맛보지 못하게 했다. 일제는 소래염전에서 생산한 소금을 수인선과 경부선 열차로 부산항에 옮긴 후 일본으로 실어 갔다. 해방 이후에는 염전의 운영 주체가 국가에서 민간으로 바뀌었다가 소금이 과잉 생산되며 1996년 폐염전이 됐다.생태공원에는 80여년 역사의 소금창고 2채와 체험에 쓰이는 염전이 남아 있다. 염전체험장에서는 햇빛에 증발한 소금을 모아 천일염을 만드는 과정을 체험할 수 있다. 소금이 수북한 염전 체험장에 아이들이 둥그렇게 둘러서 있다. 밀대를 손에 쥐고 흩어진 소금을 한가운데로 그러모은다. 맨발로 소금도 밟아 본다. 도시에 사는 아이들이 느껴보지 못한 감각, 경험하기 드문 체험이다. #자연과 마주하는 갯골생태학습장 소금창고 뒤편, 갯골생태학습장은 갯골생태공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갯벌 위 나무 데크 관찰로를 따라 갯골에 사는 생물과 눈을 맞출 수 있다. 농게, 방게 같은 게 종류가 있는가 하면 칠면초, 퉁퉁마디처럼 소금기 있는 땅에서 자라는 염생식물 군락도 있다. 갯벌에서 먹이를 찾는 철새들도 해마다 시흥갯골에 들른다. 갯골은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 저어새의 훌륭한 먹이터이자, 남반구에서 겨울을 나고 북반구에서 번식하려 매년 1만 5000㎞가 넘는 거리를 비행하는 도요물떼새에게 중요한 중간 기착지다.크고 붉은 집게발을 가진 농게 수컷이 갯벌 ‘구멍’에서 나타나자 아이들은 게 설명문을 절로 읽는다. 책이나 영상 콘텐츠가 따라잡지 못하는 생생한 자연 학습이다. 갯벌에 있는 크고 작은 구멍은 게와 지렁이 같은 저서생물이 사는 집, 서식굴이다. 갯골에 밀물이 차면 굴속에 들어가 있다가 썰물이 돼 물이 빠지면 굴 밖으로 나와 먹이활동을 한단다. 풀에도 단풍이 든 걸까. 1년에 7번 색깔이 바뀌어 칠면초라고 불리는 염생식물은 가을이면 붉은 자줏빛을 뽐낸다. 진흙투성이 갯벌에서 어쩜 이리 고운 물이 들었을까 너도나도 감탄한다. 사람 키만 한 갈대도 무성하다. 가을바람에 자기들끼리 부대끼는 소리가 시골에서 듣던 싸리 빗자루 소리 같다. 갯골생태학습장을 내딛는 걸음걸음에 가을이 따라붙는다.#바람 불면 흔들… 22m 높이 흔들전망대 공원의 랜드마크는 22m 높이의 흔들전망대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게 설계돼 흔들전망대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구조적으로는 안전하다. 전망대는 갯골 바람이 휘돌아 오르는 느낌을 나타내고자 나선형의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계단을 빙글빙글 돌아 6층에 오른다. 꼭대기에 이르자 도심에서 볼 수 있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던 장면이 펼쳐진다. 자연과 사람이 스스럼없이 어울린 풍광이다. 물 빠진 갯골이 공원을 휘감아 돌고, 사람들은 억새 사이에서 사진을 찍는다. 아이들이 잔디밭에서 숨차게 뛰어노는 동안, 왜가리와 청둥오리는 갯골에 무리 지어 쉰다. 동식물에게 살 곳을 내어주고 사람을 불러 모으는 갯골. 갯골생태공원에 살아 숨 쉬는 자연이 있다.#신석기시대로 떠나는… 오이도 선사유적공원 1960년부터 오이도 곳곳에서 패총이 발견됐다. 안말패총, 소래벌배총, 신포동패총 등 오이도 전역 6개 지점에서 총 12곳이 발견됐으니 섬 전체를 유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패총은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무덤처럼 쌓인 유적을 말한다. 그뿐 아니다. 신석기인들의 집터, 빗살무늬토기, 돌을 그물에 매달아 물속에 가라앉게 해 물고기를 잡는 데 사용한 어망추, 식기 등의 유물도 발굴됐다. 신석기시대부터 오이도에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다. 이로써 시흥 오이도 유적은 중부 서해안에서 신석기시대 패총을 대표하는 유적이 돼 2002년 사적 제441호로 지정됐다.까마득한 선사시대 생활상을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오이도 뒤편에 자리한 시흥 오이도 선사유적공원이다. 공원은 43만㎡(약 13만평) 규모의 선사유적지 부지를 단장해 올해 4월 문을 열었다. 얕은 구릉을 오르내리며 패총전시관, 억새길, 선사체험마을, 야영마을 등을 산책하듯 둘러볼 수 있다. 공원의 하이라이트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재현한 선사체험마을이다. 잔디밭에 갈대로 엮은 움집 여러 채가 늘어서 있는데 원뿔형의 무주식 움집부터 시흥 능곡동 움집까지 당시 주거 형태를 완성도 있게 재현했다. 밭을 갈아 농사짓는 사람, 빗살무늬토기를 굽는 사람, 움집에서 사냥한 고기를 손질하는 사람도 생생한 조형물로 되살아났다.#해·바다· 갈매기·바다냄새· 낙조… 일몰 명소 오이도 시흥 서남쪽의 섬이었던 오이도가 육지가 된 지 100년이 다 돼 간다. 때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 염전 개발을 위해 오이도와 안산시 사이에 제방을 쌓으며 오이도는 육지가 됐다. 누군가는 오이도에 볼 것이 뭐가 있냐고 한다. 그럼에도 오이도가 서울 근교의 당일치기 여행지로 끊임없이 거론되는 건 바다와 낙조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글 이수린(여행작가) 사진 장명확(사진작가) ■여행수첩(지역번호 031) →가는 길 : 서울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서해안고속도로를 지나 제3경인고속화도로를 이용한다. 서해안고속도로 도리터널로 들어가 제3경인고속화도로를 따라가다 연성IC에서 ‘신천동, 시흥시청’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하중교차로에서 ‘부천, 시흥IC’ 방면으로 우회전하고 하중교차로에서 좌회전하면 갯골생태공원이다. →맛집 : 오이도 ‘빨강등대’에서 함상전망대로 가는 길가에 활어회, 조개구이, 바지락칼국수 등을 파는 식당이 즐비하다. 조개포차(010-7338-7338)는 모차렐라치즈가 듬뿍 올라간 조개구이를 무한으로 낸다. 자연석돌판생오겹살(507-6670)에서는 돌판에 오겹살, 오리훈제고기, 전복, 새우, 주꾸미를 한데 구워 먹을 수 있다. →잘 곳 : 갯골생태공원에서 차로 5분 거리에 갯골캠핑장(488-6998)이 있다. 부티크호텔K 오이도점(319-9598)은 서울 지하철 4호선 오이도역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 생계·의료·주거급여 차별받는 청춘들… 어른이면 청년을 품어라

    생계·의료·주거급여 차별받는 청춘들… 어른이면 청년을 품어라

    노인 빈곤·저출산 직결되는 청년 빈곤… 청년·기성세대·전문가 한자리에 모이다 청년 빈곤은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자리가 없어 청년의 독립이 늦어지면, 그 짐은 부모 세대로 고스란히 전가된다. 지난해 고령사회(65세 이상 노인 인구 14% 이상)로 진입한 상황에서 ‘가난의 대올림’은 노인 빈곤의 확산을 가속화하는 또 다른 악재가 될 수 있다. 저출산 문제도 마찬가지다. 불안한 일자리와 월세에 허덕이는 청년들은 이미 연애와 결혼, 출산을 거부하고 있다. 지난 2분기 합계출산율은 0.97명을 기록했다. 국회 예산정책처의 ‘우리나라 저출산의 원인과 경제적 영향’ 보고서를 보면 출산율이 1.05명으로 유지될 때 2060년 국내총생산(GDP)은 3.3~5.0% 감소할 거라는 전망도 있다. 앞면과 뒷면의 구분이 무의미한 뫼비우스의 띠처럼 청년 빈곤은 노인 빈곤과 저출산으로 직결되고 결국 우리 사회의 활력을 떨어트릴 수밖에 없다.서울신문은 지난달 19일 광화문 본사에서 기현주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센터장, 김병철 청년유니온 위원장,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장과 함께 대담을 진행했다. 청년은 일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주거급여 등 주요 복지 대상에서 차별받고 있는데, 이 지점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청년 빈곤 →우리 사회 청년 빈곤의 특징은 무엇인가. -김 위원장 청년 빈곤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는 게 문제다. 기성세대의 시각으로 보면 청년은 빈곤하지 않다. 단지 소득 빈곤으로 청년 빈곤을 얘기할 수 없다. 기성세대가 열심히 일해서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면 지금은 불가능하다. 심리적 빈곤도 논의돼야 한다. 소득이 낮고, 저학력 청년일수록 사회적 관계 단절이 쉽다. 문화자본과 관계자본 등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소득과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다. 청년 세대 내에서도 빈곤 청년들은 박탈감을 느끼고 의욕이 상실되며 빈곤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다.-최 소장 과거가 성장시대였다면 지금은 성장이 거의 멈췄다. 청년 빈곤은 과거와 양상이 다를 수밖에 없다. 과거엔 열심히 일하면 월세, 전세, 자가로 한 걸음씩 상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주거 사다리가 끊겼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부터 그랬다. 그때 가난한 청년은 지금 가난한 중년이 됐고, 그들의 자녀가 지금의 20대다. 지금의 중년들이 자녀를 도와줄 여력이 없다. 오랜 시간 누적된 빈곤의 결과다. 문제는 다른 아동, 노인 빈곤과 달리 청년은 가정의 책임으로 여전히 두고 있다. 사회는 바뀌는데 기성세대 인식이 바뀌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다.-기 센터장 청년 빈곤을 해석할 때 다차원이라는 키워드가 제일 중요하다. 소득 부족에서 발생하는 박탈 현상을 주목해야 한다. 서울시 청년수당을 시작할 때 ‘청년에게 시간을 드립니다’라는 키워드를 사용했다. 청년들은 시간 빈곤을 느꼈고, 인생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율권이 없었다. 시간 빈곤에 처한 청년은 사회적 관계에 쏟을 여력이 없었다. 인적 자본도 굉장히 줄고, 자신의 선택지도 줄 수밖에 없었다. 악순환이 발생하는 구조다. 일본에도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문제가 발생한 이후 최근 청년 나이를 40세로 본다. 우리 사회도 그 시점을 맞이하고 있다. #주거 빈곤 →가난한 청년이 독립해 처음 마주하는 건 주거 빈곤이다. 해결책이 있을까. -최 소장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1960년대 산업화 시대에 공장과 대학을 늘리면서 청년 주거 문제는 신경을 안 썼다. 미국 등 선진국은 대학을 만들면 기숙사는 의무로 지어야 한다. 주거 문제를 학생에게 떠넘기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의무가 없다. 주거 문제의 책임을 중앙정부와 지자체만 지면 안 된다. 대학과 기업 모두 나눠서 져야 한다. 교육부가 대학평가를 할 때 기숙사 수용률도 평가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 국회의원과 시의회 의원, 구청장들도 나서야 한다. 청년 주거 지원 대상도 잘못됐다. 결혼한 지 5년이 안 된 신혼부부가 주요 대상인데, 이미 자기 집을 소유한 이들이 44.7%(2017년 주거실태조사·청년가구 19.2%)다. 전체 가구의 자가 점유율이 57.7%인 것을 고려하면 10% 올려 주려고 국가가 힘써야 하는지 모르겠다. 또 고시원 사는 청년 지원책은 거의 없다. 주거급여도 이달부터 부양의무제가 폐지돼 본인이 가난하면 주거급여를 받을 가능성이 커졌지만, 청년은 대상이 아니다. 부모가 수급자면 독립한 청년은 수급 대상이 아니다. 청년은 주거 문제에서만큼은 사회적 왕따를 당하고 있다. -김 위원장 주거 빈곤 당사자로서 서울 와서 8년간 다섯 번 이사했다. 지금도 5평 원룸에 산다. 그런데 청년 주거 정책은 전혀 나아지지 않은 걸 체감한다. 서울에서 안정된 공간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노동에 근로기준법이 있듯 주거에도 최저주거선에 대한 법 제도가 필요해 보인다. 물론 사회적 합의가 선행돼야 한다. -기 센터장 서울시가 ‘역세권 2030 청년주택’을 추진하다가 지역 주민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면에는 집값 문제가 있다. 청년들만 집단으로 살면 시끄러워서 주변 집값이 내려간다는 것이다. 주택 공급에서 청년만 따로 분리하면 안 된다. 청년, 노인, 장애인 분리하지 말고 통 합해 공공임대주택 정책을 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특정 세대만 공격받는다. 주거수당을 (일정 기준을 적용한) 급여 말고 전면적으로 도입했으면 좋겠다. 서울시가 청년을 대상으로 전세자금대출을 고민하고 있는데, 주택 공급 물량도 늘려야 월세 상승을 낮출 수 있다. -최 소장 전·월세 상한제가 조속히 도입돼야 한다. 특히 서울은 시급하다. 뉴욕도 민간임대주택의 3분의2가 상한제 규제를 받는다. 우리나라는 중앙정부 중심으로 주거 정책이 결정되는데, 지자체에도 정책의 권한을 줘야 한다. 서울시장에게 서울의 전·월세 임대료 상승을 막을 수 있는 권한을 줘야 한다. 공공임대주택과 주거급여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임대시장 규제는 선진국에선 상식이다. #청년 실업 →청년실업이 문제다.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기 센터장 일자리의 질과 조직, 문화 모두 중요하다. 여성 청년은 성적 불평등을 겪을 때 퇴사하는 경우가 많다. 6개월간 청년수당을 받는 청년들은 진로를 탐색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일자리 결정에서 자기결정권이 높아지면 청년 스스로 일자리 문제를 해결할 힘이 커진다. 청년수당을 받는 청년이 점차 늘어나야 한다. -김 위원장 정권이 바뀌어도 청년을 바라보는 관점은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본다. 그나마 전 정부처럼 중동에 가란 말을 안 하는 게 다행일 정도다. 고용보험제도를 고쳐야 한다. 지금 청년 세대에게 평생 직장은 무의미하다. 이직이 잦고 다양한 경험을 쌓아야 하는 게 청년 노동의 특성인데 자발적 이직에 따른 실업급여는 지급되지 않는다. 실업급여를 받은 청년이 10명 중 1명(직업능력개발원에 따르면 청년 실업자 가운데 수급 비율은 2014년 기준 3.1%)도 안 된다. 가난한 청년일수록 기술 발전으로 위협받을 확률이 높다. 직업훈련을 받기 어려워 단순노무직을 전전할 수밖에 없다. 질 좋은 직업훈련을 제공할 수 있는 공공정책이 필요하다. -최 소장 우리 때만 해도 석사만 따면 연구원에서 정규직 취직이 가능했다. 지금은 박사 학위를 받아도 안 된다. 예전엔 고등학교만 나와서 성실히 일하면 평생 일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청년에게 눈높이를 낮추라고만 하는 건 정말 아니라고 본다. 판이 바뀐 것을 인정하고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기본소득 보장 →청년 빈곤에서 기본소득 보장은 의미가 있을까. -최 소장 기본소득을 논의하기에 앞서 기존 복지 틀에서 청년을 배제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새로운 논의도 좋지만 이 지점부터 우선 논의를 해야 한다. 청년들도 가난하면 연령 차별 없이 급여를 받아야 하는데, 청년 대부분은 가난해도 생계급여, 의료급여, 주거급여를 못 받는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청년은 부모와 함께 묶여 있기 때문이다. 모든 기초 복지가 가난한 부모에게만 쏠려 지급되는 형태다. 시행령을 보면 30세 미만 년은 지방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교육이나 취업준비 때문에 서울에 와서 따로 살아도 별도 가구로 집계가 안 된다. 통계청은 두 가구로 집계하면서 기초생활보장 대상으로는 한 가구로 분류한다. 서울에 사는 청년과 지방에 사는 부모가 동시에 기초급여를 신청하면 한 가구만 받을 수 있다. 불합리한 조항이어서 꾸준히 요구하고 있지만 정부는 수정하지 않고 않다. -기 센터장 청년수당 도입 초기에 대상을 선정할 때 가구소득 기준을 두지 않았다. 미취업 기간만 뒀다. 낙인을 찍지 말자는 이유였다. 그러나 지금은 중위소득 150% 이하로 기준으로 둔다. 청년 세대 안에서 논란이 됐기 때문이다. 청년끼리도 자산, 소득 격차가 심하다 보니 보편적 수당 지급에 대한 합의가 안 되고 있었다. 부모의 부가 청년에게 이어지고 있고, 청년 세대 안에서도 빈부격차가 발생하고 있어 빈부격차를 줄이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그런 점에서 보면 기본소득으로 청년 빈곤 문제를 돌파하기는 어렵다. 차라리 저소득 청년에게 실업수당과 주거수당 같은 다층적 지원을 해야 한다. -김 위원장 다양한 시도 차원에서 기본소득은 논의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우선순위는 필요해 보인다. 청년 세대는 양극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격차를 줄이려면 다층적 복지 정책이 나와야 하고, 더 열악한 청년에게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 청년수당은 전국적 확대가 필요하다. 서울시 모델이 바람직하다. 금전적 지원뿐만 아니라 다양한 지원이 필요하다. 가난한 청년들의 사회적 관계 회복을 위한 프로그램과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지원도 있어야 한다. #청년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 →2007년 ‘88만원 세대론’이 등장했을 때 우석훈 박사는 ‘짱돌이라도 던져라’라고 충고했다. 지금 청년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기 센터장 청년들이 이보다 얼마나 더 짱돌을 던져야 하나. 이미 온몸으로 던지고 있다. 사회 진입, 결혼, 출산을 거부하고 있다. 이보다 어떻게 더 던질 수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청년들의 몸부림을 외면하고 있는 거다. 청년들은 그래도 살아야 하니까 사는 거다. 살기 위해 안 맞는 사회와 제도에 몸을 끼워 맞추고 각자도생하는 모습이다. 청년들이 각종 정책에 참여할 기회를 대폭 열어 줘야 한다. 각종 사회적 기구에 청년 참여를 의무적으로 배당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청년들에게 짱돌을 던질 것만 요구하지 말고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는 터를 마련해 줘야 한다. -김 위원장 짱돌은 혁명을 의미하는데, 1980년대 혁명 방식은 믿지 않는다. 새로운 정치를 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적 논의가 이뤄질 수 있다. 청년에게 권한을 많이 줘야 그게 가능할 것 같다. -최 소장 청년들이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기성세대가 알아줘야 한다. 어른이면 청년도 포용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20대 청년 중 부모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청년들이 생기고 있는데, 이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우리 사회가 고민해야 한다. 20대라고 주거급여를 안 주는 것도 문제다. 우리 사회가 반성해야 한다. 그런데 저같이 목소리를 내는 기성세대는 사회적 힘이 없다. 그래도 계속해야 한다. 그래야 희망이 있다.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사진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특별취재팀 이성원·홍인기·민나리 기자 ■취재지원 한국언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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