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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황광우 지음

    한국의 1980년대는 사람들의 이름에 시대의 흔적을 새겼다. 평범한 이름 석자가 ‘민주화의 상징’이 되기도 했고,‘빨갱이의 수괴’가 되기도 했다. 수많은 가명과 필명이 탄생했고, 작명 과정에서 후일담이 넘쳐났다. 황지우 시인의 동생인 황광우(49)는 ‘정인’ 혹은 ‘최윤석’으로 불렸다. 때론 ‘조현업’으로 불렸고, 때론 ‘살로우만’이라고도 불렸다.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창비 펴냄)는 황광우가 이름을 바꿔가며 살아야 했던 시대를 그린 자전적 초상화다. 황광우가 호명한 사람들에 대한 삶의 기록이고, 호명 받은 사람들의 기억으로 재생된 펄떡거리는 역사다. 한국 현대사의 상흔이자 진보의 동력이었던 두 꼭짓점,80년 5월과 87년 6월을 찍은 무채색 다큐멘터리다. 황광우의 이름은 80년대 곳곳에 발자국을 찍었다.78년 ‘서울 6개 대학 연합시위’에 연루돼 군사재판을 받았고,80년 ‘서울의 봄’ 땐 서울대 총학생회 간부로 활동하다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제적됐다.85년 구로동맹파업 땐 ‘학출’(대학생 출신 위장취업자) 노동자로 공장을 멈췄고,87년 6월항쟁 땐 최루가스 안개 속에서 항쟁을 주도했다. 황광우에게 80년대는 젊음의 시대였다. 젊음의 상징은 ‘돌격’이다. 일단 부딪고 아픔은 부서진 뒤 생각한다. 아픈 줄 모르고 부서져간 이름들을 황광우는 하나씩 기억해냈다. 광주항쟁 당시 머리에 총을 맞고도 기적처럼 살아난 김상호, 광주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돼 13년간 망명생활을 해야 했던 윤한봉,80년대 중반 목숨 걸고 조직 비밀을 지켰던 인천 노동운동의 리더 전희식, 감옥을 수없이 들락거리다 약혼식마저 감옥에서 해야 했던 김창한…. 황광우는 역사에서 ‘수’가 중요하다고 말한다.“500명의 시위대가 1000명의 전경들에게 밀렸던 몇 달 전”을 기억하며 87년 6월의 황광우는 “1000명의 전경들이 1만명의 시위대열에 에워싸여 버렸다.”며 감격한다. 오늘의 민주화는 소수의 스타가 아닌 독재권력에 ‘떼로 덤빈’ 다수의 무명인들이 이룩한 ‘수의 승리’란 것이다. 황광우도 분명 스타였다. 정인이란 필명으로 쓴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와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은 당대 젊은이들의 의식을 때린 필독서였고,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장을 마지막으로 현실정치에서 물러날 때까지 그는 진보정치 진영의 촉망받는 이론가였다. 그런 그도 몇몇 스타운동가들이 ‘386’이란 이름을 전유하며 순식간에 명멸하는 지금, 거리에서 이름 없이 스러져간 이들이 내뱉었던 뜨거운 호흡을 그리워한다. 윤동주의 시어를 빌려, 황광우는 오직 말한다.“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1만1000원.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6월 항쟁 20주년 ‘그날의 함성’그 이후] (6) 빛바랜 평등, 팍팍한 일상

    [6월 항쟁 20주년 ‘그날의 함성’그 이후] (6) 빛바랜 평등, 팍팍한 일상

    서울 천호동에서 조그만 고깃집을 경영하는 박진형(42·가명)씨. 아랫배 두둑하고 인상 좋은, 영락없는 ‘아저씨’다. 그러나 대학 3학년이던 87년 6월 항쟁 당시에는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그의 몸에서 떠나지 않았다. 대학로와 명동 거리가 그의 강의실이었다. 더구나 민족해방(NL)계보다 급진적이었던 제헌의회(CA) 출신이었다. 구소련이 무너지던 91년.TV를 통해 철거되는 레닌 동상의 모습을 보면서 그 역시 가슴속 이념의 지향을 지웠다. 졸업 뒤 그가 안착한 곳은 시중 은행. 그러나 또 한번의 ‘격동’을 맞았다.97년 외환위기 이후 그의 직장은 공중 분해됐다. 재취업의 길도 없었다. 다시 가슴에 구멍이 뚫렸다. 그렇다고 마냥 넋 놓고 있을 수 없는 일.27평짜리 아파트를 팔아 마련한 1억원을 밑천 삼아 음식점을 차렸다. 특유의 성실함에 운도 뒤따랐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시간표는 ‘오전 10시 출근, 자정 퇴근’이다. 실직의 공포는 뼛속 깊숙이 새겨졌다. 한 발자국만 벗어나면 어김없이 추락할 것 같은 위기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6월 항쟁 이전보다 빈부격차도, 경쟁도 훨씬 심해진 것 같아요. 혁명 같은 단어는 지운 지 오래죠. 그러나 이런 세상에서 살겠다고 민주주의를 외쳤나 싶습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는 그만한 대가가 주어지는 사회가 정상적인 거 아닌가요?” ●저소득 통한 고성장 6월 항쟁 ‘불씨’ ‘압축성장’이라는 단어는 한국 경제의 특성을 잘 말해 준다. 지난 1953년 국내총생산(GDP)은 13억달러,1인당 국민소득(GNI)은 67달러에 불과했다. 필리핀은 우리보다 국민소득이 세 배나 많은 ‘부자나라’였다.. 그러나 지난해 국내총생산은 8883억달러,1인당 국민소득은 1만 8372달러에 이르렀다.44년 만에 각각 683.3배,274.2배가 뛰어올랐다. 하지만 이는 악명 높은 노동시간과 저임금을 기반으로 한 성과였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오일쇼크의 직격탄을 맞은 1980년, 실질 경제성장률은 1.5% 빠졌지만 실질임금은 무려 25.3%나 떨어졌다. 이후에도 10%를 오르내리는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임금 상승률은 그에 턱없이 못 미쳤다. 주가는 1년에 70∼100% 뛰었다. 기업이 호황의 과실을 고스란히 독차지했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80년대 초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더욱 심해졌다. 소득 1분위(하위 10%)와 10분위(상위 10%)의 소득배율은 80년 7.97배에서 85년 8.46배로 늘었다.6월 항쟁을 단순한 민주화운동으로 국한시키기 어려운 이유다. ●진전된 국민 삶 외환위기로 파탄 6월 항쟁 이후 한동안 경제적 민주화는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88∼97년 실질임금 인상률은 한 해 평균 7.24%를 기록했다. 실질성장률 역시 평균 7.73%로 건실한 상승세를 계속했다. 상위 20%와 하위 20%의 연소득을 나눈 상하위 20% 소득배율 역시 85년 5.13배에서 ▲90년 4.63배 ▲95년 4.42배 ▲97년 4.49배 등으로 꾸준히 떨어졌다. 하지만 90년대 초반부터 한국 경제에는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95년 실질 성장률이 9.2%에 달했는데도 주가지수는 14.08% 하락했다. 기업의 해외자금 차입 증가에 따른 과잉투자와 재무건전성 하락이 경상수지 악화와 해외채무자들의 자금회수 우려 증가로 이어진 탓이다. 97년 말 외환위기를 맞았지만 한국 경제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경제성장률은 98년 -6.9%에서 99년 9.5%,2000년 8.5%로 급반등했다. 그러나 이때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은 중산층 붕괴, 양극화 심화라는 경제적 불평등 확산의 결과를 낳았다. 2005년 상하위 20% 소득배율은 5.43배.97년 4.49배보다 1배 가까이 벌어졌다. 소득 불평등 수치인 지니계수는 96년 0.291에서 99년 0.3을 넘은 뒤 떨어질 줄 모르고 있다. 지니계수는 낮을수록 소득 분배가 잘 되고 있다는 뜻이다. 결국 한국은 부자에게는 자상하지만 없는 이들에게는 ‘괴물’의 얼굴을 한 사회로 변모했다. ●성장 과실 분배통로 막혀 ‘20대80’ 사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단어는 ‘강남공화국’이다. 특히 아파트 가격은 강남 서초 송파 등 ‘강남’과 ‘비강남’으로 우리 사회를 양분화시켰다. 86년 당시 강북과 강남 아파트가격, 소비자물가 지수를 100으로 잡았을 때 외환위기 직전인 97년 지수는 180.8,204.4,187.5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강남 아파트 가격이 큰 폭으로 뛴 것은 2001년 이후. 강북·강남 아파트가격 지수는 ▲2002년 234.6,352.8 ▲2003년 242.8,403.2 등에 이어 2005년 8월 현재는 247.1,448.4로 두배 가까이 벌어졌다. 최근에는 강남에서 ‘평당 1억원 시대’라는 말까지 돌 정도다. 수출 호조의 과실이 개인 대신 기업에 쏠리고 있는 것도 문제다.90년부터 96년까지 개인과 기업의 실질소득 증가율은 각각 7.0%,6.5%로 같은 기간 경제성장률 7.6%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기업과 개인에 골고루 재화가 분배됐다는 뜻이다. 그러나 2000∼2003년에 개인 소득은 겨우 2.4% 늘었지만 기업은 18.9%나 급증했다. 소득에서 세금을 뺀 순소득인 가처분소득 증가율은 각각 0.3%,62.6%에 달한다. 임금근로자 중 비정규직 비중도 2001년 8월 26.8%에서 올해 3월 36.7%로 꾸준히 늘고 있다. 전체 개인 소득은 제자리걸음이지만 양극화가 극심해지고 있다는 것은 중산층이 몰락하고 있다는 뜻. 이는 소비와 내수 침체로 이어진다. 올해 1·4분기 1∼5분위 중 1분위 소비성향은 156.5%,2분위는 101.5%이지만 4분위는 79.6%,5분위는 64.8%에 불과하다. 서민층은 소득의 대부분을 소비로 지출하지만 고소득층은 투자에 상당 부분의 돈을 쓴다. 전체 소비가 위축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재벌 중심주의 경제체제의 변화 없이 경제적 민주화는 물론 추가적인 한국 경제의 성장도 요원하다고 말하고 있다. 경원대 경제학과 홍종학 교수는 “6월 항쟁의 최대 수혜자는 일반 국민이 아닌 재벌 등 경제적 상위 계층”이라면서 “정치 권력의 자리에 대신 들어선 경제 권력의 통제를 위해 일반 시민 권력의 목소리가 더욱 커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진보 진영 새 사회발전모델은 최근 한국 경제의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잠재성장률 하락이다. 특히 참여정부 들어 경제성장률이 5% 안쪽에서 머물자 잠재성장률 역시 4% 초반대로 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높다. 좌우 할 것 없이 현재 한국 경제가 문제 있고, 성장률을 높여야 선진국 진입이 가능하다는 데에는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우파의 성장 전략은 규제 완화에 따른 투자 활성화와 생산성 향상이라는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현재의 신자유주의 발전전략이 더욱 급속도로 적용돼야 한다는 뜻이다. 반면 양극화 문제에 대해서는 불가피한 현상이라며 눈에 띄는 대안을 내놓지 않고 있다.‘양극화의 영향이 좌파 진영에 의해 과장됐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고 있다. 진보진영 발전 전략의 공통점은 노동의 기여도를 높이는 것이다. 쉽게 말해 경제발전의 세 요소인 자본과 노동, 기술 가운데 현재 가장 기여도가 낮은 노동에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국가의 역할도 강조된다. 신자유주의의 ‘작은 정부’가 아니라 자본, 노동 등과 함께 경제발전을 이끄는 주체다. 최근 가장 활발히 논의가 진행된 자리는 지난해 11,12월 두 차례에 걸쳐 열린 ‘한국 경제의 대안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토론회다. 진보정치연구소, 대안연대 등 10개 단체가 참여했다. 먼저 진보정치연구소의 ‘사회연대국가론’의 골자는 ‘똑똑한 지식노동자의 적극적 역할과 미래산업의 발굴·투자’다. 핵심 전략은 ▲지식노동자의 생산성 주도와 경영 참가 ▲교육복지 강화 미래의 성장잠재력 육성 ▲국가의 산업정책 복원으로 재생가능에너지·환경산업 육성 ▲부유세 사회복지세 등 사회연대적 조세 신설 등이다. 곧 노동의 참여와 복지를 통해 성장잠재력을 높여 나가겠다는 것이다.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의 ‘노동주도형 경제모델’ 역시 말 그대로 노동의 역할을 끌어올린다. 안정적인 노동정책은 국민적 노동창의성 보장의 필수 요건인 만큼 국가 경쟁력 향상의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기초로 노동자 재계약과 산업간 재배치를 국가가 책임 지고, 공공금융기관의 지원 아래 산업자본을 강화한다. 국가는 비전 제시자다. 새사연 김병권 연구센터장은 “노동창의성 중심 성장전략은 세계사적으로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을 대체할 보편성·시대성을 지니고 있다.”면서 “피터 드러커의 지적처럼 인적 자원이 풍부한 한국에서 가장 적합한 모델”이라고 지적했다. 청와대 참여혁신 수석비서관 출신인 박주현 변호사가 만든 시민경제사회연구소 역시 ‘한국형 신성장동력 사회투자모형’이라는 눈에 띄는 결과물을 내놓았다. 기본 구조는 학습복지(Learnfare), 일자리복지(Jobfare), 사회적 안전망(Welfare) 등 ‘3 fare’다. 노동자의 평생학습 시스템을 갖춰 안정적인 일자리를 창출하면 경제성장과 복지를 함께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성공회대 신정완 교수도 사회구성원의 학습능력과 취업·혁신능력을 증진시킨 ‘한국형 사회적 시장경제모델’을 주창했다. 다만 논의들의 현실화에는 아직까지 의문 부호가 찍힌다.LG경제연구원 송태정 연구위원은 “‘지식경쟁’ 사회로 세계 경제가 변모하고 있는 만큼 노동의 한계생산성을 높이려는 진보 진영의 논의 방향은 맞다.”면서 “다만 이를 위해서는 교육 개혁 등이 동반돼야 하는 등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6·10항쟁 의미 되새기는 기회로”

    “6·10항쟁 의미 되새기는 기회로”

    “2004년 6월10일 영정이 찢겼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내 가슴도 찢어졌죠.”(이한열 열사 어머니 배은심 여사) “당시 도서관 앞이 시끄럽다고 그런 짓을 했다던데 화가 치솟더군요.”(영정과 걸개그림을 그린 최병수 화백) “교내에서 생긴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우리가 꼭 책임지고 싶었습니다.”(연세대 상경대 이한열 열사 추모기획단장) 2년 전 연세대 중앙도서관 앞에서 훼손된 채 발견된 이한열 열사의 영정이 6월 항쟁 20주년을 앞두고 단과대 후배들에 의해 복원된다. 영정은 1987년 이한열 열사 영결식 때 사용됐던 영정으로 2004년 6월10일 중앙도서관 앞에 전시됐다가 예리한 칼로 난도질 당한 채 발견돼 그동안 복원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30일 연세대 상경대 고(故)이한열 열사 추모기획단에 따르면 이한열 열사 영정 복원과 대형 걸개그림 추가 제작을 위한 모금운동에 들어갔다. 가로 1.8m, 세로 2.3m 크기의 영정은 6월 항쟁의 상징적인 그림으로 다음달 9일까지 복원돼 중앙도서관 앞에 다시 내걸린다. 걸개그림은 이미 제작된 두 점이 각각 국립현대미술관과 광주비엔날레에 소속돼 있어 추가로 제작하는 것이다. 재학생들은 지난 3월 영정과 걸개그림을 그린 최병수 화백을 찾아가 영정 복원을 부탁했다. 최 화백은 “훼손된 것도 나름대로 역사적 의미가 있고, 다시 제작하는 것 역시 다른 의미의 복원이니 다시 그리자.”고 말했다. 영정은 1988년 9월에 스프레이를 뿌려 놓은 훼손 사건이 있었던 터라 이번이 세 번째로 제작되는 셈이다. 모금 목표액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거액의 기부보다는 학생들이 조금씩 정성을 모아 마련할 계획이다. 현재까지 모인 금액은 목표금액의 20%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졸업생들도 이 소식을 듣고 참여하기 시작했다. 몇 만원씩이지만 꾸준하게 모이고 있으며 약정서를 써주는 선배들도 늘어나고 있다. 추모기획단장 이혁(24)씨는 “모금은 6월9일이 지나도 계속된다.”면서 “하루를 위해 준비하는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요즘 학교에선 민주주의라는 단어 자체를 듣기 힘들다.”면서 “영정·걸개그림 재제작 모금사업을 통해 이한열 열사와 6·10항쟁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모금운동을 함께하는 이모(24)씨도 “큰 의미가 아니라도 학우들이 2007년 현재의 관점에서 6·10항쟁의 의미를 새롭게 정립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높이 10m, 폭 7.5m의 이한열 추모 걸개그림도 현재 80% 정도 작업이 진행됐다.2004년 10월 위암 수술을 받은 최 화백은 “대학생은 취직에만 관심 있다고 말하는 세상에 대견한 일”이라면서 “다시는 훼손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는 “돈도 없는 학생들이 한두푼씩 모으는 게 쉽지 않은데 그저 고맙기만 하다.”고 말했다. 모금운동에 동참하려면 상경대 학생회실(02-2123-3648)로 연락하면 된다. 이경주기자 kdlrudwn@seoul.co.kr
  • [6월 항쟁 20주년 ‘그날의 함성’그 이후] (5) 교육 민주화 어디까지 왔나

    ‘우리는 더 이상 강요된 침묵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결심에 이르렀다.´1986년 5월10일 동토(凍土)의 교육현장에 ‘교육민주화선언’이 울려퍼졌다. 군사독재 정권의 폭압 통치에 항거해 교육의 정치적 중립과 교사·학생의 교육권 보장을 부르짖는 목소리는 ‘참교육’을 향한 치열한 대장정을 예고하며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6월 항쟁 이후 그 움직임은 급속도로 커졌고, 마침내 87년 9월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가 결성된 데 이어 89년 5월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참교육 쟁취라는 구호 아래 출범했다. 그로부터 20여년. 수많은 교사들이 교단에서 쫓겨나는 고통을 감내하며 이뤄낸 교육 민주화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최근 전교조에 대해 투쟁 일변도로 변했다거나 교사들의 이익단체로 변질됐다는 등의 비판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합법화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시절과 대중 조직으로서 교육 운동을 펼치는 현재의 전교조는 교육 민주화와 관련해 어떻게 다르며 앞으로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당시 교육 민주화의 산증인들과 학교 현장에 있는 교사들로부터 교육민주화의 현주소와 향후 과제에 대해 들어봤다. ●군사주의 교육 잔재 여전 “교육 민주화라…,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제7대 위원장을 지낸 김귀식(73 전 서울시교육위원회 의장)씨는 고개를 저었다. 교육 부문에서도 상당한 민주화가 이뤄지기는 했지만 뿌리 깊은 고질병은 여전하다는 쓴소리였다.“군사정권 시대의 병영 문화 잔재가 아직도 학교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에는 교육도 신자유주의에 오염돼 ‘1등만이 살길’이라고 가르치고 있어 문제가 더욱 심각합니다.” 1999년 1월 ‘교원노조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을 때 기자회견문을 읽어 내려갔던 그였다. 하지만 교육 민주화의 대표적인 성과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학교운영위원회(학운위)는 제도권 속에서 존재 이유를 상당부분 잃어버렸다. 그는 “학운위는 학교 민주화를 법제화한 엄청난 성과물로, 전교조가 그 도입 과정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지금은 교장의 독선을 합리화하는 기구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사학법 재개정은 학생보다 유권자 보고 결정” 사립학교법에 대해서는 “한나라당에서 사립학교법을 재개정하자고 하는데, 학생 입장에서 내린 교육적 판단이 아니라 사학이라는 엄청난 유권자를 보고 내린 결정”이라면서 “아이들의 민주화 의식은 학교에서부터 길러지는데 아이들은 배제하고 있어 문제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그에게는 ‘친정’이라고 할 수 있는 전교조에 대한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일부 보수 언론이 침소봉대해 마치 전교조가 정부의 정책 추진에 발목만 잡는 집단인 양 잘못된 편견을 조장해 왔다.”면서 “물론 전교조도 정치적 대응을 줄이고 교육현장에서 연구한 것들을 실천하는 데 더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당부했다. ●사회변화에 한걸음 앞서 실천을 제9대 전교조위원장을 지낸 이수호(58)씨도 전교조의 역할을 강조했다. 전교조가 처음 교육 민주화를 이끌었듯 다시 변화에 앞장서야 한다는 지적이었다.“사회 변화에 비해 교원노조 운동 내용이나 방식이 적절하게 변화하지 못했습니다. 정책 반대에만 머물렀다는 비판을 겸허히 수용해 앞으로는 대안을 제시하고 한걸음 앞서 실천하는 운동을 해 나가야 합니다.” 사학법 재개정 움직임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사립학교가 자금은 정부 지원을 받으면서 실제 운영만 교장·이사장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면서 “보수세력이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소외지역 공부방 지원사업 추진 교육 민주화 1세대인 이들이 전교조 합법화 등 제도적인 발판을 마련한 것과 달리 2세대들은 교육 민주화를 위한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정치적인 투쟁보다는 학교 현장에서 다양한 대안과 대책을 실천하는 활동이다. 현 전교조 한만중 정책실장은 “앞으로 교육 양극화 때문에 소외받고 있는 농·어촌과 도시빈민 지역, 다문화 가정 학생들에게 교육복지 혜택을 늘리는 정책을 추진해 나갈 것”이라면서 “다음달 초부터 전국지역공부방협의회와 공부방 지원사업도 펼칠 계획”이라고 말했다.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관료주의적 행정에 교육의 質 구멍” 지난 4월 어느날, 경기 A초등학교 김모(49) 교사가 한창 오전 수업을 하고 있을 때 교실 책상에 놓인 컴퓨터 모니터에서 신호음이 울렸다. 시교육청에서 보내온 공문이 팝업창으로 뜬 것이었다. “재학생 과거 병력을 파악하고자 하오니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김씨는 날짜를 보았다. 바로 다음날까지 하라는 것이었다. 벌써 처리를 미뤄둔 공문만 5개나 되는 터에 또다시 공문이라니…. 김씨는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현직에 있는 교사들은 이처럼 관료주의적이고 실적중심주의적인 교육행정으로는 진정한 학교 민주화를 꽃피우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교육과정 연구와 학생에 대한 관심은 뒷전인 채 학교는 점점 행정중심 사회로 변질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갖가지 불필요한 공문을 남발하는 교육 당국도 문제지만 교육청 기관 평가에서 점수를 높게 받기 위해서, 혹은 근무평정에서 더 나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 과다한 업무 처리를 마다하지 않는 교장·교감을 비롯한 교사 사회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경남 B초등학교 최모(57) 교사는 “학교는 국가교육과정이 우선돼야 함에도 실제적으로는 교장 명령이나 교육청의 시책 사업이 훨씬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런 과정에서 교육의 질 향상은 구멍이 뚫려버리고, 학생들에 대한 교육 기능이 점점 학원으로 밀려나가는 부작용이 생기고 있다.”고 개탄했다. 또 “학교장의 사상이나 관점이 학교 경영을 실제적으로 좌우하느니만큼 민주적 리더십을 강화하는 교장 연수 프로그램이 보강돼야 한다.”고 말했다. 경기 C초등학교 하모(47) 교사는 교사 성장 프로그램이 미미한 것을 문제점으로 꼽았다. 현재의 연수제도는 승진을 위한 수단으로서 존재할 뿐, 진정으로 전문성을 기르고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기능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교원 수급정책은 있지만, 교원 양성정책은 없다. 현재 교사는 노량진 고시학원에서 양성하는 것밖에 더 되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 D고등학교 이모(32·여) 교사는 학교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등한시하는 것이 문제라고 꼬집었다. 이씨는 “정년을 지키려는 기득권 교사들에 밀려 기간제 교사들은 재계약 불발, 정교사 임용 약속 불이행 등 갖가지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한다. 이들에 대한 제도 개선 없이 학교민주화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고 말했다.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새모델 ‘대안학교’는 “2000년 전교생 28명으로 폐교 직전에 이른 남한산초등학교를 교사 4명이 주축이 돼 살려냈습니다. 이때부터 공교육 틀 안에서 이른바 대안학교의 정신을 실현해나가는 교육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18일 경기 광주시 중부면 번천초등학교 서길원(47·전 전교조경기지부 정책실장)교사는 ‘공교육 혁명’ 활동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현재 ‘작은학교 교육연대’와 ‘새로운 학교를 만드는 사람들(schooldesign21)’을 이끌고 있다. ‘새로운 학교’라는 모델은 2001년 경기 광주시 남한산초교를 시작으로 이를 벤치마킹하는 움직임이 일면서 2002년에는 충남 아산 거산초교,2003년에는 전북 완주 삼우초교,2004년에는 경북 상주 남부초교,2005년에는 부산 금성초교 등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가장 큰 특징이라면 국가교육체제 내의 학교교육 틀을 가지고 대안교육을 모색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교육과정 내용은 일반 공립학교와 다르지 않되 활동의 면면은 보다 자유롭고 주체적이다. 예를 들어 남산초교 120여명의 전교생들은 여름과 가을에 일주일씩 열리는 계절학교에서 공예 등 문화체험활동, 예술활동 등을 펼친다. 다른 학교 역시 지역 대학생·문화예술인·귀농한 전문가 등이 자원봉사자로 방과후학교에 참여하는 등 지역사회와 연계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중학생 딸(12)과 초등학생 아들(9)을 대안학교에 보냈다는 전교조 참교육실장 진영호(48)씨도 “일반 학교는 입시위주 교육으로 아이들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 같아 주저없이 대안학교행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서길원 교사가 속한 작은학교 교육연대 모임은 앞으로 산촌유학·귀농모임과도 연대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서 교사는 “진정한 교육민주화는 소수자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학교 운동은 공동체성을 강화하는 교육민주화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중계석] “신자유주의 확산 민중이 대항하자”/김명인 인하대 교수

    “1987년은 부르주아민주혁명으로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형성된 부르주아민족국가는 신자유주의 드라이브에 의해 사실상 해체될 운명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6월민주항쟁 20주년을 맞아 열린 대토론회 ‘민주화 20년, 문화 20년 상상변주곡’의 여섯번째 토론회가 23일 서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강당에서 개최됐다. 발제자로 나선 김명인 인하대 교수는 ‘다시 민중을 부른다’라는 발표문에서 1987년 6월항쟁 이후 20년을 한국이 신자유주의 세계체제로 편입되는 과정으로 분석하고 반신자유주의 운동을 펼치기 위해 민중 개념을 다시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신자유주의의 지배를 받는 사회에서 자본화되지 않는 모든 인간은 사회 밖으로 내몰린다.”며 “오늘날의 극단적 양극화와 불평등, 경쟁주의는 신자유주의 시장독재의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신자유주의의 확산에 대항하기 위해 시민사회와 노동계급의 분발이 무엇보다 요구되는 상황”이라며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주체를 구성한다는 맥락에서 민중개념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0년대 탄생해 1970,80년대에 발전한 ‘민중’ 개념은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 등을 아우르는 포괄적 개념이면서도 억압적인 사회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주체로서의 가능성을 포함한 개념이기도 하다. 김 교수는 “1970∼80년대의 민중개념은 한국사회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장독재체제에 반대하는 지구상의 모든 지역 인민들을 아우를 수 있는 개념으로 상당한 적합성을 지닌다.”고 평가했다. 이어 “정규·비정규 노동자계급, 농민, 도시빈민, 이민자 등 신자유주의 시장독재체제의 희생자들이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반신자유주의 연합을 이뤄 세계적 규모의 저항운동을 펼치는 것이 지금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의 전망이고 희망”이라고 주장했다. 김명인 인하대 교수
  • [5·18 민주화운동 27주년] “오월에서 유월 함성으로”

    5·18민주화운동 27돌인 18일 광주에서는 기념식과 추모제 등 5월 영령들의 넋을 달래는 각종 행사가 개최된다. 오전 10시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는 유족과 정부 주요 인사, 여야 대표 등 정치인, 시민 등 2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이 열린다. 이날 행사는 개회식과 묵념, 헌화·분향, 경과보고, 기념사 등의 순으로 1시간 동안 진행된다. 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옛 전남도청 앞과 금남로 일대에서 전야제가 열렸다.5·18묘지에는 이날 하루 동안 2만여명의 참배객들이 몰리는 등 추모열기가 절정에 달했다. 대구에서 온 김영석(49·택시기사)씨는 “TV에서만 보던 현장을 직접 느끼기 위해 시간을 냈다.”면서 “묘에 묻힌 수많은 희생자들을 대하니 숙연해 진다.”고 말했다. 이날 묘지를 찾은 전남대생 박모(21·여)씨는 “광주에서 태어났으나 5·18을 경험하지 못한 탓에 5·18이 낯설게 느껴져 왔다.”며 “5월 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교육 등을 통해 더 널리 알려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임채정 국회의장과 한명숙 전 국무총리 등 정치인들의 광주 방문도 잇따랐다. 한 전 총리는 “1980년 5월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으로 광주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면서 “당시 교도소안에서 헬리콥터 굉음과 총성, 함성이 울리는 역사적인 현장을 함께했다.”며 5·18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5월에서 6월의 함성으로’를 주제로 열린 이번 전야제는 공연난장, 거리행렬굿, 진혼마당, 체험마당, 주제공연 순으로 밤늦게까지 진행됐다.금남로에서는 ‘주먹밥 나누기 행사’가 열려 시민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옛 도청 앞 특설무대에서는 일본 우타고에의 특별공연,‘무등합굿’‘님을 위한 행진곡’ 춤꾼 김은희의 넋풀이 ‘생명의 바다’가 이어졌다. 횃불행진에 이어 1980년 당시 시민군과 계엄군의 대치상황을 묘사한 상황극도 펼쳐졌다. 계엄군의 발포에 시민군이 결사 항쟁하는 모습, 시민들이 계엄군이 발포한 총알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 등이 재현돼 그날의 아픔을 되새기게 했다. ‘가자 오월에서 유월 함성으로’란 분수대 탑돌이 노래시극과 대동놀이가 펼쳐지면서 추모열기는 절정에 달했다. 이밖에 시내 일원에선 5·18 사진전, 어린이 환경극,5·18 퀴즈, 통일체험행사 등의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펼쳐졌다.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꽃만봐도 서럽고 그리운 날들/ 5·18 기념재단 엮음

    “…이대로 가다가는 어쩌면 광주가 피바다가 될 것이 뻔했기에 그대로 두고볼 수 만은 없었다. 그래서 손에 각목을 들고 머리띠를 두르고 금남로로 시민들은 모여들었다. 그것이 이상복씨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후로는 상복씨를 아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1권 266쪽) 남은 자와 누리는 자들의 업(業)이요, 트라우마인 5·18은 어김없이 올해도 우리 곁에 돌아왔다. 누군가는 이렇게 얘기했다.“5·18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아직도 많은 상처는 가려져 있고, 밝혀지지 않은 상흔도 적지 않다. 행방불명된 사람과 항쟁 이후 사망한 사람의 가족들은 그 아픔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살아갈 것이다. 5·18광주민중항쟁 행방불명자와 상이 후 사망자들의 기록인 ‘꽃만 봐도 서럽고 그리운 날들’(전2권,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5·18기념재단 엮음, 한얼미디어 펴냄)은 지금이 아니면 영영 되돌릴 수 없는 ‘기억’들을 담고 있는 책이다. 항쟁 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 151명의 죽음에 대한 증언록으로 지난해 발간된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의 후속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번 책들은 남겨진 가족들의 구술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항쟁 이후 사망한 44명과 행방불명자 56명에 대한 유족들의 기억을 담고 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정수만 회장은 “증언집에 수록된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겪어야 했던 고통과 그 가족이 품고 살아온 회한의 세월을 통해 우리는 왜 아직도 ‘5·18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하고, 그 상처를 사회가 함께 보듬어야 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망각하느냐, 기억하느냐. 선택은 하나다.“이제는 잊고 화해하자.”는 망각의 해법은 “그만하면 됐다.”는 가해자 입장의 선택이다. 하지만 진실과 정의를 외면한 과거사 청산은 사죄와 용서를 전제로 한 화해가 아니라 야합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이런 일은 더이상 안 된다.”는 자책의 심정을 담아 과거를 청산하려 한다.5·18기념재단 이홍길 이사장은 “이 책이 이분들의 모든 이야기를 담을 수는 없을 것이나, 우리가 희망하는 것은 그분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함께 나누어서 고통의 무게를 줄여 나갈 수 있다는 것”이라면서 “마땅히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한다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올해 여든여섯살의 노모는 지금도 텔레비전에 국립 5·18묘지가 나오면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훔친다. 전에는 자신이 움직일 수 있어 그의 묘비라도 손으로 만지며 하염없이 울어줄 수 있었지만 이제 바깥 출입이 어려울 만큼 건강이 나빠져 그마저 할 수 없는 처지다.…가난한 집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제화공으로 일하고 있던 장재근씨는 5·18민중항쟁에 참여했다가 1980년 6월3일 광주월산파출소에 연행되어 상무대 합동수사본부로 넘겨졌다. 그는 상무대에서 장갑차를 운전한 시민군으로 지목되어 허위자백을 강요받기 시작했다.”(2권 266쪽) 가슴속 깊이 묻어둔 기억을 재생시키는 것은 유족들에게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27년이라는 세월은 기억의 재생에도 긴 시간이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그 기억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지금이 아니면 영영 되돌릴 수 없다는 절박함이 이 책 곳곳에 넘쳐난다. 각권 1만 5000원.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한국 젊은세대 진보·보수 대립구도 떠났다”

    “한국 젊은세대 진보·보수 대립구도 떠났다”

    “NL(민족해방)은 농경적 신체,PD(민중민주)는 기계적 신체의 이데올로기이다.”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의 ‘민주화 20년’ 진단은 상당히 독특하다. 진 교수는 지난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20년을 특집으로 다룬 계간 ‘사회비평’ 여름호에서 ‘신체의 지질학’이라는 글을 통해 20년간의 구조변동을 한국인의 사회적 신체변화로 분석해냈다. 진 교수는 “급격한 지각의 변동이 지질학적 지층에 고스란히 기록되듯이, 급격한 사회의 변동 역시 한국인의 사회적 신체 안에 고스란히 충적되어 있다.”고 전제한 뒤 “온갖 디지털기기와 결합되어 있는 한국의 젊은 세대는 세계에서 가장 사이보그화한 신체가 되었다.”고 진단했다. ●농경적신체(NL)는 민족주의 우선 그는 “NL,PD 등 운동권의 두 기둥은 한국사회가 거쳐온 두개의 발전단계, 그 과정에서 형성된 두개의 신체를 대표한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NL은 산업화 과정에서 몰락한 농민들의 좌절감, 농촌지역의 소외감, 농민계급의 위기감 등을 ‘미제(美帝)’에 대항하는 민족주의로 승화시킨 ‘농경적 신체’의 이데올로기이다.80년대 운동권에서 NL이 주류로 떠오른 것은 급격한 산업화 속에서도 여전히 한국인들 신체가 농경문화에 젖어있었음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산업적신체(PD)는 논리·원칙 중시 다른 한쪽 기둥인 PD는 70∼80년대에 이루어진 산업화의 정서를 대변하는 ‘기계적 신체’의 이데올로기이다. 진 교수는 “NL이 인간을 믿는다면,PD는 텍스트(문자)를 믿는다.”면서 “PD에게는 품성보다는 논리가 중요하고, 의리보다는 원칙이 중요하다.”고 해석했다. NL과 PD의 대립을 두개의 다른 이념의 대립이 아닌, 두개의 다른 신체의 대립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진 교수는 87년의 정치적 체험공간은 농경적 신체를 지닌 NL과 산업적 신체를 지닌 PD가 공동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한 이례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보화신체는 노동이 오락화 그럼 2007년 우리의 신체는? 진 교수는 “IT분야에서 선두권에 속하는 한국은 이미 정보사회로 진입을 완료했다.”면서 “정보가 재화가 되고, 소비가 기호화하고, 생산이 정신화하고, 노동이 오락화하는 사회는 당연히 이전까지와는 다른 신체를 요구하게 된다.”며 ‘정보적 신체’의 등장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정보적 신체를 가진 젊은 세대에게 중요한 것은 집단의 미래가 아니라, 자기 개인의 발 앞에 닥친 현실”이라면서 “텍스트 세대의 눈에는 ‘보수화’로 보일지 모르지만 젊은 세대는 이미 진보나 보수의 ‘이항대립’ 구조를 떠났다.”고 진단했다.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지방시대] 5·18정신의 진정한 의미/김준태 시인·조선대 교수

    ‘역사는 발전한다’는 말을 예증하듯이 5·18은 엄청난 상처였으나 마침내 민주주의의 승리로 이어졌다.12·12와 5·17 쿠데타에 이어 광주학살을 자행한 신군부 세력이 민족과 민주주의에 준거한 역사적 단죄를 피할 수 없었음이 그것이다. 이른바 전직 두 대통령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세기적 재판’을 받기 위해 ‘나란히’ 법정에 서야 했다. 1996년, 대법원은 피고들을 판결하면서 “우리나라는 제헌헌법의 제정을 통하여 국민주권주의, 자유민주주의, 국민의 기본권보장, 법치주의 등을 국가의 근본이념 및 기본원리로 하는 헌법질서를 수립한 이래….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하여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는 것”이라고 명백한 선언을 했다. 1980년 5월 이후 계속되어온 ‘5월싸움’은 어김없이 모든 시민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먼저 5·18은 시인 김정환이 노래했듯이 ‘끝까지 우리들 인간성을 배반하지 않았던’ 나눔과 베풂의 문화를 창출한 공동선의 전범(典範)을 보여주었다. 계엄군이 투입된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광주시민들끼리는 살인·강도·절도사건 하나 없이 모두가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운명공동체를 아름답게 재현했는데 그것이 이후 한국사회 시민운동의 도덕적 모델이 되었다. 둘째로 분단국가에서는 여차하면 군부세력이 출몰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5·18의 경험을 통해서 터득한 시민대중은 국토와 민족의 통일에 대한 열망을 저버리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외세에 의존하는 단순한 환상에서 벗어나 ‘주권국가’로 일어서자는 의지가 확실한 목소리로 표출되었다는 것이고 넷째는 서로 다른 성격의 부문 운동이 종국엔 하나로 만나는 연대운동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다섯째로는 1948년의 여순사건과 제주 4·3사건, 거창민간인학살사건의 재조명과 역사재평가운동 등이 그것이다. 여섯째로는 불교·천주교·개신교 등이 각 종파를 초월하여 ‘함께하는 나라사랑운동’이 우선 큰 족적을 남겼다. 그렇다. 이 땅의 민주주의운동과 통일운동에 온몸을 바친 젊은 영혼들을 잊어서는 안 되리라. ‘잊지 말자 그리고 기억하자’는 경구가 말해주고 있듯이 한국의 민주주의가 이만큼이라도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한 사람들은 바로 그들이었으니 말이다. 5·18의 연장선상에서 촉발된 1987년 ‘6월항쟁’에 동참한 대다수 국민들의 결집된 역량이 마침내 나라발전에 커다란 활력소를 불어넣었다는 사실 또한 역사의 소중한 자산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제 5·18은 우리나라 전체구성원과 해외 700만 동포,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의 민주주의의 교과서로 읽혀지면서 자유와 평화, 인권운동으로 보편성과 영원성을 부여받고 있다. 해마다 5월 그날이 돌아오면 노래처럼 입술에 올리고 싶은 슬로건이 있다.‘5월에서 민주주의로,5월에서 통일로’가 그것이다. 결국 이 말에서 찾아지는 5·18의 진정한 의미는 갈라짐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하나됨’ 속에서만이 완성될 수 있다는 얘기다. ‘서로 손잡고 서로를 위로하며 어루만져주는 세상’그것이 5월정신이기 때문이다. 김준태 시인·조선대 교수
  • [6월 항쟁 20주년 ‘그날의 함성’ 그 이후] (4) 연대성 위기의 그늘… 노동계도 양극화

    6월 항쟁의 큰 축은 노동자였다.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의 열기는 작열하는 태양만큼이나 뜨거웠다. 비참한 노동 환경에서 숨죽이며 살아온 노동자들은 가슴에 쟁여 놓았던 울분을 한순간에 토해냈다.‘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절규였고, 그 절규로부터 한국 노동운동은 비로소 만개하기 시작했다. 20년이 지난 현재 노동운동은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적으로 따돌림을 받고 있다. 현재의 노동운동은 ‘귀족 노동조합(노조)´ 논란과 함께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에서 한 발짝 물러서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불안정한 노동계층은 여전히 ‘인간답게 살고 싶다.’며 오늘도 절규한다. ●“노동운동으로 남은 것은 팍팍한 현실뿐” “20년전이나 지금이나 우리 삶은 더 물러설 곳 없는 벼랑입니다.” 1980년대 후반 노동 운동으로 해고된 뒤 줄곧 건설노동자로 살아온 사춘식(52)씨의 짙은 흑색 낯빛엔 지난 세월이 묻어났다.10일 경기 화성시 동탄신도시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만난 그는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용접 작업을 하고 있었다. 사씨는 “노동운동하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내 삶은 변함없이 팍팍하다.”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는 고아가 돼 중학교 이후 배움은 꿈도 꾸지 못했다.85년 일당 3300원에 밥값까지 제했던 회사 H프레스에서 위장취업 대학생을 만나 노동운동에 눈을 떴다. 밤마다 전태일을 읽었고, 근로기준법을 공부했다. 파업에 앞장선 후 그는 곧바로 해고됐다.86년에는 B냉방 하청업체에 재취업해 노조를 만들었다가 H프레스 전력이 탄로나 또 해고됐다. 그의 이름은 정보기관의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그 후 한번도 정규직장을 갖지 못했다. ‘굶어죽지 않으려고’ 건설현장으로 들어갔다.87년 여름 ‘노동자 대투쟁’ 때도 그는 건설현장 노동자로 참여했다. 한 달 일하고 두 달 쉬는 생활이 계속됐고, 외환위기 직후에는 일이 없어 1년간 공공근로를 해야 했다. 밥 먹는 게 힘에 부친 생활이었고, 그 생활은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졌다. 노동운동이 힘을 키웠고 대기업 노동자들의 생활도 안정을 찾은 지금, 그는 “파업하고 내게 남은 건 잘린 인생”뿐이라고 했다. 그는 “과거 동료들이 만든 민주노총이지만 이젠 신뢰 안 한다.”고 불만을 쏟아냈다. “나 같은 ‘노가다’ 일하는 거 봐라. 비정규직도 이런 비정규직이 없다. 하루를 버티기 힘들던 20년전, 라면 한 젓가락 나눠 먹고 동료의 꺼진 연탄을 걱정하던 작은 사랑이 있었기에 우린 버틸 수 있었다. 우리를 돌아보지 않는 지금의 노동운동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다.” 80년대말 동구권이 몰락하자 그렇게 열렬했던 ‘학출(위장 취업 대학생)들’은 모두 살길을 찾아 떠나갔다. 그에게 노동운동을 가르쳤던 그 대학생도 지금은 사업에 성공해 큰 돈을 벌었다고 한다. “얼마 전 그 친구를 만나 웃으며 말했다.‘너희들은 살 길 찾아가 사업하고 잘 살지만, 갈 곳 없어 남은 우리는 여전히 힘겹다.’고. 내 말에 친구가 그러더라.‘형, 더 이상 그때 마음 기대하지 마.’ 친구가 변할 걸까, 내가 변하지 못한 걸까.” 동탄신도시 건설현장에서 사씨가 맡은 일은 1개월짜리 단기계약이다.5월말이면 일이 끝난다. 이후 살길은 그도 아직 모른다. ●“이제 비정규직에 눈 돌릴 때” 자동화기계를 만드는 경기 군포의 한 ‘마치코바(영세 동네공장을 일컫는 일본식 표현)’에서 일하는 김종주(47)씨가 10시간이 넘는 하루 일을 마치고 짐을 정리했다. 그는 사춘식씨와 H프레스에서 해고된 ‘학출들’ 중 지금까지 현장에 남은 2명 중 한 사람이다. 경상도에서 대학 한 학기를 마친 84년 친구의 꾐(?)에 빠져 노동운동하러 안양으로 올라왔다. 그는 “일단 알게 된 이상 반란을 꿈꾸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고, 반란의 대가는 해고로 되돌아왔다. 한번 시작된 해고는 10번을 훌쩍 넘어섰고, 이젠 몇 번 해고당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도 못하는 지경이 됐다. 노조 결성을 이유로 마지막 해고된 시점이 불과 3년전이다. 반복되는 해고로 승진이나 임금인상 같은 ‘호사’는 한번도 누려보지 못했다. 잘릴 때마다 앞이 캄캄했던 그가 끝내 현장을 지키는 이유는 뭘까.“그는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라고 말끝을 흐렸다. 그는 영세공장을 전전하며 87년 당시보다 더 힘겨워진 현실을 온몸으로 겪어왔다. “97년 이후 힘 있는 대기업노조는 고용안정을 최소한 보장받았지만, 노조가 없는 영세사업장 노동자는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훨씬 심해졌다. 내가 거쳐 온 회사의 90%가 없어졌다.” 그는 “현재 노동운동이 비정규직 문제를 중심으로 힘을 모으지 않으면 아무리 외형적으로 성장하더라도 아무 소용없다.”면서 “공장에 있으면 절망할 틈이 없다.”고 말했다.“먹이사슬의 마지막 단계”인 ‘마치코바’에서 그는 오늘도 절망과 싸우고 있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전문가들 진단 “6월 항쟁 때는 사무직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와 공장 노동자들과 함께 어깨 걸고 투쟁했지만, 지금은 노동자들도 직업에 따라 계급이 갈렸다. 노동자들이 목 매고 분신하며 만든 현실에 노동자 스스로 안주한 결과다.”(주봉희 민주노총 부위원장)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노총의 도덕적 힘은 강했다. 그 힘을 바탕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고, 사회개혁의 주축 세력이 됐다.20년이 흐른 지금, 민주노총의 도덕적 힘은 급격히 약화됐다. 비리 혐의로 잇달아 구속된 노조 간부들 탓만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꼽는 핵심 원인은 ‘연대성의 위기’다. 비정규직 노동자와의 범사회적 연대보다는 기업별 고용 안정에 주력하는 정규직 노조 위주의 운동 방식에 대한 일침이다.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87년 이전엔 자기 자신 취약계층이던 노동자들이 고용조건이 안정되면서 자기 주변을 포용하는 연대의 틀을 개발하는 데 소홀했다.”면서 “지금은 매우 심각한 위기 상황”이라고 단언했다. 한때 민주노총에서 비정규직 사업을 책임졌던 관계자는 “오늘날 비정규직이나 저임금, 여성, 불안정한 노동자의 삶은 6월 항쟁 당시 다수 노동자의 삶과 다르지 않다.”면서 “민주노총이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나서지 않으면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또 겪어야 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KBS 비정규직노조 위원장 출신으로 올 1월 선거에서 당선된 주봉희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4개월도 안 돼 민주노총의 높은 벽을 실감하고 좌절했다.”면서 “민주노총은 낮은 사람들을 위한 대중조직이 아닌 정규직의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색깔을 바꾸는 카멜레온 같은 조직으로 바뀌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한 노동계 인사는 “2.8%에 불과한 비정규직 조직률을 높이고 임원·대의원 비정규직 할당제 등을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가 스스로 자기 세력화할 수 있도록 민주노총의 재정과 인력 대부분을 투여하겠다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은수미 연구위원도 “수십억원에 이르는 현대차노조의 이월재정을 산별노조 재원으로 전환해 비정규직 재교육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써야 한다.”고 충고했다. 안기호(43) 전 현대자동차 사내하청노조 위원장은 “비정규직이 돼 보니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어려운 모멸감과 고통을 겪게 되더라.”면서“정규직노조 중심의 민주노총이 몰매를 맞는 것은 비정규직 등 사회적 약자의 아픔을 외면했기 때문으로 운동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재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규직·비정규직 노조 위원장을 모두 역임한 그의 주장이기에 울림이 크다. 노동운동의 중심 축이 비정규직 운동으로 과감하게 이동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내가 본 광주항쟁 영화에 생생히”

    5·18 광주 민주화항쟁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감독 김지훈·제작 기획시대)’ 제작보고회가 9일 열렸다. 이 자리에는 당시 사건을 취재했던 외신기자가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김지훈 감독을 비롯해 안성기, 김상경, 이요원, 이준기, 박철민 등 배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압구정 CGV에서 열린 보고회에는 1980년 당시 미국의 유력지 시카고 트리뷴 서울특파원이었던 도널드 커크(69)씨가 참석, 당시 광주의 상황에 대해 증언했다. 현재 자유기고 언론인으로 활동하는 그는 지난 30년간 한국의 굴곡 많은 역사를 지켜본 산 증인. 커크씨는 광주 민주화항쟁에 대해 “200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죽음을 맞은 비극적인 사건일 뿐아니라 한국 민주화의 전환점이 된 대단한 사건”이라며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고 평가했다. 사실 그는 5월18일 항쟁이 일어났을 당시에는 서울에서 기사를 쓰고 있었다. 그가 광주를 찾은 것은 소요가 일단 가라앉은 직후이다. “전남도청 옆에 수많은 나무관들이 쭉 도열해 있었는데 유족들이 관 뚜껑을 일일이 열어보며 자기 가족을 확인하는 장면이 눈에 생생하다.”며 “영화 속에 이 장면이 사실적으로 잘 묘사돼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광주 민주화항쟁은)개인적으로 슬픈 추억”이라고 덧붙였다. 전날 영화를 본 그는 크게 감명받았는지 함께 자리한 감독과 배우들을 보며 “영광” “감사”라는 말을 연이어 쏟아냈다. 또 “영화가 사건의 핵심을 잘 살린 것 같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제작비 100억원 규모의 대작 ‘화려한 휴가’는 역사의 격랑에 휘말리는 소시민의 삶을 통해 광주 민주화항쟁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으로, 오는 7월 중순 개봉을 앞두고 있다.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생활 속의 식민지주의/미즈노 나오키 등 지음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우리 안의 식민지주의’는 도대체 얼마나 남아 있을까.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우리의 청년학생들은 집체 군사훈련인 ‘교련’이라는 과목을 학교의 정규수업으로 수강해야 했다. 아직도 사적인 이해를 공적인 것으로 포장한 의리 중심의 정치·사회문화가 일상화돼 있기도 하다. ‘생활 속의 식민지주의’(미즈노 나오키 등 지음, 정선태 옮김, 산처럼 펴냄)는 이처럼 식민지배를 받은 우리나 타이완, 그리고 식민지배를 한 일본에 남아있는 식민지주의가 어떤 구조에서 만들어졌는지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규명한 책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20세기가 낳은 식민지주의의 구조를 먼저 해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저자 가운데 한명인 미즈노 나오키가 한국어판을 내면서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처럼 이 책의 저술 목적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일본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의 2002년 여름 공개강좌 강연내용을 엮은 이 책은 비록 5년여의 시간이 지났지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생활은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가 도달한 ‘종착점’이다. 다시 말해 일상생활은 국가나 제국의 이념이 깃들인 사회적·문화적·정치적·군사적 지층(地層)이기 때문에 그 사회 민중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행사하는 것이다. 책은 학자 네명의 사례연구를 담고 있다. 미즈노 나오키는 일제가 조선인들의 이름을 가지고 어떻게 식민통치에 활용했는지 설명하면서 그런 일제 때의 관행이 아직도 한국인들에게 남아 있는지 살펴보고 있다. 합병(1910년) 이후 ‘막둥이’ 등 조선어 이름의 호적 등재를 금지한 것이 식민통치의 효율성을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밝힌 그는 그런 관행이 최근까지도 한국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서울대 정근식 교수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의 민주화는 총동원체제의 해체이며 그 속에서 작용하는 신체규율의 해체와 연결되어 있다.”고 단언한다. 교토대의 고마고메 다케시 교수와 효고교육대의 마쓰다 요시로 교수는 타이완에 대한 일본 식민지배가 신사참배와 원주민 동화교육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진단을 통해식민지주의의 뿌리깊은 역사를 고발한다.1만 2800원.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6월항쟁 계승사업회 다큐 제작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는 6월민주항쟁 20주년을 맞아 ‘다큐 6월항쟁’을 제작한다고 밝혔다.3권의 기록물과 1권의 사진집으로 꾸며질 ‘다큐 6월항쟁’은 6월 항쟁의 배경을 설명하는 제1장과 6월 항쟁의 발발 및 전개과정을 담은 제2장으로 구성될 예정이다.1987년 6월 당시 항쟁에 참여한 40여명이 필자로 참여한다. 전국 동시다발 투쟁을 이끈 지역 운동가들의 인터뷰도 이뤄질 예정이어서 관심을 끈다.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측은 “6월항쟁은 군사독재 폭압정치를 끝내고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린 자랑스러운 역사”라며 “‘다큐 6월항쟁’은 소수 저명인사의 영웅사가 아닌 평범한 국민들의 승리라는 관점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밝혔다.
  • ‘5·18부터 6·10까지’

    ‘5·18부터 6·10까지’

    올 5·18민주화운동 제 27주년 기념행사는 ‘6월 항쟁’과 연계해 추진된다. 5·18기념재단은 1일 6월 항쟁 20주년을 맞아 ‘5월 항쟁’과 ‘6월 항쟁’의 연관성을 드러내는 데 행사의 초점을 두고, 이날부터 금남로 등 시내 전역에서 5·18 민주화운동 공식 행사에 돌입했다. 5·18 민중항쟁 제 27주년 기념행사위원회는 이를 위해 최근 공모를 통해 행사의 주제를 ‘참여해요 5·18, 함께해요 6·10’으로 선정했다. 18일 국립 5·18묘지에서는 기념식이 열리며, 전날인 17일 옛 전남도청 앞 특설무대에서는 ‘5월에서 6월의 함성으로’란 주제로 전야제가 펼쳐진다. 행사위는 기본행사 이외에도 정신계승·문화예술·학술대회·시민참여·국제연대·타지역 행사 등 모두 10개 부문 40여개의 각종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5·18 기념재단 조진태 사무처장은 “올 행사는 6월항쟁과의 연관성을 규명하는 데 역점을 뒀다.”고 말했다. 한편 기념재단은 최근 ‘2007년 광주인권상’ 공동 수상자로 인도의 인권운동가인 레닌 라흐바니시(37)씨와 이롬 샤밀라(여·35)씨를 선정하고,18일 시상식을 갖는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6월 항쟁 20주년 ‘그날의 함성’ 그 이후] (3) ‘항쟁의 산물’ 시민단체 어제와 오늘

    [6월 항쟁 20주년 ‘그날의 함성’ 그 이후] (3) ‘항쟁의 산물’ 시민단체 어제와 오늘

    6월 항쟁의 중심에는 시민이 있었다.‘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며 거리로 나온 대학생과 시민, 그리고 퇴근 후 시위에 합류한 ‘넥타이 부대’가 있었다. 전경을 피해 달아나는 시위대를 숨겨 주거나 정성스레 물 한잔을 건네 준 사람도 6월 항쟁의 숨은 주역이었다. 6월 항쟁 이후 불붙기 시작한 ‘시민의 힘’은 시민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시민없는 시민단체’,‘명망가 중심의 운동’,‘대안 없는 비판’ 등으로 시민운동이 위기를 맞고 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6월 항쟁으로 촉발된 시민운동이 이제 새로운 도약을 위한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시민 없는 그들만의 활동이 위기 자초 26일 시민·사회단체에 따르면 시민운동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급성장했다. 여성민우회(87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88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88년), 환경운동연합(93년), 참여연대(94년) 등 굵직한 시민단체들이 탄생했다. 시민·사회단체는 전국적으로 2만 3500여개에 이른다. 시민·사회단체들의 움직임은 2000년 총선 당시 ‘낙천·낙선운동’을 벌이며 전성기를 누렸다. 시민운동의 영역도 정치민주화를 넘어 사회·경제민주화로 다양화되고 세분화됐다. 그러나 2000년을 기점으로 위기론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시민운동이 일부 명망가 중심의 운동으로 변질되고, 일부 단체의 도덕성 문제가 도마에 오르면서 시민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또 보수·진보 단체의 대립과 정치·권력화로 ‘그들만의 단체’로 바뀌었다. 안진걸 희망제작소 사회창안팀장은 “단체의 영향력이 떨어진 게 위기가 아니라 시민들과 함께 하려는 치열함과 진정성 부족이 위기를 불렀다.”면서 “교수, 변호사, 활동가, 고액후원자 등 전문 집단이 독점한 시민운동 의제를 시민들에게 돌려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시 시민속으로, 시민과 함께’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6월 항쟁 당시와 같이 자발적인 시민참여 열기를 되살리는 것이 시민운동이 재도약하는 길이라고 입을 모은다. 쟁점을 쫓아가는 운동보다는 내실화에 치중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경실련은 ‘통계와 수치로 말하자.’는 운동을 몇 년째 실천하고 있다. 그 성과는 지난해 ‘아파트값 거품빼기 운동’으로 나타났다. 윤순철 경실련 시민감시국장은 “보도자료를 내는데도 3개월 이상 철저하게 준비를 했다.”면서 “시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운동을 벌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대안 마련에 중점을 둔 단체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희망제작소,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생태지평,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등이 대표적이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시민단체가 이것저것 다하다가 무엇하나 제대로 못하는 악순환이 위기를 자초했다.”면서 “정형화된 운동의 틀을 깨고 ‘할 수 있는 하나라도 제대로 하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과잉대표성 폐해 시민운동의 침체 원인이 명망가 중심의 운동이 빚어낸 ‘과잉 대표성’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원로 한명이 여러 단체 대표로 ‘겹치기 출연’ 일부 명망가들이 각종 시민·단체 공동대표 등에 겹치기로 나서는데다 정부 자문위원회 진출까지 독점하면서 ‘시민’의 설자리가 사라져 버렸다는 지적이다.‘시민의 힘’을 보여준 6월 항쟁의 정신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일부 명망가들이 독점한 시민운동의 의제를 다시 시민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원로 시민운동가인 A목사는 자신이 공동대표 등으로 있는 단체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그는 “일은 실무자가 다하니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자회견장을 지키는 것뿐”이라고 털어놨다. 명망가 위주로 ‘이름 빌려주기’하는 것도 문제다. 심지어 ‘단체 따로, 대표 따로’라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지난 1월10일 언론개혁시민연대 등 30여개 시민단체들은 최근 파행을 겪고 있는 ‘시민의신문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시민의신문 이사회를 비판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지만 당시 이 신문 이사 B씨는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를 겸하고 있었다. ●일부 인사가 정부 자문위원회도 독점 민주당 손봉숙 의원이 지난해 5월 발표한 여성단체 인사들의 정부 자문위원회 진출 현황에 따르면 박인례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사무총장은 14개, 김소림 인천여성단체협의회 회장 11개, 조윤미 녹색소비자연대 사무처장 11개, 김재옥 소비자시민모임 회장 11개, 이향기 한국소비자연맹 부회장 10개의 정부 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다. 여성운동가 출신인 손 의원은 “이들이 겹치기로 자문위원회에 나가서 과연 내실 있는 자문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비판했을 정도다. 한상희 건국대 법대 교수는 일부 시민단체 명망가들의 자질 부족과 무책임을 꼬집는다. 그는 “개인 경험을 늘어놓거나 양비론으로 흘러 김을 빼놓는 경우를 적지 않게 봤다.”고 꼬집었다. 명호 생태지평 연구원은 “정부는 책임과 권한은 주지 않고 내용은 취약한 명분밖에 없는 민관협력을 원하기 때문에 전문성을 가진 시민운동가가 아니라 그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고 지적했다. ●‘명망가 중심 시민운동 이제 끝내야’ 시민운동가들은 시민단체 원로들을 ‘얼굴마담’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형식에 치우친 연대사업과 급조된 기자회견 남발을 원인으로 꼽는다. 한 시민단체 정책실장은 “제대로 된 기자회견이라면 가장 열심히 하고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앞에 나와야 하는데 실제로는 늘 오던 사람만 기자회견장을 채우는 경우가 많다.”고 인정하면서 “연대기구, 기자회견, 집회 모두 남발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안진걸 희망제작소 사회창안팀장은 “단체 대표들이 아니라 실무자들이 정부위원회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열악한 시민운동가 처우 시민운동가 A씨는 지난해 국회보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10년간 시민운동을 통해 남은 것은 5000만원의 빚뿐. 생활고에 시달리다 시민운동을 접었다. 매월 시민단체 15곳에 내는 회비만 50만원인 A씨는 “지금도 시민단체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쉽지 않다.”고 전했다. 시민운동 활성화의 또다른 걸림돌은 시민단체 상근자들의 열악한 처우다.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와 경실련 상근자들의 임금이 100만원 정도에 불과하다. 시민운동가들에게 최소한 생활을 보장해줄 수 있는 재정적 기반에 대한 고민은 시민운동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시민단체들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쓴다. 참여연대는 올해부터 상근자 최저임금을 100만원으로 정했다.4년간 동결했던 임금을 지난해 15% 인상한 결과다. 경실련도 같은 방식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기본급을 95만원으로 올렸다. 한때 상근자만 90명에 육박하던 경실련은 5∼6년전 55명, 지금은 34명이 일하고 있다. 경실련은 상근자 35명을 상한선으로 정했다. 박병옥 경실련 사무총장은 “사업 영역을 통폐합하면서 지난 3년간 급여를 높이고 사람을 줄였다.”고 전했다. 김민영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선택과 집중’으로 상근자에게 투자하는 비율을 높일지, 현재처럼 인력을 더 늘리는 방향으로 유지할지 내년에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5월 21일은 ‘부부의 날’

    민주화 운동의 대명사인 ‘6월 항쟁’이 국가 지정 기념일로 등재됐다. 정부는 24일 국무회의를 열어 민주항쟁 기념일인 6월10일을 법정기념일로 제정한다는 내용 등을 담은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의결했다. 6월 항쟁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1987년 6월 전국적으로 일었던 민주화 시위를 일컫는다.지금까지는 시민단체 차원에서 6월 항쟁 기념행사가 열렸다. 법정기념일로 제정되면 위상에 변화가 있지만, 정부의 별도 지원은 없다. 정부는 또 ‘부부의 날’(5월21일),‘세계 한인의 날’(10월5일)도 법정기념일로 추가 제정했다. 여성가족부의 요청으로 제정된 부부의 날은 부부 관계의 개인적·사회적 중요성을 인식시키자는 취지다. 가정의 달인 5월에 둘(2)이서 하나(1)되는 날이란 뜻에서 5월21일로 지정했다.세계 한인의 날은 지난해 9월 노무현 대통령의 유럽순방 당시 그리스 동포 간담회에서 건의된 내용으로, 재외동포의 권익 신장을 위해 외교통상부가 제정 건의했다. 이로써 법정기념일은 이날 추가 제정된 3개를 비롯해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근거를 두고 있는 40개,‘입양의 날’ 등 개별법에 의한 8개 등 모두 48개가 됐다.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옴부즈맨 칼럼] 뉴스의 시각화/김사승 숭실대 언론홍보학 교수

    지난주는 16일 일어난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사건 기사들로 1면을 비롯해 주요 지면들이 채워졌다. 사건이 사건이니만큼 당연한 선택이라고 본다. 그러나 1면에 배치하는 것만으로 사건의 의미전달을 충분히 했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물론 어디까지가 ‘충분’한 것인지 정답은 없다. 공식적인 수사결과도 나오지 않은 시점에서 섣부른 예단은 오히려 문제다. 다만 전달의 방법을 놓고 그 ‘충분함’을 따질 수는 있다. 과학이나 기술의 발전은 인간이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보다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시각적 재현을 향한 진화의 역사인 셈이다. 다른 한편 기술은 시간과 공간을 압축한다. 인터넷은 시공간을 극단적으로 압축하면서 전지구를 하나의 마을로 만들었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사람들은 이 때문에 실제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로열티를 상실해가고 있다. 사람들 사이의 실존적 유대감도 왜곡되고 있다. 지구촌은 지구적 미아를 만드는 구조이기도 한 것이다. 인터넷시대 저널리즘이 택할 수 있는 ‘어떻게’의 한 방법이 여기에 있다. ‘집단적 시각화’라는 게 있다. 잃어버린 공동체를 찾아주는 시각적 표현기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과 관련된 정보들을 시각화해서 개인이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인 존재감을 갖게 해주는 것을 말한다. 개인과 공동체의 연관성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각종 정보들을 위계화해서 범위나 강도, 수나 관계의 긴밀도 등을 통해 보여준다. 지도를 통해 이런 것들을 표현하는 매핑(mapping)기법이 대표적인 예다. 이번 사건 보도의 경우를 보자.18일자 3면의 캠퍼스 사진과 사건일지표, 총기사망사고 현황표 등이 있다. 구글의 위성사진을 옮겨놓은 듯한 캠퍼스사진은 1단 5∼6㎝ 정도의 작은 크기로 사고현장인 노리스홀이나 존스턴홀의 형태도 알아보기 어렵다. 사건일지는 시간 순서대로 제시되어 있다. 미국 학교내 총기사고 사망현황은 관련된 수치들을 그냥 나열했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사람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지도의 경우 캠퍼스의 사고현장위치뿐만 아니라 사고건물의 구조까지 보여주는 게 사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사고가 지역사회에 미치는 파장이나 지역교포들과의 관련성을 설명하기 위해 한인밀집 주거지역, 조승희가 살았던 지역 등 주변 지역을 포함하는 지도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총기난사 사건일지는 훨씬 더 많은 정보를 보여줄 수 있다. 단순 활자정보가 아니라 사고지역들을 지도에 표시한 다음 사망자의 규모를 사고지역에 붉은 원의 크기로 보여준다. 범인의 가족살해와 같은 사건의 특징, 사용된 총기종류, 사건들 사이의 유사성, 범인의 공통점, 사고지역과 범인의 연관성 등 다양한 정보들을 그 주변에 표시한다. 학교내 총기사고 사망현황도 마찬가지다. 이 표는 중요한 사실들을 드러내는 수치정보들을 한데 꾸겨 넣었는데 미국지도를 배경에 깔고 다양한 방식으로 정보들을 시각화할 수 있다. 버지니아공대 총기사고 외에 시각화할 수 있는 기사들이 많다.16일자 ‘지자체도 전관예우’,18일자 ‘엉터리 통계탓 수조원 낭비’,19일자 ‘황혼이혼 10년래 최고’,20일 ‘6월 항쟁 20주년’ 기사 등 서울신문은 최근 1면에 각종 통계치를 이용한 박스기사들을 다루고 있다. 이런 종류의 기사들도 얼마든지 시각적 표현이 가능하다. 특히 이들 기사들은 그냥 읽기에는 딱딱한 내용들로 일반 독자들이 소화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시각적 접근은 중요하다.1장의 시각적 표현이 10장의 기사보다 더 큰 의미를 제공할 수 있다. 김사승 숭실대 언론홍보학 교수
  • “민중 힘으로 입신한 사람들, 사욕만 좇을뿐”

    “민중 힘으로 입신한 사람들, 사욕만 좇을뿐”

    “6월 항쟁의 성과를 과연 모든 민중이 누리고 있습니까. 정치인 몇 명이 독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픔과 분노, 좌절과 환호, 승리와 패배가 뒤섞였던 1987년 6월, 그 복잡다단한 표정을 한 장의 인화지에 담아낸 시인이자 기록사진작가 박용수(73) 한글문화연구회 이사장은 20년이 지난 오늘을 “더없이 살기 힘든 시대”라고 일갈했다. 당시 최루탄 가스 냄새에 갇힌 항쟁의 기억들이 역사적 증거로 남아 있는 것은 온갖 고초를 마다하지 않고 현장을 누비고 다녔던 그의 땀방울이 있었기 때문이다.19일 서울 종로구 한글문화학회에서 만난 그는 떨리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18세 때 장티푸스로 청각·언어장애인이 된 그는 중요한 부분을 언급할 때마다 펜으로 짧은 문장들을 적어나갔다. 맘속에 쟁여온 6월 항쟁의 뜨거움을 전하기에, 세상의 언어는 너무 빈약했다. “머리만 좀 다친 줄 알았는데 한열이가 죽었어. 난 (사진을) 찍어야 했어. 찍다 경찰에게 맞아도 찍어야 했기에 참았지. 나 자신을 한열이라고 생각하며 셔터를 눌렀어요.” 그가 담은 이한열 장례식 사진은 당시의 열기를 잘 보여준다. 그는 “사람이 너무 많아 근처에 가기도 힘들었다.”면서 “근처 봉제공장 여공들 도움을 받아 공장 건물에 올라가 찍을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온갖 죽음의 현장을 목격하며 내 정신도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며 잠시 말을 중단하기도 했다. 경남 진주에서 사진가로 일하던 1960년 한 문예지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한 그는 ‘시인의 꿈’을 이루기 위해 1970년 1월 상경했다. 1974년 11월 소설가 이문구·김정한·박태순·송기원, 시인 고은·신경림 등의 문인들과 함께 1974년 11월 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족문학작가회의 전신)를 구성하면서 민주화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6월 항쟁 당시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내에 보도실을 만들어 50대의 나이로 현장을 낱낱이 기록했고, 한국 민주화 과정을 담아낸 8만 7000여점의 사진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기증해 귀중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당시는 경찰이 사진기자의 접근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어요. 나는 말투도 이상하니까 외신기자라고 속여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그가 촬영에 중점을 둔 부분은 구치소에 수감된 민주인사들에게 또 다른 폭력이 가해지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호주머니에 작은 카메라를 숨겨 구치소 관계자 몰래 수많은 사진을 찍어 세상에 알렸다. 안동교도소에 갇힌 문익환 목사가 노별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자 문 목사 사진을 찍어 외신에 넘겼다. 서울교도소에 수감 중인 장기표씨를 면회 갔을 땐 기둥에 숨어 셔터를 눌렀다. 그는 “사진이 세상에 공개되면 담당 경찰들이 상부로부터 심한 문책을 받았다.”고 전했다. 기록사진가이기 이전에 민통련 중앙위원이었던 그도 두 번 구속됐다. 그런 그가 바라보는 항쟁 20년 후의 모습은 ‘민중의 삶과는 너무 먼 시대’로 요약된다. “항쟁의 성과로 정치에 입문한 사람들이 자기 이득만 취할 뿐 민중을 생각지 않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예외가 아닙니다. 항쟁 당시의 신념으로 산다면 가난한 사람들이 점점 더 가난해지는 현실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민주화 이후 ‘겨레말 갈래 큰사전’(93년),‘새우리말 갈래사전’(94년),‘겨레말 용례사전’(96년) 등을 펴내며 ‘우리말 지킴이’로 살았고, 또 그렇게 살다갈 그는 마지막 한 문장을 노트에 옮겼다. “6월은 해마다 오지만 1987년 6월은 다시 오지 않습니다.” 글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사진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 [6월항쟁 20주년]②87·07학번 ‘20년의 간극’

    [6월항쟁 20주년]②87·07학번 ‘20년의 간극’

    1987년 6월 항쟁은 당시 대학에 입학했던 ‘87학번’에게는 ‘민주화의 단초를 놓은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러나 20년이 흘러 대학에 들어온 ‘07학번’에게는 ‘역사의 한장면’으로 기억될 뿐이었다.19일 서울신문이 6월 항쟁 20주년을 맞아 이달초 87학번과 07학번 각 50명을 직업·대학별로 무작위 선정해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6월 항쟁에 참여했느냐(87학번),6월 항쟁을 알고 있느냐(07학번).’는 질문에 87학번은 88%가 6월 항쟁에 참여했다고 답한 반면,07학번은 74%만이 6월 항쟁을 알고 있다고 답했다. ‘6월 항쟁을 상징하는 사건’에 대한 주관식 질문에는 87학번의 경우 집회와 거리행진(16명), 이한열(11명)·박종철(6명) 사망사건 등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반면 07학번들은 전두환·노태우 대통령(8명), 민주화(9명), 없음(4명) 등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적인 사실에 주목했다. 정치적 성향을 묻는 질문에서는 시각차를 드러냈다.87학번의 60%와 07학번의 52%가 자신을 진보적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보수적이라는 응답에서는 큰 차이를 보였다.87학번은 보수적이라는 응답자가 8%인 반면 07학번은 26%에 달했다. 국가보안법에 대한 질문에서 87학번은 92%(46명)가 폐지해야 한다는 데 찬성한 반면 07학번은 50%(25명)만 찬성했다. 구체적으로 87학번의 20명(40%)이 ‘폐지 후 형법 보완’을 지지했고, 무조건 폐지도 19명(38%)에 달했다. 그러나 07학번은 24%(12명)가 ‘일부조항 개정’을 지지했고,‘현행유지’ 14%(7명),‘잘 모른다.’ 14%(7명) 등이었다. 올 연말 대통령선거에서 투표 의향을 묻는 질문에 87학번은 94%가 투표를 할 생각이 있다고 답했다. 87학번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대통령 직선제 쟁취를 위해 싸웠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비해 07학번은 투표를 할 생각이 있다고 답변한 비율이 86%에 그쳤다. 투표할 의사가 없다고 답한 14%는 “관심이 없거나 달라질 것이 없어서”라는 이유를 들었다. 07학번 눈에 비친 87학번도 흥미롭다.07학번들은 “민주화를 위해 많은 고초를 겪은 세대”로 87학번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면서도 “시간은 못 속인다. 이제는 기성 세대가 돼 버렸다.”는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강국진 이재훈기자 betulo@seoul.co.kr
  • 87학번,명퇴 제일 걱정…07학번,취업등 고민

    87학번,명퇴 제일 걱정…07학번,취업등 고민

    “사회 생활을 한지 벌써 13년이나 됐어요. 첫 직장은 외환위기 때 부도났고요. 명퇴(명예퇴직)가 남 얘기가 아니더라고요. 솔직히 하루라도 더 버텨야 한다는 생각으로 꾹 참고 출근합니다. 자식들 학비도 갈수록 부담스럽고요.”(87학번 회사원 김모씨) “남자 친구도 사귀고 친구들과 술 마시며 대화도 많이 하죠. 이달부터는 새벽에 영어 학원을 다녀요. 취업도 미리 준비해야죠. 여름방학에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니까 지금보다 훨씬 더 바쁠 것 같아요.”(중앙대 07학번 황모씨) 6월 항쟁과 함께 대학생활을 시작한 87학번과 20년이 지난 지금 07학번에게서는 세월의 차이만큼의 간극이 있다. 두 학번 사이에는 삶의 문제에 대한 고민과 함께 정치적 성향 등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87학번 성향은 진보, 삶은 점차 보수화 6월 항쟁에 참여했던 87학번의 상당수는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 사안에서는 일관되게 진보적인 색깔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87학번의 60%가 진보적이라고 답했지만 한·미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서는 오히려 보수적인 의견이 많았다. 대부분 도시 근로자로서 왕성한 경제 활동을 하고 있는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87학번의 경우 FTA에 대해 ‘매우 지지’(8%)를 포함한 찬성이 44%(22명)로 반대 32%(16명)보다 훨씬 많았다. 보통은 24%(12명)였다. 반면 07학번은 매우 지지(8%)를 포함해 찬성이 34%, 반대 32%로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또 ‘시민단체 활동에 대한 참여 여부’를 묻는 질문에는 87학번의 46%가 ‘가입 의사가 없다.’고 답했다. 이 가운데 12%는 시민단체 활동을 지지하지도 않는다고 답했다. ‘파업으로 인해 지하철 운행이 전면 중단됐을 때 며칠이나 참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6명(12%)은 ‘하루도 못 참는다.’ 15명(30%)은 ‘사흘은 참겠다.’ 3명(6%)은 ‘닷새는 참겠다.’고 답했다.‘일주일 이상이라도 참겠다.’는 답은 17명(34%)이었다. ●사회양극화 현상엔 모두 걱정 40대에 들어선 87학번에게는 직장 문제(42%)가 가장 큰 고민인 것으로 나타났다. 외환위기 이후 명예퇴직과 비정규직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된 상황에서 이들은 끊임없이 직장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이어 금전문제(22%)와 가정문제(10%)를 현재 가장 고민하는 문제로 꼽았다.87학번은 사회초년병 시절 외환위기를 겪었고 명예퇴직과 비정규직화, 자녀 학비문제를 걱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07학번은 그러나 친구·이성관계, 성적·취업문제가 다수를 차지했다. 친구·이성문제가 30%로 가장 많았고, 이어 성적문제(26%), 취업문제(18%)등이었다. 또래관계가 고민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엄청나게 늘어난 등록금 뿐 아니라 벌써부터 취업을 걱정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 87학번은 60%가 소수의 부자들이 독점하는 사회와 다수의 빈곤층이 확대되는 사회적 양극화 현상을 꼽았다. 반면 07학번은 사회적 양극화(40%)와 신자유주의 세계화(16%), 일자리부족(14%), 환경문제(10%) 등 고민의 폭이 컸다. ●07학번 “개헌 잘 모른다” 48% 87학번은 정치적 사안에 대해 뚜렷한 의견을 가진 반면 07학번들은 상당수가 무관심했다.87학번들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대통령직선제를 위해 싸웠고, 당시 직선제는 쟁취해야 할 중요한 목표였다. 반면, 07학번들에게 대선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여러 선거 가운데 하나다. 특히 이 같은 문제는 4년 연임제와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를 일치시키는 ‘원 포인트 개헌’에 설문 조사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87학번은 지지 28명(56%), 반대 12명(24%)으로 의견을 분명히 한 반면,07학번은 ‘잘 모른다.’가 48%를 차지했다. 이에 대해 한 87학번 시민운동가는 “노동운동이 더 이상 생존권투쟁으로만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과 함께 양극화로 인해 사회적 연대감이 약해지고 개인이나 가족 위주로 파편화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87학번,“6월항쟁은 내 삶의 변곡점” 공무원 채치용(중앙대 87학번)씨는 “6월 항쟁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내 인생의 지표가 됐다. 비유하자면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다. 그 시절에 내가 했던 행동과 사고체계가 내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고 가장 건전했던 시대였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회고했다. 환경운동가 김홍철(성균관대 87학번)씨는 “당시의 경험은 지금 시민단체 활동을 하게 만든 인생의 변곡점이었다. 사회를 대하는 태도나 눈이 많이 달라졌다. 그날 이후 살아오면서 조금씩 변했다고는 하지만 그 당시 정립한 기본적인 인식틀은 지금도 내게 기본방향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회사원 안덕균(경기대 87학번)씨는 “당시 민주화에 대한 희망도 봤지만 좌절도 맛봤다. 일부 민주화의 정신을 왜곡한 정치인들 탓에 아직도 6월 항쟁이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회사원 양재용(단국대 87학번)씨는 “6월 항쟁은 학창시절 이후 많은 고민을 던져준 사건이었다.”면서 “지금껏 살아오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나 가치관에도 큰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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