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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에도 첫 이질환자/6세 女兒 원주 방문뒤 발병

    경기도 안산시보건소는 11일 도내에서 처음으로 세균성 이질환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이번에 발생한 이질환자는 金모양(6)으로 지난 3일 강원도 원주 친척집을 방문한 이틀 뒤부터 설사증세를 보여 지난 6일 원주보건소에서 보균검사를 받은 직후 안산으로 돌아왔다. 원주보건소는 역학조사를 끝낸 지난 9일 金양이 세균성 이질환자임을 확인,이를 안산보건소에 통보했다.안산보건소는 金양의 치료를 위해 10일 다시 강원도 원주의료원에 입원시켜 격리 치료중이라고 밝혔다.
  • 과기부 산하 13개 출연硏/경영혁신 싸고 노·사 대립

    ◎KIST 등 노조 반발로 이사회 개최 불투명 정부출연연구기관 경영혁신 문제를 놓고 기관별 노사가 첨예하게 대립,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29일 과학기술부에 따르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한국항공우주연구소,한국과학기술원(KAIST),안전기술원 등 모두 13개 출연연구기관은 29일부터 이틀간 일제히 이사회를 열어 기관별 구조조정안을 통과시킬 계획이었으나 노조의 반발로 이사회 개최가 무산됐거나 무산될 것으로 보여 사실상 안건처리가 힘들게 됐다. KIST의 경우 이날 오전 7시 라마다 르네상스호텔에서 임시이사회를 열어 경영혁신방안을 통과시킬 방침이었으나 노조원들이 회의장을 원천봉쇄하는 바람에 이사회 개최가 무산됐다. 이어 이날 오전 11시로 예정된 항공우주연구소와 KAIST 이사회도 열리지 못했다.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한국기계연구원,한국전기연구소,한국자원연구소,한국과학재단,한국화학연구소의 경우 30일 이사회를 열 예정이고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은 다음달 8일 열기로 돼 있으나 역시 이사회 개최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이들 연구기관의 경영혁신 방안은 ▲조직 감축개편 ▲인력 감축계획 및 복무규정 강화 ▲정년 하향조정 ▲연봉제·계약제 확대시행 등으로 요약된다. 세부적으로 보면 출연연구기관의 연구직·행정직·기술직 등 전직종의 책임급 정년을 기존의 65세에서 61세로,선임급은 60세에서 58세로,기능직은 60세에서 56세로 각각 낮추는 것을 포함해 전직원을 대상으로 계약제와 연봉제를 도입해 시행하고 특별유급휴가 폐지 등 복무규정을 강화하는 것이 주된 골자다. 그러나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은 ▲노사합의를 거쳐 구조조정방안을 채택해야 하며 ▲임시이사회를 연기하고 ▲姜昌熙 과기부 장관이 노사관계 정상화에 직접 나서야한다고 주장하며 이사회를 원천봉쇄하고 있다.
  • 새해 예산안­문답으로 본 짜임새

    ◎균형재정 2006년께 달성되도록/공공부문 개혁 1조2,500억 절감/실업예산관련 366만명에 혜택 내년도 예산안을 문답으로 알아본다. ­구조조정과 경기부양을 동시에 달성하기에는 미흡하지 않은가. ▲내년도 조세 수입이 3조원 정도밖에 늘지 않아 재정 규모 확대에 한계가 있다.그러나 두가지 목표를 달성키 위해 금융구조조정,실업자보호 및 사회안전망 확충,사회간접자본 등은 적자재정을 편성해 최대한 지원키로 했다. ­유례없는 5% 적자예산인데. ▲2000년까지는 구조조정에 따른 세출증대 및 세입감소로 재정적자의 확대가 불가피하다.그러나 우리 경제가 정상적인 성장을 이뤄가고 세입증대 및 세출증가 억제 노력을 한다면 2001년부터 적자폭이 감소해 2006년에는 균형재정을 회복할 것으로 보인다.균형재정을 되찾기 위해 세입 기반 확충과 세출증가 억제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금융구조조정 비용이 3조6,000억원에서 7조8,000억원으로 대폭 늘었는데 향후 관리는. ▲이는 64조원 규모인 금융구조조정 채권에서 발생하는 이자비용을 지원하기 위해 책정된 금액으로 지원자금의 회수를 철저히 해 국민 부담을 최소화할 것이다.채권이자 부담에 지원해야 할 소요액수는 점차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부실채권이 추가로 발생한다거나 폐쇄 금융기관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비용이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공기업 등 공공 부문 구조조정 효과는 예산에 어떻게 반영됐나. ▲중앙정부 조직개편으로 8,562억원,59개 출연연구기관 경영개혁으로 960억원,공기업 민영화로 9,000억원,133개 정부 출연·위탁기관 구조조정으로 2,500억원,210개 보조기관 보조금 정비로 340억원 등 모두 1조2,500억원이 절감된다. ­올해 예산 대비,증액 분야와 축소 분야는. ▲증액 분야는 금융구조조정(2.2배),실업자보호 및 사회안전망 확충(45%),문화예술(27.4%),사회간접자본 투자(5%),중소기업 및 수출(2%) 등 지원항목이다.국방비를 포함한 인건비(5.7%),농어촌지원비(5.4%)·교육개혁(5.1%)지원비는 대신 삭감됐다. ­실업 관련 예산은 어떻게 쓰이나. ▲실업급여 60만명,공공근로사업 45만명,직업훈련 32만명,실직자 대부13만명,자녀학비 지원 25만명,결식아동 지원 12만명,고학력 미취업자 4만명,자활보호대상자 123만명,생업자금 융자 5,000가구,거택보호대상자 50만명 등에게 쓰인다. ­공공사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은. ▲객관적 평가를 통한 사업추진을 위해 예비 타당성조사(신설)→타당성조사 및 설계→보상→공사 등의 단계를 제도화했다.또 낙찰이 끝나면 총사업비와 다음 연도 예산을 조정,예산을 절감토록 했다. 입찰제도도 개선,공사비는 예정가의 70%에서 75% 이상,적격점수는 75점에서 80점 이상으로 높였다. ­국민생활 변화는 ▲주택보급률이 92→93.7%,상수도보급률 85.3→86.1%,국도길이 2만4,013→2만4,943㎞,고속도로 9,079→9,693㎞,항만하역 능력 4억900만→4억7,200만t,산업재해율이 0.77→0.72%로 개선된다.또 공공도서관이 390곳으로 20곳 늘어나고,인구 1만명당 장서수도 4,315권으로 500여권 늘어난다.평균수명이 74.3세에서 74.6세로 늘고 노인인구 비율도 29.9%에서 31.4%로 높아진다. 1일 1인당 급수량이 420ℓ에서 426ℓ로 늘고,지하철운송분담률은 서울 30.8%에서 32%,부산 9.8%에서 15%로 각각 높아진다.
  • 민주열사 열전:8/金永哲 5·18시민군기획실장(정직한역사되찾기)

    ◎‘광주 고통’안고 18년 투병끝 숨져/‘투사회보’ 제작… 계엄군 잔학상 시민에 알려/좌수족 마비·정신질환 앓다 지난 8월 영면 5·18 광주 민중항쟁도 18년이 지난 올 8월19일 광주시 전남도청 5월 추모탑 앞에서 ‘5월 시민군’ 金永哲 열사의 민주시민장이 치러졌다. 영결식에서 시인 文炳蘭은 영면한 고인을 다음과 같은 조시로 추모했다. …여기 한 사나이는 무너진 도시 캄캄한 절망을 안고 18년을 앓으며 살았다 18년을 죽으며 모질게 살았다. …꽃도 한 줄기 빛도 없이 어둠이 흐르는 정신병동 쇠창살에 18년을 죽어온 당신의 신음소리는 18년을 앓아온 광주의 고통이었다.… 5·18 당시 시민학생 투쟁위에서 기획실장을 맡았던 金永哲은 계엄군 진압대에 체포된 후 모진 고문으로 정신이상이 되고 말았다.질환 초기 몇몇 순간을 제외하곤 사망할 때까지 18년간 대부분을 가족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과거와 현재를 분간하지 못하는 정신병자로 지내야 했다. 5·18때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와 계엄군들은 많은 무고한 인명을 비롯해 숱한사람들의 육신과 정신에 회복할 수 없는 파괴를 가했다.이들은 32세의 金永哲을 18년간의 정신병동 폐인으로 내몰아 죽음에 이르게 했다. 金永哲은 광주항쟁의 시민군 기획실장 이전에 최하층 빈민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온갖 애를 쓴 빈민운동가로서의 면모가 먼저 빛난다.의사였던 아버지가 일찍 작고한 후 어머니가 고아원 보모를 하게 되어 목포의 고아원에서 고아들과 형제처럼 지내며 성장했다.지역 명문인 광주 서중,광주일고를 졸업했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대학에 가지 못하고 5급 공무원이 됐다.그러나 면사무소와 농협의 비리에 통탄하고 공무원 생활을 그만뒀다. 군복무를 마친 金永哲은 신문배달 과일행상 목장잡부 우산팔이 등을 하면서 소외받는 사람들과 평생을 같이하며 사랑의 공동체를 실현하겠다는 결심을 한다.결혼한 지 1년도 못된 77년 부터 광주의 빈민지역인 광천동 시민아파트로 와 주민들과 직접 부딪혔다.시가 피난민 부랑민들에게 지어준 후 판자촌이나 다름없게 황폐해진 이곳에 청년회를 재조직하고 마을청소와 어린이 주말학교를 이끌었으며 신용 협동조합을 정립하고 아파트의 개조사업을 활발히 펼쳤다. ○빈민들 삶 개선위해 혼신 78년 7월 이곳 빈곤 청소년들을 상대로 尹祥源과 朴寬賢 등 전남대생들이 강학으로 나선 ‘들불’야학이 시작되고 金永哲은 민주시민 양성을 목표로 한 이 야학의 교장이 됐다. 80년 5·18이 터지자 공수부대원들의 무자비한 만행을 목격한 金永哲은 19일 저녁부터 尹祥源 등 들불야학 팀과 논의하여 공수부대의 잔학상과 이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투쟁 소식을 알리는 ‘투사회보’제작에 나선다.투사회보는 광주시민들이 한데 뭉치는 데 큰 힘을 발휘했으며 고아로서 金永哲과 의형제를 맺고 같이 살던 박용준과 광천동 야학생들이 제작과 배포에 중요한 역을 맡았다.20일 金永哲은 금남로 시위 도중 계엄군이 던진 돌에 왼쪽 어깨를 맞았다.이 부상으로 그는 죽을 때까지 좌수족 불구로 고생했다. 金永哲은 22일 자신이 신용조합 참사로 있던 YWCA의 여성 회원들과 함께 포목점에서 검정 천을 사와 수천개의 검정 리본을 만들어 시민 학생들이 가슴에 달도록 했다.그는 계엄군이 철수한 후 열린 23일의 1차 시민궐기대회에서 투쟁 경과보고를 했다.계엄군에게 무기반납을 주장해오던 기존 수습위가 물러나고 25일 金宗培·尹祥源 등이 주도하는 새 시민학생 투쟁위가 도청에 들어서자 金永哲은 조직 업무를 총괄하여 차량과 유류 통제,도청출입 통제,무기 및 보급품을 관장하는 기획실장 일을 했다. 계엄군이 도청에 재진입해온 27일 새벽 金永哲은 尹祥源 등과 도청을 사수하다 尹祥源이 총탄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 붙잡히면 죽음 이상의 고통을 받을 것을 직감하고 자결하려 했으나 계엄군에 체포됐다. ○간첩으로 몰려 자살 시도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간 그는 계엄수사대가 모진 고문을 가하며 자신을 간첩으로 몰고 가자 다시 자살을 결심한다.그는 화장실 콘크리트 모서리 벽에 있는 힘을 다해 이마를 여러 차례 찍었다.이를 발견한 헌병은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려 바지까지 흥건히 젖은 金永哲을 군화발로 밟고 밖으로 끌어냈다.그들은 그를 긴 곡괭이 자루로 사정없이 내리쳤다.그리고 나서 두 손과 두 발을 포승으로 묶고 국군통합병원으로 실어 갔다.그러나 수술한 이마가 아물기도 전에 다시 상무대 영창으로 끌고왔다.심한 환각과 환청 증세에 시달리며 80년 10월 1심에서 12년형을 선고받았다.81년 12월 성탄절 특사로 석방되었지만 이미 金永哲은 왼쪽 다리와 팔을 쓰지 못할 뿐 아니라 머리의 통증을 참지 못해 엉엉 울면서 사방에 머리를 찧고 이상한 소리만 되풀이하는 정신질환자였다.석방된 뒤 몇 차례의 수술에도 불구,정신이상 증세가 더욱 심해져 84년부터 나주 정신병원에서 투병생활을 계속해왔다.그러나 끝내 온전한 정신을 되찾지 못하고 지난 8월16일 세상을 떴다. ◎金永哲 열사 연보 1948년 전남 순천 출생 55년 목포에서 광주로 이사 64년 광주서중 졸업,광주일고 입학 68년 5급 지방 공무원 76년 결혼 77년 광주 광천동 시민아파트 개발운동 78년 광천동 들불야학 80년 5·18 ‘투사회보’제작 참여,시민학생 투쟁위 기획실장 80년 10월 ‘내란중요임무 종사’혐의로 1심 12년 선고 81년 12월 특사 석방 84년 나주정신병원 입원 98년 8월16일 영면 ◎부인 金順子 여사/병수발 18년… 세자녀 키우느라 안해본 일 없어/“야학교장 등 즐겁고 보람된 생활 못내 그리워” 金永哲 열사가 계엄군에 끌려갈 때 당시 26세였던 부인 金順子 여사는 임신 8개월 만삭의 몸이었다.아버지가 상무대에 갇혀 있을 때 태어난 막내딸은 지금 고3이고 그 위의 1남1녀는 나란히 대학2년생이다.18년간 정신이상의 남편을 병수발하면서 없는 살림에 세 자녀를 키우기 위해 金여사는 안해본 일이 없다. 우유배달원,구멍가게,옥수수 행상,과일·채소장사,공장 일,파출부,사글세 음식점 등. “병원에 10여년 입원했었지만 최근에야 정부로부터 기초적인 의료지원을 받았다.부상자에 대한 의료지원 카드도 뒤늦게 발급됐다”고 부인은 말한다.이번 민주시민장도 조의금으로 치러야 했다고 한다. 자녀들과 앞으로 살 일이 막막하기만 하다면서도 金여사는 80년 당시 남편이 ‘광천동 삼화신협 이사장,새마을 지도자,반장,조기 축구회 회장,야학 교장’ 등으로 활동하던 “즐겁고 보람된 생활”이못내 그립다고 말한다. ◎吳壽成 전남대 교수가 분석한 정신손상 유형/기질적 장애­총상·몽둥이 등에 머리다쳐 사고기능 단계적으로 와해/정신분열증­계엄군에 무차별 폭행 당해.감정 통제·현실적 판단 마비/외상후 스트레스­공수대원 고문 후유증으로 군인 공포·모든 일에 무관심 5·18 항쟁의 진압이 잔혹했던 만큼 金永哲 열사 같은 참혹한 정신 손상자들이 많다.전남대 5·18연구소 소장인 吳壽成 교수(심리학)에 따르면 5·18로 인한 정신장애는 3가지로 대별된다. 첫번째는 기질(器質)적 정신장애로 항쟁 와중에 직접적으로 두뇌에 총상을 입었거나 개머리판이나 몽둥이에 머리를 다쳐 뇌의 손상을 갖게 된 경우로 金永哲 열사가 대표적 사례다.그의 병증은 외상(外傷)성 성격장애,정신분열증,간질 및 뇌수종에 의한 기질적 정신장애,기질적 정신병으로 심화됐다.한 마디로 인간이 단계적으로 파괴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사고기능이 와해되어 있고 사고 자체가 지리멸렬된 상태다. 두번째는 정신분열증.5·18 당시 아침운동을 하려고 운동복 차림으로 집밖에 나갔다가 주민등록증이 없다는 이유로 계엄군에 붙들려 눈을 가리운 채 지하실로 끌려간 시민이 있었다.깜깜한 속에서 여러날 전신을 구타당한 뒤 승용차에 태워져 외곽도로에 버려졌다.그후 그는 계속 감시당하고 있다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혔고 집에 있으면 무섭다고 하면서 밖으로 뛰쳐나가 여러 날 후에 초라한 몰골로 돌아오곤 했다.집안 사람들을 폭행하고 난동을 부리며 자기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다.말에 조리가 없으며 연상 장애,비현실적 판단이 두드러진다. 세번째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시위대에 참가했던 한 시민은 공수부대원에게 잡혀 개머리판으로 얻어맞아 의식을 잃고 쓰려졌다.깨어나 보니 여러 명이 같이 손을 묶인 상태로 고개를 땅에 처박힌 채 군화발에 차이고 곤봉으로 맞고 있었다.같이 있던 사람이 저항하다 죽는 것을 보고 제정신이 아니었다.조사과정에서 무수히 맞아서 이빨이 나가고 코뼈가 부러졌다.20여일 만에 석방됐다. 이후 그는 후유증으로 7개월 동안 몸져 누웠고 10여년 동안 직장 한번 제대로 갖지 못했다.당시의 일이 자꾸 기억나고 같이 있다 죽은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군용트럭의 군인들만 보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아직도 두려워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가지 못한다.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 없으며 모든 일에 관심을 잃게 되었다.
  • 親日의 군상:7­1/尹致暎家의 빛과 그림자(정직한 역사 되찾기)

    ◎저항 포기… 親日로 명맥 이은 세도가 집안/고관대작 다수 배출… 화려한 가문 자랑/중시조 雄烈 ‘한일병합’후 男爵 받아/尹 전 대통령 숙부·사촌중 변절자 많아 우리 근·현대사에서 대표적인 세도가 집안의 하나로 尹致暎 전 공화당의장서리(96년 작고) 가문을 들 수 있다.尹潽善 전 대통령을 비롯해 집권당 의장서리,장관,서울대 총장 등 장·차관급 이상만 13명에 학자·의사가 60여명이나 나왔다. 尹씨 가문은 한말 尹雄烈에 의해 중흥된 후 자손도 번성하여 400여명에 이른다.尹雄烈의 아버지 取東은 늘그막에 웅달산에서 기도를 하고 첫 아들을 얻었대서 이름을 雄烈이라 지었다.15년 뒤 태어난 동생은 ‘영웅(英雄)’이라는 말에 맞추기 위해 英烈이라 지었다. 雄烈은 致昊·致旺·致昌 3형제를,동생 英烈은 致旿·致昭·치성·致昞·致明·致暎 등 6형제를 두었다. 열(烈),치(致)에 이어 다음 항렬은 선(善),구(求),영(榮) 순이다.선(善)자 항렬의 유명인사는 致昊의 아들 永善·璋善,致旿의 아들 日善·明善·昇善,致昭의 아들 潽善·源善,致明의 아들裕善 등이다.구(求)자 항렬에서는 日善의 아들 錫求·鐸求,潽善의 아들 商求·同求 등이 있다.번성한 자손과 함께 이 집안에서 배출한 유명인사들의 면면을 한번 훑어보자. 중시조격인 雄烈은 1856년 무과에 급제,한말 군부대신을 지냈다.동생 英烈은 연안부사·삼남토포사·육군참장(參將,현 준장에 해당)을 지냈다.雄烈의 장남 致昊는 학부(學部)·외부협판(協辦,현 차관)을,2남 致旺은 초대 육군의무감(육군소장 예편)·대한의학협회장을,3남 致昌은 초대 주영공사와 주터키대사를 지냈다. 英烈의 아들 중 장남 致旿와 차남 致昭는 대한제국 시절 각각 학무국장과 중추원 의관을 지냈다.3남 致성은 일본육사(11기)졸업 후 군부 군무국 교육과장을,4남 致昞은 육군 보병 정위(正尉,현 대위에 해당)로 예편하였다.막내 致暎은 해방 후 초대 내무장관과 서울시장, 3공에서 공화당 의장서리를 지냈다. ○부귀영화에 장수까지 致旿의 장남 日善은 서울대 총장·원자력원장을,致昭의 장남 潽善은 서울시장·대통령을,3남 源善은 민선 경기도지사를 지냈다.致明의 아들裕善은 도쿄제대 의학부를 졸업,보사부 의정국장·국립의료원장을 지냈다.3대 농림부장관을 지낸 永善과 재미 원로 피아니스트 琦善은 모두 致昊의 아들들이다. 또 日善의 차남 鐸求는 원자력병원장을 역임한 후 동생 鍾求와 함께 서울대 의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보통 집안에서는 한명 나오기도 힘든 큰 벼슬아치가 이 집안에서는 3대에 걸쳐 속출하였다.그리고 장수(長壽)집안으로도 유명하다.중시조(中始祖)격인 雄烈(72세),英烈(86세)형제와 致昊(81세),致旺(88세)이 70,80세를 넘겼고 永善(92세),日善(91세),潽善(93세) 등은 망백(望百·91세) 이상 장수했다.부귀영화에 장수까지 겸했으니 한 가문으로서야 더 바랄 것이 없다 하겠다. 그러나 이 집안의 역사가 이렇게 화려한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많은 사람들이 여러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지만 격동의 근·현대사를 거쳐 오면서 친일 행위를 한 사람들도 적지않다. ‘친일’은 이 집안 중흥의 1등공신 雄烈(1840∼1911)로부터 시작된다.1856년(철종 7년) 무과에 급제,1861년 충청 감영의 중군(中軍)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선 그는 1880년 별군관으로 朴永孝·金玉均 등과 함께 수신사 金弘集을 따라 일본을 다녀온 후 이듬해 일본식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 창설의 주역이 되었다. 1882년 별기군과의 차별대우를 참다못한 구식군대가 반란(소위 ‘임오군란’)을 일으키자 그는 시위대에 쫓겨 원산을 거쳐 나가사키(長崎)로 줄행랑을 쳤다.도중에 원산에서 주민들에게 발각됐으나 한 일본인 승려의 도움으로 피신했다고 한다.도쿄 체류중 그는 ‘조야신문(朝野新聞)’(1882년 9월2일)과의 인터뷰에서 구식군대의 반란은 조선 내 수구파들이 세력을 잡기 위한 ‘폭거’라고 주장했다. 갑신정변 무렵 귀국한 그는 개화당 정권에서 형조판서를 지내다가 정변이 실패하자 1886년 능주(綾州)로 귀양갔다.그후 1894년 갑오경장으로 개화파가 다시 집권하자 경무사·군부대신을 지내다가 1896년 소위 ‘춘생문(春生門)사건’에 가담했다가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일제말기에 지조 꺾어 대한제국 성립 후 다시 벼슬길에 나서 궁내부 특진관·군부대신을 지낸 그는 1910년 한일병합 후 일제로부터 은사금 2만5,000원과 남작(男爵)작위를 받았다.그의 작위는 장남 致昊가 습작(襲爵)하였다.致昊는 1913년 ‘105인사건’의 확정판결로 실작(失爵)되었으나 이는 ‘충순(忠順)치 않은 행위’(‘조선귀족령’ 제7조),즉 일제에 협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총독부로부터 작위를 박탈당한 다른 사람(남작을 거절하고 순국한 金奭鎭 등)들과는 구분된다. 雄烈·英烈 두 형제 중 친일 경력자는 동생인 英烈의 집안에 많다.英烈의 장남 致旿는 한말 중추원 참서관(9품)·학부(學部,현 교육부)학무국장을 역임했는데 한일병합 후 중추원 부찬의·찬의(1910∼15년)를 지냈다.차남 致昭 역시 한말 중추원 의관을 거쳐 일제하에서 중추원 참의(1924∼27년,주임관 대우)를 지냈다.특히 致昭는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8월14일 당시 쌀 120가마 값에 해당하는 2,000원을 국방헌금으로 내고 같은해 9월9일 결성된 ‘애국경기도호(號)’ 군용기 헌납기성회의 집행위원을 지냈다. 3남 致성은 일본육사를 마치고 구한말 정부에서 육군기병 부령(副領,현중령에 해당)으로 예편한 후 한일병합 후에는 실업계로 진출,분원자기 취체역(중역)·경성조선인상업회의소 특별위원을 역임했다.막내 致暎은 미국 유학시절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歐美)위원부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그러나 그 역시 일제 말기에 가서는 지조를 꺾은 것으로 보인다. 친일 잡지에 그의 이름으로 된 글이 실려 있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는 임전대책협의회 채권가두유격대에 참가(1941년 9월7일)했다.또 그해 12월20일에는 친일 잡지사 동양지광사(東洋之光社) 주최 ‘미영(美英)타도 대좌담회’에 참석하기도 했다.그는 회고록 ‘윤치영의 20세기’에서 친일 잡지 ‘동양지광’에 실린 자신 명의의 글은 이름을 도용당한 것이라며 “일제 전시하여서 명예훼손 소송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고 주장한 바 있으나 설득력이 약하다.그의 건국포장 서훈을 두고 말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이밖에 致旿의 아들 중에도 친일 경력자가 더러 있다.교토제대 의대 출신으로 서울대 총장·원자력원장을 지낸 장남 日善은 일제가 주최한 ‘미영타도 대강연회’에 연사로 참가한 적이 있다.또 도쿄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한 차남 明善은 일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후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 정부에서 총무청 통계과장·국무성 사무관·간도성(間島省) 차장을 지냈다.4남 昇善은 관동군사령부에서 대위로 근무했다는 기록이 있다. ◎독립운동가 가문과 사돈 맺은 아이러니/尹致昌 결혼 당시 심한 반발로 한때 감금되기도 자손이 많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집안은 친일 가문은 물론 독립운동가 가문과도 더러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 우선 雄烈의 3남 致昌은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孫貞道 목사의 장녀 孫眞實과 결혼했다.초대 해군참모총장·국방장관을 지낸 孫元一 제독, 재미 원로의사 孫元泰(84세) 박사,YMCA 회장을 지낸 여성계의 원로 孫仁實(81) 등은 모두 眞實의 동생들이다.독립운동가 진영은 이들의 결혼을 거세게 반대하며 한때 致昌을 감금하기도 했었다. 致昊의 차남 光善(6·25때 납북)은 독립협회의 창건자이자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사장을 지낸 南宮檍의 딸 南宮慈卿과 결혼,4남3녀를 두었다.致昊가 독립협회에서 활동한 것이 인연이 돼 두 사람의 결혼이 성사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집안 딸 중에는 독립운동가 당사자와 결혼한 사람도 있다.致旺의 장녀 善姬는 2차대전 때 OSS 대원으로 활동한 張錫潤(95) 전 내무장관과 결혼하였다.이밖에 致昭의 차남 浣善의 부인 李順貞은 한말 탁지부 대신 李容稙의 딸이자 ‘을사조약’후 자결,순국한 충정공 趙秉世 선생의 외손녀다.
  • “제2 미싱 발언” 파문 해법/吳豊淵 차장·정치팀(오늘의 눈)

    한나라당 李揆澤 의원의 ‘제2 공업용 미싱발언’파문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조짐이다. 사정(司正),의원 빼가기,장외투쟁,정기국회 공전 등으로 정국이 꽉 막힌터에 ‘기름’을 부은 격이어서 ‘폭발력’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국민회의는 당 총재에게 망언(妄言)을 한 李의원의 버릇(?)을 고쳐주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는 데 반해 한나라당은 당내 행사에서 발언한 것을 도청(盜廳)해 문제삼는다며 되레 상대방의 ‘속좁음’을 꼬집고 있다. 이번 공방은 李의원이 지난 11일 의원·지구당위원장 연석회의에서 “76세나 되는 분이 계속 ‘사정’‘사정’하다가 내년에 변고가 있지 않을까 걱정이다.DJ는 정말 거짓말을 너무 잘하기 때문에 金洪信 의원이 이야기한 ‘공업용 미싱’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金大中 대통령을 겨냥해 모독성(冒瀆性) 발언을 한 데서 비롯됐다. 회의 당시 분위기를 감안하더라도 시정(市井)아치들이나 쓰는 외설(猥褻)적인 표현으로 국가원수인 대통령을 모독한 것은 아무래도 지나쳤다.李의원은 처음에 ‘조크’정도로위기를 벗어나려고 했다.한나라당도 李의원을 감싸기에만 급급했지 발언의 파장은 지나쳐버린 느낌이 들었다. 한나라당은 심지어 李의원의 발언을 문제삼는 것을 언론의 자유 침해와 결부시키는 논리적 비약까지 선보였다.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직무상’ 행한 발언에 대해 국회 밖에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면책특권’이 있다.그러나 이 경우에도 무한정의 언론자유를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더군다나 李의원은 국회 밖에서 직무와 상관없이 심한 발언을 했다.면책특권을 부여받을 수 없는 상황이다. 국민회의는 14일 李의원을 명예훼손혐의로 검찰에 고발하고,윤리위원회에도 제소키로 했다고 한다.하지만 윤리위원회는 ‘솜방망이’로 전락한 지 오래고,이 시점에서 형사문제화한 것도 진정한 ‘해법’은 아니라고 본다. 파문이 가라앉지 않자 李의원은 이날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정치적 표현의 오해로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진심으로 유감을 표시한다”고 사과 성명을 냈다.본인이 진정 ‘석고대죄(席藁待罪)의 심정’인지 알 수 없으나 이 문제로경색된 정국이 더이상 꼬이지 않았으면 한다.
  • 親日의 군상:6/‘친일파 1호’ 金麟昇(정직한 역사 되찾기)

    ◎日帝 침략선 타고와 모국 침탈 앞장/1875년 ‘운양호사건’ 전후 日에 침략정보 제공/日 통역으로 강화도조약 체결에 결정적 역할/日本식 두발·복장에 ‘皇國 절대 충성” 다짐/한때는 선비정신 소유자/日 속셈 모르고 매국 행위/背族 대가는 日의 멸시뿐 1876년 2월4일 강화도 초지진(草芝鎭) 앞바다에 일본 군함 한 척이 출현했다.1월6일 일본 시나가와만(品川灣)을 출발,부산을 거쳐 온 이 배에는 일본 정부의 특명전권변리공사(特命全權辨理公使)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일행이 타고 있었다.구로다 일행은 6개월 전에 발생한 ‘운양호(雲揚號)사건’을 빌미로 조선과 강제로 수교조약을 맺으러 오는 길이었다. 구로다를 포함해 무려 800여 명에 달하는 일행 가운데 일본인 복장을 한 조선인 한 명이 끼어 있었다. 그의 이름은 金麟昇(생몰연대 미상). 그는‘운양호사건’ 이전부터 일본측과 내통하면서 일본을 도와오다가 이제 그 마무리 작업인 조약(강화도조약)체결을 돕기 위해 동행한 통역이었다. 임진왜란 때도 일본에 협력한 ‘친일파’는 있었지만근대적 의미에서 金麟昇보다 앞서는 친일파는 없다.친일파 연구가 고(故) 林鍾國씨 역시 그를 ‘친일파 1호’로 꼽았다.조선조 말기 양반계층의 지식인이었던 그가 친일의 길을 걷게되는 과정은 이후에 등장하는 친일파들의 행태와 유사한 점이 없지 않다.그의 친일행적 연구는 일제하 친일파 연구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金麟昇의 친일행적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그는 해외에서 일제의 외국인 고문(顧問)으로 고용돼 비밀리에 활동한 까닭에 국내에는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林鍾國씨 조차도 그의 글에서 ‘김인승’이라는 이름 석자만을 기록했을 뿐이다.몇몇 역사학자 역시 논문에서 그를 언급한 바는 있으나 친일활동의 전모를 밝히지는 못했다. 金麟昇의 친일행적은 지난 96년 2월 성신여대 具良根 교수(당시 도쿄대 외국인 연구원)가 발표한 한 논문을 통해서 그 전모가 드러났다.具교수는 일본 외무성 사료관에서 입수한 3건의 자료를 토대로 ‘일본외무성 7등출사(七等出仕·일본의 구식 관직명) 세와키 히사토(瀨脇壽人)와 외국인고문(顧問)金麟昇’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친일파의 ‘선구자’격인 金麟昇의 친일행적을 추적해 보자. 金麟昇은 함경북도 경흥(慶興)태생으로 본관은 김해(金海).7대조 때 경흥으로 이사한 뒤로 그의 집안은 토반(土班,지방의 양반)으로 전락하였다.그는 16세 때부터 경흥부(慶興府)에 근무하면서 상당한 직책을 맡기도 했다.그러나 이 지역에 대홍수와 기근이 몰아치던 1869년 그는 모종의 일로 이 지역 수령과의 의견충돌 끝에 관직을 그만두고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땅 니콜리스크(당시 한국명 吹風,블라디보스토크 북방 50리)로 탈주하였다. 이곳에는 그 뒤 식량을 찾아 월경(越境)한 조선인 유랑민이 대거 몰려들었는데 한학실력이 출중했던 그는 여기서 학교를 열고 생도들을 가르쳤다.그러던중 여기서 다케후지 헤이가쿠(武藤平學)라는 한 일본인과 사귀게 된다.다케후지는 원래 양학(洋學,서양의 신학문)을 공부하려고 집을 나왔다가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흘러오게 된 사람이었다.바로 이 다케후지가 나중에 그를 친일의 길로 이끈 첫 안내자가 된다.한편 이무렵 러시아가 부동항(不凍港)을 찾아 남진(南進)정책을 강행하자 1875년(明治 8년) 4월 일본정부는 외무성 7등출사 세와키 히사토(1822∼78)를 블라디보스토크와 포셋 지방에 파견,러시아와 교섭을 갖게 하였다. 세와키는 공식적으로는 일본 외무성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무역사무소를 개설키 위해 파견한 외교관이었지만 사실상 정탐꾼이었다. 일본 외무성이 그에게 준 ‘출장명령서’(1875년 4월4일)의 임무 부분은 ‘탐색’,‘정탐’인데 이 중의 절반은 의외로 조선에 대한 것이었다.명령서에는 구체적으로 ‘조선인을 고용하여 조선땅으로 들어가서 토지·풍속 등을 탐색하고 올 것’ 등이 명기돼 있다.그러나 어떤 연유에서인지 세와키는 조선에 들어가지 못했다.대안을 모색하고 있던 세와키는 여기서 일본인 다케후지를 만나 문제의 金麟昇을 소개받는다.金麟昇의 학식과 경험을 높이 산 세와키는 귀국길에 그를 일본으로 데리고 갔다. 이무렵 일제는 다수의 외국인 고문을 고용하고 있었는데 1874∼75년에는 그수가 약 2,000명에 달했다.운양호사건(1875년 9월20일),강화도조약(1876년)이 체결되기 바로 직전의 일이다.당시 일제는 조선에 ‘황국(皇國)의 군현(郡縣)’을 설치하여 이를 근거로 대륙을 침공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외국인 고문 채용은 이를 대비하기 위한 사전포석이었다.그리고 그 첫 군사행동이 바로 ‘운양호사건’이었다. 1875년 7월 세와키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金麟昇은 운양호사건 발생직전 1차로 3개월간(8월1일∼10월30일) 일본정부와 외국인 고문 고용계약(日給 1원)을 맺었다.당시 일본 외무성이 그를 고용한 목적은 ▲만주지방 지도작성 ▲북방사정 탐색 ▲조선 침략용 지도작성 ▲기타 필요한 사항에 대한 자문 등.이중에서 金麟昇이 일본측에 크게 도움을 준 부분은 조선에 관한 사항이었다. 1875년 일본 육군참모국이 조선 침략용으로 작성한 ‘조선전도(朝鮮全圖)’는 金麟昇의 자문을 받아 작성된 것이다.지도 하단부에 적힌 ‘조선 함경도인 모(某)씨에게 친히 그 지리를 자문받고…’의 모씨는 바로 金麟昇을 지칭한 것이다.지도 외에도 당시 조선사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계림사략(鷄林事略)’ 역시 그의 자문을 받아 출간됐다. 한편 1차 계약기간중인 10월부터 金麟昇의 급료가 월급제로 바뀌면서 금액수 두 배로 늘어났다.당시 일본 외무경(현 외상) 데라시마(寺島宗則)는 태정 대신(太政大臣,총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어는 물론 한학,시문(詩文)이 능통하여 아주 유용한 인물로…한지(韓地,조선)에서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라고 그를 평가하였다.일제는 강화도조약 체결을 앞두고 그를 적절히 활용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실지로 그는 강화도조약 체결(1876년 2월27일) 이후까지 거의 1년동안 도쿄에 머물면서 조선침략을 위한 갖가지 정보와 조언을 일본측에 제공했는데 결정적인 공헌은 역시 강화도조약 체결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1876년초 강화도조약 체결을 앞두고 일본정부의 대표 구로다 특명전권공사가 그에게 동행을 요구하자 그는 ‘이번 수행에서도 만약 머리를 깎지않고 의복을 바꾸지 않으면 이는 제가 조선인을 자처하는 일이며 일본인의 입장에 처하는 것이 아니니 어찌 황국(皇國,일본)의 신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황송해 했다.심지어 ‘끓는 물,타는 불 속이라도 어찌 고사하겠는가’라며 일제에 충성을 맹세하였다. 1876년 2월4일 강화도에 도착한 구로다 일행은 1주일만인 2월10일 강화부(江華府)에 상륙하여 다음날 11일부터 담판에 들어갔다.조약이 체결되기까지는 보름 이상이 걸렸다.이 기간동안 그는 강화도 앞바다에 정박한 일본군함에 머무르면서 공문의 한문번역과 수정책임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그는 조약체결 과정에서 수시로 일본측에 조언을 해주었는데 구로다에게는 조선관리설득방책 18개항을 서면으로 제출하기도 했다.여기에는 전신기(電信機)사용을 권장하는 내용에서부터 ‘여러 말 할 필요없다.청국(淸國,청나라)은 그처럼 인구가 많고 땅이 넓은데도 먼저 일본에 강화조약을 청하여 맺었다.두루살펴 깊이 생각하라’(18항)는 등 공갈·협박성 문귀도 들어 있다. ‘직량(直亮)’한 성격에 동포애도 강한,조선의 전통적 선비정신의 소유자였던 金麟昇.당시 그는 일본의 속셈을 헤아리지 못한 채 ‘일본과 조선은상맹상통(相盟相通)의 나라’로 보고 일본의 강화도조약 체결 추진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조약 체결후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얼마후 러시아로 되돌아갔는데 도쿄에서 남긴 한 편지에서 ‘거리에서 듣기 불편한 말들이 들리고 길을 걸으면 조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이 든다’고 적었다.‘친일파 1호’가 배족(背族)의 대가로 일본인들로부터 받은 보상은 멸시와 증오였다.그 이후 대개의 친일파들이 그러했듯이. ◎강화도 조약/日,운양호사건 고의 유발뒤 강제 체결/총 12조… 韓日간 맺어진 첫 불평등조약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은 병자년에 체결됐다고 해서 일명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으로도 불리는데 정식명칭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조선과의 국교를 줄기차게 추진해온 일본은 조선정부의 쇄국정책으로 교섭이 난항에 빠지자 1875년 9월 20일 해안측량을 빙자하여 ‘운양호사건’을 고의로 유발했다.이를 빌미로 일본은 군함과 함께 구로다를 전권대사로 파견,1876년 2월 27일 조선측 대표 판중추부사 申櫶을 상대로 수교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총 12조로 구성된 이 조약은 ▲부산 이외에 원산·인천 추가 개항 ▲조선연해 측량권 허용 ▲개항장 내 조계(租界)설정·일본인의 치외법권 인정 등 일본측에 유리한 내용들 뿐이다.이 조약은 국제법적 토대 위에서 양국간에 이뤄진 최초의 외교행위이자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기도 하다.
  • ‘제2 미싱발언’ 대치정국 강타/李揆澤 의원 대통령 비난 파문

    ◎사정관련 김 대통령 연령 빗대 폭언/국민회의 “용납 못할 저질발언” 강경/이 의원 발언 각계 시선도 곱지 않아 경색정국이 한나라당 李揆澤 의원의 ‘제2의 공업용미싱발언’으로 더욱 대치국면으로 치달을 전망이다.국민회의는 즉각 국회·당 차원에서 ‘저질발언’을 문제삼을 태세다.사법적으로도 좌시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입장이다. 李의원은 ‘공업용 미싱’발언이 문제가 되자 “金大中 대통령 취임 이후 정치보복이 진행되고 지역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것 같다고 판단,金洪信 의원 의 공업용미싱발언이 왜 나왔는지 이해가 된다고 한 것”이라고 얼버무렸다. 李의원은 또 “76세나 되는 분이 계속 ‘사정’‘사정’하다 내년에 …”라며 여권의 사정(司正)정국을 비난하는 한편 金대통령 개인의 건강도 비꼬았다.이는 “대통령의 건강을 걱정해 조크한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다.李의원은 또 아태(亞太)재단도 걸고 넘어졌고 아태재단과 국민회의는 “근거없는 망발”이라고 반발했다. 鄭均桓 국민회의 사무총장은 “용납할 수 없는 저질발언”이라며“즉각 국회 윤리위원회에 제소하겠다”고 밝혔다.鄭총장은 “의원직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국민회의는 李의원의 발언을 중대사태로 규정,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12일 상오 긴급간부회의를 소집했으며 李의원을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는 방안을 검토키로 했다. 李의원을 포함,한나라당 인사들의 발언에 대한 각계의 시선도 곱지 않다. “국민이 뽑은 국가 원수에 대한 저질발언은 국가와 국민에 대한 모독”(金玟河 교총회장)“근거없는 낭설로 국가운영자인 대통령에게 인신공격을 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申律 명지대 교수)라는 반응이다. 국민회의가 밝힌 한나라당 의원들의 11일 소속의원·지구당위원장 연석회의 석상 문제발언은 다음과 같다. ▲李揆澤 의원(경기 여주)=77세나 되는 분이 계속 ‘사정’ ‘사정’하다가 내년에 변고가 있지 않을까 걱정이다.DJ는 정말 거짓말을 너무 잘하기 때문에 金洪信 의원이 이야기한 ‘공업용 미싱’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아태재단은 화투판의 ‘아도’재단과 같아 9,000억원이나 되는 거액을 챙겼다. ▲정병원 위원장(원외,서울 영등포)=이 정권은 미치광이 정권과 같다. ▲白承弘 의원(대구 서갑)=나라가 편안하기 위해 DJ가 하루속히 하야하기를 4,000만 국민이 기다리고 있다. ▲김성식위원장(원외,충남 예산)=DJ가 나라를 팔아먹고 있다.DJ도 전직대통령들처럼 불행해질까봐 걱정이다.
  • 野 대통령 모독 발언 파문/李揆澤 의원 “76세된 분” 운운

    ◎국민회의 검찰 고발 검토 한나라당 李揆澤 의원의 ‘제2의 공업용미싱’ 저질발언의 파문이 커지면서 꼬인 정국도 더욱 경색될 전망이다. 李의원은 11일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에서 열린 소속 국회의원·원외지구당 위원장 연석회의에서 金大中 대통령을 직접 겨냥,“DJ는 거짓말을 너무 잘 하기 때문에 ‘공업용미싱’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된다”고 비난했다. 李의원은 또 “76세나 되는 분이 ‘사정’하다가 변고가 있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모독했다. 李의원은 이어 “아태(亞太)재단이 9,000억원이나 되는 거액을 챙겼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발언이 나온 뒤 국민회의는 긴급 간부회의를 갖고 李의원을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하는 한편 국회윤리위원회에 李의원의 저질발언을 제소키로 했다. 국민회의는 12일 상오 긴급 간부회의를 소집,李의원 발언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다. 이날 한나라당 연석회의에서는 “DJ가 하루속히 하야하기를 4,000만 국민이 기다리고 있다”(白南治 의원),“DJ가 나라를 팔아먹고있다”(金聖植 충남 예산지구당위원장)는 등 문제발언이 속출했다.
  • 예리한 필봉 휘두른 항일언론인/9월의 독립운동가 張道斌 선생

    ◎대한매일신보 시절 반일 언론의 선봉/일제의 행각 발로 뛰며 낱낱이 기사화/국사연구 몰두… 황국사관 정면 반박도 “국가라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국민을 모아 이룬 것이오. 국정이란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국민이 그 일(국정)을 자치(自治)하는 것이오. 애국이란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국민이 그 몸(국가)을 스스로 사랑하는 것이라. 고로 민권이 흥(興)하면 국권이 세워지고 민권이 멸(滅)하면 국권이 쓰러지니 윗 사람이 압민(壓民)하는 권리에 힘쓰면 그 나라는 스스로 멸망하는 것이오,국민된 자가 그 권리의 신장에 힘쓰지 아니하면 그 몸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張道斌의 대한매일신보 논설중에서) 산운(汕耘) 장도빈(張道斌·1888∼1963)선생. 타고난 문재와 예리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일생을 언론활동과 역사연구에 몸바쳤던 애국자다. 반일·항일의 선봉에 섰던 대한매일신보(서울신문 전신) 기자겸 논설위원으로 언론계 활동을 시작해 일제하에서 날카로운 필봉을 날리며 이름을 떨쳤다. 망명과 귀국을 거치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해 굽힐줄모르는 지조와 의식을 발휘했던 빼어난 애국자·민족주의자이기도 하다. 평안남도 중화에서 태어난 張선생은 5세에 사서삼경을 통독,신동 소리를 들었던 인물. 소문을 들은 평양감사의 추천으로 대한제국의 학부가 관장하던 한성사범학교에서 수학했다. 선생은 여기서 교편생활을 했던 朴殷植의 소개로 1908년 봄 대한매일신보와 인연을 맺어 총무인 梁起鐸의 각별한 신임을 얻었다. 21세에 논설위원이 됐고 申采浩의 후임으로 논설주필을 맡아 친일내각과 친일단체인 일진회에 당당하게 맞서 싸웠다. 대한매일신보는 일제를 신랄하게 비판해 미움을 받았지만 영국인 裵說이 사장을 맡아 항일의 강한 논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일제의 폭압이 더해가면서 신문압수와 검열이 심해졌으나 선생은 일제의 행각을 발로 뛰며 낱낱이 기사화한 장본인으로 이 시절 미국에서 돌아온 安昌浩의 신민회 비밀회원으로 가담했다. 이 때 金九·李昇薰·李商在·尹致昊 등 애국지사들과 교분을 쌓아 나중 망명생활 때 큰 도움을 받게 된다. 1910년 한일합방직후 필진들이 묶여 들어가고 신문사의 명맥이 끊어질 때까지 필봉을 늦추지 않았다. 밤엔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면서 국사연구에 몰두, 사학자의 발판을 다졌다. 선생의 사관은 당시 팽배해 있던 황국사관과 사대주의사관을 정면으로 반박해 우리의 독립적인 역사의식을 불어넣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결국 1913년 블라디보스토크행 망명길에 올랐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까운 신한촌에서 다시 申采浩를 만나고 독립투사들과 교류했다. 그는 신병으로 安昌浩가 초청한 미국행을 포기하고 1916년 귀국했다. 평북 영변의 서운사에서 요양한 뒤 처음으로 민족혼을 일깨우는 역사서적 ‘국사’를 저술했다. 1919년 귀경후 동아일보의 발간을 출원해 허가를 받았으나 돈이 없어 운영을 양도했다. 하지만 1926년까지 잡지 ‘서울’‘학생계’‘조선지광’을 발간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이때 출판사 고려관을 설립,‘조선사요령’‘조선위인전’‘조선역사록 등 숱한 책자를 편찬했다. 1927∼45년은 고적답사를 통한 역사연구에 전념하던 시기. 일제말기 총독부의 끈질긴 중추원 참의 제의를 거부하고 고향 근처의 심산에 은둔하며 역사서적 집필에 전념했다. 그는 후학양성에도 뜻이 컸다. 1947년 한국대학을 설립한데 이어 1948년 단국대학을 설립,초대학장을 맡았다. 1949년엔 육군사관학교 국사학교수로 일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문화훈장을 수상했다. 그러나 단국대 명예교수로 강의를 가던 길에 짐수레에 치이는 사고를 당해 1년간 병원에서 고생하다 1963년 76세의 일기로 운명했다. 지난 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으며 98년 9월 국가보훈처가 지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그의 후손들/高合 회장 致赫씨 등 5남1녀/모두 재계·학계 뿌리내려 저명 선생은 늦은 나이인 33세에 평북 영변의 기독교 집안 출신 金淑姿씨(1979년 타계)와 결혼,5남1녀를 두었다. 선생의 은둔생활과 구국운동에 따라 부인 金여사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모두 재계·학계에서 뿌리를 내린 유명인사들이다. 장녀 致豊씨는 지난 60년대 결혼후 도미,76년 작고했고 장남 致榮씨는 신동아손해보험 상임이사·고려다이아몬드공업 대표이사를 지낸뒤 92년 별세했다. 삼양식품을 창설한 차남 致德씨도 지난 88년 작고했고 3남 致健씨는 신화다이아몬드공업 회장·고려합섬 이사를 거쳐 현재 BBC 영어연구원 고문이다. 고려합섬을 창업한 4남 致赫씨(고합그룹 회장)는 아버지의 뜻을 기리기 위해 81년 산운학술문화재단(현 고려학술문화재단)을 설립했고 막내 致順씨는 중앙대 사회과학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 고구려 軍유적지 남한서 첫 발굴/구리 아차산

    ◎타원형 성벽·간이 대장간 등/5∼6세기 南進전진기지 추정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워커힐 인근 아차산 일대에서 남한 최초로 고구려 군사 유적지가 발굴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5세기 중엽∼6세기 중엽의 것으로 보이는 이 유적지는 100여명 정도가 묵었던 크기로 모두 15곳 가량이 확인됐다. 따라서 이 지역이 적어도 대장수 등 비중있는 인물이 기거한 것으로 추측됨에 따라 광개토대왕에서 장수왕까지 이어지는 고구려 남진정책의 전초기지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대 인문학연구소 발굴단(단장 오인석)이 지난 7월 발굴을 시작해 9일 공개한 아차산 보루성 유적지(사적 제234호)는 타원형 성벽과 7기의 장방형 건물지,간이 대장간 시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출토된 유물은 토기인 접시 시루 동이 등과 철기인 정·끌·호미·화살촉·갈고리창 등 모두 100여점에 이르며 개체분까지 포함하면 1,000여점에 달한다. 고구려 유물 가운데 명문이 새겨진 토기가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9급 공무원 고학력자 급증세

    ◎올 공채 합격자 전문대졸 이상 97.4% IMF관리체제 이후 고학력자의 취업난이 심화되면서 올해 9급 공무원시험 합격자의 학력과 나이가 예년에 비해 크게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행정자치부는 6일 지난 2일 발표된 제39회 9급 공개경쟁 채용시험 결과,대졸이상 72.1%(대학원졸 0.4%포함),대학 재학중 17.6%,전문대졸 7.8%로 전문대졸 이상의 고학력자는 97.4%인 반면 고졸이하는 2.5%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올해 대졸이상의 합격자 비율은 88년에 비해 3배가 높아졌으며 지난 해의 63.4%보다도 8.5% 포인트가 높다. 고졸이하 합격자는 10년전인 88년 과반수에 약간 못치는 48%였으나 그 이후 계속 감소,지난 해에는 6.4%,올해는 2.5%로 뚝 떨어졌다. 또 연령 분포도 88년에 45%였던 18∼20세 연령대의 합격자가 올해는 한명도 없었고 88년에 각각 28%,13%에 머물렀던 24∼26세와 27∼28세가 53.6%,35.2%를 차지,20대 후반 합격생의 비율이 크게 높아졌다. 올해 27∼28세의 합격자는 지난 해(26.4%)와 비교할 때 8.8% 포인트가 증가했다. 이와 함께 남녀비율면에서 볼 때 남성 합격자는 여성파워에 밀려 그동안 감소추세에 있었으나 IMF 사태이후 남성 고학력자의 지원이 크게 늘어나면서 지난 해 65%에서 79%로 높아졌다. 여성합격자의 비율은 88년 10%에서 97년 35.3%로 큰 폭으로 늘어났으나 올해는 21.3%로 증가세가 둔화됐다.
  • 포르투갈 대사 邊承國씨/탄자니아 대사 安孝承씨

    정부는 2일 주(駐) 포르투갈 대사에 邊承國 주 탄자니아 대사를,주 탄자니아 대사에 安孝承 주 호주 공사를 임명했다. ◇邊대사 △황해 서흥·56세 △서울대 법학과 △외시 4회 △ 방글라데시 참사관 △LA 참사관 ◇安대사 △충북 음성·48세 △서울대 경제학과 △외시 7회 △캐나다 참사관 △국제경제국 심의관
  • 꽉막힌 자금줄(주택경기 이렇게 살리자:下­1)

    ◎분양률 10%대… 사업포기 속출/수요자도 고금리로 허덕 “특단대책 시급” 경기도 용인에 대규모 아파트를 지으려던 중소건설업체 J사.최근 분양사업권만 남기고 시공권 등 모든 권한을 대형 건설업체에 넘겼다.지난 5월 모델하우스를 개장했지만 찾아오는 사람은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가수와 탤런트,부동산 전문가까지 동원했지만 사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빚으로 구입한 비싼 땅을 놀리자니 이자 부담이 너무 커 일단 입주자들의 청약금으로 공사를 벌여 자금을 돌리려던 계획이 완전히 물거품이 됐다.이 때문에 분양가만 결국 평당 50만원정도 뛰었다. 중견 주택건설업체인 D건설 자금담당 金모 차장(42).그는 최근 급한 운전자금 100억원을 대출받으러 은행에 갔다가 눈앞이 아득해졌다.시가 300억원짜리 회사 땅을 담보로 내놓았지만 은행측은 공시지가의 50% 이상은 대출이 어렵다고 했다.공시지가는 시가의 절반 수준이어서 기껏해야 70억∼80억원선.金차장은 “지난해 같으면 150억원은 빌렸을 것”이라며 허탈해했다. 대기업 尹모 과장(37).그는 지난해 김포의 S아파트를 분양받아 내집 마련의 꿈에 부풀어 있다 최근 해약여부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어김없이 다가오는 중도금 납부일자를 도저히 맞출 자신이 없다.회사에서 대출받은 전세자금과 은행대출금만도 4,000만원에 달한다.이자만도 월급의 3분의 1에 육박해 더 이상의 대출은 상상도 못한다. 이렇듯 수요자들은 ‘투자’가치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고금리로 주택을 장만한다는게 ‘꿈’이 돼버렸다.주택건설업계도 미분양사태와 중도금 연체,해약으로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사방으로 돈줄이 꽉 막혔다. 7월 현재 미분양주택은 11만6,433호.지난 한햇동안의 8만8,867호를 넘어선지 오래다.완공후 주인을 못 구한 집도 1만1,684호에 달한다.길훈건설 崔洛龍 전무는 “초기 분양률이 최소 50%는 돼야 공사를 시작할 수 있지만 지금은 10∼15%에 그치고 있다”고 한숨지었다.남양주 지역에서 아파트 426세대를 분양중이지만 분양률이 10%대에 그쳐 사업 자체를 미룰 것을 저울질하고 있다. 사업을 하는 곳도 울며 겨자먹기식이다.김포에 1,800여세대 아파트를 분양중인 신안건설은 평당 분양가를 340만원으로 책정했다.2년전 인근지역 분양가는 330만원으로 했었다.이번에는 식기세척기,살균기,TV겸용 도어폰 등 평당 20만원에 달하는 각종 편의시설과 고급마감재를 사용했다. 이렇게라도 해서 자금을 회전시키려는 고육책이다.이 탓인지 지난 20일 모델하우스 개장때 2,000여명이 찾아 반응이 좋았다.禹政錫 부사장은 “언제인지는 몰라도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어떻게든 생존하는게 당면과제”라고 말했다. 자재값도 크게 뛰어 자금줄을 더욱 옥죈다.하이섀시·아스콘 등은 지난 해보다 25%,철근은 30%,합판은 20%,레미콘은 10%정도 올랐다. 수요자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분양가와 시세 차이가 15∼20%정도는 나야 투자가치가 있게 마련이나 현재로선 시세 전망조차 불투명하다.게다가 대출이자 연 16.25∼17%(주택은행)도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중도금 납부율도 과거 80∼90%에 육박했으나 지금은 대부분 절반이하로 떨어졌다.김포 합동부동산 崔鍾範 부장은 “중도금 대출금리가 하늘 높은 줄모르고 치솟은데다 부동산 담보대출도 사실상 불가능해 청약은 물론 제때 중도금을 내는 것도 불가능한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입주자들은 또 통상 분양가의 50%정도는 전세금을 통해 확보하지만 전세경기마저 얼어붙은 상황에서 여의치 않은 실정이다.지난 27일 김포 현대아파트 모델하우스에 들른 金光烈씨(36)는 “집값 가운데 5,000만원을 전세금으로 확보한다면 구입해 보겠으나 가능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수요자와 공급자 모두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외에 다른 대안이 사실상 없다고 입을 모은다.구매력을 높이기 위해 중도금 대출을 보다 원활히 하고 금리를 낮춰야 하며 주택자금에 대한 세금을 감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주)태산 李点雨 전무는 “지금까지 생색성 대책만 있었을 뿐 실질적인 자금회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정책은 거의 없었다”면서 “양도소득세 5년간 면제혜택만 해도 액수가 크지 않은데다 기존주택은 혜택에서 제외해 신규주택 경기를 활성화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 도도의 노래/데이비드 쾀멘 지음(화제의 책)

    ◎생명의 진화·멸종 주무대 섬 연구 도도는 인도양의 모리셔스섬에 살다 17세기에 멸종된 새.날지 못하는 이 새는 16세기 유럽인이 상륙하면서 급격히 개체가 줄어 100여년만에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자연생태 저술가인 저자는 도도를 모티브로 해 항해시대가 열린 후 얼마나 많은 생명이 수난을 당했는가를 직접 발로 뛰며 확인했다.생명의 진화와 멸종은 주로 섬에서 일어난다.다윈이 진화론의 영감을 얻은 곳이 태평양의 갈라파고스 제도였고,진화생물학자로 꼽는 윌리스도 외딴 섬을 대상으로 현장연구를 했다.이렇듯 섬 생물지리학은 진화와 멸종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라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푸른숲 전 2권 각권 1만원
  • 남이 맡은 내 앞가림(朴康文 코너)

    셰익스피어가 쓴 것으로 돼 있는 희곡 ‘헨리 6세’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의 끝 무렵, 그러니까 프랑스 구국소녀 잔 다르크가 활약하던 때의 이야기다. 전쟁으로 국가의 치안 능력이 물렁해진 틈을 타고 영국의 한 지방에서 어중이떠중이가 패거리를 지어 기세를 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 폭도 가운데 한 사람이 선동적으로 외친다. “우리가 제일 먼저 할 일은 법률가들을 죽이는 것이다” ○힘있는 곳에 부패가 15세기 서양 백성들 눈에, 법률가란 악덕의 표상으로 비쳤다. 법률가들이 양피지에 뭔가를 쓰고 나면 사람들의 목숨이 사라지는데, 까막눈인 보통사람은 뭐가 뭔지 모르고 죽는 일이 많았다. 힘이 있는 곳에 부패가 있기 쉬운 것은 예나 이제나 같다. 법률가들이 민초들이 꼽은 제거 제1순위 표적 집단이 된 것은 그만큼 전횡과 부패가 심했기 때문이다. 16세기 셰익스피어 시대에도 아마 그랬으니까 이 대목을 집어 넣었을 것이다. 성경에 율법학자 또는 율법교사들에 관한 언급이 많은데, 한결같이 부정적이다. 예수의 꾸짖음이 준열하다. “너희 율법교사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서, 너희 스스로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사람도 막았다” 19세기 프랑스 풍자화가 오노레 도미에의 그림을 보면, 법률가는 대개 탐욕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된다. 얼마 전 새로 대법관 된 분의 청빈이 화제가 됐다. 법관 직분에 있으면서 청빈하기가 어렵다는 통념이 지금 우리 사회에도 깊이 깔려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오늘날 선진국에도 법률가, 특히 변호사에 대한 풍자적 농담이 많은 것은 여전히 그 직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직분이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그 직분의 일탈에 대한 비판은 크다.천국과 지옥 사이에 송사가 났다 하면 지옥이 이기게 마련인데, 법률가들이 지옥에 모두 가 있기 때문이라는 농담이 있다. 이런 농담도 있다. 입원한 노인이 죽음을 앞두고 의사더러 변호사를 불러 달라고 했다. 의사가 변호사를 불러 함께 병상에 다가갔다. 노인은 두 사람을 본 뒤 다시 누워 눈을 감고 아무 말이 없었다. 몇 분 뒤 의사가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노인이 말했다. “예수는 양쪽에 도둑 두 사람을 두고 죽었소. 나도 그렇게 하고 싶소” 변호사를 헐뜯는 농담이 끊임없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모든 변호사가 다 탐욕스러운 것은 물론 아니다. 물질적 풍요와 안온한 삶을 포기하고, 외롭게 의로운 투쟁을 하는 이들의 편에 서서 핍박을 받아 온 이들도 있다. ○변호사·언론 도마위에 지금 변호사 징계권을 대한변호사협회(변협)가 지니고 있으나,정부에 되돌리는 것으로 규제개혁위원회가 추진하자 변협과 변호사들이 반발하고 있다.내가 해야 할 앞가림을 남이 나서서 해 준다는 것, 자율이 다시 타율로 가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비리 변호사들을 스스로 징계하지 못한 죄로, 오랫동안 어려운 시절을 겪은 뒤 찾게 된 징계권이 5년만에 다시 관으로 넘어갈 판이다. 제 앞가림을 남이 해 주어야 할 대상으로 언론도 도마 위에 올라 있다. 어제 언론개혁시민연대(언개연)라는 시민단체가 결성되었다. 시민단체가 이제는 언론을 그대로 두지 않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해야 할 때 할 말 못한 지난 날이 부끄럽고 앞으로 어떻게 나무람당할지 두렵기만 하다.
  • 새 교육위원 69% 교육행정 경험

    ◎재선 44명… 평균연령 57세로 젊어져 전국 16개 시·도 교육위원회는 지난 17일부터 20일까지 제3기 교육위원 선거를 통해 146명의 새 교육위원을 선출했다. 이번에 선출된 교육위원의 평균연령은 57.7세로 1기(60세),2기(59.6세)보다 약간 젊어졌으며 교원 출신이거나 교육행정 경험이 있는 사람이 101명으로 69.2%를 차지했다. 직업별로는 현직 위원이 44명으로 가장 많았다. 현직 초·중등 교원은 교장 13명,교사 4명 등 17명이며 대학 교원도 14명이나 됐다. 나머지는 전직 교원,교육장 등 기관장,학원 경영자,개인사업자 등이다. 여성은 2명에 불과했다. 교육위원에 당선된 교원이나 공무원은 겸임이 금지되므로 다음달 임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퇴직해야 한다.
  • 법원장 6명 등 법관 15명 人事/서울고법원장 尹載植

    ◎서울지법원장 李勇雨/부산지법원장 金榮一/수원지법원장 趙容完/청주지법원장 權誠/창원지법원장 新明均 대법원은 19일 서울고등법원장에 尹載植 서울지방법원장을 승진,발령하고 서울지방법원장에 李勇雨 수원지방법원장을 전보하는 등 고법 부장판사급 이상 법관 15명에 대한 승진 및 전보인사를 오는 24일자로 단행했다. 수원지법원장에는 趙容完 청주지법원장이,부산지법원장에는 金榮一 창원지법원장이 전보됐으며 창원지법원장에 申明均 서울지법 북부지원장,청주지법원장에 權誠 서울지법 서부지원장이 각각 승진,임명됐다. 이와 함께 서울지법 북부지원장에 金曉鍾 서울고법 부장판사,서울지법 서부지원장에 朴英武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각각 임명됐다. 이밖에 고법 부장판사급 이상 법관 전보는 △서울고법 부장판사 蔡永洙 △대전고법 부장판사 李宙興 △대전지법 수석부장판사 閔亨基 △부산지법 수석부장판사 朴鏞秀 △부산지법 동부지원장 金文洙 △대전고법 부장판사 吳世彬 △부산고법 부장판사 康文鍾 등이다.◎尹載植 서울고법원장/연구하는 법원 독려 듬직한 외모에 과묵·소탈한 성품으로 의리가 강하며 이론과 실무 능력을 겸비했다는 평. 선후배들로부터 신망도 두텁다. 법원장급에서는 유일한 호남 출신. 서울지법원장 재직 때 ‘판례연구회’ 결성을 추진하는 등 연구하는 법원 분위기를 독려했다. 權孝英씨(54)와 사이에 1남2녀. ▲전남 강진·56세 ▲서울대 법대 ▲사시 4회 ▲서울지법 동부지원장 ▲광주지법원장 ▲서울지법원장 ◎李勇雨 서울지법원장/전관예우방지 주도 업무 처리가 치밀하고 매사에 적극적이라는 평. 따뜻한 마음 씀씀이로 인해 따르는 후배들이 많다. 법원장 승진 1년 만에 ‘법원장의 꽃’인 서울지법원장을 맡았다. 서울고법 수석부장 때 ‘전관예우 방지를 위한 특별재판부’ 구성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金銀子씨(53)와 사이에 2남1녀. ▲경북 의성·56세 ▲서울대 법대 ▲사시 2회 ▲사법연수원 교수 ▲서울고법 수석부장판사 ▲수원지법원장 ◎金榮一 부산지법원장/全·盧씨 비자금 재판 강직한 성품으로 재판에서 균형잡힌심리 진행 솜씨가 돋보인다는 평. 96년 서울지법 형사수석부장 재직 때 全斗煥·盧泰愚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및 12·12,5·18사건 1심 재판을 맡아 각각 사형과 징역 22년6월을 선고,주목을 받았다. 李淸子씨(56)와 사이에 1남2녀. ▲서울·58세 ▲서울대 법대 ▲사시 5회 ▲청주지법 충주지원장 ▲서울지법 북부지원장 ▲창원지법원장 ◎趙容完 수원지법원장/19세에 司試 합격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하다는 평가와 함께 재판진행 솜씨도 탁월하다. 검정고시를 통해 서울대 법대에 입학,19세에 사시에 합격한 수재형. 서울지법 서부지원장,청주지법원장 재직 때 법원내의 인화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직원들로부터 신망을 얻었다. 辛惠卿씨(50)와 사이에 1남1녀. ▲서울·53세 ▲서울대 법대 ▲사시 4회 ▲서울고법 부장판사 ▲서울지법 서부지원장 ▲청주지법원장 ◎權誠 청주지법원장/사법개혁작업 지휘 파기 환송을 두려워하지 않는 소신을 겸비한 사시 8회 선두 주자. 사법부내 대표적인 기획통으로 93년 사법제도 발전위원회 연구실장을 맡아 사법개혁 실무작업을 진두지휘했다. 한학에 조예가 깊어 판결문에 한시 자구와 고사성어를 즐겨 인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朴仁淑씨(51)와 사이에 3남. ▲충남 연기·57세 ▲서울대 법대 ▲사시 8회 ▲사법연수원 교수 ▲서울고법 부장 ▲서울지법 서부지원장 ◎申明均 창원지법원장/수재타입 ‘영국신사’ 영국 유학시절 익힌 매너로 영국신사로 통한다. 사시 8회 수석 합격의 수재로 치밀한 법논리 전개와 능숙한 재판진행으로 정평이 나 있다. 법관으로서의 자세에 조금의 오해 소지가 없도록 원칙에 충실한 처신으로 선후배 법관들의 신망이 두텁다. 張仁順씨(51)와 사이에 3남. ▲서울·54세 ▲서울대 법대 ▲사시 8회 ▲대법원 재판연구관 ▲서울고법 부장판사 ▲서울지법 북부지원장
  • 아키타縣 지자제/崔弘運 논설위원(外言內言)

    지난주 일본 혼슈(本州) 북부 아키다켄(秋田縣)을 방문할 수 있었다.한·일 합작 건설회사인 공영그룹 鄭秉勳 회장이 후원하는 ‘아키다성지순례지원본부’(본부장 鄭東柱)의 초청으로 아키다시(秋田市)의 작은 천주교 수녀원인 성체봉사회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그 수녀원에는 지난 75년 1월 4일부터 81년 9월 15일까지 6년 8개월동안 101차례나 눈물을 흘린 높이 68㎝의 조그마한 목각 성모 마리아상이 있어 더욱 유명한 곳이다. 눈물을 흘리는 마리아상을 목격한 사람만도 2,000여명에 이르며 아키다대학 법의학부는 이 눈물을 사람의 체액성분과 똑같다는 분석결과를 내놓기도 했다.니가타 교구와 로마 교황청도 다각적인 조사활동을 벌인 끝에 1984년 5월 이 성모상에 관련된 일들을 ‘초자연적인 것’,즉 기적(奇蹟)으로 결론내렸다. 이쯤 되면 프랑스의 루르드나 포르투갈의 파티마처럼 전 세계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드는 성지(聖地)로 명성을 떨칠 법도 하지만 지금까지 한적한 시골지방으로 남아 있다.천주교가 전파된지 500년이나 되는 일본이지만 신자 수는 아직 30만명정도밖에 되지 못하는 신사(神社)의 나라,일본만의 뿌리깊은 토속신앙 때문이다.천주교 전래 200년만에 신자 수가 300만명이 넘고 개신교는 100년 역사에 1,000만 신자를 확보한 우리와 사뭇 다른 풍토다. 독실한 불교신자이며 한국인인 칠순(七旬)의 鄭회장이 이 곳에 순례객들을 위한 호텔을 짓고 서울∼아키다 직항로 개설추진 등 아키다 성지 개발사업에 발벗고 나선 데는 남다른 사연이 있다.각막장애로 시력을 잃게 될 위기에 처했던 지난 96년 서울강남성모병원에서 모두 천주교 신자인 26세의 청년과 19세된 소녀의 안구를 기증받아 시력을 회복했기 때문이다.빛을 다시찾게 된 보은의 뜻을 나타낼 사업을 찾던 중 우연히 이 지방을 지나다 초라한 성모상에 관한 얘기를 듣고 전 재산과 남은 생을 바치기로 한 것이다. 이같은 사실들을 확인하는 우리 일행 22명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아키다켄과 시,그리고 그 지역 상공인들이 보여준 ‘고장 사랑’정신과 실천이었다.언론계 인사들로 구성된 우리 일행을 그들은 놓치지 않고이틀동안이나 식사 대접을 하며 관광명소와 특산품,미인과 인심좋은 지역사람들에 관해 열성적으로 설명했다.반도 구미코(板東久美子) 부지사와 이시카와 렌지로우(石川鍊沿郞) 아키다시장,中田건설 나카다 사장 등을 통해 지방자치제는 민·관이 힘을 하나로 뭉쳐야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 통계로 본 ‘대한민국 50년 경제 사회상’

    ◎65년 1만원짜리 97년엔 22만원으로/소주·담배 소비량 각 4.6배·1.9배 증가/대졸 이상 여성 45년간 0.3%서 13%로/남한 수명 북한보다 평균 3.2세 높아 지난 65년 이후 지난해까지 소비자물가가 21.9배가 올랐다.이에 따라 65년 1만원의 가치는 지난해 4백56원 수준으로 하락했다. 초등학교의 학급당 학생수는 48년 58.6명에서 지난해 35.1명으로 줄었지만 다른 선진국과 비교하면 여전히 과밀학급을 면치 못하고 있다. 소주와 맥주가 약주와 탁주를 누르고 국민들의 주요 술로 자리잡았다. 통계청이 12일 발표한 ‘대한민국 50년의 경제사회상 변화’에 따르면 48년 정부 수립 이후 50년간 우리 경제와 국민의 생활은 양적 팽창과 함께 질적인 면에서도 많이 달라졌다. ▲국민생활=경제성장은 술과 담배를 권하는 사회로 이행되는 것일까. ○약주·탁주 뒷전으로 20세 이상 국민 1인당 연간 소주소비량은 96년 25.2ℓ(2홉들이 소주 70병)로 5일에 평균 1병씩 마신 셈이다.62년 5.5ℓ보다 4.6배나 증가했다. 맥주 역시 62년 0.5ℓ(500㎖짜리 1병)에서 96년 59.9ℓ(119.8병)로 늘었다.1인당 3일에 1병 꼴이다.반면 탁주와 약주는 밀려나 주류 출고량 비중이 지난 34년간 81.6%에서 7.3%로 격감했다. 20세 이상 인구 1인당 담배소비량은 60년 87갑에서 97년 167갑으로 1.9배가 늘었다. ○가족 3.3명으로 줄어 ▲인구와 교육=가구수는 55년 379만에서 95년 1,296만가구로 3.4배 늘었으나 평균 가족수는 5.5명에서 3.3명으로 줄어 핵가족화가 진전됐다. 대졸 이상 여성이 전 인구대비 55년 0.3%에서 95년 13.1%로 급증했다.대졸 남자와 대졸 여자 비율도 같은 기간 8대1에서 2대1로 개선됐다. ○IMF로 GNP 감소 ▲경제지표=경제성장에 힘입어 GNP(국민총생산)규모는 53년 14억달러에서 97년 4,374억달러로 312.4배로 불어났다. 국민 1인당 GNP도 53년 67달러에서 77년 1,000달러를 넘고 95년에는 1만달러를 돌파했다.그러나 경기침체와 외환위기로 인해 지난해에는 9,511달러로 전년보다 오히려 감소했다. 실업률은 63년 8.1%로 최고를 기록한 이후 96년 2.0%까지 하락했다가 지난해에는 2.6%로 다시 높아졌다. ○3차산업 중심 재편 ▲산업=53년에는 농림어업 47.3%,광공업 10.1%,사회간접자본과 기타 서비스업 42.6%로 1차산업 중심이었으나 97년에는 각각 5.7%,25.9%,68.4%로 3차 산업 중심으로 바뀌었다. 자동차생산량은 62년 1,800대에서 지난해에는 281만 8,300대로 급증했다. ○여성 長壽 ‘남북 공통’ ▲남북한 비교=남북한 모두 여자가 남자보다 오래 살지만 남한사람들의 수명이 북한보다 평균 3.2년 더 길다. 남자 수명은 남한의 경우 60년 51.1세에서 95년 69.5세로,북한은 46세에서 67세로 높아졌다. 반면 여성은 남한이 53.7세에서 77.4세로,북한은 52.1세에서 73.3세로 각각 높아졌다. ○세계인구의 0.8% 차지 ▲국제비교=남한인구는 97년 현재 세계 총인구의 0.8%로 세계에서 26위.중국은 12억4천만명으로 세계의 21.3%를,인도는 9억6천만명으로 16.4%,미국이 2억7천만명으로 4.6%이며 인도네시아가 2억3천만명으로 3.5%를 차지했다. 자동차 생산은 97년 현재 281만8,000대로 지난 32년간 1만9,986배로 증가, 세계 5위의 자동차 생산국이다. 미국은 1,208만대,일본은1천97만대를 각각 생산했다. 교역량은 48년에 2억2,000만달러에서 97년 2,808억달러로 세계 11위. 미국은 48년에 208억달러에서 97년에 1조5,877억달러로,일본은 48년에 10억달러에서 97년에 7,596억달러로 증가했다.1인당 GDP는 96년에 1만600달러로 세계 31위 수준.55년에는 미국이 2,431달러로 세계 1위였으나 96년에는 스위스가 4만1천65백32달러로 가장 높았다. 1인당 원유 소비량은 95년에 1,912㎏로 지난 25년간 6.3배로 증가했다. 일본은 1,767㎏,독일이 1,260㎏,영국이 1,405㎏,프랑스가 1,373㎏ 등으로 선진국 대부분이 우리보다 낮은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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