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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방정부의 위상 변화(정치판 달라진다:7·끝)

    ◎단체장 직선… 지자체권한 대폭 강화/중앙의 인허가등 기능·사무 이양 가속/지역이기주의 극복·재정 자립 급선무 내년 6월27일 우리는 우리손으로 시·도지사 15명과 시장 2백60명을 뽑게 된다.대다수 국민들이 설렘 속에 본격적인 「풀뿌리민주주의」를 사실상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뽑는 시장은 지금 시장과 무엇이 다를까.지금처럼 어느날 다른 곳에서 부임해 온 시장도 주민들을 위해 일해 왔는데….중앙집권정치에 34년동안 길들여져 온 우리들은 이 직선단체장의 의미를 쉽게 가늠하지 못한다. 그러나 지방자치제의 완전실시는 정치와 행정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내가 하는 것」으로 바꿔놓게 된다.주민투표에 의해 구성된 지방정부가 기대만큼 일하지 못할 때 주민들은 지금처럼 바뀌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갈아치우게 된다.이는 주민들에게 행정의 참여와 판단,선택의 권리와 의무를 함께 부여하는 것이다.곧 남이 하는 것으로만 생각해 온 정치와 행정을 주민 스스로 하는 것으로 바꿔놓는 것이다.나 말고는 모두 남이라는 생각에 「우리」라는 개념을 심어주게 된다. 이번 지방자치법개정안은 단체장 직선뿐 아니라 그동안 중앙정부가 쥐고 있던 부단체장등 지방공무원에 대한 인사권을 지방정부에 이양했다.아울러 중앙및 상위지방단체의 감사권을 대폭 제한했다.이는 곧 지방정부의 권한이 크게 강화된 것으로 지역주민을 위한 행정을 펼 공간을 넓혀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난 92년이후 정부는 인·허가,신청,등록등 3만6천여건의 중앙행정사무 가운데 4백89건을 지방행정기관에 넘겨줬다.지방자치제 실시로 중앙정부의 권한·기능 이양작업은 보다 가속화될 전망이다. 한편 이같은 지방정부의 권한강화는 불가피하게 중앙정부와 마찰을 빚을 소지도 안고 있다.이를 해소하기 위해 지방자치법개정안은 중앙이 단체장에게 「직무이행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견제장치를 두고 있다. 지방자치시대의 도래는 우리에게 분홍빛 꿈만을 안겨주는 것은 아니다.지방정부에 돈이 없으면 제대로 된 지역행정을 펼 수가 없다.지역별 재정자립도는 천차만별이어서 지난해 서울·부산·인천시와 경기도가 1백%를 웃돈데 반해 충남북과 전남북 강원 제주는 50%에도 못미쳤다.산업불균형이 이처럼 지방세수 편차를 심화시켜 놓은 것이다.지방의 작은 시가 파산선고를 받고 이웃의 큰 시에 편입되는 사례를 외국에서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지방재정의 자립이 이뤄지지 않는 한 이처럼 균형있는 지방자치는 실시되기 어려운 것이다.이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민주당의 신기하의원은 『중앙정부가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역에 일정기간 사회간접시설을 대폭 확충,산업발전을 통한 세수증진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쓰레기매립장등 혐오시설의 건설과 상수원건설,도로건설등을 둘러싸고 벌어질 지역이기주의를 목도해야 하는 것도 자치제를 앞둔 우리의 현실이다.유인태의원(민주)은 이를 과도적인 현상일 것으로 진단하면서도 해결방안으로 혐오시설건설에 따른 피해를 보전해 줄 수 있는 이권사업을 해당지역에 유치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단체장 대부분이 당직을 갖게되는 만큼 「여당 도의 야당 시」나 「야당 시의 여당 구」의 출현이 가능하게 되고 이에 따른 분쟁도 불가피할 것으로 여겨진다.지방행정이 당리당략과 인기위주로 흐를 소지도 크다.
  • 민주 「조기당대회론」 명분상실/비주류 주장 철회 안팎

    ◎“장선거 등 늦춰져 서두를 이유없다”/당 재정비가 새과제로 민주당의 조기전당대회 개최주장이 수그러들고 있다.전당대회를 앞당겨 치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내년의 4개 지방선거를 6월하순에 치른다는 여야합의가 제일 먼저 민주당에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지난달 7일 조기전당대회의 소집을 요구하며 공개적으로 당권도전의사를 밝혔던 김상현고문은 5일 『지방선거일자가 95년 6월27일로 확정됨에 따라 임시전당대회의 성격을 띤 조기전당대회를 피하고 내년 2월중 정기전당대회를 실시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역시 대표경선 출마의사를 숨기지 않았던 김원기최고위원도 이날 『지방자치제 선거가 내년 6월 하순으로 결정된 상황에서는 전당대회를 조기에 개최할 이유가 상실됐다고 본다』고 밝혔다.가장 먼저 조기전당대회의 소집을 요구했던 개혁모임측은 아직 명확한 뜻을 밝히지 않고 있으나 곧 의견을 개진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당대회 조기개최론은 내년 지방선거가 3월 또는 4월에 치러질 가능성이 크다는 예상을 전제로 삼고 있었다.이 선거를 제대로 치르기 위해서는 당체제의 개편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비주류와 개혁모임측의 주장이었다. 반면 이기택대표진영과 동교동계는 『물가와 우루과이 라운드(UR)비준등 민생현안이 산적한 마당에 당권싸움에 몰두하는 인상을 줘 비난을 받을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이에 반대해왔다. 물론 이대표는 내년 2월까지 임기를 채우겠다는 생각이다.동교동계 또한 조기전당대회에서 이대표가 당권을 다시 장악하든,아니면 김고문이 대표로 선출되든 자기들에게는 아무 것도 더 나아질 것이 없다는 판단이다.하지만 하염없이 명분만을 내세우며 수세만 취할 수도 없는 일이다.주류측은 최근 임시국회가 끝난 뒤 최단시일 안에 「불가」쪽으로 논의를 종결짓는다는 방침이었다.주류측이 조기전당대회에 관한 논의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정치관계법 협상과정에서 전당대회와 지방선거일자와의 간격을 되도록 넓히는 방안을 강구했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처럼 조기전당대회론이 물을 건너감에 따라 이제 남은 과제는 지자제선거에 대비해 당을재정비하는 일이다.김원기최고위원은 조기전당대회 요구가 설 땅을 잃게 되자 즉각 조직강화특위의 강화를 들고 나왔다.김고문은 당분간 관망하는 자세를 취할 전망이지만 개혁모임측은 김최고위원과 마찬가지로 지도부에 당의 체질개선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늘 「이대로는 안된다」고 주장해온 개혁모임측은 이대표진영에 대한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기 위해 새로운 카드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민주 전당대회 내년초 열릴듯/비주류 등 조기개최 요구 철회

    민주당 일각에서 나타났던 조기전당대회개최 요구움직임이 내년의 지방선거가 예상보다 2∼3개월 가량 늦은 6월27일로 확정되면서 수그러들 조짐을 보이고 있다.이에 따라 민주당의 전당대회는 올해가 아닌 내년초쯤 개최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민주당 주류측의 권로갑·한광옥최고위원과 중도세력인 유준상·조세형최고위원등이 「조기전당대회불가」를 주장해온 데 이어 김원기최고위원도 5일 기자간담회에서 불가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김최고위원은 『지방자치단체장및 지방의회의원선거가 내년 6월 하순으로 결정된 상황에서 조기전당대회를 개최할 이유가 없어졌다』면서 『전당대회등 당권문제논의를 중단하고 우루과이라운드및 민생문제등에 당력을 결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조기전당대회개최를 요구하던 김상현고문과 이부영·노무현최고위원도 자신들의 주장을 철회했고 이날 하오 열린 김대중전대표를 따르는 동교동계 모임인 「내외문제연구소」(이사장 허경만국회부의장)의 정기총회에서도 조기전당대회문제는 거론하지않기로 했다.
  • 4개지방선거 내년 6월27일 실시/정치개혁 3법 국회 통과

    ◎선거범 10년간 공직취임 금지/「재정신청」 후보·중앙당에 허용/임시국회 폐회/“정개법통과 선진정치 기틀 확립”/김 대통령 국회는 4일 하오 본회의를 열어 공직선거및 선거부정방지법(통합선거법),정치자금법,지방자치법등 3개 정치관계법안과 농어촌특별세법등 13개법안을 처리하고 18일동안의 제1백66회 임시국회를 폐회했다. 정치관계법이 여야의 마라톤 협상끝에 이날 국회에서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됨으로써 새정부 출범 1년 남짓만에 정치개혁입법이 마무리되어 「돈 안드는 선거,깨끗한 정치」를 위한 제도적인 장치가 완비됐다. 이만섭국회의장은 폐회사에서 『시대와 국민이 국회에 부과한 소임인 정치관계법을 여야합의로 통과시켜 우리 정치사에 새로운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하고 『이를 계기로 진정한 의회민주주의의 신기원을 이룩해 나가자』고 강조했다. 여야는 정치관계법의 합의처리에 대해 「의회민주주의의 진면목이 발휘된 의회사의 쾌거」라고 환영했다. 이날 통과된 공직선거및 선거부정방지법은 법정 선거비용에 있어 대통령선거는 1백95억원,시도지사 7억2천만원,국회의원 5천7백만원,구시군의 장 5천6백만원,시도의원 1천8백만원,구시군의원 1천1백만원으로 각각 상한액을 정했다. 이와 함께 가두연설의 무제한 허용,연좌제 확대,선거사범에 대한 10년동안 공직취임및 공민권 제한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정치자금법 개정안은 선관위발행 정액영수증제를 도입하고 국고보조금을 유권자 한사람마다 6백원에서 8백원으로 인상했으며 지정기탁금제는 존속시켰다. 지방자치법개정안은 지방의원에 달마다 보수를 지급토록 하는 한편 도·농통합의 법적 근거를 신설했다. 농어촌특별세법은 우루과이라운드협상 타결에 따른 대책으로 농·어업의 경쟁력 강화와 기반시설 확충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오는 2004년까지 10년동안 농어촌특별세를 부과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조세감면규제법 개정안은 노후생활안정을 위해 개인연금저축에 대한 세제지원제도를 신설했다. 여야는 이에 앞서 이날 정치관계법 6인 대표협상을 계속해 최대 쟁점이던 선거사범에 대한 재정신청제를 도입하되 신청주체를 후보자와 정당의 중앙당에 한해 허용하고,선관위는 제외하기로 최종 합의했다. 재정신청의 대상은 매수및 이해유도죄,선거자유방해죄,부정선거운동죄,허위사실공표죄등 9개 사안으로 제한하기로 했다. 한편 여야는 이날 총무회담 합의에 따라 국가보안법 개·폐문제를 다룰 소위를 법사위안에 구성하고 정당투표제등 이번에 합의되지 않은 정치관계법 관련 의견들을 정치발전차원에서 계속 논의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진해서 기자간담 김영삼대통령은 4일 『여야 합의에 의해 정치개혁관련 법안들을 국회에서 통과시킨 것은 가히 혁명적인 일로 이제 정치선진화의 기틀을 확립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대통령은 4일 하오 해사졸업식에 참석한뒤 수행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하고 『정치개혁의 목표는 돈안드는 선거,깨끗한 선거를 치르는 것으로 앞으로는 부정한 방법으로 선거에 당선되는 경우 어느 누구도 용납되지 않을 것이며 자격이 박탈될것』이라고 밝혔다. 김대통령은 또 『공명선거와 정치개혁을 위한 정치인 스스로의 자세도 중요하지만 국민 모두가 깨끗한 선거의 감시자이자 새역사를 만드는 창조자가 돼야 할것』이라고 덧붙였다. 김대통령은 이어 『김권선거뿐 아니라 앞으로는 관권선거도 결코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이번 정치개혁 법안들의 국회통과를 선거혁명의 기회로 삼아 다가올 지자제선거,국회의원선거,대통령선거를 통해 반드시 정치선진화를 이루어내야 할것』이라고 강조했다.
  • 2천개도시 동시 「대성회」 한국 주도로

    ◎「기독교 21세기 운동본부」 6월25∼26일 여의도서 주관/주요도시 위성중계로 TV 상호시청/세계 2백여권 참여,같은시간에 집회/한국교회 초교파적 참여… 세계선교주역으로 부상 세계 2천개 도시에서 올해 동시에 열리는 「94,기도와 전도대성회」를 한국교회가 주도하게 되었다.오는 6월25∼26일 대륙간을 인공위성으로 연결한 가운데 열릴 이 대성회의 중심지역은 서울의 여의도광장. 대성회 주체인 한국의 기독교21세기운동본부는 세계 2백여개국이 참여하는 민족단위와 16개국제분과 조직을 통해 기도망을 짜놓았다. 대성회의 주제는 「2000년까지 지역마다 교회를,사람마다 복음을」.6월25일은 기도의 날,6월27일은 전도의 날로 결정되었다. 같은 시간대에 세계 2천개 도시에서 동시에 갖는 이 집회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초유의 행사로 알려졌다.특히 대륙간 주요 도시들은 위성중계에 의한 TV공동예배 및 예배실황 상호시청,메시지교환 등의 최첨단 메커니즘 이용 프로그램을 운영키로 했다. 이번 성회의 각별한 뜻은 중심지가 서울 여의도집회라는 점과한국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 6월25일을 성회의 기점으로 삼았다는 사실이다.이는 한국이 20세기에 마지막으로 남은 분단국이면서도 세계선교의 주역으로 부상한 것을 세계교회가 동의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리고 동서이념의 벽을 허무는 계기가 되었던 지난88년 서울올림픽에서 처럼 서울에서 주도하는 성회가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성령의 횃불로 승화되길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94,기도와 전도대성회」개최를 위해 지난 91년 초교파적으로 21세기운동한국준비위원회와 함께 한국이 주도하는 세계기도위원회를 가동시켰다. 이들 2개 조직의 위원장은 원로 김준곤목사(한국CCC총재)가 맡았으며,세계기도위원회 총무로 세계적 신학자인 피터 와그너교수(뮬러신대)가 활약하고 있다.그리고 이번 대성회 국제대회장으로는 토머스 왕(미국·대사명신학원장)이 추대되었다. 이번 대성회는 한국이 주도하면서 한국교회가 초교파적으로 참여한다는 특징을 갖는다.명예대회장으로 한경직목사(영락교회 원로목사)를 비롯,상임대회장으로 김우영목사(만나감리교회)가 참여했다.이밖에 대성회 사무총장으로 유근만목사,준비위원회 사무총장으로 박영률목사가 봉직하는 등 교파가 골고루 참여하고 있다.이에 따라 관련조직 모두가 초교파적으로 운영되는 가운데 개신교계가 모처럼 하나가 되는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94,기도와 전도대성회」에 앞서 조직된 세계기도위원회는 토털지구촌시대에 걸맞는 「세계1,1,1기도운동」을 4년째 펼치고 있다.이 운동은 91년1월1일 하오1시부터 매일 하오1시에 전기독교인들로 하여금 1분의 기도를 부탁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한국교회가 채택한 기도제목은 ▲민족복음화와 남북통일을 위해 ▲세계복음화를 위해 ▲믿지 않는 불신자를 위해 ▲청소년과 소외된 이웃을 위해 등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오는 6월25∼26일까지 열리는 「94,기도와 전도대성회」는 지금까지의 기도운동을 스스로 평가하고,그 실천을 가늠하는 시험대적 집회가 될 것이다.
  • 계열사 변모현황/5개사 매입한 한일합섬 급성장

    ◎연철인수… 동국제강 철강재벌로 지난85년 해체당시 국제그룹의 계열사는 23개였다.84년말 기준으로 연간 매출액 1조7천9백13억원,수출액 9억3천4백만달러,종업원 3만8천8백명으로 국내 재계 랭킹 7위였다. 85년2월21일 해체결정 이후 16개월후인 86년6월27일 재무부의 제3차 부실기업 정리결정으로 계열기업들은 뿔뿔이 쪼개져 다른 기업에 인수됐다.국제상사 건설부문은 극동건설로 ▲연합철강·국제종합기계·국제통운은 동국제강으로 ▲원풍산업과 국제기술개발은 우성건설에 각각 넘어갔다.또 86년9월22일 4차 부실기업 정리로 성신토건과 국제토건등 2개사는 부도처리됐고 ▲국제상사 무역부문·남주개발·신남개발·원효개발·연합물산은 한일합섬에 ▲국제방직은 (주)동방에 ▲국제제지는 아세아시멘트에 ▲조광무역은 서우산업등에 넘어갔다.모두 새 주인을 맞은 셈이다. 당시 국제상사 주식 55.86%등을 인수한 한일합섬에는 ▲기존 여신 3천9백83억원중 1천8백8억원은 15년거치 15년분할 상환하고 이자는 완전 면제,나머지 2천1백75억원은 12년거치 10년분할 상환에 이자는 초기10년간 연10%,5년간은 원금가산,이후는 정상 수취 ▲종자돈(시드머니) 5백81억원은 10년거치 10년분할 상환등의 특혜가 주어졌다.극동건설과 동국제강등에도 이와 유사한 특혜가 부여됐다. 국제상사 무역부문등 가장많은 계열사를 인수한 한일합섬은 이후 급성장을 지속,지난해 재계 랭킹30위를 기록했다.한일합섬은 조직의 축소및 실속없는 사업분야의 정리를 통해 국제상사의 경우 5년만인 91년부터 흑자로 전환시켰다.증자에도 주력,원효개발은 10억원이던 자본금을 1백14억원으로,신남개발(하얏트리전시 부산호텔)은 40억원에서 2백60억원,남주개발(하얏트리전시 제주호텔)은 72억원에서 2백20억원으로 각각 늘렸다. 국제 계열사중 가장 알찬 기업이었던 연합철강을 인수한 동국제강은 이를 계기로 철강전문 그룹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뿌리내릴 수 있었다.인수당시 2천억원대에 불과했던 동국제강의 매출은 지난해 6천7백억원으로 늘었다.
  • 폐수배출부과금 16억원/대구시,염색공단에 부과(단신패트롤)

    ◇대구시는 22일 허용기준치 이상의 폐수를 방출해왔던 대구염색공단에 대해 폐수배출부과금 16억5천만원을 부과했다. 시는 지난 10일 염공측으로부터 시설개선명령완료신고가 접수됨에 따라 이를 확인하고 지난 13일 방류 폐수를 채취,검사를 실시한결과 COD가 93.84㎛으로 떨어져 수질이 개선됨에 따라 부과금 부과대상기간을 지난 6월27일부터 지난 10일까지 41일간으로 산정,16억5천2백61만1천원을 부과한 것이다.
  • 현대·한양 건설장비/이라크서 추가징발

    현대건설과 한양이 이라크정부로부터 건설장비 수십대를 추가 징발당했다. 12일 관계당국과 관련업계에 따르면 현대건설은 지난 6월 굴착기등 10대(기중기 한대는 6월27일 반환)를 징발당한데 이어 지난 3일과 4일 두차례에 걸쳐 불도저 1대,굴착기 2대,기중기 3대,덤프트럭 6대,트레일러 4대등 건설중장비 24대를 추가로 징발당해 징발장비가 모두 33대로 늘어났다. 또 한양도 지난 6월14일 발전기 3대와 4백t짜리 기중기 1대등 건설장비 4대와 경차량 15대를 한꺼번에 징발당한 것으로 파악됐다.
  • 주지가 거액 부적 사기/병자에 “콩팥재생” 속여 2천만원 챙겨

    ◎불공 주부 성폭행도 ○…서울서대문경찰서는 26일 서울종로구 홍제동 104의 7 세고사주지 김종천씨(50)를 사기등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김씨는 지난 88년 1월26일 만성신부전증을 앓는 아들의 병을 상담하러온 김모씨(50·여·동작구 상도동)에게 『신령으로 아들의 콩팥을 재생시켜주겠다』고 속여 부적에 10원짜리 동전과 구리철사등을 쌓아 「방편」이라고 건네주며 9백만원을 받는등 모두 8명으로부터 2천2백여만원을 받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김씨는 또 지난 6월27일 남편을 잃은 박모씨(32·노원구 중계동)가 불공을 드리러오자 『당신의 몸에 액이 끼어 가정이 안된다』면서 90일동안 절에서 불공을 드리게 하며 욕보인 혐의도 받고 있다.
  • “「폐기물 처분장」 부지 공개선정”(국무회의 :7일)

    ◎정 총리,“남북대화 관련 언론이 너무 앞서” 우려 표시 제55차 국무회의는 체육청소년부가 상정한 「청소년기본법」등 법률안 4건과 상공부의 「오존층보호를 위한 특정물질의 제조 규제등에 관한 법률시행령」등 대통령령안 3건을 의결하고 1시간30분에 끝났다. ◎…이날 회의는 쟁점이 되거나 부처간 이견을 보인 안건이 거의 없어 토의보다는 안건을 상정한 주무장관들의 법안설명시간이 훨씬 길었다는 후문. 박장관은 『정부수립이후 처음으로 지난 6월27일 「청소년건전육성을 위한 10개년 계획」이 발표됐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청소년기본법』이라고 취지를 설명. ◎…내년도 선거일정 조정문제와 관련,최형우정무제1장관은 『기초와 광역단체장선거 동시실시방침은 당에서 내년에 있을 각종 선거에 관해 의견을 개진하는 과정에서 나온 얘기일 뿐 결코 확정된게 아니다』라면서 오해가 없길 바란다고 해명. 이어 김진현과기처장관이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부지 자원신청 현황및 처리계획을 보고.김장관은 『지난 5일 마감된 신청접수마감 결과경기·충북·전북 각각 2곳,강원·충남·경남 각각 5곳,경북·전남 각각 10곳씩 모두 41개 지역이 신청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지역주민의 이해와 협조아래 공개적인 절차에 따라 방사성폐기물 관리부지를 확보할 수 있도록 7개도를 방문,지역주민들과 얘기도 나눌 예정』이라며 「지역방문 설명회개최 계획」을 소상하게 소개하기도. ◎…마지막으로 정총리는 관계부처가 합동으로 교통사고 줄이기 대책을 조속히 마련토록 하라고 지시한뒤 『남북대화에 대한 언론의 보도가 너무 앞질러 가고있다』는 우려를 표시했다고. ▷의결안건◁ ◇청소년기본법=▲청소년활동의 내용을 고유영역과 수련영역,임의영역으로 구분 ▲국가는 매 10년마다 청소년기본계획 수립 ▲청소년 남북 동질성 회복의 적극적인 사업추진 근거 마련 ▲청소년수련시설에 대해 금융·세제·행정상의 적극 지원 ◇축산법(개)=▲종축의 정액·난자·수정난등을 채취,판매하는 업은 농림수산부에 등록 ▲부화업을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변경 ◇전화관리법(개) ◇자연환경보전법=▲자연환경보전의 기본원칙수립 ▲특정야생물·식물을 지정,보호하고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동식물및 이를 이용한 상품의 국제교역등을 규제 ◇오존층보호를 위한 특정물질의 제조규제등에 관한 법률시행령=▲특정물질의 종류를 54개 품목으로 확정 ◇정무장관실직제(개) ◇농촌진흥청과 그 부속기관직제(개)
  • 당시 중대장 이대용씨의 회고:상/「내가 겪은 6.25」

    ◎“적 대규모 남침”… 휴일 아침 전령이 보고/도서관 가다 귀대… 한여름 방한화 신고 출전/빗속의 춘천방어전서 적 자주포 5문 노획/첫날 동기생 8명 전사… “무비유환” 한탄하며 퇴각 6·25전쟁이 일어난지 41년 37개월 동안 계속되었던 동족상잔의 전쟁은 민족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국토는 아직도 두 동강이 나 있고 민족은 남북으로 갈라져 분단생활이 계속되고 있다. 국군 제7보병연대 1중대장으로 참전했던 이대용 예비역 준장(66·육사 7기·현 한국해음주식회사 사장)이 말하는 당시의 처절했던 전황을 몇차례 나누어 싣는다. 이 장군은 월남전 당시 주월 공사로 근무중 끝까지 대사관을 지키다 월맹에 의해 5년간 억류됐다가 우리 정부의 끈질긴 교섭으로 1980년 석방,귀국했다.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경 야음을 틈타 남침한 인민군의 총격으로 이내흥 중위는 춘천 북방 모진교 부근에서 전사했다. 이날 하룻동안 이 중위를 비롯,일선 중대장인 육사7기생 8명이 전사했고 다음날인 26일엔 10명이,27일엔 5명이 목숨을 잃어 불과 3일 동안에 23명의 장교가 적탄에 맞아 전사했고 약 70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렇게 시작된 육사7기생 전사자수는 한국전쟁 3년1개월 동안 모두 1백27명이나 됐고 행방불명자(적군의 포위 속에서 전사한 것으로 간주됨) 수는 19명,부상자는 약 4백명에 달했다. 이는 동기생 5백64명에 비해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그 날은 일요일이었고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때의 내 나이는 25살이었다. 직책은 육군 제7보병연대 제1중대장이었다. 그날은 휴일이어서 나는 춘천시 죽림동에 있는 하숙집에서 조반을 들고는 춘천도서관에 가서 책이나 읽을 참이었다. 카키색 군복 상하에,긴 고무장화를 신고 정모에 비닐 커버를 씌운 뒤 거울 보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하숙집 대문을 나설 때 비가 내리기에 우비를 꺼내 입고 봉의산 기슭에 있는 도서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디선지 「쿠쿠쿵 쿠쿠쿠쿵」하는 포사격소리가 들리더니 「따따따」하는 기관총 사격소리가 잇따라 들려왔다. 일요일에도 가끔 사격훈련을 하는 부대가 있기에 나는 이를 무심히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 보냈다. 그래서 나는 앙드레 모로아가 쓴 책 내용을 머리에 되새기며 가던 길을 재촉해 걸었다. 내가 춘천시내 공회당 앞까지 걸어갔을 때 맞은 편에서 철모에 전투복 차림의 한 군인이 내 쪽을 향하여 뛰어오고 있었다. 제1중대 전령 안기수 하사였다. 그는 거수경례를 하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인민군(북한공산군)이 38선을 넘어 남침했다』고 보고했다. 그는 나에게 『비상이 걸렸으니 속히 연대본부로 집합하라』는 제1대대장의 명령을 구두로 전달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지방도시에선 전화를 걸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춘천시민들의 가정에는 전화기가 한대도 없었다. 심지어 38선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나면 즉각 출동명령을 받고 부대 복귀를 해야 할 중대장들의 영외숙소에 조차도 군용전화가 한대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태고시대의 통신이랄 수 있는 연락병에 의한 연락 방법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대대장급 이상이 돼야만 그 집에 군용전화기 한대가 가설되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중대장이나 소대장에게 연락을 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렸으며,특히 장병들이 고이 잠자고 있는 새벽,그리고 사병들 대부분이 외박을 나가 있는 휴일의 연락은 더욱 그만큼 더디게 마련이었다. 6월25일. 북한공산군 이청송 소장이 지휘하는 제2보병사단은 새벽 4시 조금전에 38선을 돌파,춘천을 향하여 남침을 감행했다. 이로부터 4시간반이 경과한 뒤에야 1중대장인 나에게 연락이 닿은 것이다. 이날은 특히 일요일이라 많은 사병들이 외박을 나갔으며,연대본부 영내에 남아있는 몇명 안 되는 사병들도 잠이나 실컷 자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정신상태는 이완될대로 이완될 수밖에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비상연락을 받는 장교들마저도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비상소집이 여러번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또 맥빠지는 일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일이 많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거의 매번 연대의 비상소집명령에 따라 집합해 출동하려 하면 38선 가까이에 있는 부대로부터 「북한공산군이 다시 38선을 넘어 북쪽으로 후퇴해 버렸다」는 연락이 오는 것이 통례였다. 그럴 때마다 비상소집된 장교들의 맥은 빠지게 마련이었다. 나는 이날도 또 싱겁게 끝나겠지 하는 생각을 갖고 연대본부로 향했다. 연대본부 영문 앞에 다다랐을 때,소양로 쪽에서 확성기를 단 군용스리쿼터 한대가 달려오면서 『외출이나 외박을 나온 사병들은 비상이 걸렸으니 속히 소속부대로 돌아가라』는 가두방송을 했다. 그때 『이번엔 심상치 않구나』 하는 생각이 내머리를 스쳤다. 급히 연대 정문으로 들어서서는 제1대대장 방으로 달려갔다.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새벽 4시 조금전에 38선을 기습 돌파한 1개 사단 이상으로 추산되는 북한공산군 대병력이 38선 남쪽에 배치된 우리 제7중대와 제9중대를 격파하고 남진을 계속,현재 춘천 북방에 있는 옥산포에 육박하고 있으며,제9중대장은 이미 전사하고 내평방면에 있는 제7중대는 통신이 끊겼다』는 상황설명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1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이어 긴장된 목소리로 『얼마 안 있으면 우리 연대본부에도 북한공산군의 포탄이 쏟아질 것 같다』고설명했다. 나는 하숙방에 전투복 군화 철모 등을 두고 왔지만 이미 나에겐 그런 것들을 가지러 다시 하숙집까지 갔다올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중대 보급계 박 중사를 불러 중대보급창고에 가서 재고품 중에서 내 몸에 맞는 전투복과 철모와 군화 등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가 가져온 것 중에 다른 것들은 모두 내몸에 맞았으나 군화는 너무 작아서 신을 수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그가 다시 가지고 온 것은 겨울에 신는 방한화였다. 다행히 내 발에 맞아 한여름에 엄동설한용 방한화였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신었다. 외박이나 외출을 나갔던 사병들이 속속 중대로 복귀하고 있었다. 황급히 출동준비를 하고 제1중대 인원을 점검하니 상오 9시20분 현재 40여 명이 미귀상태였다. 나는 중대 선임하사관에게 외박으로부터 돌아오는 사병들을 계속 전방으로 내보내라고 지시하고 중대병력을 지휘하여 춘천 북방에 있는 우두산 북단에 구축해 놓은 방어지지로 달렸다. 제1중대를 포함해 제1대대 병력이 우둔산 일대의 방어진지에 배치,완료된 것은 상오 11시경이었다. 정오가 좀 지나자 북한공산군의 선두부대는 자주포를 앞세우고 옥산포에 들어오고 있었다. 봉의산 뒤에 배치된 우리 사단초병은 아주 효과적으로 옥산포의 적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들은 좀 당황한듯 전진을 멈추고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나의 제1중대 병력은 산발적으로 적과 교전했다. 어느새 어둠이 깔리더니 금방 날이 샌다. 6월26일 아침이 됐다. 내리던 비는 멎었다. 구름 속의 햇볕이 수라장의 싸움터를 비춰 주었다. 상오 8시경,제1대대는 우두산에서 일제히 뛰어내려 서쪽에 있는 옥산포로 달려들었다. 우리 사단포병은 정말로 절묘하고 무섭게 옥산포에 포탄을 퍼부어 우리 보병부대의 공격을 지원했다. 의외의 기습을 받은 옥산포의 북한공산군 자주포 부대와 보병부대는 북쪽으로 후퇴해버렸다. 우리 부대는 적군 자주포 5대를 노획했다. 이중 한대는 후퇴하는 북한공산군 스스로가 파괴한 것이고,다른 한대는 아군이 2.36인치 로켓포탄 위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 가까운 거리에서 뒤쪽을 보고 사격,일부를 파괴시켰다. 그리고 나는 소제 권총한정을 노획하여 허리에 찼다. 옥산포는 지형이 평탄했다. 그래서 우세한 병력과 화력,기갑부대까지 있는 북한공산군을 저지하기 위해 오래 머물러 있을 곳은 못되었다. 약 2시간쯤 뒤에 북한공산군 대병력이 자주포 부대와 함께 옥산포로 밀려왔다. 우리 제1대대는 우두산 방어진지로 되돌아가야 했다. 다시 날이 저물자 제1대대 병력은 우두산 방어진지를 나와 소양강을 건너 봉의산 방어진지로 이동했다. 여기서 적을 저지하며 치열한 전투를 하다가 다음날인 6월27일 해질 무렵에,원창고개 방면으로 이동,원창고개에서 적과 교전했다. 6월28일 하오 4시경 결국 원창고개 방어진지를 떠나 홍천 북방에 있는 동산리로 향했다. 서울이 북한공산군 수중에 함락되고 인제 방면에서 홍천으로 진격중인 북한공산군 제7사단이 우리 제7연대의 후방을 차단할 위험이 있다고 본 상부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북한공산군의 1개 사단 병력은 약 1만1천명이며 그들 사단이 갖고 있는 1백22㎜ 곡사포의 최대사거리는 1만2천야드인 데 비해,우리측 사단의 1백5㎜ 곡사포는 최대사거리가 8천야드에 불과했다. 병력은 물론,화력이나 기동력·기갑력에 있어 적군은 아군보다 아주 월등하게 우세했다. 우리는 이를 사전에 모르고 대비를 하지 못했었다. 무비가 유환을 가져온 셈이었다. 어쨌거나 나의 6·25 첫 전투였던 춘천지구 방어전투는,우리들에게 상당한 피를 흘리게 한 뒤 끝나 버렸다. □약력 □1925.11 황해도 김천 생 □1948.11 육군사관학교 제7기 졸업 □1950.6 제7보병연대 제1중대장 □1951.10 제32보병연대 제3대대장 □1953.3 미 육군보병학교 졸업 □1960.12 미 육군참모대학 졸업 □1961.8 제23보병연대장 □1963.9 주월남 한국대사관 무관 □1968.1 육군 준장 진급 □1968.1 주월남 한국대사관 공사 □1975.4 월남 공산정부에 의해 억류 □1980.4 석방 귀국 □현재 한국해음주식회사 대표이사 회장
  • 제네바 군축회담 재개

    【제네바 로이터 연합】 미국이 화학무기 사용중단을 선언함으로써 크게 고무된 제네바군축 협상대표들은 14일 전세계 생화학무기를 제거하기 위한 협상노력을 제개했다. 연례 제네바 군축협상은 오는 6월27일까지 진행될 계획이며 생화학무기 외의 다른 대량파괴무기 등도 다룰 예정이다. 이와 관련,한 제3세계 외교관은 『미국의 양보조치는 매우 중요한 것이며 이번 회담에서 중대한 진전이 있도록 만들 것』이라고 평가했다.
  • 경찰서 가출주부 신원확인 늑장/숨진뒤 가족에 통보/입원 57일만에

    정신을 잃고 길가에 쓰러져 있던 40대 주부가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받은지 57일만에 숨졌다. 지난 6월4일 상오4시40분쯤 서울 노원구 상계3동 앞길에서 쓰러져 있던 한정선씨(41ㆍ여ㆍ노원구 상계3동 107)가 서울 태릉경찰서 상계3파출소 순찰차에 발견돼 청량리정신병원과 서울 동부병원 등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던중 지난달 30일 상오5시쯤 입원해있던 시립동부병원에서 빈혈과 간경화증세로 숨졌다. 한씨의 가족들은 한씨가 가출한지 한달만인 6월27일 관할 상계4파출소에 가출인 신고를 냈으나 경찰은 한씨의 신원을 확인하는 업무를 소홀히 하다 한씨가 숨지자 지문을 채취해 신원을 확인,지난3일 뒤늦게 가족들에게 숨진 사실을 통보한 것으로 밝혀졌다.
  • 공항 반테러 의정서/한국 23개국째 발효

    국제민간항공에 사용되는 공항에서의 불법적 폭력행위의 억제를 위한 의정서가 27일 우리나라에 대해 발효됐다. 이 의정서의 대한발효는 정부가 지난 6월27일 최호중외무장관 명의의 비준서를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 기탁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지난 88년 2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채택된 이 의정서는 71년의 민간항공안전협약(몬트리올협약ㆍ취항중인 항공기에 대한 범죄행위규정)을 보강한 것으로 국제공항에서의 인명ㆍ시설ㆍ항공기에 대한 불법테러행위를 처벌대상범죄로 추가 규정하고 범죄발생국ㆍ범죄 소재국 또는 항공기등록국이 범죄인 처벌을 위한 관할권을 가지되 범죄인 소재국이 범죄인을 범죄발생국에 인도하지 않는 경우 범죄인 처벌의무를 지도록 하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하고 있다.
  • 감방장이 유치인 돈 갈취/울산 남부서/통장개설뒤 입금 강요

    【울산=이용호기자】 부산지검 울산지청은 19일 울산 남부경찰서 대용감방에 수감중인 고참유치인(감방장)이 유치인들을 폭력으로 위협,시중은행에 개설한 예금통장을 통해 수십만원씩의 현금을 갈취하고 있다는 피해자들의 진정에 따라 수사에 나섰다. 검찰에 따르면 지난 4월10일 약취ㆍ불법감금,강간 등 혐의로 구속돼 대용감방 제11방에 수감중인 감방장 진경호씨(20ㆍ특수강도 등 전과6범)가 유치인들의 규율을 잡는다는 이유로 폭행,공포에 떨게한뒤 편안한 감방생활을 하게 해주겠다는 조건으로 유치인 1인당 30만∼40만원씩을 갈취해 왔다는 것이다. 진씨는 지난 5월15일 주택은행 울산지검에 김기모씨(25) 이름으로 자유저축통장을 개설,유치인들에게 계좌번호(851825­90­125475)를 알려줘 가족들을 통해 현금을 입금시키도록 했다. 검찰은 지난 6월13일부터 6월27일사이 김모씨(피의자) 가족이 20만원씩 2차례,이모씨(피의자) 가족이 30만원 등 모두 70만원을 이 계좌에 입금시킨 사실을 밝혀냈다.
  • “6·25 개전초 서울·대전 점령작전 김일성이 직접 지휘”

    【내외】 6·25동란 초기에 있었던 북한군의 서울및 대전지역의 점령작전은 김일성의 직접 지휘아래 이루어졌다고 25일 북한의 중앙방송이 밝혔다. 이 방송에 따르면 북한군은 6·25전쟁이 시작된지 불과 이틀후인 6월27일 서울의 북쪽 관문인 의정부를 점령,서울을 목전에 두게 되었는데 김일성은 바로 이날 아침 연락장교로부터 전투보고서를 받아본 후 곧바로 「서울을 해방할 데 대한 전투명령」을 내렸으며 이에따라 북한군은 6월28일 새벽부터 서울로 진군했다는 것이다. 또 대전역에서도 김일성은 이곳을 「해방」하기 위한 작전을 직접 조직하고 지휘했으며 이밖에도 여러 곳의 전선에서 북한군들을 「영웅적으로 투쟁」토록 고무했다고 이 방송은 주장했다.
  • 전쟁의 발발과 전개(새 실록 6ㆍ25 김학준:중)

    ◎“북한 남침은 소의 적화음모”… 미,1주만에 파병/중국,유엔군 38선 넘자 16개사단 급파/소선 항공ㆍ기갑사단 만주에 전진배치/7월에 대전서 새 한ㆍ미협정… 군지휘권 유엔군에 넘겨(서울신문 6.25 40주 특집) 한국전쟁은 전쟁의 국면의 전개양상에 따라 5개의 기간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제1기는 50년 6월25일부터 50년 9월 중순까지의 시기로,남침을 개시한 북한의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대구와 부산 일대를 제외한 남한 전역을 석권했던 시기이다. 제2기는 50년 9월 중순부터 50년 10월 하순까지의 시기로,국제연합군의 인천 상륙작전의 극적인 성공을 계기로 국련군이 반격을 계속해 한ㆍ만 국경으로까지 접근함으로써 북한정권이 붕괴 직전까지 이르렀던 시기이다. 제3기는 50년 10월 하순으로부터 51년 4월 초순까지로,중공군이 개입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고 국련군이 다시 후퇴하던 시기이다. 제4기는 51년 4월 초순부터 51년 6월 중순까지로,국련군이 「대량보복」을 통해 전투의 주도권을 다시 장악하여 군사적 균형을 이룬시기이다. 제5기는 51년 6월 중순부터 53년 7월27일까지의 시기로,전쟁과 함께 휴전회담이 진행된 화전양상의 시기이다. 이번의 제2회에서는 제1기부터 제3기까지를 다룬다. ○3일만에 서울점령 ▷제1기◁ 50년 1∼2월 이후 38도선 주변에서 소규모의 군사력 충돌을 계속 일으켜오던 북한은 6월25일 새벽 드디어 전면남침을 개시했다. 북한의 공격은 빨라 6월27일 서울의 외곽인 창동과 미아리에 방어선을 설정한 한국군을 붕괴시켰다. 이에 따라 이 날짜로 육군본부는 수원으로 후퇴했고 정부는 대전으로 천도했다. 6월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다. 그런데 북한군은 서울 점령 3일동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는데,이 3일은 생사의 갈림길에 있던 남한을 살려 준 귀중한 시간이었다. 북한군이 남침 사흘만에 서울을 점령한 여세로 그대로 밀어붙였다면 남한으로서는 최악의 상태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북한군의 기습에 대한 놀라움 속에서도 트루먼 미국대통령은 즉각적인 응전을 결심했다. 북한의 남침을 소련의 세계적화 시도의 일환으로 보았으며,직접적으로는 미일 군사안보체제에의 대항조치로 인식하여 한반도가 공산화하는 경우 그것이 일본의 국내정치에 미칠 영향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곧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 대해 긴급회의의 소집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6월25일 일요일 하오 3시에 열린 안보리에서 미국은 북한이 남한에 대해 「무력공격」을 가했다고 주장하고 그 「무력공격」은 「평화파괴행위」라고 비난한 다음 북한군이 즉각적으로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군사력을 38도선 이북으로 철퇴시킬 것을 요청했다. 미국의 제안은 9대0으로 가결됐다. 때마침 소련 대표는 장기결석중이어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안보리의 결의는 북한의 군사행동을 정지시킴에 있어 아무런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리하여 6월27일 안보리는 『군사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결의했다. 이와 더불어 트루먼은 도쿄의 미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해ㆍ공군의 지원을 개시하라고 명령하고,미 제7함대로 하여금 중공군이 대만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동시에 대만의 장개석정부가 중국 본토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조처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6월30일 트루먼은 맥아더 총사령관에게 ①해ㆍ공군뿐만 아니라 지상군을 투입할 권한과 ②군사상 필요한 경우에는 38도선 이북의 군사목표를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이튿날 주일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가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미 지상군의 개입이 시작됐다. 바로 이날 안보리는 국제연합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국제연합 회원국들의 무력원조를 미국의 단일지휘 아래 둔다는 내용의 공동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노르웨이 출신의 국제연합 사무총장 트리그브리는 국제연합기를 미국에 전달했으며 트루먼은 즉시 미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를 국련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미국의 단호하고 신속한 결정은 대한민국을 크게 고무시켰다. 비록 남침에 쫓겨 피난길에 들어선 형편이지만 국련군의 반격으로 오히려 통일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6월29일 맥아더가한강전선을 시찰하고 곧바로 수원에 내려왔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모든 협력을 약속했다. 실제로 7월14일 대전에서 맺은 협정을 통해 이대통령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위임했다. 이어 7월19일 이대통령은 『국련군의 작전목표가 전전원상의 회복,즉 38도선에서의 진격정지에 그쳐서는 안되며 북진통일을 완수해야 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트루먼에게 전달했다. 한미간의 이러한 협력속에서도 전세는 계속 불리해 후퇴에 후퇴를 거듭 했다. 그리하여 맥아더는 한때 최악의 경우에는 한국에서 손을 떼고 한국정부를 괌이나 하와이로 후퇴시킨다는 계획마저 세웠다. 이대통령은 분노속에 강경하게 거절했다. 마침 9월5일부터 13일까지 경주와 영천일대의 사활을 건 전투에서 국련군은 북한군 제15사단을 궤멸시켰다. 국련군의 반격이 전개될 수 있는 상황이 비로소 형성된 것이다. ○소대사가 대화 제의 ▷제2기◁ 국련군 반격의 결정적 계기는 확실히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었다. 9월12일 극비리에 부산을 출발한 2백61척의 대수송선단은 9월15일 인천항에서의 작전개시와 동시에 곧바로 인천시 남부에 상륙했다. 북한군은 2개 사단병력으로 서울방위사령부를 편성했으나 한국군의 해병대가 9월27일에,이어 국련군이 9월28일에 서울을 완전히 수복했다. 이에 따라 9월29일 이대통령은 맥아더와 함께 공로로 서울에 도착하여 서울을 대한민국정부의 관할아래 넘기는 수도 탈환식에 참석했다. 국련군의 성공적인 반격이 확고해지면서 서방진영 및 중립국가들의 일각에서는 전전원상의 회복이라는 조건아래 즉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철퇴시키는 조건아래 국제연합군의 진격을 멈추게 하고 이 테두리 안에서 한국전쟁을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제기됐다. 8월1일 안보리의 의장이 되는 것을 계기로 삼아 안보리에 복귀한 소련대사 말리크도 남북한 대표를 국제연합에 동시 초청하여 한반도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의했다. ○북한에 “항복”요구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확고하여 북한정권의 완전한 붕괴,즉 대한민국에 의한 한반도 통일만이 국련군의 목표임을 선언했다. 대한민국 정부도 『38도선의 존재를 부인한다』고 선언하면서 국련군의 북진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을 강조했다. 이때 서방 7개국이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공동결의안을 제출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무력을 써서라도 국련군의 주도 아래 한반도를 통일시킨다는 태도를 밝혔다. 그러나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해도 좋다는 최종적인 결정은 내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10월1일 우선 한국군은 드디어 38도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했다. 이튿날 맥아더는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서도 좋다는 미국정부의 최종결정을 한국정부에 알리면서 북한정권의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국련군이 38도선 이북으로 진격해도 좋다는 서방의 공동결의안이 아직 국련을 통과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막으려는 공산진영 외교적 노력이 시도됐다. ○주은래 “방관 않겠다” 우선 중국 총리겸 외무장관 주은래는 10월2일 깊은 밤에 주중 인도대사 파니카르를 외무부로 불러 『만일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는 경우 중국은 조선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그러나 한국군만이 38도선을 넘는 경우 중국은 그러한 조처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파니카르대사는 주의 발언을 본국정부에 즉시 알렸으며,인도정부는 그대로 미국정부에 알렸다. 트루먼은 주의 발언이 국련군 북상안이 통과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련을 협박하려는 「대담한 시도」로 판단하여 그것을 무시했다. 이에 따라 국련은 10월7일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허용하는 서방쪽의 공동결의안을 통과시켰으며 여기에 근거해 국련군은 7∼8일 드디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했다. 이제 중국이 주사위를 던질 차례가 되었다. 10월10일 주은래는 『조선전쟁은 처음부터 중국의 안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고 규정하고 이 전쟁에서 『중국인민은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주의 이 선언은 중국의 모든 유력지들에 보도되었는데 그것은 중국의 참전에 대비하여 중국인민들을 동원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되었다. 이처럼 중국의 참전 가능성이 커지자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트루먼은 10월5일 태평양의 웨이크도로 맥아더를 불렀다. 회담에서 맥아더는 중국의 참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대답했다. 이 무렵 국련군의 북진은 계속되고 있었다. 북한군이 곳곳에서 무너지자 김일성은 10월12일 스탈린에게 소련의 지원을 요청하는 친서를 보냈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과의 직접적 대결을 피하려는 자세만 보일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김일성은 가을비가 세차게 내리던 10월16일 새벽 2시 소련제 고급승용차 볼가를 타고 평양을 빠져 나가 10월26일 만주와의 접경지대인 평양북도 강계군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이날 이대통령은 원산시에 그 모습을 나타내 열광적인 원산시민들을 격려했다. 이어 10월30일 평양을 방문하고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공산당을 몰아내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고 호소했다. ○스탈린,중국에 찬사 ▷제3기◁ 이 무렵 중국의 군사적 개입이 극비리에 시작되고 있었다.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허용한 서방결의안이 10월7일 국련총회를 통과하자 모택동 중국공산당 주석은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팽덕회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마침 북한으로부터 파병을 요청하는 밀사들이 와 있었으며 그리하여 팽은 10월13일 북한으로 들어가 김일성을 만난 뒤 전투에 참가하여 전황을 살핀다음 그 결과를 모에게 보고했다. 그때로부터 엿새뒤 중국군은 마침내 은밀하게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이 참전을 최종 결정하던 어느 시점에 스탈린은 『김일성동지는 장래 중국 국경 안에 망명정부를 세울 것』이라고 모에게 알리면서 이처럼 위급한 상태에 빠진 북한정권을 구출하려던 중국이 적어도 6개 사단을 파견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러나 중국은 일단 행동을 개시한 뒤 16개 사단을 출동시켰다. 중국쪽 설명에 따르면 중국의 이러한 결정을 보고 『처음에는 우리들을 민족주의자가 아닌가 의심했던 스탈린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들이 가장 좋은 동지임을 인정했다』 중국군의 개입을 전혀 모르는 채 한국군은 10월25일 마침내 압록강변의 초산을 점령했고 미 제24사단은 북한의 임시수도 신의주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제 대한민국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은눈앞에 닥쳐온 것 같았다. 그러나 바로 그날에 있었던 한국군과 중국군의 첫 교전은 상황을 완전히 바꾸었다. 맥아더는 11월5일 중국군의 참전을 국련에 보고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음을 알렸다. 중국군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한국전쟁은 국련군 총사령관의 권한 범위를 벗어나 국련과 세계 여러 나라들의 정치수뇌급에서 해결책이 제시돼야 할 전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중국 외무부도 11월11일 중국군의 참전을 공개적으로 처음 시인했다. 이와 더불어 중국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취하면서 계속 남쪽으로 쳐내려 왔다. 이때로부터 약 2개월 동안 미군은 미군의 역사상 가장 장기의 후퇴를 경험하게 되었다. ○영서 종전모색 제의 그 결과 중국군은 12월26일 38도선을 넘고 12월말까지 38도선 이북의 북한 전역을 점령하고 51년 1월4일에는 서울을 점령했다. 이에 따라 국련군은 평양철수(12월4일 완료)와 흥남철수(12월24일 완료) 및 서울철수(1ㆍ4후퇴)를 경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만주에 소련의 1개 항공사단이 배치되어 북한군과 중국군의 배후를 지원했고,전투상황의 악화에 대비하여 5개 기갑사단을 북한에 파견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중국군이 개입하면서 서방세계의 일각에서는 휴전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미 중국을 승인한 영국은 국련 대표권을 대만에 줄 것이 아니라 중국에 준뒤 중국과 종전을 모색하자고 제의했으며,애틀리 총리는 12월4일 워싱턴에서 트루먼과 회담한 뒤 『두나라는 협상을 통해 종전을 추구한다』는 합의를 끌어냈다. 여기에 발맞춰 아시아ㆍ아랍권 13개국도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을 국련에서 통과시켰다. 그러나 미국 안의 반공분위기는 매우 높아 하원과 상원은 각각 51년 1월19일과 1월23일 국련이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국련의 휴전 분위기에 실망하던 한국 정부는 다시한번 무력통일에 대한 기대를 걸게 됐다. 북한은 북한대로 다시 한번 적화통일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됐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구출된 김일성은 12월4일 강계군에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정기회의를 열고 「미제의 완전한 축출」을 다짐했다. 이와 동시에 무정을 비롯한 주요한 도전자들을 숙청했다.
  • 법정증인 보복살인 「동화파」의 정체

    ◎신흥폭력조직… 강남주도권장악 기도/광주 「동아파」 후신,조직원 1백명 추정/업소 갈취등 청부폭력… 디스코장 경영 법정증인 살해사건의 범인들이 속해있는 「동화파」는 70년대 중반 광주 중심가 충장로를 장악했던 「동아파」에 뿌리를 두고 최근 조직을 재정비,유흥가가 밀집돼 있는 서울 강남일대를 장악하려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에 「동화파」의 활동이 처음 포착된 것은 지난해 7월 이 조직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장성파」일당 11명이 검거되면서 부텨였다. 경찰은 『조직폭력배들로부터 금품을 갈취당하고 있다』는 강남일대 유흥업소 업주들의 제보를 받고 서울 양천구 목2동에 있는 장성파 아지트를 급습,이들 일당 19명 가운데 11명을 검거했다. 「장성파」는 조직원 11명이 검거된뒤 한때 와해되는 듯 했으나 이번 사건의 주범 변운연이 중심이돼 곧바로 서울 강서구 염창동 나이아가라카페에서 조직원 10여명으로 조직을 재정비,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주범 변 등은 김모씨(33)로부터 곗돈 1억4천만원을 받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지난해 6월27일 하오10시30분쯤 서울시 양천구 목2동 231 강모씨(40ㆍ여) 집을 찾아가 등산용 도끼 낫 톱 목검 등으로 강씨의 아들 홍모군(12)을 위협하면서 18일동안 강씨집에 머물기도 했다. 경찰은 이처럼 폭력을 휘둘러온 「장성파」가 지난 1월5일 「동화파」에 흡수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주범 변 등은 「동화파」의 두목 문계남(35ㆍ일명 윤계남)이 70년대 중반 「동아파」의 중간보스로 폭력계의 선배인데다 자금력 또한 만만치 않아 스스로 조직원이 된 것으로 보인다. 두목 문은 전남 나주 출신으로 하남과 부천에서 디스코장과 스탠드바 등을 경영하며 조직을 관리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동화파」가 조직적인 범죄단체임이 처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3월8일 행동대원 최종국씨(23)와 오호렬씨(22) 등 일당 4명이 서울 강동경찰서에 구속되면서 부터였다. 최씨 등은 이번 사건의 피해자인 임용식씨(33)가 경영하는 송파구 방이동 59의2 「대부룸살롱」과 부근 「88스탠드바」(주인 이규항ㆍ25) 등에서 10여차례에 걸쳐 폭력을 휘둘러 3백50만원어치의 공짜술을 마시다 임씨의 고소로 경찰에 붙잡혔었다. 검찰과 경찰은 이 조직의 보스 역할을 해온 「문계남」이 지난7일 서울 강남경찰서에서 「경락부동산낙찰 조직폭력배」 사건으로 수배된 윤계남씨(35)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있다. 경찰은 「동화파」의 조직원이 1백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 「증인살해범」 은닉처 급습… 1명검거/포천서/「동화파」총책 공장

    ◎현장덮치자 한패3명 도주/붙잡힌 조유근 전모 자백… 주범등 신원 파악/경찰,4개 중대 해룡산 외곽 차단… 철야수색 법원앞 증인피살사건을 수사중인 서울지검 동부지청은 14일 이번 사건의 결정적인 단서를 쥐고있던 「동화파」 중간보스인 조유근씨(26ㆍ전남 장성군 장성읍 단광리 656)를 조씨가 숨어있던 경기도 포천군 포천읍 설운리 481 보량식품주식회사 공장안에서 검거,같은 행동대원들의 범행일체를 자백받았다. 검찰은 조씨로부터 숨진 임용식씨를 부엌칼로 살해한 범인이 「동화파」 행동대원인 변운연씨924ㆍ폭력전과5범ㆍ장성군 장성읍 영천리 1049의2)임을 밝혀내고 범행당시 현장에서 변씨와 함께 달아난 행동대원 김계영씨(26ㆍ장성군 삼서면 석마리 509)와 강대연씨(27ㆍ주거부정) 등 모두 3명의 행방을 쫓고 있다. 검찰은 또 변씨 등이 숨어있다 달아난 이 회사 공장안에서 범행당시 변씨가 입고있던 피묻은 검은색양복 한벌을 압수했다. 달아난 변씨는 지난해 6월27일 김석운씨(33ㆍ주방용품대리점경영)로부터 『강모씨(40ㆍ여)에게 계돈 1억4백만원을 받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강씨 집으로 찾아가 강씨의 아들 홍모군(12)을 등산용칼과 낫 등으로 위협,같은해 3월14일까지 18일동안 강씨집에 머물면서 행패를 부린 혐의로 구속기소돼 징역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지난 1월24일 풀려 났었다. 변씨는 주민등록증을 위조,「노재갑」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하면서 신분을 감춰온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이번 사건과 관련돼 구속중인 피고인 최종국(23) 등의 피의자 접격부 등 수사자료를 검토한 결과 「동화파」의 서울총책 이도형씨(45)가 포천에서 보량식품주식회사를 한때 경영한 사실을 밝혀내고 이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검찰수사관 5명을 포천읍내 이 회사로 보냈다. 한편 이날하오 수사본부에 『범인을 알고 있는 선배인데 함께 찾아가 자수시키겠다』는 전화가 걸려와 수사관들이 이 제보자와 함께 이 회사를 급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하오5시30분쯤 수사관들이 이 공장앞에 도착하자 공장옥상에 숨어있던 주범 변씨 등 3명은 낌새를 알아차리고 공장뒤편 이웃 야산으로 도주했다.그러나 조씨는 수사관을 피해 달아나다 공장안에서 붙잡혔다. 검찰과 경찰은 이들이 달아나자 즉시 이웃 의정부지청 수사관들과 공조수사에 들어가고 포천ㆍ의정부ㆍ남양주 3개 경찰서에 비상령을 내려 도주로를 차단하는 한편 전경 4개중대를 이들이 달아난 해룡산주변에 투입,철야수색작업에 나섰다. ◎“전화제보로 출동”/“수사기록서 단서”/은닉처 출동싸고 검ㆍ경 엇갈린 주장 한편 공장안에 있다가 참고인 자격으로 수사본부까지 동행한 공장종업원 가운데 1명은 이날밤 기자에게 『조유근씨가 수사본부에 전화를 걸어 범인을 자수시키겠다는 제의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조씨는 자신은 범행과 관련이 없어 도망갈 이유가 없다고 말했었다』라고 전했다. 검거된 조씨는 수사본부로 오면서 『검찰이 약속을 어기고 나까지 잡으려고 했다』면서 강한 불만을 터뜨렸다고 이 종업원이 말했다. 또 이날 하오10시 수사본부가 검거결과를 발표하기 직전 경찰의 한 관계자는 『수사본부가 자수권유제의를 받고 출동,1명을 검거하고 3명을 놓쳤다』는 사실을 본사에 알려왔다.
  • 중국학자가 밝힌 「중국의 6ㆍ25참전 배경」

    ◎김일성,남침2개월전 북경에 통보/모택동,유엔군 38선 넘자 심한 불안감/중국,미 무력위협 견제위해 참전 선언/소의 공군ㆍ물자지원 조건으로 병력 파견 6ㆍ25발발 40주년을 앞두고 한국전쟁에 대한 재평가작업이 국내외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전쟁을 중국의 시각에서 조명한 논문이 중국학자에 의해 발표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국전쟁연구회(회장 김철범)주최로 14일부터 이틀간 서울힐튼호텔에서 열리는 한국전쟁40주년기념 국제학술회의에서 중국국제전략연구소의 적지해연구원이 발표할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결정에 대한 재고찰」이란 제목의 논문은 중국의 한국전 참전배경을 새 시각에서 조명하고 있다. 중국의 한국전 참전은 국민당정부를 후원하는 미국으로부터의 무력개입위협을 견제하기 위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중국공산당은 1950년6월20일 5천1백만명에 달하는 인민해방군을 주은래 책임아래 1천4백만명을 감축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에 앞서 김일성은 50년4월 모스크바에서 평양으로 귀환도중 밀사를북경에 파견,모택동에게 군사적인 수단으로 조국을 통일키로 했다는 사실을 통보했으나 군사계획과 그밖의 상세한 내용을 알려주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지도자들은 처음부터 한국전에 개입할 의도는 없었고 김일성의 요청에 따라 인민해방군에 속한 한국계 중국군을 보내는 것만으로 평양을 돕고자 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트루먼이 6월27일 중국본토와 대만사이에 제7함대를 배치하자 미국이 국민당을 구하기 위해 중국내전에 다시 참가하기로 결정할 것으로 믿었다. 이에 따라 7월10일 「미국의 대만 및 한국침략에 대한 중국인민위원회」가 북경에 설치됐고 모택동은 등후아장군으로부터 급속한 남진,보급선 확대,후방의 공백상태등 한국전의 상황을 보고받고 김일성에게 「남진속도를 늦추고 확실한 방어망을 구축하라」는 충고를 했다. 9월초 북동부지역 사령관인 가오강은 한국전 상황을 분석한 보고서에서 북한이 통일할 기회는 이미 지나갔으며 김일성의 군사행동은 처참하게 실패하리라고 확신했다. 이에 모택동은 9월9일 동부군사지구 제10군에게 철도에근접하게 병력을 배치,압록강에 대한 병력보강에 대비할 것을 지시했다. 10월2일 주은래는 당시 인도대사인 파니카를 통해 만약 미군이 북한을 점령한다면 중국은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한뒤 영국외상 포리스트 버빈은 네루를 통해 유엔군이 만약 38도선을 넘어야 할 경우에는 압록강 40마일 앞에서 멈추겠다고 중국지도자들에게 통보했다. 미국은 인도를 통해 전달한 자신의 약속을 두차례나 어겼으므로 중국지도자들은 미국의 맹서는 사기술이라고 믿게됐다. 1천㎞에 이르는 압록강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병력이 필요하겠는가. 더구나 언제 적이 침입해 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중국은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었다. 50년 10월1일 김일성은 불리한 전황을 알리면서 인민의용군의 즉각 투입을 요청하는 전문을 모택동에게 보내왔다. 그러나 북동부지역 사령관 가오강과 임표는 이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들은 중국경제력의 열세와 군사력의 열세,후방의 취약성 등을 그 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이어 열린 정치국특별확대회의에서 ▲한국은 미국의 세계전략의 취약한 고리이며 ▲전면적인 핵전은 불가능하며 ▲한반도지형은 미군의 기계화부대와 화력운용에 불리하다는 결론에 따라 장기적으로 어느 정도 희생을 치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게 됐다. 만약 중국이 전쟁을 회피한다는 것은 국민당에 대한 해방전쟁이 몇년 더 지체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10월2일 정치국 특별회의에서 모택동은 소련이 공중지원과 전쟁물자를 원조한다는 조건으로 병력파견을 승인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후 전황이 김일성에게 크게 불리해지자 스탈린은 딜레마에 빠지게 됐으며 이러한 딜레마의 탈출구로서 지상은 중국군이,공중은 소련공군이 기꺼이 맡기로 합의했다. 결국 10월13일 모택동은 김일성이 중국으로 후퇴하기 전에 한반도에 군대를 보내는 것이 낫다고 판단,압록강을 건너 진격키로 결정했다. 소련은 합의대로 50년말 공군 2개사단(2백대전투기)을 파견,압록강철교와 1백㎞에 이르는 의용군 보급로를 엄호했으며 중국군복을 착용한 이들 소련군조종사는 생포되더라도중국계러시아 소수민족이라고 속였다. 한국전에 투입된 2백30여만명의 중국인민의용군은 당시 중국이 보유하고 있던 전야전군의 66%,전포병사단의 60%,전기갑사단의 1백%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다. 모택동이 중국과 미국의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았거나 모택동이 본토를 석권했을 당시 트루먼이 보다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면 스탈린은 당시 상황으로 봐서 모택동의 결정을 제지했는지도 모른다. 한국전에서 이데올로기는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지난 30년동안 서구의 역사가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중국공산당과 트루먼행정부가 서로를 좀 더 잘 이해했더라면 중국의 참전이라는 비극은 분명히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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