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6·25
    2026-03-14
    검색기록 지우기
  • 2026-03-14
    검색기록 지우기
  • 다리
    2026-03-14
    검색기록 지우기
  • 보상
    2026-03-14
    검색기록 지우기
  • 나라
    2026-03-14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9,232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여자 빨치산‘ 황순희 100세 거의 채우고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여자 빨치산‘ 황순희 100세 거의 채우고

    옛적 로마에서는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 행진을 할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메멘토 모리!”라고 외치게 했다.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인데,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 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아메리카 인디언 나바호족에게도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넌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라”는 가르침이 전해진다. 죽음이 곧 삶이다. 의미있는 삶을 마치고 죽음을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들의 자취를 좇는다.지난 17일 사망한 북한 ‘혁명 1세대’ 황순희의 장례식이 19일 평양에서 국장으로 진행됐다. 조선중앙통신은 2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며 조선혁명박물관 관장인 항일혁명투사 황순희 동지의 장의식이 19일 평양에서 국장으로 진행됐다”고 전했다. 장례식에는 최룡해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 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비롯해 당·정·군 고위간부 70명으로 구성된 국가장의위원회 위원들과 유가족이 참석했다. 지난 17일 평양시 보통강구역 서장회관에 마련된 빈소를 조문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고인의 시신을 실은 영구차가 대성산혁명열사능으로 이동했는데 평양 시민들은 “슬픔에 잠겨 발걸음을 멈추고 깊은 애도의 뜻을 표시했다”고 통신은 전했다. 최 제1부위원장은 영결식 애도사를 통해 “절세위인들의 사랑과 보살피심 속에 혁명가로서, 여성으로서 값높은 삶을 누려온 한생이였으며, 수령의 사상과 권위, 영도를 백방으로 옹호하고 충직하게 받들어온 견결한 전위투사의 한생이었다”고 돌아봤다. 이어 “그가 당과 혁명,조국과 인민 앞에 세운 공적은 길이 남아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인의 유해는 남편 류경수의 묘에 합장됐으며,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노동당 중앙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내각 등 명의로 화환이 바쳐졌다.지난 17일 오전 10시 20분 급성 폐렴으로 인한 호흡 부전으로 사망한 고인은 과거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모인 김정숙 등과 함께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여자 빨치산 혈통’의 대표 인물로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등졌다. 6·25 전쟁 당시 서울에 처음 입성한 류경수 전 105탱크사단장의 아내로, 두 사람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숙의 주선으로 부부의 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인맥과 빨치산 출신이란 상징성 때문에 김정은 위원장은 2017년 조선혁명박물관 시찰 때 휠체어에 탄 황순희를 끌어안는 등 예우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민국 8년(서기 1919년) 5월 3일 중화민국 길림성 연길현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 중국 동북지방에서 김일성유격대 간호원으로 빨치산 활동을 했으며, 1945년 11월 북한에 돌아왔다. 1956년 3월 조선민주여성동맹 양강도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1961년 9월 당 중앙위 후보위원에 선출됐다. 1965년 10월 조선혁명박물관 당 중앙위 위원장, 1969년 8월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 위원, 1969년 11월 당 중앙위 위원을 차례로 역임했다. 그 뒤 1971년 10월 ‘여맹’ 중앙위 비서, 1973년 6월 조선혁명박물관 당 중앙위 비서, 1977년 12월 ‘여맹’ 부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1980년 10월 당 중앙위 위원에 올랐다. 1988년 7월 조선혁명박물관 당 중앙위 비서를 거쳐 1990년 5월 조선혁명박물관 관장을 맡았고, 2010년 9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임됐다. 1962년 10월 최고인민회의 제3기 대의원에 선출돼 2003년 제11기까지 일곱 차례(3~5기, 7~11기)나 대의원을 지냈다. 1979년 5월 노력훈장과 1982년 4월 김일성훈장을 받았으며, 2005년 4월 러시아의 조국전쟁 승리 60돌 기념메달, 2010년 5월 러시아의 조국전쟁승리 61돌 기념메달을 받았다. 1994년 김일성 전 주석, 이듬해 오진우 전 인민무력부장, 2011년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 사망 당시 국가장의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사실상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에 매달리지 않고 자력갱생해 정면돌파하자고 2020년 정책 노선을 확실하게 정리한 북한 정권으로선 백두 혈통과 살가운 인연을 맺으며 만주에서 항일 빨치산 활동을 이어간 고인의 죽음이 선전 재료로 활용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조국에 충성하면 그 유족까지 살뜰히 챙긴다는 믿음을 주민들에게 심어주는 효과도 기대된다. 그러나 고인의 개인사는 애닯다. 남편은 1958년 군단장으로 일하다 부관의 총탄에 스러졌고, 세 아들 가운데 한 명은 총기 오발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둘은 교통사고로 온전한 생활을 하지 못했다. 외딸 류춘옥은 김정일 위원장의 누이 김경희와 단짝 친구로 나중에 알코올 중독으로 죽었다. 사위 김창선만 김정은 위원장의 비서로 지금도 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박완서 타계 9주기… 다시 읽는 ‘작가의 말’

    박완서 타계 9주기… 다시 읽는 ‘작가의 말’

    박완서(1931~2011) 작가의 타계 9주기를 추모하며 그가 생전에 쓴 ‘작가의 말’을 모은 책이 나왔다. 최근 출간된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작가정신)은 말 그대로 박완서의 모든 책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다. 소설, 산문 , 동화의 서문과 발문에 실린 ‘작가의 말’ 67편을 연대순으로 정리했다.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 작가의 소회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 그에 대한 고찰을 솔직한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그가 남긴 ‘작가의 말’에서 두드러지는 한 가지는 시대의 변화를 목격한 자로서의 책임감이다. 평소 입버릇처럼 “전쟁의 상처로 작가가 됐다”고 고백해온 작가는 전력을 다해 시대를 증언하고자 하는 냉철한 목격자였다. 동시에 온정적인 시선을 잃지 않았던 따듯한 서술자이기도 했다. “6·25의 기억만은 좀처럼 원거리로 물러나주지 않는다. 아직도 부스럼 딱지처럼 붙이고 산다”라고 얘기하면서도 “나의 부스럼 딱지가 개인적인 질병이 아닌, 한 시대의 상흔”(‘목마른 계절’(1978) 후기)이라며 시대의 아픔을 함께 경유하는 식이다. 소설집 ‘꽃을 찾아서’(1996)에서는 1985년에 계간 ‘창작과비평’이 폐간되면서 ‘창작사’란 출판사 이름으로 나왔다가 1996년에 다시 ‘창작과비평사’로 펴내게 된 사연을 적었다. 그는 “야만적인 시절”에 대한 곡절을 풀어내며 창작의 자유가 그토록 ‘대견’한 것인 줄 몰랐던 자신의 안이함을 반성한다. 그 밖에 새마을운동, 급격한 근대화와 자본주의의 이식, 전체주의, 자연 파괴에 이르기까지 여러 갈래로 뻗어가는 세상에의 관심이 그대로 담겨 있다.대문호에게도 예외없었던, 창작에의 고통을 다룬 구절도 눈에 띈다. “써지진 않는데 원고 독촉은 빗발칠 때는 아유, 지긋지긋해, 소리가 입에 붙어 있기도 했습니다. 언제나 이 노릇을 안 하나, 쓰는 노릇에서 놓여날 것을 상상만 해도 황홀한 해방감을 맛볼 수가 있었으니까요.”(‘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1989) 책 뒤에) 마감에의 압박은 그에게도 여지없이 몰아쳤다. 그러나 마흔 살 당시로는 늦은 나이에 데뷔, 세상을 뜨기 전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작가를 구원하는 것도 역시 문학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뜻하지 않게 닥쳐온 무서운 고통과 절망 속에서 겨우 발견한 출구도 쓰는 일이었으니까요.” 이어지는 작가의 고백이다. “작가로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만나야 하고, 자기가 지닌 것 중 가장 괴로운 것을 마주하며 살아야 하고, 자신을 극복하고 갱신해야 하는 일”이며, “그 길을 피하지 않고 온전히 지나가신 선생님의 모습을 돌아보게 됐다”는 최은영 작가의 말처럼, 문학으로 한 시절을 살다간 이의 생생한 육성이 오롯이 담겼다. 208쪽. 1만 4000원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춥고 눈 내리는 겨울… 추풍령 넘어가며 본 얼어 죽은 군인 잊지 못해”

    “춥고 눈 내리는 겨울… 추풍령 넘어가며 본 얼어 죽은 군인 잊지 못해”

    6·25 참전 인천학생 백재익 인터뷰 일시 1998년 11월 12일장소 인천학생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이규원 치과 3층대담 백재익(인천공업중학교 4학년생)이경종(인천학생6·25 참전관 설립자)이규원 치과원장 (이경종 큰아들) ----------------------------------------------------------------------------------------------- 6·25 남침으로 인천의 적화(赤化) 내가 6년제 공립인천공업중학교 4학년 때인 인 1950년에 6·25 사변이 일어났으며 당시 내가 살던 곳은 동구 화수동(花水洞) 174번지였다. 6·25 사변이 일어난 몇 일 후 인천으로 곧 인민군이 들어오게 되어 나와 우리 가족들은 인민군을 피해 수원에서 가까운 남양에 있는 친척집으로 피란을 가게 되었다. 9·15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 9월 15일 미군(美軍)해병대와 한국해병대가 인천에 상륙한 다음에서야 나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인민군 치하를 무사히 견딘 우리 친구들은 “우리가 어려운 위기와 고비를 넘기고 자유를 되찾았으니 우리들은 학생이지만, 나라를 위해서 뭔가를 하자!”해서 호국(護國)활동을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인민군 치하에서 많은 중고등학생들이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갔는데, 대부분 실종되어 다시는 고향 땅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나와 동네 친구 주철재는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에서 호국활동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압록강까지 진군한 UN군과 국군은 중공군(中共軍)의 참전으로 인하여 남쪽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계송 대장이 이끌었던 인천학도의용대(仁川學徒義勇隊) 전체가 남쪽으로 남하(南下)한다는 지시가 내려와 우리 북구지대도 남하할 준비를 하고 있게 되었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 남하 드디어 인천학도의용대 대원들이 인천을 철수하는 1950년 12월 18일이 닥쳐왔다. 이날 남하(南下)하기 위해 모인 장소는 인천축현국민학교였으며 동네 친구 주철재와 같이 오후 늦게 군악대를 따라 인천에서 출발하였다. 그날 행군 도중에 눈이 많이 내리는 바람에 길이 미끄러워서 많은 고생을 하였다. 밤이 깊어서야 도착한 곳이 안양(安養)이었다. 안양에서 하룻밤 자고, 이튿날 또 행군하여 도착한 곳이 수원(水原)이었다. 수원에서 2~3일간 기다리고 있다가 그때부터 각자 개인적으로 기차 화물칸 지붕 위에 올라타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그때는 기차표 같은 것은 없었다. 그렇게 내려가는 도중에 인천학도의용대에서 연락이 오기를 대구역전에 집결하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단체행동은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우리와 같이 내려가는 피란민들과 국민방위군들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0명 내외 친한 친구들과 동네 선후배들과 함께 걸어서 남하하였다. 그 당시 우리들이 탔던 기차는 증기 기관차였다. 그래서 석탄 그을림에 얼굴들은 까맸으며 추운 겨울철에 세수까지 못 하게 되니까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1950년 12월 24일 대구 도착 그렇게 고생하며 대구역까지 주철재와 함께 내려오게 되었다. 1950년 12월 24일 저녁 대구역에 내리니까 대구에 있는 국민방위군(防衛軍)에서 나와 우리들을 대구에 있는 어느 방직공장 창고로 안내하여 우리들은 그 창고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때 가마니 한 장씩을 지급받아 바닥에 깔고 가지고 간 담요를 덮고 그날 밤 잠을 잤다. 그때 주먹밥을 주어서 받아먹었는데 양이 너무나 적어 배를 채우지 못해 혼이 났었다. 그렇게 얼마를 지나서 다시 기차를 타고 경산을 지나 삼랑진까지 오게 되었다. 이때까지도 나는 동네 친구 주철재와 함께 행동했다. 1951년 1월 2일 마산에 도착 삼랑진역에서 내려 주위를 보니까 팻말이 있었다. 거기에는 ‘인천학도의용대는 마산(馬山)으로 집결하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삼랑진에서 하룻밤을 잔 후 마산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1951년 1월 2일 마산에 도착하였다. 그때 우리들은 마산에서 해병 6기 신병 모집에 지원했다. 그때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학생들만 뽑았는데 그때 나는 합격이 되었고 주철재는 처음에는 불합격되었으나 다시 뒤로 숨어 들어가 합격하였다. 이렇게 해병대에 입대했던 것은 그 당시 당장 갈 곳 없는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1951년 1월 24일 해병대 6기 정식 입대 내가 해병대 가입 기간 중 제일 잊지 못한 일은 ‘기념빳다’이다. 그 당시 우리가 훈련받던 진해경화국민학교 뒷산에는 소나무가 많았다. 그때 우리들을 맡아 훈련을 시키고 있던 조교들은 뒷산에 있는 소나무를 3m 길이로 잘라 가늘게 깎아 다듬은 빳다를 여러 개 만들어 놓고 우리에게 기합을 줄 때 사용 하였으며 그때 그 소나무 빳다로 우리들은 고생을 많이 했다. 그런 가운데 1951년 1월 24일 우리들의 해병대 6기 정식 입대일이 닥쳐왔다. 이날 해병대사령관 참석하에 우리들은 해병대 6기 입대식을 마쳤다. 나는 신병 훈련을 마치고 해병 1연대 3대대 11중대 2소대 전투소대로 배치되어 강원도로 가게 되었다. 주철재는 11중대 3소대에 배치되어 우리는 헤어졌다. 1952년 11월 1일 상이(傷痍) 명예 제대 그때 나는 강원도 양구 도솔산전투에서 큰 부상당했다. 그날 헬리콥터를 타고 진해 해군병원으로 후송되었고 그때부터 1년 넘게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이후 1952년 11월 1일 상이(傷痍) 명예제대(名譽除隊)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 나중에 동네 친구 주철재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철재는 다정다감한 친구였는데 어린 나이에 전사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슬프다. 가끔 1950년 12월 말, 추운 눈오는 겨울이 생각난다. 그 당시 철재와 같이 추풍령을 넘어가면서 본 얼어 죽은 국민방위군이 생각난다.6·25 전사 인천학생 주철재 1934년 중구 송월동에서 태어나서 송현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영화중학교(현재 대건중고교) 4학년때, 해병 6기로 자원입대했다. 이후 해병 1연대 3대대 11중대 3소대 전투병으로 참전하여 장단36고지전투에서 1952년 9월 20일 날 전사했다. 남기고 싶은 말 48년전 나라를 지키겠다고 인천을 떠나서 그 먼 마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많은 인천학생들이 해병 6기로 자원입대하였고, 전사자도 많았다. 기록이 없었던 우리들의 이야기를 이경종 이규원 2부자(父子)가 발굴·기록해줌에 큰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글 사진 제공 :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관백재익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 소속 1933년 10월 21일 인천 동구 화수동 출생 1950년 6월 25일 6년제 인천공업중학교 4학년 재학 중(18세) 1950년 12월 18일 인천을 출발 1951년 1월 2일 걸어가서 마산에 도착 1951년 1월 3일 해병 6기 신병모집 합격…해병대 6기 보병(군번:9210584) 1951년 11월 1일 강원도 도솔산 전투에서 부상당함 1952년 11월 1일 상이 명예 제대
  • “임진왜란 뒤 明에 더 예속된 조선… 6·25 뒤 전작권 없는 현실과 비슷”

    “임진왜란 뒤 明에 더 예속된 조선… 6·25 뒤 전작권 없는 현실과 비슷”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의 다툼이 아닌 동아시아의 거대 국가인 명나라 중심의 ‘국제전쟁’입니다. 정탁(1526~1605)은 전쟁에 대비하지 못하면 어떻게 거대 국가의 영향력에 종속되는지 후세에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현재 한반도 정세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을 총지휘했던 우의정 정탁의 ‘임진기록’ 완역을 총괄한 김경록(52)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은 13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임진기록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임진기록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장계와 영의정 유성룡의 보고서, 일본군 가토 기요마사가 명나라에 화해를 청하며 보낸 편지 등 조선과 명나라의 고문서가 수록됐으며 국가위기 극복을 위한 조선의 노력이 담겨 있다. 정탁은 임진왜란을 16세기 동아시아 역학관계 속에서 벌어진 명나라 중심의 전쟁으로 바라봤다. 특히 명나라가 전쟁에 소극적 태도로 임하며 일본과의 화친을 조선에 강요한 모습에 주목했다. 김 연구원은 “조선이 전쟁 피해국이면서도 명나라에 의해 객체로 밀려나 주도적 역할을 못할 수밖에 없었던 역학관계를 그린 것”이라며 “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선은 정탁의 우려대로 명나라에 더 예속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했다. 전쟁에 대비하지 못하면 외세에 종속될 수 있다는 교훈을 전하려 했다는 설명이다. 정탁의 주장은 감옥에 갇힌 이순신의 구원을 주장한 ‘이순신 옥사기’에 잘 나타난다. 김 연구원은 “단순히 이순신의 공이 커 구원을 주장한 게 아니다”라며 “정유재란 발발을 감지한 정탁은 명나라가 다시 조선에 개입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전쟁을 위해선 이순신이 필요하다는 ‘전쟁방어구상’을 펼친 것”이라고 말했다. 400여년 전 조선의 상황은 6·25 전쟁 이후 한국 정세와도 상당 부분 겹친다. 김 연구원은 “임진왜란처럼 6·25 당시 한국 주도의 군사작전을 하지 못했고, 그 결과 미국 영향력이 커지고 지금도 전시작전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스스로 국방력을 키워야 한다는 게 정탁이 주는 교훈이자 현시점에서 갖는 함의”라고 했다. 이어 “전쟁의 주체이자 당사국이면서도 조선은 강화협상에서 배제됐는데 6·25 전쟁 때 우리가 빠진 상태로 미군·유엔군과 북한·중공군이 휴전협상을 한 것과 닮은꼴이고, 두 전쟁 모두 우리 의사와 관계없이 흘러갔다”고 했다. 그러면서 “향후 한반도를 중심으로 군사적 긴장이 조성이 됐을 때 한국이 취해야 할 군사·국방정책, 군사외교의 방향성을 임진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도쿄올림픽 징크스?… 1964년에도 日과 뒤숭숭, 北과 어수선

    도쿄올림픽 징크스?… 1964년에도 日과 뒤숭숭, 北과 어수선

    일본의 부당한 경제보복에 따른 한일 관계 경색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2020년 도쿄올림픽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 첫 도쿄올림픽이 열렸던 1964년으로 돌아가 보면 당시에도 상황은 뒤숭숭했다. 일제강점을 벗어난 지 20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로, 국교 단절 상태여서 한일 관계라 부를 만한 것도 없었다.1963년 말 대선을 통해 군복을 벗고 사복을 입은 박정희 정부가 경제성장과 안보 문제 등을 이유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반일 감정이 치솟았다. 올림픽 개막을 넉 달 정도 앞두고 6·3 항쟁 등 반정부 시위가 절정에 달하자 정부는 50일가량 계엄령을 선포하기도 했다. 도쿄 대회는 정부 수립 이후 한국이 태극기를 앞세워 정식 출전한 다섯 번째 올림픽이다. 10월 10일부터 보름 동안 93개국 5000여명이 열전을 펼쳤다. 6·25전쟁의 상흔이 가시기 전이라 나라 살림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한국은 전체 18개 종목 중 16개 종목에 165명을 출전시켰다. 20년 뒤 로스앤젤레스 대회(175명)에 맞먹는 대규모 선수단을 보낸 것이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서 열리고, 또 체제 경쟁을 벌이던 북한과 사상 첫 올림픽 대결까지 예상됐기 때문이었다. 1965년 한일협정을 앞두고 도쿄 대회가 더욱 성대하게 치러지도록 지원하려는 박정희 정부의 의중이 작용했다는 평가도 있다. 한국은 레슬링 자유형 플라이급에서 장창선이 은메달, 유도 80㎏급에서 재일교포 김의태가 동메달, 복싱 밴텀급에서 정신조가 은메달을 따내며 종합 26위에 올랐다. 레슬링과 유도는 역대 첫 메달이었다. 일본과 가까운 부산 정도를 제외하고 국민들은 라디오 중계를 통해 메달 소식을 들어야 했다. 4년 전 로마 대회 노메달의 아쉬움을 털어 낸 것은 물론 양정모(레슬링)가 사상 첫 금메달을 따냈던 1976년 몬트리올 대회 이전까지 역대 최고 성적을 거뒀으나 당시 기대에 견주면 아쉬운 결과이기도 했다. 개선 퍼레이드도 서울이 아닌 대전에서 열렸다. 도쿄에서의 아쉬움은 태릉선수촌 건립(1966년 개촌)으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에도 지금 못지않게 남북 단일팀 논의가 뜨거웠다. 북한이 오히려 적극적이었다. 1960년 로마에 단일팀을 보내자고 1957년 6월 먼저 제안할 정도였다. 남쪽이 정부 수립 이전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가입한 상황이라 미가입 상태인 북한은 단일팀이 아니면 올림픽 무대를 밟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해 9월 북한의 가입이 조건부(올림픽 출전 남측 동의)로 잠정 승인되며 논의는 흐지부지됐다. 도쿄 대회를 앞두고 다시 단일팀 논의가 진행됐는데 국기와 국가 문제 등에 대한 이견이 커 진척이 없었다. 결국 1963년 10월 IOC는 북한의 공식 가입과 독자 출전을 승인했다. 그런데 북한은 앞서 사회주의 국가 중심으로 치러진 ‘반IOC’ 성격의 신흥국경기대회(가네포)에 출전한 선수들이 올림픽 출전 금지 제재를 받자 도쿄 대회 개막 하루 전 보이콧을 선언하고 선수단을 철수시켰다. 당시 가네포에서 비공인 세계기록을 세우며 북한 육상 영웅으로 떠오른 신금단과 남한 아버지의 상봉 문제가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단 7분으로 끝난 부녀 상봉은 두고두고 회자되며 안타까움을 샀다. 이후 북한은 IOC가 올림픽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이 아니라 북한(North Korea)이라는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하자 올림픽에 나서지 않았다. IOC는 1969년에야 DPRK를 승인했고, 북한은 1972년 뮌헨 대회를 통해 올림픽에 데뷔한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독립유공자 집안도 ‘병역명문가’ 포함

    올해부터 일제강점기 독립군 등 독립유공자 집안도 ‘병역명문가’ 선정 대상에 포함된다. 8일 병무청에 따르면 올해 봉오동·청산리전투 승전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로 등록된 모든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 가문을 새롭게 병역명문가 선정 대상에 포함하기로 했다. 병역명문가 제도는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3대 가족 모두가 현역 복무를 마친 가문 중에서 선정한다. 또 학도병 등 정규군이 아닌 신분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가문도 병역명문가로 인정한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윤석열 ‘손발’ 다 잘라버린 추미애… 靑수사 지휘부 사실상 해체

    윤석열 ‘손발’ 다 잘라버린 추미애… 靑수사 지휘부 사실상 해체

     8일 법무부가 검찰 고위 간부 인사를 단행하면서 검찰 내 ‘빅4’로 불리는 핵심 요직도 모두 새로운 인물로 채워졌다. 검찰 인사와 예산을 책임지는 법무부 검찰국장에 비(非)검사 출신을 임명할 것이란 관측이 제기되고 이 과정에서 청와대와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갈등설도 흘러나왔지만 결국 이번 인사에서는 청와대의 의중이 고스란히 반영됐다는 게 중론이다.  검찰 조직 내 2인자로 꼽히는 서울중앙지검장 자리에는 이성윤(58·사법연수원 23기) 법무부 검찰국장이 임명됐다. 이 신임 지검장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대통령 사정비서관실 특별감찰반장으로 파견돼 당시 문재인 민정수석과 호흡을 맞췄다. 문 대통령의 경희대 후배이기도 하다. 이 지검장은 1994년 서울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전주지검 부장과 광주지검 특수부장, 인천지검 마약·조직범죄수사부장, 서울서부지검 형사5부장,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2부장 등을 거쳐 금융위원회 조사기획관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2014년 광주지검 목포지청장에 근무할 때 세월호 참사 당시 검경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기도 했다. 지난해 법무부로 자리를 옮기기 전 대검찰청에서 반부패·강력부장을 지냈다. 검찰 내에서도 투철한 사명감과 집념을 보유한 인물로 손꼽힌다. 술은 거의 입에 대지 않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법무부 검찰국장 자리에는 조남관(55·24기) 서울동부지검장이 보임됐다.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의 감찰무마 의혹 사건 수사를 총괄한 조 지검장이 검찰국장에 임명된 것을 놓고 의외라는 평가도 나왔지만,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사정비서관실 행정관으로 일하면서 문 대통령과 인연을 맺는 등 현 정권과 가까운 인물로도 분류된다. 조 신임 국장은 전북 전주 출신으로 전주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1992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부산지검 검사로 임관했다. 이후 광주지검 마약·조직범죄수사부장, 서울동부지검 형사5부장, 부산지검 형사4부장, 서울서부지검 형사1부장, 광주지검 순천지청 차장검사 등을 거치며 수사 경험을 쌓았다. 아울러 법무부 인권조사과장, 인권구조과장도 역임했다.  2000년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1과장으로 활동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 조사 중 사망한 최종길 전 서울대 법대 교수 의문사 사건을 조사하기도 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검찰 내부망에 “비위를 제대로 감찰하지 못한 죄스러움이 있다”고 글을 올리기도 했다. 이 신임 지검장과 함께 전주고 동문이다.  또 다른 핵심 요직인 대검찰청 반부패·강력부장과 공공수사부장(옛 공안부장) 자리에는 심재철(51·27기) 서울남부지검 1차장과 배용원(52·27기) 수원지검 1차장이 각각 검사장으로 승진·임명됐다. 전국 특별수사를 지휘하게 될 심 신임 부장은 박상기 전 법무부 장관 시절 대변인을 지냈으며, 추미애 장관 인사청문회준비단에도 투입된 바 있다.  배 신임 부장은 전남 순천 출신으로 서울대 법대를 나와 1998년 창원지검 검사로 임관했다. 창원지검 거창지청장, 대검 DNA수사담당관·공안3과장, 법무부 법무심의관, 서울중앙지검 형사6부장, 대검 미래기획·형사정책단장, 수원지검 안양지청 차장검사를 역임했다.  윤 총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할 대검 신임 차장검사에는 구본선(52·23기) 의정부지검장이 임명됐다. 구 신임 차장검사는 검찰 내에서 대표적인 기획·특수통으로 꼽힌다. 2006년 론스타의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을 수사하는 대검 중수부에 파견돼 근무한 적이 있고, 2015년 문무일 전 검찰총장과 함께 ‘성완종 리스트’ 특별수사팀 수사 멤버로도 활동했다. 대검 대변인·형사부장을 지내면서 대검 업무에도 정통하다.  반면 ‘윤석열 사단’으로 불린 대검 참모진은 모두 일선 검찰청으로 물러났다. 사실상 좌천이나 다름없다는 평가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감찰무마 의혹 수사를 지휘해 온 한동훈(47·27기) 대검 반부패강력부장은 부산고검 차장검사로, 청와대의 하명수사·선거개입 의혹을 수사해 온 박찬호(54·26기) 대검 공공수사부장은 제주지검 검사장으로 전보됐다. 이 두 사람은 윤 총장이 중앙지검장이던 시절부터 함께 ‘적폐수사’를 해 왔다. 배성범(58·23기) 서울중앙지검장은 고검장 승진을 했지만 비수사부서인 법무연수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밖에 강남일(51·23기) 대검 차장검사는 대전고검 검사장으로, 조상준(50·26기) 대검 형사부장과 이원석(51·27기) 대검 기획조정부장도 서울고검 차장검사, 수원고검 차장으로 각각 자리를 옮겼다. 윤 총장과 가까운 사이로 꼽히는 윤대진(56·25기) 수원지검장은 사법연수원 부원장으로 간다. 사법시험이 2017년을 마지막으로 폐지됨에 따라 지난해 처음으로 단 1명이 50기 연수생으로 입소한 바 있다. 검찰 내부에서는 차기 총장설까지 거론된 인사를 ‘한직’으로 보낸 것은 사실상 “옷을 벗으라는 신호가 아니냐”는 반응까지 나왔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날것의 언어로 자유 외쳤던 시인 김수영… 그의 연인이자 아내인 것이 고마울 따름”

    “날것의 언어로 자유 외쳤던 시인 김수영… 그의 연인이자 아내인 것이 고마울 따름”

    한국 문단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뚫고 꿋꿋하고 공고하게 융성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때론 누구는 체제를 찬양하고 또 누구는 침묵했지만, 많은 문인들은 자신의 정신과 삶을 글로 말로 풀어내면서 시대를 이야기했다. 유성호 문학평론가이자 한양대 국문과 교수가 한국 문단의 큰길을 만든 인물을 조명하는 연재를 시작한다. 그들의 삶과 철학을 함께 들여다보며 문단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그리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시인 김수영(1921~1968)은 한국 현대문학사의 뜨거운 상징으로서, 아직도 탕진되지 않는 신화를 거느리고 있는 드문 사례에 속한다. 해방 후 그의 시는 다음 세대들에게 가장 광범위한 감염력을 가진 선행 모델이 돼 주었다. 누구보다도 치열한 정직성과 현실참여 의지로 시를 썼던 그는 그릇된 것들에 대한 철저한 부정 정신으로, 흔치 않은 비판적 지성으로, 자유와 혁명을 향한 역동적 언어로 기억되고 있는 위대한 시인이다. 그런 그에게 ‘가족’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거칠기 짝이 없는 우리 집안의/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 이것이 사랑이냐/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나의 가족’)라는 구절에서 보듯, 그것은 순하고 아득한 사랑의 물결에 감싸인 낡은 둥지 같은 것이었다. 지난해 말에 찾아뵀던 김현경 여사는 김수영에게 ‘가족’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가를 실감 있게 들려주었다. 이미 ‘김수영의 연인’(2013)에서 기억 속의 남편을 선명하게 재현한 바 있는 그녀는, 생전 남편이 남겼던 창작 일화나 소소한 삶의 맥락까지 아득하게 전해 주었다. 김현경은 진명여고 2학년이던 1942년 5월 김수영을 만났다. 여섯 살 위 김수영을 ‘아저씨’라고 부르면서 줄곧 따랐고, 1950년 초 서울 돈암동에 신접살림을 차렸지만 곧이어 터진 전쟁이 그들을 갈라놓았다. 휴전 후 김수영과 다시 결합하여 정착한 곳이 성북동이었다. 그로부터 시인이 타계하기까지 김현경은 시인의 가장 가까운 벗이자 독자로 함께 살았다. 지금도 남편과 자신이 수많은 대화를 통해 서로의 열정을 지켜 주었노라고 말하는 그녀는, 남편이 오래전 세상을 떠났지만 자신을 향한 그의 마음이 오늘의 자신을 붙잡아 주고 지켜 주고 있다고 고백한다. 시인의 시간을 그대로 품은 책과 유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살면서 아직도 자신이 ‘시인의 연인, 시인의 아내’인 것이 고마울 따름이라고 한다. 김현경 여사는 1927년생이다. 수업 시간에 김수영 초기작 ‘토끼’를 말할 때 그의 아내가 토끼띠라고 이야기한다고 하니, “토끼띠 맞습니다. 김수영 시인은 닭띠고요. 우리가 양계를 했잖아요. 양계장 안에 토끼도 길렀어요”라고 웃으면서 말을 건네신다. 김수영이 1921년생 닭띠이니 내년은 김수영 탄생 100주년이 된다. 전후를 풍미했던 조병화나 김종삼도 동갑내기들이다. “조병화 선생 부인은 진명여고 3년 선배예요. 부덕이 훌륭한 사람이었지요.” 그러고 보니 김현경 여사는 현대사의 쟁쟁한 인물들과 관계가 깊다. 작곡가 김순남이 친척 오빠였고, 젊은 시절 임화, 오장환, 박인환 등과도 교유가 깊었다. 이화여대 영문과 다닐 때 정지용 선생께 배우시지 않았느냐고 여쭙자 “그때 시경을 가르치셨어요. 판서를 내가 했어요. 시경에 실린 한시를 한자로 쓰는데 참 열심히 칠판에 가득 썼어요”라고 들려주신다. 정지용 선생 댁에는 안 가보셨냐고 하자 어제인 듯 선명한 기억을 풀어놓는다. “돈암동 얌전한 기와집에 사셨어요. 근데 이화 그만두시고 녹번리로 가셨어요. 녹번리 댁은 한 번 갔거든요. 겨울철인데 한 번 술이 취하셔 가지고 나 혼자 못 간다고 그러시면서 함께 녹번리까지 갔어요. 참으로 학식이 대단하셨고 라틴어나 영어도 대단하셨지요. 한문은 물론이고요.” 김현경 여사의 첫사랑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다. 그의 첫사랑인 시인 배인철은 그때 매우 이례적으로 ‘흑인시’(黑人詩)를 쓰던 사람이었다. “형님이 인천에서 손꼽는 유수한 실업가이면서 무역상이었어요. 서울과 인천을 걸어 오가기도 했는데 우리는 참 호흡이 잘 맞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다리도 안 아팠어요. 얘기를 거침없이 한 거지요. 그러던 어느 날 남산에서 그분이 머리에 총을 맞았어요. 첫사랑이었고 처음 연애다운 연애를 한 사람이에요.” 그렇게 배인철은 김현경 여사와 데이트 중 누군가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김현경 여사는 이화여대의 연애금지 학칙을 어겨 제적을 당한다. 그리고 김수영과 다시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김수영의 1950년대는 실존적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는 명동 문청들 사이의 히로인이었던 김현경과 결혼하여 짧은 시간 행복한 생활을 했지만, 6·25전쟁이 터지면서 결혼 4개월 만에 의용군에 강제 동원됐고, 거기서 야간탈출했다가 체포돼 거제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거제에서 아산 수용소로 이동한 그는 1952년 12월과 1953년 2월 사이로 추정되는 어느 시점에 아산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나온다. 그리고 바로 부산으로 간다. 그때 ‘자유세계’ 편집장이었던 소설가 박연희의 청탁으로 1953년 5월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를 쓴다. 시인 박태진의 주선으로 미8군 수송관 통역으로 취직하였지만 곧 그만두고 모교 선린상고 영어교사로 잠시 근무했다. 그해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 어느 날 그는 서울로 올라와 ‘주간 태평양’ 편집부에 근무하게 됐고, 그 후로 타계할 때까지 서울에서 쭉 살았다. 1952년 말부터 1954년까지의 김수영은 포로수용소에서 나와 통역으로 교사로 잡지사로 동선을 옮겨 갔고, 공간적으로는 포로수용소(거제·아산), 부산과 대구, 서울로 옮겨 갔다. “그때 시 한 편이 얼만가 하면 30원이에요. 근데 그분 시는 팔렸어요. 다른 사람들은 지면이 거의 없었지요. 한 달에 시 한 편 정도 쓰고 나머지 시간은 번역에 매달렸어요. 공터에다 닭을 길렀는데 잘되었어요. 1961년인가 쌀 파동이 일어나 쌀이고 뭐고 십 배로 뛰었어요. 덩달아 옥수수도 모이도 다 수입이어서 사료 값이 너무 오르고 알 값은 떨어지는 거예요. 거의 십 년 가까울 때 내가 딱 생각하고 그만뒀어요.” 김현경은 참으로 강인한 생활력을 가진 분이었다. 이렇게 김수영은 생애 내내 김현경이라는 삶의 동반자이자 매니저이자 동지와 함께했다. 생활의 구체는 물론 시의 초고를 가지런히 정서하는 일도 그녀의 몫이었다. 김수영은 자기 책이건 남의 책이건 읽으면서 낙서나 언더라인을 치고 책장을 접어 헌책으로 만드는 것으로 자신의 정력적인 독서력을 가진 이였다. 손때와 흔적이야말로 그의 책 읽기의 결실이었다. 김현경은 이러한 흔적을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남편 사후에 의상실 경영에 미술 컬렉터 및 디렉터로 줄곧 활동하면서 살았다. 나날의 난경과 고독도 시인의 연인이요 아내라는 자의식으로 넘어설 수 있었다. 두루 알다시피, 김수영은 사랑의 시인이다. 그는 ‘사랑’이라는 작품에서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이라고 노래했다. 사랑의 낭만적 분위기와는 반대편에서 사랑의 모순과 복합성을 날카로운 이미지로 포착한 작품이다. 그에게 사랑이란 불멸의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번개처럼 금이 간 사랑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출렁이게 하는 매혹이 아니던가. 김수영은 이러한 번개 같은 순간의 사랑을 여러 흔적으로 남겼다. 그는 자신의 시나 산문에서 여성들에 대한 여러 경험과 기억을 토로한 바 있다. 하지만 우리는 김수영의 유일한 여인은 아내 김현경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김수영은 언젠가 “시를 쓰는 나의 친구들 중에는 나의 시에 ‘여편네’만이 많이 나오고 진짜 여자가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는 친구”(‘미인’)도 있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바로 “나는 닭띠이고 나의 아내가 바로 토끼띠”(‘토끼’)인 김수영과 김현경 사이의 사랑과 이별, 재회와 사랑으로 이어지는 굴곡의 여정이 김수영만의 사랑의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그의 시편에 ‘여편네’가 많이 나오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김수영 작품에서 출몰하는 여러 여성들은 김현경에 비하면 김수영에게 잠깐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김현경은 시인이 글을 쓸 때 소리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자, 소음이 없는 서강 언덕을 거주지로 택하기도 했다. 시인의 삶과 정서와 기분까지 헤아렸던 그녀는 그 점에서 김수영의 가장 순하고 아득한 둥지였을 것이다. 그 ‘유일한 여인’ 김현경이 “50년이 못 돼서 가셨으니까 얼마나 안 됐어요?” 하면서 김수영으로 하여 자신이 행복했음은 물론 우리 문학사도 풍요로워졌다는 것을 지금도 기뻐하노라고 한다. 번개처럼 불안하기는 했지만,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었던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 [평화로 나아가는 사람들 4] 평화교육단체 피스모모 문아영 대표

    [평화로 나아가는 사람들 4] 평화교육단체 피스모모 문아영 대표

    <이 기사는 1월 6일자 서울신문 2면에 실린 것인데 이 시리즈의 취지와 부합해 취재기자의 양해를 얻어 게재합니다.> “6·25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이 되는 2020년엔 한국 사회에서 유독 납작했던 평화에 대한 담론을 풍성하게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요.” 평화교육이란 화두로 8년째 비영리단체 ‘피스모모’를 이끌어 온 문아영(37) 대표는 5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사회는 평화라면 곧장 통일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는데, 평화는 통일만이 아니라 전쟁 종결이나 적대하지 않는 문화, 구조적인 폭력의 개선 등 훨씬 다채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라며 이같이 제안했다. 피스모모는 우리가 원하는 평화란 무엇인지 이야기하는 것을 통해 한국 사회를 덜 폭력적인 사회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본다. ‘모두가 모두에게서 배운다’는 수평적 배움을 모토로 20~30명이 대화를 나누는 소규모 워크숍이 기본 방식이다. 서울 은평구의 피스모모 사무실에서 만난 문 대표는 “워크숍에선 분노로 달려가던 호흡이 상대방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호흡으로 바뀌는 모습을 자주 본다”며 눈을 반짝였다. 그는 “옳고 그름을 가리려고 이곳에 모인 것이 아니라 다른 점과 비슷한 점 그리고 합의를 통해 조정 가능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확인하는 자리라고 약속하고 토론을 시작하면 긴장 관계가 갈수록 풀린다”고 말했다.평화교육은 초등교사가 될 준비를 하던 문 대표가 입시 중심의 교육 현장에 실망하고 관심을 갖게 된 주제다. 교원대 졸업 후 코스타리카 유엔평화대학(UPEACE·University for Peace)에서 평화교육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문 대표는 2012년 피스모모를 만들었다. 유엔평화대학은 1948년 코스타리카가 군대를 해산하고 복지·교육에 예산을 쓰기로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학교다. 지난해 피스모모가 시작한 ‘탈분단 평화교육’은 휴전 상태인 한국 사회를 ‘낯설게’ 보는 시도에서 출발한다. “분단을 국가 차원의 문제로만 여기는 게 아니라 일상과 연계해 분단을 지속시켜 온 장치들을 낯설게 보는 것, 스스로 분단에 기여한 것은 없는지 성찰하는 것”이라고 문 대표는 설명했다. 문 대표는 “누군가는 분단 과정을 경험했지만 누군가는 태어나 보니 주어진 조건”이라며 “북한과 남한을 나눈 분단으로 우리 사회가 자연스레 적과 우리 편을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각자가 이에 기여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한국 교육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어 “남한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불순분자로 찍힐 수 있거나 언제든 전쟁이 터질 수 있다는 상시적인 공포감을 안고 있지 않느냐”며 “분단이란 나에게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보람 있다”고 말했다. 문 대표는 “통일을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적 접근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평화와 당신이 생각하는 평화를 놓고 충돌 지점을 조율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을 만든다면 구조화된 폭력도 바꿔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3명의 활동가에 10여명의 회원으로 시작한 피스모모는 점차 규모를 키워 지난해에만 활동가 10여명이 200여 차례 워크숍을 통해 전국에서 1만여명을 만났다. 주로 각급 학교 교사나 청소년, 학부모들이 참석한다. 이 밖에 군비통제·군축을 연구하는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연감을 한국어로 번역·요약하는 작업도 하고 있다. 불과 1년 전엔 남북 철도 연결 착공식이 열렸지만 이제는 북한이 ‘충격적 행동’을 예고하는 급반전된 정세에선 평화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문 대표는 “70년을 끌어 온 갈등이 단칼에 풀리기는 쉽지 않고 견뎌야 할 시간의 절대량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낙담하기보다는 인내하면서 한 걸음씩 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문 대표는 평화교육의 핵심에 대해 “체감할 수 있는 평화의 지평을 넓혀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많은 사람은 여전히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로마 베게티우스 장군의 말을 따르지만 군비 증강 위주의 안보전략이 과연 무기를 사고파는 사람이 아닌 다수의 평화를 위해 도움이 되는지를 한국전쟁 70년을 맞는 올해엔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물었다.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70년 분단 갈등’ 공론화 필요 구조화된 폭력도 바꿀 수 있어”

    “‘70년 분단 갈등’ 공론화 필요 구조화된 폭력도 바꿀 수 있어”

    “6·25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이 되는 2020년엔 한국 사회에서 유독 납작했던 평화에 대한 담론을 풍성하게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요.” 평화교육이란 화두로 8년째 비영리단체 ‘피스모모’를 이끌어 온 문아영(37) 대표는 5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사회는 평화라면 곧장 통일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는데, 평화는 통일만이 아니라 전쟁 종결이나 적대하지 않는 문화, 구조적인 폭력의 개선 등 훨씬 다채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라며 이같이 제안했다. 피스모모는 우리가 원하는 평화란 무엇인지 이야기하는 것을 통해 한국 사회를 덜 폭력적인 사회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본다. ‘모두가 모두에게서 배운다’는 수평적 배움을 모토로 20~30명이 대화를 나누는 소규모 워크숍이 기본 방식이다. 서울 은평구의 피스모모 사무실에서 만난 문 대표는 “워크숍에선 분노로 달려가던 호흡이 상대방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호흡으로 바뀌는 모습을 자주 본다”며 눈을 반짝였다. 그는 “옳고 그름을 가리려고 이곳에 모인 것이 아니라 다른 점과 비슷한 점 그리고 합의를 통해 조정 가능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확인하는 자리라고 약속하고 토론을 시작하면 긴장 관계가 갈수록 풀린다”고 말했다. 평화교육은 초등교사가 될 준비를 하던 문 대표가 입시 중심의 교육 현장에 실망하고 관심을 갖게 된 주제다. 교원대 졸업 후 코스타리카 유엔평화대학(UPEACE·University for Peace)에서 평화교육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문 대표는 2012년 피스모모를 만들었다. 유엔평화대학은 1948년 코스타리카가 군대를 해산하고 복지·교육에 예산을 쓰기로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학교다. 지난해 피스모모가 시작한 ‘탈분단 평화교육’은 휴전 상태인 한국 사회를 ‘낯설게’ 보는 시도에서 출발한다. “분단을 국가 차원의 문제로만 여기는 게 아니라 일상과 연계해 분단을 지속시켜 온 장치들을 낯설게 보는 것, 스스로 분단에 기여한 것은 없는지 성찰하는 것”이라고 문 대표는 설명했다. 문 대표는 현재 같은 대학원에서 평화교육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문 대표는 “누군가는 분단 과정을 경험했지만 누군가는 태어나 보니 주어진 조건”이라며 “북한과 남한을 나눈 분단으로 우리 사회가 자연스레 적과 우리 편을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각자가 이에 기여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한국 교육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어 “남한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불순분자로 찍힐 수 있거나 언제든 전쟁이 터질 수 있다는 상시적인 공포감을 안고 있지 않느냐”며 “분단이란 나에게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보람 있다”고 말했다. 문 대표는 “통일을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적 접근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평화와 당신이 생각하는 평화를 놓고 충돌 지점을 조율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을 만든다면 구조화된 폭력도 바꿔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3명의 활동가에 10여명의 회원으로 시작한 피스모모는 점차 규모를 키워 지난해에만 활동가 10여명이 200여 차례 워크숍을 통해 전국에서 1만여명을 만났다. 주로 각급 학교 교사나 청소년, 학부모들이 참석한다. 이 밖에 군비통제·군축을 연구하는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연감을 한국어로 번역·요약하는 작업도 하고 있다. 불과 1년 전엔 남북 철도 연결 착공식이 열렸지만 이제는 북한이 ‘충격적 행동’을 예고하는 급반전된 정세에선 평화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문 대표는 “70년을 끌어 온 갈등이 단칼에 풀리기는 쉽지 않고 견뎌야 할 시간의 절대량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낙담하기보다는 인내하면서 한 걸음씩 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문 대표는 평화교육의 핵심에 대해 “체감할 수 있는 평화의 지평을 넓혀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많은 사람은 여전히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로마 베게티우스 장군의 말을 따르지만 군비 증강 위주의 안보전략이 과연 무기를 사고파는 사람이 아닌 다수의 평화를 위해 도움이 되는지를 한국전쟁 70년을 맞는 올해엔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물었다.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부산 구포 개시장 갈등해결 백서 발간

    부산 구포 개시장 갈등해결 백서 발간

    부산시는 2019 구포가축시장 갈등해결 백서를 발간했다고 5일 밝혔다. 부산시와 북구는 개 시장 상인,동물보호단체 간 지속적인 토론과 협의를 통해 지난해 7월 60년 만에 구포 개 시장 폐업에 합의했다. 개 시장 폐쇄는 생명을 존중하고 민관 협치를 강조하는 부산시의 대표적인 성과로 꼽힌다. 구포 개 시장은 6·25 전쟁 이후 형성된 부산 최대 규모 가축시장이었지만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이 변하고 폐업을 요구하는 동물보호단체의 집회가 이어지면서 상인과의 마찰이 잦았다. 합의를 통해 상인들은 개 시장 폐쇄에 따른 생활 안정 자금을 지원받고 남은 개들은 해외로 입양하기로 했다. 이번에 발간된 백서는 개 시장이 폐쇄되기까지 협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정리됐고 폐업 당일 개 시장 현장 사진과 뒷이야기를 담았다.갈등해결 백서는 생명의 소중함을 대화를 통해 지켜낸 부산시의 사례를 다른 지역에 널리 알리기 위해 제작됐다. 동물학대 논란과 상인들의 생존권 문제가 복합돼 해묵은 갈등이 되었으나, 대화의 끈을 끝까지 놓지 않은 결과 전화위복을 만들어 낸 사례로서 타 지자체의 모범사례로 평가받는다. 백서는 영문판으로도 제작돼 세계 100여개 언론사 외신기자와 해외 동물보호단체에도 배포될 예정이다. 부산시는 국비·지방비 410억원을 확보해 구포 개 시장 정비와 각종 사업을 진행하며 불법 영업 방지에도 나서고 있다. 부산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원인철 공군총장 ‘6·25 낙동강 전선’ FA-50 지휘비행

    원인철 공군참모총장이 3일 FA-50 전투기를 타고 6·25전쟁 전적지인 낙동강 일대에서 새해 첫 지휘비행을 했다. 공군은 원 총장이 이날 오후 한반도 중·북부 영공방위 임무를 수행하는 제16전투비행단을 방문해 항공 작전 운영 현황과 대비태세를 점검하고 지휘비행을 했다고 밝혔다. FA-50 전투기 편대를 지휘한 원 총장은 6·25전쟁 발발 70년을 맞아 합천 해인사, 칠곡 다부동 등 6·25전쟁 주요 전적지인 낙동강 전선 상공을 비행했다. 원 총장이 지휘 비행한 칠곡·포항 등 낙동강 전선 지역은 6·25전쟁 초기 최후의 보루였다. 이날 비행은 적의 총공세를 끝까지 막아내며 전쟁 승리의 발판을 마련한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호국 영웅들을 기리면서 강한 힘으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정착을 뒷받침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고 공군은 설명했다. 특히 합천 해인사는 공군 창군 7인의 주역 중 한 명인 고(故) 김영환 장군이 6·25전쟁 중 항공 작전 임무를 수행하며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곳이라고 공군은 전했다. 공군 관계자는 “원 총장이 해인사 상공을 비행하며 김 장군의 호국 의지와 조국 영공·국민 안위를 수호하는 공군의 숭고한 사명을 계승할 것을 다짐했다”고 밝혔다. 이날 지휘비행은 공군 최초 여성 전투비행대대장인 박지연 중령이 임무 계획을 짜고 편대원으로서 함께 임무를 수행했다.원 총장은 영공 방위 임무 완수에 남녀 구분이 없다며 박 중령에게 정예 조종사 양성에 힘써 달라고 당부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정경두 “어느 때보다 군사대비태세 유지 필요…北 위협 증가”

    정경두 “어느 때보다 군사대비태세 유지 필요…北 위협 증가”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1일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빈틈없는 감시태세와 확고한 군사대비태세 유지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정 장관은 이날 새해를 맞이해 각 부대에 전화를 걸어 “현장 지휘관을 중심으로 엄정한 군 기강과 정신적 대비태세를 다지고 현행작전 수행에 만전을 기해줄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정 장관이 ‘어느 때보다’라는 말을 강조한 것은 최근 북한의 움직임과 연관이 있다는 분석이다. 북한은 이날 오전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노동당 제7기 5차 전원회의 보고에서 “곧 머지않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보유하게 될 새로운 전략무기를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내년 북한이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움직임에 나서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정 장관은 이날 북한 탄도미사일을 요격 임무를 맡은 공군 패트리어트 부대를 비롯해 북방한계선(NLL) 남방 8㎞에 위치한 해병대 우도 경비대 등과 통화하며 대비태세를 강조했다. 정 장관은 이날 신년사를 통해서도 “새해에도 우리가 직면한 안보 상황이 결코 녹록지 않다”며 “북한은 지난해 총 13회에 걸쳐 25발의 단거리 탄도미사일 등을 발사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북한은 창린도 해안포 사격으로 9·19 군사합의를 위반했고, 최근 동창리 지역에서의 엔진 시험 등 군사 활동과 함께 ‘수사적 위협’도 증가시키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1월 정 장관의 신년사에는 북한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었지만, 지난해 북한의 거듭된 도발에 따라 올해 신년사에는 북한의 위협을 언급하면서 대비태세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으로 정 장관은 “지난 한 해 정부의 북한 비핵화와 항구적인 평화정착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강한 힘’으로 든든하게 뒷받침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정 장관은 또 “올해는 6·25 전쟁이 발발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라며 “과거 아픈 역사가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빈틈없는 군사대비태세를 갖추고 군 본연의 임무에 더욱 충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김정은 “장구한 투쟁 결심”… 7시간 마라톤 보고로 ‘자력’ 강조

    김정은 “장구한 투쟁 결심”… 7시간 마라톤 보고로 ‘자력’ 강조

    국가건설·경제발전·무력건설 종합 논의 대미협상 책임감에 국가개조 명분 쌓기 대북 제재 장기화 전제로 내부 결속나서북한이 북미 비핵화 협상 시한 마지막 날인 31일까지 나흘째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5차 전원회의를 열고 ‘장구한 투쟁’에 대해 논의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체제 들어 처음으로 나흘째 전원회의를 이어가면서 최종 협상 결렬 선언 이후 선택할 ‘새로운 길’에 대해 엄중하게 접근하는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전원회의가 또 다른 안건을 토의할 것이라고 예고해 매년 1월 1일 해왔던 신년사 발표가 연기되거나 전원회의 결정서 등으로 대체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북한 관영매체 조선중앙통신은 31일 5차 전원회의 3일 차 회의가 전날 진행됐다고 보도하며 “(김 위원장이) 7시간이라는 오랜 시간에 걸쳐 노동당 중앙위 사업정형과 국가건설, 경제발전, 무력건설과 관련한 종합적인 보고를 했다”고 전했다. 전원회의는 당 대회가 열리지 않는 기간 동안 당의 주요 노선과 정책을 결정하는 기구로, 김 위원장 체제서 이틀 이상 열린 적은 처음이다. 특히 북한 체제의 특성상 한 해의 성과를 종합하고 새해의 계획을 세우는 12월에 신년사 발표 직전까지 전원회의가 열린 것은 이례적이다. 이번 5차 전원회의가 사실상 당 대회나 대표자회에 버금가는 규모로 열린 것은 김 위원장이 직접 설정한 비핵화 협상 시한 이후 상황에 대해 정치적 무게를 느끼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협상 시한을 걸고 미국에 ‘새로운 계산법’을 가지고 나오라며 압박했지만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한 데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2019년 신년사에서 김 위원장은 ‘미국과 언제든 대화할 자세가 되어 있다’고 했는데 막상 지난해 성과가 미비한 데 대해 책임감을 느낄 것”이라며 “내년 새로운 길을 공표하기 전에 당 건설, 국가건설, 경제건설, 무력건설 등을 총괄적으로 검토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명분을 쌓으려는 의도”라고 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집단지도체제가 아닌 유일영도체제를 지향하는 북한에서 당 전원회의를 4~5일간 여는 것은 흔하지 않다”며 “1953년 6·25전쟁 직후, 1962년 12월 중소 분쟁 직전, 1990년 공산권 붕괴 시점 등 국내외 정세가 복잡한 시기에 5일간 개최한 사례가 있어 이번 회의도 어려운 국내외 정세를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고 했다. 특히 통신은 김 위원장이 보고 말미에 “혁명의 최후승리를 위해 우리 당은 또다시 간고하고도 장구한 투쟁을 결심했다”고 전해 새로운 길의 의지를 다진 것으로 관측된다. ‘장구한 투쟁’이라는 표현에 대해 김 위원장이 대북 제재의 영향이 장기화될 것임을 전제로 내부 결속에 나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임을출 경남대 교수는 “북한이 향후 상당기간 자력 자강에 집중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며 “미국의 협상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 단기간 내 비핵화 협상의 진전은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고 했다 조선중앙통신이 “전원회의가 해당 의정의 결정서 초안과 다음 의정으로 토의하게 될 중요문건에 대한 연구에 들어갔다”며 “전원회의는 계속된다”고 전해 전원회의가 내년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김 위원장 집권 이후 매년 1월 1일에 했던 신년사를 전원회의 종료 이후 참석자들 앞에서 연설하는 방식으로 대체할 가능성도 있다. 실제 김일성 주석이 1986년 12월 27일 전원회의를 연 뒤 신년사는 발표하지 않고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로 대체한 사례가 있다.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박원순 ‘러브콜’ 펭수, 제야의 종 타종 나선다

    박원순 ‘러브콜’ 펭수, 제야의 종 타종 나선다

    EBS 자이언트펭TV의 인기 캐릭터이자 유투브 크리에이터인 펭수(10·사진)가 올해 12월 31일 제야의 종 타종 인사로 나선다. 펭수는 시민대표를 선정하는 온라인 투표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었다.서울시는 내년 1월 1일 자정 보신각에서 시민들과 함께 펭수 등 11명의 시민 대표가 제야의 종 타종 행사에 참여해 33번의 종을 울린다고 26일 밝혔다. 앞서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 25일 유튜브 방송 ‘박원순TV’에서 펭수를 언급하며 “서울시에 한번 나와달라”고 ‘러브콜’을 보내기도 했다. 시에 따르면 올해 타종 행사는 매년 정례적으로 참가하는 서울시장, 서울시의회의장, 서울시교육감, 서울경찰청장, 종로구청장 외에도 서울시 홈페이지 등을 통해 추천받은 다양한 분야의 대표 11명이 타종인사로 참석한다. 최다 득표를 자랑하는 펭수 외에도 이춘재·고유정 사건 등 다수의 강력범죄 수사에 참여하고 영국 BBC가 선정한 ‘100인의 여성’에 선정되기도 한 범죄심리학자 이수정(55·여) 교수, 서울시체육회 소속 선수로 제100회 전국체육대회 볼링 종목에서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를 수상한 신다은(20·여) 선수 등이 포함됐다. 1세대 벤처기업인 한병준(58)씨, 박미경(49·여) 한국여성벤처협회장, 2019년 서울시 복지상 대상 수상자 김동현(37) 변호사, 2017년 주한 유럽연합 대표부 대사로 부임한 미하엘 라이터러(65)도 이름을 올렸다. 평창 동계올림픽 VIP 수행 통역과 고려인 이동진료 통역 봉사 등으로 2019년 서울시민상 청년상을 수상한 이서윤(21·여)씨와 다문화가정의 가장으로 두 아이를 키우는 이하은(53·여)씨,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양동 작전인 장사상륙작전에 학도병으로 참전한 강영구(86)씨, 5·18기념계승사업에 앞장선 이철우(68)씨도 타종인사로 선정됐다. 이날 타종 행사는 tbs교통방송과 온라인방송인 라이브서울에서 생중계한다. 행사를 위해 31일 오후 10시 30분부터 내년 1월 1일 오전 1시 30분까지 종로, 우정국로, 청계천로 등 주변 도로는 차량 진입이 통제되고, 주변을 지나는 버스도 임시 우회한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사방에 포탄 터지는 소리… 지뢰 폭발로 잃은 다정했던 친구 잊지 못해”

    “사방에 포탄 터지는 소리… 지뢰 폭발로 잃은 다정했던 친구 잊지 못해”

    일시 1999년 5월 16일 장소 인천광역시 남구 숭의동 부산식당 대담 유세원(북구지대 감찰부장) 이경종(인천학생6·25 참전관 설립자) 이규원 치과원장 (이경종 큰아들)1950년 6월 25일 6·25 사변 이전 나는 화수동 281번지에서 살고 있었다. 인천에 인민군이 들어와서 학생이나 젊은이들을 의용군(義勇軍)으로 막 잡아갈 때였다. 그때 나도 신변의 위험을 느껴 화수동에서 친구들과 지하에 숨어 지내게 되었다. 이렇게 인공(人共/인민공화국의 약자)치하때 어려웠던 지하 땅굴 생활로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친구들은 ‘유문길·사철순·문호영·이용운·허용환·김유득·이희중·신현남·정명돌·노영남·주억재·이상순·유세원’ 이었다. 이들이 후일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로 활동한 핵심 멤버들이었다. 1950년 9월 15일 어느 날 하루는 포탄 터지는 요란한 소리가 여기 저기에서 들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위해 인천 앞바다에서 쏘아대는 함포탄이 인천 시내에 떨어지면서 터지는 소리였다. 그날이 1950년 9월 15일이었다. 이날 UN군과 국군이 인천에 들어와서 인민군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인천학도의용대(仁川學徒義勇隊) 북구지대 우리들은 인민군 치하에서 너무 고생을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호국활동을 하게 되었고, 인천학도의용대가 창설되어 북구지대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그 해도 다 저무는 12월이 되면서 우리 인천학도의용대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단체로 남하(南下)한다는 소문이 들리는 것이었다.1950년 12월 18일 남하(南下) 1950년 12월 18일 남하 행진에 참여한 우리들은 안양, 수원을 거쳐서 기차 화물차 지붕에 올라타서 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밀양을 지나 마산에 도착 하였다. 마산에 도착해서는 어느 민가에 투숙하게 되었는데 이때 나는 가지고 내려왔던 여비도 다 떨어졌었다. 그런데 “해병대모집이 있다!”라는 소식이 있는 것이었다. 나와 친구들은 그 해병대 모집에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우리들은 해병대 모집장소에 찾아갔다. 1951년 1월 3일 해병대 6기에 지원 해병대 모집 장소는 마산국민학교였다. 그때 시험관들은 우리들을 운동장에 쭉 세우더니 10명씩 조를 짜서 운동장을 한 바퀴 돌게 하고는 1등부터 3등까지만 뽑고 나머지는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그때 간단한 학과 시험도 있었다. 이날이 1951년 1월 3일쯤이었으며 그때 나는 합격 되어 마산에서 진해로 걸어가 진해경화국민학교에 들어갔다. 1951년 1월 24일에 우리들은 정식으로 해병대 6기 입대식을 하였다. 1951년 2월 10일이 되어 우리들 6기생 전 훈련과정을 마쳤으며 6기생 중 반수는 보병으로 가고, 그 당시 처음으로 해병대에 생긴 포병과로 반이 가게 되었다. 이때 나는 포병과로 배치받아 당시 진해에 있던 육군포병학교로 포병교육을 또 받게 되었다. 이때 포병학교를 마친 나는 다시 미(美)해병대에서 또 포병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후 나는 강원도 최전방으로 배치받았다. 처음 우리 해병대 포부대가 올라가 전투한 곳이 김일성고지와 스탈린고지였다. 그 당시 이 2 고지는 적의 수중에 있었는데 이때 우리 해병대가 뺏는 큰 전과를 올렸다. 1956년 9월 21일에 가서야 만 5년 8개월 만에 나의 파란만장한 군 생활을 마감하고 명예제대를 하게 되었다. 6·25 전사 인천학생 윤운철 1933년생으로 인천송현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영화중학교(현재 대건중고교) 4학년생으로 마산에서 해병6기 입대하여 1951년 7월 17일 입대한지 6개월 만에 17세로 전사하였다.전사한 동네 친구 윤운철을 추모하며 인천에서부터 같이 학도의용대원으로 내려와 6기생으로 같이 입대한 윤운철은 입대한지 6개월 만에 전사했다. 당시 나는 전포대가 돼서 포를 쏘는 직책이고 윤운철은 포를 수호하기 위해 포 전면에서 보초를 서면서 포를 지키는 임무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임무를 한 윤운철은 척후 임무를 띠고 전면 숲속으로 가다가 대인지뢰를 잘못 밟고 그 지뢰 폭발로 전사하였다. 윤운철은 성격이 유하고 온순하며 남하고 이야기할 때에는 말을 가려서 하는 아주 다정다감하고 배려 많은 친구였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런 온순한 사람이 왜 먼저 하늘나라로 가야 했는지 안타까운 생각에 가슴이 먹먹하다. 부디 이경종 이규원 2부자(父子)께서 하시는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역사 발굴사업이 유종의 미를 거두기를 바란다. 글 사진 제공 :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관유세원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 감찰부장 1933년 8월 5일 인천 동구 화수동 출생 1950년 6월 25일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 감찰부장(용산중학교 5학년생) 1951년 1월 24일 해병대 6기로 자원입대 군번 : 9210591 병과 : 해병대 포병 1956년 9월 21일 만기 명예 제대
  • [미래유산 톡톡] 약수터로 이름난 영천, 떡 도매시장으로 인기… 옥바라지 허기 채우다

    [미래유산 톡톡] 약수터로 이름난 영천, 떡 도매시장으로 인기… 옥바라지 허기 채우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영천시장의 명칭은 서대문 경기대 뒷산에서 무악재 고개까지 말안장 모양으로 누워 있는 안산 정상에 속칭 ‘악박골’ 약수터 일명 영천이 있던 데서 유래됐다. 영천 약수는 신기하게도 모든 병에 효력이 있었고, 특히 위장병에 신기한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지명을 딴 영천시장은 서대문구 영천시장길 38일대에 1960년대 형성된 대표적인 떡 도매 재래시장이다. 2011년 7월 전통시장으로 등록됐다. 영천시장의 유래가 되는 것은 영천장이다. 영천장은 지금의 독립문 인근에 존재하던 장으로 고양시의 화전, 원당, 능곡, 일산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던 장이었다. 이곳에서는 서울의 물품과 경기 서북지역의 농산물과 땔감 등이 주로 거래됐는데, 100여년 전까지만 해도 그 규모가 엄청났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6·25전쟁 시기까지는 야시장이 영천~서대문에 걸쳐 열렸고 포목 제품이 주로 거래됐다. 영천장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지금의 장소인 독립문 사거리에 복개된 만초천 위에 자리잡았다. 지금 영천시장은 도심재개발 지역 및 주택가 인근에 위치해 주변 시민들이 애용하는 서울의 대표적인 골목형 전통시장이다. 주요 취급품목은 식료품과 농축산물, 생활용품 등 시민 생활과 밀접한 품목들이며, 특히 떡과 떡볶이가 유명하다, 서울시 떡 수요의 70%를 영천시장이 공급했던 적도 있다, 과거 서대문형무소, 서울구치소 시절 옥바라지하던 이들이 인근 영천시장 떡가게를 많이 이용하면서 활성화됐고, 금전적인 여유가 없었던 옥바라지 아낙들이 끼니를 영천시장의 분식으로 채웠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영천시장 독립문 쪽 초입부터 떡볶이, 꽈배기, 순대, 튀김, 어묵 등 간식 집과 칼국수, 순댓국집, 횟집 등이 식당촌을 이룬다. 다양한 식자재 소매점과 함께 시장의 절반쯤이 전통시장 맛집을 꿈꾼다. 옥바라지를 온 이들의 허기를 채워주던 분식형 먹거리 집들이 언론과 블로거들 주목을 받게 되고, 또 도심재개발로 찾는 이들이 다양화되고 있다. 심흥식 정치학 박사·서울도시문화지도사
  • “머리 부상당한 나에게 참수리호 펄 직접 치우라고 했다”

    “머리 부상당한 나에게 참수리호 펄 직접 치우라고 했다”

    갑판장으로 참전 이해영 예비역 원사머리 꿰맸는데 8일 만에 병원서 퇴원악몽 시달리는데 상부서 황당한 지시“너희들이 펄 안치우면 누가 치우겠냐” “상부에서 군 생활하는 동안 우리를 ‘특별관리’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대로 복귀하니 침몰한 참수리호를 뒤덮은 ‘펄’(해저 진흙)을 직접 치우라고 했습니다. 제가 맨발로, 그 썩은 펄을 치우다 무서운 독이 올라 병원까지 여러 번 다녔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2002년 제2연평해전에 ‘갑판장’으로 참전했던 이해영(56) 예비역 원사가 17년 만에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그는 제2연평해전 전우회장으로, 지난해 9월 35년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군복을 벗었습니다. 이씨는 인터뷰에서 “이제 군인 신분이 아니니 속시원하게 우리 전우들 얘기를 해야겠다”고 털어놨습니다. 우리는 그날의 아픔만 기억합니다. 그 뒤에 숨겨진 생존자들의 아픔은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꼭 ‘진실’을 이야기해야겠다고 합니다.●“내부에선 우리를 ‘패잔병’ 취급했다” 터키와의 한일월드컵 3·4위전을 9시간여 앞둔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 25분.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해 내려온 북한 경비정의 기습공격으로 ‘참수리 고속정 357호’ 정장 윤영하 소령을 포함한 장병 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했습니다. 생존대원들은 포탄이 터지고 총탄이 빗발치는 상황에서도 전투를 벌였고, 30여명이 사상한 적 경비정은 갑판이 대부분 부서진 채 NLL 너머로 돌아갔습니다. 우리가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할 승전 대원들의 아픔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씨의 설명입니다. “머리 부위 피부가 탄에 맞아 찢어졌고 꿰맸는데 8일 만에 국군수도병원에서 내쫓기듯 나왔습니다. 실밥 겨우 뽑고 마음 안정도 안 된 나를 바로 2함대 의무대로 보내더라고요. 군 내부에서는 암묵적으로 우리를 ‘패잔병’으로 취급했습니다.” 전투 직후 정부는 이 사건을 ‘서해교전’으로 명명했습니다. ‘승전’이 아닌 ‘남북 충돌’ 의미가 강했습니다. 2008년이 돼서야 기존 승전인 연평해전은 ‘제1연평해전’으로, 서해교전도 승전의 의미로 ‘제2연평해전’으로 격상했습니다. 그때 전사자 추모 행사도 국가보훈처가 주관하는 정부 행사로 승격됐습니다. 이씨는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렸습니다. 그런 그에게 내려온 상부의 지시는 인양한 참수리호에 가득 차 있는 펄을 치우라는 것이었습니다. “트라우마로 악몽에 시달리는데 부대에서 생존대원들에게 펄을 치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용역 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따졌지요. 그런데 상부에서는 ‘다른 대원들이 그걸 하겠냐. 너희들이 안 치우면 누가 치우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서 퇴원한 10여명이 그걸 물청소를 하면서 다 치웠습니다. 그때 군인 신분이어서 말을 못해서 그렇지 정말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제2연평해전 ‘승전’했지만… 전사자만 특진 1999년 7월 4일 제1연평해전에 참가했던 해군 유공장병 7명은 1계급씩 특진을 했습니다. 군장병이 교전으로 특진한 것은 6·25전쟁과 베트남전 이후 처음으로, 언론에 대서특필됐습니다. 그런데 제2연평해전 생존대원은 외면했습니다. 정부는 또 당시 윤영하 소령 등 전사자 6명과 심한 부상을 당했던 생존장병 3명을 각각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대상자로 정했습니다. 나머지 부사관 7명과 병사 6명은 무공포장과 대통령·국무총리·국방부 장관·참모총장 표창으로 격이 낮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생존대원들은 지금이라도 정부가 명예를 회복시켜 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3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습니다. 군 생활을 계속해야 할 상황이라 불만을 공개적으로 얘기할 수 없었습니다. 인사 우대도 없어 2007년 정식 심사까지 받은 뒤 상사에서 원사로 진급했습니다. 이씨는 이 대목에서 숨을 참더니 크게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는 “참전용사에게 특진이나 훈장은커녕 국민 성금이 포함된 보상금 1000만원과 대통령 표창이 전부였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훈격 격상 같은 명예 회복을 받고 싶다”고 토로했습니다. ●“12년 만에 트라우마 치료… 그것도 서울에서” 또 다른 생존자 곽진성(38) 예비역 하사는 제2연평해전 당시 ‘전기장’으로 참전했습니다. 그는 오른팔 관통상과 엉덩이 파편상을 입고 국군수도병원으로 실려 왔습니다. 8개월이나 치료를 받고 2003년 3월 전역했습니다. 그는 “‘부사관은 뺀다’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훈장 대상에서 제외됐다”고 했습니다. 또 “환자 후송이나 사후 지원을 하던 부대에서 승진자가 나오고 상을 받았지만 정작 참전대원은 외면받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전했습니다. 당시엔 국군기무사령부 관계자들이 사복을 입고 병원에 상주하며 모든 대화를 체크해 불만을 얘기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전기장으로 참전 곽진성 예비역 하사8개월간 부상 치료했는데 훈장 제외‘부사관은 뺀다’는 이상한 이유 내세워생존대원들 트라우마 치료도 못 받아 곽씨는 트라우마 치료를 받은 경험도 없다고 합니다. 그는 “생존대원 중에 정부 지원으로 트라우마 치료를 받은 사람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 대부분 사비로 치료받았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러다 12년쯤 지나 정부에서 갑자기 “트라우마 치료를 받으러 서울로 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곽씨는 “우리 일정은 하나도 고려하지 않고 경남에 있는 내게 서울로 올라와서 진료를 받으라고 했다”며 “실태조사를 해 보고 문제가 되니까 실적 쌓으려고 부른 것밖에 더 되겠나. 왜 오라고 하는지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보상금으로 3000만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씨보다 부상 정도가 심해 더 많은 보상금을 받은 겁니다. 그런데 10%인 300만원만 정부 지원금이었고 나머지 90%는 ‘국민 성금’이었습니다. 정부에서 참전용사에게 보상금을 줄 법적 근거가 없다 보니 성난 국민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전달한 것입니다. ●“지원부대 상 받는데 난 땡볕에서 박수 쳤다” 현재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국가유공자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은 전투행위 자체는 보훈대상으로 예우하지 않고 있습니다. 적의 침략을 막으려 아무리 열심히 노력했더라도 사망하거나, 7급 이상 상이 등급을 받거나, 훈장을 받지 못하면 국가유공자로 예우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17년이 지난 지금도 제2연평해전 참전 예비역 중 2명이 국가유공자로 지정받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세 번 이상 보훈대상자 신청을 했지만, 부상 정도가 경미하다는 이유로 연이어 탈락했습니다. 따라서 국가를 위해 특별히 헌신한 참전용사에 대해 예우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다른 제2연평해전 참전자는 이런 말을 전했습니다. “수술하고 몸도 안 좋은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배 청소를 했고, 깨끗한 군복 챙겨입고 땡볕에 나가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 상 받을 때 박수 치고 있자니 너무 울적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에게 우리가 과연 어떤 대우를 하고 있는지, 또 어떤 대우를 해 왔는지 곱씹어 봐야 할 때입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DMZ서 발굴한 유해까지… 6·25 전사자 630구 합동 봉안식

    DMZ서 발굴한 유해까지… 6·25 전사자 630구 합동 봉안식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국군 유해 630구에 대한 합동 봉안식이 18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진행됐다. 특히 지난해 평양에서 열린 3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9·19 남북 군사합의의 성과물로 비무장지대(DMZ)에서 발굴된 260여구의 유해도 포함됐다. 국방부는 “이낙연 국무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6·25전쟁 국군 전사자 630구에 대한 합동 봉안식을 거행했다”고 밝혔다. 행사에는 이 총리를 비롯해 정경두 국방부 장관과 보훈단체 대표 등 350여명이 참석했다. 올해 봉안된 630구의 국군 전사자 유해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 육군 및 해병대 부대가 지난 3월부터 11월 말까지 DMZ 화살머리고지를 비롯해 경기도 파주·연천, 강원도 인제 등에서 발굴했다. 지난해 10월부터 DMZ에서 발굴된 유해 가운데 박재권 이등중사 등 3명은 신원이 확인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지만, 나머지 유해는 신원 확인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합동 봉안식을 가진 국군 전사자 유해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중앙감식소(유해보존실)에 보관돼 신원 확인 절차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 총리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김대중 정부 때인 2000년 유해 발굴을 시작한 이래 1만 3000여구가 발굴됐지만 전사자의 90%(12만여구)는 아직도 모시지 못했다”며 “갈 길이 멀다”고 밝혔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6·25전쟁 국군전사자 유해 합동봉안식…DMZ 발굴 260여구

    6·25전쟁 국군전사자 유해 합동봉안식…DMZ 발굴 260여구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국군 유해 630구에 대한 합동 봉안식이 18일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국방부는 이날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이낙연 국무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6·25전쟁 국군전사자 630구에 대한 합동 봉안식을 거행했다고 밝혔다. 올해 봉안되는 630구의 국군전사자 유해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 육군 및 해병대 31개 사·여단급 부대가 지난 3월부터 11월말까지 비무장지대(DMZ) 화살머리고지를 비롯해 경기도 파주·연천, 강원도 인제 등 전후방 각지에서 발굴한 유해다. 이날 합동 봉안식에서는 지난해 9·19 남북 군사합의가 실시된 이후 최초로 비무장지대에서 발굴된 260여구의 유해도 포함됐다. 현재 지난해 10월부터 DMZ에서 발굴된 유해 가운데 박재권 이등중사 등 3명은 신원이 확인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지만, 나머지 발굴된 유해는 신원확인이 필요한 상황이다. 국방부는 내년에도 DMZ에서의 유해발굴을 계속해 수습되지 못한 유해를 발굴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북측은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동참하지 않고 있어 공동유해발굴 여부는 미지수다. 이날 합동봉안식을 가진 국군전사자 유해는 이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중앙감식소(유해보존실)에 보관돼 신원확인 절차에 들어갈 예정이다. 국방부는 6·25전사자 유해발굴 사업을 지난 2000년 4월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처음 시작한 이후 올해 발굴한 630구를 포함해 현재까지 약 1만여 구를 수습했다. 다만 전 장병의 유전자 정보를 보관하고 있는 미군과 달리 한국은 관련 정보가 부족해 유해 신원확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설명이다. 국방부는 “내년이 6·25전쟁 70주년임을 고려해 유해발굴 사업을 한층 속도감 있게 추진할 것”이라며 “향후 비무장지대 전역으로 유해발굴작업을 확대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