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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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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플러스] 기업집단 친족 8촌→ 6촌으로

    대기업집단 계열사 소속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인 동일인 친족 범위가 현행 혈족 8촌에서 6촌으로 완화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안이 6일 국무회의를 거쳐 확정됐다고 밝혔다. 이번 개정은 특수관계인의 친족 범위를 6촌으로 축소한 법무부의 상법 시행령을 반영한 결과다. 대규모 기업집단으로 지정된 기업의 신고 및 공시 부담이 완화된 셈이다.
  • 신해철 “은퇴 걸고 서태지 밴드와 대결 원해”

    신해철 “은퇴 걸고 서태지 밴드와 대결 원해”

    신해철이 서태지에게 도전장을 냈다. 최근 6촌 지간인 것이 알려지면서 화제를 모은 신해철과 서태지는 최근 한 방송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2일 오후 8시 서울 홍대 상상마당에서 열린 ‘넥스트 6집 앨범 발매 & 전국투어 콘서트’ 기념 기자회견에서 신해철은 “데뷔 후 처음으로 서태지와 한 무대에 섰는데 무대 위에서 서태지 밴드와 대결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서태지에게 대결을 신청했다. 신해철은 “넥스트 밴드와 서태지 밴드끼리 1대1 승부를 해봤으면 좋겠다.”며 “진 팀은 영원히 해산하자라는 내기를 걸고 진행하고 싶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한편 올해로 데뷔 20주년을 맡는 신해철은 지금까지 맡아온 라디오 DJ, 연예기획사 대표 등 ’과외 활동’을 모두 멈추고 새로운 소속사의 뮤지션으로, 넥스트의 신해철로 음악활동에 전념할 계획이다. 4년간의 공백을 끝내고 오는 일산(6일), 대구(13일), 서울(24일) 전국투어 콘서트로 새로운 도약을 다짐하는 넥스트는 이번 기자회견과 쇼케이스를 통해 새 앨범의 곡들을 최초로 공개했다. 서울신문NTN 서미연 기자 miyoun@seoulntn.co.kr / 사진=조민우 기자@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나훈아 피앙세는 부산 미인 미스리

    나훈아 피앙세는 부산 미인 미스리

    최근엔 영화에까지 얼굴을 내미는 총각인기 가수 나훈아(羅勳兒)(25)가 장가갈 날도 멀지않은 것 같다. 지난봄엔 약혼 추진설이 나돌더니 요즘엔 약혼녀와 동거하고 있다는 소문이 연예가에 나돈다. 소문대로 그는 이미 신부감과 단꿈의「테이프」라도 끊은것일까? 두살 아래의 소꿉친구로「스타」고은아(高銀兒)의 6촌동생 나훈아의 약혼 동거설은 믿어도 좋을만한 그의 측근자에게서 새나왔다. 그의 전속「레코드」사의 한 측근자는 약 2개월 전부터 그의 약혼녀가 나훈아집에 와있다고 밝혔다. 『젊었겠다, 인기있겠다. 여자가 얼마나 많이 따르겠소. 그러다가 여성관계로 복잡해지는 것 보다는 신부감이 일찌감치 집에 썩 들어앉아있는게 오히려 훈아에겐 안전할지 모르죠』라고 말하는 그 사람은 지금의 상황이 나훈아에게 오히려 유리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 측근자의 말을 더욱 뒷받침이라도 하듯 나훈아와 가정적으로 인척 관계가 되는 B씨는 그가 이미 약혼식을 올렸다고 밝혔다. 『지난 초여름으로 기억해요. 부산의 신부집에서 양가의 어른들만을 모시고 조촐히 약혼식을 올렸죠』 B씨의 말에 따르면 약혼식때는 그가 관계하고있는「오아시스·레코드사」의 친한 사람들도 초대되지 않았다. 대신 간소한 선물은 보내왔다고 했다. 그런데 나훈아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그가 약혼했다는 사실을 알고있는 사람은 많지않았다. 그의 약혼설을 알고있는건 몇사람에 불과할 정도로 극히 비밀리에 진행된 것 같다. 약혼 2~3개월후에 약혼녀가 서울의 나훈아의 집에 올라왔다고 B씨는 말했다. 이미 지난봄 약혼추진설이 나돌때부터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나훈아 자신도 시인하고 있는 상대아가씨는 나훈아와 같은 고향인 부산태생의 이숙희(李淑姬)양. 나이는 두살아래. 부산의 남성(南星)여고를 나왔고 미모에다 가정환경도 좋다는 것. 한마디로 현모양처감이라는 그녀는「스타」고은아의 6촌 동생이라 한다. 나훈아가 이 아가씨와 인연을 맺게된 것은 어려서부터 한동네에서 친하게 지낸, 소꿉동무의 관계에서부터라고. 이웃간에 살다보니 양가 부모들끼리도 친하게 지냈고 자연스럽게 혼담이 오갔다는 것이다. 집안끼리 혼담 오갔지만 군대간 친형이 아직 미혼 지난봄 약혼 추진설이 나돌 때 이양과의 관계를 부모들은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을 때 나훈아는『양가 부모님들도 서로 호감을 갖고있는 것은 사실이다. 양가에서 사위·며느리 삼았으면 하고 오고간 얘기가 없었던 건 아니다』라고 밝힌바 있었다. 약혼녀가 나훈아집에 올라왔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동거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이에 대한 장본인의 말을 들어보자. 『동거요? 양쪽의 가정이 엄하기 때문에 말도 안돼요. 왔다갔다하긴 해요. 그렇다고 동거라고 볼 수 있나요』라고 동거설을 놀라듯 부인. 신부감의 육촌언니 고은아 역시 이양의 집안이 꽤 엄하다고 소개한 적이 있었다. 약혼한 사실이 있느냐고 묻자『약혼한 사실도 없다』고 약혼설 자체부터 부인했다. 그렇다면 B씨의 얘기는 다른 의도라도 있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그런말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내생각으로는 나와 잘안다고 괜히 우쭐해보려는 심정으로 그런 말을 퍼뜨린 것 같아요』라고 B씨의 얘기가 몹시 못마땅한 듯 흥분된 어조로 반박(?). 지난봄 약혼 추진설이 나돌 때 나훈아는 이양과의 관계에 대해 모호한 답변을 해왔으나 이번엔 그자신도 시인. 『이양을 신부감으로 굳히고 있는건 사실이에요. 그러나 가봐야 알지 나중일이야 어떻게 장담합니까』라는 그는 어떤 여성이 되든간에 결혼시기는 앞으로 2년후가 될 거라고 동거 약혼설을 끈덕지게 부인. B씨는 나훈아가 지금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도 쉽사리 그럴 수 없는 입장에 놓인 것은 물론 인기면도 있으나 군에 가있는 형이 제대하고 먼저 결혼한 다음이라야 되지않겠느냐는 것. 측근의 소문을 종합하면 동거까지는 몰라도 약혼은 거의 사실인듯 전해지고있는데 장본인은 이를 끈덕지게 부인하고 약혼설에 대해 극히 조심스런 반응을 보이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팬」의 70%가 여성이기에 속이 쓰려도 발표는 못해 나훈아뿐만이 아니고 대개 인기 처녀·총각 연예인의 경우 인기를 고려해서 결혼을 하려고 해도 꺼려하는 경우가 적지않다. 그래서 미혼인 연예인 가운데는 동거생활을 하면서도「팬」들 앞에선 처녀·총각 행세를 하는 경우가 적지않다. 특히 나훈아의 경우는 동거·약혼설을 거의 치명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팬」의 70%가 여성이란 점 때문인지 모른다. 더구나 남진(南珍)이 월남(越南)서 귀국한후 정상의 자리 고수를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마당에 그런 문제는 더욱 치명적이라는 생각을 하는 게 나훈아일 듯. 따라서 그는 영원한 배필을 발표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입장을 속쓰리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남진 귀국후에도「디스크」판매면에선 여전히 압도적. 그리고 최근엔 영화에까지 발을 뻗친 탓인지 여성「팬」이 더욱 늘은게 나훈아. <걸>(杰) [선데이서울 71년 11월 28일호 제4권 47호 통권 제 164호]
  • ‘대우 구명로비’ 주가조작 의혹 LG 3세 구본호씨 체포

    대우 구명 로비 의혹 등을 수사하고 있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부장 박용석 검사장)는 19일 LG가(家) 3세인 구본호(35)씨를 증권거래법 등 위반 혐의로 체포해 조사 중이다. 검찰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차명으로 숨겨 놓은 수백억원대 재산을 찾아 내는 과정에서 구씨가 시세 조종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올린 혐의를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씨는 구본무 LG회장의 6촌 동생으로 지난해 주식시장에서 손대는 종목마다 상한가를 기록하면서 주가조작 의혹을 받아 검찰의 내사를 받아왔다. 검찰은 구씨가 대주주인 여행사 레드캡투어의 2006년 유상증자 때, 조풍언(구속기소)씨가 실소유주로 알려진 글로리 초이스 차이나가 제3자 배정방식으로 참여해 주식 20만주를 주당 7000원에 매입, 수십억원의 시세차익을 얻은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한편 검찰은 김우중 전 회장의 수백억원대 차명재산과 관련, 베스트리드리미티드사(옛 대우개발)의 지분 가운데 상당부분이 김 전 회장의 차명 지분이며 은닉재산인 것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지난 2005년 수사에서 김 전 회장이 페이퍼컴퍼니 퍼시픽인터내셔널에 1983년 9월부터 2000년 1월까지 4771만 달러를 송금했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4589만 달러가 부인 정희자씨가 대표이사로 있던 필코리아의 지분 90%를 사는 데 쓰여진 것으로 알려졌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단독]李당선인 ‘금의환향’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금의환향한다. 이 당선인의 한 핵심측근은 4일 “당선인이 이번 설 연휴에는 고향마을을 찾을 것 같다.”면서 “이 당선인에게는 어느 해보다 각별한 설이니만큼 조상들에게 인사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 당선인의 고향마을 방문은 지난 2006년 9월 이후 1년 5개월 만이다. 이 당선인은 설 연휴가 시작하는 6일 오전 부인 김윤옥 여사와 함께 KBS ‘아침마당’에 출연, 국민들에게 설 인사를 하고 고향인 경북 포항 흥해읍 덕성리 ‘덕실(德室)마을’로 향할 것으로 보인다. 덕실마을은 조선시대에 전국적으로 가뭄이 들었을 때 덕이 있는 사람이 많아 마을의 샘이 마르지 않았다는 얘기가 전해져 붙여진 이름이다. 일본 오사카 출생인 이 당선인은 4세 때 광복과 함께 덕실마을로 들어와 2∼4년간 자랐다. 현재 마을에는 31세대 주민 68명이 거주하고 있고, 이 당선인의 문중(경주 이씨) 6촌 동생 상욱(61),8촌형 상근(71),8촌 동생 상용(55)씨 등이 살고 있다. 포항시는 이 당선인의 방문을 맞는 특별한 설을 위해 ‘이명박 당선인 고향마을 설맞이 행사’를 열 계획이다.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최근 17년 진행 교통방송 떠난 성우 송도순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최근 17년 진행 교통방송 떠난 성우 송도순씨

    인생은 70%가 ‘말’에서 좌우된다. 또 의사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목소리’라고 한다. 유명한 미국의 심리학자 앨버트 메라비언 박사는 메시지의 전달 요소에서 ‘내용’은 그 중요성이 겨우 8%밖에 안된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표정이 35%, 태도가 20%, 그리고 목소리가 무려 38%를 차지한다는 것. 특히 전화로 상담할 때에는 목소리의 중요성이 82%로 올라간다. 이게 바로 메라비언의 법칙(The Law of Mehrabian)이다. 그래서일까, 사업이나 일을 잘 하는 사람들은 대개 정감있는 목소리를 낸다. 화려함보다는 따뜻한 음성을 담는다. 만약 당신이 ‘비호감’ 스타일이라면 이 대목을 한번쯤 떠올려볼 만하지 않을까. ●라디오스타 송도순 ‘똑소리 아줌마’가 있다. 얼핏 ‘수다’처럼 들리지만 구수하게 다가온다. 뜨거운 여름날의 청량음료처럼 시원시원하다. 어쨌든 하루 일과를 마친 퇴근길에서 ‘친절한 길잡이 아줌마’로 지난 17년 동안 우리들과 만났다. 혼자 운전하는 사람에게는 늘 옆자리에 앉아서 ‘길안내’를 해주는 푸근한 아줌마였다. 그래서 길이 막히면 돌아갈 수 있었고 잃어버린 물건도 찾을 수 있었다. 우리의 교통문화와 교통질서를 한 차원 끌어올렸다는 평가도 받는다. 바로 이 시대의 ‘라디오 스타’ 성우 송도순(58)씨를 말한다. 송씨는 최근 명콤비 배한성씨와 함께 진행해 왔던 퇴근길 라디오 프로그램(tbs·교통방송, 함께 가는 저녁길)을 그만두었다.1990년 tbs 개국 이래 줄곧 이 프로그램을 맡아 하루 일을 끝낸 청취자들의 귀갓길을 도왔다. 그만둔 사연이야 나름대로 있겠지만 그동안 직장인 팬들과 많은 정이 들었기에 아쉬움도 크고 또 앞으로 어떻게 지낼지 궁금증 또한 생겨난다. 특히 올해로 성우인생 40년째를 맞기에 그로서는 이래저래 각별한 요즘이다. 지난 10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짧은 생머리, 수수한 옷차림이 인상적이었다. 키가 172㎝! ‘와’ 놀라워했더니 “고등학교때 선생님의 권유로 농구선수를 했지만 운동신경이나 취미가 영 따라주지 않아 금방 그만두었다.”며 웃는다. ●목소리는 인품이자 성품 이어 “목소리가 인품이요, 성품이다. 전화 목소리를 들어보면 인간성을 알 수 있다. 단어선택, 어순, 강약이 다 한 순간에 나온다. 그러기 때문에 (인성이)결정된다.”고 특유의 목소리론(論)을 펼친다. 하지만 “(방송에 있어서)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던 소리, 말 그대로 목소리로만 하던 때는 지나갔다.”며 시대변화의 흐름을 거론했다. 아마 애지중지 아껴온 교통방송 진행의 도중하차에 대한 이유를 우회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닐까. 지난달 30일 교통방송을 그만 두는 날 팬들이 많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는 그는 “하루종일 격려와 아쉬움의 전화가 쇄도해 정말 놀랐다.”면서 “그동안 입만 갖고 살아왔으니 이제는 편안하고 좋은 아줌마로 살아갈 생각”이라고 피력했다. 방송진행을 하면서 나름대로 보람과 애환도 많았을 터.“처음 시작할 때에는 고속도로 휴게소 주변이 먼지 덩어리였으나 지금은 깨끗해졌고, 교통용어도 많이 순화된 것 같다. 아울러 줄서기 문화와 4거리에서 교통질서를 지키는 것도 많이 좋아졌다.”고 의미부여를 했다. 예를 들어 교통 위법차량을 실시간 화면으로 보면서 “끝자리 번호가 0인 아저씨, 자식들한테 창피하잖아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번호까지 적어보내고 있어요.”라는 방송멘트를 하면 금방 달라지곤 했다는 것이다. 에피소드. 교통방송 진행 초창기때였다. 한번은 배한성씨가 방송시간에 늦어 송씨 혼자 마이크를 잡았다. 이때 배씨한테서 서울 종로구 사직터널 안에서 차가 꽉 막혀 오도가도 못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자 송씨는 생방송을 통해 “제 짝궁인 배한성씨의 빨간 티코차가 사직터널 안에 있습니다. 저 혼자 방송진행하고 있거든요. 좀 도와주세요.”라고 하자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차들이 양쪽으로 비켜주었다. 또 하나. 어느날 형편이 어려운 버스기사가 수천만원이 든 돈가방을 주워 방송국에 들고 와 주인을 찾아준 일도 보람으로 남는다. ●“저녁때 약속이 없다보니 흔한 스캔들(?)도 없었다” 송씨는 교통방송의 ‘함께 가는 저녁길’과 그 전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까지 합해 34년 동안 저녁을 제때 먹지 못했다. 거의 매일 휴대용 아이스박스에 김밥이며 떡을 싸들고 방송 스튜디오에서 배씨와 함께 1∼2부 사이에 간식으로 저녁식사를 때운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명절을 쇠는 건 아예 꿈도 꾸지 못했다.“저녁때 약속이 없다보니 흔한 스캔들(?)도 없었다.”며 웃는다. “열아홉살 때, 그러니까 1967년부터 성우생활을 시작했지요. 그때만 해도 곱게 소리를 내고, 남보다 얼마만큼 튀느냐가 중요했어요.” 송씨의 부모는 황해도 출신이다. 해방직후 월남했다.5남매 중 막내로 서울에서 태어난 송씨는 6·25때 가족들과 함께 군산으로 피란갔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와 혜화초등학교를 나왔다. 이어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진학했다.1학년때 대학 교수의 권유로 성우시험을 보게 돼 TBC(동양방송) 공채 3기 수석으로 입사했다. ●원래 꿈은 연극배우 타고난 끼가 어디갈까. 그는 성우를 하면서 방송 드라마에 출연도 했다.‘산다는 것은’‘사랑하니까’‘달수 시리즈’‘간이역’ 등 20여편에 출연했다. 만화영화 ‘톰과 제리’‘101마리 달마시안’‘내친구 드래곤’ 등에도 익숙한 목소리를 남겼다. 방송진행으로는 고 이기동·박상규씨와 ‘싱글벙글쇼’를 맡았다. 또 고 심철호씨와는 12년 동안 ‘저녁의 희망가요’를 진행했다. 이어 오승룡씨와 ‘명랑콩트’ 15년, 그리고 고 서영춘씨와 ‘가요만세’ 프로그램에서 오랫동안 호흡을 맞췄다. 송씨는 슬하에 아들 둘을 두었다. 첫째 박형재는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나온 후배로 현재 탤런트로 활동 중이다. 지난해 7월 결혼해 함께 살고 있다. 며느리는 동덕여대에서 자신의 ‘화술´강의를 들은 제자. 항공사 스튜어디스 출신이기도 하다. 둘째 아들은 미국에서 대학 공부 중이다. 남편은 무역 오퍼상을 하다가 현재는 서울 강남에서 친구와 함께 커피숍을 운영하고 있다. 송도균 전 SBS사장이 6촌 오빠다. 송씨는 당분간 방송 출연은 계획하고 있지 않다.2004년 9월부터 시작한 현대홈쇼핑 진행(화요일 저녁 8시40분, 토요일 아침 9시10분)에 전념할 생각이다. 이에 대해 “우리나라 중소기업들이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 상품들을 소비자들에게 있는 그대로 잘 소개해주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왜 ‘송도순’이냐고 했더니 “길을 순하게 안내하라는 뜻에서 아버지가 도순(道順)이라고 이름지었다.”며 활짝 웃는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49년 서울 출생. ▲67년 중앙여고 졸업. ▲71년 중앙대 연극영화과 졸업. ▲67년 TBC(동양방송) 성우 3기 수석 입사. ▲75년 대한민국 방송대상 라디오부문 대상 수상. ▲주요 출연작품 @만화영화=‘톰과제리’‘요괴인간’‘달려라번개호’‘내친구 드래곤’,@드라마=‘산다는 것은’‘사랑하니까’‘달수 시리즈’‘간이역’ 등 20여편.@방송진행=‘아침의 창’‘싱글벙글쇼’‘저녁의 희망가요’‘송도순·배한성의 함께 가는 저녁길’‘가요만세’‘명랑꽁트’ 등.
  • 남편죽인 17세 신부(新婦)와 시동생

    남편죽인 17세 신부(新婦)와 시동생

    너무도 끔찍한 사건이 충남(忠南) 금산(錦山)군의 어떤 외딴집에서 일어났다. 17살짜리 형수와 19살짜리 시동생이 28살의 친형을 죽여놓고 그 시체옆에서 또 한번 불륜의 정을 통했다. 형수아가씨는 결혼1개월도 못되어 시동생과 패륜에 빠지고 넉달만에 남편을 공모살인 한 뒤 보따리를 싸들고 줄행랑을 쳤다가 드디어는 쇠고랑을 차고 말았다. 가난한 신혼에 짜증내자 그때마다 시동생이 위로 형수 김정임여인(가명·17)은 전북 정읍(井邑)에서 태어나 어릴때 어머니를 여의고 서모밑에서 자랐다. 3년전부터 전주, 광주 등지에서 식모살이를 해오다가 서모도 세상을 떠나자 식모살이를 그만두고 지난 1월20일쯤 서외삼촌 되는 전복남씨(가명·38·충남 금산군)집에 들른 것이 사연의 실마리였다. 전씨는 2월초순 같은 마을에 사는 박윤직씨(가명·28)와 생질녀 김여인과의 혼담을 진행시켜 『두 집이 가난하니 서로 결혼시켜 알뜰히 살도록 해주자』고 지난 2월24일 약혼식, 이틀 뒤인 26일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신랑 박씨는 입이 딱 벌어지게 좋아했다. 젊은 신부에 마음이 온통 쏠려 3만원의 이잣돈과 장리쌀 2가마를 누이인 박정숙 여인(가명·32)을 통해 얻어다가 동네사람들과 가까운 친척들이 모여 축복을 보내는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가난한 살림에 신혼여행을 갈 수 없는 이들 부부는 신랑집인 이 마을 맨끝 산마루집 흙담 2간의 아랫방에 신방을 차리고 첫날밤을 즐겼다. 『내 비록 국민학교 조차도 못다니고 가난하지만 몸뚱이 하나는 튼튼해. 젊은 몸뚱이니까 밥은 안 굶겨. 당신만은 꼭 행복하게 해줄께…』 귀엣말로 속삭이는 남편에게 김여인은 『한번 재미있게 살아보더라고 잉! 이몸도 식모살이 하다가 시집온게 참 재밌구만!』하고 신아나서 좋아했다. 그런데 17살짜리 마누라는 싫증을 너무 빨리 느꼈다. 이유는 남편이 촌스럽다는 것. 재산이라고는 겨우 인삼밭 3간(약50평) 밖에 없고 남의 땅을 소작하고 있는 박씨의 가정에 대해 도시에서 잘 사는 집 식모살이라도 해 본 김여인은 촌스럽게 생긴 남편 박씨와의 시집살림에 며칠이 안가 싫증을 느꼈다. TV도 없고 전화도 없다. 설멋이나마 눈에 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결혼 10일이 지날 무렵부터는 남편에게 『촌사람 같다』고 노골적인 불만을 털어놓게 됐다. 이 때마다 친시동생인 박성직군(가명·19)이 17살짜리 형수를 위로하며 싸움을 말리곤 했다. 패륜은 우연히 시작되고 현장들키자 살해를 공모 결혼한지 만1개월에서 하루가 모자라는 지난 3월25일 아침에도 사소한 일로 김여인과 박씨는 언쟁을 한 뒤 박씨는 집을 나가 마을로 갔고, 홀로 있는 시어머니 홍여인(51)과 13살 된 시누이는 인삼밭에 가고없는 낮 4시쯤. 이날따라 봄 기운은 고사하고 매섭게 추운 날씨였는데 시어머니와 남편 박씨를 비롯한 5식구중 3식구가 집을 나가고 나니 남은 것은 형수인 김여인과 시동생인 박군 둘이만-. 형이 결혼한 뒤부터 박군은 거의 매일 저녁 뜬 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그간 흙담집 얄팍한 장지문을 사이에 두고 형내외의 야릇한 숨소리가 흘러 나올때마다 박군은 못견디게 몸부림쳤었다. 이 날 낮에도 아랫목 이불속에서 간 밤의 야릇한 숨소리에 사로잡혀 있을 무렵, 형수인 김여인이 부엌일을 끝내고 박군이 누워있는 이불속으로 몸을 녹이려 파고든 것이 불륜의 시초. 박군은 참을 수 없는 충동에 형수인 김여인을 부둥켜안았고, 김여인도 그만 순식간에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남편에게 불만이 있는데다 시동생 박군이 항상 자기 편에서 두둔을 해주곤 했기에 호감이 가던중 연령으로도 10여살 위인 남편보다 홀가분한 시동생의 품에 손쉽게 파고들고 말았다. 이들의 불륜은 거의 매일같이 계속되었다. 식구들이 일하러 가거나 마을을 간 틈을 타 벼락같이 진행되었다. 이들은 남의 눈을 두려워할 겨를도 없이 인삼밭이 띄엄띄엄 있는 뒷산으로까지 장소를 옮겨 가면서 육체의 향락을 즐겼다. 그러던 지난 6월5일 새벽 4시쯤. 논물을 보러 남편이 집을 나간 사이 시동생과 함께 어울리고 있다가 그만 돌아온 남편에게 2개월10일간이나 비밀리에 지속해 온 부정의 현장을 들키고 말았다. 이 날부터 가정불화는 더욱 심해졌고, 겨우 빚까지 얻어 맞아들인 아내를 쫓아버리자니 가난한 살림에 새로 장가를 갈 수도 없는 박씨는 부인과 함께 딴 집으로 이사를 나가면 되겠지 하는 생각에서 이사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부정이 남편에게 탄로난 김여인은 그날부터 남편을 죽일 결심을 하고 그 방법을 곰곰 생각하게 됐으며, 시동생인 박군과도 의논이 됐다. 박군을 시켜 금산장날인 6월12일 읍내 모농약점에서 15원을 주고 극약 한알을 샀다. 나흘뒤인 15일 남의 집 모내기를 하고 막걸리 두어잔을 먹고 울적해진 박씨는 같은 마을에 있는 누이 박정숙여인 집을 찾아가 『내일 방을 얻어 이사를 갈테니 독 2개와 잔그릇 몇개만 장만해 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16일 상오 0시쯤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지 약 30분뒤 아내 김여인이 갖다주는 극약이 든 냉수를 아무 의심없이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날밤 시어머니 홍여인은 13살된 시누이와 인삼밭을 지키러 나가고 없었다. 고통으로 신음하는 박씨를 동생인 박군이 준비했던 막대기로 이마를 내리쳤다. 머리가 깨진 박씨는 약물중독에 겹쳐 그 자리에 쓰러져 비명 한마디 지르지 못한채 숨지고 말았다. 죽여놓고 자연사를 위장 장례 치르고 도망쳤으나 박윤직씨를 죽이는데 성공한 이들은 자연사를 가장하기 위해 숨진 박씨를 마당으로 굴러뜨려 얼굴에 상처를 입게 하고 다시 방으로 끌어들여 잔인한 살인연극을 끝냈다. 박군은 이 날 새벽4시30분쯤 동이 트자 같은 마을에 살고있는 누이집으로 달려가 『형이 소변보러 간다고 밖에 나가다가 넘어져 죽었다』고 태연히 말했다. 이 소식을 들은 박여인이 허겁지겁 뛰어 갔으나 이미 빳빳이 굳은 시체. 일단 자연사로 넘겨 날이 밝자 약 5백m 떨어진 마을뒤 밭에다 시체를 매장해버렸다. 이것으로 일단 사건은 끝났으나 매장을 한 다음날인 17일낮 11시쯤 김여인과 박군은 『남편과 형이 죽은 집에서는 살기 싫다』는 구실로 옷가지를 싸들고 중매를 선 전씨집에 들러 『집을 나간다』고 전한 뒤 자취를 감추자 약간의 의심을 품었던 전씨는 박윤직씨의 사인에 부쩍 의심이 짙어졌다. 박씨 어머니 홍여인으로부터 이와같은 사실을 들은 박씨의 6촌형 박모씨는 홍여인과 함께 경찰의 문을 두드려 박씨의 사인이 이상하다고 신고, 금산 경찰은 연고지를 토대로 수사에 착수하여 김연인과 박군을 긴급수배했다. 박군과 김여인은 금산읍 모하숙에서 이틀동안 단꿈(?)을 즐기다가 돈이 떨어지자 금산군 군북면에 있는 박의 고종사촌 형인 황모씨(45)집에 숨어 있다가 잡혔다. 이들은 경찰앞에서 박씨가 숨지고 난 다음 시체옆에서 『성교를 했다』고 진술하고 『약간 겁은 났지만 마음놓고 즐길 수 있었다』고 말했다. <금산=김앙섭(金昴燮) 기자> [선데이서울 70년 7월 2일호 제3권 27호 통권 제 92호]
  • 美 줄리아니 대선행보 ‘발목’

    “14년 동안 지속돼 온 6촌 여동생과의 첫번째 결혼을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결혼 인가를 받은 적이 없다.’는 이유로 무책임하게 끝냈다. 두번째 부인과의 이혼 과정에서도 인간성 논란을 받을 정도로 잡음을 일으켰다.”“낙태나 동성애자 권리에 대한 지지는 보수 유권자들을 소외시킬 수 있다. 진보적인 시각이 공화당과는 맞지 않는다. 정체성이 의심스럽다.” 2008년 미국 대선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공화당의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이 14년 전 자신의 취약점에 대한 대비책을 담은 선거전략 보고서 때문에 곤경에 빠졌다. 지난 93년 시장 선거 당시 참모들이 작성한 보고서가 뒤늦게 인터넷에 떠돌면서 개인적 약점과 과거 행적들이 부각되고 있는 탓이다. 약점을 방어하려고 만든 자료가 대권 행보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를 상황이다. 보고서는 줄리아니가 복잡한 사생활에 대한 모순되는 해명 때문에 과연 건전한 판단력을 가졌는지조차 의심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결혼 생활이나 성실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면 수치스러운 네거티브 캠페인이라며 일축해야 한다.”는 처방도 내놓고 있다. 줄리아니 참모들은 그가 과거 민주당원이었기 때문에 정치 철새로 비쳐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공화당 정책과는 독립성을 유지했음을 강조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13일(현지시간) “줄리아니의 참모들은 그의 취약점 가운데 ‘기이한 행동’을 유권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우려했다.”고 전했다. 줄리아니는 공화당 후보군중 경쟁자인 존 매케인을 16% 포인트 이상 따돌리고 있으며,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 보다도 2% 포인트 근소한 차이로 앞서고 있다.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효심 이어가는 제주 ‘벌초방학’

    효심 이어가는 제주 ‘벌초방학’

    ‘벌초방학을 아십니까?’ 제주 대부분의 학교는 음력 8월 초하룻날인 22일 하루 문을 닫는다. 육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제주도만의 독특한 방학이다. 음력 8월 초하루를 전후해 전국에 흩어져 있는 일가친척은 물론 일본에서도 자손이 찾아와 조상의 묘를 정성껏 단장하는 벌초행사는 제주만의 오랜 전통 풍습이다. ‘식게(제사)는 안지내도 벌초는 해사(해야)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제주에서 벌초를 하지 않는 것은 ‘불효 중의 불효’로 친다. 이 때문에 음력 8월 초하룻날을 전후해 온 섬이 ‘벌초행사’로 떠들썩거린다. 평소에는 한산한 한라산 중산간 지역이 몰려든 벌초차량으로 교통체증을 빚을 정도다. 형제나 사촌들이 모여 부모와 조부모의 산소를 단장하는 것은 물론 6촌,8촌까지 한 데 모여 증조, 고조부 등 4대 조상 묘까지 깨끗하게 손질하는 ‘모듬벌초’가 벌어진다. 특히 괸당(친·인척을 일컫는 제주사투리)을 중시하는 제주에서 벌초는 문중세를 과시하는 날이기도 해 수년전만 해도 전국에서 밀려드는 벌초 귀향인파로 항공사가 특별기를 투입하기도 했다. 벌초량이 많은 직장인들은 며칠씩 휴가를 받기도 하고 회사는 아무리 바빠도 벌초날 만큼은 휴가를 내준다. 도교육청 한영희 장학관은 “시대가 바뀌어도 학생들에게 제주 전통의 ‘미풍양속’을 체험하게 한다는 취지에서 많은 학교가 자율적으로 벌초방학을 계속 실시 중”이라고 말했다. 제주에서는 농번기에 부족한 일손을 돕기 위해 보리방학, 미깡(감귤)방학 등도 있었으나 지금은 벌초방학만 남아 있다.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건대 할머니’ 또 2억 쾌척

    ‘건대 할머니’ 또 2억 쾌척

    이순덕(79) 할머니의 건강은 전보다 훨씬 더 나빠져 있었다. 옆에서 부축하지 않으면 걷는 것은 물론 일어서지도 못한다. 입과 안면근육이 굳어 항상 무표정한 얼굴과 어눌한 말씨, 온 신경을 집중하지 않으면 할머니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17일 서울 화양동 건국대에서 만난 할머니는 평소와 달리 얼굴 가득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난해 1월 평생 모은 돈으로 세운 2층 건물(시가 약 4억 6000만원)을 건대에 기부한 할머니. 마지막 남은 돈 2억원을 다시 건대에 내놓은 할머니를 꼭 1년 만에 다시 만났다. ●2억원 또다시 건대 학생에게로 이 할머니는 1927년 12월11일 황해도 연백군 해변면 금천리 축골마을에서 태어났다.6·25전쟁 이듬해인 51년 1·4후퇴 때 여동생 남숙(76)·순옥(70)씨와 헤어져 6촌 언니와 함께 쌀 한 말만 짊어지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강화도 교동섬에서 거적대기만 덮어놓은 움막에 살면서 이웃집 물을 길어주거나 떡방아를 찧어주고 밥을 얻어 먹었다. 전 재산인 쌀 한 말을 팔아 마련한 장사 밑천으로 인천의 미군부대를 오가며 담배와 껌, 과자와 성냥 등을 사다 팔았다.3년 뒤 인천에 방 2개짜리 판잣집을 마련해 하숙을 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언제 세상 뜰지 몰라… 잘 된 것 같아” 할머니는 지난해 1월 물려줄 사람 없는 재산을 건대 학생들에게 돌려주기로 마음먹고 건물을 학교에 내놓았다. 그 때도 2억원이 든 통장만은 품에 간직하고 있었다. 두 여동생을 위해 따로 적금을 부어 챙겨둔 돈이었다. 두 여동생과 만나는 날 그 돈으로 자기 집과 똑같은 연립주택에 전자제품 등 모든 가재도구를 갖춰 살게 해주고 싶었다. 자기 피땀으로 얼룩진 돈이지만 단 한번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하지만 지난해 말 몸이 급격히 쇠약해지기 시작하면서 이 돈도 학교에 기부하기로 마음먹었다. “통일이 되면 남숙이, 순옥이 주려고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었는데 작년 말부터 언제 세상 뜰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통장을 볼 때마다 만날 수 없는 동생들 얼굴이 떠올라 마음에 아렸는데 차라리 잘된 것 같아.” ●79평 소강당 이 할머니 이름 담긴 건물로 할머니의 2억원은 건대가 추진하고 있는 ‘네이밍 기부운동’ 차원에서 학교발전기금으로 보관된다.‘네이밍 기부운동’은 일정금액(평당 300만원) 이상 기부하는 사람에게 원하는 건물 강의실에 이름과 사진을 새겨주는 것이다. 산학협동관 소강당 79평은 오롯이 할머니의 이름이 담긴 공부방이 됐다. 건국대는 “통일이 돼 할머니의 여동생들과 연락이 닿으면 이번에 기부한 2억원의 법정이자를 매월 보내주기로 약속했다.”고 밝혔다. 글 사진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여자에 미쳤나 낚시에 미쳤지

    여자에 미쳤나 낚시에 미쳤지

    남편은 무슨 일이 있어도 1주일에 두 번 이상 낚시질을 다닌다. 그러니까 결혼한지 만 18년이라지만 실상 남편과 산 것은 12년 남짓. 나머지 6년은 붕어에게 남편을 빼앗기고 살아온 한 낚시 미망인이 있다. 이름은 이죽순(李竹順)(43). 낚시에 미쳐 사는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대폿집을 차렸다. 옥호는『태공(太公)집』 - 강태공을 닮은 남편을 둔 때문이란다. 선볼 때 남편의 첫마디가 “난 낚시에 미친 사람이오” 서울특별시 중구 다동(茶洞) 17 큰 길가에 자리잡은「태공집」문턱을 넘어서면 우선 눈에 띄는 것이 한쪽 벽 가득히 들어찬 어탁(魚拓)(실물 크기의 붕어·잉어 모양을 뜬 것)과 한시(漢詩)들. 그 어탁과 한시들엔 모두 조태원(趙泰元)(54)이란 이름이 적혀 있다. 바로 이 사람이「태공집」마나님의 남편이자 조력(釣歷:낚시경력) 30년의 명조사(名釣士)다. 천안서 태어나 20세 때부터 낚시에 맛을 들이기 시작, 온양서 5, 6년간 낚시점을 경영하다 13년 전에 상경, 종로4가에서 수도(首都)낚시회를 차렸다. 그러나 반도·조선「아케이드」가 생기자 장소를 옮겨「아케이드」낚시회로 이름을 바꿨다. 조씨가 낚시점을 그만둔 건 3년 전 일. 『「플라스틱」낚시대가 나오는 바람에 집어치웠읍죠. 거 뭐 찌나 깻묵이나 팔아선 입에 풀칠도 못하겠더군요』그래서 전재산을 처분, 마나님에게「태공집」을 차려주고 자신은 아예 조태공으로 나앉았다. 낚시 안가는 날은 바둑으로 소일하는 게 낙. 『가게에 붙어있어 보았자 무용지물인 걸요 뭐. 괜히 장사하는데 걸리적 거리기만 하죠』하는 게 태공집 마나님의 말씀. 그런 남편을 둔 게 후회되지 않느냐니까, 『천만에요. 낚시에 미친 게 얼마나 좋아요? 괜히 딴 남자들처럼 여자에 미치는 것보다 골백번 낫죠』하는 게 이 마음씨 너그러운 마나님의 말씀이시다. 이죽순씨가 조태원씨와 결혼한 건 이씨 나이 25세 때. 꼭 얼굴 두 번 보고 결혼식을 올렸단다. 선볼 때 조씨의 첫 마디가『난 낚시에 미친 사람입니다』 결혼 이튿날 눈치 수상해 낚시밥 만들어 주었더니 그러더니 결혼한지 사흘 만에 일요일이 왔다. 그 전날 밤부터「우물쭈물하는 게 아무래도 수상해서」모른 체 부엌에 나가 떡밥(낚시미끼)을 만들어 주었더니 다음날 새벽 온다간다 말도 없이 낚시질 떠나고 없더란다. 이때부터 이씨의 낚시미망인 생활은 시작되었다.『여자가 귀찮아 한다고 집어치울 정도가 아니어서 18년 동안 군소리 한 번 없이』낚시질 뒷바라지를 해왔다. 낚시점을 차렸을 땐「김치 아줌마」로 낚시꾼들 세계에선 소문이 났다. 낚시대회가 있을 때마다 이씨는 큰 항아리 2개에 김치를 듬뿍 담아 보내곤 했는데 이 김치맛이 또한 신선맛. 그래서 낚시터 태공들은 이씨를 가리켜「김치 아줌마」로 불렀다고. 살다보니 떡밥이며 깻묵의 제조법 등 낚시에 필요한 지식은 모조리 갖추게 되었다. 매주 화요일과 토요일 밤은 꼬박 새우다시피 남편의 다음날 낚시준비를 해야 했고. 덕택에 월척(越尺)짜리 붕어나 2척이 넘는 잉어맛은 많이 보았단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먹어서 물려 버렸다고. 오히려 많이 잡아오는 게 귀찮을 지경. 태공집을 차린 건 꼭 3년 전. 옥호는 물론 딴 내부 장식 대신 어탁과 남편이 쓴 한시로 벽 하나를 채웠다. 그리곤 남편이 잡아온 붕어들을 조려 손님들에게「서비스」술안주로 내놓았다.『붕어조릴 땐 뼈가 녹아버리게 해야 해요. 그러자면 먼저 맹물에 1시간쯤 끓인 뒤 다시 간을 맞추어 조려야지요. 보통은 식초를 쓰는데 그러면 신맛이 나서 못써요』하는 게「태공집」마나님의 붕어 조리비법. 자연히「태공집」엔 낚시를 즐기는 손님들이 단골손님이다. 어떤 이는 낚시회 가입 절차를 물어오는가 하면 심지어 어느 저수지는 어디가 제일 고기 잘 물리는 곳인지 가르쳐 달라고 물어오기도. 이럴 땐「태공집」마나님은「들은 풍월로」아는 대로 정성껏 대답해 준단다. 모르는 것은 남편에게 물어 다음날 알려주기도. 대폿집 벽엔 남편의 어탁과 한시 붙어 제일 우스운 게 낚시 간다고 몇 천원씩 들여 떠났던 손님들이 겨우 송사리 몇 마리 잡아가지고 와선 집에 들어가기 미안하니 붕어 몇 마리 팔라는 것. 이런 손님들이 대개 초심자라는 것쯤은 아는 이 마나님은 남편이 두둑히 잡아 온 붕어들을 무보수로 분양해 준단다. 집에 돌아가 한껏 체면을 세운 그 낚시꾼이 다음날부터「태공집」단골손님이 되어버리는 건 두말할 나위도 없고. 『남편을 따라 몇 번 낚시질도 갔지요. 제일 처음 예당(禮塘)저수지에 갔을 땐 하루종일 겨우 잡은 게 새끼손가락 만한 붕어 두 마리였어요』 「태공집」벽에 붙인 어탁은 모두 7점. 두 자가 넘는 잉어가 셋, 월척 붕어가 네 점이다. 잉어 중 제일 큰 놈은 66년 8월 춘천「댐」에서 잡은 2척(尺) 6촌(寸) 8분(分)짜리. 붕어는 예당서 잡은 1척 3촌짜리가 최고다. 옆에 써붙인 한시들은 모두가 조씨의 자작으로 주제는 낚시. 그 중 2수(首)만 소개하면 - 愛竿一廻投湖時(애간일회투호시) 긴 낚시 한번 휘둘러 호수에 던지니 千憂萬難寸刻消(천우만난촌각소) 온갖 근심이 촌각에 사라지더라 山水絶是迹處江(산수절시적처강) 산수경치 좋은 강가 낚시터에 앉으니 釣樂情攘勝仙境(조락정양승선경) 낚시 즐거움이 仙境(선경)보다 낫구나 낚싯대 메고 온 손님 보면 남편 보는 것 같아 반가와 조씨가 밝히는 바로는『서풍이 살살 불고 기압이 조금 높은 날』이 태공들에겐 가장 바람직한 날씨라고. 그러나 날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리. 그래서 터를 잡는 눈이 곧 조정(釣丁)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조씨는 아예 예당저수지의 소위 명당 자리에 조대(釣臺) 10여 개를 만들어 두었단다. 호심(湖心)에 나가기 위해 자그마한 배도 한 척 마련해 두고. 『요즈음 젊은 사람들은 낚아 올리는 데만 정신이 팔려 낚시도(道)라는 걸 몰라요. 아무 데나 가서 첨벙거리는 건 옆의 사람에겐 실례가 되거든요』하는 게 명조사 조씨의 말. 『낚싯대 메고 들어오는 손님을 보면 마치 남편을 보는 것 같아 반가와요. 그래 친절히 하다 보면 손님들은 그 친절한 맛에 또 찾아오고요』이건「태공집」마나님의 말씀이다. 이 어울리는 한 쌍의 부부 - 호연지기(浩然之氣)의 남편과 인종지덕(忍從之德)의 아내 사이엔 건강히 자라난 2남 1녀가 있다. [ 선데이서울 69년 4/13 특대호 제2권 15호 통권 제29호 ]
  • 농촌 줄파산 ‘공포’

    농촌 줄파산 ‘공포’

    농촌 줄파산이 본격화할 조짐이다. 한 마을 사람들이 나란히 보증을 서는 ‘어깨보증´, 채무자가 잠적하면 보증인을 주채무자로 바꾸는 ‘엎어치기´ 등 농촌 사회에 퍼져 있는 편법적인 채무변제 방식이 연쇄파산의 원인이다. 전문가들은 파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도시 파산에 이어 연대보증으로 얽히고설킨 농촌의 줄파산이 심각한 수위로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한다. 농민들은 개인회생제도를 농촌 현실에 맞지 않아 꺼린다. 파산전문 박용석 변호사는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카드빚이 상대적으로 많은 도시 사람과 비교해 땅과 집을 담보로 잡힌 농민들이 많다는 점이다.1억원 농지에 근저당이 8000만원 설정돼 있다면 현재 개인회생제도에서는 이 8000만원을 빚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개인회생제도는 담보채권을 구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소득을 증명하기 쉽지 않다. 번 돈 중에 최저생계비를 뺀 만큼 갚아나가는 개인회생제도는 급여제가 많은 도시민과 달리 농민의 소득수준을 산출해 내기에 적절치 않다. 이런 점 때문에 파산을 택하는 게 맞지만, 농촌에서의 파산은 줄파산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구조에 놓인 일종의 뇌관인 셈이어서 이 또한 선택이 쉽지 않다. ●대부분 땅등 담보대출… 구제대상 안돼 전라북도 남원 인근의 한 마을에서 600평 규모의 비닐하우스를 경영하는 구재진(가명·42)씨. 구씨는 현재 파산 절차를 밟고 있다. 그의 빚은 2억 9000만원. 구씨는 지난 5년 동안 대출금의 만기일이 돌아올 때마다 보증인을 데리고 농협을 찾았다. 같은 마을 사람인 농협 직원은 그때마다 정책자금·가계대출·일반대출 등의 명목으로 500만∼2000만원까지 돈을 빌려줬고 이 돈은 곧바로 만기일이 돌아온 대출금을 갚느라 다시 농협으로 들어갔다. 구씨가 5년 동안 농협에서 받은 대출은 15차례. 대출을 위해 세운 보증인만 모두 6명이다. 동네 어른 3명, 마을 친구 2명, 친형까지 모두 구씨의 보증인이다. ‘보증인 돌려막기’방법으로 5년을 버텨 온 구씨는 지난 5월 6촌 형의 부도로 직격탄을 맞았다. 구씨는 지난해 6촌 형의 땅에 7000만원을 대출받아 비닐하우스를 세웠다.6촌 형은 부도 후 잠적했고 구씨의 비닐하우스는 경매로 넘어갔다. 그 뒤 농협에서는 더 이상 대출을 해주지 않고 있다. 매달 200만원 가까운 이자를 갚을 수 없게 되자 구씨의 선택은 파산이 될 수밖에 없었다. 구씨에게 보증을 선 지인 3명은 지난해 농수산신용보증기금으로 대체했지만 여전히 친형과 친구 2명은 그의 보증인이다. 구씨의 빚은 하우스를 짓기 위해 1998년 농협에서 3000만원을 대출받으면서 시작됐다.2001년 100년 만에 내린 기록적인 폭설로 하우스가 주저앉자 다시 대출을 받았다.2002년 11월 전기 누전으로 하우스에 불이 나자 보증인을 세워 대출을 받았다. 구씨는 “내가 파산하면 같은 농사를 짓는 보증인들도 줄줄이 파산할 수밖에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일봉(가명·44)씨는 ‘어깨보증’을 섰다가 전 재산을 날렸다.2000년 함께 농민회 활동을 한 친구가 세운 미곡종합처리장의 보증을 섰다. 그러나 친구의 사업은 1년 만에 부도가 났고 이씨뿐만 아니라 ‘어깨보증’을 선 2명 모두 재산이 가압류됐다. 이씨의 전 재산은 7200여평 규모의 논과 밭이다. 이씨는 1995년 농업기반공사로부터 논과 밭을 매입한 비용 1억원 가운데 절반만 갚은 상태였다. 가압류는 청천벽력이었다.10년 동안 갚아 온 5000만원보다 당장 농사 지을 땅을 잃은 건 큰 충격이었다. 지난 9월 이씨의 땅은 경매로 처분됐다. 이제 빚을 갚기 위한 대출마저 불가능해졌다. 이씨의 현재 빚은 1억 7000만원.2000년 이후 태풍과 폭설, 폭우 피해가 날 때마다 이씨는 친구 2명을 보증인으로 세우고 농협과 신협, 축협 등에서 수십차례 대출받았다. 이씨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친구 2명에게도 맞보증을 서준 상태다. ●보증인이 주채무자로…엎어치기 파산 ‘어깨보증’을 선 보증인이 주채무자가 되는 ‘엎어치기’도 농촌 줄파산의 원인이다. 전북 순창에서 개인택시를 모는 정용석(가명·46)씨. 그는 7년전 보증을 선 친형이 잠적하면서 형의 빚을 끌어안게 됐다. 형은 순창에서 젖소를 키우기 위해 농협에서 98년 7000만원을 대출받았다. 이때 정씨와 형의 친구 2명이 보증인이 됐다. 그러나 젖소 농장의 적자를 견디다 못한 형은 잠적했다. 정씨는 가압류를 피하기 위해 형의 채무를 자신 명의로 돌려 이자와 원금을 갚고 있다. 농협 직원도 “압류를 당하면 금융거래가 원천적으로 봉쇄될 수 있다.”면서 “형을 대신해 정씨가 주채무자가 되는 것이 유리하다.”고 설득했다. 정씨는 꾸준히 이자와 원금을 갚고 있지만 오히려 빚은 8000만원으로 늘었다. 정씨는 “택시 운전으로는 대학에 다니는 두 아이의 뒷바라지마저 힘들다.”면서 “아이들에게 빚이 대물림되는 것을 막기 위해 파산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안동환·남원 이효연기자 sunstory@seoul.co.kr
  • “형제애가 불보다 뜨겁죠”

    “같이 일하니 힘도 덜 들어요.” 4형제가 화재로부터 시민의 목숨과 재산을 지키는 소방공무원으로 근무, 화제다. 또 소방공무원 세계에는 형제, 오누이, 부부공무원도 유난히 많다. 울산시 소방본부는 9일 소방의 날을 맞아 울산시 소방공무원 현황을 파악한 결과 강만호(37·남부소방서)·윤호(33·중부소방서)·인호(28·동부소방서 화암파출소) 3형제가 울산에서 소방공무원으로 함께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이들 3형제는 경북 영양군 출신으로 만호씨가 가장 먼저 1996년 소방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이어 형을 따라 평범한 소방관 역할을 하던 윤호씨와 진로를 고심 중이던 막내 인호씨도 형(윤호)과 함께 지난 2002년 울산소방본부 공무원이 됐다. 이와 함께 6촌인 석종(33·중부소방서 병영파출소)씨도 소방공무원이 됐다.4형제가 소방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셈이다. 만호씨 형제는 “명절 때마다 비상근무 등으로 형제가 한자리에 모이지 못하지만 소방업무에 대해 수시로 의견을 나눈다.”고 말했다. 서로 위안도 되고 업무에 보탬도 된다는 게 이들의 얘기이다. 이밖에 조강식(33·동부소방서)·지은(31·중부소방서)씨 오누이를 비롯해 지은씨와 남편 최창수(35·남부소방서)씨 등 부부소방공무원도 8쌍이 근무하고 있다. 이들은 좋은 점도 있다면서도 가장 곤란한 때는 사고가 났을 때 부모님들의 걱정을 끼쳐 드리는 점이라고 털어놨다. 실제로 사고 때마다 이쪽저쪽 친척들로부터 전화가 올 때가 가장 난처하다고 말했다.울산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한화(1)-김승연회장가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한화(1)-김승연회장가

    1981년 ‘걱정 반 기대 반’속에 등장한 20대의 젊은 총수가 사반세기를 거치면서 이제는 중년의 관록이 물씬 풍기는 회장이 됐다. 재벌가(家)의 어린 도련님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경영자로 바뀌었으며, 패기만만하고 저돌적인 성격은 다소 무뎌진 대신 기다림의 여유를 알게 됐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선 지 25년째. 당시 국내 최연소 10대그룹 총수로, 풋내 나는 젊은이로 알려진 김 회장의 이미지는 싹 가시고, 어느덧 성공한 2세 경영인, 구조조정의 마술사, 의리파 총수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김 회장은 재계에서 2세 경영의 성공적인 착근을 넘어 제2의 창업을 했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뛰어난 경영 수완을 보여줬다. 선친인 고 김종희 창업주 때보다 규모면에서 20배 이상의 성장을 이뤘으니 세간의 평가가 그리 터무니없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시행착오와 시련도 적지 않았다. 또 그의 성공을 시대상황의 결과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검찰과 악연이 있기도 했으며, 생존을 위해 선친의 손길이 잔뜩 묻은 우량 계열사들을 매각해야 했다. 또 한화의 부활을 알리는 대한생명 인수 때에는 로비 의혹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환위기 시절에 ‘필사즉생(必死則生)’의 각오로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왔던 김 회장의 성공 스토리는 2세 경영인의 실패가 다반사인 요즘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이너마이트 김’ “몇십 배가 남는다고 해도 난 설탕이나 페인트를 들여올 달러가 있으면 단 얼마라도 화약을 더 들여올 겁니다. 나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송충이이며, 화약쟁이가 어떻게 설탕을 들여옵니까? 난 갈잎이 아무리 맛있어도 솔잎이나 먹고 살거요.”(실록 김종희) 한화그룹(옛 한국화약그룹) 김종희 창업주가 얼마나 다이너마이트 국산화에 집착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남들이 선뜻 하려 하지 않는 사업이었지만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 화약업이라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는 이름보다 ‘다이너마이트 김’으로 통했다. 그가 다이너마이트를 독점 생산하는 기업인이라는 점도 있었지만, 그의 외곬 성격과 경영 방식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정확히 터져야 하는 다이너마이트의 속성과 닮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리역 폭발사고.“이리역 폭발사고는 창업 이후 가장 심각한 경영위기에 봉착한 상황이었습니다. 선친은 모든 책임을 지고 그룹 전체를 내놓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정부가 당시 이리시 재건에 총예산 130억원을 잡았는데, 한화가 내놓은 돈이 91억원이었으니 선친의 책임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김승연 회장) 김 창업주는 1922년 충남 천안에서 부친 김재민(작고)옹과 모친 오명철(작고) 여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원산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조선화약공판에 입사, 화약과 첫 인연을 맺었다.1952년 부산 피란 시절에 한국화약을 창업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무역과 건설, 정유, 기계 등 기간산업으로 영역을 넓혔다. 김 창업주가 손을 댄 회사 가운데 성격이 다른 유일한 기업은 대일유업(현 빙그레)이다. 여기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대일유업의 거듭된 적자로 골치를 썩던 정부는 한국화약(현 한화)에 대일유업 인수를 요청했지만 김 창업주는 기간산업이 아닌 탓에 인수를 꺼려했다. 그러나 축산농가가 쓰러지고 있다는 정부의 집요한 설득에 못 이겨 그는 대일유업을 떠안았다. ●김 회장의 뚝심경영 패기만만한 김승연 회장의 뚝심 경영은 1982년 한양화학(현 한화석유화학) 인수와 합작사인 경인에너지(현 인천정유)의 경영권 확보에서 시작됐다. 모든 임원들이 당시 한양화학 인수에 반대했지만 김 회장은 혼자서 밀어붙였다. 이 때문에 ‘젊은 혈기로 무리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김 회장은 대주주인 다우케미칼의 한양화학 철수는 본사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방편이지, 석유화학 업계의 불황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여기에 가계약으로 협박하던 다우케미칼측을 ‘편지’ 한장으로 저지한 김 회장의 놀라운 협상 전략이 더해지면서 한화는 당초보다 싼값에 한양화학을 인수하게 됐다. 이는 불안하게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을 잠재우며 ‘김승연 체제’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또 미국 유니언오일사와 합작해 설립한 경인에너지의 경영권 확보에서도 김 회장의 ‘뚝심’은 잘 드러난다. 한화측에 불리한 계약서를 고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김 회장은 유니언오일의 한국 경영진을 대상으로 ‘을사보호조약 같은….’이라는 격한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김 회장의 성공 스토리는 5공 시절에 더욱 화려해진다. 명성그룹 5개사를 인수해 콘도를 비롯한 레저산업에 진출했다. 또 한양유통(현 한화유통)을 인수, 유통 분야로의 사업 확장도 꾀했다. 전광석화와 같은 공격경영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장인인 서정화 전 내무부 장관이 전두환 정권의 실세인 탓에 김 회장의 이같은 공격경영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도 일부 있었다. 서 전 장관이 사위인 김 회장의 사업에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관측에서다. 91년에는 빙그레와 제일화재가 계열 분리되면서 2세들의 분가도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형제간 재산 분쟁으로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다. ●“나는 가정 파괴범”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김 회장도 외환위기 파고는 쉽게 넘지 못했다. 생존을 위해서는 계열사를 팔아야만 했다. 그는 매각 금액을 줄이더라도 고용은 100% 승계를 원칙으로 했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김 회장은 구조조정으로 50∼60명의 직원이 일터를 잃게 되자 사내 방송에서 “선대 김종희 회장이 한화를 창업한 이래 이런 대규모 구조조정은 없었다.”면서 “나는 그들의 가정에 많은 고통을 준 가정파괴범이며, 만일 내가 경영을 잘 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비참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당시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집에 러닝머신을 설치해서 발에 물집이 생겨 터질 정도로 뛰어보기도 했다.”면서 “스트레스로 인한 고통 때문에 체중이 5㎏ 이상 빠졌다.”고 밝혔다. 이어 “그때는 정말 회장직에서 물러날 각오로 경영에 임했다.”고 설명했다. 성공적인 구조조정이 끝나면서 그에게 ‘구조조정 마술사’라는 애칭이 붙었지만 그는 이에 대해 가슴 아픈 별명이라고 했다. 한화는 2000년 동양백화점 인수를 시작으로 2001년 대덕테크노밸리 설립,2002년 대한생명을 인수했다. 외환위기 시절 위축됐던 사세를 크게 확장시킨 것이다. 이로써 한화는 석유화학을 중심으로 한 제조업과 대한생명의 금융, 한화국토개발과 한화유통이 포진한 유통·레저산업을 3대 축으로 하는 성장엔진을 마련하게 됐다. ●강태영 여사의 외유내강 강태영(78) 여사를 옆에서 지켜본 이들은 ‘조용하지만 강단있다.’고 평한다. 지난해 4월 김호연 빙그레 회장이 ‘한국의 경영자상’을 수상할 때다. 김호연 회장은 이 상에 자부심이 유독 컸다고 한다. 한때 ‘경영자로서 자질이 의심된다.’는 비난에 마음 고생이 심했던 탓이었다. 강 여사는 작은아들의 수상 소식에 들떠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시상식장을 직접 찾아 격려할 정도였다. 강 여사는 특히 90년대 초 형제간 재산 분쟁으로 우의가 상했던 탓에 형제가 화목하게 지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주변에선 전한다. 강 여사는 또 남편인 김 창업주와 사별한 이후 한번도 생일 잔치를 벌인 적이 없다고 한다. 김 회장의 설명이다.“2003년 어머니가 희수를 맞을 때 온 가족이 뜻을 모아 잔치를 해드리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내 생일 잔치는 하지 않겠다.’는 모친의 뜻을 꺾지 못했습니다.” 뜻을 굽히지 않는 강 여사도 김 창업주 생전에 큰 목소리 한번 내는 일 없이 묵묵히 내조를 했다고 한다. 두 아들의 평은 한결같다.“어머니는 유교적인 태도를 간직한 전형적인 현모양처 스타일”이라고. 김 창업주와 강 여사는 1946년 장남인 김종철 전 국민당 총재가 결혼을 차일피일 미룬 덕분에 인연을 맺었다. 차남인 김 창업주가 부친의 강요에 못 이겨 집안간 혼처가 결정난 곳으로 먼저 상투를 틀었기 때문이다. ●백두진 국회의장 부인의 중매로 김 창업주 생전에 치른 혼사는 맏딸 영혜(57)씨밖에 없다. 영혜씨의 남편은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 부장의 차남인 이동훈(57) 전 제일화재 회장이다. 김 회장은 부친 타계 1년 후인 1982년 서정화 당시 내무부장관의 장녀 영민(44)씨를 배필로 맞았다. 영민씨는 당시 김 회장보다 아홉 살이나 어린 신부로, 서울대 약대 3학년 재학중인 학생이었다. 김 회장과 영민씨의 만남은 국회의장을 역임했던 백두진씨 부인인 허숙자 여사의 중매로 맺어졌다. 서 전 장관과 김 회장 양가를 잘 알고 있는 백의장쪽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연결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김 회장과 영민씨는 교제를 시작했고,82년 10월에 식을 올렸다. 동생인 김호연(50) 회장도 형이 결혼하자 곧 백범 김구 선생의 손녀인 김미(48)씨를 배필로 맞아 혼례식을 치렀다. 영민씨는 결혼 후에도 공부를 계속해 약대를 수석 졸업했다. 현모양처 스타일로 자식 뒷바라지에 애쓰며, 바깥 활동은 거의 없는 편이다. 영민씨 친가도 만만치 않은 유력 가문이다. 부친인 서 전 장관은 29세 때 군수를 지냈으며, 중앙정보부 차장을 거쳐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또 민정당과 신한국당, 한나라당에서 국회의원을 지냈다. 서정신 전 대검찰청 차장은 서 전 장관의 친동생이며, 고 서정귀 호남석유 사장은 6촌형이다. 영민씨의 조부는 이승만 정권 시절에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 고 서상환 장관이다. ●천안의 명문가 김 회장의 방계도 화려하다. 백부인 고 김종철 의원은 전 국민당 총재로 천안에서 6선 의원을 지냈다. 한화 계열사인 한국베어링(현 파그베어링)과 태평물산(현 한화무역) 회장을 맡기도 했지만 경영엔 관여치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부인 유성은(83) 여사 사이에 요섭-신연-수연-진연-규연-광연 등 5남1녀를 뒀다. 둘째숙부인 김종식(70) 전의원은 큰형인 김종철 전 총재가 작고하자 선거구인 천안을 물려받아 국회의원을 지냈다. 부인 문영숙(59) 여사 사이에 정연-서연-도연-원필 등 3남1녀를 뒀다. 고모인 김종숙(64) 여사는 미국에서 UC미클릭에서 지형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김영일(70)씨와 결혼했다. 김씨는 한화에너지(현 인천정유) 부사장을 맡는 등 그룹 경영에 참여했지만, 김 회장 취임 이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친인척 가운데 현재 한화 계열사 경영에 참여하는 인사는 김신연 한화폴리드리머 대표가 유일하다. 김 대표는 김종철 전 국민당 총재의 차남이다. ●‘한화호’를 이끄는 전문경영인 총자산 37조원의 ‘거함’ 대한생명을 이끄는 신은철(58) 부회장은 보험업에 30년을 몸담아온 생명보험업계의 대표적인 전문경영인이다. 사내에서는 ‘따뜻한 카리스마’로 통한다. 취임 직후 대전 영업현장을 방문, 처음 만나는 지점장 20여명의 이름을 외우고, 친근한 선배처럼 대화를 나눠 참석자들이 헹가래를 쳐주기도 했다. 신 부회장은 평소 ‘3선(先) 경영’(선견, 선수, 선제)을 강조한다. 사전에 미리 예측하고 준비해, 신속하게 실행하는 조직만이 경쟁에서 앞설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서울 출신으로 삼선고와 한국외대 독일어과를 나왔다. 진영욱(54) 신동아화재 사장은 경남 고성 출신으로 23세의 나이로 행정고시에 합격한 수재다. 재무부와 재정경제원에서 잔뼈가 굵었다.99년 한화증권 사장으로 전격 발탁돼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서 한화증권을 우량 금융기관으로 탈바꿈시켰다.2002년 대한생명과 함께 한화 계열사로 편입된 신동아화재를 만성적 적자 구조에서 흑자로 전환시켰다. 경기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허원준(59) 한화석유화학 대표이사는 68년 한화석유화학의 전신인 한국프라스틱㈜에 입사한 이후 줄곧 석유화학 한 분야에 매진한 전문가이다. 엔지니어와 연구실장 등 다양한 분야를 거쳤다. 외환위기 이후 한화석유화학의 구조조정 실무 책임자로서 비핵심사업을 과감하게 정리했으며, 해외 자본을 유치해 재무구조를 향상시켰다. 경남 출신으로 부산고와 연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김관수(54) 한화국토개발㈜ 사장은 79년 태평양건설 입사 이후 제일화재 총무부장, 한화종합화학 기획실장, 한화석유화학 관리담당 임원, 여천 NCC 관리 임원, 한화건설 기획담당 임원 등 다양한 직무를 수행했다. 그는 변화와 혁신을 추구할 뿐 아니라 스킨십 경영을 중시한다. 서울 출신으로 경기고와 한양대 전기공학과를 나왔다. 김현중(55) ㈜한화건설 사장은 건축 기사에서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실전형 경영인’이다.2000년 개발사업 전문가로서 한화건설로 스카우트된 김 사장은 아파트 브랜드 ‘꿈에그린’과 주상복합 브랜드 ‘오벨리스크’를 내놓아 화제를 불러일으켰다.4년만에 회사 규모를 4배로 키워냈다. 인천 태생으로 서울고와 서울대 공업교육학과를 나왔다. 남영선(52) ㈜한화 사장은 78년 한국프라스틱에 입사해 인사와 총무, 기획 등 관리업무를 두루 거쳤다. 또 그룹 홍보팀장으로 재직할 때에는 폭넓은 대외 활동과 원만한 관리능력을 인정받았다. 충남 출신으로 배재고와 연세대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golders@seoul.co.kr ■ 김승연회장의 자식교육관 “눈에 꿈이 담겨 있지 않으면 산 너머가 보이지 않고, 그 곳에 도도히 흐르는 강을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 평소 저의 생각입니다. 아이에게 꿈과 희망을 갖도록 하는 것이 부모로서 갖춰야 할 최고의 미덕이라고 여깁니다.”(김승연 회장) 김 회장은 동관(22)-동원(20)-동선(16) 등 3세에게 공부하라는 말을 안 한다. 다양한 경험과 문화, 체육활동을 오히려 권한다. 이는 선친에게서 받은 자식 교육에서 비롯된다. 김종희 창업주는 평소에 “남자는 술도 먹고, 담배도 피워보고 그래야 해. 어차피 될 놈은 무엇을 하든 간에 나중에 제대로 되니까. 남자의 과정은 여자와 다르지.”라고 했다고 한다. 선친의 기대 때문일까. 자식들 모두 수재인 데다 성공한 기업인이 됐다. 김 회장은 경기고를 다니다가 미국으로 유학, 드폴대에서 국제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김호연 회장도 경기고와 서강대, 일본 히도쓰바시 대학원을 나왔다. 김 회장은 또 전인교육을 강조한다.“교육 문제는 집사람이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어 저는 큰 방향만 잡아줄 뿐 간섭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닙니다. 그래도 공부뿐 아니라 지·덕·체를 고루 갖췄으면 하는 것이 아버지의 바람입니다.” 3형제도 김 회장의 기대대로 공부뿐 아니라 체육과 문화 활동에 관심이 크다. 특히 막내 동선은 취미로 시작했던 승마에 본격적으로 매달려 지금은 국가대표 선수가 되는 것이 꿈이다. 장남 동관은 미국 하버드에 재학 중이며, 차남 동원은 예일대, 막내 동선은 미국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golders@seoul.co.kr ■ 재계에서 손꼽히는 2대째 미국통 고(故) 김종희 한화 창업주와 김승연(53) 한화 회장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미국의 마당발’이다. 그룹 모체인 화약부문이 방위산업과 연관이 많은 데다 창업주 특유의 친화력으로 주한미군 및 미국 대사관 관계자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이다. 또 김 회장은 한·미교류협회 회장으로서 선친의 인맥을 미국 정계로 더욱 발전시켰다. 부자는 자연스럽게 ‘다이너마이트 김과 다이너마이트 주니어’로 불렸다. 리처드 워커 전 주한 미국 대사와의 2대(代)에 걸친 약속은 한화 김씨 부자의 미국 인맥 관리를 잘 보여준다. 창업주는 워커 전 대사의 60세 생일 잔치를 한국식 환갑 잔치로 열어주기로 했지만 1981년 지병으로 타계하면서 이를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아들인 김 회장이 82년에 환갑 잔치를 열어줌으로써 선친의 약속을 지켰을 뿐 아니라 워커 전 대사의 팔순 잔치도 2002년 서울에서 열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20년 이상의 약속을 대를 이어 지킨 셈이다. 김 회장의 설명이다.“선친은 1960년 말부터 워커 전 대사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워커 전 대사가 두세달 빨리 태어나 워커 대사는 한국의 미풍양속에 따라 자신이 형님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선친은 또 리처드 스틸웰 전 주한 미군사령관과도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세 사람은 자주 만났고, 만남의 횟수만큼 우정도 깊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워커 전 대사의 아내였던 세니도 모친(강태영 여사)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김 회장은 또 한·미교류협회를 만들어 미국 인맥을 더욱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키신저 전 국무장관을 비롯해 에드윈 퓰너 헤리티지재단 이사장, 데니스 헤스터트 하원 의장, 톰 대슐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 딕 체니 부통령, 얼 포머로이 민주당 의원, 클린턴 전 대통령 등과 꾸준히 친분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인연은 2002년 미국 하원에서 한·일월드컵 성공 개최를 기원하는 결의서가 통과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golders@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1) 숨은 키워드‘궁궁을을’(弓弓乙乙)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1) 숨은 키워드‘궁궁을을’(弓弓乙乙)

    1894년 4월27일, 전주성 함락을 눈앞에 두고 전봉준은 휘하 장수들을 모아놓고 특명을 내렸다. 궁을(弓乙)이란 부적을 불살라 동학농민군들에게 먹이라는 것이었다.“궁을부는 신통력이 있다. 비 오듯 쏟아지는 관군의 총탄과 화살도 무력하게 만드는 게 궁을부다. 그 효력은 이미 큰 스승 최제우 선생께서 밝히신 바다. 궁을은 이미 너희가 잘 아는 ‘정감록’에도 나와 있다.” 그 명령대로 동학군은 모두 궁을부를 태워 나눠마셨다. 그 다음날 동학군은 호남제일성인 전주성을 함락시켰다. 궁을부란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13자를 쓴 종이 쪽지로, 본주(本呪)라 한다. 이 글귀의 뜻은 한울님을 모시면 조화가 이뤄진다, 이 진리를 항상 염두에 두고 살면 세상만사를 다 알게 된다는 것이었다. 동학의 근본 교리를 압축해서 표현한 것인데, 신기하게도 궁을부엔 궁을이란 용어가 보이지 않는다. 왜 동학에선 이 부적을 궁을부라 했을까? ‘궁궁을을’(弓弓乙乙) 또는 ‘궁을’이 정감록의 가장 중요한 핵심어였다는 사실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수많은 민중이 그 참뜻을 알고 싶어했기 때문에 민중 종교의 지도자들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일반적으로는 정감록의 핵심어라면 ‘진인’과 ‘십승지’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정감록을 꿰뚫고 지나가는 숨은 키워드는 ‘궁궁을을’이다. 문제는 그 뜻을 쉽게 짐작하기 어렵다는 점이다.‘궁을’이란 두 글자를 뜯어보면 평이하다.‘弓’은 활이요,‘乙’은 갑(甲)에 이어 이른바 두 번째 십간(十干)이다. 그런데 누구나 빤히 알고 있는 이 두 글자의 뜻을 아무리 조합시켜도 무슨 말인지 감감하다. 뜻이 분명하지 않은 이 용어는 정감록에서 중요한 구실을 담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학과 원불교에서도 중시되었다. 그 내력을 알아보자. ●‘정감록’에 보이는 ‘궁궁을을’ ‘감결’(鑑訣)에 이런 구절이 있다.“모름지기 인간 세상에서 몸을 피하는 데 산도 이로울 게 없고 물도 이로울 게 없다. 가장 좋은 것은 양궁(兩弓)이다.”는 것이다. 양궁은 궁을 두 번 쓴 글자다. 그런 점에서 ‘궁궁’이라고 읽히기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이선생가장결’(李先生家臧訣) 중에도 “이로움이 을을궁궁에 있다.”는 대목이 있다. 정감록의 다른 곳에서는 ‘궁궁을을’이라 적기도 하였다. 일제시대 한국의 민속을 연구한 일본인 무라야마 지준은 ‘궁궁을을’을 한 글자로 줄여 약(弱)이라고 보았다. 궁과 을 두 글자를 포개서 그렇게 만든 것이다.“이로움이 약함에 있다.”는 뜻이 되어 알쏭달쏭하긴 마찬가지다. 또는 한국 사람들은 일본과 같은 강대국에 약한 태도로 의존적일 때만 살아갈 수 있다고 비꼰 것일지도 모르겠다. ‘도선비결’(道詵秘訣)에도 ‘궁궁’이란 표현이 눈에 띈다.“병자(丙子)에는 북쪽 오랑캐가 나라에 가득 찰 것이다. 산도, 물도 이롭지 못하고 이로운 것은 오직 ‘궁궁’이다.” 이것은 아마도 병자호란 때의 사정을 반영한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서 말하는 ‘궁궁’은 두 말할 나위 없이 피란처다. 요컨대 여러 예언서에서 자꾸 눈에 뛴는 ‘궁을’,‘을을궁궁’ 또는 ‘궁궁’은 난리를 피하는 최고의 장소임이 분명하다. 정감록엔 피란지로 손꼽히는 십승지가 있는데 왜 하필 ‘궁궁’이란 용어를 또 사용했는지 궁금한 생각이 든다. ●1748년 ‘정감록’ 사건에 언급된 ‘궁궁’ 실록에도 ‘궁궁’이란 표현이 나온다. 이것이 처음 언급된 것은 1748년(영조 24) 5월이었다. 청주의 몰락 양반 이지서 등이 괘서, 즉 불온한 내용이 적힌 벽보를 붙인 혐의로 체포되어 왕의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용어였다. 이지서는 6촌 형제가 반란에 가담해 처벌된 일이 있어 꼼짝없이 연좌제에 걸려들었다. 그는 관직에 등용될 희망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이었다. 이 사건의 피의자인 박민추가 한 말 중에 ‘궁궁’이 언급되어 있다.“도선비기(道詵秘記)를 보면, 왜인(倭人) 같지만 왜인이 아닌 것이 남쪽에서 올라온다고 들었습니다. 이 때는 산도 아니고 물도 아닌 궁궁이 이롭다고 했지요.” 박민추 역시 우리가 앞에서 검토했듯이 ‘궁궁’을 피란처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이 구체적으로 어떤 장소인지 그도 잘 알지 못했다. 박민추가 읽은 18세기의 ‘도선비기’는 오늘날 남아 있는 ‘도선비기’와 비슷했다.“산도 아니고 물도 아니고 궁궁이 이롭다.”고 말했는데, 이 부분은 현재의 도선비기에도 똑같이 되어 있다. 다만 그 이야기가 전제하고 있는 시대상황은 완전히 다르다.18세기의 도선비결에는 “왜인 같지만 왜인이 아닌 것”이 쳐들어온다고 했다. 그러나 현재의 도선비기에 보면,‘병자년 북쪽 오랑캐’가 문제다. 요컨대 청나라가 침입해온 병자호란을 소재로 삼고 있다. 이런 차이는 필사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다. 혹은 아유가이나 호소이 같은 일제 어용학자들이 슬며시 단어 몇 개를 바꿔 쓴 데서 빚어진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들로선 정감록에서 일본이란 나라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부각시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본론으로 되돌아간다.1748년 사건 당시 충청도 문의 지방의 관리였던 김재형은 이지서의 벽보 사건을 직접 취조했던 사람이다. 그는 벽보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벽보에는 왜인 같지만 왜인이 아닌 것이 남쪽에서 오는데 물도 이롭지 않고 산도 이롭지 않고 궁궁이 이롭다. 이 고을에 대인(大人)과 명장이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곳에서 피란하지 않으면 반드시 큰 화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김재형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더라도 ‘궁궁’은 피란의 한 방법이었다. 문제는 어디로 피란해야 되는가로 압축된다. 벽보에서 말한 “왜인 같지만 왜인이 아닌 사람들”이란 누구일까. 이지서는 이렇게 설명했다.“어떤 사람들은 곧 왜인이 쳐들어온다고 한다. 하지만, 실은 왜인이 아니고 누군가가 거짓으로 왜인의 모양을 꾸며가지고 쳐들어온다. 이들은 무신년의 잔당(餘黨)들이다. 해도(海島)에 가 숨어 있던 사람들이다.” 사건 피의자 오명후는 그 정체를 울릉도에 숨어 있는 황진기(黃鎭紀) 일당이라고 말했다. 영조4년(1728) 무신년에 있었던 일부 소론과 남인들이 일으킨 반란에 가담한 장수가 황진기다. 요컨대 울릉도에서 황진기가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올 때 피란할 만한 곳이 궁궁이란 이야기다. 이지서의 일당인 오수만은 ‘궁궁’의 뜻을 좀더 명확히 정의했다.“궁궁은 활의 허리(弓腰)를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구부러진 곳(劣處)에 숨으라는 뜻이지요.” 실록 편찬자는 이 대목에 주를 달아 놓았다.“궁요는 그 음이 열(劣) 자의 뜻을 해석한 것과 같다.” 정리하면,‘궁궁’은 궁요와 같고 그 뜻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 후미진 곳이란 것이다. 이를 테면, 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 중에서도 꽤나 후미진 곳이 ‘궁궁’이란 말이다. 18세기 내내 ‘궁궁’에 대한 해석은 일치하지 않았다. 심지어 한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끼리도 해석이 엇갈리는 판이었다. 이지서 사건의 피의자 이영손은 ‘궁궁’을 머문다는 뜻을 가진 유(留) 자로 보았다. 다른 곳으로 피란가지 말고 집에 머무는 것이 최상의 피란법이요, 궁궁이란 견해였다. 사건의 주모자 이지서는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궁궁’은 광활하다는 것입니다” 라고 했다. 만일 광활한 지역이라면 태백산이나 소백산 기슭에 위치한 십승지와는 별 상관이 없을 것 같다. 혹은 십승지 중에서도 비교적 터가 넓은 지역을 가리켰을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이지서가 ‘궁궁’을 개활지로 보았다는 점은 다른 피의자들도 증언했다. 어떤 피의자는 ‘궁궁’이 활활(闊闊)을 가리킨다고도 했는데 그 역시 광활하단 뜻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지서 사건의 피의자들은 ‘궁’의 음이 ‘활’인 점에 착안해 ‘궁궁’을 ‘활활’한 곳, 달리 말해 터가 널찍한 피란처로 생각했다. 그로부터 40년쯤 지난 1787년(정조 11)에 또 다른 ‘정감록’ 사건이 일어났다. 그 때는 ‘궁궁’에 대한 해석이 상당히 달라졌다. 사건 피의자 김서달의 진술이 주목된다.“근래에 떠도는 말을 들으니 청의(靑衣)가 남쪽에서부터 오는데 왜인 같지만 왜인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 때는 산도 이롭지 않고 물도 이롭지 않으며 궁궁(‘좌’(坐)의 고자(古字))이 이롭다고 하였습니다.” 전에도 ‘궁궁’을 ‘머물 유(留)’자로 보는 견해가 있기는 했다. 그런데 1787년 사건에서 김서달은 ‘궁궁’을 ‘앉을 좌(坐)’의 옛날 글씨체로 보았다. 피란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본 점에서는 별로 새로울 것은 없다. 다만 서체에 대한 지식이 해석의 기준이 되었다는 점은 주목된다. 한마디로 말해,‘궁궁’이 피란처란 점에 대해서는 다들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나 어떤 피란처냐는 물음에 대해서는 골짜기일 수 도 있었고, 넓은 터, 또는 자기 집으로 규정되는 등 사람마다 견해가 달랐다. ●동학의 ‘궁궁’ 19세기 말 새로 등장한 동학은 ‘궁궁’이란 표현에 종교적 의미를 불어넣었다. 동학의 경전 ‘동경대전’의 ‘포덕문’에 보면 최고의 명약과 부적은 바로 태극이자 ‘궁궁’이라고 했다.‘궁궁’은 어느새 태극이 됐고 무병장수의 상징으로 변형되었다. 오랫동안 특정한 공간을 뜻했던 ‘궁궁’이 추상적인 명사로 둔갑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어떤 학자들은 동학의 ‘궁을’이 인간의 내면에 있는 신명을 뜻한다고 말한다. 그 말이 옳은지는 잘 모르겠으나, 동학에서는 ‘궁궁’을 영원한 생명, 완전무결을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한 것은 틀림없다. 왜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정감록’에 나오는 ‘궁궁’이란 표현에 관심을 가졌을까?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정감록에 의지하였고 참된 ‘궁궁’을 찾아 십승지를 비롯해 각처로 떠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최제우 자신도 한 때 그런 체험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정감록을 빗대어 이렇게 말한다.“이미 지나간 임진왜란 때는 이로움이 송송(松松)에 있었다. 평안도 가산과 정주에서 서쪽 도적이 일어났을 때는 이로움이 집집에 있었다. 여보소, 세상 사람들아, 이런 일을 본받아서 살길을 찾아보세.” 최제우는 정감록의 내용을 연상하면서 임진왜란 때는 이여송·이여백 형제가 도와 살아났고, 서북에서 홍경래 난이 일어났을 때는 도리어 집에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이 이로웠다고 회상했다. 최제우의 정감록 패러디는 계속된다.“우리도 이 세상에 이로움이 궁궁에 있다 하네. 매관매직을 일삼는 세력자도 마음 다해 궁궁을 찾고, 돈과 곡식을 쌓아두고 사는 부자 영감들도 마음 다해 궁궁이라. 떠돌아다니는 거지와 패가망신한 사람들도 마음 다해 궁궁이라. 풍수에 현혹된 사람들은 더러 궁궁촌 찾아서 혹은 깊은 산속에 들어가고, 혹은 천주교에 들어가 제 생각이 옳다하지만 그 말들도 따져보면 궁궁 뿐이네.” 최제우는 누구나 찾고 있는 것이 바로 ‘궁궁’이라 하였다. 심지어 천주교 신자들이 갈망하는 것도 ‘궁궁’, 즉 난리를 피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가 발견해낸 ‘궁궁’의 궁극적인 의미는 종교적인 수련이었다. “제 몸 닦고 집안 살피지 않고 명당 찾아 두루 강산을 돌아본단 말인가. 덕이 없는 세상 사람들, 가서 볼 것이 무엇인가? 가련한 세상 사람들, 이로움이 궁궁에 있다 하여 찾는다면 웃을 일 아닌가. 세상 잘못 만났다 한탄하지 말고 세상구경하세. 이로움이 송송에 있단 말 집집에 있단 말은 이제 알았지만, 이로움이 궁궁에 있다는 뜻을 어찌 알겠는가?” 이것은 ‘용담유사’에 실린 한 구절이다. 세상이 어지럽다 해서 원망하지도 말고 길지를 찾아 헛되이 여기저기 헤매지 말라 했다. 최제우가 찾아낸 답은 간단명료했다.“한울님을 모시면 조화가 이뤄진다. 부디 이런 진리를 항상 염두에 둔다면 세상만사를 다 알게 된다.” 이것이면 다 되었다. 한울님을 믿기만 하면 절로 후천개벽이 되는 것이었다. 이밖에 따로 ‘궁궁’이 있을 턱이 없었다. ●원불교의 ‘궁궁을을’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정감록’에 매료되어 ‘궁궁’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많은 길지를 놓고 ‘궁궁’이 어딘지를 점쳤다. 원불교를 창건한 박중빈 대종사는 그런 세태를 비판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최제우와 같은 입장이었다. 대종사는 ‘궁궁을을’의 종교적 의의를 새롭게 정리하려 했다. 그는 정감록을 신앙하는 민중을 원불교로 이끌기 위해 노력했다. 해방 전 그는 제자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말했다.“‘정감록’ 비결에 궁궁을을의 사이에 이로움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 궁궁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일원(一圓)이다. 또 ‘정감록’에 도하지(道下地)란 말이 있다. 그것은 도하지(道下支), 즉 일원 대도(大道)에 의지해야 산다는 말이다. 요즘 사람들이 좌우간(左右間)이라 말하는 것은 네가 옳다, 내가 옳다 싸우다가 죽는다는 뜻이다. 너희들은 좌익이나 우익이나 어느 편도 들지 말라. 그 싸움에 끼어들면 죽기 쉽다. 양심만 지켜라. 양심, 그것이 곧 일원이다.” ‘궁궁을을’을 대종사는 어떤 구체적인 장소가 아니라 ‘일원’이란 종교적 개념으로 보았다. 달리 말해 ‘일원은’ 바로 양심이라고도 했다. 양심을 기르는 원불교의 가르침을 따라 살면 되지 따로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 때문이었겠지만 원불교 신자들은 ‘궁을가’(弓乙歌) 라는 일종의 예언적이고 종교적인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일설에 따르면, 이 노래를 지은 사람은 북창 정염(1506∼1549)이라고 하는데 믿을 만한 증거는 없다. 정염은 남사고와 더불어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예언가였다.‘궁을가’엔 구한말의 중요 사건과 8·15해방까지 예언되어 있다. 그 일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갑신년에 큰 별이 태양을 돈다/ 태양과 태음이 자리를 못 잡아 외국 여러 나라가 시끄럽다 (중략) 매번 끝 구절에 이 여섯 자로 궁궁을을 성도로다./ (중략) 지성으로 늘 부르면 외국군대가 못 쳐들어온다.//(중략) 부모처자 다버리고 길지(吉地) 찾는 저 백성아/ 예로부터 피란해도 그 얼마나 살았더냐./ 인의예지(仁義禮智) 어진 마음 사람 다치게 않고 물건 부수지 않으면// 오복(五福)이 내 몸이라 길한 별 비춤이 따로 어디인가/ 살아날 방법 내게 있어 부모처자 안전히 보존한다.” 노랫말에 보면,“궁궁을을성도”라는 6자 주문을 자주 외워야 나라가 편안하다고 했다. 원불교 3대 교조 대산종사는 이 주문을 나무아미타불로 바꿔 불렀다. 또한 위 인용문에서는 갑신년에 외국 세력이 시끄럽게 군다고 했다. 갑신정변(1884, 고종21) 당시 청나라와 일본이 개입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인용문의 말미에선 길지를 찾아 떠나는 것이 아무 소용도 없다고 단언했다. 내 마음의 인의예지를 기르는 것이 그보다 낫다며 대안으로 제시했다. 한 마디로 ‘궁을’은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다고 보았다. 대산종사는 ‘궁을’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두 손을 들어 둥글게 만들면 그것이 궁이다. 그 안에 ‘∽’을 하면 궁을이 되어 태극이 된다. 태극을 유교에서 무극이라고 하고 원불교에서는 일원이라고 하는데, 대종사님께서 이렇게 손을 들어 궁궁을을을 가르쳐주셨다. 우리 한국도 좋아진다. 태극기가 궁궁을을 아닌가? 또 이 한국에 일원 대도가 나왔으니 이 나라가 잘 될 것이다. 태극이 궁궁을을이다.” 궁궁을을은 태극이란다. 18세기만 해도 정감록의 ‘궁궁을을’은 무슨 뜻인지 잘 모를 한 개의 빈 사발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민중들은 꿈으로 그 그릇을 여러 가지 생각으로 채우기에 바빴다. 이 그릇은 결국 동학과 원불교에 이르러 종교적인 가르침으로 바뀌었다. 빈 그릇이 많은 정감록은 여전히 민중의 희망이다.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LG家③-‘사업동지’ GS 허씨일가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LG家③-‘사업동지’ GS 허씨일가

    지난해 발표된 국내 100대 부호 명단에는 6명의 허씨가 포함됐다. 허창수(57) GS회장이 3160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허정수(55) GS네오텍 사장이 2530억원, 허광수(59) 삼양인터내셔널 회장이 1700억원, 허완구(69) 승산회장이 1510억원, 허남각(67) 삼양통상 회장·허진수(52) GS칼텍스 부사장이 각각 1390억원으로 뒤를 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돈이 많은 가문 가운데 하나인 김해 허씨 문중인 이들은 경남 진주의 만석꾼인 고 허만정씨 자손들이다. 허씨가는 지난 세월 재계에서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올해 LG에서 분리, 재계 7위 규모의 GS그룹을 출범시키며 재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GS그룹은 삼양통상, 승산, 코스모 등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친족 회사들을 계열로 편입시키며 무려 50여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지난 4월 공정거래위원회 발표기준 자산규모는 18조 7200억원으로 한화(16조 2200억원), 두산(9조 7300억원) 등 전통을 자랑하는 그룹들을 압도할 정도였다. ●허씨의 핵, 허준구 일가 수백년간 이어졌던 구씨와 허씨의 관계를 ‘인척’에서 동업관계로 바꾼 사람은 고 허준구 회장이다.1946년 초 고 구인회 LG 창업회장 장인(허만식씨)의 재종(6촌)인 고 허만정씨가 3남인 준구(작고)씨의 ‘경영수업’을 부탁하면서 사업자금을 내놓은 것이다. 구 회장은 귀족적인 용모의 일본 간토중학교(5년제) 출신 사돈을 반갑게 맞이했다고 한다. 당시 허만정씨가 내놓은 자금이 얼마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허씨가는 이후에도 고향마을(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내리)의 땅을 처분한 돈으로 계속 출자를 했다. 이른바 해방정국의 ‘벤처캐피털’인 셈인데 허씨의 투자는 59년 만에 18조원이 넘는 자산으로 돌아왔으니 ‘대박’이 터졌다고 볼 수 있다. 허준구 회장은 당시 가내수공업 수준을 면치 못하던 락희화학의 영업담당 이사로 발을 디뎠는데 당시 공장에서 고생하던 구자경 이사를 부산 시내로 불러내 술을 사 주며 ‘위로’하기도 했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내가 ‘비어홀’이라는 곳을 처음 가 본 것은 준구씨 덕분”이라고 회고했다. 허 회장은 반도상사(현 LG상사)·금성사 상무를 거쳐 62년 금성사 부사장으로 승진했다.68년 반도상사 사장을 시작으로 71∼82년 금성전선(현 LS전선) 사장,84∼95년 금성전선 회장 등을 지내며 LG그룹의 버팀목이 됐다. 구인회 회장은 68년 그룹체제를 출범시키며 허 회장에게 초대 기획조정실장을 맡길 정도로 무한한 애정을 보였다.69년 락희화학이 민간기업 최초로 기업공개를 실시한 것도 당시 기조실장이었던 허 회장의 ‘숨은 공로’다. 77년 하루 480㎜의 폭우가 쏟아져 금성전선 안양공장이 2m 가까이 침수됐을 때 허 회장은 예비군복에 장화를 신고 물속을 헤치고 다니며 공장 복구를 진두지휘했다고 한다. 밤낮없이 꼬박 두달동안 계속된 복구작업끝에 안양공장은 주변 공장 중에서 가장 빨리 재가동에 들어갈 수 있었다. 2002년 7월29일 허 회장이 세상을 뜨자 구자경 명예회장, 구본무 회장 등 구씨들은 ‘5일장’ 내내 자리를 지키며 ‘사돈이자 동지’였던 허 회장의 타계를 안타까워했다. 허 회장은 구인회 회장의 첫째 동생인 고 구철회씨 장녀 위숙(77)씨와의 사이에서 5명(창수·정수·진수·명수·태수)의 아들을 뒀는데 모두 고려대 동문인 데다 대부분 해외유학파 출신이다. 특히 창수·정수·진수씨는 학과(경영학과)까지 똑같다. ●항상 공부하는 허창수 회장 장남인 허창수 회장은 그룹 회장을 맡으면서 지주회사인 GS홀딩스와 GS건설의 대표이사 회장을 맡고 있다. 경남고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허 회장은 미국 세인트루이스대 경영대학원(MBA)을 마친 77년 그룹 기조실 인사과장으로 입사했다.79년 럭키금성상사 해외기획실 부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홍콩지사, 도쿄지사 등 해외근무를 오래하며 영어와 일어 실력을 쌓았다.88년 럭키금성상사 전무로 승진한 직후인 89년에는 LG화학 부사장을 지냈고 92년부터는 LG산전(현 LS산전) 부사장을 맡았다. 95년 구본무 회장이 3대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아버지가 맡고 있던 LG전선 회장을 이어받았고 2002년부터는 LG건설(현 GS건설)을 지휘하며 분가를 준비해왔다. 허 회장은 첨단제품과 해외정보에 관심이 많은데 지금도 월스트리트저널, 비즈니스위크 등 해외 경제전문지들을 빼놓지 않고 보고 있다.2002년 LG건설 회장을 맡으면서 ‘건설부흥’,‘주간 다이아몬드’ 등 일본의 경제잡지에 나온 일본 건설회사의 현황 기사를 번역해 임직원들에게 배포하기도 했다. 최근에도 ‘미국 건설산업 왜 강한가?’,‘영국 건설산업의 혁신전략과 성공사례’ 등을 필독서로 권유했다. 허 회장은 전형적인 ‘아침형 인간’으로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전날 읽은 책의 내용을 정리하고 헬스장에서 1시간 정도 조깅을 한다. 허 회장은 조깅, 등산 등으로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는데 운동량이 부족한 임직원들을 위해 ‘만보기’를 직접 사줄 정도로 자상한 면모도 갖고 있다. 골프는 80대 중반 실력이지만 라운딩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니다. 주량은 양주 반병 가량으로 약하지는 않지만 맥주를 마시며 대화하는 것을 즐긴다고 한다. 늘 구본무 회장 한발 뒤에 섰던 허 회장은 소탈하고 겸손한 면모를 갖고 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GS타워에서 지하철 한 코스 떨어진 강남역 정도는 수행비서도 없이 걸어서 다닌다. 비서팀도 따로 없다. 탁월한 외국어 실력을 지닌 데다 젊은 직원들도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첨단기기들에 관심이 많은 허 회장의 향후 행보는 재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하다. 허 회장은 지난 3월 취임 기자회견에서 “당대에서는 LG와 겹치는 사업에 진출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지만 ‘슈퍼루키’ GS그룹의 펄펄 끓는 에너지가 어느 쪽에서 터져나올지 아무도 예측하기 어렵다. 허 회장은 고 이철승 전 상공부 차관의 딸인 부인 이주영(53)씨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뒀다. 아버지의 모교인 미국 세인트루이스대를 나온 아들 윤홍(26)씨는 지난 2002년 LG칼텍스정유(현 GS칼텍스)에 입사, 영업전략팀·경영분석팀 등을 거쳐 올 초 아버지가 회장으로 있는 GS건설 경영관리팀 대리로 입사했다. 구씨와 마찬가지로 허씨 역시 ‘장자승계’의 원칙을 따르고 있으므로 먼 훗날에는 윤홍씨가 허씨가의 대표로 그룹 회장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 윤홍씨는 조만간 누나(윤영·29)가 공부중인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MBA 코스를 밟을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GS경영을 책임지는 동생들 허창수 회장의 첫째 동생 허정수(55)씨는 GS네오텍(전 LG기공) 지분 100%를 보유하며 사장을 맡고 있다. 고려대 경영학과 출신인 허 사장은 90년대 LG전자에서 상무로 일하다 96년 LG기공으로 자리를 옮겨 독립했다. 당시 LG는 처음으로 계열분리를 시도하면서 구씨와 허씨 한 명씩을 분가시키기로 했는데 구씨 쪽에서는 고 구정회씨 아들인 구형우씨가 부민상호저축은행을 갖고 독립했고 허씨쪽 대표로 허 회장이 LG기공을 맡았다. 교환기 설치 및 부가통신공사, 유무선 통신케이블 및 전송공사, 전기전력 및 산업 플랜트 공사, 정보통신 및 인터넷사업을 영위중인 GS네오텍은 지난해 수주 2700억원에 매출 2250억원, 당기순이익 123억원을 냈다. 최근에는 반도체,LCD 공장에 필수적인 ‘클린룸’ 사업 비중을 확대하고 있다. 부인 한영숙(51)씨와의 사이에 2남을 두고 있다. 장남 철홍(26)씨는 GS홀딩스 지분 1.26%를 갖고 있는데 ‘홍’자 돌림 3세 가운데 가장 많다. 허진수(52) GS칼텍스 부사장은 고려대 경영학과와 미국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원을 마치고 주로 호남정유(현 GS칼텍스)에서 일했다.2000년에는 LG전자 중국지사 부사장을 거친 뒤 2001년부터 GS칼텍스 경영전략본부장·경영혁신본부장을 거쳐 지난해부터 생산본부장으로 일하고 있다.2003년에는 발전회사인 LG에너지 대표이사를 맡았지만 GS가 LG에서 분리되면서 자연스럽게 대표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LG는 LG에너지 지분을 GS에 매각하는 것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허 부사장은 부인 이영아(47)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고 있다. 허명수(50) GS건설 부사장은 경복고와 고려대 전기공학과를 나와 LG전자 청소기공장장, 영국 뉴캐슬 법인장 등을 거쳐 2002년 허창수 회장과 함께 GS건설로 자리를 옮겼다. 재경본부장으로 회사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다.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운동에 남다른 소질을 보여 고려대 ‘역도부’에서 활동했다. 허 부사장은 노재현 전 국방부장관의 딸인 부인 노경선(45)씨와의 사이에 2남을 뒀다. 노 전 국방장관은 ‘12·12사태’때 국방장관으로 말 못할 고초를 겪은 뒤 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 한국비료공업협회 회장, 한국자유총연맹 총재 등을 지냈다. 허태수(48) GS홈쇼핑 부사장은 중앙고와 고려대 법대를 거쳐 미국 조지워싱턴대에서 MBA 코스를 밟았다. 이후 콘티넨탈은행, 어빙은행 등 금융권 경력을 살려 88년 LG증권 국제조사팀 과장으로 입사했다. 이후 런던법인 상무보 등 2002년까지 LG증권에서 일하다 LG홈쇼핑 전략기획부문 상무로 자리를 옮겼고 2003년 말 경영지원총괄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허 부사장은 중국 현지 법인인 ‘충칭GS쇼핑’ 설립을 주도하는 등 중국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허 부사장은 바로 위 형인 허명수 부사장과 함께 골프실력이 재계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다.‘싱글’ 수준을 넘어 ‘이븐’이나 ‘언더파’를 칠 정도로 프로 못지않다. 부인 이지원(43)씨는 이한동(71) 전 국무총리의 장녀. 한때 대권 후보로까지 나섰던 이 전 총리는 현재 법무법인 남명의 대표변호사를 맡고 있는데 아들 이용모(41)씨는 건국대 행정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장남가의 화려한 혼맥 고 허만정씨의 장남인 고 허정구 삼양통상 회장은 고 이병철 회장, 고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와 함께 삼성을 공동 창업했다. 보성전문 법학과 출신의 허 회장은 제일제당(현 CJ) 전무, 삼성물산 사장을 지낼 정도로 삼성 경영에 깊숙이 관여하다 57년 삼양통상을 설립, 독립했다. 야구공·글러브와 나이키 신발을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하는 삼양통상은 지난해 2121억원의 매출에 97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삼양통상은 또 수입담배, 골프용품, 윤활유 판매 등을 맡고 있는 삼양인터내셔널과 보헌개발, 경원건설 등 건설사를 계열사로 두고 있다. 허 회장은 권투협회장, 대한체육회장, 프로골프협회장, 골프장협회장, 아시아태평양아마골프회 회장 등 체육계와 남다른 인연을 쌓았는데 생전에 체육훈장 기린장을 받았다. 삼양통상은 허 회장이 99년 사망한 뒤 장남인 허남각(67) 회장이 이끌고 있다. 허 회장의 부인은 이화여대 문헌정보학과 교수를 지낸 구자영(68)씨다. 허 회장은 보성고와 서울대 상대, 미국 시카고대 대학원을 마친 뒤 63년 삼양통상 시카고 지사장으로 경영에 뛰어들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시아태권도연맹회장을 지낼 정도로 스포츠와 인연이 깊다. 허 회장은 GS그룹의 주요 주주이자 ‘장손’ 자격으로 올 초 허창수 회장의 전남 여수 GS칼텍스 사업장 방문을 동행해 주목을 받았다. 허 회장의 장녀 정윤(34)씨는 정문원 전 강원산업 회장 아들 대호(37)씨와 결혼했고 아들 준홍(30)씨는 올해 GS칼텍스에 입사했다. 이로써 현대차 그룹 정몽구 회장의 장남인 정의선씨와 사돈으로 연결된다. 의선씨가 정문원 회장의 조카사위가 되기 때문이다. 장녀 허영자(65)씨는 벽산그룹 김희철(68)회장과 결혼, 김성식(38) 벽산 사장, 김찬식(36) 벽산 상무 등 3형제를 낳았다. 차남 허동수(62) GS칼텍스 회장은 보성고와 연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화학공학 석·박사 학위를 받은 대표적인 ‘오너경영인’이다. 허 회장은 미국 셰브론 리서치사의 연구원을 거쳐 73년 호남정유(현 GS칼텍스)로 입사,33년째 ‘오일맨’의 길을 걷고 있다. 국내 최초로 휘발유에 브랜드(테크론)를 도입하는가 하면 전 세계 정유업계 최초로 ‘6시그마’를 도입해 혁신을 추구했다. 도시가스, 전력,LNG 등 사업다각화와 대규모 시설투자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허 회장은 지난 2000년 3월 국내 처음으로 지속가능발전기업협의회(KBCSD)를 설립, 현재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아마 6단으로 바둑에 남다른 취미를 갖고 있는데 2001년부터 한국기원(총재 한화갑 민주당 대표) 이사장을 맡고 있다.GS칼텍스배 바둑대회를 신설해 바둑 활성화에도 기여했다. 젊은 시절에는 태권도 선수로도 활동했다. 김선집(86) 전 동양물산 회장의 장녀인 부인 김자경(60)씨와의 사이에 2남1녀를 뒀는데 막내딸 지영(25)씨는 이병무(64) 아세아시멘트 회장의 차남 인범(34)씨와 결혼했다. 3남 허광수(59) 삼양인터내셔널 회장은 경기고와 고려대 상대를 거쳐 미국 스탠퍼드대 대학원을 마쳤다. 삼양통상과 나이키의 합작사였던 한국나이키 대표이사를 맡기도 했다. 아시아태평양 골프연맹 부회장, 영국 로열앤드에인션트골프클럽 정회원으로 골프와 인연이 깊다. 허 회장은 사촌 동생(명수·태수)들에 못지않은 골프실력을 자랑한다. 고려대 아이스하키 대표선수로 활약할 정도로 ‘운동신경’이 남다르다. 부인은 고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의 딸인 김영자(55)씨로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의 부인 김영명씨의 언니다. 허 회장은 지난 2000년 외동딸 유정(31)씨를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의 아들 준오(31)씨와 결혼시켜 또 한번 화제를 뿌렸다. 삼양통상은 지난해 류근일(67) 전 조선일보 주필을 사외이사로 선임, 조선일보와 끈끈한 인연을 이어갔다. 허남각·동수·광수 3형제는 GS타워 인근에 ‘삼정빌딩’을 갖고 있는데 삼양통상 본사가 입주해 있다. 삼정은 3형제가 돈을 모아 세웠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3형제는 또 삼양통상 지분 17%,4.5%,3.1%를 나눠 갖고 있다. 허남각 회장의 아들 준홍(34)씨, 허동수 회장의 아들 세홍(36)·자홍(33)씨, 허광수 회장의 아들 서홍(28)씨도 각각 11%,1.7%,0.8%,1.7%를 갖고 있다. 삼양인터내셔널의 경우 준홍·세홍·자홍·서홍씨가 각각 37%,33%,11%,7.5%를 갖고 있어 사실상 2세들이 소유하고 있다. 차녀 허영숙(53)씨의 남편은 유명한 소설가인 윤후명(59·본명 윤상규) 한국문학원 원장이다. 윤씨는 연세대 철학과 재학중이던 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현대문학상(여우사냥), 이상문학상(하얀배), 이수문학상(나비의 전설) 등을 수상했다. 연세대 강사와 추계예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한국소설대학 학장도 역임했다. ●LG의 창업공신 허학구·신구가 고 허만정씨는 8형제 가운데 허준구씨의 경영수업을 사돈에게 부탁했는데 이후 준구씨의 형인 고 허학구씨와 동생 허신구(76) GS리테일 명예회장도 LG경영에 뛰어들었다. 학구씨는 고향마을을 지키다 51년 플라스틱 사업 진출을 준비하던 락희화학에 들어갔다. 부산 범일동에 공장 부지를 마련하고 사업진출을 서두르던 구인회 LG 창업회장은 학구씨를 불러들여 아들 자경씨와 함께 공장업무를 맡겼다. 이후 각각 전무와 상무로 승진한 뒤에도 둘은 공장이 완공돼 빗, 칫솔 등을 생산하기 시작하자 군용 슬리핑백에서 잠을 자며 현장 노동자처럼 일했다고 한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당시 함께 고생한 학구씨와 그의 자형인 이연두씨 등 ‘지킴이 삼총사’가 일은 물론 술로도 호흡이 잘 맞았다고 회상했다. 학구씨는 6척 장신으로 경기고보 시절부터 농구선수로 이름을 날렸지만 부친(허만정)이 공부해야 한다며 진주고보로 전학을 시켰다. 하지만 진주고보에서도 농구를 시키려고 하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야 했다고 한다. 학구씨는 LG전선 부사장을 지내기도 했지만 1970년 구자경 회장이 2대 회장으로 취임하자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학구씨는 최필선(89)씨와의 사이에 1남3녀를 낳았는데 장남 전수(61)씨는 코스닥 등록기업인 새로닉스 회장을 맡고 있다. 새로닉스는 고 허학구 회장이 68년 설립한 ‘정화금속’이 이름을 바꾼 회사로 인쇄회로기판(PCB), 섬유강화플라스틱(FRP) 등을 생산하다 최근에는 LCD백라이트 부품인 도광판과 브라운관 전자총 부품 등 디스플레이 부품 사업으로 주력사업을 변경했다. 허 회장은 71년 미국 센트럴 미시간대를 졸업하고 74년 정화금속 총무이사로 입사, 아버지 사업을 이어받았다. 허신구 GS리테일 명예회장은 부산대 상대를 나와 해운회사인 ‘조선통운’에 근무하던 시절 사돈어른인 구인회 창업회장의 부름을 받고 락희화학의 서울사무소 일을 맡았다. 허 명예회장은 처음에는 장사 경험이 없다며 사돈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자네 뒷조사는 다했다. 그만하면 일 하겠더라.”며 서울행 기차표를 쥐어주는 사돈의 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고 한다. 허 명예회장은 이후 동남아 출장에서 ‘합성세제’ 아이디어를 얻어 럭키 ‘하이타이’를 탄생시키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금성사 사장, 럭키 사장, 그룹 부회장, 럭키석유화학 회장을 지내다 95년 구본무 회장 취임과 함께 일선에서 물러났다. 허 명예회장은 윤봉식(74)씨와 2남2녀를 뒀다. 장남 경수(48)씨는 코스닥 등록기업인 코스모화학 등을 주력으로 한 ‘코스모그룹’ 회장을 맡고 있다. 코스모그룹은 코스모정밀화학, 코스모앤컴퍼니, 코스모앤홀딩스, 코스모양행, 코스모아이넷, 코스모레저, 드림스포츠 등을 계열사로 거느리고 있다. 코스모화학은 코스모산업이 2003년 이산화티타늄 독점공급업체인 ‘한국지탄공업’을 인수하면서 이름을 바꾼 회사다. 허 회장은 LG전자에서 이사로 잠시 일하다 87년 코스모산업 설립과 함께 자리를 옮겼다. 동생인 허연수(44)씨는 GS리테일 상무로 삼촌인 허승조(55) 사장을 보필하고 있다. 보성고와 고려대 전기공학과를 거쳐 87년 LG에 입사한 허 상무는 LG상사 싱가포르법인장을 끝으로 상사를 떠나 2002년부터 LG유통(GS리테일)에서 일해 왔다. ●고향이름을 딴 승산가 허완구(69) 승산 회장은 미국 페이퍼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잠시 LG에서 일했지만 69년 ‘대왕육운’이라는 물류회사를 차려 일찌감치 독립했다. 허 회장은 이미 LG에서 자리를 잡고 있던 형님들이 너무 많아 회사를 나왔다고 한다. 대왕육운은 이후 구씨와 허씨의 고향 이름을 따 승산으로 이름을 바꿨다. 허 회장은 한국올림픽위원회(KOC) 상임위원, 부위원장과 민속씨름협회장 등을 맡을 정도로 스포츠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아버지 허만정씨가 1925년에 설립한 진주여고(일신여고)에 100억원을 쾌척, 교사를 새로 짓는 등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96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장남 허용수(37) 승산 사장은 보성고와 미국 조지타운대를 마치고 뉴욕 및 홍콩 CS 퍼스트 보스턴 투자증권에서 일했다.98∼99년에는 국민은행 사외이사로도 활동했다. LG그룹의 육상 운송을 담당하는 승산은 허 사장이 58.55%, 여동생인 허인영(33) 승산레저 이사가 18.48%, 허완구 회장이 18.34%, 허 회장 부인 김영자(66)씨가 4.63%를 갖고 있다. 김영자씨는 ‘추일서정’,‘와사등’ 등으로 유명한 시인이자 사업가였던 고 김광균씨의 딸이다.‘매듭공예가’인 김은영(63) 녹미미술문화협회 이사장이 동생이다. LG는 친인척 소유의 회사에 물류업무를 맡기고 있는데 수출 관련 물류는 고 구정회씨 둘째 아들인 고 구자헌씨가 운영하던 범한종합물류가 담당한다. 범한여행을 자회사로 갖고 있는 범한물류는 구자헌씨의 미망인인 조금숙(55)씨가 54%, 아들 구본호씨가 46%의 지분을 갖고 있다. 승산은 물류회사인 에스엘에스·여수화물, 골프장·호텔사업을 하는 승산레저 등을 계열사로 갖고 있다. 국내보다 미국내 계열사인 철강회사 파웨스트스틸(Farwest Steel)의 규모가 훨씬 크다. 허 회장이 91년 인수한 파웨스트스틸은 지난해 2593억원의 매출에 183억원의 순이익을 거둬 모회사인 승산(매출 867억원, 순이익 183억원)보다 덩치가 크다. ●‘젊은 삼촌’ 3형제 허승효(61)씨는 조명전문업체인 알토 회장을 맡고 있는데 경남고와 경희대를 졸업하고 형님 회사인 정화금속 이사와 승산의 대표이사를 역임한 뒤 85년부터 알토를 이끌었다. 알토는 아셈타워 정상회의실과 인터컨티넨탈 호텔, 서울역사, 인천공항 여객터미널,GS타워 등의 조명시스템을 설계, 제작했다. 숭례문, 보신각, 비원, 동십자각 등 문화재 조명도 이 회사의 작품이다. 허 회장은 서울시 야간경관 개선 공로로 월드컵유공자, 모범시민상 등을 받았다. 그는 한국조명디자이너협의회 회장, 한국산업디자인협회 이사, 한국전기설비조명학회 이사 등을 맡을 정도로 조명분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지난해 매출 311억원, 순이익 20억원을 낸 알토는 허 회장이 36%, 아들 영수(36)·윤수(32)씨가 각각 15%, 동생인 허승표(59) 인텍웨이브 회장, 허승조(55) GS리테일 사장이 각각 3.8%의 지분을 갖고 있는 ‘가족기업’이다. 영수씨는 현재 GS리테일 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허승표(59) 인텍웨이브 회장은 기업인으로뿐만 아니라 ‘축구인’으로도 잘 알려진 인물. 보성고와 연세대 상대, 서울은행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했고 74년 한국인 최초로 영국 프로축구 3부 리그에서 뛰기도 했다. 허 회장은 78∼90년 형님 회사인 승산에서 근무한 뒤 90년 방송 프로그램 제작, 미디어 유통,CF편집 등을 담당하는 미디아트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미디아트는 허 회장과 부인 조희숙(56)씨, 딸 서정(29), 아들 준수(28)씨가 지분 100%를 갖고 있다. 허 회장은 2000년에는 이동통신용 전력 증폭기, 유무선 통신용 부품 및 이동통신용 중계기 등을 제조하는 ‘인텍웨이브’를 설립,IT업종으로 발을 넓혔다. 인텍웨이브는 LG전자 등을 주 거래처로 지난해 15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허 회장은 90∼92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지냈고 97년에는 축구협회장 선거에 나서기도 했다. 지난해에도 회장 선거 출마설이 나돌았지만 올 초 한국축구연구소 이사장을 맡는 선에서 정리했다. 축구계의 ‘야당’으로 불리는 연구소는 이용수, 신문선씨 등이 책임연구원을 맡고 있다. 허승조(55) GS리테일 사장은 서울고와 한양대 공업경영학과를 마치고 78년 럭키금성상사에 입사했다. 이후 패션본부장, 유통사업부문장, 마트부문장 등을 역임하다 2000년 LG백화점 사장으로 유통경영을 시작했다.2002년 LG백화점,LG상사 할인점 부문,LG유통이 LG유통으로 통합되자 초대 사장을 맡아 지금까지 이끌고 있다. 허 사장은 임직원들에게 늘 “단기적인 성과보다는 10년 뒤의 장기 비전을 갖고 대비하라.”고 주문하고 ‘페어플레이’를 강조한다고 한다. 허 사장은 지난해 말 세계적인 헬스·미용 전문기업인 ‘왓슨’과 합작으로 ‘GS왓슨스’를 설립, 지난 3월 홍익대에 1호점을 내고 지난 2월에는 코오롱마트를 인수하는 등 신규사업 진출에 공을 들이고 있다. 태광그룹 창업주 고 이임룡 회장의 장녀인 부인 이경훈(51)씨와 2녀를 두고 있다. 허 사장의 처가는 장상준 전 동국제강 회장, 양택식 전 서울시장, 한광호 한국베링거인겔하임 명예회장, 신선호(롯데 신격호 회장 셋째 동생) 일본 산사스식품 사장 등과 혼사를 맺었다. ukelvin@seoul.co.kr ■ 허씨의 남다른 축구사랑 GS그룹은 분리되면서 LG의 프로야구·프로축구·프로농구 등 스포츠 가운데 축구를 갖고 나왔다.‘안양LG’는 지난해 3월 ‘FC서울’로 이름을 바꿔 서울 입성에 성공한 뒤 거물 신인 박주영을 잡으면서 일약 명문구단으로 떠올랐다. FC서울의 눈부신 성장에는 허창수 회장 등 허씨 일가의 남다른 축구사랑이 밑거름이 됐다. 98년부터 LG축구단 구단주를 맡은 허 회장은 축구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데 해외출장 중에도 FC서울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인터넷을 통해 경기상황을 직접 확인할 정도다. 뿐만 아니라 경기를 녹화해 나중에라도 꼭 챙겨 본다고 한다. FC서울은 박주영의 고교(청구고)시절인 2002년부터 영입에 공을 들였다. 비록 박주영이 고려대 진학으로 진로를 정하면서 영입에 실패했지만 이후에도 끈질기게 박주영측과 고대를 설득, 마침내 대어를 품에 안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허 회장이 모교인 고대에 7억원짜리 잔디구장을 기증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GS측은 “그런 사실은 없다.”고 부인했다. 하지만 허 회장 5형제가 모두 고대 출신일 정도로 고대와 깊은 인연이 어떤 식으로든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박주영의 유니폼에 광고를 하고 있는 GS건설은 박주영 신드롬으로 광고효과만 5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GS리테일이 실시한 ‘박주영 경기 보러 가자.’라는 이벤트에는 3만 6000여명이 응모하는 대성황을 이뤘다.GS는 지난 5월10일 열린 ‘GS출범 이벤트’ 추첨자로 박주영을 내세우는 등 박주영을 그룹의 ‘얼굴’로 십분 활용하고 있다. 허 회장의 삼촌으로 연세대, 서울은행, 영국 아스날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한 허승표 인텍웨이브 회장은 축구계의 대부로 통한다. 그는 97년 대한축구협회 회장직에 도전한 데 이어 올 초 한국축구연구소 이사장을 맡아 축구계 개혁에 힘쓰고 있는데 경쟁 상대인 정몽준 회장이 조카인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회장의 동서라는 점이 이채롭다. 사돈간의 ‘정리’도 축구에 대한 열정만큼은 막지 못한 것이다. 허씨들은 축구 외에도 아이스하키, 골프, 역도, 태권도 등 다양한 스포츠에 재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GS 관계자는 “허씨들이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데다 집안에 여유가 있어 일찍부터 스포츠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고 말했다. 허씨 3세 남자들 가운데는 아마추어 수준 이상의 축구 실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고 여자들도 열성 축구팬이 많다. ukelvin@seoul.co.kr ■ 계열사의 핵심인맥 GS그룹은 숫자에 관한 감각이 탁월하다는 오너 허씨 일가에 이어 각 계열사 CEO도 재무통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다. 18조원이 넘는 그룹 자산을 관리, 운용하고 투자 포트폴리오를 짜야 하는 서경석(58) GS홀딩스 사장은 부산 출생으로 경남고를 졸업했다. 서울대법대 4학년이던 70년 행정고시 9회에 합격, 국세청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재무부 세제국, 국세심판소 조정실장, 간접세과장, 소득세제과장, 조세정책과장, 상임심판관, 주 일본 대사관 재무관 등을 역임하고 91년 LG그룹 회장실 재경 상임고문으로 옮겼다. 서 사장은 공직에서 쌓은 재무 경력을 바탕으로 LG에서도 회장실 재무팀장, 전략개발사업단 운영본부장,LG투자신탁운용 사장,LG종금 사장, 극동도시가스 사장,LG투자증권 사장 등을 거쳤다. 허창수 회장이 서 사장을 GS그룹으로 영입한 것도 그의 회계·재무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강말길(62) GS홈쇼핑 부회장 역시 재무통이다. 부산대 상대 출신으로 공인회계사이기도 한 강 부회장은 금성통신 재경본부장, 관리담당 이사를 거쳐 회장실의 관리담당 상무를 역임했다.89년 LG유통(GS리테일) 전무로 부임, 유통 전문가의 길로 들어섰고 95년 LG유통 대표이사로 취임한 지 3년만에 만년 적자이던 편의점 사업을 흑자로 돌려 놓은 뒤 지난해 LG홈쇼핑으로 옮겼다. 김갑렬(57) GS건설 사장은 허창수 회장의 경남고, 고려대 경영학과 동기동창으로 74년 LG화학 입사 후 LG상사 등을 거쳐 93년부터 96년까지 LG건설 재경 담당을 역임했다. 이후 LG구조조정본부 재무팀장과 LG화학 최고재무책임자(CFO)를 거치며 대표적 재무 전문가로 부상했다.2002년 허 회장과 함께 LG건설로 옮겨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김 사장은 취임 당시 “2010년까지 양과 질에서 국내 1위 건설회사로 만들겠다.”던 약속대로 2002년 3조 6000억원이던 수주액을 2003년 5조원, 지난해 6조원으로 키워냈고 올해 6조 5000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완경(51) GS스포츠 대표이사 부사장도 선린상고와 고대 경영학과를 거쳐 79년 LG그룹 기획조정실에 입사한 이래 줄곧 재경업무를 담당해 왔다.LG투자증권 부사장으로 서경석 사장과 함께 ‘LG증권 전성시대’를 연 주인공으로 GS홀딩스 재무팀장을 겸임하고 있다. 심재혁(58) 한무개발 사장은 연세대 상대, 미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 출신으로 LG그룹 홍보팀장을 거쳤다. 인터컨티넨탈을 국내 최고 수준 호텔로 키워내 재계의 대표적인 ‘홍보맨 CEO’로 꼽힌다. ukelvin@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혁신-공기업 탐방] 박양수 광업진흥公 사장 / 인터뷰

    [혁신-공기업 탐방] 박양수 광업진흥公 사장 / 인터뷰

    공기업에도 혁신의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민간기업에서나 볼 수 있었던 팀제, 연봉제, 임금피크제, 다면평가시스템 도입 등은 더이상 새로운 뉴스가 아닐 만큼 공기업의 변화 속도가 빠르다. 정부도 공기업의 경영성과나 부패정도, 고객만족도 등을 평가해 공기업 인사 및 조직운영에 반영한다는 계획이다.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메스를 들이댈 게 뻔하다. 이에 서울신문은 오풍연 공공정책부장이 공기업 사장을 직접 만나 혁신의 방향과 성과를 들어보는 시리즈를 싣는다. 대한광업진흥공사는 공기업 가운데 적극적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정년을 3년 앞둔 직원을 대상으로 실시할 수 있는 근거규정을 마련한 것이다. 박양수 광진공 사장은 27일 서울신문과의 첫 인터뷰에서 “능력과 성과중심의 인사제도를 만들기 위해 연봉제를 전사원으로 확대하고 다면평가 비중을 높이는 한편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면서 “임금 지급률 등 세부 시행방안은 조만간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광물자원산업의 육성과 지원을 위해 법정자본금도 종전의 3000억원에서 6000억원으로 증액했다.”면서 “남북경협 차원에서 북한과 자원개발사업도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광진공은 최근 전 직원 투표결과를 토대로 후임 상임이사를 제청했다. 어떤 취지인가. -공기업 최초로 상임이사를 전직원 투표를 통해서 제청했다. 투명하고 공개적인 인사원칙을 확립하기 위해서다. 또 사장이 인사권한을 직원들에게 넘겨줌으로써 과거 공기업이 가지고 있었던 인사폐단에서 과감하게 탈피하겠다는 것이다. 과거 사장이 일방적으로 임명하는 대신 직원들이 직접 자기의 손으로 선출하면 좀 더 능력 있고 덕망 받는 인사가 뽑힐 가능성이 그만큼 크지 않겠는가. 상식적으로 한 사람의 생각보다 여러 사람의 생각이 옳고 현명하다고 본다. ▶일부에서는 인기영합적인 인사라고 비난하고 있다. -당연히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을 수 있다. 겸허하게 수용하고 귀 기울이겠다. 그러나 투명하고 공개적인 틀에서 전 직원이 공감하는 임원을 뽑아야 한다는 인사원칙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직원들의 지지를 받는 CEO가 되고 싶다. 직원들로부터 인기를 얻겠다는 것이 아니라 직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우리 공사 앞에 놓인 일련의 혁신과제들을 하나씩 하나씩 풀어가겠다는 뜻이다. ▶상임이사 인사 투표제가 다른 공기업에 파급효과가 있을 것 같다. 또 상급기관이 불쾌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오히려 다른 공기업을 도와줬다고 생각한다. 광진공의 사례를 통해서 능력있는 사람을 공정하게 뽑는 시스템을 배울 수 있지 않겠나. 물론 상임이사를 전직원이 투표를 통해 뽑으면 상급기관이 특정인사를 기용하려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는 있다고 본다. 하지만 나는 투표제가 진정 공사를 위하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투자기관 가운데 처음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는데 어떤 효과를 기대하고 있는가. -취임 후 변화와 혁신의 기치를 내걸고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능력과 성과중심의 인사제도 정비다. 임금피크제는 바로 위와 같은 취지에서 다른 공기업보다 한발 앞서 도입했다. 또 우리 직원들이 안정적으로 직장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잘만 정착이 된다면 회사와 직원이 함께 ‘윈윈’할 수 있는 제도라고 여겨진다. ▶중앙부처도 조직을 팀제로 바꾸고 있다. 최근 개편한 팀제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지난해 말 처단위 조직을 팀조직으로 전면 개편했다. 우리 공사는 지난해 국회에서 어렵게 공사법을 통과시켜 해외자원 직접개발 사업을 확대하고, 아울러 전략광물에 대한 비축사업과 광산물 가공산업 지원업무를 할 수 있도록 사업 범위를 대폭 확대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공사의 가장 핵심사업인 해외자원개발 사업 중심으로 조직개편과 인력확충이 불가피해졌다. 또 팀장에게 책임과 권한을 대폭 위임, 우리의 목표인 자원보국을 위해 적극적이며 공격적인 업무추진이 되도록 했다. ▶공기업에도 다양한 형태의 성과 평가 시스템이 도입되고 있는데, 광진공의 성과평가 시스템은 어떤가. -가장 눈에 띄는 점이 연공 서열주의에 입각한 승진제도를 업적과 능력위주로 개선했다는 것이다. 근무평점, 어학능력, 다면평가 등의 내부평가 비중을 확대하고 대신 연공비중을 축소했다. 특히 다면평가제를 체계적으로 개선했는데, 부하평가·상사평가·동료평가 등 평가방법을 다양화했고 다면평가 결과를 중시해 승진반영 비중을 20%에서 40%로 높였다. 또한 종전 간부사원만 대상으로 했던 연봉제를 전 직원으로 확대 시행하고 있다. ▶취임할 때부터 노조에서 반대가 있었는데, 지금은 협력적인 노사관계로 나아가는 것 같다. -지금까지 재직한 6개월 동안 공사의 주요현안에 대해 노사가 머리를 맞대고 토론함으로써 협력적 노사문화를 구축하는 데 노력했다. 사실 공모제를 통해 광진공 사장으로 왔지만 취임 초에 정치인 출신 낙하산 인사라는 비난을 받았다. 노조와의 관계개선이 급선무라고 판단하고 업무 첫날 노조사무실을 직접 방문해 노조위원장과 공사현안에 대해 함께 협의했다. 이후 노사관계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형식적인 의전을 없애는 등 각종 혁신을 진행하고 있다.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혁신방향에 대해 말해달라. -취임 이후 비서를 수행하지 않고 직접 서류가방을 들고 출퇴근하고 있다. 취임 일성이 경영혁신이었던 만큼 사장이 먼저 솔선수범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북한자원개발 추진상황을 설명해 달라. -북한자원개발과 관련된 조직을 확대했다. 올 초 북한자원개발조직을 남북자원협력팀으로 확대개편하고, 북한사무소를 직제에 신설했다. 또 민간기업의 대북투자 협상전담 창구역할을 하기 위해 뛰고 있다.2003년부터 추진중인 황해도 정촌 흑연광산 공동개발사업은 올해 제품생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 ‘조직관리 달인’ 박양수사장 박양수 사장은 공기업 CEO로 변신하기 전 정치판에서 35년동안 몸담았던 정치인이다. 1970년대 초반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정치를 시작, 정당에서는 주로 조직관리를 해왔다. 민주당 총무국장, 새천년민주당 조직담당 사무부총장·조직위원장을 거치는 등 사람관리가 주특기인 셈이다. 조직관리를 오래 해와 ‘마당발’로 통한다. 그가 지난해 9월 제13대 사장에 취임했을 당시 각계에서 배달된 축하 화분이 사장실이 있는 3층 복도를 채우고도 모자라 4층 계단으로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지금도 여야 거물급 정치인들이 박 사장을 직접 찾아와 정치에 대한 자문을 구할 정도다. 박 사장은 2001년 1월 민주당 비례대표 의원직을 승계받았으나 2003년 10월 통합신당을 위해 탈당, 의원직을 과감히 던졌다. 이해찬 총리 등과 열린우리당을 만드는 데 산파역을 했다는 평이다. 지금은 우리당 고문을 맡고 있다. 명지대 야간 정규 석사과정을 밟을 정도로 학구열도 대단하다. 박 사장은 제11대 광진공 사장이었던 박문수씨의 6촌형이다. 일가친척이 잇따라 같은 공기업 사장을 하는 것도 이례적이다. ▲전남 진도(67) ▲서울문리사대(현 명지대) ▲민주당 사무부총장·총재특보 ▲열린우리당 사무처장 ■ 人事등 146개권한 하부 위임 팀장·부장 업무효율성 높여 대한광업진흥공사에서 가장 힘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사장도 상임이사도 아니다. 바로 팀장과 부장이다. 상부보다 하부의 권한이 더 세진 것이다. 팀장과 부장의 업무처리 비중을 합치면 전체 업무의 87%에 가깝다. 조직을 팀제로 바꾸면서 신속한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조직내 책임과 권한을 재조정한 결과다. 박양수 사장은 취임하자마자 각 직급별 권한을 분석했다. 직급마다 해야 할 일을 분명히 구분하기 위해서다. 분석끝에 전략의 방향을 정하는 것은 사장이, 전략을 관리하는 것은 본부장이, 관리운영은 팀장이 하도록 정했다. 이에 따라 박 사장은 전략방향과 관계없는 47개 권한을 본부장과 팀장에게 넘겼다. 대표적인 것이 팀내 조직설계 권한을 팀장에게 넘긴 것이다. 즉 팀내 부서의 신설·폐지·통합 등의 권한과 그에 따른 부원 인사권을 전적으로 팀장에게 넘긴 것이다. 또 박 사장은 1억원 이상 공사의 경우 결재권은 본부장에게 권한을 넘겼다. 권한 위임 이후 박 사장이 전체 업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45%에서 2.30%로 낮아졌다. 본부장은 53개의 권한을 하부로 이양하고, 사장으로부터 45개의 권한을 새롭게 받았다. 이처럼 광진공이 실시한 146개 권한조정 가운데 주목되는 부분은 역시 인사권한 이양이다. 박 사장은 “팀제로 전환해 놓고 팀장에게 권한을 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면서 “팀장에게 전폭적인 힘을 실어주는 대신 그 팀의 성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팀장에게 지우고 있다.”고 설명했다. 팀장에게 인사권이 넘어가더라도 혈연·학연·지연 등의 인사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팀장이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능력있는 부장과 부원을 끌어오려 하기 때문이다. 부장도 종전보다 50개의 권한이 늘었다. 부장이 회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7.66%에서 27.69%로 무려 10%나 뛰었다. 간단한 업무처리는 부장이 전결처리토록 한 것이다. 강충식기자 chungsik@seoul.co.kr
  • 서울에도 집성촌 10여곳 있다

    서울에도 집성촌 10여곳 있다

    특별시에 집성촌?서울 양원리등 10여곳 수십 가구씩 오순도순 유영규(42·대구시 남구 대명동)씨는 어려서 자신보다 나이는 적지만 항렬이 높아 아저씨뻘 되는 아이에게 ‘꿀밤’을 먹였다가 집안 어른들로부터 꾸지람을 들은 적이 있다. 이어 눈을 피해 이 아이를 또 혼냈다가 들통이 나는 바람에 더 큰 야단을 맞기도 했다. 유씨로서는 어린 마음에 억울한 일이 줄을 이었다. 시골지역의 집성촌(集姓村)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 아직도 ‘아랫집은 사촌 형님, 윗집은 숙부, 옆집은 조카, 앞집은 당숙’ 하는 식으로 친인척끼리 옹기종기 모여 살아가는 마을이 10여곳 있다는 것만으로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러한 집성촌들은 그린벨트로 묶이고, 세태의 변화에 밀려 점차 사라지고 있다. 서울 중랑구 망우1동 259 일대에는 서울이라고는 얼른 떠올려지지 않는 ‘양원리’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에는 동래 정씨들이 38가구나 모여 산다. ●조선 태조가 하사한 땅 이 마을 정수선(71·새마을금고 운영)씨는 “조상님들이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가 서울을 도읍으로 정한 1394년보다도 3년 전에 이곳에 터를 잡아 살기 시작했으니 벌써 610년을 넘겼다.”고 말했다. 정씨 말대로 이성계가 고려 말 역성혁명에 성공하자마자 일등공신인 정구(鄭)에게 이 일대의 토지를 하사한 인연으로 지금까지 24대째를 내려오고 있다. 마을 이름도 태조와 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다. 태조가 자신이 묻힐 무덤자리를 보러 가는 길에 고개를 넘으면서 모든 근심을 잊었다고 해서 망우(忘憂), 고갯마루에서 쉬다가 마신 우물물의 맛이 너무 좋았다고 해 양원리(養源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아무래도 개발제한이 풀리면 집성촌 유지가 어렵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마을사람들이 내놓는 대답은 ‘천만에’였다. ●사라져가는 집성촌 정씨는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이는 바람에 건물을 못 짓고, 땅값이 주변의 10분의1밖에 안되는 등 불이익(?)에 따른 불만도 불만이지만, 무엇보다 건물을 짓지 못하는 불편 때문에 후손들이 고향을 떠나고 있다.”고 허탈해했다. 개발이 늦어져 오래 모여 살아오기도 했지만, 똑같은 이유로 세월에 떠밀려 사라질 위기에 놓인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수선씨는 또한 “집을 팔고 이사하는 바람에 다른 성씨가 10가구 들어와 집성촌이라는 명맥은 이어가지만 이미 순수혈통 마을에서는 약간 벗어난 게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는 이어 “한 핏줄끼리 옹기종기 모여 산다는 자부심도 있긴 하지만….”이라며 씁쓸해했다. 정씨는 슬하에 7남매를 뒀다. 막내아들 민섭(28)씨를 빼면 모두 서울에 살고 있지만 집성촌에서 나와 사실상 ‘타향 살이’를 하고 있다. 민섭씨 또한 아버지의 마을금고 사업을 도와주려고 머무는 것이니 ‘동거’는 그리 길지 않을 것으로 여기는 눈치다. ●“죄다 믿음이 간다오” 정씨의 집 앞에는 7촌 조카, 그리고 바로 옆에는 6촌 동생이 살고 있어 “이곳이 과연 집성촌이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에 따르면 망우동이 서울로 편입되기 전인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九里面)일때는 집성촌이 10개나 있었다. 현재 구리시로 한 단계 뛰어오른 구리면은 망우·상봉·중화·묵·신내·교문·토평·갈매·수택리 등 9개 마을로 이뤄졌는데, 바꿔 말하면 한 마을에 두 가지 성씨의 집성촌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 마을에서 북부간선도로를 가로질러 자동차로 10분쯤 가면 구릉산 아래로 신내1동 산6 일대에 경주 임(林)씨 30여가구가 모여 사는 능말(큰 능이 있다고 해서 붙은 능마을의 준말)이 나타난다. 임씨 집성촌이 처음으로 들어선 것은 선조 36년인 1603년쯤이라는 기록이 전해진다.400년 남짓한 전통으로 정씨네 집안에는 ‘한끗발’ 뒤지지만 결코 녹록하지 않은 역사를 갖고 있다. 대부분 직장인들인 양원 마을과는 달리 전체의 절반인 15가구가 아직도 이 지역의 특산물인 ‘먹골배’를 생산하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종친회 총무 임현만(59)씨는 “하루 온종일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서 “조상들의 묘를 지키며 오랫동안 ‘모여 사는 정’에 익숙해져 좀처럼 외지로 나가기가 힘들었다.”고 귀띔했다. 함께 사는 임씨의 아들 준성(29)씨도 “아무래도 집안 어르신들과 가까이 지내다 보니 예의범절이 절로 몸에 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예의 범절 저절로 배워요” 강동구 강일동 ‘벌말’ 청송 심(沈)씨네는 50여가구가 모여 사는 서울에서 가장 큰 집성촌이다.410여년 전인 조선시대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중에 충청도 예산에서 피란온 선조들의 후손이다. 벌말이란 벌판에 마을이 섰다고 할 정도로 너른 땅을 말한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어 지명에는 평촌(坪村)이 있다. 벌말에서는 나이는 어려도 항렬이 높은 이에게 존칭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함부로 호칭하다가 혼이 나는 일도 적지 않다. 서로 새해인사를 하는 경우 나이는 자녀뻘이지만 항렬이 높은 이에게 머리를 숙여야 한다. 강동구의회 의장을 지낸 25대손 심재풍(69)씨는 “10대 할아버지께서 정착한 이래, 마을 규범 때문에 가끔 다투기도 하지만 성씨가 같아서인지 금방 화목을 되찾는다.”며 마을 자랑을 빼놓지 않았다. 그는 이어 “최근 다른 성씨들이 마을로 들어오고 10촌 이상 촌수가 벌어지면서, 명절이면 친척들이 모두 모여 집집이 옮겨다니며 차례를 지내는 데만 하루 종일 걸리는 옛 풍습이 사라져 아쉽다.”고 말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무슨 사연·어떤 자랑거리 있나 서울 시내엔 10여가구가 모여 작은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 모두 6곳이 있다. 도봉구 방학4동 ‘원당마을’에는 파평 윤(尹)씨, 강서구 외발산동 ‘광명마을’에는 경주 최(崔)씨, 강동구 강일동 ‘가래여울’(한강으로 흘러드는 두 여울이 갈라져 흐르는 곳이란 뜻)에는 남평 문(文)씨 집안이 있다. 또 창녕 조(曺)씨들이 대대로 일군 서초구 염곡동 ‘염통골’(마을 생김새가 염통 모양)과 경주 김씨의 내곡동 ‘능안마을’에다 아예 성씨를 따 ‘홍씨 마을’이라고 부르는 남양 홍씨 집성촌이 있다. 집성촌 속에는 깊은 역사만큼이나 자랑거리도 수두룩하다. 먼저 도봉구 방학동 원당마을에 있는 서울시의 보물덩어리가 된 830살짜리 은행나무가 손꼽힌다. 서울시 지정 보호수 1호다. 높이가 24m, 둘레는 9.6m나 된다. 관악구 신림동 산112의1에 있는 굴참나무(천연기념물 271호·수령 1010년)와 종로구 삼청동 106 총리공관 등나무(천연기념물 254호·수령 920년)에 이어 ‘수령’이 서울에서 세 번째다. 원당마을 은행나무는 옛날부터 스스로 몸에 불을 질러 나라의 큰 변고를 알리는 등 신통을 지녔다고 전해지고 있다. 예컨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직전 이 나무에 까닭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나 소방차가 출동, 진화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해마다 2월 중순이면 이곳에 30여명씩 모여 떡과 술을 놓고 나라의 안녕을 비는 ‘행목대신제’(杏木大神祭)를 올리고 있다. 은행나무 옆에는 조선시대 비운의 임금인 연산군(1476∼1506년)의 묘가 있다. 이 무덤이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의 유배지였던 강화도에서 옮겨오면서 파평 윤씨들이 뒤따라와 정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록으로 찾아볼 수 없어 언뜻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원당마을 윤주현(71)씨는 “정치적으로 억울하게 죽은 연산군의 경우 3족이 멸문지화를 당했고,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비(尹妃)에 대한 효성이 지극해 외척들이 돌봐야 한다고 여겨 이 곳으로 온 게 아니냐는 추측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 곳엔 또 마을과 역사를 함께 해온 ‘원당천’이라는 우물이 있다. 태조가 물맛을 본 뒤 칭찬했다는 망우동 양원마을 우물과 비슷한 사례다. 피란민이 숨어들었을 정도로 외진 곳이어서 자연부락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 청송 심씨들의 마을에도 흥미 넘치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심재익(67)씨는 “옛날 한 백성이 산에서 도적을 만났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화를 면했다.”고 운을 뗐다. 그는 이어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로 앞 바위의 모양이 호랑이와 똑같이 생겨 그 사건 이후에 그 바위가 마을을 지켜주는 산신령이라고 믿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해마다 음력 7월 초하루에서 사흘 사이에 길일(吉日)을 가려 ‘큰말(벌말의 딴 이름으로, 큰 마을이란 뜻) 산신제’를 지낸다. 앞산 꼭대기에 올라 집집마다 추렴한 쌀로 떡과 술을 빚고 소머리를 제단에 올린다. 서울시내에서 행하는 유일한 산신제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재계 인사이드] 재계7위 GS그룹 공식탄생

    [재계 인사이드] 재계7위 GS그룹 공식탄생

    LG그룹의 ‘세포분열’이 정부의 승인을 받음에 따라 자산기준 재계 7위의 대그룹인 GS그룹이 공식 탄생했다. LG와 GS는 27일 지주회사인 ㈜GS홀딩스를 포함해 14개사가 공정위로부터 LG 계열에서 분리승인을 받았다고 밝혔다.LG는 지난해 7월 GS홀딩스가 출범하면서 사실상 그룹 분리가 이뤄졌지만 그동안 구씨 대주주와 허씨 대주주간 지분이 남아 있어 법적으로는 같은 그룹으로 분류됐다. 이로써 1947년 LG그룹의 모체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 창립부터 시작된 구씨와 허씨의 동업관계는 완전히 끝을 맺게 됐다. 두 가문의 동업은 고 구인회 창업회장의 장인인 고 허만식씨의 6촌이자 만석꾼이었던 고 허만정씨가 구인회 회장에게 출자를 제의하면서 자신의 셋째 아들(고 허준구 LG건설 전 명예회장)의 경영수업을 부탁하면서 시작됐다. 그동안 두 가문은 재계에서 보기 드물게 잡음없이 동업관계를 유지해왔지만 세대를 내려오면서 대주주가 수백명으로 늘어나는 등 지분관계가 너무 복잡해지자 각자의 영역에서 책임경영을 하기로 합의했다. GS는 조만간 새로운 CI(기업이미지)를 내놓고 ‘에너지 및 유통 서비스 명가(名家)’로 거듭나기 위해 경영이념과 비전 수립 작업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LG칼텍스정유는 ‘GS칼텍스’로,LG홈쇼핑과 LG유통,LG건설도 각각 ‘GS홈쇼핑’과 ‘GS리테일’,‘GS건설’로 사명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GS그룹의 자산 규모는 2003년 말 기준으로 16조 900억원. 공기업 및 민영화된 공기업을 제외하면 삼성, 현대차,LG,SK, 한진, 롯데에 이어 재계 7위 수준이다.GS그룹은 지난해 매출이 22조원에 달하는데다 GS홀딩스의 투자여력만 1조 1500여억원에 달하는 등 규모가 만만찮아 재계의 ‘태풍의 눈’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GS 관계자는 “57년간 이어진 구씨와 허씨 가문의 인화와 동업 정신은 이어가되 차별화된 사업선택과 투자 집중화로 새로운 기업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말했다. LG그룹은 자산규모가 크게 줄어 현대차에 이어 3위로 내려갈 전망이지만 GS그룹을 떼어 낸 올해도 매출 94조원을 목표로 세우는 등 공격적인 경영을 시도하기로 했다. LG 관계자는 “계열분리를 계기로 주력사업인 전자ㆍ화학에 사업역량을 집중하면서 경영시스템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이고 인적자원의 창출가치를 극대화해 명실상부한 글로벌 리딩기업이 되겠다.”고 말했다. 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 儒林(204)-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儒林(204)-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제2부 周遊列國 제4장 喪家之狗 실제로 공자가 죽었을 때 공자는 곡부 북쪽에 있는 사수(泗水)가에 묻혔는데, 모든 제자들이 3년 동안 복상(服喪)을 하고 헤어졌지만 유독 자공만은 무덤 곁에 움막을 짓고 6년 동안이나 계속 무덤을 보살폈다고 ‘공자세가’가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자공은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특별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공이었던지라 생사를 모르는 스승의 안부가 몹시 걱정되었을 것이다. 공자는 다행히도 무사히 정나라에 도착하여 동문의 성곽 밑에 우두커니 혼자 서 있었고, 자공은 헐레벌떡거리며 스승을 찾으러 다녔다. 이때 길을 가던 정나라 사람, 행인 하나가 자공에게 말하였다. “글쎄요, 그 분이 당신이 찾는 그 스승인지는 모르지만 동문 근처에 서 있는 괴상한 사내를 만나기는 하였습지요.” 자공은 놀라 큰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생긴 분이셨습니까.” 그러자 행인은 대답하였는데, 이 대답은 그 무렵의 공자 모습을 한마디로 상징하는 명언이었다. “동문 밖에 한 사람이 서 있는데, 그의 키는 9척 6촌가량이고, 눈두덩은 평평하고, 눈꼬리가 길며, 광대뼈가 튀어나왔고, 그 머리는 요임금을 닮았고, 목덜미는 순임금 때의 현인이었던 고요(皐陶)를 닮았으며, 그의 어깨는 정나라의 명재상 정자산(鄭子産)을 닮았더군요. 그러나 그 키는 우임금보다 세 치가량 모자랍니다.” 틀림없이 스승의 모습이라고 판단한 자공이 다시 물었다. “그밖에 또 모습은 어떠하였습니까.” 자공이 묻자 행인은 대답하였다. “글쎄요. 그나저나 그 처량하고 축 처진 모습은 상갓집의 개와 같은 몰골이었습니다.” ‘상갓집의 개(喪家之狗).’ 처량하고 축 처진 공자의 모습을 풍자한 말. 이러한 은유를 통해 이 무렵 공자의 신세가 얼마나 절박하였던가를 미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성인 공자를 ‘상갓집의 개’라고 표현한 것은 불경스러운 용어지만 이는 일부러 폄하하려는 뜻은 아니었다. 실제로 공자 자신도 이 표현에 대해 웃어넘겼던 것이다. 마침내 행인의 표현에서 스승임을 직감한 자공은 동문으로 나아가 성문 밖에 서 있는 공자를 상봉한다. 자공이 무릎을 꿇어 예를 올리고 나서 스승에게 그 행인이 표현한 내용을 그대로 아뢰자 공자는 크게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가 형용한 용모와 자태에 대한 표현이야 잘 들어맞지는 않지만 나를 상갓집의 개라고 표현한 내용은 참으로 절묘하구나.” 바로 그해 공자의 고향 노나라에서는 정공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애공(哀公)이 왕위에 즉위하였는데, 이처럼 고향을 떠난 지 불과 1년 만에 상갓집의 개와 같은 처량한 신세로 전락하고 만 공자의 수난은 그러나 아직 시작단계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듬해인 기원전 495년 57세의 공자는 정나라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그토록 가려 했던 진나라에 도착한다. 공자는 사성(司城)인 정자(貞子)의 집에 의탁하였는데, 공자의 기대와는 다르게 진나라는 마침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 무렵의 전국시대는 뚜렷한 패자가 없이 진(晋)나라와 초(楚)나라, 오(吳)나라 이렇게 세 나라가 서로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공자가 입국한 진(陳)나라는 초나라 편에 가담하고 있었으므로 자연 오나라와 진(晋)나라가 자주 진(陳)나라를 정벌하고,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져 있었고, 천하의 정세는 극도의 불확실성에 한 치의 앞도 알아볼 수 없는 암흑의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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