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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광고 엿보기] ‘할복’ 수술 사진 실은 쇼킹 광고/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할복’ 수술 사진 실은 쇼킹 광고/손성진 논설고문

    한국인 의사로서 처음 개인병원을 연 사람은 박일근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구마모토 의학강습소를 졸업하고 1898년 4월 현재의 서울 청진동에 제생의원을 열었고 이후 무교동과 도렴동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는 황성신문 1899년 3월 7일자에 광고를 냈는데 개인병원 광고의 효시일 것이다. 또 1902년 일본 지케이(慈惠)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안상호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개업의 자격을 취득하고(황성신문 1902년 6월 28일자) 귀국, 1905년 서울 종로3가에 병원을 개업했다. 그는 1919년 고종이 뇌출혈을 일으켰을 때 진료했다. 위 사진은 이관화와 박자혜가 종로에 연 한성종로자혜의원의 대한매일신보 광고다. 특이한 것은 할복(개복) 수술 사진을 그대로 게재했다는 점이다. ‘할복 치료 봉합 사진’이라고 써 놓았다. 개복 수술이 흔하지 않았을 당시에 배를 가르고 수술을 한 뒤 꿰매는 ‘충격적인’ 사진을 과감히 실음으로써 광고 효과를 극대화하려 한 것이다. 최초의 서양식 근대병원 제중원의 후신인 세브란스병원에서 1904년 한국인 조수 ‘백정의 아들’ 박서양(세브란스의학교 1회 졸업)의 도움을 받으며 에비슨이 수술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남아 있는데 등록문화재 448호로 지정돼 있다. 광고 속의 사진은 한국인이 메스를 들고 수술하는 장면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광고에는 병원 경영주라고 할 수 있는 이관화 외에 쟁쟁한 고용 의사들의 이름도 적어 신뢰도를 높였다. 의사 홍석후는 1902년 관립의학교 3기생으로 입학해 우등으로 졸업하고 세브란스의학교에 편입해 1회로 졸업한 인물로 1929년 학감(현재의 학장)이 됐다. 홍석후는 ‘봉선화’의 작곡가 홍난파(본명 홍영후)의 형으로 동생과 함께 조선정악전습소를 다닐 만큼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홍난파는 반대로 세브란스에 입학했다가 해부학 실습에 질려 음악으로 방향을 바꿔 작곡가가 됐다고 한다. 의사 박계양은 1907년 서울대병원의 전신인 대한의원 교육부를 졸업하고 일본에 3년간 유학한 뒤 1910년 이비인후과를 개업했는데 홍명희와 정인보가 고객이었다고 한다. 정인보는 6·25때 이 병원에 석 달간 숨어 있다 발각돼 납북됐다. 한성의사회 회장 등을 지내고 1970년 88세로 사망했으며 그가 운영하던 한양의원 터의 표석이 서울 낙원동에 있다. 의사 이민창은 한성병원 부속학교를 졸업하고 병원을 열었지만, 일제에 항거해 4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제중원 부인 의생(醫生)으로 표시된 박자혜는 간호사 출신으로 신채호의 부인인 독립운동가 박자혜와는 동명이인으로 보인다. sonsj@seoul.co.kr
  • 北 묻혔던 국군 유해 80구, 70년여 만에 ‘고국 품으로’

    北 묻혔던 국군 유해 80구, 70년여 만에 ‘고국 품으로’

    6·25전쟁 당시 북한 땅에 묻혔던 국군 전사자 유해 80여구가 오는 4월 조국으로 돌아온다. 16일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미국 국방부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국(DPAA)은 올해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하와이에 있는 국군 전사자 유해 80여구를 오는 4월쯤 한국 정부에 인도한다. 2018년 10월 미국에서 64구의 국군 전사자 유해를 인도받은 이후 최대 규모다. 유해는 1950년 6월 전쟁 발발부터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이전 북한 지역에서 전투 중 산화한 국군 전사자다. 2018년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합의에 따라 북한이 미국으로 인도한 유해 중 국군으로 식별된 유해도 포함됐다. 정부는 전사자 예우 차원에서 공군 특별수송기를 하와이로 보내 유해를 봉환한다. 미국은 1996년부터 2005년까지 함경남도 장진호, 평안북도 운산 등에서 북한과 공동으로 발굴한 유해와 북미 정상회담 이후 인도된 미군 유해 250구 가운데 아시아계 유해를 식별했다. 한국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 공동 감식을 진행해 정확한 숫자를 판단할 계획이다. 한편 국방부는 지난해 7월부터 현재까지 6·25전쟁에 참전했지만 무공훈장을 받지 못한 1827명을 찾아 훈장을 수여한다고 밝혔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北 묻혔던 국군 유해 80구 70년여 만에 ‘고국 품으로’

    6·25전쟁 당시 북한 땅에 묻혔던 국군 전사자 유해 80구가 오는 4월 조국으로 돌아온다. 16일 국방부에 따르면 미국 국방부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국(DPAA)은 올해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하와이에 있는 국군 전사자 유해 80여구를 오는 4월 한국 정부에 인도할 계획이다. 80여구는 2018년 10월 미국에서 64구의 국군 전사자 유해를 인도받은 이후 최대 규모다. 유해는 1950년 6월 전쟁 발발부터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이전 북한지역에서 전투 중 산화한 국군 전사자다. 2018년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합의에 따라 북한이 미국으로 인도한 유해 중 국군으로 식별된 유해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는 전사자 예우 차원에서 공군 특별수송기를 하와이로 보내 유해를 봉환할 계획이다. 미국은 1996년부터 2005년까지 함경남도 장진호, 평안북도 운산 등에서 북한과 공동으로 발굴한 유해와 북미 정상회담 이후 인도된 미군 유해 250구 가운데 아시아계 유해를 식별했다. 식별된 유해는 한국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요원들과 함께 공동 감식을 진행해 국군 전사자로 최종 판정한다. 유해가 송환되면 신원확인 절차를 거쳐 유가족에게 인도한 후 국립묘지에 안장된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북한 땅에서 찾은 국군 유해 80구 ‘하와이를 돌아’ 4월 귀환

    북한 땅에서 찾은 국군 유해 80구 ‘하와이를 돌아’ 4월 귀환

    북한 땅에 묻혔다가 미국이 발굴해 하와이로 옮겨진 국군 6·25 전사자 유해 80구(위)가 4월에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다. 전사자 유해는 북한에서 하와이까지 7700여㎞를, 다시 하와이에서 고국까지 7600여㎞ 등 모두 1만 5000여㎞를 돌고 돌아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온다. 정부는 전사자 예우의 뜻으로 공군 특별수송기를 하와이로 보내 유해를 봉환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전사자는 1950년 6월 전쟁 발발 이후부터 1953년 7월 정전협정 이전까지 북한지역에서 전투 중 산화했다. 2018년 6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합의에 따라 북한이 미국에 인도한 미군 유해 가운데 국군으로 식별된 유해도 이번에 포함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미국은 북한과 공동발굴한 유해 중 아시아계 유해가 포함된 것을 확인하고, 2011·2015·2018년과 지난해 한미 공동감식 작업을 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2012년 12구, 2016년 15구, 2018년 1구에 이어 64구를 인도했다. 16일 정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미국 국방부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국(DPAA)은 4월쯤 국군 6·25 전사자 유해 80구를 한국 정부에 인도할 계획이다. 정부는 올해 6·25전쟁 70주년 기념 사업의 하나로 하와이에 있는 국군 전사자 유해 봉환을 계획하고 미국 측과 협의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함경남도 장진, 평안북도 운산, 평안남도 개천 등에서 발굴됐거나 북미정상회담 이후 인도된 미군 유해 250구 가운데 법의인류학적 분석을 통해 아시아계 유해를 식별해냈고,분류된 유해를 다시 한국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요원들과 공동 감식을 진행해 국군 전사자로 최종 판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에 유해 80구가 봉환되면 2018년 10월 미국으로부터 64구의 국군 전사자 유해를 인도받은 이후 최대 규모다. 당시는 제70주년 국군의 날에 맞춰 하와이에서 공군 수송기를 이용해 전사자 유해 64위를 국내로 봉환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공항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전사자 유해를 향해 거수경례로 예를 표한 다음, 참전용사 대표들과 헌화·분향했다. 이번 80위 봉환 때도 같은 규모의 봉환식이 예상된다. 유해가 고국으로 봉환되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신원 확인 작업에 들어간다. 유해에서 DNA(유전자)를 채취해 유해발굴감식단에서 보관 중인 전사자 유가족의 DNA 샘플과 일일이 대조 작업을 진행한다.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유가족에게 인도한 후 국립묘지에 안장된다. 2018년에 봉환한 64위의 유해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신원 확인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아직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부는 다음달부터 전사자 유가족과 국민을 대상으로 DNA 샘플 채취 홍보를 강화할 계획이다. 한편 국방부는 올해 비무장지대(DMZ)에서 남북 공동유해발굴을 시작할 것을 북측에 재차 촉구할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북측의 호응이 없으면 DMZ 내 군사분계선(MDL) 이남 지역에서 4월부터 단독으로 유해 발굴에 나설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DMZ 전체에 미수습 국군 전사자 유해가 1만여 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마산 보도연맹 희생자 6명 70년 만에 무죄 선고

    마산 보도연맹 희생자 6명 70년 만에 무죄 선고

    6·25전쟁 때 좌익으로 몰려 영장 없이 불법 체포·감금 당한 뒤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당한 민간인 6명이 70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창원지법 마산지원 형사부(이재덕 지원장)는 14일 마산지구계엄고등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된 고 노상도씨 등 보도연맹원 6명에 대한 국방경비법 위반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한국전쟁 발발 당시 국가는 이들이 남로당과 규합해 괴뢰군에 협력하는 등 이적행위를 했다며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사형을 선고하고 처형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들이 북한에 호응하는 등 이적행위를 했다는 증거가 없다”며 “범죄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해 무죄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1948년 정부 수립 전에 남로당 산하단체에 가입한 경력이 있었다. 당시 정부는 이런 인사들을 모아 전향을 목적으로 설립한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노씨를 비롯한 경남 마산지역(현 창원시) 보도연맹원 수백명은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중순∼8월 초순 사이 헌병과 경찰의 소집 통보를 받고 모였다가 영장 없이 체포돼 마산형무소에 수감됐다. 마산지구계엄고등군법회의는 이들에 대해 국방경비법의 이적죄 혐의로 재판을 해 1950년 8월 18일 141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같은 달 말 마산육군헌병대가 사형을 집행했다.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법원 영장 없이 보도연맹원들이 불법적으로 체포·감금돼 희생됐다고 밝히자 유족들은 2013년 창원지법 마산지원에 재심 청구를 했다. 법원은 재심 청구 사유를 인정해 2014년 4월 재심 개시 결정을 했지만 검찰이 항고와 재항고를 하면서 재심 절차가 늦어졌다. 지난해 4월 대법원이 검찰 재항고를 기각하면서 재심이 확정돼 재심 개시 6년여만에 마침내 무죄가 선고됐다. 고 노상도씨의 아들인 노치수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경남유족회장은 “돌아가신 분들은 당시 ‘논을 매다 잠시 보자고 해서 불려갔거나 부역하러 오라고 해서 나갔다가 희생됐다”며 “가족들은 내 남편, 내 자식이 어디로, 어떤 죄로 끌려갔는지도 모르고 수십 년을 살았다”고 말했다. 그는 “70년 만에 무죄가 나와 좋기는 하지만 가슴이 먹먹하다”고 밝혔다. 희생자 유족들을 변호한 이명춘 변호사는 “무죄 판결이 났지만, 당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거나 통일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좌익으로 몰려 억울하게 희생된 보도연맹원들이 많다”며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역사회도 이날 법원의 무죄판결을 반겼다. 김경수 경남도지사는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70년이 걸렸다”며 “국가 폭력으로 말미암은 모든 고통이 이번 무죄 판결을 계기로 조금이나마 치유되길 기원한다”는 환영성명을 발표했다. 허성무 창원시장도 “국가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을 바로잡았다는 점에서 법원의 이번 결정은 매우 의미 있는 역사적 진전이다”는 환영 성명을 냈다. 열린사회 희망연대, 민주노총 경남지역본부 등 14개 지역 시민단체는 “무죄판결을 환영하며 진실화해위원회 재출범, 보상특별법 제정, 가해자 처벌 등이 이뤄지길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다. 창원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사진·기록 증거 명백하면 6·25 참전 인정”

    6·25전쟁 참전 사진 등 명백한 증거가 있다면 참전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국민권익위원회 권고가 나왔다. 12일 권익위에 따르면 A씨는 6·25전쟁 당시 군인이 아닌 노무자 신분이었으나 103노무사단과 논산훈련소 등에서 근무했다며 관련 사진과 자신의 이름이 적힌 인사명령지 등을 국방부에 증거 자료로 제출했다. 103노무사단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장비 보급을 위해 노무자 등 비(非)군인으로 구성한 부대였다. 하지만 국방부는 A씨의 ‘비(非)군인 참전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육군예비학교 졸업 후 논산훈련소로 배치됐다는 A씨의 진술을 신뢰할 수 없고, 당시 군산의 제1보충연대에 전속된 것으로 기록된 부대 인사명령지 내용이 일치하지 않아 참전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권익위는 A씨가 국방부에 제출한 인사명령지 등 군 기록, 부대 근무 시 찍은 사진들, A씨와 보증인들의 면담 등을 토대로 사실 확인에 들어갔다. 인사명령지에는 A씨와 한자까지 동일한 이름의 계급·군번·소속이 명시돼 있었고 ‘육군 소위 A는 제1보충연대로, B는 제2훈련소로 전속’이라는 103노무사단장의 인사명령이 기록돼 있었다. 다른 인사명령지에는 ‘육군 소위 A, 제103사단 113연대, 공군사관학교 입교를 이유로 제적’이라고 기재돼 있었다. 이와 관련해 국방부 소속 군사편찬연구소는 “103노무사단은 전쟁 물자 및 시설 보급 등 정규군을 지원할 목적으로 설립된 조직으로 예비사관학교 졸업자들은 정규군이 아니었기 때문에 103노무사단에 배치됐다는 사실과 통상 병적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A씨의 이름이 기재된 인사명령지가 있다는 것은 참전 여부 확인에 결정적 단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권익위는 참전 입증 자료를 제출했는데도 아무런 반증 자료 없이 참전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고 판단하고 국방부에 재심의를 권고했다. 권익위 권근상 고충처리국장은 “국가를 위해 헌신했지만 참전 사실을 인정받지 못하는 억울함이 없도록 정부는 세세히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속보] 서울 도심 공사현장서 박격포탄 20여발 무더기 발견

    [속보] 서울 도심 공사현장서 박격포탄 20여발 무더기 발견

    서울 도심의 한 신축 공사 현장에서 불발탄으로 추정되는 박격포탄 형태의 폭발물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10일 오후 2시 50분쯤 서울 구로구 한 신축 공사 현장에서 폭발물로 보이는 물체가 묻혀 있다는 신고가 접수돼 군과 경찰, 소방당국 등이 출동했다. 관계 당국은 공사장 작업자의 신고를 받고 출동해 6·25 전쟁 당시 사용된 불발탄으로 추정되는 박격포탄 형태의 폭발물 20여발을 발견했다. 당국은 해당 물체가 녹이 슨 상태로 발견된 점에 비춰 오래된 불발탄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국은 현장에서 폭발물 처리 작업을 진행하는 한편 주변을 수색해 폭발물이 더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김화숙 서울시의원,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 민간위원 위촉

    김화숙 서울시의원,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 민간위원 위촉

    서울시의회 보건복지위원회 김화숙 의원(더불어민주당, 비례)은 지난달 31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 민간위원 위촉식에서 국방 분야 민간위원으로 위촉됐다.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는 올해 70주년을 맞는 6·25전쟁 기념사업 관련 정책 심의·의결 기구로서 국무총리 소속으로 설치됐다. 성별, 지역, 연령, 분야 등 다양성을 고려해 국민적 신망이 높고 대표성을 인정받는 인사들로 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2020년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범정부적 사업 추진을 통해 국민화합과 한반도 평화정착 기반 마련을 목표로 하고있다. 이날 민간위원 16명의 위촉식과 함께 1차 회의를 개최해 공식 활동을 시작했다. 회의에선 운영계획과 운영세칙, 사업종합계획 등 안건을 심의·의결했다. 특히 ▲기억 ▲함께 ▲평화 등 3개 주제로 분과위원회를 구성해 사업을 추진한다. 한편, 이날 위촉된 위원들은 회의 전 전사자 명비 앞에서 참전용사 17만 5801명을 참배하기도 했다. 김화숙 의원은 “위원회의 국방 분야 민간위원으로 위촉된 것에 대해 감사함과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하면서 “전쟁 70년을 기리며 6·25 참전용사의 희생과 헌신을 잊지 않고 추모하는 마음을 잊지 않아야 함은 물론이고, 나아가 유엔 참전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한반도 평화·번영의 비전을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위원회의 민간위원으로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전남도의 이색 ‘실내박물관’에는 뭐가 있길래

    전남도의 이색 ‘실내박물관’에는 뭐가 있길래

    전라남도가 다양한 전시·체험을 즐길 수 있는 ‘목포, 무안, 순천 실내박물관’을 2월 추천 관광지로 선정했다. 순천 유명 관광지인 낙안읍성은 사계절 많은 여행객이 찾지만 인근에 위치한 ‘뿌리 깊은 박물관’을 아는 사람은 적다. 이곳은 월간 문화잡지 ‘뿌리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의 발행인 고(故) 한창기 선생이 생전에 수집한 전통 유물 6500점을 전시중이다. 상설전시실은 토기, 옹기, 청자, 서화 등 세월을 넘나드는 다양한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귀면무늬 기와, 굽다리접시 등 독특한 모양의 토기를 감상하다 보면 선조들의 지혜에 놀라게 된다. 이곳에서는 한복체험도 할 수 있어 전통문화 체험의 장으로 그만이다. 순천시기독교역사박물관에서는 100여년 전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의 유물과 자료를 만날수 있다. 의료선교에 매진했던 애양병원 초대원장 맨튼윌슨이 탔던 포드 T모델과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올 때 사용했던 드럼통, 세탁기, 가방 등은 당시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순천 기독교 성장사 뿐만 아니라 여순사건, 6·25전쟁 등 각종 자료도 시대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3층에는 ‘ㄱ’자 형태의 과거 교회 모습도 재현했다. 유교 윤리인 ‘남녀칠세부동석’에 따라 남녀 예배실을 별도로 갖춘 특이한 구조가 인상적이다. 이와 함께 목포자연사박물관은 공룡화석, 광물 등 세계 희귀자료와 서남권 자연 생태자료를 수집·전시하고 있어 가족 여행지로 인기몰이 중이다. 입장권 구매 시 목포생활도자박물관, 목포문예역사관까지 모두 세 곳을 동시에 관람할 수 있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천연기념물인 ‘신안 압해도 수각류 공룡알 둥지화석’이 관람객의 눈길을 끈다. 지질관, 육상생명관, 수중생태관, 지역생태관에도 지구의 역사와 생물체 등에 관한 광범위한 생태자료를 전시중이다. 대형갯벌 디오라마는 천연갯벌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생생하게 구현됐다. 목포생활도자박물관은 현대인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도자기를 접할 수 있다. 도자기의 역사, 만드는 과정, 미래형 산업 도자기의 쓰임까지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 목포문예역사관 역시 남농 허건의 수석과 운림산방 4대 작품, 세계 각국 화폐가 있어 함께 관람해볼 만하다.또 무안군 오승우미술관은 현대미술의 거장 오승우 화백의 뛰어난 작품들을 감상 할 수 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제시하는 박물관도 있다. 바로 무안군 못난이동산이다. 이곳은 김판삼 조각가가 지역주민과 함께 만든 참여형 미술관이다. 주변에 쓰다 남은 건축자재, 나무 등을 기부받아 만들었다. 이광동 도 관광과장은 “전남 지역은 빼어난 자연 관광지로 유명하나 실내에서도 즐길수 있는 다양한 체험, 전시프로그램이 많이 갖춰져 있다”며 “날씨에 상관없이 사계절 내내 즐길 수 있는 테마 관광 콘텐츠를 계속 발굴하겠다”고 밝혔다. 무안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원로 희극인 임희춘 노환으로 별세

    원로 희극인 임희춘 노환으로 별세

    1970년대 국민들을 울고 웃긴 원로 희극인 임희춘이 2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87세. 1952년 극단 동협에서 데뷔한 고인은 배삼룡, 구봉서, 서영춘 등과 함께 활동하며 1970∼80년대 대한민국 코미디 프로그램을 주름잡았다. 6·25전쟁 때 부모를 잃은 고인은 ‘숙식제공’이라는 단어에 끌려 무작정 연극배우가 됐다. 이후 희극배우로 진로를 바꿔 ‘웃으면 복이 와요’, ‘고전유머극장’, ‘명랑극장’, ‘유머 1번지’ 등에서 활약했다. 당시 우스꽝스러운 바보연기로 인기를 끌었고, 기쁠 때나 슬플 때, 황당할 때 익살맞게 사용하던 ‘아이구야’ 등의 유행어를 남겼다. 고인은 은퇴 후 1995년 복지재단 노인복지후원회를 창립해 봉사에 힘썼다. 2010년엔 대중문화예술상 보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빈소는 인천 연수성당 장례식장에 마련되며 발인은 4일 오전 7시 30분, 장지는 인천가족추모공원이다.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 홍준표 “자의로 탈당해 무소속 출마? 절대 안해…날 제거하면”

    홍준표 “자의로 탈당해 무소속 출마? 절대 안해…날 제거하면”

    “특정세력 날 제거해도 지역구서 선거활동”“PK수비대장 맡겨주면 ‘PK 40석’ 책임진다”당의 ‘양천갑’ 제의 기사에 “거짓말”“단 한번도 당에서 연락받은 적 없다” “가짜 방송하면 엄단 처벌할 것” 경고자신의 고향인 경남 창녕 지역(경남 밀양·의령·함안·창녕)에 공천 신청을 한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1일 “자의로 탈당해 무소속 출마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면서 “나를 제거한다면 무소속 출마는 별개의 문제”라며 공천 탈락시 무소속 출마 가능성을 시사했다. 홍 전 대표는 이날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인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어제(1월 31일) 밀양·창녕·함안·의령 지역에 공천 신청 절차를 마쳤다”며 이렇게 밝혔다. 홍 전 대표는 “특정 세력이 나를 제거하고, 내가 무소속 출마를 강요당하게 된다면 그것은 별개의 문제”라면서 “무소속 출마를 강요당하게 되면 나는 내 지역구에서만 선거운동을 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공관위가 정당하게 심사해 부산·울산·경남(PK) 지역 수비대장을 맡겨주면 고향 지역에 터를 잡고 지원 유세로 ‘PK 40석’은 책임질 생각”이라고 덧붙였다.홍 전 대표의 이러한 발언은 당 지도부가 대표급 인사들을 향해 거듭 ‘험지 출마’를 압박하고 있는 점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당 공천관리위원회가 경남 밀양·의령·함안·창녕 후보 공천에서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을 탈락시킬 경우 무소속 출마도 불사하겠다는 뜻을 시사한 것으로도 받아들여진다. 홍 전 대표는 이날 또다른 페이스북 글에서 한 인터넷 언론사가 당으로부터 양천갑 제안을 받았다는 기사에 쓴 데 대해서도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인터넷 언론 모기자가 어제 쓴 기사를 보니 당에서 나를 양천갑에 제안 했다고 거짓말로 썼다”면서 “난 당 대표 사퇴 이후 지금까지 선거 관련으로 당으로부터 단 한번도 연락을 받은 바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양천갑 제의를 받았는지 여부를 우리측에 단 한번도 확인도 하지 않고 그것도 기사라고 썼느냐”면서 “요즘 기자들은 기사가 아니라 소설을 쓴다”고 맹비난했다.홍 전 대표는 “양천갑은 우리당 김승희 의원이 잘하고 있는 곳으로 알고 있다”면서 “그 거짓말 기사를 미끼로 유튜브에서 가짜 방송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참 어이가 없다. 가짜 방송을 하는 사람은 나중에 엄중히 처단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편 홍 전 대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에 대해 “당국의 방역 실패가 곳곳에 감지되면서 전국이 감염권에 들어가고, 전국민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공공장소에 가기를 꺼리며 악수조차도 거부하는 ‘진공 거리’가 늘어날 조짐”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혹자는 ‘선거 연기’ 운운하지만 6·25 동란 중에도 선거는 치렀다”고 덧붙였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정 총리 “6·25 참전용사 헌신 잊지 않고 보답해야”

    정세균 국무총리는 31일 올해로 70주년이 되는 6·25전쟁과 관련해 “참전 용사의 헌신을 잊지 않고 보답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 총리는 이날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 1차 회의에 참석해 “발발 70년이 된 6·25전쟁은 일제강점기를 벗어난 우리에게 또 다른 시련을 겪게 한 아픈 역사였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정 총리는 “모든 것이 파괴된 잿더미 속에서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고, 민주화를 일궈냈다”며 “지금의 위대한 대한민국은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켜 냈던 참전용사님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분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추모하면서 지역·세대·계층을 아우르는 포용과 화합으로 한반도 평화를 위해 나아가야 한다”며 “22개 유엔 참전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한반도 평화·번영의 비전을 함께 공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 총리는 이날 자신이 공동 위원장을 맡은 6·25전쟁 70주년 기념사업 심의·의결 기구인 위원회가 출범한 것과 관련해 “이런 역사적인 과제 실현을 위해서는 위원회가 중심이 돼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핵심 사업 추진에 중추적 역할을 해야 한다”며 “위원들이 경험과 지혜를 모아 달라”고 당부했다. 최광숙 선임기자 bori@seoul.co.kr
  •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 출범…“평화의 장 실현”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 출범…“평화의 장 실현”

    올해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정부기념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사업추진위원회가 출범했다. 정부는 이날 “국무총리 소속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는 이날 오전 9시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민간위원 위촉식과 제1차 회의를 개최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정세균 국무총리와 김은기 전 공군참모총장이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과 강경화 외교부 장관, 박삼득 국가보훈처장 등 정부위원과 참전용사 및 시민사회 등 사회 각계를 대표하는 민간위원을 포함해 총 31인으로 구성됐다. 위원회는 지난해 제정된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 규정’에 따라 사업 추진방향 및 종합계획 등 주요 정책을 심의·의결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날 1차 회의에서 위원회는 운영계획 및 운영세칙, 사업종합계획 등 주요안건을 심의·의결했다. 올해 기념사업은 정부기념식으로 ‘기억’, ‘함께’, ‘평화’ 등 세 개의 주제로 진행된다. 참전국 현지위로연, 전사자 유해봉환식, 전 22개국 보훈부 장관회의 등을 계획하고 있다. 정부는 “다양한 국민참여형 사업을 통해 참전용사에 대한 추모·감사의 마음이 일상화되고 국민통합과 평화 분위기 조성의 계기를 마련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김은기 민간위원장은 회의에서 “위원회 출범으로 범정부적 6·25전쟁 70주년 사업 추진 기반이 마련됐다”며 “위원회를 통해 참전용사와 국민, 유엔참전국 등 국제사회가 함께하는 추모, 화합 및 평화의 장이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어느덧 9주기… ‘한국문학 어머니’ 박완서를 그리다

    어느덧 9주기… ‘한국문학 어머니’ 박완서를 그리다

    ‘한국 문학의 어머니’ 박완서(1931~2011) 작가의 9주기를 맞아 그의 저작이 재조명되고 있다. 작가의 서문을 모은 책이 새롭게 출간되는 한편 기존 작품들이 오디오북으로 제작되거나 중단편선으로 엮였다.최근 출간된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작가정신)은 작가의 모든 책에 실린 ‘작가의 말’ 67편을 연대순으로 정리했다.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 작가의 소회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 그에 대한 고찰을 솔직한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그가 남긴 ‘작가의 말’에서 두드러지는 한 가지는 시대의 변화를 목격한 자의 책임감이다. 평소 입버릇처럼 “전쟁의 상처로 작가가 됐다”고 고백해 온 작가는 전력을 다해 시대를 증언하고자 하는 냉철한 목격자였다. 동시에 온정적인 시선을 잃지 않았던 따뜻한 서술자이기도 했다. “6·25의 기억만은 좀처럼 원거리로 물러나 주지 않는다. 아직도 부스럼 딱지처럼 붙이고 산다”고 얘기하면서도 “나의 부스럼 딱지가 개인적인 질병이 아닌, 한 시대의 상흔”(‘목마른 계절’ 후기, 1978)이라며 시대의 아픔을 함께 경유하는 식이다. 대문호에게도 예외 없었던, 창작의 고통을 다룬 구절도 눈에 띈다. “써지진 않는데 원고 독촉은 빗발칠 때는 아유, 지긋지긋해, 소리가 입에 붙어 있기도 했습니다.”(‘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1989) 그러나 마흔살 당시로는 늦은 나이에 데뷔, 세상을 뜨기 전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작가를 구원하는 것도 역시 문학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뜻하지 않게 닥쳐온 무서운 고통과 절망 속에서 겨우 발견한 출구도 쓰는 일이었으니까요.” 이어지는 작가의 고백이다.문학동네에서는 단편소설 전집(전 7권)을 오디오북으로 제작했다. 이정민, 강재형, 김정근 등 MBC 아나운서 17명이 총 97편에 달하는 작가의 단편 전체를 나눠 낭독한다. 기일인 지난 22일 1·2권이 먼저 나왔고, 새달 4일까지 7권 모두가 제작된다. 이어 추모 낭독회도 열릴 예정이다. 대표 중단편을 모은 ‘대범한 밥상’이 리커버 한정판으로 나오고, 동네서점이 선정한 대표 중단편 4편을 엮은 ‘동네서점 베스트 컬렉션’도 출간된다.문학과지성사에서도 작가의 중단편 10편을 엮은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를 출간했다. 문지작가선 7번째 작품집으로 나온 이 책에는 1975년 초기작 ‘도둑맞은 가난’부터 한국전쟁을 견뎌 낸 여성의 이야기 ‘공항에서 만난 사람’, 생명의 고귀함을 다룬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 2000년대 작품인 ‘빨갱이 바이러스’ 등 10편이 수록됐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우린 집을 짓지만 그는 빚었다

    우린 집을 짓지만 그는 빚었다

    김중업과 필자는 스승과 제자 사이이다. 그러므로 나의 시각이 개인적 견해일 수 있다는 점을 양해해 주기 바라며 직간접으로 경험한 건축에 관한 기억들을 불러와 소개하고자 한다.1980년대 초반 서울 우이동 평범한 흰색 타일건물 3층 조그만 설계사무실로 첫 출근하던 기억이 새롭다. 나의 건축 인생이 시작된 곳이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공부했고 그때의 경험이 건축 인생에 큰 밑바탕이 됐다. 근무할 당시 한남동 이강홍 주택과 육군박물관 설계가 완료돼 공사감리가 진행 중이었고, 을지로2가 재개발 공모전을 진행했다. 철야 근무 등 요즈음 젊은 건축가들은 상상할 수 없는 강도 높은 훈련이었지만 첫 사무실, 어떤 선생님을 만나는가가 건축가 인생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민족문화의 자존심을 표출하다 한국현대건축에서 건축가 김중업(1922~1988)에 대한 평가와 위상은 확고하다. 우리가 시대정신을 말한다면 김중업을 빼놓을 수 없다. 시대정신이 일상적 사고와 통념화된 감각에 저항적 감성을 불러들여 그 시대의 낯섦을 만드는 것이라면 그는 정점에 있었다. 대표작 프랑스 대사관과 제주대학 본관은 시대 상황에서 보면 문화 충격을 준 하나의 사건이었다. 특히 프랑스 대사관(1961)에서 외국공관으로서 그 나라 정서보다 이 땅의 장소성과 건축문화의 정체성을 표현했다. 프랑스 정부는 자국 건축문화 코드를 기대했을 수 있지만 김중업은 지극히 한국적 정서와 형태, 공간을 표현했다. 이는 민족 자긍심의 발로이고 한국건축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표출한 것이다. 비록 6·25 전쟁의 상흔이 치유되지 않았고, 물질적으로 빈곤하지만 한국건축의 정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당시 건축의 문화적 인식이 부족함에도 건축은 예술이고 중요한 문화예술 행위임을 실천했다. 그는 길 없는 길을 가는 고독한 구도자였고, 그의 건축들은 시대와 맞서 이루어 놓은 위대한 금자탑이었다. 그는 시대의 큰 건축가였다. 외부 조건에 굴하지 않고 민족문화 자존심을 표출한 자, 그들을 나는 건축가라 부른다. 현재는 불행하게도 그 흔적들이 거의 사라지고 없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2017년 철거 위기의 프랑스 대사관을 문화체육관광부, 한국건축가협회, 언론이 함께 지켜낸 것이 뿌듯하다. ●선의 중첩, 스케치가 건네는 말 스케치란 의미 있는 선을 찾아가는 작업 과정으로 부정, 수정, 보완, 중첩의 과정을 거쳐 최종 의미 있는 선을 찾는 여정이다. 김중업 스케치는 특히 그러하다. 젊은 시절에는 비교적 단순한 선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연륜이 쌓이면서 많은 선들의 중첩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마음의 선이고, 욕망의 선이며, 때로는 고통의 선이었을 스케치는 작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는 건축을 짓는다고 하지 않고 ‘빚는다’, ‘다듬는다’는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프랑스 대사관 지붕의 형태, 제주대학 본관 램프 형태들이 그렇다. 그것은 빚지 않으면 만들어지지 않는 형태이다. 그의 스케치 선들이 그러하다. 조소성이 강한 것은 스승인 르코르뷔지에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다시 스승의 중요성을 느낀다. 나는 개인적으로 잔레의 영향이 느껴지는 김중업 건축이 훨씬 좋고 감동적이다. 언어는 그 사람의 사고를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며, 표현 도구이다. 김중업 건축언어는 건축가와 건축의 본질에 관한 독백과 같다. “건축이란 그리 흔한 존재가 아닙니다. 헤아릴 수 없이 구축한 무질서 속에서도 고고히 자신을 지키고 있는 귀한 존재만을 건축이라고 부릅니다. 그러기에 건축이란 만의 하나 정도의 확률밖엔 없고 이를 갈아 맞추는 건축가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신을 송두리째 불사르는 이들입니다.” 내가 근무할 당시 발간한 건축 작품집 ‘김중업, 건축가의 빛과 그림자’(1984)에서 그가 한 말이다. 그의 시적 건축언어 중 “건축에서 어두멘가 울고 싶은 구석이 있어야 하잖는가?”를 보면 지금도 가슴이 저며 온다. 그의 건축은 말이 필요 없다. 왜냐하면 그의 건축 진실은 언어 너머에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는 가끔 말했다. “건축가는 시대의 나침반이고 지진계여야 한다”고. 획일적 사고를 강요받던 경직된 사회에서 그의 영혼이 겉도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작업을 위해 시대의 시녀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고독한 외톨이로 겉돌았던 모습이 오히려 건축가 김중업답다. 그리 길지 않은 건축적 경험을 뒤로하고 길을 나설 즈음 김중업은 나를 격려해 주었다. 시작부터 일어난 의문은 ‘인간은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은 건축의 존재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그 의문들은 자연, 인간, 건축의 관계성에 관한 것으로 이어졌다. 그 의문에 일부 힌트를 준 사람은 하이데거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거주함으로써 존재한다”며 인간 실존의 조건으로 거주함(dwelling)을 언급했다. 덧붙여 “인간은 단순히 거주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게 환경을 경험할 때 거주하게 된다”고 했다.●해체주의서 찾은 건축의 철학적 질문 건축가는 거주를 위한 단순한 환경을 만드는 자가 아니라 인간의 실존을 위한 의미 있는 환경(공간)을 만드는 자라는 것이다. 그러면 의미 있는 환경, 공간은 어떻게 만들 것인가? 그 해답을 얻는 과정에서 나의 건축적 사유는 세 차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해체주의 건축과 은둔의 미학’, ‘존재에서 관계로’, 관계를 넘어 윤리의 건축을 표방하는 ‘염치의 미학’이다. 20대 후반은 내게 기존 건축 방식에 대한 의문과 함께 새로운 건축 방법론에 목말라하던 시기였다. 그 시점에 후기모더니즘 철학이론으로 해체주의는 건축 영역에서 기존의 질서와 역사, 방식을 부정하고 다양성, 다면성, 다원성, 다층성, 다각성 등 사물을 이루는 인식의 도구를 총동원하는 키워드였다. 핵심은 기존 건축 접근 방식의 거부였고 부정이었다. 얼마나 매력적인 건축 방법론인가. 해체주의의 첫 시도는 국제건축공모전 참가였다. 요코하마 복합빌딩(1989)은 그때 참가작이었다. 많은 교수들의 지지로 작업을 했으며 추후 완성돼 졸업논문작품이 됐다. 주요 관점은 요코하마시 중심 전통상가인 바샤미치의 건축을 통해 도시 문제와 도심 공동화 문제의 해법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991년 한국 최초 해체주의 건축으로 기록되는 국제 갤러리를 소격동에 완성했다.●은둔의 미학으로 완성한 염치의 건축 건축가는 자신의 건축적 이념과 현실 충돌에서 새로운 길을 선택하는 상황을 맞기도 한다. 현대인의 삶이란 긴장의 연속으로 피로감이 깊다. 그렇다고 나몰라라 하고 혼자서 훌쩍 떠나버릴 수도 없다. 살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안 살 수도 없다. 이런 물음에 답하려 노력한 건축이 ‘은둔의 집’이다. 이 시대 도시에서 호젓한 삶을 실현해 정신적으로 은거를 실현하는 꿈을 꿀 수는 없는가? 은둔이란 외연의 확장만이 진리가 돼 가는 세상에서 조용히 내면의 소리에 침잠하고자 하는 성찰의 삶을 권유하는 건축적 제안이다. 은둔에는 자연 속에 파묻혀 외부와 단절하는 방법과 도시에 머물면서 은둔하는 시은(市隱)도 있다. 건축에서 은둔은 자신에게 묻고 답하는 되물음과 같은 것이다. 수도원 ‘묵당’은 그러한 장소가 되기를 바라는 집이다. 존재의 의미를 자연과의 관계성에서 찾으려 “침묵하라. 침묵하는 자만이 말의 뿌리를 건드린다”는 릴케의 말에서 영감을 받아 ‘침묵의 집’을 태기산 중턱에 계획했다. 원심력의 삶보다는 구심력을 갖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삶을 지향하라는 권유이다. “욕망의 사다리를 내려와 침잠하라. 그리고, 침묵하라.” 시인 보들레르와 릴케를 좋아하는 스승 김중업의 영향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건축의 출발은 인간과 자연의 올바른 이해이고, 목적은 인간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건축은 존재 주체인 인간과 배경인 자연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상호관계성과 상호작용성에 관한 올바른 인식이 출발점이어야 한다. 또한 상생을 위한 상호존중과 상호보완의 관계를 인식해 공존의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염치의 건축미학은 인간, 자연, 건축의 상호관계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토대로 하는 건축가의 윤리적 자세이며 건축 행위에 있어 스스로 일깨우고자 하는 성찰적 자세이다. 또한 실천적 미학이다. 실제 건축에서는 내부와 외부, 있음과 없음, 채움과 비움, 보는 것과 보이는 것,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 만질 수 있는 것과 만질 수 없는 것이 교차한다. ‘학의재’에서는 원래의 자연 모습이 건축의 일부분이 되도록 하면서 자연, 인간, 건축이 가시적·비가시적인 형태로 상호 순환하는 개념을 표현했다. 김천역사문화박물관에서는 황악산 아래 천년 고찰 직지사와 인접한 부지의 지형과 지세의 흐름을 존중하고 순환성을 강조했다. 또 다른 사유를 향해 갈 시점이 머지않았음을 느낀다. 건축가 배병길
  • ‘총독인가 동반자인가’… 주한 미국대사 70년사

    ‘총독인가 동반자인가’… 주한 미국대사 70년사

    해리스 대사, 호르무즈파병 압박 등으로 ‘총독’ 비난받아역대 23명 대사 중 유일 직업군인 출신, 국민에게 낯설어결례 논란 전임 대사도 자유롭지 않아…현대사에 영향력미국대사 과거 막후 외교관이었지만 지금은 공공 외교관변화된 역할 조정 과정서 시행착오 겪으며 논란 불거져 ●한국민에게 낯선 미국대사, 해리스 “해리스 대사는 한국 총독처럼 행세하지 않느냐. 자기가 무슨 총독인 줄 안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지난 17일 공개된 재단 유튜브 채널 ‘유시민의 알릴레오’에서 해리 해리스 주한 미대사에 대해 이같이 언급했다. 해리스 대사가 지난 7일 KBS와 인터뷰에서 “한국이 그곳에(호르무즈해협)에 병력을 보내길 희망한다”며 정부에 파병을 압박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을 ‘총독 행세’라고 비판한 것이다.해리스 대사가 16일 외신 기자 간담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같은 날 신년기자회견에서 남북 협력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데 대해 “향후 제재를 촉발할 수 있는 오해를 피하려면 한미 워킹그룹을 통해서 다루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당정청은 일제히 반발했다. 다음 날 “의견 표명은 좋지만 우리가 대사가 한 말대로 따라 한다면 대사가 무슨 조선 총독인가”(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 “내정간섭 같은 발언은 동맹 관계에도 도움이 안 된다”(민주당 설훈 최고위원), “대북정책은 대한민국의 주권에 해당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통일부 이상민 대변인), “대사가 주재국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언론에 공개적으로 언급한 부분은 대단히 부적절하다”(청와대 관계자) 등의 비판이 쏟아졌다. 앞서 해리스 대사는 호르무즈해협 파병과 남북 협력 사업뿐만 아니라 한미 방위비분담협상,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과 관련 미국 정부의 입장을 직설적으로 표명하면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해리스 대사는 지난해 11월 당시 국회 정보위원장인 바른미래당 이혜훈 의원을 관저로 불러 방위비분담금을 50억 달러 내라는 요구만 20번 정도 반복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외교적 결례라는 비난을 받았다. 해리스 대사는 같은 달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한국 정부가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맞서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내린 데 대해 “한국이 한일 과거사 문제를 안보 영역으로 확대한 데 대해 실망했다”며 종료 결정을 번복할 것을 압박했다. 해리스 대사를 둘러싼 논란은 우선 대사의 개인적 성향에 기인한다는 분석이다. 해리스 대사는 첫 직업군인 출신 주한 미국대사다. 1949년 부임한 1대 존 무초 대사부터 해리스 대사까지 23명 대사 중 6명을 제외하면 모두 직업 외교관 출신이다. 비외교관 출신 6명 중 해리스 대사를 제외하고는 외교를 전공한 교수이거나 한국과 인연이 깊은 목사, 외교에 익숙한 중앙정보부(CIA) 출신 요원, 국회와 국방부에서 외교를 담당한 정치인이었다. 군인 출신으로 외교적 수사보다 직설 화법에 익숙한 해리스 대사가 한국민에겐 ‘낯선 대사’라는 것이다.외교 소식통은 “한국어에 능숙한 캐슬린 스티븐스 대사와 한국민과 스킨십을 즐겼던 마크 리퍼트 대사에 익숙했던 한국민에게 4성 장군으로 태평양사령관을 역임한 해리스 대사의 야전군 사령관 스타일이 낯설어 보일 것”이라고 했다. 다만 주한 미국대사의 행보와 발언이 논란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승만 정권 당시 윌리엄 레이시 대사는 한미 관계 현안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서한을 보내 불만을 표출하는 등 거만한 태도를 보여 이 대통령의 반감을 샀다. 박정희 정권에 베트남 파병을 압박했던 윈스럽 브라운 대사는 카운터파트인 이동원 외무부 장관을 ‘패싱’하고 정일권 국무총리, 박정희 대통령과 직접 담판을 짓는 오만함을 보이기도 했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대사는 진보적인 노무현 정부와 보수적인 조지 W 부시 정부가 마찰을 빚던 당시 노무현 정부의 남북 화해협력 정책과 어긋나는 발언을 해 정부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했다. 주한 미국대사가 ‘한국의 총독’이라는 논란은 한국 현대사에서 미국 정부와 그의 입장을 대변하는 주한 미국대사가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불거졌다는 해석이다. 미국대사는 한국 현대사의 분기점마다 주·조연으로 등장하며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데 영향을 미쳤다. 미국대사는 한국 현대사와 한국 정치에서 한복판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국가원수급 대우 받은 초대 미국대사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첫 주한 미국대사는 존 무초 대사다. 무초 대사는 1948년 8월 13일 주한 최고대표로 임명돼 사흘 후 부임했다. 미국은 이듬해 1월 1일 한국을 정부로 승인하고 4월 7일 무초 최고대표를 주한 미국대사로 임명했다.1년 전 남북에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미국의 지원이 절실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무초 대사의 신임장 제정식을 ‘장엄하게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1949년 4월 20일 무초 대사의 신임장 제정식에는 이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 이범석 국무총리, 신익희 국회의장, 김병로 대법원장 등 삼부 요인이 모두 참석했고, 무초 대사는 중앙청에 육해군 의장대의 사열을 받으며 입장했다. 국가원수급 대우를 받은 무초 대사는 1950년 이 대통령과 6·25 전쟁 첫 2년을 함께 겪었다. 무초 대사는 전쟁 발발 직전인 6월 초 미국 의회에 북한의 침공 가능성을 경고했다. 그는 전쟁 당일인 25일 워싱턴 국무부에 “북한군의 전면 공격이 시작됐다”고 보고했고 이 대통령의 관저인 경무대로 들어갔다. 무초 대사는 피난가겠다는 이 대통령을 말렸지만, 이 대통령은 무초 대사에게 알리지 않고 27일 서울을 떠나 수원으로 갔다. 무초 대사는 이 대통령의 행동에 분노했지만 이후 한국 정부를 따라 수원·대전·대구·부산으로 피난가던 도중 이 대통령을 자신의 차에 태워 피신시키기도 했다. ●이승만 하야 작전의 선봉장? 이 대통령은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독립운동을 한 친미주의자였지만, 집권기에는 미국과 갈등을 빚었다. 이 대통령은 6·25 전쟁 기간 휴전 반대, 반공포로 석방 등으로 휴전을 원하던 미국과 틀어지기 시작했다. 전쟁 후에 미국은 냉전 전략의 일환으로 한일 관계를 정상화하라고 요구했지만 이 대통령은 이를 뿌리쳤고, 미국의 우려에도 독재의 길을 걸어가면서 양측의 갈등은 악화됐다. 미국 정부는 이 대통령을 끌어내리기 위한 계획도 세운 것으로 알려졌는데, 일각에서는 미국대사들이 야당 인사들과 접촉하며 최전선에서 하야 계획을 수행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 대통령은 당연히 미국대사와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1955년 5월 취임한 3대 윌리엄 레이시 대사는 재한 미국인 상사에 세금을 물리는 문제를 둘러싸고 한국 정부와 충돌하자 이 대통령에게 직접 서한을 보내 불만을 토로했다. 이 대통령은 반감을 느껴 이례적으로 미국 정부에 대사 교체를 요청했고, 취임 다섯 달 만에 레이시 대사는 사임했다. 후임인 4대 월터 다울링 대사는 진보당 사건, 보안법 파동 등 이승만 정권의 정치 탄압을 두고 이 대통령과 부딪쳤다. 다울링 대사는 이승만 정권이 1958년 야당 진보당의 조봉암 당수 등을 간첩 혐의로 체포해 사형을 구형하자 정권 2인자인 이기붕 국회의장을 두 차례 만나 조봉암을 구명하려 했으나 조봉암은 1년 후 사형당한다. 1958년 12월에는 이승만 정권이 야당과 언론을 탄압하기 위한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일방 통과시키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다울링 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하며 항의의 뜻을 표했다.1959년 12월 부임한 5대 월터 매카너기 대사는 이승만 정권의 종말에 일조했다. 매카너기 대사는 1960년 4·19 혁명 당일 “시위자들과 당국이 폭력을 자제하고 법과 질서를 되찾아 정당한 불만이 해결되기를 바란다”며 시위대에 우호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19일과 21일 경무대에 이 대통령을 찾아가 미국 정부의 우려를 전달했다. 26일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열리자 매카너기 대사는 “전국적으로 퍼진 정당한 국민의 불만 표시에 한국 정부는 즉각적인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하고 미봉책을 취할 시기가 아니다”며 이 대통령의 하야 요구를 시사하는 성명을 냈다. 직후 경무대로 가 이 대통령으로부터 하야 의사를 전달 받았다. 경무대 앞에 있던 시위대는 매카너기 대사의 차가 경무대에서 나오자 그가 이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냈다고 생각하며 ‘매카너기 만세’, ‘미국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박정희 인정하되 미국 요구 관철시킨 대사들 박정희·전두환 독재 정권 하에서 미국대사들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 반공의 최전선에 서 있는 이들을 돕기도 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미국의 가치에 반하는 이들을 견제하기도 했으며, 국익과 가치의 딜레마에서 이들의 독재를 방관하기도 했다. 1961년 5·16 쿠데타가 발발하고 한 달여 후 취임한 6대 새뮤얼 버거 대사는 박정희의 쿠데타 세력을 사실상 인정하되 미국의 정책을 따르도록 설득하는 전략을 취했다. 쿠데타 발발 당일 마셜 그린 주한 미국대사대리와 카터 매그루더 주한미군사령관이 쿠데타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을 뒤집은 것이다. 버거 대사는 박정희에게 민정 이양을 위한 선거를 실시하고 한일 국교정상화를 추진할 것을 요구했다. 박정희는 전역하고 1963년 10월 대선에서 승리했으며, 2년 후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기본조약 등을 체결했다.7대 윈스럽 브라운 대사는 박정희 정권에 미국이 수행하던 베트남전 참전을 압박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4년 미국이 베트남전에 본격 개입하자 그 해 9월 베트남에 의무 요원과 태권도 교관을 파견했는데, 브라운 대사는 12월 박정희 대통령에게 증파를 요청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5년 10월부터 전투부대를 파병하기 시작했고, 브라운 대사는 이듬해 3월 한국의 추가 파병에 대한 미국의 보상을 담은 ‘브라운 각서’를 전달했다. 브라운 각서와 월남 특수로 한국은 경제·군사적 성장을 이루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지만, 국군 장병의 피를 돈을 받고 팔았다는 비난도 제기됐다. ●유신 정권과 대립했던 대사들 1970년대 미국에 닉슨·포드·카터 정부가 차례로 들어서고, 박정희 정권이 1972년 유신헌법 개정으로 독재의 길을 걸으며 양국은 충돌하기 시작했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1969년 냉전 완화(데탕트)를 이유로 아시아에서의 개입을 줄이고 아시아 국가들의 자력 방위를 요구하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닉슨 독트린에 따라 8대 윌리엄 포터 대사는 1970년 박 대통령에게 주한미군을 6만 명에서 4만 명으로 감축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박 대통령이 감축에 불만을 갖고 미국의 주한미군 주둔비용 지원 요구를 거부하자 포터 대사는 “(박 대통령은) 엉클 샘(미국)의 큰 젖통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질 않으려 한다”며 독설을 하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 등 동맹국이 미국을 벗겨 먹는다며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을 대폭 인상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주한미군 감축까지 고려할 수 있다고 시사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닌 셈이다.1971년 10월 취임한 9대 필립 하비브 대사는 ‘미국 당대의 가장 걸출한 전문 외교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 내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을 구명한 인물로 유명하다. 하비브 대사는 1973년 8월 박정희 정권이 야권 정치인 김대중을 납치하자 조용하지만 적극적으로 사건에 개입했다. 하비브 대사는 박 대통령에게 “김대중 납치 사실을 알고 있으며 김대중이 죽는다면 미국과 한국의 관계는 끝장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고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 서울지부장이자 후일 주한 미국대사로 부임하는 도널드 그레그가 회고했다. 김대중은 납치 닷새 후 서울 자택에서 풀려났다. 후임 10대 리처드 스나이더 대사는 박정희 정권이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추진한 사실을 알아채고 박정희 정권에 경고해 핵무기 개발 계획을 무마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독재 정권의 견제자인가 방관자인가 11대 윌리엄 글라이스틴 대사는 1978년 7월 취임, 이듬해 10·26 사태와 12·12 쿠데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등 한국사의 주요 변곡점을 겪은 인물이다. 1977년 출범한 카터 정부는 도덕주의 외교 노선을 앞세우며 박정희 정권의 독재 정치를 비판하고 주한미군 철군을 추진함에 따라 한미 관계가 악화됐다. 이 과정에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카터 대통령을 설득해 주한미군 철군 계획을 철회하는 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박정희 정권이 1979년 10월 국회에서 여당 공화당과 유신정우회를 동원해 야당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를 의원직에서 제명하자 카터 정부는 항의의 뜻으로 글라이스틴 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하기도 했다.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1979년 12·12 쿠데타를 일으키고 이듬해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탄압할 당시 글라이스틴 대사와 미국 정부는 이를 묵인하거나 최소 방관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전두환과 그의 참모들을 만나 광주에서의 군사 작전을 항의하기도 했으나,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이 전남도청 진압작전을 수행하기 하루 전 글라이스틴 대사는 ‘(신군부에) 군사작전을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백악관에 보고한 것으로 기밀해제 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신군부의 진압작전을 묵인했다고 읽힐 수 있는 대목이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1999년 발간한 회고록에서 “신군부의 행동에 미국이 공모자는 아니었으나 무력했던 건 사실”이라고 밝혔다. 12대 리처드 워커 대사는 1981년 8월부터 1989년 1월까지 약 7년 5개월간 재임해 현재까지 최장수 대사 기록을 갖고 있다. 1대 무초 대사부터 11대 글라이스틴 대사까지 모두 직업 외교관이었으나, 워커 대사는 학자로서 첫 비외교관 출신 주한 미국대사이기도 하다. 워커 대사는 1980년 7월 내란음모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김대중을 석방시키는 데 역할을 했지만, 김대중 석방 대가로 전두환 대통령의 조기 방미를 성사시켜 12·12 쿠데타와 광주 학살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민주화 이행기의 CIA 출신 대사들 13대 제임스 릴리 대사와 14대 도널드 그레그 대사는 CIA 요원 출신으로, 1987년 6·10 항쟁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 1993년 문민정부 출범까지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목격했으며 민주화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의 광주 학살 개입, 방조 의혹으로 반미 정서가 고조됐던 1980년대 말 부임했던 릴리 대사와 그레그 대사는 한국민의 거센 반감에 직면해야 했다. 릴리 대사는 반미 시위대로부터 수차례 인형 화형식을 당했으며, 그레그 대사는 시위대의 관저 침입을 겪기도 했다. 특히 릴리 대사의 후임으로 연이어 CIA 출신인 그레그 대사가 미국대사로 임명되자 야당과 언론은 ‘미국이 한국을 외교 대상이 아닌 정보·공작 대상으로 본다’며 반발하기도 했다.하지만 1987년 6·10 항쟁 당시 전두환 정권이 명동성당에 강제 진입해 학생들을 연행하려 하자 릴리 대사는 13일 최광수 외무부 장관을 만나 “전 세계가 떠들썩해질 것”이라며 진입을 저지했다. 그는 전두환 정권이 계엄령을 검토하자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시위를 평화롭게 해결해야 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요청해 받았다. 릴리 대사는 전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으나 청와대는 18일 거절 의사를 밝혔다. 릴리 대사는 결국 다음 날 전 대통령을 찾아가 친서를 전달하고 “무력을 절대 사용하지 마라”고 경고했으며 전두환 정권은 계엄령 선포 계획을 백지화했다. 그레그 대사는 취임 약 4개월 후인 1990년 1월 광주를 찾아 미국의 광주 학살 개입 책임을 묻는광주민주화운동 참가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는 “레이건 대통령이 전 대통령을 취임 후 첫 외국 정상으로 초청한 것은 김대중을 사형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기 때문”이라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레그 대사는 노태우 정권의 남북화해정책과 북방정책을 지지했으며 미군 전술핵무기의 한반도 철수를 추진하며 1992년 남북 한반도비핵화선언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레그 대사는 1992년 남북화해를 위해 한미연합훈련인 팀스피리트 훈련을 취소하도록 이끌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듬해 한미 정부는 그레그 대사와 상의 없이 훈련을 재개하면서 북한은 준선시상태를 선언했고 핵확산방지조약(NPT)에서 탈퇴했다. 그레그 대사는 2015년 발간한 회고록에서 “내가 대사로 봉직하던 기간 중에 미국이 결정한 유일한 최악의 실수”라고 했다. ●북핵 전문 외교관 전성시대 1993년 북한의 NPT 탈퇴로 1차 북핵 위기가 촉발되자 미국의 대한국 외교는 물론 주한 미국대사의 역할도 북핵 문제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1993년 11월 취임한 15대 제임스 레이니 대사는 목사 출신으로 직업 외교관은 아니었으나, 1947~1950년 서울에서 정보장교로 근무했고 1959~1964년 연세대에서 신학을 가르친 ‘지한파’였다. 레이니 대사는 1994년 북한이 영변의 핵연료봉 추출을 강행하고 미국은 영변 핵시설 정밀 타격을 시행하려 하면서 한반도 긴장이 최고조에 오르자 카터 전 대통령을 만나 대북 특사로 방북해 중재할 것을 요청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그 해 6월 김일성 주석을 만나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냈으나, 7월 김 주석이 사망하면서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됐다. 하지만 북미는 9월 제네바합의를 타결하며 1차 북핵 위기를 종식시켰다.레이니 대사의 후임인 16대 스티븐 보즈워스 대사, 17대 토머스 허버드 대사, 18대 크리스토퍼 힐 대사는 모두 북핵 전문 외교관이다. 보즈워스 대사는 1995~1997년 제네바합의로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대신 북한에 경수로를 건설하는 역할을 맡은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주한 미국대사로 자리를 옮겼다. 보즈워스 대사는 2001년 주한 미국대사에서 퇴임한 이후에도 2009~2011년 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대북특별대표를 맡아 북미 협상을 총괄했다. 그는 미국 대북 협상파의 상징적 인물로 꼽힌다. 허버드 대사 역시 1994년 북미 제네바협상에 실무급으로 참여한 대북 협상 전문가다. 2001년 9월 취임한 허버드 대사는 이듬해 2차 북핵 위기를 맞게 된다. 아울러 2002년 6월 주한미군 장갑차의 여중생 압사 사건, 이듬해 정부의 이라크 파병 결정, 2004년 주한미군 기지 평택 이전 반대 시위 등으로 반미 감정이 고조되고 한미 동맹의 균열 우려가 심화되자 이를 해결하는 데 임기를 보냈다.후임인 힐 대사는 2004년 9월 취임해 이듬해 2월 북핵 문제를 논의하는 6자회담의 미국 측 수석대표로 지명됐으며, 두 달 후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에 취임하면서 대사직을 내려놓았다. 힐 대사는 인터넷을 통해 한국민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반미 감정을 누그러트리는 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힐 대사는 2005년 9월 6자회담에서 북한 비핵화의 이정표로 평가받는 9·19 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리코드 브레이커’ 대사들의 명과 암 19대 알렉산더 버시바우 대사부터 23대 해리 해리스 대사까지 다섯 명의 대사는 주한 미국대사 역사의 ‘신기록 보유자’들이다. 버시바우 대사는 직전에 주러시아 미국대사를 역임하고 주한 미국대사 중 역대 최고위급 인사로 부임했다. 캐슬린 스티븐스 대사는 최초의 여성이자 최초의 한국어 구사 대사, 성 김 대사는 최초의 한국계 대사였으며 마크 리퍼트 대사는 현재까지 최연소 대사 기록을 갖고 있다. 해리스 대사도 최초의 직업군인 출신 대사 기록을 세웠다. 2005년 10월 취임한 버시바우 대사는 역대 주한 미국대사 중 최고위급 인사로 부임하면서 북핵 문제 해결에 주도적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버시바우 대사는 부임 초기 북한의 인권과 위조지폐 문제를 거론하고 김정일 정권을 ‘범죄 정권’이라고 칭하며 대북 강경 기조를 보였고 당시 노무현 정부는 버시바우 대사에게 북한 비난을 자제하라고 요청하기도 했다.버시바우 대사는 2008년 5월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협상에 반대하는 촛불 시위가 한창이던 때에 손학규 민주당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실망스럽다”고 해 외교적 결례 논란을 빚었다. 버시바우 대사는 손 대표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 수입 금지를 주장한 데 대해 “과학적 근거도 없이 불안을 야기한 것에 대해 실망스럽다”고 했으며, 민주당 측은 이를 공개하며 반발했다. 다만 버시바우 대사는 힐 대사와 마찬가지로 인터넷을 통해 한국민과 소통하며 국민을 상대로 한 공공 외교를 이어나갔다. 스티븐스 대사는 유창한 한국어로 한국 국민과 접촉면을 늘리면서 공공 외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대사로 평가받는다. 스티븐스 대사는 미국 평화봉사단에 들어가 한국 복무를 자원, 1975~1977년 충남 예산군 예산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심은경’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었다. 그는 1978년 국무부에 입부한 후 1983~1989년 한국에 다시 와 서울 대사관과 부산 영사관에서 근무했다. 스티븐스 대사는 2008년 10월 취임하자마자 33년 전 봉사한 예산중학교를 방문, “예산은 내가 외교관으로 필요한 자질을 배웠던 곳”이라며 한국 국민의 마음을 샀으며, 블로그도 개설해 글을 연재하며 ‘파워 블로거’로서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후임 성 김 대사는 2008년부터 2011년까지 6자회담 특별대표를 역임하다 그 해 11월 주한 미국대사로 취임했다. 김 대사는 2017년 주필리핀 미국대사로 자리를 옮겼으나 이듬해 6월 싱가포르 1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판문점에서 최선희 당시 외무성 부상과 정상회담 조율을 위한 실무협상을 했다. ●‘같이 갑시다’ 한미 동맹 캐치프레이즈 만든 리퍼트 리퍼트 대사는 미국 민주당 상원의원 보좌관을 지내다 2008년 오바마 정부 인수팀에 합류했다. 정부 출범 후 국방장관 수석보좌관, 국방부 아시아태평양 안보담당 차관보, 국방장관 비서실장을 역임하고 2014년 11월 주한 미국대사로 취임했다. 이전 직업 외교관 출신 대사들이 ‘늘공’(늘 공무원)이었다면 리퍼트 대사는 오바마 대통령의 정치 참모로서 관직을 맡은 ‘어공’(어쩌다 공무원)인 셈이었다.리퍼트 대사는 2015년 3월 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김기종 씨에 의해 습격을 당했을 때 의연하게 대처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미국의 이미지를 제고하고 나아가 한미 동맹 강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습격 소식이 전해지자 리퍼트 대사의 수술은 물론 한미 관계에 대한 우려의 여론이 높아졌다. 리퍼트 대사는 사건 당일 수술을 마치고 트위터에 “한미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최대한 빨리 복귀합시다. 같이 갑시다!”라고 올리며 우려의 여론을 신속히 잠재울 수 있었다. 이후 ‘같이 갑시다’(Go together)는 한미 동맹의 캐치프레이즈가 돼 한미 동맹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인사말이나 건배사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문구가 됐다. 리퍼트 대사는 대사 부임 전 한국과 인연이 별로 없었지만, 부임 후 빠르게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익히며 한국민과의 거리를 좁혀나갔다. 리퍼트 대사는 한국 부임 후 갖게 된 첫째 아들에게 ‘세준’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미들 네임으로 줬고, 딸에게도 ‘세희’라는 미들 네임을 붙였다. 야구팀 두산 베어스의 팬으로 유명한 리퍼트 대사는 대사 재임 기간은 물론 퇴임 후에도 야구장을 찾아 두산을 응원하면서 ‘야구 외교’를 선보이고 있다. ●막후 외교서 공공 외교로 대사의 역할 변화했지만 해리스 대사는 2018년 2월 주호주 미국대사로 지명됐다가 세 달 후 주한 미국대사로 재지명된 뒤 7월 취임했다. 전임 리퍼트 대사가 퇴임하고 1년 6개월여 만에 공석을 메운 터라 기대도 높았던 반면, 그가 대북·대중 강경파라는 점에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추진하는 문재인 정부와 마찰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도 교차했다. 하지만 해리스 대사는 2018년 6월 상원 외교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실제 협상에 진지한지 가늠하는 차원에서 주요 (한미연합)훈련을 일시 중단할 필요가 있다”며 트럼프 정부의 대북 협상 기조에 보조를 맞췄다. 해리스 대사가 정부의 지소미아 종료 결정에 우려를 표하고 문 대통령의 남북 협력 사업 추진에 한미 협의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개인의 신념이라기보다 트럼프 정부의 기조를 대변한 것이다. 해리스 대사뿐만 아니라 전임 대사들도 한국 정부와 이견이 있는 이슈에서 항상 미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해왔다. 버시바우 대사도 재임 기간 당시 조지 W 부시 정부의 기조대로 ‘남북 경제협력의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고 말해 해리스 대사처럼 외교적 결례라는 비판을 받았다. 스티븐스 대사도 2010년 한미의 핵심 현안이자 2000년대 한국 내 반미 정서의 주요인이었던 한국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련 “(한국의) 시장이 완전히 개방되기를 바라지만 이 사안의 민감성을 잘 알고 있다”며 비록 정제된 톤이었지만 미국 정부의 입장을 명확히 전달했다.그럼에도 해리스 대사의 발언이 더욱 논란이 되는 것은 트럼프 정부가 방위비분담협상 등 한미 관계의 현안에 대해 한국 정부를 전례 없이 강하게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뉴욕타임스(NYT)는 공교롭게 한일관계가 악화 일로를 걷는 중에 해리스 대사가 부임하고, 그의 취임 후 트럼프 대통령이 방위비 분담금 인상 요구를 계속해서 밀어붙였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가 한국 정부에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번복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며 해리스 대사에게는 ‘고압적인 미국 외교관’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졌다고 진단했다. 아울러 한미 관계가 과도기를 겪는 상황에서 한국과 미국 모두 주한 미국대사의 역할을 변화한 상황에 맞게 조정하는 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이같은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한미일과 북중러가 대립하는 냉전 구도가 해체되고 한국의 국력이 급성장하면서 한미 관계가 상호 호혜적 관계로 재조정되는 가운데 주한 미국대사의 역할도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 대국민 공공 외교를 통해 한미 관계를 증진시키는 것으로 변화할 필요가 생겼다. 하지만 과거 미국대사의 한 마디에 한국 정부의 기조가 흔들렸던 경험을 겪었던 한국민은 미국대사의 발언을 정부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로 간주하며 의심의 눈초리로 볼 수밖에 없다. 미국대사들도 한국과 미국이 불평등한 관계에 있었던 역사와 한국민의 의심을 고려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발언함으로써 오해를 자초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는 “1990년대 초반까지 주한 미국대사는 주한미군사령관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지만, 냉전 이후 한국의 국력이 강화되면서 미국대사는 한미 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역할로 변화했다”고 했다. 이어 “해리스 대사를 둘러싼 논란은 대사 개인의 성향에 기인한 것도 있겠지만, 한미 정부가 변화된 양자 관계 속에서 이견을 조율하고 자신의 입장을 정제된 톤으로 발표하는 데 서툰 모습을 보이는 탓도 있다”고 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6.25 상흔 간직한 철원 대마리 역사문화관 ‘세모발자국’ 개관

    6.25 상흔 간직한 철원 대마리 역사문화관 ‘세모발자국’ 개관

    6.25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강원도 철원군 대마리 역사문화관 ‘세모발자국’이 개관했다. 철원군은 23일 철원읍 대마리 민통선 마을 안에 6.25전쟁의 상흔과 굴곡진 역사를 간직한 역사문화관 세모발자국을 전날 개관했다고 밝혔다. 세모발자국은 대마리 입주민들의 개척 역사를 기록· 보존하고 주민들에게 문화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건립됐다. 대마리 문화역사관 이름인 세모발자국은 지뢰밭 상징인 ‘세모’와 1967년부터 황무지를 개척하며 전쟁 이후 지뢰로 희생된 입주민들의 ‘발자국’을 의미해 붙여졌다. 전체 207㎡ 규모에 영상관 1곳, 전시관 3곳, 전시체험관 1곳, 마을 카페 1곳 등 6개 공간으로 꾸며졌다. 전시 공간은 대마리 입주 1세대 마을 주민들의 증언과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기획했다. 전쟁 이후 지뢰와 버려지다시피했던 척박한 땅을 피와 땀으로 일궈가는 과정을 전시물로 표현했다. 6·25전쟁 당시 철원지역 일대는 철의 삼각 전투로 인해 쑥대밭으로 변했고 대마리 뒤쪽에 위치한 백마고지에서는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쟁이 멈춘 뒤 마을 뒤편으로 비무장지대(DMZ)가 들어서는 등 북한과 대치하는 최전선으로 변하면서 민간인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으로 방치됐다. 정부는 전쟁 이후 부족한 식량문제를 해결하고 허술한 휴전선 목책 사이로 북한 간첩들이 넘어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67년 대마리에 150가구를 입주시켰다. 하지만 쑥대밭이 된 대마리는 불발탄과 지뢰가 곳곳에 널렸고 길과 수리시설이 없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다. 입주민들은 개간 과정에서 폭발물 사고로 목숨을 잃는 등 피해를 보면서도 척박한 땅을 개척해 현재 대마리는 전국 유명 쌀 생산지로 변모했다. 이현종 철원군수는 “6.25전쟁의 상처를 딛고 평화를 위해 피와 땀으로 대마리를 지켜오신 입주민의 삶을 역사문화관을 통해 되짚어 보면서 평화와 번영의 소중함을 느끼는 공간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철원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文대통령이 선택한 13편 영화에 담긴 뜻은?

    文대통령이 선택한 13편 영화에 담긴 뜻은?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카트’ ‘변호인’ ‘국제시장(2014)’ ‘암살’ ‘연평해전(2015)’ ‘판도라(2016)’ ‘재심’ ‘택시운전사’ ‘미씽: 사라진 여자(2017)’ ‘1987(2018)’ ‘기생충(2019)’ ‘천문(2020)…. 대통령의 영화 관람은 그 자체가 메시지다. ‘킬링타임용 영화’란 없다. 누구와 어떤 영화를 볼지, 어떤 정치적 메시지를 담아낼 지까지 정교하게 기획된다. 2012년말 대선캠페인 당시 문재인 후보가 ‘광해(추창민 감독)’를 보고 눈물을 닦는 모습을 담은 한 장의 사진은 지금도 회자된다. 영화가 끝난 뒤 5분 넘게 일어나지 못했던 문 후보는 소감을 묻는 질문에 “오늘은 말 못 하겠다. 감명 깊게 봤는데 눈물이 많아져 갖고…”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후 페이스북에 “목례를 올리며 예를 취하는 허균에게 떠나는 배에서 손 흔들며 웃던 하선. 아마도 그 장면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얼굴이 저절로 떠올랐던 모양입니다. 남들 보는 앞에서 수습 못 할 정도로 이렇게 울어본 적은 처음이네요”라고 평을 남겼다. 그렇게 광해는 ‘문재인의 영화’로 각인됐다.●‘문재인=세종, 장영실=조국’? 설연휴 직전 주말인 지난 19일 문재인 대통령은 ‘천문: 하늘에 묻는다(허준호 감독)’를 관람했다. ‘천문’은 표면적으로는 세종대왕(한석규)과 신분사회의 벽을 넘어 관노 출신으로는 이례적으로 종3품까지 오른 천재 과학자 장영실(최민식)을 다뤘다. 청와대는 ‘천문’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실력 있는 인재가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인정·대우받는 사회가 중요하다는 의미를 알리고, 한국적 소재를 영화화해 새해 첫 100만 관객을 돌파한 우수한 작품을 응원하기 위해 마련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명나라와 명을 추종하며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대부 세력과 각을 세우며 개혁 드라이브를 거는 세종대왕을 문 대통령으로, 개혁에 저항하는 사대부에 의해 끝내 희생되는 것으로 묘사된 장영실을 조국 전 장관에 빗대어 해석한 비평이 영화 개봉 이후 SNS(소셜네트워크) 등에서 끊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 대통령의 ‘천문’ 관람에 대한 다른 해석도 나온다. 장편영화를 기획하고 시나리오 작업을 거쳐 촬영을 마치기까지 적어도 1년 이상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국 정국’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노릇. 하지만 사대부를 대표하는 영의정(신구)이 세종을 압박하면서 “(사대부에게 위협이 되는)한글 창제를 포기하면 장영실을 살려드리겠다”는 영화 대사에서 조 전 장관의 지지자 등은 그런 컨텍스트를 읽어낸 셈이다. 실제 ‘천문’을 본 문 대통령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신년기자회견에서 조 전 장관에 대해 ‘마음의 빚’을 토로한 점에서 미뤄 추측이 가능할 뿐이다. ●2014년 이후 1년에 두편 꼴… 키워드는 메시지·눈물 과거 대선 유세를 하면서 “매달 한 번씩 영화나 연극 등을 보겠다”고 말하기도 했던 문 대통령은 정치인으로 입문한 뒤 관람이 확인된 영화만 13편에 이른다. 2014년 이후로 국한시키면 1년에 두 편꼴이다. 2014년 1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변호를 맡았던 부림사건을 다룬 ‘변호인’을 관람했다. 당시 문 대통령은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들어서 역사가 거꾸로 가고 있다. 국민들이 피와 땀으로 이룩했던 민주주의가 다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직격했다. 같은 해 11월, 참여정부 당시 이랜드 파업 사태를 다룬 ‘카트’(부지영 감독)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문 대통령은 “참여정부에는 잊을 수 없는 상처”라며 “정말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다”고 했다. 이어 “참여정부 때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을 촉진하고자 비정규직 보호법을 만들었는데, 막상 사용자들이 사내 하청 등을 이용해 빠져나가는 것을 막지 못해 비정규직 양산법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서민의 삶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뼈아픈 비판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2016년 12월 원전 재난을 다룬 ‘판도라(박정우 감독)’를 봤다.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며 눈물을 정말 많이 흘렸다”면서 “탈핵·탈원전 국가로 만들어나가자”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자유한국당과 보수언론 등은 “영화 하나 보고 탈원전 정책을 폈다”며 두고두고 공격 소재로 삼았다. 사실 관계는 다르다. 문 대통령은 18대 대선 때도 ▲신규원전 백지화 ▲수명종료 원전 가동 중단 등 탈원전 공약을 내놓은 바 있다. 20대 대선을 앞둔 2017년 2월에는 살인 누명을 쓴 사법 피해자들을 다룬 ‘재심(김태윤 감독)’을 봤다. 무대에 올라 간 문 대통령은 “과거 변호사를 할 때도 억울한 이들의 사연을 제대로 들어주려고 노력했다. 약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지를 다시 한 번 다졌다”고 했다. 인혁당 유족들이 함께 했다. ●‘국뽕’ ‘보수색채’ 영화도 관람 꼭 진보진영이나 지지자들이 공감할 만한 영화만 본 것은 아니다. ‘국제시장’이나 ‘연평해전’ 같은 의외의 선택도 있었다. 2014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영화 속 국기에 대한 경례 장면을 언급하며 애국심을 강조했던 ‘국제시장’(윤제균 감독)을 관람한 문 대통령은 “영화가 제 개인사(6·25때 흥남 철수작전으로 월남한 실향민·부산 등)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며 “보수적인 영화라든지 그런 해석은 당치 않은 것 같다. 애국주의를 강조하는 것 같은 장면이 있지만 그건 시대상이었다”고 했다. 이듬해 ‘연평해전(김학순 감독)’을 관람한 뒤에는 “장병들의 숭고한 목숨과 피로 우리 영토가 지켜졌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희생 없이 안보와 평화를 지키는 세상을 만드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치권에서는 보수와 중도층을 의식한 발언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2017년 8월 취임 후 첫 영화로는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전세계에 알린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의 부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와 함께 ‘택시운전사’를 관람했다. 문 대통령은 “광주민주화운동이 늘 광주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제 국민 속으로 확산되는 것 같다”며 “아직까지 광주의 진실이 다 규명되지 못했으며 우리에게 남은 과제”라고 강조했다. 같은 해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미씽: 사라진 여자(이언희 감독)’를 봤다. 문 대통령은 “‘사라진 여자’라는 제목도 이중적인 뜻이 있다고 느꼈는데, 실제적으론 (극중) 한매가 사라진 것인데, 의미적으로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이 아주 소외되고 있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사라졌다’는 의미도 담은 것 같다”고 소감을 전했다. 2018년 1월에는 6월 민주항쟁을 다룬 ‘1987(장준환 감독)’을 보고 또한번 눈물을 흘렸다. 문 대통령은 “가장 마음에 울림이 컸던 대사가 엄혹했던 민주화 투쟁 시기 사람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 였다”면서 “이 영화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고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인 배은심 여사, 고 박종철 열사의 형인 박종부 씨 등이 함께했다.●역대 대통령의 영화 역대 대통령이 ‘직관’한 영화와 감상평을 보면 그의 성향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1993년 5월 청와대 춘추관으로 임권택 감독과 배우 김명곤·오정해 씨를 초청해 ‘서편제’를 봤다. 그때만 해도 대통령의 극장행은 상상하기 어렵던 시절. YS는 영화를 본 뒤 “이 정도면 세계 어디에 내놔도 되겠다. 문화대국으로 가는 것도 신한국건설의 하나”라고 했다. 대선 패배 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다가 돌아온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YS가 서편제를 본 두 달 뒤쯤 임 감독과 오씨, 박지원 당시 대변인 등과 함께 극장을 찾았다. DJ는 “서편제가 나타내고자 하는 우리 민족의 한은 원한이나 절망이 아니라 무언가를 이루어내려는 몸부림이다. 오랜 역사를 통해서도 중국화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 한 때문이었다”며 차별화된 관점을 드러냈다. 재임 중 일반상영관을 찾은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처음이다. 서민적 캐릭터만큼이나 다양한 스펙트럼의 영화를 봤고, 메시지 있는 영화만 고집하지도 않았다. ‘왕의 남자’, ‘맨발의 기봉이’ ‘길’ ‘밀양’ ‘괴물’ 등을 선택했다. 특히 2007년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화려한 휴가’를 관람한 뒤 “가슴이 꽉 막혀서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 독립영화로는 드물게 흥행신화를 쓴 ‘워낭 소리’ 등을 봤다. ‘우생순’에 보고서는 “메달 색깔이 문제가 아니라 도전 정신을 갖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다운 평을 내놓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당선인 시절 ‘뽀로로 극장판’을 비롯해 ‘명량(2014년)’과 ‘국제시장(2015)’ 등을 관람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이한용의 구석기 통신] 그해 겨울은 추웠다네

    [이한용의 구석기 통신] 그해 겨울은 추웠다네

    표독스럽게 추웠다. 박완서는 그의 소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에서 수지가 동생 오목이의 손을 놓고 헤어지던 그날의 추위를 이렇게 표현했다. 표독스러울 만치 추웠던 이 소설 속 겨울 그날은 6·25전쟁 1·4 후퇴 때의 어느 날이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부두가 등장하는 유행가 가사에서도 그해 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짐작할 수 있다. 추웠던 그해 겨울을 작가는 역설적으로 따뜻했네라고 표현했는지도 모르겠다. 올해 1월은 기상청 관측 사상 처음으로 서울에서 눈 없는 겨울이 기록될 가능성이 예상된다고 한다.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서울의 한파 일수는 0일, 적설량은 0㎝를 기록 중이기 때문이라는데 한파일은 아침 최저기온이 영하 12도 이하인 날이라고 하니 표독스럽기는커녕 추위의 근처에도 못 가 보는 겨울 같지 않은 따뜻한 겨울날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거창한 그래프를 들이대며 지난 수십 년간의 기후변화를 설명하지 않더라도 올해 겨울의 싱거운 추위는 많은 사람에게 기후변동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뭔가 정상은 아니라는 막연한 불안감도 가지게 됐다. 지구에 생명체가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많게는 95%의 생명체가 절멸하는 대멸종 사건이 5번 있었다고 한다. 이 대멸종의 근본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진행 중이지만 급작스러운 기후변동이 원인이었다는 데는 큰 이견이 없는 것 같다. 화산이 폭발했건, 운석이 충돌했건 대기와 바닷물의 순환에 이상이 생기면서 기후변동이 생겼고 결국 생명체가 살 수 없을 정도로 추워지거나 더워지는 기후 변화의 과정에서 적응하지 못한 생명체는 결국 멸종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대멸종이다. 하지만 운석 충돌로 인한 기후변화로 공룡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가장 최근의 대멸종인 백악기 말의 대멸종 사건도 약 6500만년 전의 일이고 보니 마치 신화 속의 전설처럼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최근 들어 산업혁명 이후 인류의 무분별한 자원개발과 환경파괴로 인해 인류에 의한 여섯 번째 대멸종이 진행되고 있다는 경고가 계속되고 있지만, 여전히 그 심각성에 대한 인식은 부족하다. 인류가 두 발로 일어서고 석기를 만들면서 한창 진화의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할 무렵부터 인류 생존의 관건 역시 변화하는 환경에 어떻게 발 빠르게 적응해 나가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비교적 잘 적응해 왔던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유난히 따뜻한 이번 겨울 이제는 인간 스스로가 자신들이 살아가는 환경을 파괴하고 수많은 생명체의 멸종을 재촉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경고를 실감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 같다. 유리창에 두껍게 낀 성에를 입김으로 불며 손톱글씨를 쓰던 그 쨍한 추억을 소설 속에서나 느낄 수 있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채찍으로 때리는 듯한 찬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표독스러운 겨울 추위를 만나고 싶다.
  • 평화 기원하는 佛心… 휴전선 너머로 전해질까

    평화 기원하는 佛心… 휴전선 너머로 전해질까

    한국 불교 맏형 격인 조계종이 새해 벽두 ‘대북 교류’를 화두로 던져 불교계 안팎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이 지난 15일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파격적인 남북 교류 방침을 전격 선언했기 때문이다. 판문점에서 남북 종교인이 함께하는 평화 기원대회를 연다고 밝힌 데 이어 장안사·유점사 등 북한 지역 사찰의 공동 복원을 북측에 제의할 뜻을 비쳤다. 그런가 하면 남한이 보유한 북한 사찰 문화재를 원장소로 되돌려 줄 반환 의사도 처음 밝혀 귀추가 주목된다.원행 스님이 오는 6월 개최를 밝힌 판문점 기원대회가 가장 이목을 끈다.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임진각에서 평화 기원 범국민 기원대회를 열겠다는 것이다. 이 기원대회와 관련해선 북측 종교인들을 초청하고 남측의 모든 종교인과 시민사회 등 각계각층의 참여도 제안하겠다고 밝혀 그동안 물밑에서 추진해온 것으로 보인다. 남측의 종교지도자들이 금강산을 둘러보고 평양에서 북측 종교인들을 만나 교류 협력을 논의한 적은 있지만 판문점에서 남북 종교인들이 함께하는 대규모 행사를 연 적은 없어 관심이 높다. 금강산 지역의 장안사·유점사 공동 발굴 복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북강원도 고성군의 유점사는 금강산의 전체 사찰을 관장한 곳이고 내금강 초입의 회양군 장안사도 번성했지만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와중에 소실돼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이 가운데 유점사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민간 차원에서 처음 방북한 천담 스님이 북측과 복원을 협의해 고성군과 관련 업무협약을 맺기도 했다. 남북 민간 교류의 물꼬를 틀 수 있는 핵심 장소로 여겨져 왔던 두 사찰을 이미 남북이 공동 복원한 신계사의 경험을 살려 복원해 놓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불교계에 따르면 현재 북한 지역에는 60여개 사찰과 300여명의 스님, 1만여명의 불자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장안사와 유점사의 남북 공동 발굴 복원이 성사되면 남북 불교계의 교류가 봇물 터지듯 급물살을 탈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금강산 신계사의 경우 남북이 4년에 걸쳐 공동 복원 작업을 한 끝에 2007년 완공됐다. 완공 이후 남북 불교계는 신계사 템플스테이 건물 건립사업까지 논의했지만 현재는 모두 막혀 있다. 원행 스님은 이와 맞물려 남측이 보유하고 있는 북한 사찰 문화재를 북한 원소장처로 되돌려 주겠다고 제의해 눈길을 끈다. 원행 스님은 2018년 1월 일본에서 환수한 평양 만경대 법운암 칠성도를 북측에 전달할 예정이라고 전격 발표했다. 남북 교류와 관련해 북측이 크게 관심을 가질 만한 대목이다. 여기에 북측의 산림 복원을 위해 조계종단의 사찰림을 활용하는 공동 사업도 함께 제안할 것으로 알려졌다. 새해 벽두 조계종의 파격적인 화두를 놓고 불교계의 반응은 기대와 회의가 엇갈린다. 일단 꽉 막힌 남북 경색 국면에서 공염불의 선언 차원에 그칠 것이란 반응이 적지 않다. 하지만 조계종은 낙관적인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원행 스님은 기자회견에서 “보이지 않는 채널을 통해 많은 교류를 해 왔다”며 “남북문제에 있어 적극적으로 불교계가 앞장서겠다”는 뜻을 강력하게 비쳤다. 조계종 관계자도 이와 관련해 “지난해 북측에 직접 가서 신계사 답사를 했고 템플스테이를 할 수 있는 부분 등 여러 방면으로 유익한 대화를 나눴다”고 귀띔했다. 최근 새롭게 일고 있는 정부의 대북 정책도 조계종의 대북 교류 선언에 힘을 보태는 추세다. 개별관광처럼 국제 제재에 저촉되지 않는 교류는 적극 추진하겠다는 정부의 ‘남북 선행론’에 한번 기대해 보자는 시선이 적지 않다. 원행 스님은 이과 관련, “지금의 한반도 정세는 결코 우리 민족의 뜻대로만 진행되도록 놓아두지 않고 있다”며 “그럼에도 먼 옛날 묘향산과 금강산에서, 지리산과 가야산에서 우리 민족의 스승들이 그랬듯이 이제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뎌야 할 때라고 밝혔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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