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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청혼의 벽/황성기 논설위원

    《저것은 벽/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그때/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 남을 수 없는/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중략…/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개를 이끌고/결국 그 벽을 넘는다.》 시인 도종환은 ‘담쟁이’에서 도저히 넘지 못할 절망 같은 벽을 담쟁이의 생명력, 수천개의 잎과 함께 이끌고 가는 형상에 빗대 희망을 노래한다. 벽. 마음먹은 일이 제대로 안 될 때 “벽에 부딪혔다.”고 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벽을 느낀다.”고 표현하곤 한다. 소통이나 전진을 가로막는 장애물, 자신과 외부를 차단하고 격리하는 유형·무형의 것을 아우른다. 이청준의 단편 소문의 벽도 6·25때 좌우 색출이란 트라우마(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지닌 소설가 박준을 등장시킨다. 자유로운 정신을 억압하는 것들을 총칭해 소문의 벽으로 표현했다. 일본의 의학자 요로 다케시는 몇 년 전 베스트셀러가 된 그의 책 바보의 벽에서 자신이 알고 싶은 것만을 바라보려 하는 것을 바보의 벽이라고 정의하고 벽을 오브제로 썼다. 앞의 것들이 무형의 벽이라면 유대인의 성지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베를린 장벽 같은 것들은 유랑이나 이념대립의 절절한 사연과 역사의 함의를 담은 유형의 벽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벽이 몽땅 어두운 이미지만 지닌 것은 아닌가 보다.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에 가면 한글을 비롯해 세계 여러나라 언어로 ‘사랑해’를 써넣은 사랑의 벽이 있다니 말이다. 서울시가 내년 청계천 두물다리(용두동) 부근에 청혼의 벽을 설치한다고 한다. 재밌는 발상이다. 영상데이터를 칩이 달린 반지에 전송한 뒤 벽에 대면 청혼의 메시지가 재생되는 형식이다. 명소가 될지는 두고봐야 하지만 청혼의 그 숨가쁜 순간에 소통을 차단하는 느낌의 벽이라니 왠지 마음에 걸린다. 청혼마당이랄지, 청혼의 다리랄지, 다른 이름을 생각해볼 여지는 없을까.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김성호전문기자의 종교건축이야기] (17) 금강산 신계사

    [김성호전문기자의 종교건축이야기] (17) 금강산 신계사

    금강산 자락인 강원도 고성군 신북면 창대리에 고즈넉이 앉은 신계사(神溪寺). 갈려진 반도의 북녘에 있어 일반인들의 접근이 수월치 않지만 예로부터 유점사, 장안사, 표훈사와 함께 금강산 4대 사찰로 꼽혀왔던 명찰이다. 정어리 어장으로 유명한 장전에서 출발해 만 가지의 다양한 형상을 가졌다고 하는 만물상으로 가는 길 한편에 자리잡아 금강산 관광객들은 누구나 한 번쯤 들러보고 싶어하는 곳. 바로 앞쪽 기봉, 왼쪽의 응암, 오른쪽의 문필봉, 뒤쪽의 관음봉에 둘러싸여 천혜의 경관으로도 이름높다. 신라시대에 창건된 1500년 고찰이지만 6·25전쟁 중 무차별 폭격을 당해 삼층석탑과 당우 만이 덩그맣게 남아 있던 것을 남북 불교계가 손을 맞잡고 대웅전을 비롯해 건물 11채를 복원해 놓았다. 신계사 창건과 관련된 기록은 일제기에 편찬된 ‘유점사본말사지’의 ‘신계사지’와 1825년 남경 지환 스님이 지은 ‘금강산신계사사적’에 전한다. 이 사료들대로라면 신라 법흥왕 5년(519년) 보운 스님이 창건했으며 신라왕실의 통일정책에 부응하기 위해 신(新)자를 따 지었다고 한다. 실제로 창건 이후 김유신은 진덕여왕 7년(679년) 왕실의 기도를 올린 기념으로 사찰을 중건했고 통일 후인 679년에는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과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이 왕실에 청을 올려 대웅전을 보수한 것으로 전한다. 고려기 국사까지 지낸 대표적 화엄사상가 탄문 스님이 보수했으며 서경천도론을 편 묘청에 의해 중창됐고 조선시대엔 나운(1709∼1782년), 대은(1780∼1841년) 스님 등이 주석하며 숱한 후학들을 배출했다고 한다.18세기 말 무렵엔 30여동의 전각들이 들어설 만큼 흥성했으나 일제기를 거치면서 유점사 말사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6·25전란을 맞아 모든 전각이 소실됐다. 관음봉·문수봉·집선봉·세존봉 등에 둘러싸인 금강산은 전통적으로 화엄경의 법기보살이 머물며 중생을 제도하는 곳으로 알려진 불교계의 성지다. 이곳의 대표적인 사찰 중 하나인 신계사를 되살리려는 노력이 시작된 것은 2000년. 남측 불교계와 북측 조선불교도연맹(조불련)이 사찰 복원을 협의했으나 지지부진하다가 금강산관광이 활성화되면서 본격적인 사찰 되살리기가 시작됐다. 목재며 기와 같은 자재를 일일이 남측에서 날라다 써야 하는 만큼 공사 진행은 무척 더뎠다. 복원공사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분단 세월의 켜만큼이나 달라진 남북의 전통건축 양식과 사고방식이었다. 현장에서 공사를 총지휘한 도감, 제정 스님은 “초창기만 해도 남북의 인부며 전문가들이 한 끼 밥을 같이 먹기에도 힘들었다.”고 털어놓을 정도였다. 전각에 들일 단청 하나를 놓고도 의견 차가 많아 몇주일씩 토의를 해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되살아난 것은 대웅보전과 만세루, 산신각, 극락전, 나한전, 어실각, 칠성각, 종각, 축성전, 요사채 등 건물 11개 동. 요사채 한 동을 마저 짓고 주변정리를 끝내면 복원공사도 모두 마무리된다. 건물은 복원됐지만 원래의 전각 단청이며 주 불상들은 아직 갖춰지지 못한 상태. 일주문이며 천왕문도 보이지 않는다. 대웅전과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모든 전각들이 일렬로 선 채 사찰 문을 대신하는 만세루를 내려다본다. 이 가운데 주 건물인 대웅전은 1887년 김규복이 왕실의 지원을 받아 복원한 사진이 ‘조선고적도보’에 남아 있어 이를 토대로 복원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다포계 팔작지붕을 얹었는데 남한 사찰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장엄하다. 뒷 외벽에 부처님 설법도와 전법도, 앞 벽에 부처님 칠불을 미장처리하지 않은 건식공법으로 붙였는데 남북 합작의 첫 단청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대웅전 서쪽 끝의 어실각은 조선조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사당. 사찰에 사당이라니. 조선조 숭유억불 체제 아래 그나마 왕실의 사당을 모신 탓에 신계사가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다. 인근 표훈사의 본 건물 형태를 그대로 살려 초석과 기단석, 댓돌 등을 온전히 살려냈는데 모래, 황토, 석회를 다진 삼화토(三華土)가 생생하다. 문은 조선조 사당의 전형적인 형태인 삼문(三門) 형태를 띠고 있다. 어실각 바로 옆에 들어앉은 나한각도 특이한 전각.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건축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외견상 한 건물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한전과 조사전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불교적인 시각으로 볼때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부분. 어실각을 둘 만큼 중요한 사찰이었지만 조선 후기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사찰의 위상을 여실히 드러내 보인다. 나한각과 나란히 앉은 극락전은 서방 극락정토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봉안했으며 바로 옆 축성전은 지옥의 모든 중생들을 구제한 뒤 현신하겠다는 원을 세운 지장보살을 모신 곳. 임시로 불상을 봉안했지만 전국의 신도들을 대상으로 모금에 나서 내년 부처님 오신 날 원래의 모습대로 불상을 봉안할 예정이다. 대웅전 앞 삼층석탑은 현재 신계사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유구. 기단에 팔부중과 비천이 부조되어 있다. 통일신라 말∼고려 초쯤 생긴 것으로 금강산 3대석탑 중 하나로 꼽힌다. 빛처럼, 소리를 통해 부처님의 법을 중생에게 가장 빨리 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범종각도 대웅전 앞에 엄연히 자리잡았다. 삼층석탑의 옥개석이며 기둥돌, 대웅전 기단석 등 범종각 옆에 가지런히 놓여진 발굴 유물들도 눈길을 끈다. “신계사는 많은 유물들이 있었으나…야수적 폭력으로 모두 불타 버리고 터만 남았다.-국보유적 제95호 신계사터” 북측이 신계사 터에 세운 표지석 명문이다. 남과 북의 불교계가 사찰 복원의 원(願)을 세우기 한참 전 새겨진 명문이지만 남북 불교계가 합동 작업을 벌여 복원해놓은 신계사의 명문답게 새로 고쳐써야 할 것 같다. kimus@seoul.co.kr ■ 창건설화 들어보니 신계사의 명칭이 언제부터 ‘神溪’로 굳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창건 당시 원래의 이름은 ‘新溪’였다고 한다. 많은 사찰이 창건이나 이름과 관련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듯이 신계사에도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진다. 예로부터 신계사 앞 개울에는 알을 낳기 위한 연어 떼가 몰렸다고 한다. 당연히 연어를 잡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곤 했다. 바로 앞에서 살생(殺生)이 다반사로 일어나는데 절집에서 그냥 놔둘리 없었음은 빤한 일.“부처님의 도량은 가장 청정한 법계인데 어찌 물고기가 있어 냄새가 진동을 하는가” 신계사 창건주인 보운 조사가 결국 주문으로 방편을 써 고기 떼를 푸른 바다(동해)로 몰아내었고 그 바다까지 계곡물이 이르러도 고기 떼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보운 조사가 용왕에게 연어 떼가 이곳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요청했는데 신통하게도 그때부터 이곳에서 연어 떼를 볼 수 없었으며 그 이후로 절의 이름을 ‘신기한 계곡’이란 뜻의 신계(神溪)사로 고쳤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온 설화가 다 그렇듯이 그저 재미있게 각색된 이야기쯤으로 돌릴 수 있지만 설화와 관련된 유물이 남아 있어 흥미를 더한다. 2003년 11월 신계사 대웅보전 발굴 조사 때 수습된 평기와가 그것. 기와의 등에 물고기가 새겨졌는데 물고기 문양이 들어 있는 기와 유물로는 국내에서 처음 발굴된 것이라고 한다.
  • [씨줄날줄] 광 화 문/함혜리 논설위원

    광화문은 서울의 상징이다. 광화문을 볼 때마다 파리의 개선문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가벼움 같은 것을 느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콘크리트 때문이었던 것 같다. 광화문이 다음달 4일 복원작업을 위해 철거에 들어간다고 한다.2009년 말 완료되는 이번 복원공사를 통해 광화문은 중건 당시의 위치와 각도를 되찾는다. 앞으로 14.5m 나오면서 서쪽으로 10.9m 이동하고 서쪽으로 5.6도 틀어서 흥례문과 일직선으로 놓인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는 국내산 육송의 목조로 바뀌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현재의 한글 현판도 중건 당시의 것으로 복원된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4대문 중 남문이며 정문이다.1395년(태조 4년) 9월 창건 시에는 특별한 이름없이 그냥 정문(正門)으로 불리다가 세종 대에 이르러 경복궁 수리공사를 하면서 광화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광화(光化)’는 중국 고전 서경의 ‘광피사표 화급만방(光被四表 化及萬方)’에서 유래됐다. 빛이 사방을 덮고 가르침이 만방에 미친다는 뜻이다. 이름을 붙인 집현전 학사들은 ‘나라의 위엄과 문화를 널리 보여주는 문’이 되기를 원했지만 광화문은 한국 근현대사의 우여곡절을 고스란히 겪었다. 임진왜란 때인 1592년 완전히 불에 탄 뒤 270여년간 중건되지 못하다가 1865년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으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27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이어 6·25전쟁때엔 폭격으로 문루가 아예 사라지는 처참한 운명을 맞는다. 광화문은 박정희정부 시절인 1968년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재건됐다. 방향도 위치도 엉터리로 급조된 채 오늘에 이른 것이다. 총 244억원이 투입되는 광화문 복원사업은 1990년에 20년 계획으로 시작된 경복궁 원형 복원사업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이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문화재청의 주장과 방향도 맞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하고, 신경을 써야 할 것은 후세에 부끄럽지 않은 바로 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란 사실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Seoul in] 지역번영 비는 당인동 부군제

    마포구(구청장 신영섭) 21일 당인동 부군당에서 마포구의 번영을 비는 제례행사를 개최했다. 당인동 부군당관리위원회(회장 김현종)와 당인동 노인회(회장 윤준)가 주최하는 이번 제례는 초헌, 아헌, 종헌, 축문 낭독 순으로 진행됐다. 지역문화 보존을 위해 거행하는 당인동 부군제는 300여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6·25전쟁에 동원됐던 당인동 주민들이 한 명도 죽지 않고 무사히 돌아온 것은 바로 주민들이 정성들여 제례를 올린 부군당 덕분이라는 전설도 있다. 부군당은 10년 전 새로 단장한 단청과 80년 전 백년사에서 모셔온 화분 등으로 꾸며져 있다.
  • 경의선 철마 주인 누가 될까?

    경의선 철마 주인 누가 될까?

    경의선 철마의 주인은 누구일까. 경기도 파주시 경의선 장단역 비무장지대 안에 56년째 자리를 지켜온 무게 102t짜리 증기기관차 화통(등록문화재 제78호)이 마침내 20일 보존처리를 위해 인근 임진각으로 옮겨졌다. 화물차 25량은 6·25전쟁통에 사라졌고, 화통만 덩그러니 남아 남북 분단의 상징물이 돼온 터이다. 그러다 2004년 2월 근대문화재로 등록된 지 2년10개월 만에 임진각에 마련된 보존처리시설로 운반돼 새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됐다. 그러나 이 철마의 주인이 과연 누구인지에 대해선 아무도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결론은 문화재청도, 철도공사도, 국방부도 철마 소유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이유범 과장은 “전쟁후 비무장지대에 남아 대한민국 정부소유 국가재산이 됐지만 문화재청 소유는 아니다.”면서 “2004년 문화재 등록 당시에는 우선 철도청(철도공사 전신) 소유로 올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철도공사 관계자는 “공사 재산목록에 철마는 없다.”면서 “향후 국가재산 주무부처인 재정경제부와 문화재청, 철도공사가 협의해 소유주체를 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철마를 마지막으로 운전한 기관사 한준기(79)씨는 “철마는 1940년대 일본에서 만들어졌고, 원래 주인은 북한이지만 전쟁 이후 장단역으로 이동한 뒤 우리 소유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임진각 보존처리장으로 옮겨진 철마는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경주대 문화재연구소, 포스코 포항산업과학연구원 등의 전문가 20여명이 가장 적합한 표면안정화 처리기법을 결정한 뒤 내년 3월부터 1년간 보존처리된다. 이후 ‘역사의 때’를 털고 비무장지대 제자리로 되돌아간다. 파주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씨줄날줄] 해방전후사/이용원 수석논설위원

    지난 9월10일 종영한 KBS1-TV 주말드라마 ‘서울 1945’는 화려하게 각광받지는 못했지만 쉽게 잊히지 않을 드라마로 꼽힌다. 일제강점기 말기에서 6·25전쟁까지를 다룬 이 드라마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살고 사랑하고자 몸부림친 인간 군상의 얽히고설킨 애증 관계를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사회주의자로서 필연적으로 북쪽을 택한 인텔리 최운혁, 그와의 사랑을 이루고자 주저없이 이념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여인 김해경, 친일 부호의 아들이고 미국유학파이지만 이념보다는 사랑과 우정에 기울어지는 이동우,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집안의 외동딸로서 해방후 몰락한 가문을 부활시키려고 몸을 던지는 문석경 등이 주요 등장인물이다. 이 드라마는 새해 벽두에 시작해 71회로 막을 내리기까지 평균 13.4%, 최고 18.4%라는 평범한 시청률을 기록하지만 그 시청자들에게는 훌륭한 드라마로 기억됐다. 드라마 속 인물들의 삶이 그들의 부모나 조부모, 또는 그 자신이 살아온 길임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라마가 주목을 받게 되자 보수 세력의 반발이 심해져 담당 PD와 작가가 지난달 말 불구속 기소되기도 했다. 허위 사실로 실존인물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그 후손들이 고소한 것이다. 드라마 ‘서울 1945’가 무대로 한 시대를 표현한 역사용어가 ‘해방전후사(解放前後史)’이다. 이 말은 1979년 나온 책 ‘解放前後史의 認識(인식)’에서 비롯됐다. 이 논문집의 서문은 ‘이민족의 오랜 식민통치로부터 해방이 되었건만 남과 북으로 갈라진 민족은, 민족사상 유례가 전무한 대결유형을 보이는 분단시대에 날로 깊이 빠져든다.´라는 문제의식에서 책을 발간한다고 서술했다. 한국 현대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한 이 책은 큰 인기를 끌어, 출판사는 1989년까지 시리즈 5권을 추가 발간해 모두 6권으로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끝맺는다. 지난 2월 이 시리즈를 비판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두권이 출간된 데 이어 이번 주에는 ‘재인식’을 다시 비판하는 논문집 ‘한국 근현대사의 새로운 흐름’이 선보인다고 한다. 학술연구가 계속 축적되는 건 당연하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제 ‘해방전후사’도 이념의 족쇄에서 풀려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용원 수석논설위원 ywyi@seoul.co.kr
  • [오지로 떠나는 시간여행] (11) 충북 단양군 피화기마을

    [오지로 떠나는 시간여행] (11) 충북 단양군 피화기마을

    단양으로 들어가는 고개 위 국도변 휴게실에서 내려 보니 단양 읍내를 휘돌아 서쪽으로 흘러가는 남한강 줄기가 가을 가뭄으로 수량이 줄어 가늘게 보인다. 강줄기를 따라 이어진 계곡엔 낮은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원색을 잃은 단풍이 겨울 초입으로 들어선 계절을 말해주고 있다. 읍내 다리를 건너 초겨울 바람에 요란하게 흔들리는 강변 갈대를 뒤로하고 영월 쪽으로 가다 가곡면을 지나 소백산 줄기 끝에 자리 잡은 용산봉으로 접어드니 하늘만 보이는 좁은 계곡 사이로 ‘피화기 마을 가는 길’ 표지판이 가파른 산면을 따라 난 콘크리트길 옆에 서있다. 가파른 길을 한참 올라 산 정상 가까이에 가니 조금 경사가 완만한 곳에 슬레이트를 얹은 작은 토담집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동네가 나타난다. 어릴 적 서당에 다녀 동네 선비라 존경받는 김경호(88)할아버지에게 특이한 동네 이름 내력을 물어보니 동네가 산중에 깊이 있어 화(禍)를 피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피화기(避禍基)마을이라고 불리고 실제로 6·25전쟁 때 이곳에서 화전을 일구며 살던 사람들은 조금 떨어진 가곡면소재지 옆 대대리에 많은 군대가 주둔했어도 군인 한 번 못보고 전쟁 소식도 모르고 살았단다. 지금도 근동 사람들에게 피화기 마을길을 물으면 정확하게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고 한다. 나뭇짐을 한 짐 지게에 지고 산을 내려오며 “어떻게 오셨드래요?” 하고 검은 눈동자를 굴리며 묻는 장태일(73)할머니 얼굴을 보니 말투하고 얼굴 표정이 어디선가 본 듯한 착각에 빠진다. 자동차를 몰고 나타난 외지 사람을 대하는 동네 분위기도 익숙하다는 생각에 기억을 더듬어 보니 ‘동막골’ 영화에서 봤던 동막골 사람들과 너무 비슷하다. 깊은 산중 짧은 초겨울 해가 일찍 넘어가니 외지 사람이 왔다는 소식에 한 둘씩 손에 주전부리 거리를 들고 김경호 할아버지 댁으로 모인다. 오랜 세월 닳고 닳아 종이처럼 얇아진 화롯가에 모여 앉아 소주가 한 순배 돌자 옛 얘기를 꺼낸다. 부끄럽다며 한사코 손사래를 치던 김종례(81)할머니가 말문을 연다. 어릴 적 일제 말기에 동원되어 서울 노량진 근처에 있던 방직공장에서 일하다, 해방되어 인천을 통해 들어온 미군을 보고 놀란 얘기를 꺼내며 피화기 마을에 시집와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편안했던 삶을 자랑한다.6·25전쟁 중 이곳으로 들어온 김경호, 정길녀 노부부는 일제 동원을 피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 결혼해 평북 회천에 살다 전쟁 중 월남하여 이곳에 자리 잡고 십남매를 키운 얘기를 하며 눈가에 고운 미소를 짓는다. 한 참 동안 손가락을 움직이더니 외손과 친손자를 합치면 30명 정도 된단다. 마을 어른을 엄마, 아버지라 부르며 서울살이를 접고 귀향한 오석구(60)씨는 온갖 마을일을 돌보는 할아버지 마을청년이고 큰소리로 노래를 곧잘 불러 마을 어르신들을 즐겁게 해드리는 귀염둥이(?)이다. 구성진 노래에 화롯가에 모인 노인들이 서툰 몸짓으로 어깨춤을 춘다. 깊은 초겨울 밤 산골 토담집 사랑방 화롯가에서 짙은 사랑과 인정이 흐른다. 하룻밤 인연으로 처음 만난 외지사람을 어느새 ‘동생’ ‘동생’ 부르는 사람 좋은 오석구 씨가 산을 내려가려는 기자에게 서울에선 양심을 지키며 솔직하게 살기에는 너무 살벌하다며 고운 마음으로 살라며 손을 꼭 잡는다. 내려오며 바라보니 산등성이 넘어 숨어 있는 피화기 마을이 영화 ‘동막골’에서 봤던 마을과 똑같다. 사진 글 강성남기자 snk@seoul.co.kr
  • 이재정 “남북관계 개선 핫라인 추진”

    이재정 “남북관계 개선 핫라인 추진”

    이재정 통일부 장관 후보자는 17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의 인사청문회에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핫라인’ 구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 후보자는 청문회에서 열린우리당 장영달 의원이 “남북간 핫라인이 마비돼 있다. 핫라인이 있어야 남북간 충돌을 피할 수 있다.”고 지적한 데 대해 “공감한다. 그런 방향으로 추진할 의사가 있다.”고 답했다. 이 후보자는 정부의 유엔 대북인권결의안 찬성방침에 대해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국가로서 전세계 국가의 보편적 인권을 위해 책임질 필요가 있다.”면서도 “그러나 대북관계가 손상되지 않도록 보완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열린우리당 최성 의원이 남북장관급회담 재개 의사를 묻자 “조만간에 열릴 수 있으리라 보고 적절한 통로를 통해 북측에 의견을 전달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쌀·비료 등 인도적 지원은 6자회담 결과를 보면서 검토하겠지만 국회에서 합의해 주면 재개할 수 있다.”고 답한 뒤 “이산가족 상봉 재개는 남북 신뢰구축을 위해 가능한 한 빠른 시간내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후보자는 개성공단·금강산관광 사업 존폐논란에 대해서는 “남북간 긴장완화와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해 중요하다.”며 지속의지를 표명했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북핵실험 이후 대북 포용정책 지속 여부와 남북관계 개선방안을 집중 질의했다. 반면 한나라당 의원들은 이 후보자의 내정을 청와대의 ‘코드·보은인사’로 규정하고 사상적 편향성을 물고 늘어졌다. 열린우리당 임종석 의원은 “핵실험으로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일관된 원칙이나 입장이 변화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같은 당 최성 의원은 “북한 인권결의안에 찬성 의사를 밝힌 것이 6자회담 성사와 북핵폐기의 장애가 되면 안 된다.”고 주문했다. 이 후보자의 전문성 부족을 거론하며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직을 겸임하면 안 된다는 의견도 나왔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이 후보자가 2002년 대선 때 기업으로부터 10억원의 채권을 받아 전달한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전력을 거론하며 전형적인 보은인사라고 비판했다. 이 후보자의 ‘부시 행정부는 북한체제 붕괴유도 정책을 포기해야 한다.’는 등의 과거 발언에 대한 질책도 쏟아졌다. 한나라당 박진 의원은 ‘북핵용인’ 발언과 ‘북한 2차 핵실험 필연’ 발언을 거론하며 “이 후보자는 정치적 중립과 전문성은 물론 이념적 균형까지 상실했다.”고 몰아세웠다. 이에 대해 이 후보자는 “미국이 6자회담 틀에서 북·미 양자회담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말이지, 반미적인 발언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무소속 정몽준 의원이 “6·25 전쟁이 북침이냐, 남침이냐.”고 질문하자 처음에는 “여기서 말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말한 뒤 추궁이 계속되자 뒤늦게 ‘남침’이라고 대답했다. 특히 ‘핵우산’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정 의원의 질의에 충분한 답변을 하지 못해 “청문회에 나오면 사전에 공부를 하고 나왔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핀잔을 들었다. 전광삼 구혜영기자 hisam@seoul.co.kr
  • 배우로 전향(轉向)한 프로레슬러

    배우로 전향(轉向)한 프로레슬러

    배우되려고 체중을 15㎏이나 줄였단다. 「프로·레슬링」 64연도 「라이트·헤비」급 한국 「챔피언」이었던 홍덕명(洪德明·27·「링·네임」은 유도탄). 예명을 나신일(羅信一)이라고 한 이 신인배우는 85㎏의 몸무게를 70㎏으로 「날씬」하게 줄이는데 성공 했다지만 아직은 그렇게 「날씬」하지만은 않다. 젖가슴이 처녀의 그것보다 탐스럽다. 손발을 움직일 때마다 주먹같은 근육덩이가 용틀임을 했다. 고등학교(大東商高) 때부터 육체미(肉體美) 선수로 뽑혔고 66연도에는 「미스터·중앙대학(中央大學)」이었다니까 그의 남성미(男性美)는 새삼 소개할 필요도 없겠다. 온 몸에서 힘이 터져나올 것같은 억센 육체미, 보는 것만으로도 「에너지」를 느끼게 하는 몸매다. 그래도 대학은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 운동이라면 「레슬링」, 역도, 미식축구, 「스케이팅」, 수영등 만능선수지만 『마음은 항상 연기생활에』 있었단다. 권투도 개인지도를 받았지만 반쯤은 연기생활을 위한 수련이었다고 말하고있다. 나신일의 이력을 들춰보면 이 말도 어느정도 수긍이 간다. 그는 국민학교 3학년 때 KBS 어린이극회에 들어간 것을 깃점으로 10년 가까이 연기생활과 관련을 맺어왔다. 중대(中大) 연극「서클」에서는 10여개의 연극에 출연했고 『맥베드』에서는 주역을 맡아 국립극장 무대에 섰다. 68년 12월엔 극단 「가교(架橋)」의 한 「멤버」로 「새뮈얼·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YMCA강당에서 한국 처음으로 공연한 관록도 있다. 어느틈에 운동과 연극을 겸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나신일은 『연기는 공부였고 운동은 취미 겸 부업이었다』고 답변했다. 자신을 직업적인 「스포츠맨」으로 생각하기는 싫다고 덧붙였다. 억센 체구에 비해 「마스크」가 풍기는 인상은 상당히 여성적이다. 얼굴만으로는 우락부락한 운동선수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한데가 있다. 「유도탄」이란 「링·네임」을 가지고 관객에게 보여준 「스피디」한 파괴력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얼굴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가 주연하게 된 영화는 김수용(金洙容)감독의 「홈·드라머」 『남자(男子)는 괴로와』란 작품이다. 남정임(南貞姙)의 남편역인데 처가살이 하는 남자의 괴로운 일면을 그리게 된다. 제작사는 남정임을 「데뷔」시킨 연방(聯邦)영화사. 영화사가 다시 김수용감독을 기용하여 남정임 상대역의 나신일을 뽑았다는 건 우연 이상의 연관성이 있다. 연방(聯邦)의 대표 주동진(朱東振)씨는 『남정임급의 남자「스타」를 꼭 만들어 놓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여자 주연급은 그런대로 몇사람 있지만 남자(男子)신인은 성장이 어려운 영화풍토 속에서 나신일에게 거는 기대는 자못 큰 것 같다. 영화기획자로 손꼽히는 최춘지씨(崔春芝·연방전무)는 나신일을 남정임·김수용과 묶어놓은 이유도 이런데 있다고 귀띔했다. 더욱 거창한 것은 나신일의 영화계 「데뷔」이면이다. 중앙대(中央大)총장 임영신(任永信)씨, 중앙대 연극영화과 주임교수 양광남(楊廣南)씨, 극작가 이근삼(李根三)씨 등이 나신일의 배후에서 그를 돕고 있다. 공개경쟁을 거치지 않고 직접 「픽·업」된 이유도 이들 세 사람의 추천을 그대로 받아들인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3월6일 『남자는 괴로와』의 촬영을 시작한 김수용감독은 『신인답지않게 연기를 알고 있다. 기초가 돼있으니까 「톱·스타」되는 건 시간문제』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중국 땅에서 태어나 평북(平北) 선천(宣川)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국민학교 때부터 서울서 성장. 아버지는 6·25전 연극에 관계했던 홍정양(洪定陽)씨.3男6女의 맏이인데 『결혼은 「톱·스타」가 된 뒤에나 생각하겠다』고. [선데이서울 70년 3월 22일호 제3권 12호 통권 제 77호]
  • 1500년 신라 고찰이 되살아나다

    1500년 신라 고찰이 되살아나다

    1500년 신라고찰 금강산 신계사가 남북 불교계의 합동 복원공사 끝에 제모습을 되찾았다.8일 조계종 총무원에 따르면 조계종과 북한 조선불교도련맹(조불련)은 지난 2004년 총 4년간에 걸친 신계사 복원공사에 합의한 뒤 첫 해에 대웅보전, 지난해 만세루·요사채·산신각·삼층석탑을 복원한 데 이어 올해 들어 극락전과 축성전, 칠성각, 종각, 나한전, 어실각 등 주요 전각 7개동을 모두 복원했다. 이에따라 남북 불교계는 오는 19일 주요 전각 복원을 기념하는 합동 낙성식을 금강산 신계사에서 갖는다. 신라 법흥왕 6년인 519년 보운 스님이 산문을 열고 창건한 신계사는 장안사, 유점사, 표훈사와 함께 금강산 4대 사찰의 하나로 꼽히는 명찰. 금강산의 관음봉·문수봉·집선봉·세존봉 등에 둘러싸인 채 전통적으로 화엄경의 법기보살이 머무는 으뜸 성지중 하나로 통했다. 창건 이후 여러 차례 중수·중건됐으나 6·25전쟁중 미군의 폭격에 의해 소실되어 석탑과 1929년에 세워진 만세루의 돌기둥(石柱) 몇 개만 남아 있었다. 이에 따라 남북 불교계는 해방전 신계사의 모습을 되찾자는 데 합의해 내년까지 모두 21채의 건물을 원래대로 복원할 계획이며 현재 신계사엔 남한 승려인 제정 스님이 머물면서 신도들과 관광객을 맞고 있다. 한편 오는 19일 낙성식은 남측에서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을 비롯한 스님과 신도 300명, 북측에서 조불련 위원장을 비롯한 스님 신도 등 300명이 각각 참석한 가운데 불상 봉안, 복원된 전각의 편액 제막, 범종 타종, 남북 대표자 연설 등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옴부즈맨 칼럼] 북한실상을 잘 알 수 있도록/심재철 고려대 언론학부 교수

    북한은 대한민국의 일부인가 아니면 독립된 이웃국가인가? 최근 국가인권위원장에 취임한 안경환 서울대 법대 교수에 따르면, 국내법상으로 북한의 정체성은 우리 일부일 수도, 또는 아닐 수도 있다는 양극단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일반인에겐 일본보다 더 가깝고도 먼 나라가 북한이다. 광복 이후 우리 삶에 끊임없이 큰 영향을 미쳐왔지만 일반인이 북한 사람을 실제로 만날 기회는 거의 없다. 필자도 북한사람을 직접 본 적은 두 번에 지나지 않는다. 첫번째는 15년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세계커뮤니케이션학회에서 북한 외교관을 만났었다. 우리 외교관처럼 말쑥했으며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두번째는 5년전인가 중국을 거쳐 백두산에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본 50대 북한 아주머니였다. 북-중 경계선을 넘어온 그녀의 모습은 남루했으며, 영양실조에 걸린 듯 몸이 마르고 파리했다. 분단 이후 우리는 평화공존을 위한 대규모 남북한 정치 이벤트와 일촉즉발 전면전을 연상케 하는 북한 도발행위를 신문과 방송을 통해 접해왔다. 하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필자에겐 북한하면 이들 두 사람의 상반된 모습이 떠오른다. 북한이 대한민국 일부인지, 아니면 이웃 독립국가인지 정체성 논쟁은 계속되겠지만, 최근 북한 핵실험 사태를 보면서 이제 북한 체제가 무너질 날이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심을 하게 됐다. 핵폭탄을 가질 수도 없고, 가져서도 안 되며, 가질 필요도 없는 북한이 기어이 그것을 가졌다니 과연 그 체제가 얼마나 더 존속할 수 있을까. 서울신문을 포함해 우리 언론은 북한을 크게 두가지 뉴스 프레임을 가지고 보도해왔다. 첫번째는 “공산주의를 이긴다.”는 승공식 프레임이다.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는 북진통일식 보도가 여기에 해당된다. 두번째는 “공산주의를 막아내야 한다.”는 반공식 프레임이다.6·25를 거치면서 북한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며, 이번 핵실험 보도에서 보듯 여전히 레드 콤플렉스가 남아있다. 반공이나 승공식 보도프레임은 북한이 우리 일부라는 가정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을 독립된 정치체제로 간주하면서 미국처럼 북한을 ‘악의 축’ 혹은 ‘햇볕정책’ 대상으로 보도해 왔다. 최근 ‘일심회’ 사건보도에서 보듯 북한관련 이슈는 여전히 혼란스럽게 보도되며, 독자는 북한 정체가 무엇인지 헷갈린다. 안경환 위원장 주장처럼, 북한은 가난한 이웃인 동시에 위력적인 무기 체제를 갖춘 ‘중간적 존재’로 보는 게 현실적이다. 햇볕정책이나 포용정책은 북한체제 붕괴를 연착륙시킨다는 발상에서 나왔다. 그런 점에선 오히려 승공 뉴스프레임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최근 서울신문에서 보듯, 북한 핵실험 위협에 대해선 지금도 반공 뉴스프레임으로 보도한다. 앞으로는 북한체제가 붕괴됐을 때를 가상해 북한 주민을 어떻게 자본주의 체제에 흡수 통합, 적응시켜 나갈 수 있는가에 대한 제3의 뉴스보도 프레임을 준비해야겠다. 북한주민이 밑으로부터 과연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어떤 사고를 하며,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보다 생생한 뉴스를 좀 더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북한관련 보도에서 심각하게 생략된 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서울신문이 야심차게 꾸려나가는 자치행정 지면에 북한지역을 포함하면 어떨까. 기존 북한기사와는 달리 발로 뛰면서 취재한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런 기사를 기대해본다. 또한 정치권력에 의해 북한주민 인권이 심각하게 침해당한다고 한다. 이에 대한 감시기능을 높여야 하겠다. 국내 보안법 위반사건 보도에서도 판결이 나기 전까지는 무죄원칙을 적용해 피의자 인권을 존중해야 마땅하다. 심재철 고려대 언론학부 교수
  • 늦가을 산사에서 보낸 편지

    늦가을 산사에서 보낸 편지

    남쪽 지리산이 온통 붉게 물들고 있다.9월 말부터 반도 허리의 설악산에서 시작한 단풍의 오색 물결이 백두대간의 봉우리를 징검다리 삼아 지리산까지 내려섰다. 성삼재와 정령치 등 높은 고갯마루를 건넌 단풍은 골 깊고 물 맑은 계곡까지 찾아왔다. 알다시피 지리산의 수많은 계곡에는 천년 사찰들이 자리잡고 있다. 오색의 파스텔 톤으로 색칠한 산사의 가을을 보고 있노라면 속세의 때에 찌든 우리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깊은 계곡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산사의 모습에 눈이 시원해지고, 댕그렁 댕그렁 청아하게 울려대는 ‘풍경’소리에 귀를 씻고, 가슴까지 맑게 흐르는 옥수(玉水) 한 모금에 마음의 때가 씻겨나간다. 자, 깊어가는 이 가을에 모든 것을 잠시 멈추고 지리산의 산사로 훌쩍 떠나보자. 그리고 보고픈 사람에게 편지 한 장을 써보자. 글 사진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형, 오랜만이야. 잘 지내지. 아마 형에게 대학 2학년 때 편지를 써보고 첨이네. 가끔 메일이나 전화로 이야기하다 이렇게 펜을 드니 좀 어색하다. 참, 형이 그렇게 칭찬하던 가을 지리산에 다녀왔어. 생각나? 최루탄 가스로 매콤한 잔디밭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면서 “야, 가을 지리산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단풍을 이야기 하지마.”라고 크게 외쳤던 것 말이야. 그래서 지리산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단풍도 보고 천년이 넘는 사찰을 돌아보았지. 너무 좋았어…. # 어머니의 가슴 같은 실상사 지리산 서쪽의 뱀사골 끝자락에 연꽃 모양의 산세가 둘러싸고 있고, 그 연꽃의 밥 즉 ‘연밥’에 해당되는 소중한 자리에 실상사(實相寺)가 위치해 있어. 한국 선문의 발상지인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서기 828년) 증각대사 홍척(洪陟)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져. 우리나라 선문의 효시인 ‘구산선문’이 이곳 ‘실상산문’에서 출발한 우리나라 선풍(禪風)의 발상지이기도 해. 형, 근데 참 재미난 사찰이야. 이렇게 유서 깊고 오래된 절이 울창한 산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논 한가운데 있어. 일주문도 없고 잘 꾸며져 돌담에 마치 오래된 한옥같은 느낌이라 마음이 너무 편안해져. 천왕문을 지나자 사찰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아담한 목조 건물이 몇 개, 빨간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에 외갓집에 온 듯 너무 마음이 푸근해져. 실상사에는 백장암과 서진암, 약수암 등의 암자가 여럿 있고 신라시대의 많은 문화유산들이 있어.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보물33호), 수철화상능가 보월탑비(보물34호), 석등(보물35호), 부도(보물36호), 삼층쌍탑(보물37호) 등 보물이 즐비해. 무심히 바라보면 사방이 터져있는 들판 한가운데에 멋쩍은 듯 엉거주춤 서 있어 볼품없지만 마음을 열고 다가서면 수 많은 국보와 보물뿐 아니라 지친 우리 마음을 감싸주는 어머니 가슴 같은 곳이야. # 불타버린 뱀사골과 피아골 정말 지리산의 날씨는 ‘여인의 마음’과 같다고 한 말이 실감나더라. 가을 햇살이 아름답던 날씨가 갑자기 흐리더니 비가 오기 시작하더라고. 그래서 더 좋았어. 부슬부슬 비 내리는 사찰의 처마 밑에 잠시 걸터앉아 한적한 경내에 울려 퍼지는 풍경의 아름다운 소리, 그 여운이 가슴 속에서 잔잔히 울려…. 차를 몰고 861번 도로로 노고단을 향해 가는 길은 정말 예술이야. 구불구불 위험하긴 하지만 지리산 봉우리를 타고 넘는 하얀 구름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어. 근데 좀 아쉽게도 올해는 가을 가뭄이 심해서인지 단풍이 좀 별로야. 노고단쪽은 이미 단풍이 들었는데 예년보다 덜하고 7부 능선 아래는 아직 단풍이 내려오지 않았더라고. 아마 형이 이 편지를 받는 주말쯤이 절정에 달할 것 같아. 수려한 단풍으로 유명한 남원 뱀사골로 들어서니 형의 이야기가 허풍이 아님이 실감나더라. 계곡 들머리의 수려한 바위들 모습에 탄성이 절로 나와. 또 맑고 깨끗한 소·담을 물들인 붉은 물결에 지리산의 속살을 느꼈어. 이무기가 용이 됐다는 ‘탁용소’, 용이 못된 이무기가 살았다는 ‘뱀소’, 소금장수가 물에 빠져 이름이 붙은 ‘간장소’, 정진스님이 산신제를 올렸다는 ‘제승대’ 등 이번 주에 가려면 꼭 뱀사골로 가, 알았지? 참, 4일 뱀사골에서 단풍제례가 열려 볼거리를 더한대. 구름 낀 노고단을 넘어 구례 피아골로 향했어. 피아골은 예년에 비해 단풍이 좀 늦데. 아마 11월 초·중순이 절정일 것 같대. 그래서 연곡사에 들렀어. # 가을 길의 저 끝에 19번 국도에서 빠져 양편으로 황홀한 모습의 단풍나무 길을 달렸어. 아직 절정을 맞지 않았지만 굽이굽이 휘감아 도는 길가에 진하게 물들기 시작한 단풍이 서로의 모습을 뽐내는 여인의 자태처럼 농염한 모습이야. 연곡사는 신라 진흥왕 6년(545년)에 연기대사가 창건한 고찰인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어. 그 후 수 차례 증건과 소실을 되풀이하다 지금은 작은 법당이 초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야. 연곡사에 가면 꼭 보아야 할 두가지가 고려시대에 만든 ‘동부도’와 ‘북부도’란 석탑이야. 자세하게 봐. 그 단단한 재질인 화강암을 한땀 한땀 정으로 쪼아서 그린 운룡과 사자, 사천왕 등 그림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야. 아마 로마에 있는 라오콘 상이나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그 이상이야. # 반달곰이 살고 있는 천년 고찰 형, 지리산 반달곰이 살고 있는 문수사라고 들어봤어? 나도 신기해서 안내판을 보고 핸들을 꺾어 들어갔어. 세상에 굽이굽이 험한 산길을 한 30분을 달렸나.1단을 놓고도 힘겹게 오른 산의 끝자락에 문수사가 있더라. 무려 해발 700m야. 지리산 자락이 한눈에 들어오는 그런 사찰이야. 백제 성왕 25년(547년) 연기조사께서 창건했고 원효, 의상 대사를 비롯해 윤필, 서산, 소요, 부유, 사명대사 등 우리나라의 고승들이 수행 정진한 제일의 문수도량이래. 임진왜란 때 일부가 파괴됐고 6·25때 전소되었다가 1980년대에 새로 지어졌대. 3층 법당 대웅전(목탑)이 멋져. 또 문수사에 정말 반달곰이 있어. 비록 철창에 갇혀있지만 시커먼 곰의 가슴에 선명하게 새겨진 하얀 V자가 예쁘더라. 원래 4마리였는데 두 마리는 방사를 하고 이젠 두 마리만 남았대. 이밖에 신라 진흥왕 5년(544년)에 지은 화엄사, 녹차의 시배지로 유명한 쌍계사, 작고 아담한 천은사 등도 가을에 꼭 한번 들러보면 좋은 절이야. 어때, 형. 지리산에 가본 지 오래지. 아이들과 형수님 손잡고 이번 주에 지리산의 고즈넉한 산사에 꼭 한번 다녀와. 마음이 넉넉해질 거야. # 단풍 구경도 식후경이래 참, 내가 맛있는 식당 몇 개 소개할게. 남원은 추어탕이 유명한 거 알지. 광한루옆 옛 육남시장터 천변에 있는 새집(063-625-2443)과 부산집(063-632-7823)이 유명해.6000~7000원선이야. 가족들과 좀 근사한데서 먹고 싶으면 남원 시내 청월장(063-633-7533)의 한정식 한번 먹어봐. 도미회, 대하, 육회, 삼합과 각종 나물 등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나와.1인분에 3만원인데 아이들이 어리니까 형수랑 2인분이면 충분히 먹을 거야. 또 뱀사골에는 그때 그 식당(063-625-3329)을 비롯해 산채백반집이 많아.15∼16가지나 되는 산나물이 푸짐해.7000원이야. 구례쪽에서는 화엄사 가는 길의 그 옛날 산채식당(061-782-4439)과 지리산식당(061-782-4054)이 유명해. 고기가 생각나면 이시돌(061-782-4015)의 한방 갈비도 강력추천해. 담백한 육질과 깔끔한 밑반찬에 정신을 못 차린다니까.
  •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15)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앙촌’ 횡성 풍수원성당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15)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앙촌’ 횡성 풍수원성당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유현2리 두메산골에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고즈넉하게 들어앉은 풍수원 성당(주임신부 김승오·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9호). 고딕·로마네스크풍 건물이 명동성당을 축소해 옮겨놓은 듯 빼닮았지만 의자 없는 맨 마룻바닥과 간결한 내부가 100년 전 건립 때의 모습 그대로다. 자연과 잘 어울리는 고즈넉한 외양 때문에 일반인들에겐 이런저런 드라마와 영화 촬영의 단골로 애용되는 아름다운 공간이면서 한국 천주교사의 한 획을 그을 만큼 중요한 종교적 위상을 지닌 곳. 신앙촌을 터전으로 한국인 신부가 지은 최초의 성당으로, 강원도 경상도 등 한국 동부 지역의 천주교 성당과 교인을 총괄했던 ‘동부 전교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지금은 번듯한 국도가 성당 앞을 지나고 있지만 10년 전까지만 해도 좁은 비포장 길이 이 지역 유일한 통로였을 만큼 성당이 들어선 자리는 첩첩산중의 벽지다. 산중의 외딴곳이어선지 인근 경기도를 비롯한 외지에서 박해를 받은 천주교 교인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살았고 그 소식을 전해들은 당시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도 자연스레 천주교 전교의 주요 거점으로 삼았을 것으로 보인다. 1888년 강원도 최초의 본당으로 설립되어 르메르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파견됐지만 성당이 건립된 것은 2대 주임인 정규하(1863∼1943년)신부가 재직하던 1907년이었다. 정규하 신부는 김대건·최양업에 이어 1896년 서울 중림동성당에서 서품을 받은 한국 세번째 신부. 풍수원성당 역사에선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지금까지 교인들 사이에 회자된다. 사제 서품을 받아 바로 풍수원 본당에 부임했으며 선종 때까지 47년간 이곳을 지키며 신자들 사이에 신망이 두터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 신부 사목 기간중 풍수원 성당은 총 12개 군을 관할하는 중심성당으로 성장, 지금의 춘천·원주 교구의 모태가 되었다. 한국에선 7번째로 지어진 고딕·로마네스크 양식의 풍수원성당은 바로 정규하 신부의 뜻을 따른 신자들이 고생스럽게 품을 팔아 일군 성과였다. 건립기금은 강원도 지역 몇몇 지주와 신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6000원. 중국인 벽돌공들이 벽체를 쌓았지만 산에 올라 나무를 베어 오고 성당 인근의 가마에서 직접 벽돌을 구워 나른 것은 모두 한국인 신자들이었다. 성당 건립 소식을 들은 양양, 강릉의 신자들은 보름씩이나 걸려 태백산맥을 넘어와 일손을 보탰다고 한다. 본당 건물 자체는 120평 규모로 아담하다. 정문과 함께 양측 벽에 각각 1개씩 출입문을 내었는데 지금도 신자들은 이 문을 사용하고 있다. 건물 외양처럼 내부도 명동성당을 아주 닮아있긴 하지만 제대며 성물 등 구조물은 간결하고 소박하다. 제대를 중심으로 6개씩 좌우로 늘어선 기둥은 예수 부활을 증거하는 12사도의 상징. 처음엔 나무로 세웠으나 나중에 석조로 교체되었다. 바닥은 처음 그대로 의자(장궤)없는 맨 마룻바닥인데 둥근 아치형 천장과 썩 잘 어울린다. 제대 뒷부분 벽에 화려하지 않게 설치된 3개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성당 안으로 들이는 은은한 빛이 경건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제대 오른쪽 마리아상에 얽힌 사연도 흥미롭다.6·25전쟁중 이 지역에서 전투가 치열했는데 간절히 기도해 부대원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미군 장교가 나중에 귀국해 비행기로 공수해 왔다고 한다. 성당 왼쪽에 성당을 바라보며 서있는 2층짜리 유물전시관은 전국의 신자와 순례객들 사이에 인기가 높은 성지.1912년 사제관으로 만들어 써오다가 1997년 대대적인 단장을 거쳐 320점의 초기 유물들을 모아 놓았다. 성당 건립자인 정규하 신부의 유품을 비롯해 초기 사제들이 미사때 쓰던 촛대와 의식복, 흙으로 빚은 십자가, 율무묵주, 성합, 기도서들을 눈여겨보면 이곳이 예사로운 곳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사제관 왼편 나지막한 동산에 조성한 십자가의 길도 꼭 둘러봐야 할 공간. 지난 2002년 판화작가 이철수씨가 예수 최후의 고난상들을 동판화로 제작한 14처를 음미하며 정상에 오르면 잘 꾸며진 묵주동산을 만나게 된다. 나란히 선 큰 십자고상과 마리아상 앞에 축구공 크기만 한 묵주알들이 빙 둘러 박혀 있는 게 특이하다. 횡성군과 원주교구는 요즘 풍수원 성당의 역사적 가치를 인근 자연과 연계해 천주교 복합성지에 담아내려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100억원을 들여 대지 78만평에 6만 8000평 규모의 ‘바이블 파크’를 조성하는 것이다. 예정대로 완공된다면 내년 말까지 풍수원 성당을 중심으로 수목원과 피정의 집, 미술관, 정규하 신부 동상, 천국동산, 가마터 등이 들어서게 된다. 풍수원 성당 김승오(54) 주임신부는 “한국 동부지역 전교의 중심지로 우뚝 섰던 초기의 위상에선 멀어졌지만 초기 모습을 고스란히 갖춘 채 고난했던 한국 천주교의 역사를 소리없이 증거하는 핵심적인 성지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천주교계가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kimus@seoul.co.kr ■ 천주교 최초의 신앙촌은 한국엔 천주교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모여 살았던 교우촌이 여럿 있지만 풍수원 성당 일대는 가장 먼저 형성된,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앙촌이다. 초기의 큰 성당들이 주로 대도시에 들어섰던 것과 달리 험한 산골짜기에 커다란 풍수원 성당이 세워진 것은 바로 이 신앙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초는 1800년대 초 경기도 용인에 살던 40여명의 신자들이 신유박해를 피해 이 지역으로 피신해온 것. 당시 신자들은 피신처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용인에서 비교적 가까운 산골인 이 지역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 터를 잡은 신자들은 다른 지역의 교우촌과 마찬가지로 화전을 일구고 옹기를 구우며 연명했다. 단 한 사람의 성직자도 없이 두려움에 떨며 80여년간 신앙심을 지키던 신자들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에 의해 이곳에 강원도 최초의 본당이 설정된 1888년에야 자유로운 신앙의 꽃을 피울 수 있게 되었다. 이곳은 한때 전국에서 모여든 신자들로 붐볐으나 차츰 흩어져 살게 되었으며 6·25전쟁을 겪으면서 북한에서 넘어온 난민 중심의 교우촌으로 거듭났다. 이후 신자들의 크고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으나 30여년 전 도로와 마을 정비사업을 거치면서 많은 가구가 떠났다. 지금 성당 앞에 비슷한 형태로 모여있는 주택 40여채는 30여년 전 정비사업을 하면서 들어선 것이다.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모두 천주교 신자들. 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신앙촌 성격이 강한 때문인지 지금 횡성군 서원면 일대 주민 2300명중 신자가 850명에 이를 정도로 천주교 세가 강하다. 물론 풍수원 주민은 모두 천주교 교인들이다.
  • “강정구 구속은 국보법 남용”

    유엔 시민적·정치적 권리위원회(Human Rights Committee)는 강정구 동국대 교수의 구속기소가 국가보안법의 남용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크리스틴 샤네 위원장은 26일 제네바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실 회의장에서 우리나라의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대한 국제규약(일명 B규약) 이행 여부를 이틀간 심사한 결과 이같이 평가했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6·25는 통일전쟁”이라고 발언, 지난해 12월 국보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샤네 위원장은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사실과 반대되는 견해가 표명되더라도 기소와 수감 이외의 방법으로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다.”면서 “한국 정부는 이제 국보법의 남용 사례가 없다고 하지만 이 경우 남용 사례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강 교수 사건은 규약 제19조(표현의 자유)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 위원회는 다음달 2일 우리 정부에 권고사항을 전달한다.제네바 연합뉴스
  • [옴부즈맨 칼럼] 양질의 저널리즘으로 공공 신뢰 회복을/김춘식 한국외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지난 한 주 동안 언론 매체의 주된 관심거리는 북한의 핵실험 강행이었다. 서울신문도 상당한 양의 지면을 할애해 관련 내용을 보도했다. 구체적으로 9일(월)자 신문은 ‘북 핵실험 임박했나’라는 면(2쪽)을 통해, 그리고 10일(화)부터는 ‘北 핵실험 파장’(10일자 8면의 ‘북핵 실험 전문가 진단’ 포함)이라는 면을 편성해 총 33면에 걸쳐 북한의 핵실험 관련 내용을 보도했다.1면도 핵실험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관련기사가 모두 39면에 걸쳐 보도됐다. 이는 한 주간 발행면수(180면, 본지만 계산)의 21.6%에 이르는 분량이다. 관련 칼럼과 사설을 포함하면 기사의 양은 훨씬 늘어난다. 기사의 종류도 다양했다. 예를 들어,10일자 2면은 북한 핵실험 조기감행 이유를, 이어 3일(10∼12일)동안 한반도 주변 정세(‘달라질 안보환경’)와 정부의 대북 정책(‘재검토 요구받는 햇볕정책’), 북한 내부 변화(‘김정일 체제 어떻게 될까’)를 비교적 차분하게 다루었다. 특히 전문가 진단(10일 8면), 북 핵실험이 오히려 한반도 안보에 도움이 된다는 외국인·외국언론의 시각(11일 4면), 부시행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미국 언론의 비판(12일 2면), 전 외교수석 2인의 긴급대담(14일 4면) 등은 북핵문제의 발생원인 및 전망에 관한 다양한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 사설의 경우 북한 핵실험 이슈의 성격 및 문제 해결방안에 대한 서울신문의 입장이 분명히 드러난다. 서울신문은 북한의 핵실험 강행을 세계평화에 대한 분명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북한의 도발에 대한 단호한 대응과 문제해결을 위한 고난도의 외교력을 요구했다(10일). 문제해결 차원에서는 국제사회의 합의된 제재에는 동의하면서도 북한과 미국간의 대화의 필요성 및 한국과 중국의 공조가 문제해결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다(14일). 더구나 현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의 공과에만 집착하는 정치권의 소모적인 논쟁이 국론분열 양상으로 전개될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문제해결을 위해 여야가 정파적 이익을 초월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13일). 이는 북핵 문제의 해결보다는 이를 둘러싼 국가간, 정당간, 사회세력간 갈등을 부각시키는 소위 ‘보수언론’의 논조와는 분명히 비교되는 매우 바람직한 보도태도이다. 하지만 안보환경의 불안정성을 자극하는 기사 또한 적지 않았다.“한반도 ‘힘의 논리’ 폭풍…6·25 이후 최대 위기”라는 헤드라인(10일자 4면)이 대표적이다. 이는 전쟁발발 가능성을 부각시킴으로써 독자의 위기감을 자극하는 적절치 못한 표현이다. 한국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부각시킨 내용(“하루만에 21조 5170억 ‘증발’”)도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산자부 관계자’,‘재경부 관계자’,‘정부 관계자’와 같은 익명의 취재원을 이용해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반복해서 언급한 것은 적절치 못한 보도방식이다. 민감한 시기 익명의 취재원을 인용해 논지를 전개하는 한국 언론의 고질적인 보도방식은 자제했어야 했다. 북한의 핵실험처럼 언론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이슈인 경우, 그리고 이슈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을 때 독자들은 언론이 제공하는 의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므로 미디어가 강조한 내용은 독자의 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양질의 저널리즘은 합리적인 문제 해결과 사회 통합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서울신문은 정치적으로 편향되거나 갈등을 부각시키는 한국 언론의 고질적인 병폐에서 탈피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대안 제시에 중점을 둔 양질의 저널리즘 제공을 통해 독자들로부터 공적 신뢰를 얻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양질의 저널리즘 제공을 통한 공공의 신뢰 획득은 언론의 사회적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것은 물론, 발행부수 증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김춘식 한국외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60~70년대 ‘국민가수’로 명성 오기택 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60~70년대 ‘국민가수’로 명성 오기택 씨

    아빠가 있다. 늘 곁에서 든든하게 지켜준다. 하지만 어느새 멀어지기 시작했다.1997년 외환위기(IMF)때였다. 고개 숙인 아빠들이 늘어났다. 며칠동안 방황하다 힘없이 돌아오는 아빠들이 많았다. 이무렵 생겨난 동요가 새삼 생각난다. ‘딩동댕 초인종 소리에 얼른 문을 열었더니/그토록 기다리던 아빠가 문 앞에 서 계셨죠/너무나 반가워 웃으며 아빠 하고 불렀는데∼/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어요’ 시계바늘을 40년 전으로 돌린다.6·25전쟁의 후유증, 배고픔과 가난으로 아빠들은 많은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자식들에게만큼은 가난을, 무지를 물려주지 않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꾹꾹 참고 견뎠다. 한(恨)도 그리 많아 두다리 쭉 펴고 잠을 제대로 자본 날이 얼마였을까. 그런 1966년에, 노래 하나가 툭 튀어 나왔다. ‘이 세상의 부모마음 다같은 마음/아들 딸이 잘 되라고 행복 하라고/마음으로 빌어주는 박영감인데/노랭이라 비웃으며 욕하지 마라/나에게도 아직까지 청춘은 있다/원더풀 원더풀 아빠의 청춘/부라보 부라보 아빠의 인생’ 이 노래는 당시 아빠의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듯 전국적으로 급속히 퍼졌다. 이른바 국민가요로 애창됐다. 이심전심, 세월이 지난 IMF때에도 자주 불렸다. 지금도 회갑잔치나 40대 이상의 남성들이 거나하게 술한잔 마시면 단골로 나오는 노래 메뉴 중 하나다. ●해남서 내년부터 ‘오기택 가요제´ 개최 특유의 저음 가수 오기택(64). 분명 한 시대를 풍미했다. 지난 63년이었다. 밤깊은 서울 마포에서 바라본 영등포는 불빛만 아련했다. 은방울자매가 부른 ‘마포종점’의 가사 중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하나’처럼 영등포는 먼 곳이었다. 또 있다. 오죽하면 ‘진등포’였을까. 사람마다 장화를 신고 다녀야 할 정도로 늘 땅이 젖어 있었다. 이럴 때 스무살의 젊은 청년 오씨가 불현듯 나타나 ‘영등포의 밤’을 구성지게 불렀다.‘궂은 비 하염없이 쏟아지는 영등포의 밤/내가슴에 안겨오는 사랑의 물결∼/아 영원히 잊지 못할 영등포의 밤이여’ 한자락 쫙 깔린 바리톤 목소리로 가슴을 후벼 팠다. 당시 영등포 사람들은 거의 ‘애국가’처럼 불렀다. 고단한 민초의 삶을 토해냈고 미래의 꿈과 사랑을 위한 이중주였으니….3년 뒤에는 남궁원·엄앵란 주연으로 같은 제목의 영화가 나왔고 노래를 부른 오씨까지 출연하면서 ‘영등포의 밤’은 공전의 히트를 쳤다. 뿐만 아니다. 오씨는 66년도에만 ‘아빠의 청춘’에 이어 ‘고향무정’‘충청도 아줌마’‘마도로스 박’을 연이어 불러 히트치면서 단숨에 국민가수로 떠올랐다.‘구름도 울고 넘는 저 산아래∼’로 시작되는 ‘고향무정’은 타향살이에 지친 많은 사람들에게 진한 향수의 리얼리즘으로 다가갔다. 지금도 명절때 가족끼리 만나면 즐겨 부른다. 또 명사들을 만나 18번이 뭐냐고 물으면 ‘고향무정’을 꼽는 사람이 많다. ‘충청도 아줌마’ 역시 지금의 40대 이상에겐 한두 소절의 가사를 중얼거릴 정도로 친숙해져 있다.‘와도 그만 가도 그만 방랑의 길은 먼데 충청도 아줌마가 한사코 길을 막네∼’ 두번에 걸쳐 10대가수상을 받은 오씨는 그렇게 60∼70년대를 풍미했다. 일본까지 원정갈 정도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그가 녹음한 노래만 무려 1000곡이 넘는다. 지금은 어떨까. 안타깝게도 모든 부와 영예, 인기를 뒤로 하고 외롭게 혼자 재활치료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영등포구 여의도의 한 작은 아파트에서 노래말처럼 ‘아련한 불빛’과 ‘쓸쓸한 여의도 비행장’을 생각하며 회한에 빠져 있다. 이런 그에게 최근 반가운 소식 두가지가 날아들었다. 첫번째는 전남 해남군에서 내년 10월부터 ‘오기택 가요제’를 개최한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충청도 아줌마’의 노래비가 곧 세워진다는 것. ●바다낚시 갔다 뇌출혈로 죽을 고비 오씨를 만나기 위해 아파트 문을 노크했다. 불편한 다리 때문에 한손으로 벽을 기대며 애써 맞이한다. 오씨는 10년전 6시간의 뇌수술을 받고 깨어나 언어장애와 왼쪽 팔·다리 마비증상이라는 고통을 안고 살아야 했다. 그러니까 1996년 12월30일이었다. 낚시광인 그는 제주 추자도로 혼자 낚시를 떠났다.10일간 낚시할 수 있는 야영 준비물을 챙기고 도착한 곳은 상(上)추자의 ‘염섬’이라는 무인도. 이날 오후 50㎝ 크기의 감성돔 3마리를 기분좋게 낚고 상추자 주민들과 새해 첫날을 맞이할 생각에 들떠 있었다. 내일은 폭풍주의보라는 라디오 뉴스가 흘러나왔다. 철수 준비를 서둘렀다. 하지만 오기로 돼 있던 배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루가 지난 31일에도, 그 이튿날에도 배는 오지 않았다. 휴대전화도 없어 연락할 방법조차 없었다. 1월2일 아침. 폭풍주의보가 해제됐다는 뉴스를 들었다. 배가 곧 오겠지 하며 다시 짐을 꾸렸다. 이때였다. 갑자기 어지러움 증세와 함께 왼쪽 팔·다리의 힘이 쭉 빠지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운이 없게도 바다쪽으로 경사진 낭떠러지 바로 앞이었다. 게다가 솔잎이 바닥에 널려 있어서 조금만 움직여도 미끄러져 바다에 떨어질 판이었다. 겨우 오른손을 뻗어 옆에 있는 소나무 가지를 잡았다. 설상가상, 팔에 힘이 점점 빠졌다. 바지의 허리띠를 겨우 풀어 오른손을 소나무에다 칭칭 감았다. 캄캄한 밤이 됐다. 배가 고프면 솔잎으로 허기를 채웠다. 입술이 덜덜 떨릴 정도로 진눈깨비의 추위까지 엄습했다. 아무 노래나 마구 불러댔다. 부처님과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몸 전체가 꽁꽁 얼었다. 낚싯배가 온 것은 1월3일 오전 10시였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극적으로 구출된 오씨는 제주경찰청 헬기로 긴급 후송돼 제주 한라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았다.4일 오후에는 대한항공편으로 서울 성모병원으로 옮겨져 뇌수술을 받았다. “뇌출혈이지요. 평소 혈압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아찔했습니다. 해병대에서 고된 훈련을 받았기에 24시간을 버텼다고 생각합니다.” 오씨는 손목의 흉터를 보여준다. 당시 소나무에 감겨진 자국이다. 침이란 침은 다 맞아보고 약이란 약은 다 써봤다고 했다. 독자로 태어나 세살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마저 일찍 작고해 오랫동안 혼자 살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10년동안 재활치료하느라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혼을 안 한 후회도 많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고향인 해남에서 먹을 것을 조금씩 보내주는 훈훈한 인정이있었다. 치료비는 잘나가던 시절 벌어놓은 것으로 충당했다. ●날마다 헬스클럽서 걷는 연습 평소 운동으로 단련된 체력과 강한 의지로 언어장애는 약간 극복했지만 노래 부를 정도는 아니다.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하루에 한번 동네 헬스클럽에 가서 힘겹게 걷는 연습을 하며 재활치료를 하고 있다. 매년 그랬듯이 올겨울에도 쑤셔오는 몸 때문에 태국에 가서 요양할 예정이다. “그때 ‘영등포의 밤’을 불러 영등포 지역의 땅값이 많이 올랐습니다. 노래요? 어릴 때부터 잘한다고 했지요. 고복수 선생님이 운영하는 동아예술학원에 들어가면서 가수가 됐습니다.” 오씨에겐 두가지 이력서가 있다. 가수와 골프.80년부터 시작한 골프실력은 88년 제5회 광주CC 챔피언 등 각종 아마추어대회에서 10여차례나 우승을 거머쥐었다. 뭐든지 열심히 해야 한다는 특유의 성미 덕분이다. 나이가 비록 60대 중반이지만 가수로서의 재기의욕도 그만큼 강하다. 노래가 좋아 결혼도 못했다는 그는 잠시 창너머 한강쪽을 바라본다.“정말 아까운 노래들이 많아요. 생전에 팬들에게 보답하는 기회가 꼭 한번 왔으면 좋겠네요.” ■ 오기택이 걸어 온 길 ▲1943년 해남 출생 ▲59년 서울 성동공고 졸업 ▲62년 동아예술학원 2년 수료 ▲61년 제 1회 KBS 주최 직장인 콩쿠르대회 1등입상 ▲63년 ‘영등포의 밤’‘가버린 영아’로 데뷔 ▲65년 해병대 만기제대 ▲67년 제2회 부산문화방송 10대 가수상 수상 ▲75년 한국연예인협회 이사 ▲79년 동협회 가수분과위원장 ▲86∼91년 일간스포츠 초청 연예인 자선골프대회 연속 우승 ▲90년 싱가포르 렉스오픈 아마추어 1위 ▲97년 1월 추자도 인근 무인도에서 낚시 도중 뇌출혈로 쓰러짐 ▲2006년 반야월 가수예술공로상 수상 # 주요 히트곡 ‘아빠의 청춘’‘영등포의 밤’‘고향무정’‘충청도 아줌마’‘찾아온 고향’‘비내리는 판문점’ 등. 현재까지 1000여곡 발표 km@seoul.co.kr
  • [서울대 개교 60주년] 6·25때 부산 피란… 91년에 첫 직선총장

    [서울대 개교 60주년] 6·25때 부산 피란… 91년에 첫 직선총장

    서울대는 1946년 7월 문교부가 내놓은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에 따라 출범했다. 서울 동숭동을 중심으로 서울시내 곳곳의 캠퍼스에서 초기 30년을 보낸 뒤 1975년 현재의 관악캠퍼스로 이전했다. 1924년 설립된 경성제대를 모체로 동숭동의 문리과대, 법대, 예술대를 비롯해 사범대, 상대, 공대, 의대, 치대, 농림과대 등 서울 각지에 흩어져 있던 9개 단과대로 출발했다. 설립 과정에서 일부 교수와 학생들은 미 군정의 통치, 대학자율권 침해 등을 이유로 거세게 저항, 전국 400개 학교가 동맹휴업하는 이른바 ‘국대안 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50년에 터진 6·25전쟁을 피해 51년부터 전쟁이 끝난 53년까지는 부산에 내려가 있어야 했다. 다시 서울로 돌아와 학교이름을 ‘국립서울대학교’에서 ‘서울대학교’로 바꿨다. 4·19혁명으로 교수협의회가 결성되고 학생들은 자율적으로 학생회를 조직하기도 했으나 5·16 쿠데타로 강력한 통제를 받게 됐다. 이때 서울대는 동숭동을 중심으로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의식이 밑바탕에 깔린 서클, 야유회, 미팅 등 독특한 대학가 문화를 형성하기도 했다. 75년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뒤 유신시대의 긴급조치와 광주사태 등 부당한 권력의 억압을 보다 못한 많은 학생들이 강의실을 뛰쳐나와 민주화를 외쳤다.87년 6월 항쟁 이후 학내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대학 자율권이 신장돼 91년 첫 직선총장이 선출되기도 했다. 90년대부터 사회적으로는 지연, 학연 등으로 얽힌 특정 집단의 권력화를 우려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우려의 중심에 서울대가 있었다.‘서울대 폐지론’이 사회적인 이슈가 되기도 했다. 김준석기자 hermes@seoul.co.kr
  • 11일 강남 노인문화 대축제

    ‘50년대 군복,60년대 히피복장,70년대 나팔바지….’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등 숱한 고난을 넘어 오늘이 있기까지 우리사회의 디딤돌이 된 어르신들을 위한 행사가 11일 강남구민회관에서 열린다. 서울 강남구(구청장 맹정주)가 10월 경로의 달을 맞아 온 구민과 함께 마련한 ‘강남구노인문화대축제, 출발 추억속으로’는 고난의 세월을 이기고 경제발전을 이룩한 어르신들이 과거를 회상하며 잠시나마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각종 행사들이 준비돼 있다. 패션쇼에서는 어르신들이 모델로 등장,40년대 몸뻬바지에서부터 6·25때 군복,70년대 나팔바지 등 40년대에서 90년대까지의 의상을 선보인다. 또 어린이와 중년층 등은 리듬체조, 밸리댄스 등으로 어르신들을 즐겁게 하고, 어르신들도 그동안 갈고 닦은 에어로빅과 댄스스포츠, 건강체조 등을 펼쳐 보인다.1·2·3세대가 같이 어울리는 무대다. 어르신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동춘서커스단의 서커스 공연도 이뤄진다. 또 생활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지역사회 발전에 공헌한 모범노인 8명과 노인복지에 기여한 유공자 1명에게 감사패도 수여된다. 맹정주 구청장은 “동별로 다양한 어르신 위안잔치를 개최해 어르신들이 존경받고 보호받는 사회, 보람 있고 활기찬 노후를 보낼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 11일 강남 노인문화 대축제

    ‘50년대 군복,60년대 히피복장,70년대 나팔바지….’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등 숱한 고난을 넘어 오늘이 있기까지 우리사회의 디딤돌이 된 어르신들을 위한 행사가 11일 강남구민회관에서 열린다. 서울 강남구(구청장 맹정주)가 10월 경로의 달을 맞아 온 구민과 함께 마련한 ‘강남구노인문화대축제, 출발 추억속으로’는 고난의 세월을 이기고 경제발전을 이룩한 어르신들이 과거를 회상하며 잠시나마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각종 행사들이 준비돼 있다. 패션쇼에서는 어르신들이 모델로 등장,40년대 몸뻬바지에서부터 6·25때 군복,70년대 나팔바지 등 40년대에서 90년대까지의 의상을 선보인다. 또 어린이와 중년층 등은 리듬체조, 밸리댄스 등으로 어르신들을 즐겁게 하고, 어르신들도 그동안 갈고 닦은 에어로빅과 댄스스포츠, 건강체조 등을 펼쳐 보인다.1·2·3세대가 같이 어울리는 무대다. 어르신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동춘서커스단의 서커스 공연도 이뤄진다. 또 생활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지역사회 발전에 공헌한 모범노인 8명과 노인복지에 기여한 유공자 1명에게 감사패도 수여된다. 맹정주 구청장은 “동별로 다양한 어르신 위안잔치를 개최해 어르신들이 존경받고 보호받는 사회, 보람 있고 활기찬 노후를 보낼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겨레말 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이사장 고 은 시인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겨레말 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이사장 고 은 시인

    불현듯 부질없는 상상을 해본다. 언어가 없는 인간세상을 말이다. 우선 ‘사랑한다’고 못하겠지. 또 ‘미안하다’는 말을 못해 엉뚱한 싸움판도 벌어지겠지. 이래저래 오해와 진실이 마구 뒤엉켜 결국은 멸망? 지구상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과연 몇개나 될까. 학자들에 따르면 6000여개는 족히 넘는다. 또 2주에 걸쳐 하나씩 소멸된다고 한다. 이는 지구 생태계 또는 작은 부족의 멸종과 비례한다는 뜻이다.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민족의 상처와 영혼을 켜켜이 담으며 살아온 우리 언어. 남북 분단 60여년, 겨레의 언어 역시 그 세월만큼 간격의 골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 몇가지 예를 들어 보자. 남쪽에서 사용하는 ‘전업주부’를 ‘가두녀성’으로,‘도넛’을 ‘가락지빵’으로,‘반딧불이’를 ‘에디벌레’로 각각 다르게 사용한다. 또 계산기 하면 남쪽에서는 전자계산기를 연상하지만 북한에서는 컴퓨터로 통한다. 아울러 ‘해커’를 ‘헤살꾼’으로 ‘스파게티’를 ‘구멍국수’ 등으로 사용하며, 전문·학술용어의 경우 그 차이의 정도는 훨씬 심각하다. 만약 남북 의사가 같이 수술대에 있다면 시술이 불가능할 정도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아마 제주도에서 함경도의 방언까지 몽땅 비교한다면? 쉽게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지난 1970년대초였다.7·4 공동 성명과 적십자 회담 등을 위해 6·25이후 남북 당국자가 처음으로 만났다. 남측 요원이 회담장에서 서비스를 하던 북한 여성에게 “아가씨”라고 했더니 정색을 하며 “접대부로 불러주세요.”라고 당황케 했던 일화는 지금도 회자된다. 남과 북이 분단된 후 언어차이를 처음으로 실감케 한 사례였다. ●겨레말은 남한 표준어·북한 문화어·방언 합친 말 1989년 3월이었다. 문익환 목사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 주석을 만나 남북 언어의 이질감을 얘기하면서 ‘통일대사전’을 공동으로 편찬하자고 했다. 이후 논의가 중단되다가 2004년 12월 13일 금강산에서 남북 편찬위원들이 만나 결성식을 가짐으로써 본격적인 출발을 하게 됐다. 이후 지난해 2월 편찬위 1차정기회의(금강산)를 시작으로 그동안 7차례에 걸친 실무접촉을 가졌고 오는 2012년까지 30만여 어휘를 담은 남북한 단일사전, 즉 ‘겨레말큰사전’을 펴내기로 했다.‘겨레말’은 남한의 표준어, 북한의 문화어, 그리고 남북의 방언을 합친다는 뜻이다. 현재 남측과 북측은 각각 방언조사 등 편찬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글날을 앞두고 ‘겨레말 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고은(73) 시인을 만났다. 장소는 서울 마포에 위치한 편찬사업회 사무실. 지난달 말 제7차 편찬위 평양회의에 다녀온 직후였다. 어느 정도 진척이 됐을까. 그는 “현재 ‘ㄱ’과 ‘ㄴ’ 부분을 끝냈다면서 남북 모두 관심이 높기 때문에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ㄱ’의 경우만 하더라도 올림말이 6만 9000여개에 달했단다. 남쪽은 10여군데에 대한 방언조사를 끝냈고 북측도 다섯군데를 조사해 서로 CD로 자료를 교환했다. ●우리말은 세계 10위권 유지하는 민족어 남과 북에서는 현재 ‘표준국어대사전’(50만 9000여 어휘 수록)과 ‘조선말대사전’(33만여 어휘)이 주로 쓰이고 있지만 이 사전들은 현장조사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 이 두 사전에서 공통적인 것과 다른 것 20만개를 뽑고, 이들 사전에 올라 있지 않은 10만개를 새로 추가시키는 작업이다. 예를 들어 최근 조사된 호복이(전북지방, 흠씬 익도록 삶거나 끓이는 모양), 큰아베(경북, 할아버지), 쪼시락허다(전남, 하찮다) 등이 될 수 있다. “언어란 세월이 지나면서 소멸 또는 변질되지요. 우리 근대사 이후 겨레 언어가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연해주, 중앙아시아, 만주 일대는 물론 60년대 이후 미국으로 가지고 간 언어도 조사해야 합니다.” 아울러 “얼마전 사할린 징용자 위령제에 다녀왔다.”면서 30년대 후반부터 우리 동포가 약 15만명이 이주했는데 현재는 3만명밖에 안된다고 했다. 그만큼 우리 순수 언어도 줄어들거나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덧붙였다. 또한 남과 북 각 지역의 방언과 향토어 속에 우리 말을 찾아내는 작업도 병행된다고 부연했다. 따라서 훈민정음 창제 이후 최초로 우리 겨레말을 집대성하는 일이며, 우리 후손들이 만나야 할 ‘대사전’이라고 의미부여를 했다. 때문에 2012년 이후에도 계속 보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작업에 참여하는 남측 편찬위원들은 학자나 교수들이 대부분이지만 북한의 경우 사회과학원 소속 연구원에서 직접 관장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한글은 세계 문자 역사상 가장 경이로운 문자입니다. 또 한국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프랑스어보다 많은 세계 10위권 안에 들어갑니다. 러시아어도 푸슈킨 이후 주목을 받았고 독일어는 괴테의 ‘파우스트’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지요.” 우리말도 근대문학 이후 표현력이 아주 좋아졌다고 강조했다. 그 이전의 양반들은 주로 한문 중심이었다는 것. 예를 들어 편지를 쓸 때에도 ‘기체후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하시옵고….’라는 식이었다. 결국 활발한 신문학 운동은 모국어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영어, 스페인어, 중국어 등 대국어들이 횡행하는 오늘날에 우리말이 세계 10위권을 유지하게 된 것도 대단한 민족어가 아니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고 이사장은 이런 우리글이 다음 세대에 가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많다. 인터넷상에 계속 퍼지는 언어와 영어 등의 영향으로 우리 언어가 크게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겨레말 큰사전을 통해 방향타를 잡고 또 자국어 보존을 위한 정책도 꾸준히 펼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아울러 “말이란 한 시대가 지나면 사라진다.6·25 이후만 보더라도 우리말이 많이 달라졌다.”면서 고대시와 지금이 다르듯이 현재 사용되는 우리말이 나중에 고어로 남게 되고 일부는 공중에 흩어져 소멸된다고 했다. ●남북, 문화행위로써 우선 동질성 회복해야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당시 세종대왕은 몽골과 여진 지역에도 학자를 파견했다. 또 티베트어 연구는 물론 산스크리스트어를 사용하는 승려도 참여시키는 등 세계적 언어로 만들려고 애를 썼다.”고 했다. 실제로 몽골에 가면 당시 사신이 다녀갔다는 자료가 현재 남아 있다는 얘기를 몽골학자한테 전해들었다고 귀띔했다. 또 세종은 여진과 말갈족들을 끌어들이는 등 이주정책을 펼쳤는데 놀랍게도 아직까지 함경도 지방에 경상도 사투리가 남아 있단다. “아마 당시 한글창제 작업은 중국 몰래 했겠지요. 한자(漢字)와 다른 문자를 따로 만든다는 것은 천자(天子)를 자처하는 입장에서 볼 때 불온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공표도 조심스럽게, 즉 보다 쉽게 민중에게 뜻을 전달하기 위한 글이라는 식으로 중국을 달랬지요. 또 비로소 한자 지배의 구속에서 벗어나 최초로 민중문자와 민족언어를 가졌다는 역사적 의미도 있습니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 겨레말 편찬사업에 남다른 열정을 쏟는 고 이사장. 세상에 놀러오지는 않았다고 강조하는 그는 “남북은 정치·군사적 문제만이 아닌 먼저 문화행위로써 서로 동질성을 회복하고 스며들다 보면 통일도 가능해진다.”고 역설했다. 이어 “겨레말에 의탁하여 살아온 지난 역정을 바쳐 ‘이젠 죽을 수 있다. 이제 죽어도 된다.’라는 몇년 뒤의 궁극적 감회를 예감하고 있다.”며 자신감을 내보였다. km@seoul.co.kr ■ 고은이 걸어온 길 ▲1933년 군산 출생(본명 고은태), 군산고 중퇴 ▲52년 입산,10년간 승려생활(법명 일초) ▲58년 조지훈 등의 천거로 ‘현대시’에 ‘폐결핵’ 발표로 등단 ▲60년 첫 시집 ‘피안감성’ ▲62년 환속, 재야 운동가로 활동 ▲74년 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 출간. 제1회 한국문학상 ▲86년 ‘세계의 문학’에 ‘만인보’ 연재 ▲89년 제3회 만해문학상 ▲90년 민족문학작가회장 ▲99년 미 하버드대 연구교수. 버클리대 초빙교수 ▲2004년 제4회 베를린문학페스티벌 자문위원 ▲05년∼현재 겨레말 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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