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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장간첩 깐수 교수/한총련 폭력시위 비판/검찰 관계자 밝혀

    ◎간첩활동에 회의… 전향의사 표명도 단국대 교수 무함마드 깐수로 위장,간첩 활동을 해오다 검거된 정수일(62)이 「한총련」의 폭력사태에 비판적인 평가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또 정은 전향의사를 가진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 관계자는 19일 『남한 사회로의 전향을 거부해 오던 정이 조사가 진행되면서 간첩활동에 회의를 나타내며 전향 의사를 내비치고 있다』며 『구체적이고 명확한 의사를 밝힌 것은 아니나 법정에서는 태도가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밝혔다. 정은 또 지난달 22일 검찰에 송치된 뒤 신문과 TV뉴스를 잠깐씩 볼 기회를 접하고 한총련의 폭력시위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정은 이에 앞서 지난 16일에도 수사팀 3명과 저녁식사 도중 뉴스를 통해 학생들이 학교기물을 끌고나와 불을 지르고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화염병을 던지는 장면을 시청했다. 정은 수사관이 『친북세력이 저렇게 많으니 좋지 않느냐.북한 당국이 오판하지 않을까 모르겠다』고 하자 한동안 헛웃음을 짓다가 『한마디로 부정적이다.6월항쟁때는 국민들의 호응이 높아 정권유지가 힘들 것으로 북한 당국에 보고했지만 이후 전대협이나 한총련 핵심들이 북한의 대남적화통일 노선을 따를 때에는 국민들이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운동권 세력이 점점 고립되고 있다고 보고했다』고 말했다고 수사관계자가 전했다. 정은 『국민들이 폭력을 싫어하기 때문에 한총련의 행동반경은 더욱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고 이 관계자는 덧붙였다.
  • 정사 5·18(상)/광주매일 편저

    ◎80년 계엄군 광주 일시퇴각까지 전말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시민군 2백여명을 비롯해 계엄군,경찰관등 모두 8백64명의 증언,군·검찰·국회 청문회등의 관련기록을 망라해 「5·18」을 재조명했다.피해자나 가해자 한쪽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담기보다는 양쪽의 주장을 객관적으로 검토해 진실을 파헤치느라 애썼다. 상·하 두권으로 예정된 가운데 80년 5월21일 계엄군이 광주에서 일시 퇴각한 때까지를 담은 상권을 우선 선보였다.「5·18」에 앞서 그 뿌리로서 71년 대통령선거와 잇따른 유신선포,그리고 그 이후 사회 각계에서 벌어진 민주화운동,부마항쟁과 10·26,신군부세력 등장등의 흐름을 소개했다. 이어 5월18일부터 21일까지 날짜별,시간대별로 주요 장소에서 일어난 일들을 상세히 기록했다. 앞으로 나올 하권에서는 5·18의 남은 기간과 그 뒤 벌어진 6월항쟁,광주청문회,문민정부 출범이후 5·18 처리등을 다루게 된다. 「아 아 광주여!이 나라의 십자가여」란 시로 유명한 김준태부국장등 5·18을 직접 겪은 기자 11명이 특별취재반을 이뤄 2년 6개월 넘게 뛰고 있다. 사회평론 1만원.
  • 서울신문에 미친 사회풍속도 세태 50년:Ⅱ(서울신문50돌 특집)

    ◎70년대/「보릿고개」 넘기자 미니스커트 상륙/비상계엄 후유증 「카더라 통신」 난무 70년대 70년대는 유신체제라는 스펙트럼이 처음부터 끝까지 국민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잣대로 작용했다. 유신체제는 우선 「우리도 한 번 잘살아보세」라는 새마을운동 노래로 국민들의 새벽단잠을 깨우며 다가왔다. 전국 농·어촌에 새마을기가 나부끼기 시작했으며 동남아시아 국가등 해외에서도 새마을 붐을 불러 일으켰다. 서울신문도 71년부터 정부의 본격적인 사업전개에 앞서 새마을가꾸기 선두부락을 소개하는 기획물 「번영을 가꾸는 희망가족 시리즈­의욕의 현지,북돋는 자립,땀흘린 보람의 합창」이란 고정컷으로 본지 최초의 새마을운동 기획물을 72년초까지 50회에 걸쳐 연재함으로써 이 운동의 확산에 큰 몫을 담당했다. 72년 3월24일자 사설에선 이 운동을 「농민들이 스스로 잘살기 위해 자조·자립·협동하는 정신의 계발」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70년 7월7일 경부·호남고속도로 개통에다 71년 3월31일 서울·부산 자동전화 개통은 「일일생활권」이라는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정부의 이러한 불도저식 경제 최우선 정책으로 국민들의 배고픔도 어느 정도 해결되기 시작해 국민들의 얼굴에 미소가 띠기 시작했다. 환해진 모습은 먼저 옷차림에서 띠였다.67년 가수 윤복희씨가 선보인 미니스커트는 73년에는 무릎위 17㎝위까지 올라갔을 정도로 그 길이가 짧아져 경찰이 경범죄처벌대상에 미니스커트 길이를 포함시켜 자를 들고 다니며 이를 단속하는 진풍경을 빚기도 했다.남자들의 긴 머리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생들을 비롯한 청년들은 청바지를 즐겨 입고 통기타와 생맥주로 이어지는 이른바 「청통맥문화」를 만끽했다.「사랑해」「왜불러」등의 포크송이 거리를 메웠으며 「아침이슬」「고래사냥」등 금지곡도 양산됐다. 72년 7·4 남북공동성명은 통일을 염원해 온 국민들에게 벅찬 감격과 흥분으로 소용돌이쳤다. 이날자 본지는 「피맺힌 4반세기…이제 전쟁은 사라지는가! 3천리에 벼락환성」「대화있는 남·북대결의 시대 열리다」라는 제목으로 당시 시민들의 반응을 실감있게 전하고 있다. 강하면 부러진다고 했던가. 70년 11월 13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며 근로조건개선을 요구하며 평화시장 교복공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전태일씨의 분신자살 사건은 이러한 고도성장 드라이브 정책이 필연적으로 맞을 수 밖에 없는 종착점을 예고한 사건과 다름 없었다. 72년 10월 17일에는 비상계엄선포로 국회가 해산되고 대학이 문을 닫고 신문·통신마저 사전검열을 받으면서 국민들은 「카더라 방송」「유비통신」으로 불리는 소문에 귀를 기울이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행정부의 시녀로 전락한 유신국회의원들이 장충체육관에서 「체육관 대통령」을 뽑는 「거수기」로 변한 것이나 비상계엄 아래서도 반체제 인사들의 저항과 민주회복운동,양심선언 등이 계속된 것도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사건을 예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유신정권은 「그때 그사람」이라는 노랫가락 속에 울린 몇발의 총성과 함께 79년 10월26일 막을 내렸다. 10·26사태 뒤엔 「한다면 합니다」란 말과 5·17후의 떡고물 얘기가 유행했다.부정축재자로 지목된 L씨가 자신은 떡(정치자금)은만졌으나 고물(부스러기돈)만 떨어졌다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70년대 종반은 79년 12월 12일 신군부의 군사반란에 이어 80년 5·17일 쿠데타로 또 다른 군사정권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80년대/“금융사기” 장영자에 “큰손” 조롱/테러범 김현희에 구혼 줄잇고/“탁치니 억하고 죽었다”엔 분노 79년 10월26일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을 뒤로 하고 80년대를 앞두고 있을 때만 해도 국민들은 비로소 「서울의 봄」을 맞게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79년 12월12일 이른바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탈취를 노린 신군부는 압제와 서슬 퍼런 군사독재의 시대로 80년대를 열고 있었다. 80년 5월17일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18일 군부독재 연장기도에 맞서 광주에서 발생한 항의시위를 공수부대 특전단을 동원해 총검으로 유혈진압하는 비극을 초래했다. 결국 신군부는 그해 9월1일 전두환 정권을 탄생시킨다.그리고 이날부터 TV에는 「땡전뉴스」가 등장하게 된다.9시 뉴스는 어김없이 『전두환 대통령께서는…』으로 시작됐던것이다. 80년 11월12일에는 언론통폐합과 언론기본법 등이 제정돼 기자들은 강제해직을 면치못했고 언론은 통폐합 됐다. 이같은 압제는 학생운동의 흐름에도 영향을 미쳤다.학생운동은 광주항쟁에서의 좌절을 계기로 반미라는 새로운 흐름으로 표출됐고 급기야 82년3월18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발생했다.이는 85년 서울·광주 미문화원 점거로 이어졌다. 82년 5월에는 장영자 금융사기 사건이 발생했다.6천억원대에 달하는 건국후 최대의 금융사기사건으로 이때부터 사람들은 씀씀이가 큰 사람을 「큰손」이라 일컫기도 했다. 분단의 아픔은 80년 대에도 지워지지 않았다.83년 9월1일에는 사할린 부근에서 항로를 이탈한 대한항공 보잉007기를 소련의 전투기가 공격,승객과 승무원 등 탑승자 2백69명 전원이 사망했고 그해 10월9일에는 서남아시아 순방에 나선 전두환 대통령을 수행하던 서석준 부총리 등 고위관리 13명이 미얀마 양곤의 아웅산묘소에서 북한공작원이 설치한 폭탄에 절명,분노를 자아냈다. 그같은 분노는 87년 6월 테러범 김현희가 대한항공 858기에 폭탄을 설치,1백51명의 승객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로 절정에 달했다.그러나 압송돼온 김현희의 미모에 반해 결혼하고 싶다는 남성들의 문의가 쇄도했다는 웃지 못할 뒷얘기도 남겼다. 87년 1월14일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도 시대의 아픔을 공유케 했다.「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발표는 폭력적인 공권력과 인권침해에 대한 국민적인 저항을 불러 일으켜 6·29선언을 낳게 했다.민주화를 염원하는 국민들의 요구에 굴복해 나온 이 선언은 후에 「죽이구」선언으로 회자되기도 했다. 이처럼 어두운 시대였지만 변화의 물결도 뚜렷했다.80년 컬러TV 시대가 개막됐고 82년에는 통행금지가 해제됐다.또 비디오문화가 새롭게 열리기 시작하면서 외설문화의 범람을 초래하기도 했다. 80년에는 또 대입본고사 폐지,대학정원의 졸업정원제 등을 내용으로 하는교육개혁조치와 함께 과외 전면금지가 단행 됐다.이에 따라 숨어서하는 과외가 성행,수백만원대의 과외풍조가 생겨났으며 「쪽집게과외」 등 돈으로 교육을 사는 세태를 낳기도 했다. 82년 중·고생 두발자율화,83년 교복자유화 등의 조치는 청소년들의 유흥업소 출입 등 많은 문제를 양산하기도 했으며 유니섹스모드의 유행을 가져오기도 했다. ◎90년대/3D기피 현상속 세계화 바람타고 외국어 수강 “붑” 93년 2월25일 제 14대 김영삼 대통령 취임과 함께 「문민정부」가 탄생했다.5·16 이후 30여년만에 민간대통령이 탄생한 만큼 90년대는 사회 모든 분야에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안으로는 금융실명제 등을 통해 사회개혁의 기치를 높이 드는 사이 49년간 북한을 통치해온 김일성이 사망하고 김정일체제가 들어서는 등 안팎으로 많은 소용돌이가 있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90년대를 특징짓는 함축적인 표현은 이른바 「X세대 문화」다. 뒤돌아볼 겨를 없이 성장가도를 달려온 부모·선배 세대가 만들어 놓은 과실을 향유하는 신세대들의 시대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개인주의적이고 향락주의적이라는 부정적인 측면과 함께 개성적인 새대라는 의식이 공존 한다.알아들을 수 없는 「랩」을 흥얼거리며 록카페를 드나드는 「오렌지족」인가 하면 마음만 먹으면 배낭하나 덜렁 메고 유럽이고 미국이고 가고 싶은 곳은 어디라도 찾아나서 모험을 즐기기도 하는 세대들인 것이다. 컴퓨터 없이는 아무 것도 할수 없지만 정보화시대를 앞당기며 국제화와 세계화를 이끌 첨병도 바로 그들이다. 젊은이들의 문화가 인간성 상실로 인한 황금만능주의와 개인주의적 대중문화의 병폐를 양산하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컴퓨터나 외국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30∼50대 「컴맹세대」가 느끼는 세대간의 문화적 격차일 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수대교 붕괴사고,서울 아현동 가스폭발사고,삼풍백화점 붕괴 등 90년대 들어 빈발하고 있는 대형사고들은 선배세대들의 부정적 부산물일 뿐이며 그점에서 그들은 오히려 피해자인 것이다. 하지만 즐기는 신세대로서의 그들은 3D 기피현상이라는 어두운 한 단면을 90년대에 그려내고 있기도 하다.「고학력 구직난,저학력 구인난」현상과 외국인근로자의 양산도 바로 그들의 시대를 특정짓는 모습들이다.
  • 창설 50돌에 돌아본 위상/문민시대 「민생·치안경찰」로 거듭나다

    ◎6·25때 공비 토벌·전후복구에 앞장서/자유당땐 「시녀」 오명… 지탄대상되기도/91년에 경찰청으로 독립… 중립성 확보 지난 반세기 한국 경찰은 시대와 정치상황에 따라 명암과 영욕이 엇갈린 발자취를 남겼다. 45년 해방과 함께 「군정경찰」로 출범한 경찰은 6·25전쟁 당시 「구국·호국경찰」로서 멸공전선과 공비토벌에 참여했다.자유당시대 4·19의거때는 「권력의 시녀」라는 오명속에 파출소가 습격당하는 수난도 겪었다.60년대 이후 권위주의 군사정권 시절에는 화염병의 표적이 됐고 국민들의 민권의식이 높아지면서 인권유린과 과잉수사를 비난하는 지적도 받았다.86년 청사독립에 이어 91년 기구독립으로 개혁의 전기를 마련한 경찰은 갈수록 늘어나는 민생치안의 수요속에서 신뢰받는 경찰상을 주민 생활에 뿌리내리는데 힘을 쏟고 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서구식 경찰제도와 「경찰」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1894년 갑오개혁때였지만 일제 식민지 통치로 경찰제도가 단절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해방 2개월뒤인 45년 10월21일 미군정청경무국으로 출범한 한국 경찰은 이듬해인 46년 1월16일 경무부로 지위가 격상되면서 조직도 확대,개편된다.3만6천여명의 적은 인원과 보잘것 없는 장비였지만 미군정 당국은 「민주경찰」 「민중의 지팡이」 「봉사와 질서」를 구호로 내걸었다.정부수립이전 과도기 성격의 경찰은 좌우익 싸움과 공산테러 등으로 어수선한 치안을 유지하고 국군창설이전 국방임무를 맡는 등 「건국경찰」의 면모를 보였다. 정부수립직후인 48년 9월2일 정부조직법이 제정되면서 경찰조직은 내무부 치안국으로 격하 조정,본격적인 「국립경찰」시대를 맞았다. 6·25 전쟁때는 국군과 함께 전선을 맡으면서 후방지원과 전시치안 임무도 동시에 수행했다.전쟁동안 3천1백61명이 희생됐지만 9만2천8백여명의 적을 사살하는 공을 세웠다.전후에는 공비토벌에 투입돼 전쟁의 상흔을 회복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53년부터 시작된 경찰관계법령의 통·폐합작업으로 비로소 경찰기구의 정비·개편과 행정합리화에 눈길을 돌릴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자유당시대의 경찰은 지나친정치편향으로 본연의 임무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특히 정권과 밀착,3·15부정선거에 개입하고 4·19의거 당시 시위군중에 발포하는 역사의 오류를 범하기에 이르렀다.그 결과 4·19의거후 중견간부급이상 4천5백여명이 숙정되는 비운을 감수해야 했다.신뢰와 권위가 실추된 경찰은 질서유지 임무가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경찰 중립화」가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5·16군사혁명 이후 경찰 내부에는 최고책임자에서부터 중간관리층까지 군인이 주요 보직을 장악하고 군장교출신이 경찰직에 특채되는등 부정적인 변화가 나타났다.그러나 혁명이후 60년대를 거치면서 경찰의 행정관리는 차츰 선진국의 현대적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해 경찰발전의 전환점을 맞았다.경찰본연의 임무를 찾아 「봉사경찰」 「보호경찰」로서 실질적인 국민편의 기능을 수행하는데도 노력을 기울여 나갔다.66년 7월 「경찰윤리헌장」에 이어 69년 1월 「경찰공무원법」이 제정되면서 민주경찰을 지향하는 출발점과 직업공무원제도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제3공화국 이후 권위주의정치체제를 유지하려는 정치권의 「외풍」과 함께 북한의 도발이 격화되면서 경찰은 대공간첩섬멸과 반정부시위 진압이라는 두가지 기능에 얽매이게 된다.「민주·민생경찰」이라는 기능을 수행하는데는 한계가 뚜렷할 수밖에 없었다. 74년 8월15일 문세광 저격사건을 계기로 고유기능 회복과 조직 활성화 차원에서 같은해 12월 치안국이 치안본부로 승격되고 본부장 직급도 차관급으로 격상됐다.그러나 현역 육군중장이 예편,본부장으로 보임함으로써 내부에선 자성의 계기를 맞는다. 10·26사건으로 제5공화국이 들어선뒤 학생·재야의 반정부시위가 박종철군 변사사건,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지면서 경찰은 국민으로부터 「체제·공안경찰」로 낙인찍힌다. 이와함께 80년대를 거치면서 강력·조직 범죄의 급증으로 국민들의 체감치안은 갈수록 악화됐고 이에 따른 민생치안 수요도 급증했다.90년 「범죄와의 전쟁」을 치른 경찰은 문민정부가 출범한 뒤에야 종래 「체제·공안경찰」의 오명을 벗고 「민생·치안경찰」로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했다. 경찰의 정치중립성에 대한 논란도 계속돼 91년 5월 경찰법 제정으로 내무부 보조기관이 아닌 외청형태의 경찰청이 발족하기에 이르렀다.경찰이 내부 인사권과 인력·장비·예산 등에 대한 독자적 기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기구독립과 더불어 기존의 「경찰윤리헌장」을 「경찰헌장」으로 개정,국민의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생활경찰」상을 15만 경찰의 실천덕목으로 제시했다.올해 지방자치제 도입으로 또다시 변화와 도전의 시기를 맞은 경찰은 무엇보다 자치단체와 원만한 협조속에 주민생활의 고충을 적극 해결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 역대경찰총수들 어떻게 지내나/내일 경찰창설 50돌 계기로본 근황

    ◎총 48명 배출… 초대 조병옥 국장 등 13명 타계/정계진출 5명 제외,거의 취미생활로 소일/「박종철 고문 사건」의 강문창씨 칩거생활/내무장관 지낸 안응모씨 왕성한 사회활동/「경찰청 세대」 4명은 등산·여행·독서 즐겨 오는 21일은 경찰창설 50주년이 되는 날이다.경찰창설은 지난 45년 미군정청산하 경무국으로 출발한 날을 그 기산점으로 잡고있다.그래서 정부수립보다 3년이나 앞선다.국립경찰은 해방후 좌·우익 갈등과 6·25전쟁이라는 역사의 격랑속에서,그리고 자유당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변의 사회상황아래 「정권과 국민」「법과 인권」사이에서 갈등을 거듭하며 성장해왔다. 국방부장관 다음으로 많은 「식솔」을 거느린 경찰총수 역시 이같은 현대사의 굴곡에 따라 경무국장·경무부장·치안국장·치안본부장·경찰청장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부침을 계속했다.미군정하의 초대 경무국장 조병옥 박사부터 그동안 총수에 오른 사람은 모두 48명.이 가운데 김태선(3,5대),박영수(22,25대)씨등 2명이 두차례 역임해 현 박일룡 청장이 제50대이다. 평균 재임기간은 1년 남짓.정권별로는 3공화국때가 평균 1년2개월로 비교적 길었고 자유당시절이 10개월20일로 제일 짧았다.최장수는 33대 김성주씨로 2년11개월동안 재직했고,6·25발발당시의 4대 장석윤씨가 30일로 최단명 경찰총수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이들 전직 경찰총수가운데 13명이 운명을 달리했으며 정치에 입문,국회의원이나 지구당위원장이 된 5명을 빼고는 대부분이 일체의 공직및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취미생활로 소일하고 있다.정치인으로 변신한 이는 27대 정상천,36대 유흥수,38대 이해구,41대 이영창,43대 조종석씨등 5명이다. 18세때 황해도에서 단신 월남,22세때 순경으로 경찰에 투신한지 꼭 30년만에 37대 경찰총수가 된 안응모씨는 아직도 경찰내에선 입지전적인 인물로 통한다.안씨는 이후 충남지사,청와대 정무2수석,안기부1차장,내무장관에까지 올랐다.지금도 지난 93년부터 맡은 한국자유총연맹 사무총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경찰간부후보생 11기가운데 처음으로 총수에 오른 40대 강민창씨는 재임 1년만에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으로 옷을 벗었고 퇴임 1년후 뒤늦게 박군 고문치사 은폐조작사건이 폭로돼 구속됐다 1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뒤 지금까지 친지방문과 독서등을 하며 칩거생활를 하고 있다.87년6월 「6·10민주항쟁」당시 총수를 맡아 군부의 개입을 적극 저지했던 일화를 남긴 42대 권복경씨도 퇴임후 일체의 공직을 맡지 않고 난초가꾸기와 등산·골프 등 취미생활을 즐기고 있다. 한편 내무부산하 치안본부에서 경찰청으로 독립한 지난 91년8월이후 청장을 역임한 김원환·이인섭·김효은·김화남씨 등 4명도 특별히 하는 일없이 등산·여행·독서등을 즐기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 음악평론가 박용구(이세기의 인물탐구:80)

    ◎「열린 시각」으로 「평론 외길」 50년/음악·무용 비롯,모든 문화분야 탁발한 이론 전개/「음악 교육론」… 일제가 말살한 우리 정서 부활 노력/저서 「교양의 음악」은 클래식 음악감상 지침서로 유명 「미를 위해서는 깨뜨릴수 없는 규칙이란 없다」.이는 베토벤의 말이다.또 입사 박용구의 좌우명이기도 하다.「미를 창조하기 위해 무엇을 파괴해도 아깝지 않을만큼」그의 의식과 사상은 줄기차게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있었고 언제나 「열린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음악계는 말한다.「그것은 예술가 특유의 삶에 대한 위기의식과 긴장 탓」이며 「긴장이 자유를 향한 끈질긴 집념이라면 그에게 있어 자유란 예술자체이자 삶자체」일 것이다. 「박용구는 해방공간으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50여년동안 계속해서 활발한 평론활동을 벌여온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이는 작곡가 이건용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가 92년 「낭만음악」(여름호)특집 「작가연구」에서 밝힌 말이다. 같은 글에서 이교수는 「50년에 이르는 평론활동은 우리나라 음악사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며 「잡지나 신문들이 일정한 평론가에게 그 긴기간동안 계속적으로 원고청탁을 하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다」라고 짚고 있다.또 「음악과 무용정도의 범위가 아니라 그는 예술문화를 제한없이 드나들며」『논리전개도 상당히 분방하고 자유로운 필치,때로는 대담한 직관과 상상력에 따라 논조와 사안별로 관심의 소재가 변하는 「논리에 입각한 비평가라기 보다 감각에 의한 비평가」』라고 결론짓는다. ○예술계의 팔방미인 실제로 그가 우리 문화예술에서 점하고 있는 영역은 넓고 깊고 다양하다.그래서 예술에 관한 한 그를 「팔방미인」이라고 부르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음악펜클럽 예술평론가협의회 유니세프문화예술인클럽을 비롯하여 최근의 국제적인 세계무용연맹(WDA)도 그가 주관하는 단체이고 그가 쓴 「춘향가」「줄리아」「님의 침묵」등 수많은 작품들은 교향시·오페라로 작곡되어 호평받은바 있다. 과연 그의 평문은 어느 지면에서나 탁발한 이론을 유창하게 전개하면서 도저한 주관을 꿋꿋하게 지키는 것이 특징이다.해방직후 발표한 「아동음악 교육론」은 「일제의 문화정책 말살로 불식된 우리 고유의 민족적 음악감수성을 아동음악 교육으로부터 키워야 한다」는 제언이었고 전5권으로 펴낸 「교양의 음악」의 경우는 클래식음악팬의 음악감상을 위한 지침서일 뿐만 아니라 음악지망생과 음악관계 전문가들에게 「풍부한 정보」와 「해박한 지식」을 섭취시킨 교과서이기도 했다. 「예술가란 어느 시대에서나 환경의 도전자요,권위의 파괴자로서 선구자적 역할을 해야한다」고 역설해온 그는 60년대말 12음기법의 창시자인 쉔베르크 도형악보의 존 케이지·베베른·베르크와 슈톡하우젠에 이르는 실험적인 현대음악을 우호적으로 수용하는가 하면 당시 새로운 사조에 편승한 윤이상·백병동·강석희·황병기 등의 전위작업을 「선구자적 도전 정신」으로 평가하여 작가들의 시대정신을 크게 북돋워주었다.「공간」지에 발표한 일련의 「작가론」에서 특히 백병동을 향해 「음악으로 말할줄 아는 소중한 사람」 또는 「그 노여움이 화염이 되어 역사의 밤을 밝히도록 기대한다」고 감싼 것도그런 맥락에서다. ○한약방집 네째 아들 그의 녹슬지 않는 사회정의감은 87년 6월항쟁과 88올림픽이 끝난후 「예총」에 대한 역할회의론이 일어났을때도 「예총도 뉘우쳐야 한다」는 글에서 심장한 어조를 멈추지 않는다.그는 「예총이 해야할 일은 하지 않고 정권의 시녀노릇만 하고 있다」고 감연히 지적했고 「예총은 절대로 순수하지 않고 결코 지성인의 모임도 아니며 그 체질은 다만 편견과 독선에 차있다.예총이 이념공동체라면 우선 문화예술인들의 정신적인 삶의 조건인 「자유」를 수호하는 일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집단체여야 하지 않는가」라고 안일에 빠져있던 문화예술계의 분발을 촉구했다. 그가 어릴때 소망한 것은 「독립투사」가 되는 일이었다.그러나 독립투사의 조건은 「강인한 인내력과 행동력」이었으나 그는 「불행하게도 이 두가지 강점을 하나도 지니지 못하여」 그때부터 자유롭게 예술을 논하는 사람이 되었고 「무엇이 되고자 하기보다 많이 알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일본체류 기간동안은 주로 「단사들과 더불어 담예논도에 심취」하는 세월을 만들어 나갔다. 도쿄시절의 입사에 대해 건축가 김수근의 회상은 이런 흔적을 진하게 뒷받침해준다.「그는 예술순례를 주도하는가 하면 예술과 문화전반에 걸쳐 밤을 새워가며 격론을 벌이던 모임에서 항상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더구나 「누구보다 철저한 자유주의자로서 한치도 후회함이 없는 그의 사회정의감과 예술분야에 임하는 지성인의 자세는 당시 유학생들의 귀감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의 인생항로는 남보다 파고가 거세고 파란이 심한 편이었다. 경북 풍기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던 박은식씨의 7남매중 넷째로 태어난 그는 보통학교 졸업후 조부의 고향이던 평양으로 가서 평양고보에 진학,5학년이 되던해 독서회를 조직한 일로 왜경에 검거되었고 농촌운동에 관심이 컸으나 부친이 부농인 것과 상반되어 이 마저 포기한채 일본에 밀항했다.일본고등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다가 이 역시 체질에 맞지않아 일본의 「음악평론」사에 입사한 것이 음악·무용가가된 계기가 된다. 광복후 조국에 돌아와 첫 평론집 「음악과현실」을 출간,초판이 보름만에 팔려나가는 이변을 보였으나 월북 음악가를 거론했다는 이유로 재판부터 판금조치를 당했고 이와 관련하여 그는 다시 50년대를 일본에서 보내지 않으면 안될 수난의 역사를 되풀이 할 수 밖에 없었다.정처없이 떠돌던 자신의 「끝없는 파란」과 「방랑」을 「방랑시인 김삿갓」에 비유하여 스스로 삿갓 입자를 쓴 「입사」란 호를 지어 가진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창작희곡 집필 몰두 창작희곡집 「흙비」 후기는 그의 솟구치는 앙양과 침정을 요연하게 드러내는 고백성사와도 같다.「나는 성깔부터가 적을 사랑하라는 박애주의자가 되지 못함을 알고 있다.사랑해야만 할 것이 있기 때문에 미워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있었다.여기의 작품들은 사랑에서 보다는 미움으로 해서 쓰여졌는지도 모른다.그만큼 내 생애는 미움에 찬 세월이었다.마음의 눈은 항상 핏발이 서 있었다」고 처연한 심정을 글귀마다 담고 있다. 그는 82세의 나이와는 걸맞지 않게 모든 사고방식은 활짝 열려있고 목소리는 낭랑하며 행동은 반듯하다.그가 살고있는 세검정 세이장은 20여년전 건축가 김수근씨가 설계한 트롬본처럼 말려올라간 예술주택으로 요즘은 지난해 가을 문예중앙에 발표한 「바리데기」후속으로 우리 「무가」의 원천사를 집대성한 방대한 창작희곡 집필에 들어가 있다.그만이 남길수 있는 단테의 「신곡」 못지않은 명작에의 도전이라는 각오다.가족은 남매는 모두 출가하고 부인 정덕미 여사와 둘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기를 원한다.그의 주장대로 「자유롭게 생각하며 살고자하는 염원조차 허용되지 않는다면 예술미의 창조는 요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그러나 어떤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가 원한대로 언제나 「멋대로」 흘러왔으며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처럼 「우리 모두가 별이 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지금도 굳게 믿고 있는것 같다. 「예술자체이자 삶자체인 자유가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한」그는 「가장 선한 장엄미 건축을 위해」 그의 멋과 자유를 파괴하는데 아무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그런 순간을 위해 예술관조의 형안도 끝내 그 빛을 잃지 않을것이다. □박용구 연보 ▲1914년 경북 풍기출생 ▲33년 평양고보졸업,도일,일본대 예술과 입학 ▲37년 일본고등음악학교 졸업,일본 「음악평론」사 입사 ▲49년 첫 평론집「음악과 현실」(민교사)출간,도일 ▲50∼60년 일본 도쿄 고마키(소목)발레단 문예부장 ▲52년 일본 「배우좌」연출공부 ▲62년 서울음악평론동인회대표간사 ▲66∼68년 예그린악단단장 ▲70∼76년 공간사주간·운영위원 ▲76년∼현재 음악펜클럽 회장 ▲81년∼현재 예술평론가협의회회장 ▲83년∼현재 채동선기념사업회장 ▲86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기획단장 ▲88∼94년 방송문화진흥회이사장 ▲93년∼현재 세계무용연맹 발족(WDA),한국본부 회장,은관문화훈장 ▲94년 창작희곡 「바리데기」(문예중앙 가을호)발표 ▲95년 세계무용연맹 창립총회및 아시아 태평양센터주최 국제무용페스티벌(KIDE)개최 「음악의 별들」(어문각 48년) 「음악입문」(박문출판사) 「음악과 현실」(일지사 49년) 「교양의 음악」전5권(창조사 69년) 「음악의 주변」(창조사 70년) 「음악의 광장」(일지사 75년) 「불멸의 음악가들」(일지사) 「음악의 세계」(계몽사) 「음악이 만나는 자리」(일지사 77년) 「음악의 문」(청한문화사 81년) 창작집 「흙비」(해보라 기획 85년) 「오늘의 초상」(일지사 89년) 「명곡과 명인들」(세광음악출판사) 「어깨동무라야 살아남는다」(지식산업사 95년)출간외 논문 무용극본「님의 침묵」 「바리공주」 오페라극본「춘향가」 「줄리아」등 다수
  • 「5·18 불기소」 헌법소원/피해자 가족 등 3백명

    정동년씨를 비롯한 5·18 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 가족 등 3백22명은 24일 『검찰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5·18관련자 35명을 모두 불기소 처분한 것은 부당하다』고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다. 이들은 청구서에서 『5·18 정변은 성공한 쿠데타가 아니고 87년 6월 항쟁에 의해 이미 실패한 것으로 역사상 평가되고 있다』면서 『문민정부 아래 새로운 국민적 시각을 반영,올바른 평가를 내려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재판권 없음이 명백한 경우가 아니라면 재판절차에서의 진술권을 침범하면서까지 「공소권 없음」결정을 내리는 것은 검찰권의 남용』이라고 지적하고 『공소권의 존재 여부는 마땅히 법원의 판단에 맡겨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들은 이밖에 검찰이 이 사건 공소시효의 기산점을 최규하 전 대통령이 하야한 80년 8월 16일로 잡은 것과 관련,『81년 4월 제25차 국가보위 입법회의가 끝난 시점이 내란죄의 범죄행위 종료시점이므로 공소시효는 내년 4월까지』라고 주장했다.
  • 장을병 전성대총장 「중부권 개발연구모임」 세미나 주제발표

    장을병 전성균관대총장은 10일 상오 여의도의 한 빌딩에서 열린 민자당 「중부권개발연구모임」(회장 송천영 의원)초청 세미나에서 지방선거결과 나타난 지역할거주의와 내각제개헌주장을 강도높게 비판했다.이날 세미나에는 송천영 의원을 비롯,노승우 김범명 구천서 이순재 송광호 김기수 김두섭 송영진 김찬우 곽영달 의원등 민자당의원들이 참석했다.다음은 장 전총장의 주제발표요지다. 이번 지방선거는 민주주의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완전 실패했다.결과는 3김시대의 재현과 지역할거주의의 고질적인 행태를 재현했다.지방자치가 잘돼야 민주주의가 그 뿌리위에서 성장할 수 있는데 이번 선거는 지역감정으로 완전 실패했다.3김씨들이 자신들의 지역에서 싹쓸이한 선거결과는 봉건영주들에 의한 할거적 체제로 밖에 볼 수 없다. 특정지역 싹쓸이와 지역이기주의를 방지하기 위해 구국적 차원에서 국회의원선거구를 3∼5인을 선출할 수 있도록 바꿔야 한다.소선거구제하에서는 지역이기주의를 조장할 수 밖에 없으므로 구국차원에서 반드시 국회의원선거구제를개정해야 한다. 5·16쿠데타당시 내각제를 비난했던 김종필씨가 이제 와서 내각제를 주장하는 것은 논리상 일관성이 없다.또 내각제는 6월 민주항쟁정신을 정면 거부하는 것으로 이를 인정할 수 없다.국민과 나라를 위한 개헌은 반대하지 않지만 특정인을 위한 개헌은 절대 있을 수 없다. 김대중 아태재단이사장은 지역감정의 피해자인 줄 알았는데 「지역등권론」을 제기해 지역감정을 부추긴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자신의 필요에 의해 만든 민주당을 버리고 필요에 의해 또다시 당을 만들겠다는 것은 몰염치한 행위다.또 떳떳이 전면에 나서지 못한채 2선에서 「김심」이라는 것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떳떳하지 못하다. 프랑스 정치를 「죽은 자가 산 자를 지배하는 정치」라고 지칭하지만 전면에 나서지 못하는 「김심」은 떳떳하지 못하다.그가 대선패배를 시인하며 눈물을 흘릴 때는 공감했지만 지금은 남의 눈물까지 훔치는 꼴이다.「김대중 죽이기」라는 책을 볼 때 제도권언론의 잘못이 크다고 봤는데 이번에 드러내놓고 지역감정을부추기는 것을 보고 당연하다고 생각한다.상징적으로 광주시장만이라도 민주운동세력을 내보냈어야 했다.이념이나 정치를 매몰해 모든 것을 망치는 망국적인 지역감정은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30년만에 지자제를 실시하는 마당에 쿠데타로 민주주의와 지방자치를 말살했던 김종필씨가 재등장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40대 기수론을 제기한후 25년동안이나 3김시대가 계속되고 21세기초까지 자기가 하겠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이제 정치판을 새로 짜야 한다.
  • 「5·18묘역」성역화 내년마무리/광주항쟁 15돌…기념사업 중간점검

    ◎희생자 묘 1백61기 이상… 역사교육장으로/옛상무대 자리에 시민공원 조성 공사 한창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올해로 15주년을 맞는다. 5·18 관련단체 등은 지금도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을 주장하지만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시작된 기념사업은 차분히 추진되고 있다. 김영삼대통령이 취임 첫해인 지난 93년 「5·13 특별담화」를 통해 밝힌 기념사업의 주요내용은 ▲5·18 묘역의 성역화 ▲전남도청자리에 기념공원조성 및 기념탑건립 ▲옛 상무대에 시민공원조성 등이다. 5·18 15주기를 맞아 광주시가 추진하는 기념사업을 점검해본다. ◇5·18묘역 성역화=모두 1백14억원을 들여 지난해 11월 공사에 착수,5·18묘역 바로 뒤 야산에 5만1천평의 새로운 묘역을 조성하고 있다.내년말 완공을 앞두고 현재 기반조성공사가 마무리되는 등 30%의 공정을 보이고 있다. 3천평규모의 묘역과 유영봉안소(2백평)·기념관(2백50평)·관리사무소 등을 짓고 위령탑·부조벽·조각물 등 각종 조형물을 설치할 계획이다. 묘역을 진입·참배·묘역·체험공간 등으로 나눠구성,이곳을 「민주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사업이 끝나면 내년 하반기 5·18관련 사망자 1백31명과 시국관련 사망자 31명 등 총 1백61기를 새 묘역으로 옮긴다. 광주시는 ▲주차공간 8천평 추가확장 ▲묘역주변을 지나는 도로폐쇄 및 우회도로건설 ▲무등산조망권을 가로막는 인근 송전철탑이설 등 「5·18유족회」 등 관련단체의 주장을 받아들여 설계에 반영할 방침이다. ◇전남도청부지 기념공원=5·18 당시 항쟁의 현장이었던 광주시 동구 광산동 전남도청자리 4천11평에 오는 98년까지 모두 2백50억원을 들여 기념공원과 기념탑을 건립한다. 이를 위해 최근 전남대 지역개발연구소에 5·18기념사업 종합계획에 대한 용역을 의뢰했다.결과가 나오는 오는 9월20일쯤 기념탑과 공원 등 공간배치물을 확정할 방침이다. 구체적 기념사업일정은 전남도청의 이전계획이 확정된 뒤 결정한다. ◇옛상무대 시민공원조성 및 기념일제정=「5·13」 담화에 따라 정부가 무상으로 양여한 옛상무대자리 5만평에 5·18시민공원을 조성키로 하고 지난 1월 기반조성공사에 착수했다. 오는 97년6월까지 부지중 8천평에 당시 시민이 끌려가 고초를 당한 군 영창(1백53평)과 군사법정(68평)을 원형 그대로 옮겨 보존하고 추모관도 건립한다. 한편 광주시가 5·13 담화직후 시의회에 제출한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에 관한 조례안」은 계류중이다.광주만의 기념일을 제정할 경우 5·18이 자칫 「지역화」될 것으로 우려돼 시의회가 심의를 늦추기 때문이다. 또 4·19국립묘지승격에 이어 5·18묘역도 국립묘지로의 승격이 추진되고 있다.
  • “9개도 없애면 한해 1조4천억 절감”/국회 대정부 질의·답변

    ◎“용수부족은 수자원 관리정책 부재탓”/질의/“신문증면 경쟁에 용지 연30만t 부족”/답변 ▲김영광 의원(민자당)=세계화는 총론만 있고 각론은 없는데 우선 올해 추진할 계획은 무엇인가.북한이 한국형 경수로를 반대하면 한푼도 부담해서는 안된다.재벌기업들의 무분별한 대북경협을 조정하라. 6월의 지자제선거는 예정대로 실시하겠지만 시·군·구까지 정쟁의 볼모로 만드는 정당공천제도가 시대적 요청에 부합되는 것인가.행정계층 축소와 구자치제도의 개편은 시간상 할 수 없다 하더라도 도·농통합 및 경계조정은 선거전에도 가능하다고 본다.여야는 국익을 먼저 생각하고 적극 대화에 나서야 한다.지방선거를 공명정대하게 치르기 위한 정부의 의지와 대책은 무엇인가. ▲허경만 의원(민주당)=지방자치선거를 불과 4개월 앞둔 시점에서 지자제 관계법을 개정하려는 것은 정치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공작의 하나가 아닌가.대통령은 선거전에 행정구역개편을 국회에서 논의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이는 선거전에는 개편을 하지 않겠다는 뜻인가,아니면 선거전에 날치기를 해서라도 개편하겠다는 말인가.광주와 전남·북의 재정자립도가 최하위인 상태에서 지역감정이 완화될 수 있다고 보는가.5·17 군사반란사건을 또다시 기소유예처분할 것인지 밝혀라. ▲유성환 의원(민자당)=세계화와 지방화에 맞도록 헌법을 재정비할 의향은.대통령 임기와 국회의원 임기와의 불균형을 시정해야 한다.거듭되는 선거로 국력이 약화될 우려가 있다.법률서비스는 공급자인 법조계가 아니라 수요자인 국민을 위한 방향으로 개혁되어야 하는데 현행사법제도 개혁에 대한 정부측 방침은.불합리한 전관예우의 관행은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집달관 감독과 운영체계 전반을 개선하고 집달관 비리를 척결하기 위해 특별감사에 나서라.국제화에 대비한 법조인 양성방안과 국제범죄에 대한 외국과의 협조체제 구축실태 및 추진계획은 무엇인가. ▲이해찬 의원(민주당)=여권은 지방선거를 연기하려다 안기부문서가 공개되자 이를 포기하고 기초지역의 정당공천을 없애는 쪽으로 전술을 바꾼 것으로 알고 있다.대통령은 지방자치의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지난해 개혁입법이라고 성대하게 행사를 치르며 법을 공포한 사람은 누구인가.서울과 5개 광역시를 준자치구화하자는 주장은 당선된 시장들을 허수아비로 만들겠다는 발상이 아닌가.인구가 10만도 안되는 시골의 군수는 뽑고 행정이 복잡한 도시의 구청장은 뽑지 않는게 지자제의 이치와 정신에 맞다고 생각하는가. ▲남평우 의원(민자당)=비경제분야의 정부조직개편과 지방행정구조및 구역개편에 대한 총리의 견해를 밝혀라.지난 7일 민자당 전당대회때 김영삼대통령이 「안정의 기조위에 지속적 개혁」을 언급했는데 「변화와 개혁」과의 차이점과 이에 따르는 정책기조의 방향은 뭔가.공직자 부정비리 근절과 처우개선책은.차상급자의 1일 점검체계에 대한 연대책임제가 형식에 치우치고 있는데 이를 보다 강화할 용의는.공무원의 생활급 보장에 대한 총리의 견해는.국가고시제도개혁방안에 대한 견해는.공조수사체계의 허점과 광역수사단의 운용실태를 밝혀라. ▲이윤수 의원(민주당)=지방선거의 본질을 훼손하려는 것은 전두환정권의 4·13호헌조치와 다를 바 없으며 6월항쟁과 같은 국민저항에 직면할 것이다.대통령의 단임제 표명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중임제 개헌논의가 여권일각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은 장기집권음모를 획책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닌가.극심한 물부족 현상은 겨울강수량이 적어서가 아니라 현정권의 수자원 관리정책 부재가 빚어낸 예고된 재해다.돼지머리 놓고 기우제를 지낼 것이 아니라 국민이 안심할 항구적 대책을 밝혀라. ▲현경자 의원(신민당)=현대사는 건국­근대화­민주화­복지통일화­세계화의 단계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패권주의국가의 「세계화」보다는 우선 함께 고루 잘사는 「복지통일시대」의 실현을 국정지표로 삼아야 한다.행정구조개편논의는 지방선거의 정치적 의미를 탈색시켜 여권후보에게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저열한 책략에 불과하다.김영삼대통령은 3당합당 때의 내각제 개헌약속을 일방적으로 깨고는 공작정치로 몰아붙였다.총리는 대통령에게 「진실과 신의에 바탕한 정치」를 직언할 용의는 없는가. ▲손학규 의원(민자당)=현재의 다단계 중층적 행정구조는 많은 비효율과 낭비를 초래하고 있다.다단계 행정구조를 단순화해야 하며 행정구역의 합리적 조정과 철저한 분권화가 실현된 행정체계가 필요하다.도단위 행정구역은 폐지하는 대신,시·군을 확대개편한 단일 자치단위를 구성해야 한다.이를 위한 법적 제도적 준비사항과 애로사항을 제시하라.수도권을 세분화하고 중앙정부 직할의 「광역수도권위원회」(가칭)를 구성,광역행정업무를 관리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대도시 자치구의 준자치단체화와 기초자치단체 정당공천 배제등은 선거전에 개편해야 한다. ▲이홍구 국무총리=공명선거를 위한 정부의 의지는 확고하다.불법과 부정에 대해서는 여야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단하겠으며 부정을 저지른 후보는 끝까지 추적해 법의 심판대에 세우겠다.기초지방선거의 정당공천배제나 행정구역개편문제는 1차적으로 정치권에서 검토해야 할 사안이므로 국회에서 먼저 논의해 주기 바란다. 지방재정의 불균형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새로운 세원을 개발하거나 비과세 대상을 축소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국가보안법은 북한의 대남전략이나 한반도 안보상황의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그 골격을 유지해야 한다.세계화의 걸림돌로는 보지 않는다.한국노총의 정치활동은 현행법에 명백히 위배되는 행위이므로 법에 따라 엄단하겠다.세계무역기구(WTO)출범에 따른 법률수요의 폭등에 대비,법조인 양성제도를 대폭 개선하겠다.이를 위해 3월부터 공청회를 통해 각계의 의견을 수렴한 뒤 5월안에 사법제도 개혁안을 마련하겠다.변호사의 전관예우 관행을 근절하는 데 개혁의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사법시험및 법학교육 개편 등 국가고시제도에 대한 구체적인 개선책을 5월에 발표하겠다. 안기부의 지자제선거 연기검토 문건과 관련해 유사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직무활동 범위를 보다 명확히 하겠다.공명선거 의지에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일선 행정기관에 대한 지도감독을 철저히 하겠다. ▲나웅배 통일부총리=북한에 지원할 경수로는 한국 표준형이어야 하며 우리측이 설계와 건설·물자조달에 있어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게 정부의 확고한 방침이다.북한이 한국형을 거부하고 있으나 결국 대안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남북경협의 초기단계에서 일부 기업이 시범사업의 범위를 넘어선 사업을 북한측과 합의하는등 과열현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실제로 금품을 제공했는지 여부는 확인된 것이 없다.기업 스스로가 자율적으로 질서를 잡을 것으로 기대한다. ▲김용태 내무부장관=경기도의 지방선거 출마후보자 동향파악과 관련해 내무부는 전국 시·도지사에게 여론조사나 출마예상자 동향파악을 엄금하도록 지시했다.내무부가 경기도에 동향파악자료를 파기하도록 지시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이 사건을 처음 보도한 중부일보나 광고주에 대해 어떤 조치도 취한 사실이 없다.지역당정협의는 중단하지 않을 방침이나 선거개입소지가 없도록 만전을 기하겠다. 도를 폐지하는 대신 시·도를 확대개편하는 것은 학계에서도 제안한 바 바람직스러운 안으로 검토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도를 폐지할 때 3천1백여개의 법률과 시행령을 정비해야 한다.9개 도를 없애면 6만2천여명의 인력,1조4천억원의 예산이 절감되나 개편내용에 따라 그 규모는 달라진다.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절감보다 시간 절약이나 물류비용의 절감등 간접효과가 더 크다.기초선거의 정당공천 배제문제는 정치권에서 종합 검토해야 할 사안이다. ▲안우만 법무부장관=5·18사건 관련자에 대한 사법처리 여부는 현재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상태여서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않고 있다.다만 12·12사건에 대한 기소유예처분은 사회안정과 국가발전에 미칠 영향등을 숙고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5·18관련수사를 빠른 시일안에 종결하도록 하겠다. ▲오인환 공보처장관=언론사의 증면경쟁과 무가지 살포의 폐해가 매우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정치·경제·사회·환경분야의 후유증이 따를 것으로 예상된다.보도되지는 않고 있으나 언론사간에 가장 심각한 현안이다.신문용지부족으로 지난해 15만5천t을 수입했으나 올해에는 30만t을 수입해야 할 상황이다.금액으로는 2천억원에 이른다.신문용지 부족현상은 특히 지방신문·주간신문등 군소언론사에 타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과당경쟁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발행부수공사제도(ABC)의 시행이 시급하다.다행히 새해들어 ABC협회가 인증위를 구성하고 새 회장을 선출해 중립성을 둘러싼 시비를 해소할 수 있게 됐다.이에 따라 그동안 협회가입을 미뤄온 대다수 언론사들의 참여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 「12·12사태」「5·16군사정변」/중고교과서 현대사 용어 확정

    ◎「4월혁명」·「대구폭동사건」도/국사편찬위,교육부시안 수용 최근 검찰이 「군사반란」으로 규정했던 12·12사건은 오는 96학년도부터 사용될 중·고교 국사교과서에서 교육부시안대로 「12·12사태」로 기술된다. 또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당초 통상거부에서 「대서양 통상,통교거부」로 구체화되고 대구폭동사건과 여수·순천반란사건은 제주도 4·3사건처럼 발생일자를 명시,「대구10·1폭동사건」 「여수 순천 10·20사건」으로 표기될 전망이다.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이원순)는 11일 교육부의 국사교과서 시안에 대해 심의를 벌여 4·19의거를 「4월혁명」,5·16군사혁명을 「5·16군사정변」등으로 서술하게 하는등 교육부안을 대부분 그대로 수용했다. 이에따라 교육부는 이같은 심의결과를 토대로 빠르면 이달중으로 국사교과서시안을 수정,최종 확정한 뒤 새교과서 집필을 위한 준거자료로 활용하기로 했다. 새 국사교과서 상권은 96년 3월부터,하권은 97년 3월부터 배포된다. 국사편찬위에 따르면 최근 검찰의 성격규정으로 가장 관심이 모아졌던 12·12사건은 여전히 논쟁거리인데다 학문적인 연구성과등도 미약해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고 보고 교육부 시안대로 「12·12사태」로 기술하도록 했다. 대구폭동사건과 여수·순천반란사건는 제주도 4·3사건처럼 지명과 일자를 명시하기로 표기방식을 통일,「대구 10·1 폭동사건」 「여수 순천 10·20사건」으로 표기토록 했으며 8·15광복,6·25전쟁,10·26사태,5·18 광주민주화운동,6월민주항쟁등은 교육부안대로 통과시켰다. 특히 4·19의거는 비록 미완의 혁명이었지만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가치관를 두고있다는 세계사적 관점에서 「4월혁명」으로 기술토록 하고 5·16군사혁명은 다수설을 존중,「5·16 군사정변」으로,동학혁명도 「동학농민운동」으로 서술토록 했다.
  • 민자 13개 지구당 조직책인선 안팎

    ◎개혁세력 “수혈”… 민주계 기반확충/서울은 「야성」·호남은 득표력 중시/민정·공화계 색깔시비 없어 “의외” 27일 단행된 민자당의 13개 사고지구당 조직책 인선은 6개월 전인 지난 3월의 10개지구당 조직책인선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속에 이뤄졌다. 민중당의 대표를 지낸 이우재씨와 대변인을 지낸 정태윤경실련정책실장,그리고 6·3세대 출신의 송철원신문로포럼대표등 재야인사들이 포함된 이번 조직책 인선결과는 한 핵심당직자의 표현대로 「개혁세력의 수혈」과 「민주계의 기반확충」으로 요약된다.따라서 그동안 조직책 물갈이 때마다 불편한 심기를 표출했던 보수성향의 민정·공화계의 불만과 반발이 예상됐으나 그같은 반발이나 색깔논쟁의 시비 없이 비교적 조용한 가운데 마무리됐다. ○…지난 3월 김문수씨의 영입을 둘러싸고 격렬한 색깔논쟁이 일었을 때 침묵으로 일관했던 당 지도부는 이날 이례적으로 재야인사들의 입당을 환영하는 공식논평을 발표. 박범진대변인은 논평에서 『민자당은 근대화 추진세력과 합리적인 민주화투쟁세력이 힘을 합쳐 탄생시킨 국민정당』이라면서 『과거 진보적 노선을 걸었던 재야인사들의 우리당 참여는 국내의 무익한 냉전적 대립을 해소하고 정치를 건강하게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 박대변인은 또 『시대적 상황이 바뀐 만큼 과거 재야노선을 걸었던 인사들중에서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분들이 우리당에 동참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이번과 같은 진보성향의 개혁인사 영입작업이 계속될 것임을 시사. 또한 지난번 조직책인선 때 「빨갱이」라는 말까지 튀어나오는등 지도부 성토장이 되다시피 했던 당무회의도 이날 몇몇 위원이 발언에 나섰으나 별다른 이의없이 조직책인선안을 의결. 서석재위원은 회의제출 자료가 조직책 인선의 적격여부를 파악하기에 부족하다며 상세한 설명을 요청했고 평소 보수적 발언을 자주 해온 김중위의원은 『이우재씨가 나름대로 열심히 봉사한 사람이기 때문에 입당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고 이씨의 입당을 적극지지해 눈길. 그러나 정순덕위원은 의결이 끝난뒤 『국민들은 몇몇분이 그동안 보수정당이 수용할 수 없는 주장을 해왔기 때문에 걱정하고 있다』면서 『어떤 상황과 배경에서 입당하는 것인지 설명이 있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고 전남도지부위원장인 정시채위원은 『전남지역에 좋은 분들이 선정돼 감사하다』면서도 『선정절차에서는 현지조사가 없고 심의단계에서도 도지부의 의견수렴이 생략됐다』고 이의를 제기. ○…민자당의 이번 인선기준은 야성이 강한 서울에서는 색깔있는 인물을 과감히 기용하고 취약지인 호남은 병원장과 기업인등 재력을 바탕으로 득표기반을 지닌 인사들을 발탁한 것이 특징. 이같은 기준에 따라 민자당은 원래 정태윤씨와 김영춘청와대행정관을 이번에 「깜짝카드」로 내놓을 예정이었으나 정씨영입이 사전 공개되면서 김씨의 기용을 다음기회로 미뤘다는 후문. 이번 인선에서 유광사서울시의원이 강서갑에 발탁된 것은 기초·광역의회에서 훈련받은 인사의 첫 조직책 등용으로 민자당은 앞으로 이같은 사례를 늘려나갈 계획. 이번 인선작업을 추진한 한 핵심당직자는 특히 『이번 인선이 민주계중심의 물갈이라고 얘기하지만 실제 골수민주계는 전남 장성의 김만수씨 뿐으로 나머지 민주계신청자가 다 배제됐다』면서 『당에서 정한 큰 줄기는 계파를 불식,참신한 개혁성향 인사들을 지속적으로 당에 끌어들이는 것이며 이같은 작업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설명. ▷재야인사 3인의 여권진입 변◁ ◎구로을 이우재/개혁 최대결실 돕는데 진정한 진보 『이제 진보정치의 개념과 내용은 전면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27일 민자당 구로을지구당 조직책에 영입된 이우재전민중당공동대표는 민중운동가에서 집권여당의 조직책으로 변신하게된 심경을 짤막히 털어 놓았다. 이씨는 이날 『한국의 정치현실에서 진보정당의 존립은 불가능하며 문민시대에서 진정한 진보주의자의 역할은 개혁이 최대의 결실을 거둘 수 있도록 구체적인 참여를 하는데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장등 제도권 밖의 농민운동으로 독재정권에 맞서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한 이씨는 『농업전문가로서 우루과이라운드협상 타결 이후 어려움에 놓인 농업분야의 정책개발로 김영삼대통령의 농촌회생의지를 구체화해 나가겠다』고 활동방향을 밝혔다. 새정부출범 직후 대통령 직속기구인 농어촌발전위원회 위원으로 농촌정책 수립에 참여한 경험도 있다. 민중당이라는 이념정당을 이끌던 지도자로서 집권당에 개별입당하게된 점에 대해서는 『정치는 각자의 조건과 시대적 과제에 따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면서 『고난을 함께 했던 분들도 현실의 시대정신인 개혁운동에 적극 동참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충남 예산출생(58) ▲서울대 수의학과·건국대 경제학과 대학원졸업 ▲민중당대표 ▲한우물소비자생활협동조합 이사장 ▲농어촌사회연구소장 ◎도봉을 정태윤/개혁 뒷전비판 보다 대안제시 중요 옛 진보정치연합 대표,민중당 대변인등 「민중의 정치세력화」에 앞장서 온 정태윤 경실련정책실장의 민자당 입당소감은 꽤나 길었다. 27일 민자당 서울 도봉을지구당위원장직무대리에 선임된 정씨는 당사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재야 출신의 입당에 대한 당내 일부의 색깔시비를 의식한 듯『소견을 명확히 하겠다』고 「전향의 변」을 밝혔다. 특히 그는 회견에 앞서 배포한 입당성명에서 『저는 급진적 방법론에 일시적이나마 경도된 적이 있다』면서 『급진적 개혁은 바람직스럽지도 가능하지도 않다』고 말해 민중민주주의노선을 「포기」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유신시절 학생운동으로 투옥된 뒤 노동운동을 하다가 「6월 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재야의 정치세력화라는 독특한 「정치실험」을 해온 정씨는 『지금은 개혁지향 세력이 모두 하나로 뭉쳐 민족의 저력을 통합해 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김영삼정부의 개혁에 대해 『정권출범 때 국민이 기대했던 이상으로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다만 그 구체적 내용에 대한 여론주도층의 합의가 부족해 일부 어려움이 있다』고 진단했다.그는 『개혁이라는 시대정신은 한 정권만의 과제일 수 없으며 체제밖의 비판과 압력보다는 대안을 제시하는 생산적 정치활동이 현실정치에서 보다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경남 남해(40)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 ▲민중의 당대표,진보정치연합대표 ▲민중당대변인겸 기조실장 ▲경실련 기조실장,정책실장 ◎성북갑 송철원/문민정부의 차별성 부각에 힘쓸터 『정치초년생으로서 신선한 정치를 해보고 싶습니다』 27일 민자당 서울성북갑지구당의 새 조직책으로 선임된 6·3세대 출신의 송철원신문로포럼공동대표는 집권당에 입문한 소감을 이같이 밝혔다. 『앞으로의 정치가 과거와는 다른 개념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진보성향의 내가 발탁된 것 같다』고 해석한 그는 『이러한 취지를 잘 살려나가기 위해 애쓰겠다』고 다짐했다.그 다른개념에 대해서는 『개혁으로 표현되는 김영삼정부와 과거정권과의 차별성』이라고 해석하면서 『이승만정권때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함으로써 지금까지 흘러온 과거의 청산내지 개혁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지난 64년 6·3시위를 주도했다가 이듬해 내란음모등 혐의로 투옥됐던 그는 김덕용의원,김정남청와대교문사회수석등 「개혁실세」들과 서울대 문리대 동기동창으로 각별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서울의 서대문을을 원했다가성북갑에 발탁돼 경기고·서울대 정치학과 후배인 민주당의 이철의원과 「격돌」하게 됐지만 『오히려 성북이 개인적으로 지지기반이 더 넓다』고 자신감을 표시했다. ▲충남 성환(52) ▲경기고·서울대 정치학과 ▲64년 중앙정보부 연행린치,70∼75동으로 투옥,79년 김영삼전신민당총재 영문회견문작성으로 연행 ▲문민민주정책협의회 회장 ▲한겨레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입후보 ▲신한국창조를 위한 시민연합 중앙위원장
  • 민족사관확립의 중추되라(사설)

    국사편찬위원장이 10년여만에 바뀜으로써 「국편위」의 개혁과 개편에 대한 학계의 기대와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위원장의 경질과 함께 지난 6월30일자로 국사편찬위원 15명 전원의 임기가 끝나 곧 있을 새 위원의 위촉도 그동안 침체된 국사편찬위원회의 활성화에 전기를 마련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국편위」는 민주사의 편찬을 비롯,사료수집·조사·보관및 자료간행 등을 기본적인 기능으로 하고 있다.해방되던 해 「국사관」으로 출범했으니까 반세기의 역사를 지니게 되었다. 어느 시대에나 올바른 역사인식은 타당한 「시대정신」을 창출해내고 그것은 그 사회와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법이다.인간은 정확한 역사인식을 통해서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다.따라서 국사의 편찬과 연구를 총괄하는 「국편위」의 중요성은 실로 막중하다 아니할 수 없다. 김영삼대통령이 신임 이원순위원장에게 『국사편찬위가 새로운 역사의식을 가지고 역사 바로잡기와 바로 세우기에 각별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달라』고 한 당부도 역사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우리 국사연구가 추구해야 할 과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올바른 역사관을 토대로 하는 민주사관의 정립이라고 하겠다.일제 식민지지배를 통해 왜곡되고 격하당한 우리역사의 줄기가 제 모습으로,제자리에 복원되어야만 한다.통일을 앞두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러한 민족사관의 확립은 더욱 절실한 명제로 대두된다. 그럼에도 최근 사학계일부에서는 진보주의라는 미명하에 근·현대사를 왜곡기술하는 사례가 빈번하여 우려를 낳게 하고 있다.96년부터 사용될 중·고교 국사교과서의 1차 시안에서 연구팀이 제시한 용어들은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고 국민정서를 배신하는 황당한 내용들이다.「제주도 4·3사건」을 「4·3항쟁」으로,「대구폭동사건」을 「10월항쟁」으로,「동학농민운동」을 「농민전쟁」으로 기술하는등 역사왜곡이 극심한 북의 사회주의시각과 유사한 관점을 보였다.검증되지도 않은 소수의 학설을 교과서에 기술하려 했다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독선이요,오류다.사학계 일각의 이런 시각을 우리는 크게 경계하지 않을 수없다.신임 위원장의 취임과 새 편찬위원의 위촉으로 새 모습을 보일 「국편위」는 학계의 이같은 혼란에 깊은 관심을 갖고 그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직제의 개편이나 연구위원의 확충,발간사업 확대등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사연구를 주도하는 핵심기관으로서 올바른 사관의 방향을 제시하고 민족사관의 기틀을 확립하는 일이라고 믿는다.일부 좌경성향의 사학자들에 대해서는 학문적인 연구성과와 논리로써 오류를 시정토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 「정치학과 정치」 정치학회 세미나 초점

    ◎“학계의 「지식인 정치」 비난 없어야”/학자의 역할은 「덜 위험한 대안」 모색/연공서열·편가르기가 정치낙후 원인 현실정치와 정치학이론과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또 현실정치 무대에서 지식인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이며 정치발전을 위해 지식인의 정치참여는 어떤 방향과 수준으로 전개돼야 할까. 3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한국정치학회(회장 김호진·고려대)주최로 열린 「한국에서의 정치학과 현실정치」라는 주제의 세미나에서는 여야 현역정치인과 정치학교수등 50여명이 발표및 토론자로 참가,이같은 주제가 심도있게 다루어졌다. 이날 세미나에서 「학문으로서의 정치학과 권력으로서의 정치」를 기조논문을 발표한 김호진회장은 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정치학자들은 탈비판적이고 탈규범적인 경향에서 벗어나 통일국가 건설이라는 실천적 과제를 중심에 담을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김회장은 그러나 한국정치에서의 이념적 보수성이 정치학에서도 자유로운 논의를 제약하는 경향이 아직 남아있다고 지적했다. 권력의 문민성과는 별개로 좌파이론과 주체사상을 공격하면 급진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그것을 인정하면 보수세력으로부터 질타를 받는 사회현실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그는 「주사파」논쟁을 한국사회의 후진성을 나타내는 「소모적 촌극」이라고 비판한뒤 이같은 논쟁은 학문적 영역에서의 규범적 연구로 흡수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대해 이부영의원(민주)은 「나의 현실정치 체험」이라는 소논문을 통해 두터웠던 현실정치의 벽을 실감한 대표적 사례로 「비이성적 냉전논리」를 들었다. 문민정부 출범 뒤에도 얼마전 「조문파동」처럼 국가정책의 다양한 효용성을 검토하기 보다는 상대에게 특정 이념의 올가미를 씌워 반사이익을 얻는 「냉전형 정치」가 건재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세계가 탈냉전의 시대에 접어들었지만 우리사회는 합리적 보수와 합리적 개혁의 공존 없이 이분법적 편가르기로 생산성을 잃고 있다고 했다. 그는 또 보수우위의 여야정치에서 자리잡은 「연공서열형 정치」는 정치문화의 새바람을 가로막는 장벽이며 시민의 능동적 정치참여를 방해하는 낙후성이라고 주장했다. 노재봉(민자)의원은 「권력의 실체와 본질」이라는 소논문에서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지식인에게 이성적이면서도 선입견 없는 견해의 확립이 선행돼야 한다는 점을 먼저 강조했다. 그는 따라서 정치인으로서 불가능한 목적아래 비인도적이고 극단적인 방향으로 흐르지 않기 위해 변화에 대한 환상을 갖지 않으면서도 갈등을 부인하지 않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보다 현실론적 견해를 피력했다. 현실속의 정치인은 잘못된 분석에 따른 실책으로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학자와 달리 신중한 선택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나 통치자의 역할부분에 이르러 완곡한 어조로 그러나 날카롭게 현실을 비판했다. 방향감각이 없는 현대의 통치자들은 여론의 조작으로 약점을 덮어두려 하고 대중들의 기호에만 영합하는 지도자는 정체를 면하지 못하며 대중들의 경험을 초월하는 지도자는 항상 오해를 받는다는 것이 통치권자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좌해본 그의 체험담이었다. 그는 따라서 현실의 이해관계에 따라 입장이 달라지기 쉬운 통치자들의 모험을 보완,「비교적 덜 위험한」 대안을 찾도록 하는 정치학자의 역할을 강조했다. 장달중교수(서울대)는 지식인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현실정치인들의 시각에 이의를 제기했다. 장교수는 지금까지 지식인출신 정치인이 성공한 예가 별로 없는 것은 통치권자의 일방적 필요에 동원된 정치참여였기 때문으로 풀이했다. 따라서 어느 계층보다 지지기반이 취약하고 언론·학계등 지식인그룹이 오히려 지식인출신의 정치인을 비판의 표적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최근 일관성 없는 정책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지식인출신의 「외교 안보팀」에 대해 『그들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지금 전쟁 또는 분열이라는 극단적 상황에 와있을지 모른다』고 옹호했다.
  • 이애주교수 살풀이 춤판/오늘 국립국악원 소극장서

    지난 87년 6월항쟁 당시 「바람맞이춤」을 춰 널리 알려진 이애주교수(서울대)가 한영숙류 살풀이춤의 진수를 선보인다.(3일 하오 2시 국립국악원 소극장) 국립국악원이 89년부터 열어온 「우리음악감상교실」의 일환으로 마련된 이번 무대에는 살풀이춤에 대한 자료화면과 함께 상세한 해설도 곁들여져 일반의 이해를 돕는다. 살풀이는 생명을 위협하는 악하고 모진 기운인 살을 「푼다」는 뜻으로 남도지방의 굿판에서 즉흥적으로 추던 민속춤.조선시대 굿으로서의 살풀이가 핍박을 받으면서 사당패의 놀이판과 기녀의 교방으로 흘러들어가면서 생성된 춤으로 알려져있다.남도지방의 무속음악에서 나온 시나위곡을 기본으로 한 정중동의 움직임과 이승의 원한을 뿌리쳐내려는 듯한 수건뿌림의 유장한 곡선이 일품이다. 이씨가 69년부터 승무를 사사한 벽사 한영숙 선생은 한국인 특유의 한의 정서를 형상화한 「넋의 춤」으로 전통무용의 새로운 원형을 제시한 인물. 90년대 들어 거리와 마당의 춤판에서 본격무대로 돌아온 이애주교수는 93년 벽사 타계이후 중요무형문화재 27호 승무보유자 후보로 지정됐으며 현재는 한영숙류 승무 보존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한영숙류의 춤을 살려내는 작업에 몰입하고 있다.
  • 광복 49돌/해묵은 이념갈등 종식을 모색한다/정담

    ◎“「자유민주」 건국이념 통일로 승화돼야”/미군정·독재정권 친일파 수용이 갈등의 불씨/자유민주=보수·민족주의=진보 「기형적 틀」 형성/남북 이념적인 통합기회 없이 분단/6·25 겪으며 반공·반미로 첨예 대립/탈냉전시대 사상논쟁 재연은 역사의 아이러니 올해로 광복 49주년을 맞았다.그러나 반세기가 지나도록 자유민주주의라는 건국이념을 다시 논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우리 현실이다.김일성사후 주사파문제가 예년에 없이 심각하게 부각되고 사회 일각에서는 우리 정부의 정통성마저 부인하며 해묵은 사상논쟁이 재연되고 있다.새로운 남북관계와 통일정책수립을 앞두고 진덕규(이화여대),이택휘(서울교대·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이현희교수(성신여대)가 우리의 건국이념을 재조명해보고 현재에 갖는 의미,구현방법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이택휘교수=광복 당시 남북한은 모두 통합된 민족국가를 세우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고 국민적 합의도 얻고 있었습니다.그러나 광복과 함께 남한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북한은 구소련의 사회주의를 수용해 이념적으로 통합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분단이 고착됐습니다.광복전부터 내재해 있던 이념갈등은 그후 심화됐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현희교수=건국이념의 배경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내부적으로는 민족광복세력의 왕조체제청산과 미국과 소련등 외세에 의한 영향등을 우선 꼽을 수 있습니다.임시정부가 중심이 됐던 군주제청산은 민주체제로의 자주적인 노력으로 임시헌장에 절대 자주독립과 자유민주주의,나아가 전통사상인 홍익인간과 이화세계,삼균주의정신을 담고 있습니다.그러나 광복후 남북의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건국이념은 올바로 설정되지 못했습니다. ▲진덕규교수=국민적 열망이었던 자주독립정신을 문서에 담은 것이 건국 초기의 헌법입니다.여기에는 의회정치와 개혁적인 경제정책,근대적인 시민사회와 선진문화 도입등을 분야별로 담고 있습니다.그러나 이같은 헌법정신,즉 건국이념은 이데올로기와 남북갈등으로 인해 반공으로 치우치게 됐고 결국 이데올로기의 경화는 삼균주의와 같은 임시정부의 이념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택=그렇습니다.항일운동은 여러 갈래로 나눠 진행됐지만 군주정치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이념적인 틀에는 모두 합의하고 있었죠.그러나 45년이후 남북간에 타율적으로 생겨난 이념갈등은 6·25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전쟁을 겪으면서 남한은 자유민주주의의 제1 요소로 반공을 부각시켰고 북한은 반미를 들고 나와 첨예하게 대립합니다.이같은 갈등은 60년대 국제적인 해빙무드와는 상관없이 계속되다 80년대 들면서 서서히 해소됐습니다.45년 당시와 마찬가지로 국제적인 역학변화가 이번에도 남북에 영향을 줘 급기야 남한에 사상논쟁을 재연시켰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현=광복직후 서구의 특정 이념을 초월해 통합된 민족국가를 수립해야 한다는 데 국민적 합의가 모아졌다는 사실을 살펴봤습니다. 하나의 민족국가를 세우겠다는 국민들의 열망은 그러나 좌우대립으로 멀어져갔고 그 과정에서 남한이 48년 먼저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사회 일각에는 이같은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을 분단고착과 연결지어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북한의 주장처럼 단정의 책임이 전적으로 남한에 있는지,또 단정수립이 정말 불가피했는지 등을 짚어봤으면 합니다. ▲진=단독정부수립을 남한의 이승만정권이 혼자서 주도했다고 보는 것은 정확한 역사인식이 아니라고 봅니다.왜냐하면 북한에는 이미 46년 실질적으로 정부가 세워진 것과 다름없을만큼 조직이 정비돼 있었고 남쪽마저 공산정권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진행중이었습니다.그래서 남쪽에서는 북쪽에 대응해 단독정부를 수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위기감과 절박감이 팽배했습니다. 게다가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끝나 미국은 결국 유엔에 남북한 정부수립문제를 위임했고 총선이 가능했던 남한에서만 선거가 치러진 겁니다.다시말해 처음부터 단독정부를 수립해 분단을 획책한 것이 아니라 당시 주변상황이 남한 단독정부수립으로 이어지게 한 거지요.때문에 이승만정권이 단정수립으로 분단을 노렸다는 것은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이며 역사에 대한 몰이해·반이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봅니다. ○무정부상태 계속 ▲이현=저 역시 단정수립에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시킬 의도가 있었다고 보지 않습니다.45년부터 48년까지 남로당은 대구폭동,여순반란사건,4·3제주사건등 전국적인 교란작전으로 정국을 무정부상태로 만들었습니다.당시 이승만박사는 「선 정부수립 후 통일」이 불가피 하다고 봤고 김구선생이 이끄는 한독당과 접촉을 합니다.한독당은 그러나 남한단독정부수립은 한반도의 영구분단을 가져온다며 반대하며 좌우연립정권 수립을 주장합니다.이박사는 공산세력을 절대로 끌여들여서는 안된다는 단호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한독당이 불참한 가운데 불가피하게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 ○단정수립 불가피 ▲이택=단정수립이 과연 불가피했느냐 하는 문제는 현대 정치사의 주요 논쟁의 대상입니다.앞에서도 언급됐지만 북한은 46년에 이미 정부조직을 거의 완료해 놓고 남쪽에도 공산정권수립 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 입증된 사실입니다.사료들을 종합해보면 단정수립의 책임은 상당 부분 북한 특히 소련에 있다고 봐야합니다.그러나 남한도책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이박사와 민족세력등이 보다 적극적으로 미군정을 설득하고 단정수립을 지연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 점이 아쉽습니다. ▲이현=좌우합작을 시도했지만 역부족이었고 무정부상태에 가까운 치안상태와 내외의 역작용을 고려할 때 단정수립은 불가피했다고 정리를 해도 무리는 없겠군요.그렇다면 화제를 최근의 사상논쟁으로 돌려 그 원인과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운 건국이념이 현재에 갖는 의미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진=건국이념의 현재의 의미를 논하기전에 먼저 현실인식과 당위성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단정이 수립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 까에 대한 가정은 얼마든지 해볼 수 있습니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현실인식이 선행돼야 한다는 겁니다.대한민국은 선거를 통해 수립된 합법적인 정부였지만 상해 임정세력들이 제헌의회에 불참하는 등 불완전한 부분도 있습니다.그러나 그후 5·30선거에는 임정세력들도 참여했고 특히 조소앙선생이 최다득표를 얻어 국민적합의가 생겨납니다.강조하고 싶은 것은 6·25전쟁은 자유민주주의의 건국이념을 변하게 했던 사건이 되었습니다.즉 공산주의와의 대결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건국이념으로 서의 자유민주주의를 반공으로 몰아가는 냉전적 대결성을 가열시키고 말았습니다. ▲이택=그렇습니다.이쯤에서 왜 이념적 갈등 또는 논쟁이 아직까지 정리되지 않고 있는지 그 이유를 정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가장 큰 이유는 미군정이 군정의 편의를 위해 친일인사를 수용한 겁니다.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면서 막상 항일민족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철저하게 배제됐습니다.이런 모순된 상황은 결국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를 싹틔웠고 「자유민주주의=보수,민족주의=진보」라는 기형적인 이념적 틀을 만들었습니다. 이념적 왜곡은 70년대를 거치면서 더욱 커졌고 지금에 이릅니다.최근의 사상논쟁의 중요배경 역시 미군정과 그후 독재정권이 친일파를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했다는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진=친일파처리문제가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정통성시비를 일으키는 면이 있습니다.대한민국에는 48년부터 50년대 초까지 정부·경찰·학교·법조계등 국가의 중간관료급에 친일파가 다소 남아있었지만 각료의 차관급이상에는 친일파가 비교적 적지않았습니다.그러나 50년대 중반기 이후 중요정책의 결정에 참여했던 고위직에도 친일파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이는 당시 이승만정권이 국가의 1차적인 대결세력를 공산주의자들로,이들과 대립하면서 승리하기 위해 힘의 응집이 필요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현상으로 여겨집니다. ○김일성 집권수단 ▲이현=최근 주사파 학생들은 남북한의 친일파숙청과정을 비교하면서 남한 정권의 정통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북한이 광복이후 인민위원회의 주요간부급에 친일파 또는 친일한 혐의가 있는 사람을 모두 배제한 것은 사실입니다.그러나 북한은 친일파의 숙청을 그 자체보다는 김일성 반대세력을 제거,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행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이택=친일세력들은 6·25전쟁과 5·16혁명을 거쳐 80년대까지 모든 분야에서 충원됐고 이는 이념의 혼란을 가져온 주요 원인입니다.과거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은 30∼40년씩 방치해둬 어렵게 사는 반면 친일세력은 득세하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된 겁니다.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은 이를 비판했습니다.소위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친일세력이 대부분 일치하자 「이게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자연히 북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됐다고 봅니다.대안마련이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북쪽의 이념은 그래도 어느정도 정리된 것처럼 비친 것이 우리사회의 이념적 혼란을 가중시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진=한국전쟁이후 3·15부정선거까지만 돌이켜 보아도 자유민주주의 정치질서와 속성이 얼마나 유린되었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4·19혁명은 자유민주주의로 되돌아가서 이를 확립해 보려는 열망의 표출입니다.그러나 곧 박정희정권의 조국근대화 기치에 눌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열망도 빗나갔지만 6월 항쟁을 계기로 다시 국민과 정부는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으로의 올바른 자리매김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정의실현 ▲진=먼저 건국이념인 자유민주주의의 본질과 민족국가의 개념을 짚어봐야 합니다.민족국가수립의 적시성과 국민적 욕구와 합의가 확보되어 있었는지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체제에서 말하는 민족주의의 개념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원래 민족주의는 계급을 초월한 개념입니다.그러나 사회주이는 이를 전략적·수단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택=민주주의는 통합된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민주주의의 운영원리는 구성원들 사이에 도덕성과 사회적 정의를 과감하게 실현하기 위해 개혁을 지향하는 겁니다.정부가 먼저 주사파등을 수용,보다 과감하게 개혁을 추진해야 합니다. ▲이현=반대세력은 용인하되 자유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불순한 사상 제거를 전제로 한 건국이념을 정립해야 합니다.광복이전의 공산활동은 항일운동의 방편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8·15이후와는 구분돼야 합니다.따라서 대단합 차원에서 8·15이전에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공산활동을 한 사람도 독립운동자로포상하는 방안은 검토해볼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단군의 후손으로 「하나였다」는 주체적인 입장에서 45년 또는 48년이 아닌 임정의 임시헌법이 만들어진 19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경험을 토대로 한 건국이념으로 통일을 지향해야 합니다.
  • 남총련 폭력시위·점거난동 여파/대학마다 피해방지 “비상”

    ◎연합집회·외부인 출입 금지/홍익대 “10억손실 보상받을 길 막막” 광주·전남지역 대학총학생회연합(남총련)소속 대학생들의 홍익대 기습점거시위사태이후 각 대학들이 피해방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홍익대가 이번의 폭력시위로 10억원대의 재산피해를 입었으나 보상은 커녕 호소할 곳도 없게 되자 각대학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라며 시위관련 정보를 파악하느라 여념이 없다. 홍익대는 지난 20일 긴급 교무회의를 소집,피해보상을 받는 방법을 논의했으나 선례가 없어 일단 「어떻게든 피해보상을 받는다」는 원칙만을 확인했을 뿐이다. 학교측에 따르면 이번 남총련 시위로 학생회관과 본관등의 앞면 유리창 1천4백장과 책걸상등 8천만원 상당의 각종 집기류가 파손되는등 측정가능한 재산피해만 최소한 1억5천만원에 이른다.그러나 학생들은 『미술대학 동양학과와 조소과 실습실에 있던 학생들의 예술작품과 각종 도구가 상당수 부서지거나 파손됐음을 감안하면 전체 피해액은 10억원대에 달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더욱이 이 대학은 이면영총장 취임이래 총장이 엑셀승용차를 타는등 학교재정지출을 줄이기 위해 허리띠 졸라매기 운영을 해왔으나 이번 피해로 모든 절약운영이 물거품이 됐다. 각 대학은 타대학생들이 참석하는 연합집회의 경우 대부분 과격시위의 양상을 띠게 되고 학교기물 파손에 대한 법적인 보상제도가 없다는 점때문에 이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총학생회측에 협조를 요청하고 있다. 연세대가 지난해 6월 『학교시설을 보호하기위해 학교의 허가없는 외부단체의 모든 집회를 금한다』는 입장을 밝히자 대부분의 대학들이 이에 따르고 있으나 이번처럼 돌발 학생시위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인 것이 현실이다. 연합집회의 경우 경찰과의 충돌이 없더라도 1회당 재정손실은 5백만원에서 천만원대에 이르며 투석전이나 화재가 발생하면 수억원씩의 재산피해를 본다. 서울대는 92년 서울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서총련)발대식때 문화관 대강당내 의자등 기물이 파손돼 수천만원어치의 재산피해를 입은뒤 일체의 외부연합집회를 금지하고 있다. 이 대학 김동진학생처장(50)은 『한총련등타대생들이 연합집회를 강행하려할 경우 총학생회와 주최측에 자제를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는등의 방법을 강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한총련 본부가 있는 한양대는 지난 11일의 「6월항쟁기념대회」를 비롯,최근 1년남짓동안 6차례의 연합집회가 교내에서 열렸으나 이를 막을 수 없어 대책 마련에 고민하고 있다. 학교측은 피해를 최소화하기위해 총학생회측의 집회신고시 3건당 1건꼴로 허락해준다는 방침이나 한총련등 주최측이 집회를 강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밝혔다.
  • “안보 최우선” 국정기조로 선회/YS의 잦아진 군격려 행보

    ◎2주새 부대시찰등 다섯차례 “사기진작”/북핵제재 대비,소리없이 대응태세 다져 김영삼대통령의 국군 격려활동이 두드러지고 있다.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방문 앞뒤로 나타나기 시작한 김대통령의 이같은 움직임은 6월이 「호국보훈의 달」이라는 측면 말고도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둘러싼 한반도의 위기에 즈음하여 군을 국정운영의 최우선에 두는 새로운 정책방향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김대통령은 11일 아침 서울 강동구 둔촌동에 있는 보훈병원에 들러 6·25전상자등 보훈환자들을 격려했다.김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이분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게 한 진정한 애국자들』이라고 말하고 『보훈환자들을 돌보는 일은 우리국민 모두의 책임』이라고 특별히 강조했다.그리고 『군인들은 명예를 존중히 여기는 사람들이므로 6·25참전용사들이 용기를 갖고 일 할 수 있도록 각별히 배려하라』고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기도 했다. 군과 직접 관련된 대통령의 일정은 지난달 27일 동부전선의 육·해·공 3군 부대를 차례로 시찰한 것을 비롯,2주만에 자그만치 다섯 차례에 이른다.김대통령은 러시아에서 돌아온 다음날인 8일 새벽 국립묘지를 참배했다.10일에는 전쟁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한데 이어 군원로 6명과 오찬을 나누어 눈길을 끌기도 했다. 김대통령의 이같은 잇단 군관련 행사일정은 그 빈도와 발언에 비추어 단순히 보훈의 달을 맞은 이례적인 행사로만 치부하기가 어렵다.북한핵 위기와 관련해 대통령이 군을 생각하는 기조가 바뀐 것으로 보는 견해가 더 우세하다.특히 대통령이 외국순방후 곧바로 국립묘지를 참배한 것은 그 장소가 갖는 상징성 때문에 국가의 명운과 관련된 어떤 결심을 다지기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북한핵에 대해서는 일전을 각오하고라도 반드시 저지한다는 의지를 다짐하는 의식이었을 가능성이 그것이다. 우리군의 원로들을 만난 10일은 김대통령의 정권승계에 있어 가장 큰 동력이 된 이른바 「6·10항쟁」이 7주년을 맞는 날이었다.그는 민주화운동세력과는 자칫 대칭적인 개념에 놓이기 쉬운 군의 원로들을 오찬에 초대했다.그러면서 「6·10항쟁」에 대해서는아무런 말 없이 행사도 갖지 않았다.의도적으로 그렇게 일정을 짰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같은 일련의 군관련 행사는 분단국가의 운영에 있어 군의 역할이 무엇보다 막중하다는 사실을 간파한 대통령의 인식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또한 현실적으로 북한핵문제에 대비한 군통수권자로서의 사기진작책이기도 하다.대통령의 국정운영 인식이 야당총재의 그것에서 비로소 전통적인 대통령의 그것으로 바뀌고 있는게 아니냐 하는 분석도 가능해진다. 11일 김대통령을 방문한 미국국무부의 타노프차관은 『소리 없는 김대통령의 군사기진작책이 인상적』이라고 평가했다.이에 대해 김대통령은 『안보와 관련된 준비는 어차피 소리 없이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안보준비를 소리 없이 철저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북한핵문제에 대해 「유일한 방안은 안보리제재」라는 한국과 미국의 공동인식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군에 뜨거운 신뢰를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 김 대통령 차남 현철씨 인터뷰/월간중앙 발췌

    ◎“인사개입 추측은 아버지성격 모르는 탓”/단순한 시중여론 아들입장서 전달할뿐/「한겨레」와의 송사 개인명예차원의 대응 김영삼대통령의 둘째 아들 김현철씨는 최근 월간 중앙 6월호에 실린 인터뷰 기사를 통해 한겨레신문과의 송사등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그 내용을 간추려 본다. ­한겨레신문과의 20억원 송사는 너무 감정적인 대응이 아닌가. ▲감정대응이라는 말은 타당하지 않다.한겨레신문 창간당시 이 신문의 주주는 6만명이었고 나의 아버지도 포함돼 있었다.나 역시 주주는 아니지만 한겨례신문의 탄생을 축하하는 입장이었다.그러나 이번 보도태도에 크게 실망했다. ­20억원이라는 손해배상청구액수가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특수신분을 인정한 것이라든지 언론에 대한 탄압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근거는 무엇인가. ▲액수의 과다를 떠나 언론도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이다. ○청와대조율 무근 ­이번 송사는 청와대와 사전에 조율된 것이라는 지적이 있는데. ▲터무니없는 얘기다.청와대라는 국가기구와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개인을 구별하지 못한데서 나온 발상이다.청와대와 연결시키려는 것은 권력이 언론을 탄압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한 노력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한겨레신문에서는 현철씨에게 반론권을 주려고 노력했는데 연락이 안됐다고 하던데. ▲전혀 사실과 다른 얘기다. ­일부에서는 이 사건이 권력을 이용한 언론통제라는 인식이 있다. ▲언론통제라는 말 자체가 벌써 시대착오적 발상이다.이 사건은 아직 재판이 진행중이니까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이번 사태를 권력과 국민의 알권리와의 충돌로 보는 사람도 있는데. ▲분명히 말하지만 이번 일은 국가권력과 국민의 알 권리와의 충돌이 아니라 단지 내 개인의 명예와 인권에 관한 문제다.신문사쪽에서는 정론직필이라는 주장을 하지만 이는 객관성을 유지하고 진실에 바탕을 둔 보도일 때 가능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주말이면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을 뵙는다고 들었다.여러 얘기를 하다보면 정책건의도 하지 않는지. ▲남들은 정치 얘기를 많이 할 줄 알지만 전혀 다르다.시중의 여론같은 것도 말씀드리고 교수·대학원생·친구들의 얘기를 전할 때도 있다. ­일부에서는 김현철씨 역할중 하나가 대통령께 직언이 가능한 것을 드는 데 어떻게 생각하나. ▲직언이란 공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 윗분에게 드리는 말씀이고 나는 단순히 시중여론을 자식의 입장에서 아버지께 전해드리는데 불과하다. ­김현철씨가 정부의 상당한 고위직 인사도 천거하고 주위의 검증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인사개입을 하는 것처럼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사청탁 등 불용 ▲인사와 관련해 정말 아버지의 성격을 몰라서 하는 추측들이다.나도 그런 청탁을 안하지만 아버지도 그런 것은 용납하시지 않는다. ­최근 언론노보가 정치부기자들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44.7%가 김현철씨를 여권의 제2인자로,91.8%가 영향력을 10위권 이내로 보았다. ▲의도를 가진 보도에 대해서는 언급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얼마전 부시 전미국대통령이 청와대를 방문했을때 주지사에 출마한 아들에 대한 얘기가 나왔고 김대통령도 잘되길 바란다고 했다.이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과거 정권이 친인척 관리를 잘못해 그 불똥이 나에게까지 튀어 기가 막히다는 말을 하고싶다.친인척이라면 그 자체가 무조건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이제는 좀 달라질 때도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앞으로 정치를 안한다고 단정지을 수도 없는데 진로에 대해 생각해본 것은 없는가. ○진로 아직 못정해 ▲솔직히 아직 결심하지는 않았다.박사학위를 딴뒤 생각할 일이고 현재는 「학생 김현철」로 인식해주기 바란다. ­미국유학에서 돌아와 선거전에 뛰어든 동기는. ▲미국에 간 것은 아버님의 23일간의 단식과 가택연금이 풀린 직후인 84년이다.3년동안 경영학석사과정을 밟고 87년 대선 직전에 돌아왔다.6·10항쟁과 6·29로 이어지고 곧바로 대선에 돌입해 자연스럽게 관여하게 됐다. ­92년 대선당시 상도동 캠프에서 일했던 전병민씨는 어떤 인연으로 합류하게 됐는가. ▲이영호전체육부장관의 추천으로 대통령께서 나보다 전병민씨를 먼저 알고 계셨다. ­이충범씨와는 어떤 인연인가. ▲중학교(중대부중)3년 선배다.학교 다닐때는 몰랐으며 본격적으로 알게된 것은 이씨가 상도동에 무료법률사무소를 개설한 뒤다.3당합당과 14대 총선 전에 만나기 시작했고 상당히 호감을 갖고 있었다. ­김현철씨가 실제로 정부 주요 정책에 어느 정도 간여하고 있나. ▲그런 말이야말로 한평생을 정치에 몸담아 온 대통령과 주변 참모·요직에 계신 분들에 대한 과소평가이자 누가 되는 얘기다.나는 분명히 그럴만한 위치에 있지 않다.국정이 정부와 당의 공조직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언론인은 안 만나는가. ▲일부 아는 언론인은 있지만 적극적으로 찾아서 만나지는 않는다. ­아직도 김현철씨의 사조직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 ○여론조사팀 해체 ▲과거의 여론조사팀을 나의 사조직이라고들 하는 모양인데 이 팀은 대선직후 완전히 해체됐다. ­대통령의 국정운영과 개혁에 대한 평가나 사견이 있다면. ▲대통령의 아들이기 때문에 어버지가 하시는 일이 하시는대로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다른 사람보다 큰 정도다.국민 대다수가 이 정부의 국정운영과 개혁기조에 대해 적극 찬성하지만 다소 미흡하고 아쉬운 대목이 있다고 보는 것 아닌가.대통령 아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찬성파는 아니다. ­국내 대학원 입학은 언제 결심했고 박사논문은 뭘 쓸 생각인가. ▲92년 선거 직후 결심했다. 지난해 9월 학기부터 수업을 들었고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기업합병이 기업의 사회화 전략에 미치는 영향을 잠정적인 논문 제목으로 잡았다. ­롯데부지 매각이나 롯데월드와 관련된 장인인 김웅세씨와 관련된 루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장인은 루머의 피해자다.이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사법부에 대한 명예훼손이라고 생각한다.그동안 공무원과 사업가의 연륜을 가지신 분이 상식적으로 볼 때 품위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시진 않을 것이다. ­민주계 실세,이른바 가신들과의 알력이니 불화니 하는 얘기가 나오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가신」과 불화라니 ▲그분들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뵙던 분들이고 어른이 정치적으로 어려웠던 고비마다 곁에서 큰 힘이 돼주셨다.존경하고 신뢰하는 분들로 외람되게 내 입장에서 그런 대선배들과 갈등이니 뭐니가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 「5·18」 기념사업 표류/「망월동묘역 성역화」 착공조차 못해

    ◎기념일 제정·공원조성도 지지부진/광주시·관련단체·시민 이해 상충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사업이 표류하고 있다. 문민정부 출범이후 5·18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와 함께 망월동묘역의 성역화사업,기념일 제정,기념공원조성등 그동안 갖가지 기념사업이 제시되었으나 광주시·5월관련단체·시민등 관계당사자들간에 이해가 엇갈려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광주시는 이번 5·18 14주 기념행사는 묘역성역화를 마친 상태에서 외부 참배객을 맞이한다는 목표아래 각계대표 34명으로 구성된 「5·18기념사업추진협의회」(오추협)를 발족시켰었다. 그러나 5·18유족회가 『묘역을 상무대로 옮겨 성역화해야한다』며 시청앞에서 1백7일동안 천막농성을 벌인데다 오추협내부에서도 묘역위치를 둘러싸고 투표까지 하는등 이견을 좁히지 못하다 지난해 11월 비로소 망월동으로 장소를 확정했다. 이에 따라 시는 지난 10일 남광엔지니어링과 삼정·디엔드지종합건축사무소가 공동으로 출품한 「5·18묘역 성역화기본계획」을 토대로 망월동묘역일대 4만4천여평의 부지에 기념·참배·승화·체험공간등 각종 시설물을 설치하는 성역화사업기본계획을 확정,오는 9월 공사에 착수키로 했다. 그러나 재야대표로 구성된 「5월 성역화를 위한 시민연대모임」등은 최근 책임자처벌등을 요구하며 독자적으로 「5·18광주민중항쟁 기념사업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마련하는 등 반발하고 있어 사업착공여부가 아직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시는 또 「5·13특별담화」에 따라 그동안 5월단체및 재야의 주도로 치러진 5·18을 공식기념일로 지정,이를 범시민축제로 끌어올리기 위해 지난해 6월 조례안을 마련,시의회에 제출했다.그러나 의회는 『국가차원이 아닌 광주시민만의 기념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며 심의를 유보하는 바람에 본회의에 상정조차 못하고 있다. 상무대부지 68만여평 가운데 정부로부터 10만평을 무상 양여받아 이곳에 5·18기념시설 8천평을 포함한 시민공원 조성계획을 세우고 내년부터 공사에 들어갈 계획으로 있으나 광주·전남환경연합과 「오민련」(5·18광주민중항쟁연합)은 지난 16일 기자회견을 갖고 『단독택지지구로 지정된 기갑학교 자리 5만평을 공원부지에 포함시켜야한다』고 주장,사업시행에 어려움이 예상되고 있다. 이와 함께 전남도는 지난해 10월 도청이전 후보지를 전남 무안군 삼향면으로 결정,도청자리에 기념공원을 조성할 예정으로 있으나 도의회의 반발이 심해 이전시기조차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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