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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법 “거창사건 희생자 유족, 국가배상 청구소송 가능”

    대법 “거창사건 희생자 유족, 국가배상 청구소송 가능”

    국군이 6·25전쟁 당시인 1951년 경남 거창군에서 지역주민 수백명을 학살한 이른바 ‘거창사건’ 희생자 유족들이 국가배상 청구를 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14일 거창사건 희생자 유족 A씨 등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부산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밝혔다. A씨 등은 1996년 제정된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거창사건 사망자 및 유족 결정을 받았다. 그러나 2005년 제정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에 따라 설치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거창사건법에 의해 사망자 및 유족 결정이 이뤄진 피해자는 진실규명 신청대상에서 제외해 진실규명 결정이 별도로 이뤄지진 않았다. 과거사정리위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사건에 대한 배·보상 특별법 제정을 건의했지만 입법이 이뤄지지 못한 채 2010년 6월 활동을 종료했다. A씨 등은 이후 2017년 2월 국가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1심과 2심은 거창사건 희생자 유족의 위자료 청구권은 과거사정리위가 활동을 종료한 날부터 이미 3년이 지나 시효로 소멸했다며 청구를 기각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2018년 8월 과거사정리법상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 등에서의 국가배상 청구권은 장기소멸시효 적용이 배제된다며 일부 위헌 결정을 내렸다. 대법원은 헌재 위헌결정에 따라 효력이 없게 된 장기소멸시효에 관한 규정을 적용한 잘못이 있다며 원심 판단을 뒤집었다. 대법원은 “거창사건법에 의해 사망자 및 유족결정이 이뤄진 피해자는 과거사정리위에 의한 진실규명 결정이 별도로 이뤄지지 않았으나 과거사정리법상 한국전쟁 전후 시기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 제16회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만곡 임장수상’ 유정진·이금복 작가 수상

    제16회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만곡 임장수상’ 유정진·이금복 작가 수상

    한국미술협회가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하는 ‘제16회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행사가 지난 5일 한국방송회관 코바코홀에서 개최됐다. 미술협회는 매년 12월 5일 ‘미술인의 날’ 행사를 통해 기업 및 문화계와 지속적인 교류의 장을 마련하고 젊은 작가들의 발전 가능성을 제시해 왔다. 한국 미술의 위상을 높인 이들을 위해 마련된 이 시상식에서는 대상, 공로상, 원로작가상, 미술문화공로상, 정예작가상 등 5개 부문의 본상이 수여되며, 지난해 처음으로 개인작가 이름의 상인 ‘만곡(晩谷) 임장수상’을 제정해 올해 두 번째 수상을 진행했다. 시상은 고(故) 임장수 화백의 부인 최금식(77)씨가 맡았다. 올해 ‘만곡 임장수상’ 수상자는 유정진 작가와 이금복 작가가 선정됐다. 유정진 작가는 개인전 9회 및 단체전 50여회의 전시 이력이 있는 작가로 2015년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2010년 6·25 60주년 기념 미술대전 우수상의 수상 경력을 갖고 있다. 현재는 한국미술협회 수채화분과 이사로 활동 중이다. 이금복 작가는 개인전 및 단체전 200여 회의 전시 이력이 있는 작가로, 제1회 대한민국 수채화전람회 수상 경력을 갖고 있다. 현재는 한국미술협회 재활치료교육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다. 이광수 미술협회 이사장은 “대한민국 미술계의 큰 획을 그은 미술인으로써의 만곡 임장수 화백의 정신을 받들어 만곡 임장수상을 제정했다”며 “고인은 청년 작가들을 육성시켜야 한국 미술의 미래가 있다고 늘 말했고 해외의 미술이 한국으로, 한국의 미술이 해외로 나가려면 청년 작가들을 육성해야 한다는 유지를 깊이 새겼다”고 전했다. 임 화백은 1941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서라벌고, 서라벌예대를 졸업하고 만학으로 90년대에 유학을 떠나 러시아 레핀 아카데미 미술대학에서 공부한 최초 한국인이다. 우리나라 자연과 모든 삶의 현장이 주제이자 모티브였던 그는 피사체를 정직하고 정확한 묘사를 위해 평생 데생과 크로키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살아있는 선으로 우리 민족의 역동성, 전통을 화폭에 담은 드로잉 화보집 ‘만곡 임장수가 연필로 그린 한국의 미’를 발간했으며, 직접 찾아다니며 우리나라 사계를 담은 그의 풍경화는 철저한 사생의 바탕에서 자신의 감성을 기록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임 화백은 살아생전 순수예술인들을 위한 후원을 아끼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국인 최초로 세계 3대 미술 학교인 러시아 레핀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면서 후배들이 러시아 유학을 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줬다. 이후에 한국 미술 유학생들이 러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했다. 미술협회 관계자는 “임 화백의 미술에 대한 애정과 후배 작가를 생각하는 깊은 마음이 사후에 더욱 더 빛나고 있다”고 말했다.
  • 6.25전쟁 영웅 고(故) 백선엽 장군 동상 세운다

    6.25전쟁 영웅 고(故) 백선엽 장군 동상 세운다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자 6.25전쟁 영웅 고(故) 백선엽(1920∼2020) 장군의 동상 건립 사업이 추진된다. 경북도는 오는 21일 경북도청에서 이철우 도지사, 배한철 도의장, 김재욱 칠곡군수 등 지역 기관·단체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백선엽 장군 동상 건립 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원회)를 발족한다고 14일 밝혔다. 추진위원회는 이우경 한국자유총연맹 경북도회장이 위원장을 맡는다. 백 장군의 장녀 백남희(74·재미교포) 여사는 고문으로 위촉됐다. 위원으로는 이광희 경북보훈단체협의회장, 포항·구미·경산 상의 회장, 지역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등 10여명이 참여한다. 이 위원장은 이날 추진위원회 발족식에서 백 장군 동상 건립 성금 1억원을 기탁할 예정이다. 추진위원회는 이날부터 백 장군 동상 건립을 위한 모금 운동에 들어간다. 목표액은 5억원이다. 추진위원회는 모금 운동을 발판으로 내년 7월 백 장군 3주기 추모식 이전에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전적기념관에 동상을 제막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다부동은 1950년 8월 백 장군이 지휘한 국군 제1사단과 미군이 북한군 3개 사단을 격멸하고 낙동강 방어선을 지킨 6.25 전쟁 최대 격전지다. 백 장군 동상 건립은 10여년 전부터 경기 파주 등지에서 추진됐지만 일부 정당·시민사회단체 등이 백 장군이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 독립군 토벌대로 악명 높은 간도특설대에서 2년 남짓 복무한 이력을 문제 삼아 반발하는 바람에 큰 진척을 보이지 못했다. 그러다 지난 7월 8일 칠곡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열린 백 장군 서거 2주기 추모식 때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내년 3주기 추모식은 백선엽 장군 동상을 다부동전적기념관에 모셔 동상 앞에서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히면서 속도가 붙었다. 경북도 관계자는 “예산으로 동상을 세우는 것보다 민간 주도로 시민 모금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장군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인 백 장군은 2020년 7월 10일 99세로 사망, 대전국립현충원 장군 제2묘역에 안장돼 있다. 한편 경북도는 이날 도청에서 칠곡군과 다부동전적기념관 운영권 이관 협약을 체결, 내년 1월 운영권을 넘겨받을 예정이다. 다부동전적기념관은 1950년 8~9월, 6·25 한국전쟁 낙동강 최후 방어선에서 북진 전환한 ‘다부동 전투’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981년 국방부가 칠곡군 가산면에 지은 현충시설이다. 칠곡군 공유재산으로, 1997년부터 자유총연맹이 위탁 운영해 왔다. 약 1만 9000㎡ 부지에 기념관과 구국관이 있고 구국용사충혼비, 구국경찰명각비, 백선엽 호국 구민비와 장갑차·전투기·자주포·호크미사일 등 전시물 111점도 뒀다. 도는 앞으로 다부동기념관에 국비 포함 예산 100억원을 들여 다부동 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 기념관을 짓고 상설·특별전시를 열 계획이다.
  • 인천상륙작전, 노르망디처럼… 국제행사 격상 추진 ‘시끌’

    인천시가 6·25 한국전쟁의 대전환점이 된 인천상륙작전을 프랑스 노르망디상륙작전에 버금가는 국제 행사로 기념하는 방안을 추진하자 일부 정당 및 단체들이 반발하고 있다. 송도 자유공원 맥아더 장군 동상의 보존·철거 문제를 놓고 수십 년을 이어 오고 있는 인천 지역의 이념 갈등이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 확대 문제로 번진 모양새다. 11일 시에 따르면 유정복 인천시장은 지난 9월 15일 제72주년 인천상륙작전 전승 기념행사에서 “노르망디상륙작전에 버금가는 행사로 발전시켜 더 나은 대한민국의 내일을 여는 초석으로 삼겠다”고 밝혔다. 유 시장은 지난달 13일 노르망디 현장을 방문한 자리에서도 “인천상륙작전 기념사업을 국가급 행사로 격상시키겠다”고 밝히고, 29일에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비롯한 지역위원장 12명과 가진 당정협의회에서 기념사업을 위해 28억원의 국비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시는 정전 70주년인 내년부터 기념사업을 단계적으로 확대해 2025년에는 8개국 정상들이 참여하는 국제 행사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당장 내년 예산안에 인천상륙작전 재연식 등을 위해 국비 외에 3억 3000만원을 편성했다. 그러나 인천지역 45개의 시민단체가 기념사업 확대를 반대하고 나섰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목숨을 잃거나 고향에서 쫓겨난 송도 원주민들의 상처를 먼저 치유하고 인천을 평화도시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08년 조사에 따르면 인천상륙작전으로 민간인 100여명이 목숨을 잃고 간신히 살아남은 주민마저도 삶의 터전을 잃었다. 이들은 지난 6일 성명서에서 “희생자·실향민들의 아픔이 여전한 상황에서 인천시가 한반도의 긴장을 불러올 수 있는 기념행사를 확대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인천시의회와 정부는 인천시가 편성·요청한 관련 예산을 전액 삭감하라”고 요구했다. 고주룡 시 대변인은 이에 대해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를 확대하는 이유는 한국전쟁 당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구한 작전의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을 재조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세계적으로 공유된 인천상륙작전의 가치는 인천이 초일류 글로벌 도시로 도약하는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 6·25 참전 22국 내년 국제 추모식… 보훈처, 정전 70돌 행사 오늘 설명

    6·25 참전 22국 내년 국제 추모식… 보훈처, 정전 70돌 행사 오늘 설명

    6·25 정전 70주년을 맞는 내년에 유엔군으로 참전했던 22개국과 함께하는 대규모 국제 추모식이 열린다. 국가보훈처는 7일 서울 서초구 한강 서래나루에서 주한 유엔참전국 대사·무관, 유엔군사령부 관계자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제보훈사업 및 정전 70주년 사업’ 설명회를 개최한다. 보훈처가 추진하는 정전 70주년 기념식에 대해 설명하고 유엔참전국의 관심과 협조를 요청할 계획이다. 유엔참전용사 재방한과 후손 교류, 참전국 현지 감사 행사 등 주요 사업도 안내한다. 또 올해 진행했던 미국 워싱턴DC ‘한국전 전사자 추모의 벽’ 준공, 유엔참전용사 재방한 행사, 유엔참전국 후손 평화 캠프, 유엔참전용사 유해 봉환 및 안장식 등을 소개한다. 강국진 기자
  • 6·25 휴전 70주년 맞아 참전용사 국제 추모식 열린다...보훈처 22개 유엔참전국 설명회

    6·25 정전 70주년을 맞는 내년에 유엔군으로 참전했던 22개국과 함께하는 대규모 국제 추모식이 열린다. 국가보훈처는 7일 서울 서초구 한강 서래나루에서 주한 유엔참전국 대사·무관, 유엔군사령부 관계자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제보훈사업 및 정전 70주년 사업’ 설명회를 개최한다. 보훈처가 추진하는 정전 70주년 기념식에 대해 설명하고 유엔참전국의 관심과 협조를 요청할 계획이다. 유엔참전용사 재방한과 후손 교류, 참전국 현지 감사 행사, 학술회의, 특별전시, 국내외 미래세대 관련 연계 행사 등 주요 사업도 안내한다. 또 올해 진행했던 미국 워싱턴DC ‘한국전 전사자 추모의 벽’ 준공, 유엔참전용사 재방한 행사, 유엔참전국 후손 평화 캠프, 유엔참전용사 유해 봉환 및 안장식 등을 소개한다. 유엔참전국과 유엔사 관계자들이 정전 70주년 사업 성공 기원 메시지를 담은 유등과 참전국 국기·유엔기·태극기를 한강에 띄우는 ‘정전 70주년 사업 성공 기원 등불 띄우기’도 예정돼 있다. 박민식 보훈처장은 “정부는 혈맹으로 맺어진 참전국과의 상호 우의와 협력을 더욱 굳건히 할 수 있도록 정전 70주년 사업의 내실화와 범국민적 추진에 모든 역량을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 강원 인제군 한석산 가리봉 전투 전사자 유해 71년만에 가족 품으로

    강원 인제군 한석산 가리봉 전투 전사자 유해 71년만에 가족 품으로

    세 살배기 아들을 남겨 두고 입대한 지 한 달 만에 강원 인제군에서 전사했던 강농원 일병의 유해가 71년 만에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국유단)은 2020년 6월 인제군 덕적리에서 발굴한 유해의 신원을 육군 3사단 23연대 소속 강농원 일병으로 확인했다고 6일 밝혔다. 국유단은 오른쪽 허벅지뼈 일부를 처음 식별한 데 이어 10m 떨어진 곳에서 척추뼈 등 유해 6점을 추가로 찾았고 유전자 분석을 통해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인은 인천시 옹진군에서 태어났으며 1951년 3월 입대했다. 그해 4월 21일부터 5월 15일까지 인제군에서 벌어진 ‘한석산·가리봉 전투’에서 전사했다. 당시 국군 3사단은 인제~원통 도로와 주변 저지대를 통제할 수 있는 한석산을 점령해 동부전선을 견고히 하는 데 성공했다. 고인이 전사할 당시 세 살이었던 아들 강한표씨는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그리워하다가 10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그 모습을 생각하니 목이 멘다”며 “내 생이 다하기 전에 아버지를 찾아서 다행”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국유단에 따르면 2000년 유해발굴사업이 시작된 이래 강 일병을 포함해 신원이 확인된 202명의 호국 영웅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국유단은 6·25 전사자 신원 확인을 위해 유전자 시료 채취에 참여해 달라고 당부했다.
  • 전쟁의 상처도 치유되듯…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2주기 추모전

    전쟁의 상처도 치유되듯…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2주기 추모전

    “아버지의 침묵이 불편했습니다.” 물방울 그림으로 세계적인 거장이 된 故김창열 화백의 아들 김오안 감독이 예술가 아들의 시선으로 써내려간 시네마 에세이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브리지트 부이오 공동 감독)에서 독백하고 있다. 그러나 마치 속죄하는 마음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모든 걸 말해주는 듯한 침묵’을 이해하고 마침내 아버지의 삶을 자신의 시선으로 풀어내고 있다. 제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제61회 크라쿠프영화제 국제다큐멘터리 경쟁부문 실버혼상을 수상한 이 영화는 지난 9월 28일 전국 50여개 상영관에서 개봉됐다. 김 감독은 아버지를 떠나 보내고 6개월이 지난 즈음 이 영화를 완성했다. 고인의 둘째 아들 김 감독은 사진작가 출신답게 스틸 사진처럼 잔잔하고 조용하고 깊이있는 시적인 영상을 탄생시켰다. 김 화백의 2주기에 즈음해 영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를 모티브로 한 추모전 ‘시선’은 6일부터 내년 2월 26일까지 김창열미술관 1전시실에서 열린다. 총 11점이 전시되는 작품들에서 작가의 초기 물방울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난 김창열 화백은 검정고시로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으나 6·25 전쟁이 벌어지면서 학업을 중단했다. 전쟁은 여동생을 앗아갔고 친구들마저 그 전쟁으로 잃었다.그래서 물방울은 전쟁의 고통과도 연결된다. 전쟁의 외상을 평생 지니고 산 그는 “상흔 자국 하나하나가 물방울이 됐다”고 고백했다. 어쩌면 김 화백에게 있어 물방울은 치유다. 프랑스 파리 근교의 낡은 마구간에 머물며 작업을 하던 어느 날 아침 세수하려고 대야에 물을 담다가 캔버스 뒷면에 튕겨진 물방울이 햇빛에 비쳐서 그림이 된 것처럼. 운명처럼 50년간 마치 수행하듯 물방울을 그리며 한 길을 걸었다.  고인은 제주와는 한국전쟁때 1년 6개월 정도 머물렀던 인연이 돼 제2의 고향이 됐다. 그리고 2016년 제주도 한경면 저지리에 김창열미술관을 개관했다. 유복한 의사 집안의 딸로 동양인 화가의 아내가 된 마르틴 질롱 여사의 시선, 불문학자인 큰아들 김시몽(고려대) 교수가 아버지를 바라본 시선까지 더해 기존의 물방울에 더욱 풍성한 해석을 입혔다. 김창열미술관 최형순 관장은 “이번 전시는 김창열 화백의 2주기에 즈음해 가족의 시선으로 바라본 물방울의 세계는 물론 한국전쟁의 상처, 그 역사까지 녹아 있다”고 말했다.
  • 김정은, 이달말 전원회의 소집… 새 대남·대미전략 촉각

    김정은, 이달말 전원회의 소집… 새 대남·대미전략 촉각

    북한이 내년 국정 운영 방향을 결정하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이달 하순 열 예정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전원회의 연설을 통해 새로운 대남·대미 전략 노선을 밝힐지 관심이 모인다.  노동신문은 1일 김 위원장 주재로 당 중앙위원회 8기 11차 정치국회의가 전날 당 중앙위 본부청사에서 열렸고 12월 하순 당 중앙위원회 8기 6차 전원회의를 소집하기로 결정됐다고 보도했다. 김 위원장은 회의에서 올해에 대해 “사상 초유의 역경”이라면서도 “나라의 국위와 국광이 새로운 경지로 상승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내년에 대해 “공화국 창건 75돌과 조국해방전쟁(6·25전쟁) 승리 70돌이 되는 역사적인 해인 동시에 5개년 계획 완수의 결정적 담보를 구축해야 하는 중요한 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북한은 통상 최고 지도자의 신년사를 통해 새해 대내외 정책 방향을 제시해 왔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2020년 이후 당 전원회의와 당 대회 연설로 신년사를 대신해 왔다. 북한이 이번 전원회의에서 대남·대미 정책, 국방력 강화 방안 등에 어떤 메시지를 낼지 주목된다. 김 위원장이 회의를 소집하며 북한 정권 수립 75주년과 정전 70주년을 언급한 것을 감안하면 내부 결속을 위해서라도 대결구도를 부각하려 할 수 있다. 올해 1월 1일 공개된 지난해 말 전원회의 연설에서는 대남·대미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당 전원회의에서는 중국, 러시아의 움직임을 포함한 국제 정세에 대한 평가와 함께 대남·대미 관련 입장 표명, 군사력 강화 방안 등이 주요 안건으로 다뤄질 전망”이라며 “올해 내내 남측과 미국을 향해 초강경 대응을 강조해 온 김 위원장이 더 강화된 입장을 내거나 핵무기 고도화에 대한 진일보한 입장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김 위원장은 지난달 28~29일 남한을 겨냥한 시위성 비행에 투입된 공군 비행사들에 대해 승진인사를 단행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했다고 노동신문이 보도했다. 북한이 지난달 4일 한미 연합공중훈련 ‘비질런트 스톰‘에 대응해 벌인 시위성 비행 작전에는 5개 사단 20여개 연대에서 705명의 비행사가 투입됐다. 김광혁 항공 및 반항공군사령관에게는 ‘공화국 영웅’ 칭호가 부여됐다.  
  • 북한, 이달 하순 당 전원회의 소집…“사상 초유 역경에도 국위 상승”

    북한, 이달 하순 당 전원회의 소집…“사상 초유 역경에도 국위 상승”

    북한이 내년 국정 운영 방향을 결정하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이달 하순 열 예정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전원회의 연설을 통해 새로운 대남·대미 전략 노선을 밝힐지 관심이 모인다. 노동신문은 1일 김 위원장 주재로 당 중앙위원회 8기 11차 정치국회의가 전날 당 중앙위 본부청사에서 열렸고 12월 하순 당 중앙위원회 8기 6차 전원회의를 소집하기로 결정됐다고 보도했다. 김 위원장은 회의에서 올해에 대해 “사상 초유의 역경”이라면서도 “나라의 국위와 국광이 새로운 경지로 상승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내년에 대해 “공화국 창건 75돌과 조국해방전쟁(6·25전쟁) 승리 70돌이 되는 역사적인 해인 동시에 5개년 계획 완수의 결정적 담보를 구축해야 하는 중요한 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북한은 통상 최고 지도자의 신년사를 통해 새해 대내외 정책 방향을 제시해왔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2020년 이후 당 전원회의와 당 대회 연설로 신년사를 대신해왔다. 북한이 이번 전원회의에서 대남·대미 정책, 국방력 강화 방안 등에 어떤 메시지를 낼지 주목된다. 김 위원장이 회의를 소집하며 북한 정권 수립 75주년과 정전 70주년을 언급한 것을 감안하면 내부 결속을 위해서라도 대결구도를 부각하려 할 수 있다. 올해 1월 1일 공개된 지난해 말 전원회의 연설에서는 대남·대미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당 전원회의에서는 중국, 러시아의 움직임을 포함한 국제 정세에 대한 평가와 함께 대남 대미 관련 입장 표명, 군사력 강화 방안 등이 주요 안건으로 다뤄질 전망”이라며 “올해 내내 남측과 미국을 향해 초강경 대응을 강조해온 김 위원장이 더 강화된 입장을 내거나 핵무기 고도화에 대한 진일보한 입장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김 위원장은 지난달 28~29일 남한을 겨냥한 시위성 비행에 투입된 공군 비행사들에 대해 승진인사를 단행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했다고 노동신문이 보도했다. 북한이 지난달 4일 한미 연합공중훈련 ‘비질런트 스톰‘에 대응해 벌인 시위성 비행 작전에는 5개 사단 20여개 연대에서 705명의 비행사가 투입됐다. 김광혁 항공 및 반항공군사령관에게는 ‘공화국 영웅’ 칭호가 부여됐다.
  • [정재정의 독사만평] 망우역사문화공원과 근현대사 탐방/서울시립대학교 명예교수

    [정재정의 독사만평] 망우역사문화공원과 근현대사 탐방/서울시립대학교 명예교수

    요즘 나라 안팎이 혼란하면 국립현충원이나 망우역사문화공원을 찾는 버릇이 생겼다. 특별히 누구를 참배한다기보다는 파란만장한 근현대를 살다 간 분들과 교감하면서 대한민국 역사를 되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동작동 국립묘지’나 ‘망우리 공동묘지’로 불린 때는 들르기 어려웠으나, 지금은 새 이름에 걸맞게 묘역이 잘 정비돼 탐방하기 쉽다. 경관이 수려하고 분위기도 고즈넉해 산책과 사색까지 즐길 수 있다. 늦가을 햇살이 가물거리던 11월 초 망우역사문화공원을 돌아봤다. 흩날리는 낙엽을 맞으며 묘역을 거닐다가 글로만 접하던 분들의 묘소를 만나 묵념에 잠기니 몸과 마음이 안온해지는 느낌이었다. 필자는 1998년에 ‘서울 근현대 역사기행’이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망우묘역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가족이나 지인 단위로 역사문화 현장을 답사하는 바람이 불었다. 필자는 그 대상이 주로 전근대 유적유물에 편중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우리의 역사문화 의식이 근현대로까지 확장되기를 바라며 책을 펴냈다. ‘서울 근현대 역사기행’은 처음으로 묘역을 역사 기행의 장소로 크게 다루었다. ‘민족 민주 영령들의 성지’라는 큰 제목 아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유택 효창공원’, ‘국가 정통성의 뿌리 동작동 국립묘지’, ‘망우리 공원묘지’, ‘청담동 도산공원’, ‘수유리 4·19혁명 국립묘지’라는 장을 설정해 묘역의 내력과 안장된 주요 인사를 소개했다. 서울의 묘역을 근현대사 탐방의 주제로 삼은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망우산은 높이가 282m에 불과하지만 1933년부터 1973년까지 서울의 가장 큰 공동묘역이었다. 최성기에는 약 4만 7700기가 들어섰는데 필자가 책을 쓸 때는 2만 8000기로 줄었다. 그런데 이번에 가 보니 7000기가량만 남아 있었다. 일제는 4대문 밖 이태원, 신사리(응암동), 미아리, 수철리(금호동)에 공동묘지를 조성했는데 이곳들이 포화 상태에 이르자 1933년 망우리 일대 52만평에 묘역을 조성하고 기왕의 공동묘지를 이곳으로 이장했다. 해방 후에도 망우묘역은 선산 없는 서울시민의 유택이 됐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묘지는 더욱 늘어 추석에는 전국 각처에서 몰려온 성묘객으로 교통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서울시는 1973년을 끝으로 ‘망우리 공동묘지’를 폐장하고 기존 묘지도 이장을 권고했다. 그리고 1977년 묘역의 이름을 ‘망우묘지공원’으로 바꿨다. 1997년에는 독립운동가와 문화예술인 15인 묘지 근처에 ‘어록’과 ‘추모비’를 세웠다. 나아가 이듬해 아예 ‘묘지’를 떼고 이름을 ‘망우리공원’으로 바꿨다. 문화재청은 2012년에 한용운, 2017년에 오세창·문일평·방정환·유상규·오기만·서광조·서동일·오재영 등 독립유공자 묘지를 국가지정등록문화재로 선정했다. 이로써 망우묘역이 휴식과 현창의 공간으로 바뀐 셈이다. 망우묘역은 지난해부터 중랑구가 관리하고 있다. 중랑구는 묘역을 대대적으로 정비해 탐방과 산책의 장소로 개편했다. 올해 4월 1일에는 묘역 입구에 ‘중랑망우공간’이라는 우아하고 쾌적한 건물을 신축·개관해 전시·교육·홍보 시설로 활용 중이다. 묘역 이름도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교체했다. 광장 벽에는 안장된 역사 인물 50여명의 사진과 약력을 부착했다. 계용묵·박인환·지석영·장덕수·조봉암·이중섭·이영민·차중락 등 저명한 문화인·정치인도 들어 있다. 망우역사문화공원은 역사와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평안한 공간이다. 그리고 서울시와 구리시 및 한강의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명소다. 다사다난한 올해를 마감하는 요즘 망우역사문화공원에 가서 각자가 기리고 싶은 역사 인물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잠시나마 근심을 잊었으면 좋겠다.
  • “너흰 병기로 싸우나 우리는 義로 싸운다” 곡창 연백평야 중심 연안성 혈전 사수[서동철의 임진왜란 열전]

    “너흰 병기로 싸우나 우리는 義로 싸운다” 곡창 연백평야 중심 연안성 혈전 사수[서동철의 임진왜란 열전]

    1592년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5월 3일 한성을 점령했지만, 선조가 북쪽으로 몽진하면서 전선은 크게 확장됐다. 평안도까지 북상한 왜군은 뜻하지 않게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군량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도성 이북의 가장 큰 곡창인 연백평야를 차지하는 것이 왜군에게는 절실한 과제였다. 하지만 황해도 초토사 이정암이 이끈 의병이 연백평야의 중심인 연안성을 사수하면서 왜군의 조선 침략 구상은 크게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황해도 연안은 최근 강화도를 잇는 연륙교가 세워진 교동도에서 지척이다. 6·25전쟁으로 연안읍에서 피란 나온 주민들이 세웠다는 교동도 망향대에서 바다 건너 연백평야는 불과 3㎞ 거리다. 망향대에서는 멀리 연안읍의 진산인 비봉산이 눈에 들어온다. 인터넷 위성사진의 연안시가지는 이제 잿빛 건물만 빽빽할 뿐 고지도에 나타난 연안읍성은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몸집 가냘픈 전형적인 문관 연안성 방어전을 이끈 사류재(四留齋) 이정암(李廷·1541~1600)은 1561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전형적인 문관이다. 1587년 동래부사에 임명되자 스스로 서생(書生)이어서 활쏘기와 말달리기를 익히지 않았다며 부임을 사양하기도 했다. 왜적이 침입하면 최전선이 될 수밖에 없는 동래에 자신처럼 문약(文弱)한 부사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을 5년이나 남겨 둔 시점이었지만, 그만큼 왜침의 분위기가 이미 고조돼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일화다. 이정암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1593년 1월 30일자 선조실록에 담긴 사관(史官)의 평가에 잘 드러나 있다. 이정암은 키와 몸집이 작고 가냘퍼 옷의 무게도 이기지 못할 듯하지만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고 과감하며 정교하고 민첩하여 일을 처리함에 있어 누구의 말에도 동요되지 않았고 시세에 따라 오고가지 않았기에 언제나 시류에 영합하는 이들에게는 배척받았다는 것이다. 이정암과 연안의 인연은 1572년 그가 연안부사에 임명되면서 시작됐다. 그는 4년의 재임 기간 동안 선정을 펼쳤지만 송사 처리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자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럼에도 이정암이 연안부사로 재임한 기간에 쌓은 신뢰는 훗날 왜적이 온 나라를 휩쓸자 황해도 의병을 이끌어 줄 리더로 지역민들이 그를 떠올리는 계기가 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왜란 초기 이정암의 행적은 임금에 대한 충성을 먼저 내세우는 당대의 일반적인 우국충정(憂國衷情)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윤색되지 않은 이정암의 전쟁 대응 과정은 ‘서정일록’(西征日錄)이라는 그의 전쟁일기가 남아 있어 자세히 알 수 있다. ‘서정일록’은 광해군이 세자에 책봉된 1592년 4월 28일부터 같은 해 10월 7일까지 156일 동안 쓰여졌다. 이정암은 정3품 당상관인 이조 참의였다. 4월 29일자에는 도순변사 신립이 충주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나라 전체가 다급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적었다. 이튿날에 새벽에는 선조가 세자인 광해군과 돈의문을 나와 평양을 향해 떠났고 백관 대다수는 호종하지 못했다고 썼다. 하지만 실제로는 호종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늙은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이 걱정돼 호종하지 않은 것이었다. 5월 1일 이정암은 가족을 이끌고 개성 풍덕으로 향한다. 이정암은 5월 2일 승지 신잡과 마주쳤다. 신잡은 선조의 명을 받아 도성의 형세를 살피러 가는 길이었다. 이정암은 신잡으로부터 동생 이정형이 개성유수에 제수된 사실을 알게 됐다. 5월 3일 그는 임금이 머물고 있는 개성 행재소에 도착했다. 이때 개성유수 이정형은 선조에게 형 이정암이 이미 벼슬이 떨어졌으니 자신과 함께 임진강 방어를 할 수 있도록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하지만 이정암은 이후에도 한동안 가족의 안전을 도모하는 데 모든 노력을 쏟았다. 5월 19일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이정암은 배를 구해 바닷길로 피란할 방책을 마련하고자 했다. 6월 들어 이정암의 가족은 바다가 가까운 연안부로 옮겼다. 7월 21일 생원 박춘영이 찾아와 의병을 일으키려는데 주장이 돼 달라고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이정암은 노모를 모시고 피란 갈 계책을 세웠다면서 거절했다. 그럼에도 주변 지역 의병의 요청은 이어졌고 결국 이정암은 가족을 배에 태워 강화도로 보낸 뒤 7월 26일 의병 창의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광해군이 초토사에 제수 해서지역 의병의 조직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분조(分朝)를 이끌고 있던 광해군은 이정암을 황해도 초토사에 제수한다. 이정암은 8월 4일자 ‘서정일록’에 ‘나의 본뜻은 단지 연안·배천 등의 의사들과 의병을 모아 난리를 틈타 날뛰는 도적떼나 막자는 것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중임을 받고 보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복잡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선조수정실록은 연안성 주변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적병은 해서의 주군(州郡)을 나누어 점거하고 있었는데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가 주민들을 유인하니 반민(叛民)이 다투어 붙좇았다. 감사와 수령은 모두 바닷가나 산속으로 숨어버리고 연안 부사도 도망했다. 정암은 전에 연안 부사로 있으면서 인애하는 덕을 폈으므로 이때 아전과 주민이 듣고 와서 모였다.’ 왜군은 전투에 앞서 이정암에게 사신을 보내 ‘작은 성으로 대군(大軍)을 이길 수 없으니 항복하라’고 했다. 그러자 이정암은 ‘너희는 병기로 싸우나 우리는 의(義)로 싸운다’는 글을 써서 사신에게 주었다. 당시 연안성에 들어간 의병은 1000명 미만, 왜군은 3000~4000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안성방어전의 전말은 백사 이항복이 지은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 비문에 자세히 담겼다. 1608년 세워진 연성대첩비는 북한의 보존급(준국보급) 문화재다. 전투는 의병의 기세를 꺾으려는 왜적의 심리전으로 시작됐다. ‘28일 해가 기울었을 때, 왜적이 세 겹으로 성을 포위했다. 이윽고 한 적수(賊帥)가 성 밖을 두루 살피고 성루에 접근해 지나가는데 그 모습이 매우 화려했다. 이때 문장(門將) 장응기가 화살 한 발을 쏘아 그의 가슴을 관통시켜 죽이자, 적의 사기가 몹시 떨어져 감히 함부로 나오지 못했다.’ 그러자 이정암은 좌우를 둘러보며 ‘이것은 적이 패할 징조’라고 말했다고 선조수정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9월 1일 왜적이 성벽을 기어 개미처럼 떼를 지어 오르는 것을 본 이정암이 쌓아 둔 짚더미에 앉아서 아들 이준에게 “성이 함락되거든 분신 자결해야 한다”고 하자 사람들이 감읍해 모두 힘을 합쳐 함께 싸웠다. 이렇게 4일 동안을 싸우다 보니 왜적 또한 사상자가 절반을 넘었다. 이에 사기가 크게 떨어진 왜적은 이튿날 아침 시신을 모두 불태운 뒤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청주성을 탈환하고 금산성 전투에서 순절한 옥천 의병장 조헌과 육전 최초의 승리인 양주 해유령 전투를 이끌었음에도 도망자로 지목돼 참수된 신각의 일화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1591년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옥천으로 돌아간 조헌은 당시 평안감사 권징과 연안부사 신각에게 글을 보내어 참호를 깊이 파고 성을 수리해 전쟁 준비를 미리 하도록 했다. 권징은 그 글을 보고 ‘황해도·평안도에 왜적이 올 리가 있겠는가’ 하고 웃어넘겼다고 한다. 반면 신각은 무기를 정비하고 성안으로 봇물을 끌어들여 큰 못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연안성방어전 과정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조선의 안시성 싸움’ 연안성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이정암의 모습은 더욱 인상적이다. 이정암의 장계에는 “단지 어느 날 성이 포위당하고 어느 날 풀고 떠났다고만 했을 뿐 다른 말이 없었다”고 한다. 광해군은 연성대첩을 두고 “고구려의 안시성주(安市城主) 외에는 일찍이 듣지 못했던 일”이라고 했다. 연안성전투를 ‘조선의 안시성 싸움’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다. 비변사는 이순신의 한산대첩 예에 따라 이정암에게 상을 내릴 것을 선조에게 주청하기도 했다. 이정암의 장계에 조정에서는 “전쟁에 이기는 것도 쉽지 않지만 공을 자랑하지 않는 것은 더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이정암은 선무공신 2등으로 월천부원군에 추봉됐고 좌의정에 추증됐다. 무덤은 황해도 개풍군에 있다고 한다. 남쪽에는 고양시 사리현동 벽제초등학교 앞에 ‘사류재사우’가 남아 있다. 글·사진 문화재위원회 위원
  • 백마고지에서 인식표와 함께 발굴한 전사자 유해 유족 품으로

    백마고지에서 인식표와 함께 발굴한 전사자 유해 유족 품으로

    6·25전쟁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것으로 평가받는 백마고지 전투에서 전사한 참전용사의 유해가 인식표와 함께 발굴돼 유족 품으로 돌아갔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국유단)은 지난 7월 강원 철원군 백마고지에서 발굴한 유해의 신원을 김용일 이등중사로 확인했다고 30일 밝혔다. 신원확인 통보 행사인 ‘호국의 영웅 귀환 행사’는 이날 경기 부천시 유가족 자택에서 열렸다. 고인은 충북 괴산군에서 6남 6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슬하에 1남 1녀를 뒀다가 막내딸 출생 한 달 만인 1952년 3월 육군에 입대했다. 친손자 김정덕씨는 “아버지가 세 살 때 할아버지가 입대하셔서 아버지도 기억에는 없으셨지만, 할아버지를 매우 보고 싶어 하셨다”며 “손자인 제가 장손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말했다. 김 이등중사 유해는 참호에서 웅크린 자세로 가슴 부위에 팔을 모은 모습의 완전한 형태로 발견됐다. 머리뼈 위에는 철모, 발뼈에는 전투화 밑창, 정강이뼈에는 고무링이 남아 있었고 고인의 이름이 선명히 새겨진 인식표도 찾을 수 있었다. 친손자의 유전자와 비교해 가족관계도 확인했다. 고인의 유해는 지난 21일 신원 확인 소식이 전해졌던 고 편귀만 하사와 같은 참호에서 70년 동안 함께 있다가 발굴되면서 연속으로 신원을 파악할 수 있었다. 김 이등중사와 편 하사는 국군 9사단 30연대 소속으로 1952년 10월 6∼15일 벌어졌던 백마고지 전투에 참전했다. 국유단은 유해 신원 확인에 국민 참여가 필요하다며 전화(1577-5625) 및 인근 보건소·보훈병원·군병원 등으로 연락해 줄 것을 당부했다.
  • 12월 독립운동가에 정미의병, 12월의 6·25 전쟁영웅에 영국 해병 대령

    12월 독립운동가에 정미의병, 12월의 6·25 전쟁영웅에 영국 해병 대령

    국가보훈처는 1907년 정미의병에서 항일 의병운동에 나섰던 김상태·신태식·김동신 선생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0일 밝혔다. 충북 단양에서 태어난 김상태(1862~1911) 선생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선포에 항거해 경북 문경에서 이강년 의진(의병진영) 중군장으로 의병에 참여했다. 1911년 6월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아 9월 순국했다. 경북 문경 출생인 신태식(1864~1932) 선생은 1908년 12월 일본군과 교전 중 왼쪽다리에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 붙잡혔다. 이듬해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상고해 10년으로 감형돼 1918년 출소했다. 출소 이후 1920년 9월 독립운동의 재정 후원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인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의 경상북도 단장을 맡아 군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벌였다. 충남 회덕에서 태어난 김동신(1871~1933) 선생은 1907년 8월 의병 80여명을 이끌고 의병 활동을 시작했다. 1908년 2월 고향으로 돌아와 신병 치료를 받던 중 일제에 체포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내란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보훈처는 이와 함께 6·25전쟁 격전지였던 장진호 전투에서 미국 제1해병사단의 퇴로를 확보하고 중공군의 남하를 지연해 흥남 철수작전 성공에 기여한 영국 해병대 더글러스 드라이스데일 대령(1916~1990)을 ‘12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영국 제41해병 독립특공대 특공대장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드라이스데일 대령은 장진호 전투에서 맹활약했다. 이러한 공로로 1951년 영국 무공훈장을, 1955년 미국 은성무공훈장을 각각 받았다. 정부는 지난해 6월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 대공세자, 한국인 참전 용사와 ‘특별한 만남’

    대공세자, 한국인 참전 용사와 ‘특별한 만남’

    룩셈부르크 대공세자가 6·25전쟁 당시 룩셈부르크군 소속으로 참전했던 한국인 참전용사를 만났다. 29일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기욤 장 조제프 마리 룩셈부르크 대공세자는 김성수옹과 함께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룩셈부르크 참전비에 참배했다. 김옹은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룩셈부르크군 소속으로 배속돼 참전했다. 기욤 대공세자는 김옹에게 감사 메시지와 함께 왕실을 상징하는 특별 선물을 증정했다. 룩셈부르크는 파병 당시 인구가 20만명에 불과했지만 전투병력 100명을 한국에 보냈다. 1950년 10월 1일 지원병 48명으로 1개 소대를 편성해 벨기에군 대대 A중대에 편입시켜 참전했다. 벨기에·룩셈부르크군 대대는 1950년 12월 18일 벨기에 앙베르를 출발해 1951년 1월 31일 부산에 상륙했다. 룩셈부르크 소대는 1951년 1월 31일~8월 25일 활동한 제1차 분견대와 1952년 3월 28일~1953년 1월 7일 활동한 제2차 분견대로 구분돼 연인원 100명을 파병했다. 2명이 전사하고 13명이 다치는 희생이 있었고, 현재 6명이 생존해 있다. 1975년 시작한 우리 정부의 6·25전쟁 유엔참전용사 재방한 프로그램에는 지금까지 참전 22개국에서 3만 3751명이 초청됐고, 이 가운데 룩셈부르크에선 참전용사 및 유족 150명이 방한했다. 박민식 보훈처장은 “6·25전쟁은 룩셈부르크가 해외 전쟁에 파병한 유일한 군사 개입 사례였고, 룩셈부르크는 유엔군 가운데 인구 대비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한 국가였다”면서 “룩셈부르크 참전용사들의 공헌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 룩셈부르크 대공세자 6·25전쟁 룩셈군 배속 한국인 참전용사와 특별한 만남

    룩셈부르크 대공세자 6·25전쟁 룩셈군 배속 한국인 참전용사와 특별한 만남

    룩셈부르크 대공세자가 6·25전쟁 당시 룩셈부르크군 소속으로 참전했던 한국인 참전용사를 만났다. 29일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기욤 장 조제프 마리 룩셈부르크 대공세자는 김성수옹과 함께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룩셈부르크 참전비에 참배했다. 김옹은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룩셈부르크군 소속으로 배속돼 참전했다. 기욤 대공세자는 김옹에게 감사 메시지와 함께 왕실을 상징하는 특별 선물을 증정했다. 룩셈부르크는 파병 당시 인구가 20만명에 불과했지만 전투병력 100명을 한국에 보냈다. 1950년 10월 1일 지원병 48명으로 1개 소대를 편성해 벨기에군 대대 A중대에 편입시켜 참전했다. 벨기에·룩셈부르크군 대대는 1950년 12월 18일 벨기에 앙베르를 출발해 1951년 1월 31일 부산에 상륙했다. 룩셈부르크 소대는 1951년 1월 31일~8월 25일 활동한 제1차 분견대와 1952년 3월 28일~1953년 1월 7일 활동한 제2차 분견대로 구분돼 연인원 100명을 파병했다. 2명이 전사하고 13명이 다치는 희생이 있었고, 현재 6명이 생존해 있다. 1975년 시작한 우리 정부의 6·25전쟁 유엔참전용사 재방한 프로그램에는 지금까지 참전 22개국에서 3만 3751명이 초청됐고, 이 가운데 룩셈부르크에선 참전용사 및 유족 150명이 방한했다. 박민식 보훈처장은 “6·25전쟁은 룩셈부르크가 해외 전쟁에 파병한 유일한 군사 개입 사례였고, 룩셈부르크는 유엔군 가운데 인구 대비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한 국가였다”면서 “룩셈부르크 참전용사들의 공헌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 ‘예비교사’ 대학생들 6·25 참전국 교사들 만난다...보훈처 워크숍

    국가보훈처는 국내 6개 교육대와 서울대, 숙명여대 등 8개 대학교에 재학 중인 예비교사 대학생 19명이 참가하는 2022년 유엔참전국 교류 프로그램 ‘비전캠프’와 국제보훈공동연수 워크숍을 28일부터 5박 7일 일정으로 미국에서 진행한다고 28일 밝혔다.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대학생들은 뉴욕 한국전쟁기념비와 필라델피아 한국전 참전비에 참배하고, 릭 더큐너스 필라델피아 한국전쟁참전협회장 등 미국 참전용사도 만난다. 국제보훈공동연수 워크숍은 미국 미국사회역사교사연합회(NCSS) 연례총회와 연계해 진행된다. 예비교사들은 NCSS 연례총회 사전회의와 총회에 참석해 6·25전쟁 참전 역사를 미래세대에 계승하기 위한 교육·교재에 관해 현지 교사들과 토론한다. 총회 사전회의는 6·25전쟁에 참전한 전함 뉴저지호 함상에서 열린다. 박민식 보훈처장은 “6·25전쟁이 잊힌 전쟁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미래세대에 6·25전쟁의 역사를 가르치는 것”이라면서 “앞으로도 참전국 교사들과의 교류활동을 확대해 6·25전쟁으로 맺어진 유엔참전국과의 소중한 인연과 우정이 더욱 굳건해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 세계 최대 감리교회 일군 김선도 목사 소천

    세계 최대 감리교회 일군 김선도 목사 소천

    한국 감리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였던 김선도 광림교회 원로목사가 25일 소천했다. 92세. 평안북도 선천군 출신인 고인은 1971년 광림교회 5대 담임목사로 부임해 이 교회를 세계 최대 감리교회로 성장시켰다. 감리교신학대를 졸업한 뒤 미국 풀러신학대학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1대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세계감리교협의회 회장, 한국월드비전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30년 태어난 고인은 6·25 한국 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징병됐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를 위해 북한군에서 탈출했고, 지나가던 국군에게 발견돼 5분 만에 북한 군복에서 국군 군복으로 갈아입게 된다. 김 목사의 자서전의 제목이기도 한 ‘5분의 기적’은 이 사건에서 나왔다. 광림교회는 그가 담임목사로 부임할 당시만 해도 신도 150명명이 다니는 작은 교회였다. 그는 매일 전도, 매일 성경공부를 외치며 교회를 급성장시켰다. 현 위치에 1978년 교회를 새롭게 건축해 지금의 광림교회가 됐다. 김 감독의 장례는 25~28일 기독교대한감리회장으로 4일간 교회 내 빈소에서 진행된다. 입관 예배는 26일 오전 11시, 장례 예배는 28일 오전 9시 30분 광림교회 대예배실에서 진행된다. 하관 예배는 28일 오후 12시다. 장지는 광림수도원이다.
  • 소길댁도 와서 한번 걸어봐요… 일곱번째 4·3길 소길리 길 열리다

    소길댁도 와서 한번 걸어봐요… 일곱번째 4·3길 소길리 길 열리다

    제주4·3의 역사와 정신을 기리는 일곱 번째 4·3길이 제주시 애월읍 소길리에서 23일 개통됐다. 제주애월 소길마을 4·3길 개통식이 23일 오후 소길리 리사무소에서 애월읍 주민, 4·3유족, 도민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100여 가구 규모의 작은 마을이던 소길리는 1948년부터 6·25전쟁 이후까지 무장대와 토벌대에 의해 주민 70여명이 희생된 아픈 과거를 품고 있다. 총 8㎞ 구간으로 소길리사무소, 할망당 4·3성, 소길리 경찰파견소터, 멍덕동산 4·3성, 베나모를굴, 윤남비 경찰주둔소, 윤남비못, 원동 주막번데기, 원동 경찰주둔소, 원동지, 원동 군주둔지로 이어져 있다. 오영훈 지사는 “제주4·3의 정의로운 해결을 이루는 과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어 ‘건널 수 없는 강’이라고 여겼지만 4·3유족, 국민과 함께 그 강을 건널 수 있었다”며 “앞으로도 4·3희생자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 국가보상금 지급에 차질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오임종 제주4·3희생자 유족회장은 “과거 마을이 초토화된 아픔을 딛고 소길마을을 크게 키워주셔서 고맙다”면서 “일곱 번째 평화의 길이 대한민국 번영으로 가는 초석의 길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4·3길은 2015년 동광마을을 시작으로 2016년 의귀·북촌마을, 2017년 금악·가시마을, 2018년 오라마을 6개소가 조성돼 평화·인권의 교육현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올해 2월 공모를 통해 소길리와 아라동이 4·3길로 선정됐으며, 아라동은 오는 12월에 개통될 예정이다.
  • 6·25 백마고지전투 산화 용사 유해 70년 만 가족 품에...국유단 편귀만 하사 확인

    6·25 백마고지전투 산화 용사 유해 70년 만 가족 품에...국유단 편귀만 하사 확인

    6·25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백마고지 전투(1952년 10월 6∼15일)에서 전사한 고(故) 편귀만 하사 유해가 70년만에 유족들 품으로 돌아간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국유단)은 강원 철원군 백마고지에서 발굴한 국군 9사단 30연대 소속 고 편귀만 하사 유해를 가족에게 인계하는 ‘호국의 영웅 귀환 행사’를 22일 경기 오산시 보훈회관에서 연다고 21일 밝혔다. 백마고지 전투에서 9사단은 12차례 공방전 끝에 고지를 확보했던 전투였다. 유해는 지난 7월 작은 뼛조각을 발견하면서 처음 확인했고, 이후 철모와 M1 소총 등 유품 91점을 발굴했다. 특히 편 하사 이름을 새긴 만년필을 통해 유해 신원을 확정할 수 있었다. 고인은 전남 나주시에서 5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으며, 1948년 결혼해 슬하에 1남 1녀를 뒀다. 배우자 태중에서 막내딸이 자라고 있던 1952년 6월 입대해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은 뒤 9사단에 배치됐고, 끝내 딸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전사했다. 딸 편성숙씨는 “간절히 찾았는데 살아서 돌아오시는 기분”이라며 “자식으로서 할 도리를 다한 것 같아 마음이 벅차다”고 소회를 전했다. 국유단은 유해 신원 확인에 국민 참여가 필요하다며 전화(1577-5625)나 인근 보건소·보훈병원·군병원 등으로 연락해 달라고 당부했다. 유전자 시료 채취를 희망하나 거동 불편, 생계 등 이유로 방문이 어려우면 국유단이 직접 찾아갈 수도 있다. 6·25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은 2000년 4월 시작됐고 지금까지 전사자 200명의 신원을 확인했다. 백마고지에서는 3명의 유해 신원이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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