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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업률 1.9%(외언내언)

    우리나라 실업률이 사상 최저다.지난 5월중 실업률이 1.9%로 정부가 실업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62년이후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한 것으로 보도됐다. 통계학적 개념으로는 이른바 완전고용의 수준에 이른 것이다.만 15세이상의 남녀로서 재화와 용역의 생산을 위해 노동제공의 의사가 있는 「경제활동인구」가운데 일부 질병을 앓거나 취직을 위해서 대기중인 자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취업상태에 있다는 얘기다.6·25동란으로 전국이 폐허가 된 지난 50년대와 60년대 초기의 너무나 가난했던 시절,대학졸업장이 고등룸펜자격증 정도로 치부되던 그때와 비교하면 말 그대로 상전벽해의 상황이다. 현금으로 보수를 받는 것은 고사하고 밥먹여 주며 잠재워 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해서 궂은일 마다않고 뼈빠지게 닥치는 대로 일하던 그 시절 근로여건에 비하면 요즘의 3D업종 구인난이나 외국근로자 채용은 꿈속에서나 들을수 있는 얘기고 사치스런 한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1.9%의 실업률은 세계적으로도 최저수준에 속한다.대만 홍콩등 일부지역만 우리보다낮을뿐 일본 3% 미국 6.2% 프랑스 12%이다. 물론 통계숫자와 피부로 느끼는 실업률에는 적잖은 차이가 있다.국제노동기구(ILO)방식에 의한 실업률조사는 일주일에 한시간이상만 일하고 급료를 받으면 취업자에 포함되고 가사노동의 경우엔 급료를 안받더라도 일주일에 18시간이상 일하면 실업자가 아니기 때문이다.일부 유럽국가에선 한푼이라도 실업보험을 타는 사람은 실업자로 간주하므로 ILO방식을 채택하는 대부분의 나라들보다 실업률이 높게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감안하더라도 우리의 실업률은 매우 낮고 국내경기는 활황국면의 정점을 향하고 있다.좋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과소비억제등 총수요관리를 통한 성장의 내실화가 절실한 시기임을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 떠오르는 휴전론(6·25내막/모스크바 새 증언:19)

    ◎“전세 불리”… 김일성,중·소 극비 방문/북경 이어 모스크바서도 “휴전유익” 의견 일치/소,대미협상 우위 노력 중 비행사단 투입 요구 전황이 크게 불리해지는 가운데 모택동은 전선이남으로 불시공격을 가해 적에게 타격을 가한 뒤 신속히 북으로 후퇴하는 식의 게릴라전법을 써보자고 스탈린에게 제의했다.그러나 스탈린은 이 전법이 한두번은 써먹을 수 있으나 위험부담이 커 그 이상은 곤란하다고 답했다.『영·미군은 금방 이 작전을 눈치챌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북으로 후퇴하기 전 큰 손실을 입게 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스탈린은 한번에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총공세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스탈린이 51년 5월29일자로 모택동에게 보낸 이 전문내용은 다음과 같다(전문번호 N3282.소련군총참모부 제8총국.대통령문서소 보관). ○“대규모 작전 필요” 이런 전술은 공격작전완료 뒤 주력군이 안전하게 철수하도록 후방방어를 훌륭하게 해줄 전력을 갖추었을 때 가능함.그러나 본인이 아는 한 인민군은 그런 전력을 갖추지못했음.영·미군은 북진하면서 차근차근히 새로운 방어선을 확고히 구축할 것임.이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 것이며 이 또한 바람직한 일이 아님.모동지가 중국공산당이 장개석군대를 상대로 이 전술을 구사했음을 참고로 든 데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음.영·미군은 장개석군대 같은 오합지졸군대가 아님을 명심하기 바람.그들은 모동지가 임의대로 자기들의 병력을 하나하나 궤멸시키도록 절대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임.만약 평양이 다시 적의 수중에 떨어진다면 이는 조선인민군의 사기저하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적의 사기를 크게 올려주는 결과를 초래할 것임.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대규모의 전면작전을 준비해야 할 것임. 6월에 접어들며 전황이 점차 더 인민군에 불리해지고 있는 가운데 모택동은 스탈린 앞으로 다음의 전문을 보냈다.6월4일자로 팽덕회가 모앞으로 보내온 전황보고서였다.특기할 것은 이 보고서에서 팽이 전력의 열세가 점차 뚜렷해져 정면대결의 승산이 희박하다고 보고 적의 후방에서 게릴라전을 시작하겠다는 뜻을 밝힌 점이다(전문번호 N20406). 적은 다량의 포·탱크·항공기를 동원해 공세를 계속하고 있음.반면 아군은 이에 맞설 확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지 못했음.7월말까지 소총·대전차포·대공무기를 추가공급받으면 적극적으로 게릴라투쟁을 전개하겠음.적이 병력을 대규모로 증가시키지 않고 아군이 예측치 못한 작전미스를 범하지 않는다면 전선을 평양이남에서 저지할 수 있음.…중략… 적이 대규모의 병력·항공기·탱크·막강한 포를 보유한데다 사기까지 드높아 현상황에서 적을 차례로 격파하기는 쉽지 않음.따라서 적의 후방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해 전력을 흐트러뜨릴 필요가 있음.적이 전진할 때까지 당분간 기다렸다가 전진하면 후방에 게릴라부대를 투입시키겠음. 그러나 바로 같은 날 팽덕회는 전병력에게 총퇴각명령을 하달했다.이 명령문은 『전선이 너무 확대됐다.수송수단이 부족해 식량·탄약보급조차 힘들다.병력은 지쳤고 이제 남으로 더 진격하는 것은 너무 힘들다.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제5차 공격작전의 제2단계를 예정보다 앞당겨 종결짓고 병력을 제5차 작전의 제1단계를 시작한 지점으로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그곳에서 1개월 반 내지 2개월동안 병력을 재정비,강화한 다음 새로운 전투에 대비,훈련을 쌓도록 하겠다』는 비장한 어투를 담고 있다. ○휴전추진 모에 맡겨 팽덕회로부터 이 퇴각명령문을 보고받은 모택동은 이의 사본을 같은 날 즉각 스탈린에게 보고했다(대통령문서소.전문번호 N20412.모택동이 스탈린앞으로 보낸 전문). 명령문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이 휴식기간에 중국의용군사령부는 다음 사항을 이행한다.…중략… (2)우리군 내부에 심각히 만연된 우익풍조를 일소함.…중략… (4)항공기·대전차예비병력·대공포부대를 전선에 투입시킬 준비를 갖춤.(5)적의 후방에 게릴라부대 투입,전선을 확장해 적의 전력을 분산시킴.그렇게 해서 향후 아군 주력군이 작전을 펼치는 데 용이하게 함.아군병력은 6∼7일간 진격하고 나면 식량·탄약이 부족해지고 병력은 지치기 시작했음.반대로 적은 미리 대규모 기계화병력을 준비해 아군의 공격작전시 진격과 퇴로를 모두 중도에서 차단했음.우리는 이런 점을 미리 고려치 못했음.도보로 걷는 아군은 차량으로 이동하는 적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음. 이런 이유 때문에 공세작전 수행시에도 1차·2차·3차의 방어선을 만들어야 했음.새로 전선에 투입되는 병력은 훌륭한 장비를 갖춘 적을 상대로 싸운 경험이 없었음.특히 방어전경험은 전무했음.하급지휘관들의 질이 특히 형편없었음.기술적으로 잘 무장된 적을 상대로 용기 하나만으로 맞서 싸울 수는 없음.용기와 합리적인 리더십이 함께 갖추어져야 함.모택동 동지는 소규모전투에서 적을 패배시킴으로써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나아가 대규모패배를 안겨주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주문했음.지금같이 모험적인 공세를 계속하는 적을 상대로 해서는 이같은 전술이 가장 바람직한 것임. 이 명령문은 게릴라식 소규모전투를 통해 적을 괴롭히자는 전술변화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총퇴각결정이었다.이후 중·조선연합군은 적극적 방어전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이같은 상황악화로 인해 중공·인민군은 마침내 탈출구를 모색하기에 이른다.휴전문제가 북조선·중국 양측에서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스탈린도 이를 무시할 다른 방도가 없었다.물론 휴전협상을 모색하면서도 동시에 전력을 강화하고 한치라도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한 소규모전투를 계속 수행해나갔다.아울러 이들이 내건 휴전협상조건도 매우 비현실적이고 적극적인 협상의지를 담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스탈린은 또한 자신이 직접 휴전협상에 나서기를 거부하고 이를 모택동에게 맡겼다.아울러 전쟁이 파장기미를 보이며 스탈린과 모택동 두 사람 사이에는 소련의 군사적 지원과 군사고문단 추가파견문제를 놓고 줄다리기가 벌어졌다.모택동은 끊임없이 새로운 원조요청을 내놓았고 스탈린은 갖은 이유를 달아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려고 했다.팽덕회의 철수명령이 떨어진 바로 이튿날인 51년 6월5일모택동은 스탈린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띄웠다(대통령문서소 보관.전문번호 N20448.소련군총참모부 제2총국). ○“최소 8개사 보내라” 필리포프 동지께.조선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재정문제,바로 우리국경에서 군사작전을 벌이는 문제,적이 바로 우리 영토 후방에서 상륙작전을 벌이는 등 여러 심각한 문제를 겪었음.조만간 고강 동지를 모스크바로 파견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동지의 지시사항을 듣고자 함.현재 김일성 동지가 북경에 와 있음.김일성동지도 고강 동지와 함께 스탈린 동지를 찾아가 이 문제들을 의논하고 싶어함. 이 전문에 이어 김일성은 고강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했다.전쟁중 고위지도자의 동정과 관계되는 일은 모두가 극비였지만 특히 이 당시 김일성이 북경을 방문해 모택동을 만났고 이어서 모스크바로 가 스탈린을 만난 사실은 지금까지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극비사항이다. 김일성·고강의 방문을 받은 뒤 스탈린은 모택동 앞으로 전문을 보내 방문결과를 통보해주었다(51년 6월13일.스탈린이 모택동에게 보낸 전문.전문번호 N3557). 오늘 본인은 모택동 동무가 보낸 대표단과 조선대표단(김일성과 고강)을 만났음.이 자리에서 3가지 문제가 제기됐음.첫째 휴전문제.현상황에서 휴전은 유익하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음.둘째군사고문단문제.군사고문단이 그렇게 필요하다면 보내주겠음.셋째 60개 사단에 필요한 무기공급문제.우리는 이에 반대하지 않음.대표단들이 귀국즉시 동지께 보고할 것이기 때문에 상세한 사항은 이 전문에서 언급치 않겠음. 이와 함께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중국 비행사단 16개중에서 최소 8개 비행사단을 신속히 전선에 투입해줄 것을 요청했다.조만간 시작될 휴전협상에 앞선 일전에 대비하기 위한 전력강화의 일환이었다. ◎새로 발혀진 사실/김,51년 6월초 모·스탈린과 연쇄 대좌/휴전협상 문제 북·중·소 협의사실 판명 우리는 스탈린과 모택동의 전술적 이견이 단순치 않았다는 점을 이번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모택동은 장개석군대와의 내전때와 같은 게릴라전술을 주장하였으나 스탈린은 영미군은 장개석 군대가 아니라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대규모의 전면적인 작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이것은 ⑴전쟁의 결정 ⑵중국군의 참전문제 ⑶전세 역전 후의 북한정부의 구제여부 ⑷참전중국군에 대한 지원문제등한국전쟁과 관련한 결정적인 문제에 있어서 자주 이견을 보여온 스탈린과 모택동이 휴전회담의 개시를 놓고 다시 한번 의견의 차이를 보였음을 의미한다. 자국의 병력으로 싸우기 때문에 모택동은 제한적인 전쟁을 하려했던데 반해 배면에 숨어서 중국군과 북한군으로 하여금 싸우게 하고 있는 스탈린은 대규모의 전쟁까지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회의 내용에서 밝혀진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전쟁중 김일성의 북경과 모스크바 방문사실이다.전쟁중 김일성이 북경과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모택동과 스탈린을 만났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특히 그것이 휴전협상의 개시를 앞둔 시점이었다는 점에서 전쟁중의 휴전협상의 개시가 이들 공산3국의 깊숙한 논의와 합의하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전쟁을 결정할 때와는 달리 김일성은 이번에는 모택동을 먼저 방문하고 그다음에 스탈린을 방문하는 순서를 밟았다.아마도 스탈린의 결정을 수용하여 그대로 전쟁을 수행하기보다는 직접 참전하여 공동으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모택동의 견해를 먼저 들어 둘의 의견합치를 본 뒤에 이를 갖고 스탈린의 의견을 묻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북한의 전쟁 결정과 진행이 중국 및 소련과의 긴밀한 협의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을 들어 전쟁중 언젠가 김일성이 모택동과 스탈린을 방문하지 않았을까 추론을 하기는 하였으나 그동안 이를 증명할 자료는 물론 이러한 사실조차 한번도 증명되거나 공개된 적이 없었다.따라서 이번에 공개된 사실은 앞으로 한국전쟁을 연구하는데 있어 매우 중대한 기여를 할 것이 틀림없다 하겠다.
  • “갱목 껍질·지하수로/16일간이나 버텼다”

    ◎광산에 매몰 구조 양창선씨를 통해본 「한계」/외부와 연락 가능했던게 가장 큰 힘/정신적 의지가 생명 연장여부 관건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생존자에 대한 구조 작업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지난 67년 충남 청양군 구봉광산에 매몰됐다 16일만에 극적으로 구조된 양창선(64·충남 부여읍)씨가 세인들의 기억에 되살아나고 있다. 이제부터는 인간으로서 견딜 수 있는 한계 상황을 극복하는 사람만이 생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최후의 한사람까지도 구조작업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점에서 양씨의 사례가 관심을 모으는 것이다. 구봉광산 배수부에서 막장의 물을 퍼내는 일을 했던 양씨는 67년 8월22일 하오9시 지하 1백25m 갱안에 갇혔다. 막장 안을 받치던 갱목이 너무 오래돼 썩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갱안에 갇힌 그가 처음으로 한 일은 6·25때 해병으로 참전해 통신 업무를 담당했던 경험을 살려 플래시의 건전지,망가져 뒹굴던 군용 전화기 등을 이용해 불을 밝히고 갱밖으로 연락을 취하는 것이었다. 외부와의 연락이 가능했던 것이 생명을 부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다른 매몰 사고의 예를 보더라도 「살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더라면 16일을 견뎌낸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는 천장 벽으로 흘러내리는 물을 헬멧으로 받아마시고 작업복에 스며있는 풀과 갱목의 껍질을 빨아먹으며 연명했다. 매몰 사고 당시 1백75㎝,62㎏이었던 그는 결국 45㎏이라는 피골이 상접한 몸으로 구출됐다. 6·25때 한쪽 눈을 잃어 원호대상자이기도 한 그는 전투를 하면서 1주일 이상 굶은 경험이 생환에 도움이 됐다고도 했다. 또 82년 9월3일에는 강원도 태백시 태백탄광에서 채탄작업을 하던 전재운(당시 47세)씨 등 4명의 광원이 매몰 사고 발생 14일만에 극적으로 생환했다. 93년 8월17일에는 강원도 태백시 연화동 한보에너지 통보광업소의 여종업(당시 32세)씨가 지하 2천1백88m에 매몰됐다가 사고발생 91시간만에 구출되기도 했다. 양씨 등은 당시 한결같이 『같은 상황이라면 육체적인 어려움보다 꼭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명력의 연장 여부를 결정한다』고 강조했다.
  • 신생한국의 경제상황(새로쓰는 한국현대사:25)

    ◎귀속재산 민간불하로 재벌 자본축적 첫발/산업시설 북 편재… 저성장·인플레 시련 신생대한민국의 경제정책은 자본주의경제를 원칙으로 하는 통제경제체제를 채택했다.다시 말하면 국가의 종합적 경제목표와 정책하에 이루어지는 자유경제체제론 이었던 것이다.이는 세계 자본주의 여러 국가에서 나타난 일종의 수정자본주의체제라고 할 수 있다. ○미,“자립자족 불가” 진단 대한민국의 수정자본주의체제 채택은 불가피한 것이었다.그 하나가 새로 건설되는 한국경제는 일제의 유산을 안고 출발한다는데 있다.일제지배하에서 한국경제는 일본경제의 한 지체로 형성되어 일본공업과의 계열하에 존재했다.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한국경제는 일본과 단절되었고 38선을 경계로 북한과는 분리되었다.이러한 상황에서 정부의 종합적인 경제계획과 목표 없이는 국민경제 발전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것이다. 미군정기 미국의 원조는 한국경제에 부분적인 기여는 했으나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지는 못했다.그래서 정부수립 당시 한국의 경제기반은 취약할 수 밖에 없었다.특히 산업부문에서 모든 분야가 북한에 편재된 상태였다.중화학공업의 경우 생산액 대비 남한은 20%에 불과했다.그리고 전력은 8%,철광은 0.1%,석탄은 0.3%에 지나지 않아 남한지역이 북한지역에 비해 19 50년대 말까지 국민소득이나 경제성장에서 뒤지는 요소가 되었다. 한국의 경제가 암담했다는 사실은 대한민국이 출범하기 전해인 19 47년 9월에 작성한 미 대통령특사 A C 웨드마이어중장의 「한국의 정치·군사 상황에 대한 보고서」에 잘 표현되었다.이 보고서는 남한이 수출을 통해 투자와 복구계획에 재정을 염출할 가능성은 자세히 고찰할 필요도 없다는 식으로 잘라말했다.그리고 현재의 생산으로는 어떠한 자본의 증식도 기대할 수 없다고 예측했다.이어 한국의 경제안정을 위해 매년 1억5천만달러의 원조가 필요한 것으로 본 이보고서는 원조가 이루어지더라도 남한경제를 자급자족으로 이끌 전망은 없다고 결론지었다. ○면방직공업 일찍 재기 1948년의 공식통계에는 1인당 국민소득액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그해에 수출액은 7천2백만달러였지만 수입이8천8백60만달러에 이르렀다.수출품이라야 텅스텐,구리와 같은 약간의 광석과 인삼,우뭇가사리(한천)와 같은 수산물 일부였다.우뭇가사리는 국제시장에서 수요가 대단했다.일제시대에는 국내에서 가공하지 못했는데,말하자면 해방이후 전략수출품으로 가공에 성공한 식품이다.텅스텐도 해방후 비로소 개발한 신종수출품으로 19 46년 기준 생산량이 3백76t에 불과하던 것을 49년 말에는 1천4백5t으로 끌어올렸다. 대한민국은 헌법을 통해 국영과 공영기업의 범위를 상당히 넓혀잡았다.헌법 제86조는 「주요한 운수·통신·금융·보험·전기·수리·수도·가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고 규정했던 것이다.그러나 규모는 보잘 것이 없었다.전력의 경우 19 48년 총발전용량은 6만㎾에 지나지 않았다.19 48년 5월 14일 북한의 단전영향은 정부수립 이후에도 계속되어 전력난이 심각했다. 미군정하에서의 통화량 급증,공급물자의 부족,운송난등이 계속 악성으로 이어졌다.그래서 물자유통이 빡빡했다.5백11만t의 화물수송능력을 겨우 갖춘 철도역시 영세하기 짝이 없었다.그리고 화차 9천3백18량,증기기관차 6백56대를 보유했을 뿐이었다.그 무렵 전국의 자동차는 1만4천7백여대로 집계되고 있지만,연료가 없어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철도의 여객수송 능력은 연간 6천1백12만명 밖에 안되어 교통대란이 뒤따랐다. 공업분야에서는 면방직공업이 비교적 일찍 재기했다.이 면방직공업은 정부수립 후 정부의 특별지원으로 시설이 개선되어 6·25전란 전까지 방적기 31만6천5백72추,직포기 9천75기를 보유할 수 있었다.면방직공업이 다른 사업을 앞질러 일찍이 조업을 재개할 수 있었던 까닭은 면방직업이 갖는 몇가지 유리한 여건에 연유한다.일제 때에 전시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목화경작이 정책적으로 장려되어 목화솜을 자급자족할 수 있었던 것이 그 이유의 하나다.또 조업기술이 단순하여 기능공 훈련이 용이했다는 점에도 있다. 한국의 면방직업은 해방전에도 이른바 민족기업이 참여했던 사업이다.따라서 관리경험과 기술을 축적한 사람들이 다른 공업분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았다.이에 힘입어 해방당시 잠시 휴업했던 민족기업 경성방직은 1945년 9월에 이미 조업을 재개했다.또 적산이던 종연공업의 후신 전남방직,고려방직등 5대 적산방직은 6·25전란 이전에 기존의 생산능력을 회복했다. 우리는 여기서 종연공업과 같은 적산재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미군정은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귀속재산을 일단 국가자본화한 뒤에 한국 독점자본형성에 기여했기 때문이다.또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중소민간자본은 미군정기에 불하과정을 거쳐 한국인 민간자본 형성을 부추겼다.19 47년에 들어와서 도시기업과 소기업체를 불하하기 시작한 미군정은 기업체와 부동산 2천2백58건(계약고 2천6백51만4천원)을 처리했다. ○귀속재산 3,053억 어치 미군정이 대한민국 정부에 이관한 귀속재산은 1948년 기준 3천53억3천1백만원어치에 해당하는 엄청난 것이었다.이 가운데 국영화나 공영화한 금융,보험,주택,식량,전매,전화,토지관리 업체를 제외한 기업체만도 1천8백12개에 달했다.이들 귀속재산은 한국정부가 불하했다.이 과정에서 한국인 산업자본가들이 탄생되었다.이는 일제말기 자본가 형태의 변화를 가져왔다.다시 말하면 상업자본가에 뒤져 있던 사업자본가가 우위에 이르는 동시에 재벌의 자본축적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소련과 북한으로 부터 늘 공격적 선전대상이 되었던 토지개혁은 농지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정부가 맡아 처리했다.농지개혁은 1949년 6월 21일에 제정,공포한 농지개혁법에 따라 50년에 착수되었다.한국인 지주들이 소유했던 농지 32만2천㏊와 귀속농지 29만1천㏊를 합해 모두 61만3천㏊에 달했다.이들 농지는 91만8천5백48호의 농가에 돌아가 경자유전을 어느 정도 실현했다.지주들에게는 지가증권을 주어 귀속재산 불하에 참여시키는 한편 분배농가에 대한 땅값은 정부가 지가상환미를 통해 거두어들였다. ○농지 61만㏊ 농가 분배 농업생산에 필수적인 화학비료의 자급능력은 턱없이 모자랐다.남한 소요량의 90%이상을 공급했던 흥남질소비료공장은 북한에 있었다.당시 남한에는 삼척산업 삼척공장,조선화학비료공장 인천공장,왕자제지 목포공장에서 비료를 생산했다.그러나 생산능력은 흥남질소비료공장연간생산량(70만t)의 6%인 4만2천t이 고작이었다.이에 따라 구제원조인 GAROA원조 중에 비료가 큰 몫을 차지했다.이 원조를 통해 1946∼47년까지 31만t,정부가 수립된 1948년에는 46만t의 비료를 도입했다. 해방공간 3년간의 통화량 증대와 이에 따른 물가폭등은 가히 살인적이었다.정부수립 전해인 1947년 12월 말 현재 전년대비 88.5%에 해당하는 3백33억8천8백만원의 화폐가 발행되었다.대한민국 탄생 직전 2·4분기에는 2.5%로 둔화되었지만 이른바 「해방 인플레」여파는 계속되었다. ◎47년 서울 직업별 인구통계/제조업 가동률 급락… 실업률 11.6%/주부 29% 상업 8% 일용근로자 6.8%순/미확인자 포함땐 실질실업률 26% 넘어 주한미군 군정청(USAMGIK)이 19 47년 3월을 기준으로 조사한 수도 서울의 직업별 인구통계가 발견되었다.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이 미공문서보존기록관리국에서 찾아낸 이 문서는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맞물린 시기의 직업통계라는 점에서 다음해 갓 태어난 한국의 경제가 어떤 상황에서 출발했는 지를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서울의 15세이상 인구 숫자는 77만9천8백90명으로 집계되었다.직업에 대한 비율을 보면 가정주부(29.2%),미확인(15.1%),실업자(11.6%)가 19개 항목 가운데 가장 큰 비율을 차지했다.이 가운데 미확인 항목을 실업자 군(군)에 포함시키면 실제 실업률은 26.7%가 훨씬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실업률이 높았던 것은 해외와 이북으로 부터 유입된 인구 가운데 노동가능 인구가 대부분 실직상태에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그리고 이 무렵 남한의 1만65개의 각종 산업제조업체의 가동률이 해방전에 비해 44%(4천5백개 업체)로 떨어졌다.이에 따라 노무자는 59%인 19만1천4백14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이 발굴한 이 자료는 당시 직업 가운데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 직업은 상업 8.2%,일용노동자와 학생 각각 6.8%,공업 6%,사무원 4.2%,공무원 3.2%등으로 나타났다. 이 항목에는 고리대금업을 직업으로 분류해 끼어넣었는데,그 비율은 0.1%로 조사되었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부국장급 ▲이용원 문화부 기자▲김성호 문화부 기자 ▲김경운 조사부 기자
  • 인공기 달면서 쌀 줄순 없다(사설)

    굶주리고 있는 북한동포들을 돕기위해 우리쌀 2천t을 실은 우리국적선 씨 아펙스호가 청진항에 정박해 있는 동안 북한측의 도선사가 마스트에 인공기를 게양하게 한 것은 결코 용납할수 없는 행위다.그것은 북한정권이야말로 믿을수 없는 집단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입증해준 것이기도 하다. 모든 선박은 게양된 국기로 국적을 표시한다.선박이 외국항구에 입항할때에는 상대방국기를 마스트에 게양하고 자국기는 선미에 다는것이 국제적인 관례다.그러나 남북한은 북경쌀회담에서 우리정부의 「인도적인 입장」과 북한당국의 「체면」을 고려,우리배가 북한항구에 입항할때는 아무국기도 달지 않기로 합의했다.그런데도 북한은 이 합의를 일방적으로 깨버렸다.북한을 민족공존의 동반자로 돕겠다는 우리정부의 선의를 외면한 행동이 아닐수 없는 것이다. 북한 당국은 뒤늦게 삼천리총회사를 통해 연락이 잘 안돼서 일어난 실수라고 변명했으나 일개 회사가 나설 일이 아니다.실수에서 빚어진 것이라면 북한의 책임있는 당국자가 공식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해야한다.그러지 않을 경우 우리정부는 추가 쌀지원을 중단하기로 했으며 28일·29일 쌀 8천t을 싣고 청진항으로 떠났던 3척의 배를 회항시켰다.또 나웅배 부총리는 30일 북한당국이 성의있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면 7월중순으로 예정된 2차 쌀회담이 무산될 수 있음도 시사했다. 인공기는 북한의 깃발이지만 우리는 이것을 단순히 북한을 상징하는 표상으로 보지 않는다.그 깃발에는 동족상잔의 비극적 기억이 얼룩져 있기 때문이다.6·25를 겪은 세대에게는 증오와 비탄의 의미로 남아있다.우리 배에 인공기를 달게 한 것은 참을 수 없는 도발행위다.우리 정부는 북한의 위반행위를 철저히 따져야 하며 북한당국은 진심으로 뉘우치고 다시는 그런일이 없을 것임을 분명히 약속해야 한다.국민의 자존심을 생각하더라도 가볍게 넘길 일이 결코 아니다.
  • 한대병원 임협타결 어제부터 정상근무

    한양대병원 노사분규는 28일 노조측과 병원측의 임금협상이 타결됨에 따라 농성 5일만인 이날 낮 12시부터 정상화됐다. 노사 양측은 이날 ▲해고된 차수련 위원장의 2년내 원직복직 ▲총액기준 기본급 6.25%(4만1천원) 인상등에 합의했다.
  • “조순씨,차지철과 깊은 교분”/조후보 「전력」시비 2라운드

    ◎차씨 전비서/“TV토론 거부는 「과거」은폐 의도”­민자/“허위사실 유포… 구시대 악습 재연”­민주 여야는 투표일을 하루 앞둔 26일에도 민주당 조순 서울시장후보의 전력을 놓고 치열한 설전을 계속했다.민주당은 이날 민자당의 박범진 대변인과 이신범 부대변인,무소속 박찬종후보의 이상용 대변인을 검찰에 고발했고 민자당과 박후보측은 『충분한 자료를 갖고 있다』며 공세의 수위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3공 때 차지철 청와대경호실장의 비서관을 지낸 H씨는 이날 『조순씨는 차실장과 가까운 관계였고 국기하강식 때 참석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고 밝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민자당은 선거운동 마지막날인 이날도 박범진 대변인 김정숙 부대변인등이 나서 조순 서울시장후보의 전력을 계속 거론하며 민주당측의 고발조치를 비난했다. 박범진 대변인은 『민주당은 조후보의 전력과 정직성에 문제를 제기한 우리당 대변인단을 고발하겠다고 했으나 선거가 끝나면 곧 취하할 것』이라면서 『이는 투표일을 앞두고 급한 불을 끄자는 책략일 뿐이며 재판을 하게 되면 조후보의 부끄러운 과거가 낱낱이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박대변인은 또 『조후보가 자신의 과거문제에 정직하지 못한 데 대해 괴로워하고 있다고 듣고 있다』면서 『정직하지 못한 거짓말쟁이에게 서울시 살림을 맡겨서는 안된다』고 역공을 가했다. 박대변인은 이날 저녁으로 예정됐던 SBS­TV 토론을 조후보가 거부한 것에 대해 『이는 서울시민의 마지막 판단기회를 가로막는 비겁한 행위』라면서 『그것은 최근 6·25당시 강릉상고 교사시절의 공산주의 활동과 유신독재 정권과의 유착관계등 자신의 부끄러운 전력이 폭로되어 추궁을 받을 것이 두려워 이를 회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정숙 부대변인도 『조후보는 유신독재 시절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접근하는 등 유신권력에 아첨했고,좌에서 우까지 권력지향으로 일관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면서 『김대중 이사장은 박찬종후보등 다른 후보의 흠을 잡기에 앞서 자기가 영입한 조후보의 전력부터 바로 알아야 할 것』이라고 비난했다. ○…민주당은 이날도 조순후보에 대한 전력시비와 관련,대대적인 반격을 가했다.이미 예고한 대로 민자당의 박대변인과 이부대변인을 명예훼손과 허위사실 유포혐의로 이날 서울지검에 고발했다.반박의 목소리도 잇따랐다. 민주당은 이번 사안에 대해서는 끝까지 문제삼겠다는 자세다.더이상 용공음해로 피해를 입지 않겠다고 강조한다. 당사자인 조후보도 이날 기자회견에서 『완전한 허위사실을 갖고 유인물과 사진까지 배포하는 등 과거 수십년간의 나쁜 수법이 다시 등장했다』고 목청을 돋운 뒤 『여당이 아직까지 이런 수법을 사용,선거에 영향을 미치려한다는 것에 연민의 정을 금치 못한다』고 말했다. 조후보측은 또 조후보를 『인민공화국에 충성한 사람』이라고 비난한 무소속 박찬종후보의 이상용 대변인도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했다. ○…3공 때 차지철 경호실장의 비서관이었던 H씨(53)는 이날 『30경비단의 국기하강식은 우연히 들렀다 참석할 수 있는 행사가 아니다』라면서 『당시 조후보는 차실장의 초청으로 7∼8명의 교수와 함께 참석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조후보등 교수들은 차실장이 국회 외무위원장이던 시절부터 교분을 갖고 있던 사이』라고 전하고 『차실장은 가끔씩 이들 교수들을 초청해 점심이나 저녁을 같이 하며 교분을 유지했다』고 말했다. 그는 『조후보가 TV토론에서 왜 차실장과 교분이 있었던 일을 수치스럽게 감추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다시 매주 금요일의 국기하강식에는 국무위원들이 한번 참석했고 스틸웰 주한유엔군사령, 조교수등 자문교수단, 박찬종의원도 참석했다』고 전했다.
  • 중·북한군 사기 저하(6·25내막/모스크바 새 증언:18)

    ◎모,스탈린에 “장기전 대비책 강구” 요청/연합군 재반격에 “수년간 싸울 준비 필요” 전문/모스크바,중의 게릴라 전법 비판… 전술적 이견 제4차 공세작전을 펼 뜻을 나타낸 모택동의 전문을 받아본 스탈린은 이틀 뒤인 51년1월30일 모택동 앞으로 답전을 보내 그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밝혔다.서울과 제물포는 반드시 사수하고 공격작전은 계속돼야 한다는 내용이었다.같은 날 스탈린은 모택동과 김일성 두사람 앞으로 같은 내용의 전문을 보내 다음 사항을 함께 논의하자고 제의했다.북조선군 사단수를 대대적으로 축소,재편성하자는 충격적인 제의였다(소련군총참모부 제8총국.전문번호 N651). 1.현북조선사단은 지난해 여름의 사단보다도 전투력이 떨어짐.당시 북조선사단은 10개 사단에 충분한 장교가 있었고 잘 훈련된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음.현재 북조선은 28개 사단에 이중 19개 사단은 전선에,나머지 9개 사단은 만주에 주둔중임.이렇게 사단수가 많으면 장교를 충분히 배치시킬수 없음.이것이 지금 북조선사단들의 산만하고 불안정·비효율적인 주원인임.북조선측은 사단수에만 집착,질이 중요하다는 점을 잊고 있음. ○“5개사단 감축” 제의 2.따라서 사단수를 23개로 줄이는 것이 바람직함.줄어드는 5개 사단 소속 장교와 병력은 나머지 취약한 사단에 보충시킬 것.4개 인민군 여단도 전투력이 미미하기 때문에 장교·사병을 사단강화용으로 전용시킬 필요가 있음. 3.현단계에서 병단사령부를 별도 설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음.병단을 지휘할 장교수가 태부족이고 또한 군사령부가 이미 설치돼 있기 때문임.각각 4개 사단으로 구성되는 5개 군사령부를 조직하는 게 더 바람직함.이럴 경우 인민군은 5개군(총20개 사단)과 3개 예비사단으로 구성됨.이 3개 사단은 총사령관 직접지휘하에 두어 작전기간중 다른 군 소속 사단을 지원케 함.물론 시간이 지나 지휘관들이 충분한 경험을 쌓고 숫자도 늘어나면 그때 병단체계로 돌아갈 수 있음.이 군조직개편은 지금 당장 하는 게 아니라 작전이 끝난 뒤 휴식기간중에 추진하자는 것임. 그러나 이 전문을 받은 평양의 소련대사관은 이를 김일성에게 곧바로전달하지 못했다.1월31일 내각 부수상 김책의 사망으로 김일성의 심기가 매우 불편해 있었기 때문이다.대신 평양주재 소련대사가 자신의 견해를 보내왔다.모두 13개 항목으로 정리된 이 전문내용을 요점만 소개한다(전문번호 N500316sh). 스탈린동지의 북조선군 전력에 대한 평가는 전적으로 타당함.인민군내에서 이미 사단수 감축조치가 진행중임.북한군이 사단수에만 집착,질이 형편없다는 스탈린 동지의 지적은 타당하나 현상황에서 이들을 도와줄 적절한 방도가 없음.가장 심각한 쪽은 해군임.불과 3척의 함정을 보유하고 있으나 모두 소련에 정박중이고 이를 운용할 해군병력·장교수가 태부족임.특히 북조선에서는 매사를 차근차근 따져보지 않고 무계획적으로 진행하는 습관이 있음.병단 체계는 종전 후에 도입하는 게 바람직함… 이 답전을 받고 스탈린이 만족할 리가 없었다.그는 2월3일 평양주재 대사관으로 다시 전문을 띄워 인민군 편재개편에 관해 보낸 1월30일자 전문을 조속히 김일성에게 직접 보여주고 그의 반응을 보고하라고 재촉했다.이튿날 평양대사관은 김일성과 만난 회담결과를 즉시 스탈린 앞으로 보고했다.예상대로 김일성은 스탈린의 제의에 별다른 이견을 달지 않았다.특기할 점은 김일성이 여기서 다음 공세작전시기를 51년 2월7일부터 13일사이로 잡아 스탈린에게 보고했다는 점이다.김일성은 이 공세작전 이후 사단·군 감축등 추가군편제개편을 단행하자고 스탈린에게 건의했다. ○“미 소모전 전개 예상” 그러나 이후 연합군의 반격이 보다 조직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북한쪽의 사기는 크게 위축되기 시작했다.2월10일소련군 해군사령관은 스탈린 앞으로 보낸 전문을 통해 미군의 상륙작전개시가 임박했다는 정보보고를 올렸다.2월7일부터 미해군 극동사령부와 한국 근해에 파견된 해군전선 사령관들 사이의 전파교신횟수가 급속히 늘어났고 2월9일에는 동서해안에 많은 수의 미군전함이 출현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가운데 모택동은 3월1일자로 스탈린 앞으로 장문의 전문을 보내 상황의 심각성을 상세히 알리고 이에 대한 대책마련을 요청했다.그 대책은 다름아닌 장기전에 대비하자는 것이었다(전문번호 N17255). 필리포프 동지께.현재 북경에 잠시 머물고 있는 팽덕회 동지로부터 들은 조선상황과 관련,본인의 입장을 전하는 바임. 1.심대한 패배를 당하지 않는 한 적군은 조선에서 물러날 것같지 않음.그리고 이들에게 큰 패배를 안겨주기까지는 다소의 시간이 필요할 것같음.장기전이 전개될 가능성이 생겼으며 최소 2년은 더 싸울 대비를 해야 할 것같음.적은 우리를 소모전으로 몰고가려 하고 있음.적의 목적은 한편으로는 전선에서 우리 병력이 휴식을 취하거나 전력재정비할 여유를 주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세한 무기를 이용해 소모전으로 이끌려는 것임.동시에 해군함대를 이용해 조선해안을 쉴새없이 공격하고 있고 아군 통신시설에 대한 적의 공습이 계속되고 있음.전선에 대한 물자보급이 60∼70%만 당도하고 나머지는 모두 적의 공습에 도중 파괴되고 있음.추가병력은 전선에 투입되지 못하고 전선병력은 물자보급을 받지 못해 앞으로 1개월 반 후면 적군이 38도선 지역에서 공격작전을 다시 전개할 수 있을 것임. 2.장기전에 대비해중국군은 중단없는 병력투입(편집자주:인해전술)전술을 구사하겠음.이에 대비해 이미 의용군 3개 그룹을 결성해 1개 그룹씩 차례로 전선에 투입키로 결정했음.현재 조선에서 전투에 참가중인 9개 병단(30개 사단)이 제1그룹임.중국내에 있는 6개 병단과 조선에 주둔중인 다른 3개 병단을 합쳐 9개군단(27개 사단) 제2그룹을 만듬.현재 중국영토에 있는 10개 병단(30개 사단)으로 제3그룹을 만들어 6월경 전선에 투입할 예정임.지금까지 4차례의 작전에서 중국군은 전사·부상등 합쳐 10만명의 인명피해를 입었음.이를 보충하기 위해 12만명을 새로 충원할 예정임.금년도와 내년도에 중국군 30만명의 추가인명피해를 예상하고 있음.병력 계속투입을 위해 30만명을 추가차출할 계획임. 인민군조직과 관련,팽덕회는 김일성에게 현재의 8개 병단을 6개 병단으로 줄일 것을 권유했음.각병단은 1만명으로 구성되는 3개 사단으로 짜도록 권했음.아울러 해안·주요도시 방어를 위해 5개 여단을 창설하도록 요청했음. ○지상군의 열세 인정 3.오는 4월초 의용군 제2그룹의 9개군단이 전선에 투입되기 전까지 지상군 우위는 적이 차지할 것같음.따라서 그때까지는 공격작전을 펴지 않는 게 좋음.이 기회를 이용해 적이 1개월 내지 1개월 반 뒤에 공격을 취할 가능성이 있음.만약 적이 다시 서울을 장악하고 38도선을 넘어올 경우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것임.미리 이에 대비할 필요가 있음. 4.현재 우리가 고전하는 주이유는 적이 화력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임.우리는 보급수송이 취약해 보급물자의 30∼40%가 적의 공습을 받아 도중에 유실됨.4∼5월중 10개 항공여단이 전투에 투입될 것으로 기대함.지금까지는 조선에 마땅한 비행장이 없음.지상에 눈이 쌓여 있어 아직 보수작업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음. 결론적으로 우리는 수년간에 걸친 장기전에 대비해야 함.미군을 몰아내지 않고서 조선문제는 해결될 수 없음. 당신의 지시를 기다리며.볼셰비키의 인사를 전하는 바임.모택동. 그러나 이 간곡한 청원을 받은 스탈린은 무려 보름 뒤인 3월15일에야 답전을 보냈다.모택동의 공군지원요청을 마지못해 수락하면서 스탈린은 끝까지 소련공군기를 전선에 직접 투입하는 것은 피했다.즉 중국 안동지역에 전투기 1개 사단을 보내줄 테니 그곳에 있는 중국공군 전투기 2개 사단을 전선으로 빼내가라는 것이었다.안동에 있는 이 중국군 전투기 2개 사단도 사실은 벨로프장군이 지휘하는 소련 전투기사단이었다. 이 무렵 스탈린·모택동 두사람은 전술문제를 놓고 다소의 이견을 빚고 있다.즉 모택동이 전선에서 치고빠지는 식의 게릴라전법을 구사하겠다고 한 데 대해 스탈린이 이를 한반도사정에 적절치 않다는 이유를 들어 매우 신랄히 비판한 것이다. ◎새로 밝혀진 사실/북 28개 사단중 9개사단 만주 주둔/스탈린·모 「연합군 대응전술」 마찰 51년 1월30일의 스탈린 전문을 보면 북한군의 당시 시점에서의 병력의 규모와 위치가 나타나 있다.총 28개사단이다.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28개 사단중 9개사단이 만주에 주둔중이라는 사실이다.중국군의 참전 이후 북한군은 전쟁의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군대가 만주로 이동하였었다.전면적으로패퇴한 북한군은 이 만주를 근거지로 하여 재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그동안 미군의 정보문서에만 나타나 있었을 뿐 소련과 북한은 물론 중국의 공식문서에서는 비밀로 취급되어오던 사실이었다.이러한 내용이 이번 자료를 통하여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다.이번 회에서 우리는 병력의 가장 구체적인 편제까지 스탈린이 장악,지시하고 있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또한 모택동이 51년 초부터 장기전에 대비하려 하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이미 51년 3월에 모는 『2년은 더 싸울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수년간에 걸친 장기전에 대비해야 한다』고 언명하고 있는 것이다.흥미롭게도 실제의 전쟁은 이로부터 2년을 더 끈 뒤에 종결되었다.끝으로 스탈린과 모택동 사이에 대응전술의 이견이 존재하였다는 점도 처음 밝혀진 사실로서 앞으로 많은 규명을 요하는 부분이다.그들은 소련공군과 무기의 지원문제만이 아니라 실제의 전쟁수행방식을 놓고도 이견을 보였던 것이다.물론 이러한 내용 역시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 정전협정 파기 위협/박재범 정치부 기자(오늘의 눈)

    대북 쌀제공협상이 마무리단계에 접어든 지난 22일.북한측은 최근들어 거의 매주마다 가져온 판문점 참모급(일직장교)회담에서 뜻밖의 발언을 했다. 『25일을 기해 정전협정 파기선언을 하겠다』 북한군 인민대표부 유영철 상좌(중령)는 카운터파트인 유엔군사령부 흘러리중령에게 『유엔측은 지난해 미군헬기 조종사 송환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방북한 미국 허바드특사가 약속한 북·미간 장성접촉을 계속 회피하고 있다』고 지적한뒤 『앞으로 더이상 장성접촉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말한 끝에 이같이 밝혔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한·미 양국은 6·25발발 45주년이자 전쟁발발시 처럼 일요일인 25일,북한이 어떤 상징성을 확보하기 위해 모종의 조치를 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초긴장상태에 들어갔다. 유엔사와 국방부는 또한 대북경수로 제공문제가 어느정도 매듭지어지고 대북 쌀지원논의가 한창인 시점에 북측이 과연 무엇을 획책하는 것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정보수집 및 분석능력을 총동원,해답찾기에 나섰다. 마침내 북측이 예고했던 25일.유엔사와국방부 관계자들은 대부분 휴일임에도 정상출근,하루종일 북측의 움직임을 주시했으나 북한은 별다른 변화없이 「조용하게」 지나갔다. 다만 북한은 이날 관영 중앙통신으로 보도된 노동신문사설을 통해 『정전체제가 마비상태에 있다』고 주장하고 『한반도에서 무력증강과 전쟁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새로운 평화보장체계 수립이 절실하다』고 강조한 것이 전부였다. 북한 정부기관지 민주조선도 이날 『한반도평화는 미국에도 이롭다』면서 평화협정체결을 촉구했다. 유엔사와 국방부는 이같은 북한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북한의 「정전협정 파기 예고선언」이 평화협정체결과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종전 전략을 되풀이하면서 강도를 다소 높인 「엄포」라고 결론지었다.이와함께 최근 쌀지원 수용등에 반발한 강경파의 목소리를 반영한 것이라는 의견도 대두됐다.그러나 이번 북측 태도를 지켜본 관계자들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한가지였다.역시 북한은 알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 한국쌀의 대북메시지(사설)

    우애의 쌀 2천t이 북녘으로 갔다.6·25 45주년을 맞는 날 태극기 휘날리는 「씨 아펙스」호에 실려 출발했고 26일 하오4시께 청진항에 닿았다.쌀보내는 일이 정해진 지 한이레도 안되어,북측의 받을 준비가 오히려 주춤거릴만큼 빠른 발걸음으로 보내진 이 압도적인 기동성에 우리도 놀랐다. 나락상태의 쌀을 도정하는 일,아무 인식표도 없는 부대를 만들고 거기에 쌀을 담는 일,그것을 출발지인 동해항구까지 도착시키는 일,그리고 선적하는 일을 이렇게 일사불란하고 기민하게 진행시킬 수 있었던 것은 뭐니뭐니해도 우리의 국력을 말해주는 일이다.거기에 북녘동포의 허기를 덜어줄 수 있는 화급한 일을 한시간이라도 빨리 진행하려는 동포애가 온 국민의 일심한 정성으로 모아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인 것이다. 한민족에게 쌀은 그냥 양식이 아니다.그것은 백성의 신앙이고 나라의 근본이었다.그것 없으면 정치도 사상도 빈사에 이르고 국가경영에 실패하는,아무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양식이다.우리네 조상은 허연 낟알이 버려지는 일을 용서하지 않았다.이외경스러운 곡식을 우리가 북에 보낸 것은 남쪽 동포의 땀으로 지은 이 정성의 낟알이 배곯는 형제들의 허기를 채우기만을 바라서인 것이다. 그러므로 따뜻한 우애로 포장된 이 쌀에 담긴 뜻이 모쪼록 그대로 북쪽에서 펼쳐지기를 간절히 바란다.금방 찧은 우리쌀은 밥을 지으면 기름이 자르르 흐른다.동포끼리만 아는 그 윤기나는 차진 「이팝」맛이 마음을 움직여,까닭도 없이 남쪽을 비방하고 헐뜯는 오랜 북측의 행동을 고치게 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이 쌀이 동포의 허기를 메우는 일 이외의 것에 쓰인 흔적이 우리에게 발견되지 않기를 바란다.북으로 쌀이 가면 군량미가 되어 남쪽 가슴을 겨냥하는 일을 거들게 될 것이라 걱정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그런 혐의를 북측은 다 벗지 못했다.이번 쌀이 그걸 벗게 하는 기회이기를 우리는 진정으로 소망한다.
  • 조순 후보 전력 시비/“사퇴 마땅”·“흑색선전” 여·야 격렬공방

    ◎조 후보·경호실 관계 교수들이 밝힌 것­민자/“전대통령 스승까지 용공이라니” 반박­민주/인공부역→DJ수하… 무차별 권력지향­무소속 여야는 25일에도 민주당 조순 서울시장후보의 전력시비를 놓고 격렬한 공방전을 벌였다.민자당은 이날 『조후보가 6·25때 부역하면서 세가지 직책을 맡았다』고 주장하며 직책명을 구체적으로 제시했고 민주당은 『흑색선전』이라고 맞받으며 민자당의 박범진 대변인과 이신범 부대변인을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여기에다 무소속의 박찬종 서울시장후보진영도 민자당과 같은 주장을 펼치며 조후보의 분명한 답변을 요구하는 등 민주당이 제기한 박후보의 「유신지지」 전력에 대한 역공을 펼쳤다. ▷민자당◁ ○…조후보측이 박범진 대변인과 이신범 부대변인을 검찰에 고발조치하자 『법정에서 흑백을 가릴 일』이라면서 시비가 확대될수록 손해볼 것 없다는 분위기. 박대변인은 『공인은 자신의 경력과 관련해 이의를 제기할때 해명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조후보를 겨냥한뒤 『유신때 청와대경호실장과 함께 국기하강식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자문교수단에 참여했던 많은 교수들의 얘기를 종합해서 밝힌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대변인은 민주당에 의해 고발당한 것과 관련,『재판을 하면 많은 동료교수들의 명예를 훼손시킬뿐 아니라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가 낱낱이 모두 밝혀질 것이므로 선거가 끝나면 취소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신범 부대변인은 이날 『조후보는 6·25때 강릉농업학교 교사시절 교직원 동맹위원장,민청위원장,문화동맹위원장 등 세가지 직책을 맡아 공산주의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공격의 고삐를 더욱 조였다. 이부대변인은 이같은 전력시비 공방에 대해 『민주당이 먼저 다른 후보의 전력을 문제삼고 나섰기 때문에 우리당도 조후보의 의문스런 전력에 대해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주당◁ ○…조후보의 중학시절 남로당가입설과 3공의 차지철 청와대경호실장 비밀자문교수단 참여주장을 명백한 흑색선전으로 규정,민자당의 박범진 대변인과 이신범 부대변인을 명예훼손 및 허위사실 유포혐의로 형사고발하는등 강경 대응방침을 정했다.조후보측의 정대철 선거대책위원장과 이해찬 본부장은 이날 기자회견을 갖고 『남로당은 지난 46년12월23일 생겼고 조후보가 경기중학을 그만둔 44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면서 『전두환·노태우 두전직대통령과 이춘구 민자당대표를 가르친 스승이자 국가 일급비밀을 다루는 부총리와 국고의 열쇠를 책임지는 한은총재를 지낸 조후보를 용공으로 몰아가는 것은 지나친 흑색선전』이라고 주장했다.또 『비밀자문교수단 참여주장도 전혀 사실과 달라 진실을 가리기 위해 고발조치를 취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박지원 대변인도 논평에서 『당선이 확실한 조후보에 대해 없는 사실까지 만들어 인신공격을 하고 있는 반면 박찬종 후보 싸안기와 정원식 후보 버리기라는 국민들의 선택을 왜곡하는 반국민적 작태를 서슴지 않고 있다』고 공격했다.박대변인은 『이로써 민자당이 과잉반응을 보였던 박찬종 민자당입당설,즉 이충범 시나리오는 현실화됐고 민자당의 진짜후보는 박후보임이 드러났다』고 덧붙였다. ▷박찬종 후보◁ ○…선거대책본부의 이상용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인민공화국시절 교육동맹위원장으로 시작하여 3공·유신·5공과 6공을 지나 김대중선생 수하에 들기까지의 무차별적 권력지향은 그를 초야의 선비로 한때 존경한 많은 사람의 가슴을 황량하게 하고 있다』고 조후보를 맹비난했다.이대변인은 『조후보는 더이상 출세주의 기회주의로 지자제의 신성함을 더럽히지 말라』면서 조후보의 사퇴를 촉구하기도 했다.
  • 서울 「빅3」 휴일 총력전(“열전” 6·27선거 D­1일)

    ◎“한표라도 더 줍자” 동분서주/대세 이미 결판 났다… 국립묘지 참배­정 후보/“무소속 시장 무책임… 시정혼란” 지적­조 후보/“조 후보되면 DJ가 상왕행세 한다”­박 후보 민자당의 정원식,민주당의 조순,무소속의 박찬종 후보 등 서울시장후보 「빅3」는 투표일을 이틀 앞둔 25일 휴일을 맞아 권역별 연설회 및 거리유세 등을 잇따라 갖는 등 막바지 총력전을 펼쳤다. 선거전 자체가 박빙양상인데다 조후보에 대한 전력시비 및 그에 따른 고발사태 등으로 긴장감이 극도로 고조된 가운데 세후보진영은 각자 승리를 장담하며 선거전의 승패를 최종적으로 좌우할 부동표흡수를 위해 안감힘을 썼다. ○공원 찾아 지지 호소 ▷정원식 후보◁ ○…이날 6·25발발 45주년을 맞아 서울시의 구청장후보들과 국립묘지를 참배한뒤 조찬을 함께 하면서 마지막까지 결전의 고삐를 늦추지 말 것을 당부했다. 정후보는 이어 충현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전날 서울시정위원장에 내정한 이명박 의원 등과 함께 동호대교의 안전상태를 돌아보았다.이 자리에서 정후보는 「현대건설 신화의 주역」인 이의원의 「현장감」을 은연중 과시하는 한편 휴일을 맞아 한강시민공원을 찾은 유권자들에게 악수공세를 펼치며 지지를 호소했다. 이날 하오에는 이의원과 함께 문래공원·장충단공원·신일고 등 3곳에서 강남과 중부,동북부지역의 지구당이 합동으로 마련한 정당연설회에 잇따라 참석,이의원이 사실상의 러닝메이트인 시정위원장에 내정된 사실을 알리며 지지분위기 확산을 유도했다. 정후보는 『서울시장에 출마하면서 돌가루와 탄가루를 뒤집어쓰는 한이 있어도 소신껏 밀고 나가겠다고 다짐했다』며 강력한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이명박 의원은 찬조연설에서 『정후보가 당선돼야만 나의 경험을 시정에 반영할 수 있다』며 『서울시정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또 최형우 의원은 『대통령에 당선될 자신이 없으니까 내각제로 정권을 잡겠다는 욕심을 내고 있다』고 김대중 아태재단이사장을 비난한뒤 김종필 자민련총재에 대해 『나에게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자행한 유신본당』으로 몰아세웠다. 이세기 서울시선거대책위원장은 『오늘 드디어 정후보가 선두로 나서기 시작했다』고 소개하면서 『대세는 이미 결판났다』고 주장했다. 연설회에는 민주산악회원 4백여명이 중앙에 포진,『정원식』 연호를 선도하는 가운데 에어로빅강사 5명이 로고송에 맞춰 율동을 펼쳐 유세장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한편 이명박 의원은 이날 상오 기자간담회에서 조순 후보가 러닝메이트로 이해찬 의원을 지명한 것과 관련,『이의원이 의원직을 버려야 하는 정무직 부시장을 수락한 것은 조후보가 당선되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시민들과 즉석 대담 ▷조순 후보◁ ○…조후보는 이날 상오9시 부인 김남희여사와 함께 동작구 국립묘지를 참배한뒤 도봉산입구와 용산가족공원,서울역앞 광장등에서 유세를 갖고 『현정권은 정치를 공작으로만 알고 있다』고 비난했다. 조후보는 『현정권은 정치를 통해 국민을 편안케 해주지 않고 공작을 통해 고통만을 안겨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민자당이 패색이 짙어지자 자기당의 대표를 가르친 은사에게까지흑색선전을 한다』고 남로당 입당 등 자신의 전력에 대한 민자당의 주장을 반박한뒤 『이번 선거에서 승리,현정권에 대한 평가를 확실히 하자』며 지지를 호소했다. 조후보는 또 이동중에 드림랜드와 대학로 등 길거리에서 시민들과 즉석 대담을 갖고 교통,환경,안전문제에 대한 자신의 공약을 밝혔다.조후보는 『무소속시장이 당선되면 서울시정이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강조한뒤 『국민을 살리고 깨끗한 정치를 할 수 있도록 「포청천 조순」을 뽑아달라』고 당부했다. 특히 25개 구청장 및 시의원후보가 모두 참석한 서울역앞 광장에서 조후보는 『현정권은 대기업에까지 압력을 가해 직원들을 선거원으로 이용하려 한다』고 주장하고 『진정한 지방자치제를 위한다면 중앙정부의 「대리인」이나 「책임없는」 무소속은 낙선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차기대권 출마 시사 ▷박찬종 후보◁ ○…이날 상오 7시30분 도봉산입구에서의 「아침인사」를 시작으로 우이동 도선사입구와 잠실 롯데백화점,명일동 해태백화점,청량리역 광장,전농동 매봉근린공원 등에서 잇따라 유세를 갖고 막판 표다지기에 전력했다. 박후보는 『지방살림꾼을 뽑는 이번 선거가 중앙정치인들의 개입으로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등 점차 혼탁해지고 있다』며 『여야를 가릴 것없이 총체적인 중간평가를 내리자』며 지지를 호소했다. 그는 『주민자치를 실현하는 선거에 지역등권론이나 내각제는 무엇이고 국가보안법이나 핫바지론은 왜 나오느냐』며 김대중 아태재단이사장과 자민련의 김종필 총재를 비난했다. 박후보는 또 조순 후보를 겨냥,『세속에 초연한 선비인척 하지만 자신의 어두운 과거에 대해서는 「모르는 일이다」「우연히 그렇게 된 일이다」 등으로 발뺌하고 있다』면서 『조후보는 호국영령과 4천2백만 국민앞에 떳떳이 사죄하든가 후보직을 사퇴,지자제의 신성함을 더럽히지 말라』고 조후보를 집중 공격했다. 박후보는 이날 잠실유세를 마친뒤 기자간담회를 갖고 『성공적인 서울시장이 되면 예비적 국가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차기 대권출마의사를 시사했다. 한편 박후보진영의 조해진 부대변인은 이날 조순 후보를 겨냥,논평을 내고 『조후보가 당선되면 서울시청의 상왕부가 동교동에 설립되고 서울은 DJ의 내각제 대권구도의 교두보가 되며 조후보는 그의 충실한 대리인으로 DJ 청와대입성 전략의 디딤돌이 될 것』이라며 『결국 1천1백만 시민을 인질로 잡은 피비린내 나는 패권다툼이 벌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이해찬 의원을 정무직부시장으로 지명한데 대해 『대권쟁패전의 선발대로 파견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 「통일의 소망」 뱃고동에 싣고…/씨 아펙스호 청진항으로 떠나던날

    ◎남녘 동포애 한시라도 빨리 전달됐으면…/「우리의 소원」 가락속 힘찬 출항/실향민들 “마음도 함께…” 눈시울 【동해=조성호 기자】 「우리의 소원은 통일…」 25일 우리 쌀을 싣고 북한으로 떠나는 씨 아펙스호를 환송하는 동해항에 통일을 염원하는 「우리의 소원」이 울려퍼졌다. 국민들은 『6·25 발발 45주년을 맞은 바로 그 날 북한에 쌀을 보내게 돼 감회가 깊다』며 『하루 빨리 북한 동포들에게 골고루 나눠졌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중앙 부두에서 비가 내리는 가운데 하오 5시부터 시작된 「우리 쌀 북한수송 출항행사」는 통일원 송영대 차관의 경과보고,농림수산부 최인기 장관의 「정부양곡 인도증」 전달 등에 이어 화동 김상년군(10·송정국교 3년)이 김예민 선장에게 꽃다발을 걸어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20분만에 끝났다. ○…씨 아펙스호는 5시20분 쯤 북평고교 밴드부가 연주하는 「우리의 소원」에 맞춰 고동을 울리며 출항했고,시민들은 박수와 환호로 환송. 행사장에 나온 표성례 할머니(73·동해시 천곡동 주공 5차아파트)는 『6·25 전쟁이 한창이던 28살 때 남편과 함께 월남,동해시에서 살았다』며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또 『평양에는 남동생을 비롯한 친인척들이 많이 산다』며 『쌀을 싣고 가는 배에 내 간절한 마음도 함께 실어 보내고 싶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이모와 함께 부두에 나온 황선아양(9)은 『우리나라가 자랑스럽다』며 『하루 빨리 통일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동해항은 행사시작 30분전인 하오 4시30분부터 갑자기 번개와 천둥이 치는 등 폭우가 쏟아지다 출항 뒤인 하오 5시30분 쯤 그쳤다. ○…빗속에서도 씨 아펙스호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아 행사장 주변 곳곳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기도. ○…씨 아펙스호는 행사에 앞서 환송객들을 위해 7개의 화물창고 가운데 1개를 활짝 열어 화물칸에 실려있는 쌀을 공개해 박수를 받았다. ○…동해시청은 행사 준비를 위해 상오 비상연락망을 통해 전 공무원을 출근시켰고 동사무소는 출항하는 씨 아펙스호를 보려는 주민들을 위해 군용 및 관용버스,쌍용양회 동해공장의 통근차 등 23대의 버스를 동해항 노선에 긴급 배치. ○…우리 국적선으로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한 항구에 입항하는 「씨 아펙스」호는 동해항을 떠나 12마일 밖 영해까지 해양결찰대 소속 경비정 4척의 호위를 받았다. 그 이후에는 해군 함정이 레이더로 항로를 점검하며, 북한 영해에 들어서면 북한 당국의 지시를 받게 된다. 씨 아펙스의 항해거리는 약 2백80마일(약 5백30㎞)로 최고 12노트로 달려도 목적지인 청진항까지는 24시간 이상 걸린다.
  • 「6·25」 그날 우리는 쌀 보냈다

    ◎씨 아펙스호 어제 동해출항 오늘 청진입항/“남북화해 새 이정표”/이 총리/15만t 8월10일까지 모두 제공 북한에 제공하기로 약속한 쌀 15만t 가운데 2천t을 실은 첫 배인 「씨 아펙스(Sea Apex)」호(선장 김예민)가 25일 하오 5시20분 강원도 동해항에서 북한의 나진항을 향해 출발했다. 남성해운 소속의 우리 국적선인 3천t급 「씨 아펙스」호는 약 24시간의 항해를 거쳐 26일 저녁 늦게 나진항에 도착할 예정이다. 「씨 아펙스」호에 선적된 쌀은 93년산 일반미로 북한측의 요청으로 아무 표시를 하지 않은채 40㎏들이 폴리프로필렌(PP)부대로 포장됐다. 「씨 아펙스」호는 당초 지난 24일 하오 4시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23일 북경에서 열린 대한무역진흥공사와 북한의 조선삼천리총회사간의 실무협상에서 북한측이 나진항의 인수준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수송을 늦추어 줄 것을 요청해 이날로 연기됐다. 당초 씨 아펙스호는 나진항을 향해 떠났으나 이날 하오 9시5분(우리시각) 쯤 북한조선삼천리총회사의 북경대표부가 대한무역진흥공사에 「도착항구를 청진으로 바꿔달라」고 요청했으며,우리 정부도 씨 아펙스호에 도착항을 바꾸도록 지시했다. 정부는 「씨 아펙스」호에 이어 오는 30일 마산항에서 2천t,군산항에서 2천5백t,목포항에서 3천5백t등 모두 8천t의 쌀을 실어 북한으로 보낼 예정이다. 정부는 25일 북경 실무협상에서 북한측과 맺은 계약에 따라 오는 8월10일 이내에 제공하기로 약속한 15만t 전량을 북한으로 수송할 계획이다. 또 북한은 하역에 필요한 모든 자료를 오는 28일까지 우리측에 통보하기로 했다. 대한무역진흥공사는 박용도 사장과 북한 조선삼천리총회사의 김봉익 총회장이 25일 북경에서 이러한 내용이 포함된 쌀제공 계약서에 합의,서명했다고 발표했다. 한편 정부는 「씨 아펙스」호의 출항에 앞서 이홍구 국무총리 최인기 농림수산부장관 박재윤 통상산업부장관 오명 건설교통부장관 송영대 통일원차관 김철용 해운항만청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공무원 시민 학생등 1천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동해항 중앙부두에서 「우리 쌀 북한수송 출항행사」를 가졌다. 이날 행사는 국민의례,송통일원차관의 경과보고,국무총리 격려사,최농림수산부장관의 정부양곡 인도증 전달,김항만청장의 출항허가서 전달,김선장에 대한 화환 증정,「우리의 소원은 통일」 합창,출항 기적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총리는 격려사를 통해 『이번 대북 곡물 지원은 남북관계의 역사에 하나의 소중한 이정표를 마련한 것』이라면서 『남과 북이 화해협력의 정신을 바탕으로 책임있는 당국간의 협의를 거쳐 해결해 나간다면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능히 풀 수 있다는 훌륭한 선례를 만들어냈다』며 『이번 대북 쌀 지원이 남북간에 화해와 신뢰를 쌓아 교류협력이 본격화할 수 있는 뜻깊은 계기가 되기를 충심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대북 쌀제공 계약서 요지 ▲계약서명과 동시에 남측은 첫 선박을 출항시키며 나머지 잔량은 95년 8월10일이내에 북측에 제공한다. ▲포장은 정미 40㎏단위 PP부대로 하며 포장에는 일체 표시를 하지 않는다. ▲제공되는 쌀의 품질은 습도 1.5%이하,파쇄율 5.0%이하 등 한국 농산물 검사규격에 준한다. ▲5천t이상급의 남측 선박으로 수송해 청진항 나진항 등의 북측에 인도하며 필요시 제3국 선박이용도 가능하다. ▲남측은 하역항 도착시까지 수송선박에 관련된 비용을 제공하고 북측은 항만비용과 하역비를 부담한다. ▲북측은 남측 선박 선원의 신변안전과 선박의 무사 귀항을 보장하며 필요한 편의도 제공한다.
  • 특별취재팀 기자방담(“열전” 6·27선거/D­1일)

    ◎통합선거법 위력… 「돈 안쓰는 선거」 정착/“이번처럼 「돈구경」 못해본적 없다”/TV토론 열기속 유세장은 한산/공명의지에 부천시장후보 넷 구속/지역감정 촉발하는 구호 유포 여전 전국을 들끓게 했던 지방선거전이 26일로 끝난다.전국에서 1만5천여명의 후보자들이 당선 고지를 향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유권자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사상 처음 동시에 치러진 4대 지방선거였지만 전체적으로는 깨끗한 선거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그러나 아직도 지역감정 중앙정치바람 흑색선전등 고쳐야할 문제점은 남아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이번 선거현장을 취재한 전국의 지방자치기획취재팀의 방담을 통해 이번 선거과정에서 드러난 현상과 문제점들을 짚어 본다. ­지방선거투표일이 이제 이틀앞으로 다가왔습니다.이번 선거의 의미는 역시 사상 처음으로 4개 지방선거가 동시에 치러진다는 점입니다.전면적인 지방화시대를 위한 선거인 셈이지요. ­이번 선거에서 분명한 변화는 「돈안쓰는 선거」가 점차 정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부산에 가보니 민자당의 한 사무처요원이 「엄살」을 피우더군요.10년이 넘게 선거를 경험해봤지만 이번 선거처럼 「돈구경」을 못해본 적이 없었다고요. ­동감입니다.「후보진영에서 흘린 자금에서 3분의 1만 유권자에게 돌아가면 성공작」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이번에는 나오지 않았잖아요.그만큼 뿌린 돈이 별로 없다 보니 중간에 새나가는 돈도 없을 수 밖에요. ­지방선거에 대한 유권자들의 무관심도 한번 짚어 보아야 할 대목인 것 같습니다.투표일이 불과 이틀밖에 안 남았는데도 혼전지역이 많고 부동층이 40%를 넘어 각 후보진영을 안타깝게 하는 경우도 있지요. ­한 야당의원은 이런 말을 하더군요.주민들에게 「제가 누구 누굽니다」하고 인사를 건네고는 「이번에는 우리 당후보를 밀어 주셔야죠」라고 하면 주민들은 「밀어 드려야죠.그런데 후보가 누구지요」하고 되묻는다는 겁니다.그나마 시·도지사후보는 각 지역 텔레비전의 토론회가 활발히 열려 비교적 알려져 있는 있는 편이나 특히 지방의원후보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고 투표하는 유권자는 거의 없을것이라는 한탄이었습니다. ­이번 선거의 특징으로는 역시 유세장의 퇴조와 TV등 대중매체의 위력 발휘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당원에 대해 총동원령을 내린 야당의 일부 집회를 빼고는 대부분의 유세장 청중 규모가 1천명을 넘지 못했잖아요.여야가 막판 팽팽한 접전을 벌인 충북과 강원 경기도 일대 시도지사 후보연설회장을 돌아 보니 당총재 또는 대표가 참석했음에도 2백∼3백명밖에 청중이 모이지 않아 실무진이 당황해 하는 예가 많더군요. ­통합선거법으로 인해 금품살포등 선거법위반은 크게 줄어 들었으나 돈은 묶고 말은 푼다는 정신에 따라 역대 어느 선거보다 말잔치가 풍성했지요.또 선거 방법에서 PC통신 이용,자원봉사자 활동이 두드러지게 늘어난 것도 변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그러나 선거가 막판으로 접어들면서 흑색선전 폭력등으로 크게 혼탁해지는 양상을 보였고 각 후보자들이 주로 시장통등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장소에서 개인 유세를 하는 바람에 교통소통장애 상인들의 장사에 지장을 주는 사례도 빈발해 항의를 받기도 했습니다.­그동안 호남지역은 황색바람으로 일컬어지는 DJ바람의 영향으로 야당후보들이 싹쓸이하는 선거결과를 가져왔으나 이번 선거에서는 영향이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상당히 약화된 듯해 민주당 관계자들을 긴장시키고 있는 상황입니다.더구나 DJ의 후보지원 유세장 청중도 예전에 비해 크게 줄었고 전북지역에서는 오히려 역DJ바람이 부는 현상도 보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선거때만 되면 후보자들이 향응을 제공하는 바람에 음식점들이 반짝경기를 누렸으나 이번에는 오히려 손님이 없어 업주들이 울상짓고 있는 실정입니다. ­수안보 온천 관광지는 관광객수가 예년에 비해 30%이상 줄었다는 상인들의 주장입니다. ­또 유세장에서의 흥청거림이 사라졌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예전 같으면 선거때마다 으레 먹자판이 뒤따랐었지만 이런 풍토가 거의 사라진 것입니다.이는 통합 선거법이 워낙 까다로운데다 선관위나 경찰들의 감시가 엄했고 대부분의 후보자와 유권자들이 자숙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밖의 변화라고 한다면 종전 여당공천자들은 집권당의 프리미엄을 등에 업고 있어 여러모로 유리했으나 이번 선거전에서는 이같은 풍토 또한 사라졌다는 것입니다.반대로 야당은 선거법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는 반응입니다.여당의 조직이 예전처럼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지 못해 상대적으로 약한 야당의 조직력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음식점 손님 격감 ­어느 때보다 당국의 공명의지가 돋보였는데 경기도 부천의 경우 시장후보 4명이 유권자들에게 금품을 제공한 혐의로 무더기로 구속되는 등 찬바람이 일 정도였습니다.민자,민주등 주요후보들이 한꺼번에 구속된 것은 아마 선거사상 처음있는 일로 기록될 것입니다. ○전북 역DJ 바람 ­지방선거가 대권전초전등 중앙정치의 대리전으로 변모하고 망국적인 지역감정이 지방선거의 본질을 흐리고 있습니다.또 갈수록 후보자들의 전력시비등 흑색선전이 난무,선거풍토를 혼탁하게 했지요. ­「신판 관권선거」「공천장사」등 신종 용어까지 등장했잖아요.「관권선거」라는 말은 그전에는 여당의 전유물처럼 인식되지 않았습니까.그런데 이번에는 없어지는가 했더니 민자당 전남도지부에서 『공무원이 민주당 선거운동을 돕고 있다』면서 「신판 관권선거운동」시비를 제기하기까지 했습니다.민주당이 여당행색을 한 셈이죠.그래서 민주당 공천을 따기 위해 검은 돈 거래가 있었다는 등 끊임없이 시비가 일었지요. ­「멍청도」와 「핫바지」는 이번 선거에서 충청도의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대표명사가 됐습니다.「자민련」의 유세장에서는 언제 어느곳에서든 이 말을 들을 수 있었으니까요.오죽하면 민자당의 박중배 충남도지사후보는 『자민련후보는 네사람이 됐건 아홉사람이 됐건 「멍청도」「핫바지」밖에 모르느냐』고 하더군요. ­김대중 이사장이 민주당후보의 지원유세를 본격화하면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정치권의 최대 쟁점이 되었습니다.지방선거의 본질과는 동떨어진 정계복귀시비,세대교체,지역등권론,내각제 개헌등 이슈만도 엄청났습니다. ­사실상 이번 지방선거는 김이사장의 현실정치 참여로 「신3김구도」가 쟁점으로 등장했으며 이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게 중론입니다. ­호남권과 충청권,대구·경북등지가 이번 지방선거를 통해 부산·경남의 지역패권을 극복하자는 게 김이사장 주장의 「지역등권론」주장의 요지입니다.그러나 그의 주장은 이기택 총재 뿐만 아니라 이부영·노무현 부총재등이 지역분할기도라면서 정면 반박,당내에서도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더욱이 김이사장의 전면 등장으로 민주당뿐 아니라 정치권 전체의 판도가 변화할 가능성도 높아졌습니다.김이사장과 자민련의 김종필 총재가 손을 잡고 이총재와 이부영·노무현 부총재등 당내 반DJ파가 당을 뛰쳐 나가 여권과 보조를 맞출 것이라는 가상 시나리오가 인구에 회자하고 있습니다. ­유세때마다 김이사장은 「나와 여러분은 하나다」라는 말을 계속했습니다.물론 지역적으로 하나라는 말은 아니었지만 은연중에 호남표 결속을 유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그런데 하나 눈여겨 볼 점은 전남과 전북 청중들의 반응이 다르다는 점입니다.일례로 광주의 청중들은 손을 머리위로 올려 박수를 칩니다.열렬한 환영이죠.그러나 전주의 청중들은 훨씬조용했어요. ­워낙 후보자들이 많다 보니 유권자들의 혼란은 물론 후보자들간의 흑색선전,자질시비도 있었지요. ­서울시장 「빅3」의 전력시비도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연일 유신시절 청와대 국기하강식 참석문제,6.25부역설,심지어 남로당 가입설까지 나왔지요.결국 이들 시비들을 가리는 것은 유권자들의 몫이라는 생각입니다. ­어느 지역에서 3파전을 벌이고 있는 각 후보는 상대후보에 대한 「음해성 선전」을 골고루 하나씩 퍼뜨렸습니다.여자문제와 건강문제,그리고 조상의 묘를 고향에서 파내 다른 지역으로 옮겼다는 내용입니다. ­부산에서는 4대선거 출마자 가운데 72%가 사기·폭력등 전과기록을 갖고 있어 전과기록공개와 함께 후보자들의 자격요건을 강화해야 한다는 자질검증론이 대두됐습니다.광주지검도 최근 광주·전남지역 입후보자중 전과 경력자가 45%에 이른다고 해당 선관위에 전과조회 결과를 통보하기도 했습니다. ○자질검증론 대두 ­후보진영간에 경력위조 공방을 벌이는 사례가 많았는데 각 후보캠프에는 상대후보가 내건 경력을 쫓아 다니며 확인하는 전문요원이 따로 있을 정도로 상대후보 약점캐기에 주력하고 있습니다.인천 남동구 시의원에 출마한 유종극씨는 지난해 10월 열린 세금비리규탄대회 장면을 찍은 사진에서 한 참석자의 얼굴을 오려낸 뒤 자신의 사진을 부착해 홍보물에 실었다가 상대진영의 고발로 구속되는 패가망신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후보자들의 실현성없는 공약남발도 많아 유권자들이 혼란을 겪고 있지요.일부후보자는 다른 후보의 공약을 그대로 배껴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후보자들이 내놓은 공약을 보면 지역예산으로는 불가능한 사업을 남발하는 부도수표형과 법개정이나 상급기관의 정책결정으로 추진가능한 사업을 해결하겠다는 월권형이 주를 이루었습니다.부산의 모후보는 출신구역도 아닌 다른 구의 그린벨트를 해제,공장 용지난과 주택 용지난 해소에 앞장서겠다는 국가적차원의 공약을 내걸기도 했지요. ­후보들의 공약사항은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 앞으로 추진여부를 점검해야 한다는 유권자들의 지적도 있었습니다.결국 유권자들의 현명한 선택만이 본격적인 지방화시대의 승패가 달려 있다고 결론을 내려야 하겠지요.
  • 북 “정전협정 파기 선언”/유엔사에 오늘 발표 통보

    북한은 최근 6·25발발 45주년이자 일요일인 25일을 기해 정전협정 파기선언을 하겠다고 위협해온 것으로 밝혀져 주목된다. 24일 주한유엔군사령부와 국방부에 따르면 북한은 지난 22일 열린 유엔·북한간 영관급 일직장교회담에서 『25일 정전협정 파기선언을 하겠다』고 일방통보했다는 것이다. 북한측은 이 접촉에서 『유엔군측은 지난해 12월 미군헬기월경사고로 억류된 홀준위의 송환협상시 허바드 미특사가 약속한 북·미간 직접 장성접촉을 계속 거부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앞으로는 장성접촉을 제의하지 않겠다』고 말한 끝에 이같이 통보했다. 한편 유엔사는 이날 성명을 통해 『북한군이 정전협정 파기를 발표할 계획임을 알고 있다』면서 『정전협정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협정관련 모든 국가들의 동의가 있어야 하며 유엔사는 정전협정을 일방적으로 변경·손상·파괴하려는 북한의 모든 시도를 강력하게 거부한다』고 밝혔다.
  • 안보의식 다잡는 김대통령/6·25격전지 방문·참전용사 위로연 참석

    김영삼 대통령은 6·25 45주년을 하루 앞둔 24일 상오 6·25당시 최대 격전지로 꼽히는 경북 칠곡군의 다부동전투 현장에 건립된 「구국용사 충혼비」 제막식에 참석했다.하오에는 서울 신라호텔에서 국내외 참전용사가 초청돼 열린 「6·25 참전용사 위로연」에 참석했다. 김대통령은 최근들어 군부대 방문,군관련 인사 접견 때뿐만 아니라 일반 인사들을 만나서도 안보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김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경수로 및 쌀지원문제가 타결됐음에도 안보의식이 약해지면 남북관계를 주도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고 청와대 관계자들은 설명한다. 김대통령은 이날 충혼비 제막식 치사에서도 『우리의 안보가 튼튼해야만 자신있게 남북대화를 이끌어 가고 우리의 번영과 통일을 힘차게 이뤄 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백선엽 다부동전투 전우회고문 등의 영접을 받으며 전적기념관에 도착한 김대통령은 『55일간이나 계속된 다부동전투는 3만4천여명의 사상자를 낸 가장 처절한 격전이었다』면서 『다부동전투에서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온 침략자들을 섬멸함으로써 6·25의 전세를 바꾸는 분수령이 되었으며 북진의 기틀이 되었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이어 전면에 「구국용사 충혼비」 후면에 「대통령 김영삼 서」라는 친필휘호가 새겨진 충혼비를 제막한 뒤 헌화·분향했다. 김대통령은 전적기념관내 구국관에서 다부동전투 전우회회원 등 참석자 대표 1백20명과 오찬을 함께하며 격려했다. ○…김대통령은 이날 하오 장태완재향군인회장,데이비스 한국전 참전기념사업위원장(미국) 등 국내외 참전용사와 각계 인사 8백40여명이 참석한 「6·25 참전용사 위로연」의 격려사를 통해 『참전용사 여러분의 고귀한 헌신과 희생은 시간과 더불어 더욱 빛나고 있다』고 역설했다. 김대통령은 『참전용사들은 우리 국민의 호국의지와 안보태세를 더욱 강화하는데 지도력을 발휘해 달라』고 당부했다.
  • 오늘 「6·25」45돌/전국서 기념행사

    한국전 발발 제45주년인 25일 국민안보의식 고취를 위한 범국민궐기대회가 서울 장충동 자유센터 운동장에서 열리는 것을 비롯,전국에서 6·25에 따른 각종 기념행사가 펼쳐진다. 대한민국재향군인회(회장 장태완)와 한국자유총연맹(이사장 최호중)이 공동주최하는 범국민궐기대회에는 경제·문화·체육·종교·안보관련 1백여 단체 회원 1만2천여명이 참가한다.
  • 변화기류속 「6·25」45돌(사설)

    6·25전쟁 45돌을 맞는다.이제는 기억도 희미해진 전쟁이지만 동족상잔(동주상잔)의 참담했던 그 아픔과 고통을 세월이 흘렀다해서 어느 누가 잊을 수 있겠는가. 최근 탈냉전의 국제질서속에서도 한반도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있으며 휴전선을 사이에 둔 남북한의 군사적 대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다.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정전상태에 들어가 있는게 엄연한 우리의 현실인것이다. 6·25전쟁은 남북 통틀어 2백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고 전국토를 초토화 하였으며 1천만명이상의 이산가족을 만들어냈다.북에 의해 도발된 적화야욕의 이 엄청난 민족적 비극과 고통에 대해 당사자인 북한정권은 아직 한번도 반성과 사죄를 한 일이 없는 것은 유감이 아닐수 없다. 남북관계는 그동안 「기본합의서」가 채택되고 평양과 서울에서 여러차례 고위급회담을 가졌음에도 북한측의 무성의와 회피로 실질적인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그러나 최근 한국형 경수로 지원과 인도적 차원의 한국쌀제공이 성사됨으로써 남북한 관계의 새로운 변화가예고되고 있음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경수로지원이나 조건없는 쌀제공은 한반도에서의 평화정착을 희구하는 우리정부의 간절한 염원과 순수한 동포애의 발로임을 북한당국은 잊어서 안될 것이다. 북한이 진정한 평화를 추구한다면 순수한 인도주의적 차원의 남북 이산가족상봉과 노부모의 고향방문을 1차적으로 실현시켜야 할 것이다.분단의 땅 저쪽 지척에 부모형제와 고향을 두고 반세기 가까이 오가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통한스런 일인가.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더 이상 미룰수 없는 일이라고 본다. 아울러 북한은 에너지·식량난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회생시키기 위해 남북경제협력에 적극 나설 것을 촉구한다.21세기 아시아·태평양시대에 남북한이 경제협력과 교류를 통해 공동의 번영을 모색하는 일이야말로 세계평화에 기여하고 민족사의 위대한 전진을 기약하는 일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 「6·25」 45돌… 체험과 감회

    25일은 북한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6·25사변을 일으킨지 45주년이 되는 날.이날에 즈음하여 24일 서울에서는 사변으로 졸업장을 받지 못했던 60대 노인들이 뒤늦은 졸업장을 받는가 하면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에서는 어린 국민학생들이 헤엄쳐 강을 건너는등 기념행사들이 펼쳐졌다. ◎대신고 1회동문 29명 명예졸업식/45년만에 받은 고교졸업장/졸업 두달전 6·25터져/학도병 출전… 34명 전사 이날 상오 서울 종로구 행촌동 대신고교 체육관에서는 졸업식을 겨우 두달 앞두고 6·25가 터져 뿔뿔이 헤어졌던 이 학교 제1회 동문 29명이 45년만에 명예졸업장을 받고 눈시울을 붉혔다.50년6월 그때 학제로 중학교 6학년에 다니다 포성소리와 함께 펜을 놓고 학도병으로 달려갔던 노선배들이다. 『그때 마포구 도화동 분교에서 북한군의 남침 다음날인 26일 2교시까지 수업을 받았습니다.갑자기 북한군 비행기가 나타나 운동장과 학교건물에 기총소사를 퍼붓는 바람에 책상 밑에 한참동안 엎드려 있었습니다.그리곤 바로 이별이었죠』 고희를 앞둔동기회장 오세운(67)씨의 회상이다.그때 6학년생은 「갑조」와 「을조」 두학급에 모두 1백20여명.이들 가운데 34명이 전란중 포화 속에 불귀의 넋이 됐고 지금은 40여명만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같은 동기생이지만 이날 학교장으로 졸업식사를 한 이 학교 김한수(62) 교장은 『이제야 1회 졸업생들의 여한을 풀게 됐다』면서 『오래오래 살자』고 흰머리가 성성한 동기생들의 손을 꼭 쥐었다. 회초리를 들고 국어를 가르치던 은사 이경은(73)옹은 『선생님…』하며 고개를 숙인 옛날 제자들과 지나간 세월만큼이나 긴 포옹을 나누었다.이옹은 『거의 반세기가 지나도록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고 오늘 이 자리에서 짇??장을 벗게된 제자들이 자랑스럽다』고 말하다 끝내 목이 메고 말았다. ◎덕수국교생 6백명 수영 도하 행사/한강 헤엄치며 피난고통 체험/선조 아픔 몸으로 느껴/위험 극복·모험심 배워 6·25사변의 곤통을 몸소 체험해보려고 용帝하게 나선 어린이들이 북한강의 차가운 물살을 힘차게 갈랐다. 서울 덕수국민학교 어린이를 비롯한 6백25명의 어린이들이 24일 하오 경기도 양평군 대성리 강나루캠프장에서 「6·25 어린이 한강 헤엄쳐 건너기 대회」에 참가,어른들도 어려운 「도하작전」을 성공시켰다.어린이들에게 6·25의 아픔을 되새기고 전쟁의 의미를 일깨우려고 마련한 이날 행사에는 덕수국민교 어린이 4백44명,덕수유치원 어린이 60명,참가를 희망한 다른 25개 학교 어린이 30명,학교교사,자원지도자등이 참가했다. 행사를 주관한 덕수국민교 옮승평(5s) 교장은 『어린이들이 6월의 거칠고 차가운 북한강을 헤엄치면서 민족의 슬픔인 6·25의 고통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어려움과 위험을 피하기보다 맞서 헤쳐나가는 모험심을 陷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심 10m,거리 6백25m를 건너가는 이날 대회는 하오 2시27분 신교장이 울린 징소리로 막을 열었다. 수영을 못하는 어린이는 보조물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허리에 오색풍선만을 매달고 힘차게 헤엄을 쳤다.접영·평영·배영·자유형등 저마다 그동안 갈고닦은 수영솜씨를 마음껏 뽐냈다.해병대와 서초해병전우회 소속스쿠버대원들의 안전감시아래 열린 이날 어린이들의 작전은 1시간만에 무사히 끝났다.물론 단 한뫙의 낙오자도 없었다. 1등은 덕수국민교 6학년 김하림양(12).김양은 『전쟁이 나서 피란할 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다리가 끊어져서 헤엄을 쳐 건넜던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고 말했다. 이날 50년 서울 탈환 때 중앙청에 태극기를 꽂았던 해병소대장 박정모(71) 예비역 대령이 서초해병 전우회원으로 참가해 많은 어린이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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