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6·25 참전
    2026-08-14
    검색기록 지우기
  • 충청 지역
    2026-08-14
    검색기록 지우기
  • 자원화
    2026-08-14
    검색기록 지우기
  • 스위스
    2026-08-14
    검색기록 지우기
  • 국문학
    2026-08-14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480
  • 고난을 체험하는 사랑의 실천/『6·25 음식먹기 운동』 벌인다

    ◎개신교 각 선교단테 20개 도시서… 15만 경찰 동참/꽁보리주먹밥·수제비 등 1천원씩 판매 개신교 각선교단체들이 오는 25일 6·25 43주년을 앞두고 고난의 체험을 통한 절제와 사랑의 실천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한다. 한사랑선교회(회장 김한식목사)가 주관하는 「6·25음식먹기운동」은 그 대표적인 것.네번째를 맞는 올해 행사는 21일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등 시내 3개대학에 「6·25음식판매대」를 설치,판매함으로써 본격적인 행사에 돌입한다. 오는 26일까지 계속될 이 행사는 전국 20여개 도시에서 일제히 거행된다.올해는 특히 15만 전국경찰이 동참키로 하고 노동부 전체 산하기관과 대한요식업중앙협의회등이 참여한다.또 전국교회가 20일 주일집회 후에 동참하며 각 직장의 구내식당,음식점,가정도 상당수가 참여,사상 최대규모가 될것으로 보인다. 6·25음식의 종류는 꽁보리주먹밥 수제비 개떡 깻묵 호박죽등이며 1인분에 1천원을 받는다.서울에서는 21∼22일 대학가 판매에 이어 23일부터 26일까지 서울역광장과 잠실롯데에서 대대적으로 펼쳐진다. 한사랑선교회측은 이 운동으로 모아진 수익금을 일차적으로는 그 단체나 교회가 자체적으로 가까이 있는 6·25참전용사나 불우이웃에 전달하는 것으로 하고 있다.그리고 자체 판매대운영에서 모아진 수익금과 운동본부로 전달돼온 수익금은 중앙차원에서 같은 용도로 쓸 계획이다.이에앞서 운동본부측은 17일 올림픽공원 문화회관에서 이 운동의 참가희망자들을 초청,6·25음식 시식회및 설명회를 갖기도 했다(문의 588­1733). 한편 한국이웃사랑회(회장 정해원)는 25∼26일 이틀간 「지구촌 기근퇴치를 위한 전국민 사랑의 굶기운동」을 벌인다.이 운동은 이날을 기해 전국민이 한끼이상씩 굶어 마련된 금식기금으로 우리주변의 결식아동과 아시아 아프리카등지의 기아문제 해결에 동참한다는 취지에서 전개된다(문의 704­9923). 한국이웃사랑회측은 또 이 운동의 일환으로 기독교방송과 함께 26일 하오7시30분 서울 등촌동 88체육관에서 사랑의 굶기운동 공개행사 선교뮤지컬 「지금 우리는」을 공연한다. 한사랑선교회 김한식목사는 이번 6·25고난체험행사에 전국민의 참여를 당부했다.『오늘날 우리의 시련은 감사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6·25당시 상황을 간접체험해보고 감사를 회복하자는 것이 이 운동의 취지입니다.자녀들에게도 훌륭한 교훈이 될것입니다』
  • 「홍도야 울지마라」 영화배경음악으로 쓰여 이채(북한이모저모)

    ◎6·25참전 퇴역군인 휴전40돌 앞두고 충성모임 ○“분위기에 맞는 노래” 평가 ○…최근 종영된 국내 모TV드라마에서 코믹하게 불려져 화제가 된 바 있는 노래 「홍도야 울지 마라」가 북한 최고 인기영화 「민족과 운명」에 삽입곡으로 쓰여져 화제. 평양서 발간되는 영화잡지 「조선영화」최근호에 의하면 이 노래는 지난해 11월 개봉된 「민족과 운명」(제8부)에서 주인공인 홍영자(오미란반)가 캐나다의 한 다방에 앉아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됐다는 것. 이 노래는 다방안의 분위기가 고조되는데 따라 더욱 강렬하게 울려 주인공의 심정을 자극함으로써 급기야 홍영자가 감정에 복받쳐 본인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데 이 대목을 놓고 북한영화평론계에서는 『장면의 극적 과제와 주인공의 심리,정황과 분위기에 맞게 노래를 잘 쓴 실례』라고 평하고 있다. 다부작 극영화 「민족과 운명」에서는 이 노래외에도 「아리랑」「낙화유수」「고향의 봄」「동무생각」등 우리의 귀에 익은 여러 노래들이 배경음악으로 쓰여졌으며 이와함께 조선민요·현대가요·외국음악 등도 다수 삽입돼 이 영화가 북한의 영화음악형상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고 「조선영화」지는 전언. ○“김 부자 결사보위” 다짐 ○…북한은 최근 「전승」(휴전)40주를 앞두고 각지서 6·25 참전 퇴역군인들의 「충성의 모임」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북한방송 보도를 종합한 바에 의하면 이같은 모임은 퇴역군인들이 지난달 발표된 당중앙위원회의 구호를 철저히 관철하여 6·25당시 발휘하던 투쟁정신과 기백으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맡은 바 책임을 다할 것을 다짐하기 위해 열리고 있는데 모임에서는 토론과 김일성·김정일부자에 대한 총성맹세,예술공연 등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임에 참석한 퇴역군인들은 토론을 통해 ▲「군·민일치운동」 ▲농촌지원사업 ▲건설현장에 노동력 동원 ▲거주지 마을 미화사업 등에 앞장설 것과 전쟁발발시 또다시 무기를 들고 김일성·김정일부자를 결사 옹호·보위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다짐하고 있다. 한편 북한은 지난달 평양서 전쟁참가자들의 경험담을 발표하는 설화경연모임을 가진 바 있다.
  • 수석비서관들에 「이해력」 밝혀 눈길

    ◎김 대통령,“군생리 누구보다 잘 안다”/“의원시절 절반 국방위원으로 활동”/절묘한 인사에 “비공식채널 보유” 추측도 ○“그건 날 모르는 소리” 김영삼대통령은 군정보를 어떻게 얻고 있고,얼마나 알고 있을까. 최근 단행된 전격적인 군수뇌인사의 정교성에 군내외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이런 가운데 김대통령이 27일 군에 대한 자신의 높은 이해력을 스스로 공개해 화제다. 김대통령은 이날 수석비서관들과 만난자리에서 『일부에서는 내가 군에대해서 잘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건 국회의원생활의 절반이상을 국방위원으로 보낸 걸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밝혔다.김대통령은 백선엽장군부터 시작해 6·25참전군인들의 이름을 열거해 보이면서 『군출신들보다 내가 군의 생리를 더 잘안다』고 말했다는 것. ○두 전 대통령 대위때 김대통령이 처음 국방위원이 되었을 때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들은 육군대위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이와관련,청와대의 한측근은 『김대통령과 두전임대통령의 이런 인연때문에 김대통령은 전임대통령들을 어렵지 않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즉 김대통령은 전임대통령들의 재임시에도 『내가 국방위원이었을 때 겨우 대위였던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깔려있었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측근의 이야기도 이를 뒷받침한다.『3당합당후 노태우 당시대통령과 김영삼대표는 현안이 있을 때마다 격렬히 부닥쳤다.대통령은 기본적으로 「대통령이 됐다고 재는 모양인데 웃긴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상대방에 대한 그런 관념이 격렬한 투쟁을 할 수 있었던 동력중의 하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고급장교 잦은 접촉 이측근은 『김대통령이 군의 고급장교들과 수십년을 부딪혀 왔기 때문에 누구보다 군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또 어디를 잡으면 되는 것인가를 잘안다』고 설명했다.때문에 어떤인사를 하면 군의 단결이 강화되고 군이 좋아하는 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일련의 군인사가 군내부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것도 특별한 정보가 있어서라기보다 군에 대한 높은 이해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고 있다. ○군내부에서도 지지 일련의 군수뇌인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군을 잘아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해군인사의 경우 청와대의 한고위관계자는 『해군내부에서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만세를 부르고 있다』고 말했다.오랜 국방위원으로서 갖게된 군에 대한 이해력만으로 이런 인사가 가능했을까. 이에대해 청와대의 다른 관계자들은 군내부에 대해 비공식 정보라인을 갖고 있지않겠느냐고 풀이했다.검찰에 대해 가차없는 숙정을 지시했던 것도 걸러지지 않은 정보의 유입채널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감각·결단력 큰 요인 실제 김대통령은 전임자들이 의존했던 기무사에 대해 큰 역할부여를 하지 않는 것 같다.사령관과의 독대도 눈에 띄지 않는다. 이경재청와대대변인은 『높은 이해력과 풍부한 정보탓도 있겠지만,그보다는 타이밍에 대한 감각과 결단력이 군인사의 점수를 높인 결정적 요인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 한·필리핀 정상회담 이모저모

    ◎양국 민주화 화제로 1시간여 대화/“개혁은 통일 활력소” 라모스 찬사 ○…25일저녁 청와대 본관 충무실에서 방한중인 피델 라모스 필리핀대통령을 위해 열린 「공식만찬」은 양국 경제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 김영삼대통령은 만찬사에서 라모스대통령에게 『6·25때 필리핀과 우방국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과 같은 한국의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의 실현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앞으로 우리 양국은 우호와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함으로써 21세기 아시아 태평양시대의 주역이 되도록 노력하자』고 강조. 라모스대통령도 답사를 통해 『우리 국민들은 한국과 한국민들을 보면서 우리도 빵과 자유를 함께 가질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우리가 발전을 위한 모형을 찾는 과정에서 한국민의 단결심,기업정신,근면성,창의력등 성공의 원동력에서 배울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됐다』고 답례. 라모스대통령은 김대통령집권이후 추진하고 있는 개혁정책에 찬사를 보낸뒤 자신의 개혁정책인 「필리핀 2천년」을 상세하게 설명. 이날 만찬에는 우리측에서 황인성총리,김덕주대법원장,이만섭국회의장등 3부요인과 여야대표,김선홍기아회장,이재준대림회장,김중원한일그룹회장,박종근노총위원장 등이 참석. ○…25일 청와대에서 열린 김영삼대통령과 피델 라모스 필리핀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은 단독회담과 정상회담 순으로 1시간 20분간 만족스런 분위기에서 진행. 김대통령은 단독회담에 들어가기에 앞서 비가 오는 날씨를 들어 『라모스 대통령께서 지난 52년 5월 한국전쟁에 참전하셨을 때도 많은 비가 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고 당시 육군소위로 참전했던 라모스대통령은 『그땐 비도 오고 몹시 추웠다』면서 『맑은 날씨와 비오는 날씨를 골고루 경험할 수 있게된 것은 김대통령이 변화와 개혁의 정책수행에 있어 절묘한 시기를 택하고 있는 것처럼 방한시기를 잘택해준 덕분이며 김대통령의 시기에 대한 감각은 탁월하다』고 언급. 단독회담에서 라모스대통령은 한국의 변화와 개혁이 궁극적으로 한반도통일에 큰 활력소가 될것이라면서 필리핀서도 방한직전에 경찰고위직 63명을 해직했다고 설명.김대통령은 단독회담에 이어 계속된 확대회담에서 회담결과를 보도진이 보는 앞에서 직접 설명하고 『필리핀은 86년 2월,한국은 금년 2월에 각각 문민정부가 출범했다는 점에서 양국은 서로 민주화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면서 양국간의 긴밀성을 강조.
  • 북한군부 원로는 누구인가

    ◎오진우/인민군 창건 주역… 20년간 군대부 군림/「빨치산」으로 김일성과 인연… 한때 숙청/최광/60년대 군외교전담한 대표적 강경파/김철만/백학림/김정일체제 구축한 소년유격대 출신 먼저 인민무력부장인 오진우(76·인민군원수).그는 당 정치국상무위원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을 겸직하고있는 권력서열 3위의 군부1인자.1917년생으로 함북 무산출생인 그는 만주 간도지방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33년부터 김일성을 따라 항일유격대 활동을 벌인 것으로 돼있다. 해방후 인민군창군에 관여했고 6·25때는 766유격부대장으로 참전했다.전후 군단장 공군참모장을 거쳐 60년대 서열 24위의 노동당중앙위원이 됐다.그는 69년 김일성이 당시 민족보위상이던 김창봉등 10여명의 빨치산파 장성들을 제거할때 앞장서 그공로로 같은해 2월 군총참모장에 올랐다.그후 76년 인민부력부장에 발탁됐고 이때부터 20년 넘게 군대부로서의 지위를 지켜왔다. 그 다음은 현 군총참모장 최광(인민군차수).권력서열 8위인 그는 오와 동갑내기로 역시 함북에서 태어났다.간도 용정의 대성중학교를 중퇴한 그는 35년경부터 빨치산에 가담한 이래 소련도피시절까지 김일성과 함께 움직였다.인민군창설때 제1사단장에 임명됐으며 일찍이 63년 총참모장에 오르는등 박성철이나 오진우보다 진급이 빨랐으나 69년 군부숙청때 군부내 반당음모를 제때 보고하지않았다는 이유로 탄광노동자로 쫓겨났다. 그러나 최는 이시절 모범적인 행동과 충성심을 과시,10년만인 77년 황남도 인민위원장에 기용됨으로써 권력일선에 복귀했다.그후 80년 당 정치국후보위원에 복귀한 그는 88년 김정일세대의 군부내 선두주자인 오극렬을 제치고 군총참모장에 재기용 됐다. 최와 함께 90년 권력서열 19위의 정치국 후보위원과 국방위원으로 10년여만에 권력무대에 복귀한 김철만역시 이른바 항일유격대출신으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항일빨치산 출신인 그는 67년 부참모장에 기용된 이래 군사대표단으로 활발한 대외활동을 펼쳤으나 80년이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었다. 1918년생으로 추정되는 그는 보기드문 남한출신으로 3·1운동무렵 만주로 온가족이 이주,만주에서유격활동을 펼치다 46년 뒤늦게 입북해 군사령부의 작전군관으로 군경력을 시작했다.6·25때는 민족보위성 작전참모를 지냈으며 65년 중장으로 제2군단장을 거쳤다. 오진우 최광과 함께 대표적 강경파로 꼽히는 김철만이 90년 재기용되자 당시 혁명1세대들이 여전히 북한통치권력의 핵심실세가 아니냐는 관측을 낳았었다. 노동당 중앙위원겸 중앙군사위원이며 인민군차수로 치안과 대민사찰기구인 사회안전부 총수인 백학림(72)역시 이들 3인보다 연배는 다소 낮지만 대표적인 빨치산출신.그는 국방위 위원인 이을설(호위총국장·차수) 주도일(평양방어사령관·차수)당 중앙위군사위원인 이두익(차수)등과 함께 10대중반부터 이른바 소년유격대원으로 김일성을 따라다니며 항일빨치산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백은 6·25때 연대장으로 참전한후 민족보위성 정치안전국장·안전호위처 사령관등 전형적인 정치군인의 길을 밟아 85년 사회안전부장에 발탁돼 김정일체제구축에 앞장서왔다. 이들에 이어 북한군부의 핵심에 접근하고 있는 인물들은 전총참모장오극렬(인민군대장)을 필두로 김두남당중앙군사위원 김강환중장 최상욱중장 이봉원인민군대장 이하일당군사부장등 혁명2세대.이들은 한결같이 만경대혁명학원과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왔으며 군내 김정일친위그룹을 이루고있는 것으로 알려지고있다. 이중 김일성의 옛 전우 오중흡의 아들이라는 오극렬은 김정일의 오른팔로 알려진 대표적인 차세대 선두주자.1931년생인 그는 64년 소장,71년 공군사령관을 거쳐 79년 총참모장과 당 정치국후보위원이 되는 초고속승진을 거듭하면서 군부내 김정일세력구축에 앞장서왔다.
  • 6·25참전 퇴역군인 노력동원(북한 이모저모)

    ◎「4월의 봄 예술축전」 곧 개막 ○노동자 160차례 방문 격려 ○…북한은 최근 새세대의 김일성·김정일 부자에 대한 충성심제고 및애국심 고양과 노동의욕 고취를 위해 6·25참전 퇴역군인들을 으로 경제건설 현장에 집중 동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평양 방송은 1일 『혁명 2세대들인 전쟁참가자 노병들이 혁명3,4세대들에게 당과 수령,조국과 인민을 위해 어떻게 살며 일해야 하는가 하는 뜨거운 마음을 심어주고 있으며 김일성의 명령에 따라 사회주의 대건설장에 대한 노력지원사업을 성심성의껏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6·25참전 퇴역군인들의 이같은 노력지원사업은 북한이 지난해부터 표방하고 있는 는 차원에서 추진되고있는데 최근 몇달 동안에만도 이들은 평양에 건설중인 과 조각군상 건립공사현장을 1백60여차례 찾아가 노력지원과 건설자들의 사기진작에 힘쓰고 있다고이 방송은 전했다. ○연구토론회 잇달아 개최 ○…북한은 지난달 31일 김정일이 「근로자」지 3월호에 기고한 「담화」를 주제로 한 연구토론회와 김정일이 지난 73년에 발표했다는 「영화예술론」에 대한 연구토론회를 잇달아 개최,김정일의 지도자적 이미지와 「업적」을 부각 선전했다. 북한은 이날 부주석 박성철,당비서 윤기복 등이 참석한 가운데 김정일의 「담화」(사회주의에 대한 훼방은 허용할 수 없다)를 주제로 한 중앙연구토론회를 개최,김정일의 이 「노작」이 「원수들의 반사회주의적 책동을 짓부수고 사회주의위업을 옹호·고수하고 완성하는 참된 길을 밝힌 강령적 문헌」이라면서 김정일이 새로운 「사회주의 투쟁」을 개척해 나가고 있는데 대해 찬양한 것으로 중앙방송이 31일 보도했다. ○음악·무용·기악 등 다채 ○…북한이 김일성의 생일을 기념,연례적으로 개최하는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제11회)이 곧 평양에서 개막된다고 중앙방송이 보도했다. 이번 행사에는 세계적인 유명 예술인들이 참가,음악무용부문과 교예(서커스)부문으로 나뉘어 음악·무용·기악·교예 등 다채로운 종목에 걸친 경연을 벌이게 된다고 이방송은 전했다.
  • 6·25때 부상 70대/후유증 비관 자살

    30일 하오5시45분쯤 서울 용산구 이태원2동 384 전효근씨(71)집 안방에서 전씨가 목을 매 숨져있는 것을 부인 정화자씨(55·청소원)가 발견했다. 정씨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보니 남편이 안방벽 2.5m 높이에 박힌 못에 나일론끈을 걸고 목을 매 숨져있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전씨가 6·25때 육군중사로 참전했다가 왼쪽다리에 총상을 입은뒤 10여년전부터 후유증을 앓아오면서 평소 죽고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는 가족들의 말에 따라 이를 비관,자살한 것으로 보고 있다.
  • 참전군인지원기금 6백억 조성/각의 법안 의결

    ◎내년부너 72만명 복지혜택 6·25참전 사병·경찰및 월남전 참전자에 대한 명예선양과 복리증진을 위한 사업이 내년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국무회의는 4일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참전군인등 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의결하고 이를위해 정부출연금등을 재원으로 하는 최소 6백억원의 참전군인지원기금을 조성키로 했다. 이에따라 보훈처는 72만여명으로 추산되는 연령별·분야별 대상자 분류작업을 올연말까지 마무리지을 계획이며 기금의 운용·관리및 사업은 법인 또는 단체가 하도록 준비할 방침이다. 보훈처는 6·25참전 사병에 대한 기준을 「전투에 1년 이상 참전한 자로서 3년이상 복무하고,중사(당시 이등상사)이상으로 전역한 자」로 했다. 보훈처는 또 참전군인지원기금이 조성된다해도 대상자들에게 기본연금을 지급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고 이를 바탕으로 조형물·기장제작배포등 명예선양사업에 치중할 방침이며 규모가 확장되는대로 고령자등에 대한 일부 생계지원방안을 검토키로 했다.
  • 6·25가 남긴 교훈/최갑석 재향군인회 중앙이사(굄돌)

    3년 1개월간 계속된 6·25동란의 참전자의 한사람으로서 나는 이 전쟁이 남긴 세가지 교훈을 후배들에게 꼭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첫째 창군한지 불과 2년밖에 안되는 소수 국군의 초인적인 투지였다.개전 초기의 국군의 장비는 전차·전투기·군함 한척 없는 참으로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게다가 동원할 예비군도 없고 축성진지도 없고 지휘 통신체제도 갖추지 못한 유아기의 군대였다.이에 비해 공산군은 중국과 소련에서 전투경험을 가진 베테랑 장병들이며 화력은 3대1,인원은 5대1의 비율로 국군에 비해 우월했다. 그러나 국군은 3개월간을 버티면서 낙동강 방어선을 지켰다. 둘째는 전국민적인 참전의식이다.낙동강 최후방어선에서 학도병 20만명,청소년 1백50만명,노무자 40만명등 2백만명이 참전했다.이들은 군번도 계급도 훈장도 보상도 없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자진해서 총·칼을 들고 전선에 달려온 애국자들이었다.이는 국난극복을 위한 위대한 총력전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셋째는 우리국군은 중공군의 대포위망속에서도 결코 소대이상 집단투항한 일이 없었다.북한군은 부대단위로 집단투항한 결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13만명이나 수용되어 있었는데 국군의 포로는 낙오병들이 중심이 되어 1만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1·2차 대전기간동안 독일과 이탈리아·소련군·일본군·영국군이 사령관이 항복문서에 서명,집단적으로 2만∼3만명씩 포로가 되었으나 우리군은 장교가 항복문서에 서명한 기록이 없다. 이렇듯 우리 국군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조국과 민족을 지키기 위해 호국정신으로 싸웠다.지휘관이 전사하고 부대가 궤멸되어도 상부의 명령없이도 개별적으로도 용감하게 싸우는 병사들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찾아보기 힘들다.국군의 감투정신은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 건립중인 전쟁기념관에도 이런 정신적인 사료들을 잘 보존하고 홍보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혈혈단신으로 참전했던 용사들은 죽어서는 국립묘지에 안장됨으로써 호국영령으로 국민의 참배로 승화됨이 마땅하다 하겠다.
  • 사실 바로 전하기/최갑석 재향군인회 중앙이사(굄돌)

    강원도 철원군 문혜리에서 북쪽으로 가면 한탄강이 나온다. 한강이나 낙동강처럼 수량이 많고 강이 크지는 않지만 군사전략적으로는 중부전선의 극히 중요한 지점으로 6·25동란당시 여러번 주인이 바뀐곳이다. 10m가 넘는 절벽밑에 자갈로 된 강바닥위로 맑은 물이 흐르는 이곳은 여름철에는 많은 피서객들이 모이기도한다. 한탄강위의 다리 이름이 한글로 「승일교」라고 씌어있다. 언제부터인가 이 고장 주민들과 이곳에 주둔해 있는 군 부대장병들은 「승일교」를 6·25당시 격전지이며 북한의 김일성이 반쯤 놓은 다리를 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면서 이승만대통령이 완성을 한 다리로 이때문에 다리이름도 「승일교」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의기양양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6·25당시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던 21연대장인 박승일대령이 북한군을 맞아 장렬히 전사한 것을 기념하기위해 「박승일교」라고 명명했던것이 다리의 보수과정에서 박이라는 글자가 빠져버리고 「승일교」라고만되어 이야기를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꾸며낸 말이다. 70년대 육군오뚝이부대장으로 이 지역에서 사단장을 하던 필자는 6·25에 참전했던 군단장들과 함께 승일교의 참된 유래를 장병들에게 누누이 설명한바 있었다. 20년이 지난 지난여름 이곳으로 피서를 갔던 필자는 이 지역 장병들과 주민들이 아직도 「승일교」를 이승만대통령과 김일성의 합작품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우리 군대의 전사와 지형지물에 얽힌 향토사가 왜곡되고 있는 사실을 보고 부끄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개인이나 부대 또는 고장의 역사는 당시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기록함으로써만 사료로 존재하게 된다. 오뚝이부대장 당시 필자는 작전책임지역내의 지형 지물을 연구하며 산과 강,부락과 사찰,교량과 도로등을 샅샅이 답사하면서 유사시 작전계획을 수립했었다. 우리 주변에 더 이상의 망발은 없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하겠다.
  • 닭띠 부자 황상구­선욱씨의 계유년 소망

    ◎“닭이 아침열듯 모두 새 출발을”/가족들 모두가 부지런하고 심성고와/“마음의 벽 활짝 열고 믿음사회 됐으면” 『새벽을 알리는 닭의 홰치는 모습처럼 새해에는 모두가 힘차게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해 첫 새벽에 계유년(계유년)을 알리는 닭울음소리가 유난히 우렁차게 들린다. 늘상 한해가 가고 새해를 맞을 때마다 새로운 각오와 희망을 다짐해보지만 닭의 해를 맞는 황상구씨(59·경기도 고양시 토당동 297의4)와 아들 선욱씨(35)부자의 느낌은 남다르다. 황씨 부자는 각각 33년생과 57년생으로 「닭띠 부자」.아버지 황씨에게는 올해가 5번째 맞이하는 환갑 닭띠 해가 된다. 비록 세대가 다른 부자지간으로서 맞는 닭의 해이긴 하지만 이들 부자의 마음은 새해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부풀어 있다. 『지난 한해는 두차례의 큰 선거와 크고작은 일들이 끊이지 않아 모두가 어수선하게 보냈지만 새해에는 닭이 아침을 열듯 모두들 새출발하는 기분으로 맞이하면 모든 일이 잘되리라 믿습니다』 고향인 경기도 고양시에서 6대째 살고있는 황씨 부자는 지금도 한집에 3세대가 사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가족들이 하나같이 부지런하고 심성이 고운탓에 마을에서도 화목한 가정으로 소문이 자자한 것을 큰 보람으로 여기는 아버지 황씨는 평생을 근면과 성실로 살아왔다. 『집안에 닭띠가 두명이라서 그런지 가족들이 모두 부지런합니다.직장이 서울인 아이들도 지금껏 이사가자는 말 한번없이 새벽 닭울음소리와 함께 일어나 출근할 정도로 성실합니다』 현재 경기 화훼농협 전무로 일하는 아버지 황씨는 6·25때는 당시 북한지역 설악산에서 유격대하사관으로 전투에 참가했던 참전용사이기도 하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의 포로가 돼 3년 가까이 포로생활을 하기도 했던 황씨는 지난 56년 군에서 제대한뒤 곧바로 고향인 고양시에서 단위 지도농협을 설립,89년7월 정년퇴직할 때까지 30여년동안을 농협에 몸담아온 농협인이다. 직장을 그만둔 뒤에도 자신이 해온 농협일에서 손을 떼고 싶지않아 마을에서 멀지않은 화훼농협에서 꽃가꾸기에 열성을 다하고 있는황씨는 『꽃을 가꾸는 마음처럼 다른 사람을 대할때도 정성과 온화함을 잃지 않으면 서로의 벽을 허물수 있을것』이라며 늘 가족들에게 충고하기를 잊지않는다. 새해들어서도 변함없이 꽃을 돌보는 황씨는 『흔히들 닭은 모든 동물가운데 가장 부지런하고 사람과 가까운 영물이며 어김없이 아침을 알리는 믿음의 상징이라고 일컬어진다』면서 『새해에는 모든 사람들도 믿음과 신뢰와 성실을 되찾아 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을 합쳐 노력했으면 좋겠다』고 새해 희망을 밝히며 환하게 웃었다. 건설공제조합 전산부에 근무하는 아들 선욱씨도 『새해에는 모든 일이 잘될것 같다』는 기대와 함께 『낡고 그릇된 모든 과거의 잘못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건강한 사회·잘사는 사회가 이뤄져 신바람나는 사회가 반드시 올것으로 기대한다』며 올 한해의 포부를 털어놓았다. 『지난 45년 일제가 망하고 우리나라가 해방될때 맞았던 해가 바로 닭의 해였습니다.올해 역시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좋은 일·즐걸운 일이 많이 일어날 것같은 기분입니다』 이들 부자의 바람에 답하는 새해 아침의 하늘은 유난히 맑아보였다.
  • 일 헌법 개정특위/민사당 내년 설치

    【도쿄 연합】 일본 민사당은 해석상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현행 일본 헌법 9조(전쟁의 방기·군비및 교전권의 부인)의 개정 문제를 내년부터 특별위원회를 설치,본격적으로 검토하기로 했다. 민사당은 17일 민사당 지원 노조및 학자들로 구성된 「민사당을 말하는 회」로부터 『일본일본의 집단 자위권행사는 현행 헌법상의 해석으로도 가능하며 현행 헌법하에서 유엔군을 비롯한 6·25 동란때 유엔군이 참전했던 것과 같은 형태의 전쟁에도 자위대가 참여할 수 있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건의안을 제출받고 이같은 방침을 결정했다.
  • 해운부문/안상만씨/등대지기 35년… 선박안전의 길잡이(본상)

    6·25참전용사로 57년 포항해운국 장기갑등대를 첫근무지로 35년동안 망망대해 등대지기로 선박의 안전운항의 길잡이로 일해왔다. 동해의 장기갑등대 속초등대에서 근무할 당시 6·25전쟁으로 손상을 입은 발동발전기와 공기압축기등을 수리하여 기능유지보수에 만전을 기했다. 울릉도등대 근무시에는 등대불을 회전시키는 모터가 고장이 났으나 13일간 밤을 세우며 등명기를 회전시켜 성어기에 조업하는 많은 어선들의 안전조업에 크게 기여했다. 농무가 발생하거나 신호기가 고장나면 꽹과리와 징을 쳐서 좌초사고를 막았다.
  •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관 개관/복원사업 일환… 내일 문열어

    ◎비극의 역사 산교육장으로 전후세대들의 산교육장이 될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관이 경남 거제군 신현읍 고현리에 건립돼 11월1일 문을 연다. 6·25의 참상과 수용소내에서의 처절했던 반공·친공세력간 사상전의 실상을 한눈에 알아볼수 있게 온갖 자료가 갖추어진 이 유적관은 거제군이 지난해 5월 마련한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지 복원계획에 따라 제1차사업으로 추진돼 1년반만에 결실을 본 것이다. 군은 오는 97년까지 모두 51억여원을 들여 나머지 복원사업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거제포로수용소가 설치된 것은 지난 50년 11월27일. 중공군이 참전한뒤 51년 6월부터는 인민군 15만명,중공군 2만명,의용군및 여자포로 3천명등 무려 17만3천명이 수용돼 53년 7월27일 휴전때까지 끊임없는 난동·폭동이 일어났다. 특히 반공포로와 친공포로사이에 전개된 사상전은 살육전으로까지 번져 수많은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 53년 7월27일 휴전협정에 따른 포로교환으로 수용소는 폐쇄되고 55년 봄부터 주민들이 되돌아와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이같은 역사의 현장은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형태를 잃었던 것이다. 뒤늦게나마 거제군은 포로수용소가 지닌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당시의 사령관 숙소·포로영창·헌병대 막사·무도장·PX 등 주요건물 15동과 천막막사 20개동을 복원하고 기념관과 기념탑·유적관을 건립하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이번에 우선 개관된 50평규모의 유적관에는 포로들이 사용했던 식기류와 친공포로들이 폭동을 일으킬 때 무장했던 죽창·목총·삼지창·철조망·곤봉 등 사제무기류 및 인공기·소련기·중공기·기록사진 등 2백여점이 전시돼 당시 수용소내의 처절했던 실상을 엿볼 수 있게 했다. 전시된 자료가운데 인공기를 비롯한 깃발들이 군용 속옷을 찢어 이어붙인 흰색 광목천에 머큐롬 등으로 비교적 정교하게 그려져 있어 지독했던 이념투쟁의 단면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한편 거제군은 유적관 개관을 계기로 국방부와 주한미군 등에 관련 자료제공을 요청하는 한편,반공포로로 석방됐던 인사들을 상대로 새로운 자료수집에 나서기로 했다. 양정식 거제군수는 『거제포로수용소와 복원사업이 마무리되면 전후세대에게 6·25의 참상을 생생하게 알리는 산교육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6·25참전사과 뜻 없다”/장 주한중국대사,종전입장 재확인

    장정연 주한중국대사는 16일 『지난 9일 외무부 출입기자들과의 회견때의 발언을 번복할 생각이 없다』고 밝힘으로써 중국은 한중수교교섭과정에서 6·25참전과 관련,유감을 표명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뜻이 없음을 재차 확인했다. 장대사는 이날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신문편집인협회주최 금요조찬대화에 참석,이같이 밝히고 『우리는 당시 사정이 있어 부득이 참전했으며 우리 국민도 피해를 입었다』고 말했다. 장대사는 지난 9일 부임후 처음으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중국은 한중수교교섭과정에서 6·25참전과 관련해 유감을 표시한 적이 없으며 또 그럴만한 이유도 없다』고 말해 수교교섭과정에서 중국이 유감을 표시했다는 우리 외무부의 발표를 정면으로 부인했었다. 장대사는 또 6·25의 발발원인에 대해 『조선전쟁에 관한 우리의 입장은 명확하며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중국이 아직도 북한이 주장하는 북침설에 동조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 외신내신

    미그29전투기.구소련제 「하늘의 검은 무법자」이다.우리 국방부 정책의지대로라면 이 미그기를 포함한 러시아 무기가 수입된다.적성무기체계분석및 전술개발차원의 무기구매라는 설명이다.◆미그기의 원조를 구태여 들추자면 소련제 야크기가 될 것이다.최근들어 속속 밝혀지고 있지만 6·25한국전때 소련은 그들 공군 조종사에게 북한군복이나 중공군옷을 입혀 참전했다.전쟁초기 한반도상공에는 북측의 야크 전투기와 우리측 미제 무스탕전투기의 공중전이 빈번했다.서울사람들은 지상에서 이 하늘의 미소대결을 올려다보며 어이없게도 그들의 「묘기」에 탄성을 올렸다.◆무스탕이 흔히 쌕쌕이로 불리던 제트전투기로 바뀐 것도 전쟁중이었다.아득한 하늘을 물찬제비처럼 누비며 직선 사선으로 뿜어내는 비행운에 사람들은 신비로움마저 느끼면서 『이제 곧 우리가 이기고 전쟁은 끝난다』고 자신했다.한반도의 제공권을 완전 장악한 제트 전투기에 눌려 야크기들은 얼씬도 하지 못했다.◆한소수교몇년전 그러니까 87년만 해도 미그 전투기는 북한상공을 초계하며소·북한합동 지·해·공연습작전을 엄호했고 때로는 휴전선까지 아슬아슬하게 공중 근접도 했다.남포상공으로 빠져 동해하늘을 누비다가는 남중국해 상공을 흘러 베트남에 착륙하는 위협비행도 서슴지 않았다.여기에 맞선것이 미제 F4·F16등 팬텀전투기.미그와 팬텀의 대치가 된 것이다.◆무기에는 국경이 없다.과거 미소강국처럼 국제적 지역분쟁에 휘말려 참전했을때 자국이 수출한 무기에 스스로 빠져드는 그런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무기의 부메랑효과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그래서 오늘날 국제무기상은 현대판 모순의 실천자들이다.『이 칼은 어떤 방패도 뚫는다』,『이 방패는 어떤 칼도 막는다』.시대는 바뀌어 이제 다시 한반도 상공에 미그와 팬텀 그리고 또 다른 차세대전투기가 나란히 시험훈련비행에 나서게 된다.오늘의 안팎세상이 이러한 것이다.
  • 휴전선과 정계비/노주석 문화부기자(오늘의 눈)

    우리는 곧잘 휴전선을 국경선으로 착각한다.그것은 남북분단의 현실을 숙명처럼 받아들인데서 비롯된 혼돈일 수도 있다.휴전선이 바라 보이는 전망대에 가본 사람이면 실상 국경선이상으로 긴장하기 일쑤다. 그러나 우리의 국경선은 휴전선 저 멀리 북쪽에 있다.오늘날 북방외교의 소산으로 수교국이 된 중국과 러시아에걸친 경계가 국경선인 것이다.소위 영토한계선으로서의 이들 국경선에는 실제대한민국의 통치권이 미치지는 못한다.지금 당장은 그렇다하더라도 언젠가는 관심을 가져야할 우리의 진짜 국경선이다. 그 국경선 가운데 중국과의 국경선 논의가 공식화한 것은 1712년의 일이다.당시 청의 목극등일행이 책임있는 조선관리가 불참한 가운데 세운 백두산정계비가 그것이다.그 뒤 1886년 조선은 이 경계비문에 적힌 「동위토문」의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해석하려는 청의 오류를 지적한바 있다.학계는 그동안의 연구실적을 통해 토문강은 명백하게 중국 송화강의 지류로 밝힌다.이경우 우리의 영토는 중국동북3성일대를 포함하게 된다.그러나 당시 몇차례의 담판은 성과없이 곧 열강의 대립속에 휘말려 버렸다. 올해는 그 백두산정계비를 세운지 2백80년이 되는 해다.더 늦기전에 역사·지리적 배경이나 문헌사료를 근거로한 영토연구문제가 절실한 시기이다.이는 우리가 통일주체가 되었을 때를 대비한 장차의 외교상 자료정립이라는 뜻도 있다.영토의 영유권주장에서는 가끔얼토당토 않은 사례가 나타난다.우리땅독도를 걸핏하면 자국의 도서로 주장하는 일본의 시비따위가 아닌가 한다.한국에 부임한 장정연주한중국대사의 최근 기자회견을 들어보면 이러한 일련의 문제들은 더욱 시급하다는 생각이 든다.『6·25와 관련해 중국은 한국에 유감을 표시할 필요도 없다』는 그의 말.불과 50여년전에 자신들이 참전한 대전란의 비극과 그로 말미암은 국경선아닌 국경선을 까맣게 잊어버리고있다. 정치적 망각인지도 모른다.그의 의도된 한마디는 중국이 직접 개입했던 6·25와 휴전선,2백80년전에 중국이 일방적으로 표시한 정계비를 오버랩시킨다.역사의 아이러니를 다시금 일깨워 주는 대목들이라 할 수 있다.
  • “한·중 항공협정 곧 체결/6·25참전 유감표시 없었다”

    ◎장정정 중국대사 장정정 초대 주한중국대사는 9일 『중국은 한중수교교섭 과정에서 6·25 참전과 관련해 유감을 표시한 적이 없으며 또 그럴만한 이유도 없다』고 말했다. 장대사는 이날 지난 9월12일 부임후 처음으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말해 수교교섭석상에서 중국측이 유감을 표시했다는 우리 외무부의 발표를 정면 부인했다. 장대사는 양국간 항공회담의 마지막 쟁점으로 남아있는 관제이양점과 관련,『중국은 동경 1백25도를 고수하고 있으나 다른 의견이 있으면 이를 고려할 수도 있다』고 말해 오는 11월초 서울에서 열리는 제2차회담에서 협정이 체결될 수 있을 것임을 시사했다. 장대사는 한국내 대만정부소유 재산처리에 관해 『공공재산은 모두 중국정부에 완벽하게 반환돼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확고부동한 원칙』이라고 못박고 『이에따라 한중양국은 명동의 대사관 부지및 건물과 부산의 영사관을 중국에 반환한다는데 합의했으며 연희동의 화교학교등도 이같은 원칙에 따라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89년부터 3차례에 걸쳐 모두 15년간 북한에서 근무했던 장대사는 남북한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제도상의 큰 차이점을 갖고 있다』면서 『북한은 경제건설에 곤란을 겪고 있으나 이를 극복하면 좋은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대사는 김일성의 11월초 방중설에 대해 『아직 통보받은 바 없다』고 말하고 동북아 다자간안보협력체 구상에 관해서는 『중국은 경제·정치등 모든 면에서 쌍무관계를 위주로 한 발전을 희망한다』고 말했다.
  • 남북화해·협력의 기틀 마련/정원식내각 16개월 결산

    ◎시위·노동쟁의 해소… 사회안정 공헌/새질서운동 등 벌여 경제회복 기여 8일 하오 총리이임식을 마치고 정부종합청사9층 총리집무실에 마지막으로 들른 정원식전국무총리는 1년4개월동안 자신의 체취가 흠뻑 밴 집무실 창옆에 서서 깊은 감회에 잠겼다. 이제 궤도를 잡기 시작한 남북대화·학원및 노사문제를 포함한 사회안정·교육문제·환경문제 등 재임기간동안 그가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갖가지 시책이 한꺼번에 뇌리를 스치는 듯 했다. 국무총리라는 막중한 직무를 맡아 「6공 최고의 총리」로 평가받기도 한 「교육자 정원식」은 조용히 물러났다. 총리실을 비롯한 관가에서는 그의 재임기간중 큰 업적으로 단연 사회안정과 남북대화를 꼽는다. 정전총리가 취임한 지난해 5월은 강경대군 치사사건이후 계속된 시위정국과 노동쟁의가 겹쳐 사회가 극도의 혼란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는 학원과 산업안정을 포함,사회전체의 안정을 되찾는데 국정운영의 역점을 두겠다고 천명하며 의욕을 보였다.그러나 취임 열흘만인 6월3일 외국어대 교육대학원에서 마지막 강의를 마치고 나오다 학생 2백여명에게 둘러싸여 계란과 밀가루세례를 받고 폭행당하는 봉변을 겪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판단은 준엄하고 현명했다.총리이전에 한 교수로서 맡았던 강의를 책임지기 위해 종강을 하고 나오는 스승을 끌고 다니며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는 것은 세계 어느 문명국가에도 없는 개탄스런 일이라고 국민들은 한결같이 꾸짖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각종 불법시위와 폭력에 대한 국민의 시선이 따가워지자 학생시위의 참가자수가 격감하는 등 학생과 재야의 시위가 한풀 꺾이고 사회도 점차 안정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정전총리는 우선 남북관계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4차회담에서 8차회담까지 5차례의 남북고위급회담을 통해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및 교류협력에 관한 기본합의서를 발효시키고 이를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부속합의서까지 발효시켰다. 정전총리는 분야별 부속합의서채택에 최대의 장애로 제기된 북한의 한미방위조약폐기·국가보안법철폐주장등을 철회시키는 협상의 노련함도 발휘했다. 이로써 남북간 화해및 교류협력이 실천단계에 접어들게 되어 정치·군사교류협력분과위등 협의기구와 군사공동위등 5개 실천기구를 남북이 구성,현안을 논의하게 됐고 남북공식연락창구로 남북연락사무소가 설치됐다. 정전총리는 재임기간중 「남북화해와 협력의 기틀마련」이란 위업을 해낸 것이다. 이와관련,학도병의 한사람으로 6·25에 참전했던 정전총리는 『남북관계의 새로운 돌파에 기여한 것을 보람으로 느끼며 부속합의서 발효까지의 성과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회담이 계속 진행돼야 전쟁재발을 막을 수있다』며 지속적인 회담을 강조했다. 그러나 황해도 재령출신으로 실향민인 그는 남북한 이산가족의 고향방문을 성사시키지 못한 것을 가슴아파하며 후임총리가 꼭 이 일을 성사시켜주길 바라고 있다. 그는 총리취임전 문교부장관으로 2년간 재임한 경력을 바탕으로 취임당시부터 국정관리자로 각부처간 업무조정에 탁월한 수완을 보였다. 취임당시 정전총리는 주부들이 느끼는 피부물가의 상승,국제수지적자,생산성저하및 경쟁력낙후,근로의욕좌절등으로 경제가 침체의 늪에 빠진 위기국면을 맞았었다. 그는 이를 극복키위해 경제부처간 업무협조가 잘되도록 필요할 경우 관계부처사이의 다리를 놓아주고 조정역할을 원활히 수행,국제수지적자를 50억달러로 줄이고 농가소득을 18%나 상승시키는등 경제를 회복시키는데 총력을 기울였다.이는 정전총리가 중점을 두고 추진한 「새질서 새생활운동」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그가 앞장선 「30분 더 일하기 운동」,「근검절약 운동」,「식생활개선 운동」,「교통사고줄이기 운동」등은 이제 사회전반에 확산되고 있어 정착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그의 국가와 민족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소신으로 미뤄볼 때 앞으로도 나라에 봉사할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그는 『학문분야에서 못다한 집필을 완성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스승 고 오천석박사가 고희에 이르기까지 공직생활을 한뒤 1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꼭20장의 원고를 써 방대한 전문서적을 남긴 예를 귀감삼아 이제 총리에서 학자로 되돌아 갔다.
  • “통일의 외적장애 제거 큰 보람”/노 대통령,수행기자 간담회

    ◎4강과 대등관계로 전방위외교 열어/중국,“6·25 잊자”에 “온고이지신” 응답했다 노태우대통령은 3박4일동안의 중국공식방문 마지막날인 30일 아침 숙소인 북경 조어대에서 수행기자들과 조찬간담회를 갖고 방중결과를 결산했다. 노대통령은 이번 중국방문을 북방정책의 마무리였다는 측면에서,또 통일로 가는 외적 장애를 모두 제거했다는 의미 때문인듯 무척 만족스러운 모습이었다. 노대통령은 또 중립내각구성등 국내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대통령후보시절 공약을 실현,만리장성에 오르신 소감을 말씀해 주시지요. ▲소박한 한 인간으로서의 감회 뿐아니라 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도 그 깊은 소회는 말로 다하기 어렵습니다.세계의 반쪽만 상대하던 우리 외교가 이제야말로 전방위 외교를 펼치게 됐구나 하는 생각이 가슴에 와닿았습니다.1세기전 4강에 짓밟혀 끝내 국권을 빼앗긴 우리가 지금 4강과 대등하게 그 중심적 입장에서 내가 조정의 역할까지 할 수 있는 수준으로 국위가 높아졌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가슴 뿌듯했습니다.우리 역사상 나라의 대표가 과연 이런 감회를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싶군요. ­이번 방중에서 많은 합의가 이루어진 특별한 배경이 있었습니까. ▲배경이 있지요.예를 들어 강택민 당총서기와는 대화의 거의 반이 속담을 주고 받는 것이었는데 「백문이불여일견」「천리길도 한걸음부터」등 생소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이처럼 두나라는 역사적 문화적인 동질성을 지니고 있어 딴 나라와의 수교 때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이런 점에서 속도가 더 빨라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가장 큰 소득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무엇보다도 북방정책을 마무리한 것입니다.이제 평양으로 가는 모든 외적 장애는 제거됐습니다.통일을 향한 가장 튼튼한 기반을 다졌다는 것이 큰 보람입니다. ­이런 추세로라면 언제쯤 남북정상회담이 가능하다고 전망하십니까. ▲단정은 내릴 수 없습니다.이제까지 북방외교를 추구한 경험에 비추어 소련이나 중국과의 수교는 일반적인 예상보다 빨리 이루어졌으나 북한만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첫째는 북한의 태도에 달려있습니다.어제 강택민총서기와 이문제를 얘기하면서 핵문제가 가장 걸림돌이라고 했습니다.핵개발 의혹이 해소되면 남북관계 진전속도는 매우 빠를 것이고 북한의 미일과의 수교도 도와주고 경협도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중국도 남이고 북이고 간에 핵보유를 원치 않으며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인데 너무 강한 압력으로 효과가 있냐는 것이지요. ­임기중 평양에 가시게 될 것 같습니까. ▲나 혼자 너무 많이 한 것같습니다.좀 나눠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6·25 참전문제에 대해 중국측의 언급이 있었습니까. ▲옛 성현들의 얘기와 속담으로 오고 갔습니다.예컨데 강총서기는 「잊어버리자.잊어버리자.새것을 찾자」는 옛시를 인용,과거의 모든 불행을 극복해나가자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나는 「온고이지신」을 얘기했습니다.옛날 것도 알 것은 알아야 그것이 교훈이 돼서 새로운 것을 추구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강총서기도 맞다고 했습니다.내용적으로는 장관선에서 실무적 논의가 있었습니다. ­국내에서 야당이 영종도신공항건설등 대형 국책사업과 관련한 예산을 삭감하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매우 바람직스럽지 못한 일입니다.이번에 와보니 중국도 북경비행장이 협소하는등 사회간접시설이 너무 미약해 확충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더군요.우리의 경우도 공항·항만시설이 크게 모자라는 상태입니다.사회간접투자를 막는 것은 참으로 답답합니다. ­귀국후 각당 대표들을 만날때 이 문제를 거론하시겠습니까. ▲설득해야지요. ­3당대표와는 개별회담을 할 것입니까.다 함께 만날 것입니까.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떠날때 김영삼총재에게 각당 대표들끼리 상의해보도록 얘기했습니다.어쨋든 공명정대한 선거를 치르는데 알맞은 내각을 만들겠다고 한만큼 형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바라기는 이제 제발 안에서 아웅다웅 싸워 국론분열을 초래,바깥으로 엄청난 경쟁에서 뒤져 나라에 큰 손실을 가져오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정치권도 깨닫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새내각은 언제 구성할 생각이신지요.행정부를 빨리 안정시켜야 된다는 여론도 있습니다만. ▲가급적 빨리 하는게 좋겠지요.그러나 너무 서둘러서는 안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인사란 아무리 잘해도 모두를 만족시키기는 어렵더군요.
위로