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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총리 “공적 마스크 구매량, 다음주부터 1인당 3매로 확대

    정세균 국무총리는 24일 코로노19 사태로 인해 시행 중인 마스크 5부제와 관련,“다음 주에는 공적마스크 구매량을 1인당 3매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정 총리는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주재한 코로나19 대응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앞으로 경제활동이 증가하면 마스크가 더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정 총리는 “마스크 수급은 공적 마스크 5부제가 정착되면서 많이 안정됐다”며 “마스크가 꼭 필요한 이웃을 위해 양보와 배려의 미덕을 발휘해 준 국민 여러분 덕분으로,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고 했다. 정 총리는 이어 “아직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어려운 이웃 국가를 돌아볼 여유도 생겼다”며 “우선 올해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를 지켜준 해외 참전용사를 위해 총 100만장의 마스크를 공급하겠다”고 언급했다. 정 총리는 “향후 마스크 수급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된 수요처에 대한 해외반출은 국내 공급에 문제가 없는 범위 내에서 예외적으로 허용토록 하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정 총리는 “27일부터는 자가격리 위반자 관리에 ‘안심밴드’를 도입하고 앱 기능도 고도화할 예정”이라며 “착용을 거부하는 위반자에 대해서는 위반행위에 대한 처벌은 물론 별도시설에 격리해 관리의 실효성을 높이겠다”고 강조했다. 정 총리는 또한 “오늘 ‘생활 속 거리두기’의 분야별 세부지침을 논의하고 이를 일반에 공개, 의견을 수렴하고 보완하겠다”며 “코로나19 이후의 삶은 결코 예전과 같을 수 없으며 이런 변화된 환경에서 우리가 일상생활과 경제활동을 영위하기 위해 지켜야 할 사항을 분야별로 정리했다”고 전했다. 정 총리는 “어떻게 보면 없던 규제가 생기는 것이라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개인과 공동체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생활규범들로, 지난 위기를 극복했던 것처럼 높은 시민의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질서가 정착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최광숙 선임기자 bori@seoul.co.kr
  • 정 총리 “마스크, 다음주부터 1인당 3매씩…해외 반출 허용”

    정 총리 “마스크, 다음주부터 1인당 3매씩…해외 반출 허용”

    “해외 참전용사에 마스크 100만장”코로노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로 인해 시행하고 있는 마스크 5부제와 관련, 앞으로는 공적 마스크를 1인당 3매씩 살 수 있게 됐다. 정세균 국무총리가 24일 “다음 주에는 공적마스크 구매량을 1인당 3매로 확대하겠다”면서 “마스크 해외 반출은 국내 공급에 문제가 없는 범위 내에서 예외적으로 허용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정 총리는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주재한 코로나19 대응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회의에서 “앞으로 경제활동이 증가하면 마스크가 더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며 이렇게 말했다. 정 총리는 “마스크 수급은 공적 마스크 5부제가 정착되면서 많이 안정됐다”면서 “아직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어려운 이웃 국가를 돌아볼 여유도 생겼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올해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를 지켜준 해외 참전용사를 위해 총 100만장의 마스크를 공급하겠다”고 말했다.“27일부터 자가격리 위반자에 안심밴드”위반시 처벌·별도시설 강제 격리 조치 정부가 마스크 대란을 해결하기 위해 지난달 9일부터 1인당 마스크 구매량을 2매로 제한하는 마스크 5부제를 시행해온 가운데 최근 마스크 수급 상황이 다소 안정화됐다는 판단 아래 이러한 조치를 한 것으로 보인다. 정 총리는 “27일부터는 자가격리 위반자 관리에 ‘안심밴드’를 도입하고 앱 기능도 고도화할 예정”이라면서 “착용을 거부하는 위반자에 대해서는 위반행위에 대한 처벌은 물론 별도시설에 격리해 관리의 실효성을 높이겠다”고 강조했다. 정 총리는 또 “‘생활 속 거리두기’의 분야별 세부지침을 논의하고 이를 일반에 공개, 의견을 수렴하고 보완하겠다”면서 “코로나19 이후의 삶은 결코 예전과 같을 수 없으며 이런 변화된 환경에서 우리가 일상생활과 경제활동을 영위하기 위해 지켜야 할 사항을 분야별로 정리했다”고 전했다.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국방부 “DMZ 국군 전사자 유해 4점 발굴”

    국방부 “DMZ 국군 전사자 유해 4점 발굴”

    6·25 전쟁에서 희생된 비무장지대(DMZ) 국군 전사자의 유해 4점이 추가로 발견됐다. 국방부는 24일 “국방부는 지난해에 이어 지난 20일부터 남북공동 유해발굴을 위한 사전 준비차원에서 화살머리고지일대 우리측 지역에서 유해발굴을 진행하고 있다”며 “이날까지 화살머리고지 일대에서 발굴된 유골은 총 4점”이라고 밝혔다. 지난 21일 지표굴토작업 진행간 두개골 1점과 골반뼈 1점이 발견된 데 이어 지난 23일 지뢰탐지간 지표상에서 두개골 1점과 팔뼈 1점이 식별돼 정밀발굴이 진행 중이다. 이와 함께 무전기, M1탄창·탄약 등 307점의 유품들도 발굴됐다. 국방부는 2018년 남북이 체결한 9·19 군사합의 일환으로 DMZ 화살머리고지 남측 지역에서 유해발굴을 진행 중이다. 다만 북한은 지난해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여파로 유해발굴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 현재 경색된 남북관계에 따라 향후에도 북한의 참여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전망이 나온다. DMZ 내에 묻힌 국군 전사자의 유해는 1만여구로 추정되고 있다. 국방부는 “남북공동유해발굴을 위한 사전 준비차원에서 진행되는 지뢰제거 및 유해발굴간 발견되는 유해와 유품에 대해 최고의 예우를 다해 수습할 것”이라며 “마지막 6·25전쟁 전사자 한 분까지 사랑하는 가족과 조국의 품으로 모실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예정”이라고 강조했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반일감정 덕(?)에 탄생한 ‘한국형 전투식량’의 비밀

    반일감정 덕(?)에 탄생한 ‘한국형 전투식량’의 비밀

    소고기 고추장 비빔밥, 김치 비빔밥, 카레 비빔밥, 해물 비빔밥, 닭고기 비빔밥…. ‘집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이 음식들은 바로 ‘전투식량’입니다. 최근 출시된 전투식량은 일반 즉석식품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품질이 높아졌습니다. 심지어 물이 없어도 ‘발열팩’으로 데워 먹을 수 있습니다. 6·25 전쟁 때만 해도 전투식량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주먹밥’이 곧 전투식량이었습니다. 물론 미군이 2차 세계대전부터 보급한 ‘C레이션’이 있었지만, 우리 입맛엔 맞지 않았습니다. ‘한국인의 밥상’에 대한 갈구는 베트남전까지 이어졌습니다. 한국군은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8년간 베트남전에 파병됐습니다. 이 긴 기간을 미군 전투식량으로만 버텼다면 아마 군인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을 겁니다. 그래서 이 시기 ‘한국형 전투식량’(K레이션) 개발이 본격화됐습니다.●베트남전이 만든 ‘한국형 전투식량’ 23일 이신재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이 작성한 ‘베트남전쟁기 한국형 전투식량 개발과정 고찰’ 논문에 따르면 베트남전 파병 첫 3개월 동안 우리 군은 쌀밥을 맛보지 못하는 ‘지옥’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파병 초기 미군으로부터 전투식량을 보급받았지만, 대다수 병사들은 제대로 된 사용법조차 몰랐습니다. 참고로 당시 미군 전투식량은 냉장시설이 완비된 곳에서 사용하는 신선식품 조리식 ‘A레이션’, 취사장비는 있지만 냉장시설이 없을 때 먹는 통조림 형태의 ‘B레이션’, 취사가 불가능한 지역에서 먹는 즉석식품 ‘C레이션’ 등 3종류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한 해병대 대대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취사병들이 B레이션 깡통 속 내용물을 요리할 줄 몰라 처음에는 솥에 넣고 물을 부어 ‘꿀꿀이죽’처럼 먹었다. 맛이 시금털털하고 괴상했다. 처음엔 엉망이었지만 차차 나아졌다”고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한국군 사령관이었던 채명신 장군의 요청으로 남베트남의 쌀이 보급됐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김치’였습니다.●“김치 보급 문제 美 상원 청문회에도 등장” 채 전 사령관은 회고록에서 “월남쌀로 밥을 짓고 C레이션으로 찌개나 국을 끓여 먹이니 장병들의 입맛이 살아나 살이 찌는 현상까지 생겼지만 한계가 있었다”며 “내가 부대를 방문할 때마다 듣는 건의사항은 무기나 탄약, 한국에서는 귀했던 휘발유 같은 보급품이 아니라 ‘된장, 고추장, 김치가 먹고 싶다’는 요청이었다”고 토로했습니다. C레이션에 질려버린 일부 장병들은 추수가 끝난 밭에서 그 매운 ‘베트남 고추’를 따 섞어 먹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김치 문제는 미 상원 청문회에 등장할 정도로 크게 이슈가 됐습니다. `채 전 사령관의 간곡한 요청으로 미 군사원조사령부는 ‘한국형 C레이션’을 새로 보급했습니다. 밥, 김치, 꽁치 통조림이 포함돼 맛도 괜찮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또 있었습니다. 전투식량을 하와이에서 일본인들이 만들어 납품한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한국 고유의 음식인 김치를, 일본 사람이 만들어 납품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1965년 한일협정의 여파로 베트남전 파병시기는 국민들의 반일 감정이 매우 높을 때였습니다. 이에 채 전 사령관은 정부에 ‘국산 전투식량’을 개발해 달라고 요청하게 됩니다. 난관이 이어졌습니다. 시제품 통조림에선 시뻘건 녹물이 나와 도저히 음식을 먹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열대 기후에도 버틸 수 있는 통조림 제조기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미 육군 시험소 분석 결과 미군이 최초 보급한 한국형 C레이션도 미군 C레이션 중량의 절반이었고 칼슘, 비타민 등의 영양소가 기준치에 미달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14개 업체를 동원해 7개월간의 노력 끝에 1967년 3월 드디어 미군 검증을 통과한 제품이 나왔습니다. 그해 10월 한미 양국은 한국에서 개발한 ‘K레이션’을 납품하는 내용의 합의서를 작성하게 됩니다. K레이션은 한국인 기호를 고려해 K1부터 K6까지 6가지 종류로 구성됐습니다. 흰밥과 김치, 멸치 파래무침, 돼지고기 조림, 소고기 조림, 오징어 조림, 꽁치 조림, 두부전, 콩자반, 장조림, 소시지 조림 등 반찬 10가지가 포함됐습니다. 여기에 인삼차, 가루고추장, 설탕, 소금, 껌, 담배, 휴지, 성냥 등의 부속품도 포함됐습니다. 한국형 전투식량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입니다.●베트남전 기간 5639만 달러 수출 달성 한미 정부는 1967년 12월부터 1968년 6월까지 7개월분 709만 달러, 이후 1년 단위로 해마다 1000만 달러가 넘는 전투식량 공급 계약을 맺었습니다. 한국 장병들이 먹는 음식이었지만, 비용은 미국이 부담했기 때문에 우리가 미국에 전투식량을 ‘수출’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김치를 그리워하는 장병들의 원성에 마음이 급했던 정부는 위문품 형태로 시제품 15만 상자를 구입해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이 ‘성탄절 선물’은 1966년 12월 배에 실렸고 다음해 2월 처음으로 장병들에게 보급됐습니다. 이후 장병들은 하루 2끼는 미군 전투식량을, 1끼는 한국 전투식량을 먹게 됐습니다. 심지어 남베트남 쌀까지 보급돼 식단 열량이 미군을 능가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아도는 쌀을 베트남 민간인에게 보급할 정도였습니다. 베트남 파병 장병에게 우선 공급됐던 K레이션은 1971년부터 한국에도 보급됐습니다. 전투식량은 해외 수출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베트남 전쟁 시기 군납을 통한 외화수입은 1억 8000만 달러 규모였는데, 그중 31.3%인 5639만 달러가 K레이션 수출로 달성한 것이었습니다. 1968년 1000만 달러 이상 수출한 업체가 국내에 2곳밖에 없을 정도였으니,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던 겁니다. 지금은 일반 마트에서도 제품을 접할 수 있을 정도로 전투식량이 흔해졌습니다. 진공건조 기술을 적용하고 물만 부으면 일반 비빔밥처럼 즉시 먹을 수 있어 여행할 때 이용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제품과 입맛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지만, 편의성만큼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겁니다. 불과 50년의 역사로 이런 성과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정부와 군, 업체가 경쟁력 있는 제품을 계속 개발해 K레이션이 세계적인 전투식량으로 발전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국정 안정화 발판 마련… ‘협치’ 내세워 경제위기 극복 매진할 듯

    중도개혁 인사에 과감한 ‘내각 문’ 열수도 남북 경색국면 탈피 대화노력도 본격화 청와대는 15일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비례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과 함께 ‘단독 과반’을 확보할 것이 확실시되는 출구조사 및 초반 개표결과가 나온 데 대해 공식반응을 삼갔다. 그럼에도 임기 후반기 안정적 국정운영의 디딤돌이 놓였다는 점에서 고무적인 분위기다. 대통령의 임기중반에 치러지는 총선은 통상 중간평가의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이번 총선은 코로나19 대응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이례적으로 50%를 훌쩍 웃돈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에 기대 여당이 승리했다는 점에서 당분간 청와대의 ‘국정그립’은 굳건할 것으로 보인다. 총선 결과에 대한 문 대통령의 메시지가 나오는 시점은 불투명하지만, 여당의 ‘단독 과반 달성’이라는 성적표에도 겸허하고 낮은 자세를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2018년 6월 지방선거 압승 이후 문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등골이 서늘해지는 두려움을 느꼈다”고 말했던 것처럼 ‘더 잘하라’는 채찍질로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인 셈이다. 청와대는 코로나19와 이에 따른 경제위기 극복에 매진하는 것은 물론 변화된 국회 지형을 바탕으로 각종 개혁과제를 ‘입법’의 뒷받침 속에 차질 없이 추진하는 데 역점을 둘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 이전에도 적신호였던 글로벌 경기침체의 여파는 하반기에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제2, 제3의 추경은 물론 생존의 위기에 빠진 국민과 기업들을 돕고, 경기회복을 위한 조치를 적시에 취하려면 야당과의 대화와 타협이 절실하다. 겸허하고 낮은 자세는 담대한 협치 구상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거론된다. 이번 총선에서 사실상 제3지대가 사라진 만큼 중도개혁 성향의 인사들에게 과감하게 내각의 문을 개방할지도 관심거리다. 여권 고위관계자는 “청와대도 자신감을 가지고 담대한 협치 구상을 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남북관계 경색 국면을 탈피하기 위한 대화 노력도 본격적으로 모색될 것으로 보인다. 올해는 6·25 70주년과 9·19 평양남북정상회담 2주년 등 남북관계의 역사적인 모멘텀들이 적지 않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문화재청, 비무장지대 6·25전사자 유품 보존처리 지원한다

    문화재청, 비무장지대 6·25전사자 유품 보존처리 지원한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국방부가 시행한 강원도 철원군 화살머리고지 일대 비무장지대(DMZ) 내 6·25전사자 유해 발굴 현장에서 수습된 유품 544점의 보존처리를 지원한다고 10일 밝혔다. 국방부는 남북 간 체결된 ‘역사적인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에 따라 남북공동 유해발굴구역으로 선정된 철원 화살머리고지의 기초 유해 발굴 작업에서 유골 2030점과 화기, 탄약, 전투장구, 개인유품 등 총 71종 6만 7476점의 유품을 발굴했다. 국방부는 그동안 유품에 대한 보존처리를 자체 시행해왔으나 발굴지역이 넓어짐에 따라 보존처리가 지연되면서 지난해 11월 관계기관 협의회를 통해 문화재청에 유품 보존처리에 대한 협업을 요청했다. 문화재청은 기존 수습 유품 중 전시·교육·연구자료 등으로 활용 가치가 높은 69건 544점에 대한 보존처리를 우선 지원하기로 했다. 다음 달까지 국방부로부터 대상 유품들을 인계받아 문화재청 소속기관인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 전달해 연내 보존처리를 완료할 예정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화기류 등 총 68건 384점을, 한국전통문화대학교는 탄약류 1건 160점의 보존처리를 하게 된다.강원도 대마리 일대에 위치한 철원 화살머리고지는 1953년 국군과 유엔군으로 참전한 프랑스군이 중공군과 치열하게 싸운 격전지였다. 이 지역의 유해발굴은 6·25 전쟁 이후 68년 만에 이뤄진 최초의 비무장지대 유해발굴 사례로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 문화재청은 앞으로도 국방부와 함께 철원 화살머리고지 유해발굴 현장 유품 수습 지원, 유품 보존처리 지원 확대, 보존처리 관련 기술 자문 등 순국선열에 대한 국가적 책무를 실천하고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를 위한 협력을 지속해서 확대해나갈 계획이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씨줄날줄] 중국인 출입국자 ‘제로’/박록삼 논설위원

    [씨줄날줄] 중국인 출입국자 ‘제로’/박록삼 논설위원

    한국에서 중국은 일본만큼이나 가깝고도 먼 나라다. 유교적 가치를 공유하며 중국과는 주로 사대관계를 유지했지만, 백제·신라·고구려 등 삼국시대는 물론 고려와 조선을 이어 오면서 필요하다면 전쟁도 불사했던 사이다. 과거 한반도의 집권세력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독자성을 지키려고 노력해 왔다. 근현대에는 상하이를 시작으로 충칭까지 이어지는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국민당의 장제스 정부가 지지하며 연대했던 경험도 있다. 1949년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건국한 뒤의 관계는 달라졌다. 냉전기에 6·25전쟁이란 열전을 거친 한반도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은 한국 정부로서는 멀리해야만 했던 나라였다. 민간 일부에서는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의 이념과 철학·가치를 실천하는 사회로 동경하기도 했으나 ‘문화대혁명’ 등을 지켜보며 불안해했다. 이념 대결의 시대가 저물어 가던 1988년 노태우 정부는 이른바 ‘북방정책’을 발표했다. 중국, 러시아 등 사회주의 국가와도 교류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1992년 8월 24일 한국은 중국과 정식 국교를 수립했다. 중국은 1950년 한국전쟁에서 비공식적으로 ‘항미원조전쟁’을 함께한 혈맹 북한에 대한 리스크를 감수했다. 한국은 중화민국인 대만과 국교단절을 전제로 절차를 진행했다. 일중 국교 재개가 1972년, 미중 국교 재개가 1979년인 점을 감안하면 최대 20년이 늦은 결정이었다. 동북아 질서는 본격적으로 새롭게 정립됐다. 이념의 장벽도, 국가의 협애함도 모두 뛰어넘는 경제적 이익 공동체가 동북아에서 탄생한 것이다. 1992년 27억 달러에 불과하던 한국의 대중(홍콩 포함) 수출액은 2017년 현재 17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이는 수출총액의 25% 안팎이다. 실사구시적 경제 관계가 정립됐음을 뜻한다. 한국 정부는 외교안보적으로는 한미 동맹을 중심으로, 경제적으로는 중국과의 관계를 도외시할 수 없게 됐다. 그러나 코로나19가 한순간에 바꿔 놓았다. 지난 4일 한국에 들어오거나 나간 중국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28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난해 말까지 한국에 들고난 중국인은 하루 평균 3만 3000명이었다. 한국은 후베이성을 제외하고 중국발 항공을 봉쇄한 적이 없으니, 물론 일시적 기록에 불과할 것이다. 국경봉쇄가 바이러스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 이탈리아와 미국, 이스라엘 등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 국가 단위로 살 수 없음 또한 명백해졌다. 다만 코로나19가 언젠가 종식된다 해도 감염에 대한 두려움이 민간의 문화교류 자체를 막지 않을까 염려된다. youngtan@seoul.co.kr
  • 한국을 사랑한 美 용사, 부산 땅에 묻히다

    한국을 사랑한 美 용사, 부산 땅에 묻히다

    18세였던 1950년에 6·25 전쟁 참전 한국서 3번 복무… 한국인 부인과 결혼 부산서 생애 마지막 보내다 88세 별세한국을 사랑했던 해외 6·25 참전용사가 한국땅에서 영면한다. 국가보훈처는 7일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에서 미국 6·25 참전용사인 보이드 와츠의 안장식이 개최된다고 6일 밝혔다. 와츠는 18세였던 1950년 12월 6·25 전쟁에 참여해 1952년 1월까지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당시 그가 속한 부대는 대구지역 다리를 폭파해 적의 남하를 저지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강행군 이후 극심한 추위로 신장 질환이 악화해 부산에 있는 스웨덴 병원에 입원했으며 1952년 1월 일본으로 후송된 뒤 귀국했다. 참전 이후 공을 인정받아 ‘한국전쟁 종군기장’과 ‘유엔 종군기장’을 받았다. 6·25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그와 한국의 인연은 계속됐다. 와츠는 1957년 다시 입대해 경기 의정부 통신대대에 배치됐다. 이어 미국, 독일 등에서 복무한 뒤 한국에서 세 번째 복무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 1970년 전역했다. 1991년 약 20년 만에 다시 부산을 방문했을 당시 “새로운 세상이 된 한국의 발전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한국인 부인을 만나 가정을 꾸릴 만큼 한국을 사랑한 그는 2014년 아내와 함께 부산으로 돌아와 생애 마지막을 보내다가 지난 3월 8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이번 안장식에는 부인과 아들 등 유가족과 권율정 부산지방보훈청장, 대니얼 게닥트 부산 미국영사관 선임영사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유엔군사령부 의장대의 경건한 의식으로 개회사, 추모사, 조총, 조곡 연주, 안장, 헌화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유엔 참전용사의 부산 유엔기념공원 사후 개별 안장은 이번이 11번째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기무치’는 도저히 못 먹겠다”…‘반일’로 탄생한 전투식량 [밀리터리 인사이드]

    “‘기무치’는 도저히 못 먹겠다”…‘반일’로 탄생한 전투식량 [밀리터리 인사이드]

    베트남전, 초기 3개월간 미군 C레이션 제공“한국음식 그립다” 불만에 ‘한국형 C레이션’‘일본인 생산’ 김치 비판여론…K레이션 개발베트남 군납 수출 30% 차지…외화벌이 기여소고기 고추장 비빔밥, 김치 비빔밥, 카레 비빔밥, 해물 비빔밥, 닭고기 비빔밥…. ‘집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이 음식들은 바로 ‘전투식량’입니다. 최근 출시된 전투식량은 일반 즉석식품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품질이 높아졌습니다. 뜨거운 물만 부으면 한 끼 식사로 충분한 밥상이 차려집니다. 물을 끓이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발열팩’이 포함된 제품으로 데워 먹을 수도 있습니다. 6·25 전쟁 때만 해도 전투식량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주먹밥’이 곧 전투식량이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은 전투를 마친 뒤 참호에서 늘 ‘따뜻한 밥 한 끼’를 떠올렸고, 주린 배를 움켜쥐고 전투에 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미군이 2차세계대전부터 보급한 ‘C레이션’이 있었지만, 우리 입맛엔 맞지 않았습니다. ‘한국인의 밥상’에 대한 갈구는 베트남전까지 이어졌습니다. 한국군은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8년간 베트남전에 파병됐습니다. 이 긴 기간을 미군 전투식량으로만 버텼다면 아마 군인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을 겁니다. 그래서 이 시기 ‘한국형 전투식량’(K레이션) 개발이 본격화됐습니다. ●베트남전 파병으로 개발한 ‘한국형 전투식량’ 한국형 전투식량 시초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을 뿐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된 적이 없습니다. 참전자의 회고록이나 사료 등으로 조금씩 알려졌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신재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이 올해 ‘베트남전쟁기 한국형 전투식량 개발과정 고찰’이라는 제목의 첫 논문을 냈습니다. 5일 이 논문을 바탕으로 김치 등 한국음식이 어떻게 참호 속 군인들의 밥상에 올라왔는지 되짚어보려 합니다.베트남전 파병 첫 3개월 동안 우리 군은 쌀밥을 맛보지 못하는 ‘지옥’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파병 초기 미군으로부터 전투식량을 보급받았지만, 대다수 병사들은 제대로 된 사용법조차 몰랐습니다. 참고로 당시 미군 전투식량은 냉장시설이 완비된 곳에서 사용하는 신선식품 조리식 ‘A레이션’, 취사장비는 있지만 냉장시설이 없을 때 먹는 통조림 형태의 ‘B레이션’, 취사가 불가능한 지역에서 먹는 즉석식품 ‘C레이션’ 등 3종류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한 해병대 대대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취사병들이 B레이션 깡통 속 내용물을 요리할 줄 몰라 처음에는 솥에 넣고 물을 부어 ‘꿀꿀이죽’처럼 먹었다. 맛이 시금털털하고 괴상했다. 처음엔 엉망이었지만 차차 나아졌다”고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한국군 사령관이었던 채명신 장군의 요청으로 남베트남의 쌀이 보급됐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김치’였습니다. ●“휘발유보다 더 귀한 고추장·김치를 달라” 채 전 사령관은 회고록에서 “월남쌀로 밥을 짓고 C레이션으로 찌개나 국을 끓여 먹이니 장병들의 입맛이 살아나 살이 찌는 현상까지 생겼지만 한계가 있었다”며 “내가 부대를 방문할 때마다 듣는 건의사항은 무기나 탄약, 한국에서는 귀했던 휘발유 같은 보급품이 아니라 ‘된장, 고추장, 김치가 먹고 싶다’는 요청이었다”고 토로했습니다. C레이션에 질려버린 일부 장병들은 추수가 끝난 밭에서 그 매운 ‘베트남 고추’를 따 섞어 먹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김치 문제는 미 상원 청문회에 등장할 정도로 크게 이슈가 됐습니다. 채 전 사령관의 간곡한 요청으로 미 군사원조사령부는 한국 음식으로 구성된 ‘한국형 C레이션’을 새로 보급했습니다. 밥, 김치, 꽁치 통조림이 포함돼 맛도 괜찮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또 있었습니다. 전투식량을 하와이에서 일본인들이 만들어 납품한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한국 고유의 음식인 김치를, 일본 사람이 만들어 납품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1965년 한일협정의 여파로 베트남전 파병시기는 국민들의 반일 감정이 매우 높을 때였습니다. 이에 채 전 사령관은 정부에 통조림 형태의 ‘국산 전투식량’을 개발해 달라고 요청하게 됩니다.군납업체인 ‘대한종합식품’이라는 회사가 만들어지고 시제품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다시 난관이 이어졌습니다. 시제품 통조림에선 시뻘건 녹물이 나와 도저히 음식을 먹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열대 기후에도 버틸 수 있는 통조림 제조기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 육군 시험소 분석 결과 미군이 최초 보급한 한국형 C레이션도 미군 C레이션 중량의 절반이었고 칼슘, 비타민 등의 영양소가 기준치에 미달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14개 업체를 동원해 7개월간의 노력 끝에 1967년 3월 드디어 미군 검증을 통과한 제품이 나왔고, 그 해 10월 한미 양국은 한국에서 개발한 ‘K레이션’을 납품하는 내용의 합의서를 작성하게 됩니다. K레이션은 한국인 기호를 고려해 K1부터 K6까지 6가지 종류로 구성됐습니다. 흰밥과 김치, 멸치 파래무침, 돼지고기 조림, 쇠고기 조림, 오징어 조림, 꽁치 조림, 두부전, 콩자반, 장조림, 쏘세지 조림 등 반찬 10가지가 포함됐습니다. 여기에 인삼차, 가루고추장, 설탕, 소금, 껌, 담배, 휴지, 성냥 등의 부속품도 포함됐습니다. 한국형 전투식량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입니다. ●5600만 달러 수출 기여…전투식량 발전 ‘초석’ 한미 정부는 1967년 12월부터 1968년 6월까지 7개월분 709만 달러, 이후 1년 단위로 해마다 1000만 달러가 넘는 전투식량 공급 계약을 맺었습니다. 한국 장병들이 먹는 음식이었지만, 비용은 미국이 부담했기 때문에 우리가 미국에 전투식량을 ‘수출’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김치를 그리워하는 장병들의 원성에 마음이 급했던 정부는 위문품 형태로 시제품 15만 상자를 구입해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이 ‘성탄절 선물’은 1966년 12월 배에 실렸고 다음해 2월 처음으로 장병들에게 보급됐습니다.이후 장병들은 하루 2끼는 미군 전투식량을, 1끼는 한국 전투식량을 먹게 됐습니다. 심지어 남베트남 쌀까지 보급돼 식단 열량이 미군을 능가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아도는 쌀을 베트남 민간인에게 보급할 정도였습니다. 베트남 파병 장병에게 우선 공급됐던 K레이션은 1971년부터 한국에도 보급됐습니다. 전투식량은 해외 수출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베트남 전쟁 시기 군납을 통한 외화수입은 1억 8800만 달러 규모였는데, 그 중 30%인 5639만 달러가 K레이션 수출로 달성한 것이었습니다. 1968년 1000만 달러 이상 수출한 업체가 국내에 2곳 밖에 없을 정도였으니,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던 겁니다. 지금은 일반 마트에서도 제품을 접할 수 있을 정도로 전투식량이 흔해졌습니다. 진공건조 기술을 적용하고 물만 부으면 일반 비빔밥처럼 즉시 먹을 수 있어 여행할 때 이용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제품과 입맛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지만, 편의성 만큼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 할 겁니다. 불과 50년의 역사로 이런 성과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정부와 군, 업체가 경쟁력 있는 제품을 계속 개발해 K레이션이 세계적인 전투식량으로 발전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항공모함 도입 결정, 중일 눈치보다 23년 흘려보냈다

    항공모함 도입 결정, 중일 눈치보다 23년 흘려보냈다

    이케다 日외무상 “독도, 日영토” 망언YS, 2만t급 항모 도입 계획 전격 재가軍, 중일과 갈등 이유로 반대해 무산해군 ‘대양해군 건설’ 여론 조성 나서천안함 사건 이후 해군에 질타 쏟아져아덴만 여명작전 성공으로 여론 반전작년 도입 결정…‘23년 전쟁’ 종지부 지난해 7월 12일은 해군사에 역사적인 날로 기록됐습니다. 이날 박한기 합참의장과 육해공군 총장 등 군 수뇌부는 해군의 오랜 숙원이었던 경항공모함급 ‘대형수송함Ⅱ’ 건조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정부와 군이 공식적으로 사업 추진 결정을 내린 것은 당시가 처음이었습니다. 국민들의 호응도 뜨거웠습니다. 그동안은 항모를 도입해야 하느냐, 도입하지 말아야 하느냐를 놓고 수십년 동안 옥신각신하느라 연구는커녕 시간만 흘려보냈습니다. 어떤 시기엔 중국과 일본 등 주변국의 눈치를 보느라, 어느 시기엔 북한의 연안 기습 도발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정부와 군이 스스로 항모 도입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흘려보낸 시간이 무려 ‘23년’입니다. 항모 도입 결정에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걸까요.27일 한국국방연구원이 발간하는 학술지 ‘국방정책연구’에 실린 ‘한국형 항공모함 도입 계획과 6·25전쟁기 해상항공작전의 함의’ 보고서에 따르면 ‘대양해군’에 대한 개념이 희미하게나마 잡히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였습니다. 그 이전인 박정희 정부 시절엔 북한의 지상전력 위협에 대비하느라 해군에 힘을 쏟을 여력이 없었습니다. ●“北 위협에 연안 방위… 이젠 항모 필요” 강영오 전 해군교육사령관은 1992년 ‘제1회 함상토론회’에서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는 “북한의 지상 위협 때문에 불가피하게 연안 방위에 중점을 뒀던 전략에서 탈피해야 한다. 중국과 일본의 해군력 증강에 대처하고 통일 이후 태평양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 ‘항모기동함대’ 체제를 갖추는 게 급선무”라고 했습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1996년이었습니다. ‘대양해군’ 개념을 국내에서 처음 공론화한 것으로 알려진 안병태 전 해군참모총장은 그해 4월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부터 수직이착륙기 20기를 운용할 수 있는 경항모 도입 계획을 재가받았습니다. 그 배경엔 이케다 유키히코 일본 외무상의 ‘독도 망언’이 있었습니다. “독도는 일본 영토의 일부”라고 주장한 일본에 대해 반일 감정이 치솟았고, 김 전 대통령의 지시로 2만t급 항모와 구축함 6척 건조 계획이 마련됐습니다. 국민 열망을 대변하듯 1996년 서울에어쇼에는 현대중공업이 제작한 2만t급 국산 경항모 모형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국방부와 합참이 이 계획에 반대했고, 이듬해 경항모 연구개발비는 전액 삭감됐습니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군은 “항모 도입이 중국, 일본 등 주변국과의 불필요한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다고 합니다.●국방부·합참 “한반도는 불침항모” 반대 현재 항모 개발에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붓고 있는 중국이나 일본의 상황을 감안하면 실소가 나올 법한 논리였지만 당시엔 그렇게 계획이 무산됐습니다. 당시 육군 위주로 구성된 국방부와 합참 지휘부는 “한반도 자체가 ‘불침항모’이기 때문에 항모가 필요 없다. 북한에 우선 대응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이때부터 해군 지휘부는 ‘북한의 위협’ 대신 ‘대양해군 건설’을 주된 노선으로 삼고 여론 조성에 나섰습니다. 여기에 국민들의 공감대도 더해져 독도함과 마라도함 등 대형수송함 건조사업, 세종대왕함 등 이지스 구축함(KDX-III) 건조사업이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2010년 3월 발생한 ‘천안함 폭침 사건’이 해군에 또 한 번의 고난을 안겼습니다. 1200t급 초계함이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하면서 “덩치만 크고 비싼 군함 만들면서 허세 부리다 앞마당이 뚫렸다”, “연안도 못 지키면서 무슨 대양해군이냐”는 언론의 질타가 이어졌습니다. 그러자 이명박 전 대통령까지 나서 “우리 군이 현실보다는 이상에 치우쳐 국방을 다뤄 온 것이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고 군을 질책했습니다. 해군은 그해 국회 국정감사 업무보고서에 ‘대양해군’이라는 용어를 단 한마디도 꺼내지 못할 정도로 움츠러들었습니다.●올해 경항모 개발사업비 271억 첫 투입 2011년 1월 여론은 다시 급반전했습니다. 해군 청해부대가 소말리아 해적에 의해 피랍된 삼호 주얼리호 선원 21명을 단 1명의 사망자도 없이 구출해 낸 ‘아덴만의 여명작전’이 대대적으로 보도됐습니다. 이에 2012년부터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대양해군’이라는 용어가 다시 등장하고, 해군의 노력이 점차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2012년 중국이 첫 항모인 랴오닝호를 취역시키고 일본 내부에서 이즈모급 경항모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하며 국산 항모 도입 논의에 가속도가 붙게 됩니다. 그러고도 7년이 더 흐른 지난해 정부는 올해 예산으로 ‘F35B 스텔스 전투기’를 탑재할 수 있는 경항공모함급 ‘대형수송함Ⅱ’ 개발사업비 271억원을 확정했습니다. 항모 건조까지는 앞으로도 10년의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항모 도입 계획은 지난해까지 무려 23년 동안 수많은 논쟁과 질곡의 역사를 거쳤습니다. 이젠 이런 소모적인 논쟁은 끝내고 건설적인 연구가 필요한 시점 아닐까요. 수십년간의 논쟁에도 많은 국민이 꿋꿋하게 항모 도입에 응원을 보내고 있다는 점은 그나마 긍정적인 부분입니다. ●“전투 지원 ‘움직이는 비행장’으로 대비” 연구팀은 이미 ‘6·25전쟁’에서 항모의 장점이 입증됐다고 설명했습니다. 핵심은 전쟁 초기 지상군 지원 기능입니다. 전쟁 초기 남한에서 비행장 운용이 어려워지자 미 공군은 일본에서 전투기를 출격시켰습니다. 그렇지만 대한해협 너머에서 온 전투기들은 작전시간이 ‘15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항모를 동원하자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공군 전투기들이 표적에 도착하는 데 평균 1시간 7분이 걸린 반면 함재기는 5~10분 만에 지상군 지원이 가능했습니다. 이는 ‘낙동강 혈투’에서 북한군을 막아 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미 해병1사단의 역사적 철수작전인 ‘장진호 전투’와 피란민 9만명과 병력 10만명을 안전하게 대피시킨 ‘흥남철수’도 수많은 함재기의 도움으로 가능했습니다. 당시와는 상황이 다르지만 방사포와 탄도미사일 개발에 열을 올리는 북한이 공군 비행장을 1차 타격 목표로 삼을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70년 전의 교훈을 되짚어 보며 ‘움직이는 비행장’ 항모를 통한 대비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흙과 돌 틈, 자연 그대로의 삶이 오롯이… ‘토지’ 생명력처럼 강인하고 든든한 품

    흙과 돌 틈, 자연 그대로의 삶이 오롯이… ‘토지’ 생명력처럼 강인하고 든든한 품

    ‘작가의 땅’(작.땅)은 온 생을 다해 글을 쓴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주소다. ‘작.땅’은 치열한 창작의 공간이자 문장으로 대들보를 세운 장소들을 따라간다. 작가들이 글을 쓰는 뒷모습과 곡진한 삶의 희비를 엿보는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책 바깥의 여행이다. 그곳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강원 원주 매지리에 있는 토지문화관은 내게 멧돼지 떼가 창궐하던 한여름 밤의 옥수수밭으로 남아 있다. 재작년 여름, 두 번째 소설집의 교정지와 가을호 계간지 마감이 겹쳐서 얼마간은 저돌적인 상태로 토지문화관 문인 창작실에 입소했다. 만두 찜기의 뚜껑을 연 것 같던 하오가 지나도 청쾌한 바람은 쉽게 산골에 스미지 않았다. 창작실에서 식당으로 가는 길목에 나 있던 산짐승 발자국이 멧돼지의 것이라는 사실은 먼저 입소해 소설을 연재하고 있던 전성태 소설가가 알려주었다. 그날 밤부터 나는 창작실의 베란다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벌레 소리들을 배경음악 삼아 원고 작업에만 매달렸다. 일상에서 오는 잡념들을 접어둔 채 오로지 창작에만 매달릴 수 있는 환경이 더할 나위 없었지만 작업은 진척이 없었다. 자정을 넘기고서야 겨우 숨이 좀 가라앉을 만한 바람이 내려왔다. 그리고 바람을 따라 산골의 멧돼지도 왔다.창밖의 기척이 심상찮아서 밖을 내다보던 중이었다. 하늘보다 더 어두운 옥수수밭 한가운데에 분명 어떤 움직임이 있었다. 만일 나에게 귀신을 보는 눈이 트였다면, 헛것에게라도 어떻게든 빌어 보고 싶던 시기였기에 내 눈은 어둠 속의 움직임에 집중돼 있었다. 그 밤 내내 일사불란하게 옥수숫대 사이를 누비는 소리를 들으며 간신히 새벽을 맞았다. 다음날 남들이 점심 먹을 때쯤 일어나 식당으로 가다 보니 옥수수밭 한가운데가 우주선이 앉았다 간 모양으로 둥그렇게 파헤쳐져 있었다. 식당에서는 어젯밤에 내려온 멧돼지들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옥수수와 고구마밭이 점점 더 크게 헤쳐진다는 사실도 덧붙여 들려왔다.덕분에 아침마다 밭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도 내 또 다른 일과가 됐다. 엄밀히 따지자면 산짐승의 공간을 우리가 침범한 셈이기도 했으니 잘못은 이쪽에 있었지만 말이다. 그곳에서 나는 원고가 풀리지 않을 때마다 박경리 선생이 손수 일구시던 밭과 장독대에 다녀왔다. 선생의 거처를 지키고 있는 거위 떼들이 꽉꽉 우는 곳이었다. 그 소리를 따라 창작실과 선생의 울 안까지 오가는 길이 내가 부릴 수 있는 최대치의 여유였다. 정갈한 장독대와 두둑하게 북이 오른 밭이랑을 볼 때마다 직접 농사를 지어 수확한 작물들로 하루에 한 끼는 꼭 직접 반찬을 만들어 후배 작가들의 식사를 챙겼다는 선생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그곳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산짐승의 울음도, 더위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자연의 모든 것들은 우리가 후대에게 잠시 빌려 쓰는 것일 뿐”이라는 선생의 말씀에 따라 자연 친화적으로 지어진 문화관의 모습과 인위적인 것을 최대한 배제하며 살아가고자 했던 그분의 뜻이 곳곳에 배어 있는 자리였다. 생의 마지막까지 밭둑의 흙을 돋우며 생활하셨던 선생답게 남겨진 것들은 매우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선생이 손수 지은 옷들과 밀짚모자, 호미와 낫 같은 농기구들이 생전 그대로 놓여 있었다. 허울 좋은 건물의 이름 크게 쓴 문학관보다는 문인 창작실을 지어 후배 작가들의 작업을 응원했던 그 정신 그대로 오로지 작가들의 복지만을 추구하고 당신께서는 직접 흙과 돌 틈에서 최대한 자연 그대로의 삶을 사셨다. 그러는 동안에도 창작에 대한 열의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는 이야기가 떠오를 때마다 이렇게 앉아 게으름을 피우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소리가 들리지는 않지만 게으른 후배에 대한 정갈한 꾸짖음, 그렇지만 응원과 격려를 한꺼번에 전해 받는 듯한 그 감각은 오로지 선생의 울타리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좋은 기회에 선생이 사용하던 모든 물건이 고스란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처에도 들어가 보았다. 방 한쪽에 은은한 분위기를 풍기던 장은 예전에 선생이 어느 글에서 썼던 그 나비장이었다. 6·25전쟁 당시에 피란을 가기 위해 이불에 싼 나비장을 마른 우물에 던져 넣고 떠났다가 천신만고 끝에 다시 돌아온 뒤에 건져냈다고 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애지중지하며 아꼈던 장과 필기구, 오래된 살림살이들, 태우시던 담배 보루까지도 여전한 그곳은 선생이 곧 문을 열고 들어올 것처럼 무척 현실적인 공간이기도 했다.작가 중에서 토지문화관을 모르거나 거쳐 가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로 이곳은 창작하는 사람들에게는 고요한 꿈의 공간, 선생의 창작열을 느낄 수 있는 산실이다. 누구도 선뜻 문인들의 복지를 이야기하지 않았던 시절에 사재를 기꺼이 헌사해 지은 이 공간을 선생은 무척 아끼고 사랑하셨다고 전해진다. 매지리 안쪽 산기슭에 자리했지만 제주도와 경상도, 전라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작가들이 몰려들었고 급기야 해외 작가들도 한 번쯤 다녀가고 싶은 공간으로 손꼽히는 장소가 됐다. 중견과 신진을 가리지 않고 고루 지원하는 문화관의 정책도 여전했다. 국내 지원을 넘어서 해외 레지던스까지도 교류를 넓힌 상태였다. 매년 봄이면 새로운 작가들이 입주해 60일 동안 혹은 길게는 90일 정도 이곳에 머물다 간다. 올해도 봄이 시작됐으니 창작실도 새 주인을 맞이했겠다.올해 토지문화관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박경리 선생의 딸 김영주 이사장이 숙환으로 별세한 후 그의 둘째 아들 김세희 관장이 취임했다. 선생의 유지를 이어 작가들의 창작을 지원하고 소설 ‘토지’의 삶과 생명 그리고 환경보호의 정신을 잇는 일이 손자 대로 넘어온 셈이었다. 토지의 생명력처럼이나 강인하고도 든든한 바통 터치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박경리 선생과 관련된 공간은 하동 악양면 평사리의 최 참판 댁 한옥문화관, 통영 박경리기념관 그리고 원주의 박경리 문학공원과 ‘토지’를 완성하고 선생이 말년을 보낸 공간인 이곳 흥업면 매지리 토지문화관까지 모두 네 군데다. 선생이 17년 동안 사신 원주시 단구동 자택이 택지지구가 되면서 그 자리가 없어질 위기에 처하자 많은 문인이 마음을 모았다. 여기에 택지지구 보상금과 토지개발공사 기부금을 합쳐 토지문화재단과 토지문화관이 들어섰다. 토지문화관 개관식에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도 참석해 선생의 소설과 후배들을 지원하고자 하는 마음을 기렸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흘렀지만 창작실에는 여전히 문인들의 입주 신청이 쇄도하고 매일 관람객들이 찾아와 문전성시를 이룬다. 김세희 관장은 위에 언급한 네 군데의 장소들을 보다 유기적이고도 조직적으로 연계해 ‘토지’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더불어 소설 ‘토지’의 콘텐츠들을 보다 현대적이고도 접근성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제반 사업들을 검토 중이라는 사실도 덧붙였다. 선생의 유훈과 창작 업적을 기리기 위해 숙고 끝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세계문학상인 ‘박경리 문학상’을 국내외 독자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작업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박경리 문학상 수상자들이 토지문화관에서 진행하는 강연 또한 국내에서 다시 듣기 어려운 기회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터였다. 최인훈, 베른하르트 슐링크, 응구기 와 티옹오, 이스마일 카다레 등이 이 상의 역대 수상자였으며 이들의 강연은 창작실에 입주한 작가들을 비롯해 전국에서 찾아든 독자들로 인해 매년 성황리에 개최됐다. 아울러 여러 문화 행사들과 관련된 장소 대관과 숙박을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을 대여하는 일도 동시에 이루어지는 바쁜 문화관이라는 관장의 말을 듣고 있자니 소설 ‘토지’의 북적이는 평사리 장터의 여러 장면들이 떠올랐다. 선생이 일구었던 환경과 삶 그리고 창작의 힘을 후대에도 변함없이 이어 가겠다는 새 관장의 목소리에 자못 힘이 실려 있었다. 끊임없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중에도 문화관 한켠에 위치한 창작실에서 여러 명의 작가가 각자의 작업에 몰두하는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문화의 산실이 아닌가.코로나19 탓에 여러 나라의 국경이 닫혔다. 새싹과 꽃이 피는 길을 따라 걷던 발걸음도 사라졌다. 그러나 곧 감염병은 잠잠해질 것이며(그러리라 믿고!) 우리는 다시 길 위에 두 발을 얹어둘 것이다. 봄꽃은 남도에서부터 피어 온다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봄꽃을 따라 통영에서 하동을 거쳐 원주에서 그 여정의 정점을 찍는 일명 ‘박경리 토지 로드’를 돌아보시기를 추천해 드린다. 일상에서 잠시 벗어난 시간에 문학과 대문호의 발걸음을 따라 걷는 시간이 길 위의 사람들에게 보다 의미 있는 여정이 돼 주리라 확신한다. 토지문화관을 돌아보고, 선생의 자취를 밟으며 하룻밤 토지문화관에서 묵어가는 일정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꿈꿨던 작가의 삶을 조금은 엿볼 기회가 되지 않을까. 올봄의 여정은 ‘토지’의 길을 따라 문학적인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보시기를, 그곳에 다녀가면 분명 이 ‘다음’을 살아갈 새로운 용기가 생겨 있을 것이니. 참, 나는 그해 여름에 멧돼지 옥수수 갉아먹는 소리를 들으며 작업했던 두 번째 소설집 ‘유빙의 숲’을 출간했고, 단편소설 마감 역시도 무사히 마쳤다. 선생의 응원이 분명 그곳에 실려 있다고 아직도 믿고 있다. 그 시간을 지켜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어디에 해야 할지 몰라 이곳에 적는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소설가 이은선
  • 전국 독립·국가유공자 합동묘역 57개소, 국가 관리 묘역 지정

    전국 독립·국가유공자 합동묘역 57개소, 국가 관리 묘역 지정

    전국의 독립유공자 및 국가유공자 합동묘역 57개소가 국가 관리 묘역으로 지정됐다. 국가보훈처는 19일 국립묘지 외의 장소에 안장된 독립유공자 및 국가유공자 합동묘역을 국가 관리 묘역으로 지정해 관리하도록 한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지난 17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고 밝혔다. 개정된 법률에 따르면 기존 독립유공자 및 국가유공자 합동묘역은 소유자와 관리자, 유족의 요청을 받아 국가 관리 묘역으로 지정해 국립묘지에 준해 관리한다. 독립유공자 합동묘역은 서울 강북구에 있는 수유리 애국선열 묘역, 광복군 합동묘역을 비롯해 서울 중랑구 망우공원묘지(애국선열묘역), 서울 용산 효창공원 삼의사 및 임시정부요인 묘역, 경기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묘역과 고주리 애국선열 6인 순국 묘역 등 12개소다. 국가유공자 합동묘역은 6·25전쟁 전몰군경 등이 안장된 곳으로 전국 45개소에 달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현충일 추념사를 통해 “합동묘역을 국가가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무연고 국가유공자 묘소를 국가가 책임지고 돌보겠다”고 밝힌 바 있다. 국가 관리 묘역 지정을 통해 국가차원에서 상시 점검 및 훼손복구 등 체계적인 관리를 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또 정부는 배우자와 직계 존·비속이 없는 국가유공자 등의 묘소를 국립묘지로 이장할 경우 이장 비용을 국가가 지원하기로 했다. 보훈처는 “나라를 위해 헌신한 국가유공자 묘소가 무연고로 방치되는 것을 방지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개정안은 공포 후 6개월이 지난 후 시행된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역사 대중화 이끈 재야 사학자, 역사 속으로 떠나다

    역사 대중화 이끈 재야 사학자, 역사 속으로 떠나다

    ‘한국사 이야기’, ‘인물로 읽는 한국사’ 등으로 역사 대중화를 이끈 원로 사학자 이이화(왼쪽) 선생이 18일 별세했다. 83세. 고인은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지 않았지만 역사학자로 활동한 대표 재야 사학자다. 철저한 고증을 통해 사료를 해석하고, 일반인 눈높이에 맞춰 쉽고 재미있게 역사를 서술해 인기를 끌었다. 그는 1937년 대구에서 주역 대가인 야산 이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학교에 보내지 않아 대둔산에서 한문 공부를 했다. 6·25전쟁 때 가출해 각지를 돌며 고학하다 광주고를 졸업했다. 상경한 뒤에는 훗날 중앙대에 편입된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다녔다. 대학을 중퇴하고 외판원, 술집 웨이터, ‘불교시보’ 기자, 학원 강사 등 다양한 일을 했다. 한국고전번역원 전신인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고전을 번역하고, 서울대 규장각에서 고전 해제를 썼다. ‘허균과 개혁사상’, ‘척사위정론의 비판적 검토’ 등을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면서 본격적인 한국사 저술가의 길에 들어섰다. 계간지 ‘역사비평’을 내는 역사문제연구소 창립(1986년 2월)에도 참여했고,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와 함께 운영위원으로 지내다 제2대 연구소장을 역임했다.고인은 특정 시대사에 집중하는 강단 사학자들과 달리 고대사부터 현대사까지 자유로이 오가며 연구했다. 특히 역사를 쉽고 재밌게 풀어낸 다양한 저서를 남겼다. 개인이 쓴 한국 통사로는 가장 분량이 많다고 알려진 22권짜리 ‘한국사 이야기’(오른쪽)가 대표적이다. 10여년에 걸쳐 완성한 뒤 오류를 수정해 2015년 개정판이 나왔다. 이 외에도 ‘인물로 읽는 한국사’, ‘만화 한국사’, ‘주제로 보는 한국사’, ‘허균의 생각’, ‘전봉준 혁명의 기록’ 등을 발간했다.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에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내세우는 ‘민족주의 사관’은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구려역사문화보전회 이사장,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등을 지내며 정치와 경제에 집중하는 문헌사와 민속에 관심을 기울이는 생활사 간 경계도 넘는 활동을 펼쳤다. 단재상과 임창순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4년에는 원광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8년 8월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개관한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도 맡았다. 유족으로 부인 김영희씨와 아들 이응일씨, 딸 응소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21일 오전 10시다. (02)2072-2010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굴곡졌던 어제…혼란스런 오늘…다시 세운 내일

    굴곡졌던 어제…혼란스런 오늘…다시 세운 내일

    ‘세운상가’라고 부르는 7동의 건물들이 멈춰 선 열차와 같이 서울 도심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다. 건립 때는 ‘동양 최대’의 복합쇼핑센터로 위용을 자랑했지만, 이내 도시 경관을 해치는 철거 대상 흉물이 됐다가 이제는 노후 지역을 되살리는 도시재생의 핵심이 됐다. 반세기가 넘은 이 건물의 극적인 과거는 곧 수도 서울의 역사였고, 앞으로의 운명은 곧 현대 도시의 미래이기도 하다.●‘불도저 시장’ 시대의 빛과 그림자 세운상가가 위치한 일대는 조선시대에 ‘남촌’이라 하여 중산층들의 한옥이 밀집한 주거지역이었다. 상인과 수공업자의 상점과 주택, 통역이나 의원 같은 전문직들의 터전이었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5년 3월 미국은 344기 전폭기로 도쿄 대공습을 감행해 도시의 40%를 불태웠다. 일제는 일본 본토는 물론 식민지 경성에도 대대적인 ‘소개공지’를 급히 조성했다. 밀집된 도심 지역을 강제 철거해 화재가 번지지 않도록 대규모 빈터를 만드는 일종의 청야작전이었다. 이때의 많은 소개공지들은 이후 율곡로, 흥인문로, 의주로 등 서울의 간선도로가 됐다. 가장 핵심적인 곳은 종묘 앞부터 필동까지 훗날 세운상가가 서게 된 소개공지다. 마치 두발 가운데를 박박 밀어 버린 것처럼 도심의 희괴한 빈터가 갑자기 생겨났다. 소개공지 조성 두 달 후 일제의 항복으로 전쟁은 끝났고, 해방 후 ‘광로3호선’이라는 소개 도로로 방치됐다. 6·25 이후 혼란기에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소개 도로 위에 무허가 판자촌을 형성했다. 종묘 일대는 ‘종삼’이라 하여 국내 대표적인 집창촌이 됐고, 광로3호선 판자촌까지 그 판도가 확장됐다. 불량과 불결, 성매매와 각종 불법이 횡행하는 최악의 슬럼이 됐다. 1966년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부임 일주일 만에 광로3호선 도로 정비에 착수한다. 무허가는 강제 철거하고, 이미 불하했던 민간 토지를 비싼 값에 되사는 무리도 불사했다. 6월에 계획을 세우고 8월에 철거를 마쳐 그에게는 ‘불도저시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순식간에 서울시는 폭 50m, 길이 893m, 넓이 4만 4650㎡의 도심 내 거대한 땅을 얻게 됐다. 이 땅의 개발에 대해 당대의 건축가 김수근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주상복합과 공중보행로 등 환상적인 개념들을 제안했고, 곧바로 계획에 착수해 세운상가가 탄생하게 된다. 김 전 시장은 ‘돌격 건설’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수많은 도시정비와 개발 사업을 벌였다. 청계천을 비롯한 곳곳의 무허가촌을 철거하고 경기도 광주(현 성남시)와 양주(현 상계동)에 철거민 이주촌을 조성했다. 도심 고가도로와 강변도로를 건설하고 한강종합개발계획을 세워 여의도와 강남 일대의 대대적인 개발을 시작했다. 4년 남짓 재임 기간 내내 대담한 계획과 무리한 건설을 밀어붙였다. 1971년 6개월 만에 완공한 와우시민아파트가 준공한 지 석 달 만에 붕괴돼 34명의 사망자를 냈고 결국 그 책임으로 사임하게 된다. 세운상가는 김현옥 시대의 공과를 동시에 안고 있는 도시건축 유산으로 남게 됐다.●환상적인 이상과 비루한 실현 도쿄예술대학원생이던 김수근(1931~1986)은 서른 살인 1960년 남산 국회의사당 현상 설계에 1등으로 당선돼 금의환향한다. 비록 5·16쿠데타로 의사당 건립 계획은 무산됐으나, 김종필을 비롯한 쿠데타 주역들과 친분을 쌓게 된다. 30대 약관으로 워커힐호텔, 세계반공연맹(현 남산자유센터), KIST 본관 등 국책 건축들을 도맡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세운상가 설계를 맡긴 김 전 시장 역시 수송부대장 출신의 군부 실세였다. 김수근은 세운상가를 상가와 사무소, 주택과 호텔, 학교와 우체국 등이 어우러진 ‘도시 속의 도시’로 만들고 싶었다. 종로~청계천~을지로~마른내길~퇴계로 사이에 놓인 4개 블록의 대지 형상을 따라 블록당 2동씩 총 8동의 기다란 건물군을 계획했다. 지면보다 7.5m 높은 곳에 콘크리트 데크를 설치해 인공 대지를 만들고 그 위에 상가 건물을 세운다. 5층부터 아파트를 건설해 주택을 도시 위에 띄운다. 1층 전체를 차도와 주차장으로 조성해 차량과 보행을 수직적으로 분리한다. 인공 데크에 마련된 보행로는 각 블록을 모두 연결해 ‘공중보행길’로 만들었다. 이러한 건축 개념들은 모더니즘의 도시론과 1950년대 팀텐그룹의 건축론에 뿌리를 둔 국제적이고 첨단적인 내용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44달러였던 시절 세운상가에 소요되는 건설비는 44억원으로 그해 서울시 예산의 3분의1이었다. 이 막대한 재원을 민간 건설 자본에 떠맡길 수밖에 없었다. 현대건설 등 주요 건설사들이 각 동을 쪼개 맡았다. 건물 이름도 대림상가, 삼풍상가, 진양상가 등 건설사 이름을 따라 붙였다. 민간 자본은 최대 면적 건설과 최대 이윤 추구에 몰두했다. 1층은 분양가가 가장 높은 곳, 양쪽 1차선 차로만 남기고 모두 밀집된 상점들을 배치했다. 상점, 차로, 주차장, 보행로가 혼재된 어둡고 복잡한 곳이 되고 말았다. 에스컬레이터 없는 인공 데크는 오르내리기가 너무 힘들어 보행을 어렵게 했다. 서로 다른 건설사들은 그나마 계획된 연결 육교마저 없애 버렸다. 계획의 핵심인 공중보행길은 애초부터 불구로 태어났다. 계획했던 학교나 우체국은 아예 건설되지 않아 공공성은 사라졌다. 이상적 설계와 현실적 건설 사이의 갭이 너무나도 컸다.●슬럼에서 다시 살아나는 문화 발신 열차로 그래도 준공 후 문을 연 백화점식 상가들은 ‘세계 제1의 쇼핑센터’로 각광을 받았다. 풍전호텔 나이트클럽과 분식센터는 장안 청춘들의 ‘최애’ 유흥장이었다. 한때 아시아 최대의 전자상가로 위용을 떨쳤고, “미사일도 만들 수 있다”는 첨단 기술의 집합소이기도 했다. 아파트는 연예인, 교수, 의사들의 인기를 끌었고, 진양상가에는 95명의 국회의원 사무실도 입주했다. 그러나 1970년대 신세계, 미도파, 롯데 등 백화점들의 명동상권에 고급 시장을 넘겨주고, 1980년대에는 용산전자상가에 전자상권의 주도권도 빼앗겼다. 치명적인 것은 세운상가와 동시에 추진된 강남 개발이었다. 명문 고교들을 이전하는 유인책까지 쓴 강남은 이내 고급 아파트촌이 됐고, 세운상가는 서민 아파트로 전락했다. 두 달 설계와 1년 시공으로 조산한 이 거대 건축군은 태생부터 부실했다. 설상가상으로 서울시의 중구난방식 개발 전략의 피해가 고스란히 세운상가 몫이 됐다. “도시의 흐름을 단절하는 흉물”로 전락한 세운상가는 서울시의 애물단지가 되고 말았다.2008년 오세훈 전 시장이 발표한 세운 재정비 촉진계획은 낡고 추해진 세운상가에 내린 사망 선고였다. 세운상가를 모두 철거하고 주변 지역은 초고층지구로 재개발한다는 계획이었다. 실제로 종묘 앞 현대상가를 철거해 공원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세운상가 건설이 무모했다면 철거 계획은 황당했다. 이미 도시 환경의 일부가 된 건축 유산을 지워 버리는 반문화적 발상이었다. 도심 제조업과 유통업의 싹을 자르는 비경제적 계획이었다. 여러 반대에 부딪혀 철거 작업이 지지부진하면서 세운상가는 더 급속히 슬럼이 됐다. 2014년 박원순 시장은 세운상가를 존치하고 재생시키겠다는 ‘다시-세운 프로젝트’를 발표했고, 현재 2단계 계획을 실현 중이다. 세운상가의 문제는 건축가, 시공자, 시정부 3자가 모두 책임져야 할 업보다. 건축가는 자기 낭만에 홀려서 비현실적 계획을 세웠고, 시공자는 이윤 추구에만 급급해 저급한 욕망 덩이를 낳았다. 가장 큰 책임은 서울시에 있다. 애초부터 즉흥적으로 임신했지만, 그래도 낳았으면 잘 키워야 했다. 그러나 마음은 용산이나 강남으로 떠나 없애야 할 골칫덩어리로 취급했다. 이제 마음을 바꿔 죽어 가는 자식을 돌보기 시작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소생의 치료법은 가해의 역순이다. 우선 현실적인 재생 계획을 다시 세워야 한다. 공간의 품질과 공공성을 높이도록 투자해야 한다. 그리고 일관된 도시재생의 정책을 지속해야 한다. 세운상가는 대체 불가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 가깝게는 을지로 일대의 도시제조업과 문화산업의 생태계에 속해 있다. 그 너머로 연극의 대학로, 미술의 인사동, 영화의 충무로 등과 닿아 있다. 문화예술과 지식산업이라는 21세기적 발전을 위한 잠재력을 넘치게 가진 곳이다. 이들 잠재력만 활용해도 세운상가는 첨단 문화를 발신하며 도시를 끌고 달리는 중후한 기관차가 될 것이다. 건축학자·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 왜 항공모함 도입 결정까지 ‘23년’이 흘렀나 [밀리터리 인사이드]

    왜 항공모함 도입 결정까지 ‘23년’이 흘렀나 [밀리터리 인사이드]

    1996년 김영삼 前대통령 재가 받아놓고도“주변국에 갈등 야기” 軍 스스로 항모 반대“한반도는 불침항모” 황당 논리까지 등장‘대양해군’ 내세우며 23년 만에 도입 결정전문가 “6·25전쟁으로 항모 유용성 부각”지난해 7월 12일은 해군사에 역사적인 날로 기록됐습니다. 이날 박한기 합참의장과 육·해·공군 총장 등 군 수뇌부는 해군의 오랜 숙원이었던 경항공모함급 ‘대형수송함-II’ 건조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정부와 군이 공식적으로 사업 추진 결정을 내린 것은 당시가 처음이었습니다. 국민들의 호응도 뜨거웠습니다. 그동안은 항모를 도입해야 하느냐, 도입하지 말아야 하느냐를 놓고 수십년 동안 옥신각신하느라 연구는 커녕 시간만 흘려 보냈습니다. 어떤 시기엔 중국, 일본 등 주변국의 눈치를 보느라, 어느 시기엔 북한의 연안 기습도발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정부와 군이 스스로 항모 도입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흘려보낸 시간이 무려 ‘23년’입니다. 항모 도입 결정에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걸까. 15일 한국국방연구원이 발간하는 학술지 ‘국방정책연구’에 실린 ‘한국형 항공모함 도입계획과 6.25전쟁기 해상항공작전의 함의’ 보고서에 따르면 ‘대양해군’에 대한 개념이 희미하게나마 잡히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였습니다. 그 이전인 박정희 정부 시절엔 북한의 지상전력 위협에 대비하느라 해군에 힘을 쏟을 여력이 없었습니다. ●“北 위협에 연안방위…이젠 항모함대 필요” 1992년 강영오 전 해군교육사령관은 ‘제1회 함상토론회’에서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는 “북한의 지상위협 때문에 불가피하게 연안방위에 중점을 뒀던 전략에서 탈피해야 한다. 중국과 일본의 해군력 증강에 대처하고 통일 이후 태평양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 ‘항모기동함대’ 체제를 갖추는 게 급선무”라고 했습니다.결정적인 전환점은 1996년이었습니다. ‘대양해군’ 개념을 국내에서 처음 공론화한 것으로 알려진 안병태 전 해군참모총장은 그 해 4월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부터 수직이착륙기 20기를 운용할 수 있는 경항모 도입계획을 재가 받았습니다. 그 배경엔 이케다 유키히코 일본 외무상의 ‘독도 망언’이 있었습니다. “독도는 일본 영토의 일부”라고 주장한 일본에 대해 반일 감정이 치솟았고, 김 전 대통령의 지시로 2만t급 항모와 구축함 6척 건조 계획이 마련됐습니다. 국민 열망을 대변하듯 1996년 서울에어쇼에는 현대중공업이 제작한 2만t급 국산 경항모 모형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국방부와 합참이 이 계획을 반대했고, 이듬해 경항모 연구개발비는 전액 삭감됐습니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군은 표면적으로 “항모 도입이 중국, 일본 등 주변국과의 불필요한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다고 합니다. ●처음엔 “중일, 갈등 유발” 軍 스스로 반대 주변국의 해군 군비 증강이라는 ‘나비 효과’를 일으켜 국가 안보를 더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현재 항모 개발에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붓고 있는 중국이나 일본의 상황을 감안하면 실소가 나올 법한 논리였지만, 당시엔 그렇게 항모 도입계획이 무산됐습니다. 당시 육군 위주로 구성된 국방부와 합참 지휘부는 “한반도 자체가 ‘불침항모’이기 때문에 항모가 필요없다. 북한에 우선 대응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이 때부터 해군 지휘부는 ‘북한의 위협’ 대신 ‘대양해군 건설’을 주된 노선으로 삼고 여론 조성에 나섰습니다. 여기에 국민들의 공감대도 더해져 독도함과 마라도함 등 대형수송함 건조사업, 세종대왕함 등 이지스 구축함(KDX-III) 건조사업이 마련됐습니다. 하지만 2010년 3월 발생한 ‘천안함 폭침사건’이 해군에 또 한번의 고난을 안겼습니다. 1200t급 초계함이 북한의 어뢰공격으로 침몰하면서 “덩치만 크고 비싼 군함 만들면서 허세 부리다 앞마당 뚫렸다”, “연안도 못 지키면서 무슨 대양해군이냐”는 언론의 질타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이명박 전 대통령까지 나서 “우리 군이 현실보다는 이상에 치우쳐 국방을 다뤄 온 것이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고 군을 질책했습니다. 해군은 그 해 국회 국정감사 업무보고서에 ‘대양해군’이라는 용어를 단 한마디도 꺼내지 못 할 정도로 움츠러들었습니다. ●‘아덴만의 여명작전’으로 국민여론 급선회 2011년 1월 여론은 다시 급반전했습니다. 해군 청해부대가 소말리아 해적에 의해 피랍된 21명의 삼호 주얼리호 선원들을 단 1명의 사망자도 없이 구출해 낸 ‘아덴만의 여명작전’이 대대적으로 보도됐습니다. 이에 2012년부터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대양해군’이라는 용어가 다시 등장하고, 해군의 노력이 점차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여기에 2012년 중국이 첫 항모인 랴오닝호를 취역시키고 일본 내부에서 이즈모급 헬기항모를 경항모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하면서 국산 항모 도입 논의에 가속도가 붙게 됩니다. 그러고도 7년이 더 흐른 지난해 정부는 올해 예산으로 ‘F35B 스텔스 전투기’를 탑재할 수 있는 경항공모함급 ‘대형수송함Ⅱ’ 개발사업비 271억원을 확정했습니다. 우리 눈으로 항모를 직접 확인하려면 앞으로도 10년의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항모 도입 계획은 지난해까지 무려 23년 동안 수많은 논쟁과 질곡의 역사를 거쳤습니다. 이런 역사를 이해한다면 “좁은 바다에서 굳이 돈이 많이 드는 항모를 운용할 필요가 있느냐”는 무의미한 논쟁은 이제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수십년간의 논쟁에도 많은 국민들이 꿋꿋하게 항모 도입에 응원을 보내고 있다는 점은 그나마 긍정적인 부분입니다. 연구팀은 ‘6·25전쟁’ 당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 항모의 역할을 감안하면 항모 도입에 단순히 대양해군 논리만 내세워선 안 된다고 조언했습니다. ●“전투지원 ‘움직이는 비행장’으로 대비” 전쟁 초기 남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비행장 운용이 어려워지면서 미 공군은 일본에서 전투기를 출격시켰습니다. 그렇지만 대한해협 너머에서 온 전투기들은 작전시간이 ‘15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항모를 동원하자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공군 전투기들이 표적에 도착하는데 평균 1시간 7분이 걸린 반면 함재기는 5~10분만에 지상군 지원이 가능했습니다. 이는 ‘낙동강 혈투’에서 북한군을 막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미 해병1사단의 역사적인 철수작전인 ‘장진호 전투’와 피난민 9만명과 병력 10만명을 안전하게 대피시킨 ‘흥남철수’도 수많은 함재기들의 도움으로 가능했습니다. 당시와는 상황이 다르지만 방사포와 탄도미사일 개발에 열을 올리는 북한이 공군 비행장을 1차 타격 목표로 삼을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70년 전의 교훈을 되짚어보며 ‘움직이는 비행장’ 항모를 통한 대비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겁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정전협정 2주 앞두고 전사한 4명, 67년 만에 귀향

    정전협정 2주 앞두고 전사한 4명, 67년 만에 귀향

    6·25전쟁 종식을 불과 2주 앞두고 비무장지대(DMZ)에서 전투 중 사망한 국군 전사자 유해 4구의 신원이 올해 처음으로 확인됐다. 국방부는 9일 “지난해 DMZ 내 화살머리고지 일대에서 발굴된 유해 중 국군 전사자 4명의 신원이 올해 처음으로 확인됐다”며 “신원이 확인된 국군 전사자는 정영진 하사, 임병호 일등중사, 서영석 이등중사, 김진구 하사 등 4명”이라고 밝혔다. 이번에 신원이 확인된 국군 전사자들은 모두 제2사단 31연대 소속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정전협상이 진행되던 1953년 7월 중순 화살머리고지 4차 전투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전사했다. 정전협정 체결을 불과 2주가량 앞둔 시점에서 가족을 남겨 두고 숨져 안타까움을 더했다.유해의 대부분은 발굴 당시 개인호에서 부분 유해 및 골절된 상태로 발굴돼 전사하기 직전까지 목숨을 걸고 전투를 벌인 것으로 추정된다. 유해의 신원은 발굴 이후 유가족의 유전자 시료 검사를 통해 확인됐다. 군 당국은 향후 유해에 대한 귀환행사와 안장식을 진행할 계획이다. 김 하사의 부인 이분애(90)씨는 “남편의 시신을 못 찾아서 무덤이 없으니까 내가 죽거든 선산에 묻지 말고 뿌려 달라고 말해 왔을 정도로 오랜 세월 가슴 아파하며 살아왔다”며 “남편을 찾게 돼 앞으로 같이 묻힐 수 있다니 너무나 다행”이라고 말했다. 군 당국은 지난해 4월부터 11월까지 화살머리고지 군사분계선(MDL) 남측 지역에서 2000여점의 유해와 6만 7000여점의 유품을 발굴했다. DMZ에는 현재 1만여구의 유해가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DMZ 내에서 발굴된 유해 중 신원이 확인된 국군 전사자는 총 7명이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이제야 같이 묻히겠구려”…67년만에 돌아온 남편의 유해

    “이제야 같이 묻히겠구려”…67년만에 돌아온 남편의 유해

    “남편의 시신을 못 찾아서 무덤이 없으니까 내가 죽거든 선산에 묻지 말고 뿌려 달라고 말해 왔을 정도로 오랜 세월 가슴 아파하며 살아왔습니다. 남편을 찾게 돼 앞으로 같이 묻힐 수 있다니 너무나 다행이네요.” 6·25전쟁에서 남편 김진구 하사를 여읜 부인 이분애(90)씨는 9일 지난해 비무장지대(DMZ)에서 발굴된 유해 가운데 남편의 신원이 확인됐다는 소식에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소감을 말했다. 6·25전쟁 종식을 불과 2주 앞두고 DMZ에서 전투 중 사망한 국군 전사자 유해 4구의 신원이 올해 처음으로 확인됐다. 국방부는 이날 “지난해 DMZ 내 화살머리고지 일대에서 발굴된 유해 중 국군 전사자 4명의 신원이 올해 처음으로 확인됐다”며 “신원이 확인된 국군 전사자는 김 하사를 포함해 정영진 하사, 임병호 일등중사, 서영석 이등중사 등 4명”이라고 밝혔다. 이번에 신원이 확인된 국군 전사자들은 모두 제2사단 31연대 소속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정전협상이 진행되던 1953년 7월 중순 화살머리고지 4차 전투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전사했다. 정전협정 체결을 불과 2주가량 앞둔 시점에서 숨졌다. 특히 이들은 부인과 아이들을 피난길에 남겨둔 채로 전장에서 홀로 전사해 안타까움을 더했다.유해의 대부분은 발굴 당시 개인호에서 부분 유해 및 골절된 상태로 발굴돼 전사하기 직전까지 목숨을 걸고 전투를 벌인 것으로 추정된다. 유해의 신원은 발굴 이후 유가족의 유전자 시료 검사를 통해 확인됐다. 군 당국은 향후 유해에 대한 귀환행사와 안장식을 진행할 계획이다. 군 당국은 지난해 4월부터 11월까지 화살머리고지 군사분계선(MDL) 남측 지역에서 2000여점의 유해와 6만 7000여점의 유품을 발굴했다. DMZ에는 현재 1만여구의 유해가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DMZ 내에서 발굴된 유해 중 신원이 확인된 국군 전사자는 총 7명이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김정은 친서’ 닷새 만에…북한, 동해로 단거리 발사체 3발 발사

    ‘김정은 친서’ 닷새 만에…북한, 동해로 단거리 발사체 3발 발사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에게 위로 친서를 보낸 지 닷새 만에 북한이 단거리 발사체 3발을 또 동해상으로 발사했다. 북한이 방사포 발사를 한 지 딱 일주일 만이다. 합동참모본부는 9일 “오늘 오전 북한 함경남도 선덕 일대에서 북동쪽 동해상으로 발사된 미상 발사체 3발을 포착했다”고 밝혔다. 합참은 “우리 군은 추가 발사에 대비해 관련 동향을 추적 감시하면서 대비태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발사체는 최대 190∼200㎞를 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 당국은 미군과 함께 이 발사체의 비행거리, 고도 등 구체적인 제원을 정밀 분석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해 8월 24일 함남 선덕 일대에서 초대형 방사포를 발사했었다. 북한은 지난 2일 초대형 방사포 2발을 발사한 지 일주일 만에 또 동해로 발사체를 발사했다.북한의 도발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4일 문재인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코로나19와 싸우고 있는 남쪽 국민에게 위로의 뜻을 전달한지 닷새 만이다. 북한은 지난 2일 낮 12시 37분쯤 원산 인근에서 동해 북동 방향으로 초대형 방사포 2발을 발사했다. 2발은 35㎞의 저고도로 240㎞를 비행했다. 연발 사격 시간은 20초로 분석됐다. 군 당국은 북한의 이번 발사가 초대형 방사포 등 지난해 집중적으로 시험 발사한 신무기를 실전 배치하기 전 단계의 성능 시험검사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영·프·독 등 유엔 안보리 이사회 5개국, 안보리 결의 위반 규탄 성명에 반발인 듯 북 외무성 7일 “미국 사촉 받은 나라들”“무분별 처사, 중대한 반응 유발 도화선될 것”김여정 3일 “저능한 청와대, 겁 먹은 개”여기에다 계속되는 대북제재 등에 대한 반발일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분석한다. 특히 일각에서는 북한의 이번 발사가 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에스토니아 등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유럽지역 5개국이 5일(현지시간) 초대형 방사포 발사에 대해 안보리 결의에 위반된다는 규탄 성명을 발표한 데 대한 반발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이 성명에 대해 7일 담화에서 “미국의 사촉을 받은 이러한 나라들의 무분별한 처사는 우리의 중대한 또 다른 반응을 유발시킬 도화선이 될 것”이라고 반발했었다. 대변인은 “방사포병의 통상적인 훈련마저도 규탄의 대상이고 그 무슨 결의위반으로 된다면 우리더러 눈앞에 있는 미국과 남조선의 군사력은 무엇으로 견제하며 우리 국가는 어떻게 지키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앞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은 지난 3일 청와대가 관계장관회의를 열어 북한의 합동타격훈련에 강한 우려를 표명한 데 대해 처음으로 담화를 발표해 “저능한 청와대”, “주제넘은 실없는 처사”, “적반하장의 극치”, “바보”, “겁 먹은 개가 더 요란하게 짖는다” 등 거칠게 대남 비방전에 나섰다. 이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은 다음 날인 4일 충북 청주 공군사관학교에서 열린 공군사관생도 졸업 및 임관식에서 “올해는 전쟁의 비극을 되돌아보면서 안보와 평화의 의지를 다지는 해가 될 것”이라면서 “우리는 한반도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올해는 6·25 전쟁 70주년이자 6·15 공동선언 20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라면서 “한반도의 하늘과 땅, 바다에서 총성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다만 문 대통령은 “평화에는 강한 힘이 필요하다”면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철통같은 안보가 전제돼야 한다는 점을 함께 강조했다. ‘강한 유감’ 빼고 청와대 “북한 합동훈련, 평화 정착 도움 안돼”청와대는 이날 북한이 일주일 만에 단거리 발사체 3발을 또다시 동해상으로 발사한 것과 관련해 “한반도에서의 평화 정착 노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 행위”라는 입장을 밝혔다. 앞서 북한의 반발을 감안한 듯 ‘강한 유감’, ‘강한 우려’와 같은 표현은 직접적으로 쓰지 않았다. 청와대는 이날 오전 8시 15분부터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국가지도통신망을 통해 긴급 관계부처 장관회의를 개최했다. 화상으로 이뤄진 회의에는 정경두 국방부 장관, 서훈 국가정보원장 등이 참여했다. 청와대는 보도자료를 통해 “관계 장관들은 북한이 2월 28일과 3월 2일에 이어 대규모 합동타격훈련을 계속하는 것은 한반도에서의 평화 정착 노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지적했다”고 말했다. 일본 “北, 탄도 미사일 추정 물체 발사”… 아베, 국가 안보리 개최한편 교도통신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북한의 이날 발사체에 대해 “탄도 미사일로 보이는 물체가 발사됐다”고 이날 밝혔다. 일본 해상보안청은 발사체가 동해에 떨어진 것으로 분석하고 일대를 지나는 선박에 주의를 촉구했다. 일본 정부는 북한이 쏜 발사체가 자국이 설정한 배타적경제수역(EEZ)에는 떨어지지 않은 것으로 추정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발사 소식이 전해진 직후 ‘정보 수집 및 분석을 빈틈없이 하고 자국민에게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NHK가 전했다. 또 항공기와 선박 등의 안전 확인을 철저히 하고 예상하지 못한 사태에 철저하게 대비하라고 주문했다. 아베 총리는 이날 오전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이번 북한의 행동은 우리나라(일본)와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라면서 “그간의 탄도미사일 등 거듭되는 발사를 포함해 우리나라를 포함한 국제사회 전체에 있어 심각한 과제”라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개최해 대응 방안 등을 협의할 계획이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이중근 저서’ 뒷돈 김명호 교수 유죄 확정

    ‘이중근 저서’ 뒷돈 김명호 교수 유죄 확정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의 저서 출간을 돕는 과정에서 인쇄업체로부터 수십억원대의 뒷돈을 받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대학교수에게 징역형의 집행유예가 확정됐다. 대법원 3부(주심 이동원)는 배임수재 혐의로 기소된 김명호(71) 전 성공회대 교수의 상고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32억 5600여만원의 추징을 명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8일 밝혔다. 함께 기소된 인쇄업체 대표 신모(69)씨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이 확정됐다. 부영주택 고문과 이 회장의 개인 출판사인 ‘우정문고’의 주간을 지낸 김 전 교수는 이 회장의 저서 ‘6·25전쟁 1129일’ 등을 출간하는 과정에서 신씨가 운영하는 인쇄업체를 소개하고 이 업체로부터 32억 5600여만원의 뒷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김 전 교수는 중국 전문가로 ‘중국인 이야기’의 저자로도 유명하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코로나19가 최전방”…당신이 영웅입니다 [밀리터리 인사이드]

    “코로나19가 최전방”…당신이 영웅입니다 [밀리터리 인사이드]

    혈액 보유량 35.4% 부족…‘혈액대란’ 위기일선 부대 헌혈 앞장서…해군참모총장 동참육군, 역대 최대·최단기간 7억 6천만원 모금국민들 ‘밴드 투혼’ ‘간호장교 대구行’ 감동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사태로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내수 부진 등으로 경제 위기에 신음하는 국민들이 크게 늘었습니다. 더 큰 문제도 생겼습니다. 수술을 하려고 해도 혈액이 부족해 병원마다 응급환자 외에는 수술을 미루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겨울이라는 계절적 요인과 코로나19 사태가 겹치면서 적정 혈액보유량을 채우지 못해 ‘혈액 대란’이 우려되고 있습니다. 8일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에 따르면 1월 중순부터 지난달 중순까지 1개월 동안 전국에서 헌혈을 취소한 단체가 270여곳에 이릅니다. 지난 7일 기준 혈액관리본부 혈액 보유량은 O형 2.6일분, A형 3.0일분, B형 3.9일분, AB형 3.6일분에 불과합니다. 평균 3.2일분으로 적정 보유량 5일치보다 훨씬 적은 양입니다. 현재 혈액 보유량은 1만 6803유닛으로, 적정 보유량(2만 6000유닛)과 비교해 35.4%나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병원마다 혈액 확보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메르스’에 팔 걷어붙인 그들…다시 일어섰다 김강립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제1총괄조정관도 최근 코로나19 브리핑을 통해 “지난달 중순 이후 감소하던 혈액보유량이 범국민적인 협조로 전년 수준을 회복했지만 최근 다시 감소 추세에 있다”며 헌혈 동참을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녹록치 않습니다. 헌혈자 중 가장 많은 비중(2018년 통계청 자료)을 차지하는 직업군은 회사원(23.9%)과 대학생(23.9%), 고등학생(21.4%)입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방학이 길어지고 단체헌혈이 급감하면서 이들에게 의존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습니다. 결국 헌혈자의 15.2%를 차지하는 군인이 나설 수 밖에 없게 됐습니다.군인 헌혈량은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군인 헌혈 건수는 2009년 37만 5477건에서 2018년 43만 9343건으로 증가했습니다. 가장 많은 헌혈이 이뤄졌던 2017년에는 46만 973건으로, 2009년과 비교해 22.8%나 늘었습니다. 특히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당시 헌혈 통계가 눈에 띕니다. 그 해 5월 첫 환자가 발생해 186명이 확진됐고 38명이 사망하면서 올해처럼 헌혈량이 급감했습니다. 그런데 군인 헌혈량은 44만 5129건으로, 2014년(42만 3815건)보다 크게 늘었습니다. 올해도 군이 팔을 걷고 나섰습니다. 국방부는 “계절적 요인과 코로나19 장기화 때문에 국가적으로 혈액 수급이 어려워졌다”며 “채혈 환경 안전 대책을 마련해 군 단체헌혈을 추진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군 장병이 안심하고 단체헌혈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건복지부와 협력해 적십자사 채혈직원의 감염 여부 전수조사, 혈액원 소속 전 직원 매일 건강 상태 점검, 채혈시 직원·헌혈자 마스크 착용 등의 대책도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끝없는 ‘소독 업무’…장병들의 헌신 없었다면 일선 군부대는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선 해군 1함대 장병은 혈액 수급 위기 경보가 주의단계로 떨어지며 비상이 걸렸던 지난달 6일 단체헌혈을 통해 혈액 11만㎖를 모았습니다. 해군 전체가 혈액 150만㎖ 이상을 확보했고, 심승섭 해군참모총장도 장병들과 함께 헌혈에 동참했습니다. 해병대 2사단 ‘헌혈 릴레이’를 통해 이달 3일까지 15회에 걸쳐 장병 1300여명이 참여하는 성과를 냈습니다. 공군 20전투비행단에서도 지난달 24일부터 27일까지 장병 900여명이 자발적으로 헌혈에 참여했습니다. 공군 제8전투비행단은 같은 달 27~28일 이틀 동안 전 장병과 군무원을 대상으로 헌혈 버스를 운영해 눈길을 끌었습니다.군인들의 헌신은 헌혈에 그치지 않습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방역인력이 크게 부족해지자 대구를 포함해 수많은 지역의 소독 업무를 장병들이 맡고 있습니다. 소독 업무가 끝없이 이어지다보니 피로도가 높아졌지만 그들은 묵묵히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대구 동산의료원 코로나19 격리병동에서 환자를 돌보고 있는 국군춘천병원 소속 간호장교 김혜주 대위는 최근 쓸린 콧등에 밴드를 붙이고 환자를 돌보는 모습이 국방부 유튜브 영상으로 공개돼 화제가 됐습니다. 마스크를 너무 오래 쓰다보니 콧등이 헐어 마스크를 교체할 때마다 새 밴드를 붙인다고 합니다. 여기엔 ‘밴드 투혼’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김 대위는 영상에서 “처음에는 몰랐는데 콧등이 쓸려 벗겨지면서 외상이 발생했다”며 “국군의무사령부 소속으로 힘을 보탤 수 있어서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해 네티즌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의 헌신적인 근무 영상은 10시간 만에 조회수가 1만 5000회에 이르렀습니다. 김 대위 외에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군 의료진이 잠 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생명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목숨 바칠 각오로 임무 수행” 대구로 향하다 국군간호사관학교 60기 신임 간호장교 75명은 이달 3일 졸업 및 임관식을 마친 뒤 곧바로 대구국군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당초 9일로 예정됐던 임관식을 6일 당겼고, 졸업과 임관의 기쁨을 나눌 여유도 없이 곧바로 대구로 향했습니다. 특히 6·25 참전용사의 후손인 이혜민 소위는 “전쟁 중 다친 전우를 위해 목숨 걸고 임무를 수행한 할아버지를 본받아 군 의무 요원으로서 우리 국민과 군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임무를 수행하겠다”고 말해 국민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국군간호사관학교를 찾아 신임 소위 교육을 참관하고 “임관하자마자 곧바로 (대구 방역 현장으로) 보내게 돼 안쓰럽고 미안하다”면서 “대구·경북 주민들을 위한 든든한 방패 역할을 잘해 주시길 바란다.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최선을 다해달라”고 격려했습니다.육군은 5일 대구·경북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대구에 5억 1000여 만원, 경북에 2억 5000여만원 등 7억 6000여만원의 성금을 기부했습니다. 육군이 기부한 재난모금액 중 최고액입니다. 불과 8일 만에 모은 금액이었는데, 휴일 이틀이 포함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참여 열기가 매우 뜨거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동해 육군본부 인사근무과장도 “육군 전 부대에서 자발적인 참여로 모금을 시작했는데, 짧은 기간에도 예상보다 많은 장병이 동참해 놀랐다”고 말했습니다. 국난(國難)에 군인이 앞장서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군복을 입었다고 용기가 저절로 나오는 건 아닙니다. 헌신을 깎아내리진 말아주세요. 작은 칭찬이 더 큰 용기를 내게 합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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