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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속보] 국방부 “일본, 6·25참전국 아니다”

    국방부 “일본, 6·25참전국 아니다…유엔사 전력제공국 참여 안돼”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6·25참전 미군 4만여명 ‘추모의 벽’, 한미동맹 상징·평화의 기념탑 기대”

    “6·25참전 미군 4만여명 ‘추모의 벽’, 한미동맹 상징·평화의 기념탑 기대”

    “7월 27일 정전협정 66주년을 맞아 미국에 ‘추모의 벽’ 성금을 건넵니다. 6·25참전 미군에 대한 고마움이 진정성 있게 전달되고 한반도 평화 정착과 국익에 큰 도움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김진호 대한민국재향군인회(향군) 회장은 10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재향군인회 집무실에서 가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워싱턴의 한국전참전기념공원에서 열리는 미국 정부의 정전협정 기념행사 후에 향군이 참전용사 200여명을 초청하는 만찬을 주최한다”며 “미국 고위급 관료도 참석하기로 한 이 자리에서 미국 한국전참전용사추모재단(KWVMF)에 성금을 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추모의 벽은 KWVMF와 한국교민이 공동 발의한 사업으로 2016년에 설치 법안이 미 의회를 통과했다. 내셔널 몰 지역의 한국전참전기념공원 내 ‘추모의 연못’을 중심으로 둘레 50m, 높이 2.2m의 원형 크리스털 유리벽을 설치하게 된다. 유리벽에는 6·25전쟁에서 전사한 미군 3만 6000여명과 카투사 8000여명 등 4만 4000여명의 이름을 새긴다. 향군은 지난해 9월부터 모금을 시작해 최근까지 6억 3000여만원을 모았다. 김 회장은 “향군 회원을 대상으로 1인 1달러 모으기로 1억원을 모금하는 게 계획이었는데 서울신문 등에서 보도하면서 총 89개 단체, 22개 기업, 2만 8577명이 참여했다”며 “평균 연령 91세인 육군종합학교전우회에서 가장 먼저 성금을 기탁한 것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추모의 벽 총건립예산 280억원은 성금에 한국 정부 예산을 지원받아 충당하며 설계와 건설은 미국 측이 맡는다. 김 회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2022년까지 건립하겠다고 밝히면서 국가보훈처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며 “최근 KWVMF 이사장으로 한미연합사령관을 지냈던 존 틸렐리 장군이 부임했고 지난 5월에는 설계기획사도 선정했다”고 밝혔다. 김 회장은 “지난해 미국참전용사촌을 방문했을 때 ‘미국이 세계 각지에서 전투를 치렀지만 감사하다며 답례하는 나라는 한국뿐’이라는 얘기를 들었다”며 “6·25에 참전한 미군은 179만명이고 이후 주한미군으로 복무한 미군이 350만명이나 되는데 이들과 후손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이어 “워싱턴 내셔널 몰은 한 해 2000만명이 찾는 관광 명소”라며 “추모의 벽이 한미 동맹의 상징이 되고 평화의 기념탑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한국사가 잊어버린 독소전쟁의 한인 영웅들

    한국사가 잊어버린 독소전쟁의 한인 영웅들

    한국에서 6월말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십중팔구 6·25남침이라는 대답이 들릴 것이다. 그것은 물론 사실이다. 한국전쟁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큰 비극이며 그 상처들은 아직도 완치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9년 3일 전인 1941년 6월 22일에 인류의 역사를 완전히 바꿀 또 한 가지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바로 나치 독일이 선전포고도 없이 소련을 침략한 것이다.유럽 대륙을 정복하고 새로운 ‘생활권’(Lebenstraum)을 확보하려는 일본의 동맹국 독일이 유발한 이 전쟁은 소련의 자원을 빼앗고 ‘불필요한 인구’를 말살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만약 독일이 성공했다면 전 세계가 몇 개의 민족들이 강제 지배하는 암흑시대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한국의 해방도 없었을 것이고 한국 문화가 일제에 의해 완전히 말살되었을 가능성도 매우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1941년 6월 22일 독일 침략에 맞서 싸운 소련의 붉은 군대는 4년동안 피를 흘려 가면서 나치독일 침략자들을 패배시켰으며, 1945년 8월에 미국의 요청으로 대일전쟁에 참여하였고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 북부를 해방하였다. 물론 이 전쟁은 단순히 러시아인들과 독일인들 간의 전쟁이 아니라 러시아족을 비롯한 소련의 모든 민족들이 참여한 전쟁이었으며, 그 중 침략 당시에 소련에 거주한 한인, 소위 ‘고려인’들도 있었다. 이 기사에서 유럽, 나아가 전 세계를 나치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전쟁에서 불멸의 공로를 세운 한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문서보관소의 폐쇄 등으로 제2차 세계대전 한인 참가의 연구는 오랫동안 큰 제약을 받고 있었으나 1990년대 이후 러시아의 문서보관소가 개방되면서 일반 연구자들도 자료를 접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2011년에 신 드미트리, 박 보리스, 최 발렌틴 등 연구자들이 방대한 분량의 사료를 분석한 ‘1941년~1945년 위대한 소련 조국전쟁 고려인들의 참전록’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는 독소전쟁 한인 참전자 372명과 관련된 사료, 회고록, 신문기사 등이 수록되었다.1941년 당시 소련에 거주하는 한인에게 붉은 군대에 입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37년 국가안보의 이유로 극동지역에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를 당한 소련의 한인들은 신뢰할 수 없는 민족으로 간주되어 붉은 군대에서 오랫동안 근무해온 전문군인들도 강제 전역되었다. 1937~1938년 대숙청이 끝난 후 그 일부는 군대에 복귀되었지만, 많은 한인에게 붉은 군대 입대권은 여전히 거부되고 있었다. 하지만 1941년 6월 22일, 독일 침략의 소식이 알려지자 각각 도시와 농촌의 군사동원부 앞에서 사회주의 조국을 지키고 나치즘이라는 위협을 없애기 위해서 붉은 군대에 지원하려는, 애국열과 투쟁열에 불타오르는 소련 모든 민족 젊은이들의 기나긴 줄이 생기기 시작하였는데, 한인들도 그 예외가 아니었다.당시 군대에 입대하면 전선에서 나치침략자들과 싸우는 전선군대와 후방에서 전선부대들을 지원하기 위해 창설된 노동군대 등 2가지의 길이 있었다. 물론, 입대에 성공한 많은 한인은 전선에 가지 못해 노동군대에 파견되어 무기생산이나 방어시설 건설 등에 전선부대들을 지원하였다. 하지만 역사 앞에서의 책임을 자각하는 많은 한인 젊은이들은 전선에 가는 것을 꿈꾸고 이를 위해 온갖 방법을 강구하였다. 입대지원서에 출신지, 민족에 대하여 위조한 사실을 신고하고 입대하는 경우가 제일 많았고 이름을 바꾸고 입대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보다 극단적인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1941년 노동군대에 동원된 차가이 씨가 전선에 가기 위해 3번이나 탈영 시도했고 결국 성공하여 고리키 시에 도착하고 노동자로 일하다가 다시 동원되어 전선에 파견되었다. 1941년 8월 노동군대에 동원된 황동국은 스탈린에게 “소비에트 조국의 원수들과 직접 싸우게 해 달라”는 편지를 보내 1942년 9월에 입대했으며 중사라는 계급을 수여받고 대전차포의 지휘성원으로 베를린 공세작전에서 참여하였다.우리에게 나치독일과 싸워 유럽과 아시아 해방에 크게 기여한 한인들의 참여에 대해 가장 잘 알려지는 자료는 그 공로의 기록이 나오는 붉은 군대 훈장수여증명서이다. 러시아국방부중앙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 훈장수여 관련 자료는 너무 방대해서 연구가 완료되어 있지 않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자료 중 대표적인 예들을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제116사단 제246 반전차대대 부대장 지(池 혹은 智) 대위가 1942년 4월 22일 오전 5시에 예정된 아군 보병부대의 공격을 지원하지 위해 용감성을 발휘하여 최전방 정찰부대가 위치한 곳에 44㎜ 대포를 설치하였다. 새벽이 되자 측면사격으로 적군 중기관총 5대와 토목화점 2개 파괴한 것으로 ‘용맹’ 훈장을 수여받았다. 제4돌격군 소속 함 니콜라이는 1943년 8월 6일 독일군 방어선을 공격할 때 돌파구에서 분산된 부대들을 통합시킨 후 그 지휘관으로서 전투를 계속하였다. 198,5 고지 전투에서 함 대위는 전차들을 위해 교량과 도로의 안전 여부를 확인하면서 누구보다 먼저 고지에 돌격하여 독일군 장병 3명을 직접 제거하였다. 함 대위는 1944년 1월 6일 벨라루스를 해방하면서 영웅적으로 전사하였다.유럽 해방에 공로를 세운 한인도 있다. 예컨대, 제233 붉은깃발사단에 속한 김 니콜라이 중좌는 전쟁 첫날부터 참전하였으며 제3우크라이나전선의 일원으로 헝가리 수도인 부다페스트 공세작전에 참여하여 1급 조국전쟁 훈장을 수여받았다. 살벌한 방어전 후 김 중좌가 지휘한 연대는 1945년 3월 20일 공격을 개시하여 적군 부대들을 격파시키면서 시몬토르냐라는 마을을 점령하였으며 카포시 수로를 건너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3월 23일, 김 중좌의 정확하고 능숙한 지도 하의 그 연대는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패주시켜 약 500명의 독일군 장병을 제거하였다. 소련의 영웅이라는 최상위의 칭호이자 가장 높은 훈격을 수여받은 한인 민 알렉산드르도 있다. 만 26세의 청년인 그는 1941년에 입대해 가장 어려운 전투를 감당한 전선군 중에 하나인 브랸스크 전선군에 파견되었으며 대위 계급을 수여받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1944녀 7월 9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러시아문서보관소에서 보관되어 있는 그의 훈장수여증명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볼린 주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투에서 민 동무는 그 부대의 전장으로 가서 직접 대대를 지휘하면서 적군 5개 반공격을 퇴치하고 전진할 수 있었다. 스타리예 코샤르 마을 전투에서 민 동무와 그 대대는 용감하게 우회작전을 실시하여 마을을 해방하였다. 육박전이 된 이 전투에서 민 동무는 직접 그 대대를 지휘하였다. 그 후 파로두브 마을 전투 때에도 민 동무는 전장에 직접 섰으며 부대를 지휘하다가 영웅적으로 전사하였다. 용감성과 영웅의 기질을 발휘한 민 동무는 ‘소비에트 연방의 영웅’이라는 칭호를 받기에 합당하다고 판단한다. 현재까지 확인된 바에 따르면, 독소전쟁의 거의 모든 큰 전투에 한인들이 참여했다. 모스크바 전투에 적어도 2명, 레닌그라드 방어전에는 21명, 스탈린그라드 전투에는 16명, 쿠르스크 전투에는 8명, 베를린 공세작전에는 11명, 그리고 1945년 6월 24일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첫 승리 퍼레이드에는 한인 2명이 참가했다. 전선에 나가 파시즘과 싸운 한인 중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지만, 그들은 소련의 다른 민족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면서 나치 독일을 막음으로써 그 희생과 공훈이 한국 해방으로의 길을 열렸다고 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 사람들을 기념하는 한국 영화는 아직 한 편도 없다. 최근에 나온 영화 중에 독소전쟁과 관련이 있는 유일한 것은 ‘마이웨이’이라는 영화이지만, 그는 냉전 시대에 할리우드로부터 들어온 선입견에 사로잡혀 독소전쟁의 진정한 모습이 아닌 풍자화를 그리고 있다. 1941년에 발발하고 1945년 5월 9일에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종식된 이 전쟁은 한민족을 비롯한 그 전쟁에 참여한 모든 민족들의 공동 공로이며, 한인들의 독소전쟁 참전 역사를 연구하고 그들에 대한 역사적 기억이 영원토록 남게 하는 것은 우리 역사가들의 중요한 과제이며 거룩한 임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바실리 V 레베데프(고려대 사학과 석사)
  • 국가유공자 집 명패 달아드리기 이달까지 전군 지휘관들도 동참

    국가유공자 집 명패 달아드리기 이달까지 전군 지휘관들도 동참

    국방부는 국가보훈처가 추진하고 있는 ‘국가유공자의 집 명패 달아드리기 사업’에 전군 지휘관들이 동참한다고 8일 밝혔다. 6·25전쟁 참전 유공자의 자긍심을 높이고 사회적 예우 분위기를 확산하는 데 이바지하기 위해 마련한 행사다. 전군 장성 및 대령급 이상 지휘관이 자신의 책임 지역 내에 있는 6·25무공수훈자 및 6·25참전유공자 자택을 찾아 명패를 달아 줄 예정이다. 행사 기간은 8일부터 오는 31일까지로 각 군이 지역 보훈지청과 협력해 진행한다. 명패에는 호국보훈을 상징하는 불꽃, 하늘을 공경하는 민족정신을 뜻하는 ‘건’괘, 훈장, 태극 등의 표시가 담겨 있다. 서울신문과 대한광복회는 보훈처의 후원으로 지난해 ‘국가유공자의 집’ 명패 제작을 위한 모금 활동을 벌인 바 있다. 보훈처는 제작된 명패를 올해 상반기에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에게 전달했다. 이어 연말까지 6·25 참전유공자를 비롯해 상이군경, 무공수훈자 등 20만 2000여명의 집에 설치한다. 전체 참전유공자는 34만 8902명으로 나머지는 내년에 받게 된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동정] 방사청장, 6·25참전유공자 찾아 ‘명패 달아주기’

    △ 왕정홍 방위사업청장은 27일 오후 경기 수원시에 있는 보훈원을 방문해 6·25 참전유공자와 유족들에게 방사청 직원들이 모은 위문금을 전달했다. 이어 경기 과천시에 거주하는 참전유공자 윤용황(85) 씨의 집을 방문해 위문품을 전달하고 ‘국가유공자의 집 명패’를 달아줬다. 이 자리에서 왕 청장은 “국가유공자 명패 달아드리기 행사에 참여한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하며, 이런 행사를 통해 국가유공자를 예우하는 분위기가 더욱 확산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데스크 시각] 2019년 6월은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김미경 국제부장

    [데스크 시각] 2019년 6월은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김미경 국제부장

    미국 오하이오주 출신 마음씨 좋은 90살 할아버지 헤즈키아 퍼킨스는 6·25전쟁 참전용사였다. 미국의 수많은 참전용사들처럼 그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자원 입대해 참전했다. 퍼킨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지난달 말 CNN 등 미 언론을 통해서였다. 그가 결국 노환으로 숨을 거둔 뒤 마련된 장례식에 멀리 사는 유가족이 건강상 이유로 참석하지 못하게 되자 장례식장 측이 장례식을 불과 하루 앞두고 SNS에 “젊은 시절 한국을 위해 싸운 미군의 상주 역할을 해 달라”는 특별한 안내문을 올린 것이 계기가 됐다. 지역 일부 주민들의 관심 정도를 기대했던 장례식장 측은 깜짝 놀랐다. 고인과 아무런 인연이 없는 시민 수천명과 제복을 차려입은 전현직 군인들이 몰려들어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고 함께 추모하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들 중에는 참전용사인 그에게 조의를 표하기 위해 수백 마일을 운전해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장례식장 측은 “참석자들에게 감사하고 너무나 자랑스럽다”고 사의를 표했다. 호국보훈의달인 6월을 보내며 퍼킨스의 장례식 사연이 떠오른 것은 나라를 위해 싸운 참전용사들에 대한 미국 사회의 예우에 부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미국우선주의’를 앞세우며 좌충우돌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도 참전용사 앞에서는 작아진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5일 데이비드 벨라비아 예비역 육군 하사에게 생존한 이라크전 참전용사로는 처음으로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2016년 워싱턴 특파원 시절 만났던 미 보훈부 관계자는 “미국이 초강대국 자리를 지키며 하나로 뭉칠 수 있는 저력은 참전용사 등 애국자들에 대한 예우로부터 시작된다”며 “애국자들을 영원히 기리고 후손을 챙김으로써 애국심은 더 고취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어떠한가. 해마다 찾아오는 6월 6일 현충일과 6·25전쟁 기념식은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희생정신을 기리는 자리이지만, 언제부터인가 좌우 이념 대립과 여야 정쟁의 장으로 얼룩지면서 그들에 대한 예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나라를 위해 몸바친 영웅들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지면서 과연 ‘애국’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저마다 각자의 자리에서 애국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출신 학교 이름이 써진 깃발을 들고 매주 광화문에 모이는 60~70대 ‘태극기부대’들도, 그동안의 젊은이들과는 무엇인가 다르다는 평가를 받는 90년대생들도 말이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 ‘낀 세대’로 양쪽을 다 짊어지고 가는 듯한 30~50대들도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 피 흘려 싸운 애국지사도, 참전용사도 잊혀지고 그들과 유족들에 대한 예우도 기념식에서나 빤짝 이뤄지는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일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올해로 100주년이 된 3·1운동과 6·25전쟁 등 희생의 역사를 분명히 기억하고, 제대로 기록하고, 그에 맞는 평가를 하는 것이 절실하다. 그래야 진정으로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애국이 후손에게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인지 알게 될 테니 말이다. 마침 6월의 끝자락에 한반도 운명에 영향을 미칠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계기 한중, 한미 정상회담 등 각종 정상회담이 이어진다. ‘총성 없는 전쟁터’인 외교무대에서 문재인 정부는 북한 비핵화와 남북 화해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이 역시 정쟁과 갈등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나라의 앞날을 위해 애국하는 마음으로 중지를 모아야 할 때다. 이 또한 역사로 기록돼 후손에게 물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만드는 것도, 기억하고 평가하는 것도, 후대에 물려주는 것도 결국 우리의 몫이다. chaplin7@seoul.co.kr
  • 6·25 장사상륙전 전사자 문산호 선원 10명 무공훈장 서훈

    6·25 장사상륙전 전사자 문산호 선원 10명 무공훈장 서훈

    6·25전쟁 당시 경북 영덕 장사상륙작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문산호 선원 10명의 화랑무공훈장 서훈식이 충남 계룡 해군본부에서 27일 개최됐다. 해군은 이날 “6·25전쟁 당시 장사상륙작전에 참전했던 문산호 전사자 선원 10명의 화랑무공훈장을 유가족들에게 전달했다”고 밝혔다. 문산호는 1950년 당시 교통부 대한해운공사 소속 선박이었으나 6·25전쟁 발발과 동시에 해군에 동원돼 해군 작전에 참여했다. 9월 14일에는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북한군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실시한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됐다. 문산호는 육군 유격대원을 태우고 9월 15일 해안으로 상륙하기 위해 돌격하던 중 풍랑으로 좌초되는 어려운 상황에서 상륙을 감행해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문산호 선장과 선원 11명을 비롯해 국군 130여명이 전사했다. 문산호 선원은 6·25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음에도 전쟁에 동원된 인력이라는 사유로 그동안 서훈이 누락돼 있었다. 이에 해군은 당시 작전에 참전했던 생존자들의 증언을 청취하고 관련 문헌을 찾아냈다. 해군은 2016년 문서고에서 전사 기록 속에 묻혀 있던 문산호 선원의 해군 임명 기록과 전사 기록을 찾아냈다. 지난 18일 국무회의를 통해 선원 10명에 대한 화랑무공훈장 수여가 결정됐다. 이수용 선원의 아들 이용규(69) 씨는 “지난 69년 동안 아버님 유해는 찾지 못하더라도 명예만큼은 꼭 되찾아야겠다고 생각해왔다”며 “해군에서 문산호 선원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무척 감사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문 대통령 만난 오사카 동포들 “한일 관계는 사활이 걸린 문제”

    문 대통령 만난 오사카 동포들 “한일 관계는 사활이 걸린 문제”

    “한일관계는 우리에게는 사활이 걸린 문제입니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차 일본 오사카를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27일 시내 뉴오타니 호텔에서 주최한 동포 만찬 간담회에서 악화 일로인 한일관계에 대한 재일동포들의 우려가 쏟아졌다.오용호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의 오사카 단장은 환영사에서 “최근 한일관계는 결코 양호한 관계라 할 수 없다”며 “양국 관계가 악화하면 재일동포 삶에 큰 영향을 주고 재일동포 사회의 발전도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일부터 열리는 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일관계가 크게 개선되고 미래를 함께하는 동반자로서의 양국 신뢰 관계가 회복되길 바란다”고 언급했다.오 단장은 “저희는 일본이라는 땅에서 먹고 자는 것보다 대한민국이 곤경에 처했을 때 사재를 털어 희생해 오늘날까지 살아왔다”며 “문 대통령과 함께 새로운 동포사회, 새로운 한일관계, 한반도 평화구축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했다.여건이 민단 중앙본부 단장은 건배사에서 “지금 한일관계가 너무 어렵다”며 “대통령께서도 많이 고생하시는 것은 잘 알지만, 한일관계는 우리에겐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토로했다. 여 단장은 “일본과 한국은 긴 역사가 있다”며 “가까운 나라여서 좋은 시절도, 나쁜 시절도 있지만, 내일을 향해 할 수 없이 미래로 갈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문 대통령은 인사말에서 “한국과 일본은 1500년간 문화와 역사를 교류해 온 가까운 이웃이자 오래된 친구”라며 “우리는 이미 우호·신뢰에 기반한 교류가 양국의 문화를 꽃피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2017년 10월 양국 시민단체가 함께 노력해 ‘조선통신사’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며 “양국 국민 간 교류·만남, 이해·협력은 한일 양국이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가는 디딤돌이 되고 있다”고 역설했다. 또 “내년 도쿄에서 하계 올림픽이 개최된다”며 “가까운 이웃인 일본이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도록 성의껏 협력하겠다”라고도 했다. 문 대통령은 “재일동포 1세대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면면히 조국 문화를 지켜왔기에 일본에서 한류가 더욱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며 “정부도 여러분이 해오신 것처럼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는 한일 우호 협력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하자 좌중에선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날 간담회장에 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들어서자 일부 참석자들이 ‘사랑합니다’를 외쳤고, 곳곳에서 휴대전화로 대통령 모습을 담기도 했다.문 대통령은 조선 도공 심당길의 후손인 제15대 심수관(본명 오사코 가즈데루) 선생으로부터 특별 제작한 흰색 도기인 ‘사츠미 난화도 접시’를 선물받았다. 간담회에서 동포들은 재일동포로 활동하면서 느낀 소회를 밝혔다. 홍성익 도큐야마 물산 대표는 “코리아타운 내 이쿠노에는 한국문화와 한류를 접하려는 젊은 일본인들로 북적인다”며 “한국 정부가 코리아타운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차봉근 MTM JAPAN 대표는 젊은 재일동포 청년들의 창업 지원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부탁했고, 김미화 몽쉐르 대표는 재일동포 후손에 대한 많은 관심을 부탁했다. 윤기 마음의 가족 이사장은 아버지와 결혼한 일본인 어머니 얘기를 들며 “재일동포 1세대의 역사를 기억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과거사 때문에 어려운 문제가 생기고 있지만 양국 정부가 지혜를 모아 나가며 극복해 가야한다”고 답했다고 한정우 청와대 부대변인이 전했다. 문 대통령은 위안부 이야기를 다룬 영화 ‘귀향’의 주연배우 강하나 씨와 감바 오사카에서 활약 중인 황의조 선수를 소개하기도 했다. 축하 공연에서 가수 정수라씨가 ‘난 너에게’, ‘환희’를 열창했고, 오사카 건국중·고등학교 전통예술부 학생들은 사물놀이와 사자춤을 춰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간담회에는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과 한국인 연합회 등 동포단체 관계자를 비롯, 6·25 참전유공자, 경제·문화예술인 등 동포 370여 명이 참석했다.  오사카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동정] 서울경찰청장, 6·25 참전유공자 찾아 ‘명패 달기’

    △ 원경환 서울지방경찰청장은 27일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6·25 참전유공자 자택을 방문해 ‘국가유공자 명패 달아드리기’ 행사를 했다. 이 사업은 정부 기관장 등이 국가유공자 가정을 찾아 국가보훈처에서 제작한 명패를 달아주는 행사다. 원 청장은 “사회 전반에 국가유공자를 예우하는 분위기가 확산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 “어린 시절 함께 자원입대한 고향 후배… 48년 만에 비석으로 만나”

    “어린 시절 함께 자원입대한 고향 후배… 48년 만에 비석으로 만나”

    아래의 글은 6·25 전사 인천학생 조순범의 동네 선배 형인 이경종이 전사한 고향 후배 고(故) 조순범을 추모하며 서해문화 1998년 12월호에 기고했던 글이다. 고 조순범은 전사하였기 때문에 아래의 글로 조순범 참전기를 대신한다.송림동에서 같이 자란 동네 후배 조순범과 나 조순범은 인천 동구 송림동 333번지에서 태어나서 6·25사변 때 인천해성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6·25 참전 인천학생 이경종)는 송림동 333번지에서 살았고 조순범은 송림동 334번지에서 살았다. 인민의용군에 끌려가서 실종된 청소년들 1950년 6월 25일 6·25사변이 터지고 악몽과도 같았던 인민군 치하에서 지옥보다도 더한 고통을 견디고 9·15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민군 치하에서 벗어났다. 인민군 치하에서 많은 중학생 또래의 청소년들이 인민의용군에 강제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 나는 매부가 살고 있던 용유도로 피난 가서 몰래 숨어 있었다. 그래서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가는 것을 피했지만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간 인천 지역 청소년들은 대부분 실종되었다. 인천학도의용대 해성지대 9·15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천이 수복되었고, 차차 안정을 되찾아갈 무렵인 1950년 10월 초에 인천학도의용대가 창립되어 호국활동을 하면서 우리 송림동에는 인천학도의용대 해성지대가 생겼고, 동네 후배인 조순범과 나는 해성지대에 들어가서 호국활동을 같이 하였다. 중공군의 참전과 인천학도의용대의 남하 1950년 11월이 되자 우리 국군과 UN군은 압록강까지 북진했으나 만주 지역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하여 1950년 12월에는 우리 국군과 UN군은 후퇴하였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가 인천 병사구 사령부(현재의 병무청)에서 파견을 나온 국민방위군 소위를 따라서 경상남도 통영충렬국민학교에 있었던 국민방위군 제3 수용소를 최종 목적지로 하여 인천축현국민학교에서 떠날 때, 나와 조순범도 같이 걸어서 남하하였다. 조순범과 함께 18일간 걸어서 도착한 마산 조순범과 나는 함께 출발하여 첫날은 안양역에서 자고 그다음 날은 수원역에서 하룻밤을 자고, 대전에 도착했을 때는 1950년 12월 24일이었다. 조순범과 나는 계속 걸어서 같이 내려갔는데 대구를 지나서 경산, 청도, 밀양, 삼랑진을 지나서 마산에 도착한 것은 인천을 떠난 지 18일만인 1951년 1월 4일이었다. 조순범과 나는 추운 겨울 함께 걸어서 내려갔는데 추풍령 고개를 지나면서부터는 추운 겨울 날씨에 제대로 된 방한복 없이 남하하는 국민방위군을 행렬을 많이 봤다. 국민방위군들은 제대로 먹지 못하여서 굶거나 얼어 죽은 경우가 많았고 겨울 황량한 논밭에 제대로 묻지도 못해서 내팽개쳐 있는 국민방위군 시체를 많이 봤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 입소 조순범과 나는 국민방위군 사건을 보고 경상남도 통영의 국민방위군 제3 수용소(통영충렬국민학교)로 들어가지 않고 마산에서 해병 6기 모집 광고를 보고 둘이 같이 지원했는데 둘 다 탈락하였다. 인천학도의용대 이계송 대장의 인도하에 조순범과 나는 마산항에서 함께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1951년 1월 10일 부산 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자원입대하였다. 1~3학년 중학생들이 입대할 수 있었던 이유 이 당시 훈련소에 입소하는 징집군인 중에는 문맹자가 많았다. 그래서 훈련소에서 훈련하기 전에 문맹자를 위해서 기본적인 문자 교육을 해야만 했다. 미군이 주는 각종 무기가 영어로 표기되어 있고 명령서나 무기 사용 안내서 등 공문서를 읽어야 하므로 문맹자는 국군의 큰 골칫거리였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영어와 한자까지도 아는 중학교 1~3학년 중학생들을 행정 요원으로라도 쓰기 위해서 입대를 받아줬다. 1951년 1월 31일 조순범과 헤어지다 부산 육군 제2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 조순범과 나는 1951년 1월 31일 헤어졌다. 조순범은 동대신동에 있었던 부산육군통신학교로 가게 되었고 나는 공병학교로 가서 공병이 되었다. 그 뒤로 군 복무 중에는 조순범을 만나지 못했다. 또한 나는 제대하여 집으로 돌아왔는데 조순범의 소식은 그 후 전혀 듣지도 못했고 48년간 나는 만나 본 적도 없었다. 47년 만에야 알게 된 조순범의 전사 1996년 7월 15일부터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역사 발굴을 큰아들(이규원 치과원장)의 도움으로 시작했는데, 1997년 9월 15일 6·25 참전 인천학생 변광선(인천상업중학교 4학년 재학 중 해병 6기로 입대)선배가 제공한 자료를 보고 조순범의 전사를 알게 되었다.48년 만에 비석으로 만난 고향 후배 조순범 인천상업중학교 변광선 선배님으로부터 제공받은 자료를 통하여 조순범의 전사를 알게 된 나는 1998년 4월 26일 아침에 동작동 국립묘지를 큰아들 이규원(치과원장)과 함께 찾아갔다. 전사한 후배여! 참전역사 찾기를 도와다오! 나는 조순범 무덤 앞에 앉아서 “48년 전 인천에서 부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함께 자원입대하여 참전하여 너는 전쟁터에서 죽고 나는 참전하고 살아 돌아와 여기서 만나게 되었구나! 채 피지도 못하고 전쟁터에서 죽어간 너의 기록을 남기려고 48년 만에 이렇게 찾아왔다”라고 조순범에게 말하였다. 또한 잠들어 있는 조순범에게 나는 “넋이 있다면 부디 편안한 잠들기 바라며 나와 큰아들 이규원(치과원장)이 하고 있는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 역사 찾기 사업을 도와다오!”라고 말했는데 눈물이 앞을 가렸다. 글 사진 인천학생 6·25참전관 제공 ■참전기 24회를 마치며 한때 인천에 중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국가의 징병모집에 대하여 한참이나 어려서 입대할 필요가 없었던 어린 중학생이었습니다. 저의 아버지 또한 중학교 3학년 16살이어서 인민군에 끌려갈 나이지, 국군에 입대할 필요가 없었던 어린 나이였습니다. 조순범은 저의 아버지보다도 2살이나 어린 14살 인천해성중학교 1학년생으로 저의 아버지께서 사시던 동구 송림동 같은 동네에 사는 동네 후배였습니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한 조순범은 부산까지 저의 아버지를 따라 함께 내려가서, 1951년 1월 10일 부산 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같이 입소하였습니다. 1951년 1월 31일 헤어졌던 운명의 날, 조순범은 육군통신학교로 갔고 저의 아버지는 공병학교로 가셨습니다. 1951년 1월 31일 조순범과 헤어져 다시는 소식을 모르고 지내시다가 48년 만에 동작동 국립묘지에 누워있는 동네 후배 조순범을 만나고서 아버지께서 비석을 어루만지시며 구슬프게 우시는 모습을 저는 지켜봤습니다. 이규원 인천학생 6·25 참전관 관장故 조순범 1936년 10월 22일 : 인천 동구 송림동 334. 출생 1950년 12월 18일 : 인천해성중학교 1학년때 인천에서 출발하여 부산까지 30일간 걸어서 남하 1950년 12월 24일 : 대전역 도착 1950년 1월 4일 : 마산역 도착 1951년 1월 10일 : 부산 육군 제2 훈련소 입소 1951년 1월 31일 : 부산육군통신학교 입교 통신병 군번 0243077 1951년 12월 1일 : 동부전선에서 전사(戰死) 묘지 위치 : 동작동 국립묘지 동-08-31891하늘땅처럼 오래갈 겨레는 끝없는 충성을 나라에 바치고, 자손만대를 이어갈 집안은 먼저 어버이께 효도를 다 하고, 여기 오가는 바람이여 이 뜻을 모두에게 전하라! -충렬사-
  • 스러진 6·25 용사 위해… 워싱턴도 함께합니다

    스러진 6·25 용사 위해… 워싱턴도 함께합니다

    주미 한국대사관은 25일(현지시간) 워싱턴DC 한국전참전기념공원에서 6·25전쟁 69주년 기념 전사자 추모행사를 열었다. 행사에는 마크 내퍼 미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 등 미 정부 관계자들을 포함해 한미 참전용사, 호주·벨기에 등 참전 지원군 대표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조윤제 주미 대사는 이날 행사에서 “참전용사 여러분의 희생으로 우리나라가 전례 없는 경제성장과 민주적 자유를 달성할 수 있었다”면서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완수해야 할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정착’이라는 과제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일각에서 우리의 성공 가능성을 염려하는 것을 안다”면서 “그러나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유산은 우리가 변함없는 한미동맹 및 전 세계 우방과의 노력을 토대로 과제가 얼마나 어렵든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보여 준다”고 강조했다. 존 틸럴리 한국전쟁참전용사기념사업재단 의장은 참전용사들이 자유를 위해 싸웠음을 강조하면서 “여러분의 희생이 절대 잊히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주한미군사령관을 지낸 그는 한미동맹을 상징하는 한국말로 “같이 갑시다”라며 추모사를 맺었다. 모건 오테이거스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트위터에 “한국전 기념일은 동맹군의 헌신적인 용맹과 과거, 미래의 공격에 대한 한미의 자유 수호 결의를 일깨운다”면서 “이 역사는 인도 태평양 지역과 전 세계에 알려져야 하고, 잊혀지거나 왜곡되면 안 된다”고 밝혔다. 워싱턴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6·25전쟁 69주년… 눈물 흘리는 참전 용사

    6·25전쟁 69주년… 눈물 흘리는 참전 용사

    6·25전쟁 69주년을 맞은 25일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한 참전유공자가 기념공연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국가보훈처가 ‘대한민국을 지켜낸 희생과 용기, 평화와 번영으로 보답하겠습니다’라는 주제로 연 이날 행사에는 국군 및 유엔군 6·25 참전유공자, 참전국 주한 외교사절, 정부 주요인사, 각계 대표, 시민 등 4000여명이 참석했다. 각 지자체와 6·25 참전유공자회 등의 주관으로 17개 광역시도와 전국 216개 지역에서도 기념행사가 일제히 열렸다. 박윤슬 기자 seul@seoul.co.kr
  • 6·25전쟁 69주년… 눈물 흘리는 참전 용사

    6·25전쟁 69주년… 눈물 흘리는 참전 용사

    6·25전쟁 69주년을 맞은 25일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한 참전유공자가 기념공연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국가보훈처가 ‘대한민국을 지켜낸 희생과 용기, 평화와 번영으로 보답하겠습니다’라는 주제로 연 이날 행사에는 국군 및 유엔군 6·25 참전유공자, 참전국 주한 외교사절, 정부 주요인사, 각계 대표, 시민 등 4000여명이 참석했다. 각 지자체와 6·25 참전유공자회 등의 주관으로 17개 광역시도와 전국 216개 지역에서도 기념행사가 일제히 열렸다. 박윤슬 기자 seul@seoul.co.kr
  • 美 초중고 교사용 ‘6·25전쟁 교육자료’ 첫 출간

    미국의 초·중·고교 과정에서 6·25전쟁의 의미를 다룬 자료집이 처음으로 출간됐다. 미국 내 비영리 재단인 ‘한국전쟁 유업재단’(이사장 한종우)은 24일(현지시간) 미 사회·역사교사 연합체인 ‘미국사회과학 분야 교원협의회(NCSS)’와 공동으로 일선 교사용 한국전쟁 교육자료집인 ‘한국전쟁과 그 유산’(The Korean War and Its Legacy)을 발간했다고 밝혔다. 이번 사업은 국가보훈처 지원을 받아 진행됐다. 교사들에게 정확한 수업 자료를 제공함으로써 더 체계적인 교육이 가능하도록 하자는 취지에서다. 자료집은 NCSS 소속 교사 1만 5000명에게 우선 배포된다. 이에 따라 오는 9월 시작되는 2019~2020년도 학기부터 초·중·고교 사회·역사 수업에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초등학교 과정에서는 한반도·동북아시아·세계 지도 등을 통해 6·25전쟁을 전반적으로 배우고, 역사적 의미를 탐구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중학교 과정에서는 6·25전쟁을 주제로 전쟁을 예방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 참전용사들의 희생 등을 다뤘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7년 거센 설전을 주고받으면서 전쟁 위기로 치달았다가, 지난해 초 대화 모드로 돌아서면서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으로 이어진 과정도 반영됐다. 고등학교 과정에서는 6·25전쟁이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으로 인식된 미국의 정� ㅋ英맛� 배경, 한미동맹의 의미, 미국의 대북외교 필요성 등을 다뤘다. 한종우 이사장은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자료집을 조만간 캐나다 교사들에게도 배포할 예정”이라며 “앞으로 전쟁에 참전한 22개국에 대한 총서를 발간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포토] 이낙연 총리, 6·25전쟁 부부참전 유공자 초청

    [포토] 이낙연 총리, 6·25전쟁 부부참전 유공자 초청

    이낙연 국무총리가 25일 6·25전쟁 부부참전 유공자 11 부부를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초청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19.6.25 연합뉴스
  • 文 “전쟁 없는 한반도로 6·25 참전용사에 보답”

    文 “전쟁 없는 한반도로 6·25 참전용사에 보답”

    문재인 대통령은 6·25전쟁 발발 69주기를 하루 앞둔 24일 “전쟁의 포연은 가셨지만, 아직 완전한 종전은 이뤄지지 않았다”며 “두 번 다시 전쟁 걱정이 없는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드는 게 참전용사의 희생·헌신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6·25 참전 국군·유엔군 유공자와 유가족 182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함께한 오찬에서 “6·25는 비통한 역사지만, 북한의 침략을 이겨냄으로써 대한민국 정체성을 지켰다”며 이같이 밝혔다. 청와대는 이날 군악대 연주와 3군 의장대 의전 등 예우를 갖춰 참석자들을 맞았다. 역대 최초로 참전용사 위로연이 외부 장소가 아닌 청와대에서 열렸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대사, 로버트 에이브럼스 한미연합사령관, 박한기 합참의장도 참석했다. 행사에서는 참석자들의 사연이 소개됐다. 화살머리고지 전투에 참전했던 박동하(94) 선생은 ‘아직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에게’라는 제목의 편지 낭독을 하다 흐느꼈다. 박 선생은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최근 고지에 가서 너희들이 묻혀 있을 만한 곳을 확인했다”며 남북 공동 유해 발굴에 기대감을 드러냈다. 문 대통령은 “참전용사 여러분의 헌신과 애국이 헛되지 않았다”고 감사하며 “참전 유공자들께서 평화의 길잡이가 돼 달라”고 당부했다. 청와대는 대통령 서명이 새겨진 시계와 건강식품을 선물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에게”…참전 유공자의 눈물 젖은 편지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에게”…참전 유공자의 눈물 젖은 편지

    “저는 오늘, 돌아오지 못한 나의 전우들에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박동하(94)씨가 24일 청와대에서 미리 준비한 편지를 낭독했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나의 전우들에게’가 제목이었다. 이날은 청와대가 6·25 전쟁에 국군과 유엔군으로 참전한 유공자들을 청와대 영빈관으로 초청한 날이다. 박씨는 전쟁 당시 프랑스 대대 소속으로 화살머리고지 전투에 참전한 유공자다. 박씨는 단상에 올라 준비한 편지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어느덧 녹음이 짙어지고 날씨가 더워지는 것을 보니 6월이구나. 매년 이맘때면 6·25 전쟁에 참전했던 그해 여름이 떠오른다. 그리고 너희들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전쟁 중에 사망한 전우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대목에서 박씨는 눈물을 보였다. “전투를 치르고 나면 전우들의 모습이 하나 둘 보이지 않았지. 전우들의 시신을 직접 수습하던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어느 날엔가는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나서 자리를 비운 사이 포탄이 떨어져 우리 전우들을 한꺼번에 잃은 날이 있었지. 어떤 이는 머리가 없고, 어떤 이는 다리가 없고, 누군가는 배가 터져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최근 화살머리고지를 다녀온 일을 언급하면서도 울먹였다. “최근에 국방부와 함께 화살머리고지에 가서 너희들이 묻혀 있을 만한 지점을 확인하고 돌아왔지···. 그리고 그곳에서 유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그나마 마음이 놓이더라. 67년 내 마음은 아직도 그곳에서 너희들과 함께하고 있다.” 편지 낭독을 마친 박씨는 청중들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참전 유공자들을 초청한 자리에서“6·25 전쟁 참전용사 한 분 한 분이 대한민국 역사의 주인공”이라면서 “참전용사 여러분의 헌신과 애국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 참전 유공자들께서 평화의 길잡이가 돼 달라”고 밝혔다.아래는 박씨가 낭독한 편지 전문. 어느덧 녹음이 짙어지고 날씨가 더워지는 것을 보니 6월이구나. 매년 이맘때면 6·25 전쟁에 참전했던 그해 여름이 떠오른다. 그리고 너희들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그러나 잘 그려지지 않는 것이 이제 내 기억도 희미해져 가는 거구나. 얼마 전 우리의 마지막 전투 장소였던 화살머리고지에 다녀왔다. 그곳을 지켜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땀과 피를 흘렸는지, 너무나도 많은 전우들이 이 땅을 지키다가 전사했다. 화살머리고지를 지키기 위해 밤새도록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기억이 나는구나. 전투를 치르고 나면 전우들의 모습이 하나 둘 보이지 않았지. 전우들의 시신을 직접 수습하던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어느 날엔가는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나서 자리를 비운 사이 포탄이 떨어져 우리 전우들을 한꺼번에 잃은 날이 있었지. 어떤 이는 머리가 없고, 어떤 이는 다리가 없고, 누군가는 배가 터져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그날만 생각하면 너희들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이 나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구나. 그런 세월이 흘러 어느덧 67년이 지났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난 최근에 국방부와 함께 화살머리고지에 가서 너희들이 묻혀 있을 만한 지점을 확인하고 돌아왔지. 그리고 그곳에서 유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그나마 마음이 놓이더라. 67년 내 마음은 아직도 그곳에서 너희들과 함께하고 있다. 여전히 너희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구나.내가 살아나갈 수 있었던 것은 너희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냐. 오늘 여기에 나 혼자 청와대에 오게 되어 너희에게 더 미안한 마음은 참을 수가 없다. 함께 왔다면 얼마나 좋았느냐. 죽어서라도 한순간 너희와 다시 만나고 싶구나. 너와 너희들의 후손들은 그곳에 잠들어 있는 너희들을 기억하고 시체 하나가 없을 때까지 찾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한다. 부디 영면하라.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포토] 문 대통령, 6·25 전쟁 참전유공자 오찬

    [포토] 문 대통령, 6·25 전쟁 참전유공자 오찬

    문재인 대통령이 24일 낮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6·25 전쟁에 참전한 국군 및 유엔군 유공자 초청 오찬에 입장하며 참석자들과 인사하고 있다. 2019.6.24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참전용사 한명씩 호명한 문 대통령 “나라 정체성 지켰다”

    참전용사 한명씩 호명한 문 대통령 “나라 정체성 지켰다”

    문재인 대통령은 24일 6·25 전쟁 참전유공자와 가족 182명을 청와대 영빈관으로 초청해 “전쟁 걱정 없는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드는 게 참전용사의 희생·헌신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6·25 전쟁 참전유공자들이 현역 장병들과 함께 청와대에 초청된 적은 있었지만, 대통령이 참전유공자들만 따로 청와대로 초청해 위로연을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행사에는 정경두 국방부 장관,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대사, 로버트 에이브럼스 한미연합사령관, 박한기 합참의장 등 한미 양국의 정부·군 고위관계자도 함께했다. 문 대통령은 “6·25는 비통한 역사이지만 북한의 침략을 이겨냄으로써 대한민국 정체성을 지켰다”며 “전쟁의 참화를 이겨내려는 노력이 대한민국의 발전을 이뤘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전쟁의 잿더미에서 수출 세계 6위, 국민소득 3만 불을 넘는 경제 강국으로 발전했고,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전쟁과 질병, 저개발과 가난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돕는 원조공여국이 됐다”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이어 “여러분이 계셨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 자유와 평화를 지키고 애국의 참된 가치를 일깨운 모든 참전용사께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며 “참전용사들이야말로 평화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낄 것이다. 늘 건강하게 평화의 길을 응원해달라”라고 당부했다. 문 대통령은 “참전용사는 대한민국의 자부심이며 헌신에 보답하는 일은 국가의 책무이자 후손의 의무”라며 “선양과 보훈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정부는 참전명예수당을 역대 최고 수준으로 인상했다. 마지막 가시는 길까지 존경받도록 대통령 근조기와 영구용 태극기를 정중히 전해 드리고 있다”며 “재가복지서비스도 확대했다”고 설명했다. 화살머리고지 유해발굴에 대해서도 “4월 1일부터 지금까지 유해 72구, 유품 3만 3000여 점을 발굴했다”며 “마지막 한 분까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최고의 예우를 갖추겠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화살머리고지 전투 참여 유공자 박동하(94) 선생이 ‘전우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송하자 “화살머리고지에는 수많은 용사가 잠들어 계신다. 감동적 편지를 낭독해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소중한 아들딸, 자랑스러운 부모였던 사람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 전선으로 향했다”며 참전용사들의 이름을 한명씩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특히 “고등학생 유병추 님은 학도병으로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공헌했고, 박운욱 님을 비롯해 일본에서 살던 642명의 청년은 참전 의무가 없는데도 전장에 뛰어들었다. 이들을 재일학도의용군이라 부른다”고 소개했다. 이어 “고(故) 김영옥 대령님은 미국 최고의 전쟁영웅 16인 중 한 분으로, 전역 후임에도 다시 입대해 조국으로 달려왔다”며 “휴전선 중·동부를 60㎞나 북상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경찰도 전쟁의 참화에 맞섰다. 고 임진화 경사는 경찰 화랑부대 소속으로 미 해병 1사단과 함께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다”며 “수류탄 파편 7개가 몸에 박히는 중상에도 전장으로 복귀해 조국을 지켰다”고 감사를 표했다. 문 대통령은 외국 참전용사도 언급하며 “6·25는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이 함께 전쟁의 폭력에 맞선 정의로운 인류의 역사”라며 “22개국 195만명의 젊은이가 대한민국으로 달려왔다”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그 중심에 미국이 있었고 가장 많은 인원이 참전해 가장 많은 희생을 치렀다. 정부는 그 숭고한 희생을 기려 워싱턴에 ‘추모의 벽’을 건립할 예정이다. 한미 양국은 동맹의 위대함을 기억하며 누구도 가보지 못한 항구적 평화의 길을 함께 열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문 대통령은 참전유공자들에게 대통령의 서명이 들어간 시계와 건강식품을 선물했다. 또 감사의 마음과 함께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이뤄 참전용사의 용기와 애국에 보답하겠다는 메시지를 담은 카드를 참전용사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새겨 전했다. 다만 지난 4일 국가유공자·보훈가족 초청 오찬 당시 남북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함께 찍은 사진이 담긴 채 배포돼 천안함 희생자 유족 등 참석자들의 반발을 불렀던 소책자는 제공하지 않았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파격의 1박2일… 시진핑 ‘혈맹’ 과시, 김정은 ‘우군’ 확보

    파격의 1박2일… 시진핑 ‘혈맹’ 과시, 김정은 ‘우군’ 확보

    金, 숙소로 금수산 새 영빈관 첫 제공 당 정치국 성원과 기념촬영도 최초 한밤까지 밀착 동행… 동선 직접 챙겨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20~21일 북한을 국빈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밀착 동행하며 ‘황제급’으로 예우했다. 미중 갈등, 홍콩 시위 등으로 국내외에서 수세에 몰린 시 주석은 김 위원장으로부터 파격 예우를 받으며 북한에서의 영향력을 과시했고, 김 위원장은 향후 북미 비핵화 협상을 진행하는 데 있어 중국으로부터 지지와 지원을 확보했다는 평가다. 조선중앙TV가 지난 22일 공개한 시 주석 방북 관련 기록영화를 보면 김 위원장은 시 주석이 20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이튿날 떠날 때까지 1박 2일 내내 시 주석의 동선을 직접 챙겼다. 김 위원장은 20일 공항 영접 행사부터 평양 도심 무개차 퍼레이드, 금수산태양궁전 광장 환영 행사에 시 주석과 함께했으며, 행사 후 시 주석 숙소인 금수산 영빈관까지 동행해 시 주석을 방까지 직접 안내하고 숙소를 설명했다. 김 위원장은 시 주석에게 새로운 영빈관을 숙소로 제공하면서 극진한 예우를 선보였다. 시 주석의 숙소인 금수산 영빈관은 그동안 북한 매체에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으며 외국 정상 숙소는 주로 1983년 평양 대성구역에 건립된 백화원 영빈관이 이용됐다. 지난해 방북한 문재인 대통령도 백화원 영빈관에서 묵었다. 김 위원장은 시 주석과 금수산 영빈관에서 회담을 한 뒤 자신의 집무실인 노동당 중앙위 본부청사에 시 주석을 초청, 당 정치국 성원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지난해 방북한 문 대통령과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도 본부청사에 초청받았으나 김 위원장 및 당 정치국 성원과 기념촬영을 한 것은 시 주석이 유일하다. 김 위원장은 시 주석과 환영연회를 하고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집단체조 ‘불패의 사회주의’를 관람한 뒤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시 주석 숙소인 금수산 영빈관에 먼저 도착해 시 주석을 맞이했다. TV는 “시 주석이 김 위원장의 진심 어린 극진한 정에 감동을 금치 못해하면서 비록 길지 않은 하루였지만 조선 인민에 대한 지울 수 없는 훌륭한 인상을 받아안았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김 위원장은 이튿날인 21일에도 시 주석과 함께 중국 인민지원군의 6·25전쟁 참전을 기념해 건립된 북중 우의탑을 참배하며 북중 혈맹을 과시했다. 이후 금수산 영빈관으로 이동해 부부 동반으로 영빈관 내 호수 주변을 산책하고 오찬을 했다. 김 위원장은 평양 순안공항에 직접 나가 시 주석을 환송했다. 한편 시 주석의 방북 기간에 북한의 지도부 구성에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는 신호가 포착돼 주목된다. 20일 정상회담에는 그동안 네 차례 북중 정상회담에 모두 배석한 김영철 당 부위원장이 빠지고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겸 국무위 제1부위원장이 배석했다. 또 북중 정상회담 관련 조선중앙통신 보도에서 리용호 외무상이 서열상 위인 리수용 당 부위원장 겸 국제부장보다 먼저 호명됐다. 이에 최 상임위원장과 리 외무상이 향후 북미 협상에서 주요 역할을 맡을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된다. 김여정 제1부부장은 시 주석과 김 위원장, 당 정치국 성원 기념촬영에서 빠졌지만, 공항 영접 행사에서 정치국 위원인 김수길 군 총정치국장보다 앞에 도열해 정치적 위상에는 변화가 없다는 분석이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은 “김 제1부부장은 2017년 10월 당 중앙위 7기 2차 전원회의에서 후보위원에 보선된 이후 현재까지 직을 유지하고 있으며 정치적 위상은 오히려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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