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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화 논란에 휩싸인 중국 6·25전쟁 영웅

    미화 논란에 휩싸인 중국 6·25전쟁 영웅

    중국이 ‘항미원조’(抗美援朝, 6·25전쟁)의 대표적인 영웅으로 칭송해 온 추사오윈(邱少云)이 미화 논란에 휩싸였다. 군사학교에서 시작된 논란은 군 기관지의 보도로 뜨거워졌고, 사상의 자유 논란으로 확대되는 양상이다. 중국인민해방군 기관지 해방군보(解放軍報)는 지난 29일 ‘당과 군의 역사수업을 듣는 우리의 자세’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최근 난징(南京)의 포병군사학교 역사 수업에서 어떤 생도가 ‘추사오윈의 죽음이 생리적인 상식에 어긋난다’며 역사 교관에게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해 교관들이 충격에 휩싸였다”고 보도했다. 해방군보는 역사 교육에 의심을 품는 학생을 비판하려는 의도였으나, 이런 사실을 공개한 것 자체가 이례적이다. 추사오윈은 1952년 10월에 있었던 한 전투에서 잠복을 하다 소이탄을 맞고 전사한 인물이다. 중국 당국은 26세에 불과했던 추사오윈이 화염에 휩싸여서도 미동도 하지 않고 엎드린 채 불에 타 죽어 부대를 지킬 수 있었고, 해당 부대는 그의 영웅적 죽음에 힘을 얻어 대승을 거두었다고 선전해 왔다. 추사오윈은 혁명열사 및 일급전투영웅 칭호를 얻었고, ‘혁명집체주의’의 교본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 죽음에 대해 포병 생도가 “불에 타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반기를 든 것이다. 해방군보의 기사는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열띤 논쟁을 불러왔다. 누리꾼들은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모순은 인민들의 지적 수준을 무시하는 세뇌교육이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중국사회과학원은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는 조용히 듣고만 있고, 할 말은 인터넷에 쏟아낸다”면서 “이런 현상이 지속되는 것은 위험하다”고 밝혔다. 난징정치학원 차이후이푸(蔡惠福) 교수는 “이제 학교 문을 활짝 열어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야 한다. 당과 군의 역사에 대해서도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전 노병들도 가세했다. 추사오윈이 속한 부대의 사단장이었던 샹서우즈(向守志·98)는 신화망(新華網)과의 인터뷰에서 “내 부하의 죽음은 분명 영웅적이었다”고 밝혔다. 베이징 이창구 특파원 window2@seoul.co.kr
  • [美대사 피습 파장] 리퍼트, 韓·美관계 책 ‘두 개의 한국’ 읽어

    지난 5일 피습을 당해 입원 중인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는 한국 국민들의 성원에 감사한다는 뜻을 밝히며 한반도 현대사 및 한·미 관계에 관한 ‘바이블’로 꼽히는 ‘두 개의 한국’(The Two Koreas)을 읽고 있다고 대사관 측이 8일 밝혔다. 로버트 오그번 주한 미국대사관 공보참사관은 이날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서 브리핑을 열고 “리퍼트 대사께서 밀려드는 성원에 정말 감사해하고 있다”며 “김치를 드셨더니 더욱 힘이 나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리퍼트 대사는 돈 오버도퍼 존스홉킨스대 교수의 ‘두 개의 한국’을 정독하고 있다고 오그번 참사관이 전했다. 포병장교로 6·25전쟁에 참전해 한국과 인연을 맺은 뒤 워싱턴포스트 등의 언론계에 40여년간 몸담은 오버도퍼 교수가 광복 이후 한국 현대사를 기술한 ‘두 개의 한국’(1997년)은 외국인이 저술한 한반도 관련 책으로는 가장 정통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리퍼트 대사가 읽는 판본은 로버트 칼린 전 국무부 동북아 담당관(현 스탠퍼드대 연구원)이 2001~2013년 한반도 상황을 둘러싼 뒷이야기를 보태 100여 페이지를 추가한 완성판이다. 리퍼트 대사는 빠른 속도로 회복하고 있으며 이르면 10일 퇴원할 예정이다. 리퍼트 대사는 전날 점심으로 갈비탕을 먹은 데 이어 저녁과 이날 아침 식사도 한식으로 했다고 병원 측은 전했다. 윤도흠 세브란스병원장은 “오늘 오전 3시쯤 손목에 통증이 있어 진통제를 한 번 투여했다. 비교적 숙면을 취했다”며 “혈압, 맥박도 정상 수준이고 염증 소견도 없다”고 설명했다. 최선을 기자 csunell@seoul.co.kr
  • 어느 국군포로 탈북 아들의 죽음

    어느 국군포로 탈북 아들의 죽음

    ‘너를 만나 잘 살고 하였는데 내가 인구실(사람 구실) 못 하는구나, 미안하다. 앞으로 잘 살고 아프지 마라.’ 북한 아오지탄광에서 국군 포로의 아들로 태어나 천신만고 끝에 탈북했지만 남쪽에서 아버지는 6·25전사자일 뿐이었다. 살아 보려고 발버둥 쳤지만 쉽지 않았다. 아버지의 명예 회복과 법적 자녀의 권리를 부르짖었지만 메아리조차 없었다. 결국 50대 탈북 남성은 아내에게 이별을 암시하는 문자메시지를 남기고 세상을 등졌다. 지난 26일 주락철(53)씨의 빈소에는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 한영복 6·25국군포로가족회(가족회) 회장의 조화 2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같은 처지인 가족회 관계자들을 제외하면 조문객도 찾아오지 않았다. 주씨는 1962년 함경북도 은덕군(아오지)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으로 강제 이주당한 북한 여성과 결혼한 아버지는 탄광에서 일하다 다이너마이트 발파 과정에서 시력을 잃고 ‘봉사지기’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아들 주씨에게는 ‘남조선 괴뢰군 새끼’라는 손가락질이 늘 따라다녔다. 북한에서 최하층에 속한 주씨 가족은 다른 많은 탈북민처럼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절에 살아남기 위해 중국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서울 영등포구 한강성심병원 빈소에서 만난 아내 김모(52)씨는 주씨가 헤이룽장(黑龍江)성과 몽골, 태국을 거쳐 2005년 3월 부산에 들어왔다고 전했다. 김씨와는 한국으로 들어온 지 6개월 만에 가족의 연을 맺었다. 김씨는 “남편이 북에 두고 온 딸과 아들이 보고 싶어 힘들어했다”며 “2008년까지는 브로커를 통해 가족과 연락을 했는데 딸이 ‘꽃제비’로 먹을 것을 찾아 떠돌아 다닌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는 잠도 제대로 못 이뤘다”고 말했다. 주씨는 하나원을 나온 뒤 아버지의 고향인 전북 전주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물론 ‘남쪽’에서의 삶은 팍팍했다. 일터에서는 국내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주씨를 이주노동자 대하듯 했다. 일용직 노동으로는 한달에 70만~80만원을 벌기도 빠듯했다. 탈북 뒤 이국을 떠돌며 생긴 상처들은 고스란히 병이 돼 주씨를 괴롭혔다. 식당 일을 하려고 경북 구미로 떠난 아내와도 떨어져 살았다. 주씨는 가족회 시위에 동참하기 위해 지난해 7월 상경했다. 주씨를 비롯해 가족회 회원들의 요구는 국군 포로 지위를 인정하고 가족들에게 제대로 된 배상과 보상을 해 달라는 것이다. 또 생존 국군 포로를 귀환시키고 북한에 묻혀 있는 유해를 국내로 들여오기 위해 정부가 노력해 달라는 것이다. 주씨 아버지를 비롯해 국군 포로 중 상당수는 현재 전사자 신분이다. 정부는 미귀환 국군 포로들을 참전국가유공자로 인정하기는 했지만 호적상으로는 전쟁 중에 사망한 것으로 돼 있다. 탈북 국군 포로 자녀들은 부모의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가 없어 유공자 자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주씨는 청와대 앞 1인 시위에 매일 참석했다. 회원들이 생계를 위해 각자 집으로 돌아갔지만 주씨는 홀로 서울 중구의 가족회 사무실에서 지냈다. 힘이 들 때마다 멀리 떨어져 지내는 아내에게 연락해 “아버지 명예를 찾기 위해 끝까지 잘해 보겠다”고 했다. 그러던 중 주씨는 지난 13일 가족회 인터넷 카페에 올라온 속기록을 통해 국회에서 국방부 관계자가 ‘국가적 책무에서 국군 포로는 제외해야 한다’고 발언했다는 이야기를 접하고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경숙 가족회 총무는 “주씨가 속기록과 관련해 분노를 표출하는 글을 커뮤니티에 올리기도 했다”고 전했다. 주씨는 지난 25일 가족회 사무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가족회는 신경안정제를 과다 복용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주씨의 시신을 부검했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가족회는 주씨 발인일인 27일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방부 군비통제 관계자는 책임지고 고인과 가족회 회원들에게 공식 사과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들은 주씨 시신을 실은 운구차를 몰고 와 노제를 지냈고, 국방부 측의 유감 표명을 들은 뒤에 화장터로 이동했다. 한줌 남짓한 주씨의 유골은 경기 고양시 예원추모관에 봉안됐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잊을 수 없는 전쟁의 기억…노병, 끝내 울었다

    잊을 수 없는 전쟁의 기억…노병, 끝내 울었다

    “미국에서는 한국전쟁이 ‘잊혀진 전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그 전쟁이 승리한 전쟁이었음을 알게 됐습니다. ‘잊혀진 승리’인 것입니다.” 1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인근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의 한 극장에서 영화 ‘국제시장’ 특별상영회가 열렸다. 북한동포사랑한인교회연대(KCNK) 등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6·25 참전 국가유공자회 워싱턴지회, 워싱턴 재향군인회, 미 한국전 재향군인협회 소속 한·미 참전용사 50여명을 초청해 영화를 상영한 것이다. 1950년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던 ‘영원한 노병’ 스티븐 옴스테드(85) 예비역 장군은 영화 속 흥남 철수 작전과 피란민들의 생이별 장면을 보면서 애써 참고 있던 눈물을 끝내 흘리고야 말았다. 옴스테드 장군은 “당시 흥남 부두에서 아우성치던 사람들의 모습과 군함, 병력 등의 움직임을 정확히 그려 내 정말 놀랐다”며 “지금 자랑스럽고 성공한 한국이 존재하는 것은 바로 1950년대 초 북한·중공군과 싸운 군인들의 희생뿐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커다란 아픔을 겪었던 민간인들의 희생 위에서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이날 상영회에는 흥남 철수 과정에서 선박 내 무기를 버리고 피란민들을 극적으로 탈출시킨 당시 10군단장 에드워드 아몬드(1892~1979) 소장의 외손자 토머스 퍼거슨(72) 예비역 대령도 참석했다. 퍼거슨 대령은 “외할아버지는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의 승인도 얻지 않고 즉석에서 배 안의 무기를 버리고 피란민들을 태우라는 결정을 내렸다”며 “그러나 나중에 아무런 문책을 듣지 않았고 오히려 피란민을 승선시킨 데 대해 칭찬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경주 6·25 참전 국가유공자회 워싱턴 지회장은 “이런 전쟁이 한국 땅에서 되풀이되면 안 된다. 이 영화를 통해 한·미 동맹의 특별한 의미를 재조명하게 됐다”고 밝혔다. 나르스 콜리바(85) 미 한국전 재향군인협회장은 “영화는 감동 그 자체였다”며 “한국전에 참전했던 모든 미국인들이 이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격동의 한·일 70년] 독립유공자 후손 처우 실태

    [격동의 한·일 70년] 독립유공자 후손 처우 실태

    정부는 올해 광복 및 분단 70주년을 맞아 국정과제의 하나로 ‘명예로운 보훈’을 채택했다. 하지만 정부의 보훈정책은 친일 잔재 청산과 ‘광복’보다는 한·미 동맹 강화나 6·25 참전 등 ‘분단’ 극복과 안보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는 평가다. 12일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보훈 대상자는 지난해 12월 31일 기준으로 모두 242만 2727명이고 이 중 독립유공자(순국선열·애국지사) 관련 대상자는 6만 6190명이다. 생존 독립유공자(애국지사)는 88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6만 6102명은 배우자와 자식 등 돌아가신 애국지사의 유가족이다. 보훈처는 생존 독립유공자에게 훈격에 따라 매달 97만 3000원에서 490만 8000원의 보상금을 지급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후손이다. 특히 사망한 유공자의 유족(배우자 포함)은 대통령 표창(52만 2000원)부터 건국훈장 1~3등급(217만 4000원)까지 매달 훈격에 따라 다른 보상금을 지급받는다. 그러나 유가족 중 실제 보상금을 지급받은 인원은 지난해 연인원 기준 5786명이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양승만(1990년 사망)씨의 다섯째 딸 양옥모(74) 할머니는 해방 당시 한국으로 돌아갈 시기를 놓쳐 중국에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양씨는 2011년 한국에 들어왔다. 하지만 아버지가 받은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에 따른 유공자 월 보상금 120여만원은 중국에 있는 언니가 받고, 본인은 매달 기초노령연금 20만원밖에 받지 못한다. 박근영 독립유공자유족회 사무총장은 “중국에서 독립운동한 선조를 따라 살다 한국으로 온 사람이 1300여명 정도 되지만 한국에 기반이 없어 여자들은 주로 식당이나 가정집 파출부, 남자는 노가다 판을 전전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밝혔다. 보상금을 지급받은 유족 5786명 중에서도 건국훈장보다 등급이 낮은 건국포장이나 대통령 표창 대상자 1883명(32.5%)은 월 보상금이 52만 2000원~91만 6000원 수준으로 생계비로는 부족하다는 평이다. 새정치민주연합 김기준 의원실이 보훈처로부터 제공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1월 한 달간 독립유공자와 후손에 대한 보훈액수 총액은 65억 873만여원으로 나타났다. 보훈처는 현실적으로 모든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보훈처 관계자는 “보상금 혜택을 받지 못하는 유족에게도 영주귀국자에 대한 국내 정착금과 유족의 의료비 혜택, 취업 가점 등으로 수혜를 확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보훈처는 지난해까지 독립유공자가 1945년 8월 15일 이후 사망한 경우 손자녀에게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부터 최초 등록 당시 자녀까지 모두 사망해 유족 가운데 보상금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는 경우 손자녀 중 1명에게 보상금을 지급한다. 그러나 정부의 올해 보훈 예산은 5조 2108억원(세출예산 4조 4674억원+기금예산 7434억원)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 3조 6041억원은 보훈 심사와 국가유공자(독립유공자, 상이용사 등 포함)의 보상비용으로 투입된다. 이 밖에 의료·교육 등 보훈복지가 5971억원, 보훈선양사업 예산이 607억원이다.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사업 기금은 605억원이다. 이에 따라 보훈 예산 확보와 이명박 정부 시절 차관급 기관으로 격하된 보훈처의 위상 강화가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무엇보다 숨겨진 해외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에 대한 발굴 노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안성호(충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한국보훈학회장은 “80세가 넘는 해외 6·25 참전 군인도 매년 초대하는데 중국 만주나 연해주 등 해외에 생존한 독립유공자도 적극 발굴하고 신경 써야 할 시점”이라고 밝혔다. 친일 행위자가 여전히 국립묘지에 독립유공자와 나란히 안장되는 현실도 풀기 어려운 과제다. 일본군으로 복무했던 반민족 행위자들이 6·25전쟁 등을 통해 국가 수호 공헌자로 둔갑했기 때문이다. 박 사무총장은 “월남 파병자나 6·25 참전자는 봉급을 받으면서 국가에 기여했지만 독립운동한 사람들은 자기 재산을 써 가면서 국가에 기여했다”며 “친일파의 후손은 잘살고 해외로 뿔뿔이 흩어진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여전히 소외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2·8독립선언 96주년… 도쿄에서 울려퍼진 만세 삼창

    2·8독립선언 96주년… 도쿄에서 울려퍼진 만세 삼창

    지난 7일 일본 도쿄의 재일본한국YMCA회관에서 열린 2·8독립선언 96주년 행사에서 황인자(왼쪽부터) 새누리당 의원, 유흥수 주일대사,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박유철 광복회장 등 참석자들이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2·8독립선언은 1919년 2월 8일 한반도 출신 유학생이 도쿄의 당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한 사건으로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날 주일 한국대사관에서는 일본에서 학업이나 생업에 종사하다 한국전쟁에 참가한 재일학도의용군들에게 호국영웅기장(메달)이 수여됐다. 호국영웅기장은 6·25전쟁 정전 60주년인 2013년 참전 유공자에게 정부 차원의 존경과 감사를 표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해외의 참전 용사에게 수여되기는 처음이다. 국가보훈처 제공
  • 한국전쟁 미국인 참전용사 다큐 美채널서 방영

    한국전쟁 미국인 참전용사 다큐 美채널서 방영

    “한국이라는 나라를 전혀 몰랐지만 목숨을 걸고 싸웠지요. 한국의 눈부신 발전이 자랑스럽습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붙잡혀 죽을 고비를 넘겼던 미국인 참전용사 3명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미 비영리 케이블·위성 방송사 C-SPAN이 운영하는 다큐멘터리·역사채널(C-SPAN3)을 통해 방송돼 눈길을 끈다. 미국 내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있는 한국전쟁유업재단(이사장 한종우 시라큐스대 교수)은 5일(현지시간) 1950년 인천상륙작전, 장진호전투 등에 참전해 싸우다 중공군에 붙잡혀 1953년 풀려날 때까지 힘든 포로생활을 했던 참전용사 찰스 로스(왼쪽·87), 클리퍼드 페트리(가운데·84), 살바토레 콘테(오른쪽·86)를 인터뷰한 내용이 8일부터 한 달 동안 방영된다고 밝혔다. 재단은 지난해 7~8월 한국전쟁포로협회 행사에서 이뤄진 인터뷰에 대한 방송이 최근 결정됐다고 전했다. 재단에 따르면 로스는 “지난 60여년간 포로수용소 경험을 얘기하지 않다가 이번 인터뷰를 통해 처음 밝히게 됐다”며 “한국은 기적을 이룬 나라”라고 평가했다. 페트리는 “포로 생활 이후 종교를 갖게 됐다”며 “북한을 용서하고 싶지만 잊지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콘테는 “한국은 생소한 나라였지만 한국이 이룬 발전을 보면서 참전 경험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들은 6·25전쟁은 잊혀진 전쟁이 아니어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강조했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기일에 맞춰… 가족 품에 안기는 6·25 참전용사

    6·25전쟁 때 전사한 국군 참전용사의 유해가 본인 기일(忌日)에 64년 동안 애타게 기다린 가족의 품에 안긴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북한군과의 교전 중 전사한 고(故) 김영탁 하사(당시 23세)의 전사자 신원확인 통지서와 국방부 장관 명의의 위로패, 유품 등을 28일 고향인 경북 청도에서 여동생 김경남(84)씨에게 전달한다고 27일 밝혔다. 육군 9사단 29연대 소속이던 김 하사는 1950년 9월 입대했고 1951년 1월 15일 강원도 정선·강릉 일대에서 인민군 침투부대 격멸작전에 참여했다 전사했다. 군 당국은 1954년 김 하사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전투가 끝나도 김 하사 유해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유족들은 다만 1951년 1월 16일(음력 1950년 12월 9일)부터 김 하사가 보이지 않았다는 주변의 증언을 토대로 음력 12월 9일을 기일로 정해 매년 제사를 지내왔다. 유해가 전달되는 28일은 음력으로 12월 9일이다. 하지만 60여년이 지난 2013년 9월 유해발굴감식단은 강원 동해시에 사는 김기준(76)씨로부터 “아버님이 동해 망상동 선산 인근에 국군 전사자 일부를 매장했다고 말씀하셨다”는 제보를 받았다. 이후 감식단은 제보지역에서 7구의 유해와 함께 현장에서 군번 ‘1136180’이 선명하게 새겨진 스테인리스 재질의 인식표와 버클, 단추 등을 함께 발견했다. 이후 유전자 감식 등 15개월 동안 확인 작업을 벌인 결과 유해 1구와 유품의 주인공이 김 하사로 확인됐다. 여동생 경남씨는 “살아생전 오빠를 현충원에 모시는 게 소원이었는데 이제야 가슴에 묻었던 한을 풀었다”고 말했다. 한편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2000년부터 국군전사자 8477구를 발굴했고 이번에 김 하사의 신원을 포함해 모두 100명의 신원을 확인해 유족에게 통보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강제북송 국군포로에 국가 배상 책임 첫 인정

    2004년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돌아오려다 강제 북송된 국군포로 한만택(당시 72세)씨 유족에게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7부(부장 홍동기)는 15일 한씨의 유족 3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1억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국군포로의 북송과 관련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것은 처음이다. 재판부는 국방부와 외교부 공무원들이 한씨를 보호해 국내로 무사히 송환될 수 있도록 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아 한씨가 강제북송돼 사망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특히 “6·25 전쟁이라는 국가적 위난에 국가 존립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참전했다 포로 신분이 된 사람들을 송환하는 것은 국가의 기본적 책무”라며 “공무원들의 과실로 50년 넘는 기간동안 염원했던 한씨의 귀환과 가족 상봉이 무산됐고, 한씨가 결국 사망에 이르렀다”고 강조했다. 6·25전쟁에 참전해 포로가 된 한씨는 2004년 12월 두만강을 넘어 중국으로 탈북, 가족을 만나려다가 중국 공안에 체포된 뒤 강제 북송됐다. 국방부는 한씨가 생존해 있고, 중국에서 가족과 상봉하는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는 진정서를 한씨 가족으로부터 접수받고도 한씨가 재외공관의 적절한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외교부 등에 협조를 요청하지 않았고, 한씨가 체포됐다는 사실을 통보받은 뒤에야 외교부와 국가정보원에 협조 공문을 보냈다. 외교부 역시 구체적인 구금 장소 등을 확인하고도 국내 송환이 이뤄지도록 한씨를 방문 면담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 북송 사실만 한씨 가족들에게 알렸다. 강제북송돼 평안남도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된 한씨는 2009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시론] 특권은 의무를 요구한다/손봉호 고신대 석좌교수·나눔국민운동본부 대표

    [시론] 특권은 의무를 요구한다/손봉호 고신대 석좌교수·나눔국민운동본부 대표

    소위 ‘땅콩 회항’ 사건은 우리 사회에 다양한 반향을 일으켰다. 그 가운데 하나는 가진 자들에 대해 시민들이 평소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시각이 확인되고 강화된 것이다. 물론 모든 부자와 권력자들이 다 그렇게 오만하고 무례하지는 않다. 그 사건이 좀 특이한 기업, 이상한 중역의 우발적인 행동이었다면 가십거리는 될지언정 분노의 대상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돈과 권력을 가진 자라면 충분히 그런 짓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사람들이 흥분한 것이다. 어쨌든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의 흉한 단면을 노출시켰고, 그것에 대해 근본적으로 반성할 계기를 만들었다. 곪은 종기는 터져야 낫는 법. 수치스럽지만 잘 터졌다 할 수 있다. 가진 자들이 그렇게 된 이유는 충분하다. 과거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경제발전에 목을 걸었고 그 과정에서 최하급 가치인 돈이 최고의 가치로 등극했다. 권력, 지위, 인기, 쾌락 등 거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게 하는 만능의 열쇠로 격상됐고 돈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지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는 착각이 생겨났다. 그러나 돈은 모든 가치 가운데 최하급이다. 사랑, 자비, 지혜, 관용 등 고급 가치는 경쟁적이지 않아서 공동체에 조화와 평화를 증진한다. 그러나 돈은 영합적으로 분배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권력, 인기와 함께 매우 경쟁적이고 공동체에 갈등을 쉽게 조장한다. 그동안 경제가 발전해 우리 삶이 풍요하게 됐고 민주화가 이뤄져 자유의 폭이 넓어졌는데도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인도네시아, 필리핀보다도 낮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거의 꼴찌 수준이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돈벌이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다. 유난히도 경쟁심이 강한 한국인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뒤지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돈이 사람의 위상을 결정하는 우리 사회에서 실업자가 늘고 빈부 격차가 벌어지니 고통지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아픈 상처에다 물을 끼얹는 것이 바로 가진 자들의 오만이며 무책임이다. 서양에는 로마 시대부터 ‘특권에 따르는 의무’(noblesse oblige)를 다하는 전통이 있었다. 귀족은 전투에 앞장서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취급해 왔다. 우리나라에도 경주 최부자 가문처럼 비슷한 예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서양에서만큼 일반적이지는 못했다. 6·25 전쟁에 미군의 장성 아들이 142명이나 참전해 35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했다. 우리나라 고위 공직자와 그 자녀들 상당수는 병역기피를 특권으로 향유하고 죄책감도 없는 것을 보면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미국의 부자 워런 버핏은 빌 게이츠가 출연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게이츠 부부가 세운 복지기관에 기부했다. 자기가 세운 복지기관보다 게이츠 재단이 복지활동을 더 잘하기 때문이라 했다. 부자이지만 존경받는 것은 그런 멋진 신사도 때문이다. 왜 우리나라 부자들은 사회의 존경을 받지 못하는지 근본적으로 반성해 봐야 한다. 혹시 ‘갑질’에는 능숙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에는 인색해서가 아닐까? 인간의 삶이 주로 개인의 능력에 의해 좌우되던 과거에도 특권과 권한에 의무가 따랐다면 인간의 삶이 사회에 의해 좌우되는 오늘날에는 그 의무가 훨씬 더 클 수밖에 없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질서가 유지되고 도로·항만·철도 등 기간시설이 설치·유지·보수되는데, 이런 질서와 시설이 없으면 어떤 기업도 사업을 할 수 없고 누구도 큰돈을 벌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가진 자는 국민 모두에게 빚을 진 것이다. 가난하게 되는 것도 게을러서가 아니라 주로 국가의 교육, 복지, 과세 등의 정책이 잘못됐거나 미흡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승자의 기부와 사회공헌은 시혜가 아니라 사회에 진 빚을 갚는 것이며 패자가 도움을 받는 것은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앞으로는 특권을 누리고 권한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부러움이 아니라 존경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존경받는 삶이라야 가치와 보람이 있다.
  • 공군 첫 여성 포대장 “빈틈없는 영공 방위 최선”

    공군 첫 여성 포대장 “빈틈없는 영공 방위 최선”

    공군 역사상 처음으로 방공유도탄 패트리엇(PAC)2 미사일 포대를 지휘하는 여군 포대장이 탄생했다. 주인공은 공군 학사장교 107기 이영미(37) 소령이다. 이 소령이 지휘하는 PAC2 미사일은 공군이 2012년에 실전 배치한 방공 유도탄으로 고도 15㎞ 이내에서 폭발해 그 파편으로 항공기와 전술 탄도탄을 요격한다. 1개 포대는 미사일 4발을 갖춘 6개의 발사대로 이뤄졌고 공군은 2001년부터 여군에게 방공 병과를 개방했다. 공군 관계자는 “교육부대의 지휘관이 아닌 실제 작전을 수행하는 전투 포대의 지휘관에 여군이 임명된 것은 그만큼 작전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북대를 졸업하고 2002년 임관한 이 소령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으로 군인이 됐다. 6·25 참전용사였던 할아버지와 공군 정비 준사관으로 근무했던 아버지를 보고 자란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국가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생각으로 공군 학사장교를 지원했다. 이후 제3방공유도탄여단 상황실장, 방포교 작전계획담당, 19전투비행단 대공방어대장 등을 맡았고 공군참모총장 업무 유공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소령은 특히 정신분열증을 앓는 병사와의 면담을 계기로 병사들의 심리와 상담기법을 배우기 위해 지난해 8월 아주대에서 사회복지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 병사들에 대한 관심이 지극한 이 소령도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에 아직 미혼이다. 이 소령은 “방공유도탄의 핵심 작전을 수행하는 패트리엇 미사일 포대장이 되니 어깨가 무겁다”면서 “영공방위 임무에 빈틈이 생기지 않도록 부대원들과 호흡을 맞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한국기업 해외 진출 도와달라”… 30분 단위 ‘세일즈 외교’

    “한국기업 해외 진출 도와달라”… 30분 단위 ‘세일즈 외교’

    박근혜 대통령이 11일 30분 단위로 아세안 국가 정상들과 회동을 가졌다. 오전에 테인 세인 미얀마 대통령,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에 이어 오후에도 통싱 탐마봉 라오스 총리, 쁘라윳 짠오차 태국 총리,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 등과의 연쇄 면담이 이어졌다. 박 대통령은 비선 실세 논란 한 가운데였지만 “각국 정상들에 대한 각각 다른 인사말과 거론해야 할 주요 현안 등을 다 암기하고 있더라”고 회의에 참석한 외교부의 한 주요 인사가 전했다. 예컨대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에게는 “현장 시찰을 의미하는 ‘블루스칸’과 ‘e-블루스칸’을 통해 일하는 내각을 실천하면서 개혁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통령의 리더십하에 인도네시아가 더욱 발전하길 기대한다”고 덕담을 건네며 양국 정상 간 인연을 설명했다. 박 대통령은 이 짧은 정상회담에서 집중적으로 한국 기업 진출에 협력해 줄 것을 부탁했으며 개별 기업의 민원 해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였다. 미얀마에 대해서는 “우리 기업(대우인터내셔널)이 지난해 7월부터 가스 생산을 시작한 미얀마 북서부 해상 가스전 개발 성공 사례와 같이 에너지와 광물자원개발 분야에서 양국 간에 더 많은 성공 사례가 나올 수 있도록 지속적인 협조를 기대한다. 미얀마의 경제 성장에 따른 물동량 증가로 항만개발이 필요한 것으로 아는데 세계적인 기술력과 노하우를 가진 한국과의 협력 관계가 더욱 강화되길 기대한다”고 요청하는 식이다. ‘CEO 서밋(최고경영자 정상회의)’ 기조연설에서는 ‘글로벌 가치사슬’을 제시하며 “한국 스마트폰의 상당 부분이 베트남에서 생산되면서 베트남 수출의 약 20%를 차지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이런 글로벌 가치사슬이 더 큰 경제적 혜택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중소기업의 참여가 매우 중요하다”면서 “중소기업이 참여할 수 있는 품목을 발굴하고 글로벌 가치사슬을 이끌어 가는 대기업과의 네트워크 형성을 촉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아세안 10개국 정상들은 이번 방한 기간 ‘홍보전’에 뛰어드는 등 왕성한 활동을 개시했다. 취임 이후 친서민 개혁 정책을 표방해 온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이날 부산 경성대를 방문해 자국 출신 유학생과 결혼이민자 등을 만나 격려했다. 경성대에는 전국 대학 가운데 가장 많은 130여명의 인도네시아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와 2011년 잠수함 3척 수출 계약을 체결한 대우조선해양, 부산의 신항만 시설 등도 들를 예정이다. 미얀마의 초대 민선 대통령으로 개혁·개방 정책을 이끄는 테인 세인 대통령은 방한 기간 부경대와 부산외국어대에서 명예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부산외국어대는 1992년 국내 유일의 미얀마학과를 처음 설치한 학교다. 싱가포르의 리셴룽 총리는 이날 서울시 신청사 지하 서울교통정보센터를 방문해 서울의 교통 시스템 운영 현황을 살폈으며 박원순 서울시장으로부터 명예 시민증을 수여받기도 했다. 통싱 탐마봉 라오스 총리는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의 김영목 이사장과 만나 한국의 대라오스 공적개발원조(ODA)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새마을운동 등에 높은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훈 센 캄보디아 총리도 방한 기간 코이카 측을 만나 협력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이 외에 응우옌떤중 베트남 총리는 국내 기업인들과 면담하고 부산 경제자유구역청을 방문하며 쁘라윳 짠오차 태국 총리는 태국군 6·25전쟁 참전 기념비가 있는 유엔기념공원을 찾을 것으로 알려졌다.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과 하사날 볼키아 브루나이 국왕은 12일 출국에 앞서 김해공항에서 각각 별도로 FA50 전투기를 둘러보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이번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는 2009년에 이어 5년 만에 다시 열린 것으로, 1차 회의 때 ‘포괄적 협력 동반자 관계’였던 양측 관계는 2010년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됐다. 그간 전통적으로 정치·안보 분야 협력에는 소극적이었던 아세안과 이 분야에서도 협력 기반을 강화하는 것 역시 정부의 주요 목표 가운데 하나다. 부산 이지운 기자 jj@seoul.co.kr
  • 유공자 ‘나라사랑 행복집’ 어느덧 1740호

    유공자 ‘나라사랑 행복집’ 어느덧 1740호

    “평생 살아온 우리 마을에서 동네 사람들과 함께 100살까지 삶을 누리고 싶어요.” 20대 초반 6·25전쟁에 참전했던 박호식(83)씨는 지난 21일 강원 원주시 문막읍에서 새로 집을 지었다며 이같이 밝혔다.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이 준공한 ‘나라 사랑 행복한 집 1740호’에 살게 된 주인공이다. 자기 집에 살며 나이 들어 가는 것은 많은 노인들이 꿈꾸는 삶이다. 노후에 행복한 집에서 살려면 사회적 고립을 피할 커뮤니티가 주변에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바로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계속 거주하는 게 최선이다. 또 노후에도 내 집에서 오랫동안 안전하게 생활하려면 집을 고쳐야 한다. 그래서 복지사업으로 해외에서 등장한 게 ‘내 집에서 나이 들기’이고, 노인의 신체 특성이나 생활 습관을 감안해 집을 고치는 ‘유니버설 디자인’으로 거듭났다. ‘나라 사랑 행복한 집’도 이런 취지를 담았다. 나라 사랑 행복한 집 사업은 복권기금을 활용해 육군본부 및 각 지방자치단체 등 여러 기관과 함께 국가유공자, 보훈 가족의 오래된 집을 편리하게 고치는 것이다. 2007년 이후 지금까지 1700채를 웃도는 집을 고쳤다. 이번 사업을 통해 거동에 불편을 겪는 박씨의 집 밖에 있던 재래식 화장실을 철거하고 실내에 현대식 화장실을 만들었으며 거실에서 창고까지의 동선에 핸드레일을 설치해 편의성을 높였다. 빗물이 새던 기와지붕도 전면 개량했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강영만·강쾌출 6·25용사 유해 63년만에 유가족 품으로 귀환

    6·25전쟁 때 전사한 20대 참전용사들의 유해 2구가 63년 만에 유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1951년 경남 김해와 강원 인제에서 전사한 고(故) 강영만 하사(당시 25세)와 강쾌출 이등중사(당시 20세)의 유해 신원을 확인했다고 29일 밝혔다. 강 하사는 1951년 1월 결혼한 지 한 달 된 아내를 두고 육군 8사단에 배속됐고 같은 해 8월 19일 인제지역 2차 노전평 전투에서 전사했다. 강쾌출 이등중사의 유해는 2008년 김해공원 묘지에서 발굴됐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백선엽 한미동맹상’ 웨버 수상

    ‘백선엽 한미동맹상’ 웨버 수상

    국방부는 23일(현지시간) 미국 국방부에서 열린 제46차 연례한미안보협의회의(SCM) 공동 기자회견 직전 같은 장소에서 ‘제2회 백선엽 한미동맹상’ 시상식을 갖고 윌리엄 웨버 미국 육군 예비역 대령에게 상을 수여했다. 웨버 대령은 6·25전쟁에 참전해 한국 방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89세의 고령임에도 6·25전쟁의 의미를 널리 알리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국방부는 수상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6·25전쟁 중 원주 지역 전투에서 오른쪽 팔과 다리를 잃었다. 전후에는 20여년 동안 6·25전쟁 미 참전용사 기념재단 회장으로서 6·25전쟁 기념비 건립 등을 추진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커버스토리] “월북하면 100억” 달콤한 유혹… ‘USB에 한국 가요’ 문화적 충격

    [커버스토리] “월북하면 100억” 달콤한 유혹… ‘USB에 한국 가요’ 문화적 충격

    남북한이 살포해 온 전단의 내용물은 시대적 상황 변화와 궤를 같이해 왔다. 전단 살포의 목적은 물리적인 전투를 직접 벌이지 않고 상대 집단의 가치체계에 혼란을 야기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전단은 당시의 정치·경제·사회상을 그대로 반영해 왔다. ●남북 가치체계 혼란 야기 ‘조용한 전쟁’ 전쟁 중에는 항공기로 적지에 살포하는 전단이 가장 보편적인 방식이다.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미 8군사령부와 극동사령부가 뿌린 대북 전단은 24억 6000만장이 넘는다. 우리 군이 뿌린 대북 전단까지 합하면 40억장이 넘는다는 추산도 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월에는 한 달간 1억 5000만장의 전단이 살포되기도 했다. 북한 측도 3억장을 살포하며 대응했다. 양측 모두 귀순을 유도하며 추위와 배고픔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이 주를 이뤘다. 국군이 전쟁 당시 북한군을 상대로 살포한 삐라에는 “중공군이 좋은 무기는 자기네가 차지하고 못쓸 무기만 북한군에 넘겨 주고 있다”며 북·중 혈맹 관계를 이간질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 눈길을 끈다. 당시 김일성-마오쩌둥(毛澤東)으로 연결되는 북·중 관계는 항일투쟁의 동지로 혈맹 이상으로 여겨졌다. 유엔군 총사령관 명의로 북한군에 살포한 삐라도 귀순을 유도하는 ‘안전보장증명서’가 대표적이다. 한국어와 영어, 중국어로 된 이 증서는 이 종이를 가지고 항복하면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이다. 북한은 6·25 전쟁에 참전한 미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무고한 주민들을 살해하는 미군의 모습을 그린 삐라를 제작해 대응했다. 사기를 떨어뜨리고 미군들의 향수를 자극하기 위해 ‘사랑하는 어머니께’(Dear Mom)로 시작하는 편지의 내용을 어머니가 읽고 있는 내용도 있었다. 우리 군 장병 가운데 북한에 투항한 병사가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는 내용도 많았다. 6·25 전쟁이 끝난 직후 남북한의 삐라전쟁은 경제발전상을 그대로 반영했다. 특히 북한이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던 1950~1960년대는 대남 공세가 거셌고 혼란한 시대상을 틈타 실제 월북한 인사도 많을 정도로 남한 정부는 수세에 몰렸다. 북한은 1960년대와 1970년대 김일성 주석의 우상화 작업을 본격화하면서 ‘우리 장군님 제일이야’, ‘민중 위주의 나라’, ‘치료비·공해 없는 민중이 살기 좋은 세상’ 등의 내용이 적힌 삐라를 살포했다. 특히 1960년대까지 평양의 빌딩과 가정집을 전단에 담아 월북하면 아파트까지 주겠다고 제의했다. 하지만 남한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212달러로 북한(194달러)을 앞지른 1969년 이후 상황이 바뀌게 된다. 1970~1980년대 체제 경쟁에서 점차 밀리게 된 북한에서 넘어온 삐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여성편력 등을 거론하며 모욕하는 내용이 많았다. 1980~1990년대에 와서는 의거월북하는 국군 장병들에게 대학 교육까지 무료로 시켜 주는 동시에 생활보장금으로 최고 3억원, 상금으로 100억원이 넘는 돈을 준다는 과장된 내용도 나왔다. 남한은 1970년대 서울에서 가장 높던 삼일빌딩(31층)을 내세웠다. 1980년대에 와서는 국산 자동차의 세계 수출이나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소 등 경제 발전상을 과시했다. ●1970년대 말부터 ‘풍선 대북전단’ 요즘처럼 풍선에 싣고 대북 전단을 살포하는 모습은 197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전신)가 심리전을 기획하면서 타이완 국민당 정부가 풍선에 식료품을 실어 중국 본토에 보내는 사례를 본뜬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북한제 ‘천리마 라디오’와 같은 모양의 라디오를 만들어 대북 전단 풍선에 실어 보냈다. 대북 전단 풍선에 다는 타이머 역시 타이완 정부가 가르쳐 준 것으로 전한다. 정부는 당시 이에 대한 보답으로 타이완이 계절풍을 이용해 중국 둥성 쪽에 전단을 보낼 수 있도록 전북 부안에 임시 기지를 제공하기도 했다. 남한은 1980년대부터는 유명 연예인 사진을 전단에 넣고 월남을 유도하기도 했다. 또 선정적인 여자 모델 사진과 함께 귀순을 유도하고 월남할 때의 보상금과 혜택의 범위를 기재했다. 1990년대 중반 탈북한 정모씨에 따르면 당시 남한 정부는 삐라와 함께 옷 양말, 통조림, 1㎏짜리 봉지쌀, 여자 속옷, 시계 등을 비닐로 포장해 살포하기도 했다. ●北, 배용준·이승연 사진 넣어 대남전단 북한도 1990년대 이후부터 남측 유명 연예인들이 등장한 삐라로 관심을 끌고자 했다. 당시 유명세를 탄 배용준이나 이승연의 사진에 ‘민족의 제일 자랑 김정일 장군 만세!’라는 문구를 넣어 이들이 북한을 찬양하는 것처럼 디자인한 것이다. 북한의 대남 전단 공세는 김대중 정부가 대북 포용정책과 남북정상회담을 실시하던 2000년대 초에도 지속됐지만 남북한이 2004년 심리전을 중단하기로 함에 따라 주춤해졌다. 북한은 대신 인터넷을 통한 선전 선동으로 방향을 바꿨다. 노동당 통일전선부의 ‘우리 민족끼리’ 사이트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2010년 천안함 사건에 따른 5·24 대북 제재 조치로 심리전이 재개됐고, 북한은 지난해 연평도와 백령도 등 접경 지역에 한국군의 전투의지를 꺾는 내용의 전단을 살포하기도 했다. 2000년대에는 정부 대신 탈북자 출신 민간단체들이 대북 전단 살포에 나섰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의 치부를 겨냥한 삐라 살포는 북한 체제에 위협이 됐다. 이들은 김씨 정권이 수입하는 프랑스 코냑, 종마, 명품 가방, 시계와 유아용품 등 사치품을 부각시켰다. 특히 김정일의 여성편력 등 문란한 사생활 등에 초점을 맞추면서 북한이 ‘상호비방’ 중지를 요구하고 나선 계기로 평가된다. 자유북한운동연합 등의 대북 민간단체들이 지난 10일 경기 파주시 통일전망대 주차장에서 풍선에 매달아 띄운 전단에는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영결식 사진과 함께 “우리 탈북자들은 북조선 인민해방과 민주화를 위해 김정은 3대 세습을 끝내기 위한 자유민주통일의 전선으로 달려간다”는 내용이 담기기도 했다. ●김정은 일가 가계도 실린 대북전단도 특히 최근 대북 민간단체들은 전단에 보통 1달러짜리 지폐나 USB 등도 같이 넣어 보낸다. USB에 담긴 한국 드라마나 영화, 가요 등을 통해 문화적 충격을 주기 위한 것이다. 최근 북한이 전단 살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 일가의 가계도가 실렸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김 제1위원장의 생모 고영희의 부친은 제주도 출신의 재일교포로 조총련의 동포 귀국 사업에 따라 북한에 들어간 인물이다. 북한에서 재일교포들은 항일혁명과 6·25전쟁 후 재건을 이룩한 주류 사회와 달리 기회주의자로 평가된다. 북한 당국이 순수혈통으로 권위를 내세우는 ‘백두혈통’이 알고 보니 제주도 출신 재일교포 후손이라는 내용은 김 제1위원장의 권위를 손상시킬 수밖에 없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北 대북전단 총격 이후] 北, ‘미군 유해’ 카드로 美와 접촉 안간힘

    북한이 ‘인질외교’에 이어 미군 ‘유해’를 카드로 미국에 대화를 촉구하는 모양새다. 북한은 그동안 자국을 방문한 미국 관광객을 ‘적대행위’ 등 죄목으로 억류해 미 정부와 관련 사안에 대한 논의를 촉구하는 일종의 ‘인질외교’를 구사했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이 원하는 ‘고위급’의 외교사절 파견은 없다는 입장을 유지하며 대화에 나서지 않고 있자 이번엔 ‘유해발굴 사업’ 재개를 고리로 북·미 접촉을 시도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13일 6·25전쟁 참전 미군 유해들이 유실될 위기에 놓였다며 이것은 미국의 ‘적대시정책’ 탓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북한은 이날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 대변인 담화’에서 척 헤이글 미국 국방장관이 지난달 19일 미군 유해 발굴이 중단된 책임을 북한에 돌리는 발언을 했다며 “역사는 날강도적인 대조선 적대시정책으로 하여 조·미(북·미) 쌍방이 합의한 미군 유해 발굴 문제와 같은 인도주의 사업조차 파탄시킨 미 행정부의 반인륜적 범죄를 저주하며 단죄하게 될 것”이라고 미국의 책임을 강조했다. 북한이 미국과의 대화를 통한 해법 모색에 안간힘을 쓰는 것은 사실상 유엔을 비롯한 국제무대에서 미국의 주도로 대북 압박이 진행되고 있다는 현실적 고민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북한은 핵과 인권문제 등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이 강화되는 시점에서 북·미 대화를 통한 ‘일괄타결’식 해법을 원하는 듯 보이지만, 미국은 여전히 ‘복지부동’이다. 미국은 1996년부터 북한에서 미군 유해 발굴 작업을 진행하다가 2005년 미국 발굴팀의 안전 우려를 이유로 중단했으며 2011년 북한과의 합의로 재개했으나 이듬해 3월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계획 발표로 또다시 중단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6·25 때 전사 美 쇼 대위 흉상 海士서 제막

    6·25 때 전사 美 쇼 대위 흉상 海士서 제막

    6·25전쟁이 나자 “한국은 나의 조국”이라며 미국 해군에 자원입대해 참전했다가 전사한 미국 해군 대위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전사 당시 28세) 대위의 흉상이 29일 해군사관학교에 건립됐다. 해군사관학교는 이날 학교 안 통해관 1층 도서관 로비에서 이기식 해군사관학교장과 리사 프란체티 주한 미국해군 사령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쇼 대위의 흉상 제막식을 했다. 일제강점기 때 선교사로 한국에 와 있던 윌리엄 얼 쇼 부부의 외아들로 1922년 평양에서 태어난 쇼 대위는 1941년 일제가 일가족을 강제추방할 때까지 한국에서 생활했다. 해군 중위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전했던 그는 전역 뒤 1947년부터 1년간 대한민국 해군사관학교 전신인 ‘조선 해안경비대 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며 생도들에게 영어와 함정 운용술을 가르치는 등 해군 발전에 이바지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하버드대에서 철학박사 학위과정을 공부하다 6·25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한국은 나의 조국”이라며 자원해서 해군대위로 재입대해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다. 쇼 대위는 1950년 9월 22일 서울 은평구 녹번리 전투에서 매복한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참전한 지 몇 달 만에 28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그는 부모에게 “지금 한국 국민이 전쟁 속에서 고통당하고 있는데 이를 먼저 돕지 않고 전쟁이 끝난 후 평화 시에 선교사로 한국에 간다는 것은 제 양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습니다”는 내용의 편지를 쓰고 6·25전쟁에 참전했다. 창원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서울수복 기념행사. 서울시청 광장에서 1950년 9월 28일을 재연하다

    서울수복 기념행사. 서울시청 광장에서 1950년 9월 28일을 재연하다

    해병대사령부는 28일 서울시청 광장 등에서 6·25전쟁 당시인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는 ‘제64주년 서울수복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행사는 제64주년 서울수복 기념식 및 중앙청 태극기 게양 재연, 해병대마라톤 대회, 연희고지 전투 전승행사, 안보전시 및 군 문화 체험 등으로 구성됐다. 서울수복 기념식은 서울시 및 보훈처 관계자, 한미 해병대 참전용사, 학생 및 시민 2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시청 광장에서 개최됐다. 중앙청 태극기 게양 재연 때는 현역 장병, 학생, 시민, 미군 참전용사 대표 등이 참가했다. 미군 참전용사 대표인 윌리엄 윌슨(85)씨는 미 해병대 1사단 소속으로 실제 서울수복작전에 참전했다. 한미 해병대는 1950년 9월 15일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파죽지세의 공세로 서울수복작전을 감행했다. 그 결과 같은 해 9월 27일 오전 6시 10분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중앙행정관청인 중앙청을 점령해 옥상에 태극기를 게양했고, 다음날인 9월 28일 수도 서울을 완전히 수복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한·캐나다, 북극 탐사·2차전지 협력 MOU 체결

    한·캐나다, 북극 탐사·2차전지 협력 MOU 체결

    박근혜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간) 캐나다 의회에서 스티븐 하퍼 캐나다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고 두 나라가 1993년 수립한 ‘특별 동반자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이날 이뤄진 두 나라 정상 간의 회담은 ‘협력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진행됐다. 두 나라 정상은 자유무역협정(FTA)에도 정식 서명했으며 에너지·자원 관련 기술과 북극 연구·개발, 산림 분야 등으로 협력의 범위를 확대하는 등 각종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한국은 지질자원연구원과 캐나다 지질조사소 간 MOU를 통해 캐나다 인근 북극 지역 지질, 자원 등에 대한 공동 조사와 탐사를 추진할 수 있게 됐다. 한국 전자부품연구원과 캐나다의 세계 최대 수력발전기업인 ‘하이드로퀘벡’이 2차 전지에 대한 기술 협력을 추진키로 하는 등 에너지 기술 분야에서도 각종 MOU가 맺어졌다. 두 나라는 항공편의 운항 횟수, 노선 제한을 철폐하는 내용으로 2009년 가서명된 양국 간 항공자유화 협정에 정식 서명했으며 전국경제인연합회와 캐나다 상공회의소는 민간 경제협력위원회를 재개키로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전날 첫 공식 일정으로 수도 오타와의 총독 관저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서 “한·캐나다 FTA는 관계의 발전을 위한 새로운 도약대가 될 것이며 양국 간 파트너십은 양자 협력을 넘어 아·태 지역 협력, 유엔과 주요 20개국(G20) 등의 국제 협력으로까지 확대돼 나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데이비드 존스턴 총독은 “양국은 자유, 민주, 공정성 및 법치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고 양국 국민은 훌륭한 교육을 받은 교양인이며 세계 무대에서 책임감 있는 사람들로 인정받고 있다”고 화답했다. 캐나다는 이날 총독 관저 연회장에서 열린 국빈 만찬에 존스턴 총독 내외 외에도 하퍼 총리 내외, 베벌리 매클래클린 대법원장 내외 등 캐나다 정부 의전 서열 1~3위가 모두 참석하는 등 각별한 예우를 보여줬다. 청와대는 경협 확대 측면에서 에너지 기술 분야 교류 협력을 이번 방문의 대표적인 경제 성과로 꼽았다. 양국 간 ‘2차 전지’에 대한 기술 협력 MOU를 통해 캐나다의 원천 기술과 우리의 제조 기술을 결합해 전기자동차용 차세대 2차 전지(리튬폴리머)를 개발하는 동시에 현재 51% 수준인 우리의 2차 전지 국산화율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한편 박 대통령은 22일 오전 숙소인 총독 관저 정원에서 존스턴 총독 내외와 함께 기념식수를 했다. 이어 오타와 시내 중심부 캐나다 의회 맞은편에 자리 잡은 국립전쟁기념비를 찾아 헌화하고 묵념하며 6·25전쟁 당시 파병된 캐나다 참전 용사들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에 사의를 표했다. 박 대통령은 2박 3일간의 국빈 방문 일정을 마치고 23일 미국 뉴욕으로 이동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의 면담을 시작으로 유엔 일정을 시작한다. 오타와(캐나다) 이지운 기자 j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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