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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시 중대장 이대용씨의 회고:상/「내가 겪은 6.25」

    ◎“적 대규모 남침”… 휴일 아침 전령이 보고/도서관 가다 귀대… 한여름 방한화 신고 출전/빗속의 춘천방어전서 적 자주포 5문 노획/첫날 동기생 8명 전사… “무비유환” 한탄하며 퇴각 6·25전쟁이 일어난지 41년 37개월 동안 계속되었던 동족상잔의 전쟁은 민족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국토는 아직도 두 동강이 나 있고 민족은 남북으로 갈라져 분단생활이 계속되고 있다. 국군 제7보병연대 1중대장으로 참전했던 이대용 예비역 준장(66·육사 7기·현 한국해음주식회사 사장)이 말하는 당시의 처절했던 전황을 몇차례 나누어 싣는다. 이 장군은 월남전 당시 주월 공사로 근무중 끝까지 대사관을 지키다 월맹에 의해 5년간 억류됐다가 우리 정부의 끈질긴 교섭으로 1980년 석방,귀국했다.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경 야음을 틈타 남침한 인민군의 총격으로 이내흥 중위는 춘천 북방 모진교 부근에서 전사했다. 이날 하룻동안 이 중위를 비롯,일선 중대장인 육사7기생 8명이 전사했고 다음날인 26일엔 10명이,27일엔 5명이 목숨을 잃어 불과 3일 동안에 23명의 장교가 적탄에 맞아 전사했고 약 70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렇게 시작된 육사7기생 전사자수는 한국전쟁 3년1개월 동안 모두 1백27명이나 됐고 행방불명자(적군의 포위 속에서 전사한 것으로 간주됨) 수는 19명,부상자는 약 4백명에 달했다. 이는 동기생 5백64명에 비해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그 날은 일요일이었고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때의 내 나이는 25살이었다. 직책은 육군 제7보병연대 제1중대장이었다. 그날은 휴일이어서 나는 춘천시 죽림동에 있는 하숙집에서 조반을 들고는 춘천도서관에 가서 책이나 읽을 참이었다. 카키색 군복 상하에,긴 고무장화를 신고 정모에 비닐 커버를 씌운 뒤 거울 보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하숙집 대문을 나설 때 비가 내리기에 우비를 꺼내 입고 봉의산 기슭에 있는 도서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디선지 「쿠쿠쿵 쿠쿠쿠쿵」하는 포사격소리가 들리더니 「따따따」하는 기관총 사격소리가 잇따라 들려왔다. 일요일에도 가끔 사격훈련을 하는 부대가 있기에 나는 이를 무심히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 보냈다. 그래서 나는 앙드레 모로아가 쓴 책 내용을 머리에 되새기며 가던 길을 재촉해 걸었다. 내가 춘천시내 공회당 앞까지 걸어갔을 때 맞은 편에서 철모에 전투복 차림의 한 군인이 내 쪽을 향하여 뛰어오고 있었다. 제1중대 전령 안기수 하사였다. 그는 거수경례를 하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인민군(북한공산군)이 38선을 넘어 남침했다』고 보고했다. 그는 나에게 『비상이 걸렸으니 속히 연대본부로 집합하라』는 제1대대장의 명령을 구두로 전달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지방도시에선 전화를 걸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춘천시민들의 가정에는 전화기가 한대도 없었다. 심지어 38선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나면 즉각 출동명령을 받고 부대 복귀를 해야 할 중대장들의 영외숙소에 조차도 군용전화가 한대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태고시대의 통신이랄 수 있는 연락병에 의한 연락 방법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대대장급 이상이 돼야만 그 집에 군용전화기 한대가 가설되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중대장이나 소대장에게 연락을 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렸으며,특히 장병들이 고이 잠자고 있는 새벽,그리고 사병들 대부분이 외박을 나가 있는 휴일의 연락은 더욱 그만큼 더디게 마련이었다. 6월25일. 북한공산군 이청송 소장이 지휘하는 제2보병사단은 새벽 4시 조금전에 38선을 돌파,춘천을 향하여 남침을 감행했다. 이로부터 4시간반이 경과한 뒤에야 1중대장인 나에게 연락이 닿은 것이다. 이날은 특히 일요일이라 많은 사병들이 외박을 나갔으며,연대본부 영내에 남아있는 몇명 안 되는 사병들도 잠이나 실컷 자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정신상태는 이완될대로 이완될 수밖에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비상연락을 받는 장교들마저도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비상소집이 여러번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또 맥빠지는 일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일이 많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거의 매번 연대의 비상소집명령에 따라 집합해 출동하려 하면 38선 가까이에 있는 부대로부터 「북한공산군이 다시 38선을 넘어 북쪽으로 후퇴해 버렸다」는 연락이 오는 것이 통례였다. 그럴 때마다 비상소집된 장교들의 맥은 빠지게 마련이었다. 나는 이날도 또 싱겁게 끝나겠지 하는 생각을 갖고 연대본부로 향했다. 연대본부 영문 앞에 다다랐을 때,소양로 쪽에서 확성기를 단 군용스리쿼터 한대가 달려오면서 『외출이나 외박을 나온 사병들은 비상이 걸렸으니 속히 소속부대로 돌아가라』는 가두방송을 했다. 그때 『이번엔 심상치 않구나』 하는 생각이 내머리를 스쳤다. 급히 연대 정문으로 들어서서는 제1대대장 방으로 달려갔다.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새벽 4시 조금전에 38선을 기습 돌파한 1개 사단 이상으로 추산되는 북한공산군 대병력이 38선 남쪽에 배치된 우리 제7중대와 제9중대를 격파하고 남진을 계속,현재 춘천 북방에 있는 옥산포에 육박하고 있으며,제9중대장은 이미 전사하고 내평방면에 있는 제7중대는 통신이 끊겼다』는 상황설명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1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이어 긴장된 목소리로 『얼마 안 있으면 우리 연대본부에도 북한공산군의 포탄이 쏟아질 것 같다』고설명했다. 나는 하숙방에 전투복 군화 철모 등을 두고 왔지만 이미 나에겐 그런 것들을 가지러 다시 하숙집까지 갔다올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중대 보급계 박 중사를 불러 중대보급창고에 가서 재고품 중에서 내 몸에 맞는 전투복과 철모와 군화 등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가 가져온 것 중에 다른 것들은 모두 내몸에 맞았으나 군화는 너무 작아서 신을 수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그가 다시 가지고 온 것은 겨울에 신는 방한화였다. 다행히 내 발에 맞아 한여름에 엄동설한용 방한화였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신었다. 외박이나 외출을 나갔던 사병들이 속속 중대로 복귀하고 있었다. 황급히 출동준비를 하고 제1중대 인원을 점검하니 상오 9시20분 현재 40여 명이 미귀상태였다. 나는 중대 선임하사관에게 외박으로부터 돌아오는 사병들을 계속 전방으로 내보내라고 지시하고 중대병력을 지휘하여 춘천 북방에 있는 우두산 북단에 구축해 놓은 방어지지로 달렸다. 제1중대를 포함해 제1대대 병력이 우둔산 일대의 방어진지에 배치,완료된 것은 상오 11시경이었다. 정오가 좀 지나자 북한공산군의 선두부대는 자주포를 앞세우고 옥산포에 들어오고 있었다. 봉의산 뒤에 배치된 우리 사단초병은 아주 효과적으로 옥산포의 적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들은 좀 당황한듯 전진을 멈추고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나의 제1중대 병력은 산발적으로 적과 교전했다. 어느새 어둠이 깔리더니 금방 날이 샌다. 6월26일 아침이 됐다. 내리던 비는 멎었다. 구름 속의 햇볕이 수라장의 싸움터를 비춰 주었다. 상오 8시경,제1대대는 우두산에서 일제히 뛰어내려 서쪽에 있는 옥산포로 달려들었다. 우리 사단포병은 정말로 절묘하고 무섭게 옥산포에 포탄을 퍼부어 우리 보병부대의 공격을 지원했다. 의외의 기습을 받은 옥산포의 북한공산군 자주포 부대와 보병부대는 북쪽으로 후퇴해버렸다. 우리 부대는 적군 자주포 5대를 노획했다. 이중 한대는 후퇴하는 북한공산군 스스로가 파괴한 것이고,다른 한대는 아군이 2.36인치 로켓포탄 위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 가까운 거리에서 뒤쪽을 보고 사격,일부를 파괴시켰다. 그리고 나는 소제 권총한정을 노획하여 허리에 찼다. 옥산포는 지형이 평탄했다. 그래서 우세한 병력과 화력,기갑부대까지 있는 북한공산군을 저지하기 위해 오래 머물러 있을 곳은 못되었다. 약 2시간쯤 뒤에 북한공산군 대병력이 자주포 부대와 함께 옥산포로 밀려왔다. 우리 제1대대는 우두산 방어진지로 되돌아가야 했다. 다시 날이 저물자 제1대대 병력은 우두산 방어진지를 나와 소양강을 건너 봉의산 방어진지로 이동했다. 여기서 적을 저지하며 치열한 전투를 하다가 다음날인 6월27일 해질 무렵에,원창고개 방면으로 이동,원창고개에서 적과 교전했다. 6월28일 하오 4시경 결국 원창고개 방어진지를 떠나 홍천 북방에 있는 동산리로 향했다. 서울이 북한공산군 수중에 함락되고 인제 방면에서 홍천으로 진격중인 북한공산군 제7사단이 우리 제7연대의 후방을 차단할 위험이 있다고 본 상부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북한공산군의 1개 사단 병력은 약 1만1천명이며 그들 사단이 갖고 있는 1백22㎜ 곡사포의 최대사거리는 1만2천야드인 데 비해,우리측 사단의 1백5㎜ 곡사포는 최대사거리가 8천야드에 불과했다. 병력은 물론,화력이나 기동력·기갑력에 있어 적군은 아군보다 아주 월등하게 우세했다. 우리는 이를 사전에 모르고 대비를 하지 못했었다. 무비가 유환을 가져온 셈이었다. 어쨌거나 나의 6·25 첫 전투였던 춘천지구 방어전투는,우리들에게 상당한 피를 흘리게 한 뒤 끝나 버렸다. □약력 □1925.11 황해도 김천 생 □1948.11 육군사관학교 제7기 졸업 □1950.6 제7보병연대 제1중대장 □1951.10 제32보병연대 제3대대장 □1953.3 미 육군보병학교 졸업 □1960.12 미 육군참모대학 졸업 □1961.8 제23보병연대장 □1963.9 주월남 한국대사관 무관 □1968.1 육군 준장 진급 □1968.1 주월남 한국대사관 공사 □1975.4 월남 공산정부에 의해 억류 □1980.4 석방 귀국 □현재 한국해음주식회사 대표이사 회장
  • 「6·25와 동북아 새안보질서」 국제학술회의

    ◎“남북한 체제 안정돼야 대화 활성화”/상호 안보이익 존중… 교우승인 유도를/군축 실효성 확보엔 국제적 보장 긴요 한국정쟁연구회(회장 김철범·국방대학원 교수)와 미국 피츠버그대학 리지웨이 국제안보문제연구소는 20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한국전쟁과 동북아 신안보질서」라는 주제로 제3차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했다. 6·25전쟁 41주년을 맞아 열린 이 학술회의에서 소련과학아카데미의 보리스 자네긴 교수는 「한국전쟁」은 동서냉전의 시작을 의미했으나 걸프전은 선진국과 후진국간의 이른바 「남북냉전」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미 일리노이대의 고병철 교수는 침체상태에 있는 남북대화가 다시 활성화되려면 남한의 민주화와 정치적 안정을 포함해 남북한의 국내 상황이 보다 향상돼야 하며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국제적·지역적 환경이 근본적으로 변화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제발표 내용을 요약했다. □한국전쟁의 재고찰과 걸프전 이후 전환하는 국제정세(보리스 자네긴·소과학아카데미 미국 및 캐나다문제연구소)=한국전과 걸프전 사이에는 피상적이긴 하지만 의미있는 유사점이 있다. 이 두 전쟁은 모두 분단된 민족끼리의 충돌로서 모두 분단된 민족끼리의 충돌로서 시작됐으며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대규모로,그리고 결정적으로 전쟁에 개입했다. 또 두번 다 이들의 개입이 국제연합기구(유엔)에 의해 합법화됐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유사점은 이 전쟁들로 인해 국제관계의 새로운 시기가 시작됐으며 국제정치에 있어서 지정학적 세력을 새로 고정배치시켰다는 것이다. 이 전쟁들의 중요한 차이점은 한국전은 두 개의 사회체제와 이념의 갈등을 반영한 것이었으며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참전한 자본주의 「서방측」과 중국과 소련 등이 참전한 공산주의 「동방측」간에 전쟁이 수행됐으나 걸프전은 그렇지 않았다. 걸프전은 선진국과 그들의 원자재 공급원이었으며 이제 막 현대화되기 시작한 후진국간의 오래된 갈등을 새로운 차원에서 보여주었던 것이다. 북쪽(선진국)은 남쪽(후진국)과의 대결에 있어서 소련의 능동적인 역할로 강화되고 있다. 남쪽과 북쪽 대결은 오랜기간 동안 동서반목에 의해 가려져왔다. 이제 소련이 개발도상국(이라크)에 대한 전쟁에서 서방측에 가담함으로써 남쪽과 북쪽의 대결은 보다 뚜렷하고 중요하고 위험스럽게 됐다. □변화하는 국제질서와 남북한관계(고병철·미 일리노이대 교수)=침체상태에 있는 남북대화가 다시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남북 각자의 국내상황과 국제적 환경이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국내상황에 있어서 남한의 민주화나 정치적 안정이 어느 정도 이룩되면 남북한이 대화를 보다 진지하게 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그같은 민주화나 안정으로 인해 서울정권의 정통성이 강화되면 동시에 서울은 대화에 있어서의 계산된 위험을 감수할 수 있을 만큼 대담해질 것이고 서울정부를 성실한 대화상대로 다루기를 꺼려하는 북한의 태도도 변화할 것이다. 또 악화일로에 있는 경제난으로 인해 북한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서울과의 협력을 추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외부적으로 보면 「교차승인」의 실현은 하나의 촉매로서 작용할 것이다. 그럴듯한 시나리오는 북한과 일본이먼저 수교하고 한국과 중국이 그 다음에 수교하는 것이다. 이 북­일,한­중 수교가 미국­북한간 관계정상화를 가속화시킬 것은 뻔한 이치다. 일본과 미국이 남북대화 진전을 대북관계 진전의 주요한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것이 함축하는 것은 교차승인이 단지 남북대화를 활성화시킬 뿐만 아니라 교차승인 자체로써 이미 남북대화는 활성화과정에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군비통제에 대한 전망(안병준·연세대 교수)=한반도에서의 군비통제과정은 우선 쌍무적이어야 하고 거기서 나오는 어떤 결과라도 주변 강대국들과 유엔의 국제적인 보장이 필요하다. 남북 양측의 주장 가운데는 중요한 유사점도 있는가 하면 근본적인 차이점도 있다. 양측은 아직도 서로 대화함으로써 상호이익을 도출해내려는 진지한 의지가 없다. 남북한이 상호 정치적인 이해를 할 수 있게 되면 다른 기술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는 쉬울 것이다. 남북 양측이 상호반목의 요인을 이해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대체로 평양이 외국군대와 자국군대의 존재에서 나타나는 대결의 징후에 보다 관심이 있는 데 반해 서울은 적대감과 불신의 존재에서 나타나는 대결의 원인에 보다 관심이 있다. 결과적으로 전자는 군사적 위혐을 제거하는 일에 모두하고 있는 한편 후자는 정치적 위협을 제거하는 일에 여념이 없다. 이 대조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정치체제를 반영한다. 북한은 남한의 합법성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합법화시키고 있으나 남한은 경제발전·민주화·국제화 등으로 자신을 합법화시킬 수 있다. 남북한은 서로의 안보이익을 존중하는 방법으로 정치적 긴장의 원인과 징후들을 제거해야 한다. 남한의 몰락은 결코 남한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서독과 달리 남한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북한을 적절히 흡수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다른 주변국들의 이익에도 맞지 않는다. □90년대 한반도의 군비통제­문제와 전망(김병기·미 조지타운대 교수)=남한 당국의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아직 대부분의 군사분야에있어서 양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그러나 질적으로는 소련이 미그27이나 스커드B미사일 같은 첨단무기들을 계속 북한에 공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한이 우위에 있다. 전략적 수렁에 빠져 있는 소련이 서울과의 관계개선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이 지역에서 미국과 경쟁하는데 필요한 유일한 카드라고 간주하고 있는 한 주변국들의 한반도에 대한 무기공급은 계속될 것으로 볼 수 있다. 군비통제의 과정에 있어서 80년대에는 비록 아무런 합의도 없었지만 과거로부터 진전된 변화는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원래 1987년 이후의 제안에 기초해 북한은 외국군대와의 합동군사훈련의 제한,특히 군사분계선에서의 제한은 물론 금지까지 요청했다. 북한은 이밖에 비무장지대에서 군인과 무기들을 제거함으로써 평화구역을 설정하고 민간인들에게 국경을 개방하는 것,(존재하지는 않지만) 남북을 갈라놓고 있는 콘크리트장벽의 제거,직통전화 복구,군사분계선에서의 도발 금지 등을 제안했다. 남한은 북한의 이같은 제의에 대해 대체적으로 협상에 응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북한은 실질적인 문제와는 상관이 없는 임수경양 석방문제를 대화지속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웠다. 따라서 앞으로 군비축소 성사는 북한정권이 남한에 대한 태도를 포함해 그 근본적인 정책을 어떻게 수정해 나가는가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 “김일성,소와 한달간 6·25남침 계획”

    ◎전 북한군 작전국장 유성철 증언/대독 전쟁경험 풍부한 소 장성들 고문단에 참여/“서울 전격 점령하면 상황 끝”… 예비병력 안갖춰 북한의 김일성은 지난 50년 3월 모스크바를 비밀리에 방문,스탈린으로부터 남침에 대한 동의를 받아낸 후 약 한달간의 구체적인 작전계획작성에 들어갔으며 이 작업에 전쟁경험이 풍부한 소련 장군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전쟁 전후 북한군 작전국장이었던 유성철씨는 지난 5일까지 재소 교민신문 고려일보에 연재한 자신의 회상록 「피바다의 비화」에서 김일성의 소련 방문 직후 민족보위성 작전국의 한 방에서 약 1개월간 극비리에 작전계획이 작성됐으며 소련군의 많은 군사전문가들이 이 작업에 적극 참여했다고 증언했다. 한편 전쟁 발발 직전까지 모두 3천여 명의 공작대를 남파시킨 전 강동학원 원장 박병률씨(86)는 16일 유씨의 6·25증언이 가장 정확한 진실이라고 확인했다. 다음은 6·25전쟁에 관한 유씨 회상록의 요약이다. 『6·25 전쟁 작전계획은 민족보위성 작전국의 한 방에서 약 1개월에걸쳐 극비밀리에 진행됐다. 이 작전계획에는 총참모장 강건,포병사령관 김봉률,포병참모장 정학준,공병국장 박길남,동신국장 이용인,공군사령관 한일무,해군 참모장 김원무,병기국장 서용선,후방국장 정목,정찰국장 최원,작전국장 유성철(필자),작전부국장 유상렬 등이 참여했다. 소련 고문단에서는 바실리예프 중장,포스트니코프 소장 및 기타 장군들과 영관급이 작전계획 작성에 주동 역할을 했다. 이 작전계획 작성을 위해 독소전쟁 등 경험이 풍부한 소련 고문단이 필요했기 때문에 바실리예프 중장 등이 구 고문단과 신속히 교체된 것이다. 작전계획의 실천을 앞두고 비밀을 보장할 목적으로 훈련형식을 취하면서 병력을 38선에 집결시켰다. 집결이 완료된 후 기동연습에 관한 명령서를 무전으로 공개적으로 전파했는데 국방군 참모본부는 아마도 이 같은 북의 기만에 떨어졌으리라고 믿어진다. 이 작전계획의 기본 약점은 미국이 손쓸 사이없이 불의의 공격으로 서울을 점령하면 전쟁이 끝날 것으로 예상하고 예비 병력을 준비하지 않은 데 있다. 또한 서울함락 후 박헌영의 지도하에 있는 남로당원 10만명이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지리산 후격대들이 후방에서 세찬 공격작전을 펼 것을 기초로 해 작성된 것이다. 서울은 전쟁개시 3일 만에 함락됐으나 기대했던 인민봉기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지리산 유격대의 활동도 없었다. 인민군은 한 달 동안에 남한의 90%를 점령하고 남한인구의 92%를 장악했으나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의 참전으로 후퇴를 거듭하게 됐다. 전황이 극도로 불리해지자 김일성의 지시로 박헌영과 함께 북경을 방문,원조를 요청하게 됐다. 우리 일행을 접견한 모택동은 조선에 지원군을 파견키로 결정했음을 알리고 팽덕희 장군이 전선을 지휘하고 후방은 중국 동북정부 주석 고강이 책임지게 됐다는 것과 이들 두 동지가 손을 잡으면 조선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모는 최종발언에서 전쟁은 지금처럼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다섯 손가락을 앞으로 펼쳐 보이면서 미군과 괴뢰군(국군을 지칭)을 각각 분리하여 격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는 이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한 다리를미군이라고 가정하고 다른 다리를 괴뢰군이라고 하자. 먼저 괴뢰군을 포위 섬멸하고 다음에 미군을 포위 섬멸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미군이 맥을 추지 못할 것』이라면서 한 다리를 들고 다른 다리로 툭툭 뛰면서 설명했다. 모의 이러한 말에는 김일성을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모가 김을 비판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50년 10월19일 저녁 8시쯤 중국 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너 여러 지점을 통과,조선 전쟁에 참전하기 시작했다. 피아간에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어느 쪽에서도 승리자도 패배자도 없이 전쟁은 끝이 나 1953년 7월27일 비로소 남북 인민들이 그처럼 고대하던 휴전을 맞게 됐다. 전쟁이 끝난 후 김일성은 악명높은 소위 「사상검토」를 통해 민간인을 휩쓸고 뒤어어 군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착수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김일성에게는 세 가지 「흑색」 명단이 작성되어 있었다. 첫 명단에 든 사람은 죽어도 좋다는 부류였고 제2명단에는 무기징역을 받을 사람들이 들어 있었으며 제3 명단에는 소련으로 가기를 원하면 보내도 좋다는 사람들이 포함돼 있었는데 필자는 제3명단에 들어 있어서 소련으로 나올 수 있었다. 김일성은 6·25전쟁에 참가한 장군들 중 남일·이권무·김창봉·김광협 대장,무정 중장 등 모두 44명을 처형하거나 숙청했으며 이 가운데 필자를 비롯한 이상조·강상호 중장 등 16명의 장군이 탄압을 받고 소련을 위시한 외국으로 망명했다』
  • 미 예비역장성 8명 20일 방북/핵문제·유골 송환 협의

    【워싱턴 연합】 리처드 스틸웰 전 주한 유엔군 총사령관과 엘모 줌월트 전 해군 참모총장 등 미 예비역 고위장성 8명이 오는 20일부터 24일까지 평양을 방문할 것으로 10일 알려졌다. 북한의 평화군축연구소 초청으로 5일 동안 방북하는 이들 일행은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미군 유해 송환,한반도 군축,핵무기 문제 등 상호 관심사를 협의할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당국이 모두 한국전에 참전한 경력의 이들 미 고위 예비역 장성 일행을 6·25 발발 기념일을 앞두고 초청한 것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다각적인 포석의 일환으로 해석되고 있다.
  • “자기실현이 요즘 학생의 첫째 욕구”

    ◎“교수직 50년” 연대 원일한 박사/“40년대엔 사회적 책임의식 강했죠”/설립자의 손자… 개교 1백6돌 감회 깊어 지난 11일 창립 1백6주년을 맞은 사학의 명문 연세대의 학교법인 이사인 원일한 박사(74)에게는 올해가 참으로 뜻깊은 해이다.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한지 5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원 박사는 1885년 4월5일 미 북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와 연희전문을 설립한 언더우드(원두우) 박사의 손자.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이 학교에 봉직하고 있으며 맏아들 한광씨(48)도 영문과 교수로 있다. 따라서 원 박사 집안 4대의 역사는 연세대학교의 작은 역사이기도 하다. 원 박사의 할아버지 언더우드 박사는 1915년 4월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창천리이던 현재의 학교부지 일대의 땅 19만 평을 사들여 연희전문학교를 설립,초대 교장으로 학교의 터전을 닦았다. 그는 언더우드의 발음을 따 원두우라는 우리 이름을 썼다. 연세대 본관은 지금도 그의 이름을 따 「언더우드관」으로 불린다. 원 박사의 아버지 원한경 박사도 이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34년 9월부터 41년까지는 제3대 교장으로 일했다. 원일한 박사는 1917년 10월 서울 남대문 근처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외국인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35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해밀턴대학에서 교육학과 영문학을 전공했다. 원 박사는 40년 서울로 돌아와 연희전문에서 영어회화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당시의 학생들은 고등교육을 받는 자부심과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이 강했으나 요즘 학생들은 자기실현의 욕구가 가장 큰 것 같다』는 것이 원 박사의 평이다. 그는 42년 일본이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미국으로 돌아가 해군대위로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45년 전쟁의 승리는 제2의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이라는 또 하나의 기쁨을 주기도 했다. 『해방후 부터 한국전쟁이 일어나기까지의 기간이 이 학교에 머물면서 가장 보람을 느꼈던 시절』이라고 그는 회상했다. 『그때 대학생들은 해방의 흥분과 조국의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차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느꼈으며가르치는 교수들도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원 박사는 41년 결혼,아들 셋을 두었다. 43년 맏아들이 태어나자 당시 연희전문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위당 정인보 선생이 「한국의 빛을 받고 태어났다」는 의미로 한광이라는 이름을 지어줬으며 뒤에 아버지의 「한」자를 물려받기 위해 한광으로 고쳤다. 그는 한자도 한국의 상징인 한강과 통하기 때문에 한자와 마찬가지로 좋은 이름이라고 했다. 원한광 교수는 영문과에서 영미소설을 강의하고 있다. 둘째 윌리엄과 셋째 피터의 한국이름은 이 학교 초대 총장을 지낸 용제 백낙준 박사가 영어이름의 원뜻을 살려 한웅과 한석으로 지었다. 흥분의 시대가 지나고 50년 6·25사변이 일어나자 원 박사는 다시 해군으로 복귀,현역장교로 인천 상륙작전에 참가했다. 53년 휴전회담이 이루어지자 원 박사는 유엔군측 수석대표 통역관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연희전문학교는 연희대학교로 이름을 바꿔 57년 세브란스의과대학과 통합,연세대학교로 발전했다. 원 박사는 이때부터 83년까지 전공인 교육학을강의했다. 75년 부인과 사별한 원 박사는 호주 출신의 선교사로 한국에 온 이화여대 종교음악과 원성희 교수(58)와 77년 재혼했다. 파란눈에 다부진 몸집을 가진 원 박사에게 『한국말을 얼마나 잘하느냐 』고 묻자 『책상 위에 주전자로 물을 부으면 물방울이 「또르륵」 굴러 간다』고 말하며 웃었다.
  • 미 입양고아 출신 30대/대구 미 문화원장 부임(조약돌)

    ○…낳은 지 10개월 만에 미국인 가정에 입양됐던 한국계 미국인이 어엿한 외교관이 되어 고국에 돌아왔다. 지난 15일 대구 미 문화원장에 부임한 로버트 오그번씨(32·한국이름 우창재)는 22일 이해봉 대구시장을 방문,자신이 한국계임을 밝히고 『고향에 온 기분으로 한미 우호증진에 힘쓰겠다』고 다짐했다. 오그번 원장은 지난 59년 6·25 참전용사로서 일본에서 군속으로 근무하던 미국인 해럴드 오그번씨(70)의 양자로 입양,메릴랜드대를 거쳐 조지워싱턴대 대학원에서 동아시아관계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뒤 1백 대 1의 경쟁을 뚫고 외교관시험에 합격했다. 오그번 원장은 고향이나 부모는 모르지만 항상 그리워하던 한국을 자원,근무지로 택했다고 말했다.
  • 「550」군번·기갑연대 복무/6·25참전 옛전우 연락바라(조약돌)

    ○…기갑연대전우회(총무 조증만)는 기갑연대 출신으로 「550」 군번을 받은 사람과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 당시까지 기갑연대에서 복무한 적이 있는 군인 및 군무원 등 6·25에 참전했던 옛 전우들을 찾고 있다. 전우회는 전우들이 모이는 대로 6·25 전적지를 순례하고 자신들의 소속부대였던 기갑연대를 방문,후배들을 격려하는 한편 국립묘지도 참배할 계획이다. 연락처 (051)246­0030 (0525)35­0300
  • 소 학자가 밝힌 중공군 파병 경위

    ◎모택동,사흘 밤샘끝에 6·25참전 결정/김일성 긴급요청 하룻만에 3개군에 동원령/주은래 모스크바에 급파,공군지원 설득 나서/“미군의 압록강 진격 우려”… 당중앙위,신중론 일축 한국전에 관해서는 지금껏 비교적 많은 양의 사료와 비사들이 공개되고 발굴돼 온 편이다. 그러나 1950년 10월 UN군측에 유리하던 전쟁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뒤바꾸어 놓은 중공군의 개입에 관한 중국측 자료들은 좀체 공개되지 않았다. 한국전 참전 중공군 장성들이 쓴 회고록과 중국 내부에서 공개된 사료,중국 언론에 보도된 자료들을 토대로 중국의 한국전 참전배경을 밝힌 글이 최근 소련에서 발표돼 관심을 끌고 있다. 소련 과학아카데미 산하 극동연구소에서 발간하는 격월간지 「극동의 제문제」 최근호에 실린 소련 역사학자 빅토르 유소프의 글 「누가 중국지원군을 한국에 보냈나」는 당시 한국전을 보는 모택동 등 중국 지도부의 시각과 파병결정과정에서 있었던 중소의 갈등 등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1950년 10월1일,모택동은 김일성으로부터 긴급 전문 한통을 받았다. 「미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남조선 괴뢰정부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자신에게 중공군을 보내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모택동은 즉시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긴급회의를 소집했고 찬반 양론이 개진됐다. 임표은 파병 반대를 주장하며 『중국정부는 수립된 지 얼마 안됐고 전국 각지에서 지금도 반혁명 잔당들이 설치고 있다. 국내외에서 동시에 적을 상대하기엔 아직 벅차다』라고 말했다. 고강도 같은 의견이었다. 『우리는 20년 이상 전쟁을 했고 아직 정상생활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무기는 모두 낡았다. 미군은 대포 1천5백문을 실전배치할 수 있는데 비해 우리는 3백문밖에 배치할수 없다. 탱크도 우리가 훨씬 적다. 미군이 압록강 너머로 진격해 온다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 것인가. 북동쪽 국경의 수비를 강화하고 자중하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생각한다』라고 고강은 주장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참전쪽을 지지,이튿날인 10월2일 당중앙위원회는 한국파병을 결정했다. 같은날 당중앙위는 모택동이 서명한 파병결정전문을 스탈린 앞으로 보냈다. 지원군의 지휘책임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를 놓고 회의가 열렸다. 처음에는 임표가 적임자로 지목됐으나 그의 건강이 문제가 돼 팽덕회에게 넘어갔다. 10월4일 모택동은 서안에 있는 팽덕회를 북경으로 불렀다. 모는 이렇게 말했다. 『덕회 동지,결정은 내려졌고,3개군에 동원령을 내렸고 수십만명이 움직일 것이오. 잘못하면 우리는 큰 시련을 맞게 될 것이오. 확대 정치국 회의석상에서도 모두들 신중론을 제기했소. 하지만 김일성이 지금 위기에 처해 있는데 우리가 이를 방관하면 사회주의국은 모두 한 진영이라는 말은 헛말에 불과하게 되오』 팽덕회가 소련과의 군사 협조에 대해 묻자 모는 스탈린이 공군지원 약속을 했으며 따라서 중공군이 지상작전을 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1950년 10월8일,모택동은 팽덕회를 중국지원군사령관겸 정치장교로 정식 임명했다. 팽덕회는 이튿날 회의에서 연설을 통해 『조선에 군대를 보내는 것은 의무이다. 미국은 압록강 너머에 군대를 배치하는 즉시 구실을 붙여 침략전쟁을 도발해 올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10월11일 팽덕회는 새벽 기차를 타고 안동으로 갔다. 그리고는 압록강을 넘는 병력수송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10월12일 하오8시,모주석이 보낸 긴급 전문 한통이 팽덕회 앞으로 날아들었다. 지원군의 월경작전을 중지하고 즉시 북경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팽덕회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소련이 당초 약속과 달리 공군을 한국전에 보낼수 없다는 내용을 모스크바 주재 중국대사관에 통보해 왔다는 것이다. 주은래는 이같은 사실을 즉시 모에게 보고했다. 그 보고를 받고 모는 안색이 변하면서 담배를 문채 10여분동안 방안을 서성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출정명령은 이미 내린 상태였다. 이틀뒤 모는 정치국회의를 열어 파병을 연기시킨뒤 주은래를 모스크바로 보내 중국이 처한 어려운 입장을 설명하기로 했다. 10월15일 팽덕회는 심양으로 가서 모주석의 교시와 정치국의 파병연기 결정을 알렸다. 10월16,17일 이틀간 팽덕회는 김일성이 보낸 특사를 만났다. 주은래는 스탈린을 찾아갔으나 아무런 소득도 얻어내지 못했다. 스탈린은 한번 내린 결정은 번복치 않는 사람이었고 소련 공군이 참전 가능성은 없었다. 모는 꼬박 사흘을 뜬눈으로 새웠고 수면제 수십알을 먹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모는 결국 파병키로 결정을 내렸다. 모스크바의 주은래 앞으로 모의 전문이 전달됐다. 소련 공군의 오든 안오든 중국은 싸운다는 내용이었다. 같은날 주은래는 다시 스탈린을 찾아갔다. 스탈린은 주를 보고 『아직 떠나지 않았던가』라며 딴청을 부렸다. 주은래는 결연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모주석으로부터 조선 파병결정을 내렸다는 전문을 받았습니다』 스탈린은 한동안 침묵을 지킨끝에 『중국 동지들이 정말 훌륭해』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1950년 10월19일 하오8시,팽덕회의 지휘아래 중공군 지원군은 마침내 압록강을 건넜다.
  • 생활고에 찌든 「3·1」의 후예들/박현갑 사회부기자(현장)

    ◎“자부심 앞서 생계걱정이 더 절실” 일흔 두돌째 3·1절인 1일 하오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 광복아파트단지에서는 독립유공자 유가족들이 TV를 보며 쓸쓸한 하루를 보냈다. 12평자리 소형아파트단지인 이곳에는 가구마다 곳곳에 가난에 찌든 모습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유가족들에게는 이날이 어느 때보다도 자긍심을 가져봄직한 날이었는데도 그들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생계문제가 더욱 절박한 듯 했다. 『연탄가스 때문에 해마다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재작년에는 신혼부부가,작년에는 노부부가 가스중독으로 숨졌습니다』 일제치하에서 광복군 충청도 지역 책임자로 일하다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28살 젊디 젊은 나이에 감옥에서 세상을 떠난 장두환씨의 아들인 기년씨(76)는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가장 큰 소망은 연탄가스냄새가 없는 따뜻한 방에서 지내는 것』이라고 했다. 이곳에 아파트가 들어선 것은 지난 72년.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배려로 독립유공자와 6·25 참전용사 등에게 5백30가구가 분양됐다. 그때만 해도 꽤나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다보니 주거환경이 상대적으로 나빠져 한집두집 모두 떠나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독립유공자 유가족은 겨우 43가구 백여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정부의 배려로 집을 구하기는 했지만 한달에 20만∼30만원씩의 연금으로는 겨우겨우 생활을 꾸려가는데도 벅차 다른 집을 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아직까지 연탄가스에 시달리고 있다. 연탄가스 때문에 두번이나 병원신세를 졌다는 김봉영씨(72)는 『습기가 차거나 흐린날에는 늘 가스냄새를 맡으며 지내야 하고 밤9시가 넘으면 중독사고가 걱정이 돼 연탄을 갈 생각조차 못한다』고 했다. 이들이 겪는 어려움은 연탄가스 문제만이 아니다. 중국에서 광복군으로 군자금조달 등의 지하운동을 했던 고 길창일씨(71)의 미망인 최인숙씨(60)는 구들장이 내려앉아 전기담요로 겨울을 나고있다. 그렇지만 이들은 『다른 불편은 그런대로 참을수 있다』면서 『가장 무서운 것은 생명의 위협이 되는 가스중독』이라며 이것만이라도 고칠수 없겠느냐며 안타까워 한다. 『이웃에 있는 15층짜리 현대식아파트와 비교하면 우리 아파트는 정말 달동네』라는 것이 이들의 자조섞인 한탄이었다.
  • 투병 6·25 참전용사/노 대통령이 금일봉

    노태우 대통령은 2일 상오 서울 보훈병원에서 투병중인 한국동란 당시 베티고지 영웅인 김만술씨(60)에게 이상연 민정수석비서관을 보내 하사금을 전달하고 위로했다. 김씨는 53년7월 경기도 연천지방 베티고지에서 소대병력으로 중공군 2개 대대를 물리쳐 태극무공훈장을 받았으나 그후 척추부상으로 대위로 전역하여 치료해오다 최근 다시 악화되어 양다리 절단수술을 받고 입원 치료중이다.
  • 페만의 전쟁(사설)

    ◎인내와 자제로 슬기롭게 대처하자 전쟁은 마침내 터졌다. 흔히 석유전쟁으로 불리는 이번 전쟁은 아마도 금세기의 마지막 최대전쟁이나 가장 기이한 전쟁으로 기록될 것이다. 미영불 등 서방 강대국을 비롯,28개국의 연합군이 어떤 강대국의 후원이나 주변국가의 지원도 없는 중동의 한 소영웅주의자 사담 후세인을 응징하기 위해 바그다드에 대한 야간공습으로 큰 전쟁을 시작했다. 전력으로만 따진다면 전쟁은 얼마나 빨리,얼마나 적은 손상을 입고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이 이기며 그후 중동의 새 정치지도를 어떻게 만들어 세계가 중동 석유의 안정공급을 도모하고 앞으로 중동의 패권을 노리는 새로운 소영웅의 출현을 막느냐 하는데 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지난 80년 이란을 선제공격,8년간의 긴긴 소모전을 계속하면서 1인 체제를 강화해 왔고 지난해 8월 안보상의 위험 등 아무 명분도 없이 그냥 산유쿼 를 초과해 원유를 과잉생산해 왔다며 석유부국 쿠웨이트를 기습점령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후세인의 첫 오산은 미국이 감히 군사개입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았고 시리아 등 이웃 아랍국들이 반이라크 전선에 가담할 수 있으리라고는 예견치 못했다. 그가 그간 쿠웨이트 문제를 팔레스타인 문제와 연계해서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했으나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염두에 두고 행동개시를 한 것으로 믿는 아랍권의 지도자는 없다. 아랍권에 출현했던 지난날의 모든 영웅들이 그러했듯 코란을 높이 쳐들고 성전을 외치며 서방 이교도들을 분쇄해야 한다는 후세인의 주장이 아직은 이웃 아랍국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라크의 후세인이 아랍권의 패권을 장악하는데 대한 이웃들의 견제심리와 그에 대한 어떤 두려움 등이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의 아랍권 진입을 묵인하게 했다. 전쟁은 때로 위대한 전략가도 예상못한 상황이 벌어지는 수도 있다. 특히 아랍세계처럼 서구의 합리주의적 계산을 뛰어넘는 알라신을 섬기는 정신세계 속에서 예언자를 따라가는 그들의 행동양식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너무도 엄청난 전력차이를 보면서 우리는 후세인을 주축으로 한 이라크가 어느 정도,얼마나 오래 저항과 항전이 가능한가에만 생각이 미치고 있다. 이라크의 경제는 전적으로 수입의존 체제요,수입대금의 대부분을 원유수출로 얻어진 외화로 결제해 왔고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대단한 군수산업 체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그들의 저항은 코란의 정신력과 금지된 화학무기와 신경가스를 사용하는 방안,그리고 이스라엘을 공격,전쟁에 끌어들임으로써 서방의 기독교 세력과 아랍의 이슬람권간의 대결구도로 전쟁의 방향을 바꿔놓은 전략밖에 길이 없을 것같다. 중동 유전의 한가운데 성냥불을 그어들고 앉아있는 후세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것이 다국적 참전국들의 기본목표라면 미국은 그후 중동에서의 영향력 강화 등 21세기를 향한 원대한 세계전략 구도가 그 밑에 깔려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어찌보면 중동은 우리에게는 대단히 멀리 떨어져 있는 타국이면서도 바로 이웃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 이상으로 온 국민의 관심이 높다. 우리의 수입석유는 70%가 그곳에서 들어오고 건설·수출선 등으로 그간 아랍권과 맺어진 경제적 우대가 깊었던 점을 감안하면 그럴만도 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은 떨어져서 사태를 정관하는 균형감각과 냉정을 유지할 줄 아는 지혜를 보여야할 것으로 생각된다. 국가간의 이해는 냉정한 계산과 합리적인 접근,슬기로운 판단 등이 요구되며 지나침이나 부족함이 없는 적정한 수준의 대응이 정부나 국민 모두에게 절실히 필요한 시점임을 우리는 명심해야겠다. 물론 쿠웨이트와 이라크의 전화가 결코 대안의 불은 아니나 그렇다고 바로 우리 자신의 전쟁 또한 아닌 것이다. 우리가 외면할 수 있는 전쟁도 아니지만 우리 스스로의 전쟁인양 너무 흥분하고 덤비는 모습 또한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중동의 전화가 한반도에 어떻게 투영될 것인가 등 우리 자체 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히 검토해야 할 것이다. 교전중인 이라크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고 무기를 공급중인 유일한 지원국이 북한이라는 보도 또한 우리는 깊이 새겨봐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큰 전쟁의 발단이 된 한 중간형의 국가가 보다 작은 이웃국가를침공함으로써 비롯된 국지전이 지역평화는 물론 세계평화 기운마저 깨는 불행한 사태가 묵인되고 방치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 이 때문에 우리는 유엔의 기본입장에 호응,의료단을 보내 간접적으로 참전을 하고 있다. 무모한 침략행위는 응당 응징되어야 하고 힘에 밀려 주권을 빼앗겼던 국가는 다시 주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유엔의 결의에 우리는 뜻을 같이 한다. 그러나 한 통치권자의 정치적 모험주의에 희생당하는 많은 인명을 생각하며 전쟁의 조속한 종결을 우리는 고대한다. 이번 전쟁은 전쟁 당사자간의 현격한 국력과 전력의 차이,그리고 제3 강대국의 개입으로 인한 보다 큰 전쟁으로의 발전 가능성이 없는 만큼 전쟁의 장기화는 예상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라크가 호언했듯 뜻밖의 대단한 무기(핵)을 보유하고 또 사용을 위협하며 화학이나 생물학전 무기로 자살적인 공격을 하고 나서면 예상치 않은 사태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없지는 않다. 우리는 오늘의 페만전의 발발배경에 유의하면서 경제적인 손실을 최소화하도록 국민 각자가자제하면서 지난달 6·25의 참화와 제1·2차 오일쇼크를 극복했던 우리의 의지와 지혜를 되살려 이번의 고난을 재도약의 계기로 삼는 슬기로운 국민이 되어야겠다.
  • 군 의료단 페만행 안팎/김원홍 사회부차장(오늘의 눈)

    페르시아만의 긴장상태가 날이 갈수록 고조되고 있다. 이라크와 다국적 지원 지상군 1백50여만명이 대치하고 항공모함을 포함한 함정 2백여척,전투기 2천2백대 등 막강한 화력이 집중되고 있다. 군사전문가들은 현대전에서의 살상은 폭력이나 총상에 의한 부상이 아닌,화상이나 화생방전에 의해 파상풍으로 사망하는 율이 80% 이상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국군은 이번 파병으로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화생방 공격에 대비한 파상풍치료 등 현대전에 필요한 군의료기술을 이번기회에 선진국으로부터 많이 배워올 것으로 기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14일 사우디아라비아로 출국한 군조사단 26명도 화상치료제와 해독제 방독면 등 화학전대비 응급약품과 장비를 싣고 갔다. 또 지난달 하순 현지답사를 하고 돌아온 군의관에 따르면 병원시설이 최신식 3층 건물인데다 각종 의료기자재와 검사기구 등이 영·불·독의 최고급 고가제품이며 의약품도 최일류제품으로 산적해 있어 월남전때의 낡은 장비로 의료행위를 하던 군의관들에 비하면 호화환경이라는 것이다. 영관급장교가 사용할 개인아파트가 30∼50평 수준이며 사우디아라비아 군참모장은 취사병·당번병·운전병·행정병까지 모두 데리고 와 달라고 사정하는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사우디의 자국 의료진은 적정량의 10∼20% 밖에 되지 않아 국민 대다수가 의료시혜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부호들은 스위스나 영국·프랑스 등 선진국에서 치료를 받고 있어 이번 기회에 우리군의관의 우수성이 입증되면 이 지역에 진출할 민간인 의사 수요도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나라는 81년에 15개교에 불과하던 의과대학수가 90년에는 31개교로 2배 이상 늘고 해마다 2천9백여명의 의사가 배출되고 있으나 일부는 군의관으로 수용되지 못하고 무의촌에서 봉사활동을 펴고 있다. 지난 86년에는 의대 졸업생을 중동근로자들이 일하는 곳에 파견,병역의무를 면제해주는 방법도 연구된 적이 있었다. 더욱이 최근 우리 의학계는 심장수술이나 태내수술,시험관 아기,제3세대 항생제개발 등 눈부신 발전을 보여 세계의 주목을한몸에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하튼 2월 초순이면 사우디의 국경도시에 태극기와 적십자기가 게양된 한국야전 병원이 들어서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전상자들을 치료 하게 된다. 41년전 6·25동란때 스웨덴과 덴마크가 병원선을 파견해 준데 대해 우리는 이들을 참전국이라고 부르지 않으면서도 아직까지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있다. 이때문에 기자는 이번 우리 군의료진 파견이 전후에 민간의사의 해외진출기회로 연결되고 「고마운 한국인」이라는 좋은 인상에 세계인 모두에게 심어지기를 기대해본다.
  • 나병 퇴치연구 김도일씨

    사단법인 대한나관리협회 연구원장 김도일박사가 8일 상오2시27분 서울 풍납동 중앙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65세. 김박사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해군 군의관으로 6·25에 참전,공훈을 세웠으며 나병 퇴치 및 연구에 힘써 「한센씨병의 임상학 및 재활의학」 「나병 가이드」 등의 저서를 남겼다. 발인은 10일 상오8시,서울 중앙병원 영안실에서 있으며 장지는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이선리 가족묘지. 484­8899.
  • 북한,대미 관계개선에도 적극적/고위소식통

    ◎테러포기등 미 선결조건 수락 검토/「핵협정」엔 비공개대화 요구/워싱턴선 “참전용사 유해 송환이 우선” 북한은 최근 한소 수교와 관련,소련측의 자세를 비난하는 한편 일본에 이어 미국과도 관계정상화를 강력히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28일 알려졌다.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하기 위해 미국이 대북 관계개선의 선결조치로 요구하고 있는 국제테러행위 포기선언을 전향적으로 검토하고 있으며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안전협정 가입 문제에 대해서는 미·북한간 비공개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의 이같은 급격한 자세변화는 방북했던 일본의 가네마루(김환) 전 부총리 일행에게 오는 11월 일·북한 관계개선을 공식제의했던 사실과 함께 앞으로 동북아정세 변화와 관련,귀추가 주목된다. 정부의 한 고위소식통은 이날 『북한의 한 고위외교관이 소련과 북한과의 관계는 지난 2일 셰바르드나제 소 외무장관의 평양방문으로 사실상 끝났으며 따라서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개선이 불가피하다고 말한 것으로 안다』며 『이 외교관은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국제테러행위 포기선언은 할 수 있으나 핵안전협정 가입은 미국과의 비공개 대화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이 소식통은 『북한은 핵안전협정 가입 문제를 대미 관계개선의 협상카드로 활용하려는 것으로 보인다』며 『이에 대한 미측의 반응은 냉랭한 상태이기 때문에 미·북한간 급속한 관계진전은 예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소식통은 또 『미국은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해서 6·25 참전용사의 유해 송환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며 비공개대화는 불합리하다고 보고 있다』며 『핵안전협정 가입 문제는 북한이 자체적으로 해결돼야 할 문제이며 미국과 협의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 모범용사를 환영하며(사설)

    노병들이 전투복을 입고 서울의 도심지를 2㎞쯤 행진했다. 24일의 일이다. 국가 유공자,6·25참전 용사,월남귀순 용사,전쟁미망인 등 4천여명의 전흔의 당사자들이 묵묵히 걷는 모습은 색다른 무게를 주었다. 집단이기주의의 투쟁수단으로 수도 없이 거듭되는 시위를 보아온 시민들에게는 색다른 인상이었다. 그들이 전쟁을 몸으로 막아준 덕분에 우리는 살아남았고 오늘과 같은 영화를 누리게 된 것이다. 침략군 앞에서 국운이 경각에 이르러 한발을 바다에 담근 것 같은 형세에 몰렸을 때,낙동강물을 선지빛으로 물들이며 지켜준 「국군」덕에 조국은 회생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40년. 오늘의 우리 모습은 너무 당당하게 우뚝 섰다. 이런 형세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다. 40년전,우리를 그 무서운 악몽속에 몰아넣고 반세기가 가까워도 여전히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는 이 비극의 전쟁을,묵인하고 충동하고 지원했던 당사자 나라들이 손을 벌리며 교류하기를 자청해 오는 나라로 우리는 성장했다. 우리가 이렇게 되기까지 젊던 병사는 노병이,새 병사는 중견이,다시 젊은 병사가 뒤를 잇는 법통이 이어져 왔다. 모범적인 국군용사. 그분들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번영을 구가하며,어떻게 이 초라한 반도의 분단국이 최강대국을 불러들여 우리 문법으로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겠는가. 용사들을 믿고 그들에게 전선을 맡긴 것만으로 신뢰에 가득차서 산업을 발전시키고 고급두뇌를 양성하고 생산을 확대하고 문화예술을 부흥시키고,국위를 떨칠 수가 있었다. 국군용사들의 그같은 공훈을 우리는 잊지 못한다. 서울신문이 국군 모범용사내외를 초청하여 발전조국의 현장도 찾아보게 하고 위로와 격려의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도 그 공훈에 대한 깊은 표경이다. 표경과 관계없이 성스런 조국수호의 임무에 회의도 빈틈도 없는 것이 우리 국군용사들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에게,그들을 잊고 있지 않으며 앞으로도 잊지 않으리라는 다짐으로 서울신문은 이 연례행사를 갖고 있다. 여기 대표로 나온 용사들만 아니라 육해공군 3군에는 이런 군인들이 가득히 있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특히 우리의군은 본인이 원하고 원하지 않는 것과 상관없이 이 땅에 남아로 태어나면 누구나가 의무로 수행해야 하는 병역에 의해 구성된다. 그러므로 국민 모두는 군인들을 지금 가족으로 가졌거나 장차에 가족으로 지닐 것이거나,옛날에 이미 가졌었거나 하게 마련이다. 내자녀,내 동기간을 적앞에 불침번으로 세워놓고 일상을 편안하게 지내고 번영을 구가하며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너무 평안한 나머지 육친의 노고를 잠깐씩 잊기도 한다. 사치 낭비같은 어리석은 짓도 하고 타락도 한다. 그런 그들에게 우리의 동기간들이 겪는 시련을 다시 알리고 싶다. 말없이 맡겨진 일에만 신명을 다하는 국군의 그 면면히 이어온 정신은 언제라도 우리에겐 교훈이 된다. 나들이 나온 모범용사들의 건강한 정신이 후방의 다소 나태한 사람들에게도 자극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박동하는 조국의 심장소리를 듣고 돌아간 용사들이 그들이 느낀 조국의 빛나는 모습을 전해주면 위로와 격려가 될 것이다. 그걸 믿고 있다. 국군용사들의 나들이를 진심으로 환영한다.
  • “소­북한 군사동맹 재검토를”/모스크바 정치주간지 촉구논문 게재

    ◎평양의 대대적 인권침해 비판/“대한수교는 극동긴장 완화 효과” 【도쿄 연합】 소련 정치주간지 노보에 브레미야(신시대)는 23일 발매될 최신호에 북한에서는 『광범위한 인권침해가 행해지고 있어 현재의 소련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고 비판,북한과의 동맹관계를 재검토하도록 촉구하는 논문을 게재한다고 일본지지(시사)통신이 22일 모스크바발로 보도했다. 지지통신에 따르면 노보에 브레미야 편집원 레오니드 물레틴이 서명한 이 논문은 『한국과의 국교수립은 극동의 긴장구조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대한 국교수립을 제창하고 북한과의 동맹관계를 고집하는 소련 외무부의 자세도 비판하고 있다. 논문은 또 6·25때는 소련공군의 조종사가 참전,전사자가 나왔고 스탈린의 전후정책이 한반도 분단에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인정하는등 소련의 대한반도정책에 대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혁명적인 논조를 담고 있다. 논문은 국제사면위원회의 보고서를 인용,『북한에는 그라스노스티(공개성)가 전혀 없으며 다수의 강제수용소가 있어 정치범등 약 10만명이상이 수용돼 있다』고 소개하고 『우리는 이 자료를 믿는다』고 말했다. 논문은 이어 북한 실정을 있는 그대로 기사화했던 타스통신 평양주재 특파원이 최근 추방당했다고 밝히고 이 잡지 편집부에는 북한이 『루마니아의 교훈을 배우려하지 않고 있다』는 독자투고가 다수 배달되고 있다고 전했다. 논문은 또 북한과의 동맹관계가 거꾸로 극동의 냉전구조 유지에 기여하고 있다고 지적,군사동맹관계를 재검토하라고 촉구했다.
  • 외언내언

    저는 동작동 한 귀퉁이에 묻혀 있는 40년 전의 졸병입니다. 살아 있었다면 올해 환갑이겠군요. 어디다 누군한테 대고 말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 한마디 하고는 싶은 마음이네요. ◆조야의 모든 관심이 소련과 고르바초프라는 사람에게 쏠려 있군요. 며칠 전에 막을 내린 소련 상품 전시회에는 연1만여명 관람객이 다녀가고 계약고도 3천만달러에 이르렀다 합디다. 하기야 모스크바­서울 사이의 비행기 길이 트인지도 오래 됐지요. 하지만 너무 소련 소련하고 시끌벅적한 것을 보는 우리 동네 마음은 그렇게 편한 것만은 아니네요. 더구나 오늘은 현충일이라고 하는 날 아닙니까.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세월이 약』이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가 못하군요. 2년 전 영국 텔레비전이 방영한 다큐멘터리가 있었지요. 「한반도­알려지지 않은 전쟁」이라는 제목이었다고 기억되네요. 그 필름은 6·25때 소련 공군이 참전한 것을 「증명」했지요. 영국까지 들먹일 것 뭐 있나요? 지난해 가을에는 소련 국방성의 시도로프중장이 6·25 참전을 시인했잖습니까. 스탈린한테 결재 맡고 소련제 탱크 앞세워 쳐들어온 「북괴군」 모르는 사람 손들어 봅시다. 그러니 점령된 서울거리에 「조선인민의 친근한 벗 쓰딸린 대원수 만세」라는 현수막도 붙었던 거지요. ◆40년 세월이 무섭긴 하네요. 하기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에 따르자면 강산도 네번은 바뀌었겠지만요. 「국익」 때문에 이렇게 바뀐다고는 합시다. 그래도 그 40년전의 더운 여름날 소련제 탱크에 소련 조종사의 기총소사에 피 흘리며 죽은 우리 동네 젊음들을 잊어도 좋다고 할 수야 없겠지요. 안그런가요? 한소수교 열기속에서 맞는 오늘 현충일이 우리 동네 젊음들에게는 야릇해지는 마음이네요. ◆너무들 들뜨지는 말기 부탁합니다. 어제의 적을 오늘에 친구로 삼는 것 별로 반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평화의 날을 위한 초석이었다 하겠으니까요. 그러나 잊지는,잊지는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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