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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별별 이야기] 달 착륙의 ‘히든 피겨스’/손봉원 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

    [별별 이야기] 달 착륙의 ‘히든 피겨스’/손봉원 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

    1969년 7월 20일은 인류가 지구 밖 천체에 처음 발을 디딘 역사적인 날이다. 인류 달 착륙 50주년을 맞은 올여름, 몇 년 전 상영된 영화 ‘히든 피겨스’가 떠올랐다. 영화는 아폴로 계획 전인 1960년대 초 최초의 유인지구궤도 위성사업인 머큐리 계획에 참여한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흑인 여성 연구자들의 실화를 다루고 있다. 미국에서는 ‘스타워즈 로그원’을 제치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지만 2017년 국내 개봉 당시 관객수가 50만 명에 미치지 못했다. 그렇지만 국내에서는 ‘스타워즈 로그원’ 관객수도 100만 명을 겨우 넘겼고 지난해 개봉했던 ‘퍼스트 맨’도 60여만 명에 그쳤다. 같은 장르의 ‘인터스텔라’와 ‘아바타’가 1000만 관객을 넘겼던 것을 생각하면 관객 탓만 할 것은 아니다. 그런데 달 착륙 장면은 어떻게 지구에 중계됐을까. 당시 달 착륙 중계방송은 전 세계 6억 명이 시청했다. NASA는 아폴로 11호의 추적과 통신을 위해 미국, 스페인, 호주에 대형 접시안테나를 설치해 달에서 오는 미약한 신호를 잡았다. 달에 착륙한 선장 닐 암스트롱은 원래 계획과는 달리 휴식 없이 곧바로 ‘문 워크’를 결정했다고 한다. 결정 직후 바로 달에 발을 디뎠다면 TV중계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골드스톤이 맡았겠지만 우주복을 점검하고 입는 과정에 시간이 걸려 미국 서부에서는 달이 지기 시작하고 호주에서 달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호주 허니서클에서는 NASA가 설치한 접시안테나뿐만 아니라 NASA의 것보다 3배쯤 큰 ‘파크스 전파망원경’도 달 착륙선이 보내오는 영상 신호를 잡고 있었다. 실제로 유튜브에서 당시 중계 화면을 찾아보면 달 착륙 순간의 화질은 영 신통치 않다. 첫 8분간 허니서클의 NASA 안테나가 중계를 맡았지만 이후 파크스 망원경이 포착한 영상이 더 선명한 것을 확인하고 이후 수시간의 중계는 파크스 전파망원경이 담당해 선명한 영상을 남겼다. 이때 파크스 주변에서는 강한 바람이 불어 관측자 중 일부가 부상을 당했지만 중계를 이어 갔다고 한다. 그때 일화를 담은 ‘접시’라는 독립영화가 2000년대 초반 개봉해 호주와 유럽에서 제법 큰 호응 얻었다. 한국인 작곡가 에드먼드 최가 맡은 영화 음악도 좋다. 영화에서처럼 극적이지는 않았지만 묵묵히 ‘인류의 위대한 한 걸음’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숨은 영웅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 경북 포항서 김성도 기념사업회 출범

    경북 포항서 김성도 기념사업회 출범

    일본의 독도 침탈에 맞서 ‘우리 땅’ 독도 수호에 앞장섰던 김성도(19 40~2018)씨의 삶을 재조명하는 기념사업회가 5일 경북 포항에서 출범했다. 이날 모임에는 대구·경북지역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10여명이 참석했다. 초대회장은 손경찬 전 경북도의원이 맡았다. 이들은 향후 사업회를 통해 지난 20여년간 아내 김신렬씨와 함께 독도 수호에 앞장섰던 고인의 생전 나라 사랑 정신을 계승하는 일을 한다. 관계자는 “사업회는 우선 정부가 지난 5월 김씨에게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여하는 과정에서 김씨의 주요 공적인 독도 서도 998계단 설치를 제외시킨 점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1960년대부터 독도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김성도씨는 2007년 4월 초대 울릉군 독도리 이장에 취임했고, 2014년 1월 독도 주민 최초로 기념품 판매 매출에 대한 국세를 납부해 독도의 국제법적 지위를 공고히 했다. 월남전에 참전한 국가유공자인 그는 2005년 일본 시마네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 제정 조례안을 통과시키자 민간 성금으로 건조된 ‘독도호’를 기증받아 직접 몰고 바다로 나가는 등 독도 수호 활동을 적극 벌였다. 포항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日 위안부 피해 할머니 또 별세… 올해만 5명째

    日 위안부 피해 할머니 또 별세… 올해만 5명째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한 명이 4일 별세했다.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20명으로 줄었다. 정의기억연대는 이날 “서울에 거주하던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 A할머니께서 8월 4일 오전 하늘로 가셨다”고 밝혔다. 정의연은 “할머니가 아프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모두 잊고 편안하기를 바란다”고 추모했다. 장례 절차는 A할머니와 유가족의 뜻에 따라 비공개로 진행될 예정이다. A할머니를 포함해 올해 별세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는 모두 5명이다. 지난 1월 28일에는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임을 공개 증언하고 위안부 문제 해결에 앞장서 온 김복동(93) 할머니가 별세했고, 이모(94) 할머니도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지난 3월에는 60년간 중국에서 살다 2004년 극적으로 고국으로 돌아온 광주·전남 지역 유일한 생존자 곽예남(94) 할머니가 별세했다. 지난 4월에는 피해 할머니 한 명이 3월에 별세했다는 소식이 뒤늦게 전해졌다. A할머니의 별세로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20명으로 줄었다. 생존자 20명은 모두 85세 이상의 고령으로,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90세가 넘었다.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 [월드피플+] 50년전 바다로 던진 편지에 답장했더니 ’이메일’로 돌아왔다

    [월드피플+] 50년전 바다로 던진 편지에 답장했더니 ’이메일’로 돌아왔다

    50년 전 누군가 바다에 던진 편지를 주워 주인에게 돌려준 소년이 편지의 주인에게서 진심어린 ‘이메일’을 받았다. 자이야 엘리엇(9)은 지난달 남호주 에어 반도에서 열린 낚시대회에 갔다가 우연히 유리병 하나를 발견했다. 병 안에는 군데군데 찢어졌지만, 손글씨가 선명한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는데, 놀랍게도 50년 전 쓰인 편지였다. 편지 위에는 1969년 11월 17일이라는 날짜와 함께 1988년 폐업한 시트마 여객선 회사의 로고가 찍혀 있었다. 이 편지에서 자신을 13살 영국 소년이라고 소개한 폴 길모어는 ‘페어스타’라는 배를 타고 호주로 가는 중이라고 밝혔다. 페어스타는 1960년대 이주 지원 계획에 따라 영국에서 호주로 이주민들을 실어 나르던 배로, 길모어는 당시 가족과 함께 영국 사우스샘프턴을 떠나 호주 멜버른으로 향하고 있었다. 길모어는 누구든 이 편지를 찾으면 답장을 해 달라고 덧붙이며 자신의 영국 집 주소도 적어 두었다. 50년 전 쓰인 편지를 발견하고 잔뜩 흥분한 엘리엇은 어머니 칼라(40)와 아버지 폴(39)과 함께 편지의 주인공 길모어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호주 ABC방송의 도움을 받기로 한 엘리엇 가족, 방송사 측은 편지의 주인을 수소문했다. 그리고 지난달 11일, 편지의 주인을 안다는 사람과 연락이 닿았다. 길모어의 누이 애니 크로스랜드는 ABC 측에 “정말 놀랍고 대단한 일”이라면서 “길모어 입이 귀에 걸릴 것”이라고 기뻐했다. 길모어의 형제 데이비드 역시 “편지를 보니 길모어가 쓴 것이 맞다”며 놀라워했다. 편지의 주인 길모어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길모어는 편지가 쓰인 1969년 이후 처음으로 나선 크루즈 여행에서 해당 소식을 접했다.그렇게 길모어의 존재를 확인한 엘리엇은 “내 이름은 자이야 엘리엇이다. 남호주 작은 시골 마을에 엄마와 아빠, 여동생 미아와 함께 살고 있다. 9살이다”라며 길모어의 편지가 연상되는 내용의 서신을 전달했다. 편지에서 엘리엇은 “이곳에서 당신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으며 지금 당신이 배 위에 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당신의 연락을 기다리겠다”라고도 덧붙였다. 얼마 후 크루즈 여행에서 돌아온 길모어는 이번에는 편지 대신 ‘이메일’로 엘리엇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는 “네가 나의 편지를 발견했다니 매우 기쁘다”면서 “덕분에 50년 전 멋진 추억이 떠올랐다. 할 수 있다면 해변을 계속 확인해봐라. 아직 두 개의 편지가 더 남아있다”며 궁금증을 자아냈다. 13세 소년이던 시절 쓴 편지의 답장을 63세의 노인이 되어 받게 됐지만, 길모어는 5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엘리엇과 펜팔 친구가 되었다는 전언이다. 50년 전 바다로 던진 병이 발견된 것과 관련해 호주 해양학자 데이비드 그리핀은 “바다를 떠다니던 병이 해변으로 흘러와 묻혀있다가 태풍이 불면서 다시 바다로 나가게 됐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호주에서는 지난해 3월, 132년 전에 쓰인 편지가 병 안에 담겨 발견되기도 했다. 이는 독일 선박이 바다에 띄운 것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유리병 편지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케네디家에 또 비보, 로버트 F 전 법무의 손녀 시얼샤 약물과용 사망

    케네디家에 또 비보, 로버트 F 전 법무의 손녀 시얼샤 약물과용 사망

    정말로 이 가문에는 단명(短命)의 저주가 전해지는지 모를 일이다.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동생이며 법무장관을 지낸 로버트 F 케네디의 손녀 시얼샤 케네디 힐(22)이 1일(이하 현지시간) 매사추세츠주 히아니스 포트에 있는 케네디 단지 안에서 약물 과용인 상태로 앰뷸런스를 불러 케이프 코드의 병원으로 옮겨진 뒤 숨을 거뒀다고 영국 BBC가 2일 전했다. 시얼샤는 로버트 F 케네디와 에셀(91) 부부 사이에 다섯째로 태어난 코트니의 딸이었다. 손녀와 함께 살았던 할머니 에셀은 “오늘 이 세상은 덜 아름다워지게 됐다”고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더 이상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상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현지 일간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시얼샤는 보스턴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학을 전공했다. 그녀가 위중한 상태로 발견된 케네디 단지는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이 1960년대 여름 백악관으로 쓰던 곳이었다. 그는 1963년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암살됐고, 동생이자 시얼샤의 할아버지인 로버트 F 케네디 전 법무장관 역시 1968년 암살로 세상을 등졌다. 대학 민주당원 연맹의 부회장이었던 그녀는 2016년 매사추세츠 디어필드 아카데미에 재학 중일 때 우울증 및 정신질환과 싸우고 있음을 털어놓았다고 NYT는 지적했다. 그녀는 “뿌리를 찾자면 중학교 입학 직후로 거슬러올라간다. 슬픔의 느낌이 내 가슴을 커다란 바위마냥 짓누른다”고 적은 일도 있었다. 이 가문의 슬픈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자. 존 F의 형 조지프 케네디 2세는 1944년 2차 세계대전 중 전사했고, 누나 로즈메리는 정신지체로 태어나 뇌수술 실패 후 평생을 병원에서 지내다 2005년 세상을 등졌다. 여동생 캐슬린은 1948년 비행기 추락 사고로 숨졌고, 남동생 에드워드 케네디 전 상원의원은 2009년 세상을 등졌다. 패트리샤는 2006년, 아널드 슈월제네거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사위로 맞는 마리아 슈라이버는 2009년 세상을 등졌다.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아일랜드 대사를 역임한 다섯 번째 딸 진 앤이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다. 그 다음, 흔히 말하는 케네디 가문의 5세대 중에는 존 F의 맏딸 아라벨라가 1959년 사산했고, 아들 패트릭이 아버지가 세상을 등진 같은 해 조산 중 죽었고, 존 F 2세는 1999년 비행기 추락으로 세상을 떠났다. 로버트의 아들 데이비드는 1984년 마약 과다복용으로 숨졌고, 동생 마이클은 1997년 스키 사고로 세상을 등졌다. 물론 5세대와 6세대 중에는 생존자가 훨씬 많긴 하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사설] 일본의 ‘무도한 경제전쟁’, 의연하고 단호히 대응하자

    韓 철회 요구에도 日 백색국가 제외 막무가내 결정 1100개 품목 규제로 국내 생산 큰 차질 예상 글로벌 공급망 교란해 세계경제에 큰 피해줘 일본 요구는 강제징용 판결 대책 내라는 것 무조건 항복 노리는 일본 의도 오만방자 사법부 판단 무시 강요, 결코 수용 못해 정부, 사태 해결책 국민적 총의 수렴하고 피해자 중심주의 입각한 외교 해결로 일본, 60년 경제·협력 파트너십 지켜야 일본 정부가 2일 각의 결정을 통해 한국을 백색 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했다. 한국이 한 목소리로 데드라인을 넘지 말라고 줄기차게 요구하고 경고했는데도 일본은 듣지 않았다. 정부가 백색국가 제외 입법예고를 철회하라는 의견서를 전달하고, 국회가 일본의 경제보복을 규탄하는 가운데 한국인들 사이에 ‘노노 재팬’(일본 안돼), 불매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는데도 아베 신조 정부는 한국을 내리치는 칼을 결국 꺼내들고 말았다. 일본이 경제 전쟁을 먼저 걸어왔으니 우리는 단호히 맞설 수밖에 없다. 한일이 분쟁을 잠시 멈추고 협상을 통해 해결해 보라는 미국의 중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일본이다. ‘21세기판 조선 정벌’처럼 말 안듣는 한국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무릎 꿇리겠다는 일본 아베 내각의 오만하고도 무도한 경제전쟁에 맞서 5000만 국민과 정부, 국회가 똘똘 뭉쳐 의연히 싸울 수밖에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임시 국무회의에서 “우리는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을 것”이라면서 “지금의 도전을 기회로 여기고 새로운 경제 도약의 계기로 삼는다면 충분히 일본을 이겨낼 수 있다”고 의연하고 단호히 대응의 의지를 강조했다. 아베 내각 각료 전원의 만장일치로 통과된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은 수출심사 우대 대상인 백색 국가에서 한국을 뺀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이로써 한국은 1100여개의 전략물자 규제 품목을 수입할 때 사전 심사 없이 3년에 1차례 포괄허가를 받던 우대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됐다. 백색 국가 제외 시행은 이달 하순경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이들 규제 품목 심사를 개별 허가로 전환할 수 있게 됐고, 나아가 수출 허가를 지연하는 등의 저급하고 악랄한 추가 조치도 전망된다. 국제분업의 안정성을 믿고 지난 15년간 일본산 부품에 의존하던 국내 제품 생산에 큰 차질을 빚게 될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일본의 경제전면전은 글로발 공급망을 교란하는 행위로 세계 경제에 큰 피해를 끼치는만큼 자유무역체제를 옹호하는 나라로서 좌시할 수 없다. 일본의 백색 국가는 한국을 포함해 미국의 우방국 27개국이 포함돼 있다. 일본은 2004년 한국을 백색 국가로 지정했는데, 무역 분야에선 동맹 개념처럼 인식돼 오던 제도다. 일본이 우리를 백색 국가에서 제외했다는 것은 안보상 우호국가에서 배제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간 한미, 미일 동맹 속 한미일 공조라는 명목으로 유지해온 한일 안보협력을 더 지속할 것인지 중대한 기로에 놓였다. 일본은 지난해 10월 대법원의 강제동원 피해자 판결과 관련해 외교 당국 간 협의나 중재위원회 구성을 요구했으나 우리 정부가 응하지 않자 지난 7월 4일 반도체 제조에 사용되는 불화수소 등 3개 품목에 대한 수출 규제라는 1차 보복 조치를 단행했다. 그러나 7·4 조치에도 한국이 꿈쩍하지 않자 약 한달만에 한국에 경제 전면전을 선포했다. 일본은 7·4 때도 그랬지만 8·2 백색 국가 제외 결정에도 강제징용 판결과는 관계없는 것이라 옹색한 변명을 할 뿐 구체적인 근거를 대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한국의 전략물자 수출 관리가 허술하다’는 일본 주장을 반박하고 지난달 하순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자유무역에 역행하는 일본 조치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렸지만 치밀하게 짠 각본대로 ‘한국 때리기’를 진행하고 있다. 일본의 의도와 요구는 뻔하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로 인해 일본 기업의 국내 자산이 현금화돼 원고에게 지급되는 일이 없도록 한국 행정부 차원의 조치를 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강제동원 피해자와 일본 기업 간 민사소송 결과에 대해 행정부가 끼어들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정부는 6월 19일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지급해야 할 위자료는 1965년 한일청구협정의 경제협력자금으로 특혜를 본 한국 기업과 피고인 일본 기업이 지급하는 게 마땅하다는 ‘1+1’안을 제시한 바 있다. 일본은 이를 묵살했다. 일본은 판결 그 자체가 1965년 협정이라는 국제법을 어겼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국제 조약을 국내법의 상위에 두는 일본과 국내법과 동등하게 보는 한국의 헌법 체계는 다르다. 그래서 강제동원 피해자가 낸 소송에서 일본 최고재판소는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 반면 한국 대법원은 피해자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대법원과 일본 최고재판소의 상이한 판결은 결국 1965년 협정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낡은 ‘65년 체제’에서 비롯된 작금의 사태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것이라 이전부터 예고돼 온 것이다. 보다 빨리 한일이 대응하지 못하고 사상 초유의 경제 전쟁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유감스럽기 짝이 없다. 지금이라도 한일은 마주앉아 대법원의 10·30 판결을 어떻게 볼 것인지, 현재 진행형인 일본 기업의 국내 자산 매각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며, 향후 예상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줄소송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허심탄회하게 대화해 외교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일본은 ‘65년 협정으로 모든 것은 해결됐다’는 일방적 주장을 거두고, 역사 앞에 겸허해져야 한다. 1965년 국교정상화 이후 긴밀하게 유지되고 발전해 온 한일경제 파트너십과 동북아 안보협력의 근간은 이제 근본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놔두다간 양국의 파국은 불보듯 뻔하다. 경제규모가 일본의 3분의 1의 수준인 한국이 일본보다 더 피해를 볼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일본이 자유무역 질서를 교란시키면서까지 대한민국의 급소를 노려 경제를 무너뜨리고, 글로벌 공급망에 큰 혼란을 주기로 마음 먹었다면 우리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 한국은 1910년 무기력하게 불법적으로 병탄을 당한 100여년 전의 대한제국이 아니다. 세계 11위권의 경제대국이며, 일본 만큼이나 많은 우호국가를 두고 있다. 무엇보다 식민지과 전쟁을 극복하고 빠르고 탄탄하게 민주주의를 성숙시킨 나라가 한국이다. 아베 정부의 잘못된 결정으로 일본이 두고두고 역사에 오점을 남기지 않도록 하루빨리 냉정을 찾고 사태 해결책을 모색하기를 바란다. 특히 경제전쟁의 장기화는 민간교류 1000만 시대의 한일관계를 파탄내고 그 앙금을 다음 세대로 전이시킬 수 있다는 점을 심히 우려한다. 정부는 일본의 보복 장기화에 맞서기 위해 우리가 구사할 수 있는 경제 피해 최소화 등의 대책을 서둘러 가동하는 한편 여론전을 통해 일본의 부당함을 호소해 국제적인 지지를 확보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사태의 근본적 해결책에 관한 국민적 총의를 수렴해 향후 재개될 대일 교섭에 반영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강제징용 판결을 내린 사법부의 판단 존중과 일본 기업으로부터 위자료와 사과를 받겠다는 피해자 입장에 입각한 피해자 중심주의를 결코 잊지 말기를 주문한다.
  • 경제 5단체 “백색국가 제외는 글로벌 경제에서 일본 위상 약화 초래”

    경제 5단체 “백색국가 제외는 글로벌 경제에서 일본 위상 약화 초래”

    국내 경제 5단체(한국무역협회, 대한상공회의소, 중소기업중앙회, 한국경영자총협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가 2일 일본 정부가 전략물자 수출우대 대상인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한 것과 관련해 “비상한 각오로 소재·부품 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제조업 강국으로서의 위상 제고를 위해 정부와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경제 5단체는 이날 ‘화이트리스트 한국 제외 결정에 대한 경제계 입장’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통해 “일본 정부의 이번 결정은 외교적 사안을 경제적 수단을 동원해 보복한 것으로 한·일 경제와 교역 전반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한국은 반도체를 포함한 정보기술(IT), 자동차, 화학 등 주요 산업에서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생산에 차질이 생기면 경제성장이 지연될 수 있다”면서 “일본 역시 한국이 3대 교역국이자 양국 경제가 산업 내 분업과 특화로 긴밀하게 연결된 점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피해가 예상된다”고 강조했다. 또한 “일본의 이번 조치는 글로벌 공급망에 혼란을 불러와 글로벌밸류체인(GVC)에 참여 중인 세계의 많은 기업에게 타격을 줄 것이 분명하다”면서 “특히 글로벌 경제에서 일본의 위상 약화는 물론 지난 65년간 쌓아온 자유무역 수호국이자 WTO 회원국으로서의 신뢰에 상당한 손상을 끼칠 것이다”고 덧붙였다. 경제 5단체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한국과 일본은 과거 어느 때보다 긴밀한 교류와 협력이 필요하다”면서 “두 나라가 높은 경쟁력을 가진 다양한 원천기술, 응용기술, 제조역량, 상용화와 마케팅 등에서 상호 협력하지 않는다면 양국은 과거와 같은 공동 번영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이어 “나아가 화이트리스트 제외를 통한 수출 규제가 지속될 경우 양국 기업이 오랫동안 쌓아온 신뢰관계를 심각하게 손상시키고 양국 국민의 상호 이해와 소통을 가로막으며 종국에는 인적, 물적, 사회적, 문화적 교류에도 부정적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고 덧붙였다.또한 “한국과 일본은 60년 이상 분업과 특화를 통해 상호 보완적인 무역구조를 형성했고 이를 바탕으로 지금 이 시간에도 글로벌 경제에 중대한 기여를 하고 있다”면서 “한·일 간 협력과 호혜적 발전을 위해서는 외교·안보 이슈가 민간 교류에 영향을 끼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고 했다. 이어 “경제 5단체는 한국과 일본이 동반 성장하면서 동북아 경제의 번영을 주도하는 동시에 아시아를 대표하는 선진국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일본의 수출규제 원상 복구 및 화이트리스트 제외 조치 철회를 강력하게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달 4일부터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의 핵심 소재인 3개 품목의 수출 통제를 강화한 데 이어 이날은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을 강행함으로써 15년 이상 백색국가로 인정해오던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를 강화했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눈앞서 펼쳐지는 진주검무… 내 손으로 만드는 나전칠기

    눈앞서 펼쳐지는 진주검무… 내 손으로 만드는 나전칠기

    논개가 왜장과 함께 몸 던진 의암부터 촉석루·진주오광대놀이 등 문화 힐링 통영에서는 ‘통제영 12공방’ 체험행사 조선 대표적인 목조물 세병관서 열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전통문화와 상설문화관광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각 지역 특유의 문화 콘텐츠를 여행에 접목시킨 프로그램이다. 이 가운데 진주검무 등 무형문화재 토요상설공연을 여는 경남 진주와 ‘통제영 12공방’ 체험 행사를 여는 통영을 다녀왔다. 이번 휴가철엔 전통이 깃든 문화여행을 떠나는 건 어떨까. 옛것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기록이 전하는 진주검무의 역사는 조선시대 후반으로 거슬러 오른다. 당시 교방의 기녀들이 익히고 공연했던 이른바 ‘교방검무’는 궁중무용의 하나였다. 궁궐 안팎의 각종 연회 때 주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검무를 한층 세련되게 다듬은 이들은 선상기(選上妓)였다. 선상기는 지방관아의 향기 중에 뽑혀서 상경한 기생들을 일컫는 말이다. 일정 기간 궁궐에 머물던 선상기들은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각 지역의 특색을 담은 검무로 발전시켰는데, 현재의 진주검무가 그중 하나다. 진주검무의 명맥이 끊어질 위기도 있었다. 물론 일제강점기 때다. 현 진주검무 예능보유자인 유영희(72)씨는 “당시 일제는 ‘권번’이라는 기생조합을 만들어 기녀들을 예기(藝妓)가 아닌 창기(娼妓)로 격하시키고 진주검무 공연도 일절 금지시켰다”며 “일제 때 각인된 창기 이미지가 후대에 이어지면서 한때 학교에서조차 기생들의 춤이라며 검무를 배우려 들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식 연회에 오르지 못하던 진주검무는 ‘의암별제’ 등의 행사 때 암암리에 공연되며 명맥을 이어 왔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서도 진주검무는 춤의 연출 형식이나 춤의 가락, 칼 쓰는 법 등을 옛 궁중 형식 그대로 이어 왔고, 마침내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됐다.진주검무는 여느 검무와 달리 칼의 목부분이 접히지 않는다. 오로지 손목의 힘으로만 검무를 운용해야 한다. 칼을 배꼽 아래로 내리는 법도 없다. 유씨는 이에 대해 “조상님의 칼을 들고 배꼽 밑에서 움직이게 할 수 없다. 정신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진주검무가 남성적인 건 이 때문이다. 유씨의 표현대로 “기깔나게 추는 여성의 춤”과는 결이 다르다. 무뚝뚝하면서도 힘차다. 진주검무는 8명이 한 팀이 돼 공연을 펼친다. 2~4명이 추는 여느 검무와 다르다. 아울러 보통의 검무들이 타령조의 장단을 주로 쓰는 데 견줘 진주검무는 도드리 장단으로 시작해 타령곡 등 다양한 곡들이 쓰인다. 무형문화재 토요상설공연은 10월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 2시~3시 30분 진주성 일대, 남강야외무대 등에서 열린다. 혹서기인 31일까지는 촉석루에서 진행된다. 공연은 모두 6개 단체가 번갈아 3주에 한 번씩 연다. 무대에 오르는 국가지정문화재는 진주검무와 삼천포농악, 도지정문화재는 한량무, 진주포구락무, 신관용류가야금산조, 진주오광대놀이 등이다.진주검무 공연이 펼쳐지는 진주성과 촉석루는 자체가 문화재이자 볼거리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이 펼쳐진 곳이다. 1592년 1차 진주대첩 때는 대승을 거뒀지만 이듬해 6월 2차 공격 때는 진주성을 내주고 만다. 이때 등장하는 이름이 의기(義妓) 논개다. 당시 관기 신분이었다고 전해지는 논개는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장을 껴안고 촉석루 아래 남강에 몸을 던졌다. 논개의 영정을 모신 의기사(義妓祠), 왜장과 함께 몸을 던진 의암(義岩) 등이 촉석루 주변에 있다. 촉석루는 평양 부벽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국내 3대 누각으로 꼽힌다. 창건 연대는 고려 1365년까지 거슬러 오르지만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1960년쯤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통영에서는 ‘통제영 12공방’ 체험행사가 열린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2019 지역문화브랜드’ 가운데 대상으로 꼽힌 프로그램이다. ‘통제영 12공방’은 1604년 통영에 자리잡은 삼도수군통제영이 군수품 수급을 위해 전국의 장인들을 불러들여 만든 공방에서 유래했다. 충무공 이순신의 한산진영에서 비롯된 통제영은 각종 군사용 기물은 물론 임금에게 올리는 진상품과 일반 생활용품까지 만들었다. 통제영 12공방의 체계적인 관리 아래 제작된 통영산 공예품들은 하나같이 수준이 높기로 유명했다. 그 가운데 익히 알려진 것이 이른바 ‘통영 갓’과 나전칠기다. 나전칠기의 경우 12공방 중 상하칠방에서 생산됐는데, 이후로 통영은 400년 전통을 이어 온 나전칠기의 고장으로 명성을 얻게 됐다. 통영시의 체험 프로그램은 다양한 국가무형문화재 기능을 보유한 전통공예 장인 중심으로 운영된다. 국가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제10호 나전장 등의 기능보유자들이 작품 제작 시연과 해설을 곁들인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체험은 매주 토, 일요일 오후 1시~5시 30분 통제영 12공방과 백화당 등에서 열린다. 참가 인원은 20명 안팎이고, 통영시 홈페이지에서 신청을 받는다.체험 프로그램이 열리는 삼도수군통제영의 핵심 건물은 세병관(국보 305호)이다. 당시 객사로 쓰였던 건물로, 전남 여수 진남관(국보 304호)과 더불어 대표적인 조선시대 목조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애초 1603년(선조 36)에 충무공 이순신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가 이후 통제영 건물로 사용됐다. 세병관은 여느 국보들과 달리 자유롭게 안쪽까지 들어갈 수 있다. 웅장한 건물의 그늘 아래 다리쉼을 하는 맛이 각별하다.미륵도 일대는 통영 여정의 필수 방문 코스다. 박경리 기념관, 전혁림 미술관, 달아공원, 루지 체험 등 통영의 명소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다. 미륵산 정상을 오르는 재미도 쏠쏠하다. 케이블카를 타면 단숨에 정상 언저리까지 오를 수 있다. 글 사진 진주·통영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오페라의 유령’ 연출 뮤지컬 거장 프린스 별세

    ‘오페라의 유령’ 연출 뮤지컬 거장 프린스 별세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전설적인 연출가 해럴드 프린스가 세상을 떠났다고 뉴욕타임스(NYT)가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전했다. 91세. NYT에 따르면 프린스는 스위스에서 뉴욕 맨해튼으로 가던 중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지병으로 숨을 거뒀다. 20세기 후반 현대적 개념의 뮤지컬을 창조한 것으로 평가받는 프린스는 세계 뮤지컬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연출가로 꼽혔다. 펜실베이니아주립대를 졸업한 뒤 스무 살 무렵 뮤지컬계의 거장 조지 애벗의 보조연출가로 활동을 시작한 프린스는 애벗과 함께 제작한 ‘파자마 게임’으로 1955년 토니상 최고뮤지컬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1960년대 들어 직접 뮤지컬 연출에 나선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뮤지컬로 꼽히는 ‘오페라의 유령’을 비롯해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에비타’, ‘스위니 토드’ 등을 연출하며 상업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뒀다. 1988년 무대에 올린 ‘오페라의 유령’은 브로드웨이 역사상 최장 기간 공연으로 기록될 만큼 인기를 끌었다. 그는 2006년 특별공로상 등 토니상을 21차례나 수상했고, 2000년에는 미 최고 권위 전미예술훈장을 받으며 공로를 인정받았다. 뮤지컬계는 그가 타계 소식에 추모를 표했다. 그와 ‘오페라의 유령’ 등을 함께 만들었던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는 트위터에 “뮤지컬계의 ‘왕자’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내게 참 많은 것을 가르쳐 줬고 뮤지컬에 관한 그의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고 안타까워했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성매매 집결지 유네스코 국제공모 도전

    전북 전주시 성매매 집결지인 ‘선미촌’이 유네스코 인증을 위한 첫 관문을 통과했다. 전주시는 1일 집창촌에서 문화예술마을로 변신하는 ‘서노송 예술촌 프로젝트’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지속가능한 발전 교육(ESD) 공식 프로젝트 인증제 공모에 선정됐다고 밝혔다. 시는 유네스코 국제공모 심사에도 도전할 계획이다. 시는 한국위원회 인증제 공모에 ‘선미촌을 여성 인권과 문화예술의 공간으로:선미촌 문화예술 프로젝트’를 주제로 ▲성 평등 ▲지속가능한 도시와 공동체 분야에 참여했다. 성매매가 이뤄지던 어둡고 음침했던 공간을 공권력에 의한 강제단속이나 집단 철거 방식이 아닌 주민참여에 기반한 문화예술 재생방식을 채택해 점진적으로 기능을 전환해 지속가능성, 협치, 참신성 부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2011년부터 한국의 다양한 지속 가능한 발전 교육 사례를 발굴·인증하고 널리 알림으로써 한국형 ESD 모델을 개발, 국제사회에 소개하고 있다. 한국위원회가 지금까지 국내 96개 사업을 인증했으나 현재까지 국제 인증을 받은 국내 사례는 없어 전주시의 도전이 주목된다. 서노송 예술촌 프로젝트는 2016∼2020년 총 74억원이 투입돼 선미촌을 포함한 서노송동 일대(11만㎡)의 골목과 도로정비, 커뮤니티 공간 및 문화예술복합공간 조성, 주민공동체 육성 등을 추진하는 사업이다. 이 프로젝트 이후 이곳에 일반음식점들이 생겨나고 상설문화예술프로그램이 운영되는 등 다양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서노송동 일대 주택가에 형성된 선미촌에는 한때 400여 명의 여성이 성매매 일을 했으나 2004년 성매매방지특별법 시행 이후 종사자가 100여 명으로 급감했다가 도시재생사업 등으로 지금은 절반가량으로 줄었다. 김승수 전주시장은 “그간 국내 성매매 집결지 정비가 주로 공권력을 동원해 강제로 행해져 왔던 것과는 달리 서노송 예술촌 프로젝트는 행정과 시민단체 등이 힘을 모아 문화예술을 통해 시민에게 열린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사업”이라며 “국제공모를 통해 이 프로젝트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릴 것”이라고 말했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미래유산 톡톡] 이미자·나훈아·조용필의 아지트였던 마포옥

    [미래유산 톡톡] 이미자·나훈아·조용필의 아지트였던 마포옥

    세계적으로 전차가 전성기를 누렸던 시기는 1920년대였고 이후 자동차가 발달하면서 1953년을 전후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서울의 전차는 주요 교통수단으로서의 지위를 이보다 10여년 더 유지하다 1968년이 돼서야 전면 폐지되었다. 왜 그랬을까. 첫째, 조선을 통해 대륙침략을 꿈꾸던 일본은 전차의 궤도를 포기할 수 없었다. 궤도를 통해 대륙으로 나가고자 했기 때문이다. 둘째, 철도 사업에 막대한 이권을 갖고 있던 조선총독부로서는 자동차의 발달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셋째, 한국전쟁은 서울을 폐허로 만들었고 교통발달을 지체시켰다. 포구 문화가 번성했던 마포에 전차가 운행된 것은 1907년 초였다. 서대문에서 마포에 이르는 전차 노선이 처음 개통 운행되면서 마포는 한양의 동쪽인 청량리에서 달려온 전차가 머물다 떠나는 전차의 서쪽 종점이 됐다. 마포종점은 약 60년 동안 자리를 지켰다. 작사가 정두수씨는 당시 마포종점 부근에 살았다. 그곳에서 작곡가 박춘석씨와 밤샘작업을 자주 했다. 둘은 밤샘작업을 하다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이 울리면 마포에 있는 단골 설렁탕집인 마포옥을 찾았다. 마포는 변두리였지만 전차 때문에 교통이 편하니까 서민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마포옥은 당시 내로라하는 작사가, 작곡가, 가수들의 아지트였다고 한다. 이미자, 하춘화, 남진, 나훈아, 조용필에 이르기까지 새벽 4시에 통행금지가 해지되면 밤새 작업을 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 얘기꽃을 피웠다.하루는 설렁탕집 주인이 정씨에게 마포종점에서 실성해 돌아다니는 한 여자 이야기를 들려줬다. 젊은 부부가 있었는데 남자는 큰 꿈을 안고 유학길에 올랐고, 여자는 마포에서 바걸 생활을 하며 돈을 벌어 뒷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남편이 과로한 나머지 뇌졸중으로 쓰러져 그만 짧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 여인은 늦은 밤이면 신혼집이 있었던 마포종점께로 나가 그곳을 미친 듯이 배회하다 그만 정신을 놓고 말았다고 한다. 정씨는 그날 밤 두 연인의 사랑을 담은 노래시를 쓰게 된다. 얼마 후 박씨와 설렁탕집에서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는데, 박씨가 갑자기 “바바바(밤 깊은) 바바바바(마포종점)” 곡조를 떠올렸고 노래는 완성됐다. 박정아 교육학 박사
  • 오르가니스트 최규미, 세계 최고 권위 콩쿠르서 아시아인 첫 1위

    오르가니스트 최규미, 세계 최고 권위 콩쿠르서 아시아인 첫 1위

    오르간 연주자 최규미(29)가 오르간 연주계 최고 권위 영국 세인트 올번즈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이 대회 60년 역사상 아시아 출신 연주자가 우승한 것은 최규미가 처음이다.31일 최규미의 모교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따르면 최규미는 지난 8∼20일 영국 세인트 올번즈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최종 1위에 올랐다. 1라운드와 2라운드의 지정곡 최우수 연주자에게 주는 상까지 휩쓸어 3관왕에 올랐다. 1963년에 시작된 세인트 올번즈 콩쿠르는 오르간 연주 대회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오자경 한예종 음악원 교수는 “이 콩쿠르 역사상 아시아인이 1위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고, 1985년 이후 여성이 우승한 것도 처음”이라고 수상 의의를 설명했다. 최규미는 이번 1위 특전으로 유럽 투어 기회를 비롯해 미국 필립 트러켄브로트 에이전시와의 계약, 솔로 음반 발매 혜택을 받는다. 그는 2009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기악과에 입학해 오자경 교수, 김현정 강사를 사사했다. 프랑스 파리 고등국립음악원에서 석사 과정을 거쳐 독일 프라이부르크 국립음대에서 최고연주자 과정에 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내친김에 잉글랜드 정복 KO GO

    내친김에 잉글랜드 정복 KO GO

    에비앙레뱅에서 ‘태극기 세리머니’를 펼치며 프랑스를 접수했던 고진영(24)이 이번엔 잉글랜드 정복에 나선다. 1일 영국 잉글랜드 밀턴킨스의 워번 골프클럽(파72·6585야드)에서 개막하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AIG 여자브리티시오픈은 올해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열리는 메이저 대회다. 이번 대회의 특징은 2주 연속 열린다는 점이다. LPGA 투어에서 메이저 대회가 2주 연속 열린 것은 1960년 6월 마지막 주 웨스턴오픈과 7월 첫째 주의 LPGA 챔피언십 이후 59년 만이다. 고진영은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시즌 메이저 2승을 거두고 곧바로 세 번째 메이저 정상을 노크한다. 한 시즌 메이저 3승은 2013년 박인비(31)를 전후해 찾아볼 수 없는 진기한 기록이다. 박인비는 그해 나비스코 챔피언십(현 ANA 인스퍼레이션)을 시작으로 LPGA 챔피언십, US여자오픈을 연달아 제패하며 여자 선수로는 사상 첫 ‘그랜드슬램’(한 시즌 메이저 전승)의 대기록을 눈앞에 뒀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고진영은 비회원 자격으로 출전한 2015년 브리티시여자오픈에서 준우승한 좋은 기억이 있다. 변수는 에비앙 우승의 컨디션이 그대로 이어지느냐 여부다. 집중력이나 체력 유지는 물론 두 대회 코스 간 달라진 환경도 경기력에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영국의 유력 베팅업체 윌리엄 힐은 “고진영의 우승 배당률이 9/1로 가장 낮고 그 뒤를 이어 에리야 쭈타누깐(태국)이 10/1, 김효주(24) 12/1 순”이라고 밝혔다. 우승 배당률이 낮을수록 우승 가능성은 크다. 최병규 전문기자 cbk91065@seoul.co.kr
  • [데스크 시각] 주민자치 확대, 정치판 흔든다/김승훈 사회2부 차장

    [데스크 시각] 주민자치 확대, 정치판 흔든다/김승훈 사회2부 차장

    # 금천구는 전국 최초로 주민자치·마을민주주의 시대를 열었다. 2010년 민선 5기 출범 이후 가장 작은 행정 단위인 동 주민들이 마을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혁신적인 실험을 도입했다. 주민들이 예산 편성부터 사업 기획·실행까지 한다. 골목길을 어떻게 하면 더 좋게 만들 수 있을지, 더 안전한 동네를 만들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지 등을 논의하고 답을 찾아낸다. 주민들이 행정기관에서 추진하는 사업 수혜자에서 사업을 기획·운영하는 참여자로 거듭난 것. 주민들은 “마을 단위에서 주민들이 정책결정권과 재정운영권을 갖고 마을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거듭된다면 진정한 의미의 ‘풀뿌리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 강서구도 주민자치 구현에 나섰다. 화곡6동·우장산동·화곡3동·등촌2동·방화3동 5개 동을 주민자치 시범 동으로 정하고, 지난 10~20일 주민총회를 차례차례 열었다. 마을 소식을 전하는 ‘마을 소식 게시판’ 설치, 같은 골목을 공유하는 주민들과 골목밥상을 운영하는 ‘마을밥상’ 등이 주민 논의를 거쳐 마을 사업으로 결정됐다. 주민들이 직접 사업과 정책을 결정하고 예산까지 집행하는 주민자치가 서울 전역에 뿌리내리고 있다. 주민자치는 직접민주주의 결정판으로, 민주주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제도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지방자치법 전면 개정안 핵심도 주민자치 확대다. 정치권 시선은 곱지 않다. 현 정치체제인 대의제민주주의를 송두리째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시의회는 서울시가 추진하는 ‘서울민주주의위원회’에 강한 거부감을 표했다. 서울민주주의위원회는 시민들이 예산편성 등의 권한을 갖는 합의제 행정기관이다. 위원회가 편성하는 예산은 내년 2000억원, 2021년 6000억원을 거쳐 2022년엔 1조원대까지 늘어난다. 시의회는 위원회의 예산편성 권한이 과도하고, 의회 예산 심의권을 침범한다며 집단 반발했다. 진통 끝에 위원회는 지난 25일 출범했지만 앞날이 순탄치만은 않다. 한 시의원은 “대의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반발 기류가 팽배하다”고 했다. 서울시가 2012년 주민참여예산제를 도입하려 했을 때도 논란이 거셌다. 당시 시의원들은 주민들이 편성한 예산이 의회에 상정되면 어느 시의원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겠느냐며 예산 심의를 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여의도 정치권도 주민자치 확대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는다. 주민 참여가 늘면 자신들의 입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어서다. 과거엔 물리적·기술적 한계로 대의제를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정보통신기술(ICT) 발달로 정치 지형이 확 바뀌었다. 스위스 같은 작은 나라가 아니라 큰 나라도 ICT만 뒷받침해 주면 실시간 주민 참여와 의사 결정이 가능하다. 우리나라는 전 국민이 스마트폰을 갖고 있고, 휴대전화로 대화를 나누고 투표를 통해 약속 날짜를 정한다. 순식간에 하나의 사안이 수천·수만명에게 전달된다. 60년 4·19혁명, 87년 6월항쟁, 2017년 촛불혁명을 거치며 국민들 참여 역량도 성숙해졌고, 참여 의지도 커졌다. 온라인 환경이 발달하고, 참여 의식도 높아진 한국에서 직접민주주의 비중이 커지는 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직접민주주의 비중이 커지는 건 대리인(정치인)이 주인(국민) 뜻을 거스르고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것을 통제하고, 자정 노력을 이끄는 긍정적인 면도 크다. 속도가 관건일 뿐 직접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건 자연스런 흐름이다. 정치권도 밥그릇 챙기기에 매몰되지 말고, 전향적인 자세로 접점을 찾는 노력과 고민을 할 때다. hunnam@seoul.co.kr
  • 경아~ 오랜만에 누워보는군… 숨 막힌 검열의 시대가 낳은 ‘별들의 고향’

    경아~ 오랜만에 누워보는군… 숨 막힌 검열의 시대가 낳은 ‘별들의 고향’

    1970년대는 한국영화가 침체와 불황의 긴 터널로 진입하는 시기였다. 1971년 202편의 제작편수를 유지했던 한국영화는 1972년 122편으로 급감했고, 이후 한국영화는 텔레비전과 대작 외국영화 사이에 끼어 호스티스 멜로와 무협 액션 같은 저예산 장르로 연명하게 된다. 1970년대가 극심한 암흑의 시대였다고 해서 청년들의 에너지와 희망마저 꺾을 수는 없었고, 영화계는 이를 포착해 작은 위안들을 발신했다. 서구영화의 뉴웨이브 정신과 교감하는 청년 감독들이 새로운 감수성과 신선한 영상감각을 앞세운 영화들로 젊은 관객들과 만났다. 그 포문은 이장호가 열었다. 그의 데뷔작 ‘별들의 고향’(1974)은 46만 관객이라는 초유의 흥행 기록을 세우면서 산업적 활로를 열었을 뿐만 아니라, ‘청년영화’라는 새로운 방향까지 제시했다. 김호선의 ‘영자의 전성시대’(1975),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1975)이 그 뒤를 이었고, 이들을 포함한 젊은 감독들은 청년영화집단 ‘영상시대’를 결성해 한국의 뉴시네마운동을 선포한다. 이번 연재는 1970년대 한국영화가 쇠퇴하게 된 배경 그리고 ‘별들의 고향’이라는 기념비적인 데뷔작을 선보인 이장호 감독에 대해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국책영화 만들어 외화 쿼터 따낼 방법에 골몰 1972년 10월 유신정권이 들어섰고 영화계 역시 더욱 경직되어 갔다. 그리고 1973년 2월 유신 체제를 반영한 영화법 4차 개정이 있었다. 영화 제작을 하려면 국가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제작업과 수입업이 다시 통합됐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렇다. 1973년 시점 20개였던 제작사는 12개로 줄었고, 허가받은 12개사에 제작권을 부여해 연간 제작편수를 130편으로 묶었다. 50편 내외였던 외국영화 수입권도 12개 제작사만 나눠 가졌다. 국산영화 3편을 제작하면 외화 쿼터 1편을 받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당시 한국영화는 외국영화 수입 쿼터를 받는 수단으로 전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작자들은 좋은 영화를 만들기보다 저예산으로 빨리 만들 수 있으면서 관객들의 호기심과 볼거리를 채울 수 있는 영화들로 눈을 돌렸다. 특히 대중적 신파 감성에 여성의 신체를 상품화하는 호스티스 영화, 깡패, 스파이, 무협 등으로 분화한 액션영화가 유행했던 이유다. 물론 외화 쿼터를 더 따낼 방법 역시 존재했다. 정부가 제시하는 ‘국책영화’, ‘우수영화’ 같은 기준에 부합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성웅 이순신’(이규웅, 1971)을 위시로 박정희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기획된 ‘성웅사업’ 영화들, 문학을 영상으로 옮긴 ‘무녀도’(최하원, 1972) 같은 문예영화들, ‘진짜진짜 잊지 마’(문여송, 1976)로 시작한 ‘진짜진짜’ 시리즈, ‘고교얄개’(석래명, 1976)가 대표하는 ‘얄개’ 시리즈 등 하이틴영화들이 그 대상이 됐다. ●깡패·스파이·호스티스 영화 붐으로 이어져 4차 영화법 개정으로 설립된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의 전신) 역시 국책영화 제작을 주도했다. 국가가 직접 나서 ‘증언’(임권택, 1973) 등의 전쟁영화, ‘아내들의 행진’(임권택, 1974) 같은 새마을영화를 만든 것이다. 물론 이 영화들이 실질적인 국책 전파에 기능했는지는 의문이다. 1960년대부터 이어온 국가 주도의 영화 정책은 명과 암을 동시에 지닌 것이었고, 1970년대는 그 폐해가 더 커져 갔다. 흑백이긴 했지만 텔레비전 보급률이 급증하면서, 반대로 전국의 영화관수와 관객수는 급격히 줄었다. 그리고 관객들은 외화 한편을 수입하기 위해 졸속으로 제작된 영화들과 상업성이 없어 며칠 만에 간판을 내리고 마는 우수영화들에 흥미를 잃어 갔다. 이러한 침체 일로의 영화계에 일순간 활력을 불어넣은 작품이 바로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이었다. 1945년 5월 서울에서 출생한 이장호는 영화 검열관이었던 부친 덕에 어릴 때부터 영화와 가깝게 지냈다. 아버지가 일하던 검열실에 따라가 채플린 영화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을 보기도 했고, 집에서는 아버지가 가져온 필름을 만지고 놀았다. 그의 영화적 원경험이었던 셈이다. 학창 시절 문학에 탐닉했던 그는 홍익대 건축미술학과에 입학했지만 제도권 교육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부친은 방황하던 그를 ‘신필림’으로 데려간다. 애초 배우를 희망했지만 신상옥 감독 앞에서 자존심이 상해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말했던 일화는 꽤 유명하다. 그는 신상옥 감독의 ‘무숙자’(1968)를 비롯해 신필림에서 연출부 생활을 했으나, 적극적으로 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도에 연출부를 그만두기도 했고, 극단 일도 하면서 자신만의 일을 모색하는 쪽이었다.그의 인생은 말 그대로 한순간에 바뀌었다. 1973년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소설 ‘별들의 고향’ 판권을 치열한 노력 끝에 확보한 것이다. 사실 소설가 최인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죽마고우였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역시 감독 데뷔도 하지 않은 친구에게 덜컥 판권을 내주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장호는 동생의 대학등록금을 최인호의 집에 던져놓고 오는 막무가내식 고집을 부리며 결국 승낙을 받아낸다. 하지만 이후 과정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도제 시스템이 확고하던 시절, 신필림에서 연출권을 확보하기 힘들 것을 직감한 그는 도망치듯 떠나 하길종 감독이 소개한 화천공사로 옮긴다. 연출부 제2 조수 출신의 영화청년이 일순간 감독으로 데뷔한 것은 여하튼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데뷔작 ‘별들의 고향’이 46만 관객을 동원하는 역대 최고 흥행 성적을 기록하며 이장호는 일약 충무로의 스타 감독이 되었다. 물론 이 기록은 ‘1000만 영화’ 시대인 지금으로 치면 대단치 않아 보일 수 있지만, 당시 영화 개봉이 서울의 한 영화관에서만 이루어졌던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인파로 세 달 내내 이 영화만 상영했던 결과인 것이다. 개봉관은 바로 을지로 4가의 국도극장이었다. 이후 그는 ‘어제 내린 비’(1975)로 흥행을 이었고, 1975년 8월 동료 감독 하길종, 김호선, 홍파, 이원세 그리고 영화평론가 변인식과 함께 ‘영상시대’를 결성한다. 1975년도 한국영화 흥행 1위부터 3위까지 작품이 김호선의 ‘영자의 전성시대’(36만),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15만), 이장호의 ‘어제 내린 비’(14만)가 랭크된 것에서 영상시대 동인들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 작품 ‘그래 그래 오늘은 안녕’(1976)으로 이장호의 1970년대 연출 활동은 갑자기 끝나버렸다. 1976년 연예인 대마초 파동에 휘말려 활동 정지를 당한 것이다. 촉망받는 젊은 감독에서 순식간에 낭인으로 전락했던 4년간, 그는 말 그대로 각성의 시기를 보낸다. 특히 염무웅의 평론집 ‘민중 시대의 문학’은 한국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1979년 12월 유신정권 종식으로 감독 자격을 회복한 그는 그간의 고민을 담아 연출한 ‘바람불어 좋은 날’(1980)로 재기에 성공한다. 이후 작가주의적 인장이 새겨진 ‘바보선언’(1983), ‘과부춤’(1983)의 흥행 실패로 위기감을 느꼈지만, 보란 듯이 ‘무릎과 무릎 사이’(1984), ‘어우동’(1985)을 히트시키며 뛰어난 상업적 감각을 입증하기도 했다. ●김홍준, ‘바람불어 좋은 날’ 보고 ‘감독의 길’로 이장호는 1980년대의 가장 중요한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한국영화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영화계에 새로운 인력들이 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배창호, 장선우, 김동원 등은 그의 연출부로 영화를 시작했고, 신승수, 정지영, 장길수 등은 ‘영상시대’가 개최한 오디션을 통해 영화계로 진입한 바 있다. 또 김홍준, 강우석, 임상수 같은 감독들이 처음 영화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바로 ‘바람불어 좋은 날’을 보고 나서라는 것도 잘 알려진 얘기다. 그는 1980년대 한국의 ‘뉴웨이브’ 영화, 더 나아가 현대 한국영화의 기원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장호의 데뷔작 ‘별들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자. 김홍준 교수가 기록한 ‘이장호 감독의 마스터클래스’(작가, 2013)에서, 이장호 감독이 직접 ‘별들의 고향’의 기록적인 흥행에 관해 언급한 대목이다. “관객이 10만명 들었을 때 이 소설의 인기를 진짜 실감했어요. ‘어떻게 이 소설이 인기가 있어서 관객을 이렇게 끌어왔나.’ 10만을 넘어서 20만 되는 동안엔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면 ‘이장희 영화음악도 참 효과를 탔구나.’ 사람들이 음악 얘기를 많이 하니까. 근데 30만이 드니까 그제야 비로소 내 잃어버렸던 자존감 ‘영화도 잘 만들어서 그런 거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드디어 싹트기 시작하더라고요, 근데 그게 30만이 넘어서 40만이 드니까 정말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슬퍼져요, 뭔가 배신당한 느낌. 이 영화는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구나, 혼자 달려가는 말 같구나, 주인 없는 말처럼 달려가는구나.”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기성 감독 누군가가 영화화를 맡았다면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별들의 고향’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당시 충무로의 수많은 선배 감독들이 판권을 탐내고 있는 상황에서, ‘초짜 감독’ 이장호는 어떻게 한국영화의 새로운 분기점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거칠고 투박하지만 신선하고 감각적인 이 영화가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은 바로 그의 타고난 직관력과 돌파력이었던 것 같다. 사실 그는, 카메라를 직접 잡는 신상옥 감독 특유의 촬영 현장에서 게다가 제2 조감독에 머물렀기 때문에 연출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서구영화를 섭렵했던 영화 청년으로서의 세월이 그의 연출 방향을 직관적으로 알려주었다. 사실 ‘별들의 고향’은 이전의 한국영화처럼 이야기를 촘촘하게 설명하는 데 주력하지 않는다. 광나루에서 한 첫 촬영부터 즉흥적으로 연출하며 장면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촬영해 놓은 필름을 돌려본 편집실에서 비로소 구성을 시작했다는 이장호의 증언처럼, 그는 편집 감각을 통해 아마추어리즘을 참신함으로 바꿔놓았다. 영화는 플래시백 구조의 리듬도 균일하지 않고 차라리 복잡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는 말이지만, 이는 도리어 관객들에게 긴장감을 주고 영화 속으로 몰입시킨다는 점에서 신의 한 수가 되었다.●이장희 음악도 큰 몫… “아마추어리즘의 승리” 영상뿐만 아니라 음악도 큰 몫을 했다. 이전의 한국영화들은 시간도 없고 돈도 없어, 영화음악의 대가들이 녹음실에 오케스트라를 불러 잠깐 맞춰본 뒤 일사천리로 즉흥적인 음악을 녹음하는 식이었다. 이장호는 고교 후배인 가수 이장희에게 음악을 맡겼고, 아예 레코드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무려 40여일을 투자했다. 물론 기존의 전통적인 방식을 벗어나 혹은 잘 몰라서, 신선하게 음악을 배치한 것이 주효했다. 이장희가 부르는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 소녀가 울고 있네’가 흐르는 장면들은 단연 이 영화의 백미일 것이다. 이장호가 “아마추어리즘의 승리”라고 규정한 것처럼, ‘별들의 고향’이라는 흥행작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은 새로운 세대들이 그들의 느낌대로 과감히 밀고 나간 덕분이었다. 1970년대 중반 한국영화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별들의 고향’은 이후 두 가지 경향을 만들어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영화가 선취한 도시 속 젊은 여성의 이야기는 ‘영자의 전성시대’, ‘겨울여자’(김호선, 1977)로 이어지며 흥행과 비평을 두루 만족시켰다. 하지만 이 작품들의 성공은 1970년대 후반, 순수한 여주인공이 호스티스로 전락하는 과정을 관음증적 볼거리로 전시하는 것에만 주력하는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의 유행을 낳았다. 한편 새로운 감수성과 영상 감각은 ‘청년영화’의 선명한 줄기를 만들어냈다. 다음 연재를 통해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1975)과 영상시대 활동을 살펴보기로 한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박성수 송파구청장, 수익 25% 사회에… 구민과 연대·협력 함께할 것

    박성수 송파구청장, 수익 25% 사회에… 구민과 연대·협력 함께할 것

    누구를 만나든 미소로 인사를 건네는 코스타리카인들. 지난 7~19일 3개국 순방 중 5일간의 방문일정 동안 그들이 내게 보여준 모습은 언제나 밝고 친절했다. 과연 ‘국민행복지수 세계 1위’의 나라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청장 취임 이후 어떻게 하면 70만 주민들 삶의 질을 더욱 높이고 진정한 행복을 이끌 수 있을지 늘 고민했다. 코스타리카의 사회적경제 시스템이 눈에 들어왔다. 시장경제의 경쟁 논리가 아닌 사회적 연대와 협력이 공동의 이익을 창출한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그중에서도 1960년 228명의 생산자들이 모여 결성한 코스타리카의 대표 협동조합 ‘코페타라수’ 방문이 기억에 남는다. 이곳에선 56개 지역에서 수확한 고품질의 커피를 모아 86%가량을 수출한다. 공동의 노력으로 발생한 수익은 75%를 농부에게, 나머지 25%를 사회공헌사업 등 공적 목적으로 사용했다. 조합원이 협력해 함께 이익을 창출하고, 이를 다시 사회에 환원해 또 다른 공동의 발전을 이끄는 선순환의 구조가 안정적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지방정부의 궁극적 목적은 결국 주민의 행복이다. 사회적경제부터 시작하겠다. 현재 운영하는 ‘송파구 사회적경제지원센터’를 통해 혁신적인 사회적경제 사업가를 보다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성장 단계별 밀착 지원도 이어갈 것이다. 매년 20~30여개씩 설립되는 사회적경제 기업의 양적 성장은 물론, 질적 성장을 위해 판로개척, 네트워크 구축 등 다각적인 지원으로 코스타리카에 견줄만한 송파구만의 모범 사례를 만들어 가겠다. 다만 조급해하지 않으려 한다.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간다’는 말처럼 사회적경제의 핵심 정신인 연대와 협력을 기억하겠다. 주민과 손잡고 그들과 보폭을 맞추며 차근차근 송파의 행복을 만들어가겠다.
  • 탈북민 맞다는데도 ‘위장 탈북’ 의심한 검찰...2심도 무죄

    탈북민 맞다는데도 ‘위장 탈북’ 의심한 검찰...2심도 무죄

    중국 여권 발급받은 탈북민에검찰, 중국 국적자로 판단유죄 판결 시 강제 북송 위기법조공익단체 무료 변호 나서1심 이어 2심도 무죄 이끌어국내로 들어오기 위해 제3국 여권을 발급받았다가 위장 탈북민으로 내몰리면서 강제 북송 당할 처지에 놓인 북한이탈주민에 대해 법원이 “탈북민이 맞다”고 재차 인정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4부(부장 홍진표)는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된 탈북민 A씨의 항소심에서 1심과 마찬가지로 무죄 판결을 선고했다고 28일 밝혔다. A씨는 1960년 중국에서 태어나 북한 국적의 아버지를 따라 1976년쯤 북한으로 이주했다. 당시 A씨는 북한 공민증을 발급받으면서 북한 국적을 취득했다.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는 중국 국적법에 따라 A씨의 중국 국적은 상실됐다. 2001년 A씨는 탈북해 5년 간 만주 일대에서 숨어 지내다가 2006년 탈북 브로커에 중국 여권과 비자 발급을 의뢰했다. 당시 중국에 자신의 호구부(가족관계등록부)가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호구부 회복 신청을 통해 중국 여권을 발부받았다.그러나 검찰은 A씨의 중국 국적이 회복된 후 중국 국적자로서 여권을 발급받은 것으로 보고 A씨를 위장 탈북민으로 의심했다. 현행 법상 북한이탈주민은 탈북 후 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아니한 사람으로 정의된다. 또 북한이탈주민에 해당되지 않는데도 부정한 방법으로 정착지원금을 받은 경우 형사 처벌 대상이 된다. 이에 재판부는 “A씨가 탈북 후 중국 호구부를 다시 발급받고 이를 이용해 중국 여권을 발급받기는 했지만, 국적회복절차에 갈음해 국적을 회복하는 법적 효과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중국 국적법에 따라 국적을 회복하려면 공안기관에 외국 여권, 영구거류증 등의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데, 중국에 불법 입국한 A씨가 이러한 서류를 갖췄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본 것이다. A씨가 당초 중국 국적을 상실했던 사실조차 공안기관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재판부는 “공인기관이 호구부 등을 근거로 A씨를 사실상 중국 국적자로 대우했을 개연성이 상당하다”면서 “A씨가 중국 국적을 회복한 중국 국적자라는 사실은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증명되지 않았다”고 봤다. 그동안 중국 국적자가 탈북민을 가장해 국내로 들어와 적발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수사 당국에 의해 중국 국적자로 오인됐다가 법원에서 구제받은 경우는 A씨가 처음이다. A씨의 딱한 사정을 전해 들은 법조공익단체 변호사들이 무료로 소송에 임한 것도 특징이다. 공동변호인 박원연 통일법정책연구회장(변호사)는 “국가 기관의 오판으로 인해 A씨는 무려 10년 동안 원하지 않게 외국인으로 간주돼 가족과 헤어져 살아야만 했다”면서 “이 판결을 계기로 정부가 탈북민 관련 신원 확인 절차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치맥이 대세? 보양식 으뜸은 삼계탕이닭!

    치맥이 대세? 보양식 으뜸은 삼계탕이닭!

    요즘 젊은이에게 복날이 꼭 기억해야 하고, 삼계탕을 먹어야만 하는 날일까. 이는 우문(愚問)일 개연성이 높다. `복날 보양식=삼계탕’이라는 전통 보양식 공식이 깨지고 장어, 민어, 전복 등으로 다양화하고 있다. 이마트가 지난 2년간 7∼8월 보양식 매출을 분석한 것만 봐도 백숙용 생닭 비중이 51.6%에서 45.6%로 감소하고 전복은 23.2%에서 25.6%, 장어는 17.2%에서 21.4%로 늘었다. 닭 요리만 따져도 치킨이 대세여서 곳곳에서 ‘치맥’(치킨+맥주)축제가 열리고, 배달업체들은 복날이면 할인 쿠폰을 주며 치킨 판매에 열을 올리는 판이다. 많은 공공기관과 회사에서 초복부터 구내식당에 삼계탕을 내놓고 수많은 사람이 삼계탕을 찾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치킨을 시켜 먹는데 복날에 꼭 삼계탕을 먹어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늘어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하지만 김혜영 우송대 외식조리학부 교수는 25일 “지금도 여름철 음식으로 치킨이 삼계탕을 대체할 수 없다”며 “삼계탕은 국물까지 보양식”이라고 잘라 말했다. 신승미 청운대 호텔조리식당경영학과 교수도 “치킨은 그냥 튀김으로 보양식이 될 수 없다”고 밝혔다.‘삼계탕’이란 이름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960년대 충남 금산이나 풍기(경북 영주)에서 탄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 곳은 인삼의 주요 유통 및 생산지였다. 정부가 1965년 허가제였던 인삼 재배를 자율화하면서 생산량이 크게 늘어나 수삼을 넣을 길이 열렸다. 신 교수는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금산이 유력하다”고 추정했다. 이후로 삼계탕은 수도권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대중화됐다. 이전에는 닭을 앞세운 ‘계삼탕’이 있었다. 닭은 1920년 조선총독부가 양계산업을 권장해 늘었고 이후로도 대량생산됐지만, 인삼은 자율화 전까지 무척 귀했다. 김 교수는 “닭은 집에서도 한두 마리쯤 쉽게 기를 수 있어 흔한 가축이 됐다”고 설명했다. 양계가 기업화한 지금과 달리 1960~1970년대에는 집에서 닭을 기르는 일이 흔했다. 그때는 족제비가 밤에 허술한 닭장을 비집고 들어와 닭을 잡아먹어 이튿날 아침 난리가 나는 일이 잦았다. 반면 인삼은 귀해서 약간만 넣었기 때문에 닭 중심의 계삼탕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50년 ‘삼복더위에 계삼탕을 먹으면 원기가 돋고 연중 질병에도 걸리지 않는다’는 글이 신문 등에 실렸다. 신 교수는 “당시 계삼탕은 백삼(말린 인삼) 가루를 넣어 만든 것으로 수삼을 넣는 삼계탕과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수삼은 무더위에 썩기 쉬워 사용이 어렵고 인삼 가루를 약간 넣었을 뿐이니 인삼을 앞세울 수 없었다. 삼계탕이 탄생한 건 재배 자율화에 따른 인삼의 대량생산 때문이다. 서민들도 수삼을 구하기 쉬워졌다. 냉장고의 보급 역시 삼계탕을 대중화했다. 더운 날씨에도 수삼을 썩지 않게 보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흔해져도 인삼은 예나 지금이나 건강식품의 대명사다. 이를 강조해 닭보다 이름을 앞에 붙여 ‘삼계탕’이 됐다. 삼계탕은 ‘이열치열’의 보양식이다. 여름으로 접어들면 몸이 뜨거워지지만 몸속 기운은 떨어진다. 몸속이 차가워져 탈이 나기 쉬운데 이때 위장을 따뜻하게 보호하는 게 바로 삼계탕이다. 닭고기 속에 단백질은 물론 카르노신, 앤서린 등이 들어 있어 피로 해소에 효과가 좋다. 인삼과 황기 등은 사포닌 성분이 풍부하다. 마늘 등이 많이 들어가 항암에도 뛰어나다. 김 교수는 “삼계탕은 푹 끓여 소화가 쉽고 몸에 흡수도 잘된다”면서 “어린이는 물론 치아가 시원치 않은 어르신들도 먹기 편한 여름 보양 음식”이라고 말했다.계삼탕, 삼계탕 전에도 닭을 푹 고아 만든 음식은 있었다. 1924년 발간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이 같은 음식이 기록돼 있다. 신 교수는 “계삼탕 이전에는 백숙과 연계(軟鷄·새끼를 낳지 않은 부드러운 닭)백숙이 있었다. 삼계탕처럼 푹 끓여 먹는 음식”이라고 설명했다.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닭보다 오히려 값이 싼 꿩을 사용했다고 한다. 물론 지금도 찬반 논란이 거센 개장국(보신탕)이 복달임의 중심 음식이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닭이 대량생산된 이후로는 푹 고아 만든 닭 요리가 서민들의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농경사회에서 여름철 땀을 뻘뻘 흘린 후에 힘을 보충해 준 게 닭 요리, 탕”이라며 “그것도 매일 먹기 어려워 복날만 먹었다”고 전했다. 반면 조선시대 반가에서는 복날 고급 닭 요리를 즐겼다. 참깨를 넣어 시원하게 만든 ‘임자수탕’이나 도라지를 넣어 뜨겁게 끓인 ‘초교탕’ 등이 그것이다. 임자(荏子)는 깨를 말한다. 최근 들어 이 같은 음식은 호텔 등에서 더러 건강 보양식으로 내놓을 뿐 대중화되지 못했다. 최종 승자는 요리법이 간편하고 서민들이 즐겼으며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한국 최고의 음식’이라고 극찬했다는 삼계탕이다. 요즘은 한방·전복·홍삼·해물 등을 첨가한 삼계탕으로 발전하고 있다. 경제 수준이 높아지면서 소비자의 욕구도 다양해진 것이다. 그래도 삼계탕은 삼계탕이다. 더 나아가 가정간편식(HMR)까지 출시되고 있다. 품을 크게 들이지 않고 보양식을 즐기려는 맞벌이, 싱글족이 늘어난 게 이유로 분석됐다. 롯데마트가 지난 5년간 여름철 3개의 복날 ‘백숙용 닭고기’와 ‘삼계탕 HMR’ 매출 구성비를 조사해 보니 2015년 7.3%에 그쳤던 삼계탕 HMR의 비중이 지난해 26.8%까지 늘었다. 올해 초복 삼계탕 HMR 비중은 30.2%로 커졌다. 신 교수는 “HMR 삼계탕은 전통이 아니어서 좋다는 느낌이 들지 않지만 동남아에 수출도 한다니 마냥 나쁘게 볼 것은 아니다”라며 “먹거리가 매우 다양한 시대지만 외국인들도 좋아한다는 삼계탕은 같이 가야 할 친구이고 꼭 지켜야 할 음식”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금은 젊은이들이 삼계탕을 즐기지 않지만 부모와 함께 먹었던 그 DNA는 사라지지 않아 좋아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전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전복삼계탕 대전시 제공 한방삼계탕 대전시 제공
  • 영남이공대 영도벨벳와 산학협력 협약체결

    영남이공대는 25일 영도벨벳과 산학협력 협약식 가졌다. 행사에는 영도벨벳 류병선 회장 및 사장, 부사장 등 임원진이, 영남이공대에서는 박재훈 총장과 교무위원, 패션디자인마케팅과 교수 등이 참석했다. 영도벨벳은 1960년 설립되어 한국 최초로 벨벳 직물을 개발하여 국내 벨벳 산업을 선도했다. 현재 우수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벨벳 산업 시장에서 생산 및 수출 세계 1위를 달성한 글로벌 기업이다. 영남이공대 박 총장은 “이번 산학 협약을 계기로 긴밀한 상호 협력 관계를 이어나가길 바란다” 고 했다. 영도벨벳 류 회장은 “협약식이 학교와 기업이 힘을 합쳐 동반 성장해나가고 지역에도 기여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문소영 칼럼] 7세기 백강전투와 21세기의 한일 관계

    [문소영 칼럼] 7세기 백강전투와 21세기의 한일 관계

    백강전투(白江戰鬪). 7세기 한반도에서 한중일이 처음으로 격돌한 국제전으로 평가받는데도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중국에서는 백강구전투로, 일본에서는 백촌강전투로 알려진 이 백강전투는 663년 8월 금강 하구 등에서 백제 부흥군과 일본이 연합군으로, 나당연합군과 싸운 전투다. 백강전투에 당시 백제 부흥군의 규모는 5000명에 불과했지만, 일본군은 5~8배 이상인 2만 7000~4만 2000명이었다. 다른 의도가 없다면 일본은 혈맹 백제를 위해 엄청난 출혈을 감행한 것이다. 이들 백제·일본 연합군은 그러나 신라군 5만과 당군 13만의 대군에 대패했다. 당시 전투에 대해 ‘구당서’는 “왜군 수군의 배 400척을 불태워 그 연기가 하늘을 덮었고 바닷물은 왜군의 시체로 핏빛이었다”고 적어 놓았다. 7세기 당시 일본 국력을 가늠하기 쉽지 않지만, 배 1000척과 3만~5만에 가까운 군대를 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백제와 일본 관계의 밀도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일본의 정권 자체가 휘청했는데, 그때를 놓치지 않고 삼촌이 왕위에 오른 조카를 죽이고 정권을 탈취했으니 말이다. 4년 전쯤 알게 돼 깜짝 놀랐던 역사다. 요즘은 교과서에도 짧게 소개된다는데 잘 안 알려졌다. 왜일까. 일각에서는 백제가 660년 멸망한 뒤에서도 3년 넘게 신라에 저항했다는 사실을 숨기려는 의도라거나, 16세기 임진왜란과 20세기 일제강점기 등 과거사에 대한 분노 탓에 일본군이 백제를 도왔다는 사실조차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전쟁사 전문가는 일본이 백강전투를 근거로 한국 식민지배를 정당화했던 탓이란다. 일본의 아전인수식 왜곡된 역사 해석은 안타깝다. 한국인은 수천 회에 달하는 외세 침략의 희생자라 규정하고는 한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계승범 교수의 저서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에 따르면 조선의 세조와 성종 때 명나라의 요청으로 여진을 치는 연합군을 편성해 전쟁에 나섰고, 인조 때는 청의 요청으로 ‘재조지은’인 명나라를 치려고 파병하며, 효종 때는 역시 청나라의 요청으로 러시아를 원정하는 1, 2차 나선정벌에 나서는 등 소극·적극적으로 쏠쏠하게 군사행동에 나섰다. 또 한국인이 일본을 괴롭히지 않은 것도 아니다. 고려 말 창왕 때와 조선 초 세종 때 각각 쓰시마를 정벌했고, 또 고려 말에는 원나라와 함께 일본 정벌을 위해 1, 2차 여몽연합군을 편성했다. 최근 한일 정부 간 갈등이 심화하고 있다. 일본은 G20 주최국임에도 문재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거부하더니, 지난 4일부터는 반도체 소재의 대한국 수출 규제를 시작했다. 더 나아가 15년간 유지해 왔던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한국을 배제하겠단다.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따져 가다 보면 일본 정부가 아무리 부인해도 한일 과거사 문제가 나온다. 가깝게는 2018년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과 2015년 한일 정부의 위안부 졸속 합의, 멀리 가면 1965년 한일협정과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불안정성이, 더 멀리 가면 1910년 한일병탄의 불법성이 나온다. 즉 독도 소유권 문제나 일본군위안부와 강제징용 배상 등 한일 과거사 논쟁의 뿌리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런 지경인데도 일본 아베 정부는 한국 정부와 관련한 과거사 문제에 대해 외교를 통해 원만히 해결하는 방안을 찾기보다 전략물자의 관리 부실이라는 가짜뉴스급 ‘안보의 문제’를 제기하며 자유무역 체제를 훼손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서 국제분업은 민주주의 국가들이 서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경제활동인데, 가장 큰 혜택을 본 국가 중 하나인 일본이 국제분업을 정치적 보복의 수단을 악용함으로써 나쁜 선례를 남기고 있다. 이는 성숙한 선진국의 자세라고 볼 수 없다. 역사를 돌아보면 한일 관계가 나쁠 때도 있었지만, 악감정을 내려놓고 좋은 이웃으로 지낸 시간들이 더 길었다. 대표적으로 1592년 임진왜란과 1598년 정유재란 이후 조선은 일본의 반성을 근거로 1609년 국교를 정상화한 뒤 1876년 강화도조약을 맺기 전까지 260여년 평화를 구가했다. 중국이 팽창하고 있고 미국의 외교안보정책이 ‘미국 우선주의’로 변화하는 가운데, 21세기 동북아의 평화는 소소하게 티격태격하더라도 한미일 3각 안보동맹이 튼튼해야만 가능하다. 한일이 윈윈했던 역사를 돌아보고, 개항기의 나쁜 일본뿐 아니라 역사 해석의 논란이 있지만 백제의 혈맹이었던 일본이라는 고대사를 소환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symu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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