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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전쟁 때 경찰들이 확실하게 중공군 저지”

    6·25전쟁 당시 유엔군과 중공군이 격돌한 장진호 전투에서 우리나라 경찰부대인 ‘화랑부대’가 활약한 사실이 구체적으로 확인됐다. 경찰청은 오는 6일 현충일을 앞두고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화랑부대의 활약상을 발굴했다고 3일 밝혔다. 경찰청에 따르면 6·25전쟁 초기인 1950년 11~12월 장진호 전투에 참전한 미국 해병 로버트 태플릿 중령은 2002년 발간한 자신의 수기 ‘다크호스 식스’에서 “화랑부대는 상대 공격의 예봉을 잡았고 기관총 대원들의 영웅적인 희생은 대대 지휘본부 지역으로 진격하던 중공군을 확실하게 저지했다”고 서술했다. 미국 해병 마틴 러스의 저서 ‘브레이크 아웃’(2004년)에서도 장진호 전투와 관련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책에서 “전초에는 미 해병에 의해 훈련된, 군기가 있고 상당한 전투력을 가진 한국경찰 기관총 부대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장진호 전투에 경찰부대가 참전한 사실은 이미 알려진 내용이지만, 화랑부대원들의 활약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은 처음이라는 게 경찰청의 설명이다. 당시 미 해병의 통역장교였던 변호사 이종연(91)씨는 지난 4월 경찰청 관계자와의 면담에서 “한국 경찰은 장진호 서쪽 유담리에서 전투를 했다”며 “경찰관들이 전투 전문인 해병과 함께 싸우면서 주공격을 맡았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회고했다. 6·25전쟁 당시 경찰은 1만 5000여명이 유엔군에 배속돼 활동했다. 특히 미군에게 특별훈련을 받고 별도로 편제된 경찰관들은 ‘화랑부대’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경찰청이 1957년 작성된 ‘유엔 종군기장 수여대상자 조사명부’ 등을 통해 확인한 장진호 전투 참전 경찰관은 모두 18명이다. 전체적으로는 40여명이 참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육군 35사단 참전용사 아들에게 훈장

    육군 35사단은 한국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고(故) 황인석 옹을 대신해 그의 아들인 황성배(62)씨에게 무성화랑무공훈장을 수여했다고 3일 밝혔다. 고인은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2년 입대해 5사단 포병으로 근무하며, 강원 양구 도솔산 전투와 피의 능선 전투 등에서 용맹을 떨쳤다. 이후 전투에서 총상을 입어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다 1955년 8월 상병으로 제대했다고 사단은 전했다. 35사단은 이날 전북 완주군에 사는 황 옹의 유족을 부대로 초청해 훈장을 수여하고 조국을 위해 희생한 고인과 유족에게 존경과 감사의 뜻을 표했다. 황씨는 “늦게나마 아버지의 훈장을 받게 돼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한다”며 “가까운 시일에 묘소를 찾아 아버지께 훈장을 꼭 보여드리고 싶다”고 밝혔다. 석종건 육군 35사단장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눈부신 발전은 조국을 위해 희생한 순국선열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우리 장병도 고인의 뜻을 이어받아 조국 수호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육군은 한국전쟁 당시 전공을 세웠지만 급박한 전황으로 누락된 수훈자를 찾아 훈장을 대신 수여하는 ‘6·25전쟁 참전자에 대한 무공훈장 찾아주기 사업’을 하고 있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화살머리고지서 찾은 프랑스軍 인식표, 67년 만에 고국 귀환

    비무장지대(DMZ) 화살머리고지에서 최근 발굴된 프랑스 6·25 참전용사의 인식표가 67년 만에 고국으로 귀환했다. 제18차 아시아안보회의 참석차 싱가포르를 방문 중인 정경두 국방장관은 지난 1일 샹그릴라호텔에서 플로랑스 파를리 프랑스 국방장관과 만나 프랑스 참전용사인 이브 모알릭 상병의 인식표를 전달했다. 파를리 장관은 모알릭 상병의 인식표를 프랑스로 옮겨 “귀하게 보관하겠다”고 말했다. 또 프랑스 참전용사를 기억하려는 한국의 노력에도 감사의 뜻을 밝혔다고 국방부는 전했다.정 장관은 “아직도 찾지 못한 프랑스군 유해가 적어도 3구 이상 이곳(화살머리고지)에 잠들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다 발굴돼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모알릭 상병은 1951년 12월 프랑스 제6증원 파견단 일원으로 6·25 전쟁에 참전했다. 이듬해 10월 6일 화살머리고지 일대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이후 프랑스 플루이넥 지역에 안장됐다. 모알릭 상병의 인식표는 지난달 국군이 화살머리고지에서 단독으로 진행하고 있는 6·25 전사자 유해 발굴 과정에서 발견됐다. 싱가포르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67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간 프랑스군 참전용사의 ‘인식표’

    67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간 프랑스군 참전용사의 ‘인식표’

    비무장지대(DMZ) 내 화살머리고지에서 최근 발굴된 프랑스 참전용사의 인식표가 67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갔다. 제18차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 참석차 싱가포르를 방문 중인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1일 샹그릴라 호텔에서 플로랑스 파를리 프랑스 국방장관과 만나 최근 화살머리고지에서 발견된 이브 모알릭 상병의 인식표를 전달했다. 파를리 장관은 정 장관으로부터 모알릭 상병의 인식표를 넘겨 받으며 “귀하게 보관하겠다”고 소감을 말했다. 또 프랑스 참전용사를 기억하려는 대한민국 정부의 노력에도 감사의 뜻을 밝혔다고 국방부는 전했다. 모알릭 상병은 1951년 12월 프랑스 제6증원 파견단 일원으로 6·25에 참전했다. 이듬해 10월 6일 화살머리고지 일대 전투에서 전사한 그는 프랑스 쁠루이넥(Plouhinec) 지역에 안장됐다. 육신은 고국으로 돌아갔지만 타지의 차디찬 흙속에 묻혀 있었던 그의 인식표는 지난달 화살머리고지에서 남측 단독으로 진행되고 있는 6·25전사자 유해발굴 과정에서 발견됐다. 6·25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였던 백마고지 남서쪽 3㎞ 지점에 있는 화살머리고지는 휴전 직전인 1953년 국군과 중공군의 고지 쟁탈전이 치열하게 벌어진 곳이다. 정 장관은 이날 파를리 장관에게 “아직도 찾지 못한 프랑스군 유해가 적어도 3구 이상 이곳(화살머리고지)에 잠들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한국정부는 (프랑스 군의 유해가) 다 발굴돼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전했다. 6.25전쟁 참전 프랑스군 실종자는 총 8명으로 현재 그 중 3구 화살머리고지 인근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 장관은 또 최근 서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에서 진행된 프랑스군의 한국인 인질구출에 대해서도 감사를 표하고, 작전과정에서 희생된 2명의 프랑스 군인 유가족에게 깊은 위로의 말을 전해달라고 당부했다. 싱가포르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추풍령에서 얼어 죽은 친구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추풍령에서 얼어 죽은 친구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유각순 ▲인천학도의용대 중구지대 대원 ▲인천여자중학교 3학년생 유각순은 1934년 인천 동구 화수동에서 태어나서, 인천여자중학교 3학년 때 인천학도의용대 중구지대 대원으로 호국(護國)활동을 하다가, 후발대를 따라서 1950년 12월 24일 원저호를 타고 월미부두를 출발하여 부산항에 도착하여 부산육군통신학교에서 신봉순 교육대장님의 보살핌으로 5개월 머무르다가 1951년 5월 인천으로 귀향하였다.일시 1997년 8월 6일 장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편집실 대담 유각순(인천학도의용대 중구지대), 이경종(6·25 참전사 편찬위원), 이규원(치과원장·이경종 큰아들) 6·25사변의 발발과 지옥 같았던 인공치하 6월 25일 전쟁이 났을 때, 나는 인천여자중학교 3학년이었다. 나는 피난을 가지 않았는데, 내 또래 남학생들이 인민 의용군으로 끌려가는 것을 많이 목격했다. 대부분 돌아오지 못하고 실종되어서 전쟁의 비극을 처절하게 느꼈다. 인천학도의용대 중구지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우리 인천을 점령하고 있었던 인민군은 물러났다. 9월 말에 내 친구 한영희(인천여자상업중학교 3학년)가 나를 데리고 가서 소개해 준 곳이 바로 인천학도의용대 중구지대본부였다. 중구지대장은 이용희(인천공업중학교 5학년생)였으며, 그때 대원수는 약 30여명 이었다. 인천학도의용대가(仁川學徒義勇隊歌) 1절 정열과 용맹은 학도의 보배 이 나라의 흥망은 우리의 생명 이 몸을 다 바치어 나라가 흥한다면 우리 학도의용대 죽음으로써 아~ 웃으며 꽃이 되리라 2절 임전무퇴 교우이신 화랑도 정신 거룩하신 십용사 뒤를 받들어 백두산 하늘 높이 태극기 휘날릴 때 우리 학도의용대 보람 있으리 아~ 웃으며 꽃이 되리라 그때 내가 처음 인천학도의용대 본부에 가서 학도의용대가를 익히고 중구지대에 와서 대원들한테 교습을 시켰으며 조회시간에는 내가 직접 지휘를 하면서 인천학도의용대가를 불렀다.1950년 12월 24일 윈저호를 타고 남하 압록강까지 북진했던 국군과 UN군이 갑작스런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하여 후퇴를 거듭하여 1950년 12월 중순이 되었을 때 인천학도의용대가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소문이 있었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축현국교에 가보니 인천학도의용대 대원 약 3000명이 모여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따라가지는 않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1950년 12월 24일 인천상업중학교 밴드부와 여학생들이 지금의 인천역 근처에 있었던 월미부두에서 윈저호라는 배를 타고 부산을 향하여 후발대로 남하한다는 연락이 왔다. 그때 배를 타고 남하한 여학생들은 나를 포함해서 약 150명이었다. 서해 바다를 거쳐서 남해를 지나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인천학도의용대 밴드부는 육군종합학교 군악대원으로 모두 입대하였다. 그리고 우리들 인천학도의용대 여학생 대원들은 부산육군통신학교로 가게 되었다. 당시 부산육군통신학교에는 우리들보다 먼저 내려와 자원입대한 인천학도의용대 대원들이 육군통신학교에서 통신병 교육을 받고 있을 때였다. 사실 그때 인천에서 부산까지 걸어서 내려온 여학생들과 우리들처럼 배를 타고 내려온 여학생들 모두는 딱히 머물 곳이 없었는데, 마침 다행히도 부산육군통신학교에 신봉순 교육대장님이 계셨었다. 너무나 고마웠던 신봉순 선생님의 도움 그때 부산육군통신학교에 있었던 신봉순 대위님은 8·15 해방 후 공립인천상업중학교에서 과학 선생님을 하시다가 뜻하신 바 있어, 교직을 사직하시고 육사 8기로 임관하여, 그때 마침 부산육군통신학교에서 교육대장으로 근무 중이셨다. 그런 인연으로 오갈 데 없었던 인천학도의용대 여학생 대원들의 숙식을 해결해 주신 잊지 못할 선생님이셨다. 1951년 5월 말 때쯤, 인천이 수복이 되어서 나는 여러 여학생과 같이 고철을 실어 나르는 한양호라는 배를 부산항에서 타고 인천으로 돌아왔다. 자원입대하여 전사한 친구들 인천학도의용대 중구지대에서 같이 활동하였던 학생들 30여명이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 후 참전하여 몇 명이 전사했다는데, 지금도 그 인천학도의용대 전사 대원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흐른다. 오늘까지도 이름이 잊혀지지 않는 전사 학생은 중구 지대에서 같이 활동했던 박봉춘으로 나중에 전사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또한 추풍령역을 지나면서 중구 지대원 중 한 명이 얼어서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부산에서 많이 운 기억이 지금도 난다. 6·25 전사 박봉춘(군번 9210267)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 재학 중에 마산에서 해병 6기로 자원입대하여 참전하였다. 1951년 11월 1일 강원도 월산령 지구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남기고 싶은 말 지나간 일들은 모두 희미해지는데, 이상하게도 인천학도의용대 중구지대에서 활동했던 일들은 세월이 흘러도 희미해지지 않고, 더욱 또렷한 기억으로 남는다. 어린 나이에 자원입대하여 나라를 구하려고 전사한 우리 인천 출신 참전 중학생들의 죽음은 잊혀져 가는 것 같아서 더욱 슬프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6·25참전사 편찬위원회 ▶다음호에 24회 계속■참전기 23회를 마치며 중학교 때 나라를 지키려고 자원입대하여 전사한 동네 친구들을 기억해주는 살아남은 친구들이 이제는 80대 후반이 되었다. 살아계시는 6·25 참전 인천학생들이 모두 돌아가시면, 그 누가 6·25 전사 인천학생들의 나라사랑 마음을 기억해 줄까? 69년전 인천에서는 나라를 지키려고 부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중학생 소년들이 2000명이 있었다. 그중에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전사한 소년들은 208명이다. 6·25 전사 인천학생 박봉춘을 기억해주는 유각순님은 몇 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이규원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 3000여명이 잠든 땅… 파는 곳마다 치열한 전투 흔적이 그대로

    3000여명이 잠든 땅… 파는 곳마다 치열한 전투 흔적이 그대로

    총 맞은 수통·중공군 방독면 등 유품 나와 일대 54곳서 325점 유해 발굴·17구 수습 “남북 관계만 풀리면 올해 내 마칠 수 있어”“65년 만에 처음으로 비무장지대(DMZ)에서 유해발굴 작전이 진행되는 겁니다. 남북 관계만 풀리면 당장 올해 내에 마칠 수 있습니다.” 강원 철원 DMZ 내 화살머리고지 남측 지역에서 지난 28일에 만난 문병욱 남북공동유해발굴 태스크포스 단장(대령)은 북쪽을 보며 이렇게 강조했다. 한국군은 지난달 1일부터 이곳에서 남북 공동유해발굴을 위한 사전 기초발굴 작업을 진행 중이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 5사단 장병 등 100여명이 유해발굴용 호미를 들고 땅을 긁어내자 소총탄을 묶는 ‘탄 클립’이 나왔다. 인근에서는 소총탄으로 추정되는 유품도 나왔다. 기존에 발굴돼 이날 공개한 전사자의 유품들은 전쟁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국군 용사가 쓰던 수통에는 23개의 구멍이 총에 맞은 흔적으로 남아 있었고, M1 소총의 총열에는 미처 다 사용하지 못한 탄이 녹슬어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쓰던 미군의 방탄복, 국공 내전 당시 사용하던 중공군의 방독면이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는 등 좀처럼 볼수 없는 유품들도 발굴됐다. 백마고지로부터 남서쪽 3㎞ 지점에 있는 해발 281m의 화살머리고지에서는 6·25전쟁 당시 1951년부터 2년간 4차례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국군 제9사단과 2사단, 미군, 프랑스군 대대가 전투에 참여했고 300여명이 전사했다. 북한군과 중공군 사망자는 3000여명에 이른다. 지금까지 화살머리고지 일대 54곳에서 50여구로 추정되는 325점의 유해가 발굴됐고 17구의 유해가 수습돼 중앙감식소로 보내졌다.남북은 지난해 ‘9·19 군사합의’에 따라 화살머리고지에서 올해 4월부터 공동 유해발굴을 진행하기로 했지만 북측은 아직 참여하지 않고 있다. 다만 북측도 남측의 유해발굴 현장에는 관심을 보인다는 게 현장의 분위기다. 실제 국방부 관계자는 “우리 측 유해발굴에 대해 감시 범위를 넓히려는 듯 북한군은 기존의 감시초소(GP) 인근에 2∼3명이 근무할 수 있는 소형 감시소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한편 AP통신에 따르면 미국 국방부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은 지난해 8월 북한으로부터 돌려받은 55개의 유해상자에서 6·25전쟁 참전 미군 유해 가운데 3구의 신원을 추가로 확인했다. 기존의 3구를 포함해 총 6구의 신원이 확인된 것이다. 철원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서울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잊지 않을게… 그리운 남편

    잊지 않을게… 그리운 남편

    6·25전쟁에 참전했던 미군 전사 실종 장병 해럴드 진 스펜서의 부인 조 레이너트가 28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6·25 참전 미국군 전사·실종 장병 추모식’을 마친 후 전사자 묘비에 있는 남편의 이름을 탁본하고 있다. 뉴스1
  • 잊지 않을게… 그리운 남편

    잊지 않을게… 그리운 남편

    6·25전쟁에 참전했던 미군 전사 실종 장병 해럴드 진 스펜서의 미망인 조 레이너트가 28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6·25 참전 미국군 전사·실종 장병 추모식’을 마친 후 전사자 묘비에 있는 남편의 이름을 탁본하고 있다 뉴스1
  • 상주는 수천명 시민…6·25 美참전용사 마지막은 따뜻했네

    상주는 수천명 시민…6·25 美참전용사 마지막은 따뜻했네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열린 90대 6·25전쟁 참전용사 장례식에 고인과 일면식도 없는 수천명의 시민이 몰려 화제다. 26일(현지시간) CNN 등에 따르면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전날 열린 6·25전쟁 참전용사 헤즈키아 퍼킨스(90)의 장례식에 유족 대신 시민 수천명이 몰렸다. 건강상 문제로 유족들이 참석하지 못한 퍼킨스의 장례식에 그와 인연이 없는 시민들이 장례식 상주 역할을 한 것이다. 퍼킨스의 장례식에 많은 시민이 모인 이유는 페이스북에 올린 ‘메시지’ 때문이었다. 신시내티의 스프링 그로브 묘지 측이 장례식 전날인 24일 페이스북을 통해 “퍼킨스는 20년 넘게 장례식을 준비하고 비용도 미리 냈지만 현재 그의 가족은 모두 마을을 떠나 다른 곳에 거주하고 있다. 1950년대 한국전쟁에서 미군을 위해 싸워온 한 남자의 마지막을 기리기 위해 참여해달라”고 호소했다. 묘지 담당자인 스킵 펠프스는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튿날인 25일 스프링 그로브 묘지에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고인을 만난 적도 없는 수천명의 낯선 얼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메시지를 읽고 미시시피에서 달려온 커플을 포함해 수백 마일을 운전해 달려온 이들도 있었다. 이날 장례식에서는 켄터키주 육군부대 ‘포트녹스’ 소속 군인들이 성조기를 접어 전달하는 국기 의식을 진행했고, 군악대의 나팔과 백파이프의 ‘어메이징 그레이스’ 연주, 오토바이를 선두로 수백대의 추모 차량 행렬이 이어졌다. 스프링 그로브 묘지 측은 이후 성명에서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지역사회가 너무나 자랑스럽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워싱턴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워싱턴에 한국전쟁 용사 ‘추모의 벽’ 추진…향군 “목표 5배 성금” 서울신문에 감사패

    워싱턴에 한국전쟁 용사 ‘추모의 벽’ 추진…향군 “목표 5배 성금” 서울신문에 감사패

    서울신문사가 미국 내 한국전참전용사 ‘추모의 벽’ 건립 성금 모금 운동을 지원한 공로로 대한민국재향군인회에서 감사패를 받았다. 배상기 향군 사무총장은 22일 서울신문 본사를 방문해 고광헌 서울신문 사장에게 김진호 향군회장 명의의 감사패를 전달하고 “추모의 벽 성금 모금 운동을 적극적으로 홍보해 성공적으로 마감하는 데 큰 도움을 주셔서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에 고 사장은 “실제 건립 때도 지원하겠다”고 답했다. 향군은 지난해 10월 15일부터 지난달까지 약 5억 2000만원의 성금을 모았다. 본래 목표였던 1억원의 5배가 넘는 금액이다. 김 회장이 개인적으로 1000만원을 기탁했고 정경두 국방부 장관, 박한기 합참의장,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 등이 동참했다. 이상용씨, 신수지씨 등 향군상조회 홍보대사와 월남전참전자회, 대한항공, 삼성물산 등도 힘을 보탰다. 서울신문 독자 등 일반 시민들도 성금을 냈다. 향군은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추가로 모금 운동에 나선다. 김 회장은 오는 7월 27일 워싱턴에서 열리는 66주년 정전협정 기념식에 참석해 추모의 벽 건립을 추진하는 한국전참전기념공원재단(KWVMF)에 그간 모은 성금을 전달할 계획이다. 추모의 벽은 미국 워싱턴에 있는 한국전참전기념공원 내에 둘레 50m, 높이 2.2m의 유리벽을 설치하고 6·25전쟁에 참전했다 희생된 전사자의 이름을 새기는 사업이다. 이곳에 기릴 대상은 3만 6000명의 전사자와 카투사 8000여명이다. 총예상사업비는 약 280억원이다. 현재는 한국전에 참전한 국가 이름, 사망자·부상자·실종자 수를 새긴 조형물만 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고아·장애아들에 희망 남기고 떠난 ‘말리 언니’

    고아·장애아들에 희망 남기고 떠난 ‘말리 언니’

    고아와 장애아동을 위해 평생 헌신한 말리 홀트 홀트아동복지회 이사장의 영결식이 21일 열렸다. 홀트아동복지회는 이날 경기 고양시 홀트 복지타운에서 지난 17일 84세로 별세한 홀트 이사장의 영결식을 가졌다고 밝혔다. 홀트 이사장은 2012년 골수암 판정 이후 투병해 왔다. 홀트 이사장은 홀트아동복지회 설립자인 해리 홀트와 버사 홀트 부부의 딸이다. 홀트 부부는 1955년 6·25전쟁에 참전한 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고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뒤 입양 사업을 시작했다. 부부는 6명의 자식이 있었지만, 한국인 고아 8명을 미국으로 데려가 키웠고, 이듬해 한국으로 와 홀트아동복지회를 세웠다. 홀트 이사장은 1935년 미국 사우스다코타주 화이어스틸에서 태어나 오리건대 간호학과를 졸업했다. 1956년 홀트아동복지회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한국과 처음 인연을 맺었고, 이후 60년 이상 한국에서 고아와 장애아동을 위해 일했다. 팔순을 넘긴 고령에도 홀트 복지타운에서 300여명의 중증 장애인과 함께 생활하며 이들을 직접 돌봤다. 독신이었지만 ‘고아와 장애아들의 어머니’, ‘미혼 부모들의 대모’, ‘말리 언니’로 불렸다.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 6·25서 전사한 美 쌍둥이 형제, 69년만에 고국서 나란히 영면

    6·25서 전사한 美 쌍둥이 형제, 69년만에 고국서 나란히 영면

    6·25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미국 쌍둥이 형제가 69년 만에 나란히 안장됐다. AP통신 등은 17일(현지시간) 고(故) 존 G 크렙스 상병의 유해가 일리노이주 스털링시 캘버리 묘지에 있는 쌍둥이 형제인 조지의 무덤 옆에 안장됐다고 전했다. 부모가 없었던 조지와 존 쌍둥이 형제는 19살 어린 나이에 6·25전쟁에 참전했다. 이들은 1950년 7월 11일 조치원 전투에 함께 참가했고, 이 전투에서 존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존의 유해를 찾지 못했던 조지는 안타까운 마음에 한국을 떠나지 못하고 계속 전투에 나섰다가 결국 전사했다. 존은 이 전투 후 소재가 확인되지 않아 ‘전투 중 행방불명자’ 명단에 올랐다가 지난해 12월 유해를 통해 신원이 확인됐다. 이에 이들 형제의 친척들은 하늘에서 형제의 우애를 이어가라는 마음으로 이들을 나란히 안장하기로 했다. 이날 행사에는 오토바이그룹이 경찰·소방관과 함께 장례식장에서 묘지까지 행렬을 이끌었고, 군요원이 관을 옮겼다. 존의 여조카는 의식 마지막에 성조기를 건네받았다. 워싱턴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보훈처, 참전유공자 집에 명패 부착

    보훈처, 참전유공자 집에 명패 부착

    국가보훈처가 오는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참전유공자를 대상으로 ‘국가유공자의 집 명패’ 달아드리기 사업을 실시한다고 13일 밝혔다. 지난해 서울신문·대한광복회 등이 주도한 국민 모금활동에서 모인 자금과 포스코의 후원으로 제작된 국가유공자의 집 명패는 올해 초부터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에게 전달됐다. 해당 작업이 마무리되면서 참전유공자 대상 사업으로 이어 가는 것이다. 보훈처는 6·25 참전유공자, 상이군경, 무공수훈자 등 참전유공자 중 올해 20만 2000여명에게 명패를 전달하고 나머지는 내년에 전달할 계획이다. 전체 참전유공자는 34만 8902명이다. 명패는 호국보훈을 상징하는 불꽃, 하늘을 공경하는 민족정신을 뜻하는 건(乾)괘, 훈장, 태극 등의 형상이 담겨 있다. 한편 보훈처는 참전유공자들에 대한 예우를 확대 강화하기 위해 국립괴산호국원, 제주국립묘지, 국립연천현충원 사업에 속도를 낸다고 전했다. 2만기 규모로 조성되는 국립괴산호국원은 올해 10월 개원하며, 1만기 규모의 제주국립묘지는 연내에 착공해 2021년에 완공된다. 5만기 규모의 국립연천현충원은 2025년이 목표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정경두 국방, 프랑스 국방장관과 통화…인질 구출에 감사 뜻 전달

    정경두 국방, 프랑스 국방장관과 통화…인질 구출에 감사 뜻 전달

    최근 서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에서 프랑스군이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인질을 구출한 작전에 대해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프랑스 측에 감사의 뜻을 전달했다. 국방부는 정경두 장관이 10일 밤 플로랑스 파를리 프랑스 국방부 장관과 통화하고 프랑스군이 진행한 인질 구출 작전의 결과를 들었다고 11일 밝혔다. 정경두 장관은 한국민으로 추정되는 1명을 포함한 인질 구출 작전에 대해 깊이 감사하면서, 이번 작전 과정에서 희생된 2명의 프랑스 군인에 대해서는 애도를 표한 뒤 유가족에게 깊은 위로의 말을 전해달라고 말했다. 또 한국민으로 추정되는 구출자의 신원 파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가족에게 신속히 연락할 수 있도록 조속히 신원을 파악해 달라고 요청했다. 전화 통화는 파를리 장관의 요청으로 20여분간 진행됐다. 프랑스 대통령실인 엘리제궁은 10일(현지시간) 부르키나파소에서 프랑스군 특수부대가 무장세력과 교전을 벌여 이들에게 납치됐던 프랑스인 2명, 미국인 1명, 한국인 1명 등 4명의 인질을 구출했다고 발표했다. 한편 통화에서 정경두 장관은 화살머리고지 유해 발굴 작업에서 6·25 전쟁에 참전한 프랑스군 전사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인식표(군번줄)가 발견된 사실도 전했다. 양국 장관은 전사자의 추가 정보 공유 및 인식표 인도 방안에 대해 긴밀히 협의해 나가기로 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나라·고향 지킨다는 일념 하나로 뭉쳐… 전사한 후배 생각하면 눈물”

    “나라·고향 지킨다는 일념 하나로 뭉쳐… 전사한 후배 생각하면 눈물”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창립과 활동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9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했다. 20년간 노력해 마침내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은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1926년 10월 25일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병 소위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12일 24세 때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안두영 인터뷰 일시 1997년 8월 18일 장소 인천학생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사무실(이규원치과 3층) 대담 안두영(인천학도의용대 내동분대원) 이경종(6·25 참전사 편찬위원) 이규원 치과원장(이경종 큰아들) 다음은 이규원 6·26 참전사 편찬위원장이 묻고 안두영이 답하다. →안녕하십니까, 안두영 님. 6·25 당시 인천학도의용대의 행적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는데도 기록이 없습니다. 저의 아버지께서도 “어린 학생들을 데리고 간 대학생 간부 형들이 그때의 활동과 업적을 기록해놨어야 하는데 아쉽게도 하나도 없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이제는 당시 주인공들의 나이가 60 중반이나 70의 고령들입니다. 지금 기록하지 않으면 영원히 파묻혀 버리게 됩니다. 먼저 6·25 발발 당시 상황은 어땠나요. -625 당시 우리 집은 인천축현국민학교 정문 앞 수일구 한의원이었으며 아버지께서는 한의사를 하셨습니다.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집에 있었습니다. 6월 26일은 월요일이라 학교로 가서 오전에는 정상적인 수업을 받았습니다. 6월 27일은 이미 상황이 악화돼 학교에는 갈 수 없어 못 갔습니다. 7월 4일 갑자기 쇠바퀴 돌아가는 요란한 소리가 아침에 들려왔습니다. 우리 가족은 경기도 화성군 송산면 사강리 외삼촌 댁으로 피란을 갔습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우리 가족도 다시 인천 집으로 오게 되었습니다.→9·15 수복 후 인천학도의용대가 창설되었는데, 어느 분대에 소속되셨고,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나는 인천학도의용대 제1대대 내동분대에 가입해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학도의용대에 들어갈 당시 대원들은 어린 중학생들부터였으며 대학생들도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들은 치안을 돌보았고 중요 건물에 대한 경비도 하였으며 아직까지도 학도의용대에 참여하지 않은 학생들을 방문하면서 참여를 권유하기도 하였습니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축현국민학교를 출발하여 남하하셨는데, 그 힘들었던 남하 과정을 생각나시는 데로 말씀해 주십시오. -1950년 12월 18일 축현국민학교에는 학도의용대원들이 참 많이 모였습니다. 12월 19일 새벽 안양에 도착했습니다. 안양에서 새벽잠을 자고, 수원에 도착하니까 대구에 모이라는 연락받고 거기서부터는 각자 행동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12월 24일 대구에 도착했습니다. 대구에서 2~3일 있으려니까 다시 목적지는 마산이라 해서 삼랑진을 거쳐 마산으로 갔습니다. 12월 29일 마산에 도착했습니다. →남하할 때 이동 방법은 어떠셨나요. -안양에서부터는 각자 남하했으며, 다음 장소를 정하여 어디로 모이라고 하는 전언(傳言)이나 연락을 받으면 그곳으로 이동하는 식이었습니다. →부산 육군통신학교에 입교하셨는데 통신학교에서의 훈련을 말씀해주시지요. -우리들은 부산 동대신동에 있었던 육군통신학교에 가서 군복을 정식으로 지급받게 되었습니다. 지급품은 작업복 2벌, 정복 1벌, 방한복 1벌, 팬티 2장, 런닝 1장, 담요 1장, 양말 2켤레, 맞지도 않는 군화 1켤레 이것들이 통신학교에서 처음으로 받은 보급품이었습니다. 나는 유선교육대에서 유선 가설 교육을 4주 받았습니다.→인천지역 중학생들로만 편성이 되어 창설된 통신부대가 있었다는데, 말씀해주시지요. -1951년 2월 28일 부산육군통신학교를 졸업하고, 인천학생 110명이 창설된 통신부대 화랑중대에 배속되었습니다. 화랑통신부대는 71 통신 가설대대(571부대)의 신설 중대였습니다. 대대본부 기간 요원으로 인천학도의용대 출신의 학생들이 기억납니다.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문칠웅(인천상업중학교 6학년) 서민석(공립인천중학교 6학년) 안두영(서울중학교 6학년) 김태정(인천상업중학교 5학년) 한양배(인천상업중학교 5학년) 김진오(강화중학교 5학년) 고종순(인천중학교 4학년) 이응도(서울사범학교 4학년) 이종린(인천상업중학교 4학년) 이성진(인천상업중학교 4학년) 김태식(인천상업중학교 3학년) →6·25 국가위난(國歌危難) 속에서 인솔했던 형들은 나름 최선을 다했고, 끝까지 형들을 믿고 따랐던 학생들은 “형들을 따라가는 것이 이 시대에 사는 우리가 할 일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끝까지 형들을 따랐을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안두영 님은 어떤 생각으로 참전하셨는지, 그리고 전사한 인천학생들에 대한 마음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때의 인천학도의용대원들은 동지애(同志愛)로 뭉쳐 나라를 구하고 고향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전쟁터에 간 것입니다. 살아서 돌아온 우리들이 힘을 모아 위령탑을 세워 전사 인천학생들 이름이라도 새겨 주었으면 하는 생각은 살아 돌아온 우리들의 공통된 생각입니다. 또한 ‘인천시에도 6·25 참전 인천학생들의 참전역사는 기록되어야 한다’고 늘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마침 반갑게도 인천학생들의 625 참전역사 편찬사업이 시작됐다는 소식에 기쁨과 기대에 벅차 있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또한 인천학도의용대 내동분대원으로 같이 활동하다가 부산까지 같이 걸어가서 함께 자원입대하여 통신병으로 참전하여 전사한 동네 후배 김태식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고 슬픕니다.→끝으로 인천사람들과 후대(後代)에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면 해 주십시오. -6·25에 참전한 우리들은 일본강점기에 태어났고, 교육은 일본어로 시작해 국민학교 3~6학년 때 해방이 되어 우리나라 글을 처음 배웠고, 그 후 중학교 들어가서 좀 배우려 하니까 625가 터져,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한창 공부할 나이에 입대하여 5~6년씩 군대 생활을 하고 제대했지만,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공부는 더할 수도 없게 됐고, 먹고 살기에 바빠 세월이 어느덧 흘러 이 나이가 됐지만, 그래도 그때 내 고향을 지키겠다는 정신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인천학생들의 625 참전 역사는 인천을 위해서는 아주 큰 의미가 담겼다고 생각되며, 앞으로도 인천에서 살아가는 인천사람들에게 교훈과 자부심을 같이 일깨워질 수 있도록 참전 역사를 잘 기록해 주시기 바랍니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안두영 ▲인천학도의용대 내동분대 대원 1933년 1월 26일 인천 중구 경동 출생 1950년 9월 30일 인천학도의용대 내동분대 1951년 1월 10일 육군 통신병 입대(군번 0241016) 1954년 5월 1일 만기 제대
  • 기자협회, 한국전쟁 순직 종군기자 추도식

    기자협회, 한국전쟁 순직 종군기자 추도식

    제41회 한국전 순직종군기자 추도식이 지난 26일 한국기자협회(회장 정규성) 주관으로 경기 파주시 파주읍 통일공원 내 한국전 순직종군기자 추념비 앞에서 열렸다. 이날 추도식에는 한영섭 한국전종군기자회 회장과 박기병 6·25참전 언론인회 회장을 비롯한 참전·종군기자 출신 원로 언론인 및 기자협회 관계자 등 40여명이 참석했다. 한국전쟁을 보도하다 희생된 기자는 한규호 서울신문 기자 1명을 포함해 미국 10명, 영국 4명, 프랑스 2명, 필리핀 1명 등 모두 18명이다. 한국기자협회 제공
  • 전쟁기념관 찾은 6·25전쟁 뉴질랜드 참전용사

    전쟁기념관 찾은 6·25전쟁 뉴질랜드 참전용사

    25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을 찾은 6·25전쟁 뉴질랜드 참전용사와 가족들이 기념비에 추모의 노래를 바친 뒤 슬퍼하고 있다. 이들은 국가보훈처 초청으로 ‘임진강·가평지구 전투 68주년 상기행사’ 등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연합뉴스
  • 노장의 경례

    노장의 경례

    23일 경기 가평군 영연방 참전 기념비에서 열린 가평지구 전투 기념행사에서 참전용사들이 경례를 하고 있다. 가평지구 전투는 6·25전쟁 중 영연방 제27여단이 1951년 4월 중공군의 춘계 공세에 맞서 펼쳤던 방어전을 말한다. 이 전투로 중공군의 전선 분할 시도를 막아냈고 서울∼춘천 보급로를 확보한 것으로 평가된다. 연합뉴스
  • 6·25 참전국 기념비서 식사 논란…전쟁기념관 “사과 및 재발방지 약속”

    6·25 참전국 기념비서 식사 논란…전쟁기념관 “사과 및 재발방지 약속”

    지난 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한 기독교선교단체가 주관한 행사에서 일부 참가자들이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있는 6·25전쟁 참전국 기념비를 밥상 삼아 식사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된 가운데 전쟁기념관 측이 사과와 함께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지난 21일 전쟁기념관 홈페이지 고객의 소리 게시판에 “전쟁기념관 관리 참담하네요”라는 글과 함께 전쟁기념관 측의 안일한 관리 책임을 지적하는 글이 게시됐다. 해당 글에 대해 전쟁기념관 측은 “전 세계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몰상식한 추태 행위에 대하여 행사 대관 책임자가 즉시 위령비의 식음료 등을 제거하도록 조치를 취했고, 전쟁기념관 경비대원이 안전순찰 중 지적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이어 “행사(당일) 주최·주관사 안전요원을 함께 배치하였으나, 많은 인원 참석으로 통제가 불가하여 불미스러운 사례가 발생했다”며 “대관 시 위령비 등 중요한 장소 등에 대한 충분한 교육과 주의를 철저히 하지 않고 소홀히 한 데 대해 관리책임을 통감한다”고 사과했다. 또한 전쟁기념관 측은 “향후 대관업체 책임자 및 참여 관람객에게 전쟁기념관에 대한 설립목적 및 취지, 평화의광장 위령비, 전사자 묘비 등이 있는 회랑 등 추모 공간에 대해 더욱더 세심하고 주의 깊게 행동하도록 사전 교육 등을 철저히 할 것을 약속”하며 “추모공간에 대한 폴리스라인 설치 등 주최·주관사에 추가 안전요원을 배치토록 조치하겠다”고 약속했다. 전쟁기념관 측은 재발 방지 약속과 함께 행사 주관사의 사과문을 함께 올렸다. 해당 단체는 사과문을 통해 “행사 일부 참가자들이 위령비인 줄 모르고, 간식을 먹는 무례하고 비상식적인 행위로 물의를 일으킨 것에 대해 깊이 반성한다”며 “불편함과 불쾌함을 느끼셨을 모든 분들께 충심으로 사과드린다”고 전했다.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여검사를 황영감이라니요”/손성진 논설고문

    [그때의 사회면] “여검사를 황영감이라니요”/손성진 논설고문

    지금이야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크게 늘고 있지만 수십 년 전에는 남성의 전유물 같았던 직업이 많았다. 그 속에 끼어 남성과 경쟁한 한 명의 여성, 홍일점은 개척자이자 선구자였다. 1948년 정부 수립 직전 런던올림픽에 참가한 한국 선수단은 67명이었는데 그중에 여성은 단 1명, 이화여중 5학년 학생인 투원반 선수 박봉식(1930~1950)이 있었다. 1948년 제헌국회 총선에 여성 18명이 출마했지만 전원 낙선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의 표적이 됐다. 그러나 1949년 보궐선거에서 임영신이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당선됐고, 이듬해 총선에서 박순천이 홍일점으로 배지를 달았다. 1952년 1월 발표된 고등고시 2회 사법과 합격자 명단에 고 이태영 박사가 들어 있다(동아일보 1952년 1월 23일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최초의 여판사 황윤석은 1953년 여성으로선 처음으로 검사시보로 근무했다. 직원들이 “황 영감님”이라고 부르자 황씨는 얼굴을 붉히며 “미스 황”으로 불러 달라고 했다고 한다. 기사가 나자 황 시보에게 러브레터가 전국에서 쏟아졌다. 어떤 이는 ‘황 영감’의 사진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이듬해에는 최초의 여성 공군 조종사로 6·25전쟁에도 참전한 김경오 대위의 기사가 실렸다. 석사 학위를 받는 여성도 극히 드물어 기삿감이었다. 1962년 이미순씨가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서울대 농대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해에 프랑스에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은 함복순씨 기사도 실렸다. 그때까지도 함씨는 홍일점 약학 박사였다(경향신문 1962년 8월 28일자). 1969년에 여성 박사는 국내 박사 75명, 해외 박사 11명이었다. 의학 박사를 빼면 문학, 법학, 정치학, 사학 등 각 분야에서 1~2명씩에 불과했다(동아일보 1969년 3월 20일자). 1962년에 홍일점 영화감독인 홍은원씨가 ‘여판사’라는 제목의 영화 데뷔작을 촬영 중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은 박남옥씨인데 1955년 ‘미망인’이라는 영화를 촬영했다. 아기를 업고 15명이나 되는 스태프의 식사를 차리면서 영화를 찍었지만 개봉 3일 만에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동아일보 1955년 2월 27일자). 홍숙자씨는 1959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외교관이 됐다. 외교관으로 10년 동안 근무하고 동국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1987년 사회민주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했다. 교육자이자 정치가였던 정희경씨는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에 홍일점 대표로 참석해 주목을 받았다. 평양 만찬장에서 정씨가 술을 사양하자 북측 박성철이 “술 연습 좀 하시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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