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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찬호 ‘악연’끊고 6승 던진다

    박찬호(LA 다저스)가 시즌 6승에 도전한다. 박찬호는 당초 예정보다 하루 이른 4일 오전 5시 에디슨필드에서 열리는 미국 프로야구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의 애너하임 에인절스와의 ‘프리웨이 시리즈’에 선발 등판한다.다저스 코칭스태프는 지난 1일 뉴욕 메츠전이 끝난직후 카를로스 페레스 등판을 뒤로 미루고 박찬호의 일정을 하루 앞당겼다. 애너하임은 다저스의 지역 라이벌팀인데다 박찬호가 지난해 6월6일 애너하임과의 경기도중 상대 투수 팀 벨처에게 발길질해 7경기 출장정지를 받았던악연의 팀이다. 박찬호의 선발 맞상대는 신인 브라이언 쿠퍼(25).지난달 22일 마이너리그에서 올라온 쿠퍼는 최근 2승 무패,방어율 3.21로 호조다.박찬호의 경계 대상1호는 아메리칸리그 MVP출신의 모 본으로 공격 전부문에 걸쳐 상위에 랭크돼있다.지난해 박찬호와 한차례 맞붙어 3타수 1안타를 기록했지만 볼넷을 2개나 내준 껄끄러운 타자다. 김민수기자
  • 남북정상회담 D-18/ 준비접촉 뒷얘기

    지난달 22일부터 이달 18일까지 5차례 열린 남북정상회담 판문점 준비접촉에서 북측 대표단은 예상보다 훨씬 호의적이고 적극적 태도를 보였다고 준비접촉 우리측 수석대표인 양영식(梁榮植)통일부차관이 24일 밝혔다.양차관이전한 회담 뒷얘기를 소개한다. ■우호적 분위기 양차관은 “준비접촉 분위기만으로 정상회담은 ‘되는 회담’이란 걸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과거 남북간 접촉에서는 서로가 상대방의 얘기를 묵살하거나 반박해 대화가 막히기 일쑤였는데,이번 준비접촉에서는 북측도 우리의 얘기를 진지하게 받아주면서 어떻게든 되는 쪽으로 끌고가려는 자세가 뚜렷했다는 것. 예컨대 우리가 이산가족 문제를 주제로 삼기 위해 어버이날 얘기를 우회적으로 꺼내면 북측에서 알아채고 이산가족을 먼저 거론하는 식이다.또 우리는북한식 언어사용법을 배려해 왕래를 ‘래왕’으로 발음하고 북측도 이심전심으로 ‘왕래’라고 발음하는 등 서로 상대방의 언어관습으로 회담이 진행될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다. ■한때 해프닝 북측 발언의 진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착오를 빚는 등 분단 장기화로 인한 언어 이질화의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00일에 만나자”는 북측의 주장에 우리측이 다른 날짜를 제시했는데 북측이 선뜻 “그렇게 합시다”라고 해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였는줄 알고 일어섰다고 한다.그런데 확인과정에서 북측의 말뜻이 ‘자신들의 뜻대로 하자’는말을 강하게 권유한 표현이었던 것으로 판명돼 양 대표단이 부랴부랴 다시자리에 앉는 해프닝이 있었다. ■긴장된 상황 양측 대표단은 폐쇄회로 TV로 회담 실황이 양 정상에게 보여지고 있다는 점을 의식,단어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하는 등 회담 내내 긴장을풀지 못했다.특히 북측 대표단은 테이블에 꽂힌 담배에 전혀 손을 대지 않는 등 상부의 시선을 의식하는 태도를 보였다. 서울과 평양에서 회담상황에 따라 수시로 메모지를 대표단에 전달했기 때문에 양 대표단은 준비접촉을 예비 정상회담이나 다름없게 여길 정도였다. 김상연기자 carlos@. *정상회담 선발대. 남북정상회담 선발대에 정부와 청와대 1급직 공무원들이 여럿 포함돼 통일부 ‘1급’이 청와대와 타부처 ‘1급들’을 지휘하며 평양에서 사전 준비업무를 진행하게 됐다. 24일 정부 당국자에 따르면 선발대에 포함된 1급직으론 손상하(孫相賀)외교통상부 의전장,청와대 구영태(具永太)경호처장,정병용(鄭炳鏞)통신처장 등이포함돼 있다. 외교부측은 당초 “대통령 외국방문행사의 선발대 단장은 외교부 의전장이맡는 게 관례였다”며 단장몫을 요구,통일부와 맞섰었다.북한에서 이뤄지는대통령 행사란 점에서 단장으로 한때 청와대 관계자가 검토되기도 했다. 그러나 6개 부처 장관으로 구성된 정상회담추진위원회는 지난 23일 “북한을 잘 알고 종합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통일부 관계자가 지휘·조정업무를맡는 게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냈다는 후문이다. 선발대의 의전부문은 외교부 내에서 제1의 의전전문가로 알려진 백영선(白暎善)의전심의관과 청와대 의전담당자 5명,경호는 청와대 경호실 관계자 8명으로 구성돼 있고 통신·보도부문은 각각 2명으로 한국통신 기술요원이 포함돼 있다.생방송문제 협의를 위해 민간방송 기술진 3명도 함께 방북대열에 끼게 됐다.평양에 도착하면 남측 숙소인 백화원초대소에 상황실을 설치,운영하게 될 통일부·국방부 운영요원 10명도 선발대 30명안에 들어있다. 정부는 회담전에 12일동안 체류하게 되는 선발대 인원을 6월6일과 9일쯤 두차례 교대시키면서 준비의 효율을 높일 계획이어서 사실상의 선발대 인원은30명을 넘을 것으로 보인다. 손인교 단장은 “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와 대통령의 정상회담 수행에 한점의 차질이 없도록 현지에서 사전에 준비·점검하는 일이 선발대 역할”이라면서 “선발대는 분야별 해당부처의 실무 전문가들로 짜여졌다”고 설명했다. 이석우기자 swlee@
  • 러 ‘붉은 군대 합창단’ 새달 내한공연

    가슴 아리는 우수,보드카 같은 열정의 러시아 음악과 춤이 초여름 한국팬들을 찾아온다.볼쇼이 무용단과 함께 러시아 최고의 예술단으로 꼽히는 알렉산드로프 레드 아미 앙상블(일명 붉은 군대 합창단)이 6월 3-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6월6일 대전엑스포 아트홀에서 내한공연을 갖는다. (02)7456-119 아리랑TV가 주최하고 예맥문화가 주관하는 이번 공연에는 남성합창단 55명을 비롯 오케스트라 35명,무용단 24명 등 총 130여명이 참가한다. 이번이 두번째 내한공연으로 지난 93년에는 합창단만 왔었다. 올해로 창단 72년째인 붉은 군대 합창단은 12명으로 출발,37년 파리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국제적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단원들은 대부분이 군인 신분으로 러시아 각 연방에서 선발된 최고 실력의 솔로이스트들이다.‘알렉산드로프 레드 아미 앙상블’이란 명칭은 설립자의 이름을 따서 1946년부터 붙인 것. 이번 내한공연은 러시아인 특유의 매력적 저음과 전통 무용,전통 악기가 한데 어울려 근래 보기드믄 초대형 무대가 펼쳐질 예정이다. 관록의 합창단답게 ‘칼린카’‘광야의 노래’등 러시아 민요와 오페라 ‘나부코’중 아리아 ‘나의 아름다운 고향’등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들려주며 드라마 ‘모래시계’의 배경음악으로 우리 귀에 친숙한 ‘백학’,한국 가요 ‘친구여’ 등도준비했다. 허윤주기자 rara@
  • 서울서 만나는 ‘호주의 예술세계’

    오는 9월15일 개막하는 시드니올림픽에 앞서 호주의 다양한 문화를 선보일‘호주페스티벌’이 2일∼6월6일 서울에서 열린다. 주한호주대사관이 주최하는 이번 행사에서는 음악,무용,연극,문학 등 각 장르에 걸쳐 호주인들의 특색있는 예술세계가 소개될 예정.우리 앞으로 성큼다가온 호주를 만나보자. 먼저 호주 3대 예술단체중의 하나인 ‘서커스오즈’가 3∼8일 LG아트센터에서 초청무대를 갖는다.라이브음악과 스펙터클한 신체움직임이 조화를 이룬현대적인 서커스로 뉴욕타임스로부터 ‘가장 호주적인 공연단체’라는 극찬을 받은 바 있다. 이어 25∼28일 문예회관 대극장에서는 호주의 대표적인 직업무용단 ‘익스프레션스 댄스컴퍼니’의 공연이 열린다.85년 창단된 이 무용단은 에너지 넘치는 혁신적인 작품으로 휴스톤 국제예술제,뉴욕 아·태 현대무용제등에서 시선을 모았다. 박기자 배상복 권금향 등 8인의 한국 안무가들이 호주 음악을 배경으로 신작을 선보이는 ‘호주음악과 만나는 한국춤’은 6월3∼5일 오후7시30분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된다. 호주음악이 무대 배경으로 소개되기는 이번이 처음.국립호주음악센터가 엄선한 음악들이 한국춤에 어떻게 녹아들지 기대를 모은다.이밖에 아동도서전,문학강연회,음식페스티벌 등이 다채롭게 열린다.(02)730-6490이순녀기자 coral@
  • [의열 독립투쟁] (9)장진홍 의사

    1927년 10월18일 11시20분경 대구시 중앙통에 위치한 조선은행 대구지점에허름한 옷차림의 한 청년이 나타났다.청년은 곧바로 창구 앞으로 다가가 들고온 보자기를 풀어 네개의 상자 가운데 한 개를 창구로 내밀면서 창구의 직원에게 “이것은 벌꿀인데 우리 여관에 든 손님이 지점장님께 전해달라고 한선물입니다”고 디밀었다. 군대에서 포병대 근무경력이 있는 창구직원 요시무라(吉村)는 상자에서 화약냄새가 나는 것을 느끼고 급히 상자를 열었다.아니나 다를까!상자 안에는도화선에 불이 붙은 폭탄이 들어있었다.깜짝놀란 요시무라는 도화선을 끊고청년으로부터 보자기를 빼앗아 다급하게 나머지 상자를 열었다. 연락을 받고 황급히 달려온 10여명의 순사들이 도화선을 끊으려고 하였으나이미 때는 늦었다. 곧이어 폭탄 하나가 터짐과 동시에 뒤이어 두개의 폭탄이 연속적으로 굉음을 내면서 폭발하며 천지를 뒤흔들었다.이것이 저 유명한장진홍(張鎭弘)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이다.폭탄을 전한 청년은장의사가 심부름을 보낸 덕흥여관 종업원 박노선(朴魯宣)으로 이 사건과 별다른 관련은 없다. 장의사는 1895년 6월6일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문림리에서 아버지 장성욱(張聖旭)과 어머니 순천(順天) 김씨 사이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본관은인동(仁同),호는 창려(滄旅).장의사는 어려서부터 담력이 크고 의협심이 강했다.칠곡소재 인명학교(仁明學校)를 졸업하고 1914년 조선보병대에 입대해군사지식을 배운 장의사는 1916년 고향에서 대한광복회에 가입했으나 일경의감시가 심해 1918년 만주로 망명했다. 동지인 이국필(李國弼)과 함께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로 건너가 조선인 청년 100여명을 규합해 군사훈련을 실시했으나 1917년 러시아혁명의 여파와 일본군의 시베리아출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귀국하였다.1919년 3·1 의거가 일어나자 장의사는 일제의 만행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기 위하여 동생 진환(鎭煥)으로부터 600원을 받아 전국 각지를 돌며 일제의 만행사실들을 조사,수집하였다.이 해 7월 미국 군함이 인천항에 입항하자 장의사는 경북출신조선인 하사관 김상철(金相哲)에게 이를 영문으로 번역,세계 각국에 배포해줄 것을 부탁했다. 한편 장의사는 일제 통치기관에 폭탄을 투척,일제의 만행을 응징키로 결심하고 대한광복회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지 이내성에게서 일본인 무정부주의자이자 폭탄제조 전문가인 호리키리 시게미쯔로(堀切茂三郞)를 소개받아 폭탄제조법을 배웠다. 1927년 8월에 직접 제조한 폭탄의 성능실험을 마친 장의사는 동지들과 경북도청·경북 경찰부·조선은행 대구지점·식산은행 등에 폭탄을 투척하기로하고 10월16일 폭탄 여섯개를 제조했다.이튿날 6개의 폭탄 가운데 5개를 가지고 대구로 향한 장의사는 조선은행에서 가까운 덕흥여관에 숙소를 정하였다.18일 오전 10시40분 장의사는 여관의 사환을 불러 “이것은 조선꿀인데조선은행·도청·식산은행·경찰부 순서로 배달해달라”고 부탁하였던 것이다. 이어 11시40분경 조선은행 대구지점에서 굉음과 함께 폭탄이 터져 일본인순사 4명과 은행원 1명,행인 1명 등 모두 6명이 부상을 입고 조선은행 대구지점 유리창 60여장이 깨졌다.그 순간 두루마기 차림에 파나마모자를쓰고네 대의 금니를 한 모습으로 변장하고 있던 장의사는 말쑥한 양복 차림에 흰 운동화로 갈아신고 상주에서 안동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는 다부원고개를 넘고 있었다. 사건 직후 일본경찰은 철저한 보도통제 속에 범인색출에 나섰으나 단서조차 잡지 못하였다.일본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장의사는 일본으로 건너가 막내동생 의환(義煥)에게 몸을 의탁하고 도쿄(東京) 오사카(大阪) 히로시마(廣島)등을 왕래하며 1년반 동안을 지냈다. 한편 이 사건의 수사가 미궁으로 빠져들 무렵 엿장수로 변장,장의사 고향집 부근에서 탐문수사를 벌이던 한 형사가 장의사가 오사카에서 안경공장을 경영하는 동생집에 숨어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일본경찰은 조선인 여자첩자를 오사카로 파견,장의사 동생부부에게 접근하여 마침내 장의사가 2층에 숨어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1929년 2월14일 밤 동생 장의환의 안경공장에서는 술자리가 벌어졌다.일본경찰에 매수된 한 조선인 첩자가 안경 1만5,000개를 산다며 계약금조로 30원을 내놓은 것이었다.오랜만에 목돈이 생긴 장의환이 벌인 술자리에는 조선인첩자를 포함해 김해중으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하던 장의사도 참석하였다. 술이 몇 순배 돌면서 취기가 무르익자 갑자기 일본경찰이 들이닥쳤다.장의사는 순간적으로 일어나면서 전등을 손으로 쳐서 깨뜨리고 창문으로 뛰어내렸으나 아래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형사들마저 피할 수는 없었다. 현장에서 체포돼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장의사는 단독범행을 주장하며 심문하는 일경에게 “일본이 조선을 해방시켜주지 않으면,너희 일본도 망할 날이멀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취조하던 조선인경찰에게는 “나의 죽은 혼이라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라고 호통을 쳤다. 대구고등법원에서 사형언도가 확정된 장의사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날인 1930년 7월31일 옥중에서 자결 순국하였다.장의사의 순국소식이 옥중에 퍼지자재소자들은 ‘조선독립만세’,‘장진홍만세’를 외쳤고 이에 당황한 교도소측은 서둘러 장 의사의 사인이 뇌일혈이라고 발표하였다. [김순석 독립기념관 전시부 연구원] *장진홍 의사 후손들 근황 장진홍 의사는 후손으로아들,딸 각각 3형제를 두었는데 아들은 모두 어려운 형편 속에 살고 있다.세아들 가운데 장남만 보통학교 4년 중퇴를 했을 뿐나머지 두 아들은 모두 무학자이다. 96년 83세로 작고한 장남 형옥(衡玉)씨는 생전에 부친 장의사의 기념사업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나 경제사정이 허락하지 않아 별다른 성과는 남기지 못했다고 한다.차남 형술(衡述·81)씨는 구미시 옥계동에 살고 있는데 연로해서 현재 거동이 불편한 상황이다.또 대구에 살고 있는 3남 형태(衡泰·73)씨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행상 이발소를 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장남 형옥씨는 7남3녀를 두었는데 현재 8명이 생존해 있다.장손 상규(相圭·63)씨는 칠곡에서 전자제품 하청업체를 운영하고 있는데 IMF 사태 후 모기업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연쇄부도를 맞아서 살고 있는 집마저 근저당이 설정된 상태. 장의사의 후손 가운데 그나마 그럭저럭 살고 있는 사람은 세 딸이 고작이다.세 딸 가운데 위로 두 딸은 모두 작고하였고 현재 막내딸 형필(衡必·70)씨만 구미에서 살고 있다. 현재 장의사 추모단체나 기념사업회는 특별히 구성된 것이 없고 낙동강 기슭에 서있는 추모비 하나가 고작이다.장의사는 62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받았으며 묘소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128번)에 마련돼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 박찬호 경기 올시즌 결산

    올 시즌은 박찬호에게 평생 잊지 못할 한 해로 각인될 것으로 보인다. 97년14승,98년 15승을 거둔 박찬호는 시즌 초반 20승대 사이영상 후보로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았다.그러나 4월24일 세인트루이스전에서 페르난도 타티스에게 1이닝 2만루홈런으로 130년 메이저리그 사상 최초의 불명예를 안았고6월6일 애너하임전에서는 상대투수 팀 벨처와의 난투극으로 7경기 출장정지를 당하는 등 메이저리그 4년만에 최악의 사태를 몰고왔다.이후 박찬호는 끈임없는 트레이드설과 마이너리그 추락설에 시달리며 슬럼프는 더욱 깊어만갔다. 그러나 박찬호는 후반기들어 주무기인 직구의 볼끝이 살아나고 팀 타선도뒷받침되면서 파죽의 7연승을 질주,당초 예상을 뒤엎고 3년 연속 ‘두자리승수’로 13승을 일궈냈다.최악의 상황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보약’으로삼은 특유의 노력과 오기가 빚어낸 눈부신 결과로 풀이된다.박찬호의 이같은저력은 잃었던 팬들과 코칭스태프의 신뢰를 회복하며 내년 시즌 한 단계 성숙된 플레이를 펼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게다가 올연봉 230만달러의박찬호가 내년 재계약 협상때 500만달러 이상을 요구할 수 있는 발판도 마련하게 됐다. 그러나 박찬호는 내용면에서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고질적인 제구력 난조로게임당 3.4개꼴인 무려 113개의 사사구를 남발했고 볼넷을 내주지 않으려다볼이 가운데로 쏠리면서 지난해(16개)보다 두배나 많은 31개의 피홈런(게임당 1개꼴)을 허용했다.제구력 난조는 내년 20승 행로에 가장 시급해 해결해야 할 최우선 과제임이 틀림없다. 김민수기자 kimms@
  • 선동열-이상훈-이종범 “더이상 시련은 없다”

    ‘우려반 기대반’-.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스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동열·이종범·이상훈 등 ‘주니치 삼총사’가 당초 기대치를 밑도는 플레이로 팬들의 우려를 샀으나 전반기 막판 진가를 드러내 후반기에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들은 23∼29일 일주일동안 꿀맛 휴식을 취한 뒤 후반기에는 올 시즌 목표로 하고있는 주니치 우승의 선봉으로 ‘한국 야구’의 진수를 펼칠 것을 다짐했다. ‘나고야의 태양’선동열은 팬들의 가장 큰 걱정을 샀다.지난해 ‘불패행진’을 거듭하던 그가 느닷없이 부진에 빠지며 지난 6월6일 히로시마전부터 3경기 연속 구원에 실패,팬들에게 충격을 안겼다.27일까지 2주일동안 등판하지 못했고 이후 중간계투요원으로 나서는 수모를 당한 선동열은 최근 151㎞의 강속구를 뿌리며 4경기 연속 구원에 성공,‘부활’을 알렸다.‘수호신’으로 거듭난 선동열은 전반기 23경기에서 15세이브(방어율 3.79)를 기록,후반기 일본 진출후 첫 구원왕에 도전한다. ‘바람의 아들’이종범도 상황은 마찬가지.시즌 초반 3할대의 맹타를 터뜨리던 이종범은 경기를 치르면서 방망이가 둘쭉날쭉해 코칭스태프의 불신을샀다.다만 질풍같은 주루플레이로 22개의 도루를 뽑아 리그 선두를 달리고있는 것이 위안거리. 이종범은 전반기 막판 5경기 연속 결승득점을 올리며 분전했지만 최근 영입한 외국인선수 넬슨 리리아노(도미니카)에 밀려 지난 21일 2군으로 전격 추락,최소 10경기는 결장이 불가피한 상태다.코칭스태프는 조만간 1군에 복귀시킬 계획이나 2할5푼대(타율 .242)에도 못미치는 부진한 타격을 어떻게 회복하느냐가 관건이 되고 있다. ‘삼손’이상훈은 선발에서 중간계투요원으로 강등되는 아픔을 맛봤다.지난 6월16일까지 선발로 나서 4승(4패)을 따냈지만 구위가 떨어져 선동열·이종범과 함께 동반 추락의 양상마저 보였다.그러나 최근 선동열과 합작하며 6경기 연속 팀 승리의 디딤돌을 놓아 후반기 선발 재진입의 가능성을 부추겼다. 11년만에 주니치의 정상 등극 여부는 이들 삼총사의 활약에 달렸다 해도 지나치지않다. 김민수기자 kimms@
  • ‘나고야 태양’지는가…선동열 2경기 연속구원 실패

    ‘나고야의 수호신’선동열(주니치 드래건스)이 2경기 연속 구원 실패로 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게다가 2경기 연속 구원 실패는 선동열이 현해탄을 건너간 96년이후 처음.따라서 일본 프로야구계는 하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선동열은 8일 도쿄돔에서 벌어진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서 5-4로 앞선 9회 등판,1이닝동안 6타자를 상대로 2안타 1볼넷에 2개의 폭투까지 범하며 1실점,구원에 실패했다.앞서 6일 히로시마전에서는 7-6으로 리드하던 9회 마운드에 올라 2실점하며 패전을 기록,64경기째 이어가던 ‘불패신화’에 종지부를찍었다. 전문가들은 선동열이 최근 일찌기 볼 수 없었던 불안한 모습을 보인데 대해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일부에서는 선동열이 한계에 다달한 신호탄으로 보는 반면 일부는 ‘있을 수 있는’ 단순 일과성으로 가볍게 치부하고 있다. 부정적인 의견은 항상 마운드에서 자신감에 차 있던 선동열이 최근 초조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점을 들고 있다.이는 구위는 살아있지만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컨트롤이 듣지 않고 있다는뜻이며 결국 볼이 가운데로 쏠려 얻어 맞는다는 것이다.또하나는 선동열의 주무기인 슬라이더 등 빠른 볼이 일본선수들의 눈에 익으면서 대처 능력이 향상된 반면 선동열은 새로운 구질 개발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다양한 볼 배합에 실패했다는 주장이다.여기에선동열의 나이(64년 1월생)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요인으로 체력이 문제가되고 있다는 분석이다.그러나 긍적적인 반응이 우세하다.선동열의 최근 등판일정을 보면 5월5일이후 5월15일,5월27일,6월6일 등 열흘 간격으로 마운드에 올라 경기 감각이 크게 떨어져 있다는 주장이다.이는 등판이 잦아지면 자연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더우기 혼쭐이 난 8일 경기에서 여전히 149㎞의 강속구를 뿌리는 등 구위에 전혀 문제가 없기때문에 곧 정상 투구를 보일 것이라는 진단이다.팀 관계자와 팬들은 선동열이 예전의 당당한 모습으로 부진을탈출할 것으로 믿는다. 김민수기자 kimms@
  • 행자부 당부“현충일 弔旗게양 잊지마세요”

    ‘현충일은 한해에 유일하게 조기를 다는 날’ 행정자치부는 오는 6월6일 제44회 현충일을 맞아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뜻을 기리기 위해 조기를 게양해 줄 것을 당부했다. 행자부 관계자는 24일 “이번 현충일은 일요일과 겹쳐 국기 게양률이 더욱낮아질 것으로 보인다”며 각 가정마다 조기를 달고 경건한 하루를 보내 달라고 당부했다. 국기와 함께 게양된 기관의 기 등도 모두 깃봉에서 깃면의 세로길이만큼 내려서 조기로 게양하며,조기 게양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다. 국기는 우체국에서 우편주문판매를 이용하거나,시·군·구청 민원봉사실 또는 읍·면·동사무소에 문의하면 된다.
  • 원시적 생명력의 원천…김흥수 누드 드로잉전

    ‘기(氣)의 화가’ 김흥수화백(80)에게 여체는 원시적 생명력의 원천이다. 끝없는 요설(饒舌)과 작가적 열정도 거기서 비롯되는 것인지 모른다.‘김흥수 소묘전’이 열리고 있는 가나아트센터 2,3전시장은 요즘 여체의 향기로가득하다.김화백의 누드 드로잉(소묘) 근작 30여점이 싱그러운 기운을 내뿜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줌렌즈를 작동해 사진을 찍듯 김화백은 여인의 기(氣)를 가까이 끌어당겨 그림을 그린다.드로잉 작품 ‘무녀도’는 그 대표적인 예다.이번의 누드 드로잉은 기존 작품과는 달리 종이에 바탕 여백을 그대로 살렸다.또 목탄으로 그린 간결하고 깔끔한 선은 여성의 체형을 알뜰하게 드러낸다.그의 여체 드로잉은 사람의 몸에 대한 완벽한 이해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김화백은 지난 60년동안 유화와 함께 소묘작업을 병행해 왔다.그 소묘는 가벼운 의미의 연습그림 즉 에튀드(etude)가 아니다.그것은 큰 작업을 구상하는데 따른 설계도면의 일부이자 동시에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 어엿한 그림이다.그의 소묘는 그 자체로서 완성된 하나의 작품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김화백의 소묘작품을 본격적으로 전시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6월6일까지(02)720-1020김종면기자
  • 극단 신화 서민극 시리즈 ‘해가 뜨면‘

    “이 시대에 걸맞는 연극의 모습은 서민극이다” 극단 신화는 3일부터 6월6일까지 인간 소극장무대에서 이같은 캐치프레이즈 아래 서민극 시리즈 3편으로 ‘해가 뜨면 달이 지고’(김태수 작·김영수연출)를 올린다. 삶의 구석진 곳을 샅샅이 찾으려는 이들의 작업은 옥수동 꼭대기(1편 ‘옥수동에 서면 압구정동이 보인다’)와 뚝섬 목욕탕(2편 ‘땅끝에 서면 바다가 보인다’)을 지나 이번엔 망우리 달동네로 이어진다.주요 등장인물은 도시빈민이자 실향민이다.만두가게 주인(윤주상)의 집에서 인물 동희(추귀정)남매와 전과자 성준(김규철·최준용) 등은 사소한 일에 울고 웃고,지지고 볶으며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간다. 아울러 이들이 서로를 ‘고향친구’로 받아들이면서 ‘마음의 고향’을 되찾는 모습도 그린다.(02)923-2131李鍾壽
  • 내년 광주비엔날레 주제 ‘人+間’

    내년 봄 열리는 제3회 광주비엔날레의 주제가 ‘인(人)+간(間)’으로 결정됐다. 광주비엔날레 전시기획위원회(위원장 吳光洙)는 5일 비엔날레 회의실에서기자회견을 갖고 “人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신체·성·인간성을,間은 공간·상황·접속·교류·경계 등의 의미를 함축하며 전체적으로 인간이 지향하는 새로운 상황·환경 등을 상징한다”고 주제 선정 배경을 밝혔다. 본전시와 함께 열릴 특별전의 소주제는 ┥북한미술의 어제와 오늘 ┥아시아 현대미술의 정체 ┥예술과 인권 ┥인터내셔널 에로틱 아트 ┥인간의 숲,회화의 숲 ┥여명의 빛 등 6개로 확정했다. 행사기간은 2000년 3월29일∼6월6일까지 70일 동안으로 잠정 결정했다. 주제 및 전시계획안은 광주비엔날레 이사회의 추인을 받아 최종 확정된다.광주 l 崔治峰 cbchoi@
  • 새해스포츠 어떻게 달라지나

    [프로야구] 양대리그를 도입한다.전년도 시즌 성적을 토대로 1,4,5,8위 팀과 2,3,6,7위 팀이 각각 조를 이뤄 리그를 펼친다.따라서 올해엔 현대-OB-해태-롯데와 LG-삼성-쌍방울-한화가 따로 묶여 조별리그를 펼친다.같은 리그팀과는 20차전,다른 리그팀과는 18차전을 벌이고 팀당 경기수는 모두 132게임.전년도 보다팀당 6게임이 늘어나고 총경기수도 528게임으로 24게임 많아진다. 포스트시즌은 리그 1위팀이 상대리그 2위팀과 7전4선승제의 플레이오프를벌인 뒤 이긴 팀이 한국시리즈(7전4선승제)에 나간다. 일괄지급했던 신인선수의 계약금은 계약시점에 50%를 우선지급하고 시즌을마친 뒤 나머지를 주는 2회 분할지급 방식으로 바뀐다. [프로축구] 99정규리그(6월6일∼10월10일)가 팀간 세차례 대결을 벌이게 돼 지난 시즌보다 팀당 9게임이 늘어난다.전체 경기수는 141게임.정규리그와 별도로 두차례의 컵대회를 치르는데 한번은 조별 컵대회,나머지 한번은 토너먼트로 승자를 가린다.플레이오프의 챔피언 결정전도 종전 홈앤드어웨이 방식에서 3전2선승제로 조정했다. [골프] 여자프로골프에 시드제가 도입된다.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공식대회통산 20승 이상,해외투어 10승 이상 선수에게 영구 출전권을 준다. [레슬링] 89년부터 시행된 5분 1회전 경기방식이 국내외 대회 모두 3분 2회전으로 바뀐다. 경기대진표 작성에서는 기존의 토너먼트 대신 모든 선수들을 3·4명씩 1개조로 나눠 조별 리그전을 치른 뒤 각조 1위들만으로 토너먼트 형식의 본선을치를 예정이다. [펜싱] 종합대회 종목이 플뢰레 남녀,에페 남녀,사브르 남자 5개였으나 99년부터여자 사브르가 추가된다.이에 따라 개인전과 단체전을 합하면 대회마다 금메달수가 10개에서 12개로 늘어난다.
  • 민주열사열전:17/88년 투신·분신3명의대학생(정직한역사되찾기)

    ◎‘허울뿐인 민주’ 항거… 생명의 불꽃 살라/조성만­민주화운동 통일논의 새장 열어/최덕수­광주항쟁 진상규명 국조권 요구/박래전­“양심수 석방… 죽음 더 없어야” 유서 16년만에 국민이 직접 뽑은 대통령과 함께 1988년 6공화국이 시작되었으나 진정한 민주정부를 갈망하던 국민들은 허탈감과 패배의식에 사로잡혔다.직선제란 모양을 갖췄을 뿐 6공 盧泰愚 정권은 5공 군사정권의 연장이라는 인식이었다. 6공은 공식 출범 전부터 민주화추진위원회 등을 구성하며 ‘민주화’ 정책을 차례로 발표했다.군사독재 정권인 5공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선언인 셈이었다.그러나 6공 출범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5월 중순부터 20일간에 걸쳐 3명의 대학생들이 ‘노태우정권 타도’를 부르짖으며 젊은 목숨을 잇따라 내던졌다. 87년 12월 대선 때 문민정부의 도래를 꿈꾸었던 많은 사람들은 체념과 함께 6공 출범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나아가 일말의 기대감도 없지 않았다.80년 5·18 광주학살 피해자들이 처음으로 민주화추진위에서 증언하기도 했다.그러나6공이 요란한 선전과 함께 내놓은 민주화정책들은 군사정부의 연장이라는 정권의 본질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진정한 개혁이 절실한 때에 어설픈 개랑주의의 깃발만 펄럭이는 모습이었다.세 젊은 학생은 이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세 대학생의 잇따른 투신·분신을 두고 일부 사람들은 운동권의 좌절감과 방향감각 상실을 웅변해준다며 냉소적으로 바라보았고 정권도 이런 쪽으로 몰고갔다.그러나 수십,수만명의 시민·학생들이 이들의 장례식에 참석했다.세 학생은 직선제 정부의 출현에 만족해하려는 현실순응의 추세를 질타하면서 우리에겐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해결해야만 하는 민주 현안이 산적해있음을 죽음으로 일깨웠다.이에 많은 국민들이 각성하고 공감을 표한 것이었다. ○시청앞 장례식 노제 30만 인파 운집 88년 5월15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민가협 등 재야 민주단체 주최로 ‘양심수 전원석방을 위한 범국민 결의대회’가 진행되고 있었다.다른 한쪽에서는 100여명의 청년들이 참가한 명동성당 청년단체연합회(명청) 주최 ‘광주항쟁계승 마구달리기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출발신호를 기다리던 오후 3시38분.서울대생(화학과 2년)으로 명청소속 가톨릭민속연구회 회장인 趙城晩이 구내 교육관 4층 옥상에 나타나 핸드마이크로 사이렌을 울린 뒤 “양심수 가둬놓고 민주화가 웬말이냐” “공동올림픽 개최하여 민족통일 앞당기자” “광주학살 진상규명 노태우를 처단하자”는 구호를 1분여 동안 외쳤다.이어 흰색 농민복을 입은 조성만은 오른손에 든 칼로 복부를 찌르고 몸을 뒤로 날려 마당으로 떨어졌다.투신 직후 인근 백병원으로 옮겨진 조성만은 이날 저녁 7시쯤 운명했다. 5월19일 낮 서울시청 앞에서 치뤄진 조성만의 장례식 노제에 30만명에 달하는 인파가 운집했다.1년전 시민항쟁 당시의 열기가 느껴지는 군중모임으로 4월총선에서 여소야대를 이룬 당시 야당의 金大中 평민당총재와 金泳三 민주당총재도 참가했다.조성만이 중고등학교를 다닌 전주 도심을 지날 때와 망월동 묘역으로 떠나기 전 광주 도청앞에서 노제를 지낼 때도 수만명의 시민들이 장례 행렬을 뒤따랐다. 전북 김제 농촌에서 하급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조성만은 독실한 가톨릭신자로 대학을 졸업하는 대로 신부의 길을 걸을 계획이었다.그는 투신 오래전에 일기에서 ‘10년 세월에 휼륭한 사제가 되어 교회의 모습을 변화시켜야 하느냐 한순간에 나의 진실된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 옳은가’라고 자문했다.조성만은 투신 당일 아침 작성한 유서에서 특히 한반도 통일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면서 자유로운 통일 논의를 소리높여 요구했다. 민주화 운동에서 통일논의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와 함께 ‘통일 전사’로 불리는 조성만은 유서 말미에 ‘지금 이 순간에도 떠오르는 아버님,어머님 얼굴,차마 떠날 수 없는 길을 떠나고자 하는 순간에 (그리스도가) 고행전에 느낀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오월항쟁 계승 군부독재 타도” 외쳐 조성만의 장례식이 있기 하루전인 5월18일 오전 10시30분 단국대 천안 캠퍼스 시계탑 밑에서 이 학교 법학과 2학년에 다니다 휴학중인 崔德秀가 온몸에 신나를 붓고 분신했다.성명서를 통해 ‘광주학살 비리주범 노태우를처단하자’‘오월항쟁 계승하여 군부독재 타도하자’‘광주민중항쟁 진상규명 국정조사권을 발동하라’고 주장한 최덕수는 천안 순천향병원에 이어 서울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분신 9일만인 26일 운명했다. 빈한한 가정사정으로 학교를 쉬고 공장과 고향 농촌을 오르내려야 했던 최덕수가 분신할 당시 정가는 4월 총선후 국회개원을 앞두고 광주항쟁 진상조사 특위구성을 놓고 대립하고 있었다.그의 30일 서울역 노제에는 1만5,000여명의 시민 학생들이 참가했고 광주도청 분수대 노제에는 3만여명이 모였다. ○“안일과 비겁을 깨뜨리고 투쟁” 호소 그리고 6월4일 오후 4시30분 대학생들의 통일논의가 급피치를 올리고 있는 가운데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이던 朴來佺(국문3)이 학교 학생회관 옥상에서 “광주는 살아있다”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군사파쇼 타도하자”라고 외치며 몸에 신나를 뿌리고 불을 붙여 분신했다.박래전은 이미 분신 이틀전에 작성한 유서에서 ‘학살원흉 노태우 처단’ ‘통일논의 자유보장’ ‘양심수 즉각석방’ 등을 주장했다.그는 특히 학생들과 사회인 모두에게 안일과 무감각 그리고 분열의 씨앗을 제거하고 단결의 투쟁 대오를 갖추어 나갈 것을 호소했다. “저의 뒤로 저와 같은 죽음이 뒤따라서는 안됩니다.이제 더 이상 죽음은 우리의 손실일 뿐입니다.”“어두운 시대를 열정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한 인간이 여러분의 곁을 떠납니다.87년 6월 투쟁을 기억하십시오.그리고 개량의 환상,안일과 비겁을 깨뜨리고 투쟁의 대오를 굳게 하십시오.”“지금은 슬프시겠지만 제가 원하는 그날이 오면,두분 부모님,아니 그날이 오기까지 힘드시더라도 눈감지 마세요.” 분신 이틀 뒤인 6일 운명한 박래전의 장례식은 12일 수천명이 참가한 시청앞 노제와 함께 치뤄졌다. ◎박래전의 형 박내군씨/인권운동 사랑방 사무국장 활동/동생보다 먼저 민주화운동 투신/유가협 일맡아 희생자 50여명 처리 인권 ‘지킴이’로 이름높은 인권운동 사랑방의 朴來群 사무국장(37세·연세대 국문과졸)은 분신자살한 숭실대생 박래전의 바로 윗형이다.민주 열사 가족들 가운데 스스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지만 대부분 그들이 세상을 뜬 다음이다.그러나 박래군 사무국장은 동생보다 먼저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렇다고 형이 동생을 의식화(?)한 것은 전연 아니다.그는 “대학 학회장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바빴을 뿐이며 동생은 스스로의 길을 택했다”고 말했다. 두 형제는 수원에서 버스로 한시간 달려가야 하는 남양반도 끄트머리 시골 출신으로 부모는 가난한 농부였다.어렵게 대학에 보낸 두 아들이 모두 민주운동을 한다면서 감옥에 가고 그러다 끝내 분신하는 아들까지 나오게 된 시골 부모의 마음을 이리저리 헤아릴 필요는 없을 터이다.박래전이 유서에서 염려했던 부모는 지금도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박래전이 대학 1학년 때인 82년 가을부터 가두 시위에서 형제는 서로 마주치곤 했다.박 사무국장이 86년부터 2년형을 살고 있던 감옥에서 87년 6월 항쟁으로 석방돼 나온 뒤에 형제는 자취방에서 같이 살았다. “그때 래전이는 특히 몇몇 운동한다는 사람들의 불성실 무책임에 가슴아파했다.” 동생이 죽은 후 그는 유가협 일을 맡아 5년동안 사무국장으로 있으면서 50구가 넘는 민주화 희생자들의 시신을 처리해야 했다. 그는 동생의 분신이 갖는 의미에 대해 따로 덧붙일 말이 없다고 하면서 오히려 같은 무렵 통일논의에 물꼬를 튼 조성만의 분신에 주목한다고 말했다. □연보 ◆박래전 63년 경기 화성 출생 82년 숭실대 국문과 입학 83년 휴학,입대 86년 제대 87년 복학 12월 민중후보 선거대책위선전국장 88년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 88년 6월4일 학생회관 분신 88년 6월6일 운명 ◆최덕수 68년 전북 정주시 출생 87년 단국대 천안캠퍼스 법학과 입학 88년 휴학 88년 5월17일 교내 광주영령 추모식에서 성명서 낭독 88년 5월18일 분신 88년 5월26일 운명 ◆조성만 64년 전북 김제 출생 83년 전주 해성고 졸업 84년 서울대 화학과 입학 85년 군입대 87년 제대,복학,명동성당 가톨릭 민속연구회 회장 87년 12월 대선 구로구청 부정선거 규탄데모 관련 구류 10일 88년 5월15일 명동성당내 교육관 옥상 투신,운명
  • 풍전등화의 대한제국과 창간(다시 태어난 ‘대한매일’:2)

    ◎‘排日護國’ 민족혼 일깨운 횃불/여론조작 친일紙 득세하던 1904년/치외법권 혜택 裴說 발행인 내세워/첫호부터 日 야욕 고발한 민족지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이하 대한매일)가 한국사 무대에 등장한 1904년은 일본의 한반도 병탄 야욕이 막바지에 달한 때였다.그해 2월8일 일제는 인천항에 정박한 러시아 군함 2척을 격침해 러일전쟁을 도발한다. 이를 빌미로 서울을 점령한 일본군은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한반도에 주둔하면서 자유롭게 군사활동을 하는 권한을 획득한다.이어 7월20일에는 ‘군사경찰 훈령’을 공표해 ‘집회나 신문이 치안을 방해한다고 인정할 때는 그 정지를 명령하고 관계자를 처벌할 수 있다’는 규정을 마련한다. 배일(排日)민족언론의 숨통을 죌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이같은 올가미가 드러나기 이틀 전인 7월18일 대한매일은 그 거대한 족적의 첫걸음을 내디뎠다.당시 국내에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발행하는 신문이 뒤섞여 있었다.한국인 신문(민족지)으로는 ‘황성신문’‘제국신문’이,일본인 신문(친일지)으로는 ‘한성신보’‘대한일보’‘대동신보’가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민족지들은 일본군 주둔 이후 갖가지 탄압에 시달려 활기를 잃은 반면 수적으로도 우세한 친일지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일제는 19세기 말 한반도 침략을 시작하면서 여론 조작수단으로 일본인 경영의 신문을 많이 발간했다.1881년 이래 한반도 전역에서 발간한 한글·일본어·영자 신문이 총 30여종에 이를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매일 창간은 한민족에게 한줄기 빛과도 같은 희망을 주었다.발행인인 배설(裴說)이 치외법권을 누리는 영국인이어서 일제의 검열을 피할수 있을 뿐더러 발간 즉시 ‘한민족과 대한제국의 편에 서서 일제침략에 맞서는’태도를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한매일의 영문판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는 당시 유일한 일간 영자지여서 한반도 정세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 지지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크게 작용했다. 대한매일 창간 무렵 한민족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은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였다.일본은 6월6일 ‘한국인이 명백하게이용·경작하는 토지를 제외한 전국토’를 개간해 50년 동안 경영하는 권리를 달라고 대한제국 정부에 요구했다.표면상 개간권을 요청한 자는 일본 각료 출신인 나가모리(長森藤吉郞)였지만 실제로는 일제의 치밀한 ‘식민지화’ 계획의 하나로 추진된 것이다. 이 일이 알려지자 한반도는 당연히 들끓었다.요구를 받아들이면 적어도 국토의 6분의 1(당시 일본 외상의 발언)에서 많게는 3분의 2(윤치호 주장)까지 일본에 넘어가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아울러 황무지 개간을 내세워 일본인들이 떼지어 한반도로 몰려올 것도 불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민족지들은 일제히 일본의 야욕을 비난했고 농광회사(農鑛會社),보안회(保安會)등의 단체가 생겨나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시작했다.이같은 상황에 제동을 걸고자 일제는 ‘군사경찰 훈령’을 공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대한매일도 당연히 ‘황무지 개간’건 보도의 일선에 나섰다.현재 대한매일의 창간호부터 15호까지는 남아 있지 않고 제16호(1904년 8월4일자)가 가장 오래된 지면이다. 그 날짜 영문판 톱기사는일본의 영자지 ‘고베 크로니클’의 논설 ‘프로텍팅 코리아(Protecting Korea)’를 절반 가까이 전재했다.‘일본 정부는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허용하지 않으면서 코리아에는 부당한 요구를 한다’는 기사를 자세히 소개한 뒤 대한매일은 ‘이같은 고발에 대해 일본 정부는 무슨 말로 대답할 것인가’라고 비판했다.이어 16일자에도 ‘나가모리 어게인(Nagamori Again)’(18일자 한글판 제목 ‘장삼씨의 문제 갱론이라’)이란 톱기사로 이 문제를 계속 거론한다. 대한매일이 배일 논조를 뚜렷이 하자 친일지들은 즉각 대한매일과 배설(裴說)을 비방하는 기사를 실었다.대한일보 10월5일자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이 신문은 ‘영국인 배설이 경성에서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는…번번이 일본이 패전한다는 설을 논하고,러시아의 제2군이 이미 일본군의 후방을 차단하여 포위했으므로 머잖아 일본군이 대패하리라는 등의 거짓말을 싣고 있다’고 비난했다.이어 ‘이 영국인은 (일본)고베에서 장사꾼으로 생활하던 천인(賤人)이기로 전국(戰局)을 알 리가 없다’고 인신공격을 달았다. 이 신문은 이밖에도 11월10일자,12월23일자 등에서 대한매일을 ‘일본에게 공정하지 못하다’거나 심지어 ‘친러시아 기관지’라는 등의 악의에 찬 비난을 거듭 퍼부었다. 창간하자마자 민족지의 대표로 떠오른 대한매일신보.민족과 국가의 명운을 두 어깨에 짊어진 대한매일이 6년여 동안 일본제국주의를 상대로 벌인 대전쟁은 이처럼 막을 올렸다. ◎대한매일신보 발행 체제/영문·순한글 6면 합쇄/타블로이드판으로 출발 대한매일신보(1904.7.18∼1910.8.28)는 6년여 동안 4가지 체제로 발행됐다.창간시에는 영문판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 4면과 순한글판인 대한매일신보 2면 등 모두 6면을 합쇄 형태로 냈다.지면 비율로는 2대1일이지만 영문판 4면 가운데 2면은 광고였으므로 처음부터 한글·영문 기사의 비중은 같게 출발했다.판형은 타블로이드판이다. 그즈음 영문으로 나온 정기간행물은 미국인 헐버트(Homer B.Hulbert)가 내는 월간지 ‘코리아 리뷰(Korea Review)’뿐이어서 일간지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는 처음부터 널리 주목받았다. 영문·한글판 합쇄 체제는 다음해 5월10까지 이어졌으나 인쇄시설에 문제가 생겨 다섯달 동안 휴간한다.1905년 8월11일 속간하면서는 영문판과 국한문혼용판을 분리해 발행했다.2년쯤 뒤인 1907년 5월23일에는 한글판을 부활해 영문판·국한문혼용판·한글판 세 가지가 동시에 나왔다.우리 언론 사상 유일한 사례다. 裴說이 영국인 만함(Alfred Weekly Marnham)에게 신문사를 넘긴 며칠 뒤 영문판 발행이 중단돼 1908년 6월1일부터는 국한문판과 한글판 2종만을 내었다.영문판은 이듬해 복간되지만 곧 사라진다. 이같은 발행체제의 흐름을 살펴보면 초기에는 독자층이 넓어지면서 국한문판·한글판으로 점차 확대하다가 후기에는 일제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영문판이 사라짐을 알 수 있다.1900년대 초 시대요구에 부응해 다양한 독자층의 욕구를 수용한 대한매일의 발행체제는 진실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대한매일신보 연구 현황/韓末 담아낸 시대그릇/각 분야별 연구 활발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연구는 100여년 한국 언론사 연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대한매일신보가 이같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첫째 정치적 압력에 굴하지 않고 언론의 소임을 다한,우리 언론사에 거의 유일한 신문이었다는 원론적 의미에서다.둘째는 한말 우리의 사회상과 국제정세를 가장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대한매일에 대한 지금까지 연구는 우리 언론사 연구에서 항일과 관련,독립적으로 다뤄져온 부분도 많다.언론 자체 문제뿐 아니라 한말 우리의 시가(詩歌),한글,산업진흥,광고,자주의식,국제 외교사 등 다양한 분야로 연구 영역이 확대돼왔고 특히 80년대와 90년대 들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현재 대한매일신보만을 독립적으로 다룬 단행본은 △‘제국주의와 언론­배설·대한매일신보 및 한·영·일 관계’(구대열·이화여대출판부 1986) △‘대한매일신보 연구’(이광린 유재천 김학동 공저·서강대출판부 1986)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정진석·나남 1987) 등이 있다. 한말 저항시가연구서는 가장 많아 ‘대한매일신보 가사연구’(조현경·전남대 석사논문 1995),‘대한매일신보소재 가사문학연구’(유정선·이화여대 〃 1990),‘개화기의 저항시가연구’(박을수·경희대 박사논문 1984),‘우국가사 연구­대한매일을 중심으로’(김준태·고려대 석사논문 1980) 등이 있다.한글 신문에 대한 연구로는 ‘대한매일신보 국문판 연구’(오선화·이화여대 〃 1988)가 있다. 한말 대한매일신보가 산업진흥을 역설한 논설들에 대한 연구로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에 나타난 실업진흥론’(이윤정·서울시립대 〃 1997)이,당시의 신문광고에 대한 연구로는 ‘대한매일신보에 나타난 광고에 관한 연구’(김영희·효성여대 〃)가 있다. 그밖에 ‘대한매일신보의 항일 자주의식연구’(김영애·성신여대 〃 1979),‘대한매일보에 나타난 의병 동향’(윤경숙·인하대 〃 1988),‘대한매일신보의 항일 언론활동’(권만용·건국대 〃 1993) 등이 있다. 또한 한말 국제관계를 다루는 논문들에는 특히 영국과 일본과의 관계에서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을 다루고 있다.
  • 민주열사 열전:7/朴寬賢 前 전남대 총학생회장(정직한역사되찾기)

    ◎시민 민주역량 결집한 ‘광주의 아들’/5·18 당시 특유의 지도력으로 평화 시위 주도/교도소내 비인간적 처우에 항거 단식중 사망 역사는 검은 음모를 뿌리치지 못하지만 가끔 환한 광장으로 가는 길을 가리킨다.음모의 시대가 갈듯말듯 하던 1980년 봄 사람들은 광장을 찾았다. 1980년 봄 광주의 도청앞 광장은 일개 지리적 점에서 드넓은 역사적 공간으로 빠르게 변신하고 있었다.이 변신은 朴寬賢이란 촉매제 덕분이었다. 80년 5월14일 박관현이 주도하는 ‘민족민주화 성회(聖會)’가 도청앞 광장에서 개시될 때 1만명의 참가자 중 대학생 아닌 시민은 소수였다.박관현을 아는 시민은 더더구나 적었다.성회 마지막날 5월16일 야간 횃불시위를 마치고 다시 광장에 모였을 때 참가자는 5만명이 넘었고 시민 수가 학생 못지 않았다.그리고 50만명 이상의 광주 시민들이 朴寬賢을 ‘광주의 아들’‘무등의 아들’로 부르고 있었다. 朴寬賢은 광주의 희망으로 우뚝섰다.그러나 도청앞 광장은 그의 존재보다 더 큰 부피로 살아나고 있었다. “민주화의 성스런 횃불이 꺼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히 꺼진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활활 타오르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한 朴寬賢은 “휴교령이 발동되면 정오에 도청앞 광장에 모이자”고 당부했다.광장은 광주 시민을,역사를 안을 태세가 되었다. 80년 4월9일 직선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에 뽑혔던 朴寬賢은 5·18 광주민중항쟁이란 역사의 핏빛 숲으로 똑바로 난 푸르른 길이다.광주에 박관현이 있음으로 해서,박관현의 결집력과 지도력이 있음으로 해서 5·18의 야만적 폭거와 승화된 공동사회체의 대조적인 두 측면이 뚜렷하게 부각된다. ○민주화운동에 남다른 열정 그는 한달이 약간 넘는 짧은 기간에 전남대 학생들과 광주 시민들에 잠재된 민주역량을 깊은 속까지 파내고 정연한 모양새로 다듬었다. 광주 시민들은 이 민주역량의 판석들을 꺼내 비록 가장 불행한 형태이긴 하지만 거대한 항거의 피라미드를 구축했던 것이다. 79년 10월26일 朴正熙 대통령의 사망과 함께 유신철폐와 민주화에의 기대가 드높기만 했으나 崔圭夏 과도정부는 애매한 이원집정제의 정부주도 개헌을 고집하고 있었다.무엇보다 全斗煥 중앙정보부장 겸 보안사령관이 이끄는 신군부는 비상계엄 상태를 유지하면서 정권찬탈의 야욕을 구체화해 갔다.분열과 대립으로 내닫는 정계보다는 대학이 민주화의 기수로 나섰으며 특히 광주의 전남대가 그러했다.박관현이 4월 27세의 나이많은 법대 3년생으로 총학생회장에 당선할 때 그의 사회 및 학원 민주화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탁월한 대중지도자 자질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소수였다. 고시 합격을 통해 사회정의 실현을 강력하게 꿈꾸었던 그는 1학년 말 야학운동에 뛰어드는 일대 방향전환을 한다.‘들불’ 야학을 통해 박관현은 尹祥源,金永哲 등 광주 빈민·노동 운동의 선구자들을 만나는데 박관현과 깊은 신의를 맺은 이들은 5·18 때 시민투쟁군의 중추로 활약했다. ○현상금 눈먼 동료 공원이 고발 朴寬賢은 5월 중순 단 며칠새 민주화를 희원하는 모든 광주 시민의 가장 믿음직한 아들로 자리잡았다.변혁에 대한 갈망은 리더에 대한 갈구를 깊게했고 민주화 변혁 갈망이 유달랐던 광주에 때마침 청중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는 연설력의 박관현이 등장한 것이다.전남대와 박관현의 주도로 계엄령 아래 3일 연속 도청앞 광장에서 열린 민족민주화 성회는 비상계엄 즉각해제를 요구했으나 평화스럽게 마무리되었다.朴寬賢은 이때 방관자,구경꾼으로 머물러 있던 시민들을 민주화 희원의 역군으로 동참시키는 자력을 발휘했다. 그의 이같은 능력은 세계 역사상 드문 5·18 항쟁의 일반시민 주도 사실과 맞물려 전설이 되다시피 했으나 정작 박관현은 5·18 때 현장에 있지 못했다.신군부가 5·17 비상계엄 확대 쿠데타로 민주 인사들을 사전검거하자 18일 아침 격렬한 논쟁 끝에 학생회장 박관현의 피신이 결정됐다. 인간의 야수적 본성을 그대로 드러낸 만행과 함께 사람들의 더불어 같이 사는 소질이 꽃처럼 만개한 열흘간의 항쟁 상황을 여수 앞바다 돌산섬에서 전언으로만 듣게된다.몇번 잠입을 시도하다 실패한 박관현은 항쟁이 진압된 뒤 6월6일 서울로 도피한다.항쟁후 ‘공수부대원들이 조각조각내 버렸다’는 소문이 돌았던 朴寬賢은 82년 4월 서울 편물공장에서 현상금을 탐한 동료 공원의 고발로 체포돼 광주로 압송됐다. “도청앞 광장에서 만나자”는 자신의 ‘말’을 금쪽같이 지켜줬던 광주에 23개월 만에 발을 디딘 박관현은 드디어 ‘행동’한다.내란 중요임무 종사 죄목으로 5년형이 선고됐으나 朴寬賢의 눈은 다른 곳을 천착하고 있었다.그는 광주교도소 수감 3개월 후인 7월부터 교도소 내의 비인간적 처우에 항거하는 단식을 실시한다.믿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무기로 육신을 택한 그의 단식은 철저한 것이었고 3개월 동안 3차에 걸쳐 50여일에 달했다. ○단식중 외부진료 한번 못받아 교도소 당국은 처우개선 약속을 조롱하듯 파기하면서 점점 한계 상태로 빠져드는 그를 외부진료 한번 없이 방치했다.10월10일 온 신경이 돌처럼 굳어 도무지 음식을 음식으로 여기지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전남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급성 심근경색증에다 급성 폐부증 증세로 12일 새벽 숨지고 말았다.만 29세였다. 朴寬賢의 젊고 강한 넋은 5·18의 핏빛 숲 뒤꼍에 언제나 푸르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朴寬賢 열사 연보 ▲1953년 전남 영광군 불갑면 출생 ▲70년 광주동중 졸업 ▲73년 광주고등학교 졸업 ▲74년 군입대 ▲78년 전남대학교 법대 입학 ▲78년 12월 광주공단 노동자실태 조사작업에 참여 ▲79년 광천 들불야학 강학 활동 ▲80년 4월 전남대 총학생회장 당선 ▲80년 5·17조치로 서울 피신 ▲82년 4월5일 체포,12일 광주교도소 수감 ▲82년 7∼10월 3차례에 걸쳐 50여일 간 단식투쟁 ▲82년 9월 ‘내란중요임무종사자’로 5년형 선고 ▲82년 10월12일 전남대 병원에서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사망 ◎누나 朴幸順 여사/어머니는 아들 검거된뒤 생존 사실 알아/동생 죽기전 “전면 단식” 조언 지금도 恨 朴寬賢 열사의 셋째 누나인 朴幸順 여사(49)는 광주대에서 구내매점을 열고 있다. 항쟁이 끝난 후 寬賢이 죽지 않고 서울에 은신한 사실을 서울의 큰언니를 통해 알았지만 寬賢의 부탁대로 아들의 생사를 몰라 애태우는 어머니에겐 체포 때까지 비밀에 부쳤다.아들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들으면 아무래도 어머니의 안색이 달라져 당국의 주의를 끌까 우려해서였다. 체포된 뒤 단식 소식을 전해듣고 찾아간 그에게 寬賢은 새벽 2시 무렵에 고문하는 소리가 수시로 들리고 수형자의 부식비를 빼먹는 비리와 함께 생명 유지도 어려울 정도로 형편없는 음식만 지급한다며 “안에서 이런 악을 해결하지 못하면 바깥에 나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한편 누나는 자신의 잘못된 조언이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며 지금도 가슴아파한다.단식이 30일째에 가까웠을 무렵 재소자 폭행 근절,주·부식 정량 지급,정치범 부당 차별대우 개선 등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았다며 다시 전면 단식을 강행할 것인가,부분 단식으로 나갈 것인가를 寬賢이 자신에게 물었다는 것이다.이때 누나는 다소라도 자신을 희생할 생각이 있으면 ‘전면’으로 나가라고 말했는데 동생이 죽기 열흘 전쯤 한 이 ‘매정한 조언이 두고두고 한이 된다는 것이다. ◎동료 宋善泰씨 회고/결벽 심해 현실적 타협 거부/뜻 정하면 끝장보는 성격… 自身에 철저/검정고무신 신고 술·노래 잘하던 학생 朴寬賢 총학생회장 아래서 제2선의 비공식 기획실장 역을 맡았던 宋善泰 현 광주 시의회 전문위원은 “결벽증이 있을 만큼 자신에게 철저했던 朴寬賢은 뜻을 정하면 끝장을 보고 말지 결코 어설프게 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학생회장 취임 직후 학원민주화 현안으로 어용교수들의 퇴진 문제가 대두됐을 때 朴寬賢은 타협안이나 다른 이슈와 함께 추진하자는 의견에 반대,어용교수의 발본색원과 문제의 완전해결을 강력 주장했다.또 학생들이 단식 농성에 들어간 후 몇몇 집행부 학생들이 투쟁 지도를 위해 김밥을 먹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이를 빼앗아 내팽겨쳐 버렸다고 한다. 소금장수,모기장 행상,편물공장 공원 등으로 서울에 피신하고 있을 때 광주 민주인사들에게 연락을 해 고향에서 잠적하거나,자수를 해서 형을 살고 나와 ‘내일’을 도모할 수도 있었다고 본 宋위원도 그의 강직한 성품이 이런 현실적 타협책을 거부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학생회장이 되기 전까지 쭉 검정 고무신 차림으로 학교에 다녔던 朴寬賢은 술도 잘 먹고 노래도 곧잘하는,놀 줄아는 젊은이였다고 한다.
  • 反民특위 강제 해체/‘6·6사건’의 의미(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파 ‘미완의 단죄’로 민족사 굴절/제헌국회,48년 반민족처벌법안 통과/화신재벌 朴興植 등 검거 재판대 세워/본격 활동 앞두고 李承晩이 강력 제동/조사대상 30%만 기소… 결국 흐지부지 일제 강점기 친일 행각을 벌인 반역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된지 50년의 세월이 흘렀다.그러나 이 특위는 李承晩 대통령의 집요한 방해로 활동에 제약을 받아오다가 마침내 이듬해 6월6일에는 강제 해산을 당하고 말았다.반민특위 활동의 미완성은 이후 49년 동안 우리 현대사 굴절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해왔다. 1949년 6월6일 아침 8시.서울 남대문로에 위치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사무실.경찰을 가득 태운 2대의 드리쿼터가 들이닥쳤다. 습격대 지휘자는 尹기병 당시 중부경찰서장.尹을 비롯한 40여명의 경찰은 장탄한 권총을 꺼내들고 출근하는 특위 직원들을 연행했다.반민특위 金尙德 위원장과 金相敦 부위원장이 “국립경찰이 헌법기관인 특위를 강점하고 직원을 불법체포하니 이게 무슨 행패냐”고 항의했으나 경찰은 막무가내였다.金부위원장은 책상을 치며 울분을 터트렸다.검찰총장 겸 특별검찰관장 權承烈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그 역시 안하무인의 경찰에게 권총을 뺏기는 수모를 당했다.“지휘권자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는 호통도 소용없었다. 연행된 사람은 모두 35명.특경대원 24명,직원 및 경호원 9명이었다.직원을 면회온 민간인 2명도 엉뚱하게 같이 끌려 갔다.연행자 중 22명이 입원할 정도로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날의 ‘6·6사건’은 해방후 우리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분수령이었다.경찰력이 제헌국회가 설치한 반민특위를 사실상 해체,李承晩 독재의 길을 열었다.친일파 제거에 실패함으로써 헌정사 왜곡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입법부가 행정부의 들러리로 전락하는 순간이기도 했다.반민특위가 구성된것은 48년 9월29일.올해가 50주년이다.반민특위가 친일파를 제대로 정리했다면 李承晩 독재는 물론,이후 군사정권도 불가능했을 지 모른다. 제헌국회는 48년 9월7일 반민족행위처벌법안을 통과시켰다.반민특위 위원은 각도 출신국회의원 중 선임됐다.金相敦(서울) 趙重顯(경기) 李鍾淳(강원) 朴愚京(충북) 金明東(충남) 吳基烈(전북) 金俊淵(전남) 金尙德(경북) 金孝錫(경남) 金庚培(제주·황해) 등이었다.金炳魯 대법원장을 재판관장으로 하는 특별재판부,權承烈 검찰총장을 정점으로 하는 특별검찰부,李元鎔 총무과장이 이끄는 중앙사무국이 각각 구성됐다.진용을 갖춘 반민특위는 49년 1월5일 공식업무를 시작했다.특위는 1월8일 화신재벌 朴興植을 검거하는 것을 필두로 전광석화같이 친일파 색출에 나섰다. 그러나 출범초부터 친일세력의 심한 반발이 일어났다.일제 경찰 출신들이 반발세력의 중심이었다.해방직후 발족된 새 경찰의 50%이상이 이들 출신으로 추산된다.친일파 세력을 집권 기반으로 한 李承晩도 반민특위가 눈엣가시였다.李承晩은 盧德述 崔燕 등 심복인 경찰간부들이 특위에 체포되자 특위 해체를 추진,‘6·6사건’에 이르게 된다. 결국 특위는 49년 8월31일 조사대상 682명 중 221명을 기소하는 것으로 활동을 끝냈다.이중 12명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5명은 집행유예,나머지 7명도 형집행정지 등으로 석방됨으로써 친일파 단죄는 흐지부지 넘어갔다. ◎다른 나라의 사례/佛,나치협력 3만∼4만명 처형/시민법정 설치… 9만5천여명 시민권 박탈/中·대만 정부 친일파 漢奸 색출 상당수 처벌 2차대전 직후 독일과 일본의 전범처리가 있다.뉘른베르크재판에서는 22명의 1급 전범이 기소되어 나치군 원수 괴링 등 12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7명이 종신형∼10년의 금고형을 받았다.도쿄재판에서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 7명의 전범에게 교수형이 내려졌다.기도 고이치(大戶幸一) 등 18명에게는 종신형∼금고 20년이 선고되었다. 우리의 친일파 문제와 비슷한 것은 유럽국가의 나치협력자 숙청과 중국·대만의 한간(漢奸·친일파)재판이다. 프랑스의 드골은 나치멸망 직후인 44년 6월부터 11월에 걸쳐 나치협력자 처리를 위한 4개의 훈령을 내렸다.이 훈령에 따라 조사받은 인원은 150만∼200만명.드골은 회고록에서 1만842명이 나치협력자로 처형됐다고 밝히고 있다.드골은 작가,언론인,학자 등 나치에 협력한 지식인들도 엄히 다스렸다.현대사가 로베르 아롱은 “3만∼4만명이 재판에 의했든지, 그렇지 않든 간에 민족반역자로 사형당했다”고 추정했다.프랑스는 형사재판권이 없는 시민법정도 설치,9만5,000명을 ‘비국민’으로 판정해 시민의 권리를 박탈했다. 덴마크는 1만4,000명,네덜란드는 4만명,벨기에는 5만명, 노르웨이는 2만명의 나치협력자를 각각 민족반역자로 무기에서 유기징역형에 처했다. 중국과 대만정부도 2차대전이 끝난후 친일파 제거에 나섰다.한간재판은 중국공산당 정부와 장제스(蔣계石)의 국민당 정부에 의해 46년 4월부터 48년 9월까지 따로 진행되었다.중국·대만정부에 의해 한간으로 판명된 상당수 인사들이 처형됐지만 개별처리 사실만 알려질뿐,전체적 통계는 아직 집계되지 않고 있다. ◎특위 총무과장 역임 李元鎔옹/“민족정기 바로서는 날 두눈 감기전 보았으면” “金大中 대통령이 명실공히 역사를 바로잡아 민족정기를 되찾아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반민특위 총무과장과 조사관을 역임했던 李元鎔옹(78)은 국민의 정부에 거는 기대가 컸다.반민특위에관계했던 인사들이 대부분 타계한 현실에서 그는 당시 특위의 고위 중앙요원으로는 유일한 생존자다.서울 공대 전신인 광산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48년 10월 반민특위 구성때 민간인 신분으로 행정실무를 주도했다.다음은 李옹과의 일문일답. ­현재의 심경은. ▲오늘 이 땅위에 사는 구세대 치고 일제의 학정과 인간 이하 대우를 받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이러한 일본의 관헌에게 우리 조국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치던 애국지사를 밀고,또는 체포해 넘긴 반역자가 있었습니다.아직도 그 생각을 하면 피가 역류하는 분노를 금할 길 없습니다.두 눈을 감기전 바르게 처리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반민특위가 소기의 목표를 달성 못한 이유는. ▲국내사정에 어두운 李承晩 대통령이 친일파들의 간계에 현혹되어 경찰력을 동원,하루 아침에 반민특위를 와해시켰습니다.제헌국회의 결정에 따른 헌법기관이 불법적으로 무너짐으로써 헌정사에 크나 큰 오점을 남기게 됐지요. ­친일파 청산의 현주소는. ▲金泳三 정권이 들어선 뒤 역사 바로 세우기를 기치로 내걸어 혹시 하며 기대했습니다.그러나 실효없이 용두사미격이 되어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현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지금이라도 관계 각료나 관련 인사들이 모여서 기구를 만들어 과거에 처단치 못한 민족반역자를 처벌해야 합니다.그래야 이 나라의 기초가 탄탄해집니다.金대통령은 해박한 경제관과 탁월한 국제 외교력을 겸비했습니다.조국광복을 위해 순국하신 많은 선열들의 넋을 위로해주는 데도 힘써주실 것으로 믿습니다.그것이 경제 등 다른 난국의 극복에도 도움이 됩니다. □반민특위 활동 일지 ▲48년 8월5일=제헌국회,‘반민족행위 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 구성 ▲9월7일=‘반민족행위 처벌법’ 국회 통과 ▲9월29일=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반민족행위 조사특위(반민특위)’구성동의안 국회 가결 ▲10월1일∼11일=반민특위 10명 조사위원 선임 ▲10월23일=반민특위 1차위원회 ▲49년 1월5일=반민특위 사무실 개소,업무 개시 ▲1월8일=화신재벌 총수 朴興植 1호 체포 기록 ▲1월13일=崔麟 검거 ▲1월25일=盧德述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검거 ▲2월7일=崔南善 李光洙 검거 ▲2월15일=李承晩 대통령,반민처벌법 개정 필요성 특별담화 ▲3월28일=李琦鎔 朴興植 등 반민자 첫 공판 ▲5월하순∼6월초=정부,1·2차 국회 프락치사건 발표 ▲6월6일=경찰,반민특위 습격,조사요원 불법체포,특경대원 무장해제 ▲6월26일=金九 선생 암살 ▲8월31일=반민특위 공식해체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羅潤道 팀장,李昌淳·李穆熙 차장,金聖昊·任昌龍 기자
  • 6·4 지방선거 투표일/6·4선거후 政局 향배

    ◎與 선전땐 ‘정치권 틀’ 대변화/與大野小 재편… 사회 전반 개혁 가속화/院구성·정치개혁입법 싸고 격돌 예상 6·4 지방선거 후 정국 향배에 정가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특히 이번 선거는 金大中 정부가 들어선 뒤 실시되는 전국 규모의 첫 선거로 여권에 대해서는 그동안의 치적에 대한 평가가 매겨지고 야당에게는 당의 진로를 가늠할 잣대다. 선거결과는 여야할 것 없이 당의 운명,향후 정국구상·운영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 틀림없다.특히 수도권의 승패는 향후 정계개편,정국운영 주도권 잡기에 결정적인 변수가 될 전망이다. 여권은 지방선거 승리를 전제로 ‘정계개편’의 밑그림을 이미 그려둔 상태다.여권은 특히 여야의 정당 구조 변화에 초점을 맞춰놓고 있다. 정치권의 틀을 바꾸지 않고는 경제 회생과 개혁은 어렵다는 판단에서다.‘한나라당 의원의 대거 이탈 가능성’이라든가,4∼5개 정당의 필요성’이 나온 것은 여권의 개편 시각을 설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국민회의쪽에서는 金대통령의 방미 기간(6월6일∼14일)중 야당의원의 유입이시작될 거라는 시각이 우세하다.이와 관련,당의 핵심관계자들은 “선거가 끝난 직후부터 이뤄질 것”이라며 정지 작업을 마쳤음을 시사했다.당 안팎에서는 수도권 지역 10여명의 한나라당 의원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여소야대’(與小野大)의 구도가 깨진다는 의미다. 여당과 정부조직의 개편도 뒤따를 전망이다.지방선거 이후 여야는 모두 당 체제 정비를 위한 임시전당대회의 개최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지방선거 결과를 수습해야 하고 7월21일로 잡힌 7곳의 국회의원 재·보선 일정도 촉박하기 때문이다.국민회의는 개혁·정책정당으로서의 당 체질개선을 요구받고 있다. 한나라당은 6·4선거 진행과정에서 드러난 지도부의 갈등을 봉합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또 분산된 리더십을 다시 확립해야 한다.한나라당의 지도체제개편은 여권의 ‘여소야대 틀 깨기’와 맞물려 분당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게 정치권의 시각이다. 여야는 이 과정에서 국회의 원구성을 서둘러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일단 여대야소로 재편되면 국회의장·상임위원장몫을 놓고도 여야간 한차례 격돌이 예상된다.정부조직법 등 정치개혁입법에도 입장차이가 커 여권의 개혁입법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의 큰 틀이 바뀌면 여권의 개혁작업은 한층 가속화될 전망이다.정·재계 인사에 대한 사정방침은 이미 예고돼 있다.대대적인 물갈이가 불가피할 전망이다.여야는 정치권의 개혁이 우리 경제의 회생과 직결돼 있다는 공통인식은 있다. 단지 개혁을 보는 시각과 방법론은 크게 달라 6·4선거이후 정치권은 엄청난 시련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 반민특위의 좌절과 개혁세력(金三雄 칼럼)

    초하의 6월이 열리면 우리는 6·25한국전쟁과 반독재 6월 민중항쟁을 생각한다. 한국 현대사의 물굽이를 바꾼 큰 사건이다. 그런데 6월이면 잊어서는 아니 될 또 하나의 사건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앞의 두 사건에 못지 않는 사건이다. 단재 신채호의 필법을 차용하여 ‘한국현대사의 제1대사건’이라면 무엇일까. 해방 건국 분단 전쟁 4월혁명 5·16쿠데타 10월유신 10·26사태 5·17쿠데타 광주항쟁 여야정권교체 등, 안정된 사회라면 1세기에 한번 겪을까말까할 일을 우리는 숨돌릴 틈도 없이 무수히 치렀다. 그 ‘다사다난(多事多難)’중에 정신사적으로나 정치사회적 측면에서 국민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의 하나는 이승만 정부의 반민특위 해체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민족을 배반한 반역자들을 하나도 처벌하지 못하고 친일세력이 건국과정과 그 이후 권력의 핵심으로 자리잡으면서 사회정의와 민족정기가 설자리를 잃은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학계에서 ‘6·6사건’으로 불리는 친일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사건은 1949년 6월6일 상오에 자행되었다. ‘웃어른(이승만)’의 양해를 받은 무장경찰은 관할인 서울 중부서장 윤기병의 지휘로 반민특위 사무소를 습격하여 요인들을 체포하고 기물을 파괴했다. 시경국장 김태선 내무차관 장경근 종로서장 윤명운 등 일제경찰출신들이 중심이 된 만행이었다. 이날 경찰에 끌려간 특위 직원들은 심한 고문을 당하고 많은 관련 자료가 폐기되었으며 지방의 특위 사무소도 피습되어 업무가 마비되었다. ○청산하지 못함 반민세력 국민적 환호와 기대를 받으면 진행되던 반민특위의 친일파 청산작업은 이렇게 하여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반면 친일파들은 이승만과 결탁하여 뿌리를 내리고 군사정권과 문민정부를 거치는 동안 가지를 쳐서 기득세력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반민특위를 와해시키려는 친일세력의 공작은 집요했다. 이들은 반민특위인사들을 ‘빨갱이집단’이라 음해하면서 정신적 지주인 김구를 살해하고 국회프락치사건을 일으켜 항일독립운동 세력을 제거했다. 친일파들이 독립운동가들을 완벽하게 제거한 6·6사건의 진상은 독재치하에서 묻혀지고, 식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부끄러운 역사가 반세기 동안 이어지게 된 것이다. 50년만의 정권교체로 집권하게 된 김대중 정부의 책임과 사명은 막중하다. 현실적으로는 경제를 희생시켜 IMF체제에서 해방되는 일이며, 역사적으로는 반민특위의 좌절이래 전도된 가치관과 사회정의를 바로 잡는 일이다. ○개혁, 반민특위 정신으로 친일세력에 뿌리를 둔 수구세력은 그동안 키워온 인적 물적 기반을 바탕으로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들은 김대중 정부의 개혁을 훼방하고 국가적 위기상황에도 눈을 돌린채 기득권 유지에 연연하면서 사사건건 개혁의 발목을 잡는다. 반민특위의 좌절로 지난 반세기의 역사가 독재와 불의로 점철되었듯이 김대통령의 개혁이 실패하면 역사는 또 얼마나 가혹한 시련을 안겨줄 것인지, 수구세격은 이를 외면하는 것이다. 하루빨리 김대통령의 개혁의지를 뒷받침할 컨트롤 타워로서의 개혁주체(세력)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청산할 것은 청산하고 개혁할 것은 개혁하여 국난을 극복해야 한다. 뼈저린 반민특위 좌절의 역사는 한번으로도 족하다.
  • 金 대통령 6일 訪美/클린턴과 정상회담/8박9일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 김대중 대통령은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클린턴 미 대통령의 초청으로 8박9일간의 일정으로 미국을 국빈 방문한다.김대통령은 오는 6월6일 출국,14일 귀국한다. 김대통령 내외는 이번 방미기간 동안 뉴욕과 워싱턴,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를 차례로 방문,미국의 각계 지도자들을 만나 21세기 한·미 동반자관계를 보다 돈독히 하기 위한 노력을 할 것이라고 박지원 청와대대변인이 20일 발표했다. 김대통령은 특히 6월10일 새벽 워싱턴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갖고 경제난 타개를 위한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고 새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지지를 촉구할 예정이다. 또 21세기 동북아 안정 및 협력,평화 구축을 위해 한미간 공동 목표를 설정하고 방법에 대해서도 깊이있는 대화를 나눌 계획이다. 김대통령은 이어 6월11일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영어연설을 통해 새정부의 국정운영 철학인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비전과 의지를 밝히고 경제난 극복에 미국이 적극 나서줄 것을 촉구할 방침이다. 김대통령은 이와함께 클린턴 대통령이 주최하는 국빈만찬,고어 부통령 초청오찬,의회지도자들과의 간담회 등을 계기로 미 정부와 의회 지도자들을 두루 만날 예정이다. 아울러 뉴욕증권거래소와 미상공회의소,실리콘 밸리의 벤처기업도 방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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